대한민국 35/ 국방14/ 6.25전쟁 이야기
2015.09.01 박정인 전 백골부대 사단장의 北 도발 대응 작전①-③
"北 기관총 쏘면 우리는 대포로 군인 임무는 적을 응징하는 것"
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주간은 지난 8월 13일 ‘맹장(猛將)의 싹을 자른 박정인 사단장 해임 사건’이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백골부대의 전설’로 불리는 박정인 전 육군 제3보병사단장(87·육사 6기·예비역 육군준장) 얘기였다. 박정인 전 사단장은 1973년 이른바 ‘3·7 완전작전’ 당시 정전협정을 위반한 북한군의 선제 공격에 즉각적인 보복 공격을 퍼부어 30명 가까운 북한군을 사살한 용장(勇將)이다. 같은 날 그는 북한군을 응징하기 위해 야간에 부대의 모든 트럭을 남방한계선까지 돌진시켰다. 당시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전군 비상동원령까지 내렸고, 휴전선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2010년 11월 30일 백골부대 사단장 출신 박정인 장군이 서울 중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북한 연평도 포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양 논설주간이 이 시점에서 박정인 장군을 주목한 건, 지난 8월 4일 비무장지대(DMZ)에서 발발한 북한의 지뢰 도발에 대한 국군의 대응과 비교돼서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확실하게 응징하겠다”고 했지만 대북 확성방송을 재개하는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 때도 100발이 넘는 포탄을 쏟아부은 북한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해 정부와 군은 여론의 질타를 받은 바 있다.
박정인 장군은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중앙보훈병원에 입원 중이다. 지난 8월 17일 이 병원의 재활병동으로 박 장군을 찾아갔다. 박 장군은 지난해 11월 16일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꾸준한 재활치료로 상태는 호전됐지만 의사소통은 어려웠다. 얼굴을 마주보고 가족을 통해 질문해도 “예, 아니오” 이상의 답변을 듣기는 어려웠다. 대신 옆에 있던 아들 박홍건(62·육사 31기·예비역 육군대령)씨와 며느리 김순실(60)씨에게 박 장군의 평소 생각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홍건씨는 경기도 용인의 집에서 둔촌동의 중앙보훈병원까지 매일 간병을 온다. 그는 아버지 병실에 들어서면 거수경례와 함께 “백골!” 구호를 외친다.
아들 박홍건씨에게 “지난 8월 4일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지뢰 폭발 사건 당시 박 장군이 해당 사단의 지휘관이었다면 어땠을까?”를 물었다. 홍건씨는 두말없이 “바로 보복했죠. 상황이 종료된 뒤에 알았으면 그때라도 보복하셨을 분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북한군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추호도 양보하실 생각이 없었던 분입니다. ‘나는 군인이다. 우리 군이 적에게 당하면 반드시 응징한다’는 일념만 있었죠. 상관과의 관계나 정치적 영향은 고려하지 않으셨어요. 당장 아군이 쓰러지고 있는데 왜 주변 눈치를 보고 윗사람 눈치를 보느라 응당 해야 할 반격을 하지 못하냐는 거죠. 북한군이 소총을 쏘면 우린 기관총을 쏘고 북한군이 기관총을 쏘면 우린 대포를 쏜다는 게 아버지의 평소 신념이었어요. 가능하다면 우리가 넘어가서라도 저놈들 목을 따야 한다고 하시던 분이었죠.”
홍건씨는 아버지를 “한마디로 전시(戰時)의 군인”이라고 표현했다. 평시의 군인인 현재 군인들과는 마음가짐과 정신자세가 완전히 달랐다는 뜻이다. 박 장군은 6·25전쟁 때 보병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적을 만나서 사람을 죽여보고 전투를 해서 동료가 옆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모습을 수없이 보고 경험한 실전 군인이다. 북한군에 대한 미움이 사무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는 아들인 홍건씨에게도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죽으면 너는 이 애비의 시체를 밟고 돌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6·25 당시 보병 제37연대 제1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박정인 장군.
천안함 사건 때에도 흥분
박정인 장군은 평소 백골부대 사단장 시절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아들 홍건씨는 “아버지는 삶 자체가 군인이셨던 분”이라며 “TV에서 군 관련 뉴스가 나올 때는 물론, 가족 모임 때마다 3사단장 시절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와 회고록 ‘풍운의 별’(1990년간·홍익출판사)에 기록된 ‘3·7 완전작전’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1973년 3월 7일 강원도 철원군의 비무장지대 내. 박 장군이 이끄는 육군 3사단(일명 ‘백골부대’) 장병들이 표지판 보수 작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북측에 통보했고 그 다음날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승인받은 작업이었다. 오후 2시쯤 작업을 완료한 장병들이 귀대하던 중, 일이 터졌다. 군사분계선 바로 이북에 위치한 북의 GP(관측초소)에서 갑자기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군의 대위 1명과 하사 1명이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사단장이던 박정인 장군은 마이크로 북에 사격 중지를 요청하면서 “이후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북측에 있다”고 몇 차례 경고했다. 북한군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 장군은 관측기를 상공에 띄운 후 포병 관측장교에게 표적을 관측하게 했다. 그리고 사단 포병에게 일제 사격을 명령했다. 105㎜, 155㎜ 곡사포가 즉각 불을 뿜어 북한군 GP를 강타했다. 아군에 사격을 가했던 적 보병 배치선에도 포탄이 떨어졌다. 동시에 백린연막탄을 발사해 적의 시야를 가렸다. 연막탄이 떨어진 풀밭에는 불이 붙었다. 지뢰들이 요란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사격을 멈춘 적 보병들이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부상한 대위와 하사는 무사히 구출됐다. 나중에 귀순한 북한군 장교에 따르면 당시 포탄이 GP에 명중하면서 30명 가까운 북한군 병사가 사망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박 장군의 보복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사단 내 모든 트럭에 라이트를 켜라고 명령한 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까지 돌진시켰다. 일부 트럭들은 군사분계선 남단까지 진출했다. 아들 홍건씨에 따르면 이 후속 공격은 상관의 지시사항이 아니라, 박 장군의 자체 판단이었다고 한다. 홍건씨는 “평소 아버지는 ‘북한이 도발하면 그 열 배로 갚아야 기어오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북한 측에서는 난리가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일성은 즉각 전군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휴전선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유엔군사령관은 전쟁 방지를 위해 “이번 사건은 북한 측의 휴전협정 위반으로 일어난 것이고 유엔군은 부상병 구출을 위한 자위적인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후일 국방부는 이 사건을 ‘3·7 완전작전’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한 달 뒤인 4월 3일, 박 장군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보직에서 해임됐다. 3일 뒤 사단장 이임식에서 박 장군은 “북진통일의 성업을 완수 못하고 사단장직을 떠나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5개월 후인 9월 10일, 박 장군은 군복을 벗었다. 아들 홍건씨는 이 상황에 대해 “1군사령관은 아버지의 강경 대응을 지지해줬지만 직속상관 격인 군단장이 반대지시를 했다”고 말했다. 회고록에는 “해임 이면에는 당시 보안사령관 강창성 소장(소장 예편)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좋지 않게 건의한 게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부대원들에게 박 장군은 과감하게 적군을 응징한 용장이자 부대원의 생명을 금같이 여긴 ‘영웅’이었지만, 윗사람들에게 비친 박 장군은 ‘상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불손한 군인’이었다. 며느리 김씨는 “아버님은 평소 정치인들 눈치 보느라 부대원들이 희생당하는 상황을 너무 분해하셨다”며 이렇게 말했다. “천안함 폭침 사건 때에도 흥분하셨습니다. 선제공격을 당하면 바로 보복해야지, 왜 눈치 보면서 아까운 생명들을 지게 하냐면서요.” 아들 홍건씨는 “아버지가 천안함 사건 당시 지휘관이었다면 북한에 엄포를 줘서 접근도 못하게 만드셨을 겁니다. ‘내 앞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진다’ 하시면서요”라고 말을 보탰다.
/박 장군의 가족은 3대가 육사 출신이다. 왼쪽부터 박정인 장군(육사 6기), 아들인 박홍건 예비역 대령(육사 31기), 손자 박선욱 대위(육사 64기)./박홍건
박 장군은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1950년 10월 26일 당시 소령이던 그는 제6사단 19연대 소속으로 부대원들과 함께 평안북도를 통과해 압록강변으로 북진하던 중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연대장은 중공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고 박 소령은 동료들과 함께 포로가 됐다. 유엔군의 공습을 피해 북으로 끌려가던 박 장군은 압록강변 벽동에서 동료 5명과 함께 1차 탈출을 감행했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붙잡혔다. ‘악질 분자’로 분류된 그들에게 북한군의 학대는 더 심해졌다. 걸핏하면 몽둥이로 후려치고 정강이를 걷어차는 등 구타가 계속됐다.
박 소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벽동으로 끌려간 박 소령은 동료 4명과 함께 보초의 눈을 피해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월부터 3월까지 두 달 동안 수백㎞를 주파한 끝에 마침내 국군이 지키는 한강변에 도착했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적진을 남하하면서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식량은 옥수수. 그는 “자유에의 갈망과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버텼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박 장군이 공산당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데에는 불우한 가족사 탓도 있다. 그는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났다. 함흥고보 재학 중이던 1946년, 함흥반공학생사건에 연루되면서 김일성 정권으로부터 수배당해 월남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고향에 둔 채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마지막 순간 부모님께 큰절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북한의 공산집단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른다”고 했다. 며느리 김씨는 “아버님은 뇌경색으로 입원해 건강이 좋지 않은 지금도 빨간색 알약은 드시지를 않아요. 누가 붉은색 넥타이를 선물이라도 하면 ‘당장 나가서 푸른색으로 바꿔 오라’고 하셨죠”라고 말했다.
박 장군의 가족은 3대가 육사 출신이다. 외아들인 홍건씨를 포함해 큰손자인 박선욱 대위(30·육사 64기)도 육사를 나왔다. 박 대위는 할아버지가 사단장을 맡았던 백골부대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중이다. 회계사로 일하는 박 대위의 쌍둥이 남동생 역시 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두 손자 모두 할아버지인 박 장군을 만나면 “백골!” 구호 거수경례로 인사한다.
/강원도 철원군 백골부대 전방 초소 장병들이 철책 근무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예비역 대령인 아들 홍건씨는 과거와는 다른 군의 풍토를 지적했다. “대령까지 군생활을 해봐서 알아요.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른 장교들은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죠. 그게 꼭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요. 늘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도 정책을 다루는 부서에 근무하다 보면 ‘아 그럴 수밖에 없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는 면도 있었으니까요. 연대장만 해도 휘하에 거느린 부하가 2000여명인데요. 더 높은 지위의 장군이 함부로 행동하기는 어렵죠.”
홍건씨는 북한이 도발해도 한국군이 즉각 반격을 하지 않는 이유를 현역들이 전쟁 경험이 전무한 탓에서 찾았다. 현역 중 해외에 파병된 경우를 제외하면 대규모 전쟁을 치른 한국군은 거의 없다. 실전에 참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적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겠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홍건씨는 육사31기로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동기생이다. 그는 “육사 기준으로 볼 때 저보다 3년 선배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마지막 세대입니다”라고 했다.
박 장군은 회고록에서 “북한 공산당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지만 강한 자에게는 더없이 약하다”며 “내가 포격을 퍼붓는 동안 그들은 단 한 발의 포도 우리 쪽에 발사하지 못한 게 그 근거”라고 했다. 아군이 강력하게 응징하면 북한은 꼬리를 내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3·7 작전 한참 후인 1985년,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원의 일원으로 평양에 방문한 함경남도 도민회 회장에게 북한 정치보위부 고위간부가 찾아왔다. 그는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라며 원한이 서린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만큼 북측은 박 장군을 두려워하고 의식했던 것이다.
“지금은 평화시의 군대이기 때문에 전시의 군인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요즘 장교나 부사관 등 직업군인은 군인을 직업으로 삼고 그걸로 생계를 꾸린다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정말 일반 회사원과 다를 바 없이 그저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해서 진급을 해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어요. 그에 비하면 아버지는 정말 군인정신이 투철한 분이셨죠.” 홍건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현역 시절 모습이다.
‘북한은 남을 향해 도발하면 훈장을 주고 남한은 반격하면 벌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당시 포격을 주도한 박 장군은 해임되고 군복까지 벗어야 했다. 반면 “부상자 구출을 위해 무리하게 사격하지 말라”며 포격을 말리던 군단장은 대장까지 진급했고 나중에는 주미 대사도 지냈다. “아군을 구하기 위해 대포를 쏜 아버지 같은 분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책임을 두려워해 위기에 처한 아군 구출을 꺼리던 사람은 진급해 합참의장까지 지냈습니다. 어떤 장군이 안보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 듭니다. 용기 있는 지휘관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풍토가 생겨야 소신 있는 장군들이 활약하는 풍토가 생기는 것 아닐까요?”
배용진 주간조선 기자
■국군포로 이야기
2015-06-18 “北 국군포로 죽을때까지 강제노동…
“국군포로로 북한에 잡혀 있던 47년 가운데 37년을 광산에서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매일 국군포로들이 죽어 나갔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유영복 귀환국군용사회장(85·사진)은 17일 북한에서 겪은 고통이 떠오르는 듯 이같이 말했다. 이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사단법인 물망초의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소’ 기자회견에서다.
유 회장은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강원 김화지구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혔다가 2000년 북한을 탈출했다. 북한은 처음에 국군포로가 8만 명이라고 했다가 막상 휴전 협상이 시작되자 5만 명이라고 말을 바꿨다. 한국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북한군 포로 7만5000여 명을 북한에 돌려보냈지만 돌아온 국군포로는 8343명에 그쳤다.
유 회장은 “6·25전쟁에서 많은 젊은 남성이 죽었기 때문에 북한은 휴전 후 폐허를 복구할 노동력이 부족했다”며 “전후 복구에 필수적이었던 석탄과 광석을 캘 노동력으로 쓰기 위해 국군포로를 강제 동원했다”고 전했다. 대외적으로 더이상 국군포로가 없다고 주장하던 북한은 당시 내무성 건설대에 1701∼1709부대를 만들어 국군포로를 집단 수용했다.
유 회장은 아연 등을 캐는 검덕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북한은 검덕광산과 인근 용양광산에 국군포로 1000여 명을 투입했다고 한다. “지하 600m∼1km 깊이로 내려가 거리가 10∼20km 되는 막장에 들어가면 가만히 서 있어서도 땀이 났고 피부가 쓰렸다. 생산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거기서 먹고 자면서 일하다 보니 거의 매일 사람이 죽었다.”
그는 “미국은 죽어서 북한에 묻힌 미군 유해를 찾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데 한국 정부는 살아있는 국군포로에 대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며 “그들의 희생을 기릴 수 있도록 국립현충원에 국군포로 추념탑이라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망초는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귀환국군용사회, 인간성 회복운동 추진협의회와 함께 포로 송환을 규정한 제네바 협약 위반을 이유로 김정은을 ICC에 제소할 계획이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2016.06.27 北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代 세습 동안 국군포로 6만명 노예노동 3代 세습
▲ 6·25전쟁 중 북한에 끌려간 국군포로 손동식씨로 추정되는 유해가 담긴 유골함이 2013년 10월5일 중국을 거쳐 봉환됐다. 2005년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맏딸 명화(51)씨는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영선) 등 민간단체의 도움을 얻어 유골을 봉환하는 데 성공했다./뉴시스
*유엔 보고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국군포로 수 숨긴 사실 보고한 자료 발견.
*부자(父子), 부녀(父女)가 아오지 탄광 등에서 함께 노동. 거의가 진폐증으로 60 이전에 사망, 현재 약500명 생존 추정. 평생 군(郡)을 벗어난 적 없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
*국군포로 자녀 200여 명이 탈북, 한국에 와서 겪는 또 다른 차별-"왜 아버지가 이런 나라를 위하여 총을 들었는가?"
*몽골 군율은 포로 버리고 온 부대원을 전원 사형(死刑)
■국군포로 K씨의 짧은 가족사(家族史)
1987년 함북 온성군 상화탄광에서 30여년간 노예노동을 하다가 57세에 진폐증으로 죽은 수도 사단 출신 국군포로 K씨(탈북한 두 아들이 남겨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익명 처리)의 짧은 가족사(家族史)는 이렇다.
그는 휴전 후에도 불법 억류된 뒤 결혼하여 네 아들과 딸을 두었다. 큰 아들(B씨)은 아버지와 같은 탄광에서 일하다가 탈북, 2004년에 한국에 왔다. 둘째 아들은 49세에 진폐증으로 죽었다. 셋째는 딸인데 옷공장에서 일하다가 '식량 미공급 시기'에 먹을 것을 찾아 가출(家出), 행방불명되었다. 넷째는 아들인데, 탄광에서 일하다가 탈북, 한국에 왔다. 다섯째는 탄광에서 일하다가 1995년에 굶어죽었다.
큰 아들 B씨는 부인과 1女2男을 北에 두고 한국에 와서 살다가 2008년에 브로커를 통하여 그들과 접선을 시도했다. 이게 탄로 나서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 간 뒤 소식이 없다.
B씨가 아버지 고향을 찾아 갔더니 사촌과 배다른 누이가 살아 있었다. DNA 조사로 친족(親族)관계가 확인되었다. 아버지는 국방부에 의하여 전사자(戰死者)로 처리되어 있었고, 유족 보상금은 할아버지가 받다가 사망했다. 정부는 그동안 국군포로를 행방불명으로 분류하였다가 전사자로 처리, 보상을 해왔다.
B씨는 아버지의 전사날짜 이후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어 호적에 올릴 수가 없다. 살아서 돌아온 국군포로가 받는 보상금이나 전몰자 유자녀가 받는 보상금도 받을 수 없다. 다만 탈북자 정착금 3,700만 원과 별도로 국군포로 지원금으로 4,790만 원을 받았다.
B씨처럼 한국에 온 국군포로 탈북 자녀는 90여 가족에 200여 명이다. 이들은 국방부 앞에서 석 달째 시위를 하면서 호적 등재 허용과 생환 포로에 준하는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국방부 출입 기자들은 관심이 없고, 국방부도 '수용불가' 입장이다.
유엔 보고서, "최소 5만 명 불법 억류"
2014년 2월에 발표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에는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북한 억류 국군포로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많이 소개되었다. 보고서는 <8만 2000명의 한국군이 한국 전쟁 이후 실종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그 중 5만~7만 명의 한국 군인이 북한이나 북한 동맹국(중국)에 억류된 것으로 추정했다.
1952년 스탈린, 김일성, 주은래 회담 기록에 따르면 1952년 9월 현재 북한군이 잡은 국군포로는 3만 5000명이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스탈린에게 휴전 협상을 할 때 전쟁포로수를 7500명으로 축소해 발표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별도로 2만 7000여 명의 공개되지 않은 포로가 더 있다고 했다. 이 회담에서 팽덕회 중공군 사령관은 그들이 4만 명의 한국군을 따로 포로로 잡았다고 했다.
1953년 4월부터 1954년 1월까지 8343명의 한국군 포로만 송환되었다. 유엔의 북한인권위원회 보고서는, 김일성과 팽덕회가 스탈린에 보고한 숫자에서 송환자 수를 빼어 본 결과 최소 5만 명의 한국군 포로가 불법적으로 억류되었다고 추정했다. 그들 가운데 약 500명이 생존하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보고서는 또 약 400여 명의 국군포로 및 가족이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보고서는, <북한, 러시어, 중국간 있었던 회담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국군 포로를 송환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김일성은 포로들을 인민군 소속으로 강제 입대시키면서 이들의 정확한 수와 행방을 감췄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1만 2000명을 포로로 잡고 있으며 이중 4416명이 외국인이라고 외부에 알렸지만, 2만 7000명의 한국군 포로는 인민군으로 입대시켰고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고서 작성팀은 <2012년 9월까지 총 80명의 한국군 포로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면서 이들을 면접한 결과 <초기에 잡힌 포로들의 경우는 수 개월간 사상교육을 받고 “한국을 민주화시키는 데 투입될 것이다”라며 인민군으로 징집되었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나라가 있으니 우리를 구하러 올 줄 알았다."
포로 중 소수는 자원해서 인민군에 입대했다. 한 한국군 포로는 병원에서 부상자를 돕는 인민군 부대로 자원해서 들어갔다며 포로 취급을 받지 않고 여느 인민군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포로는 강제로 인민군에 편입되었으며 '건설여단'으로 배치받았다. 이 여단은 북한 북부 지역의 탄광과 공장, 농장 등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됐다.
젊은 나이에 포로가 돼 50여 년이 흐른 뒤 탈북한 유영복 씨는 북한정권이 송환의 기회를 준 적조차 없다고 증언했다. 그는 평안북도에서 600여 명의 다른 포로들과 탄광에서 일했다고 한다.
“우리는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한국군 포로다, 왜 우리가 송환되지 못하냐, 왜 우리가 여기서 일해야 하나를 계속 물어봤습니다. 북한인들은 자신들도 모른다며 자신들도 지시받은 대로 할 뿐이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이게 길어질 줄 몰랐습니다. 남북관계가 나아질 줄 알았죠. 지휘관들도 살아 있고, 한국 정부도 무사하고, 대통령도 살아 있으니 언젠가는 우리를 구하러 올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또 참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반세기가 흐르도록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우리를 이용했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포로들은 사회안전부와 국가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보고서는, <각종 고문이 자행되었고 탈출을 막기 위해 각별한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 포로는 평안북도 수용소에서 동료와 탈출을 시도했던 사례를 소개했다. 탈출 시도 중 여러 명이 총격을 받아 숨졌고 나머지는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조사 기간 중 북한군은 이 증인(證人)이 기억을 잃도록 전기 고문과 손톱을 제거하는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재판에서 35명의 포로가 사형을 선고받았고, 당시 가장 어렸던 증인에게는 20년 형이 선고됐다.
代를 이은 탄광 노동
유엔 보고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탈출을 기도한 수감자의 가족도 북한에서 자행되던 연좌제에 의해 죽음으로 이어졌다. 본 위원회는 남동생이 포로들의 탈출을 돕는 계획이 발각돼 함경북도의 한 보위부 수감소에서 죽었다는 여성의 이야기도 확인했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나이 든 포로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려 한 두 명의 북한인은 요덕수용소(15호)로 보내졌다. 한국으로 탈출한 한 포로는 자신의 탈북 후 아내는 자살했다고 했다. 연좌제로 아들이 위험해질까 걱정돼 자살을 결심했다는 설명이었다.>
유엔 보고서는 국군포로의 자녀들도 代를 이어 탄광 등에서 강제노동을 한다고 기록했다. 한국군 포로와 가족은 북한 계급 ‘성분’에서 최하위 계층에 속하게 됐고 그들의 후손도 지속적으로 차별을 당했다는 것이다. 포로의 자식들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며 부모와 같이 탄광일을 하게 되었다. 억류된 지 수십 년 후 탈북한 한 포로는 자신의 자식들이 ‘성분’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심해도 너무 심해 한 번은 그의 아들이 “대체 우리는 왜 태어난 거에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보위부 직원과 친해진 한 포로의 아들은 자신이 발급받은 서류에 적힌 ‘43’이란 숫자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43은 포로의 자식을 뜻한다. 여성의 경우는 차별이 더욱 심하다. 포로의 자식인 것이 알려지면 자신보다 높은 ‘성분’의 사람과 결혼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과 같은 ‘성분’들과 결혼하게 된다. 이 계급의 남성들은 대개 육체적 노동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게 되고, 이 여성들은 혼자 남게 된다. 이렇게 반복되는 차별로 자신의 자식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자괴감에 자살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국군 포로 중 인민군으로 자원한 경우 조금은 나은 대우를 받았다. 1951년 인민군에 자원한 한 포로는 병원에서 근무했고 그와 가족들은 포로 취급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 후에는 황해도에 있는 탄광에서 강제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지하에 들어가는 최악의 일은 피했다고 했다.
"생존 포로와 가족들까지 다 모시고 와야."
<휴전 후 한국의 가족들은 포로들의 생사(生死) 여부를 포함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물론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 양측은 적십자 회담을 통해 이들의 접촉을 약속했다.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사람들만이 이산가족 상봉 차원에서 몇 시간만 함께 할 수 있었다. 2~19차 이산가족 상봉 기간(2000-2013) 동안 (북한은) 19명의 포로가 살아 있고 22명이 사망, 105명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 중 17명만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북한은 정전협정에 따라 포로 송환은 제대로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북한에 있는 한국군 포로들은 모두 자의(自意)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탈북한 한 포로가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본 위원회에 증언했다.>
유영복 씨는 이렇게 증언한 것으로 유엔 보고서에 실려 있다.
“한국에 집이 있고, 부모나 형제가 있는데 왜 북한에 있길 원하겠습니까, 탄광 같은 곳에서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제 그들 나이가 70, 80세가 다 돼갑니다. 북한 언론에 따르면 아직도 북한에 500여 명의 포로가 살아있다고 합니다. 북한은 이들 500명을 한국으로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잡아서 처벌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북한은 포로들의 자식들도 학대합니다. 정말 反인도적입니다. 한국 정부와 국제 사회는 이런 범죄를 척결해야 합니다. 생존 포로들은 이제 80세가 다 돼갑니다. 북한에 자식과 손주들이 있습니다. 나이 든 할아버지 한 분을 한국으로 모셔 온다고 그들이 한국에서 잘 살겠습니까? 북한에 버리고 온 가족 생각에…그러니까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포로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다 모시고 와야 합니다.”
수령 3대 세습과 노예 3대 세습
지난 9월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6·25전몰군경유자녀회 주최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나오는데 얼굴이 새까만 남자가 다가와서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명함을 건네는데,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 한영복’이었다. 아버지 한진령 씨는 강원도 삼척군 출신의 국군 8사단 사병으로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함북 아오지 탄광에서 노역하다가 은퇴, 2003년에 사망하였다. 한영복 씨는 잠시 방을 나가더니 아버지를 국군포로로 둔 네 탈북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 다섯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대한민국이 버린 약 6만 명의 국군포로들은 노예처럼 살다가 거의가 죽었다. 이들은 공산당에 의하여 계급의 적(敵)으로 분류되어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 불법억류 포로들은 노동조건이 가장 험악한 아오지, 회령, 김책 시 일대의 함북 지역 석탄광산에서 노역하다가 거의가 60대 이전에 사망하였다. 생존자는 80대 이상이니 많아야 수백, 수천 명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사실은 수령 3대 세습 기간에 국군포로는 노예 노동을 3대 세습하였다는 점이다.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용케 탈북한 김경숙, 김정옥, 최수경 세 여성도 아버지를 이어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 김정옥 씨(47세)는 탄광의 갱차(坑車) 운전사였다고 한다. 할아버지-아들-손자가 대를 이어 같은 탄광에서 노예노동을 하면서 살다가 스러져 간 것이다.
국군포로 자녀들은 군대도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아무리 잘 해도 북한노동당 당원은 될 수 없다. 통행증도 끊어주지 않는다. 한영복 씨는 평양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고 한다. 앞에 나오는 A씨는 함북 온성군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들에 대한 감시는 2중, 삼중으로 철저하였다. 1970년대 후반 김정일 후계체제를 강화할 때는 국군포로 가족들이 수시로 강제수용소로 사라졌다.
결혼도 성분이 나쁜 계급의 여성과 하도록 권장했다고 한다. 중세나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 이후 노예 신분을 상속시켜 부려먹는 집단은 북한정권뿐이다.
1990년대 후반 대기근(大饑饉) 때 아오지 탄광은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갱도(坑道)에 물이 찼다. 탄을 캐지 못하게 되니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 이 탄광에서만 수천 명의 국군포로가 일하고 있었는데 많이 굶어죽었다. 이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남침 전쟁 때 전사한 북한군의 자녀들은 특별 우대를 받았다. 식량배급을 끊은 당에선, 국군포로 집안에 명령하였다. 식량을 모아서 북한군 전사자 가족을 도우라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이불과 장농까지 장마당에 들고 나가 팔아서 산 식량을 전사자 가족들에게 바쳐야 했다.
임동원의 악담(惡談)
최수경 씨(51세)의 아버지 최학연 씨(69세에 회령에서 사망)는 5사단 소속이었는데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전남 강진이 고향인데, 가족들을 불러놓고 이런 농담도 하였다고 한다.
“나는 혼자였는데 결혼하니 일개 분대를 만들었다. 너희들이 결혼하면 1개 소개가 되겠구나. 소대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간다면 얼마나 놀랄까.”
최학연 씨는 귀향(歸鄕)의 꿈을 접지 않고 있다가 나중엔 자녀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너희 중에 누구라도 고향에 가거든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꼭 전해라.”
딸은 그 약속을 지켰다. 최학연 씨의 3형제가 다 전쟁 중 입대했는데, 한 사람은 국군포로, 한 사람은 행방불명, 생존 형제는 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의 역대 정부가 국군포로 송환을 위하여 실질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국가적 범죄이다. 남북대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대북(對北) 퍼주기에 열중하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보내주고, 휴전선상의 對北전광판 방송도 중단하면서까지 북한정권의 편의를 봐주면서, 그들에게 ‘국군포로들이 죽어 가는데 고향에서 죽도록 돌려달라’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다는 것은, 노벨평화상이나 인권변호사의 명칭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의 패륜이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 씨는 회고록에서 국군포로 송환을 요구한 이들을 향하여 악담(惡談)을 했다.
<당연히 냉전수구 세력의 송환반대와 방해가 극심했는데, 이들은 '가치관의 혼란 우려' '북측의 체제선전에 이용당할 우려' 등을 들먹이며 '탈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와 연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송환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7년 전 이인모 노인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반대할 때 들고나온 논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北에선 노예, 南에선 소외
한영복 씨에 따르면, 국군포로들은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때나 2000년에 김대중 정부가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보낼 때 “우리도 돌아갈 수 있겠구나”하고 기대를 하다가 실망, 급사(急死)한 이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명절 때만 되면 어머니, 어머니 하고 흐느끼셨는데 그때는 어른도 저렇게 우는 수가 있구나 하는 철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군포로의 자녀들 중 자력(自力)으로 탈북, 한국에 온 이들은 98 세대 소속의 200여 명이다. 자력으로 탈출, 귀환한 국군포로는 81명, 그 가운데 45명이 생존해 있다. 자녀들은 北에선 대를 이어 노예생활을 했는데 한국에 와서도 멸시를 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우선 호적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미귀환 국군포로는 거의가 국방부에 의하여 전사자(戰死者)로 처리되어 있다. 정부는 미귀환 국군포로들을 참전국가유공자로 인정하기는 했는데, 호적상으론 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고, 자녀들이 부모의 제적(除籍)등본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어 이들은 유공자 자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온 국군포로 자녀들은 아버지의 남한 형제들과 DNA 대조를 통하여 혈육임을 확인 받았으나 호적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가족회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아 북한에서 사망한 부친을 자력(自力) 귀환 국군포로처럼 대우해달라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작년 남재준(南在俊) 국정원장은 귀환국군포로 초청 행사에서 “그동안 국가가 국군포로 문제에 너무 소홀했다”고 사과한 적이 있다.
주락철 씨(53세)는 “북한에선 남조선 '괴뢰군 새끼들'이라고 불리면서 박대를 받으면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한국에 오니 그렇게 못 배운 것이 죄가 되어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한영복 대표는 북한정권이 전사자 가족을 극진히 대우하고 한국이 국군포로를 버린 사실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북한에선 당이나 수령을 위하여 충성하다가 죽으면 남은 친족들이 영웅 가족으로 대우를 받아 잘 살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불이 났을 때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김일성 초상화를 들고 나오다가 죽는 행동이 그렇게 해서 일어납니다. 한국에 와 보니 우리 아버지들처럼 나라를 위하여 희생한 사람들이 오히려 냉대를 받더군요. 특히 국방부의 냉소적 자세엔 실망했습니다.”
북한정권은 국군포로 자녀들이 탈북하다가 잡혀오면 가중 처벌을 하여 거의가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포로 버린 군인은 사형감
몽골 기마군단의 常勝(상승) 비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엄격한 군융(軍律)이었다. 집단 책임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어느 부대가 공격할 때 다른 부대가 지원하지 않으면 그 부대의 책임자들을 처형했다. 어느 부대가 전투중 999명이 죽고 한 명이 생환(生還)하였을 때는 패전일 경우 사형에 처했다. 같은 부대원이 포로가 되었는데도 구출 작전을 펴지 않고 돌아온 부대원들은 전원 사형에 처했다.
한국은 적지(敵地)에 남은 국군포로 6만 명을 데리고 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국가라는 조직을 갖춘 집단 중 이런 짓을 한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한국군과 유엔군에 포로가 되었던 북한군은 전원 돌려보냈고, 비전향 장기수까지도 북송했는데, 북한정권에 대하여 그들이 불법억류한 국군포로를 송환하라는 요구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칭기즈칸의 군율(軍律)대로 처벌한다면 한국의 안보 책임자들은 사형감이란 이야기이다. 국군(國軍)포로 6만 명을 버릴 수 있는 나라나 軍은 이미 영혼이 빠진 존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먼저 망가뜨리지 않고선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포로 문제의 기원
1951년 여름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2년이 걸렸다. 휴전회담이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국군과 미군이 주력(主力)이던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상당수가 돌아가기보다는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제네바 포로 조약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는 남고 싶어 했으나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냈다.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美 국무부 간부들은 이 전례(前例)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 쪽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 대통령의 최종 결재를 받자고 했다. 트루먼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공산군 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은 늦어졌다. 트루먼 재임(在任) 기간 중 휴전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인권(人權)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미군은 한국전(韓國戰)에서 전사(戰死) 5만3000명을 포함, 14만 명의 사상자(死傷者)를 냈다. 그 가운데 45%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입은 피해라고 한다. 미국은, 인간의 자유의지, 그것도 적군 포로의 인권(人權)을 존중한다는 고귀한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자국(自國)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킨 셈이다.
한미동맹을 위한 제물(祭物)로 바쳐진 이들?
1953년 6월18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막바지에 이른 휴전회담이 깨진다고 화를 냈으나 공산군 측도 내심으론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해소해버린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깨려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말리는 과정에서 한미(韓美)상호방위 조약과 국군현대화 계획 및 전후(戰後) 복구지원들을 약속한다. 이때 처음으로 이승만이 전국(戰局)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 모택동(毛澤東), 김일성, 맥아더가 주무르던 한국전쟁의 향방을 李 대통령이 막판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미(韓美)동맹이란 국가번영의 울타리를 만들어낸다.
수년 전 ‘모택동 비화’를 쓴 정창과 할리데이 두 저자(著者)는 러시아 측 외교문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毛澤東이 金日成에게 휴전당시 불법(不法)억류하고 있던 6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계속 잡아두도록 지시함으로써 이들을 비참한 운명에 넘겼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탈출도 할 수 없도록 북한의 벽지로 보내졌으며 생존자가 있다면 이들은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毛는 중공군 포로 2만1374명중 3분의 2가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버린 데 대한 보복을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한 셈이다. 두 저자(著者)가 인용한 문서는 러시아에서 2000년에 출판된 '극동문제연구'(Problemyi Dalnego Vostoka. 제2권)에 실린 '알레나 볼로코바(Alena Volokhova)의 '한국전의 휴전회담'(1951-1953)이란 논문이었다.
한영복 씨는 아버지가 남긴 이야기를 전했다.
“휴전 직후 북한군이 국군포로들을 운동장으로 불러내더랍니다. 남한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과 북한에 남고 싶은 사람들을 나누겠다면서 가운데 선을 긋더니 돌아가고 싶은 이들은 오른쪽으로 나오라고 하더랍니다. 거의가 오른쪽을 선택했답니다. 그 순간 북한군의 기관총이 오른쪽 끝의 바닥에 일제 사격을 하였고, 겁이 난 포로들은 왼쪽으로 몰려가 북한에 남는 선택을 강요당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 북한과 중국을 자극, 이들이 국군포로 6만 명을 잡아 두기로 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면, 그렇게 억류되어 죽어간 이들은 반공포로의 인권과 한미동맹을 위하여 제물(祭物)로 바쳐진 셈이다.
국방부의 입장
6·25국군포로가족회(이하 가족회, 회장 한영복) 회원들은 지난 7월부터 국방부 서문(西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매일 20여 명의 가족회 회원들은 “국군포로 자녀들은 고아가 아니다”, “선친의 제적등본에 등재할 수 있도록 전사(戰死) 일자를 정정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건다. “정부와 국방부는 미귀환 국군포로의 명예회복과 그 자녀들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라”는 구호도 있다. 현장에 나와 있던 한 경찰 간부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尹 일병 사건 이후 소위 軍 인권단체 등 좌파(左派)단체가 국방부 앞에서 자주 시위를 했다. 그때마다 해당 부서 공무원들이 직접 나와 단체 관계자들과 만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가족회 회원들이 두 달 간 시위를 벌여도 해당 부서는 본 체 만 체였다. 만약 가족회 회원들이 힘 있는 사람을 끼고 있었거나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방부의 입장은 이렇다.
<*미귀환 국군포로의 명예회복과 자녀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 수용불가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은 타(他)법에 대한 특별법임. 적용 대상이 국군포로 및 억류지 출신 포로 가족에 한정되어 있고, 국군포로와 가족의 송환 및 지원에 관한 특별한 사항을 정하고 있으며, 他法보다 우선한다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음. 동법에 대한 내용을 변경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동법을 개정하는 것이 적절하지, 또 다른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 현재 황진하 의원은 억류지 출신 포로 가족 지원금(4,790만원)을 상향하기 위한 법개정을 추진중에 있음(국방위 소위 계류중)
*아버지 보수·연금을 자녀에게 지급 요구 : 수용불가
생환한 국군포로에 대한 지원은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 제6조에 따라 등록한 후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으로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등록 자체가 불가. 생환한 국군포로가 국내에 잘 정착하고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원하는 제도로, 배우자 또는 자녀에게 지원하는 것은 아님. 대신, 배우자 및 자녀에게는 4,790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제도가 별도로 있음. 억류지 출신 포로 가족은 탈북자 지원금(3,700만원)을 합할 경우 총 8,490만원을 기(旣) 지급받았음.
아울러, 전몰군경 유가족 등 他 보훈가족의 경우에도 전사하신 아버지에 대한 보상을 유가족에게 하고 있지 않은 바, 이 분들과의 형평성도 고려할 필요.
*호적등본에 등재할 수 있도록 전사(戰死)일자 정정 요구 : 일부수용
재북(在北) 국군포로 사망일자는 객관적인 입증이 불가하며, 전사(戰死) 처리 취소 시 국내 가족의 보훈혜택 제공 근거가 사라짐에 따라 대규모 민원 야기 우려. 대법원은 호적변경은 재판절차를 통해 해결할 사안으로, 재남(在南) 가족과의 관계 등을 감안하여 신중히 검토하여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실무 의견).>
500명의 라이언 일병
대한민국이 北에 버린 6만 명의 라이언 일병들, 代를 이어 노예노동을 하다가 죽어가고 있는 가족들 중 목숨을 걸고 한국에 온 200여 명의 자녀들, 이들에게 세월호 사고 유족들보다 못한 국가보상을 할 수 있는가? 포로 6만 명을 버린 국가적 범죄에 대한 징벌적 보상과 명예회복 조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국민국가, 민주국가 아닌가?
유엔의 북한인권보고서 공개를 계기로 김정은과 부하들을 反인류범죄 혐의로 단죄(斷罪)하려는 움직임이 국제사회에서 의미 있게 논의중이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도 적극적이다. 10월8일 현재 유럽연합(EU)이 작성한, 유엔에 의한 김정은 일당 국제형사재판소(ICC)회부 결의안 초안이 유엔에서 회람되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 3代가 저지른 反인류 범죄 목록 중 국군포로 불법억류와 노예노동 3대 세습제는 그 규모나 악질성으로 보아 상위(上位)에 들 것이다.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맞추어 한국 정부는 대북(對北)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인권문제, 특히 생존 국군포로와 그 가족의 송환을 올려야 할 것이다. 좌경 야당이 국회에서 북한인권법 통과를 저지하고 있는 것은 북한정권에 의한 국군포로 불법억류나 역대 정부의 무관심과 비슷한 수준의 반(反)인류적 범죄행위라 할 것이다. 이스라엘 국회가 나치에 억류된 유대인 구출 결의안을 저지하는 것과 비슷한 정신병동적 상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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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手記)-국군포로를 아버지로 둔 죄많은 인생
<注: 며칠 전 필자에게 이런 편지가 왔다.
"저는 6·25전쟁에서 포로가 된 국군포로 하사 000의 아들입니다. 6·25전쟁 당시 아버지는 수도사단 기갑연대에서 복무하셨으며 휴전협정 보름을 앞두고 북한군·중공군에 의하여 억울하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올리게 된 것은, 선생님께서 지난 9월23일 TV조선 뉴스쇼 판에 출연하시어 국군포로를 찾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이고 또한 아버지 대신 자녀들이 목숨 걸고 대한민국에 왔지만 정부가 외면한 데 대하여 비판하고 그들에게 특별법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너무 고맙고 감사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생님, 저희 국군포로 자녀들은 아시다시피 북한에서 아버지 때문에 군대도, 대학도 가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대로 말도 할 수 없으며 항상 ‘괴뢰군 새끼’라는 말 때문에 기가 죽어 살다보니 문장의 표현도 서툽니다. 널리 양해하여 보아 주십시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잘 표현도 안 되고 제가 대한민국에 오면서 간단히 자서전처럼 썼던 글을 선생님께 함께 보냅니다.>
●정전(停戰) 보름을 앞두고 포로가 된 아버지
저의 아버지는 수도사단 기갑연대에서 복무하였고 한국전쟁에서 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1953년 7월 정전(停戰)협정을 보름 앞두고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노동을 강요당했으며 철창 없는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북한 당국은 정전(停戰)협정에서 남한포로가 없다고, 다 전향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거짓말을 해오고 있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아버지의 북한에서의 가혹한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 생지옥이었습니다. 국군포로 대부분을 끌어다 함경남북도 탄광, 광산에서 노동을 강요하고 항상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습니다. 북한 정권은 국군포로에게, 죄인들에게 붙이는 번호인 43호(감시대상) 딱지를 붙였습니다.
‘언제면 고향의 그리운 부모형제를 만날까, 오늘일까? 내일이면 갈 수 있을까?’ 아버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항상 사무치게 고향을 그리다 결국 1987년 초겨울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국군포로라는 꼬리표 때문에 종성 49호 정신병원에 1년간 감금되기도 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언제면 고향에 가겠는가”라고 한 말을 누군가 밀고해 ‘정신없는 말’을 하였다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언제 무너져 내려 죽을지 모르는 지하 막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새벽별을 보며 일터로 나가 저녁별을 이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질통을 지고 수직으로 된 지하 막장을 수십 차례 오르내려 온몸에 멍자국을 새기고 땀에 젖은 옷을 입고 계신 아버지가, 어린 눈에도 불쌍해 보였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를 위해 싸운 국군포로들의 처참한 현실이었습니다. 전향(轉向)을 했으면 이런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해왔겠습니까? 6·25 전쟁에 참전했던 북한군은 북한당국이 책임지고 평생 최고의 대우를 해주며 그 자식들까지도 대를 이어 보살펴줍니다. 저는 국군포로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되어 아버지와 같은 삶을 대물림해야 했습니다.
남쪽 따뜻한 고향을 그리면서
아버지 고향은 경상남도이고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고향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참대나무 숲이 무성한 남쪽의 따뜻한 곳이 고향이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생생한 모습이 그립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을 꾸리기는 했지만 북한 당국이 형식적으로 갖추게 한 것입니다. 몇 만 명의 국군포로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자주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여 그를 저지하기 위해 북한당국이 생각해 낸 것이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한 출신인 걸 모르고 결혼하셨고, 훗날 아버지 출신을 알고부터는 외갓집 반대가 극심해 결국 이혼까지 강요했습니다.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를 구박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꿈과 포부, 희망을 모두 버려야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17살부터 아버지를 따라 탄광 일을 해야 했고 남들이 다 가는 군대도 가지 못했으며 공부를 잘하여도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27년이 넘도록 탄광 지하 막장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노예생활을 강요당하며 살아야 했던 삶. 군사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친구들이 “너는 어느 부대에서 복무했어?”라고 물어도 답해줄 게 없었고, 아버지 때문에 군복무를 하지 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초라하고 서글퍼서 저도 모르게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습니다.
왜 아버지는 남한을 위해 총을 잡았는가? 아버지가 북한을 위해 전쟁에 나갔으면 전쟁영웅 칭호를 받아 대접도 받고 북한에서 제가 마음먹은 대로 모두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의 과오를 저라도 씻어보고자 열심히 일하고 발버둥 쳤지만 북한 당국은 이런 우리를 선전용으로 써먹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막장에서 기계처럼 일하다 굴이 무너져 깔려 허리를 다쳤고, 坑車(갱차)에 다리를 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대한민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광산은 국군포로들의 노예 현장입니다. 일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괴뢰군 반동 새끼’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보상해주지도 않습니다. 제 동생도 탄광 일을 하다가 폐결핵으로 4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막내 동생마저 고난의 행군 시기 굶어죽었습니다.
맞선으로 저와 같은 국군포로의 딸과 결혼하여 세 자식을 둔 아버지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던 마음이 후회가 되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차디찬 북한에 두고 온 죄책감에 대한민국에 와서도 어느 한순간도 편히 잠들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저 아버지 고향에 혼자 왔습니다. 제 자식도 버리고 말입니다. 이 불초자식을 용서마세요’ 매일 빌고 또 비는 저를 하늘에서 아버지가 보고 계실까요?
중국의 개가 흰밥 먹는 것 보고 충격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더욱 극심해진 식량난 때문에 家長(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전선에 나선 것이 결국 1999년 1월3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밤 중국으로 넘어와 이집 저집 문을 두드려도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열어준대도 제 옷차림을 보고는 北에서 넘어온 것을 알아보고 문전박대하기 일쑤였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구나 하는 설움에 북받쳐 오르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어느 농촌 집에 들어가 보니 북한에서는 강냉이죽도 없어서 못 먹는데 마당에 있는 개밥그릇에 흰쌀밥이 가득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한의 내 자식이 못 먹는 쌀밥을 여기서는 개가 먹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북한에서 배운 것이 탄광일이다보니 중국에서 떠돌아다니며 찾은 일자리도 결국 탄광 일이었습니다. 기업주는 제가 북한에서 온 것을 알고는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며, 월급을 달라고 하면 공안에 밀고한다고 해 일을 해도 돈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누군가의 밀고로 중국 공안에 붙잡혀 2002년 5월에 북송되어 북한 보위부 조사를 받고 6개월간 노동 단련대에 수감되었습니다. 말은 노동 단련대이지만 그곳에서 저는 평생 맞아도 다 못 맞을 매를 죽도록 맞았으며, 짐승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괴뢰군 새끼자식이라고 더 맞은 것입니다.
하루 14~15시간 이상 고된 노동이 계속됐으며 저녁에는 2~3시간씩 반성문을 쓰게 하고 10평도 되나마나한 좁은 공간의 시멘트 바닥에서 30~40명씩 몰아넣고 앉아서 쪽잠을 자게 했습니다. 여물지 않은 쭉정이 강냉이 가루로 죽을 쑨 것을 식사라고 주니, 잘 먹지도 못한 데다 강도 높은 노동에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니 병이 났습니다. 본래 2년이었던 노동기간을 6개월로 줄여 집으로 보냈습니다. 집에 돌아와 1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중국을 넘은 것이 2003년, 이번엔 베트남을 걸쳐 대한민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온 게 죄입니까?
통일이 되면 온 가족이 함께 따뜻한 남쪽 고향으로 가자고, 아버지 고향에 가면 너희들은 북한에서보다 좋은 대접을 받을 거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합니다. 불효자식인 저는 아버지 고향에 왔지만, 제 일가족은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있는 줄로 압니다. 할아버지가 괴뢰군 새끼라고, 손자까지도 괴뢰군 자식새끼로 딱지를 붙여 항상 감시하고 미행하는 줄도 모르고 제가 가족을 데려오려 한 것이 꼬리가 잡혀 아내와 딸과 두 아들이 수용소로 끌겨 갔습니다. 8년이 다 되도록 生死(생사)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고국에 아버지 대신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죄입니까? 돌아가신 국군포로 아버지들이 이 현실을 알면 땅속에서도 통곡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가 하고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아버지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전사(戰死)일자 정정과 억울한 삶에 대한 피해보상, 국군포로 자녀들에게 대한민국의 전몰(戰歿) 유자녀와 같은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7.05.31 살아서 돌아온 국군포로 허재석의 아오지 탄광 체험 증언
『포로는 굶어죽고 黨 간부는 돼지에게 죽 먹이고』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2004년 6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탈북 국군포로 허재석씨의 인터뷰 기사를 재록한다. 그는 6.25 전쟁 후 북한에 억류된 6만 명의 국군포로 중에 한 명이다. 국군 포로는 자신은 물론 자녀들까지 아오지 탄광 등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노동을 착취당하며 살았다.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현재 500명 정도가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 기차 정전 사고로 수천 명 사망
● 재북(在北) 포로 등 87명 명단 공개
●『대남(對南) 간첩은 금의환향시키고, 국군포로는 외면하는 나라』
국군포로와 非전향 장기수
/지난 3월 개봉된 영화 「송환」이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관객몰이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1992년 석방되기 시작한 非전향 장기수들이 2000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되기까지의 사연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것이다.
이 영화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가슴속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 『내 평생 이런 감동적인 영화는 처음이다』 등의 소감을 적은 글들이 넘쳐났다. 영화 배급사는 『쏟아지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이 영화를 5월17일부터 재개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非전향 장기수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남북 양쪽에서 잊혀지지 않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국군포로 허재석(許再碩·72)씨.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든 1953년 7월 어느 날, 그는 포탄이 쏟아지는 전방의 최전선에 있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전사(戰死) 처리되었고,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그로부터 47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 7월29일, 허재석씨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를 맞는 요란한 환영식도 언론의 조명도 없었다.
허재석씨가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 땅을 헤매고 있는 사이,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2000년 6월15일 열린 남북 頂上회담의 여진에 휩싸여 남북관계의 행복한 미래를 점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許씨가 돌아온 지 한 달여 만인 2000년 8월25일, 정부는 北으로 돌려보낼 63명의 非전향 장기수 명단을 발표했다. 그해 6월15일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金正日과 한 非전향 장기수 송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다.
2000년 9월2일, 국내에서 벌어진 온갖 환송회를 당당하게 마친 63명의 非전향 장기수들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北으로 갔다. 이들을 맞는 북측 지역 통일각 건물에는 「백절불굴 통일 애국 투사들에게 영광 있으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이들이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 도착하자 군가인 「용진가」가 울려 퍼졌다.
장기수들은 통일각 앞 金日成의 친필비 앞에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쳤다. 평양 시내에서는 이 장기수들을 환영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국내 언론도 연일 특집방송을 꾸며 장기수들이 북송되기 전까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했다.
이로부터 며칠 후인 9월6일, 許씨는 50년 前 자기가 복무했던 사단에서 조촐한 전역식을 치렀다.
許씨는 탈북(脫北) 후 틈틈이 쓴 수기(手記)에서 이날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사단에 가서 내 생에 받아 보지 못한 분에 넘치는 환영을 받으며 전역식을 마치고, 50년 동안 어느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고, 언제 내가 살아서 고향땅에 찾아가서 조상의 묘소와 형제들을 만나 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어느 하루도 떠나 본 적이 없던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고향땅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을 찾아온 나는 내가 살던 고향땅에서 조상의 묘소에 술잔을 드리고 재석이가 찾아왔다는 인사를 올리고 나서 고향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마련한 잔치에 참석하였다. 내가 마을에서 자랄 때 시냇물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내가 알고 있는 분들은 불과 몇 명밖에 없었지만, 그들에게서 따뜻한 인사를 받고 성의껏 마련한 음식을 먹으며 지나온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웃음과 함께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국군포로
지난 5월1일, 국군포로 허재석씨를 찾았다. 許씨는 현재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 있는 관산리라는 시골 마을에서 탈북자인 李모(63·여)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許씨의 고향은 경남 진양군 일반성면 운천리다. 許씨가 자기 고향이 아닌 지리산 끝자락에 있는 산골 마을에 터전을 잡은 것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李씨가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멀리서 사람이 찾아와서인지 이 「시골 노인」은 연신 「허허허」하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許씨는 귀가 좋지 않았다. 질문을 여러 차례 큰 소리로 물어야 알아듣곤 했다.
許씨는 북한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을 했다. 좁은 막장에서 수십 년간 시끄러운 탄광 굴착 기계를 잡고 굴을 뚫고 탄을 캤을 許씨를 생각하니 가는귀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許씨는 놀랄 정도로 정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로가 된 1953년 이후 자신이 북한에서 스쳤던 곳의 지명, 날짜 등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許씨는 북한에서 겪었던 고생담을 털어놓으면서도 좀처럼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국군포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는 대목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한민국을 뒤엎겠다며 활동한 장기수들은 다 돌려보냈으면서 목숨을 걸고 싸운 국군포로는 왜 한 명도 못 데려오느냐 말이오. 非전향 장기수 그 사람들, 北에 가면서 우리한테 침을 뱉으면서 갔어요. 그 사람들은 여기 있으면서 북한에 국군포로와 납북자는 한 명도 없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내가 여기 南에 와 보니 北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가 더 불쌍해서 못 견디겠어요. 고생만 하고 산 국군포로들 한 명이라도 좋은 세상 한 번 보고 죽으라고…. 국군포로가 北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 국민들이 알아야 해요』
이틀에 걸친 인터뷰 도중 許씨가 가장 흥분하면서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許씨는 北에서 1남5녀를 두었다. 許씨의 셋째 딸은 許씨가 한국에 도착한 후 곧바로 탈북, 2001년 한국으로 건너와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 현재 북한에는 부인과 나머지 자식들이 남아 있다.
許再碩씨는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현재 남한에는 許씨의 제일 큰누나(85)만 생존해 있고 나머지 형제들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북한을 탈출하는 데는 1997년 12월 탈북해 한국으로 들어온 국군포로 양순용(梁珣容·당시 72세·경남 함양군 출생)씨의 도움이 컸다.
1953년 강원도 금성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양순용씨는 1994년 10월 귀환한 조창호씨에 이어 두 번째로 돌아온, 국군포로 명단에 올라와 있는 사람이다.
梁씨는 당시 국방부가 지급한 200만원의 위로금을 거절해서 화제가 됐었다. 梁씨의 보상금 반환사건은 정부가 국군포로 지원 특별법을 만드는 직접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양순용씨는 귀환 직후 50~60명의 생존 국군포로를 포함, 100명 가량의 국군포로 명단을 증언했다. 梁씨가 증언한 생존 국군포로 가운데 허재석씨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허재석씨와 양순용씨는 북한에서 같은 탄광에서 일을 했다. 양순용씨는 3년 前 교통사고로 숨졌다.
허재석씨의 막내동생 태석(2003년 작고)씨는 형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을 통해 북한에 사람을 몰래 보내 형과 접촉을 시도했다.
허재석씨는 동생이 중국에 나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98년 12월 중국 연변으로 건너와 꿈에 그리던 동생을 상봉할 수 있었다. 이후 북한에 돌아갔던 許씨는 2000년 7월 북한을 再탈출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휴전 20일 전 중공군에 포로가 되다
許씨는 1945년 국민학교 5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당시 정부에서 한글과 역사를 더 배우라고 7개월간 졸업을 연기하는 바람에 許씨는 1947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許씨는 고향에서 친척이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일을 하다가 6·25 전쟁을 맞았다. 1952년 3월 許씨는 소집장을 받고 입대했다. 훈련을 마친 許씨는 1952년 8월 수도사단(現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26연대 1대대 1중대 2소대에 배치되어 수도고지 전선에 투입되었다.
1952년 12월, 許씨의 부대는 강원도 금화고지로 옮겼다. 許씨 소대는 금화고지 최전방에 있는 독립된 高지대에 배치되어 중공군과 맞섰다. 소대의 임무는 이곳에서 잠복근무를 하며 敵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敵과의 직선거리는 20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許씨는 이곳 잠복근무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목 놓아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1953년 7월 들어 휴전이 임박하자 중공군의 공세가 빈번해졌다. 7월5일 비가 내리는 밤 許씨 분대는 잠복근무를 나갔다. 그날따라 사방에서 포탄이 날아들어 시야가 좋지 않았다. 許씨는 일등중사인 이병진 분대장과 3m 떨어진 곳에서 전방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꽝」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許씨가 있던 진지 속으로 떨어졌다. 許씨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순간 하늘에는 조명탄이 터지며 사방이 밝았다. 許씨는 고개를 돌려 분대장이 있던 쪽을 바라보았다. 분대장 이병진은 진지를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許씨도 진지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참호 속을 기어나와 살펴보니 오른쪽 팔이 완전히 부러져 있고, 왼쪽 무릎과 오른쪽 허벅지가 파편에 맞아 출혈이 심한 상태였다. 許씨는 止血을 해보려고 했지만 한 손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때 중공군이 몰려왔고 許씨는 포로가 됐다.
중공군들은 許씨의 양다리를 잡고 50m나 끌고 내려갔다. 許씨가 아프다고 소리치자 중공군은 許씨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부러진 팔과 무릎을 붕대로 감싼 후 許씨를 들쳐 업고 내려갔다. 포로가 되었을 때 許씨의 계급은 하사였다.
중공군 진지에 잡혀 온 許씨는 간단한 응급처리를 받고 들것에 실려 강원도 창도군에 있는 중공군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곳 땅굴 속 병원에서 許씨는 마취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일어나 보니 다행히 팔을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許씨는 중공군의 리어카에 실려 강원도 평강에 있는 중공군 야전병원에 후송되었고, 이곳에서 휴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許씨는 인민군에 인계되어 다시 평안남도 강동군에 있는 해운광산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한 달 후인 8월 중순경 기차로 평남 신창탄광으로 옮겨졌다. 신창탄광에서 許씨는 오랫동안 치료를 받지 못해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상태에서 또 한 번 수술을 받았다.
許씨는 『신창탄광의 노동자 사택이 포로수용소로 쓰이고 있었고, 국군포로가 약 450명, 미군포로가 4~5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許씨는 포로가 된 소대원 일부와 재회했다.
『소대장 황신주(경북 상주) 소위, 분대장 이병진(부산 영도), 나와 한마을에 살다가 軍에 같이 와서 같은 분대에 있었던 하옥주 하사, 소대 향도였던 백이호 이등상사가 포로로 잡혀 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휴전 10여 일 전인 7월14일,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許씨는 황신주 소대장으로부터 자신이 戰死 처리된 사연을 들었다.
許씨가 실종되자 이병진 분대장은 許씨가 戰死했다고 소대장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전사자 시체를 올려 보내라는 사단사령부의 지시에, 소대장 황신주씨는 許씨 시신을 찾지 못하자 許씨와 같이 근무를 나갔다가 戰死한 양정훈(경남 함양)씨의 시체에 TNT를 넣고 폭파하여 둘로 나누어 사단에 올려 보냈다는 것이다.
許씨는 탈북 후 고향에 와 보니 집에서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더라며 웃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許씨의 고향집에서는 아버지의 첫 제삿날에 許씨의 전사통지서를 받아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許씨가 머문 신창탄광 수용소內에 의무실이 있었으나 전기 시설도 없고, 화장실을 제 발로 가지 못하는 환자가 많았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許씨는 신창탄광 포로수용소에서 1개월 정도 있었는데 화물차가 오더니 환자들을 싣기 시작했다고 한다. 許씨는 『부상자를 먼저 송환하는가보다 하고 기뻐했다』고 말했다. 소대장 황신주씨가 許씨에게 다가와 『한국에 돌아가면 여기 국군포로가 500명이 있다고 꼭 말하라, 미군포로도 있다고 알리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이제 고향으로 가는구나』
그러나 許씨 일행을 태운 차가 멈춘 곳은 1개월 前 許씨가 신창탄광에 오기 전 머물렀던 평남 강동군의 해운광산이었다. 許씨는 이곳은 부상자 전문 포로수용소였다고 했다. 여기서 부상자는 치료를 받고, 조금 건강한 사람들은 탄을 캤다는 것이다. 포로들이 머무는 사택 주변은 전부 철조망을 쳐 놓았다고 했다.
북한은 부상 포로들을 수용한 강동 해운탄광 수용소를 「내무성 중앙병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 강동수용소에는 내과환자가 약 100명, 외과환자가 약 130명, 합해서 230명 가량의 부상 포로가 있었다고 했다.
『병원이라고 하지만 약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택 밖으로 외출도 할 수 없었어요. 사택을 둘러싼 철조망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내무원 인솔下에 탄을 캐러 갈 때 뿐이었습니다. 몸이 좀 회복되면 「회복소대」에 배치되었는데 여기에 배치되면 탄을 캤습니다』
許씨는 이곳에서 포로가 된 국군장교를 여러 명 보았다고 말했다.
『국군장교 포로 10여 명이 강동수용소로 왔습니다. 그중에 김홍종씨는 국군대대장이었다고 하고, 김종식은 국군소위, 신형규씨는 헌병소위였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허통운이라는 사람은 양쪽 다리를 절단했고, 김덕수라는 사람은 복부 부상으로 겨우 살아났다고 합디다. 이곳에 왔을 때 이들은 몸이 허약해서 뼈에다 가죽을 씌워 놓은 듯했습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장교들은 1950년 10월경에 포로가 됐는데 그동안 구류장에 있었다고 해요』
許씨는 『구류장은 포로들이 반항을 하거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가두어 두는 곳으로, 이곳에 들어간 포로들은 햇볕도 들지 않는 방에 한 달 동안 감금된다』고 설명했다.
강동수용소에서 다행히 許씨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54년 4월25일, 트럭이 오더니 회복된 환자들 50~60명을 싣고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기차를 갈아타자 포로들은 『드디어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며 환호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許씨 일행을 실은 기차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3일 후 기차는 함경북도 경흥군 어느 탄광에 도착했다. 아오지 탄광이었다. 포로들이 탄 기차는 고향行이 아니라 「아오지行」이었다.
許씨가 강동수용소에서 본 국군장교 포로들도 이때 許씨와 함께 아오지에 왔다. 장교 포로 중 신형규씨만은 그때 아오지가 아닌 함경북도 새별군 하면탄광으로 갔다고 한다.
―강동수용소에서 본 복부 부상자 김덕수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부상이 심한 사람들은 1956년 포로 해방 때 신의주 전상자 병원 등으로 갔는데, 그 후 소식을 모릅니다』
―아오지에 같이 간 장교포로 김홍종과 김종식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김홍종·김종식 장교 등은 아오지 탄광에서 얼마 안 있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보위부에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보위부가 데려간 사람들이 김홍종·김종식을 비롯해 김영철·윤창수·김민호·좌공수·이홍경 등입니다. 북한은 보위부가 데리고 가면 그 후 소식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어요』
許再碩씨는 탈북한 후 20명 정도의 생존자 국군포로를 비롯, 80여 명의 명단을 관계 당국에 증언했다고 한다. 현재 국군포로는 나이가 제일 어린 사람이 72세이고,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오지 탄광의 국군포로 500명
국군포로는 대부분 탄광으로 보내졌다. 許씨는 『북한은 탄광을 1701부대, 1702부대, 1703부대 등으로 일련번호를 매겨 놓고 전부 「내무성 건설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許씨가 있었던 아오지 탄광은 1701부대로 불렸다. 아오지 탄광은 다른 탄광에 비해 규모가 가장 컸다고 한다.
―아오지 탄광에는 당시 국군포로가 몇 명 있었습니까.
『500명 가량 되었습니다』
―휴일에는 쉬었습니까.
『탄광은 원래 한 달에 두 번 놀면 잘 노는 것인데, 명절이라도 일할 때가 많습니다. 포로들은 일요일이고, 명절이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했어요. 포로들과 같이 일을 한 사회 일반 노동자들은 일요일이면 쉴 수 있었습니다』
―국군포로와 사회인이 같이 일을 했습니까.
『같이 組를 이루어 일을 했습니다. 그 밖에 아오지 탄광에는 교화소 죄인들도 많았지만, 이들은 국군포로와 섞여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굴진작업(굴 뚫는 작업)을 할 때는 사회인 1명에 포로 3명 정도가 섞여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화소 죄수들은 일을 하다가 죽으면 원인규명이라도 하지만 우리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식사는 어땠습니까.
『일반 노동자들은 작업하다가 중간에 휴식을 하면서 싸 온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굴에 한 번 들어가면 8시간 동안 일만 하다가 밖에 나와서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밥은 좁쌀밥인데 쌀을 조금 넣을 때가 있지만 순 좁쌀밥이 더 자주 나왔습니다. 그것을 한 식기(그릇) 주면 시래깃국이나 미역국에 말아 훌 마시면 끝입니다. 20~30代의 젊은이들이라 배고픈 것이 제일 괴로웠습니다』
許씨는 매일 작업이 끝나면 권총을 찬 소대장이 포로들을 열을 세워 앉혀 놓고 작업량을 달성 못 했다고 온갖 험한 욕을 퍼붓곤 했다고 한다. 작업 중 부상자가 발생하면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있는 군의소에 입원을 하는데, 약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치료를 해주지 않는다고 항변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오지 탄광에 회암 2갱이라는 곳이 있는데 일제 때부터 석탄을 캐던 곳입니다. 이곳은 온도가 30℃가 넘었습니다. 땀이 비 오듯 하기 때문에 우리는 팬티만 입고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매일 작업량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온갖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일을 해야 했어요. 몸에 땀이 흐르고 석탄가루가 새카맣게 묻어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캐낸 탄을 鑛車에 실어 밖으로 빼낼 때도, 8시간 내내 쉬지 않고 탄을 실어 날라도 작업량 달성이 쉽지 않았습니다』
許씨는 겨울에도 작업복이 땀에 흠뻑 젖었다고 했다.
『작업이 끝나도 갈아입을 옷이 없기 때문에 땀이 밴 옷을 입고 수용소 막사까지 걸어오면 아오지의 강추위에 옷과 발싸개가 얼어 버립니다. 그러면 신발이 벗겨지지 않아 애를 먹어요』
許씨는 『대부분 탄광갱에는 통풍시설이 잘 되지 않는 통에 일산화가스와 메탄가스가 가득해 머리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고 말했다.
『탄을 캐기 위해 한 번 발파작업을 하고 나면 180cm 정도의 탄이 쌓입니다. 화약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쌓인 탄을 삽으로 다 꺼내고 나면 머리가 아파서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토를 하기도 합니다. 일을 끝내고 400m 정도 되는 갱도를 나오는데 머리가 아파서 중간에 몇 번이나 쉬어 가며 올라와야 했어요』
노동력 짜내려고 국군 포로 붙들어둬
아오지 탄광 내무 건설대에는 4개 중대가 있었다. 1개 중대에는 130명 가량이고, 이는 다시 3개 소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1개 중대의 하루 작업은 3교대로 이루어지며 낮일은 오전 8시~오후 4시, 저녁 일은 오후 4시~밤 12시까지, 새벽일은 밤 12시~다음날 오전 8시까지였다. 근무 시간은 1주일에 한 번씩 바뀌었다.
하루 일이 끝나면 현장에서 작업량에 대한 총화를 한 후 수용소로 돌아온다. 막사로 돌아오면 소대장이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보고를 한 후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
좁쌀밥과 식은 죽을 한 그릇 먹고 나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나면 이번에는 학습시간이다. 상부에서 학습교재가 내려오는 데 따라 맞추어 학습을 했다고 한다. 학습내용은 주로 金日成의 家系와 경력 등에 대한 것이었다.
일반 노동자들은 중대별로 작업량을 비교하여 우승 중대에게 표창을 내리기도 했지만, 포로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1955년 4월에는 힘든 노역에 항의해 포로들의 집단반발도 있었다고 한다.
포로들 사이에 「진달래 꽃이 필 때까지」란 말이 떠돌았는데 許씨는 『그 말이 「날씨가 따뜻해지면 우리 한국에서 미군과 함께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탈출 계획 신호」였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 때문에 국군포로 5명 정도가 구류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구류장에서 1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나온 포로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했다.
許씨는 이렇게 국군포로를 탄광에 몰아넣고 강제노역을 시킨 것은 북한의 戰後복구에서 석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탄을 캐야 공장이 돌고, 공장이 돌아야 戰後 복구사업이 차질 없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북한은 국군포로가 없다고 계속 주장을 한 것입니다. 탄광 갱 안에서 여자들도 같이 일을 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했습니다. 부상자 포로들이 이곳저곳 탄광을 다니면서 국군포로를 많이 보았으니, 이들을 송환했다가는 다른 포로까지 보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병신이 된 국군포로라도 돌려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포로들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다가 죽어도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값싼 노동력을 북한이 왜 포기하겠습니까』
폭발사고 냈다고 처형
포로들의 강제수용소 생활은 1956년 6월 끝이 났다. 1956년 6월, 북한은 6·25 전쟁 때 인민군을 따라온 소위 의용군 8만 명을 제대시켰다. 이것을 북한에서는 「8만 명 제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許씨는 『이때 국군포로는 「내각결정 143호」라는 명칭을 붙여서 공민증을 내주고 사회인으로 환원시키는 조치를 취했다』며 『이후 모든 포로수용소는 해체되었다』고 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국군포로」라는 말은 없어지고 「143호」 혹은 그냥 「43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내각결정 143호」가 내려지고 사회인이 되었지만 포로들에게 직업을 선택할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자기가 포로 시절 일하던 탄광에서 그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8만 명 제대」로 새로 사회에 배출된 의용군들도 대부분 탄광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의용군들은 1956년 7월 중순부터 탄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의용군 출신들은 오자마자 15일간 탄광 안전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억울했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의용군이 큰 소리를 쳐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군포로가 탄을 캐는 데는 전문가들이니까 의용군들이 우리에게 기술을 많이 배웠습니다. 의용군은 조금만 기술이 있어도 소대장도 되고 중대장, 기타 간부가 되는 데 반해 국군포로 출신은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소대장이나 중대장 되기가 힘들었습니다』
북한의 탄광에는 크고 작은 사고가 항상 이어졌다. 許씨가 겪은 첫 번째 큰 사고는 1958년 8월 아오지 탄광 용연 청년갱 폭발사고였다.
낮 12시경 용연 청년갱에 메탄가스가 차면서 폭발했는데 39명이 사망했다. 許씨는 『사망 사고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죽은 사람의 몇 배나 되는 수십 명의 화상자』였다고 했다.
『안전부요원이 사고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폭발사고가 나서 제일 먼저 밖으로 나온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내었는데, 백남운이라는 국군포로였습니다. 이 사람이 담뱃불을 잘못 놓아 폭발했다는 것이죠』
백남운씨는 몇 달 후에 공개 공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許씨는 막장에서 일단 사고가 나면 국군포로가 가장 먼저 의심받고, 처벌의 강도도 높았다고 했다. 최인규라는 국군포로는 탄차를 갱으로 밀고 가던 도중, 탄차가 갱도 버팀목을 치는 바람에 갱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를 냈다고 한다. 이 사고로 최씨는 『부주의로 국가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징역 3년을 살았다고 한다.
1961년 아오지 탄광 회암 2갱에서 메탄가스가 폭발하여 1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곳 탄광에서는 최양희라는 국군포로가 일을 했는데 사고 후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1985년 7월, 밤 12시경에는 막장의 석탄에 자연발화로 불이 붙어 석탄이 쏟아져 내리면서 굴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30분 동안에 40명이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이때 국군포로들의 자식들이 많이 변을 당했다고 한다.
이 사고는 문책 대상자가 중대장 박병기씨가 되어야 하나, 그는 6·25 때 월북한 의용군 출신이라고 하여 강제노동 6개월에 그치고, 대신 坑長이 6년간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 사고 후 許씨에게는 「자연발화 중대장」을 맡게 되는 「행운」도 따랐다.
許씨는 중대장 직책이 버거워 사양했으나 상부에서 『맡길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맡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許씨는 일을 하지 않고 연로보장을 타먹는 나이(정년퇴직)가 되는 1992년까지 중대장이란 직책으로 일했다고 한다. 許씨의 임무는 탄광內에서 자연발화가 일어날 만한 곳을 사전에 찾아서 대비를 하고, 발화가 생기면 신속하게 대응조치를 취하는 것이었다.
탄광 사고 이야기가 나오자 許再碩씨는 북한에서 있었던 큰 사고 몇 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2000년 2월경 평양에서 열린 농업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태우고 돌아오던 기차가 평안남도 양덕고개에서 전기가 끊어지는 바람에 멈춰 섰다는 것이다. 기관사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자 기차를 세워 놓고 잠시 식사하러 갔다고 한다.
기차에는 지방 黨 간부들이 대거 탑승했으며, 장사꾼·주민 등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잠시 멈춰 선 기차가 갑자기 후진을 하기 시작하더니 첫 번째 역을 지나 두 번째 역에서 대기 중이던 기차를 들이받았다. 대기 중이던 기차에도 많은 사람이 탔다고 한다. 許씨는 『이 사고로 약 3000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증언했다.
1990년경에는 청진 아래 있는 용반이라는 곳에서 화약을 싣고 가던 기차가 폭발해 인근 1km 내의 건물이 형체도 없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 사고의 인명피해는 용천역 열차사고에 못 미치지만 폭발 규모는 용천역 열차사고에 버금갔다고 한다.
폐광이 된 탄광
허재석씨는 현재 아오지 탄광은 폐광 상태나 마찬가지라고말했다.
『탄광에는 물이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이 물을 양수기로 퍼내야 하는데, 1990년 이후 북한의 전기 공급이 불규칙하면서 양수기로 물을 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전이 한 시간만 되어도 물이 엄청나게 나오는데, 이 물이 갱도까지 차면 물먹은 탄과 암석이 늘어나 탄광 갱도의 버팀목이 무너집니다. 무너지면 다시 복구해야 하는데 복구해 놓으면 또 정전이 되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탄광에 쓰는 대형 기계도 모두 물 속에 잠겨 못 씁니다』
특히 1992년 이후 배급이 나오지 않아 광부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탄광 광부들이 집에서 쓸 연료를 얻기 위해 갱도에 들어가 벽을 파헤치며 탄을 긁어내는 바람에 굴이 무너지기도 하고, 사람이 부상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허재석씨는 60세가 되던 1992년 8월 연로보장을 받을 나이가 되어 탄광 일을 그만두었다. 정년퇴직을 한 셈이다.
許씨는 탄광생활을 할 때, 많을 때는 300원 가량의 월급도 받았다고 한다. 許씨는 『배급이 정상일 때 강냉이 1kg이 7~8원, 쌀 1kg이 15원이었으니까 300원이면 제법 많은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돈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991년부터 배급이 점점 줄어들면서 쌀값이 오르더니 1992년에 와서는 300원으로 쌀 10kg을 겨우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997년에는 쌀 1kg이 70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연로보장비는 제대로 받았습니까.
『연로보장비는 훈장을 타거나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나오기 때문에 「공로비」라고도 합니다. 1998년 10월인가 북한 정무원 결정 10호라는 게 내려져서 원래 지급 연로보장비에서 35~40% 가량 삭감을 했습니다. 나는 1992년 탄광을 그만두고 196원 정도의 연로보장비를 받다가 1998년부터는 125원으로 줄어들더니 그 후로는 통장에 돈을 넣어 주었습니다. 은행에 돈이 없으니 찾을 수도 없습니다』
―배급 사정은 언제부터 어려워졌습니까.
『1990년도부터는 배급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1994년부터는 한 달에 10일분도 줬다가 많이 주면 보름치도 줬다가 했는데, 그나마 탄광 같은 중노동 현장이나 주었지 일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1992년부터 배급이 없다시피했습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하루를 나고 있습니까.
『온 가족이 먹고 살자고 산에 가서 비닐로 천막을 쳐 놓고 생활하며 나무를 해서 시내에 내다 팔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쪽에는 나진·선봉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인데, 개방도시(경제특구)라서 그 안쪽은 풍족합니다. 나진·선봉 주위에는 독일제 전기철조망을 둘러 쳐 놓았습니다. 그곳이 바다와 접해 있어서 사람들이 고기를 사다가 되팔기 위해 철조망을 많이 넘는데 감전되어 많이 죽습니다』
―왜 철조망을 넘습니까.
『그 안에는 중국 사람들이 많고 사람들도 다 잘삽니다. 밖에 있는 사람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장사를 하려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송이와 약초를 판 얼마간의 돈을 장사밑천으로 나진·선봉으로 들어가서 물고기를 사와 그것을 파는 것이죠. 감시원이 있으면 돈을 주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송이버섯, 산나물을 캐서 연명
許씨는 탄광 일을 그만둔 후부터는 산에 다니며 봄·여름에는 산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송이버섯과 도라지를 캐고, 겨울에는 개구리를 잡아다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993년 농장에서 경비를 서면 1년에 강냉이를 108kg 주겠다고 해서 농장 경비를 섰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니 농장에서 수확량이 없다며 이삭 강냉이로 두 마대 주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2년 정도 경비 일을 하다 그것도 그만뒀어요』
許씨는 1997년 3월 약초를 캐기 위해 눈 쌓인 산속을 해매다가 급성신장염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그해 4월 몸이 겨우 회복되자 許씨는 딸들 집을 전전하며 약초를 캐어 근근이 살았다고 한다.
『송이버섯은 「5호 관리소(노동당의 외화벌이사업소)」 관리 물품이라 따는 즉시 갖다 줘야 합니다. 관리소에 주면 송이 1등품 1kg을 30~50원 정도 값을 쳐 주거나, 기름·밀가루·사탕가루 등을 조금 주는데, 그것도 제때 나오지가 않을 때가 많아요. 중국 상인에게 파면 1kg당 5000~6000원의 값을 받기 때문에 주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중국 상인에게 팝니다』
許씨는 국군포로가 식량난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국군포로는 나이가 많아서 연로보장이나 배급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데, 이것이 끊어진 지 오래기 때문에 앉아서 굶어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의용군 출신은 郡黨에서 확인증을 가지고 가면 은행에서 연로보장비를 우선해서 내주기 때문에 그나마 생활형편이 조금 낫다고 한다.
―한국에서 원조물품을 보내 주는 것은 알았습니까.
『돈이 오는지 쌀이 오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2000년 이후에 형편이 좀 나아지지 않았나요. 金大中 정부가 金正日에게 많은 돈을 주었는데요.
『설사 원조물품이 들어와도 배급을 기업소가 담당하기 때문에 제대로 배급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아오지 탄광에 강냉이 30t이 내려오면 기업소 지배인과 당비서 둘이 앉아 「채탄공은 7일분, 굴진공은 10일분, 밖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닷새분」 하는 식으로 결정해 버려요. 위에서 원조물품 다 떼어먹어도 일반 사람들이야 알 도리가 없습니다』
돼지에게 죽 먹이는 黨 간부
―한국에서 파견된 정부 관계자들은 배급이 제대로 되는지 보고 왔다고 하는데요.
『사람이 떼로 굶어 죽는 함경도 같은 곳에서 확인을 해야죠. 배급 잘나오는 평양 모란봉 구역에서 백날 보고 오면 뭣합니까』
간부들과 안전원·군대가 모두 장사에 나서기 때문에, 간부들은 오히려 옛날보다 살기가 더 좋아졌다고 한다. 許씨는 사람이 굶어 죽어 나가는데 어느 당 간부는 집에서 돼지에게 싸라기 죽을 먹이며 나이든 머슴까지 부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998년 중국에서 동생을 만나고 들어온 許씨는 그때부터 보위부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북한으로 들어온 지 10여 일 만에 누군가의 밀고로 중국에서 동생을 만나고 온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許씨는 은덕군 보위부 부부장에게 불려 갔다. 보위부 부부장은 許씨가 가지고 있던 중국 인민폐 3210원을 빼앗았다고 한다. 許씨가 빼앗긴 인민폐 3210원은 북한 돈으로 환산하면 8만원 정도로, 이는 시장에서 쌀 약 1.5t을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고 한다.
보위부 부부장은 許씨에게 『돈을 준 것을 비밀로 하라』고 했다. 이후 보위부에 수시로 불려간 許씨는 꿇어앉은 채 조사를 받았다. 보위부는 특별히 물어보는 것도 없이 벽을 보게 꿇어앉혀 놓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반복했다고 한다.
3개월 후부터는 보위부가 許씨를 부르지는 않았으나 감시원(지역담당 보위지도원)을 붙여 놓고 감시했다고 한다.
동생 만나 귀환
許씨는 『나에게 감시가 이렇게 심한 것은 같이 생활하던 국군포로 양순용씨가 한국으로 갔기 때문에 보위부는 「국군포로들은 기회만 되면 북한을 탈출하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許씨는 집에서 꼼짝도 하지 말라는 보위부의 지시에 온종일 집에만 있어야 했다고 한다.
2000년 7월5일, 許씨에게 중국에 동생이 나와 있다는 소식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許씨는 감시가 심하기 때문에 이번에 중국에 나가면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에 연락책을 따라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동생이 많이 아프다. 형님을 꼭 보고 싶어 한다. 내가 꼭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결국 許씨는 그를 따라 나섰지만, 이번이 마지막 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許씨는 밤을 틈타 두만강을 건넜고, 北京에서 동생을 만나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우리가 웃으며 뛰놀 수 있는 것, 재물을 모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나라를 지켜 주는 국군장병들 덕택입니다. 우리 정부의 고위 간부들은 항상 국군장병들을 친자식처럼 돌봐주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04년 6월호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 전쟁영화 이야기
[내가 본 '연평해전']
[1] 배우 이순재
"얼마나 처절한 전투였는지 당시 비극 생생히 그려내 무관심했던 사람들에게 반성할 기회 주는 영화"
/배우 이순재
'연평해전'은 영화 자체로 완성도가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고 엊그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서 충격이 컸다. 배우들도 애국심이 전해질 만큼 열심히 했다. 제2연평해전의 실상을 보고 싶었는데 얼마나 처절한 전투였는지 영화가 말하고 있었다. 싸우다 죽어가면서도 전우애를 발휘했고 결국 승리를 이끌었다는 게 특히 감동적이었다.
2002년 6월에 우리는 월드컵으로 들떠 있었고 북한은 그것을 노렸다. 무방비 상태에서 정신이 해이해진 순간 기습을 당한 것이다. 제2연평해전은 국가적 재난으로 기록해야 할 사건이었다. 우리 모두 그때 희생된 장병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무관심했던 사람일수록 영화를 보고 더 미안해질 것이다.
북한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앞에서는 평화 무드를 조성하고 뒤에서는 전쟁 준비를 했던 집단이다. 1950년 6월 초에 북한은 억류 중인 고당 조만식 선생과 간첩 이주하·김삼룡을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분위기가 좋아지는구나' 했는데 며칠 있다가 6·25가 터졌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여전히 겉과 속이 다른 집단과 마주하고 있으니 정말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에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때도 우리는 무방비 상태였다. 일부 좌파들이 악용하는 당시 표어 중에 '북진통일'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가 있었다. 슬로건일 뿐 우리에겐 탱크 한 대도 없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6·25전쟁이 터지고 6월 27일 아침에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여름 피란'은 충남 공주로 갔는데 인민군이 벌써 금강을 넘고 있었다. 1·4 후퇴 때는 충북 보은·옥천으로 '겨울 피란'을 갔다. 키가 컸으면 의용군으로 붙들려 갔을 거다.
'연평해전'을 보는 관객은 저마다 숙연했다. 눈물겨운 장면이 많았다. 젊은 군인들이 사투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막연히 우리 군대에 '관심병사'가 많은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우리 젊은이들도 아낌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교전수칙이 복잡해서 일일이 상부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느라 우리 피해가 커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늘 북한이 먼저 싸움을 걸어온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저들에게 강력하게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
통일은 일방적으로 우리가 하자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변화가 필요하다. 금강산 관광은 우리 민간인 관광객이 피살됐기 때문에 중단됐다. "미안하다. 우리 병사가 실수했는데 대단히 잘못됐다.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하면 재개될 수 있는 일이다. 그걸 인정 안 하고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됐다. 북한이 언제부턴가 우리를 인질로 착각하는 것 같다. 목 조르고 두들겨패면 뭘 좀 보내는구나 하고 버릇을 잘못 들여 놓았다. 햇볕정책은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우리 진심을 그들이 정략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문제인 거다. 계속 당할 수만은 없다. 유화책을 쓰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연평해전'이 정치적인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이 각자 판단할 것이다. 죽은 장병을 살릴 수는 없다.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느끼고 반성하고 보완하고 대비해야 한다. 흥행은 공감 때문일 것이다. 천만은 봐야 할 영화다. 우리 현실을 좀 똑바로 알 필요가 있으니까. 이념적으로 헷갈리지 말고 북한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주권, 우리의 기반을 강력하게 수호해야 한다.
유족에게는 그저 죄송하고 안타깝다는 말밖에 전할 게 없다. 사람의 기억은 불확실하다. 영화 '연평해전'은 그 비극을 오래 기억해주는 그릇으로 삼아야 한다. 6·25를 다룬 영화 중에는 오히려 혼돈을 가져다주는 것들도 여럿 있었다. 내가 목격한 전쟁의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인민군을 인도적이고 멋쟁이로 그려놓았다. 미래의 남북 화해를 위한 영화겠거니 이해는 하지만 '연평해전'처럼 사실을 좀 더 정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다 같이 반성할 기회를 준 셈이다.
2015-07-06
[2] 산악인 엄홍길
해군에서 복무했다. 산을 한창 다닐 때라 육군 가면 편했을 테지만, 3년 동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망망대해를 떠다닌다는 낭만도 있었다. 갑판병으로 인천에서 연안 경비정을 탔는데 졸병 시절엔 취사 일뿐이었다. 끼니는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잠자리에 누워서도 다음 날 음식 걱정을 했다. 그러다 특수전단(UDT) 요원 모집 포스터를 보고 지원했다. 체질에 맞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너무 힘들어서 후회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해군은 가족과 같다. 영화 '연평해전'도 저절로 몰입됐다. 특히 영결식 장면에서 가슴 아팠고 눈물이 났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이런 나라에서 유사시에 누가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킬까 의문이 들었다. 참수리 357호 장병과 유족께 낯부끄러웠고 대한민국이 싫어졌다.
며칠 전 판문점에 다녀왔다. 남과 북 사이에 철책도 없이 선이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서울에서 고작 한 시간 거리였다. JSA 경비대대에서 강연을 했다. "실패와 좌절이 있었기에 성공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패담을 들려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라"고도 조언했다.
요즘 군인들은 정신적으로 나약하다. 이기적이고 조직 생활을 모른다. 희생정신도 부족하다.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 지역에 가면 해발 4000~5000m 빙하 위에 군부대가 있다. 동상 환자, 고소병 환자가 있지만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다. 히말라야 원정도 혼자 가는 게 아니다. 팀이 간다. 우리라는 생각, 가족이라는 생각, 한마음 한뜻으로 가야 정상을 밟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연평해전'은 국민적 후원으로 완성됐다. 영화를 보면서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국민은 또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젊은 세대가 많이 본다니 반가운 일이다. 2002년 6월 357호의 비극은 월드컵 중계방송 아래 자막으로 축소돼 흘러가버렸다. 정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적이 쏜 다음에 사격하라는 교전 수칙은 엉망이었다. 툭하면 국정감사 하는데 이게 조사감이다.
/이철원
군도 해이해졌다. 북한 병사가 노크로 귀순을 알려야 할 정도다. 안개가 짙어서 몰랐다는 해명이 말이 되나. 강한 정신, 강한 부대를 만들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런데 훈련 세게 하다 누가 자빠지면 인터넷 들쑤시고 지휘관은 목이 날아갈 판이다. 그러니 대충대충, 무사안일로 흐른다. 최근에 일어난 관심병사 사건은 대부분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부터 문제가 쌓였다가 폭발한 것이다. 전부 다 군이 잘못했다고 하고 사기 떨어뜨리는데 이래서 되겠나. 한심하고 답답하다.
제2연평해전 여섯 용사를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격상하겠다는 것을 국방부가 반대하고 있다. 유족을 또 한 번 모욕한다. 나라가 무슨 꼴인가. 미국이 강국인 이유는 국민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6·25전쟁 때 북한에 남겨진 유해를 발굴해 데려온다. 국민은 그런 국가를 믿고 자긍심을 가진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정치와 교육 때문이다. 흑인지 백인지 흐리멍덩해졌다. 사고만 터지면 머리띠 두르고 소리를 지른다. 법 위에 '떼법'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을 안 지키면서 인권을 운운할 수는 없다.
나는 산에서 10명을 잃었다. 동료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떨어지는 일을 당하면 참담하고 고통스럽다. 살아남은 게 죄스럽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 그들이 품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일어선다. 그들과 함께라는 생각으로 산에 오른다. 극한 상황에 부닥치면 그 동료 얼굴을 떠올린다. 그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왼다. 나에게 힘을 다오, 용기를 다오. 그럼 어느 순간 위기에서 벗어났고 정상을 밟는다. 히말라야 설산에 묻혀 있어야 할 내가 꿈을 이루고 무사히 내려왔다면 어떤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살고 있다.
여섯 용사도 그렇게 기억돼야 한다. '연평해전'은 초·중·고교에서 수업의 연장으로 볼만한 교육적 가치가 있다. 그런 분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국가도 존재한다는 걸 학생들이 모른다. 이순신은 너무 멀리 있다. 우리는 북한이라는 화약고를 머리에 이고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국가관을 다시 세우고 군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기회다. 군대는 '시간 낭비'가 아니고 군인은 '군바리'가 아니다.
제2연평해전에서 이겼지만 희생을 수습하는 과정은 13년 동안 실패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버리다시피 했다. '연평해전'은 비극을 어떻게 추스르고 성공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숙제를 준다. 그들을 예우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다시 국가를 위해 방패가 되겠나.
2015.07.10
[3] 이용만 前 재무부 장관
연평해전'을 보는 내내 참혹했던 전투 장면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전투를 해본 사람이라면 모든 장면이 실전 상황을 가감 없이 묘사했다는 데 공감할 것이다. 전투 장면을 보면서 필자 또한 6·25전쟁 중 그날의 기억들이 주마등같이 떠올랐다.
1951년 5월 11일. 최전방인 춘천 가리산에 잠복하여 척후 활동 중이었다. "적군 출현! 소대 전원 즉시 출동!"이라는 명령에 따라 나는 M1 소총 실탄 약 300발을 전신에 휘감고 능선을 따라 적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행군 중 문득 '만약 북에 있는 맏형(승현)이 인민군으로 끌려와 내게 총을 겨눈다면 내가 쏴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김창조 소대장을 선두로 능선을 행진하고 있을 때 발소리에 놀란 인민군들은 황급히 도망쳐 T자 산 능선에 잠복했다. 버리고 간 담배꽁초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잠시 후 '따따따다' 일제히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적의 공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50~60m 떨어진 적군을 향해 M1 소총을 1시간 이상 정신없이 쏘았다. 남은 실탄이 한 줄, 100발 정도였을 때 총열이 달아올라 나무 뚜껑이 타기 시작했으며 뿌연 연기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조준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연기가 가시기를 기다리는 사이 적의 총탄이 쏟아졌다. 집중 사격이었다. 나는 1m쯤 언덕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가 총열이 조금 식었을 때 다시 올라가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또다시 총열이 달아올랐고 연기로 앞을 볼 수 없었다.
잠시 머문 그 순간 요란한 따발총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에 도끼로 후려치듯 큰 통증이 느껴졌고 척추에도 총을 맞고 말았다. 내 몸은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2~3바퀴를 구르다가 불타다 남은 나무 그루에 걸렸다. '아! 나는 죽었구나. 죽을 때는 이렇게 아픈 거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북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산 밑은 화강암 바위 절벽으로 더 굴렀으면 시체도 못 찾을 낭떠러지였다.
이종국 일병이 "용만이 총 맞았다" 외치며 도우러 왔다가 총탄이 다시 쏟아지자 재빨리 피신했다. 나는 일어나서 "나는 죽었으니 빨리 피신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총 맞고 다시 사는 것을 몰랐다. 이때 소대장이 뛰어와 "인마, 총 한 발 맞고 뭘 그래!"라고 말하면서 오른팔을 어깨에 메고 재빨리 바위 뒤로 피신시켰다. 다행히 두 발 모두 급소를 피해 갔다. 진땀 흘리며 험산 계곡을 넘어 후송해준 미군 병사 4명에게 지금도 깊이 감사한다.
2002년 제2연평해전의 우리 해군 용사들은 6·25전쟁 당시의 나보다 훨씬 참혹한 전투를 치렀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아들들이 희생되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기에 영화가 주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몇 가지 제언을 할까 한다.
첫째,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군에 가야 하며, 나라를 지키는 고귀한 사명을 수행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와 지도자의 가장 기본적 책무다. '적이 먼저 총을 쏜 다음에 대응하라'는 교전 수칙은 참으로 무책임의 극치이지 않은가?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단지 국방의 의무감보다 용기와 보람, 자긍심을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 방위력을 굳건히 강화하는 노력을 쉼 없이 경주해야 한다〈2013년 6월 22일자 조선일보 칼럼 참조〉. 1988년 폐지된 '방위성금제도' 부활과 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조기 배치를 제안한다. 그리고 장차 감군(減軍)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정치인들의 '복무 기간 단축' 같은 인기영합적 공약의 남발도 걱정이다. 국가 안보야말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지상 명령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다시 한 번 젊은 영웅들의 명복을 빈다.
☞1933년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 단신으로 월남, 국군에 입대했다.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재무부 재정담당 차관보, 신한은행장, 한국외환은행장, 은행감독원장, 재무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용만 前 재무부 장관 2015.07.22
2013-05-29 눈물로 만드는 영화 '연평해전'을 아십니까
우리가 제2연평해전을 떠올릴 때 더욱 참담해지는 것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우리의 무심함 때문이다. 딱 한 달 뒤 11주기가 돌아오는 이 비극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착잡 미묘하다. 뭐랄까, 트라우마처럼 붙어있는 죄책감 비슷한 느낌이다. 천안함 폭침이 분노와 충격을 주었다면, 제2연평해전은 우리를 그저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형제자매를 모른 척한 가족의 뒤늦은 회한과도 비슷할 것 같다.
제2연평해전이 터진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폐막 전날(6월 29일)이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목숨 건 사투가 벌어지고 장병 6명이 산화했지만, 이날 우리의 관심은 온통 터키와의 월드컵 3·4위전에 쏠려 있었다. 정부는 사태를 축소하느라 쉬쉬했고, 온 국민이 애도(哀悼)는커녕 붉은 티셔츠 차림으로 거리 응원을 벌였다. 다음 날 김대중 대통령은 영결식 참석 대신 월드컵 결승전을 보러 도쿄로 날아갔다. '참수리 357호'의 6용사들은 그 후로도 6년 동안 죄인처럼 묻혀 있어야 했다.
이런 트라우마가 있기에 6용사 스토리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경남 진해에선 'NLL 연평해전'이란 영화가 10월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이다. 메가폰을 잡은 것은 해군 병장 출신 김학순 감독이다. 그는 "참수리호 6용사의 영화는 왜 없느냐는 지인의 질타가 가슴을 때렸다"고 제작 이유를 밝혔다. 김 감독뿐 아니라 제작진 상당수가 해군·해병대에서 복무한 것이 눈에 띈다. 윤영하 소령 역의 주연 정석원(28)씨부터 해병 수색대 출신이다.
첫 촬영은 넉 달 전 서울 홍익대 거리에서 시작됐다. 참수리호 조타장 한상국 중사가 부인을 위해 결혼식 반지를 구입하는 장면이었다. 운명의 그날, 한 중사는 허리 관통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방향타를 놓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41일 만에 참수리호 조타실에서 방향타를 단단히 움켜진 자세 그대로 발견됐다. 그 후 한 중사 부인이 "(영웅을 냉대하는)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이민을 떠나 사람들 마음을 울리기도 했다.
이 영화는 제작 과정 자체가 한 편의 감동 드라마 같다. '대장금'의 한 상궁으로 유명한 배우 양미경(52)씨는 개런티를 한 푼도 받지 않고 출연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부상병을 돌보다 전사한 의무병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다. 양씨는 "꼭 만들어져야 할 영화인데 제작 난항이란 말을 듣고 안타까워서…"라고 했다. 양씨뿐 아니다. 120여명의 배우·스태프 전원이 사실상 무(無)보수로 참여하고 있다. 진보와 좌파 코드가 판치는 영화계, 이들은 왜 유별나게 애국의 가치에 매달리는 것일까.
장외에선 20·30대 젊은이들이 응원부대를 자처하고 나섰다. 청년들은 '2030 나눔서포터즈'를 조직해 영화 홍보와 제작비 기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연평해전의 진상을 알리고 인터넷에 인증샷을 올리기도 한다. 청년들은 참수리호 영웅들 스토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11년 전 이들은 초·중학생이었다. 연평해전에 아무 부채(負債)가 없을 청년들이 앞장선 것이 놀랍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영화 제작은 순탄하지 않다. 제작비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5·18 광주를 다룬 '화려한 휴가'에 굴지의 대기업이 투자했었지만 '연평해전'엔 어떤 투자회사도 붙지 않았다. CJ·롯데·쇼박스 등 문을 두드린 투자사로부터 모조리 거절당했다. 애국과 안보 코드의 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좌파 상업주의가 지배하는 영화판의 현실이 이랬다.
제작진은 대신 인터넷 모금으로 비용 조달에 나섰다. 일반인으로부터 몇 만원씩 후원받아 지금까지 2억여원을 모았다. 놀랍게도 소액 후원자의 80%가 20~30대 청년층이었다.
모금 첫날, 한 고교생이 5000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보내왔다. "당장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쓴 고교생 사연을 보고 제작진은 눈물을 뿌렸다. "연평해전 당시 나도 육군 병장이었다"며 1억여원을 후원한 30대 사업가도 있었다. 모금에 참여한 수천 명 후원자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 영화는 꼭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제작진은 지금 진해 앞바다에서 해상 전투신을 촬영 중이다. 먹고 자는 숙식비와 기자재 임차료만도 한 달간 5억원이 더 필요한데 제작비는 바닥난 지 오래다. 악전고투 속에서도 배우·스태프들을 버티게 하는 것은 단 하나, '꼭 만들어야 할 영화'라는 신념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영화는 반드시 완성돼 빛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무관심 속에 산화한 참수리호 6용사, 우리가 냉대했던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다.
조선일보
2015.06.25 [영화 '연평해전' 개봉 첫날]
쥬라기월드 누르고 예매율 1위 "2002년 월드컵때 이런 일이… 국가와 애국심 생각하게하는 영화" 한민구 국방 "부모 심정으로 봤다" 한국 전쟁영화 최초로 3D 상영
NLL(북방한계선)을 넘어 남하한 북한 경비정에서 날아온 85㎜ 포탄이 조타실에 명중할 때 상영관도 배처럼 흔들렸다. 고속정만 한 공간을 가득 메운 관객은 다 같이 2002년 6월 29일의 참수리 357호에 승선한 것 같았다. 화염이 치솟았고 귀가 먹먹해졌다. 관객은 몸을 웅크렸다. 스크린 속 피가 흥건해진 갑판으로 뜨거운 탄피가 쏟아졌다.
영화 '연평해전'(감독 김학순)이 24일 개봉했다. 이날 저녁 서울 용산 CGV에서 만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다. 그들은 월드컵 4강 신화(神話) 속에서 고립돼 목숨 걸고 싸운 357호 용사들과 마주해야 했다.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4위전이 열린 6월 29일, 새벽에 출항할 때부터 다들 숨을 죽였다. 기습 공격을 받아 교전이 벌어졌고 윤영하 정장, 황도현 하사, 조천형 하사, 서후원 하사가 총알이나 파편에 맞아 차례로 쓰러졌다.
조타장 한상국 하사는 침몰한 357호와 함께 실종됐고 중상을 입은 의무병 박동혁 상병은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됐다. '연평해전'은 이 지점에서부터 영화와 현실이 겹쳐진다. 월드컵 중계방송 아래로 뉴스 속보가 무심하게 흘러간다. 실제 있었던 합동영결식, 유족의 오열, 예포 발사, 하관 등을 당시 TV 화면 그대로 옮겨 보여줄 땐 객석도 흐느꼈다. 옆자리에 앉은 여성 관객은 눈가를 훔치기 바빴다. "일발 쏴" "일발 쏴" "일발 쏴"…. 20~30대 젊은 관객이 대부분인 객석은 13년 전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의 장례식에 몸을 들썩이며 동참했다.
영화 '연평해전'은 이날 오후 3시 예매점유율 1위에 올랐다. 공룡 판타지를 담은 '쥬라기 월드'와 1978년 부산의 납치사건을 다룬 '극비수사', 용산 참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소수의견'을 제쳤다. 우리가 짐짓 잊었던 전쟁의 한 토막이 다른 실화와 환상을 모두 넘어선 것이다.
본편이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와도 관객은 좀처럼 일어서지 못했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응원하겠다"는 윤영하 정장의 생전 영상을 지켜봤고 생존 장병들의 증언을 들으며 붙박인 듯 앉아 있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본 대학원생 조선영(27)씨는 "윤영하 정장의 아버지가 벽에 걸린 윤영하의 하얀 정복을 쓰다듬다 부둥켜안을 때, 숨을 거둔 박동혁을 향해 어머니가 전기충격기를 들이댈 때 눈물이 쏟아졌다"며 "2002년 월드컵 때 이런 비극이 있었는지 영화를 보고야 알았다"고 했다. 조금 일찍 퇴근해 달려왔다는 직장인 정인호(32)씨는 "국가란 무엇이며 애국심이란 또 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며 "중학생 조카를 데리고 다시 볼 것"이라고 했다.
관객은 영화관 화장실에서 가장 솔직해진다. 영화가 끝나고 들어간 남자화장실에서 가장 많이 들린 소리는 "슬프네" "너도 울었지?"였다. 이날 CGV에서 이 영화 예매자는 여성이 63%, 남성이 37%다. 나이별로는 핵심 관객이랄 수 있는 20대가 61%를 차지했고 30대(23%)·40대(10%)·10대(6%) 순으로 나타났다. 관객 '플스폰'은 인터넷에 "한일 월드컵 당시 모든 국민이 환호했을 때 실제 일어난 진짜 대한민국 역사라는 것만 알아도 그 가치가 충분하다"는 글을 남겼다. 영화의 원작 소설 '연평해전'을 쓴 최순조씨는 "색깔을 들씌우지 마라"며 "그들은 정치적 목적을 갖고 목숨을 던지지 않았다. 주어진 책임을 다한 것뿐"이라고 했다.
'연평해전'은 한국 전쟁영화 최초로 3D로도 볼 수 있다. TV 화면으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카드 섹션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월드컵 경기장의 함성과 357호 용사들의 악전고투를 교차 편집하면서 감정 진폭을 키웠다. 카리스마 넘치는 '독쟁이' 윤영하와 수병들이 좋아하지만 남모를 상처가 있는 한상국, 맑고 책임감 강한 박동혁을 중심으로 승조원의 끈끈한 관계, 남겨진 가족의 애환을 서정적으로 뭉쳤다. 파도 벼락, 꽃게 라면, 인간 안테나, 애인 면회 같은 장면이 희극적 쉼표를 찍어준다.
이날 저녁 간부들과 함께 용산 CGV에서 이 영화를 본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오늘 영화의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아들들이고, 장관 이전에 부모의 심정으로 영화를 봤다"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은 반드시 기억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2015년 06월 29일 “DJ정부 연평해전 전사자 외면에 ‘비참함·분노’ 느꼈죠”
故 박동혁 병장 치료 맡았던 당시 군의관 이봉기 교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산화한 군인들의 희생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당시 정부의 이해하기 힘든 행태를 보고 자연스레 ‘헛된 죽음’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의무병 박동혁 병장 등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강원대 의대 이봉기(45·사진) 심장내과 교수는 29일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 교수는 “의료진의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 사고 발생 84일 만에 박 병장이 운명한 뒤 장례식장은 정부 고위인사, 군 수뇌부 누구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썰렁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당시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면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고귀한 희생이 자칫 ‘헛된 죽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군인으로서 너무나 비참했고 국가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군인들이, 의무병이 다치고 죽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국가가 앞으로는 절대로 군인들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자신이 잘못되면 남은 가족들한테 국가가 엄청 잘해주고 뒤를 든든히 돌봐주고, 대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군인들이 몸을 던지지 않겠습니까.”
지난 1일 영화 ‘연평해전’ 시사회 때 부상자와 사망자 유족들과 오랜만에 만난 이 교수는 의무병으로 자신이 혼신을 다해 치료했던 박 병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후송돼온 부상자 중 의무병이던 박 병장이 제일 많이 다치고 파편도 많았습니다. 생존자들에게 물어보니 전투병들은 은폐·엄폐하며 몸을 숨기지만 의무병은 여기저기서 부상자들이 부르는 소리에 뛰어다니느라 자기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어요. 총탄과 파편에 맞아도 아픈 줄 모르고 뛰어다니던 장면이 영화 속 전투 장면 그대로였다고 생존자들이 증언했습니다.”
이 교수는 “부모님과 동료들 얘기를 들어보니 박 병장은 착하고 정이 많고 남 생각을 많이 하는 굉장히 괜찮은 젊은이였다”며 “박 병장이 사망하던 날 저를 비롯한 모든 의료진 가슴에도 구멍이 뚫렸다”고 회상했다. 이 교수는 “물과 피가 섞여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총알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 전투장면의 전율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전해왔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 교수는 2003년 딸에게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다’는 글을 의료전문지 수필공모전에 응모해 수상한 바 있다.
정충신 기자 csjung@munhwa.com
2015.07.02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우리가 할 일이다
방학을 맞아 집에 온 아들과 잠시 헤어지는데도 마음이 울적했다. 한편으로는 연평해전 전사자 고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씨를 생각하니 내가 너무 사치스러운 감정에 젖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연평해전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는데 '연평해전' 영화가 실상을 알려주고 있어 참 다행이다.
연평해전은 내게 목에 걸린 가시 같다.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여섯 용사, 부상한 제2연평해전 참전 용사들의 처우가 너무나 부당해 늘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대통령은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말라는 교전수칙을 지시하고, 국민들은 월드컵 3·4위전 경기에 모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서해 바다에서는 목숨을 건 교전이 벌어져 30여 분 만에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2003년 한 군의관은 자신의 9개월 된 딸아이에게 쓴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군대에 온 이래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을 달고 있는 부상병을 목격했다. 중환자인 박 상병이었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 근육과 척추에 박혀 있었다.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으며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부상한 동료를 구하려고 뛰어다니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군의관들은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고 맘을 모았다. 그러나 회복이 되는 듯하던 박 상병은 결국 9월 20일 새벽에 숨을 거두게 된다"라고 썼다. 고 박동혁 병장뿐만 아니라 다른 전사자와 부상자들에 대해서도 목격한 참상을 적고 있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유족들을 더 아프게 한 것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외면한 대통령과 정부의 처신이었다. 일본에서 월드컵 결승전을 보던 대통령의 표정은 밝고 즐거워 보였다. 박 병장 어머니 이경진씨는 말한다. "아들 낳아서 해군 보낸 죄밖에 없다. 슬프지만 내 아들이 자랑스럽다"라고…. 나도 그렇다. 6명의 전사자와 부상병을 생각하면 슬프지만 참수리 357호 대원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고맙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는다면 유족들의 아픔도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부산 UN기념공원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6·25전쟁 희생자들도 잠들어 있다. 그들은 정말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우리나라 젊은이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전하는 최소한의 감사 표시다.
신용옥·울산 동구
2015.07.08 [인터뷰] "'너를 믿는다'는 말에 용기내 연기"…'연평해전' 김동희
'연평해전'(감독 김학순)은 실제 사건(제2연평해전)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영화다. 연출을 맡은 김학순 감독이 이 작품을 "희생자를 위한 헌시"로 표현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연평해전'은 영화이지만, 영화로 그치지 않는다. 요컨대 '연평해전'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대중적 파급력에 기댄 일종의 기록에 가깝다.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연평해전'에 기여한 영화를 이루는 요소 중 두드러진 한 가지를 꼽자면, 역시 배우들의 연기다. 김무열, 이현우, 진구 등이 이 영화에서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애초에 '연평해전'은 배우에게 허락된 행동반경이 넓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연기로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영화가 집중하고자 한 것은 세상을 떠난 6용사였을 것이다. 김학순 감독은 대중영화의 틀에 사건을 집어넣기 위해 다시 6용사 중 3용사(윤영하 대위, 한상국 하사, 박동혁 상병)를 택했다. 이들을 연기한 배우 김무열과 진구, 이현우는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데 대한 부담감을 여러 자리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이런 부담감이 어디 이들뿐이었을까. 추측이지만, 당시 참수리357호에 탔던 군인의 실제 이름을 부여받은 모든 배우들은 3명의 주연 배우 못지않은 사명감으로 영화에 임했을 것이다. 배우 김동희(29)도 그런 배우 중 한 명이다. 김동희가 맡은 역할은 박동혁 상병의 절친한 동료로 나오는 '권기형 상병'이다. 신인배우가 제안이 들어온 역할을 거절하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김동희는 권기형 상병 역을 거절했다.
"아픈 내용을 담은 영화잖아요. 실화이기도 하고요. 처음에 김학순 감독님에게 무서워 못 하겠다고 말했어요. 용기가 안 난다고. 제가 지금까지 했던 역할 중에 가장 큰 역할인데, 이 정도 역할을 할 깜냥이 제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김학순 감독이 보내준 김동희에게 보내준 믿음과 신뢰 때문에 그는 촬영 열흘을 앞두고 영화에 합류했다. 합류했다고 다가 아니다. 이제 연기를 해야 한다. '권기형'을 연기하는 김동희의 생각은 하나, "권기영 형에게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였다. 그는 "내 방식대로만 연기할 수는 없었다. 그분은 살아계신다. 유가족도 있고, 생존자도 있었다. 어떻게 내 맘대로 연기하겠나"라고 설명했다.
김동희는 당시 교전에 참여했던 권기영 씨에게 의지했다. 촬영 전에는 권 씨와 술자리를 함께 했고, 촬영 중에는 그와 자주 통화하면서 당시 권 씨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했다. 김동희는 권기형 씨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 중에 "너를 믿는다"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촬영하다가 힘들었던 순간이 있어요. 자꾸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때 술 한 잔 마시고 기영이 형한테 전화했어요. 하소연 좀 했죠. 그때 기형이 형이 그러시더라고요. '너를 믿는다. 우리를 위해서 조금만 버티고, 이겨냈으면 좋겠다.' 정말 큰 힘이 됐어요."
영화 속 김동희에게서는 부담감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연기는 김무열, 진구, 이현우 못지않게 자연스럽다. 김동희는 자상하고, 친절한 전우의 모습과 함께 교전 상황에서는 잘린 손가락을 부여잡고 북한군을 상대로 총을 쏘는 투혼도 보여준다. 그는 교전 장면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는다.
전투 장면 촬영은 배우 진구가 가장 먼저 했다. 김동희는 촬영에 앞서 진구의 연기를 가편집본으로 봤다. 그리고 감동 받았다.
"진구 선배 혼자 찍은 장면이었어요. 카메라 앞에서 그냥 혼자 연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는 걸 알았죠. 진구 선배님이 기준점을 알려줬어요."
김동희의 데뷔작은 지난해 개봉한 영화 '수상한 그녀'다. 1986년생인 그의 데뷔를 빠르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부터 끊이지 않고 드라마와 영화에 모습을 비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역할이 작지만,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인배우에게는 행복한 일일 수 있다. '연평해전'의 권기형은 김동희가 한 연기 중 가장 분량이 많은 역할이었다.
"'연평해전'은 배우로서나 인간 김동희로서나 성장할 수 있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정말 좋은 공부였습니다. 연기에 욕심도 더 생기고, 자신감이 더 생겼어요."
뉴시스
2015.07.10 영화보다 사실이 더 슬픈 연평해전
“한상국 중사의 처는 2005년에 고국을 떠났고 조천형 중사의 딸 시은이는 2015년 2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박경수 중사는 제2연평해전 이후 전역을 고려했지만 마침 딸이 생겨 마음을 바꾸었다. 그러곤 천안함으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때 바다에서 산화하였다.”
지난 주말 영화 ‘연평해전’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다가 참았던 눈물샘이 터졌다. 영화 후반 고(故)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가 숨진 아들의 하얀 해군 제복을 쓰다듬을 때도 가슴이 먹먹해지긴 했지만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그러나 본 영화가 끝난 뒤 희생자의 뒷얘기를 담은 자막을 보면서 기어이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엔딩 크레디트와 희생자의 프로필이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자리에 앉은 60대는 됨 직한 부부는 희생자의 나이를 보고 “어휴, 저 사람은 우리 아들보다 어리네”라고 탄식을 했다. 영화보다 사실이 관객들을 울린 것이다.
김학순 감독은 처음엔 연평해전을 저예산 다큐멘터리 영화로 기획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많은 팩트를 담고 있다. 특히 사전에 우리 군이 감청을 통해 북한의 도발 움직임을 알아챘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에서도 보도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해 6월 13일 대북 감시부대는 참수리 357호를 공격한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상부에 발포 명령을 구하는 통화를 감청했다. 등산곶 684호는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때 우리 해군에 당했던 쓰라린 패전 기억을 갖고 있다.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처음부터 전차포로 무장하고 복수를 노린 것이다. 결국 이를 알고도 깔아뭉갠 군 수뇌부가 참수리 357호를 당하게 만든 셈이다.
참수리호의 반격으로 거의 침몰해 가던 등산곶 684호에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린 것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클라이맥스로 치닫던 30분간의 격렬한 전투 장면 끝에 관객들이 허탈감을 느끼는 이유다. 움직이지도 못하던 등산곶 684호는 북한 경비정에 의해 예인돼 돌아갔고, 참수리 357호만 차가운 바닷속에 잠겼다.
연평해전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의 대우는 더 울분을 터뜨리게 만든다. 월드컵 관람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귀국길에 성남공항 코앞에 있는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입원한 부상자들을 위문하지 않았다. 희생자 영결식엔 대통령은 물론 국방부 장관도 참석하지 않았다. 허리에 관통상을 당하고도 숨질 때까지 조타수 키를 놓지 않았던 한상국 중사의 묘비엔 ‘연평도 근해에서 사망’이라고 적혔다. ‘전사’가 아니라 ‘순직’으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는 연평해전 희생자들에게 단순히 공무상 사망자 보상금을 적용해 본인 월급의 36배만 지급했다. 그 결과 윤영하 소령은 6500만원, 한상국 중사는 3800만원, 박동혁 병장은 3000만원만 보상을 받았다.
도발 정보 묵살, 복잡한 교전 수칙, 응징도 막은 사격 중지 명령, 희생자들에 대한 형편없는 예우…. 영화를 볼수록 분노의 화살이 북한에서 우리 정부로 옮겨 갔다.
이 영화를 놓고 개봉 초반부터 말들이 많았다. “애국 마케팅을 이용한 반공 영화”라는 공격도 있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인색한 평가(별점 두 개)를 내렸다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영화 ‘변호인’ ‘국제시장’ 개봉 때도 벌어졌던 패싸움이다. 김대중평화센터는 영화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배급사 NEW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변호인’을 배급했던 영화사다. 서동욱 NEW 부사장은 “반공 영화를 만들거나 희생자를 영웅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관객들이 공감을 한다면 그건 ‘사실의 힘’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주말 400만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영화의 네이버 평점은 현재 9.29다. 영화 전문가는 아니지만 개인적 평가를 하라면 9점을 주겠다. 감점 이유는 이렇다. “영화적 묘사보다 사실이 주는 슬픔이 더 강렬하다.”
중앙일보 정철근 논설위원
2015-07-15 연평해전을 봐야 할 분들
영화 ‘연평해전’을 보기 위해 표를 끊었다. 전직 영화 담당 기자이다 보니 완성도를 평가하는 버릇이 발동했다. 화면 구성, 사운드, 스토리의 미진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 초반과 중반부에는 집중력이 떨어져 자꾸 딴 생각이 들었다. 1970년대식 유머와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몇몇 장면에서는 낯이 간지러웠다.
후반부, 전투가 시작되자 ‘이 영화가 내가 봤던 그 영화가 맞나’ 싶었다. 긴박한 전투 장면은 서스펜스를 극도로 끌어올렸고, 등장인물들의 안타까운 희생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초반과 중반부는 별 5개 만점에 별 2개, 후반부는 별 4개.
엔드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등장하는 실제 ‘제2연평해전’ 부상자와 전사자 가족의 인터뷰 영상은 영화가 실제 사실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했는가라는 궁금증을 불렀다.
당시 기사와 기록물들을 뒤졌다. 그러고 나니 영화의 여운으로 미열이 남아있던 심장은 화가 나 뜨거워졌다. 당시 정부가 보여준 태도가 그랬다. 부상한 해군 장병들이 입원한 국군수도병원에 대통령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전사자 영결식에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없었다. 참수리 357호가 북한 등산곶 684호의 공격을 받고도 다른 함정의 지원 없이 외롭게 싸우던 영화 장면이 오버랩 됐다.
전사자 6명의 면면을 보니 이들이 더 외로워 보였다. 명문대 출신은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참수리 357호의 함장 윤영하 소령뿐이었다. 한상국 상사는 광천상업고, 조천형 중사는 대전대 사회체육학과, 황도현 중사는 숭실대, 서후원 중사는 대구기능대 출신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묘사된 박동혁 병장은 원광보건대 치기공과에 다녔다. 황 중사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학비를 벌겠다며 해군에 자원입대했고, 서 중사의 집안은 사과농사를 지었다. 이처럼 대부분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천안함 폭침 사건의 기록을 찾아보니 역시 명문대나 서울 소재 대학 출신은 드물었다. 희생된 46명의 용사 중 이용상 하사(숭실대)와 강태민 상병(홍익대)만이 서울 소재 주요 대학 출신이었다.
두 사건 모두 북한의 도발이 잦은 서해상에서 해군과 관련된 것이었다. 도발이 잦은 곳이라면 공부 잘한, 머리 좋은 인력을 배치해야 전투력을 높일 수 있는 것 아닐까. 왜 뱃멀미 나고 힘들다는 해군에서는 명문대 출신을 찾기 힘든 걸까. 순직자 중에는 고위층 자제도 없었다.
영국 왕실은 대대로 왕자들에게 엄격한 군복무를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달 10년간의 군 생활을 마친 해리 왕자는 아프가니스탄 남부 탈레반 거점 지역에서 복무했다. 찰스 왕세자는 6년간 해군 장교로 복무했고, 그의 동생인 앤드루 왕자는 1982년 헬기 조종사로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공산주의자도 예외는 없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도 6·25전쟁에 참전해 1950년 전사했다.
‘연평해전’의 단체 관람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군 장병들의 안보교육용으로 제격이라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정작 봐야 할 분들은 따로 있다. 본인이나 자제들의 군 미필 혹은 면제로 눈총을 받으며 청문회 문턱을 간신히 넘은 국무위원들, 군대 안 간 국회의원들은 단체로 극장을 찾으시길.
민병선 문화부 기자 bluedot@donga.com
2015.07.17 "고등학생 돼서야 연평해전 알아… 죄송스럽고 부끄러워"
인천 송도고 1·2학년생, 연평해전 6용사에 손편지
"2002 월드컵에 모두가 눈 돌린 상황에서 당신은 서해의 푸르름을 지켜주셨습니다. 우리 학교를 졸업하신 선배님이시기에 눈물이 핑 돕니다."
15일 오후 3시, 인천시 연수구 송도고등학교 3층에 있는 1학년 5반 교실에선 학생들이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내며 편지를 쓰고 있었다. 2002년 '연평해전' 때 북한군에게 맞서 싸우다 산화(散華)한 '6 용사(勇士)'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연갈색의 '주니어 ROTC' 제복을 입은 학생 30명은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편지를 꾹꾹 눌러 썼다. 엽서 뒷면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날 '손편지 쓰기' 행사를 가진 송도고는 연평해전 때 전사한 참수리 357호정 정장 고(故) 윤영하〈사진〉 소령의 모교(母校)다. 1993년 졸업한 윤 소령을 기리며 이 학교 학생과 교직원은 2013년 영화 '연평해전' 제작 성금 6168만원을 모았다. 학생들은 지난달 28일과 지난 10일 양일에 걸쳐 '연평해전'을 단체 관람했다. 영화를 본 1·2학년 학생 800명이 까마득한 선배와 그 전우(戰友)들을 편지로 위로한 것이다.
/15일 오후 인천 송도고등학교 ‘주니어 ROTC’ 학생들이 2002년 연평해전 당시 북한군에게 맞서 싸우다 전사(戰死)한 ‘6용사’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송도고는 연평해전 때 전사한 참수리 357호정 정장 고(故) 윤영하 소령의 모교다. /송도고 제공
학생들에게 가장 많은 '위문편지'를 받은 건 선배인 윤 소령이었다. 박정환(16·고1)군은 영화를 보기 전까진 미처 몰랐던 선배를 향해 "고등학생이 돼서야 연평해전이라는 전쟁을 알게 됐습니다. 죄송스럽고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라고 썼다. 윤 소령과 함께 영화 '연평해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고(故) 박동혁 병장과, 죽는 순간까지 조타실을 지킨 고(故) 한상국 상사에게도 많은 편지가 쏟아졌다. 신승호(16·고1) 학생은 한 상사에게 쓰는 편지에서 "위독한 상황에서도 조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습니다"며 "당시 적극적이지 못했던 정부의 보상과 대책에 대해 제가 대신 죄송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이날 학생들이 쓴 편지는 국민이 볼 수 있도록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손편지 이야기관'에 전시된다. 송도고 오성삼 교장은 "학생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학교 선배이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윤 소령을 잊지 않기 위해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인천=윤형준 기자
2015.07.21 연평해전에서 다리 잃었지만 인생 동반자를 만난 드라마틱한 사연
연평해전 참수리호 부정장 이희완 중매 당시 숨겨진 사연
영화관 불이 켜지자 난 눈물을 들킬까 봐 고개를 숙이다가 멈칫했다. 주변에 나 같은 울보가 많아서였다. 영화 ‘연평해전’을 봤다. 2시간 내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먹먹함을 간신히 눌렀다. 월드컵의 함성에 도취한 우리에게 잊혀져야만 했던 안타까운 희생, 그 지난 역사에 대한 분노와 회한에 휩싸였다. 특히 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부정장 이희완 중위가 포격을 맞아 다리가 절단되는 장면을 보면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면서 12년 전으로 돌아가서 내 기억의 한 페이지가 열렸다. 바로 이희완 중위와의 만남이었다.
2003년 7월 전후였다. 처음의 기억은 두 갈래로 나뉜다. 지인 혹은 군 상급자가 이희완 중위의 중매를 부탁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부에서 매니저들이 뜻을 모아 내게 전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취지는 좋으나,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고, 혹시라도 맞선 과정에서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감수했고, 그 이후에도 심신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 중위에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주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감으로 다가왔다. 이 중위와 연락이 되었을 때, 그는 우리의 제의에 어리둥절해했고, 결혼정보회사를 통한 맞선이라는 것에 어색해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에는 군인다운 호쾌함으로 “잘 부탁한다”고 우리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 중위 결혼 대작전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해군 장교로서 큰 뜻을 채 펼치기도 전에 포격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무엇보다 의족인 상태에서 결혼상대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고, 삶의 의지가 강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1000명 정도의 남녀가 있으면 확률상 그 안에 어울리는 상대는 존재한다. 1단계 리서치 작업으로 500여명의 여성 리스트가 분석되었고, 그 여성들에게 이희완 중위를 소개하고, 회원 본인이나 친구, 지인들에게 추천을 부탁하는 메일을 발송했다. 당시 50명 정도 되는 커플매니저 전체 회의가 열렸다.
“나이 차이가 나기보다는 동갑이나 1살 정도 어리거나 연상인 여성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그분 상황을 이해하고, 대화가 통하려면 비슷한 연령대가 낫겠죠.”
“무엇보다도 성장배경이 중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특히나 국가에 대한 헌신, 이런 부분에 가치를 두는 집안에서 성장한 여성이라면 그분을 더 이해할 것 같은데요.”
“가족 중에 국가유공자가 있는 여성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죠.”
여성이 갖는 다양한 이상형의 요소 중에는 이렇게 정의감, 희생정신, 용기 등에 가치를 두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신념과 행동을 이상형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본인 승낙이나 추천 메일을 받고, 회의 때 나온 의견을 반영해서 30명의 여성으로 범위를 좁혔고, 다시 회의를 해서 15명으로 압축했다. 그리고 그 15명과 일일이 면담을 했다.
“이 여성은 약간은 호기심 차원인 것 같아요. 한번 만나보고 나서…. 라고 하는데, 진지하지 못하다는 느낌 받았어요.”
“제가 면담한 여성은 다리가 불편하다는 게 계속 걸린다고 하네요. 사실 그 부분에 대한 이해가 제일 먼저 되어야 하는데, 이분은 아닌 것 같아요.”
“근무지를 옮겨다니는 것도 신경이 쓰이나 봐요. 직업적인 특수성은 만나고 나서 확인해도 되는 부분인데, 만나기 전에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받으려고 하는 게 너무 까다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자 면담한 여성들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고, 최종적으로 3명이 결정되었다. 3명 모두 이희완 중위의 국가에 대한 헌신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했다. 그 3명 중 특히 눈에 띄는 여성이 있었다. 지방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여성이었는데, 원만한 가정환경, 맏딸로서 책임감과 포용력이 있고, 긍정적이고, 배려하는 심성을 가졌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한국전에 참전했고, 큰아버지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가유공자 집안이었다.
우리가 찾던 여성상에 가장 근접한, 아니 바로 그 자체인 여성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이희완 중위는 경상도 지역에 근무하고 있었고, 여성은 광주에 있기 때문에 장거리 커플이라는 것이었다.
“00님. 남성분과 거주지역이 먼 거 알고 계시죠? 아무래도 만남이 조금은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 괜찮으세요?”
“어른들이 그러시잖아요. 산 좋고, 물 좋은 데 없다고…. 큰 그림을 그려서 사람을 찾고, 나머지 작은 그림은 만나면서 채워넣어야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제게 남동생이 있으면 00님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쩜 생각이 그렇게 건강할까요?”
내 마음은 정말 그랬다. 생각이 곧고, 건강한 여성이었고, 그래서 꼭 만남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이 중위님. 매니저분이 여성에 대해 설명드렸죠? 어떠세요? 저희가 500명 중에 찾은 분입니다.”
“그분이 허락만 해주시면 저야 좋습니다. 마음에 든다는 말도 감히 못 하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만났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장거리 연애가 시작되었다. 매니저들은 1주일에 한 번씩 두 사람에게 연락해서 안부도 묻고, 데이트코치도 하면서 각별하게 챙겼다. 만난 지 1년 만에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결혼 후 얼마 안 되어서 이 중위가 사무실을 방문했다. 군인다운 포스가 풍기는 멋진 사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얼마 안 되지만, 감사의 표시”라고 했다. 억지로 쥐여 주고 간 봉투에는 그의 성의가 들어 있었고, 그걸로 전체 회식을 했다. 이럴 때 정말 일할 맛난다.
이후에는 이 중위와 직접 연락하는 일은 없었지만, 간간이 주변을 통해 소식을 듣고 있다. 그러다가 오늘 혼자 영화를 보고, 감상에 젖었고,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보았던 그 씩씩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그와 가족의 행복을 빌어본다.
*연평해전 당시 중위 이희완은 결혼할 때 대위였고, 현재는 소령으로 대전 합동군사대 해군대학 교관이 돼 근무 중이다.
이웅진 결혼정보회사 선우 대표, 한국 결혼문화연구소 소장.
2015.08.01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300만 관객 돌파 <연평해전> 김학순 감독
영화 <연평해전>이 300만 관객을 돌파하기 직전인 7월 1일, 김학순(57) 감독은 좀 들뜬 모습이었다. 배낭을 메고 나타난 그는 “7년에 걸쳐 이 영화를 만들면서 두 가지 큰 짐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제2연평해전에서 희생된 여섯 용사의 유족이 어떻게 볼 것인가를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짐 하나는 뭘까. 김 감독은 “이름없는 후원자들”이라면서 덧붙였다. “흥행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마음 한쪽에서는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연평해전>이 손익분기점을 넘어섭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요.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고 남은 수익을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조선 DB
돈이 부족해 촬영이 여러 번 중단되며 표류한 이 영화는 국민 성금으로 목적지에 닿았다. 순제작비 60억원 중 20억원이 크라우드펀딩과 후원금 등으로 모였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제작진 말고도 개인과 단체 이름 7000여 개가 담겨 있다. 지난 6월 초 언론과 유족에 <연평해전>을 공개한 다음 날 그를 만났을 때 낯빛이 환했다. “매일 서너 시간밖에 못 자 몸은 지쳐도 이제 마음은 편하다”고 했다. “‘내 자식 죽는 거 못 보겠다’고 망설이던 분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잘 만들어줘 고맙다’고 하는데 뿌듯했습니다. 유족을 설득하고 이 영화를 만들면서 짊어진 짐, 그 무게와 압박감은 아무도 몰라요. 이제 내려놓은 것 같아 홀가분해졌습니다.”
인간은 망각에 취약하고 기억은 불완전하다. 영화는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붙잡아두는 장치일 수 있다. “유족은 극장에서 <연평해전>을 보면서 울기도 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올 때는 한 단계 승화된 표정이었다”고 김 감독은 전했다. 처음엔 겁이 나서 영화를 보기도 힘들어했지만 나중엔 안도하며 상처를 다스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월드컵의 함성 속에 외롭게 죽어간 연평해전 여섯 용사를 잊었던 관객은 미안한 마음이 될 수도 있다”며 “단순한 전쟁영화가 아니라 부조리한 우리의 현실, 인간의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국민 정성과 열망으로 일군 영화
영화 <연평해전>은 대한민국이 월드컵으로 붉게 물들던 2002년 6월 29일 오전에 서해에서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참수리 고속정 357호 승조원들의 이야기다. 윤영하 정장(김무열), 조타장 한상국(진구), 의무병 박동혁(이현우)을 중심으로 희생된 장병과 남겨진 가족의 애환을 담았다. 김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병사들의 고통과 두려움, 용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생활은 허구로 재구성했다”며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국민의 성금과 후원, 열망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DB
전쟁영화지만 전쟁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아우르면 누구나 가진 가족 이야기다. 20대 여성 관객 입장에서는 당장 오빠나 남동생, 남자친구가 겪을지 모를 비극일 수도 있다. “만약 군대 이야기로만 갔다면 그들이 호응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일부 관객이 앞부분이 길고 지루하다고 하는데 비극을 만나기 전에 감정을 쌓아가야 했습니다. 실화를 예술적으로 다루면 생생함이 떨어져요. 전투를 허구로 만들면 전사자나 생존자에게는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감독이 꼽은 영화 속 명장면은 뜻밖이었다. 그는 “교전 장면도 공을 많이 들였지만 가장 고집한 건 수중촬영”이라며 “침몰한 357호 조타실에서 한상국 하사의 시신을 발견해 수면으로 올라오는 장면, 또 그를 찾아 바닷속으로 한없이 내려가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경북 울진 앞바다 수심 20m에 가라앉은 난파선을 이용해 촬영하고, CG(컴퓨터그래픽)로 매만졌다.
평양 출신 실향민 부모의 아들인 그는 <연평해전>에 북한 수뇌부 중 한 명으로 출연까지 했다. 영화를 보며 좀처럼 웃지 않던 유족도 김 감독이 나온 대목에선 빵 터졌다. “영화 예산이 부족했다는 낯뜨거운 증거지요. 다들 북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서 다행입니다.” 김 감독은 “김학순이 <연평해전>을 만들었지만 내 몸만 빌렸을 뿐 국민의 정성과 열망으로 일군 영화”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서 찡했어요. 7000여 명의 이름이 올라가는데 그분들이 누굴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들 없이는 완성할 수 없었던 영화예요. 대한민국이 아직 건실하구나 싶었습니다.” 닉네임으로 후원한 마지막 이의 이름은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였다.
박돈규 문화부 기자
2015.08.13 영화 <연평해전>이 한국사회에 던진 의미는 무엇인가?
/영화 <연평해전>의 한 장면.
김학순 감독의 영화 <연평해전>의 흥행으로 잊혀져왔던 그날의 아픔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반(反)대한민국에 치우친 정치인과 언론은 영화가 애국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한다. 하지만 <연평해전>은 지금껏 대한민국이 외면했던 진실, 그리고 그 대한민국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진실을 알린 영화
영화 <연평해전>은 13년 동안 대한민국이 외면했던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제2연평해전은 사실상 국민들에게 잊혀진 전투였다. 하지만 김학순 감독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면 그들의 전사(戰死)는 무의미하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들이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조국의 미래는 무엇일까?’라는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며 제2연평해전을 재조명하고자 했다. 정치적 목적이 아닌 실제 그 당시에 일어났던 사실 그 자체와 아픔을 겪은 인간과 가족의 모습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연평해전>은 개봉 5일 만에 143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고, 604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성공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오늘날의 성공에 이르기까지는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 ‘연평해전’이라는 소재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적 논란까지 더해져 흥행 실패를 예상한 기업들은 투자를 고사했다. 제작비 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촬영이 무기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학순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한 달 안에 초기 목표액인 1억 원 모금에 성공했고,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각계각층에서 후원이 이루어졌다. 대출을 받으려고 찾아간 은행에서도 사연을 듣자 대출 대신 대규모 투자로 지원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영화 <연평해전>은 7년이 걸려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한 <연평해전>은 적으로부터 어떻게 공격을 받았고, 우리 해군은 어떻게 대응을 했는지, 어떻게 전투가 종결되었는지 등 당시 상황을 다큐멘터리처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실제 전투시간과 비슷했던 30분간의 치열한 해상 전투 장면은 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했고,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와중에도 “모두 다 꼭 데려다 줄 거야.”라고 말하며 오른손을 조타대에 묶고 전함과 함께 침몰한 고(故) 한상국 상사의 희생 장면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국민은 그동안 잊고 있던 대한민국의 영웅들과 드디어 마주하게 된 것이다.
거짓을 이기는 진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전까지만 해도 제2연평해전은 ‘서해교전’으로 불리며 패배한 전투로 평가절하 되었다. 또한 순직한 장병들은 전사자 사망보상금을 규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전사’가 아니라 공무 중 사망인 ‘순직’에 해당하는 보상만을 받았다. 실제로 전사자 장례식이 열리는 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예정된 일정이라며 한일월드컵 결승전 관람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해버렸다.
하지만 진실은 반드시 고개를 드는 법이다. 영화의 흥행으로 인하여 가라앉았던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당시 상황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다. 또한 13년 만에 처음으로 국방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각계 고위인사들이 추모식에 참석하며 연평해전을 공식적인 승전기념일로 인정하는 등 반성의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제2연평해전은 북한의 명백한 계획적 도발이었고, 군 수뇌부는 이러한 도발징후를 사전에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살했다. 또한 ‘NLL을 사수하라, 먼저 공격은 하지 마라, 공격을 당했을 때 대응해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확전을 방지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교전수칙 지시로 인해 우리 해군은 초반 북한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잘못된 교전수칙과 안일한 수뇌부의 대응은 고귀한 장병 6명의 희생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를 지키는 안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자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하는 ‘안보’와 ‘안전’의 울타리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튼튼한 국가안보는 국민의 자유를 수호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개인과 국가의 발전의 바탕이 된다.
영화 <연평해전>은 당연하게 누려왔던 그 ‘자유’를 지키기까지 얼마나 힘겨웠는지, 또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아들이고 동생이기도 했던 6명의 장병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지금 이 시간에도 땅과 바다, 하늘, 최전방에서는 60만 명의 국군 장병들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 국민들은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를 지켰던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면 그들의 전사는 무의미하다. 이제 앞으로의 과제는 그분들의 희생으로 지켜 낸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자유를 지키는 일은 그 성격이 공공재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국민은 세금을 내어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하며, 국가는 자유를 확장하고 보호하기 위해 국민의 세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2015년 08월 28일 “연평해전 보며 많이 울었어요” 초등생들 감동편지
▲ 울산 남구 야음동 대현초등학교 학생들이 27일 학교에서 ‘제2연평해전’ 희생자 유족들에게 편지를 쓴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현초등학교 제공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편안히 공부할수 있어 감사
모두 나라사랑 계기됐으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연평해전 희생 장병들에 감사드립니다.”
울산 남구 대현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과 교사 등 20명은 27일 제2연평해전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들의 편지쓰기는 6학년 1반 정봉효 교사가 학생들과 여름 방학 중 관람한 영화 ‘연평해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감사의 마음을 유족에게 직접 표현해보자고 제안하면서 이뤄졌다. 당초 자신의 반에서만 편지쓰기를 하려던 정 교사는 좀 더 많은 학생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6학년 다른 반 담임교사에게도 연평해전을 본 학생 중에 편지를 쓰고 싶은 이가 있으면 함께 하자고 알렸다. 이에 6학년 6개 반에서 영화 연평해전을 관람한 18명의 학생이 모두 편기쓰기에 참여하게 됐다.
자신들이 태어나기 1년 전에 발생한 연평해전을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한 6학년 학생들은 편지에서 한결같이 희생 장병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6학년 회장 박유진 학생은 “저도 영화를 보면서 너무 많이 울었는데, 유가족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여섯 분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전했다. 또 김도훈(6학년) 학생도 “저희가 평화롭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연평해전 희생 장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커서 연평해전 희생 장병처럼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이 되겠습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교사 2명도 편지쓰기에 동참했다. 편지 쓰기를 제안한 정 교사는 “고등학교 시절 월드컵에 빠져 나라를 지켜주신 분들의 감사함을 잊고 지냈던 지난 시절을 부끄러워하며, 6명의 전사자 유가족분들께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학생들과 함께 편지쓰기 행사를 했다”고 말했다.
이순학 교사도 “광복 70주년을 맞는 우리나라에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보잘것없는 편지 한 장이지만 유가족들께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며 “우리 학교 어린이들에게도 편지쓰기를 계기로 나라 사랑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임길엽 교장을 비롯한 다른 교직원들도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편지쓰기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쓴 20통의 편지는 27일 해군동지회로 발송됐으며, 조만간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울산=곽시열 기자 sykwak@munhwa.com
2016.01.19 "軍人이 존경받는 사회 만들어야죠"
['연평재단' 10억 출연한 김학순] 21일 전쟁기념관에서 창립식… '연평해전' 흥행수익 사회에 환원 "애국심은 희생 기억해야 싹터"
/18일 서강대에서 만난 김학순 감독은“영화‘연평해전’수익금 중 10억원을 출연해 연평재단을 만든다”며“군인과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이라고 했다. /오종찬 기자
"영화 '연평해전' 제작에 써달라는 국민 후원금이 모일 때부터 궁리한 일입니다.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고 남은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게 보답하는 길이잖아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난해 '연평해전'으로 604만 관객을 모은 김학순(58) 감독이 영화 수익금 중 10억원을 출연해 연평재단을 창립한다. 그가 이사장을 맡는 연평재단은 오는 21일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창립식을 열고 제2연평해전 유가족에게 2억원을 전달할 예정이다. 김 감독은 "국가보훈처에서는 '대기업에 취지 설명하고 도움을 받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먼저 시작하고 나서 찾아다니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며 "목숨 바쳐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군인이 존경받는 사회를 목표로 다양한 사업을 펼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생활 지원보다는 군(軍)에 대한 의식 전환을 이끌고 싶습니다. 재단 이름에 나타나듯이 출발은 연평해전이에요. 해군을 포함해 모든 군인, 나아가 미국처럼 경찰·소방관 등 제복 입은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쓰겠습니다."
'연평해전'은 "대~한민국!"으로 붉게 물들었던 2002년 6월에 NLL(북방한계선)을 사수한 참수리 357호의 이야기다. 돈이 부족해 촬영이 여러 번 중단되며 표류했던 이 영화는 국민 성금으로 목적지에 닿았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개인과 단체 이름 7000여 개가 담겨 있다. 관객은 "늦게라도 애도하며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사회적인 반향도 컸다. 여섯 용사는 합동묘역에 안장됐다.
비영리재단인 연평재단은 제2연평해전 유가족에 대한 지원금 전달로 첫 사업을 시작한다. 다음 달 23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14주년 추모 음악회 '영웅'을 연다. 김 감독은 "큰 충격을 받은 357호 생존 장병에 대해서도 심리치료를 비롯해 여러 가지 지원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 해군장학재단에도 1억원을 기부한 바 있다.
"돌아보면 기적 같은 일이에요. 제작 중에 힘겨운 일이 많았지만 지난해 '연평해전'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포함해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겪었습니다. '잘 만들어서 많은 사람이 보게 하겠다'는 유가족과의 약속을 지켜서 다행이고, 영화의 사회적 힘과 책임감에 대해 새삼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큰 관심을 받은 건 사회에 진 빚이니 갚아나가야지요."
'연평해전' 관련 강연을 할 때마다 최인훈 소설 '광장'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김 감독은 "오죽하면 주인공이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을 택했겠느냐"며 "'헬조선'이라는 말이 횡행하는 요즘 우리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청년 세대가 뿌리 내리고 자부심 가질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마다 서울대 몇 명 보내고 대통령 배출한 걸 자랑할 게 아니에요. 미국은 작은 마을도 해마다 6·25나 베트남전, 이라크전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엽니다. 애국심은 기억하고 응답하면서 싹트는 것 같아요."
그는 아덴만 여명 작전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업 중이고 천안함에 대한 영화도 언젠가 만들고 싶다고 했다. "좌파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았지만 그들을 이길 방법은 영화를 잘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며 "연평재단 같은 기부 문화가 퍼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박돈규 기자
[現]서강대 영상대학원 교수 / [現] 영화감독
직업
교육자(교수)
학력
미 템플대 영화제작 석사
경력
한국영상자료원 비상임이사(임기 3년)
서강대 영상대학원 대학원장
2016.07.28 '평점테러' 당한 <인천상륙작전>이 예매율 1위를 달리는 까닭은?
/영화의 한 장면.
개봉 첫날인 어젯밤(27일) 늦게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았다. 밤늦은 시간인데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이 20~30대 젊은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개봉도 하기 전부터 포털 사이트에서 소위 전문가 그룹이라는 사람들로부터 ‘평점테러’(3점)부터 당했다.
이들이 올린 영화 감상평은 ‘2016년 판 <똘이장군>’ ‘멸공의 촛불’, ‘겉멋 상륙, 작렬’, ‘리암 니슨 이름 봐서 별 한개 추가’, ‘시대가 뒤로 가니 영화도 역행한다’, ‘반공주의와 영웅주의로 범벅된, 맥아더에게 바치는 헌사’ 등이다.
평점 3점이라는 것은 만들다가 만 영화가 아닌 담에야 전문가 그룹에서 나오기 어려운 평점이지만, 이들은 ‘반공영화’라는 딱지를 붙여 조롱에 가까운 평점을 준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직접 영화를 본 관람객은 9점대에 가까운 높은 평점을 매기고 있다. 관람객의 평을 요약하면 “재미있다”“감동적이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개봉직후 예매율 1위를 차지, 흥행돌풍을 일으킨 <부산행>을 압도했다.
필자가 봤을 때 영화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모든 배우가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표현했고, 특별하게 튀거나 거슬리는 장면이 없었다. 영화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미국의 유명 배우 리암 니슨의 맥아더 장군 역할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영화에서 딱 필요한 만큼만 등장했지만, 그는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요 배역이었다.
전투장면을 포함한 영화의 외적인 완성도도 무척 높았다. 사실 이 영화를 만든 이재한 감독은 이미 2010년 <포화 속으로>라는 6·25 전쟁 영화를 내놓은 적이 있다. 6·25 당시 낙동강 방어선 최동쪽에서 벌어진 포항전투에 투입된 71명의 학도병 이야기를 그린 영화였다.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근래 우리 영화계에서 거의 처음으로 6·25 세대의 희생에 대한 감사를 그린 영화로 기록될 정도로 모험적인 영화였다. 그만큼 우리 영화계가 좌파코드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포화 속으로>는 당시 아무도 기억하지 않던 군번 없는 학도병 이야기를 다룬 감동적인 영화였지만, 완성도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특히 당시 군사적 상황이나 전투장면의 고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보는 내내 뭔가 목에 걸린듯한 느낌을 받았고, 마지막의 감동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도한 상황설정과 전투장면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이재한 감독의 이번 <인천상륙작전>은 과연 같은 감독이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전투장면이 실감 났고 카메라 기술도 현란했다. 대규모 상륙작전을 표현한 그래픽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명량해전>의 어설픈 그래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영화를 본 필자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국판 전쟁영화의 공식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는 필자가 1998년에 나온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받았던 그런 느낌과 비슷했다. 성조기와 애국심으로 대변되는 미국 전쟁영화의 익숙한 공식을 드디어 우리 영화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동안 6·25 전쟁이나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가 몇 편 있었지만, 감독들은 전쟁을 일으킨 이념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을 하면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부분에서는 병적일 정도로 집착해 왔다. 전쟁영화에서 나라를 지켜준 세대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에 가까웠다. 오히려 애국심을 별 가치없는 일로 치부하거나, 소위 반미(反美)·반전(反戰) 코드가 영화계 전반을 지배해 왔다.
실례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국군을 거의 학살자 수준으로 그려 놓았다. 심지어 이 영화는 “이 전쟁 누가 이기면 어때” “사상이 형제끼리 총질할 만큼 중요해”라는 병사들의 대사를 통해 김일성 공산집단으로부터 자유를 지킨 전쟁을 졸지에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무의미한 내전(內戰)처럼 그려 놓았다. 이 영화를 본 한 소년병 출신 참전자는 당시 필자와 인터뷰에서 “참전 당사자들이 엄연하게 살아 있는데도 6·25를 이렇게 호도해도 되는가”하며 분노했다.
이 때문에 필자는 우리나라 감독들이 조국을 지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리면 ‘꼰대 감독’ 혹은 ‘수구 꼴통’ 소리를 듣고, 그 반대로 표현하면 ‘진보 지식인’으로 포장되는 그들만의 문화 속에 살거나, 아니면 영화에서 반전(反戰)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 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전쟁영화의 안방을 점령해오던 좌파코드가 더 이상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연평해전>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중요한 장면마다 태극기도 보이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명확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이 보인 순수한 애국심을 잘 표현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당시 어린 나이에 수많은 젊은들이 조국을 지키겠다는 애국심에 불타 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반공영화’라는 딱지가 붙었다면 이 영화가 차지한 현대판 훈장이라고 할 만하다.
<연평해전>에 이어 <인천상륙작전>까지 흥행에 성공하면 앞으로 전쟁영화 뿐 아니라 우리 영화계 전반에서 주요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자녀들과 같이 보면 좋을 영화다.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6.07.29 '인천상륙작전'을 보고...나라와 국민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 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 이미지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개봉 이틀째에 보았다. 주인공 이정재의 극적인 캐릭터 설정부터가 시선을 모은다.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의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악질반동’이란 이유로 동료 공산주의자에게 학살당하자 이내 전향한다. 그리고 해군첩보부대 대위 신분으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밀명을 받아 적진에 침투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자칭 ‘평론가’들과 일부 기자들에 의해 ‘평점 3’을 받기에 충분했는지 모른다. ‘반공’ 이라느니, 선과 악의 2분법으로 그렸다느니, 어쩌고저쩌고 하는 넋두리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전체주의-독재-수용소-피바다가 있으니까 그걸 좋다고 하는 ‘친공’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격어 보니 공산당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는 ‘반공’도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이게 어디가 어때서 안 된다는 것인가?
선악 2분법? 맞다. ‘자유주의+세계시장’을 악(惡)으로 낙인 해 탱크를 몰고 쳐들어오는 전체주의-독재 세력(파시스트와 볼셰비키)가 있는 한에는, 자유-민주 진영은 그 진짜 악(惡)인 전체주의-독재를 상대로 선(善)의 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전체주의-독재 세력은 우리를 상대로 무자비한 선-악 2분법을 쓰는데 우리는 그걸 가만히 앉은 채 바라보기만 하라는 게 대체 말이 되는가? 그건 우선 공정(fair)하지 않다.
영화 ‘국제시장’ 이래 ‘대한민국 사랑+세련된 연출+재미’를 결합한 영화의 시장성이 일단 입증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인천상륙작전‘이 또 히트를 칠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대중에 미치는 영화의 영향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걸 안 일부 이념세력이 영화계를 독식하다 시피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전선(戰線)에서도 이젠 ’인천상륙작전‘과 9. 28 수복이 있어야 한다. 그 귀중한 영토를 ’빼앗긴 들판‘으로 마냥 내버려둘 순 없지 않은가?
영화판이 만약 ‘빼앗긴 들판’이라면 국민 관객들이 ‘국제시장’이나 ‘인천상륙작전’ 같은 영화를 대히트 작이 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재미도 없고 흥행성도 없는 타작을 억지로 그렇게 히트 시켜 주자는 게 아니라 ‘감동’과 ‘연출력’과 ‘재미’로서도 분명한 수작(秀作))이기에 그렇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는 자유-민주-문명개화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많은 영웅들과 영웅적인 서사시와 피와 땀과 눈물의 흔적이 도처에 배어있다. 다만 그걸 암장(暗葬)하려는 전체주의 세력과 그 동조자들의 고의적인 왜곡과 폄하로 인해 그것이 대중 차원에서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을 따름이다. ‘국제시장’과 ‘인천상륙작전’은 그래서 한 의미 있는 시작일 수 있고, 그런 시작이 되게끔 만들어 줘야 한다.
한 나라와 국민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네이션 빌딩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장엄한 미학(美學)으로 승화시키는 ‘신화’를 먹고 산다. 이 ‘신화’를 대중문화의 형태로 표출하고 전달하는 영화예술의 교육적 효과는 그래서 결코 과소평가 돼선 안 된다.
이재한 감독, 리암 니슨, 이정재, 이범수, 진세연 자~알 했다
글 | 류근일 언론인, 전 조선일보 주필
2016.08.01 "X-레이 작전·켈로부대, 인천상륙때 이런 역사 있었다니…"
20대 관객까지 몰려… '인천상륙작전' 개봉 5일 만에 200만 돌파]
"맥아더만 있는 줄 알았는데… 숨겨진 영웅 보여주는 영화"
"첩보전·한국군 활약 뭉클"
부산행·제이슨 본 등 경쟁작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
영화 '인천상륙작전'(감독 이재한)이 개봉 닷새 만인 31일,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난 20일 개봉해 800만 관객을 넘긴 '부산행'과 27일 개봉한 할리우드 흥행작 '제이슨 본' 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어떻게 여름 성수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을까.
◇'부산행' '제이슨 본' 제치고 1위
개봉 일주일 전 열린 시사회 직후 평론가들은 "첩보 작전 장면이 영화적 재미를 못 살렸고, 극 중 인물들의 부자연스러운 신파 장면이 걸린다"며 혹평을 내놓았다. 하지만 개봉날 이 영화는 관객 46만4379명을 동원하며 '부산행'과 '제이슨 본'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예매율도 꾸준히 1위를 유지했고, 2위인 '부산행'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포털사이트의 관객 평점은 8점대(10점 만점)를 꾸준히 유지했다.
/31일 오후 서울 삼성동의 복합 상영관을 찾은 영화 관람객들. 이날 개봉 닷새째인‘인천상륙작전’은 누적 관객 수 200만명을 돌파했다. 개봉 전 평단에서 혹평을 받았지만, 개봉 당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오종찬 기자
◇"숨겨진 영웅을 보여주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 초반 낙동강 이남까지 내몰린 국군과 유엔 연합군이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인천 상륙을 목표로 펼치는 첩보 작전 '엑스레이(X-RAY)'를 다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군 첩보 부대와 켈로 부대 무명용사들의 희생을 그린다. 영화는 '한국군 켈로 부대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린다'는 자막을 내보내며 끝난다.
이 영화를 보고 호평을 한 관객들은 "6·25 전쟁 같은 현대사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며 공감을 나타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이 영화에 9~10점의 높은 평점을 준 네티즌들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놀라움과 한국군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맥아더가 아니라 숨겨진 영웅을 보여주는 영화."(rok_****)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돌아보게 해줘서 뭉클했다."(rim_****) "우리가 지금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분들을 알게 됐고, 감사함을 가져야겠다."(dusk****)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많은 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mini****)
이 영화에 낮은 평점을 준 네티즌들도 영화의 주제의식에는 공감하면서 만듦새에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된 분들께는 늘 빚지고 살아가지만, 그분들을 기리려 했으면 이것보단 훨씬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었어야 했다"(rafa****)는 것이다.
중장년층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20대 관객 비중이 30%를 훌쩍 넘는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 세대가 6·25전쟁과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기 때문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영화 개봉일, 부모와 함께 봤다는 장병수(24·대학생)씨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선 맥아더 장군이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 시킨 작전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첩보전과 한국군의 활약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최근 '인천상륙작전'처럼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조명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연평해전'과 올 상반기 개봉한 '귀향'은 각각 600만, 385만 관객을 동원했다.
변희원 기자
2016.08.03 "맥아더 감동시킨 소년병이 내 남편… 영화로 만나게 될줄이야"
영화 '인천상륙작전' 실존 인물 故 신동수씨… 그의 아내가 말하는 6·25전쟁]
- 본지 보도로 알려진 영웅
소년병의 '한강 사수 각오' 듣고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결심
- 소년병은 그 후…
당시 스무 살에 자원입대… 총 맞아 왼쪽 무릎 아래 절단
"궂은 날이면 끙끙 앓고 식은땀"
/영화‘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UN군 사령관과 만나는 소년병의 실제 모델인 고(故) 신동수씨의 아내 두월순씨는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 불광동의 한 극장에 들어서면서“남편을 만난다는 생각에 극장에 오는 내내 설레고 긴장됐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언제까지 여기를 지키고 있을 건가?" "상관의 명령 없인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게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1950년 6월 29일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서울 영등포의 진지(陣地)에서 당시 스무 살이던 한 병사와 맥아더 장군이 나눈 대화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초반부 맥아더(리엄 니슨) 사령관과 한 소년병의 대화를 재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인민군이 한강 이북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리자, 도쿄에 있던 맥아더는 최후의 한강 방어선이던 이곳을 시찰한다. 소년병의 패기에 감동받은 맥아더는 통역을 맡았던 김종갑 대령을 통해 "소년에게 씩씩하고 훌륭한 군인이라 전해달라. 일본으로 돌아가는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한국전쟁의 변곡점이 된 맥아더의 참전기는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정일권 회고록 등을 통해 전해졌다.
영화 속 소년병은 실존(實存) 인물이다. 지난 2013년 작고한 고(故) 신동수씨. 영화에선 소년병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스무 살에 자원입대한 청년이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전쟁터로 달려가 배치된 직후였다. 신씨는 맥아더와 만난 사흘 뒤 후퇴 명령을 받고 퇴각하다가 왼쪽 다리에 총탄을 맞는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해 상처가 곪고 구더기가 끓을 지경까지 되어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했다.
아내 두월순(82)씨는 몸이 성하지 못한 남편을 평생 수발하며 살았다. 2일 오후 두씨는 서울 불광동의 한 극장을 찾아가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했다. 맥아더 장군이 소년병의 각오를 듣고 상륙작전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두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새파란 청년 모습의 배우가 연기하고 있었지만, 살아생전 남편이 골백번도 더 이야기했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손에는 사별 전에 남편이 선물했다는 하트 모양의 플라스틱 팔찌를 꼭 쥐고 있었다.
영화 속 소년은 처음엔 자신에게 말을 건 외국인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두씨는 "(남편도) 그 사람이 맥아더인지 아는 데 한참 걸렸다더라"고 했다. "자동차에서 외국 사람이 내리는데, 처음엔 적군(敵軍)인 줄 알고 쏘려고 했대요. 마크를 보니까 소련군이 아닌 것 같아 기다렸는데, 사령관이었다고 하지 뭐예요. '왜 후퇴하지 않느냐'는 말에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후퇴 안 한다' 했더니 무언가를 주고 떠나더래요. 한참 후에 그 사람이 맥아더였고, 자기가 나라 구한 거나 다름없다는 농도 자주 쳤죠." 건네받았다는 '무언가'는 연막탄 2개와 대공 표지판이었다.
/(왼쪽)소년병과 장군의 만남 - 영화‘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가 한국전쟁 참전 의지를 일깨운 한 소년병과의 일화를 회상하는 장면. (오른쪽)소년병의 실제 모델 신동수씨를 인터뷰한 2006년 6월 24일 자 조선일보 기사. /CJ E&M
전쟁이 끝난 뒤 신씨는 국가보훈처에 일자리를 얻어 서울 중계동에 살았다. 전장에서 입은 상처는 항상 그를 괴롭혔다. 두씨는 "날씨가 흐려지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생으로 잘라낸 다리가 아픈지 자면서 혼자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고 했다.
"남편은 6월 25일만 다가오면 슬픔에 잠겼어요. 눈앞에서 죽어간 동료들, 제 손으로 직접 묻어준 동료들 생각에 잠도 오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지만 남편으로부터 젊은 나이에 나라를 지키다 다리를 잃은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다.
두씨는 영화를 보는 사이사이 검정 천 가방에서 색 바랜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았다. 2시간여의 상영이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지자 두씨는 "흙투성이 난닝구 사내아이가 우리 그이 맞죠"라고 말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바로 신씨처럼 평생을 무명(無名)으로 살다간 '영웅'들에게 바치는 헌사(獻辭)다. 제작자 정태원씨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 소년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재한 감독과 이만희 작가에게 소년병 이야기를 반영시켜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생각에 잠긴 듯 앉아 있던 두씨는 맨 마지막으로 극장을 빠져나왔다. "우리 남편이 살아서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데 기자 양반, 혹시 이 영화 비디오로 하나 살 수 없을까? 남편 얼굴이 가뭇가뭇할 때마다 보고 싶어서 말이야." 세상 떠난 남편과 극장에서 조우한 그녀는 남편의 출연 분량(?)이 짧은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
박상현 기자
2016.08.05 한 손엔 꽃, 또 한 손엔 비디오… '소년병의 아내' 찾아간 이정재
4일 오후 서울 역촌동의 한 병원. 영화 '인천상륙작전' 주연 배우 이정재(44)씨가 한 손에는 꽃바구니, 다른 손에는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찾았다. 이곳엔 영화에서 맥아더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유엔군 참전 결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묘사된 소년병의 실제 모델 고(故) 신동수씨의 아내 두월순(82)씨가 입원해 있다. 최근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두씨는 젊은 시절의 남편이 등장하는 영화를 비디오로 소장하고 싶어 했다〈본지 3일 자 A13면〉. 영화 초반부 1분가량 나오는 짧은 장면이지만, 두씨는 "영화로나마 남편과 다시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영화‘인천상륙작전’의 주연배우 이정재(44·왼쪽)씨가 4일 오후 서울 역촌동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고(故) 신동수씨의 아내 두월순(82·오른쪽)씨를 만나‘인천상륙작전’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전달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인천상륙작전' 주연 이정재
소년병 실제모델의 부인 찾아
"비디오로 소장" 소원 풀어줘
- 이메일 보낸 맥아더役 리엄 니슨
"소년병 얘기 듣고 출연 결심"
두씨의 바람은 하루 만에 현실이 됐다. 두씨의 사연을 신문에서 읽은 이씨가 영화를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찾아온 것이다. 흰 셔츠에 검정 넥타이를 맨 차림의 이씨를 만난 두씨는 소녀처럼 미소 지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옆자리에 앉은 이씨는 두씨의 손을 잡고 "영화 속 소년병으로 나오는 어르신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며 "직접 비디오를 전해 드리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두씨는 "남편 그리운 마음에 툭 던져본 말인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다"면서 "남편 덕에 잘생긴 배우까지 만나고…"라며 웃었다.
영화 속 소년병은 영화 초반부에 잠깐 등장할 뿐이지만 출연 배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맥아더로 나오는 영국 배우 리엄 니슨도 두씨의 사연을 접하고, "맥아더 역을 맡은 이유 중 하나가 당신의 남편을 만난 장면 때문이다. 남편이 맥아더에게 건넨 '상관의 명령 없인 절대 후퇴하지 않겠다.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겠다'는 말에 담긴 헌신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을 것"이라는 이메일을 제작사를 통해 두씨에게 보내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장학수를 연기한 이씨 역시 "촬영 전부터 '소년병'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씨는 "내가 느꼈던 뜨거운 마음을 많은 관객이 함께 느끼고, 나라를 위해 싸운 분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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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3 그들만의 '영화평론'
[남정욱의 명랑笑說]
국제시장·연평해전 이어 인천상륙작전도 비아냥…
지금 이 땅의 사람들과 너무 동떨어진 역사 인식
최초의 스타 영화평론가는 정영일 선생이었다. TV 명화극장 예고편에서 그는 검은 뿔테에 절대 거짓말 안 할 것 같은 건조한 말투로 이렇게 끝을 맺었다. "놓치면 후회하실 겁니다." 절대 후회할 수 없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좀 있으면 보석이 나타난다는데. 그 달콤한 협박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새벽 두 시까지 TV 앞에 앉아 있었다. 예고편과 본편이 항상 맞아떨어졌던 건 아니다. 가끔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정영일이 추천한 건데 하면서 끄덕끄덕 넘어갔다. 그를 좋아했던 건 정영일이라는 사람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떡같이 만든 영화라도 그는 어떻게든 좋은 구석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래도 조연들의 연기는 볼만합니다" "음악은 제법 들을 만하네요" 그는 영화를 사랑했다. 대중은 그런 그를 사랑했다.
영화평론가들의 전성시대는 1980년대 중반부터다.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 아닌 철학과 미학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 절정은 키노(러시아어로 영화라는 뜻)라는 잡지였다. 스크린이니 로드쇼니 하는 잡지도 있었지만 그건 결국 스타 화보집이다. 키노는 차원이 달랐다. 생판 처음 들어보는 남미영화 특집을 하지 않나 60년대 일본 영화감독의 전 작품 리뷰를 싣지 않나 하여간 목차부터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무식은 죄다. 죽어랏!).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고색창연 문어체의 향연을 우리는 키노체(體)라고 불렀다. 지금 와서 그 필체를 논하라면 '저도 모르는 소리를 방언처럼 지껄여대는 허언증'이라고 정리하고 싶지만. 평론가들의 몰락은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그리고 DVD에 별 정보가 다 담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지식이 상식이 되었다. 그래도 평론가들의 글을 자주 읽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최근 들어 이 평론가라는 분들이 이상해졌다. 평론이 아니라 취향 고백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생하고 희생한 아버지들의 이야기 '국제시장'에 "술술 흘러간다. 그렇다고 술술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다"며 딴죽을 걸었다. 피눈물 나는 응전의 기록 '연평해전'을 "130분 예비군 안보훈련"이라고 짓밟았다. '인천상륙작전'에는 아예 작심을 하고 달려들었다. 평점이 10점 만점에 높아야 넷, 적으면 둘이었다. 이건 할리우드 삼류 액션물에도 안 주는 점수다. 평점만 짠 게 아니었다.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인천상륙작전'에 퍼부은 이들의 포화는 다음과 같다. "2016년판 똘이 장군", "멸공의 촛불", "겉멋 상륙, 작렬", "리엄 니슨 이름 봐서 별 한개 추가", "시대가 뒤로 가니 영화도 역행한다", "반공주의와 영웅주의로 범벅된 맥아더에게 바치는 헌사" 이렇게 읊으신 분들은 자기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목숨 걸고 지킨 이 나라가 너무너무 싫은 거다. 1948년 8월 15일에 태어난 대한민국은 올해 예순 여덟 살이 되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 인식도 나이와 엇비슷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평론가 분들은 어디서 따로 살다 왔는지 인지 발달이 여전히 1948년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애들에게는 애들 말투로 말해야 알아듣는다. 가령 이런 식으로. "오구 오구 화났떠염? 그러니까 애들은 어른 영화 보지 말고 뽀로로나 보세욤."
2016.08.17 한국 영화 "인천상륙작전"과 미국 영화 "Inchon!"을 보고나니...
▲ 1982년작 영화 <lnchon!>과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지난 일요일 나는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하나는 한국영화 "인천상륙작전" (영어제목 Operation Chromite)이고 다른 하나는 34년 전 미국 영화인들이 만든 "Inchon!"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워싱턴 근처 극장에서 보았는데, 우선 극장의 의자가 recliner라 다리를 쭉뻗고 거의 누운 자세로 영화를 볼수있어서 좋았고 영화도 재미있게 보았다. 71 년 전 여름에 한반도가 적화통일될 위기에 처했을때 다글러스 매카앗서 장군(5성)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시키지 못했더라면 오늘 내가 이렇게 편안한 자세로 미국의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상륙이 없었더라면 이 영화를 "반공영화"라고 비하하는 한국의 좌익 영화평론가들은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나 할어버지 세대가 한국전쟁 중 죽었거나 김일성 공산독재 치하에서 직사하게 고생하다 일찍 죽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5000분의 1이라는 성공률을 무시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한반도 적화통일을 막아준 매카앗서 장군의 은혜를 모르는 한국인은 공산주의자이거나 그들로부터 역사교육을 잘못 받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미국이 우리를 위해 한 세가지 역사적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1. 1945년 일본을 패망시키고 우리 한민족을 35년간의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켜준것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학교에서 가르친다.)
2. 일본의 항복을 겨우 1주일 앞두고 얌체같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급속히 한번도에 들어오는 소련군대를 38도선에서 정지하라고 요구하여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아준 것
3. 1950년 김일성이 일으킨 한국전쟁 초반, 대구와 부산만 남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인천에 상륙하여 전세를 역전시킴으로써 남한까지 적화되는 것울 막아준 것이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2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볼 수있게 잘 만들어졌다. 다만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인천 앞바다 섬들에 들어 가 2주동안 사전적업을 총 지휘한 미국 해군대위 유진 클라크와 그의 한국인 연정(한국해군 대위)과 계인주(한국육군대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일부 한국인 유격대원들만 부각시킨 것이 좀 아쉬웠다. 물론 영화는 역사적 정확성 보다는 재미가 더 중요하므로 충분히 이해는 간다. 좋은 영화이므로 모두들 꼭 보기를 권한다. 특히 좌경화한 교사들로부터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를 배운 젊은이들은 반드시 봐야할 필수영화다.
뉴우욕 타임즈도 이 영화를 호평했다, 특히 리엄 닛슨이 "Inchon!"에서 매카앗서 역을 한 로랜스 올리비에 보다 훨씬 더 잘했다고 평했다.
1982년작 영화 "Inchon!"은 어떤가?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잡에 돌아와서는 1982년 미국서 만든 "Inchon!"을 DVD로 보았다. 007 James Bond 영 화 몇편을 만든 할리우드 명감독 태런스 영(Terence Young)이 연출하고 당시 황혼기의 탑스타 군에 속했던 로렌스 올리비에가 매카앗서 장군 역을 맡았다. 그리고 육체파 여배우 재클린 비셋과 당시 꽤 유명한 밴 가자라가 주인공 부부로 나온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탑스타 미후네 도시로가 한국인으로 나온다. 영화 초반에 한국 배우 이낙훈이 잠시 나와 유창한 영어로 재클린 비셋과 대화하는 장면도 있고, 당시 한국 탑스타 남궁원도 나온다. 이런 호화 케스트와 명 감독에도 줄구하고 이 영화는 흥행에 대 실패했다. 4천6백만불을 들여 만든 이 영화는 입 장권 수입이 겨우 520만불에 그쳤다.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작품 자체가 엉성해서가 아니라 통일교 교주 문선명 목사가 제작비 거의 전부를 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평론가들이 영화평을 아주 나쁘게 썼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문 목사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었고 (잠시 감옥살이까지 했다) 그가 세운 통일교도 미국 기독교단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영화 자체는 그런대로 재미도 있고 또 한국전쟁의 비극을 비교적 잘 묘사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영화 제작에 거의 이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 장면 연출에 막대한 돈과 엑스트라들이 동원 되었을 것이고 또 탑스타들에게 지급된 출연료도 만만차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될 정도로 정성들여 만들었다. 이 영화는 Youtube에 들어가 "1982 film Inchon!" 을 검색하면 1/14 부터 14/14까자 14개로 나눈 비데오를 무료로 볼수 있다, 아래는 13/14회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Q5kvgFn3fdA
워상턴에서 조화유
2016.09.03 Initiate Operation Chromite
'신노아(New Noah)'. 얼마나 놀라운 방주였기에 히틀러는 그걸 만든 '그'를 그렇게 칭했을까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그'의 공로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He won the war for us(그는 2차 세계대전 승전의 공신이다)." '그'는 디데이(D-Day)를 위한 LCVP 상륙정을 만들어낸 앤드루 히긴스입니다.
창의력은 새로운 것을 고안하는 능력(Creativity is thinking up new things)이고, 창의력으로 무장된 혁신은 새로운 것을 실행하는 행위(Innovation is doing new things)입니다. 그렇기에 위대한 역사적 혁신도 다 창조적 '행동 개시(initiation)'로부터 시작되는 법이지요.
아이젠하워는 히긴스의 혁신적 면모를 이렇게도 평했습니다. "그는 엔지니어를 안 쓰고도 상륙정을 만들었다." 목재상 출신인 그가 미국 해군이 설계한 것보다 뛰어난 상륙정을 고안하고 생산한 사실도 놀랍지만 공과대학 출신을 안 뽑았다는 사실은 더 놀랍지요. "공과대학은 '할 수 있는 것' 대신 '할 수 없는 것'만 가르치는 것 같다"고 한 그의 술회가 밝히듯 당시 그가 발탁해보려 한 이는 다 실행력이 부족했나 봅니다.
'인천상륙작전'(사진)은 맥아더와 그를 도운 우리 해군 첩보원들의 혁신적 실행력에 집중한 작품입니다. 대단원에 이르러, 성공할 확률이 5000:1이기에 모두가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라고 주장할 때 장군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행동 개시를 준비합니다.
'Decisions determine dest iny(당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당신의 결정이다).' 종교 지도자 토머스 S. 몬슨의 이 명구처럼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이 디데이에 내려집니다. 그 결정은 이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Initiate Operation Chromite(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륙정이 앞장서 출동합니다. 이 땅에 평화를 상륙시키기 위하여…!
이미도 외화 번역가
2016.08.05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 전쟁과 맥아더
최근 한국 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인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쟁과 맥아더 장군 얘기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를 찾아보았다.
할리우드가 바라 본 한국 영화
철모 (The Steel Helmet, 1951)
/(왼쪽부터) 영화 '철모' 포스터, 영화 '철모' 속 한장면 미군 병사 잭과 그를 수용소에서 구해주고 그를 따라다니는 남한 고아 소년, 영화 속에서 비치는 한국의 풍경은 실제 한국에서 촬영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와 많은 차이가 있다. 영화 속 불상의 모양 역시 한국 사찰에 있는 불상과는 다르며 석굴암 크기 정도의 불상을 어느 사찰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서양의 인식을 보여준다.
한국 전쟁을 다룬 최초의 영화이다. B급 영화의 거장 새뮤얼 풀러가 감독을 맡았다. 미국 보병부대 병사 잭은 북한군과 교전 중 포로로 붙잡혀 처형 위기에 놓이지만 총알이 철모에 박히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남한 고아 소년의 도움으로 북한군에서 벗어난 잭은 일본계 미국인, 낙오병, 흑인 의무병 등을 만나면서 북한군에 맞설 계획을 세운다.
인종차별적 내용을 담았다는 논란으로 감독이 미국 당국에 소환되기도 했지만 상업적으로 작품적으로도 성공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뮤얼 풀러는 6·25 전쟁 소재로 철모 말고도 '총검장착'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이 영화에는 제임스 딘이 지나가는 병사 1로 출연하기도 했다.
배틀 서커스 (Battle Circus, 1953)
/(왼쪽부터) 영화 '배틀 서커스' 포스터, 영화 속 한 장면, 북한군 포로 역으로 출연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 필립 안. 그는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계 배우 1세대로 다양한 영화에서 악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6·25 전쟁 속에서 피어난 로맨스를 다룬 영화도 있다. 1953년 영화 '배틀 서커스'는 야전병원의 부원장과 간호장교의 사랑을 그렸다. 영화 '카사블랑카'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을 맡았으며 상대역이었던 준 앨리슨 역시 당시 할리우드 대표 여배우였다. 전쟁 속 위험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앞에 폭격과 불륜이라는 위기가 찾아오지만 결국 새로운 야전병원에서 재회하며 영화는 막이 내린다. 영화 속에서 수류탄을 터뜨리겠다고 협박하는 북한군 포로 역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 필립 안이 출연하기도 했다.
원한의 도곡리 다리 (The Bridges At Toko-Ri, 1954)
/(왼쪽부터) 영화 '원한의 도곡리 다리' 포스터. 우리나라 제목은 '원한의 도곡리 다리'이지만 영어 원제는 'Bridges at Tokori'이다. 가상의 마을인 도곡리의 발음이 다른 것은 영어 제목을 지을 때 일본식 표기를 참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품의 여주인공이자 훗날 모나코의 왕비가 되는 그레이스 캘리, 영화 속 폭격 장면 중 하나.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미치너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전 작품들과 달리 할리우드에서 대규모의 제작비를 투자해서 만든 최초의 한국전쟁 영화이기도 하다. 북한군의 주요 보급로인 도곡리 다리를 폭파하라는 임무를 가진 미군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여주인공으로 그레이스 캘리가 나오며 28회 아카데미 특수효과상을 수상했다.
전송가 (Battle Hymn, 1957)
/(왼쪽부터) 영화 '전송가' 포스터, 영화는 한국 전쟁 고아들을 제주도로 피신시키려는 일명 '꼬마자동차작전'의 한 장면, 딘 헤스 대령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한 실제 고아들이 영화에 직접 출연해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
6·25 참전용사 딘 헤스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을 영화화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군 대령으로 참전한 딘 헤스 대령은 전쟁 기간 내 여러모로 한국에 도움을 많이 준 인물이다. 한국 공군 양성을 위해 힘썼고 '전쟁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거두고 보살폈다. 영화는 이런 딘 헤스 대령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실수로 폭탄을 떨어뜨려 고아 37명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딘 헤스 대령은 한국에서 만난 전쟁 고아들과 열악한 시설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한다. '전송가'는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호평을 받은 영화다. 실제로 딘 헤스 대령의 도움을 받았던 전쟁 고아들이 직접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해 영화의 사실성을 높였다.
매쉬 (MASH, 1970)
/(왼쪽부터) 영화 '매쉬'의 포스터.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포스터였다, 영화 매쉬의 장면들.
야전병원에서 사고뭉치 외과 전문의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매쉬는 한국전쟁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외과 전문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즉흥연기와 시종일관 이어지는 비속어와 무질서한 모습들은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형식이었다. 한국전쟁 자체의 특수한 상황을 다뤘다기 보다 전쟁과 군대를 향한 블랙코미디라고 봐야 한다. 베트남전이 한창이었던 당시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 영화적 배경을 한국전쟁으로 설정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정도로 영화는 작품성 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맥아더 장군을 다룬 영화
맥아더 (MacArthur, 1977)
/(왼쪽부터) 영화 '맥아더' 포스터,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그레고리 펙.
맥아더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할리우드 탑 배우 그레고리 펙이 맥아더 장군 역할을 맡았다. 더글라스 맥아더라는 인물의 전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 속 맥아더 장군 얘기보다 여러 전쟁과 미국 내에서 맥아더가 겪는 갈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화는 1943년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맥아더의 모습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는 맥아더 장군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영화이다.
인천 (Inchon, 1981)
/(왼쪽부터) 영화 '인천' 포스터, 영화 속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의 장군의 모습, 영화 속에서 상륙작전 성공 후 서울 수복 기념 행사장에서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과 포옹하는 장면.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또 있었다. 1981년에 제작된 '인천'은 기획 단계부터 화제를 모은 영화다. 감독부터 배우, 음악감독까지 초호화 캐스팅이었으며 제작기간만 5년인 할리우드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당시 6· 25 전쟁을 다룬 영화 중 가장 제작비를 많이 쓴 영화이기도 하다.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도 제작에 투자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물 3편을 감독했던 테렌스 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남자 주인공로는 20세기 최고의 영국 배우이자 비비안 리의 남편으로도 잘 알려진 로렌스 올리비에, 여자 주인공로는 재클린 비셋이 캐스팅됐다. 하지만 허술한 시나리오와 구성으로 만듦새가 훌륭하지는 못해 흥행에는 실패했다.
조선일보 뉴스큐레이션팀 구성
■저격수 이야기
□저격수의 기원 - 세계 최고의 저격수는 누구?
/길리 수트를 입고 위장한 채 잠복 중인 미군 저격수와 관측수 <출처: 미 육군>
저격수(sniper)는 군사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다. 한 발의 총알로 적을 무력화하고, 적 부대에 공포심을 심어주며, 넓은 적진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소설, 영화, 게임 등에서 저격수를 소재로 다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격수는 사전적으로는 “일반 보병보다 표적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격소총 등 총기로 적을 정밀 조준해 무력화하도록 훈련을 받은 전문화한 요원”을 가리킨다.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지만 실전에서의 위력은 다원적이고 위력적이다.
저격수는 효율적이다. 단순히 적의 병력 숫자를 줄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적의 작전에 당장 지장을 줄 수 있는 지휘관이나 통신병, 기관총 등 위력적인 무기체계를 다루는 요원, 적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야전 의무병 등 전술적 가치가 높은 적은 찾아 무력화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저격수가 쏘는 한 발의 총탄은 한 명의 적을 무력화하는 수준을 넘어 질적으로 그 몇 배의 전술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저격수는 고도의 심리전도 수행한다. 저격수는 통상 은폐·엄폐된 위치에 몸을 숨기고 사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기치 못한 장소, 발견하기 힘든 곳에 숨어서 필살의 총탄을 날리는 저격수는 상대측 군인들에게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행동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 대단한 압박을 준다.
저격수는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현재 저격수가 사용하는 총기는 정확성과 살상력, 내구력이 뛰어난 첨단 과학기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망원조준경이 부착돼 조준을 용이하게 해준다. 레이저거리측정기를 비롯한 다양한 군사과학 기술이 접목된다. 이 때문에 저격수는 그 탄생과 발전 과정에서 인류 과학기술의 발달과 궤를 함께해왔다. 탄생 과정을 포함한 저격수의 유래를 살펴보는 것은 인류 과학기술 발달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과 일맥상통할 수밖에 없다.
저격수는 통상 은폐·엄폐된 위치에서 사격을 한다. 저격수가 사용하는 총기에는 대개의 경우 망원조준경이 부착돼 조준을 용이하게 해준다. 저격수는 크게 군사조직·준군사조직 등 군사 분야나 경찰·보안기관 등 법 집행기관에 소속된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국제안보지원군 저격팀. 저격수 옆의 관측수는 레이저거리측정기로 거리를 계측하고 있다. <출처: 프랑스 국방부>
저격수는 사격술과 함께 정찰 기술, 엄폐 및 개인위장술, 야전 전투 기술, 전장 첩보 수집을 위한 지역 수색, 군사적 위장술, 침투술 등을 훈련받는다. 저격수는 저격과 관측 효율을 동시에 높이기 위해 통상 사수(shooter)와 관측수(spotter)가 2인 1팀인 경우가 많다.
스나이퍼의 어원은 도요새
영어로 저격수를 의미하는 ‘스나이퍼(sniper)’라는 단어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담겨 있다. 이 단어의 기원을 살펴보면 저격수의 역사가 보인다. 단어의 기원은 17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도 주둔 영국군 병사들이 본국에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스나이프하다(to snipe)’라는 동사가 그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내용 중 가장 오래된 스나이퍼 기원으로 통한다. 이 동사는 당시 “명사수(marksman)들이 도전적인 표적을 맞추려고 사격을 하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나이퍼(sniper)’의 어원은 도요새(snipe)에서 비롯한다. <출처: (cc) Gregory "Slobirdr" Smith at wikimedia.org
그 어원은 야생조류인 도요새(snipe)라는 명사에서 비롯한다. 도요새는 조심성이 많은 성격에 위장 능력도 뛰어나 사냥꾼에게 잘 발각되지 않는다. 깃털 중 햇빛에 노출된 부분은 어두운 색, 노출되지 않은 부분은 밝은색의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은폐가 잘 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다가오는 인간의 기척을 눈치 채고 하늘로 날아오르면 비행 패턴이 상당히 불규칙하고 변화무쌍하다. 이 때문에 사냥꾼이 총기를 조준해서 맞추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고 한다. 영어에서 ‘도요새 사냥을 가다(Going on a snipe hunt)’라는 관용구는 ‘쓸데없는 심부름’이나 ’불가능한 임무‘를 뜻한다. 미국에서는 여름 캠프나 보이 스카우트(Boy Scout) 같은 그룹에서 요구하는 ’통과의례‘를 가리키기도 한다. 도요새 사냥만큼이나 ‘하기 힘들거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처럼 18세기 당시 수준의 수렵용 총기로는 도요새를 제대로 사냥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다른 조류 사냥과 구분되는 ‘도요새 사냥(snipe shooting)’이라는 용어가 별도로 있었을 정도였다. 그 약칭이 ‘스나이핑(sniping)’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도요새를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냥꾼을 ‘스나이퍼(sniper)’로 부르게 된 것이라는 추론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스나이퍼(sniper)는 ‘사격술(marksmanship)과 위장술(camouflaging)에 대단히 뛰어나며 고도로 숙련된 사냥꾼’을 가리키는 말로 변화했다. 이는 나중에 ‘사격의 명수(sharpshooter)'나 '숨겨진 곳에서 저격을 하는 사수'를 가리키는 용어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길리 수트를 입은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스나이퍼’라는 단어가 영어권에서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20년대다. 1822년 ‘사격의 명수’를 가리키는 ‘샤프슈터(sharpshooter)’라는 단어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 용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샤프슈터라는 단어는 19세기 영어권에서 “활이나 총 등 뭔가를 발사하는 무기를 잘 다뤄 정밀 사격이 가능한 사격의 명수”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1801년 영국 신문에 ‘샤프 슈터(sharp shooter)’라는 형태로 등장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는 독일에서 ‘뛰어난 사수’ 또는 ‘저격수’라는 의미로 1781년에 처음 사용되었던 ‘샤르프쉬체(Scharfschütze)’)라는 단어를 그대로 번역해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용하는 스나이퍼(sniper)라는 단어는 1822년 처음 사용되었지만 명사수나 저격수를 가리키는 ‘샤프슈터(sharpshooter)', '마크스맨(marksman)’ 등의 단어와 상당 기간 함께 사용되었다. 스나이퍼라는 용어가 널리 정착해 일반화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다.
저격수와 관측수는 2인3각
군대나 경찰에서 저격 임무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저격수가 담당하게 된다. 저격이 이뤄지는 상황은 상당히 다양하나, 공통적인 것은 저격수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적절한 위치로 이동해서 매복하고 조준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적은 총탄으로 목표물인 범죄자나 적을 확실하게 무력화하는 것이 저격이다
/저격수와 관측수는 2인3각으로 함께 움직인다. 사진은 독일에서 훈련 중인 미 공군 저격팀이다. <출처: 미 국방부>
저격수는 기본적으로 관측수를 동반해서 함께 움직인다. 저격수가 저격에 전념할 수 있도록 관측수[영어로는 스포터(spotter), 포스트(post), 또는 옵서버(observer)]가 한 팀을 이뤄 활동하는 것이다. 관측수의 기본 임무는 장거리 사격에서 탄착점을 관측하고 사수에게 수정을 지시하는 것이다. 관측수는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을 전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처리하기도 한다. 관측수는 저격수의 기술을 지닌 인력이 담당한다. 그래야 의사소통이 잘 이뤄질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서로 역할을 교대로 맡아 부담을 나눌 수 있다. 관측수는 경험이 많은 저격수가 담당하며 저격수에게 사격을 지시하고 탄착점을 살펴 조준 수정 정도를 계산한다.
변칙적인 경우로 저격수에 범용기관총 사수와 소총 사수가 3인 1조로 활동한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의 사례가 있다. 이는 저격수가 주의력을 유지하는 부담을 줄이는 것은 물론, 저격용 소총의 부족한 화력을 보완해주는 측면도 있다. 저격용 소총은 대개 장전한 실탄이 한 발 또는 몇 발에 지나지 않은 데다 연발사격 능력도 없는 경우가 많아 화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3인 1조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매우 유효한 전술로 평가된다.
/2010년 10월 미국 조지아 주 포트 베닝(Fort Benning)에서 열린 제10회 국제 스나이퍼 경연대회에 참가한 미 육군팀 <출처: 미 국방부>
저격수와 관측수는 은밀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이동 흔적이 적에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이를 활용해 이들에게 정찰 임무를 부여할 수도 있다. 적 배후를 은밀하게 이동하며 적정을 파악해 본부에 전달하는 한편, 목표물을 무력화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항공 지원이나 포격을 요청할 수 있으며 심지어 순항미사일을 비롯한 정밀유도무기체계의 표적 설정이나 유도 임무도 맡을 수 있다.
일발필살의 저격용 소총
저격용 소총은 통상 군용이나 민수용 라이플(rifle) 양산품에서 정밀도가 좋은 것을 골라서 망원조준경을 추가 장비로 부착한 것을 사용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처음부터 저격 전문 총기로 개발된 제품도 존재한다. 정밀도 문제 때문에 종래에는 일발필살(一發必殺)을 노린 볼트액션(bolt-action) 방식의 라이플이 주로 이용되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사격 정밀도를 희생하고라도 제2탄을 신속하게 발사할 수 있는 반자동 방식의 라이플 제품이 늘고 있다.
/미군이 사용했던 M24 저격총은 민수용 레밍턴 M700 볼트액션 소총에 바탕한다. <출처: Public Domain>
/반자동 방식의 M110 저격소총 <출처: Knight's Armament Company>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사이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부 국가에서 자동소총을 저격용으로 사용하는 구상을 한 적도 있다. 연속적으로 지근탄을 쏘는 것으로 제압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에서 소총수에게도 다양한 자동화기를 지급하면서 이런 구상은 폐지되었다.
나의 존재를 적에게 알리지 말라-위장은 저격수의 생명
군사작전에 나선 저격수는 몸을 숨기기 위해 고도의 위장 기술이 요구된다. 눈에 띄기 어려운 색깔의 옷이나 위장복을 입고 그 위에 더해서 식물을 잔뜩 붙인 길리 수트(ghillie suit)를 추가로 걸치거나 아예 식물을 온몸에 감는 등의 방법을 활용한다. 길리 수트는 나뭇잎이나 줄기, 모래, 눈 등 주변 환경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만든 위장복의 하나다. 주로 올이 굵은 삼베, 직물, 노끈 등으로 만들며 잔가지나 나뭇잎 등을 겉에 덧붙여 주변 환경과 구분이 되지 않게 해 적 경계병의 눈을 피하는 효과가 있다. 군이나 경찰의 저격수는 물론 민간 사냥꾼이나 자연 전문 사진작가, 영상작가가 사격이나 촬영 목표물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려고 착용한다.
/길리 수트를 입은 미 해병 저격수 <출처: 미 국방부>
길리 수트는 저격수를 입체적으로 감싸 관측자가 주변 환경과 구분하기 힘들게 하는 효과도 있다. 제대로 제작한 길리 수트의 가장자리는 바람이 불 때 주변의 풀잎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관측자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일부 길리 수트는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소재로 만들기도 하며, 반대로 착용자를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바람을 막아주는 털실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복장을 군사적으로 사용하면 적에게 ‘언제 어디서 저격수가 갑자기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효과도 있다. 길리 수트는 주로 군에서 사용하며 경찰이나 경비 분야에서는 위장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참호전에서 머리 부분만을 위장한 영국군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길리 수트는 스코틀랜드의 사냥터 관리인들이 휴대용 은닉도구로 개발한 것이 그 기원으로 알려졌다. 이를 처음 사용한 부대는 영국군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연대 소속의 기마의용병 부대였던 로뱃 정찰대(Lovat Scouts)다. 1899년 10월~1902년 5월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 과정에서 편성된 로뱃 정찰대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 영국군의 첫 정규 스나이퍼 부대로 개편되었다.
저격수의 전술적 가치
군 작전을 수행할 때 저격수의 기본 임무는 아군을 위협하는 고위험 목표를 무력화하는 일이다. 아군을 노리는 적 저격수의 존재를 사전에 탐지하고 무력화하는 ‘카운터 스나이퍼(counter sniper)’ 임무를 비롯해 아군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대전차무기나 기관총 사수를 제거하는 임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체가 어려운 고급 지휘관을 제거해 적의 지휘계통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현장과 본부 간의 소통을 담당하는 통신병을 무력화해 통신계통을 마비시키고, 의무병을 사살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 등도 저격수의 주요 임무에 포함된다
/저격수는 고위험 목표를 무력화하는 정밀타격수단이 된다. 사진은 1944년 이탈리아 전선의 미군 저격수가 M1903A4 저격총을 장전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 Public Domain>
저격수가 장교나 통신병, 위생병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에서는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저격수가 부대원의 상하관계를 아예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작전 중 장교와 사병이 서로 같은 제복을 입는다든지 상급자에 대한 경계를 생략하는 등의 기만작전이 흔하게 벌어진다. 과거 장교의 특성이던 쌍안경, 권총, 지도 등 고유의 소지품이나 장비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게 숨기기도 한다. 베트남전 이후 미군은 군 계급장의 재질을 장교와 병사의 구분 없이 동일하게 통일해 저격수가 멀리서 쉽게 계급을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저격수는 적 병사들을 심리적으로 강력하게 압박해 공포감을 심어줌으로써 적의 공격 진행을 늦추는 효과가 있다. 단 한 명의 저격수 때문에 1개 부대의 작전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이를 노려 적을 사살하기보다 부상을 입혀 다른 부대원들의 심리적인 공포를 극대화하고 부상병 부축과 운송에 귀중한 자원을 쓰게 하는 등의 작전을 펼칠 수도 있다.
/저격수는 시가지 등 폭격이 곤란한 곳에 은신하므로 제거하기 어렵다. 사진은 시가지에서 저격 중인 캐나다군 저격수의 모습이다. <출처: Public Domain>
이 때문에 저격 공격을 받은 부대는 신속하게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격수는 강력한 위장으로 위치를 숨기고 있어 위치를 알아내기가 곤란하다. 이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보다 대략적인 위치를 짐작해 그 주변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에 박격포나 야포의 포격, 또는 공중 폭격을 대규모로 가해 저격수를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군사용어로 ‘점 공격’이 아닌 ‘면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저격수가 시가지 등 폭격이 곤란한 곳에 은신하고 있는 경우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저격수 제거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만큼 부대의 작전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 저격수는 적의 적개심이나 혐오감의 대상이 될 수 있어 포로가 된 경우 학대나 즉결처분 대상이 되기가 쉽다.
소총 기술의 발달이 저격수 탄생 이끌어
저격수 운용에는 정확도가 높은 총기가 필수적이다. 과학기술과 산업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술 발전에 따라 이런 총기나 나타나면서 비로소 저격수가 탄생할 수 있었다. 강선총포인 라이플(소총)이 개발되기 전의 화기는 총신 내부에 강선이 없는 활강총포(滑腔銃砲, smoothbore)였다. 활강총포는 장거리에서 명중률이 낮았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가장 인기 높았던 활강총포인 샤를빌(Charleville) 머스킷 1776년 모델 <출처: Public Domain>
총기의 높은 명중률은 강선총포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강선총포는 총열 안쪽에 나선형의 강선(rifling)이 파여 있어 이로 인한 요철 때문에 발사되는 총알이나 포탄에 회전이 생기게 된다. 총구나 포구를 벗어난 총탄이나 포탄은 이 회전 덕분에 요동 없이 안정적으로 비행해 목표물에 정확하게 명중하게 된다.
/강선총포가 등장하면서 명중률이 높아져 저격도 가능하게 되었다. <출처: MatthiasKabel at German wikipedia>
게다가 머스킷 소총을 비롯한 활강총포에는 둥근 탄환만 장착할 수 있었지만, 라이플에는 탄도 궤도의 안정성 덕분에 뾰족한 탄환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라이플의 사거리와 명중률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5세기 후반 강선총포가 발명되었지만 당시에는 단지 대형 포에만 적용되었다. 강선총포를 적용한 라이플은 18세기 전반에 등장했다. 라이플이 더욱 발달해 명중률이 높아지면서 비로소 저격수가 등장했다.
초기 형태 저격수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미국 독립전쟁
초기 형태의 저격수가 등장한 최초의 전쟁은 18세기 후반인 1775~1783년에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이다. 1777년 9~10월 벌어진 뉴욕 주 새러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대륙군(식민지 민병대)은 500명 이상의 저격수를 동원했다. 지휘관인 대니얼 모건(Daniel Morgan)의 이름을 따서 ‘모건 소총부대’로 불렸던 이 부대는 사격 솜씨가 좋은 병사를 뽑아 구성했으며 전술적으로 영국군 장교와 포병을 골라서 저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모건 소총부대는 저격 임무를 수행하여 독립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사진의 중앙 오른쪽에 흰색 제복을 입은 것이 지휘관인 모건 대령이다. 그림은 영국군 존 버고인(John Burgoyne) 장군의 항복 장면을 묘사한 존 트럼벌(John Trumbull)의 1821년 작품이다. <출처: Public Domain>
이를 통해 영국군 지휘부를 혼란에 빠뜨리고 포병들이 제대로 작전에 임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효과를 노렸다. 저격수들은 정밀 사격을 위해 라이플에 총검을 부착하지 않아 적의 공격에 취약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총검을 부착한 머스킷을 운용하는 부대와 함께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저격수들은 나무 뒤에 숨어 초기 모델의 라이플로 200야드(약 182.88m) 이상 떨어진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대륙군 저격수 티모시 머피(Timothy Murphy)는 이 전투에서 300야드(약 274.32m)[400야드(약 365.76m)라는 기록도 있다] 거리에서 영국군 지휘관인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 장군을 사살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륙군의 전설적인 영웅이자 저격수인 티모시 머피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당시에는 등 뒤에서 적을 사살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1777년 9월 11일에 벌어졌던 펜실베이니아 주 브랜디와인 전투(Battle of Brandywine)에서 영국군 장교 패트릭 퍼거슨(Patrick Ferguson)은 훤칠한 키에 위엄 있는 외모를 지닌 대륙군 장교가 자신의 라이플 조준선에 들어왔음에도 그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이유로 총을 쏘지 않았다. 나중에 퍼거슨은 그 키 크고 위엄 있는 외모의 대륙군 사령관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신사적인 저격수의 한 순간의 선택이 역사를 바꾼 것이었다.
나폴레옹에 맞선 영국군 저격수들
19세기 초반인 1803~1815년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영국군은 명사수로 이뤄진 특수부대를 구성해 운용했다. 당시 대부분의 군대가 명중률이 낮은 활공총기인 머스킷을 사용했지만, 눈에 띄는 녹색 제복을 입은 영국군 ‘그린 재킷츠(Green Jackets)’ 부대는 라이플의 역사에서 유명한 베이커 라이플(Baker rifle)을 사용했다.
/19세기 저격수들이 사용했던 베이커 라이플 <출처: Public Domain>
베이커 라이플은 영국의 총기제작자인 이즈키엘 베이커(Ezekiel Baker)가 제작한 영국산 라이플로, 1800년 영국군 최초의 표준 장비로 채택되었다. 전장식이지만 강선 총구를 갖춘 베이커 라이플은 장전 속도는 느렸지만, 명중률은 당시 어떤 소총보다 높았다. 이런 성능을 바탕으로 이 라이플을 사용하는 그린 재키츠 부대는 영국군의 엘리트 부대로 통했다. 어떤 전투에서도 최전방에 서서 정확한 사격으로 진격해오는 적을 저지했다.
/베이커 라이플로 저격을 하고 있는 샤프슈터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스나이퍼라는 용어에 앞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샤프 슈터(sharp shooter)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당시 영국군 부대의 활약을 보도한 1801년 6월 23일자 《에딘버러 애드버타이저(Edinburgh Advertiser)》의 기사였다. 샤프 슈터는 1781년 독일에서 처음 사용되었던 ‘샤르프쉬체(Scharfschütze)’라는 단어의 영어 번역이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남북전쟁은 저격수의 전쟁
최초의 장거리 저격용 소총은 19세기 중반에 디자인되었다. 영국의 엔지니어이자 기업인인 조지프 휘트워스 경(Sir Joseph Whitworth, 1803~1887년)이 1854~1857년에 설계한 휘트워스 라이플이 그것이다. 유효사거리가 800~900야드(약 731.52~822.96m), 최대사거리가 1,500야드(1,371.6m)에 이르렀다. 당시로서는 사거리가 대단히 긴 저격용 소총이었다.
/장거리 발사가 가능했던 휘트워스 소총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휘트워스 라이플은 비용 문제로 영국군에는 팔리지 못하고 프랑스군과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남부연맹 측 군대, 즉 남군에 납품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 모두에서 저격수를 운용했다. 남북전쟁은 저격수의 전쟁이었다. 당시 1864년 5월 9일 스포트실베이니아 코트 하우스 전투(Battle of Spotsylvania Court House)에서 북군의 존 세지위크(John Sedgwick) 장군이 1,000야드(약 914.4m)의 거리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세지위크 장군은 “이 정도 거리라면 코끼리도 제대로 맞힐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직후 총탄을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북군의 주력인 포토맥군 소속의 저격수를 그린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의 1862년 작품 <출처: Public Domain>
비슷한 시기인 1853~1856년 벌어졌던 크림 전쟁(Crimean War) 당시 소총에 부착할 수 있는 광학조준경이 설계되었다. 이 덕분에 저격수들은 과거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도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게 되었다. 광학기술을 이용한 망원조준경의 등장은 저격 전술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탁 트인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에 최초의 저격수 부대 등장
1899~1902년에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계 보어인 양측 모두 탄창과 무연화약을 쓰는 최신형 라이플을 사용했다. 영국군은 리-메트퍼드(Lee–Metford) 라이플을, 보어인들은 독일제 마우저(Mauser) 라이플을 사용했다. 탁 트인 대지가 많은 남아프리카의 지형 특성상 저격수는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이 사용한 리-메트퍼드 라이플 <출처: Public Domain>
이 전쟁에서 1899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연대 산하에 설치된 영국군 최초의 저격수 부대인 로뱃 정찰대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제2차 보어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뱃 경이 이 부대를 조직해 미국 출신의 영국군 정찰부대 지휘관이던 프레더릭 러셀 버넘(Frederick Russell Burnham)에게 맡겼다. 버넘은 로뱃 정찰대를 “절반은 여우이고 절반은 산토끼”라고 표현했다. 영국군 저격수들은 보어인 상대와 마찬가지로 사격과 야전 활동, 독도, 감시, 그리고 군사 전술에 뛰어났다. 이들은 저격수들이 최초로 체계적으로 훈련되고 전투력과 전술을 강화한 군 부대 소속으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만들었다.
/캐나다에서 산악훈련 중인 로뱃 정찰대원들 <출처: Public Domain>
그들은 “저격하고 곧바로 달아난다. 살아남아 다른 날에 또 저격하기 위해서다”를 모토로 삼았다. 그들은 위장 능력이 뛰어난 길리 수트를 착용한 최초의 군 부대였다. 제2차 보어 전쟁이 끝난 뒤 이 부대는 최초의 저격수 부대로 공식 편제되었다. 당시 저격수는 스나이퍼(sniper)가 아닌 샤프슈터(sharpshooter)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실, 강선총구를 지닌 라이플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고 저격수라는 보직이 제대로 확립되기 전에도 ‘요인 저격’이라는 군사 임무는 존재했다. 일본에서는 1598년 벌어졌던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사가 저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작전 지휘관이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의 조총 사수가 배 뒤에 숨어 이순신 장군을 노려 저격했다는 주장이다. 양측이 교전 중 날아온 유탄에 맞았다는 조선측 기록과는 다른 주장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선총포가 도입되기 전 활공총포를 이용한 저격 활동이 된다. 조총은 당시 일본에서는 ‘다네가시마 댓포(種子島鐵砲)’로 불렸는데 1543년 포르투갈인이 일본 남부 다네가시마(種子島)를 통해 전래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불이 붙은 화승을 점화구에 갖다 댐으로써 총알을 발사하는 화승식 전장 소총이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말기인 16세기 1527년 5월 부르봉 공작 샤를 3세(Charles III, Duke of Bourbon)가 로마 성벽에서 저격을 당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는 교황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가 경쟁자였던 프랑스 왕국을 지원하자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에게 군대를 맡겨 교황령인 로마로 진군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하얀 망토를 걸쳤던 부르봉 공작은 5월 6일 로마 성벽 앞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 금세공인, 군인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자신이 저격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강선총포가 없어활공총포인 아쿼버스(arquebus)가 사용되었다. 아쿼버스도 조총처럼 화승총이다. 화승총은 1470년 무렵 독일에서 개발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부르봉 공작은 화승식 활공총포를 이용한 저격으로 목숨을 잃은 드문 경우로 볼 수 있다. 조총도 아쿼버스급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서양에서는 화승식을 거쳐 부싯돌을 이용하는 수발총(燧發銃, flint lock) 방식이 등장했다.
당시 지휘관의 전사로 규율이 무너진 신성로마제국 군대는 로마에 들어가 약탈을 했으며 교황청을 경비하던 스위스 근위병 500명을 전멸시켰다. 스위스 근위병은 ‘총성의 서약’을 어길 수 없다며 최후까지 싸웠다. 그 뒤 교황청은 지금까지도 스위스 근위병에게 경비 업무를 맡기고 있다. 교황청 스위스 근위병들은 이를 기려 매년 5월 6일 신입 근위병의 충성 서약을 실시한다.
영국에서는 17세기 잉글랜드의 의회파와 왕당파가 1642~1651년에 벌였던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 당시 의회파 군사지도자인 2대 브루크 남작 로버트 그리빌(Robert Greville, 2nd Baron Brooke, 1607~1643)이 스나이퍼의 의도적인 총격에 숨진 최초의 인물로 통한다. 그리빌은 스트래트퍼드셔(Staffordshire) 리치필드(Lichfield)에 있는 리치필드 성당(Lichfield Cathedral)에서 숨어서 그를 노린 한 남자의 총격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의회파가 구성한 신모델군(New Model Army)은 전장식 활공총포인 머스킷을 사용했다. 머스킷 총구로부터 화약과 총알을 차례로 넣고 조준·발사한 뒤 총신 내부를 소제하고 다시 장전·발사하는 과정을 그림 등으로 교육하는 자료가 남아 있다. 이 때문에 그리빌은 머스킷에 의해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여명기를 거친 뒤 강선총포가 등장하면서 저격수는 비로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저격수는 이처럼 인류사와 과학기술사, 그리고 군의 역사와 보폭을 함께해왔다.
채수윤
영국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영국과 중국을 오가며 현대 중국학을 연구했다. 러시아와 발칸 지역을 비롯한 동유럽의 분쟁사와 대외 관계사, 서유럽 국가 지도자들의 위기관리 리더십, 중국 현대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해왔다. 중세와 근대, 현대의 분쟁사와 무기체계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04.26
■ 저격수 이야기
바실리 자이체프, 크리스 카일··· 세계 최고의 스나이퍼는 누구일까?
“신은 많은 병력 편이 아니라 정확한 사수의 편에 선다”는 말을 증명한 저격수들
저격수나 전쟁을 미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사람의 목숨을 앗는 저격수의 세계에도 기록이 남는 만큼 ‘역사상 최고의 스나이퍼가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에서 자료를 찾고 기사를 작성했다
▲ 미국의 최고 저격수 중 한 명인 크리스 카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사진=조선DB)
저격수를 뜻하는 스나이퍼(sniper)는 야생 도요새 스나이프(snipe)에서 나왔다. 18세기 인도의 영국군 장교 사이에 이 새를 쏘아 잡는 경쟁이 벌어졌다. 도요새는 워낙 작고 동작이 날래어 맞히기 어려웠다. 스나이프를 떨어뜨릴 만큼 총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켜 그때부터 스나이퍼라고 불렀다.
저격수는 총알을 허비하지 않는다. ‘일발필중(one shot one kill)’이 모토다. 제1,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이라크전을 거치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1차대전 때 적 1명을 제거하는 데 들어간 탄약은 7000발, 2차대전 때는 2만 5000발이었다. 저격수들은 평균 1.7발을 사용했다. 저격수 한 명이 1개 중대(100명)만큼의 효과를 낸 셈이다.
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저격수의 한 발은 치명적인 위협이다. 철학자 볼테르가 “신은 많은 병력 편이 아니라 정확한 사수의 편에 선다”고 말한 대로다. 사람의 목숨을 앗는 저격수의 세계에도 기록이 남는다. 그렇다면 역사상 세계 최고의 스나이퍼는 누구일까.
‘백색 죽음’ 시모 해이해
/핀란드의 저격수 시모 해이해. ‘백색 죽음’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1939년에 발발한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겨울전쟁’에서 스탈린군과 맞서 상상을 초월한 전과를 올렸다.(사진=조선DB)
대부분의 군사사(史) 전문가들은 핀란드의 저격수 시모 해이해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백색 죽음’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1939년에 발발한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겨울전쟁’에서 스탈린군과 맞서 상상을 초월한 전과를 올렸다.
평범한 농민이자 사냥꾼이었던 그는 겨울전쟁(1939. 12~1940. 3)에서 라이플총으로 542명을 저격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수치만이다. 기관단총으로 2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하니,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최소한 700명이 넘는다. 참전 일수가 90일 남짓하니, 하루 9~10명의 적군을 사살한 셈이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상황에서 하얀색 옷을 입고 위장한 채 구식 총으로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히는 이 인간 사냥꾼은 소련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당황한 소련군 지휘부는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가 쏜 것으로 보이는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대규모 포격과 폭격을 가한 것이다. 결국 해이해는 턱과 왼쪽 뺨이 모두 날아가는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지만, 목숨은 구했다. 핀란드의 영웅으로 제대한 그가 개발한 전술은 지금도 전 세계 저격수들이 배우고 있다.
바실리 자이체프
/소련군의 전설적 저격수였던 바실리 자이체프.(사진=조선DB)
스탈린그라드 박물관에는 소련군의 전설적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의 모신나강(M1891/30) 소총이 전시돼 있다. 총을 설명한 곳에는 “오른뺨에 총을 밀착, 스코프 십자가에 목표물이 메워지면 방아쇠를 …”이라고 적혀 있다.
1915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자이체프는 우랄산맥 일대에서 자라며 사냥 사격술을 배웠다. 태평양 함대에서 근무하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그는 1942년 10월부터 한 달여간 242명을 저격해 죽였다. 사용한 총알은 243발. 100% 가까운 명중률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엄청나게 활약한 그는 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저격부대 책임자가 되어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세 곳의 지점을 옮겨가며 넓은 목표 지역 내의 적들을 저격하는 전술을 전수했다. 자이체프가 양성한 저격수들은 2차대전 동안 6000명의 적을 사살했고 그의 저격 전술은 현대전의 교범으로 자리 잡았다.
종전 뒤 자이체프는 키예프에서 섬유업에 종사하다 1991년 76세의 나이로 숨졌다. 얄궂게도 소련 해체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자이체프를 모델로 한 영화도 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년 작). 독일군을 적으로 돌리는 내용임에도 2001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자이체프 역은 할리우드 최고의 섹시남으로 꼽히는 주드 로가 맡았다.
크리스 카일
/2012년 전쟁 경험담을 엮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저격수)》출간 직후 촬영한 크리스 카일의 생전 모습. (사진=조선DB)
크리스 카일은 미 해군 특수전부대 네이비실의 저격수로 복무하며 이라크전을 통해 미군 역사상 최다 저격 기록(공식 160, 비공식 255명)을 수립한 스나이퍼다. 그가 이라크 전쟁에서 세운 ‘군공’은 경이로울 정도다. 2100야드(1.9㎞) 거리 밖에서 저격에 성공하는가 하면 총 한 자루로 도로에 고립된 아군 해병부대를 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벌어진 근접전에서 반군을 권총으로 쓰러뜨리기도 했다. 카일을 두려워한 이라크 반군들은 그에게 ‘악마’라는 뜻의 ‘알-샤이탄(al-Shaitan)’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다. 전투 파병이 끝난 후 해군 특수전 저격수 및 대(對) 저격수 팀 훈련과정 수석 교관으로 일하면서 최초의 네이비실 저격수 교본인 《해군 특수전 저격수 교리집》을 집필했다.
이런 활약 덕분에 카일은 은성훈장 2개, 동성훈장 5개, 해군과 해병대 근무유공훈장 2개, 그리고 해군과 해병대 공로표창을 받았다. 국가안보문제 유대연구소가 수여하는 ‘위대한 조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카일은 2013년 2월 2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미 해병대 저격수 출신 레이 라우스의 치료를 위해 텍사스주에 있는 사격장을 방문했다가 그에게 4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라우스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았다.
크리스 카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극장에서만 2억 5000만 달러(약 2755억 원)의 수입을 거둬, 전쟁영화 역사상 미국 내 최고 수입 기록을 깼다. 이전까지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2억 1600만 달러)가 최고였다.
아직도 카일이 묻힌 텍사스 주립 묘지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병(老兵)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항상 성조기와 꽃이 에워싸고 있다. 참전 용사나 전쟁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카일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던 가치를 지킨 수호자로 받아들여진다.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 불린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유튜브 캡처)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 중에는 여성도 있다.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키예프 대학 역사학도였던 그는 1941년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보병으로 자원입대해 소련군 25사단에 배속돼 저격 훈련을 받았다. 파블리첸코는 오데사 전투에 투입돼 약 두 달 반 동안 무려 187명을 사살한 뒤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전투에 가담했다.
1942년 6월 박격포에 부상을 당해 전선을 떠날 때까지 그는 소련군 공식 집계로 309명을 저격했고, 그중 36명이 적의 저격병이었다. 그는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 불렸지만, 아군에게는 상대 저격병을 사살한 구원의 천사이기도 했다.
국제적 영웅이던 파블리첸코는 캐나다와 미국, 영국 등지에 초대받아 대중 강연 등을 했고, 백악관에 초대받아 루스벨트와 그의 부인을 예방하기도 했다. 파블리첸코는 1943년 소련 영웅금성훈장을 탔고 소령 예편 전까지 저격 교관으로 복무했다. 종전 후 학위를 받은 뒤로는 사학자로 일했다. 1916년 7월 12일 태어나 1974년 10월 10일 별세했다. 그녀의 시신은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16세기에 건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에 안장됐다. 파블리첸코의 일대기 역시 2015년 영화로 개봉됐다. 제목은 〈1941: 세바스토폴 상륙작전〉.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3산악사단에 배치, 345명의 소련 병사를 저격한 독일 최고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유튜브 캡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독일 최고의 저격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3산악사단에 배치, 345명의 소련 병사를 저격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최다 기록이다. 당시 제3산악사단장은 소련군 2개 중대의 공력을 헤체나우어의 저격만으로 물리쳤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헤체나우어는 특별한 지원 없이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전선의 은폐된 진지에서 소련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증언했다.
“아군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날 밤, 포병이 공격준비사격을 했지만 우리수적으로 열세했고 탄약도 부족해 오히려 적의 대포병 사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단독으로 적 지휘관과 포병만을 골라 장거리 저격을 가했다. 결국 적은 잠잠해졌고 아군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헤체나우어는 동료에게 “두뇌가 우수한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고 한다.
환갑을 넘긴 노년의 스나이퍼 아부 타신
/173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을 사살한 아부 타신.(사진=조선DB)
최근 활동 중인 저격수 중에서는 아부 타신이 첫손에 꼽힌다. 환갑을 넘긴 노년의 이 스나이퍼는 173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을 사살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그는 2017년 5월 시아파 민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지금까지 저격수로 활동 중이다. 타신이 최고의 저격 실력을 갖춘 것은 풍부한 실전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제4차 중동전쟁과 이란-이라크전 등 총 5차례의 굵직한 전쟁에 참전했다고 데일리메일은 전했다. 타신은 “전쟁 후 은퇴해 지내다 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다시 총을 잡았다”면서 “IS의 누구도 우리 땅에 발을 내딛지 못하게 하겠다고 신께 약속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고향이 한눈에 보이는 산 위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밝혔다.
베트남전 영웅 카를로스 해스콕.
/베트남전 영웅 카를로스 해스콕.
베트남전 영웅인 미국의 카를로스 해스콕 상사 같은 뛰어난 저격수는 그 존재만으로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6월 미 제1해병사단 소속의 해스콕은 코끼리 계곡에서 잠복하던 중 개활지를 향해 일렬로 전진해오는 월맹군을 발견한다.
800m 떨어진 곳에 숨어 있던 해스콕 상사가 적의 선두 지휘관과 후미에 있던 부사관을 동시에 사살하자 월맹군은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얼마 후 총알이 날아오는 곳을 확인하려 고개를 든 월맹군은 모두 머리통이 날아가고 만다. 월맹군은 꼼짝 못 하고 더위와 갈증을 참으며 밤을 지새우고 저격수들은 교대로 조명탄을 쏘아 적군을 사살했다. 저격은 이렇게 5일 동안 지속됐고, 월맹군은 결국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이후 해스콕은 짐승을 뛰어넘는 ‘인내자’라고 불렸다. 해스콕은 미군의 저격학교 시스템을 정립하다시피 했다. 미 해병대 저격학교의 모토인 ‘One shot, One kill’을 만든 것이 해스콕이다.
해스콕은 가장 먼 거리(2286m)를 저격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의 기록은 2002년 아프간전쟁에서 캐나다군의 롭 펄롱이 2430m에서 적군을 저격함으로써 비로소 깨졌고, 이 기록 역시 2009년 11월 영국 육군의 크레이그 해리슨이 아프간에서 2475m의 저격에 성공하면서 깨졌다.
2017년 6월 23일 CNN은 캐나다 특수부대 사령부를 인용해 이 사령부 소속의 한 스나이퍼는 3540m 거리에서 목표 대상을 사격해 명중했다고 보도했다. 이 스나이퍼는 모술 전선 후방에서 이라크군을 도와 수니파 급진 무장세력 IS와 싸우는 캐나다 최정예 특수부대 JTF-2 소속이다. JTF-2 측은 군 보안상의 이유로 언제, 어떻게 저격이 성공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JTF-2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종전 세계 신기록을 크게 뛰어넘는다.
로자 샤니나
/루드밀라 파블리첸코에 버금가는 소련 여성 명사수 로자 샤니나. 유튜브 캡처
로자 샤니나도 루드밀라 파블리첸코에 버금가는 여성 명사수다. 1924년 소련의 아르한겔스크에서 태어난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군대에 입대한 오빠가 전사하자 자원입대했다. 군사 훈련에서 뛰어난 사격술을 보인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이자 저격수 소대의 소대장이 되어 공격 선봉에 나섰다. 그녀가 겨눈 총에 독일군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한 번에 두 명의 적을 쏴 죽이는가 하면 하루에 5명의 적을 없애기도 했다. 샤니나는 1944년 4월 초부터 저격수로 나서 다음 해인 1945년 1월 28일 동프로이센 공세 작전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숨질 때까지(21세) 9개월여 동안 적군 59명을 사살했다. 샤니나는 영광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소련군 여성 저격수 중 최초였다. 러시아 아르한겔스크주 샨가루이(Shangaly)와 스토로에후스코에(Stroyevskoye) 등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도로(샤니나 거리)가 있다.
차상률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저격수 차상률은 소련제 모신나강 저격총으로 국군과 미군을 합쳐서 총 120명을 사살했다. 유튜브 캡처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저격수 차상률은 소련제 모신나강 저격총으로 국군과 미군을 합쳐서 총 120명을 사살했다. 이륙하던 미군 측 헬기를 단 한 발로 격추시켰다는 말도 있다. 물론 당시 헬기는 내구성과 방호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차상률은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차상률은 6·25 전쟁을 그린 한국 영화 〈고지전(高地戰)〉에 나오는 저격수 ‘2초’의 모티브라고도 한다. ‘2초’는 총을 맞고 나서 2초 후에 총성이 울린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북한은 6·25 전쟁 때 제2차 세계대전 시 소련군처럼 2인조 저격수를 운용했다. 그들의 야전 규정에는 ‘저격조나 사냥꾼 조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공격을 준비하는 적을 끊임없이 타격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북한군과 중공군 저격수들은 피란민으로 위장, 유엔군을 기습 공격하고 작전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전쟁 후 북한은 〈인민군 군사상식〉이란 책을 통해 저격수들의 활약을 선전했다. 선전·선동 목적으로 작성된 책인 만큼 신뢰도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북한군의 저격수 운용 방식을 짐작게 하는 내용이 많다. 차상률에 대한 내용은 이 책에도 나온다.
“1952년 한 해 동안 동부전선에서 행동한 인민군과 해방군 저격수들은 1만6000여 명의 적병을 소멸했다. 적들이 밤에는 습격이 무섭고, 낮에는 저격수가 무서워 못 살겠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특히 인민군 저격수 차상률이 소련제 모신나강 저격총으로 무장, 120여 명의 한국군과 미군을 사살하고 헬리콥터를 추락시켰다.”
장 타오팡
/중국 최고의 명사수로 알려진 장 타오팡. 1953년 6·25 전쟁 종반 중국인민해방군 24군단 소속으로 국군과 미군 214명을 저격했다. 유튜브 캡처
장 타오팡은 중국 최고의 명사수로 알려졌다. 1953년 6·25 전쟁 종반 중국인민해방군 24군단 소속인 장 타오팡은 삼각고지 전투에 저격수로 투입된다. 18일 동안 매복 끝에 나타난 적에게 12발을 발사했으나 모두 실패, 오히려 역공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상황을 다시 분석하고 가늠쇠 사용법을 터득한 그는 32일 동안 214명을 저격했다. 적이 쓰러지고 최소 15분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에만 저격에 성공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뒤늦게 저격수의 중요성을 깨달은 미국은 해병대 저격수들을 투입했다. 저격 소대의 수장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정찰중대장이며 젊고 유능한 저격수인 홀메스(G. Holmes). 그는 719m 고지의 저격전투에서 장거리 사격을 가해 중공군들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미 해병 저격수들은 약 400m 정도의 사거리에서 좋은 목표물을 발견, 차례차례 제거하고 기관총 사수까지 명중시켰다
남북한의 저격수 수준은?
우리 군 저격수와 관련한 내용은 대부분이 대외비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모은 취재기록을 공개하자면 일단 우리 저격수들이 사용하는 대표적 저격총은 AW50 모델이다. 항공기 테러 같은 원거리 지원을 목적으로 사용하는 저격총으로 영국 애큐러시 인터내셔널사가 개발한 12.7mm의 대구경 총으로 도주 차량의 엔진도 폭발시킬 수 있다. 전문 저격소총인 독일제 SSG-3000과 SSG-69도 쓴다. 최근에는 국산 기술로 개발된 K14저격소총을 사용하는 부대도 있다. 2017년 12월 28일 레바논 지중해 연안 나쿠라 해변의 사격장에서 열린 유엔레바논평화유지군(UNIFIL) 사격경연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동명부대원’들이 사용한 총이다.
우리 군 저격수의 산실은 해병대다. 해병대는 사단-여단급은 물론 연대와 헌병특경대까지 전문 저격수를 양성하고 있다.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 해양경찰특공대도 위탁교육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우리 군 저격수 수준에 대해 “800m 밖에 있는 표적을 가뿐히 맞힌다”고 했다. 집중력과 실력은 뛰어나지만, 장비 면에서 1km를 맞히는 미군엔 뒤떨어진다.
북한의 저격병들은 구(舊)유고슬라비아의 분대 저격수용 소총인 M-76을 국산화해 쓰고 있다고 한다. 북한제 저격총의 유효 사거리는 800m. 최고 600m 거리에 있는 목표물을 사격하는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보병 전술에서 저격수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분대당 저격수 한 명을 배치하고 있다. 북한군 저격수는 연대급 이상의 단위에서 집체 훈련을 정기적으로 받는다. 한 탈북자는 “항일 빨치산 시절 김일성 부대 저격수와 6·25 당시 북한군 저격수의 활약상에 대해 세뇌 교육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천부적 자질과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력
저격수는 천부적인 사격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틀 동안 꼼짝하지 않고 사격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하다. 영화나 게임에서처럼 뛰어다니며 저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전증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셔도 안 되고 완벽한 매복을 위해 담배도 금물이다. 눈도 아주 좋아야 한다. 위장을 구별하기 위해 색맹이 없어야 하고 나안시력도 2.0 이상이어야 한다. 한국 정규군에 스나이퍼가 필요하다고 최초로 주장한 저격수 전문가 황광한 예비역 준장은 “모기가 물어도 꿈쩍 않는 인내력이 필요하다”며 “전설의 스나이퍼 해스콕은 엎드린 자세로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속옷도 안 입었다”고 했다.◎
글 | 최우석 조선뉴스프레스 기 출처 | 톱클래스 2018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