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31/ 국방10/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4/
81 수안보까지 내려온 김일성, 유랑극단처럼 밀려 떠돌았던 1사단
(9)전쟁의 시작
부럽기만 했던 6사단
나름대로 다짐을 했지만 적이 정말 앞에 나타날 경우 우리 1사단이 제대로 공격을 펼칠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군복조차 입지 못한 군인이 대열에 섞여 있었고, 그런 이는 대개 소총조차 제대로 지니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병력은 약 4000명 정도에 이르렀으나 야포 1대조차 보유하지 못해 일반 연대 병력에 비해서도 전투력이 훨씬 떨어져 있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우리 1사단은 백마령을 넘어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그곳의 방어 임무를 교대해야 했다. 북한군은 수원을 넘은 뒤 역시 파상적인 공세로 충청도 일원에 진입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크게 밀리는 형국이었으나, 국군은 나름대로 각 지역별로 북한군의 공세를 늦추기 위해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국군 6사단은 전쟁 초반에 상당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사기가 매우 높은 부대였다. 춘천 지역에서 북한군 공세를 좌절시킨 유일한 국군 사단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6사단은 다른 국군 사단이 갖추지 못한 ‘장점’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영월 일대는 광산개발이 붐을 이뤘다. 그래서 꽤 많은 광물개발 회사가 그곳에 진출해 있었다. 다양한 광석을 캐내면서 그곳 일대는 당시로선 남한에서 가장 ‘산업화’의 속도가 빨랐던 지역이다. 따라서 차량이 아주 많았다. 광석을 실어 나르는 중소형 트럭이 전국 어느 지역에 비해 많았다는 얘기다.
/신성모 국방부장관(마이크 든 이)이 개전 초반 일선 부대를 방문해 격려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6사단은 전쟁 발발 뒤 그 광물회사의 트럭을 징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기동력이 아주 탁월했다. 미군 전투사단에 비할 수는 없더라도 국군 사단 중 가장 많은 트럭을 징발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김종오 사단장의 탁월한 지휘력과 준비성 때문에 개전 초기에 춘천 지역을 지향했던 북한군의 공격 부대를 잘 막았다. 그러니 여러 모로 부대의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6사단 7연대와 교대를 해 음성 지역 일부에서 북한군과 다시 싸워야 하는 게 당시 내가 이끄는 1사단의 임무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증평을 지날 때 그곳 농협 창고에 쌀이 가득 들어 있었던 장면이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농가로부터 돼지와 소를 사들여 증평 창고에 있던 쌀로 밥을 지어 함께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화력을 구걸하다
그럼에도 7연대와 임무교대를 한 뒤 우리가 북한군과 잘 싸울 수 있을지를 두고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임부택 대령이 이끄는 7연대는 충주시 인근의 동락리에서 한 초등학교 여교사의 제보를 이용해 북한군의 주둔 지역을 알아낸 뒤 기습을 벌여 큰 성공을 거뒀다. 1개 대대를 보내 북한군 1개 연대 병력을 섬멸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 매우 값진 승리였다. 북한군의 파상적인 공세에 맞서 국군이 벌인 작전 중에서 전과(戰果)로 볼 때 아주 두드러지는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기가 높은 7연대와 임무교대를 하기 위해 우리는 백마령을 넘어 음성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나는 임부택 대령이 인사차 찾아온 자리를 빌려 도움을 요청키로 했다. 1사단의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 있음을 상기시킨 뒤 “임무교대 뒤에 바로 이동하지 말고 우리를 도와달라”고 했다. 7연대가 지닌 포병화력을 조금이라도 이용하면 북한군과 싸워 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에 화력 지원을 한 임부택 대령(왼쪽).
임 대령은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7연대는 내 부탁대로 포병화력을 음성 전면의 북한군에게 집중했다. 7연대의 야포 엄호를 받으면서 우리 1사단은 전면의 적과 싸웠다. 결국 북한군의 공세는 7연대와 1사단의 공동작전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나는 절박했던 상황에서 내 부탁을 들어줬던 임부택 대령의 배려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러나 임 대령은 이 일 때문에 사단장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부대 이동 명령을 어기고 왜 임의대로 싸움을 벌였느냐는 지적이었다. 사단장으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질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나를 도왔던 임부택 대령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우리 1사단은 ‘유랑 사단’임에 분명했다. 빗물이 고인 진창에서 잠을 자야 했고, 모기가 사정없이 물어뜯는 잡풀 속을 헤매야 했으며, 적을 만나서는 화력이 없어 전전긍긍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혹 증평에서처럼 쌀이 든 창고를 만나 모처럼 배를 불릴 수도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시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음성을 떠나 괴산을 거쳐 속리산 동남쪽 기슭인 경북 상주군 화령장으로 진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행군 길도 험악하기만 했다. 화령장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미원을 거쳤다. 현지의 조그만 우체국에 사단 지휘본부를 차리고 하루를 묵어야 했다. 내리던 비가 멈추고 오랜만에 날이 아주 개인 상태였다.
그날 밤은 유독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번민이 머릿속을 채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사단의 운명은 캄캄한 밤에 발을 딛는 것과 같았다. 대한민국의 운명도 어둡다고만 여겨졌다. 이 전쟁을 어떻게 치러야 할까, 우리는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 당장 어떻게 적과 싸워야 할까라는 생각이 끝없이 갈마들었다.
말없이 떠난 연대장
모처럼 보는 보름달이었다. 나는 미원 우체국 뜰에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다시 찾아들었다. 특히 당시의 내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연대장과 참모의 이탈이었다. 개전 뒤 줄곧 11연대를 이끌었던 최경록 대령과 작전참모 한 명이 사단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전쟁 중이라 명령계통이 뒤죽박죽이기도 했다. 특히 한 부대장이 자신에게 맞는 부하를 임의로 선택해 끌고 올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다른 부대에 가 있는 부하를 불러와 자신의 부대에 앉힌 뒤 육군본부에 “필요해서 데리고 왔다”라고 하면 양해가 이뤄지는 게 관례였다.
최경록 대령 등 두 사람은 전쟁 전에 예편했다가 국군의 후퇴과정에서 군에 다시 복귀한 김석원 장군을 찾아갔다. 김석원 장군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국군 초기의 거의 유일한 지휘관이었다. 그가 수도사단장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한 때 그 밑에 있었던 최 대령 등 두 사람이 수도사단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내 마음이 손가락에 걸린 담배처럼 타들어갔던 이유는 두 사람이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다는 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1사단의 경우가 그토록 비참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야 옛 상관을 모신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1사단이 번듯한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발길을 쉽게 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담배를 몇 대 피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작전 참모 문형태(전 합참의장) 중령이 서 있었다. 내 심사가 그런 분위기에 푹 젖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심코 내가 뱉은 말은 “자네도 가려는가?”였다. 그 역시 전쟁 전에 김석원 장군의 부하였다. 그러나 문 중령은 “아닙니다, 저는 남겠습니다”라고 했다.
/신속하게 일본으로부터 이동해 온 미군 장병들이 부산항에 도착해 하선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이제 곧 미군이 참전한 마당인데, 사령관님처럼 젊은 지휘관이 활동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미군은 부산에 상륙해 점차 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전력으로 어떻게 나타날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게 미원에서의 밤은 저물었고, 이튿날 우리는 화령장을 향해 떠났다.
당시 김일성은 수안보까지 내려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 통일성전을 마무리하자”고 독촉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어 진공이 계획보다 늦춰지자 “큰 길 말고 소로(小路)까지 활용해 공세를 벌이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런 지시에 따라 북한군 정예인 15사단이 화령장 일대를 향해 공격을 벌이고 있었다. 북한군 13사단도 15사단을 도우려 그쪽을 향해 몰려오는 상황이었다.
화령장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가르는 경계에 있다. 이곳을 적에게 내주면 상주에 이어 대구까지 큰 위협에 놓인다. 적은 그 요로를 차지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빗속을 뚫고 행군을 거듭해 시간에 맞춰 7월20일 화령장에 간신히 도착했다.
그곳에는 미 25사단의 24연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부산을 통해 급히 올라와 쉴 틈도 없이 북상한 부대였다. 24연대는 흑인으로 편성한 부대였다. 그러나 그 부대의 지휘관은 백인이었으며, 성(姓)도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White였다. 나와는 구면인 지휘관이었다.
82 白장군, White 대령에게 "우린 같은 姓"
9) 전쟁의 시작
처음 본 155㎜의 위용
호턴 화이트(Horton White) 미 25사단 24연대장은 내가 정보국장을 맡고 있던 1948년 처음 만난 사이였다. 당시 그는 미 군정 하의 24군단 정보국장 신분으로 업무 때문에 나와 자주 만났다. 나는 처음 맡는 정보국장으로서 정보 계통의 업무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사안을 그에게 여러 번 자문했다. 그는 내 도움 요청에 성심껏 응했다. 그로부터 많은 충고를 듣고, 그가 제공하는 여러 자료로 인해 정보국의 업무를 신속하게 튼튼한 토대 위에 올릴 수 있었다.
나는 그때 화이트 대령과 자주 만나면서 “우리는 같은 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우스개를 던진 적이 있다. 그의 성씨인 White는 한자로 적으면 白(백)이어서 나와 동성(同姓)이라고 할 수 있다는 조크였다. 그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는 나와 가까워졌다.
마침 그의 연대가 화령장에 진출해 있었다. 박성철이 이끄는 북한군 정예 15사단, 그를 돕는 조공(助攻)의 북한군 13사단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보국장 때 만나던 화이트 대령과 전쟁터에서 다시 조우해 몹시 반갑기도 했으나, 사실 내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부산을 거쳐 이곳에 왔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화령장에 도착한 직후 신임 15연대장으로 1사단에 복귀했던 최영희 대령이 큰 소리를 치며 내게 달려왔다. 그는 “미군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대포를 끌고 왔다”면서 내게 “함께 가보자”고 했다. 나와 몇 사람은 최 대령이 이끄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최 대령의 표현처럼 ‘아주 커다란’ 대포가 물이 고인 진창에 바퀴를 묻고 푹 빠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6.25전쟁 당시 투입됐던 미군의 M-40 155mm GMC/사진=Olive-Drab
우리로서는 처음 보는 미군의 155㎜ 야포(榴彈砲)였다. 그 전까지 우리가 운용했던 대포로는 105㎜가 최대의 크기였다. 우리 눈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155㎜는 정말 우람했다. 국군 1사단 장병 수십 명이 그 주위를 에워싼 채 정신없이 155㎜의 이쪽저쪽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옮겨 화이트 대령을 찾았다.
나는 화이트 대령을 보자마자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내게 조금이라도 줄 수 있는가, 지금 지도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화이트 대령은 느닷없는 내 요구에도 “지도는 충분하다. 필요하면 주겠다”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지도는 축적 5만분의 1 지도였다. 나는 그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눈이 어질어질했다. 지도는 아주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곳에는 작전지역 일대의 산과 하천, 낮은 구릉과 작은 실개천이 모두 그려져 있었다.
숫자로 말하는 전쟁
전쟁이 벌어지고 나서 화령장에 도달하기까지 국군 1사단이 사용했던 지도는 학교 교실에 걸려 있던 전도(全圖)가 다였다. 작전은 그 전도를 보면서 어림잡아 어느 곳을 지정하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작전이란 게 주먹구구식으로 펼쳐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축적 5만분의 1 지도는 그와 양상이 전혀 달라지는 전쟁을 예시하고 있었다. 아울러 미군의 지도에는 상세한 좌표(座標)가 종으로 횡으로 그어져 있었다. 5만분의 1 축적이라 그 좌표는 아주 정밀했다. 그 지도를 사용하면 전쟁의 여러 상황을 숫자로 설명할 수 있었다. 적이 있는 곳, 우리가 머무는 곳의 정확한 위치도 수치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5㎜도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105㎜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화력을 뿜어내는 거대하고 웅장한 야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관심은 정작 그 야포의 화력을 상대의 머리 위에 정확하게 투사(投射)할 수 있는 5만분의 1 지도에 더 쏠렸다. 나는 그때까지 지켜본 미군이 사실 걱정스러웠다.
오산에서 마주친 스미스 대대, 그 뒤를 이어 대전에서 분전했던 24사단이 모두 북한군의 T-34 전차와 압도적인 기동에 의해 맥없이 물러나버렸기 때문이었다. 화령장에서 다시 미군과 만날 때 나는 그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그런데 화이트 대령의 미 24연대는 마침내 포병화력의 주력인 155㎜를 끌고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점이 우선 든든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운용해서 정확하게 적을 타격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갈망했다. 새로 온 미군은 그런 점에서 믿음직했다. 적을 압도할 수 있는 155㎜ 야포에, 그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화력을 적진에 정확하게 투사할 수 있는 5만분의 1 지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그 지도가 절실했다. 앞으로는 미군과의 연합작전이 불가피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당장 그 지도가 필요했고, 우리 스스로 움직이며 적과 접전을 펼치면서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도 그런 상세한 지도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화이트 대령으로부터 경북 일원을 그린 상세한 지도를 얻었고, 그는 그에 덧붙여 상황판을 그릴 수 있는 그리스 펜과 아스테이지(표지물) 등을 듬뿍 안겨줬다.
5만분의 1 지도는 원래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했을 때 우리 땅의 모든 구석을 실측(實測)해 만들었다. 그로써 만들어진 동판(銅版)은 일본 패망 뒤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한 도쿄의 맥아더사령부가 보관했었다. 한국 정부는 그 원판을 인쇄해 지도를 확보했고, 전쟁 전 각 부대에 그 지도를 보급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대가 전쟁이 발발하자 지도를 챙기지 못한 채 밀리고 말았다.
/부산으로 상륙한 뒤 열차에 올라타 전선으로 향하고 있는 미군들. 교통장애로 잠시 열차가 멈춘 상태의 모습이다
일본의 원판으로 만든 지도는 미군이 새로 만든 지도와 달랐다. 미군은 컬러를 입혔고, 일본이 만든 지도에 없던 좌표를 그렸다. 입체감에서 전혀 다른 지도였던 셈이다. 그 좌표로 인해 탄착지점을 설정하는 일이 훨씬 정교해졌다. ‘감’에 의존하는 포격에서 ‘수치’로 중심이 옮겨지는 포격이었다.
기어이 본대를 찾아온 장병들
미군의 정규 전력이 이 땅에 올라서면서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우선 그 지도에서 읽혔다. 맥아더의 긴급 명령으로 화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서둘러 부산에 올라섰던 스미스 대대와 딘 소장의 24사단과는 다른 미군이 올라온 셈이었다.
화령장은 사실상 최초의 한·미 합동작전이 펼쳐진 무대이기도 했다. 국군 1사단과 17연대, 그리고 미군 24연대가 함께 북한군을 맞아 싸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갈령을 넘어오는 적 15사단의 주력을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7월23일부터 이틀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의 강력한 화력이 뒷받침된다면 한국군이 보다 효율적으로 적을 맞아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발견했다. 7월25일에는 다른 명령이 내려왔다. 당시 1사단은 김홍일 장군의 1군단에 속해 있었다. 김홍일 군단장은 우리에게 “전선을 미 24연대에 모두 인계한 뒤 상주의 상주읍에 모였다가 조직을 재편한 뒤 상주의 함창읍으로 진출하라”고 했다.
상주는 우리 국군 1사단이 벌여왔던 ‘유랑’의 종착지에 해당했다. 우리는 그곳에 도착해 박기병 대령이 이끌고 있던 20연대와 청년방위대를 새로 추가할 수 있었다. 그로써 병력은 7000명으로 크게 불어났다. 개인 화기를 지니지 못했던 병사들에게도 카빈 소총이나 M1 소총을 지급했다.
개전 전에 갖췄던 포병전력과 수송 트럭, 일부 장비는 없었지만 그래도 병력의 숫자나 개인화기 지급 등에서는 얼추 보병사단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셈이었다. 아주 큰 다행이었다. 후퇴를 거듭했지만 전쟁 지도부는 발 빠르게 미군과 협력해 전투사단 재편, 무기 보급 등을 수행했던 것이다.
/참담한 후퇴 작전 뒤 상주에 도착해 준장으로 진급한 백선엽 장군.
미군의 신속한 기동, 무기 등을 비롯한 물자와 장비의 상륙 등도 그런 국군 전투사단 재편에 큰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별을 달았다.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이 상주로 찾아와 내게 준장 계급장을 달아주며 “앞으로 더 잘 싸워달라”고 했다. 좋은 일은 더 이어졌다.
적에게 우리가 쫓겨 오는 동안 후방에서 양성한 포병 1개 대대가 우리 1사단에 배속됐다. 대한민국은 개전 초반의 혼란기를 그렇듯 용케 수습하고 나섰다. 새 포병대대는 105㎜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쟁 전의 화력 수준은 아니더라도 당시 1사단으로서는 매우 기쁜 일이었다.
개성에서 적에게 밀렸다가 고립될 뻔했던 12연대 병력 800여 명도 사단을 찾아 복귀했다. 적에게 후방을 내줬던 상황에서 정말 눈물겨운 고생 끝에 사단을 찾아와 복귀한 병력이었다. 그들은 적에게 밀린 뒤 어선 등에 올라타고 서해 연안을 따라 남하해 군산에 도착한 뒤 묻고 또 물어서 상주까지 1사단 본대를 찾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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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낙동강 전선
옆구리를 노린 북한군 공격
60여 년 전 벌어진 전쟁에서 우리는 몇 차례의 고비에 섰다. 개전 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야 했다. 아주 뚜렷한 고비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달여를 적에게 줄곧 밀렸다. 그러나 중간 일부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침착한 반격을 통해 적의 발길을 묶어두기도 했다. 다음 차례의 고비는 낙동강이었다. 이곳을 지키느냐, 아니면 내주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은 크게 갈릴 수 있었다. 만약 이곳을 지키지 못하고 적의 수중에 내준다면 대구의 함락은 시간상의 문제에 불과했다.
미군은 그에 대비해 대구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중간의 길목인 밀양에 방어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획정한 방어선이 아니었다. 적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대구를 점령했을 경우 미군에게는 철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밀양은 그런 시간을 벌기 위해 미군이 마지막으로 북한군의 물을 잠시 묶어두고자 했던 ‘철수용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결연히 전쟁에 임할 태세였다. 8월1일 월턴 워커 신임 미 8군 사령관이 부산에 도착해 전선을 정비하고 나섰다. 내가 이끄는 1사단은 상주를 거쳐 낙동강을 넘어야 했다. 그곳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 다음에 파상적인 공세를 펼치는 김일성 군대에 맞서야 했다.
/북한군을 공습하기 위해 일본 공군기지에서 미 F-80 전투기들이 발진하는 모습.
워커 장군은 방어부대를 낙동강 이남으로 철수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그곳에서 최후의 저지선을 만들어보자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변수가 등장했다. 개전 이래 행방을 포착하기 어려웠던 북한군 6사단이 호남을 우회해 경남의 마산과 진주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커 장군의 미 8군 지도부는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경부 축선에 주요 저항선을 설정했다가 옆구리를 찔리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워커 장군은 상주에 주둔하고 있던 미 25사단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켜 마산으로 향하는 북한군 6사단을 막도록 했다.
그로 인해 1사단도 움직여야 했다. 미 25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지역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은 낙동강을 넘어 경북 선산으로 진주했다. 그곳에서 수행해야 했던 임무는 전면 41㎞에 달하는 전선을 방어하는 일이었다. 8000여 명의 병력으로 그 넓은 전면을 맡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구간이었다. 북한군은 이곳을 넘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낮에는 잘 움직일 수 없었다. 미군의 공중 폭격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북한군은 주로 밤을 이용해 공격을 벌였다. 낮에는 당시 그 지역 일대에 발달해 있던 사과밭 등에 몸과 장비, 무기 등을 숨기고 있다가 어두운 밤에 공격을 펼쳐왔다.
/1950년 8월 미 폭격기에서 찍은 미군의 원산 폭격 장면. 미군은 압도적인 공군력을 활용해 북한군의 공세를 묶기 위한 폭격을 펼쳤다.
김윤환과의 만남
북한군의 공격 최전면에 나섰던 사람들은 대개가 대한민국 지역을 점령한 북한군이 강제로 징병한 남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테면 북한군은 남한 지역에서 강제로 징집한 병력을 총알받이로 내세웠던 셈이었다. 아주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눌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은 밤의 야음(夜陰)을 타고 아군 지역 일부를 점령했고, 아군은 이튿날 낮에 그를 다시 회복하는 식으로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힘에 겨워지고 있었다. 무기와 장비 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비해 우리 사단이 지닌 무기와 장비가 보잘 것이 없었다. 게다가 전선의 전면이 너무 넓었다. 모자란 병력, 그리고 탁월하지 못한 무기와 장비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긴 전선이었다.
우리는 당시 선산의 오상중학교라는 곳에 사단 지휘소를 차리고 있었다. 그 학교는 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동석씨가 설립했다. 전쟁 중에 나를 괴롭혔던 게 말라리아였다. 한 번 걸린 뒤 몸이 약해질 때마다 다시 도지는 병이었다. 심한 오한(惡寒)이 찾아와 한 여름에도 벌벌 떨면서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다. 마침 그 때 또 말라리아가 내게 머물고 있었다.
오상중학교 설립자인 김동석씨 집안이 내게 사택을 내줬다. 전투 사령관이 말라리아를 앓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사택에서 쉴 수 있도록 배려를 했던 것이다. 그 사택에서 나는 죽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전쟁 통에는 맛보기 어려운 흰쌀 죽에 장조림과 조기를 내주기도 했다. 부디 힘을 내서 전선을 잘 막아달라는 말없는 성원이기도 했다.
/1995년 10월 17일 국회에서 정당대표 연설을 하는 김윤환 민자당 대표위원의 모습.
말라리아를 앓고 있던 나는 그 집의 한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죽이 다 쑤어지면 그를 반찬과 함께 쟁반에 올려 내 방으로 오는 젊은이가 있었다. 당시 경북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윤환 학생이었다. 그는 오상중학교 설립자 김동석씨의 아들이었다.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었으나 당시 김윤환 학생은 제법 의젓했다. 죽을 받친 쟁반을 들고 와서는 내 방 앞에 서서 “죽 좀 쑤어왔습니다”라고 굵은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키가 훌쩍 컸고, 이목구비도 수려했다. 행동거지도 신중하게 보였다.
나는 정신없이 말라리아를 앓다가도 “죽을 가져왔습니다”라는 김윤환 학생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곤 했다. 그는 대개 아무런 말없이 내 방안으로 들어와 죽이 올려져있던 쟁반을 조심스럽게 놔둔 뒤에는 인사를 꾸벅한 뒤 말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윤환 학생은 또 그렇게 죽을 들고 내 방문 앞에 나타났다. 평소 때처럼 죽 쟁반을 상에 올려놓은 뒤 인사를 한 김윤환 학생은 “잠깐 의논을 드릴 게 있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그래, 앉아보라”고 말을 했다.
그는 내게 입대 문제를 의논하고 싶다고 했다. “어차피 군대에 나가 싸워야 할 상황입니다.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저도 군대에 입대해 싸우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으로 물었다. 누구나 싸울 힘이 있으면 전선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많은 수의 학도병이 전선에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군에 들어가 싸우겠다는 마음을 낸 그가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마지막 방어선
그는 결국 내 제안에 따라 우리 1사단으로 입대했다. 나중에 그가 1사단 포병으로 배속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낙동강 전선에서 나와 함께 싸우다가 북진을 하면서 먼저 평양에 입성한 1사단을 따라 ‘평양 첫 탈환’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고 했다.
그는 나중에 유명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한 동안 그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1985년 무렵 그는 문화공보부 차관을 맡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었다. 일본 손님을 맞이했는데, 그 일본 손님이 “백선엽 장군을 함께 만나보고 싶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김윤환 학생’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는 왕성한 정치활동을 보이다가 그만 2003년 한참을 더 일할 수 있었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먼저 등졌다. 정치적으로 그가 얼마나 성공을 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는 그저 내 방문 앞에 조용히 섰다가 “군에 입대해 나도 싸우겠다”고 했던 당시의 수많은 대한민국의 건강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낙동강 전선이 이제 제 모습을 갖춰갈 참이었다. 호남으로 우회한 북한군은 마산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신속하게 그곳으로 이동한 미 25사단 병력에 의해 발이 묶여가고 있었다. 워커 장군이 이끄는 미 8군은 왜관으로부터 포항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의 전선을 국군에게 맡기고, 왜관으로부터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낙동강 일대를 미군에게 맡겨 적을 막겠다는 구상을 다지고 있었다.
/6.25 당시 대구 방어의 요충지인 유학산 고지. 이곳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 국군을 다부동을 탈환하고 그 기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미군은 동서로 향하는 전선을 Y선, 남북으로 향하는 방어선을 X선으로 명명했다. 이 선이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전선이었다. 우리는 그에 따라 왜관 동쪽, 대구 북방으로 다시 이동했다. 국군 1사단은 X선과 Y선이 만나는 곳, 양대 축선의 핵심인 왜관의 낙동강 건너편 동쪽 지역을 맡기로 했다.
나는 우선 지프에 올라탔다. 부관 등을 태우지 않은 상태였다. 먼저 그곳 지형을 살펴 어느 곳에 방어선을 설정하는 게 옳을까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대구를 향하는 지점에 유학산이 버티고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동쪽으로는 가산, 서쪽으로는 수암산이 늘어서 있어 마치 병풍과 같은 지세를 보이는 곳이었다.
그 입구에 있는 마을이 다부동(多富洞)이었다. 경부 축선이 지나는 곳으로 다부동에 진입하는 길목을 잘 지키면 적의 병력이 발을 멈출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나는 내심으로 그곳을 우리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마지막 선이었다. 이곳에서 밀리면 대한민국은 대구에 이어 부산을 적에게 내줘야 할 판이었다.
84 "이곳은 국가보위 최후 방어선!", 다부동에서 북한군 3개 사단에 맞서다
(10) 낙동강 전선
전쟁터에서의 우연
어떤 묘한 인연인지는 모르겠다. 존망을 다투는 전장, 그곳에서도 인연이라는 것은 참 묘하다 싶을 정도로 작용한다. 당시의 전쟁을 돌아볼 때, 나는 존재감이 강했던 지휘관이 아니었다. 전쟁 전에는 그저 정보국장으로 숙군(肅軍) 작업을 펼치면서 잠시 매체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정도였다.
그 전에는 더 그랬다. 1946년 창군 멤버로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뒤 국방경비대 소속의 제 5연대장으로 부산에 주둔하면서 2년 2개월 정도를 보냈다. 다른 이들은 부지런히 자리를 옮겼지만, 나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창고지기’라고 해야 옳을까. 나는 그곳에서 부산 부두에 도착해 산적해 있던 미군의 물자를 관리하기도 했다.
전쟁이 발발한 뒤의 역정이야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다. 개성 전면과 임진강을 주요 방어지역으로 둔 국군 1사단장을 맡았다가, 김일성의 돌발 남침 직전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교육생의 신분으로 서울 신당동 집과 학교를 오가다가 전쟁을 맞았다.
앞서 소개한 대로 전쟁이 터진 뒤 한 달여는 그저 ‘유랑 사단’의 지휘관으로서 북한군 남침의 거센 물결에 밀려 계속 후퇴만을 했다. 한강 다리를 일찍 끊는 바람에 병력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한강을 넘었고, 중화기와 장비 및 트럭 등은 거의 하나도 챙겨오지 못했다. 뿔뿔이 흩어진 병력은 안간힘을 쓰면서 내 밑으로 다시 모여들었지만, 원래의 건제(建制)는 그대로 회복하기 어려웠다. 후퇴 중에 급히 병력을 재편할 때 내가 이끈 적이 있던 5사단을 합쳤지만, 낙동강 전선에 도착할 무렵에야 겨우 병력 8000명 정도를 규합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미군이 부대를 정렬하고 있는 모습.
급히 부산으로 올라온 미군과의 교섭으로 인해 소총과 기관총 등 중화기를 보급받을 수 있었으나, 어엿한 국군 전투사단으로 불리기엔 여러 가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런 국군 1사단의 속내가 전투 지휘부에게 알려지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당시의 국군 전투 사단 중 우리 1사단은 한 달여의 유랑을 막 끝낸, 형편이 가장 좋지 않은 사단으로 알려지기에 충분했다.
그런 처지를 고려했던 까닭일까. 경북 선산으로 들어서기 직전 우리 1사단에게 내려진 전투 명령은 낙동강 전선이 아닌 안동 북쪽의 경북 춘양면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초의 그 전투명령이 갑자기 바뀌고 말았다. 앞 회에서 소개한 대로 북한군 6사단의 호남 우회에 이은 마산 방면으로의 진출 때문이었다.
미 8군 사령관은 허리를 찌르고 들어온 북한군의 출현에 당황해 경북 선산 일대에 진출해 있던 미 25사단을 급히 이동시켜 북한군 6사단을 봉쇄하려 했다. 미 25사단을 대체할 병력으로는 우리 1사단이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무기와 장비, 병력 등에서 고루 부족했던 1사단은 그렇게 아주 우연히 낙동강 전선에 설 수 있었다.
한반도 전쟁 축선에 서다
북한군 6사단의 느닷없는 출현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끌던 국군 1사단은 안동 북쪽으로 진출해 적의 주력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전장에도 주(主)전장이 있고,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는 전장이 있다. 보조 전장에서는 전쟁의 흐름을 되돌릴 만한 역할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다부동 작전회의
거느린 병력과 화력은 다른 전투사단에 비해 결코 낫다고 할 수 없었던 1사단이었으나, 그럼에도 최선을 다 해 적의 발길을 막아야 했다. 아주 커다란 중압감이 내 어깨를 짓누를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홀로 지프에 올라 타 새 방어선을 둘러봐야 했다.
한반도의 전쟁은 대개가 압록강 신의주에서 평양, 이어 서울~대전~대구~부산의 축을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다. 이를 테면 ‘한반도 전쟁의 축선’이다. 이곳은 한반도 교통의 축선이기도 하며, 인구가 가장 밀집해 있고, 그에 따르는 물자가 가장 활발하게 집산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 축선을 점령하면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60여 년 전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의 군대는 서울을 점령한 뒤 대전, 이어 대구를 점령해 종국에는 부산을 수중에 넣고 한반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루고자 혈안이었다.
김일성 군대는 일부 호남으로 우회한 병력이 마산과 진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 외에는 대다수의 주력을 남쪽의 경부 축선에 몰아넣고 막바지 공세를 벌이고 있었다. 이제는 대구 차례였다. 적의 주공(主攻) 병력은 따라서 대구 북방을 향해 기세 좋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 길목에 서는 사단이 바로 내가 이끄는 1사단이었다. 힘은 부족했지만, 장비와 병력의 부족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발 빠르게 병력을 이동시켜 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곳에 서야 했던 것이다.
대구 북방 약 20㎞ 지점에 있는 다부동은 작은 골목을 연상해도 좋을 만한 곳이다. 선산에서 대구를 향할 때 서쪽으로 유학산(839 고지)과 수암산(519 고지)이 버티고 섰으며, 동쪽으로는 902고지의 가산이 늘어서 있다. 천연의 요새에 해당한다고 봐도 좋을 지형이었다.
나는 방어선을 설정할 때 반드시 참모들의 의견을 묻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이곳이 마지막 방어선이다’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러나 참모들에게 의견을 묻는 절차는 필요했다. 그럼에도 역시 머릿속으로는 ‘참모들이 반대해도 내 의견을 관철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부동에 펼친 최후 저지선
참모들은 대개 내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나 참모장인 석주암 대령은 “그래도 한 번 정찰을 한 뒤 의견을 말하겠다”고 했다. 신중을 기하려는 자세는 좋았다. 그러나 적은 벌써 다부동 인근으로 모여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다행이었다. 석주암 대령은 유학산 일대를 둘러본 뒤 돌아와 “아주 좋은 지역”이라며 찬성했다.
/2002년 6월 8일 다부동(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을 찾은 백선엽 장군. 다부동 전적기념관 옥상에 올라 다부동전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유학산 837고지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대한민국 마지막 보루를 지키고자 하는 비장한 결전이었다. 급한 형편이라도 참모들과 함께 뜻을 나눠야만 좋을 상황이기도 했다. 싸우고자 하는 뜻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게 1사단의 최후 방어선은 정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심각했다. 유학산은 북쪽이 완만한 경사를 보이는 지형이었다. 우리가 올라야 할 남쪽 사면(斜面)은 그 반대로 지형이 매우 가팔랐다. 게다가 북한군 선발대는 이미 유학산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공격을 하는 북한군이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가파른 사면을 타고 올라가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유학산을 담당한 김점곤 12연대장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런 불만을 표출하기에는 우리가 맞은 상황이 너무 심각했던 것이다.
나는 참모와 각 연대장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이곳이 우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다. 이곳에서 적을 막지 못하면 대구는 금세 떨어진다. 그렇다면 부산도 결국 내줘야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질 테니 각자 최선을 다 해 싸워주기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8월 12일 밤에 부대를 선산에서 새로 설정한 방어선으로 이동시켰다. 낙동강을 넘어선 적들과의 모든 접촉을 끊은 뒤였다. 포남동과 수암산, 다시 유학산과 다부동 북방을 잇는 전면 20㎞의 방어지역이었다. 사단 지휘소는 다부동 남쪽의 동명초등학교에 정했다. 말라리아가 계속 엄습했지만 아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모든 신경이 전선의 동향에 모아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당초 8월 15일 부산 점령을 목표로 내걸고 독전을 벌였다. 그러나 미군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대대의 출현, 24사단 본대의 대전 저항, 곳곳에서 벌어진 국군의 분전 등으로 공격 전선에서 여러 가지의 차질을 빚고 말았다. 따라서 김일성의 남침 전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그에 따라 8월 15일까지 부산이 아닌, 대구 점령을 목표로 움직였다. 이는 전선에서 붙잡힌 북한군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8월 15일의 상징성을 살려 대구만이라도 수중에 넣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구를 향한 북한군의 공세는 아주 뜨겁게 불이 붙었다.
다부동의 전면을 압박하는 전선의 북한군은 이영호가 이끌었던 3사단이었다. 거기다가 화령장을 향해 내닫던 박성철의 15사단, 그의 조공(助攻) 역할을 담당했던 최용진 휘하의 13사단이 가세했다. 적 3개 사단에 맞서 싸워야 할 숨막히는 상황이었다.
85 1950년 8월14일 북한군 낙동강 총공세 시작, 임시수도 대구도 '흔들'
(10) 낙동강 전선
다부동에 진지를 마련한 이유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늘어서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야 했던 국군은 모두 2개 군단 5개 사단이었다. 서쪽 끝에는 내가 이끌고 있던 1사단이 섰고, 그 동쪽으로는 3사단, 6사단, 8사단, 수도사단이 섰다. 대구 북방에서 포항까지였다.
남북으로 낙동강을 따라 포진한 미군 사단은 제1 기병사단, 2사단, 24사단, 25사단이었다. 왜관에서 마산까지가 방어지역이었다. 월턴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구상한 대한민국 최후의 전선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동서의 축선은 Y, 남북의 낙동강 연안 전선은 X로 분류했다.
당시의 북한군 공세도 아주 치열했다. 그곳을 뚫지 못한다면 전쟁은 쉽게 역전의 흐름으로 바뀔 수 있었다. 자기가 도발한 전쟁에서 상대의 마지막 보루를 허물지 못한다면 그동안 소진했던 전력의 공백으로 인해 북한은 우리의 역공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공세는 크게 두 흐름을 타고 펼쳐졌다. 당시 다부동을 지키면서 모든 전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나중에 우리 국방부가 자세하게 정리한 <6·25 전쟁사>를 보면서 그런 느낌이 확실하게 와 닿았다. 8월 초순에서 중순까지 벌어진 북한군 공세와 그 뒤 인천상륙작전 직전까지 벌이는 북한군의 공격이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 다리 위에 길게 줄을 서서 하천을 건너는 국군과 개울물을 맨발로 지나는 민간인. 유명 잡지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8월 초반의 공세에서 북한군은 먼저 두 곳을 노리고 공격을 펼쳤다. 대구와 마산이었다. 그 뒤의 공세에서 북한군은 전선의 모든 구석을 노렸다. 이곳저곳을 열심히 두들기다가 한 군데가 뚫리면 그곳의 돌파구를 넓히고 들어와 대구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였다.
1950년 8월 초 내가 맞이한 다부동의 전투는 그와 같은 북한군 초기 공세에 놓여 있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먼저 마산을 기습적으로 노렸다. 은밀하게 호남으로 우회했던 6사단 등 2개 사단을 앞세우고서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대로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경북 상주에 진출해 있던 미 25사단을 급히 이동시켜 그 앞길을 막았다.
그럼으로써 미군 주력이 빠진 자리를 대신 메우고 들어간 국군 1사단의 방어지역이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한강 다리가 일찍 끊겨 인원과 장비, 무기 등에서 다른 국군 전투사단에 비해 열세에 있던 1사단으로서는 그곳 방어가 매우 벅찼다.
/미 항모를 이륙하는 미군 전투기. 미군은 탁월한 공습력으로 북한군 후방을 공격해 보급에 큰 차질을 안겼다.
낙동강은 적군의 입장에서 건너기 쉬운 강은 아니었다. 강의 양안(兩岸) 지형이 물을 건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월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른 곳이 많다. 수심도 평균 1.5m 이상이고, 강폭 또한 400~800m에 달했다. 지키는 사람, 즉 방자(防者)의 입장에서는 천혜의 방어선이라고 봐도 좋았다.
정일권 총장의 추천
그 전에 대한민국과 미군이 북한군 공세에 밀리면서 상정한 방어선은 여럿이다. 우선은 개전 초 임진강 방어선이 있었고, 서울을 내준 다음에는 한강 방어선이 있었다. 한강 방어선이 허물어진 다음에도 국군 지휘부와 미군은 동서(東西)의 폭이 급히 좁아지는 평택~삼척 방어선에도 착안했다.
그러나 그 역시 밀렸다. 전력의 차이가 너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이어 소백산이 동서로 지나가는 방어선도 구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세 좋게 닥치는 김일성 군대를 막기에는 그 또한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한강 방어선 뒤에 설정한 라인은 큰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으로 설정한 낙동강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적합한 방어선이었다.
급히 참전한 미군은 경부 축선의 복판에 있는 대전이라도 지켜보려 했으나 역시 도로(徒勞)에 그치고 말았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맞이한 대한민국, 그리고 그를 지원하는 미군의 눈에는 자연스레 낙동강 전선이 최후의 보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더 뒤로 물러나 다부동에 진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41㎞에 달하는 방어 전면이 너무 넓었고, 그를 지키기 위해 따라야 하는 병력과 화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주 고심 끝에 설정한 방어선이 대구 북방의 길목에 해당하는 다부동이었다. 이곳은 왜관에서 진입해 대구로 뻗는 도로, 상주와 안동 등으로부터 대구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 있는 곳이었다. 아울러 경부(京釜) 축선의 도로와 철로도 함께 지나가는 곳이었다.
/전시의 월턴 워커 중장(왼쪽).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고 좁은 도로를 막고, 옆으로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유학산과 수암산을 제대로 지켜낸다면 대구를 노리고 들어오는 적의 발길을 묶을 수 있는 곳이다. 왜관 북방으로는 미 제1 기병사단이 막아서서 동서로 난 Y선의 제일 서쪽인 우리 1사단과 접점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당초 춘양면으로 진출할 예정이었던 1사단이 왜 대구 북방의 전선에 설 수 있었던가에 관해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6·25 전쟁사>에는 그 해 8월 초 낙동강 전선의 윤곽을 확정할 때 워커와 정일권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대화가 나온다.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내용인 듯하다.
당시 워커 장군은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어느 국군 전투사단에 맡길 것인가를 두고 정일권 총장의 의견을 물었던 모양이다. 그 때 정 총장이 1사단장인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워커는 흔쾌히 정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북한군이 드러낸 보급의 문제
그런 인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다부동에서 적을 맞아야 했다. 우리 앞에는 북한군 13사단과 15사단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울러 왜관 북쪽의 미군 제1 기병사단을 공략하던 3사단도 경우에 따라 다부동 쪽으로 공로(攻路)를 조정할 가능성이 높았다. 강한 미군을 피하고, 상대적으로 허약한 국군 방어지역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1951년 3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된 뒤 정일권 총참모장(왼쪽)과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이 반격작전을 숙의하는 모습.
경우에 따라서는 개전 초반 우리 1사단과 임진강에서 맞붙었던 북한군 1사단 일부 병력도 이곳을 겨냥할 가능성이 있었다. 8월 15일 이전에 대구만이라도 수중에 넣겠다는 김일성의 조바심이 북한군 주력의 상당수를 이곳으로 몰리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북한군의 보급이 여의치 않아졌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북한은 공세를 가속화하면서 보급선이 매우 길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참전한 미군의 공습 능력은 절대적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길어진 보급선을 맹폭하는 미군의 공중전 능력 때문에 무기와 식량, 피복 등을 전선으로 보급하는 북한군의 능력이 아주 떨어져 있었다.
북한은 당시의 전시 물자를 두 방향으로 옮기고 있었다. 우선은 중국 만주에서 평양, 다시 서울을 거쳐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는 길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청진을 거쳐 원산과 서울 등을 경유해 전선에 당도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둘 다 쉽지 않았다.
미군은 탁월한 공습력으로 원산과 평양, 서울을 거치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줄기차게 폭격했다. 후방의 보급기지에 해당하는 평양의 병기창(兵器廠), 진남포의 알루미늄 공장, 흥남의 합성화학공장, 원산의 정유소, 성진의 제철소 등이 모두 미군의 폭격에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개전 초에 국군을 유린했던 소련제 T-34 전차를 추가로 보급하는 일도 따라서 어려웠다. 또한 박격포 등의 중화기 전력은 개전 초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식량을 보내는 일도 보급로 사정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북한군의 사기는 크게 꺾인 상태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빗발치는 독촉으로 북한군 일선 사단 병력들은 모든 힘을 짜내면서 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1사단은 적어도 2개 사단, 경우에 따라 북한 105 전차사단을 포함한 더 많은 북한군 공격 앞에 서야 했다. 적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게다가 낙동강 연안에서 다부동으로 철수했던 우리 1사단의 후퇴 조짐을 읽어 뒤를 따라온 적군은 우리보다 먼저 다부동 초입에 있는 유학산의 완만한 경사면을 오르고 있었다.
당시 임시 수도는 대구였다. 이승만 대통령 등 정부 요인들과 국회, 미 8군 사령부, 국방부, 그리고 육군본부 등이 모두 대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가 대구로 모아지면서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정부와 국회, 일반 국민들까지 나서서 총력전을 펼칠 분위기는 만들어지고 있었으나, 북한군 공세는 아주 강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옮기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었으나, 전선의 분위기는 그와는 달리 깊은 위기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유학산 전면을 맡은 12연대 지휘소로 나갔고, 12연대장은 휘하 1대대 관측소로 나가 적을 맞았다. 8월 14일 오후 2시 경이었다.
86 화랑담배 연기처럼 스러져간 그 이름들, 다부동의 무명용사
(10) 낙동강 전선
아군 1개 연대 vs 적 1개 사단
국군 1사단에는 3개의 연대가 있었다. 11연대와 12연대, 그리고 15연대였다. 11연대는 다부동 초입이 있는 356고지와 297고지에서 석우동까지 이어지는 7.5㎞, 12연대는 수암산과 유학산 및 674고지를 잇는 9.5㎞, 15연대는 328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3㎞ 길이의 전선을 맡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11연대, 12연대, 15연대가 늘어선 형국이었다.
개전 초기 서울을 먼저 점령함으로써 김일성으로부터 ‘서울 사단’이라는 명예를 얻었던 북한군 3사단은 우려했던 대로 왜관 북쪽에서 진격하다가 화력이 국군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미 제1 기병사단 방어지역을 우회해 15연대 지역으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대구 북방을 향해 직접 치고 내려오던 북한군 2개 사단과 미군 방어지역을 우회한 북한군 3사단이 모두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을 향해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유학산 일대를 담당한 12연대 앞에는 북한군 15사단, 그 동쪽으로 서 있던 11연대 지역에는 북한군 13사단이 공격을 벌여왔다.
우리는 따라서 다부동 전투가 막 벌어지던 무렵에는 각 연대가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특히 북한군 3사단이 밀고 들어오는 15연대 방어지역에서는 험한 지형 때문에 격전이 불가피했고, 12연대는 유학산 북사면을 먼저 점령한 북한군과 혈전을 벌여야 하는 형국이었다.
/1950년 11월 무렵, 대구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어느 신병의 어머니가 먼길 떠나는 아들에게 물을 떠와 먹이는 모습.
매일 사단 지휘소로 날아 들어오는 보고는 그 격전과 혈전의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8월 14일 이후의 모든 상황은 아주 절박할 정도로 돌아갔다. 15연대는 고지를 두고 적과 뺏고 빼앗기는 접전에 들어갔다. 15연대 방어지역은 돌산이 많아 흙을 깊이 파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개인 참호를 제대로 파지 못해 인명 피해가 많았다.
유학산의 12연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북방으로 800m 이상의 능선이 4㎞ 길이로 펼쳐져 있는 유학산은 방어를 하는 쪽인 우리가 정상을 향할 때 문제가 심했다. 700m 지점에 이르러서는 높이 70~80m의 아주 가파른 바위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북사면의 완만한 경사를 올라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북한군은 우리의 공격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아군이 7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수류탄을 던지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가다 죽거나 사망하는 병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따라서 12연대는 야간 공격을 지속적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적의 반격이 거세 피해는 계속 증가했다.
담뱃갑에 적은 신병 이름
내가 있던 다부동 동명초등학교의 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고지를 공격하다 사망한 장병들의 시신이 나날이 쌓였다. 매일 전황 브리핑에서 보고받는 사망자 숫자가 자꾸 늘어나더니 2~3일이 경과하면서는 하루 700여 명의 손실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충격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사단 사령부를 나와 연대 전방 지휘소 등을 둘러보러 길을 떠날 때는 일부러 시신이 쌓여 있는 곳에 눈길을 두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참담한 그 광경을 보면서 괜히 투지(鬪志)가 꺾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그곳 일대는 무더운 8월의 날씨로 인해 주검이 부패하면서 번지는 냄새로 가득 차고 말았다.
전쟁은 여러 가지의 책략과 전기(戰技)를 필요로 한다. 싸움의 얼개를 다루면서 전체 흐름을 조정하며 적에 앞서 유리한 지형과 시간을 선점하는 전략적 안목, 병력과 화력을 제때 동원해 공격과 방어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보내는 전술적 시야 등이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 낙동강 전선 서쪽, 대구 북방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적을 맞아 끝까지 싸우려는 굵고 강하며 꺾이지 않는 투지였다. 적도 사력(死力)을 다해 전선을 허물고자 덤벼들었고, 우리 또한 그에 맞서 젖 먹던 힘까지 자아내 적을 막아야 했다. 당시의 전장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겠다는 강인한 투지였다.
병력 보충은 후방의 육군본부, 전시 행정 채비를 갖춘 정부의 노력으로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다급한 전시의 상황이라서 새로 모병한 장병들에게 충분한 훈련을 시킬 수가 없었던 점이 문제였다. 이들은 각 연대의 임시 훈련장에서 한두 시간 소총 작동법 등을 배운 뒤 전선으로 갔다.
각 고지에서 대원을 이끌고 있던 소대장들은 이렇게 올라온 신병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유학산 전선에서는 주로 밤을 틈탄 공격이 이뤄지고 있어 소대장은 신병이 올라오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춘 뒤 “내가 소대장”이라고 소개한 뒤 공격을 이끌었다. 소대장은 또 신병들의 이름을 화랑 담뱃갑 쪽지에 적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나중에 전사자를 확인할 때 이름이나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때 국군에게 배급된 화랑담배. 당시 우리 국군의 고난이 상징처럼 어려있는 담배다.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
15연대의 상황은 아주 처절했다. 참호를 깊이 팔 수 없었던 까닭에 아군은 적의 공격에 자주 몸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15연대 장병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 뒤에 숨어서 적과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신병들은 한번 올라간 뒤 내려오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열에 여덟아홉은 그렇게 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세상을 등졌다. 전사자 확인도 쉽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 또한 전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설령 소대장이 살았더라도 신병들의 이름을 적었던 화랑 담뱃갑은 땀과 피에 젖어 적어 놓은 이름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희생당한 무명용사는 그런 이유로 해서 아주 많았다.
11연대의 싸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곳 정면을 공격하던 북한군 13사단은 다부동 일대를 향해 다가서던 북한군 중에 병력이 가장 많아 전투력이 강했다. 역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나는 피가 마르는 듯한 느낌에 빠졌다.
쉴 새 없이 전선을 들여다보면서 급한 상황이 생기면 일선을 지휘하는 연대 지휘소로 달려갔다. 현황파악을 위해 그 밑의 대대급 부대도 방문했다. 일선에서 마주치는 전쟁터의 피해는 참담했지만, 나는 전황을 파악한 뒤 가혹할 정도로 단호히 고지탈환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위기에 마주치면 잘 싸우는 민족이라는 점은 그때 알았다. 휘하의 장병들은 군말 없이 내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향했다. 지휘관들은 묵묵히 싸움터로 향했고, 겁에 질려 전선에 당도한 신병들도 명령을 내리면 어김없이 고지를 향해 달렸다.
일보(日報)라는 게 있다. 매일의 작전 상황을 육군본부에 보고하는 문서였다. 다부동 전투 중에 우리 1사단은 감찰을 받은 적이 있다. 작전 상황을 보고하는 일보를 육군본부에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 감찰팀이 사단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직접 현장에 보냈다. 15연대가 공방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었다.
/다급한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학생의 신분으로 전투에 나선 학도병들의 자랑스러운 모습.
그들은 15연대의 방어지역인 270고지에 다녀왔다. 일보를 올리지 않은 일은 문책 사유에 해당했다. 그러나 육군본부 감찰팀은 고지를 다녀온 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현지의 전황이 아주 처참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시체 냄새 때문에 현장을 제대로 살필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군은 ‘제파(諸波)식’ 공격을 벌이고 있었다. 물결처럼 끊임없이 다가서는 방식이었다. 소련군이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선보였던 전술이었다. 돌파구를 설정해 그곳에 여러 차례의 공격 진영을 짜놓고는 계속 투입하는 방식이다. 소련의 작전계획을 따랐고, 그들의 전법까지 그대로 보고 배웠던 북한군은 최후의 돌파를 위해 인명의 손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전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5연대 전면에서는 계속 공방이 벌어졌고, 유학산은 아군이 쉽게 정상에 오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11연대 또한 북한군 13사단과 치열한 공방을 전개하면서 희생이 나날이 커졌다. 8월 16일에는 유엔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벌어졌다.
미 8군으로부터 지시가 왔다.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경에 대규모 공습이 있을 예정이니 전 병력으로 하여금 진지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미 공군이 정확히 어느 곳을 폭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지시에 따라 당일의 그 시간에 맞춰 전 병력에게 진지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87 주먹밥과 탄약 날랐던 다부동의 노무자들, 처절했던 그들의 희생
(10) 낙동강 전선
거대한 공습, 융단폭격
하늘에서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미 8군이 폭격에 대비해 참호 속에 들어가 나오지 말라고 했던 시간이었다. 하늘엔 굉음만 가득했다. 미군 폭격기들이 대구 북방과 왜관 쪽을 향해 새카맣게 몰려가고 있었다.
예정 시간이 되자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맹렬했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폭발음과 함께 실제로 땅이 울렁거렸다. 융단폭격이었다. 지정한 지역을 융단 깔듯이 폭탄으로 덮어버리는 작전이다. 일본 오키나와와 가네다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B-29 전략 폭격기 98대가 날아와 전선의 지축을 흔들었다.
폭격기들은 이날 오전 11시 58분에 폭격을 시작해 12시 24분까지 26분동안 400~900㎏에 달하는 폭탄 960t을 쏟아부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최대 규모의 폭격이었다. 다부동에서 벌어진 당시의 전쟁 양상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날의 폭격은 왜관 북방인 구미 일대의 가로 5.6㎞, 세로 12㎞ 지역에 집중됐다. 우리로서는 적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 폭격 효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는 점에서 폭격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으리라는 짐작만 했을 뿐이다.
/일본 오키나와와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 폭격기들이 1950년 8월 구미 일대에 융단폭격을 하는 모습.
나중에 드러난 결과는 이랬다. 낙동강 일대에서 대구로 나아가던 북한군 주요 병력은 사실 대부분 이미 강을 넘어 우리와 접전 중이었다. 미군 폭격기가 폭격을 감행하기는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곳의 북한군을 폭격하면 그들과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아군의 피해가 막심해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북한군 병력을 향한 폭격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전선에 있는 북한군을 지원하는 후방의 물자 보급기지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는 나중에 포로로 잡혔던 북한군의 증언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왜관 인근 약목 일대 북한군 3사단과 15사단 예비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지원 포병과 공병, 전차, 탄약, 보급품 등이 미군의 융단폭격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얘기다. 북한군 내부를 잇는 통신선 등도 모두 폭격으로 끊겼다고 한다. 북한군은 이를 ‘비밀’로 분류해 외부로 새나가는 것을 막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적은 코앞에 있었다. 다부동 일대 모든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적과 그를 막아 세우려는 아군의 끊임없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병은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모집, 끊임없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앞에서 적은 대로 그들의 희생은 아주 컸다. 당시 전선의 사병들은 새로 모집해 전선에 당도한 신병들을 ‘고문관’으로 불렀다.
노무자들의 막심한 희생
신병들은 대부분 총도 제대로 다룰 줄 몰랐고 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행동이 굼뜰 수밖에 없었고, 숙지하고 있는 사항이 많지 않으니 자연스레 겁도 많았다. 그런 신병들을 ‘고문관’이라고 부르면서 비하했지만, 사실은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호칭이기도 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품고서도 결국 전선으로 올라가 목숨을 바쳤다.
/6.25 최후의 방어선이자 최대 격전지였던 낙동강 일대. 지난 2000년 4월, 6.25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된 전사자 유해발굴작업 도중 다부동 현장에서 발견된 군화 조각.
그들 못지않게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사람들이 노무자였다. 이들은 대개 전선에 나가 직접 총을 잡고 싸울 나이를 넘긴 사람들이었다. 보통은 40대, 나이가 좀 더 들었으면 50대였다. 이들은 후방에서 전선으로 탄약과 식량 등을 나르는 이른바 ‘짐꾼’이었다.
당시 이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다부동은 지키기 어려웠다. 지게에다 짐을 잔뜩 짊어진 노무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선의 장병들에게 짐을 날라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희생은 나날이 커져갔다. 당시 전선사령관이었던 나는 전선 상황에 매달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잘 몰랐다.
나중에 실시한 피해조사 등을 보면 노무자들은 신병을 포함한 일반 전선의 장병 못지않은 희생을 감수했다. 주먹밥과 탄약을 실어 날랐던 그들은 밤중에 고지를 향하다 적의 사격에 무수히 희생됐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항전이었다. 장병과 더불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일반인들의 처절한 희생이었다.
전략적인 의도에서 벌인 폭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세는 집요했다. 전선의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전선을 모두 이끌고 있던 미 8군 사령부는 다부동 일대의 상황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8군 사령부는 융단폭격에 이어 별도의 조치를 취했다.
다부동 일대에서 분전(奮戰)하는 국군 1사단의 뒤를 받쳐줘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듯하다. 사실, 당시 국군 1사단 전력으로서는 전선을 지탱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군 1개 연대가 적 1개 사단 병력과 싸워야 했던 수적인 열세 때문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적을 압도할 만한 화력을 갖추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마산으로 급히 이동해 북한군 6사단 등 2개 사단의 공로를 좌절시켰던 미 25사단의 1개 연대를 빼내 우리 1사단의 우전방을 막도록 했다. 27연대장은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었다. 그는 처음 다부동에 왔을 때 계급이 중령이었으나, 도착과 동시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미남 연대장 마이켈리스
그는 매우 잘 생긴 미군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으나 얼굴 생김새가 웬만한 영화배우 못지않았다. 나는 미 8군 사령부로부터 “27연대가 다부동 방어를 위해 그곳으로 이동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몰랐는데, 그는 나중에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에 이어 제 4대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는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참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막강한 전투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 101공수사단에서였다.
/존 마이켈리스 미 25사단 27연대장. 다부동 초입의 길목을 막기 위해 미 8군이 1950년 8월 그를 국군 1사단 방어지역으로 급파했다. 미남의 장교로, 나중에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라이프'에 실린 사진.
당시 공수사단장이 맥스웰 테일러였고, 그의 참모장이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었다.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가장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한 공수사단이었으니, 마이켈리스 또한 전쟁을 충분히 숙지한 인물이라도 할 수 있다.
그는 동명초등학교의 사령부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와 함께 상주로부터 다부동에 이르는 국도의 북쪽 길목인 천평동 초입으로 갔다. 27연대가 방어를 맡은 지역이었다. 그는 내가 보는 가운데 신속히 작전 배치에 들어갔다. 천평동은 작은 협곡의 지형이었다. 약 1㎞ 남짓의 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좌우 양쪽으로는 유학산 등의 산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부대 27연대는 협곡 가운데에 해당하는 천평동 계곡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북한군은 당시 국군이 지니지 못했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지를 두고 벌이는 전투와는 다른 양상의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천평동이었다.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몰려올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미 8군이 27연대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경험 많은 미군 장교답게 천평동 계곡을 둘로 나눠 좌우 양쪽에 1개 대대씩을 배치했다. 맨 앞에는 지뢰를 매설했고, 중간에는 전차를 배치했다. 각 대대장에게는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지침만을 전달했다. 부대의 방어선을 정확하게 그었으며, 각 장교에게는 임무와 위치를 거듭 확인했다.
나는 그 뒤를 줄곧 따라다녔다. 그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약 두 시간이 걸렸다. 그 짧은 시간에 연대급 전투 병력을 모두 배치했다. 말이 연대였지, 사실 그가 이끌고 온 부대는 여단 규모였다. 다부동 방어에 총력으로 나선 미 8군 사령관이 그에게 증강된 여단 병력을 이끌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그가 끌고 왔던 병력이 우선 궁금했다. 마이켈리스는 내 의중을 알겠다는 듯이 “전차 1개 중대, 155㎜ 곡사포 6문, 105㎜ 18문에 공지(空地) 연락장교도 데리고 왔다”고 시원스레 대답해줬다. 그는 아울러 “포탄 사용량에도 제한이 없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면서 씩 웃어 보였다.
경북 화령장에서 개전 이래 처음 한미 합동작전이 벌어졌었다. 그보다 절박한 상황에서 다시 국군과 미군의 합동작전이 벌어질 태세였다. 마이켈리스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그러나 한국군과의 합동작전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그에게선 세계 최강 미군의 자존심과 함께 국군에 대한 일종의 불신감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88 밤중에 우리 사령부를 덮친 북한군, 전멸 위기에서 구해준 '밥심'
(10) 낙동강 전선
하수구에 CP차린 미 연대장
마이켈리스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스승과 제자로서가 아니라, 전선에서 경험이 많은 지휘관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그는 내게 많이 보여줬다. 그는 부대 배치를 끝낸 뒤 연대 지휘소를 의외의 곳에 마련했다. 하수구였다. 양쪽으로는 포대를 두텁게 쌓은, 물이 흘러 지나가도록 만든 하수구였다.
아울러 그는 전선에서 병력을 배치할 때도 직접 통신병 한 사람만 대동한 채 총탄이 날아다니는 곳을 정찰했다. 그와 함께 작전을 펼치고 있던 1사단 11연대 병력은 연대장이 통신병 하나만을 대동한 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선을 시찰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이틀 뒤에는 폴 프리먼 대령이 이끄는 미 2사단 23연대가 전선에 왔다. 역시 다부동을 튼튼하게 막아두려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결단이었다. 프리먼 대령은 이듬해 중공군 참전으로 벌어지는 1·4 후퇴 당시 경기도 가평 인근 지평리라는 곳에서 프랑스 대대와 함께 중공군 5개 사단 병력을 물리쳤던 전투로 이름을 크게 높인 인물이다.
23연대는 마이켈리스 대령의 27연대 후방을 받쳐주면서 서쪽으로 우회해 대구로 진입할 지 모를 북한군 병력을 대구 진입로에서 막아 세우기 위해 보낸 병력이었다. 어쨌든 북한군의 발악적인 공세에 대응코자 미 8군은 여러 후속 조치를 취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어 국군 8사단 1개 연대도 1사단 방어지역으로 보낸다는 통보가 왔다. 다부동에서 동쪽으로 나있는 가산(架山)산성 쪽에 적군 병력이 모여들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다부동을 통해 대구로 진입하는 공로가 막히자 북한군 일부 병력이 동쪽으로 나있는 가산산성을 노렸던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은 미 25사단 27연대, 미 2사단 23연대, 국군 8사단 10연대의 병력을 증원받은 형국이었다.
/다부동 입구 천평동 다리에서 정찰 나갔던 전차를 보고 있는 미 27연대 병력. 다리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다.
8월 18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군 8사단 10연대의 선발대가 곧 도착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사단 사령부가 있던 동명초등학교 정문 앞에 나가 있었다. 전쟁을 치를 때 원군(援軍)의 의미는 각별하다. 사지(死地)와 다름없었던 당시 다부동 전투에서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오는 원군은 가물에 단비 이상의 귀한 존재였다.
가산산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다부동을 뚫기 어려워 북한군이 그곳을 향하고 있다는 정보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곳은 적이 박격포 등으로 대구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증원군이 필요했다. 1사단 병력으로서는 가산산성을 방어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후 5시 무렵, 저 멀리 선발대가 보였다.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도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앞에는 대대장 한 명이 대열을 이끌고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1948년 정보국장 시절 데리고 있던 김순기 소령이었다.
‘밥부터 먹여야 잘 싸운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순기야! 밥은 먹었냐!”라고 소리쳤다. 멀리서 내 얼굴을 알아본 그는 단걸음에 달려와서는 “사단장님, 아이고…, 먼길 오느라 아직까지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천에서 하루종일 시간에 쫓기며 굶으면서 행군을 했던 모양이다. 이어 도착하는 장병들도 피곤과 갈증, 배고픔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이들은 사실 곧바로 전선을 향해 행군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가산산성의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배고픈 군인은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헤아렸다. 이들을 사단 사령부 운동장에 숙영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참모 한 사람이 “그래도 가산산성으로 먼저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우선 쉬도록 했다. 그 상태에서 전선에 올려 보낸다고 하더라도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으리라 봤기 때문이다. 나는 내친 김에 인근 마을에서 돼지 3마리를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 문형태 작전참모에게 “우선 배불리 먹고 쉬게 한 다음에 내일 아침 일찍 전선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사단사령부가 있던 동명초등학교 운동장은 갑자기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변했다. 고달픈 행군에 지쳤던 증원군 부대원들이 오랜만에 먹는 돼지고기와 식사로 들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본 뒤 사령부 안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이 늦어서야 나는 학교 운동장 뒤편에 있는 교사 숙직실로 가 잠이 들었다.
꿈결에서 들었을까. 요란한 총소리가 마구 울렸다. 이어 무언가 깨져서 땅에 흩뿌려지는 소리도 들렸다. 잠결에 듣는 소리여서 나는 그저 꿈으로 알았다.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숙직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를 깨웠다. 부관인 김판규 대위였다. 목소리가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사단장님, 사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적이 기습했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를 알 수 없었다. 사단사령부에 적이 당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상황을 짐작했다. 저들이 소규모 부대로 기습을 벌였다는 얘기였다.
숙직실에서 운동장으로 나가려면 교사(校舍)가 있는 건물을 거쳐야 했다. 중간에 복도가 길게 난 교실 앞을 지나는데, 사단 참모들 여럿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유리창이 거의 모두 깨진 상태였다. 기관총 탄알이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수류탄도 함께 날아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군화를 맨 상태에서 자는 버릇이 있다. 교범의 규정대로다. 그에 따르면 전시 중의 지휘관은 취침 시간에도 군화 끈을 매고 자야 했다. 나는 깨진 유리를 밟으면서 곧장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연병장에 숙영하고 있던 증원군 부대를 향해 소리쳤다. “순기야, 어서 나가라. 빨리 부대를 출동시켜. 적들이 앞에 있다!”
대구에 날아든 적의 포탄
김순기 소령은 다행히도 아주 기민하게 부대를 통솔했다. 일부는 곧장 개인화기를 지니고 나와 적이 노리고 있는 오른편 담장을 향했고, 일부는 정문을 빠져나가 적이 있는 곳으로 우회하면서 공격을 펼쳤다.
적은 곧 쫓겨 갔다. 김 소령의 일사불란한 지휘가 빛을 발했다. 적은 사단을 직접 노리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부동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지시대로 뚫리지 않았다. 발악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다부동을 지키던 국군 1사단이 쉽게 물러서지 않자 사단지휘부의 전멸을 노리고 들어온 기습이었다.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했다. 국군 1사단장인 나와 사단지휘부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사단사령부는 평소 1개 헌병 소대 병력이 지켰다. 적의 기습을 막아내기에는 화력이 여러 모로 떨어지는 병력이었다. 북한은 그 점을 노리고 야밤에 직접 사단사령부를 공격해 들어왔다.
사람은 전쟁 중이라도 먹어야 한다. 먹지 못하면 싸우지를 못한다. 배가 불러야만 적을 제대로 보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평소 나의 소신이다. 그에 따라 하룻밤을 먹이고 재운 김순기 소령 의 병력이 결국 사단의 전멸을 막을 수 있었다. 당장 그들을 전선으로 올려 보내자는 참모의 제안을 따랐다면 국군 1사단은 적의 기습에 당했을 수도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단사령부의 자체 경계 능력을 높이기로 했다. 사단에서 2개 소대를 끌어와 사령부 경계를 맡겼다.
경계는 그만큼 중요하다. 적이 다가서는 동향을 모를 바에는 경계라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 그에 빈틈이 생기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놓이기 십상이다. 그날 밤에 있었던 적의 기습은 경계의 중요함을 새삼 일깨웠다.
간발의 차로 위기를 넘겼지만 여전히 첩첩산중에 놓인 심정이었다. 유학산에서는 아직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아군의 희생이 늘어만 갔다. 15연대 방면의 전선도 적과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치르면서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가산산성을 차지하려는 적의 움직임도 부쩍 활발해지고 있었다. 적은 이미 가산산성에 들어서 있었다.
그곳은 대구를 직접 포격할 수 있는 위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대구에서는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었는데, 대구역에 떨어진 북한군의 포탄은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다. 대구는 금세 혼란에 빠져들었다.
89 대구역에 적 포탄 세례…이승만은 맥아더에 맞서 "대구 사수!"
(10) 낙동강 전선
피난민으로 북적였던 대구
대구는 당시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구는 결코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될 곳이었다.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대구를 빼앗긴다면 적에게 대한민국의 명운을 넘겨줬다고 해도 좋을 만큼 대구는 중요했다.
적은 낙동강을 넘어 대구로 진입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개전 이래 낙동강까지 진출하면서 소모한 자신의 병력과 물자, 화력 등을 대구를 점령한 뒤 모두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구는 우리 대한민국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을 지휘하는 미 8군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적에게 대구를 내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따라서 그와 도쿄에 머물고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은 1950년 8월에 접어들면서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뜻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한다.
/미군들이 대구의 외곽지역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이승만 대통령은 그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대구 사수(死守)’ 의지를 내비치면서 끝까지 그곳에 남아 김일성 군대를 막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워커 장군 또한 낙동강 전선을 지휘하는 주요 기간병력은 대구에 남긴 채 나머지 주요 인원들을 부산으로 옮기도록 했다.
아울러 그들은 밀양과 울산을 잇는 마지막 방어선도 설정했다. 미 8군 공병참모였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만든 ‘데이비드슨(Davidson) 라인’이었다. 적이 대구를 차지하면 워커는 이 방어라인을 한동안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기도록 하고, 한반도에 전개했던 미군을 일본 등으로 철수시킬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였다.
피란민들은 계속 대구와 부산으로 몰려드는 상황이기도 했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북한군 치하(治下)의 고난을 피해 강을 넘으려는 피란민이 대거 몰리면서 이들을 통제하려는 미군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움직이려는 피란민은 강을 넘어와도 얼마든지 좋았다. 그러나 피란민의 통행이 아군의 작전을 저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오열(五列)’의 문제였다. 유럽의 전쟁에서 적과 내통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면서 자리를 잡았던 이 단어의 주인공들은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도 아군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1950년 여름, 미군 헌병이 낙동강을 넘어 오는 피란민들을 검색하는 모습.
피란민의 틈에 끼어들어 강을 건너는 위장(僞裝) 북한군, 또는 그를 추종하는 빨치산, 그들로부터 사주를 받은 민간인 등이 많았다. 변장한 채 아군지역으로 넘어와 불시에 기습을 벌이는 상황이 생겼고, 미군 등은 그에 따라 커다란 피해를 입거나 작전에 큰 차질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통제하는 일이 아주 큰 문제였다.
어느 날 날아든 적의 포탄
자칫 상황이 악화되면 대한민국이 임시 수도를 다시 부산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았고, 피란민들이 자꾸 몰려들면서 대구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전쟁 전에 인구 30만 명이었던 대구에는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가 불붙고 있던 무렵에는 70만 명의 인구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8월 18일 대구 북방의 가산산성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박격포를 쐈다. 대구를 직접 노린 포격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8일 새벽에 북한군이 가산산성에서 쏜 포탄 일곱 발이 대구역에 떨어지고 말았다. 대구는 금세 요동쳤다. 우선은 역무원 1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7명이 부상했다.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적의 포탄은 기름을 가득 머금은 볏짚에 그어댄 성냥불과 같았다. 대구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로써 임시 수도는 부산으로 옮겨가는 게 정해졌고, 피란령이 발동했다. 시민들 일부는 대구에 북한군이 진입한 것으로 착각까지 했다고 한다. 삽시간에 불어난 피란대열로 인해 군 부대 이동도 불가능할 정도로 대구는 혼돈의 도가니로 깊이 빠져들었다.
당시 내무장관은 조병옥(趙炳玉·1894~1960) 박사였다. 그는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한민당과 결별하면서 이 대통령과 협력 관계를 끊었다가 전쟁이 터진 뒤인 7월 15일 다시 정부의 요직인 내무장관을 맡고 있었다. 조병옥 박사는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등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해외 유학파 경력을 지닌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연희전문을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해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최고의 지식수준을 갖췄던 데다가 선이 굵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력한 리더 중 한 사람이었다.
/1959년 10월 10일 조병옥(왼쪽)과 장면. 유석(維石) 조병옥 (趙炳玉ㆍ1894~1960) 박사는 초대 경무국장(경찰총수)을 지냈다.
대구역 앞에 적의 포탄이 떨어져 모든 거리가 피란대열로 엉망이 돼가고 있을 무렵, 그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지프에 올라탄 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우리는 절대 대구를 적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의 대구 사수 의지를 전파하고 다녔다. 급기야 피란민이 죄다 몰려 있던 대구역에 나타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정부의 대구 사수 의지를 연설하면서 분위기를 안정시켰다. 대구가 적의 포탄이 날아들어 금세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들었음에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조병옥 박사의 공이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조병옥 내무 수습에 안간힘
실제 조 박사는 7월 15일 내무장관에 취임한 뒤 많은 일을 수행했다. 그가 내무장관에 올라 먼저 살핀 점은 경찰병력이었다.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를 도와 후방에서 상황을 관리해줘야 했던 경찰병력이 북한군 남침과 국군의 급한 후퇴로 많이 줄어있었다.
약 2만5000여 명의 경찰 병력은 조 박사가 내무장관으로 취임할 때는 1만3000명 정도로 감소한 상태였다. 지닌 무기도 칼빈 소총 6000정 정도가 고작이었다. 후방의 치안을 책임져야 할 내무장관으로서 조 박사는 당장에 경찰병력 증원과 무기 확보에 나섰다고 했다.
고급 수준의 지식인이었고, 아울러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영어에도 능통한 조 박사였다. 그는 자신의 그런 장점을 충분히 살렸다. 경찰병력을 6만5000명으로 늘릴 계획을 잡은 뒤 대구와 부산에 경찰관 훈련소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경찰요원들을 길러냈고, 미군과 탁월한 교섭을 벌여 무기를 크게 늘렸다.
나중에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조 박사의 활약에 힘입어 경찰 병력은 1950년 말 4만8000여 명으로 늘었고, 미 8군 참모장 앨런(Leven C. Allen) 소장과 협의해 미군으로부터 칼빈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을 지원받아 무기를 7만 여 점으로까지 증강했다.
아울러 조 박사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요청해 한국의 경찰을 미군부대에 배속토록 했다. 이는 워싱턴 미 행정부의 승인을 얻어 곧 현실화했다. 한국 경찰이 미군을 따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계기였다. 이들 경찰은 미군 부대의 전선에 진출해 낙동강을 넘어서는 피란민 중에 섞여 들어온 ‘오열(五列)’을 색출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한국 경찰의 성가를 높일 수 있었다.
전선에서는 처참한 아군의 희생이 매일 벌어졌다. 솜털이 얼굴에 나있는 신병과 학도병도 기꺼이 고지에 올라 적과 싸우다가 세상을 등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 많은 노무자들도 전선의 병사들에게 밥과 탄약을 날라주다 목숨을 버렸다. 후방에서도 조병옥 박사처럼 분투를 보이는 대한민국 사람도 아주 많았다. 그런 피어린 노력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위기의 깊은 그늘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면서 들은 풍문으로는 믿고 싶지 않은 내용도 적지 않았다. 일부 군인들의 탈선도 있었다. 그보다는 부산에서 밀항을 준비하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자극적이었다. 대한민국의 패망을 미리 짐작해 제주도와 일본으로 먼저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부산을 빠져나가 일본으로 가는 밀항은 당시에 ‘돼지몰이’로 불렸다고 한다. 밀항 주선 비용은 1인당 50만원에서 시작했다가 100만~150만원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선박 임대료는 5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호가’했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정부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위기에서 먼저 제 목숨만 건지려고 들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90 지프 운전병 팔뚝 관통상…"하느님 도와주소서" 간절한 나의 기도
"당신들 뭐 하는 군대냐", 전선 무너지자 미8군의 거센 질책
(10) 낙동강 전선
중국말 하는 미 연대장
앞서 소개한 존 마이켈리스 미 25사단 27연대장에 이어 그 후방을 받쳐주는 미군 부대로 2사단 23연대가 추가로 다부동 전선에 도착했다. 23연대의 연대장 폴 플리먼 대령은 이듬해 1·4 후퇴로 한강 이남으로 아군이 밀렸을 무렵 지평리라는 곳에서 중공군 5개 사단 6개 연대와 맞서 싸워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었던 이른바 ‘지평리 전투’의 영웅이었다.
마이켈리스의 27연대에 이어 23연대가 도착하던 무렵이었다. 프리먼 대령이 우리 1사단 사령부로 나를 찾아왔다. 인상이 좋아 보였던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중국어로 “당신 중국말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내 이력을 그가 알아본 뒤 건넨 중국말이었다.
나도 중국어를 사용해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프리먼은 “그렇다면 우리 중국어로 이야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상황이 조금 우스워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영어도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러자 프리먼은 활짝 웃으면서 “왜 진작 영어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화답했다.
자라온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군대가 전우로서 함께 전선에 나서는 상황이었다. 본격적인 한국과 미국의 연합작전을 알리는 장면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화력과 전투경험, 물자보급 능력 등이 모두 부러웠다. 당시의 국군 수준은 미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낮았다. 그런 양국군의 연합작전은 그저 함께 서서 싸운다는 열정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어 보였다.
프리먼은 중국에 유학한 경험이 있었다. 1931년부터 4년 동안 중국 베이징(北京)에 머물면서 익힌 중국어가 아주 돋보였다. 그는 함께 싸울 한국군 지휘관과의 소통을 먼저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이력을 살펴 만주군관 출신이라는 점을 알고서는 중국어를 써서라도 소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 한국군 지휘관 중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까닭이다.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공세에 맞서는 국군과 미군.
다부동의 전선은 그렇게 큰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부동 초입의 천평동 계곡에 마이켈리스 대령이 이끄는 미 27연대가 전차와 포병으로 무장한 채 늘어섰고, 그 남쪽으로 프리먼 연대장의 23연대가 역시 막강한 화력으로 부대를 전개했다. 남북으로 향하는 간선도로에 미군이 중첩적으로 늘어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다른 나라, 다른 부대
우리 1사단은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15연대, 유학산 일대의 12연대, 다부동 초입에서 다시 가산산성 방향으로 11연대가 진을 펼친 채 북한의 막바지 공세에 맞서 분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북은 미군, 동서는 국군이 막아서면서 대구를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형국이었다.
27연대의 마이켈리스 대령은 아주 노련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철저하게 현장을 살피면서 냉철하게 부대를 이끌었다. 내가 전쟁 중에 만났던 전형적인 앵글로색슨 계통의 지휘관이었다. 상견례를 할 때는 부드러웠지만 현장을 돌아보면서 부대를 배치할 때는 매우 냉정했다.
모든 전선은 견부(肩部·어깨부위)가 중요하다. 어깨와 어깨가 서로 잘 맞물려야 한다. 군사용어로는 전투 지경선(地境線)의 문제다. 함께 적을 맞아 싸우는 군대가 서로 경계를 형성하는 이 지경선은 뚫리기가 가장 쉬운 부분이다. 제대로 어깨를 잇지 않으면 적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아군의 후방을 노릴 수 있다.
따라서 지경선 옆에 선 아군 부대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면 그 옆의 부대는 곧장 커다란 위기를 맞는다. 적은 제방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와 사나운 기세로 돌변하는 물길처럼 변해 아군의 측면과 후방은 금세 요동을 친다. 공황에 빠진 군대는 곧 무너지면서 참혹한 결과를 빚고 만다.
미군은 그런 점에서 당시의 국군을 잘 믿지 못했다. 국군의 전투력이 우선 크게 떨어지는 상태였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켈리스 대령과 프리먼 연대장 둘 모두는 나와 부드럽게 상견례를 했으나 그런 염려를 불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이켈리스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차와 포병 등 막강한 화력을 지닌 제 부대 병력을 배치하면서 철저하게 무엇인가를 따지는 눈치였다.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미군이 어떻게 부대를 배치하는지 관찰하던 내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미군 전차의 야간 포격..
프리먼 대령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오죽하면 내 이력을 먼저 살핀 뒤 영어로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고 판단해 먼저 중국어로 말을 건넸을까. 함께 싸워야 하는 한국군의 지휘관과 그렇게라도 소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전선에 나서는 군대에게는 함께 어깨를 댄 채 싸워야 하는 옆 부대의 역량이 매우 중요했다.
적군의 공세는 아주 집요하게 벌어졌다. 처참한 인명의 희생이 날로 늘어갔다. 그럼에도 우리 국군은 고지에서 적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8월 21일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평동에서 다부동과 대구로 이어지는 축선의 간선 도로는 앞에서 소개한 대로 미 27연대와 23연대가 지켰다. 동서로는 우리 11연대가 천평동 계곡 북쪽 초입의 양쪽 산에 포진해 있었다.
“우리도 철수한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천평동 계곡 초입 지역 돌파에 안간힘을 기울였으나 마이켈리스의 27연대에 의해 번번이 꺾이고 말았다. 계곡 양쪽에 포진한 1사단 11연대도 분전을 거듭하며 고지를 확보하는 등 나름대로 선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내가 있던 1사단 사령부에 전화가 걸려왔다. 대구의 미 8군 사령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부관한테서 건네받은 전화통 안에서는 대뜸 호통이 튀어 나왔다. “사령관, 지금 당신들 뭐 하고 있는 거야! 한국군이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당시 미 8군의 작전 참모 중 한 명이었을 그 미군은 “당신들이 이러면 우리는 철수한다. 계곡에 적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렇게 한국군이 물러난다면 미군 또한 그냥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이어 “천평동 계곡 좌측방 고지가 뚫렸다. 한국군이 물러나고 말았다. 한국군에 실망했다. 27연대가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철수한다’고 통보해왔다”라고 말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붙잡힌 북한군 포로가 미군 지프에 앉아 있는 모습.
전투의 지경선, 가장 우려했던 어깨 부분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맥없는 후퇴라는, 신경질 가득 섞인 지적이었다. 상황이 아주 급했다. 그곳에서 한국군이 물러나고 북한군이 계곡 좌측을 뚫고 진입하면 미군은 바로 고립을 면치 못한다. 계곡 위의 고지에서 공격을 퍼붓는다면 미군은 전멸 위기에 몰릴 수도 있었다.
나는 지프에 올라타고 곧장 천평동 계곡 초입으로 달렸다. 11연대 1대대가 방어하는 곳이 문제가 생겼는데,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산길을 올라가야 했다. 산자락 근처에 도달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파편이 운전병의 팔을 뚫었던 모양이다. 지프를 몰던 운전병이 갑자기 “억!”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운전을 멈췄다.
운전병은 제 팔뚝을 감싸 쥐고 있었다. 선혈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를 살필 겨를도 없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1대대 방어지역을 향해 달려갔다. 몇 백 미터의 평지를 달렸고, 이어 나타난 산길을 타고 올랐다. 마음속으로는 이제 닥친 가장 큰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라는 생각만 했다.
뭔가에 좀체 기대지 않는 게 내 성정(性情)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심성도 내겐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산길을 뛰어오르다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에 먼저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내가 7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어린 삼남매를 꿋꿋하게 돌보신 어머니였다. 마음은 어느새 어머니의 그런 굳건함을 찾고 있었다.
이어 그전까지는 제대로 다니지 않던 교회도 떠올렸다. 그리고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이번 위기를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마음속 기도였다. 그때는 그런 생각만이 들었고, 그저 그런 기도만이 떠올랐다. 저 멀리에 11연대 1대대가 보였다. 고지에서 밑으로 무질서하게 밀려 내려오는 부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계속 그쪽으로 달려 올라갔다. 점점 다가서면서 부하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이어 후퇴의 선두에 선 1대대장 김재명 소령이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를 불렀다.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사령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91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 다급했던 나의 비상작전 '사단장 돌격'
(10) 낙동강 전선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다”
지휘관이 갖춰야 할 자질은 여럿이다. 적의 의중을 미리 읽어낼 수 있는 지혜, 부하를 잘 대할 줄 아는 덕성(德性), 적의 기세에 굴하지 않는 용기, 차분하게 싸움을 이끌어갈 수 있는 치밀함 등이다. 그러나 위기에 닥쳤을 때 내 몸 하나 던져서라도 적을 막아야 한다는 의지는 다른 무엇보다 아주 확고해야 한다.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지휘관이 등을 보이면 전열(戰列)은 아주 급속하게 무너지고 만다. 다부동의 당시 상황이 그랬다. 나는 평소에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앞으로 먼저 나서지 않으면 후퇴하는 병력을 도저히 되돌려 세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11연대 1대대가 다부동 좌측방의 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물러난다면 천평동 계곡의 미군은 아주 심각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아주 다급한 마음에 우선은 산에서 밀려 내려오다 나와 마주친 1대대장을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마구 후퇴하는 병력을 우선 땅바닥에 앉도록 했다.
일단 땅바닥에 앉히면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퇴 대열의 선두가 땅에 앉자 뒤따라오던 부대원들도 모여들면서 바닥에 앉고 있었다. 나는 즉석에서 이런 내용으로 연설을 했다.
“지금 우리는 대구와 부산만을 남긴 상태다. 이곳을 지키지 못해 대구를 내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바다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여러분 모두 그동안 잘 싸워줘서 정말 고맙다. 그러나 한 번 더 힘을 내자. 저 밑 계곡에서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 중이다. 우리가 먼저 물러나면 저들은 곧장 철수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대한민국은 망한다. 내가 먼저 앞장을 설 테니 나를 따라와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말을 마치고서 나는 대열을 가르면서 걸어 나가 앞장을 섰다. 권총을 빼들고 선두에 서서 물러났던 고지를 향해 뛰어나갔다. 얼마를 뛰다가 나는 뒤를 따라오던 부하들의 제지로 더 이상 앞장을 설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내 어깨와 허리를 잡더니 “이제 우리가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했다.
/낙동강 전선으로 행군하고 있는 1950년 8월의 국군 모습.
내가 가끔 다부동 전투를 회상할 때 소개하는 대목이다. 무용담이라고 여길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정은 너무나 절박했다. 아무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단을 이끌고 있는 사단장으로서 전선에 서서 직접 돌격을 감행한 일이 퍽 인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너무도 절박한 상황, 그만큼 곤혹스러웠던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미 연대장과의 설전
내 성격이 특히 용감하다고는 할 순 없다. 그러나 전선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최고 지휘관이 제 몸 하나를 던져서라도 막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는 특별한 용기도 아니다. 전선 지휘관이 갖춰야 할 기본 자세일 것이다. 무너져 쫓겨 내려왔던 1대대 병력들은 사실 격전과 배고픔, 갈증으로 많이 지쳐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령관인 나를 앞서면서 왕성한 기세로 다시 고지를 향해 올라갔다. 공세를 벌이던 북한군은 후퇴 병력이 다시 고지에 오르자 증원 병력이 왔다고 착각했다고 한다. 결국 1대대는 다시 힘을 내 고지에 올라서고 있던 북한군을 꺾고 다시 원상태를 회복했다.
산에서 내려오자 미군들이 몰려들었다. 마이켈리스 미 27연대장도 있었다. 그들은 후퇴를 서두르려다가 한국군이 다시 산을 오르는 장면을 계곡 아래에서 지켜봤던 모양이다. 한국군이 다시 고지에 오르자 환호성까지 올렸던 모양이다. 그들의 철수는 멈췄고, 천평동 계곡은 결국 정상을 되찾았다. 마이켈리스 대령은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마이켈리스 대령과 그곳으로부터 조금 후방에 자리를 잡고 있던 27연대 포병 진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노여움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따지듯이 마이켈리스에게 물었다. “왜 1사단에 먼저 상의하지 않고 8군 사령부에 ‘한국군이 후퇴하니 우리도 철수한다’고 말을 했느냐”는 항의였다.
/1950년 8월 다부동 위기의 막바지 무렵에 천평동에 전개한 미 27연대./라이프
나는 마이켈리스와 다소간 언쟁을 벌였다. 어깨를 잇고 함께 싸우는 부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자 했다면 27연대는 우리 1사단 사령부와 먼저 소통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이켈리스는 한국군의 전투 자세를 두고 비판적인 견해도 드러냈다.
11연대 1대대의 후퇴는 그저 북한군이 두려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상황으로 볼 때 몇 가지 오해가 생기면서 일부 병력이 뒤로 물러서자 뒤의 병력들이 후퇴상황으로 알고 무질서하게 산을 내려왔던 듯하다. 그렇다면 미 8군 사령부에 보고하기 전 1사단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좀 더 침착하게 알아본 뒤 행동에 들어갔어야 한다는 게 내 지적이었다.
한국군에 대한 불신
나와 마이켈리스는 그런 문제를 두고 다소 감정적인 발언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논쟁 끝에 나는 “미군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정 그렇다면 서로 위치를 바꿔보자. 당신들이 저 험악한 산에 올라갈 수 있겠느냐.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다. 평지를 맡긴다면 우리도 당신들 못지않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후에 주한 미8군 사령관이 되는 존 마이켈리스.
사실, 내 말대로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 장담대로 평지의 수비를 맡더라도 우리 1사단이 강력한 화력을 갖춘 미군의 수준을 따라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속에 담긴 감정적인 앙금 때문에 불쑥 입에서 튀어나온 발언이었을 것이다.
마이켈리스와의 언쟁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어쨌든 상황을 회복했으니 다행이었다. 마이켈리스라는 지휘관은 이력이 독특했다. 그는 사병 출신으로 군대생활을 하다가 뜻한 바 있어 동년배의 장교들에 비해서는 훨씬 늦게 미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미 101 공정사단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의 참모장 신분이었다.
그가 복무한 부대는 미국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주역으로 등장하는 그 101 공정사단이다. 그는 그곳에서 바스토뉴 전투에 참가했다가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사병에서 출발해 웨스트포인트를 거쳐, 다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크게 활약했던 그는 아주 뛰어난 야전 군인이었다.
전쟁 자체를 깊이 이해해 야전에서 어떻게 하면 적을 물리칠 수 있는지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런 철저한 장교로서 마이켈리스는 천평동 계곡에서 좌측 견부로부터 우리 11연대 1대대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고, 사태를 재빨리 판단해 자신의 부대를 즉각 철수시키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6.25참전 소년병전우회 윤한수(尹漢壽) 사무총장이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그 당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의 사진을 펼쳐보이고 있다.2008년 6월 3일 촬영.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마이켈리스의 그런 행동에는 당시 대한민국 국군에 대한 강한 불신이 숨어 있기도 했다. 그는 한국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국군의 형편을 이리 저리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장비나 화력 등에서 크게 떨어지는 수준의 국군, 투지는 온통 미지수였던 국군을 아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를 함께 극복하면서 마이켈리스는 우리 1사단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나와 말싸움까지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터에서 적을 마주한 아군의 같은 입장에서 벌인 논쟁에 불과했다. 그는 그날 말다툼 이후 나와 매우 친숙한 사이로 발전했다.
그는 바스토뉴 전투 때 복부 관통상을 당하면서 신장을 다쳤다. 그래서 늘 30분 또는 적어도 1시간 간격으로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에 그는 별 넷의 대장 계급을 달고 한국 주둔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당시 골프장에서도 그는 늘 화장실을 빈번하게 다녔다. 그러면서도 늘 왕성한 원기를 잃지 않았다. 다부동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치밀한 현장 연구, 빈틈없는 부대 운용으로 그는 아주 튼튼한 방어막을 펼쳤다. 하수구에 차린 지휘소에 머물면서 그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대비했다. 그가 이끄는 27연대는 그 다부동 입구 천평동 계곡에서 6·25 전쟁 중 최초의 전차전을 북한군과 벌인다. ‘위기’의 순간을 함께 넘긴 직후였다. 김일성은 원산에서 신형 T-34 전차 15대를 급히 옮겨와 다부동에 배치했다. 적이 다시 미 27연대 전면에 분주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92 볼링장처럼 요란했던 천평동 계곡, 처음 벌어진 북한군과의 전차전
10) 낙동강 전선
김일성이 보낸 신형 T-34
천평동 계곡의 위기를 넘기자 적은 기만전술을 펼쳤다. 1950년 8월 21일 오후 접어들 무렵에 마이켈리스 연대장이 이끄는 27연대의 정면에는 곳곳에 백기(白旗)가 올라갔다. 항복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그에 따라 주민들의 신고도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벌써 적의 기세가 꺾인 것일까.’ 대부분은 그런 예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확인해본 결과 아무것도 없었다.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전차 3대와 보병 2개 소대를 정면으로 보내 현장을 확인했으나 적이 투항하는 조짐은 전혀 없었다. 마이켈리스는 그런 적의 동향을 두고 ‘상대가 곧 야간 공격을 벌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27연대는 그런 상황 판단에 따라 연대 정면의 가장 앞에 설정해 둔 지뢰지대를 보강했다. 이어 그 앞쪽으로도 많은 지뢰를 더 뿌렸다. 전방의 2개 대대, 후방의 전차부대, 다시 그 뒤쪽의 포병부대도 더욱 긴장을 하며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포격이 먼저 벌어졌다. 이어 북한군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미 27연대를 향해 주공(主攻)으로 나섰고, 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국군 1사단 11연대 쪽으로는 조공(助攻)을 집중했다. 이미 어두워진 천평동 계곡은 적의 공세가 벌어지면서 미군이 발사한 조명탄으로 삽시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적은 전차 7대를 앞세웠다. 아울러 자주포 3문이 가세하면서 아군을 향해 사격을 벌이며 몰려들었다. 19대에 달하는 차량 종대, 그 양옆으로는 보병이 산개(散開)하면서 따랐다. 특히 압도적인 미 공군 화력에 밀려 보급선이 곳곳에서 끊겼음에도 북한군은 김일성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새로 도착한 신형 T-34 전차를 앞세웠다는 점이 특기할 만했다.
/한국 전선에 진출한 미군 전차에서 사병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라이프
그럼으로써 벌어진 게 6·25 전쟁의 첫 전차전(戰車戰)이었다. 그 이후로 여러 장면에서 미군의 전차와 북한의 전차가 싸움을 벌이지만 천평동 계곡에서 벌어진 이날 밤 전투는 양측 전차의 본격적인 첫 조우전(遭遇戰)이라고 해도 좋았다.
적의 전차는 6·25 개전 초반 북한군의 압도적인 우세(優勢)를 가능케 했던 동력이기도 했다. 한국군은 처음 보는 전차 앞에서 전투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생전 처음 마주치는 전차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군은 대부분의 38선 남침 과정에서 T-34라는 소련제 전차의 덕을 톡톡히 봤다.
북한군의 전차를 두고 품었던 국군의 두려움이 많이 가셔진 곳도 낙동강 전선이었다. 미군이 T-34를 파괴할 수 있는 3.5인치 로켓포를 급히 가져와 일선의 국군 부대에게 일부를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일선의 국군은 3.5인치 로켓포를 사용해 북한군 전차 여럿을 이미 파괴해 본 경험이 있었다.
마이켈리스의 27연대는 차분하면서도 치밀하게 대응했다. 우선 적의 머리 위에 조명탄을 쏘아 올린 뒤 모든 사격을 퍼부어 적의 전차와 보병 사이를 떨어뜨렸다. 천평동 계곡에 늘어선 미군의 전차는 먼저 사격을 시작하지 않고 적의 전차가 사정권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볼링 앨리(Bowling Alley)
미군 전차부대는 적이 약 200m 앞에 접근하자 일제히 전차포 사격을 벌였다. 곧바로 선두에 있던 북한군 전차 1대가 파괴됐다. 전면에 포진했던 미군이 발사한 3.5인치 로켓포는 우리 쪽으로 다가서던 북한군 자주포 1문을 주저앉혔다. 앞쪽에서 전진하던 전차와 자주포가 아군의 사격으로 공격을 멈추자 뒤에 따르던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는 더 이상 앞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선두의 북한군 전차 1대는 진지 전방에 파놓았던 전차호(戰車壕)에 빠졌다.
이 장면이 아주 가관이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상황은 외신을 통해서도 아주 잘 알려졌다.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병사들은 27연대의 포병부대와 전차부대로부터 적을 향해 날아가는 각종 철갑탄과 북한군이 발사하는 포탄이 좁은 천평동 계곡의 남북 양쪽으로 교차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그 장면을 두고 미 장병들은 볼링장에서 공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구르는 나무 통로, 즉 ‘볼링 앨리(Bowling Alley)’를 떠올렸던 듯하다.
/미군과의 교전에서 파괴된 북한 소련제 T-34전차. '볼링 앨리' 전투 직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
어쨌든 당시 치열하게 불붙었던 미군과 북한군의 포격 모습을 표현했던 미군 병사들의 이런 발언은 종군기자를 한국 전선에 보냈던 미국 언론을 통해 해외에 인상 깊게 알려졌다. 강렬했던 전차전과 포격 때문이었다. 거의 5시간 정도 이어졌던 이 전투는 다음날 날이 밝으면서 곧 결과가 드러났다.
북한군은 27연대의 강력한 화막(火幕)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했다. 연대의 방어 전면은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북한군은 다음날 후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전차 7대와 자주포 4문이 파괴된 상태로 주저앉아 있었고, 13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천평동 계곡 좌우를 지키고 있던 우리 1사단 11연대에도 적은 대대 병력을 보내 공격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결국 안간힘을 써서 다부동을 돌파하려고 벌였던 북한군의 막바지 8월 공세는 그렇게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이 전투는 매우 상징적이었다. 적은 서쪽의 국군 1사단 15연대, 중간의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에 포진했던 12연대, 다부동 초입을 지키고 있던 11연대를 모두 넘지 못했다. 산악지대의 고지를 점령해 다부동에 이어 대구를 지향하려 했던 당초의 계획을 모두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최후로 뚫고자 했던 게 신형 T-34 전차의 지원을 받아 펼친 ‘볼링 앨리’의 천평동 계곡 공격이었다.
적 연대장도 귀순
그러나 북한의 힘으로 뚫기에는 미군의 견고하고 두터운 힘이 이미 부산에서 대구, 낙동강 전선에 고루 스며든 상태였다. 미군은 개전 초반에 어떻게 해서든지 북한군 공세를 지연시키면서 부산을 통해 자신의 막강한 역량을 부지런히 상륙시킨 상태였다. 모든 전시 물자,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병력, 뛰어난 무기체계를 차례차례 한반도 남단의 뭍으로 올렸던 것이다.
미군의 그런 역량이 이미 아주 높은 수준으로 축적됐다는 점을 보여준 지상의 전투가 바로 천평동 계곡에서 벌어진 ‘볼링 앨리’의 싸움이었다. 북한군은 5시간 정도 벌어졌던 그 전투에서 막바지 힘을 토해냈지만 그대로 꺾이고 말았다.
/6.25전쟁 중 처음 전차전이 벌어진 천평동 계곡의 격전 직후 모습.
격렬했던 미 27연대와 북한군의 전투가 끝난 뒤인 8월 22일에는 북한군 중좌(중령)가 귀순했다. 그는 북한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정봉욱 중좌였다. 그는 국군 1사단 11연대 지역으로 병사 1명과 함께 백기를 들고 넘어왔다. 귀순 동기는 자신이 속했던 13사단의 사단장과 불화를 빚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포진지 문제로 시비를 벌이다가 공산주의에 대한 평소의 회의가 덧붙여져 귀순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군 작전지도를 많이 지니고 왔다.
그를 통해 아군은 북한군이 과수원에 교묘하게 위장해 둔 포진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적 122㎜ 곡사포 7문, 76㎜ 곡사포 13문이 있는 곳이었다. 미군은 155㎜를 야포를 동원해 정봉욱 중좌가 지정해 준 곳을 겨냥하며 강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그로써 이후 북한군 포격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6·25 전쟁사>는 적고 있다.
사단의 포병 연대장이 귀순을 결심할 정도로 북한군의 기세는 크게 꺾이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적의 역량이 이제는 개전 초반의 기세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리라는 점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볼링 앨리’의 전투가 끝난 뒤 국군 1사단의 전면에는 적이 간혹 출몰하면서 공격을 벌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대세(大勢)가 이미 기운 뒤의 맥없는 공격이라는 점이 느껴졌다. 공세(攻勢)를 줄곧 이어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반격을 시도하는 아군에게 아주 쉽게 밀렸다. 수암산과 유학산의 경우에도 그랬다. 적은 뒤로 물러나는 기세가 역력했다. 그런 와중에 적군의 연대장이 귀순함으로써 그런 정황을 더욱 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며칠 뒤에는 12연대 수색대 1소대장 대리 배성섭 특무상사는 부하 11명을 이끌고 적정 수색에 나섰다가 급기야 북한군 13사단 사령부를 기습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적의 사령부에 우리 수색대가 진입하는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배성섭 특무상사와 부대원 11명은 적의 사단 사령부에 진입해 적군을 살상하면서 포로 3명을 붙잡았다. 부대원 모두 1계급 특진과 함께 상금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적은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아주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그곳을 떠올리면 마음이 어두워진다. 아주 많은 희생이 따랐기 때문이다. 수많은 장병, 역시 수많은 학도병, 그리고 이름 없는 노무자들…. 우리는 그들의 희생으로 무덥고 잔혹했던 그 해 여름을 견뎠다.
93 부하들은 스러지고…다부동에서 내가 흘린 그 많은 눈물
(10) 낙동강 전선
미 육참총장의 방문
‘볼링 앨리’의 천평동 계곡 격전이 끝난 뒤였다. 1950년 8월 23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미 육군참모총장 로튼 콜린스 대장, 월턴 워커 미 8군 사령관, 정일권 한국 육군참모총장 등과 함께 우리 1사단을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일행은 23일 낮에 사령부를 방문했다. 격전을 치른 뒤라 이들을 맞이할 행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저 격전을 치른 뒤의 분위기 그대로 방문하는 귀빈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은 처음 대면했다.
나는 사단 사령부가 있던 동명초등학교 교실 하나를 비워 마련했던 사령부 회의실에서 콜린스 총장과 워커 8군 사령관 등을 대상으로 전황 브리핑을 했다. 딱히 이렇다 할 내용은 없었다. 우리가 다부동에 진주하면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상황을 순차적으로 설명했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 보면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인명의 희생을 치르고 지켜낸 전선이었다. 1950년 8월 14일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져 약 10일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진 ‘격전 또 격전’의 과정이었다. 나는 사령부를 방문한 일행 앞에서 그 전 과정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로튼 콜린스 총장과 워커 사령관으로부터 “잘 싸웠다”는 격려를 들은 듯하다. 신성모 장관은 그 동안에도 여러 차례 사령부를 방문해 내게 격려를 했던 차였다. 정일권 총장은 별다른 발언이 없었다.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이 한국의 전선을 시찰하는 차원의 방문이었기에 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듯하다.
/백선엽 1사단장(오른쪽)이 사령부를 방문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가운데)과 워커 8군사령관(왼쪽 끝)에게 전황을 설명하는 장면.
그들은 사단 사령부 관계자들에게 두루 인사를 건넨 뒤 곧 돌아갔다. 나는 그들이 왜 갑자기 1사단 사령부를 방문했는지 잘 헤아릴 수 없었다. 한반도 전선을 이끄는 미군의 입장에서 볼 때 다부동의 전선 방어는 매우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찾아든 생각이었을 뿐 당시에는 별다른 감회가 없었다.
당시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다부동 전선에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렸다는 생각, 그래서 이 전선만큼은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전체 전선에서 다부동이 차지하는 의미는 별로 따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드러난 여러 정황을 보면 다부동 전투는 개전 이래 줄곧 이어져 온 적의 공세가 크게 꺾이는 분기점에 해당했다.
우리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 따르면 다부동 전선을 뚫기 위해 전면에 모여들었던 북한군은 모두 5개 사단이었다. 부분적으로 미 1기병사단이 방어했던 서쪽의 왜관, 국군 6사단의 방어지역과 다소 겹치는 동쪽의 가산 일대를 모두 포함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적은 1950년 8월의 공세에서 이곳을 집중 타깃으로 설정했다. 전면에 포진했던 북한군 사단은 국방부 공간사(公刊史)가 적은 대로 모두 5개 사단이었다. 게다가 김일성은 이곳에 소련제 T-34 20여 대로 구성한 105 전차사단을 투입해 전력을 크게 증강한 상태였다.
남몰래 흘린 눈물
미군은 집요하면서도 가혹한 북한군의 공세가 거듭 이어지자 예비대로 있던 미 25사단 27연대와 미 2사단 23연대를 증강해 다부동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길목에 급히 배치했고, 인근 국군 8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를 차출해 이곳을 보강했다. 그럼에도 병력이나 화력에 있어서 북한군은 여전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럼에도 모든 힘을 기울여 이곳을 지켰다. 처절한 고지전을 수행하면서 아주 많은 부하들이 목숨을 잃었다. 앞서 소개한대로 후방에서 초모했던 신병들은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고지에 올라 허망하게 적의 총구 앞에서 스러져 갔다.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 탄약을 날라주기 위해 나섰던 노무자들의 희생도 가혹했다.
좀체 감정에 짓눌리지 않는 나였지만, 그런 희생 앞에서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처음 꺼내는 이야기지만, 나는 당시의 다부동에서 남몰래 많이 울었다. 예전의 회고록에서는 “그저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다”고 표현했지만, 실제 나는 그때 적잖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1950년 9월 2일 다부동 전선에서 촬영한 국군 용사의 주검.
격전이 벌어지던 1950년 8월 중순부터 10여 일 동안 나는 전황을 정리하는 브리핑 때마다 700 또는 800이라는 숫자를 들어야 했다. 국군 1사단을 포함해 가산산성 쪽에 증강 배치한 8사단 병력, 그리고 미군까지 포함한 희생자 숫자였다. 나는 그런 숫자를 귀로 들을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신음소리를 삼켜야 했다.
그러다가 사령부를 나가는 일이 있을 때면 여러 고지에서 숨져 그곳으로 옮겨져 온 부하 장병들의 시신을 봐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프 앞자리에서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 처참한 광경에 감정을 섞으면 적을 반드시 꺾어야 한다는 투지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 나는 지프에서 자주 울었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 솟아나는 눈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고지를 뺏어라” “당장 병력을 보내 싸우라”면서 줄곧 재촉해야 했다. 김일성도 모질게 병력을 몰아붙였고, 우리 또한 그를 막기 위해 전선의 참담한 희생을 무릅쓰고 부하들을 고지에 올려 보냈다.
그렇게 1950년 8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볼링 앨리’에 몰려들었던 북한군의 공세가 좌절하자 저들은 주력의 일부를 동쪽으로 옮겼다. 15사단을 영천으로 이동시키는 등 공세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조짐을 보였다. 전차사단으로 증강한 5개 사단의 정예 병력으로 다부동을 뚫지 못하자 다른 곳을 택해 공세를 이어가겠다는 심산이었다.
천평동 격전이 끝난 뒤 적의 공세는 완연히 꺾이는 모습이었다. 23일 밤에는 많은 희생을 안겼던 유학산 고지가 우리 품에 들어왔다. 15연대가 분전했던 328 고지 인근도 아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천평동은 미 27연대의 견고한 화력으로 일찌감치 적을 물리치면서 지속적으로 안정 상태를 유지했다.
바닥 드러낸 북한군
마지막 전선은 가산산성이었다. 적은 그곳을 먼저 치고 들어와 박격포를 몇 차례 쏘면서 대구를 일대 혼란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8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아군 1개 연대와 그를 뒷받침했던 마이켈리스의 미 27연대, 폴 프리먼의 미 23연대가 원활한 합동작전을 펼쳐 그곳의 북한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쫓겨나고 말았다.
/1950년 8월 23일 다부동 최대 위기가 한 고비를 넘자 국군 1사단 사령부를 찾은 미 육군참모총장 일행. 지프 앞자리 왼쪽이 콜린스 총장, 뒤가 워커 8군사령관.
그럼에도 적은 대구를 향한 공격을 지속할 작정으로 보였다. 전선을 이끄는 북한군 2군단은 공세를 우선 가산~팔공산 일대로 모았다. 그곳에서 험준한 산악지대를 뚫고 남하해 대구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계획이었다. 8월 말의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미 8군 워커 사령관은 우리 1사단을 그곳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동안 우리가 지켰던 다부동 일대 전선을 좌측의 미 1기병사단에게 인계한 뒤 부대를 옮겨 가산~팔공산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으라는 취지였다. 8월 30일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이 내려왔다. 부대를 하양과 신녕 일대로 옮겨 2개 연대를 전개해 동쪽으로 인접한 국군 6사단의 7연대와 기갑연대 원래 방어지역을 맡으라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우리는 곧 이동해야 했다. 격전을 치른 다부동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우리 방어지역을 인계받는 미군이 심각하게 이의를 제기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지켰던 328 고지 일대, 수암산과 유학산 고지를 돌아본 뒤 “시체를 치우고 떠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직 수습하지 못한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처참한 모습을 본 미군이 현장을 정리해줘야만 진지를 인수하겠다고 나온 것이었다. 그러기에는 우리 1사단의 상황도 여유롭지 못했다. 1사단은 미군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얼른 부대를 이동해야 했다.
하양을 거쳐 신단동이라는 곳에 설치키로 한 사령부로 향하던 때였다. 북한군 T-34 전차 1대가 길가에 파괴된 채 멈춰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북한군 전차를 살폈다. 나는 기름통을 우선 열어봤다. 유류가 전혀 없었다. 다음은 전차 안에 들어가 포탄과 탄약을 살폈다.
역시 전차 기름통 안처럼 깨끗했다. 나는 적군이 당면하고 있던 상황을 그로써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기름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고, 포탄과 탄약 또한 필요한만큼 보급 받지 못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적의 공세는 그렇게 기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94 미군의 집요한 '테스트', 다부동 전투가 끝난 뒤 받아든 내 성적표
(11) 전우야 잘 자라
다부동 못 지킨 미 사단
우리 1사단이 다부동 전선을 인계한 미 1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은 호버트 게이 소장이 이끌고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1기병사단은 전통이 강한 군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일본군이 점령했던 필리핀 마닐라를 되찾는데 선두에 섰고, 그 뒤 일본 도쿄 점령 때에도 점령지에 선착한 부대였다.
미군 중에서도 탁월한 전투력을 인정받고 있는 부대였고, 아울러 여느 미군의 전투사단처럼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는 그런 명예, 외형적인 조건으로만 펼쳐지지는 않는다. 전쟁엔 수많은 변수가 등장한다. 각기 다른 위기 상황도 벌어진다. 잠시라도 자만에 빠져들면 그런 변수와 위기는 날카로운 비수로 변해 내 심장을 향해 날아든다.
앞 회에서 소개한 대로 우리 1사단은 미 8군 사령부, 국군 2군단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다부동 작전지역을 모두 미 1기병사단에게 인계했다. 우리는 이어 동쪽으로 이동해 가산 일대와 팔공산을 방어하는 임무에 들어갔다. 그 이동은 8월 31일 시작했고, 우리 1사단은 신속하게 새 임무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미 1기병사단이 우리로부터 물려받았던 다부동 전선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국군보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녔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던 미 1기병사단이 다부동에서 적에게 뚫리고 만 것이다.
9월2일 밤이었다. 국군 1사단이 인계하고 떠난 다부동 초입의 계곡 서측 고지가 우선 북한군의 공세로 흔들렸다. 이곳을 국군 1사단으로부터 물려받은 방어부대는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였다. 이어 우측의 진지도 북한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낙동강 전선에 참전 중인 미군이 대오를 정비하면서 공격채비를 하는 모습.
가산은 902고지로 대구 북방 16㎞에 자리를 잡고 있어 대구를 방어하는 데 있어서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 이곳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고지를 형성하고 있는 까닭에 상대를 감제(瞰制)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전략 요충이기도 했다.
미 8기병연대장은 우리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받는 과정에서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그는 우리가 그곳을 비우고 떠난 뒤 바로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병력 부족’을 이유로 댔다고 한다. 그 빈 곳을 북한군이 치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대구를 감제할 수 있는 전략적인 고지를 적에게 선점당하고 말았으니 아주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로부터 다부동은 적의 차지로 변했다. 북한군은 원래의 방어선을 뚫고 10㎞ 정도를 밀고 들어왔다. 다부동이 대구로부터 약 22㎞ 떨어져 있으니 적과 대구의 거리는 10㎞ 조금 더 남겨둔 상태에 불과했다.
다시 요동치는 전선
뚜렷한 위기의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아울러 전선 전면에서 고루 공세를 이어갔다. 1950년 8월의 상황과는 달랐다. 8월 한 달 동안 북한군은 다부동 전면을 뚫으려고 공세를 거의 한 곳에만 모았다. 그러나 9월 들어서는 다부동과 영천, 포항 등 지역 전선에서 모두 공세를 벌였다.
광범위한 전선을 두들기다가 한 곳을 뚫을 경우 그곳에 여세를 모두 몰아 파고들겠다는 전략이었다. 우선 뚫린 곳이 다부동이었고, 그 다음 위기에 처한 곳이 영천이었다. 다부동이 뚫려 벌어진 위기 상황은 10일 정도 이어졌다. 미군은 탄약이 부족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탄약선 두 척을 띄웠고, 대구와 부산 등 지역에서 새로 모병한 한국군 신병으로 부대를 급조해 대구를 향하는 북한군 공세를 막으려고 했다.
영천이 뚫리면서 국군 2군단 상황도 다급해졌다. 당시 2군단장인 유재흥 장군은 휘하 1사단장인 나와 6사단장 김종오 장군을 불러 각 1개 연대를 차출하는 데 협조할 것을 지시했다. 우리 1사단과 6사단의 상황도 1개 연대를 빼 영천 방어에 나서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1사단은 11연대를 돌려 영천을 지원했다.
그해 6월 25일 북한군 남침이 벌어지면서 우리 1사단이 지키고 있던 개성과 임진강 전선에서 맞붙었던 북한군 1사단이 다시 팔공산과 가산 일대에서 우리와 전투를 벌였다. 11연대를 뺀 상황에서 우리는 북한군 1사단의 공격을 차분하게 잘 막았다. 다부동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던 우리 1사단의 전의(戰意)와 전기(戰技)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적은 다부동과 영천 등을 뚫었으나 공세를 이어가기엔 전력이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위기의 상황이 닥쳤으나 워커 장군의 미 8군 사령부는 혼신의 힘을 다 하면서 적의 공세를 받아쳤다. 영천 시내도 그곳을 치고 들어온 북한군에게 하루 정도 점령당한 뒤에는 다시 국군 2군단의 반격작전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9월 10일이 지나면서 전선의 움직임은 차츰 잦아들었다. 12일로 기억한다. 미 8군 사령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밀양에 가서 VIP를 만나보라”는 전갈이었다. 나는 그에 따라 지프에 올라 밀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8군 사령부가 말해준 장소에는 내가 만나야 했던 VIP가 없었다.
그 다음 날에 8군 사령부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대구의 모 사과과수원에 가서 VIP를 만나보라”는 내용이었다. 전선의 지휘관이 자리를 뜨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함부로 이리저리 오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나는 VIP 만나는데 한번 허탕을 쳤으니 속으로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내 군사 스승 밀번
그러나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부의 지시였다. 그들이 말해준 장소를 또 찾아갔다. 대구 교외에 있던 조그만 과수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야전용 텐트가 들어선 곳에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는 미국인이 강아지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투복 차림에 허리에는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6.25 당시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으로 종군했던 임인식(1920-1998) 씨의 사진집 '우리가 본 한국전쟁'(눈빛 펴냄)이 출간됐다. 1950년 7월 낙동강전선 다부동전투에 종군기자로 투입된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 랜돌프 처칠 기자/임인식씨 아들 임정의씨 제공
미국 시골의 한가로운 농가 뜰에 앉아 있는 듯했던 인상의 그 사내는 내가 인기척을 내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당신이 제너럴(General) 백이냐?”고 물었다. 내 신분을 확인한 그는 밝게 웃으면서 “당신이 이끄는 한국군 1사단이 전투를 퍽 잘했다고 들어서 알고 있다”며 일단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그는 프랭크 밀번(Frank Milburn) 소장이었다. 한국 전선의 신임 미 1군단장으로 독일에서 막 부임한 상태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21군단장으로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상륙한 뒤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인 알사스 로렌 지방을 공격하면서 이름을 떨쳤던 미군 장성이다.
작달만한 키에 목이 짧아 강인하다는 인상을 줬지만, 얼굴 표정은 시골 노인네처럼 편했다. 그는 이어 “전쟁의 흐름이 곧 바뀔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공세로 전환할 수 있다. 이제 곧 귀관의 한국군 1사단은 미군 1기병사단, 미 24사단과 함께 내가 지휘하는 미 1군단 휘하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3년여의 6·25전쟁 기간에 나는 많은 일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군사(軍事)에 관한 모든 지식과 기술, 싸움을 보는 안목, 전략과 전술의 틀을 구성하는 일 등 아주 다양하면서 많다. 그런 군사 일반에서 내게 배움의 큰 토대를 닦아준 사람이 바로 프랭크 밀번이다. 그는 이를 테면 나의 ‘군사 스승’인 셈이다.
그와는 그렇게 조우했다. 나는 그가 언급한 공세 전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아무튼 미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시도해 전쟁의 흐름을 뒤바꿀 작정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상륙작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9월 13일 내가 이끌고 있던 국군 1사단은 정식으로 프랭크 밀번 장군이 지휘하는 미 1군단에 편입됐다. 그는 곧 내게 많은 ‘선물’을 안겨줬다. 우선 미 10 고사포 여단을 우리 1사단에 배속해줬다. 90㎜ 야포 18문, 155㎜ 18문, 4.2인치 박격포 36문을 거느린 부대였다.
한국군 사단이 미군 전투사단에 필적할 만한 화력을 갖추는 셈이었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나름대로 큰 방점을 찍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들은 나를 ‘테스트’라는 시선으로 바라봤던 셈이다. 다부동은 그 시험장이었다. 다부동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국군 1사단의 능력을 그들이 인정한 셈이기도 했다.
나는 밀번으로부터 그런 설명을 들은 뒤 떠나기 전 “5만분의 1 지도를 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밀번은 활짝 웃으면서 “얼마든지 가져 가라”고 했다. 그는 지프 가득 지도를 싣고 가도록 배려했다. 지도에 상황판을 작성할 때 필요한 그리스 펜, 아스테이지 등도 잔뜩 안겼다.
95 中 장제스에 질린 미군, 늘 한국군 지휘관을 예의주시했는데…
(11) 전우야 잘 자라
한국에 온 미군의 우려
한국 전선에 뛰어들어 우리와 함께 어깨를 잇고 공산주의 군대를 맞아 싸운 미군에게는 좀체 없애기 힘든 큰 상처의 기억이 하나 있다.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대를 지원했으나, 종국에는 그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군에게 중국 전역의 지배권을 넘겨주도록 했던 기억이다.
당시 미국은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군대에 막대한 예산을 지원했다. 무기와 장비는 물론이고, 천문학적인 예산을 지원하면서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국민당 장제스의 군대는 하루아침에 30개 사단이 공산군에게 투항하면서 중국 전역의 지배권을 내주고 말았다.
‘무능과 부패’는 당시 국민당 장제스 군대를 바라보는 미군의 솔직한 시선이었다. 엄청난 돈과 무기를 지원하고서도 허망하게 무너지는 중국인의 군대, 나아가 동양인이 구성하는 군대에 대한 미군 수뇌부의 시선은 싸늘하다 못해 아주 차가웠다. 특히 중국 국민당 군대에 대한 지원을 주도했던 미군의 사실상 최고 전략가 조지 마샬의 태도가 더욱 그랬다.
중국 국민당 군대가 남긴 암울한 그림자는 아직 없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한 1949년으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던 당시의 상황이 그랬다. 미군은 아주 많은 조바심과 우려를 지닌 채 한반도에 올라섰던 것이다.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고 대만으로 패퇴한 장제스가 국민당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그들은 우선 김일성의 공산주의 군대를 맞아 싸움을 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눈을 들어 주변의 한국군 지휘관을 살폈다. ‘어느 지휘관이 우리가 믿고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문제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미군은 아주 교묘하다 싶을 정도로 한국군 지휘관을 검증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한국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은 군사고문단을 각 한국군 부대의 지휘관에게 보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물론 한국군에 대한 지원이다. 그러나 그 말고도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지원하는 한국군 지휘관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지켜보는 일이었다. 전략과 전술 분야의 능력, 보급 등 행정체계의 구성과 운용, 사생활을 비롯한 개인적 면모 등이 모두 관찰 대상이었다.
1970년대 초반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사람 중 하나가 존 마이켈리스다. 그는 6·25 당시 다부동에서 우리 1사단과 함께 적을 맞아 싸운 미 25사단 27연대장이었다. 그는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뒤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전쟁 중에 한국에 올라온 미군 지휘관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한국군 지휘관 중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워커가 부른 장군 밀번
미군의 역사적 전통은 여럿이지만 가장 뚜렷한 특징 하나가 끊임없는 관측과 개척의 부대라는 점이다. 이는 미국 동부에서 서부를 개척하는 과정, 그 이후로 벌어진 독립전쟁 등을 통해 쌓은 미군의 전통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엄격한 검증을 통해 힘을 축적하고 전개하는 버릇이 있다.
게다가 그들이 접한 중국 국민당에 관한 기억도 머릿속에서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중국의 공산화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발발한 한반도의 전선에 올라서는 미군이 어떤 마음으로 한국군을 보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의 그런 시선에 내가 들었던 셈이다.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다부동이라는 곳에서 우리 1사단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라는 의식 속에서 뭉치고 또 뭉치면서 싸웠다. 그런 모든 과정은 1사단 사령부와 각급 부대에 파견된 미 군사고문을 통해 자세히 알려졌던 듯하다.
우리 1사단 모든 이의 분투를 미군은 아주 높이 샀다. 그로써 신임 미 1군단장으로 부임한 프랭크 밀번은 ‘공세 전환’을 위해 선뜻 국군 1사단을 자신의 예하에 편입시킨 뒤 막강한 미 제10 고사포여단을 우리에게 배속했던 것이다.
밀번은 독일에 주둔하다가 막 한국전선에 부임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둔하던 독일에서 참모진을 대거 몰고 왔다. 그는 당시 한국 전선을 모두 이끌고 있던 월턴 워커 미 8군 사령관의 호출을 받았다고 한다.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이 기관총을 거치한 채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라이프
원래 워커는 자신이 이끌고 있던 미 8군의 콜터(Jon B. Coulter) 부사령관을 미 1군단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워커는 독일에 주둔 중이던 밀번을 불렀다. 워커와 밀번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유럽 전선에서 군단장으로 함께 전쟁을 치른 사이다. 워커는 패튼 장군의 지휘 아래에 있어 밀번과는 소속이 달랐다.
그러나 인접한 유럽의 전선을 누비면서 워커는 밀번의 공격력을 잘 알고 있었다.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졸업 연도는 워커가 두 해 앞섰다. 그러나 그런 학연(學緣)보다는 같은 전선에서 상대가 어떤 싸움의 자세를 보였는지가 중요했던 모양이다.
밀번은 별명이 ‘새우’다. 사람들은 늘 밀번을 ‘슈림프 밀번(Shrimp Milburn)’으로 불렀다. 미식축구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그의 키는 미국인 치고는 작은 편에 속했다. 게다가 목이 길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웨스트포인트 재학 시절 미식축구를 할 때는 밀번이 크게 돋보였다고 한다.
작은 키에 다부진 몸집을 한 밀번이 축구 볼을 가슴에 끌어안고 맹렬하게 달려갈 때의 폼이 꼭 ‘새우’의 모습을 닮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칭 비슷하게 그를 항상 ‘슈림프 밀번’이라고 불렀다.
독일 주둔지에서 느닷없는 미 8군 워커 사령관의 부름을 받고 한국전선에 도착한 밀번은 특별한 임무를 받았다. 바로 도쿄에 있는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의 흐름을 바꿔 공세를 벌여야 하는 내용이었다.
인천상륙을 위한 준비
당시 맥아더가 구상했던 인천 상륙작전은 몇가지 조건이 달려 있었다. 인천 앞바다의 심한 조수간만 차를 극복해야 했고, 대량의 병력과 화력을 일거에 뭍으로 올려야 하는 등 여러 난관이 있었다. 그 외에도 반드시 선결(先決)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 머무는 아군의 보병 전력이 북상해 인천으로 상륙하는 미 해병대의 뒤를 받쳐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후방에서 인천을 통해 상륙한 해병대 병력의 뒤를 보호해주는 ‘rink-up’ 작전이 펼쳐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전 이래 줄곧 방어에만 주력해 오던 아군의 흐름을 공세로 전환해야 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그 적임자로 밀번 장군을 선택한 것이다. 콜터 미 8군 부사령관도 의중에 있었지만, 기존의 흐름을 과감한 공세로 전환하는 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유럽 전선에서 탁월한 공격력을 선보였던 밀번 장군이 적격이라고 봤던 것이다.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맨 왼쪽) 시절의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오른쪽).
미 8군은 공세로 전환하는 길목에서 국군의 조력(助力)이 필요했다. 현지 지형과 모든 상황을 잘 아는 한국군 전투사단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고, 그에 따라 미 8군은 다부동에서 위기를 이겨내는 데 나름대로의 공로를 쌓았던 우리 1사단을 선택했던 셈이다.
대구의 과수원에서 내가 밀번을 만나는 장면은 사실 일종의 ‘면접’과도 같았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뒤 우리 1사단의 전적(戰績)과 그를 이끌고 있는 내 관련 정보를 모두 숙지했던 듯하다. 그는 곧 미 제10 고사포 여단을 내게 보냈다. 고사포 여단을 이끌고 있던 지휘관은 헤닉(William Hennig) 대령이었다. 밀번을 만난 하루 뒤 그가 먼저 우리 1사단 사령부를 찾아왔다. 당시 한국군으로서는 언감생심의 막강한 화력을 이끌고 나타난 그는 표정이 아주 침착해 보였다.
이후 그는 나와 줄곧 전선에서 생사를 함께 하는 동지로 변했다. 당시 그는 내게 아주 기쁜 소식을 건넸다. “포탄 운반 차량도 아주 많이 끌고 왔으니 지원이 필요할 경우 서슴없이 요청해라.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부산을 방어하던 미 10고사포 군단이었다. 막강한 화력으로 우리의 뒤를 받쳐주겠다는 그의 약속은 적을 앞에 두고서도 화력이 변변치 않아 늘 고전해야 했던 우리 1사단에게는 반갑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마침 밀번 장군을 만난 뒤 그로부터 잔뜩 얻어온 미군의 5만분의 1 지도가 곁에 있었다. 정밀한 좌표가 있는 지도였고, 그 좌표에 따라 정밀한 포격을 가할 수 있는 미군 포병 여단도 우리 1사단에게 왔다.
이제 앞으로 적을 뚫고 나가는 일만 남았다. 9월 15일이었다. 인천으로 미 해병이 상륙작전을 벌여 성공을 했다는 낭보가 낙동강 전선에 날아들었다.
96 숨 막히는 칼과 방패의 공방, 마침내 뚫은 북진의 길
(11) 전우야 잘 자라
인천상륙작전의 날
마침내 9월 15일이 왔다. 그날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전개 과정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북한군의 허리를 과감하게 자르고 들어가는, 적으로서는 예상은 했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전격적으로 벌어져 의표(意表)를 찔린 거대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후방의 낙동강 전선에 머물고 있던 아군이 문제였다. 당시의 낙동강 전선 모두를 지휘하고 있던 미 8군에서는 노심초사(勞心焦思)가 깊어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하루빨리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해 인천으로 상륙한 미 해병대의 뒤를 받쳐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이 북상하지 못한다면 인천으로 올라온 미 해병대 등 상륙 부대는 적의 공세에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부산과 대구를 지키고 있던 낙동강 전선의 대규모 아군 육상 병력이 북상해 적군의 포위 가능성을 없애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군사작전에 해당했다.
밀번 장군이 이끄는 미 1군단에 배속한 우리 1사단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루 빨리 낙동강 인근에 포진하고 있던 북한군의 수비망을 뚫고 북진(北進)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적이 이미 기진맥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선의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마침내 뚫은 북진의 혈로. 미 1기병사단 게이 소장(가운데)이 북진을 시작하며 국군 1사단에 들러 백선엽 사령관(왼쪽), 최영희 15연대장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고 하루가 흘렀다. 그러니까 9월 16일이었다.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한국군 1사단은 팔공산에서 가산 쪽으로 공격해 전면의 북한군 1사단을 격파한 뒤 미 1기병사단과 협조하면서 낙동강을 건너 상주로 진격하라”는 내용이었다.
9월 16일이 D데이, 시간은 오전 9시였다. 미 1기병사단은 적에게 잠시 내줬던 다부동을 향해 진격했다. 나는 좌측에 15연대, 우측에 11연대를 전개한 뒤 중간에는 12연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장마철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의 때, 천시(天時)는 당시 우리가 품었던 조급한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듯했다.
압도적인 공습력을 지닌 미군의 역량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미군 폭격기와 전투기 등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나설 수 없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게다가 가산 쪽으로 진출하려던 15연대와는 통신이 끊겨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착잡한 마음이 접어들었다.
그러나 미 8군의 초조감은 우리보다 더 했던 듯하다. 이튿날인 9월 17일에 이르러서도 전선은 뚫리지 않았다. 12연대는 공격에 나섰으나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11연대의 전선 역시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15연대는 통신이 끊긴 채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조차 짐작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작고 통통한 몸집, 사나운 불독을 연상시켰던 월턴 워커 장군이 우리 1사단 사령부를 찾아왔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뒤를 받치기 위한 링크업(rink-up) 작전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가 상륙작전에 일단 성공했으나 시급하게 후방을 받쳐주는 부대가 필요했던 도쿄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어떤 압박을 받았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워커 사령관의 훈수
당시 우리 1사단 사령부는 동촌 비행장 근처의 양조장 건물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워커는 사단 사령부에 들어선 뒤 나를 바라보면서 “제너럴 백, 당신 포트 레븐워스(미 참모대학)에서 공부했던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역시 한국 실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은 미국과의 군사교류 차원에서 학생을 유학시킨 적이 없었다. 나는 “유학을 가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워커는 “이런 상황에서는 바이패스(bypass) 전술을 써야 한다. 이해하겠는가? 적을 공격하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면 돌아가라는 얘기다. 어느 쪽으로 우회를 할 것인지는 귀관이 잘 알아서 판단해라. 뚫리지 않는 한 곳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으면 곤란하다”고 했다.
/아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을 시작하면서 주민들을 동원해 강을 건너기 위한 작업을 벌이는 모습.
전쟁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게 상식이다. 적을 꺾을 수 있는 모든 방도를 다 강구해야 한다. 워커는 그 점을 말하고 있었다. 공격을 퍼부어도 좀체 뚫리지 않는 곳에 집착하느니 적이 허점을 드러내는 곳을 찾아 공세를 펼쳐보라는 다그침이었다.
12연대를 맡고 있던 김점곤 연대장(중령)을 불렀다. 그에게 워커의 말을 전하면서 지금까지 노렸던 공격 지점을 다른 곳으로 옮겨보라고 지시했다. 그는 매우 민첩한 사람이었다. 두뇌 사고가 아주 유연했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뒤 곧장 우회 공격로를 찾아 나섰다.
이튿날에는 연대의 공로(攻路)를 모두 조정했다. 좌측 15연대는 가산 북쪽의 산자락을 따라가며 공격을 펼친 뒤 다부동으로 진격토록 했다. 11연대는 25번 국도를 따라 상장동으로 진격하고, 12연대는 신녕과 효령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5번 국도를 차단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18일에는 날씨가 말끔하게 개었다. 그에 따라 미 공군의 공격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아울러 마음속으로 가장 든든했던 대상은 우리가 미 1군단에 배속하면서 새로 증강한 미 10 고사포 여단의 화력이었다. 우리 1사단은 미군의 탁월한 공습력, 새로 증강한 고사포 여단의 화력 지원을 받으면서 활발하게 공격을 펼쳐나갔다.
15연대와 11연대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각자 우리가 변경한 새 공로상에 있던 고지를 차지하면서 적을 감제(瞰制)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두 연대의 공로가 작용했을 것이다. 마침내 김점곤 연대장으로부터 “전선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점곤 중령의 12연대는 전화를 걸어와 “현재 적의 방어선을 뚫고 다부동 북쪽 12㎞ 지점인 거매동까지 진출했다”고 알려왔다. 믿기 힘든 소식이어서 나는 거듭 “정말 거매동까지 진출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전선 자체를 뚫기 어려워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터였다. 일거에 12㎞를 북상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혈로를 뚫고 북상하다
전날 밤 김점곤 중령의 12연대는 효령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야간에 16㎞를 이동한 뒤 적 후방진지 깊숙한 곳에 수색대를 투입했다고 한다. 이어 그곳에 적의 병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 뒤 김점곤 중령은 미 10고사포여단에 탄막 사격을 부탁했다.
/소년병 출신 6.25 참전 용사들이 2005년 6월 23일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투 참전용사 명패석 앞에 헌화하는 모습./이재우 기자
쉬워 보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국군 작전 능력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확하게 거리를 측산(測算)해 전방에 미 포병화력의 탄막을 형성하는 일, 그러면서 아군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는 일 등이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가능한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김점곤 중령은 거뜬히 그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거매동에 진출한 12연대의 지휘소를 직접 찾아갔다. 김점곤 연대장은 내게 작전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자세히 설명했고, 나는 그런 김점곤 중령이 자랑스러워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워커 장군은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뚫었느냐?”고 물었다. 그로서는 우리 1사단을 찾아와 우회작전의 필요성을 잠시 언급했을 뿐인데, 바로 전선이 뚫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워커는 아주 격앙된 어조로 “정말 훌륭하다, 아주 잘 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속 작전도 중요했다. 적을 궁지로 몰기 위해서는 즉각 후속 조치를 취해야 했다. 15연대와 11연대를 호출해 동원 가능한 병력을 좌우로 이동시키면서 전방의 적을 몰아가도록 했다. 12연대가 저 멀리 12㎞를 북상하면서 적의 퇴로는 일단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적을 좌우로 협격(挾擊)하면 퇴로가 막힌 적은 급격히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였다. 15연대와 11연대가 움직이면서 적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왕좌왕하면서 적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다부동에서 북상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던 미 1기병사단도 기동을 할 수 있었다.
점(點)이 뚫리면서 적의 전면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큰 방죽을 뚫은 조그맣지만 거센 물줄기가 방죽 전체를 허물고 있었던 셈이다. 그것은 뚜렷한 세(勢)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 완강하다 싶을 정도로 버티던 적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힘찬 북진의 행로였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북진의 작전이 벌어졌다. 우리 1사단은 전선을 처음 뚫고 북진하는 대열의 앞장에 섰고, 좌측으로 인접한 미 1기병사단도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97 우리가 뚫은 혈로, 미군이 앞장서자 부하들은 "이럴 수 있느냐"면서 울분
(11) 전우야 잘 자라
쇠사슬에 묶인 북 기관총 사수
먼저 12연대장 김점곤 중령과 함께 둘러본 적의 점령지역은 참혹했다. 북한군 진지 여기저기에서 일어나 항복을 하는 기관총 사수들의 발목에는 한결같이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이미 죽어 엎어진 북한군 사병들의 발목에도 사슬이 둘러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길가 산에는 북한군의 시신이 잔뜩 쌓여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폭격으로 처참하게 헐벗은 산과 길 곳곳이 다 그런 모습이었다. 북한은 전선에 진출하는 장병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독전대(督戰隊)를 운영하면서 원래의 북한군과 남쪽에서 강제 징용한 사병들을 그렇듯 잔혹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북진(北進)의 길에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그럼에도 묘한 긴장감이 먼저 흘렀다. 혈로를 뚫고 북상한 우리 1사단의 12연대 덕분에 적은 퇴로가 막히면서 크게 흔들렸다. 아니, 그저 흔들린 정도가 아니었다. 이미 거센 물길에 밀린 둑처럼 무너지는 형국이었다.
가슴 벅찬 북진의 길에 올랐다. 미 1기병사단의 호버트 게이 소장은 북진하는 길의 한 삼거리에서 만났다. 상주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안동에서 대구를 향하는 길의 교차점이었다.
우리 1사단 병력으로는 최영희 대령이 이끌고 있던 15연대가 그곳에 당도했고, 미 1기병사단도 그곳을 거쳐 북진에 오르던 참이었다.
미 1기병사단의 사령부는 다부동을 적에게 내주면서 대구의 경마장으로 밀려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덧 모든 행장을 꾸리고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미 1기병사단은 앞에서 잠시 소개한 대로 맥아더의 지휘 아래 마닐라를 먼저 점령했고, 이어 맥아더가 진주하기 직전 도쿄에 선착(先着)한 부대였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평양이었다. 적의 심장부를 먼저 점령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 1기병사단의 구호는 “마닐라, 도쿄, 그리고 평양”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미군 함정과 상륙부대 등이 뭍에 올라선 모습.
미 1기병사단의 선두 점령 욕심은 그래서 남달랐다. 당시 호버트 게이 미 1기병사단 소장은 예하의 한 연대장이 진격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그를 경질했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전투력을 크게 증강한 777 연대전투단을 선두에 세워두고 야심차게 진격을 서두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디를 향해 그렇게 급히 나서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매우 자신에 찬 어조로 “서울에서 보자”고 말했다. 선두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이제 우리의 공로(攻路)가 직접 서울을 향하고 있으며, 머잖아 적의 수도인 평양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우선 기뻤다.
‘미군에 뒤지기 싫다’
그러나 내 마음 한 구석에 찾아드는 섭섭함도 적지 않았다. 북진의 혈로를 직접 뚫었던 우리 1사단을 뒤로 제쳐두고 다부동에서 적에게 10㎞를 밀렸던 미 1기병사단이 선두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당시 미 1군단은 휘하의 미 1기병사단과 미 24사단을 북진 공로의 선두로 세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이해했다. 그들은 우리 1사단에 비해 기동력이 탁월했고, 전투를 수행하는 장비와 화력에서도 뛰어났다. 그런 점을 고려해 신임 미 1군단장인 프랭크 밀번 장군이 그 둘을 선공(先攻) 부대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전장(戰場)에서나 전투를 수행하는 부대는 사기(士氣)를 바탕으로 싸움을 벌이는 법이다. 우리 1사단은 혹심했던 시련을 이기고 적의 3개 정예사단에 맞서 대구의 길목인 다부동을 지켰던 부대였다. 미군도 나름대로 분전을 했지만 하루 700~800명에 달하는 부대원의 희생을 무릅쓰고 적을 꺾은 우리의 사기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엉뚱한 명령으로 크게 마음이 상했다. 미 1군단의 명령은 “경북 군위로 진출해 잔적(殘敵)을 소탕한 뒤 공격 대열에 합류하라”는 내용이었다. 선두에 나서지 못할 뿐만 아니라 후방을 정리한 다음에 천천히 북상하라는 지시였다.
사단을 이끌고 있던 내 마음은 이미 불편해질 대로 불편해진 상태였다. 속으로 ‘우리도 할 수 있는데…’라는 푸념만이 거듭 쌓여가고 있었다. 사단 예하의 연대장들과 참모는 나보다 더 직접적으로 울분을 토로하고 있었다. 12연대장 김점곤 중령은 미 1군단 참모들과 아주 심한 말을 섞어가며 다퉜다고 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일찌감치 북진을 시작한 국군이 38선을 넘었다. 북진하는 국군과 격려하는 인파의 모습.
나는 그래도 부하들을 설득해야 했다. 12연대장에게 군위 일대의 잔적을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연대장은 내게 “적도 보이지 않는데 뭘 어떻게 소탕하라는 얘기냐”라면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른 연대장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작전을 위해 통제하는 ‘도로 우선권’을 먼저 타내 북진 길에 오르는 미군을 눈앞에서 그저 지켜보고 있어야 했던 부하들의 심정을 내가 모를 리는 없었다.
우리 1사단 사령부는 일단 가산~팔공산 일대에서 북진하면서도 당초의 전선이 있던 하양에 지휘소를 그대로 둔 상태였다. 그래도 차분하게 작전을 벌여야 했다. 우리는 상주에서 보은과 미원을 거쳐 약 1주일 동안 작전을 벌이며 길을 나아갔다. 골이 깊었던 속리산 일대에는 잔적이 조금 남아 저항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이 출몰하면 바로 소탕했다. 적은 후퇴 대열에서 낙오한 병력이라 저항이 변변치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곧 진압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남몰래 다녀온 청주
10월 1일 경인가 그랬다. 나는 잔적 소탕에 나선 본대를 뒤에 두고 사령부 지휘소를 떠났다. 사단 참모들과 휘하 연대장에게 기별도 하지 않은 채였다. 무장한 헌병 병력이 지프 한 대에 올라 타 내가 탄 지프를 수행하는 정도였다. 나는 상주를 거쳐 국도를 따라 청주까지 갔다.
우리보다 먼저 길을 떠난 미 1기병사단 덕분에 길을 오가는 데는 별 위험이 없었다. 그러나 산 깊은 곳에는 아직 후퇴 대열에서 낙오한 적군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따라서 안전한 이동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길을 나섰다. 선두에 서지 못하는 부대의 사령관 심정 때문이었다.
우선은 앞을 둘러본 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상황을 먼저 점검한 뒤 나름대로 복안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나를 믿고 다부동의 그 참혹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우리 1사단의 사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수가 떠오를 리는 없었다.
청주에 도착했다. 북한군 전선 사령관이었던 김책이 “조치원에서 도망 중”이라는 정보를 앞서 수색대로 길을 떠난 우리 1사단 공병 소대장에게 들었다. 나는 이미 그곳에 진출했던 미 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장 마셜 크롬베즈 대령에게 알려줬다. 그들은 내가 잡아준 조치원 역 일대의 좌표에 따라 포격을 벌였다.
/1950년 10월 북한 해안을 따라 도보로 북진하는 한국군.
조금만 서둘렀더라면 우리는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을 생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책은 요행히 북으로 빠져 나갔다. 조치원 일대에 머물렀다는 그의 행적은 우리로서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김책은 이듬해 1월 북한에서 사망했다.
미 1기병사단은 신나게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 경기도 오산으로 가서 인천으로 상륙한 미 7사단과 링크 업(rink-up)을 한다며 분위기가 한껏 오른 상태였다. 나는 길을 떠나는 그들을 보며 오히려 내가 왔던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청주에서 길을 떠난 나는 한밤중에 우리 1사단 사령부로 돌아왔다. 참모들은 내가 청주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군대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며 분투를 이어왔던 우리 1사단의 명예와 사기를 꺾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마음속으로 고민이 자꾸 깊어만 갔다.
우리 1사단 본대는 곧 청주에 도착했다. 사단 지휘소를 청주에 있던 충북도청에 차렸다. 다부동의 막바지 전투, ‘볼링장 엘리’의 격전을 치러냈던 존 마이켈리스 미 24사단 27연대장이 그곳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우리 1사단의 후방 작전을 맡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마이켈리스 대령이 반가워 우리는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우리 후방의 잔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1사단도 진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격 방향은 어디일까.’ 마이켈리스와 막걸리를 나누면서도 나는 그 생각에 깊이 빠져들기만 했다.
98 평양 탈환은 한국군이 앞에 서겠다" 미 1군단장을 설득해 작전명령서를 수정하다
(11) 전우야 잘 자거라
실망스런 작전명령서
마이켈리스 대령이 우리 1사단을 방문하고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미 1군단 사령부는 대전에 있었다. 우리 1사단의 사령부가 있던 청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그곳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10월 5일 쯤이었다. “군단 사령부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나는 당시 미 포병 여단에 있던 경비행기 한 대에 올라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지프로도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시간과 안전 등을 생각해 비행기로 날아갔다. 미 1군단 사령부는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간이 비행장에 내려 미군 장교에게 내 신분을 밝힌 뒤 지프를 한 대 빌려 타고 대전의 충남도청에 도착했다. 사령관 집무실은 2층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곧장 직행했다. 그러나 프랭크 밀번 군단장은 자리에 없었고, 대신 참모장인 밴 브런트 대령이 나를 맞았다.
그가 내게 불쑥 건넨 것은 작전 명령서였다. 매우 두툼했다. 얼른 봐도 200쪽이 넘는 분량의 두터운 문서였다. 브런트 참모장은 “미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과 24사단장 존 처치 소장, 영국군 27연대장 바실 코드 준장은 벌써 이곳에 들러 작전 명령서를 수령해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받아드는 작전 명령서였다.
나는 다급한 심정으로 그가 건넨 작전 명령서의 봉투를 열어 문서를 꺼내 읽었다. 우선은 평양 진공 계획이 작전 명령서의 핵심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아, 이제 평양으로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만감이 교차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벌어진 전쟁, 전세를 뒤엎은 우리가 이제 통일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맹렬한 공세를 물리친 국군이 북진 길에 나섰다.
명령서 앞부분 몇 장을 넘기자 우선 작전 지도가 눈에 띄었다. 점점 내 마음이 헝클어지고 있었다. 작전 지도는 경의선 축을 따라 평양으로 가는 부대로 미 1기병사단, 그 우익의 구화리와 시변리, 신계와 수안 등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부대를 미 24사단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1사단은?’이라는 생각으로 내 눈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눈에 들어온 국군 1사단 공격로는 평양을 향하지 않았다. 미 1기병사단의 좌익으로 나서서 황해도 내륙지방을 거쳐 진남포를 향해 진격하도록 짜여 있었다. 나는 서울을 향하는 진공로에서 미 1기병사단이 우리를 앞서 나가는 것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다음의 공격 목표인 평양을 지향하면서 우리가 빠진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대한민국 군대에 몸을 담고 있는 군인으로서, 다부동과 가산~팔공산 전투에서 온몸을 바쳐 싸운 국군 1사단의 사단장으로서 그런 명령을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었다.
분명히 작전 지휘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전선이 마구 무너지던 무렵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했고, 미 8군은 그에 따라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도(敵都)인 평양을 공격하는 데 우리 국군이 전혀 끼어들지 못하도록 한 명령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명령서를 바꿔 달라”
명령서를 한동안 훑어본 나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브런트 참모장을 주시했다. “군단장을 면담하고 싶다.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브런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알았을지 모르겠다. 그는 “감기가 걸려 지금 쉬고 있다. 만나기 어렵다”고만 말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반드시 전할 말이 있다. 어느 곳에 계신지만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브런트 참모장의 태도는 냉랭했다. 우물쭈물하면서 군단장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미 1군단에 배속해 있는 한국군 1사단장이 군단장을 만나는 것도 어렵냐”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제서야 브런트 참모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밀번 군단장과 직접 통화를 하는 눈치였다. 그는 “군단장이 도청 건물 앞 밴 차량에서 쉬고 있다. 지금 그곳으로 가보라”고 말해줬다. 나는 작전 명령서를 들고 집무실을 나와 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조그만 밴 차량이 눈에 띄었다. 지휘관이 이동할 때 사용하도록 간이침대 등이 있는 차량이었다. 나는 차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서 밀번 군단장이 일어나면서 반갑게 맞았다. 그는 우선 내 안부를 물으면서 “낙동강 전선 돌파를 지금에나마 축하한다”면서 침대 옆에 있던 위스키 병을 들어 한 잔 따라 내게 건넸다.
나도 준비한 ‘선물’이 있었다. 청주에 있던 우리 1사단 사령부를 떠나면서 챙겨온 소련제 권총이었다. 북한군 장교들이 휴대했던 것으로 전선의 사병들이 적으로부터 노획한 권총이었다. 밀번은 웃으면서 권총을 받았다. 용건을 꺼내기 전에 벌인 일종의 ‘의례(儀禮)’였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이 서울 외곽에 들어선 뒤 조심스레 공격을 펼치고 있다.
그 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방금 브런트 참모장으로부터 작전 명령서를 건네받아 읽었다. 적군의 수도인 평양을 공격하는 작전 지도에 우리 1사단이 빠져 있다. 평양을 공격하는 마당에 한국의 군대가 빠진다면 의미가 없지 않느냐? 내가 지휘하는 1사단이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해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밀번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했다. 이어 그는 “제너럴 백, 귀관의 사단에 있는 트럭이 전부 몇 대냐?”고 물었다. 나는 “모두를 합치면 100대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밀번은 “그 정도의 기동력으로 주공(主攻)에 나설 수는 없다. 미 1기병사단이나 24사단은 트럭이 1000대는 넘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평양을 공격하는 작전은 시간이 중요하다. 기동력이 좋은 미군 사단이 앞장서서 길을 열어야 한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시간을 다퉈 공격에 나서야 할 입장이다. 상황이 그러니 국군 1사단을 선두에 세울 수 없다. 그런 점을 이해하고 명령서대로 작전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경청할 줄 알았던 군단장
그럼에도 내게 할 말은 남아 있었다. 며칠 전 우리 1사단 본대를 놔두고 청주를 오가면서 내가 생각했던 게 있었다. 평양만큼은 우리 국군이 선봉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었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명분을 내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바가 있었다. 나는 밀번 군단장을 보면서 설득을 벌였다.
“나는 평양 출신이다. 어렸을 적 대동강 물에서 헤엄을 치며 자랐던 터라 어느 곳의 수심이 얕고 깊은지 다 안다. 이 땅에서 60년 전 벌어진 청일(淸日) 전쟁 때 일본군이 평양성을 지키던 청나라 군대를 어떻게 공격했는지도 훤히 알고 있다. 이 전쟁을 벌인 북한의 수도를 점령하는데 우리 국군이 앞장서지 못한다면 우리 국민에게도 면목이 서지 않는 법이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나 말은 다 맺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어느새 앞을 가리고 말았다. ‘고향 평양’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감정이 복받쳐 올랐던 듯했다.
밀번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는 앞에서 ‘내 군사 스승’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의 여러 면모를 따라 배우고자 했으면서도 내가 그로부터 받은 가장 큰 인상은 부하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한다는 점이었다. 그 때도 그랬다. 그는 잠자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해병대가 서울 진격 도중 김포 인근에서 붙잡은 북한군 포로.
나는 내친 김에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택한 공격로와 평양성 공격의 구체적인 방법을 언급했다. 그러자 밀번은 지도를 꺼냈다. 잠자코 지도를 들여다보던 밀번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어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제너럴 백, 좋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다.”
밀번 군단장은 이어 전화기를 들었다. 브런트 참모장을 호출하는 전화였다. 밀번은 전화기에 대고 “브런트 참모장, 24사단의 처치 장군 공격로와 한국군 1사단의 공격로를 서로 맞바꿔라”고 단호하게 지시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밀번은 나를 보면서 “작전 명령서를 수정할 것이다. 브런트 참모장과 다시 의논하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군단장이 있던 밴 차량을 빠져나와 나는 다시 도청의 2층으로 올라갔다. 군단장의 명령을 다시 받은 브런트 참모장의 표정은 떨떠름해 보였다. 작전이 다급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작성해 배포한 작전 명령서를 수정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단장의 명령은 이미 내려진 상황이었다. 브런트 참모장은 “사단으로 돌아가 있으면 새로 수정한 작전 명령서를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입장이 달랐다. “아니다, 수정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직접 받아서 가겠다”고 했다. 브런트는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해라”면서 곧 작전 명령서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99 "이제 평양으로 간다" 소식에 1사단 사령부는 금세 환호의 물결
(11) 전우야 잘 자거라
양보할 수 없던 선두
우리가 낙동강 전선을 딛고 일어서 북진을 시작한 뒤였을 게다. 그 이듬해인가 아니면 더 뒤인가는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 무렵 언젠가 대중적으로 많이 불리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전우야 잘 자라’는 노래다. 정식 군가(軍歌)는 아니었으나 대중적으로 많이 불렸던 이른바 ‘진중가요(陣中歌謠)’에 해당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이 같은 1절 뒤에는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등의 소절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크게 울렸던 노래다. 이어지는 2~4절에 등장하는 국군의 이동 경로도 추풍령, 노들강변, 38선으로 나온다. 노래에 등장하는 그 같은 국군의 이동로가 우리 1사단이 북진했던 행로와 거의 겹친다.
그 노래대로였다. 우리의 상황도 그랬고, 마음도 그랬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우리 전우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많은 전우의 희생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전진하고 또 전진해야 했다. 당장은 인천상륙작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상륙 아군과의 연계(rink-up)작전, 나아가 서울을 수복한 뒤 곧장 적의 수도인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떠나는 길의 뒤에는 처참하다 싶을 정도로 많았던 전우의 희생이 있었다. 그런 참담한 희생이 있었던 만큼 적에 맞서 싸워 끝내 분단 조국의 통일을 앞당기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아주 높았다. 전우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강하고도 굳은 신념이었다.
그 점은 우리의 사기(士氣)로도 충분히 나타났다. 일선의 연대장들은 잔적(殘敵)을 소탕하라는 내 지시에 “적이 보이지를 않는데 뭘 소탕하라는 것이냐”면서 반발을 할 정도였다. 공격의 대열에 앞장을 서겠다는 강한 신념으로 그들은 똘똘 뭉쳐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북진을 어떻게, 어느 위치에 서서 하느냐는 매우 중요했다.
미 1군단은 그런 국군 1사단의 강한 열망과는 상관없이 미군 1기병사단과 24단을 선두로 내세운 공격 방법을 확정했었다. 나는 우리 부대원 모두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미 1군단장을 설득해 결국 미 24단의 공로(攻路)를 우리 1사단의 것으로 가져왔다. 아주 다행이라면 큰 다행이었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 부대가 서울에 들어선 뒤 북한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고 있다.
나는 그날 밀번 군단장을 설득한 뒤 다시 밴 브런트 참모장을 만나 작전 명령서가 군단장의 지시대로 고쳐지는지를 확인했다. 구체적인 작업에는 내가 끼어들 소지가 없었다. 단지 밴 브런트 참모장이 군단 작전참모를 불러 군단장의 지시를 전하고, 그에 따라 작전 명령서를 수정하라고 말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명령서 수정하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작전 명령서를 수정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군대를 이동시키는 길의 사용권, 즉 ‘도로 우선권’부터 각 부대의 진행, 그에 따르는 수많은 보급의 문제 등을 모두 고치고 다듬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시간이 꽤 걸리고 있었다.
브런트는 집무실의 이곳저곳을 오가면서 작전 명령서 수정 작업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작전 참모는 자신의 방에 들어앉아 방대한 분량의 명령서 세부사항을 여러모로 점검하면서 다시 고치고 있었다. 나는 작전 참모의 방에 직접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저 군단장 집무실에 앉아 바쁘게 오가는 밴 브런트 참모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약 2시간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작전 명령서 수정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청 밖으로 나섰다. 간단하게나마 시장기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많은 것을 휩쓸어 가지만 사람이 살고자 하는 뜻마저 모두 꺾을 수는 없는 법이다.
도청 밖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북한군의 치하(治下)에 놓여 있다가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겨우 되찾은 곳이라는 점이 무색하게 식당들이 문을 열어놓고 벌써 장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한 음식점을 찾아 들어섰다. 전쟁 중이라지만 어엿하게 돈을 받고 국밥을 팔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국밥을 시켜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시라도 빨리 군단장을 설득해 수정한 명령서를 들고 사령부 지휘소로 복귀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군대의 사기를 생각했다. 영어로는 morale이라고 적는다.
무형(無形)의 커다란 자산(資産)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대의 사기가 꺾이면 전투를 제대로 치를 수 없는 노릇이다. 아주 많은 희생을 딛고 다부동을 지켜낸 뒤 북진의 혈로(血路)를 뚫었던 우리 1사단의 예하 장병들은 공격의 선두에 서는 것을 정말 갈망했다. 나는 다행히 부하의 말을 경청하는 지휘관 밀번 군단장을 만나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착잡한 심사도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과연 북진의 선두에 서서 평양에 선착함으로써 대한민국 군대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미군은 앞서 소개한 대로 당시 국군의 형편과는 하늘과 땅 차이에 해당하는 기동력과 화력,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미군과의 선두 경쟁에 나서야 할 판이었다. 평양을 지향하는 공로(攻路)는 우리 1사단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필리핀 마닐라에 이어 일본 도쿄(東京)에 먼저 입성함으로써 대단한 명예를 쌓았던 미 1기병사단이 맡았다. 그들은 “마닐라, 도쿄, 그리고 평양”이라는 구호까지 만들어 벌써 평양 선착(先着)에 관한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기쁨에 들떴던 사령부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지만 자신에 차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고 또 걸으면 미 1기병사단에 뒤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자신감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당시의 나는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어느덧 국밥을 다 먹은 상태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밴 브런트 참모장이 있는 충남도청 2층의 집무실을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밴 브런트 참모장은 내게 “수정한 내용의 명령서”라면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건넸다. 그 자리에서 확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군단장의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그에 따라 미 1군단 참모진은 명령서를 지시대로 수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군 전차에 올라타 북진길에 나선 국군 장병들. 낙동강에서 북진을 시작한 국군은 1950년 10월1일 38선을 돌파했다.
나는 지프에 올라타 간이 비행장으로 향했다. 밀번 군단장의 지시에 따라 우리 1사단에 배속해 함께 움직이고 있던 미 10 고사포 여단의 연락 비행기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향해 비행기가 솟구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는 청주에 도착했다.
나는 사단 참모들이 기다리는 충북 도청의 지휘소에 들어섰다. 그때야 내 손에 있던 명령서의 봉투를 열었다. 나는 우선 작전지도를 먼저 들여다봤다. 밀번 군단장의 지시대로 경의선 축을 따라 미 1기병사단, 그 우익으로는 구화리와 시변리 및 신계와 수안 등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부대로 우리 1사단을 확정한 그림이었다.
그 뒤는 나중에 살펴도 좋을 내용이었다. 나는 그 지도를 확인한 뒤 초미의 관심을 내보이고 있던 사단 참모들을 향해 “이제 우리는 평양으로 간다!”라고 외쳤다. 당시 사단 지휘소에는 참모들과 함께 기간 장병 및 호위 헌병대 병력까지 약 100여 명이 머무르고 있었다.
내 말을 듣자 사단 참모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 주변에 있던 장병들도 함께 소리를 높였다. “이제, 평양이다”라는 함성이 물결처럼 사단 지휘소가 있던 충북도청을 휩쓸었다. 선두에 서서 평양으로 내딛고자 했던 우리 1사단의 갈망은 그만큼 높고 깊었다. 사단 지휘소에는 그런 기쁨과 열정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는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선두의 경쟁에 나서야 하는 형국이었다. 우리 1사단, 나아가 우리 국군,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명예가 걸린 새로운 경쟁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우리는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도로 우선권’ 때문이었다. 미 1기병사단이 먼저 움직이고, 다음이 우리 차례였다. 국군 1사단 다음으로는 미 24사단이 움직이도록 순서가 매겨져 있었다. 우리는 그런 명령서에 따라 이틀을 청주에서 지체해야 했다. 이틀 동안 미 1기병사단이 길을 나서는 모습만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100. 100여 일만에 돌아온 서울, 가족의 안부를 묻고 또 길을 나섰다
(11) 전우야 잘 자거라
북한군에게 길을 물은 미군
평양 진공(進攻)을 위해 선두에 선 미 1기병사단의 이동은 빨랐다. 90㎜ 포를 장착한 신형 M-46 전차를 앞세워 경부 국도를 따라 거침없이 진군해 5일 만에 1기병사단의 선두는 오산에서 인천으로 상륙한 미 10군단과 연계할 수 있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구상한 인천상륙과 낙동강 전선 북상 작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으로써 이상한 현상도 벌어지곤 했다. 북한군이 아군의 선두에 뒤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북한군 본대의 후퇴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낙오 병력은 깊은 산 속으로 숨거나 허겁지겁 길을 되돌아 북상하고 있었다. 뛰어난 기동력을 지녔던 미 1기병사단의 선두 병력은 그들을 앞질러 북상했다.
명령에 맞추기 위해 1기병사단의 선두에 나서서 급히 북상했던 부대는 길을 가다가 북한군 병력을 만났어도 차분하게 적군을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시급했던 연계(rink-up)작전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그 뒤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잔적(殘敵)으로서 뚜렷한 공격 능력을 갖추지 못한 북한군을 일일이 섬멸할 틈이 없을 정도로 아군의 북진 작전 모두는 아주 신속하게 펼쳐졌다.
불과 5일 만에 미 1기병사단의 선두는 오산까지 북상하면서 적지 않은 에피소드를 남겼다고 한다. 이들이 9월 말 천안에 이르렀을 때 선두 부대를 지휘했던 미군 장교가 현지에 남아 후퇴를 서두르던 북한군 낙오병에게 “오산은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 북한군이 꽤 당황했을 듯하다.
밤중에 오산 인근에 도달한 미 1기병사단 선두 부대는 이들을 북한군으로 오인한 인천상륙 10군단 예하의 부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동안 맹렬한 공격을 퍼붓던 이 두 부대는 결국 전차에서 발사한 포격의 섬광 때문에 미군의 표시인 흰색 페인트의 별이 드러나자 그때야 서로 공격을 멈췄다고 한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낙동강으로부터 신속하게 이동한 미 1기병사단의 선두는 뭍으로 올라와 그들을 기다리던 미 10군단과 연계를 마칠 수 있었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의 일부는 9월 28일 드디어 수도 서울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후방의 10군단 본대는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힘차게 북상한 미 1기병사단과 연계했다. 그럼으로써 북한군은 후퇴로가 완연하게 끊기는 형국을 맞이했다.
/1950년 9월 서울에 진입한 미 해병의 전차가 북한군 포로를 이동시키고 있다.
북한군의 철저한 와해
그에 따라 북한군은 이미 공격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낙동강 전선에 모든 힘을 쏟아 부으면서 벌였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전쟁 전에 비축했던 역량은 거의 다 소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간헐적으로나마 이어갈 수 있었던 보급선 등이 미군의 공습에 이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완전히 끊어진 상황이었다.
후방에서 선두에 이어 북상하던 우리 국군 1사단은 물론이고, 국군 1~2군단 모두 잔적을 보이는 대로 소탕했다. 그러나 산속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는 북한군 후퇴병력은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면서 북진을 거듭해 적의 수도인 평양을 함락하고 압록강에 도달해야 했다.
미 1기병사단에게 ‘도로 우선권’이 있었다. 1기병사단 본대가 지나가기 전까지 우리 1사단은 청주에서 이동할 수 없었다. 거의 이틀 동안을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그저 북상하는 일이라고 단순하게 볼 수는 없었다. 1만 명이 넘는 부대의 이동 또한 엄연한 작전이었고 쉽지도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트럭이 충분하지 않았다. 겨우 150대에 이르는 트럭은 병력을 정해진 목적지에 실어 나른 뒤 곧장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나머지 병력을 또 싣고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도로 사정이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부족한 수량의 트럭으로 길을 갔다. 또 되돌아와 부대 병력을 또 실어 나르는 일이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꿈에 부풀어 길을 나섰다. 일사불란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 매우 한정적인 트럭을 빈틈없이 운용하면서 부대를 이동시켰다. 트럭이라는 고마운 운반 수단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병력도 아주 많았다. 그들은 밤을 낮 삼아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우리는 어느덧 한강에 도착했다. 청주를 떠난 지 이틀 만이었다. 미 1기병사단은 이미 그 강을 넘어섰다. 한강에 도착했지만 바로 건널 수는 없었다. 그 좁은 한강의 부교를 아무나 이용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아군 전체는 북상하고 있었으나 각종 필요에 따라 남쪽으로 강을 거꾸로 넘어 후방으로 가야 하는 병력도 적지 않았다.
부교는 그런 필요에 따라 일정하게 움직였다. 짜인 순서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는 병력이 부교를 사용할 때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는 병력은 그대로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점 때문에 한강 남안(南岸)에 도착했으면서도 우리는 바로 강을 넘어 서울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 차례가 왔다. 구급차 등 비상용 차량이 먼저 부교를 건너고 그 뒤를 이어 지휘관 차량이 다리를 건넜다. 내가 탄 지프도 구급차 등 비상용 차량의 뒤를 따라 부교 위를 지나쳐 서울에 이르렀다. 당시 인도교가 끊겨 부교는 여의도에서 마포 방향으로 놓은 상태였다.
/서울에 진입한 미 해병대원들이 전차와 함께 작전을 벌이고 있다.
100여 일만에 돌아온 서울 다시 밟은 서울의 땅-. 형용하기 어려운 감회가 밀어닥쳤다. 그러나 전선에 선 지휘관은 그런 감회에 젖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우리는 곧장 지금의 은평구로 향하는 길목의 녹번리 파출소에 사단 지휘소를 차렸다. 마포에서 녹번리로 이동하면서 본 서울은 폐허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서울에는 이미 여러 아군 부대가 들어와 있었다. 내 동생인 백인엽 17연대장도 이미 서울에 와 있었다. 그는 개전 초에 옹진반도에서 항전하다가 밀린 뒤 여러 곡절을 거쳐 인천상륙 작전 때 국군 부대로는 그 대열에 유일하게 참여해 서울로 진주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동생은 내가 이끌던 1사단에 비해 일찍 서울에 진입했던 셈이다. 인엽의 17연대는 서울 퇴계로의 한 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차려두고 있었다는 전갈을 들었다.
나는 잠시 틈을 내서 그곳으로 갔다. 전쟁이 벌어진 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동생의 얼굴을 보는 일, 그리고 내가 서울에 남겨두고 갔던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보다 서울에 일찍 들어왔던 동생은 다행히 어머니와 처, 그리고 딸의 생사를 확인했던 모양이었다.
동생은 “어머님과 형수, 그리고 조카 모두 잘 있다”는 말을 전했다. 서울 신당동에서 “북한군이 전면전을 벌였다”는 1사단 참모의 전화를 받고 길을 나선 지 100여 일에 이르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기 3년 전에 태어난 딸아이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국군 1사단장의 어머니와 아내라는 신분으로 적의 치하(治下)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러나 작전이 먼저였다. 나는 ‘그래, 가족의 안부라도 확인했으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동생을 짧게 만난 뒤 나는 녹번리의 사단 지휘소로 곧 돌아왔다. 하룻밤을 그곳에서 묵은 뒤 우리는 다음 예정지였던 임진강의 고랑포를 향해 길을 나섰다.
10월 10일 우리는 고랑포에 도착했다. 북한군이 전쟁을 벌이기 전 국군 1사단이 지키던 곳이었다. 옛 임지로 돌아온 감회도 남달랐다. 그러나 역시 작전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 1기병사단은 이곳을 벌써 지나쳐 북진하고 있었다. 국군 1군단은 더 일찌감치 38선을 넘어 원산에 도착한 상태였다.
전선의 전면적인 북상에서 뒤로 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간단없이 길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작은 ‘사건’이 하나 생겼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사단이 다른 아군 부대처럼 하염없이 뒤로 밀리던 시점에 각자 부대를 이탈했던 1사단 장교 약 50명이 부대를 찾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당시 한강 다리가 끊겨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먼저 강을 건넌 뒤 시흥,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지리산에서라도 다시 만나 적과 싸우기로 했었다. 그러나 후퇴 뒤 본대에 합류하지 못한 장교들이 문제였다. 뒤늦게나마 본대에 찾아와 합류를 요청하는 장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힘을 뭉쳐 싸우면 그만일까. 그러나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치 않았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101 미군은 의심과 우려 속에서도 결국 전차를 보내줬다
징계와 포용 사이의 고민
참모들을 불러 놓고 의견을 물었다. 적의 치하(治下)에 남아 있다가 지금 합류하려는 장교들을 받아들여야 하느냐에 관해서였다.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더 많은 수의 참모들이 이들을 징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적에게 밀리고 있을 때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본대(本隊)를 찾아 합류하는 게 군인의 사명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지당한 말이었다. 원칙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부 참모들은 이들을 용서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전시(戰時)라서 한 사람의 자원이라도 사단에 합류시켜 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상황을 볼 때 그런 의견이 틀리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참모들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들에게 미심쩍은 구석은 없지 않았다. 적의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 중 일부는 부역(附逆) 행위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다급하게 벌어지는 전쟁의 상황을 감안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참모들의 의견을 모두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원칙적으로 이들에게 일정한 징벌을 내려야 하는 점은 맞다. 그러나 상황이 다급하다. 한 사람의 힘이라도 끌어모아 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 게 지금 상황이다. 우리는 더구나 적의 수도인 평양을 공략하는 길에 나섰다. 이제 임진강에 왔다. 과거의 흉과 허물은 이곳에 모두 던지자. 그저 앞을 향해 함께 싸워나가자”는 내용이었다.
그 발언은 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전쟁은 살고 죽는 일을 결정하는 아주 중차대한 자리다. 아주 가파르다 싶을 정도로 벌어지는 전쟁의 상황에서는 실질(實質)을 먼저 따지는 게 매우 중요했다. 돌아온 장교들에게 분명히 허물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각자 힘이라도 끌어모아 우리 전체의 힘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참모들은 다행히 사단장인 내가 내린 결정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로써 개전 초반에 부대를 이탈했다가 본대에 뒤늦게야 합류한 장교들은 예전에 있던 자리, 또는 새로 배정받은 위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은 곧 북진 대열에 합류해 평양에 입성하는 과정, 그 뒤 중공군 참전으로 밀렸던 1.4 후퇴 등의 과정에서 고루 활약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의 일시적인 과오(過誤)를 만회하기 위해 이들은 열심히 자리를 지키면서 적을 맞아 싸웠다. 아무튼 그런 작은 곡절(曲折)을 거친 뒤 우리는 마음을 한 데 모아 북진을 이어가기로 했다. 10월 11일 경이었다. 나는 부대 전체 장병에게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명령을 내린 뒤 나는 직접 현장 각급 부대를 돌면서 진격 상황을 체크했다.
/미 해병 전차가 야간사격을 벌이고 있다.
“패튼 식 돌파가 필요하다”
꼬박 하루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북진 상황을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5㎞의 북상에 그쳤다. 앞으로 평양까지의 거리는 170㎞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하루에 5㎞를 북상하는 속도라면 평양에 도착하기까지에는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었다. 나는 속으로부터 긴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우리 1사단이 배속해 있던 미 1군단의 프랭크 밀번 군단장을 찾아가 “국군 1사단을 평양 주공(主攻)으로 설 수 있게 해달라”면서 이미 만들어진 작전 명령서를 고치도록 ‘생떼’까지 썼던 나였다. 그런 처지에서 하루에 5㎞를 북상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국군 전체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질 수 있었다.
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던 모양이다. 제 10 고사포 여단을 이끌고 우리 1사단을 지원하고 있던 윌리엄 헤닉 대령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정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평양 진공의 선두를 자신했는데 실제 추진해보니 하루에 5㎞ 전진하는 데 그쳤다. 생각만큼 잘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헤닉 대령은 내게 “사단장, ‘패튼 전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이라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헤닉은 “바로 그 점이다. 지금 한국군 1사단에게 필요한 전법은 패튼 장군의 진격 방식이다”고 말했다.
그런 지적은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우리 사정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전차 한 대조차 없었다. 그런 전차를 앞세우고 적진을 곧장 뚫고 가면 좋겠지만 우리 국군 1사단은 그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전차가 없는데 어떻게 패튼 장군의 전법을 동원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과감한 돌파 작전을 선보였던 조지 패튼 장군(왼쪽).
그러나 헤닉은 이런 소리를 했다. “사단장, 당신에 대한 평가가 지금 미군에서는 아주 좋다. 그 정도라면 군단장에게 직접 전차 지원을 요구해라. 군단장은 당신 말을 분명히 들어줄 가능성이 있다”는 귀띔이었다. 그렇다. 그 상황에서는 체면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헤닉은 한 수 더 떴다. 그는 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었다. 내 처지를 감안하고, 군단 전체의 작전 상황을 사려 깊게 따져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국군 1사단을 도와주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포병 여단에서 트럭은 100대 정도를 후원해 1사단의 이동을 돕겠다. 그러나 문제는 전면을 뚫고 나가는 전차다”라고 했다.
이어 그는 그 자리에서 테이블로 이동한 뒤 바로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군단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그는 교환원이 전화선을 접속하는 때를 이용해 내게 수화기를 건넸다. 표정에는 ‘군단장을 잘 설득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프랭크 밀번 군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솔직하게 말을 털어놓았다. “군단장, 이제 패튼 장군의 전법을 채택해 북진을 시도해야 하는데 전차가 우리에겐 한 대도 없다. 이를 해결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밀번은 이어 “제너럴 백, 당신 보전(步戰) 협동작전 경험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단장의 통역
보병(步兵)과 전차(戰車)의 협동작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런 경험이 내게 있을 수 없었다. 전차의 실제 모습을 6·25전쟁 개전 뒤 북한군이 몰고 온 T-34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었던 게 국군의 형편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없다. 하지만 지금 곧장 익혀서 바로 실전으로 활용하겠다”고 대답했다.
밀번은 부하에게 퍽 신뢰를 거는 장군이었다. 가급적 부하의 말을 경청하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그렇다면 잠시 기다려봐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전차는 무서운 무기이기는 하지만 보병 없이 홀로 작전에 나선다면 적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전차가 전진할 때 그 주변을 방어하며 따르는 보병의 호위를 받아야 강력한 무기로서의 진가(眞價)를 발휘할 수 있다. 전차와 보병의 호흡이 잘 맞아떨어져야 하는 일이다. 따라서 엄격한 훈련이 따라야 한다. 밀번은 그런 점을 우선 걱정했던 것이다. 당시 미 1군단은 전차 1개 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3개 중대 약 50대에 달하는 전차가 있었다. 이들은 군단에 배속한 미 1기병사단과 24사단, 그리고 국군 1사단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전차를 국군에게 잘 보내지 않았다. 아주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국군에게는 전차를 지원하지 않았다. 보전(步戰) 작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국군에게 섣불리 전차를 지원했다가 이를 몽땅 잃는 결과가 나올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밀번 군단장은 그런 우려를 딛고서 결국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말했다. “제너럴 백, 좋다. 당신 1사단에게 군단 전차 1개 중대를 보내겠다.” 이튿날이었다. 군단 소속 6전차대대의 C중대 전차부대가 우리 사단에 당도했다. 우리 사단 병력은 그런 전차가 부대 안으로 진입하는 광경을 보면서 사기가 치솟았다.
/6.25 전쟁 중 국군1사단을 지원하고 있는 미군 전차.
그러나 이들 전차와의 협동작전이 문제였다. 나는 현장에 서서 미군 전차 중대로부터 협동 작전의 개요를 들은 뒤 ‘통역’에 나섰다. 전차를 따라다니면서 미군 전차 부대원이 요구하는 작전 내용을 1사단 장병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반나절을 그렇게 사단 지휘소 마당에서 보냈다.
전차가 일으키는 굉음, 그로부터 밀려드는 흙먼지를 들이마시면서 마침내 목이 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작전의 요령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전달되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나를 대신해 일부 장교들이 나서서 작전 요령을 전파하고, 함께 뛰어다녔다.
102 “낮엔 호랑이, 밤에는 고양이”, 숙영하는 미군 두고 국군은 강행군
투지가 넘쳤던 국군
우리 한국군이 드러내는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전쟁을 겪으면서 체험한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여러 사람들은 ‘신바람’을 말한다. 전쟁 때도 우리 국군은 그런 면모를 보일 적이 적지 않았다. 위기에 강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김일성 군대의 초기 강력한 압박으로 우리가 낙동강 전선에 몰려 저항을 벌일 때가 그랬다. 위기에는 잘 뭉친다. 특히 우리 국군 1사단의 기간요원을 이뤘던 전라도 출신의 부사관들은 낙동강 전선 이남의 경상도 일원에서 모병한 신병들을 잘 이끌면서 훌륭히 적을 막아냈다.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질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1사단의 장병은 출신 지역과는 전혀 상관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런 힘은 아주 강력했다. 자신의 안위(安危)는 전혀 돌보지 않으면서 적을 맞아 고지를 오르고 또 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낙동강 전선에서 강력한 김일성 군대의 정예 3개 사단을 물리쳤다.
‘신바람’의 면모는 북진의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앞 회에서 소개한 대로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의 배려에 따라 막강한 미 1군단 전차대대의 1개 중대 병력이 우리 1사단을 지원코자 도착했고, 우리는 현장에서 즉석 보전(步戰) 협동작전을 익히면서 북진에 안간힘을 기울였다.
미군은 그런 우리의 분위기를 매우 신기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내가 직접 나서서 ‘통역’까지 하면서 당장에 전차와의 협동작전을 연습했고, 대원들은 신바람 속에서 훈련에 열중했다. 미 1군단 소속의 6전차대대 C중대와의 협동작전 연습은 오후에 들어서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우리 보병은 미군 전차와 서서히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전차가 의도하는 방향에 따라 대열을 맞추면서 함께 움직이는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매우 빠른 학습 능력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제 곧 작전을 벌여도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 식사를 하고 있는 국군 부사관의 모습.
1번 전차에 오르다
연습작전을 지켜보고 있던 미군 전차 중대장은 우리 1사단 장교들에게 “한국군의 적응 속도가 매우 빠르다”면서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후 시간이 더 흐르면서 이제는 완연한 보전 협동작전의 모습이 갖춰지고 있었다. 이제는 공격 대열을 움직여야 할 때였다. 오후 늦게 우리는 다시 평양을 향한 공로(攻路)에 올랐다. 미 10 고사포여단을 이끌고 우리를 지원하고 있던 윌리엄 헤닉 대령은 “이왕이면 사단장이 직접 1번 전차에 올라라. 패튼 장군이 그랬다. 1번 전차에 올라탄 채 공격을 지휘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우리 1사단의 수석 군사고문인 로버트 헤이즐레트(Robert T Hazlett) 대령은 나를 말렸다. “선두에 서서 진격하다가 사단장이 적의 반격에 직면할 수 있다. 위험하다. 그런 상황은 피하는 게 옳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 1사단에 온 뒤 아주 성실하게 우리의 작전을 뒷받침해주던 이였다. 그의 권유도 사실은 합당했다.
그러나 우리 1사단이 수행해야 할 작전의 최고 핵심은 평양 진격이었다. 미 1군단의 작전 명령서까지 수정하면서 우리를 공격 선두에 세워 달라고 했던 사정도 있었다. 우리 국군 전체의 명예까지 걸려 있는 작전이기도 했다. 따라서 나는 윌리엄 헤닉 대령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헤이즐레트 대령의 우려대로 적의 심장부를 향해 가는 길에 아직은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겠다는 각오를 하면서 1번 전차에 올랐다. 공격의 최전방에 나섰던 셈이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힘차게 평양 공격의 길에 올랐다. 1번 전차에 올라 전체의 보전 협동작전을 직접 지휘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아주 황급하게 보전 협동작전 연습을 벌였으니, 아직은 모든 게 서툴 수밖에 없었다. 1번 전차에 올라 대열을 내가 직접 이끌었던 까닭에 그런 미진한 점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이튿날 진격 속도를 따져보니 하루에 25㎞에 달했다. 최대한의 행군 속도는 아니었으나, 전차가 당도하기 전 5㎞에 불과했던 행군 속도보다는 괄목할 만한 진척이었다. 그러나 그에 만족할 상황이 아니었다. 불철주야(不撤晝夜), 밤을 낮으로 삼고 걷고 또 걸어야 했던 게 당시 우리 1사단의 사정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낮에는 용감하게 길을 나서 작전을 벌이던 미군은 아주 신기하게도 밤이 되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계와 장비, 막강한 화력(火力)을 바탕으로 큰 몸집을 구성해 상대를 힘으로 밀어내는 게 미군의 매우 두드러진 점이었다. 그들은 따라서 웬만해서는 밤에는 싸움에 나서지 않았다.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왔던 미 1군단 소속 전차중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거대하면서도 값비싼 첨단 무기인 전차를 이끌고 다니던 부대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밤이 오면 그들은 숙영(宿營)을 원했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또 늘 뜨거운 음식, 핫푸드(Hot food)를 원했다.
/뜨거운 음식을 즐겼던 미군이 칠면조 고기를 요리하고 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는 한국 노인의 표정이 이채롭다.
경마장 식 생중계
우리 입장에서 보면 속이 터지는 장면이었다. 전쟁 중에도 뜨거운 음식과 차가운 음식을 가리는 모습, 밤이면 “나는 이제 쉬어야겠다”라면서 잠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행동 등이 다 그랬다. 그러나 그런 미군을 압박하는 방도는 내게 없었다. 나는 그저 “시간이 없는데 꼭 쉬어야 하느냐?”면서 은근히 길을 재촉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미군 전차 중대장은 “사단장, 우리 사정도 이해하라. 미군은 낮이면 호랑이일지 몰라도, 밤이면 고양이로 변한다”며 내 요청을 거절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를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군대를 이루는 물질적이면서 정신적인 바탕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미군을 놔두고 가면서 “우리는 밤에도 행군한다. 내일 아침 길을 따라 우리에게 빨리 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어 우리는 밤을 낮 삼아 걸었다. 그러면서 행군의 속도는 줄이지 않았다. 우리가 보유한 트럭의 수는 미군 1기병사단의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런 부족한 트럭을 일정 구간에서 왕복하는 셔틀(shuttle) 방식으로 운영하면서 병력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트럭이 부족해 차에 몸을 싣지 못하는 병력이 훨씬 많았다. 밤을 낮 삼아 걷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부대원들은 걸으면서 늘 졸음에 빠진다.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았다. 나는 자주 두 대열이 길게 늘어선 도로 복판에 등장했다. 일부러 아주 높은 목소리로 “평양~!”을 외쳤다. 그러면 졸음에 빠진 채 길을 걷던 병력은 잠에서 깨 원기가 왕성한 목소리로 “평양~!”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우리는 밤길을 걷고 또 걸었다.
우리가 경기도 북부 지역을 지나 황해도 시변리에 들어선 때는 전차를 앞세우고 진격을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난 10월 12일 경이었다. 그로부터는 아주 긴장감 있는 속도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보다 일찌감치 길을 나선 미 1기병사단도 우리 국군 1사단의 진격속도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아군끼리의 경쟁이었으나, 이 또한 엄연한 경쟁이었다.
/105㎜ 야포를 견인한 채 전선으로 달리고 있는 미군과 트럭.
황해도 시변리를 지나면서는 미군 1기병사단과 자칫 총격전을 벌일 뻔한 적도 있었다. 우리의 진격로 앞에 미 1기병사단 일부 병력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전면에서 우회한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그 뒤를 쫓다가 우리의 ‘작전 구역’을 침범하고 말았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작전 구역을 넘어서면 아군끼리 교전(交戰)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다행히 그런 상황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미군 병력은 급히 방향을 돌려 우리 작전 구역에서 벗어났다. 1번 전차에 올라타고서 계속 길을 갔다. 하늘에는 아주 작은 몸집의 경비행기인 ‘모스키토(mosquito)’가 떠다니고 있었다. 작전 상황을 체크하는 비행기였다. 미 고문관은 내게 “지금 저 비행기들은 우리의 작전 상황을 중계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마치 경마장의 주행 코스를 어느 말이 먼저 달리고 있는지 알리는 해설 요원의 역할이라는 얘기였다. 그만큼 미 8군과 내가 배속한 미 1군단은 선두 경쟁에서 어느 부대가 앞장을 서는지 초미의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평양과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미군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낮에는 호랑이, 그러나 밤에는 고양이”라면서 밤길 나서는 일에 주저하던 미군도 이제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103 “한국군 1사단 평양 선착할 듯”에 전차 전부 몰고 합세한 미군 대대장
(12) 이제 평양이다
한국군 응원한 미군
미군은 어찌 보면 우리와는 여러모로 다른 군대다. 적을 맞아 싸우는 점에서야 다를 바 없었지만, 사람들이 뭉쳐 이룬 집단으로서 드러내는 특징이 몇 개 있다. 정실(情實)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 중의 하나다. 미군이라서 미군의 편을 들지만은 않는다는 얘기다. 평양을 향해 줄기차게 북진하던 그 무렵의 한 에피소드가 그랬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대로 우리 국군 1사단의 북진 속도와 평양을 향해 함께 다른 하나의 주공(主攻) 길에 나섰던 미 1기병사단의 속도는 당시 미군 지휘부는 물론이고 일선 부대 사이에서도 큰 화제였다.
‘한국군과 미군 중 어느 주공 부대가 평양에 선착할까?’에 관한 호기심이자 관심이었다. 월튼 워커 장군이 이끄는 미 8군 사령부, 우리 국군 1사단이 배속해 평양 공격의 선두에 섰던 미 1군단이 우선 그랬다. 그들은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펼치는 공격로 상공에 앞서 말한 대로 아주 작은 몸집의 모스키토 경비행기를 띄웠다. 상공에서 한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중 어느 누가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가에 관한 정황을 관측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의 공격 진척도는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미 8군 사령부와 미 1군단 사령부에 알려진 상황이었다. 우리 1사단에도 윌리엄 헤닉 대령이 이끄는 미 10 고사포 여단이 지원을 위해 와있었다. 이들은 미군을 응원하지 않았다. 제가 임시로 배속해 있던 한국군 1사단의 열렬한 팬에 해당했다. 윌리엄 헤닉 대령은 내 곁에 늘 붙어 있다시피 하면서 온갖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은 야전의 군인답게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작전이 펼쳐지는 모든 상황에서 그는 제 경험을 내게 들려주면서 “반드시 평양에 먼저 닿아야 한다”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다 과감한 진격(進擊)을 위해 내가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장군에게 요청해 우리를 지원코자 현장에 와있던 6전차대대 C중대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경험이 부족한 한국군 지원을 꺼렸으나 서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그들 또한 우리 1사단의 열성적인 지원부대로 변하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선두 경쟁에서 우리 1사단의 속도가 더 붙어가던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6전차대대의 대대장 존 그로든(John Growden) 중령이 나머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우리 1사단을 직접 찾아왔다. 그는 대뜸 “우리도 한국군 1사단과 함께 싸우러 왔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공에 떠다니던 경비행기 모스키토의 ‘생중계’ 때문이었다. 한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의 선두경쟁을 지켜보다가 한국군 1사단의 평양 선착 가능성이 보다 더 크다는 점을 눈여겨봤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먼저 평양에 닿을 것으로 보이는 부대에 ‘줄’을 대고자 했다는 얘기다.
/6.25 전쟁 중 적진을 향해 수색작전을 벌이는 미군 전차 부대.
갑자기 나타난 미 전차대대장
군공(軍功)에 관한 문제였다. 전쟁터에 나선 군인은 명예와 훈공(勳功)을 탐내기 마련이다. 평양에 먼저 도착할 부대 뒤에 섰다가 함께 목적지에 도달함으로써 ‘평양 첫 탈환’의 공적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야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전차 자체가 없어 급히 미 1군단장 밀번 장군에게 요청해 ‘억지 춘향’ 식으로 전차 중대 1개를 지원받은 게 고작이었던 우리 1사단의 형편으로는 그야말로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1사단의 전차 대수는 급작스럽게 50대 수준에 이르렀다.
병력 1만 5000명, 군단이 보유했던 전차대대, 원래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을 방어했던 미 10 고사포여단이 떠받치고 있던 우리 1사단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거칠 게 없는 듯한 강력한 기세로 평양을 향해 전진할 수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닥칠 수 있는 재앙에 대비하라는 교훈을 담은 말이다. 그로든 대대장의 합류로 힘을 얻은 우리 1사단의 앞길에 고비가 나타났다. 나는 여전히 1번 전차에 올라탄 채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황해도 시변리를 한참 지나서 북진하던 무렵이었다. 그때 길의 굽이가 보였다.
내가 올라탄 1번 전차는 기세 좋게 앞으로 향하면서 길의 굽이를 돌다가 급히 멈춰 서야 했다. 길의 커브가 끝나는 곳으로부터 북한군의 T-34 전차가 여러 대 줄을 지어 서 있었던 것이다. 서로를 처음 발견한 상태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차 부대원들도 우리처럼 깜짝 놀랐던 듯하다.
위기였다. 양쪽 모두 자칫 잘못 대처할 경우 상대의 전차에서 날아온 포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나는 전투의 경험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서 왜 밤길을 밝히는 밝은 별처럼 빛을 발하는지 그때 지켜볼 수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1번 전차의 중대장은 나를 향해 “빨리 전차 밑으로 뛰어 내려가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의 말대로 급히 전차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어 길 밑에 몸을 숙인 뒤 다음에 벌어질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미군은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역전(歷戰)의 부대였다. 1번 전차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뒤를 따라오던 미군 전차는 모두 해치를 닫고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길 양쪽 옆으로 산개(散開)하기 시작했다. 전면에 있던 북한군 전차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미군 전차가 포격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숨 막혔던 전차전
북한군 전차는 약 10여 대 정도에 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번 전차를 비롯한 미군 선두 대열의 전차도 그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길 양쪽 옆으로 산개한 미군의 전차가 훨씬 빨랐다. 미군 전차는 길 양쪽으로 산개하고 바로 사격을 시작했다. 한참 동안 미군 전차의 사격이 이어졌다. 북한군 전차의 대응은 거의 없었다. 길 양쪽의 미군 전차부대는 신속하게 교차 사격을 벌였다. 눈 깜짝할 새라고는 할 수 없었어도 매우 이른 시간에 양쪽 전차의 조우전(遭遇戰)은 쉽게 결말이 나고 말았다.
북한군 전차 모두는 곧 화염에 휩싸였다. 미군은 길 양쪽으로 급히 산개하면서도 적의 전차를 정확하게 사격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역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련함의 승리였다.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게 무엇일까. 나는 속으로 미군의 전투 경험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은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잠시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가 미군 전차부대에 의해 무너진 북한군 전차부대는 북한 수뇌부가 우리의 평양 진격을 마지막으로 막아보기 위해 서둘러 남진(南進)시킨 부대로 보였다. 그들의 최후 저지선을 돌파하고 나서는 거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1사단의 진군은 속도가 더 붙기 시작했다. 길에는 북한군 저항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10월 14일에는 신계를 지났고, 사흘이 흐르고 드디어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에 도착했다. 이제 평양이 곧 눈앞에 나타나는 지점이었다. 길이 갈라지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우선 멈췄다. 사단의 모든 연대가 지금까지는 함께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격했다. 공로(攻路)를 세분화해야 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평양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공격로를 펼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15연대를 강동(江東) 방면으로 우회하도록 했다. 대동강 북쪽 모란봉 지역을 향해 진격하면 강의 수심(水深)이 낮아 쉽게 강을 건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부대 전체를 어떻게 전개(展開)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평양은 적도(敵都), 따라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그곳의 반격(反擊)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10월 18일 저녁 무렵에 우리는 평양 남쪽 15㎞ 지점인 지동리에 이르렀다.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공격 일선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를 다시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11, 12연대장과 사단 참모, 미군 고문관, 미 10 고사포여단 헤닉 대령, 미군 전차부대 지휘관들이 길가의 민가(民家)로 모였다.
그러나 일선 작전 부대의 전개 방식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전쟁터에 선 군인들은 대개 선두(先頭)에 서고자 한다. 특히 일정한 규모 이상의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의 경우가 그렇다. 누구를 선두로 세울 것인가-. 그 상위(上位)의 지휘관은 항상 그런 고민에 빠진다. 그때의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04 북한군 포로 앞세워 평양 길목에 놓인 지뢰를 제거하다
(12) 이제 평양이다
막바지 역할 분담 확정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11연대장 김동빈 대령이었다. 그는 이제껏 벌인 북진 공격에서 항상 12연대에 밀렸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12연대의 김점곤 연대장은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과 연합군을 통틀어 최초로 북진의 혈로(血路)를 뚫었던 주인공이었다.
그 이후의 서울 진입, 임진강 이후의 북진 진공로에서 12연대는 늘 앞장을 섰다. 11연대장 김동빈 대령은 그 점이 불만이었다. 그는 평양을 목전에 둔 마지막 작전회의에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앞장서게 해달라”는 주장을 펼쳤다. 나름대로 그의 주장은 이유가 있었다. 군공(軍功)을 다툴 수밖에 없는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1사단이 평양 진격의 선두에 나섰다는 점을 확인하고 나머지 2개 전차중대를 이끌고 대열에 합류했던 미 1군단 6전차대대 존 그로든 중령은 그에 반대했다. “지금까지 호흡을 맞춰왔던 12연대와 함께 진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이유를 댔다. 그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었다. 전쟁터에서 장수가 지금껏 타고 다녔던 말(馬)을 갈아타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미 10고사포 여단장 윌리엄 헤닉 대령이 갑자기 화를 벌컥 냈다. 그는 그로든 중령을 향해 “입 닥쳐(Shut up)!”라고 높은 소리로 꾸짖은 뒤 “지금의 전쟁계획은 육군 보병을 위주로 펼쳐진다. 다른 병과는 보병을 보조하는 일이 기본이다. 나서지 마라”고 준엄하게 야단을 쳤다. 헤닉은 그로든 중령의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 교관이었다고 했다.
헤닉은 당시 웨스트포인트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쳤고, 생도였던 그로든 중령은 그로부터 스페인어를 배운 사이였다. 원칙을 들이대면서 꾸중을 하는 과거의 교관에게 그로든 중령은 한 마디도 대꾸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장면은 어색했지만 어쨌든 헤닉이 나서서 그로든 중령을 꾸짖는 바람에 김동빈 11연대장도 제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 어려운 분위기로 변했다. 그러나 나는 김동빈 대령의 11연대에게도 기회를 주기로 했다. 선봉에 나서는 대신 우측의 사동 방향으로 돌아 평양 비행장을 점령하는 목표를 안겼다.
그는 그로써 12연대의 뒤를 따라다니는 형국을 모면할 수 있었다. 사동 방향으로 우회해 평양 비행장을 공격하는 작전도 선두의 12연대에 못지않은 중요한 임무이기도 했다. 그로써 평양을 목전에 둔 마지막 작전회의는 끝을 맺었다. 로버트 헤이즐레트 미 군사고문은 그러나 회의 말미에 “사령관이 1번 전차에 탑승해 선두에 나서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했다.
/미 해병이 야간에 적진을 향해 포격을 벌이고 있다.
전화로 들은 북한군 붕괴
평양을 눈앞에 둔 마지막 공격이 벌어졌다. 10월 18일 밤이었다. 우리의 공격도 치열했지만 적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수도를 내줄 수 없다는 결의에서 총력을 기울여 저항을 펼치고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관문인 지동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으나 별로 진전이 없었다. 100문에 달하는 미 10 고사포 여단의 야포들이 밤새 공격을 펼쳤다. 적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그렇게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면서 날이 밝았다. 지동리에서 북상하면 평양으로 들어서는 매우 넓은 벌판이 펼쳐진다. 우리 부대는 조금씩 그쪽 벌판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적의 저항이 많이 줄어들었다.
벌판에는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었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자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드넓은 벌판을 바라보면서 미군 전차병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싸우기 좋은 곳”이라며 그곳을 ‘탱크 컨트리(tank country)’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지나온 산과 협곡의 좁고 험했던 이동로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그들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선두에는 미 1군단의 6전차대대 50대의 전차가 서 있었고, 그 뒤로는 미 10 고사포여단의 막강한 야포와 박격포 부대가 따랐다. 우리 1사단의 2개 연대는 동서로 길게 횡대(橫隊)를 지어 벌판을 가로지를 태세였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는 그런 넓은 벌판에 막강한 병력을 이끌고 고향인 평양을 되찾으러 가는 내 감회를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다.
약 5년 전 주머니에 500원을 넣고 부랴부랴 평양을 떠났던 나였다. 대한민국 군문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뒤 김일성의 남침으로 낙동강 전선에 밀렸던 위기의 순간이 떠올랐다. 힘겹게 다부동 전투를 치른 뒤 가까스로 북진의 길에 올랐던 일들도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경계를 게을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적은 벌판 곳곳에 진지(陣地)를 구축한 상황이었다. 지동리 관문은 내줬지만 그 이후의 상황전개에 대비해 벌판 여러 곳의 조금 높은 지형에 토치카 등을 만들고 저항을 벌이는 상태였다.
그들 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들고 있었다. 사동이라는 곳에 접근하면서는 적의 사격이 한층 도를 더했다. 기관총탄과 박격포탄도 날아들었다. 그러면 아군은 기세 좋게 응전(應戰)을 벌였다. 북한군으로서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뒷심이 아주 떨어지는 듯했다. 적은 아군의 응전에 계속 밀렸다. 그러면서 우리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서도 소개한 장면은 그때 벌어졌다. 사동에서 적의 저항을 만나 이곳저곳에서 아군의 응전이 벌어지며 북한군 일부가 후퇴를 하던 무렵이었다. 윤혁표 사단 통신참모가 내게 급히 달려왔다. “적군 통신선을 하나 잡아서 평양의 인민군 총사령부 교환대를 호출했습니다. 제가 평양 사투리를 몰라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평양 출신인 내가 직접 인민군 총사령부 교환원과 통신을 해보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가 건네주는 전화기를 받았다. 이어 평양 사투리로 그에게 물었다. “동무, 지금 어떤 상황인가?”라고 물었다. 전화선의 건너편 교환원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미 제국주의자들이 땅크 수백 대를 몰고 쳐들어온다”고 말했다.
/미군이 화염방사기로 북한군 진지를 공격하고 있다.
지뢰밭을 넘으려면
나는 내친김에 “김일성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고 또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지금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도 지금 가야 한다”고 했다. 전화를 끊으려는 그에게 내가 다시 한마디 했다. “그래도 최후까지 저항하면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후퇴해서 우리도 살아야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평양은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우리가 평양을 향해 다가서기 훨씬 전에 그곳을 떠난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그는 평양의 군대에 “최후까지 사수하라”면서 평양을 떠났고, 뒤에 그를 알게 된 군인들이 다시 황급하게 평양을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로써는 알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나중에 기록을 통해 이해한 사실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난 뒤 나는 사동 일대의 북한군 저항도 곧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고 판단했다. 후방인 평양이 그토록 다급하게 무너지는 상황이라면 전선에 선 병력도 줄기차게 저항을 펼칠 수 없는 법이다. 예상대로였다. 사동 일대의 북한군은 곧 등을 보이면서 후퇴했고 우리는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추을이라는 곳을 지날 때는 위험스러운 장면도 벌어졌다. 적은 후퇴하면서도 가끔 반격을 시도했다. 추을을 지날 때 적의 기관총탄과 박격포탄이 내가 지나는 곳에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얼른 전차에서 뛰어내린 뒤 길가 도랑에 엎드리면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미군 전차는 재빠르게 해치를 닫고 그곳으로 응사했다. 적은 곧 물러났다.
그러나 다른 위험 하나가 도사리고 있었다. 북한군이 길에 뿌려놓은 지뢰였다. 당시 북한군은 나무로 만든 박스에 폭약을 넣어 지뢰를 만들었다. 따라서 미군의 지뢰 탐지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전차에 올라탄 사람은 문제가 없었으나 길을 걷는 보병이나 트럭 또는 지프 차에게는 상당한 위협이었다. 북진 길에는 많은 북한군 패잔병이 눈에 띄었다. 일일이 다 잡아들일 수 없을 만큼 자주 보였다. 우리가 지동리를 지나 사동을 거칠 무렵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잡아들여 지뢰를 제거할 수는 없을까? 우리 1사단은 그런 점에 착안했다.
그래서 북한군 패잔병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벌써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군복을 벗지 못한 장병 등 모습이 다양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지뢰를 제거토록 했다. 그들은 지뢰를 매설한 지점을 잘 알았다. 일종의 ‘진풍경’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지뢰 제거 작업에 나섰다. 국군과 미군에게 지뢰 매설 지점을 정확하게 알려주면 아군이 그를 하나씩 제거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105 드디어 평양 선착, 대동강 철교 앞은 박수와 환호로 가득
(12) 이제 평양이다
미군이 만든 환영 피켓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지금 평양을 향하는 길목에서 과연 선두에 서 있을까라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와 선두의 경쟁을 벌이는 미 1기병사단은 지금 어디를 통과했을까. 전투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터라 사실 미 1기병사단의 위치가 그렇게 궁금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군이 “탱크 컨트리(Tank country)”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던 평양의 길목을 지나면서는 그에 생각이 미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미군과의 경쟁이었다. 그 역시 싸움 아닐까.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선두 경쟁에서 이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군 공지(空地) 연락장교를 불렀다. “지금 우리가 미 1기병사단의 앞에 서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즉시 공중에 떠다니고 있던 모스키토 정찰기와 교신을 시도했다. 그는 “미 1기병사단은 지금 중화리 지역을 통과하고 있다”고 얘기해줬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선두에 서 있는 셈이었다. 속으로 ‘우리가 먼저 도착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1번 전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예전처럼 지프로 갈아타고서 움직였다. 저 멀리 대동강이 보였다. 긴 철교가 눈에 들어왔다. 내 고향 선교리였다. 우리가 작전상 닿는 지점은 그곳 선교리였다. 누가 먼저 선교리에 도착하느냐에 따라 평양 입성의 승부가 갈리는 것으로 정해진 터였다.
그 순간 폭발음이 들렸다. 내 뒤의 지프에 올라타고서 따라오던 석주암 참모장의 지프가 지뢰를 밟았던 것이다. 차는 뒤집혔다. 석주암 대령이 크게 다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앞을 지났는데도 지뢰를 밟지 않았으나 그의 차는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집혀진 그의 차량을 살피고, 병력을 움직여 그를 후방으로 실어 날랐다. 이어 지프에 올라타고 대동강 철교를 향해 이동했다. 나에 앞서 먼저 도착한 미군 전차병들이 길 양쪽을 에워싸고 목표지점에 도착하는 우리 1사단 지휘부 행렬을 반겨줬다.
미군 전차병들은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적을 몰아내고 적도(敵都)에 먼저 닿았다는 자부심이 보였다. 아울러 함께 대열을 형성하며 도착한 한국군 1사단에 대한 성원(聲援)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대형 피켓을 들고 있었다. ‘Welcome 1st Cav. Division-from 1st ROK Division Paik(환영 미 1기병사단, 한국군 1사단 백)’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선두로 도착했다고 해도 미 1기병사단의 체면을 너무 짓밟는 듯하다. 피켓을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무슨 말이냐? 엄연한 경쟁에서 이겼다. 우리도 한국군 1사단인 셈이다. 승리를 축하해야 한다”고 했다.
/백선엽 국군 1사단장의 뒤를 따르던 석주암 당시 참모장의 차량이 북한군 매설 지뢰를 밟아 전복해 있다.
30분 뒤 도착한 미 1기병사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승리의 기쁨에 흥분한 상태였다. 일체감을 이룬 그들에게 내가 뭐라고 더 말할 내용은 없었다. 국적과 인종을 건너뛰어 한국군 1사단과 강렬한 동질감을 표시하는 그런 미군이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50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선착하는 기록을 남겼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멀리서 미 장성이 탄 지프 행렬이 보였다. 우리가 배속한 미 1군단의 군단장 프랭크 밀번 장군의 대열이었다.
그는 지프에서 내려 내게 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면서 말을 건네는 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와 동행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특사 자격으로 보낸 로우(Low) 소장이었다. 전쟁에서 적의 수도를 점령하는 일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런 감격스런 장면을 직접 보고 상세한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
평양 초입의 선교리 로터리는 완연한 축제 분위기였다. 밤을 낮 삼아 걷고 또 걸어 미군의 빠른 기동력을 앞질렀던 국군 1사단 장병의 기쁨이야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격 그 자체였다. 미군도 로터리에 도착하는 대로 서로 얼싸 안고 악수를 건네면서 기쁨에 겨워하는 모습이었다. 본격적인 행사는 그 뒤에 벌어졌다. 밀번 군단장 일행이 선교리 로터리에 도착한 뒤 다시 15분 정도 흘렀다. 선두에 호바트 게이 미 1기병사단장이 탄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담담하게 차에서 내렸다. 밀번 군단장의 지시로 야트막한 단(壇) 하나가 금세 만들어졌다.
아군의 평양 점령을 축하하는 의식이 벌어졌다. 밀번 군단장은 우선 나와 게이 소장을 불러 단에 오르게 했다. 밀번 군단장의 뜻에 따라나와 게이 소장은 악수했다.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한국군 1사단 장병, 그에 배속한 미군 10 고사포여단과 6전차대대 장병, 뒤이어 도착한 미 1기병사단의 장병이 뿜어내는 소리였다.
로터리 일대는 그런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뒤덮였다. 모두 기뻐하고 있었지만 미 1기병사단장 게이 장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선두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의 1기병사단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필리핀 마닐라, 일본의 도쿄(東京)에 먼저 선착하는 부대의 전통으로 평양에 첫 입성(入城)한다는 확신에 차서 길을 내달았던 사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 감회에 젖었다. 1945년 12월 월남(越南)을 감행하면서 떠났던 고향 선교리로 5년 만에 돌아온 순간이었다. 휘하 1만 5000명의 막강한 한미 연합군을 이끌고서 말이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3남매를 데리고 평양에서 살다가 생활이 힘에 겨워 우리와 함께 세상을 하직고자 대동강 물에 몸을 던지려 했던 어머니의 생각도 났다.
/평양 선착을 눈앞에 둔 백선엽 1사단장이 미군 군사고문과 구수회의를 하고 있다.
어머니 생각도 잠시
이제 대동강을 넘어 평양을 거쳐 청천강, 최종 목표인 압록강에 도달하면 우리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마친 뒤 국토를 온전케 하는 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다. 감회가 감회로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는 시절이었다. 간단하게 의식을 마친 뒤 나는 제 자리를 찾았다. 평양에 들어서기 전에 각 연대의 임무를 분담토록 한 게 작전상 주효했다. 평양은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가 선교리에 도착한 시간에 1사단 11연대는 평양 서부비행장을 점령했다. 이어 그들은 평양 시내로 곧장 진격했다.
강동(江東) 방면으로 우회토록 한 15연대도 작전을 잘 펼쳤다. 그곳은 대동강 상류에 해당해 수심이 얕았다. 도섭(渡涉)이 훨씬 용이했던 터라 진격이 빨랐다. 그들은 곧장 모란봉 일대로 치고 들어갔다. 아울러 평양의 한복판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전적(戰績)을 올렸다. 평양에 남아 있던 적은 그래서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평양 초입에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당도했고, 북쪽에서는 국군 1사단 11연대, 동북쪽에서는 1사단 15연대가 밀려와 아군의 협격(挾擊)에 몸을 드러낸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당초 선교리의 대동강 유역(流域) 건너편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곳으로 넘어오는 국군과 미군의 주력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군 1사단 11, 15연대가 후방에서 협격을 하자 진지를 버리고 쉽게 도망치고 말았다.
밀번 군단장은 내게 다가와 “어떻게 그런 공격로를 구상했느냐?”면서 신기해했다. 나는 “예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곳이 내 고향이고, 어렸을 적부터 나는 대동강에서 자라 어느 곳의 수심이 깊고 얕은지를 잘 알았다”고 했다. 아울러 청일(淸日) 전쟁 때 평양을 지키는 청나라 군대를 일본군이 어떻게 공략했는지도 일찌감치 살폈다는 점을 말해줬다. 그는 연신 “아주 잘했다, 정말 잘했다”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평양 첫 입성의 기록을 남긴 선교리 도착 직전의 백선엽 사단장 모습이다.
이제는 평양을 평정(平定)하는 일이 남아있다. 시내에서는 시가전(市街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도망을 치지 않은 북한군 잔존 병력이 시내 곳곳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군들이 신속히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대신할 부교(浮橋) 설치작업에 나선 정황을 살폈다. 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다리를 만들어냈다.
우리 1사단은 선교리 초등학교에 사단 본부를 설치했다. 고무보트를 동원해 그 위에 목판(木板)을 깔아 만들었던 부교 위로 아군 병력이 강을 건넜다. 강 북안(北岸)에는 강동으로 우회했던 1사단 15연대 병력이 벌써 도착한 상태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펼쳐졌다.
106 까만색 저고리와 치마 입은 평양기생, “노동당 간부는 나쁜 X들”
(12) 이제 평양이다
7사단 8연대도 평양 진입
선교리에 도착한 뒤였다. 저녁 무렵에 들어서던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동강을 건너는 아군 주력을 지켜보다가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7사단 8연대장 김용주 대령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지금 우리 부대도 평양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이냐? 작전구역이 아닌데 어떻게 들어왔단 말이냐?”고 거듭 물었다. 그는 자세한 경위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군단 작전지역에 예고 없이 들어서면 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다”면서 경위를 캐물었지만 그는 시원스럽게 털어놓지를 않았다.
나중에 벌어진 일이지만 국군 7사단도 “우리가 평양 선착 부대”라고 선전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실은 한국군이 미군에 평양 선두 입성을 빼앗길까 저어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염려가 작용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상징적인 평양 선두 입성의 기록을 미군에게 내주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듯하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일권 장군에게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미군에 앞서 입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던 것이다. 정일권 총장은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이 배속해 있던 평양 주공 병력인 미 1군단 서쪽에서 북한의 중부 내륙지역을 향해 진공 중이던 국군 2군단에 “평양에 어떻게 해서든 먼저 진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에 따라 평양에 진격한 부대가 위에서 말한 국군 7사단의 8연대였다. 북진 길에서 미군보다 출발이 늦었던 국군이었고, 병력을 옮기는 수송능력에서도 미군보다 한참 뒤떨어진 국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만큼은 놓칠 수 없다고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뭐라고 탓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정해진 작전구역이 아닌 곳에 아군이 출현하면 아주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일은 다시 벌어져서는 곤란했다. 공을 다투다가 잘못하면 장병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다행히 7사단 8연대와 교전이 벌어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교리 초등학교 바로 옆에는 내가 살던 집이 그대로 있었다. 마침 그곳 학교에 사단본부를 설치한 김에 나는 내가 살던 집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다시 만감이 교차했다. 북녘에 두고 왔던 누나의 안부에도 생각이 미쳤다. 나는 살던 집 이웃들을 만나 누이의 안부를 물었다. 시집을 간 누이는 전쟁이 난 뒤 평양 교외로 옮겨 가 잘 지내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평양과 교외 지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국군이 선무작업을 벌이는 모습
5년 만에 찾아온 옛집
황혼 무렵이었다. 차량 대열이 사단본부가 있던 선교리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갑자기 밀려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프랭크 밀번 군단장이었다. 그는 나를 불러 그의 앞으로 오게 하더니 불쑥 훈장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어 훈장 수여식이 열렸다. 간단한 의식이었다. 내가 손에 받아든 것은 ‘은성(銀星) 무공훈장’이었다. 매우 영예로운 미군의 포상(褒賞)이었다. 밀번 군단장은 평양 선두 탈환의 명예를 나와 국군 1사단에게 걸어준 것이었다.
그렇게 날은 저물었다. 우리의 다음 작전은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을 향하면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우선은 평양 북쪽의 숙천과 순천 일대에 대규모 공중강습 작전이 벌어진다고 했다. 미군의 공정사단이 벌이는 그런 작전 또한 인천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켰던 작전처럼 후방을 받쳐주는 연계(link-up) 작전이 필요했다.
그 연계작전을 우리 1사단이 맡았다. 공중에서 강습부대를 낙하시켜 적의 퇴로를 끊음으로써 보다 큰 규모의 적군 전투력 상실(喪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길을 또 부지런히 가야 했다. 미군 공정대의 공중강습에는 다른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적의 후퇴로를 끊으면서 그들에게 붙잡혀 북으로 끌려간 남한 인사들을 구출하는 일이었다.
도시는 늘 장병을 유혹하는 법이다. 우리가 평양 선두 탈환의 명예로운 공적을 쌓으면서 도착한 지점이 당시로써는 한반도 제2의 도시라고 할 수 있었던 평양이었다. 야전(野戰)을 누비면서 험난한 길을 걸었던 장병이 도시에 닿으면 마음이 풀리는 법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당시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은 당시의 기억 하나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선교리를 넘어 평양에 들어선 뒤 부하들의 채근에 시달렸다고 한다. “평양 기생이 아주 유명하니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 번 들러보자”는 주문이었다는 것이다.
험로(險路)를 걷고 또 걸어 평양을 선두로 탈환한 마당이었다. 부하들의 그런 부탁을 모른 척하고만 있기에는 조금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점곤 연대장은 부하 몇몇과 함께 평양 기생집을 찾았다고 한다. 평양에는 원래 기생집이 몰려 있던 곳이 하나 둘 있다.
김점곤 연대장은 그 중의 한 곳에 들렀던 모양이다. 예상 밖으로 기생집이 버젓이 운영 중이었다고 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한 노동당의 간부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예전만큼 장사할 수는 없었지만 노동당 간부들이 단골로 찾아오면서 운영을 멈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김점곤 연대장은 그때 여러 가지를 살폈다. 우선 기생들이 한결같이 검은색 치마와 저고리에 버선 또한 까만색을 입거나 신고 있었다. 아울러 화장도 진하게 하지 못한 상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잠자코 있던 기생들이 술을 한두 잔 마신 뒤에는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라면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시가전을 벌이다 붙잡힌 북한군 포로들이 이송되고 있다.
평양기생의 넋두리
김점곤 연대장 일행은 그런 점이 궁금해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기생들은 “일반인들은 출입하지 못하게 우리더러 검은색 한복으로 입은 채 장사를 하도록 했고, 화장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했다. 더 괘씸한 점은 노동당 간부들이 외상으로 술을 먹고서는 돈을 떼먹기 일쑤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구한말,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평양 기생은 아주 유명했다. 미모도 미모지만, 기생으로서의 엄격한 훈련과정을 거쳐 쌓는 음악과 가무(歌舞) 등의 수준이 아주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평양 기생이 이름을 드날린 진짜 강점(强點)이 하나 있다. ‘아주 지독할 정도로 계산에 밝다’는 점이었다. 장삿속이 아주 철저해 남에게 돈 떼먹히는 일은 거의 없으며, 악착같다고 할 수 있는 장사수완으로 돈을 잘 버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평양의 기생에게 외상을 적어놓고 돈을 생으로 떼먹다시피 했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결국 대한민국 적화까지 벌이려 남침했던 노동당 간부들의 진면목이었던 셈이다.
김점곤 연대장은 나중에 그런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잇속에는 밝기 그지없던 평양기생의 등을 처먹는 사람들이 바로 북한 노동당의 공산주의였다”면서 말이다. 그들 일행은 오랜만에 차린 음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한다. 제대로 차린 음식을 좀체 맛보지 못했던 평양의 기생들이 왕성하게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는 광경을 자리에서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집에서 대동강 푸른 물을 오가며 뛰어놀던 무렵의 어린 시절을 아련히 회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이면 일찍 길을 떠나 숙천 일대의 공중에서 낙하하는 미군 공정대의 뒤를 받쳐줘야 했다. 그래서 우선은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아침 일찍 나는 미군이 깔아놓았던 부교를 건너 평양 시내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그때 미군 2사단 소속으로 어깨에 ‘인디언 헤드’ 마크를 부착한 미군 중령이 나를 찾아왔다. 약 100명 정도에 이르는 부하를 이끌고서였다. 그는 내게 “GHQ(미군 극동군사령부) 소속 문서 수집반에 있다. 이제 평양 시가지에 들어가 적군 수뇌부 등이 남긴 문서를 수집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왔다. 사령관께서 우리가 시가지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달라”고 했다.
/평양시내에 진입한 국군이 막바지 작전 마무리에 나서고 있다.
미군은 그렇듯 치밀했다. 적들이 남기고 간 대량의 문서를 수집하기 위해 벌써 그렇게 일찍 평양에 도착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그들은 내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평양 시가지를 향해 들어갔다. 그들은 나에 앞서 강을 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GHQ의 문서 수집반은 평양 시내의 공공건물 등을 다니면서 수많은 문서를 확보했다.
강을 건너자 김일성의 집무실 사정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전쟁을 벌인 자, 수많은 살상의 피와 눈물을 이 땅에 몰고 온 자의 사무실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수대 인민위원회라는 건물에 그의 사무실이 있었다. 나는 지프에 올라타 그곳으로 향했다
107 왠지 모를 불안감이 찾아들었던 청천강을 넘어가다
(13) 청천강을 건너며
평양형무소에는 시신이 가득
만수대 인민위원회라는 건물에 들어 있던 김일성의 집무실은 황급히 빠져나간 그곳 방주인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지러이 흩어진 집기류, 서랍이 열린 책상, 비스듬하게 걸려 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 등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기는 하지만, 김일성은 매우 황급히 평양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평양을 사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려놓고서다. 그를 믿고 평양을 지키던 북한군 수비대는 우리 국군과 미군이 시내로 진입하자 단발마적인 저항을 잠시 펼치고는 역시 그 뒤를 따라 황망하게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 사람이 이 땅에 가혹한 전쟁을 일으킨 주인공인가….’라는 생각에 빠져 나는 그곳에 서서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한동안 생각했다.
오래 머물 일은 없었다. 그저 적의 수괴(首魁) 김일성이 어느 자리에 앉아 어떻게 생활한 인물인가가 우선 궁금했다. 나는 곧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어 도착한 곳이 평양형무소였다. 그곳은 처참했다. 미처 데리고 가기 어려웠던 반공적 성향의 사람들을 모두 그곳에서 학살하고 그들은 도망쳤다.
/평양에 남은 국군 장병이 평양 시민들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벌이는 모습이다.
형무소 우물에는 그런 시신이 가득했다. 마당에도 여기저기에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아주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북한군이 남침을 벌인 뒤 남녘에서 강제로 끌고 왔던 유명한 사람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확인할 여유는 내게 전혀 없었다. 곧 평양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요인들이 방문하면서 그에 대한 준비도 필요했다. 15연대를 이끌었던 최영희 연대장이 “요인들 방문에 대비한 일을 맡겠다”면서 후방인 평양에 있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군 트럭은 쉼 없이 북으로 향했다가는 곧 짐칸 가득 북한군 포로를 싣고 내려왔다. 길에는 전의(戰意)를 잃은 북한군 포로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들은 적지 않은 수가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아군이 당도하면 순순히 손을 들고 나와 말없이 트럭에 올라탔다. 민가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던 도중에 그곳 주변에 도착한 아군을 보고 황급히 도망치는 북한군 패잔병도 많았다.
미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시에 따라 평양 북방 56㎞ 지점인 숙천, 그리고 평양 서북방 60㎞ 지점인 순천에 대규모 공습강하 부대를 투하할 계획이었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그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국군 1사단이 맡은 상태였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길을 가야 했다.
숙천 일대의 공수작전
맥아더 장군이 펼치는 과감한 공중강습 작전이었다. 이로써 북한군에게 끌려가는 미군 등 연합군 포로, 국군 장병, 남쪽의 피랍 민간인들을 구출한다는 계획이었다. 우리가 미리 정했던 지점인 숙천과 순천의 남쪽 지역에 도달할 무렵에 수많은 미군 수송기들이 굉음을 울리며 하늘을 지나갔다. 곧이어 비행기에서 공정대원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곧 셀 수 없이 많은 낙하산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로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던 장관(壯觀)이었다. 미군의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작전의 규모이기도 했다. 당시로써는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들어보니 당시의 숙천과 순천 공중강습 작전은 세계의 전사(戰史)에 적힐 만한 내용이었다고 했다.
당시의 강습 작전에는 공정대원 4000여 명을 동원했다. 아울러 90㎜ 대전차포와 105㎜ 야포 17문, 포탄 1000여 발을 떨어뜨렸다. 특히 105㎜ 야포를 낙하산으로 내려 보낸 일이 세계적으로는 처음이라고 했다. 지상(地上)에는 국군과 미군 및 연합군이 이끌고 왔던 야포들이 즐비했다.
그럼에도 미군은 105㎜ 야포를 낙하산으로 강하시키는 시험을 해봤던 것이다. 미군은 그렇게 열심히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 당면한 적을 무너뜨리는 과감하면서도 강력한 공격을 펼치면서 한편으로는 제 나름대로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테스트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평양 북방 숙천과 순천 일대에서 미군 수송기로부터 공수대원들이 낙하하고 있다.
나는 새카맣게 몰려온 미군의 수송기에서 점점이 흩어져 뛰어내리면서 펼쳐지는 낙하산, 그리고 심지어는 대포까지 낙하산에 매달아 지상으로 내려 보내는 미군의 대규모 공중강습 작전을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시 빠졌다. 미군의 힘이 우선 느껴졌고, 현대전에서는 풍부한 국력을 바탕으로 물자와 장비, 화력, 병력을 일순간에 필요한 곳으로 급거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는 점을 새삼 절감했다.
처음 든 생각은 아니었으나 숙천 상공을 바라보면서 그 깊이가 더해졌다. 그럼에도 당시 맥아더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펼쳐진 공중강습 작전은 원래 상정(想定)했던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3800여 명에 달하는 북한군 포로를 잡았으나 선두에 서서 도망을 쳤던 북한군 수뇌부의 퇴로를 끊어 그들을 잡아들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청천강을 넘어 훨씬 북쪽으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도쿄의 맥아더 유엔군 사령부는 당초 평양 북쪽에서 청천강 일대에 북한군이 약 1만5000명 정도 남아 있을 것으로 보고 공중강습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병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무튼 이 작전으로 인해 아군이 평양을 넘어 더 북쪽으로 진격하는 길은 활짝 열렸던 셈이다. 서해안과 서북쪽의 지역에서는 특히 그랬다.
공중에서 낙하한 미 공정부대의 뒤를 받쳐주는 임무는 12연대에 일임한 상태였다. 연대를 이끌던 김점곤 대령은 아주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시간을 맞출 줄 알았으며, 공격에 나서면 늘 과감했다. 아울러 모든 작전에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평양 진격 때에도 그를 선두에 나서게 했던 이유였다. 그는 이번에도 제시간에 맞춰 일을 틀림없이 수행했다.
평양을 떠난 뒤의 첫 작전은 그렇게 잘 마무리했다. 우리의 다음 임무는 안주(安州)를 거쳐 운산(雲山)을 지나 압록강의 수풍호(水豊湖)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미 24사단이 신의주(新義州)에 닿고, 동북 지역에서 아군이 다시 두만강에 이르면 우리는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서늘한 물빛의 청천강
가슴이 벅차오를 수 있는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변수(變數)의 연속이다. 그 변수가 눈앞에 나타날 경우 방심(放心)을 스스로 허용한 사람은 커다란 낭패에 직면하는 법이다. 나는 꿈에 부풀어 올라 흥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아가고자 했다. 곧이어 우리 눈앞에 나타날 강이 청천강이었다.
이 강을 경계로 그 북쪽과 남쪽의 지형적 차이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천강 이북은 구릉(丘陵)으로 이어지다가 곧 험한 산세(山勢)를 드러내는 산맥이 펼쳐진다. 묘향산맥과 적유령 산맥 등이 켜켜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지형이다.
청천강이 바다로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안주(安州)는 옛 지명이 그렇듯이 우리의 인상만큼 평안했던 곳은 아니다. 옛 지명에 편안하다는 뜻의 안(安)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으면 그곳은 군대 주둔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군대의 주둔지가 아니라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곳에 세워진 전방 요새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국군 1사단이 1950년 10월 말 나무 다리 위를 지나 청천강을 건너고 있다.
청천강 경계를 동쪽으로 죽 이어서 그으면 원산의 북쪽에 안변(安邊)이라는 곳이 나타난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평안해서 지어진 지명이 아니다. 안주와 마찬가지로 전방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아주 큰 군사 기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안주와 안변을 잇는 이 라인은 전통적으로 한반도 거주민이 북방의 침입을 맞을 때 경계선을 형성했던 곳의 하나다.
이곳은 한반도 북부의 지형이 크게 좁아지는 곳이다. 최북단의 압록강과 두만강이 펼치는 우리 국경의 넓이는 이곳 안주~안변, 즉 평양~원산의 라인에서 크게 좁아진다. 적을 막으려는 방자(防者)의 입장에서는 아주 유리한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곳이다.
청천강은 그 북단에 속했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늘 신의주~평양~서울~대전~대구~부산의 축선을 중심으로 승패가 갈리는 점을 감안하면 청천강을 넘어설 때 우리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전략적 사고가 필요했다. 당시의 나는 아직 젊었다.
나이만 서른에 불과한 군인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지형 전체를 감안한 전략적 사고를 하기에는 불충분했다. 그럼에도 나는 1사단을 이끌고 1950년 10월 말 청천강을 넘어설 때 뭔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청천강 물빛은 그때 유난히 서늘했다.
108 “먼 남쪽에서 이동해 왔다", 첫 중공군 포로 말에 가슴 철렁
(13) 청천강을 건너며
전쟁이 남긴 지명들
우리가 진군(進軍)하는 곳의 1차 주둔지는 영변(寧邊)이었다. 그곳에 사령부를 차려놓은 뒤 작전을 전개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영변이나 동부 해안선에 있는 안변(安邊), 서부의 안주(安州)는 마찬가지의 인문적 속성(屬性)을 지닌 땅이다. 해당 지역을 안전하고 평안하게 지키자는 뜻이다.
이를테면, ‘평화를 지키자’는 뜻의 이름을 지닌 영변 역시 이 땅에 침입하는 외부의 군대를 맞아 싸우는 땅이었던 셈이다.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사람의 생각이 크게 엇갈리지 않는 한 비슷한 장소, 비슷한 지형에서 벌어지게 마련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적을 맞아 싸우는 장소로서 늘 비슷한 곳을 선택한다. 그러니 앞 회에서 설명했듯이 서쪽으로는 안주(安州), 동쪽으로는 안변(安邊), 그리고 청천강을 북으로 넘는 곳에 영변이 싸움과 전쟁이라는 주제를 땅 이름에 간직한 채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곳 영변 말고도 같은 성격의 이름을 지닌 땅이 또 있었다.
군우리(軍隅里)였다. 군우리는 영변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지나면 나오는 땅이다. 구름이 많이 끼어서 붙은 이름이겠지만, 금광(金鑛)으로 유명한 운산(雲山)에 붙어 있는 곳이다. 군우리라는 이름은 직접 군(軍)이라는 글자를 지니고 있다. 다음 글자인 우(隅)는 ‘모퉁이’라는 뜻이 우선이기는 하지만, 특정할 수 있는 사람과 집단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군대가 모여 있는 곳, 그런 성질을 드러내는 지명이 바로 군우리다. 그러니 그곳 또한 예로부터 북방에서 밀려오는 적군을 맞이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1950년 10월 말, 우리 1사단은 그렇게 예로부터 싸움이 늘 벌어졌던 영변과 군우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군문(軍門)에 몸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늘 사람이 벌여온 전쟁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을 위해 전기(戰技)를 연마해 언젠가는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서야 하는 사람이 군인이다. 그러니 내 생각은 늘 싸움이 도졌던 옛 전쟁터에 가서 닿았다.
/1950년 당시의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회의 석상에서 발언하고 있다.
평양을 넘고 청천강을 건너 다시 압록강을 향할 때 내 느낌은 불안하기만 했다. 예로부터 싸움이 크게 벌어졌던 지역으로 진군을 하는 상황이었으니 더 그랬다. 지명(地名)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소개할 것이 있다. 바로 적유령(狄踰嶺)이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대개 한반도를 동서남북으로 지나가는 산맥 이름의 하나로만 그를 알고 있다.
“되X들이 왔습니다”
‘적유령’은 오랑캐(狄)가 넘어오는(踰) 고개(嶺)라는 뜻의 이름이다. 북쪽에서 마구잡이 살상(殺傷)을 벌였던 오랑캐를 두고 한반도 사람들은 그를 보통 ‘되X’이라고 불렀다.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평화와 안정을 깨고 싸움을 벌여왔던 사람들에 대한 우리식의 비칭(卑稱)이다.
적유령은 한반도 서북부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산맥의 고유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땅에 흔한 보통의 명사이기도 했다. 의정부를 지나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의 고개도 한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벽제관을 비롯해 북방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몇 개의 길목에도 그런 이름이 붙었다. 순 우리말로 하자면 ‘되너미 고개’다.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를 그런 식으로 불렀던 것이다. 청천강을 건너 우리가 마주쳐야 했던 북쪽의 적유령 산맥은 다른 한반도 북부 산맥이 그렇듯 험준한 지형이다. 산이 높고 험악해서 협곡의 지형이 매우 발달한 곳이다. 따라서 그곳을 지나 북쪽으로 진군하는 우리에게는 이동하는 길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동로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행군(行軍)만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청천강을 건넌 뒤 영변에 도착하던 무렵에야 나는 그 많은 생각을 다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참담한 혈전(血戰)을 치르고 난 뒤 퍽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든 생각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 매우 불안했다. 고래(古來)의 격전(激戰)이 늘 벌어졌던 곳으로 우리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야 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영변 농업학교에 사단 지휘소를 차렸다. 청천강을 건너면서 들었던 불안감은 더 짙게 다가와 있었다. 사단 지휘소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내 눈에 들어왔던 당시 영변의 하늘은 그저 적막하기만 했다. 하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길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프에 올라타 영변 농업학교를 향해 가면서도 그 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왜 사람들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일까’ 등의 생각 때문이었다. 길 앞 먼 곳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점차 다가가면서 그들이 현지에 사는 두 노인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들 앞에 차를 멈추도록 했다. 그리고는 두 노인 앞에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길을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없느냐?”고 했다. 그러자 두 노인은 “되X들이 왔다. 다니는 것을 봤다”고 알려줬다. 나는 내 불안감의 원천(源泉)이 무엇인지를 그때 처음 명료하게 알 수 있었다. 어느 한순간부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안감은 바로 중공군(中共軍)의 존재였다. 당시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헤아릴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 전쟁을 총괄하면서 이끌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도쿄 유엔군 총사령부는 그 가능성을 아주 낮게 보고 있기도 했다.
/마오쩌둥(오른쪽)과 중국군 원수 주더가 참전을 위해 떠나는 중공군 병사들을 사열하고 있다.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다 나 역시 청천강을 넘으면서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은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않았다. 작전 명령은 시시각각 닥쳤고, 그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나는 온 힘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전명령에 따라 움직이면서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정성을 기울이는 일이 내 직무였다. 그럼에도 머리 뒤끝을 잡아당기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아주 막연한 불안감이어서 나는 그 실체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영변으로 들어서면서 길에서 만난 두 노인이 해 준 한 마디는 막연한 내 불안감을 아주 생생하게 드러내 주고 말았다.
나는 눈이 번쩍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섬광처럼 내 눈을 깊이 찌르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영변의 사령부 지휘소에서 나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전쟁은 아주 많고 다양한 가능성에 모두 대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불안감에 익숙해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불안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또 살펴야 했다. 영변 농업학교의 사령부에서 나는 부대 전면의 수색을 강화키로 했다. 앞에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무엇이 그 안에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영변의 북쪽으로는 운산이 있다. 구름이 자주 끼어 붙은 이름이리라고 생각했다. 구름은 비를 내려 이 땅을 적시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밝은 해를 가리는 이미지도 있다. 어둡고 음습한 느낌도 준다. 운산은 영변처럼 고요했다. 적막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러나 구름이 건네는 느낌처럼 그 속에는 무엇인가가 잔뜩 웅크린 채 숨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가운데의 어느 날이었다. 부대 전면에서 작전을 펼쳤던 수색대로부터 신호가 왔다. 전면에 적이 출몰했고, 소규모의 접전이 벌어졌으며, 도망치던 적을 생포했다는 전갈이었다. 보고는 붙잡힌 상대가 어느 군대의 어느 소속인지가 불분명하다고 했다. 나는 그들을 긴급히 후송하라고 했다. 이제 구름이 잔뜩 낀 산, 운산에 숨어 있던 상대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김일성의 군대가 떨어뜨리고 간 패잔의 병력일까, 아니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던 불안감의 실체일까. 그 점이 너무 궁금했다.
11연대 수색대가 급히 사령부로 보내온 포로 두 명이 사령부 지휘소 경내로 들어섰다. 두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데리고 온 부하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중공군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주군관학교에서 나는 중국어를 배운 적이 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동생 부걸(溥杰)이 내 중국어 교사였다. 청나라 황실의 가장 표준적인 현대 중국어를 배운 셈이었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중국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중공군들이 출정식을 벌이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중국어로 물었다. “당신, 어디에서 왔느냐?” 겁을 다소 집어먹은 듯한 그 중공군 사병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하이난(海南)에서 왔다.” ‘하이난이라, 하이난….’ 순간 나는 아찔했다. 하이난이라는 곳은 중국 최남단의 섬이다. 그곳에서 이동했다는 이 중공군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가슴이 철렁거리며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109 중공군의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돌아온 미군의 전차
(13) 청천강을 넘으며
중공군 포로 심문
중공군이라고 통칭했던 당시의 중국 군대는 역사적인 생성 과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끌었던 공산당은 중국을 석권하고 말았다. 그 전에 중국 대륙을 주름잡았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는 패권을 공산당에게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 간 상태였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의 군대는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뒤 새로 편성한 부대였다. 그 속에는 자연스레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시절 그 밑에서 활동했던 국부군(國府軍)이 상당수 섞여 들어갔다. 원래부터 공산당에 속했던 팔로군(八路軍)이나 그 다른 명칭인 홍군(紅軍)에 비해 국부군 소속이었던 성원이 오히려 더 많았다고 볼 수 있었다.
내가 심문한 포로는 “하이난(海南)으로부터 이동해 왔다”고 말했다. 지금은 정확한 기억이 없지만, 당시 그 포로는 자신이 원래는 국민당 군대 소속이었다고 얼핏 말했던 듯하다. 내가 놀랐던 이유는 그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이 맞닿은 만주지역의 접경으로부터 아주 먼 곳인 하이난에서 이동해 왔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부대의 이동은 생각보다 그리 간단치가 않다.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맨몸이 아닌 장비와 무기를 지니고 이동해야 하는 이유에서다. 따라서 많은 운반수단이 뒤를 따라야 하고, 일반 교통수단의 이동을 제한할 수도 있다. 아울러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한다. 군대의 편제와 무기 또는 장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부녀자들이 참전 중공군에게 입힐 누비옷을 만들고 있다.
중국 대륙 최남단의 섬인 하이난에서 그가 이동했다는 사실은 조직적이면서 치밀한 체계성이 뒤를 받쳐줘야 가능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 눈앞에 나타났던 중공군은 중국 대륙의 군대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었다. 두툼한 카키색 군복을 입고 있다는 점도 내 우려를 한층 더 자극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군복은 솜으로 안을 채워 누빈 동복(冬服)이었다. 겉은 카키색이었으나 속은 하얀색이었다. 평소에는 카키색으로 입고 다니다가 눈이 내릴 경우 위장(僞裝)을 위해 거꾸로 뒤집어 입을 수 있도록 만든 옷이었다. 이미 가을의 한복판을 훌쩍 넘어선 무렵이었다. 한반도 북부는 날씨가 쉽게 차가워진다. 눈도 빨리, 그리고 많이 내린다. 그런 한반도 북부의 기후 특성을 감안해 입힌 군복이라는 점이 심사를 자극했다.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했구나’라는 심증이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중공군 포로를 심문했다. 소속과 계급 등 신분 확인에 필요한 항목부터 그의 출신지역과 이동 경로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물었다. 중공군 포로는 이후의 전쟁터에서도 자주 드러내는 특성이 있다. 비교적 담담하게 자신의 관련 사항을 털어놓고 타협을 시도한다는 점이었다.
달려온 미 1군단장
그 때 그 포로도 그랬다. 그는 솔직하게 제 사항을 내게 알려줬다. 심문을 끝낸 뒤 나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넌 시점이 얼마 전이었고, 대규모 부대가 이미 강을 넘어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촌각(寸刻)을 다툴 정도의 화급한 사안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적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로써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히 전화기를 들어 우리가 배속해 있던 미 1군단의 프랭크 밀번 군단장을 찾았다. 그의 군단 본부는 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안주에 있었다. 나는 “중공군 포로를 잡았다.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 지금 이곳으로 와서 직접 포로를 심문해야 한다”고 했다.
밀번 군단장은 부하의 말과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평양 진격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러 차례 소개했던 내용이다. 그는 “알았다. 곧장 가겠다”고 했다. 얼마 뒤 그는 영변의 우리 사단 지휘소에 도착했다. 나는 그와 함께 중공군 포로를 다시 심문했다. 군단장이 중공군 포로에게 질문하면 내가 영어로 통역했다. 밀번 군단장은 내가 미리 캐물었던 내용을 몇 가지 다시 질문했다. 심문을 마친 뒤 나는 밀번 군단장에게 “중공군의 본격적인 대규모 참전임이 분명하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참전에 나선 대학생들을 중국인들이 격려하고 있다.
아직은 전면에서 접전이 벌어지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물기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운산 일대를 덮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에 따른 불안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늘어만 갔다. ‘이제 중공군과의 대규모 접전이 불가피하다’는 생각, 새로운 적은 어떻게 작전을 펼치면서 나올 것인가라는 생각 등으로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운산 전면에 나가있던 12연대 김점곤 연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전면을 제대로 수색해야 옳겠으니 미군 전차를 몇 대 보내달라”는 전갈이었다. 우리에게 닥친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사단에 와있던 미군 전차 부대를 호출했다. “12연대로 가서 전차 수색정찰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미 1군단 소속 6전차대대 C중대에서 1개 소대 5대의 전차를 그곳으로 보냈다. 12연대 김점곤 대령은 그들을 곧장 부대 전면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나중에 김점곤 대령은 수색과 정찰을 끝내고 왔던 미군 전차소대의 상황을 자세히 들려줬다.
핏빛으로 돌아온 미군 전차
전차는 연대 지휘소의 정문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앞에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가를 살피기에는 미군 전차가 가장 유용했다. 한동안 수색정찰을 펼쳤던 미군의 전차가 연대 지휘소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아주 놀라고 말았다. 앞을 이끌었던 전차 2대의 색깔이 아주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색깔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2대 모두 핏빛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김점곤 대령은 그 중 1대의 전차 해치가 갑자기 열리더니 사병 하나가 뛰쳐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전차 사병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는 전차에서 뛰어내려 이상한 고함소리를 내지르면서 지휘소 앞마당을 마구 뛰어다녔다. 이어 전차를 지휘했던 소대장이 그 뒤를 따랐다. 사병의 뒤를 따르던 소대장은 급기야 미식축구에서나 볼 수 있는 태클을 걸어 병사를 쓰러뜨렸다. 김점곤 대령은 어안이 벙벙했다. 핏빛으로 돌아온 전차, 실성해서 뛰어다니는 사병, 그를 태클로 넘어뜨린 소대장…. 김점곤 대령은 그 안에 담긴 곡절을 전차 소대장으로 자세히 들었던 모양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우리 앞에는 아주 심각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수의 중공군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설명에 따르면 전차는 연대 지휘소를 벗어나 운산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갑자기 매복해 있던 중공군들이 전차 위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아주 많은 수의 중공군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전차를 향해 공격을 펼치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미군들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앞의 전차에 올라탄 중공군을 향해 뒤의 전차가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뒤의 전차에 중공군이 뛰어오르면 앞의 전차가 머리를 돌려 기관총을 쐈다. 그런 식의 대응이 한동안 이어졌던 모양이다. 선두에 섰던 미군 전차 2대가 뒤집어썼던 핏빛은 중공군이 흘린 피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교전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전차 속의 사병은 그런 상황 속에서 제 정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소대장은 그런 사병의 뒤를 좇으면서 결국 태클까지 걸며 넘어뜨린 뒤 진정시키는 수고를 해야 했다.
/참전한 중공군들이 은폐를 위해 판 동굴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
10월 24일 무렵에 벌어진 일들이다. 구름이 자주 끼어 붙은 운산(雲山)의 지명이었다. 그 구름 잔뜩 낀 적유령 산맥의 품안에는 아주 낯선 이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붙잡힌 중공군 포로의 당초 이동 출발지가 아주 먼 중국 대륙의 남쪽이라는 점, 12연대 전면으로 수색정찰을 나갔던 미군의 전차 2대가 중공군의 피로 물들어 지휘소로 되돌아 왔다는 점이 모두 그를 말해주고 있었다.
초미(焦眉)라고 할 수 있을까. 눈썹을 태우는 불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이 꼬였다. 느닷없는 영전(榮轉)명령이 내게 떨어졌다. 1사단장 자리를 떠나 인접한 군우리에 있던 2군단장으로 옮기라는 내용이었다. 영전이랄 수 있었으나 마음은 착잡했다. 나는 그 내막을 알 수 없었다. 화급하게 전쟁이 벌어질 마당에 아주 이상한 인사조치가 행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여러 가지가 불길했다. 인사명령에는 따라야 하겠지만 지금 이 자리를 떠나야 옳은가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110 “탄약 떨어졌다…”, 압록강 진출 6사단의 절망적인 목소리
(13) 청천강을 넘으며
중공군 매복에 걸린 부대
영변에서 군우리를 향했다. 군우리는 앞에서도 소개했듯 원래 조선의 군대 주둔지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었다. 영변의 동남쪽에 있던 군우리의 2군단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는 전임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육군본부 참모차장으로 영전해 자리를 떠난 뒤였다.
유재흥 장군이나 나나 당시로서는 한 단계 위로 자리를 옮기는 영전이었다. 비록 진급(進級)은 아니었더라도 직위에 있어서는 분명히 영전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영전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전면에 전혀 새로운 적, 중공군이 나타난 시점에서 자리를 옮긴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2군단의 상황도 점차 깊은 늪에 빠져드는 꼴이었다. 군단 예하의 6사단 상황이 자못 심각했다. 6사단은 개전 초 춘천을 훌륭히 방어했던 부대였다. 북한군 예봉을 꺾으면서 대한민국 군대 중에서는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았던 부대였다.
/나무를 하나씩 멘 중공군들. 미군 정찰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장용으로 지니고 다니던 것이다.
이미 소개했듯이, 6사단은 다른 국군 사단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장점이 하나 있었다. 원래 사단이 주둔했던 지역이 춘천을 비롯해 영월 일대에 걸쳐 있어서 당시로서는 가장 훌륭한 기동력을 갖췄다는 점이었다. 영월 지역에 들어섰던 광물(鑛物)회사의 트럭을 대량으로 징발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6사단은 다른 국군 사단에 비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개전 뒤 낙동강 전선으로의 이동, 그 뒤 북진이 펼쳐지면서 북한 일대로 진군하던 과정에서의 이동도 그랬다. 6사단은 서쪽으로 인접한 국군 1사단이 청천강을 넘어 운산으로 이동하던 무렵에 더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내가 2군단장으로 영전해 군우리로 왔을 때 6사단의 선봉인 7연대는 이미 압록강 바로 남쪽의 초산으로 진입한 상태였다.
6사단장 김종오 장군에게도 불의의 사고가 닥쳤다. 김종오 준장은 적군이 병기창고로 사용했던 동룡굴이라는 곳을 시찰하다가 넘어져 턱이 깨지는 사고를 당한 뒤 더 이상 직무를 담당할 수 없어 후방지역의 병원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사단장이 사고로 자리를 비우면서 6사단의 상황은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출현은 직접적인 위협으로 닥쳤다. 10월 25일에 접어들면서 국군 1사단이 운산 지역에서 적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그 무렵에 이미 초산으로 향하고 있던 6사단의 7연대는 그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적의 공격에 몸을 드러낸 상태였다. 내가 군우리에 도착해 2군단장으로 부임했을 때인 26일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인사명령의 번복
군단 예하의 7사단도 덕천 방면으로 진출하다가 새로운 적, 중공군의 공격에 직면한 상태였다. 영원으로 향했던 8사단의 상황은 그보다 조금 나았지만, 역시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중공군의 위협으로 불안한 상황이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쪽은 6사단 7연대였다. 군단 사령부로 연락한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탄약이 모두 떨어지고 보급품이 모두 바닥났다. 급히 공수(空輸)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산중에 갇혀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6사단 2연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무선으로 계속 탄약과 보급품 공수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소부대가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했다. 가장 중요했던 일은 미군 공군기를 이용해 적진에 고립된 아군의 부대에게 효과적으로 탄약과 보급품을 공수하는 일이었다. 후퇴로를 유지해 전면 깊숙이 나가있던 아군의 후퇴를 원활하게 하는 일도 중요했다. 그러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져만 가고 있었다. 북진을 거듭하다 청천강을 넘어서는 순간 다가온 불안감, 새롭게 나타난 적을 맞이하기 위해 전의를 가다듬어야 할 때 느닷없이 벌어진 군단장으로의 이동이었다. ‘재앙은 겹쳐서 닥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던 때였다. 국군 1사단이 배속해 있던 미 1군단, 그 오른쪽의 6~8사단을 거느리고 있던 국군 2군단의 상황이 모두 그랬다.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던 장면은 바로 그 뒤다. 원래 2군단을 맡고 있다가 육군본부 참모차장으로 발령이 났던 유재흥 장군이 다시 2군단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내가 2군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 사흘 뒤였다. 그는 갑자기 2군단 사령부에 나타나 “갑자기 돌아가라고 그러네…”라고 말했다.
원래의 자리로 모두 돌아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2군단장으로 복귀했고, 이제는 나더러 1사단으로 돌아가라는 얘기였다. 2군단 사령부에서 암울한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런 인사명령으로 인해 다시 영변의 1사단으로 움직여야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시의 모든 상황이 착오(錯誤)의 연속이었다. 한반도의 북부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던 중공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크게 보자면 맥아더의 도쿄 유엔군 총사령부에서 우선 중공군 참전 가능성을 아주 낮춰 보고 있었다.
당초 맥아더 총사령부에서는 수비 지형에 유리한 평양~원산 라인을 상정했었다. 그러나 북한군 저항이 변변치 않은 점이 드러나고, 아군의 북진이 가속화하자 그를 철회하고 진출선을 북상시킨다.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덕천 일대를 진출선으로 잡아 북진을 벌이다가 그마저도 철회해 목표지점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설정했다. 서부 전선에서 볼 때 이 덕천이라는 곳은 중공군도 노렸던 지점이다. 나중의 전사에 실린 내용이기는 하지만 덕천을 동서로 긋는 지점이 우연히도 미군과 중공군 양쪽이 함께 노렸던 진출선이었다. 그러다가 맥아더의 결단에 의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로 진군이 벌어지자 정작 당황한 쪽은 중공군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10월 19일 강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유엔군이 덕천 라인을 넘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로 전격적인 진군을 벌인다면 그들의 도강(渡江)이 크게 위협을 받으리라 봤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중공군 수뇌부는 당초 기획했던 참호전(塹壕戰)의 전술적 방식을 거두고 기동전(機動戰)으로 나왔다는 설명이 우리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 실려 있다.
기이한 전법의 중공군
당초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국 수뇌부는 중공군 병력을 압록강으로 건너게 한 뒤 덕천을 중심으로 동서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진지(陣地)를 구축한 뒤 유엔군과 교전키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엔군의 진격 속도와 이동로가 시시각각 현지에 와있던 종군기자들에 의해 알려지면서 당초의 계획을 변경해 기습과 야습(夜襲), 매복(埋伏)과 우회(迂回) 및 포위 등의 기동전(중공군의 전술 개념으로는 흔히 ‘운동전’이라고 한다)을 펼치고 나섰다는 것이다.
/주로 야밤에 기습을 벌이던 중공군의 특공대.
1950년 10월 말의 나와 국군의 다른 병력은 그런 와중에 있었던 셈이다. 적군의 수는 우리를 압도했다. 급히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넌 중공군은 우선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보이면서 전혀 새로운 전법(戰法)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적유령과 묘향산맥, 강남산맥 등 한반도 북부 지역에 발달한 험준한 산악을 근거지로 몸을 숨기고 공격을 펼쳤다. 아주 컴컴한 야밤을 틈타 먼저 피리소리와 꽹과리 소리를 울려대면서 다가왔다. 정면(正面)보다는 항상 측면(側面)을 공격하는 버릇이 있었다. 낮에는 대개 산속에서 불을 피워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면서 미국 공군기의 치밀한 감시를 피했다. 나무를 베어 병사 한 사람이 그를 지고 다니다가 미 정찰기가 나타나면 나무를 땅에 대고 밑에 주저앉았다.
그런 중공군이 적유령과 묘향산맥 일대를 메우고 있었지만 맥아더를 비롯한 아군 수뇌부는 11월 말의 추수감사절까지 공세를 완료한다는 목표 아래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이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었으나 유엔군 총사령부와 미국 본토의 CIA는 기껏 3~4만 명의 중공군이 긴급 투입된 정도로만 상황을 보고 있었다. 2군단장으로 부임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1사단장으로 복귀하는 해프닝도 그 무렵에 벌어졌던 것이다. 우려는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1사단장으로 복귀하면서 다시 분주해졌다. 우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29일 평양을 방문했다.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가 평양을 방문하니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중은 하지 못했다. 행사가 벌어질 때 자리에 갔다가 이 대통령이 평양을 떠날 때 그를 내 지프에 모셨다. 감격에 겨웠던 이 대통령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미군이 보내줬던 C-47기에 몸을 실었다. 거수경례로 그를 배웅한 뒤 나는 급히 1사단으로 향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