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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27/ 국방6/ 유 제독의 Periscope(잠망경)/ 〈1〉 “백두산! 백두산! 여기는 한라산!” - 〈10〉 병장(兵長)의 군대, 장군(將軍)의 군대

상림은내고향 2021. 7. 28. 21:39

대한민국27/ 국방6/ 유 제독의 Periscope(잠망경)

■유 제독의 Periscope(잠망경) 유영식 월간조선 2017

유영식

1962년생으로 해군사관학교를 39기로 졸업했다. 359개월간의 군 생활 가운데 17년간을 해군본부와 국방부 대변인실 등에서 정훈장교로 일했다. 2009년부터 5년 동안 해군 공보과장으로 재직하며, 최장수 해군 공보과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14년 해군 준장으로 해군본부 정훈공보실장(해군 대변인)을 지냈다.

 

 1〉 “백두산! 백두산! 여기는 한라산!”… NLL 해상에서 취재기자들과 남북한 함정교신 지켜봐

⊙ 제1 연평해전 승전으로 이지스 구축함 사업 가능… 500톤급 유도탄 고속함도 탄생
⊙ 제2 연평해전 교전 대응 부족, 정보전파 묵살 논란으로 홍역 치러… 교전규칙 3단계로 간소화
2004년 금강산 초대소에서 열린 남북한 장성급 회의 참석… 3차회담 때 남북 함정 간 충돌방지
    
합의

 

1999 6 15일 아침, 우리 해군 장병들의 숨 가쁜 교신소리와 함께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과 우리 해군 참수리 편대 간의 제1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을 동원해 오전 97분과 920분 두 차례 선체 충돌 공격을 가했다. 북한 경비정은 소총으로 선제 사격을 하다가 25mm 기관포를 발사했으며,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다. 이 교전에서 북한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됐으며, 경비정 4척도 선체에 파손을 입은 채 퇴각했다

 

  6 15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사이의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상 교전 문제가 논의됐다. 북한 측은 남한이 먼저 도발해 왔다고 억지를 부렸다. 심지어 교전이 일어난 곳은 북한 영해라고까지 주장했다

 

  남북한 함정 간의 교전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우리 고속정이 선택한 밀어내기식 충돌 공격이다. 왜 해군은 적 경비정의 사정거리 내에서 위험을 무릅쓰면서 충돌 공격을 한 것일까? 현대적 전투함정이 충돌 방법으로 영해를 지키는 해상전 사례는 해전사의 시각으로 볼 때 참 생뚱맞은 전술이다. 이는 목재선박 시대의 전투 방식으로, 철선(鐵船) 시대에 들어서는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협 앞에 놓인 무장한 선박이 총격을 가하지 않고 승조원 모두의 생명을 담보로 충돌 작전을 하는 것은 NLL이 정치·군사적으로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장에서 충돌 공격을 가한 당시 편대장 김모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은 우리 함정이 돌격하는 모습에 경악했다고 한다. 북한 경비정의 함미(艦尾)를 올라타는 과감한 충돌을 북한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평해전酒

당시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상태여서 남북한 교전은 여러 고민을 낳게 했다. 남북한 간 교전이 패전으로 종결되면, 국민들은 국군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군과 정부를 비판할 것이다. 북한과의 전투는 이겨놓고 봐야 군대를 유지하고, 군을 통수하는 대통령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은 우리 해군의 승리로 끝났다. 해군은 승전의 기쁨으로 ‘연평해전주’를 즐겼다. 맥주는 서해, 맥주 위에 떠 있는 소주잔은 북한 경비정, 소주는 해군 고속정 40mm 함포에 비유하면서 맥주잔 위에 소주잔을 띄우고 소주잔에 술을 부어 가라앉혀 마시는 ‘격침주(擊沈酒)’라는 지금의 ‘소맥’을 즐긴 것이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거나 지휘계선상의 모든 장병이 무공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그중 북한군이 발사한 총 세 발 가운데 두 발이 방탄조끼, 한 발이 목 부위에 스쳤던 안지영 대위는 지금 대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안 대위는 “지금부터의 삶은 덤이다”라고 말을 했다. 안 대위가 방탄복에 맞은 총탄의 충격에 대해 “‘쿵’ 하는 느낌을 받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 고속정을 지휘했다”고 말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해군이 제1차 연평해전에서 패했더라면 북한과의 교류는 불가능한 상태가 됐을 것이다. 우리 해군이 패했더라면 북한의 도발에 무능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이 쏟아졌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남북교류를 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이지스함 건조 계획 반영에 대해 해군은 이를 승전의 대가로 생각했다. 패전의 군대는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은 동서와 고금을 관통하는 교훈이다. 당시 해군은 이지스 구축함 건조 사업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1척당 건조비, 전투체계, 무장 비용이 약 9800억원이었다

 

  1차 연평해전에서 승리하자 이지스 구축함 건조 사업도 탄력을 받았다. 이때 시작해 만들어진 세종대왕함은 2009년 북한의 탄도 미사일을 정확히 탐지했다. 미군의 정보자산 이외에 한국군 자산으로 북한의 미사일을 탐지하는 최초의 탐지전력이 된 것이다

  

DMZ보다 더 위험한 NLL

/1999년 6월 제1차 연평해전 때 참수리 325정(오른쪽)이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에 직접 부딪치며 ‘밀어내기’작전을 펴고 있다. 참수리 325정은 11ㆍ10 서해교전에서도 직접 북측 함정과 맞섰다. 사진=조선일보

 

  1차 연평해전 이후, 서해에서 교전이 발생한 것에 대해 “NLL의 법적근거는 있는가” “공동 관리구역을 설정하자”는 등 NLL을 둘러싼 안보논쟁이 불붙었다. 당시 언론들은 남북 함정 간 충돌예방을 위한 방안, NLL은 남북기본합의서상에 존재하는 확실한 해상분계선으로서의 기본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두 갈래의 보도를 이어갔다

 

  당시 중령으로 공보실에 근무하던 필자는 향후 NLL이 국방부와 해군 차원을 넘어, DMZ보다 더한 남북한 간의 대결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인적으로 다소 뚱딴지같지만 새만금 간척 사업처럼 바다를 매립해 갈등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1차 연평해전의 결과, 우리 정부는 NLL은 확실한 해상분계선임을 천명하고, 북한의 NLL 무력화 기도에 대해 강력히 군사적으로 대응한다는 기조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NLL에 대한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혔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시절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함께 추진된 남북한 군사회담의 핵심은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이다. 1991년에 체결된 남북한 기본합의서에 명시된 핵심 내용은 해상경계구역 지정(NLL에 대해 실질적 해상분계선으로 북측이 인정했다는 의미)과 불가침 행위, 그리고 무력 사용 금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남북한이 공동 서명한 것은 남한의 주장에 강력한 근거를 제공하는 기초가 됐다

 

  북한은 1999년 이후 지금까지 NLL을 놓고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의 과정에서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를 거듭했다고 한다. 필자의 이러한 얘기의 근거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 열린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북측 협상단 일원이 우리 협상단 일원에게 과거의 이 서명에 대해 그토록 후회스러워했음을 토로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유도탄 고속함의 탄생

/2013년 6월 29일 제2 연평해전 11주년 기념식이 열린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故 윤영하 소령과 황도현 중사의 유가족들이 윤영하함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해군은 제1 연평해전 결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우선 당시의 PKM, 즉 참수리 고속정에 대해 보완을 추진했다. 해군이 보유한 PKM의 후속 고속함으로 PKG, 즉 유도탄 고속함이라는 새로운 함형(艦型)을 구상한다

 

  북한 경비정에 저격수가 있다는 점에서 정장의 지휘 위치가 기존의 노출형에서 방탄으로 보호돼야 하고, 낮은 수심에서 기동이 월등해야 한다는 점에서 워터제트 엔진을 장착했으며, 북한 경비정을 장거리에서 요격하기 위해 함대함 미사일의 탑재를 추진했다. 유도탄 고속함은 500톤급 규모이지만 1000톤급 이상의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고속함으로, 10년 후 해군에 매우 유용한 전력을 제공하게 된다

 

  훗날 500톤급 이상을 ‘함()’이라고 분류하던 기준에 따라 함정의 이름을 명명했고, 첫 번째 함의 이름으로 제2 연평해전 참수리 357호 정장 고 윤영하(尹永夏) 소령의 이름을 부여했다. 그리고 5명의 전사자 이름을 후속으로 건조되는 5척의 함에 명명했다. 해군이 함에 제2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이름을 붙인 이유는 목숨 걸어 서해를 지킨 이분들의 거룩한 정신을 후배 장병들이 이어받겠다는 의지다

 

  1999년 이후 언제 다시 NLL 선상에서 재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됐고, 북한 경비정은 수시로 NLL을 침범하면서 우리 해군의 대응태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해군은 무엇보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한 해군이 언젠가는 반드시 보복의 칼날을 들이댈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한 경비정의 연간 NLL 침범 횟수는 평균 수십 차례에 이르렀고, 꽃게잡이 성어기인 4월부터 11월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2002년 월드컵으로 남북한 간에 다양한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고, 대부분의 국민은 북한이 평화 무드를 깨는 무력도발을 서해상에서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연평해전에서 40여 명의 전·사상자와 경비정 침몰을 경험했던 북한 해군은 드디어 보복을 실행한다. 3년 후 2002 6 29일 제2 연평해전이 발발했다. 2 연평해전으로 명명된 교전은 북한 해군이 치밀하게 계획했다
  

  , 경비정에 대전차포 달아 보복 준비 

북한 경비정 684호와 지원 경비정은 근접전에 대비해 저격수를 준비하고, 지상에서 사용하는 대전차포를 함정에 장착하는 등 무장을 강화했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우리 고속정의 대응 기동 방법을 살피고 ‘매의 눈’으로 보복 을 준비했다
  
 
남북한 경비정의 전투 능력을 비교하면, 우리 군 고속정은 월등히 좋은 기동력과 20·40mm 벌컨 등 무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우리 고속정을 조기에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우리 경비정과 지원 함정들이 대응태세로 전환해 교전의 결과는 우리 해군이 우세한 상태로 마감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보복을 준비한 북한 해군은 짧은 순간 교전을 종료하고, 퇴각하며 치명적 공격을 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평택 2함대사령부에 전시하고 있는 우리 고속정 357호정의 피해 흔적을 보면, 북한의 선제공격이 선체의 수면하를 노린 점을 알 수 있다
  
 
경비정의 엔진을 파괴해 기동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저격수에게 정장을 제1의 타깃으로 삼아 지휘를 못 하게 하는 전술이었다. 저격수로 하여금 우선적으로 당시 정장 대위 윤영하를 저격하게 하고 이어 357호정의 조타실 기관실에 수천 발의 사격을 가했다.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우리 장병들은 분전했고, 적 경비정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참수리 357정은 예인 중 침몰했다
  

  해군이 제작 지원한 영화가 ‘국민영화’가 되다

/영화 〈연평해전〉은 해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2015년 6월 24일 개봉해 관람객 600만명을 돌파했다. 용산 CGV에서 포스터를 배경으로 관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교전 결과에 대해 해군 내에서는 경계심과 교전 대응 부족, 국방부에서는 정보전파 묵살이라는 논란이 이어졌다. 우선 경계심의 부족과 후속 공격이 부족했다는 질타는 현장 지원 함정의 지휘관들에게 큰 멍에를 안겼다 
  
 
두 번째로 대북 감청부대의 정보보고를 국방부 수뇌부가 묵살했다는 등의 논란은 교전 이후 엄청난 논란을 유발했으며, 여당과 야당 간 정쟁으로 비화했다. 2002년 당시 국방부는 국회 현안 보고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국회의 질타를 감당해야 했으며, 이후 블랙북(Black Book)이라는 정보보고서의 논란은 몇 년 동안 계속됐다
  
 
언론도 둘로 갈라졌다. 2 연평해전 교전 경과에 대해 보수언론은 교전규칙의 절차 문제와 당시 김대중 정부의 안이한 군사 대비태세, 긴장감의 이완 등의 이유로 젊은 장병들이 ‘적의 제물’이 됐다는 논리를 폈다. 3개월이 지나 당시 야당의 비판에 대한 정치적 타협은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의 사임으로 마감됐다
  
 
2 연평해전에 대한 합참 전비태세 검열실 주간으로 이루어진 조사 결과는 ‘참수리 357호 승조원들은 북한의 계획되고 기습적인 공격에 6명 전사, 함정 침몰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용맹하게 싸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추서 진급이 이뤄지고, 현양(顯揚) 활동이 뒤이어 진행됐다. 2함대 안보공원에는 같은 자리에 제1 연평해전 승전비에 이어 제2 연평해전 기념탑이 세워졌다
  
  2002
년 제2 연평해전 결과는 정부에 대해 NLL에서 해군 간 충돌 가능성은 상존하며, 향후 남북한 교류 정책에 대해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숙제를 제공했다. 해군과 합참의 서해 NLL 대응 작전에 대한 경각심은 더 한층 높아졌다. 그리고 4단계 교전규칙이 현장에서 기습을 허용했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교전규칙을 4단계에서 3단계로 조정, 초동대응을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작전을 주도한 당시 2함대사령관 정병칠(鄭炳七) 제독(소장)은 전역 이후 부하의 전사를 가슴 아파하며 지내다 몇 년 후 폐암으로 사망했다
  
  2014
년 필자는 해군 정훈공보실장으로 재직 중 연평해전에 관한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책임자로 일했다. 김학순(金學詢) 감독의 영화 시나리오를 몇 번이고 고치고 싶었으나, 영화는 영화로서 접근하자는 생각에 지원에만 전념키로 했고, 영화 지원 장교를 선임하면서까지 촬영을 마쳤다
  
 
최초 모금으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촬영을 마친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될 무렵, 메르스가 창궐해 고민 고민하면서 개봉일을 늦추기도 했다. 군이 지원한 영화가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개봉일을 맞이했던 영화 〈연평해전〉. 그 영화는 650만명이 관람한 ‘국민영화’가 됐다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한 장성급 회의 참석

/2004년 5월 26일 북한 금강산 초대소에서 남북장성급 회담이 열렸으나 서해상의 우발적인 분쟁 방지 대책에 관한 합의안 도출에는 실패했다. 각각 남측과 북측 수석대표인 박정화 합동참모본부 작전차장(왼쪽)과 안익산 인민무력부 정책국장이 회담 시작 전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김대중 정부 집권기에 두 번의 서해교전이 발생했고, 이를 지켜본 노무현 정부는 앞으로 남북한 교류를 지속해야 하는 입장에서 남북한 교류의 기본은 군사적 충돌 예방이라는 것을 우선적 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04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방부, 통일부에서는 서해상의 남북한 함정 간의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남북한 군사실무 회의를 격상해 남북한 장성급 회담을 추진했다. 남북한을 번갈아가며 열린 이 회의는 파주와 금강산 초대소에서 진행됐다. 3차에 걸쳐 진행된 회의 중 1차는 파주에서, 2차는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북측 금강산 초대소에서 열렸다
  
 
필자가 참석한 회의는 북한 지역에서 열린 2차 회의였다. 삼청동 남북회담사무소를 출발한 버스는 강원도 고성을 지나 북측 군사분계선(MDL) 선상에 이르자 북한 측의 벤츠와 버스로 갈아탔다. 20m 간격으로 비무장 북한군 병사를 3km가량의 도로 양측에 세워놓고 남측 일행을 환영하게 했다
  
 
회의 참가단은 장전항 출입국 관리소를 지나 온정리 금강산 관광호텔을 거쳐 1차선 도로를 따라 약 1km를 산속으로 더 들어갔다 금강산 초대소가 보였다. 초대소 우측 강변에는 수십 채의 방갈로가 있었고, 주변 분위기는 당 간부들의 휴양시설임을 직감하게 했다. 북한 측은 촬영을 일절 금지했다
  
 
금강산 초대소에 도착하자 업무를 보는 박모 선생이 필자를 맞이했다. 초대소 현관 입구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단과 벽면에 걸린 엄청난 크기의 대형 카펫 형태의 자수가 들어서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1974년에 지은 초대소는 유럽풍의 자재를 사용했고, 각 방마다 은갈색 무늬의 은은한 욕조, 고급 샤워 꼭지 등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공보담당관으로 북측 파트너를 “박○○ 선생”으로 불렀고, 그는 회담 기간 내내 나에게 남측의 정치·사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했다. 질문지를 만들어서 계획적으로 물어본다는 것을 두 번째 미팅 때 알게 됐고, 나의 목소리를 보이스 레코더로 녹음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내가 “통일부 공무원”이라고 하자, 금세 “국방부 소속의 군인 아니냐”며 “속일 생각 마시라요”라고 했다. 어찌 아는 건지 궁금했으나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남측은 한라산, 북측은 백두산

/2015년 1월 1일 신년 해상경계태세 점검 P3C에 탑승한 필자(가운데). 

 

  2차 회의 시 남북한 간 합의사항은 남북 장성급 회담을 지속한다는 결과 이외에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3차 회의는 남측 설악산에서 하기로 하고 종료했다. 직감적으로 3차 회의 때 무엇인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설악산에서 진행한 3차 회의 때는 남북한 간 합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이 회의를 통해 나온 핵심적 결과물은 남북한 경비정 간 공용주파수(국제상선 공통망 156.8Mhz, 156.6Mhz)와 발광신호를 활용한 의사소통이었다. 1999년 서해교전 당시 있었던 우발적 무력충돌이 사전방지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원거리에서도 서로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기 때문이다
  
 
남측은 한라산, 북측은 백두산이라는 호출부호를 정했다. 당시 합의 사항에 군사분계선상에서 진행하던 대북확성기 방송이라는 강력한 심리전 수단을 중지하는 것이 있었는데 반대가 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측 장성 대표인 박정화(朴貞和) 해군 준장(해군작전사령관 역임)은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는 동료 장성들이 개인적으로 합당치 않은 합의 결과라고 눈총을 준다면서 불편함을 토로했다. 사실 남북한 회의 결과는 현장에 있는 대표 장성의 결정이 아닌 상위의 조정과 협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장성급 회담의 컨트롤 타워는 청와대의 NSC로서 현장의 남북 군사실무자들은 양측의 의견을 전달하고 마지노선을 지키는 수준의 회의로 진행했을 뿐이다
  
 
남북한 상호 호출부호의 지정과 운영은 심리적으로 남북한 해상 경비 전력 간에 최초로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고자 하는 소통채널을 유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언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서해바다에 평화의 물결이 넘실거린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정부의 NLL 입장은 불변 

국방부는 합의 결과를 보여주는 취재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국방부에서 새벽 1시에 출발한 취재진을 인천에서 경비정에 태워 오전 11시경 연평도의 NLL에 도착했다. 정해진 날짜와 시각과 위치에서 NLL을 중심에 두고 6척의 남북한 함정이 국제상선 공통망 주파수를 오픈하고 상호간에 호출했다.
  
 
현장을 취재하던 연합뉴스 기자는 북한이 응답을 하지 않자 현장 1보 기사를 ‘북한 경비정 통신 무응답’으로 작성했다. 필자가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했더니, 얼마 후 북측 경비정에서 “백두산”이라는 응답이 왔다. 우리 고속정의 통신병이 “왜 늦게 응답하느냐”고 묻자 북측은 “통신기 상태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해왔다. 현장의 우리 해군 장병과 기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남북 해군 간의 교신은 그다지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간간이 NLL 선상에서 북측 함정과 어선의 항로 착오, 불법어선 확인 등의 사유로 북한 경비정의 NLL 근접 또는 일시적 월선의 경우, 상호 교신이 이뤄졌다
  
  1999
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친 서해상의 교전은 정부의 대북 정책에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이론적으로 정부의 정책은 군사 정책의 상위 개념이다. 따라서 정책에 따라 군사적 대응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영토, 주권, 국민이라는 국가의 3대 요소에 대한 것은 불변의 가치다
  
 
정부의 대북 정책에 따라 변화는 있었고, 대외적으로 표현은 달랐지만 남북한 간의 영토와 영해를 논한 협상에서 어느 정부도 흔들림 없이 북한에 대응했다. 실제로 어떤 사건이 발생해도 늘 그렇게 정책은 발표됐다. 오늘날 서해는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전투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남북한 교류 정책은 서해상의 군사적 충돌 앞에서 늘 사상누각의 위험을 안고 있다 라는 생각이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2〉 서해 북방한계선

서해 NLL상의 남북한 해군, 서로 보복의 칼을 품고 산다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에서 해군은 새로운 교전규칙으로 교전 2분 만에 완승을 거뒀다. 
사진은 덕적도 인근해상에서 해군 2함대 235편대 참수리정이 서해 NLL 해상경계태세 훈련 중 사격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2002 6월 발생한 제2연평해전 이후 3개월간의 심각한 논란을 뒤로 하고 합참의 전비태세 검열실의 조사를 거쳐 해전은 종결됐다. 정부는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남북한 장성급 회담을 시작으로 상호 소통채널을 확보했다. 회의 결과, 서해상에서 긴장이 완화되는 듯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기간 동안 남북교류가 이뤄지는 가운데 서해상에서 교전수준의 충돌은 사실상 없었다


 
해군은 제2연평해전에서 ‘기습’의 교훈을 얻었다. 서해 경비작전 중 “교전이 발생하면 다시는 도발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과, 만약 북한의 기습으로 피해가 발생하면 NLL을 북상해서라도 도발세력을 궤멸적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NLL 현장을 지키는 군인들은 날마다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역대 정부는 NLL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이곳에서 남북한 교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주요 관심사항이었고, 이명박(李明博) 정부도 그러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고 남북한 간의 교류정책 기조에 변화를 맞으면서, 북한의 대남선전에 있어서도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며 “원칙 없는 북한 지원은 없다”는 정책 방향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서해의 NLL 선상에서도 긴장감이 과거보다 높아졌다. 북 경비정의 움직임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2함대는 일시적으로 NLL을 침범하는 북한 선박에 대해 남북한 간 우발적 충돌을 예방한다는 목적으로, 지정한 북 경비정 호출부호를 통해 “백두산 응답하라”를 요구해도 대답 없는 메아리가 돼 가고 있었다. 이 호출부호는 2007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무효화됐다.   
  


  
대청해전, 발발 2분 만에 북 경비정 무력화

2009 11 10일 오전 11시경 등산곶에서 출항한 북한 경비정 383호가 서해 대청도 동쪽 6마일 해상의 NLL 1.2마일 침범했다. 당시 우리는 고속정 3척을 1개 편대로 기동을 하고 있었으며 북측은 NLL 선상을 따라 조업 어선을 통제하기 위해 6척가량의 경비정이 백령, 대청, 연평도를 잇는 NLL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대청도 인근의 383호정이 NLL을 월선해 계속 남하했고 이에 대응해 우리 해군의 참수리 325호와 336호가 대응 기동을 하며 경고통신을 5차례나 보냈으나 북한 경비정이 이를 무시하고 남하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과감하게 월선하고 경고통신에도 아랑곳 않고 NLL을 월선해서 기동했다. 그날따라 북 경비정이 6척가량 NLL 인근 북측 수역에서 경비작전 중인 상태여서 우리도 긴장상태에서 대응기동을 했다
  
 
우리 고속정 편대는 경고통신을 무시하며 월선한 북 383호정에 경고사격을 한다는 통신을 보내는 등 신중하고 통제된 대응을 했다. 경고사격을 통신한 후 참수리 325호정은 대응규칙에 따라 1136분 북 경비정 1km 전 후방에 경고사격을 실시했다
  
 
우리 고속정의 경고사격이 있자 북 경비정은 기다렸다는 듯 우리 고속정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조사결과처럼 교전 후 20여 발 정도가 참수리 325호정 외부에 피탄(被彈)된 것을 확인했다. 2연평해전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있던 2함대 전투원들은 20mm 벌컨포로 즉각적인 대응사격을 통해 2분 만에 북한 경비정을 무력화했고, 반파당한 북한 경비정은 겨우 침몰을 면한 채 북한 경비정에 의해 예인돼 퇴각했다
  
 
이 교전에서 해군 경비정은 확실하고 충분한 대응으로 적 경비정을 초토화시켰다. 필자는 당시 해군 공보과장으로서 언론의 질의에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고, 동시에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6명의 전우들을 떠올렸다
  
 
3km 거리를 사이에 두고 교전을 벌였던 ‘대청해전(大靑海戰)’의 결과, 해군 2함대는 인명피해 없이 교전을 승리로 마쳤고, 북한 측은 공식적으로 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으나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당국은 평가했다
  
 
교전과정에서 우리 고속정의 우월한 대응사격에 대해 상급부서 일부에서는 과도한 대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전해졌으나, 당시 국방부와 합참은 북한과의 교전에서 적절한 대응규칙에 따라 응전하고 사상자 없이 종결된 사안으로 당연히 그 전과에 상응해 현장 지휘관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대청해전 직후 나타난 북한의 군사적 징후

북한 해군은 대청해전으로 인해 다시금 패전의 길에 놓였다. 교전 직후 북한은 공식 대남 선전매체를 통해 “남조선의 도발”이라는 주장을 펴고 다시 NLL 무력화를 위한 선전전을 시작했다. 다시 서해상에 긴장이 고조됐다. 서해상에서 3번째 교전인 대청해전이 발생한 이후, 해군 2함대사령부는 앞으로 북한이 또다시 보복전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군의 전투장교와 정보장교들은 ‘어떤 양상이 될지 모르나 반드시 다시 온다’고 생각했다
  
  2009
11 10일 해군창설 기념일 전날에 일어난 대청해전 이후 2함대사 예하 전투원들과 함정은 전투준비 태세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북한 경비정의 월선이 있을 때마다 최고의 긴장상태에서 대응작전을 했고 모든 출동함정은 실탄을 장전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곧바로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준비했다
  
 
고속정 장병들은 손과 발이 파도에 얼고 또 얼어도 40mm 함포와 탄약을 철저히 관리했다. 전투함정의 장병들은 그것이 유사시 스스로의 생명을 보장하는 첩경이라고 느끼며 대비태세에 매진했다. 2함대 전투함정과 전투원들은 “쏘라고 할 때 나가지 않으면 내 총이 아니다. 그리고 쏘라는 말 없이 나가도 내 포가 아니다”라는 말을 입과 머리에 달고 살았다
  
 
이 구호는 NLL 선상에서 고도로 통제된 대응, NLL 월선을 허용하지 않고 도발시는 즉각적으로 대응해 승전을 담보하며 동시에 과도한 대응이라는 해석을 낳지 않는 상태라는, 매우 어려운 작전 종결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청해전 이후 나타난 특이한 군사적 징후는 북한이 서해 NLL 인근 지점의 해안포를 이용해 사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NLL 해상도발은 북한 해군이 해상교전에서 북한 함정의 전투력 열세를 극복하려는 방편으로 해안포를 이용하겠다는 의도와 함께, 해안포의 방향만 돌리면 포탄의 탄착점은 백령도 연평도 대청도를 해안포 사정거리 내에 둔다는 의미도 있었다.   

  
  
2함대사령부, 해안포와 유도탄 공격에 집중 대응

/2009년 12월 9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김태영 국방부 장관(사진 맨 왼쪽)이 대청해전을 승리로 이끈 고승범 소령, 김상훈 대위, 김성완 대위(왼쪽부터)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돌이켜보면 북한은 서해 도서(島嶼)에 대해 해안포 공격 훈련을 염두에 두고 진행했다는 점을 연평도 포격 도발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NLL 선상에 대한 북한의 해안포 사격은 2009 11월부터 2010 3월까지 집중적으로 이어졌다
  
 
우리 6여단과 연평부대는 NLL 이남으로 넘어오는 포탄의 숫자를 평가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NLL 북측 지점에 K9 자주포로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대응사격을 가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NLL은 실질적인 해상 군사분계선이라는 불변의 기준을 유지하고 적의 도발에 대한 응전의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해안포 도발에 대한 대응은 참으로 어려웠다. 포탄이 NLL을 월선한 탄착점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포탄의 숫자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해병 6여단과 연평부대 관측부대는 24시간 감시와 대응사격에 주력했다. 2함대 전투전대 함정과 작전요원들은 앞으로 해상교전이 발생하면 북한이 우리 함정과 지원전력에 대해 해안포 공격과 유도탄을 이용한 통합전력을 운영하거나, 평상시 경비 중인 함정을 공격할 것이라는 도발형태를 상정하고 이에 집중 대비했다
  
  2
함대의 모든 함정은 유도탄 방어 훈련에 집중했고 해안포 도달 거리를 경비작전구역에 적용해 안전을 확보하는 노력을 병행하면서 경비작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래도 최전방 해역 ○○○기지에 전개해 대응하는 고속정과 전투원들은 NLL 근접작전을 해야 하기에 북의 해안포 거리 내에서 작전기동을 해야 했다. 유사시 경비정의 NLL 월선 없이 북한이 해안포와 유도탄으로 도발할 경우를 대비해 평소 우리의 중형 경비함은 사격거리를 고려해 경비작전을 수행했다
  
 
기동경비작전 중 기상악화로 항해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이르면 항해하면서 북 해안포와 유도탄 사격을 피할 수 있는 음영구역을 찾아 피항을 실시했다. 장기간 기상악화가 예상되면 함정의 손상, 승조원의 피로도를 고려해 기지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곧바로 경비구역 복귀를 위해 북한 유도탄과 해안포 표적이 잡히지 않는 음영구역으로 이동했다.     


  
증거의 인멸성 보복, 천안함 피격

/2010년 4월 24일 인양한 천안함 함수(위). 인양한 천안함의 아래 부분을 촬영한 사진. 외부 충격으로 천안함의 동체가 안쪽으로 눌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천안함이 내부 폭발이 아닌 외부 폭발로 침몰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사진=조선일보

 

  2010 3 26일 천안함이 피항한 지점이 바로 백령도 용기포 인근 해역이다. 북한은 이곳에 종종 대피하는 초계함을 노리고 있었으며 이날 북한 잠수정은 용기포로 피항해 있던 천안함을 야간에 어뢰로 공격한 것이다. 잠수정에 의한 천안함 공격은 대청해전이 일어난 후 4개월 만에 발생했다
  
 
대청해전은 2009 11 10일 발생했고, 이 교전은 2함대사령관이 취임한 지 5개월 정도 지나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안함 피격은 그 후 4개월 후인 2010 3 26일에 발생했다. 북한이 대청해전의 보복을 생각하고 감행할 때 가장 우선시한 것은 무엇인가? 증거의 인멸성과 확실한 보복성이라고 본다
  
 
증거의 인멸성 차원에서 잠수정 어뢰를 이용한 공격을 선택한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잠수정의 출항시기를 구름 낀 기상상태로 잡은 것은 북한 군사기지에서 잠수정의 입출항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도발의 원인을 확증하지 못하게 증거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의도로 잠수정에 의한 공격을 선택했다
  
 
서해의 해저가 뻘 지역이라는 점에서 어뢰의 추진체를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도 작용했다. 또한 작전적으로 북 잠수정의 경우 서해상에서 장기간의 항해가 제한되고 기동중인 함정에 대한 공격은 성공 확률이 낮다는 점과 잠수정이 노출될 경우 등을 고려할 때 NLL 인근의 위치에서 매복해 공격 후 복귀하는 선택을 했다고 추정된다
  
 
확실한 공격, 즉 미수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정지한 함정에 대한 공격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피항 중인 함정을 타깃으로 정했다. 아울러 백령도와 연평도 인근 해역에 대한 잠수함정의 이동을 탐지하기가 어렵고 초계함의 대()잠수함정 탐지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잠수정에 의한 초계함(PCC) 어뢰공격을 선택했다고 본다
  
 
이러한 작전적 판단뿐만 아니라 북한의 공격이 2010 3월에 이뤄진 점에는 보복의 성격이 농후한 시기의 문제가 숨어 있다. 해군의 주요 전투 지휘관 인사 시기는 대외 비공개 사안으로 그 시기와 대상이 일정치 않으나 대청해전이 발생한 이듬해인 2010년 중순이 가까워지면서 당시 참모총장의 임기 만료로 인해 순환인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함대사령관과 전투전대장 그리고 함장의 일부가 인사이동을 맞이할 시기가 다가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공격했다고 추정한다. 즉 남한의 2함대사령부에 대청해전에서 얻은 승전의 메달을 남기지 않겠다는 북한 해군의, 더 나아가 북한군 전체의 보복의지가 담겨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우선 대청해전에서 완전히 패배한 결과를 그대로 넘길 수 없다는 북한 서해함대사와 약 4개월에 걸친 NLL 포격도발 양상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2010
3 26일 저녁 102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던 두 동강 난 천안함 속에서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전사가가 46명이고, 살아난 장병은 58명이었다. 피격 당시 함장 최원일 중령은 배를 떠나지 않겠다고 전복된 함정의 일부에 서서 발길을 옮기지 않았으나 생존 장병의 권유로 배를 이탈해 수색작전을 지원했다
  
 
“왜 살아왔냐”라는 질타를 받던 최 중령의 고통이 어떠할까를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합당한 지휘관의 선택이라고 궁극적으로 판단했다. 캄캄한 함정의 복잡한 격실 속에서 손으로 더듬으며 살아온 장병 58명은 전사한 전우들 앞에 그리고 그 가족들 앞에 서면 늘 살아 돌아온 것이 마음의 빚을 진 듯한 모습인데, 이를 보며 모두 가슴 아파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마음 한 곳에 남기고 있다고 한다
  
 
천안함에 승함했던 정다운 중위는 함정근무를 하지 않는 정훈장교로 병과를 선택해 복무 중이다. 그는 “인생을 두 번 사는 것 같아 모든 것에 어렵게 느껴지는 일이 없다”고 필자에게 고백했다. 젊은 나이에 사지를 뚫고 나온 청년장교의 마음이 그렇게 담담해진 것 같았다.     


  
해군 창설 이래 최초로 감사원 감사 받아 

함정을 공격한 것은 영토를 공격한 것이라는 점에서 해군 내에서 “이대로 지나가면 대한민국은 군대를 가진 국가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비등했고 다양한 군사적 조치를 강구하자는 비공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정부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확증발표를 못하고 민군 합동조사단을 발족시켰다. 동시에 원인의 조사와는 별개로 해군 창설 이후 최초로 국방부, 합참, 해군 등 군 기관에 대한 감사원의 군사 대비태세 감사를 받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군의 조치와 대비태세의 무능을 지적하는 언론의 지적이 빗발치는 가운데 작전지휘 계선상에 있는 지휘관들에 대한 직무감사가 이뤄지고 합참의장과 작전사령관, 2함대사령관 및 예하 지휘관들이 줄줄이 조사의 대상으로, 그리고 책임을 추궁받는 대상이 됐다
  
 
대비태세 감사는 대비태세, 교육훈련, 함정장비, 근무기강, 언론조치 분야 등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이에 대해 국방부, 합참, 해군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국민의 비판 앞에 놓인 군은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다
  
 
해군은 46명의 전사자 유족들의 비탄과 원망을 온몸으로 받았다. 동시에 순직자에게 예우를 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 많은 가족도 국가를 위해 전사했다는 명분으로 비통함을 참았다. 심지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가자”는 일부 가족도 있었으나 유족들은 참고 또 참았다. 유족의 슬픔과 애도에 많은 국민이 동참했고 동시에 분노와 슬픔을 같이했다
  
 
약 한 달간 천안함에 대한 브리핑이 오전 오후 생방송으로 진행됐다. 원인에 대한 일부 기사가 나오면 이어서 해명하고 이를 단번에 설명치 못해 혼선이 지속됐다. 평택 2함대에 300여 명의 기자, 백령도에 150여 명, 국방부에 200여 명의 기자가 관련 보도를 이어 갔다. 시간의 오류, 가족의 증언, 통화기록 차이, 물기둥 영상, 작전지휘관들의 활동 등 모든 것이 시간이 갈수록 불투명해져 가는 듯했다
  
 
심지어는 사건 발생 직후 출동한 인천해양경찰서 소속 해안경비정에 의해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되었으나, 최원일 함장이 46명을 탈출시켰다는 어처구니없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민평기 기관총’

/2011년 3월 25일 오전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 영주함(1200t급)에서 열린 ‘3.26 기관총 기증식’에서 천안함 순국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씨(왼쪽에서 두번째)와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왼쪽에서 첫번째)이 기관총을 살펴보고 있다. 3.26 기관총은 윤청자씨가 기탁한 1억898만8000원의 성금으로 구입한 K-6 기관총 18정으로, 천안함 피격일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이렇게 명명했다. 사진=조선일보

 

  수색과정에서 3 30일에는 UDT 대원인 한주호 해군준위가 작업 중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돼 순직했으나, 이에 대해서도 잠수지역이 다른 곳이었고 무엇인가를 수색하려는 별도의 잠수라는 오보가 설명을 거듭해도 기사화되어 나왔다
  
 
이에 대해 순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언론중재위에 9개의 매체를 동시에 제소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평소 해군에 이해가 깊었던 언론인이 넌지시 서툰 대응 방법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당시 필자는 국민 앞에 해군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다시금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두 달 가까운 혼란을 거듭하면서 천안함이 인양됐다. 그러나 6명의 전사자를 끝내 찾지 못했으나 유가족들의 동의하에 2010 4 29일 영결식을 치렀다. 민평기 상사의 모친은 북한 경비정을 상대로 다시 싸우라고 보상금을 해군에 기탁해 일명 ‘민평기 기관총’이라는 중기관총을 초계함에 장착하기도 했다. 당시 현역 군인 모두가 민 상사의 모친 윤청자 여사의 생각에 머리를 숙였다
  
 
국방부 민군 합동조사단은 2010 5 20일 인양한 함수, 함미 선체의 변형형태와 사고해역에서 수거한 증거물들을 조사한 결과, 천안함은 북한에서 제조한 감응어뢰의 강력한 수중폭발에 의해 선체가 절단돼 침몰했다고 최종 발표했다
  
 
그 근거는 침몰해역에서 수거된 어뢰 추진동력 장치와 선체의 변형형태, 관련자들의 진술내용, 부상자 상태 및 시체검안, 지진파 및 공중음파 분석, 수중폭발의 시뮬레이션, 백령도 근해 조류분석, 폭약성분 분석, 수거된 어뢰부품들의 분석결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임을 밝혔다. 핵심사안은 천안함은 어뢰에 의한 수중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에 의해 절단돼 침몰했으며, 폭발위치는 가스터빈실 중앙으로부터 좌현 3m, 수심 6~9m정도이다. 공격무기는 어뢰로서 북한에서 제조한 고성능폭약 250kg 규모의 CHT-02D 어뢰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질문과 일부 전문가 사이에서 다른 견해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그중에서도 민군 조사단의 일원으로서 추천된 사람은 암초에 의한 침몰을 주장했고 이는 천안함 전사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혼란을 가중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당시 2함대사 공보실장 김○○ 소령의 고소로 인해 3년에 걸친 재판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의 도발, 즉 침몰의 원인에 대한 다른 주장과 정부 발표 사이의 차이를 두고 시시비비를 법원이 판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일부의 그 주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NLL 전사상자 132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단의 발표와 함께 정부의 각종 외교적인 노력이 있었으나 북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국은 천안함 피격원인에 대해 전략적 모호함으로 일관하는 등 실제로 북한에 대한 압박은 실효적이지 못했다
  
 
그해 중국의 반발을 예상했지만, 한미 정부는 종전 동해상이나 남해상 근해에서 실시하던 연합 해상강습훈련을, 핵 항모 조지워싱턴이 참가하는 가운데 훈련해역을 변경해 서해상에서 군산을 기점으로 근해까지 북상해 대북 응징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실시했다. 당시 중국은 서해상의 미 항모 진입 훈련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수준에서 입장을 정했다
  
 
한반도는 주변해역 5000km 안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중에서도 군함 간에 해상전투가 진행되는 해역인 서해 NLL은 유일한 초갈등 해역이다. 이 전쟁의 바다에서 2002년 연평해전으로 명명된 남북한 해군 간의 교전이 발생한 이후,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에서까지 해군은 교전 중이던 함정이 침몰하고 지휘관과 젊은 군인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우리 해군의 전사자는 52명이며 부상자는 80여 명에 달한다
  
 
접적해역이라는 바다에서 그 불편함을 인내하고 고속정의 갑판에 떨어지는 바닷물과 매캐한 엔진가스를 들이마시며 긴급 출동과 대기를 반복하는 고된 일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지금도 서해 NLL에 있다. 서해 NLL을 실효적으로 관리하고 지키려는 64년간의 노력은 이처럼 전투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계속되고 있다. 평택 2함대 안보공원에는 침몰했던 참수리 357호정과 천안함이 두 동강 난 채 전시돼 있다. 잊지 말자는 뜻이다.

  

3〉‘세월호·잠수함 충돌설’을 반박한다

맹골수로에서 잠수함 항해는 ‘자살 행위’ … 잠수함 충돌 주장은 궤변

/세월호가 침몰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인터넷에서는 ‘잠수함충돌설’ 등 괴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DB

 

  2001 9·11 테러를 당한 뒤 미국은 전쟁을 개시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과정에 ‘음모론’이 파고들었다. 9·11 테러는 개전 명분을 만들기 위한 미국 정부 자작극”이란 내용이었다. 2010 3,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격침됐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음모론이 제기됐다. “천안함이 암초에 부딪쳐 좌초했다” “미군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았다” “선체가 오래돼 ‘피로파괴’된 것이다” 등의 온갖 추측과 의혹이 난무해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천안함은 1988년 해군에서 인수해 22(내구연한 25)간 운용한 함정이다. 최근 5년간 69주에 걸쳐 총 14회 정비를 시행해 평균 선체 부식률은 3.22%였다. 즉 함정의 상태는 ‘피로파괴’가 발생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양호했다
  
 
천안함은 격침 당시인 2010 3 26일 오후 915분쯤 백령도 서남방 해역(海域·수심 46m)을 지나고 있었다. 이곳은 북방한계선(NLL)에 인접해 있는 작전지역이었지만 이상 징후는 없었다. 그동안 천안함이 15번이나 기동했던 곳으로 암초도 없어 큰 무리 없이 정상 항로를 유지하며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국제 민·군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천안함 침몰 원인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북한 무력 도발의 결정적 물증인 북한제 어뢰 추진체가 발견됐다. 국제 합동조사단은 같은 해 5월 “천안함 폭침은 북한의 어뢰 공격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 30%가량은 이를 믿지 않았다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은 2010 4월 “천안함 침몰은 좌초 때문인데도 정부와 군이 북한 어뢰 공격인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는 글을 온라인상에 올렸다
  
 
인천중학교 1학년 재학 시절 ‘폭발 연구’에 전념했다는 알파잠수기술 대표 이종인씨 역시 ‘좌초설’을 주장했다.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폭발에 대해 객관적인 관련 경력과 지식이 검증되지 않은 이씨의 주장 탓에 ‘천안함 좌초설’은 한동안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됐다. 이씨는 4년 뒤 세월호 침몰 사고 때는 자신이 제작한 ‘다이빙벨’의 효능을 자신하다가 ‘잠수 시연’만 한 뒤 철수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이후 이에 대해 천안함 때와 비슷한 음모론이 제기됐다. 그중 대표적인 게 “세월호가 잠수함과 충돌해 침몰됐다” “학생들을 구조하려 했던 통영함(만재톤수 4700t, 수상함 구조함) 출동을 저지한 세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혹은 2016 12월 ‘네티즌 수사대’를 자처하는 일명 ‘자로’란 이가 유튜브에 올린 ‘세월X’란 동영상을 통해 재확산됐다.   


  
‘세월X’로 인해 또다시 부상한 ‘세월호 음모론’

‘세월X’의 핵심 주장은 세월호 사고 원인 중 외부 충격에 의한 침몰을 배제할 수 없으며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잠수함과의 충돌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라는 것이다
  
 
‘자로’는 동영상 공개 후 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아직 단 한 번도 괴물체가 잠수함이라고 단정한 적이 없다〉며 〈사고 직후 나타났다가 약 10분 후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물체는 상식적으로 잠수함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을 뿐이다〉라고 강변했다


 
‘자로’가 관련 자문을 구한 김관묵 이화여자대학교 나노과학부 교수는 “(세월호 사고) 당시 큰 파도도 없었고, 바람도 그렇고 고래라고 해도 그렇게 큰 피해를 줄 수는 없다”면서 “잠수함이 아니라고 하면 ‘외계 생명체’인데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동영상 공개 후 ‘잠수함 충돌설’이 확산되자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다. 자로의 주장 대로라면 세월호와 충돌한 잠수함 잔해도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자로는 2016 12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세월호가 잠수함과 충돌했다면 잠수함도 남아나질 않는다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오랫동안 잠수함 관련 업무를 해 오신 분께서 ‘세월X’를 보시고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직접 남긴 글을 소개합니다〉란 글과 함께 링크를 올렸다. 자신의 ‘잠수함 충돌설’의 논거로 해당 글의 일독을 권했다는 얘기다
  
 
‘오늘의 유머’에 게재된 해당 글은 ‘잠수함 관련 업무를 오래 해 온 현직자’라고 밝힌 인물이 〈압력 선체는 웬만한 미사일을 맞아도 찢어지지 않고 그저 찌그러질 뿐〉이라며 〈세월호와 정면 충돌을 했다 하더라도 잠수함의 침수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는 궤변에 불과하다. 잠수함이 미사일을 맞더라도 찌그러지기만 할 정도로 강도가 높다면 잠수함 파괴용인 ‘대잠 어뢰’는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잠수함 충돌설’을 제기한 이들의 논거가 매우 빈약하다는 얘기다.   


  
사고 발생 해역은 잠수함 항행 불가 지역

/한국 해군이 운용 중인 214급 잠수함. 맹골수로는 잠수함이 항해할 수 없는 해역이다. 

 

  필자는 세월호 사고 당시 해군 공보실장으로 2014 4 17~5 9일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초기 구조와 수색 작전 지휘부에 참가하며 언론 질의에 답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명명백백하게 사실 관계를 밝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세월호 침몰 원인과 인명 구조 방치에 대한 의구심을 방치하는 건 세월호 사망자 유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세월호가 잠수함과 충돌했다는 주장은 2014년에도 있었다. 세월호 구조작전 지원본부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많은 기자들이 ‘잠수할 충돌설’에 대해 문의했고, 그때마다 사실 관계를 설명했다


 
세월호 사고 발생 당일, 그 시각에 진도 맹골수로를 항해한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은 없었다. 단정적으로 얘기하자면, 세월호가 잠수함과 충돌했을 가능성도 없다고 판단된다
  
 
모든 잠수함은 항해 공역이 확인된 안전한 곳으로만 항해한다. 일정 규모의 작전 공간과 안정된 수심이 있어야 잠수함이 움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한 잠수함 함장이라도 작전 가능 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해역을 항해할 수는 없다
  
 
우리 군은 209급 잠수함(1300t) 9, 214 6(1800t) 등 잠수함 15척을 운용하고 있다. 주변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도 잠수함을 운용하면서 필요에 따라 우리 해역이나 공해상에서 작전 활동을 한다고 판단되지만, 맹골수로는 잠수함 항행 가능 해역이 아니다. 우리 군보다 규모 면에서 월등히 큰 주변국 잠수함은 물론 북한의 잠수정도 이곳에서 항해할 수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진도 맹골수로는 조류가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수중에서 저속으로 움직이는 잠수함은 조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센 조류는 잠수함 기동에 치명적인 악조건이다. 전시라고 해도 잠수함이 항해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얘기할 수 있다
  
 
맹골수로는 수심이 낮다. 평균 수심이 37m에 불과하다. 가장 깊은 곳의 수심도 50m에 불과하다. 해저 굴곡도 심하다. 잠수함이 항해할 때 확보해야 할 안전수심이 최소 50m인 점을 감안하면 맹골수로에서 잠수함이 작전 활동을 한다는 건 ‘자살 행위’인 셈이다.   

  
  
‘레이더 괴물체’ 주장은 잠수함을 모르는 사람들의 궤변

맹골수로는 다수의 상선·어선이 지나는 곳이다. 수상함보다 속력이 느린 잠수함이 최소 안전수심조차 확보되지 않은 항로로 다닌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항해한다고 해도 육안으로도 잠수함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좁고 낮은 곳이다. 이에 따르면 맹골수로는 은밀하게 기동해야 하는 잠수함 특성상 가장 피해야 할 해역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잠수함 충돌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세월호 침몰 당시 주변에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괴물체’가 있었다면서 레이더 영상을 내세운다. “세월호 1/6 크기의 물체가 세월호가 지나간 자리에 나타났으며 이를 기존의 주장들처럼 ‘컨테이너’로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크다”고 얘기한다. 수중항해를 하는 잠수함은 탐지·식별이 어려운 ‘비대칭 전력’이다. 레이더에 잡히지도 않는다. 잠수함을 탐지·식별·추적할 수 있는 장비는 수중음파탐지기(소나, Sound Navigation And Ranging)인데 이마저도 완벽하게 잠수함을 잡아내지 못한다
  
 
잠수함이 수면으로 떠올라 항해하면 레이더에 잡히긴 하지만, 선체 특성상 물 위로 노출되는 부분은 함교탑과 선체 일부뿐이다. 세월호 사고 당시 레이더에 잡힌 ‘괴물체’의 레이더 반사면적(Radar Cross Section)을 근거로 그 규모를 추정하고 이를 잠수함이라고 주장하는 건 잠수함과 레이더와 관련해 기초지식조차 없다는 걸 드러내는 것과 같다
  
 
만약 잠수함과 화물을 적재한 세월호(6800t)가 충돌했다면 잠수함(1200t 또는 1800t)은 산산조각이 났을 가능성이 크다. 파괴까진 아니더라도 심한 손상을 입고 침몰했을 것이다. 해군이 잠수함 구조 작전을 하고, 해당 선체를 수리했을 테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자로 등이 주장하는 세월호 주변의 ‘괴물체’는 급변침 당시 쏟아진 세월호 적재 컨테이너 박스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에 대해 수면을 떠다니는 컨테이너 박스의 경우 레이더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해군 함정이 작전이나 항해를 할 때 냉장고 같은 소형 부유물이 레이더에 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런 표적들이 레이더에 나타나면 해군은 고속정을 출동시켜 육안으로 확인하고 있다.     


  
해군, 세월호 사고 직후 시운전 중인 통영함 투입하려 했지만 … 

통영함은 해군에서 약 30년 동안 운용한 광양함과 평택함을 대체하기 위해 2012 9월 건조한 수상함 구조함이다. 전장 107m·전폭 16.8m·선박 중량 3500t급 규모의 통영함은 기존 수상함 구조함에 비해 탑재 장비 성능이 우수하다. 선체고정음파탐지기, 사이드스캔소나(Side Scan Sonar)와 수중 3000m까지 탐색할 수 있는 수중무인탐사기(ROV)를 탑재해 탐색능력이 향상됐고, 잠수요원이 수심 90m에서 구조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잠수지원 체계를 갖췄다
  
 
통영함은 또 최고 38km/h까지 속도를 낼 수 있어 해난사고 발생 시 보다 신속하게 구조 현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 예컨대, 서해 백령도 인근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기존 수상함 구조함이 모항 진해항에서 출발하면 현장까지 가는 데 이틀이 걸리는 반면 통영함은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다. 통영함은 해군의 윤영하급 유도탄 고속함(570t)을 인양할 수 있으며, 대형 수송함(독도함)을 예인할 수 있다
  
  2014
4 16,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한 직후 황기철 당시 해군 참모총장은 두 차례에 걸쳐 “구조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인력을 최우선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하고, 진해 해난구조대(SSU)와 각종 함정 등 전 구조 전력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여기엔 수중 탐색 및 구조 작전을 수행하는 잠수사를 지원하기 위한 챔버를 보유한 함정도 포함됐다. 2011년 천안함 피격을 경험한 해군은 잠수사들이 대규모로 잠수에 들어갈 것을 예상했고, 반드시 다수의 챔버 보유 함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해 3척을 우선 출동시켰다. 챔버란, 잠수사가 수중에서 각종 작업을 마치고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잠수병 예방 및 치료 장비로, 잠수사들의 몸에 남아 있는 질소를 밖으로 서서히 빼내는 역할을 한다
  
 
황 총장의 지시를 받은 해군본부 각 부서에선 향후 지원 가능 분야를 점검했다. 그중 기획관리참모부는 챔버 고장 등 함정 운용상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고자 당시 대우조선해양에서 건조된 후 시운전 과정에 있던 통영함도 현장에 투입하려고 했다.   

  
  
해군 자체 종합 판단에 따라 통영함 투입 계획 철회

 

  황기철 총장은 2014 4 16일 세월호 사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진도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한 황 총장은 국방부 지시에 따라 당시 사고 현장에 있던 정홍원 총리가 주관하는 상황 대책 점검회의에 참석했다. 이튿날부터는 해군참모총장으로서 구조작전 지원본부장 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고 23일 동안 맹골수로에 배치된 상륙함 독도함에 올라 작전을 지휘했다
  
 
한편 황 총장은 4 16일 밤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로부터 시험평가를 다 마치지 못한 통영함을 출동시키려면 양해각서를 체결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해군본부, 방위사업청, 대우조선해양이 통영함 사용에 관한 합의각서를 체결했다. 이 기획관리참모부 1차장이 해군참모총장 명의(1차장 전결)의 공문으로 관련 부대 및 기관에 ‘통영함 투입 준비 지시’를 했다
  
 
해군이 통영함 투입을 준비한 건 앞서 밝혔던 ‘챔버’ 때문이었는데, 당시 세월호 사고 현장에는 각각 챔버 3, 1개씩을 보유한 청해진함, 평택함, 다도해함이 배치돼 있었다. 이들 함정 세 척의 챔버들은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통영함을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무리하게 사고 현장에 배치할 경우 전력화 과정을 다 끝마치지 못한 통영함의 장비 오작동이나 항해 안전사고 우려도 있었다. 해군은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통영함을 현장에 투입하지 않았다
  
 
통영함이 세월호 구조 현장에 투입됐다면 실종자 탐색구조에 큰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면서 통영함 미투입 논란은 점점 확산됐지만, 통영함은 구세주가 아니다. 통영함이 세월호 사고 현장에 투입됐다고 해도 해당 함정이 그곳에서 수행할 수 있는 임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통영함, 현장 배치된 청해진함과 임무 중첩 … 투입했어도 효용 없었을 것 

통영함의 기본 임무는 크게 네 가지다. ▲설계 능력 안에서 침몰 선박과 항공기 인양 ▲해상 기동 불가능한 함정 예인 ▲암초나 얕은 바다에 빠진 함정 이초(離礁) ▲수중 탐색 및 구조 임무 수행을 하는 잠수사의 잠수 지원(챔버) 등이다
  
 
이 중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필요로 한 통영함의 기능은 잠수사의 잠수를 지원하는 것이었는데, 이 임무는 이미 잠수함 구조함인 청해진함에서 하고 있었다. 이미 배치된 함정이 관련 임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영함이 세월호 사고 현장에 투입됐다고 해도 별다른 효용이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이에 대해 혹자들은 “통영함이 최첨단 함정이고 통영함에 있는 선체고정음파탐지기와 수중무인탐사기가 정상 작동했다면, 이 두 장비로 실종자를 탐색하고 구조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선체고정음파탐지기와 수중무인탐사기는 수중 물체를 탐지하는 장비다. 선체고정음파탐지기는 해저에 있는 물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장비인데, 이미 세월호의 침몰 위치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필요성이 높지 않았다. 사람이 카메라를 통해 조종을 하는 수중무인탐사기의 경우 세월호 선체의 세부 모습, 실종자 외부 탐색 등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현장 여건상 활용하기 어려웠다. 사고 해역의 강한 조류 탓에 수중 이동이 어려울 뿐 아니라 시계(視界) 20~50cm에 불과해 무인 조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실제로 세월호 사고 수색 작업에 참여한 미국 민간업체는 2014 4 21일 수중무인탐사기를 투입했지만, 강한 조류와 시계 불량 때문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했다
  
 
많은 언론과 국민들이 세월호 사고 이후 정부의 무능한 대응을 지적했다. 그 과정에서 해양경찰은 조직이 해체되는 아픔까지 겪었다. 당시 구조작전을 지켜보았던 필자는 정부나 군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허위가 역사가 되는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기록을 남겨두려는 것이다. 

 

4〉 해군 해난구조대(Navy SSU) - 바다에 산다! 해난구조대!

⊙ 한성호·서해훼리호·세월호 침몰, 천암함 폭침 등 각종 해난사고 때마다 해난구조대 활약
⊙ 해난구조대의 첫 활동은 1954 8월 독도에 등()을 설치한 것
⊙ 북한 미사일 은하3호 수색작전에서도 활약

/경남 진해 군항기지에서 혹한기 내한(耐寒)훈련을 받는 해군 해난구조대(SSU) 대원들. 
대한민국 바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건 SSU는 달려간다. 

 

  세월호가 3년 만에 인양됐다. 그 선체를 보면 해난구조대(SSU) 대원들이 생각난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맹골수로의 잠수 바지선 위에서 해난구조대 대원들은 쉼 없이 세월호의 암흑 속으로 들어갔다. 해난구조 잠수사들의 잠수횟수는 1253회로, 63000m에 달한다
  

  잠수조건은 시계 1m 이하, 수중전등 빛에 의존하고 문을 부수고 격벽(隔壁)을 잘라야 하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생명줄을 차고 호흡줄을 달고 기어서 더듬어 실종자들을 찾아 갔다. 동서남해의 전방함대에 배치된 구조대원 중 젊은 대원들이 순환배치돼 긴 수색작전이 진행되었다
  

  세월호의 격실은 잠수하는 조간이 너무나도 열악했다. 미군 해난구조팀은 맹골의 조류에 단 한 번 잠수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철수했다. 맹골의 조류속도는 4킬로노트, 안전조류는 1킬로노트였기 때문이다
  

  2014 4 16일부터 그해 11월까지 해난구조대원들이 줄을 이어 잡고 손으로 더듬어 생명을 구하려 실시하던 잠수는 어느새 시신을 찾아내는 임무로 바뀌었다. 한 사람의 주검 앞에 잠수사들은 물속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이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며 수색작업을 계속했다


 
늘 바다에서 벌어지는 생사 기로의 현장에 부름과 명령에 달려가야 하는 것이 해군 해난구조대이다. 바다의 119 역할을 해 온 해군 해난구조대의 발자취 중에서 꼭 기억해 볼 만한 기록을 찾아본다. 해난구조대는 1950 9 1일 ‘해상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당시 해군총참모장이던 손원일 제독은 함정 손상 시에 복구의 중요성을 인식해 해군 구성원 중 상선학교 출신자, 일제하 일본식 근대 잠수장비 운용능력을 보유한 기술자(민간 구난회사 근무 경력자)와 선박구조 운용에 능숙한 민간인 16명을 선발했다. 1954 8 1일 ‘해상공작’이라는 이름이 ‘해난구조’로 변경됐다


  
독도에 최초로 등을 달다

 해난구조대의 첫 활동이 독도에 등()을 설치한 것이다. 이는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근거로, 두고두고 작용한다. 1952 1월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언, 즉 한국연안의 50~60마일 수역에 대한 한국의 주권을 선포하자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고조됐다
  

  1952 2 27일부로 미국은 독도를 미군 폭격 훈련지에서 제외시켰는데, 이 시기를 이용해서 일본은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에 대한 침탈행위를 빈번히 일삼았다. 일본은 1953년 독도 어업허가권을 일본 어민에게 부여했다. 1954년 일본 참의원 쓰지 마사노부는 일본 기자들과 함께 독도에 잠입해 암벽마다 페인트로 일장기를 그렸다. 이 만행에 동행했던 일본 기자들은 ‘한국의 함정은 어디에 있느냐’며 대서특필했다
  

  일본 언론의 주장은 “독도에 들어가는데 막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평화선 무효화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에 대응해 1954 7 24일 정부 조사단은 독도에서의 일본인 행적을 확인하고 대응책으로 ‘독도 등() 설치안’을 정부에 건의한다
  

  1954 8 8일부터 8 11일까지 해군 함정 S-2 정과 해난구조대원들이 독도에 상륙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으로 등을 설치했다. 군사적 목적 이외에 처음으로 해난구조대가 수행한 임무였다
  

  최근 일본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내용을 교육요령에 포함해 발표한 점에 비추어볼 때 1954년 대한민국 독도에 등을 설치한 것은 참으로 잘한 선택이다. 일본이 아무리 떠들어도 실효 지배가 우선이다. 해군의 독도방어 훈련은 연 2회 빠짐없이 진행하고 있으며 일본 순시선이 독도 근해 12마일 이내에 진입하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일도 계속되고 있다


  
LST 문산호를 해체하다

/초기 해난구조대원들은 6·25전쟁시 활약했던 LST문산호를 해체, 폭파하면서 실력을 닦았다. 

 

  해난구조대가 수행한 군사임무 중에 손꼽히는 것은 상륙작전 중 경상북도 영덕 장사 해안에 좌초된 문산호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해난기술로 큰 선박을 해체한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문산호는 상선이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작전에 사용하기 위해 묵호경비부에 징발된 선박이었다
  

  1950 9 14일 문산호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기만작전을 위해 특공대원 800명이 편승하고 경북 포항 장사동에 상륙했다. 특공대라지만 대구·밀양에서 모집된 중고생들로 두세 차례 총을 쏴 본 게 훈련의 전부였다. 이들을 태운 문산호는 장사 해안으로 들어서면서 태풍을 만나 좌초된다


 
북한군 5사단을 동해안으로 끌어내 6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전사자만 139명을 남겼다. 징발된 상선인 문산호 구조를 위해 1950 10 16일 해군 해상공작대가 투입됐으나 북한군과의 지속적인 전투로 구조 활동은 불가능해졌고 그 다음해인 1951 4 11일부터 27일까지 17일간 재차 전장에 투입되어 좌초된 문산호를 해체하고 유실된 병기 등 주변 탐색 등을 실시했다

 

  1954 7 9일부터 8 6일까지 29일간 해난구조대가 3차로 출동하여 선체 내부를 해체하고 1966년에야 폭파작업을 실시하여 선체를 완전히 제거했다. 문산호 해체는 맨손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해난구조대는 선진 기술과 장비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교육, 장비, 기술축적 등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진도수로 침몰 여객선 한성호 구조작전!

1973년에도 세월호처럼 화물을 과적(過積)한 한성호가 팽목항을 향하다 항해 중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한 적이 있다. 한성호는 목포와 조도간을 정기 운항하는 총톤수 70톤의 여객선이다. 1973 1 22 24시경 서해남부 남해서부 해상에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여객선의 운항이 금지됐는데도 한성호는 정원(86)보다 41명이 초과한 127명과 선원 9명을 포함한 승객 136명을 승선시키고 과적 상태에서 855분경 목포항을 출발했다
  

  당일 시하도를 통과할 무렵에는 폭풍주의보가 해제됐다. 한성호는 장죽수로와 진도수로의 인근 섬들인 마진도, 장산도, 율도, 가학도 등을 거쳐 1 22 14시 다음 기항지인 팽목항을 향하여 가학도를 출발했다
  

  각흘도(角屹島)를 통과할 무렵 파고 2~3m에 달하는 격랑이 일었다. 한성호는 진도 해안을 따라 조속 3~4노트로 흐르는 역조를 거슬러 항해 중 3~4m에 달하는 파도를 맞고 전복돼 삽시간에 침몰되었다
  

  이날 사고로 선원을 포함한 승객 19명이 익사하고 76명이 실종됐다. 1973 1 22일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 6명이 현장에 출동했으나 익사체 탐색과 침몰선 인양에 전념하는 구조작업에 한정됐다
  

  1973년도에도 사고해역은 수로를 따라 흐르는 강한 조류가 발생해 잠수사의 접근이 제한됨에 따라 수상구조작업을 주로 실시하고 사실상 수색작업과 인양을 위한 잠수작업이 불가한 상태라는 판단하에 3일 만에 구조작업을 지원한 뒤 종료했다. 그랬던 진도 인근에서 40여년 만에 세월호 같은 험한 일이 재연된 것이다


  
바다의 유물 발굴자-거북선을 찾아라 !

/해난구조대는 충무공해전유물발굴 사업에 참여, 별황자총통을 비롯한 당시의 유물들을 다수 인양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 주도하에 충무공 이순신 현양(顯揚)사업이 활발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이순신 제독의 유물발굴이 정부와 학계의 관심이 됐다. 1973 5월 당시 문화공보부는 이 충무공의 해저유물(거북선)을 발굴 인양해 애국애족 정신을 드높인다며 발굴조사단을 발족했다
  

  유물발굴조사단은 1973 7 5일 조사작업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당시의 국내외 문헌을 검토해 칠천수로, 당포, 당항포 등 유물잠재 가능 해역을 선정하고 해군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들과 국립지질연구소가 조사작업에 착수했다   

 

  1975년도 시작한 충무공 해저유물 발굴조사 결과, 거북선과는 관계없는 총통 4(당포 2, 노량 1, 고만 1)과 각종 토기류 철편, 목편류 등 100여 점을 인양하고 돌무덤 1개소와 침몰된 지 40~50년으로 추정되는 고철선을 발견했을 뿐 거북선의 실체는 찾아내지 못했다
  

  7년간의 해저유물 발굴조사 작업을 통해 축적된 자료와 경험은 값진 것으로 이후 발굴조사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됐다. 당시 7년간의 총 발굴조사 기간은 92주로, 칠천수로-노량-당포-안골포 등 조선 수군의 격전지 또는 수군 기지와 수로를 중심으로 실시됐다

  

  1975 8 20일 전라남도 신안군 지덕읍 방축리 도덕도 앞 해상에서 한 어부(최평호·당시 35)가 물때에 맞추어 내려놓은 그물에 걸린 청자화병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발견하여 신안군청에 신고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이곳에 다량의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작업에 착수하고 반경 2km 정도의 해역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1976 10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사항에 따라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해군 해난구조대 임시조사단을 편성하고1차 확인조사를 벌여 청자류 100여 점을 인양하고 다음 달인 11월에 청자류 1000여 점을 건져올림에 따라 당국에서는 이 해역에 다량의 유물이 잔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후 문화재관리국은 해군 당국과 회의를 열고 정밀 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한 후 197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 작업을 추진했다. 이에 해난구조대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간 11차에 걸쳐 신안 해저유물 발굴조사를 펼쳐 도자기류 기타 유물 22007점과 동 약 28, 자단목 1017, 선체편 445편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유물을 인양했다. (출처 : 해난구조대 60년사)   

 

  이때 동원된 장비가 총 872종이었으며 잠수사는 연인원 9896명으로, 이들의 잠수시간은 3474시간이었다. 1970년대 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은 발굴 및 인양 장비를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여서 유물인양 작업은 오로지 해군 심해 잠수사에 의해 이뤄졌다.  


  
해상사고 그 자리에 언제나 해난구조대   

/세월호 사고를 비롯해 해난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SSU는 어김없이 출동한다. 

 

  1993 10 10 940분경 전북 부안군 격포리를 항해 중이던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근해 해상에서 기상악화로 장항으로 회항하다 침몰해 승객과 승무원 292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해상 참사가 발생했다
  

  1993 10 11일 해군은 민군 구조대의 지휘권을 인계받아 1993 10 27일까지 구조작업을 시행했다. 골든타임이라는 용어가 없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사고 이후 구조작업은 사체인양이 중심이었고, 2~6노트의 조류와 수심 18m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선체 내부의 좁은 격실에 들어가 무거운 시체를 안고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는 것이었다   

 

  훼리호는 선체가 단순하고 작아서 세월호보다 수색작업이 수월했다는 해난구조대 한 잠수사의 말이 생각난다. 당시에도 선체인양 작업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10 26 2330분경 선체를 2차로 인양해 10 27일 동방호(서해훼리호 바지선)에 탑재한 후 군산항으로 돌아와 지방해운항만청에 인계함으로써 구조상황이 10 27 1130분에 종료됐다
  

  서해훼리호 구조작전 시 1차 사체인양은 해난구조 SSU 심해 잠수사 78, UDT요원, 해경 특수구조 20명 등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2차 선체인양은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 구미함, 설악호, 바지선 2, 예인선 5척에 의해 진행되었다. 당시에도 구조작전의 긴박성을 고려하여 야간잠수 작업을 강행했다

 

  미 해군 잠수 교리에는 조류 1노트 이상 잠수작업 금지, 1 1회 잠수, 야간잠수 작업 지양토록 되어 있으나 해군은 단기간 내에 수색과 인양 작업을 종료했다. 이 과정에서 해군 헬기 1대가 해상에 추락하여 순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서해훼리호 작전에 참가한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 가운데 상병 이태원은 이런 구조 체험담을 남겼다

  

  10 14일 선체의 3등 격실 내부를 탐색하여 사체 1구를 안고 상승하던 중 뒤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고 놀랐다. 시정은 전무했고 격실에는 시체와 부유물밖에 없는 상황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낚시에 잠수복이 걸린 것을 알았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느낌으로 공포가 밀려 왔지만 부상(浮上) 후 사체를 인계한 뒤 다시 잠수해 5구의 사체를 더 인양했다.  

 

  상사 반석동은 10 14 19시경 선미 펄 굴착작업으로 잠수후 4m 지점까지 굴착하고 나오는 순간 펄이 무너져 내려 퇴로가 막혔다. 반 상사는 “시야는 전무하고 오직 생명줄에만 의지한 상태로 구조신호가 전달되지 않으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고 회고했다. 그를 구조한 것은 5분쯤 후에 펄을 뚫고 들어온 동료 잠수사였다. 당시 반 상사는 5분이 5시간 같았다고 증언했다
  

  상사 함동호는 10 15 3시경 선수에 체인을 묶는 작업을 끝내고 상승하던 중 어망에 공기통이 걸려, 탈출을 시도하다 격한 조류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죽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용기를 내어 잠수용 칼로 어망을 제거하고 탈출한 후 공기량을 보니 잔량이 거의 바닥에 가까웠다

 

  하사 이용호는 10 16 10시경 선체인양을 하는 중 선미 부분 굴착작업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빨라지는 조류를 느끼고 이번 작업을 종료하지 못하면 다음 정조시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사로잡혔다. 그 때문에 작업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바람에 펄 굴착을 마치고 나서 공기량을 보니 바닥이 나서 18미터 깊이에서 해면까지 비상탈출했으나 수면에서 의식을 잃었다
  

  그 후 조류에 떠내려가다 고무보트에서 발견되어 즉시 구미함으로 이송돼 감압챔버(잠수병 치료실)에서 약 50분이 지난 후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3시간 치료 후 챔버실에서 나와 수많은 유가족의 고통을 생각하며 10 16일 야간작업부터 다시 잠수에 참가했다

 

  송무진은 10 17 10시경 배수작업차 선체에 올라갔을 때 심한 악취와 함께 부패된 시체 50여 구를 목격하고 심한 구토 등으로 시신들의 처리작업이 매우 어려웠다고 기록했다
  

  하사 최세안은 야간에 수중등 하나만을 들고 2~3m가 넘는 파도를 헤쳐 18m 아래로 내려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격실을 더듬어 가며 무거운 사체를 찾아 젖먹던 힘까지 다해 고무보트로 계속해서 올렸다. (출처 : 서해훼리 작전 소감문 )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들이 이토록 험난한 과정을 잘 참고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해군 SSU 요원으로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며 유가족 여러분께 한시라도 더 빨리 인양을 해 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수대교 붕괴 현장,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고뿐 아니라 70년대 간첩선 인양작전, 해군함정의 좌초 현장, 공군기 추락 현장, 남해 간첩선 격침 현장 등 수십 차례의 간첩선 침몰 현장에서 증거를 찾고 인양하는 등 해난구조대의 역사는 늘 구조대원이 목숨을 던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별빛 같은 잠수사 한주호 준위   

/천안함 폭침 후 구조작전을 수행하다 순직한 고(故) 한주호 준위. 

 

  2010 3 26 2122분경 서해 백령도 서남방 해역에서 경비 중이던 천안함이 북 잠수정의 어뢰공격으로 선체가 함수, 함미 부분으로 분리돼 침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생존 장병들은 일사불란하게 행동해 해경-501함에 의해 구조되었다. 승조원 58명이 구조되고 46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함정에서 탈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해군은 3 27일부터 수상함 구조함을 비롯해 해군 해난구조대 등을 현장에 투입해 침몰한 천안함과 실종자 수색작업에 돌입했다. 백령도 근해는 조류가 최대 4노트였으며 사고 해역은 50m의 수심과 강한 조류에 의한 퇴적물과 육지에서 유입되는 담수 부유물질로 10m 이상의 수심에서는 거의 0m의 시계 상태를 보이는 수준이었다

 

  나쁜 기상조건과 빠른 조류 때문에 수색·구조 작업은 난관을 겪었다. 작전 초기부터 현장에 있던 한주호 준위는 3 30 14시경 장병 등을 한시라도 빨리 가족에게 찾아줘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의 감독을 해야 하는 나이임에도 잠수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한주호 준위는 사망했다
  

  잠수활동으로 순직한 한주호 사건을 계기로 전사자 가족들은 또 다른 장병들의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공감하게 됐고 구조 및 수색 작업을 중단하고 인양작업에 돌입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50m에 이르는 깊은 수심으로 어려움을 겪던 함미 인양과정은 4 12일 오후 함미를 백령도 해안 방향 수심 25m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에 성공했다  

 

  4 14 21시 크레인을 이용해 세 번째 인양용 체인 연결작업이 성공해 20일 동안 서해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함미 부분이 15일 만에 최종 인양됐다. 하지만 인양된 함미 부분에는 실종 장병 36명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돼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이 폭침한 후, 해군 SSU 잠수 요원들은 헌신적으로 구조작전을 수행했다. 

 

  인양된 함미에서 순직 장병 수습 후, 함수 인양작업은 함미에 비해 더욱 어려웠다. 선체가 오른쪽으로 기운 데다 상부 구조물이 돌출해 있어 인양 과정에 유도 와이어와 인양 체인이 끊어지는 등 난관이 많았다
  

  4 22일 네 번째 체인까지 연결한 군과 민간 인양팀은 4 23일 함수 바로세우기 작업에 성공하고, 24 08시부터 인양작업을 시작하여 12시경 마침내 함수를 바지선에 탑재하면서 침몰 한 달여 만에 인양작업을 마무리했다

 

  인양된 함수에서 실종 장병 시신 1구를 확인하고 이에 앞서 22일 연돌에서 시신 1구를 추가로 확인하면서 실종자 46명 중 40명이 숨진 것으로 최종 확인했다
  

  그 후 천안함 폭발원인 규명, 주요 잔해물 수거, 실종자 시신 탐색 및 수습을 위해 탐색수거 작업이 실시되었다. 참가 전력으로 청해진함, 평택함, 양양함, SSU 대원 73명이 투입되었다. 기뢰탐색함이 해저 음탐기로 탐색하여 목표물이 확인되면 그 지점에 위치 부이를 설치하고 일일이 그 자리에 SSU 대원과 구조함이 위치하여 수거 또는 인양하는 절차로 진행되었다  

      

 바다에 떨어지는 증거물은 샅샅이 찾는다-북한 미사일 은하 3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안보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북한은 위성발사라고 주장했지만 국방부 등 안보 부처는 탄도미사일 위험으로 발전될 가능성에 주목했으며 일정 고도에서 분리된 페어링의 크기와 성공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이유는 장거리 미사일에 핵 탄두를 장착할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전문가들은 이 미사일 발사에서 비행궤도를 분석하고 그 잔해를 수거하는 것이 관심 사안이었다
  

  정보에 따라 미사일 발사 탐지를 위해 고도의 감시 태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해군의 이지스함은 북한 미사일을 탐지했다. 특히 탐지한 궤적 이외에도 분리 과정과 그 분리된 낙하물의 고도와 위치를 정확히 탐지하여 낙하 지점을 일정한 해역으로 예측할 수 있는 탐지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잔해물 수거작전을 위해 청해진함과 해난구조대 잠수사들이 현장으로 직파됐다. 그리고 2012 12 12일 평안북도 동창리 시험장에서 발사된 장거리 로켓 은하 3호의 대형 잔해물이 12 14일 서해 해저에서 인양됐다
  

  해군 청해진함이 군산 서방 160km 해저에서 인양한 대형 잔해물은 1단 추진체 잔해로, 연료가 연소될 수 있도록 산소를 공급하는 산화제통이었다. 산화제통은 길이 7.45m, 직경 2.4m, 두께 3.8mm의 원통 모양으로 중량은 1.13t이었다. 인양장소는 변산반도 서방 82NM, 수심 85m 해저로, 소해함인 옹진함이 식별하고 인양은 구조함인 청해진함이 임무를 수행했다   

 

  수중 잔해물을 음파로 탐지하고 수중카메라로 확인한 다음에 청해진함의 심해잠수구조정(DSRV)을 이용하여 접근하고 인양 조건을 확인한다. 그 이후 잠수사들이 잔해물의 연결을 위해 칠흑같은 바닷속에서 연결색과 인양색 연결작업을 하면 청해함이 위치를 고정시키고 매우 천천히 이를 들어올리는 방법이다
  

  청해진함이 현장에 도착해 수중카메라로 잔해물 상태를 확인한 1단 로켓은 해저 85~88m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인양작업은 밀물과 썰물이 없는 정조 시간대를 이용해 해난구조대 잠수사가 인원수송캡슐(PTC)을 타고 수심 80m 아래로 내려갔다   

 

  잠수를 위해 청해진함 가압 챔버에서 수심 80m 압력에 맞춰 몸을 적응하고 있었다. 수중라이트를 켜도 50cm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잔해 한쪽 끝에 인양용 특수 로프를 거는 데 성공했다. 또 다른 로프를 연결해야 하는 나머지 한쪽은 펄에 30~50cm 정도 묻혀 있어 잠수사들이 손으로 펄을 직접 파내야 인양색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은 오후 617분 중단됐다. 조류속도가 작업제한 규정인 0.5노트를 넘어 0.7노트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0.7노트의 조류는 물속에서 1초에 약 30cm씩 잠수사를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

  해군은 오후 858 2차 인양작업을 개시했다. 인양작업을 지휘한 55구조군수지원대장 김진황 대령은 “야간작업을 금하고 있지만 물살이 점점 더 세질 기미가 보이고 기상이 나빠진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 불가피하게 결정했다”고 했다
  

  새로 투입된 잠수사 3명은 손으로 펄을 파낸 끝에 오후 1050분쯤 두 번째 로프를 잔해물에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청해진함은 오후 1113분부터 1단 로켓을 올리기 시작했고 14 026분 인양작업을 완료했다   

  이 모든 과정이 잠수사들의 손과 발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장비와 함정이 일체화되어야 인양이 가능해진다. 완전한 준비가 이루어져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기상이다
  

  포화잠수 기법은 해군 해난구조대의 유일한 기술로서 장비와 체력과 기술을 갖춘 잠수사, 훈련시설 등을 통해서 가능한 잠수기법이다. 이런 준비가 없었다면 그저 바다에 떨어지는 낙하체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광명성 미사일 잔해도 91m 해저에서 순식간에 찾아내   

/알몸 구보는 SSU의 전통이다. 겨울바람을 뚫고 SSU 대원들은 진해기지를 달린다.

 

  2016 2 7일 북한이 발사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체에 대한 수거와 인양 작전이 해난구조전대장 제병렬 대령의 지휘로 서해에서 진행됐다. 이 수색전대에는 통영함과 33명의 잠수사로 편성됐다. 이지스함에서 탐지한 낙하체의 구역을 가로 10NM 세로 60NM로 정하고 이를 약 3NM을 소해함이 탐색하고 근접해서 통영함의 수중무인탐사기(ROV)를 이용하여 물표를 확인하면, 통영함의 ROV와 잠수사들이 낙하체에 대한 결색을 진행하고 인양기를 이용하여 들어올리는 절차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때도 약 90m의 해저에서 인양체의 결색은 표면공급식 혼합기체 방법으로 준비하고 잠수사들이 해저로 진입하여 연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전은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했다. 한계 수심 91m에 육박하는 혼합기체 방식의 잠수는 잠수사들의 고난도 훈련과 준비를 입증하는 대단한 성과였다
  

  도대체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발사체의 일부이기는 하나 어떻게 만들었지에 모두가 관심을 보였고, 바다에 떨어진 이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나 이를 순식간에 찾아낸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과였다   

 

  해군으로 근무하면서 늘 이렇게 바다에서 마지막 국면을 담당하는 것은 해난구조대였다. 그동안 언론에 알리는 일들 중에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이들의 노력을 꼭 기록하고 싶었다. 지금도 해난구조대는 대한민국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어느 곳에든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숨 막히는 삶을 살면서 바다로 뛰어든다.

 

월간조선 5월호

 5〉 전투의 그늘

⊙ 사선을 넘은 생존 장병의 침묵 … “불을 켜고 잠을 자고, 엘리베이터 혼자 타기가 겁나”
⊙ 천안함 1주기 때 ‘마음의 돌’ 매달고 사는 최원일 함장의 인터뷰를 주선할 수 없었다
⊙ 현행법상 전투행위 자체는 보훈대상 아냐 … ‘전투행위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가칭) 
    
제정 시급
⊙ 서해바다는 전쟁의 바다 … 국가도 참전장병들에게 합당한 의무 다해야

/2010년 12월 24일 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특별묘역을 찾아 참배하는 천안함 생존 장병들. 
많은 생존 장병들이 전상 인정이 안 돼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천안함 피격사건 생존자 전환수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NLL 인근 해역 경비작전 수행차 출동임무 수행 중인 (2010) 3 26일 어뢰에 공격을 받았고, 그날은 야간에 수제비로 야식을 먹고 빨래하던 중 봉변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함정이 두 동강 나는 그 순간, 함수 쪽에 있다가 간신히 구조되었으나, 동기생 한 명은 함미의 체력단련장에 있다가 전사했는데, 그 동기생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씨는 손가락 부상을 인정받아 보훈대상자가 되었으나, 상선의 항해사 꿈을 접고 바다와 관련 없는 직장에 영업직으로 취직했다
  

  2년 전 천안함 생존 용사들과 가진 인터뷰 조사에 의하면 생존자 중 60%가 “잠잘 때 악몽이 잦고 불을 켠 채로 잠자고 있다” “사고 직후에는 엘리베이터도 혼자 타는 게 두려웠다” “길거리를 걷다가도 갑자기 옆 건물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지하철 타고 가다가 열차가 전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라고 진술했다


  
자살해도 국가유공자가 되는 현실

/2017년 3월 2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에서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함장이었던 최원일 해군 중령이 유족을 위로하고 있다. 

 

  군 복무를 마친 병사나 간부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싶지만 취직을 못할 것 같아 두렵다” “국민적 영웅이라 칭하고 엄청 띄우더니 행사 때는 높은 분들에 밀려 구석에 박힌 들러리 신세”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천안함 생존 장병 58명 중 3명만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정부지원금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실태에 대해 한 생존자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훈련 중에 부상을 당하거나, 사무실 집기를 운반하다 허리만 삐끗해도, 내무반별로 휴일날 축구하다 다쳐도, 극히 일부지만 심지어 자살해도 국가유공자가 되는 게 현실이다.
  

  천안함 피격사건 때 해군본부 인사근무처장을 지내며 전사자 현양(顯揚) 활동을 한 오계록 예비역 해군 제독은 “천안함 사건 이후 생존 장병에 대한 지원책이 부족했다”고 아쉬움을 밝혔다. 당시 해군에서 극한의 침몰상황에서 살아 나온 장병들에게 군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본인들이 원하는 보직, 즉 인사요청을 받아들이는 것과 희망 시에 군 병원에서 언제든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게 전부였다
  

  오 제독은 “생존 장병의 심리치료 환경조성을 위해 각 부대에 소속된 생존 장병의 진료 여건 보장을 위한 지침을 하달했지만, 그나마 새로운 보직을 받은 간부들은 수시로 병원을 찾아가는 것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생존 장병들은 전문가에 의한 지속적인 심리치료와 관리가 필요했는데, 군 병원에 트라우마를 전담할 전문 인력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는 것이다
  

  천안함재단이 발족되고 전사자에 대한 지원책이 마련되자 전사자 가족들의 요청으로 천안함재단에서 생존 장병에게 소정의 위로금을 전달했다. 위로금을 받은 생존 장병들은 그마저도 전투 중 사망한 장병의 자녀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며 해군장학재단에 기부했다. 당시 이 기부행위를 보도자료로 작성해 언론에 제공했던 필자는 한 배를 탔던 전사자에 대한 생존 장병들이 갖는 ‘짐’이 있음을 직감했다.   


  
생존 장병의 전투 후유증 문제 소홀

천안함 피격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함정의 침몰과 전사자가 발생한 것은 초유의 사태였다. 정부와 해군은 대규모 전사 장병에 대한 예우와 선양을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피격 원인의 문제점을 검토해 이후 군사적 대응책을 강구하는 것은 정부와 군이 시간을 두고 진행했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지원책들이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가운데 국민들의 모금운동도 일어났다.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이 모금운동은 애국심의 발로였고, 지금도 당시 국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나라를 지키는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국민 참여 모금운동 현상을 보고 현역군인으로서 ‘군인의 죽음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고, 국민들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전사자에 대한 추모와 지원책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하고, 국민의 애도와 추모 마음을 바탕으로 천안함 전사자 현양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족했던 부분이 바로 생존 장병의 전투 후유증 문제다
  

  천안함 1주기 시점이 되자 언론들은 최원일 중령(당시 천안함장)에 대해 인터뷰 요청을 물밀 듯이 해 왔다. 그러나 해군 입장에서는 참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피격사건으로 최 함장은 그 순간부터 가슴에 돌을 달고 사는 심정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북한의 도발과 분노를 강력하게 표출하고 싶었지만, 그의 입장은 역시 생존자의 아픔을 다시금 들추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천안함의 전사한 장병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그의 고뇌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천안함 추모식이 다가오면 언론은 전사자 가족의 생활과 아픔을 주요 관심사로 다뤘다. 자연스레 생존 가족의 근황과 생활이 기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반해 생존한 장병들에겐 늘 그늘이 존재했다. 그들의 전투 후유증은 표면화하지도 못하고, 그들 역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이중의 압박이 생존 장병들의 마음을 옥죄고 놓아 주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최근 천안함처럼 극단의 사선을 넘어 생존한 장병들이 겪고 있는,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해군 법무실장으로 오랫동안 군 법무업무에 종사한 김칠하 변호사는 천안함 생존 장병이 겪는 어려움을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김 변호사 주장은 이렇다   

 

  “현행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전투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보훈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 전투행위의 결과 사망하거나 상이 등급(7급 이상)을 받거나 훈장을 받은 자에 대해서만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있어 일반 천안함 참전 장병은 법상의 보훈혜택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국가를 위해 특별히 희생과 헌신한 전투행위에 대해 새로운 보훈정책을 수립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전투행위를 국가유공자로 포섭할 필요성이 크다면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동법의 적용대상으로 추가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하지 아니하고 천안함 참전 장병의 경우만 특별히 보훈예우가 필요하다면 특별법인 가칭 ‘전투행위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야 할 것입니다.   


  
전상(戰傷)인가 공상(公傷)인가

/2011년 3월 27일 백령도 연하리에서 열린 천안함 46용사 위령탑 제막식에서 고 임재엽 중사의 어머니가 부조상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 변호사의 이 같은 주장은 ‘적으로부터 공격 받은 천안함 장병의 전투 후유증’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우선 “천안함 장병들은 참전해 전투행위를 한 것인지, 국가의 수호·안전보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일반적인 직무를 수행한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안함 피격사건이 북한이 불법적으로 일으킨 전쟁도발 행위라면 사망하거나 부상한 천안함 장병들은 공상자가 아닌 전사자나 전상자로 예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의 주장에 앞서 2016 3 24일 개최된 천안함 6주기 호국보훈 세미나에서 세종대 김민석 교수는 “적이 천안함을 공격해 46명은 전사하고 58명이 생존했다면 58명은 참전한 것”이라며 “무엇보다 당시 적의 공격에 의해 전사한 동료와 같은 배를 타고 있다가 살아남은 생존 장병에 대한 예우가 전상(戰傷)이 아닌 공상(公傷)으로 대접받고 있으니 말 그대로 모순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임영호 전 자유선진당 의원은 6명의 전사자와 13명의 부상자라는 전투피해가 발생한 제2연평해전 부상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2009 6 29일 국가보훈처에서는 2005년 연천 GP 총기난사 사고 당시 내무반에 있던 21명 전원에 대해 공무상 질병으로 인정해 국가유공자로 등록시킨 전례가 있다. 연천 GP 총기난사 사고는 내부적인 문제로 인한 총기난사 사고였던 점에 비해, 2연평해전은 군인으로서 전투에 참가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참전이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국가가 제2연평해전 부상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유공자 등록기준에 있어 사안에 대한 성격과 형평성을 무시한 처사다.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되지 못하고 있는 참전 장병들에 대해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되어야 한다.   

 

  이처럼 천안함 피격사건의 생존 장병과 제2연평해전 부상자에 대한 예우 문제의 핵심은 위험작전구역에서의 전투행위라는 인식의 기반 위에서 그 결과가 공상이냐 전상이냐 하는 해석의 문제이다.


  
서해 NLL 해역의 평시 작전 위험성

/서해5도서 인근 해역에서 어로작업을 하는 어선들을 보호하는 해군 함정들. 
서해5도서 해역에서의 근무는 전시를 방불케 하는 위험한 임무이다.

 

  필자는 국민들이 서해 NLL 경비작전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한다면, 국민들은 이를 전상이라고 판단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난 1999년 이후 서해에서 벌어진 3차례의 교전과 1차례의 어뢰피격 사건이 왜 전투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1953 NLL(북방한계선)이 설정된 이후 1973년 서해사태 때까지 서해상에는 큰 충돌이 없었다. 1953년 당시 북한은 유엔군 사령관이 설정한 NLL에 대해 이렇다 할 대응을 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휴전 이후 북한은 서해지역에 보유한 함정이라곤 3척 수준으로, 북한 주민의 해상 탈북을 통제할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0년 지난 1973년 북한은 느닷없이 서해사태를 야기했다. 서해사태는 1973 10월부터 12월 사이 10여 차례에 걸쳐 북한이 집중적으로 NLL을 월선 도발한 사태다. 고속전투함 위주의 전력을 갖춘 북한이 연평도, 대청도 등 연안까지 거침없이 침범하고, 인천 백령도와 연평도를 오가는 우리 여객선을 에워싸는 초유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북한은 휴전 이후 고속함 위주의 함정 건설에 집중해 1973년경 약 80척의 유도탄정 고속정 어뢰정을 건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안 전투력에서 남한보다 우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73년 서해사태 때 우리 군은 적의 도발에 대응할 무장을 갖춘 소형 고속함이 없었던 관계로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사태를 계기로 우리 군도 고속정을 건조하기 시작해 지금의 참수리정과 유도탄 고속함으로 발전시켜 왔다
  

  이후 서해에는 우리 고속정 전진기지, 전탐감시대, 항공기지, 유도탄 기지를 집중적으로 건설했고, 북한도 서해에 함정 전진배치, 유도탄 기지 증강, 해안포 집중 등 서해는 남북한 간에 강력한 ‘구역방어’를 위한 공격 전력이 집중하는 곳으로 급변했다  

 

  남북이 NLL을 두고 일정 수준의 전투력이 강화된 상태에서 일종의 힘의 균형이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고, 특별히 위기를 조장할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1999년까지 남북 간에는 강력한 해상 충돌 없이 NLL은 평온하게 유지됐다. 이러한 가운데 해상의 전투전력은 점점 더 정교하고 강력하게 집중돼 왔다. 일례로 북한은 고속함정에 저격수를 배치하고, 전차에 달던 포를 함정에 장착하는 등 1990년대 들어 해상 근접전투에 필요한 조치를 해 오고 있었다
  

  남북한 간에 점점 증강된 전투력을 보유한 시기인 1999년을 기점으로 NLL 인근 해역은 ‘전투의 바다’로 변했다. 서해에서 북한과의 해상교전이 3차례 있었다. 1999년 제1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의 피해는 없었다.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은 전사 6, 부상 13, 참수리 357호정 침몰이라는 대규모 피해를 입었다   

 

  3차 교전인 대청해전에서 우리 군은 피해가 없었고, 북한 함정은 대규모 인명피해가 났고, 함정은 예인 상태로 퇴각했다. 그 이후 잠수정의 어뢰에 의한 천안함 피격사건이 발생했다. 천안함은 해전의 성격으로 볼 때 제2차 대전 이후 잠수 함정의 어뢰로 함정을 공격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서해 바다는 전쟁의 바다

/천안함사태 등은 서해5도서에서의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위험지수로 따질 때 서해 NLL 해역은 전쟁의 바다이다. 서해 경비작전에 투입되는 함정은 평소에도 대전투 준비태세를 유지하지만, 출동 전 점검을 통해 기관, 무장, 탄약 등 분야별로 언제든 기동과 사격이 가능하도록 완벽한 전투준비 상태를 갖추고 투입된다. 그러나 NLL 인근에서 북한 경비정과의 조우는 그야말로 긴장이다
  

  고속정장과 편대장들은 적 경비정의 사격거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지만, NLL을 무시하고 기동하는 북 경비정의 월선을 차단하고 저지하는 기동은 유사시 적 경비정의 사격거리 이내로 우리 함정이 기동해야만 한다   

 

  더욱이 우리의 교전규칙은 북한의 선제공격 후 반격의 경우가 대부분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상호간 수천 발의 조준사격이 있었던 3차례의 모든 교전은 북한 함정의 선제공격 이후 자위권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장병들의 피해 위험도는 매우 높다
  

  특히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은 NLL 경비작전의 형태를 변동시킬 정도로, 적 잠수함으로부터의 함정 보호를 위해 고속기동을 해야 하고, 위험 해역에서는 수시로 변침기동해야 하는 등 함정의 기동 양상이 마치 대잠수함 작전(ASW)을 진행하는 수준으로 격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 승조원과 장비의 피로도는 출동 기간 내내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높아진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적 잠수함()과 수상함을 탐지하고 싸우는 일은 고강도 위험에 연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현재 세계의 갈등 해역이라고 해도 교전이 이루어지는 해역은 유일하게 서해 NLL 인근 바다이다. 이곳은 사실상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경비작전에 참가하는 지역으로서 전투해역이다. 이곳에 전진 배치된 우리의 고속정, 초계함 10척 정도가 늘 도발의 위험을 무릅쓴 채 경계작전 근무를 하고 있다
  

  이는 청해부대를 비롯한 UAE, 이라크 자이툰사단 등 해외파병 지역 임무보다도 더 위험한 지역에서의 임무수행이다. 3차례의 교전과 1차례의 피격사건으로 52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국가도 합당한 의무 다해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 예비역 해군은 “전투 함정 간 발생하는 경계작전은 과거 베트남전 참전으로 파병을 인정받은 수송부대, 즉 비둘기부대보다 더 위험지역에서의 전투형 복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천안함 전사자 묘역에서 주장했다. 서해 NLL에서의 교전(전투) 결과와 경계작전의 위험도를 고려해 생존 장병을 참전으로 인정해 예우해야 하며 이에 대한 법적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김칠하 변호사는 “천안함 참전 장병은 물론 연평해전 참가자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고 있는 참전 장병 중 상이등급을 부여 받지 못한 장병은 군인으로서 일반 의무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참전, 전투 행위를 해 특별한 희생을 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의 보훈정책은 중요한 과제다. 국가유공자 지정이나 훈장을 받지 못한 연평해전과 천안함 참전 장병들에게 어느 정도의 예우가 합당한지 결정되어야 한다. 생존한 참전 장병들이 겪는 고통은 일종의 폐쇄성 질환이다. 이는 지속적일 수도 있고, 잠복되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참전한 장병들의 고충을 외면한 채 젊은 장병들에게 자신이 있는 곳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눈을 부릅뜨고 적과 싸우라고 명령하려면 국가도 합당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들이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선(死線)에 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곧 국가의 의무다.

  

6〉 해양 세력 재()팽창 시대에 다시 보는 군함 도입기 

2000년까지 미국 퇴역 구축함 운용하던 한국, 잠수함 등 수출하는 나라로
⊙ 해군 장병들의 모금으로 구입한 백두산함, 6·25 개전 직후 부산에 상륙하려던 북한 선박 격침시켜
    
나라 구해
⊙ 함정(艦艇) 확충에 비해 병력 확보 하지 못한 것은 아쉬워
⊙ 북한의 SLBM 확보, 중국 해군력의 급속한 팽창에 대한 대책 시급

 

2011년은 대한민국 조선(造船)산업 역사에 기록을 남긴 해다. 인도네시아에 209급 디젤 잠수함 3척을 총 11억 달러에 수출하는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독일제 209급 잠수함을 도입하고 이를 기술이전 받아서 국내 건조를 시작한 지 불과 20년 만에 이루어낸 성과다. 이 계약으로 대한민국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잠수함 수출국’이 됐다. 이 잠수함 3척 중 2척은 지난해 성공적으로 진수됐다
  
 
인도네시아로 수출되는 잠수함이 진수된 지 1년이 지난 2017년경 필리핀이 러시아의 디젤 잠수함을 수입하기로 했다. 태국도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 디젤 잠수함을 도입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력이 어지간하면 주변국의 군사력 팽창을 그저 볼 수만은 없는 법이다. 지금 중국은 해양 팽창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군력 건설을 시작했다. 2020년대 중반이 되면 중국은 동아시아 해양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3~4년 후면 항공모함 약 3척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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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제22회 바다의 날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강력한 해양경제력과 해군력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해양강국으로 입지를 굳건히 하고, 우리가 처한 안보 현실 속에서 국익과 튼튼한 안보를 함께 얻기 위해서는 바다로 과감히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해군 전력(戰力)에 대한 투자, 외국 어선의 불법조업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강조하면서 해양 안보를 위협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우리 바다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2000년대 초까지 미국 퇴역 구축함 운용

/2000년 12월 퇴역한 기어링급 구축함 강원함. 미 해군에서 윌리엄 R. 러시함이라는 이름으로 운용될 때의 모습이다. 

 

  한국은 이제 조선업에 있어서는 세계 메이저리그에 속하는 나라다. 2017년 초 대우조선은 4년 전 영국으로부터 수주하여 건조한 첫 번째 군수지원함인 ‘타이드 스프링(Tidespring)’함을 인도했다. 2번함인 ‘타이드 레이스(Tiderace)’함을 비롯한 나머지 3번함과 4번함도 올해 하반기까지 인도한다. 현대중공업은 214급 디젤 잠수함, 이지스함을 건조하는 등 군함 건조에 있어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우리 해군은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업을 바탕으로 원하는 규모의 함정을 원하는 시기에 건조할 수 있는 해양산업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퇴역한 최초의 국산 호위함(FF) 울산함이 건조되어 해군에 인도되던 1985년에만 해도 우리 해군은 미() 해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건조한 기어링급 구축함을 주력 전투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필자도 11전투전대 강원함(DD, 기어링급)에서 소위로 근무했다. 강원함은 1944년 미국에서 건조되어 미국 해군의 DD-714 윌리엄 R. 러시(William R. Rush)함으로 명명(命名)되어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서 활약했다. 1978년 우리 해군이 인수해 2000 12월까지 주력함으로 운용했다. 퇴역 후에는 진해 해양공원에서 군함전시관으로 활용되다가 노후화로 인해 2016년 해체됐다
  
 
국산 호위함과 초계함이 다량으로 건조되었지만 우리 해군은 2000년대 초까지 강원함 같은 미국에서 도입한 구형 구축함을 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97년 광개토대왕함 도입 이전까지 헬기 갑판을 보유한 전투함은 기어링급 구축함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해군 장병들 모금으로 전투함 구입 

전투함 없는 해군은 의미가 없다. 1947년 무렵 우리 해군(당시는 조선해양경비대) 18척의 YMS(소해정·掃海艇)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12척은 미 해군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고, 6척은 영국이 사용하던 것을 미국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전투함은 단 1척도 없었다
  
 
우리 해군에서 만든 최초의 함정은 충무공정이다. 이 배는 1947년 경비정으로 건조됐다. 이마저도 일본 해군이 항공기 구조정으로 만들다 중단한 것을 초창기 해군이 완성해 경비정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조선해안경비대의 기함이 바로 이 충무공정이었다
  
 
당시 우리 해군에게는 전투함이 절실했다. 해군 창설자인 초대(初代) 해군참모총장 손원일(孫元一) 제독은 미국에 여러 차례 전투함 제공을 요구했다. 1948년 미국에서 작성한 〈한국 긴급 함정소요 목록〉을 보면 당시 한국은 순양함 2, 구축함 11, 소해함 5, 유조함·상륙함·보급선·예인선 등 20여 척을 요청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무척 낮게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은 ‘전투함을 외국에 양도하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흘렀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미국으로부터 전투함을 원조받을 수 없다면 사오기로 결심했다
  
 
손 총장은 1949 6월 해군에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조직했다. 장교는 10%, 병조장은 7%, 하사관 수병은 5%를 매달 봉급에서 떼어서 모았다. 해군 부인들도 이에 동참하여 삯바느질과 자수공예품 판매, 세탁소를 운영하며 모금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4개월간 모은 돈 15000달러를 가지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에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보조금 45000달러를 내주면서 전투함을 사오라고 했다.     


  
이성호 제독

손 총장은 직접 인수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당시 인수한 배를 몰고 태평양을 건너와야 했기 때문에 인수단은 항해 지식과 경험을 갖춘 장교와 간부로 구성했다
  
 
인수단에는 진해 해원양성소에서 공부한 이성호 중령(5대 해군참모총장 역임)도 포함됐다. 이성호 중령은 6·25전쟁 중에는 인천상륙작전, 통영상륙작전, 은율철수작전, 연합군 군수물자 수송작전 등 수많은 작전을 수행한 PC-703 삼각산함 함장으로 활약했다. 이성호 중령은 이때 함정 인수에 참여했던 경험에서 해군에게 대양(大洋) 항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는 1957년 해군 전투함 4척을 모두 동원하여 대만과 필리핀을 돌아오는 해군사관생도 순항(巡航)훈련을 최초로 주도했다
  
 
인천상륙작전 전에 있었던 X-RAY 작전의 주역인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은 2016년 해군사관학교에서 있었던 제독들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성호, 그는 앞으로 해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해군을 이끄는가를 알고 있었다.
  
  
  
백두산함

/해군 장병들의 모금으로 구입한 백두산함. 6·25 개전 직후 대한해협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49년 손 제독이 구입한 첫 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PC-823이라는 함정이었다. 이 무렵에는 군에서 퇴역해 뉴욕주 롱 아일랜드에 있는 해양대학에서 실습선으로 쓰이고 있었다. 우리 해군 인수단은 뉴저지주 호보켄항에 정박해 있던 이 배를 보러 갔다. 배의 이름은 ‘엔슨 화이트 헤드(Ensign White Head)’였다. 해양대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화이트 헤드 소위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이성호 전 총장은 이렇게 술회했다
  
 
“인수단은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최초의 전투함이라는 차원에서 해군은 구매할 함정의 이름을 백두산함이라고 정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 배가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 PC-701 백두산함이었다. 우리 해군이 함께 구매한 함정은 PC-702 금강산, PC-703 삼각산, PC-704 지리산이었다. 이 함정들은 모두 현지에서 우리 해군 인수단이 수리와 정비를 했다. 4척의 함정은 동·서·남해 전 해역을 누비며 6·25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다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은 전투함 구입 초기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수단은 함정에 달린 항해 레이더를 처음 보고 이를 공부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전투함으로서의 생명이 다해 제거됐던 함정의 포는 다시 붙이고, 탄약은 또 따로 구매하고 해서 들여왔다. 참으로 어떻게 그 일을 했는지…. 초기 해군의 군함에 대한 간절함이 만들어 낸 결과다. 
  
 
백두산함은 1950 4, 나머지 3척은 1950 6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으로 출발했다. 금강산함 외 3척은 1950 6 24일 하와이에 도착한 다음날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서둘렀다. 그중 한 척은 기관 고장으로 수리에 수리를 거쳐 한국에 도착하는 곡절을 겪었다. 백두산함은 개전(開戰) 다음날인 1950 6 26일 새벽 부산에 상륙하기 위한 특수부대원들을 태운 북한 선박을 발견, 격렬한 전투 끝에 격침시켰다. 이것이 ‘대한해협해전’이다. 이때 이 선박을 격침시키지 못하고 북한군이 부산에 상륙했으면 낙동강 방어전도, 유엔군의 투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싹계획’ 

 6·25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한국 해군에 더 많은 함정 이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쟁 중 미국이 이양한 함정은 호위함 5, 구잠함(驅潛艦) 2, 구잠정(驅潛艇) 4, 어뢰정 4, 상륙함 4, 경비정 1, 상륙정 4, 유조함 1, 수송함 4, 예인함 1척 등 30척이나 됐다
  
  PF-66
임진강함으로 명명된 호위함은 1952 10월부터 1953 3월까지 요코스카와 사세보항에서 전개된 전쟁물자 수송선단을 호송하는 임무를 집중 수행했다. 우리 해군이 구형 함정인 임진강함을 잘 정비해서 100% 운용하는 것을 지켜본 미국 해군은 우리 해군을 높게 평가했다. 임진강함은 우리나라 해안을 누비며 2만 마일에 달하는 수송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해군은 1957년 ‘새싹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군함 도입사업을 시작했다. 경제력과 조선업이 전무한 국내 환경에서 군함을 건조할 형편은 못 됐다. 미국의 퇴역군함을 싼값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해군이 도입하려 한 함정은 구축함(DD) 4, 호위구축함(DE) 4, 상륙함(LST) 4, 중형상륙함(LSM), 상륙로켓함(LSMR), 잠수함 등이었다
  
 
미국 해군은 한국 해군이 구축함과 잠수함을 도입하려 하는 데 대해 난색을 표명하였다. 미국 해군 관계자들은 “구축함을 대여(貸與) 방식으로 한국에 제공하는 것은 미국 국내법상 가능하지만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터빈 엔진 정비 능력 유무도 지적했다. 한국에 군함을 대여하더라도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함정대여법상 군사원조 예산이 통과되어야 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계획은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우리 해군이 끈질기게 요청한 결과 우선 미국 구축함 2척을 도입할 수 있었다. 해군은 1958 3월 해본특명(海本特命) 53호를 내려 함정 인수요원을 차출해 진해에서 훈련시키면서 구축함 인수 준비를 시작했다. 이 무렵 미국 해군은 한국군이 인수하기로 한 것과 같은 급의 구축함을 한국이 구매할 수 있다는 정보를 해군무관을 통해서 알려왔다
  
 
‘새싹계획’의 결과 우리 해군은 1958년 총 79척의 함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는 해군을 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기틀이 되었다


  
해군의 인력난

/2016년 9월 5일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2016년 해군 수항훈련전단 환송식. 해사생도 130여 명 등 장병 600여 명이 107일간 일본, 러시아, 미국(괌, 하와이) 등 12개국 13개 항을 순방했다.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은 해군력 증강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2017년 현재 지상전력, 공중전력, 해상전력 중에 국산화율이 가장 높고 국내 산업과의 연계가 가장 밀접한 것은 바로 해군일 것이다. 인도네시아·필리핀·태국 등이 오늘날 우리나라 함정을 구매하는 것을 보면서 발전한 해양산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우리 해군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 해군이 함정을 확보하는 데 비해 인재를 키우는 일은 상대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력 증원 계획은 마련했지만 달성하지는 못했다
  
  1960
년대 초반 해군 병력은 총 22000명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 규모는 함정의 규모와 연동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군 병력이 점진적으로 늘어났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약 4500여 명의 병력이 증강된 선에서 머물고 있다
  
 
이런 상황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해군에 큰 제약요소가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군은 신기술에 바탕을 둔 전투함 건조를 계획해도 그 전투함을 운용할 병력 문제에 늘 봉착하고 있다. 때문에 “병력도 없는데 함정은 왜 만드는가?”라는 거부논리가 형성되기도 한다
  
 
세종대왕급 이지스구축함을 비롯해 구축함, 호위함, 잠수함, 초계함, 해상 초계기 등 입체전력을 운영하는 해군은 지금 극한적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NLL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해상전투, 소말리아 파병, 해외파병 작전 등을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해군 병력으로는 이런 작전들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아무리 호소해도 잘 먹혀들지 않는다. 지난 20년간 마른 수건도 다시 짜낸다는 심정으로 해군 육상부대의 병력을 차출하여 함정으로 편성해 왔지만 이것도 이제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한다.   


  
북한과 중국의 위협

/중국의 첫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호 (편대)전단이 서태평양에서 훈련 중인 모습. 
중국은 2030년이면 4개의 항모전단을 갖게 된다.

 

  북한은 여전히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 발사를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위협에 맞서 우리는 KAMD 등 다중(多重) 대응체계를 구성해 가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잠수함발사미사일(SLBM)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한이 잠수함에 핵탄두 미사일을 장착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해군 선진국들은 모두 잠수함에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있다. 가장 방어가 어려운 것이 바로 SLBM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중국의 해군력 증강도 심상치 않다. 2020년경이면 젠()-16급 이상의 함재기(艦載機)를 탑재한 중국 항공모함이 서해에 나타날 것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지난 5 24일 시진핑 주석은 해군 부대를 방문, “현대화된 해군이 세계 일류 군대의 중요한 지표이며, 해양강국의 전략적 지지 기반인 동시에 중화민족 부흥을 위한 중요한 구성 부분”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또한 “해군의 디지털화에서 원양작전 능력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전투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관영 《차이나데일리》는 “중국 해군이 전력 강화를 위해 지난 10년간 100척의 첨단 군함과 잠수함, 다수의 전투기를 추가로 배치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3월 홍콩 매체인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중국이 향후 해군육전대(해병대) 6개 여단 10만명까지 확대하고, 현재 235000여 명인 해군 병력도 30만명 규모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국내 군사전문가들은 중국이 2027~2028년까지 4개의 항모전단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해군 강국들의 각축전

대륙을 통해서 한반도로 진격했던 역사 속의 중국은 이제 바다로 다가오고 있다. 서해를 지나는 동경(東經) 124도 해상에서 벌어지는 한·중 해군 간의 신경전은 어느 외교전보다 심각하다. 중국 해군 함정은 하루도 빠짐없이 남북으로 이 선을 따라 항해하고 있다. 일본의 순시선은 365일 독도 영해 12마일 외곽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돌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이런 행동은 후일 해당 영유권(領有權) 분쟁이 벌어졌을 때에 해당 해역이 자신들의 영해이며, 그 영유권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이를 국제법상 ‘응고(凝固)의 원칙’이라고 한다. 우리 해군이 NLL 70년간 목숨을 바쳐가며 지켜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한반도 중심으로 반경 500km 이내에 강력한 함대를 가진 중국·일본·러시아가 존재하고 있다. 20세기 세계 바다를 지배했던 미국도 태평양에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천안함 폭침(爆沈) 당시 일각에서는 “해군이 대양해군 부르짖다가 앞마당이 뚫렸다”는 비판이 있었다. 우리의 바다 NLL을 철통같이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연해(沿海)만을 바라보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한반도 인근 바다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각축전에도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7〉 제주민군복합항 건설이 남긴 숙제

강정기지 관련 갈등,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

1989년부터 구상한 제주 해군기지, 2010년 공사 시작해 작년에 군항 건설 끝내
⊙ 사업단 관계자들, 군복 입지 않고 출퇴근할 정도로 숨죽이며 살아
⊙ 공사 방해자들에게 구상권 행사한 지 1년 지났지만, 아직 재판 시작도 안 해
⊙ 문재인, 구상권 철회 약속했지만 뾰족한 해법 안 보여

 

2015 1 31일 제주 강정마을 해안가에는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이날 군() 관사 공사 현장 출입구 전체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 철거를 위한 국방부 장관 명의의 행정대집행(行政代執行)이 이루어졌다. 공사 진입로를 막고 있는 시위자, 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 제주민군(民軍)복합항 건설사업단 관계자들이 새벽부터 대치하고 있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과로로 순직한 고 장원준 대위.

 

  필자도 이날 온종일 그곳에서 이 현장을 지켜봤다. 이날 제주기지사업단 현장에 파견 나와 있던 27살의 정훈장교 장원준 대위는 행정집행이 종료되는 자정까지 줄곧 현장에서 임무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새벽 1시경 복귀했다가 인근 숙소에서 사망했다. 제주기지 공사와 관련된 최초의 인명피해였다. 그가 사망한 다음 날 그의 부인은 첫째 아이를 출산했다. 아름다운 제주 바다의 올레길목에서 6년간의 길고 긴 여정의 길에서 사람을 잃었고, 부하를 잃었고, 가족을 잃었다. 당시 해군 내에서도 일부 관계자 외에는 이런 일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갔다. 장원준 대위는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지금에 와서 제주민군복합항의 전략적 가치를 굳이 다시 얘기할 것은 없다. 이미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민군복합항은 서해를 마주하고 있는 중국을 비롯한 주변 해양강국에 맞설 유일한 전략기지이고, 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나라의 제1의 해상교통로를 지키는 길목이며, 잠수함이 대기하고만 있어도 주변국에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이고, 북한이 미사일을 쏠 경우 신속히 동·서·남해로 전개하여 탐지하는 이지스 구축함의 모항(母港)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제 제주민군복합항 이야기가 나오면 그 전략적 가치보다 고() 장원준 대위와 그가 남기고 간 젊은 부인과 3살이 된 아이는 잘 살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기지 건설 방해자들에 대한 구상권 행사 문제

필자는 8년 동안 제주민군복합항 건설사업 진행과정에 관여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국군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군의 존재이유는 국민이다. 국군은 박수 받고 싶어하고, 국민은 박수쳐 주고 싶다. 국군에는 우리 아들딸들이 복무하고 있다. 미국 어느 공항에서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군인들을 본 시민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면서 한숨과 부러움이 인 적이 있다.
  

 2015년 해군은 제주민군복합항 공사를 적극적으로 방해한 이들을 대상으로 구상권(求償權)을 청구했다. 당시 공사업체인 삼성건설은 공사지연으로 인한 손실금 중 일부인 127억원을 되돌려 받았다. 관계 법률에 따르면 이로 인한 예산의 추가 집행, 즉 국고 손실에 대해서는 구상권을 행사해야 한다. 해군은 일부 공사지연 원인은 시민단체 등의 방해활동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고 그 증거를 확보한 후, 121명에게 35억원가량을 청구하는 소장(訴狀)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구상권 청구는 항구가 다 지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갈등의 골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해군에 대한 반감이 더 생길 우려도 있었다. 제주민군복합항 완공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구상권 청구를 한 것을 강정마을 주민들은 국가와 군대의 보복이라고 생각할 소지가 있었다. 강정마을 주민은 “이미 마을은 찬성자와 반대자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이 팬 상황에서 구상권 청구는 주민들이 다시 둘로 갈라지는 장벽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기지 건설에 찬성해 온 주민들은 그동안 ‘마을을 팔아먹은 사람들’이라고 비난 받아 왔다면서 “주홍글씨 달고 살아 온 시간이 너무나도 아팠다”고 말한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제주민군복합항 준공 몇 달 후 제주기지에 정박한 함상에서 열린 해군 해양력 심포지엄 기조연설에서 정호섭 해군참모총장 등에게 구상권 청구 철회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5 10일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기간 중 구상권 철회를 언급했다. 이로써 이 문제는 국방부와 해군의 현안이 됐다
  

구상권 청구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 면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는 법률적 절차의 연속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화합의 저해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해군에 그 정서적 문제와 법적인 문제를 동시에 충족할 선택은 없었다. 필자도 해군에 근무할 당시 국회의 자료 요구와 언론의 질의에 대하여 구상권의 청구는 해군과 정부의 입장에서 법적인 절차의 연속이라고 답변했다.  


  
1989년부터 제주기지 구상 

지금 당사자인 해군의 입장은 무엇일까? 대통령의 후보 시절 언급은 이제 하나의 방침이 되었다. 이는 갈등의 치유와 화합이라는 점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해법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과거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미래의 답을 구한다는 점에서 제주기지 건설과정을 간략히 돌아보자.
  

해군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1989년이었다. 4년 후인 1993 12월 합동참모회의를 거쳐 이에 대한 군사적 필요성을 인정받고 계획소요를 반영했다. 이후 제주기지 사업은 매번 예산반영의 우선순위에서 뒤처지다가 14년 만에 사업을 시작했다. 2007년에 들어서야 제주도청 주관으로 제주도민과 후보지 주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가능한 한 제주도와 주민들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해군은 제주도 한라산에 케이블카를 놓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논의가 100년여 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 법률상 제주도의 행정적 협조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었으나, 군은 상황을 낙관했다. 국방예산으로 민군복합항을 건설하니 제주도는 힘 안 들이고 상당한 규모의 국제항을 하나 더 갖게 되며,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면서 강정지역도 발전하게 될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2007
5월 제주도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군항을 건설하기로 하고 이를 국방부에 통보했다.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항구가 군항 역할만 하고 국제항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해소하기 2008 9월 국가정책조정회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美港)’ 추진을 결정했다.
  
  2010
1월 드디어 공사가 시작됐다. 아쉽게도 제주도의 정서와 주민여론, 제주도청의 요청에 따라 기공식은 갖지 못했다. 그러나 해군은 이제 순탄하게 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다.   


  
라스트 라운드 없는 권투경기

/제주 해군기지 건설방침이 정해진 후 격렬한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2011년 초부터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반대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주장은 강정마을의 아름다운 해안선과 연동되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2011 9월에는 놈 촘스키와 마이클 호이 등 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공동명의로 모 언론사 영문판에 ‘제주를 구하자’는 기고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제주기지 건설공사를 막기 위한 행위는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군은 일부 국민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구럼비 바위 발파는 TV에 생중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제주기지 건설이 중앙정부와 국회에서 다루어야 하는 이슈가 되었다. 급기야 2011년 후반기에는 제주기지 건설 예산이 모두 이월(移越)되고, 다음해 공사예산이 일부 줄어드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안보 수장 중 한 인사는 연일 언론에 보도되는 반대론을 접하고 굳이 제주도에 군항을 건설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懷疑)를 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군은 필사적으로 이 사업의 당위성을 각계에 설명했다. 이 과정은 마치 라스트 라운드가 없는 권투경기 같았다. 제주기지 건설사업이 참여정부 시절 시작되었다는 근거를 찾기 위해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에서 했던 말씀자료를 찾으려 노력했다. 러시아 출장 중이던 문정인 교수에게 본 사업의 국가적·전략적 의미를 언론을 통해서 이해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문정인 교수는 이를 받아들여 관련 글을 모 신문에 기고했다. 5년간 20여 회에 걸쳐 언론사 논·해설위원들이 제주기지 공사현장을 돌아보았다
  
 
제주기지 건설을 결정하고, 지역을 선정한 것은 김태환 지사 시절이었다. 그 후임인 우근민 지사는 기지 건설에 대한 반대여론을 보면서 사실상 속도 조절에 나섰다. 우 지사는 2011 11월 군에 건설될 항만의 능력을 제시했다. 15t급 크루즈 2척이 동시 계류하고, 30노트의 바람에도 접안이 가능한 항구를 건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15t급 크루즈 선박이 동시에 계류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우 지사의 주문은 그만큼 까다로운 것이었다. 우 지사는 이러한 주문을 제주도 의회와 도민들을 설득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해군은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면 공사가 지연된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임종률 국무조정실장은 이러한 요구를 수용했다. 이를 위한 항만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8개월이 지체됐다.
  
 
그러는 과정에 제주도는 해군을 상대로 한 청문을 요청했다. 지방자치단체가 군을 상대로 청문을 실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즈음 제주기지 건설 반대 세력이 해군을 ‘해적’이라고 표현하는 일이 발생했다. 예비역 단체들은 피켓 시위를 했다. 해군 간부들 가운데서도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자는 논의가 나왔다.
  
 
제주도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렸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제주도청에 마련된 청문회에 출석해 질문에 답변하고, 제주도 의회 의원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경청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법적 권한은 그야말로 특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항 공사는 끝났지만 …

/제주도의 요구에 따라 제주 해군기지는 15만t급 크루즈선이 동시에 계류할 수 있는 민군복합항으로 건설되었다.

 

  이후에도 기지 건설은 몇 번의 속도조절이 있었다. 지역구 의원의 요구와 제주도의 정서를 중앙정부가 수용하고 예산 집행과 관련된 부수 조건을 추가로 이행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러는 사이에 6명이 제주민군복합항 건설사업단장 자리를 거쳐 갔다.
  
 
강정마을에 있는 사업단에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다녀갔다. 이들은 사업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업단장과 관계자들은 강정사업단에서 군복을 입지 않고 출퇴근하는 근무지침을 시행할 정도로 숨죽이며 살았다.
  
 
강정마을 주민들의 고통도 컸다. 함께 소주를 나누던 마을사람들이 입장을 달리하면서 불편한 관계가 됐다.
  
  2016
2 8년간의 길고 긴 사업이 마침내 종료됐다. 2016 2월 군은 주민들의 상처를 생각해 요란하지 않은 준공식을 가졌다. 이제 제주민군복합항은 군항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민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후속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도로건설, 출입국사무소, 항만센터 등 크루즈 기항을 위한 시설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미 크루즈 기항 일정을 받는 여객선사가 있다고 한다.


  
구상권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해군의 구상권 행사 방침에 대해 통합진보당 등 제주기지건설 반대 세력은 2012년 3월 12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사업단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항의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간의 갈등을 어떻게 치유하느냐 하는 것이다. 기지 건설 방해자들에 대한 구상권 청구 문제는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다. 최근 확인한 결과, 2016년 해군이 구상권을 청구했지만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아직 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지 않고 있다. 소송 당사자에 대한 소환이나, 관련 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시간은 1년 넘게 지나고 있다.
  
 
가장 간단한 것은 해군이 소송을 철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상권 집행이 합당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담당자들이 직무상 배임죄를 저지르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구상권 행사를 했던 과거와 현재 무엇이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에 합당한 답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법원이 중재에 나서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1차 구상의 대상으로 선정된 121명에게 소장이 전달되지도 않고 있으며, 재판 기일도 예상키 어려운 상태에서 아직 이런 해법을 논의하기는 어렵다. 중재라고 해야 구상권 청구 액수를 줄여주는 것인데 이것이 수용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또 현재 삼성물산과의 중재 확정금액이 275억원인데, 현재 진행 중인 대림산업과의 중재금액이 비슷한 액수로 확정될 경우 청구금액은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중재를 하더라도 단번에 확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준공식을 하루 앞둔 2016년 2월 25일 제주 해군기지(제주민군복합항)의 모습. 접안시설에 4400t급 구축함인 문무대왕함(아래부터 시계방향), 7600t급 이지스구축함 서애류성룡함, 4400t급 구축함 왕건함, 2500t급 신형 호위함 전북함, 1만4500t급 대형 수송함 독도함이 정박해 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국가는 안보를 위해 정책을 집행했고, 국민의 세금으로 이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세력의 방해 행위로 세금이 손실됐다. 국가는 법에 의거하여 구상권을 행사했다. 구상의 대상이 된 국민은 국가정책에 반대했던 이들이다.
  
 
국가는 개인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가? 개인은 국가정책을 반대하면서 저지른 위법행위에 대해 면책(免責)받을 지위에 있는가? 국가정책에 반대하면서 국고에 손실을 끼친 국민들에게 국가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합당한 것인가? 기지 건설을 추진했던 국가와 해군, 이에 반대한 일부 주민들 가운데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가? 이에 대한 논의를 통해 미래를 위한 교훈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8〉 잠수함 부대의 ‘알뜰신잡’

잠수함 마스트에 빗자루를 내거는 이유는?

⊙ 잠수함전대, 1995년 해군 작전사령부 체육대회 줄다리기에서 30년 만에 정비창 군무원단 이겨
⊙ 근무 특성상 두통, 치통, 변비 등에 시달리고, 흡연율 낮아
⊙ 수중항해 계획에 따라 잠수함 운항, 우군 잠수함끼리 충돌은 불가능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근무하는 잠수함 부대원들은 결속력이 남다르다.

 

  잠수함이 부두에 정박한 사진을 보면 잠수함 마스트에 빗자루가 내걸려 있는 것이 가끔 보인다. ‘물속에서 나온 잠수함이 왜 빗자루를 달고 다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잠수함 근무 장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 빗자루는 ‘바다에서 적(수상함)들을 쓸어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세계 어느 나라 해군이든 잠수함에 근무하는 장교는 남다른 문화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해군의 잠수함 장교도 긍지가 대단하다. 군대에서 체육대회는 유사 전쟁 수준이다. 1995년 진해 해군 작전사령부 가을 체육대회에서 30년간의 신화가 깨졌다.
  
 
줄다리기 종목은 세계 해군 공통의 주 종목이다. 배를 부두에 계류하기 위해 홋줄을 연결하고 계류색을 부두에 연결하면, 그때부터 함정의 승조원들은 줄을 당겨야 한다. 때문에 모든 배의 승조원은 줄다리기를 밥 먹듯이 해야 한다. 그래서 줄다리기는 어느 나라에서든 해군 체육경기의 필수 종목이다.

/‘수상함을 쓸어버리겠다’는 의지를 담아 마스트에 빗자루를 내거는 것은 잠수함대의 오랜 전통이다.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 잠수함 와후(SS-238)호의 모습.

  

  1995년까지 줄다리기는 정비창 군무원팀이 30년 전승(全勝)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생한 젊은 병사로 구성해서 붙어도 노련한 정비창 군무원단을 이기는 현역팀은 없었다. 그런데 잠수함 전대(戰隊)가 이 기록을 깼다. 잠수함 부대의 응집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대한민국 잠수함 부대원이 신화를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이후 잠수함 부대는 전대, 전단(戰團)을 거쳐 214급 잠수함이 건조, 운영되기 시작하자 사령부로 승격했다. 잠수함사령부는 대한민국을 지키는 침묵의 부대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식재료와 함께 보관

/배식을 하는 잠수함 승조원들. 잠수함에서는 음식재료와 음식물쓰레기를 함께 보관한다.

 

  항구를 떠나는 배의 승조원은 누구나 단절감을 느낀다. 그중에서도 잠수함 부대원들의 단절감은 대단하다. 출동 시기가 가까워 오면 부인들은 남편들의 눈치를 많이 본다. 신경을 거슬리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편 또한 말수가 줄어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족들하고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가족에 대한 걱정과 외부와의 단절이라는 점이 1회성이 아니고 반복 또 반복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잠수함 근무자들은 토로한다.
  
 
최근 출동 중에 아이를 출산한 김 모 대위는 “출산과 산후(産後)에 도움을 주지 못해서 바가지 긁힌다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내 일이 됐다”면서 “둘째는 생각을 해 보고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수상함의 공간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잠수함은 그보다 훨씬 더 협소하다.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가피한 일들이 많다.
  
 
모든 음식물 쓰레기는 먹어야 할 음식 재료와 함께 냉동실에 보관한다. 이때 제일 신경 써야 하는 일은 쓰레기나 식재료가 터지지 않게 잘 감싸는 것이다
  
 
잠수함에서 세탁은 할 수 없다. 소음 발생 원인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세탁물은 최대한으로 부피를 줄여서 보관했다가 집으로 가져간다. 출동 후 가져온 세탁물에 모두 놀라워한다.
  
 
햇빛이 없는 잠수함에서는 비타민 D가 생성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무기력한 상태에 이르기 쉽다. 잠항(潛航) 시에는 공기 순환이 제한되는 상태에서 이산화탄소(CO) 농도가 일반 대기보다 10~20배가량 늘어난다. 이로 인해 졸림, 두통 등의 증세가 발생하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치통이 동반되기도 한다. 운동 부족 등으로 변비가 발생하고 방귀를 뀌는 경우가 많아진다. 잠수함 장교들은 방귀에 대하여 매우 너그럽다. “서로 방귀 튼 관계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잠수함 부대는 흡연율이 낮다. 잠수함 장교였던 정우성 예비역 준장은 잠수함 부대원들이 “이번 출동에 담배 피우지 못할 바에야 이참에 끊는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도 부상(浮上)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함교 탑 밑에 줄을 선다. 참으로 묘하다. 수십 일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고 생각도 없다가 잠수함 부상 시기가 다가오면 담배 생각이 갑자기 몰려오고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정 준장은 잠수함 함장이나 전대장 시절에는 피우던 담배를 해군본부 근무 시절 끊었다. 책임감으로부터의 해방이 담배를 끊은 이유가 됐나 보다.  


  
우군 잠수함끼리 충돌은 불가능

/적함에 발견되지 않기 위해 잠수함 함내에서는 최대한 정숙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이 사는 집이 쪼그라들어서 수축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떨까? 잠수함 승조원들은 깊은 바닷속으로 심도(深度)를 변경할 때에 선체 압력으로 외부 선체가 찌그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잠수함의 활동 심도가 깊어지면 외부 수압이 높아져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잠수함의 외부 쇳덩이가 압력에 의해 “끼기기긱--” 하는 소리를 낸다.
  
 
잠항심도가 깊어질 때는 모든 승조원이 긴장감을 가지고 자신이 체크해야 할 안전 사안을 빠짐없이 확인한다. 매번 들리는 소리이지만 이 소리는 마치 바다의 신()이 신음하는 소리로 들린다. 매우 불편하고 기분 나쁜 소리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잠수함 승조원들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잠수함”이라고 말한다.
  
 
잠수함은 항해에 나서기 전에 계획된 경로를 정하고 그 경로상에 해저 지형, 지물 등 모든 항해상 안전 사항을 파악하고 출항한다. 그리고 그 바닷속 경로를 따라서만 이동한다. 만약에 잠항 항해 중에 물체와 접촉하면, 적으로 구분하고 작전대응에 들어간다. 그 잠항구역에 우리 잠수함은 없기 때문이다.
  
 
잠수함은 수중관리 구역, 상호간섭 방지, 수중교통 안전규칙 등 안전항해에 대한 규정에 따라 수중항해 계획을 수립하고 그대로 행동한다. 또한 우리 잠수함의 안전과 이동은 보장하고 적 잠수함에 대한 탐지공격 작전을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탐지된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는 대잠전(對潛戰) 구역 ▲잠수함 공격 금지구역 ▲우리 잠수함 안전 이동로 등의 개념에 따라 수중구역 관리규칙을 작전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한다. 이 때문에 우군 잠수함끼리의 충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부상 항해와 입항의 설렘

/마스트에서 바다를 살펴보는 잠수함 승조원들.

 

  임무지역을 벗어나 모항(母港)으로 일정 구역까지 오면 복귀 중 잠수함은 부상한다. 종종 어민으로부터 잠수함을 보았다는 신고가 해경(海警)이나 해군에 접수된다. 대체로 잠수함 식별절차를 진행하고 확인해 보면 우군 잠수함이다.
  
 
이런 제보를 받고 언론이 확인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해군은 우군 잠수함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꼭 한 가지를 당부한다.
  
 
“신고된 잠수함 부상 항해의 위치는 보도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해군은 모든 미()식별 잠수함 신고에 대하여 각종 채널을 통해 확인한다. 목격된 시간과 해역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우군 잠수함인지 미식별 잠수함인지 꼭 확인한다. 우리 군 잠수함의 이동, 동맹국이나 주변국 잠수함 동향 등을 확인한다. 만약 영해 내에서 잠수함이 보인 이후 잠항했다면 그 순간부터 대잠식별 작전이 펼쳐진다.
  
 
잠수함은 작전을 종료하고 복귀하는 과정에 정해진 일시와 해역에 도달하면, 부상항해를 한다. 잠수함의 부상은 다시금 외부세계와의 연결, 만남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부상시간이 몇시 몇분인가? 최대 관심사가 된다.
  
 
부상을 하고 항해 당직장교가 함교탑 상부 해치를 열고 올라가면서 “상황 끝. 수상항해 상태 유지”를 외치는 순간이면, 이미 잠수함 승조원의 마음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달려간다. 함교 탑 해치가 열리는 순간부터 1시간가량 함교 탑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햇빛을 보려고, 밤이면 별빛을 보려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 파도소리와 멀리 보이는 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기쁨이다. 출동임무를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간다는 확신이 서는 순간이기에 더욱 그렇다.
  
 
바다는 또 다른 인생의 배움터이고, 삶의 터전이다. 그래서 꼭 지켜야 한다.

 

“한국도 이제는 원자력 잠수함을 가져야 한다!

⊙ 원자력 잠수함, 생존성을 지닌 확실한 보복 능력
⊙ 북한의 SLBM 위협에 대응하려면 한국도 원자력 추진 잠수함 가져야
⊙ 원자력 추진 잠수함 연료는 농축도 20% 미만의 상업용 우라늄을 사용하면 돼

/2016년 2월 부산항에 입항한 미국 원자력잠수함 노스캐롤라이나호(7800t급).
사거리 1250~2500㎞인 토마호크 미사일과 어뢰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 45개국에서 490여 척의 잠수함이 활동 중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등 주요 군사 강국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150척 운용하고 있다.
  
 
필자는 해군 장교로 32년을 지냈지만 잘 모르는 분야가 잠수함이다. 1985년 임관하여 수상함을 2년 정도 경험하고 난 후 정훈장교로 복무해 온 필자는 언론의 현장취재를 도우면서 해군에서 움직이고 탈 수 있는 것은 다 체험했다.
  
 
해군 항공기는 P-3C 해상초계기, S-3브라보, 와일드캣(일명 링스), 500MD, UH-60, UH-1H 등등. 해상초계기는 200시간 정도 타 보았다. 수상함은 PK(일명 제비), DDH(지금은 동해안의 안보공원에 전시 중인 강원함), 이지스급, 울산급, 광개토대왕급, 천안함급 전투함들은 물론 기뢰제거함, 순수지원함 등에도 승선해 보았다.
  
 
해군의 전투함을 모두 경험했지만 가장 짧은 시간 동안 타 본 것이 잠수함이다. 2012년에 부산항을 출항하여 3시간 동안 ○○ 해역을 항해하고 온 것이 고작이다. 이처럼 잠수함은 해군에서도 금역이다. 그것은 은밀성 제일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러시아 해군의 중심은 원자력 잠수함 부대”

2015년 한국 해군과 러시아 해군 간의 정례 교류회의차 러시아를 방문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합동참모부와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잠수함 장교가 날아왔다
  
 
그에 앞서 매년 동해에서 실시하는 한미 연합 해군훈련에 구역 인근에서 러시아 해군의 정보활동을 우리 군이 포착했다. 때문에 한러 해군교류회의에서 이에 대한 항의성 질의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러시아 잠수함 장교는 “공해상에서의 일반적 수준의 활동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네 수상함의 항해 기록을 보여주면서 한국 해군의 이해를 구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의 설명이 러시아 잠수함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임을 직감했다
  
 
그날 만찬 자리에서 러시아 잠수함 장교는 디젤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차이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에 정박한 러시아 잠수함 중 디젤 잠수함은 모두 대위나 소령이 함장이다. 그 잠수함은 이제 교육훈련 목적으로 사용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항한 원자력 추진 잠수함은 아르헨티나 해변가 등 세계 어느 곳이든 필요한 곳에서 작전을 수행한다. 
  
 
그는 만찬 내내 “러시아 해군의 중심은 원자력 잠수함 부대”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러시아 해군사령부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잠수함 장교는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전략적 가치인 “생존성을 지닌 확실한 보복 능력”에 대해 되풀이 강조했다.  


  
이라크전쟁의 교훈

/1991년 걸프전쟁 이후 미국은 원자력 잠수함이나 이지스함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급 원자력 잠수함 14척은 이라크 지상 시설 타격임무를 수행했다. 미국은 개전 초기 잠수함과 수상함에서 800여 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중에서 약 3분의 1이 잠수함에서 발사한 토마호크였다. 이 미사일들의 주된 목표는 이라크 공군비행장과 공군기들이었다.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으로 이라크 공군은 날아 오르지도 못하고 하룻밤 사이에 궤멸됐다. 군 공항 활주로도 파괴됐다.
  
 
미국은 핵 추진 잠수함의 원거리 미사일 공격은 100% 목표를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LA 급 잠수함은 36초마다 토마호크 미사일을 1발씩 발사할 수 있다. 1척당 14기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탑재하고 있다. 이 순항 미사일은 475노트(시속 1000km 속도)로 적의 방공망을 피하고, 미사일에 내장된 지도와 실제지형을 비교하며 비행하여 목표지점을 타격한다.
  
 
바닷속에서 솟아오른 미사일을 막아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걸프전쟁은 전략잠수함의 가치를 입증한 명백한 사례다
  
  12
년 지난 2003년의 제2차 이라크전쟁도 미국 잠수함의 미사일 공격으로 시작됐다. 수백km 떨어진 아라비아 해상의 이지스구축함과 어딘지 모르는 바닷속에 숨어 있는 잠수함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막을 방법은 없다.
  
 
우리 국방부도 2003년 이라크전을 지켜보면서 동맹국 미국의 전쟁 방식과 군사적 능력에 대해 예의 주시했다. 필자를 포함해 이라크전쟁을 지켜본 군인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은 어떻게 시작될까?
  
 
‘강력한 미국은 개전 전에 북한의 주요 기지를 미사일로 정리하고 이어지는 지상전을 한국군에게 맡기겠지?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능력을 조기(早期)에 완전히 와해시킬 정도의 군사력을 집중할까?
  
 
‘미국은 대한민국이 원하는 시기와 장소에 미군의 전력(戰力)을 배치할까?
  
 
이라크가 전쟁 초기 작전의 양상과 그 결과를 지켜보면서 전투 전문가가 아닌 필자도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전쟁의 양상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초기 조영길 당시 국방장관은 “토마호크의 가격이 얼마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갑작스런 조 장관의 물음에 국방부나 합참의 전문가들은 답변을 못했다. 조 장관은 토마호크는 미국이 해외에 팔지 않는 무기이기 때문에 가격을 매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본 것이라는 후문이 있었다.
  
 
‘전력 건설 분야 전문가’라는 평처럼 조영길 장관은 균형적인 사고(思考)과 함께 국방재원을 장기적으로 지·해·공 전력 중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전략적 생각을 지닌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육군 전략가이지만 잠수함의 전략적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즈음 해군은 잠수함 전력 건설 초기에 도입한 209급 잠수함이 도태되는 시기를 고려해 후속사업을 검토 중이었다. 당시 조영길 장관은 이왕 잠수함을 만들려면 3000톤급으로 바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20년을 앞서 있었다. 2015년 해군 잠수함사령부 창설시 그 자리에 꼭 초청해야 할 역대 장관으로 그가 꼽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원자력 잠수함에 눈 돌릴 때 

잠수함의 가장 큰 전략적 가치는 적에게 들키지 않고 확실히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무기라는 점이다. 정박해 있는 잠수함을 선제 타격하는 방법 말고는 현존하는 탐지수단을 가지고 잠수함을 잡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디젤 추진 잠수함이든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든 자체 사고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잠수함이 노출된 사례는 제로에 가깝다. 항구를 몇 개월 전에 출항한 원자력 추진 잠수함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북한의 전략 무기에 의한 위협 중 가장 위험한 것은 잠수함에서 핵탄두가 탑재된 탄도 미사일(SLBM)을 발사하는 경우이다. 북한이 아직 기술적으로 본격적인 SLBM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2015 5 9일 첫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을 쏜 적이 있다. 북한이 죽자 하고 개발하면 SLBM 보유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한국 해군이 잠수함을 한 척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던 1970년대에 북한은 이미 잠수함을 20여 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한민국 해군이 잠수함을 운용한 지 25년이 지났다. 우리는 디젤 추진 방식의 9척의 장보고급 잠수함과 214급 잠수함은 지속적으로 건조하고 있다. 모두 건조하면 우리나라는 18척의 잠수함을 운용하게 된다. 그러면 아마도 잠수함 보유 척수에 있어서는 세계 7위 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3000
톤급 잠수함의 건조가 시작된 지 약 5년이 흘렀다. 3000톤급 잠수함 건조에 관련한 기업이 대략 3000개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 추진하는 1차 건조 분은 디젤 추진 방식이다. 몇 년 후면 잠대지(潛對地) 미사일 ○○기를 탑재한 3000톤급 잠수함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위협을 생각하면, 디젤 추진 잠수함에 잠대지 탄도 미사일을 탑재하는 정도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더 이상 원자력 추진 잠수함에 대해 논의만 해서는 안 된다.  


  
잠수함용 핵연료 확보 등 가능

/잠수함 전문가인 문근식 예비역 대령.

 

  잠수함 전문가인 문근식 예비역 해군 대령은 이렇게 주장한다.
  
 
첫째, 한국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원자로를 수출하는 기술력을 가지는 세계 5위의 원자력 기술 강국이다.
  
 
둘째, 핵 연료는 프랑스 루비급 잠수함이 사용하는 농축도 20% 미만의 우라늄을 사용하면 된다. 현재 국제시장에서 상업용으로 거래되는 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셋째, 사용한 우라늄을 농축 및 재처리하지 않고, 이를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에 공개하고 점검을 받으면 핵무기를 제조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을 수 있다.
  
 
넷째, 어떠한 경우에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에 쓰이는 농축 우라늄은 95% 정도로 농축된 연료를 사용하고 있다. 혹자는 원자력 잠수함이 어뢰를 맞거나 기뢰를 접촉해 폭파되면 원자로가 핵무기처럼 폭발하거나 엄청난 핵재앙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원자로의 핵 연료가 핵무기급으로 반응하려면 고농축 우라늄이 여러 개의 고성능 화약으로 기폭되어 핵분열을 일으키는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원자력 잠수함이 피폭(被爆)되어도 원자력 잠수함에 있는 핵연료가 반응할 정도의 고온 고압의 조건이 형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면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에 대한 눈총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은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놓여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를 추진하기 시작해도 20년 후인 2037년 정도에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 북한은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게 될 것 같다.
  
 
북한을 비롯한 군사강국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를 향해 나가야 한다. 계속 변화하는 북한의 위협에 쫓아가기에 급급해하는 국방정책은 이제 선택지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자전거 뒷바퀴를 아무리 굴려도 앞바퀴를 못 쫓아가는 형국을 만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보다 강력한 선택이 대한민국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안보는 의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보장하는 것이다.

 

 

10월 호 

 9〉 국방개혁의 성공을 위한 조건

대한민국 국군, 갈라파고스 군대가 되지 않으려면…

⊙ ‘강한 군대’ 만들려면 군사혁신과 국방개혁 필요
⊙ 박정희 정권 이후 정권마다 국방개혁 추진했지만, 군내(軍內) 기득권에 막혀 성과 못 거둬
⊙ 국방개혁 성공 위해서는 인력운영의 개방성, 절차적 정의 확보, 소통과 신뢰 중요

  

 #1. 우리에게 갈라파고스 군대는 필요 없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1000km 떨어진 태평양의 작은 섬,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당연히 군대는 없다. 그러나 이 섬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된 진화론은 국방개혁을 추진하는 대한민국 국군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진화론은 1835 9월 찰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험하던 도중 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격리된 환경에서 다른 모습으로 서식하는 핀치 새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이론은 1864년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스펜서(H. Spencer)가 《생물학의 원리(Principles of Biology)》라는 저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이른바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요약된다. 진화론은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급변하는 안보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방개혁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방 분야에 있어 화두는 단연코 국방개혁이다. 문 대통령은 합참의장 이·취임식에서 “강한 군대를 만들라는 국방개혁은 더 지체할 수 없는 국민의 명령”이라고 말했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왜 ‘국방개혁’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답은 간단하다. 북한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억제·압도하는 강군으로 체질을 갖추고, 안정적 평화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선진화된 군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에도 우리 군은 북한의 도발을 성공적으로 억제해 왔고 미래의 위협에 대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은 더욱 고도화되고 급기야 미국 본토를 공격하겠다고 호언하는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미군의 전략자산에 기대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의 입장에서 “연간 40조원에 이르는 국방예산을 사용하면서도 언제까지 미군 전력에 의존을 해야 하는지?” “그동안 우리 군은 싸우면 이기는 전투형 군대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병력자원은 감소하고 있고 경제성장도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군 스스로는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매는 혁신을 어떻게 해왔는지?”라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국방개혁은 국방안보 종사자들이 함께 모여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안보위협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대한민국 군대는 갈라파고스 군대가 될지도 모른다.  


  
#2. 강한 군대의 조건은 군사혁신에 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한 크레시 전투. 유급병 제도를 도입한 군사혁신의 승리였다.

 

  ‘강한 군대’는 적과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군대이다. 동시에 그 존재만으로도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군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강한 군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우수한 무기, 전략전술에 뛰어난 지휘관과 참모진, 잘 훈련되고 수적으로도 우세한 병사, 병참 능력 등 요소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정답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특정 군대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군사 지도자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다른 나라나 군대와 차별되는 혁신적인 시도를 하게 된다. 그 혁신은 전투를 수행함에 있어 자신의 군대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극대화해서 전장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춘추(春秋)시대로 가보자. 춘추시대 초기의 군사력은 병력과 전차(戰車)의 수()라고 할 수 있었다. 천승(千乘)이라는 말은 ‘1000대의 병거(兵車)를 갖출 힘이 있는 나라’라는 말이다.
  
 
당시에는 마치 약속대련(對鍊) 하듯이 넓은 평원에서 만나 전차를 이용하여 전투를 벌였다. 때문에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이 제한되었다. 그 시대에 전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게 바로 당시 변방 국가였던 오()나라의 손무(孫武)였다. 그는 습지와 호수가 많아 전차 운용이 제한되는 약점을 다양한 보병전술을 창안하여 극복했다. 그것이 바로 군사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적용된 손무의 다양한 전술은 나중에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정리됐다.
  
 
우리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군사적 혁신의 사례는 바로 이순신 제독이다.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 수군이 함선의 수에서 우위에 있고, 위력적인 조총으로 무장했으며, 백병전에 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근접전을 피하는 대신 판옥선과 함포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해상전술을 개발했다. 이와 함께 근접전이 불가피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하여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창안했다. 군사혁신은 단순히 무기의 개발이나 특정 지휘관의 전략전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당시 유럽의 3류 군대였던 잉글랜드군을 단번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성장시켰다. 일반적으로 그가 전투에서 승리한 원인을 장궁(長弓)이나 화포의 도입 등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클리퍼드 로저스(Clifford. J. Rogers)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에드워드 3세가 유급(有給)병사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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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 군대의 승리의 원인을 흔히 군사적 천재인 나폴레옹의 전략전술에서 찾는다. 하지만 나폴레옹군이 이기는 군대가 된 것은 신분에 관계없이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국민들(국민병)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1792년 국민총동원령 덕분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에드워드 3세의 유급병 제도, 프랑스의 국민병 제도 등도 군사혁신의 좋은 사례이다.  

  
  
#3. 군사혁신에서 국방개혁으로

그렇다면 ‘국방개혁’은 무엇인가? ‘군사혁신’이 전투수행 방식의 개선에 중점을 두는 반면 ‘국방개혁’은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시스템 자체를 개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국방개혁은 정부가 주도하게 되며 입법과도 연계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민, 군대, 정부의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중요하다 강조했다. 전쟁의 양상이 국가의 모든 자원을 투사(投射)하는 총력전으로 변한 현대전에 있어 전쟁은 훨씬 복잡 다양해졌다. 따라서 군사혁신도 필요하지만 보다 포괄적인 영역에서 가령 무기체계 획득 방식, 인사 및 조직 관리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직접 주도해야 하는 국방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 것이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국가의 경제력이다. 첨단무기를 구비하고 양질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돈이 든다. 미국은 약 683조원, 중국은 약 164조원, 우리나라는 약 40조원의 예산을 국방비로 지출한다.
  
 
이 정도의 예산을 쓰려면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당연히 국민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국가자원의 효율적이고 투명한 사용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회의 개입도 당연한 것이다. 국방개혁이 정부가 주체가 되고 입법화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골드워터-니콜스 법의 탄생

/미국의 국방개혁법안인 골드워터-니콜스 법안을 상정한 배리 골드워터(왼쪽)와 윌리엄 니콜스 상원의원.

 

  국방개혁을 논함에 있어 미국의 골드워터-니콜스 법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개혁은 원래 실패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1960~1980년대에 베트남전쟁, 이란 인질 구출작전, 그레나다 점령 작전 등을 겪으면서 크고 작은 실수를 경험했다. 이에 따라 국방개혁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다.
  
  1982
3월 미국 합참의장 데이비드 존스(David C. Johns) 장군은 논문을 통해 각 군의 이기주의를 타파하고 합동성(合同性)을 강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후 미국 의회는 강력한 국방개혁법안인 골드워터-니콜스 법안을 상정했다. 이 법안으로 기득권을 침해당하게 된 각 군 본부 등에서는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1986 1월 상하원을 통과한 후, 같은 해 10월에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이 법은 국방부 구조 개편과 문민화, 합참의 책임과 권한 강화, 국방자산의 효율적 운영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국방개혁 2020’도 여기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5. 대한민국 국방개혁에 대한 평가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5년 9월 12일 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국방개혁 2020’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골드워터-니콜스 법의 근간인 합동성 강조는 결국 군대에 대한 중복 투자 방지, 조직과 병력 감축을 통한 슬림화로 귀결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나라에서도 1969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시도되어 왔다. 하지만 슬림화의 측면에서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는 조직이나 병력 감축의 경우는 이해관계에 따라 내·외부의 강력한 저항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국방개혁 노력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박정희 정권 - 특명검열단을 통한 개혁

  우리나라의 국방개혁도 위기에서 촉발되었다. 1969년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 높아졌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자주국방’이라는 기치하에 국산무기 개발을 독려하는 한편 국방부 특명검열단을 만들어 군 개혁을 시도했다. 특명검열단은 군() 지휘통솔의 용이성, 경제적 군 운용 등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 노태우 정권 - 818 개혁 

진정한 의미에서 국방개혁은 노태우 정권이 추진한 ‘818 개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개혁의 핵심은 ‘통합군제(統合軍制)’였다. 각 군 참모총장 직위를 없애고 국방참모총장(현재의 합참의장)을 신설하는 상부구조 개편, 3군 사관학교 통합 등을 통해 비대화된 국방부 본부와 직할기관의 조직을 개편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지금의 관점으로 봐서도 상당히 획기적인 개혁안이었다.
  
 
하지만 이 개혁은 군권(軍權)의 집중을 우려한 야당의 강력한 반발과 각 군의 저항으로 무산됐다. 결국 당초 지향했던 통합군제 대신 현재의 합동군제로 변경되었으며, 인력과 조직의 감축 등 슬림화는 실패했다.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818 개혁의 실패로 오늘날 우리 군이 전투형 군대가 아닌 관리형 군대, 행정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 노무현 정권 - 국방개혁 2020

노무현 정권 시절 ‘국방개혁 2020’이 등장했다. 병력자원의 감소와 국가재정 능력 등을 고려, 지상군은 병력을 감축하되 현대화하고, 미군에 의존하던 해군과 공군력을 확장하며, 3군 균형발전과 합동성을 강화하며, 이를 토대로 전시(戰時)작전권을 가져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국방개혁은 국방개혁을 최초로 법제화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후 정권에서 병력감축 계획은 후퇴하고 전시작전권 반환이 연기되면서 미완의 개혁으로 남게 됐다


  
▲ 이명박 정권 - 국방개혁 307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도발을 거친 후, 노무현 정부의 국방개혁을 수정하여 2011 3 8일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 개혁안이 ‘국방개혁 307’이다. ‘국방개혁 2020’이 잠재 위협 대비에 중점을 뒀다면 이 개혁안은 현존 위협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현존 위협을 중시한다는 이유에서 병력감축의 시기나 규모 등이 후퇴했다.  


  
▲ 박근혜 정권 - 국방개혁 2030

박근혜 정부의 개혁안은 군단 중심의 작전수행체계 구축을 포함하여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 국방개혁에 비교하여 차별화된 내용이 많지 않았으며, 병력과 조직 감축의 시기나 규모 등은 이전의 개혁안과 비교하여 상당히 역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6. 국방개혁의 성공의 조건은?

/지난 8월 11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육군참모총장 이·취임식에 참석한 군 수뇌부. 군의 인력운용에는 능력제일주의의 개방성이 중요하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 청와대 직속으로 국방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국방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일부 언론은 정부 출범이 100일이나 지났는데 국방개혁의 청사진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앞으로 많은 논의가 있겠지만 거시적인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조직의 슬림화와 병력의 감축이다.
  
 
심도 깊은 토론의 결과 북한의 위협을 이유로 반드시 병력감축이 보류되어야 한다면 보류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주변을 둘러보자. 세계 최강인 미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법안까지 만들어 국방개혁을 추진하여 조직을 슬림화하고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병력을 감축하고 있다. 중국 또한 육군의 경우 7개 군구(軍區) 5개 전구(戰區)로 통폐합하는 등 병력감축에 나서고 있다. 정보화 시대에 있어 군을 슬림화하는 대신 정예화시키는 국방개혁은 대다수 국가의 공통과제인 것이다. 우리나라만 예외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국방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고려해 볼 수 있는 선행과제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인력운용에는 ‘개방성’이 중요하다  

어느 역사에서건, 혁신적인 마인드를 가진 신진 세력에 의해 새로운 나라 혹은 정권이 등장하면서 국력이 강성해진다. 이후 신진 세력이 부나 권력을 세습하면서 기득권층이 되면서 혁신 대상이 되곤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바로 기득권이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특정 출신들이 조직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독식하고 직책을 대물림하게 되면 조직의 사기는 물론 경쟁력이 극도로 떨어지게 된다. 반면 누구나 노력하면 등용되는 시스템을 갖춘 조직은 경쟁력을 갖게 된다. 에이미 추아 예일대 교수는 그의 저서 《제국의 미래》를 통해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방적인 인재등용이 국가를 얼마나 강력하게 만드는지 많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국방부 내부를 들여다보면 공무원과 군인들이 있다. 그들의 출신 또한 다양하다. 개방성의 측면에서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특정 집단을 배제해서도 안 될 것이며, 또한 ‘보여주기식’으로 한시적으로 운용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인력·조직 관련 국방개혁을 추진하면서 개방성의 원칙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능력과 의지가 있는 부사관들이 고급 장교로 진출할 수 있고, 사관학교를 나오지 않은 장교들이 각 군의 총장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환관 출신으로 장군이자 재상이 되어 동로마를 구했던 영웅 나르세스도 인재 등용의 개방성이 작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2.
‘기득권 타파’에는 절차적 정의의 원칙을 적용해 보자 

그 누구도 상황에 있어 국방개혁을 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이 바로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자신에게 직접 미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당연히 갈 수 있는 보직의 길이 막히거나 진급에 영향을 준다면 극렬히 반대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장성 수가 대표적인 예이다. 박근혜 정부는 장성 수 감축 목표를 60명에서 40명으로 축소했다. 이 때문에 언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장성 진급을 꿈꾸는 상당수 장교는 안도했을지 모른다.
  
 
군은 그동안 북한의 도발이나 위기상황을 이유로 몸집을 불려온 측면이 없지 않다. 군은 매년 조직 진단을 하는데 스스로 조직을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부대나 부서는 결코 없을 것이다. 물론 예산도 마찬가지다. 각 군이 군 내에서의 지분과 몸집을 키우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만 국한된 일도 아니다. 이 모든 현상은 한마디로 ‘기득권 지키기’라 할 수 있다. 국방개혁의 성패는 이 기득권 지키기를 타파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골드워터-니콜스 법으로 되돌아가 보자. 시아파 테러분자들은 레바논의 미국 해병대 병영을 공격해 200명 이상의 해병 요원과 해군 수병을 살상했다. 각 군은 부상 요원들을 어디로 옮겨 치료해야 할지를 놓고도 갈등을 빚었다. 미군의 그레나다 점령 작전 당시 해군은 육군 헬리콥터의 해군 함정 승선도 인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각 군의 기득권 관련 논의가 전개될 경우 갈등이 수면으로 부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며 개혁안을 추진해 나갈 것인가?
  
 
이 대목에서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존 롤스 교수가 정의의 원칙을 도출해 내는 과정에서 사용한 가설적 상황을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가설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조직 구성원에 통용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을 만드는 데 있어 이해 당사자인 개인이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으로 돌아가고 어떤 계층인지 모르는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라는 조건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가 강조한 것이 ‘공정으로서의 정의’ 즉 절차적 정의이다. 굳이 롤스의 정의론이 아니라도 갈등이 예상되는 정책의 수립과 추진 과정에서는 사전에 합리성과 설득 효과를 제고할 수 있는 절차적 원칙을 만들어 적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고민에 앞서 군대가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운영된다는 것에 기초해 볼 때 군 스스로 자기 희생적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가령 지금 정부는 핵추진잠수함을 확보하겠다고 한다. 해군은 이를 확보만 할 수 있다면 작전운용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유용하다고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핵추진잠수함을 건조하는 데는 1척당 15000억원, 실제는 그 이상의 예산이 든다. 그래도 핵추진잠수함이 필요하다면 해군은 그에 상응하는 다른 전력(戰力)사업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보유 자산을 국고에 환수시키는 등의 자기 희생을 보여줄 의지가 있어야 한다.

  

  3. ‘소통’과 ‘신뢰’의 로드맵을 만들어야  

지금까지 우리의 국방개혁이 미완이었던 것은 결국 내부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을 내부의 저항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소통과 설득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도 함께 되돌아봐야 한다.
  
 
지금 정부가 아무리 좋은 국방개혁안을 만들어 내더라도 군 스스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야(與野)는 물론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국가안보는 특정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무리 중요하고 옳다고 판단되더라도 독단으로 결정하고 이를 일방적으로 홍보하면서 강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 국방개혁안을 만들 때 소통과 신뢰의 로드맵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가령 주한미군의 사드가 아무리 유용하다고 설명해도 지금도 배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님비(NIMBY)현상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 때문일까? 정책을 결정해 놓고 3년이 넘도록 언론의 문의에 “요청받은 바도 없고, 협의한 바도 없고, 결정된 것도 없다”는 3 (NO) 정책이 과연 옳았던 것일까?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 혹은 국민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수렴 과정을 통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향후 정권이 다시 바뀌어도 이러한 과정을 거친 정책은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소통’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신뢰’이다. 국가정책의 추진동력은 평상시 국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과거 정부는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설익는 정책이나 전략무기를 갑자기 공개하기도 했다. 이는 북한에 대한 맞대응의 차원도 있겠지만 “그동안 뭐했느냐”는 비판을 무마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런 일시적인 처방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기 힘들다. 루머나 음모론은 대개 정보의 결핍에서 오고 신뢰는 투명성에서 온다
  
 
김재창 예비역 육군대장은 한 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개혁에 대한 저항을 설명한다.
  
 
1861, 미국 버지니아 사람 개틀링이 최초로 기관총을 발명하였습니다. 남북전쟁이 시작될 무렵입니다. 당시 분당 최대 400발을 사격할 수 있었던 이 기관총 한 정은, 몇 개 대대가 소총으로 사격하는 화력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군은 이 무기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새로운 무기를 선택하지 않은, 그런 이유가 많이 있었습니다. 총이 너무 무겁다, 고장이 잘 난다, 또는 실탄 소모가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없다 등이었지만, 사실은 군이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정확합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우리 군을 “공룡이 아닌 표범”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공룡이 표범이 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극심한 반발이 있을 수 있고 언론의 강한 질타도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가야 하는 길은 가야 한다. 우리 군이 변화를 기피하여 결국에 갈라파고스 군대로 전락하게 되면 우리 모두는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지금 정부가 미완의 국방개혁을 완성시키는 것은 대한민국의 생존이 걸린 사활적인 문제이다. 모두의 관심과 지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12월 호

10〉 병장(兵長)의 군대, 장군(將軍)의 군대

⊙ 노무현, “용산의 국방부 장관과 전방 내무반의 총기 사건에 인과관계가 있는가?”라며 국방장관 해임 여론에 제동 걸어
⊙ 해군, 방산비리 사건 이후 공관병 폐지 등 급진적 개혁 추진
⊙ “계급은 누리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일하라고 주는 것”

/2015년 4월 3일 명예해군운동추진계획보고회의. 해군은 명예해군운동을 통해 자기개혁에 나섰다.

 

  대한민국 남자는 병역의 의무를 지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군 복무를 한다. 그래서인지 군대를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경험을 기초로 군()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 고정관념이 형성되는 것이다. 1986 2월 필자는 어청도에서 해상 대()간첩작전이 주임무이던 PK(patrol killer) 171호정의 부장(副長)을 맡고 있었다. 장교는 정장(艇長), 부장, 기관장 등 세 명, 승조원은 모두 28명이었다.
  
 
매일 약 30마일 거리의 경비해역이 주어지면 그 지점으로 이동해서 5시간 해상경비에 투입된다. 저녁 8시 출항하는 함정은 새벽 3시경 기지에 복귀하고, 23시에 출항하는 함정은 새벽 6시경 귀항한다. 젊은 승조원들은 밤마다 야식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느꼈다. ‘육·해·공 전방지역의 전투력은 라면에서 나온다’고 ….  


  
라면 담당 김 일병

/PK-11기러기. 고속정은 경량화를 위해 식탁이 없었다.

 

  고참 부사관 및 장교의 라면 당번은 위생병인 김 일병이었다. 그의 후임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인천대 간호학과를 다니다 입대한 김 일병의 하루 일과는 매일 밤 라면 20개를 끓여야 마감이 되었다. 흔들리는 배에서 작은 전기 쿠커에 라면은 4개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당시 중위였던 필자는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물었다.
  
 
“김 일병, 라면 몇 개를 끓여야 제대하나?
  
 
그는 즉시 대답했다.
  
 
5800개 정도 끓이면 전역합니다.
  
 
깜짝 놀랐다. 경량화(輕量化)를 위해 고속정에는 식탁 하나 없었다. 김 일병이 체감하는 군대란 흔들리는 고속정에서 ‘라면 끓이기(국물 흘리지 않고)’였다. 부장인 필자가 작전명령, 항해 당직 전투배치 사격훈련, 수리 소요와 소속원 휴가계획, 봉급지급 및 항해수당 계산에 신경 쓸 때 그는 라면에 신경을 썼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갑판에 라면 국물이 흐르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깐깐한 갑판장 유원줄 상사는 늘 위생병에게 “국물 좀 흘리지 마라. 이 배가 무슨 부식정이냐?”고 농을 했다. 김 일병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타사가 어청도 가게(전남상회)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출항 전 나타났다. 짜파게티였다. 맛도 있고 국물도 없다. 위생병은 너무도 좋아했다. 간부들은 항해수당 상당 부분을 짜파게티를 사는 데 지출했다. 짜파게티는 330, 라면은 130원이었다. 부식비를 일부 지원해야 하는 필자에게 짜파게티는 비싼 야식이었다. 승조원들이 원하는 만큼 짜파게티를 사 줄 수 없었다. 이제 미안함을 전한다. 30년 만에.  


  
운전병의 평가가 정확하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잡힌 우리 선원들을 구출한 아덴만 여명작전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였다.

 

  군에는 이병부터 대장까지 계급이 있다. 힘들지만 격조 있는(?) 전투병 이외에 PX, 식당병, 간부숙소 당번병, 운전병, TMO 근무병 등 하는 일도 다양하다. 군 복무를 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를 해석한다. 운전병들은 장군 및 지휘관들의 면모를 꿰뚫고 있다. 그리고 운전병의 인성 평가가 대체로 정확하다
  
 
얼마 전 한 장성의 공관병에 대한 갑질 의혹 문제가 제기됐다. 군은 많은 국민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운전병은 전역(轉役)을 하루 앞둔 장성의 마지막 퇴근을 도우면서 전투복 상의에서 손 편지를 꺼내 “그동안 자식같이 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울며 포옹했다. 그 순간 그 장성도 “고마웠다”며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장성은 그에게 “제대해서 복학하면 꼭 만나자”고 했다. 다음 해 두 사람은 까만 밤하늘 아래 관사 주차장에서 했던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군에서 엉뚱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군 당국에서는 국민들에게 “군을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공보장교로서 필자도 여러 번 그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저마다 다양한 군 경험을 갖고 있는 국민들에게 그러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연평해전 같은 경우는 전우들이 여러 명 전사하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공보장교로서 그들의 용전을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고위 장교들의 일탈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는 참으로 궁색했다. 조영길 국방장관 시절 북한을 탈출한 6·25 참전자의 송환 문제가 발생했다. 국방부·통일부·외교부가 연관된 일인데 모두 모르쇠로 일관했다. 3개 부처가 모두 연일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방부 인사국장이 복지 관련 사안을 브리핑하기 위해 기자실에 들렀다. 기자들은 탈북 참전용사 문제를 집중 질문했다. 인사국장은 주무 부서장이 아니었지만 기자들의 설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그러면 잘못했다”고 답변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국방부 잘못 시인, 관계자의 부주의 결과’라는 기사가 나갔다. 3주간 끌던 문제가 하루 만에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여기서 보듯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모든 사건에는 사정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답이다.
  
 
군대가 심하게 비판을 받는 경우는 대개 장군의 일탈, 고급 장교의 성()추행이나 성폭행, 그리고 경계태세 실패이다. 사실 이것만 아니면 군대는 그렇게 욕먹을 일이 없다. 1999년 연평해전 이후 해상교전을 치러 왔던 해군은 ‘패전(敗戰) 지휘관은 갈 곳이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용전분투한 전투원의 행위는 선양(宣揚)해야 하지만, 전투가 승리로 끝났다는 확증을 장병들과 국민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건사고에 전전긍긍하는 지휘관들 

대한민국 국군의 장교와 부사관들은 병사들이 안전하게 군 생활을 하고 무사히 전역하게 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남성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데서 나온 당연한 의무다. 그래서 ‘자식을 군에 맡긴다’고 표현한다. ‘맡겼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 참 답답해한다. 얼마 전 사격장 사망 사건도 그렇다. 중대장이 책임져야 하나? 병사의 죽음에 대해 지휘관은 ‘사회적 죽음’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국가는 마땅히 안타깝게 사망한 젊은 병사의 가족들을 충분히 위로하고 그를 기려야 한다. 하지만 ‘군대 내 사고는 모두 지휘관의 책임’이라는 등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고려했으면 한다.
  
 
직업군인에게 혜택은 딱 한 가지다. 연금이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복지혜택이 없다. 지난 20년간 군인 복지를 개선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장관·총장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말 없는, 말 못하는 군인들의 복지는 점점 낙후되었다
  
 
군인들이 복지향상을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군 골프장 문제라고 생각한다. 직업군인들이 군 골프장을 값싸게 이용하는 것이 국민들에게는 마치 엄청난 혜택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경계태세가 높아진 상황 속에서 군 골프장을 이용했다가는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 십상이다. 국회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직위로 갈 가능성이 있는 군인은 골프장 이용에도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계룡대나 전방부대 간부들은 “비상소집 시 등산하다가 상황실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골프장에 있다가 들어가는 것이 더 빠르다”고 항변한다. 아무리 그래도 ‘국민정서법’을 이기기는 힘들다.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는 이들은 결혼 후 제1의 사명인 자녀교육에 제한받는다. 대개의 경우 도시에서 벗어나 생활해야 한다. 모든 공무원이 60세까지 일할 수 있는 세상인데 군인 중에 60세까지 일하는 사람은 딱 7, 즉 대장(大將)인 합참의장, 각군 참모총장,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1·2·3군 사령관뿐이다. 그 외의 모든 직업군인은 40세부터 50세 중반 이전에 퇴진한다.  


  
‘진급’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군인들

이러한 복무 여건은 결국 진급에 대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군에서 진급은 개인적으로는 사활적 문제다. ‘진급’이라는 문제 앞에만 서면 군인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조직을 이끄는 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토너먼트식 진급(To Be or Not To Be)’엔 생각해 볼 부분도 있다
  
 
그런 데다가 앞에서 본 것처럼 지휘관은 군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군인은 그래서 운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의 잘못이 아닌 일로 인해 자신의 미래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군인들은 늘 답답해한다
  
  2005
년도인가? 전방부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 때문에 윤광웅 당시 국방장관이 퇴진의 기로에 선 적이 있었다. 여당도 장관 해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이즈음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글을 올렸다. 내용인즉슨 인과관계론(因果關係論)이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임금의 부덕함이고 그래서 쫓겨나는 것이 합당한가? 용산의 국방부 장관과 전방 내무반의 총기사건에 인과관계가 있는가? 현대에도 그렇게 일을 처리해야 하나?〉라는 취지의 글이었다. 사건사고만 나면 지휘관의 책임부터 묻던 한국식 문제해결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었다. 이 글로 논란은 일거에 수그러들었다


  
해군의 자기 개혁

/정호성 전 해군참모총장은 2015년 3월 26일 해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참모총장 특별정신교육을 실시했다.

 

  한때 ‘해피아(해군사관학교 출신 방위산업 종사자)’라는 오명(汚名)을 낳기도 했던 방위산업 비리 수사도 국민들의 마음을 군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해군은 당시 세월호 이후 시작된 방산비리 수사와 일부 장성 및 영관급 고급 지휘관의 일탈행위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해군은 ‘제2의 창군’ 수준으로 ‘해군문화 대혁신’을 통해 도덕적인 조직으로 재탄생하겠다면서 ‘명예해군운동’을 펼쳤다. 3년 전이다.
  
 
당시 해군은 명예·헌신·용기를 3대 핵심가치로 새로 선포하고, 다음과 같은 명예해군 7대 윤리지침을 선정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1. 국가자산(인력, 재물)을 절대 사적(私的) 용도로 사용하지 않겠다.
2.
금품수수, 부당이익을 취하지 않겠다.
3.
공공예산을 절대 부정 사용하지 않겠다.
4.
인사문란 행위를 일절 하지 않겠다.
5.
군인으로서 품위를 위반하여 사회적 물의를 야기하지 않겠다.

6. 직권남용 행위를 하지 않겠다.
7.
조용한 내조를 통해 건전한 해군 가족문화를 정착하겠다.

  

  
  
공관병 제도 폐지

/세종대왕함.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추적할 수 있는 이지스함이다.

 

  특히 해군은 당시 급진적이라 생각될 정도의 혁신적인 제도를 추진했다. 먼저 공관에 상주하던 공관병을 모두 없앴다. 과업시간에만 근무하고 일과 후에는 생활관으로 퇴근하도록 했다. 다만 참모총장 공관에는 행정병 1명만 상주하여 긴급전문 수발, 수시보고, 문서관리 등 행정 및 시설관리·안전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 경우에도 조리나 세탁, 애완동물 사육, 영농활동 등은 일절 취급하지 않도록 했다. 해군작전사령관은 야간에 운전병 1명만 공관에서 취침하여 24시간 비상대기 태세를 유지하도록 했다. () 해군에서 병사 2명만이 야간에 장성 공관에 대기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공관비품도 지휘관 교대 시마다 취향에 따라 교체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시키고 내구연한 초과 품목만 부대 교체계획에 따라 집행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장성급 지휘관의 부관이나 보좌관 등 부속실 인력의 사적 목적이나 근무시간 외의 운용도 철저하게 통제했다.
  
 
해군은 국가자산(재물, 예산, 시설, 장비, 비품, 차량 등)의 사적 목적 사용도 철저하게 통제했다. 관용차량도 근무시간에 한해 공적(公的)으로만 사용하도록 제한했다. 주말 골프운동, 종교활동 참석 등에 가능한 자기 소유 차량을 사용하도록 했다(나중에 상부 공용차량 운행지침에 따라 영내 종교시설 및 군 운용 체력단력장의 출입에 공용차량 사용은 허용됐다).
  
 
부대 기념품 제작 시에는 반드시 부대 명의로 하고 지휘관 개인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외부에서 공식 기념품을 받았을 경우에는 반드시 부대 내 적정 장소에 비치하도록 했다. 실제로 당시 정호섭 총장은 계룡대 골프장을 이용할 때 개인 차량을 사용했고 군사교류 시 받은 기념품 일체를 사관학교 교육장에 기증하고 전역했다.
  
 
해군은 군인 상호간에 일체의 금전이나 선물, 향응 수수행위를 금지했다. 방산, 군납 직무관련자와의 골프, 여행, 개별적인 식사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진급심사에서 선발된 사람에게 보내는 축하전화나 축전 또는 화환 등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심지어 연말연시, 명절, 생일, 결혼기념일 등을 기리는 인사 목적의 연하장이나, 휴대전화를 이용한 문자 메시지도 금지시켰다.
  
 
()전투사고와 군기(軍紀)사고의 원인이 되는 불건전한 음주 회식을 하지 않도록 회식은 한 자리에서 한 가지 술로 밤 10시 이전에 반드시 마치고 숙소로 복귀한다는 1110운동도 추진했다. 지휘관이나 상관에 의한 소위 ‘권력형 성군기 위반행위’를 예방하기 위하여 성폭력 범죄자는 원아웃(one-out)제도로 일벌백계하는 준엄한 제도를 시행했다.  


  
“세금 아깝지 않다”는 소리 듣는 국군이 되길 

해군·해병의 전 부대를 20여 차례 순시하면서 고위직 간부들에게 “국가 재물과 인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비리·성폭력에는 무관용 및 원아웃이라는 엄격한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교육을 했다. “장성 및 대령들이 솔선수범하여 국가와 해군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떳떳한 언행과 책임지는 자세로 해군을 가장 정직하고 도전적인 조직으로 만들자”며 명예해군운동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구속력을 갖도록 규정화했다.
  
 
이 같은 명예해군운동은 일부에서 “‘하지 말라’는 식의 제재 위주로 되어 있고 너무 급진적인 내용이라 성직자(聖職者)들이나 실천 가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노력의 결과 군의 도덕성 회복이나 윤리의식이 많이 향상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쟁에서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존재목적인 군에 있어서 전투력의 근원은 철저한 윤리의식 및 도덕성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한시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군 장성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장관이 삼정도(三精刀)를 주면서 한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계급은 누리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일하라고 주는 것이니 합당한 생각과 행동으로 본인의 생활상을 늘 살피는 것이 국민의 신뢰와 장병에게 믿음을 주는 첩경”이라는 말이었다.
  
 
아덴만 작전 성공 때처럼, 종래 연합사에 의존하던 북한 미사일 궤도를 세종대왕함이 포착해서 실시간으로 보고할 때처럼, 대한민국 국군이 국민들로부터 “세금 아깝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