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2015-05-24 40%가 참전… 서울고 출신들이 전쟁터로 달려간 까닭은?
▲서울고 교정에 있는 현충 시설물.왼쪽부터 삼일탑,표충탑,강재구 소령 흉상.서울고총동창회는 이3가지 현충시설 외에2010년 6·25참전기념비를세웠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서울고등학교 교정은 마치 현충원을 방불케 한다.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顯忠) 시설이 4개나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이갑성 옹의 친필 휘호인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가 새겨진 삼일탑(三一塔), 6·25 당시 학도병(學徒兵)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표충탑( 表忠塔·이승만 대통령의 휘호), 훈련 중 중대원 한복판에 떨어진 수류탄에 몸을 던져 중대원을 구하고 산화(散花)한 故 강재구 소령 흉상, 그리고 2010년에 건립된 6·25 전쟁 참전 기념비가 그것이다. 이 외에도 학교 본관 건물 복도에는 참전용사들 전원의 이름이 새긴 명패가 걸려 있다. 서울고 재학생들은 특별한 날이 되면 이들 현충시설에 헌화행사를 가진다.
▲서울고총동창회는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2010년 서울고 출신 참전 동문들을 기리기 위한 6·25 전쟁 참전 기념비를 건립했다. 서울고는 서울지역에서 가장 많은 학도병 참전자와 전사자를 냈다. 기념비에는 참전자와 전사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시 기념비 제막식 후 생존 참전 용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서울(중)고는 6·25 전쟁 당시 서울지역에서 학도병 참전자와 전사자(35명)가 가장 많이 나온 학교다. 전쟁기간 동안 457명의 재학생이 참전하였는데, 이는 1회부터 6회까지의 졸업생 1198명의 40%에 해당하는 숫자다. 특히 3회 기수의 경우 169명 중 118명이 참전, 70%에 이르는 참전율을 기록했다. 6·25가 발발했을 때 서울고는 개교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학교였다.
▲2010년 6·25 전쟁 참전 기념비 제막식 후 열린 호국음악제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강대신 서울고총동창회장.
서울고 제18대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강대신(姜大信) (주)케이티엠파트너스 대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명문인 이튼스쿨과 일본의 귀족학교인 학습원(學習院)의 20%대에 불과한 참전율과 비교했을 때 단일 학교에서 이러한 참전율을 기록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있는 경이적이고 자랑스러운 호국(護國)의 역사”라고 말했다.
서울고동창회는 모교(母校)의 호국 역사와 선배들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2010년 10월 6·25 전쟁 60주년에 맞추어 서울고동문참전기념비를 건립한 것이다. 기념비에 새겨진 ‘자유민주주의수호’라는 휘호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이다.
당시 서울고총동회장으로 참전비 건립을 주도했던 강대진 회장은 “기념탑에 새겨 넣을 휘호를 받기 위해 내가 직접 이명박 대통령께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며 “참전 동문과 전사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이 기념비가 후손에게 오래도록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큰 뜻을 전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1년 내내 이어진 서울고의 전쟁영웅 기리기 행사
강 회장은 참전기념비 건립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가 서울고 동창회장을 맡기 얼마 전 국립 서울대에 6·25 참전 기념비가 없다는 어느 교수의 신문 기고 칼럼을 읽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 제가 동창회장이 되었을 때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저는 이를 계기로 호국과 현충(顯忠)의 교풍(校風)을 이어온 우리 서울고가 모범적인 기념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온 서울고 동문들의 힘을 모아 기념비건립을 추진했습니다.”
▲서울고총창회는 모교 출신 참전자들의 수기를 모아 <경희궁의 영웅들>이라는 기념문집 편찬했다
강 회장은 아울러 서울고 출신 참전자들의 수기(手記)를 모아 기념문집 편찬사업을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경희궁의 영웅들>이라는 서울고 동문 참전기념문집은 2010년 10월16일 참전기념비가 준공되는 날 기념비 앞에 헌정되었다. 강 회장은 “참전기념비 준공식에 참석한 서울고 출신 노병(老兵)들은 저마다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고 전했다.
아울러 서울고총동창회는 6·25 발발 60주년이 되던 2010년 한 해 동안 모교의 참전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참전 선배들과 함께한 서울고 가족 마라톤대회, 육군사관학교 내의 강재구 소령 동상 헌화 및 추모 테니스대회, <6·25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라는 주제의 학술대회, 재학생들의 6·25 관련 백일장, 호국가을운동회, 6·25 전적지 참배 산행 및 전투기념비 헌화, 동문 참전기념비 건립과 호국예술제, 참전동문 기념문집 발행 등이 그것이다.
이듬해인 2011년 7월에는 미국 뉴욕에서 서울고 재미연합동창회를 개최해 미국에 거주하는 서울고 1회부터 6회까지 참전 동문을 초청한 가운데 뉴저지주 포트리시(市)에 있는 6·25 전쟁 참전 기념비에 헌화했다. 이 행사에는 30명의 미국 6·25 참전 용사들이 초청되었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찰스 랭겔 연방하원 의원과 포트리시 시장도 첨석했다.
강대신 회장은 “이 행사는 미국 내 50여개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며 “특히 당시에 서울고 출신인 김관진 국방장관이 보낸 국방부 로고가 들어간 기념 시계를 미국 참전 용사들에게 전달했는데, 노병들이 무척 감격해 했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미국의 많은 언론이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회가 왜 미국까지 와서 참전비에 헌화하느냐고 물어 왔는데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었다”고 말했다.
“61년 전 조국이 위태로워졌을 때, 당시 서울고 재학생들이 자원입대 참전하여 조국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 국민소득은 30달러 였습니다. 오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2만달러, 세계 12위권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서울고는 우리 조국을 구한 모교의 참전용사뿐 아니라, 미군 참전용사들까지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국군의 간성(干城)을 길러온 호국의 요람
서울고의 호국 전통은 6·25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에도 서울고는 수많은 국군의 간성(干城)을 길러낸 호국의 요람역할을 해왔다.
7회 졸업생의 경우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인원이 5명, 8회 때 27명, 9회 때 31명 등 매년 10명 이상이 입교함으로써, 전쟁 후 상당기간 동안 최다수 육사 입학생을 배출한 학교라는 영예를 유지했다. 그 결과 13회까지 장군만 32명이 탄생했고, 16회까지 확장하면 서울고의 육군 장성 출신은 40명에 이른다.
서울고가 6·25 당시 이토록 높은 참전율과 전사자를 기록하고, 지금까지도 호국의 전통을 이어온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서울고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고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 현재의 경희궁 터에서 개교(開校)했다. 그 자리는 일제가 경희궁을 헐고 지은 경성중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경성중학교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한 엘리트 양성을 위해 지은 학교다. 일제는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 궁궐을 철저하게 훼손하였고, 창경궁에는 동물원을, 경복궁에는 총독부를, 경희궁에는 학교를 만들었다. 경희궁에는 신사(神社)까지 두었다. 광복 후 이 신사를 헐어버리고, 삼일탑을 세웠다. 이 탑은 현재 서초동 서울고 교정(校庭)에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김원규 서울고 초대교장의 흉상.
서울고 출신의 많은 동문들은 광복 후 생긴 신생학교가 10년이라는 이른 시일 안에 명문고로 우뚝 서고, 호국의 전통을 이어온 배경에는 김원규(金元圭) 초대 교장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원규 교장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때 함흥고보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서울시 교육국장 시절 6년제 중학교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하는 등 우리 교육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교육자다.
많은 서울고 출신 인사들은 “김 교장선생님은 ‘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으며, 그의 애국심과, 교육방침과 리더십이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증언하고 있다. 서울고 본관 출입구에는 김 교장의 가르침을 적은 글귀가 붙어 있어, 재학생들에게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재학생 절반 이상이 이북 출신
강대신 회장은 “서울고 출신의 남다른 애국심과 호국 정신 이면에는 이북 출신이 많았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울고 초창기 입학자의 과반수가 이북 출신이거나, 월남자들의 자제들이었습니다. 이들 서울고 선배들은 공산주의의 실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반공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전쟁이 나자 이들 다수가 자원해서 전장으로 뛰어들었고, 많은 분들이 전사했습니다. 이들이 세운 교풍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강 회장은 “서울고의 학풍은 ‘엘리트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며 “이런 교풍 속에서 배운 서울고 출신들은 어디서나 솔선수범해왔고, 국가와 사회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교풍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우리 서울고 출신들이 제일 먼저 나서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역사는 승리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라며 “이런 사실을 볼 때 지나간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젊은이들에게 잊혀져가는 6·25, 잘못 이해되고 있는 6·25를 명확하게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고 동문 참전용사들의 수기
2010년 발행한 서울고 동문 6·25 전쟁 참전 60주년 기념문집인 <경희궁의 영웅들>에는 다양한 참전 수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인상적인 수기 몇 편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독립포병 대대로 활약했던 서울고 출신의 유인준(3회) 중위./이미지= '경희궁의 영웅들'에서 발췌.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계속 총을 쏘라”김봉태(3회, 육군소위)
전쟁이 나자 인민군 앞잡이들이 부친과 큰 형님을 붙잡아 갔고, 인민재판으로 처형되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가슴에 한을 품은 채 혹여나 아버님과 형님의 유골이라도 거둘 수 있기를 소망하시며, “절대로 장사동 집을 팔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3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전쟁 당시 서울에서 숨어 지내던 나는 서울이 수복되자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수도 없이 불렀다. 수복 후 나는 육군에 지원하여, 군인이 되었고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우리는 5월경 전열을 제정비하고 인제 동남방 소양강을 경계로 남쪽에 포진했다.
그때 중공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순간 터지는 포탄에 토사를 뒤집어쓰고, 의식을 잃었지만, 다시 깨어나서는 통증을 참고 숨돌릴 사이도 없이 혈투를 벌여야 했다. 나는 소대원에게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계속 총을 쏘라”고 명령했다. 어차피 도망쳐도 중공군에 죽을 몸이었다.
탄약이 떨어지자 강을 넘어온 중공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하지만 밀려드는 인해전술을 당할 수가 없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열흘 동안 산속을 헤매며 맴돌았지만, 결국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90일 동안 공포, 굶주림, 추위로 점철된 포로생활을 마치고, 휴전협정이 되면서 그리던 조국 품으로 돌아왔다.
6·25에 갖혀버린 어느 전쟁 영웅의 삶목진홍(4회, 육군소령)
※목진홍씨는 6·25 전쟁의 부상으로 극심한 언어장애, 기억력 쇠퇴, 뇌 퇴행성 파킨슨씨병,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급격한 노화 등 악성 질환에 시달리며 60년을 고독 속에서 보냈다. 목진홍씨는 서울고 동문에서 수기를 편집할 당시 80세였다. 그는 후배들이 찾아와 서울고 모표가 새겨진 벨트를 선물을 받고, 북받쳐 오르는 감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수기는 부인과 장남의 구술로 재구성되었다.
천석꾼 집안에 태어난 나는 부친이 최상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서울고에 진학시켰다. 전쟁이 나자 나는 “학업도 좋지만, 조국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태겠다”며 아버지께 입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입대가 아니라도 나라에 이바지할 길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렸지만, 나는 결국 포병 소위로 입대했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서울탈환작전, 봉일천 지구 전투, 두매리 전투 등을 거쳤고, 수많은 중공군을 물리친 공으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포탄을 맞아 쓰러졌고, 육군수도병원 시체 안치실로 보내졌다. 깨어보니 주위는 깜깜하고 목이 말랐다. 기침도 났다. 시체확인을 위해 병원에 온 딸이 내 기침 소리를 듣고 나를 긴급히 후송시켰다. 나는 의식은 돌아왔지만, 머리에 파편 7개가 박혀 반신불수가 되었다. 나의 부상에 충격을 받은 부친이 돌아가셨다.
1953년 부산 3육군병실을 드나들던 간호사 방순이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1957년 결혼식을 올렸다. 나의 자녀 4남매가 모두 공부를 잘해 성공했고, 막내는 의사가 되었다. 나는 1958년 병상에서 소령으로 전역했지만, 1급 상이용사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30~40대에는 푼돈이라도 벌고자, 휠체어를 타고 화장지, 연필, 칫솔 등을 파는 길거리 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상의 후유증이 너무 커 병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부인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등 시장이란 시장은 전부 누비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60년간의 고독한 생활을 보내왔지만, 나라를 위해서 지혜와 충성을 다했고, 부상당했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으로 인한 나와 같은 피해자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통한과 눈물의 포로생활 2년 7개월현재복(5회, 육군일등중사)
서울 수복 후 학교를 찾아와 수학의 기초를 갖춘 학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모병관의 말에 군에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대공세에 끝내 포위망을 탈출하지 못하고 나는 포로로 붙잡혔다. 3월 하순경 평양 동쪽 강동군에 있는 수용소에 도착했다. 땅굴이었다. 이 굴에서 매일 한 두명씩 사람이 죽어나갔다. 밤낮없이 활주로 개설 작업 등의 노역이 이어졌다. 급식은 수수 잡곡밥에 소금국이 전부였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UN군이 폭격을 예고하는 삐라를 뿌렸다. ‘8월말에 대공습 예정이니 노인과 부녀자는 피신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아니 이런 전쟁방식도 있나’며 고소를 금치 못했지만, 얼마 뒤 폭격은 예고대로 정확하게 시행되었다. 이 이야기는 요즘 좌파들에게 물들어 날뛰는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포로 교환에 포함돼 8월 초순에 개성에 왔는데, 수용소에서 처음으로 현미밥에 감자국을 먹고 나니 꿈만 같았다. 8월 하순 드디어 판문점을 통과했다. 포로 교환 시 그들이 지급한 중국산 인민복과 신발은 몽땅 벗어 던졌다. 문산의 환영식에서 팬티차림으로 애국가와 만세삼창을 외치던 그 감격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하리오!
귀환 후 원대 복귀하여 군 복무를 마쳤고, 학업을 계속하고자 학교에 갔다. 학업을 중단한 지 3년 반이 지났고, 20대의 성년이 되었다. 학교 측은 자동 복교(復校)가 안 된다고 해서 선발고사를 보고 합격해서 복학할 수 있었다.
김원규 교장은 파안대소하며 입학허가서에 등록금 등을 일체 면제하라고 기재하고 나서 왕도장을 찍으셨다. 나는 학업에 매진하여 교직에 종사하여 정년을 마쳤다. 인격이 존중되고 소질과 능력을 발휘하여 인생을 보람을 이룰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이들 세 명의 수기 외에도 <경희궁의 영웅들>에는 키가 컸던 탓에 중학 2년 때 길에서 잡혀 의용군에 끌려 북행했다가 간첩으로 돌아와 자수한 이야기(7회 김용규), 미군 노무대원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9회로 졸업한 7회 출신 이야기(7회 이남규), 선후배 두 명이 중공군에 포위되어 탈출하면서 후배(6회 함경호)가 쓰러진 5회 선배(설규옹)를 이끌고 며칠 만에 아군 집결지로 돌아온 사연 등 서울고 출신 참전 동문들이 겪은 생생하고, 감동적인 수기 48편이 실려 있다.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5.08.23 "전우들과 끝까지 나라 지킬 것" 남북 군사 긴장 속 '전역 연기 장병' 증가
▲"전우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전역을 미루겠다는 의사를 밝힌 육군 7사단 독수리연대 소속 전문균(22)·주찬준(22) 병장./뉴시스 제공
지난 21일 북한의 서부전선 포격 도발과 우리 군의 대응 포격 이후 남북간 군사적 긴장상태가 지속되있다. 하지만 휴가 중인 장병들은 속속 조기 복귀하고 있고, “남북간 군사적 긴장국면이 해소될 때까지 전역을 연기하겠다”는 장병들도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육군 7사단 독수리연대 소속 전문균(22)·주찬준(22) 병장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동기로 21개월 동안 복무를 마치고 25일 전역을 앞두고 있다. 이들은 전역 다음날인 26일, 앞서 전역한 선임 전우들과 함께 제주도로 전역기념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항공권을 예매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 국군 장병들은 북한의 포격 도발로 이미 예매해 둔 항공권을 취소했다.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전우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의지에서였다. 이들은 이번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전역을 연기하기로 중대장에게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균 병장은 "21개월간 가족처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들을 뒤로한 채 긴박한 상황에서 부대를 떠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을 느꼈다"면서 "마지막으로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전했다. 주찬준 병장 역시 "전역연기를 결정하는 데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면서 "대한민국의 최전방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복무했는데 국가적 위기 속에서 끝까지 싸울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했다.
2015.08.24 박 대통령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가장 중요
박근혜 대통령은 24일 남북 고위급 접촉과 관련해 "이번 회담의 성격은 무엇보다 현 사태를 야기한 북한의 지뢰도발을 비롯한 도발행위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며 "매번 반복돼온 도발과 불안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방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그것은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북한이 도발 상황을 극대화하고 안보에 위협을 가해도 결코 물러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확성기 방송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과 적당하게 타협해 이번 사태를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그러나 박 대통령은 "지난주말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 고위급 당국자 접촉에서 연이틀 밤을 새워 논의했고 현재 합의 마무리를 위해 계속 논의 중에 있다"고도 말했다. 협상에 진전이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는 발언이었다. 박 대통령은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결과가 나오는대로 국민 여러분께 확실한 소식을 전해드리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저는 우리 군을 믿고 우리 장병들의 충성심을 신뢰한다. 어제 '지금의 위기 상황이 끝날 때까지 전우들과 함께 하겠다'며 전역을 연기한 두 병사 소식을 들었다"며 "저는 그런 애국심이 나라를 지킬 수 있고 젊은이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정치권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한마음으로 단결하고 군과 장병들이 사기를 얻을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며 "그들의 사기를 꺾고 군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것은 결국 국민의 안위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정부는 북한의 그 어떤 도발도 강력히 응징할 것"이라며 "하지만 이번에 대화가 잘 풀린다면 서로 상생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정부와 군을 믿고 지금처럼 차분하고 성숙하게 대응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아무리 위중한 안보상황이라도 정부와 군,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면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며 "지금의 안보 위기도 국민 모두의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은다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으며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2015.09.08 "거듭된 北만행에 짜증, 응징 못 한 나라에도 실망… 스스로 굳건한 안보관 생겨"
[한국의 2030, 안보의식 왜 강해졌나] "北도발을 더는 묵과해선 안 된다는 인식 커진 결과"
"불러만 주십시오. 언제든지 가겠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이 한목숨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달 22일 육군 공식 페이스북에 20대 청년이 올린 글)
지난달 북한이 비무장지대에 지뢰·포격 도발을 감행한 데 이어 준(準)전시 상태를 선포하며 위협 수위를 한껏 끌어올렸을 때 한국의 SNS와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예비군복과 전투화 인증 사진을 올리며 '참전(參戰)' 의지를 밝힌 젊은이들의 글이 쇄도했다. 스스로 전역을 연기하겠다고 나선 장병도 속출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전쟁 공포' 분위기가 번진 경험을 통해 이번에도 남남갈등을 노린 북한도 놀랐을 상황 반전이다. 북한 도발에 맞선 젊은 층의 응전(應戰) 의지가 체감할 정도로 표출되면서 북의 추가 도발을 억지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5년 사이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이렇게 확연히 달라진 것일까. 전문가들은 "20·30대 젊은 세대 가운데 '북한의 도발을 더는 묵과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한 영향"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안보 신(新)세대'의 출현이다.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선임연구위원은 "연평도 포격이나 천안함 폭침 같은 북한의 도발을 학창시절 겪은 20·30대들은 북한에 대한 분노와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안보 의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고, 인터넷을 통해 국내외 정세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학습했다"며 "이들은 그동안 북 도발을 용납해온 일부 기성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분석했다.
이번 북한 도발 사태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응은 분노와 짜증에 가깝다. 신민우(27) 홍익대 학생회장은 "천안함 폭침이 터졌을 때 군 복무 중이었는데, 당시 우리 자주권과 국민의 안전을 위해 북의 무력도발에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주변 친구들도 대다수가 지뢰 도발에 다리를 잃은 두 하사의 희생에 존경을 표하면서 북한에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근(26) 대한민국청년대학생연합 대표는 "과거 각종 음모론에 휘둘리던 청년들이 수차례 북한의 도발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며 "거듭된 만행에도 단호히 북한을 응징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에 실망감과 짜증을 느낀 청년들은 스스로 굳건한 안보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터넷 등 다양한 루트로 정보를 습득하는 2030세대들은 맹목적인 적대가 아닌 합리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세대"라며 "3대 세습도 용납하기 어려운데 각종 폭압 통치에다 한국을 상대로 전쟁놀이까지 벌이는 김정은에게 상당수 젊은이가 환멸에 가까운 감정 상태를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이태동 기자 |임경업 기자
2015.09.08 지뢰도발 때 北에 대한 분노… 천안함 때보다 훨씬 강했다
지난달 경기도 파주 인근의 DMZ(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이 지뢰 도발을 했을 때 우리 국민은 2010년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당시보다 훨씬 강하게 분노를 표출한 것으로 빅데이터 분석 결과 확인됐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온라인에 등장해 국론을 분열시키던 '자작극' 같은 괴담(怪談)은 이번엔 국민의 성숙한 안보 의식에 밀려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이는 본지가 SK플래닛·메트릭스 등 빅데이터 분석 업체와 함께 트위터·블로그·인터넷카페·게시판 등 사이버 공간에 올라온 주요 대북 이슈와 관련한 글 107만9995건을 전수(全數)조사한 결과다. 분석 시기는 DMZ 지뢰 도발 직후 3주일간이다. 이를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등 최근 발생한 북한의 다른 도발 당시 3주간 올라온 글과 비교했다.
이번 DMZ 지뢰 도발 직후 3주간 인터넷 블로그·카페 등에는 '깡패와 북한을 다루는 방법은 동일하다' '김정은은 도대체 제정신이냐' 등 북한을 향한 분노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글이 1만1602건 올라왔다. 트위터 글을 제외한 숫자다. 앞서 천안함 폭침 당시 20일치 글 4519건과 비교하면 갑절 이상 많았다. 북한이 100발이 넘는 포탄을 쏟아부은 연평도 포격 사건 때의 1만837건보다도 많았다. 지뢰 도발 때는 참전, 전역 연기 등 안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글도 2만926건이나 올라왔다.
트위터에는 북한을 비판하는 게시글이 '자작극' 같은 음모론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지뢰 도발에 높아진 대북 분노
여론조사 및 빅데이터 분석 업체인 메트릭스는 8월 10일부터 20일간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 블로그와 인터넷 카페, 게시판 등에 올라온 북한 관련 웹 문서 44만9013건을 분석했다.
DMZ 지뢰 도발 이후 '전쟁'을 언급한 글은 21만3178건에 달했다. 천안함 폭침 때의 9만5528건보다 갑절 이상 많았다. 연평도 포격 때의 13만9605건에 비해서도 증가했다. 북한이 DMZ 지뢰 도발에 이어 준(準)전시 상태를 선포하자 국민 사이에 전쟁 긴장감이 컸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터넷 민심(民心)은 전쟁의 위협과 긴장감에 굴복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전쟁'의 연관어는 '사재기'가 아니라, '참전'과 '전역 연기'였다. 블로거들은 '전역 연기 병사, 장한 대한민국 국민들' '병사들 전역 연기, 이런 게 바로 진짜 사나이!'와 같은 글을 매일 수백~수천 건씩 써서 올렸다. 천안함 폭침(7851건)과 연평도 포격(8375건) 때와 비교하면 2~3배 급증한 것이다.
이재열 서울대 교수(사회학과)는 "운동권 출신 40대가 북한을 이상(理想)적인 태도로 바라봤다면 20대는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며 "자신의 현실적 문제로 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북한 문제를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대하는 '안보 신(新)세대'가 사이버 공간에서 이런 글을 많이 올렸다는 것이다.
◇음모론(陰謀論) 안 통했다
SK플래닛은 DMZ 지뢰 도발 탓에 대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8월 트위터에서 안보 관련 내용이 포함된 글 63만982건을 추출해 분석했다. 매일 평균 2만건씩 '북한'을 언급한 글이 올라오는 가운데 여기에 포함된 주요 단어는 '도발' '지뢰' '포격' 등 북한의 공격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가 1~3위를 차지했다.
이번에도 우리 정부가 사건을 처음 발표하자 트위터에는 '지뢰 도발이 북의 소행이 아니다'는 음모론과 각종 괴담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목함 지뢰가 남측 거래요. 자작극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과 같은 음모론이 매일 100~500건씩 올라왔다. 특히 북한이 지뢰 매설을 전면 부인한 이틀 뒤인 8월 16일엔 '자작극' 또는 '아군 지뢰' 등 음모론 관련 글이 2641건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더 이상 확산은 없었다. 트위터에선 '도발'이란 단어를 키워드로 하는 글이 3주 동안 15만6090건에 달했다. '자작극' 관련 글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이번에도 북에 끌려다니면 대한민국은 설 자리가 없다" "도발이 터지면 온 국민이 전쟁터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두려워할 이유 없다" 등 북한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남북 고위급 접촉이 타결된 직후엔 그동안 제기됐던 '자작극'을 향한 비판이 쏟아졌다. "천안함도 자작극, 세월호도 자작극, 메르스도 자작극, 목함 지뢰도 자작극… 좌파의 뇌에서는 북한 김정은에게 조금이라도 비난이 가해지려 하면 거부감이 드나 보다" "병사 두 명이 다리를 잃은 비극적 상황에서도 자작극이라며 국민을 선동하는 무리를 공권력은 왜 나 몰라라 방관하는가" 등의 글이 음모론을 차단했다.
조일상 메트릭스 사장은 "예전에는 온라인 민심을 주도하는 20·30 세대가 음모론이나 정부 책임론에 감정적으로 휩쓸리는 경향이 있었다"며 "요즘은 예전과 달리 젊은이들이 북한의 도발을 현실적이고 냉정한 시각으로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조선일보 성호철 기자 홍영림 기자
2016.02.09 불쌍한 한반도
▲지난 8일 김일성광장에서 로켓발사 경축 무도회를 즐기는 평양의 학생청년들. [사진 노동신문]
한?미?일 vs 북?중?러.
북한의 이번 광명성호 발사는 한반도에 ‘신냉전’의 그림자를 드리운 결정판이 됐다. 66년 전의 악몽인 6.25전쟁이야 재현되지 않겠지만 ‘신냉전’의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북한의 호전세력들이 준비했던 제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한?미?일의 호전세력들에게 확실한 ‘빌미’를 제공했다.
냉정한 현실 앞에 평화는 낭만이 돼 버렸다. 2월 말에 예정된 한미합동군사훈련인 키리졸브가 시작되면 한반도에 조성될 긴장은 최고조에 도달할 것이다. 아울러 독수리 훈련까지 포함하면 4월 말까지 한반도는 ‘신냉전’의 유령이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다.
북한은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을 한 뒤 곧 이은 키리졸브 기간 중에 ‘제2의 조선전쟁’을 언급하는 등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속으로 몰아넣었다. 중국이 수차례 경고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북한의 최근 기세라면 이번 훈련 기간에도 과격한 용어들이 오고 갈 가능성이 높다.
남북이 이처럼 으르렁대는 사이 미국은 한반도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THADD)를 밀어 넣을 기세다. 그 동안 말을 자제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미군 시설이나 미국인에게 도달할 어떤 가능성도 막기 위해 미사일 방어능력을 더 높이는 문제를 한국과 처음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이 사드의 한반도 배치가 필요하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국방부도 “한국과의 조속한 협의를 거쳐 사드 배치가 최대한 빨리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피터 쿡 국방부 대변인은 “사드는 방어시스템일 뿐 중국의 우려를 자아내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중국은 결사반대다. 화춘인 외교부 대변인은 “관련 국가가 지역 미사일 방어를 배치하면 한반도 정세를 한층 자극해 지역 평화안정 유지에 불리한 것은 물론 각국이 현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유관 국가에 (사드)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기를 정중하게 촉구한다”고 밝혔다.
60여년 전 미?소가 한반도를 놓고 한바탕 겨루더니 지금은 미?중이 한반도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이때를 이용해 전력(戰力) 보유를 금지한 헌번 9조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자민당이 2012년 내놓은 헌법 개정 초안은 일본이 육해공군이나 여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주전권(주권국이 전쟁할 수 있는 권리)을 부인한다고 규정한 헌법 9조 2항을 수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베 총리가 지난 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당연히 나도 총재로서 자민당과 같은 생각”이라고 답한 것은 사실상의 군대 보유 구상을 국회에서 언급한 것이다.
해방된 직후 한반도가 남북끼리, 남남끼리 이념대결로 치고받고 싸우는 사이 주변 강대국들은 한반도의 긴장을 활용해 세력다툼을 벌였듯이 2016년이 딱 그렇다.
북한 주민들은 광명성호 발사를 자축한 대규모 불꽃놀이와 군중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경축분위기를 이어갔다. 통제된 사회에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북한 주민들이 이런 세상의 움직임을 모르고 춤을 추지만 유엔의 추가 대북 제재안이 통과되면 고통은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 된다.
한반도에 사드가 배치되면 중국이 어떻게 나올 지 걱정된다. 중국은 내심 한국과의 교역에서 적자를 내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중국은 지난해 들어 10월까지 4589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한국과의 교역에서 587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냈다. 같은 기간 대 일본 무역 적자(59억 달러)의 10배 수준이다.
따라서 일부 중국 사람들은 “한국이 중국에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미국 무기를 산다”고 불만이다. 한국은 2014년 78억 달러의 무기 구매계약을 체결해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이 됐으며 그 가운데 90%인 70억 달러 가량은 미국에서 수입했다. 중국 사람들은 이 점을 고깝게 보고 있다. 사드는 주한미군이 배치하지만 한국 정부가 그 비용의 일정 부분을 부담할 텐데 그 돈이 중국에서 벌어 간 돈이라는 설명이다. 때문에 중국이 여차하면 교역량을 조절하는 상황이 올 수 도 있다.
한국은 중국과 무역을 통해 먹고사는 나라다. 가뜩이나 제품 경쟁력 면에서 중국에 밀리거나 거의 비슷해져 고전하는 마당에 외교안보 문제로 보복 조치까지 취해지면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한국 경제가 중환자실로 실려 갈 수 있다.
강대국의 거대한 파도에 한반도가 불쌍해지고 있다. 아직은 한국도 북한도 서로의 ‘큰 형님’을 믿고 티격태격 하지만 거대한 파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어떤 고통을 감내 할 지 모른다. 살인의 고수들은 상대방을 공격할 때 미리 말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경계를 하기 때문이다. 하수들이 괜히 폼만 잡고 떠든다. 고수들은 상대방이 당하는 지 도 모르게 공격한다. 상대방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2016.02.09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김정은은 무능한 세습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민들 1년 먹여살릴수 있는 돈 약 1조원(한화)을 광명성 장거리 미사일 만들어 날려버리는데 낭비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더 버티는지 두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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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 vis pacem para bellum.
대한민국도 핵무장 할 때가 되었다는 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국제사회가 북한 정권에 아무리 핵포기를 종용해왔지만 북한 정권은 핵이 그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들은 소량이긴 하지만 핵무기를 가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핵무기를 미국 본토까지 날려보낼 대륙간 장거리 미사일 개발도 상당히 진척된 것 같다. 그러자 한국정부는 때애드(THAAD) 즉 날아오는 북한 미사일을 공중에서 파괴시키는 무기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때애드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다. 때애드가 백발백중 적중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어적 자세에서 공격적 자세로 전환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즉, 한국도 핵무기를 만들자는 얘기다.
라틴어 속담에 Si vis pacem para bellum.(씨 비스 파셈 파라 벨룸)이라는 것이 있다. 영어로는 If you want peace, prepare for war.가 되고 우리말로는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가 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얘기다.
A: What do you think of North Korea's continuous testing of nuclear bombs and long-range ballistic missiles? Should South Korea react in kind?
B: Yes, it's about time South Korea should make nuclear weapons as well. The South Korean military must show Kim Jong Un that they're not paper tigers “Si vis pacem para bellum,”or if you want peace, prepare for war.
A: 북한이 핵폭탄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십니까? 한국도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까요?
B: 네. 남한도 핵무기를 만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군이 종이호랑이가 아니라는 것을 김정은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씨 비스 파셈 파라 벨룸”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해야합니다.
워싱턴에서
조화유
2016.02.10 '恐怖의 균형' 원칙으로 맞서라
북한이 4차 핵실험에 이어 대륙간탄도탄(ICBM) 발사를 감행함으로써 막가파식 도발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김정은 정권의 핵무장 기도는 '하늘이 무너져도' 요지부동이고, 미국 본토를 위협할 정도의 장거리 미사일을 '인공위성'으로 위장하며 기술 업데이트를 계속해나가고 있다. 거칠 것 없는 핵·미사일 도발에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한 건곤일척의 대응이 불가피해졌다.
우리 정부는 기민하게 대처했다. 관심을 모았던 주한 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 논의를 공식화하고, 대북 확성기 방송을 확대하며, 개성공단 체류 인원을 축소했다. 특히 UN 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 규탄 만장일치 성명을 도출해 징벌적인 국제 압박을 유도한 것은 북핵 당사자로서 취해야 할 최소한의 조치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대한민국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임과 '혹독한 대가'를 통해 북한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하겠다는 강력한 경고도 보냈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에는 '소귀에 경 읽기'로 그치고 있다.
미국은 원유 공급을 통제할 수 있도록 고강도 대북 제재를 중국에 요구하는 한편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BDA) 성과를 경험 삼아 자금 루트를 원천 봉쇄하는 제3자 제재(secondary boycott)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한반도에 첨단 전략 자산을 전개해 강력한 대북 억지력도 제공하고 있다. 반면 북의 핵·미사일에 "견결(堅決)히 반대한다"는 중국은 구체적인 제재 조치보다 원론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한 비핵화'를 되풀이해 한국을 실망시켰다. 지난 5일 한·중 정상 간 통화에서도 시진핑 주석의 언급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북한 붕괴로 한반도가 미국 영향권하에 들어갈 바엔 차라리 핵무장한 북한의 존치가 낫겠다는 전략적 계산이 숨어 있다. 가치와 안보가 핵심인 한·미 '동맹(alliance)'과 안보 공감대 없이 경제 협력이 중심인 한·중 '전략적 동반자(partnership)' 간 차별화가 불가피한 배경이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중국의 부당한 압박에 안보 주권의 원칙과 국익 차원에서 단호히 대처해야 하는 당위(當爲)가 더욱 분명해졌다.
중국의 소극적 자세로 북한의 '마이 웨이'를 바꿀 만큼의 국제 압박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국제 공조 노력과 병행하여 독자적 비상 대책도 함께 모색해 나가야 한다. 우리 국방력과 한·미 동맹의 결합이 안보의 원동력임을 감안하여 현재의 한·미 연합 방위 체제를 견지하되 북핵 당사자로서 '자위(自衛)'를 향한 새로운 인식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본래 핵에는 핵에 의한 대칭적 맞대응으로만 억지가 가능한데, '자체 핵무장'의 벽이 아직 높다면 우선 제대로 된 방패만이라도 확보해야 한다.
이번 사드 배치 논의를 계기로 훨씬 강력한 미사일 방어(MD) 체계와 그 이상의 첨단 국방력 건설에 나서야 한다. 북핵에 진작 대응해온 일본의 미사일 방어 능력은 한국보다 1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 열강이 각축하는 동북아 국제 환경에서 국방력의 상대적 약화는 우려할 일이다.
1960~70년대 압도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던 북한 재래식 군사력에 직면해 박정희 대통령은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국방과 경제 투 트랙 전략으로 난관을 헤쳐 나왔다. 사즉생(死則生)과 임전무퇴의 자세로 심기일전할 때 사상 초유의 북의 핵·미사일 비상사태를 돌파할 수 있다. 북핵을 눈앞에 두고 '비핵화' 주문만 반복해선 김정은 정권의 군사 모험주의가 일으키는 동북아 안보(安保) 파란을 통제할 수 없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은 요원하다.
25년 전의 '비핵화 공동 선언'이 사실상 사문화된 상황에서 유사시에 대비해 자체 핵(核) 잠재력을 키우는 한편 모든 북핵 대응 시나리오를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북핵에 도움을 주는 현금과 전략 물자의 대북 유입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남북 간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구축하는 조치가 시급하다.
조선일보 홍관희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2016.02.10 김정은만 웃고 있다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이 북한의 권력자가 될 것이라고 가장 먼저 예견한 사람 중 하나다. 그는 1980~90년대 북한에서 김씨 왕조의 전속 요리사로 13년을 살았다. 그는 2003년부터 '다음 권력자는 김정은'이라는 주장을 폈다.
후지모토씨가 김정은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1월이었다. 김정은과 그의 형 정철을 '왕자'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 정철은 '큰 대장', 정은은 '작은 대장'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김정은이 손위뻘 친척에게 '내가 아직도 유치원생인 줄 아느냐'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본 뒤 후지모토씨는 정은을 꼬박꼬박 '대장 동지'라고 불렀다. 김정은이 열 살도 되기 전의 일이다.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서 후지모토씨는 '난폭한 김정은'이 외국을 떠도는 배다른 첫째 형과 유약한 둘째를 제치고 김씨 왕조의 세 번째 권력자가 될 것이라고 믿게 됐다.
김정은은 농구광(狂)이다. 10대 시절 종종 형 정철과 편을 갈라 농구 시합을 했다. 북한의 남녀 농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두 형제가 직접 뛰는 이 경기에 동원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경기가 끝나면 김정은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일일이 잘잘못을 따졌다. 14세도 안 된 김정은이 농구 선수들을 직접 '지도(指導)'했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거의 매일같이 예순 살을 훌쩍 넘긴 북한 노동당과 군의 노(老) 간부들이 30대 초반인 김정은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받아 적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북한 권력 서열 2위다. 그런 황병서도 김정은보다 한발 앞서 걷다가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황이 의자에 앉아 있는 김정은에게 무릎을 꿇듯 자세를 낮추고 보고하는 장면도 등장했다. 김정은이 자신의 집권을 도운 후견인이자 친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할 때 내걸었던 죄목(罪目) 중 하나가 김정은에 대해 '왼새끼를 꼬며(딴 마음을 먹고)', 김정은을 추대하는 자리에서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는 것이다. 우리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김정은이 참석한 행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는 이유 등으로 처형됐다.
이런 김정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제아무리 권력 2인자 또는 인민무력부장이라 해도 정신 바짝 차리고 굽실거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현재 북한 안에는 김정은의 폭주(暴走)를 막을 인물이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국제사회도 김정은의 광기(狂氣)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뿐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대북(對北)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중국까지 '우리도 어쩔 수 없다'며 두 손을 들었다. 미국·일본의 경우 대북 제재 강화를 외치고 있지만 김정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한국 정부가 대북 경고라고 내놓은 '상응하는 대가' '혹독한 대가' 운운하는 외교적 수사(修辭)들은 거꾸로 조롱거리가 됐다.
김정은은 집권 5년 만에 두 번의 핵실험과 세 번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실시했다. 한국과 미·일의 거듭된 경고와 압박, 유엔 제재, 중국의 설득 그 어느 것도 김정은을 막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도 깜짝 놀랄 도발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김정일은 집권 직후인 1990년대 중반 대(大)홍수와 뒤이은 식량난으로 정권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었다. 북이 비핵화 시늉이라도 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김씨 왕조의 창업자인 김일성도 6·25 도발에 따른 엄청난 대가를 경험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북한 내에 지하 시설을 만들고 동선(動線)을 극비에 부쳤던 것은 그만큼 안팎의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정은에게선 이런 공포와 번뇌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김정은이 올 들어 감행한 핵·미사일 도발은 국제사회가 그에게 두려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상황은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도발한 것은 북한인데, 엉뚱하게도 한·중 관계가 틀어지고 미·중이 충돌했다. 어느덧 각국이 서로 골치 아픈 '북한 리스크'를 다른 나라에 떠넘길 궁리만 하는 모양이 됐다. 김정은이 원하는 대로 한·미·중이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는 해묵은 난제(難題)다. 얽히고설킨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이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妙策)은 없다. 결국 '북한 체제의 변화'라는 큰 틀에서 긴 호흡으로 풀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 외교는 이 원칙을 잊은 채 좌충우돌하고 있다. 한국의 대북 정책이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김정은만 웃고 있다. 이래서는 대북 압박·제재와 대화,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이제라도 모든 대북 역량을 김정은을 향해 정조준하고, 이 과정에서 김정은이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국제 논의 역시 대북 제재 몇 가지를 추가할 것인가 하는 차원을 넘어서 '김정은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
조선일보 박두식 부국장 겸 사회부장
2016-02-11 김정은, 이스라엘 식으로 다루자
1차 북핵 실험 6개월 뒤인 2007년 4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국장이 미국 백악관을 비밀리에 찾는다. 그는 딕 체니 부통령에게 시리아 사막에 건설 중인 원자로 사진을 보여주며 “영변 핵시설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어 북핵 시설 핵심 관계자가 시리아원자력에너지위원회(SAEC) 책임자와 나란히 찍은 사진도 내놓았다.
이스라엘도 북핵 저지
마침 미 정보 당국자로부터 북한과 시리아의 핵 협력이 199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2001년엔 북한 고위 당국자가 시리아를 방문했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던 체니 전 부통령은 “모사드가 제시한 정보를 통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록(‘나의 시대’·2011년)에서 전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국을 향해 “핵시설을 폭격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시리아의 보복으로 이라크 주둔 미군 희생을 우려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유엔을 통한 외교적 노력’을 권한다. 이에 대해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는 “어떻게 이스라엘 운명을 유엔 손에 맡기는가. 미국이 못 한다면 우리가 하겠다”고 받아친 뒤 마침내 2007년 9월 6일 전투기를 출격시켜 시리아 핵시설을 폭격한다.
모사드가 북한 핵개발과 중동 테러조직 확산 저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징후는 또 있다. 2004년 세계를 놀라게 한 평안북도 용천역 폭발사고와 관련해 최근 많은 해외 정보당국과 북한 전문 미디어들이 모사드 개입설을 유력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2013년 미 언론들은 ‘열차에는 12명의 시리아 핵과학자가 북한에 전해줄 핵물질을 갖고 타고 있었는데 모사드가 이를 알고 저지하기 위해 북한에 직접 요원을 침투시킨 것으로 의심된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북핵을 남의 일로 보지 않는다. 이스라엘 최대 영자지 예루살렘포스트는 북이 4차 핵실험을 한 지난달 6일 “북한이 시리아와 이란에 지속적으로 핵 기술을 전해줬다는 점에서 북핵 위협은 동아시아 국가들로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전 정보부 장관의 말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우리와 이스라엘은 공통점이 많다. 정부 수립 연도(1948년)도 같고 건국 직후 전쟁으로 나라가 망할 뻔한 위기를 겪은 것도 똑같다. 이스라엘은 1948년 인접국인 아랍 6개국 연합군의 침략을 받고 국민의 1%에 가까운 6000여 명이 숨지는 결사항전 끝에 전세를 역전시켜 이듬해 유엔의 중재로 휴전한다. 인구는 남한의 7분의 1, 영토는 5분의 1, 국내총생산(GDP)은 5분의 1이지만 국방비는 우리의 절반을 쓰면서 지난 70여 년간 중동전쟁과 헤즈볼라 등의 테러 공격에 맞선 전쟁에서 대부분 승리했다. 건국 이후 20여 년 동안 연평균 10% 성장률을 달성하며 국력을 키웠고 200여 기의 핵무기를 보유해 아랍 전체를 상대로 안보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스라엘 안보는 ①철저한 자주국방 ②막강한 군사력으로 힘의 우위 유지 ③도발에는 가차 없는 응징과 보복 ④필요할 경우 선제공격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모사드는 국가안보의 첨병으로 세계 4대 정보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안보의존 벗어나야 한다
중동의 먼 나라 이스라엘까지도 북핵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는데 우리는 계속 시간만 벌어주었다. 얼마 전 만난 전직 장성이 “한미동맹은 안보에 필수 불가결하지만 국방 의존성을 키워온 점도 있었다”고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북핵 실전배치는 수년 내에 이루어질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외교안보라인을 문책 퇴진시키고 근본적 발상의 전환을 통해 안보 전략을 재수립해야 한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2016-02-16 박근혜 대통령 국회 국정연설문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전 10시 국회에서 ‘국정에 관한 연설’을 하며 “저와 정부는 북한 정권을 반드시 변화시켜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도록 만들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인권, 번영의 과실을 북녘 땅의 주민들도 함께 누리도록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북한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근본적 해답을 찾아야 하며 이를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 길을 가는데 지금보다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 여러분께서 지지해주시고 함께 해주신다면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북한의 4차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한 안보위기 등과 관련해 '국정에 관한 국회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 대통령은 또 “개성공단 전면중단은 앞으로 우리가 국제사회와 함께 취해 나갈 제반조치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지금부터 정부는 북한정권이 핵개발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스스로 변화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보다 강력하고 실효적인 조치들을 취해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 “아무리 강력하고 실효적인 제재 조치가 취해진다 해도 그 효과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잡고 결연한 자세로 제재를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국민들의 단합된 힘이 뒷받침 될 때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그 과정에서 북한이 각종 도발로 혼란을 야기하고 ‘남남(南南) 갈등’을 조장하고 우리의 국론을 분열시키기 위한 선전선동을 강화할 수 있다”며 “그럴수록 우리 국민들의 단합과 국회의 단일한 힘이 북한의 의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그러면서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 일부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 도발이라는 원인보다는 ‘북풍 의혹’ 같은 각종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내부에서 그런 것에 흔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북한이 바라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지금 우리 모두가 북한의 무모한 도발을 강력 규탄하고 북한의 무모한 정권이 핵을 포기하도록 해도 모자라는 판에 우리 내부로 칼끝을 돌리고 내부를 분열시키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며 “우리 내부에서 갈등과 분열이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의 존립도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 “안보위기 앞에서 여와 야, 보수와 진보가 따로 일 수 없다”면서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위는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북한의 도발은 예상하기 힘들며 어떤 극단적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철저한 대비를 해 나가야 한다”며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국민 모두의 결연한 의지와 단합, 그리고 우리 군(軍)의 확고한 애국심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국민을 향해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한민국과 국민 여러분의 안위를 지켜낼 것”이라며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정부의 단호한 의지와 대응을 믿고, 함께 힘을 모아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린다" 고 했다.
박 대통령은 또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라는 위협 앞에서도 정부를 신뢰하고 의연하게 대처해주신데 대해 감사드리며 정부와 저는 더욱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한편 국회에 대해 북한인권법과 테러방지법을 하루 속히 통과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함께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노동개혁 4법의 국회 통과도 촉구했다.
박근혜 대통령 국회 국정연설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여러분,
저는 오늘,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따른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 여러분의 불안과 위기감에 대해 정부의 대처 방안을 설명 드리고 국회의 협력과 동참을 당부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북한은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거듭된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새해 벽두부터 4차 핵실험을 감행하여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 평화에 대한 기대에 정면도전을 했습니다.
특히 국제사회의 규탄과 제재가 논의되는 와중에 또 다시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고, 추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까지 공언하고 있는 것은 국제 사회가 바라는 평화를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극단적인 도발행위입니다.
만약 이대로 변화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면,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은 핵미사일을 실전 배치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북한은 수없이 도발을 계속해 왔습니다.
최근만 하더라도,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46명의 소중한 우리 장병의 목숨을 빼앗았고, 연평도 포격 도발로 우리 영토에 직접적인 무력 공격을 가했으며, 작년 8월에도 DMZ 지뢰와 포격 도발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북한을 변화시켜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고, 상생의 남북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저는 국정의 무게중심을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기반구축에 두고 더 이상 한반도에 긴장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자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정부 출범 초기부터 북한의 핵은 용납하지 않고 도발에는 더욱 단호하게 대응하되, 한편으론 남북간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정책기조를 표방했습니다.
2014년 3월에는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하여 민생, 문화, 환경의 3대 통로를 함께 열어갈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작년 8월에는 남북간 긴장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도 고위 당국간 회담을 열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UNICEF, WHO 등 국제기구에 382억원과 민간단체 사업에 32억원을 지원해서 북한의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보건의료 사업을 펼쳐 왔습니다.
작년 10월에는 북한 요청에 따라 우리 전문가들이 금강산을 방문하여 산림병충해 방제사업을 실시하였고,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개성만월대 공동조사‧발굴사업을 진행해 왔으며, 그 밖에도 민간차원의 다양한 교류협력도 적극 지원해 왔습니다.
작년 8월에는 경원선 우리측 구간에 대한 복원 공사를 착수했고, 북한 산업발전을 위한 남북 경제협력구상도 착실하게 검토해왔습니다.
돌아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부 차원의 대북지원만도 총 22억 불이 넘고 민간 차원의 지원까지 더하면 총 30억불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정부의 노력과 지원에 대해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대답해 왔고, 이제 수소폭탄 실험까지 공언하며 세계를 경악시키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기존의 방식과 선의로는 북한 정권의 핵개발 의지를 결코 꺾을 수 없고, 북한의 핵 능력만 고도화시켜서 결국 한반도에 파국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북한의 기만과 위협에 끌려 다닐 수는 없으며, 과거처럼 북한의 도발에 굴복하여 퍼주기식 지원을 하는 일도 더 이상 해서는 안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북한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근본적 해답을 찾아야 하며, 이를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 국제사회는 한 목소리로 북한의 도발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4차 핵실험 이후 이미 100개가 넘는 국가들이 북한 도발을 규탄했고, 최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이후 비판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면서 유엔 안보리에서는 역대 가장 강력하고 실효적인 대북제재 결의안을 도출해가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 의회는 가장 강력한 대북 제재 별도 법안을 전례 없이 신속하게 통과시켰고, 일본과 EU 차원에서도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가 취해지고 있으며, 일부 국가들은 북한과의 외교관계까지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김정은 정권의 극단적 행동을 묵과할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국제사회가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북한 핵과 미사일의 1차적인 피해자는 바로 우리이며, 이 문제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 역시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그 동안 북한은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수시로 대남 핵 공격을 언급하면서 우리 측을 위협해 왔습니다.
1994년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우리 측을 향해 ‘핵불소나기’, ‘핵참화’, ‘핵공격’, ‘핵전쟁’, ‘핵보복타격’ 등 핵무기 사용 위협을 지속적으로 자행해 왔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오래 북한의 위협 속에 살아오면서 우리 내부에서 안보불감증이 생긴 측면이 있고, 통일을 이뤄야 할 같은 민족이기에 북한 핵이 바로 우리를 겨냥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더 이상 설마 하는 안이한 생각과 국제사회에만 제재를 의존하는 무력감을 버리고, 우리가 선도하여 국제사회의 강력한 공조를 이끌고,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번에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막기 위해서는 북한으로의 외화유입을 차단해야만 한다는 엄중한 상황 인식에 따른 것입니다.
잘 아시듯이, 개성공단을 통해 작년에만 1,320억 원이 들어가는 등 지금까지 총 6,160억 원의 현금이 달러로 지급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급한 달러 대부분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쓰이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노동당 지도부에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북한 정권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사실상 지원하게 되는 이런 상황을 그대로 지속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대북 제재에 동참하고 있는 것도 국제사회의 도움이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김정은의 체제유지에만 들어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제사회가 북한으로의 현금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제재수단을 강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인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만들 모든 수단을 취해 나가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번에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 중단 결정을 하면서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했던 것은 우리 기업인과 근로자들의 무사귀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북한의 일방적인 개성공단 가동 중단 당시, 우리 국민 7명이 한 달 가량 사실상 볼모로 잡혀 있었고, 이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피 말리는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우리 국민들을 최단기간 내에 안전하게 귀환시키기 위해 이번 결정 과정에서 사전에 알릴 수 없었고, 긴급조치가 불가피했습니다.
정부는 우리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물자와 설비 반출 계획을 마련하고 북한에 협력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예상대로 강압적으로 30여분의 시간만 주면서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자산을 동결했습니다. 우리 기업들의 피땀 흘린 노력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입주기업들이 공장 시설과 많은 원부자재와 재고를 남겨두고 나오게 된 것을 저 역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개성에 있는 우리 국민들의 안위를 뜬눈으로 걱정해야만 하고, 우리 기업들의 노력들이 북한의 정권유지를 위해 희생되는 상황을 더는 끌고 갈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부는 입주기업들의 투자를 보전하고, 빠른 시일 내에 경영을 정상화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갈 것입니다.
남북경협기금의 보험을 활용하여 개성공단에 투자한 금액의 90%까지 신속하게 지급할 것입니다.
대체 부지와 같은 공장입지를 지원하고, 필요한 자금과 인력확보 등에 대해서도 경제계와 함께 지원할 것입니다.
또한 생산 차질 등으로 인한 손실이 발생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별도의 대책을 마련해 나갈 것입니다.
현재 정부는 합동대책반을 가동해서 입주기업 한 분 한 분을 찾아 다니면서 1:1 지원을 펼치고 있으며, 신속하고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개성공단 전면 중단은 앞으로 우리가 국제사회와 함께 취해 나갈 제반 조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부터 정부는 북한 정권이 핵개발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스스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보다 강력하고 실효적인 조치들을 취해나갈 것입니다.
이 과정에 우리는 동맹국인 미국과의 공조는 물론 한·미·일 3국간 협력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연대도 계속 중시해 나갈 것입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5자간 확고한 공감대가 있는 만큼, 이들 국가들도 한반도가 북한의 핵 도발로 긴장과 위기에 빠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그 공감대가 실천되어 갈 수 있도록 외교력을 집중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하고 실효적인 제재조치가 취해진다 해도 그 효과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잡고 결연한 자세로 제재를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국민들의 단합된 힘이 뒷받침될 때 나타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이 각종 도발로 혼란을 야기하고, ‘남남갈등’을 조장하고 우리의 국론을 분열시키기 위한 선전·선동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국민들의 단합과 국회의 단일 된 힘이 북한의 의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 일부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 도발이라는 원인보다는 ‘북풍의혹’같은 각종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부에서 그런 것에 흔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북한이 바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북한의 무모한 도발을 강력 규탄하고 북한의 무모한 정권이 핵을 포기하도록 해도 모자라는 판에 우리 내부로 칼끝을 돌리고, 내부를 분열시키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댐의 수위가 높아지면 작은 균열에도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북한의 도발로 긴장의 수위가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는데 우리 내부에서 갈등과 분열이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의 존립도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안보위기 앞에서 여와 야, 보수와 진보가 따로 일 수 없습니다.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위는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정치권에 권한을 위임한 것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고 보호해 달라고 한 것이지 그 위험까지 선택할 수 있도록 위임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장성택과 이영호, 현영철을 비롯해 북한 고위 간부들에 대한 잇따른 무자비한 숙청이 보여주듯이, 지금 북한 정권은 극한의 공포정치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도발은 예상하기 힘들며, 어떤 극단적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에 철저한 대비를 해 나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국민 모두의 결연한 의지와 단합, 그리고 우리 군의 확고한 애국심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한민국과 국민 여러분의 안위를 지켜낼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정부의 단호한 의지와 대응을 믿고, 함께 힘을 모아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앞으로 정부는 북한의 불가측성과 즉흥성으로 야기될 수 있는 모든 도발 상황에 만반의 대비를 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 정부는 확고한 군 대비태세 확립과 함께 사이버 공격, 다중시설 테러 등의 비군사적 도발에도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대북 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미 연합방위력을 증강시키고, 한미동맹의 미사일 방어태세 향상을 위한 협의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10일 발표한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 협의 개시도 이러한 조치의 일환입니다.
국회의장님, 국회의원 여러분,
북한이 언제 어떻게 무모한 도발을 감행할지 모르고 테러 등 다양한 형태의 위험에 국민들의 안전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그 동안 제가 여러 차례 간절하게 부탁 드린 테러방지법과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권유린을 막기 위한 북한인권법을 하루속히 통과시켜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국민의 선택 받으신 여러 의원님들께서 국민의 소리를 꼭 들어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여러분,
여러분들이 국민의 선택을 받고 처음 이 자리에서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5년 만에 찾아온 살을 에는 강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향 가는 바쁜 걸음도 멈춰선 채, ‘민생 구하기 입법촉구 서명운동’에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을 하루빨리 이겨내기 위해 하나 된 힘을 보이자는 국민의 눈물이자, 절규입니다.
의원 여러분께서는 지난 설 명절에 지역 곳곳을 돌며 우리 경제에 대해 많이 걱정하시는 민심을 생생히 듣고 오셨을 것입니다.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각 지역을 발전시키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말대로 경제활성화와 민생법안을 지체 없이 통과시켜 주실 것을 거듭 부탁 드립니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제출된 지 벌써 3년 반이 넘었습니다. 서비스산업 육성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우리 경제의 재도약과 청년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저성장이 지속되는 환경 속에서 과거처럼 제조업과 수출에만 의존해서는 더 이상 우리 경제의 성장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서비스산업은 일자리의 보고(寶庫)입니다. 고용창출 효과가 제조업의 2배나 되고, 특히 관광, 의료, 금융, 교육, 문화 등 우리 청년들이 선호하는 양질의 일자리를 최대 69만개나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13~14년 OECD 자료에 따르면, 고용률 70% 이상을 달성한 선진국들 중에 서비스 산업이 활성화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 서비스 산업을 육성해야만 고용률 70%를 달성할 수 있고,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부에서 보건·의료 공공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억측이고 기우에 불과합니다. 정부가 제출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어디에도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훼손할 수 있는 조항은 없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인력과 인프라를 활용해서 의료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고급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 어느 순간 ‘의료영리화’로 둔갑되어 3년 반 동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을 국민들은 납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에게 새로운 일자리의 희망을 주고, 사회 안전망을 촘촘하게 만들어 근로자를 보호하며, 상생의 고용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도 하루가 시급합니다.
노동개혁은 일자리 개혁입니다. 하루 속히 노동개혁 4법을 통과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서민의 아픔을 달래고, 경제 활력의 불쏘시개가 될 법안들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거두고 국민의 입장에서 통과시켜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라는 위협 앞에서도 정부를 신뢰하고 의연하게 대처해주신데 대해 감사 드리며 정부와 저는 더욱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와 정부는 북한 정권을 반드시 변화시켜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도록 만들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인권, 번영의 과실을 북녘 땅의 주민들도 함께 누리도록 해 나갈 것입니다. 잘못된 통치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북한주민들의 삶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데 지금보다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 여러분께서 지지해주시고 함께 해주신다면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만들고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 주실 것을 당부 드리며 국회의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동참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손덕호 기자
2016.02.16 개성공단 사태로 본 대통령 리더십
死即生 결기를 보여야 무시당하지 않는다
▲ 2016년 박근혜의 개성공단 폐쇄
지난 2월 11일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개성공단 차량이 출경하고 있다. photo 연합
지난 2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정부는 개성공단을 사실상 폐쇄했다. 짧게 보면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한 조치다. 하지만 길게는 대한민국의 정신사(精神史)에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다. 인간이나 국가나 사즉생(死即生)의 결기가 없으면 끌려 다닌다. 주변 세력에 무시당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보통국가는 더욱 그러하다.
한 국가의 자존(自尊)은 위기 대처에서 드러난다. 남한에는 북한이라는 위협이 결정적 시험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남한은 무시당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에 한국은 용기 없는 나라로 비쳐진 것이다. 지도자가 자신의 노벨 평화상을 위해 협박세력에 4억5000만달러를 쥐여주고, 그런 부끄러운 거래판에서 실세들이 떡고물을 챙기고, 정보기관장이 적국의 수장에게 굽신거리고, 대통령이 굴욕적으로 영토선을 양보하는 그런 나라를 어느 강대국이 두려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중국과 일본은 한국을 눌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 조선은 조공(朝貢)을 바쳤고, 일본에 조선은 식민지였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됐다지만 안보의 결기가 없으니 한국은 이들의 간담(肝膽)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니 중국은 툭하면 한국을 협박한다. 사드를 배치하면 “대가를 치를 것”이란다. 위안부 문제를 끝내자면서도 일본 관리는 할머니들에게 직접 사죄하지 않는다. 한국을 가볍게 보는 것이다.
한민족의 결기가 원래부터 이렇진 않았다. 구한말 국가 경영을 잘못해 나라를 빼앗겼지만 적잖은 지사가 목숨을 걸고 정기(精氣)를 지켰다. 물론 망국의 한쪽에는 부끄러운 풍경이 있었다. 왕족과 고위직 양반 76명이 합방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쪽에는 목숨과 재산을 던지며 항거의 길을 간 이들이 있었다.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 강화도와 진천의 양명학자들, 경상도 안동의 이상룡·김대락 일가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떠났다. 민영환이나 매천 황현처럼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이가 의병에 나서기도 했다.
구성원이 결기를 보일 때 공동체는 자존을 지킨다. 3·1운동 같은 항거와 안중근·윤봉길·이봉창 같은 의거가 있어 조선의 정신은 마지노선을 지켰다. 중국과 일본은 이를 지켜보았다.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상하이에서 폭탄 투척을 결행하자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할 일을 해냈다”고 했다. 장제스는 훗날 헌시(獻詩)를 증정하기도 했다.
▲ 1976년 박정희의 미루나무 절단
1948년 건국 이후 비록 나라는 작았지만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은 결기로 국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6·25전쟁 중 미국과 중국이 서둘러 휴전하려 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민족의 운명을 당신들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의지였다. 이 대통령은 전쟁 중에도 영해주권(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여 독도를 한국 해역에 포함시켰다. 선을 넘는 일본 어선은 나포하라고 대통령은 명령했다.
북한 도발에 박정희 정권은 단호하게 응징했다. 1973년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이 사격을 가했다. 백골부대 3사단장 박정인 장군은 포 사격으로 북한군 초소를 부쉈다. 북한은 더이상 도발하지 않았다. 1976년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도끼만행을 저질렀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군과 함께 미루나무 절단이라는 응징작전을 폈다. 북한이 공격하면 북한땅 연백평야까지 진군한다는 각오였다. 김일성은 처음으로 유엔군 사령관에게 사과했다.
남한이 군사적으로 제대로 응징한 것은 사실상 이것이 마지막이다. 북한이 비수(匕首)를 들이대도 남한의 유약한 대통령들은 보복하지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진보정권뿐만이 아니다. 보수정권도 자긍(自矜)의 수준을 채우지 못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추진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아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싹을 자르지 못해 오늘날 이 죽음의 나무는 남한에 검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북한 잠수함이 천안함을 폭침해도, 섬마을이 북한의 포격에 불타도, 이명박 정권은 응징의 결기를 보이지 못했다. 한 대에 1000억원이나 하는 F-15K를 국민이 43대나 사 주었는데도 미사일 한 방 쏘지 못했다. 사실 군사적 경략(經略)이 있는 지도자라면 북한의 연평도 포격 같은 것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로 삼아야 했다. 반격은 물론이거니와 차제에 천안함에 대한 보복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이 강력하게 반격해도 북한이 확전할 가능성은 낮았다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아니 설사 국지전이 벌어져도 이를 감수하고 북한 정권에 충격을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 전략이 북한의 위협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안보의 충격이 발생하면 북한은 남한을 두려워하게 된다. 남한을 보는 북한의 시각이 달라지면 핵개발을 포함한 북한의 국가 노선이 변할 수 있다.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이라면 당연히 그런 충격 전술을 썼을 것이다.
대통령을 위시해서 당시 청와대 지하벙커에 있던 수뇌부의 상당수가 군대를 가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경략이 나올 리가 없다.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서도 이명박 정권의 담당자들은 폭격을 하지 못한 책임을 군부에 넘기고 있다. 물론 폭격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지 못한 군부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군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다. 대통령과 안보보좌관들이 사태를 지휘하지 못해 놓고는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천안함과 연평도의 실패를 보고 중국과 일본이 한국의 수뇌부를 어떻게 생각할까.
안보에 있어 이명박 정권은 나름대로 할 일을 하기도 했다. 금강산 관광을 닫았고 5·24조치라는 강경한 대북제재를 감행했다. 아덴만 작전으로 해적을 제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런 것은 당연한 필요조건이지 충분한 게 아니다. 남한이 치러야 할 희생이 별로 크지 않은 것이다. 한 국가가 엄청난 희생이나 위험을 무릅쓰면서 안보의 결기를 보일 때만 적국이 두려워하고 주변국이 감동한다.
▲ 1953년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1981년 6월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핵개발 원자로를 폭격했다. 원자로 주변에는 대공 미사일과 요격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렇다고 대충 멀리서 미사일이나 쏘는 식으로 하진 않았다. 폭격기들은 1000여㎞를 날아갔다. 돌아올 때 필요한 기름을 아끼려 저속으로 비행했다. 조종사들은 원자로를 눈으로 보고 폭탄을 원자로 벽에 때렸다. 폭탄들은 명중했고 원자로는 사라졌다. 이스라엘은 2007년엔 시리아 원자로도 부쉈다.
1981년이라면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지기 전이다. 여차하면 5차 중동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해냈다. 조종사도, 국가도 목숨을 거니까 아랍이, 세계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최근 이란은 핵개발을 포기했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견디기도 어려웠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폭격을 두려워한 것이다.
국가가 안보의 결기를 보이려면 야당과 반대세력이 도와야 한다. 이스라엘 정권이 이라크와 시리아의 원자로를 폭격했다고 야당이 “국가를 전쟁의 위험에 빠뜨렸다”고 반대한 일은 없다. 그런데 한국의 야당은 다르다. 천안함을 폭침한 북한 어뢰가 발견됐는데도 2년 반이나 북한의 소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의 야당이 그러하니 중국이 북한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하겠는가.
국가가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국민도 결의를 보여야 한다.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사람들에게 포탄을 퍼붓겠다고 북한이 위협했다. 휴전선 일대에는 20여개의 면(面)이 있다. 만약 면장들이 모여 “우리끼리 순서를 정하자. 순서대로 매주 마을에 와서 전단을 뿌리라고 하자”고 했으면 어떨까. 중국이, 일본이 아니 무엇보다 북한이 남한을 다시 봤을 것이다. 그러면 지뢰 도발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성공단 폐쇄는 북한에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1년에 1억달러의 현금이 막히는 것이다. 북한 정권에 더 곤란한 것은 개성인구 20만의 생계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들은 정권에 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김정은에게 정말로 두려운 것은 다른 것일 게다. 그것은 남한 박근혜 정권의 결기다. 이제 남북한에는 걸친 것이 없다. 북한이 계속 도발하면 남한은 더 큰 결심을 할 수 있다. 어쩌면 한반도에 진정한 변화의 순간이 오고 있는지 모른다.
글 | 김진 중앙일보 정치담당 논설위원
2016.02.16 국민 3분의 2 찬성 핵무장론이 국론(國論) 분열이라고?
15일자 중앙일보는 자위적 핵무장론을 '이성적 토론을 막고 국론(國論)을 분열시킬 우려가 있는' 극단적 주장이라고 비방했다. 중앙이 소개한 여론 조사엔 자위적 핵무장에 찬성하는 국민이 67.7%, 반대가 30.5%이다.
중앙의 안경으로 보면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 윤용남 전 합참의장, 박근 전 유엔 대사, 김대중 조선일보 전 주필, 원유철 집권당 원내대표 등 자위적 핵무장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국론(國論)을 분열시키는 이들이다. 핵무장 찬성 국민의 약 3분의 2도 극단론자이다. 적(敵)이 핵무장을 했으니 우리도 살기 위해서는 核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실존적 요구, 즉 생존 본능이다. 핵은 핵으로만 대응할 수 있다는 검증된 이론이자, 현실과 사실에 기초한 가장 이성적 판단이기도 하다.
5000만의 생명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살자의 손에 맡겨놓을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주장이 비이성적이고 국론 분열이라면 독립운동도 반공애국운동도 국론 분열이었다(일제와 공산당 입장에서는). 중앙일보가 자위적 핵무장론자를 국론분열자로 몰기 위하여 내세운 이른바 전문가는 上記 핵무장론자에 비교하면 경륜이나 논리, 그리고 고민의 깊이 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한다.
중앙일보는 핵무장론과 함께 좌파가 주장하는 '총선용 북풍 기획설'을 同格으로 놓고 양비론(兩非論)을 전개한다. 북풍 기획설은 거짓에 기초한 음모론인데 이를 절대 다수가 지지하는 핵무장론과 동급으로 취급한다는 것 자체가 중앙일보의 비열한 자세를 증명한다. 핵무장론을 희화화(戱畵化)하기 위한 말장난이 아닌가.
중앙일보는 사드 문제를 논하는 사설(社說)에선 주한미군이 자신들의 경비로 한반도에 배치하려는 사드를 마치 한국이 국방예산으로 도입하는 것처럼 거의 조작 수준의 왜곡을 하여 독자들의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였다.
중앙일보의 안보 이념 등 체제 문제 관련 최근 사설, 칼럼, 편집 태도 등을 종합하면 이 신문이 反대한민국 세력에 보험을 들기 위하여 이런 反저널리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게 ‘독자적인 핵무장론’과 ‘총선용 북풍(北風) 기획설’이다. 하지만 이런 극단의 주장들은 이성적인 토론을 막고 국론 분열을 키운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문장은 기사가 아니다. 정당한 주장과 거짓말을 한 덩어리로 묶어 극단이라고 규정한 것부터가 논리학의 초보도 못되는 수준이고 이 신문사의 '우려'를 마치 불특정 다수의 '우려'인 것처럼 둔갑시킨 문장은 제대로 된 언론사에선 부장이 읽고서 쓰레기통으로 던졌어야 할 수준이다. 중앙일보가 일제 시대에 활동하였다면 이렇게 썼을까?
<대표적인 게 무장 독립운동론과 한일합방 무효론이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주장들은 이성적인 토론을 막고 민족 분열을 키운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식민지 노예근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자들은 내 힘으로 나를 지키겠다는 사람을 보면 공연히 질투심이 생긴다. 노예는 용감한 사람을 보면 자신이 더욱 부끄러워지므로 용자(勇者)를 미워하는 것이다.
국민의 3분의 2를 국론분열자로 몬 중앙일보는 역사와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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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finding/'사드 배치'를 '사드 도입'이라고 왜곡: 되풀이되는 중앙일보 사설의 오보(誤報)
이런 중대 사안에 대하여 이렇게 큰 오보(誤報)가 되풀이 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중앙일보가 사드 배치를 반대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하다.
중앙일보 사설 제목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강력하게 대처해야>이다.
이런 대목이 있다.
<물론 덮어놓고 사드를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1개 포대를 들여오는 데 2조원 이상이 드는 만큼 오로지 안보와 국익 차원에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한 해 국방비는 38조여원이다. 이 중 경상비에 해당하는 전력운영비가 27조원을 차지한다. 첨단무기 개발 및 구입 등에 쓸 수 있는 건 11조원 남짓하다는 얘기다. 그런 판에 2조원이 넘는 사드를 들여온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사설 필자는 '사드 배치'를 '사드 도입'이라고 했다. 주한미군이 미국 예산으로 구입한 사드를 주한미군 기지 보호용으로 한국에 배치하겠다는 것이지 한국이 사드를 사들이겠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오해, 한국의 국방 예산으로 사드를 도입한다고 전제하고 <그런 판에 2조원이 넘는 사드를 들여온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고 썼다.
며칠 전에도 같은 실수가 있었다. 이런 중대 사안에 대하여 이렇게 큰 오보(誤報)가 되풀이 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중앙일보가 사드 배치를 반대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하다.
지난 7일 오후 한미 양국의 공동 발표문을 읽어보자.
<대한민국과 미국은 최근 핵실험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가 대한민국과 전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북한의 심각한 핵‧WMD 및 탄도미사일 위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 미국과 대한민국은 증대하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동맹의 미사일 방어태세를 향상시키는 조치로서, 주한미군의 사드(종말단계고고도지역방어체계) 배치 가능성에 대한 공식 협의의 시작을 한미동맹 차원에서 결정하였다. 이러한 한미동맹의 결정은 한미연합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인 커티스 M. 스캐퍼로티 대장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 한미 공식 협의의 목적은 가능한 조속한 시일 내에 사드의 한반도 배치 및 작전수행 가능성을 공동으로 모색하는데 있다.
□ 앞으로 진행될 양국의 논의는 대한민국을 방어한다는 미국의 철통같은 공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한미동맹은 대한민국과 주한미군에 대한 방어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대비태세를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조정하고 있다.
□ 한미동맹이 이러한 방어적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가 주목해 왔듯이, 북한이 전략적 도발을 감행하고 비핵화에 대한 진정하고 신뢰성 있는 협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사드체계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북한에 대해서만 운용될 것이며, 다층 미사일 방어에 기여하여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미동맹의 현존 미사일 방어 능력을 강화시키게 될 것이다.>
발표문의 '주한미군의 사드(종말단계 고고도지역방어체계) 배치'가 중앙일보 사설에선 '한국 국방예산에 의한 사드 도입'으로 둔갑하였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6.02.17 자유민주, 자유지성이 바닥을 치고 일어서는 반격의 계절
결단의 순간-대통령이 나서고 국민이 각성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연설은 1970년대의 남북 적시자회담 이래 우리 역대 정부가 추구해 온 40년~45년간의 대북 평화공존, 교류협력 노력이 결과적으론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직시한 것이다. 그런 선의(善意)의 노력을 시작한 당초의 충정 자체는 순수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결과의 측면에서 볼 때는 그 노력이 별 성과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용기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결함을 호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용기다. 이점에서, 듣는 사람들로선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이 담은 진정성을 전달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북 정책에서 우리는 왜 적중하지 못했는가? 어느 대목에서부터 우리의 대북 평화공존, 교류협력, 통일추구가 ‘북에는 유리하고 우리에겐 불리한’ 게임이 되기 시작했는가? 북한과 교섭하는 데 있어 ‘상호주의를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 실책의 가장 결정적인 발단이었다고 필자는 바라본다.
그 전에도 남북회담, 정상회담, 적십자회담 같은 행사를 자기 정파(政派)의 정치적 입지 향상을 위한 쇼로 활용하는 등, 대북정책의 일탈적 양상이 드러난 적이 곧잘 있기는 했다. 그러나 대북 정책이 본격적으로 ‘북에는 이롭고 우리에겐 불리한’ 짓으로 역기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햇볕정책’을 계기로 해서였다.
‘햇볕 전도사’들은 선공후득(先供後得,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북한에 대한 일방적, 무조건적 현금지원을 자행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은 그 동안 북한에 흘러간 우리의 공여자금 액수는 무려 30~35억 달러였다고 했다. 우리는 그러나 그렇게 하고서도 아무런 후득(後得)을 한 바가 없다. 비전향 장기수(북한의 간첩과 공작원)를 돌려보냈는데도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데려오지 못했다. 이게 후득인가?
'햇볕 논리‘나 ’햇볕 짓‘에선 그러나 일부 ’좌파적‘ 개인이나 운동단체나 정권만이 한 게 아니라, 크게 봐선 보수라 해야 할 개인, 단체, 정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부 대기업은 “북한 사람들에게 ’돈맛‘을 드려주면 북한이 변해서 공존, 교류, 협력, 시장화, 평화통일로 나올 것”이란 소리를, 마치 신상품 개발이나 한 듯 세일즈 하고 다녔다. 일부 대(大)부르주아들의 그런 “돈이면 염라대왕도 매수할 수 있다”는 식의 ’경제 환원(還元)주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으면 어딘가 버스 놓친 루저 취급을 받다 시피 했다.
비단 대(大)상인들만이 아니었다. 딱히 좌파가 아니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잘 노는 소(小)부루주아 학자, 언론인, 고소득 화이트칼라들 역시 “북한이 무슨 수로 전쟁하나...” “우리 경제가 북의 몇 십 배니까...“ ‘돈맛으로 북한을 녹일 수 있다“ ”같은 민족끼리 무조건 주고 양보해야...“ ”김정일 비판은 냉전적...“ 하는 논리를 내걸고, 심지어는 막대한 뒷돈을 줘가면서까지 평양에 가서 김정일 알현(謁見)을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요즘도 ”북한이 핵 동결(凍結)을 하는 조건으로 미-북 평화협정을 논의하자“는 소리들을 하고 있다.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천안함-연평도-목함지뢰 도발, 김정은의 공포정치, 그리고 점점 더 심해지는 북한의 호전적 자세는 우리 내부의 그런 ‘좌파 햇볕’과 ‘강남 햇볕‘에 대한 통렬한 배신이자 따귀였다. 그러나 ’좌파 햇볕‘도 ’강남 햇볕‘도 이게 배신’이요 ‘따귀’라는 걸 모른다는 데 더 큰 아이러니가 있다.
그들은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의 개성공단 폐쇄가 마치 남북관계를 냉각시킨 최초의 원인인 양 몰아가고 있다. 박 대통령이 개성공단 폐쇄를 결단하기 이전에 있었던 북한의 이중성, 각종 도발, 거짓, 꼼수에 대해선 일체 함구한 채... 개성공단에서 북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달러의 70%가 당으로 간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이제 그런 수 십 년 동안의 위선을 더 이상 방치하거나, 되풀이하거나, 그것에 당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의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것, 북한의 변화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제재와 봉쇄, 북한 인권참상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 등, 비상한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볼 때 평양의 '세습 천황제 파시즘'과 그 엽기적인 '신정(神政) 체제'거 없어지지 않고서는 한반도의 평화구조 구축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의 교훈이 일깨워준 이 '불편한, 그러나 확실한' 진실과 마주서는 것을 결코 기피해선 안 된다. 아니, 우리는 이 진실을 숙명적으로 피해갈 수 없다.
어떤 논자들은 이 추세를 ‘신(新)냉전’이라고 딱지 붙인다. 평화를 버리고 대결로 간 ‘전쟁 불사(不辭)론’인 것처럼 몰아가는 비딱한 시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 취지는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평화공존, 교류협력, 평화통일 기반구축을 위해 최대한 노력했지만 북한은 그 선의에 찬물을 끼얹고 핵-미사일로 임했다. 이걸 그대로 방임하면 나중에 우리가 꼼짝 못하고 당하게 생겼다. 그래서 참다 참다 못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데 있다. 진실로 참다 참다 못해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국민이 국민 몫을 해야 할 차례다. 국민 몫은 무엇인가? 각성하는 것이다. 목함지뢰 도발 때 전역일자를 반납하겠다고 나선 애국병사들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 국민은 지금 각성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 결정에 찬성하는 여론이 반대하는 여론을 단연 제치고 있다.
정세는 대한민국 진영의 우세로 들어섰다. 좌(左) 풍조가 ‘그들의 한 철’이었다면 이제는 자유민주-자유지성 세(勢)가 다시 바닥을 치고 일어서는 반격의 계절이다. 이 기세로 2016년을 장식하자.
글 | 류근일 언론인, 전 조선일보 주필
2016-02-17 32살 폭군 김정은의 핵 장난감
북한은 김정은의 생일은 공개하고 있으나 출생 연도는 밝히지 않는다. 나이를 공개하면 리더십에 손상이 생긴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김정은은 1984년 1월 8일생으로 집권 5년 차인 올해 32세이다. 어린 나이에 등극한 김정은은 일천한 통치 경험과 연소(年少)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대범함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2012년 목선을 타고 섬 부대를 방문하거나 비행기를 직접 조종하는 것이 그런 사례다.
김정은은 1996년 4월부터 6년 가까이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아버지 김정일처럼 예술가적 기질을 지녀 영화 관람을 즐기고, 전자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그는 운동 경기의 리더가 되어 상대 팀을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고 승부욕도 강했다고 한다.
유학 시절에 북한과 스위스를 오가며 7세 연상의 왕재산악단 가수 현송월과 애인 관계로 지낸 것은 북한에선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그의 사생활을 규율할 사람은 아버지뿐이지만 김정일은 스스로도 그랬기 때문인지 아들의 여성 문제에 관대했던 것 같다. 현송월은 작년 12월 중국 공연을 취소하고 귀국한 모란봉악단의 단장이다.
김정은은 2002년 1월에 영구 귀국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들어갔다. 김정일은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오래한 김정남이 서구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어 북한 체제 적응에 어려워지는 것을 보고 김정은의 유학을 중단시키고 4년 동안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김정은이 군사무기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군사시설 시찰이 잦은 것은 군사종합대학 시절에 배운 학습의 영향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모부 장성택, 총참모장 이영길 등 당과 군의 최고위급뿐 아니라 중간 간부들까지 파리 목숨이다. 2015년 5월 대동강 자라공장을 방문하고 나서는 경영성과 부진을 이유로 지배인과 당비서를 총살했다. 심지어 가족들을 참관시켜 놓고 자동소총과 고사포로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 난사를 하는 반인륜적인 처형 방법도 동원했다. 김정은의 포악성은 독재자들이 쓰는 공포정치의 전형이지만 그것만으론 연소한 권력자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다스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도비만을 부른 폭음과 폭식도 이러한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김정은처럼 사람을 함부로 죽인 폭군은 전례가 없다. 당과 군의 고위간부들은 언제 숙청될지 몰라 좌불안석으로 각자 살 궁리만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고 최근 탈북한 고위 인사들은 전한다. 그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정책 결정 및 간부의 인사와 처벌이 기분에 따라 좌우된다. 심지어 술파티를 하다 최근 강등시킨 군 장성을 보고 “아직도 그 계급이야”라며 바로 복권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자제력이 부족하고 감정 변화가 심한 폭군이 핵무기 발사 버튼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의 안위는 물론 세계평화에도 심대한 위협이다. 정상적인 판단력과 리더십을 갖췄다고 하기 어려운 그가 잘못된 충동에 휩쓸릴 경우 북한에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도,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3년 개성공단 재개 협상 시 북쪽 대표단이 우리 쪽에 매달리다시피 한 것을 보면 김정은은 통치자금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개성공단은 마지막 남은 북한과의 창구이고 북한 주민에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알리는 산 교육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서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사후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국가 명운이 걸린 안보 문제를 여론조사로 결정할 수는 없다. 국가지도자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고독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북한이 작년 8월 목함지뢰 도발 후 방송을 시작한 우리 쪽 확성기를 향해 포탄 두 발을 쏘았을 때 우리가 강도 높은 대응 포격을 하자 김양건과 황병서가 득달같이 나와 협상에 나선 것에 미루어 체제 불안감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야수 같은 포악함과 안하무인의 태도 뒤에는 이처럼 약삭빠른 계산과 체제 불안감이 움츠리고 있다. 이번에 개성공단 직원들을 인질로 잡지 않은 것도 전면 대결은 피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도 어떻게 보면 가진 것, 지킬 것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다. 지금은 회초리든 몽둥이든 집어 들고서 천방지축 김정은이 위험한 장난감을 내려놓도록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놓아야 할 때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
2016-02-18 박근혜 독트린
어제 아침 일찍 70대 전직 장관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남한 국가원수 입에서 ‘(北) 체제 붕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방법론 유무를 떠나 국민과 국제사회를 향해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나도 들으면서 섬뜩했을 정도였다. 조간신문 1면 제목 크기가 더 컸어야 했다.” 북핵폐기 결기 보였다 대통령 국회 연설이 있었던 그제 저녁 또 다른 전직 장관, 은퇴한 언론사 사장, 중견 학자, 의사들까지 두루 망라한 모임에서도 “속이 후련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다들 ‘박근혜’를 찍긴 했어도 잇단 인사 실패와 불통 리더십에 “정말 이렇게 못할 줄은 몰랐다”며 실망을 감추지 않았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대통령 칭찬을 쏟아냈다. 리얼미터 긴급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3명 중 2명이 “대통령 연설 내용에 공감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북핵은 실전 배치될 것이므로 ‘파국’을 막으려면 ‘근본적’ 해답을 찾아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라며 현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했다. “개성공단 가동 중지는 제반 조치의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보다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한 대목들에서는 장기 전략하에 북핵을 반드시 폐기시키고 말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김정은이 숙청한 고위 간부들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 것도 눈길이 갔다. 지구상에서 보기 드문 북 정권의 야만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 우리의 자유 인권 번영의 과실을 북녘 주민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겠다”는 말에는 우리가 가야 할 통일의 내용과 방향성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신뢰 프로세스’ 정책의 폐기 정도가 아니라 지난 20년간 대북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가히 ‘박근혜 독트린(doctrine·외교안보 노선의 기본 지침)’이라 할 만하다. 국가안보가 절체절명인 상황에서 밤잠을 설치고 있을 대통령은 요즘 누구를 가장 많이 생각할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화가(畵家) 아버지를 둔 자식이 미적 감각이 개발되듯 (퍼스트레이디 시절)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며 ‘하려는 일이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그것을 풀어갈 만한 실마리는 늘 아버지의 충고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제 연설에서 “더 이상 국제사회에 의존하는 무력감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대목도 평소 자주국방을 외치던 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박 대통령은 개성공단에서 철수하기 전부터 이미 장래의 실행 플랜과 전략을 설계해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야에서 거론되는 다음 대통령 후보들도 떠올려 보며 ‘누가 차기 정권에서 북핵에 맞설 수 있을까… 내 임기 동안 근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태산보다 무거운 사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란 외로운 자리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지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봐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권력자라 하지만 사실 무척 외로운 자리입니다. 하지만 대통령마다 그 시대에 져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노 대통령께서는 노 대통령 시대의 사명을 잘 생각하고 마무리하셔야 합니다. … 국민을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이나 대통령이란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과연 시대적 사명을 잘 생각하고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새로운 시작 앞에 서있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2016.03.02 박근혜 대통령, 김정은이 주적(主敵)임을 분명히 하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7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의 기념사를 들었다. 약 15분간 계속된 연설은 여러 번의 박수를 받았다. 대통령은 또박또박 연설문을 읽어내려 갔다. 단호하게, 때로는 절실하게 國政의 큰 방향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하고 균형 잡힌 연설이었다. 취임 후 가장 잘 된 연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념 행사도 연설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기념식장을 나오면서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 되었다.
1. 朴 대통령은 오늘 연설에서 김정은 정권이 주적(主敵)이고, 일본은 우방국임을 분명히 하였다. 대통령은 북한의 핵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북한정권의 해체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정도의 엄정한 메시지를 담았다.
<이제 기존의 대응방식으로는 북한의 핵개발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핵으로 정권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 주민들을 착취하고 핵개발에만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이 북한의 정권을 유지시킬 수 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한편 일본의 對北압박을 호의적으로 소개하였다.
<이에 더해, 미국의 對北제재 법안 채택과 일본, EU(유럽연합), 여타 우방국들이 강력한 對北제재 조치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공통의 위협인 핵 앞에서 韓日이 공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2. 朴 대통령은 우리가 말하는 '평화통일'의 내용이 '북한의 자유화'를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우리가 통일을 염원하는 이유는 (중략)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인권, 번영을 북한 동포들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부는 평화와 번영, 자유의 물결이 넘치는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어 갈 것이며, 그것이 바로 3·1 운동 정신의 승화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자유의 물결이 넘치는 한반도'는 남북한의 공산전체주의 세력을 정리하지 않고선 달성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오늘 朴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 1, 3, 4조가 명령하는 통일방식(북한 노동당 정권의 평화적 해체에 의한 자유통일)에 충실한 발언을 한 것이다. 대통령은 헌법 위에 설 때 강해진다. 연설에서 통일의 절대 가치로서 '자유'를 이처럼 강조한 대통령은 李承晩 이후 최초일 것이다.
3. 朴 대통령은 지난 年末의 종군 위안부 문제 합의를 감안한 듯 일본에 대하여는 비판 대신 점잖은 충고를 하였다.
<일본 정부도 역사의 과오를 잊지 말고, 이번 합의의 취지와 정신을 온전히 실천으로 옮겨서 미래 세대에 교훈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를 直視(직시)하는 가운데, 서로 손을 잡고 韓日 관계의 새로운 章을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朴 대통령은 <북한이 연이은 도발과 1차 타격대상이 청와대라고 위협하며 불안과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를 둘러싼 대내외 경제여건도 매우 어려워지고 >있으므로 경제를 살리려는 정부의 노력에 맞추어 <정치권도 국민의 열망에 호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호소하였다. 이 대목에서 박수 소리가 특히 높았다.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개혁하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혁신과제들이 아직도 기득권과 정치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면서 <왜 우리 국민들이 '민생 구하기 서명운동'에 직접 나서야 했는지에 대해 국민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고 호소하였다. 맨 앞자리에 앉은 政界 지도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지금 대내외적인 어려움과 테러위험에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국회가 거의 마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직무유기이자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청중은 박수를 쳤지만 참석 야당 정치인들은 가만 있었다.
5. 朴 대통령은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정치권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바꾸어 달라는 요지의 부탁도 하였다. <퇴보가 아닌 발전을 위해, 분열이 아닌 통합을 위해 이제 국민들께서 직접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민생살리기 서명에 곱은 손을 불으시면서 서명해주신 국민들의 힘이 대한민국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는 호소는 절실하게 전달되었다.
6. 朴 대통령은 정부가 기업의 혁신을 가로 막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경고도 하였다. 시장경제주의자의 면모를 보인 대목이다.
<기업이 혁신적인 기술, 독창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속도를 정부가 따라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관행적으로 내려온 정부 만능의 事前的 규제 방식에서 민간 중심의 事後的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전환하여 新산업이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커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7.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이 50년, 100년 후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역사로 기억되길 바랍니다>라는 마무리도 좋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수십년 간의 잘못된 對北정책을 轉換(전환)하고, 北核폐기와 자유통일로 가는 길을 열려고 애쓰는 모습,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약하는 官과 정치의 폐해를 개혁하려는 의지, 이런 國政방향을 3·1 독립운동 정신과 연결시켜 역사적 당위성을 부여한 논리 전개 등 흠 잡을 데 없는 연설이었다.
8. 물론 연설이 자동적으로 역사를 바꾸지는 않는다. 연설에 담긴 뜻을 공무원, 정치인, 국민들이 공감할 때 행동으로 발전하여 역사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국민들께서 직접 나서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호소는 <국민들께서 선거를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는 부탁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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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주년 3·1절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00만 해외동포와 북한동포 여러분,
그리고 독립유공자와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뜻 깊은 제97주년 3·1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영전에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며,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97년 전 오늘, 독립만세의 함성은
신분과 계층, 종교와 사상의 차이를 뛰어넘어
오직 독립을 향한 열망과 애국심으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소녀의 슬픔'이라고 외쳤던
유관순 열사의 애국심이 곧 3·1 운동의 정신이었고,
민족대단결이 바로 3·1 운동의 정신이었습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힘을 하나로 모은 역사적인 일로
모든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는 동방의 밝은 빛으로
세계 각국의 민족 자결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3·1 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졌고,
마침내 우리는 그토록 소망하던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
세계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건설했습니다.
97년 전,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조국의 광복을 이루어
자유롭고 번영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지금,
선열들이 피 흘려 세운 이 조국을
진정한 평화통일을 이루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 분들에게 갚아야 할 소명이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루어
후손들이 평화롭고 부강한 한반도에서 살게 하는 것이야말로
3·1 정신을 이 시대에 구현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면서,
당국 간 대화와 민간 교류협력을 강화하고
남북 간 신뢰구축과 평화통일기반 구축을 위해
북한에 많은 지원과 양보를 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우리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3차 핵실험을 한 데 이어
또 다시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라는
극단적인 도발로 우리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계속 핵과 미사일 도발을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모한 도발을 일삼는 북한을 그대로 놔둔다면,
5차, 6차 핵실험을 계속 할 것이고,
북한의 핵은 결국 우리 민족의 생존은 물론
동북아 안정과 세계평화를 실질적으로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평화 의지에 대한 도전이자
전 세계가 원하고 있는 평화정착에도 큰 위협이 될 것입니다.
이제 기존의 대응방식으로는
북한의 핵개발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핵으로 정권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 주민들을 착취하고 핵개발에만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이
북한의 정권을 유지시킬 수 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단합된 의지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 세계 100여 개가 넘는 국가들이 북한의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한데 이어,
가장 강력하고 실효적인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가
곧 채택될 예정입니다.
이번 대북 결의는 안보리 결의와 국제사회를 무시하고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도발을 자행한 데 대해
엄중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단호한 의지가 응집된 것입니다.
이에 더해, 미국의 대북제재 법안 채택과
일본, EU(유럽연합), 여타 우방국들이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정부는 대화의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지만,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이지 않고 변화를 거부하는 한,
우리와 국제사회의 압박은 계속될 것입니다.
정부는 앞으로 더욱 확고한 안보태세와 국제공조를 바탕으로
북한이 반드시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갈 것입니다.
이제 선택은 북한의 몫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들도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위한 길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북한이 핵개발을 멈추지 않고,
한반도 긴장을 지속적으로 고조시키고 있는 현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도
한반도의 평화통일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통일을 염원하는 이유는
핵무기 없는 세상의 비전이 한반도에서 시작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인권, 번영을
북한 동포들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부는 평화와 번영, 자유의 물결이 넘치는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어 갈 것이며,
그것이 바로 3·1 운동 정신의 승화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데 국민여러분께서 함께 동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지금의 정쟁에서 벗어나
호시탐탐 도발을 시도하고 있는 북한과
테러에 노출되어 있는 국민을 지키고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나서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1 운동은 자유와 독립을 향한 열망이자,
세계평화와 인류행복 구현이라는 시대정신의 발현이었습니다.
지난해 말, 24년 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일 간 합의가 있었습니다.
이번 합의는 피해자 할머니가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집중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습니다.
앞으로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명예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실질적인 지원을 확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일본 정부도 역사의 과오를 잊지 말고,
이번 합의의 취지와 정신을 온전히 실천으로 옮겨서
미래 세대에 교훈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서로 손을 잡고 한일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북한이 연이은 도발과 1차 타격대상이 청와대라고 위협하며
불안과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를 둘러싼 대내외 경제여건도 매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만성화되고 있는 세계 경제 침체에 대응하고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개혁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어떤 정치적 고난이 있어도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4대 구조개혁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완수해서
우리 경제의 튼튼한 기초를 확고히 다져 나갈 것입니다.
그동안 국민 여러분께서 힘을 모아주신 덕분에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그리고 4대 구조개혁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노동개혁과 서비스산업 육성을 비롯해서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개혁하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혁신과제들이 아직도 기득권과 정치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동개혁은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 개혁입니다.
청년들이야 말로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지금 이들이 좌절하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노동개혁이 현장에 뿌리를 내려야만
'더 많은 일자리',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노사 모두 서로 조금씩 양보해 주시고
정치권도 국민의 열망에 호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부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개혁의 길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경제의 활력을 높이고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이제 민간과 정부의 관계에 대한 생각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기업이 혁신적인 기술, 독창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속도를
정부가 따라 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관행적으로 내려온 정부 만능의 사전적 규제 방식에서
민간 중심의 사후적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전환하여
신산업이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커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앞으로 전국의 시·도에 도입될 '규제프리존'에서는
각 지역의 전략산업과 관련된 핵심규제를 과감히 철폐할 것입니다.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통해 창의적 사고와 혁신적 도전정신이
우리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창업기업의 더 큰 성장과 끊임없는 재도전이 이루어지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가 상생 협력하는
지속가능한 창조경제 생태계를 완성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산업에 문화의 옷을 입히고 문화와 IT(정보기술)를 융·복합시켜
한류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처럼
우리의 경제와 문화영토를 넓히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올해에는 이러한 개혁과제들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서
국민 여러분이 그 성과를 체감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더 큰 위기가 닥치기 전에 대한민국의 변화와 혁신을 이뤄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 우리 국민들이 '민생구하기 서명운동'에 직접 나서야 했는지에 대해
국민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내외적인 어려움과 테러위험에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국회가 거의 마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직무유기이자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럴 때일수록 국민 여러분의 진실의 소리가 필요합니다.
나라가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항상 국민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 왔고,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인 대한민국은
선열들의 피흘림으로 지켜온 소중한 나라입니다.
저는 지금의 위기 역시,
국민 여러분의 단합된 힘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외환위기를 극복한 힘으로
지역, 세대, 계층을 떠나 하나로 뭉쳐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갑시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제 때 대처하지 못하고 낡은 것에 안주했을 때
어떤 역사적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나라 잃은 서러움과 약소국의 고난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퇴보가 아닌 발전을 위해, 분열이 아닌 통합을 위해
이제 국민들께서 직접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추운 영하의 날씨에 가는 길을 멈추시고
민생살리기 서명에 곱은 손을 불으시면서 서명해주신 국민들의 힘이
대한민국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이 50년, 100년 후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역사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애국애족과 민족대단결의 3·1운동 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의 번영과 평화통일이라는 위대한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6년 05월 11일 트럼프보다 위험한 ‘설마’病
정충신 / 정치부 부장
집권 5년 만에 친정체제 구축에 성공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는 독설과 막말 언행 등 닮은 점도 많지만 경제에 대한 관점만큼은 극과 극이다.
김정은은 36년 만의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경제야 어찌 되든 체제 유지와 장기 독재에 골몰하고 있다. 핵 만능주의에 빠져 ‘선핵(先核)주의’ ‘자강력(自强力) 제일주의’란 신조어를 낳은 김정은의 안보 모험주의는 선대인 김일성·김정일과도 차별화된다. 김 씨 왕조가 멸망하기 전까지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며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기한 데 이어 당 규약에 핵·경제 병진 노선을 못 박아 핵무력 강화를 국시로 채택했다. 김정은식 핵 모험주의로, 우리는 5·6·7차 핵실험이 이어지는 핵 질주시대를 경험하게 될 것이란 경고음까지 울린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 경제 제일주의에 입각해 미국 경제 회복을 위해서라면 동맹국의 안보쯤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안보 상업주의의 화신이다. 동맹의 안보 무임승차론으로, 방위비 분담금을 50%에서 100%로 늘리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핵무장을 하든 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이미 한반도 안보에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주한미군 주둔’이 한반도 안보의 상수에서 변수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눈치 빠른 김정은이 그 틈을 놓칠세라 당대회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 카드를 꺼내 들었다.
김정은의 핵폭탄과, 2000년 첫 대선 출마 당시 북한 영변 핵 정밀 타격을 주장했고 이번에 한국의 독자 핵무장 용인 발언까지 한 트럼프의 북핵정책 인식에 대응하는 우리 국민의 안보 불감증과 정부의 안보 낙관주의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 북한이 2013년 3차 핵실험 후 탄도미사일에 탑재해 공격할 정도로 ‘소형화’에 성공했다고 주장했지만 국방부는 그 증거를 갖지 못했고, 설사 소형화를 했다 해도 아직 실전 배치는 못 했다며 번번이 평가절하했다.
김정은이 당대회 전 자신들의 핵미사일 능력을 모조리 보여주고 있지만 이에 대응한 전력화는 더디기만 하다. 김정은이 핵미사일 개발과정을 ‘친절히’ 소개한 것은 세계 핵미사일 개발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핵폭탄급 코미디다. 우리 국민 중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더라도 한국에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진 이가 많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와 안보 불감증이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우리 국민, 일부 북한 전문가들까지 가세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설마 한·미 동맹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주한미군 철수까지 검토하겠느냐며, 당선되면 생각이 바뀌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낙관주의다. 미국은 대선을 통해 국민에게 공약한 안보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탄생하면 방위비 분담금 100%는 기본이고 해마다 달라는 대로 내든지,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트럼프도 용인한 만큼 저비용 고효율의 핵무기를 자체 개발해 대응하든지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삼각 안보 위협에 직면해 있다. 김정은의 안보 모험주의, 트럼프의 안보 상업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안보 낙관주의라는 내부의 적(敵)이다.
csjung@munhwa.com
2016.08.04 김정원 하사 "발 한쪽 잃었지만 명예 얻었다"
北 DMZ 지뢰 도발 1년 사이버사령부에서 복무… 10월이면 중사로 진급
"나는 특전사에서 태어나 불굴의 정신과 독기를 배웠고, 수색대대로 날아와 조국 수호와 전우애를 배웠다. 발을 한쪽 잃었지만 명예를 얻었고, 이제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나의 몸을 적신다."
지난해 8월 4일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지뢰 도발로 오른쪽 발목이 절단된 김정원(24·사진) 하사의 수기가 지난 2일 육군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됐다. '8·4 북 지뢰 도발 시 작전 영웅 김정원 중사(진급 예정) 수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 하사는 지뢰 도발 당시 상황과 회복 과정, 현재 심경 등을 밝혔다.
김 하사는 "발을 영영 못 쓰게 될 거라는 사실은 지뢰가 터졌을 때 이미 깨달았다. 매일 계속되는 극심한 환상통(없어진 신체 일부가 있는 듯이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마약성 진통제를 주입했고, 식사는 전폐했고… 두껍게 쌓인 붕대들을 보며 나는 잠깐 내 인생의 꿈과 사랑에 대해 포기하며 절망했다"고 썼다. 그는 이어 "삶의 고통도 나의 일부분이며 앞으로의 새로운 고난과 역경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당당하게 부딪치며 성장하고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김 하사는 또 "비겁한 방법을 밥 먹듯이 쓰는 북한군을 모두 죽이고 싶었다"며 "그때 적과 교전이라도 했다면 나와 하재헌을 이렇게 만든 북한군 한 놈이라도 쏴 죽였을 텐데 적은 없었고 비겁한 지뢰만이 있었다"고 했다. 김 하사는 자신에게 쏟아진 주변의 관심에 대해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감사함"이라며 "의족 육상 선수 겸 모델인 에이미 멀린스씨와의 만남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김 하사는 군에 복귀해 국군사이버사령부에서 복무 중이다. 오는 10월엔 중사로 진급한다. 김 하사는 "내가 하고 싶었던 컴퓨터 관련 분야에서 일하게 됐으니 미친 듯이 적응하고 미친 듯이 공부하며 몸 관리도 살기 위해 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다리가 절단된 하재헌(22) 하사는 국군의무사령부에서 근무 중이며 11월 중사로 진급한다. 하 하사는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참 힘들고 고된 순간이 많았지만 항상 응원해준 가족과 국민들 덕에 버티고 이겨낼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군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힘쓰겠다"고 말했다.
육군은 3일 북의 DMZ 지뢰 도발 때 김 하사와 하 하사를 구조한 1사단 수색대대 수색7팀의 훈련 모습을 공개했다. 당시 팀장이던 정교성(29) 중사가 지금도 팀을 이끌고 있고, 지난해 작전에 참여했던 통신관 이형민(22) 하사도 여전히 임무를 수행 중이다.
조선일보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2016.08.11 김정은 목에 현상금 건 대북전단에 “죽탕져 버리겠다”
▲2016년 4월 29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인근에서 탈북자 단체 회원들이 대북전단을 날리고 있다./조선DB
탈북인단체총연합회가 김정은의 목에 현상금을 내건 대북전단을 북한으로 날려보낸 것과 관련해 북한 매체가 '단말마적 발악'에 불과하다며 자신들의 존엄과 체제에 도전하는 자들을 '죽탕쳐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9일 북한 대남선전 매체인 우리민족끼리(우민끼)는 '징벌의 불소나기를 자청하는 쥐새끼무리들의 망동-반공화국 삐라 살포 난동에 대한 경고'라는 글을 통해 "반공화국 삐라 살포 도발은 반민족적, 반통일적인 대결정책의 총파산으로 더욱 궁지에 몰린 미국과 괴뢰패당의 필사적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우민끼는 "우리는 이미 반공화국 삐라 살포 행위는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이며 따라서 우리의 존엄과 체제를 헐뜯는 무모한 행위에 대해서는 추호의 용서도 없이 무자비하게 징벌해 버릴 것이라는 것을 경고했다"고 했고, "무엄하게도 우리 존엄과 체제 감히 도전해 나선 자들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든, 그 세상 어디에 숨어 있든 끝까지 추적해 모조리 죽탕쳐버리려는 것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확고한 의지"라고 위협했다.
앞서 탈북인단체총연합회는 지난 6일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전단지 10만장을 북한으로 날려보냈다. 단체는 김정은의 죄명을 '살인과 인권 유린'으로 정하고 현상금 5000만 달러를 내걸었다.
김현정 자유북한방송 기자
2016.09.01 "군 복무는 낭비 아닌 하프타임"
"명예, 권력, 돈, 시간, 기회 등 얻고 싶어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내려놓았습니다."
육군 2사단 17연대 소속 박주원(31·사진) 일병은 지난 봄 병무청에 보낸 수기에서 "나 자신을 훈련병과 이등병 신분으로 낮췄다"며 이렇게 썼다. 나이 서른한 살에 이등병 계급장을 뗀 박 일병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미국 뉴욕주 스키드모어 칼리지 철학 교수다. 영주권을 갖고 있어 입대할 필요가 없었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 한국군 복무를 자원했다.
/병무청
박 일병은 여덟 살에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케냐로 건너가 11년 동안 살았다.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아 힘들었지만 그는 운동화 바닥이 닳으면 타이어 조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덧댈 줄 아는 케냐 소년이 됐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한 박 일병은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전액 장학생으로 학사·석사를 마치고 28세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쟁을 뚫고 스키드모어 칼리지에서 정년을 보장받는 교수가 됐다.
그는 미국에서 탄탄한 자리를 잡고 꿈을 펼칠 수 있게 됐지만 한국군 입대를 선택했다. "대학교수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이해해야 하는 직업이다. 군 생활에서 습득한 경험들은 전역 후 대학 교수로 돌아갔을 때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수기에서 밝혔다. 부대에서 동료들과 거친 운동을 하다가 아킬레스건 파열로 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경험도 정신의 자양분이 됐다고 한다.
군 복무를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박 일병은 "군 복무 시간을 아깝게 생각하지 말고 축구나 농구 게임에 있는 '하프타임' 또는 '작전타임'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한다. "군 입대 전까지 전반전을 열심히 살아왔다면 남은 인생의 후반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작전을 세우자"는 것이다.
병무청은 31일 박 일병과 같이 병역 의무가 없음에도 자진해서 현역 복무 중인 청년들의 사연을 담은 수기집 '대한 사람 대한으로 2016'을 발간했다.
조선일보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2016.09.03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가 명심할 일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가 독립과 존엄을 지켜나가기는 쉽지 않다. 한 걸음 삐끗하면 지도에서 사라진다. 한반도는 1910년에서 1945년까지 36년 세월 세계지도에 'JAPAN'으로 표기(表記)됐다. 16세기 무렵 중부 유럽 대국(大國)이던 폴란드도 국경을 맞댄 강대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에 의해 몇 차례 국토가 분할되다가 1795년 지도에서 사라졌다.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 종전(終戰)과 함께 123년 만에 나라를 되찾았으나 1939년 독일과 소련이 동서 양쪽에서 공격해오자 또다시 지도에서 사라졌다. 폴란드 멸망 원인은 수구(守舊)·혁명 세력 간 국론(國論) 분열과 국제 정세 오판(誤判)이었다. 주변 강대국들은 서로 다투다가도 폴란드 분할 문제에선 언제 다퉜느냐는 듯 쉽게 합의(合意)를 이뤘다.
최강대국 미국 국민의 상당수는 인도네시아가 인도 곁에 있는 나라인 줄 안다. 미국 청년 5만4260명이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는데도 한국이 일본 북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모르는 미국인이 꽤 된다. 그러나 지도에서 사라졌던 역사를 짊어진 나라 국민은 그럴 처지가 못 된다.
브레진스키는 1977년부터 4년간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세계 정치를 주물렀다. 그는 퇴임 후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과 '제국의 선택(The Choice)'이란 책을 냈다. 책 속에서 21세기 미국의 세계 전략을 철두철미 강대국의 눈(眼)으로 들여다보며, 한국의 자부심(自負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 운명을 강대국의 종속 변수(變數)처럼 취급했다. 강대국 편집증(偏執症)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수수께끼는 브레진스키가 '강대국 간 합의'에 의해 국토가 세 번 분할되고 나라가 두 번 지도에서 사라졌던 폴란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면 풀린다. 그의 혈관 속에는 강대국 간 냉혹한 거래 때문에 속절없이 나라를 잃었던 망국민(亡國民)의 강박관념이 흐르고 있다.
2005년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정치 이론가 25명을 선정했다. 이 리스트에서 5위를 차지한 미어세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강대국 국제 정치의 비극(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이란 자신의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한국과 폴란드가 강대국에 의해 한때 지도에서 사라졌던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이 나라를 지키려면 동맹의 구조, 세력 균형, 강대국의 본성과 행동·핵무기라는 복잡한 문제를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사드(THAAD) 배치 발표 이후 한국에서 벌어져 온 일들은 '이 나라가 100년 전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가'라는 의심이 들게 만든다. 정부는 습관적으로 결정·발표하고, 야당은 관성(慣性)에 따라 반대하고, 전문가는 공론(空論)으로 일부 여론에 영합하고, 지역 주민은 이해(利害)에 떠밀려 머리띠를 동여맨다.
현재의 한·미 관계에서 혈맹(血盟)이란 단어에만 지나치게 과다(過多)한 의미를 부여하면 착각을 불러올 수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과대평가하고 이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미국은 한국을 떠나지 못한다는 식(式)으로 미국을 무골호인(無骨好人) 취급하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동맹이란 국익을 같이하는 나라가 한 지붕 아래 동거(同居)하는 상태다. 결혼과는 다르다. 한·미 안보조약은 한 나라가 조약 해지(解止)를 상대국에 통고하면 1년 후 자동 종료된다. 사실 사드의 주목적은 주한 미군과 미군 장비를 북한의 선제(先制)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다. 한국 방어를 위해 나와 있는 자국(自國) 병사를 보호하는 장비 도입에 한국이 반대하면 미국 내에 어떤 여론이 일지는 불 보듯 하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가치는 망국(亡國)을 맞았던 1910년대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대와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한국 국익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미국 국익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의 차이가 여전히 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개인 관계에서도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동맹국이라도 상대 국가 탓에 자국(自國)의 이익에 절실하지 않은 분쟁에 휘말리지 않나 은근히 걱정한다. 다른 한편 도움이 필요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동맹국에 버림받지 않을까를 우려하는 것이 국제관계이기도 하다. 한·미 관계에도 이런 양면(兩面)이 작용하고 있다.
미·중 관계가 견제 국면으로 넘어가고 사드에 대한 중국의 과잉 반응은 그 연장선에 있다. 중국에 한국이 사드 배치 결정을 불러온 것이 북한 핵과 미사일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진실을 알고도 모른 체하는 상대를 납득시키긴 쉽지 않다. 폴란드 역사에서 보듯 주변 강대국이 한국 어깨너머로 한국 문제에 손쉽게 합의에 다다르는 것이 반드시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미·중 갈등과 견제 시대를 버텨낼 전략적 인내(忍耐)와 국력을 함께 키워갈 필요가 있다.
깅천석 논설고문
2016.09.18 '최후의 그날'까지 8년 남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을 "정신 상태가 통제 불능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9일 3개국 순방을 마친 뒤 열린 청와대 안보상황 점검회의에서 한 말이다. 같은 날 박 대통령은 라오스에서도 북한 핵실험에 대해 "김정은 정권의 광적(狂的)인 무모함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신 상태가 통제 불능'에 '광적인 무모함'을 고루 갖춘 사람을 표현할 말은 광인(狂人), 즉 '미친놈'밖에 없다. 우리 정치사에서 북한의 수령을 이렇게 표현한 대통령이 박 대통령 이전에 딱 한 명 있었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는 정확히 40년 전인 1976년 8월 18일 그렇게 말했다.
그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를 자르던 유엔군과 국군 장병에게 북한군 30여 명이 도끼를 휘둘렀다. 2명이 죽고 8명이 다쳤다. 대통령은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며 보복을 다짐했다. 사흘 뒤 한·미 양국 군이 완전 무장하고 미루나무를 자르는 모습을 북한은 겁먹은 표정으로 지켜만 봤다.
그 후 40년간 우리는 북한 도발에 뒷걸음질만 해왔다. 엄포를 놓다 미군 항공모함이나 폭격기로 '쇼'를 한 뒤 망각하는 수순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됐다. 박 대통령이 아버지처럼 몽둥이를 못 들고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유약해서가 아니라 입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12일 대통령과 여야 대표 회담에서 대통령이 잘못한 것은 없다. 대안 없이 사드에 반대하는 '퍼주기 주역'들의 대북 특사 요구를 받는 것은 국군 총사령관의 자세가 아니다. 북한의 10㏏짜리 폭탄 한 방에 서울에서만 20만~40만명이 죽는다. 그런 마당에 '여·야·정 안보 협의체'를 열자는 야당 주장은 안이함의 극치다.
야당은 안보를 노사정(勞使政) 협상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게 허망한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도 회담 뒤 비판은 대통령에게만 쏟아진다. 그 이유를 대통령도 알고 국민도 안다. 그렇다고 '발등에 떨어진 불'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바라보며 냉소만 짓는다면 대한민국은 누가 지켜준다는 말인가.
북한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면서 핵 개발에 매진했다. 그새 우리 대통령들은 조연 역할에 충실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의 영변 폭격에 반대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에 5억달러를 헌납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북한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왔다"며 국민의 기운만 뺐다.
북핵 위기에 백가쟁명(百家爭鳴)식 처방이 쏟아지고 있지만 나는 우리가 취할 현실적인 1차 대안이 원자력 추진 잠수함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원잠(原潛)은 무협지식 표현을 빌리자면 '너 죽고 나 죽자'는 동귀어진(同歸於盡), 즉 '물귀신' 같은 무기다. 단순 무식해 보이지만 이것만큼 무서운 무기도 사실 없다.
서해에서 우리 원잠이 몇 달간 숨어 있다면 평양의 김정은은 꿈자리가 뒤숭숭해 살이 쪽 빠질 것이다. 중국·일본도 두려워할 원잠은 2012년부터 2~3년 간격으로 세 척이 건조될 예정이었다. 2003년 6월 2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된 '362계획'대로라면 2번함이 취역했고 3번함이 완공 단계였을 것이다.
북한은 '핵 종합 세트'의 마지막 단계로 원잠을 만들어 거기 핵탄두가 달린 탄도미사일을 장착할 것이다. 우리가 배고픈 늑대에게 먹히는 배부른 돼지 신세가 되는 날이다. 그때 종북 세력들이 "항복하자" "함께 살자"고 선동하면 대다수가 노예의 행렬에 줄 설 것이다 . '최후의 그날'이 앞으로 8~10년 남았다.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2024년 우리가 독자 설계한 '장보고-Ⅲ' 3번함을 원잠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원잠은 핵폭탄과 달리 주변 국가의 반대를 벗어날 수단도 많다. 대통령이 열강에 맞서 결단만 한다면 자주국방을 위한, 노무현이 못한 것을 박근혜가 이룬 '위대한 불통(不通)'이 될 것이다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2016-09-23 국가안보에 투영된 근거 없는 낙관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민족의 쇠락은 임진왜란 때부터 가속도가 붙었던 것 같다. 중국과 일본이 내전 상태에 있을 땐 발 뻗고 살 수 있었지만 두 나라가 통일국가로 발흥할 땐 어김없이 국난의 위기를 피해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국제정세가 바뀌자 위기를 맞은 조선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있었다.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서인의 대표 황윤길은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동인의 대표 김성일은 “그런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정반대 보고를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국가 안보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짜야 하는데 당시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서인 소속으로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가 된 율곡 이이는 1583년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먼저 준비해야 하는데 오늘날 나라의 정사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한심하여 가슴이 터질 듯하다”며 개혁안을 상소하지만 탄핵 대상으로 몰려 사직하고 만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9년 뒤 조선은 왜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고 명의 참전으로 겨우 나라를 유지하다 1636년 다시 청의 침략을 받는다. 이후 258년간 사실상 청의 속국 신세였던 조선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비로소 독립국이 되지만 이내 일본의 식민지로 유린당한다.
지금 우리의 국력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산업화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해 이제야말로 국운의 융성기가 왔다고들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오만과 자만심이 번졌다.
한반도에 전쟁의 유령이 떠다니고 있고 북한은 ‘핵실험’ 단계에서 ‘핵무장’ 단계로까지 발전했지만 우린 안보불감증에 빠져 무력해져 있다. “미국이 있는데 감히 우리를 칠 수 있겠어?” “저러다 쿠데타 아니면 민란으로 무너지겠지” “북핵은 공격용이 아니라 협상용이야” 같은 담론들도 횡행한다.
1960, 70년대 우린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뤘다. 1980년대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시대도 열었다. 자부심이 한없이 고조되었다. 다들 국운의 융성기가 왔다고 했다. 삼성이 소니를 이기고 현대차가 미쓰비시를 추월하며 올림픽에서 세계 10위권의 메달을 따는 걸 보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양 자기도취에 빠졌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만심이 번졌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경고도 무시했다. 가진 사람들은 펑펑 쓰고 노조 등 이익집단은 자신의 꿀단지를 지키기 위해 머리띠를 둘렀다. 이런 오만과 근거 없는 낙관주의 풍조가 안보에도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선놀음에 빠져 북핵 위기 앞에 갑론을박하며 정쟁을 일삼는 모습은 임란을 앞둔 조선의 조정을 보는 듯하다.
사드 배치 긍정 여론이 높아가는 것과 함께 자위적 핵무장에 찬성하는 목소리도 늘고 있는 데는 최소한의 자구 조치도 내놓지 못하고 말 폭탄만 늘어놓는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이 깔려 있다. 21일 국회 대정부질의에선 더불어민주당 김진표 의원까지 전술핵 재배치를 주장하고 나섰고 육군 준장 출신인 국민의당 김중로 의원도 “군 선후배들 모두 핵무장을 하자고 한다. 상대방이 핵을 가졌는데 나 홀로 비핵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따졌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엔 동맹이나 공조도 무의미하다. 국방은 전력도 중요하지만 정신력도 중요하다. 자주 국방 의지를 가져야 임진란과 같은 국난을 막을 수 있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2016.12.29 한·미 동맹 없었어도 우리가 이럴 수 있을까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야당 출신 한 전직 의원이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이 식물이 되고 토요일마다 수십만명씩 모여서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것은 국가 비상사태 아닙니까. 북한의 도발 위협을 언제나 받고 있는 나라에서 이런 국정 공백과 수십만 시위 사태는 아주 심각한 상황 아닌가요. 그런데 이 비상사태를 이렇게 축제처럼 가족사진 찍고 인증 사진 찍고 가수 노래 듣고 간식 사먹으며 즐길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필자는 "경찰이 강제 진압을 하지 않는 데다 시민 의식이 높아져서 그런 것 아닐까요"라고 답했다. 그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며 "경찰 진압이 없고 시민 의식만 높으면 우리는 안전한 나라입니까. 지금 북한군이 기습하면 우리 스스로 막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고선 "시위에 나온 사람 중에 북한의 위협을 머리에 떠올려 본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럴 수 없었을 겁니다"고 했다.
그 정치인의 말대로 '만약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주한미군이 지금 여기에 없다면 대통령의 잘못을 응징하는 과정이 이렇게 평화롭고 자유로울 수 있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문재인 전 대표는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되면) 혁명밖에 없다"고 했는데 시위 군중이 대통령을 강제로 끌고 나와야 한다는 뜻까지 포함한 말이다. 정말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그래서 언제나 휴전선 걱정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아닐 것이다.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제9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공기는 어디에나 있다. 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의식하지 않고 산다. 그런데 없어지면 살지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휴전선으로부터 불과 60㎞ 떨어진 서울 광화문에서 포탄에 맞을 걱정은 0.00000001%도 하지 않고서 시위로 대통령을 탄핵 소추할 수 있는 것은 안전을 보장하는 한·미 동맹을 공기처럼 숨 쉬고, 물처럼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이나 공기를 고마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야당은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를 재검토한다고 한다. 중국의 이익에 반(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드는 한·미 군 시설과 유사시 미 증원 전력이 들어오는 항만 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동맹국 미국이 아니라 중국 입장을 더 중시한다면 미국이 어떤 생각을 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야당은 집권하면 개성공단도 즉시 재가동한다고 한다. 대북 제재의 구멍을 우리가 만들겠다는 것으로 미국과 합의했던 정책을 뒤집는 것이다. 집권하면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고도 한다. 외교·안보정책이라고 내놓는 것이 한·미 동맹을 해치거나 위태롭게 하는 것뿐인 것 같다. 한·미 동맹 덕에 안보 걱정은 눈곱만큼도 없이 촛불 시위에 편승한 정치인들이 한·미 동맹을 흔드는 언행만 하고 있다. 자신이 밟고 서 있는 땅을 자기가 발 굴러 허물어뜨리는 모습이다. 용감한가 어리석은가.
▲3월24일 서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지덕칠함(PKG)과 미 육군 카이오와 헬기(OH-58) 2대가 한미연합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해군 제공
우리는 한·미 동맹이 영원할 것으로 안다.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고, 무슨 일을 벌여도 언제나 곁에 있을 것으로 안다. 국제 관계를 자기 눈으로만 보는 습관은 자신을 스스로의 피로 지켜본 적이 없는 나라의 전형적인 속성이다.
야당은 미국이 필요해서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미 동맹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지긋지긋한 6·25에서 발을 빼는 것이 먼저였다. 미국은 한국전이 재발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경우 다시 말려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일본이나 호주같이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가 아닌 한국과 구속력을 갖는 방위조약을 맺는 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분위기를 이승만이 때로는 미친 것처럼, 때로는 고집불통으로, 때로는 허를 찌르는 충격적 조치로 바꿔놓았다. 한·미 동맹은 싫다는 미국을 이승만이 억지로 끌어다가 도장 찍게 만든 것이다.
미국의 대외 정책은 한국 정권의 변화에 일희일비하지는 않는다. 한·미 동맹이 지금까지 존속한 것은 이익 동맹이 아닌 가치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발전하면서 미국에 있어 한국은 미국의 대외 정책이 성공한 사례, 미국인이 흘린 피가 보답받은 사례가 됐다. 미국 도움으로 성공한 자유 민주국이 된 한국과의 동맹은 단순한 이익 개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제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다. 그는 모든 일을 거래와 협상, 이익이냐 손해냐로 본다.
트럼프 이후 한·미 동맹이 기회가 될지, 위기가 될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가치'가 아니라 '이익'만을 보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한·미 동맹이 더 이상 '물'이나 '공기'일 수 없다는 뜻이다. 공기가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 상황을 맞을 실력, 각오, 전략이 있는가. 없다면 자중(自重)해야 한다.
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주간
2017.04.12 美 航母가 오는데 왜 우리가 떠나
미국의 강공 전략에 한국이 먼저 두려워한다
용기도, 배짱도 없이 得失에나 연연하는 동맹국을 끼고 北核을 어떻게 해결하나
이란 핵(核)이 북핵과 다른 길을 간 데엔 거친 이웃들의 역할이 컸다. 이란의 핵개발 문제가 제기되자 이스라엘은 "미국이 막지 않으면 우리가 핵 시설을 폭격하겠다"고 했다. 말로 그치지 않고 이란의 핵 과학자 5명을 암살한 의심까지 받는다. 또 다른 이웃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이 미국에 요구한 말은 무섭다. 뱀의 목을 쳐달라고 했다.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 요구였다. 거친 이웃들이 와글거리는 가운데 미국은 이란에 카드를 내밀었다. '타협 아니면 폭격.' 확실한 신호였다. 게임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북핵이 이란 핵 문제와 다른 길을 간 것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이유를 댄다. 북한의 숨통을 쥐고 있는 중국이 북한을 옹호하면서 북핵 문제에 미온적이기 때문이라고 원망한다. 미국이 중동과 테러 이슈에만 신경 쓰고 북핵 문제를 방치하다가 '실패한 30년'을 자초했다고도 비난한다. 무리한 비판이 아니다. 미·중은 핵 기득권자로서 한국의 핵무장을 막고 있다. 무슨 방법으로라도 북한의 핵무장을 막아야 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웃인 우리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제 밤 일본 공영방송 NHK가 한반도 긴장 상황을 보도했다. 미 핵 추진 항공모함 전단(戰團)의 한반도 이동을 보도하면서 '북폭설(北爆說)'을 소개했다. 미 정부의 강경 자세로 미뤄 낭설로만 넘길 수 없다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실행되기 어렵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자국민 피해를 우려해 북폭에 반대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발언이 마침 정부에서 나왔다. 통일부는 "(북폭설을)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장관도 나서 "안보의 핵심은 국민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외교는 게임이다. 게임엔 전략이 있다. 강공(强攻)은 상대의 공포심을 자극해 양보를 유도하는 전략이다. 항모 전단 재배치와 북폭설도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얼마 전 미국은 시리아를 실제로 폭격했다. '타협 아니면 폭격'이라는 확실한 신호를 북한에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10년 전 이스라엘이 이란 폭격 의지를 내보이기 위해 때린 곳도 시리아였다. 그땐 세상이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신하지 않는다. 북폭설이 나오면 북한보다 더 큰 공포를 느끼고 요동치면서 반대하는 쪽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적국을 위협했는데 동맹국이 먼저 떨면 어떤 강공도 통하지 않는다.
▲'떠다니는 군사기지'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 전단이 오는 15일 전후로 한반도 인근 해상에 도착할 것으로 전망된다.사진은 한미 합동 '독수리' 군사훈련에 참가 중인 칼빈슨호에서 지난 3월14일 F/A-18 전투기가 발진 준비를 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24년 전 서해의 한 섬을 취재했다. 미국의 북폭설이 퍼지면서 서울에서 사재기가 일어날 때였다. 그 섬은 전쟁이 일어나면 고립될 수밖에 없다. 피난처가 없는 곳이다. 주둔한 군인은 물론 주민도 폭격을 피하기 어렵다. 그곳에 사는 이상 각오한 듯했다. 만난 사람 모두 담담했다. 섬 주민의 이야기를 기사로 작성해 송고했지만 실리지는 못했다. 카터 전 미 대통령이 북한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길었던 북한과의 타협은 결국 실패했다. 그때 서울이 서해 섬마을처럼 늠름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이스라엘을 닮기는 어렵다. 70년 동안 같은 민족끼리 한 번 전쟁 한 나라와 아랍 전체를 상대로 네 번 이상 전쟁한 나라의 상무(尙武) 정신은 다르다. 두 나라 국민의 용기와 배짱 차이는 역사에서 겪은 고난의 농도에 비례할 것이다. 피를 피로써 갚는 그들의 생존술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분열된 중동에서 통할 뿐 강대국에 둘러싸인 동북아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간 나라가 지도에서 지워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다. 한반도 위기설이 돌면 먼저 주가(株價)를 걱정한다. 북 핵시설을 폭격하면 북의 무차별 공격으로 서울이 불바다 된다는 공갈을 당연하게 여긴다. 미 항모 전단에 우리가 몸을 떠는 현실은 여기서 비롯된다. 국방비로 매년 38조원을 쏟아 부어도 이렇게 흔들리면 한국은 누구도 이길 수 없다. 언젠가 동맹국 자격도 의심받을 것이다.
어느 대선 후보는 북폭설과 관련해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국민 모두 같은 마음이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는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정상적 타협이 물 건너가고 굴종만 남는다. 요즘 대통령 선거에 나간 후보들 사이에 가장 심한 야유가 '남자 박근혜'라고 한다. 그렇게 조롱을 당하는 처지이지만 박 전 대통령에게도 평가할 만한 업적이 있다. 그중 하나가 군사 충돌 위기에 굳건히 대처해 지뢰 만행에 대한 북의 유감 표명을 받아낸 것이다. 아집과 불통의 정치 뒤엔 이런 강한 측면이 있었다. 박근혜 시대를 부정해도 이것만은 배웠으면 한다.
조선일보 선우정 논설위원
2017.07.26 평화협정이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앞으로 유럽에서 전쟁은 없다. 우리 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1869~ 1940)가 1938년 9월 30일 런던 헤스턴 공항에서 몰려온 환영 인파 앞에서 뮌헨 평화협정문을 흔들면서 연설한 내용의 일부이다.
체임벌린 총리는 나치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려 하자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막으려 했다. 체임벌린 총리는 독일 뮌헨에서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와 함께 히틀러와 협상을 벌였다.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에게 체코의 다른 지역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우면서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텐란트를 할양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히틀러가 이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4개국 지도자들은 뮌헨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뮌헨의 교훈
당시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에게 체코의 영토 일부를 양보해 유럽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 의원은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새로운 국제질서냐”면서 체임벌린 총리를 비판했다. 처칠의 말대로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야심을 간파하지 못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국제사회의 여론 때문에 뮌헨 평화협정을 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체임벌린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히틀러의 ‘위장 평화’ 공세에 속았다. 실제로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차지한 데 이어 1939년 3월, 체코 전역까지 점령해 뮌헨 평화협정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이어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됐다. 이로 인해 ‘적의 도발 앞에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과 소련이 맺은 불가침조약까지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 외상 요아힘 리벤트로프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성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 불린 이 조약이 1938년 8월 체결되자, 전 세계는 견원지간인 양국이 평화를 선택했다면서 환호했다. 공산주의를 증오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의사당 방화 사건을 독일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일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탄압했다. 소련은 나치 독일이 자국을 위협하는 세력이라면서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였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상호 불침략과 분쟁의 평화적 처리 등이었다. 이 조약에는 또 폴란드 서부 지역은 독일이, 발트국은 소련이 각각 차지한다는 비밀 조항들도 들어 있었다. 이후 소련은 2차 대전에서 독·소불가침 조약에 따라 나치 독일에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유럽 전체를 차지하려던 히틀러는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했다. 나치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만을 믿고 침공에 대비하지 못한 소련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4년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2500만명이 희생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미국 최고의 전략가라는 말을 들어온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바로 미국과 남·북베트남이 1973년 1월 체결한 파리 평화협정이다. 당시 막대한 전비(戰費)와 국내의 반전 여론 때문에 미국은 북베트남(월맹)과 평화협정을 체결해 베트남전쟁을 종결하고 싶었다. 이를 간파한 북베트남은 협상과정에서 미군 철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남베트남(월남)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협상대표였던 키신저는 미군 철수 후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침공하면 미국의 해·공군력을 동원해 북베트남을 응징하고 지상군을 지원하겠다고 남베트남에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파리 평화협정은 종이쪽에 불과한 셈이 됐다.
▲ 1938년 뮌헨 평화협정 1938년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나치 독일과 함께 서명한 뮌헨 평화협정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키신저의 오판
북베트남은 1975년 4월 남베트남을 침공해 무력으로 통일시켰다. 그 결과 남베트남에서 1000여만명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서 죽어갔고 100만여명의 보트피플이 공산 치하를 피해 해상을 떠돌았으며 그중에서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협상의 주역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키신저는 “미국은 타협을 원했지만, 북베트남은 승리를 원했다”면서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을 후회했다. 키신저는 또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지 못한 것은 미국 내의 평화운동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키신저의 이런 회고는 미국이 더 이상 전쟁을 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었다. 파리 평화협정의 교훈은 평화협정이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인 화성-14형의 시험발사에 성공하고 조만간 핵탄두를 소형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비핵화와 함께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 사회의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중국은 아예 쌍중단(雙中斷, 북한 핵·미사일 도발 중단과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과 쌍궤병행(雙軌竝行,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 병행)을 미국에 제안해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북한이 화성-14형을 시험 발사한 지난 7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쌍중단과 쌍궤병행을 한반도 위기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중국이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비핵화를 병행 추진하려는 것은 비핵화를 평화협정 체결 카드로 활용하는 동시에 동북아에서 패권국의 지위를 차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주한미군 철수 명분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은도 지난해 5월 제7차 당 대회에서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철회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조선에서 모든 무장장비와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 1939년 독·소 평화협정 1939년 몰로토프 소련 외무인민위원(왼쪽)과 리벤트로프 독일 외상이 악수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평화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전쟁이나 분쟁 당사국들은 모두 평화협정을 맺고 평화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평화협정(Peace agreement)이란 군사적으로 대치 관계 또는 전쟁을 벌이는 국가들이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맺는 약속을 말한다. 7월 27일로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4년을 맞는 남북한도 평화가 정착되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정전협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경우는 한반도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정은 평화를 반드시 보증하는 약속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돼왔다.
실제로 각국이 맺은 평화협정은 지금까지 8000여건이나 되지만 평화협정의 평균적인 유효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의 문명사학자인 윌과 아리엘 듀런트 부부에 따르면 인류 문명사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68년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역사에서 91.6%는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일상사였으며 평화로운 시기가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얘기다. 20세기만 놓고 보더라도 전쟁으로 죽어간 인구가 9억여명이나 된다.
▲ 1953년 정전협정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대표 해리슨 미군 중장(왼쪽 두 번째)과 북한군 남일 대장(오른쪽 두 번째)이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photo 미국 국무부
휴지조각된 오슬로 평화협정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1993년 9월 체결한 오슬로 평화협정을 들 수 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하고 있는 아랍 영토를 당사국에 반환함과 동시에 그곳의 일부에 팔레스타인의 독립국 건설을 허용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른바 ‘땅과 평화의 교환’이었다. 국제사회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적극 지지했고, 세계 언론들은 중동지역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덕분에 오슬로 평화협정에 서명한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슬로 평화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독립국을 세우려던 땅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분리장벽을 세웠으며,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테러 공격과 로켓포를 무차별로 쏘아댔다. 양측의 분쟁과 유혈충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평화회담의 전 단계인 정전협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유엔에 따르면 북한은 전 세계에서 정전협정을 가장 많이 위반한 국가이다. 북한은 그동안 정전협정을 무려 43만여건이나 위반했고, 이 가운데 침투와 국지도발은 3000여건이 넘는다. 북한은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면서도 핵 실험을 무려 다섯 차례나 실시했으며, 올 들어서만도 ICBM급을 비롯해 각종 탄도미사일을 12차례나 발사하는 등 위기를 고조시켜왔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날을 ‘전승절’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을 북한이 승리했다고 인정하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하나도 없는데도 북한은 세계 최강인 미국에 대항해서 승리했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올해 기념행사를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다. 주민들은 굶어죽어 가는데도 엄청난 돈을 허투루 쓰고 있다.
▲ 1973년 파리 평화협정 1973년 미국 대표 헨리 키신저(오른쪽)와 북베트남 대표 레둑토가 파리 평화협정 합의 후 악수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적화통일전략의 일환이다. 북한이 말하는 ‘평화’는 ‘공산화’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비핵화는 평화협정과 연계할 수 없으며 평화협정이 체결돼야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브루스 클링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지난 6월 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한 관리들과의 비공개 협의에서 “북한 관리들이 미국이 먼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이후 평화협정을 체결할지 전쟁을 할지 대화를 하자고 제의했다”면서 “한국을 협상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은 핵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헌법과 당 노선으로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한 북한은 핵 포기를 전제로 한 어떠한 대화와 협상에도 응할 생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북한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론을 거부하고 있다. 북한의 전략은 오로지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적화통일을 하려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정전협정에 근거해 유지되고 있는 유엔군 사령부가 해체돼야 하고 주한 미군은 철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이런 주장에 중국과 러시아가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 핵무기와 ICBM이 두려워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면 자칫하면 체임벌린과 키신저의 전철(前轍)을 밟을 수 있다.
▲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때의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photo 연합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
트럼프 미국 정부는 북한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정상회의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개별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최대의 압박 정책을 추진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 야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대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중국과 러시아의 주장을 검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 25년간 북한 정권을 상대한 경험으로 볼 때 우리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더라도 북한은 매번 핵 개발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해왔다”면서 “북한의 핵 개발을 지금 상태로 동결하더라도, 북한이 매우 높은 수준의 핵 능력을 여전히 보유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도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수미 테리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한국담당 보좌관은 “북한이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추진하려는 것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 동맹을 해체하기 위해”라면서 북·미 간 평화협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브루스 베넷 랜드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 정권은 결코 한국을 점령해 무력통일을 이루는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다”며 “북한의 평화협정 요구는 평화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전쟁 준비의 일환”이라고 지적했다. 베넷 선임연구원은 “만약 평화협정이 체결돼 미군이 일단 철수하면 다시 한국에 재배치 가능성이 희박하다”면서 “북한 정권은 이를 활용해 수십 년간 축적한 생화학무기와 핵무기 등을 앞세워 한국 점령을 시도할 수 있다”고 밝혔다. 베넷 선임연구원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은 역설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테리 전 보좌관도 “북한과 조급하게 대화에 나서면 비핵화는 물론 한반도의 평화나 안정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 자칫하면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정전협정 64주년을 맞아 한반도에선 또다시 평화협정이라는 말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꾼다고 평화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로마제국의 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의 말을 그 어느 때보다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출처 | 주간조선 2467호 글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2017.07.31 [가상 시나리오] 월간조선 문갑식
(1) 대한민국 무너지다(1948~20XX) (1/3) “서울 시민 여러분! 백두산의 김정은이 왔습네다”
⊙ 미국 정찰위성 평안북도 구성에서 이상 징후 발견
⊙ 위기 때 한국 대통령은 장기간의 유럽 순방 떠나 지휘부 공백
⊙ 백악관, 주한 미국인 철수 결정 … 영국·일본도 뒤따라
⊙ 중국·러시아, 미국의 북한 억제 요청 무시
⊙ KTX 예매표 동나고 인천공항 등에 외국인 대피객 몰려
⊙ 증권 폭락 … 전쟁 냄새 맡은 외국 종군기자들 서울로 입성
⊙ 국무총리의 대(對)국민담화에도 불안 가중
⊙ 대연평도·백령도 초토화, 원전(原電)·포스코 등 주요 기간산업망도 미사일 맞아
⊙ 한미 공군의 반격 … 참수작전 시작
⊙ 평양 김일성 동상과 만수대 김일성 시신 폭격 … 북한 주요 갱도 파괴
⊙ 작전계획 5015 발동
⊙ 은신했던 김정은 나타나 ‘핵 보복’ 위협
⊙ 흔들리는 민심 … 평화 원하는 촛불집회 시작, 미국 여론도 돌아서
⊙ 북한, 방사포와 장사정포로 반격 … 한 광역시에 핵 미사일 투하
⊙ 대통령은 항복 선언 후 외국 망명
첫째, 이 시나리오의 스토리는 허구(虛構)다.
둘째, 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전부 가상이며 특정인과 관련이 없다.
셋째, 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문서들, 예를 들어 작전계획 5015 같은 것들은
모두 군사기밀로서, 인터넷이나 언론에 공개된 것들을 이용한 것이다.
무기의 제원(諸元)들도 공개된 것들이다.
김일성은 1994년 7월 7일 사망했다. 죽기 직전까지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가 김영삼 대통령의 평양 방문 후 답례로 서울에 와서 읽을 연설 원고문이 최근 공개됐다.
“서울 시민 여러분! 백두산의 김일성이 왔습니다. 북조선은 주먹이 강하고 대신 남조선은 잘삽니다. 이 둘을 합치면 우리 민족은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나진·선봉·청진, 이 황금의 삼각주(三角洲)를 왜 남들에게 주겠습니까? 남한에 개방하겠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한 지 20년이 넘었다. 아들·손자 대로 넘어오면서 북한의 대남 안보위협은 점점 가중되고 있다. 장거리·중거리·단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북한은 이제 그 미사일에 핵 탄두(彈頭)를 달아 미국·일본·한국을 공격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
이 시나리오는 날로 약해지는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일깨우기 위해서 기존에 발표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엮었다. 즉 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팩트(fact)’들은 모두 사실이다. 다만 시나리오의 스토리 라인은 허구(fiction)이다. 이 시나리오가 전 국민이 북핵의 위험성을 깨닫고 의연히 대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D-15 새벽 3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구성시
언뜻 유성(流星)처럼 보이는 19t짜리 금속체가 하늘을 ‘휙’ 하고 갈랐다. 지구 전역(全域)을 살피는 KH-12 정찰위성 5대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정찰위성은 1992년 미국 국립정찰국(NRO)과 공군우주사령부가 방산업체 록히드마틴과 함께 개발한 것이다.
정찰위성은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타이탄-4 발사체(發射體)에 실려 우주로 날아간 뒤 1초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지구 궤도를 돌고 있다. 해상도 15cm의 사진을 얻기 위해 이 정찰위성에는 태양계 너머를 살피는 허블 망원경과 비슷한 수준의 광학렌즈에, 적외선(赤外線) 카메라도 장착돼 있다.
적외선 카메라는 적(敵)이 미사일이나 우주발사체를 쏠 때 발사장 일대에 남는 강한 열기(熱氣)를 포착해 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미국이 KH-12 정찰위성 수를 다섯 대로 유지하는 것은 ‘5’라는 숫자가 지구상에서 미국이 생각하는 적성(敵性)국가를 관찰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위성 하나가 수명이 다하거나 사고로 추락하면 미국은 성능이 개량된 KH-12를 다시 쏘아 같은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 KH-12 정찰위성은 군사기밀이지만 태양 궤도로 돌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대를 개발하는 데 10억 달러, 한 번 우주로 쏘아 올리는 데 4억 달러가 드는 이 정찰위성에 묘한 장면이 잡혔다.
KH-12는 잠시 사람처럼 ‘갸웃’ 하는가 싶더니 사전에 프로그램된 대로 고도(高度)를 낮춰 북한 상공으로 접근하여 구성시 일대에서 수만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이윽고 다시 제 궤도로 상승한 정찰위성은 미국 버지니아주 챈틀리와 콜로라도주 엘파소 카운티로 사진을 전송하기 시작했다.
미국 국립정찰국과 공군우주사령부에 설치된 수퍼 컴퓨터는 한반도 상공에서 촬영해 동시에 전달된 이 의문의 사진 파일들을 정해진 프로토콜에 따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KH-12 정찰위성은 제 값을 했을 것이다.
# D-14 오전 10시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미국 대통령은 즉각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47년 국가안전보장법에 의해 설치됐다. 이 회의에는 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과 함께 국가정보국장·합참의장·국가안보국보좌관·중앙정보국(CIA) 국장을 비롯해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세계가 기억하는, 역사에 기록된 이름난 전쟁들이 모두 이곳 테이블 위에서 기획되고 진행됐다. 그중에는 6·25도 있었고 베트남전도 있었으며 걸프전도 있었다. 느닷없는 호출을 받고 대통령 집무실로 달려온 안전보장회의 멤버들 앞에는 2장짜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1급 기밀(Top Secret) SHAPE \* MERGEFORMAT - 하루 전 북한 평북도 구성시에 이상(異常)징후 포착. - ‘화성-12형’(한미연합군이 명명한 코드명은 KN-1, KN은 ‘Korea North’의 약어·略語) 11기 기립(起立)확인. - 이 미사일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바로 이전 단계로 볼 수 있는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로 최장 사거리 5000km. - 2017년 5월 15일 발사했을 최대 2111.5km까지 올라갔다가 발사지에서 787km 떨어진 공해상(公海上)의 목표 수역을 정확히 타격한 바 있음. - 정상 각도로 쐈으면 5000여km를 비행할 수 있었는데 고각(高角)발사를 했기에 비행거리는 787km였음. - 주한미군에 ‘데프콘3(전군・全軍의 휴가·외출 금지, 한국군이 갖고 있던 작전권의 한미연합사 이양) 즉각 발령 통보, 추후 또다른 위협 징후가 있을 경우 데프콘 상향 조정. - ‘KH-12’ 정찰위성 총 5대를 북한 상공에 고도 300km까지 초근접 정찰 개시. - 국가안보국(NSA)의 통신감청 활동 풀가동. - ‘SAR’ 위성 북한 상공 긴급 투입 필요. - 정보감시정찰(ISR) 자산 추가 투입 필요. - 일본 가데나 기지의 E-8 제이스타스 한반도 투입. |
한참 서류를 들여다보던 대통령이 침묵을 깼다.
“SAR이 대체 뭐요?”
국가정보국장이 말했다.
“이 위성은 전파를 쏩니다. 표적에 맞은 전파가 되돌아오면 그 반사파(反射波)로 영상을 만듭니다. 건강검진을 할 때 초음파 사진과 비슷한 원리지요. 초음파 대신 레이더파를 쏘기 때문에 어두워도 관계없고 구름이 짙게 깔려도 상관없이 지상 표적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3대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다시 투덜댔다.
“그 빌어먹을 젊은 녀석이 또 발광을 하는군. 이번엔 과거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한국에는 미국인이 몇 명이나 있소?”
이번에는 합참의장이 말했다.
“주한미군을 제외해도 23만명이 조금 넘습니다.”
대통령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많기도 하군. 그가 미친 짓을 한다면 그 많은 미국인들을 다 어떻게 한반도에서 빠져나오게 하지?”
이번에는 중앙정보국장이 말했다.
“클린턴이 대통령이던 시절, 우리는 북한 영변에 대해 제한공습을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중앙정보국장은 서류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NEO(Noncombatant Evacuation Operation) 프로그램, 즉 민간인 소개(疏開) 계획입니다.”
국무부장관이 나서더니 중앙정보국장의 말을 끊었다.
“NEO는 한반도에서 대형 재난이 발생하거나 무력분쟁이 벌어질 경우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도움을 받아 미국인을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대피시키려고 마련한 프로그램입니다. 1차 북핵 위기 이후 주한 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은 이를 숙달시키기 위해 ‘커레이저스채널(Courageous Channel·용기 있는 항로)’이라는 이름의 정기훈련을 매년 두 차례 실시해 왔습니다.”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그렇게 많은 인원이 일시에 빠져나오면 한국인들이 눈치채지 않겠소?”
국무부장관이 말했다.
“당연하지요. 한국인들뿐 아니라 한반도를 주시하고 있는 일본인들도 금세 알게 될 겁니다. 커레이저스채널은 일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거든요. 천안함 폭침(爆沈) 직후였던 2010년 5월에도 정기훈련이 예정돼 있었는데 ‘한국인들의 불필요한 오해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취소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렇다고 한국인과 함께 미국인들이 저승으로 갈 순 없지. 2차 정보가 들어와서 북한의 핵 위협이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다면 곧장 ‘철수작전’을 시작하시오. 앞서 말한 건의사항들도 모두 승낙하겠소.”
# D-12 청와대
이날 대통령은 흥분돼 있었다. 다음 날로 예정된 유럽순방 때문이었다. 그는 영국을 간 뒤 프랑스·이탈리아를 거쳐 독일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영국에서는 여왕이 VIP에게만 제공한다는 마차(馬車)를 내준다고 했다. 그 마차를 타고 유서 깊은 버킹엄궁까지 간다는 상상에 대통령은 행복했다.
프랑스에서는 엘리제궁 만찬이 예정돼 있었는데 대통령을 설레게 한 것은 입맛에 맞지 않는 프랑스 요리보다 북한과 함께 루브르박물관에 지은 ‘남북한 통합 문화관’ 테이프 커팅이었다. 원래 한국문화관만 있던 것을 모든 비용을 한국이 다 대고 프랑스 쪽에 사정해 겨우 성사시킨 것이었다.
이탈리아 순방에 ‘통일 대통령’으로서의 대미(大尾)를 독일에서 하기 위한 잠깐의 휴식이라고 대통령은 생각했다. “동·서독 통일의 주역으로 몇 년 전 숨진 콜 수상처럼 나도 첫 남북한 통일 대통령이 돼야지” 하며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 갑자기 몇 년 전 유럽 순방 때의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대통령은 “사상 최초의 통일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아내는 종북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의 흔적을 찾아 그의 고향에서 가져온 흙을 뿌렸다. 그런데 아내가 한 말을 보수언론이 물고 늘어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괘씸한 인물이 있었다. 한 월간지의 편집장이라는 작자였다.
그의 악의(惡意)에 찬 칼럼은 하도 읽어 이제 눈 감고도 줄줄 외울 정도였다.
“남북한이 통일하는 게 그리 싫은가?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언론인이라는 작자가 말이야. 아직도 이 지구상에 좌파니 우파니 색깔 논쟁을 벌이는 사람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대통령은 생각했다.
“보수의 수준이라는 게 그렇지, 뭘. 내가 반드시 그들이 옳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어.”
이렇게 대통령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門)에서 할 역사적인 연설의 원고문을 다시 읽어 보기 시작했다.
“반드시 전 세계가 감동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 그날 밤 북한 방현 비행장
▲북극성-2 미사일 기지를 시찰하는 김정은.
김정은은 평양 인근 방현 비행장에 있었다. 그의 앞에는 연료를 주입한 ‘화성-12형 미사일’이 은빛 몸체를 반짝거리고 있었다. 원래 이 미사일은 2단 추력을 받도록 설계돼 있었다. 100여t의 1단 추력으로 미사일을 띄운 뒤 5~10t의 2단 추력을 갖추면 ‘화성-12형’은 곧장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된다.
즉 ‘단(段) 추가’와 ‘비행 중 단 분리’, 그리고 이 미사일에 적합한 핵탄두의 완성과 핵탄두를 실은 탄두부의 대기권 재진입 기술만 개발했다면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에 이어 미국 본토(本土) 어디든 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유엔의 제재와 자금부족 때문이었다.
대신 북한이 생각해 낸 게 갱도(坑道) 활주로와 격납고에 미사일을 숨겨 놓은 뒤 한미 정찰위성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될 때 숨겨 놓은 미사일을 꺼내 발사하는 전술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원래 군용(軍用)으로 쓰다 민간 국제공항으로 만든 원산 갈마 비행장 옆에 새로 만든 ‘강다리 비행장’이다.
2002년 공사를 시작해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인 2012년 완공된 ‘강다리 비행장’에는 두 개의 활주로가 있다. 그중 하나가 해발 140여m의 야산(野山)을 관통해 건설했다. ‘1번’이라 불리는 지상 활주로와 달리 ‘2번’으로 불리는 이 활주로는 이 야산을 뚫고 건설한 것이다.
갱도 활주로의 목적은 한 가지였다. 유사시 한미연합군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 1번 활주로와 2번 활주로의 남쪽 부분이 파괴되더라도 2번 활주로의 북쪽은 140m의 산이 ‘방패’가 되는 것이다. 이 활주로에는 다른 용도도 있었다.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를 넣는 곳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군사용어로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를 ‘TEL’이라고 한다. ‘수송’의 Transport, 기립을 뜻하는 Erection, 발사를 뜻하는 Launch의 약어다. 몇 년 전 미국 존스홉킨스대가 운영하는 ‘38노스’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강다리 비행장에서 폭발 흔적이 있었음이 처음 공개됐다.
김정은은 그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었다.
“종간나 새끼들. 미사일을 쏘려다 발사 전에 미사일이 터지는 사고를 쥐새끼들처럼 알아냈지. 그래 봤자 소용없다. 며칠만 기다리라. 곧 통일의 날이 올 테니.”
김정은은 ‘화성-12형 미사일’을 쓱 돌아보더니 방현 비행장을 떠나 어디론가 향했다.
방현 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평북 동창리 서해(西海) 위성 발사장이었다. 동창리로 향하는 위장(僞裝) 전용차 안에서 김정은은 강다리 비행장에서 그동안 벌어졌던 숱한 미사일 시험과 그 과정에 겪은 고난과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진땀을 흘렸던 날들을 떠올렸다.
“2016년 6월 22일에는 남조선 애들이 ‘무수단’이라고 부르는 ‘화성-10형 미사일이 두 발을 발사했지. 첫 발은 150km를 날아가 공중에서 폭발하고 두 번째는 고각발사해 1413.6km 상공까지 치솟은 뒤 400여km를 비행했다. 여섯 번 만에 화성-10형 발사에 성공한 것인데 …. 그때도 이 갱도 활주로에 무수단 이동식 발사대를 숨겨 놓았는데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은 그걸 몰랐어. 강다리 비행장보다 더 전방에 있는 황해북도 곡산 비행장의 갱도 활주로가 완공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
# D-11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북한의 무수단 미사일은 2500~4000㎞의 사정거리를 자랑한다
이틀 전 멤버가 다시 모였다. 표정이 그때보다 훨씬 굳어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보고서는 김정은이 드러내 놓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는 걸 입증하고 있었다. 김정은의 신호만 떨어지면 곧바로 북한의 미사일이 남한의 주요 타깃을 향해 발사될 것이다. 몇 분 내에 한반도는 아비규환의 불바다로 변할 것이다.
긴급상황(Urgent) SHAPE \* MERGEFORMAT - KH-12 정찰위성 총 5대와 SAR 위성 3대를 북한 상공에 모두 투입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파악했음. - 국가안보국(NSA)의 통신감청에는 별다른 징후 포착되지 않음. - 평안북도 구성시 방현 비행장에 ‘화성-12형’ 11기 여전히 기립 중. - 전방 지역에 스커드B형 미사일 10기 확인. - 평양 부근 동창리 미사일 기지에 무수단 미사일 15기 추가 기립 확인. - 북한에는 모두 15개 비행장에 갱도 격납고가 건설돼 있음. 다른 비행장의 갱도 격납고도 확인 필요. - NEO(Noncombatant Evacuation Operation) 프로그램, 즉 민간인 소개계획 즉각 시행 요망. - 중국 주석과 러시아 대통령에게 핫라인으로 북한 통제 요청. - 데프콘2(실탄 지급과 휴가·외박장병 전원 귀대로 부대 편제인원 100% 충원)로 격상 명령 하달. |
대통령이 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젊은 친구가 끝내 일을 저지르려는 모양이지? 그럼 총 36기의 미사일이 발사되면 예상되는 피해는?”
합참의장이 말했다.
“화성-12형은 준(準) 대륙간탄도미사일, 즉 IRBM입니다. 독성이 강한 질산을 산화제로 쓰기 때문에 한 번 주입 시 1주일 안에 발사하지 않으면 엔진이 부식됩니다. 최대 사거리가 4000~5000km으로 알래스카가 타격권에 들어옵니다.”
“으~음.”
대통령이 신음했다. 잠시 대통령의 안색을 살피던 합참의장이 보고를 이어 갔다.
“스커드 미사일은 아시다시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러시아에서 도입해 걸프전 때 처음 사용했습니다. 여러 번 개량이 이뤄졌는데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스커드는 B형으로, 그들 용어로는 화성5호입니다. 최대 사거리는 300km로 남한 대부분이 사정권입니다.”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그 발음하기도 힘든 무수단 미사일이라는 건 또 뭐요?”
합참의장이 말했다.
“무수단은 북한의 지명(地名)인데 사거리가 2500~4000km입니다.”
대통령이 양손으로 감싸쥐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머리가 다 헝클어져 있었다.
“그 빌어먹을 녀석이 그럼 미국과 일본과 한국을 동시에 겨냥하고 있다는 거요?”
백악관 집무실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국가안보보좌관이 침묵을 깼다.
“빨리 일본 총리에게도 알려줘야겠습니다. 영국 총리에게도 전화하시고요. 한국 대통령에게는 어떻게 할까요?”
대통령이 말했다.
“영국과 일본 지도자에게는 즉시 전화를 연결하시오. 한국 대통령은 한미연합사를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라고 하시오. 그 친구 가진 것도 없이 초대 통일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뻐기더니….”
# 같은 날 백악관 집무실
미국 대통령이 영국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시오? 긴급한 정보가 있는데 김정은이가 마침내 광분한 모양이오.”
영국 총리가 말했다.
“전쟁 징후가 확실합니까?”
대통령이 말했다.
“미사일 36기를 곧추세워 놨소. 한국 내에 있는 미국인들을 즉각 소개(疏開)시킬 계획이오. 영국도 준비를 하시오. 내 특별히 알려드리는 것이오.”
미국 대통령이 다시 일본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본 총리는 영국보다는 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미 대통령 각하. 우리는 이미 자위대를 통해 북한의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내각조사실을 통해 일본인 대피 계획을 즉각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하실 계획입니까?”
미국 대통령이 말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작전계획 5015대로 할 생각이오. 그런데 불분명한 것이 ….”
일본 총리가 잽싸게 물었다.
“뭡니까? 그게.”
미국 대통령이 말했다.
“한국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할 각오가 돼 있는지 그걸 믿지 못하겠어요. 자유는 거저 얻는 게 아닌데 ….(Freedom is not free.)”
일본 총리는 아부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가 태평양 건너 도쿄의 집무실에서 작은 두 눈을 번쩍이고 있을 것이라고 대통령은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 총리가 말했다.
“저희는 대통령과 함께 싸울 것입니다. 전비(戰費)도 갹출하겠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변치 않는 친구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이제 중국 주석에게 전화를 했다. 중국 주석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가 아무리 말려도 김정은은 듣지 않습니다. 다만 미국이 지상군을 동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만일 지상군이 한반도에 도착한다면 우리 중국도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전화를 거느라 지쳐 가고 있었다. 러시아 대통령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사냥을 하러 가 연락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러시아 대통령궁 비서들이 대고 있었다. 대통령은 믿지 않았다.
“음~, 이 불곰 같은 친구가 아예 나를 무시하는구먼.”
# D-11 오전 10시
성남 서울공항에 붉은 색 카펫이 깔리고 의장대가 도열했다. 10박11일의 유럽 4개국 순방을 떠나는 대통령을 위한 행사였다. 대통령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 옆의 부인은 과거에 한 영부인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전 주한 미국대사 부인에게 벗어 줘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한복과 비슷한 차림이었다.
대통령 부인의 가방에는 같은 옷이 색깔별로 여러 벌 있었다. 누군가 원하면 그 자리에서 훌렁 벗어 줄 요량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외국에 가는 게 너무 행복했다. 젊었을 때는 ‘군대도 안 간 사람이 무슨 대통령이냐’는 비판을 받고 고생깨나 했는데 역시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옛 말이 사실이었다.
# D-11 오전 11시
대통령 일행이 탄 비행기가 떠난 뒤 성남 서울공항 VIP대기실에서는 설전(舌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미연합사령관과 주한 미군사령관으로부터 북한의 도발 징후를 보고받은 국방부장관은 대통령이 떠나기 전 이런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은 한사코 그를 만류했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이 떠난 뒤 눈빛마저 달라졌다.
“아니, 꼭 이런 경사스런 행사에 북한이 도발한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소? 북한이 미사일을 쏜 게 어디 한두 번입니까? 그 사람들 싸울 의지 없어요. 당장 전쟁이 시작되면 전투기를 띄울 연료조차 없는 나라라는 걸 장관도 아시잖습니까?”
국방부장관은 기가 막혔다.
“전쟁이 꼭 전투기 날리고 전차(戰車) 몰고 미아리고개 넘어야 시작됩니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핵 미사일 몇 방이면 상황이 종료된다고요. 그런 걸 대통령도 아셔야 ….”
이때 누군가 말을 끊었다. 친북(親北) 인사로 낙인 찍혀 임명할 때부터 언론의 비판을 받은 사람이었다.
“아직도 전쟁 운운하니, 이 정부의 장관 맞습니까? 언제는 감군(減軍)해도 된다고 큰소리 펑펑 치더니. 북한이 미사일 쏘면 미국이 가만히 있겠어요? 통일 선언하러 가는 대통령께 좋은 소식은 못 전할망정.”
국방부장관은 할 말이 없어 VIP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대통령이 떠난 하늘이 유달리 붉었다. 불길했다.
# D-10
서울 용산 캠프 개리슨
새벽부터 사람들의 행렬이 미군 용산기지 내 ‘캠프 개리슨’으로 몰려들었다. 캠프 개리슨은 공식 명칭이 제34지역지원단이다. 이 조직은 전쟁이 임박하면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철수를 지원한다. 이들은 약 1시간 30분 만에 대형 트럭에 나눠 타고 경기도 평택의 캠프 험프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쉴 틈도 없이 한참 프로펠러에 속도가 붙은 치누크 헬기에 나눠 타고 대구의 캠프 워커로 이동한 뒤 다시 같은 기종의 헬기로 김해 공군기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C-130 허큘리스 수송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2800여 대가 생산된 C-130 허큘리스 수송기는 130명을 태우고 이륙했다.
한 미군 대위는 상공으로 올라가는 수송기를 바라보며 “우리는 군인들이 가족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하고 걱정하길 원하지 않는다”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내년에 정년을 맞는 한국인 군무원은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 같은 날 용산구 동부이촌동
‘리틀 도쿄’라 불리는 이 동네는 일본어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일본 상사원들이 주거환경이 좋다며 몰려들어 아침이면 아이들을 통학버스에 태워 보낸 뒤 일본어로 수다를 떠는 일본 아낙네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날은 한꺼번에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듯했다.
# 같은 날 KTX 예약센터
이날 근무자는 KTX 예약현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닷새치 KTX 경부선 표가 다 매진된 것이었다. KTX는 서울-부산에 하루 46편이 편성되며 입석표까지 치면 최대 1043명을 실어 나를 수 있다. 하루 46편이면 4만7978명, 닷새면 23만9890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근무자는 의아했다. 추석이나 설날도 아닌데 갑자기 KTX 표가 닷새치나 완전 매진된 것은 처음이다. 근무자는 상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임박한 시간 개찰구에 내려가 보니 하나같이 외국인들이었다. 그들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짐 크기도 통일한 것 같았다.
근무자는 자신의 SNS를 통해 ‘한국에 사는 미국인들이 전부 부산으로 가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고 알렸다. 머지않아 그의 SNS에 2009년 5월 14일부터 사흘간 미군이 실시했다는 ‘커레이저스채널’ 훈련 내용을 보도한 기사가 링크돼 올라왔다. 내용을 살펴보는데 댓글이 폭주했다.
*
주한 미국인의 탈출 경로는 크게 두 가지다. 비행기를 통한 탈출(fly-away)과 수송선박을 통한 탈출(sail-away)이다. 위키리크스 전문에 따르면 민간인 대피계획 가운데 비행기를 통한 탈출은 오산 미7공군기지를 통해 일본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나 후텐마 기지로 수송하는 것이다.
또 다른 수송선박을 위한 탈출은 한반도 전역에 거주하는 미국민을 철도를 이용해 부산에 집결시킨 다음 선박을 이용해 일본으로 대피시키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전쟁을 대비해 용산 등 18개의 집결지와 대피통제소(Evacuation Control Center)를 설치하고 대피 희망자 가운데 적격자를 선별한다.
미국 정부는 실제 상황에서 우선 대피시켜야 할 인원을 내부적으로 정했다. 1순위가 주한미군의 배우자와 자녀 등 직계가족과 군무원, 민간인 정부 관료다. 이들은 대부분 미 공군기지에서 이륙하는 수송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대피 계획 대상이다.
다음으로는 기타 미국 시민권자이고 마지막이 미국 시민권자의 직계가족이다. 이들은 한국군이 제공하는 열차를 이용해 부산으로 향한 뒤 배 편으로 일본으로 떠난다. 한반도 전면전을 상정해 한미연합사령부가 작성해 둔 작전계획 5027에는 이를 위해 수십 편의 열차를 마련하는 시나리오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2009년 커레이저스채널 훈련은 주로 주한미군 가족과 군무원을 대상으로 이뤄진 비행대피 연습이었다. 총 50명의 자원자가 실제로 용산 미군 기지 대피통제소에 나와 신분을 확인받고 오산 공군기지에서 오키나와까지 미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날아간 다음 이틀을 머물고 돌아오는 스케줄이다.
훈련에 참가한 이들은 각각 여권과 주한미군 가족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지참하고 사흘치의 간편 식량과 물, 약간의 원화와 달러화 현금,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손전등, 만성질환자의 경우 30일 분량의 의약품 등을 휴대했다. 이들 수화물은 모두 합해 1인당 30kg 내외로 중량이 제한됐다.
미군 측은 기지 내 대피통제소에서 자격을 승인받은 이들에게 식별용 바코드를 부착한 흰색 팔찌를 배부했다. 이후 비행장 진입과 수송기 탑승, 착륙 후 일본 입국 과정의 주요 관문마다 NTS(NEO Tracking System)라는 이름의 탐지장비를 설치해 누가 어느 단계의 대피과정에 있는지 실시간 확인할 수 있도록 자동화했다. 별도의 인원점검에 소요되는 시간낭비를 줄이려는 조치인 셈이다. 시스템 운영과 대피계획의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주한미군 각 기지에는 NEO 프로그램만 전담하는 부서와 인원이 할당돼 있음을 전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대피항로의 목적지가 일본이므로 NEO 프로그램과 훈련에는 일본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전문은 당시 훈련도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들이 미군 측 안내를 받아 참관했다고 전한다. 특히 50명의 인원이 실제로 대피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와 관련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난점도 확인했다.
한 필리핀 출신의 여성이 일본 비자가 없어 최종적으로 입국하지 못한 채 도쿄 요코타 기지에 머물러야 했다. 위키리크스 전문은 “참가자 개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피자의 지참 문서를 꼼꼼히 점검해야 할 필요성과 일본 정부와의 사전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대피 대상자의 애완동물도 계획에 포함되느냐를 두고 미국 대사관과 주한미군 사이에 혼선이 빚어졌다는 전문의 마지막 단락이다.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사전 논의 과정에서 애완동물 역시 포함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 구체적인 범위를 놓고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1년 5월 실시한 커레이저스채널 훈련에 관해 미국 국방부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동영상에는 용산 기지 대피통제소에서 강아지에게 예방접종을 하는 장면이 포함됐다. 2009년 이후의 훈련에는 애완동물도 함께 대피하는 절차가 포함됐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억해 둘 것은 이러한 NEO 프로그램을 실제로 가동하는 것은 상황이 매우 극단적으로 번졌을 경우에 한한다는 점이다. 1994년 당시 백악관과 국무부는 각국 대사관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항공편을 예약해 두던 시점까지도 NEO를 가동하지 않았다.
관계자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섣불리 NEO를 가동할 경우 위기를 심각하게 증폭시킬 수 있음을 충분히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이는 만에 하나 한반도 전쟁 발발이 현실적인 문제로 떠오르는 경우에도 미국이 자국민 소개계획을 먼저 가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프로그램 가동 여부로 한반도 위기상황의 심각성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가 의미 없는 이유다.
(2) “서울 시민 여러분! 백두산의 김정은이 왔습네다”
▲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
# D-9
인천공항
끝도 없이 외국인들이 공항으로 밀려들었다. 주로 일본인이었고 미국인처럼 보이는 외국인들이었는데 억양이 더 딱딱했다. 알고 보니 영국인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뿐 아니라 외국계 항공기까지 모두 예약했다. 이코노미뿐 아니라 프레스티지, 일등석까지 모든 좌석이 매진됐다.
일본인과 영국인들이 빠져나가자 이번에는 프랑스·독일 등 유럽계 한국 거주자들과 캐나다·호주 등 영연방 국가 계열, 뒤를 이어 남미·중동계 주한 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자기 나라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무조건 한국 밖으로 빠져나갈 표를 원했다. 그 틈을 타 암표 장수까지 등장했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을 하려고 공항에 온 한국인들은 이 어수선한 장면이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누군가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수군댔다.
“주한 외국인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있다는데 …?”
“그게 무슨 뜻이야? 전쟁이라도 난다는 거야?”
이렇게 수군대던 이들은 가족에게 일제히 전화를 걸어댔다.
소위 ‘돈 있는 나라’ ‘정보 있는 나라’ 외국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동남아·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메웠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이 공항으로 끝없이 파도처럼 밀려 왔다. 인천뿐 아니라 김포공항·김해공항·제주공항 등 국제선이 운항하는 곳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처음에는 자포자기하던 동남아·아프리카 출신 외국인들 가운데 누군가가 외쳤다.
“우리에게도 티켓을 달라!”
“우리도 생존권이 있다!”
“차별을 철폐하라!”
한국어를 얼마나 배웠는지 마치 전문 시위대 같았다. 공항은 곧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 사이 권총을 들고 군중 앞으로 나선 외국인들도 있었다. 국내에서 암약하던 외국인 갱들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갱들은 익숙한 듯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공항을 폐쇄하라!”
“인근 편의점과 레스토랑에서 먹을 것과 식수를 가져오라!”
“면세점을 약탈해 챙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챙겨라!”
“한국인의 출입을 통제하라!” ….
눈에 힘을 잃었던 외국인들은 갱 두목들의 지시에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역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었다. 그들은 사냥개들처럼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이들은 조선족들이 주축이 돼 신길동 등지를 장악한 연변 흑사파와 함께 국내 외국인 근로자 구역을 양분한 이태원 나이지리아파 행동대장급들이었다. 그들이 꺼내 든 무기는 모양도 각양각색인 칼, 도끼, 체인, 쇠스랑부터 권총, 기관총, 심지어 수류탄까지 있었다.
한국인 직원들은 이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공항 경비를 맡는 경찰이 있었으나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도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한때 아시아의 허브라 불렸던 인천국제공항은 외국인들의 거대한 요새(要塞)처럼, 슬럼처럼 험악하게 변했다.
# D-8
강남 외국어학원가
보통 때라면 북적였을 토익·토플학원 강의실은 을씨년스런 풍경이었다. 한순간에 외국인 강사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평소 사용하던 물품까지 놔둔 채 어디로 간다는 소리도 없이 없어졌다. 전화를 해 봐도 “지금은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반복될 뿐이었다.
비슷한 시각, 강남의 돈 있는 자녀들만 다닌다는 영어유치원은 아이들이 보채는 소리와 어머니가 그들을 달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아이는 “엘리자베스 선생님과 오늘 생일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어디로 가신 것이냐”며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할 말이 없어진 어머니는 아이를 꼭 감싸 안을 뿐이었다.
# D-8
영국 런던의 한 호텔
대통령은 여왕이 베푼 만찬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국력을 반영하듯 여왕의 대접은 환대(歡待)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마(白馬) 두 필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숙소에서부터 유서 깊은 옥스퍼드 서커스-그린파크를 거쳐 황금빛 사자 석상 분수가 있는 버킹엄궁 앞에 도착했다.
여왕은 손수 궁 입구까지 마중나왔으며 찰스 왕세자를 비롯해 외신(外信)에서만 보던 왕족들이 하나같이 정장을 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왕의 만찬은 영국식과 한국식을 섞은 것이었다. 시골 출신인 자신을 위해 신선한 어류 요리가 서빙됐고 주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이날 오전 대통령은 영국 의회에서 “6·25 때 한국을 도와준 영국군 노병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연설로 수차례 박수를 받았다. 의회 방문을 마친 뒤엔 빅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국전 관련 동상에 헌화했고 이어 템스강을 건너 런던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런던아이’에 탑승했다.
기나긴 일정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외교부장관이 안색이 하얘진 채 보고서를 들고 왔다. 원래 백발이었지만 며칠 새 머리가 더 센 것 같은 그가 갑자기 생경해 보였다.
“무슨 일 …?”
대통령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외교부장관이 본국의 상황을 전달했다.
“북한이 미사일 30기 이상을 기립시켜 놓았다는 정보입니다.”
그는 대통령의 멍한 표정을 흘끔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 갔다.
“주한 미국인 20만명 이상이 이미 한국을 탈출했고 뒤이어 일본·영국·프랑스 등 유럽인들도 한국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엑소더스(Exodus)입니다.”
영어에 능한 외교부장관이 ‘엑’ 자에 힘을 주는 게 왠지 서글퍼 보였다.
“한미연합사의 방어태세는 어떻답니까?”
대통령의 말에 외교부장관은 다른 보고를 계속했다.
“인천공항을 비롯해 국제선 노선이 있는 공항들이 전부 마비됐습니다. 가난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자기들에게도 비행기 편을 마련해 달라며 공항을 점거했습니다. 일부는 중무장했다고 합니다 ….”
호텔 방 밖으로 유서 깊은 영국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대통령은 할 말을 잊었다.
“북한이 그럴 리가 없는데, 통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
대통령은 외교부장관에게 “국무총리와 연락해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전군지휘관 회의를 열어 확고한 안보태세를 확인시켜 주라”고 했다.
# D-7
여의도 증권시장
‘검은 월요일’, ‘블랙 먼데이’라는 굵직한 제목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증권시장 지수가 연일 폭락하고 있었다. 한국 경제의 상징으로 세계적인 회사인 삼성전자가 사흘째 하락 제한폭인 30%씩 하락하고 있었다.
한때 242만원에 달했던 삼성전자는 첫날 30%가 하락해 170만원대로 미끄러지더니 다음 날도 하한가를 맞아 120만원대로 추락했다. 이틀 만에 몇 년 전 주가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하락세는 갈수록 거세졌다. 사흘째 다시 하한가를 맞아 100만원 대가 무너지더니 나흘째 70만원, 닷새째 50만원 대로 떨어졌다. 증시 전문가들은 “끝이 안 보인다”고 하소연했다.
‘대장주’인 삼성전자가 이 모양이니 다른 주식은 팔래야 팔 수도 없었다. 외국인들은 끊임없이 매도 주문을 냈다. 증권거래소가 견디다 못해 서킷브레이커, 즉 주식매매 일시정지 명령을 내자 시장(市場)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주식을 팔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은행으로 몰렸다.
은행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예금자들이 돈을 인출할 것에 대비해 준비했던 지급준비금이 바닥나 버렸다. 사람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항의했지만 은행 직원들은 “당분간 돈을 찾을 수 없다. 댁에게 가서 기다리고 계시면 연락 드리겠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예금자들은 분명 예금액수가 적혀 있었지만 한푼도 찾을 수 없는 통장과 언제 자기 차례가 될지 모를 순번이 적힌 종이 쪼가리를 품에 넣은 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D-7
서울로 몰려드는 종군기자들
미국과 영국의 종군기자들이 속속 서울로 모여들고 있었다. 일본 기자들도 수십 명이 입국했다. 그들은 청와대 혹은 이순신장군 동상이나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북쪽을 배경으로 한 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제목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Korean Crisis’였다.
개중에는 전쟁만 찾아다닌다는 CNN의 유명 여성 종군기자 크리스티안 아만푸어도 있었다. 나이가 육십을 넘긴 아만푸어는 국방색 군복을 입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지은 채 “한국전쟁이 임박했다. 앞으로 수일 내에 이 유서 깊은 도시가 화염에 휩싸일지 모른다. 이것은 내가 취재하는 마지막 전쟁이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외신들과 달리 국내 지상파와 종편은 대통령이 유럽 순방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자신감 있는 통일 외교에 세계 지도자들이 격찬을 보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전쟁설’에 대해서는 ‘혼란을 부추기려는 일부 세력이 한 것’ ‘전쟁에 미친 보수세력의 자작극’이라고 분석했다.
# D-6
이마트·롯데마트·백화점·재래시장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쌀과 라면, 생수 등을 카트에 채우고 있었다. 전국의 이마트·롯데마트·백화점이 전부 비슷한 상황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눈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직원들이 열심히 빈 곳을 채워도 사람들은 걸신(乞神)들린 것처럼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사재기하고 있었다.
전쟁 때 왜 필요한지 모를 물건도 동이 났다. 화장품, 선크림, 프라이팬, 주전자가 왜 전쟁 때 비축해야 할 물품인지 평소라면 분간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직원들도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쇼핑 대열에 합류했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곳곳에서 비명과 유리창 깨지는 소리, 상품 전시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반면 재래시장은 사정이 달랐다. 눈치가 누구보다 민감한 상인들은 일제히 가게에 두꺼운 자물쇠를 잠근 채 셔터까지 내려 버렸다. 시장 안은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파리만 웅웅거릴 뿐이었다. 며칠 전까지 후끈한 인간의 냄새가 이곳을 메우고 있었지만 지금은 짙은 생선 비린내와 함께 죽음의 그림자만이 어른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 D-6
국무총리의 대(對)국민담화
국무총리는 담화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부 근거 없는 악성 루머가 번져 가고 있습니다. 북한은 대한민국과 전쟁을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남북 양측은 빠른 시일 내에 개성공단을 재개하기로 이미 합의했으며 금강산관광도 다시 시작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영국 방문 중에도 의연히 직무를 수행하고 계시며, (중략) 한미 양국은 완벽한 안보태세를 갖추고 만일의 사태에 긴밀히 대비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국군을 믿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기 바랍니다.”
# 2시간 뒤 B-1벙커
대한민국에는 221개소의 전쟁지휘소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9개 지하벙커다. 서울 관악산의 B-1벙커는 수도방위사령부가 관리하는 한국정부의 군지휘소로 전쟁이 발발하면 군과 주요 부처 관계자들이 함께 이곳으로 들어와 전쟁 지휘를 한다.
이 벙커에 2시간 전 TV에 나와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던 국무총리를 비롯해 전 각료들이 모였다. 그들이 민방위복을 입고 심각한 표정으로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이 공중파를 비롯해 종편채널에 ‘Live’라는 표시와 함께 생방송됐다. 종편 출연자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초전 박살”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외쳐대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구라’를 총동원하고 있었다.
# 같은 시각 B-2벙커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지하에 위치한 B-2벙커에 육·해·공군 장성(將星)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북한의 위협이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실제 전쟁 개시의 주역들, 즉 한미연합사 소속 장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이라고 해서 모였을 뿐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한 장성이 옆에 있는 장성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가족들은 다 대피시켰어?”
옆자리의 장성이 말했다.
“응. 급한 대로 일본 쪽으로. 미국 유학 중인 아이 보고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고. 당신은?”
먼저 물었던 장성이 말했다.
“나도 다 내보냈어.”
# 같은 시각 CC서울
서울 용산 미군 기지 내에 위치한 CC서울은 한미연합사 지하벙커다. 1979년 12·12사태 때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급히 피신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보통 ‘미8군 벙커’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미 첩보위성과 U-2정찰기, 통신감청 기지로부터 지득한 각종 정보가 모인다.
한미연합사령관은 이곳으로 모인 장성들에게 “아무래도 CP탱고로 옮겨야 할 것 같다”고 했다. CP탱고는 1970년대에 경기도 성남의 캠프 탱고에 건설된 주한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육·해·공 전구(戰區) 작전지휘소(Theater Air Naval Ground Operations)의 약자다.
그곳으로 이동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참석자들은 알고 있었다. CC탱고는 핵 공격에도 견딜 수 있으며 외부의 지원 없이도 2개월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물품이 비축돼 있다. 탱고에는 한국군 고위 관계자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정보시설 SCIF가 있다. 이곳에는 한반도 상공을 감시하는 첩보위성과 주한미군 U-2정찰기의 대북 감시정보는 물론 미국 본토의 중앙정보국(CIA), 국방정보국(DIA)이 파악한 최신 첩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 공군 MCRC
한국 공군의 오산(1MCRC)과 대구(2MCRC)의 중앙방공통제소에서 근무하는 인력들은 파김치가 돼 있었다. 1주일째 24시간 비상 전시 근무체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에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레이더가 수집한 공중감시 자료가 모인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공중상황을 감시하고 방공작전을 수립해 시행한다.
분명 북한 공군의 움직임은 없었다. 만일 있었어도 별로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공군력은 댓수만 많을 뿐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행기를 움직일 연료가 부족해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침묵하는 SA-2, SA-5지대공 레이더는 거대한 격진(激震)의 전조(前兆)같이 음울했다.
# D-5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
엘리제궁은 듣던 대로 호화찬란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손길이 묻은 이 왕궁은 한때 나폴레옹 차지가 된 곳이었다. 세계 3대 미식(美食)이라는 프랑스 요리가 황금색 접시에 담겨 끝도 없이 나오고 있었으나 대통령은 영 식욕이 없었다. 조국에서 끊임없이 날아드는 기분 나쁜 뉴스 때문이었다.
만찬 전 대통령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남북한 통합 문화관’ 개막식에 참석했다. 테이프 커팅 순간을 기다려 왔는데 지켜보는 프랑스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프랑스어여서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속삭였고 개중에는 은근히 조소(嘲笑)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대통령은 이틀 전부터 북한측과 핫라인을 연결하라고 성화를 부려대고 있었다. 북측 핫라인은 신호만 갈 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 ‘웅~’ 하고 수화기에서 울리는 소리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에서의 연설 기회를 놓치는 게 너무 아쉬웠다.
# D-4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멤버들이 다시 모였다. 참석자들은 “또 무슨 미사일이 몇 대나 기립했을까” 하고 지레 짐작했다. 이날의 안건은 영 다른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 미사일 기지를 돌며 군인들을 격려하던 이 젊은 뚱뚱이의 모습이 갑자기 유령처럼 획 정찰위성의 렌즈 밖으로 사라진 것이다.
# 그 시각 평양
김정은은 군 수뇌부를 모아 놓고 “원수들의 머리통 위에 불벼락을 내릴 시점이 다가왔다”고 몇 차례나 큰소리쳤다. 그러면서도 한미연합전력의 정밀타격에 대비해 평양 인근을 비롯해 북한 전역에 구축해 놓은 지하 벙커 가운데 어디로 은신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매우 신중했다.
이날 그가 소집한 군 수뇌부는 5명뿐이었다. 자칫 많은 인원을 소집했다가는 그 안에 포함돼 있을지도 모를 미제 간첩에게 소중한 정보만 제공하는 꼴이 되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때부터의 인연으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직도 곁에 두고 있는 최룡해가 보고했다.
“장군님, 아시다시피 지하벙커는 김일성 수령님 시절부터 만들기 시작해 김정일 장군님 대에 다 완공됐습니다. 모든 지하벙커는 지하 100〜200m 깊이에 다량의 강화 콘크리트와 강철재를 이용해 건설돼 적의 핵 공격을 받아도 꺼떡없을 만큼 견고합니다.”
그 말에 김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룡해가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남조선에 불벼락을 내리면 미국은 분명 보복을 할 텐데 그렇다면 우리 인민군 전쟁 지휘부가 1차 대상이 될 것이며 그중에서도 지하벙커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여기서는 2, 3개월 이상 전쟁을 지휘할 수 있고 여차하면 중국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중국으로 갈 수도’라는 말에 김정은의 미간이 움찔하는 것을 최룡해는 놓치지 않았다. 심장이 철렁했다.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전쟁을 해 보기도 전에 김정은 손에 죽을 판이었다. 최룡해가 서둘러 입을 열어 김정은의 불안감을 달래기 시작했다.
“지하벙커의 세부 위치와 시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내부에 핵·미사일 전력을 총괄하는 부대(전략군)를 비롯해 일선 주요 부대를 장군님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통신망과 물과 식량 등 전쟁물자, 회의실, 핵·화생방 방호 시설도 갖추고 있습니다. 중국과의 접경지역과 수십 km 떨어진 곳에도 지하 벙커가 여러 개 있는데 미제나 남조선은 중국 눈치를 보기 때문에 그런 곳을 타격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북한 수뇌부가 대피용 땅굴망을 전역에 구축했다는 사실은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2009년 평양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지하 300m 깊이의 거대한 김정일 전용 땅굴에 대해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황 전 비서는 당시 이렇게 증언했다.
“수십 년 전 평양 지하철과 연결된 비밀 땅굴에 직접 가 봤다. 지하철에서 다시 150m 정도 더 내려갔다.”
# D-3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
이미 네이버 등 한국의 인터넷은 ‘전쟁’이라는 단어가 점령한 지 오래됐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글은 한 네티즌이 쓴 ‘전쟁이 터졌을 경우에 개인적으로 대비하는 요령’이라는 글이었다. 이 글을 쓴 인물의 신원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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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과 공무원은 대비 계획이 있으니, 개인적으로 준비가 필요하다. 적어도 수도권 주민들은 전쟁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전쟁 대비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방공호 대피다. 집이나 직장 주변의 방공호 위치와 가는 길을 사전에 파악하라. 최소한의 생수와 비상식량과 약간의 현금과 라디오 등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한다.
폭격이 시작되면 전기, 가스, 수도, 통신, 교통 등 도시기능이 전면적으로 마비될 것이다. 대부분의 피해는 북한의 방사포나 장거리 대포로 인한 것이고 일부 노동미사일 등 단거리 미사일 공격도 있을 것이다. 6·25 때처럼 북한군 주력부대가 휴전선을 넘어 서울을 침공할 가능성은 없다.
장사정포를 맞고 아파트가 붕괴되는 등의 일도 가능성이 낮다. 개전 후 일반적으로 24시간, 늦어도 2일 정도면 대남 보복수단인 휴전선 부근 북한의 장거리포나 방사포는 거의 다 제거되어 수도권 지역에 떨어지는 포격은 거의 멈추어서 피해가 그 이상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성급하게 남쪽으로 피란을 서두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남쪽으로 가는 주요 도로는 통제되고 또 엄청난 차량행렬로 거의 마비가 될 것이므로 섣불리 피란을 가다가는 피해가 더 클 수도 있다. 휴전선 부근 북한군의 주력은 길어야 3일 정도면 정리되고 그 이후에는 한국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진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일주일 정도만 서울에서 잘 버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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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은 네티즌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낙관적인 댓글이 많이 달렸다.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 “우리가 며칠 내로 이긴다”는 의견이 많았고 “북진통일”을 외치는 네티즌들도 많았다. 이 글은 다가온 전쟁에 대한 예민한 신경을 은근히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었다.
# D-2일
이탈리아 피렌체
대통령은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대한민국 역사에 새로운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있다”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는 “통일한국이 앞으로 태평양 시대를 이끌어 갈 것이며 통일한국에서 시작돼 중국~러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판코리아(Pan-Korea)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은 수행원들에게 “북한과의 핫라인이 여전히 불통(不通)이냐”고 짜증을 냈다. 수행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D-1일
일본 요코스카항
미국 핵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 호. 한반도 위기 때마다 곧잘 전개되는 미국의 최신 항공모함이다
대서양과 인도양에 있던 미 해군의 2개 항모(航母) 타격단이 한반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방향타를 틀었다. 일본 요코스카항에 정박하고 있던 레이건 항모 전단은 동해(東海)로 출항했다.
# 비슷한 시각
미국 워싱턴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합참의장은 하와이 소재 미 통합전투사령부 예하 태평양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특수부대들의 한반도 대규모 증파(增派)를 실행하라. 이 동원 명령에는 NBC 방호부대나 제독(除毒)부대의 배치도 포함된다!”
거의 비슷한 시각 미 공군사령관은 주한 미 7공군과 주일 미 5공군에 전술기를 증원하라는 명령을 시달했다. 이와 함께 일본 요코스카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 선단이 한반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단에는 전쟁 물자가 하역돼 있었다.
# D데이 새벽 3시
대연평도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0분쯤 이 섬을 향해 북한이 포격을 가한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이 포격을 하자 여기 주둔하던 대한민국 해병대는 대응사격을 했다. 북한 포격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원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이 전사했으며 군인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민간인도 2명(김치백, 배복철)이 사망했으며 3명이 다쳤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이날 전방지역에 기립해 있던 화성 5호, 즉 스커드B형 미사일이 차례로 불을 뿜었다. 제1기는 바로 이 섬, 즉 대연평도로 향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해병대원들과 대연평도 주민들은 5분 후 전원 사망하고 말았다. 스커드 미사일 한 방으로 대연평도는 무인도(無人島)처럼 변했다.
# D데이 새벽 3시10분
백령도
2번째 화성 5호 미사일이 발사됐다. 미사일은 연평도 바로 옆 백령도에 떨어졌다. 새벽 백령도와 대연평도는 불바다로 변했다. 주위가 마치 대낮처럼 하얗게 변했고 연기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이곳을 지키던 해병대원들은 전멸했다.
# D데이 새벽 3시15분
미국 CNN·영국 BBC·일본 NHK
미국 CNN방송 화면 자막에 ‘긴급(Urgent)’이라는 단어가 떴다. 곧이어 ‘한국이 공격당했다(South Korea is Attacked)’라는 자막이 등장했다.
1분 뒤 영국 BBC방송에서 처음 ‘대연평도·백령도’라는 지명이 나왔고 3분 뒤 일본 NHK 아나운서는 “자위대 방공레이더에 잡힌 미사일은 북한의 화성 5호”라고 말했다. 모두가 특종이었다. 이에 AP 등 세계 유수의 통신사들이 전황(戰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D데이 새벽 3시20분
포스코
이번에는 평안북도 동창리 미사일 기지에 기립돼 있던 무수단 미사일 15기 가운데 6기가 일제히 고각으로 발사됐다. 첫 발은 포스코로 향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박태준 포스코 회장의 땀과 눈물이 섞여 있던 한국 경제의 견인차 포스코는 미사일을 맞고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북한 미사일이 목표로 한 지점은 제1고로(高爐)였다. 제1고로는 1973년 7월 3일 완공돼 한국 철강신화의 서막을 올린 곳이다. 북한이 미사일 타격 목표를 선정하면서 역사적 의미까지 감안했다고 전문가들은 훗날 평했다.
# D데이 새벽 3시25분
광양제철소
무수단 제2탄은 광양제철소를 초토화시켰다. 광양제철소는 ‘파이넥스’라는 신공법을 개발한 곳이었다. 북한은 광양이 망가지면 주변 하동, 순천, 여수, 구례가 덩달아 타격받는다는 점을 확실히 계산하고 있었다.
# D데이 새벽 3시30분
경주 신월성 원전(原電)
무수단 제3탄은 신월성 원자력 발전소를 타격했다. 북한은 교묘하게도 방사능 누출을 피하기 위해 신월성 원자력 발전소의 굴뚝을 겨냥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한국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미사일의 폭발력에 거대한 원자력 발전소 굴뚝 파편이 흩어지면서 인근에 있던 감은사지 석탑 한 기가 무너져 내렸다. 바로 앞 문무대왕이 동해의 용(龍)이 되겠다며 잠들어 있던 대왕암에도 균열이 생겼다. 그것은 한국민의 저항 의지가 꺾이는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 D데이 새벽 3시40분
울산 현대중공업 골리앗 타워 크레인
무수단 제4탄은 울산 현대중공업의 상징인 골리앗 타워 크레인에 명중했다. 이 타워 크레인은 원래 ‘코쿰스 크레인(스웨덴어 Kockumskranen)’으로 스웨덴 말뫼의 코쿰스 조선소에 있었다. 높이가 138m로 세계에 있는 조선소 타워 크레인 가운데 가장 높다. 이 크레인은 2002년 여름 해체돼 울산 현대중공업 미포조선소로 옮겨졌다. 말뫼에서 크레인이 선적될 때 시민들은 대부분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16년 후 이 거대한 공업화의 상징이 한낱 쇠부스러기로 변하고 말았다.
# D데이 새벽 3시50분
창원국가산업단지
무수단 제5탄은 경상남도 창원국가산업단지 한복판에 떨어졌다. 방위산업체가 모여 있던 창원국가산업단지는 이 한 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 D데이 새벽 4시
여수국가산업단지
무수단 제6탄은 전라남도 여수국가산업단지의 심벌인 GS칼텍스 정유공장을 명중시켰다. 이 한 방으로 에너지 대란이 일어났다.
# 비슷한 시각
경북 성주 사드 포대
경북 성주에 배치된 사드 미사일. 배치 초기부터 주민들과 반미단체의 반발에 부딪혔다
사드 포대의 미군 지휘관은 레이더상에 북한 미사일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2017년 한국에 도입된 사드 1개 포대는 여전히 가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5월 새로 선출된 한국 대통령은 느닷없이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한국 대통령은 환경영향평가를 곧 끝낼 것처럼 말했지만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먼저 한 환경단체가 사드 레이더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성주(星州) 참외에 변종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좌파 매체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성주 주민들은 반정부 시위에 앞장섰다.
주민들은 사드 포대에 출입하는 군인들을 막아섰다. 주민들을 제지해야 할 경찰은 정권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주 사드 포대는 플래카드에 싸여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중 대표적으로 사람들의 빈축을 산 것은 이런 구호였다.
“나에게 참외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어서 울산의 한 종교인이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심각한 변형이 생겼는데 이 변형이 사드 레이더에서 방출되는 전자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몇 조각이 최근 떨어져 나갔다. 경찰은 수사 결과 ‘관광객이 장난 삼아 떼어 간 것 같다’는 내부 결론을 내렸지만 밝히지 않았다.
종교인들이 떼로 경찰서 앞으로 몰려와 확성기를 틀어 놓고 시위를 벌이는 게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한 아마추어 과학자가 자기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자파가 발생했을 경우 석조물(石造物)에 대한 피해 입증’이라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궤변을 연일 늘어놓고 있었다.
양식 있는 이들은 혀를 끌끌 찼지만 시청률 1위인 한 종편은 그를 인터뷰한 뒤 사흘 연속 그의 주장을 방영했다. 사람들은 “환경영향평가가 끝나더라도 사드를 배치하면 안 된다” “성주 인근의 아파트 외벽도 영향받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 방송사의 여론조사 결과 사드 반대가 80%에 달했다.
# 비슷한 시각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독일 통일에 이어 한반도 통일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이 파리로 가져갔던 이 문을 되찾기 위해 빌헬름 1세 황제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 유서 깊은 문 앞에서 세계 평화에 대한 소신을 열심히 펴고 있는데 수행원이 메모를 전달했다.
한반도 주요 목표에 북한이 미사일 타격. 백령도, 연평도에 북한군 상륙. 울산 현대중공업, 경주 신월성 원전, 포항 포스코 공장, 창원 국가산업단지, 광양제철, 여수국가산업단지에도 미사일 피해. 사망자 부상자 수 파악 중. 한미연합사 ‘참수작전’ 돌입. |
대통령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해 귀국 채비를 서둘렀다.
(3) “서울 시민 여러분! 백두산의 김정은이 왔습네다”
# D데이 오전 10시
괌의 미군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새벽 6시부터 스텔스 전략폭격기 B-2 6대가 차례로 발진했다. 길이 5km의 활주로 2개를 보유한 앤더슨 공군기지에는 이날 비상이 걸렸다. 한국의 2개 섬과 주요 산업시설을 북한이 미사일로 공격했다는 사실이 즉각 전해졌다.
스텔스 전략폭격기 B-2에 이어 ‘죽음의 백조’라고 불리는 B-1B ‘랜서’가 60t의 폭탄을 싣고 B-2의 뒤를 이었다. 채 4시간이 안 돼 한반도 영공에 진입했을 때 한국군의 F-15K, F-16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사전에 수차례 훈련한 대로 김정은을 제거하기 위한 ‘참수(斬首)작전’을 시작했다.
# D데이 오전 11시
미군은 평양 공습의 선봉을 한국공군 F-15K에 맡겼다. 한국공군 1호기 조종사는 슬램(SLAM-ER) 미사일 첫발을 평양 만수대 김일성 동상에 겨냥했다. 잠시 후 높이 20m인 이 황금색 동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종사는 두 번째 발을 김일성의 시신이 있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쏘았다. 시신 부패를 막는 데 연간 8억원을 쏟아부었다는 궁전과 액체 용액 냄새로 가득한 김일성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한국공군 F-15K가 선공(先攻)을 하자 미 공군 B-2가 사전에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일제히 J-Dam미사일을 발사했다. 정오가 되기 전 북한의 군사 목표물 1016곳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이어 B-1B ‘죽음의 백조’ 2대가 나란히 비행하며 북한을 융단폭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무도(舞蹈)였다.
한국공군의 F-15K, KF-16과 미 공군의 B-1B, B-2 폭격기가 북한 상공을 유린하는 동안 이를 막고 나선 북한 공군기는 한 대도 없었다. 북한의 SA미사일 사정권 밖인 6만~7만 피트 이상 상공에서 미군 AWACS가 쟁반 레이더를 돌리고 있었고 U-2기나 한국공군의 E-737 글로벌 호크 등이 매의 눈처럼 북한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 공군은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북한 방공망(防空網)을 무력화시켰고 수년 동안 훈련해 왔던 것처럼 북한 전쟁지휘소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동서 해안에는 한미 해군의 이지스함과 오하이오급 핵추진 잠수함이 토마호크 순항(巡航)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게다가 괌기지에서는 곧 또다른 B-2폭격기 편대가 F-22 스텔스 전투기와 전자전기의 엄호와 AWACS 공중경보통제기의 지휘를 받으며 2차 공세를 위해 날아올 예정이었다. 이제 한미 공군과 해군은 김정은과 북한군 수뇌부의 생사(生死)를 확인하는 순간 종전(終戰)을 선언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한미 공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교량을 비롯해 주요 항구도 무력화시켰다. 손대지 않은 북한의 유일한 시설은 영변 등지의 원자로와 핵시설이었다. 잘못 폭격했다가는 다량의 방사능이 유출돼 한반도가 죽음의 땅으로 변할 우려가 있어 그 임무는 해병대 등 지상군에 맡길 예정이었다.
# D데이 오후 1시
CP탱고
한미연합사 수뇌부가 CP탱고에 모였다. 한미연합사령관은 전쟁 발발 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초기에 백령도와 연평도에 미사일이 떨어지고 한국의 주요 기간산업이 큰 피해를 봤습니다. 당초에 미국 주장대로 사드 포대를 증강하고 한국군이 가진 PAC-2 미사일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PAC-3 미사일을 도입했다면 피해를 크게 줄였을 겁니다.”
이 말에 한국 측 장성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미연합사령관은 그 모습을 흘낏 살피더니 이내 그들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미연합군은 압도적인 공군 전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전쟁지휘소를 일거에 격멸했습니다. 북한은 반격하지 못할 겁니다. 작계 5015도 예정대로 발동하고 있습니다.”
CP탱고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 작전계획 5015
미공군과 한국공군이 평양을 비롯해 북한의 주요 목표물을 폭격하고 돌아오는 순간 한미연합군은 데프콘이나 워치콘의 상향 없이 바로 5015를 가동한다. 이를 위해 양국 대통령에게 사전 승인을 받아 놓는다.
작전계획 5027(영어: Operational Plan 5027; OPLAN 5027)은 1974년 처음 만들어진 대한민국 국군의 단계별 작전계획이다. 주로 짧게 작계 5027이라 부르며 숫자에서 50은 태평양 지역을 가리킨다.
한반도 내에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군의 전쟁 재개 상황에서 한미연합군이 조선인민군을 이기고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내용이다. 전부 6단계로 구성돼 있으며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반격·수복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과거 2010년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계획 5027에는 미군이 전쟁 후 90일 안에 병력 69만명, 5척의 항공모함, 함정 160여척, 항공기 2500여대를 한반도에 파견하는 걸로 나와 있다.
작계 5015는 북한의 국지도발과 핵·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 위협의 증가 등 군사 안보상의 환경 변화에 대한 한미연합전력의 군사적 대응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기존의 작계 5027은 주로 북한의 남침에 따른 전면전 상황을 가정해 시나리오에 따른 6단계 대응으로 구성돼 있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발생하면 서울 북쪽의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뒤 미군의 증원 전력이 도착하면 전열을 정비해 반격에 나선다는 개념이다
반면 작계 5015에서는 북한의 국지도발의 확전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한미연합전력이 국지도발에 어떤 절차를 거쳐 대응할지 등이 검토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 군당국은 이미 2013년 3월 ‘한미 공동 국지도발 대비계획’을 수립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작계 5015에는 당시 합의된 내용이 이후 상황 변화까지 업데이트돼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작계 5027이 주로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 대비에 맞춰졌다면 이번 작계 5015는 북한의 전면전 도발 이전에 미리 국지도발 상황부터 한미연합방위 체제를 어떻게 가동할지 등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징후가 포착되면 30분 안에 선제 타격한다는 한국군의 ‘킬 체인’ 개념도 작계에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막상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징후를 알고도 한미연합군은 북한을 선제 타격하지 못해 백령도·연평도가 큰 피해를 입었고 기간산업망도 마비됐다.
작계 5015가 알려지자 일부 종북세력은 ‘작계 5015는 유엔이 금지한 예방전쟁을 하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예방전쟁은 상대가 나를 공격할 의사를 보일 때, 먼저 상대를 공격해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전쟁을 말하는데 종북세력은 죽으면 죽었지 북한과 싸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 D+1 새벽 1시
한미연합사령부가 북한의 미사일에 대해 보복응징을 완료하고 모처럼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때 휴전선 인근의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금속제 포신(砲身)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7년 7월 초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거론했던 북한 방사포 부대가 출현한 것이다.
# 《뉴욕타임스》 2017년 7월 6일 자 보도
제목=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미국의 무력대응 가능성이 언급되는 상황에서 ‘정밀 타격(surgical strike)도 최악의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제하의 한반도 전쟁 가상 시나리오 기사
내용=이 신문은 미국 민간 연구기관인 노틸러스연구소의 2012년 보고서를 토대로 북한이 이런 재래식 무기로 한국의 군사시설을 조준한다면 한 번의 일제사격으로 3000여 명, 민간인을 겨냥한다면 3만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올 수 있다고 보도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의 군사공격을 받더라도 곧바로 핵무기에 손을 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 북한은 미국의 핵 보복을 우려하기 때문에 핵·생화학 무기의 즉각적인 사용은 자제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예상이다.
문제는 이런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더라도 북한이 한국에 줄 수 있는 피해가 심대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휴전선 근방에 배치한 재래식 무기만 동원하더라도 한반도는 엄청난 피해가 불가피하고 전황의 예측 또한 어렵다고 지적했다.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앤서니 코즈먼 연구원은 미국의 북한 공격 후 단기간에 벌어지는 상황을 예상하는 것은 “3차원 체스(three-dimensional chess)와 같은 아주 복잡한 게임”이라고 묘사했다.
NYT는 남북 양측 모두에 확전으로 치달을 요소가 많아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멈추기가 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받는다면 의도적으로 ‘제한적 대응’을 하기보다는, 미국과 한국의 북침에 대비해 단시간에 화력을 집중시켜 큰 피해를 안기려 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랜드연구소의 제프리 호르넝 연구원은 “끝장내기 전쟁(the end war)이라는 것을 북한도 안다”며 “일제 사격(barrage)을 퍼부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북한이 수도권을 겨냥한 170mm 자주포, 240mm와 300mm 방사포 공격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가 초기 피해를 가름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노틸러스연구소는 북한이 예고 없이 서울과 수도권의 군사시설을 향해 포 공격을 할 경우 첫날 만 하루 동안 6만명의 사망자가 날 수 있다고 예견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사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북한 군사문제 전문가 조지프 버뮤데즈는 “탄도미사일은 (서울이 아닌) 주일 미군기지 등 군사시설을 겨냥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다. 한국 측의 방어전략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뾰족한 수가 없다(little they can do)”는 회의적인 견해를 내놨다.
한국에 배치된 사드(THAAD)나 패트리엇 등 미사일 방어체계는 일부 탄도미사일을 격추할 순 있겠지만, 이스라엘의 대공방어 체계인 ‘아이언 돔’처럼 저고도로 날아오는 포탄이나 로켓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과 미국은 레이더로 북한의 포를 탐지한 후 공습으로 궤멸시키는 전통적인 대포병 전략에 집중할 것으로 봤다.
노틸러스연구소는 이라크전을 토대로 한미가 이 전략을 구사하면 북한이 시간당 1%의 포를 잃고 만 하루 동안 포 전력의 5분의 1 정도를 상실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신문은 인명피해 규모는 한국 정부의 국민보호 능력에 달렸다면서도 피상적인 민방위훈련, 일반 주민의 ‘전쟁 불감증’은 문제라는 시각을 보였다.
# D+2
북한의 장사정포·방사포, 서울 초토화
▲북한의 방사포. 300㎜ 방사포는 최대 사정거리가 200㎞에 달한다.
미 국방정보국(DIA)은 1995년부터 북한의 지상전력 가운데 한국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 휴전선 바로 북쪽에 배치한 240mm 및 300mm 방사포(다연장로켓) 5500여 문과 170mm 장사정포 등 모두 1만3000여 문이라고 분석했다. 240mm 방사포는 조선인민군 제620포병군단에, 170mm 장사정포는 독립중포병 여단 소속이다.
1994년 당시 미군은 이 재래식 야포가 전쟁 초기 24시간 안에 5만 발을 서울을 향해 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같은 해 미 국방부의 고위 관리는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생하면 개전 90일 안에 미군 사상자만 5만2000명, 한국군 사상자만 49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노동당 군수공업부가 작성한 극비자료에 따르면 GPS시스템을 장착한 방사포는 주력이 240mm이고 최근 300mm까지 개발했다. 정확도는 70% 정도이며 최대 사거리가 300mm 방사포의 경우 최대 200km다. 발사대에 여러 개의 발사관을 장착해 동시에 포탄을 퍼붓는 300mm 방사포는 비행고도가 낮게 질주하는 탄도로 한꺼번에 많은 포탄이 날아오기 때문에 요격이 불가능하다.
북한 방사포와 장사정포가 일제히 포탄을 쏘아대자 한미연합군도 방사포·장사정포의 위치를 확인해 반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무차별로 쏘아대는 북한 야포에 서울의 절반가량이 마치 불도저로 밀어 놓은 듯 폭삭 무너지고 말았다. 마치 6·25 때 같은 풍경이 재현됐다.
대표적으로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가 반파됐고 일제가 지어 놓은 것을 헐고 다시 지은 서울시 신청사는 유리로 만들어져 포탄 반동에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경복궁과 덕수궁에서 화재가 일어났고 거미줄처럼 서울 지하를 잇던 지하철은 곳곳에서 푹썩 주저앉아 통행이 마비됐다.
놀라운 것은 그간 북한에 비판적이던 신문사들이 북한 방사포와 장사정포의 집중 타깃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서울 광화문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포격을 당해 건물이 전파(全破)됐고 같은 건물에 있던 TV조선과 채널A도 보도 기능을 순식간에 상실하고 말았다. 기자 수십 명이 사상을 당했다.
방사포나 장사정포에 아파트는 끄떡없을 것이라는 말과 달리 곳곳에서 고층 건물들이 붕괴해 수많은 시민들이 매몰됐지만 그 누구도 구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쟁 개시 이틀째, 미확인 사상자만 20만명에 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울의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공포가 확산됐다.
# 비슷한 시각
서울 남산 1호 터널과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눈치 빠른 사람들 일부가 가족을 데리고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사이에 있는 방공호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방공호는 포탄 한 발을 맞아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공포에 질린 서울시민들은 서울 남산 1호 터널로 향했다.
이 터널은 1968년 1·21사태 때 북한 124군 부대 소속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뒷산까지 나타난 데 경악한 정부가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었다. 길이 1.5km의 이 터널에 5000명 정도가 들어찼을 때 갑자기 남북 입구(入口) 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고정간첩이 초강력 다이너마이트로 시민들을 생매장한 것이다.
# D+3
김정은이 모습을 드러내다
▲2017년 신년사를 하는 김정은.
오전 10시 조선중앙방송에 김정은의 연설이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김정은의 목소리가 TV를 통해 울려 퍼지자 대한민국은 동요했다. 한미연합공군의 폭격에 사망한 것처럼 보였던 김정은은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북조선의 무자비한 반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정은은 극비리에 건설한 지하갱도로 피신했으며 북한의 군사 지휘부 역시 지하갱도에 분산해 은닉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에 대해 예리한 관찰자였다면 이 같은 경우를 상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 훨씬 전 북한의 지하갱도 관리원 출신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전쟁지휘소는 미국 정찰위성을 따돌릴 수 있다”며 지하갱도의 구조, 조직구성, 전쟁 시 활용 등을 공개했다. 그는 또 “전쟁 지휘소 갱도 입구의 철문은 전파 흡수물질로 도색했기 때문에 미 정찰위성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가 말한 내용이다.
“(전쟁)지휘소 갱도 입구 철문은 바르는 전파 흡수물질로 칠해 놓았기 때문에 미국의 정찰위성 사진에서도 전혀 잡히지 않는다.”
“전시 식량을 보관하는 2호갱도는 북한에서 생산된 햅쌀을 넣고 묵은 쌀을 꺼내 주민 식량과 군부대 식량으로 공급한다. 이 갱도에 식량을 훔치러 들어올 경우 현역군인도 즉시 사살한다.”
이 관리원에 따르면 전쟁지휘소 갱도는 유사시 주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동원, 지휘하는 전시 참모부로서 모든 시, 군마다 한 개씩 있다. 1호갱도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동상과 1호물자를 보관하며 ○○시의 1호갱도에는 유사시 김정숙 동상을 운반할 수 있는 전용 차량이 보관돼 있다.
북한은 전쟁을 대비해 지하갱도에 민방위부를 조직, 전시를 대비한 군사훈련과 갱도굴착, 전략물자의 보관과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전시를 대비한 북한의 지하갱도는 작전지휘용, 전략물자 보관, 전시 군수물자 생산시설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지하갱도 공사는 1970년대 전당(全黨)·전군(全軍)·전민(全民)·전국(全國)의 요새화와 무장화 방침이 나온 뒤 시작됐다. 갱도 형식은 영구화 갱도, 반영구화 갱도, 자연 갱도 등 3가지다. 유사시를 대비하는 갱도는 전기 공급이 끊기면 물과 습기가 차, 반드시 전기를 지원한다.
북한은 식량난이 최악에 달했던 1995~1997년경에도 66호갱도(민간인 대피용)를 비롯해 모든 지하갱도 공사를 진행했다. 식량난이 아무리 심해도 시당(市黨) 책임비서를 포함해 누구도 2호갱도(식량창고)의 식량과 물자에 손댈 수 없다. 2호 창고(식량 보관)는 보위대가 실탄을 장전하고 경비를 서는데 실수로 잘못해서 들어온 사람이라도 곧바로 사살한다.
북한의 요청으로 러시아 정찰위성이 북한의 해당 지역에 대한 위성사진을 찍어 북한군 총참모부에 제공한다. 이를 토대로 전국의 지휘소 갱도 출입문이 노출된 곳을 찾아 출입문에 새로운 전파흡수제를 칠하도록 명령서를 내려보내기도 한다.
# D+3
김정은의 최후 통첩
김정은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한 연설 말미에서 무시무시한 협박을 해 한국과 미국을 당황케 한다. 그는 “48시간 이내로 우리를 공격한 한국군의 국방부장관·합참의장·공군참모총장을 처벌하라. 공화국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고 원상복구하라. 인민군대가 당한 시설 피해를 보상하고 사상자에 대해서도 위로금을 내놓아라. 다시는 공화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남조선 대통령이 각서(覺書)를 써라. 다시는 미군이 공화국 상공에 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만일 48시간 내에 우리 요구를 전면 수용하지 않으면 서울을 비롯한 5개 광역시 가운데 한 도시를 지도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며 “미국 역시 이 문제에 개입하면 서부지역 중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시애틀 가운데 한 도시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날리겠다”고 협박했다.
# D+3
김정은 협박 3시간 뒤
독일에서 전용기를 타고 귀국 중인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과 화상(畵像)회의를 한 뒤 대책을 논의했다. 두 정상은 다음과 같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첫째, 미국이 한국에 약속해 온 핵우산 정책, 즉 확장된 억지 전략을 적용하기로 했다.
둘째, 한미연합군은 북한의 위협에 전혀 굴하지 않고 참수작전과 작계 5015에 따른 조치를 계속 취하겠다.
# D+3
한미 정상회담 합의문 발표 1시간 뒤
중국은 만일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반도에 핵 추진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전개할 경우 중조(中朝)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에 따라 해군을 총동원하고 항공모함 및 원자력잠수함을 서해에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 D+3
중국의 협박 2시간 뒤 김정은의 2차 공갈
김정은이 또다시 조선중앙방송에 등장했다. 그는 예의 협박을 다시 언급하면서 “한반도 상공에 요격기를 띄워 남조선 대통령 전용기가 발견되면 즉시 격추하겠다. 수정된 요구사항을 말하겠다. 즉시 무조건 항복하라”고 말했다.
이 소식은 즉각 대통령이 타고 있는 공군 1호전용기에 전달됐다. 대통령을 비롯한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당황했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한민국 땅을 밟기도 전에 북한 미사일을 맞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게다가 비행기 연료 게이지도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 D+4
정치권 분열
전쟁 초기 단결을 외쳤던 정치권이 마침내 분열하기 시작했다. 전쟁 당시 진보·보수당의 의석 비율은 7대3으로, 보수당이 절대 열세였다. 보수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6년 최순실 사태로 치명상을 입은 뒤 두 차례 연속 대통령선거에서 패했고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당으로 전락했다.
집권 진보당은 “백령도와 대연평도가 공격받고 주요 기간산업 시설에 피해가 있었더라도 대한민국이 형의 입장에서 동생 같은 북한과 대화를 해 문제를 플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진보당 의원 중에는 “한미연합군의 원점타격 보복이 과잉대응이었으며 ‘참수작전’도 성급했다”는 말도 나왔다.
# D+5
미국 내 반전(反戰)여론
북한의 협박은 미국민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국민들이 불안해하자 미국 의회와 언론에서도 “서울을 지키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을 버려야 한다’는 여론은 세 가지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첫째,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이나 잠수함 탑재 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핵공격할 때 이를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은 8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이는 ‘한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국인의 안전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둘째, 한국이 그동안 보여온 태도에 대한 불만으로, 이는 전통적인 한국 지지층이었던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확산됐다. 그들은 “한국은 미국 때문에 생존해 왔으면서 중국에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공공연하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세번째는 항상 등장하는 반핵·반전 단체들이었다. 이 단체들은 “미국의 서부 도시들이 제2의 히로시마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여론의 추이에 민감한 미국 행정부가 고민에 빠지자 미국만 바라보고 있던 한국 정부도 딜레마에 빠졌다. 특히 공군 1호기상에서 내릴 곳이 없어 연료가 떨어질 때마다 미 공군의 공중급유기의 도움을 받은 뒤 창공을 선회하고만 있는 한국 대통령은 스스로 자괴감에 빠졌다.
# D+6
중국의 휴전 제의
▲북한의 SLBM 미사일은 한국군의 킬체인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전략무기이다.
이 틈을 타 중국이 6자회담을 제의한다. 핵전쟁을 막기 위해 남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담판을 짓고 휴전하자는 것이다. 중국은 회담을 제의하면서 중·북(中北) 접경 남쪽 50km까지를 ‘비행 및 무력사용 금지구역’으로 설정한다는 발표를 한다.
이는 미국의 공격을 피해 북한이 핵심 시설을 옮기려 할 때 피난처를 제공하겠다는 뜻이었다. 5개국이 중국의 제안을 수락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앞으로 12시간 내에 우리의 요구조건을 무조건적으로 받으라”고 협박했다.
# D+7
D시에 피어난 버섯구름
▲D시에 투하된 핵무기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보다 10배 더 강력한 것이었다
북한 남포항을 출발한 잠수함이 군산 앞 100km 해상에 접근했다. 북한 잠수함은 머뭇거리지 않고 SLBM, 즉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각각의 탄도미사일에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보다 10배 더 강력한 핵탄두가 장착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D시 상공에는 거대한 두 개의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강력한 열풍(熱風)이 폭풍처럼 도시 전체를 휩쓸더니 낙진이 검은 비에 섞여 이 도시를 적셨다. 대한민국 교통의 중심이자 행정신도시 부근에 있던 D시는 유령도시처럼 변하고 말았다.
# D+7 이후
D시가 핵공격을 받은 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연일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모임인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을 공격한 한미연합군을 반대하는 시위로 변질됐다. 촛불시위 참가자는 갈수록 늘었다. 이들은 “미군 철수” “한국군 책임자 처벌”을 외쳤다.
부근에 있는 대한문 앞에서 한미동맹만이 살길이라는 보수단체의 태극기 집회가 열렸지만 각 언론엔 “촛불집회 참가자, 태극기 집회보다 10배 많아” “촛불집회 참가자 10일 만에 1000만 돌파”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 때보다 더 활활 타올라” 같은 왜곡 선동 기사가 봇물을 이뤘다.
급기야 촛불집회장에는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우리 민족끼리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개 보이던 김정은 대형 초상화가 수백 개씩 등장했다. 김일성 대(代)부터 남쪽에 심어 놓은 고정간첩들이 눈치 안 보고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 D+10
무조건 항복
아직도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하지 못했던 대통령은 전용기 내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작전계획 5015의 철회를 미국에 요청했으며 국방부장관·합참의장·공군참모총장을 해임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또 북한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겠으며 자신은 대통령 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차기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식에 대해 대통령은 시민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통일한국의 지도자를 뽑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사실상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대통령의 발표가 있은 지 2시간 만에 김정은은 조선중앙방송에 다시 나와 “남조선 대통령의 뜻을 수락하며 더 이상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서울 광화문과 종로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거리에는 누가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인공기(人共旗)가 나부꼈다. 평양의 급한 요청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간 한국의 기자들은 평양의 분위기를 생방송으로 전했다. 주민들이 흐느끼며 ‘통일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고스란히 안방까지 전해졌다. 한때 남한에서 유행했던 북한 가요 ‘반갑습니다’를 부른 리경숙도 방송에 나와 목이 터져라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를 반복했다.
# D+20
통일한국의 대통령에 김정은이 취임했다. 그가 서울로 와 대중 앞에 서서 터뜨린 일성(一聲)은 “서울시민 여러분! 백두산의 김정은이 왔습네다”였다.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한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준비했던 것과 똑같은 멘트였다. 김정은은 말을 이어 갔다.
“북조선은 주먹이 강하고 대신 남조선은 잘삽니다. 이 둘을 합치면 우리 민족은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범식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새 공화국 출범식이 열렸다. 김정은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좌중을 둘러봤다. 우측에는 남조선의 역대 고위 관리들, 좌측에는 북한의 김정은 심복들이 도열해 있었다. 김정은은 새 헌법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
“나는 국헌(國憲)을 준수하고 ….”
그날 밤 경회루에서 새 공화국 출범 파티가 열렸다. 이날을 김정은은 너무도 고대해 왔다. TV나 인터넷 혹은 사진으로만 보던 남조선 걸그룹들이 총출동했다. 김정은은 ‘루이13세 코냑’이 가득 찬 잔을 들고 시혜를 베풀 듯 말했다.
“동무들은 이제 보천보 전자악단 남조선 분국(分局)에 소속되는 것이오. 아! 그리고 몇 개 더 만들어야갔다. ‘광명성 댄스악단’과 ‘화성12호 경음악단’도 만드시오.”
밤이 이슥해지자 김정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걸그룹 멤버 셋을 한꺼번에 옆에 끼고 청와대 본관 침실로 사라졌다.
# 망명 대통령
한국의 대통령은 결국 자신이 통치하던 나라를 밟지 못하고 미국 망명을 택했다. ‘대한민국’이 사라진 후 한참 뒤 그에게 미국 고위 관리가 찾아왔다. 식사를 함께 한 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그 미국 관리는 전직 대통령에게 작심한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한미 관계는 정상화되는 듯하였으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정부가 굴복하는 데 우리는 놀랐습니다. 가짜 뉴스에 한국의 정치·언론이 다 속더군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때 당시의 미국 정부는 내심 한국군의 태도를 주목했습니다만, 한국군은 전투기를 출격시키고도 폭격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복수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요청으로 한미연합사 해체 시기를 연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임기 말에 미국과 한국과 일본이 북핵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데 꼭 필요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서명을 직전에 취소한 뒤에 독도를 방문했습니다. 그 결과 아베 정권이 등장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뒤를 이은 박근혜 대통령은 친중(親中)정책을 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2015년 중국의 전승절(戰勝節) 행사에 박 대통령이 자유 진영 지도자로선 유일하게 참석하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한국은 북핵 위협에도 핵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생존이 걸린 문제를 다른 나라에 물어보고 결정할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도 미국의 허가를 받고 핵무장을 한 것은 아니죠. 2016년 여름 한국에서 벌어진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은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시각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드 배치는 적의 핵미사일을 막겠다는 것이고 동맹국인 미국이 자국(自國) 부담으로 하겠다는데 이를 막고 나서는 세력이 그토록 강하고 더구나 여당 의원까지 가세하면서 국방장관을 시위대가 감금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한국은 과연 동맹국인가, 미국이 지켜 줄 가치가 있는가 라는 회의(懷疑)가 지도부에 확산되었습니다.
1994년에 이어 2017년 우리는 북핵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또 다시 놓쳤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마지막 찬스였습니다. 북한이 예상 외로 장거리 미사일과 잠수함 발사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고 우리도 심각한 대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사드를 비롯하여 PAC-3, SM-3 등 다층적 방어망을 건설하고 이를 미국의 MD(미사일방어망)와 연결시켜 두었더라면 설사 북한이 얻어맞은 뒤 남은 핵폭탄으로 보복을 가해 와도 대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한국 국민들 스스로 안보에 대한 의식이 희미한 게 더 문제였지만요.”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6개월 뒤 서울광장
서울광장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사기총 소리가 들려 온다. 촛불이 사라진 자리를 이 요란한 살인무기의 총성(銃聲)이 대체한 것이다. 처음에는 구경꾼들이 있었으나 그 잔인한 장면에 이제는 발길을 끊었다. 고사기총 연발사격으로 지금까지 사망한 인물은 10만명이 넘었다.
처음에는 국군 수뇌부, 경찰 간부, 공안부 출신 검사들, 고위 관리, 언론사 간부들이었다. 생존해 있던 6·25전쟁의 영웅들도 마침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북한 수뇌부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던 역대 대통령들의 시신과 호국영령 가운데 특히 미워했던 인물들의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했다.
한때 ‘자유’와 ‘민주’라는 단어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던 서울광장은 이제 회색빛으로 변했다. 겨울이면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던 곳의 잔디는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도 보위부원들을 피해 숨어 지내던 국군의 가족과 언론사 간부의 가족들이 굴비처럼 엮여 나왔다.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년 뒤 요덕수용소
함경남도 요덕군에 있는 요덕수용소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곳이다. 탈북자들이 그곳의 혹독하고도 비인간적인 상황을 여러 차례 폭로했기 때문이다. 최근 이곳에 1만명 이상의 남한 출신 인사들이 한꺼번에 수용됐다. 자세히 살펴보면 뉴스에서 몇 번씩 보았던 유명 인물들이었다.
사드 반대를 외치던 종교인과 환경단체 간부들, 차별철폐를 외치며 수십 년간 귀족노조 생활을 해 왔던 노동단체 간부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통일이 되자 중용되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사상개조를 한다며 북한 평양에서 개조교육을 받은 뒤 간첩으로 몰려 요덕수용소로 끌려온 것이다.
영락(零落)한 한때의 민주투사들을 꽤 낯익은 정치인들이 맞았다. 그들은 시민사회단체 간부들보다 6개월 앞서 이곳에 수용됐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까칠했으며 번지르르하게 윤이 나던 머리는 허옇게 색이 바래 있었다. 이 어색한 만남을 개마고원의 삭풍(朔風)이 두들기고 있었다.
# 그 다음 날 요덕수용소
다음 날 잘 알려진 민중예술가 한 명이 요덕수용소로 들어왔다. 그는 남한에서 대통령들을 성적으로 비하하거나 동물로 묘사해 이름을 얻은 인물로, 통일이 된 뒤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산하 미술동맹에 소속돼 있었다. 모두가 잘 먹고 잘살 것이라고 했던 그의 출현에 놀랐다.
그가 말했다.
“수령님 얼굴에서 미소를 뺐지요. 업적 위주보다는 인간적인 수령님을 그리려고요. 그랬더니 자격을 박탈당하고 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번에는 수령님 대신 인민들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낙원을 형상화하는 화폭에 등장한 인물에게서 미소를 지워 버린 것은 체제의 오늘과 내일의 의미까지 지워 버린 염세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저는 미술가 자격을 박탈당했어요.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 웃는 동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웃는 동물은 없지 않습니까? 예상대로 대박이 났어요.”
사람들이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
미술가가 답했다.
“너무 기분 좋아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수령 얼굴을 그릴 때보다 동물의 얼굴을 그리는 지금이 더 풍족하다’고 말한 걸 누군가 일러바친 겁니다.”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년 뒤 조갑제와 한 종북주의자의 대화
12월. 추운 계절이다. 이곳에 들어온 지 몇 해나 되었을까? 풍성하던 백발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한때 남들이 올려다보던 키는 이제 어린아이처럼 줄어들었다. 뻔질나게 불러내 못살게 굴던 시절이 오히려 그리워진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그립다. 젊은 시절에는 사람을 만나러 다니고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게 일이었다. 그들 중에는 박정희의 딸도 있었고, 박정희의 군대 시절 부관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박정희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한 사람도 있었다. 젊은 시절 석유에 대한 기사를 썼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나서 중앙정보부 지부에 불려 가 조사를 받았었다.
그때 나를 조사했던 사람이 나중에 박정희 암살에 가담했다.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박, 박, 선 …. 마지막 글자가 생각이 잘 안 난다. 효였나, 호였나 …. 보위부 조사실하고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박은 신사적이었다. 그 얌전하던 사람이 대통령을 쏘는 일에 가담했다.
잡지를 만드는 일은 즐거웠다. 신문에서 잡지로 옮겨간 것은 내 뜻이 아니었지만, 거기서 나는 활짝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다. 편집장을 지내고, 사장을 지냈지만, 나는 기자였다. 은퇴를 하고 난 후에도 늘 사람을 만나러 다녔고, 글을 썼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는 글로 옮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인터넷 뉴스사이트를 만든 것도 그래서였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똑, 똑, 또독, 똑 …. 벽에서 들리는 소리다. 아하! 통방이로구나. 영어로는 ‘Tap Code’, ‘Knuckle Voice’라고 한다. 아서 쾨슬러의 《백주(白晝)의 어둠》에서도 옆방의 죄수와 통방하는 얘기가 나온다. 소련 전체주의 사회의 잔인함을 다룬 이 소설을 참 많이도 인용했었는데 ….
나도 한 번 해 볼까? 옛날 범죄자들을 취재하면서 통방하는 방법을 배운 기억이 난다. 군대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모스신호 치는 법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을 그때는 했었다. 이상도 하다. 박정희를 쏘는 데 가담했던, 그 사람의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나하고 같이 일했던 후배 기자들의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어쩌다 재미로 배운 통방하는 법은 생각이 난다.
또, 똑, 또도독. 똑, 똑 ….
‘누구요’라는 단어 하나 옮기기가 이렇게 힘들었나? 컴퓨터 자판으로 치면 금방인데 ….
‘옆방이오’라는군. 제길, 누가 옆방인 줄 모르나?
똑, 똑, 똑 ….
누구…냐고? 내 이름을 말해야 하나?
‘정치범이오. 악질 극우반동.’
똑, 똑, 똑 ….
뭐 했느냐고?
적화 전에 기자를 했다고 대답해야겠는데 …. 적화 전이라고 하면 탈이 날까? 통일 전이라고 해야 하나? 하긴 통일은 통일이지 …. 그냥 전에 기자를 했다고 하고 말지.
‘전에 기자를 했소. 대한민국이 있던 시절에 …. 당신은.’
답이 온다. ‘교수였소. 나는 빨갱이 소리를 들었지. 대한민국이 있던 시절에 …. ㅎㅎㅎ.’
하이에크의 말이 생각난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을 때 아들이 그 소식을 알리자 “거봐, 내가 뭐라 했어?”라고 했다던가? 내가 늘 그랬지. 적화통일이 되면, 남쪽의 종북좌파부터 수용소행이 될 거라고 말했잖아.
또 신호가 온다. ‘당신 이름이 뭐요’라고 하네. 참 빨리도 묻는다. 통방 시작한 지 네 시간 만에 이름을 묻네. ‘조갑제요. 당신 이름은 …?’
답이 없다. 나 같은 반동이랑은 얽히기 싫다는 건가?
똑, 또도도옥, 똑 ….
‘장… 장인가, 동…, 규…. 장동규.’
장동규, 장동규, 장동규 …. 생각이 난다. 그 종북학자, 입만 열면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던 ….
‘그 장동규 교수요?’
‘그렇소. 조 선생.’
‘나야 그렇다 쳐도… 당신이 어떻게 여길…. 무슨 죄목으로 ….’
답이 없다. 아, 이제야 답이 오는군.
‘바보였소. 난… 바보였소. 그게 내 죄요.’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년 뒤 초등학교 력사교과서
남조선은 1948년 건국해 20xx년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해방됐다. 남조선은 통일조선을 건설하자는 김일성 수령님의 제의를 거절하고 역도 리승만이 남반부 단독 선거를 실시하면서 수립됐다. 김일성 수령님은 이런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해방전쟁을 벌였으나 미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조선은 군인 출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경제를 건설해 군인 출신 전두환·노태우 대를 거쳐 북조선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갔다. 다행히도 그 이후 친북(親北) 대통령들이 잇따라 나오고 북조선의 공작 결과 자생적인 종북주의자들이 배양되면서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북조선은 30년에 걸쳐 교육계·언론계·노동계·시민사회계·종교계에 집요하게 주체사상을 전파하였다. 거기에 발맞춰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최순실이라는 여편네의 농간에 놀아나다 탄핵당하면서 통일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하였다.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핵폭탄과 핵미사일을 개발해 오던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의 백령도·대연평도에 불벼락을 내리고 주요 기간산업망을 마비시켰다. 남조선 역도들은 미제의 힘을 빌려 북조선의 강토에 침략했으나 김정은 장군의 호령 한마디에 굴복하고 말았다.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0년 뒤 중학교 교실
사회교사가 각 나라별 경제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한때는 세계 10위에 드는 경제강국이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지금은 세계 200여 개국 가운데 180위로 짐바브웨, 앙골라와 같은 순위라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까?”
남조선 출신의 선생님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기억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분명히 있었습니다.”
선생의 눈망울이 점점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 그날 오후
그 학생의 집
학생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물었다.
“오늘 선생님께 들었는데 우리 조선이 한때 세계에서 열 번째로 잘살았다면서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아이가 또 물었다.
“우린 지금 아프리카 짐바브웨, 앙골라와 비슷한데 ….”
아버지는 아이를 골방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오늘 본 것을 절대 남에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몇 차례나 다짐을 받은 뒤 낡은 잡지 한 권을 꺼내 보여줬다. 거기엔 이런 글이 있었다.
*
1961년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살았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 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2800달러로서 세계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미(美), 중(中), 일(日), 독(獨)에 다음가는 5대 공업국, 7대 수출국, 8대 무역국, 12위의 경제대국(구매력기준 GDP)이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유신기(維新期)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8월호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2019.09.19 우리의 사전(辭典)에는 전쟁(戰爭)이라는 단어가 있는가?
20세기 역사에는 전쟁을 결심한 지도자가 여럿 등장한다. 독일 총통 히틀러,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 중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등이다. 히틀러, 히로히토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이나 김일성(金日成)을 도운 스탈린의 6·25는 악의(惡意)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루스벨트에게 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선제공격에 대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마오쩌둥이 6·25 때 참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항미원조(抗美援朝)였다. 북한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직후 연전연패해 압록강까지 후퇴하자 유엔군이 만주를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고 하지만 훗날 소련의 지침에 따른 북한 돕기였던 것으로 판명됐다.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을 하면서 한반도에 짙은 전운(戰雲)이 깔리고 있다. 언제 전쟁이 시작돼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인데 우리 지도자와 국민들만 그것을 모른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헛된 망상(妄想)에 사로잡힌 것인지, 딴 나라 이야기처럼 여기는 무관심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인지, 세 가지 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세(情勢)를 종합해 보면 남북한 간에 전쟁이 시작되면 한국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참패하고 말 것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한국은 거란족의 요(遼), 탕구트족의 서하(西夏), 여진족의 금(金)에 시달리다 끝내 몽고의 원(元)에 망한 송(宋)보다 상황이 더 한심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국력을 다한 싸움이기에 무엇보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국민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걸려면 지도자가 그럴 만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의 사전(辭典)에 왜 전쟁을 해야 하고 왜 이겨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규정되고 설득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난파선의 쥐떼처럼 우왕좌왕하다 몰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정치지도자 가운데 생(生)의 사전 속에 전쟁이란 단어가 없기에 극단적인 상황과 맞닥쳤을 때 이겨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력이 아무리 북한보다 월등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국력이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하려면 국민의 신념이라는 도화선에 불이 붙어야 하기 때문이다.
1940년 5월 10일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총리로 취임했을 때 독일 히틀러는 폴란드·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를 점령한 뒤였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사자는 이 정도 포식했으면 길게 하품을 하고 단잠을 즐겼을 텐데 아귀(餓鬼) 같은 히틀러는 그날 프랑스 침공을 시작했다. 5월 15일 처칠에게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내각 구성도 채 마치지 못한 처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랑스 총리이자 친구였던 폴 레노였다. 레노는 절규했다. “졌습니다. 전투에서 패했어요!(We are defeated, we have lost the battle!)” 다음 날 프랑스 파리로 간 처칠이 “예비부대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가믈랭 영불연합군 총사령관은 어깨를 으쓱하며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영국과 처칠은 촛불 앞의 등불 같은 신세가 돼 근근이 버틴다. 덩케르크 해변에서 영국과 프랑스군 34만여 명이 독일군에 포위된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처칠은 1940년 5월 28일부터 6월 4일까지 영국군 22만6000명, 프랑스군 11만2000명을 철수시켰다.
이 철수작전은 세계사에 3대 철수작전으로 유명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게 한 흥남철수작전과 미 해병대가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뚫고 성공적으로 후퇴한 장진호 전투처럼 덩케르크 철수작전도 숱한 감동을 자아냈지만 그것은 단순한 철수작전이 아니었다.
34만여 명의 영불연합군은 이제 잉글랜드를 지키는 힘이 돼 독일의 영국상륙 작전 가능성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육군과 해군으로 안 되자 독일은 영국 본토에 대공습(大空襲)을 시작했다. 이때 처칠은 다시 한번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 어떤 위기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침착함으로 영국 국민들의 전의(戰意)를 북돋았다.
처칠은 전쟁이 진행 중인 곳이라면 어디든 방문하려 했는데 독일의 공습이 한창일 때도 그랬다. 그는 런던과 브리스톨의 공습지역을 찾았으며 독일군의 폭격기가 런던 하늘을 새까맣게 덮을 때 지붕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처칠은 국민들에게 용기를 줬다. 1940년 8월 20일 행한 처칠의 연설은 지금도 유명하다.
“인류의 전쟁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소수의 사람들에게 빚을 진 적은 없었다.”
나는 우리가 독일군의 런던 대공습 때처럼 북한의 미사일이 서울 상공을 뒤덮고 북한의 장사정포가 쏘아 댄 대포알이 서울의 전역을 강타해 아파트와 건물이 붕괴되는 상황을 내일 혹은 내주 혹은 내달 맞을지도 모르다고 생각한다.
처칠은 이런 절대 열세의 상황을 견뎌 내면서 가느다랗게 찾아온 승기(勝機)를 마침내 거머쥐게 된다. 만일 처칠이 비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거나 매사에 짜증을 냈거나 오늘과 내일 말을 다르게 하는, 오락가락하거나 좌고우면을 일삼는 베르테르 같은 성품이었다면 오늘날 유럽 전역은 나치 히틀러의 후예들 차지가 됐을 것이다.
인터넷에는 처칠의 성격을 보여주는 유머가 널려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미국을 방문한 처칠의 연설에 인파가 몰리자 한 여성이 말했다. “자리가 미어터지니 얼마나 기분 좋으세요?” 처칠이 답했다. “연설이 아니라 교수형을 당할 때라면 지금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것을 전 늘 기억하지요.” 이것은 처칠이 최악과 최상에 대비하는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날 처칠의 비서가 일간지를 들고 오더니 흥분했다. 처칠을 시거를 문 불독으로 묘사한 만평(漫評)을 그 신문이 게재한 것이다. 처칠이 말했다. “기가 막히게 잘 그렸군. 벽에 있는 내 초상화보다 훨씬 나를 닮았어. 당장 저 초상화를 떼고 이 그림을 오려 붙이게.” 이것은 처칠이 비판언론도 수용할 줄 아는 포용성을 보여준다.
2차 대전 초기 미국으로 건너간 처칠이 호텔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허리에 감고 있던 수건이 스르르 내려가 처칠은 알몸이 됐다. 난처해하는 정장 차림의 루스벨트에게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각하, 보시다시피 우리 영국은 미국과 미국 대통령에게 아무 것도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처칠이 상대국 지도자와 어떻게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여는지를 아는 정치인임을 보여준다. 끝으로 처칠은 영국 의회 사상 첫 여성 의원이 된 에스터 부인과 매우 적대적이었다. 처칠이 여성의 참정권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에스터 부인이 우연히 만난 처칠에게 독설(毒舌)을 퍼부었다.
“내가 만약 당신의 아내라면 서슴지 않고 당신이 마실 커피에 독을 타겠어요.” 이때 처칠은 태연히 답했다. “내가 만약 당신의 남편이라면 서슴지 않고 그 커피를 마시겠소.” 이것은 처칠이 상대 당(黨)이라도 최소한의 예의와 유머를 잃지 않는 상식적인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런 지도자를 만났기에 영국은 이길 수 있었다.
윈스턴 처칠이 남긴 일화(逸話)에는 숱한 과장이 가미됐을 것이다. 하지만 당면한 위기에 둔감한 지도자, 최악과 최상의 상황에 대비하지 못하고 한쪽만 바라보는 외눈박이 지도자, 비판언론에 발끈하는 지도자, 우방국 지도자와 친해지지 못하고 의심만 사는 지도자, 상대 정당을 박멸할 대상으로만 보는 지도자들만 그득한 우리 처지에는 정말 가지고 싶은 부러운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대한민국은 이제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북한은 끝장을 볼래, 항복할래 하는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한민족을 가장 괴롭혀 온 중국은 북한을 편들고 한국을 골탕먹이고 있으며 일본은 이 기회에 자기들의 최대 숙원인 무장화을 꿈꾸고 있다. 거기에 대한민국의 유일한 구명줄인 미국마저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자초한 일이다. 20년 전, 10년 전, 아니면 몇 년 전 그 여러 번 맞은 고비에서 우리가 전쟁을 각오하는 결연한 자세로 일관했다면 지금 같은 어처구니없는 풍경 속에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단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 그 기회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