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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16/ 정치2/ 대선의 역사/ 사진으로 보는 대선(大選) 뒤안길 熱望과 希望, 失望이 엇갈리는 민주공화국의 드라마 - 사진으로 본 선거 70여 년 - 노태우에서 박근혜까지

상림은내고향 2021. 7. 7. 17:39

대한민국16/ 정치2/ 대선의 역사/ 

■사진으로 보는 대선(大選) 뒤안길 熱望과 希望, 失望이 엇갈리는 민주공화국의 드라마

2017.04.20 (월간조선 5월호) - 5월 대선(大選)

▲초대 대통령은 1948 7 20일 국회에서 선출했다
196표 중 180표를 얻어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48년 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됐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선포했다. 유사(有史) 이래 민주주의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 나라의 어린 백성들은 ‘민주’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정치’를, 공화국이란 ‘나랏님을 내 손으로 뽑는 나라’로 이해했다
  
 
그로부터 69, 18번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11명의 대통령을 뽑았다. 때로는 국회에서, 때로는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 국민적 비원(悲願)이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포스터
신익희 대통령 후보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급서했지만,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외침은 선거구호의 고전으로 남았다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 산다” 등의 구호로 맞섰으나, 호응은 적었다
.

 

  6월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것이 3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국민의 환호 속에 뽑힌 6명의 대통령도 말로는 험했다. 감옥으로 가거나 자살하거나 탄핵소추로 쫓겨났다. 망명을 하거나 쿠데타로 쫓겨나거나 암살당한 전임자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역사는 박복한 이 나라의 현대사 그대로다. 난데없이 치르게 된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목전으로 닥쳐온 지금, 사진을 통해 지나간 대통령 선거의 뒷모습들을 반추해 본다.

 

▲1960 8 13일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열린 제4대 대통령 취임식.
윤보선 대통령은 8 12일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지방 유세 도중 울산지역 거리에 붙은 자신의 선거벽보를 바라보는 김대중 신민당 후보

 

▲육영수 여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남편의 선거 유세를 보러 대전공설운동장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청중이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결국 단상으로 올라와야 했다
40년 전 제6대 대통령 선거 때의 일이다
.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호소했다. 김대중 후보에게 94만여 표 차이로 승리한 박 대통령은 이듬해 유신을 선포, 직선제를 폐지했다.

 

▲1980 9 1일 제11대 대통령 취임식.
전두환 대통령은 그해 8 23,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79 12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

▲16년 만에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그동안 내연(內燃)해 오던 지역감정이 분출된 선거였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다른 후보의 지지 지역에 가서는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다
.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격돌했던 1992년 제14대 대선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 22%를 득표했다

 

▲1997 721일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제15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이회창 후보와 경쟁상대였던 이인제 후보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후 이인제 후보는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출마해 492만여 표를 획득, 이회창 후보 패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제16대 대선 유세 마지막 날인 2002 12 18일 밤 서울 명동에서 유세를 하는 노무현 민주당 후보.
노무현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로 노 후보가 급부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정몽준 의원은 이날 밤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를 선언했지만, 노 후보의 당선을 막지는 못했다
.

▲2007 8 20일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사실상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본선이나 다름없었다
박근혜 의원을 꺾은 이명박 후보는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상대로 531만 표 차로 압승했다
.

▲2012년 제18대 대선 당시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지금 두 사람은 지지율 1, 2위를 다투고 있다. 누가 승자가 될까?

 

▲흰 눈을 맞으며 선거 유세를 하는 2012년의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이때 그는 임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으로 본 선거 70여 년

2017.04.27

선거는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핵심적 권리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꽃'으로 일컬어진다. 세계의 역사는 선거를 통해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69년 동안 수많은 선거가 있었고, 이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만들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 시절 그 선거를 사진으로 추억해봤다.

▲왼쪽부터)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기념식, 제2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된 윤보선씨의 모습, 1967년 5월 3일 5.3 대통령 선거 개표 속보판의 모습,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된 대통령 입후보자 포스터 /조선DB

 

제1공화국

/1948.5.10 광복이후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거를 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1948년 7월. 초대이승만대통령(1대재임 1948.07~1952.08) 취임식에서선서하는모습. /국가기록원

 

 

/1952 510. 1회 전국 도의원 선거.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전국 도의원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52년 8월5일. 제2대 정·부통령 선거 투표함을 옮기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2공화국

 

 

1960년 4·19 혁명으로 새롭게 집권한 민주당은 내각제 하에서의 대통령과 총리 자리를 두고 신파와 구파 간 갈등을 빚었다. 구파의 대표였던 윤보선은 신·구파의 협상에 의해 8월 12일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구파와 신파가 국정운영 과정에서 대립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이후 윤보선은 군부세력과 갈등을 빚다가 1962년 3월22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제3공화국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후보 선거 벽보가 붙은 모습/ 국가기록원

 

/1963년 10월 15일. 서울시민들이 제5대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려고 줄을 서 있는 모습/ 국가기록원

 

/1967 4 24. 대구에서 공화당은 황소를 상징동물로 정하고 대통령 선거운동을 벌였다./ 조선DB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실시됐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는 46.6%를 득표, 45.1%의 득표율을 얻은 민정당의 윤보선을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1963년 12월 2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1967년 5월 3일에 치러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51.5%의 득표율을 얻어 40.9%를 얻은 윤보선을 이기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 선거 운동 당시 공화당은 상징 동물을 황소로 정해, 선거 유세장에 황소가 등장하기도 했었다.

 

재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9년 대통령의 3선연임 허용을 골자로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53%의 득표율을 얻어, 45.3%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제4공화국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제8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 국가기록원

 

 

 

/1978년 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투표 모습(세종문화회관)/ 국가기록원

 

/1979년 12월 06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10대 대통령 선거에 참석한 모습(장충체육관)/ 국가기록원

 

1972년 10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두달 후인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 선거가 간선제로 치러졌다. 박정희는 99.9%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99.8% 지지로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1979년 10·26사태로 사망했다. 이에 1979년 12월,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던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6일 후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한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가 사임하자, 정국주도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1980년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 투표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왼쪽부터) 1967년 4월 24일 대구에서 공화당이 상징동물로 정한 황소의 모습, 1958년 5월 10일 제 1회 도의원 선거 투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투표 모습, 2002년 12월 19일 전통복장을 한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한학마을 사람들의 투표 모습 /조선DB, 국가기록원

 

제5공화국

1980년 10월,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공포됐다.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전국 77개 선거구에서 '대통령선거인단' 투표로 실시됐다. 결과는 전두환 후보가 90.1%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야당후보였던 유치송, 김종철, 김의택 등을 물리치고 당선됐다.

 

제6공화국

/1987년 11월 23일.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대통령 입후보자 포스터를 직원들이 검토하고 있다./ 조선DB

 

/1987 12 12. 노태우 민정당후보의 여의도 유세./ 조선DB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선거 개표도중 투표함에 의문을 제기한 재야학생들이 개표장인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검거작전을 펴고 있다.옥상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들에게 소방차가 물세레를 뿜고 있다. 조선일보

 

/1987 12 17.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노태우 민정당 총재

 

/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 중인 주민의 모습./ 국가기록원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5년 단임의 대통령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되고, 같은해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여당의 노태우와 야당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이 출마하여 노태우가 36.7%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은 28%, 김대중은 27.1%, 김종필은 8.1%의 지지를 얻었다.

 

 

/1992년 12월 1일. 14대 대통령 선거기간 중 국민당의 김동길, 이주일 씨가 유세 현장에 모인 청중들 앞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해 웃기고 있다./ 조선DB

 

/1997 11 28. 15대 대선 투표용지 견본./ 조선DB

 

/1997 11 30.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경북 포항시에서 선거운동

 

/2002 12 19. 16대 대선이 치러진 19일 밤 서울의 개표장에서 개표요원들이 개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2 12 19. 16대 대선 투표가 끝나고 오후 6시 서울 명동 거리에는 많은 시민들이 중계방송되는 전광판을 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2012년 11월 30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벽보 첩부가 시작된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율곡로를 지나던 어린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후보들의 벽보를 보고 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박찬종 등이 출마해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42%로 당선됐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는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권영길 등이 출마해 김대중이 40.3%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 등이 출마해 민주당의 노무현이 48.9%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 정동영, 권영길 등 10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결과는 한나라당 이명박이 48.7%로 당선됐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근혜, 문재인 등 6명의 후보가 출마해 새누리당 박근혜가 51.55%로 당선됐다.

출처: 한국의 역대 대통령 선거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국가기록원 조선일보 DB

 

■노태우에서 박근혜까지...역대 대선 지지율로 읽는 19대 대선

‘선거 3주 전 지지율이 최종 당락을 가른다’는 속설이 있다. 통계에서 추론한 말이다. 19대 대선을 2주 앞둔 4 25일 현재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은 문재인 후보 41%, 안철수 후보 30%, 홍준표 후보 9%, 심상정 후보 3%, 유승민 후보 3%.(4 18~20,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4명 대상 조사, 한국갤럽 자체조사, 그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기존 통계치만으로 보자면 후보 단일화 등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지만 예단하기는 이르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번 대선은 역대 대선과는 판이하게 다른 ‘낯선’ 대선인 만큼 기존의 통계나 예측치로 판단하긴 어렵다는 전망 역시 높다. 국내 최초로 선거 여론조사가 실시된 것은 1987년 제13대 대선부터다. 우리나라 대통령선거는 1952(2)부터 1971(7)까지는 직접선출제였고, 1972(8)부터 1981(12)까지는 간접선출제를 실시했다. 한국의 대표적 여론조사기관으로 꼽히는 한국갤럽조사연구소는 다시 직선제를 실시하기 시작한 13대 대선부터 꾸준히 선거 여론조사를 실시해 당선자를 예측해왔고, 결과 역시 적중했다. 13대 대선부터 18대 대선까지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지지율 추이와 지지율의 변곡점을 만든 사건을 짚어본다.

 

13
1987 12 16
투표율 89.2%

 노태우(민주정의당36.6% 당선
 김영삼(통일민주당) 28.0%
 김대중(평화민주당) 27.0%
 김종필(신민주공화당) 8.1%

 

여당의 노태우 후보 대 야당의 3(김영삼·김대중·김종필) 후보의 선거로 치러졌다.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는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동지 관계라 후보 단일화만 하면 야당이 질 수 없는 선거라는 인식이 파다했다.


그러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신경전이 깊어지면서 단일화는 물 건너가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원래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보다 지지율이 높았으나 김영삼 후보가 정승화 전 육군 참모총장을 영입하면서 김영삼 후보에게 표가 몰려 최종 득표율 2위를 차지했다. 선거 2주 전 KAL기 폭탄테러 사건이 터져 안보를 강조한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됐다.

 

14 
1992
12 18 
투표율 81.9%
 

 김영삼(민주자유당) 42.0% 당선
 김대중(민주당) 33.8%
 정주영(통일국민당) 16.3%
 박찬종(신정치개혁당) 6.4%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 김영삼 후보와 통합야당인 김대중 후보와의 경쟁구도 성격이 강했다. 정주영 후보는 현대그룹의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등장,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역대 대선 중 사전 지지율과 실제 선거 결과의 차이가 가장 크다. 선거 보름 전 지지율이 25%였던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실제 선거에서 42%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지지율보다 무려 17%를 더 얻었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구도로 치러진 대표적 선거로 거론된다. 특히 선거 막판 지역감정을 대놓고 모의한 부산의 ‘초원복집’ 사건이 터져 떠들썩했다. 실제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서울과 호남에서만 우위를 점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모두 김영삼 후보의 득표율이 높았다. 

 

15 
1997
12 18
투표율 80.7%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40.3% 당선
 이회창(한나라당) 38.7%
 이인제(국민신당) 19.2%

 

‘대쪽’ 법조인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이회창 후보는 ‘떼어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다. 그러나 두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지지율이 폭락했다. 38%의 지지율은 순식간에 반토막 이하인 16%까지 떨어졌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후보를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한 이인제 후보에게 지지자가 몰리면서 이인제는 탈당 후 신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했다. 한때 이회창보다 두 배 높은 지지율을 받았으나 “이인제를 뽑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공세에 밀려 지지율이 뒤집히기 시작, 이회창 후보에게 다시 표가 몰렸고 김대중 후보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역대 대선 중 가장 적은 격차인 1.6%포인트 차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16
2002
12 19
투표율 70.8%

 노무현(새천년민주당) 48.9% 당선
 이회창(한나라당) 46.6%
 권영길(민주노동당) 3.9%

 

지지율 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대선으로 꼽힌다. 이회창 후보는 2002 5월 여론조사 이래 지지율에서 늘 압도적 1위를 달리다가 노무현 후보에게 져 ‘패배할 수 없는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표현이 붙는다. 두 가지 결정적 사건이 대선 정국을 뒤바꿔놓았다

 

“노무현으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는 인식으로 정몽준·노무현 후보가 단일화했고,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이 발생하면서 반미감정이 고조되어 보수정권이 불리해졌다. 지지율에서 엎치락뒤치락했던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는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정몽준 후보가 사퇴하면서 25%였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44%로 껑충 뛰면서 1위로 급부상했다. 이후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 1위를 지켰다.

 

17
2007
12 19 
투표율 63.0%

 이명박(한나라당) 48.7% 당선
 정동영(대통합민주신당) 26.1%
 이회창(무소속) 15.1%
 문국현(창조한국당) 5.8%
 권영길(민주노동당) 3.0%

 

줄곧 한나라당 후보가 지지율 1위를 지킨 다소 싱거운 선거였다.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치열한 경선 끝에 이명박 후보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확정됐고, 이후 이명박 후보는 지지율이 61%까지 치솟았다. 무소속이었던 이회창 후보가 대선 한 달 전 갑자기 대선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이명박·정동영·이회창 후보의 12중 선거가 됐다. 노무현 정부 말기, 부동산정책 실패를 비롯한 총체적 난국으로 여권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상황이라 이명박 후보(48.7%)가 정동영 후보(26.1%)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지지율로 당선됐다. 

 

18
2012
12 19
투표율 75.8%
 

 박근혜(새누리당) 51.6% 당선
 문재인(민주통합당) 48.0%

양강구도가 가장 두드러진 선거였다. 박근혜 후보 51.6%, 문재인 후보 48%의 득표율로 두 후보의 득표율이 99.5%를 차지한다. 박근혜 후보는 줄곧 지지율 1위를 달렸고,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엇비슷한 지지율을 보이던 중, 안 후보가 문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 단일화하면서 국면이 전환됐다. 24%에 불과하던 문 후보의 지지율은 안 후보의 지지율을 흡수해 42%로 치솟았다. 이후 3주 전부터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오차범위 내 접전 양상을 보였다.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높다는 여론조사가 대부분이었으나 문재인 후보가 앞선다는 조사도 꽤 있었다. 박근혜 후보는 대선 사상 최초로 과반 이상 득표로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출처주간조선 2455   김민희 주간조선 기자

 

□2012 12.13 중앙일보 2000명 여론조사

 

 

19대 

2017.05.09

●문재인 득표율 41.1%

홍준표 득표율 24.03%

안철수 득표율 21.41%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19 대통령에 당선됐다.

 

9 실시한 19 대통령선거 개표를 모두 마친 10 오전 7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문재인 당선인의 득표율은 41.08% 13423800표를 얻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24.03% 7852849표를 얻어 2위에 올랐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21.41% 6998342표로 득표율 3위를 기록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6.76% 2208771,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6.17% 2017458표를 기록했다.

군소후보 중에는 조원진 새누리당 후보가 0.13%(42949), 김민찬 무소속 후보가 0.1%(33990), 김선동 민중연합당 후보가 0.08%(27229), 장성민 국민대통합당 후보가 0.06%(21709), 윤홍식 홍익당 후보가 0.05%(18645), 이경희 한국국민당 후보가 0.03%(11355), 이재오 늘푸른한국당 후보가 0.02%(9140), 오영국 경제애국당 후보가 0.01%(6040) 얻었다.

후보의 지역별 득표율은 전북이 64.84% 가장 높았고 광주(61.14%) 전남(59.87%) 뒤를 이었다. 서울에선 42.34% 기록했다.◎
최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