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4/ 한반도 외교7/ 신상목의 ‘이간질의 역사’ 월간조선
2018.02.06 김정은의 대화 제의 배경으로 본 ‘이간질의 역사’
이간책(離間策), 동맹을 깨고 나라를 망하게 하다
⊙ 초(楚) 회왕, 진(秦) 장의의 꾐에 넘어가 제(齊)와의 동맹 파기… 수시로 동맹 바꾸다가 고립과 쇠락 자초
⊙ 마오쩌둥, 정보공작의 귀재 리커눙에게 장쉐량-장제스 이간 지시… 공산당의 ‘내전중단 일치항일’ 호소에 말려든 장쉐량, 시안사변 결행
⊙ 히틀러, 위장평화 공세로 주변 반독(反獨) 동맹국들 간 유대 허물고 영국의 대륙방위 의지 약화시켜
⊙ 거물간첩 성시백,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설득, 국회 프락치 사건·국군부대 월북 등 꾸민 통일전선공작의 귀재
▲ 이간책으로 상대방을 무너뜨린 술책의 달인들. 장의, 리커눙, 성시백, 히틀러(왼쪽부터).
북한의 김정은이 지난 1월 1일 신년사를 발표했다. 그는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고 미국을 위협했다. 반면 한국을 향해서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남북고위급회담에 나선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은 “우리가 보유한 원자탄·수소탄·대륙간탄도로켓(미사일)을 비롯한 모든 최첨단 전략무기는 철두철미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북한의 대남 기구 가운데 하나인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는 최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를 비롯한 대북 교류 민간단체들에 보낸 신년 인사에서 “우리는 새해에 귀 단체가 북남선언들을 고수·이행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고, 자주통일을 위한 활동에서 성과를 거두게 되리라는 기대를 표명한다”고 했다.
한미동맹을 흔들고 남-남(南-南) 갈등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한미 간, 남남 간 이간책이다. 사실 이간책을 써서 동맹을 허물거나 적의 내부를 교란한 사례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에서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손자(孫子)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병법은, 사전에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쳐부수는 것이다. 그다음의 방법은, 적의 동맹관계를 분단시켜 고립시키는 일이며, 그다음의 방법이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최하의 방법이 성을 공격하는 것이니, 성을 공격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을 때 한다.”
이간책은 적이 동맹관계를 분단시켜 고립시키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사례들을 돌아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적국의 꾐에 넘어가 동맹을 파기한 초(楚) 회왕
배경
주(周)나라 이래 한때 수백 개에 이르던 중국의 여러 제후국은 전국(戰國)시대에 이르러 7개의 강국(진·초·제·위·한·조·연)으로 대략 정리된다. 천하의 종주국이던 주는 낙양 일대를 점거한 소국(小國)으로 전락한다. 그 밖에 그때까지 용케 명맥을 보존한 작은 나라들이 열강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전국 7웅 가운데서 특히 서쪽의 진(秦)나라와 동쪽의 제(齊)나라, 남방의 초(楚)나라가 천하의 패권(覇權)을 노리고 경쟁했다. 종횡가(縱橫家)라는 외교가들이 나와 활약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초나라와 제나라가 연합하자, 진나라는 장의(張儀)를 초나라로 보내 영토를 미끼로 초-제 동맹을 깨뜨렸다.
장의, ‘600리 땅’으로 유혹
/제나라 선왕.
기원전 313년 제나라가 초나라를 도와 진을 공격, 곡옥 땅을 탈취했다. 진 혜문왕은 제를 치려 했으나, 초나라가 제나라와 동맹관계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때 나선 사람이 장의였다. 장의는 초 회왕을 만나 이렇게 유세했다.
“폐읍(弊邑·자기 나라를 겸손하게 낮추어 이르는 말)의 군왕(진 혜문왕)이 호의를 가지는 분으로는 대왕만 한 분이 없습니다. 폐읍의 군왕이 심히 미워하는 분으로는 제왕(齊王·제 선왕)을 앞설 자가 없습니다. 이에 폐읍은 제나라를 치고자 하나, 문제는 대국(초나라)이 제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대왕이 능히 관문을 닫고 제나라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다면, 신(臣)은 폐읍의 군왕에게 주청해 상어(商於·하남성 내향현과 섬서성 상현 일대)의 사방 600리의 땅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나라는 반드시 약해질 것이고, 제나라가 약해지면 그들은 틀림없이 대왕을 받들 것입니다. 이는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에 은혜를 베풀고, 사사롭게는 상어 땅을 얻어 이익을 얻게 되니 그야말로 일계삼리(一計三利·하나의 계책으로 3개의 이익을 취함)가 되는 격입니다.”
장의의 유혹에 입이 벌어진 회왕은 조정에 나가 선언했다.
“과인은 상어 600리 땅을 얻었소.”
모든 신하가 축하했다. 진진(陳軫)이라는 신하만이 반대하고 나섰다.
“무릇 진나라가 대왕을 중히 여기는 것은 대왕에게 제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땅을 얻지도 못했는데 미리 제나라와 관계를 끊으면 초나라는 고립되고 맙니다. 그리되면 진나라가 어찌 고립되어 있는 초나라를 중시하겠습니까? 장차 먼저 땅을 내놓게 한 뒤 제나라와 절교하면 진나라의 계책은 성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제나라와 절교한 후 땅을 요구하면 장의에게 이용만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되면 대왕은 틀림없이 장의를 미워할 것입니다. 이후 초나라는 서쪽으로 진나라에 대한 근심이 생기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의 우의가 단절되고야 맙니다. 그러면 진·제 두 나라의 군사가 반드시 밀려들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초 회왕은 진진의 충언을 외면하고, 사자를 제나라로 보내 동맹 파기를 선언했다. 이러는 사이 진나라의 장의는 귀국하자마자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초나라의 배신에 분노하고 있던 제나라는 이에 기꺼이 응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초 회왕은 사신을 장의에게 보내 자신에게 주기로 한 상어 600리 땅을 넘겨달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장의는 초나라 사신을 만나주지 않았다. 초 회왕은 장의가 아직 초나라가 제나라와 완전히 동맹을 파기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그런다고 생각했다. 회왕은 자신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제나라에 대한 군사도발까지 감행했다.
이를 보고 초나라가 제나라와 완전히 단교했다고 확인한 장의는 그제야 초나라 사신을 만났다. 장의는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제가 진나라 군왕으로부터 받은 땅인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사방 6리의 땅을 가져가십시오.”
초나라 사신은 경악했다.
“저는 600리 땅이라고 들었는데, 6리라니요?”
장의는 시침을 떼고 말했다.
“아니, 저는 소인(小人)에 불과합니다. 제 땅이라면 몰라도 진나라의 땅을 제가 무슨 수로 600리나 내드린단 말입니까?”
초나라의 갈지자 외교
/초 회왕에게 충간했던 굴원.
사기(詐欺)였다. 속은 것을 깨달은 초 회왕은 격분해서 기원전 312년 진나라를 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진나라와 밀약을 맺은 제나라가 진나라 편에 가담했다. 초나라군은 단양에서 장군 굴개 이하 70명의 요인이 포로가 되고 8만명이 전사하는 등 참패를 당하고, 600리의 땅을 빼앗겼다. 초나라는 군대를 정비해 남전으로 진격했지만, 이 틈을 타서 한(韓)나라와 위(魏)나라가 쳐들어 왔다. 초나라는 두 개의 성을 내주고 진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기원전 311년에는 다시 진나라에 소릉을 빼앗겼다.
하지만 이후에도 초나라의 외교는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다. 기원전 306년경 제 선왕이 편지를 보내 동맹관계 회복을 요청해 왔다. 초나라 조정은 친제파(親齊派)와 친진파(親秦派)로 갈라졌다. 회왕은 친제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진나라에서는 혼인동맹을 제안했다. 회왕은 지조도 없이 여기에 넘어갔다. 화가 난 제나라 선왕은 위나라, 한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침공했다. 궁지에 몰린 회왕은 태자를 진나라에 인질로 바치면서 원병을 요청했다. 진나라의 도움으로 회왕은 일단 위기를 넘겼다.
기원전 302년 진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태자가 진나라의 중신과 말다툼 끝에 상대를 죽였다. 이런 유의 사건은 그 당시 드문 일은 아니었다. 태자 쪽에서 진나라에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하면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몰래 진나라를 탈출해 초나라로 돌아와 버렸다. 이로써 초-진의 동맹은 깨졌다.
기원전 301년 진나라는 제나라, 위나라, 한나라와 연합해 초나라의 방성을 공격했다. 초나라 장군 당매가 전사했다. 이듬해 진나라는 다시 초나라를 공격했다. 장수 정결 이하 2만명이 전사했다. 초나라는 제나라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며 동맹을 요청했다. 이듬해 진나라는 다시 초를 침공, 8개 성을 빼앗았다.
초나라가 다시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 소양왕은 초 회왕에게 편지를 보내 무관에서 양국 정상(頂上)회담을 갖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무관은 진나라 영내였다. 굴원(屈原)·소저 등 초나라 대신들은 “진은 늑대, 호랑이와 같으니 믿을 수 없다”며 말렸다. 하지만 왕자 난은 “어찌 진의 호의를 내친다는 말입니까?”라며 진나라행을 권했다.
초 회왕은 결국 무관으로 갔다. 진 소왕은 그를 동등한 군주가 아니라 속국의 신하 다루듯 하대했다. 급기야 진은 회왕에게 무·검중 땅을 내놓아야 돌아갈 수 있다고 협박했다. 평생 맹꽁이같이 굴던 회왕도 이 지경이 되자 격분했다.
“군왕은 나를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 땅까지 빼앗겠다는 것이오? 그럴 수는 없소.”
진나라는 회왕을 함양성에 억류했다. 회왕은 후일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결국 진나라 땅에서 병사(病死)했다. 천하의 모든 나라가 진나라의 무도함을 규탄했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남방의 강국이던 초나라는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회왕으로부터 두 세대 후인 기원전 223년 초나라는 진나라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진진의 경고
초나라는 양자강 이남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열강 가운데 가장 먼저 왕(王)을 칭하면서 천하를 도모했던 강국이었다. 하지만 초 회왕이 진나라의 이간질에 놀아나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동맹을 갈아치우는 저질 외교를 벌이면서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초 회왕의 경우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동맹인 미국과 일본을 멀리하고 중국과 친해지려 안달하는 모습은 “무릇 진나라가 대왕을 중히 여기는 것은 대왕에게 제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제나라와 관계를 끊으면 초나라는 고립되고 만다. 그리되면 진나라가 어찌 고립되어 있는 초나라를 중시하겠는가?”는 진진의 경고를 무시하는 초 회왕의 모습과 닮았다. 비핵화 등 북한의 양보는 전혀 없이 먼저 양보부터 하는 모습도 600리 땅을 얻기 전 제나라와의 동맹부터 깨뜨렸던 초 회왕의 모습 그대로다. 대한민국도 초나라와 같은 운명을 걸을 것인가?
시안사변은 공산당의 ‘우리 민족끼리’ 공작의 산물이었다
배경
1930년대 중반 중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공산주의자와의 내전(內戰)이, 밖으로는 만주를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다. 장제스(蔣介石)는 내부의 적인 공산주의자들을 먼저 토벌해 국내를 안정시킨 후 일제(日帝)의 침략에 맞설 생각이었다. 장제스는 일제의 침공으로 기반을 잃은 만주군벌 장쉐량(張學良)과 그 휘하 동북군(東北軍)을 공산군 토벌에 투입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내전을 중지하고 일제와 싸우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옌안(延安)으로 쫓겨가 있던 중국공산당은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장쉐량에 대한 설득공작에 나섰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 중단과 항일전쟁을 요구한 시안(西安)사변은 바로 그런 공작의 소산이었다.
역사를 바꾼 시안사변
/장쉐량(왼쪽)과 장제스. 시안사변 전인 1935년경 찍은 사진이다.
1936년 12월 12일 새벽 6시, 당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었던 시안 화청지(華淸池) 일대에서 총성이 울렸다. 공산군 토벌에 투입되었던 동북군과 제17로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공산군 토벌 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내려와 있던 장제스 국민당 중앙군사위원장의 숙소를 습격했다. 장제스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뒷산으로 도주했지만, 오래지 않아 반란군에게 붙잡혔다.
끌려온 장제스를 만난 장쉐량은 “이것은 병란(兵亂)이 아니라 구국(救國)을 위한 병간(兵諫)”이라면서 8개 항의 요구를 내놓았다. 요점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抗日)정책을 채택하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일본군에 고향 만주를 잃고 중국 본토로 들어와 기약 없는 공산군 토벌에 투입되어 있던 동북군은 장제스를 당장 죽일 듯이 굴었다. 실제로 그들은 장제스의 조카인 장샤오센(蔣孝先) 소장을 총살했다.
장쉐량은 공산당에도 사람을 보내 장제스 설득에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시안으로 급히 달려온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장제스를 설득했다.
“홍군(紅軍·공산군) 토벌을 중단하고 항일을 같이하신다면 저와 홍군은 모두 위원장님의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장쉐량과 장제스, 공산당, 국민당 간에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2주일 동안 계속됐다. 결국 장제스는 장쉐량의 ‘내전중단 일치항일(一致抗日)’ 요구를 받아들였다. 궤멸 직전에 놓여 있던 공산당은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 이듬해 중일(中日)전쟁이 시작됐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멀리 충칭(重慶)까지 밀려난 사이에 공산당은 농촌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결국 일제 패망 후 재개된 국공(國共)내전에서 승리해 1949년 대륙을 차지했다.
리커눙의 공작
/정보공작의 귀재였던 리커눙.
시안사변은 만주 군벌(軍閥)이었던 아버지 장쭤린(張作霖)과 만주를 일제에 잃어 항일의지에 불타던 장쉐량이 무의미한 공산당과의 내전에 투입되어 고뇌하던 끝에 일으킨 ‘구국의 결단’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공산당의 공작이 있었다.
옌안까지 쫓겨나 소멸 직전에 놓여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은 정보공작의 귀재인 리커눙(李克農)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우리는 항일전쟁을 주장하는 장쉐량의 의견에 동의한다, 동북군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싶다 해라. 장제스와 장쉐량을 떼어놔라. 내전을 중지하면 홍군이 항일의 선봉대 역할을 하겠다, 매국노 토벌도 우리에게 맡기면 성실하게 수행하겠다 해라.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직접 장쉐량과 담판해라.”(김명호, 《중국인이야기(4)》) 공산군은 저우언라이의 지휘 아래 장쉐량군에 대한 정치공작을 전개했다. 전선에서 장쉐량군과 대치하는 공산군은 이렇게 외쳤다.
“중국인은 중국인을 치지 않는다!”
“국민당은 중국인은 치면서 일본인은 치지 않는다!”
“내전을 멈추고 함께 일본에 맞서자!”
사실 이때 동북군은 고단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들은 1935년 7월 시안으로 이동해 공산군 토벌전에 투입된 이래 공산군에게 연전연패(連戰連敗)하고 있었다. 사단장 두 명이 전사하고 한 명은 공산군의 포로가 될 정도였다. 전의(戰意)를 상실한 장쉐량과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은 1935년 12월경 공산군에 대한 작전을 중단했다.
정보공작의 귀재 리커눙도 움직였다. 그는 후일 한국전쟁 휴전협상 당시 막후에서 공산 측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수완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리커눙은 장쉐량과 만나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쉐량과 저우언라이의 회담도 성사시켰다. 1936년 4월 저우언라이와 만난 장쉐량은 “동북군에 홍군 대표를 파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문제가 생기면 함께 토의하자”고 제안했다. 장쉐량은 무기 구입에 쓰라고 은(銀) 2만 냥과 미화(美貨) 20만 달러도 주었다. “내 입당 원서로 간주하라”면서 최신 군사지도까지 넘겨주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장쉐량의 입당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코민테른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국민당 정부의 정보기관인 조사통계국을 이끌던 다이리(戴笠)는 장쉐량이 공산당과 접촉한 사실을 포착하고 장제스에게 장쉐량 체포를 건의했다. 하지만 장쉐량과 친분이 있던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장쉐량을 감싸주었다. 이후에도 장쉐량은 공산군 토벌작전을 회피하면서 장제스에게 수시로 ‘내전중단’과 항일전쟁을 촉구했다.
이에 분노한 장제스는 1936년 12월 4일 시안으로 가서 장쉐량과 양후청을 채근했다.
“한 달 내로 공산비적들을 소탕하라. 그러지 못하면 중앙군을 투입하겠으니, 푸젠성(福建省)으로 가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푸젠성으로 가라는 얘기는 장쉐량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새삼 공산군 토벌에 나설 수도 없었다. 공산당의 ‘내전중단 일치항일’ 주장에 물들 대로 물든 휘하 장병들의 변란이 우려됐다. 장쉐량은 12월 12일 낮에도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를 설득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장쉐량을 몰아붙이기만 했다. 결국 그날 밤 장쉐량은 ‘병간’이라는 명목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우리 민족끼리’에 현혹된 장쉐량과 동북군
장쉐량은 협상이 타결된 후 장제스가 수도 난징(南京)으로 귀환할 때 동행했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연금(軟禁)했다. 기사회생한 공산당은 중일전쟁 중 세력을 키웠고 전쟁이 끝난 후 국공내전에서 승리했다.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주할 때 장쉐량을 끌고 갔다. 장쉐량은 장제스는 물론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죽은 후인 1990년이 되어서야 연금에서 풀려났다. 장쉐량은 2001년 하와이에서 10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중국공산당의 장쉐량에 대한 공작은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운 전형적인 통일전선공작이었다. 적군(공산군)의 이러한 공작에 동북군은 설득당했다. 공산군은 내전중단과 항일을 호소해 동북군 장병들의 전의를 꺾은 후, 상층부에 대한 통일전선공작에 들어갔다.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대한 확신은 부족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더 관심이 있던 청년군벌 장쉐량은 그 공작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더욱이 그에게는 자신을 합리화할 ‘항일’이라는 대의명분도 있었다. 장제스의 주적(主敵)은 공산당이었지만, 장쉐량의 주적은 일본이었다. 시안사변은 동북군 장병들의 주적 개념이 희미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우언라이와 리커눙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 장교와 병사들은 전교조 교사들 밑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편향 역사교과서로 공부하면서 성장한 세대다. 유사시 전쟁을 결단하고 이끌어야 할 국가지도부는 북한을 ‘주적’으로 보기보다는 ‘같은 민족’으로 여기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안 된다”는 소리만 되뇌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대한민국 국군은 제대로 전쟁을 해낼 수 있을까?
히틀러, 외교로 반독(反獨) 동맹 각개격파
배경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독일의 재기를 막기 위해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부과하는 한편, 독일의 군사력을 무력화(無力化)하고 외교적으로 독일을 포위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등의 지배 아래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등으로 하여금 개별적 혹은 집단적으로 동맹을 맺도록 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들의 독립을 보장해 주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세력이 미미하던 시절부터 이미 베르사유조약의 파기와 독일의 재군비, 영토확장 등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3년 1월 집권했을 때, 히틀러나 독일에는 이러한 정책을 실천에 옮길 힘이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폴란드와의 불가침협정, 영국과의 해군협정,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탈취한 뮌헨협정 등을 통해 외교적 농간으로 대독동맹을 약화시키면서 재군비와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폴란드와 불가침협정 맺어 유럽의 신뢰 획득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영토의 15%, 인구의 10%, 그리고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했다. 독일은 1차대전 발발의 모든 책임을 져야 했고, 이에 따라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도 물게 됐다. 배상의 일환으로 독일이 가진 특허권들도 포기해야 했는데, 독일 바이엘사가 갖고 있던 아스피린이 대중화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병력은 10만명으로 제한됐고, 항공기, 잠수함, 전차, 일정 크기 이상의 군함의 보유도 금지됐다.
독일인들에게 베르사유조약은 둘도 없는 국치(國恥)였다. 이 조약 체결에 동의한 바이마르공화국의 문민정치인들은 독일 국민들에게 ‘국적(國賊)’으로 간주됐다. 패전으로 인한 상실감, 내전을 방불케 하는 좌우익의 무력충돌, 그리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히틀러는 바로 이 치욕스런 베르사유체제를 혁파하고 위대한 독일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집권했다.
히틀러는 집권한 지 불과 1년 만에 독일을 나치당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국가로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대외(對外)관계는 생각처럼 쉽게 바꿀 수 없었다. 영국·프랑스·소련 같은 유럽의 강대국, 그리고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작은 나라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군사력을 철저하게 제한당해 온 독일로서는 무력(武力)으로 국제질서를 급격하게 흔들 수도 없었다. 히틀러는 재군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현란한 외교를 펼쳤다.
집권한 지 1년 후인 1934년 1월 독일은 폴란드와 불가침협정을 맺었다. 18세기 후반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에 의해 분할당했던 폴란드는 1차 대전 이후 주권을 회복했다. 독일과 러시아(소련)가 패전과 혁명으로 약화된 틈을 타 폴란드는 1920년대 10년 동안 중부 유럽의 군사강국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언제 독일과 소련이 재건되어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려 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폴란드가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건설함으로써 프랑스의 군사정책이 방어적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폴란드 독재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유사시 프랑스의 동맹에 기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때 히틀러가 손을 내민 것이다.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의 내용은 간단했다. 기존의 국제조약들의 준수를 다짐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무력 사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후 5년간 독일과 폴란드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폴란드의 독립으로 동부의 영토를 상실한 독일이 폴란드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독일은 신뢰해도 좋은 책임감 있는 국가’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영국 정치인들과 정부, 언론 일각에서는 독일인들이 베르사유체제에 대해 품고 있는 반감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며, 차제에 베르사유조약이 독일에 부과한 군비제한 규정을 철폐해 독일에 ‘군비평등권’을 주는 대신, 독일을 유럽의 안전보장체제 안으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내재적 접근법’에 따라 북한을 이해해 주면서 평화협정을 맺어 북한이 ‘미국의 대북(對北) 적대시 정책’ 때문에 느끼고 있는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고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이끌어내자는 주장들과 닮은꼴이다.
1934년 3월 영국 외무부 일각에서는 독일의 군비를 제한하는 베르사유조약 제5장의 폐기를 지지하는 주장이 나왔다.
“베르사유조약 제5장은 현실적인 목적을 잃었다. 만약에 이를 폐기시키지 않는다면 부패한 송장이 되어 유럽의 정치적 환경을 오염시킬 것이다. 또한 만약에 이에 대한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면 히틀러가 장의사에게 아직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 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
히틀러, “나치 독일은 평화를 갈망한다”
/1936년 3월 7일 독일군은 베르사유조약이 비무장지대로 규정한 라인란트로 진주했다.
히틀러는 이런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1935년 3월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징병제 부활과 재무장을 선언했다.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일방적 파기였다. 프랑스는 펄펄 뛰었지만, 영국은 ‘독일의 주장이 그렇게 부당한 것은 아니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두 달 후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감동적인 평화연설을 했다.
“국가사회주의(나치) 독일은 평화를 갈망한다. 모든 전쟁의 주요 성과는 그 나라의 정수(精髓)를 파괴하는 것뿐이다. 독일은 평화를 필요로 하며, 평화를 원한다.”
히틀러는 1차 대전 후 프랑스에 빼앗긴 알자스-로렌, 폴란드의 영토로 편입된 옛 독일제국 영토를 요구할 생각이 없으며,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의도도 없다고 밝혔다. ‘군비평등권’이 보장되면 ‘영토규정을 포함하여’ 베르사유조약의 비군사적 조항들을 ‘무조건 존중’하고, 라인란트의 비무장화를 준수할 것이며, ‘언제라도’ 집단안보체제에 참가할 의도가 있다고도 했다.
히틀러는 특히 영국을 향해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의 35% 수준으로 제한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독일과의 해군력 확장 경쟁 끝에 1차대전에 돌입했던 영국에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히틀러는 “(‘군비평등권’에 대한 독일의 요구는) 마지막이며 영속적이고 불변(不變)의 요구”라고 다짐한 후,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전쟁의 불을 유럽에 점화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혼돈 이외에 아무것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 서구의 몰락이 아니라, 그 재생이 실현될 것이라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있다. 독일이 그 위대한 사업에 끊임없이 기여하는 것이 곧 우리의 자랑스러운 희망이며 또한 확고부동한 신념이다.”
영국의 《런던타임스》는 이 연설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연설은 타당하였고 솔직하였으며 앞뒤가 잘 맞는 것이었다. 공평한 정신으로 이것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히틀러가 주장한 주안점이 독일, 16년 전에 평화를 강요당해서 항복한 독일 대신에, 자유롭고 평등하며 강력한 독일과의 완전한 화해의 토대를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영국은 히틀러가 내민 평화제안을 덥석 물었다. 1935년 6월 영국과 독일은 히틀러가 제안한 대로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의 35% 수준으로 제한하는 영독해군협정을 체결했다.
영국은 독일과의 해군협정 체결 과정에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논의하지 않았다. 사후(事後)에 그 내용을 통보했을 뿐이다. 프랑스는 이를 영국의 배신으로 간주했다. 양국 간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후일 1941년 독일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군을 결성해 싸우면서도 ‘영국이 언제 손을 털고 전쟁에서 이탈할지 모른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프랑스는 결국 끝까지 함께 싸우자는 영국의 호소를 외면하고 독일에 항복했다. 그 씨앗은 어쩌면 이때 뿌려진 것일 수도 있다.
영국, 독일의 라인란트 점령 방관
/오스트리아 출신인 히틀러는 합병 다음날 빈에 입성,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936년 3월 7일 독일군은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비무장지대로 규정되어 있던 라인란트로 진주(進駐)했다. 독일인들은 열광했다. 그 직후 히틀러는 제국의회에 나가 다시 한 번 평화를 다짐했다.
“첫째, 우리는 우리 국민의 명예를 회복함에 있어서, 여하한 폭력에도 호소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둘째, 우리는 지금까지보다도 한층 더 유럽 국민, 특히 서방의 이웃 여러 나라 국민과의 이해에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 …
우리는 유럽에서의 영토적 요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
독일은 결단코 평화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로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나라는 프랑스였다. 피에르 에티앤느 플란당 프랑스 외무장관은 영국에 프랑스의 반격작전을 후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연합국 측이 독일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갖고 있다고 해도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영국 측은 “독일은 자기의 뒤뜰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제3제국의 흥망》의 저자인 에드워드 샤이러는 이렇게 평했다.
“1936년 3월 서구의 두 민주주의 국가에는 중대한 전쟁의 위험 없이 군국주의화한 침략적인 전체주의 독일의 대두를 방지하고 사실상 나치스 독재자와 그 제도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병합은 독일 국내 문제”
/뮌헨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유린한 사람들. 왼쪽부터 체임벌린 영국 수상,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히틀러 독일 총통,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치아노 이탈리아 외무장관.
1937년 2월 20일 히틀러는 제국의회 연설에서 ‘우리나라 국경에 인접하고 있는 두 나라에 살고 있는 1000만명이 넘는 독일인’의 자결권(自決權)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및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텐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해 3월 11일 히틀러는 협박과 회유, 무력을 동원해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이에 앞선 수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합병을 요구하는 나치당원들의 소요로 편할 날이 없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나치를 사주해 합법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신정부(?)를 수립하게 한 후 이들의 요청에 응한다는 형식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영국이 이에 항의했지만, 노이라트 독일 외무장관은 이를 간단하게 묵살했다.
“독일-오스트리아 관계는 독일만이 전적으로 가질 수 있는 관심사로서 영국 정부가 간섭할 바가 아니다.” 독립국가를 강제합병하면서도 이를 ‘민족 내부의 문제’로 치환(置換)해 외부의 관여를 막아버린 것이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이루어지면 북한과 종북(從北) 세력은 히틀러와 흡사한 수법과 수단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한 후 ‘통일’을 선언할지도 모른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대해 마땅히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작은 나라지만 유럽 유수의 공업력을 바탕으로 잘 무장된 정예군대를 갖고 있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편을 들 가능성을 우려했다. 나치 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이 베를린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공사 마스토니 박사와 만났다. 괴링은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에 진주한 것은 ‘국내 문제’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마스토니 박사는 본국 외무장관과 통화한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문제와 관련해 군대를 동원하거나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전했다. 괴링의 감언이설에 넘어감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스스로 파멸을 재촉했다.
히틀러, “수데텐은 내가 요구하는 마지막 영토”
/뮌헨에서 돌아온 체임벌린은 협정문을 흔들면서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외쳤다. 1년짜리 평화였다.
다음 목표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1938년 5월이 되자 ‘수데텐 문제’가 표면화됐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의지를 노골적으로 피력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할 결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재무장, 라인란트 진주 등을 용인했던 영국은 독일이 독일인 300만명이 사는 수데텐을 합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열강들은 체코슬로바키아는 수데텐을 할양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닦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독일의 침공이 있을 때 자신들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9월 21일 “우리는 버림받았고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강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을 비롯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서방국가들에 대해 배신감을 품게 됐다. 이런 감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토양이 되었다.
9월 23일 체임벌린 영국 수상과 만난 히틀러는 “수데텐은 내가 유럽에서 요구하는 마지막 영토”라고 단언했다. 체임벌린은 감격했다. 수데텐 문제를 놓고 막바지 협상이 진행되던 그해 9월 27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먼 나라의 주민들 사이에서 분쟁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방공호를 파고 방독면을 써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이상한 일인가?”
“전혀 알지 못하고 만나본 적 없는 나라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쟁기념조형물에 새겨진 글귀와는 정확히 정반대의 발상이다.
9월 29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는 동안, 체코슬로바키아 대표 두 사람은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개선장군처럼 영국으로 돌아온 체임벌린 수상은 의기양양하게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했다. 열강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분할되고 있는 동안, 폴란드와 헝가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자국계 주민들이 사는 땅을 차지했다. 이 나라들이 행여 체코슬로바키아를 도울까 싶어 히틀러가 던져준 뇌물이었다.
히틀러와 김정은
이번에도 ‘마지막 요구’라던 히틀러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데텐을 제외한 나머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히틀러는 이듬해 이 땅들마저 점령했다. 이어 1939년 8월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비로소 오랜 미망(迷妄)에서 깨어난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후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독일-폴란드불가침협정에서부터 폴란드 침공에 이르는 시간은 5년8개월에 불과했다. 이 기간 동안 히틀러는 수없이 평화를 다짐했다. 긴장을 조성한 후에는 ‘이번이 마지막 요구’라고 약속해 반대급부를 얻어냈다. 적국들을 이간시키고 방심케 하는 외교적 사술(詐術)이었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는 세계대전을 착실하게 준비해 나갔다.
제네바합의부터 시작해 6자회담, 6·15선언과 10·4선언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수없이 핵개발 포기 내지 동결을 약속했고, 자기들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핵개발이나 미사일 발사로 인해 국제적 긴장이 한껏 고조되면 대화를 제안해 위기를 모면했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하나의 작은 합의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에 북한은 핵실험을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이제는 올봄까지 북한을 저지하지 못하면 북한은 원자탄과 수소탄, ICBM 양산체제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지경이 됐다. 거기에다 덤으로 북핵에 대한 대응을 두고 한국과 미·일을 이간시키는 성과도 거두었다.
지금도 북한은 한국에 대해서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내세워 ‘올리브 가지’를 흔들면서 미국에는 ‘군사훈련 중단’과 ‘전략무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애써 미소를 짓지만 독기를 감출 수 없는 김정은의 얼굴 위로 히틀러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김구 북행(北行) 성사시킨 거물간첩 성시백
배경
김구는 독립운동 시기부터 반공노선을 견지해 왔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이승만과 함께 민족 진영(우익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김구는 자기보다 한 살 연상인 이승만을 존중했고, 그와 정치노선을 같이했다. 하지만 1947년 11월 유엔총회 결의 이후 김구는 점차 이승만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2월 10일에는 ‘3000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2월 16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북한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김구는 이승만과 결별했다. 4월 21일 김구는 결국 남북협상 참석을 위해 38선을 넘었다. 이 뒤에는 김일성 직계의 거물간첩 성시백이 있었다.
김일성 직계 공작원
/남북협상 참석차 38선을 넘는 김구. 북한 간첩 성시백이 김구를 설득했다
통일전선전술은 소수파인 공산주의자들이 자기편 세력을 결집하고 상대편의 세력을 약화 또는 고립시키기 위해 이해관계가 같은 계층 또는 정당·사회단체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협동하는 전술을 말한다. 북한노동당의 통일전선부와 그 산하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은 통일전선전술을 담당하는 기관들이다.
해방 후 결성되었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서부터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 통일, 민주화, 진보를 내걸고 명멸(明滅)했던 수많은 단체의 뒤에 북한 공작기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거물간첩 성시백은 바로 이 통일전선전술의 달인(達人)이었다. 평생 반공노선을 견지했던 김구가 말년에 남북협상 참가라는 실족(失足)을 하게 된 데에는 이 성시백의 역할이 있었다.
성시백은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3·1운동에 참가했고, 1925~1926년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박헌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28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대학에 다니다가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공산당 지하공작에 투신하면서 저우언라이와 가까운 사이가 됐다. 1997년 5월 26일 자 《로동신문》에 실린 성시백의 일대기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에 의하면, 상하이 시절부터 성시백은 김구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추방당하게 됐을 때, 《상해일보》 기자로 있던 성시백이 “프랑스 총영사가 조선 망명자들을 자기들의 불행처럼 여기면서 성심성의로 보호해 주고 있다”는 기사를 썼고, 결국 프랑스 총영사는 김구 등을 내쫓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성시백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절친하게 지냈다. 김구의 측근이던 엄항섭, 안우생(안중근 의사의 조카), 임정 각료 장건상 등 좌파 성향 인물들은 물론 훗날 대한민국에 참여하는 이범석, 김홍일 등과도 가까웠다. 김홍일과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다. 성시백은 임정 요인들에게 김구를 중심으로 구국전선을 구축하라고 설득하는 등 김구의 정치적 지지자 노릇을 했다.
1946년 2월 평양으로 들어간 성시백은 김일성을 만나 충성을 맹세했다. 김일성은 그를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소속 대남공작부서인 5호실(연락실) 부실장으로 임명했다. 성시백이 바로 김일성 직속 공작기구의 간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저우언라이의 추천장 때문이었다.
성시백은 그해 3월부터 남북한을 오가며 조선공산당 중앙과의 연락업무, 좌우합작, 좌익 정당들의 통합사업 등을 담당했다. 1947년 5월 성시백은 남한 내에 남로당과는 별개의 공작조직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남파됐다.
성시백은 중국 무역을 하는 상인으로 행세했다. 그는 북한에서 명태·카바이드 등을 들여와 중국에 수출해서 돈을 만들었다. 물론 그의 사업 뒤에는 북한 공작기구가 있었다. 그가 사용한 공작비는 미화 3만9000달러, 현재 가치로 17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 돈으로 그는 《조선중앙일보》 《우리신문》 등 10여 개의 매체를 경영하기도 했다. 늘 신사복 차림의 깔끔한 멋쟁이여서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성시백은 좌익 정당들이 남로당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낙오한 좌익 계열의 정치 낭인들, 중도파 정객들, 임시정부 계열의 정치인들을 주로 포섭했다. 이들 사이에서 성시백은 김일성과 통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선’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이후 북한공작원과 선이 닿거나 노동당에 입당한 인사들이 운동권 내에서 행세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후일 ‘성시백선(線)’으로 알려진 그의 인맥에는 김구의 측근 엄항섭, 개인비서 안우생, 김규식의 비서 권태양, 민족자주연맹 간부 박건웅, 조소앙의 비서 김흥권, 이범석의 측근 정국은,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간부 최백근, 홍명희의 민주독립당 간부 강병찬 등이 있었다.
“내가 바로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입니다”
/성시백의 공적을 대서특필한 1997년 5월 26일 자 《로동신문》.
1948년 2월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했던 김구에게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한 사람도 성시백이었다. 이보다 앞선 1947년 12월 성시백과 만난 김일성은 남북합작과 민족주의자와의 통일전선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시백이 상하이 시대의 인연을 바탕으로 김구에게 접근해 그를 설득해 가는 상황을 1997년 5월 26일 자 《로동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철자와 약물은 표준어에 맞게 손보았다).
〈성시백 동지는 김구 선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쳐오시는 분인데 김일성 장군님을 직접 만나 뵈옵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북에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자주역량으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대표자들의 연석회의를 개최할 데 대한 제의를 내놓았는데, 이 거사가 성사되기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입니다.”
김구 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네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며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워할 리야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시백 동지는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시겠는데 오늘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간 일을 두고 중상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북행을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 사람들의 시녀 노릇을 하는 이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 장군과 마주 앉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 장군을 신봉하고 있군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태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드리었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게 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선견지명의 지략에 탄복하면서 성시백 동지는 즉시 김구 선생의 서기에게 김일성 장군의 특사가 곧 찾아간다는 것을 알리고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간단한 인사말이 오간 다음 성시백 동지는 김구 선생에게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부친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고 물으셨지요?”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이라고 양보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자 김구 선생은 “아니 뭐, 뭐라고? 김일성 장군님께서?!”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그런데 자네는 어떤 인물인가?” 하고 물었다.
“내가 바로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입니다.”
김구 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과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김구 선생은 “아니, 자네가?… 그렇다면 임자가 오늘 오신다고 하던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란 말씀이시오?!” 하고 물었다.
이렇게 김구 선생의 말투도 대뜸 달라졌다.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 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백범 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 선생의 얼굴이 크나큰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주실 줄은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주시었으니 기어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92년 12월 어느 날에 이때에 있은 일을 회상하시면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때 성시백의 활동이 컸다고 하시며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신 후 “나는 앞으로 회고록을 쓸 때 해방 후 남북연석회의 대목에 성시백의 활동 내용을 적어 넣으려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안우생, “북의 공산주의자들과 합작” 주장
《로동신문》의 성격, 특히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김구를 폄하하는 대목은 가려가며 읽어야겠지만, 김구의 북행 과정에 성시백의 공작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김구의 최측근이던 엄항섭은 4월 김구의 북행을 앞두고 성시백과 자주 접촉했다. 일각에서는 김구가 북행을 결행하게 된 것은 측근들이 “남북협상에 성공하면 통일조국의 대통령은 선생님이 될 것이며, 김일성도 그걸 원하고 있다”는 식으로 속삭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게 사실이라면 김구의 측근들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은 사람은 성시백일 것이다. 성시백은 중국 시절부터 엄항섭·안우생 등과 가까운 사이였으니 말이다. 이런 정황은 후일 월북한 안우생의 술회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남조선에 있던 나는 중경 시절부터 교우 관계를 갖고 있던 구면 친지인 성시백 선생을 재회하였다. 그는 나의 아우(안지생)를 대동하고 찾아와 남창동에 있는 우리 집에 보름가량 묵으면서 어지럽게 변천되는 시국관을 나누기도 했다. … 마침내 우리는 민족의 출구에 대한 일치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체 외국 군대를 철거시키며 단정·단선음모를 저지·파탄시키기 위하여 북의 공산주의자들과도 제휴·합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작용하기로 했다.”
성시백의 공작의 결과 이승만과 김구는 결별했다. 이는 그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우익 세력과 민주주의적 우익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우익을 확실하게 이간질해 놓은 것이다.
성시백의 공작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1949년 적발된 국회 프락치 사건 관련자 13명 가운데 6명이 성시백 계통의 인물이었다.
성시백은 1950년 5·30 국회의원 총선에 나선 후보들도 지원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 김모에게 선거자금 185만원을 지원한 것이 그 예이다. 성시백은 박건웅, 장건상, 김성숙, 김붕준, 김찬, 유석현, 윤기섭, 조소앙, 원세훈 등 ‘진보 성향’의 임정 출신 인사들도 지원하려 했으나, 선거 직전인 5월 15일 체포되는 바람에 무산됐다.
국군 2개 대대 집단 월북 조종
성시백의 손은 군부에도 뻗었다. 그는 국방부, 육군본부, 각 병종(兵種) 사령부에서부터 일선 연대, 대대까지 조직을 구축했다. 1949년 강태무·표무원 소령이 8연대 1대대와 2대대 병력을 이끌고 집단 월북한 사건, 그해 9월과 이듬해 3월 공군기 3대의 월북, 1949년 9월 해군 초계정 월북, 1950년 해군 함정 강철호 월북 등의 뒤에는 성시백이 있었다.
1950년 6·25 발발 직전 육군본부는 주요 참모들과 사단장들을 인사 이동시키고, 비상대기 태세를 해제하고 장병들을 휴가 보냈다. 전쟁이 터지기 전날에는 육군회관 낙성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군 지휘부는 다음날 작취미성(昨醉未醒) 상태에서 전쟁을 지휘해야 했다. 이를 두고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 등은 이런 ‘우연’들이 군내에 침투한 오열(五列)의 소행이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것도 성시백이 공작한 것이라는 설(說)이 있다.
1948년 9월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 중국 총통이 정상회담을 한 후 그 내용이 고스란히 북한으로 넘어갔다. 주한 중국대사관 직원으로 이 회담의 통역을 맡았던 김석민이 성시백의 수하였던 것이다. 미국대사관 직원 김우석을 통해 미국 정부와 주한 미국대사관 사이에 오간 문건과 기밀들도 북으로 유출됐다.
1950년 5월 25일 이태희 서울지검장, 오제도 검사, 장도영 육군정보국장, 김태선 치안국장 등은 합동기자회견을 열어 성시백을 우두머리로 하는 간첩단 ‘북조선로동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상인, 공무원, 교원, 학생, 회사원, 의사, 외국 공관 직원, 직공 등 112명이 연루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을 제대로 수사하기도 전에 6·25가 터졌다. 서울 함락 하루 전인 6월 27일 특무부대원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성시백을 끌어내 처형했다.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북한 평양에 있는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그의 가묘(假墓)가 있다.
김일성은 그에게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내렸다. 1990년대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7부작 영화 〈붉은 단풍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의 3남인 성자립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냈다. 2002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북측 부단장으로 다녀갔다.
‘제2의 성시백’은 어디에?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으로부터 ‘순결한 애국자’로 추앙받는 김구의 북행에도, 건군 초기 육·해·공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월북사건에도, 정상회담 기밀 유출에도 북한 간첩 성시백의 손길이 있었다. 성시백에게 포섭되어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사사건건 건국사업을 방해했던 국회의원들도 있었다. 성시백이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려 한 정치인과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과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이들, 지금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정부 내에서 평화, 통일, 자주, 민주를 외치는 자들, 사드와 강정해군기지 반대를 외쳐온 자들, 그 밖에 대한민국과 국군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온갖 주장을 하는 자들 가운데, ‘제2의 성시백’에 의해 조종되는 이들은 없을까?⊙
출처 | 월간조선 2018년 2월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신상목의 세계정세
2018.01.02 미 중간의 균형자로 변모하는 일본...일본의 족쇄를 풀어주는 한국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헌팅턴은 일본이 동맹외교를 기조로 하면서도 한 번도 '균형자(balancer)'로서의 동맹을 맺어본 적이 없으며 늘 '무임승차자(bandwagoner)', 즉 그때 그때 가장 강력한 세력과 제휴하여 반사적 이익을 취하는 행태를 보여왔다고 주장했다.
요즘 일본에서는 미일동맹의 성격에 대해 많은 재고(re-thinking) 논의가 있다. 그 가운데 대세를 이루는 것은 미일동맹이 단지 일본의 안보를 미국에 위탁하는 것이 아니며, 슈퍼파워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균형자(balancer)'로서 성격이 변모하였으며, 이는 일본 안보태세의 근본적 성격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안보태세의 성격 변화라는 것은 일본의 동맹 내에서의 역할 재정의, 그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 능력 개편을 의미한다. 미국의 적극적 후원과 지지를 바탕으로 이러한 동맹 재조명 작업은 더욱 탄력을 받고 있고 가속화되고 있다.
일본은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과거사 문제이다. 미국으로서는 동맹의 또 다른 바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과의 관계를 일본이 잘 관리해주기를 희망한다. 일본 또한 한국의 블레싱까지는 아니라도 묵시적 동의 정도는 확보하고 싶어했다. 미일 모두 중국 견제가 목적이므로 세 확보 차원에서 한국을 같은 테두리로 묶고 싶어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그것이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있어 최소한 한국의 요구에 응하는 모습을 보여온 이유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이 먼저 애가 달아서 협의를 요청해 오고 대화를 희망할 이유가 없다.
한국이 정말로 균형자를 희망한다면 그러한 미일의 이해관계의 회계장부 속에서 운신의 여지가 있다. 흑자 사업으로 살릴 수 있다는 가망이 있어야 계속적인 회계관리(book keeping)의 유인이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사업은 결손으로 처리하고, 그에 투입될 자원을 리그룹핑하여 그를 만회할 다른 사업에 노력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 수순이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일동맹과 일본의 역내 안보 역할에 대한 재정의가 한국의 양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 한국이 그를 공동의 이해관계로 받아들일 것인지가 관심사인 상황 속에서 그러한 가망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 최근 한국의 외교행보이다. 어쩔 수 없다기보다는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메시지라고까지 해석되는 행보들이다.
미, 중, 일을 향해 발신되고 접수되는 한국의 모든 메시지가 미일 외교안보 담당자들에 의해 캐치되고 분석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의 회계장부는 점점 붉은 펜을 들어 최종결산 두 줄을 긋고 챕터를 마감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뭐 한국은 독립국이니까 미일이 어떻게 생각하건 무엇을 바라건 하고싶은대로 할 권리가 있다. 다만, 한 쪽에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균형자 운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중국에 대해서도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중국 견제 세력의 후원을 한국이 굳건히 확보할 수 있을 때이지, 중국견제 세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을 때가 아니다.
한국 챕터를 회계장부에서 결손 처리한 미일은 무엇으로 그 결손을 보충하려 할 것인가? 그것은 뻔한 것이다. 일본 국내적으로 반발이 심해 진행시키지 못하던 난제의 족쇄를 풀어주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 될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한국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는 중국이 한반도 미래의 평화와 번영에 확실한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지지를 받으며 민주적으로 집권하고 있기에 (앞으로도 상당 시간 집권할 것으로 예상되기에) 미일은 더욱 결속을 요구받을 것이고, 두 대국은 그를 기꺼이 추진해 나갈 것이다. 한국이 뭐라 그러건 어떠한 입장이건 부담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니, 그 속도와 폭은 기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너따로 나따로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살게 되는 한국인들은 진정으로 한국의 국익이 증진되고 국민의 삶이 나아지고 더욱 안전한 한반도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될까?
글 | 신상목 전 외교관/일식당 운영 조선일보
01.11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후속 처리...일본은 전혀 손해볼 것이 없게 된 이유는?
▲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브리핑룸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뉴시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일본정부에 재협상을 요구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이 화해치유재단에 출연한 돈 10억엔도 우리 돈으로 충당하겠다고 했다.
이와 관련,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지 합의 이행한다고 한 적 없다. 그러니 일본이 엿먹은거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 궤변이 어디에서 통할 것이라는 발상이 섬뜻하다.
내가 보기에 일본은 손해볼 것이 전혀 없다. 10억엔 돌려주고 말고 어쩌구는 일본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재단을 존치시키건 해산시키건 일본한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일본이 위안부 합의를 통해 얻고자 한 최중요 목표는 더 이상 한국 정부가 정부간 어젠다로서 위안부 문제를 일본에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잊은 것이 있는데,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대일외교의 핵심 어젠다로 잡은 것은 정부가 원했던 것이 아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 때에도 위안부 문제를 내세운 적이 없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기 과거사 문제를 임기 중 거론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러던 것이 상황이 일변한 것은 헌법재판소에서 부작위 위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지면서부터이다.
한일협정과의 관계에서 해결이 안된 사항이라고 정부가 유권해석을 했고, 일본이 그를 부인하는 상황은 한일협정 해석에 분쟁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 해석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외교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위헌이라는 취지이다. 헌재가 행정부의 외교적 판단까지 간섭한 행위를 나로서는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정부는 위헌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외교 문제로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일본에 외교문제로 제기하더라도 대일관계 관리를 염두에 두면서 강약과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때 위안부 몰빵 외교를 하면서 한일관계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60년간 지켜온 한일협정으로 모두 최종적으로 해결했다는 원칙을 꺾고 합의를 한 것은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변화였던 것이다.
일본이 전후 기초가 되는 입장을 바꾸면서까지 합의에 응한 이유는 딱 하나이다. 한국 정부가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정부간 이슈로 제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게 일본에게는 합의의 목적이고 알파이고 오메가이다. 그리고 그 합의에 기초해서 외교공관 앞 소녀상 문제를 한국 정부에 제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 덤이었다.
한국 정부가 지원금을 자기 예산으로 지급하건 재단을 해산하건 일본측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일본은 합의 상의 의무를 다 이행했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들의 의무 이행을 근거로 한국측이 이 문제를 다시는 제기하지 않을 것을 한국의 의무로 규정하고 그 이행을 요구한다. 한국 정부가 합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지, 언제 합의 이행한다고 했냐? 와 같은 어리석은 발상으로 정신승리하며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론을 내리면, 한국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부정하지 않으려면 일본에 대해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면 안된다.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겠다는 말로 해석된다.
일본은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정부간 이슈로 위안부 문제만 제기되지 않으면 된다. 다만 소녀상 문제는 일본도 어물쩍 넘어갔기 때문에 합의를 근거로 더 강하게 요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그것은 통한이다.
현 정권은 전 정권의 위안부 합의로 헌재 결정의 족쇄를 풀었다. 정부가 최소한 부작위 위헌 소리는 안들어도 된다. 족쇄가 풀린 현 정권은 위안부 문제로 얼마나 일본과 대립각을 세울 용의가 있는가?
글쎄... 일본에서는 더 이상 나올게 없다. 박근혜 정권 합의보다 진전된 합의는 불가능하다. 잘하면 평생 평행선이고 잘못하면 양국관계는 관리불가이다. 예전부터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일본을 거의 유일한 공짜 돈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여정부에 있었다. 실제 일북수교 등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이기도 하다. 지금 정권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권 잡기 전과 잡고 난 후의 상황 변화를 관리하려는 것인데 그렇게 맘대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것만이 진리다.
01.18 16세기 왜구(倭寇)는 중국인들이었다 !
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가 '왜구(倭寇)'이다. 한국에서는 노략질이나 일삼던 '일본'의 해상 도적떼 정도로 정체성이 부여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특히 서양의 동양사 연구자들은 동양 (특히 중국과 한국) 연구자들과 기본적인 인식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왜구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왜구라는 존재가 서양문물의 전래 또는 전파의 계기를 마련하는 파일롯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같은 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15세기 이전의 왜구와 16세기 이후의 왜구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전자, 즉 전기 왜구는 주로 일본지역에서 발흥한 해적집단이 주를 이루나, 후기 왜구는 국적 구성, 활동 영역, 활동 내용 면에서 완전히 다른 성격의 집단이다.
우선 후기 왜구는 중국인들이 주를 이룬다. 일본인과 동남아인들이 일부 섞여 있었다. 여러 갈래의 집단이 있으며 본거지에 따라 동남아 거점, 중국 해안 거점, 규슈 거점의 왜구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인들이 다수인데 왜 왜구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명의 사가들이 명의 법도에서 벗어난 불법집단을 자국민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기존의 멸칭인 왜구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후기 왜구의 발흥 원인은 명의 해금 정책 때문이다. 명은 조공무역 체제의 유지를 원하였기 때문에 바닷길을 통한 사무역을 규제했다. 심지어 연안의 어부들이 고기잡이 출어를 나가는 것도 금지하고 연안의 섬을 무인화하였다. 명은 제국의 위엄과 외적 방어의 명목으로 폐쇄체제를 추구하였고 이 와중에 남중국 연안 주민의 생존권이 심대한 침해를 받는다. 중국의 복건성, 저장성 연안은 토질이 매우 척박한 곳이다. 농사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어렵다. 더구나 당대, 원대, 송대 시기에 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누린 경험이 있는 곳이다. 명 조정의 해금이 이들에게는 수용할 수 없는 압제였다.
먹고 살기 위해 출어와 밀무역에 나서는 상인들이 생겨난다. 바다는 넓고도 넓다. 쾌속정이 단속을 하는 현대에도 바다에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어려운데 그 옛날 무동력선으로 관리들이 바다를 엄격히 통제한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무역이 엄격히 제한되던 시절, 바다에 나가 밀무역으로 입수하는 물건들은 큰 이익을 안겨주었고, 워낙 상업 마인드가 뛰어난 복건과 저장의 상인들은 점점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밀무역의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 밀무역 상인들의 활동을 더욱 부채질한 것이 포르투갈인들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기점으로 15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진출을 모색한다. 말라카, 자바, 시암, 참파 등에 무역 포스트가 만들어지고 1540년대 들어서는 동중국해에 진입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명과의 무역을 희망했지만, 전술한대로 명은 조공무역 외 사무역을 금하였다. 이 지점에서 중국 밀무역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다. 동남아 일대의 무역 포스트에서 거래를 트기 시작한 두 세력은 동중국해 일대에서 파트너쉽을 형성한다. 포르투갈인들이 유럽과 동남아에서 운반해 온 물자를 중국 상인들에게 넘기면 중국 상인들이 이를 자신들의 밀무역 루트에 태워 처분하고 그 댓가로 얻은 이익을 포르투갈 상인들과 나누는 형식의 일정의 대리 무역이 성행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배에 승선한 포르투갈인 일부가 태풍의 영향으러 다네가시마에 표착한다. 1543년의 일이었다. 이것이 일본과 유럽의 최초 만남이었다. 유럽과 일본의 만남 자체가 왜구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인들을 왜 왜구, 즉 해적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명 정부가 밀무역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그에 종사하는 상인들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이미 범죄자 신분이 된 이들이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는 순수한 도적집단인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집단이 그저 밀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으로 출발하였다가 관헌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복귀시 처벌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본거지를 세우고 때로는 상업적 거래를 때로는 무력에 의한 약탈을 병행하는 독립적 집단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이들의 본거지는 일본인들이 용병으로 합류하기도 하고 동남아인들이 참여하기도 하는 등 국제적 또는 무국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일본이 중국과 가장 달랐던 점은 중국인들은 중국에 돌아가면 모두 범죄자로 처벌받는 신세였지만, 일본의 다이묘들은 이들의 이용가치를 높이 사 협력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중국 왜구들의 밀무역이 성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과 명 사이의 공무역인 감합무역이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이다. 전국시대의 전란 속에서 생존을 건 부국강병을 추진해야 했던 큐슈의 다이묘들은 중국 왜구의 비호를 통해 대중국 밀무역이 가져댜주는 경제적 이익을 중시했다.
앞서 말한대로 이 과정에 포르투갈인들이 개입함으로써 왜구라는 존재의 가치가 일본 다이묘들에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조총과 화약을 비롯한 전략물자를 비롯하여 면포, 비단 등의 생필품, 고가품까지 그간 류큐의 중계를 낀 감합무역으로 힘들게 진행되던 대외무역이 왜구의 존재로 훨씬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규슈 및 세토 내해 일대의 왜구들이 다이묘들의 해상 전력집단으로 제도적으로 포섭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즉,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각 다이묘가 관할하는 운송선의 경비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네이비 또는 코스탈 가드로서의 역할이 부여되고 그에 걸맞는 가신화가 진행된 것이다.
1570년대가 되면서 중국 왜구 세력은 크게 쇠퇴한다. 원인은 포르투갈과의 결별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와 나가사키라는 무역 포스트를 확보함으로써 더 이상 리스크가 높은 중국 왜구들과의 신용거래에 의존하지 않고 정해진 장소에서 공식적인 절차와 방법에 의해 대중, 대일 무역을 시행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후기 왜구는 일본인이 아니라 주로 중국인들이었고 이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비공식 무역 종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은 이들을 끝까지 범죄자 취급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를 국가가 활용하지 못하였으나, 전국시대의 일본은 각 지방이 처한 사정에 따라 이들의 이용 가치를 활용하고 제도권으로 편입시켜 전력화하였다.
16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동남아, 동중국해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역은 서양세력의 진출로 인한 큰 변화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그 물결의 첨단을 타고 왜구라는 존재가 묘기 부리듯 서핑을 타고 이곳저곳을 휘젓고 있었다. 제1차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해도 좋을 그 변화의 물결에서 오로지 조선만이 무풍지대로 남아 있었다. 축복이라 보는 사람도 있고 저주라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덧)서양 학자들의 왜구에 대한 평가가 동양학자들과 다른 것은 유럽의 해양진출사에서 privateer(사략선: 정부로부터 적국의 선박을 나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민간선박)나 buccaneer(모험적인 사업을 벌이는 해적)의 존재가 갖는 의미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01.25 이건희 회장이 호텔사업을 보는 안목에서 작은 식당 주인이 배울 점은?
/사진: 신상목 페이스북
<“호텔 사업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1980년대 후반 이건희 회장이 신라호텔의 한 임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임원은 서비스업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에 수긍하지 않았다. “다시 제대로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 회장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은 경영진 스스로가 연구하고 찾아내기를 원했다. 그것이 바로 자율경영의 실체이기도 했다.
그 임원은 해답을 얻기 위해 일본 등지로 출장을 나가서 해외 유명 호텔을 벤치마킹 하면서 호텔 사업의 본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아와 이 회장에게 호텔사업은 ‘장치산업과 부동산업’에 가깝다는 보고를 했다. 입점지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갈리고, 새로운 시설로 손님을 끌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제서야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치산업이자 부동산업으로서 호텔의 발전 방향에 대해 구체적인 전략을 논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조선닷컴 2014년 3월 3일 기사 중에서)>
직장인 시절에 이런 기사를 봤으면 "서비스의 본질도 모르면서 돈만 밝히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거다. 지금은 이런 기사가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조그만 식당을 하면서도 내가 절감하는 바로 그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짚어주기 때문이다.
직원과 이런 얘기를 종종 한다. 내가 식당의 본질이 뭐냐고 물으면, 직원이 "정성이 담긴 맛있는 음식" 그런다. 그러면 나는 "그건 기본이지. 본질이 아니라. 소비자가 좋아할 음식 만들 능력은 식당의 기본이고 전제일 뿐이지"라고 말해준다.
경제 주체로서의 의미에서는 작은 식당도 본질적으로 큰 호텔과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식당 역시 그 본질은 금융과 부동산에 있다. 맛은 (호텔로 치면 훌륭한 서비스는) 당연한 거다. 그게 없이는 존립 자체가 매우 불안한 토대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튼튼한 토대 위에 기초를 세웠다 할지라도 그것을 성장과 상업적 활력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임직원들의 지속적인 소득 향상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는) 금융과 부동산을 업의 본질로 파악하는 안목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작은 식당 하나라도 자기 몸 바쳐 성실히 건사하는 것이 목표라면, 맛 하나로 승부 보려는 것이 칭송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딸린 식구가 많아 그 사람들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경영자라면, 그 사람들의 힘을 모아 1+1=3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내가 그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01.30 항복이냐, 멸망이냐...미국의 일본제재 사례로 본 미국의 대북제재의 의미
/2017년 3월 20일 오전 미 해군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CVN 70)가 훈련을 위해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부산기지에서 출항하고 있다./ 조선DB
제재(sanction)는 국제정치학 교과서에 외교의 수단의 하나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 제재를 외교 목적 달성을 위해 사용하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제재의 대상이 그로 인해 생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정도로 실효적인 제재를 위해서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재를 실질적인 외교수단으로 활용하는 나라는 초강대국뿐이다. 그 중에서도 미국 정도나 제재를 외교수단으로 적극 활용한다. 다른 나라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미국의 외교사 중 가장 역사적인 제재는 2차세계대전 전인 1941년 소위 헐노트(Hull Note)로 귀결된 대일압박 제재이다. 헐 노트는 1941년 11월26일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이 일본의 주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와 미일교섭 대사였던 쿠루스 사부로에게 전달하였으며, 사실상 대일 최후통첩이 되었다.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자국의 안보 위협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일본의 팽창 야욕을 철저히 분쇄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헐노트는 실질적으로 일본에게 '항복 아니면 멸망(succumb or perish)'의 선택지만 남기는 최후 통첩이었다. 미국은 일본이 제시한 화해안을 안보위협 해소에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제안에 대해 일본의 숨통을 죄는 제재안을 역제시함으로써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미국의 핵심 이익과 상충되는 일본의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메세지를 분명히 했다.
그 숨통을 죄는 제재의 핵심은 석유와 금융이었다. 일본의 국가 존립과 관련된 사활적 이익이 달린 라이프 라인을 직접 겨냥한 것이다. 만약 어떤 나라가 미국의 이러한 제재를 무력화하는 시도를 했다면, 즉 석유나 돈줄을 일본에 제공하려고 했다면 그 나라는 미국에 의해 일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미국은 사활적 이익이 달린 안보위협 제거를 위한 특단의 조치에 초를 치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제재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그 결과는 다들 주지하는 바와 같다. 항복(Succumb)을 선택하지 않은 댓가는 멸망(perish)이었다.
미국의 제재는 그런 의미가 있다. 한국은 한 번도 제재를 외교수단으로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제재 이후의 힘의 사용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 외교와 그 의미를 읽어내는데 감각이 무디다. 미국은 힘의 사용 이전에 제재를 통해 '항복 아니면 멸망(succumb or perish)'의 메세지를 던진다. 그 메세지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은 한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외교 능력의 하나이다.
그런 미국을 호전적 제국주의 망상에 빠진 악의 근원이라고 욕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남을 욕한다고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미국의 안보위협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분명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미국의 제재에서 삐져나가려는 시도부터 하는 것은 큰 위태로움을 초래할 것이다. 다들 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덧)제재 대상의 당사자였던 일본은 미국 제재 외교의 의미와 각 단계에서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감수성이 잘 발달해 있다. 긴가 민가 하고 잘 모르겠거든 일본에게 물어도 보고 그러면 좋을 것이다.
03.02 미국의 이라크 후세인 축출을 반기는 이라크인 주방장...북한의 보통사람들 생각은?
2004년 주이라크 대사관에 파견 나갔을 때 가장 괴로웠던 것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장의 긴장감.. 이 아니라 먹거리였다.
개인 저택을 임차해 대사관으로 쓰면서 그 안에서 공관장을 비롯해 모든 직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바그다드 어디에도 안전지역은 없었다. 한국 해병의 내부 경비, 이라크 정부군경의 외곽 경비, 돈주고 고용한 프로경비회사에 의한 추가 외곽 경비 등 3중의 무장경비 보호를 받는 대사관이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미국의 그린존도 박격탄이 날아들고 시시때때로 자폭 테러의 대상이 되기에 어찌 보면 그린 존보다 안전한 측면도 있었다.
한 곳에 모여 살면서 현지 요리사를 고용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까먹었지만, 집채만한 덩치에 수염이 덥수룩한 이라크인 요리사가 해주는 밥은.. 아 힘들었다.
털이 북실북실한 솥뚜껑만한 손으로 미역국도 끓이고 된장찌개도 끓이고 나름 열심히 했지만, 도무지 한국 맛이 날리가 없었다. 요리사 잘못이 아니다. 재료가 없는걸. 어디 쌀인지 얼마나 묵은 쌀인지도 모르는 누런 쌀로 밥을 하면 예전 정부미 냄새가 풀풀 올라왔다. 김치는 어쩌다 한 번 나오는 특식이고 이라크산 어린애 주먹만한 마늘 슬라이스와 어렵게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마른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게 그나마 입맛에 맞는 반찬이었다.
요리사는 전형적인 이라크 사내였다. 말이 없고 표정이 험악하고 웃을 줄 모르고 동작이 굼뜬 사내였지만, 사실은 마음이 따뜻하고 가정적이고 충섬심이 강한 전형적인 이라크 사내였다.
서로 낯설음을 면하고 난 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했다. 전문 요리사는 아니고 다른 일을 하다가 전쟁통에 먹고 살 길이 막막했는데 한국대사관에 취직이 되어서 너무 기쁘고 한국에 고맙다고 한다. 아이들이 세 명인가 된다고 했던 것 같다.
하루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슬쩍 물어봤다.
잠시 망설임의 표정을 비추던 사내가 조심스레 대답한다. 자기는 사담 후세인 치하가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자기가 철들고 나서부터 이란과의 전쟁, 쿠웨이트 침공 등으로 전쟁이 끊인 적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바트당 치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 비밀경찰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가 처형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정치적 자유도 없고 경제는 피폐하고 무엇보다 먹고살 길이 없었다고 한다. 국민은 그렇게 고통받는데 바트당 간부들은 온갖 부정부패로 축재하고 권력 남용하고..
자신으로서는 그러한 삶만 끝낼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사담 후세인과 바트당을 권력에서 몰아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고 한다. 위대한 이라크라는 미명 하에 사담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이라크인들이 죽고 공포에 떨고 굶주리고 있는 현실을 바꿀 수만 있다면 자신은 누구라도 환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미국에 대해 반감이 없다고 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트당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 정도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예전에 이런 얘기를 하려면 목숨을 내놓고 해야 했기 때문에 아직도 조심스럽다고 한다.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던 망설임의 정체는 평생 그의 삶에 익숙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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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그 이라크인 요리사가 자꾸 생각난다. 한반도 북쪽에 거주하고 있는 평범한 보통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함께 떠오른다. 아마 그 빨간 추리닝 입고 억지스런 웃음과 몸동작을 죽을 힘을 다해 반복하던 여성 응원단의 로보트같은 표정이 뇌리에 남은 탓인 듯하다.
03.14 한국에서 요란한 '4차산업혁명' 구호...일본에선 들을 수 없는 이유는?
일본에서는 4차산업혁명 구호를 별로 볼 수 없다. 정부건 기업이건 언론이건 학계건 다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기술적 진보로 자신의 영역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지 누구보다 기업이 가장 잘 안다. 그걸 누가 얘기해줘서 알면 그 바닥에서 숟가락 놔야지...
일본 기업들은 묵묵히 예측하고 기술 개발하고 신기술의 현실 적용성을 계속 타진하고 가능성을 개척한다. 이를테면 혼다는 자동차회사인데 왜 2족보행 로봇인 '아시모'를 20년 전부터 구상하고 돈도 안되는데 계속 투자를 하고 있었을까. 이를테면 그런 관점이고 그런 발상이다.(참고로 혼다에서는 앞으로 인간의 근력 사용을 자유자재로 보조하는 motion assisting mobile suit/device가 본격적으로 시판될 예정이다. 아마 인간의 삶을 바꿀 것이다.)
일본에서는 기업들의 그러한 자체적인 노력이 모여 산업경쟁력이 창출된다. 정부가 요란하게 구호를 외치며 밴드웨건을 몰고 다니면 기업들이 그에 올라타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다. 정부는 기업의 발상과 역량을 따라갈 수도 없고, 그에 간섭하거나 겐세이 놓을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는 정부와 언론이 4차산업혁명을 외치고 다니기 바쁘다. 그러나 정작 시장에서는 그러한 신기술을 활용한 혁신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등 몇 개 분야에서만 남에게서 입수한 기술을 갈고닦아 최고 경쟁력을 유지할 뿐 사회 전반의 혁신 능력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이대로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팔로워 신세이다. 노동력이 별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될 것이기에 팔로워 신세가 되면 예전처럼 그 과실을 따먹기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중국이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정부 탓을 많이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업탓이 가장 크고, 그것은 어찌 보면 한국 (대)기업들이 그만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영세한 사정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수준에서 보면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 그저 영세한 구멍가게 수준의 기업들인데 죽일놈 살릴놈 하면서 외부에서 들들 볶거나, 내부에서 정신 못차리고 지배구조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는 것 보면 안타깝다. 한일 간에는 구호없이 조용히 실생활에서 혁신이 이루어지는 나라와 밤낮 시끄럽게 구호만 외치다가 말잔치로 끝나는 나라의 차이가 있다. 한국을 독일이나 미국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적나라할 것이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