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2/ 한반도 외교5/
유주열의 외교 칼럼1 중앙일보 2015 - 2016
2015.01.14 위안밍위안(圓明園)의 꿈
\베이징 교외의 하이텐구(海澱區)에 ‘위안밍위안’ 즉 우리 귀에 익은 발음으로는 ‘원명원’이라는 청조(淸朝)시대의 고궁이 있다. 황제의 별궁으로 지어졌지만 나중에는 황제가 상주하면서 집무를 보았던 정궁이 되었다. 시내의 자금성은 의전적인 궁이고, 넓은 정원이 딸린 원명원에서 황제가 주로 거처하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궁으로 유명한 원명원이 애석하게도 2차 아편전쟁 기간 중인 1860년 함풍제가 열하(熱河 지금의 承德)로 피난 간 사이 영불 연합군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지금도 3.5 평방km(여의도 보다 약간 큼)의 넓은 지역이 온통 폐허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는 서양의 침략자에 의해 파괴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의미로 복원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원명원은 역사 교육현장이다. ‘힘이 없어 당한 선조들의 아픔과 설움을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녀 온 사람들의 일반적인 소감이다.
198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공청단(共靑團) 중앙의 젊은 직원들도 애국 교육을 겸한 야유회(郊遊)로 원명원을 찾았다. 공청단은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의 약칭으로 중국 공산당 주도아래 14-28세의 젊은 단원의 지도를 맡는 청년 엘리트 조직이다. 그 날 원명원을 방문한 공청단의 직원 중에는 선전과장 링지화(令計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원명원에는 구리핑(谷麗萍)이라는 여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베이징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구리핑은 학벌과 미모로 며느리 감으로서는 영순위였다고 한다. 바늘에 실을 꿰듯(穿針引線) 주변의 소개로 링지화는 구리핑을 만났고 그 날을 계기로 두 사람의 사랑이 싹 터 결혼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1988년 외아들 링구(令谷)가 태어난다.
1956년 10월생인 링지화는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의사로서 항일운동에 참가한 혁명가족 출신이다. 산시성(山西省) 윈청(運城)병원의 의무과장인 아버지는 4남1녀의 자녀들에게 당시 공문서에 자주 오르는 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큰아들은 루센(路線) 둘째는 쩡처(政策) 셋째(딸)는 팡쩐(方針) 넷째는 지화(計劃) 망내는 완청(完成)이다. 링지화는 네 번째 자식이지만 아들로서는 셋째이다.
링지화는 고향인 산시성 핑루현(平陸顯)의 인쇄공장의 검자공(檢字工)으로서 출발하였으나 일벌레라고 할 정도로 근면과 성실로 산시성 공청단의 선전부에 발탁되었다. 링지화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지만 항상 책을 옆에 두는 학구파였다고 한다. 그리고 문장력뿐만이 아니라 글씨도 여러 서체(書體)에 맞춰 잘 썼다고도 한다. 당시 공청단 중앙에 보내는 보고는 모두 직접 글을 써서 보고하므로 글씨가 중요했다. 링지화의 손을 거친 보고서는 내용도 알차지만 글씨가 흐트러짐 없고 여러 글자체가 입체적으로 섞여 눈에 확 띄는 보고서였다고 한다. 링지화가 상사의 신임과 인정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당 중앙에서는 세대교체(年輕化)를 위해 지방의 젊고 유능한 간부를 중앙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청년 링지화는 이러한 정부 시책에 따라 베이징의 공청단 중앙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공청단 중앙에서도 그는 근면과 성실로 동료와 상사의 의도를 미리 파악 처리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가 38세 때 공청단 중앙의 선전부장이 될 정도로 승진이 빨랐다.
링지화는 그럼에도 남 앞에서 사진에 찍히는 것을 꺼리고 그의 이름이 외부에 노출 선전되지 않도록 부탁할 정도로 겸손하였다. 링지화는 성공의 충분조건인 근면 성실과 필요조건인 재능을 모두 갖추고 자신의 인생을 나름대로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링지화의 능력은 당 중앙에서도 알려져 1995년 공청단 중앙에서 당 중앙 판공청(대통령 비서실 해당)으로 파격적으로 발탁된다. 그의 근무처가 중앙 영도들이 집무를 보는 중남해(中南海)로 바뀐 것이다. 1979년 산시성에서 공청단 중앙으로 영전한지 16년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당 중앙 판공청 부주임을 거쳐 판공청 주임(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으로 고속 승진을 하면서 그의 관운은 수직으로 열렸다. 공직자로서 최고 꿈인 당 중앙 정치국위원이 되는 것은 18대(2012년) 당 대회에서 확실해 보이고, 나아가서 정치국 상무위원도 이변이 없는 한 19대(2017년) 때에는 가능해 보였다.
이권을 쫓는 사람들은 링지화와 그의 형제 가족들에게 몰려들었다. 링지화는 가족들에게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당부를 하고 아들 링구의 대학 입학 시에는 자신의 아들인지 모르게 다른 이름(化名)을 사용토록 하는 용의주도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승진을 거듭함에 따라 이상과 신념이 느슨했는지 그의 주변 관리가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아들 링구에게 페라리라는 고급 외제 스포츠카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링지화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 같다.
2012년 3월18일 링구는 밤을 새워 어울리다가 새벽녘에 검은 페라리에 젊은 여인 두 사람을 태워 베이징 4환로를 질주했다. 새벽 4시경 링구의 페라리가 북4환로 지하도의 교각을 들이 받았다. 바오푸쓰교(保福寺橋)였다. 중국의 IT 단지 중관촌(中關村)이 있는 곳이다.
3월18일은 베이징의 봄이 오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봄추위(春寒)가 장독을 깬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베이징의 꽃샘추위가 대단하다. 그날 밤도 꽃샘추위로 진눈깨비가 흩날렸다고 한다. 지표를 살짝 덮은 눈은 차량 사고를 부르기 좋게 되어 있다. 아무래도 운전에 미숙한 링구의 검은 페라리는 순간 미끄러져 교각과 시멘트벽에 부딪친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는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운전자는 튀어 나갔다. 목격자의 신고에 의해 베이징 공안이 달려 왔으나 운전자는 즉사하였고 두 여인은 병원에 실려 갔다. 베이징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한 24세의 꽃다운 나이의 링구는 아버지 링지화와 어머니 구리핑이 만나 가정을 이룬 원명원에서 멀지 않은 바오푸쓰교에서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출세욕으로 죽음 자체가 은폐되어 장례도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을 것 같다.
18차 당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중대 사고가 발생한 것을 감지한 링지화는 한 순간 사실 보고와 은폐를 놓고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는 결국 은폐라는 악수를 택했다. 이는 자신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 주고 윗분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이었다.
링지화는 중앙 경위국(대통령 경호실 해당)을 동원 현장을 봉쇄하고 언론을 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 알려지게 된다. 링지화는 정치국위원은커녕 통일전선공작부장(통전부장)으로 좌천되었다. 사람들은 링지화의 주변을 떠나가고 그에 대한 비리 조사가 조용히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링지화의 집에서 트럭 6대분의 뇌물이 적발되었고 일본 교토에 호화 저택을 2채나 소유하는 등 일본에 불법 투자한 사실이 밝혀 진 구리핑이 일본으로 출국하려다가 검거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4년 12월 말경 ‘기율위반’ 혐의로 조사 중인 링지화 통전부장이 면직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시골 산시성에서 상경하여 자신의 이름처럼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링지화는 아들의 ‘페라리 사고’가 계기가 되어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었다. 원명원에서 시작된 링지화 가족의 청운의 꿈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01.21 주한 외교관 탕사오이(唐紹儀)
얼마 전 중국의 지인이 탕사오이의 서울 행적을 알고 싶다고 하여 조계사 근처의 옛 우정총국 건물로 안내한 적이 있다. 탕사오이(1860-1938)는 청말 민국초의 외교가이며 정치인으로 16년간의 서울 생활을 통하여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
우정총국(Centeral Post Office)은 미국을 다녀 온 홍영식이 건의하여 우리나라 역참을 서양식의 우정 시스템으로 바꾸기 위해 설치한 최초의 우편행정관서다. 병조참판인 홍영식이 총판을 겸직 하였다. 1884년 12월4일은 우정총국이 개국하는 날이다. 이 날 축하를 하기 위해 홍영식 김옥균 등은 각국의 외교관과 대신들을 불러 신청사에서 축하연을 개최하였다. 민영익 등 주요대신과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 미국의 푸트공사 영국의 애스턴 총영사 외에 일본의 외교관도 초청되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행사장 인근에서 불길이 솟았다. 불이 난 것을 확인하고자 밖으로 급하게 뛰어 나간 민영익이 칼을 맞고 돌아 와 쓰러진다. 우정총국 개국을 계기로 쿠데타를 준비한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숨겨 둔 행동대원들의 칼에 맞은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청국에 납치된 후 조선은 쇄국의 빗장을 열고 개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세였다. 그러나 개화파 중에는 청국의 양무운동을 벤치마킹하자는 온건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 따야 한다는 급진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친일 급진파는 민영익 등 민비 척족으로 이루어진 친청 온건파를 개혁의 걸림돌로 보고 있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먼 친척이지만 10년 전 폭탄테러로 폭사한 명성황후의 양 오라버니 민승호의 대를 이은 양 조카이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집안의 대를 잇고 있어 척족의 중심인물이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민영익을 도와 준 사람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였다. 그는 민영익을 부축하여 그 곳에서 멀지 않은 자기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묄렌도르프의 집은 지금의 조계사 후문의 수송근린공원 근처에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조계사는 없었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4대문 안에는 사찰이 없었다. 1910년 한용운 등의 노력으로 4대문 안에 처음 사찰을 세운 것이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였다.
천연기념물로 수령이 수백 년 된 조계사 백송(백피송 또는 백골송)은 중국이 원산지이다. 현재 백송이 있는 곳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 온 어느 세도가의 안마당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사신을 다녀 온 세도가들은 귀국 길에 중국의 백송을 가지고 와 자기 집에 심었던 것이 유행이었다. 조선에는 없는 귀한 백송으로 집안의 위세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민영익을 데리고 간 묄렌도르프의 집은 본래 흥선대원군의 막내처남인 민겸호의 집이었다. 민겸호는 폭사한 민승호의 친동생이며 민영환의 생부로 1882년 임오군란 시 병조판서로 있었다. 급료를 받지 못해 난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이 민겸호를 죽이겠다고 민겸호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민겸호는 피신한 후였다. 난병들은 민겸호를 찾아 내 창덕궁으로 끌고 가 대원군이 보는 가운데 민겸호를 죽였다. 민겸호의 시체는 창덕궁내 개천에 아무렇게나 버려졌으나 한 동안 어느 누구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민겸호 집은 불행하게 죽은 집주인 때문이지 사람이 살지 않은 폐가가 되었다. 조선조정은 이 집을 묄렌도르프에게 하사하여 자택 겸 해관관서로 사용하게 하였던 것 같다. 1885년 묄렌도르프가 중국으로 돌아 간 뒤에는 엄 귀비의 소유가 되었다. 엄 귀비는 후에 이 자리에 여성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숙명여중고였다.
한편 우정국의 난을 피해 묄렌도르프가 민영익과 함께 돌아오자 집을 지키던 묄렌도르프의 비서인 탕사오이가 맞이하였다. 탕사오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집안을 단속하였다. 그는 민영익을 처단하겠다고 몰려오는 친일 폭도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막아냈다. 폭도들이 물러가자 묄렌도르프는 미국인 의사 알렌을 불러 민영익을 치료하게 하여 구사일생의 목숨을 살린다.
우정총국에서 시작된 갑신정변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1500명의 청군에 의해 진압되고 3일천하로 끝났다. 일본으로 달아 난 김옥균 서재필의 집은 몰수되어 후에 관립한성고등학교(구 경기고등학교) 부지로 제공된다.
위안스카이는 묄렌도르프 집에서 일어난 탕사오이의 용감한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두 사람은 한 평생 허물없는 우정(莫逆之交)을 나누었다고 한다. 당시 위안스카이(25세) 민영익(24세) 탕사오이(24세)는 모두 20대의 청년들이었다. 조선에서 담대한 면모를 보여 준 탕사오이는 신해혁명 후 1912년 대총통 위안스카이 아래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탕사오이는 광동성 향산 출신으로 차 무역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2세에 청국 정부에서 시행하는 ‘유미유동(留美幼童)’으로 선발되어 국비로 미국 유학을 떠난다. 탕사오이는 컬럼비아 대학 등 7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끝내고 1881년 귀국 하여 텐진의 수사(水師)양무학당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리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조선조정의 외교고문으로 파견하면서 탕사오이를 비서로 수행시켰다.
묄렌도르프가 조선조정에 거청친로(拒淸親露)정책을 권유하였다하여 그를 추천한 리홍장의 요구로 해임되어 중국으로 돌아가지만 탕사오이는 서울에 남아 통역 등 위안스카이의 외교 업무를 도운다.
갑신정변 10년 후 갑오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업무를 대리할 탕사오이를 남겨 두고 귀국한다. 탕사오이는 원세개의 안전 귀국을 위해 지팡이를 짚는 노인으로 분장시켜 일본군이 쫙 깔린 서울을 떠나 인천에 정박 중인 청국의 군함을 탈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1895년 을미년 시모노세끼(下關)조약으로 조선은 청국과의 조공관계가 대등관계로 바뀌었다. 조선과 청국은 정식 외교관계에 들어가면서 청나라는 탕사오이를 조선주재 초대 총영사로 임명하였다. 탕사오이는 청국의 공식 외교관으로 일본의 대륙낭인에 의한 명성황후의 처참한 시해와 고종의 아관파천 등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끼인 조선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탕사오이는 1898년 9월 귀국 후에는 위안스카이의 대외관계 비서로서, 리홍장 사후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을 맡고 있을 때에는 천진 해관업무를 관장한다. 1904년 영국이 티베트를 공격하였을 때 탕사오이는 인도(印度)에 파견되어 영국과 담판, 중영(中英) 티베트 조약(Convention between Great Britain and China respecting Tibet)을 통하여 영국이 티베트 점령을 포기토록 한다.
위안스카이 사후 탕사오이는 군벌 정부의 외교수장으로도 활동하나 장제스(蔣介石)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본에 이용될 것을 우려한 장제스의 밀정에 의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의 자택에서 암살된다. 1938년 9월의 일이었다.
01.28 제주도와 ‘차이나 머니’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모든 것을 얻었지만 자신이 늙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 고통이었다. 이 때 진시황을 불로장생케 하겠다고 전국의 방사(方士)들이 모여 들었다. 방사란 당시 의술 천문 역학에 능한 전문직업군 이었다. 그중에 제(齊)나라 출신의 서복(徐福)이라는 방사는 불로장생의 신선(神仙)도 본래 인간인데 불로초를 먹고 신선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신선이 사는 바다 건너 동쪽의 삼신산(海中有三神山)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고 진시황을 설득한다.
서복은 동남동녀 수 천 명을 데리고 배를 띄워 동쪽으로 떠났다. 바다 건너 동쪽으로 간 서복의 일행에 대한 전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우리나라 제주도와 일본의 와까야마(和歌山)현의 신궁(新宮 신구우)시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정방폭포가 있는 해안에 닻을 내리고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한라산)에 오른 서복은 작은 머루알 같은 시로미와 영지 버섯을 채취하여 내려왔다. 영주산의 불로초였다. 정방폭포 암벽에는 서복이 지나갔다는 글귀가 지금도 남아 있고 서귀포는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또한 중국의 사서(史書)에 의하면 서복은 넓은 들판과 맑은 물이 많은 고장(平原廣澤)을 얻게 되자 그 곳에 머물러 왕이 되고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평원광택은 한라산에서 내려다본 제주도로 서복이 결국 제주도에서 여생을 마쳤는지 모른다.
일본에 있을 때 와까야마현의 신궁시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신궁시는 서복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서복공원을 조성 서복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불로장생주라고 하면서 서복주(徐福酒)까지 팔고 있었다. 신궁시는 구마노(熊野) 강의 하구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그 곳에는 봉래산이라는 작은 야산이 있다. 신궁시의 설명은 서복이 이곳 봉래산이 삼신산의 하나로 믿고 정착하여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신궁시를 찾는 요우커(遊客 중국인관광객) 즉 서복의 후예가 늘고 있다고 하였다. (졸저 ‘삼국지문화’ 13-14페이지 참조)
개혁 개방으로 유사 이래 최고의 부(富)를 구가하고 있는 서복의 후예들이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는 선계(仙界) 제주도에 몰려오고 있다. 더구나 제주도는 서복공원을 만들고 서복의 고향 산둥성(山東省)의 도움으로 훌륭한 기념관까지 건립해 놓았다. 현판의 글씨는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의 친필이다. 시진핑(習近平)주석이 우연인지 모르지만 저장성(浙江省) 당서기 시절 이곳을 다녀간 후 승진을 거듭하여 국가주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관운에 관심 있는 요우커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어쨌든 관광업이 주요 수입원인 제주도 외국인 관광객의 90%가 요우커이다. 한국 전체 방문 외국인의 40%에 비하면 높은 수치이다. 그리고 제주도로 향하는 ‘차이나 머니’가 급증하고 있음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이는 제주도가 관광 진흥과 부동산 경제 활성화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측면도 있다. 우선 비자(입국사증) 면제다. 2002년부터 요우커는 까다로운 비자발급의 수고 없이 제주도에 언제든 마음 만 먹으면 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베이징에 근무 시 비자를 못 받아 안타까워하는 중국인들에게 비자가 필요 없는 제주도 관광을 권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2010년부터는 투자이민제의 실시이다. 지정된 리조트 호텔 콘도 등 휴양시설에 50만 달러(5억원정도) 이상 투자해 분양권을 취득하면 국내거주 자격을 주고 5년 후면 영주권도 준다.
그 결과 부동산 취득 5년이 되는 금년부터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된다. 보도에 의하면 요건이 갖추어진 외국인 투자이민자가 1000명을 넘었는데 992명이 중국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중국 사람들이 제주도에 몰려오는 것은 제주도의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이 현대판 불로장생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겨울철에 베이징이나 상하이를 가본 사람은 앞이 잘 안보일 정도의 미세먼지 스모그에 도시 전체가 파묻힌 것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중국의 부동산 개발회사로 제주도 개발에 참여한 뤼디(綠地) 집단이 있다. 이 회사는 ‘한라산소진(漢拏山小鎭)’이라는 이름으로 한라산 중턱에 400여개의 별장식 아파트를 지어 놓고 분양을 끝냈다고 한다. 60여 평 규모의 아파트를 9억 원 정도에 분양하였다고 하면서 제주도의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선전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최근 제주도에는 중국인들의 난개발에 자연이 훼손되고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 높다. 중국의 개발 사업자가 제주도에 ‘차이나타운’을 만들면서 천혜의 자연경관을 마구 헤치고 있다고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몰려오는 ‘차이나 머니’가 기회인가 위기인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원희룡 제주지사의 고민이 깊다고 한다. 유네스코의 세계 자연유산이 된 제주도의 자연 경관을 개발을 이유로 헤쳐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개발을 늦추어서도 안 될 것 같다.
얼마 전 원희룡 지사는 중국을 방문, 제주도 투자에 관심 있는 중국 기업인들을 모아 놓고 1) 환경보호를 우선하는 투자 2) 고루고루 균형 잡힌 투자 3) 미래가치를 높이는 투자 등 투자 3원칙을 내놓았다.
‘차이나 머니’의 힘으로 제주도가 개발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투자의 원칙과 질서가 지켜질 때 제주도뿐만이 아니라 투자한 중국기업들에게도 장기적으로 이익이 돌아갈 것으로 본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 올 서복의 후예들에게 가급적 서복이 처음 만났던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여 주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02.03 시진핑 주석과 양(羊)의 문화
금년 양의 해를 맞아 중국문화 속에 흐르는 패(貝)의 문화와 양(羊)의 문화를 생각하게 된다. 패란 고대 중국의 화폐(貝錢)로 쓰이던 조개껍질이다. 고대인에게는 옷바늘, 낚시바늘, 칼날 등 생활 용구를 만드는데 필요한 조개껍질이 돈처럼 귀했다. 그리고 양은 신(神)에게 바치는 제물로 쓰이던 동물(희생양)이다. 신과 관련하여 신성한 이념과 가치를 지닌다.
한자어에 재물과 관련되는 글자 즉 재(財), 화(貨), 무(貿), 자(資) 등에는 패가 들어가는 반면에 이상과 가치를 지향하는 글자 즉 선(善), 의(義), 상(祥), 미(美) 등에는 양이 들어간다.
물질을 숭상하는 패가 흥하면 부패와 타락으로 이어지고 정신적인 면인 양을 너무 강조하면 이데올로기에 젖어 배고픔을 느끼게 된다. 5000년 중국 역사를 되돌아보면 패의 문화와 양의 문화가 괘종시계의 추(錘)처럼 반복하는 것 같다.
현대사에 와서 보면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은 패의 문화에 너무 젖어 있었다. 그에 대한 반동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 혁명이다. 마오쩌둥의 성공은 부패가 만연한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대한 인민 대중들의 불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마오쩌둥의 혁명으로 중국 인민들은 부패된 봉건사회의 질곡에서는 벗어는 났으나 돌아 온 것은 전 인민의 궁핍화였다. 1950년대 말 ‘대약진 운동’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은 가난의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을 양의 문화에서 패의 문화로 시계추를 다시 옮긴 사람은 개혁 개방을 이끌어 낸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그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우선 ‘잘 살아보세’였다. 색깔(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위정자는 모름지기 인민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이른바 ‘샤오캉(小康)사회’ 건설이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의 방향은 좋았으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덩샤오핑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성장 일변도 정책은 전체적인 부(富)는 이루었으나 분배는 부족하였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 내륙과 연해 등 소득 격차와 당(黨). 정(政). 군(軍)의 부정부패가 문제였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허셰(和諧)’를 내세워 모두가 고루 고루 잘 살아보자는 조화사회를 외쳤지만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집권하자마자 ‘파리든 호랑이든 다 때려 잡겠다’ 면서 반부패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한 중국은 다시 양(羊)의 모드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다. 시진핑 주석의 우려는 이대로 가다가는 중국 공산당이 옛날 장제스의 국민당이 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보인다. 중국사회에서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중국의 전체 경제는 세계 제2위이지만 1인당 소득은 중진국 수준도 못 미치고 있고 부(富)는 편재되어 있다. 중국사회의 ‘뉴 노멀(新常態)’이란 것도 결국 경제 성장의 저하를 감수하더라도 성장의 질을 높이고 분배에 치중하겠다는 것이다. 양의 문화에 기초를 둔 중국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계추가 다시 움직이고 있다.
패의 문화와 양의 문화는 평화적으로 교대되기도 하지만 기득권 세력으로 대부분 전쟁 등으로 충돌한다. 중국 고대사에서 두 문화가 처음으로 부딪치는 전쟁이 기원전 1027년의 목야전쟁(牧野之戰)이다. 이는 패(貝)의 문화의 대표인 상(商)나라가 양(羊)의 문화의 대표인 주(周)나라에 굴복한 전쟁이다.
북경에서 서남 방향으로 500km 떨어진 곳에 안양(安陽)이라는 도시가 있다. 지금은 하남성 소속이지만 한때는 평원성의 일부였다. 안양은 과거 은(殷)이라고 불렀던 도시로 중국의 7대 고도(북경 남경 낙양 서안 항주 개봉 안양)의 하나이다. 상의 20대 왕인 반경(盤庚)이 수도를 지금의 산동성에서 하남성 은(殷)으로 천도하여(盤庚遷殷) 상의 후반기를 은상(殷商)이라고 하는 것도 수도가 은일 때의 상(商)을 의미한다. 목야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은상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총비 달기(妲己)와 함께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사치가 극도에 이르러 소수 군대를 가진 주의 무왕에게 참패한다. 천자(天子)의 나라가 제후국에게 망한 것이다.
주왕은 결혼선물로 달기에 주기로 한 천하의 보물을 모아 둔 ‘녹대(鹿臺)’에서 스스로 불을 질러 달기와 함께 분신자살한다. 상은 멸망하였지만 나라 이름은 우리 주변에 남아 있다.
상의 유민이 농토를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면서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을 업으로 연명하였다. 주나라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멸시하여 상나라 사람 즉 상인(商人)이라 하고 그 업을 상업(商業)라고 불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최하층이 나라를 잃은 상의 유민이 하는 직업이다. 가치와 이념을 지향하는 양의 문화가 부패와 타락의 패의 문화를 비하한 것이다.
02.11 야율초재와 진순신
지난 1월21일 일본에 살고 있는 화인(華人) 작가 진순신(陳舜臣)(1924-2015)이 세상을 떠났다. 90세였다. 그는 일본인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 재일한국인 작가 김달수(1920-1997) 등과 함께 동북아시아에서 대한 좌담회를 통해 한중일 3국이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대륙의 거대한 꿈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 작가로 기억된다.
특히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와 인연이 깊다. 두 사람은 각 각 오사카와 고베 출신으로 오사카 외국어 대학 1년 선후배 사이다. 진순신은 인도어를, 시바 료타로는 몽골어를 전공하였다. 시바 료타로는 사기(史記)를 지은 한(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天)을 존경하여 필명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마천에 가까이 가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의미의 요(遼)를 넣었다.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福田定一)이다. 시바 료타로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중심으로 TV대하드라마 작가로도 유명하다.
진순신은 우리의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이름 한자가 꼭 같고 발음도 같아서인지 친밀감이 갔다. 언젠가 그가 한국에 와서 ‘한국 분들은 저의 이름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이라는 농담으로 이순신 장군을 거론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베이징의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그의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베이징에 살 때는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세계문화 유산 이화원(頤和園)으로 안내할 기회가 많다. 청조의 건륭제가 어머니의 장수를 위해 거대한 원림을 만들었다. 당시 옥천산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형성된 옹산박(瓮山泊)을 준설하여 그 흙으로 60m 높이의 인공산 만수산(萬壽山)을 만들고 더 넓고 깊어진 옹산박을 곤명호로 개명하였다. 원림의 이름은 청의원(淸漪園)이라고 불렀다. 1764년도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의 100년 만인 1860년 2차 아편 전쟁 시 영불 연합군에 의해 인근의 원명원과 함께 약탈당하고 불 태워져 폐허가 되었다.
광서제 때 서태후는 자신이 은퇴 후 살 곳을 생각하고 국가 예산을 무리하게 조달하여 1884-1895년간 청의원을 복구하였다. 그리고 화합을 추구하는 의미의 ‘이양충화(頤養衝和)’ 즉 이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정문을 통하여 이화원으로 들어가면 서태후의 정전 인수전이 나오고 그 곳에서 좌측으로 나가면 야율초재의 사당이 나온다. 사당을 지나면 곤명호 옆으로 지춘정이 나오며 그 옆으로 문창각이 서있다. 당시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는 누군지 잘 몰랐지만 이화원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귀에 익지 않은 이름으로 한족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야율초재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진순신의 동명의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순신은 중국의 유명한 인물에 대해 중국 현지에서 직접 취재하여 소설 속에 많은 에피소드로 풀어 넣어 그가 아니면 쓸 수없는 재미있는 역사 소설을 지어 냈다.
야율초재의 가족은 요를 건국한 야율아보기의 직계 후손으로 요(거란족)의 왕족이지만 요가 망하고 여진족이 세운 금에서 벼슬을 하였다. 야율초재는 금의 중도(中都 지금의 北京)의 서쪽 이화원 근처의 옥천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노년에 스스로 옥천노인(玉川老人)이라고 부른 것도 이와 관련된다.
야율초재의 아버지는 금에서 재상을 지내고 은퇴한 환갑노인이고 어머니는 한족 양씨였다. 아버지가 손자 같은 늦둥이 아들의 이름을 ‘초재’라고 지었다. 좌전의 고사 ‘수초유재 진실용지(雖楚有材 晉實用之)’라는 전고에 따와 지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4자성어로는 ‘초재진용’이라고 말한다. 초나라의 인재를 진나라가 영입해 쓴다는 이야기이다.
이미 금나라가 기울고 있고 어린 이 아이는 금이 아닌 몽골에서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어머니 양씨는 초재에게 일반 학문뿐만이 아니라 천문 지리 복술 등 모든 것을 골고루 배우도록 하였다. 초재가 24세 때인 1214년 칭기스 칸은 중도를 함락하고 금의 명문 가족을 포로로 하였다.
포로 중에 재상의 아들로 장신인데다가 젊지만 수염을 길게 기룬 초재의 당당한 태도에 칭기스 칸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초재가 천문 지리에 밝고 점성술 등 복점에 능해 칭기스 칸은 ‘우르토사리(긴 수염 long beard)'라는 애칭을 지어주고 자신의 측근 참모로 만들어 두터운 신임을 주었다. 초재는 칭기스 칸의 중앙아시아 원정의 본대에도 수행한다.
초재는 아버지 거란족(유목민)의 유전자와 한족인 어머니(유교사상)의 유전자를 두루 갖추었다. 칭기스 칸 사후 그의 3남 오고데이가 ‘칸’이 된다. 초재는 오고데이 칸에게, 항복하지 않은 성민(城民)을 모두 학살하는 몽고의 옛 제도의 폐지를 건의한다. 몽골은 중국의 화북지방을 점령하고 그곳에 농사짓고 있던 한족을 모두 죽이고 화북지방을 거대한 초지로 만들어 양을 키우겠다는 황당한 발상을 내 놓았다.
초재는 전쟁의 목적은 사람과 땅을 얻기 위한 것인데 사람이 없으면 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설득한다. 그는 한족 포로를 조직화하여 농사를 짓게 하여 그 수확에 대해 과세하면 사람도 살리고 세수도 확보하여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이 움직이게 하기 위해 유학을 공부한 실무관료를 양성 몽골이 중국의 전통과 문화를 살리면서 중국 대륙을 통치하도록 권유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보인 야만적 통치가 중국에서는 문명적이 된 것도 초재의 공로로 보인다. 초재를 몽골제국의 설계사라는 말이 이렇게 해서 나왔다.
초재는 풍수에도 능하여 자신이 죽은 후 옹산박을 바라보는 곳에 자신의 묘 자리를 잡아 두었다. 그의 묘가 한동안 옹산박 동편의 호반에 있었는데 건륭제가 이곳을 대대적으로 준설하면서도 충신 초재의 사당을 그대로 보존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
작가 진순신은 중국 사람이면서 일본 땅에 태어나 일본을 위해 활동하는 자신의 이야기(초재진용)로 생각하고 이 방대한 소설을 썼는지 모른다. 지금 글로벌 시대에 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서울에서 공부하고 미국 일본 중국 등 글로벌 기업에서 취업하여 활동하고 있다. 한국판 초재들이다. 야율초재의 이야기는 글로벌 인재인 한국의 초재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다.
진순신은 아편전쟁, 청일전쟁, 태평천국 등 수 많은 역사 소설을 일본어로 저술하여 ‘중국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작가 진순신의 명복을 빈다
02.21 즈장(之江) 이야기
중국의 23개의 지방 성(省) 중에서 우리나라(남한)와 비슷하면서 인연이 많은 곳이 저장(浙江)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장성은 10만여 평방km의 규모에 인구가 5천만정도로 우선 사이즈가 비슷하다.
/중국 저장성 쑤이창현 난젠옌 정상에서 바라본 구름전망대와 다랑논 모습
그리고 산지가 70%이며 평야는 대부분 벼농사가 중심이다. 저장성 사람들의 성격도 한국 사람들과 유사하여 교육열이 높고 생활에 악착같다. 해외에 이주해도 동향인끼리 결집력이 높은 것도 특징이다. 이우(義烏), 원저우(溫州) 등 저장 상인들을 ‘중국의 유대인’으로 불리 우는 것도 이러한 성격과 관련된다고 본다.
불교의 명산으로 유명한 푸퉈산(普陀山)과 텐타이산(天台山)이 저장성에 있다. 필자는 텐타이산을 찾아 가 보고 우리와 저장성과 의 역사는 불교의 교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세기 말 수양제(隋煬帝)의 스승인 선사(禪師) 지자(智者)(538-597)스님은 텐타이산에서 ‘연꽃과 같은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法華經)’을 중심으로 독자적 수행방법을 찾아냈다. 이것이 불교의 텐타이종(天台宗)의 시작이다. 수양제는 스승 지자스님을 위하여 궈칭쓰(國淸寺)를 지어 드렸다. 지난 1997년 지자스님의 입적 1400주년을 맞아 텐타이종의 세계적 불교지도자들이 모여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법회가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해발 1000m 남짓 하는 텐타이산은 산 전체가 사찰과 수도장으로 되어 있었다. 백제의 현광(玄光), 신라의 연광(緣光) 스님이 이곳 텐타이산에 유학와서 수행하였다. 고구려의 파야(波若)스님은 이곳에서 수행 중 입적하였다. 텐타이산의 정상 근처 화딩쓰(華頂寺)에 가보니 파야정(波若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현지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파야스님이 해발이 높은 이곳에 수맥을 찾아 우물을 파서 많은 사람들이 마시게 하였다고 한다.
한반도의 천태종(텐타이종)은 이곳에서 공부한 스님들이 가져 왔지만 중국에서는 한동안 텐타이종의 명맥이 끊어져 있었다. 당(唐)후기 회창법난(會昌法難) 등 불교 억제정책으로 텐타이산의 많은 사찰이 불타고 텐타이종의 경전이 일실되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고려의 의통(義通)스님이 고려에서 보관하고 있던 텐타이종 관련 서적을 가지고 와서 중국의 텐타이종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은혜를 갚은 것이다. 닝보(寧波)의 관종쓰(觀宗寺)를 방문했더니 의통대사가 중국 텐타이종의 중흥조(中興祖)로 존경받고 그의 동상이 모셔져 있었다.
저장성에서 텐타이산을 이야기 한다면 전장 688km의 첸탕강(錢塘江)을 빠트릴 수 없다. 벼농사가 중심인 저장성은 첸탕강을 젖줄처럼 의존하고 있다. 안휘성 황산에서 발원된 첸탕강이 이곳에 와서는 강의 흐름이 꺾어(折)지면서 지그재그(之)로 굽어 흐른다하여 저장(浙江) 또는 즈장(之江)으로 불렀다. 저장성도 첸탕강에서 유래되었다.
첸탄강에는 특이한 지리적 환경으로 매년 추석이 지나면 거대한 조수해일(潮水海溢 tidal bore)이 일어난다. 이것을 보기 위해전국에서 많은 구경꾼이 몰려오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쓰나미 같은 조수해일로 관광객이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사고가 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든다고 한다. 바다에 맞닿은 첸탄강의 하구는 강폭이 100km가 넘지만 강의 상류인 육화탑(六和塔) 부근의 강폭은 2km도 안 되는 나팔구조이다. 만조일 경우 이곳을 역류하는 바닷물은 시속 25km정도 된다고 한다.
육화탑은 1000여 년 전 조수해일을 부처님 힘(佛力)으로 진정시키고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의 전설이 더 재미있다. 옛날 옛적에 육화동자가 살았는데 해일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어린 육화동자는 용왕(龍王)을 원망하여 강를 향하여 매일 돌을 던지면서 부모를 돌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결국 용왕이 감동하여 그 후부터 해일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육화동자가 던진 돌이 쌓인 곳에 탑을 세워 육화탑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저장성은 인물이 흥(興)하는 곳이라고 한다. 저장성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함께 신 중국을 건국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꼽는다. 어릴 때 삼촌에게 입양되어 텐진(天津) 등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조적(祖籍)이 사오싱주(紹興酒)로 유명한 사오싱이다. 국공내전에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쫓겨 간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총통도 이곳 출신이다. 장제스는 자신의 동향 사람들을 많이 발탁하다 보니 과거 국민당 정부의 고위층 중에 저장성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저장성은 중국 공산당과도 인연이 깊다. 공상당의 탄생을 알리는 첫 당 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1921년 7월말 공산당 창당대회는 상하이에서 시작되었지만 관헌의 눈을 피해 회의 도중에 자싱(嘉興)으로 장소를 옮겼다. 자싱 난후(南湖)의 소형 유람선(畵舫) 을 빌려 회의를 속개하였다. 1921년 8월2일 오전 11시에 시작된 회의는 오후 6시에 무사히 종료됨으로써 중국 공산당의 창당을 내외에 알릴 수 있었다. 후에 ‘중국혁명은 유람선에서 탄생의 첫 울음을 들려주었다(革命聲傳畵舫中)’이라는 유명한 말이 여기서 나왔다.
저장성이 정치 경제 종교 등에서 중요하다보니 중국의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저장성 당위서기를 맡았다. 현재 중국정부의 서열 1위와 3위가 저장성을 거쳐 갔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2002년부터 5년간,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 위원장은 이에 앞서 1998년부터 4년간 당위서기를 지냈다.
시 주석의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은 저장성에서 시작되었다. 시 주석은 당위서기 시절 저장성의 발전을 위해 한국을 모델로 참고하고자 2005년 7월 방한하였다. 그 때 처음으로 박근혜 당시 야당 한나라당 대표를 만나 새마을 성공담을 경청하고 자료를 받아 갔다고 한다. 한중관계의 돈독한 관계는 시 주석과 박근혜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과 신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저장성의 발전을 10년 앞당긴 세계 최장 항주만 해상대교 건설을 시작한 시 주석은 후에 상하이 서기와 국가 부주석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시 주석이 저장성 시절 많은 인재를 확보해 두어서인지 개혁 개방 30년의 적폐를 제거하는 반부패 드라이브정책에 ‘저장인맥(之江派)’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02.24 난창 봉기와 ‘사드(THAAD)'
치라이! (起來!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 싫은 사람들아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쌓자
중화민족에 닥친 가장 위험한 시기
억압에 못 견딘 사람들의 마지막 외침
치라이! 치라이! 치라이!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적의 포화를 용감히 뚫고
전진하자
적의 포화를 용감히 뚫고
전진! 전진! 전진! 전진하자!
이 노래는 중국의 국가(國歌)이지만 인민해방군(PLA)이 군가(軍歌)처럼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본래는 항일 의용군의 행진곡이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槍杆子裏出政權)’라는 유명한 말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기 위해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7년 4월12일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 공산당원은 장제스(蔣介石)로부터 백색테러(쿠데타)를 당했다.
뜻밖에 쫓기는 몸이 된 저우언라이는 주더(朱德) 등 동지들을 규합 그 해 8월1일 국민당이 지배하고 있는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른 바 난창 봉기(南昌起義)다. 그러나 난창은 5일 만에 국민당에 탈환되어 저우언라이와 주더는 다시 좇기는 몸이 된다. 그 후 그들은 인근의 징강산(井崗山)으로 들어갔다. 징강산에는 그 해 가을 추수봉기에 실패한 마오쩌둥이 이미 숨어든 곳이다.
후에 중국 공산당은 난창봉기의 8월1일을 인민해방군의 창군 기념일로 삼았다.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 군대에 처음으로 맞서 싸운 날을 기념한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민해방군의 군장에는 항상 8.1(八一)이 붙어 다닌다.
중국 대사관 근무 시 인민해방군을 탄생시킨 난창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난창은 중국 제1의 담수호 포양호(鄱陽湖)가 가까이 있었다. 바다 같은 포양호는 후한 말 삼국시대 오(吳)나라 주유(周瑜)의 수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주유는 적벽대전에 앞서 이곳에서 수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난창에는 등왕각(滕王閣)이 유명하다. 등왕각은 악양루, 황학루와 함께 강남 3대 누각의 하나로 풍류를 좋아하는 등왕이 포양호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지은 누각이다. 등왕은 당고조 이연(李淵)의 아들로 산둥성 등주(滕州)에 봉해졌다가 후에 난창에 전봉된다.
난창의 옛 이름은 관성(灌城)이다. 한고조 유방(劉邦)의 부하장군 관영(灌嬰)이 이곳을 방비하기위해 처음으로 성을 쌓아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관성이 남방영토를 지키는 주요한 거점이 되면서 난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창대남강(昌大南疆) 또는 남방창성(南方昌盛)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난창 봉기로 시작된 인민해방군은 군사력 2백만 명이 넘은 세계 2위의 군대가 되었다. 2014년도 국방비 지출도 1294억불로 미국(5810억불)에 이어 2위였다. 그러나 개혁.개방 30년의 적폐가 인민해방군을 피해갈 수 없었다. 시징핑(習近平) 주석 취임이후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당 중앙군사위부주석 등 인민해방군의 고위층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하였다. 사실 시 주석은 덩샤오핑 이후 인민해방군을 가장 잘 아는 중국의 최고 지도자이다.
1979년 칭화(淸華)대학 공정화학과를 졸업한 시 주석의 첫 직장이 인민해방군의 최고 수뇌부 당 중앙군사위원회였다.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전우였던 껑뱌오(耿飇)가 상기 군사위원회의 상무위원 겸 비서장이었다. 시 주석은 나중에는 국방장관이 된 껑뱌오의 비서로도 활동하였다. 시 주석은 1980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군사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 국방부를 방문, 미국의 선진 군사 시스템을 시찰하고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시 주석은 푸젠성(福建省) 저장성(浙江省) 그리고 상하이 등 25년의 지방 근무에서 해당 군구(軍區)의 당위서기 등 정치위원으로서 군무를 겸직하였다고 한다. 군 관계 경력이 많지 않은 후진타오(胡錦濤) 및 장쩌민(江澤民) 주석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국가의 군대(國軍)가 아니고 공산당의 군대(黨軍)이다. 당이 군(銃口)을 지휘한다. 따라서 인민해방군에는 당을 대표하는 정치위원이 제도화 되어 있다. 정치위원은 군의 혁명성 지도 등 정치 행정 분야를 총괄하는 주요 직책이다. 정치위원은 사령관과 동격 또는 그 이상이다. 이러한 인민해방군의 이원적 지휘체계를 ‘쌍장제(雙長制)‘로 불린다.
인민해방군에서 잔뼈가 굵은 덩샤오핑(鄧小平)도 정치위원 출신이다. 그의 명콤비가 류보청(劉伯承) 사단장이었다. 1940년대 항일전선을 담당한 제8로군 129사단의 ‘류덩대군(劉鄧大軍)’은 일본군을 허베이성(河北省)에서 몰아냈고 국공 내전 시에는 장제스 국민당 군을 창장(長江)이남으로 밀어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신 중국 건국 후 류사오치(劉少奇)와 콤비가 된 ‘신(新)류덩대군’은 마오쩌둥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인민해방군을 잘 알고 있는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경제 우선을 위해 군축을 감행하였다. 4백만 정도의 군에서 백만 정도 감축하였고 13대군구의 군 편제를 거의 절반 수준인 7대군구로 간소화 하였다. 선양(沈陽)군구, 베이징(北京)군구, 지난(濟南)군구, 난징(南京)군구, 광저우(廣州)군구, 청뚜(成都)군구, 란저우(蘭州)군구가 그것이다.
북한과 관련되는 군사 문제는 한반도에 가까운 선양군구에서 담당하고, 일본과의 댜오위다오(센카쿠)문제, 타이완 해협문제, 동중국해의 방공식별구역(CADIZ) 선포 등은 난징군구의 소관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관계는 1992년 수교이후 경제관계가 최우선이었다. 어느 나라든 국가의 기본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우리는 ‘강병은 미국에서, 부국은 중국에서’ 미.중 간 역할분담처럼 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군사와 경제를 두 나라에 크게 의존하여 ‘양다리 걸치기(double dipping)’로 비난도 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적절한 조합이다.
그러나 최근 한중간의 군사외교도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한중관계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와 관련 국내 학자들의 주장도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해 7월 서울 한중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은 ‘주권’ 운운하면서 사드의 한국 배치에 우려를 나타냈다고 보도되었다. 최근 방한한 창완취안(常萬全)국방부장도 한중 국방장관 회담 시 사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한다.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회귀(rebalancing)정책에 민감해 한다. 그리고 아베(安倍晉三)정권하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 및 평화 헌법 개정 움직임 등으로 일본이 군사강국화 되고 있음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사드 배치를 ‘미사일방어체계(MD)구축에 의한 대중(對中)봉쇄 전략’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북한의 핵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생사가 걸린 중요한 안보문제이다. 한국 측은 아직 사드 배치에 대해 미국과 협의는 없지만 사드는 방어용이기에 중국이 우려하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사실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된다면 사드 문제는 자동 소멸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김장수 전 청와대 국가 안보실장이 주중대사로 내정되었다. 중국과 수교이후 군 장성이 대사로 내정된 것을 처음이다. 그 만큼 점차 대두되고 있는 한중 사드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풀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미중 간에 선택을 강요받으면 이미 패배한 게임(lost game)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국은 ‘군사동맹’(미국)과 ‘전략적 협력동반자’(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고 조언도 한다. 한국의 군사 안보 외교가 시험대에 올랐음을 부인할 수 없다.
03.04 몽촌토성에서 본 한성백제의 꿈
필자가 사는 아파트가 올림픽 공원 근처에 있어 산책 나가는 기회가 많다. 공원이 조성되기 전에는 ‘곰말’이었다고 안내되어 있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이곳이 풍납성과 함께 고대 백제의 중심이 되는 위례성(palace)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풍납성과 몽촌성을 위례성이라 하였고 나중에 주변 지역을 포함하여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성은 성벽(都城)이 아니고 한강변의 도시(city of Han river)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금의 송파구 전체와 강남구 강동구 일부에 해당된다.
위례(慰禮)라는 말은 ‘크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한자는 발음을 위한 표기이므로 의미는 없다. 아리수(水)의 ‘아리’와 ‘위례’는 같은 뜻이 된다. 아리수는 ‘큰 강’ 즉 한강의 고어이다.
백제는 압록강 부근의 부여족이 남하하여 세운 왕국이다. 지금은 일실된 백제서기에 기록된 설화에 의하면 강을 다스리는 하백(河伯 압록강의 신)의 딸 유화(柳花)가 하늘을 다스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결혼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나중에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 동명성왕이다.
주몽은 동부여에서 성장 결혼하여 첫 아들 유리를 낳았다. 그러나 주몽의 인기가 높아 이에 불안을 느낀 동부여 왕자들의 시기로 주몽은 졸본부여로 쫓겨 온다. 주몽을 알아 본 졸본부여의 왕은 자신의 세 딸 중 둘 째인 소서노와 정략결혼을 시키고 고구려의 건국을 도와준다. 소서노는 주몽과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둔다.
소서노는 자신이 낳은 아들 비류가 태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주몽은 동부여에서 데리고 온 장남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실망한 소서노는 두 아들과 함께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도착한다.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負兒岳 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고 도읍지를 찾는다. 신하들은 남한산과 한강과의 사이의 지역(지금의 송파구)을 내려다보고, 북으로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남한산 522m)에 의지하며, 남으로는 비옥한 땅이 펼쳐 있고, 서쪽에는 큰 바다로 막혀 있어, 쉽게 얻기 어려운 천험의 지세라고 도읍지로 추천한다. 그러나 비류는 해안가인 미추홀(인천)을 고집한다. 온조는 미추홀이 습하고 염분이 많아 농사에 어려워 신하들의 추천에 따른다.
온조는 자신을 따라 온 10명의 신하들과 함께 나라를 건국, 십제(十濟)라고 부른다. 이에 비류는 십제를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실패하고 자살한다. 비류의 신하들이 온조에 귀순하자 온조는 크게 기뻐하고 ‘백성이 모두 즐거이 따랐다(百姓濟海樂從)’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쳐 불렀다.
초기 백제는 발달된 철기로 인근의 원주민 마한 세력을 정복한 후 북성(北城)인 풍납성에 이어서 남성(南城)인 몽촌성을 건립한다. 토성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축성법을 도입하여 판축(版築)기법과 부엽(敷葉)공법으로 흙을 다지고 나뭇가지와 잎 등을 깔아 만든 당시로는 최신식 공법의 성이다.
한성 백제 시기 가장 걸출한 왕은 근초고왕이다. 고구려에 광개토대왕이 있다면 백제에는 근초고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성기 백제의 상징인 근초고왕은 북으로는 한사군의 대방군과 낙랑군 영토를 흡수하고 남으로는 마한을 복속시켜 현재의 전라남도를 모두 정복한다. 그리고 해양으로도 세력을 펼쳐 일본의 규슈, 중국의 산동성과 요서지역에 진출 이른 바 ‘글로벌 백제’의 이름을 떨친다.
근초고왕은 아직기와 왕인박사를 일본에 파견 말(馬)을 이용하는 기술과 천자문과 논어를 전달한다. 일본에서 발견된 칠지도(七支刀)는 그 용도가 아직 미스테리로 남아 있지만 학자들은 백제를 본국 줄기로 하고 백제에서 뻗어 나간 동아시아의 6개의 분국(백제인 진출기지)가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침입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평양성 지역을 백제 영토로 만든다. 고국원왕의 손자 광개토대왕은 북방 정벌로 백제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없었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백제 공략에 나섰다. 위협을 느낀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는다. 장수왕은 475년 위례성 건너 아차산에 진지를 구축하자 백제의 개로왕은 태자인 동생(후에 문주왕)을 신라에 파견 원군을 요청한다.
문주왕이 신라의 원군과 함께 위례성에 도착하였을 때 위례성은 장수왕에게 유린되어 완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장수왕은 3만의 군사로 7일 밤낮으로 북성(풍납성)을 공격하였고 남성(몽촌성)에 있던 개로왕은 왕비와 함께 붙잡혀 살해되었다.
문주왕은 위례성을 포기하고 신라에 가까우면서 장수왕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금강 상류 곰나루 웅진으로 천도한다. 웅진은 고려 때 현지의 산세가 공(公)자와 닮았다고 공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장수왕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 남한강 상류의 충주 땅을 밟고 충주(중원)고구려비를 세워 새로운 영토의 경계로 삼는다.
백제의 웅진 시기는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까지 5대왕 63년(475-538)으로 끝난다. 백제의 중흥의 왕인 성왕은 국가 발전을 위해 내륙의 웅진에서 바다가 가까운 금강 하류 사비성(조선조에 부여로 개명)으로 천도하고 국가이름을 남부여로 바꾼다. 551년 성왕은 신라와 함께 선조의 땅인 한성을 고구려로부터 일시 탈환하나 2년 만에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에게 빼앗긴다.
660년 백제의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사비성 백제는 122년(538-660)으로 끝난다. 사비성은 해양진출에는 유리하지만 바다를 건너 금강을 올라 온 소정방의 당군(唐軍)을 방어하기에는 취약하였다.
한성백제는 493년간으로 전체 백제 왕조 678년의 73%이며 31명의 국왕 중 21명이 한성백제 시기의 국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한성백제를 잘 모른다. 백제하면 웅진 또는 사비성 백제를 생각하고 공주와 부여로 몰려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신라의 관점에서 역사서를 기술, 삼천궁녀 등 백제 패망 당시 역사에 중점을 두고 백제의 전성기였던 한성백제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성하면 지금의 서울을 생각하지만 조선조 서울은 한성이라기보다 한양(漢陽 한강의 북쪽 도시)이다. 지금 종로구 중심의 한양과 송파구 중심의 한성과는 거리와 입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오리지널 한성은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라고 생각된다.
‘흩어진 겨레의 힘을 한데 모우고, 동서로 갈라진 세계를 하나가되게 한’ 서울 올림픽이 송파구에서 개최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근초고왕의 칠지도는 7개의 가지만 있는데 올림픽 광장에는 참가국 160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백제가 동아시아를 품었다면 서울 올림픽은 전 세계를 안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한성 백제 시대의 지명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엿 볼 수 있다. 위례성의 북성지인 풍납은 그 길죽한 모습으로 사성(蛇城)으로 불리었는데 사람들은 ‘뱀(배암)들이’로 불렀고 그것이 다시 ‘바람들이’로 와전되어 풍납(風納)이 되었다고 한다.
남성지인 몽촌(夢村)은 옛 지도에는 몽촌리인데 당시 사람들은 ‘곰말(곰마을)‘로 불렀다. ‘곰말’이 ‘꿈마을’이 되어 ‘몽촌리’가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이곳을 떠나 곰나루(웅진)로 간 백제를 그리워하여 곰말(웅촌)로 불렀던 것이 아닌가 멋대로 추측해 본다.
석촌동은 ‘돌마을’인데 이 돌이 바로 적석총(돌무지무덤)으로 된 백제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고분군에서 나왔다. 가락동과 방이동의 고분군은 일반인의 무덤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이 이 돌로 진지를 구축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인조대왕의 항복을 받아 냈다. 일제 강점시기에 100개 가까운 적석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탄천(炭川)의 백사장은 군사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훈련 시 불을 때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데 남은 숯(炭)은 강물을 정화시키는데 사용하여 ‘숯강’이 되었다고 전한다.
한국판 ‘폼페이’라고 흥분했다는 풍납토성 발굴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고, 서울 올림픽 개최로 몽촌토성을 정비할 때 위례성을 복원보다 올림픽 경기장과 체육시설 마련이 급하였기에 일반인에게는 올림픽 공원으로 더 알려져 있다.
소나무를 로고로 쓰고 ‘맑은 공기 푸르른 세상’을 구호로 하는 송파구는 1970년대 도시 개발과 함께 조선조의 ‘동잠실’이었던 거대한 뽕나무섬(蠶島)의 남쪽에 흐르는 송파강을 매립하여 만든 지역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신천은 확장되어 한강 본류가 되고 뽕나무섬은 육지와 연결되어 올림픽 주경기장과 수많은 아파트 숲이 들어서 있다.
송파구는 2013년부터 관광특구로 지정 되어 있다. 오늘 날 관광은 인문관광이 중심으로 역사의 스토리를 입혀야 국내외 관광객이 열광한다.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을 생각한다면 송파구는 한성백제의 유적지를 일부라도 복원하고 한성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는 행사 주관을 권하고 싶다. 2012년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도 좋은 명소가 될 것이다.
평양성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근초고왕의 개선행사, 침류왕 때 동진(東晉)의 고승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하는 행사, 일본으로 떠나는 아직기와 왕인 박사의 송별행사 등을 재현한다면 우리 국민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의 큰 관심도 끌어 낼 것이다.
국내외 관광객이 롯데 월드타워 몰에서 쇼핑을 하고 한성백제의 문화행사를 경험한다면 좋은 관광 상품이 될 것 같다. 마침 지하철 8호선은 한성백제의 전 지역을 운행하고 있어 한성백제를 둘러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03.10 강상(姜尙)과 육도략(六韜略)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상.주(夏商周)의 마지막 왕조인 주(周)의 발상지는 황허(黃河)의 상류 오르도스 사막지역으로 연간 강우량이 250mm 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의 지방 호족 태공(太公)은 3명의 아들을 두었다. 막내 계륵(季歷)이 아버지의 신임을 독차지하자 위로 두 형들은 아버지의 뜻을 미리 알고 멀리 피해준다.
계력의 아들 창(昌)은 지혜롭고 용맹하였다. 천자국 상(商 후에 殷으로도 불림)은 충성스러운 창을 서부지역의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서백창(西伯昌)으로 봉하였다. 그가 나중에 주의 문왕으로 추증된다.
인재를 구하고 있던 문왕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기인(奇人)을 만나게 된다. 그는 흔한 낚시꾼이 아니었다. 그와 이야기를 해보니 전략가로서 당시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상(商)의 취약점을 낱낱이 알고 왕(紂)의 폭정에 제후들이 궐기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아는 병법가(兵法家)였다. 창은 자신의 할아버지(太公)가 늘 바라던(望) 사람을 만나 것이라고 기뻐하였다. 그가 후에 태공망(太公望)으로 불리었던 강상(姜尙)이다. 대략 기원전 11세기경의 이야기이다.
강상은 본래 동이(東夷)사람으로 지금의 산동성 출신이다. 상의 하급관리로 근무하였는데 왕의 폭정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민생이 안정되지 않아 상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벼슬을 버린다. 그는 지금의 시안(西安)근처의 판시계곡(蟠溪峽)에 은둔생활을 통하여 언젠가 필요할 병법(兵法)을 연구하고 인근의 위수(渭水)에 낚시를 하면서 자신을 알아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상이 은거 10년 만에 현인을 만났으니 그가 문왕이다.
처음 문왕의 관심을 끈 것을 강상의 낚시 바늘에 있었다. 강상의 낚시 바늘이 굽어있지 않고 똑 바름(直勾)을 이상하게 생각한 문왕은 그 까닭을 물어 본다. 강상이 답하기를 자신의 낚시는 미끼를 끼워 물고기를 속여 잡는 것이 아니고 물고기가 스스로 낚이고자 할 때 비로소 물고기를 잡는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유명한 ‘강태공의 낚시는 원하는 자가 문다(太公釣魚 願者上鉤)’라는 말이 유래 된다. 문왕이 크게 감동하여 강상의 인물됨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문왕은 강상을 중용하고 그의 딸(邑姜)을 며느리(무왕의 부인)로 삼으면서 사돈이 된다.
강상이 하급 관리를 그만두고도 농사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병법서를 읽거나 하루 종일 낚시를 하면서 소일하자 부인의 불만은 늘어 갔다. 낚시라고 하지만 미끼 없는 곧은 낚시 바늘에 물고기가 잡힐 리가 없었다. 집안의 땟거리가 없게 되자 참 다 못한 부인은 도망을 간다. 후에 강상이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부인이 찾아 와 용서를 빌었다.
찾아 온 부인을 만난 강상은 하인을 불러 대야에 물을 떠오게 한다. 하인이 물이 가득한 대야를 가지고 오자 강상은 부인이 보는 앞에서 대야의 물을 바닥에 쏟아 버린다. 그리고 부인보고 이 쏟아진 물을 다시 대야에 담을 수만 있으면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부인은 말없이 돌아 가버린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는 고사다. 후에 줄여서 복수불반(覆水不返)이란 4자성어가 되었다. 영어의 격언에 'It's no use crying over split milk'라는 말과 상통된다.
한편 포악한 상(商)의 주왕은 문왕이 제후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반역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였다. 주왕은 인질로 잡아 둔 문왕의 장남을 죽이자 문왕은 상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지만 실행을 못하고 죽는다. 문왕이 죽자 둘째 아들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그가 후에 주를 건국한 무왕이다.
무왕은 동생 주공단과 강상의 지략과 병법을 이용 상을 칠 것을 논의한다. 그러나 강상은 무왕에게 서두르지 말 것을 권한다. 그가 낚시에 배운 진실은 서두른다고 될 것이 아니고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상의 주왕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쪽의 이민족(東夷)을 정복하러 떠나 수도를 비웠다. 주나라는 이때를 노려 기습적으로 공격한다. 상의 주왕은 동이를 공격하다 오히려 자신이 멸망하게 되는 위기에 처한다(紂克東夷 而損其身)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은 72만의 대군을 앞세워 4만5천명의 주를 압도한다.
주(周)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상의 대군을 목야(牧野)에서 패퇴시킨다. 주의 군대가 절대 열세임에도 승리한 것이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상의 군대 속에 제대로 싸우지 않은 노예군단, 주의 충성스러운 10명 신하(十亂臣), 상의 이반된 민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거론되지만 후세 역사가는 군사(軍師 the master of strategy)로서 강상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 최고의 병법서로 무경7서(武經七書 Seven Military Classics)가 있다. 그 중 육도(六韜 Six Secret Teachings)와 삼략(三略 Three Strategies) 2개를 강상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도는 6가지의 비밀 전략이고, 삼략은 전투에서의 상중하 3가지 전략과 전술이 중심이 되어 있다. 도(韜)는 칼집 또는 화살집으로 무기를 감추는 것을 의미하여 육도는 육도략(六韜略) 즉 여섯 가지의 비밀전략으로 해석된다.
육도략은 1)문도(文韜): 치국과 인사(用人)에 대한 도략(韜略) 2)무도(武韜): 용병에 대한 도략 3)용도(龍韜): 군사 조직에 대한 도략 4)호도(虎韜): 전쟁환경, 무기체계 그리고 포진(布陣)에 대한 도략 5)표도(豹韜): 전술에 대한 도략 6)견도(犬韜): 군대의 지휘 훈련에 대한 도략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중국에는 초한전(楚漢戰)을 승리로 이끈 유방(劉邦)의 참모 장량(張良)과 후한(後漢)말 유비(劉備)의 촉(蜀)을 도운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대표적인 군사(軍師)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전국(戰國)시대인 16세기 전후하여 중국의 병법서가 대거 도입되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사후 혼란스러운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도운 다케나카 한베에(竹中半兵衛)와 구로다 간베에(黑田官兵衛)가 일본의 대표적인 군사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강상의 육도와 삼략을 필독서로 두고 연구하였다고 한다.
03.17 양회(兩會)와 베이징의 봄
매년 춘제(春節 설)가 지나면 베이징에도 봄이 온다. 베이징의 봄과 함께 중국의 연중 최대의 정치행사 양회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the State of the Union Address)를 기다리듯 세계 2위의 경제를 가진 중국 국무원 총리의 국정업무보고(政府工作報告)가 발표되는 양회를 기다린다.
중국의 양회(兩會 two assemblies)란 국가최고 자문기관인 전국정치협상회의(CPPCC 정협)와 우리의 국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NPC 전인대)를 말한다.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되는 양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정협 위원 2000여명과 전인대 의원 3000명이 화려한 의상으로 베이징으로 몰려온다.
특히 소수 민족출신들은 울긋불긋한 민족전통의상을 입고 천안문 거리를 활보한다. 베이징의 호텔은 만원이 되고 주요 음식점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져 모피와 명품 백이 자취를 감추고 저녁 행사의 분위기도 썰렁해질 정도로 검소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베이징 시민은 양회기간을 잔치 날로 생각한다.
이때가 되면 베이징에서 가장 바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대사관에 근무하는 각국의 외교관과 베이징에 주재하는 외국의 언론 특파원이다. 그들은 발표되는 업무보고를 통하여 중국의 한 해 정책을 전망 분석하여 본부에 보고하거나 언론에 보도한다.
전인대는 중국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 고무도장(rubber stamp)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듣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고유의 입법권 외에도 중요한 인사권을 행사한다. 국가주석과 부주석, 국무원 총리와 국무위원, 최고인민법원원장과 최고인민검찰원원장 등의 행정부와 사법부 수장의 임면권(任免權)을 가진다. 사실상 3권 분립 하의 우리 국회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2012년 말 제18기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 총서기가 된 시진핑(習近平)과 정치국 상무위원인 리커창(李克强)은 다음해인 2013년 3월, 제12기 전인대 1차회의에서 각각 국가주석과 국무원 총리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2013년 3월의 전인대는 다른 해와 달리 중요하였다. 그런데 전인대 개최 얼마 전인 2013년 2월에 김정은의 북한이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세 번째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중국의 잔치판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당시 시진핑 주석을 비롯하여 중국 지도자들은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이 지금도 북한의 김정은을 만나주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로 이러한 악연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같은 전인대에서 지난 주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북중(北中)정상회담 가능성 운운하며 앞서 잔치판을 망쳐 놓은 북한에 대해 관계 회복의 신호탄을 보낸 것은 아이러니하다.
금년도 양회는 3월3일 개막되었던 정협과 3월5일 개막되었던 전인대가 11일간의 열띤 회의를 끝내고 지난 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양회의 핵심 포인트는 ‘신창타이(新常態 new normal)’와 ‘4개전면(四個全面)’의 공식화이다. ‘신창타이’는 저성장 구조를 새로운 노말(正常)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금년도 성장률 목표는 작년보다 더 떨어진 7%전후이다. 과거 중국은 성장률이 최소 8%는 되어야 고용이 유지되어 국정이 안정된다는 ‘바오바(保八)’ 주장이 있었다. 어느 정도 달려야 쓰러지지 않고 굴러가는 자전거 원리이다. 그러나 2012년부터 7.7%대로 떨어졌다가 2014년에는 목표 7.5%에도 미달하는 7.4% 성장에 멈추었다. 1998년 이래 16년만의 저성장이었다. 금년은 이보다 더 낮은 7% 성장률을 제시하여 ‘바오치(保七) 마저 걱정하게 되었다. 반면에 국방예산은 전년대비 10.1%로 두 자리 숫자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신창타이’는 지난 해 개최된 중국 공산당의 ‘당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과거 중국의 무리한 성장에 따른 대기오염 및 환경파괴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다. 지난 30년 이상의 관(官) 주도로, 양(量) 중심의 고도성장 일변도에서 시장(民) 주도로, 질(質)중심의 적정성장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보인다.
‘4개전면’은 1)전면적인 개혁심화, 2)전면적인 의법치국(依法治國), 3)전면적인 종엄치당(從嚴治黨), 그리고 4)전면적인 샤오캉(小康)사회건설이다. 이는 시진핑 주석 집권이후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한 통치이념으로 시 주석의 집권기간 내내 반복해서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외교정책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가 있다. 이는 ‘당중앙외사공작회의’를 통해 주변국과의 관계를 ‘신형국제관계’로 정리하면서 구체화 된 것이다. 즉 육지에서는 ‘실크로드 경제벨트’ 해상에서는 ‘21세기 해상실크로드’로 하나의 벨트(one belt)와 하나의 로드(one road)의 경제권의 구상이다. 과거 중국이 유럽과 연결한 육지와 해상의 2개의 실크로드를 현대의 경제권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국내 성장 둔화를 해외에서 활로를 찾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국내정치나 사회문제에서는 ‘부정부패 척결’과 서민을 위한 ‘빈부의 격차해소’를 언급하였다. 성역 없는 반부패운동을 통해 빈곤층의 불만을 해소시키고 도시의 농민공 자녀의 교육문제에 대한 배려도 눈에 띈다.
필자가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 농민공이나 지방 출신의 가사 도우미(阿姨)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베이징 외곽에 가보면 거주증이 없는 부모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앞으로는 이들이 임시거주증(暫住證)을 받아 제대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가운 서민정책이 될 것 같다.
양회도 끝나고 베이징의 봄은 완연해졌다. 양회에 참석한 대표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귀향열차에 오르면서 내년을 기약한다. 차창 밖에 봄기운에 젖은 들판을 바라보면서 반부패 강화를 내세운 시진핑 주석이 경고한 ‘온수자청와(溫水煮靑蛙 천천히 끓는 물속의 청개구리)’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할 것 같다.
전인대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은 장더장(張德江) 상무위원장(우리의 국회의장)이다. 그는 우리말을 유창하게 잘한다. 라오닝성 출신으로 문화혁명 당시 조선족 자치구에 하방(下放)된 인물이다. 다행히 조선족 지도자 이덕수(李德洙)의 도움으로 옌볜대학 조선어학과를 졸업하고 김일성대학에 유학하였다.
1989년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북한 방문을 수행하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큰 신임도 얻었다. 그는 저장성과 광둥성 당위원회 서기와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 지방과 중앙에서 폭 넓은 국정경험을 통하여 국가 서열 3위가 되었다. 장더장 위원장은 한반도 최고 전문가로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인물이다.
03.24 리퍼트 대사와 라이샤워 대사, 그리고 니콜라이 황태자
▲지난 3월5일 아침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가 민화협 조찬모임에서 피습되었을 때 필자는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어느 지방의 조찬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 뉴스 속보를 본 사람들이 술렁거리면서, 황당하고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한일관계를 이야기 하던 중이라서 일본에서 일어 난 유사한 사건이 생각났다. 1964년 3월 24일 라이샤워 미국 대사의 피습사건과 1891년 5월11일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의 오쓰사건이다.
1964년 3월 주일 대사로 부임한지 3년이 된 에드윈 라이샤워 대사는 외출을 위해 대사관 후문에서 자신의 전용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일본청년이 칼을 들고 뛰어나와 라이샤워 대사의 허벅지를 찔렀다. 예리한 칼날은 대퇴동맥(大腿動脈)을 뚫어 피가 솟구쳤다. 대사관 직원이 급히 대사를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 측은 출혈이 심해 생명이 위독한 대사에게 긴급 수혈로 목숨을 구했다. 범인은 19세의 정신병 환자로 밝혀졌다.
“드디어 나의 몸에도 일본의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인 라이샤워 대사의 이 한마디로 많은 일본인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수혈된 ‘일본의 피’ 속에 간염 균도 들어 있었다. 대사는 평생 그 간염 균과 싸워야 하는 후유증을 앓다가 79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사망 원인은 간염의 합병증이었다.
라이샤워 대사는 직업외교관이 아니다. 그는 1910년 미국 선교사의 자녀로 일본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동아시아 관계학으로 박사를 학위를 받고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박사 논문은 9세기 일본의 천태종 엔닌(圓仁 794-864) 스님의 중국 당(唐)나라에서의 유학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대한 것이다.
라이샤워 교수는 엔닌 스님의 일기를 통해 통일신라의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완도)을 근거로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왕’이었던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라이샤워 교수는 일본 전문가로서 미국의 대일(對日政策)을 비판한 글을 학술지에 자주 올렸다. 그 중에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지에 게재된 ‘파손된 대화(Broken Dialogue)’라는 논문이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논문은 미국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일정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일본의 중심 세력인 자민당의 지도자만 만나지 말고 비주류계인 사회당 인사 그리고 일본의 그늘진 곳을 대변하는 인사들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는 논지였다.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주일 대사 취임 요청을 받은 라이샤워 교수는 일개 교수가 미국의 최대 해외 공관을 맡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사양했다. 그러나 ‘직접 맡아 해보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라(put up or shut up)’는 대통령의 의중을 읽고 대사직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재혼한 일본인 부인 마쓰카타(松方) 여사와 함께 미국 대사로서 그늘에 가려진 일본인을 부지런히 만나고 다녔다. 1966년 대사를 그만 두고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 와 많은 제자를 기르고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자문역할을 하였다.
1891년은 일본이 아직도 동 아시아의 신흥국일 때이다. 동 아시아에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라고 부르는 청(淸)의 리훙장(李鴻章)이 최신예 북양함대로 버티고 있고, 시베리아에 철도를 놓아 동방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의 세력이 동점(東漸)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3세는 누나들 속에 둘러싸여 내성적 성격의 니콜라이 황태자를 일본방문 등 아시아 여행에 오르게 했다. 명분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극동지구 기공식 참석이었다.
니콜라이 황태자를 실은 러시아 함대는 흑해를 출발 인도양을 돌아 일본의 남단에 도착하였다. 가고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고 세토내해를 거쳐 고베에 입항하였다. 1891년 5월11일 황태자 일행은 교토를 방문하고 인력거를 이용 비와호(琵琶湖)를 보기 위해 호반의 도시 오쓰(大津)로 갔다. 비와호는 일본 내륙에 감추어진 바다 같은 아름다운 호수이다. 라이샤워 교수가 연구한 엔닌 스님은 비와호가 내려다보이는 히에이 산(比叡山) 엔라쿠지(延曆寺)에서 주지스님을 하였다. 러시아 황태자가 방문하자 오쓰의 많은 사람들은 유럽 대제국의 황제가 될 황태자를 보러 나왔다.
일본정부는 수많은 경찰을 동원 경호를 엄하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경호 경찰 한사람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사벨)을 뽑아 인력거에 앉아 있는 황태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순간 황태자가 급하게 피하는 바람에 칼은 황태자의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황태자의 머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것을 안 경찰관이 두 번째로 다시 내리쳤다. 순식간이었다. 황태자와 동행하던 사촌 게오르그 그리스 왕자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두 번째 칼을 막아 냈다.
크게 놀란 것은 메이지 천황과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총리 등 정부의 요인들이었다. 라이샤워 대사부인 마쓰카타 여사는 마쓰카타 총리의 증손녀이다. 알렉산더 3세가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아시아에 세력을 펼치고 있어 황태자의 조난이 일본과 전쟁을 할 수 있는 절호의 핑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호 경찰관이 황태자를 직접 공격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 발생했다.
다급한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직접 황태자의 숙소인 교토로 병문안을 하고 고베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까지 황태자를 배웅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일본인들로 하여금 황태자의 쾌유를 빌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 교토에 사는 한 일본 여인은 황태자를 시해하려고 한 부끄러운 일본인을 대신하여 속죄의 자살을 하여 ‘열녀(烈女)’로 칭송되었다.
황태자는 다음 일정인 요코하마와 도쿄 방문을 취소하고 급거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1891년 5월19일 시베리아 횡단 철도 기공식의 기록 사진을 보면 니콜라이 황태자의 머리는 하얀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다. 일본에서는 러시아가 공격해 올 것이라는 ‘공아증(恐俄症)’이 팽배하였으나 알렉산더 3세는 관용으로 사건을 넘겼다.
5년 후 니콜라이 황태자는 알렉산더 3세의 급서로 황제(니콜라이 2세)가 된다. 1896년 모스크바에서 거행된 대관식에는 고종의 시종무관 민영환이 참석하였다. 오쓰의 악연이 있는 메이지 천황과 니콜라이 2세는 1904년 러일전쟁으로 다시 마주치게 된다.
니콜라이 2세는 실정과 함께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1917년 볼셰비키(러시아 과격파 혁명주의자)에 의해 강제 퇴위되면서 300년 역사의 로마노프 왕조도 문을 닫게 된다. 니콜라이 2세는 1918년 7월 시베리아의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된다. 볼셰비키는 은폐를 위해 황제가족 시신(屍身)을 모두 소각하였다. 그러나 무슨 우연인지 오쓰사건 백년만인 1991년에 시신이 발굴되고 오쓰에서 수거된 황태자의 DNA로 니콜라이 2세의 시신임이 밝혀졌다.(졸저‘인문삼국지’의 ‘러시아 황태자 동방견문’ 참조)
수술을 받은 후 트위터에 한글로 “같이 갑시다”라는 문구를 올려 우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리퍼트 대사는 최근 부인 로빈과 첫아들 세준이 그리고 애견 그릭스비와 함께 걸어서 출근하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자신의 말처럼 “한미동맹의 진전”을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최대한 빨리 업무에 복귀한 것이다. 리퍼트 대사의 조속한 쾌유를 기원한다.
03.31 벚꽃 유감(有感)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봄이 왔지만 봄답지 않다(春來不似春)고 할 정도로 바람이 세차고 공기가 차가웠다. 그럼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목련 등 봄의 꽃은 피어나고 있다. 그중 사람의 혼을 쑥 빼 놓을 만큼 담홍색으로 무리지어 피어나는 꽃이 벚꽃이다. 어제까지만 꽃 봉오리였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면 벌써 피어 있어 벚꽃은 “팝콘처럼 핀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곧 벚꽃이 만개할 계절이 왔다.
일년초나 다년초에서 피어나는 꽃은 아름답긴 하지만 뭔가 연약하여 아쉬운 감이 있다. 그러나 수령이 백년 가까이 되는 키 높고 아름드리 벚나무에서 피는 벚꽃은 매년 볼 수 있다는 안정감이 있다. 크게 자란 나무이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가지에 꽃송이도 그 만큼 많다. 벚나무가 무리지어 꽃을 피우면 그 근처가 꽃으로 인해 밤에도 밝게 느껴지고 낮에는 마치 안개라도 끼어있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벚꽃의 일본어인 ‘사쿠라’는 ‘무리지어 핀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북서풍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디어 내야하는 동아시아 야산에서는 보통 꽃나무는 새잎을 내고 꽃을 천천히 보여주는데 벚나무는 성질 급해서인지 잎보다 화려한 꽃을 먼저 내보인다. 제주도 및 한반도의 서남쪽이 원산지인 벚나무는 그 꽃의 화려함이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유교의 영향으로 질박(質朴)을 미덕으로 삼는 조선 선비들이 벚꽃의 화려함을 우정 멀리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벚나무는 목재의 우수성으로 국보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나무로 사용되었다. 또한 한의학(韓醫學)에서는 벚나무의 껍질을 달여 먹으면 감기가 낫고 벚나무와 열매인 버찌도 진해거담(鎭咳去痰)의 약재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충효를 으뜸으로 치는 유교문화에서는 겨우 내내 찬바람과 심지어 눈(雪)까지 둘러쓰고도 피는 한 송이 순백의 매화(梅花)를 좋아하였다. 매화 한 송이가 충성스러운 선비의 모습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매화는 중국과 한반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전쟁이 없었던 헤이안(平安)시대(794-1192)까지만 해도 꽃이라면 매화를 생각하고 매화의 고절(孤節)을 읊은 시(詩)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금도 일본에서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에는 매화 밭이 많다.
중국과 한반도에 전란이 일어나자 일본은 대륙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국풍(國風)이라는 일본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킨다. 일본에서는 대륙적인 매화보다 꽃이 화려한 벚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근세 에도(江戶)시대에는 오래 동안 평화에 젖고 상업의 발전으로 화려한 채색의 우끼요에(浮世繪 일본의 전통 풍속화)가 유행하자 벚꽃의 인기는 폭발하게 되었다.
벚꽃의 개화는 오래 가지 않는다. 봄바람에 날리면서 우수수 꽃잎이 떨어진다.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 꽃잎으로 대지가 뒤 덥혀 있다. 관찰력이 좋은 일본인들은 벚꽃이 피고 지는 모습은 사무라이(武士)가 배워야할 덕목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화려한 벚꽃의 꽃잎이 대지위에 휘날리면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생명을 초개처럼 버릴 줄 아는 무사도(武士道)를 발견하였는지 모른다. 20세기 초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을 침략할 때 군인정신을 일깨워주는 정훈목(政訓木)으로 일본군 주둔지에는 반드시 벚나무를 심었다.
한국에는 오래된 벚꽃 명소가 많다. 매년 4월초가 되면 대표 벚꽃 축제인 ‘진해군항제’가 시작된다. 올해도 진해가 있는 창원시는 3월 31일을 전야제로 시작하여 4월10일까지 군항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올해로 53회째라고 한다.
진해에 이어 잘 알려진 벚꽃 명소는 서울의 창경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은 일본은 순종황제를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연못을 파서 수천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 그 후 1920년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일반에 공개하였다.
1945년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물러간 이후에도 오랫동안 창경원은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벚꽃의 명소로 시민공원이 되었다. 1990년대에 와서 조선왕조의 창경궁으로 복원되면서 동식물들은 과천으로, 벚나무는 여의도로 옮아갔다. 오늘 날 서울의 벚꽃 명소가 된 여의도의 윤중제 벚나무는 본래 창경원의 벚나무였다. 윤중제의 ‘나체팅(나이트 체리 블로섬 미팅)’이라는 밤 벚꽃 구경도 벚나무와 함께 여의도로 옮겨진 것이다.
일본이 패망한 후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를 다 잘라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그때 많은 학자들이 벚나무가 본래 우리나라가 원산지라는 것을 호소하여 일제 강점 시 심은 오래된 고목이 아직도 남아 있게 되었다.
지금은 전국 주요 명승지에 벚나무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벚꽃의 나라 일본 사람들이 ‘하나미(花見)’라고 부르는 벚꽃(사쿠라)관광을 하러 올 정도라고 한다. 일본의 벚나무는 에도(江戶)시대 심은 것이 많아 수령이 수 백 년이 된 고목이 많지만 우리나라 벚나무는 대개 수령 50-60년의 중년의 활기를 보인다.
일본의 벚꽃 명소는 대개 고목으로 이루어져 각종 질병에 약하여 고사목이 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일본 언론은 ‘벚꽃의 위기’를 전하면서 앞으로 50년 후 일본의 주요 벚꽃 명소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벚꽃 명소는 해를 거듭할수록 원숙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 같다. 벚꽃의 종주국을 다시 찾을 날도 머지않다.
우리나라 전국에서 피고 있는 벚꽃을 일본에서는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라고 부른다. 1908년 독일의 식물학자가 ‘소메이요시노’의 선조가 제주도의 왕벚나무라는 것을 밝혔다. 그 후 1930년대 일본의 저명한 식물학자 고이즈미(小泉源一)박사도 ‘소메이요시노’가 제주도에서 도래되었다고 확인하였다.
‘소메이(染井)’는 일본 도쿄 북서쪽의 지명이고 ‘요시노(吉野)’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이 많이 살던 일본 중부 나라현(奈良縣)의 지명이다. 요시노의 산에서 가지고 온 새끼 벚나무가 18세기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의 원예촌이던 ‘소메이’ 수목원에서 개량되어 전국에 보급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최근 벚꽃의 원산지를 놓고 일본은 다른 의견을 내 놓고 있다. 일본의 벚꽃은 일본 내 자생종인 히간(彼岸)벚꽃과 오시마(大島)벚꽃의 교배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제주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다. 한일 간 벚꽃의 원산지 논쟁이 일고 있다. 여기에 중국도 가세하여 벚꽃의 진짜 원산지는 중국의 히말라야 지역이라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한중일 벚꽃의 원조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세계적인 벚꽃명소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다. 봄철에 워싱턴에 가 본 사람들은 포토맥 강변의 아름드리 벚나무에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에 취한다. 워싱턴은 본래 미국 남부 버지니아 주의 버려진 습지로 말라리아가 극성스러운 곳이었는데 남북의 화합을 위해 이곳에 연방정부의 수도가 된 계획도시다. 1910년대 일본은 미일(美日)의 우호를 상징하여 포토맥 강변과 조수(潮水)조절용의 인공호(tidal basin) 호반에 3000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
일본이 워싱턴의 벚나무를 ‘소메이요시노‘로 소개해 놓아 당시 나라를 잃은 재미 한국인들은 워싱턴의 벚나무는 한국이 원산지임을 알리기 위해 제주도의 왕벚나무 수 그루를 워싱턴의 모 대학에 심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본고는 졸저’삼국지문화‘의 ’벚꽃이야기‘를 발췌 수정한 것임)
04.06 위기의 ‘광창우(廣場舞)’
내가 처음 중국 베이징에 살면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중국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어느 날 새벽에 날이 밝을 무렵 산책을 위해 아파트를 나서자 어디선가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따라 가보니 작은 공원이 있고 공원의 한쪽에서 중노년(中老年) 남여들이 모여서 집단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신기하여 한참 구경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몇 년을 살다보니 공원뿐만이 아니라 로터리 등 공공 장소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부터 가을 까지는 물론이고 한 겨울에도 두툼한 외투를 입고 연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광장에 나와 춤을 추었다. 휴대용 카세트 레코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추는 각종 춤으로 보는 사람까지도 흥겹게 하였다.
언젠가 중국의 지인(知人)을 만나 공원의 춤 이야기를 꺼냈더니 “광창우(廣場舞)!“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는다. 별다른 취미가 없는 어르신들이 아침에 모여 운동하고 친구들도 만나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아침잠이 없는 지인의 부모도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시니 좁은 집에서 어른들 눈치 보느라고 못다 한 부부 간의 대화도 그 때 나눈다고 한다.
내가 처음 베이징에 근무할 때는 집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소음공해(noise pollution) 이야기는 없었는데 요즈음은 공원이나 광장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들려오는 ‘광창우’의 음악 소리에 잠을 설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사실 중국에서 광장이나 공원 등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집단으로 춤을 추는 이른 바 ‘광창우’(plaza mass dancing)는 1980년대부터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대도시가 정비되어 길이 쭉쭉 뻗고 공원이나 광장이 만들어졌지만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고 빈 땅이 많았다. 그런데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내 집 마련의 부동산 붐으로 허허벌판이었던 공원이나 광장 주변에 여유 공간 없이 빽빽이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주택가의 어지간한 공터는 사라지면서 이때부터 ‘광창우’의 소음문제가 대두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1990년대 중반부터 국유기업의 구조 조정으로 대거 퇴직(退休)을 당한 50대의 젊은 할머니들이 ‘광창우’에 합세하였다. 그들은 주로 저녁 식사를 끝낸 후 화려한 유니폼까지 갖추어 입고 춤을 춘다. 중국에서는 광장에 나온 활기 찬 50대를 ‘광창우 따마(大媽)’라고 부르고, 외지(外紙)에서는 ‘춤추는 할머니(dancing grannies)'로 소개하고 있다.
따마들은 1960-70년대 문화혁명 시 홍위병 경험에서 집체주의에 익숙하여 ‘광창우’에 일종의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홍위병들은 매일 광장에 모여 확성기를 크게 틀어 놓고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沒有共産党, 就沒有新中國)!”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오쩌둥(毛澤東)을 찬양하였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활기 찬 50대 따마들이 앞으로 증권계와 부동산계의 큰 손, 해외관광의 큰손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들의 장롱예금이 중국경제에 영향을 주고 있어 마치 과거 일본의 ‘와타나베 부인’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광창우’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청력이 쇠퇴한 어르신들이고 ‘따마’들은 소리가 커야 흥이 난다고 우정 음향기의 볼륨을 높이고 있어 주택가의 소음공해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특히 입시생을 가진 부모들에게는 참기 어렵다. 주민들은 여러 차례 민원을 제기하였지만 당국이라도 20-30년 계속되어 온 ‘광창우’를 쉽게 중단 시킬 수는 없었다.
그간 경제성장에 집중하느라고 노인복지시설이 제대로 없는 중국에서 중노년들에게 아침저녁으로 광장에 나와 춤추는 것까지 막을 수가 없었다. 중국정부는 ‘광창우’를 사회주의 중국의 집단문화로 긍정적으로 보고 소음문제 대책에 소홀히 하였다.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1년 여 전 베이징에서는 소음을 참지 못한 한 남자가 공중에 향해 엽총을 쏘고 맹견을 풀어 광장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혼비백산 시켰다. 그리고 어느 지방도시에서는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물을 뿌리거나 고성능 확성기로 음향대포(경고음)를 쏜 사건도 있었다. 그 이후도 수많은 민원과 함께 비슷한 사건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과거에는 도시라도 농촌에서 올라온 지 오래지 않아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여 집집마다 서로 아는 사이라 대 놓고 불만을 터트리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급속한 도시화로 전국 곳곳에서 올라 와 서로 잘 모르는 주민이 많고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옛날의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래된다.
지방도시에 따라서는 저녁 9시부터 오전 7시까지 주택가에 소음을 내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리는 특별 조례를 만들어 사실상 ‘광창우‘를 금지시키고 있다. 따마들도 스스로 같은 시간대에는 소음(噪)을 내지 않겠다고 “자오인(噪音)No (no noise)"라는 피켓을 들고 캠페인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간의 분쟁이 심각해지자 국민 오락 스포츠를 담당하는 국가 체육총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신도시를 중심으로 아침저녁 운동만을 유도하기 위해 고정 운동시설 설치, 춤을 규격화하고 장소를 한정, 음악의 소리(데시벨)를 낮추거나 이어폰의 보급 등 여러 가지 방안을 만들어 시행에 나서고 있지만 ‘광창우 따마’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주민들의 소음문제도 있지만 ‘광창우’는 이제 13억 중국인의 대표적인 놀이문화로 정착되고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는 좋은 관광 포인트(景点)가 되고 있다. 그리고 해외여행을 즐기는 ‘광창우 따마’들은 시간과 장소가 있는 한 여행지에서도 함께 모여 춤을 춰, 현지인의 호불호에 관계없이 중국의 ‘광창우’는 세계적인 뉴스가 되고 있다.
아직도 1인당 7000미불 남짓하는 중국이 이미 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부유하기 전에 고령화 현상(未富先老)에 부담이 되고 있는 중국에서 ‘광창우’는 큰 예산지출을 없이 중노년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중노년들을 ‘광창우’에서 쫓아내서는 안 된다. 중국의 경제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한 그들에게 은퇴 후 운동도 하고 팍팍한 생활의 스트레스를 풀면서, 친구들을 만나 친교도 다지는 ‘광창우‘가 유일한 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04.14 정동(貞洞)의 공사관거리와 ‘신조선책략’
피습의 상처에서 회복중인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금년 초 서울에서 태어난 아들 세준이를 위한 한국식 백일잔치를 준비한다고 한다. 132년 전 미국의 푸트 공사가 구입하여 정동을 ‘공사관거리’로 만든 미국의 옛 공사관(지금의 대사관저)에서 세준이의 백일잔치가 열리게 되었다.
188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의 조선 진출이 강화되자 종주국인 청국은 위협을 느끼게 된다. 청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열강과도 수교하도록 조선에 권한다.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은 외교 경험이 없는 조선을 위해 독일인 묄렌도르프(1848-1901)를 외교 고문으로 파견하였다.
1882년 5월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가장 먼저 체결하였다. 이듬 해 1883년 5월 변호사 출신으로 칠레의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에서 총영사를 역임한 푸트(L.H. Foote 1826-1913)가 초대 미국의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한다. 당시 미국이 대부분 국가에 영사를 파견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조선에 중국이나 일본과 동급의 최고위 외교관을 파견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푸트 공사는 외국인을 위한 숙소가 전혀 없던 서울(漢城)에서 당분간 묄렌도르프 집에 기거하면서 공사관 자리를 물색하였다. 당시 서울 도성 내에는 외교 공관이 없었다. 조선은 외국 공사관으로서는 1880년 서대문(敦義門)밖의 청수장에 처음으로 일본공사관 설치를 인정하였지만 도성 내에는 불허하였다. 그러나 푸트 공사에게는 처음으로 도성 내 공사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푸트 공사는 공사관에 적합한 입지를 갖춘 지역을 찾아보았다. 공사관의 업무는 예나 지금이나 유사시 주재국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신속하게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로는 안전한 곳이란 가장 가까운 항구에 정박 중인 자국의 함대에 승선시키는 것이었다.
청국의 수도 베이징의 가장 가까운 항구는 텐진(天津)이고 서울의 경우 제물포(인천)이다. 당시 베이징에서 외국의 공사관들이 몰려 있는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는 동교민항(東交民巷 뚱자오민샹)이었다. 동교민항은 본래 동강미항(東江米巷)으로 불리던 곳으로 중국 남쪽의 곡물이 운하를 통해 텐진을 경우 베이징 까지 운반된 남량북운(南糧北運)의 터미널이었다.
푸트 공사는 도성 내에서 제물포와 가까운 서대문 근처를 물색하였다. 이는 유사시에 서대문을 빠져 나와 마포에서 배를 타고 베이징-텐진 사이의 운하 같은 한강의 물길을 따라 내려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푸트 공사는 서대문에서 서소문(昭義門)사이의 남북으로 둘러 처진 성벽 안쪽의 배(梨)밭을 끼고 북으로는 동서로 뻗은 꽤 높은 야산의 언덕 남향 골짜기가 마음에 들었다. 인근에는 한 때 왕궁으로 쓰였지만 당시는 사용되지 않은 경운궁(慶運宮)이 있는 곳이다. 지금의 정동 일대이다. 푸트 공사는 이곳의 전통 한옥과 주변의 땅을 사들였다. 명성황후의 친척인 강원도 관찰사 민치상의 아들 민계호의 사저였다.
정동은 본래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神德)왕후의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부인이자 참모며 비서였던 신덕왕후 강(康)씨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함경도의 무장출신으로 입신한 이성계는 수도 개성(開城)의 정치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신진 사대부 정몽주 정도전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은 이성계를 이용할 뿐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이 때 이성계가 강씨를 만났다. 대대로 개성에서 벼슬을 한 양가집 규수인 강씨는 야심이 있는 여자였다. 이성계를 망해가는 고려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인물로 보았다. 21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둘은 결혼한다. 첫 부인 한(韓)씨가 고향을 지키는 향처(鄕妻)라면, 강씨는 이성계의 서울(開城)에서의 정치활동을 도우는 경처(京妻)였다.
강씨는 이성계를 통해 조선왕조의 건국에 성공함으로써 자신은 조선왕조의 첫 왕비가 되고 아들(방석)은 왕세자가 되었다. 강씨는 자신의 꿈은 이루었으나 한참 나이인 40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조선왕조 초기의 대혼란의 시발점이 된 ‘왕자의 난’은 강씨가 죽은 후에 일어 난 일이다.
태조 이성계는 강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정릉(貞陵)을 조성했다. 지금 영국 대사관이 소재하는 정동 4번지이다. 그리고 인근에 흥천사를 지어 강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태종 이방원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킨 후 정릉을 파괴하고 이전하는 일이었다. 지금의 성북동 정릉이 새로 옮긴 정릉이다.
푸트 공사가 정동에 공사관을 개설하면서 미국의 교회(장로교 및 감리교)가 들어섰다. 그리고 영국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공사관이 개설되었다. 정동이 조계지처럼 외국인 거리가 되고 손탁 호텔 등 외국인 전용 호텔도 신축되었다. 미국정부는 다른 나라와 달리 푸트 공사가 구입한 공사관의 한옥을 유지하고 서양식으로 새로운 건물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조선 왕조시대 정동의 본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지금의 미국 대사관저와 주변의 수림이라고 한다.
공사관 초기에 푸트 공사와 함께 근무한 사람은 의사인 알렌과 포크 무관이다. 두 사람 모두 당대 정권의 최고 실세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의 특별한 관계가 관심을 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일족으로 민씨 외척정권의 중심인물이었다.
미국과 수교한 조선은 미국 정부가 서울에 푸트 공사를 파견 신임장을 제정하자 2개월 후인 1883년 7월, 약관 23세의 민영익을 전권대신(正使)으로 하는 보빙사(報聘使 답례사절)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미국 대통령 아서(C.A. Arthur)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서였다. 민영익 일행은 한국어(조선어)-중국어-영어, 한국어-일본어-영어 등 이중 통역을 위해 중국인 우리탕(吳禮堂)과 일본인 미야오카(宮岡)도 수행시켰으나 한국어와 영어를 바로 통역하는 사람이 없고 수행원들이 서양 예절을 몰라 불편하였다.
워싱턴에 도착하자 미 국무성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미국인을 급히 찾았다. 그 때 해군성에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포크(G.C. Foulk 1856-1893)소위가 중국어 일본어와 함께 한국어를 잘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무성은 포크 소위를 통역 겸 안내인으로 임명하였다.
포크 소위는 민영익 일행에게 언어뿐만이 아니고 미국 및 서양의 문화며 예절 등도 소상하게 알려주어 민영익의 호감을 얻었다. 민영익은 다음 행선지 유럽에서도 포크의 통역과 안내가 필요해 하자 미 국무성은 포크를 보빙사 일행을 계속 수행토록 하고 수행이 끝난 후에는 조선 주재 무관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발령을 냈다. 보빙사 일행은 포크 무관과 함께 유럽과 이집트 인도 홍콩 나가사키 등을 거친 뒤 1884년 5월 귀국한다.
알렌(H.N. Allen 1858-1932) 박사는 민영익의 생명의 은인으로 유명하다. 보빙사가 귀국한 그 해 12월 조선정부 내에 정변이 일어난다. 갑신정변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가 우정국 신청사 낙성을 축하하는 외교 행사장에서 수구파인 민(閔)씨 일족을 암살한 사건이다. 행사장에는 푸트 공사와 묄렌도르프도 참석하였다.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맞아 쓰러지자 묄렌도르프가 인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푸트 공사와 협의 알렌 박사를 급히 불렀다. 알렌 박사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3개월 전에 서울에 온 미국 공사관 소속의 무급의사였다.
민영익은 알렌 박사의 수술 등 외과치료로 생명을 구하고 3개월 후에 회복하였다. 외과치료가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알렌 박사에게 서양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설립을 지원하고 개신교에 대해 자유로운 선교의 길을 터 주었다.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등 선교사들이 대거 조선으로 올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 초기 선교사들이 미국 공사관 인근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 대사관저가 있는 정동이 선교사의 거리로도 불리어 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조선왕조 초기 신덕왕후의 비극이 서린 정동이 조선왕조 말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푸트 공사가 이곳을 공사관 자리로 잡았기 때문이다. 푸트 공사의 선택이 정동을 공사관 및 선교사 거리로 만들었다.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불리어진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을 보낸 후 1897년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한 것도 정동이 공사관 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정동의 공사관거리는 동아시아에서 열강의 권력투쟁과 세력전이(power transition)로 오래 가지 못했다. 1905년 11월 정동의 중명전(重明殿)에서 체결된 일본과의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는다. 정동의 공사관들은 모두 문을 닫고 철수한다. 정동에서 시작한 공사관거리는 정동에서 끝을 맺은 셈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다시 동아시아에서 세력전이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30여 년 전 청국의 외교관 황준센(黃遵憲)은 ‘조선책략’에서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생존을 위해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의 전략을 제시하였지만 조선은 러시아가 아니고 일본에 의해 나라를 잃었다. 21세기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한국은 맹미(盟美) 연중(聯中) 용일(用日)의 ‘신조선책략’으로 지정학적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전문가도 있다.
리퍼트 대사는 최근 한국 정부가 중국에 경사되었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미국은 한중(韓中)이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한미, 한중 관계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동북아 이슈 등 주요사항에 대해 한미(韓美) 양국 정부는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어려운 시기에 리퍼트 같은 용기 있는 대사가 주한 대사여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피습 이후 한국인들의 성원이 한미관계의 지표로 본다는 리퍼트 대사의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제임스 윌리암 세준 리퍼트’의 백일을 축하한다.
04.20 뚝섬에서 만난 치우왕(蚩尤王)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의 통치이념은 중화민족의 부흥 즉 중국의 꿈(中國夢)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몽과 함께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 헌원(軒轅)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신화의 영역에 속했던 황제 헌원의 이야기를 고고학의 발달을 근거로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 같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우월적인 중화민족(華)과 그렇지 못한 주변민족(夷)간의 이른바 화이(華夷)를 엄격히 구분하는 화이질서(華夷秩序)를 구축하였다. 그 구분을 지어 준 영웅이 황제 헌원으로 보고 있다.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북쪽으로 300km 정도 가면 황제릉(黃帝陵)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에는 “황제께서 천명으로 나라를 세우시고 추악한 치우(蚩尤)를 주살하시어 화(華)와 이(夷)를 구분지어셨다” 라는 문구가 있다. 매년 황제릉을 찾아 참배하는 국내외의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지 모른다.
사마천(司馬天)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중국 고대에는 2차례 문명의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동양문명의 맹주를 놓고 벌린 치열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잔혹성을 묘사하여 “들판에는 피가 백리나 흘렀고 병장기가 핏물에 둥둥 떠 다녔다”는 과장된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 훤원은 2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중국의 초대 천자(天子)로서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허베이성(河北省)과 랴오닝성(遼寧省)의 경계에 위치하는 장자커우(張家口) 인근의 반취안(阪泉 판천)에 일어난 반취안 전쟁은 황제 헌원(軒轅)이 이끄는 중화민족이 복희 여와 염제(신농)으로 이어지는 고대 삼황 부족과의 전쟁이었다. 황제 훤원은 화이(華夷) 혼합 민족을 이끌고 있는 삼황부족의 최후의 왕인 염제와 반취안 전쟁을 통하여 승리한다.
삼황부족을 제압한 황제 헌원의 마지막 라이발은 산동성의 동이(東夷)족을 통솔하는 치우였다. 치우는 삼황부족의 잔존 민족과 구려족(九黎族) 등 80여개의 변방 민족을 결속시켜 세력을 과시하였다. 장소는 반취안 인근의 줘루(탁록 涿鹿) 지방이다.
황제 헌원은 줘루전쟁에서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막강한 치우세력을 격파하였다. 치우 세력이 패배하자 구려족이 분산되어 남방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묘(苗)족 려(黎)족 등이 되었고 치우의 세 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 중 한 아들이 동북으로 달아나 지금 한반도인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줘루 전쟁에서 치우는 망했지만 싸움을 잘하는 치우에 대한 숭배가 대단하여 진시황은 치우의 사당을 만들었고 유방도 항우와 싸우기 전에 반드시 치우에게 무공을 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치우왕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그가 동이족으로 분류되어 단군의 선조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한반도에서도 치우왕을 전쟁의 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무장들은 출진하기 전에 반드시 치우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도 치우사당에서 제사지낸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 한반도에는 치우사당이 많았다. 서울에서 치우왕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 성수동에 있는 뚝섬이다. 뚝섬은 본래 한강과 중량천에 둘러싸인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일시 섬이 되는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무장 출신이라 새로 도읍을 정한 한양에 사냥터가 필요했다. 그는 지금의 뚝섬에 치우사당을 지어놓고 치우왕을 상징하는 치우기(纛旗 독기)로 치우사당을 표시하였다. 독기에는 검은 쇠꼬리나 꿩 꼭지 털로 만든 장식물을 달았다고 한다. 뚝섬은 본래 독기가 있는 섬을 의미하는 독도(纛島)가 뚝도 뚝섬으로 변형되었다. 지금의 뚝섬은 치우사당이 있는 섬이라는 의미이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대 조선왕조의 왕들은 이곳을 사냥터로 정해 놓고 신하들이 활을 쏘게 하고 직접사열을 하여 무예를 연마했다. ‘화살곶이벌’ ‘살곶이(箭串)벌’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이곳 사냥터에서 나왔다. 이러한 전통으로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은 뚝섬에 나와 사냥을 겸하여 무예를 익히고 갑옷차림으로 치우사당에 치우제(纛神祭 독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홍수로 유실되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의 치우사당에는 치우왕이 황제 헌원이 싸웠던 ‘탁록 전투도’가 걸려 있었다. 치우왕은 전쟁에 패배하여 천하의 맹주가 되지 못했지만 황제 헌원의 후손인 중화민족을 제외한 주변의 소수 민족 즉 동북아시아 지역의 여러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에서 치우왕의 스토리가 남아 있는 뚝섬에 치우사당을 복원하고 내친 김에 황제릉과 같은 ‘치우릉(蚩尤陵)’을 조성한다면 어떨까. 중화민족 이외의 치우왕 후손들인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치우사당에는 황제와 치우의 대전인 ‘탁록전투도’를 그려 놓으면 요우커(遊客)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자녀들에게는 광활한 중국을 무대로 천하를 다투어 싸운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상상력을 키워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줘루(탁록)전쟁의 최종 승리자인 황제 헌원은 자신을 포함 후손인 전욱, 곡, 요, 순 등 5제 시대를 연다. 마지막 순(舜)임금의 신하 중에 우(禹)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하 치수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도 돌보지 않고 양서류처럼 항상 물과 가까이 하면서 치수사업을 성공시킨다. 후에 순임금의 천거로 왕이 된 우는 새로운 국가 하(夏)를 창건한다. 중화민족 최초의 국가로 기원전 2070년경이다.
중국은 중국몽의 장기포석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내 세우고 있다. 육지와 해양의 신 실크로드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둔화되고 있는 경제성장을 밖에서 끌어 오겠다는 발상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금융지원을 위해 57개국을 창립회원국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한다. 중화민족(華)이 주변민족(夷)과 협력 동반성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중국몽은 황제와 치우왕의 구분을 통하여 화이질서를 강조했지만 새로운 중국몽은 황제와 치우왕 후손들의 화이공영(華夷共嬴 윈.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04.28 중국의 반부패 정책과 사자견(獅子犬)의 운명
시진핑 중국의 국가주석이 이끄는 반부패 드라이브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지난 주 상하이의 모터쇼에서 자동차를 선전하는 미녀들이 사라졌다. 미녀들도 부패와 관련이 있다고 본 것 같다. 중국의 골프장도 텅텅 비었다. 주중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라운딩하는 골퍼가 잘 보이지 않는다. 신 중국 건국 직후 골프는 ‘금지된 놀이(forbidden game)’로 배척되어, 골프장이 동물원이나 어린이공원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의 중국 분위기가 당시를 상기시킨다고 한다.
최근 중국을 다녀 온 지인에 의하면 베이징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짱아오(藏獒 Tibetan mastiff)로 불리는 덩치가 큰 사자견(獅子犬)이 상상할 수 없는 헐값 매물로 나와 있으나, 누구 하나 거들 떠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억 원 씩 하는 짱아오는 부(富)의 상징으로 고급 선물로 활용되었으나 지금은 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짱아오의 멸종이 우려된다.
짱아오는 신라의 김교각(金喬覺 697-794) 스님이 중국으로 갈 때 수호견으로 데리고 간 신라 사자견의 일종이다.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에 있는 중국 4대 불교성지인 주화산(九華山)에는 지장보살로 숭앙받고 있는 신라의 성덕왕의 왕자 김교각 스님의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그곳의 기록에는 김교각 스님이 719년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바다 건너 중국으로 올 때 자신을 보호해 줄 사자견(神犬)과 함께 왔다고 전한다.(新羅國王子爲求正法携神犬渡海來唐)
사자견은 그 얼굴 모습과 사자를 닮은 우람한 덩치로 부쳐진 이름이지만 본래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양떼를 지켜주는 목양견(牧羊犬 sheep dog)이었다. 사자처럼 털이 많고 갈기가 있는 사자견이 중국과 한국에서 악귀를 쫓는 길상의 동물로 취급되는 것을 불교의 전래와 함께였다고 한다.
불경에는 사자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도에서는 사자가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사람 가운데 으뜸(人中獅子)으로 동물 중에 으뜸(獸中王)인 사자에 비유된다.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의 포효에 비유하여 사자후(獅子吼)라고 하고, 부처님의 걸음을 사자보(獅子步), 부처님이 앉은 곳을 사자좌(獅子座)로 부르고 있다.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기운으로 번뇌를 없애고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의 국기(Lion flag)에 사자가 그려져 있다. 인구의 74%인 싱할라족은 스스로 사자의 자손이라고 한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는 불교를 보급시킨 아소카왕 석주(石柱)의 사자상이 국장(emblem)으로 되어 있다.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면 호랑이는 맹수의 왕이라고 한다. 사자와 호랑이는 모두 고양잇과의 동물로 먼 사촌간이다. 그러나 사자의 서식지는 초원이고 호랑이는 산림이므로 서로 만나 싸울 일은 없다. 호기심 많은 고대 로마 사람들은 사자와 호랑이를 1:1로 싸우게 하였다.
사자보다 몸집이 더 큰 호랑이는 단독으로 공격하지만 사자는 무리지어 공격한다. 1:1 싸움의 경우 호랑이의 빠른 공격과 체중을 실은 강한 앞발차기에 사자가 수세에 몰린다. 호랑이를 타이거(tiger)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화살’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호랑이가 사냥할 때 그 빠름이 화살 같다고 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승자는 호랑이였다.
과천 서울동물원의 사자 사육사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속의 사자 중에는 반드시 우두머리가 있어 위계질서가 분명하다고 한다. 사자를 백수의 왕으로 보는 것은 무리지어 움직이는 사자 속의 우두머리는 신하를 거느리듯 왕다운 모습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대 국가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사자가 인용되기도 하였다. 고대 인도에서 사자가 수호수(守護獸)로서 인정받아 불상의 좌우에 사자상이 놓여 있는 곳이 많고 이집트의 스핑크스도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불교가 수호수 사자와 함께 중국으로 전래되었지만 중국에는 사자가 살지 않았다. 중국의 12지(十二支) 동물에는 사자가 없다. 아프리카의 초원이외에 아시아대륙에서 사자가 서식하는 곳은 페르시아(이란) 등 중동지방과 인도이다. 중국에서 사자라는 말도 페르시아어 ‘서(Shir)’에서 음역한 ‘스(Shih 獅)‘였다. 단음절 ’스(獅)‘를 보조하기 위해 접미사 ’즈(子)‘와 함께 ‘스즈(獅子)’라는 단어가 탄생하였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사자’ 또는 ‘시시’로 같은 글자(獅子)에 발음만 다르다.
불교에서 부처님을 보호하는 사자의 전설이 중국과 한반도에 전래되었으나 실제 사자가 없어 사자를 닮은 북방 유목민의 사자견이 인기를 차지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사자견이 보이고 신라의 사자견은 불교와 함께 고구려에서 전래되었다고 본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귀족들은 반드시 호신용으로 사자견을 데리고 다녔다. 왕자인 김교각 스님도 중국으로 건너 갈 때 자신의 사자견을 데리고 갔을 것이다. 중국의 기록에는 김교각 스님이 사자견을 타고 이동하였다고 하니 신견(神犬)으로 표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본의 쇼토쿠(聖德) 태자의 스승인 고구려 혜자(慧慈)스님이 일본에 가져 온 사자견이 고마이누(高麗犬)가 되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렀기 때문에 고마(고려)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도 고마이누는 점차 멸종되고 지금은 벽사수복(闢邪守福)의 석상만 남아 있다.
중국의 석사자상과 일본의 고마이누 석상은 암수 한 쌍이다. 오른편(右)에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숫컷이다.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쉬는(inhale) 모습으로 진언(眞言)을 알린다고 한다. 왼편(左)에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암컷이다. 입을 닫고 코로 숨을 내쉬는(exhale) 모습으로 열반(涅槃)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반도의 사자견은 삼국의 멸망으로 귀족사회의 붕괴와 함께 점차 개체수가 줄어든다. 임진왜란 등 전쟁을 겪고 일제 강점시대 에 군용으로 징발되어 거의 멸종되었다고 한다. 지금 경북 지방에는 리틀 사자견인 삽살개가 복원 보호되고 있다. 삽살개는 체구가 사자견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얼굴 모습에서 원래 사자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삽살의 어원도 살(煞 악귀)를 쫒아낸다(唼)는 의미가 있다.
신라의 절이나 왕릉에는 사자의 석상을 수호신으로서 탑을 받치게 하거나 왕릉의 입구에 두었다. 기와에도 사자의 얼굴 모습을 조각하여 집을 지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귀면와(鬼面瓦)는 사자의 얼굴로 악귀를 쫓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중국에도 사자상이 많이 남아 있다. 자금성을 지키는 천안문의 사자상 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쓰허위안(四合院)이나 큰 건물의 정문에는 반드시 수문장처럼 석사자상이 놓여 있다. 암수 한 쌍의 돌사자는 집을 지켜주는 수호사자(guardian lion)이므로 중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좌측은 암사자로 새끼를 감싸고 있고 우측은 숫사자로 공(球)을 희롱하고 있다.
오래 전에 중국에서 일본의 도요타(豊田) 자동차가 판매되면서 자동차 광고가 나왔다. 광고를 본 중국인이 크게 분노하여 도요타 자동차회사에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광고 속에 도요타 자동차가 달리고 중국의 돌사자가 이에 경례를 하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를 이해 못한 황당한 광고였던 것이다.
사자상을 비교해 보면 인도의 사자상은 실제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중국의 사자상은 목에 방울로 장식되어 있는 등 실제 사자보다 사자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실제 사자를 본 적이 없는 어린이들에게는 구분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몇 년 전 중국의 어느 중소 도시의 동물원에서 일어 난 일이다. 그 동물원의 사자가 문제가 있어 사자우리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자를 구해 와야 하는 데 방법이 없어 사자 대신에 사자견을 우리에 넣어 어린이들을 속였다는 기사가 있었다.
지난 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은 일본의 아베총리를 여유로운 얼굴로 맞이하면서 중일정상회담을 이끌었다. 불과 5개월 전 무표정으로 아베총리를 맞이하는 모습과는 딴 판이었다. 철저한 반부패 정책으로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권력기반이 공고해진 시 주석의 자신감의 표현으로 분석하고 있다.
중국의 반부패 드라이브 정책으로 제주도 카지노 업계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계속 될 중국의 반부패 드라이브 현실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 둘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애물단지가 된 짱아오를 선진기술을 가진 우리가 사육하여 멸종을 막는다면 한중협력사업에도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들린다. 김교각 스님이 데리고 간 신라 사자견의 1300년만의 귀향(歸鄕)이 이루어 질 수 있을지 모른다.
05.01‘나비부인’과 나가사키 짬뽕
최근 몇 년간 한일 관계가 안 좋다고 하지만 일본을 찾는 한국인이 꾸준히 늘고 있다. 2015년도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이 400 만 명인데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은 그 절반도 안 되는 180만에 그쳤다. 한일 양국의 인구를 고려하면 한국인의 일본 방문이 압도적으로 많은 셈이다.
어쩐지 주변에 일본 규슈에 다녀 온 사람이 부쩍 늘었다. 무엇이 한국 사람들을 끌어당기는가. 나가사키를 다녀 온 어느 지인은 비싸지 않으면서 깔끔하고 맛있는 음식과 많은 볼거리에 만족한다고 하였다.
2차 대전 시 히로시마와 함께 원폭이 투하된 도시라 하지만 활기에 차 있고 특히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나비부인(蝶蝶夫人 Madama Butterfly)’이 살던 글로바 정원을 가 본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오래 전 일본에 근무할 때 나가사키의 글로바 정원을 다녀 온 기억이 난다. 글로바 정원은 스콧트랜드 출신의 무역상 토마스 글로바( Thomas Glover 1838-1911)의 저택이다. 글로바는 1859년 나가사키가 조약항(treaty port)으로 개항되면서 이곳에 자리 잡아 일본의 비단 수입부터 총기류 판매까지 무엇이든지 거래하였다.
언젠가 일본 친구로부터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明治)유신의 성공은 글로바 무역상이 나가사키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250 여 년간 일본을 지배해 온 에도막부(江戶幕府)를 무너뜨리고 왕정(메이지 천황)을 복고시킨 것은 서(西)일본의 젊은 지사들이 막강한 도쿠가와(德川) 막부군에 대항 무력으로 싸워 이겼기에 가능하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인 젊은 지사들에게는 글로바 무역상으로부터 비밀리 구입한 신무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1860년대의 미국은 남북전쟁 중이었다. 미국의 무기제조업체들은 남북전쟁이 오래 갈 줄로 예상하고 많은 신무기를 만들어 두었다. 장전된 총알을 연발로 쏠 수 있는 윈체스타 연발총이 당시의 신무기였다.
생각보다 빨리 남북전쟁이 종결되자 무기상들은 넘치는 재고 처리를 위해 동아시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일본의 내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글로바 저택에 가보면 무기구입 협상의 현장을 보존해 놓아 당시를 상황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에 도움을 준 글로바는 죽고 그의 일본 부인과 사이의 혼혈 아들 글로바 도미사부로(倉場富三郞)가 글로바 무역회사를 이어받았다.
근대화의 우등생인 일본이 군국주의로 변신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침략하자 영미(英美)와 전쟁이 불가피 하였다. 군국 일본에게는 영국계의 글로바 회사가 눈의 가시였다. 특히 나가사키 항을 굽어보는 글로바 저택이 문제였다.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비밀리에 전함 무사시노(武藏)를 건조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전함 건조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도미사부로를 스파이 명목을 걸어 그의 저택에서 쫓아냈다. 그 후 도미사부로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연합군을 배신하고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섰다. 일본의 패전은 글로바 도미사부로를 전범으로 처리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도미사부로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전범으로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목메어 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도미사부로는 나가사키 외국인 묘지의 아버지 토마스 옆에 묻혔다.
‘나비부인’의 원작자인 미국인 존 롱( John Long)은 나가사키에 간 적이 없고 나가사키에 사는 누나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라고 한다. 1904년 이 소설을 오페라로 무대에 올린 푸치니 역시 나가사키에 간적은 없다.
그러나 나가사키에서 가장 전망 좋은 글로바 저택에 나비부인이 미국의 해군장교 핑커튼과 신혼 생활을 한 곳으로 상상되어 글로바 저택을 나비부인의 집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기가 끝난 핑커톤이 미국으로 돌아 가 새로이 결혼하는 등 나비부인도 결국 핑커튼에게 배신을 당한다. 핑커튼에게 크게 실망한 나비부인은 유일한 자식을 남겨 두고 자살로 끝을 맺는다.
높은 언덕위의 글로바 저택은 나가사키의 원폭의 피해를 덜 입었다고 한다. 나가사키는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떨어져 7만 명 이상의 생명이 희생된 곳이다.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의 일차 대상 지역이 아니었다.
‘팻맨(Fat Man)’이라는 원폭을 싣고 괌을 출발한 미국의 B29 폭격기는 야하타(八幡) 제철소를 중심으로 하는 고쿠라(小倉) 등 북(北)규슈의 공업지대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상공에 잔뜩 낀 구름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투하를 포기하고 오키나와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였다는 것이다. 일기가 운명을 바꾼 순간이었다.
나가사키에는 과거 포르튜갈 선교사, 네들란드의 상관이 있어 카스텔라, 덴뿌라가 여기서 발상되는 등 서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과도 인연이 깊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우동(??) 요깡(羊羹) 만주(饅頭) 등 중국의 고유 음식이 불교 전래와 함께 중국(宋)의 스님을 통해 들어 왔다고 한다. 1570년 경 나가사키항의 전체 인구가 3만 정도였을 때 중국인이 1만 명이었다고 하니 나가사키는 일본 속의 중국 도시였다.
나가사키에는 서양식 성당과 함께 중국식 절, 그리고 중국인이 타국에 세운 유일한 공자를 모신 사당 공자묘(孔子廟)도 있다. 또한 나가사키 신치(新地)의 주카가이(中華街)는 일본 3대 차이나 타운의 하나이다.
유명한 나가사키 짬뽕이며 중국식으로 라운드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식사하는 싯포쿠(??)요리도 중국에서 온 것이다. 사각으로 자른 돼지고기를 부드러운 빵 속에 끼워 먹는 일본식 ‘돈포로우(東坡肉)’는 싯포쿠 요리에 빠지지 않는다.
나가사키와 중국(淸)과의 관계에서 종종 나가사키 ‘청국수병사건’이 거론된다. 1886년 7월 청조(淸朝)는 딩위안젠(定遠艦) 등 4척의 최신식 북양함대를 한반도 원산에 출동시켜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하였다. 북양함대는 귀로에 연료보급을 위해 나가사키에 기항하였다.
이 때 북양함대의 선원 500 여명이 허가 없이 나가사키에 상륙하여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아시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북양함대의 수병들은 후진국 일본을 업신여겨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을 모욕한 청국수병사건이 몇 년 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국에게 승리한 동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05.06 오바마, 링컨 그리고 아베(安倍)의 마지막 기회
언젠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린치핀’(linchpin 핵심축)' 미일동맹을 ‘코너스톤(cornerstone 주춧돌)’에 비유한 적이 있다. 2013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 의회 상하 양원합동 연설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일본 총리는 한 번도 이러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린치핀이 코너스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아베 총리의 방미는 달랐다. 박근혜 대통령처럼 상하 양원의 합동 연설을 영어로 하였고 오바마 대통령 내외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일본의 역대 총리 중에 취임 3년이 다 되도록 한국과 정상회담을 못하고 있으며 2013년 12월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미국을 크게 실망시켰던 성적표에 의하면 뜻밖으로 볼 수 있다.
70년 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낸 미국은 일본을 영원히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로 만들 계획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 낙농국가를 만들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군수재벌을 해체하고 일본 내 군수시설은 동남아시아로 보내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세는 미국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중국의 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장제스(蔣介石)에 승리하여 공산 중국을 건국하고,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기습적인 남침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되어 일본 내에서 좌익 공산주의자 활동이 강화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한가하게 일본을 낙농국가로 둘 수 없었다. 1951년 미국은 일본과 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하고 1960년 이를 보완(신미일안보조약), 미일동맹의 실질적 근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78년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방위협력지침(안보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1997년에는 이를 개정, 냉전 해체 후 북한의 핵 위협 등 새로운 안보환경에 대응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상하는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글로벌로 확대하였다.
“힘이나 강압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변경을 시도해 주권과 영토의 일체성을 해치는 행동은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는 미일정상의 공동성명처럼 중국이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에서 예상되는 군사행동이나, 해저자원이 풍부하고 여러 나라와 영유권 분쟁이 되고 있는 남중국해에 모래장성(great wall of sand)을 쌓아 인공섬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미일 공동 대응이 예상된다.
필자는 일본에 근무하면서 일본은 태풍의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겨울이 지나면서 남태평양에서 발달된 태풍이 수없이 올라온다. 태풍이 너무 많아 이름대신에 올라오는 순서대로 번호를 매길 정도다. 그러나 한반도까지 도달하는 태풍은 많지 않다. 대부분 일본 열도의 높은 산에 부딪쳐 깨지고 말기 때문이다. 일본 지도를 보면 일본열도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활처럼 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열도는 한반도로 올라오는 태풍의 방파제(water-typoon breaker)이면서 지정학적으로는 대륙의 세력을 막아주는 태평양의 보루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진과 함께 일본의 최대의 자연재해인 태풍은 카미가제(神風)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외침으로부터 지켜주기도 하였다.
20세기 초 극동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진(南進)은 중국과 인도에 기득권을 가진 영국을 긴장시켰다. 영국은 아프리카 종단정책과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의 네덜란드계 백인 보어인과 두 차례 전쟁( Anglo-Boer War)으로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은 요동반도를 반환케 하여 일본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이해가 일치되어 영국은 영일동맹을 맺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도왔다. 일본은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를 이용 대한제국을 합병(경술국치)한다. 그 후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망하지만 독일제국의 부상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유지한다.
양호우환(養虎憂患)이라고 할까. 1차 세계대전 후 세력이 커진 일본의 대륙(중국) 침략을 우려한 영미 등 해양세력은 일본을 경계하였고 결국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후 소련의 부상과 냉전 그리고 소련이 붕괴되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중국이 부상했다. 덩샤오핑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감추고 은밀히 힘을 기른다)의 원칙을 지켜 주변국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를 거쳐 시진핑(習近平) 주석에 이르러서는 개혁 개방 30년의 성과를 내세워 중국몽(中國夢) 실현을 위한 유소작위(有所作爲 필요할 경우 제 몫의 역할은 한다)의 정책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중국의 부상에 대응 일본과의 동맹 강화가 필요해진 것은 변화된 지정학적인 환경이 만들어 주었다. 일본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정학적 환경만 믿고 잘못된 과거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과거 제국주의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일본은 미일관계만 좋으면 아시아 주변국과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라는 착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 등 아시아 국가와 관계가 좋아야 미국의 진정한 존경을 받고 지속 가능한 신뢰도 끌어 낼 수 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과거사 문제를 조기 극복하여 이 지역에서 존재감을 갖는 것이 미국으로서도 바라는 바일 것이다.
아베 총리의 방미에서 인상적인 것은 링컨 기념관에서 내셔널 몰을 바라보는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 두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링컨 기념관으로 안내한 숨은 메시지가 궁금하다. 링컨 대통령 서거 150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사와 관련 화해와 치유를 촉구하는 링컨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진짜 의도는 이름이 같은 아베(安倍-Abe) 총리가 노예(slave)해방으로 유명한 링컨(에이브-Abe) 대통령을 본받기를 기대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내내 성노예(sex slave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방청석에서 쓸쓸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한마디도 언급도 없었다.
아베 총리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다. 지난 4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와 이번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등 아베 총리에게 주어진 두 번의 기회는 지나갔다. 남은 것은 8월15일의 총리 담화이다. 세간에서는 두 번의 연설에 실망하여 한국 외교의 실패라는 질타성 반응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오는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라는 중요한 외교 무대가 남아 있다. 에드 로이스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도 “이제는 8월의 종전 70주년 기념일이 마지막 기회다” 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1971년의 ‘닉슨 쇼크’ 같은 ‘아베 서프라이즈’를 기대하면서 미워도 다시 한 번 8월의 담화를 지켜보자.
05.12 네팔 대지진과 비렌드라 국왕의 비극
지난 4월25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부터 80km 떨어진 곳에서 진도 7.8의 강력한 대지진으로 카트만두와 인근 농촌의 피해가 엄청나다. 특히 카트만두 어디에서도 보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건축물인 다라하라(빔센)탑이 붕괴되어 처참한 잔해만 보여 주고 있다. 9층 높이의 이 탑은 1834년 완공되어 100년 후인 1934년 대지진에서도 살아남아 탑의 머리에 장식되어 있는 힌두 시바(Shiva)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언론을 통해 카트만두 중심부가 폐허처럼 무너진 것을 보면서 지금부터 30 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연수를 끝낸 후 귀국하여 아주국 서남아과에서 근무하였다. 1981년 여름이었다. 서남아과는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등을 담당하는 지역과이다.
다음 해인 1982년 가을에 아랍에미리트(UAE)로 발령받아 나갔기 때문에 인도와 네팔을 담당한 나의 서남아과 근무는 불과 1년을 좀 넘긴 기간이었다. 서남아과 근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네팔에 대한 것이다. 네팔은 우리나라처럼 자원이 별로 없고 해발 8000m의 고산으로 둘러싸여 한 때 외국인의 입국도 거부했던 은둔자의 나라(hermit kingdom)였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라는 초강대국 사이에 끼여 지정학적 어려움이 많은 것도 우리와 흡사하였다.
에베레스트 산을 포함하여 안나푸르나 마나슬루 등 우리의 귀에도 익은 세계의 10대 최고봉 중 8개가 포함되어 있어 알피니스트의 메카이고 일반인에게도 생애 한번은 꼭 가봐야 하는 동경의 나라였다.
네팔에는 ‘어머니와 모국은 천국보다 위대하다(Mother and motherland are greater than heaven'라는 말이 있다. 천국보다 멋있는 네팔이 지금 지진의 피해가 크고 수많은 사람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파묻혀 목숨을 잃었다. '지진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무너진 건물이 죽인다( Earthquakes do not kill people, buildings do)'라는 지진 전문가의 말이 상기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구호금을 내고 구호 팀을 보내 네팔을 도왔다.
그 중에도 인도와 중국의 구호활동이 눈에 띈다. 보도를 보면 중국의 인민해방군 청뚜(成都)군구 배지를 단 군인들이 구조에 직접 나서고 있고 ‘란텐(藍天)구원대’라는 푸른 제복을 입은 구조대가 내시경 카메라 같은 기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건물 잔해 깊숙이 집어넣어 매몰된 사람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중국은 아시아 인프라 은행(AIIB)을 통한 일대일로(一帶一路 바다와 육지의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이번 대지진으로 파괴된 도로 교량 등 네팔의 인프라 재건을 포함 시킬 것으로 보인다.
인도는 헬리콥터 13대를 동원 의료팀과 구조대를 신속히 보내 구조 활동을 돕고 있다. 네팔에 부족한 헬리콥터는 교통이 마비된 산간지역을 이어주는 효과적 활동하고 있다. 인도는 이번 기회에 왕정 폐지이후 중국에 가까워진 네팔을 역사 종교 문화의 오랜 연관성을 강조 관계개선의 의욕을 보이는 것 같다. 네팔은 인도와 함께 대표적 힌두교 국가이다. 네팔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국과 인도의 지원경쟁을 끌어내는 모습이다.
내가 서남아과에서 근무할 때에는 즉위 10년을 맞이하는 비렌드라(1945-2001) 국왕이 네팔을 통치하고 있었다. 입헌군주제를 선호했던 비렌드라 국왕은 국민으로부터 폭 넓은 지지와 신망을 받고 있었고 대외관계에서도 중국과 인도를 고루 방문 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도 잊지 않았다. 남북한과의 관계에서도 균형을 이루어 한국(1974.5)과 북한(1974.6)과 거의 동시에 수교하였다.
당시 나는 수첩 속에 비렌드라 국왕의 사진과 함께 ‘인도에 항복하는 것보다 국민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 (It's better to surrender to the people rather than surrender to India)'라는 국왕의 글귀도 적어 두었다. 네팔의 처지가 조선왕조 말기에 백성을 무시하고 당쟁을 일삼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와 비슷해 이 말에 끌렸다. 비렌드라 국왕은 영국 이튼 칼레지에서 공부하고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한 개명군주였다.
서남아과에서 비렌드라 국왕을 알게 된 때로부터 꼭 20년이 되는 2001년 6월, 나는 해외 근무를 마치고 다시 외무부 본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때 비렌드라 국왕 가족의 비극적인 뉴스를 접하게 된다. 비렌드라 국왕은 아이슈와라 왕비와 함께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왕세자가 난사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세계 왕조사에 유례가 드문 네팔왕실대학살사건(Nepalese Royal Massacre)이다.
범인인 왕세자 디펜드라(1971-2001)는 내가 처음 서남아과 근무 때는 10살의 애 띈 외모의 소년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디펜드라 왕세자는 30세 나이의 청년이 되었다. 2001년 6월1일 저녁 나라얀히티 왕궁에서는 왕족들의 정례 만찬이 열렸다. 왕세자는 부왕과 어머니 왕비와 언쟁을 하였다. 왕세자가 좋아하여 결혼하고자 하는 여자를 부모가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 집안은 왕비 가문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앞으로 왕비가 될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화가 난 디펜드라 왕세자는 술에 잔득 취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조금 후 나타난 왕세자의 손에는 소총과 기관단총이 쥐어져 있었다. 네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왕세자는 총기에 익숙하다. 그는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라 왕비 그리고 왕자(남동생)와 결혼한 공주(여동생)를 차례로 살해하고 다른 왕족을 5명을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의식 불명상태로 병원으로 이송 되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병상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왕이 되었다가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6월4일 사망한다. 가장 짧은 ‘3일 국왕’이다. 디펜드라 국왕이 죽자 그를 섭정한 삼촌 갸넨드라가 새로운 국왕이 된다. 갸넨드라는 마침 지방출장으로 왕실 만찬에 참석치 않아 생명을 구했다. 왕실대학살 사건에 갸넨드라 가족의 피해가 거의 없어 형인 비렌드라 국왕과 의견이 맞지 않은 갸넨드라의 궁중 쿠데타라는 루머도 있었다.
새로운 왕이 된 갸넨드라는 형과 달리 절대군주제를 지지하여 민주화 의식이 높아진 네팔 국민과 대립하게 된다. 국민들이 갸넨드라 국왕에게 등을 돌리면서 산악과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왕정타파를 내세운 마오이스트(Maoist)와의 내전이 격화되고 국토를 서로 양분할 정도로 반군의 기세가 드높았다.
2006년 4월 갸넨드라 국왕의 독재에 반대하는 시민 궐기로 ‘네팔의 봄(Loktantra Andolan 국왕 없는 민주화 운동)’이 왔다. 국왕 갸넨드라의 정치적 특권이 박탈되면서 10년을 끌었던 내전도 종결되었다. 이어서 2008년 제헌의회에서는 왕정폐지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네팔은 더 이상 왕국이 아니고 공화국(네팔연방민주공화국)이 되었다.
이번 네팔 대지진은 인도판(Indian plate)이 유라시아판(Eurasian plate) 아래에서 밀어 올려 일어났다. 더구나 카트만두 계곡은 수 천만 년 전 호수의 밑바닥 퇴적물이 융기한 지형이라 흔들림이 더 심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예고된 지진인데 미리 대비를 못하고 속절없이 당한 것도 내전에 의한 정국의 불안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날이 휴일(토요일)이라 학교 건물이 무너졌으나 학생들의 희생은 없었다고 한다.
네팔의 국명이 그 곳에 사는 ‘네와르(Newar)’ 민족에서 유래된다고 하지만 히말라야 수호신(神 Ne)의 보호(pal)를 받는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지금 네팔에는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전 세계의 구호의 손길이 닿고 있다. 국내에서는 3만에 가까운 네팔 출신이 살고 있다. 그들과 함께 네팔을 위해 기도하면서 지금까지 여러 악조건에서 '신의 보호(Nepal)'를 믿고 꿋꿋이 살아 온 네팔의 복원력(resiliency)을 믿고 싶다.
05.20 나마스테! 모디 총리님
인도의 북서부 구자라트 지역의 여름은 덥다. 먼지가 펄펄 날리는 시골버스 터미널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더위에 지친 표정이다. 털털 거리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은 터미널 한쪽에서 시원한 차(茶水)를 파는 간이 노점(tea stall)으로 간다. 형제인 소년 두 사람이 연신 얼음에 식힌 차를 잔에 담아 판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기차역에서 차 행상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차 팔아 보아서인지 손님이 원하는 것을 재빨리 알아낸다. 그 중 한 소년이 인도의 총리(Prime minister)가 되어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이다
나렌드라는 인도의 카스트에서 바이샤(평민)계급의 간치(착유업 oil-presser)집안 출신의 6자녀 중 3째이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여 구자라트 주(州) 수상(Chief minister)을 4선이나 하였지만 ‘미스트 크린(Mr. Clean)'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부모가 정해 준 조혼(早婚)에 실패하여 자녀가 없고, 홀어머니는 낡고 작은 아파트에 살며 형제들은 동네 야채가게를 하면서 생활한다.
2014년 5월 만년 야당이었던 인도인민당(BJP)이 30년 만에 단독으로 하원(Lok Sabha)의 과반 의석을 차지 정권을 잡았다. 만모한 싱 총리가 이끄는 인도국민의회(INC)는 부패와 경제정책의 실패로 국민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 ‘모디노믹스(Modinomics)’로 유명한 경제수완가 구자라트 주의 모디 수상이 승리할 수 밖에 없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이 인도에도 통했다. 2013년 미국의 양적완화의 축소로 인도 루피 화의 폭락이 이어졌고 인도 경제는 국제 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해야 할 정도로 나빴다. 구자라트 주 모디 수상이 인도 경제를 살리는 구원투수가 된 것이다.
모디 수상은 영국의 대처총리, 미국의 리간 대통령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주 수상 재임기간(2001-2014)에 구자라트 주 경제성장률을 평균 13.4%로 끌어올려 인도의 전체 평균 성장률의 두 배가 되었다.
모디 수상은 구자라트 주의 제조업 발전을 위해 규제 없는 경제, 기업이 토지 취득을 쉽게 하는 등 친 기업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발전소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확충을 통해 기업투자를 유치하여 높은 경제 성장 달성하는 것이 모디노믹스의 중심이었다.
모디 수상은 구자라트 주의 외자 유치를 위해 아베 총리 등 일본의 정치 지도자, 스즈키 자동차의 스즈키 회장 등 일본의 재계 지도자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한국도 다녀갔다. 이러한 대외활동이 구자라트 주를 인도의 어느 주보다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게 하였다.
인도는 급성장한 경제를 배경으로 군사대국화 하는 중국의 부상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 제2위의 에너지 수입국인 중국은 에너지 확보를 명분으로 홍콩에서 수단까지 해상로 안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른 바 ‘진주목걸이(string of pearls)정책’으로 불리는 홍콩부터 인도양의 주요 항구를 진주목걸이처럼 이어 주는 해상 실크로드의 건설이다.
또한 중국은 시안(西安)에서 티베트 네팔 그리고 파키스탄으로 잇는 육상 실크로드도 준비하고 있다. 인도로서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바다와 육지의 신 실크로드 계획) 정책이 남으로는 해양(一路), 북으로는 대륙(一帶)에서 인도를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친다.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인도가 할 수 있는 것은 경제발전 외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인도 국민은 모디노믹스라는 경제발전의 매직 핸드를 가진 모디 수상을 총리에 앉혀 인도의 구자라트 화(化)를 원했다. 모디 수상이 이끄는 인도인민당 대승의 배경이다.
모디 총리에게는 운(運)도 따랐다. 그가 취임 이후 유가인하 등 세계 경제가 우호적인 환경으로 바뀌어 인도경제가 다시 살아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국제 통화기금은 인도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중국(6.8%)보다 높은 7.5%로 예상하고 있다.
시골 버스 터미널에서 차 행상을 하던 나렌드라는 틈틈이 공부하여 구자라트 대학까지 마쳤다. 어릴 때부터 힌두교 지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민족의용단(RSS)’에 가입하고 후에 인도인민당 당원이 되었다. 전임 인도국민의회의 만모한 싱 총리가 시크교도로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의 박사를 취득한 경력과 비교된다.
모디 총리의 출신지 구자라트 주는 종교적 민족적 색채가 비교적 강하다. 구자라트는 예로부터 중앙아시아 와 페르시아(이란)에서 인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인도의 동북부가 8000 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가로 막혀 있지만 구자라트 주가 소재하는 북서부는 인더스 강이 흐른다. 따라서 인도아대륙으로 들어 가기위해서는 인더스 강이 흐르는 계곡이 유일한 통로였다. 인도라는 국명이 서양에 알려진 것도 인더스 강에 의한 것이다.
7세기 당(唐)의 고승 현장(玄獎)법사가 수도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을 출발 중앙아시아를 돌아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들어 갈 때도 관문인 구자라트를 먼저 찾았다. 현장법사가 귀국 후 기술한 ‘대당서역기’에 구자라트(古古拉特)가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2014년 9월 시진핑(習近平) 중국의 국가 주석이 인도를 방문할 때 뉴델리에 앞서 모디 총리의 고향이며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한 구자라트 주를 먼저 방문하였다. 지난주(5.14-16) 중국을 방문한 모디 총리는 답례로 베이징에 앞서 시안을 먼저 찾았다. 산시성(陝西省)의 시안은 시진핑 주석의 고향이지만 현장법사가 인도를 다녀 온 후 불경 번역을 한 곳이다.
영토문제 등으로 갈등관계의 중국과 인도가 모디 총리 이후 정상 간의 상호 ‘고향외교(家鄕相會)’로 친밀해졌다.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현실주의자인 모디 총리의 중인(中印)양국관계는 ‘인치(英寸)에서 마일(英里)로’ 도약하고 있다고 하고, ‘용상공무(龍象共舞 용과 코끼리의 카플 댄스)’를 하고 있다고도 한다. 모디 총리는 시안에서 현장법사가 가져 온 불경을 번역 보관한 대안탑(大雁塔)을 찾았다. 모디 총리의 고향이 현장법사의 취경지(取經地)라면 시진핑 주석의 고향은 현장법사의 역경지(譯經地)이다. 인도와 중국은 현장법사를 공통분모로 가까운 시일 내 ‘대당(大唐) 현장’이라는 영화를 공동 제작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인구 26억의 친디아(중국과 인도)의 부상이 눈앞에 보인다.
구자라트 주는 반 이슬람과 힌두교 지상주의가 강하다. 이슬람교 국가인 파키스탄과 경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영국의 통치하에는 같은 인도였지만 종교를 중심으로 두 나라로 분리 독립되었다. 따라서 종교적 분쟁이 일어 날수도 있는 곳이다. 2002년 발생한 ‘구자라트 폭동’은 종교 폭동으로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충돌로 알려져 있다. 폭동을 막지 못한 당시 구자라트 주의 모디 수상은 서양 언론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한 때 모디 수상에게 비자 발급마저 거부했다. 그러나 모디 수상이 인도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서양 언론이 친 모디로 전향하고, 모디 총리 취임 후에 미국은 존 케리 국무장관을 파견 인도와의 관계강화를 모색하였다고 한다.
모디 총리 역시 ‘국민과 함께’라는 슬로건으로 과거와 다른 행보를 내 비추었다. 그는 총리가 되자 예상외의 제안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반 이슬람교 힌두교 지상주의자로 여겼던 모디 총리가 자신의 취임식(swearing-in ceremony)에 사리프 파키스탄의 총리를 초대한 것이다. 종교적 화합을 위한 통 큰 제안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 각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어느 한쪽의 총리가 다른 한쪽 총리의 취임식에 초청을 받아 참석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사리프 총리 역시 통 큰 응답으로 취임식 초청을 수락하고 참석하였다.
모디 총리는 이제 경제 지상주의자로 변신하여 글로벌 행보를 주저하지 않는다. 취임 1년 만에 인근 국 부탄과 네팔을 위시하여 미국 중국 일본 등 18개국을 방문했다. 구자라트 주의 경험을 살려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의 기치를 내 걸고 해외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인도를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려는 ‘세일즈 외교’의 일환이다. 모디 총리의 정책이 성공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메이드 인 인디아(Made in India)' 없이는 하루도 보낼 수 없는 날이 올지 모른다. 모디 총리의 임기 내 엄청난 발전을 이룬 인도(Incredible India)가 예상된다.
모디 총리의 이번 방한기간도 절묘하다. 석가 탄신일(5월25일)을 불과 며칠 앞둔 날이다. 모디 총리는 이를 감안해서인지 보리수나무를 선물했다. 기원전 7세기 인도의 보드가야에서 싯다르타 왕자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Buddhahood)이 되어 유명해진 보리수나무(Bodhi tree)의 직계후손이라고 한다.
한인(韓印)정상의 공동성명을 보면 양국은 정상회담을 연례화한다고 한다. 인구 12억 세계 제2위의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는 인도와 ‘특별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된 한국은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예찬했던 21세기의 ‘동방의 등불’이다. 한국은 모디 총리의 ‘동방정책’의 종착역으로 볼 수 있다.
세일즈 외교를 내세운 모디 총리의 이번 첫 방한에서는 공업도시 울산을 방문하지만 다음에는 허왕후(허황옥)가 살았던 김해를 방문하기를 기대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갠지스 강 연안의 아요디아 왕국의 슈리라트나(후에 허왕후)공주가 인도에서 차(茶)종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한국의 차의 기원이다. 어릴 때 차 행상을 한 모디 총리는 김해에서 슈리라트나 공주가 가져 와 보급된 한국의 차를 마시면서 한국과 인도의 2000년 깊은 우정을 느끼기를 바란다.
05.27 유라시아 횡단열차 탑승기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과 대륙횡단 열차여행
광복 70주년을 맞아 부산과 목표에서 KTX로 출발 서울에서 합류하여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으로 이동 유라시아를 횡단, 베를린에 이르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2015’ 운행 행사가 7월14일부터 8월2일까지 실시된다고 한다. 코레일과 함께 이번 행사를 공동 주관하는 외교부는 “이번 친선특급은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구현하기 위한 대표 사업으로 소통협력, 미래창조, 평화화합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18년 전 중국 베이징 대사관에 근무할 때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중국의 베이징(北京)까지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불리는 유라시아 특급을 미리 타 보았다. ‘통일의 꿈’을 안고 달리는 이번 유라시아 친선특급을 탈 많은 사람들을 위해 외람스럽지만 나의 소박한 탑승기를 소개하여 참고가 되도록 하고 싶다.
우리 가족은 열차여행을 좋아한다. 외교관으로 중동지역에 근무할 때 전지 휴가를 얻으면 유로 레일 패스를 사서 가족이 열차여행을 통해 유럽을 둘러보았다. 그 때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열차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여행’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우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여행에 대한 책을 구입하였다. 미국에서 발간된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이러한 말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 본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아직 타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빨리 타 보라는 독촉 메시지로 다가왔다.
대학생 시절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를 좋아했다. 구소련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나르크가 지은 소설로 “지바고”라는 의사를 통해 소련의 공산혁명으로 운명이 희롱당한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었다. 이 소설은 소련에서 출판 못하고 이탈리아에서 출판(1957)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어 그 다음해(1958) 노벨 문학상의 수상작이 되었다. 미국에서 만든 동명(同名)의 영화를 보면 시베리아 행 피난열차를 타고 우랄산맥을 넘어 설원(雪原)을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통해 알게 된 거대한 시베리아 평원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1997년 베이징의 대사관 근무 2년 차 여름휴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휴가를 이용하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지 못한다면 시베리아의 대평원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장녀는 학교 일로 참석 못하여 우리 내외와 장남 등 가족 3인은 편도만 꼬박 일주일 걸린다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를 이용하려는 여행계획에 마음이 설레었다. 평소 얻기 어려운 2주일의 긴 휴가를 얻어 일주일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나머지 일주일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본래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전장 9288 km의 유라시아 횡단철도이다.
대륙횡단철도 부설 경쟁
유럽에서 19세기 중반이 되어 철도 수송이 중요해지자 미국 캐나다 등의 대륙국가가 경쟁적으로 장거리 대륙횡단철도를 부설하고 있었다. 1869년 미국이 가장 먼저 대륙횡단철도를 완공하였고 이어서 1885년 캐나다가 태평양횡단철도를 완성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러시아의 ‘차르(황제)’ 알렉산더 3세는 극동진출을 위해 동맹국인 프랑스의 자본을 빌려 철도 부설을 시작하였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양쪽에서 공사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기공식에는 아시아를 여행 중인 황태자 니콜라이가 참석하고 계속해서 철도부설의 책임자가 되도록 칙유(勅諭)를 내렸다.
당시 23세의 니콜라이 황태자는 황제의 칙유대로 일본 등 아시아를 순방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시베리아 철도부설 기공식에 참석했다. 1891년 5월 19일이었다. 당시 기록 사진을 보면 무슨 일인지 니콜라이 황태자의 머리에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기어 있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피습사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 방문 시 일본의 경호경찰의 칼을 맞아 입은 상처였다. 오쓰(大津)사건으로 전해진 일본 중부 시가현(滋賀縣)의 오쓰에서 비와코(琵琶湖)를 관광하고 있던 니콜라이 황태자를 쓰다(津田)라는 경호경찰이 느닷없이 칼로 내려치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891년 5월 11일 오후였다. 처음 내리 친 칼날이 약간 빗나가자 그 경찰이 두 번 내려칠 때 황태자 수행원이 재빠르게 지팡이로 칼날을 막아 니콜라이 황태자는 목숨을 건졌다. 황태자는 도쿄를 방문 일본천황을 만나는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부설이 25년간의 공사를 끝내고 1916년 10월 전구간이 완공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과 열차 내 식사
우리는 중국 베이징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베이징(莫斯科-北京) 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한번만 이용하기로 하고 베이징에서 모스크바로 갈 때 탈 것이냐 모스크바에서 돌아 올 때 탈 것이냐고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하였다. 일주일동안 열차 안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세끼 식사해결이 문제였다. 열차의 식당 칸이 있지만 메뉴가 한정되어 있고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 분의 식사를 위한 밑반찬은 잔득 준비해야 했다. 베이징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면 일주일 음식을 모두 소진하게 되어 모스크바에 내릴 때 짐이 가벼워진다. 러시아에서의 관광이 간편해 진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의 열차여행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막상 러시아에 도착해서는 피곤해서 돌아다니기가 싫어질 수 있는 우려도 있다. 생각 끝에 짐은 많지만 모스크바 갈 때는 항공기를 이용하고 돌아올 때 열차를 타도록 하여 여행 중의 피로를 집이 있는 베이징에서 풀기로 하였다.
키릴 문자를 익히면 러시아 여행이 즐겁다
항공편으로 모스크바에 도착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7일간 열차여행을 감안 모스크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3일로 나누어 관광하기로 하였다. 우선 러시아어를 표기할 때 사용하는 키릴 문자를 익혔다. 키릴 문자는 페니키아 또는 그리스 문자의 계통의 음소(音素)문자로 33개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단 외워두면 러시아어로 표기된 간판 지하철 역 등을 읽어 낼 수 있다. 마치 한글의 모음 자음 24자를 알아 적의 조합하면 한글을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러시아어를 별도로 공부하지 않은 관광객이라도 키릴 문자를 읽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된다. 러시아어에 우리가 아는 외래어가 많이 들어 있어 읽어 보면 금방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택시 스톱” “메트로” “커피 하우스” 등이 그렇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 보면 책을 통해 알게 된 주요 관광지 지명이 지하철 역명에 나타나 있어 읽을 수 있다면 물어 보지도 않고 알아서 내리게 된다.
크렘린, 바실리성당, 붉은 광장 등 모스크바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고 모스크바에서 650km 떨어진 러시아 고도(古都)이며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할 때는 “붉은 화살”이라는 야간열차를 이용하였다. 우리는 모스크바의 호텔주인에게 베이징에서 가져 온 일주일 분의 식품을 맡기고 떠났다. 어차피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다시 짐을 찾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 된다.
유라시아 횡단열차 탑승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유명한 여름궁전과 과거 러시아의 황제들의 호화로운 수집품이 전시된 에르미타주 국립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 온 우리는 호텔에 들러 짐을 찾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나갔다. 모스크바-베이징의 국제 열차 차표를 미리 구입한 지인이 역으로 나와 주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왕복하는 국제열차는 중국열차와 러시아열차 두 편이 있었다. 당시 치안이 불안한 러시아에서 국제열차 승객을 대상으로 하는 갱단의 사건이 보도되고 있어 안전을 고려하여 중국 열차를 선택했다. 중국에 근무하는 외교관 가족으로서 중국 정부가 발행한 신분증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 문제가 있다면 열차 승무원과 중국어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열차라서 러시아열차와 달리 객실이 동양인의 체격에 맞추어 조금 작지 않을 까 걱정했는데 막상 열차를 타보니 독일제 차량으로 유럽 기준으로 만들어진 안락한 열차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 출발한다. 이 역에서 제정 러시아 시대 시베리아 유형(流刑)길의 사람과 생이별하기도 하고 시베리아 개척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도 한 유서 깊은 역이다. 1940년대 일본의 마스오카(松岡洋右)외상이 소련과 일소(日蘇)중립조약에 사인하고 만족한 표정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야로슬라브스키 역으로 나갔는데 당시 최고 지도자 스탈린이 이례적으로 친히 역까지 나가 배웅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나치 독일의 공격과 제국 일본의 공격을 양쪽에서 받아야 했던 스탈린으로서는 일본과의 중립조약이 더 없이 고마웠던 것이다.
시베리아 열차 내 풍경
우리에게는 아래 위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침대칸 객실(컴파트먼트)이 배정되었다. 쿠페라는 2등 칸이다. 1등 칸은 룩스라 하여 침대가 2개뿐인 호화로운 객실이고 3등 칸은 6인이 쓰는 침대칸도 있다. 우리 가족은 3명이지만 4인용 전체 컴파트먼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한 사람 몫의 침대에는 짐을 끌어 올렸다.
출발시간이 되니 열차는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여름 날 늦은 오후지만 아직 햇살은 강했다. 이윽고 열차는 도시 풍경을 뒤로 했다. 이윽고 차창에 보이는 모습은 모스크바 교외의 주말 별장 “다차”였다.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러시아인의 꿈은 교외에 “다차”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다차”는 러시아어로 “주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황제가 신하에게 농노가 딸린 전원(封土)를 수여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차창에서 비친 “다차”에는 터 밭이 있고 도시 거주 러시아인들이 한가로이 야채를 가꾸는 모습이 평화스럽게 보였다.
모스크바를 떠난 열차가 도중 역에 도착하면 우리와 같은 베이징까지의 승객은 열차에서 내릴 수는 있어도 역 밖으로는 못나간다. 30분 정도 열차가 쉬면서 새로운 승객을 태우고 기름과 물을 넣으면서 필요한 점검을 하는 것 같았다. 저녁시간이 되면 열차 승객도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식당차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역구내로 쏟아져 들어 온 현지의 행상으로부터 빵 과일 야채를 사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도 러시아 루블화 잔돈을 잔뜩 준비하여 빵과 야채를 샀다. 빵은 방금 오븐에서 구워 낸 것 같이 따끈따끈했다. 여름이라 과일도 흔하고 상추 같은 야채가 신선했다.
집사람은 방금 구입한 빵과 야채를 이용 3인분의 샌드위치를 솜씨 좋게 만들어 냈다. 맛이 있었다. 이렇게 7일 동안 매끼 외부에서 가져오는 현지의 식품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은 열차 내에서 공급이 되어 커피 또는 녹차를 마실 수 있었다. 준비해 간 컵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스프처럼 샌드위치와 같이 먹으니 피로가 풀리면서 일품이었다. 때로는 준비해 간 김치 볶음을 먹으면 속이 개운했다. 시계를 보니 자정에 가까웠지만 밖은 계속 낮이다. 이른 바 백야(白夜)현상으로 해가 지지 않는 것 같다. 차창의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몽골의 전설적 영웅 우랄 이야기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책자를 보면서 우리가 어디 쯤 가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우랄 산맥을 언제 쯤 넘을까하고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우랄은 본래 “우랄 바토르” 즉 전설적인 몽골족 영웅(바토르) 우랄에서 연유된다고 한다. 영웅 우랄이 종족을 위해 희생되어 사람들의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무덤에 돌을 쌓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우랄산맥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우랄 산맥은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대륙의 경계로 러시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산맥인데 그 길이가 2000km 정도 된다. 우랄 산맥의 고도는 평균 1000m이나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으로 남부는 비교적 낮고 넓은 구릉상태의 습곡산맥이다. 횡단 열차는 남부 우랄 산맥을 통과할 때 제대로 된 터널 통과 없이 우랄산맥을 구렁이 담 넘듯 서서히 넘어 서(西)시베리아로 향하고 있었다. 지도에서나 느끼는 분계선을 현지에서는 실감할 수 없었다. 열차는 예카테린부르크 역에 도착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처형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니콜라이 2세의 일본과 악연과 로마노프 왕조 멸망
전술한 바와 같이 니콜라이 황태자는 일본 방문 중 크게 부상을 입었으나 예정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철도기공식에 참석한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3년 후 인 1894년 부왕 알렉산더 3세의 급서로 황제 ‘차르’가 된다. 활달하고 야심이 많았던 알렉산더 3세는 한참 나이인 49세 때 신장염으로 급사한다. 26세의 황태자는 전혀 준비 안 된 채로 “되고 싶지 않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되었다. 그의 대관식에는 고종의 시종무관 민영환이 참석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와 달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치를 이해하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을 뿐만이 아니라 외치(外治)에도 소홀히 하여 러일전쟁에 패배한다.
전쟁으로 경제는 피폐되고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어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2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군에 의해 폐위되고 가족 함께 갇히는 몸이 된다. 자신이 기공(起工)하고 건설 감독을 맡았던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공된 지 4개월만이었다.
제정 러시아의 부활을 우려한 혁명군은 황제가족을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예카테린부르크로 이감(移監)시켜 처형하였다. 1918년 7월17일이었다. 당시 50세의 황제와 황후, 4명의 아리따운 공주 그리고 혈우병으로 제국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알렉세이 황태자 등 전 가족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수행원 등 수 십 명도 처형되었다. 처형된 곳이 이파티예브 하우스로 현재 보존되고 있다고 하지만 역에서 내려 가볼 수는 없다. 다만 이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제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라는 생각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고인의 명복을 빌어 보았다. 황태자 시절 일본과의 악연으로 일본에서 황당한 부상을 입고 다시 일본과의 전쟁에서 국력을 소모하여 공산 혁명의 명분을 주어 결국 1613년부터 이어져 온 300년의 로마노프 왕조가 문을 닫게 만든 장본인이다.
또 하나의 버킷 리스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열정이 있는 로맨틱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는 일주일 동안 샤워도 제대로 못하고 음식도 불편한 이 열차를 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웃 칸의 사람들과도 뭔가 인생의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의 하나를 해낸다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 쉽게 친해졌다. 우리 바로 옆 칸에는 벨기에 교수가 타고 있었다. 그는 일생의 꿈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것이었다면서 마치 꿈이 이루어진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베이징에 국제회의가 있어 부부동반 초청을 받게 되었는데 부인은 열차여행을 싫어하여 항공편을 이용하고 자신은 조금 일찍 출발 모스크바로 날라 와서 이 열차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마치 아파트의 이웃처럼 초대하고 초대 받기도하면서 각자 가져온 비상식량을 나누어 먹고 유라시아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민족의 고향 바이칼 호 와 데카브리스트가 만든 도시
며칠이 지났다. 열차가 멈춘 곳은 이르쿠츠크란 도시이다. 시베리아의 대표적 유형자(流刑者) 도시로 한때 시민의 두 사람 중 한사람은 유형자 출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2월 혁명당이라는 의미의 데카브리스트들은 모두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 그들은 유럽 시민혁명의 영향을 받은 젊은 장교를 중심으로 하는 인텔리들로서 니콜라이 2세의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의 절대 왕정에 항거하여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1825년 12월이었다. 혁명에 실패하여 유배되었지만 그들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상적인 유럽 문화 수준의 도시를 만들었다.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이곳에서 세계 최대의 깨끗한 담수 호수 바이칼 호가 멀지 않다. 바이칼은 특별한 의미는 없고 현지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우리 한민족이 이 바이칼 호 연안에 살다가 남하하였다는 설이 있어 친숙한 기분이 드는 호수이다. 열차는 바이칼 호의 남서쪽으로 감아 돌면서 5시간 이상 달린다. 따라서 5시간 이상을 끝없이 펼쳐지는 바이칼 호수를 차창을 통해 원도 한도 없이 볼 수 있었다. 달려가서 통째로 마시고 싶도록 바닥이 환히 보이는 맑고 깨끗한 호수를 언제 다시 볼까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과거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의 가장 장애가 된 곳이 세계 최대의 담수호 바이칼 호수였다고 한다. 전체 길이 640km의 호수를 종단하기 위해 겨울에는 얼음 위로 레일을 임시로 깔아 달리게 하였고 여름에는 열차 페리를 운행케 하여 페리 선박이 레일을 이어 주었다고 한다. 1905년이 되어서 환(環)바이칼 철도(circum-Baikal)가 완공된다. 시베리아의 진주(眞珠) 바이칼 호를 달린 기차는 울란우데에 도착한다. 17세기 중반 코사크부대가 ‘우데’ 강 하류에 요새를 건설한 것이 도시의 시초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붉은 우데’ 즉 ‘울란 우데’로 바뀌었다. 여기서 직진하면 블라디보스토크로 빠지고 우회전하여 몽골 횡단철도(TMGR)를 이용하면 몽골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한다. 울란바토르를 거쳐야 베이징을 향하게 된다.
울란바토르에서 만난 사람
몽골 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울란바토르는 문자 그대로 ‘붉은(울란) 영웅(바토르)’의 의미이다. 1924년 구소련의 지원으로 중국에서 독립한 몽골 인민공화국이 처음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울란바토르 역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타기 시작한다. 베이징으로 가는 승객이다. 우리는 6일간의 여행이 끝난 상황으로 이제 하루 밤만 지내면 베이징에 도착한다는 안도감이 들어 곧 내릴 듯이 흩어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긴 여행의 종착역을 바로 앞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침 가까운 컴파트먼트의 승객으로서 창가에서 쉬고 있는 서양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울란바토르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본국에서 부모님이 방문하여 베이징 구경을 시켜 드리기 위해 이 열차를 탔다고 한다. 벌써부터 상당히 지루한 여행이 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우리는 베이징은 금방이다 이제 다 왔다고 했더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거리란 상대개념이다. 긴 여행의 우리와 이제 열차를 금방 탄 승객과는 거리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울란바토로를 떠난 기차는 몽골과 중국의 국경도시에 도착했다. 차내 안내방송이 열차의 바퀴를 바꾸어야 한다면서 승객들은 잠시 내려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내리지 않고 열차의 바퀴를 어떻게 갈아 끼우는가를 보고 싶었다.
러시아의 광궤 그리고 중국의 유럽식 표준궤
알렉산더 3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만들 때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준궤(1435mm)에 따르지 않고 조금 넓은 광궤(1520mm)를 놓도록 지시하였다. 과거 나폴레옹 1세의 침범을 경험한 러시아는 또 다시 나폴레옹 같은 침략자가 러시아의 철도 레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유럽과 다른 궤도의 철도를 놓은 것이다.
구소련의 지원으로 독립한 몽골공화국은 러시아와 같은 광궤로 부설하였으니 문제가 없다. 그러나 중국이 문제였다. 중국은 청말 민간자본으로 독일 프랑스 등의 자본과 기술을 통해 철도를 부설하였다. 모두 유럽식의 표준궤다. 1950년대 중소(中蘇)분쟁으로 구소련의 침입을 우려한 중국은 우연히도 중국과 소련의 철도 폭이 달랐던 것에 안심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소련군이 열차를 이용 중국을 곧 바로 침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열차는 궤도조정 수리 창으로 들어간다. 공장안의 크레인이 열차를 하나 씩 들어 올리더니 지금까지 달려 온 광궤 폭 열차의 바퀴세트를 내리고 표준궤에 맞는 바퀴세트를 새로이 끼우는 작업을 하였다. 작업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바퀴세트를 갈아 끼운 열차는 수리 창을 떠나 본래의 홈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열차에서 내려 역구내에서 쇼핑을 하던 승객들이 제자리를 찾아 올라온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수고가 필요 없을 것 같다. 최근 한국 철도연구기술원은 한국의 표준궤와 러시아의 광궤 모두에서 운행할 수 있는 ‘궤간 가변열차’ 기술의 개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한국 열차가 논스톱으로 러시아까지 달릴 수 있게 된다.
바퀴세트도 갈아 끼웠으므로 이제 중국 베이징으로 들어갈 준비는 다 끝냈다. 열차는 밤사이 몽골 공화국과 중국의 내몽고를 지났다. 아침이 되니 열차는 바다링(八達嶺)의 터널을 뚫고 쥐용관(居庸關)을 바라보면서 베이징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얼마 후 베이징 역사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일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무사히 끝냈다. 만감이 교차하였다.
미래 유라시아 시대의 주역이 될 코리아
유라시아의 시대이다. 1930년대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가는 교통수단으로서 선박의 경우 40일간 걸리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면 15일 만에 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손기정 선수도 이 철도를 이용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국제 정세의 변화로 한반도에서 대륙의 열차 여행은 불가능 했다.
지난 해 8월 ‘원 코리아 뉴 유라시아(One Korea, New-Eurasia)’ 자전거 평화 원정대가 독일 베를린을 출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서울에 이르는 거리를 자전거로 주파하였다. 한반도 통일과 유라시아 시대의 개막을 염원하여 독일에서 서울까지 15,000km 대장정이었다. 이번 7월의 유라시아 친선 특급도 한반도의 ‘통일의 꿈’을 안고 베를린까지 달리는 빅 이벤트다. 다만 북한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다행히 이달 27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국제철도협력기구(OSJD)회원국 사장들이 서울에 모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정회원국이 아니지만 회원국들은 ‘서울선언문’을 채택하여 한국 철도의 대륙철도 진출을 공식 지지할 예정이다. 한국철도와 대륙철도와의 연결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인구의 70%가 산다는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한반도의 한국은 대륙에 막힌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미래의 유라시아의 주역이 될 우리는 이제부터 생각의 지평선에 대륙철도를 놓아야 한다. 새로운 ‘유라시아 대륙의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의 또 한 번의 도약이 기대된다.
06.02 홍콩의 구룡(九龍)과 남송(南宋)의 황제
홍콩은 시드니, 리우데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 홍콩은 지금과 달리 바다가 푸르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깨끗한 도시였다.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로 동서 문화가 융합되어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의 하나였다.
이러한 때에 외교관으로 홍콩에 근무하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홍콩에 부임하니 전임자가 홍콩 섬 동편의 브레머 산 중턱에 위치 좋은 아파트를 얻어 놓았다. 브레머 산은 1841년 아편전쟁 시 홍콩 섬에 상륙한 고든 브레머 제독의 이름에서 유래된다. 아파트 창문을 통해 바라다 보이는 것은 빅토리아 하버의 푸른 물과 멀리 뭉게구름을 이고 있는 구룡(九龍)반도의 산봉우리였다. 그리고 눈 아래로는 매 15분 간격으로 잠보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카이탁(啓德) 공항이 보였다. 지금의 첵랍콕 공항이 개항하기 전이었다.
전망 좋은 아파트를 우리만 즐길 수 없어 인근 국의 동료 외교관이며 현지 사람들을 가끔 불러 홈 파티를 열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초대된 손님 중에 대학교수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있었다. 그는 눈앞의 구룡반도를 가리키면서 산 봉오리가 몇 개 인지 세어 보라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구룡이므로 봉오리가 아홉 개가 되리라 생각하고 세어 볼 것도 없이 아홉이라고 답하였다.
그 교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세어 보라고 한다. 하나 씩 세어 보니 9개가 아니고 8개였다. 봉오리 하나하나가 용에 비유된다면 팔룡(八龍)인 셈이다. 그 교수는 설명했다. 사실은 8개의 봉오리지만 남송의 마지막 황제가 그 곳에 살았기에 구룡이 된다는 것이다. 용은 황제를 상징한다. 그러고 보니 구룡반도에 송왕대(宋王臺)라는 공원이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교수의 이야기가 길어진다. 남송을 멸망시킨 원(元)세조 쿠빌라이 군대는 남송의 마지막 황제를 추격 홍콩까지 내려와 왔다. 황제는 다시 배에 태워졌으나 더 이상 갈 곳 없어 해상을 떠돌며 원의 군사를 피해 다녔다. 남송의 군대와 원의 군대가 홍콩 인근의 애산(崖山)에서 조우하여 해전을 치루었다. 이것이 남송과 원의 마지막 전투로 전세가 기울어지자 남송의 충신 육수부(陸秀夫)는 어린 황제와 함께 바다에 뛰어 들어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남송의 마지막 황제는 홍콩의 푸른 바다 속에서 수장이 되었지만 그의 영혼은 구룡의 봉오리와 함께 지금도 홍콩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이 있는지 모른다. 역사에서 나라 잃은 슬픔을 경험한 우리들은 남송의 마지막 황제의 최후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13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불세출의 영웅 칭기즈 칸이 나타난다. 그는 금나라 치하에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던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북방의 강자로 군림한다. 북송시대 중국의 북부는 거란족의 요(遙)가 지배하고 있었다. 북송과의 전쟁에서 국력을 잃은 요를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가 정복한다. 금은 요와 달리 북송의 개봉을 점령하고 황제 휘종을 포로로 하였다. 이 때 북송은 공식적으로 멸망된다. 그러나 휘종의 동생이 무리를 이끌고 절강성 임안(臨安 지금의 항주)에 임시 수도를 정하고 송을 이어가니 그가 남송의 초대 황제인 고종이다.
칭기즈 칸은 3남 오고타이와 함께 금의 중도(中都 지금의 북경)를 점령하고 개봉을 함락함으로서 금은 몽골에 흡수된다.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남송까지 멸망시켜야 했다. 한편 몽골에서는 칭기즈 칸 사후 3남 오고타이가 몽골 고유의 말자(末子)상속의 불문율을 어기고 왕위 계승자인 말자 톨루이를 물리치고 2대 칸이 된다. 그 후 오고타이가 갑자기 죽자 그의 아들 구유크가 아버지를 이어 3대 칸이 된다. 그러나 구유크 칸도 2년 만에 죽자 삼촌에게 칸을 빼앗긴 톨루이의 큰 아들 몽케가 재빠르게 권력을 잡아 몽골제국의 4대 칸이 된다.
몽케는 후라구에게 서쪽의 바그다드와 시리아를, 막내 동생 아릭부케에게는 수도(카라코람)를 맡기고 자신은 바로 아래 동생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남송 정벌에 나선 몽케가 역병을 얻어 죽는다.
칸 몽케가 죽자 말자상속을 다시 내세운 아릭부케가 수도에 위치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칸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말자상속의 제도가 깨진 상황에서 남송정벌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형 쿠빌라이가 응할 리 없었다. 쿠빌라이는 지금의 북경 근처의 우호세력과 연대하여 스스로 칸으로 추대된다. 몽골제국은 일시적으로 두 사람의 칸이 등극했다. 결국 4년간의 내전 끝에 쿠빌라이의 승리였다. 풍부한 전략 물자의 공급원인 화북지방을 세력권에 둔 쿠빌라이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1276년 쿠빌라이의 부하 바이얀은 남송의 방위선을 뚫고 수도 임안으로 진격하여 남송 공제(恭帝)의 항복을 받았다. 황제의 나이 6세였다. 2년 전 불과 4세로 황제가 되어 재위 2년 만에 몽골에 항복한 것이다. 역사에서 남송은 공제로서 끝난다. 홍콩의 구룡 유래는 공제이후의 이야기이다.
바이얀에 의하여 남송이 멸망되지만 남송의 충신 3명은 몽골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남송의 3걸로 불리는 육수부 장세걸(張世傑) 문천상(文天祥)은 공제의 아버지 도종(度宗)의 서자인 두 어린 아들 익왕(단종)과 위왕을 안고 배를 타고 복건성(福建省)으로 달아난다. 몽골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해 추격을 하지 못한다. 충신들은 복건성에서 7세의 익왕을 황제로 즉위시킨다. 익왕은 공제의 배다른 형(庶兄)이다.
당시 복건성의 천주(泉州)에는 인도와의 후추 무역으로 큰돈을 번 색목인 호족 포수경(蒲壽庚)이 있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의 아랍상인이었다. 육수부는 천주를 남송의 임시 수도로 정하고 포수경의 협력을 얻어 수군을 정비, 물에 약한 몽골과 장기 항전을 꾀한다. 그러나 몽골의 바이얀은 가만있지 않았다. 오히려 포수경을 포섭하여 남송에게 등을 돌리게 한다. 정보에 빠른 무역상 포수경은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장래가 없어 보이는 남송을 버리고 몽골제국을 선택한다. 오히려 천주의 남송 왕족을 몽골에게 넘겨주어 충성을 보이기도 한다.
포수경에 배신당한 육수부 장세걸은 문천상을 바이얀에게 보내 강화협상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수군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피한다. 다음 행선지는 광동성(廣東省)이다. 광동성의 구룡반도가 안전 해 보였다. 당시 홍콩은 무인도 바위섬이었다. 구룡반도의 해안에 황제 단종(익왕)과 그의 동생 위왕이 나와 놀던 곳이 송왕대이다. 단종은 1278년 9세 때 사망한다. 광동성으로 이동할 때 배가 전복되어 물에 빠져 위험한 고비가 있었는데 단종의 사망은 그 후유증이었다. 단종이 사망한 후 육수부와 장세걸은 홍콩의 란타오 섬에서 6세의 위왕을 황제로 즉위시킨다. 그가 사실상 최후의 황제이다.
격전의 시기가 왔다.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2만의 남송수군과 색목인으로 원의 수군사령관이 된 포수경이 이끄는 25만 수군과의 일전이었다. 육수부는 마지막까지 선상에서 어린 황제에게 제왕학인 대학을 가르치면서 태연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족으로 전세가 불리하자 육수부는 황제와 함께 물로 뛰어 든다. 1279년 황제 나이 7세로 재위 1년 만이었다. 광동성의 심천에는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업고 있는 상이 있다. 육수부가 이러한 모습으로 황제를 업고 바다에 뛰어 들었는지 모른다. 혼자 살아남은 장세걸은 해남도 쪽으로 다시 도망가다가 태풍을 만나 최후를 맞이한다.
포수경은 역사에 다시 한 번 나타난다. 몽골제국이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동로군을 조직 고려군과 함께 마산에서 출발할 때 중국 영파에서는 남송의 수군을 모아 만든 강남군이 결성되었다. 강남군의 사령관이 포수경이었다. 포수경은 후에 몽골제국의 지원으로 천주를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시켜 중국 최초의 대외무역 거점을 만든다. 그러나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은 바뀐다. 주원장은 원을 몽골 고원 밖으로 쫓아내고 명(明)을 건국한다. 몽골에 부역한 포씨 일족은 체포되어 노예가 된다.
이야기를 마친 노교수는 한동안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지명에서 시작 되어 연상 된 여진족 금과 몽골의 원 등 북방 오랑캐의 침략에 의해 북송과 남송이 차례로 멸망된 슬픈 역사로 마음이 무거워 진 것 같이 보였다.
06.09 만주국과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 지린(吉林)성의 성도 창춘(長春)에 출장을 자주 가게 되었다. 당시는 선양(瀋陽) 총영사관 개설되기 이전으로 지린성은 대사관 관할이었다.
창춘은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가 뻗어 있어 중국 도시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중국 공산당 지린성위원회 본부건물이 일본의 성(城)의 천수각(天守閣)을 닮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 오사카 성을 본 딴 건물로 과거 만주국 시대 일본 관동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 건국에 중심 역할을 한 악명 높은 일본 최강 정예군이다. 창설 당시 산하이관(山海關) 동쪽(당시 만주국 영역으로 지금의 동북 3성)을 지키라는 의미로 관동군이 되었다고 한다.
관동군이 사령부의 건물을 지을 때 가도정명(假道征明)이라는 황당한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임진왜란)하고 중국을 넘어 다 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못다 이룬 야망을 이루기 위해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을 재현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만주국을 건국하고 창춘을 수도로 정하면서 새로운 수도 즉 신징(新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징은 19세기 파리를 모델로 건설한 신도시였다고 한다. 창춘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린대학 기초의학원의 건물도 자세히 보면 일본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 다만 지붕은 자금성처럼 기와로 되어있어 중일합작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건물은 당시 만주국 정부의 정무원 건물이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만주국은 멸망되고 옛 이름 창춘을 되찾았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청조의 마지막 황제(선통제) 푸이(溥儀)를 만주국 초대 황제(강덕제)로 내세운 일본의 괴뢰국가였다. 국제연맹이 리튼 조사단을 파견 만주국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1933년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는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에 대한 찬반 의결이 있었다. 당시 일본 대표는 영어에 능통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1880-1946)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후에 남만주 철도회사(滿鐵)의 총재와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으로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13세 때 미국 오레곤 주의 친척집에 위탁되고 그 곳에서 미국 감리교의 후원으로 오레곤 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돌아 와서 외무성에 입부하였다가 퇴직하고 만철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마쓰오카 의원은 동양인의 영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유창한 영어로 ‘십자가 위의 일본‘이라는 논리로 국제연맹을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걸형(桀刑)에 처하였지만 그의 진실이 후에 알려지듯 국제사회는 일본을 십자가 걸형에 처하려고 하지만 일본의 정당성은 후세가 알아 줄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였다. 마쓰오카는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독교를 끌어넣은 억지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만장일치로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부인하였다. 일본은 국제연맹의 결의에 불복 탈퇴하면서 고립을 자초하였다.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만주국과 관계가 깊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이야기한다. 그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현 총리의 외조부이다. 1936년 만주국의 산업차관으로 기시 노부스케가 부임하였다. 당시 38세의 가장 잘 나가는 상공관료로서 만주국 건설을 위해 관동군으로부터 삼고초려의 끈질긴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관동군의 기대에 부응하여 만주국의 산업(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 성공시키고 1940년 일본으로 귀임한다. 1941년 관동군 참모장 출신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가 총리가 되면서 그는 상공대신으로 발탁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1896년 일본의 야마구치시(山口市)에서 사토 노부스케(佐藤信介)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토 히데스케(佐藤秀助)는 야마구치현청의 관리였다. 그는 본래 기시 히데스케(岸秀助)였는데 처가인 사토가(佐藤家)에 데릴사위로 입양되면서 처가 성을 따라 사토 히데스케가 된 인물이다. 어머니는 모요(茂世)로 야마구치 현의 명문가 사토 집안의 따님이다.
그가 태어 날 때 외증조부 사토 노부히로(佐藤信寬 1816-1900)가 기뻐하여 자신의 이름 자 노부(信)를 취하도록 허락하여 노부스케가 되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유신 이전에 죠수번(長州藩)의 관료(藩士) 출신의 노부히로는 집권세력인 도쿠가와 막부 타도(倒幕派)에 가담한 혁신가였다. 죠수번이 구주를 토벌할 때 참가한 공로로 메이지유신 이후에 시마네(島根)현의 현령이 되었다. 그가 은퇴한 후에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정치원로들이 찾아 올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고 한다.
부친 히데스케는 노부스케가 3살이 될 때 야마구치현청의 직장을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처가가 대를 이어 해오던 양조장 사업을 이어 받았다. 사토 집안은 본래 양조업(주조업)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모요가 결혼 직후에는 남편 따라 야마구치 시에 살면서 그 면허를 일시 타인에게 빌려 주었다가 남편이 사직하고 고향(布施)에 돌아와서 양조업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부부는 1889년에 첫아들 이치로우(市郞), 1896년에는 둘째아들 노부스케, 1901년에는 셋째아들 에이사쿠(榮作)를 얻었다. 첫째 둘째는 현청 말단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에이사쿠는 양조장 사장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형제 모두 머리가 좋아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마을 사람들은 세 형제 중에 ‘머리(頭 두뇌)는 첫째부터, 배짱(度胸)은 셋째부터’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머리 좋은 노부스케가 중학 3년 때 아버지 친가의 성 기시(岸)를 따르게 된다. ‘사토 노부스케’에서 ‘기시 노부스케’로 바뀌었다. 그러나 다른 두 아들은 사토 성을 그대로 쓴다. 장남 이치로는 군인이 되어 해군 중장에서 퇴역하였고 막내 에이사쿠는 형 기시 노부스케에 이어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수재들이 근무하는 내무성이 아닌 농상공성에 들어가 혁신관료로 두각을 나타낸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만주국 상공차관으로 만주국의 산업을 발전시켜 일본의 군수산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이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인연은 독(毒)이 되어 전후 도조 히데키와 함께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된다. 육군대장 도조 히데키는 사형에 처하나 문관인 기시 노부스케는 다행히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공직에서는 일시 추방되었다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자유당에 가입하면서 복권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 시게루와 대립하면서 자유당에서 제명되고 하토야마(鳩山一郞)와 함께 일본 민주당을 결성한다. 후에 민주당은 자유당과 합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되면서 자민당의 초대 간사장이 된다. 후에 총리가 되는 자민당의 총재 경선에 나섰으나 이시바시 단잔(石橋잠山)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2개월 후 이시바시 총리가 병으로 사직하여 기시 노부스케는 후임 총리가 된다.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가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의 외무대신을 역임한 아베 신타로는 3남 노부오(信夫)를 처남인 기시 노부스케의 장남 노부와(信和)에 입양시켜 기시(岸)의 성을 따르게 한다. ‘아베 노부오’에서 ‘기시 노부오’로 이름이 바뀐다. 기시 노부오는 현재 참의원 의원이다. 할아버지 대에는 형제간이 사토와 기시로 나누어지고 아베 총리에 와서는 아베와 기시로 나뉜다.
양조장 사장 집 아들인 에이사쿠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련님으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항상 우쭐한 기분으로 공부는 않고 강에 나가 물놀이 하느라고 본래 검은 얼굴이 더 새까맣게 되었다고 한다. 야마쿠치 중학을 졸업하고 구마모토의 제5고에 합격한다. 당시 시험준비를 위해 같이 하숙하면서 제5고에 합격한 친구로 히로시마 출신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에이사쿠 보다 먼저 총리가 되었다.
에이사쿠도 형과 같이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철도성에 근무하면서 형과 달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좌천되는 등 관료생활이 매끄럽지 못했다. 이것이 오히려 복(福)이 되어 패전 후 점령군으로부터 전범의 혐의를 받지 아니하고 공직에도 추방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후 정치인이 되어 형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 간사장을 할 때 총무회장으로 형의 오른 팔 노릇을 하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가 된 후 대미 자주외교를 지향 미국과 일본의 불평등 안보조약을 개정 신 안보조약을 체결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협상 결과이다. 그러나 국내의 여론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국회 비준을 강행하자 이른 바 ‘안보투쟁(1960)’이라는 대규모 민중 시위로 발전되어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직을 사직한다.
기시 총리가 사직하자 사토 에이사쿠의 친구 이케다가 총리가 된다. 에이사쿠는 이케다 총리의 총재의 3선을 막기 위해 총재 경선에 뛰어 들지만 이케다에게 패배한다. 얼마 후 이케다 총리가 병으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총리가 된다. 이는 1956년 형 기시가 총리가 된 과정과 유사하다. 형제끼리 총리가 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전임자의 병으로 총리직을 이어 받는 것도 더욱 드물 것 같다.
오는 8월 아베 담화를 앞두고 그의 뿌리이며 역사관의 원점이라고 보는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어릴 때 지역구 의정활동으로 도쿄의 자택을 자주 비우는 부친(安倍晉太郞) 대신에 외조부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외조부에 대한 추억에서인지 아베 총리가 초선의원 시절인 1995년 10월, 창춘을 방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근무한 만주국 국무원을 찾았다고 한다.
06.17 서울의 메르스와 베이징 사스의 기억
국내 메르스 사태가 고비를 넘겼다고 하지만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다. 메르스 관련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국제행사가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중국 당국이 베이징 개최예정의 ‘한중고위 언론인 포럼’을 연기 시켰고 서울 개최의 ‘한국기업 베이징투자설명회’도 연기되었다. 이 행사에는 베이징 시 공무원과 기업인 30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는 한국인 영화인들의 참석 자제를 요청하였고 쓰촨(四川)성에서 개최예정이던 대형 한류축제에서는 수 백 명의 한국인에 대해 입국을 불허함으로써 행사 자체가 취소되었다.
국내 중국 유학생의 동요도 심상치 않다. 일부 유학생은 기말 시험도 안 보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이는 국민안전처가 홈페이지 등에서 메르스 방역정보를 한국어로만 게재하고 있어 이를 잘 이해 못하는 학생들은 SNS의 과장 허위 정보에 노출되어 두려움을 크게 느낀 것 같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하루 2만 명씩 입국하던 요우커(遊客)가 40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명동이나 백화점 등에는 그 많은 요우커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중국은 과거 사스의 기억이 되 살아 난 것일까.
전문가들은 메르스가 사스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병원감염에 국한되는 메르스는 사스에 비해 크게 우려할 사항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의학지식이 많지 않고 이러한 주장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불요불급한 한국여행이나 행사를 연기 또는 취소부터 하고 본다. 중국 친구들이 사라진 허전한 서울 거리를 거닐면서 과거 베이징에서의 사스의 기억을 되돌아본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는 코로나(왕관처럼 원형)바이러스(CoV)의 일종으로 사촌간이라고 한다. 앞의 수식어 중증급성(Severe Acute)과 중동(Middle East)이 다를 뿐이고 뒤에 붙은 RS(호흡기증훈군 Respiratory Syndrome)는 항열(行列)처럼 같다.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감염병이라고 한다.
필자는 중국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중국인의 사스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해한다. 사스로 여행이 제한되었을 때 베이징은 유령도시처럼 변했고 베이징에 일자리를 구해 온 농촌출신들은 고향도 가지 못했다. 중국 전역으로 사스의 확산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스를 중국에서는 페이덴(非典)이라고 부른다. 비전형폐염(非典型肺炎)을 줄인 것이다. 사스는 2002년 11월 광둥(廣東)성에서 40대의 농협직원이 첫 환자로 발생된 후 인근 홍콩 싱가포르 등을 거쳐 전 세계 30개국으로 확산되었다. 2003년 7월5일 WHO에서 중국의 사스가 통제되었다고 공식 선언할 때 까지 전 세계적으로 8069명이 감염되어 775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간 무서운 신종 전염병이었다.
중국(홍콩 타이완 등 제외)은 그 중에서 5327명의 감염에 348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한국에도 3명이 감염되었으나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도 중국이나 동남아 등 주변국에서 사스의 공포가 널리 알려져 있어 당시 정부가 초기부터 범정부 대책반을 꾸려 강력히 대응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국내외 언론 등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광둥 성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감염 확산 우려가 높았던 중국은 홍콩과 달리 국민의 불안을 막는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비밀주의로 일관하였다. 군(軍)외과전문의 장옌융(蔣彦永) 인민해방군 소장은 사스가 계속 만연되고 있는데도 당시 위생부장(장관)과 베이징 시장은 ‘감염 12명 사망 3명으로 사스는 유효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등 사실과 다른 발표를 하여 사스를 축소 은폐하고 있다고 보았다.
장옌융 장군은 자신이 근무한 군병원의 확진환자와 유사환자 케이스를 조사하여 2003년 4월초 언론에 폭로하였다. 당시 타임지 베이징 특파원은 “Beijing's SARS Attack(베이징의 사스 공격)'라는 제목으로 사스 실태를 최초 보도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에 WHO 조사단이 긴급 파견되면서 실제 사항이 밝혀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중국정부는 4월22일 멍쉐눙(孟學農) 베이징 시장과 장원캉(張文康) 위생부장의 ‘늑장대응’의 책임을 물어 곧바로 면직시켰다. 멍쉐눙 시장은 베이징 당위 부서기에서 승진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우이(吳儀) 부총리가 위생부장을 겸직하고 하이난다오(海南島)성의 왕치산(王岐山) 당서기가 베이징 시장대리로 발탁되었다.
왕치산은 1997년 광둥 성 부성장으로서 해외 금융 관계자와 협상 중국의 금융위기를 해결한 공로로 국무원 경제체제 판공실주임을 거쳐 하이난성 당서기로 영전한 인물이다. 왕치산은 과거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야오이린(姚依林)의 사위로서 전임자 멍쉐눙과는 공교롭게도 동서지간이 된다.
왕치산은 컨트롤 타워(중앙지휘자)로서 사스와 ‘공개전쟁’을 결심하였다. 그는 투명한 정보공개를 통한 치밀한 방역체계를 갖추어 3개월 만에 사스를 조기 퇴치하였다. 왕치산은 금융 ‘소방대장’에 이어 ‘사스영웅’으로 국민들의 인기가 높았다. 그 후 승승장구하여 지금은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로서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다.
베이징을 포함한 전 중국에 대한 사스감염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미 국무성은 4월초 ‘철수인가(Authorized Departure)’를 내리면서 중국 본토와 홍콩소재 미국 공관의 비 필수요원과 가족의 자발적 철수를 권고하였다. 이는 ‘철수명령(Ordered Departure)’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이지만 심리적인 공포감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이징 시에는 휴교와 함께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등 사회불안이 극에 달하여 각국의 공관과 기업도 철수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당시 중국 주재 김하중 대사는 자신의 회고록 ‘하느님의 대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사스가 발생하였을 때라고 할 정도로 교민 안전에 부심하였다고 한다. 대사관 내에 ‘사스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교민 철수 등 특단의 조치를 검토하였다. 우리 기업들은 대사관의 철수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 대사의 회고에 의하면 한국인은 중국의 사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보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중국과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이 사스가 무서워 떠난다면 중국의 사스 위험성이 더 크게 부각될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어려울 때 친구를 놔두고 가버린다면 나중에 그 친구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서양 격언처럼 김 대사는 우리가 중국의 진정한 친구라면 어려움에 처한 중국인과 고난을 함께해야 한다면서 철수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국인이 사스에 강한 것은 김치를 먹기 때문이라면서 김치를 컨테이너로 수입하여 정부 요로에 선물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대사관 직원들과 부인회를 통해 사스로 고생하는 베이징 시민을 위한 십시일반의 모금으로 베이징 시 위생국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정부에 건의하여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하여금 위로 전문 발송과 함께 상징적으로 성금 10만 불을 지원 중국의 사스 퇴치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김 대사의 이러한 노력은 출범(2003.3.15) 직후 사스 공격에 휘둘리고 있는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의 제4세대 지도부에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다시 김 대사의 회고에 의하면 중국의 후진타오 정부와 거의 비슷하게 출범(2003.2.25)한 노무현 대통령 정부의 측근들은 중국의 사스를 이유로 계획된 대통령 방중행사(7.7-10) 연기를 검토하고 있었다.
2003년 5월에 서울에서 공관장회의 개최되었다. 대통령 취임행사로 예년보다 2-3개월 정도 늦은 시기였다. 공관장 회의 기간 중에는 청와대 만찬이 일정에 포함되어 있다. 어느 날 본부 간부가 김 대사 내외분이 청와대 만찬을 참석하기 위해서는 2주전에 귀국해야 한다는 전화를 걸어 왔다. 사스는 2주 정도 잠복기를 거쳐야 증상이 나타나므로 사스 감염여부를 먼저 확인하겠다는 의도였다.
담대한 마음으로 교민 사회에 사스 극복을 진두지휘하는 김 대사는 현장을 그렇게 오래 비우기도 어려워 서울의 지시를 따를 수 없었다. 청와대 만찬 참석이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회의 날짜에 임박하여 귀국한 김 대사 내외는 예상대로 청와대 만찬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사스가 잠복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여타 공관장들이 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갈 때 김 대사 내외는 쓸쓸히 호텔 방에 남아서 설렁탕을 시켜 먹었다고 한다.
며칠 후 대통령이 김 대사를 따로 불렀다. 중국에서의 사스 상황을 직접 보고 받고 방중행사를 예정대로 해도 될 것인지에 대해서 대사의 의견을 물었다. 김 대사는 베이징의 사스가 방중 이전에 통제될 것이 확신하므로 예정대로 방중해 줄 것을 건의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지 대사의 건의를 받아 들여 방중행사를 예정대로 수행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다행히 사스는 진정되어 6월13일자로 베이징 인근 텐진 시 등의 여행제한이 해제되고 6월24일에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베이징 시에 대한 여행제한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7월5일 WHO는 사스가 세계적으로 완전히 통제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예정대로 중국을 국빈 방문하여 사스 발생 후 처음 중국을 찾은 국가원수로서 중국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며칠 전 중국의 권력 서열 3위인 장더장(張德江)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이 방한하였다. 한국의 메르스 감염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국내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장더장 위원장의 방한은 2003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을 상기 시켰다. 장더장 위원장은 정의화 국회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을 스스로 밝혔지만, 한국어가 유창하며 한반도 전문가인 장더장 위원장의 한국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으로 12년 전 김 대사처럼 추궈홍(邱國洪)주한 중국대사의 확신에 찬 건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사스가 한창일 때 성금과 위로로 곤경에 처한 중국 친구들을 감동시킨 사스 퇴치 모범국가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3년의 준비기간이 있었는데도 의료 선진국의 자만에 빠져서인지 예방조치에 손을 놓고, 초기에 안일하게 대처 메르스를 잡지 못하고 곤란을 겪고 있다.
우리 민족은 저력 있는 민족이다. 수 천 년 역사에서 외침과 재난을 겪을 때마다 일치단결하는 강인한 민족이다. 근거 없는 불안의 증폭을 자제하고 단합된 힘으로 총력전을 펼친다면 메르스 위기는 곧 극복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나섰다. 메르스와 싸우는 환자와 의료진을 방문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동대문 패션상점가에서는 불안스러워 하는 요우커를 직접 만나 안심시키도 하였다.
한국이 치루고 있는 메르스와의 전쟁을 전 세계가 지켜본다. 특히 대부분의 중국인은 12년 전 진정한 중국의 친구로서 김 대사의 용단과 한국정부의 성원을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은 메르스의 조기 퇴치를 기원하면서 ‘자요우, 자요우(加油 加油 힘내라 힘내라)!’라고 하면서 격려해 주고 있다. ‘화이팅’ 대~한민국!
06.25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과 성산별곡(星山別曲)
‘공산(空山)에 쌓인 잎을 삭풍이 거두어 불어
떼구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니
천공(天公)이 일을 즐겨 옥으로 꽃을 지어
만수천림(萬樹千林)을 잘도 꾸며냈구나‘
송강 정철이 정쟁에 휘말려 고향(담양군 청평면 지곡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성산(星山)기슭과 송강(松江)강변의 사계절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은 성산별곡의 일부이다. 성산별곡의 한글 병풍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安倍晉三) 일본총리가 참석한 6월22일 서울과 도쿄의 한일국교정상화50주년 기념행사장에 등장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1965년 6월22일 한국은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외교권을 상실한 이후 60년 만에 일본과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한일기본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장소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총리의 공관이었다. 그 후 한일기본조약은 양국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12월18일 서울에서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발효된다. 비준서 교환 당시 사진을 보면 한글 서예가 갈물 이철경 여사의 성산별곡 12폭 병풍이 보인다.
비준서 교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이후락 실장이 1970년 1월, 3대 주일 대사로 부임하면서 병풍의 전반 6폭은 도쿄로 가지고 가고, 후반 6폭을 한일우호의 증표로 주한 일본대사관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正英)대사에게 기증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서울행사에 사용된 병풍 뒷면에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식 기념품 이후락 증 1970. 1.26’ 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락 대사가 가지고 간 전반부 6폭도 이번 도쿄행사에서 사용되었다. 서울과 도쿄에서 성산별곡의 12폭 전체 병풍이 50년 만에 한일우호의 상징이 된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한국은 1965년 12월 주일대표부 공사로 근무 중인 김동조 대사를 초대 대사로 임명하였고 일본의 경우 1966년 3월에 기무라 시로시치(木村四郞七)대사가 초대 대사로 부임하였다.
지난 50년 한일관계는 ‘시지푸스의 바위’처럼 위로 끌어 올리면 다시 굴러 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올려야 하는 좌절을 겪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중단 없이 발전을 이어 왔다.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이다가도 다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는 자연의 이치처럼 한일관계에서도 냉온탕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지난 2012년 말 아베정권이 들어서고 2013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나 그 후 2년 반 이상 두 나라는 정상(頂上)회담 없는 비정상(非正常)이 계속되고 있다. 한일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까지 받아 왔다. 마침내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전에서 두 정상이 교차 참석함으로써 ‘삭풍에다 눈까지 몰아오는’ 추운 겨울 한 가운데서 봄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훈훈한 행사가 되었다.
6월22일 저녁 동 시간대에 도쿄의 쉐라톤 미야코호텔과 서울의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기념행사’가 열렸다. 도쿄에서는 한국의 국악이 연주되고 서울에서는 한일어린이합창단이 ‘고향의 봄’ ‘후루사토(고향)’등을 불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서울에서는 벳소 고로(別所浩郞) 주한 일본대사의 안내로 박근혜 대통령이 연단에 올랐고 도쿄에서는 아베 총리가 마이크를 잡았다. 박 대통령은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으로 내려놓자”고 하였고 아베 총리는 “앞으로 50년을 위해 손잡고 새 시대를 열자”고 화답하였다. 행사의 주제는 ‘함께 열어요! 새로운 미래를! (Let us open jointly, a new future)’였다. 한일 간의 화해 협력 신뢰 그리고 미래를 강조하는 두 정상의 축사 연단에는 상기 성산별곡의 6폭 병풍이 각각 놓여 있었다.
한일기본조약은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기시 총리의 친동생) 당시 총리,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깊이 관여하여 이루어 낸 조약이다. 50년 후에는 그들의 손자와 따님이 총리로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이를 축하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게 된 것은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50년 전 한일 양국의 대표가 서명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에는 1)어업협정 2)재일교포의 법적지위 및 대우협정 3)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 4)문화재 및 문화협력협정 등 4개의 협정과 25개의 문서로 되어 있다. 한일 기본조약이 양국이 마음에서 화해를 이루고 만들어 낸 조약이 아니었다. 냉전시대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이 손을 잡도록 한 미국이 관여한 사실상의 ‘3국 관계’의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한일 기본조약은 전문에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1951년 9월8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미국과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배경으로 한다. 이른 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일환이다.
미국의 워싱턴 D.C를 방문할 때 덜레스 공항을 이용하게 되는데 덜레스 공항은 존 포스터 덜레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법률고문으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다. 반공주의자인 덜레스는 소련과의 냉전체제하에서 중국의 공산 통일과 북한의 남침도발로 아시아의 공산화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덜레스는 일본을 공산주의의 물결을 막는 방파제로 생각하고 일본이 식민지 지배라든지 침략에 대한 충분한 사과 배상이 없었음에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에 주권을 넘겨주고 동일자(9.8)로 미일 안전보장조약에도 서명하였다.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자 도쿄의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시볼트 외교국장의 중재로 1951년 10월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최초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배상요구를 해 놓고 있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1961년 5월 새로이 집권한 군사정부는 일본의 기술과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교정상화 회담을 적극적으로 이어갔다. 1961년 11월22일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를 만나 협조를 부탁하였고 다음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 간에 협상내용에 합의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시청 건너편에 전쟁기념 오페라하우스 건물이 있다. 매주 월요일만 관람이 되어 최소 2주 전에 신청해야 내부 투어가 가능하다. 이 오페라하우스에서 일본이 항복하기 전인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국제법 변호사인 덜레스가 중심이 되어 국제연합(UN)헌장을 만든 곳이며 1951년의 일본과 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산실이기도 하다.
덜레스 고문은 1950년 6월20일 북한의 남침 5일전에 방한하여 공산주의자와 마주보는 최전선인 38도선을 시찰, 북한의 동정을 살폈다. 그는 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무장관(1953-1959)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반공의식은 월남의 평화를 위한 제네바 회의에서 당시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가 내민 악수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대륙의 공산화와 북한의 남침으로 아시아와 한반도의 상황이 위급할 때 반공주의자 덜레스는 태평양과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을 반공 보루로 만들었다면 50년이 지난 지금도 지정학적 구도는 비슷하다. 해양굴기를 앞세우는 중국의 부상에 대처하여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같은 동맹국인 한일 양국의 결속을 도모하는 것이 미국의 재 균형 전략(Pivot to Asia)으로 보인다. 미국 국무성은 이번 행사에 대해 한일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양국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증진한다면서 한일 관계개선은 한미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세계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특히 북한의 핵 위협에 노출된 한국은 안보 면에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적으로도 국제사회에서 성공한 두 나라가 자본과 기술을 합쳐 서로 손을 잡는다면 제 3국에서 못할 일이 없다. 이제 50주년을 지났지만 앞으로 국교정상화 100주년을 내다보면서 긴 호흡으로 한일 관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양국 정상의 교차참석으로 한일관계는 완연한 봄이 왔다고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제대로 된 봄을 맞이하기 위해 8월15일 예정된 아베 총리의 종전 70주년 특별담화를 기다려야 한다. 아베 총리는 담화에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죄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담화내용에 따라 성산별곡처럼 “떼구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는 삭풍“이 다시 불지 모른다.
06.30 차이나타운
나는 정부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가족과 함께 뉴욕소재 C 대학 특수대학원의 석사과정에서 2년간 미중(美中)관계를 중심으로 국제관계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당시 같이 공부한 학생들은 미 국무성이나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젊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여름 방학을 이용 베이징이나 상하이를 다녀와서 중국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그 때 만난 A 교수는 중국 전문가로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순수한 학생이라기보다 중견 공무원으로 파견되어 공부했기에 그러한 사정을 아는 A 교수는 가끔 점심 식사에 초대 남북한 관계며 한중관계에 대해 물어 오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과 수교 이전이라 중국하면 대륙보다 타이완을 떠 올릴 때였다.
우리는 대학 앞에 ‘문 팰리스(月宮)’라는 중국 식당에서 만났다. A 교수는 ‘페이킹 덕 (베이징 오리요리)’ 같은 진짜 중국 음식을 먹고 싶다면 지하철을 타고 차이나타운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때 처음으로 뉴욕에 차이나타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국음식은 여러 사람이 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친구들과 함께 중국어 실습을 핑계로 차이나타운으로 내려 가 ‘페이킹 덕(Peking duck)’을 시켜 먹곤 했다.
맨해튼 아래쪽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으로 가 보니 왁자지끌한 가게가 줄지어 늘어 있고 중국인들이 무거운 것을 메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은 진짜 중국인 거리 같았다. 요리는 ‘페이킹 덕’이지만 실제로는 뉴욕시 인근의 롱 아이랜드에서 키운 오리라고 했다. 사실은 '페킹 덕'을 먹은 것이 아니고 ‘롱 아이랜드 덕’을 먹었다고 농담 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가족과 함께 미국이나 카나다를 자동차로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여행 중에 아침이나 점심은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 등으로 간단히 해결하였지만 저녁만큼은 차분히 앉아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한국 음식점을 찾아 가고 싶지만 당시 미국의 중소 도시에는 한국 음식점이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에는 규모는 작지만 차이나타운이 있어 중국 음식점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익숙한 중국요리 몇 개를 시키고 짜차이(소금에 절인 뿌리채소) 또는 라자오짱(중국식 고추장)을 주문하여 느끼한 중국요리에 섞어 먹으면 속이 개운했다.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도 가보았다. 안내해 준 지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이른 바 골드러시가 시작되고 미국 대륙횡단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를 부설되면서 막노동자로서 중국인을 대거 데려왔다고 한다. 막노동자라는 의미의 쿠리(苦力)라는 말이 그 때 생겨났다고 한다.
광부며 철도부설 노동자로 열악한 환경에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귀국하지 않고 샌프란시스코에 그대로 눌러 앉아 오늘 날 미국의 대표적인 차이나타운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중국의 남부에는 객가인(客家人 하카)이라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본래 황하 유역 등 중원에 살다가 몽골이나 만주족이 세운 이민족의 지배를 거부하고 남쪽 해안지역인 푸젠(福建)성 및 광둥(廣東)성에 내려 와 ‘토루’라는 성채(城砦) 같은 공동주택을 지어 놓고 자신들의 언어로만 대화하며 자기들 끼리 살아 왔다.
1851년 광둥성 북쪽 작은 마을 (花縣)에서 홍수전(洪秀全)이라는 기인이 나타나서 자신은 여호와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면서 아편전쟁의 패전으로 흔들리고 있는 민심을 잡고자 하였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세워 난징(南京)을 수도로 정하고 양쯔강(長江)을 사이에 두고 청국정부와 10년에 걸친 전쟁을 이어갔다.
중국에 기독교 교리에 의해 태평천국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서양열강은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교리의 이단성으로 크게 실망하고 태평천국의 진압에 가담하자 1864년 홍수전이 자살하고 난징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은 멸망한다.
전쟁의 와중에 전란을 피해 돈 많은 객가인 및 광둥성의 토착 지주들은 홍콩의 자유항에 내려 와 대륙의 물산을 동남아시아 화교들에게 되파는 중계무역을 하였다. 동남아 화교들은 15세기 초 명나라의 정화(鄭和)제독의 동남아시아 인도 등 남해 원정으로 주요 항구 주변에는 일찍이 차이나타운(唐人街)을 형성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돈이 없는 서민들은 야채행상, 노역 등 홍콩에서 막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미국 서해안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철도부설을 위해 막 노동일을 할 수 있는 노동력(쿠리)이 크게 필요하였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해외 인력 송출은 불법이었다.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을 일으킨다.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의 이화원 및 원명원을 약탈, 불을 지르고 마지막으로 자금성을 점령한다. 황제 함풍제는 열하(熱河)로 달아나고 황제의 동생 공친왕이 협상에 나선다. 영불 연합군은 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자 자금성도 불태우겠다고 협박을 하자 공친왕은 러시아의 중재를 통해 영불 연합국과 굴욕적인 협상을 한다. 그 결과가 1860년의 베이징 조약이다.
청국은 베이징 조약에 의해 홍콩 섬 건너편의 주룽(九龍)을 영국에 할양한다. 홍콩 섬은 1차 아편전쟁(1840-1842)의 난징조약에 의해 1842년 영국에 이미 양도 되었다. 이로써 주룽반도의 바운더리 도로(Boundary Street)를 경계로 남쪽을 모두 영국이 차지한다.
영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898년 바운더리 도로 북쪽에서 심천강 이남까지 청국령으로 남아있던 주룽반도 전체와 란타오 섬을 99년간 조차한다. 영국은 이 넓은 땅을 신계(新界 New Territory)란 이름으로 홍콩에 편입시켰다. 1997년 신계의 조차가 끝나는 해에 영국은 신계를 포함 영구할양 받은 홍콩 섬과 주룽을 50년간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조건으로 중국에 반환(hand over)하였다.
청국은 러시아에게는 베이징 조약 중재 대가로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 시가 있는 프리모르스키 지방)를 할양해 준다. 연해주의 할양으로 청국은 동해로 나가는 진입로가 완전히 막히게 된다. 당시 연해주를 할양은 하더라도 한 뼘 정도의 두만강 하구(河口)지역만이라도 지켰다면 오늘 날 중국이 동해로 나가기 위해 북한 땅을 거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청국은 값싼 쿠리가 필요한 열강의 요구에 굴복하여 자국민의 해외이주 금지 정책을 철폐한다. 드디어 인력 송출이 합법화된 것이다. 베이징 조약에 의해 홍콩은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본격적으로 쿠리를 공급하는 인력수출의 중심이 되었고 이 쿠리들에게 중국 전통음식을 보내주는 생활 보급기지가 되었다. 홍콩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보내진 쿠리는 약 3만 정도 추산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를 골드러시에 비추어 ‘황금의 산(金山)’으로 불렀다. 미국의 금산에 이어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근처에서도 금광이 발견된다. 쿠리를 송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금산이 생긴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는 구금산(舊金山)으로 바뀌고 시드니는 신금산(新金山)으로 불렀다.
얼마 전 김혜수 주연의 ‘차이나타운’이라는 영화가 상연되었다. 세계 도처의 차이나타운이 푸젠성과 광둥성 등 중국 남부의 연안지역 사람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한반도와 지리적 근접성으로 유일하게 산둥(山東)성 출신이 모여 산다고 한다. 영화를 통해 인천의 차이나타운 이야기를 알고 싶어 영화관을 찾았으나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부제(副題)에 나와 있는 것처럼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이 차이나타운이라는 하드보일드한 범죄 영화였다.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보다는 마피아의 대부(代父 God Father)를 연상케 하는 냉혹한 대모(代母)가 등장하는 폭력물 영화였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고 역사가 수 백 년 된 차이나타운에 그러한 이야기가 없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에는 걸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07.08 베이징 블루와 서울 블루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사태의 여진이 계속되어 짜증이 나다가도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어릴 때나 본 것 같은 새 하얀 뭉게구름이 둥실 둥실 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달라진 서울의 푸른 하늘에 안도가 되면서 마음 한 쪽은 위안을 받는 것 같다. 서울의 푸른 하늘(서울 블루)을 가져다 준 배경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푸른 하늘(베이징 블루)에 있었다.
지난 5월 베이징을 다녀 올 일이 생겼다. 베이징에 간다고 하니 가족들의 걱정이 앞선다. 베이징의 공기가 나쁘다는데 오래 있지 말고 일만 보고 빨리 돌아오라고 하면서 특별한 선물을 건넨다. 풀어 보니 황사 마스크였다.
작년 11월 베이징의 교외에서 개최된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정상회담 때는 전형적인 베이징의 쪽빛(藍色) 가을 날씨를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마술처럼 반짝 되 살아 난 베이징의 푸른 하늘을 ‘APEC 블루’라고 비꼬았다. 손님에게는 씨암탉도 잡아 준다는 중국 고유의 손님접대(하오커 好客)문화가 일시적이나마 수도 베이징을 스모그의 도시라는 악명에서 벗어나게 한 것으로 보였다.
APEC 행사가 끝나면서 그간 중단시켰던 공장이 다시 가동되고 홀짝으로 운행되던 자동차도 밀물처럼 몰려나와 베이징은 다시 스모그 도시로 변했다는 보도를 읽은 적이 있다. 사실 베이징 공기가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가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공항에서 두 시간 거리의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비행기 객창을 통해 바라 본 공항 주변의 대기는 어찌된 일인지 예상과는 달리 소나기가 지나 간 거리처럼 깨끗해 보였다. 비행기에 내리자 마중 나온 지인의 얼굴도 밝다. 모처럼 베이징의 파란 하늘을 보여주어 뿌듯한 모양이었다.
지인은 이러한 하늘이 요 며칠 지나가는 반짝 하늘이 아니고 지난 4월부터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악명 높았던 베이징의 대기가 이제는 ‘스모그 프리’의 베이징 블루가 되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베이징 체재가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세수한 것 같은 베이징의 푸른 하늘을 모처럼 즐겼다. 즐비한 고층 건물과 신록이 잘 조화되어 눈이 부셨다. 가지고 간 마스크는 쓸모가 없어졌다. 베이징 블루를 실감한 며칠이었다.
베이징에 오래 거주하는 지인은 베이징 블루에 대해 몇 가지 분석을 내 놓았다. 우선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의 반부패 드라이브의 효과라고 한다. 중국의 환경관련 공무원들이 부패에 젖어 공장 굴뚝에서 배출되는 매연 등 환경기준에 맞지 않는데도 기준에 맞는 것처럼 눈감아 주어 결과적으로 대기를 오염을 시킨 예가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하수구에 배출되는 오염도 눈감아주고 엉터리로 측정하여 강물이나 호수를 많이 오염시켰는데 이제는 그러한 부패 사슬 구조가 사라져 대기뿐만이 아니고 하천도 깨끗해졌다는 것이다. 관련 공무원이 현지 부패업자와의 결탁이 끊어지게 되어 환경관련 기술과 인력을 선진국에서 조달하여 기술의 수준이 향상된 것이다.
‘대기환경규제강화’로 발전소 제철소 시멘트 공장 등은 반드시 탈질설비 장착의 의무가 부과되어 대기 정화용 촉매필터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이 방면에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한국 업체가 수혜를 받고 있다. 과거 현지 업자와의 결탁으로 한국의 환경 관련 기술이 사용되지 못했는데 이제는 환경 공무원들이 제대로 된 기술을 찾게 됨으로써 한국의 기술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지방정부의 지도자 평가에서 과거에는 ‘경제성장 만능주의’로 경제성장이 가장 높게 반영되고 환경문제는 거의 무시되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환경이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해 APEC 정상회담 후 시진핑 국가 주석이 베이징 블루를 실감하고 APEC 블루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하였고 베이징 당국도 APEC 기간의 성공사례에 고무되어 APEC 블루를 유지할 수 있는 자신 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국몽(中國夢)은 베이징 공기부터’라는 베이징 시민의 소박한 바람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베이징뿐만이 아니라 여타 지방정부 지도자들도 자신의 입신을 위해 그리고 중국의 대외적 이미지 개선을 위해 관내의 공장의 매연가스 배출 등을 직접 챙기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깨끗한 대기를 유지하는데 힘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세 번째는 2018년 평창에 이어 2022년도 동계 올림픽 개최지 후보로 신청한 베이징을 올림픽 실사단이 수시 방문하여 베이징 의 대기를 체크해 온 것도 베이징 블루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베이징은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APEC 때와 비슷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징 주변의 불요불급한 공장 가동을 중단시키고 인공 강우로 미세 먼지를 씻어내는 등 베이징 블루를 만들어 내고 있다. 베이징 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푸른 하늘을 ‘올림픽 블루’라고 비꼰다고 한다. 베이징은 이달(7월31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열리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총회에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경합을 벌린다.
마지막으로 베이징의 대기 순환을 위해 ‘바람 길(風穴)’을 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베이징 주변에 무질서하게 식목 되었던 이른 바 녹색장성(防風林)을 벌목하여 ‘바람 길’을 만들고 베이징의 도시 계획도 ‘바람 길’을 생각하여 건물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베이징은 북쪽과 서쪽이 산으로 막혀 있지만 동남이 열려 황사가 내습해도 동남의 ‘바람 길’로 빠져나갔는데 무질서한 도시 계획으로 동 남 지역에 고층 건물을 지어 옛날부터 내려오던 ‘바람 길’이 막혔다. 전문가들은 베이징은 플라시(排水)기능이 고장 난 양변기처럼 오염된 대기가 제대로 빠져 나가지 못해 스모그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낙후된 굴뚝 산업, 노후 자동차의 배기가스, 세계최대 석탄 사용국 등의 이유로 스모그의 도시 베이징의 대기 오염은 비관적이었다. 심지어 외국인들 사이에는 대재앙을 경계하는 ‘에어포카립스(airpocalypse)’라는 자조적인 신조어도 나왔다. 공기(air)와 종말(apocalypse)의 합성어로 공기오염에 의한 묵시론적인 미래를 강조하였다. 외국인의 탈출 러시가 이어지고 베이징의 미국대사관은 베이징 대기의 수준을 ‘건강에 매우 해롭다(very unhealthy)’에서 ‘건강에 치명적(hazardous)’이라고 경고하여 사람들은 외출 시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한자녀 정책에 의해 독자(one child)를 두고 있는 베이징의 여유 있는 가정(well-to-do families)들은 노우지독(老牛舐犢)의 심정으로 자녀를 공기가 깨끗한 미국 카나다 또는 호주에 조기유학이나 이민을 보낸다는 이야기가 파다하였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 우리가 베이징을 다녀 간 이후에도 베이징 날씨는 맑고 푸른 하늘을 계속 보여주어 베이징 블루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중국 정부는 2017년까지 240조원을 투입하여 미세먼지를 대폭 줄인다는 계획의 보도가 있었다.
또한 중국은 지구 온난화 대책으로 GDP에 대한 이산화탄소(CO2)의 배출 양을 2030년까지 2005년 기준으로 60-65% 감축한다는 서류를 국제연합(UN)에 국제공약으로 제출하였다는 보도도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풍력이나 태양광 등 재생가능 에너지(脫炭素)산업을 육성하는 한편 석탄의 열효율을 높이는 선진기술을 도입한다면 석탄 의존국인 중국의 대기 오염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6월이 되면서 서울 사람들은 메르스 감염의 우려로 서울 공기를 마스크를 쓰고 마셔야 했는데 같은 시기에 베이징 사람들은 메르스 걱정도 스모그 걱정도 없어 마스크가 필요 없는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서울의 미세 먼지의 30-40%는 베이징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니 서울 시민은 베이징 블루에 고마워해야 할지 모른다. 베이징과 서울은 역시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라 베이징 블루는 서울 블루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07.15 인문학 코드로 읽는 한.중.일
인문학의 국제 전도사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경제관계가 두터운 한중(韓中) 사이에 인문학적 교류를 강조하였다. 비즈니스도 중요하지만 한중 양국의 국민들 끼리 ‘사람 사는 방식’을 서로 이해하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다. 인문학의 국제화다.
얼마 전 서울의 어느 모임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강의를 요청해왔다. 내가 외교관 출신으로 특히 중국과 일본 근무를 길게 한 것을 알고 강연제목으로 아예 ‘인문학 코드로 읽는 한.중.일’라고 정해 주었다. 엉겁결에 수락을 해 놓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대기업에서도 기업 경영에서 인문학에 애착을 보이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취업준비생의 운명을 가를 것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휴머니즘이라고 한다. 휴먼(human) 즉 인간을 알자는 이야기로 보인다. 왜 인간인가. 과거 유럽의 중세를 암흑기라고 불렀다. 인간의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신(神)이었다. 신본주의(神本主義) 즉 신이 중심이 된 시대였다. 그 후 학자들이 사람 중심의 문화 즉 휴머니즘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발전시켰다고 본다.
한자문화권에서 ‘인문(人文)’이란 글자 그대로 사람에 대한 무늬(紋)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피부에 새기는 무늬는 문신(紋身)이지만 인문은 마음에 새기는 문심(紋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다. 인문은 마음에 대한 학문이다.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는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지만 의식주 해결을 위한 활동은 몸에 관련되어 인문이 아니라고 본다. 대학에서도 상과(商科)며 공과(工科)는 의식주 해결을 위한 학문이므로 비인문학으로 분류하고 이와 다른 문학 역사 철학(文史哲)등을 인문학으로 분류한다. 몸이 있어야 마음이 있다. 인문학을 제대로 하려면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리베랄한 인문학
나와 인문학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 간 대학이 문리과(liberal arts and science) 대학이었다. 문리과 대학은 리베랄한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리베랄은 무엇인가. 돈에서 자유롭다(liberal)는 것이다. 공대와 상대는 비즈니스 학문이지만 문리대는 비즈니스(돈)와 상관없는 학문이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집안이 먹고 살만한 부유층의 자제가 들어 와서 자유롭게 사색하면서 공부하는 귀족학교가 문리과대학이다. 취직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문리과대를 졸업하면 고등룸펜(失業者)이 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었다.
인문학은 이상을 추구하는 연애와 같다면 비인문학은 현실을 중시하는 결혼에 비유될까. 그래서 문리과대를 졸업한 동문들은 취직하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주로 언론계 교수 등으로 진출하지만 공급에 비하여 수요가 턱 없이 부족했다.
나는 다행히 외교관이 되면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거나 주재하면서 폭 넓은 인문학의 소양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외교관의 경험에서 깊이 있는 인문학은 여행에서 얻어진다는 생각을 많이 해 보았다.
여행으로 얻어지는 인문학의 힘
집을 떠나 여행을 하면 위험한 고비도 수없이 겪는다. 더구나 교통이 나쁘고 치안이 좋지 않은 옛날에는 여행 자체가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위험한 일이었다. 외교관을 ‘디플로맷’으로 부르는 것은 디플로마(diploma 접는 문서)를 휴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디플로마는 위험한 여행이 전제되는 해외로의 출국 또는 해외에서의 입국 증명서였다.
얼마 전에 타계한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는 아시아의 3대 거룡(巨龍)으로 한국의 박정희,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꼽았다. 세 사람 모두 젊은 시절 해외여행을 많이 한 공통점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직을 그만두고 당시 만주국 군관학교에 공부하고 나중에 도쿄의 일본 육사에서도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도 10대에 근검공학(勤儉工學)케이스로 프랑스에서 유학하였고 후에는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요시다 수상은 외교관 출신이라 해외여행 자체가 직업이었다.
나는 30년간의 외교관 생애에 있어서 20년을 해외 공관에 근무하였는데 그 중 중국에서 9년 일본에서 6년 모두 15년을 동북아시아와 관계를 맺었다. 중국과 일본은 한자 문화권과 불교 및 유교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황금 같은 기회를 이용, 중국과 일본에서 일반 서민을 접촉하고 여론 형성자(opinion leader)들과도 어울리면서 그들의 역사와 사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한중일 3국의 공통되는 인문학적 코드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와 사는 방식
첫 임지인 일본 도쿄(東京)의 한국 대사관 근무 시 역사 탐방회를 조직하였다. 역사를 잘 아는 일본인 선생 두 분과 함께 우리 대사관 직원 5-6명이 월 2회 정도 주말에 도쿄 근처 역사의 현장을 찾는 것이다.
도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7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일본을 통일하고 자신의 세력 근거지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에서 집권하여 400년 이상 된 고도(古都)이다. 메이지(明治) 유신의 현장이기도 하여 일본과 한반도와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일본인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20세기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잘못된 배경을 알 수 있었다.
10년 후에는 일본 나고야 총영사관 근무 시에는 현지의 어피니언 리더들과 월 1회 역사좌담회를 가졌다. 당시 KBS방송국의 ‘역사스페셜’ 프로그램 중 한일 양국에 관계되는 내용을 녹화하여 일본인들과 같이 시청하면서 역사 토론회를 가졌다. 10년 전 도쿄에서는 일본역사의 현장에서 일본의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바라보았다면 나고야에서는 한국의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바라본 기회였다. 일본인 참석자는 대개 30-50인 규모였다.
현지 공관장으로서 역사 좌담회를 조직 운영하면서 3년간 34회의 기록을 책자로도 발간 일본 전국 대학과 도서관에 배포하였다. 비교적 객관적인 현장의 한일관계의 기록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중국의 베이징 한국 대사관 근무 시에는 매주 화요일 왕징(望京)의 ‘재중한국인회’ 회관에서 ‘화요(총영사)사랑방’을 개설하였다. 중국진출 한국인과 조선족 동포를 대상으로 한중 문화의 이해를 통하여 한중 인문학적 교류에 필요한 지식을 터득토록 도왔다. 중국에는 비즈니스에도 유상(儒商)이 있고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한다)의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베이징의 주요 대학으로부터 특강 요청의 기회를 이용 중국 대학생과 인문학적 교류를 강화하였다. 한국의 단오제의 유네스코 등록에 대해 당시 중국 대학생들이 잘 못 알고 있는 사항이나 한중 관계에 전반에 대한 솔직한 의견으로 미래 세대의 이해를 넓혀 나갔다.
한.중.일을 관통(串)하는 인문학 코드
나는 일본과 중국에서 현지의 많은 유식자를 만난 경험에서 과거 동일한 인문 코드가 변질되어 같은 어휘라도 나라에 따라 쓰임이 다른 것은 뭔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가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수 천 년 내려오면서 중국이 그려 놓은 무늬(紋)에 한국과 일본이 독창적으로 변형 시킨 것이 오늘의 한중일 삼국의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우선 정종(正宗)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정종은 ‘마사무네’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일본 술(日本酒) 브랜드이지만 중국어로는 원조(元祖)라는 뜻이 있는 보통 명사(또는 형용사)이다. 에도시대 일본 고베(神戶)의 로코산(六甲山) 근처에서 새로운 술을 만든 사람이 브랜드(상표)를 얻기 위해 사찰을 찾았다. 그날따라 정작 스님을 만날 수 없어 스님 앞에 놓인 책의 제목 일부로 보이는 ‘정종(正宗)’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외워 와서 새로운 술의 상표를 정했다는 것이 ‘정종’의 유래이다. 스님 앞에 놓인 책은 ‘정종 조동종(正宗曹洞宗 원조 조동종파)’이라는 불교서적이었다.
일본어에는 외래어로 들어 온 ‘부스’라는 말이 있다. 뜻은 마땅하지 않다는 부정적 말이다. 현대 중국어의 ‘부스(不是 NO)’와 같다. 일본에서는 그 유래를 잘 모르고 쓰기도 하지만 본래 항구도시 나가사키(長崎)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나가사키에 드나드는 중국의 선원들이 현지 일본인과 교류시 마땅하지 않은 것에는 “부스” “부스” 했던 중국어를 일본어에 그대로 들어 와 지금의 형태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도쿄의 우에노(上野)에 홍고(本鄕)라는 지명이 있다. 도쿄대학이 소재하는 학문의 중심지이다. 그 유래가 중국과 관련이 깊다. 이곳의 지명은 ‘창평향(昌平鄕)’이었고 홍고는 창평향의 중심거리였다. 창평향은 중국 산동성 공자가 태어 난 곳으로 곡부(曲阜)의 한 지역이다. 중국의 창평향이 도쿄에 나타난 것이다. 일본 유학의 대가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이곳에 공자를 모시고 이름도 공자의 고향 창평향을 그대로 따왔던 것이다.
황금과 옥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한중일 삼국은 황금보다 옥을 귀하게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태양의 빛깔이 황금색이라 생각하였다.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가 죽으면 태양의 빛깔인 황금 마스크를 씌워 사후 승천하도록 기원했다. 이집트의 황금 숭배 사상이 그리스에서 유럽으로 옮아갔다.
그리스 신화에 미다스 왕은 만지는 것이 모두 황금이 된다. 황금이 얼마나 좋으면 이러한 신화가 나왔을까 싶다. 그리스에서 전래된 황금이 귀하게 되니 스키타이 등 기마민족이 황금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기마민족 만주족이 세운 후금(淸)의 초대 황제 누루하치의 본래 뜻은 황금이다. 청조가 망하고 민국시대에 청조의 누루하치 집안은 한자 성 김(金)씨로 바꾸었다. 기마민족의 후예인 신라의 왕족 김(金)씨의 성도 황금과 관련 된다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신라의 수도 경주의 고분에서 황금관이 많이 출토된 것도 기마민족의 황금숭배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황금의 문화와 옥(玉)의 문화
중국에서는 태양의 색을 백색으로 보았다. 한자의 백(白)이라는 글자는 태양(日)에 비스듬한 햇살이 붙어 만들어 진 글자이다. 중국 태극의 음양(陰陽 낮과 밤)은 흑백이다. 중국에서는 태양이 비추는 낮은 흰색이요 밤은 검은색으로 보았다.
한중일 3국의 보물은 역시 옥이다. 완벽(完璧)이라는 글자가 옥의 온전함을 이야기 하듯 중국이나 한국의 왕이 쓰는 면류관은 옥관이다. 옥이 달린 12줄은 황제의 옥관(帝冠)을 의미하고 9줄은 제후 즉 옥관(王冠)으로 구분한다. 황제는 만세라고 부르는 왕은 천세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일본에서 황금은 보물 보다는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얇은 종이처럼 잘 늘어나는 황금의 성질을 이용하여 황금 종이로 집의 외벽을 장식했다. 교토의 금각사는 황금 종이로 입힌 건물로 오후가 되면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신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일본을 찾아 온 송나라 무역상들은 일본은 황금으로 집을 지을 정도의 황금이 풍부한 나라라고 알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항저우(杭州)에서 만난 송나라 무역상으로부터 일본에는 황금이 돌처럼 굴러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견문록에 기록해 두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탐독한 콜럼버스가 배를 띄운 것은 황금의 나라 일본을 가기위해서였다.
일본은 황금을 중요시하지 않고 옥을 중시했다는 것은 일본 천황이 귀하게 여기는 3종의 신기(神器)에 황금은 없고 옥이 맨 먼저 나온다. 옥(曲玉)은 재력(富)을 상징한다. 다음으로 지식을 상징하는 거울(鏡), 그리고 공권력을 상징하는 칼(劍)이 천황의 3종 신기이다.
중국과 한국에서의 피휘 사상
중국의 황제나 성인(聖人) 공자의 이름(휘 諱)을 기피하는 피휘(避諱)제도가 한국에는 그대로 이어져 왔지만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중국과 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한반도의 여러 왕조들은 중국문화의 입김을 직접 받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바다로 떨어져 있어 자신의 뜻으로 문을 닫거나 열수는 있어도 한반도는 그렇지 못했다.
불교의 관세음보살이 당 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피해 세(世)가 빠지면서 관음보살이 된다. 큰 언덕이라는 대구(大丘)가 공자의 이름자인 구(丘)를 피해 대구(大邱)가 된 것도 같은 이유다. 한반도에서 중국에 따라 경명(敬名)사상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字)나 호(號)를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 왕조 임금들의 이름에 어려운 글자가 쓰이거나 외자가 사용된 것은 피휘 제도를 고려 백성들이 이름 짓는 데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반면에 일본은 조상이나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자를 자신의 이름 속에 넣는 풍습이 있다.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이름자에는 그의 고향 야마쿠치(山口)의 위인(偉人)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의 이름자(晉)가 들어 있다.
한자를 통해 본 고대 중국의 인문지리
한자(漢字)의 발상지가 중국이므로 한자를 통해 과거 중국의 인문지리 상황을 알 수 있다. 동쪽의 동(東)을 자세히 보면 나무(木)에 태양(日)이 걸린 모습이다. 이는 고대 중국은 지금과 달리 숲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인은 아침이 되면 숲속에서 떠 오른 태양을 기억하고 있다. 숲이 많은 고대 중국에는 아프리카처럼 코끼리(象)도 많았던 것 같다. 한자 상(象)은 코끼리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황토 고원을 위시해서 대지가 벌거숭이로 남아 있다. 그 많은 수림이 어디로 갔을까. 고대 중국인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엄청난 크기의 청동제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청동제기는 광물을 녹여 청동을 뽑아내어 만든다. 많은 나무를 잘라서 화목(火木)으로 써야했다. 나무는 자르지만 심지를 않았다. 수림과 함께 코끼리도 사라졌다.
불교의 사찰에는 어미에 반드시 ‘사(寺)’를 부친다. ‘사’를 종교시설로 보지만 본래는 한(漢)나라 시대는 정부의 관청을 의미하는 는 접미사였다. 후한시대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될 때 인도의 스님이 백마에 불경을 싣고 왔다고 한다. 한나라는 불교의 사절을 예우하기 위해 정부의 관청으로 외빈 숙소인 홍로사(鴻矑寺)에 스님 일행을 모셨다.
관청을 의미하는 사의 권위가 좋아서일까. 외래 종교로서 관청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어서일까. 그 후 불교의 사찰에는 반드시 ‘사’를 붙여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생존에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한국과 일본은 연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불교 전래와 함께 그대로 쓰고 있다.
국(國)이란 글자를 자세히 보자. 네모(囗)안에 혹(或)이 들어있다.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혹(或)자는 혹(惑)처럼 항상 뭔가 잘 못되고 있는 분위기다. 본래 국가라는 의미로 방(邦)을 썼는데 한(漢)고조 유방(劉邦)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국(國)자를 만들어 썼다고 한다. 이 글자를 분해해 보면 고대 중국인의 의식을 알 수 있다. 네모(囗)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라는 사상에 따라 국가를 의미한다. 네모 속에 사람(백성)의 입(口)이 있다. 입(백성)을 무기(戈)로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영토 백성 그리고 주권을 지키는 국방력 등 국가의 구성요소가 글자 한 자에 다 들어 있다.
그런데 만들고 나서 보니 국가 안에 항상 미혹(迷惑)이 붙어 있는 모습이 된다. 2000년 전 당(唐)의 무측천(武則天)이 주(周)라는 나라를 세워 중국 최초의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되었다. 여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은 글자를 임의대로 바꾸었다. 그 중에 국(國)자가 들어 있다. 무측천의 생각으로는 나라는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야 하는데 나라 속에 ‘미혹’이 들어 있어 발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무측천은 네모(囗) 속에 ‘팔방(八方)’을 넣어 새로운 ‘국(囗+ 八方)’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20 년간 쓰이다가 무측천이 죽고 주(周)가 멸망하자 무측천이 만든 모든 글자가 자동 폐기된다. 중국과 멀리 떨어져 무측천의 주(周)가 망한 것을 몰랐던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는 지금도 이름 등에서 무측천의 ‘국(囗+八方)’자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회 배지에는 한 때 국회라는 국(國)자가 들어 있었다. 무궁화와 연결시키다 보니 무궁화 속에 혹(或)이 들어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2000년 전 무측천이 우려했던 ‘국’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회가 생산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 국가를 미혹하게 만든다는 글자가 배지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국회 배지에 ‘국회’라는 한글 두 글자를 넣은 새로운 배지를 사용하고 있다.
한.중.일의 한자 조어(造語)
우리가 흔히 쓰는 한자 단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든 것이 많다. 한자는 본래 중국 것이지만 그 글자를 이용하여 근세에 도입된 서양의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 번역어를 만들었다. 한중일 3국에서 서양문화에 대대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의 학자들이 번역의 필요에서 만든 조어가 많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신문 지상에 오르는 한자 단어의 70%이상이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의 학자들이 만든 글자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이나 중국은 일찌기 일본에 유학한 학자들에 의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를 역수입해 쓰고 있는 셈이다.
은행(銀行)이란 글자를 보자. 일본의 학자들은 동양권에는 없는 서양의 뱅크(bank)를 번역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풀어서 뜻이 통하는 다른 언어를 만들었다. 당시 은본위제라 돈 즉 은(銀)을 사고파는 비즈니스(行)를 은행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은고(銀庫)라고 했다지만 고(庫)는 돈을 가두어 두는(stock) 현상만 생각했다. 은행은 돈의 흐름(flow)이 중요하므로 거래의 의미의 행(行)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글자를 ‘은행’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한자 언어는 중국에서 만든 것도 많다. 중국은 명말 마테오 리치 등 서양의 선교사가 들어 와서 당시 라틴어를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기하(幾何)는 라틴어의 ‘geo’를 발음대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을 의미하는 구라파(歐羅巴)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한 것으로 중국 발음으로 읽으면 ‘오우로파’가 된다.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세계지도를 보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세계 지명이 당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되는 번역어의 유래가 중국제인지 일본제인지 한자어의 어순으로 알 수 있다. 중국어의 기본 문형은 영어처럼 ‘주어+ 동사+ 술어(목적어)’로 나열되고 일본어는 우리말처럼 ‘주어+ 술어+ 동사“ 순서가 된다. 한자어의 구성이 전자에 속할 경우 중국제 후자에 속할 경우 일본제(또는 한국제)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금융(金融)은 일본제이다 돈(금)을 융통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중국식으로 융금(融金)이라는 말도 함께 쓴다. 중국식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번역어를 그대로 쓰다 보니 웃지못할 일도 생긴다. 독일(獨逸)이나 낭만(浪漫)의 말은 일본인이 자신들의 발음에 맞는 한자를 찾아 사용한 글자이다. 한자는 발음부호로 글자에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일본의 한자발음과 다른 발음을 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쓰는 것은 맞지 않다. 독일로 쓰지 않고 ‘도이치’로, 낭만이라고 하지 않고 ‘로망’이라는 현지 음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
인문학의 힘으로 뉴 노말(新常態)을 맞이하자
한중일 3국의 역사적 사실 중에 데자뷰 즉 기시감(旣視感)을 느끼는 사실을 발견한다. 중국의 ‘정난의 변’은 명초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54년 후 조선 초기 수양대군이 이것을 벤치마킹하여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러한 삼촌과 조카의 권력투쟁은 7세기 중반 일본에서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임신(壬申)의 난이라고 부르는 텐무(天武)천황이 된 오오아마가 형님인 텐치(天智)천황의 아들 오오토모를 몰아내고 천황이 된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3자매 이야기는 300년 이상의 시공간의 역사를 사이에 두고 비슷하게 전개되어 관심을 끈다. 일본 희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여동생 오치치의 세 딸과 청말 찰리 송(宋)의 세 딸과 운명이 비슷하여 놀라게 된다.(졸고 ‘인문삼국지’의 ‘중국과 일본의 세자매’ 참조)
21세기 한중일 3국은 새로운 시대에 처했다. 이른바 ‘신창타이(新常態)’ ‘뉴 노말’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들은 길 없는 길, 지도에 없는 길을 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새로운 길을 찾아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가야하는 우리들에게는 생각의 근육이 단련되어야 한다. 여기에 한중일 3국의 인문학의 힘이 필요하다.
07.21 대마도 불상과 ‘레이디 인 골드’
최근 ‘일본에서 훔쳐 온 통일신라 불상 반환’이라는 기사와 함께 2012년 10월 사건발생 이후 도난 문화재 관련 한일(韓日) 공방이 출구를 찾는 것 같다. 관계당국은 ‘불상이 불법 유출되었다는 증거가 없는 데다 국내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어 형사소송법에 따라 도난 당시 불상을 점유하고 있던 사람(대마도)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대마도(對馬島 쓰시마)는 부산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섬인데 원시림과 청정한 바다로 한국의 아마추어 등산객이나 낚시 군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한다. 사건 직후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불상도난 사건으로 현지 분위기가 썰렁했던 기억이 난다.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에 가까워 17세기 이후 200년간 조선통신사의 왕래를 통한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와 조선 왕조 간의 한일외교의 현장이었다. 특히 이즈하라(嚴原)의 세이잔지(西山寺)는 임진왜란 당시 종군 외교승인 겐소(玄蘇)가 세운 절로 전쟁 후에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이 곳에서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 등 조선과 외교 활동의 중심으로서 유명하다.
대마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결혼과도 관계가 있다. 고종황제가 환갑나이에 얻어 귀여워하던 덕혜옹주가 일본의 농간으로 대마도 영주의 아들 소 타케유키(宗武志)와 1931년 정략 결혼하였다. 이즈하라에는 덕혜옹주의 결혼 기념비가 있다.
국내 TV 인기 드라마 '징비록(懲毖錄)'에서 겐소와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심복으로 맹활약을 하는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대마도의 초대 영주이다. 요시토시는 크리스찬인 고니시의 딸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자신도 ‘다리오’라는 세례명을 가진 크리스찬 장수였다.
1598년 요시토시는 순천왜성에서 고립된 고니시를 구출하여 이순신 장군이 대승한 노량해전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으나 토요토미(豊臣秀吉) 사후 일본의 내란 상태에 휘말린다.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를 따라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이끄는 동군과 대립하는 서군에 가담하였으나 1600년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패배 고니시와 함께 멸문의 화를 입게 된다.
그러나 독실한 불교도인 도쿠가와는 조선외교에 활용하기 위해 요시토시를 사면하고 불교로 개종시켜 ‘반쇼(万松)’라는 법명을 내린다. 그 후 대마도는 불교가 보편화되어 곳곳에 사찰이 들어서고 불교가 흥성하였다.
섬의 구석구석에 불상을 모신 절이며 신사가 많아 한반도 도래 불상만 130여개가 된다고 한다. 대마도 사람들은 이러한 불상이 ‘왜구에 의한 약탈’이 아니고 한일 간 오랜 문화 교류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2012년 한국의 4인조 문화재 절도단이 대마도의 간논지(觀音寺 세이잔지의 말사)와 가이진(海神)신사에서 각각 관세음보살좌상과 동조여래입상 등 불상 2점을 훔쳐 한국으로 반출해 오다가 붙잡혔다. 이른 바 ‘대마도 불상도난사건’이다. 이 불상은 일본의 국가 및 지방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을 조사한 국내 전문가는 불상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혔다. 그 중 하나는 1330년(고려 충선왕 원년) 충남 서산 부석사에 봉안된 기록이 나와 부석사가 가처분 소송을 해두고 있다. 1370년 전후 서산 지역에 왜구의 출몰이 많아 그때 약탈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고 한다.
유네스코가 1970년에 규정한 ‘문화재 불법 반출 반입에 대한 협약’에 의하면 훔친 문화재는 원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절도범을 처벌하고서도 불상이 약탈 문화재라는 이유로 돌려주지 않아 일본뿐만이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다. 국내 학자들 간에도 찬반 여론 대립되어 돌려주어야 한다는 측과 훔친 불상이라도 우리 문화재가 반환되어 온 것인데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강했다.
이번의 대마도 불상 도난사건으로 대마도뿐만이 아니고 일본 지식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난 해 11월 한국의 또 다른 절도단이 대마도의 불상을 훔치려다 체포된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과거에는 대마도의 사찰에 스님이 상주하지 않아 경비가 허술하여 도난이 용이하였는데 이제는 경비가 심해졌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불상을 훔치려다 덜미가 잡힌 것이다.
우리는 일본에 비해 문화선진국이면서도 16세기 말 임진 및 정유년 등 두 차례에 걸쳐 침략을 받았고, 20세기 초에는 36년간 강점을 당했기에 일본에는 우리의 약탈문화재가 수없이 많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문화재협정) 체결 당시 우리 정부는 4000여점의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1000여점에 불과하였다. 그것도 ‘인도’라는 명목으로 막도장, 짚신, 의류 등 대부분 인사동에서도 구할 수 있는 어이없는 물건들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일 기본조약으로 문화재 환수는 끝난 문제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지만 아직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 수십만 점의 약탈 문화재가 일본의 민간인 소장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문화재 환수는 시간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과제이다.
최근 서울에서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라는 외국 영화가 개봉 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아 알트만‘ 부인이 나치 독일에 의해 약탈된 명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초상‘을 합법적으로 환수해 낸 실화로 근거로 만든 영화이다.
이 초상화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전성기 대표작으로 알트만 부인의 숙모인 아델레 의 관능적인 여성미와 금박(金箔)을 이용한 현란한 색채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500억 원에 상당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초상화의 하나로 알려진 이 그림은 비엔나 미술관에서 ’레이디 인 골드‘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1940년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알트만 부인이, 열정과 정의의 변호사와 함께 8년에 걸쳐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숙모의 초상화 ‘레이디 인 골드’ 환수에 성공하는 해피 엔딩 스토리가 진한 감동을 주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비엔나의 모나리자‘라고 할 정도로 아끼는 그림이지만 나치 치욕의 역사를 외면할 수 없고 약탈 물건은 돌려주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인의 양심이 국보급 초상화를 원 소유주의 가족에게 돌려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 많은 시사점이 있었다. 우리는 문화재 환수에 감정적인 접근보다는 장기적으로 문화재 환수관련 전문 변호사를 육성하여 끈질기게 법적 접근을 계속 한다면 약탈 문화재를 합법적으로 환수해 올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빼앗긴 것을 다시 되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알트만 부인의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07.29 시진핑 주석이 만난 조선족
베이징 대사관에 근무할 때 가장 출장을 자주 간 곳은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사는 연길(옌지 延吉)이였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주도(州都)인 연길에는 ‘좋은 일이 길게 이어 진다’는 뜻이 있지만 옛날에는 이곳이 연초(煙草)의 집산지로 ‘연집(옌지 煙集)’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초 이름을 미화하여 같은 현지(중국)발음의 ‘옌지’가 되었다고 본다. 지금도 연길의 담배공장에서 생산하는 ‘장백산’은, ‘중난하이(中南海)’ ‘홍타산(紅塔山)’과 함께 중국 최고급 담배의 하나로 유명하다.
연길에 가면 인근의 용정(룽징 龍井)을 가보게 된다. 용정에는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고 그가 공부한 대성학원이 있다. 그리고 해란강(하이란장 海蘭江)이 흐른다. 해란강은 백두산에서 흘러나와 화룡(허룽 和龍)시와 용정시를 거쳐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용정의 비암산(琵岩山) 고개 마루에는 옛날부터 정자 모양의 큰 소나무(一松亭)가 한 그루 있었다. 일본강점시대 굽이굽이 흐르는 해란강을 바라보면서 독립투사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일본군이 사격 연습하듯 총을 쏴 수백년 된 소나무를 죽였다고 한다. 1991년 이 곳에 진짜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를 다시 심어 지금의 일송정이 되었다. 일송정과 해란강을 보면 우리 민족 누구나 같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얼마 전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취임 후 처음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방문하였다. 그는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족 박물관을 먼저 찾아 조선족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화룡시 조선족 마을에서 ‘붉은 태양이 변강을 비추네(紅太陽照邊疆)’라는 노래에 맞추어 박수를 치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산시(陝西)성 출신으로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시골에서 당서기를 한 시진핑 주석은 젊은 시절 즐겨 듣던 이 노래의 해란강변을 한번은 꼭 와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청산녹수에 무지개 비끼고
백두산(장백산)기슭에 과수나무 숲을 이루어
해란강변의 벼꽃(稻花) 향기 그윽하구나
시진핑 주석은 벼꽃 향기 그윽한 해란강변에 온 감회를 털어 놓으면서 전통의상을 한 조선족과 함께 온돌방에서 양반다리(盤腿而坐)를 하고 즐겁게 담소하였다. 연해(沿海)지역에 비해 경제가 낙후된 데다가 최근 북중(北中)관계의 경색으로 지역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조선족 자치주에 대해 국가 지도자로서 친민(親民)활동의 일환으로 보인다.
중국은 ‘단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한족(漢族)이 92% 차지하고 나머지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8%밖에 안 되지만 거주지역은 중국 전체의 63.7%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우리 동포인 조선족(朝鮮族 Korean)은 192만 명으로 55개 소수 민족 중 14번째이다. 조선족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운 동북 3성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 많은 곳이 지린(吉林)성으로 122만 정도가 살고 있고, 헤이룽장(黑龍江)성에 45만, 랴오닝(遼寧)성에 25만 정도의 통계가 있다. 지린성 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80만이 집중되어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의 급속 발전에는 한국어와 중국어(雙語 bi-lingual)에 능통한 조선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중국 진출 한국 기업이 짧은 기간에 언어와 문화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이 도왔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이 부러워했던 것도 조선족의 존재였다. 사실 한국기업이 활동하는 베이징 텐진 상하이와 산둥성에 많은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역사는 오래된다. 임진왜란 때 명군을 끌고 원정에 나선 이여송 장군의 아버지 이성량은 자신이 조선족 후예임을 밝힌 적이 있다. 누루하치가 후금(청)을 건국할 때에도 포로로 납치했거나 현지에 살던 많은 조선족을 영입하여 팔기군(八旗軍)의 군사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청군에 편입된 조선족이 명군과의 주요 전투에 무공을 세워 청군의 중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군이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명을 멸망시켰지만 불과 수백만의 만주족으로서는 광활한 중국을 다스릴 수 없었다. 모든 만주족을 동원하고서도 모자라 청에 우호적인 한족(漢族)을 등용하여야 했다.
만주족이 새로운 대제국 건설을 위해 베이징 등 중국 본토로 떠나버리자 그들이 살던 지역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발생하였다. 청조는 만주지역을 성역화하고 한족(漢族)의 이주를 금했다. 그러나 강폭이 좁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한(韓)민족의 이주는 막을 방법은 없었다. 1869년 전후하여 한반도 북부에 대흉년이 들자 조선의 농촌에서 남부여대하여 두만강을 건너 만주지역(間島)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조가 쇠퇴하고 이 지역에 러시아인의 진출이 늘어나자 청조는 이를 막는 방책으로 1885년부터 한족의 이민금지를 철폐한다. 마침 산둥성에 대가뭄으로 흉년(기근)이 들어 이곳 사람들이 대거 바다를 건너고 요동반도를 거쳐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를 ‘틈관동(추앙관둥 闖關東 산해관 동쪽으로 진출하다)’이라고 불렀다. 한반도의 조선인도 청의 이민해제로 두만강 건너 간도에 이어 압록강 건너 서간도(西間島)에 자리를 잡은 조선인이 늘어났다.
20세기 초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점되기 전에 10만정도의 조선인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면서 만주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국을 건국한 일본은 인구 밀도가 낮은 이 지역에 식민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본의 가난한 농민과 함께 한반도의 조선인도 이주를 권장했다. 당시 일제에 의해 농토를 탈취당한 농민들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만주지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두만강 건너 간도 지역(吉林省)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어, 경상도 사람은 주로 헤이룽장성에, 전라도 사람은 주로 랴오닝성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부쳐 놓은 것처럼 한반도의 북쪽 사람이 만주지역의 남쪽에, 한반도의 남쪽 사람이 만주지역의 북쪽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60만 정도의 조선인이 만주지역에 이주하였다고 한다.
춥고 황량한 만주벌판에 근면한 조선인은 물을 끌어 와 벼농사를 지었고 제철소 탄광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한편 조선인의 이동에 맞추어 항일 독립투사들의 무대도 이 지역으로 옮겨 역사에 빛나는 항일 투쟁사가 여기서 일어난다.
예로부터 만주지역에 사는 조선인은 1) 강한 민족의식 2) 씨족의 연대감 3) 내향적 흡인력 4) 역경에 저항 심리가 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중 가장 교육열이 높은 민족이 조선족이라고 한다. 언어 면에서 보면 한국어와 중국어의 2중 언어는 당연하고 한국어와 문법 체계가 유사한 일본어 숙달자도 많아 3개의 언어 구사자도 많다.
1945년 한반도는 해방과 함께 일본이 물러가고 만주지역의 조선인이 돌아왔지만 국내 기반이 없는 조선인은 중국 현지에 계속 살게 되었다. 중국도 한동안 국민당과의 내전상태로 조선족에 대한 정책을 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4년의 내전 끝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1949년 10월1일 신 중국이 건국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날을 기해 그 이전부터 거주한 조선인에게 중국 국적을 부여하여 조선족으로 편입하고, 그 이후부터 거주한 자는 당시 신중국과 수교한 북한의 교민(朝僑)으로 인정하여 북한의 국적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 후 1952년 8월8일 ‘소수민족구역 자치 실시요강’이 통과되고 9월3일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되면서 조선족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산해관을 기점으로 그 이북에 거주하면 조선족으로 인정하고 그 이남에 거주하면 거류증을 발급, 조교(朝僑)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연길에서는 매년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된 날인 구삼절(9.3절)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는데 금년은 63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심각한 인구 감소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자치주 지정기준은 소수민족의 인구비율이 30%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연변의 조선족은 한국을 비롯하여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로 떠나 연변 자치주에는 전체 인구 227만의 35% 수준인 80만에 불과하며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번의 시진핑 주석의 연변 자치주 방문 목적이 ‘조사연구와 고찰(調硏考察)’이므로 이에 대한 해결 방안도 찾을 것으로 생각된다.
08.05 미완(未完)의 ‘암살’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이 화제다. 일제 강점 시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조선사령관)에 대한 암살을 다룬 영화이다. 우리가 역사에서는 실제 경험해보지 못한 1930년대 경성(京城 서울) 한복판에서 결혼식을 무대로 집단 암살을 영화로 만들어 냈다. 평소 흔히 듣는 ‘암살’이란 두 글자의 의미가 영화를 통해 무겁게 닥아 와서 새삼스럽게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정치적 사상적 입장 차이를 동기로 해서 비합법적 방법으로 비밀리에 살해하는 행위. 영어로는 assassination. 이는 11세기 페르시아에서 소수정예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이들에게 마약의 일종인 하시시(hashishin)를 주어 정부요인을 암살한 것에서 유래’
일제가 1905년부터 한반도를 강점하기 시작하면서 해방된 1945년까지 우리나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초대통감 이후 2명의 통감과 9명의 총독, 그리고 14명의 조선사령관이 거쳐 갔다. 독립투사의 1급 암살 타깃은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의 수뇌부였지만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이후 10년만인 1919년 9월, 남대문(서울)역에서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1858-1936)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강우규 의사 외는 알려진 것이 없다.
사이토 마코토는 부임 첫날 강우규 의사의 수류탄 투척 암살을 피하여 1927년까지 총독 직을 수행하였고 2년 후 5대 총독으로 다시 부임하였다가 1932년 일본의 내각총리로 영전하였다. 그러나 1936년 쿠데타(2.26사건)를 일으킨 일본의 청년장교들에 의해 자택에서 40여발의 총탄을 맞고 처참하게 살해된다
최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꿈을 꾸고 그 꿈을 만들어 대중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감독”이라고 했는데 그는 오래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이 결성한 한인 애국단원이 중국 땅이 아닌 조선의 경성에서 암살의 성공 드라마를 실현시켜 보는 꿈(영화)을 꾸었는지 모른다. 최 감독은 애국단원이 하지 못한 ‘미완의 암살’을 영화에서는 완벽하게 완성시켰다.
최 감독의 시나리오에서 1933년 암살시켜야 할 조선사령관은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육군중장이었던 것 같다. 당시 총독은 우카기 가즈시게(宇垣一成). 영화에서는 허구 인물 가와구치 마모루(川口葵)사령관이 암살된다. 실제 가와시마 중장은 영화와 달리 조선군사령관 직을 무난히 수행한 후 육군대신으로 영전된다.
최 감독이 꿈꾼 ‘암살’은 007 영화처럼 모두 시원하게 완수된다. 가와구치 사령관과 친일 기업인 강인국 그리고 친일파 변절자 염석진까지. 최 감독의 이러한 꿈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성공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쾌거를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당시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윤 의사의 의거를 극찬하였다. 그는 많은 중국군을 희생시키고 상하이를 무단 점령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살해하고 요인들에게 중상을 입힌 윤 의사의 의거를 누구보다 기뻐했다. 이 때 장 총통의 뇌리에 각인된 ‘한인(韓人)은 살아있다’는 강한 인상이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강력히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상하이 홍커우(지금은 루신)공원에 가 보면 윤 의사를 호를 딴 매헌(梅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정자가 있다. 정자 내에는 1932년 4월 29일 거사 당시 사진이 진열되어 있다.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에 참석한 단상의 요인들이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를 제창하는 사이 윤 의사가 던진 물통 폭탄이 터졌다.
단상의 요인들이 국가를 부르느라고 급히 몸을 피하지 못해서인지 타깃이 되었던 시라가와 육군대장은 다음 날 죽고 나머지 단상의 요인들은 겨우 목숨은 구하였으나 다리를 잃고 눈을 잃는 중상을 입었다. 그들은 일본의 영웅이 되었지만 일본에 의해 노예상태가 된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감을 되새기면서 불편한 몸으로 여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윤 의사의 ‘미완의 암살’로 인해 살아남은 그들은 누구인가.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 만(灣)에 정박한 미국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 문서에 사인하려고 한 중년 노인이 10kg 무게가 나는 의족의 다리를 쩔뚝거리고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다. 그는 1932년 4월 천장절 행사의 단상에서 윤 의사가 던진 폭탄의 파편이 우측 다리를 관통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였다.
직업외교관이던 시게미쓰는 그 후 소련 및 영국 대사를 거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제2기 외상(1943.4-1944.7)이 된다. 제1기 외상은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1941.12)을 승인한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1882-1950) 외상이었다. 그는 정유재란 당시 정읍에서 납치되어 간 도공(陶工)의 후예(한국명 朴茂德)였다.
시게미쓰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여 전범은 피할 수 있었으나 소련대사 시절 악연으로 소련 검찰관의 주장이 관철되어 A급 전범이 된다. 소련대사가 된 것도 극히 우연이었다. 시게미쓰는 당초 주독대사로 내정되었는데 외무성에서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를 도와준다고 현안이 별로 없는 소련대사로 임명한 것이다.
시게미쓰는 패전 직후 하가시구니노미야(東久邇宮) 내각의 외상(1945.8-1945.10)이 된다. 1945년 9월 항복문서에 일본 대표로서 서명을 하기위해 미주리호에 오른 것이다. A급 전범이 된 시게미쓰는 스가모(巢鴨) 감옥(도쿄 이케부쿠로 선샤인 빌딩 자리)에서 복역하다가 석방되고 공직 추방에서도 풀려 나 정치 활동을 통해 개진당(改進黨)의 당수, 민주당 하토야마 내각의 부총리 겸 외상이 된다.
시게미쓰 전 외상이 최근 한국 언론에 보도 되었다. 시게미쓰가 롯데 그룹의 신동주-동빈 형제의 어머니인 일본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의 외삼촌이고 초창기 롯데가 사업을 키운 것도 시게미쓰가 뒤를 봐 주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롯데 측에서는 시게미쓰 전 외상과는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다고 부인했다.
윤 의사의 폭탄을 맞은 단상의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1877-1964) 해군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그는 함대사령관으로서 양쯔강(長江)에서 함포사격으로 시라가와 육군을 지원했다. 노무라는 다음해 해군대장으로 승진하고 1937년 퇴역한다. 퇴역 후 귀족학교로 불리는 학습원의 원장에 취임한다.
1939년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일본 내각총리가 된다. 당시 총리 후보로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가 물망에 올랐지만 일본 남방군의 총사령관으로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이유로 다음 순번인 아베 총독이 총리가 된 것이다.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초대 조선총독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아들이다.
아베 총리는 정권 발족 직후는 외무대신을 겸임하였으나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국제법 전문가인 노무라 원장을 외상으로 발탁한다. 그러나 미일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1940년 11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내각은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과 교우관계인 노무라 전 외상을 주미 대사로 임명한다. 노무라 대사는 주미 대사관의 해군무관으로 근무할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성 차관이었다.
일본은 노무라 대사를 통해 미국과 교전을 피하기 위해 막판 교섭을 벌리고 있었으나 미국의 헐(Cordell Hull 1871-1955) 국무장관은 강경하였다. 후에 국제연합을 결성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헐 장관은 미국의 최장수 국무장관이다. 이른 바 ‘헐 노트’라고 불리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은 1) 일본의 중국에서 전면철수 2) 독일 이태리 일본의 3국 군사동맹 파기 3) 중국의 충칭(重慶)정부 이외 정부 부인이었다.
일본이 이를 무시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고노에 내각은 구루스 사부로 (來栖三郞 1886-1954) 전 독일 대사를 미일교섭담당 특별대사(제2의 대사)로 파견 노무라 대사를 돕게 한다. 해군 출신의 노무라 대사는 영어가 부족한 반면 구루스 대사는 미국통의 직업외교관으로 미국에 오래 근무하였고 부인도 미국인이라 미국에 지인도 많았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구루스 대사가 미국이 파기를 바라는 3국 군사동맹의 서명자로 기피 인물이었다.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윤 의사의 거사에서 왼쪽 다리를 잃은 우에다 겐기치(植田謙吉) 육군중장은 가와시마( 영화에서는 가와구치)가 육군대신으로 영전한 후 그 후임 조선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34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 관동군 사령관이 된다.
단상의 무라이 구라마쓰(村井倉松 1888-1953) 당시 상하이 총영사는 얼굴과 신체에 수많은 파편을 맞았다. 그는 시드니 총영사 타이랜드 공사로 영전하고 퇴직하였다. 전쟁 후 고향 아오모리(靑森)현의 하치노헤(八戶)시의 시장을 역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원훈(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원흉(元兇)이다.”, “한일 역사를 넘나들면 영웅(英雄)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된다.” 김종필 전 총리의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일제 강점 시 독립투사들의 암살 대상은 일본의 대단한 영웅들이었다. 따라서 그 만큼 암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암살’이 개봉 2주 만에 700만의 관객을 돌파하였다고 한다. 이제 8월이다. 광복 70주년이 되는 달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을 바친 독립투사들의 무력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암살’은 이번 8월에 잘 맞는 영화 같다.
08.12 ‘베이징 올림픽’ 다시한번!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역대 올림픽 사상 여름과 겨울올림픽을 모두 개최하는 첫 도시가 된다. 올림픽의 그랜드 슬램이다. 2008년의 하계올림픽(夏奧)에 이어 2022년에 동계올림픽(冬奧)의 개최지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구미(歐美)의 선진국들이 하계와 동계 올림픽을 치룬 경험은 있지만 한 도시가 두 행사를 모두 개최한 예는 없었다.
지난 7월31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토마스 바흐 위원장이 “베이징“ 하면서 ‘베이징(BEIJING 2022)’이 표기된 카드를 보여 주자 베이징 올림픽 유치팀은 기뻐서 펄쩍 펄쩍 뛰었고 베이징은 완전 축제 분위기이다.
4년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당시 자크 로그 IOC 위원장이 “평창” 하고 부를 때 한국인 모두가 잠시 숨이 막혔던 감동을 13억의 중국인이 느꼈을 것 같다. 이번의 투표 결과 베이징 (44표)은 라이벌 도시 알마티가(40표) 보다 근소한 표차로 승리하였기에 중국의 흥분은 더했다. 평창의 경우 라이벌이었던 독일의 뮌헨이 얻은 25표보다 2배반 이상인 63표를 얻은 압도적 승리와 비교된다.
더반에서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아니고 뮌헨이 선정되었다면 뮌헨은 독일이 통일된 후 처음 개최되는 올림픽이 됨과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여름과 겨울올림픽을 모두 개최하는 첫 도시가 될 뻔 했다. 뮌헨은 1972년 9월 하계올림픽이 개최되었으나 이스라엘 대표단에 대한 검은 구월단의 테러로 피로 얼룩진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뮌헨의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이었던 토마스 바흐는 2013년 9월 브라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8년 임기(2013-2021)의 제9대 IOC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바흐 위원장은 이번 쿠알라룸프르 총회에서 베이징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함으로써 뮌헨이 이루지 못한 꿈을 베이징이 이루게 해 준 셈이다.
베이징은 부드러운 이미지의 류옌둥(劉延東 여) 국무원부총리를 단장으로 하고 농구 스타 야오밍(姚明) 등을 내세워 2022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동계올림픽 로고도 동(冬)을 이용하여 2022을 숫자를 겨울과 연결하여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의 로고가 경(京)을 육상선수로 형상화한 것과 유사하다.
평창의 3수와 달리 단번에 유치한 베이징의 운이 좋았다. 당초 유럽의 노르웨이 오슬로, 스웨덴의 스톡홀름 등이 개최신청을 하였고 아시아에서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가 신청하였다. 더구나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눈의 나라로 전통적인 겨울 스포츠 강국이다.
대륙 안배를 중시하는 IOC로서는 2018년 평창이 개최지로 선정되어 동북아시아에서 연속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어려워 보였다. 더욱이 2020년 도쿄가 하계올림픽이 열릴 예정이므로 동북아시아에서 2년 마다 동계-하계-동계 올림픽이 개최되는 진기록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변(異變)이 일어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등 유럽국가가 시민들의 미지근한 반응과 재정상의 이유로 유치를 포기한 것이다. 올림픽의 인기가 높지만 유치 후보도시의 납세자로서는 개최비용이 문제다. 3주간 잔치를 위해 수년간 갚아야 할 부담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최근 미국의 보스턴이 2024년 하계올림픽 유치를 포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은 두 도시는 베이징과 알마티이다. 알마티는 1997년 아스티나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의 수도로 기본 인프라가 잘 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텐산(天山)산맥의 기슭에 위치한 눈(雪)의 고장이다. 선수들이 무한한 자연설로 경기를 할 수 있다. 4년 전에는 동계아시안게임의 개최지로 시설의 70%가 이미 준비된 후보도시였다.
알마티는 모든 경기시설이 반경 30km 이내 위치하고 있으며 겨울 스포츠의 자연 환경을 제대로 갖춘 동계올림픽의 최적 개최지로 선전하였다. 알마티 홍보 문구도 베이징을 겨냥하여 “동계올림픽답게( Keeping It Real)"였다.
반면에 2008년 하계올림픽을 개최한 베이징은 동계올림픽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분산개최가 불가피하다. 도시 종목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이스하키와 피겨스케이트 및 스피드스케이트 등 빙상 종목은 베이징 시내에서, 스키 등 설상종목은 베이징에서 60 km 밖의 옌칭(延慶)과 160km나 떨어진 허베이(河北)성 장자커우(張家口)에서 개최한다는 것이다. 장자커우는 산이 별로 없고 겨울에는 춥기만 하지만 건조해서 눈이 별로 오지 않는다. 인공눈으로 스키장을 채울 수밖에 없다.
베이징은 떠오르는 중국의 수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도시인데다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영상 메세지를 통해 정부의 확고한 지지를 보증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베이징 유치단은 베이징에서 장자커우까지 고속철도를 부설하여 선수들의 이동 거리를 50분 이내로 줄이겠다고 약속하였다. 물론 고속철 부설은 올림픽과는 별도로 국가 예산에서 충당한다는 것이다.
베이징의 유치단은 바흐 위원장이 제창한 ‘올림픽 아젠다 2020(기존시설 활용으로 예산절감)’에 따라 개최비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인기를 끌었던 새 둥지 모양의 메인 스타디움( Bird Nest 鳥巢)에서 개폐회식을, 각수(角水)모양의 국가 수영센타(Water Cube 水立方)에서 빙상경기를 한다는 것이다. 2008년 하계올림픽 때 400억불을 투입 과다 투자로 비난을 받았던 시설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중국의 약재에 동충하초(冬蟲夏草)가 있다. 겨울에는 벌레이던 것이 여름에는 버섯으로 변한다. 겨울과 여름의 정수(精髓)가 하나의 약재에 들어 있으므로 명약이 된 것이다. 베이징 유치단은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을 수도 베이징에 모두 담아 보자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동계아시안 게임을 열었던 눈의 고장 하얼빈이나 장춘이 아니고 눈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베이징을 선택하였다. 하계올림픽은 대도시에서, 동계올림픽은 덜 유명하지만 눈이 많은 작은 도시에서 개최하는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다.
올림픽 유치에는 항상 인권(human rights)문제가 제기된다. 인권문제에 대해 서방세계의 점수는 짜다. 라이벌 국가인 카자흐스탄의 경우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독립이후 25년 이상 장기집권의 독재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임기는 2020년이 되어야 끝나게 된다. IOC 위원들은 카자흐스탄의 인권 상황이 중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뉴욕 타임스의 시사만평에 시 주석의 얼굴을 한 스키어가 2022년 동계올림픽을 향해 활강(downhill)하고 있는데 인권 운동가(human rights activists)가 중국을 견제하고자 따라 내려가다가 나무에 부딪쳐 낭패하는 모습을 그려져 있다.
또 하나의 걸림돌은 베이징의 악명 높은 스모그이다. ‘올림픽 블루’를 만들기 위하여 대기 오염을 줄이는 작업이 계속되어 왔고 올림픽 실사단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푸른 하늘을 만났다고 한다. 베이징은 계속해서 미세먼지 농도를 일정 수준이하로 낮출 것을 약속하였다. 인공설 제조에 의한 환경문제도 거론되었지만 베이징의 환경 개선 의지를 믿고 개최지로 선정한 것 같다.
중국은 2022년 동계올림픽 유치로 국위선양은 물론 최근 침체되고 있는 경기부양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인근 허베이성과 공동 개최함으로써 베이징-텐진-허베이성(京津冀)의 인구분산과 수도권 정비를 위한 인프라 투자의 명분을 얻게 된다. 겨울에 눈이 많은 인구 3억의 동북지방의 겨울스포츠 보급에도 촉매제 역할을 하여 관련 산업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2022년은 중국공산당 창당(1921.7)의 100주년이 되고 샤오캉(小康 중산층)사회가 되는 의미 있는 해로, 시 주석의 임기 마지막이 되는 해 이기도 하다. 시 주석이 자신의 임기 중에 동계올림픽을 유치 개최함으로써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인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시킨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2022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인근 국 중국의 베이징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시차 부담 없이 경기할 수 있는 우리 선수들에게도 희소식이지만 가장 기뻐한 곳은 강원도 평창이라고 한다. 평창이 기뻐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말한다.
1) 평창 올림픽에 많은 요우커(遊客 중국인관광객)의 입장이 기대된다. 동계올림픽에 관심이 높아진 요우커들이 춘제 연휴를 이용 평창으로 몰려들 것으로 본다.
2) 평창은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 외국 선수들의 전지 훈련지로 적합하다.
3)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 후 경기 시설을 중국 선수들이 기록 향상을 위한 훈련지로 활용 가능하다.
4)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설상(雪上) 경기장 상황이 나쁠 경우 ‘아젠다 2020’에 따라 종목 일부를 인근 국 분산 개최도 가능하므로, 평창은 이에 대해 기대를 할 수 있다.
5) 한중(韓中) 공동으로 꿈나무 청소년을 위한 ‘평창-베이징’을 잇는 동계종목의 공동 프로그램 운영 등이다. 한중관계는 어느 때보다 좋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과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협력하여 전무후무가 될 4년 터울의 동북아시아 두 개의 올림픽이 ‘윈.윈’이 되도록 이끌고 가야한다.
“깨끗한 눈과 얼음에서 즐거운 만남을(Joyful Rendezvous Upon Pure Ice and Snow)"는 베이징의 유치 슬로건이다. 앞으로 7년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은 2022년까지 ‘깨끗한 빙상과 설원 그리고 맑은 대기(大氣)까지’ 만들어 낼 것으로 세계인들은 믿고 있다. ‘어게인!’ 베이징 올림픽이 기대된다.
08.19 전후 70년과 자이니치(在日)
직업외교관은 대개 3년을 주기로 가족과 함께 새로운 임지에 부임한다. 임지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은 현지에서 사는 해외동포(overseas Koreans)들이다. 해외(재외)동포에는 우리 국적을 유지한 상태로 현지에서 영주권을 얻어 장기 거주하는 재외국민(한국인)과 우리 민족이지만 현지 국적을 가지고 사는 한국계 동포(Korean diaspora)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세계 각국에 우리 해외동포 700만이 흩어져 산다. 흔히들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그리스어인 ‘디아스포라’는 민족 집단이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파종되어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의미이다. 민족이산이다. 우리의 민족 이산은 7세기 신라가 중국(唐)과 동맹을 결성 한반도의 백제와 고려(장수왕 이후 고구려를 고려로 고침)를 멸망시켜 나라 잃은 유민들이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로 이주해 간 것이 그 시작으로 본다.
중국 베이징 인근에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보이고 일본에도 고마(高麗) 구다라(百濟)라는 지명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이후이다. 12세기는 몽골 침략으로 그리고 16세기 말에 와서는 일본의 두 차례(임진년. 정유년)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우리 민족이 포로로 끌려갔다. 포로들은 현지에서 강제 결혼 등으로 동화되거나 일부는 이태리 등 유럽으로도 팔려갔다고 한다. 특히 일본은 우수한 도공(陶工)을 집단으로 납치하여 도공마을을 만들어 놓고 도자기를 제조 수출까지 하였다.
일본 침략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17세기 누루하치의 후금세력이 다시 두 차례(정묘년. 병자년)침입하였다. 백두산 근처에 유목 생활을 하던 여진족이, 조선과 중국(明)이 일본의 침략전쟁에 매달려 있는 기회를 이용, 부족을 통일하고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한 것이다. 조선에 침입한 후금도 수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가 고급 인력으로 활용하였다.
근세에 와서 일본의 한반도 강점으로 다시 민족이동이 시작된다. 그 결과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수많은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들은 일제 강점 시 ‘조센진(朝鮮人)“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자이니치(在日)‘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스탈린에 의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카레이스키‘ 또는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나는 일본의 도쿄 대사관과 나고야의 총영사관 등에서 6년을 근무하면서 자이니치에 대한 관심이 가장 컸다. 우리가 말하는 자이니치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이후 이주한 사람을 말하지만, 일본에서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백제의 멸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 한일관계가 어려워져 도쿄 시내 자이니치가 모여 사는 지역에서 ‘조선인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혐한시위를 하고 있다. 현재의 일본이 7세기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자이니치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나라라는 주장에 의하면 먼저 온 자이니치가 뒤에 온 자이니치 보고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일본에는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처럼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계와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계가 있다. 자이니치는 한국 국적의 교민뿐만이 아니라 조총련소속의 동포들도 일컫는다. 자이니치는 ‘자이니치 칸코쿠진(在日韓國人 민단계)’ ‘자이니치 조센진(在日朝鮮人 조총련계)’을 줄인 것이다. 고대의 자이니치는 모두 동화되어 오늘의 일본을 이루었으니 근세 일본의 자이니치 역사는 1905년 을사늑약이후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이 성립한 후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일시 자이니치로 불렀지만 1910년 한일 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지자 대한제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던 자이니치는 모두 일본제국 국적으로 바뀌어 한동안 자이니치는 없었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하게 되고 한반도에는 한국과 북한이 각각 독립국가가 됨에 따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다시 자이니치라는 이름이 붙는다.
해방 직후 일시적이나마 자이니치는 200만에 달했다. 한반도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꾸준히 일본 열도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다. 1910년 이후에는 유학생이 많았고 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한반도의 경제가 나빠짐으로써 돈을 벌기위해 중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많았다. 특히 선진 사회였던 일본에 많은 한반도인이 건너가 1930년대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거대한 중국 대륙에 전선(戰線)을 펼친 일본은 수많은 젊은 남자를 징병하여 중국으로 보내야 했으므로 일본 노동시장의 인력부족 현상이 발생한다. 일제는 한반도의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였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자 장병과 근로자의 만성부족으로 식민지하의 조선의 젊은 남자를 강제로 징병 또는 징용해 갔다. 젊은 여자들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끌려갔다.
전후 일본정부는 전쟁이 끝나자 해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600만 이상의 일본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자이니치를 본국으로 보내야 했다. 일본정부는 비용을 부담하면서 한반도 출신을 한국으로 보냈다. 당시 140만 정도가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라든지 한반도의 정세 불안 등을 이유로 귀국하지 않은 60만의 자이니치가 남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과거 한국으로 돌아 온 사람들 중에는 전란을 피해 밀항선을 이용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고 하였다.
1955년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남북한의 대립과 함께 자이니치 사이에서도 민단(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과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결성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에 대한 보호차원에서 ‘자기나라에 귀국하지 않고 더군다난 일본으로 귀화하지도 않는 사람은 보호할 이유가 없다’면서 차별 대우를 유지하여 자이니치의 귀국을 암암리 종용하고 있었다.
일본은 골치 아픈 자이니치를 조금이라도 밀어내기 위해 북한과 협상하여 1959년부터 1962년까지 3년에 걸쳐 자이니치를 집중적으로 북송시키고도 1984년까지 꾸준히 이어져 현재 10만 정도의 자이니치가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남아 있는 자이니치에게 1) 지문날인 2) 외국인 등록증 상시 휴대 3) 해외여행 시 재입국허가 4) 강제퇴거 제도 등 차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한국정부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차이니치에 대한 일본의 차별 정책을 비난하고 외교적 노력을 기우렸다. 1991년 1월 드디어 한국 정부는 일본과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향상 및 처우개선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어 자이니치에 대한 지문날인 철폐, 국공립 교원 임용기회와 지자체 공무원 임용기회를 획득토록 하였다.
민단도 어려운 한국 경제를 위해 여러 가지로 지원사업을 아끼지 않았다. 민단은 도쿄의 대사관 부지를 포함 일본 내 총영사관 청사 및 관저 등 우리 공관의 대부분 부지와 건물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국내 자연 재해 등 어려움이 있을 때 성금을 모아 기부하기도 하였다.
자이니치 중에는 ‘올드 카머’와 ‘뉴 카머’라는 말이 있다. 1965년 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그 이전부터 살던 자이니치는 ‘올드 카머’로 특수 영주자격을 가지고 있으나 국교정상화 이후 새로운 여권에 입국비자를 받아 들어 온 ‘뉴 카머’는 일반 영주자격을 가진다.
북한이 경제실패와 핵.미사일 위협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조총련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2014년 말 통계에 의하면 전체 자이니치 중 민단계는 45만이나 조총련계는 민단의 10%인 4만 5천 여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 8월14일 발표된 아베(安倍晉三) 일본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는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역대 내각의 입장을 ‘흔들림 없이’ 계승하겠다는 것에 주목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지난 수년간 과거사를 둘러 싼 한일 갈등이 불완전하나마 봉합될 전망이다. 그 사이 어려운 입장에 있던 자이니치로서도 안도가 될 것 같다. 일본에 다시 한류열풍이 불어 도쿄의 신오쿠보(新大久保) ‘코리아타운‘이 붐비고 밝아 진 자이니치의 모습을 보고 싶다.
08.27 중국의 전승절과 항일정신
금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으로부터 70년이 되는 해다. 그 해 유럽 전쟁은 5월에, 태평양 전쟁은 8월에 모두 끝났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전승국들은 각자 전승절(전승기념일)에 맞추어 기념행사를 하였거나 준비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대개 8월15일을 대일본 전승절(V-J Day: Victory over Japan Day) 행사를 한다.
유럽의 전승절(V-E Day: Victory in Europe Day)은 5월 8일이다. 1945년 5월7일 프랑스 북동부 도시 랑스(Lens)에 있는 한 학교에서 독일군은 연합군 사령부에 항복을 하면서 5월8일 오전 11시를 기해 유럽 전역의 군사행동을 종료 시켰다. 따라서 총성이 멎은 5월8일을 전승절로 기념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하루 더 늦은 5월9일이 전승절이다. 소련의 스탈린은 랑스 연합군 사령부의 서명을 인정하지 않고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진격 5월8일 밤 10시43분 독일로부터 직접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아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5월 9일 0시43분이었다.
미국에서는 도쿄 만(灣)에 정박 중인 미주리호 함상의 항복조인식에서 일본정부가 항복 서명을 한 9월2일이 대일본 전승절이다. 기록 사진을 보면 맥아더 사령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외상이 보인다. 그는 1932년 4월29일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물통 폭탄에 좌측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당시 주중공사였다.
중국은 금년부터 미국의 전승절 다음날인 9월3일을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즘 승리 70주년’ 기념일(전승절)로 정했다. 그리고 53개의 외국 정상 등 지도자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열리는 열병식(군사 프레이드)행사에 초청하였다.
지난 5월9일 모스크바에서 70주년 전승절 행사를 주관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베이징의 열병식 참석은 물론 러시아 군인도 열병 행사에 참가시켰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현지 대사를 참석시키고 정상들은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전승절이 개최되는 톈안먼 광장이 1989년 6월 톈안먼 사건(반정부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사건)이 일어 난 곳이라는 이유로 참석을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준비한 핵미사일과 최첨단 전투기 등 최대 규모의 ‘군사굴기’를 과시하는 열병식이 군사적 색채가 너무 강해 참석을 포기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중일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는 아베 (安倍晉三) 일본 총리는 당초 열병식을 피하여 9월3일 전후 방중을 계획하였으나 국회 일정을 핑계로 결국 방중을 연기하였다. 미국이나 유럽의 정상들과 보조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8월20일 한중 정상회담을 통한 양국의 협력증진을 위해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기념행사 참석을 발표하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북한은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을 요구하면서 포격을 가하고 우리 측이 응사하는 긴박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사건으로 야기된 남북한의 군사긴장이 점차 고조되어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이 어렵게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남북한 고위급의 마라손 회담을 통해 박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에 북한이 굴복함으로써 방중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전승절 열병식 준비에 한창이다. 보도에 의하면 베이징 외곽에 톈안먼 광장을 본뜬 모의광장에서 매일 연습을 하고 언론에 공개까지 하였다. 베이징의 악명 높은 스모그를 우려하여 전승절에 맞추어 대기 오염 요인을 철저히 점검 전승절에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열병식 블루’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중국의 항일전쟁과 관련 일본에 대한 불편한 역사는 청일전쟁(1894-1895)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예상치 않게 패전하여 분함을 삭이지 못하고 있을 때 날라 온 시원한 낭보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히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소식이었다. 안 의사의 쾌거를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한 중국의 당대 실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시(詩)를 지어 안 의사를 칭송했다.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몸은 한국출신이지만 이름은 만방에 떨치니
살아서 백년을 살지 못하지만 그 명성 죽어서는 천년을 가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안 의사의 쾌거를 청일전쟁 이후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항쟁의 기원으로 보았다. 저우언라이 자신도 난카이(南開) 대학 시절 연극반에서 안 의사의 분장을 한 경험이 있고, 후에 그의 부인이 된 덩잉차오(鄧潁超)도 남장(男裝)으로 안 의사의 배역을 하였다. 연극 ‘안중근’을 통해 두 사람의 항일 정신이 결합되어 영원한 반려자가 된 것 같다.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 만난 중국인 개개인(라오바이싱 老百姓)의 항일(또는 반일)정신은 특별하다고 느꼈다. 지난 2012년 9월 일본정부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국유화를 선언하였을 때 중국의 100여개 도시에서 폭력시위가 있었다. 일본 물건 불매는 물론 심지어 일본 백화점에 난입하여 불태우는 사건도 있었다. 어느 도시에서는 항일 시위군중과 일본차를 타고 있는 중국인과 시비 끝에 살인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중일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중국을 찾은 일본인들이 지방여행을 못하고 베이징 및 상하이 등 비교적 안전한 대도시에만 여행을 한다고 들었다. 일본 여행자들이 택시를 탈 때 한국어를 한 두 마디 알아 두어야 안전하다고 농담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중국에서 텔레비전을 켜면 어느 채널에서든지 항일 유격대의 드라마가 방영된다. 드라마 속에서는 착하고 용기 있는 애국 항일 투사가 반드시 잔악한 일본군을 징벌한다. 진부한 이야기로 지루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인기가 높다. 특히 중일전쟁이후 일본군이 중국전역에 전선을 넓혀 일부 한간(漢奸 친일 매국노)을 제외하고는 일본군에 의해 피해를 보지 않은 가정이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까지 8년간 1500만의 중국인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군이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까지는 중국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NRA 국민혁명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인민해방군(PLA 홍군)이 합작하여 일본군과 외롭게 싸웠다.
마오쩌둥과 장제스 중 누가 더 항일 지도자냐고 하는 바보 같은 질문을 가끔 듣는다. 연구가 부족하여 잘 모르겠지만 마오쩌둥은 항일의용군 행진가를 그대로 중국 국가(國歌)로 정하였고 장제스는 일본군도 막아야 하지만 공산당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않았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일본군은 피부병이지만 공산당은 심장병이다. 지금 중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은 몸에 난 두드러기처럼 가렵고 귀찮지만 때가 되면 물러간다. 공산당은 처음에는 느끼지 못하나 나중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심장병처럼 위험하다.” 장제스의 ‘피부병-심장병’ 논란이 생각난다.
09.02 환구단과 한.중.일 정상회담
지난 주 어느 날 시내 조선호텔 코스모스 룸에 한.중.일(韓中日)에 관심을 가진 인사들이 모였다. 이 날은 한중일협력사무국(TCS: Trilateral Cooperation Secretariat)의 일본 출신의 이와다니 시게오(岩谷滋雄) 2대 총장이 이임 인사를 하고, 3대 사무총장으로 부임한 중국의 양허우란(楊厚蘭) 총장이 취임 인사를 하는 외교 행사였다.
한중일협력사무국은 2011년 9월 한.중.일의 협력추진을 위해 3국 정부에 의해 설립된 국제기구이다. 동 사무국은 사무총장과 2명의 사무차장이 중심이 된다. 사무총장은 2년 임기로 현재 한국-일본-중국 순으로 임명된다. 양허우란 총장의 2년 임기가 끝나면 다시 한국의 사무총장 순번이 된다. 역시 2년 임기의 사무차장은 사무총장을 맡은 국가가 아닌 다른 두 나라가 차장이 된다. 사무총장과 차장은 상하 서열이 아니고 3국을 대표하기 때문에 각자 거부권이 있어 총장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의사결정은 3국 대표의 컨센서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무국의 주요 역할은 1) 한중일 3국간 협의체인 정상회담과 외무장관회의 지원 2) 한중일 3국의 재난대비 도상훈련과 비즈니스교류회 등 새로운 협력사업 발굴 3) 한중일 3국의 협력과 이해증진을 위한 국제포럼 개최 4) 아세안, EU 등 타 국제기구와의 협력 등이다.
이와다니 사무총장은 지난 2년간 한.중.일 정상회담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였지만 결국 그 행사를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양허우란 신임 총장은 과거 서울 근무와 중국 외교부에서 한반도.북핵 문제 대사를 역임한 경험으로 막중한 책임을 느끼면서 사무총장의 직무를 자신 있게 수행할 의지를 보였다. 2년 전 이맘 때 이임식을 한 신봉길 초대 사무총장도 참석하여 처음으로 한.중.일 3국의 사무총장이 나란히 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추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 벳쇼 고로(別所浩郞) 주한 일본 대사가 참석하고 서울 주재 대사들도 다수 보였다.
행사장에서 최근 한.중.일 정세를 생각하면서 창밖을 바라보니 3층 팔각정이 큼직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오후 6시가 지났는데도 늦여름의 긴 낮 시간 때문에 환하게 눈에 들어오는 황궁우(皇穹宇) 팔각정은 이 곳이 대한제국의 환구단 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the Great Han Empire)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황제로서 중국 및 일본과 대등하며, 서구열강에게는 독립된 제국으로서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앞에 환구단(圜丘壇)을 만들고 그 부속 시설로 황궁우를 건립하였다. 과거 중국의 사신이 기거하였고 청국군대가 한 때 주둔했던 남별궁 자리이다. 지금의 조선호텔뿐만이 아니라 롯데호텔(과거 반도호텔)과 백화점이 포함되는 넓은 지역이다.
사실 고려시대까지는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天祭 제천행사)가 있었지만 조선조에서는 중국의 압력으로 천제는 하늘의 아들(天子)인 황제만 할 수 있고 왕은 그러한 권한이 없다고 자제했다. 이제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천제를 당당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天圓地方)지다’라는 동양의 전통 우주관에 따라 천제의 제단을 둥글게 만든다. 그래서 환구단 또는 원구단(圓丘壇)으로 부른다.
중국 베이징에는 자금성의 4배 규모의 거대한 수림을 동반한 천단(天壇 the Temple of Heaven)이 있다. 이는 베이징의 동서남북에 일월천지(日月天地)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고 천제를 지내는 천단은 베이징의 남쪽에 위치하여 규모가 가장 큰 제단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다.
천단 공원에는 천제를 위한 원구단(圓丘壇 the Circular Mound of Heaven)이 있다. 원구단은 하늘을 바라보는 텅 빈 공간으로 문자 그대로 둥근 제단이다. 원구단 북쪽에 천제 시 사용하는 신패가 안치되어 있는 황궁우(皇穹宇 the Imperial Vault of Heaven)가 있다. 단층의 둥근 건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거대한 기년전(祈年殿 the Hall of Prayer for Good Harvest)이 있다. 기년전은 천안문 자금성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건물로 높이 38m로 3층 구조 전각이다. 이름 그대로 중국의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는 특수 실내 제단이다.
한중일협력사무국의 사무총장 이.취임 행사가 거행된 소공동의 조선호텔은 역사적으로 중국, 일본과 연고가 깊은 곳이다. 조선조 태종의 둘째 딸 경정(慶貞)공주가 결혼하여 왕실에서 궁(宮)을 지어 주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소공주동(小公主洞 작은 공주골)’이라고 불렀다. 줄여서 소공동이 되었다.
150여년 후 선조는 소공동 일부에 인빈 김씨의 소생으로 요절한 의안군(義安君)을 위해 궁을 지어 주었다. 이 궁은 임진왜란 때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군대가 주둔하였다. 우키타 군은 종묘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에 크게 패하고 부상까지 입어 의안군의 집으로 주둔지를 옮겼다고 한다. 일본군이 물러 간 후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 군대가 주둔하였고 그 후 중국(청) 사신의 숙소(영빈소)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임오군란과 청일전쟁 시 파병된 청군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만방에 선포하고 독립의 상징인 환구단을 조성한지 13년이 되는 해인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과 병합조약을 맺고 조선총독부를 설치 한반도를 통치한다. 조선총독부는 서울을 방문하는 일본 또는 외국의 요인이 숙박할 수 있는, 도쿄의 데이코쿠 호텔(帝國호텔 1891년 개업)과 같은 영빈관이 필요하였다.
총독부는 경성(京城 서울)역에서 멀지 않고 조선은행(현재 한국은행 본관)과 경성부 청사(현 시청)에서 가까운 환구단을 헐고 서양식 호텔 신축을 계획하였다. 총독부는 일본 고베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일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에게 설계를 맡겼다. 베를린 공대를 졸업한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구 국립 중앙박물관)의 건물도 설계하였다. 호텔에는 국내 처음으로 오티스(Otis)사가 제작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당시 애국 청년들이 황실이 제천행사를 하는 신성한 지역에 호텔 건립을 반대하여 신축현장을 기습하여 수비병을 살해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호텔은 완공되어 1914년 10월10일 ‘조센호테루(Chosen Hotel)’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30년간 많은 일본 또는 친일 인사들이 다녀갔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반도의 38도 이남에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고 군정청의 사령부가 이 ‘조센호테루’에 주둔한다. 미군이 물러 간 후 한국 정부가 인수 ‘조선호텔(Chosun Hotel)’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계속한다. 독립 대한민국이 당시 조선의 국명을 모두 대한으로 고쳤지만 조선이 그대로 유지된 것은 이 호텔의 이름과 조선일보사 정도로 보인다.
1958년 화재로 당시 4층의 호텔 건물이 거의 전소하였다. 이 때 정부가 호텔을 완전히 헐고 환구단을 복원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의 숙박 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환구단 복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호텔은 복구되어 1970년 미국의 스타우드 그룹과 제휴 20층 건물의 ‘웨스틴 조선호텔’로 발전한다. 1995년 신세계 백화점 그룹이 웨스틴 소유 분을 전량 인수하여 ‘신세계 조선호텔’로 완전 민영화되었다. 환구단의 복원은 더욱 어려워진 셈이다.
중국의 전승절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으로 한.중.일 정상회담이 빠르면 이번 가을 개최될 전망이 높아 보인다. 2012년 5월에 마지막 한중일 정상회담이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국무원 총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참석하였다. 이번에 한국에서 개최될 경우 3년여 만이다. 새로 부임한 양허우란 사무총장의 활약이 기대된다.
09.09 박근혜 대통령의 톈안먼 외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9월 3일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 인민해방군의 열병식(군사 프레이드)에 참석하였다. 한중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성루에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중심으로 그의 왼쪽에는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이 서 있고 그의 오른 쪽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자리 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이 불편해 함에도 불구하고 열병식에 참석하여 시 주석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 대신 북한의 도발억지와 평화 통일에 대해 시 주석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박 대통령은 귀국길에 “통일은 주변국의 암묵적 동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동북아의 정치 외교 지형을 바꿀 수 있는 박 대통령의 톈안먼 외교가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톈안먼 성루에서 시 주석과 박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의 ‘군사굴기’라는 열병식이 진행되었다.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보면서 문득 베이징 대사관 근무 시절이 생각났다. 그 때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베이징을 방문하는 한국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끔 서울에서 출장을 오는 손님들에게 베이징의 역사 유적지를 안내하였다.
가장 먼저 가는 곳이 중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톈안먼과 그 광장이다. 톈안먼 성루에 올라 가 광장을 굽어보아야 베이징을 방문하는 실감을 느낄 수 있다. 톈안먼 안쪽으로 가면 성루에 올라가는 입구가 있다. 당시 먼피아오(門票 입장권)가 10 위안이었다. 가방은 가지고 올라 갈수 없어 따로 보관해야 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허락되었다. 관리인은 성루에서 광장을 향하여 촬영하고 성루 안 촬영은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성루에 올라 가보니 상당히 넓고 주요 행사시 국가 요인들이 쉴 수 있는 장소도 준비되어 있어 보안상 촬영을 금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박 대통령이 열병식 도중 휴게시간을 이용 중국 원로들을 만났다.
톈안먼 성루 바로 아래 금수하(金水河)가 흐르고 그 위로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을 상징하는 5개의 대리석 금수교가 걸려 있다. 금수란 금(金 서쪽)에서 흘러오는 물(水)이란 뜻이다. 자금성에도 금수하가 흐른다. 안팎을 구분하여 내금수하 및 외금수하로 부른다.
광장이 바라보이는 성루에서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청리라(成立了 성립하였다)”라고 하면서 신 중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5년 후에는 마오 주석이 김일성과 나란히 열병식에 참석했던 곳이다. 당시 우리의 대통령이 이곳에 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솔직히 해보지 못했다.
옛날 베이징성의 남문은 정양문(正陽門 속칭 前門)으로 우리의 숭례문(남대문)에 해당된다. 톈안먼은 황성(皇城 Imperial city)의 남문이다. 황성은 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을 둘러 싼 경산과 북해, 중해, 남해의 호수 그리고 동서로 태묘(太廟)와 태사직(太社稷) 모두를 포함한다. 베이징성-황성-자금성의 3중 구조이다. 황성의 4대문에는 모두 ‘안(安)’이 붙어 다닌다. 황실의 안전이 국가의 안전이라는 뜻이다. 북문인 지안문(地安門), 동문인 동안문(東安門), 서문인 서안문(西安門)이 그렇다. 톈안먼 외는 모두 철거되고 현존하지 않는다. 서울에는 황성이 따로 없어 톈안먼에 해당되는 문이 없다.
톈안먼을 통해 황성에 들어가면 중문(重門)격인 단문(端門)이 나온다. 이번 행사에서 시 주석 부부는 단문과 톈안먼 사이에서 박 대통령을 맞이했다. 단문을 지나면 자금성의 남문인 오문이 나온다. 오문은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에 해당된다. 자금성의 북문은 신무문(神武門), 동문은 동화문(東華門), 서문은 서화문(西華門)이다.
수도 난징(南京)에서 조카를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후 베이징으로 천도한 명(明)의 영락제는 황성의 정문을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불렀다. 정통성 콤플렉스를 느낀 영락제가 승천문을 통해 하늘(天)로부터 권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베이징을 무혈 입성한 만주족 청(淸)은 승천문을 톈안먼으로 바꾼다. 톈안먼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하늘로부터 명에 따라 나라를 평안케 하고 백성을 다스린다(受命于天 安邦治民)‘의 의미이다. 만주족 역시 정통성 부족을 느끼고 하늘(天)을 강조하여 명(明)의 유민을 회유한 것으로 보인다. 통치자에게는 네이밍(명명)이 그만큼 중요했다.
왕조 시대에 톈안먼 성루에서는 주요 법령이나 명령을 공표하고 황제가 출전하거나 개선하는 군대를 사열하였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마오 주석이 톈안먼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신 중국 건국을 기념하는 열병식을 사열하였다.
톈안먼은 중국의 국장(國章 national emblem)의 중심 도안이다. 국장의 도안을 보면 위로는 농업을 상징하는 벼 이삭과 밀 이삭이 톈안먼을 두 줄로 감싸고, 아래로는 공업을 상징하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있다. 그리고 다섯 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공산당을 의미하는 큰 별을 중심으로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 그리고 민족자산 계급을 상징하는 네 개의 작은 별 모여 있다. 중국 공산당의 영도에 따르는 인민의 단결을 보여주는 5성홍기(五星紅旗 중국국기) 그대로이다.
톈안먼에서의 역대 주요 열병식 사열은 1949년 10월 마오 주석의 사열 이외에 1984년 중국 건국 35 주년의 덩샤오핑(鄧小平)의 사열, 1999년(건국 50주년)의 장쩌민 주석의 사열, 2009년(건국 60주년)의 후진타오 주석의 사열이 있었다. 시진핑 주석은 건국 70주년인 2019년에 사열이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시 주석은 조급했다. 항일승전 70주년을 계기로 경제굴기에 이은 군사굴기로써 국민을 단합시키고 자신의 리더십을 국내외에 알리고 싶었다. 마침 날씨도 쾌청한 ‘열병식 블루’였다. “통즈먼 신쿠라! (同志們 辛苦了 동지들 수고했소)” 전용차 홍기(홍치紅旗)를 타고 사열하는 시 주석의 얼굴에 안도와 만족감이 묻어났다. 대성공이었다.
전승절과 열병식 행사에 51개국의 대표를 초청하였다. 일본과 필리핀은 보이콧 하였지만 49개국이 참석하여 시 주석의 초청외교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등 서방의 경우 정상은 참석을 않고 각료나 현지 대사가 참석하였다.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의 대통령이 어려운 여건 하에 참석을 하여 시 주석을 감동시켰다.
톈안먼 광장의 규모는 남북 880m 동서 500m의 44만 평방m로 도시 광장으로서는 세계 최대이다. 톈안먼 광장은 왕조시대는 없었다. 옛 사진을 보면 톈안먼 앞에는 천보랑(千步廊)으로 불리는 대로가 있다. 성인의 일보(一步)가 30cm정도라고 보면 300m 정도의 대로이다. 조선시대 광화문 앞에 육조(六曹)의 중앙관서처럼 천보랑의 좌우에 관청이 있고 남쪽 끝에 문이 있었다. 이 문은 명대에는 대명문(大明門), 청대에는 대청문(大淸門), 신해혁명 후 민국시대에는 중화문(中華門)으로 불리었다. 민국시대에 천보랑이 해체되면서 광장의 기능이 생기기 시작해고 신 중국 건국이후 1954년 중화문이 철거 되면서 오늘 날과 같은 규모가 되었다.
최대 1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톈안먼 광장에는 중국 역사에 남는 중요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5.4 운동’으로 알려진 세계 제1차 대전 후인 1919년 5월4일 대대적인 항일 시위가 이곳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4.5 천안문 사건’으로 불리는 1976년 4월5일 시위도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하자 4인방(四人幇) 극좌파가 정국을 장악, 저우언라이의 추모조차 금지시켰다. 그 해 4월4일 청명절을 기해 사람들이 광장 남쪽의 영웅기념비에 모여 꽃다발을 바치면서 4인방 반대 시위를 하였다. 4인방은 시위의 배후로 덩샤오핑을 지목, 덩을 실각시키고 화궈펑(華國鋒)을 등용한다.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 덩샤오핑과 예젠잉(葉劍英)을 중심으로 한 정변(쿠데타)이 일어나 4인방이 체포되는 계기가 된다.
1989년 ‘6.4 천안문 사건’도 이곳에서 발생한다. 그 해 4월15일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하자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다가 중국정부의 유혈진압으로 실패한다. 중국정부는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톈안먼 광장의 동쪽은 국가 박물관(역사박물관)이 배치되어 있고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이 있다. 남쪽으로 높은 대리석 비석이 인민영웅비이다. 비문에 새겨진 글은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 인민 영웅은 영원히 잠들어도 불후하리라)’다. 마오쩌둥 글씨이다. 비문의 반대편에는 저우언라이의 현창문(顯彰文)이 있다. 아편전쟁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까지 희생된 인민영웅을 현창한 다고 설명되어 있다.
인민영웅비 뒤로 ‘마오주석기념당’이 있다. 기념당에는 마오 주석의 유체를 방부 처리해 놓아 관람이 가능하다. 긴 줄에 서서 떠밀리면서 관람하게 된다. 마오 주석의 유체 앞에서는 금방 지나가야지 멈추어서 관람하면 제제를 받는다. 기념당의 위치는 과거 중화문이 철거된 자리이다.
파티는 끝났다.(The party is over.)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뜨거운 열병식은 지나가고 톈안먼과 그 광장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열병식과 함께 ‘열병식 블루’도 끝났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신외교’로 평가 받는 ‘톈안먼 외교’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09.16 상하이 임정과 김구 선생 탈출기
지난 9월4일 박근혜 대통령은 ‘항일독립의 심장부’이며 ‘대한민국의 법통이 시작된 곳’이라는 상하이 임시정부(임정) 청사 재개관식에 참석하여 테이프 커팅을 하였다.
상하이는 아편 전쟁이후 개방된 항구 도시이며 교통의 중심이고 자유 무역항으로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몰려와 거주하는 국제도시였다. 이곳에 일본에 의해 강점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한 대한의 젊은 애국자들이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상하이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친목단체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 해체 후 그리스로부터 터키를 지켜 낸 청년 장교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의 활동을 참고하여 ‘신한청년당’으로 이름을 짓는다. 1918년도였다. 이들은 국내와 달리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민감하였다. 마침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하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과거 제국주의의 식민지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12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몰래 보냈다. 그리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는 정보를 입수하여 영어가 능통한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한다. 도쿄의 유학생들에게는 식민지가 독립할 수 있는 세계 조류를 알려준다. 이에 따라 1919년 2월8일 도쿄에서 독립 선언서가 나왔다.
파리 출발 직전에 김규식은 세계 여론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부탁하였다. 김규식의 부인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내로 잠입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마침 국내에서도 고종의 인산일(葬禮)에 맞추어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 출신을 포함 33인의 민족 지도자들이 3월1일 독립 선언서를 채택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3.1 독립운동 후 이를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그 해 4월 13일 상하이에 신한청년당원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설립된다. 망명정부는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의 항일 독립운동 주도가 목적이다. 9월11일에는 각지에서 설립된 임시정부를 흡수 통합하여 본격적인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된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변한다. 처음에는 대통령제를 하다가 내각책임제와 집단지도 체제로, 그리고 주석제로 바뀐다. 그리고 임정 청사도 일제의 중국 침략에 따라 상하이-항저우-자싱-난징-창사-광저우-중칭 등으로 이전한다. 그 중에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은 상하이이다. 1919년부터 1932년까지 23년간 상하이에 있다 보니 상하이가 임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상하이 임정을 이끌던 김구 선생이 구사일생으로 상하이 위기를 탈출한 후 상하이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 박 대통령이 참석한 임정 청사는 김구 선생이 탈출한 후 사용되지 않았던 구 임정 청사를 수리하여 재개관 한 것이다.
1930년대 들어 와서 임정은 쇠퇴일로에 있었다. 승승장구하는 일제로부터 독립이 요원해 보여서인지 국내외 지원도 끊어졌다. 김구 선생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인애국단원’을 모집하여 일본의 요인을 암살하는 충격 요법이다. 일본어가 능통한 이봉창과 윤봉길을 한인애국단원으로 가입시켰다.
한인애국단원의 1차 거사는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어났다. 이봉창 의사가 일왕의 궁성 근처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실패였다. 2차 거사는 3개월 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행사에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물통 폭탄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도쿄 사건에 잔뜩 긴장되어 있던 일본은 상하이에서 다시 허를 찔려 패닉 상태에 빠졌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암살의 배후로 김구 선생을 지목하였다. 일제는 김구 선생에게 60만 위안(지금의 200억 원 정도)이라는 천문학적 현상금을 걸었다.
임정 요원들은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일부는 항저우(杭州)로 가고 일부는 자싱(嘉興)으로 흩어졌다. 김구 선생은 신변을 안전을 위해 상하이의 YMCA 간사로 있는 미국인 피치(George A. Fitch) 목사의 집에 숨어들었다. 피치 목사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수저우(蘇州)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정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여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동차에 태워 홍커우(虹口) 행사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피치 목사의 집은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피치 목사가 미국인이라 일본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3주가 지나자 피치 목사의 집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중국인 추푸청(楮輔成)의 도움을 청했다. 추푸청은 중국 신해혁명의 원로로서 항일구원회 회장으로 있었다. 추푸청은 자신의 아들 추펑장(楮鳳章)이 있는 자싱으로 피신할 것을 종용했다. 추펑장은 자싱에는 수륜사창이라는 면사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자싱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피치 목사의 집을 빠져 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피치 목사 집 주위에는 거액의 현상금을 노린 일본의 밀정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피치 목사는 꾀를 냈다. 김구 선생을 자신의 부인과 부부처럼 위장 시키고 자신은 운전기사로 분장하여 부부가 외출하는 것처럼 하여 집을 빠져 나가는 계획이다.
피치 목사는 김구 선생에게 흰 얼굴로 분장시키고 서양인 옷을 입혔다. 그리고 자신의 부인을 김구 선생과 함께 뒷자리에 동석시켜 부부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운전기사 복장을 하고 운전대를 잡고 집을 빠져 나왔다. 집 밖의 밀정들이 눈치 채지 못했다. 김구 선생은 자싱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추푸청은 자싱에 도착한 김구 선생을 메이완지에(梅灣街)에 있는 자신의 비서 겸 양아들인 첸둥성(陳棟生) 집의 한쪽을 쓰도록 하였다.
자싱은 운하와 호수의 도시이다. 보통 도시에는 마차나 자동차가 필요하듯 이곳은 배가 없으면 다닐 수가 없다. 첸둥성은 김구 선생을 위해 주아이빠오(朱愛寶)라는 20대의 처녀 뱃사공이 딸린 소형배(장크선)를 준비했다. 당시 자싱의 소형 배의 사공은 모두 촨낭(船娘)이라고 부르는 처녀들이었다. 물정 모르는 처녀 뱃사공은 김구 선생이 광둥 출신의 중국인으로 알고 헌신적으로 모셨다.
몇 해 전에 자싱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고속철로 상하이 홍차오 역에서 25분 달리면 자싱 남역에 닿는다. 김구 선생이 도피 생활을 했다는 메이완지에의 첸둥성 집에 가보았다. 남호가 내려다보이는 별관 2층 방이 김구 선생이 기거하던 방이다. 방 한쪽에 계단과 별도로 비밀통로도 만들어져 있었다. 김구 선생의 방은 첸둥성 내외가 기거하는 침실과 마주 보여 유사시 즉각 연락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호수 가에는 도피용 배가 옛날처럼 매어져 있었다.(졸저 '삼국지문화' pp 53-61 참조)
김구 선생은 추푸청 일가의 도움으로 며느리 친정집 자이칭(載靑)별장 등 주거지를 옮겨 가면서 일제의 추격을 피했다. 상하이 임정 청사 재개관식에 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추푸청의 후손들이 참석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김구 선생은 자신의 일기(백범일지)에서 ‘오늘은 남문 밖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호수로’라고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자싱에서 선상표박 생활도 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김구 선생은 부인 최준례를 사별한 홀몸이고 뱃사공이 20대 처녀라는 남녀 관계 설정으로 두 사람의 애틋한 만남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 나와 한 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국인 소설가가 쓴 ’촨웨(船月)‘라는 작품이다.
1935년부터 임정은 당시 수도 난징으로 옮기면서 항저우와 자싱으로 나누어져 있던 임정이 합치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난징도 일본에 의해 강점되어 임정은 장제스 총통의 배려로 임시 수도 충칭으로 옮긴다. 그리고 5년 후 그 곳에서 해방을 맞는다.
거금의 현상금이 걸려있는 데도 불구하고 추푸청 일가의 도움으로 목숨을 잃지 않고 무사히 귀국한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경교장의 총성’에 의해 안두희에게 암살된다.
09.22 '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는' 아베 총리
리치 텍스트 편집기, editor지난 9월19일 새벽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에서는 집단자위권행사가 가능하도록 자위대법 등 11개의 안보관련 법안이 참의원을 통과했다. 찬성 148표 반대 90표의 압도적 표차였다. 지난 7월16일 중의원에서 강행처리 된지 94일만이다.
1946년 11월 평화헌법이 공포된 후 70년 가깝게 지켜 온 전수방위(專守防衛 오직 방어만 위한 무력만 행사)원칙은 그 날로 깨졌다.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적극적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늘의 일본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 시간에 국회를 에워싼 시위대로부터 ‘헌법을 지켜라’ ‘아베 야메로(그만 두라)’라는 구호가 밤하늘을 덮었다.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는 ‘안보법안 통과되면 평화헌법하의 일본은 없어진다’고 호소하였지만 허사였다.
국회에서 표결 저지에 실패한 오카다 민주당 대표는 국회의 가결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으로, 안보법제를 백지로 되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후진국에만 있을 법한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날치기로 강하게 밀어 붙인 아베 총리는 ‘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룰이다’라면서 몸싸움의 와중에서 한가롭게 책보는 모습을 연출했다.
한국으로서도 중대 사안이다. 안보법제는 양날의 칼이다. 호전적인 북한을 마주하고 있는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은 미일동맹의 강화가 유리한 면도 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일본군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유사시에 주한 미군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빌미로 일본군(자위대)이 한반도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동의나 요청 없이는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이 불가하다. 한민구 국방장관도 “미군의 요청이 있다고 해도 거절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TV에 비치는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의 시위대를 보면서 55년 전 1960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정권 당시의 안보투쟁을 생각한다. 당시에도 국회 의사당 주변에 시위대가 몰려 와 안보조약 개정반대 시위를 했다. 그 때 7세의 어린 아베 소년은 총리관저에서 놀고 있었다. 관저를 에워 싼 시위대는 ‘안보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인 기시 총리가 관저로 들어오자 아베 소년은 ‘안보반대!’를 따라 외쳤다. 기시는 손자를 귀엽게 바라보고 빙그레 웃었다.
1950년 6월 북한이 불시에 남침하면서 한반도의 적화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국은 스탈린의 아시아 공산화를 견제할 수 있는 일본의 독립을 위해 평화조약이 필요해졌다.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을 포함하는 49개국 연합군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평화조약 대표로 미국을 방문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는 미국의 요청으로 ‘미일 안전보장조약’에도 사인한다. 미국과 처음으로 맺은 안보조약이다. 안보조약에 근거하여 점령군 미군이 재일미군의 지위로서 일본에 계속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은 서방 세계가 중심이 된 평화조약을 부인하고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하는 안보조약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하였다.
1957년 총리가 된 기시는 전승국과 패전국의 색채가 강한 요시다의 안보조약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안보조약은 미군이 일본 정부의 동의 없이 일본 내 내란진압에도 출동할 수 있는 반면에 일본은 미군에게 기지 제공이라는 편무적 역할에 머무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1960년 1월 기시 총리를 대표로 하는 안보조약 개정 교섭 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을 만난다. 기시 총리는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 개정된 안보조약(신 안보조약)에 서명하고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을 방일 초청하였다.
개정된 안보조약에 내란조항을 없애고 재일미군이 공격을 받았을 때 자위대(1954년 창설)가 미군과 함께 방위를 하도록 하는 미일 공동방위를 명문화하였다. 새로운 안보조약은 기시의 숙원인 대등한 미일동맹 조약으로 평가 받았지만 일본이 미국의 전쟁에 말려들 우려를 배제할 수 없었다.
안보조약 개정에 대한 국회 심의 과정에서 당시 야당인 사회당이 반대하고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연합)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에 부딪쳤다. 종전이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국민들을 불안케 하였다. 당시 여당인 자민당에서는 ‘안보소동’으로 과소평가 하였지만 전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민중 시위의 ‘안보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기시 내각으로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일하는 6월 19일에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5월19일 중의원 특별위원회에서 표결을 강행하였다. 당시 사회당의 의원들이 연좌하여 표결에 반대하였으나 자민당은 경찰을 동원하여 반대 의원들을 모조리 회의장 밖으로 끌어내었다. 5월 20일 중의원 본회에서 안보조약 개정안이 통과 되었지만 특별위원회의 강행 표결에 실망한 이시바시 단잔, 미키 다케오 등 총리를 역임한 자민당 중진들은 본회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안보조약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민주주의가 파괴되었다’면서 학생 시민들의 반대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미국의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제임스 하저티(James C. Hargerty) 백악관 공보비서관이 선발대로 방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시위대는 하네다 공항에서 하저티 비서관이 탄 자동차를 에워쌌다.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자 미군의 헬기가 동원되어 구출하는 소동도 빚었다.
6월15일 우익단체가 시위대를 습격하여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와중에 ‘미치코’라는 도쿄대학의 여학생이 압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정국이 예상외로 나쁜 방향으로 발전되자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은 방일을 무기 연기하였다.
6월 23일 미일 양국은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안보조약 개정안은 발효된다. 같은 날 기시 총리는 정국의 혼란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발표하고 7월15일 개관사정(蓋棺事定 죽어서 관 뚜껑을 닫은 뒤의 평가)을 받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총리 직을 사퇴한다. 태어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산모가 희생된 격이다.
1960년 5월 안보조약 개정안의 통과와 2015년 9월 안보법제의 가결이 다르면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시와 아베 총리는 전후체제의 탈피를 주장하고 강한 일본을 지향한다. 55년 전에는 소련에 대한 미일의 동맹 강화라면 지금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할 수 있는 강화된 미일동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변국의 반응도 갈라진다.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Pivot to Asia)’ 정책에 제도적 틀이 마련되었다고 환영한다. 중국은 중일간 군비경쟁을 경고하면서 극도로 반대한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필리핀 등 중국의 팽창(군사굴기)에 위협을 느끼는 국가는 환영한다.
아베 내각이 강행처리도 닮은 데가 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5년 전의 강행처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 일정에 쫓겼고, 이번에는 아베 총리의 마음이 급했던 것 같다. 지난 4월 방미 시 오바마 대통령에게 ‘여름까지 안보관련 법안을 통과 시키겠다’고 약속한 것에 마음에 걸렸는지 모른다. 대형 연휴 전 날인 9월18일을 데드라인으로 잡았다. 연휴가 끝나면 국회의 회기가 끝나간다. 그런데 9월18일은 공교롭게도 84년 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날이다.
반대 시위도 젊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기시 정권 때에는 ‘전학련’이었다면 지금은 ‘실즈(SEALD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가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허약한 야당을 대안세력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심판을 하겠다고 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자민당의 ‘강행처리가 적절치 않다’고 응답이 60%에 달하고,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계속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안보법제의 무리한 통과에 따른 후폭풍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기시 정권처럼 신생아를 위해 산모가 희생될지도 모른다.
일본의 안보법제 통과로 동북아 정세는 미일과 중국과의 대립이 첨예화 되는 신 냉전으로 전환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한국이 둘 중 하나의 선택은 최악이다. 돈독해진 한중 관계를 기반으로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굳건한 한미 동맹과 이를 위한 일본의 협력(用日)이 필요하다. 격동의 동북아 정세를 내다보면 한국의 ‘창조적 외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10.02 사람 인(人)자의 미중관계
유엔 창설 70주년을 맞이한 금년의 유엔총회는 전 세계 160 여 개국의 정상급 인사들과 외무장관이 대거 참석하였다. 워싱턴과 뉴욕은 유엔 총회 참석 차 방문한 정상들의 양자회담과 다자회담으로 바빴다. 바로 200년 전인 나폴레옹전쟁 후 1815년에 열린 비엔나 회의를 연상시킨다. 당시 유럽의 기라성 같은 황제 군주 왕족 고위외교관이 비엔나에 모두 모였다.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라는 말이 그 때 나왔다. 미국을 방문한 수많은 정상 중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첫 국빈방문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정묘전시 미묘대항(精妙展示 微妙對抗)’. 이것이 시 주석 미국방문의 키 워드다. ‘미국에게 중국의 역량을 요령 있게 잘 보여주고 맞설 것은 재치 있게 맞선다.’는 의미로 보인다. 협력과 대립의 균형이다.
시 주석은 미중 관계가 2 년 전 (2013.6) 캘리포니아 서니랜즈 방문 때와 상황이 다른 것을 알고 있다. 2년 전 중국의 경제는 잘 나갈 때였다. 지금은 ‘중국 탈출’ ‘중국 쓰나미가 세계 경제를 망친다’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시 주석은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전승절의 열병식(군사 프레이드)을 통해 은근히 중국의 실력을 보여 주고 자신을 중심으로 단합된 중국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마윈(馬雲) 회장 등 경제인을 대거 동행하여 협력관계를 보여주었다. ‘열려라! 참깨’ 한번 열린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중국의 개혁 개방은 지속될 것임을 확신 시켜 주었다. 손가락으로 사람 인(人)자를 만들어 보이면서 미국의 협력을 주문하였다.
시 주석은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인용하면서 중국은 이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중국이 검열하지 않는 미드의 하나이다. 정치적 암투 속에 대통령이 된 언드우드의 친중적인 내용이 중국 시청자를 만족시켰기 때문인지 모른다.
시 주석은 이번에도 ‘추억(감성)외교’를 빠트리지 않았다. 시애틀 부근의 타코마 시의 고등학교를 찾았다. 타코마 시는 푸저우(福州)시와 자매 도시이다. 시 주석이 푸저우 시 당서기(市長) 시절 타코마 시의 링컨고등학교를 방문하였다. 시 주석은 이번에도 링컨고등학교를 찾아 미중간의 화해의 상징인 탁구공과 탁구대를 기증했다. 시 주석의 추억 외교는 미국 사람들에게 자신이 정(情 sentimentalism)이 깊은 남자로 인식시키는 공공외교이다.
워싱턴에서는 오바마 대통령과 노타이로 백악관 정원을 거닐었다. 미중관계의 주요 현안은 1)사이버 보안문제, 2) 난사(南沙)군도의 인공섬 문제 3) 인권문제 등으로 알려져 있다. 9월 25일 2 시간여의 정상회담을 끝난 후 사이버 보안문제는 공동으로 협력하고 남중국해의 난사군도의 인공섬 문제와 중국내 인권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21세기의 육지와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몽 실현과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와의 충돌이 관심사이다. 미국이 구사하는, 중국을 에워 싼 거대한 초승달(Great Crescent) 전략에 대해 중국은 웨이치(圍棋 둘러싸기 게임)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키신저는 서양의 체스가 왕을 공격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중국의 웨이치(바둑)는 전략적 포위를 통해 면적의 비교우위를 추구한다고 했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꾸준히 늘어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굴기가 두드려 지자 미국은 냉전기에 조성했던 '허브와 스포크( Hub & Spoke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 일본 등 아태 연안국을 부채 살처럼 양자 동맹으로 연결한 정책)'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략을 만들고 있다.
한.미.일의 삼각동맹체제, 미.일.호주의 신남방 삼각체제, 여기에 인도까지 연결한 다이야몬드 협력체제로 중국의 도련선(島?線 Island Chain 섬을 사슬처럼 이은 해상 방위선)에 대응하는 미국판 도련선 형성이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대륙국가로 대양해군을 갖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의 중요한 해양거점으로 북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 동해바다에서도 격리되어 있다. 1860년 러시아와의 베이징 조약에 의거 연해주를 러시아에 할양해주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동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북한이 필요하다. 북한이 붕괴되더라도 중국은 북한의 동해안의 항구를 원할지 모른다.
남중국해에는 중동의 에너지 수송라인으로 미국의 함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중국이 남중국해 난사군도(Spratly Islands)의 바다를 매립하여 인공섬(공항)을 만든 것은 이러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난사군도는 침몰하지 않는 거대한 항공모함이 될 수 있다.
중국이 글로벌 파워로서 세계 어느 곳이나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분간은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접근을 막아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이 도련선 전략이다. 제1 도련선은 일본의 큐수 남단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서쪽을 잇는 선이고, 제2 도련선은 중국으로부터 2000km 밖의 해역인 괌 사이판 파푸아 뉴기니를 넘어 선다.
중국은 도련선을 통해 아태 지역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군의 접근을 억제하고 중국군의 활동영역을 단계 별로 넓힌다는 것이다. 이른 바 ‘접근거부(A2 Anti-Access)’와 ‘지역거부(AD Area Denial)’전략을 펴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종전과 같이 중국의 인공섬을 인정하지 않고 ‘접근자유(Freedom of Access)’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태평양을 미국의 호수(lake)로 생각하여 이를 침범하는 국가는 미국을 침범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20세기 초 러시아에 대해 러일전쟁으로 막았고 40년 후 일본에 대해 태평양전쟁으로 막았다. 지금은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중국은 이번 시 주석의 미국방문을 ‘신뢰를 증진시키고 의심을 푸는 방문(增信釋疑之旅)’이라고 풀이하였다. 시 주석 등장 이후 미국 등 서방세계가 갖는 우려(의심)를 불식하고 신뢰를 높이는 노력이다. 시 주석은 ‘나라가 비록 강하더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한다(國雖强 好戰必亡)는 사기(史記) 구절을 인용하여 미중 양국이 ’투기티데스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세계경제가 어렵고 특히 신흥국 경제가 더욱 어려울 때 미중이 각자 도생하면 공멸하고 공존과 협력을 추구해야 미래가 열릴 것으로 본다. 이번 시 주석의 방미 성과의 하나로 미국의 지지를 얻어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 편입전망이 높다. 위안화가 달러화 유로화 엔화 파운드화와 함께 세계 기축통화가 되는 데 초석이 될 수 있다. 중국경제는 세계경제와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다.
2013년 서니랜즈에서 시 주석이 제안한 신형대국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중국이 내 세운 주변의 동서남북을 동관(東管 점진적 대응과 관리) 서진(西進 적극 검토) 남개(南開 영향력 확대) 북화(北和 협력강화)의 정책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시 주석의 이번 방미로 2014년 11월 베이징의 APEC 정상회담에 이어 대립위주의 미중관계보다는 협력위주의 미중관계에 방점을 찍는 새로운 도광양회(韜光養晦 재능을 밖으로 들어내지 않고 어둠에서 힘을 기름)의 전략을 보이는 것 같다. 미중 간에 서로 신뢰를 높이고 의심을 풀어 나가면 일본의 안보법제 통과로 높아지고 있는 동북아의 긴장이 완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10.08 경운궁(덕수궁)의 정치학
며칠 전 국내 신문에 덕수궁에서 황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의 사진이 보도되었다. 110년 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에게 선물한 초상화가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서 2년 전은 선조의 환도(還都) 7주갑(60년이 7번 지난 420년)이 되는 해였음이 생각난다. 모두 덕수궁에 얽힌 이야기이다.
임진왜란으로 황급히 서울 떠난 선조가 1년 후 환도한 곳이 지금의 덕수궁인 ‘정릉동 행궁’이다. 정릉동은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가 사랑하던 신덕왕후 강(康)씨의 무덤을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언덕위에 만들어 놓고 정릉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영국 대사관 근처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 이방원은 눈에 가시처럼 보인 정릉을 한양 밖으로 내 보낸다.
그로부터 50여년 후 임금 세조는 정릉의 남쪽 과거 정릉의 원찰(願刹) 흥천사가 있던 곳에 혼자 된 며느리 수빈 한씨를 위해 사저(私邸)를 마련해 주었다. 사저라고 하지만 왕족이 살아도 좋은 정도로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수빈 한씨는 20세에 요절한 세조의 큰 아들 도원군( 후에 의경세자)의 부인으로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의 어머니였다. 결혼 5년 후 세조가 왕이 되면서 세자빈이 되어 입궐하였다가 2년 후에는 남편을 잃고 퇴궐해야 했다.
세조로서는 며느리 수빈 한씨가 일찍 남편을 잃은 안쓰러움도 있었겠지만 며느리의 친정아버지 한확(韓確 1400-1456)을 생각하면 뭐든지 해주어야 할 입장이었다. 사돈인 한확은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계유정난(1453)을 성공시켜 자신이 왕이 되는 데 일등 공을 세운 사람이다. 더구나 명(明)나라에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였다하여 왕으로 책봉하지 않겠다는 것을 한확이 직접 책봉사로 베이징(연경)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양위라고 설득하여 황제의 고명을 받아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귀국 도중 병을 얻어 객사한 공신 중의 공신이다.
서울에서 양평을 가다 보면 남양주시 조안면(鳥安面)이 나온다. 새도 쉬어간다는 조안면은 V자 형의 모양이다. 이 꼭지점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팔당호를 만든다. 꼭지점의 동편이 조안리이고 서편이 능내리이다. 능내리에 가면 온통 다산 정약용 이야기 뿐이다. 능내리가 다산리처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산의 생가 그와 관련된 기념관이 즐비하다. 다산은 서울 관직과 지방의 유배생활을 빼면 이곳에서 태어나서 노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능내리에 임금도 아닌 한확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확이 어렵사리 책봉 고명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과로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세조는 급히 사람을 보내 시신을 국내로 운구케 하였다. 그리고 왕실에서 준비해둔 왕릉을 한학의 묘소로 하사하였다. ‘능내리’라는 마을 이름은 왕릉 같은 한확의 묘소에서 유래된다.
한확의 아버지 한영정은 딸이 많았다. 그런데 딸들의 미모가 모두 특출하여 멀리 명나라 조정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미모가 빼어 난 조선의 처녀들을 공녀라는 이름으로 베이징으로 데리고 갔다. 한확의 누님도 공녀로 베이징에 끌려갔다가 영락제의 마음에 들어 후궁(麗妃)으로 간택된다.
누님을 호송하여 베이징에 간 한확은 여비가 된 누님 덕에 명의 벼슬을 받고 귀국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한확은 세종의 즉위와 함께 세종의 책봉 고명을 받아 왔다. ‘장자승계의 원칙’을 깨고 장남이 아닌 세종은 책봉 고명을 받아 온 한확의 은혜를 잊지 아니하였다. 한확이 잘못이 있어도 ‘나는 그를 벌할 수 없는 처지’라고 솔직히 털어 놓은 적도 있다. 1420년(세종2년) 흉작으로 명에 바칠 공물의 부담이 컸다. 한확은 다시 명에 가서 공물면제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돌아왔다. 한확은 조명(朝明)외교의 두툼한 파이프로 골치 아픈 외교문제를 척척 해결하였다.
1424년 영락제가 베이징 북쪽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북정(北征)중 과로로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금성에서 영락제의 사망소식을 들은 여비한씨는 영락제의 죽음을 슬퍼하다 못해 목을 메어 자살, 지아비와 함께 순장되었다. 베이징 교외 명십삼릉(明十三陵)의 장릉(長陵)에는 여비한씨가 영락제와 함께 묻혀 있다.
영락제의 손자인 선종 선덕제가 여비한씨의 절개를 높이 사서 그녀의 여동생이며 한확의 누이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공신부인(恭愼夫人) 한씨이다. 선덕제는 영락제가 총애하는 손자로 아버지 홍희제가 영락제의 눈 밖에 났는데도 황태자의 지위를 지킨 것도 손자를 총애해서라고 한다. 선덕제는 할아버지 영락제의 원정에 항상 동행하였고 영락제를 임종한 유일한 혈육이었다.
공신부인 한씨는 한확보다 10세 아래 동생으로 17세 때 베이징으로 와서 명의 4대 조정을 지키면서 74세까지 장수하여 명과 조선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황실 별궁이 있던 베이징의 향산(香山)에 있다. 한확이 대명 외교 채널이 된 것도 황제의 후궁이 된 그의 누나와 누이동생 덕이라고 볼 수 있다.
공신부인 한씨는 생전에 아름다우면서 온화 유순하고 말을 삼가며 자금성 내의 여사(女師)로 존경 받았다고 한다. 향산에 있는 비문에는 그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생호동국 진호중원 (生乎東國 進乎中原)
(본래 조선에서 태어나서 중국으로 출가하여)
공사천부 매옥향산 (恭事天府 埋玉香山)
(매사 공손하게 조정에 봉사하고 향산에 묻혔으니
부인지증 미시지반 (夫人之贈 美諡之頒)
(부인으로 추증되고 아름다운 시호가 내려졌다)
공신부인 한씨의 질녀인 수빈 한씨가 정릉동에서 두 아들을 키우면서 12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사이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1468년 세조가 병이 위중해 둘째 아들 예종에게 양위한 후 다음 날 승하한다. 그러나 예종도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다음 왕위는 의경세자의 두 아들 중에 장남인 월산대군에게 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수빈 한씨의 양해를 얻어 자을산군을 왕이 되도록 한다. 그가 성종이다.
동생은 왕이 되고 어머니가 인수대비가 되어 입궐하자 월산대군은 정릉동 집을 지키면서 산다. 월산대군이 죽은 후 100여년이 지나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울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하였다. 다행히 명나라의 지원을 받고 의병의 분전으로 1593년 1월 서울을 수복한다. 선조는 그해 11월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의 궁궐은 모두 불타고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선조는 과거 월산대군이 살던 집을 임시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는다. 이곳은 명 황제의 후궁 여비한씨와 공신부인 한씨의 친정이었던 곳이다. 선조는 이곳 행궁에서 15년간 살다가 승하하였다. 세자 광해군이 ‘정릉동 행궁’에서 즉위하고 3년 간 행궁에서 지내다가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임금이 옮겨 사는 것)하면서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경사와 운이 같이 트이기를 바라는 작명이다. 처음으로 경운궁이 역사에 등장한다.
광해군은 영창대군 추대사건을 빌미로 계모 인목대비를 폐하고 경운궁 석어당에 유폐시킨다. 1623년 이귀 최명길 등이 인목대비의 후원 하에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내세운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에서 왕으로 즉위한다. 인조는 즉위한 후 8일 만에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월산대군의 후손에게 건물과 토지를 돌려준다. 경운궁은 다시 한적한 별궁으로 남는다.
선조가 명 황제 후궁의 친정집(정릉동 행궁)으로 환도한 것은 명의 위세를 빌려 왜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再造)는 숨은 뜻이 엿보인다. 조선의 역대 왕들도 경운궁을 자신들의 왕계가 시작된 곳으로 특별하게 여겼다. 임진왜란의 수모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특히 영조는 1773년 3주갑(180년) 행사를, 고종은 1893년 5주갑(300년) 행사를 거행하였다.
19세기 말 한반도를 둘러 싼 열강의 세력다툼으로 조선 왕조는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일본은 친 러시아로 기울어 가는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120년 전 1895년 양력 10월8일이었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다. 1년 후 고종이 다시 환궁을 해야 할 때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경운궁을 선택했다.
선조가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릉동 행궁’에서 다진 왜군 격퇴와 재조(再造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움)의 각오와 마찬가지로 고종도 일본의 침탈 위협 속에 미국 영국 러시아의 세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자주권을 수호하고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해야 했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순종황제에게 양위한 1907년까지 10년간 경운궁에서 지냈다. 집무실은 즉조당이고 침실은 함녕전이었다. 1897년 고종은 태극전으로 이름을 바꾼 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을 선언한다. 고종은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법궁(정궁)이 되기위해 창덕궁처럼 2층 구조의 중화전을 짓고 품계석을 놓았다. 그리고 중화전에 들어가는 중화문과 함께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을 세웠다. 영국의 설계사 J R 하딩을 시켜 석조전이라는 콜로니얼 스타일의 양식 전각을 건축한다.
1904년 4월 고종 황제의 침소인 함녕전의 온돌에서 발화되어 경운궁의 많은 전각이 불탔다. 다시 재건해야 했다. 경비 절감을 위해 2층 중화전은 단층구조로 지었다. 금천교 앞의 인화문은 재건하지 않고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고 새로운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의 한(漢)은 운한(雲漢) 또는 소한(?漢) 즉 하늘을 의미하여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연결 국조연창(國祚延昌)의 염원을 담았다. 1907년 새로이 황제가 된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남겨진 고종황제의 장수를 기원하여 궁호를 덕수궁으로 개명한다. 경운궁이 고종황제의 정치의 중심이었다면 덕수궁은 은퇴한 황제가 여생을 보내는 조용한 별궁이었다.
고종황제의 승하로 일본 총독부는 수많은 전각을 헐어내고 경기여중고와 덕수초등학교를 이전시키면서 덕수궁을 크게 축소시킨다. 해방 후에는 태평로의 확장으로 대한문을 멀찌감치 뒤로 물리면서 오늘의 규모가 되었다.
고종황제는 선조와 같은 생각으로 이곳에 궁을 옮기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 본격적인 재조의 기회를 삼으려고 했지만 청국에 이어 러시아도 무너지면서 아시아의 세 마리 호랑이 중 유일하게 일본 호랑이만 남게 되었다. 결국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한 곳도 경운궁의 한 전각인 중명전이었다. 선조가 경운궁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재조의 성공을 거두었다면 고종은 불운하게도 경운궁에서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만 셈이다.
300여년을 사이에 두고 경운궁과 일본과의 특별한 인연에 마음이 불편하다. 덕수궁 아니 경운궁을 보면서 동아시아에서 강대국 사이에 낀 조선의 운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10.17 이선과 이산이 꿈꾸는 나라
얼마 전에 영화 ‘사도(思悼)’를 보았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고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우수한 연출과 연기로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했다.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드라마틱한 부분은 태조에서 세종 그리고 영조에서 정조까지의 3대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나 연출력과 연기력이 갖추어지면 조선 실록의 어느 왕조의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꾸며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사도’는 1762년의 음력 5월13일부터 21일까지 8일간의 이야기(壬午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간의 갈등을 넘어 왕과 후계 왕(세자)과의 갈등까지 섬세하게 잘 보여 주었다.
특히 영화 속의 대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 영조가 자신의 욕심에 미치지 못하는 세자가 보기 싫어 ‘너의 존재 자체가 역모’,라든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허공에 날라 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느냐’ 라는 세자의 절규는 오늘 날 젊은이에게는 ‘일등만 좋아하는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 영화‘사도’가 오스카 외국영화상 부문에 출품하였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사도’를 보면서 수원의 화성과 융건릉이 생각났다. 나중에 정조가 된 세손은 효심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이장하여 현륭원(나중에 왕으로 추존되어 융릉이 됨)을 조성하고 인근에 자신의 능인 건릉을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었지만 노론(벽파)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고종 조에 와서 장조로 추존되고 현륭원이 융릉으로 격상된다.
정조의 직계 후손은 순조와 헌종으로 끝나지만 철종과 고종은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낳은 서자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의 후손이다. 철종은 은언군의 손자이고 고종은 은신군의 양자 남연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 이선은 왕이 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 후 조선조는 그의 자손에 의해 통치된 셈이다. 고종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한 것도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예우로 보인다.
한 때 TV 인기 드라마 '이산(李? 정조)‘이 일본 NHK에서도 방영되어 일본 사람을 만나면 ’이산‘이 화제가 되곤 하였다. 드라마 ’이산‘을 통해 정조는 세종대왕과 비견될만한 군주로 꼽혔다. 개혁 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主) 라는 세론이 높아 처음 상당기간은 왕권 확립에 치중해야 했다.
먼저 비명에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을 준비했다. 양주 배봉산의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킨 후 수원의 화산(花山)으로 천봉(遷峰 이장)을 한다. 수원 팔달산을 중심으로 신도시 화성(華城)을 만들어 화산에 거주하던 백성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풍수 전문가들은 조선조에 정통성이 낮은 왕들이 천봉을 통하여 지위를 높이는 이른바 ‘사친추숭(私親追崇)’의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해 왔다고 한다. 정조도 왕권확립을 위해 천봉과 함께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진 인재를 등용하고, 장용영(壯勇營 국왕 경호대)을 통해 독자적 정치기반을 조성 기득권세력을 견제하였다.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여 기득권세력을 서울에 남겨 두고 신진 학자들을 중심으로 신도시에서 개혁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 정조의 꿈이었는지 모른다.
중국에서 지인이 찾아오면 지하철 1호선을 같이 타고 수원으로 곧 잘 내려간다. 꿈을 이루지 못한 정조의 미완의 화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팔달산을 끼고 버드 내(柳川)의 버들잎처럼 타원형처럼 늘어진 화성은 전형적인 성곽도시(城市)이다. 화성의 동서남북 성문은 걸출하다. 북쪽을 바라보는 장안문(長安門), 남쪽의 팔달문(八達門)은 서울의 4대문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한반도 성곽도시의 대표는 서울이라고 하지만 도시의 발전에 가려져 체감하기가 힘들다.
나는 화성을 ‘리틀 한양’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의 지인은 ‘리틀 베이징’으로 부르고 싶다고 한다. 화성 성벽에 전돌(塼)이 사용되었고 서울의 남대문에서는 볼 수 없는 옹성(甕城 군사적 보호를 위해 중요한 성문 밖을 반월로 둘러쌓은 이중 성벽)을 지적하면서 중국 베이징의 성문이 생각이 난다고 한다.
사실 화성 축조 기록을 보면 당시 과학 기술을 총 동원하여 중국의 축성기술을 원용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점토를 기와처럼 고온에 구워 만든 전돌로 성벽을 쌓았다. 건축 현장에는 연경(燕京 베이징)사절로 중국을 다녀 온 실학파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중국의 분위기가 없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수원 화성을 둘러 본 후 융건릉을 찾았다. 정조는 영우원 천봉을 위해 서울 인근의 풍수 길지를 물색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수원부에 화산이라는 곳이 풍수 길지로 소문이 났지만 이미 수원부 관아가 들어 선 읍성(邑城 또는 邑治)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 같으면 기존의 도시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 천봉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백성을 이주시킬 대체도시(신도시)를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다. 효종이 승하하면서 화산에 능을 조성할 것을 생각했다지만 감히 나서지 못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숭문호학(崇文好學)의 정조는 독서를 통해 수원 팔달산 아래 새로운 도시가 될 입지를 갖춘 곳이 있음을 알았다. 100년 전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통해 이미 지적해 두었기 때문이다. 신도시 건설의 후보지는 결정된 셈이다. 정조는 신도시의 이름으로 화성으로 명명하고 유수부로 승격시킨다. 초대 유수로는 영의정을 지낸 자신의 최 측근 채제공(蔡濟恭 남인의 영수)을 임명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화성을 중시하고 있음을 내외에 보여 주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여 화산의 백성을 이주시키고 화산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시면서 화산과 화성은 부모와 함께 자신의 뼈를 묻는 송추지향(松楸之鄕)이라고 하였다. 화성행궁의 정문에 ‘신풍루(新豊樓)’라는 편액을 단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다. 한고조(漢高祖)의 고향 풍패지향(豊沛之鄕)을 비유하여 정조는 자신의 새로운 풍패(고향)를 얻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1795년 정조는 대대적인 을묘원행(乙卯園行 왕릉이 아닌 현륭원에 참배)을 통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른다. 당시 기록을 보면 첫째 날 아침 일찍 창덕궁을 출발하여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시흥행궁에서 일박하고, 둘째 날에는 시흥을 출발 화성행궁(봉수당)에 도착하며, 셋째 날에는 화성 향교 대승전 참배와 문무별과를 시행하여 지방 인재를 선발하였다.
넷째 날에는 아버지를 찾아 현륭원 참배하고, 다섯째 날에는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거행하며, 여섯째 날에는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면서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었다. 일곱째 날에는 귀경 길에 올라 시흥행궁에서 다시 일박을 하고, 여덟째 날에는 시흥에서 경로행사를 끝내고 저녁에 창덕궁에 도착하였다. 7박8일간의 긴 일정이다.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화성원행반차도’를 보면 행차를 직접 보는듯한 박진감을 느끼게 된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 왕권을 과시하고 기득권세력을 견제하려는 개혁군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정조가 꿈꾸는 나라가 금방 이루어 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행사이다.
화성행궁과 융건릉을 둘러 본 지인은 정조의 부모에 대한 효성은 중국 청나라의 건륭제의 효성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조선조 정조와 비슷한 시기에 청나라에서는 건륭제가 있었다. 건륭제의 어머니는 아버지 옹정제가 황제가 되기 전 친왕시절 입궁한 인물로 신분이 비교적 낮았다. 옹정제가 일찍 죽고 제위에 오른 건륭제는 생모를 황태후로 모시고 효성을 다하였다. 건륭제의 강남순행은 여행을 좋아하는 어머니에 대한 효도여행이었다고 한다.
정조가 현륭원 조성과 화성행궁 건설은 부모에 대한 효심을 넘어 화성을 정치 경제 군사 중심의 부도(副都)로 만들어 자신의 개혁정치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다분히 정치성을 띤 프로젝트였다.
조선조에는 정도전의 건국이념에 따라 유교적 이상과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재상(宰相)이 중심이 되어 다스려지는 신권(臣權)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왕이 왕권을 통해 국정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려는 것을 억제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움 속에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세력(서인)은 신권정치를 명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왕권을 억제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왕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를 죽게 하여 효종을 즉위시키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된 숙종조에는 소론이 지지하는 경종이 요절하자, 출신 배경의 약점이 있는 영인군을 왕(영조)으로 옹립하여 정국을 좌지우지하였다. 정조는 개혁 군주로서의 싹을 보인 아버지 사도세자를 광인으로 만들어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기득권세력(노론)의 농간으로 이해하였다.
정조는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정조가 49세(1800년)에 죽음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려는 아버지와 자신의 꿈이 끝났다. 조선조 마지막 개혁 군주의 꿈이 안개처럼 사라진 것이다. 정조의 예상치 않은 죽음으로 기득권세력은 세도정치로 변형되면서 결국 조선 왕조가 패망의 길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27 부산(釜山)에서 한일(韓日)외교의 길을 묻다
/부산에서 보이는 대마도 [사진 중앙포토]
‘동래의 부산’에서 ‘부산의 동래’
요즈음 뜨고 있다는 부산을 최근에 다녀왔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많이 운사람 일수록 부산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부산을 배경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국제시장’ 이외에도 ‘변호인’ ‘해운대’ 등이 있다. 얼마 전 해운대에 짓는 고층 아파트의 분양가가 국내 최고가라 하여 다시 한 번 부산이 뉴스에 올랐다.
옛날에는 부산하면 동래(東萊)를 생각하였다. 지금은 동래가 ‘부산의 동래’이지만 과거에는 부산이 ‘동래의 부산’이었다. 부산보다 동래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부산 전체가 동래였는데 지금은 다 내 놓고 작은 구(區)로 남았다. 부산의 서면(西面)도 본래 동래군 산하 서면이었다.
동래에 사는 사람들은 ‘동래’ 발음이 잘 안되어서인지 ‘동네’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동래 출신의 지인이 들려 준 ‘설렁개그’ 같은 경험담 이야기가 기억난다. 서울에 가서 ‘부산 동래’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면 ‘부산 동네? 어느 동네?‘ 하고 되묻는다고 한다. 부산의 동래를 ’동래‘라고 발음해도 ’동네‘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서복(徐福)이 다녀 간 영도 봉래산
그런데 그 동래(東萊)의 뜻이 봉래산(蓬萊山)의 동쪽이란 의미라고 한다. 봉래산이라면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서복(徐福)을 보냈다는 영주산, 방장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생각하지만 진짜 봉래산은 부산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부산 지도를 놓고 봉래산을 찾았더니 영도(影島)의 최고봉이 봉래산이다.
지리적으로 영도 봉래산의 동쪽 방향에 동래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서복을 연구하는 학자에 의하면 서복의 일행이 우리 남해안의 남해도 거제도와 부산 영도를 거쳐 경주와 울산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바다에서 바라 본 영도의 산을 신선이 사는 봉래산으로 이름 지었는지 모른다.
영도는 절영도(絶影島)를 줄여 부른다는데 절영도는 그림자가 없는 섬이란 뜻이다. 옛날 삼국시대에 이 섬에서 준마(駿馬)를 방목했는데 너무 빨라 그림자를 남기지 않았다하여 절영도로 불렀다는 설과 고려시대 공도(空島)정책으로 사람의 그림자(人影)을 남기지 않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진성여왕이 즐겨 찾은 해운대 온천
부산 지역은 고대 신라와 가야국의 세력이 충돌하는 곳으로 두 나라의 전장 터였다고 한다. 신라가 가야국을 합병하고서는 신라의 왕과 귀족이 이곳에 자주 왔던 것 같다. 태종대는 신라의 태종 무열왕의 고사가 있는 곳이다.
부산 해운대는 조선 8경의 하나로 알려진 경승지이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동백섬에 다녀가면서 바위에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새겨 해운대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해운대 일대는 온천이 유명하여 신라의 진성여왕이 온천치료(湯治)를 위해 수차 다녀 간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알려진 해운대 온천이 부산이 개항되면서 일본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부산(해운대 동래)이 온천도시로 관광 휴양객을 끌어 왔다
부산(富山)과 부산(釜山)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수도를 개성으로 옮기자 부산은 한반도의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게 되어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왜구의 침공으로 한반도 남해안이 해방(海防)의 기지가 되었다. 조선 건국초기에는 왜구를 회유하기 위해 경상도 해안의 부산포(富山浦) 제포(창원) 염포(울산) 등 삼포에 일본인의 거주를 허가하였다. 그 후 삼포(三浦)에서 반란이 일어 나 일본인이 삼포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부산포는 지금의 부산(釜山)과는 한자의 표기가 다르다. 고려시대 이래 이곳의 어촌을 부산포(富山浦)로 불렀다. 일본의 동해안 쪽에 도야마(富山)현이 있다. 부산(富山)은 산이 많다는 의미가 있다.
부산의 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솥(釜)처럼 생겼다 하여 부산(釜山)으로 한자 표기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동구 좌천동의 증산(甑山 시루산)이 떡시루 즉 가마솥(釜)과 닮았다고 부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여하튼 1470년 성종실록에서 처음으로 부산(釜山)이란 표기가 나타난다
부산에서 한일외교의 길을 묻다
부산이 일본과 가깝다는 것이 부산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 사람들의 부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았다. 부산의 고급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든가 기네스북에 오른 센텀시티의 세계 최대의 백화점의 손님으로 일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사실 해운대에서 대마도까지 50km 밖에 안 되어 일 년에 60일은 대마도(쓰시마)가 육안에 보이고 후쿠오카와 시모노세키도 200km 밖에 안 된다고 한다.
부산과 후쿠오카는 같은 경제권으로 그쪽 사람들이 쇼핑하러 오사카나 도쿄에 안가고 부산으로 온다고 한다. 부산은 세계의 주요 도시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주요 도시와도 자매관계를 맺고 도시외교에도 활발히 하고 있다. 부산 시와 일본 후쿠오카 시의 민간단체가 2006년부터 ‘부산-후쿠오카 포럼’을 만들어 놓고 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에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예정에 있다. 이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 개최의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신조 총리 취임 후 처음 갖는 정상회담이 된다.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끝나가는 2개월을 남기고 겨우 만들어진 정상회담이다. 4년 가까이 경색된 한일외교가 정상회담 한번으로 쉽게 풀릴 리 없다. 일본과 교류가 많은 부산에서 보면 서울의 한일외교가 답답하게 느껴질 것 같다.
지난 10월 24일에는 부산과 대마도에서 동시에 한일 국교 50주년 기념하는 불꽃 축제를 하였다. 한일관계가 불꽃처럼 시원하게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 같다. 부산 사람들이 바라는 한일외교는 화해와 협력의 외교 그리고 도시 외교의 활성화로 보인다. 부산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마중물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의 첫 피해지
과거에는 부산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독(毒)이 되었다. 임진왜란 대에는 부산이 1차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592년 4월12일(음력) 대마도를 출발한 일본의 침략 제 일진은 4월13일 영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병선 700척에 1만8700명의 군인이었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일본의 대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청야(淸野)작전으로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고 병선을 가라앉히고 도망을 쳤다. 당시 경상 우수사 원균도 상황이 급박하여 병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4월13일 고시니 군은 짙은 안개를 틈타 부산진에 상륙하였다. 당시 부산진성의 남문은 바로 바다에 닿을 정도로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부산진성의 정발은 죽기로 싸워 전사하고 일본군은 배후를 우려하여 다대포진도 함락시켰다. 다음 목적지는 동래성이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경상 좌도의 총책임자이다. 고니시는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동래성을 교두보로 삼아야 했다
‘싸우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동래성을 5중으로 포위한 고니시 군은 동래성을 향하여 목찰(木札)을 던졌다. 목찰에는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가 쓰여 있었다. 송상현은 즉시 그 목찰에 다음의 글귀를 써서 고니시 군에게 다시 집어 던졌다.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
송상현은 박홍 원균 등 무신이 도망가는 가운데 문신으로 죽음을 두려워 않고 조복을 입은 채 진두지휘로 끝까지 싸워 장열한 전사를 하였다. 송상현 부사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연로한 아버지를 두고 먼저 가는 불효를 용서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무너지니 일본의 10만 대군이 부산을 통해 속속 상륙하였지만 수군으로 막을 수 없었다. 당시 한반도의 남해안을 지키는 4명의 수사(水師)가 있었다.
서울에서 보면 가장 왼쪽의 수사가 경상좌수사(박홍 59세) 본영은 동래(지금의 수영)다. 경상좌수사는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까지 관할한다. 낙동강 서쪽에서 섬진강 동쪽까지는 거제도에 본영을 둔 경상우수사는 원균(53세)이 맡고 있었다. 섬진강 서쪽부터 장흥군의 홍거천(洪巨川)까지 여수에 본영을 둔 이순신(48세)의 전라좌수사가 있다. 홍거천 서쪽의 전라우수사는 이억기(32세)가 해남 본영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임진년 4월 이순신 장군이 경상좌수사였다면 선조의 인사정책이 임진왜란을 가져왔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일본군의 주공격선인 경상도 좌우 수사에 나이가 많고 무능한 수사가 배치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순신이 경상좌수사 박홍 자리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이순신이 잘 싸워 일본군이 상륙을 포기하고 물러갔을까. 오히려 기습공격을 받은 이순신은 부산진성의 정발 장군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전사했을 것이다. 그 후 이순신이 없는 남해안은 일본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여 조선왕조는 명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망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
나가사키 데지마와 부산의 초량왜관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일본의 신정부는 화해정책을 편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江戶) 신정부 치하의 260년간 조일 두 나라는 조선통신사 교류를 통하여 성신(誠信)의 길을 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대마도 번주의 노력이 컸다.
일본과 조선의 화해를 위해 대마도 번주(藩主)는 동래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포에 조정의 허가를 얻어 지금 용두산 공원 주변 (초량)에 왜관(무역관)을 설치했다. 초량왜관은 10만평 규모로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의 화란 무역관의 4000평에 비하면 25배의 크기이다.
일본은 화란과는 데지마를 통해 통상(通商)을, 조선과는 대마도와 초량왜관을 통해 통신(通信)하였다고 한다. 초량왜관은 거주 일본인 400-500명으로 일본 마을의 축소판인 ‘리틀 재팬’이었다. 교역장 재판청 신사(神社) 등을 갖추어 있고 동의보감으로 유명해진 조선의 의학을 배우고자 일본 전역의 의사들이 찾아 왔다. 초량왜관은 일본이 가진 유일한 해외공관이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대일 외교의 원점이었다
부산에서 만난 아메노모리 호슈와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의 대 조선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초량왜관에 체류하면서 조선어 독본을 저술하여 조선 외교에 종사할 후진을 양성하였다. 왜관이 다시 역사에 나타나는 것은 명치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정책 이후였다. 대마도 번주가 없어지고 현이 되자 명치정부의 외무성은 대마도 번주가 관리하던 초량왜관을 접수하여 주 조선 외교공관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1872년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후에 일본의 초대공사)가 부산에서 이러한 작업을 지휘하였다.
당시 실력자 대원군은 초량왜관의 소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주장하고 일본 외무성 직원의 퇴거를 명령하였다. 한때 일본과 조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 수 있는 급박한 상황으로 발전되어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75년 조일 수호조규에 의해 일본의 외교사절이 서울에 주재하게 되자 초량왜관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간 조일 간 교역의 중심이 되어왔던 초량왜관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과 부산
일본으로서는 지근거리의 부산에 대한 매력을 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철도 부설권을 얻어 1905년 1월1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을 개통시킨다.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다.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의 폐해를 회복하지 못한 조선은 가해자 일본에 의해 다시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일본은 부산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다. 1925년4월1일 경상남도의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부산은 대륙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대륙으로 가는 양방향 출입구(gateway)로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한국 전쟁 기간(1950-53)에는 임시수도의 기능을 했다. 1990년대 북방정책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관심은 부산을 일시적으로 침체시켰다. 더구나 부산의 중심 산업인 조선 신발 등 은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부산의 르네상스
다시 부산의 르네상스가 왔다. 해운대의 개발과 함께 해운대 땅 값이 오르고 있다고 한다. 해운대에 가면 옛날 학창 시절에 들은 선배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그는 시골 부모님에게 부산에서 사립대학을 다닌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매년 등록금과 하숙비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에는 다니지 않고 일용근로자 생활로 숙식을 해결하고 시골에서 부쳐준 목돈으로 해운대 인근의 땅(논밭)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그 선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지금쯤 큰 땅 부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수년 후에는 해운대 센텀(Centum 라틴어의 100의 의미로 100% 완벽을 기한다는 뜻과 100년을 내다본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시티의 월드 비즈니스 타워(107층), 극동호텔 자리에 건설되는 엘시티 타워(108층)와 87층 주거용 건물 2동, 그리고 부산시청이 있던 곳에 건설되는 부산 롯데타운 타워(108층)등 부산의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된다.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고층 건물은 마치 바다 건너 일본 사람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 하는 것 같다. 부산은 동북아시아의 중심 도시로 거듭나면서 400만 전후 부산 인구가 다시 탄력을 받게 될 것 같다.
11.10 남중국해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인가?
남중국해의 불침항모
중국은 2014년 초부터 실효 지배중인 남중국해의 난사군도(Spratly Islands)의 산호초를 매립하여 7개의 인공섬을 건설, 국제법상 영유권을 인정받아 해양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은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용납하지 않고 세계 상선의 3분의 1이 통행하고 연간 5조 달러의 물동량이 움직이는 남중국해에 대한 통상과 안보이익을 중국에게 넘길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중국은 남중국해가 조상이 남긴 영토이므로 미국의 간섭을 부당하다고 주장해 왔다. 지난 5월 미 해군당국은 매립이 완성되어 일부 인공섬에서는 3000m급의 대형 활주로가 건설되어 중국의 불침항모(不浸航母)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으로서는 해외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한 해군력 강화가 필수였다. 2012년 후진타오 주석은 대국으로서 적절한 해상 통제권을 가질 수 있는 대양해군의 건설을 강조하였다. 중국으로서는 해양대국으로 가는 길목이고 앞바다(midland sea) 같은 남중국해를 확실히 장악해야했다. 중국은 역사를 인용 임의적으로 그은 9개의 선(九段線)이내 즉 남중국해의 80%가 중국의 영해라고 주장한다. 구단선의 모양이 남중국해 전체를 U자 형태로 싸고 있어 ‘소의 혀(牛舌)’라고 부른다
햄릿형 오바마 대통령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 국제 규범이나 국제법에 위배됨에도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허약함을 알게 된 중국은 난사군도에 인공섬을 건설하고 12해리 이내에 외국 군함의 진입을 막는 강경한 태도로 보였다. 미 해군 당국은 중국의 주장을 무시하는 12 해리 이내의 자유항행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너무 신중하여 햄릿이라는 별명을 얻은 오바마 대통령은 9월 하순에 미중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정상 간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대화로 해결코자 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6월 서니랜즈 정상회담 이래 시진핑 주석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순진함이 있었는지 모른다.
지난 9월 하순 워싱턴의 미중 정상 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남중국해의 매립을 중단하고 모든 국가에게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를 보장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시 주석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정상회담에 희망을 걸었던 오바마 대통령은 더 버틸 수 없었다.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중국이 주장하는 영해 12 해리 이내 미국 군함의 자유항행을 허가하였다.
'지리는 운명이다.(Geography is destiny.)'
오바마 대통령의 허가 이후 하와이의 미 해군 사령관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자 미국의 군함이 중국이 주장하는 영해에 실제 들어올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미국 해군은 일본 요코스카를 모항(母港)으로 하는 이지스 구축함 라센호(9200톤)를 파견했다. 라센호는 난사군도와 가까운 말레시아의 항구에서 10.27 출발하여 중국이 주장하는 12 해리 이내로 유유히 들어갔다.
중국은 ‘의도적 도발(deliberate provocation)’이라고 경고하면서 중국의 구축함 란저우호가 일정 거리를 두고 라센호를 추적하였으나 충돌을 없었다. 미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항공모함을 파견하여 자유항행을 정기적으로 계속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중국도 난사군도의 입장을 양보할 수 없다. 기존 입장의 양보는 통치의 정통성과 관련되어 중국 공산당의 입지를 크게 훼손할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매립지를 인정하면 항공모함 수십 대의 가치가 있는 섬이 생겨 남중국해가 중국의 내해(內海)가 되고 동맹국의 신뢰를 잃게 된다. 더구나 남중국해는 중요한 수송로(sea lane)뿐만이 아니라 77억 배럴의 석유가 확인되었으며 예상매장량은 280억 배럴로 천연자원의 보고(寶庫)이다.
미국이 자유항행을 1-2년 전에 감행하였더라면 중국의 인공섬 건설이 어려워 문제의 싹은 미리 제거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분석도 나오고 있다. 뉴욕 타임즈는 남중국해라는 풀장을 덩치 큰 시 주석이 모두 차지하여 뒤늦게 ‘아시아 회귀’라는 튜브를 들고 헐레벌떡 찾아 온 오바마 대통령이 수영할 공간이 남아 있지 않은 황당한 모습의 만평을 게재하였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미국과 중국이 위험한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는 난사군도의 7개의 매립지가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연상시킨다. 중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없다고 하지만 중국이 부상할수록 미중 두 나라의 핵심이익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투키디데스(BC465-BC400)는 고대 그리스의 장군이자 역사학자이다. 기원전 5세기 해양세력으로 신흥 강대국이 된 아테네와 기존의 패권국 스파르타와의 패권투쟁을 그린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란 역사서를 저술했다. 그는 서문에서 국가 간의 관계는 신(神)의 개입이나 정의보다 패권(軍事力)의 기반 하에 이루어진다면서 역사는 과학적이고 현실적임을 주장하였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케네디 스쿨 학장을 역임한 그래함 앨리슨(1940- )교수는 서양 역사에서 패권국과 신흥대국 사이 패권의 교대는 반드시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음에 착안하여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앨리슨 교수는 신흥대국(rising power)은 기존 패권국(established power)으로 하여금 공포(fear)를 느끼게 하고 이것이 전쟁으로 에스카레트 된다고 주장했다. 아테나와 스파르타의 전쟁이 불가피하게(inevitable) 만든 것은 패권국 스파르타가 느끼는 신흥대국 아테네에 대한 공포였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격퇴한 신흥대국 아테네는 델로스 섬을 중심으로 인근 도시 국가를 연합 델로스 동맹을 맺어 스파르타의 패권에 도전한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통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고 있는 스파르타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테네는 코린트 지협을 장악하면서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하자 스파르타와 충돌하게 된다.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이다. 남중국해를 통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중국의 전략과 유사하다. 28년간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가 신흥대국 아테네에게 승리함으로써 패권을 지키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진 동아시아의 나라들
동아시아의 역사에서도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찾아 볼 수 있다. 16세기 임진왜란 때에는 신흥강국 일본이 한반도를 통해 기존 패권대국 중국(明)을 침공코자 하였으나 실패한다. 그리고 19세기 말 청일전쟁에서는 신흥강국 일본이 청국에게 승리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한다. 20세기 초에는 일본이 청국에 이긴 여세를 몰아 러시아와의 전쟁(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다.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을 바탕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나 태평양의 기존 패권 국가인 미국은 일본에게 승리함으로써 패권을 지킨다.
20세기 중반 소련은 중국의 지원을 받고 북한을 사주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켜 50년 전 실패한 러시아의 남하정책 꿈을 다시 이루려고 하였으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에 의해 좌절된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주장한 개혁 개방 정책으로 세계의 공장으로 무섭게 성장하였다. GDP 규모로 2010년 일본을 추월하여 세계 2위가 되었다. 개혁 개방 30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성장을 지속해 온 중국은 중화문명의 부흥을 강조하는 중국몽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아시아 회귀
중국몽을 위한 글로벌 파워(패권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계 어느 곳이라도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대양해군의 능력을 요구된다. 그러나 중국은 1860년 베이징 조약이후 동해로 연결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하였기에 동해 바다에 군함을 띄우지 못한다. 북한의 나진 선봉지역에 중국의 관심이 큰 것은 동해에 접한 군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는 미국의 함대가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대양 해군을 가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중국은 서태평양의 섬을 사슬처럼 이어 제1 도련선 및 제2 도련선을 설정하여 외국 함대의 접근거부(Anti Access A2)와 진입불가지역(Area Denial AD)을 설정했다. 제1 도련선은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오키나와 필리핀 서쪽과 보르네오 북쪽 해역을 연결하고 제2 도련선은 괌 사이판 파푸아 뉴기니를 넘어 태평양 안쪽으로 연결하는 섬을 연결한 방어선이다. 최근에는 알라스카와 알류산 열도부터 하와이와 뉴질랜드에 이르는 제3 도련선까지 거론되고 있다. 명초 정화(鄭和)의 해양세력을 복원하겠다는 해양대국굴기의 전략이다.
미국은 A2AD 전력을 무력화하는 ‘에어 씨(Air-Sea) 배틀’ 전투개념을 발전시키고, 냉전기에 형성되었던 대 소련 전략인 중추(미국)와 부채살(아태 연안국)의 양자동맹 관계인 허브 앤드 스포크(hub & spoke)전략을 부활시키는 등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을 펴고 있다.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이라고도 부르는 미국의 전략은 중국의 제1 및 제2의 도련선을 다시 포위하는 거대한 초승달 전략(Great Crescent)전략으로 풀이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신형대국관계(a new type of great power relations)를 요구했다. 이는 대국이 된 중국의 핵심이익을 미국이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심지어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더 이상 인정 않자 미국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태평양은 미국의 핵심이익 권으로 20세기 이후 미국은 태평양을 자신의 내해(lake)로 생각하고 태평양에 들어오려는 어느 나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중국은 군사력이 따르지 않는 현실을 감안 태평양에 민감한 미국을 피해 유럽으로 향하는 서진(西進)의 정책을 썼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이다. 중국과 유럽을 잇는 대륙과 해상을 그물망처럼 연결하는 옛 실크로드를 연상시키는 정책이다.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이 있는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를 통해 서부 태평양으로 나가려던 계획이 미일동맹 강화로 어렵게 되자 서남쪽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龍)이 미국이라는 독수리를 피해 머리를 서쪽으로 돌린 셈이다.
중국판 먼로주의
일부 학자들은 중국은 먼로주의를 통해 미 대륙을 지배한 미국을 모방하여 먼로주의 방식을 아시아에 적용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1823년 미국의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유럽열강으로 하여금 더 이상 미 대륙의 주권 국가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였다. 유럽 열강에게 ‘아메리카 인을 위해 아메리카를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먼로 대통령 사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팽창주의 정책에서는 ‘루스벨트의 귀결(Roosevelt Corollary)'이라는 이름으로 먼로주의는 미국의 미 대륙에 대한 패권주의로 변질되었다.
최근 중국이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를 선언하자 많은 아시아의 나라들은 먼로주의의 데자뷰(旣視感)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과거 미국이 먼로주의를 내세워 유럽의 미 대륙의 간섭을 배척한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결국은 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고 있다. 중국이 기회 있을 때마다 영불칭패(永不稱覇 영원히 패권국이 되지 않겠다)라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난사군도의 산호초를 매립하여 인공섬을 만들고 있음을 예를 들고 있다.
사실 미국은 18세기 말부터 미주 대륙의 헤게모니를 추구하였고 19세기말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하여 이를 완성하였다. 미국은 자신과 대등한 경쟁자(peer competitor)를 용납하지 않았다. 세계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독일제국을,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을 그리고 냉전을 통해 소련을 제거하였다. 이제 5번째의 경쟁자로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중국의 딜레마와 시마(習馬)회담
중국은 미국의 남중국해에서 우위(dominance)를 용납하고 싶지 않지만 군사력(muscle)을 움직이기에는 시기상조(premature)임을 안다. 중국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중국으로서는 당분간 유소작위(有所作爲 필요한 역할은 한다)의 전략을 접고 새로운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감추고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중국은 경제 협력을 카드로 이용 미국의 동맹국에 접근한다. 최근 중국의 영국에 대한 거액 투자로 시 주석의 영국 방문 시 대단한 환대를 받은 경우이다. 뉴욕 타임즈의 만평에서는 미국의 애완견인 영국이 미국이 붙잡고 있는 개의 목줄을 떼어 버리고 중국이 주는 맛있는 먹이를 받아먹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과거사 문제로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일본을 포용하려는 정책을 펼 것으로 보는 관측도 있다. 경제 성장의 속도가 실속되어 실업문제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일본기업 투자 유치의 불가피한 점도 있겠지만 강건한 미일동맹을 흔들어 보려는 전략이 숨어 있다고 본 것이다.
지난 11.7 시진핑 주석은 싱가포르에서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을 분단 66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시마(習馬)회담’을 성사시켰다. 2016년 1월 대만 총통선거를 앞두고 국민당에 힘을 실어 주면서 대만의 친중화(親中化) 전략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11.8 미얀마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의 NLD(국민민주연맹)당이 승리하듯 대만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蔡英文)의 민진당이 승리하면 중국과 대만간의 긴장의 파고는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난형난제(難兄難弟)의 미중
‘세계경제의 룰은 중국 같은 나라가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야한다.’ 이는 오바마 대통령이 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 협상이 끝났을 때 한 말로 중국에 대한 불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중국은 중국대로 미국이 일본 호주와 함께 포위 전략을 펴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호 불신(mutual distrust)이다.
미국의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미중 간에 갈등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난사군도를 중심으로 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빨려 들어 갈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미중 간에는 협력해야 할 사항이 많다. 두 나라의 무역거래가 연간 5500억불 이상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상호 의존도가 높다. 그리고 북한의 핵문제 해결에도 서로 협력해야 한다.
이번 라센호의 파견에도 미국은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 전면 대결의 의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선단을 보내지 않고 구축함 1척을 보냈고, 라센호의 항로가 국제법상 무해항행이 인정되는 산호초 근처이며, 라센호가 중국뿐만이 아니고 필리핀 베트남 등이 매립하여 주장하는 영해의 12 해리이내에 먼저 진입한 후 중국의 인공섬에 접근한 것 등이다. 그리고 미중 두 나라의 해군 최고 책임자인 존 리차드슨 해군 참모총장과 우승리(吳勝利) 해군 사령관이 10.27 라센호의 항행에 이어 10.29 화상회의를 하였다.
‘뉴 노말’의 출구전략
그러나 갈 길이 멀다. 지난 11.4 말레시아에서 개최된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에서 난사군도를 놓고 미중 간의 합의가 되지 아니하여 공동선언문 채택이 무산되었다. 앞으로도 터키에서 개최예정인 G20정상회의(11.15-16), 필리핀에서 개최예정인 APEC 정상회의(11.18-19) 그리고 말레시아에서 개최예정인 동아시아(EAS)정상회의 등 아세안 관련 회의(11.21-22) 등에서 미중 양국의 정상이 수차례 만나는 다자회담이 기다리고 있다. 미중간의 마찰이 이러한 다자회의에서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미중 양국은 출구를 찾아야 한다. 중국이 긴장 완화를 위해 인공섬 건설을 중지하고 미국도 이에 대한 무력행사를 자제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난사군도의 인공섬 매립으로 남중국해가 자유항행할 수 있는 공공재(public goods)로서의 기능이 침해 받을 경우 피해가 예상되는 당사국들도 목소리를 내야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남중국해는 무역량의 30%, 석유수입의 90%가 통과하는 생존의 해상로이다. 미중 간의 정상 또는 고위급이 회담을 통해 ‘남중국해 분쟁당사국 행동수칙(code of conduct)’을 구체화하면 미중간의 군사대결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중 간에는 협력(cooperation)과 경쟁(competition)의 ‘뉴 노말(新常態)’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국제 질서에 있어서 자유(liberal)체제를 선호하는 미국과 제한(restrictive)체제를 주장하는 중국은 서로 풀어야 할 문제는 많다. 남중국해는 중국의 부상과 함께 당분간 차가운 전쟁(冷戰 cold war)이 아닌 위험한 평화(熱和 hot peace)가 계속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미중의 태평양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면서 아시아의 운명을 미중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내고 있다.
11.19 광군제와 중국의 소비혁명
중국에서 지난 11월 11일 열렸던 대광군제(大光棍節)행사가 화제다. 중국에서는 ‘싱글’ 즉 짝이 없는 ‘솔로’의 의미가 있는 숫자 1이 일 년 중 3번 겹치는 날을 ‘중(中)광군제’ 가장 많이 4번 겹치는 날을 ‘대(大)광군제’로 부른다. 20 여 년 전 중국의 기발한 대학생들이 서양의 밸런타인데이에 맞서 연인이 없는 솔로들을 위한 날로 ‘광군제’를 만들었다.
서양의 밸런타인데이는 연인들의 날이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군인들의 결혼을 금지시킨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결혼을 주선한 성 밸런타인(Saint Valentine) 주교가 269년 2월14일 처형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순교일을 기념하여 매년 2월14일에 연인들이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 되었다.
중국의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 마윈(馬雲)회장은 2009년부터 11월11일(雙11)의 광군제를 기념하여 전자 상거래 온라인 쇼핑행사를 개최해 왔다. 금년 행사는 혁명이라고 할 만한 쇼핑 광풍을 불러왔다. 232개국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하루 동안 거래한 금액만 16조 5000억 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기록이다. 글로벌 시대에 맞추어 ‘하이타오족(海淘族)’으로 불리는 해외 직구족을 겨냥한 상품이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전직 영어강사로 인터넷 기업을 성공시킨 마윈 회장은 007 시리즈의 주인공인 다니엘 크레이그를 초빙 깜작 쇼를 펼쳤다. 그리고 저장성 항저우 본사에서는 당일 매출액을 전광판으로 실시간 공개하면서 사람들을 열광시켜 쇼핑행사를 거대한 축제로 만들었다.
마윈 회장의 아이디어로 중국의 광군제는 일약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와 유럽 및 영연방 국가의 ‘박싱 데이(Boxing Day)’에 비견되는 세계 최대의 쇼핑행사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11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의 추수감사절 다음 날인 금요일에 연중 최대 규모의 쇼핑이 이루어지는데 이날에 처음으로 흑자 (black ink)를 기록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부른다. 유럽 및 영연방 국가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이 ‘박싱 데이’이다. ‘박싱’은 크리스마스 때 받은 선물 상자를 의미하는데 ‘박싱 데이’는 크리스마스 재고를 소진하기위해 물건 값을 대폭 할인하여 최대 규모의 쇼핑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블랙 프라이데이’와 ‘박싱 데이’는 오프라인 쇼핑이 중심인데 비해 광군제는 매장이 없는 외국 업체도 참여하는 전자상거래 전용 쇼핑행사다. 광군제 쇼핑은 세계적인 온라인 거래 추세에 힘입어 앞으로 쇼핑 규모의 증가는 몇 배로 늘어날지 예상을 불허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잘 맞는 알리바바 마윈 회장의 튀는 발상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국내 언론에서도 “글로벌 직구전쟁의 새 지평을 보여준 중국 광군제”, “세계를 뒤흔든 무서운 모바일 쇼핑 혁명” 등의 타이틀로 중국의 광군제 쇼크를 전하고 있다. 중국 보다 훨씬 앞선 1990년대부터 전자상거래를 시작한 정보통신기술(ICT)의 선진국인 한국은 뭘 하고 있느냐는 산업계에 대한 질타가 숨겨져 있다.
업계에서는 마윈 회장의 아이디어뿐만이 아니고 중국 정부가 규제를 없애 주는 등 전자상거래의 성장을 정책적으로 도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광군제를 하루 앞 둔 11월 10일 마윈 회장에게 축전을 보낼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안과 개인정보 등 각종 규제가 너무 많아 중국과 같은 ‘광군제’는 나올 수 없다고 한다.
글로벌 변화에 따라 자신을 개혁하면서 혁신과 창조를 이끌어 내는 마윈 같은 기업인과 함께 중국인의 폭발적인 소비 욕구가 광군제 소비 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한 때 전 세계 소비의 중심이 미국이었다면 이제는 중국이 그 역할을 이어받을 것 같다. 개혁 개방 이후 열심히 일만해 온 중국 사람들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소비문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제 소비할 수 있는 분위기만 조성되면 중국인의 소비는 급격히 늘어날 것 같다. 중국경제가 지금은 조정기로 성장이 둔화되고 있지만 오래지 않아 소비와 서비스 중심의 경제로 탈바꿈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 질 것으로 보는 관측이 많다.
12.02 요우커(遊客)에게 물어보자
모든 나라에서 관광산업을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하면서 더 많은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 외교에 힘을 쓰고 있다. 한국 정부의 관광산업 핵심은 요우커(遊客 중국 관광객)유치이다. 관광산업의 큰 손인 요우커를 모셔오기 위한 입국 비자 면제 등 각종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지난여름 한국 내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 증후군)만연으로 요우커들이 일본으로 방향 돌려 한국 관광산업이 큰 위기를 겪었다. 이제 메르스가 종식되고 요우커들이 다시 찾아 와 관광 산업이 활기를 띄고 있는데 요우커들이 주로 찾아 가는 주요 면세점의 특허 취소 등으로 관광업계가 다시 요동을 치고 있다.
한국정부가 서울 시내 면세점의 특허를 5년에 한 번씩 원점에서 재검토하다 보니 20여 년간 계속해 온 서울의 주요 면세점의 일부가 퇴출된다. 오랜 기간 동안 요우커들의 단골이 된 면세점이 뚜렷한 명분 없이 국내적 논리로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요우커들에게는 황당한 일이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온 지인을 안내하여 시내 면세점을 찾았다. 면세점의 판매원은 과거와 달리 중국어에도 능통하고 요우커들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그리고 요우커들이 사고 싶어 하는 물건을 잘 설명하여 구매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쇼핑 환경은 상당히 열악해 보였다. 많은 요우커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좁은 공간의 매장 안은 마치 시장 통 같았다. 요우커들이 쇼핑을 끝내고 다른 일행의 쇼핑을 기다려야 할 경우 마땅히 쉴 공간이 없었다. 물 한잔 제대로 얻어 마시지 못하고 쇼핑에 피곤한 몸을 면세점 통로 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요우커들이 많았다. 럭셔리 쇼핑을 하러 온 요우커들에게는 매우 민망한 일이다. ‘관광은 쇼핑이다’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감안할 때 국내 면세점은 매상에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쇼핑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이 되도록 여유롭고 안락한 공간을 준비해 두는 배려가 아쉬웠다.
차츰 면세점이 취급하는 물건이 다양하여 백화점 같은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백화점 내에서 식사 휴식 등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듯이 요우커들의 백화점인 면세점이 좀 더 쾌적한 분위기로 바뀌기 위해서는 면세점의 무한경쟁을 이끌어 내야 한다. 요우커들을 통해 얻은 수익의 일부를 오우커들에게 환원해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인 요우커들에게 유리하고 길게 보면 한국 관광 산업의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다르다. 요우커들의 선호에 관계없이 요우커들에게 잘 알려진 면세점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다든지 문을 새로 연 면세점이라도 5년 후에는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대륙의 기질을 가진 요우커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극히 한국적인 모습이다.
면세점 특허 연장의 기준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앞으로는 면세점 판매원의 친절성과 매장의 쾌적성 등 다방면에 걸쳐 요우커들의 평가를 참고하여 결정할 것을 권하고 싶다. 요우커 천만시대를 앞두고 관계 당국의 장기적 안목과 함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12.10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 최고의 미인
1930-40년대 상하이 연극(stage)과 은막(screen)계에서 활약한 4명의 국보급 중국 여배우(四大名旦)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장루이팡(張瑞方) 바이양(白楊) 수시우원(舒繡文) 그리고 친이(秦怡)등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그 중에 친이를 중국 최고의 미인(中國最美的女性)으로 꼽았다.
최근 외지(外紙)에서 4명의 여배우 중에 영화의 도시 상하이를 지키면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93세의 친이의 근황을 소개했다. 하얀 피부와 검은 눈동자가 아직도 매력적인 친이는 충칭(重慶) 시절부터 친구였던 장루이팡이 3년 전에 죽음으로써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배우가 되었다. 장루이팡이 죽기 몇 년 전에 당시 상하이 공산당위 서기인 시진핑(習近平) 현 국가주석이 그녀를 찾아 존경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친이도 중국 10대 여걸로 선정되어 중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문화 명인(名人)의 한사람이다.
중국의 잉그리드 버그만으로 불리던 친이는 1947년 궈모루(郭沫若)의 주례로 한국인 김염(金焰)과 세기적인 결혼을 하여 이듬 해 아들 첩(捷)을 낳았다. 김염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 큰 성공을 거두어 “상하이의 루돌프 발렌티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발렌티노는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미남 배우였다.
김염은 독립 운동가 김규식 박사의 처조카이다. 김규식 박사가 텐진의 베이양(北洋)대학(지금의 텐진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있을 때 김염은 김덕린이라는 이름으로 저우언라이의 모교인 난카이(南開) 중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김덕린은 고모 고모부와의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불꽃같은 인생을 기대하여 이름을 “염(焰)”으로 바꾸고 무단가출 텐진에서 상하이로 가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상하이 영화사에서 취직 온갖 궂은일을 마다않고 기회를 보고 있던 중 “야초한화(野草閒花)”에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 후 수많은 영화에 출연 나중에 ‘영화황제(影帝 film emperor)’로 등극한다.(졸저 ‘한중일 삼국문화의 지혜’ 참고)
중국에서 한류 드라마의 주인공 김수현의 인기가 높자 어느 중국 지인은 김수현를 보면 80년 전 김염의 인기를 보는 듯한 착각을 빠진다고 하였다.
1948년생인 아들 첩이 10대에 정신 장애를 앓았으나 김염- 친이 부부는 문화혁명 시절에 홍위병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되어 약을 제대로 구할 수 없어 병이 악화되었다. 김염이 1983년 상하이 화동병원에서 작고하자 친이는 김염의 유언에 따라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돌보아 주변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아들 첩은 정신은 장애가 있었으나 그림에는 소질을 보여 약간의 작품을 남겼다. 2002년 미국의 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친이의 아들 사랑에 크게 감동하여 첩의 그림을 2만 5천불에 사갔다고 한다. 2007년 첩이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친이가 아들을 위해 저금해 둔 20만 위안을 그 다음해 사천성에 지진이 발생하자 아들의 이름으로 구호기금으로 보냈다.
한국인을 사랑하고 결혼한 중국 최고의 미인 친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상하이 영화계를 지키고 있다. 상하이 분트(外灘)의 아르 데코 풍의 옛 건물군들은 화려했던 올드 상하이의 김염- 친이 한중(韓中) 커플의 로맨틱한 상하이 생활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2.21 중국의 런민비(위안화) 이야기
국제통화기금(IMF)이 11월 30일 중국의 런민비(renminbi 人民幣)를 2016년 10월부터 특별인출권(SDR 特別提款權) 구성통화에 포함한다고 발표하였다. 현재의 구성비는 미국의 달러(41.73%) 유로(30.93%)에 이어 제3위(10.92%)로 일본의 엔(8.33%) 영국의 파운드(8.09%)가 런민비를 따르고 있다.
런민비가 이제 국제 주요통화의 엘리트 클럽에 당당히 가입하게 되어 국제무역과 금융거래에서 달러 유로 다음의 주요통화로 공인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런민비의 굴기’를 이야기 하고 국제무역 거래에서 한손에는 링컨의 ‘그린백(Greenback 미달러)’ 다른 한 손에는 마오쩌둥의 ‘레드백(Redback 런민비)’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20년 전 중국 베이징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런민비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 달러로 봉급을 주므로 중국은행에 달러 구좌를 개설하였다. 런민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물건 구입에 필요한 만큼 런민비를 그때그때 바꾸어 사용하면 되었다. 중국을 떠날 때는 다 사용하지 못한 런민비를 모두 달러로 환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런민비는 중국에서나 필요한 돈이지 중국 밖을 나가면 아무 쓸 데가 없는 돈으로 보였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당시 화폐의 종이 질도 나빠서 금새 걸레처럼 헤어져 만지고 싶지 않은 돈이었다.
돈의 이름이 ‘런민비’(人民幣)고 발행기관도 인민은행이다. 처음에는 중국은행이 우리의 한국은행처럼 중앙은행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인민은행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는 인민이 최 상위 개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정당이고 군인도 국가의 군인(國軍)이 아니고 인민을 해방시킨 공산당의 군대(黨軍 인민해방군)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인민은 영어 people의 번역어로 본래 보편적인 민주주의 제도에서 사용되어 왔다. 국민국가(nation state)의 국민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공산주의가 대두하면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적 개념이 있는 국민(nation)보다 국적과 관계없이 사상과 이념으로 통합하는 ‘인민(people)’을 선호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유주의 시장경제 국가에서는 사상적으로 ‘인민’이란 말을 기피하여 중국 돈의 이름도 ‘런민비’ 보다는 ‘위안화(元貨’)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중국의 중앙은행으로서 발권은행인 인민은행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창설되었다. 당시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간의 내전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공산당 지배지 즉 인민 해방구인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화폐를 발행했다. 당시 화북은행과 서북 농민은행 등을 합병하여 화북의 중심지 스자좡(石家莊)에서 인민은행 창설과 함께 런민비를 발행하였다. 1948년 12월 1일이었다.
그 후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하고 1949년 10월 1일 신 중국이 건국되자 런민비는 중국의 법정통화(legal tender)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인민 해방구에 쓰이던 군표(軍票)같이 보잘 것 없던 런민비가 중국의 발전과 함께 세계 3위의 주요 통화가 된 것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내전)의 자금마련을 위해 그린백을 처음으로 발행하기 시작한 배경이 연상된다.
런민비는 경화(금속화폐)와 지폐가 있다. 주로 지폐가 많이 사용되는데 위안(元)표기로는 1위안, 5위안, 10위안, 20위안, 50위안 그리고 100위안 등이 있고 지아오(角)표기에는 1지아오, 5지아오가 있다. 1위안은 10지아오이다. 위안(元)은 본래 위안(圓)의 약자이다. 동양권에서 고대부터 돈은 둥근 형태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와 일본도 돈의 단위가 원(환 ?) 또는 엔(円)이다. 모두 둥글다는 의미이다
미 달러를 그린백이라고 부르는 것은 달러 뒷면이 모두 그린(綠)칼라이기 때문이다. 미 재무성 색깔이라고 한다. 런민비는 중국 공산당 색깔인 레드(紅)가 들어 있어 외국에서는 레드백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100위안 지폐를 빼놓고는 가지각색이다. 1위안 지폐는 녹색, 5위안은 자색, 10위안은 청색, 20위안은 갈색, 50위안은 청록색이고 100위안만이 붉은 색깔이다.
런민비 뒷면의 도안의 풍경화는 항저우 서호, 산동성 태산, 장강 삼협, 계림산수, 티베트의 포타라궁,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등 다양하지만 앞면의 초상화는 모두 마오쩌둥이다. 런민비를 ‘마오비(毛幣)’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지아오화의 초상화에는 소수 민족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개혁 개방으로 중국경제가 일본을 제치게 되자 중국은 런민비를 SDR의 구성통화에 넣고 싶어 했다. IMF는 매 5년마다 SDR의 구성통화를 검토한다. 1999년 유로가 달러 엔 파운드 다음으로 4번째의 구성통화가 되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5년 전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이 된 중국은 정식으로 SDR 구성통화에 런민비를 신청을 하였다. IMF는 구성통화 자격으로 무역 규모와 거래 자유화 정도에 따라 결정하는데 당시 런민비 경우 무역 규모는 충분하였으나 거래의 자유화에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5년 후인 금년에는 거래의 자유화가 많이 개선되었다고 본 것이다. 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의 통계에 의하면 국제결제에서 런민비의 순위는 5년 전 35위에서 4위로 상승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은 14억 국민들을 이끌어 가는 데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우면서 깊은 뜻(grand design)이 있는 메시지를 던지기를 좋아한다. 첫 번째가 ‘중국몽(中國夢)’이고 두 번째가 ‘일대일로(一帶一路)’이다. ‘뉴 실크로드’라고도 부르는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는 중국몽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라시아에 걸친 거대한 인프라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당연히 자금이 필요하다.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을 만든 것도 자금을 끌어 오기 위해서다. 마지막 남은 수단이 누구든 안심하고 손쉽게 런민비 채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런민비를 안정적인 국제통화로 만드는 것이다. 런민비의 국제화는 시진핑 주석이 주장하는 중국몽의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런민비가 주요통화로 결정되자 금리가 낮은 중국내(on shore) 런민비 표시 채권(판다본드)발행이 늘어나면서 홍콩(off shore) 등에서 발행하던 런민비 표시 채권(딤섬본드)은 점차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판다가 부드러운 딤섬을 먹어 치운다고 비유한다.
우리정부도 중국에서 국채로서는 최초로 30억 위안(5444억원)규모의 판다본드(런민비 외평채)를 발행하기로 하였고 증국정부(인민은행)의 승인도 받아 두었다. 우리정부는 달러 중심의 외화보유고에 런민비 비중을 높이는 한편 중국 진출 기업의 판다본드 발행을 장려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런민비는 다른 주요 통화에 비해 규제가 많다. 런민비가 진정한 국제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규제를 완화하고 주요통화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중국정부도 런민비가 SDR에 편입되는 내년 10월까지 지속적인 금융개혁을 이루어 내며 지금의 관리변동환율제에서 자유변동환율제 이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기준금리인상과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로 런민비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세계 3대 통화로 굴기한 런민비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4년 5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수출을 유지해서 경기를 살리려면 런민비를 절하해야 하지만, 가파른 절하는 외국 투자자들의 중국 이탈을 부추겨 중국 경제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SDR 편입을 앞두고 과거처럼 정부가 노골적으로 개입할 수도 없다. 딜레마에 빠진 중국정부(인민은행)의 선택이 주목받고 있다.
12.28 선전(深?)의 추억
얼마 전 중국의 광둥성 선전에서 산이 무너지면서 인근의 아파트와 공장을 덮쳐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다년간 도시 건축 쓰레기와 지하철 공사에서 파낸 토사가 쌓여진 100m 높이의 인공산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본래 채석장이 있었고 채석하고 난 빈 공간에 폐기물과 흙이 불법으로 투기되었다고 한다.
선전은 중국의 경제특구(SEZ) 1호로 덩샤오핑(鄧小平)이 만든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스타 도시인 선전에서 가장 후진적인 사고 일어 난 것이다. 중국의 압축성장의 결과로 보기에는 너무 처참하다. 특히 텐진항의 폭발사고가 난지 100여일 만에 선전에서도 황당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선전은 최신식 고층 건물이 즐비한 제2의 홍콩이라고 부르는 중국의 최첨단 도시이다. 주민 개인 소득이 연간 25,000불을 상회한다. 앞으로 30년 후 홍콩이 중국에 완전히 반환되면 홍콩은 선전의 일부가 될지 모른다.
1997년 8월 베이징 대사관에서 홍콩 총영사관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홍콩이 50년간 일국양제(一國兩制 one country two systems)의 조건으로 중국에 반환된 지 2개월 쯤 지났을 때였다. 마지막 총독 패턴이 떠난 홍콩은 더 이상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과거 영국 군대가 주둔했던 곳에는 인민해방군이 접수하여 낯익은 중국의 국기 5성 홍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홍콩은 세계 3대 미항인데다가 동서양의 문화가 어울려진 환상의 도시였다. 그러나 홍콩에 내려와 보니 베이징에서 사용하던 표준 중국어인 보통화가 통하지 않아 불편했다.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택시기사 등 일반인들은 영어 구사가 잘 안되고 현지어인은 광동화를 사용했다. 보통화는 촌스러운 공산당 말이라고 우정 기피하고 있었다.
물가가 비쌌다. 특히 매일 먹어야 하는 오이 토마토 등 야채 값이 턱없이 비쌌다. 물가가 싸고 말이 잘 통하는 중국 본토가 그리웠다. 홍콩에서 지하철(MTR)로 갈 수 있는 선전이 가까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말이면 집사람과 함께 선전으로 갔다. 각자 등산용 룩색을 하나씩 메고 국경인 로우(羅湖)로 간다. 그 곳에서 출입국 수속을 하고 나면 바로 선전의 가장 번화가 뤄후코우안(羅湖口岸)으로 나오게 된다.
베이징처럼 보통화가 통하는 선전에는 물가도 싸서 홍콩에서 오이 한 개 가격으로 흥정에 따라 오이 한 박스를 살 수 있었다. 식당에 가면 딤섬이 아니고 맵고 짠 사천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홍콩이 점잖은 고급 백화점이라면 선전은 인정이 넘치고 활기 찬 재래시장이었다.
장자제(張家界)등 중국 남부의 명승지를 찾아 갈 경우에도 선전공항에서 국내선을 이용하였다. 홍콩의 첵랍콕 공항보다 항공료가 훨씬 저렴하고 중국 어디에도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항선이 다양했다.
홍콩과 선전의 경계는 선전강(深?河)이다. 사실 중국의 개혁 개방 이전의 선전은 동쪽으로는 염전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선전강변의 보잘 것 없는 가난한 농어촌이었다. 홍콩의 신제(新界)의 북쪽 록마초우(落馬洲)는 지대가 높아 중국이 개방되기 전 죽(竹)의 장막에 싸여 있을 때 자유세계가 중국을 바라보는 유일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그 때 선전 논밭의 고랑이 유달리 깊다는 것을 알아 챈 사람이 있었는지 모른다. 선전이라는 글자를 풀이하면 고랑이 깊다는 뜻인데 바다와 가까운 선전강의 염도 높은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다보니 고랑을 깊게 팠는지 모른다.
중국 역사에서 중국 남쪽은 이민족(南蠻)인 월족(百越族)이 사는 미개지였다. 한(漢)이 망하면서 일시 삼국시대가 되지만 삼국을 통일한 위(魏)가 망하고 진(晉)이 건국된다. 진은 북쪽의 이민족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동진(東晋)이 된다. 그 때 이곳의 지명으로 바오안현(寶安縣)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명대(明代)에 와서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조정은 수군기지를 만들고 군제를 개혁하면서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바꾸고 안전을 위해 위험을 제거하자(革故鼎新 去危爲安)’는 의미로 뒤의 글자를 따서 신안현(新安縣)으로 지명을 바꾼다.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국력이 쇠약해진 청(淸)국은 중국 남부에 세력을 펼치고 있는 프랑스를 견제해야 한다는 영국의 요구를 받아 들여 1898년 제2차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다. 신안현 중 선전강 남쪽과 란타오 섬을 영국에 99년간 조차해 준다. 영국은 1차 아편전쟁(1840-42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섬을 할양 받고 2차 아편전쟁(1860 베이징조약)을 통해 주룽(九龍)을 할양받은 후이다. 이번에는 더 이상 할양 받을 명분이 없어서 99년조차를 내세웠지만 영구할양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국경이 된 선전강 주변은 물물교환지로 발전한다.
중화민국은 1914년 크게 줄어 든 신안현을 다시 바오안현으로 바꾼다. 허베이성의 신안현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바오안현의 중심부는 선전강 주변의 장터(深?墟)였다. 허시(墟市)라는 장터는 우리나라 5일장처럼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다. 광저우와 주룽간의 열차(九廣線 KCR)가 개통되면서 선전강의 장터에 역이 생긴다. 지금의 선전역이다.
1978년 중국의 개혁 개방을 주창한 덩샤오핑은 홍콩의 자본을 끌어 들이기 위해 과거 장터가 있던 선전역을 중심으로 선전강 연안을 따라 중국 최초로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경제특구는 외국으로 간주 중국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한때 선전의 경제특구에 근무하는 남자는 중국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젊은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월급 많고 장래가 촉망되었기 때문이다.
1979년 바오안현 전체가 선전시로 바뀌고 바오안현은 선전시내의 바오안구로 이름을 이어갔다. 당초 방대한 바오안구는 선전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몇 개의 구로 다시 분할된다. 당시인구 3만의 작은 농어촌이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에 이어 인구 1200만의 중국 대륙 4대 도시가 된 것이다. 이번에 사고가 난 광밍신구(光明新區)도 바오안구에서 독립해 나온 분구이다. 현재 선전공항도 바오안구 내에 있다. 애플의 부품을 받아 조립하여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만드는 대만 기업 팍스콘(富士康)이 소재하는 룽화신구(龍華新區)도 과거 바오안구의 일부였다.
선전은 연 평균 섭씨 22.3도의 따뜻한 날씨로 야채와 과일이 풍부하여 노인들이 살기 좋은 중국의 선벨트(sun belt)이다. 양귀비가 즐겨 먹었다는 여지(?枝)는 선전시를 대표하는 과일이다. 선전은 홍콩 마카오 등 대도시가 배후에 있어 자녀 취직에도 유리하다. 특히 지하철로 연결되는 홍콩은 다니기가 편리하다. 최근 겨울이 추운 동북 3성이나 베이징에 살던 나이 드신 교민들이 내려와 산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간판 도시 선전이 또 다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인재성(人災性)사고로 명예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 수습에 여념이 없는 마싱루이(馬興瑞) 선전시 당위서기의 활약이 기대된다. 그년 3월에 부임한 마 서기는 산둥성에 고향을 둔 하얼빈공대 부총장을 역임한 교수 출신으로 시진핑 국가주석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2016.01.07 새해 이른 아침 백제성(白帝城)을 떠나며
종전 70주년의 다사다난했던 을미년을 보내고 2016년 간지(干支)로는 병신년(丙申年) 원숭이해를 맞이하였다. 병(丙)은 붉은 것을 의미하므로 병신년은 붉은 원숭이 해이다. 붉은 원숭이는 지혜롭다고 한다. 금년에 자녀가 태어나면 지혜로운 아이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해이다.
중국 고대의 은(殷)대 갑골문에 나타날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간지는 10개의 천간(天干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과 12개의 지지(地支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조합한 것으로 60개의 이름(甲子)이 나온다. 태어나서 60년이 되어야 같은 이름을 만난다하여 ‘갑자’가 한 바퀴 돌았다는 의미로 환갑 또는 회갑이라고 부른다. 10개의 천간은 5행설에 의해 5가지의 기본 색과 5개의 방향을 나타낸다. 한 가지 색과 방향이 2년간 계속되는 셈이다. 갑을은 청색, 병정은 적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백색, 임계는 흑색이다. 방향으로는 청색은 동향, 적색은 남향, 황색은 중앙, 백색은 서향, 흑색은 북향이다.
중국 한(漢)대에서는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하여 생활 주변에 흔히 있는 12가지의 동물로 12지지를 나타나게 하였다. 대부분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지만 용과 원숭이는 다르다. 상상의 동물인 용은 중국의 어디에도 없으나 신화와 전설을 통해 신성한 동물(靈獸)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동국무원(東國無猿)’이라는 말처럼 우리나라(東國)에는 본래 원숭이가 야생으로 서식하지 않았다. 선사시대 한반도의 동굴에서 원숭이 뼈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이후 날씨가 추워서 멸종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따뜻한 중국의 남방과 일본에서는 야생에서 서식하여 흔히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원숭이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원숭이를 야생에서 접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원숭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것 같다. 원(猿)과 성(猩)의 합성어인 ‘원성(숭)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순수한 우리말로 잔나비라고 불렀다.
잔나비는 재주가 많은 원숭이(납 또는 나비)를 뜻한다. 금년의 신(申)과 원숭이의 만남은 우연으로 보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띠처럼 특별한(迷信的) 의미를 부여한다. 12년 마다 오는 원숭이 해(申年)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도 사람들이 한 해를 원숭이와 연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 원숭이(monkey)에는 긴 꼬리가 있지만 진화되어 꼬리가 없는 원숭이(ape)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하여 유인원(類人猿)이라고 부른다. 침팬지 고릴라 등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12지지와 함께 중국에서 전해온 것이 많다. 중국 원숭이에는 머리가 모자라는 원숭이와 지혜로운 원숭이의 두 부류가 있는 것 같다.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성어에서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에 중국 고대 소설 서유기의 손오공은 카리스마를 가진 매우 지혜로운 원숭이다. 손오공은 인도의 라마신을 도운 원숭이 신(神) 하누만(Hanuman)이 모델이라고 한다. 지금도 인도의 힌두교 성전에 가면 원숭이 얼굴을 한 하누만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무덤에서 길상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원숭이 토우(土偶)도 불교전래와 함께 신라에 도입된 하누만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원숭이를 원(猿)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후(?)라고 더 즐겨 부른다. ‘후’의 발음이 제후(諸侯)의 후(侯)와 글자와 비슷하고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출세를 하고 싶어 하는 선비들은 벼슬(侯)을 얻기 위해 원숭이(?)를 가까이 하는지 모른다.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으로 원숭이가 그려진 그림이나 청자를 지녔다고 한다. 중국의 지인들은 ‘후’가 복(福 중국음 Fu)의 발음과 비슷하여 원숭이를 사악을 물리치고(?邪) 복을 가져다주는(發福) 동물로 여기고 있다.
원숭이의 새끼사랑이 유명하다. 중국에서 원숭이의 새끼 사랑을 강조하는 뜻에서 단장(斷腸)의 고사를 만들어냈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목숨을 잃는다는 이야기이다. 원숭이가 새끼를 품에 안고 있는 모성애적 예술 작품이 많이 눈에 띄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일본에서도 원숭이가 야생으로 서식하고 있어 사람들의 애호를 받고 있다. 옛날 일본의 무사(武士 사무라이)들이 칼을 잘 쓴 것은 칼의 자상(刺傷)을 겁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원숭이를 통해 상처를 잘 낫게 하는 신비의 온천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친 원숭이를 따라 가보면 산속에 비밀 온천이 있고 그 온천을 이용한 원숭이의 상처가 말끔히 나은 것을 본 것이다.
일본에는 원숭이를 ‘사루(자루)’라고 한다. 세 마리의 원숭이 즉 ‘산자루(三猿)’전설이 있다. ‘자루’는 일본어에 하지 않는다는 부정의 접미사도 되므로 원숭이(사루)는 ‘하지 않는다(자루)’는 이중 의미가 있다. 안 듣고, 안 보고, 그리고 말하지 않는다는 세 마리의 원숭이(三猿)는 참고 또 참는 인내의 극치를 말한다. ‘산자루’는 15세기 일본의 전국(戰國) 시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시대를 거친 후 일본 천하를 통일하는 도쿠가와 이예야스(德川家康)의 인내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도쿄에서 멀지 않은 닛쿄(日光)에 있는 도쿠가와 사당(東照宮)에 가 보면 눈을 가리고 입을 가리고 귀를 가린 세 마리의 원숭이(三猿 산자루)가 조각되어 있다.
신(申)에는 성씨(姓氏)의 이야기도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신씨(申氏)는 평산 신씨라고 한다. 신숙주 신윤복 신채호 등 역사적 큰 인물을 배출한 고령 신씨도 만만치 않지만 평산 신씨의 이야기가 더 많이 전해 내려오는 것 같다. 평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 장군이다. 신숭겸(본명 三能山) 장군은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태조 왕건으로 부터 황해도 평산 지역의 식읍(관향)과 함께 신씨의 성을 하사(賜姓)받았다. 태조 왕건이 신숭겸의 가문이 크게 뻗어 나가길 기원하면서 신(申)씨 성을 주었는지 모른다.
신숭겸 장군은 후백제 견훤과의 공산(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왕을 살리기 위해 왕건의 갑옷으로 바꾸어 입고 싸우다가 장열하게 전사(爲王代死)한 충절로 유명하다. 그의 충절이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쳐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전사한 신립(申砬)장군 등 평산 신씨 가문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충신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율곡의 어머니로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인 사임당 신씨도 신숭겸 장군의 후손이다.
신(申)의 본래의 뜻은 ‘펼 신(申)’ 즉 뻗어 나간다는 의미이다. 신(申)의 글자를 보면 밭 전(田)자에서 아래위로 뻗어 나가는 모습이다. 밭의 작물이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새싹을 틔우는 것이 신(申)의 글자이다. 그래서 신년(申年)은 새로이 출발하여 뻗어 나가는 해로 보기도 한다. 지난해 을미년은 ‘메르스’ 유행 등 여러모로 지치고 힘든 한 해였다. 그러나 2016년 병신년은 불처럼 붉게 타오르면서 크게 뻗어나가는 한 해가 되기를 모두가 기원한다. 이러한 염원을 담아 이백(李白)의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早發白帝城)’라는 시(詩)를 소개하고 싶다.
이백이 당(唐)의 숙종을 배신하고 난을 일으킨 영왕(永王璘)을 도왔다는 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의 유배길이 사천성 백제성 근처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 은사(恩赦)를 받았다.
기쁜 나머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작은 배를 빌려 동 틀 무렵 물길 따라 400km 떨어진 강릉으로 한숨에 달려가는 모습이 이 시의 내용이다.
조사백제 채운간(朝辭白帝 彩雲間)
천리강릉 일일환(千里江陵 一日還)
양안원성 제부주(兩岸猿聲 啼不住)
경주이과 만중산(輕舟已過 萬重山
이백의 눈앞에서 삼협(三峽)의 수많은 산이 스쳐 지나가고 귓전에는 협곡 양안의 원숭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시에는 어려운 시절을 끝내고 새아침에 수많은 산들의 배웅을 받고, 새로운 벼슬길을 약속하는 원숭이의 응원소리를 들으면서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이백의 희망찬 마음이 가득하다. 병신년 금년 내내 우리 모두 이백의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01.18 김정은은 맹획(孟獲)이 아니다.
지난 1월 6일 북한이 예상을 깨고 ‘수소탄‘이라고 주장하는 4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세계는 다시 중국을 쳐다보고 있다. 3차 핵실험 후 지난 3년간의 중국이 대북 정책에 대한 실망이 역력하다. 북한의 대외무역의 99%가 중국과 이루어지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북한으로서 원유의 90%가 중국에서 수입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분노하고 북한을 비난하면서도 한반도 안정을 위한 대화 노력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3년 전과 바뀐 것이 없는 솜방망이 반응이다.
미국의 재균형 정책과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따라 위협을 느끼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북한을 포기할 수 없는 지정학적 전략 자산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의 계속적인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이러한 관용적이고 미지근한 반응은 제갈량(諸葛亮)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을 연상시킨다.
후한 말 삼국시대의 한 축으로 사천성을 중심으로 하는 촉(蜀)의 승상 제갈량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꿈꾸고 있었다.
명장 장비와 관우가 차례로 죽고 황제 유비(劉備)마저 어린 유선(劉禪)을 위탁하고 백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촉의 혼란을 틈타 남만(南蠻 지금의 운남성과 베트남 북부)의 맹획(孟獲)이 군사 10만으로 촉을 침범하였다.
제갈량은 맹획의 침략군을 막아내고 그를 사로잡았다. 제갈량은 맹획을 죽여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으나 관용을 베풀어 맹획을 풀어 주었다. 맹획은 자신이 잘난 것으로 착각하고 계속 군사를 일으켜 촉을 괴롭혔다.
제갈량은 끈질긴 인내로 일곱 번을 잡았다가 일곱 번을 풀어 주었다. 그제서야 맹획이 크게 깨닫고 “승상의 하늘같은 위엄을 기억하고 우리 남만인들은 영원히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서하면서 부하되기를 청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무한 관용에 의한 칠종칠금은 왕조시대 중국의 조공국 및 주변의 소수민족 정책으로 곧잘 인용되었다.
중국이 북한의 계속된 핵실험에 대해 분노하고 비난하면서도 북한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하지 않는 것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관용은 결코 아닐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보다 체제의 안정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중시하는 북한 체제가 안정되어 북한이 명실공히 위협적인 핵보유국으로 발전되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북핵문제는 물론 중국문제만이 아니고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하나가 되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북한의 명줄(생명선)을 쥐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핵실험을 계속하여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 도전하고 동북아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중국은 제갈량과 달리 이쯤에서 행동을 보이면서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야 한다. 오히려 호랑이 새끼를 키워 화를 입는 어리석음(愚)을 범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맹획처럼 “중국의 높은 은혜를 잊지 않고 중국이 원하지 않은 핵은 영원히 폐기하고 다시는 핵의 불장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서할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앞으로도 5차 6차 핵실험을 계속해서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해도 중국은 수수방관하여 제갈량의 칠종칠금을 이어 갈 것인가.
“어렵고 힘들 때 손을 잡아 주는 게 최상의 파트너”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호소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지난 해 9월 3일 중국이 외롭고 어려울 때 천안문 망루의 난간을 잡아 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 박 대통령의 따뜻한 손을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
제갈량이 남만국의 우려를 없앤 후 북벌 준비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처럼 중국도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어야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하는 서쪽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중앙아시아를 통해 유럽에 이르는 새로운 육상 실크로드와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새로운 해양 실크로드)에 제대로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01.22 ‘불타는 돌’ 아오지(阿吾地)
중국의 소수민족 언어 중 만주어(滿洲語)가 차츰 사라지고 있다. 만주어는 본래 백두산 근처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의 언어였다. 17세기 초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금(后金)을 세우고 그의 아들 황타이지가 민족 이름을 여진에서 문수보살을 의미하는 만주로 바꾸면서 나라 이름도 청(淸)으로 고쳤다.
그 후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면서 만주어는 지금의 중국보다 더 넓은 지역에 세력을 펼치게 된다.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와 만나고, 북쪽으로는 지금의 몽골 인민공화국,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헤이룽장 이북,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카슈가르에 이르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의 공용어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영어(英語)를 연상시킨다.
중국 대륙의 정복자 만주족은 처음에는 토착어 중국어(漢語)를 알지 못했다. 차츰 중국의 수준 높은 문화에 빠져 들면서 중국화(漢化)된 만주족은 자신들의 언어를 잊기 시작했다. 1912년 세계 최강의 대청제국이 멸망하자 그들의 공식 언어였던 만주어를 누구도 지켜주지 않았다.
베이징 자금성의 궁궐 전각 현판의 한자어 옆의 이상한 문자가 만주어(문자)이다. 꼬불꼬불하여 보기에 따라서는 문자라기보다 부스러진 라면처럼 보인다. 명(明)대 건축된 자금성 전각의 이름은 모두 한자어였는데 청나라가 자금성을 자신들의 법궁으로 사용하면서 전각의 이름을 일부 바꾸었다. 그리고 한자어 이름 옆에 만주어를 병기하였다.
조선조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했던 언어학자 묄렌도르프가 이러한 만주어를 라틴문자로 전사하는 방법을 고안한 이른 바 묄렌도르프 표기법을 창안하였다.
중화민국이 세워지면서 동화정책에 의해 만주족은 자신의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한자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신쥐러(愛新覺羅)성을 가진 황족은 모두 진(金)씨로 바꾸었다. 아이신쥐러가 본래 황금을 의미하므로 진씨가 된 것이다.
만주족 대부분이 동화되어 만주어도 사라지고 있지만 중국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끝자락인 이리(伊犁)강 남쪽의 차부차얼(察布査爾) 시버(錫伯) 자치현에는 만주어가 화석처럼 남아 있다. 금년이 자치현 설립 62주년이 된다.
중국 최대의 영토를 정복한 건륭황제 연간인 1764년에 청의 조정은 새로운 정복지 신장(新疆 New Territory)의 토착인 위구르 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대흥안령 산록에서 사냥과 목축을 하던 용맹한 시버(錫伯) 팔기군을 가족과 함께 이주(西遷)시켰다. 18개월이 걸린 민족 대이동이었다.
시버 팔기군은 척박한 중앙아시아에 이주되었으나 항상 푸른 산림이 무성한 동북지방의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을 염원하면서 살아 왔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로 신장이 남아 있었던 것도 용맹한 시버 팔기군 수비대가 그 땅을 지켜 주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19세기 초 영국의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어 서양 언어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버 팔기군 후예 3만 여 명이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목화재배를 생업으로 살고 있다. 그들의 일부는 250여 년 전 이주 당시의 옛 만주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의 무관심으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만주어는 사라지고 있는 반면에 만주어 지명은 과거 만주족(여진족)이 거주했던 중국의 동북지방과 함경도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하얼빈(哈爾濱 어망을 말리는 곳), 하이란강의 하이란(海蘭 느릎나무), 지린(吉林 강변), 쑹화강의 쑹화(松花 은색) 등이 만주어 지명이다.
함경도의 탄광으로 악명이 높은 아오지(阿吾地)는 ‘불타는 돌’ 온천으로 유명한 주을(朱乙)은 ‘뜨거운 물’ 두만강의 두만(豆滿)은 ‘만개의 지류’라는 의미의 만주어 지명이다.
오호츠크 해의 러시아 섬 사할린도 만주어다. ‘검다’는 의미의 사할린은 본래 흑하(黑河 사할린 울라)였다. 중국은 헤이룽장(黑龍江) 러시아는 아무르 강이라고 부르는 전장 4000km로 세계 8위의 강이다. 흑하의 지류인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된 강의 모습은 검은 색이 아니고 은색이라 하여 쑹화강(銀河)의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사할린의 지명은 만주족이 부른 흑하의 하구에서 보이는 섬 즉 ‘사할린 울라 앙가 하다’의 긴 이름에서 다른 말은 없어지고 ‘사할린’만 남았다고 한다.
01.29 시(習) 주석이 생각하는 21세기 실크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연초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및 이란 등 중동 3국을 순방하였다. 보통 3월 초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끝난 뒤 외국을 순방하는 관례를 깬 것은 중동을 경유하는 21세기 실크로드 일대일로(一帶一路)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크의 어원은 ‘스(si 絲)’에서 유래된다. ‘스’는 생사를 묶어 놓은 모습이다. 중국의 갑골문에서 ‘스’와 함께 누에(蠶) 뽕나무(桑) 등의 글자가 보여 양잠의 역사가 갑골문이 만들어진 은(殷)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천 년 전 쯤 된다고 한다. 중국의 전설적 요순시대에도 지금의 산서성 황토고원이 뽕나무가 잘 자라는 토양으로 양잠이 성했다. 뽕나무는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뽕나무 밭이 흔했던 것 같다.
실크 즉 ‘스’를 통해서 중국이라는 나라가 서양에 알려졌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역사’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중국을 소개했다. 그는 중국을 실크로 이해하여 ‘세레스(seres 실크를 만드는 나라)’라고 불렀다. 세레스가 라틴어에서 세리카(serica)로 바뀌고 영어의 실크(silk)는 세리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그리스에서 실크가 세레스와 함께 ‘시나(cina 또는 sina)‘로도 불리어서 지금의 차이나(China)가 ‘시나’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차이나가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이 보다 훨씬 이전에 ‘시나’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고대 중국의 최대 발명품이자 기반산업인 실크가 유럽으로 건너가 로마의 귀족들이 즐겨 입는 최고급 옷감이 되었다. 실크는 프로테인(蛋白質)이 주성분인 생사로 만들어져 윤기가 흐르고 따뜻하다. 몸에 걸쳤을 때 가벼우면서 그 흐름이 몸의 곡선을 감추지 않아서 사치에 빠진 로마 귀족이 앞 다투어 수입하여 국고가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는 황금의 가치와 막 먹는 중국의 실크 착용을 금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실크는 밀무역으로 조달되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자국 생산 노력이 시작되었다. 7세기 동로마시대 중국에 진출해 있던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景敎)의 선교사가 중국 관헌의 눈을 피해 대나무관 속에 누에알을 숨겨 반출하였다. 비교적 따뜻한 시칠리아 왕국에서 누에알을 부화시켜 양잠에 성공하자 양잠은 베니스 등을 통해 이태리 전역에 보급되었다.
이탈리아와 가까운 프랑스 리용에서는 이탈리아 기술자를 불러 실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기후 문제로 양잠이 실패하자 중국으로부터 직수입 하였다. 영국의 실크 수입은 국부(銀)의 유출을 가져 왔고 국부 회수를 위해 인도 산 아편을 중국에 팔게 됨에 따라 아편 전쟁이 일어났다. 아편전쟁은 사실 실크가 원인을 제공한 실크전쟁이기도 하다.
중국과 가까우며 기후가 유사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양잠의 기술이 도입되어 귀족들 중심으로 비단(緋緞) 또는 명주(明綢 명나라 견직물)라는 실크 옷을 해 입었다. 조선조에서는 한강이남 모래밭에 대대적으로 뽕밭을 만들어 국가가 직접 양잠을 운영한 것 같다. 서울 강남에 잠실 잠원 등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양질의 실크는 역시 중국에서 직수입해야 하였다. 조선의 조공 사신단을 통해 중국인이 좋아하는 인삼과 실크가 물물교환 되고 중강 개시, 책문 후시 등 공식 비공식 국경 무역을 통해 중국산 비단이 수입되었다.
조선 후기 비단이 널이 보급되면서 인천을 통해 산동성 비단이 들어오고 항저우(杭州)를 중심으로 하는 절강성 비단은 부산을 통해서 팔렸다. 중국의 비단 장사가 직접 비단을 가지고 와서 팔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비단이 장사 왕 서방’이라는 노래가 있다.
‘비단이 장사 왕 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통통 털어 다 주었소
띵호와 띵호와 돈이 없어서도 팅호와‘
실크가 거래된 옛 무역로(貿易路)를 ‘실크로드’라고 하지만 실크로드라는 말이 나온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독일의 지리학자 탐험가 리히트 호펜(1833-1905)이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저술한 ‘중국’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언급하였다. 그 후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리히트 호펜의 제자였던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1865-1952)이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후 ‘실크로드’라는 책을 저술하여 비로소 실크로드가 정착되었다.
중국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21세기 실크로드(一帶一路)를 통해 중국이 내다 팔 새로운 실크는 무엇일까. 시진핑 주석의 연초부터 중동국가 순방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02.04 이우환(Lee Ufan)의 주향천리(酒香千里)
외교관이 되면서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최고의 사교수단인 와인은 각종 외교 행사에 빠지지 않는다. 각국의 동료 외교관을 집으로 초대하는 홈 파티에도 와인이 빠지지 않았다. 초대를 받아 갈 때도 좋아하는 와인 한 병을 들고 가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과 와인 잔을 앞에 두고 국제 정세에 대해 토론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포지엄이라는 말이 ‘함께 와인을 마신다’라는 옛 그리스의 심포시온(酒宴)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와인을 이야기 하면 프랑스 와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흑해와 카스피아 해가 있는 소아시아가 원산인 와인은 기독교와 함께 로마에 전래되어 ‘신의 물방울’로 로마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로마 와인의 가격이 뛰자 로마인들은 식민지 프랑스에 포도원을 만들면서 프랑스 와인이 널리 보급되었다.
유명한 프랑스 와인 산지 보르도(Bordeaux)는 프랑스 남서부의 강이 많은 퇴적 지형으로 일사광선이 풍부하여 포도 재배의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과거 로마 해군의 기지였던 항구가 가까워 판매에도 유리한 곳이다. 보르도 와인은 약간 달콤하면서 감칠맛이 있어 대중적 인기가 높다.
프랑스 와인 생산지의 또 하나의 축인 부르고뉴(Burgogne)는 프랑스 동부의 론강 유역의 기후가 서늘한 지방으로 신맛이 나는 화이트(白) 와인이 비교적 많이 생산되고 있다. 나폴레옹 1세는 우수한 포도를 사용한 부르고뉴 와인을 특별히 좋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인 로마네 콘티는 부르고뉴 와인이다.
보르도 와인 이름에 ‘샤토(Chateau 城)’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부르고뉴 와인에는 샤토가 보이지 않고 ‘도멘(포도원)’으로 표시된 것이 많다. 프랑스의 혁명이후 정부가 몰수한 포도원을 다시 불하할 때 보르도 포도원은 돈 많은 자본가에게 전체를 불하하고 부르고뉴에서는 소상인들에게 잘라 불하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세에 와서 프랑스 와인이 종주국인 이탈리아 와인보다 신뢰를 받는 것은 이탈리아가 수많은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와인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프랑스는 통일국가를 이루어 우열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는 등 엄격한 정부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언젠가 보르도 와인을 마시면서 보르도의 특1등급(Premier Grand Cru) 와인인 샤토 오 브리옹(Chateau Haut-Brion)의 ‘와인외교’와 샤토 무통 로쉴드(Chateau Mouton-Rothschild)의 에티켓을 통한 ‘예술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빈 회의(1814-1815)에서 패전국 프랑스를 대표한 당시 외무장관 탈레랑(Talleyrand 1754-1838)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샤토 오 브리옹 와인을 제공하여 각국의 대표들이 오 브리옹의 매력에 푹 빠지게 했다. 프랑스가 패전국이면서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된 것은 오 브리옹을 통한 와인외교가 일조를 하였다고 한다.
샤토 무통 로쉴드의 에티켓에는 매년 유명 작가(아티스트)의 작품이 실린다. 와인에 붙이는 라벨을 프랑스에서는 에티켓이라고 부른다. 예절이나 태도가 불순한 사람을 흔히 에티켓이 없다고 한다. 예절의 에티켓과 와인의 에티켓은 같은 말이다.
에티켓은 본래 나무 기둥에 붙이는 표찰을 말한다. 지금도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원 입구에 붙은 표찰(에티켓)에는 들어가서는 안 될 사람의 행동을 나열해 두었다고 한다. 에티켓이 없다는 것은 에티켓에 나열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945년 이래 피카소, 샤갈, 달리, 미로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무통 로쉴드 와인의 에티켓에 들어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작가의 작품이 올려 진 에티켓도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금년에 2013년 빈티지(포도수확연도) 에티켓으로 드디어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거장 이우환의 작품이 선정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65번째의 작가라고 한다.
2008년 빈티지 에티켓으로 중국 작가 쉬 레이(Xu Lei)가 선정 된 후 동양인으로 두 번째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1월 말 샤토 무통 로쉴드 와인 회사의 줄리앙 로쉴드 남작이 서울에 와서 이우환 화백을 만나고 2013년 빈티지 에티켓의 원화를 공개하였다.
그림 한 점 당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이우환 화백은 에티켓 그림 값으로 얼마나 받을까. “명예로운 거래‘라는 이름으로 돈 대신 자신의 작품이 게재된 2013년 빈티지 와인 5케이스(60병)와 다른 빈티지 무통 로쉴드 와인 5케이스(60병)을 선물로 받는다고 한다.
지난 70년간 에티켓에 그림을 그린 모든 작가들도 돈보다 명예에 의해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와인 없이는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의 와인 애호가인 이우환 화백으로서는 늦었지만 오래된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금년에 80세가 되는 이우환 화백은 경남 함안 사람으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서울대 미대에 다니다가 1학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림 공부한 것이 아니고 동양 철학을 공부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유학자인 할아버지에게 배운 중국 고전을 더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양 철학과 예술을 접속하여 점과 선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 오늘 날 세계적으로 평가 받는 작품이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주향천리(酒香千里)라는 말이 있다. 무통 와인이 매우 비싸 누구나 쉽게 맛 볼 수 있는 와인이 아니지만 이우환 화백의 에티켓이 붙은 샤토 무통 로쉴드 와인의 향기는 천리에 다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02.20 고르디우스의 매듭
음력으로 설을 맞이하는 우리나라와 중국은 춘제(春節)문화권에 있다. 중국은 ‘춘제’, 우리는 ‘설 명절’이라 하여 긴 연휴를 맞이한다. 양력의 설(元旦)과 설 명절 사이의 한 달 여 기간은 과세(過歲)를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닌 애매한 기간이다.
금년에는 이 애매한 기간에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를 긴장에 빠트려 베이징과 서울이 춘제 와 설 명절 기분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장기간 고향 방문이나 해외여행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매일 터지는 빅뉴스에 정신이 없다.
유엔 안보리에서는 1월6일 북한의 4차 핵실험에 추가하여 2월7일 장거리 미사일까지 발사한 북한에 대해 다블 징계 논의가 활발하다. 중국과 러시아의 미지근한 태도로 만족할만한 제재가 나오기 어려워 보여 한국은 ‘개성공단 전면 중단’이라는 초강수로써 독자 제재를 시작했다.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군사적 외교적 분석에 바쁘다. ‘비올 때마다 우산 빌릴 수 없다’면서 차제에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25년 전에 철수했던 주한 미군의 전술 핵의 재배치도 주장하고 있다.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이 중국의 책임론이다. 미국의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도 문제지만 북한을 제대로 막지 못한 중국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다. 한중 관계를 역대 최상이라는 이야기를 믿었던 우리의 기대가 너무 컸는지 모른다.
중국은 국익을 우선하는 현실주의자들인데도 우리의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 같은 착시(錯視)에 빠져, 보고 싶었던 중국만 보았는지 모른다. 사실 북중 관계에 있어서 중국의 비중을 과대평가한 점이 있다. 필자가 아는 중국의 지인들은 북중 관계의 냉각으로 북한이 중국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한다. 중국의 손에 이른 바 ‘북한 패’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 네티즌 상대로 조사한 보도에 의하면 중국인들의 60%가 북한을 싫어하고, 가장 쫓아내고 싶은 이웃 국가의 4위에 북한이 랭크되어 있다. 1위 일본은 역사적인 이유에서 2위 필리핀과 3위는 베트남은 남중국해의 영유권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혈맹으로 알아왔던 북한이 4번째가 된 것은 그만큼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로 세계의 공분을 산 골치 아픈 이웃이라는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이 북한의 김정은과 한 번도 정상회담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직후 한국은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의 한반도 배치를 위한 미국과의 협의를 공식화하였다. 사드 배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홍문연(鴻門宴)의 고사를 인용하여, 사드는 “유방을 겨누는 항장의 칼춤(項莊舞劍 意在沛公)”이라고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 말속에 중국은 천하를 얻게 되는 유방, 미국은 패장 항우, 한국은 항우의 사촌 항장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 북한은 항장의 칼춤을 막은 번쾌(樊? 유방의 무장)가 된다.
비유가 매우 잘못되었다. 칼춤을 추고 있는 항장은 한국이 아니다. 4차 핵실험도 부족하여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쏜 김정은이다. “미국을 겨누는 김정은의 칼춤(正恩舞劍 意在美國)”을 막는 동맹국 한국이야말로 항장의 속뜻을 뒤 엎은 번쾌라고 생각한다.
사드는 북한의 핵미사일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자위용 미사일이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월16일 국회연설에서 북한 정권이 핵과 미사일로 생존은커녕 붕괴를 재촉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는 단호한 결기를 밝혔다. 개성공단의 전면 중단이 그 시작이다.
요 며칠 미국의 전략 자산의 전개와 이에 따른 중국의 무력시위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북한이 저질러 놓은 문제의 수습이 아니고 미중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마치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들고(Wag the Dog.)'있는 것처럼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 중국은 사드 배치에 반발할 것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관용을 거두어야 한다.
김정은의 도발에 의해 그리스 신화의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얽혀 있는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안정을 바라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이 나서야 한다. 한국의 동맹국 미국은 ‘인내’에서 ‘관여’로, 한국의 전략적 파트너인 중국은 ‘관용’에서 ‘제재’로 유일체제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
55년 전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연상된다. 쿠바의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미국의 첩보기에 의해 카스트로 공산정권의 쿠바에 건설 중이던 소련의 비밀 미사일 기지가 밝혀지면서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이 될 수 있는 세계 대전을 불사하는 긴장과 대립이 이어졌지만 결국 협상을 통하여 해결되었다.
최근 외지에 도날드 그레그(Donald Gregg) 전 주한 미국대사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미국 정보국(CIA)출신으로 한반도 전문가인 그레그 대사는 한반도의 비핵화는 전쟁을 하지 않은 한 인내심을 가지고 관여와 대화를 계속하는 방법 이외의 선택지가 없다고 한다. 그레그 대사는 잔혹한 독재체재가 지배하고 있는 북한의 붕괴는 시간문제이므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정은 정권의 도발로 야기된 한반도 정세가 미중간의 대립을 불러 마치 한반도에서 세계 대전이라도 일어날듯 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미중 대립구도에서 북한을 전략자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미중간은 과거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과는 다르다. 한반도의 안정과 비핵화의 공동 목표를 가진 두 나라가 고래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은 미국 및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 내어 강력한 압박으로 북한을 변화시켜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는 것이 급선무이다.
02.26 “레이디 고디바 이스탄불의 신부가 되다”
북한의 4차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세상이 한창 시끄러웠던 지난 2월14일은 밸런타인데이(Saint Valentine's Day 情人節)였다. 북한이 광명성절로 기념하는 김정일 생일의 이틀 앞이다.
3세기경 로마 황제는 강한 군대를 보유하기 위해 입대하는 병사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결혼 후 입대하게 되면 두고 온 처자식으로 군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이해심이 깊은 밸런타인 주교는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몰래 병사들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얼마 후 밸런타인 주교는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순교하게 된다. 그날이 2월 14일이다.
많은 젊은 남녀들이 밸런타인 주교를 추모하면서 이날은 기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카드나 꽃을 선물로 교환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 밸런타인데이는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 되었다. 밸런타인데이(2.14)는 남성이 여성에게, ‘화이트데이’(3.14)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 선물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초콜릿 선물을 주고받지 못한 싱글 남녀들이 4월14일 자장면으로 외로움을 달랜다하여 그 날을 ‘블랙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이 선물로 사용된 것은 역사가 오래지 않다. 초콜릿은 본래 중남미 멕시코의 유카탄 지방이 원산지이다. 초콜릿은 영어식 발음이고 현지에서는 ‘시큼하고 쓴 음료’라는 의미의 ‘소콜라틀’로 부른다고 한다.
멕시코의 유카탄 지방에는 카카오나무가 많았고 그 나무의 열매인 카카오 빈(콩)을 현지인들은 약용으로 사용하였다. 초콜릿은 카카오 빈 즉 코코아를 재료로 가공한 식품이다. 카카오 빈을 갈아서 카카오 버터를 제거하면 핫 초코를 만드는 코코아 가루가 된다.
이탈리아의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신대륙에서 가져 온 카카오 빈을 스페인 왕에게 선물하면서 초콜릿이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시큼하고 쓴 음료인 초콜릿에 설탕이나 꿀을 타 마셨다. 초콜릿 음료는 커피처럼 카페인이 들어 있어 머리를 맑게 하는 기호식품이다.
커피의 원산지는 동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이다. 중동의 예멘 상인에 의해 커피는 아랍 커피로서 서양에 소개된다. 유럽에 알려진 카페인이 포함된 양대 기호음료 초콜릿과 커피가 신대륙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들어 온 셈이다. 초콜릿 음료는 유럽의 귀족들에 의해 애용되었고 커피는 비교적 서민 중심으로 유행되었다고 한다.
180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스위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초콜릿 음료보다 버터, 우유와 함께 아몬드 헤이즐넛 같은 견과류를 넣은 지금과 같은 고형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최근 지인이 초콜릿을 보내왔다. 황금색의 예쁜 상자에 들어 있는 유명한 고디바(Godiva) 초콜릿이다. 고디바 초콜릿은 아름다운 여인이 누드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로고가 눈길을 끈다.
지금부터 90년 전인 1926년 벨기에의 왕실전용 초콜릿 제조업자가 실존 인물인 영국의 고디바 부인(Lady Godiva 1010-1067)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자신이 만든 초콜릿에 고디바의 이름을 사용했다.
11세기 영국의 코번트리 지방을 통치하는 레오프릭(Leofric)이라는 영주가 살았다. 탐욕스러운 영주는 세금(소작료)을 너무 많이 부과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영주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 레이디 고디바(일부에서는 ‘고다이바’로도 발음함)는 세금을 경감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영주는 부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뜻으로 발가벗은 상태에서 말을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다면 소원대로 해주겠다고 약속 한다.
레이디 고디바는 고민 끝에 백성들을 위해 발가벗고 말위에 올랐다. 가느다란 여인의 몸을 가리는 것은 길게 자란 금발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코번트리 사람들은 레이디 고디바의 고마운 용기에 보답하고자 모두 외출을 않고 집안에서도 일체 밖을 내다보지 않도록 결의를 하였다.
고디바 부인이 발가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성문을 나서자 거리는 유령도시처럼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모든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영주는 할 수 없이 약속대로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피핑 톰(Peeping Tom 몰래 훔쳐보는 톰)’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날 호기심 많은 톰이라는 청년이 닫혀 있는 창문의 커튼 사이로 지나가는 고디바 부인의 누드를 엿보았다. 그 후 톰은 저주를 받아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고디바 부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부드럽고 달콤한 초콜릿 맛으로 표현한 고디바 초콜릿 회사는 몇 년 전부터 이스탄불에 근거를 둔 터키의 글로벌 식품회사에 인수되었다.
당시 신문에서는 ‘레이디 고디바 이스탄불의 신부가 되다
(Lady Godiva becomes bride of Istanbul)'라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밸런타인데이가 조금 지났지만 고디바 초콜릿을 통하여 성 밸런타인과 레이디 고디바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한다. 한편으로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 주민의 어려운 생활을 도외시하고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를 긴장 속에 빠뜨리고 있는 김정은을 생각한다.
명품을 추구하는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 시절부터 세계 최고의 초콜릿 브랜드인 고디바의 마니아인지 모른다. 김정은이 고디바 초콜릿을 맛보기 전에 백성을 위하는 레이디 고디바의 애민(愛民)정신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03.04 중국의 양회(兩會)와 시진핑의 샤오캉(小康)
3월3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는 5100여명의 전국 대표들이 참석하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3월5일 개막) 이른 바 양회(兩會)가 시작된다. 이번 양회는 중국경제의 향방을 정하는 중요한 정치행사다.
지난해부터 중국경제의 실속, 유가인하 그리고 미국의 금리 인상이라는 세계경제의 3재(三災)로 금년은 위기의 한해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새해 들어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따른 긴장 고조와 시리아 내전에 의한 난민문제 등으로 세계경제의 또 다른 악재(惡災)가 추가되었다.
미국의 월가의 조사에 의하면 전문가들은 중국경제의 경착륙이 1년 이내 일어날 것으로 보는 응답자가 42.7%나 된다고 한다. 경착륙은 활황세 경제가 실속하면서 실업자 급증하고 주가가 폭락하며 경제성장률은 3%이하로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미국의 투자가 조지 소로스는 중국경제의 경착륙은 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위안화에 대한 공격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소로스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와 함께 중국경제를 둘러싸고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조지 소로스는 1992년 영국 파운드 위기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환투기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중국에 진출해 있는 중소기업 대표들의 신년회에 참석하였다. 모두들 위안화가 앞으로도 계속 떨어질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중국경제 전망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않아 중국경제의 심각성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를 이끌고 가는 주요 국가들이 재정지출과 금융완화로 꺼져가는 엔진을 살리기 위해 악셀레타를 너무 강하게 밟았는지 이것이 오히려 거품이 되어 세계경제가 다시 곤란에 빠졌다. 위기 탈출 방안이 새로운 위기를 키운 셈이 되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연말 홍콩에 다녀왔다. 홍콩에서 지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홍콩의 날씨가 좋아 진 것 같다고 했더니 인접한 광동성의 공장이 문을 닫아서 그렇다고 한다.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동관(東莞)의 공장들이 인력을 구하지 못해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부 회사는 사람을 찾아 내륙으로 아예 공장을 옮겼다고 한다.
중국에 다년간 근무하였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이 10%대 성장을 유지할 때라 한 자리 숫자로 내려가도 다시 두 자리 성장이 될 것으로 믿었다. 수출이 줄고 은행의 불량채권이며 지방재정의 문제가 있더라도 지대물박(地大物博 국토가 넓고 인구와 물산이 풍부)의 나라에서 일시적 현상으로 보였다.
공산당의 유능한 지도자들이 경제를 쥐고 있어 당의 체면을 위해서도 뭔가 할 것으로 믿었다. 한 때 바오빠(保八 성장률을 8%대로 유지함 )캠페인을 할 때도 자전거(중국경제)는 계속 달려야 쓰러지지 않으므로 8%는 유지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바오치(保七)를 이야기하더니 지금은 6%대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도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국정부가 발표하는 성장률도 통계의 허수로 사실은 3%전후에 불과하다는 악담도 들린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성장 잠재력을 강조하면서 지속 성장을 위해서는 1) 서비스 산업 확대 2) 도시화 3) 혁신을 통한 신 성장 동력확보 등을 거론하고 있다. 특히 과거 케인스 경제학(凱恩斯 Keynesian Economics)의 수요측면의 개혁보다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학(Reaganomics)을 참고로 공급측면의 개혁을 통하여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2년 12월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 총서기가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은 개혁 개방의 도시 선전이었다. 시 총서기는 선전의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하면서 개혁 개방의 정신을 이어 받아 중국 경제를 발전시키겠다고 맹서하였다고 한다.
지난해 말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시 주석은 초심을 잃지 않고 취임 초와 같은 정신으로 새로운 구상(新思路)을 내 놓았다. ‘창신.녹색.개방.공유.균형’ 등 5대 발전이념과 함께 ‘공급측면 개혁’이 그 중심이다. 공급측면 개혁은 정부의 규제를 줄이고 시장자율화와 기업에 대한 감세정책을 실시하는 정책이다. 이는 1970-80년대 미국의 레이건(里根) 대통령이 썼던 경제정책이다.
레이거노믹스가 정부의 간섭을 거부하는 시장 만능주의임에 비추어 볼 때 국가자본주의에 가까운 중국에서는 완전한 레이거노믹스 논리가 통할지 불확실하지만 철강 석탄 등 과잉 생산시설을 축소하고 ‘좀비기업(zombie company 자생력이 없어 금융지원으로 연명하는 기업)’의 구조조정은 분명히 할 것 같다.
지난 주 상하이에서 중국경제의 경착륙과 위안화 절하의 우려 속에서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총재회의가 개최되었다. 공동선언문에서는 의장국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의 저성장을 타개하고 금융불안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위해 모든 정책수단의 총동원과 함께 구조개혁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중국경제와 세계경제는 2인3각(二人三腿)의 구조로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이번 양회는 중국경제의 재활이 걸려 있는 중요한 회의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한 달 여에 닥친 총선 그리고 미국의 대선 이야기에 함몰되어 있다. 우리 경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국경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려야 할 것 같다.
시 주석의 집권 4년차를 맞이하는 올해는 중국의 13차 5개년(2016-2020)규획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탈빈곤에 의한 풍족한 인민생활)사회 건설을 약속한 시 주석으로서는 마지막 규획이다.
이번 양회 기간에 중국경제의 새로운 성장 인칭(引擎 엔진)이 될 수 있는 공급측면 구조개혁의 구체적인 정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해 본다.
03.11 시진핑의 판다외교
2014년 7월초 방한한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내외분은 당시 세월호 참사로 우울증에 빠져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판다 한 쌍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전 세계 2000여 마리 밖에 생존하지 않은 희귀동물 판다를 통해 양국의 우호를 확인하는 판다외교(panda diplomacy)의 일환이다. 그 판다 한 쌍이 지난 3월3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판다를 15년간 대여 받아 위탁 사육할 용인시의 에버랜드(삼성물산)는 공모를 통해 2012년생 수컷의 판다에게는 ‘러바오(樂寶)’ 2013년생 암컷에게는 ‘아이바오(愛寶)’ 즉 즐거움을 주는 보물, 사랑스러운 보물로 이름 지었다. 아이바오는 에버랜드의 중국 이름인 아이바오러위안(愛寶樂園)에서 따 왔다고도 한다.
에버랜드가 판다 한 쌍을 들여오면서 우리정부로부터 처음으로 일반연수(D-4) 비자를 발급받았다고 화제가 되고 있다. 에버랜드 측은 판다 한 쌍에게 매년 연간 200만 미불을 대여료로 중국에 낸다고 한다. 금슬이 좋아 새끼가 태어나면 마리당 60만 미불을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중국 정부가 1984년부터 멸종위기에 놓여 있는 판다를 보호하기 위해 종래의 기증형식에서 유료 대여형식으로 바꾸어 ‘따꿍꿔오바오(打工國寶)’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보 판다가 해외에 파견되어 스스로 돈을 벌어 자기를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의 로고로도 사용되고 있는 희귀동물 판다는 네팔어 ‘폰야’에서 유래되었고 ‘폰야’는 ‘대(竹)를 먹는 동물’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판다는 매일 40kg 정도의 대나무를 먹어야 사는데 판다가 본래부터 대나무를 좋아해서가 아니고 대나무 이외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판다를 대를 먹는 곰(竹熊)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다.
흑백의 털을 가진 판다는 검은 안경을 낀 것 같은 검은 눈과 둥근 얼굴 그리고 야생 동물에서 보기 어려운 느릿느릿하고 태평스러운 몸동작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판다 전문가는 판다의 이러한 모습은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눈이 쌓인 바위 그늘과 대나무 숲(竹林)에 사는 판다에게 보호색으로 흑백의 털이 자랐고, 어금니로 단단한 대줄기를 부셔야하므로 턱뼈의 근육이 발달되어 미인형의 둥근 얼굴로 보이게 된다. 느릿느릿한 몸동작은 대나무의 기본열량이 부족하여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부득이한 몸놀림이라고 한다.
귀엽지만 어딘지 모르게 함량미달로 보이는 판다에게 쿵푸(功夫 중국무술)를 가르쳐 주어 히어로를 만드는 특이한 발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애니메이션 ‘쿵푸 판다’의 이야기이다. 최근 극장가에 ‘쿵푸 판다 3’가 흥행몰이를 한 것도 판다로부터 이러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판다를 말할 때 슝마오(熊猫), 타이완에서는 마오슝(猫熊)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름에 고양이(猫)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은 생긴 모습이 고양이 같다는 의미이다. 처음 중국에 알려진 판다는 사실 고양이 또는 너구리 모습을 하였기 때문에 슝마오라 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후에 발견된 판다는 체격이 크고 모습도 다르다. 앞서 고양이 같은 판다를 샤오슝마오(小熊猫 lesser panda 애기판다)로 고쳐 부르고 지금 일반적으로 부르는 판다를 다슝마오(大熊猫 giant panda 대왕판다)로 구분해서 부른다.
서울대공원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샤오슝마오는 몸길이가 60cm 이고 무게도 3-6 kg으로 고양이처럼 작고 너구리처럼 긴 꼬리가 있다. 그러나 다슝마오는 몸길이가 1.5m이며 몸무게는 100-150kg 정도로 곰과(Ursidae) 동물로 샤오슝마오와는 과(科)가 다르다.
샤오슝마오는 주황색 바탕에 흰색과 검은 색의 털이 나 있어 붉은 판다(red panda 花熊)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판다외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685년 중국(唐)의 측천무후가 일본의 왕실에 보냈다는 판다는 울긋불긋한 샤오슝마오로 생각된다.
한국을 찾아 온 판다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2년 전 1994년 한중 수교 2주년 기념으로 대여 받아 들어 온 판다 한 쌍을 에버랜드가 5년간 사육하다가 외환위기로 반납한 전례가 있다.
이번에 사육을 맡은 에버랜드는 과거의 경험을 살려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최첨단 사육시설을 구비한 ‘판다월드’를 4월부터 공개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판다 붐이 예상되고 더 많은 유커(遊客 중국관광객)의 방문이 기대된다.
집권 4년차를 맞는 시진핑 국가주석은 ‘판다외교’를 통해 최근 서먹해진 한중 우호를 심화시키고 북한에 대해서는 ‘비핵화 압력’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03.18 서복(徐福)과 세계유산
고대 교역로 실크로드가 뜨고 있다. 특히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의 육상과 해상 신 실크로드 경제권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과도 관련되는 것 같다.
중국(唐)과 로마제국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동방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동방실크로드는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상 교역로이다.
사실은 동방 실크로드보다 1500년 앞서 이지역의 해상 교역로를 개척하여 수많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있다. 중국 진(秦)나라 사람인 서복(徐福)이다.
서복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와 회남형산(淮南衡山)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는 서복을 서불(徐?)이라고도 부른다. 서불의 불(?)은 두건(巾)을 쓴 제사장의 의미로 두건에 한 일자(一)가 들어 있는(一巾) 글자이다. 이는 두건에 ‘냄비뚜껑’을 올린 시(市)와 비슷하지만 다른 글자이다. 불(?)은 서복의 복(福)과 중국 발음(fu)이 같다.
서복이 BC 219년 진시황의 지시로 바다에 나갔다가 신선 이야기를 듣고 진시황에게 바다 건너 삼신산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해 오려고 했더니 신선이 동남동녀와 함께 오곡 종자와 백공의 제품을 가져와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진시황이 크게 기뻐하여 동남동녀 3000명과 다방면의 기술자(百工)와 뛰어 난 제품을 가지고 가도 좋다고 하였다.
서복은 BC 210년 진시황이 시킨 대로 60척의 배에 5000명의 각 분야의 기술자, 3000명의 동남동녀와 함께 3년 치 식량을 준비하여 진황도를 출항하였다고 한다. 서복 일행은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고 한다. 일본은 평원광택(平原廣澤 넓은 평야와 습지)의 땅에 기후가 온화하고 풍광이 수려하며 원주민이 착해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어 돌아가지 않았다(徐福得平原廣澤 止王不來)고 한다.
학자들은 서복이 불로장생에 눈이 어두워 판단력이 희미해진 진시황을 속여 신천지에 필요한 처녀 총각 다양한 기술자 오곡의 종자 등을 대거 싣고 기획 이민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천문지리에 능한 서복은 진시황이 포악하여 진나라가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을 예견하였는지 모른다. 그 후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폭정을 이어가 백성들이 탈출하고 천하를 통일한지 15년 만에 그리고 서복이 떠난 지 4년 만에 나라를 잃은 것을 보면 서복의 선견지명을 알 수 있다.
지금 일본의 기술이 한중일 3국 중에 띄어 난 것도 당시 중국의 백공(百工)들이 일본에 정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부에서는 서복이 떠날 때 많은 서책을 준비해서 가지고 나와 진시황의 분서(焚書)를 미리 피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중국에도 없는 유학 및 의약관련 서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서복이 도착한 곳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신구시(新宮市)에 가면 서복이 도착하여 살다가 죽었다하여 서복의 무덤이 있고 서복이 좋아했다는 서복주(徐福酒)도 팔고 있다.
일본의 하타(秦 또는 羽田)씨는 서복의 후예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진(秦)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붙인 이름(姓)이라고 한다. 과거 일본의 하타 쓰토무(羽田 孜) 총리가 일본 서복학회의 회장이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학자들은 서복은 선진 중국 문물을 가지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고대 이민 집단으로 본다. 한반도의 서복 유적지에는 서불과차(徐?過此) 또는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거쳐 갔다.’라는 의미의 네 글자가 바위에 새긴 명문이 많다. 그리고 제주도의 서귀포(西歸浦)도 서복이 조천포(朝天浦)에 상륙하여 불로초를 구하여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올랐다는 표시이므로 한반도는 서복 일행의 경유지로 본다.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 233-297)가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한반도의 진한(秦韓 辰韓)은 마한 동쪽으로 진(秦)에서 옮겨 온 유민이 살던 나라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배를 타고 작살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고래잡이(捕鯨) 그림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서복이 일행 일부를 지금의 경상도에 남겨 진한을 건국케 하고 고래잡이 등 사냥의 선진 기술을 가진 백공의 일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015년 9월 한반도의 남쪽 섬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제주도에서 한중일 3국의 서복문화 전문가들이 모여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를 창립했다. 한중일의 서복문화 관련 지역을 순회 교류하여 서복 일행이 한국과 일본에 미친 문화 인류학적 막대한 유산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문화적 유사성이 가장 높은 한중일 3국이 과거사 문제로 제대로 공통 문화를 공유 및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데 서복문화를 공통분모로 하여 한중일 3국의 서복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들 연구자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3국에 흩어져 있는 서복의 역사 유적 지구를 연구 정리하고 서복을 통해 다양한 교류를 이어간다고 한다.
또한 서복이 3국에 남긴 문화유산의 역사적 존재감을 세계에 발신하기 위하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에도 힘을 쏟는 다고 한다.
03.25 '레버넌트'와 '뉴 프랑스'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미중관계가 어려울수록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사람이 베이징의 미국 대사라고 생각된다. 2014년 2월부터 임기를 시작한 맥스 보커스 (Max Baucus 1941-)대사는 미중 간 외교 마찰로 벌써 중국 외교부에 몇 차례 소환된 적도 있다.
보커스 대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가 주중대사로 부임하기 전에는 미국 북서부 목축업(ranching)이 주 산업인 몬태나 주의 민주당 출신으로 35년 이상 의원생활을 한 고참 상원의원이었다.
보커스 대사가 상원의 재정위원회 산하 무역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던 2006년 12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장소를 몬태나로 유치하였다. 협상하는 사이 한국 대표들과 몬태나 산 쇠고기 스테이크를 같이 먹으면서 한국말로 "(쇠고기) 맛있습니다”라면서 자신의 고향 쇠고기를 적극 홍보했다고 한다.
보커스 대사는 상원의원 시절 보좌관으로 통상법 전문의 마이클 푼케(Michael Punke 1964-) 변호사를 채용했다. 그 후 푼케 보좌관은 보커스 상원의원의 추천으로 백악관의 국제무역담당 비서관으로 근무하였다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지금은 미국통상대표부(USTR)의 부대표 겸 국제무역기구(WTO)의 미국 대사직을 수행하고 있다.
보커스 대사는 요즈음 힘든 업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끼던 푼케 보좌관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질 것으로 보인다. 푼케 보좌관이 2002년 발간한 인기 소설 '레버넌트( The Revenant, A Novel of Revenge)'가 영화화되어 크게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푼케 보좌관이 그린 실존인물 휴 그라스(Hugh Glass)로 연기한 배우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가 88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다시 한 번 유명해졌다.
푼케 대사는 보커스 대사의 고향 몬태나의 이웃 와이오밍 주 출신으로 어릴 때 대자연을 벗하면서 자랐다. 그리고 고교시절 래러미 요새(Laramie Fort) 역사공원의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서부 개척시대에 인디언과 장엄한 대자연에 맞선 이름 없는 개척자들의 무용담을 듣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소설 '레버넌트'는 1823년 여름, 서부 개척시대 전설의 인물 휴 그라스가 회색 곰의 습격을 받아 온 몸이 뜯겨나가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모피 교역 일행(fur trade party)에서 버려졌다. 휴 그라스가 복수의 일념으로 죽음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 온 이야기를 폰케 대사는 박진감과 수려한 문장을 통하여 베스트셀러로 성공시킨 것이다.
푼케 대사는 전업 소설가가 아니므로 근무와 병행하여 매일 3시간 씩 소설 쓰느라고 건강을 챙기지 못해 4번이나 폐렴에 걸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학구열이 강하여 소설 레버넌트의 배경을 역사학자처럼 소상하게 밝혀 그의 소설을 통하여 미국의 서부개척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소설 레버넌트의 배경이 된 곳은 푼케 대사의 고향 와이오밍 주변의 로키산맥의 동쪽 능선이다. 로키산맥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갈래의 강은 원시림 아래로 실핏줄처럼 얽혀있다. 이러한 환경이 비버의 서식지가 되어 비버의 모피를 찾는 사냥꾼이 몰려왔다.
비버(河狸)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사는 몸길이는 60-70cm, 꼬리 길이 30-40cm 정도의 땅다람쥐와 유사한 설치류의 일종이다. 하천이나 늪에 살면서 댐을 만들어 집을 짓는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코트 비버(coat beaver)'라 하여 겨울철 남녀 할 것 없이 상류층의 겉옷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난방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모피류 의류가 보온에 가장 좋았다.
부드럽고 인기가 있는 비버 모피를 찾아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섬에서 인디언과 교역하던 퀘벡의 프랑스의 비버 사냥꾼은 새로운 비버의 서식지를 찾아 나섰다.
프랑스의 모피 사냥꾼에 의해 미국 신대륙에는 프랑스 영토가 늘어났다. 러시아의 모피 사냥꾼이 검은담비(sable)를 찾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시베리아가 러시아 영토가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피 사냥과 교역은 당시 프랑스 경제력의 근간이 되었다. '뉴 프랑스'라는 이름의 프랑스 영토는 북으로는 캐나다 인접 로키산맥의 동부에서 시작하여 남으로는 멕시코만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루이지애나 지역을 연결하는 212만 km2 의 방대한 지역이었다.
신대륙 개척과 함께 서부로 뻗어 나가는 미국의 개척자들에게는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는 '뉴 프랑스'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미국 정부는 '뉴 프랑스'를 통째로 사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구매 사절단을 프랑스 파리로 보내 나폴레옹 1세에게 매각을 권유하였다. 협상대표로 후에 미국의 제5대 대통령이 된 제임스 먼로는 미 의회 승인 한도액인 1500만 불에 흥정하였다.
나폴레옹 1세는 신대륙에서 '뉴 프랑스'의 건국을 꿈꾸고 이 지역을 지켜왔지만 유럽 전쟁에 소요되는 전비 충당을 위해 부득이 미국 대표단의 매각 요청을 수락하여 매매 계약서에 서명했다.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거대한 토지가 미국에 팔린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으로 기록된 이 방대한 지역의 매입 성공으로 미국은 서부 진출이 용이하여 오늘 날 같은 세계 대국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1803년도의 일이다. 미국 정부의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몬태나 와이오밍지역이 미국 영토에 귀속되자 미국의 비버 모피 교역업자들이 들이 닥치기 시작했다. 물러가는 기존의 프랑스 사냥꾼과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새로이 진입하는 미국 사냥꾼과의 갈등도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푼케 대사가 소설로 만든 것이 '레버넌트'이다. 영화는 소설의 분위기를 그대로 화면에 옮겨 아카데미 촬영상에 손색이 없는 장엄한 미국의 대자연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1872년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은 미국의 국립공원 1호로 와이오밍 몬태나 등 이 지역의 일부를 국립공원으로 만들었다. 대자연의 보호조치였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이다.
이 지역은 유황이 많아 바위가 누렇게 변한 것을 원주민 인디언들이 '노란 바위'로 불렀고 이것이 프랑스 사냥꾼에 이어 미국의 사냥꾼에 전해지면서 영어로 '옐로스톤(Yellow Stone 노란 바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소설 '레버넌트'의 배경도 로키 산맥을 수원으로 하는 옐로스톤 강, 그랜드 강 그리고 플랫강 등이 중심이 된다. 이 강들은 미주리 강이 되었다가 센트 루이스에서 미국이 젖줄 미시시피 강을 만나고 남으로 흘러간다.
04.06 아웅산 장군과 ‘아리비아의 로렌스‘
/아웅산 수지 [사진=중앙포토]
지난 달 3월 미얀마의 수도 네피도에서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지난 해 총선거에서 군부의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에게 승리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총재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문민정부이다.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할 아웅산 수지(1945-)는 대통령 직을 자신의 심복 틴초(1946-)에게 맡기고 자신은 외상 교육상 등 4개의 장관을 겸직하였다.
1962년 네윈(1911-2002) 장군의 군사쿠데타 이후 반세기 이상 미얀마를 통치한 군사정권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산 수지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헌법을 아예 바꾸어 버렸다. 외국적의 가족이 있는 인물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다.
수지 여사는 이미 영국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남편 마이클 아리스는 1999년 사망하였고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새 헌법에는 총선에 이겼다고 새 대통령이 모든 각료의 임명권을 행사할 수 없다. 국방 내무(경찰) 등 치안관계의 주요 장관은 군사령관이 직접 임명하고 국회 전체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여 개헌을 거부할 수 있는 규정도 신설했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당분간 군과 2인3각(二人三脚)의 정권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미얀마에 봄(민주화)이 왔다고 하지만 꽃샘추위(군의 개입)가 기다리고 있다.
막강한 미얀마 군부는 사실 아웅산 수지 여사의 아버지 아웅산(1915-1947) 장군이 만들었다. 건국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국부(國父) 아웅산 장군의 영웅적 행동으로 오늘날의 미얀마가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버마(미얀마의 옛 이름)를 방문한 1983년 10월9일, 북한에 의한 ‘랑군(양곤의 옛 이름) 폭탄테러 사건’이 터졌다. 버마를 방문하는 외국원수가 의전상 참배하는 국부 아웅산 장군의 묘소에서였다. 대통령의 도착 이전에 폭탄이 터져 대통령은 안전했지만 미리 도착해 있던 수많은 각료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아웅산은 랑군대학에 다니면서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의 힘이 옛날 같지 않음을 알고, 버마가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생각했다.
아웅산은 랑군대학 학생회회장으로 학우들을 끌어 모아 반영(反英)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투쟁은 영국 관헌의 추적을 받게 되고 독립을 바라는 학생들은 뿔뿔이 몸을 숨겨야 했다.
아웅산은 국외로 탈출하여 중국의 샤먼(廈門 아모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때 독립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이 버마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 중으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를 중칭(重慶)에 고립시키고 폭격으로 장제스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미 연합군은 ‘버마루트’를 만들어 장제스의 항일전쟁을 지원하였다.
버마루트는 랑군에서 시작하여 중국 윈난성(雲南省)의 쿤밍(昆明)에 이르는 육로 수송로로 연합군은 이 루트를 이용 군수품과 생활 일용품 등 물자를 보내고 있었다.
일본은 버마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버마의 무장 독립군을 만들어 게릴라전을 펼칠 필요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을 원하는 아랍의 지도자들을 모아 오스만 터키군을 습격하는 영국 정보당국의 게릴라 전략을 참고하였는지 모른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불리는 영국의 정보장교 로렌스(T.E. Lawrence) 소령의 활약상이 일본 육군성에서도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일본 육군성은 정보장교 스즈키 케이지(鈴木敬司 1897-1967) 대령을 ‘버마의 로렌스’로 만들기로 하였다. 스즈키 대령은 1940년 6월 샤먼에 피신 중인 아웅산을 포섭 일본으로 데려 가 훈련을 시키고 1941년 2월에는 방콕에 남기관(南機關)이라는 특수정보기관을 설치하였다.
독립심이 강한 젊은 학생들을 반영독립의 명분으로 일본이 점령중인 중국의 하이난도(海南島) 타이완(臺灣) 등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 후에 ‘30인 동지(Thirty Comrades)’로 불리는 반영 학생들이 강력한 군사훈련을 받고 버마로 돌아와 무장 항쟁을 이끌었다.
피터 오툴이 열연하고 데이비드 린이 감독한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Lawrence of Arabia)’에서 감동적으로 보았던 영국의 정보장교 로렌스 소령은 1918년 여름 아랍 독립군 지휘자 파이잘 왕자와 함께 터키군의 주요 거점 도시인 다마스커스 공략에 성공하였다.
‘버마의 로렌스’로 불리던 스즈키 대령도 아웅산 등 ‘30인의 동지’를 주축으로 하는 버마 독립군과 함께 1942년 3월 영국군으로부터 랑군을 탈환하였다.
스즈키 대령은 임무를 완수하자 1942년 6월 도쿄로 전임되고 그 후 소장까지 진급 1945년 2월 퇴역한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은 스즈키 소장을 BC급 전범으로 체포하여 랑군으로 연행하였다. 아웅산 장군 등 ‘30인 동지’들은 스즈키 소장의 체포에 강력히 항의하여 스즈키 전범은 석방되었다. 1981년 버마 정부는 스즈키 소장에게 국가최고훈장을 수여, ‘버마의 로렌스’로 공식 인정하였다.
1942년 7월 아웅산 장군은 일본의 도움으로 영국군을 버마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듯 했다. 1944년 인도침공을 앞두고 인도와의 국경근처의 임팔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버마의 독립보다 전쟁물자 조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웅산 장군은 일본의 독립 지원은 거짓이고 그들이 생각하는 독립은 일본의 괴뢰정권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아웅산 장군은 이번에는 영국의 협력을 얻어 ‘반파시트인민자유연맹’을 만들어 일본군에게 처음으로 무력으로 대항하였다. 1945년 3월 27일로 이날은 버마 국군의 날이다.
1945년 6월 아웅산 장군은 영국군의 지원으로 랑군을 회복하고 대일 승리를 선언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독립의 기쁨에 넘쳤던 버마를 돌연 영국군이 장악한다. 영국은 버마의 독립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종전 후 아웅산은 루이스 마운트배튼 버마 지역 연합군 사령관과 애틀리 수상을 만나는 등 버마의 독립을 위해 런던의 지도부를 움직여 독립의 약속을 받아냈다.
1947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한 아웅산은 내각을 구성 독립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어느 날 괴한들이 회의실에 침범 아웅산 등 각료들을 살해하였다. 1947년 7월 아웅산 장군의 나이 32세 때였다. 버마의 독립을 원하지 않은 영국정부의 음모라는 설이 흘러 나왔다. 아웅산 장군은 죽었지만 다음해 1948년 1월 그의 동료 우누를 수상으로 하는 버마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1962년 네윈 장군은 혼란에 빠진 우누 문민정부를 전복하는 군사 쿠데타를 감행한다. 네윈 장군도 ‘30인 동지’의 일원으로 아웅산 장군의 부하였다.
1988년 8월 8일 아웅산 수지를 중심으로 이른바 ‘8888 항쟁’이 일어나 네윈 장군의 장기 군사독재에 항의한다. 군사정권은 마지못해 직접 선거를 허용하게 되고 1990년의 선거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야당이 압승을 하지만 군사정권은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 된다.
2010년 군사정권은 민정이양과 함께 군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여당(USDP)을 결성하고 관제 야당도 만들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미얀마로 바꾸었다.
국명 ‘버마‘가 버마민족에 대한 구어적(口語的) 호칭인 반면, ‘미얀마’는 문어적(文語的)호칭에 불과하지만 군사정권은 영국 제국주의 잔재인 ‘버마’를 지우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옛 수도 ‘랑군’도 국호 변경과 함께 ‘양곤’으로 바꾸었다.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반체제 인사나 서방세계에서는 군사독재의 냄새가 짙은 미얀마 대신 오히려 버마라고 부르고 있다. 아웅산 수지 여사의 민주화가 완성되면 다시 국명이 버마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미얀마의 실권자가 된 아웅산 수지 여사 앞에는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반세기가 넘게 미얀마를 지배해 온 기득권을 지키려는 군부와의 타협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이다.
대외적으로는 대형 댐건설 등 미얀마 북부에 적극적 투자로 안다만해(Andaman Sea)로 나오려는 중국과 경제 시찰단을 앞세워 ‘아시아 최후의 프런티어’ 미얀마에 진출하려는 일본이 충돌할 수 있는 상황을 잘 조정해야 한다.
국민소득 1200 불로 아시아의 후진국 미얀마가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평화와 안정 그리고 인권이 지켜지는 민주국가 건설이 가능할 것인가. 아웅산 수지 여사의 민주개혁에 세계인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04.15 트럼프 후보와 ‘You're fired!’
최근 모임에 나가면 지인들 사이에서는 국내 총선보다 미국 공화당에서 독주하고 있는 트럼프 대선 후보에 대해 관심이 많다. ‘안보무임승차론’을 주장하는 트럼프 후보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주한 미군이 철수되고 미일 동맹도 어려워져 한반도가 불안해 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해 6월 ‘미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 대선 캠프 구호로 미국 대선에 뛰어 든 부동산 재벌 도날드 트럼프(1946- )는 무슬림 입국전면금지, 멕시코와의 국경 잠정폐쇄 등으로 저학력 백인 노동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적 유권자의 환호를 받아 왔다.
대외 무역에서도 보호무역 강화를 주장하여 오바마 정권이 주도하고 있는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와 자유무역협정(FTA)의 재협상 또는 폐기를 선언하고 중국과 일본에 대한 보복관세로 일자리(jobs)와 돈(money)을 찾아와야 한다는 등 구체성이 없는 궤변으로 인기를 끌어 왔다.
최근에는 낙태여성 처벌과 한국과 일본에 핵무장을 허용하겠다고 하면서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 ’성공을 빈다. 알아서 즐겨라‘라는 식의 폭탄 발언도 서슴지 않을 정도이다.
트럼프 후보는 정치적 아웃사이더라는 평판처럼 정치가(statesman)라기 보다 쇼맨(showman)에 가깝다. 미국의 외교 전략에 대해서도 정면에서 부정하여 미국뿐만이 아니라 동맹국을 불편하게 하고 미국의 가장 중요한 무력 상대국인 중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도 트럼프 후보는 외교도 세계도 모른다고 경고를 날린 바 있다.
자화자찬과 기고만장의 트럼프 후보도 위스콘신 프라이머리(예비경선)를 전환점(turning point)으로 상승세가 꺾이고 있다. 상대방에게 카드(牌)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국제정치를 도박 논리와 승부욕으로 이해하고 있는데다가 극단적 막말과 비현실적인 공약을 계속해서 쏟아내자 지지자들까지 등을 돌린 결과이다.
트럼프 대세론이 위스콘신(Wisconsin) 경선에서 패하면서 적색등이 켜졌다. 위스콘신은 ‘위스콘신(Meskousin의 와전) 강’의 강바닥과 주변이 붉은 바위(reddish sandstone 赤砂岩)로 이루어져 현지 인디언 말로 ‘붉은 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붉은 땅’에서 ‘빨간 등’을 만난 셈이다.
트럼프 후보가 자력으로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는 데 필요한 대의원 과반수 즉 ‘매직넘버’로 불리어지는 1237명 확보는 사실상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은 7월 지도부가 개입하는 중재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를 통해 최종 후보를 뽑게 된다.
공화당 지도부는 당내 강경보수 ‘티 파티’의 지지를 받고 있는 테드 크루즈 후보도 아닌 제 3의 인물을 내세울 것으로 보이나 유권자의 반발로 쉽지 않을 것 같다.
7월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은 1차로 기존 경선결과에 따른 의무투표를 하는 경쟁전당대회(contested convention)를 거치나 당 지도부가 개입하는 2차 재전당대회에서는 자유투표에 의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한다.
트럼프 진영은 풍부한 재력을 이용 몸값이 금값이 된 대의원 포섭을 위해 황금 전용기에 태우고 호화만찬 등 물량공세를 쏟을 예정이라고 한다.
트럼프 후보는 뉴욕 퀸즈에서 부동산 개발로 거대한 부(富)를 형성한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의 넷째 아들로 부동산 호텔 리조트 카지노 연예 등 다양 한 분야에서 아버지 이상으로 성공한 사업가이다.
자기 현시욕이 강해 독특한 헤어스타일(髮型)을 고집하고 각종 메디아에 노출을 즐긴다. 자신의 부동산의 이름에 모두 트럼프를 상표로 하고 있다. 서울에도 트럼프 타워가 진출되어 있다.
트럼프 후보를 보면 그가 호스트(사회자)로 나온 미국의 리얼리티 게임 쇼 ‘아프렌티스(The apprentice 후보자)'가 연상된다.
마크 바네트라는 걸출한 TV 프로듀서가 혜성처럼 나타나 2000년도에 ‘서바이버(Survivor)'라는 리얼리티 쇼를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러한 대세에 힘입어 2004년부터는 트럼프와 함께 시작한 ’아프렌티스‘가 미국 NBC(전미방송회사)를 통해 방영되어 역시 대단한 이기를 끌었다.
트럼프는 이러한 활약으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의 스타가 되었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데 동력이 되었다.
당시 필자는 미국 TV를 직접 볼 수 없는 나라에 근무하였기에 비디오를 빌려 시리즈를 보았다. ‘끝장 면접(ultimate job interview)'로 불리어진 CEO (최고 경영자) 면접에서 후보자(아프렌티스) 중 최종 통과된 자가 트럼프가 경영하는 계열사중 하나를 맡는다. 연봉 25만 불에 계약기간은 1년 이다.
대개 17명 전후의 남녀 응모자를 합숙을 시키고 개인별 또는 그룹별로 경영 과제를 주어 해결하도록 유도한다. 그 과정의 실제 상황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한 회의 방송이 끝날 때 쯤 후보자 전부를 뉴욕 맨하탄의 트럼프 타워 중역회의실에 모아 놓고 그 동안의 업무를 평가 한 후 후보자 중 한사람을 실격자로 해고한다. 회 차를 거듭한 후 마지막 회에 남은 최후 1인이 게임의 우승자가 되고 약속대로 CEO로 발탁된다.
프로그램의 압권은 트럼프가 모든 후보자들이 모인 가운데 실격자에게 ‘You're fired!'라고 하면서 해고를 선언할 때이다. 트럼프의 냉소적인 이 말이 한동안 유행어가 되어 트럼프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이제 얼마 후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트럼프도 공화당으로부터 ‘You're fired!' 라는 자신의 말을 되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이민자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좌절에 빠진 저학력 백인들을 중심으로 ‘트럼프 현상’마저 해고(fire)시킬 수 있을지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04.22 ‘아베 노부유키’의 경무대와 ‘위안스카이’의 중난하이
4.13 총선이 끝난 후 어느 모임에 나갔다. 모두들 새누리당의 패인(敗因)에 대해 한마디씩 하면서 대통령의 소통부족이 총선에서 패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반면에 소통부족의 원인을 청와대의 환경에서 찾는 사람도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북쪽을 쳐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웅장한 모습의 청와대이다. 청와대의 환경이 그곳에 사는 사람을 제왕적으로 만들고 제왕처럼 행동하다 보니 소통이 잘 안 된다는 설명이다.
지금의 대통령뿐만이 아니라 역대 대통령은 정치가로 소통의 달인이고 그래서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단 대통령이 되어 구중궁궐(九重宮闕) 같은 청와대에 들어가면 소통을 거두고 명령과 지시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임기 말년에 가까울수록 이러한 일방통행이 심화되는 것도 청와대가 주는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일제(日帝)는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 경복궁의 흥례문(興禮門)을 포함한 전각들을 헐어낸 자리에 총독부를 지었다. 총독부가 완성된 후 총독관저도 인근에 새로 지어 옮기기로 한다.
일제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경복궁 후원(royal garden)으로 과거 역대 왕족들이 활쏘기 등 무예에 힘쓰던 경무대(景武臺)를 헐어내고 그곳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이른 바 ‘경무대 총독관저‘에는 미나미 지로(南次郞) 7대 총독이 처음 입주하였다.
해방이 되자 미군의 존 하지 중장이 일제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물러간 그곳에 일시 거주하였다. 우리 민족에 대해 저주의 예언으로 악명이 높은 아베 총독은 지금의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와 성(姓)도 다르고 아무런 혈연적 관계가 없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경무대 총독관저’를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고 4.19 이후 독재의 상징인 경무대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청와대는 노태우 대통령을 거치면서 지금의 형태인 권위주의적 건물로 구성되었다. 청와대의 위용과 내부구조는 문민 대통령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어느 문민 대통령은 청와대를 옮기고 현재의 건물은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나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유야무야 되었다고 한다.
수백명이 근무하는 행정기관이면서 다양한 행사를 할 수 있는 청와대를 내 주고 다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마련하는 데는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고 더구나 경호상 더 좋은 위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청와대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 보니 필자가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중국의 청와대 중난하이(中南海)가 연상된다. 중난하이도 우연인지 청와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중난하이는 중국 왕조 시대의 정궁(紫禁城)의 후원(皇家園林 imperial garden)이었다.
과거 베이징을 수도로 한 금조(金朝)와 원조(元朝)의 궁궐은 지금의 자금성 북쪽에 있었다. 인공호수인 베이하이(北海)와 중하이(中海)는 태액지(太液池 황실정원의 호수)로 존재했고 명조(明朝)의 영락제가 자금성을 지으면서 난하이(南海) 추가로 파내어 태액지가 늘어났다. 그 파 낸 흙으로 산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징산(景山)이다.
베이징 근처에는 호수를 해(海 바다)로 표기한 것이 많은데 물이 귀해서 작은 호수라도 바다(海)처럼 보여 표기하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옛날에는 물(水)이 모여 있는 곳은 호(湖) 또는 해(海)로 구분 없이 표기되었다. 해가 바다(sea)의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로 오래지 않았다.
중난하이는 청조 말기 실권자 서태후(西太后)가 특별히 좋아하였다. 철도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서태후를 위해 중국 최초의 철도가 중난하이에 부설되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의 난으로 서태후가 시안(西安)으로 피난을 갔을 때 러시아 군이 중난하이의 서태후 궁궐을 점령 수많은 보물을 수탈해 갔다고 한다. 그 후 중난하이는 8국 연합군의 사령부가 된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한다. 쑨원(孫文)과 함께 청조 멸망의 공을 세운 위안스카이
(袁世凱)는 쑨원의 양보를 받아 대총통이 된다. 위안스카이는 약관 20대에 조선에 파견되어 왕실을 좌지우지한 인물로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은 야심가였다. 그가 총통부로 정한 곳은 과거 청조의 황실 후원이었던 중난하이였다.
위안스카이는 황실의 후원에 총통부를 정함으로써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legitimacy)을 황실의 권위를 통해 보충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일제가 조선 왕실 정궁의 일부를 헐어 총독부를 짓고 그 후원 전각인 경무대를 헐고 총독관저를 지은 것도 침략의 콤플렉스를 조선 왕실의 권위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안스카이는 중난하이의 전각 하나를 개조하여 장안(長安)대로에 나오는 문을 만들었다. 건륭제가 지은 보월루(寶月樓)라는 전각이 신화문(新華門)이 된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자금성을 둘러싼 6m 높이의 붉은 담장을 헐고 새로운 문을 만든 셈이다.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새로운 중국(新華 New China)의 황제가 되면서 총통부를 신화궁이라고 이름을 바꾼다. 위안스카이는 반대파의 압력에 황제의 지위를 포기하고 곧 사망한다. 위안스카이가 죽고 나서 중난하이는 그의 부하였던 군벌들이 차례로 차지하였다.
1928년 장제스(蔣介石)의 북벌이 성공하면서 베이징이 장제스의 국민당의 지배하에 놓인다. 장제스는 중난하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옮기고 베이징(北京)을 베이핑(北平)으로 고쳐 부르고 권력의 중심이었던 중난하이를 시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베이하이 공원과 마찬가지로 중난하이도 시민공원(public park)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겨울에는 스케이트로, 여름에는 보트를 타고 베이하이에서 중난하이로 자유롭게 다녔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베이핑을 점령했다. 그리고 천안문 누각에서 신중국을 선언하였다. 베이핑은 베이징으로 돌아 왔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쫓겨났다.
공산당 지도부는 공산당 중앙을 어디에 둘 것인가 고민했다. 결국은 과거 위안스카이가 총통부를 삼은 중난하이를 선택했다.
중난하이는 당 중앙과 국무원 그리고 정부요인의 거류구가 되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시중쉰 등이 가족과 함께 살았다. 시중쉰의 아들로 국가 주석이 된 시진핑은 중국 지도부 중에 2대에 걸쳐 중난하이에 사는 유일한 케이스이다.
중난하이는 20여 년 간 시민의 품에 있다가 다시 정부기관으로 들어갔다. 장안대로에서 보이는 중난하이의 정문인 신화문에는 ‘위대한 중국공산당 만세’ ‘불패의 마오쩌둥 사상 만세’의 구호가 붙어 있다. 문안의 영벽(影壁 screen wall)에는 ‘인민을 위한 복무(爲人民服務)’는 마오쩌둥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주말에 베이하이대교에서 바라보면 북쪽의 베이하이 공원은 베이징 시민들로 붐비지만 다리아래 호수로 연결된 남쪽의 중난하이는 너무 조용하여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사복 경찰의 경비가 삼엄하여 시민의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
과거 중국의 지도자가 황제처럼 보이는 것도 중난하이가 주는 환경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덩샤오핑은 중난하이 생활에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최고 실권자이지만 현직을 내려놓자마자 중난하이를 떠나 고루(鼓樓) 근처의 자신의 집으로 재 빨리 이사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장래 언젠가 생각이 다른 대통령이 나와 조선왕조 왕궁의 일부로 일제에 의해 총독관저가 되었던 지금의 청와대 터를 서울시민에게 돌려주고 ‘사람냄새’ 나는 새로운 청와대를 마련할지 모른다. 중국의 지도자도 장래 언젠가 중난하이를 베이징 시민에게 되돌려줄지 모른다. ‘중난하이’와 ‘청와대’ 어느 쪽이 먼저 시민의 품에 안기는 날이 올는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05.01 불의 나라(火國) 구마모토 재건의 힘
지난 4월14일 일본 규슈(九州)의 구마모토(熊本)에서 강진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규모 7.3의 본진(本震)이 들이 닥쳤다. 첫 지진 후 작은 여진만 생각하고 무너진 집으로 돌아가서 집안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또 지진이 일어날까 우려되어 1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2주째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일부는 좁은 자동차 속에서 오래 생활 하여 혈류(血流)가 방해를 받아 이른 바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으로 사망한 사례도 늘고 있다.
수년 전 구마모토에 다녀 온 적이 있다. 규슈의 대표적인 도시 구마모토 시를 둘러 싼 구마모토 현은 동쪽으로 아소산(阿蘇山 해발 1592m) 등 지대가 높으나 서쪽은 동중국해를 바라보는 아리아케 해(有明海)와 야쓰시로 해(八代海)로 연결되는 비옥한 지역이다.
구마모토에는 지방교육이 발달하여 패전 전에는 구마모토 제5고가 특히 유명하였다고 한다. 일본 메이지(明治)시대의 대문호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이 학교에서 영어선생을 하였다.
구마모토 제5고 출신으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와 아베 현 총리의 작은 할아버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가 거명된다. 두 사람은 출신 중학교는 다르나 같은 하숙방을 쓰면서 나란히 합격한 동급생 관계이다. 그 외 구마모토 출신의 인물이 많다고 한다.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도 구마모토 출신이다
구마모토하면 검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를 떠 올린다.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이다. 그는 구마모토의 새로운 다이묘 호소가와 다다토시(細川忠利)의 초빙으로 5년간(1640-45) 이곳에서 무사로서의 마지막 인생을 정리했다.
그는 구마모토 시의 긴보산(金峰山) 레이간도(靈嚴洞)에 칩거하면서 병법서 고린서(五輪書)를 완성하였다. 구마모토에는 그의 묘지가 있다.
당시 일본 지인의 안내로 이번에 피해가 큰 구마모토 성(城)을 둘러보았다. 지인은 어떤 지진에도 문제없을 정도로 잘 지은 성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전국(戰國)시대 성을 잘 짓기로 유명한 카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조선 침략전쟁의 경험을 살려 특별한 방어 설계로 정교하게 지은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했다.
정유재란 이후 1597년 울산성(지금의 학성공원)이 권율(權慄) 양호(楊鎬) 등이 이끄는 조명(朝明) 연합군에 포위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이 지은 울산성에서 농성하다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 일본으로 도망친다. 만 오천 명의 일본군 대부분은 전사하고 불과 수 백 명이 울산성에 불을 지르고 목숨만 부지한 채 달아났다.
지금의 구마모토 성은 1607년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 제일의 성을 축조하겠다는 일념으로 울산성 축성을 참고하여 조선에서 납치해 온 장인들과 함께 지은 성이라고 한다.
울산성 농성시 우물이 없고 보급마저 끊어져 말을 죽여 그 피로 갈증을 달래고 그 고기로 허기를 채웠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그 쓰라린 경험을 살려 구마모토 성은 성곽의 견고함뿐만이 아니라 성안에 우물을 120개나 파고 실내 다다미(疊)도 유사시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 군량이 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번 지진 피해로 수리 보수를 하는데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하니 당분간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 판 울산성을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지금도 구마모토에 울산마치(蔚山町)가 남아 있는 것은 강제로 끌려 온 축성의 장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설명이다. 울산광역시가 구마모토 시와 자매도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두 도시가 시대를 극복하여 과거의 앙숙관계를 미래지향적 우호 협력의 관계로 승화시킨 흔치 않은 예로 보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와의 인연은 축성으로부터 20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가토는 일본 난세의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먼 이종 간으로 두 사람 모두 일본 중부 나고야(名古屋)의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직전에 규슈에 전쟁 지휘부로 축성한 성의 이름을 나고야(名護屋)로 부른 것도 자신의 고향 나고야를 연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의 라이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히데요시의 규슈정벌에 참가하여 전공을 함께 세워 그 포상으로 구마모토 지역의 북쪽과 남쪽을 나누어 맡는다. 구마모토는 1588년 가토 기요마사가 처음으로 다이묘(大名 영주)로 머리를 올린 곳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곳의 다이묘가 되었을 때 성 이름은 구마모토(?本)였다. 구마(?)에는 ‘두려워한다’는 외(畏)자가 들어가 있다. 그는 지명이 무장(武將)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같은 발음의 다른 글자(熊 곰)로 바꾸어 구마모토(熊本)가 되게 하였다.
구마모토의 구마(熊)가 백제의 웅진(熊津)과 관계를 연결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카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과 함께 선봉장으로 활약 함경도에서 임해군 순화군 등 선조대왕의 두 왕자를 생포하는 등 우리에게는 악명 높은 장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조선에서 귀국한 가토는 동서(東西)내전에서 승리하여 패배한 고니시의 영지도 몰수하여 54만석의 강력한 다이묘가 되나 그가 죽은 후 아들 대에 가서 영지 모두를 빼앗긴다. 가토 가문이 구마모토에 터를 잡은 지 불과 44년만이다.
가토 가문을 이어 인근 고쿠라(小倉)의 작은 다이묘였던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전봉되면서 호소카와 가문이 메이지 유신까지 260년간 지배하였다. 일본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이 가문의 직계로 그는 총리가 되기 전에 구마모토 현의 지사를 역임했다.
당시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구마모토 지역은 과거 일본에서는 불의 나라 히국(火國)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의 나라라고 부른 것은 세계 최대의 칼데라(가마솥 모양의 대형 화구) 화산인 아소산이 있기 때문이다. 아소산은 항상 연기가 나오고 있어 언제 분화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활화산이다.
사람들은 불(火)의 글자가 보기에 불편하여서인지 같은 발음의 히(肥)로 바꾸어 히국(肥國)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 지역이 아소산 분화 시 날라 온 화산재가 쌓여 비옥한 토지가 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히국은 7세기 말부터 전후(前後)로 양분된다. 수도가 있는 교토를 바라보고 앞쪽이 히젠(肥前), 뒤쪽은 히고(肥後)로 부르는데 지금의 사가(佐賀)현이 히젠, 구마모토는 히고에 해당된다.
지인과 함께 아소산을 찾았다. 지대가 완만하여 자동차로 오를 수 있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분화구 주변에 한 두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콘크리트 방어벽이 준비되어 있었다. 화산 분화와 함께 언제 바위가 날라 올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행히 분화는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묘한 자연의 무서움을 느꼈다. 구마모토가 불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를 실감하였다.
일본에 살면서 좋은 온천이 많아 부러워했는데 온천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 열도 지하에는 거대한 마그마가 끓고 있어 뜨거운 온천수를 내 주지만 언제 그 마그마가 분화되고 그 충격으로 지진이 발생 큰 재앙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TV로 보는 재난 현장은 비참하다. 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구마모토 사람들은 더욱 강인해지고 자연이 주는 시련을 반드시 극복 재건할 힘을 느낀다. 그리고 5년 전 동 일본 대재난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 일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힘내세요! 구마모토의 여러분!
05.09 북한의 '뉴 노말'과 동북아정세
메가 트렌드라는 것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물결을 말한다. 세계적인 포럼의 주제에서 메가 트렌드를 찾아 볼 수 있다. 매년 정초에 스위스에서 개최되는 다보스 포럼의 주제를 보면 그 해의 메가 트렌드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 달 개최된 국내의 대표적인 싱크 탱크 연차 포럼의 주제는 ‘뉴 노말(New Normal)’이었다. 새로운 물결로 보이는 뉴 노말은 어브노말(Abnormal 비정상)이 아니고 새로운(뉴) 노말로 인정하고 대처하자는 긍정적인 표현이다.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미소 양극의 세계질서가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로 수년간 이어져 왔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 개방에 따른 고도성장은 중국의 부상을 가져왔고 세계질서는 중국을 빼 놓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2008년 리만 쇼크 이후 미국 경제의 급속한 쇠퇴는 미국 일극 중심의 세계 질서는 무너지고 중국과 여타 국가로 다극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가치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새로운 질서인 ‘뉴 노말’이 나타나고 있다.
‘뉴 노말’은 ‘신창타이(新常態)’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사용되면서 정치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과거와 다른 새로운 일상적 형태’라는 의미의 신창타이는 2014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중국의 저성장 경제상황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25년 이상 10% 대의 초고속 성장을 이룬 중국이 최근 몇 년간 6-7% 대의 중 고속 성장으로 떨어진 것을 인정하자는 의미이다.
그러나 ‘뉴 노말’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지난 5월 6-7일에 걸친 북한의 조선노동당 7차 당 대회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북한이 ‘책임 있는 핵보유국으로서 핵전파방지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세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모든 국가가 북한의 핵보유를 용납할 수 없는 ‘어브노말’이라고 비난하지만 북한의 김정은은 36년만에 개최된 이번 당대회를 통해 세계가 북한의 핵보유를 ‘뉴 노말’로 받아들이기를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이나 일본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은 세계의 비핵화 노력으로 막아 보겠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정권을 잡은 김정은은 카리스마를 가진 할아버지, 오랜 후계자 위치에서 자신감을 가진 아버지와 달리 항상 불안하다. 경험이 없는 김정은은 이러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보다 강하게 보여야 했다.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하거나 승진과 강등을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군 인사 개입 등 김정은의 유례없는 공포정치는 자신이 최고 지도자임을 확인시키고 싶어서이다. 김정은은 자신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핵 보유 자체가 통치의 정당성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정은은 ‘주권이 침해되지 않는 한 핵무기 사용을 하지 않겠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시험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공격을 억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고 있다.
김정은은 이번 당 대회를 계기로 셀프 핵보유국을 ‘뉴 노말’로 인정받고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경제문제에 집중하겠다는 발상을 보이고 있다. 이른 바 핵개발과 경제 발전을 동시하는 ‘핵-경제 병진노선’이다.
세계는 북한이 선군(先軍)정치를 띄어 넘은 선핵(先核)정치를 비판한다. 김정은이 주장하는 ‘뉴 노말’을 ‘비핵화 노말’로 바꾸기 위해 한국을 위시하여 미국과 중국의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달 말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 회의(CICA) 외상회의의 기조연설에서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북한이 새로운 도발 등 핵 보유를 고집할 경우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를 전면적으로 완전하게 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안보리 대북 결의를 전면적으로 완전하게 집행한다는 의미를 북한은 알고 있다. 북한의 대외 교역의 90%는 중국과 이루어진다. 무역은 북한 정권의 존립과 관계된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밀무역까지 중국이 막아 낸다면 북한이 생존하기 힘들다.
최근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 무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제가 중요하지만 제재만으로 북한의 위협을 줄일 수 없다. 경험이 없고 무모한 김정은이 제재의 코너에 몰릴 때 더 큰 일을 저질는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북한을 제외한 관련 당사국들이 모여 북한의 핵 보유 프로그램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협상의 활성화하는 권하고 있다.
제임스 클래퍼 미국의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최근 방한하여 북미간의 평화협정 문제를 한국정부에 타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화협정은 1953년 정전협정을 대체하기 위한 협상이다.
이수용 북한 외무상이 지난 해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새로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라는 주장을 하였고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의 병행을 제안하고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북한이 비핵화 협상하면 평화협정도 가능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앞으로 북한의 핵보유국이 되는 ‘뉴 노말’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물밑 협상이 예상된다. 문제는 북한의 진정성이다. 북한의 김정은이 자신의 통치 정당성으로 내 세우고 있는 핵을 포기하고 비핵화를 위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의 핵공격을 막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도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도날드 트럼프 경선 후보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려는 ‘뉴 노말’을 둘러 싼 동북아의 정세는 더욱 복잡해 보인다.
05.16 중국의 타이지(太極)와 서울의 태극
대한민국 정부의 상징이 바뀌었다. 무궁화 대신 태극을 사용한다. 지금까지는 나라의 꽃 무궁화를 정부의 상징으로 하였고 무궁화 속에 정부 부처의 첫 글자를 넣어 소속을 표시했다. 앞으로는 부처별로 사용해오던 무궁화 상징이 태극 하나로 통일 된다.
태극을 모티브로 삼은 이유는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고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무궁화보다 태극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태극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중국에서 도관(道觀)으로 불리는 도교사원에 가 본 적이 있다. 중국 고유의 민간 신앙인 도교(道敎)는 우주와 인생의 근원적 불멸의 진리인 도(道)의 가르침을 믿는 종교이다.
도관에는 검은 도포(道袍)를 입은 도사(道士)들이 있었고 건물 곳곳에는 태극(太極 중국어로 ‘타이지’)과 8괘가 여기 저기 그려져 있었다. 만물을 음양(陰陽)으로 구분하고 우주를 태극과 8괘로 풀이한다고 들었다.
우리의 태극기를 보면 도교 사원에서 본 태극이 연상된다. 태극기가 도교사원의 ‘타이지(太極)’와 유사하여 한국을 찾아오는 유커(遊客)들도 태극기를 보고 도교 사원의 ‘타이지’를 연상할지 모른다.
중국 대사관에서 근무할 때의 일화가 생각난다. 한중(韓中)양국의 수교 직후 한국의 많은 고위층들이 베이징을 찾아왔다. 대사관은 관련 직원들로 하여금 그들을 안내하여 소기의 성과를 이루도록 도와준다. 언젠가 출장 온 사람들이 숙소 건물 내 작은 연못을 보고 수군거리면서 놀래는 표정이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손님을 중시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고 듣긴 해도 우리 측 출장 인사를 위해 숙소 내 연못에 태극기 문양을 일부로 만들어 넣을 줄은 몰랐다고 감동한다. 무슨 일인지 하고 가까이 가보았더니 과연 연못의 밑바닥에 태극 문양의 장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태극기를 흉내 내어 만든 것이 아니고 도교의 태극이었다.
아마도 건축 당시부터 만들어져 있었던 장식으로 보였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태극 문양이 중국의 곳곳에 늘려 있는 것을 모르는 우리 출장자들은 연못의 태극을 보고 우리나라 태극기를 바로 연상한 것 같았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함께 중국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도교의 창시자로 노자(老子)를 이야기한다.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다. 본명이 이이(李耳)인 노자는 이자(李子)라고 불리어야 하지만 ‘위대한(老) 선생님’의 뜻으로 이자보다 격이 높은 노자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북유남노(北儒南老)라는 말이 있다. 유교는 북중국 도교는 남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는 북쪽의 노(魯)나라 사람이지만 노자는 초(楚)나라 사람으로 기후가 따뜻하여 자연이 풍성한 남쪽에 살았다. 북쪽의 유교는 일신교적인 분위기인데 남쪽의 도교는 다신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자연환경과도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경복궁이며 종묘에 가면 건물 속에 붉고 푸른 태극 문양을 흔히 볼 수 있다. 때로는 삼태극이라 하여 세 갈래(巴)의 태극 문양도 있다.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익숙해진 태극과 중국의 태극과의 관계가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태극 문양은 삼국시대 특히 백제의 고분 등에서 많이 보인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 태극이 들어 온 것은 6-7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이 때 들어 온 태극이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 무속(巫俗) 등 토속신앙으로 면면히 내려 온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으로 도교(太極)사상이 억제되어 왔으나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明)나라 병사들에 의해 도교가 다시 전래되어 태극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한다.
서울 경복궁 근처에 도교 사원인 삼청전(三淸殿)과 도교 관서인 소격서(昭格署)가 있었다. 서울 종로구의 삼청공원이며 소격동의 지명은 이러한 역사와 관련된다.
우리의 태극기의 역사는 오래지 않다. 근세 처음으로 국기를 만들 당시 고종의 어기(御旗) 도안인 태극과 8괘도를 변형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종 어기의 태극은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으로 내려오던 태극이다.
고종의 어기를 변형시킨 태극기가 1882년 5월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 체결 시 나라의 상징으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4개월 후 박영효를 정사(正使)로 일본에 간 수신사 일행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도교의 태극이 좌우흑백(左右黑白)인데 우리의 태극은 흰색 바탕에 상하홍청(上下紅靑)이다. 흰색은 백성, 푸른색은 신하, 붉은 색은 임금(民白 臣靑 君紅)을 나타냈다고 한다.
새로운 정부의 상징 태극 문양을 보고 중국 도교의 태극과 우리의 태극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태양의 후예’로 얼마 전에는 ‘별 그대’로 중국에서는 한류(韓流)가 절정에 이르고 있지만 수교 직후에도 ‘대장금’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주연 여배우의 사진이 중국 대륙 어디를 가도 안 붙어 있는 데가 없을 정도였다.
가끔 중국 지인으로부터 중국에는 한류가 대단한데 한국에는 한풍(漢風 한류와 반대로 한국에 유행하는 중국 문화)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불만스러워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 우리의 태극과 중국의 태극을 이야기 해주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문화는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발전한다. 이제 태극은 중국 것도 우리 것도 아니다. 태극은 한중(韓中) 두 나라 국민이 공유하는 공통 문화의 일부분이다. 이번에 정부의 상징이 된 태극 문양의 경우에도 보통 태극이 아니고 진한 청색에 흰색 소용돌이를 추가하고 본래의 붉은 색은 띠 모양으로 보이게 하여 대한민국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잘 나타낸 디자인이라고 한다.
태극은 조화 화해 그리고 협치를 나타내는 요즈음의 시대정신에도 잘 맞는다. 태극이 우리 정부의 상징이 된 것은 부처 간 업무가 태극처럼 부드럽게 조화를 이룬다는 뜻일 것이다.
태극이 중국에서 왔다고 해도 우리가 그 유래를 보존하고 그 의미를 잘 살린다면 태극을 통한 한중 문화 교류에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05.25 G7 정상회담과 아고만의 추억
일본에서 개최되는 주요국(G7) 정상회담(5.26-27)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주요국 정상회담은 세계 7개 선진국 정상들이 세계의 중요한 과제를 논의하기 위해 매년 1회씩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국제회의이다.
처음 개최된 후 벌써 4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1975년 11월 주요 선진국 6개국의 정상들이 프랑스 파리 교외 랑브예 고성(古城)에 처음으로 모였다. 미국 영국 독일(서독) 프랑스 이태리 그리고 일본이었다. 중동 전쟁으로 인한 오일 쇼크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다음해는 미국의 건의로 캐나다가 가입하여 비로소 7개국 정상이 모이는 G7( Group of Seven)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소련이 해체된 후 1998년 러시아가 가입되어 G8이 되었으나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반도 강제합병으로 러시아가 쫓겨나면서 다시 G7이 되었다.
이번의 회의 장소는 일본의 중부 미에현(三重縣)의 이세시마(伊勢志摩) 국립공원 아고만(英虞灣)이 바라다 보이는 시마(志摩) 관광호텔이다. 미에현은 필자가 나고야에서 공관장을 할 때 관할지역이라 수차 방문한 적이 있는 일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현(縣 우리의 도에 해당)의 하나이다.
G7(과거 G8) 정상회담은 회원국이 돌아가면서 개최되므로 대개 7-8년 만에 순서가 돌아온다. 지금까지 일본은 1979년 도쿄에서 첫 회담을 위시하여 5번의 회담을 개최하였고 이번은 8년 만의 행사다.
8년 전에는 G8(러시아 포함) 정상회담으로 홋카이도(北海道)의 아름다운 호수 도와코(洞爺湖)가 내려다보이는 윈저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윈저호텔은 정상들을 위하여 일본의 소니 TV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삼성 TV를 각방에 배치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번 개최지를 놓고 일본 전국에서 관광 진흥과 홍보를 위해 경합이 심했다고 한다. 회의기간 중 미디어 종사자 등 수많은 사람이 체재하게 되고 G7 정상회담 개최지로 유명해지기 때문이다.
도쿄 인근의 유명한 휴양지 가루이자와(輕井澤)가 끝가지 경합하였다고 한다. 가루이자는 국제적 지명도가 높고 도쿄에서 멀지 않은 편리한 교통편이 장점이다.
아베(安倍晉三) 총리는 일본 보수파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보수파의 성지로 알려진 이세신궁(伊勢神宮)이 멀지 않은 미에현의 시마(志摩)반도를 최종 낙점하였다고 한다.
나고야의 신공항인 중부공항이 이세만 도코나메(常滑) 인근바다를 매립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시마반도까지 교통편도 매우 가깝다. 이번 개최지 선정에는 아베 총리의 어린 시절 이곳에서 먹은 바다가제 요리를 잊을 수 없었던 추억도 담겨 있다고 한다.
미에현은 기이(紀伊)반도의 동쪽에 이세만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길이가 1000km정도 되어 ‘리틀 칠레’라고 부른다. 도시의 발전이 이루어지 않아 65%는 이상이 그린벨트 지역이다. 수산업이 발전되어 아마(海女)라고 부르는 해녀가 가장 많은 곳이다.
60여개의 작은 섬이 떠 있는 아고만은 19세기 말 세계 최초로 진주 양식방법을 개발한 미키모토 고기치(御木本 幸吉)의 양식진주 본 고장이다. 진주 양식을 위한 부표(浮漂)가 점점으로 보인다. 아고만을 일본의 진주만(眞珠灣)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베 총리는 이번 G7 정상회담을 통해 두 개의 야심찬 목표를 생각해 두었던 것 같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주장한 핵 없는 세상의 선언을 그의 임기가 종결하는 시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핵의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에서 재확인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일본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이세신궁을 방문토록 권유한다.
이세신궁은 회의장소에서 멀지 않다. 나고야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이세진궁은 이수주(五十鈴)강 위에 걸려 있는 목조 우지교(宇治橋)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다.
이수주강은 이세진궁의 배산(背山)인 다카구라야마(高倉山) 시마지야마(島路山) 가미지야마(神路山)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모여 만들어진 강이다. 일본 자동차회사 이름의 이수주(ISUZU)가 이곳에서 유래된다.
이세진궁에는 일본 신화에 나오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御神)가 일본 천황에게 주었다는 칼(劍) 곡옥(玉) 거울(鏡)의 3종 신기 중 거울이 보관되어 있다. 이 거울은 야타노가가미(八尺鏡)라고 불리는 대형 거울로 유명하다. 일본의 어느 신사의 거울보다 크다.
이세진궁은 본래 천황가의 조상신을 모신 종묘(宗廟)같은 곳이다. 고대에는 천황가 이외는 참배가 금지되어 있었으나 중세 이후 일반인의 참배도 허용하여 지금은 일본인이면 누구나 생애 한번은 이세 신궁을 순례해야 하는 성지(聖地)처럼 되었다. 이세신궁 앞의 이세시(伊勢市)는 이러한 순례 객을 위한 숙소 식당 등 편의시설과 선물 가게로 번성하여 형성된 도시다.
이세진궁의 특징은 식년천궁(式年遷宮)이다. 식년은 정해진 해라는 의미이고 천궁은 모시는 신체(神?)를 이동한다는 의미이다. 매 20년 마다 새로운 건물을 짓고 그곳으로 신체를 옮긴다.
식년에 새로 짓는 건축물은 내궁 외궁 그리고 우지교이다. 지난 마지막 식년이 2013년 이었으므로 다음 식년은 2033년이 된다.
일본은 따뜻하여 어린 나무가 성인 나무가 되는 데 걸리는 기간이 20년이라고 한다. 20년 천궁은 새로운 자연(材木)으로 신체를 모시고 천궁을 통해 신앙심을 확인하면서 무엇보다도 전래되어 온 건축기술을 잊지 않고 20년 단위로 후대에 전수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이세신궁을 순례하기 위해서 과거 교토 오사카 등 서쪽 일본에서는 육로를 통해 들어오지만 도쿄 등 동쪽 일본에서는 주로 선박을 이용했다고 한다. 인근의 도바항(島羽港)은 도쿄 등에서 오는 순례객이 타고 온 선박이 도착하는 항구이다. 순례객은 참배를 끝내고 이곳에서 양식한 진주를 토산품(土産品)로 사가지고 돌아간다고 한다.
이세시마 국립공원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석양에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을 바라보면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세신궁에서 원시림을 접하고 다시 히로시마의 원폭 기념관을 가 본다면 그 대조가 큰 충격을 줄 것이다.
자연을 좋아하는 일본인에 대한 원폭 투하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오바마 대통령의 사과 여부와 관계없이 스스로 알게 만드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일본이 과거 아시아 침략에서 보여 준 잔인함 모습은 간데 온데 없고 아름다운 일본의 자연과 잿더미가 된 원폭 피해지와의 절묘한 콘트라스트 세팅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본의 속셈을 간파해서인지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의 포로수용소에서 학대를 받은 전쟁 포로 출신의 미군을 동행하고 사과는 절대 하지 않는다고 미리 선(線)을 그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정상회담 폐막식에서 발신하는 세계 주요국 정상들의 공동선언은 세계 평화와 번영 특히 북한의 핵 포기를 끌어내는 선언이 될 것 같다. 그리고 4개월 후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개최 될 예정인 G20에 대한 나름대로의 G7의 결속을 과시 할지 모른다.
언젠가는 러시아와 중국도 가입된 G9 정상회담을 통하여 명실 공히 세계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 회담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06.03 당태종이 정벌한 나라는 고구려가 아니고 고려(高麗)였다
귀국하여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를 찾았다. 장수왕이 한반도 남쪽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중원 고구려비의 비문이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원 고구려비에도 장수왕이 자신을 ‘고구려대왕’이 아니고 ‘고려대왕’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는 제20대 장수왕(본명高巨連) 때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수왕은 39세에 요절한 정복왕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아버지가 이룩한 북방의 넒은 영토에 추가하여 한반도 남쪽 지금의 충청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장수왕은 국토를 크게 넓히고 관리한 영웅적 치세와 함께 100세 인생을 구가하여 98세까지 생존하였다. 사후 장수왕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19세에 등극하여 죽을 때까지 79년간의 재위기간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다.
베이징의 교외에는 고려영(高麗營)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만 남아 있고 과거의 흔적은 없다. 중국의 지인에게 물어 보면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위해 운하를 이용 군수물자를 옮겨 놓은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나라 잃은 고구려 유민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설명한다. 고구려가 망할 무렵의 나라 이름이 고려였기에 고려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도쿄의 인근 사이타마(埼玉)현에도 고마군(高麗郡)이 있다. 일본 대사관 근무 시절 자주 찾았던 고마군이 얼마 전 1300 주년을 맞아 큰 행사를 치루었다고 한다.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이 일본에 사절로 왔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약광이 데리고 온 호신용 고구려의 개(삽살개 일종)도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았다. 지금 일본의 신사(神社)등에 보이는 고마이누(高麗犬)가 그것이다.
그 후 동해를 건너 내려 온 고구려 유민이 늘어나자 일본 조정은 그들의 조국 고려(일본 발음으로 고마)의 이름으로 군(郡)을 만들어 모여 살게 하고 스스로 통치하도록 하였다. 당시 고려군은 수도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약광은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만들었다. 지금 히다카(日高)시의 고마신사(高麗神社)이다. 이 신사에서 기도하면 입신출세가 잘 된다고 소문이 나서 일본의 관료들이 많이 찾는 다고 한다.
우리는 고구려라고 하지만 그들이 남긴 지명은 모두 ‘고려(高麗)’이다. 당시 국가의 이름이 고려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왕건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려’라고 답습한 것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고려(고구려)를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고구려가 고려로 국명이 바뀌었는데도 고구려 본기에서 고구려라고 그대로 기술하였다. 김부식은 자신의 나라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중국의 고대 국가 상(商)의 경우 20대왕 반경에 의해 은(殷)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은(殷)나라로 불리었다. 중국 역사서에는 상(商)고 함께 은(殷)도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이름의 영문표기 코리아(Corea Korea)는 왕건이 세운 고려와 무역한 사라센 상인들에 의해 서방에 전해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고구려가 패망된 지 100년 후 고구려 유민이던 고선지 장군이 당나라에 의해 중용된다. 그는 자신을 고려인으로 소개했다. 고선지 장군은 탈레스 전투에서 당군(唐軍)을 지휘 중앙아시아인과 싸운다.
당시 탈레스 전투에서 싸운 중앙아시아인은 고선지 장군을 통해 용맹한 고려인(Korea)을 알았다. 코리아는 고선지 장군과 싸운 중앙아시아인을 통해 서방세계에 전파된 것이다.
우리의 코리아는 왕건의 고려가 아니고 한반도 절반과 흥안령 이남을 국토로 한 대제국 고구려(고려)를 의미한다. 언제든 거란의 손소녕 같은 인물이 나타나 우리 코리아가 왕건의 고려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희 장군처럼 코리아가 고선지 장군의 고려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려(고구려) 유민은 중국에서는 나라 없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업신여김을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동북3성에 주로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은 “까오리빵즈(高麗棒子)”라고 불리면서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고려(고구려)유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우리 동포들은 ‘까오리빵즈’가 싫어 고려인 보다 조선족으로 불리기를 좋아 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현지 사람들의 고려에 대한 나쁜 선입감이 없어서인지 고려인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역사 드라마 등에서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계속 고구려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고구려 후반부를 설명할 때 반드시 고구려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고려를 ‘전(前)고려’ 왕건의 고려를 ‘후(後)고려’ 등으로 구분해 사용하면 좋겠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도 고조선(최초의 고대국가)과 구분하여 ‘근세조선’ 또는 ’이씨조선‘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06.10 EU의 아버지 장 모네를 키운 영국의 EU탈퇴는 안 된다.
대서양을 가운데 두고 미국과 영국이 고립주의와 국제주의를 두고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 영국은 6월 23일 국민투표(referendum)로 결론이 나고 미국은 11월 8일 대통령 선거에 결판이 난다.
리만 쇼크 이후 8년이 지났으나 세계의 경제상황이 여전히 좋지 않다. 그동안 세계화(globalism)에 희생된 미국의 중산층 백인들이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고 불만이 높다. 필자가 80년대 초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에는 이민자의 일자리는 대개 정해져 있었다.
이민자는 주로 범죄 다발지역에서 생선가게 세탁소 등 백인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이른 바 3D 기피업종이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자 이민자의 자녀들은 사정이 좋아졌다. 이민자는 교육열이 높다. 이른 바 ‘타이거 맘(tiger mom)'을 둔 이민자 자녀들은 변호사 의사 등 고소득 직종의 자격을 취득 미국의 주류 사회로 진출하고 있다.
이민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주당 정권의 장기 집권도 일익을 했다. 오바마 대통령 이후에는 이민자의 칼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의 백인들은 머리 좋은 이민자들에 의해 일자리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세계 경제가 좋을 때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경제가 나빠지자 문제가 들어나기 시작한다. 수락석출(水落石出)현상이다. 물이 빠지면 돌이 들어나고 남은 물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물고기들이 싸운다. 여기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인물이 도날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이다.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운 트럼프 후보의 주장은 이민자가 가장 많이 들어오는 멕시코 국경지대에 만리장성을 쌓고 무슬림의 입국마저 금지하겠다는 발상이다. 미국 경제에 나쁘다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미군 철수 등 기존의 동맹국관계도 재검토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후보의 주장은 과거 먼로주의를 연상케 하는 신고립주의(neo-isolationism)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유럽의 파시즘 그리고 공산주의의 위협에 직면하자 적극적으로 국제 질서에 개입하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로 전환하게 되었다. 미국의 산업화 완성으로 국력이 높아진 탓도 있다.
트럼프는 그간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중시정책(pivot to Asia)을 비판하고 있다. 아시아 중시 정책에서 미국 우선 정책(pivot to America)으로 바뀌면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라는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신아시아주의 정책이 탄력을 받을지 모른다.
반면에 힐러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미국의 국익은 고립주의가 아니고 국제주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고립주의는 미국을 테러의 위험에 더욱 노출시키고 세계무대에서 미국의 명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EU(유럽연합)에서 탈퇴(leave)할 것이냐 잔류(remain)할 것이냐 하는 찬반투표를 6월 23일 한다. 영국의 젊은이 일자리를 EU 출신 이민 취업자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EU 출신의 취업자는 매년 늘어 금년은 22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영국은 일자리뿐만이 아니라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주택과 교육 보건 서비스 혜택을 더 이상 감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국의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 예산분담금도 큰 부담이 되고 최근에는 대규모의 난민유입도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는 대외무역의 손실을 가져와 오히려 50만의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브렉시트가 통과되면 영국의 짐도 안아야 하는 독일 등 부유한 EU 국가도 탈퇴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경기 침체에 의한 일자리 부족 그리고 난민유입으로 EU에 대한 호감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프랑스 등 내년에 선거를 앞 둔 나라들은 EU 탈퇴를 공약으로 내걸지 모른다. EU의 존립자체가 위험해 진다.
브렉시트는 막아야 한다. 영국은 EU의 아버지 장 모네를 키운 나라이다. 코냑 상인의 아들인 모네가 런던 사무소에 주재하러 갈 때 그의 아버지가 당부한 유명한 말이 전해지고 있다. “모네야 책은 한권도 가지고 가지 마라, 런던에서는 책보다 사람들을 만나서 배워야한다”
영국은 모네를 키우고 처칠과 케인스를 낳은 나라이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EU는 유사 이래 가장 성공한 경제통합기구이다. EU의 상호 무역 의존도는 60%로 세계 어느 경제 통합기구보다 높다.
1980년대 철의여인으로 불리었던 마거릿 대처 수상은 처칠과 달리 영국의 EU의 가입을 반대하였다. 세계경제의 침체는 자본주의 경제를 대표하는 미국과 영국을 새로운 고립주의인 먼로주의와 대처리즘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우리의 한자에는 사람 인(人)자가 있다. 쓸러지지 않도록 서로 의지(interdependence)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다. 국제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먼저’ ‘영국 먼저’하는 민족주의적 사고는 전염성이 강하다.
모든 나라가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할 때 세계는 파멸될 것이다. 고립주의는 명예로운 것이 아니고 진정한 애국 민족주의는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멕시코 등 이민자의 젊은이가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살고 있듯이 영국에도 수많은 EU 출신의 젊은이가 영국의 꿈을 안고 산다. 브렉시트가 되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금년 6월과 11월 세계 역사를 견인해 온 두 나라의 중요한 정책 전환이 될 투표가 기다리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지성적인 미국인과 영국인은 현명한 판단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영국의 국민투표에서 EU 잔류가 성공되면 11월 미국 대선에서도 힐러리의 국제주의가 힘을 받을 것이다.
영국은 과거 대제국의 영광에 향수를 느끼고 유럽과의 협력에 적응을 하지 못해 브렉시트를 주장한다고 한다. 마치 영국이 유럽 대륙과 맞먹는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대륙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섬나라(island)로 어원상으로 고립(isolation)과 사촌 간이다. 혼자 있을 때(independent) 더 잘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진짜 잘 할 때는 유럽과 협력(interdependence)할 때다. 더구나 장 모네를 키운 영국은 EU를 떠나서는 안 된다.
06.25 동도구선(東渡求仙)과 세계유산
중국(唐)과 로마제국간의 고대 교역로 실크로드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동방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동방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상교역로이다. 동방 실크로드보다 1500년 앞서 BC 212년 이지역의 해상 교역로를 개척하여 수많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있다. 중국 진(秦)나라의 서복(徐福)이다.
2014년 7월 국빈 방한 중인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서울대에서 특별강연을 하였다. 그는 강연에서 ‘백냥으로 집을 사고 천냥으로 이웃을 산다’는 중국 속담을 소개하고 한국 같은 좋은 이웃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다면서 한중간의 오랜 이웃의 우호 미담으로 선약(仙藥)을 찾아 한국으로 간 서복의 고사를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신선(神仙)의 나라 한국을 찾아 온 자신이야말로 21세기의 동도구선(東渡求仙)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시 주석의 소개로 서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탓인지 2015년 9월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제주도 서귀포(西歸浦)에서 한중일 3국 서복전문가들이 모여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를 창립했다. 서복이 한중일 3국에 미친 문화 인류학적 막대한 유산에 대한 기존의 학설과 연구 성과 등을 분석 정리하고, ‘서복 로드(徐福之路)’를 찾아 3국의 서복 문화관련 지역을 순회 교류 방문하여 연구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금까지는 서복문화가 전설과 구전문학 영역에 국한되어 왔으나 ‘옛 전설은 역사의 그늘이다(古之傳說 史之影也)’라는 격언처럼 고고학의 발달로 전설로 여겼던 것이 하나씩 사실로 들어 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를 축적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제2차 회의는 2015년 10월 서복의 출생지이고 출항지로 추정되는 중국의 장쑤성 렌윈강시(江蘇省 連云港市)에서 개최되었고 제3차 회의는 지난 5월 서복이 현지의 왕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는 평원광택(平原廣澤)의 신천지(新天地) 일본 규슈 사가현(佐賀縣)에서 개최 되었다. 사가현의 서복회에서는 회의에 앞서 외교관 출신의 필자를 기조 강연의 특별강사로 초청하였다. 강연의 주제는 서복문화의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등재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 요청을 받고 나서 서복문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지구상에서 문화적 유사성이 가장 높은 한중일 3국이 과거사 문제로 제대로 공통된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고 지금도 중국의 남중국해 매립과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중일(中日)관계가 악화되어 국민간의 상호 호감도도 크게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서복이 동남동녀(童男童女)와 백공(百工)을 이끌고 한반도와 일본에의 항해로 선진 중국문화를 보급시켜 지역의 발전에 기여한바 크다. 한중일 3국의 서복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사이좋게 모여 3국에 흩어져 있는 서복의 유적을 정리하고 서복이 남긴 유산의 문화적 역사적 존재감을 세계로 발신 관광발전의 기폭제가 되기 위해 서복문화유산을 세계유산(World Heritage)에 등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한중일이 싸우지 않고 협력하여 뭔가 이루어 내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 줄 필요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등재 기준을 먼저 알아보았다. 등재 기준은 진정성, 완전성, 탁월한 보편적 가치 그리고 보호관리 체계를 구비해야한다. 등재 절차는 세계 유산협약에 가입한 각국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센터의 잠정목록(Tentative List)으로 등재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된다. 세계유산 센터는 유네스코 내에서 세계유산과 관련되는 모든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사무국이다.
서복문화유산을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2020년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신청 하는 것을 목표로 관련 자료에 통해 시기별 시나리오(시간표)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2017년도까지 잠정목록에 등재해야 한다. 잠정목록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의 국내법에 의해 잠정목록 등재를 신청한다. 한국의 경우 문화유산이 소재한 지방자치단체 즉 제주도 소재 서복문화 경우 제주도 도지사가 문화재청에 잠정목록 등재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서복문화유산이 소재하는 타 지방자치단체(예: 경상남도)와 공동으로 신청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잠정목록 등재신청서를 근거로 전문가를 현지 실사케 하고 문화재청 산하 문화재 위원회는 현지 실사결과를 토대로 잠정목록 등재 요건을 갖춘 것인지의 여부를 심사한다.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기각 처리되며 요건에 맞을 경우 유네스코 세계유산 센터에 잠정목록으로 등재한다. 전문가의 현지 실사에 따른 문화재위원회의 심사가 매우 엄격하다고 한다. 기각처리 되지 않기 위해서는 등재기준에 맞는 자체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먼저 학술적 준비가 필요하다. 서복의 역사 유적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 관련 문헌기록조사 등 유산의 진정성 완전성 그리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나중에 정식으로 세계문화유산등재 신청서 작성 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학술적 근거다. 이를 위해서 국내외 수많은 학술대회를 통해 과학적 자료축적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보존 관리 방안의 계획수립이다. 문화유산은 한번 파괴되면 대체할 수 없으므로 보존 관리 방안이 전문가 현지 실사에서 눈여겨보는 항목이라고 한다. 세계유산 운영지침에 의하면 세계 유산목록에 등재된 모든 유산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장기적으로 법률 규제 제도 및 전통적 보호와 관리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세 번째로 교육 홍보사항이다. 세계 유산위원회는 유산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지역주민의 적극적 참여와 의지 그리고 구체적 활동을 심사에 적극 반영한다. 홍보자료 또는 유적소개 가이드북을 영어 일어 중국어로 제작해 두면 좋다. 주요 유적의 사진 동영상 자료가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한다.
2017년도까지 잠재목록에 등재된다면 제주도 도지사는 2018년도에 잠정목록에 등재된 유산을 세계유산 후보로 문화재청에 다시 신청한다. 문화재청은 2018년 12월까지 후보 신청이 들어 온 국내의 모든 세계유산 후보를 문화재위원회로 하여금 2019년 7월까지 한국이 신청할 최종 후보를 결정케 한다.
서복문화유산이 최종 후보로 결정되면 문화재청은 제주도 도지사에게 후보로 결정된 사실을 통보한다. 통보 받은 제주도 도지사는 2019년 9월까지 정식으로 세계유산 영문 신청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한다.
문화재청은 서복문화유산 등 한국을 대표하는 후보를 2020년 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 세계유산으로 정식 신청한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유산협약의 당사국 중 총회에서 선출된 21개국의 회원국(임기 6년으로 현재 한국이 회원국임)으로 구성된 정부간위원회이다.
본 신청서가 제출되면 세계유산위원회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The 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로 하여금 현지 실사를 하게 하여 평가 결과를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토록 한다. 세계유산위원회는 ICOMOS 평가서를 근거로 2021년 7월까지 다음 4가지 중 하나를 결정을 한다. 등재불가, 반려, 보류, 그리고 등재이다.
등재불가는 ICOMOS의 실사 결과, 등재 기준에 맞지 않을 경우에 받는 판정이다. 이 경우는 해당 유산의 재신청은 불가하다. 반려(Deferral)는 재조사가 더 필요한 경우이다. 보류(Referral)는 추가 서류 보완이 필요한 경우이다. 이러한 사항에 해당 없이 완벽할 경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으로 등재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국내법에 의한 등재절차를 살펴보았지만 중국과 일본도 자체 국내법에 의한 절차를 동시에 취할 수 있다. 잠정목록 등재부터 단계별로 한중일 3국이 보조를 맞추어 신청을 하고 가장 중요한 ICOMOS의 실사도 동시에 받아 서복문화를 한중일 전체의 관점에서 평가하도록 해야 한다. 한중일 3국이 각각 세계유산 등재 전문팀(Task Force)을 만들어 상호 보조를 맞추면서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유기적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필자의 강의로 서복문화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현실감을 느낀 한중일 3국의 전문가들은 큰 관심과 호응을 보였다. 한중일 3국이 우호 협력으로 만들어지는 ‘서복호’라는 큰 배를 유네스코에 입항시키기 위해 태풍도 막아내고 거대한 파도도 이겨내야 한다. 한중일 3국의 항해사가 키를 잡아 서복이 신천지에 도착하듯 항해가 성공한다면 ‘서복호’를 통한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동아시아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07.02 엘리자베스 여왕은 브렉시트를 원했는가?
영국의 국민투표에서 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가 확정되자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처럼 전 세계가 시끄럽다. 브렉시트와 함께 포퓰리즘, 기존정치에 저항, 세대 간 갈등, 양극화, 이민 등 현대의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문제가 동시에 들어나고 있다. 브렉시트는 세계를 뒤흔들고 세계는 다시 브렉시트를 흔들고 있는 형상이다.
브렉시트의 후폭풍을 우려 세계 경제가 불확실성의 격랑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브렉시트 가결 후 세계 증시가 총액 약 3000조원이 증발하였다고 한다. 이는 2008년 리만 쇼크 당시 2200조원보다 충격이 더 컸다는 의미이다.
이번 국민투표 결과에 실망한 스코트랜드와 북아일랜드가 EU 잔류를 위해 독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 해체되고 대영국(Great Britain)이 소잉글랜드(Little England)로 축소될 위기에 있다.
영국은 EU 국가 중 아시아 기업이 가장 많이 투지하는 국가로 아시아 국가와 인구 5억 명의 EU 국가 간의 가교와 길목의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영국이 EU 국가 중 2번째 경제 대국으로 자체 신뢰도가 높은 탓도 있지만 아시아인이 모국어 다음으로 배우고 싶어 하는 영어의 종주국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시아 기업으로서는 EU 진출의 거점국가 영국이 브렉시트를 통과시키자 쇼크가 컸다. 그들은 영국이 당연히 EU에 잔류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작년 10월 영국을 방문 영국의 발달된 금융서비스를 통하여 EU 진출을 기대하고 70조원의 투자를 약속하였다. 영국 런던의 금융시장을 통해 위안화의 국제화를 계획한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나라를 분열시키고 제 발등을 찍은 캐머런 총리에 의해 영광의 영국이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 선 꼴이 되어 세계인의 조롱을 받고 있다. 브렉시트가 통과되었음에도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고 재투표 청원이 늘고 있다. ‘영국의 후회(Britain regret)’ 합성어 ‘브리그렛(Bregret)’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영국 사람들이 체리를 심는 노고는 싫어하고 잘 익은 체리만 따고자하는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의 성격을 잘 아는 EU에서는 탈퇴절차를 빨리 취하라고 야단이다.
브렉시트를 수습할 리더십도 보이지 않는다. 캐머런 총리의 사임에 이어 차기 총리 1순위로 브렉시트를 주도했던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이 돌연 책임을 느끼고 총리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영국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영국을 보면서 지난 달 정동의 영국대사 관저에서 사진으로 만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웃음 뛴 자상한 할머니 얼굴이 생각난다. 여왕은 90세의 탄신을 맞이하여 많은 손님의 축하를 받았다.
여왕의 탄신일은 4월21일인데 영국에서는 날씨가 좋은 6월11일에 생일맞이 행사를 하였다. 여왕은 영연방 등 16개국의 현직 원수로 16개국이 여왕 탄신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진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영국대사관에서는 4월 21일 이후 좋은 날을 골라 축하 행사를 한다고 한다.
여왕이 자신의 탄신일을 외국에서 보내는 것이 극히 드문 일인데 1999년 방한하여 73번째의 탄신일을 안동 하회 마을에서 지냈다. 푸짐한 한국 전통의 생일상을 받은 여왕의 만족스러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는 본래 왕위를 계승권자인 왕세자(Crown Prince)는 아니었다. 여왕은 왕세자의 동생인 요크 공의 장녀로 태어났다. 정상적이라면 여왕은 그냥 일개 공주마마(Her Royal Highness)로 끝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변수가 생겼다. 왕세자였던 백부가 이혼녀로 심프슨 씨와 재혼한 미국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심프슨 부인은 미국 선교사의 딸로 어릴 때 중국에서 생활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인 할아버지 조지 5세가 서거하였다. 왕세자인 백부가 당연히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8세였다. 국왕은 심프슨 부인과 결혼을 원하였으나 의회의 반대를 꺾을 수 없었다.
세계 대전으로 나라가 어려운데 국왕이 고집만할 수 없었다. 왕관과 결혼의 양자택일이 필요했다.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택하고 왕위를 동생 요크 공에게 물려주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아버지 요크 공이 새로운 국왕에 즉위하였다. 조지 6세였다. 그는 마음이 연약하여 형님아래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였고 말도 더듬었다고 한다. ‘킹스 스피치’라는 영화로 통해 조지 6세의 언어 교정 이야기가 소개 된 바 있다.
조지 6세는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국왕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반면에 윈저공이 된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여 프랑스에서 여유로운 신혼생활을 하였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조지 6세가 승하하자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1952년으로 여왕 나이 26세였다. 가끔 운명이란 것을 생각해 본다. 영국 왕실에 심프슨 부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인생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번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여왕도 찬반 논쟁에 휘말려 있다. 여왕은 즉위 후 64년간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 왔기에 이번에도 탈퇴(leave) 잔류(remain)의 어느 쪽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영국의 한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여왕이 어느 만찬에서 동석한 손님에게 영국이 유럽의 일부분(EU 잔류)이 되어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말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왕이 브렉시트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낳게 하는 기사였다.
영국인들의 여왕에 대한 충성은 유명하다. 영국이 유로존에 편입되지 않은 것은 여왕의 사진이 들어 있는 파운드화를 버리고 유로화를 차마 채택할 수 없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과 영연방의 국가에는 ‘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Queen)' '여왕폐하에게 승리와 행복 그리고 영광을 주소서(Send her Victorious, Happy and Glorious)' '길이 영국을 통치하소서(Long to reign over us)'라는 여왕에 대한 예찬이 가득하다.
대영제국(British Empire)의 전성기에는 세계의 1/4이라는 유사 이래 가장 큰 국토와 인구를 거느려 ‘해가지지 않는 나라’였다. 과거 대영제국의 여왕폐하 (Her Majesty)에 대한 영국인의 충성이 브렉시트를 통과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천하대세는 오래 통합되어 있으면 반드시 분단되고 오래 분단되어 있으면 반드시 통합된다(合久必分 分久必合)라는 중국 격언이 있다. EU 통합이 오래되면서 당초 EU의 성격이 변질되자 불만이 늘어 난 나라들이 영국처럼 하나씩 빠져 나와 서서히 분리(exit)해 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벌써 넥시트(네들란드 탈퇴) 프렉시트(프랑스 탈퇴)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재정위기와 난민사태 해결을 제대로 못하는 EU의 무기력을 볼 때 EU의 대대적인 구조개혁이 없는 한 EU의 붕괴는 불가피해 보인다.
07.09 투기디데스 함정을 넘어야 하는 중국 공산당
지난 7월1일은 중국 공산당(CPC) 창립 9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수도 베이징에서 개최된 성대한 축하공연을 TV로 시청하였다. ‘공산당의 신념은 영원하고 불변이다(信念永恒)’는 것이 95주년 맞이하는 당원들의 각오였고 시진핑(習近平) 총서기를 정점으로 하는 8천9백만 명의 당원들의 합창은 ‘워 아이 니 중꾸어(我 愛 ? 中國 우리는 그대 중국을 사랑합니다.)’였다.
공연무대에 크게 부쳐 놓은 공산당의 당기(黨旗)가 눈에 들어왔다. 당기는 중국의 국기(國旗) 오성홍기(五星紅旗)와 다르다. 당기는 소비에트 연방 (구소련)의 국기와 비슷하다.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낫(sickle)과 망치(hammer)가 연결된 도안이다. 낫은 농민을, 망치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상징한다. 모두 무산(無産)계급인 프롤레타리아들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라틴어의 자녀(proles)에서 유래되었다. 스스로 생산하여 가진 것이라고는 자녀 밖에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당기에 그려진 낫의 손잡이가 매우 짧아 보인다. 사실 중국의 농민들은 러시아나 동유럽의 밀밭을 수확하는 낫을 쓰지 않는다. 소련 국기에 그려져 있는 낫의 손잡이는 길쭉한데 비해 중국 공산당 당기의 낫은 손잡이가 몽땅하여 비현실적이다. 소련의 낫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모방해서 그려진 것 같다.
당기에는 소련 국기의 오각의 별(五角星)이 보이지 않는다. 오각의 별은 공산당을 의미하지만 다섯 대륙의 노동자 단결도 의미한다. 오각성은 당기가 아니고 중국의 국기 오성홍기에 옮겨 놓았다. 오성홍기에는 공산당을 상징하는 하나의 큰 별을 네 개의 작은 별이 에워싸고 있다. 네 개의 작은 별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소자산 계급과 민족(애국)자본 계급이다.
중국의 공산당은 소련과 다르다. 소련 공산혁명 당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노동자와 농민만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이 창당 될 1920년대의 중국에는 소자산가와 민족 자본계급이 이미 존재했다.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無産) 계급뿐이 아닌 2개의 유산(有産) 계급을 포용하여야 했다. 4개의 별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 기반한 중국식 발상이다.
소련의 지시로 만들어진 북한의 조선 노동당(WPK)의 당기에도 망치와 낫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노동당 당기를 자세히 보면 노동자의 망치는 소련과 유사하나 농민의 낫은 소련식 낫이 아니고 우리나라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낫이다.
/노동당 당기에는 망치와 낫 가운데 길 다란 붓도 그려져 있다.
이는 소련의 국기와 중국 공산당 당기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오늘 날의 펜에 해당되는 붓은 근로 인텔리 즉 노동당 당원을 의미한다고 한다. 붓이 망치와 낫의 가운데 있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을 노동당이 연결하여 리드해 가겠다는 것이다.
1919년 3월 레닌에 의해 세계 30여 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국제 공산당 창건대회(코민테른 Communist International)가 열렸고 다음 해 8월 중국 상하이에서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었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에서 처음 조직된 공산당이다. 2개월 후인 10월에는 베이징과 후난성에서도 조직되었다. 비밀 지하조직인 공산당은 57명에 불과했다.
1921년 7월 23일 후난성 창사 대표 마오쩌둥(毛澤東) 등 각 지역의 공산당 전국 대표 13명이 한데 모였다. 관헌의 눈을 피해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조계지가 회의 장소였다. 이것이 제1차(창당)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다. 이후 5년마다 개최되어 2017년에는 제 19차 당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창당대회 장소는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상하이의 젊은이 거리로 알려진 신티엔디(新天地)에 가면 창당대회 유적지(一大會址)인 붉은 벽돌집을 찾아 가 볼 수 있다.
7월23일부터 시작된 회의가 끝나기 하루 전 7월30일 프랑스 조계 경찰의 기습 검문을 받았다. 불안을 느낀 전국 대표들은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자싱(嘉興)의 관광지 남호로 회의장을 옮겼다. 지금은 고속철로 홍차오 역에서 30분이면 자싱에 닿는다.
전국 대표들은 비밀리 남호의 유람선을 빌려 선상에서 마지막 회의를 마무리 하였다. 남호는 자싱 환성호(環城湖)의 일부로서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청대 건륭황제가 즐겨 찾았던 곳이다.
중국 공산당 창당의 첫 울음소리는 남호의 유람선에서 울려 나온 셈이다. 신 중국 건국에 공이 큰 둥비우(董必武)는 후에 공산당 창당 비화를 소개하면서 신성한 혁명을 알리는 첫 울음소리가 아이러니하게 유람선(畵舫)에서 울려나왔다고 하였다.
프랑스의 하급 자치체의 이름으로 공유 공동의 의미를 가진 코뮨(Commune)에서 시작된 코뮤니즘(공산주의)은 레닌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으로 발전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지금에도 중국에는 중국식 공산주의가 건재하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베이징 특파원을 지낸 리차드 맥그리거 기자는 “공산당( The Party)"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중국 공산당을 철저히 분석해 두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은 레닌의 각본에 따라 인사 선전 무력이라는 3대 축을 통해 일당 독재로 중국 국민을 영도해 가고 있으며 구소련 붕괴 후 레닌 식 공산주의는 더 이상 중국 공산당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후 역사를 보면 현실주의적인 중국 민족성처럼 중국 공산당은 현실에 적응하여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중국 공산당을 보면서 중국의 전통 가면 마술사인 변검술사(變瞼術師)의 얼굴을 연상한 적이 많다. 중국 공산당은 시대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얼굴을 연출해 왔기 때문이다.
중국은 공산당 100년을 앞두고 안팎으로 많은 과제를 안고 있는데 특히 두 개의 함정 앞에 서서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내적으로는 성장이 정체된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이고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신형대국관계를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투기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 패권국과 신흥대국간의 패권교체는 반드시 전쟁을 통함)이다.
브렉시트(영국의 EU탈퇴)로 야기된 세계 경제의 혼란은 수출 중심의 중국경제를 어렵게 하고 이번 7월12일에 발표될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판결은 중국을 고립시켜 대외적 처신을 더 어렵게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은 덩샤오핑(鄧小平)같은 지도자를 만나 과거에도 많은 난관을 헤쳐 왔듯이 앞으로도 두 개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슬기롭게 극복할 것으로 생각한다.
07.16 사드와 군칸지마(軍艦島)
최근 주한미군에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으로 한중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반면에 사드 배치를 환영하는 일본과는 관계가 개선되고 있다. 사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함께 한일관계 개선으로 이어진 예기치 않은 사건이 있었다.
일본 규슈 나가사키(長崎)에 가면 군함도를 가보게 된다. 군함도는 일본에서는 군칸지마 또는 하시마(端島)라고 부른다. 군함도가 지난 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과정에서 제동이 걸렸다.
군함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인(당시 조선인) 수 천 명이 강제 징용되어 희생된 해저탄광이 있는 곳이다. 일본은 2000년대 들어 와서 군함도 등 일본 전국에 흩어져 있는 메이지(明治)시대 산업혁명 관련 시설 23 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코자 하였다.
한국정부는 군함도 등 한국인을 강제노역을 시킨 곳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군함도 등 문제가 되는 곳은 세계유산 등재에서 당연히 빠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정부는 세계유산이 1850년대부터 1910년 사이 일본의 산업혁명 시설로 강제징용과 관계없다는 입장을 내 놓았다. 그러나 우리정부는 강경하였다. 국회에서는 세계유산 등재를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 세계유산의 등재를 하기위해서는 최소한 일본이 징용정책을 실시하여 강제노동(forced labour)을 시킨 사실을 내외에 알리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의 반대에 난감해 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결정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유산 협약의 당사국 중 총회에서 선출된 21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정부 간 위원회이다. 만장일치제로 통과되는 관례에 따라 21개 회원국의 하나인 한국이 끝까지 반대하면 등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경하던 일본은 결국 한국의 주장에 굴복하여 강제노동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입장을 바꾸었다. 생각지 못한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다만 영문 표현에서 forced labour(강제노동)에서 forced to work(강요된 노동)로 바꾸었다. 일본은 국제법상 나치스의 강제노동과 동격으로 인정되는 forced labour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이 공식적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인의 강제노역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도 조선인 강제노역을 포함한 군함도 전체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표지판 설치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 하였다.
한국정부는 군함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양해하였다. 한국도 당시 백제역사지구를 세계유산에 등재신청을 해 놓고 있어 일본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군함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로 뜻하지 않게 한일 간 화해 분위기가 일어났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 셈이다. 한일 양국은 3년 반 만에 외상회담을 거쳐 양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서로가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에 한일 정상이 자국 주재 대사관이 주최하는 축하 리셉션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서울과 도쿄에서 개최된 축하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수상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1.2 한일 양 정상이 집권 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12.28에는 종군위안부문제가 합의되었다. 금년 1월6일 북한에서 제 4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한일 양국의 정상은 전화회담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전문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한(恨)을 준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한국인을 강제 노역시킨 사실이 인정됨에 따라 한일 화해분위기를 만들어 준 실마리가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가사키에서 18.5 km 떨어진 군함도는 지금은 폐허로 방치되어 있지만 일제 강점시대 수많은 한국인이 희생되어 많은 상처를 남긴 지옥섬이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특별한 체험을 위해 한국인 관광객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수산 소설가는 군함도를 배경으로 당시 징용된 조선인을 소재로 소설 ‘군함도’를 저술하여 지난 5월 출간 하였다. 그는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징용피해자를 직접 취재하고 나가사키의 군함도를 수 십 차례 왕래하였다고 한다. 내년에는 유승완 감독으로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등 한류스타가 출연하는 동명의 영화도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군함도는 본래 지금의 섬 보다 1/3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석탄이 발견되자 인근 바다의 매립을 통하여 3배로 키웠다고 한다. 1916년부터 들어선 철근 콩크리트 건물 군을 방파제가 휘둘러 싸고 있다. 멀리서 보면 일본 군함의 실루엣을 보여주어 1930년도에 군함도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전체 20만 평 정도로 여의도 1/5 정도 밖에 안 된다. 군함도는 식물이 살지 않은 섬으로 풀포기 하나 찾아 볼 수 없다. 1960년대까지 탄광도시로 사람이 많이 살았으나 가스 석유가 일반화 되면서 석탄의 수요가 줄자 폐광이 되었다. 지금은 사람이 모두 떠나고 버려진(abandoned) 아파트 건물만 남은 무인도이다. 햇볕이 잘 들지 않고 섬의 후미진 어느 곳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의 숙소가 있었는지 모른다.
한일 양국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어 왔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호전적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등 동북아시아가 요동을 칠 때 상호 협력하여 왔다. 한일 양국은 군함도 같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인정하고 위로할 때 더욱 심화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07.25 사드 문제로 중국이 경제보복을 못하는 3가지 이유
지난 주 사드(THAAD 薩德反導系統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가 결정되자 중국은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대중 수출이 전체 수출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경제에 대한 영향과 재중 100만 교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작년 박근혜 대통령이 자유세계지도자로서는 유일하게 천안문 열병식에 참석하여 한국은 중국의 진정한 친구(朋友)라고 생각해 온 중국 네티즌 역시 한국의 사드 배치에 대해 실망하고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드 배치를 미국과 비공식 협의를 하면서도 ‘불요청’ ‘불협의’ ‘불결정’ 즉 ‘3불(不 No)정책’으로 일관한 전략적 모호성으로 중국 사람들의 기대를 키워 온 점도 있는 것 같다. 실망한 유커(遊客)의 한국 방문이 줄어들고 현지 교민들의 생업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앞선다.
과거 '마늘파동'을 통해 중국의 경제보복을 경험한 한국 기업들은 ‘사드파동’을 우려하고 있으나 중국에서 장기간 외교관으로 근무하여 중국의 현 상황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는 필자는 큰 걱정을 안 해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우선 한중간에는 과거에 없었던 한중 FTA(자유무역협정)가 체결되어 두 나라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있다. FTA 발효이후 한국의 대중 직접투자가 급증하여 작년에 이어 금년(58억불 예상)에도 일본을 제칠 것으로 보고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영향으로 세계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무역으로 경제를 성장시킨 중국으로서는 남중국해에 대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 판결에 따라 미국과 일본 등 서방 국가와 사이가 틀어진 마당에 한국과 같은 무역과 투자에 있어 최선의 파트너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일부 비관세장벽을 우려하는 업체도 있지만 비관세 장벽은 우리가 극복해야하는 분야도 많다. 중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우리 기업은 ‘차이나 플라스 원’(언젠가 중국에서 물러날 때를 대비 중국 이외의 베트남 라오스 등 투자처를 물색) 정책으로 이미 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이전하였고 중국에 남아 있는 산업은 중국으로서 불가결한 핵심 산업뿐이다.
특히 한중간에는 서플라이 체인(부품 공급망)이 되어 있어 한국의 설비 중간재 등 부품을 수입하지 않는다면 중국 기업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기가 어렵다. 한중경제는 2인3각 경기의 선수들처럼 한 사람이 무너지면 다른 사람도 따라서 무너지게 되어 있는 상호 의존구조이다.
흔히들 농담반 진담반으로 중국은 불의(不義)는 참아도 불이익(不利)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다. 중국도 한중 양국의 경제 협력이 서로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경제보복으로 판을 깨지 않으리라고 본다.
두 번째로 한반도 정세에 누구보다 밝은 중국은 북한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을 잘 알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중국도 모르게 4차례나 핵실험을 하였고 한여름 밤 불꽃 놀이하듯 쏘아대는 미사일 발사가 한국의 사드 배치를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사드 배치 문제가 거론 된 것은 2년도 넘었다. 그 동안 한국은 중국이 북한의 김정은 정권을 적절히 견제, 핵포기를 끌어내어 사드 배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었다.
중국은 유엔 결의에 의한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견제하는데 실패, 사드 배치의 대안도 보여 주지 못했다. 오히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기술이 점차 고도화 되면서 김정은 정권은 더욱 호전적이 되어 갔다.
언젠가 중국의 지인이 중국과 남북한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손등과 손바닥으로 비유하는 것을 들었다. 남북한은 중국에게는 마치 손등과 손바닥과 같아 어느 쪽을 찔러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만 한국은 감추어진 것이 없는 손등이지만 북한은 주먹을 쥔 손바닥이라 주먹 속에 뭣을 감추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사드 배치는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국은 중국에 특사를 파견 사드 배치는 날로 고도화 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자위적이고 한시적인 조치임을 설명하고 북핵이 해결되면 사드도 당연히 철수된다고 설득해야 한다. 사드는 중국이 우려하는 미국의 글로벌 미사일 방어(MD)체계의 일환이 아닌 것도 분명히 하여 중국의 멘쯔(面子 체면)를 살려 주어야 한다.
관시(關係)를 중시하는 중국으로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과 어렵사리 쌓아 온 신뢰관계가 사드 문제로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이유로 남중국해 문제가 사드 문제를 덮고 있다. 중국은 지난 7월 12일 발표된 남중국해에 대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에 격앙, ”남중국해의 영유권과 해양권익이 어떠한 상황에도 중재판결의 영향을 받지 아니 한다 ”라고 주장하면서 남중국해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남중국해 판결이 사드와 비교할 수 없는 ‘영토주권’을 흔드는 문제이다. 한국은 이번 판결에 대해 “남중국해 분쟁이 평화적이고 창의적 외교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는 지극히 선언적이며 판결의 효력을 배제한 원론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판결 결과를 승복하라는 미일의 반응과 다르다. 고립되어 가는 중국으로서는 사드 문제로 한국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본다.
한중관계는 내년이면 수교 25년을 맞이하게 된다. 한중 양국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가일층 발전시켜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생존을 위해 핵과 미사일을 결국 포기토록 유도하여 사드가 필요 없는 한반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과 교민들도 최근의 한중 관계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중국인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08.29 인천 상륙작전이 실패하였다면
최근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성공률이 5000분의 1 라고 할 정도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이 기적처럼 보인다. 미국의 해리스 트루먼 대통령과 국방성 등에서 강력히 반대를 했는데도 오랜 전쟁 경험을 가진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신념으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하였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가졌을 것이다. 인기 배우 김범수가 연기한 인천의 경비 사령관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좁은 수로에 비밀리 기뢰를 매설하는 등 북한의 방어도 완벽하였고 무엇 보다도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누구도 성공할 수 있는 상륙지점으로 보지 않았던 인천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맥아더 같은 영웅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는 혈로를 뚫지 못하고 낙동강 방어선 도 결국 무너지면서 한반도는 공산화되었는지 모른다. 영화 속에 서 적지가 된 인천시의 모습 처럼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이 성공하였다면 현재 한반도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과문한 탓이지 이에 대한 대체 역사소설(alternative history novel)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역사 소설을 만든다면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직전에 해고되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맥아더 장군이 모든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작전명 Operation Chromite)을 은밀히 준비하고 대통령의 허가를 기다린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날라 온 소식은 맥아더 장군의 해임전문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신념을 대권을 생각한 야망으로 이해한다. 맥아더 장군의 야망은 미국이 원하지 않은 3차세계대전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트루먼 대통령이 가진 정보에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오히려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와 오랜 내전에서 중국의 전쟁 역사서를 들고 장제스를 이겨낸 마오쩌둥은 전쟁의 허허실실(虛虛實實)을 잘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수차례에 걸쳐 김일성에게 연합군에 의한 인천 상륙의 가능성을 경고하였으나 김일성은 듣지 않는다.
김일성은 5000분이 1의 성공 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전쟁의 경험이 많은 맥아더 장군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인천 상륙을 통해 많은 미군을 희생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내공으로는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상대가 안 된다.
마오쩌둥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대비하여 중공군의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가 전달되어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의 희생을 줄이고 중국과 직접 대결을 피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킨 것이다 .
맥아더 장군의 해임으로 한반도의 전쟁의 양상은 달라진다.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고 부산을 내 준다. 한국정부는 제주도로 옮겨가고 제주도와 대마도 라인으로 공산군의 남하를 억제하는 선에서 포화가 멈추었는지 모른다. 부산에서 50km의 대마도는 타이완의 진먼도(金門島) 처럼 철저한 반공요새로 변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대체역사소설로 1987년 발간된 소설가 복거일의 ‘비명(碑銘)을 찾아서 ‘라고 볼 수 있다. 동 소설에서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한 일본제국 추밀원 의장 이토히루부미(伊藤博文)에 대한 암살이 실패했다면 하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비교적 온건한 의회주의자로 군국주의 세력을 견제했던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을 대동아 전쟁으로 끌고 가지 않았을 것으로 본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 타협하면서 독일을 중심으로하는 주축국(Axis Powers)에 줄을 서지 않았을 것으로 가상한다.
원자탄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아니고 독일의 드레스덴 등에 투하되어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한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전후 슈퍼파워가 된다. 1987년 소설이 발간되는 해 즉 일본의 쇼우와 (昭和)62년에 게이조우(京城) 즉 서울에서 벌어지는 대체역사소설이다.
사실 복거일씨가 ‘비명을 찾아서’를 발표하기 25년전인 1962년 미국의 필립 딕(1928-1982)이라는 공상과학 소설가가 2차세계대전에서 미국이 패배하고 독일과 일본 등 주축국이 승리했더라면 1962년 현재 미국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데 착안하여 ‘고성(高城)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라는 대체역사소설을 발표하였다.
소설가 딕은 프랭크린 루즈벨트대통령이 암살되어 미국의 뉴딜 정책이 성공하지 못해 전쟁을 이겨내는 국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시작된다. 미국의 패전으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영향하에 분활된 다. ‘고성의 사나이’는 출간 다음해인 1963년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휴고상’을 수상하였다.
‘고성의 사나이’는 출간된지 50여년이 지나서 아마존 닷캄에서 영화로 찍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10회의 연속물 시즌1이 방영되었고 금년에 또 다른 10회 연속물 시즌2가 방영된다고 한다. 지난 달 미국에 갔더니 많은 지인들이 ‘고성의 사나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09.14 한중정상회담과 무단팅(牡丹亭)
‘사드’ 한국 배치결정문제로 한중 두 나라의 갈등 국면이 고비를 맞은 것 같다. 지난 9월5일 중국 항저우(杭州)의 한중 양국의 정상회담에서 한중 정상은 각각 구동화이(求同化異)와 구동존이(求同存異)를 내세웠다. 다른 것에 대한 처리 방식에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서로의 이익을 공유(求同)하자는 데는 의견일치를 보았다.
▲9월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 무단팅(牡丹亭 모란정)이 공연되어 한중 양 국민이 구름처럼 모여 오래 만에 좋은 문화교류의 장이 되었다. 필자는 무단팅 내한 공연장을 찾았다.
영국에는 윌리암 셰익스피어(1564-1616)라는 극작가(playwright)가 있다면 중국에는 탕셴주(湯顯祖 탕현조)(1550-16161)가 있다. 두 사람은 동시대 사람으로 우연히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금년이 두 사람 서거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중국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중문학의 거장 탕셴주는 명대(明代)사람으로 중국 남쪽 장시성(江西 臨川) 출신이다. 젊을 때부터 문학을 좋아한 탕셴주는 늦은 나이인 30대 초반에 과거에 합격하여 공직에 나갔다.
탕셴주는 청렴한 성격으로 부패가 만연된 당시 관료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천이 거듭되자 결국 40대 후반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 와 옥명당(玉茗堂)을 짓고 극작가로서 여생을 보냈다.
중국은 아시다시피 지대물박(地大物博) 땅이 크고 물산이 풍부하다. 북쪽과 남쪽의 기후와 환경이 달라 사람들의 기질도 다르다. 예부터 북쪽은 정치의 중심지로 문학 작품도 정치문제와 전쟁 그리고 사회 비리에 초점을 맞추어 질박하고 현실적인 작품이 많다. 공자의 유가사상 영향이 컸는지 모른다.
그러나 남쪽은 온화한 기후와 풍요로운 환경 탓인지 작가의 이상을 펼 수 있는 화려한 꿈과 낭만적 작품이 많다. 신선사상과 도가사상의 영향인지 모른다. 자연스럽게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에 춤과 노래로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이것이 중국 오페라(戱曲)로 발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는 만주족이 춤과 노래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만주족이 세운 청(淸)이 중국을 지배하자 남북으로 흩어져 있는 노래와 춤이 곁들인 희곡을 수도 베이징으로 불러 모았다. 지금의 베이징 오페라(京劇)는 안후이성(安徽省)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 오페라가 모여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지방 오페라 중에 상하이 인근 곤산(昆山)의 곤곡(昆曲)이 유명한데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지정되었다. 곤산은 쑨원(孫文)의 부인 송칭링(宋慶齡)이 태어난 곳이다.
중국의 음악을 보면 북쪽은 템포가 빠르고 근엄하며 질박한 현악기 연주가 주를 이루고 남쪽은 템포가 느리고 부드러우면서 화려한 맛이 있는 관악기가 주를 이룬다. 남쪽은 습도가 높아 현악기가 제소리를 내지 못하는 반면에 크고 좋은 대나무가 많아서 각종 관악기가 많은 것 같다. 곤곡은 남쪽의 음악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오페라이다.
탕센주는 당대(唐代)부터 내려오던 허구적인 괴담이나 상상적인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전기(傳奇)소설을 공연용 또는 읽기위한 희곡으로 고쳐 썼다고 한다. 마치 셰익스피어가 서양의 여러 지방에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희곡으로 개작한 것과 유사하다.
‘무단팅’은 남녀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오페라로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중국몽(中國夢)을 이야기 하듯 중국 사람들은 꿈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서양 격언에도 ‘하나의 꿈은 하나의 소망(A dream is a wish.)’이라는 말이 있다. 탕셴주의 작품에는 꿈 이야기가 많다. 인생은 부질없는 하나의 백일몽(白日夢)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꿈 이야기에서 자신의 좌절과 사회의 모순 등을 밝히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차기(紫釵記)’ ‘남가기(南柯記)’ ‘한단기(邯鄲記)’ ‘환혼기(還魂記)’ 4편을 ‘탕센주의 4개 꿈(四夢)’이라고 알려져 있다. ‘무단팅’은 ‘환혼기’의 다른 이름이다. ‘환혼기’는 영어 독어 등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중국 오페라의 대표작이다.
‘무단팅’의 시대 배경은 13세기 중국의 남송(南宋)이다. 남안(南安)의 태수 두바오(杜寶 두보)에게는 외동딸 두리냥(杜麗娘 두여낭)이 있었다. 리냥은 어느 봄날 정원을 거닐다가 무단팅에서 잠간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버드나무(柳) 가지를 손에 쥔 한 젊은 서생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까지 약속하였다.
어머니의 부름으로 달콤한 사랑의 꿈에서 깨어난 리냥은 꿈속에서 만난 서생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정원의 한쪽에 있는 서생을 연상케 하는 매화나무를 보고 통곡을 한다.
리냥은 결국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리냥은 죽기 전에 자화상(自畵像)을 만들어 정자 옆에 보관하고 자신은 서생을 닮은 매화나무 아래 묻어 주기를 유언으로 남긴다.
몇 해가 지났다. 멀리 광둥성(廣東省)에서 류(柳夢梅)라는 서생이 과거 시험을 보기위해 수도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을 향했다. 도중에 남안을 지나가다가 병을 얻어 일시 체류하게 된다. 서생은 리냥이 꿈에서 사랑을 나눈 바로 그 사람이다.
서생은 우연히 리냥의 자화상을 발견하고 어디서 본 듯하여 자신의 숙소에 걸어 둔다. 그날 밤 서생의 꿈에 리냥이 찾아와 굴분개관(掘墳開棺) 즉 자신의 무덤을 파서 관에서 꺼내 주기를 부탁하였다. 서생은 시킨 대로 무덤을 파서 관을 열었더니 리냥이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왔다.
두 사람은 부부로서 인연을 맺고 지난날의 사랑을 되살리지만 리냥의 아버지 두바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딸의 무덤을 훼손한 서생을 옥에 가두기조차 한다. 그러나 우여 곡절 끝에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이 알려지게 되고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인간의 진실한 사랑은 생사조차 초월한다는 생사지연(生死之戀)을 그린 무단팅은 본래 55 단락의 긴 스토리이다. 이번 내한 공연에는 시간 관계상 유원(游園) 경몽(驚夢) 심몽(尋夢) 3개의 단락으로만 구성되었다. 리냥이 정원을 노닐다가 꿈을 꾸고 어머니의 부름에 놀라 꿈을 깨고 그리고 좋았던 꿈을 찾으면서 서생을 그리워 한다는 이야기다.
무단팅 공연 이틀 후 9월9일 북한은 제5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한중 두 정상의 북한 핵을 반대하는 구동(求同)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중 정상이 자주 만나고 양 국민간의 교류도 활발히 하여 미래지향적인 한중 양국의 꿈 ‘한중몽(韓中夢)’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한다.
11.02 스탠퍼드 대학과 쿠리(苦 力)
지난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왔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는 중국사람들이 유달리 많다.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도 있지만 슈퍼 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다. 언젠가 슈퍼에서 맥주코너를 찾는다고 동양계 여자 종업원에게 “비어(beer)?”를 이야기 했더니 금방 “피지우(?酒)?”하면서 중국어로 말을 걸어온다. 중국사람처럼 보였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중국어로 대화하면서 찾던 물건을 사서 돌아 온 적이 있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중국사람들이 이곳 캘리포니아에 오기 시작한 것은 1849년 캘리포니아에 금이 발견되면서였다고 한다. 이른바 ‘골드러시’라 하여 전국에서 금을 찾아 몰려 온 사람들로 작은 타운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광에서는 금을 캘 뿐만이 아니라 강바닥에 깔려 있는 사금을 넓은 팬을 돌려 모래와 분리하는 데도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마침 중국(淸)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거쳐 나라가 어수선해 졌다. 광동성 일대는 반란으로 젊은 사람들은 군역에 징집되거나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어 마을은 붕괴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난민들은 영국이 중국에서 할양 받아 건설 중인 신흥도시 홍콩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홍콩의 중국인력이 미국으로 송출되기 시작했다.
중국사람들은 현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자신들의 음식을 먹어야 했기에 중국 음식이 필요했고 중국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식재료도 따라가야 했다. 홍콩의 상환에 가면 ‘ 남북행’이라는 거대한 식재료 가게가 있다. 중국 전역에서 모아 온 식재료의 도매상이다. 지금도 해외의 중국인에게 공급된다.
골드러시의 중심에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스페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지배할 때 성(聖) 프란시스 미션(Mission선교부)이 있었던 곳이다. 이 지역에는 샌(San 남성형) 또는 산타(Santa 여성형)라는 접두어가 붙은 도시 이름이 많다. 산 호세(San Jose), 산타 클라라(Santa Clara)라는 도시 이름이 생각난다. 이는 스페인 시절 성인(聖人)의 이름을 딴 수 많은 미션에서 도시 이름이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라는 복잡한 이름 대신에 ‘산’으로 줄여 듣고 ‘금산(金山)’으로 불렀다. 황금이 나오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후에 오스트렐리아의 시드니 인근에서도 금이 발견되어 두 개의 금산이 생겨 났다. 신구(新舊) 구분이 필요해 중국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를 ‘구(舊)금산’ 이라 부르고 시드니를 ‘신(新)금산’으로 구분해 불렀다.
두 번째로 중국사람들이 많이 들어 온 것은 철도 부설 때이다. 1860년대 초 미국의 철도는 서쪽으로 미주리 강을 넘지 못했다. 캘리포니아의 정치가 인 스탠퍼드 지사는 현지 사업가들을 권유하여 캘리포니아까지 철도 연결을 목적으로 하는‘센트럴 패시픽 ‘철도회사를 만들었다. 스탠퍼드 지사는 나중에 요절한 외아들 스탠퍼드 주니어의 이름을 따서 대학을 세운다. 유명한 스탠퍼드 대학이다.
패시픽이란 말을 부친 것은 태평양까지 연결하는 대륙 횡단의 의미가 있었다. 기존의 유니온 철도는 ‘유니온 패시픽 ‘철도 로 회사 이름을 고쳤다. 유니온 패시픽은 서쪽을 향해 , 센트럴 패시픽은 동쪽을 향해 186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록키 산맥과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횡단하는 난공사였다.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아 레일을 깔았다. 이러한 중노동을 위해 중국의 힘 좋은 청년들이 필요했다. 노동자라는 의미의 ‘쿠리(苦力)’라는 말이 이때 생겨 났다. 당시 중국의 남부는 홍수전의 반란 왕국 태평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 남부의 청년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유니온과 센트럴 두 회사가 경쟁하듯 밤낮없이 공사를 강행했다. 쿠리의 일부는 중노동뿐만이 아니라 다습한 고향과 다른 메마른 캘리포니아 기후를 견디지 못했다. 공사장에서 탈출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회사측은 계약위반을 이유로 붙잡아 체형을 가하였다. 철도공사 감독들의 잔인한 체형은 쿠리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동서로 부설되던 두 철도 회사의 레일이 결국 만나게 된다. 두 회사는 ‘라스트 스파이크’ 즉 마지막 철도 레일을 박았다. 공사 개시 후 6년 후인 1869년 유타주에서 였다. 지긋지긋한 철도 공사는 끝났지만 쿠리들은 조국으로 돌아 가지 않았다.
신세계 미국에서 무슨 일이든 해 낼 자신이 생겼다. 더구나 지금은 ‘베이 에리어’ 라고 부르는 샌프란시스코 만의 아름다운 매력에 푹 빠져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 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과 함께 차이나 머니(錢)가 샌프란시스코 부촌으로 몰려 와 전망 좋은 주택에는 중국인 소유가 많다고 한다. 세계적 명문 스탠퍼드 대학에는 중국 학생이 많다. 최근 중국에서 건너 온 유학생도 있겠지만 쿠리의 후손이 많은 것 같다.
11.15 트럼프 후보 “You're hired!"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승리로 끝난 미국 대선 이후 일간지 지면. 2016년 11월 9일 시카고 선타임스 1면.
필자는 지난 4월 도날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 위스콘신 주의 공화당 경선에서 패하면서 대선후보가 되는데 필요한 대의원 과반수 1237명의 확보가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았다. 부동산 재벌로 정치계의 아웃사이더로 정치인이라기보다 쇼맨에 가까운 트럼프 후보는 저속한 막말(wild talk)로 세인의 관심을 끌어,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메디아에 자신을 노출시키려는 현시욕의 일환으로 보았다.
그가 출연한 리얼리티 TV 쇼 ‘아프렌티스(후보자)’에서 즐겨 사용했던 ‘You're fired!(당신은 해고야!)’를 인용 "트럼프 후보 You're fired!"라는 칼럼을 본란에 기고하였다. 그러나 트럼프 후보는 쟁쟁한 공화당 후보에 의해 'fired(해고)‘당하지 않고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본선에서 대결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국 힐러리 후보에 의해 fired(해고) 될 것으로 보았다.
두 후보의 TV 토론을 지켜보면서 트럼프 후보는 대통령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때 건강 상태로 위기가 있었지만 힐러리 후보가 체력을 관리 TV 토론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트럼프 후보는 힐러리 후보에 의해 결국 fired(해고) 될 것으로 믿었다.
지난 11월 8일 선거에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10 배 충격을 주겠다고 호언을 한 트럼프 후보가 정말 당선되어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TV 속보를 지켜보면서 눈과 귀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시절의 홍위병처럼 글로벌리즘에 의해 소외된 ‘앵그리 화이트(성난 백인들)’의 조반(造反)에 의해 준비된 대통령 힐러리 후보가 낙선되었다. 트럼프 후보가 'fired(해고)‘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hired(당선)‘되었다.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니 비즈니스로 치면 드 월드(세계)의 회장이 되어 언제든지 ‘You're fired!'를 선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남에게 관리 받지 말고 남을 관리하라” 이 말은 18세기 개교한 보스턴에서 멀지 않은 웰즐리 시에 위치한 웰즐리 여자대학의 학훈이다. 웰즐리 여대는 재학생에게 일반 여성이 아니고 세상을 바꾸는 여성을 교육시킨다고 한다.
힐러리 후보는 웰즐리 대학의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학생회장을 역임한 힐러리의 졸업 연설은 라이프 잡지에 전재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명연설이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힐러리는 예일 대학의 로스쿨에 입학하였다. 로스쿨 2학년 때 신입생 아칸소의 젊은이를 만나게 된다. 빌 클린턴이다. 빌은 아칸소 출신이지만 조지타운 대학의 외교학부를 다녔다. 조지타운 대학은 워싱턴의 고급 주택가 조지타운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대학이다.
빌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로즈 장학금을 얻어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유학하였다가 예일 대학 로스쿨에 입학한다. 빌은 힐러리보다 한 살 연상이지만 2년의 영국 유학으로 로스쿨은 한해 늦게 입학한 것이다.
힐러리는 아칸소 출신의 정치 지망생 빌에게 희망을 보았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힐러리는 빌과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해 졸업을 1년 늦추었다. 힐러리는 빌과 함께 로스쿨을 졸업하고 아칸소로 돌아가 가 결혼한다.
빌은 32세에 아칸소 지사에 당선됨으로써 미국의 최연소 지사가 된다. 힐러리는 31세 지사부인이 된다. 힐러리는 빌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빌은 46세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제42대 대통령이 된다.
힐러리는 빌이 8년의 대통령이 끝난 후에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그리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으나 오바마에게 패한다. 힐러리는 보이지 않는 여성차별의 유리천정(glass ceiling)에 도전하였으나 깨뜨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힐러리는 유리천정을 언젠가 깨뜨릴 수 있도록 수많은 균열을 만들어 두었다. 힐러리는 후일을 기약하고 국무장관을 맡아 웰즐리 대학에서 배운 대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계속하였다.
오바마 정부의 8년이 지났다. 이제는 힐러리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여론은 만만치 않았다. 준비된 대통령 힐러리의 당선이 당연할 것으로 보는 관측이 우세하였으나 1992년 이래 24년간 기득권세력이었던 힐러리에 대한 염증으로 새 인물을 바라고 있는 유권자도 많았다. 클린턴 왕조에 대한 거부였다.
힐러리 후보는 E 메일 유출 사건으로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워싱턴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 층 끼리의 야합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에 지친 저학력 백인들은 변화를 부르짖는 정치의 초년생 트럼프 후보에 열광하고 있다.
힐러리가 당선된다면 미국에 살지 않고 이민을 가겠다는 젊은이가 늘어났다. 선거 기간 중에 두 후보의 정책 대립은 사라졌고 대통령 자질을 의심케 하는 트럼프의 막말과 함께 상호간 인신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본선의 매직 넘버 27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야 대통령에 당선된다. 주류 언론들은 모두 힐러리의 당선을 예측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힐러리가 선거인단 275명 이상을, ABC 뉴스는 274명 이상을 얻어 승리할 것으로 낙관했다. 뉴욕 타임즈는 힐러리 당선 가능성을 84%까지 내다보았다.
트럼프의 당선은 뜻밖에(想定外) 찾아 온 거대 지진으로 비유한다. 이 지진으로 미국의 기득권층이 매몰되고 주류 언론도 붕괴된 셈이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지진이 휩쓸고 간 황야에서 새로운 출발을 희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서프라이즈인 것은 틀림없다. ‘앵그리 화이트’의 반란이라고 하지만 8년간 민주당 정권에 식상해하는 미국의 유권자들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면도 있다. 힐러리 후보가 오바마 대통령과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했는데 제2의 오바마를 자처한 것이 패착으로 보는 평가도 있다.
보호무역과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 후보의 당선으로 미국과 동맹관계의 여러 나라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의한 혼란스러운 국내정치와 함께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내우외환으로 보기도 한다.
미국의 대외정책도 국내정치의 연장이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당분간 동맹보다는 보호무역으로 빼앗긴 일자리를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번영과 세계평화는 글로벌리즘을 통한 자유무역과 굳건한 동맹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트럼프의 정책도 점진적으로 바뀔 것으로 본다.
12.14 흔들리는 동아시아 체스판
/동아시아의 체스판
외교관이 되어 일본과 중국에서 장기간 근무하다보니 한반도의 지정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100여 년 전에 우리가 일본에 강제병합된 것도 일본의 침략 야욕이 있었지만 주변 강대국의 지정학적 이해도 관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 군사시설을 만들어 자유항행을 위협하고, 일본은 숙원의 재무장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며, 정치 외교의 아웃사이더 도날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 등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이 흔들리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소의 생각을 정리하여 도서 출판사 현학사의 도움으로 ‘동아시아의 체스판이 흔들린다’는 졸저를 출판하였다. 서양장기의 체스판은 국제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Grand Chessboard)’을 원용한 것이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4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은 ‘거대한 체스판’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북한은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를 기만하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을 해오고 있다가 새로운 독재자 김정은의 절제되지 않은 젊음의 광기로 그 기술이 예상보다 빨리 고도화되고 공격적이 되면서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의 안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냉전의 승리자가 된 미국은 미래를 내다보는 지정학적인 전략을 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내가 2년간 유학한 컬럼비아 대학 교수였다
미국 유학과 브레진스키 교수와의 인연
1970년대 말 외무부에 입부한 나는 국비로 미국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외교관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국제관계로 유명한 몇 개의 대학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지만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을 선택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에는 당시 헨리 키신저 박사와 함께 국제관계학에서 쌍벽을 이루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폴란드 태생으로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됨에 따라 돌아 갈 조국을 잃게 되어 캐나다와 미국에서 공부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해 보니 때마침 브레진스키 교수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이 되어 대학에서는 휴직 상태였다. 카터 대통령은 땅콩 농장을 경영하다가 조지아 주 지사가 되었고 다시 민주당의 후보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국제관계에서는 문외한이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카터 대통령의 국제관계 가정교사였다.
카터 후보는 월 1회 뉴욕에서 브레진스키 교수에게 국제관계에 대해 자문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카터 지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연스럽게 안보 보좌관이 된 것이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브레진스키 교수의 지도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많은 선배들도 새로운 지도 교수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쨌든 컬럼비아 대학 재학 중에는 아쉽게도 브레진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지 못하고 졸업하였다
도광양회의 틀을 깨고 나온 중국의 굴기
동아시아의 체스판을 흔들고 있는 나라는 우선 중국이다. 중국은 서방 세계의 지원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 개혁 개방 정책을 성공시켜 2010년 처음으로 일본을 능가하여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개혁 개방 정책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아래와 같은 24자의 외교방침을 상당기간 지속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冷靜觀察 站隱脚? 沈着應付 韜光養晦 善於守拙 絶不當頭”
(냉정관찰,참은각근,침착응부,도광양회,선어수졸,절부당두 즉 냉 정하고 조용히 관찰하지만 입지는 분명히 세우며 침착하게 대처하고 힘을 아껴 보존하며 부족함을 잘 지켜 결코 나서 지마라)
특히 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속에서 실력을 키우라는 도광양회 정책을 강조하였다는 데 중국의 지도자들은 자신감인지 도광양회의 틀을 깨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우유부단했던 전임자 후진타오 주석과는 달랐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문제며 중동문제에 빠져 있을 때 남중국해 산호초를 매립하여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노믹스와 재무장
두 번째는 일본이다.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70 여년이 지나 일본에서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사망하거나 전쟁의 기억이 풍화되고 있다. 일본인들 가운데는 이른 바 라쇼몽(羅生門) 현상(기억의 주관성)에 의해 태평양 전쟁의 가해자라기보다 원폭에 의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있다.
2012년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자민당 아베(安倍晉三)정권은 과거 1년에 한번 씩 바뀌던 단명 총리와 달리 2021년까지 장기 집권을 예정해 놓고 있다. 일본은 과거 미국의 보호막 속에 안주하였으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로 일본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하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의 개헌선인 국회의원 3분의 2를 확보해 두고 있는 상황에서 아베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금의 평화헌법 개정을 강조하고 있다. 재무장의 재원확보를 위해 아베노믹스가 성공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체스판을 뒤흔드는 트럼프 쇼크
동아시아의 체스판을 가장 크게 흔들 지도자는 미국의 차기 대통령 트럼프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동아시아에서 어떤 한 나라가 패권 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8년 동안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to Asia) 정책을 통하여 중국을 견제하여 왔다.
지난 11월 8일 미국의 대선에서 일반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12월 3일 자신의 트위트에 “대만 총통이 나의 당선을 축하해주는 전화를 걸어 주었다.” ( The President of Taiwan CALL ME today to wish me congratulations on winning the Presidency. Thank you!)라는 내용을 공개하였다.
‘하나의 중국’ 정책이 흔들리게 된 중국이 크게 반발하였다. 미국이 대만과 단교 후 37년 만에 처음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자는 1시간 후 자신의 트위트에 다시 글을 올린다.“미국에서 무기를 많이 사가는 대만 총통으로부터 축하전화도 받지 말라는 말인가”( Interesting how the U.S. sells Taiwan billions of dollars of military equipment but I shoud not accept of a congratulatary call.)라고 오히려 화를 냈다.
중국뿐만이 아니라 미국 조야에서도 기존 외교의 프로토콜을 깨는 즉흥적 외교(improvisational diplomacy)에 비난이 쏟아지자 트럼프는 12월 5일 다시 자신의 트위트에 “중국은 우리에게 물어보고 윈안화 평가절하를 하였으며 우리에게 물어보고 남중국해에 거대한 군사시설(massive military complex)을 만든 것이냐?”라고 반박을 하였다.
협상의 달인 트럼프의 생각은 단순하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협상의 카드로 활용 중국과의 협상을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다. 협상가들이 즐겨 쓰는 기선제압이다. 중국의 허(虛)를 찔러 기(氣)를 꺾어 놓아야 협상이 잘 풀린다는 생각이다.
대만 총통과 계산된 통화로 ‘하나의 중국’ 정책만 믿고 있는 중국에게 ‘기막힌 일격(brilliant stroke)'을 가한 것이다. 중국이 협력해주면 ’하나의 중국‘ 원칙도 지켜주겠다는 것이다. 트럼프에게는 북핵문제, 남중국해의 자유항행 문제 등 중국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협상용 카드로 쓰겠다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떠오르는 중국의 비호아래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여 미국을 위협하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상에서 중국을 제압하는 일이다.
북한은 중국의 베이비(baby)이고 중국의 문제이므로 북한의 핵 과 미사일 문제는 중국이 맡아서 풀어내라는 것이다. 중국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트럼프는 대만 총통 차이잉원(蔡英文)과 통화하듯이 김정은과 직접 거래할지 모른다는 관측도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부틴 대통령을 회유 크리미아 반도 병합으로 소원해진 미러 관계를 복원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부틴의 오랜 친구이자 석유기업 엑슨 모빌의 최고 경영자 렉스 틸러슨을 외교수장 국무장관에 낙점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트럼프의 친 러시아 정책에는 현재 최고의 밀월관계인 중러 관계를 이간시키려는 고도의 협상술이 숨어 있다고 본다.
꽃놀이패를 든 러시아의 부틴 대통령
러시아의 경제상황이 어렵다. 주력 수출품인 원유가격의 하락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반도를 병합한 2014년부터는 구미의 경제제재로 GDP 기준으로 세계 8위였던 러시아 경제가 2015년에는 세계 12위로 추락했다. 정치적으로도 G8(주요8개국)에서 추방되고 시리아 내전문제로 오바마 정권과 갈등의 골이 깊었다.
크리미아 병합이후 80%대의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부틴도 201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는 경제를 호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부틴이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12월 15일 아베 총리의 고향 야마구치에서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정상회담을 통해 일본의 경제협력을 받아 내고자하나 북방영토(쿠릴 4개섬) 문제에 있어 일본이 원하는 양보의 가능성이 낮아 타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반 부틴 기조의 민주당 클린턴 후보를 꺾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트럼프의 당선으로 부틴에게는 봄이 찾아 왔다. 트럼프 대통령 시기에 예상되는 험난한 미중 관계에서 부틴은 꽃놀이패를 들고 있는 모양새이다. 더구나 오랜 친구가 국무장관으로 내정되어 대미 외교에 순풍이 예고되어 있다. 대일 외교에도 유리한 국면이다
한국의 나침반으로 외우내환 극복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압도적 다수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국민들은 즉각 퇴진을 외치며 영하의 추위 속에서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까지는 시간이 소요되는 탄핵정국에서 한국 국내의 불안이 계속되고 외교의 공백이 불가피해 보인다.
트럼프의 예측불가의 럭비공 외교로 동아시아의 체스판은 흔들리는 수준을 넘어 요동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내년 1월 20일 취임하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계획도 못 세우고 있다.
‘크레이지 맨’ 김정은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한국은 주변 4강의 ‘스트롱 맨’을 상대해야 하는 국력을 모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탄핵정국에 여야 정치인의 갈등으로 국력이 분산되고 있는 점이다. 외우내환이 따로 없다.
한국의 운명은 국내 정치를 하루 빨리 안정화시키고 체스판을 뒤 흔드는 4강과의 외교에 달려있다. 그들의 행보에 주목하여 객관적 사실(fact)과 현실을 정밀 분석 치밀한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 체스판이 흔들릴수록 우리 자신의 나침반(compass)을 만들어 중심을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