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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9/ 한반도 외교2/ 한중 외교1/ 130년 전의 원세개를 떠올린 이유 - 두 독재자의 만남 -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1/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한국식 대국숭배 뿌리와 송..

상림은내고향 2021. 6. 22. 15:38

대한민국9/ 한반도 외교2/ 한중 외교1

■ 한중 외교1

2016.03.12. 130년 전의 원세개를 떠올린 이유

 

과거 시험에 두 차례나 낙방한 스물셋 원세개(袁世凱)가 역전의 기회를 잡은 곳이 조선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조선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청나라는 오장경(吳長慶)의 인솔 아래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백수였던 원세개는 아버지 친구였던 오장경의 부하로 조선에 왔다. 공부는 뒷전이지만 무예에는 열심이었던 원세개는 곧 능력을 인정받았다. 임오군란 책임자로 지목된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고, 대원군 세력을 토벌하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2년 후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창덕궁에 진입해 고종을 '보호' 조치하면서 일본군() 지원 아래 개화파가 단행한 정변을 무산시켰다. 이듬해 말 원세개는 청의 실력자인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 지휘를 받는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에 임명됐다. 그 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청의 세력이 꺾일 때까지 '조선의 총독'처럼 권력을 휘둘렀다.

 

'상전(上典)' 노릇 하는 원세개 탓에 고종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청나라를 견제하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눈치 챈 원세개는 "병사 500명만 있으면 국왕을 폐할 수 있다"며 고종을 압박했다.

 

원세개가 조선에서 활약한 12년은 한·중·일이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시간과의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때였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원세개는 조선이 외교사절을 서구에 보내는 것까지 간섭하면서 발목을 잡았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와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중국은 사실상 유일한 종속국으로 남아 있던 조선을 제국의 울타리 안에 붙잡아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속방(屬邦)의 내치(內治)와 외교의 독자성을 보장해온 전통적 중화 질서에서 보면, 한참 빗나간 일탈 행위였다.

 

이 때문에 학계에선 청나라가 서구 제국을 본떠 조선을 '2류 제국주의'의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하루빨리 부국강병을 이뤄내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에서 벗어나야 했던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원세개는 근대국가 건설의 발목을 잡은 '원흉'이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130년 전 원세개의 행적을 들춰낸 이유는 얼마 전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의 '()외교적 폭언' 때문이다. 추 대사는 사드(THAAD)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한·중 관계가 파괴될 수 있다고 협박했다. 외교적 수사(修辭)를 깡그리 무시하고, 직설적으로 양국 관계 파괴를 들먹인 추 대사의 발언은 구한말 원세개의 오만을 떠오르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물론 원세개의 내정 간섭은 추궈훙 대사의 무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고 야만적이었다. 원세개는 '점잖게' 경고 정도 한 게 아니다. 직접 군대를 동원해 고종을 폐위하려 했고 조선 위에 군림했다. 분명한 것은 추 대사의 '폭언' 같은 게 되풀이되면, 한국 국민은 조건반사적으로 구한말 원세개를 금세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사무 특별대표가 이달 초 방한해 '한·중 협력'을 강조하면서 한국민의 불편한 심정을 '위로'했지만,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한·중 관계에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라는 한·중 관계가 내실을 갖추려면, 최소한 이런 패착(敗着)은 없어야 한다.

조선일보 김기철 문화부장

 

2016.06.20 시진핑의 눈으로 본 한반도

조선반도는 골치 아픈 지역이다. 북과 남은 늘 나에게 어려운 숙제를 안겨준다. 이달 초 조선노동당 중앙위 리수용 부위원장이 베이징을 다녀갔다. 나는 그에게서 비핵화에 관한 김정은 위원장의 달라진 입장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 병진 노선'만 되풀이했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한국전쟁 때 90만명을 희생한 우리의 체면을 세워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김정은은 2013년 초 나의 주석직 취임 직전 3차 핵실험으로 내 얼굴에 먹칠을 했다. 지난해는 비무장지대에 지뢰를 매설해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을 막으려 했다. 이런 인물을 베이징에 초대할 수 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우리가 가진 카드로 조선의 숨통을 조이고 싶을 때도 있다. 식량과 에너지를 1년만 끊으면 조선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조선에서 대규모 소요나 무정부 상태가 발생할 수 있다. 군부가 제2의 연평도 도발을 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한·미 연합군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다. 미군이 휴전선을 넘으면 나는 장백산의 인민해방군을 조선에 보낼 수밖에 없다. 작년 7월 내가 창춘 16집단군을 시찰한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어서다. 미군을 따라 일본 자위대까지 들어오면 조선반도는 국제전장(戰場)으로 변한다. 그 후과(後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도 미루어야 한다. 김정은이 괘씸하긴 해도 나로선 조선 민생을 살피며 6자회담장으로 불러낼 수밖에 없다. 나는 핵 부품의 조선 유입을 막고 양국 간 교량을 정비해 미래에 대비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에 협조적이지만 몇 가지 문제는 불만이다. 한국은 위기가 닥치면 단결하는 나라다. 우리의 일개 성()보다 작은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권력 다툼에 날을 지새우는 것을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전승절 퍼레이드에 참석하고 나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에 협조하는 등 양국 관계는 어느 때보다 좋다. 세계 경제가 어려운 때 한국 기업이 우리 내수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환영한다. 우리는 시장의 한 귀퉁이를 내어주고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안보를 미국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한·미 동맹이 역사(전쟁)의 산물이긴 해도 종전 60년이 지나도록 한국군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현실은 비정상적이다. 한국이 통일을 원한다면 미국 의존에서 탈피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통일된 조선반도가 중국적 질서로 복귀하는 것'이다. 주한 미군이 있는 한 이는 불가능하다. 사드 도입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미·일의 포위망을 깨고 국익을 지킬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 동맹 중 가장 약한 고리인 한·미 동맹도 변한다고 본다. 2년 전 서울대에서 말했듯이  나는 한국을 '친척'으로 대할 것이다. 조선반도는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중국 영향권에 있어야 한다. 내가 조선을 다독이고 한국을 끌어안는 이유다. 조선반도는 둘로 나뉘어 있지만 나는 하나로 본다.

 

※이 글은 시진핑 주석의 입장을 가상해 쓴 글이다. 이는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며 시 주석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혀둔다.
조선일보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2017년 01월 06일 민주당 사드訪中團의 위험한 착각

김열수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인도의 관광지에 가면 뱀 곡예사들이 있다. 이들이 피리를 불면 광주리에 있던 코브라가 피리 소리에 장단을 맞추듯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고 이들은 돈을 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및 한한령(限韓令)과 관련해 중국을 찾은 일부 국회의원을 보면 그 코브라가 연상된다.

 

사드 문제로 6명의 의원이 처음 중국을 찾은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도 아니었고 선수(選數)가 쌓인 국회의원도 아니었다. 제20대 국회의 새내기들이었다. 중국의 기관지들이 이들의 방중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의 외사위원회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했고 중국 외교부 관계자들을 만나지도 못했다. 이들이 만난 사람은 사드에 대해 전문성을 갖춘 중국의 관변 학자들이었다. 3줄짜리 브리핑이 이들의 성적표였다.

 

이번에는 7명의 의원이 4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을 찾았다. 4선 의원이 단장이 된 더불어민주당의 방중단(訪中團)은 왕이(王毅) 외교부장도 만나고 상무부와 전인대 관계자, 당의 대외연락부 관계자들도 만난다. 지난해 6인에 대한 중국의 대접이 소홀했다는 반성이 양쪽 모두에게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거의 칙사 대접을 받았다. 사드 보복 반대가 방중 목적이었다.

 

반대 요구를 한다고 해서 중국이 당장 보복을 멈출 것 같지도 않다. 우리 모두 호흡을 가다듬고 2010년 센카쿠(尖閣) 사태 당시, 그리고 2012년 센카쿠 국유화 때 중국의 보복에 대해 일본이 취한 조치들을 교훈 삼을 필요가 있다. 중국은 희토류 수출 금지, 일본 관광 제한, 심지어 베이징을 여행하던 일본인을 간첩죄로 체포하기도 했다. 일본의 자동차 수출이 반 토막 난 적도 있었다. 이런 보복에도 일본은 정치인과 국민이 똘똘 뭉쳐 중국에 대항했다.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광주리에 코브라가 없자 보복을 멈추었다.

 

이들의 방중 목적이 보복 반대만이 아니라, 북핵·미사일에 대한 중국의 근본적인 책임, 죽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 한국의 안보 현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주권 침해 문제를 조목조목 따졌어야 했다. 중국은 북핵·미사일 문제가 중국의 책임이 아니라, 미국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대북 제재 결의에 반대한 적도 없고 또 이를 충실히 이행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과 비교해 보면 중국은 북핵·미사일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과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억제해 왔지만, 중국은 북한에 대해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의 현실이 된 것이다. 

 

이런 비대칭적 현실 속에서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패트리엇 미사일(PAC-3)로는 25㎞ 고도에서 단 한 번의 격추 기회밖에 없는데 이것으로는 고각(高角)으로 발사되는 노동미사일과 무수단 미사일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고도 40∼150㎞에서 요격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은 국제 규범과 주권에 따라 무기를 선택하는데 왜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는지도 따졌어야 했다. 한국이 서해를 어슬렁거리는 중국의 랴오닝(遼寧)함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이 사정권에 포함되는 동북 3성에 배치된 500여 기의 미사일에 대해서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음을 상기시켰어야 했다.

 

중국만 무서운 게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는 소문난 카운터펀치의 달인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에도 인천공항에서 이들의 ‘사대외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기를 기대해 본다. 

문화일보

 

2017-01-06 노무현 ‘동북아 균형자론’의 망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북핵 브리핑을 받았다’ ‘트위터에 북핵을 언급했다’는 게 대서특필됐다. 외교부도 “북 도발 가능성을 경고한 것”이라 즉각 논평했다. 실제 워싱턴 분위기는 어떨까. 트럼프 인수위와 접촉하고 있는 현지 고위 외교안보 당국자들에게 새벽부터 전화를 걸었다. 대화를 종합하면 “오바마 때와 다를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 어떤 정책이 결정된 건 아니다. 한국도 차분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거였다

 

미국의 관심은 韓 아닌 中  

워싱턴 외교안보 당국자 말이다. “북핵 브리핑은 간단한 현황 보고였다. ‘딥(deep) 브리핑’을 받고 싶어도 인수위 차원에서는 힘들다. 안보보좌관 내정자(마이클 플린)도 지금 워싱턴에 없다. 트럼프는 관심 있는 문제를 트위터에 올려 여론 동향을 살핀다. 이번 일도 그 연장선상이다. 

 

캠프 선거대책위원장 출신 폴 매너포트의 연말 방한을 보도한 한국 언론들은 ‘신행정부로부터 한반도 정책 수립 과제를 받고 온 것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캠프에서 한국에 보낸 사람은 없다. 개인적 비즈니스 방문 성격이 짙다”는 게 중론이었다. 실제로 그의 본업은 로비스트다. 선대위원장 시절 거액의 뇌물수수 의혹이 불거져 캠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방한 72시간 동안 국가정보원장은 물론이고 여야 거물 정치인들을 훑고 갔다니 우리가 너무 들이댄 것은 아닌지 조급증과 불안감이 읽힌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늘 뒷전이다. 워싱턴에선 한국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 미 외교 당국자들은 “미국이 한반도 관련 메시지를 던질 때 관객은 항상 중국이다. 북핵도 미중 협상 카드로 활용한다. 이번 트럼프의 언급도 북보다는 중국에 대한 경고 성격이 짙다”고 했다  

 

중국이 자기네 안보에 전혀 위해요소가 되지 않는 ‘사드 반대’ 억지를 부리며 시비를 거는 것도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한국의 남남분열을 통해 미국에 맞서겠다는 우회 전략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조중(朝中·북한과 중국)상호방위조약이 엄연히 대치하고 있는 실질적 전쟁 상태인 한반도에서 우리는 국제법상 안보 면에서 중국과 같은 편이 될 수 없다. 미일 동맹을 축으로 중-러를 상대하는 일본을 잘 봐야 한다.

 

“사드 반대 용납 못 한다”는 엄포를 듣고도 역대 최고위급 중국 인사를 만났다고 환호작약하는 제1야당 의원들이나 “트럼프도 만나고 왕이(王毅)도 만날 수 있다”는 그 당 원내대표의 인식은 국제질서에 대한 무지를 넘어 매국적인 인식이다. 전시작전권 환수, 한미연합사 해체를 추진했던 노무현 정권의 ‘동북아 균형자론’ 망령의 재림(再臨)으로 읽힌다.  

 

박근혜 정부도 전략적 혼란을 겪었다.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을 바라본 워싱턴의 충격 파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때 외교부 수장이 윤병세 장관이다. 그가 과연 숨 막히는 외교 전쟁터의 새판을 짤 수 있겠는가. 

 

시진핑이 웃고 있다  

자주국방 능력도 없으면서 균형자가 될 수는 없다. 작금의 우리 모습은 식물정권의 양팔을 중국이, 몸통과 두 다리를 미일이 끌고 북한 김정은이 쇠망치로 머리를 정조준하고 있는 형국이다. 자기네 나라 외교부장과 나란히 웃으며 선 한국의 국회의원들을 선전하며 “거 봐라, 한국도 사드를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 의기양양해하고 있을 중국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한국을 이간질시키고 한미 동맹에서 한국을 떼어 내려는 그들에 속으면 안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2017.01.12 전략 없는 감성 외교, 자충수일 뿐

우리 외교가 리더십 부재 상태에서 '복합 위기'에 빠졌다. 북한의 위협은 점증하는데, 미국은 동맹 재조정을 요구할 기색이고, 중국은 사드로 우리를 압박하고, 일본은 소녀상 철거를 내세우며 외교 강수를 빼들었다. 주변 강국들은 트럼프, 아베, 시진핑, 푸틴 등 강력한 지도자를 앞세우며 '강한 나라의 부활'을 외치는데, 우리는 정치적 혼돈과 분열 속에 자충수만 두고 있다.

 

위기일수록 방향타를 꼭 쥐고 외교안보의 기본을 재확인해야 한다. 미국의 안보 담보가 없으면 한국의 입지는 흔들리게 되어 있다. 사드 배치를 미룰 수 없는 이유다. 중국의 압력에 굴복해 사드 배치를 미루면 앞으로 중국발 압력의 파고는 오히려 높아만 갈 것이다. 사드 배치가 북핵에 대한 방어적 대응 조치였다는 그간의 주장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북한의 창은 날카로워지는데, 한국은 방패를 내려놓는 형국이 된다.

 

중국이 북한을 움직이는 지렛대는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안보를 담보해줄 국가는 아니다. 한·미·일 공조는 북핵 대응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 한·일 간의 협력은 한·미·일 공조를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이다. 한·일 양국 갈등을 조장하는 어떠한 시도도 궁극적으로 한·미·일 협력을 약화시켜 대북 공조 균열이란 결과를 가져온다.

/지난 2016년 12월 30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

 

한·일 위안부 합의는 양국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였다. 합의 내용에 불만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걷어차고 재협상하자는 주장은 감성적 호소력은 있을지언정 현실적으로 실효성이 약하다. 외교에는 상대가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최종적 해결'이라고 정의하고서 합의에 다시 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상황 변경에 의한 재협상 요구는 '한국은 필요하면 골대를 옮기고 재협상을 요구한다'는 일본 우익의 논리를 우리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된다. 한국의 국제 신용도는 떨어지고 국제사회의 비난은 한국을 향할 공산이 크다.

 

한국 시민단체는 일본의 성의 없는 사과에 항의해 부산 일본 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했다지만, 국제사회는 '상대국 공관의 안녕과 품위를 지킬 책무'를 규정한 빈 조약 22조와 상치되는 이 같은 조형물 설치에 비판적이다. '국민 정서가 우호적이면 국제협약도 무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끼리만 통용되는 논리다. 정치인들은 이런 감성에 너무 쉽게 편승한다. 만에 하나 일본과 재협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기존 합의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다음 정권에 큰 짐이 될 것이다. 합의 당시 46명의 생존자 중 34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이미 합의 결과를 수용했다는 점도 재협상론자들에겐 깔끄러운 부담이다.

 

일본도 자제해야 한다. '일본은 한·일 합의에 따라 10억엔을 출연했으니 한국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은 합의의 본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10억엔은 소녀상 철거 대가나 선금 지불이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정책 조치였다. 금전적 보상이 사과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사죄의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으려면 일본은 10억엔 갹출과 소녀상 이전을 직접 연계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정부도 일본 공관 앞의 소녀상 추가 설치를 방치해 일본의 여론을 자극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2017-01-13 베트남에 한국남자像이 세워졌다면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이 책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에서 “한국은 강대국이 절대 아니다. 몸을 낮추고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한일 관계에 대해 ‘거망관리(遽忘觀理·분노를 접고 사리를 따진다)’를 주문한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북아의 안보지형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격변기일수록 철저하게 국익에 기반을 두고 실리 위주로 사고해야 한다.

 

강대국커녕 중견국도 아니다  

한국은 지정학적 운명 탓에 대외적인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지만 경제적으로도 해외시장 의존도가 월등히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국민총소득(GNI)에서 차지하는 수출 비중은 독일에 이어 2, 수입 비중도 멕시코에 이어 2위다.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 매출의 8090%가 해외에서 일어난다. 세계 시장의 작은 파문에도 한국 경제가 출렁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인들이 메이드인코리아와 한국 문화를 좋아하도록 만든 것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세계인의 앵글에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독 외교안보 분야에서만큼은 국제적 시각을 갖지 못하는, 난시를 넘어 스스로를 강대국이라 착각하는 착시까지 있다  

 

적도 친구도 없는 국제무대에서 우리가 선 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존립이 위험해진다. 조선시대 조정은 국제관계 동향에 눈과 귀를 닫고 살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고 결국 망한 것 아닌가. 1905년 미일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으로 조선과 필리핀을 물건처럼 주고받는 것도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들이 위안부가 된 부끄러운 역사도 우선은 우리가 약하고 못나서였기 때문 아닌가

 

 최 전 장관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강대국도 아니고 영향력 있는 중견국가도 아니다. 선진국 눈에는 ‘벼락부자가 된 촌놈’ 정도”라고 했다. 실제로 외국에 나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직도 ‘남쪽이냐 북쪽이냐’ 묻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을 안다 해도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단한 나라 정도이지 존경심을 보이는 정도는 아니다. 사람도 그렇지만 나라도 존경을 받으려면 겸손을 바탕으로 교양과 품격, 남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돈 문제로만 생각하고 진정한 사과와 반성 없이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고 싶어 하는 일본은 자격이 없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 중국 등 강대국과 전쟁을 치른 나라다. 우리도 참전했다. 베트남 정치지도자들의 일관된 외교 전략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해서도 “잘못된 정치지도자들 문제이지 국민들과는 상관없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일 베트남 시민들이 한국대사관 앞에 베트남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버린 한국 남자들을 규탄하는 조각상을 세웠다면 오늘날의 양국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외교전략은 미래 향해야   

한국인으로서 위안부 소녀상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교공관의 안녕과 품위를 지켜주자는 세계인들의 약속(빈 협약)에까지 눈감으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운 시민단체는 세계인들에게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알리자는 취지일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부터 국제사회의 룰을 지킨다는 도덕적 우위를 가져야 한다. ‘정부 간 약속(위안부 합의)도 지키지 못하는 한국은 믿지 못할 나라’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우리는 고립될 수밖에 없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2017.01.17 중국에 농락당한 한국 의원외교의 현주소

▲ 지난 1월 4일 중국 베이징 외교부를 찾아 왕이 외교부장과 기념촬영한 더불어민주당 3차 방중단(왼쪽부터 통역·박찬대·유은혜·유동수·송영길·왕이·박정·신동근·정재호·박선원). photo 연합

 

매년 10 1일은 중국이 건국기념일로 삼는 국경절이다. 주한 중국대사관은 매년 국경절을 앞두고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국경절 경축행사를 연다. 지난해 9 26일에도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국경절 경축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우리 정부 측에서 임성남 외교부 1차관을 비롯해 국회에서 심재철 국회부의장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새로 금배지를 단 송영길·표창원·노회찬 의원은 물론 낙선한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 이홍구 전 국무총리, 한·중우호협회장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등 정재계 유명 인사 800여명은 신라호텔에서 가장 크다는 다이너스티홀을 가득 채웠다


   
축하건배를 제의받는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사실 주한 중국대사는 중국 외교부의 국장급에 불과하다. 국장급 외교관이 한국의 저명인사들을 맞상대하는 풍경은 추 대사의 전임자인 장신썬()·청융화(程永華) 대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청융화 대사 재임 때인 2009년 중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역시 신라호텔에서 열린 국경절 경축행사 때는 김형오 국회의장을 비롯 이명박 정부 최고 실력자였던 이상득 의원, 김무성 의원, 정세균 민주당 대표, 고건 전 총리,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거물급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그나마 닝푸쿠이(寧賦魁), 리빈(李濱) 등 부국장급 중국대사가 행사를 주재할 때보다는 나아진 풍경이었다.  


   
국장급·부국장급 외교관이 중국의 대한(對韓) 외교를 사실상 지휘하고 있을 때, 한국은 국방부 장관·국회의원(비례)을 거쳐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지낸 김장수씨를 주중 대사로 보냈다. 박근혜 정부 초에는 주중 한국대사(권영세)는 물론 상하이총영사(구상찬) 자리에도 국회의원 경력을 가진 인사를 파견해왔다. 거물급 한국 정치인들을 맞상대한 주한 중국대사관 외교관들이 국경절 경축행사 때면 달려와 눈도장 찍기에 바쁜 한국 국회의원들을 어찌 생각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적전 분열 초래하는 한국 의원외교

국회의원들의 ‘의원외교’가 대중(對中)외교에 적전(敵前)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한·중 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중국으로 떼를 지어 우르르 달려간 야당 의원들이 의원외교에 합당한 자격을 갖췄는지부터가 논란이다.   


   
실제 지난해 8월부터 올 초까지 세 차례에 걸쳐 단체로 방중한 야당 의원들의 소속 상임위원회를 조사한 결과 1·2·3차 방중단 중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은 한 명밖에 없었다. 지난해 12 2차 방중단 단장 자격으로 방중한 이인영 의원 한 명이다. 특히 사드 문제를 직접 소관으로 하는 국회 국방위 소속 의원은 전무했다. 1차 방중을 사실상 주도한 김영호 의원은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3차 방중에 단장 자격으로 간 송영길 의원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이다.  


   
외교부와 통일부를 관장하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주로 3선 이상의 중진 의원들로 구성돼 있다. 3선의 더불어민주당 심재권 의원을 위원장으로 여야 의원 22명이 소속돼 있다. 주로 3선 이상 중진 의원들이 외통위에 배정되는 까닭은 국가 대 국가 사무인 외교를 관장하는 엄중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통위 자체의 인기가 없어서다. 국토교통위나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산업통상자원위같이 자신의 지역구에 직접적 예산배정이나 민원청탁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국회 상임위 배정 때는 외통위 배정을 손사래 치다가, 너도나도 ‘의원외교’를 한답시고 방중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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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방중 직전인 지난해 12 4일 베이징을 방문해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조선반도사무특별대표를 만난 심재권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정도가 합당한 자격을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공식일정은 아니었다. 국회 외통위원장실의 한 관계자는 “당시 중국에서 행사가 있어 국회 외통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가 우다웨이를 잠깐 만난 것”이라며 “별도로 동행한 의원은 없다”고 했다. 그나마 범위를 최대한 넓혀 국회 상임위가 아닌 당 차원의 직책을 따져도, 민주당 사드대책위(위원장 우상호)에 속한 김영호(간사)·정재호(위원) 의원 정도에 불과했다.  


   
국회의원 경력 6개월 남짓의 초선의원들이 너도나도 의원외교를 자처하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8 1차 방중 때는 의원외교 경력이 일천한 초선의원 6명이 사드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방중했다. 2차 방중 때는 이인영 의원을 제외한 3명이 초선이었다. 심지어 보건복지위 소속 초선 비례대표(정춘숙)도 있었고, 강훈식 의원은 외교석상에서 유일하게 운동화를 신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3차 방중 때도 송영길(4), 유은혜(재선)를 제외하면 무려 5명이 국회의원 경력 6개월 남짓의 초선의원이다.  


   
특히 3차 방중단 중 무려 4명이 인천을 지역구로 둔 의원이라 마치 ‘인천 지역 대표단’ 같은 모양새였다. 한 국회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인천시장을 지낸 송영길 의원의 영향력 아래 있는 ‘송영길 키즈’”라고 했다. 실제 1·3차 방중에 참가한 신동근 의원은 1차 방중 때 “사드 배치와 관련해 한국에 가장 안 좋은 것은 중국이 북한과 다시 혈맹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란 말을 전달한 후 발언의 진위를 두고 옥신각신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치과의사 출신 신동근 의원 역시 인천 서구을이 지역구로, 송영길 시장 때 인천시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 지난해 12월 5일 중국 베이징 외교부를 찾아 류전민 부부장(차관)과 기념촬영한 더불어민주당 2차 방중단(왼쪽부터 김영호·정춘숙·류전민·이인영·강훈식). photo 중국 외교부 


   
야당의 파트너는 전인대·정협  

한국 의원들을 홈그라운드에서 맞이한 중국 외교부와 중국중앙방송(CCTV) 등 관영 언론들은 “한국의 ‘공동(共同·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사드 문제 해결을 위해 방중했다”고 대대적으로 환대했다. 또 외교에 미숙한 한국 의원들을 상대로 변방 오랑캐를 상대해온 전통적 외교술인 ‘이이제이(以夷制夷)’와 레닌 이래 공산당의 전통적 외교책략인 ‘통일전선(Unified Front)’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중국 외교관 특유의 화려한 변검()술을 과시했다. 지난 1 4일 베이징 조양문(朝陽門)에 자리한 중국 외교부 감람청(올리브홀)에서 송영길 의원 등 야당 의원 7명을 직접 맞이한 왕이 부장의 표정은 득의양양했다. 베이징성의 동문인 조양문은 과거 조선의 조공사절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드나들던 문이다. 중국 외교부의 전신인 청말 총리각국사무아문도 조양문 일대에 있었고, 외교부 역시 중화적 조공질서를 상징하는 조양문에 세워졌다. 이런 역사적 장소에서 한국 의원단을 맞이하니, 지난해 7월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윤병세 외교장관과 만나 잔뜩 찌푸린 표정이 나왔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얼굴이었다.  


   
중국이 그간의 외교 관례에 따라 합당한 카운터파트를 내보냈는지는 의문이다. 중국은 사실상 야당을 인정하지 않는 일당독재국가다. 1949년 건국할 때 공산당에 협력한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중국민주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민주촉진회’ ‘중국농공민주당’ ‘중국치공당’ ‘구삼학사’ ‘대만민주자치동맹’ 등 8개 민주당파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집권 가능성이 전무한 관제야당, 어용야당이다. 중국 측은 이를 “중국공산당 영도의 다당합작 및 정치협상제도”란 말로 포장한다. 이들 8개 민주당파의 주석은 대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부위원장,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부주석 등의 직위를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타국 야당을 상대하는 것은 전인대나 정협 인사들이다. 실제 19대 국회 때인 2013년 원유철 국회 기우회장을 위시한 여야 의원들이 중국 측과 ‘바둑 교류’를 한답시고 우르르 방중했을 때 중국 측에서 카운터파트로 나온 인사는 뤄푸허(羅富和) 정협 부주석과 쑨화이산(孫懷山) 정협 부비서장 등이었다. 뤄푸허 부주석은 중국공산당원이 아닌 중국민주촉진회 부주석을 맡고 있다. 반면 2·3차 방중 때는 중국 외교부가 직접 나섰다. 원래 중국에서 외교부는 국가 대 국가, 공산당 대외연락부는 당 대 당 외교를 관장한다.  


   
최순실 사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며 박근혜 정부가 식물 상태가 된 후 찾아온 2차 방중, 3차 방중 때는 카운터파트의 격을 대폭 높이는 파격도 제공했다. 지난해 12 2차 방중 때 류전민(劉振民) 외교부 부부장(차관), 새해 1 3차 방중 때 왕이 외교부장(장관)이 직접 나왔다. 그나마 중국 외교부는 1차 방중 때인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상대국 정부와 집권당을 배려해 야당을 상대하는 금도(襟度)를 지켜왔다. 사실상 상대국 정부나 집권당을 상대하는 대신 야당을 새 파트너로 간주한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이는 격식과 의전을 그 어느 나라보다 따지는 중국 외교의 특성상 고의적 도발이다. 이 같은 도발은 우리 측 공식 외교라인인 주중 대사관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실제 송영길 의원은 김장수 주중 대사를 두고 “주미 대사로 보낼 분을 주중 대사로 보냈다”는 비아냥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송 의원은 베이징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2월 정세균 국회의장의 방중을 추진 중”이라며 “시진핑 주석과 회담 일정을 조율 중으로 회담이 잡히지 않으면 방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세균 국회의장과 시진핑 면담을 고집하는 것도 자칫 외교적 구걸로 비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의 공식 카운터파트인 서열 3위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엄연히 존재해서다. 실제 2015년 장더장 위원장이 방한했을 때도 우리 측 초청 당사자는 정의화 당시 국회의장이었다.  


   
노련한 중국의 전문 외교관들을 상대한 의원외교단의 성과는 제한적이다. 중국 측 관리들을 아예 만나지 못한 1차 방중단은 말할 것도 없다. 왕이 외교부장을 만났다고 자랑한 3차 방중단 역시 대한 무역보복을 주도하는 상무부(商務部)나 한국 연예인 방송출연 제한 등 ‘한한령(限韓令)’을 주도한 광전총국, 한국 수출품 검역을 강화한 질검총국 등에는 발걸음조차 못 했다. 굳이 성과를 찾자면 쿵쉬안여우(孔鉉佑)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의 입에서 “제재는 중국 국민들이 한 것”이란 말을 끌어낸 것밖에 없다. 중국 정부는 사드 관련 일련의 보복조치를 줄곧 부인해왔는데 사실상 자백한 것이다.   

   
   
야당 의원 중국 짝사랑의 뿌리는

 

야당 의원들의 중국 짝사랑도 남다르다. 중국 유학은 낙선한 야당 의원들의 필수코스가 됐다. 송영길 의원은 2010년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중문학을 공부하고, 2014년 인천시장 재선에 실패한 직후 베이징 칭화대로 떠나 방문학자 자격으로 1년간 머물렀다. 노무현 정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이광재 전 강원지사는 2011년 강원지사직을 상실한 후 중국으로 떠나 칭화대 공공관리학원에서 방문학자 자격으로 머물렀다. 이후 베이징대 중문과 박사 출신으로 희망제작소 기획위원을 지낸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와 함께 ‘중국에게 묻다’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행자부 장관을 지낸 김두관 의원도 17대 총선 낙선 직후인 2004 8월부터 베이징대 역사학과에 방문학자 자격으로 6개월간 머물렀다. 노무현 정부 총리를 지낸 이해찬 의원은 과거 ‘한중문화원’을 설립하고 부인 김정옥씨와 함께 계간 ‘한국과 중국’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해찬 의원은 한·중교류협회 명예고문으로 있다.  


   
야당 의원들의 중국 짝사랑은 운동권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2차 방중단을 이끈 이인영 의원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3차 방중을 주도한 송영길 의원은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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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방중에 참석한 신동근 의원은 경희대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위원장을 지냈다. 3차 방중 때 참석한 유은혜 의원도 성균관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다.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3차 방중을 실질적으로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박선원 전 노무현 정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 비서관 역시 연세대 삼민투 위원장 출신이다. 박 전 비서관은 1985년 미 문화원 점거사건 당시 배후로 지목돼 수감된 전력이 있다. 천안함 폭침 때는 ‘아군 기뢰 폭발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세대는 다르지만 3차 방중 때 동행한 강훈식 의원도 건국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1970~1980
년대 대학가 운동권들은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별’, 님 웨일스의 ‘아리랑’, 해리슨 E. 솔즈베리의 ‘대장정’, 로이드 E. 이스트만의 ‘장제스는 왜 패하였는가’,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등을 탐독하며 중국공산혁명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품었다는 것이 대체적 분석이다.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기 전 중국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일 때 국내에 소개된 서적들이다.  


   
송영길 의원은 리영희 선생이 2010년 작고했을 때 빈소를 직접 찾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된 뒤로 책도 다 읽었다”고 밝혔다. 김두관 의원도 “‘8억인과의 대화’ 등을 통해 중국을 보는 새 눈을 주셨다”고 했다. 이광재 전 강원지사도 리씨의 빈소를 지켰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2003년 방중 때 칭화대 연설에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의례적인 외교수사였을 수도 있으나, 6·25전쟁 당시 적이었던 ‘마오쩌둥 존경’ 발언은 국내에서 상당한 논란이 됐다.  


   
운동권 전성기가 끝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세대에서도 중국 짝사랑은 계속된다. 더불어민주당 김상현 상임고문의 아들인 김영호 의원은 베이징대 국제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의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성월보’를 발행했다. 박정어학원으로 유명한 박정 의원은 영어 사교육으로 수백억원의 재산을 불렸지만, 후베이성에 있는 우한대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샹판(襄樊)대와 우한대 등에서 객좌교수를 지냈다.   


   
이동호 미래한국 편집위원은 연세대 재학 시절 ‘주사파(主思派)’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동호 위원은 “운동권들에게 ‘중국의 붉은별’은 저학년용이었고, 고학년들은 ‘중국혁명사’와 ‘마오의 모순론’ 같은 책도 많이 봤는데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가 결정타였다”며 “이들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이 형성돼 있는데, 젊을 때 형성된 기본적인 사람의 생각이나 우호적인 감정은 잘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개개인의 우호적 감정과 냉혹한 외교는 전혀 별개다. 한국의 대중외교 역사상 최대 굴욕인 한·중 마늘파동은 좌파진영이 집권한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터졌다. 당시 중국산 마늘에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한국에 중국은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으로 되받아치며 참패를 안겼다

   

친중파 오자와를 징벌한 일본  

 2009 9월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정권 출범 직후인 같은 해 12월의 일이다. 민주당 정권에서 ‘상황(上皇)’으로 불린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간사장은 그해 자신의 지원으로 당선된 ‘오자와 칠드런’으로 구성된 143명 의원을 포함해 626명을 이끌고 방중했다. 이들은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오자와 이치로는 1972년 중·일수교를 단행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수제자다. 오자와 이치로 역시 다나카의 기조를 이어받아 1989년부터 ‘장성(長城)계획’이란 일·중간 민간교류를 주도해왔다.  


   
하지만 대규모 방중에 일본 국민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이면서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냈다. 마치 중국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오자와 이치로는 이듬해 불법정치자금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동반 사퇴했다. 한때 100여명에 달했던 오자와 칠드런도 2012년 중의원 선거 때 사실상 전멸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오자와만 당적을 옮기면서 재기를 모색해왔으나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민주당은 지난해 3월 ‘민진당’으로 간판까지 바꿔 달았다.   


   
오자와와 일본 민주당의 몰락은 거듭되는 야당 의원들의 방중을 바라보는 한국에도 시사점이 크다

출처주간조선 2441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2017.01.24 한·대만 의원친선협회장 조경태 의원이 말하는 대만 카드

▲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매년 10 10일 쌍십절(雙十節)은 중화민국(대만)의 건국기념일이다.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우창(武昌)봉기를 기념하는 날로, 대만은 이날을 건국기념일로 삼아 기념해왔다. 매년 10 10일을 앞두고 대만대사관에 해당하는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는 이를 경축하는 행사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열어왔다. 하지만 쌍십절 행사처럼 국제외교의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잘 보여주는 행사도 없다. 쌍십절 행사에 약 일주일가량 앞서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리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건국기념일인 국경절(10 1) 경축행사에 유명 국회의원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과 달리 이곳을 찾는 정치인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중국 눈치 때문에 참석하더라도 잠깐 눈도장을 찍고 가는 데 급급하다.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으로 있는 새누리당 조경태 의원(4선·부산사하을)은 야당인 민주당 시절부터 쌍십절 경축행사를 줄곧 찾아왔다. 이것으로 인해 조 의원은 중국 눈 밖에 난 대표적인 정치인의 한 명으로 꼽힌다. 한·대만 의원친선협회 회장으로 있는 조경태 의원은 지난해 5, 차이잉원(蔡英文) 신임 대만 총통 취임식 때는 대만 타이베이를 찾기도 했다. 지난 1 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실에서 만난 조경태 의원은 “지난해 쌍십절 행사는 대만 현지에 가서 직접 축하를 했다”며 “중국의 사드(THAAD) 압박에 맞서 대만 카드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경태 의원은 지난해부터 이어지는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의 잇단 방중(訪中)을 “굴욕외교”란 한마디로 비난했다. 그는 “자국 안보와 관련된 일을 어찌 남의 나라에 상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며 “자국 안보와 관련된 사항은 어떤 나라가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중국은 6·25전쟁 때 군사적으로 충돌했던 나라로, 군사적인 문제를 함께 상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도 밝혔다. 조 의원은 “중국이 핵미사일 기지를 결정할 때 미사일 기지를 어디다 둘 것인지 한국과 상의하나”라고 반문했다.


“사드는 중국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수단이 아니라 북한 핵미사일을 막기 위한 방어수단”이라고 인터뷰 내내 줄곧 강조했다. 이에 “중국 측도 북한 핵미사일로 인해 불가피해진 사드 배치를 한국 측에 따질 게 아니라 북한 측에 따져야 한다”는 것이 조 의원의 입장이다. 그리고 의원외교라고 하면 정치적 위상에 걸맞은 인물이 정부를 도와 수행해야 하는데 최근 민주당 의원들의 거듭되는 방중은 의원 개개인 면면만 봐도 사드 같은 국가 간 중대사를 논의하는 의원외교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조 의원은 “처신이 너무 가볍다”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19대 국회 때인 2013년부터 한·대만 의원친선협회장을 맡고 있다. 국회에는 의원외교 차원에서 약 110개국과 의원친선협회가 조직돼 있다. 사실 ‘한·대만 의원친선협회’는 그리 인기 있는 친선협회가 아니다. 미국과 함께 가장 인기가 많고 김무성, 정몽준 등 거물급 인사들이 회장을 역임한 한·중 의원외교협의회와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19대 때만 해도 조 의원을 비롯해 6명의 의원이 속해 있었으나 지난해 4 20대 총선 때 몇몇 의원들이 낙선해 지금은 3명만 남았다. 20대 국회에서는 아직 재편성조차 못 하고 있다. 한·대만 의원친선협회는 국회에서 1992년 한·중 수교에 이은 단교 이후 대사급 외교관계가 없어진 한국과 대만 간에 몇 안 되는 정치적 채널이다. 중국 눈치로 인해 양국 간 정상회담 자체가 안 되기 때문에 의원들이 우회 외교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


조 의원은 “복교까지는 정치적으로 어렵겠지만 한국과 대만 관계를 일본과 대만 관계 정도로 격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미국, 일본 등 주변국과 보조를 맞춰야 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건드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실제 대만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 카드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대만 독립을 표방하는 민진당 차이잉원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셰창팅(謝長廷) 전 행정원장(국무총리)을 사실상 주일 대만대사 격인 ‘타이베이경제문화대표처 대표’로 임명했다. 셰창팅은 2008년 대만 대선 때 민진당 후보로 출마해 국민당 후보로 나온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과 맞붙은 거물급 정치인이다.

▲ 지난해 5월 대만을 방문해 천젠런 신임 부총통(오른쪽)과 만난 조경태 의원. photo 조경태 의원실


“일본·대만 관계만큼 격상해야”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친일파’를 자처한다. 과거 한국과 같이 일본 식민지로 지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일본 역시 중국 견제를 위해 대만 카드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실제 인구 2300만의 대만은 적어도 인구 규모로만 놓고 보면 북한 못지않게 중시해야 할 나라다. 한국과 대만 양국 간 교역규모는 286억달러( 341600억원) 10위권 안에 드는 통상대국이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에 있어 대만은 8(2,3%)의 수출대상국이고 6(3.8%)의 수입국이다.


조 의원은 “양국 간 상호 인적 교류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국 간 상호 관광객 수도 급속히 늘어나 2014 100만명을 최초 돌파했고 올해는 약 12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조 의원은 “양국 간 국제운전면허 상호 인정도 시급하다”고 했다. 대만에서는 한국에서 발급받은 국제운전면허증으로 렌터카를 이용할 수 없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상호 운전면허 인정을 하지 않는 나라는 중국 정도다. 조 의원은 “대만은 국민소득도 우리와 비슷하고 중국과 달리 교통문화도 성숙했는데 상호 국제운전면허증을 인정 못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대만 제2 도시이자 최대 항구도시인 가오슝(高雄)과 서울 김포공항 간의 셔틀항로 신설도 대만 측에서 적극 요청하는 부분이다. 현재 김포공항에서는 대만 수도 타이베이 시내에 있는 쑹산(松山)공항과만 셔틀항로가 개설돼 있다.


조 의원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 양국은 현재 이중과세 방지협정 체결과 관련 협상을 진행 중이다. 기업활동 편의를 돕기 위해 기업이 한 국가에만 세금을 낼 수 있게 하는 협정으로 지금까지 3차례 실무자급 회담이 이뤄졌다. 기획재정부 가서명을 거쳐 외교부가 본서명을 하면 국회 비준을 거쳐 발효된다. 조 의원은 “대만의 누적 대한(對韓) 투자가 한국의 대만 투자보다 많다”며 “이중과세 방지협정이 체결될 경우 더 많은 투자가 유치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출처 | 주간조선 2441    |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2017-03-09 중국은 본래 그런 나라다

大國답지 않은 사드 보복이 패권적 중화질서의 본색이다 사드 번복 시사한 野대선주자, 사드 불가피성 못 밝힌 정부, 저자세 외교로는 능멸 자초할 뿐  미국에 대한 보복으로 간주하고 한미동맹 차원의 대처 조율하라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중국의 보복이 갈수록 난폭해지고 있다. 보복 범위를 ‘한한령(限韓令)’에서 롯데그룹의 중국 내 영업과 중국인의 한국 관광으로 확대하면서도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법 집행과 업계의 자발적 조치로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무역보복의 빌미를 찾으려 부심하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비겁한 잔꾀다. 아직 우리 상품의 수입 규제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역에서는 우리가 갑의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대중(對中) 수출상품의 95%는 중국의 수출산업을 지탱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소재와 부품이다

 

그런데도 중국이 대국으로서의 금도와 이성을 상실하고 치졸함과 오만의 한계를 계속 경신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중국은 본래 그런 나라다. 그간 동아시아의 전략적 게임에서 우리를 중국 편에 끌어들이려고 공들여 구애하던 친절한 가면 뒤의 민낯과 본심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뿐이다. 패권적 중화질서의 본질은 주변국에 대해 자국 이익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 주권만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만 탓할 일은 아니다. 중국에 사드 배치 결정이 번복될 수도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것이 화를 키웠고, 이를 조장한 것은 국내 정치와 국론 분열이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가 사드 배치를 차기 정부로 넘기라고 하는 데서 중국은 번복의 희망을 볼 것이다. 집권 후 번복할 생각이 없다면 집권하자마자 중국과 대립할 ‘뜨거운 감자’를 떠안겠다고 자청할 리가 없고, 한중 관계의 악재를 현 정부 임기 내에 털어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중국에 몰려가 보복을 자제해 달라고 비굴하게 부탁한 것도 보복의 신통한 효과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더 강도 높은 보복을 청탁한 셈이 되었다.

 

정부의 어설픈 대처도 문제를 키웠다. 사드가 불가피한 이유는 한중관계가 밀월을 누릴 때 설명했어야 한다. 북한이 일정 시한 내에 비핵화 결단을 내리고 구체적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부득이 사드 배치를 포함해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을 막아내는 데 필요한 모든 자구적 조치를 강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상회담 때마다 중국 측에 분명히 해두었다면 이토록 막무가내로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부가 중국을 계속 설득해 보겠다는 것도 안이하고 군색하기 짝이 없는 자세다. 우리와 안보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나라에 5000만 국민의 생사와 안위가 걸린 문제를 놓고 발언권을 허용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이다. 협의와 설득이 아니라 사전에 통보하고 관심이 있으면 친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안일 뿐이다

 

우리가 약소국이란 이유만으로 중국이 얕잡아 보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처럼 경제적 사활을 중국에 의존하면서도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결기로 온 국민이 하나 된 나라라면 감히 시비할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야당과 정부의 저자세는 중국의 능멸과 더 큰 보복을 자초할 뿐이다

 

중국의 몽니에 대한 해법도 국내 대선 결과에 따라 사드 배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게 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첫째, 대통령 선거 이전에 사드 배치를 완료하고 임시 가동해야 한다. 차기 정부에 이 무거운 짐을 떠넘기지 말고 새 정부는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한 바탕 위에서 한중관계를 리셋하도록 해야 한다. 야당도 모호하고 무책임한 입장을 버려야 한다 

 

둘째, 한미동맹 차원의 자위적 조치에 대한 보복 조치는 미국에 대한 보복 조치로 간주하여 대응하도록 한미 간에 긴밀히 조율해야 한다. 

 

끝으로,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와 중국 리스크에 대한 과도한 노출을 중장기적으로 줄여 나가고 우리와 안보 우려 및 전략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베트남 인도 등으로 투자와 무역을 다변화해 가야 한다. 안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국가와는 경제적 의존도가 심화될수록 안보와 경제 간 상호 보강효과를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경제적 의존도가 안보적 취약점이 될 수 있다

 

안보를 둘러싼 충돌은 사드가 시작에 불과하다. 중국은 안보적 이익을 위해 언제든 경제적 압박수단을 동원할 국가라는 전제 아래 민간기업들도 중국 리스크를 재평가하고 적극적인 헤징 전략을 세워야 한다. 중국은 더 이상 우리의 엘도라도가 아니다.

천영우 객원논설위원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2017.03.10 우리는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

절반 넘는 전쟁에서 小國이 大國을 이겼다

이길 수 있는 게임을 정치가 망치고 있다 약자의 게임을 펼칠 전략적 리더가 없다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제) 보복은 전쟁 선포나 다름없다. 완력으로 다른 나라 정책을 바꾸려는 사실상의 무력행사다. 우리로선 퇴로도 없다. 굴복하는 순간 주권국이 아님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어떻게든 버텨서 국가 의지를 관철하는 길밖에 없다.

 

싸움이 되겠느냐고들 한다. 국력 차이가 너무나 크고 우리의 중국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관광·유통업계에선 벌써부터 비명이 터져 나온다. 병자호란 때처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할 것이란 공포감이 무성하다. 중국도 우리가 만만하니까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힘도 없는 한국이 얼마나 버티겠느냐고 말이다.

 

정치학자 이반 아레긴-토프트 교수(보스턴대)가 내놓은 흥미진진한 논문이 있다. 그가 1950~1998년 중 강대국과 약소국이 벌인 전쟁을 분석했다. 인구·군사력이 10배 이상 차이 나는 45개 비대칭 전쟁이 대상이었다. 이 정도 국력 차이면 뻔한 싸움 아닐까.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약소국이 이긴 경우가 무려 55%에 달했던 것이다.

 

그중엔 우리가 잘 아는 사례도 적지 않다. 베트남이 미국을 꺾었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 패퇴했다. 신생국 이스라엘은 아랍 강호들과의 세 차례 전쟁을 다 이겼다. 10대1의 국력 차이라면 어른과 어린애의 싸움이다. 그런데 어떻게 약소국이 절반 넘게 이긴 것일까.

 

아레긴-토프트 교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의지 요소다.

전쟁은 대개 강대국의 침공으로 촉발된다. 강대국으로선 남의 땅에서 싸우니 이기려는 의지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반면 약소국은 지면 나라가 망한다. 생존이 걸린 약소국이 더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이런 정신적 요소가 전쟁의 흐름을 가른다.

 

둘째, 여론 요소다.

강대국이라고 전쟁이 공짜는 아니다. 군인들이 죽고 전비(戰費) 부담이 생긴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강대국의 피해도 커진다. 그 결과 반전(反戰) 여론이 형성돼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킨다. 베트남전 때 미국이 그랬다.

셋째, 전략 요소다.

약소국이라고 속수무책은 아니다. 정규전은 강대국이 세지만 약소국에 유리한 전략도 있다. 게릴라전이나 기습·야습·유격전 같은 것들이다. 약소국이 정규전을 피하고 비정규전을 구사할 때 이긴 경우가 많았다.

 

세 가지 비결은 사드 사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첫째, 져선 안 된다는 의지는 우리가 강할 수밖에 없다. 중국으로선 체면이 깎이는 정도지만 우리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중국의 보복은 온 국민을 분노시켰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중국의 오만함에 격분하고 있다. 적어도 협박 때문에 사드를 철회할 순 없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둘째, 중국이 엄포 놓는 경제 보복 또한 공짜가 아니다. 우리에게 보복하면 중국도 대가를 치른다. 중국의 산업 구조는 한국산 부품·소재에 의존하고 있다. 관광 역시 중국엔 한국 여행객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다. 우리에게도 카드가 있다. 중국이라고 마음 놓고 칼을 휘두를 형편은 못 된다.

 

셋째, 우리가 우위를 갖는 전략이 존재한다, 국제 여론전이다. 중국의 보복은 명백하게 국제 통상 규범을 어긴 것이다. 정치적 이유로 무역 보복을 금지한 WTO(세계무역기구) 규정 위반이다. 중국이 국제 규범을 무시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힘 대결 대신 프레임으로 맞서는 것이다.

 

중국은 자유무역의 신봉자인 양 행세해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를 준열히 꾸짖기까지 했다. 그게 얼마나 위선인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게 특효약이다. 힘으로 주변국을 궁핍화시킨다는 프레임은 중국의 아킬레스건(腱)이다. 급소를 찔러 국제 여론이 중국을 압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약자의 전략은 강자와 달라야 한다. 중국은 경제력과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가 똑같이 맞대응하면 중국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이다. 뒤에서 중국 제품 수입을 골탕먹이는 식의 꼼수를 써선 안 된다. 중국 여행 금지령이나 중국산 불매(不買) 운동도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중국처럼 치졸해선 안 된다. 우리가 도덕적 우위에 서야 한다. 국제 규범을 준수하면서 중국의 횡포를 알리는 것이 상책이다. 정부는 물론 학자와 민간단체들이 나서야 한다. 중국이 얼마나 남을 못살게 구는지 국제기구와 해외 언론 등에 알려야 한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결코 지지 않을 게임이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정치가 망치고 있다. 적은 문밖에 와 있는데 대통령은 유고(有故)이고 정치권은 분열돼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유력 후보들은 이상하게도 중국엔 관대하기만 하다. 중국에 맞설 전략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상 전쟁을 이긴 약소국은 예외 없이 좋은 리더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지도자 복이 지지리도 없다. 유리한 카드를 손에 쥐고도 이것을 구사할 전략적 리더가 없다. 반드시 이겨야 할 게임을 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고장난 정치 리더십 때문일 것이다.

조선일보 박정훈 논설위원 

 

2017.04.21 트럼프가 전한 시진핑 발언, '한국은 중국의 일부'-중국의 버르장머리 고치려면...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 저자 전원철 박사, "동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과 교류 협력 강화를"

◎ 황화 문명보다 앞선 것이 홍산·요하문명 등 우리 민족이 만든 문명

◎ 고구려-발해 이후 역사만 봐도 동북삼성 지역은 1000년 이상 우리 민족이 지배
◎ ‘동북공정’ 의도 드러난 셈… 미중 양국 정상이 직접 해명할 필요

▲북방민족 사학자인 전원철 박사.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통해 전해졌다. 미국의 일부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경솔했다고 보도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의 최고 통수권자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알려준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는 시진핑이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월스트리트가 보도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북한만이 아니라 한국(편집자 주: North Korea’ 또는 ‘South Korea’가 아니라 ‘Korea’ 전체)을 이야기했다. 수천 년의 역사와 많은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더라). 10분 정도 설명을 들으니 후 북한 문제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이런 발언이 시진핑 입에서 나왔다면 큰 문제고, 미국 대통령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문제다. 극단적인 경우 북한 급변 사태 시 한반도 문제가 역사적 배경에 따른 중국 내부 문제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북방민족 사학자인 전원철 박사는 “이번 시진핑 주석 발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과거 후진타오 정권 때 중국사회과학원이 기관 또는 그 소속 개인 역사연구자의 자격으로 학술적 견해를 핑계로 우리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가 이른 바 ‘중국역사의 일부’라고 발표하거나, 이에 편승한 광명일보 등 일개 관보적(官報的) 언론이 표명한 차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밝혔다.

 

국가의 수장이 세계 최강국 중의 하나인 미·중 수뇌 회담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로 직접 동북역사공정과 같은 논리를 표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4월 6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라라고에서 만찬을 시작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중국이라는 국가 존재한 적 없어. '지나' 혹은 '중공'이라 불러야"

 전 박사는 “여기서 특히 동북공정의 분석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중공의 정치적 통합 대상을 북한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 후진타오 시절의 중공(中共)의 정책과는 현저한 다른 점이 있다”며 “중공이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동북역사공정의 진정한 속셈을 드러낸 만큼 양국(미국·중국) 정상이 직접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제작년에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 (비봉출판사)을 펴낸 전원철 박사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외무부 유엔국 유네스코담당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을 거쳐, 미국에서 법학박사를 딴 후, 미국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시진핑 발언과 관련해 전원철 박사와 긴급 인터뷰를 가졌다.

 

참고로 전 박사는 인터뷰 내내 중국을 ‘중국(中國)’이라고 하지 않고, ‘지나(China)’ 혹은 ‘중공(中共)’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은 영어로는 ‘Peoples Republic of China, 곧 ‘지나(차이나) 인민공화국’이고, 정식국명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므로 ‘중공국’ 또는 ‘지나국’이라고 약칭하여 부를 수는 있어도 역사적 용어인 ‘중국(中國)’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역사상 ‘중국’이라는 이름을 국명으로 쓴 이른 바 ‘중국왕조’가 전혀 없었고, 우리 스스로 ‘중국’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속국(屬國)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논평했다. 다음은 전원철 박사와 일문일답이다.

 

- 시진핑의 이번 발언이 사실이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중공의 수장이 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후진타오 시대 사회과학원 기관 단위 또는 역사가 개인의 발언과 다른 심각한 의미가 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사회과학원이 추진 중인 동북역사공정은 이를 통해 과거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근래의 6·25 같이 남북 혹은 주변 4() 간에 전쟁 등으로 긴장이 고조된 시기를 틈 타 오늘날의 남북한을 분할 점령하기 위해 포석을 깐 공정으로 파악된다.


이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한반도 유사시 북한에 대한 중공의 군사적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조항이다. 다만 이번 시진핑의 발언이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같다면, 그것은 ‘국가 우두머리’가 과거와는 다르게 북한은 물론 남한까지도 ‘역사적 중국’의 계승자로 보는 ‘중공’의 일부로 합리화 한 점이라는 점에서 주목 된다.

 

"고구려-발해 이후 동북 삼성(三省)’ 지역은 우리 조선 민족의 영토"

 -최근 사드배치 문제도 시진핑의 발언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는지.

“사드배치는 원칙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다. 특히 중공은 ‘내정불간섭’을 국제법 원칙으로 하는 UN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은 우리의 내정 문제인 사드배치가 마치 자국 이익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내정간섭 태도를 보이고 있다.

 

최근 중공 매체나 하급 관계자가 사드 배치지역인 성주를 선제공격하겠다는 등의 발언을 통해 위협적인 메시지도 보낸 바 있다. 중공이 사드에 과민 반응하는 것은 한반도 유사시 남한까지 점령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한 자신들의 동북공정 준비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 주변국에 의해 발각된 탓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력하게 든다. 

 

-우리 정부가 시진핑의 발언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보도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지난 수천 년간 한중관계의 역사에 있어 한국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여기서 ‘지난 수천 년간 한중 관계의 역사에 있어 한국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정부의 입장은 지당하지만, 그 범위를 넘어선 역사의 진실 문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곧 한·중간 역사의 진면목은 시진핑 주석의 논리와는 정반대라는 점이다. 오히려 중공이 한(조선) 민족의 이른 바 ‘중국한족’ 통치무대의 일부였다는 점이다.

 

황화 문명보다 홍산·요하문명 등 우리 민족의 문명이 만든 문명이 앞서서 나타났다는 것이 이미 수많은 고고학적 증거로 밝혀졌다. 중공 인민이 그들의 이른바 ‘다수 민족’인 ‘한족의 선조’라고 우기는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 시대의 역사가 우리의 직접적 선조인 동이족(東夷族)의 역사라는 사실도 고대 한문 문헌 여기저기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 직접 선조인 단군, 기자, 위만조선이 중원을 지배한 고조선 시대까지 올라갈 것 없이 고구려-발해 이후의 역사적 사실을 따져봐도 오늘날 만주, 곧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동북 삼성(三省)’을 포함한 영토가 모두 우리 조선 민족의 영토였다.

 

역사적 배경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학자에 따라서는 산동(山東), 북경(北京)을 포함한 하북, 산서와 장성 이북 지역도 우리 민족의 영토에 포함된다고 보는데 그러한 점을 시사하는 고대 문헌 기록이 다수 있다. 우리 민족이 만주와 이 지역을 지배한 시기는 약 2100년 전부터 926년 사이인 고구려-발해시기의 일이다.


그 고구려-발해 시대 뒤 대요(大遼, 916 ~ 1125) 황가가 209년간 이른바 ‘중국’ 영토의 북방 태반을 다스렸다. 중요한 점은 이 요나라 황가는 고구려-발해 왕가의 가닥 족속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등에는 일찍이 ‘고구려가 거란의 선조세대인 선비를 속국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선비는 그 먼 선조가 조선 4(이른바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의 수령인 ‘현도공 갈오토’가 그 시조라고 하며,  <요사>에도 ‘거란에는 조선(朝鮮)의 유습이 남아있다’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전원철 박사는 “거란국의 창설자의 거란 성씨 ‘대하(大賀), ‘요련(遙輦), 그리고 ‘석말(石抹)’ 성씨는 오늘날의 우리말로 ‘대씨(大氏)=대가(大哥, 大家)’와 ‘조선(朝鮮), 발해의 ‘속말(粟末=대씨)’을 뜻하는 것”이라며 “나아가 요나라의 거란어 국명 ‘코루지 카다이 구르(Koruji Katay Gur)’는 ‘고려인 걸씨국’으로 풀이된다”고 밝혔다이 당시 중원 땅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등과 러시아에도 알려져 이 나라들은 지금도 ‘차이나(중공)”를 우리처럼 ‘중국(中國)”이라고 부르지 않고, 공식적으로 ‘거란’을 뜻하는 ‘크토이(Kytoy)”와 ‘키타이(kitay)”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를 세운 것도 우리 민족 계열"

 

전원철 박사는 “거란 말기에 아골타 가문이 1115년에 금나라(1115~1234)를 건설하고 거란의 요나라를 없애고 송나라를 양자강 이남으로 밀어내고 오늘날 이른바 ‘중국’ 땅의 반을 120년간 통치를 하였다”고 말했다.

 

“바로 이 아골타 가문에 대해 송나라 역사서인 <삼조북맹회편>이 ‘(高句麗) 주몽(朱蒙)의 후손’이라고 명백히 기록하였고, 청나라 황실이 펴낸 만주지역 역사서인 <만주원류고>도 아골타가 ‘발해왕(渤海王) 대씨(大氏)’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그들의 고향에 대해 원래 우리나라 함경도라고 밝혔다.

 

그뿐이 아니다. 그 뒤 금나라, 남송, 서하가 나누어 다스리던 지나(China) 땅은 서구 등 일부를 제외한 ‘세계’ 전체에 가까운 대지에 세운 ‘몽골(말갈) 4칸국’의 하나인 원나라(1271~1368) 땅의 일부가 되었다.

 

참고로 ‘원()나라’ 또는 ‘대원국(大元國)’은 쿠빌라이 칸-곧 ‘커부려 칸(고구려왕)’의 몽골식 이름-이 자기 영지가 발해 부흥국 ‘대발해(大渤海)’를 지은 고영창이 그것을 달리 ‘대원국(大元國)’이라고 불렀는데, 쿠빌라이 칸은 자기 나라가 그 후신이라는 점에서 취한 국명이다.

  

-결국 원나라 말기까지 한족은 주변국, 특히 우리 민족 계열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라는 의미다. 한족(漢族)이 세운 명나라는 어떤가.

/명나라 강역. /en.wikipedia.org/wiki/Ming_dynasty

 

1368년 원나라를 북으로 밀어내고 명나라(明朝, 1368 ~ 1644)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의 실질적 창설자인 영락 황제도 원순제와 고려공비의 아들로 역시 조선() 민족과 몽골의 혈통을 받은 인물이었고, 그와 그 후손이 이른바 ‘중국’을 276년간 통치하였다.

 

전원철 박사는 “동북삼성과 만주가 우리 민족의 무대였다는 사실은 명나라 건국 이래도 변하지 않았다”며 “청나라는 북한 출신인 우리 민족이 통치한 왕조로 중공이 들어서기 4년 전인 1945년까지 존재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반대"  

-청나라 기원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달라.

“명나라 말기인 1644년 그 명나라를 없애고 그 땅에 수립된 청나라(1644 6~1912 2)의 황가(皇家) 역시 <삼조북맹회편>이 ‘고구려(高句麗) 주몽(朱蒙)의 후손’이라고 명백히 기록한 금나라 왕가의 후손이자, <만주원류고>가 ‘발해왕(渤海王) 대씨(大氏)’의 후손이라고 명기한 우리 북한 회령 출신 황가이다.

 

바로 우리 왕가의 핏줄, 우리 땅을 고향으로 하는 가문이 청 황가가 대륙으로 진출하여 이른 바 ‘중국’을 268년간 통치하였다. 결국 지난 1000년 이상을 우리 한(조선) 민족이 중국 영토를 통치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진실이고 이는 시진핑의 역사 인식과는 오히려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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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 상당수는 한반도 국가 전체를 자신들의 속국(屬國)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말했듯이 역사적 진실은 시진핑 주석의 주장과는 달리 중공이 차지하고 있는 지나(China) 땅과 그 백성이 오히려 조선 민족의 통치를 받은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런데도 시주석은 거꾸로 역사적 ‘한국/조선(Korea)’이 과거에 ‘중공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 )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는 마치 대영 제국시대 통치를 받던 뉴질랜드의 앱오리지날(원주민)이나 북미에 있던 원주민들이 오늘날에 와서 대영제국 그 자체에 대해서 또는 그 시대 대영제국의 통치를 받던 미국, 호주, 카나다와 인도, 아프리카, 이란 등을 자기 영토라고 하는 논리와 같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월스트리트지는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10분 정도’ ‘수천 년의 역사와 많은 전쟁’을 말하고,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표명하였다고 전하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고대로까지 갈 필요도 없이 조금 전 말한 지난 1000년간의 역사적 진면목만 살펴봐도 그 관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간단히 드러난다.

 

전 박사는 “이 기간 동안 지나의 한족(漢族)은 자기 정부조차도 없던 식민지 백성이나 다름없었는데, 어떻게 이른바 이 ‘중국’의 요, , , , 청 왕조 시대에 발해, 신라, 고려, 조선이라는 독립 왕국을 유지하고 그들과 당당히 교류해온 오늘날의 역사적 한국(남북한)이 자기 영토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더군더나 한반도와 만주에 자리잡은 고구려, 발해, 신라, 고려, 조선과 함게 같은 시대에 나란히 서서 ‘차이나(China)’를 통치한 그 요, , , , 청 왕조 왕조들이 조선 민족 계였다면? 

 

/1대 수만을 상대로 싸워 세계를 제패한 몽골 군대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우리 인식의 전환 필요" 

-이번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트럼프 대통령과 신정부 각료에게 ‘역사특사’를 파견해서 설명해야 한다. 또 현재 우리 말고도 중공의 역사 공정을 겪고 있는 나라가 대만을 비롯하여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파키스탄, 미얀마, 인도, 월남, 태국 등 여러 나라가 있다. 영토 일부를 두고 중공과 분쟁을 겪는 나라로는 필리핀, 일본, 파키스탄, 미얀마, 인도 등이 있다. 이들 나라와 역사, 정치, 경제적 긴밀한 협조 및 유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중공이 주장하는 주변국에 대한 역사 인식에 우리가 보조를 맞춰줄 필요가 없다. 내몽고, 신강(위구르), 티베트, 운남, 만주, 홍콩 등 중공 내 이른 바 ‘소수민족’의 역사에 대한 우리 의식 제고가 필요하다. 

 

-그밖에 대책은?

“유럽연합,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시진핑 주석 발언의 부당성을 홍보하고, 국민들에게는 중공과의 교역, 정치 관계에 조심할 사항 홍보해야 한다. 사드 배치를 빌미로 한중 FTA 전면 부인하는 듯한 행위를 하고 있는 중공의 태도에 대응하여 이 FTA의 정신과 문구를 존중할 것을 촉구하여야 한다.


또 현재의 중공 일변도 위주의 교역, 관광 진흥을 수정하여 그간 우리가 별로 중시하지 않았으나 그 인구는 중공의 인구보다 더 큰 18억에 달하는 이슬람-아랍 국가들을 중요 교역국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그 외에 동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이란 등과의 무역을 증진하고 할인 관광패키지 여행 등을 활용하여 관광 교류관계도 적극 증진해야 한다.
 
전 박사는 나아가 “북한 주민과 지도부를 대상으로도 중공의 진정한 대()한반도 정책의 저의에 대해 주시하고 중공과의 협력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한테는 한반도를 가교로 한 중공의 정치적 야심을 알려 이 부분에서 공동으로 대처해 나간다면 중공이 우리를 우습게 알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청 태조 누루하치는 1 200의 명나라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칭기스 칸 가문은 1대 수만의 전세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공은 우리 인구의 23배 정도일 뿐이다. 호랑이가 판다를 겁낼 필요가 있는가? 오늘날 인구 300만 명이 안 되는 몽골은 중공에 당당히 맞서고 있다. 우리와 비교가 안 되는 월남, 미얀마 등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당당하게 해명을 요구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의 금번 발언과 관련된 양국 간 의혹이 규명된다면, 두 나라의 친선과 우호·동반관계는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계속 증진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7년 05월 01일  중국의 鬼話·官話와 노림수

박세영 베이징 특파원

“중국 관료들은 밖에서는 ‘귀신의 말(鬼話·구이화)’을 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사람의 말(人話·런화)’을 한다.

 

미국 유명 대학 종신교수직을 받은 뒤 중국으로 돌아온 한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사석에서 “공무원들을 상대하는 것이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중국 관료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맥락도 통하지 않고 사실과도 다른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 하는 말, 그게 ‘구이화’다

 

한국도 최근 이 같은 중국의 모습을 똑똑히 볼 기회가 있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과 관련한 중국의 ‘공식 입장’에서다. 분명 롯데를 조준한 보복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 말로는 “외자 기업의 투자를 환영한다”든지, “외국 기업은 법과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식이다. 최근 북한에 대해 취하는 일련의 압박 조치에 대해서도 여전히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정한 결의안을 성실히 이행해 오고 있다”며 녹음기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 같은 언행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말마다 추임새처럼 ‘일관되다(一貫)’ ‘명확하다(明確)’ ‘시종일관(始終)’ ‘반드시(一定)’ ‘굳건하여 결코 변하지 않는다(堅定不移)’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중국인들의 말은 어렵다. 특히 공식적인 장소에서 하는 정부 당국자의 말은 각종 비유와 고사성어를 버무려 해석하기가 어렵다. 기자가 막 중국에 부임한, 2년 전 만난 중국 외교관은 사석에서 기자에게 “CCTV 메인 뉴스를 얼마나 이해하느냐”고 물었다. 호기롭게 “7080%는 알아듣는다”고 답했지만 명문대 학부와 석사를 거쳐 외교부에서 7년여 근무한 그의 대답은 인상적이었다. “나는 반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었다. 불투명한 국내정치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는 탓에 그 의도와 속뜻을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만난 중국의 한 언론계 지인은 “중국인들은 ‘관화(官話·정부의 공식적인 말)’ ‘타오화(套話·틀에 박힌 말)’ ‘자화(假話·거짓말)’에 익숙해져 있다”면서 “관화, 타오화, 자화에 속아선 안 된다”고 귀띔했다 

 

중국을 대할 때 국내정치적 시스템을 모르면 오판하기 일쑤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 일행이 방중해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만나 “사드 보복 우려를 관련 부서에 전하겠다”는 말을 들었다며 성과 운운한 점은 순진한 처사였다. 이미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밝힌 방침에 대해 왕 부장이 이와 어긋나는 내용을 내부에 전달했을 리 없다. 왕이 부장의 국내 서열을 따지자면 18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 205명 중 한 명으로 그 위에 국무위원 4, 서기처 서기 3, 정치국 위원 18, 정치국 상무위원 7명 등 층층시하다. 미·중 정상회담과 북핵 문제 조율 등에서는 외교담당 국무위원인 양제츠(楊潔지)가 나섰다. 한·중 관계는 사드 파고를 넘고 있고 곧 한국에 새 정부도 들어선다. 한·중 관계도 기로에 섰다. 중국 옆에서 이사 갈 수 없는 이상 중국을 상대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어설프고 순진한 접근은 시효가 다했다. 말에 속지 말고 말과 행동을 함께 보며 전체적인 구조를 봐야 오판을 줄일 수 있다

문화일보

 

2017.05.05 환구시보에 담긴 시진핑의 腹心

중국 선전 매체를 대표하는 인민일보와 CCTV는 베이징 도심 동쪽에 있다. 톈안먼 광장에서 5~6㎞쯤 떨어진 곳이다. 도로변 고층 건물인 CCTV와 달리, 인민일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한 블록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담장이 둘러싸고 있어 베일에 가려진 듯한 느낌을 준다. 무장 경찰이 지키는 정문을 통과해 10분쯤 걸어 들어가야 인민일보와 환구시보가 나온다.

 

환구시보는 1993년 인민일보 국제부 주도로 만들었다. 처음엔 해외 화제 등을 다루는 작은 주간지였지만, 지금은 하루 발행량 150만 부를 넘는 국제 전문 일간지로 발돋움했다. 환구시보의 성공 비결로는 상업적 민족주의와 통속적인 문장이 꼽힌다. 이 매체는 호주를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을 예사롭게 '미국의 애완견'이라고 부른다. 지난달 26일 사드가 성주에 배치됐을 때는 '사드가 중국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제목을 달았다. 이런 거칠고 직설적인 표현 때문에 '중국판 폭스뉴스'로도 불린다.

 

중국 외교 당국자나 교수 중에는 환구시보의 신뢰도와 격을 낮게 보는 이가 많다. 하지만 지난 4월만 보면 이 신문은 맏형인 인민일보를 뛰어넘는 정부의 복심(腹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3일(현지시각) 베이징의 중국정치과학법률대를 방문해 손을 흔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환구시보는 미·중 정상회담 5일 뒤인 4월 12일 사설에서 처음으로 대북 원유 공급 제한을 언급했다.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감행한다면 유엔의 원유 공급 제한 제재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튿날에는 "핵을 포기하면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썼다. 북한군 창건일을 사흘 앞둔 4월 22일 사설은 좀 더 파격적이었다. "미국이 북핵 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적 타격을 가해도 중국은 군사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체계적이고 자신감 있는 논리의 이 시리즈 사설을 두고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한 논리의 연장선상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중국 당국이 정부 의견으로 공식화될 수 있는 인민일보 대신 상업성 강한 환구시보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흘렸다는 것이다.

 

시 주석 취임 이후 중국은 김정일이 방문하면 고위층이 버선발로 마중 나갔던 후진타오 전 주석 때와 달라졌다. 김정은 방중(訪中)에 대해서는 비핵화에 대한 언급 없이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고, 최근에는 북한산 석탄 수입까지 차단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무력 충돌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현재의 한반도 상황이 중국의 전술적 변화를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환구시보는 미국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김정은 정권 전복에 나서는 것에는 군사적 대응을 공언했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이 미·일 등 해양 세력의 대륙 진출을 막는 교두보'라는 전략적 사고 자체가 바뀐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트럼프 행정부와 거래하면서 실익을 챙기겠다는 의도가 더 강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한 무역 분야의 양보만 해도 올해 말 19차 당대회를 앞둔 시 주석에게는 큰 정치적 선물이다. 남중국해에 대한 미국의 간섭도 줄어들고 있다. 북핵 협상이 시작된다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활용해 경제적 기회를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난 수개월을 허송하는 사이, 중국은 이미 트럼프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발 빠르게 실속을 챙기고 있다.

최유식 국제부장

 

2017-08-22 ‘功七過三’과 중국의 한반도 징크스

중국의 6·25 참전 후유증… 마오쩌둥의 과오 초래한반도 평화는 中 안전 직결… 과거 역사에서 교훈 얻어야
미국은 본토 위협받으면 전쟁도 불사하는 나라
시진핑 확고한 리더십으로 北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야

덩샤오핑(鄧小平), 마오쩌둥(毛澤東), 그리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나오는 세 사람이다. 덩샤오핑은 풍요로운 삶을 가져왔고, 저우언라이는 자상한 아저씨 같으며 마오쩌둥은 신중국을 건설한 카리스마적 영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오쩌둥도 덩샤오핑 시대에는 ‘공7 3(功七過三·공이 7, 잘못이 3)’이란 역사의 평가를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든 것까지는 좋은데, 그에게 ‘과3’은 수천만 명을 아사시킨 1950년대 대약진 운동과 악명 높은 문화대혁명이다. 그런데 이 같은 마오의 ‘과3’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전쟁’(6·25전쟁)이 있다. 

얼마 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에 항거하고 북조선을 돕는다는 조선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화자찬했다. 미안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그렇지 않다. 한반도에서 국군, 중국군, 미군 등이 뒤섞여 싸웠지만 참전의 후유증을 가장 오래 겪은 나라는 아마 중국일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낙인찍혀 죽의 장막에 갇히다 보니 극단적인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과오를 범하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전까지 국가를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역사를 되새겨 보면 그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중국에 좋았고, 마오쩌둥이 조금만 현명하게 판단하고 평양에 단호하게 대처했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1949년 모스크바와 평양이 남침 계획을 세울 때 마오는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나라를 세운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민감한 조선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이 철수해버린 남조선을 소련제 탱크로 밀어붙여 보름 만에 통일하겠다는 호언장담에는 귀가 솔깃하였다. 결국 마오는 남침 계획을 적극 반대하지 않았고, 한번 터진 포성은 되돌아간 미군을 다시 한반도로 불러들이고, 중국은 남의 나라 전쟁에 말려들어가고 그 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간 북핵 사태를 놓고 오락가락하는 시 주석의 태도는 60여 년 전 마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북한의 핵 개발은 싫지만, 정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성공시켜 평화협정에 의한 주한미군 철수라는 의외의 성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건 과거 마오가 범한 것과 같은 오산이다. 시 주석은 마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첫째, 중국 역사에 ‘한반도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지난 1000년간 한반도의 평화가 깨지고 난 후에 중국이 개입하여 재미 본 적이 없다. 가깝게는 6·25전쟁이고 멀게는 임진왜란에 출병한 명의 멸망, 그리고 구한 말 위안스카이가 군대를 이끌고 섣불리 한반도에 들어왔다가 일본에 출병의 빌미를 주어 청일전쟁의 굴욕을 맛보았다.

 

둘째, 아이러니한 진실이지만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기존 동아시아 질서가 중국에 엄청난 번영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지난 10여 년간 10배 이상 급증한 중국의 경제력은 2001년 자유세계가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그때 동북아 정세가 불안했으면 미국이 중국의 WTO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4월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너무 순진하게 시 주석과 거래하였다. 무역에서 ‘중국 후려치기’ 안 할 테니 평양을 압박해 북핵 해결의 물꼬를 터 달라는 것이었다. 뒤늦게 헛짚은 것을 안 트럼프가 슈퍼 301조까지 들먹이면서 초강경 자세를 취하고 나온 게 이번 대북 제재다. 다행히 지난주 중국이 발 빠르게 북한산 석탄 등을 전면 수입 금지했지만, 이번에도 과거처럼 용두사미로 흐지부지하면 엄청난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중국 지식재산권에 대한 전면 조사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한판 제대로 붙으면 서로 크게 상처받겠지만 중국은 잘못하면 체제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지난주 북한에 대한 군사작전 불가론을 언급한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전격 해임되었다. 군사적 옵션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를 산 것이다. 미국은 본토가 위협받으면 무자비한 군사적 대응을 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 안 된다. 9·11테러 후 수십만의 군대를 중동에 파견해 두 나라와 전쟁을 한 미국이다.

중국이 다시 한반도 징크스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평화가 깨지기 전에 시 주석이 확고한 리더십을 발휘해 북한을 정상국가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어쩌면 이번이 북핵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2017.08.23 '시(習)황제의 중국'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

올가을 두 번째 임기 시작하는 시진핑은 황제급 권력자 될 것 

자기 중심적 행태로 주변국 위협… 韓, 이런 中과 어떤 관계 맺을까

 

중국에서 요즘 '전랑(戰狼·늑대 전사) 2'란 영화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 특수부대 출신 주인공이 아프리카 내전 국가에서 영웅적 활약을 펼쳐 자국민과 난민을 구출한다는 내용이다. 개봉 25일 만에 관람객 1억4000만명, 수익 50억위안(약 8550억원)을 돌파했다. 관객들은 애국심을 한껏 부추기는 주인공의 대사에 열광한다. '우리 중화민족을 건드리는 자는 아무리 멀어도 쫓아가 반드시 징벌한다', '재외 중국인이여 기억하라. 당신 뒤에 강대한 조국이 있다는 것을…' 같은 '명대사 20선'이 유행이다.

 

'전랑 2' 흥행을 가장 반길 사람은 시진핑 주석일 것 같다. 그는 올가을 19차 공산당 대회를 계기로 두 번째 임기(2017년 말~2022년 말)를 시작한다. 그에게 애국주의 열풍은 자신의 정치를 펼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우군이 된다. 이번 당 대회는 중국 공산당 역사상 또 한 번의 중대 전환점이 될 것 같다. '반부패'로 정적(政敵)들을 제압한 그는 자기 세력을 정치국에 대거 배치, 전임자를 훨씬 능가하는 권력을 쥐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덩샤오핑 이래 40년간 굳어진 공산당 집단 지도 체제가 무너지고 사실상 마오쩌둥(毛澤東)식 1인 통치 체제로 회귀할 수도 있으며, 10년 재임의 관행을 깨고 장기 집권의 길로 나설 가능성까지 점쳐진다. 두 달 뒤 모습을 드러낼 시진핑 2기 중국은 황제급 권력자가 통치하는 사회주의 대국의 부활을 보여줄 것 같다. 이는 우리가 알던 중국이 아니다. '새로운 중국'이다.

/시진핑 중국국가주석이 7월30일 건군 90주년 열병식을 갖고 있다. /신화망

 

새로운 대국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중국 국내적으로는 애국주의 열풍이 부국강병식 국가주의와 결합해 전체주의 통제사회로 회귀하는 조짐이 뚜렷하다. 시 주석과 공산당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 금기시되고, 지방 관료와 군(軍)의 충성 맹세가 잇따르고 있다. 지식인들은 '문자옥(文字獄·글 때문에 화를 당함)'이 두려워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같은 해외 소셜미디어 접속이 전면 차단됐다. 홍콩 서점 주인들이 가족 모르게 정보기관에 납치돼 몇 달간 조사받았고, 민주운동가는 신체에 스테이플러 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劉曉波·올 7월 사망)는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민주·자유·인권·법치가 짓밟히고 있다"면서 "애국적 청년들이 국내 문제에 침묵하면서 정의가 마비된 사회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

 

자긍심과 우월감으로 충만한 '새로운 중국'은 미국적 질서 대신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만드는 데 돈과 힘을 아끼지 않는다. 앞에서는 평화협력과 보호무역 반대를 외치고 일대일로(一帶一路)에 돈을 쏟아붓지만, 뒤에선 군사력으로 이웃을 협박하고 외국 기업을 골탕먹인다. 어제의 친구에게 악의에 찬 저주를 퍼붓고, 전쟁 불사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베트남, 필리핀, 인도, 한국, 미국 등이 그 대상이다. "대국(大國)주의는 안 된다"는 우젠민(吳建民) 같은 합리적 지식인의 목소리는 애국적 네티즌의 공격에 묻혀버린다.

 

중국이 평화롭고 정의로운 국제사회 만들기에 기여한다면 지구촌의 축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움직임을 보면, 중국은 자국 이익과 영향력 확대를 최우선에 두고, 이전보다 더 공격적이고 차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국가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드 보복에서 보았듯이, "한국을 짓눌러 굴복시켜야 한다"는 격앙된 목소리가 "한·중 관계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이성적 목소리를 압도한다. 핵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은 감싸면서, 자위 수단을 찾는 한국에는 이빨을 드러낸다. 한국은 '이런 중국과 어떻게 하면 대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 질문을 수교 25년 만에 다시 던질 때가 되었다. 중국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가치와 패권적 외교가, 한국이 소중히 여기는 자유민주적 가치나 평화 공존 외교와 양립할 수 있을지도 자문해봐야 한다. 우리 자식들의 운명을 대국의 자비에 맡길 수 없다면, 지금 우리가 중국을 다시 봐야 한다.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2017.12.19 중국에 쫄지 마라··· 중국 역대 왕조 흥망의 열쇠는 한국에 달려 있었다

우리는 이웃의 큰 덩지에 주눅이 들어 스스로 움츠린 면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고, 오히려 훨씬 더 당당해져야 한다.

/송나라 수도(현재의 개봉)의 번화함을 보여주는 '청명상하도'. 송은 고려의 동맹국이었을 때 세계적인 문명을 꽃피우지만, 고려가 원의 손을 잡자 몇 년을 못 견디고 몰락했다

 

중국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으로 연결되는 통일왕조 흥망의 열쇠가 바로 한국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한국과 가까울 때 흥했지만 멀어지면서 쇠락했다.

 

진은 통일을 이루자마자 큰 배 60척과 5,000명이 넘는 선원으로 구성된 선단을 동방으로 보냈고, 이 선단은 제주도의 서귀포에 닿는다. 혹자는 이 항해의 목적이 불로초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다


진왕 정은 서쪽 변방의 오랑캐 나라를 부강시켜 6국을 멸하고, 제국을 건설했다. 그런 그가 비현실적인 꿈에 사로잡혀 국력을 기울인 대선단을 동방으로 보냈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선단을 파견한 진짜 목적은 동방과의 교역을 위해서였다. 서쪽의 내륙 변방에 위치한 진은 오래전부터 동쪽해안에서 융성한 해양문화를 누리는 오, , 제 등의 나라를 부러워했다. 이 때문에 그는 대업을 이루자마자 서둘러 대규모의 무역선단을 동방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선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이 바람에 진의 국고는 거덜이 났다. 그런데다 연이어 터진 농민반란으로 제국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 후 다시 제국을 세운 한()은 한반도 북서쪽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한반도와 왕성하게 교류했을 때 가장 번창했다. 그런데 흉노를 비롯한 북방 민족과의 갈등으로 한사군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한반도와의 교류가 끊기면서 쇠약을 거듭하다 결국 붕괴되었다.

 

 왕조는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가까스로 통일을 이루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불과 15년 만에 망했다. 수를 이어 받은 당은 전조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국제적 부강을 이룬다. 그러나 동북지역에 권력기반을 둔 군벌 안록산(이란계 소그드인 아버지와 돌궐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의 반란 이후 한반도와의 교류가 끊기면서 나라가 기울었다.

 

송은 고려의 동맹국이었을 때 세계적인 문명을 꽃피우지만, 고려가 원의 손을 잡자 몇 년을 못 견디고 몰락했다. 원 역시 고려와 손을 잡은 명에 의해 북방의 몽골지방으로 쫓겨난 뒤 힘을 잃었다.

 

명은 토목의 변(1449) 50만 대군이 격파되고 황제는 포로가 된 채 북경이 포위되어 멸망 직전에 이르지만 조선의 지원으로 몽골군을 북방으로 물린 후 왕조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이 청과 손을 잡게 되자 불과 10년 만에 사라진다. 그 뒤 청은 왕조의 운명을 오롯이 조선과 함께 했다.

 

현대에서도 달라진 게 없었다. 모택동이 장개석과 패권을 다툴 때 백두산 너머로부터 무기와 피난처를 제공받았고, 이 때문에 중국은 지금도 한반도의 중요성을 결코 잊지 않는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당나라의 주왕은 새로운 세상을 위해 정변을 꾀하지만 실패하고 신라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신라 마일성 장군의 토벌로 주왕굴 앞에서 피를 뿌리고 죽는다. 이로 인해 청송 주왕산에는 봄마다 검붉은 반점의 핏빛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전설이 생겼다.

 
이처럼 역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중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알고 보면 중국이란 나라는 땅덩이는 커지만 정권은 의외로 취약하다. 권력의 소용돌이가 하도 잦고 커서 분열 후 통일을 이루는 세력은 기존권력과는 거리가 먼 평민이나 이민족이다. 이민족이라고 해봤자 인구가 수백만에 불과한데, 그 이민족의 수가 지금도 무려 50개가 넘는다. 이 때문에 중국의 권력은 강한 힘보다는 시대의 흐름과 민심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역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중국당국이 대만과 홍콩, 티벳, 신장위구르, 내몽고의 움직임은 물론 파륜궁(法輪功) 같은 단체에게마저도 왜 그리 예민하게 구는지 까닭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중국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보다 한반도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며, 한국의 중국걱정보다 중국의 한국걱정이 훨씬 더 크다는 사정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은 우리의 영원한 이웃이다. 그런데 지금껏 우리는 이웃의 겉모습만 보고 큰 덩지에 주눅이 들어 스스로 몸을 움츠린 면이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날렵하고 부드러운 체구에 자신을 갖고 보다 더 당당해져야 한다. 그래야 이웃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걱정거리도 나눌 줄 아는 여유와 아량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나라든 앞으로 겉모습보다는 속을 보자

문성근 법무법인 길 구성원 변호사

 

2018.01.04 중국이 제재 반대한 선박 5, 모두 중국인 소유

안보리 제재 어기고 北거래 혐의 5척 중 2척은 선사가 중국 회사 3척은 홍콩 선사, 주인은 중국인

 

안보리 제재를 어기고 북한과 불법 '선상 거래'를 한 혐의를 받는 제3국 선박 5척의 법적인 대표가 모두 중국인인 것으로 3일 확인됐다. 중국 정부는 선박을 이용한 북·중 간의 불법 거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 선박들과 중국 간의 '연결 고리'가 드러난 셈이다.

 

지난달 미국은 유류·석탄 등을 북한과 거래한 혐의가 있는 선박 6척을 제재 대상으로 등록해 달라고 안보리 대북 제재위에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은 작년 11월 전남 여수 여천항에 입항했다가 우리 당국에 억류된 홍콩 선적의 유조선 '라이트하우스 윈모어호'를 포함한 5척을 제재하는 데 끝까지 반대해 무산시켰다.

 

본지가 입수한 이 회사들의 등기법인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이 5척 중 3척의 선사(船社)에는 중국에 주소를 둔 중국 국적자가 유일한 등기 이사로 등재돼 있다. 파나마 선적(船籍·배의 국적)의 '오리엔탈 션위호'의 선사는 홍콩에 주소를 둔 '하이성 시핑'이다. 이 회사의 유일한 등기 이사로 오른 사람은 중국 저장성 닝보(寧波)에 사는 중국인 린하이룽(林海龍)이었다.

 

북한산 석탄을 러시아로 전달해준 혐의를 받고 있는 토고 선적 '위위안호'의 선사는 홍콩 차이완에 주소를 둔 '리치 마운틴 트레이딩'이다. 이 회사 역시 중국 랴오닝성 다롄(大連)에 사는 중국인 지상위가 유일한 등기 이사로 등재돼 있다.

 

벨리즈 선적 '신성하이호'의 선사인 홍콩의 '리버티 쉬핑'도 등기 이사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에 사는 중국인 바이수친(白樹勤)뿐이다.

 

이 5척 외에 나머지 2척은 선사가 중국에 등록된 회사로 확인됐다. 파나마 선적 '카이샹호'의 선사는 중국 산둥성의 '산둥퉁다(山東通達) 국제선박관리유한회사'였다. 이 회사 대표는 산둥성 웨이팡시에 사는 중국인 궈셴융(郭憲勇)이다. 우리 정부는 동중국해 공해상에서 북한 선박에 유류를 전달한 혐의로 여수에 억류된 '라이트하우스 윈모어'호의 선사가 대만에 주소를 둔 '빌리언즈 벙커 그룹'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아태지역 항만국 통제위 자료상의 선사는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 있는 '팡샹(方向)해운관리유한회사'였다. 그 대표는 중국인 궁루이창(�銳强)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중국과 대만 모두 이 배의 제재 위반 혐의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박에 대한 관할·통제 책임은 원칙적으로 선적이 등록된 기국(旗國)에 있다. 그러나 해운업계에는 세금을 적게 내고 선원 고용이나 조업 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선주 국적이나 선사의 실제 소재지와 무관한 제3국에 선적을 두는 편의치적(Flag Of Convenience) 관행이 있다. 중국 선사들은 이를 이용해서 수시로 깃발을 바꿔 달며 안보리 제재 위반 행위에 나서고 있다〈본지 1월 3일자 A10면〉.

 

또 중국 정부는 "제3국 선적"이라면서 이런 행위에 눈감고 있다. 그러나 의혹을 받고 있는 선박들의 선사 대표가 중국인으로 확인되면서, 이 배들이 실제로는 중국인 소유이거나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 선박들이 안보리 대북 제재 대상으로 등록됐다면, 유엔 회원국 항구 입항이 전면 금지돼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중국의 반대로 제재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여수에 억류된 윈모어호를 제외한 배들은 여전히 운항을 계속하고 있다.

조선일보 김진명 기자

 

2018.03.25 - 03.28 두 독재자의 만남 

 

 

 

 

 

 

 

 

 

 

 

 

 

 

 

 

2018.03.29 인천국제공한 중국군 유해 인도식

 

 

 

 

 

 

□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신동아

백 범 흠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2016년 9월호  

■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1) 한(漢)·흉노 전쟁과 동아시아

이 연재는 주()·진()·한() 당·()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동이족)와 중국(한족)의 접촉면에서 이뤄진 역사를 다룬다. 첫 회는 한족의 탄생. 한족의 나라 한()과 만주-몽골-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흉노(匈奴) 사이에 길고도 거대한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고조선과 부여에도 도전과 변화의 세찬 물결이 밀려드는데….

/한나라 주작도와 말 형상. [ 뉴시스] [ 뉴시스]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은 1982년 이래 영토 및 국민 통합을 위해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모두 중국사로 간주하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채택했다. ‘중국’은 100여 년 전만 해도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을 부르짖던 한족 유일주의 국가였다. 그런 나라가 국가적 필요에 따라 역사관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버린 것이다. 한국, 몽골 등을 겨냥해 동북공정(東北工程), 티베트를 겨냥해 서남공정(西南工程), 중국 안의 위구르를 겨냥해 서북공정(西北工程)이라는 역사전쟁을 벌인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과 역사공정은 공격적 현실주의가 발현한 것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는 물론 몽골, 베트남의 역사 일부가 중국사에 포함됐다. 한때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으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된 티베트와 위구르의 역사도 같은 처지다. 

 

중국의 억지 논리대로라면 당나라 시기 위구르족의 뤄양(洛陽) 대학살이나 여진족 금(金), 몽골족 원(元)의 중원 침공전은 내전으로 성격이 바뀐다. 북송(北宋)의 악비(岳飛)나 남송(南宋)의 맹공(孟珙)은 각기 여진과 몽골의 침공에 저항한 한족의 민족 영웅이 아니라 통일을 방해한 장수로 설명돼야 한다. 몽골 고원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이주해 중동-북아프리카 대제국을 건설한 터키의 역사도 산산조각이 난다. 

 

한국이 중국의 억지 논리를 차용하면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 대부분을 영토로 삼은 거란족의 요사(遼史), 여진족의 금사(金史)는 물론, 몽골족의 원사(元史)까지 한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더구나 거란, 여진, 몽골은 한족 계열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알타이 계열의 민족 아니던가. 특히 금나라는 황족 완안씨(完顔氏)의 핵심 세력이 한반도 출신 김씨이며, 발해 대씨(大氏)가 황비족이었다. 그렇지만 금사, 요사, 원사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 요, 원은 우리 민족의 원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화문명의 팽창

한족(漢族)은 인종적 개념이 아니다. 동일한 언어와 문자, 즉 한어(漢語)와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문화적 개념이다. 보하이만(渤海灣) 유역의 랴오닝(遼寧)성, 허베이(河北)성, 산둥(山東)성 한족과 창장(長江) 이남 저장(浙江)성, 푸젠(福建)성, 광둥(廣東)성 한족은 혈연적으로는 거의 관계가 없다. 한족 숫자가 12억 명 넘게 늘어난 것은 4000년 중국 역사가 한족과 이민족 간 이질혼합을 통한 팽창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적족(원시 터키족)이 지금의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石家莊)을 중심으로 중산(中山)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가 전국시대이던 기원전 3세기 조(趙)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기원전 12, 13세기에 시작된 주(周)나라 시기 황허(黃河) 이북 상당 부분은 적(狄), 융(戎), 맥(貊), 원시 선비족(鮮卑族) 등 북방민족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즉, 적족이 조와 제(齊), 연(燕) 등 한족 국가 사이에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화하족(한족)이 북방민족이 살던 땅을 야금야금 침탈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중국, 즉 중화문명은 세 갈래 방법으로 팽창했다. 

 

첫째, 주(周) 이후 역대 왕조가 유력한 제후들을 변경에 분봉해 이민족을 정복하게 했다. 이민족 거주 지역에 성읍(城邑)이라는 거점을 마련하고 세력을 확장해간 것. 지배민족인 한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수적으로는 다수이나 경제·문화적으로 열등한 주변 민족이 한족에 동화했다. 산둥성의 제와 허베이성의 연이 황해 연안 래이(萊夷)와 원시 선비족 일부를 흡수하고, 산시성의 진(晉)이 적족을 흡수한 것이 이 같은 경우다. 스페인과 루마니아 등을 로마화(라틴화)한 로마인, 중동과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아랍화한 메카-메디나의 아랍족도 한족의 경우와 행태가 유사하다.  

 

둘째, 진(秦)이나 초(楚), 오(吳)와 같은 창장 유역의 토착세력이 스스로 한족화했다. 

 

셋째, 진(晉)이나 연과 같이 문화적으로 우월한 한족이 원시 선비족이나 원시 터키족 등 이민족과 섞여 살면서 이들을 동화했다.  

 

國과 家의 탄생

기원전 1052년 산시(陝西)성을 근거로 한 무왕(武王) 희발(姬發)과 군사(軍師) 강상(姜尙)이 지휘하는 주나라와 소방(召方), 강(羌), 촉(蜀), 용(庸), 팽(彭), 미(微) 등의 동맹군 40만 명이 황허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 황허 중류 나루터인 허난(河南)성  맹진(孟津)까지 진출했으나 상(商)나라 군에 패해 회군했다. 소방은 상나라의 침략을 받아 영토의 일부를 빼앗긴 적이 있으며, 오늘날 쓰촨(四川)성과 칭하이(靑海)성 등에 잔존한 강족은 상나라에 노예로 잡혀 제물이 되곤 하던 부족으로 주나라의 외가였다. 희발의 증조모는 태강(太姜)이라 하는데 강족 출신이다. 시안(西安) 근교 풍(豊)을 수도로 한 주나라는 상나라가 산둥과 화이허(淮河) 유역 등 동방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점을 노렸다. 그러나 주나라 군은 고도로 발전한 청동 무기로 무장한 상나라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주나라 군은 일단 후퇴했다가 2년 후인 기원전 1050년 오늘날의 후베이(湖北)성과 쓰촨성 지역에서 번성한 삼성퇴·금사(三星堆·金沙) 문화라는 고도의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한 촉, 용, 팽 등 부족들과의 동맹을 강화해 다시 상나라 정복에 나섰다. 주나라 동맹군 50만은 이번엔 황허 도하에 성공했으며, 허난성 서북부에 자리한 상나라의 수도 은(殷)의 교외 목야(牧野)까지 진격했다.  

 

주나라 동맹군은 목야에서 상나라군 70만과 대회전을 벌여 상나라 군을 대파하고 은을 점령했다. 노예가 대부분이던 상나라 군이 창을 거꾸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상나라 왕 주(紂)는 자결했으나, 그의 아들들인 녹보(祿父)와 개(開)는 살아남았으며, 상나라의 군사력이나 경제력도 큰 손실 없이 유지됐다.  

 

주나라는 유력한 동맹 부족들과 함께 상나라라는 대규모 영토를 갑작스럽게 획득했기 때문에 전후 처리를 일방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족이나 상(商)의 후예를 포함한 유력 부족들로 하여금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른바 봉건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최고통치자인 주나라 왕이 △왕가와의 친밀도 △군공(軍功) △봉지(封地)의 군사전략적 중요성 등을 고려해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 작위와 봉토를 나눠줬다. 그중 후작이 가장 많았던 까닭에 나중에 제후(諸侯)라는 말이 통용된다.

 

2) ()·흉노 전쟁과 동아시아

제후는 훗날 정(鄭), 진(晉), 연(燕), 노(魯), 제(齊), 위(衛), 송(宋) 등으로 알려지게 된 ‘국(國)’을 받았다. 진(晉)과 같은 제후도 조(趙), 위(魏), 한(韓) 등의 공신을 책봉했는데, 그들은 경(卿) 또는 대부(大夫)로 불렸으며 ‘가(家)’를 받았다. ‘국가(國家)’라는 말은 이렇게 생겨났다. 

 

주(周) 부족은 원래 산시성 서부 빈(豳) 지방에 거주하다가 원시 티베트계 혹은 원시 터키계로 추정되는 융족(戎族)의 압박을 받아 동남쪽에 위치한 기산(岐山) 기슭의 주원(周原)으로 이동해 성곽을 건축하고 국가 형태를 갖춰나갔다. 돼지를 의미하는 ‘시(豕)’가 2개나 들어간 글자로 미뤄볼 때 주나라 사람들은 목축을 하고 산돼지 같은 짐승을 사냥하면서 살아가는 반목반렵(半牧半獵) 부족으로 추측된다. 주나라는 희발의 아버지 희창(姬昌), 즉 문왕(文王) 시대에 이르러 황허 유역의 패자(覇者) 상나라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해 황허의 상류 지류인 웨이수(渭水) 유역의 최강자가 됐다. 

 

희창은 풍을 점령하고 그곳으로 도읍(豊京)을 옮겼다. 풍은 주원보다 더 동쪽에 위치했는데, 이를 통해 주나라는 선진 상나라 문화를 더욱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기원전 1384년 상나라 중흥의 영주(英主) 제19대 왕 반경(盤庚)은 수도를 산둥성 취푸(曲阜)의 엄(奄)에서 황허 북안(北岸)에 자리한 은으로 옮겼다. 상나라는 주나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13대 270년간 은(殷)을 수도로 삼았다.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는 것은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에 있었기 때문이다.

  

급속·과도한 팽창의 말로

상나라가 멸망한 주요 원인은 황허 상류 지역, 즉 서방에 대한 관심 부족이었다. 주와 소방을 포함한 이 지역 부족들은 빛깔이 아름다운 조개 등 재보(財寶)로 사용되는 산물을 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財)’와 ‘보(寶)’처럼 조개 ‘패(貝)’가 들어간 글자에서 알 수 있듯 색깔과 무늬가 아름다운 조개는 당시의 보물이었다. 상나라군은 무늬가 아름다운 조개와 노예를 획득하고자 동방으로 자주 출정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는 동방 정복에 전념하다가 주나라 동맹군의 급습에 나라를 잃고 말았다. 상나라군이 동방으로 출정한 사이 주나라군에게 배후를 찔린 데다 노예제를 채택한 터라 국민 통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동방으로의 지나치게 급속한 팽창이 멸망의 주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급속하고도 과도한 팽창(over-expansion)이 국가(또는 조직)의 조기 해체를 야기한 것은 진(秦)나라, 수(隋)나라, 나폴레옹 제국, 히틀러 제국, 소련을 비롯한 국가뿐만 아니라, 대우와 STX 등 우리 기업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산시성 구석의 주(周)라는 조그만 핵(核)이 허난성의 상나라를 병합해 더 큰 핵이 되고, 춘추·전국-진·한(秦·漢)-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구심력까지 갖춘 더욱 크고 강력한 핵이 됐다. 크고 단단해진 핵은 외부 이민족의 공격에 의해 깨지기는커녕 오히려 공격한 이민족을 흡수하면서 더욱 더 커져갔다.  

 

화하족 vs 동이족

/춘추전국시대 제작된 장신구. [뉴시스]

 

4세기 이후 흉노·갈(匈奴·羯), 선비, 저(氐), 돌궐(터키),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 이민족이 계속 중국을 침공했지만, 이들은 한족이라는 눈덩이를 더 키워주는 구실을 했다. 한족이라는 눈덩이는 왕조와 시대를 거치면서 더 커지고 커져 마침내 지금처럼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주나라의 상나라 정복은 화하(華夏) 문명(한문명)과 화하족(한족)의 강화, 확대를 가져왔다. 이는 동이족(東夷族)의 위축은 물론, 한문명의 범위와 한족 규모의 확대로 이어져 아주 멀리는 다링허(大凌河)와 랴오허(遼河) 유역을 근거로 하던 고조선에, 가까이는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가공할 정치, 문화, 인종적 압박으로 작용하는 씨앗이 됐다. 

 

상나라, 주나라 시대와 그 이전 중국의 기후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 당시 황허 유역은 아열대 내지 열대 기후로 비가 많이 왔다. 코끼리, 코뿔소, 물소가 살았다. 황허 유역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채집과 사냥을 했다. 기원전 5000년경 탄생한 신석기 양샤오(仰韶)문화가 허난성, 산시(陝西)성, 산시(山西)성 등지로 퍼져나갔다. 

 

양샤오문화 시기 황허 유역 부족 간 격렬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땅과 하천, 목초지, 숲을 빼앗고자 죽고 죽이는 전투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전쟁과 함께 종족, 부족 간 연합도 활발히 이뤄졌다. 대체로 황허 상류를 따라 거주하던 사람들이 교류와 전쟁을 통해 화하족을 형성해갔다.  

 

황허 중하류는 동이족이 지배했다. ‘맹자(孟子)’ 이루편에 따르면 순(舜)은 동이 사람이다. 우(禹)는 ‘순’으로부터 선양(禪讓)받아 하(夏)왕조를 열었다. 실체나 왕조 교체 과정 등 하나라와 관련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우의 이름에는 ‘벌레 충(虫)’이 포함돼 있으므로 우는 뱀(蛇)이나 용(龍) 토템 집단의 수장으로 보인다.

 

“상() 주축은 동이족”

/동이족이 사용한 청동도끼. [뉴스1]

 

일부 중국학자들은 뤄양 부근에서 발견된 청동기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지를 기원전 2070년경 건국됐다는 하나라의 수도로 본다. 그들은 하나라가 우(禹)부터 걸(傑)까지 17제(帝) 472년간 지속됐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에서 초기 형태의 국가가 존재한 것을 보여주는 유적은 발견됐지만, 대규모 성벽이나 문자가 확인되지 않아 그것이 하나라의 유적인지는 불확실하다. 또한 인접한 지역에서 하나라와 다른 성격의 유적도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하나라가 이곳에 존재했더라도 지배 범위와 규모는 매우 협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3) ()·흉노 전쟁과 동아시아

양샤오문화보다 1000여 년이나 빠른 기원전 6000년경 내몽골 츠펑(赤峰) 일대에서 적석총(積石塚), 빗살무늬토기, 여신상 등 신석기 훙산(紅山)문화를 중심으로 한 랴오허 문명이 탄생, 확대됐다. 한반도에서 자주 발견되는 적석총이나 빗살무늬토기 같은 것은 황허 문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랴오허 문명 고유의 유물이다. 기원전 2333년 건국됐다는 고조선도 랴오허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라가 뤄양 지역을 통치할 때 상(商) 부족은 뤄양 동북지방에서 세력을 강화했다. 상 부족은 이주를 거듭하다가 허난성 상추(商邱), 즉 박(亳)에 정착한 이후 하나라에 대한 공납을 중지할 정도로 강대해졌다. 기원전 1751년 탕(湯)이 이윤(伊尹)의 도움을 받아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傑)을 멸하고 상나라를 세웠다.

 

상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은 화하족(한족)과는 다른 계통인 동이족이 점차 세력을 확장해 황허 중류까지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나라는 탕왕에서 주(紂)왕까지 32대나 이어졌다. 상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체제 변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라와 상나라는 유사한 계통의 문화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탕(湯)’은 음가(音價)로 볼 때 ‘양(陽)’과 동일하며, 태양신으로 해석된다. 탕은 수신(水神)으로 보이는 이윤의 지원을 받아 상나라를 건국했다. 

 

상나라 건국설화는 태양신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수신(水神)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야합(野合)해 알(卵)의 형태로 추모(鄒牟)를 낳고,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고구려 건국 설화와 유사한 점이 있다. 탕의 선조인 설(契)의 어머니 간적(簡狄)은 제비알을 삼키고 쇠를 나았다. 따라서 상나라는 새(鳥)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새 토템은 태양 숭배사상과 통한다는 점에서 상나라 건국설화는 추모설화는 물론 혁거세 및 알지설화와 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상나라는 태양빛과 통하는 흰색을 숭상했다. △태양 △흰색 △난생(卵生)설화가 모두 나타나는 점들로 비춰볼 때, 상나라는 동이족이 주체가 돼 건국한 나라가 확실해 보인다. 상나라가 한자의 기원이 된 갑골문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동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근거가 있다.

 

 고조선에 닥쳐온 시련

/단군과 빗살무늬토기.

 

시안 인근 호경(鎬京)을 수도로 하던 주나라(西周) 마지막 왕 유왕(幽王)은 총애하는 후궁 포사(褒姒)가 낳은 왕자 백복(伯服)으로 하여금 세자 의구(宜臼)를 대신하게 하려다 의구의 외가 신(申)나라의 저항에 직면했다. 기원전 771년 유왕이 의구를 세자 자리에서 폐하자 신후(申候)는 견융(犬戎), 서이(西夷), 증(繒)나라 등과 함께 거병해 유왕을 축출했다. 원시 티베트계(또는 원시 터키계)로 추정되는 견융의 군대가 수도 호경을 약탈했다. 견융군은 수도를 탈출한 유왕을 추격한 끝에 호경 근처의 여산(驪山)에서 붙잡아 그와 백복을 죽였다. 주나라는 이때 사실상 멸망했다.  

 

신후를 비롯한 여러 제후에 의해 옹립된 의구, 곧 평왕이 기원전 770년 낙읍(뤄양)으로 도피해 나라를 이어갔다. 낙읍(洛邑) 천도(遷都) 이후의 주나라(東周)는 제후들을 통제할 힘을 상실한 명목상의 종주국에 불과했다. 정(鄭), 위(衛), 노(魯), 채(蔡), 괵(虢) 등 중원의 제후국보다는 오히려 외곽인 동부 산둥의 제, 산시(山西)의 진(晉) 산시(陝西)의 진(秦) 등이 강화해갔다. 후베이의 초(楚), 충칭-쓰촨의 파(巴), 촉(蜀), 창장 하류의 오, 월(越) 등은 화하 문명 바깥에서 별도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을 전후한 춘추시대 중기 이후 진(晉)과 제 등 제후국들은 군대를 동원해 인근 약소국을 멸망시킨 뒤 그곳에 군·현(郡縣)을 설치해 영역을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진(晉), 진(秦), 제, 초 등의 대국들은 군현제를 도입하면서 영토국가로 발전했다. 성읍(城邑) 몇 개 정도가 아니라 수만~수십만㎢에 달하는 영토를 확보한 이들 대국은 지방을 군과 현으로 나눠 장악력을 높여나갔다. 새로 설치된 군·현은 유력한 가신들에게 분배됐다. 가신들은 새로 설치된 군·현을 거점으로 삼아 무력 기반을 갖췄기에 약소국의 멸망이 진행될수록 그들의 세력도 커져갔다. 특히, 진(晉)과 제, 노 등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가신들은 잦은 전쟁을 계기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권력과 경제력을 이용해 봉토를 확대하고, 봉토 내에서 토지제도, 조세제도, 군사제도를 개혁해 세력을 강화했다. 기원전 376년 산시성의 초강대국 진(晉)이 유력한 가신들인 조(趙), 위(魏), 한(韓) 3가(家)에 의해 분할돼 멸망하고 말았다.  

 

진(晉)이 멸망함으로써 중원 통일은 변경에 위치한 비화하적(非華夏的) 강대국 진(秦)과 초(楚)의 쟁패로 판가름 나게 됐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문명과 한족의 외연은 더욱 확장된다. 한문명과 한족은 황허 유역을 넘어 롼허(灤河), 다링허, 랴오허 유역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허베이성 동북부 베이징 부근을 도읍으로 하는 연나라의 등장은 고조선에 큰 시련을 안겨줬다. 중국식 도씨검(桃氏劍)과는 다른 비파형 동검과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 등을 사용하던 고조선은 일단 롼허를 경계로 연나라에 맞섰다. 

 

部와 落의 등장 

춘추시대인 기원전 7세기, 동으로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산시성 중북부-오르도스-간쑤성을 경계로 하는 흉노(Xiongnu)가 유목 민족 스키타이로부터 철기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해졌다. 흉노는 하나의 종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을 중심으로 건국된 알타이계 중심의 고대 유목국가를 말한다. 흉(匈)은 슝(Xiong)에서 따온 음차(音借)로 슝은 원시 터키어로 사람이란 뜻이며, 노(Nu)는 나(那), 내(內)와 같이 물가에 있는 땅을 의미한다. 흉노란 ‘물가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한족이 ‘슝누’를 음차하면서 나쁜 뜻을 가진 흉(匈)과 노(奴)를 갖다 붙인 것이다.  

 

한족은 이민족과 관련된 것에 의도적으로 나쁜 뜻의 문자를 음차했다. 개라는 뜻의 견융(犬戎), 벌레라는 뜻의 남만(南蠻)이 대표적이다. 흉노의 지도자인 선우(單于)의 정식 명칭은 탱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로 음차되는데, ‘하느님(tengri)의 아들(고도)인 지도자(선우)’ 즉, 천자(天子)라는 뜻이다. 텡그리(檀) 임금(君)이라는 뜻의 단군(檀君)도 선우와 같은 뜻이다. 

 

흉노는 물과 풀을 찾아 자주 옮겨 다녀야만 하는 유목생활의 특성상 가까운 혈연끼리 적당한 규모의 집단을 형성했다. 한족은 이것을 ‘부(部)’라고 불렀다. 1부는 5000~1만5000명 규모로 이뤄졌다. 부의 아래에는 조금 더 작은 규모인 ‘락(落)’이 있었다. 부와 락을 합해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부락’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황허를 중심으로 한 한족의 나라 한나라와 만주-몽골-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흉노 간 길고도 거대한 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면서 고조선과 부여 등 우리 민족 국가에도 도전과 변화의 세찬 물결이 밀려들었다. 황허의 거센 물결을 맞은 고조선은 한족의 침공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2016년 10월호  

■ 北 흉노, 東 조선 漢에 함께 맞서다

기원전 109년 가을, 한나라 군대가 왕검성으로 진군해 조선을 윽박질렀으나 대패했다. 흉노군이 한군의 배후를 노릴 상황이 조성됐다.

결국 한무제는 조선과의 강화를 추진하는데….

/북방 유목민은 기마술과 금속기를 바탕으로 초원지대를 지배한 아시아 역사의 한 축이다. [사진제공·황금가지]

 

1953년 중국은 한(漢)나라 이후 중국인이 줄곧 활동해온 지역이라는 ‘역사적 권리’ 등을 근거로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에 둘러싸인 남중국해에 U자형 9단선(南海九段線, 소가 혀를 늘어뜨린 모양 같다고 해서 ‘牛舌線’이라고도 한다)을 긋고, 선의 안쪽은 모두 중국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최근 들어 남중국해 파라셀(西沙), 스프래틀리(南沙) 군도의 크고 작은 암초 주변을 매립한 후 활주로와 대공(對空) 미사일 기지, 대잠(對潛) 헬기 기지 등 군사시설과 항만 등대 등 각종 시설을 조성했다. 베트남, 필리핀 등의 반대에도 2012년 7월 24일 파라셀 군도의 융싱다오(永興島)를 치소(治所)로 해 파라셀, 스프래틀리, 메이클즈필드(中沙) 3개 군도를 관할하는 싼사(三沙)시 출범식을 개최했다. 싼사시 출범 5일 전인 7월 19일 남중국해를 관할하는 싼사군사경비구역도 설치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대립해온 필리핀은 2013년 1월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중국을 제소했다. PCA는 지난 7월 12일 9단선 등 중국의 주장을 거의 대부분 배척한다고 판결했다. 중국의 해양굴기(海洋崛起) 정책이 중대한 장애에 부딪힌 것이다. 

 

문명의 십자로, 오르도스

중국은 1949년 정부 수립 이후 동서남북의 거의 모든 인접국과 영토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다. 한국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 획정 △고대사 문제 등을 두고 중국과 갈등한다. 고대사 문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          

 

춘추시대 최강국은 산시(山西)성을 중심으로 한 진(晋)나라였으나, 기원전 403년 진나라가 조, 위, 한 3국으로 분열하면서 천하통일은 서방의 강대국 진(秦)과 남방의 강대국 초(楚)의 대결로 넘어갔다.  

 

오랑캐(戎)라는 말을 듣던 진(秦)나라는 위(衛)를 비롯한 상(商)나라 고토(故土) 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해 법가식(法家式) 개혁을 추진했다. 25명의 재상 중 외국 출신이 17명, 평민 출신이 9명이나 됐다. 또한 진은 외교·군사 정책을 이용해 각개격파하는 전략인 연횡책(連衡策)으로 라이벌 초나라의 대진(對秦)정책을 무력화했다. 

 

반면 개혁 부진에다 진나라의 연횡책에 농락당해 내분에 빠진 초나라의 국력은 크게 기울었다. 왕전 부자가 이끄는 진의 대군은 기원전 223년과 기원전 221년 각각 연(燕)과 제를 잇달아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했다.  

 

통일제국 진의 적은 북방의 흉노였다. 진은 통일의 여세를 몰아 흉노와 흉노의 왼팔 격인 조선(朝鮮, 이 글에서는 1392년 창건된 조선과 구분하고자 사용되는 ‘고조선’이라는 표현 대신 본래 이름인 ‘조선’으로 표기한다), 우이(武夷)산맥 이남의 월족(越族)을 압박했다. 진시황(秦始皇)은 통일 6년 후인 기원전 215년 대장군 몽염(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줘 조선을 랴오허(遼河) 동쪽으로 몰아냈으며, 태자 부소(扶蘇)와 하투(河套), 즉 오르도스로부터 흉노 세력을 축출하고 장성을 수축게 했다.  

 

오르도스는 황하가 북으로 크게 호(弧)를 그리는 만리장성 이북의 황하 중상류 스텝 지대를 가리킨다. 인류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으로 분화하기 이전에 번성하던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교차하는 문명의 십자로였다. 오르도스의 오원은 삼국지의 맹장 여포의 고향이기도 하다.  

 

동북아 인류가 농경민족과 유목·삼림민족으로 분화한 이후 오르도스는 농경민족과 유목민족 간 생사를 건 전쟁터이자 문물이 교환되는 장터였다. 한족은 때로는 공세적 방어의 수단으로, 때로는 증가한 인구로 인한 토지 부족을 타개하고자 오르도스로 진출했다.

/한나라 시기 화상석(장식으로 그림을 새긴 돌)에 새겨진 흉노와 한나라의 전투 장면.

 

터키계 중심 유목국가

진시황이 30만 대군을 주둔시킨 지 약 100년 후인 기원전 127년 한무제(漢武帝)는 오르도스의 흉노를 축출하고, 산둥과 허난(河南) 등지로부터 10만여 명의 백성을 이주시켜 흉노에 대항케 했다.  

 

이주한 한족 농경민은 농사를 짓고자 오르도스의 땅을 파헤쳤다. 건조 지역의 농업은 표토(表土) 상실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기름진 표토를 잃어버린 초원은 본래의 모습으로 쉽사리 돌아가지 않는다. 풀도 잘 자라지 않는다.  

 

흉노와 선비, 몽골 등 유목민은 땅을 갈아 표토를 망치는 한족 농경민을 증오했다. 농경민이 유목민을 소와 말이나 키우는 냄새나는 야만인이라고 경멸했듯, 유목민도 땅에 엎드려 농사를 짓는 농경민을 땅강아지라고 멸시했다.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호복기사(胡服騎射)’의 나라 조(趙)에 멸망당한 적족(狄族)의 나라 중산(中山)의 예에서 보듯, ‘적(狄)’으로 불리던 터키계 유목민은 기원전 7세기 이후 스키타이와 주(周)로부터 자극을 받아 국가 체제를 갖춰나갔다. 흉노는 하나의 종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만주, 서로는 아랄해(Aral Sea)까지를 영토로 한 터키계 중심의 고대 유목국가를 뜻한다. 흉노는 문자 기록은 남기지 못했으나, 바지와 등자(鐙子), 반월도, 버클 등 많은 이기(利器)를 우리에게 전해줬다. 

 

농경민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유목민의 나라도 통합과 분열을 반복했다.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유목사회는 지도자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데, 영명한 지도자를 추종하면 의식주가 쉽게 해결됐기 때문이다. 유목사회는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급속히 통일됐다가 그가 죽으면 쉽게 분열되곤 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 사망 후 진나라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어리석은 아들 호해가 시황을 계승했는데, 정권을 장악한 이사와 조고는 오르도스에 주둔하던 부소와 몽염을 속여 자살로 몰아갔고 권력투쟁을 계속해 진을 위기에 빠뜨렸다.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시달리던 초, 제, 한 등 제후국 백성들의 불만은 진시황이 죽은 이듬해 진승과 오광, 항적(항우)과 유계(유방) 등의 반란으로 터져 나왔다. 진나라는 그로부터 3년 후인 기원전 206년 항적과 유계에 의해 멸망했다. 

 

조선, 遼河를 넘다

이로써 북방의 흉노와 동방의 조선은 부흥의 기회를 잡았다. 조선은 랴오허를 넘어가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 장군 진개에게 빼앗긴 영토 가운데 다링허(大陵河)와 롼허(灤河) 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위양(漁陽)과 유베이펑(右北平) 등 오늘날의 베이징 지역은 수복하지 못했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적과 유계는 황제 자리를 놓고 다퉜다. 유계의 한군(漢軍)은 형양(滎陽) 전투를 포함해 항적의 초군(楚軍)과 벌인 여러 전투에서 맥족(貊族) 등 북방 기마군단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유계는 기원전 202년 최후의 해하(垓下) 전투에서 한신(韓信)의 지원에 힘입어 항적을 자살로 몰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몽염에게 쫓겨 오르도스를 상실한 흉노의 선우(單于, 군주)는 두만(頭曼)이었다. 아버지 두만을 죽이고 선우 자리를 탈취한 묵돌(冒頓)은 흉노의 최전성 시대를 열었다. 동쪽의 동호(東胡)와 서쪽의 월지(月氏)를 정벌하고, 남쪽의 누번(樓煩)과 백양(白羊)을 합병했다. 묵돌은 영토를 세 부분으로 나눈 후 중부를 직접 다스렸으며, 수도도 중부에 뒀다. 남정(南廷)은 오르도스-음산(陰山)이었으며 북정(北庭)은 외몽골 지역으로 막북왕정이라고 했다. 동부는 산시 북부 상군(上郡) 동쪽으로 조선과 접경했으며 2인자인 좌현왕(左賢王)이 통치했다. 

 

이렇듯 흉노가 잘나갈 때 한나라 황제가 된 유계도 흉노의 침공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계의 눈에 들어온 흉노 방어의 적임자는 한왕 신(信)이었다. 초한전쟁 때 유계를 따라다니며 군공(軍功)을 많이 세운 인물이다. 한나라는 신의 주둔지를 산시성 진양(晋陽)으로 옮겨 흉노를 막게 했다. 그전부터 신의 관할 지역은 흉노가 자주 공격해오던 위험한 곳이었는데, 신은 방어가 용이한 서북쪽의 마읍(馬邑)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원했으며 유계는 이를 허락했다.  

 

기원전 200년 가을, 묵돌은 대군을 이끌고 마읍으로 향했다. 흉노의 선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한 것이라 이전의 산발적 공격과는 수준이 달랐다. 흉노군의 기세에 눌린 한왕 신은 묵돌에게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휴전을 이끌어내려 했다. 

 

신이 이렇듯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을 때 한나라 군대가 신을 구출하기 위해 출전했다. 그런데 강화 목적이었다고는 하나 신이 너무 자주 흉노에 사절을 보낸 것이 문제가 됐다. 유계는 신이 흉노에 항복하려 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는데, 신은 모반 혐의로 소환돼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흉노에 투항했다. 흉노를 막기 위해 유계가 특별히 점찍은 인물이 배신했으니, 그 충격은 엄청났다.  

 

화가 치민 한고조 유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치러 나섰다. 흉노의 묵돌은 좌현왕과 우현왕을 보내 1만여 기병을 진양까지 남하케 했는데, 유계가 이 군대를 격파했다. 흉노군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한군은 기세를 타고 그들을 쫓아 이석에서 또다시 무찔렀다. 한군은 기병을 앞세워 누번에서 흉노군을 재차 격파했다.  

 

그러나 흉노의 잇따른 패배는 묵돌의 유인책이었다. 날씨가 추운 데다 눈비까지 내려 많은 한나라 병사가 동상에 걸렸다. 32만 한군은 주로 보병으로 이뤄졌는데, 병력은 많았지만 아직 한곳에 집결하지 못했고 추위로 지쳐 있었다.  

 

유계와 묵돌의 전투

묵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40만 기병을 동원해 오늘날의 다퉁, 즉 평성(平城) 부근 백등산(白登山)에서 한군을 포위했다. 포위된 시간이 길어지자 식량이 바닥나 갔다. 이대로 가면 한군은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다. 유계는 묵돌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 한군은 천신만고 끝에 평성으로 철군할 수 있었다.  

 

이후 2000년 이상 지속된 한족 농경민과 북방 유목민의 대결 구도는 바로 이 유계와 묵돌의 전투에서 출발한다. 흉노는 물자를 얻고자 한나라 변경을 유린했으며 유계가 죽고 난 다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유계의 자손들인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도 한나라는 흉노에 저자세였다. 

 

경제 시대를 지나면서 흉노와 한나라 간 관계가 역전한다. 농경민의 엄청난 생산력이 유목민의 조직력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 문제와 경제 집권기를 거치면서 한나라의 국력은 일취월장한 반면 흉노는 기원전 174년 묵돌 선우가 사망한 이후 노상, 군신, 이치사 선우를 거치면서 약화했다.  

 

한나라는 흉노 정벌과 관련해 ‘쉬운 문제부터 먼저 해결한다’는 선이후난(先易後難) 전략을 택했다. 고가품인 비단의 서역 수출을 증대하려면 흉노가 장악한 하서회랑 탈취 등 실크로드 확보도 필요했다.  

 

경제를 이은 무제는 기원전 139년 신장(新疆) 이서 서역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월지(月氏)와 대흉노(對匈奴) 동맹을 체결하고자 장건(張騫)을 파견했다. 한군은 흉노군 수준의 철제 무기를 개발·보유했으며 유목민 고유의 군사 기술과 조직도 파악했다. 전쟁을 뒷받침할 재정은 생필품인 소금과 철의 전매를 통해 염출했다. 

 

무제는 기원전 129~119년 6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이광리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게 했다. 한나라 군대가 장성을 넘어 흉노 영역으로 돌입한 것은 무제의 처남 위청(衛靑)의 부대가 처음이다.

 

장성을 넘어 흉노를 치다

/중국 산시성 시안시 진시황릉 병마용갱. [동아일보]

 

무제는 기원전 129년 위청, 공손하, 공손오, 이광 등 네 장군에게 기병 1만 씩을 내주고 흉노를 공격게 했는데, 뛰어난 기동성을 갖춘 흉노군은 전쟁 초기 한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기원전 127년 흉노가 상구(上谷)와 위양에 침입해 랴오시(遼西) 태수를 살해하고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가자 한군은 반격에 나섰다. 위청 부대는 오르도스에 주둔하던 흉노군을 공격해 병사 수천 명을 사로잡고, 100여만 마리의 소와 양을 노획하는 등 흉노에 큰 손실을 입혔다. 위청은 오르도스도 점령했다. 기원전 124년에도 위청이 지휘한 3만 기병이 흉노군을 공격해 우현왕을 죽이고, 수십만 마리의 소와 양을 빼앗았다. 

 

기원전 121년에는 곽거병이 이끈 1만 기병이 하서회랑으로 쳐들어가 흉노 병사 3만 명을 죽이고 2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해 가을 하서회랑을 통치하던 흉노 혼야왕(渾邪王)은 패전에 대한 문책이 두려워 4만여 부중(部衆)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나라는 하서회랑에서 흉노를 축출한 후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기원전 119년 한나라는 위청, 곽거병에게 각각 5만 기병을 내줘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위청은 이치사 선우를 상대로 격전을 벌여 흉노군을 격파했으며, 곽거병은 고비사막 이북 오르혼강까지 쳐들어가 흉노 병사 7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치사가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 개선을 제의하자 한나라는 한-흉노 관계를 군신관계로 전환하고, 선우를 외신(外臣)으로 격하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격분한 이치사는 화친을 포기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한나라도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마(戰馬) 상실이 격심했다. 전마 14만 필 중 3만 필만 수습했다. 무엇보다도 식량 공급 및 수송이 어려웠다. 원정 일수를 300일로 가정하면 군사 1인당 360㎏의 식량과 400㎏에 달하는 수송용 소의 여물을 운반해야 했기에 흉노 정벌전이 100일을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때로는 완전 격파를 눈앞에 두고도 포기해야 했다. 이런 사정 탓에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이 출정한 후 20년간 한과 흉노 사이에 대규모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곽거병은 하서전역(河西戰役)에서 하서회랑을 다스리던 흉노 휴도왕의 왕비와 14세의 왕자를 포로로 잡았다. 장안으로 잡혀와 마구간 노예로 전락한 왕자는 우연히 무제의 눈에 들어 노예에서 풀려나 마감(馬監)으로 임명됐으며, ‘김일제(金日磾)’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흉노 왕자가 신라 왕실 선조?

김일제는 함께 포로가 된 일족 망하라의 무제 암살 기도를 저지한 공로 등으로 훗날 거기장군(車騎將軍)까지 승진하고 투후()에 봉해졌다. 김일제는 그를 따르는 흉노인을 모아 분봉지인 산둥성의 금성(金城)을 도읍으로 투국()을 세웠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서한(西漢) 시대에는 번영했으나, 왕망의 서한 찬탈에 협력한 탓에 광무제 유수(劉秀)에 의해 투국이 폐지되는 등 동한(東漢) 시대에는 쇠락했다 

 

신라 문무왕릉비에는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이(侯祭天之胤傳七葉以), 십오대조성한왕(十五代祖星漢王), 강질원궁탄영산악조림(降質圓穹誕靈山岳肇臨)’이라는 구절이 있다. “투후(김일제) 이래 7대를 이어갔으며, (문무왕의) 15대조 성한왕(김알지로 추정)은 신령한 산에 바탕을 내리고,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가 됐다”는 뜻이다. , 신라의 김씨 왕실은 흉노의 왕자이자 서한 거기장군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4세기 무렵 신라에 갑작스레 등장한 적석목곽분과 금관문화는 스키타이-흉노 계열의 문화로 해석된다. 공교롭게도 김일제가 분봉받은 투국의 도읍 금성(金城)과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이 발음은 물론 한자도 똑같다. 

 

진·한이 교체되는 혼란기에 조선에서는 왕조가 바뀌었다. 농·목업을 주업으로 한 조선은 비단을 생산하고 명도전도 널리 사용했다. 조선은 발해만과 서한만 등을 무대로 해상활동도 활발히 했다. 우거왕 이전부터 조선은 흉노와의 교류를 통해 확보한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국가 간 중계무역 이익을 독점했다

 

한나라의 정치·군사적 압박이 심해지자 우거왕은 흉노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한나라는 기원전 110년부터 조선 원정을 준비해 기원전 109년 가을 육군, 해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공했다. 누선장군 양복은 산둥 해군 5만 명을 거느리고 산둥반도에서 보하이만을 건너 조선의 도성 왕검성으로 진격했으며, 좌장군 순체는 지금의 베이징 지역인 위양-유베이핑 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육지로 진군했다. 양복은 주력인 육군의 진격이 지체되자 7000명을 선발해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다 조선군에게 대패했다. 순체의 육군도 한나라와 조선 간 국경을 이루던 패수(浿水) 유역에서 조선 육군에 격퇴됐다. 흉노군이 한군의 배후를 노릴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무제는 위산을 파견해 조선과 강화를 추진했으나 결렬됐다.

 

기원전 107, 조선 멸망

◀신라 금관은 스키타이-흉노 계통 문화로 해석된다.[동아일보]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박물관에 전시된 청동도끼 거푸집의 고조선인 얼굴. [사진제공·이종수 단국대 교수]

 

이후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해 조선을 재침공했다. 2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조선 지배층 사이에 분열이 생겨 우거왕이 피살되고 화친 세력은 한나라로 망명했다. 성기(成己)가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조선은 결국 기원전 107년 멸망하고 말았다

 

기원전 107년 함락당한 왕검성, 기원전 108년부터 설치된 한군현, 패수의 위치 등을 두고 논란이 있다. 조선-한나라 전쟁 당시 살아 있던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포함해 중국과 한국의 모든 사료를 뒤져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유적과 유물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서의 기술을 검토해보면 왕검성이 대동강 북안(北岸)에 위치했다거나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주장은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한군(漢軍)의 진군 과정과 전쟁 상황 기술에 비춰볼 때 맞지 않다. 흉노군을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치중부대(輜重部隊)를 포함한 한나라 육군 5만 명이 베이징 부근에서부터 진군해 조선군의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1300㎞나 떨어진 청천강 유역까지 진군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에서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일부의 주장 역시 사리에 맞지 않는 듯하다. 사서에 나타난 전쟁 상황 묘사와 지리 분석 결과 등에 비춰볼 때 패수는 다링허나 롼허로 추측되며, 왕검성은 랴오허 유역 어딘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한군현 중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강 유역설 △랴오허 유역설 △롼허 유역설 등이 있는데, 낙랑군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갔다는 설명이 맞는 듯하다 

 

‘사기’ 조선전(朝鮮傳)에 나오는 조선-한나라 전쟁 이후의 관계자 처리 결과 등을 살펴보면 한나라의 조선 원정은 사실상 실패한 전쟁이었다. 양복은 서인(庶人)이 되고,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으며, 위산과 공손수 또한 참형을 당한 것을 봐도 그렇다. 조선에서는 한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던 세력이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토착 세력의 기본 성격은 유지됐다. 한군현은 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 이 지역 토착사회에 대한 통제가 목적이었으나 토착사회의 반발에 의해 곧 축출됐으며, 존재하던 기간에도 토착사회와 병존하면서 한족 유이민(流移民)의 통치조직 겸 중계무역 기지 기능을 했다

 

전쟁 중단 선언

한무제는 기원전 104년 이광리로 하여금 신장의 오아시스 국가들과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를 정복하게 해 실크로드에 대한 한나라의 패권을 확립했다. 흉노 또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소강 기간에 힘입어 국력을 회복했다. 흉노는 한나라 변방 침공을 재개해 물자를 보충하고, 실크로드의 지분도 차지하고자 했다 

 

무제는 남월, 조선, 서역을 정벌한 여세를 몰아 다시 흉노를 치려 했다. 기원전 99년 무제는 이광리가 이끄는 20여만의 병력을 흉노로 진격시켰다. 이광리는 10여 년간 수십 차례에 걸쳐 흉노를 공격했지만 대부분 패전했다. 기원전 90년에 벌어진 흉노군과의 전투에서 부대가 거의 전멸했으며 이광리는 흉노에 항복하고 말았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한나라의 국가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면서 무제는 기원전 89년 ‘윤대(輪臺)의 조칙’을 발표해 흉노와의 전쟁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2016 11월호  

■ 하늘에서 내려온 자 ‘새벽별 (Chorbon, 졸본)’에 터 잡다

부여는 동아시아 역사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고, 고구려가 백제를 잉태했으며, 백제는 왜()와 연결된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간 이어지는데…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서 발견된 고구려 무사 벽화 모사도. [·국립중앙박물관]

 

한(漢)과 조선의 갈등이 첨예화하던 기원전 2~3세기 ‘단군(檀君)’, 즉 ‘텡그리 임금’의 나라 탁리국(橐離國)에서 떨어져 나와 남하한 일단의 무리가 만주 땅 쑹화(松花)강 유역 창춘(長春) 지역의 예족(濊族)을 흡수해 부여를 건국했다.  

 

‘텡그리’ 신봉한 부여

‘탁리’는 ‘텡리 또는 텡그리(Tengri, 하느님)’를 음차한 것으로 부여의 원류는 ‘하늘의 신(하느님)’ 텡그리를 신봉하는 부족이다. 부여는 물론 부여를 기원으로 한 고구려도 ‘하늘의 신’을 섬겼다는 것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鄒牟)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解慕漱)로 알려진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해(解)’는 음차로 우리말 ‘해(태양, 太陽)’를 뜻한다.

 

부여의 주류를 형성한 부족이 외부에서 이주해왔다는 사실은 부여 건국설화 ‘동명성왕(東明聖王)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동명성왕 설화는 남부 시베리아-북몽골·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의 남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부여는 기원전 107년 한나라에 멸망당한 조선보다 동아시아 역사에 더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고, 고구려에서 백제가 잉태됐으며, 백제는 왜(倭)와 연결된다. 

 

선양(瀋陽)과 창춘 사이에 금강 유역의 ‘부여(扶餘)’와 똑같은 이름의 도시 ‘푸위(扶餘)’가 있다. 왜 금강 유역 부여로부터 북쪽으로 1600㎞ 넘게 떨어진 쑹화(松花)강 유역에 부여라는 도시가 하나 더 있는 걸까.  

 

강원 강릉(江陵)과 경남 함양(咸陽)은 통일신라 이후 중국 후베이(湖北)성 장링(江陵)과 산시(陝西)성 셴양(咸陽)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이는 데 비해 금강 유역 부여는 훗날 부여족의 원류가 되는 탁리국 출신의 한 무리가 남부 시베리아 일대를 출발해 쑹화강과 압록강, 한강을 거쳐 금강 유역까지 수천㎞에 걸친 민족 이동의 결과로 생겨났음이 분명하다. 부여족이 만주 쑹화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 각기 ‘부여’라는 이름의 도시를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부여는 어떤 나라였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는 ‘초기에는 오랫동안 어느 나라에도 패해본 적이 없다 한다.’ 고구려가 융성하기 시작한 3세기 중엽 이전까지 부여는 만주 지역 최강국이었다. 2세기경 부여는 보기(步騎) 7만~8만을 동원해 다링허(大凌河) 유역으로 진출해 동한군(東漢軍)과 싸울 정도였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에게 멸망하기까지 고구려, 모용선비(慕容鮮卑), 읍루(挹婁) 등과 싸워가면서 700여 년간 나라를 유지했다. 

 

나라가 멸망한 5세기 이후 부여의 지배층 대부분은 고구려 지역으로 이주했다. 잔류한 부여인들은 오늘날의 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몽골계 부족과 힘을 합쳐 ‘두막루(豆莫婁)’를 세웠다. 두막루는 300여 년간 나라를 이어가다가 726년 발해 2대왕 대무예(大武藝)에게 멸망당했다. 부여의 흔적은 쑹화강 상류의 백금보-한서2기 문화 및 지린(吉林) 일대 서단산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한무제(漢武帝)의 공격적 대외정책은 북방의 흉노는 물론, 동방의 선비(鮮卑)와 예맥(濊貊), 서방의 저·강(氐羌), 월지(月氏), 남방의 월(越) 등 인근 부족에 큰 영향을 줬다. 문화와 문화, 부족과 부족이 혼화(混化)했으며, 발전이 뒤처지던 다양한 부족이 한나라와 흉노에 자극받아 스스로 나라를 세우는 등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특히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기원전 1세기 부여를 이탈한 일단의 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해모수)의 아들’로 알려진 추모를 지도자로 랴오닝(遼寧)성 동남부 압록강 중류 지역으로 남하해 원주민을 흡수한 후 졸본(Chorbon, ‘새벽별’이라는 뜻의 고대 터키어)을 근거로 고구려를 세웠다. 고구려의 수도가 ‘Chorbon’으로 불렸다는 것은 고구려에 투르크적 요소가 포함됐음을 뜻한다.

 

100개의 나루, 百濟

고구려가 국가 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소서노(召西奴)와 비류(沸流), 온조(溫祚)가 이끄는 해상 연계 세력이 이탈했다. 이들은 서해 뱃길을 타고 내려가 한강 하류 서울 일대를 점거하고 ‘100개의 나루(항구)를 가진 나라’라는 뜻의 백제(百濟)를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 이후 곧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두각을 드러냈다. 고구려와 백제 건국을 전후해 낙동강 좌안, 오늘날의 경주 지역에는 신라(新羅), 낙동강 우안, 오늘날의 김해 지역 등에는 가야(伽耶)가 출현했다. 신라나 가야의 건국 모두 북방에서 남하한 부족과 한계(韓係) 원주민이 혼화한 결과였다. 

 

무제의 증손자인 선제(宣帝)는 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 즉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고 흉노에 공세를 취하는 등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흉노는 한나라군의 잇단 공격, 불순한 기후에 따른 기아(饑餓), 선우 계승 문제가 겹친 끝에 기원전 55년경 동·서로 분열했다. 동부를 대표하는 호한야(呼韓耶) 선우가 한나라에 항복하는 등 흉노는 존망의 위기에 내몰렸다. 서부를 대표하는 질지(郅支) 선우는 탈출구를 찾아 북쪽의 정령(투르크족의 한 갈래)과 서쪽의 견곤(투르크족의 한 갈래로 키르기스인의 조상)을 정복했다.  

 

또한 카자흐스탄 동남부 일리강 유역의 강거(투르크족의 한 갈래)를 복속시킨 후 오손(투르크족의 한 갈래)을 합병해 키르키스의 추(Chu)강으로부터 우즈베키스탄 서부 아랄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서흉노는 기원전 41년 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에 큰 성을 쌓았다. 서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공격은 집요했다. 한나라와 동흉노 연합군 7만여 명이 성을 에워싸고 격렬히 공격해왔다. 끝내 성은 함락되고 질지, 선우 등 서흉노 지도부 1500여 명이 살해당했다. 한나라도 선제를 마지막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선제의 아들이자 유교적 이상주의자인 원제(元帝)와 방탕한 쾌락주의자 성제(成帝)를 거치면서 난숙기(爛熟期)의 퇴락을 경험하고, 기원후 8년 외척 왕망(王莽)의 신(新)에 나라를 찬탈당하고 말았다. 

 

고구려와 ‘하구려’

/고구려 건국 시기 한반도와 만주 일대 판도 [동아일보] 

 

한나라를 빼앗은 왕망은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해 서주(西周)에서 시행됐다’는 정전제(井田制)를 도입하는 한편, ‘한나라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존의 정부 기관명과 지명 또한 거의 다 바꿨다. 심지어 외국인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망전(王莽錢)을 도입하는 등 화폐개혁을 실시했으며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해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하고, 소금과 철, 술을 비롯한 중요 산물을모두 정부 통제하에 뒀다. 

 

왕망의 섣부른 경제·사회개혁은 경제난을 가중시켰으며, 호족(豪族)은 물론 그가 보호하려던 소상인과 농민도 불만을 품게 했다. 왕망의 실패는 이전 왕조(王朝)의 것은 덮어놓고 부정한 데서 출발했다. 과도한 이상론은 이에 기름을 부었다. 

 

농민의 불만은 ‘녹림적(綠林賊)의 난’ ‘적미(赤眉)의 난’ 등 전국 규모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왕망은 왕읍(王邑)과 엄우(嚴尤) 등에게 40만 대군을 줘 막 국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갱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의 녹림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공격 목표는 녹림군의 장수 왕봉(王鳳)과 유수(劉秀)가 수비대장으로 있던 허난성 소재 곤양성(昆陽城)이었다. 

 

유수는 13기(騎)만 거느리고 포위된 곤양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유수는 성 부근에서 구원병 7000명을 모아 다시 곤양성으로 향했다. 유수의 탁월한 지휘와 병사들의 일당백 전투력 등에 힘입어 녹림군은 곤양성 전투에서 신나라 40만 대군을 괴멸시켰다. 이 전투로 인해 신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이때가 기원후 23년이다. 

 

승세를 탄 갱시제군은 신나라의 수도 낙양(뤄양)을 점령한 데 이어 장안(시안)도 손에 넣고, 새 정권의 도읍으로 삼았다. 갱시제 유현은 유수를 경계했다. 유현은 기주(冀州)와 유주(幽州) 즉, 허베이 지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수를 허베이 지역에 파견했다. 유현과 그의 측근들은 유수가 사라지자 권력에 도취했다.  

 

‘득롱망촉(得隴望蜀)’의 유래

유수의 군대가 허베이 지역을 떠돌 무렵 한나라 성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왕랑이 이끄는 세력이 황하 중하류에 면한 한단(邯鄲)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왕랑의 세력은 급격히 불어났다.  

 

유수는 허베이 지역의 최강자가 진정왕 유양이라고 판단한 후 그에게 접근했다. 유수는 다리를 놓아 유양의 질녀인 곽성통을 아내로 맞이했다. 유수는 유양을 후원자로 두면서 그가 거느리던 10만 대군을 확보했다. 유수의 인품과 능력을 눈여겨보던 어양(漁陽), 상곡(上谷) 등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지방관들이 휘하에 모여들었다. 결국 유수는 왕랑을 손쉽게 격파했다. 어양은 지금의 베이징시 일원, 상곡은 산시성 북부 일대로 흉노, 선비, 부여, 고구려 등 북방 민족 나라들에 접한 곳이다. 

 

유현은 왕랑이 제거된 것에 기뻐하기보다 유수의 세력이 커진 것에 불안을 느꼈다. 유수의 군대는 지방 호족과 옛 한나라 관리의 군대까지 흡수해 수십만 명에 육박했다. 유수는 기원후 25년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이제 천하 패권의 향방은 유수와 갱시제 유현, 그리고 번숭(樊崇)이 주도하는 적미군으로 좁혀졌다. 광무제 유수는 유현을 압박했으며 세가 불리해진 유현은 적미군에 투항했다.

 

유수는 적미군과 천하를 건 일전을 준비했으나 거듭된 한발과 기아로 인해 오합지졸이 돼버린 적미군은 기원후 27년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유수에게 항복했다.   유수는 적미군의 항복을 받은 후 독자 정권을 수립하고 있던 간쑤성 동남부 롱(隴)의 외효(隗囂)와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세력을 멸했다.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또 한 가지를 바라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의미하는, 즉 롱을 얻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또 촉을 노린다는 뜻의 ‘득롱망촉(得隴望蜀)’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어쨌거나 광무제 유수의 한나라, 즉 동한(東漢)이 기원후 36년 모든 적대 세력을 제압하고 중국을 재(再)통일한 것이다. 

 

고구려의 베이징 침공

/중국 랴오닝성 서차구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 귀고리. 부여 초기 유적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

 

유수군과 갱시제 유현군, 적미군, 왕랑군 등이 얽히고설킨 내전이 지속됐지만 약화될 대로 약화된 흉노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흉노가 약화되고, 한나라 멸망에 이은 신나라 왕망 정권의 실정으로 인해 20여 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는 등 중원이 혼란에 빠져들자 만주와 한반도에서 새로 일어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자기들끼리는 물론, 한족과 선비·오환족, 왜족 등과도 존망을 건 전쟁을 벌였다.  

 

특히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동예와 옥저 등 인근 부족은 물론 동한 등 외부 세력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취했다. 5대 모본왕(慕本王)은 기원후 49년 동한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틈을 노려 선비·오환족 기병과 함께 멀리까지 휘몰아 쫓아가 장성 이남의 북평, 어양, 상곡, 진양 등을 침공·약탈하는 등 동한에 대해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 따르면 ‘모본왕이 기원후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진양)을 침공했다’고 한다. 삼국사기도 ‘모본왕이 49년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고 기록한다. 

 

북평, 어양은 오늘날의 베이징·허베이 일대, 진양(태원)은 산시(山西)성 성도(省都) 타이위안(太原)시다. 한족과 북방 민족이 혼거하던 베이징과 타이위안 일대는 언제나 북방 민족의 작전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다. 고구려가 초기부터 다링허와 롼허 유역을 넘어 베이징과 타이위안 등 중국 내지(內地) 깊숙이 군사를 보낸 것을 특별한 일로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수가 왕망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끝에 재건한 동한은 일종의 호족연합체제(豪族聯合體制) 국가였다. 유수는 고향 허난성 난양(南陽) 인근 출신인 음(陰), 등(鄧), 래(來), 양(梁)씨와 허베이성 진정(眞定) 출신 유(劉), 곽(郭)씨 등 호족의 협조에 힘입어 동한을 창건하는 데 성공했다.  

 

동한은 ‘난양 유씨 회장’ 밑에 호족이 지분을 가진 ‘호족 주식회사’ 형태의 나라였다. 동한은 광무제에 이어 명제(明帝)와 장제(章帝) 때까지는 융성했으며, 흉노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취했다. 장제를 계승한 화제(和帝)도 고구려와 흉노 등 북방 민족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동한의 정치 공작과 심각한 한발이 야기한 내전 탓에 동흉노는 기원후 48년 남·북으로 분열했다.  

 

흉노, 카스피海 거쳐 유럽으로

북흉노가 재기하자 동한은 기원후 73년 두고(竇固)와 경병(耿秉)을 시켜 흉노 정벌을 재개했다.   동한은 반초(班超)를 시켜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하는 등 통상로를 망가뜨리는 방법으로 북흉노의 경제력을 고갈시켜 나갔다.

 

동한은 또한 85년 남흉노, 정령, 선비·오환을 사주해 북흉노를 공격게 했다. 북흉노는 외몽골 전투에서 남흉노 연합군에 대패했으며, 20만 명 이상이 남흉노에 항복했다. 87년 선비의 공격을 받은 북흉노는 또다시 패배했다. 91년 서몽골 알타이산 부근에서 유목하던 북흉노는 동한의 대장군 두헌(竇憲)의 공격을 받아 세력을 거의 잃고, 잔여 10여만 호가 선비에 합류했다.  

 

또한 단석괴(檀石槐)가 몽골을 중심으로 선비제국(鮮卑帝國)을 세우자 몽골 지역에서 흉노의 존재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선비에 항복하지 않은 북흉노 본류는 키르키스 탈라스강 유역의 동족들과 합류해 서천(西遷)했다. 이들은 아랄해와 카스피해, 남부 러시아(키흐차크) 평원을 거쳐 4세기 무렵에는 훈족의 모습으로 로마 동북부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흉노는 남천(南遷)했다. 한지(漢地)로 이주한 남흉노는 산시(山西), 산시(陝西), 간쑤(甘肅), 닝샤(寧夏) 등지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동한 말과 삼국시대, 서진(西晉)을 거쳐, 5호 16국 시대에 민족 최후의 불꽃을 피웠다. 이들은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서진을 멸망시키고 중국 내지에 한(漢), 전조(前趙), 후조(後趙), 하(夏), 북량(北凉) 등을 세웠다.

 

화제 이후 유씨 황실은 계속 약화되고, 외척을 포함한 호족 세력은 강화됐다. 등(鄧), 염(閻), 양(梁)씨 등 외척이 득세하면서 동한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나라가 됐다. 유소년이던 질제(質帝)는 외척 출신 권신 양기(梁冀)에게 독살당했다. 질제를 이은 환제(桓帝) 시기에 이르러서는 양기를 타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환관(宦官)이 호족을 능가하는 권력 집단이 됐으며, 환제를 이은 영제(靈帝) 때는 이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영제는 십상시(十常侍)를 포함한 환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심지어 환관 장양을 아버지, 환관 조충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했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은 친인척을 대거 관리로 기용했으며, 수탈과 탐학(貪虐)으로 날을 지새웠다. 환관들의 행태는 일반 백성뿐 아니라 호족들의 이익 또한 심각하게 침탈하는 것이었다.  

 

동한의 호족과 사대부 관료들이 십상시를 포함한 환관을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이민족인 강족(羌族) 군단을 배경으로 한 서량 군벌 동탁(董卓) 집권 초기 호족 등이 그를 전폭 지지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호족이 동한 조정에 등을 돌림으로써 동한의 지배 체제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투르크-몽골계 ‘선비제국’

/고구려 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장군총(중국 지린성 지안현). [·동국대 윤명철 교수]

 

화제 이후 동한이 크게 약화되자 흉노를 대신한 고구려와 선비 등 북방 민족이 수시로 동한을 침공했다.  

 

안제(安帝)는 고구려의 거듭된 침공에 대응해 121년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선공하게 했다. 풍환은 요동태수 채풍, 현도태수 요광과 함께 3만 연합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태조왕(太祖王)의 아우 수성(나중 차대왕으로 등극)은 동한군에 포위당한 예맥성을 구원하러 가던 중 이미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항복하는 척해 풍환을 방심하게 한 후 예맥성 탈환에 나섰다. 유인책에 걸려든 풍환은 고구려군의 매복공격에 대패하고 달아나다가 예맥성을 빼앗기고 도망쳐 오던 채풍과 만났다. 풍환과 채풍은 요서 요수현(遼燧縣)으로 후퇴해 반격을 준비했다. 태조왕은 선비 병사 8000명을 포함한 정예군을 이끌고 수성의 부대에 합류했다. 태조왕이 지휘한 고구려군은 즉각 공세를 취해 동한군을 대파했다. 채풍은 전사하고 요광은 달아났으며, 유주자사 풍환은 나중에 요동의 6개 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고구려와 화친조약을 맺었다.   

 

흉노가 약화되자 투르크-몽골계 선비가 흥기(興起)해 흉노의 빈 자리를 메웠다. 선비족 족장 단석괴(137~181)는 2세기 중엽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수도 후허하오터(呼和活特) 서쪽 탄한산(彈汗山, 텡그리칸의 산이라는 뜻)을 중심으로 군대를 모아 남쪽으로는 동한의 변경을 공략하고 북쪽으로는 남시베리아의 투르크계 부족 정령(丁零)의 침공을 저지했다. 또한 그는 동쪽으로는 부여, 서쪽으로는 오손을 제압하는 등 흉노가 다스리던 땅 거의 전부를 평정해 동서 5600㎞, 남북 2800㎞에 달하는 강대한 선비제국을 세웠다. 

 

단석괴는 156년 장성 이남의 운중을 공격했으며, 158년 이후에도 허베이성, 산시(山西)성 지역과 요동 지역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단석괴는 나라를 3부로 나눈 후 각부에 대인을 둬 다스리게 했다. △우북평(베이징 동쪽) 이동 부여, 예맥 접경 지역의 우문부(宇文部)와 단부(段部)를 포함한 20여 개 부를 동부 △우북평 이서 상곡 지역 모용부(慕容部) 등을 중부 △상곡 이서 탁발부(拓跋部) 등을 서부로 나눴다.  

 

황건군의 봉기

/“스스로 머리를 쳤으면 쳤지 항복은 않는다”라며 성을 지킨 동한의 장수 엄안(오른쪽)과 유비의 충직한 아우인 촉한 장수 관우(가운데)의 석상(충칭에서 촬영). [동아일보]

 

원래 남흉노 일파인 우문부는 훗날 탁발선비의 북위(北魏)를 대신해 북주(北周)를 건국하고, 산둥의 북제(北齊)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그 뒤를 이은 수(隋)가 서진(西晉) 이후 350년 만에 다시 중국을 통일할 기반을 구축했다. 선비 세력의 부상(浮上)에 위협을 느낀 동한 조정은 177년 오환교위(烏丸校尉) 하육, 선비중랑장 전안, 흉노중랑장 장민 등으로 하여금 3만~4만 명의 동한-남흉노 연합군을 지휘해 산시성 북부 안문(雁門)에서 장성을 넘어 선비군을 공격했지만, 단석괴의 전략에 말려 대패하고 병사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단석괴가 사망한 후 선비족 연맹은 곧 와해됐다. 우문부, 모용부, 탁발부, 단부, 독발부, 걸복부, 독고부, 하란부, 을불부 등 많은 선비부족은 이합집산하면서 각자 생존의 길을 찾아 나섰다.  

 

환관의 발호라는 내우(內憂)와 단석괴가 야기한 외환(外患)에 시달리던 동한은 분열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영제가 재위하던 184년 도교 계통의 태평도 교주(敎主) 장각(張角)의 주도로 허베이 거록(鉅鹿)에서 시작된 황건군의 봉기는 허베이와 허난, 산둥 지역 대부분을 휩쓸어 동한 통치 체제와 경제·사회질서를 붕괴시켰다.  

 

() () ()의 정립

농민 저항운동 성격을 지닌 황건군의 봉기는 뿌리째 흔들리던 동한 정권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았다. 장각 3형제가 사망한 후에도 황건군의 봉기는 이어졌다. 장각 추종자들은 동한 지배층의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을 이끌고 동한 정권에 대한 저항을 지속했다. 

 

동한은 혼란을 더해갔으며 그 틈을 타 조조, 유비, 손책·손권, 원소, 원술, 공손찬, 유장, 마등, 여포 등의 군벌이 호족(豪族)과 새외민족(塞外民族)의 무력을 배경으로 새 질서 구축을 위한 축록전(逐鹿戰)에 뛰어들었다. 이 중 조조, 유비, 손권 3인만 나라를 창업하는 데 성공했다.   

 

동한의 정치·경제 중심지는 수도 낙양이 위치한 황허 중류의 허난으로 산시(陝西)와 산둥이 각기 부중심(副中心)을 형성했다. 간쑤 남동부와 산시 서부, 충칭-쓰촨(巴·蜀), 창장(長江) 이남 지역은 각기 티베트계 저·강(氐·羌)과 동남아계 무릉만(武陵蠻), 묘(苗), 월(越) 등 이민족이 산재했다.  

 

또한 산시(山西), 산시(陝西), 오르도스, 간쑤, 닝샤, 허베이 등에는 한족과 흉노·갈, 선비·오환 등 여러 민족이 혼거했다. 조조의 위(魏), 유비의 촉(蜀), 손권의 오(吳)가 황허와 창장 상류, 창장 중하류를 중심으로 분열·정립한 것도 이 같은 중국의 지리 및 사회·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조조가 위나라를 건국한 220년을 전후한 때 중국 인구는 약 1400만 명으로 황건군의 봉기가 발생하기 이전의 3분의 1 정도로 줄어 있었다. 내란 와중에 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거나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로 숨어든 것이다.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중국은 인구밀도가 지나치게 낮아지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져 분열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황건군 봉기 이후 나타난 삼국시대와 당나라 시대 황소(黃巢)의 난 이후 찾아온 5대 10국 시대가 대표적이다.  

 

2017.01월호

■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중국이 삼국시대(위·촉·오)→진→516국으로 이어지던 시기, 고구려는 그들과 때로는 통교하고 때로는 전쟁했다. 선공에 나서기도 하고,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는데…

/고구려 무용총 벽화.

 

동한(東漢) 말 흉노와 선비 등 새외(塞外, 만리장성 바깥)민족의 중원 유입은 한층 더 늘어났다. 선비족은 랴오닝에서 내몽골을 거쳐 칭하이까지 동서로 길게 띠를 두르고 거주했다. 남흉노와 갈족(羯族)은 대체로 선비족보다는 남쪽인 산시(山西, 병주), 산시(陝西, 관중), 간쑤 서부(서량) 지역에 흩어져 살았고, 저·강족(氐羌族)은 싼시 서부와 간쑤 동남부(롱)에서 쓰촨(파촉)을 거쳐 윈난(남중)까지 이어지는 서부 벨트에 주로 살았다. 후난, 저장, 푸졘을 비롯한 창장(長江, 양쯔강) 이남 지역에는 산월(山越)과 무릉만(武陵蠻) 등 좡족(壯族)과 투자족(土家族), 먀오족(苗族) 등의 조상이 거주했다.  

 

조조, 유비, 손권과 고구려

이런 상황에서 황건군이 봉기하자 동한 왕족을 비롯한 한족의 지배 체제는 약화됐다.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의 건국자는 공히 황건군 토벌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위나라 창건자 조조(155~220)는 황건군 토벌을 통해 지위와 명성이 높아졌으며, 촉을 세운 유비(161~223)는 한미(寒微)한 가정 출신인 터라 황건군 토벌전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군벌로서의 입지조차 구축할 수 없었다. 오나라 건국자 손권(182~252)의 아버지 손견은 황건군 토벌을 통해 아전(衙前) 신분에서 일약 군벌로 성장했다. 

 

조조는 원소, 여포, 마초, 장로 등 군벌과 오환(烏桓)족, 저(氐)족을 제압하고 화북을 통일했다. 이 같은 조조의 동정서벌(東征西伐)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파촉의 유비와 강남의 손권을 멸망시키지 못했다. 

 

화북과 파촉은 친링(秦嶺)산맥, 화북과 강남은 화이허(淮河)와 창장 등 대하천으로 분리돼 지역 간 왕래가 무척 어려웠으며 사회·문화적 차이도 매우 컸다. 화북인이 밀을 주식으로 한 데 비해 파촉인(巴蜀人)과 강남인(江南人)은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 당시 창장 유역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아 화북의 거의 전부를 장악한 위나라가 절대 강자일 수밖에 없었다. 위, 촉, 오는 국력 측면에서 대강 10:2:3의 비율로 차이가 났다. 

 

위는 촉과 오는 물론이고 선비족, 공손씨(公孫氏)의 연(燕), 그 동쪽의 고구려와도 맞서야 했다. 삼국이 정립하던 3세기 초 몽골고원은 선비족의 땅이었다. 단석괴 사망 이후 분열된 중부선비를 장악한 가비능(軻比能) 선우는 동부선비마저 손아귀에 넣으며, 촉나라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기도 했다. 위협을 느낀 위나라는 산시의 남흉노를 통해 북쪽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234년에는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했다. 구심점을 잃은 선비세력은 사분오열되고 만다.  

 

, 동천왕을 선우로 책봉

/손권,조조,유비(왼쪽부터)

 

공손씨는 황건군 봉기와 뒤이은 삼국 분열 시기 롼허(灤河)-다링허(大凌河) 유역에 나타난 힘의 공백을 이용해 나라를 세운 후 오의 손권 및 촉의 제갈량과 함께 위에 저항하면서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약 50년간 나라를 유지했다. 창건자 공손도는 해군을 파견해 산둥반도 둥라이(東萊) 인근을 확보하는 등 연나라를 해상강국으로 만들었다. 숙부 공손공을 타도하고 집권한 공손연은 232년 위나라를 견제하고자 오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오와 연이 손잡는 것을 우려한 위는 234년 연의 배후에 위치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통교(通交)했다. 공손연은 위가 고구려를 끌어들여 배후를 노릴까 염려해 위에 아부코자 오에서 보낸 사신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았다. 오의 사신 일부가 탈출해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이들을 잘 대접해 오로 돌려보냈다. 오는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내 동천왕을 선우(單于)로 책봉했다.  

 

동천왕은 이후 공손씨가 지배하는 랴오허 유역을 빼앗으려고 했다. 고구려는 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손씨와 대립각을 세웠으며,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에 보냈다. 동천왕은 부친인 산상왕 초기 발기(發岐)가 일으킨 고구려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한 공손씨의 연(燕)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제갈량은 ‘삼국지연의’에서 남만(南蠻)으로 소개된 남중(윈난) 정벌을 통해 획득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229년 저·강족이 거주하던 룽시(隴西) 일부를 평정했다. 제갈량은 간쑤-쓰촨-윈난, 즉 롱(隴)-촉(蜀)-전(滇)으로 이어지는 저·강 벨트를 장악해 국력을 증강하고 저·강 군단을 활용해 장안과 낙양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는 위 정벌의 전제조건인 장안을 차지하고자 여러 차례 위에 도전했으나, 사마의와 조진 등 위나라 장수들의 저항으로 실패한 후 234년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촉이 위에 가해온 군사 압력이 크게 줄었다. 위는 237년 베이징 일대를 관할하는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으로 하여금 공손씨를 치게 했다. 관구검은 다링허 유역 요수까지 진격했으나, 장마로 인해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이듬해인 238년 위나라 군권을 총괄하던 사마의가 직접 공손씨 토벌에 나섰다. 

 

사마의는 모용선비와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후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연나라 수도 양평을 점령했다. 공손씨가 멸망하고 고구려와 위나라가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 고구려-위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다.  

 

魏 공격 나선 고구려

고구려는 242년 요충지 서안평을 공격했으나 함락하는 데 실패했다. 고구려의 선공에 자극받은 관구검은 244년과 245년 오환·선비족이 포함된 2만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서전(緖戰)에서 잇달아 승리한 후 위나라군을 얕잡아본 동천왕은 5000기(騎)를 직접 지휘해 방진(方陣)을 친 위나라군을 공격했으나 기병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위나라군 본대는 동천왕 부대를 구원하러 온 재상 명림어수의 부대까지 섬멸했다. 위나라군은 기세를 타고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했으며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동해안 쪽으로 도망한 동천왕을 추격했다. 246년 동천왕은 밀우·유유의 기책(奇策)으로 왕기를 물리치는 데 겨우 성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에 따르면 위나라 군대는 ‘낙랑을 통해 퇴각했다(遂自樂浪而退)’고 한다.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관구검은 일부러 먼 남쪽 길을 돌아서 퇴각했다는 뜻이 된다. 또한 고구려를 멸망시킬 생각을 가진 위(魏)가 고구려 남쪽에 있었다는 낙랑군을 군사 발진(發進) 기지로 이용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따라서 당시의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구검은 고구려의 재흥을 막고자 고구려인 포로 3만여 명을 낙양 부근 형양(滎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공손씨가 패망하고 고구려가 위축되자 내몽골 시라무렌강 일대에 거주하던 모용선비 세력이 롼허-다링허 유역 중심지로 밀고 내려왔다.  

 

촉은 오와 연합해 위에 대항하는 것이 중국을 통일할 유일한 길이었는데도 유비가 오나라를 치다가 육손에게 대패함으로써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오나라 지도부 또한 촉과 화친할 때만이 나라를 보존하고, 천하 제패의 작은 기회나마 엿볼 수 있음을 망각했다. 손권이 유비의 의제(義弟) 관우를 처형한 것은 전략적인 실수였다. 

 

오의 권부는 이후 군벌연합 체제로 변했다. 육(陸), 주(朱), 장(張), 제갈(諸葛) 등 주요 가문의 힘이 손씨 황실을 압박한 것이다. 오는 방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지나치게 적었다.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영토 내 이민족인 산월과 무릉만을 평지로 강제 이주시키는가 하면 타이완과 오키나와 등으로 병사를 보내 원주민을 잡아오게 할 정도였다.

 

백치황제, 사마충

사마씨가 권력을 장악한 위는 263년 등애와 종회가 지휘하는 대군을 파견해 촉을 멸망시켰다. 환관 조등의 양손자인 조조는 출신 가문보다 능력을 우선시했다. 조조의 호족(豪族) 경시 태도는 최염, 공융, 모개 등 호족 출신 인사들과의 관계를 벌려 놓았다. 이는 위나라가 호족 출신 사마씨 가문에 찬탈당하는 원인의 하나가 됐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은 265년 위나라를 빼앗아 진(晉)나라를 세웠다. 위나라는 강남에 오, 파촉에 촉이라는 도전 세력이 있는 상황에서 조씨(曹氏) 세력마저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했는데도 방계(傍系)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바람에 사마씨에게 나라를 내줬다.  

 

280년 사마씨의 진(晉)은 촉의 멸망으로 옆구리가 텅 비게 된 데다 손권 말년 이후 거듭된 실정으로 쇠약해진 오나라를 쉽게 정벌했다. 183년 황건군 봉기 이후 지속된 약 100년간의 분열 시대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불행히도 사마염을 포함한 진나라 지도부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들어 나갈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새외민족이었다. 등애, 서진 곽흠, 강통 등이 남흉노, 선비족, 고구려인 등이 내포한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들을 원거주지로 돌려보낼 것을 주장했지만, 지도부 인사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진나라의 오나라 정벌 이전 하서회랑에서는 독발선비족(禿發鮮卑族)이 거병해 촉을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호열과 견홍을 죽이는 등 맹위를 떨쳤다.

 

사마염은 위나라 조씨가 방계를 지나치게 약화시켰다가 나라를 빼앗긴 전례를 거울로 삼아 자식 등 황족에게 병력을 줘 수도 낙양을 지키는 요충지 평양(平陽), 진양, 업(鄴) 등에 주둔시켰다. 그런데 백치황제 사마충 등극 후 진이 혼란에 빠지자 군사력을 가진 방계 황족은 자기 군대는 물론, 남흉노와 오환·선비 등 새외민족 병사를 동원해 축록전(逐鹿戰)에 나섰다.

 

산시(山西)와 산시(陝西) 등 내지로 이주해 있던 60만 남흉노는 반(反)독립 상태를 유지하면서 진의 황족과 장군들의 용병으로 활약했다.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동해왕 사마월 등이 일으킨 8왕의 난은 남흉노에 독립국을 세울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에 앞서 제만년(齊萬年)이 지휘하는 저족 군단이 296년 산시(陝西)에서 봉기해 맹위를 떨쳤다. 

 

호족·한족 통합 수장

성도왕 사마영의 주둔지는 허베이 남부 업이었다. 사마영은 남흉노의 힘을 빌리고자 인망이 높은 흉노 왕족 출신 유연(252~310)에게 흉노 장병을 징발하는 일을 맡겼다. 유연은 진나라 조정이 오나라 정벌전의 장수로 기용하려 했을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다. 유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중원에 흉노의 나라를 세울 것을 결심했다. 유연은 봉기하면서 “진이 무도해 우리를 노예처럼 부렸다(晉爲無道 奴隸御我)”라고 비난했는데, 이는 당시 한족-새외민족 간 갈등이 매우 심각했음을 말해준다.  

 

유연은 304년 11월 황하의 북쪽 지류인 분수(汾水) 유역 이석의 좌국성(左國城)에서 유선의 추대를 받아 대선우 한왕(大單于 漢王)에 등극했다. 5만 대군을 모아 흉노 건국의 대업을 시작했다. 유연은 진서(晉書)가 표현한 대로 남흉노 모두가 의지한 영걸이었다. 유연은 세력이 확대되자 308년 10월 포자에서 황제에 등극하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했다. ‘황제’의 통치 대상은 한족이며, ‘선우’의 통치 대상은 새외민족(胡族). 유연은 사상 최초로 호족과 한족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국가 수장을 지향했다.  

 

한나라는 309년 1월 평양으로 천도하고, 진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했다. 유연의 아들 유총, 손자 유찬, 조카 유요로 이어진 흉노의 한나라(前趙)는 유총 시대에 낙양과 장안을 함락해 진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거의 통일했다. 유찬과 유요 등 일족과 흉노의 별종인 갈족 석륵, 한족 왕미 등이 이끄는 한군(漢軍)이 311년 낙양을 함락했다. 이른바 ‘영가의 난’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고구려의 랴오허 공격

/흉노족의 모습. 빨간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고구려 미천왕은 진(晉)이 남흉노에  유린당하는 등 중원이 혼란에 처하자 311년 진으로부터 랴오둥의 요충지 서안평을 빼앗았다. 313년에는 낙랑군, 314년에는 대방군도 점령했다. 

 

모용외를 수장으로 하는 모용선비족은 다링허 유역 극성(棘城) 일대에 자리 잡고 고구려를 견제했다. 미천왕은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 세력을 멸하지 못하면 랴오허 이서(以西) 진출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외교 책략을 통해 모용선비를 제압하려 했다. 

 

미천왕은 319년 12월 한족 출신 평주자사 최비로 하여금 모용선비를 적대하던 우문선비와 단(段)선비를 설득해 모용선비를 협격하게 했다. 고구려와 우문선비, 단선비 3개국 연합군은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3면에서 포위했다. 모용외는 반간계를 썼다. 즉, 우문선비 군대에는 음식과 술을 보내는 한편, 모용외와 밀약을 맺기 위해 최비의 사자가 한밤중 극성에 도착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고구려와 단선비로 하여금 우문선비와 최비를 의심하게 했다. 고구려군은 단독으로 철군했으며, 고립된 최비는 고구려로 망명했다. 

 

3국 연합군을 계략으로 물리친 모용외는 아들 모용황을 시켜 우문선비를 격파하고, 또 다른 아들 모용인에게는 고구려에 반격을 가하게 했다. 미천왕은 이후에도 랴오허 유역을 계속 공략했으나, 랴오허를 넘지는 못했다. 미천왕은 모용선비를 압박하고자 330년 후조(後趙, 흉노가 세운 한나라) 천왕 석륵에게 우문옥고(宇文屋孤)를 사신으로 보내 건국을 축하하면서 싸리나무 화살 호시(楛矢)를 선물했다.  

 

유요는 312년, 316년 두 차례에 걸쳐 장안을 점령하고, 산시(山西)와 산시(陝西) 일대를 평정했다. 유요는 산시 일대를 정벌하다가 진군을 지원한 탁발선비 부족장 탁발의로와의 전투에서 패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한나라군의 포로가 된 서진 회제와 민제는 평양(平陽)으로 압송돼 처형됐다.  

 

강남으로 도피해 있었던 낭야왕 사마예가 317년 명문거족 낭야 왕씨와 강남 토착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건업(난징)에서 진나라(東晉)를 재건했다. 

 

4분된 중국

한편 한나라는 318년 유총이 사망한 다음 내분으로 인해 급속히 와해됐다. 유총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자 각기 군단을 거느리던 유요, 석륵, 왕미 등이 자립할 태세를 취했다. 평양의 조정에서는 한족 출신 외척 근씨(靳氏) 세력이 증대돼 황실을 압박했다. 유총 사망 후 유찬이 즉위했는데, 권력을 장악한 근씨들은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유찬을 기습해 살해했다. 

 

평양의 정변 소식을 접한 유요와 석륵 등 일선 장군들은 각기 평양으로 진군했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근씨들은 반대파에 의해 축출당하고 난은 진압됐다. 유요는 국명을 조(趙)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다.  

 

석륵은 한족 출신 전략가 장빈의 갈피대책(葛陂大策)을 받아들여 세력권이 겹치던 왕미를 살해하는 한편, 허베이와 산둥, 산시 일부를 점거하고, 319년 허베이의 양국(襄國)에 도읍해 조(趙)나라를 세웠다. 산시(陝西)에 위치한 유요의 조나라(前趙), 허베이에 자리한 석륵의 조나라(後趙), 강남의 동진(東晉), 파촉의 성나라로 중국이 4분된 것이다. 

 

스러진 천하통일의 꿈

 유요는 323년 전량왕 장무의 항복을 받았다. 유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흉노 출신 유요와 흉노 별부(別部) 갈족 출신 석륵 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유요는 328년 낙양 전투에서 석륵의 조카 석호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329년 태자 유희도 석호에게 생포당해 죽었다. 이로써 전조(前趙)는 멸망했다. 유요는 고구려에 망명한 적도 있으며, 독서인이자 빼어난 용장으로 유연으로부터 ‘우리 집안의 천리구(千里駒)’라는 말을 들은 준걸이었으나, 장안이 융성하게 된 이후 타락했다.  

 

석륵의 아들 석홍을 죽이고 자립한 석호는 전량의 수도 고장(姑藏),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포위하고 탁발선비가 산시 북부에 세운 대(代)를 내몽골로 축출하는 등 한때 화북을 통일하는 기세를 보였다. 338년 5월 후조는 고구려와 단선비의 지원을 받아 10만 대군을 인솔해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포위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롼허-다링허 유역 성읍들이 후조의 석호에게 항복했다.  

 

모용선비의 수장 모용황은 모여근과 아들 모용각 등의 도움을 받아 화공을 써서 후조군을 가까스로 물리쳤다. 이후 모용황은 석호에게 항복한 장수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는데 송황과 유홍 등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석호는 다시 한 번 모용선비를 치기 위해 도료장군(渡遼將軍) 조복으로 하여금 산둥반도에서 랴오둥반도 사이에 위치한 묘도열도를 경유해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양곡 30만석을 실어다주게 했다. 그러나 석호와 석수의 부자간 내분과 모용선비의 저항으로 인해 후조(後趙)의 천하통일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349년 석호가 죽자 석호의 자식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석호 사후 10세에 불과한 태자 석세가 등극했지만 즉위 33일 만에 석호의 양자로 군권을 장악한 한족 염민(冉閔)의 사주를 받은 석준에게 살해당했다. 석준을 죽인 석감은 염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염민은 나라 이름을 위(魏)로 바꾸었다. 염위(冉魏)는 흉노·갈족을 대거 학살하는 등 극단적 정치로 세력을 모두 잃고 수도 업 주변 극히 일부분만 확보할 수 있었다. 

 

한나라와 전조를 세운 남흉노의  인적 구성은 피정복 부족을 포함해 매우 복잡했다. 흉노의 언어는 알타이어의 일종으로 볼가강 유역 사마라와 카잔 사이에 거주하는 추바쉬인의 말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연이 세운 한(漢)나라 장군 기홍은 빨간 머리에 파란 눈을 지녔다. 

 

‘빨간 머리, 파란 눈’ 인종

중국 사서들은 각기 한과 전조를 세운 유연과 유요 모두 장신이며, 털이 많고 머리카락이 붉은 것으로 기술한다. 이로 미루어 남흉노 왕족인 도각부는 인도-유럽계 인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족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일대에 거주하던 조로아스터교도인 소그드인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외민족이 세운 나라들은 부락 제도를 유지하면서 점령지 한족을 통치해야 했다. 흉노의 한(漢)은 황제가 한족을 직접 다스리고, 황태자에게 대선우(大單于) 직책을 줘 새외민족을 통치하게 했다. 새외민족은 한족만큼 정교한 행정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다. 지방에 대한 지배는 불철저했으며, 국가권력의 중핵을 이룬 것은 군대였다. 

 

이들 군대는 부락 전통에 따라 종실에 분배됐다. 이를 종실적 군사봉건제라고 한다. 군대는 부락제의 전통을 충실히 유지했으며 자급자족했다. 이러한 군사적 봉건체제는 건국 당시에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지배권이 확립된 뒤에는 권력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 

 

조(前趙), 후조(後趙), 전연(前燕), 전진(前秦)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새외민족 왕조는 대부분 단명했다. 석호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선비가 유주(베이징 일대)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석호가 강제로 이주시킨 저족과 강족은 폐허가 된 허베이 지역을 탈출해 고향인 관중으로 돌아가는 장거리 행군에 나섰다.  

 

남부 시베리아 지역을 원거주지로 하는 투르크계 정령족도 행동을 개시했다. 383년 비수전투 이후 저족이 세운 전진(前秦)이 붕괴되자 우두머리 적빈(翟斌)은 허베이 일부를 근거로 세력을 형성했다. 그의 뒤를 이은 적요(翟遼)는 386년 여양(黎陽) 태수 등념지를 죽이고 여양을 점거했다. 적요는 후연(後燕) 모용수에게 항복했다가 산둥의 노(魯)를 근거로 자립해 388년 2월 위(魏)를 세우는데, 이것이 적위(翟魏)다.  

 

02월호

■ 발해만 제해권 장악한 백제 북연(國勢) 흡수한 고구려

사마염이 세운 서진이 멸망한 후 흉노·갈, 선비, 저·강 5개 북방민족이 주도한 516국 시대가 열리면서 한반도가 요동친다. 북연의 백성과 재화를 흡수한 고구려 장수왕은 북방을 안정시킨 후 남방으로 군사를 보내는데….

/중국 지린성 지안현 장천1호분 고구려 고분 벽화.[동아일보]

 

 발권력을 통해 패권을 유지해왔으나 경제력이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있다. 경제력 약화는 군사력 약화와 기축통화 발권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를 잘 아는 트럼프 행정부는 국방 부문 ‘연방 예산 자동 삭감 조치(시퀘스트)’를 폐기하고 △군함(270척→350척) △해병대(23개 대대→36개 대대) △전투기(1100대→1200대) △전투 병력(49만 명→54만 명) 증강을 추진하려 한다. 미국이 해군력 증강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려면 해군력 강화가 필수라고 명확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100개의 나루’ 백제

백제(百濟)는 21세기의 패권국처럼 제해권을 중시했다. ‘100개의 나루(항구)’라는 나라 이름이 의미하듯 서해와 남해, 보하이만(渤海灣)의 제해권을 장악한 해상왕국이었다. 톈진, 다롄, 후루다오, 탕산, 옌타이, 웨이하이 등의 항구를 품은 보하이만은 예나 지금이나 요충 중 요충이다. 백제는 강력한 해군력을 배경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예성강 유역을 확보한 데서 더 나아가 한때 보하이만 연안의 랴오시(遼西)와 산둥반도 일부를 점령했다. 전기 백제, 즉 한성 백제는 규슈와 주고쿠 등 일본열도에도 진출했다. 

 

‘송서(宋書)’ ‘양서(梁書)’ ‘위서(魏書)’ ‘남사(南史)’ ‘통전(通典)’ 등 중국 역사서는 한결같이 4세기 이후 백제가 랴오시(롼허-다링허 유역)에 진출했다고 기술한다. 해상왕국 백제가 383년 저족(氐族)의 전진(前秦)과 한족(漢族)의 동진(東晉) 간 ‘비수전(淝水戰)’ 이후 전진이 해체되고 모용선비족의 후연(後燕)이 아직 고토(故土)를 회복하지 못했을 무렵 보하이만 항구들을 중심으로 대륙의 몇몇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백제는 해상 근거지를 가진 남만주의 부여계 부족이 한강 유역으로 남하해 세운 나라로서 서해와 보하이만 연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구려는 5세기 이후 랴오허-다링허 유역과 한강 유역으로 팽창했다. 고구려가 서쪽과 남쪽 2개 방향으로 거의 동시에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서진(西晉)이 멸망(317년)한 후 흉노·갈, 선비, 저·강 등 5개 북방민족이 주도하는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가 시작됐으며, 백제는 약해지고, 신라와 가야는 완전한 영토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374~413) 시절 확보한 제해권도 후연, 백제, 가야, 왜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적 정책에 큰 도움을 줬다. 

 

한족의 大이동

/백제의 미(美)를 엿보게 하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동아일보]  

 

백제와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화북(華北)이 1차로 흉노·갈, 2차로 선비, 저·강 같은 수많은 부족에 의해 점령되는 등 중국이 대혼란에 처한 덕분이다. 이 대혼란기에 수많은 나라가 짧은 기간 화북과 하서회랑 등 각지에서 흥망을 되풀이했다. 이 글의 서술은 다수의 나라 이름 탓에 복잡하다. 이 무렵의 한중관계사(史)를 이해하려면 서술이 복잡하더라도 인내하면서 정독할 필요가 있다.   

 

서진 멸망 후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서 한족이 대이동을 시작했다. 강남으로 이주한 한족이나 화북에 남은 한족 모두 살아남고자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해 향촌 질서를 유지했다.   

 

자위단이 촌락 단위로 출현한 것은 183년 황건군 봉기와 관계가 있다. 자위단은 흉노·갈 등 북방민족이 화북 각지를 유린하기 시작한 서진 말에 급증했다. 자위단 구성원들은 지도자를 추대했으며 농지를 개간해 자립 기반을 갖췄다. 지도자인 주공(主公)은 독립국가의 리더 노릇을 했다. 자위단이 형성된 곳은 산간벽지였으며 성벽을 쌓아 외부의 침공에 대비했다.

 

한족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을 오(塢), 보(堡), 또는 벽(壁)이라고 일컬었는데, 한족을 공격하려던 북방민족은 각지에서 오, 보, 벽의 저항에 직면했다. 북방민족은 오, 보, 벽의 일부는 함락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오주(塢主)에게 지방관직을 주어 향촌 질서를 유지하게 했다. 한족의 자치를 인정한 것이다. 북방민족 국가 내 한족 백성에 대한 지배는 이렇듯 불철저했으며, 그로 인해 지배집단 내부의 작은 문제가 집단 전체의 존망과 연결된 사안으로 확대되는 예가 많았다. 

 

강남으로 피난한 한족은 화교(華僑)가 돼 동남아계 원주민과 섞이거나 원주민을 높은 산지나 더 남쪽으로 쫓아내고 농경문화를 퍼뜨렸다. 일부는 랴오허 유역이나 내몽골, 하서회랑으로 피난해 그곳의 북방민족과 잡거(雜居)했다.

 

북만주가 원주지(原住地)인 모용선비족의 왕 모용준은 갈족이 세운 후조(後趙) 멸망 후 화북으로 진출해 허베이, 허난, 산둥을 포함한 대제국을 세웠다. 모용준의 조부 모용외(269~333)는 동아시아 최초로 유목민을 대상으로 한 부족적 군사조직과 농경민인 한족을 대상으로 한 관료적 행정조직을 분리한 이원체제(二元體制)에 기초해 국가를 다스렸다.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은 후조는 물론, 우문선비·단선비 등 여타 선비족, 고구려·부여 등과 싸우면서 세력을 키운 끝에 337년 다링허 중류 차오양(朝陽)을 수도로 전연(前燕)을 세웠다. 

 

백제의 흥기

/백제 근초고왕이 369년 왜왕에게 전했다고 추정되는 칠지도. [사진제공·이소노카미 신궁]

 

모용선비족이 확립한 이원체제는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만주(청) 왕조를 거치면서 군산복합적(軍産複合的) 통치체제로 완성됐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이던 북방민족이 중원을 점령한 후 중원식 관료제도의 효율성을 고유의 군사적 장점과 결합해 백성을 통치한 것이다.  

 

이 무렵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랴오허 유역을 놓고 다투는 틈을 타 한반도 남서부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고구려로부터 황해도 북부와 강원도 서부를 탈취했다. 

 

전연의 모용준은 후조의 멸망으로 화북이 혼란에 처하자 350년 수도를 베이징 근교 계(薊)로 옮기고 황제를 칭했으며 허베이 남부의 업(鄴)을 점령한 뒤 그곳으로 재(再)천도했다. 전연은 365년 뤄양을 점령했으며 366년 동진(東晉)의 연주(州) 등 화이허 이북 영토를 차지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후조가 멸망한 과정을 꿰고 있었는데 모용선비의 중원 진출이 지나치게 빠른 것을 보고는 전연이 곧 후조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내다봤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모용외의 서형(庶兄) 모용토욕혼은 모용외와의 불화 끝에 따르는 무리 1700여 호를 이끌고 내몽골과 하서회랑을 지나 칭하이(靑海)로 옮겨갔다. 모용토욕혼은 285년 칭하이호 서쪽의 부사(伏俟)를 중심으로 선비족과 강족을 통합해 유목·농경·상업의 나라 토욕혼을 세웠다. 

 

갈족의 후조가 혼란에 처하자 저족 수장 포홍은 경쟁 부족인 강족 수장 요익중·요양 부자를 제압한 다음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도참설에 따라 성을 부(苻)로 바꿨다. 부홍의 아들 부건은 부족을 이끌고 원주지인 산시(陝西)로 복귀해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칭했으며 352년 황제에 즉위해 전진(前秦)을 세웠다.

 

부건이 죽은 후 맹장으로 이름난 그의 아들 부생이 황위를 계승했으나 민심을 잃어 재위 3년 만에 사촌 부견(338~385)에게 살해당했다. 부견은 지모원려(智謀遠慮)의 인물인 한족 왕맹을 기용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부견은 모든 민족을 인의로 대하고 은신으로 회유하면 결국 융합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부견이 국력을 키워나갈 무렵 동진의 장군 환온을 상대로 한 황하 연안 ‘방두 전투’ 전공 문제와 관련해 숙부 모용평의 견제에 시달리던 모용황의 또 다른 아들 모용수(慕容垂)가 전진으로 망명했다. 전연의 기둥 모용각(慕容恪)이 죽은 후 모용평과 공동으로 집정하던 모용수는 방두 전투 승리라는 큰 공을 세웠는데도 시기심 많은 모용평과 가족혼(可足渾) 태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전연의 약점을 파악한 부견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후 370년 9월 왕맹과 곽경에게 6만 대군을 줘 전연을 공격하게 했다. 왕맹은 전연 제1의 군사기지인 태원을 점령한 다음 모용평이 지휘하는 30만 대군을 격파하고 수도 업을 포위했다. 371년 봄 업은 함락되고 전연 황제 모용위는 곽경에게 생포돼 장안으로 압송됐다. 

 

거란의 모태, 우문선비

이런 와중에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백제 태자)는 고구려가 전진-전연 전쟁에 관심을 쏟는 틈을 타 북상해 평양 전투(371년)에서 고국원왕을 패사(敗死)시켰다. 

 

왕맹과 곽경이 업을 함락할 때 부여울(扶餘蔚)이 부여·고구려·갈족 인질 500여 명과 함께 성문을 열어 전진 군사를 맞아들였다. 부여울이 이끈 부여·고구려인 포로는 모용외, 모용황에 의해 포로가 된 이들이다.  

 

모용황은 342년 고구려 공격을 계획했다. 동생 모용한이 동쪽의 고구려를 정벌한 다음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고 건의한 까닭이다. 모용한은 고구려를 격파한 다음 우문선비를 정벌하고 화북으로 진공하자고 제안했다. 모용황은 주력부대는 산길로, 보조부대는 평지로 진군하는 방법으로 고구려군을 속였다. 소수 병력으로 산길을 방어하던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용황에게 대패한 끝에 필마단기로 달아났다. 모용황은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점령한 후 왕대비 주씨 등 5만여 명의 포로와 함께 회군했다. 그 과정에서 미천왕의 시신도 도굴해 수레에 싣고 갔다.  

 

고구려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모용황은 344년 우문선비를 정벌했다. 우문선비의 족장 우문일두귀의 아들 중 하나인 우문릉은 500여 기를 이끌고 탁발선비로 망명했다. 우문릉은 나중에 북주(北周)를 세우는 우문태의 선조다. 우문선비 일부는 모용선비에 편입됐으나 다른 일부는 고구려로 이주하거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남아 거란족의 모태가 됐다.

 

모용선비군은 346년 부여를 공격해 멸망시켰으며 부여왕 현(玄)과 백성 5만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모용황은 부여현을 사위로 삼았는데, 왕맹과 곽경이 업을 함락할 때 부여·고구려·갈족 인질들과 함께 성문을 연 부여울은 부여현의 아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부여울은 전연에 의해 부여가 멸망했기에 전진 군대가 업을 공격할 때 같은 처지이던 고구려와 갈족 인질을 모아 조응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울은 전진에 투항한 후 고구려인 포로가 집단 거주하던 형양의 태수로 임명됐으며 정동장군(征東將軍) 부여왕에 봉해졌다. 부여가 재건된 것이다. 

 

연거푸 바뀐 장안의 주인

/충청 부여군이 재현한 해상왕국 백제의 황포돛배.[동아일보] 

 

전진은 373년 동진으로부터 저·강 계열 민족이 다수 거주한 쓰촨(파·촉)과 윈난(남만)을 탈취하고는 378년 창장(長江) 북쪽 지류인 한수(漢水) 연안 요충지 샹양(襄陽)을 점령해 동진에 치명타를 가했다. 전진은 또 탁발선비족의 대(代), 저족의 전구지국(前仇池國), 한족의 전량(前凉)도 멸해 화북을 통일했다. 촉한을 멸한 후 오(吳) 정벌을 앞둔 서진(西晉)과 비슷한 형태로 승승장구한 것이다.  

 

383년 11월 부견은 모용수 등의 부추김을 받아 부족연합군(部族聯合軍) 87만 명을 이끌고 동진 정벌에 나섰으나 화이허 남쪽 지류인 비수 전투에서 동진 북부군(北府軍) 사령관 유뢰지에게 패했다. 비수전 패전의 영향으로 전진 원정군이 붕괴되자 전진에 강제로 복속됐던 부족들은 하나같이 독립을 시도했다. 

 

부견은 동진 정벌을 떠나기 전 중신(重臣) 여파루의 아들 표기장군 여광에게 서역 원정을 명했다. 여광은 383년 봄까지 서역 30여 국을 정복했다. 여광은 385년 구자(龜玆)를 점령한 후 계속 서진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결국 회군을 결정했다. 이것이 후량(저족), 북량(저거흉노), 서량(한족), 남량(독발선비족), 서진(걸복선비족) 등 하서회랑의 분열로 이어졌다. 구자에서 후퇴하던 여광은 385년 9월이 돼서야 전진의 비수전 패배와 장안의 혼란, 부견의 죽음을 알았다. 여광은 주천공(酒泉公)을 칭하고 이듬해 후량(後凉)을 건국했으며 387년까지 하서회랑 전역을 제압해 이전에 한족 장무가 세웠던 전량(前凉)의 영역 대부분을 확보했다. 

 

한편 부견에 의해 장안으로 끌려온 모용선비족이 세운 서연(西燕)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강족 지도자 요장은 부견의 질책이 두려워 384년 진왕(秦王)을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요장은 386년 전란으로 텅 빈 장안에 무혈입성해 황제를 칭하고 후진(後秦)을 건국했다. 요장의 아들 요흥은 전진 잔존 세력과 서진, 남량, 후량 등을 모두 굴복시키고 산시와 하서회랑을 통일했다. 후진은 399년 10월 동진이 지배하던 뤄양을 점령해 한수(漢水) 이북 지역 장악을 완료했다. 이때가 후진의 최전성기다. 이후 후진은 탁발선비와의 분수(汾水) 유역 시벽전투에서 대패하고, 왕족 간 분란으로 쇠약해져 동진이 파견한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다. 장안은 나중에 철불흉노 출신 혁련발발이 세운 하(夏)에 넘어갔다가 마지막으로 탁발선비 북위(北魏)의 손에 들어갔다.  

 

모용수는 385년 전진군을 이탈한 후 모용선비군 7만 명을 이끌고 허베이의 중산과 업을 중심으로 후연을 세웠다. 후연과 탁발선비의 북위는 원래 후연 우위와 연합관계였다. 북위는 387년 7월 후연의 도움을 받아 오르도스의 철불흉노를 격파했다. 후연과 북위는 391년 7월부터 국경을 접하면서 충돌했다. 후연은 394년 8월 병주의 장자를 근거로 하던 서연을 멸망시키고 산둥과 화이허 이북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때가 후연의 극성기다. 

 

탁발선비의 영웅, 탁발규

/중국 지린성 지안현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 능비. [뉴시스]

 

후연과 전진의 잔존 세력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385년 7월 후연의 건절장군(建節將軍) 부여암(扶餘巖)이 베이징 근처 무읍에서 4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모용수에게 반기를 들었다. 부여암은 전연의 수도이던 계를 점령한 후 수천 호(戶)를 포로로 삼고 롼허 하류 영지(令支)로 이동해 웅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그해 11월 아들 모용농에게 보기(步騎) 3만을 줘 부여암을 치게 했다. 영지성은 모용농의 맹공에 곧 함락됐으며 부여암은 참살됐다. 이에 앞선 384년 산둥 칭저우(靑州)에서는 벽려혼(辟閭渾)이 전진의 칭저우 자사 부랑을 축출하고 후연에 맞섰다. 동진은 벽려혼을 유주자사로 봉했다. 벽려혼은 제수(齊水) 상류 평원까지 북진해 후연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벽려혼은 후연의 거듭된 공격을 잘 막아내고, 399년 모용덕이 세운 남연(南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약 14년간 산둥에서 세력을 유지했다.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는 투르크-몽골 계통이다. 탁발선비어와 현대 터키어 사이에 상당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다싱안링(大興安嶺) 알선동 동굴을 고향으로 하는 탁발선비는 1세기 중엽 원주지를 떠나 3세기에는 내몽골 인산(陰山) 지역까지 남하했다. 이동하는 동안 탁발선비는 흉노, 정령, 오환 등 투르크계 및 몽골계 여러 부족을 흡수해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311년 영가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탁발선비는 남흉노·단선비와 싸우는 한편, 서진과의 주종관계에서 벗어났다. 338년 부족장 탁발십익건은 선비족, 철불흉노족, 귀순해온 한족을 모아 산시의 평성(다퉁)을 중심으로 대(代)를 세웠다. 그러나 대나라는 부견이 보낸 전진군(前秦軍)에 멸망당했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371~409)는 당시 6세의 아이였는데, 전진군의 포로가 됐다. 탁발선비는 비수전 이후 초원으로 돌아온 탁발규를 중심으로 불꽃처럼 다시 일어났다.  

 

유목민의 시대이념, 균전제

탁발규는 386년 외가 하란부(賀蘭部)의 도움을 받아 대(代)를 부흥시켰다. 후연의 지원을 받아 철불흉노를 격파해 나라의 기초를 세웠으며 396년 국호를 위(魏)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는 한편, 모용수 사후 극단의 내분에 빠진 후연 세력을 다링허 유역 용성으로 축출했다. 

 

탁발규는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가족 수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방법으로 화북의 농업생산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계구수전(計口授田)이라 한다. 계구수전에서 발전한 균전제에 따라 각 농가는 7.7㏊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유목민의 토지 공유 사상이 중국의 토지 제도에 적용된 것이다. 균전제 도입으로 생산력이 회복되자 대나라의 인구는 급증했다. 균전제는 위나라 조조가 꿈꾸던 토지제도를 구현한 측면이 강하다. 군현제가 한족 농경민의 시대이념이었다면 균전제는 북방 유목민의 시대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위는 탁발규의 손자 탁발도 시대에 화북을 통일했다. 탁발도는 외몽골 오르콘까지 출정해 유연(柔然)을 격파함으로써 북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탁발도는 428년 오르도스 통만성을 수도로 하는 철불흉노족 하(夏)를 공격해 황제 혁련창을 사로잡았으며, 431년에는 잔존 세력까지 토멸해 하나라를 멸망시켰다. 또한 탁발도는 하서회랑의 저거흉노족 북량, 룽시(隴西)의 저족 후구지도 멸했다. 

 

탁발규에 필적하는 영웅인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391년 즉위한 직후부터 거란족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시라무렌 강 유역 거란족 정벌 기사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태왕은 패려(시베리아 부리야트족의 선조로 추정)가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395년 군사를 이끌고 의무려산(富山)을 지나 염수변(鹽水邊) 언덕에 이르러 패려(稗麗) 3개 부락(部落)을 격파하고, 수많은 소, 말, 양을 노획했으며 돌아가는 길에 유성과 북풍 등 토경(土境)을 순수(巡狩)했다.’ 고구려의 거란 공격은 변경지대 약탈 저지와 양마(良馬) 확보 등 다(多)목적이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400년 후연이 내란에 휘말려 서쪽으로부터의 압력이 줄어들자 5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백제, 신라, 가야, 왜를 굴복시켰다. 백제를 항복시켰으며 가야와 왜의 준동을 제압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은 것이다.   

 

장수왕, 탁발도에 맞서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키웠다. [어린이동아] 

 

왜와 연합한 금관가야의 왕비족 허씨는 인도 갠지스 강 중류 아요디아가 본향인데, 전란을 피해 아삼을 거쳐 중국 윈난에 진입했다가 창장 물줄기를 타고 올라가 쓰촨(파·촉)의 보주(普州)에 정착한 후 서한(西漢) 말 혼란기에 창장을 타고 내려가 바닷길로 김해에 도착해 김수로계와 연합한 후 금관가야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북위는 후연의 잔존 세력이 세운 북연(北燕)의 영토를 두고 충돌했다. 장수왕은 425년 사신을 파견해 북위의 의도와 군사력을 파악한 후 427년 압록강 중류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의 위치를 두고 대동강 유역설과 랴오허 유역설이 맞서는데 고구려가 당시 북위에 수세적이었다면 대동강 유역설, 공세적이었다면 랴오허 유역설이 옳을 것이다.    

 

장수왕은 435년 북위를 안심시키고자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선사했으며 436년 4월 북위의 북연 침공이 시작되자 장군 갈로와 맹광으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북연이 파견한 사신 양이를 따라 북연의 수도 용성(차오양)으로 가서 황제 풍홍 일행을 맞아오게 했다. 장수왕의 이 같은 결정은 북위와의 충돌을 각오한 끝에 나온 것이다. 장수왕은 몽골고원의 유연과 강남의 송나라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탁발도가 결코 다링허-랴오허를 넘어 대군을 보낼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갈로와 맹광은 용성의 재화 일체와 백성을 확보해 고구려로 돌아왔다. 고구려군은 북연 백성의 앞뒤를 호위하면서 장방형으로 행군했는데 그 길이가 32㎞에 달했다. 풍홍은 고구려에 피난해 있으면서도 데리고 온 북연 백성에 대한 상벌을 행사하려 했으며 강남의 송(宋)으로 갈 뜻을 내비쳤다. 장수왕은 송나라와 교통할 수 있는 해안에서 멀리 떼어놓고자 풍홍을 북풍(선양 부근)으로 옮기게 했다.  

 

풍홍은 고구려가 아들 풍왕인을 인질로 삼자 송에 밀사를 보냈다. 송나라가 438년 7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왕백구를 사신으로 보내 풍홍을 보내주기를 요구하자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풍홍을 살해케 했다. 그러자 왕백구가 고구려군을 공격해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해 송나라군을 격파한 뒤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나라로 추방했다. 송나라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맺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해 왕백구를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는 것으로 사태를 매듭지었다. 이로써 북연의 국세(國勢)는 고구려에 흡수됐다.  

 

남한강까지 진출한 고구려

479년 장수왕은 유연과 함께 다싱안링 서쪽 산록의 거란계 지두우(地豆于)를 분할했다. 고구려와 유연이 지두우를 분할한 것은 고구려에 적대적이던 물길(勿吉) 등 지두우 인근 부족들이 북위 및 백제와 통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북위 및 백제 견제라는 공통의 이해를 가진 터라 고구려와 유연에 의한 지두우 분할이 이뤄진 것이다. 북서부 국경선을 안정시킨 장수왕은 475년 육군과 수군을 이끌고 남진해 한성에서 백제 개로왕(蓋鹵王)을 패사시키고 남한강 유역의 충주와 단양을 점령했다.  

 

03월호

■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고구려는 내우외환 탓에 중국의 혼란이라는, 세계제국이 될 호기(好機)를 놓친다. 519년 안장왕 즉위 후 내전에 돌입하자 돌궐, 신라, 백제가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고구려 강서큰무덤 벽화.[문화재청]

 

정치가 어지러우면 참요(讖謠)가 유행한다. 2017년 한국에서 떠도는 ‘카더라 통신’을 보라. 조선 숙종 때 유행한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노래가 참요, 즉 조짐을 예언하는 민요의 대표적 사례다.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뜻하는데, 민씨에게 유리한 가사를 볼 때 인현왕후가 속한 노론이 만들어 유행시켰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선무제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다. 선무제는 한화(漢化)의 군주 효문제와 고구려 출신 문소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북위는 고환(高歡)이 세운 동쪽의 북제(北齊)와 우문태(宇文泰)가 세운 서쪽의 북주(北周)로 분열했다. 국력은 북제(550~577)가 북주(557~581)를 압도했으나 북제는 지도층의 끊임없는 권력 조작 놀음과 잦은 황권 교체로 정치가 늘 불안정했다. 북주는 참요를 퍼뜨려 북제의 혼란을 부추겼다. 북주의 장군 위효관(韋孝寬)이 북제 군부의 중핵 곡률광(斛律光)을 제거하고자 북제 수도 업성(鄴城)에 첩자를 심어 퍼뜨린 참요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백승은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명월은 업성을 비추네(百升飛上天 明月照鄴城).’ 

 

곡(斛)은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다. 100승(百升)이 1곡(斛)이므로 ‘백승’은 곧 곡률광을 뜻한다. 또한 ‘명월(明月)’이 곡률광의 자(字)였으니, 곡률광이 북제 황제 고위를 대체하리라는 암시를 참요에 담은 것이다. 무능과 음학(淫虐)의 군주 고위는 결국 이 참요에 의해 쓰러졌다. 고위는 576년 곡률광 일족을 살해했다. 자신의 팔다리를 스스로 자른 것이다. 곡률광을 죽인 다음 해인 577년 고위는 북주 무제 우문옹이 보낸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신라의 군사제도 당(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신라는 고구려의 혼란을 틈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뉴시스] 

 

오르도스(河套)를 포함한 내몽골 거주 부족이 남하해 중원으로 이주하고, 그 빈자리를 몽골고원에 거주하는 부족이 채우는 현상은 흉노→선비→유연→돌궐→위구르→키르기스→몽골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된다.  

 

4세기 말 탁발선비가 국가의 중심을 화북(華北)으로 옮기자 몽골고원은 권력의 진공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등장한 국가가 혼혈선비족의 유연(柔然)이다. 유연은 유연족을 중심으로 흉노 발야계족, 고차 부복라족과 돌궐 아사나족 등이 결합된 다(多)종족 연합국가였다. 유연은 4월 축제 전통을 가진 탁발선비와는 달리 10월 제천 행사를 거행했다. 영토는 동으로는 랴오허, 서로는 중앙아시아 이르티슈 강에 이르렀다. 유연의 지배층은 투르크-몽골계로 보이나 구성원 대다수는 인도-유럽계 토하르인(Tocharian)으로 추정된다.   

 

유연의 최고지도자는 투르크 계통이 사용한 ‘선우’가 아니라 몽골 계통의 ‘한(汗)’ 칭호를 썼다. 유연의 군사 체제는 100명을 1당(幢)으로 편성하는 당(幢) 제도였다. 10당을 1군(軍)으로 편성하고 군에는 장(將)을 뒀다. 유연의 십진법적 군사편제는 몽골제국까지 계승된다. 신라도 군사제도로 당(幢), 관직으로 각간(角干)을 뒀다. 신라는 진흥왕(534~576) 시기 대당(大幢)을 편성했으며, 삼국통일 이후에는 고구려인 백제인 말갈인 등을 포함한 9서당(誓幢)을 운영했다.

 

북위는 초기엔 유연에 방어적 정책을 구사하다가 본거지를 공략하는 등 공격적 정책으로 전환했다. 북위가 끊임없이 유연 원정에 나선 이유는 물자 공급을 차단해 유연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북위의 대(對)유연 정책은 강남의 왕조들 및 고구려에 대한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돌궐, 유연을 무너뜨리다

북위는 유연 서쪽의 오손(烏孫), 고차(高車)와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 동북쪽의 물길(勿吉)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유연은 이렇듯 동서로 포위된 상황에서도 북위에 격렬하게 맞섰다. 결국 유연에 대한 북위의 공격적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강남의 왕조들과 동쪽의 고구려가 북위를 노리던 터라 유연 토벌에만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연을 멸망시킨 것은 북위가 아니라 돌궐(突厥)이었다. 돌궐은 철기 제작에 능한 부족이었다. 돌궐은 유연에 속했으면서도 독자성을 유지하다가 유연을 무너뜨렸다. 

 

311년 ‘영가의 난’ 이후 남흉노에 중원(화북)을 빼앗긴 한족 일부는 창장 하류 양주(揚州)와 중류 형주(荊州) 방면으로 남하했다. 남하한 인구는 당시 화북 전체 인구의 약 8분의 1로 90만여 명에 달했다.  

 

낭야 왕씨와 진군 사씨 등 교인(僑人·타향에서 임시로 머무는 사람)들이 주씨(朱氏), 육씨(陸氏), 고씨(顧氏) 등 강남 토착호족과 함께 사마씨를 지원해 동진(東晉)을 세웠다. 이들은 동진을 계승한 송-제-양-진 시대에도 중심 세력으로 남았다.

 

이 같은 강남의 역대 왕조들은 황무지 개간에 몰두했다. 한족의 황무지 개간으로 인해 쫓겨난 산월(山越), 파(巴), 요(獠) 등 원주민은 끊임없이 난을 일으켰으며, 일부는 한족에 동화됐다. 강남 마지막 왕조 진(陳)의 건국은 토호와 장군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의 원류는 강남의 원주민이다. ‘귀거래사’의 시인 도연명의 증조부로 동진에서 군사령관 격인 태위(太尉)를 지낸 도간(陶侃) 역시 원주민인 무릉만 출신.  

 

사마씨의 동진(東晉)은 전진(前秦) 부견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한문명(漢文明)을 유지·발전시키는 구실을 한 다음 유유(劉裕·363~422)가 세운 송(宋)에 역사의 자리를 넘겨줬다. 동진 북부군(北府軍) 출신 유유는 410년 모용선비족 모용덕이 산둥의 광고를 중심으로 세운 남연(南燕), 413년 한족 초종이 사천에 세운 촉(蜀), 417년 강족 요장이 장안을 중심으로 세운 후진(後秦)을 멸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420년 동진을 찬탈했다. 

 

선비족의 북방, 한족의 남방

송은 서한(西漢) 재상 소하의 자손으로 알려진 소도성의 제(齊)에, 제는 동족 소연(蕭衍)의 양(梁)에 멸망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송, 제, 양 왕조에는 송나라 문제와 양나라 무제 등 영명한 황제도 있기는 했지만, 도를 넘은 음란(淫亂)과 골육상쟁 등 문제를 일으킨 지도자가 많았다.  

 

양나라 무제는 초반 치세가 대단히 좋았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퇴락했다. 빈부격차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황족과 귀족에게 적개심을 품은 백성이 늘어갔다. 북제의 전신인 동위(東魏) 실권자 고징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징이 보낸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패한 끝에 양나라로 망명한 후경이 무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 건강 부근에서만 10여만 명이 동조할 정도였다.  

 

소씨(蕭氏) 황족이 서로를 견제하는 틈을 타 건강성을 함락한 후경은 무제를 유폐했다. 후경은 한(漢)을 세웠으나 광둥에서 봉기한 진패선에게 멸망당했다. 진패선은 557년 자신이 옹립한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陳)을 세웠다.  

 

大혼란의 끝이 보이다

/란저우의 황하 상류.[동아일보]

 

동진-송-제-양-진으로 이어진 강남의 왕조들은 문벌 귀족사회였으며 북조에 비해 경제력은 월등했으나 정치체제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강남, 화북 간 군사력 격차는 인구의 차이에서도 비롯했으나, 선비족이 지배하는 북방과 한족이 주력을 이룬 남방 간 조직력과 전투력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취약한 군사력에도 강남 왕조들이 상당 기간 유지된 데는 유연과 돌궐, 고구려 같은 북방 국가가 북위, 북제, 북주 등 화북 왕조의 배후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화북을 통일한 탁발선비는 지배 민족인 선비족과 피지배 민족인 한족 간 갈등을 해소해야 했다. 북연(北燕) 출신 풍태후(馮太后)의 지원을 받아 즉위한 효문제 탁발굉은 정치체제의 안정을 위해 선비족의 한화(漢化)를 추진했다.   

 

효문제는 493년 풍태후의 간섭도 피할 겸 수도를 산시성 북부 평성(다퉁)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그는 조정에서 선비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호·한 모든 가문의 격을 정하는 성족상정(姓族詳定) 조치를 취했다. 황족의 성 ‘탁발’도 한족 식(式)인 ‘원(元)’으로 바꾸었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은 탁발선비가 비극의 운명을 맞는 것으로 끝났다. 뤄양으로 수도를 옮긴 지 2년 만인 495년 선비족 귀족 목태의 반란이 일어났다. 524년에는 북위 최초의 근거지인 내몽골 성락(후오하오터)에 위치한 옥야진(沃野鎭) 소속 병사 파락한발릉의 주동으로 이른바 ‘육진의 난’이 일어났다. 육진은 내몽골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옥야진, 무천진(武川鎭), 회삭진(懷朔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회황진(懷荒鎭)을 말한다. 

 

육진의 진민(鎭民)은 원래 ①직업으로는 군인 ②사회적으로는 귀족 ③종족적으로는 선비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진민은 낙양 천도 30년이 지난 후 북위 조정으로부터 버림받아 천민화됐다. 병참 중심선이 북부 내몽골 전선에서 남부 화이허(淮河) 전선으로 전환되면서 이들에 대한 처우가 나날이 나빠졌다.  

 

진민의 반란이 육진 전체로 확산돼 북위 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한족을 어떻게 통치할지를 두고 일어난 내부 갈등은 탁발선비가 세운 제국(북위)의 분열이라는 역류를 부르며, 화북을 혼란으로 몰고 갔으나 이 혼란은 새 공동체인 호한체제(胡漢體制)로의 전환 과정이었으며, 1월호에 소개한 ‘영가의 난’과 같은 아수라장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실기

/중국 섬서성 장회태자묘 벽화를 재구성한 그림. 고구려 사신(오른쪽 두번째)이 조우관을 쓰고 있다. [뉴시스]

 

북주와 수·당을 창업하는 무천진 군벌의 싹이 이즈음 돋아났다. 온갖 나라 이름이 등장하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게 혼란스러웠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이다. 무천진 진민 중에는 북주를 세우는 우문씨(宇文氏), 수(隋)를 세우는 보륙여씨(普六茹氏), 당(唐)을 세우는 대야씨(大野氏)가 포함돼 있었다. 이들이 수·당 지배계층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을 형성한다. 

 

육진 반란군은 산시의 이주흉노(爾朱匈奴) 수장 이주영(爾朱榮)이 이끄는 북위 관군과 북위군을 지원한 유연군에 패배했다. 519~559년 40년 동안 화북에서는 북위 황실 금군의 난(519), 육진의 난(524), 막절염생의 난(527), 갈영의 난과 하음학살(528), 동·서위 분열(535), 북주·북제 간 전쟁 등 극도의 혼란이 되풀이됐다.  

 

중국의 혼란이라는 호기(好機)에 고구려가 랴오시와 허베이(유주와 기주)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한 것은 고구려 또한 안장왕-안원왕-양원왕 시대(519~559)의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고구려가 화북 정세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의 결과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이다. 

 

회삭진 출신으로 한때 하륙혼(賀六渾)으로 불린 고환(496~547)은 처음에는 이주영을 받들었으나 곧 허베이의 중심 업성에서 자립하고, 관둥(허베이, 산둥 지방을 의미)의 한족 호족들과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하음학살(이주영이 북위의 실력자 호태후와 한족 대신 등을 황하에 수장시킨 사건) 이후 한족 호족 모두 이주씨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고환은 531년 군사기지 진양으로부터 추격해 온 이주조의 군대를 업성 근교에서 격파한 후 업성에 승상부를 설치했으며, 효무제를 원수(元脩)로 추대했다. 고환과 사이가 나빠진 원수는 535년 장안의 우문태에게 도망쳤다. 고환은 원수를 추격했으나 잡지 못하자 원선견(효정제)을 옹립했다. 이로써 동위(535~550)가 성립됐다. 우문태는 원수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독살하고, 원보거를 옹립해 서위(535~556)를 세웠다. 동·서위는 각기 북제와 북주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쾌도난마(快刀亂麻)의 주인공인 고양이 동위를 빼앗아 세운 북제는 선비족과 한족, 돌궐족 등이 뒤섞인 나라였다. 곡률씨(斛律氏)는 북제 군부에 크나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곡률광의 아버지 대장군 곡률금(斛律金)이 한어(漢語)로 번역한 돌궐 노래 ‘칙륵가(勅勒歌)’를 소개한다.  

 

勅勒川 陰山下 (돌궐강 음산 아래)    

天似穹廬 籠蓋四野 (하늘은 마치 천막처럼 사방의 들판을 덮고)     

天蒼蒼 野茫茫 (하늘은 짙푸르고 들판은 가없이 넓네) 

風吹草低 見牛羊 (바람 불어 풀이 눕는데, 아아 멀리 소떼, 양떼가 보이네) 

 

세계제국 唐의 뿌리

북위의 실력자 이주영은 산시(관중) 반란 진압을 위해 일족 이주천광을 파견했는데, 무천진 출신 하발악(賀拔岳)이 이주천광의 부장으로 산시에 부임했다. 북주를 세우는 우문태(505~556)를 비롯한 무천진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하발악을 따라 종군했다. 하발악이 고환의 사주를 받은 후막진열(侯莫陳悅)에게 암살당한 후 동료 장군들의 추대를 받은 우문태는 스스로 새 질서를 만들어내기로 결심했다.  

 

우문태는 위무제(魏武帝) 조조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그가 태동시킨 호한체제(胡漢體制)가 세계제국 당(唐)을 탄생시키고, 중국 문화의 동아시아화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서위의 실권을 장악한 우문태는 소작 등 한족 유학자를 등용해 행정제도를 일신했다. 우문태는 543년 동위군과의 뤄양 북망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동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선비족 병력을 보충하려면 한족 장정을 징집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8주국(柱國) 12대장군(大將軍) 아래에 의동부(儀同府)를 두어 한족 장정 징집을 담당하게 했다. 선비족 고급장교들이 한족 하급장교와 병사를 지휘하는 체제였다.  

 

돌궐, 모술로 진출하다

/중국 랴오닝성에 위치한 고구려 최강의 요새 백암성 북쪽 성벽. [뉴시스]

 

이렇듯 서위에서 시작해 북주와 수나라를 거쳐 완성된 부병제는 토지를 기반으로 했으며, 우리의 할아버지 나라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대규모 전쟁에서 연거푸 졌음에도 국력을 회복한 이면에 부병제가 있었다. 

 

우문태는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부제를 만들었다. 이 6부제는 한국과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에 전파돼 1300년 넘게 지속됐다. 우문태는 선비족 성씨 회복 조치도 시행했다. 한족성(漢族姓)을 원래의 선비성(鮮卑姓)으로 환원한 것이다. 우문태는 이 같은 조치를 통해 관중의 사회 질서를 개편해 우문씨에 충성하는 귀족집단을 만들어냈다. 

 

우문태는 군사 측면에서도 뛰어났다. 병력이 상대적으로 작은 군대를 갖고 동위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강남의 양(梁)으로부터 파촉과 한수(漢水) 북부 상양(襄陽)을 빼앗았으며, 괴뢰국 후량(後梁)을 세우는 등 서위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우문태는 534년 북제와 유연의 침략을 방비하고자 돌궐의 수장 부민(土門) 가한과 제휴했으며 유연은 아나궤 가한과 그의 삼촌 바라문의 충돌로 크게 약화됐다. 550년경 서위-돌궐 연합군이 유연군을 격파했으며 아나궤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나라를 잃은 2만여 유연인은 6세기 중엽 아랄해와 카스피해를 거쳐 남러시아 평원으로 진출해 이란계, 투르크계 부족을 규합해 아바르(Avar)를 세웠다. 아바르는 코카서스로 진출했으며 게르만계와 슬라브계 부족을 통합해 다민족 연합국가로 재탄생했다. 아바르는 592년, 619년, 626년 3차례에 걸쳐 단독 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함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했다. 아바르의 전성기는 592년 바얀 가한이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후 남진해 콘스탄티노플 입구에 진입했을 때다. 

 

564년 서위를 계승한 북주는 돌궐과 함께 동위를 계승한 북제를 공격해 군사 요충지 진양을 약탈했다. 부민의 아들 무한(木汗) 가한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연합해 타지키스탄 바다흐샨 고원의 에프탈(백훈)을 멸망시키는 등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했다. 무한 시대에 돌궐은 랴오허~아랄해를 영토로 하는 유라시아 최강국이 됐다. 572년 거행된 무한의 장례식에는 북주, 북제, 티베트, 비잔틴, 아바르, 거란, 고구려 등 동·서 여러 나라 사절이 조문했다. 무한의 뒤를 이은 타파르(他鉢) 가한이 북제와 북주를 ‘효성스러운 두 아들’이라고 칭할 만큼 돌궐은 전성기를 이어갔다. 

 

닮은꼴 우문호, 시진핑

/수나라의 문제 [위키피디아] 

 

돌궐은 타파르 가한 이후 동족상잔 끝에 582년 톈산을 경계로 동·서로 분열했다. 서돌궐 일부는 서천(西遷)해 7세기 볼가 강 유역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국교로 하는 하자르(Khazar)를 세웠다. 하자르는 사라센 제국의 북진을 저지해 기독교 세계를 지켜냈다. 652년 하자르군이 카스피 해 연안 다르반드 전투에서 사라센군을 격파했으며 722~737년에는 하자르 기병대가 다르반드 관문을 돌파해 사라센 영토로 쳐들어가 모술(이라크 북부)과 디야르바키르(터키 남동부)까지 진격했다.    

 

우문태의 조카 우문호는 우문태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지 2개월 후인 557년 서위 공제(恭帝)가 우문태의 아들이자 사촌동생인 우문각에게 선위하게 해 북주를 개국했다. 우문호는 16년간 집권하면서 1대 우문각, 2대 우문육 등의 황제를 세운 동시에 폐살(廢殺)한 제1의 권력자였다.   

 

우문호는 572년 무제 우문옹에게 제거당할 때까지 독고신, 을불귀, 보륙여충(수나라 문제 양견의 아버지) 등 숙장(宿將·늙고 공로가 많은 장수)을 살해하는 등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우문태가 구축한 집단지도체제로는 국가의 지속적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권력 집중을 시도하는 이유도 우문호의 전례와 비슷하다. 미국, 일본과의 대결에서 중국이 힘을 발휘하려면 권력집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우문호는 돌궐과 연합해 북제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우문옹은 이를 기회로 삼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우문호를 살해하고 친정을 시작했다. 576년 우문옹이 지휘하는 북주군이 요충지 진양으로 쳐들어갔다. 북제 황제 고위는 총비(寵妃) 풍소련을 옆에 끼고 독전했으나 진양은 함락됐다. 북주가 퍼뜨린 참요에 속아 곡률광 일족을 살해한 후과였다.

 

나제 동맹의 한강 진출

고위는 패배한 군대를 버려두고 타이항(太行)산맥을 넘어 업성으로 도주했으나 생포돼 처형당했다. 북제 유성(다링허 유역 소재) 성주 고보녕은 나라가 멸망했는데도 투항을 거부했다. 북주군이 고보녕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랴오시(遼西) 배산 전투에서 고보녕을 지원한 온달의 고구려군에 패퇴했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은 당시 고구려에 복속된 지 얼마 안 된 유목부족 출신으로 파악된다.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한 유연이 돌궐에 밀려 약화하면서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랴오허-시라무렌 강 방면)에 긴장이 고조됐다. 고구려의 내정 혼란이 이어졌으며 돌궐의 동진으로 인해 고구려의 군사력이 서북방에 집중된 틈을 타 신라는 낙동강 우안의 가야를 공격하고 난 다음 백제와 함께 고구려 영토이던 한강 유역을 점령했다. 

 

신라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가야 유민을 충주와 단양 등 남한강 유역으로 사민(徙民·지배집단이 피지배집단의 주거지를 강제로 옮기는 것)시켜 전투 및 보급 부대로 이용했다. 진흥왕은 김거칠부(金居柒夫)에게 군사를 줘 동해안을 따라 북진해 함경도 원산과 함흥, 흥남 일대 고구려의 10여 개 군을 빼앗았으며, 568년 개마고원으로 넘어가는 황초령과 마운령에 척경비(拓境碑)를 세웠다.  

 

고구려는 519년 안장왕 즉위 이후 국내성, 평양성 세력 간 갈등이 격화돼 내전에 돌입했으며 돌궐과 신라, 백제는 고구려의 국경을 호시탐탐 노렸다. 531년 안장왕이 시해되고 그의 아우 안원왕이 즉위했다. 안원왕도 545년 벌어진 추군(麤君), 세군(細君) 세력 간 왕권쟁탈전 와중에 살해됐다. 왕권쟁탈전에서 승리한 추군 세력은 양원왕을 즉위시키고, 세군 세력 2000여 명을 처형했다. 양원왕 시대에도 고구려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북제 문선제 고양은 552년 양원왕에게 사신을 보내 전쟁 때 고구려로 흘러들어간 유연계(柔然係) 주민을 송환하라고 압박했는데, 양원왕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유연인 5000여 명을 돌려줬다. 고구려는 553년 신라, 백제 간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와 백제가 서로 싸우는 틈을 이용해 주력을 서부 국경에 집중하면서 돌궐의 침공에 대응했다. 관산성 전투 2년 전인 551년 양원왕은 장군 고흘(高紇)을 파견해 시라무렌 강 유역으로 침공한 돌궐군을 물리치고 1000여 명을 참수했으나 이후 돌궐은 더욱 강성해져 555년경 거란을 포함한 시라무렌 강 유역 유목 부족 모두를 합병했다.  

 

06월호

■ 행성<行星> 거느린 항성<恒星> 고구려 132만 수나라 대군 무찌르다

수나라 육군은 을지문덕에게, 해군은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에게 대패했다.

고구려 정벌 실패로 수나라는 멸망했다. 삼국사기에 ‘가족 배경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힌 을지문덕은 어느 종족 출신일까. 선비계일까, 퉁구스계일까.

/중국 지린성 지안현 고구려 개마무사 벽화 모사도.[국립중앙박물관]

 

선비족 우문태(宇文泰)가 세운 북주(北周)는 삼국시대 위(魏)와 비슷한 형태로 멸망했다. 우문태는 정치·행정·군사적 재능을 포함한 여러 측면에서 조조(曹操)를 닮았다. 위나라가 권신 사마씨(氏) 일가에게 나라를 빼앗겼듯 북주도 권신 양견(양견은 동한 재상 양진의 후예라면서 보륙여씨에서 양씨로 성을 바꿨다) 일가에 의해 나라를 잃었다. 위나라가 촉나라를 멸했듯 북주도 북제를 멸했으며 위나라를 대체한 서진(西晉)이 강남의 오(吳)를 멸하고 중국을 일시적으로 통일한 것과 마찬가지로 북주를 대체한 수(隋)도 강남의 진(陳)을 멸해 중국을 통일했다. 서진이 30여 년 만에 멸망했듯 수나라도 30여 년 만에 멸망했다. 그만큼 위-서진과 북주-수는 유사한 점이 많다. 위-서진이 한족 왕조인 반면 북주-수는 선비족 왕조라는 점은 다르다.   

 

30대에 요절한 화북 통일의 영웅 무제 우문옹을 계승한 선제 우문윤은 폭군이었다. 580년 우문윤이 22세에 급서하자 양견은 외손자인 유소년 황제 우문천을 대신해 실권을 장악했다. 유방(劉昉)을 포함한 관중(陝西·산시)의 한족 호족(豪族)들이 우문윤의 유조(遺詔)라고 속이고 양견을 승상으로 밀어 올렸다. 양견이 반대파 숙청을 시작하자 황실 우문씨의 인척인 울지형(尉遲逈)이 북제의 수도이던 업(鄴)에서 봉기했다. 후베이 총관 사마소난(司馬消難)과 쓰촨 총관 왕겸(王謙) 등 유력자가 동조해 한때 국가의 절반이 울지형에게 복속됐다.

 

맹수의 등에 올라타다

양견은 위효관을 기용해 봉기군을 제압했다. 울지형은 580년 9월 토벌군에 패해 자결했다. 봉기를 평정하자 양견의 아내 독고씨(獨孤氏)는 양견에게 제위(帝位)를 차지하라고 종용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된바, 이미 맹수의 등에 올라탄 것과 같으니, 여기서 내릴 수 없습니다(大事已然, 騎獸之勢, 必不得下).” 여기에서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말이 나왔다.

 

양견은 그해 12월 수왕(隨王)에 책봉됐으며 이듬해(581년) 제위에 올랐다. 그는 수(隨)에서 급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착(辶)’을 빼고, 새로 만든 글자 수(隋)를 국호로 정했다. 

 

양견은 우문천을 포함한 우문씨 일족을 이 잡듯 뒤져 모조리 죽였다. 우문씨는 인맥과 혼맥이 중첩된 무천진 군벌의 핵심이었다. 무천진 출신으로 북주 황실과 인척 관계인 대신, 장군이 많았다. 양견 일족은 무천진 출신 주국(柱國)과 대장군 집단으로부터 고립됐다. 훗날 당고조(唐高祖)가 되는 이연(李淵)의 처 두씨(竇氏)는 어릴 적 외삼촌인 무제 우문옹에 의해 양육됐는데, 문제가 우문씨 황족을 학살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자로 태어나 우문씨 집안을 구해주지 못해 한스럽다”고 통곡했다.  

 

양견은 무천진 집단을 대신할 지지 세력을 만들고자 과거제도를 도입해 군벌의 약화, 황권의 강화를 가져왔다. 또한 그는 율(형법)·령(행정법)·격(행정명령)·식(시행세칙)을 다듬었으며, 균전제에 기초한 부병제, 조·용·조(租庸調)라는 세(稅)·역(役) 체계, 지방행정 체계도 발전시켰다. 

 

양견의 개혁으로 재정이 풍족해졌으며 군사력은 더욱 강해졌다. 양견은 585년경 돌궐을 신종(臣從·신하로서 따라 좇음)시켰으며, 587년 창강 중류 장링(江陵)을 수도로 하는 위성국 후량(後梁)을 병합했다. 588년에는 훗날 양제로 즉위하는 둘째 아들 양광(楊廣)과 대장군 양소(楊素)에게 52만 대군을 줘 진나라를 정벌케 했다. 589년 수나라군은 큰 저항 없이 진나라의 수도 건강(南京·난징)에 입성했다. 이로써 183년 황건군의 봉기로 분열된 지 무려 400년 만에 중국이 다시 완전히 통일됐다. 양견은 597년 장군 사만세(史萬歲)를 윈난(雲南·남만)에 파견해 찬씨(爨氏) 왕국을 토멸했다. 

 

북주가 수나라로 대체될 무렵 동·서 돌궐 간 갈등이 격화했다. 부민 가한의 동생 이스테미(室點密)를 계승한 서돌궐의 타르두 야브구(가한 다음의 제2인자를 뜻한다)는 동돌궐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외몽골 오르콘 강 유역을 근거로 하던 동돌궐과 키르기스의 탈라스 강 유역에 자리 잡은 서돌궐 사이의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했다.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의 2017년 12월.[REX]

 

돌궐의 동·서 분열

동돌궐 타파르 가한은 양견이 북주를 찬탈한 581년 사망했다. 가한의 자리를 두고 타파르의 동생 다로빈과 아들 안로가 분쟁을 벌였다. 타파르는 다로빈을 가한으로 지명했으나, 돌궐 의회(Toy)는 다로빈의 생모가 돌궐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로빈의 가한 계승을 거부했다. 장로들이 안로를 후계자로 지명하자 이번에는 다로빈이 안로의 가한 계승을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안로는 삼촌 이쉬바라(沙鉢略)에게 양보하고 제2 가한 칭호에 만족한 채 정치에서 물러났다. 가한이 된 이쉬바라는 다로빈에게도 아파 가한이라는 칭호를 줘 내정의 안정을 기하고자 했다.  

 

양견은 강남의 진(陳)을 정벌하려면 먼저 북방의 돌궐 세력을 꺾어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양견은 서돌궐의 타르두에게 접근해 그를 돌궐 가한으로 칭하고 동돌궐 이쉬바라 가한에 대항하는 동맹을 모색했다. 이쉬바라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양견은 583년 양상(楊爽)을 총관으로 하는 대군을 동원해 동돌궐군을 격파했다. 유주총관 음수(陰壽)는 보기(步騎) 수만을 이끌고 유주의 호용새(虎龍塞)로 나가 북제의 유장(遺將)으로 다링허 중류 유성(柳城)을 근거로 하던 고보녕을 격파했다.  

 

장손성(長孫晟)은 이쉬바라 가한과 갈등하던 다로빈을 꾀어 수나라에 항복시켰다. 이쉬바라는 다로빈이 수나라에 항복하자 군대를 보내 다로빈의 근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 다로빈은 서돌궐로 도망해 타르두와 함께 이쉬바라를 공격했다. 타르두는 582년 이쉬바라의 가한 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돌궐은 동·서로 완전 분열했다. 내전 끝에 타르두에게 패한 이쉬바라는 584년 수나라에 항복하고, 칭신(稱臣·스스로 신하라고 자처함)했다.  

 

수나라는 이로써 마음 놓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됐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인 601년 서돌궐의 타르두가 대군을 이끌고 장안을 위협했으나, 장손성이 격퇴했다. 서돌궐은 603년 철륵부족의 반란을 계기로 분열했으며, 타르두는 근거지를 모두 잃고 칭하이(靑海) 지역으로 도주하다가 자결했다. 툴란(都藍)에 이어 동돌궐 가한이 된 계민(돌리)은 서돌궐의 공격이 계속되자 부족을 이끌고 수나라에 투항했다. 

 

-고구려-동돌궐 ‘힘의 균형’

당시 롼허-다링허-랴오허로 이어지는 랴오시-내몽골 동남부 일대는 수, 고구려, 거란·해(奚), 돌궐 등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수나라는 거란족·해족을 영향권 내에 끌어들이는 등 랴오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돌궐뿐 아니라 고구려도 위축됐다. 

 

돌궐이 동·서로 분열(582년)된 후 동돌궐의 이쉬바라 가한은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했다. 고구려와 동돌궐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자 수나라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협조 체제를 유지했다. 그 결과 수-고구려-동돌궐 간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유지돼 고구려에 대한 수나라의 위협도 줄어들었다.  

 

고구려는 평원왕(559~589) 시기에 국내성, 평양성 세력 간 벌인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력을 회복했다. 중국이 북제·북주로 분열해 있던 때다. 평원왕을 계승한 영양왕(589~617)은 수나라에 공세적으로 대응했다. 양광, 즉 양제(煬帝·605~616)가 즉위한 다음에도 고구려와 수는 한 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607년 8월 양제가 계민 가한의 장막에서 고구려 사신과 조우한 것을 계기로 고구려와 수나라 간 갈등이 고조됐다. 

 

고구려 사신과 조우한 양제는 우홍(牛弘)으로 하여금 고구려 사신에게 영양왕의 입조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정벌도 불사하겠다고 위협케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협박을 무시하고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다. 이를 전후해 속말 말갈 추장 돌지계(훗날 신라에 쳐들어온 이근행의 아버지)가 무리를 이끌고 수나라에 투항했다. 거란 출복 부족도 수나라에 투항했다. 고구려는 더 이상 수나라의 팽창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598년 2월 영양왕은 1만여 말갈 기병을 지휘해 요충지 영주(랴오닝성 차오양)를 공격했다.  

 

이에 맞서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수나라군 외에 돌궐, 거란·해, 물길, 고창(高昌) 등 외국군도 전쟁에 동원됐다. 양제가 군사적 모험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문제(양견) 이후 수나라의 경제력, 군사력이 급속히 팽창한 덕분이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 투입할 행정 능력을 갖춘 게 국력 상승의 뒷배가 됐다. 호적에서 누락됐던 호구를 등재해 이전 통계로는 40만 명에 불과하던 장정 수가 200만 명까지 증가했다.  호구 수 증가에 따라 조세 수입도 급증세를 보였다. 호구 수는 문제 초기 400만 호에서 진나라의 64만 호를 흡수함으로써 464만 호에 이르렀다.

 

호구 수는 양제 즉위 초 다시 890만 호로 급증했다. 890만 호는 당 현종 시기 900만 호를 돌파하기까지 수-당대 최대 호구였다. 수나라는 진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강력한 강남 해군도 손에 넣었다. 양제는 610년 해군력 증강의 성과를 시험해보고자 류큐(오키나와)를 침공해 7000명을 사로잡았다.

 

백제 무왕은 이 같은 대륙의 정세 변화를 읽고 사신 국지모(國智牟)를 파견해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백제는 그간 고구려와 수나라를 놓고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을지문덕 장군 영정.[연합뉴스]

 

백제 무왕, 수나라에 협력하다

612년 1월 수나라의 제2차 고구려 침공 시 원정군 규모는 우문술(宇文述)이 지휘한 좌군 52만8000명, 우중문(于仲文)이 인솔한 우군 52만8000명, 양제가 지휘한 중군 26만4000명 등 총 132만 명에 달했다.

 

수나라 육군 집결지인 베이징 부근 탁군에 모여 출정을 하는 데만 40일이 걸렸으며, 랴오허 유역 고구려 국경까지의 행군 길이는 430㎞에 달했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칠 때 동원한 병력이 52만 명인데, 고구려 정벌 때는 그 두 배가 넘는 병력(132만 명)을 동원한 것이다.  

 

수나라는 왜 고구려 정벌에 전력을 기울였을까. 다음 3가지가 원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수나라 지도부의 팽창 욕망이다. 선비족 군벌국가인 수나라는 정복국가였다. 수나라는 선비족이 한족을 정복하고, 한족에 동화돼 만들어진 나라다. 311년 남흉노 유총에 의한 ‘영가의 난’ 이후 역대 중국 왕조는 589년 수가 진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250년 동안 계속된 내전과 고구려, 유연(柔然), 돌궐의 위협으로 인해 팽창해나갈 수 없었다. 이제 통일은 달성되고, 급증한 인구로 인해 힘은 넘쳐났다.  

 

남은 것은 랴오허 이동 고구려밖에 없었다. 당시 고구려인은 미천왕, 광개토왕, 장수왕 등의 영토 확장으로 사기가 높았으며 사해(四海), 천손(天孫), 천문도(天文圖)로 상징되는 독자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는 또한 백제, 신라, 거란·해, 지두우, 물길, 두막루, 실위 등 행성(行星)을 거느린 항성(恒星)으로 자부했다. 수나라는 만주-한반도에 별도의 질서가 남아 있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둘째, 수나라군은 북위군→서위군→북주군의 전통을 이은 강군으로 577년 북제를 멸망시키고, 584년 돌궐의 무릎을 꿇렸으며, 589년 진나라를 정복하고, 609년 칭하이에 자리한 모용선비의 나라 토욕혼을 굴복시켰다. 당시 수나라군은 선비족 육군과 강남 한족의 수군을 통합해 명실 공히 전략군으로 발전했다.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수나라군은 야전과 공성전, 해군을 동원한 합동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자신감이 넘쳤다. 돌궐과 토욕혼의 굴복으로 수나라의 배후는 비교적 안전하던 반면, 고구려는 평원왕 시대 이후의 적극적 남진 정책으로 적대관계에 들어간 백제와 신라에 배후를 찔릴 가능성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울치(Ulchi)?

셋째, 국내 정치적·지정학적·경제적 이유도 작용했다. 북주 찬탈, 진나라 정복, 돌궐 정벌 등에서 많은 공신이 탄생했다. 이들에게 땅을 배분하려면 고구려와 같은 나라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고구려를 정복하면, 한강 이남의 백제나 신라는 수나라 대군의 공세 앞에 단 3개월도 버티어낼 수 없을 것이기에 고구려 확보는 곧 랴오허 이동 만주와 한반도 모두를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구려는 대동강과 랴오허, 쑹화강 유역의 농산물과 북만주 평원의 삼림 자원에서 나오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군을 보유한 동아시아 제2의 강국이었다. 

 

수나라 해군은 육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내호아가 지휘한 해군은 산둥반도 라이저우(萊州)를 떠나 미산열도(眉山列島)를 따라 동북진해 랴오둥 반도로 나아갔다. 수나라 해군은 고구려 해군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랴오둥 반도 동쪽 해안을 따라 계속 노를 저어 압록강 하구에서 남으로 진로를 바꿔 대동강 하구로 항진했다. 수나라 해군이 사용한 항로는 중국과 한반도 사이를 왕래하는 선박이 전통적으로 이용한 경로다. 이 항로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 간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 북방의 민족들은 말타기를 즐겼다.[뉴시스]

 

피비린내 축록전…당()을 세우다 

수나라 육군은 을지문덕(乙支文德·현대 중국어 발음 Yizhi Wende)에게, 해군은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에게 대패했다. 고구려 정벌 실패로 수나라는 멸망했다. 최소 50만~60만 명의 병사가 죽어나간 제2차 고구려 원정 실패로 수나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50만~60만 명을 현대 중국 14억 인구와 비교하면 1400만 명이라는 수가 나온다. 이 정도 수의 젊은이가 죽어나간 판에 무너지지 않을 나라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고구려를 구한 을지문덕과 비슷한 시대를 산 인물 중 당나라 장군 울지경덕(蔚遲敬德·Yuchi Jingde)이 있다. 조금 앞선 북위(北魏) 시대에는 물길(勿吉) 사신 을력지(乙力支·Yilizhi)가, 북주 시대에는 울지형(蔚遲逈·Yuchi Jiong)이라는 인물도 있다. 북방민족의 성은 한자로 음차(音借)해 표기한다. 울지 씨는 선비족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가족 배경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힌 을지문덕은 어느 종족 출신일까. 러시아의 우수리-아무르 강 유역에 ‘울치(Ulchi)’라는, 우리와 유전적으로 가깝고 곰을 토템으로 하는 퉁구스계 종족이 살고 있다. 을력지는 물길, 즉 울치족과 같은 퉁구스계로 보인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선비계일까 퉁구스계일까. 

 

양제는 재위 10년 동안 고구려 정벌, 대운하 공사, 양저우(揚州)의 미루(迷樓) 건설 등으로 국고를 탕진했다. 결국 양제는 618년 양저우에서 최측근 우문술(宇文述)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 우문지급(宇文智及)이 주도한 쿠데타군에 교살(絞殺)당했다.  

 

양제가 죽은 후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동돌궐 시비 가한은 이 틈을 타 수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동돌궐은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에 몰두하던 615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나라 변경을 침공했다. 시비는 북벌을 단행 중이던 양제를 공격해 산시(山西) 안문(雁門)에서 양제를 포위하기도 했다. 양제는 시비에게 출가한 누이 의성공주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났다. 시비는 617년 수나라 황실에서 약탈한 재화를 갖고 도피해온 양사도(梁師道)를 중국가한(中國可汗)에 임명했다.  

 

양제의 이종사촌이자 대야호(大野虎)의 아들인 타이위안(晋陽·진양) 유수(留守) 이연(李淵)이 봉기해 618년 당(唐)나라를 세웠다. 이연은 아들 건성, 세민, 원길과 딸 평양공주 등과 함께 이밀(李密), 두건덕(竇建德), 왕세충(王世充), 소선(蕭銑), 유무주(劉武周) 등 강력한 경쟁자를 모두 물리치고, 10여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축록전(逐鹿戰·사슴을 뒤쫓는 싸움이라는 뜻으로 제위나 정권 따위를 얻기 위한 다툼을 가리키는 말)에서 최종 승리했다. 

 

내전 시 당나라 군대는 둘 이상의 적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 이상의 적과 마주쳤을 때 한쪽은 포위해두고, 다른 쪽을 공격해야 다소라도 승리할 공산이 있다. 훗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은 수비를 위주로 하다가 적군의 보급로를 끊고 한꺼번에 몰아치는 전술을 주로 구사했다. 이세민은 설인고, 유무주·송금강, 왕세충·두건덕 격파 시에도 비슷한 전술을 사용했다. 

/삼국사기.[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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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小利)와 대국(大局)

수비를 위주로 하다가 일순간에 적을 몰아쳐 승리한 사례는 이세민 외에도 많다. 칭기즈칸의 부하 수부타이가 지휘한 몽골군의 헝가리 침공, 금나라 태조 아쿠타의 요나라 공격, 서한(西漢) 오초(吳楚) 7국의 난 진압 시 대장군 주아부가 오왕 유비(劉濞)를 격파한 것, 유계(유방)가 항적(항우)을 격파한 것, 전국시대 진나라 장군 백기가 조나라 장군 조괄을 상대한 장평대전 등이 모두 수비를 위주로 하다가 보급 문제 등 적이 허점을 보인 순간을 노려 일거에 몰아치는 방법으로 승리한 전쟁이었다.  

 

이세민은 산시(山西) 일대의 군웅 유무주, 송금강, 울지경덕 등을 보급로를 끊는 방법으로 격파했다. 주로 방어만 하면서 교전을 피하고, 길어진 보급로만 집요하게 공격했다. 산시를 확보한 이세민은 왕세충이 지배하던 뤄양성을 포함한 허난을 노렸다. 이세민은 치열한 전투 끝에 왕세충군을 격파하고 뤄양성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적의 항복만 기다리면 되는 순간, 허베이의 군웅 두건덕이 왕세충을 구하고자 뤄양으로 진군해 왔다. 두건덕의 병력은 무려 10만이나 됐다. 뤄양성의 왕세충을 포위한 3만여 이세민군은 앞뒤로 적을 맞아 포위될 우려가 있었다. 이세민은 병력을 둘로 나누는 모험을 감행했다. 일부 병력을 부하에게 맡겨 뤄양성을 계속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으로 두건덕을 막기로 한 것이다. 이세민은 우선 뤄양 부근의 요충지 호뢰관(虎牢關)에 들어가 버텼다. 1개월을 인내한 이세민군은 두건덕의 10만 대군이 방심한 틈을 타 폭풍같이 밀고 나가 적의 절반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포로 중에는 두건덕도 포함돼 있었다. 

 

이연이 축록전을 승리로 이끈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거지이던 산시(山西)성 타이위안에서 산시(陝西)성 장안을 곧바로 공략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술·전략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장안 탈취는 ‘관중에 들어앉아 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해 세력을 키우고, 물고기를 낚듯이 정권을 공고히 하다가 기회를 엿보아 천하를 통일한다’는 전략의 첫번째 발자국이었다. 타이위안은 훗날 5대 10국 시대 사타돌궐(沙陀突厥) 출신 유숭이 세운 북한(北漢)의 수도가 되는 곳으로 할거하기는 쉬운 땅이지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할 거점은 될 수 없는 곳이다. 

 

둘째, 지도자 이연은 포용력이 큰 인물이었다. 이연의 포용력은 당시 최대 세력을 가졌던 이밀(李密)의 경계를 피해 장안에 입성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셋째, 이밀과 왕세충 등 경쟁자들이 뤄양 근처의 식량 창고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리(小利)에 어두워 대국(大局)을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연은 우수한 인적자원이 몰려 있던 관중(陝西·산시)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수많은 아이와 여자들이 비참하게 죽어나가고, 지독한 기근으로 인해 인육(人肉)까지 먹어야 했던 10년 내전이 지나갔다. 수-당 교체기는 잔인과 비극의 시대였다.   

/수나라 양제.[위키피디아]

 

이세민, 천가한(天可汗)에 오르다

시비 통치 기간 중 동돌궐은 일시적으로 타파르 가한 때의 국세를 회복했다. 그를 이은 실리(頡利)는 현실 안주 성향의 인물로 타르두스, 바이쿠, 위구르족의 반란과 거란의 이탈을 초래하는 등 동돌궐제국을 파멸로 몰아갔다.  

 

626년 7월 피 냄새 가득한 현무문(玄武門) 쿠데타를 통해 형 이건성, 동생 이원길과의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태종 이세민은 동돌궐을 굴복시켰다. 630년 2월 이세민 휘하의 장군 이정은 내몽골에서 실리의 군대를 격파하고, 동돌궐에 망명해 있던 양제의 황후 소씨(蕭氏)와 손자 양호(楊浩)를 찾아내 장안으로 압송했다. 이정은 동돌궐군을 추격해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10만여 명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정은 시비 가한의 황후이던 의성공주를 잡아 죽이고, 실리마저 사로잡아 개선했다. 양견의 북제 황족 우문씨 학살이 양씨 일족에게 고스란히 되돌아 온 것이다.  

 

태종은 새외민족(塞外民族)에 의해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됐으며 유목과 농경 2개 세계를 망라한 통합 수장 자리에 올랐다. 혈연적으로 선비족인 태종 이세민이 황제와 천가한을 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나라는 태종을 이은 고종 시대에 신라와 연합해 백제-왜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8월 호

■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불꽃이 하늘을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됐다”

1) 663 8월 백제-왜 연합해군이 중국과 한반도, 일본 세력이 모두 관여한 동북아 최초의 국제해전에서 대패했다. 백제와 왜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처럼 백제를 세운 부여계가 왜의 건국에 관여했다가 웅진 시대를 전후해 왜가 백제보다 더 강대해져 거꾸로 왜가 백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백강 대해전은 660년 황산벌 전투 3년 후 발발했다. 사진은 영화 ‘황산벌’ 스틸컷.

 

고구려가 수·당 교체기(615~625)를 틈타 4세기 모용선비족의 전연·후연(前燕·後燕)처럼 화북으로 진출했다면 관동(허베이, 허난, 산둥, 산시 등)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베이는 고구려 영토와 접했고, 거란·해, 돌궐, 말갈 등 새외민족 수도 많았으며, 산둥반도는 랴오둥반도와 지척의 거리로 고구려 해군력으로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나 국제정세에 비춰볼 때 고구려는 전연·후연과 달리 점령지를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고구려는 후방이 튼튼하지 못하던 선비족과는 달리 랴오허-압록강-대동강-예성강 유역이라는 튼튼한 후방기지를 갖고 있었다.

 

고구려의 실기

그럼에도 고구려가 관동의 범위를 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수백만 명에 불과한 고구려인 중 화북 점령과 통치를 위해 상당수가 떠나면 본거지가 백제, 신라, 말갈 등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구려가 수(隋)와의 16년에 걸친 전쟁으로 고통받았고, 남쪽의 도전 세력인 신라에 대한 반격이 긴요했다 해도 수·당 교체기에 중국 내부 동향을 수수방관한 것은 큰 실책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전란에 개입해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중국 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고구려 △중국 △돌궐계 설연타(薛延陀) 등 몽골고원의 유목국가 간 정족지세(鼎足之勢)의 세력균형을 만들었어야 했다. 

 

영류왕(재위 618~642)을 비롯한 고구려 지도부는 중국에서 수십 년간 전란이 지속되거나 최소한 3, 4개 나라로 분열될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지나치게 소극적인 대(對)중국 정책은 당에 틈을 내줬으며, 도리어 고구려는 당의 분열정책에 놀아나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상잔(相殘)을 벌인 끝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630년 몽골고원에 자리한 동돌궐(東突厥)을 멸망시키고, 인근 북방민족 수장들로부터 농경-유목 2개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가진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되는 등 국력을 급속히 강화했으나 고구려는 수·당 교체기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동돌궐을 제압한 당나라가 압박해오자 631년 초가 돼서야 북부 부여성(扶餘城)에서 보하이만(渤海灣)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해 7월 당(唐)은 고구려가 조성해놓은 랴오시 경관(景觀)을 파괴했다. 경관은 고구려 침공전에서 전사한 수나라 병사의 해골을 모아 쌓은 것으로 일종의 전승탑이다. 고구려 지도부는 당의 도발에 긴장했으며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했다.  

 

멸망 위기 직면한 신라

/2010년 10월 2일 충남 논산시 논산천 둔치에서 열린 ‘황산벌전투재현’ 에서 백제5000결사대와 신라-당 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현되고 있다.[뉴시스]

 

의자왕은 642년 8월 부여윤충(扶餘允忠)에게 1만여 병력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합천)을 공략하게 했다. 대야성이 함락된 후 신라는 낙동강 우안(右岸) 영토 대부분을 백제에 빼앗기고, 낙동강 좌안(左岸) 압량주(경산)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압량주에서 수도 월성(경주)까지의 거리는 40~50㎞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는 고구려 전선에서도 밀려나 동해안 국경이 하슬라(강릉)까지 축소됐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 위기에 직면한 신라는 김춘추를 파견해 고구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김유신을 압량주 군사령관으로 임명해 전열을 재정비했다. 642년 가을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고구려 연개소문이 군사지원을 거부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매달렸다. 당나라는 태종이 직접 지휘한 645년 고구려 침공전에서 패배하자 신라를 이용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랴오허와 한강 2개의 전선에서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645년 나카노오에 왕자(덴지 천황)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 왜국(倭國)은 당나라를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大化 改新)’을 추진하면서 당나라의 동맹국 신라와 다소 가까워졌다. 압량주까지 후퇴하며 멸망의 위기에 몰린 신라의 김춘추가 직접 왜와 교섭했지만,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2) 백제, 황혼에 물들다

백제 지도부는 신라-당 동맹 구축 등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했다. 백제는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육군력 증강에 치중하느라 해군을 등한시했다. 660년 15만 대군을 실은 당나라 함대가 경기만(京畿灣)까지 남하해 덕물도(덕적도)에 20여 일이나 기항했는데도,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는 줄로만 알 정도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당나라군은 금강(錦江)을 타고 올라가 신라군과 합세해 사비(부여)와 웅진(공주)을 빼앗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고구려를 치는 것처럼 보이게 한강 유역으로 북진하다가 방향을 틀어 남하해 황산벌에서 부여계백(扶餘階伯)의 결사대를 격파하고, 사비와 웅진 공격전에 합세했다.  

 

백제에서는 곧 복국(復國) 운동이 일어났다. 백제 부흥군이 지원을 요청하자 왜는 당과 부흥군 사이에서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부흥군 지도자 귀실복신(鬼室福信)이 원병과 함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한 때가 660년 10월인데, 왜가 부여풍을 백제로 보낸 것은 거의 1년 뒤인 661년 9월이다. 왜는 결단을 내린 뒤에는 파격적으로 부흥군을 지원했다. 661년 천왕 사이메이(齊明)가 급서한 뒤 나카노오에가 즉위를 미루면서까지 부흥군 지원에 전력을 다할 정도였다. 왜는 662년 1월 화살 10만 개와 곡식 종자 3000석을 원조했으며, 2개월 뒤인 3월 피륙 300단을 추가로 보냈다. 왜가 백제 복국 지원에 나서기로 한 데는 662년 1월 연개소문이 평양 근교에서 당나라군 10만 명을 전멸시키고, 2월에는 평양 근교에 고립된 당장(唐將) 소정방이 신라군으로부터 군량 지원을 받은 후 간신히 퇴각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귀실복신이 지휘한 백제 부흥군은 사비성 주둔 당군을 포위할 만큼 기세를 올렸으나 전권을 장악한 귀실복신과 국왕 부여풍 간 갈등이 격화했으며, 663년 6월 부여풍은 귀실복신을 살해했다. 부여풍은 그해 8월 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추가 파병했으며 고구려는 신라의 변경을 공략했다.  

 

백제 부흥군 내부에 혼란이 일어났음을 파악한 신라는 서둘러 출병했다. 당은 웅진에 주둔하던 유인원(劉仁願)의 증병 요청에 따라 해군 7000명을 추가 파병했다. 당의 손인사와 유인원, 신라 문무왕이 이끄는 육군 및 당나라 두상과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함선에 나눠 탄 해군이 수륙 협공으로 부흥군의 수도 주류성(두루성)으로 진격했다. 육지에서는 부흥군 기병이 신라군과 맞섰으며, 바다에서는 왜에서 건너온 1000여 척의 함선이 백강(白江) 강변에 정박했다. 왜국 선단은 셋으로 나뉘어 당나라 해군을 공격했지만 간조(干潮) 시간차 등으로 인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네 번 모두 대패했다. 백강에 집결한 왜 함선 가운데 400척이 불탔다. 구당서와 신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모두 백강 해전에 대해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묘사한다. 

 

왜국 장수 에치노 다쿠쓰는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豪族)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는 당나라군에 잡혀 8년간 억류됐다가 귀국했다. 부여풍은 몇 사람만 거느린 채 고구려로 달아나고, 살아남은 왜군 함대는 흩어진 병사들과 백제 유민을 태우고 당나라군에 쫓기면서 간신히 귀국했다. 백강 대해전은 중국과 한반도, 일본 세력이 모두 관계된 동북아 최초의 해전이었다.  

 

연개소문家의 상잔

/연개소문.[위키피디아] 

 

백강 대해전을 끝으로 한반도와 왜(倭)의 관계가 일단락됐다. 백제와 왜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처럼 백제를 세운 부여계가 왜의 건국에 관여했다가 웅진 시대를 전후해 왜가 백제보다 더 강대해져 거꾸로 왜가 백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육지에서도 당군이 백제 부흥군을 제압하고 수도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임존성의 지수신(遲受信)을 제외한 부흥군 세력이 궤멸했다. 이때 사택상여와 흑치상지, 왜군, 탐라(耽羅) 사신 모두가 항복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왕족 및 귀족은 상당한 입지를 구축했다. 황실 방계인 이옹이 출세를 위해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태비(扶餘太妃)와 혼인할 정도였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인 대부분은 당의 정책에 따라 랴오허 유역 건안성으로 이주당해 발해의 서진(西進)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백제인들은 당나라에 의해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이용당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663년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고구려는 랴오허와 한강 유역 2개의 전선에서 적군을 막아야 했다. 고구려는 당이나 신라 등 외적이 아니라 연개소문 아들끼리 벌인 권력투쟁 여파로 몰락했다. 동생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했으며, 당나라 정복군 대장 이적(서세적)은 668년 연남생을 향도로 삼아 신라의 지원을 받아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했다.   

 

당나라는 국력에 비해 과도하게 팽창했다.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랴오허, 쑹화장(松花江)을 넘어 흑수말갈(黑水靺鞨)의 근거지 헤이룽장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여기에다 몽골고원의 설연타를 제압하고, 키르기즈와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길기트를 포함한 파키스탄 동북부로까지 세력을 뻗쳤다. 

 

당나라는 과도하게 팽창하면서 내외 모두의 저항에 부딪혔다. 과도한 전비 지출로 증세(增稅)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경제 중심지인 장화이(江淮)를 비롯한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거란과 발해의 공격에 대비해 설치된 허베이, 산시, 산둥 지역 절도사들의 할거는 당나라의 분열을 재촉했다. 티베트 고원의 토번, 만주의 발해, 윈난의 남조(南詔), 중앙아시아 사라센 압바스 왕조, 몽골 고원의 후돌궐(後突闕)의 저항은 제국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3) 티베트의 흥기

/대조영이 2000리를 행군해 도착한 후 도읍으로 정하고 진국(震國)을 선포한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지린성 둔화시 서남쪽 성산자촌의 동모산(東牟山). [뉴시스]

 

당(唐)의 강적은 서쪽에서 출현했다. 티베트 고원에서 흥기한 토번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해인 669년 가르첸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설인귀가 지휘한 당나라-토욕혼 10만 연합군을 청해호 남쪽의 다페이촨(大非川)에서 격파했으며, 여세를 몰아 신강의 안서 4진(安西四鎭) 즉, 카라샤르, 쿠차, 호탄, 카슈가르를 장악했다. 몽골고원의 돌궐이 부흥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독립했으며, 신라가 당군(唐軍)을 물리친 것도 다페이촨 전투에서 당나라가 토번에 대패했기 때문이다.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678년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칭하이호 부근의 칭펑링(承風嶺)에서 대파했는데, 이로써 칭하이의 티베트화가 공고해졌다.  

 

동돌궐이 멸망한 지 50여 년이 지난 679년 아쉬나(阿史那) 부족장 쿠틀룩(Qutluk)이 톤유쿡(Tonyukuk)과 함께 돌궐을 재건했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돌궐제국을 재건한 쿠틀룩은 당나라에 공세를 취해 허베이와 산시, 간쑤성 변경을 주기적으로 약탈했다. 쿠틀룩의 동생 카프간(默啜)도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계속해, 전돌궐(前突厥) 전성기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이때 고구려 유민 10만여 명도 돌궐에 합류했다. 그중 고문간(高文簡)은 카프간의 사위가 돼 ‘고려왕막리지(高麗王莫離支)’라고 칭했다. 이후 고문간과 고공의, 고정부 등이 이끄는 고구려인들은 쿠틀룩과 카프간 후손 간 내분이 일어나자 당나라에 항복했으며 내몽골에 정주했다. 

 

당나라가 신흥 토번과 후돌궐의 공격에 시달릴 때 랴오허 유역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잔존 세력이 거란족이 봉기한 기회를 이용해 부흥 운동에 나섰다. 처음에는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나중에는 대조영이 지휘한 고구려 별부(別部) 말갈계 중심의 부흥군은 고구려가 멸망한 30년 뒤인 698년 당나라 추격군을 격파하고 동모산성(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둔화시)을 중심으로 발해(渤海)를 세웠다. 걸걸중상(乞乞仲象)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걸걸(乞乞)’ 또는 ‘걸(乞)’은 우리말 ‘클(크다)’을 음차(音借)한 것이다. 대조영(大祚榮)과 대야발(大野勃)을 포함한 걸걸중상의 자손이 대씨(大氏)를 칭한 것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수도, 장안

/티베트 라싸 족항사원의 당-토번 평화조약기념비. 822년 두 나라는 평화조약을 맺었다.[위키피디아]

 

카프간의 아들 뵈귀(Innel)를 죽이고 가한 자리에 오른 쿠틀룩의 아들 빌게(716~734)는 725년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복속 부족의 반란을 평정하고 후돌궐을 안정시켰다. 빌게는 둘궐의 비스마르크로 알려진 톤유쿡을 시켜 당나라군을 간쑤 지역에서 대파하고, 하서회랑 지대를 유린했다. 후돌궐의 역사는 731년 사망한 빌게의 동생 퀼테긴(Kültegin)의 업적을 기린 오르콘 비문(Orkhon Inscription)에 잘 나타나 있다. 퀼테긴의 장례식에는 당나라, 거란, 티베트, 소그드, 부하라, 키르기스에서 온 조문 사절이 참석했다. 돌궐어와 한문으로 새겨진 톤유쿡 비문은 전돌궐(前突闕) 패망의 원인을 첫째, 쇠퇴기 지도자들의 태만과 무지. 둘째, 돌궐 백성의 어리석음과 동족 간 대립. 셋째, 돌궐 문화 포기와 중국화 추종. 넷째, 중국 왕조의 내부 분열책 등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돌궐을 약하게 만드는 불교와 도교 등 이질적인 종교를 받아들이지 말고 돌궐정신을 보존하자”는 말도 포함돼 있다.  

 

당나라는 한문화(漢文化)를 기본으로 했으나 황실이 선비족인 까닭에 선비적 요소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당나라 이씨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인 한족 왕조 서량(西涼) 이씨를 선조로 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는 북위(北魏) 무천진 선비족 출신 대야씨(大野氏)의 후손이다. 태종 이세민의 경우 어머니는 선비족 두씨(竇氏), 아내도 선비족 장손씨(長孫氏)다. 태종은 ‘현무문의 정변’에서 살해된 친동생 이원길의 아내 양씨를 후궁으로 들였으며, 고종은 아버지 태종의 후궁이던 무조(武照)를 아내로 삼았고, 현종은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 양옥진을 빼앗아 후궁으로 뒀다.  

 

4) 훈자족의 나라 소발률

당나라는 외국인이라 해도 능력 있는 자는 요직에 발탁하는 등 내·외국인 간 차별을 두지 않았다. 흑치상지, 고선지, 이정기, 부몽영찰, 가서한, 안록산, 이근행과 그의 아들 이다조 등 수많은 외국 출신 인사가 고위직에 올랐다. 장안은 당나라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중동을 아우르는 세계의 수도 구실을 했다. 따라서 인재와 물산이 장안으로 모여들었다.   

 

선비족을 조상으로 둔 태종 이세민의 후궁 무조(측천무후) 655년 고종의 황후로 책봉된 이후 정권을 잡았다. 측천무후는 705년 사망할 때까지 50년간 절대 권력을 한 차례도 놓지 않았다. 690년 국명을 아예 주()나라로 바꾸고, 낙양으로 천도하기까지 했다. 측천무후는 태종의 처남이며 무천진 인맥의 중핵인 재상 장손무기(長孫無忌)를 살해하는 등 서위→북주→수→당에 이르기까지 정권을 오로지한 선비족 무천진 인맥(關隴集團) 위주에서 벗어나 서위(西魏)-북제(北齊) 지역이던 관동 출신들도 기용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는 자손이라 해도 용서하지 않은 냉혹 무자비한 정치인이었다. 아들 이홍, 손녀 영태군주를 포함한 황족들과 중신들을 수없이 죽였다. 그러나 적인걸(狄仁傑)과 요숭(姚崇), 장간지(張柬之) 등 필요한 인재를 키우고, 나라를 효율적으로 통치해 국부를 증대시키는 등 상당한 업적을 이룩했다 

 

측천무후가 죽은 뒤 손자 이융기는 쿠데타를 일으켜 숙부인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는 황제(현종)가 된 다음 적극적인 대내외 정책을 취했다. 현종 시대에도 당나라와 토번은 신장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놓고 전쟁을 계속했다. 당나라와 토번 간 전쟁에서 핵심 지역은 파키스탄 동북부 훈자족의 나라 소발률(길기트)이었다. 소발률(小勃律)은 동쪽은 티베트, 서쪽은 아프가니스탄, 남쪽은 인더스강, 북쪽은 신장과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소발률은 사마르칸드(康國), 부하라(安國), 타슈켄트(石國), 샤흐리샤브즈(史國) 등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에서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목구멍(咽喉) 같은 곳으로 토번이 장악하고 있었다 

 

제지 기술의 유럽 전파

/당 태종.[위키피디아]

 

747년 고구려 유민 출신 안서도호부 부도호(副都護) 고선지는 70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방심하고 있던 토번군을 격파한 데 이어 빙하로 뒤덮인 다르코트 계곡을 달려 내려가 소발률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나라의 패권을 확립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750년 고선지는 다시 중앙아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타슈켄트가 사라센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던 시기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서역(西域) 10만 연합군은 751 1월 타슈켄트성()을 포위했다. 고선지는 타슈켄트왕을 속여 항복을 받아냈다. 당초 약속과 달리 장안으로 연행된 타슈켄트왕은 처형당했으나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사라센 압바스 왕조로 넘어갔다.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가 뿌리째 흔들린 것이다 

 

사라센은 페르가나 계곡을 넘어 키르기즈의 탈라스 강까지 촉수를 뻗쳐왔다. 751 8월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군은 탈라스 전투에서 사라센과 돌궐계 카를룩 연합군에 대패했으며, 이로써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는 종식됐다. 이때 당나라군 진영에 있던 제지 기술자가 사라센군에 잡혀간 것이 제지 기술이 사라센(중동)과 유럽에 전파되는 기원이다

 

당나라는 750년 양귀비(楊貴妃) 일가인 재상 양쇠(양국충)와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 선우중통의 지휘하에 윈난(남만)의 백족(白族) 왕국인 남조(南詔)를 공격했으나, 각라봉(閣羅鳳)이 지휘하는 남조군과의 노남 전투에서 전사자 7만여 명을 내는 등 대패했다. 7세기 초 백족이 쿤밍(昆明) 서북부에 위치한 대리를 중심으로 몽수(), 월석(越析), 시랑(施浪), 등섬(邆賧), 낭궁(浪穹), 몽사(蒙舍) 6개의 조(詔·나라라는 뜻)를 건설했으나, 몽사를 제외한 5개 나라는 곧 서북쪽으로부터 침공해온 토번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토번과 적대관계이던 당나라는 남조왕 피라각(皮邏閣)을 지원해 토번의 영향하에 있던 여타 5개의 조를 멸망시키고 737년 윈난을 통일하게 했으나, 남조가 급성장해나가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침공한 것이다.

 

5) , 멸망하다

당나라는 753년 가권(賈顴), 754년 이복(李宓)에게 대군을 주어 지난번의 패전을 설욕하게 했으나 거듭 참패하고 말았다. 남조의 최전성기를 가져온 이모심(異牟尋)이 재위하던 793년 남조는 토번을 격파했으며, 권풍우(勸豊祐)가 통치하던 829년에는 쓰촨으로 북진해 청두(成都)를 점령했다. 안록산-사사명의 난 이후 토번이 장안까지 침공하자 국력을 강화한 남조도 쓰촨을 잠식해 들어갔다. 남조는 미얀마, 라오스, 태국, 북베트남 방향으로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남조의 공세에 밀려 윈난 일대에 거주하던 타이, 샨 종족이 오늘날의 인도차이나 지방으로 밀려났다. 

 

당나라는 남조에 대비해 구이저우(貴州)와 광시(廣西) 방면에도 수비군을 증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조에게마저 밀린 당나라의 황혼이 붉게 물들었다. 남조 역시 873년 북방 전진기지인 청두를 상실한 다음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혼란 끝에 902년 한족 출신 권신(權臣) 정매사가 정권을 찬탈해 대장화국(大長和國)을 세웠다. 927년에는 검남절도사 양간정이 대장화국을 멸망시키고 대의령국(大義寧國)을 세웠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인 937년 통해절도사 단사평(段思平)이 여러 부족의 지지를 받아 대의령국을 멸망시키고 대리국을 세웠다

 

후돌궐에서는 오즈미시 샤드가 741년 텡그리 가한을 죽이고 스스로 가한에 등극했다. 오즈미시에 반대한 후돌궐 지배층 대부분은 742년 당나라에 투항했다. 약체화된 후돌궐은 위구르족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이는 당나라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몽골고원의 돌궐족이 서천(西遷)함에 따라 몽골고원과 신장, 랴오허 유역이 한꺼번에 불안정해졌다.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것은 안록산-사사명의 난, 황소(黃巢)의 난과 함께 사타돌궐족(沙陀突厥族)의 남하였다. 안·사의 난으로 카운터펀치를 맞은 당나라는 황소의 난과 뒤이은 주전충의 배반, 사타돌궐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10월 호

■ 高麗의 거란 견제 덕에 宋, 통일 대업 이뤄내다

영원할 것 같던 제국 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사의 난은 내란이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전이었다.

발해와 거란이 호시탐탐 당의 빈틈을 노렸으며

신라는 당이 혼란기에 접어들자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경제 번영과 상업 발달로 큰 도시가 출현한 송대(宋代)의 그림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

 

쿠틀룩 빌게를 수령으로 한 몽골고원의 위구르족은 745년 바스밀, 카를룩 등 여타 부족과 함께 아쉬나 부족의 후돌궐을 멸망시키고 위구르제국을 세웠다. 위구르제국은 동으로는 다링허 유역, 서로는 카스피 해까지를 영토로 해 840년까지 번성했다. 747년 쿠틀룩 빌게가 죽은 후 모옌초르가 승계했는데, 모옌초르 통치기인 751년 고선지의 당나라군과 사라센군 간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다. 

 

1) 唐의 몰락

위구르제국은 안·사의 난(755~763) 때 당나라를 지원했으며, 당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 간쑤(甘肅)와 신장(新疆)으로 진출했다. 840년 기근과 내란으로 약화된 위구르제국은 같은 돌궐계 키르기스족에게 정복당했다. 간쑤와 신장 일대로 대거 이주한 위구르인들은 농경민화했다. 오늘날 신장-위구르 지역엔 1000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계 위구르인이 거주하며 중국 중앙정부와 대립한다.  

 

당(唐)은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해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가 통치했다. 당의 추락을 재촉한 안·사의 난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  

 

755년 11월 중앙아시아 부하라(安國) 출신을 선조로 둔 범양(허베이)-평로(랴오시)-하동(산시·山西)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은 부장(部長) 사사명(史思明)과 함께 오늘날의 베이징인 위양(漁陽)에서 반기를 들었다. 안록산의 병력은 당나라 병력의 3분의 1인 15만 명에 달했다. 안록산은 동라돌궐(5대 10국 시대 때 주인공이 되는 사타돌궐이 속한 부족), 거란·해(奚), 실위(室韋) 등 북방민족을 포함한 15만 대군을 이끌고 12월 초 황허를 건너 12월 중순 장안으로 진군하다가 곽자의(郭子儀)가 이끄는 돌궐군 주축 삭방군(朔方軍)에 패하자 일단 위양으로 후퇴했다.  

 

이즈음 발해는 안록산이 당나라 공격에 실패할 경우 자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수도를 북만주 상경(上京)으로 옮겼다. 발해의 우려와 달리 756년 초 다시 서쪽으로 진군한 안록산군은 농우·하서 절도사 가서한(哥舒翰)이 이끄는 당나라군을 장안 동쪽 관문 동관(潼關) 밖에서 대파했다. 안록산군이 장안에 접근해오자 현종은 쓰촨으로 파천했다. 

 

현종을 대신해 아들 숙종(肅宗)이 즉위한 후인 756년 8월 당나라는 위구르군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757년에 들어서면서 안록산군의 상황도 급변했다. 안록산의 큰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이복동생이 후계자로 지명될 가능성이 커지자 1월 안록산을 독살하고 황제에 등극했다. 안경서군은 그해 4월 당나라군을 격파했다.  

 

2) 안·사의 난에 개입한 위구르

위구르의 카를룩 가한은 아들 타르두슈 빌게에게 4만 기()의 말을 주어 당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757 9월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은 안경서군을 공격해 6만 명을 참수(斬首)하는 대승을 거두고 해족(奚族) 군단이 지키던 장안을 빼앗았다 

 

장안과 낙양을 잃은 안경서는 허베이의 업()으로 후퇴했다. 758 9월 곽자의가 지휘하는 20만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이 업으로 진격해오자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중앙아시아 샤흐리 샤브즈(史國) 출신 사사명은 이때 13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어 안경서보다 세력이 컸다. 사사명은 안경서를 위기에서 구해줬으나 이듬해 3월 안경서로부터 양위를 받은 다음 그를 살해했다. 불과 2년 후인 761 3월 사사명도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피살돼 사조의가 황제로 즉위했다 

 

762 4월 당나라 숙종이 환관에게 시해되고 아들 이숙이 대종(代宗)으로 즉위했다. 대종은 토벌군을 일으키면서 위구르를 설득하고자 사신을 보냈다. 뵈귀 가한(타르두슈 빌게)이 사조의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히려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종은 발해에도 사신을 보내 발해왕을 왕()으로 정식 인정하는 등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당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뵈귀 가한을 설득해 동맹을 다시 맺는 데 성공했으며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은 사조의군을 대파했다 

 

그해 10월 다시 낙양에 입성한 위구르군은 약탈과 방화, 살육을 자행했다. 763 1월 사조의는 달아나다가 안록산의 부하이던 이회선에게 죽임을 당했다. 안록산의 난은 당나라의 내전인 동시에 위구르, 돌궐, 거란·해, 발해, 토번 등이 관련된 국제전이기도 했다. 당나라가 안·사의 난 후유증에 시달리던 763 10월 간쑤 방면에서 남진해온 토번군은 장안을 약 보름간 점령했다가 후퇴했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시라무렌 강-다링허 유역의 거란 세력이 급성장했다. 안·사의 난 이후 덕종(德宗), 헌종(獻宗), 무종(武宗), 선종(宣宗) 등은 당나라의 급속한 쇠락을 막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덕종은 균전제에 기초한 조용조(租庸調)를 대신해 1 2회 화폐로 세금을 걷는 양세법(兩稅法)을 도입하면서 재정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헌종은 819년 고구려계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 이사도(李師道)의 난을 평정한 후 절도사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등 군사력을 재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발해·거란, 唐의 빈틈 노리다

안·사의 난 와중이던 761년 이사도의 조부 이회옥(李懷玉)은 반란군의 공세를 피해 고종사촌 후희일과 함께 2만여 병력을 이끌고 다링허 유역(평로)에서 보하이(渤海)를 건너 산둥반도에 상륙해 10여 개 주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당 조정은 이회옥(당 조정이 ‘정기’라는 이름을 하사)을 평로·치청(랴오시·산둥)절도사에 임명했다 

 

이정기는 산둥()의 경제·군사·외교권을 장악했으며 점차 반당(反唐) 노선을 걸었다. 이정기는 777년 강남과 화북을 연결하는 요충지 쉬저우(徐州)를 포함한 5개 주를 추가 점령해 제나라(치청)를 최강 번진으로 만들었다. 아들 이납(李納)을 거쳐 806년 손자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헌종은 투항해 온 번진들을 앞세워 815 12월 이사도의 제나라 공격에 나섰다. 이사도는 당나라가 군수물자를 저장해놓은 하음창을 불사르는 등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장화이(江淮)와 허베이 번진 거의 전부가 당 조정에 가담하자 이사도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협공을 받은 이사도는 819년 위박(魏博) 번진 전홍정과의 산둥성 서부 운주·동아 전투에서 대패했으며 부하 유오(劉悟)가 이사도를 죽이고 투항했다. 이로써 765~819 55년간이나 지속되던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는 멸망했다 

 

덕종, 헌종, 무종 등의 노력에도 당나라는 무조(武照·측천무후) 초기나 현종 전반기와 같은 성세(盛世)를 회복할 수 없었다. 토번, 위구르, 거란, 남조, 발해 같은 인접국이 기울어가는 당나라의 빈틈을 노렸다 

 

이렇듯 극도의 위기상황임에도 당에서는 우승유가 대표하는 신진 관료와 이덕유가 대표하는 보수 관료 간 대립인 우·이(牛·李) 당쟁이 나날이 격화됐다. 40년간 계속된 우·이 당쟁은 환관의 정권 장악을 야기했다. 현종 때부터 영향력을 키워온 환관은 금군(禁軍)을 배경으로 황제를 옹립하기도 하고 폐립·독살하기도 할 만큼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3) 황소의 봉기

/거란인이 매 사냥하는 모습을 담은 송대(宋代) 그림.

 

새롭게 경제 중심지가 된 화이허-창장 유역의 장화이와 허베이를 연결하는 쉬저우의 번진들에서 군란(軍亂)이 종종 발생했다. 868년 남조와의 국경지대인 구이저우(貴州)에서 시작돼 화이허 유역까지 확산된 방훈(龐勛)의 난은 돌궐 사타부(沙陀部)와 설필부(契苾部)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됐다.  

 

방훈의 난이 끝난 지 불과 7년 뒤인 875년 산둥 출신 황소(黃巢)는 농민을 선동해 반당(反唐) 봉기를 일으켰다. 소금과 차(茶) 밀매업자가 반란군의 핵심 역할을 했다. 당나라는 재정을 재건하고자 소금과 차에 대한 전매제도를 실시했으며, 이는 소금과 차 상인들을 파산으로 몰고 갔다.  

 

황소는 북벌을 단행해 880년 낙양과 장안을 점령하고 제(齊)를 세웠다. 황소는 기품 있는 인물이었으나 잡다한 배경을 가진 60만 대군을 통제할 능력은 갖지 못했다. 명나라 말기 순(順)을 세운 이자성과 같이 황소에게는 특히 인재가 부족했다. 황소가 통제력을 잃어감에 따라 할거하던 절도사들의 반격이 심해졌다. 황소는 부장 주온(朱溫)의 배반과 사타돌궐족 출신 안문절도사(雁門節度使) 이극용(李克用), 티베트계 탕구트족(黨項族) 수장 탁발사공(拓跋思恭) 등의 연합 공격을 받고 점령한 지 2년 4개월 만인 883년 4월 장안을 빼앗겼다. 황소는 결국 884년 고향인 산둥의 태산 인근 낭호산(狼虎山)에서 자결했다. 

 

황소의 난으로 절도사들의 독립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머슴 출신 주온은 경쟁자이던 병졸 출신 봉상절도사 이무정(李茂貞)과 사타돌궐족 수장 이극용을 제압한 다음인 907년 소선제(昭宣帝)로부터 선양받아 카이펑(開封)을 수도로 양(梁)나라를 세웠다. 

 

태조 왕건과 해상세력의 연계

당나라에 밀착해 발해를 견제하던 신라도 당이 혼란기에 접어든 9세기 초 이후 위기에 봉착했다. 왕위에서 밀려난 무열왕계 김헌창(金憲昌)이 웅주(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앙군에 진압됐다. 왕위 쟁탈전은 더 격화돼 민애왕이 시해된 희강왕을 이어 즉위하고,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다.  

 

왕권 불안정은 신라의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군진(軍鎭)을 근거로 한 해상세력이 등장했다. 군진은 해적이 발호(跋扈)하면서 이에 대처하고자 설치한 것으로 청해진(완도), 당성진(남양), 혈구진(강화), 패강진(황해도 평산)이 대표적이다. 군진들은 당나라 번진들 및 왜, 발해 등과의 교역을 통해 부(富)와 세력을 함께 키웠다. 

 

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는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청해진을 중심으로 서해와 동중국해 일대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중앙에 진출해 민애왕을 시해하고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등 군사력을 과시했다.  

 

중앙권력이 계속 약화되는 상황에서 지방군벌 진훤(甄萱·견훤)은 한반도 서남부에 후백제를 세웠으며 신라 방계왕족 출신 김궁예(金弓裔)는 한반도 중부에 후고구려를 세웠다. 후백제는 강남의 오월, 남당과 통교했으며 후고구려는 후주(後周) 등 중원 국가들과 통교했다. 

 

918년 김궁예의 부장 왕건(王建)이 김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고구려계 해상세력으로 추정되는 왕건 일족은 혈구진과 패강진을 포함한 해상세력과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었다. 왕건이 후백제 배후지 나주를 점령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혈구진, 패강진 세력은 이렇듯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경주 주변으로 영역이 축소된 신라의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투항했다. 고려는 936년 진훤과 맏아들 진신검(甄神劍) 간 갈등으로 내란 상태에 처한 후백제마저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쇠약한 상태에서도 강력해진 거란의 동진을 일정 기간 막아줬기 때문이다.

 

4) 五代十國

주전충(朱全忠)이 당 왕실을 무너뜨린 후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인 5대 10국 시대가 열린다. 주온에서 개명한 주전충이 세운 후량은 화북을 지배했으나 중국 350주 가운데 5분의 1인 70주밖에 지배하지 못하는 반쪽 정권이었다.  

 

4세기 초 서진(西晉) 말기와 같이 사해(四海)가 삼발 솥 안의 물처럼 끓어올랐다. 거란은 랴오허 유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몽골고원과 만주, 신장을 통합했으며 중원도 노렸다. 사타돌궐족 이극용의 아들 후당(後唐)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은 주전충의 후량에 이어 이무정이 산시(陝西)성 서부를 중심으로 세운 기(岐)와 왕건(王建)이 쓰촨에 세운 전촉(前蜀)을 멸했다. 후당(사타돌궐)은 석경당의 후진(사타돌궐)에, 후진은 유지원의 후한(사타돌궐)에, 후한은 곽위(郭威)가 세운 후주(한족)에 멸망했다.  

 

고려 광종 때 과거제 도입에 공을 세운 쌍기(雙冀)가 바로 후주 출신이다. 후당, 후진, 후한 등 사타돌궐 왕조들이 황제 직할 금군(禁軍)을 한족 출신 위주로 충원하다가 마침내 한족에 의해 축출돼 한족 왕조 후주(後周)가 탄생한 것이다.  

 

5대(907~979) 왕조는 황허 유역 카이펑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10국(國)은 지방에서 힘을 길러 중원의 사슴을 노렸다(逐鹿·축록·사슴을 쫓는다는 뜻으로 정권 또는 지위를 얻기 위한 다툼을 이르는 말).  

 

10국은 양저우의 오(吳), 난징의 남당(南唐), 청두의 전촉(前蜀)과 후촉(後蜀), 광저우의 남한(南漢), 타이위안의 북한(北漢), 창사(長沙)의 초(楚), 항저우의 오월(吳越), 푸저우의 민(閩), 장링의 남평(南平) 등으로 남당이 오를 계승하고, 전촉이 망하고 후촉이 세워진 것에서 알 수 있듯 같은 시기 존재한 것은 아니다. 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5대 왕조는 황허 유역, 10국 중 북한은 산시(山西)성 중북부, 전촉과 후촉은 창장 중상류, 남평과 초는 창장 중류, 오와 남당은 창장 하류, 오월과 민, 남한은 각기 연안(沿岸)인 저장, 푸젠, 광둥에 위치했다. 

 

‘마지막 황제’ 이욱의 詞

10국 중 가장 강성한 나라는 오(吳)-남당(南唐) 정권이었다. 남당은 사가(史家)들이 붙인 이름으로 스스로 당나라의 후계자라면서 당(唐)을 자처했다. 남당은 수(隋)나라 때 이래 경제 중심지인 장화이를 영토로 삼았기에 경제력은 막강했으나 군사력은 취약했다. 남당은 945년 민, 951년 초를 병합하는 등 한때 강남을 통일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955년부터 후주 세종 시영(柴榮)이 자주 남쪽 정벌에 나서 수세에 몰렸다. 시영은 종종 친정(親征·임금이 몸소 나아가 정벌)해 958년에는 양저우까지 진격해왔다. 전쟁에 패한 남당은 창장 이북 14주를 후주에 할양할 수밖에 없었다. 남당의 역대 군주들은 지나치게 문약(文弱)했다. 남당의 마지막 황제 이욱은 아버지 이경과 함께 사(詞)의 명인이었다. 이욱은 975년 송나라군의 포로가 돼 카이펑으로 끌려가 유폐당한 뒤 고국을 그리워하는 우미인(虞美人·YuMeiRen)이라는 제목의 사를 지었다. 우미인은 현재 중국인이 좋아하는 사의 하나다. 

 

春花秋月何時了 (봄꽃과 가을 달은 언제 끝날까) 

往事知多少 (눈에 삼삼하니 모두 지난 일이던가) 

小樓昨夜又東風 (작은 누각에는 어젯밤에도 동풍이 불었다) 

故國不堪回首月明中 (고국으로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건 밝은 달뿐)

雕欄玉砌應猶在 (아름다운 난간과 옥을 깎아 만든 계단은 그대로 있겠지)

只是朱顔改 (어이 이리 청춘만 가버렸는가) 

問君能有幾多愁 (묻건대 그대 마음속 수심이 얼마더냐) 

恰似一江春水向東流 (동쪽으로 흘러가는 봄 강물과 같아)  

 

당나라 말기-5대 시대 간쑤(하서회랑) 통치권은 한족 장씨와 조씨가 차례로 장악했다. 당나라 말기 절도사 장의조(張義朝)는 하서회랑을 점령한 토번 세력을 몰아내고 ‘당나라의 신하’를 자처했다. 장씨에 이어 920년 하서회랑을 장악한 조의금은 장액(張掖)의 위구르 공주와 정략 결혼했다. 조의금은 신장(新彊)의 오아시스 국가 호탄(和田)과의 우호를 위해 딸을 시집보내 호탄왕과도 친인척의 연을 맺었다. 조의금을 계승한 조원충 시대에 조씨 정권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조원충 역시 조의금과 마찬가지로 호탄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조씨 정권은 당구트족 서하가 번성하기 시작한 10세기 말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5) 발해-거란 20年 전쟁

/중국 산둥성 장보고기념관. 

 

이런 가운데 후주 세종 시영은 중앙군을 강화하고 지방군을 약화시킴으로써 절도사의 자립성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취했다. 그는 “공취(攻取)의 길은 반드시 용이한 것을 먼저 한다”는 왕박(王朴)의 선이후난(先易後難) 전략에 따라 서쪽으로는 후촉(後蜀)이 점거하던 산시(陝西)의 진주, 봉상을 탈취하고 남쪽으로는 남당을 공격해 창장 이북 14개 주를 확보했다. 

 

중국이 5대 10국의 난세에 접어들기 직전 다링허-랴오허 유역에서 거란(契丹)이 흥기했다. 거란은 4세기 초 모용선비에게 멸망당한 우문선비 세력이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퉁구스계와 돌궐(투르크)계 부족을 통합해 형성된 민족이다. 거란은 조선(고조선을 말함)과 같은 8조 법금(法禁)을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 해금(奚琴)을 전해준 해족(奚族)은 거란 계열의 종족으로 내몽골 쯔펑(赤峰) 일대에 거주했다.  

 

시라무렌 강-다링허 유역의 거란족 수장 야율아보기(872~926)는 907년 거란을 건국하고, 해(奚)와 실위(室韋)를 정벌한 다음 랴오둥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발해와 20년 전쟁에 돌입했다. 야율아보기는 몽골고원에서 키르키스족을 축출했으며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다. 야율아보기는 거란 문자를 창제하는 등 거란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도 힘썼다. 

 

거란의 왕비 부족은 위구르 계통 을실씨(乙室氏)와 발리씨(拔里氏)였다. 을실씨와 발리씨는 스스로를 한나라 승상 소하(蕭何) 가문에 비겨 소씨(蕭氏)라 했다. 고려를 침공한 소손녕과 소배압이 왕비족인 소씨 출신이다.  

 

야율아보기를 계승한 야율덕광은 936년 석경당을 도와 후당(後唐)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晋)을 세워줬으며, 그 대가로 베이징 부근 연운 16주를 할양받았다. 그는 석경당의 후계자 석중귀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946년 카이펑을 점령하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야율덕광 사후(死後) 거란은 내분에 빠졌다. 유목국가로 남을 것인가. 한화(漢化)의 길을 걸을 것인가. 국가 진로와 황제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란 중에 세종과 목종이 살해됐다. 국수파(國粹派)는 ‘거란(契丹)’이라는 국호, 한화파(漢化派)는 ‘요(遼)’라는 한족식(漢族式) 국호를 선호했다. 어느 쪽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국호가 ‘거란’과 ‘요’를 왔다갔다 했다. 훗날 여진족의 금나라가 13세기 초 몽골의 대공세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자 랴오허 유역 거란족은 그 틈을 타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몽골에 투항하는 것을 반대한 대요수국 일부 세력이 1216년 압록강을 건너왔다가 1219년 현재의 평안남도 강동성에서 고려군, 몽골군, 동진군(東眞軍)에 포위당한 끝에 5만~6만 명이 생포됐으며, 그중 일부가 원주, 제천, 충주 등으로 집단 이주됐다. 충북 제천 박달재 근처에 거란족 집단촌 거란장(契丹場)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천하 통일 완성하다

당(唐) 중기 탕구트족은 토번에게 밀려나 동북쪽으로 이동해 간쑤와 산시(陝西) 서북부 지역에 정착했다. 부족장 탁발사공은 황소의 난(875~884) 때 장안 탈환을 지원해 당나라의 절도사로 임명됐으며 이씨(李氏)를 하사받았다. 5대 10국 시대를 거치면서 탕구트는 독립했다. 

 

송나라 초기 서하와 송은 사타돌궐계 북한(北漢), 요(遼), 토번(吐藩) 등과의 관계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서하는 송나라가 북한(北漢) 수도 진양(타이위안)을 공격했을 때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서하는 이계천 시대에 송나라 일변도에서 벗어나 오르도스와 간쑤, 신장 방면으로 세력을 뻗어온 거란과도 관계를 맺었다. 이계천은 요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여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다. 이계천은 요의 후원을 배경으로 토번, 송나라와 자주 싸워 영토를 넓혔다.  

 

요나라가 서하를 지원한 것은 송나라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송나라는 서하에 옆구리를 공격당할까봐 불안을 느꼈다. 1004년 요(遼)와 송(宋)이 ‘전연(澶淵)의 맹(盟)’을 체결하자 토번, 송나라와의 전쟁에 지친 서하는 송나라에 접근했다. 이에 앞선 958년 후주 세종은 창장 이남을 정복하기에 앞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내란 상태이던 거란을 향해 북진했다. 후주군은 연운 16주에 속한 와교관, 익진관 등을 돌파하는 등 진격이 순조로웠다. 이때 갑자기 세종이 발병했으며 카이펑으로 회군했다가 959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조광윤(趙匡胤)은 세종이 사망하기 직전 귀덕(歸德) 절도사 겸 총사령관에 임명되는데, 귀덕은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가 있던 지역이다. 세종을 계승한 것은 7세에 불과한 시종훈(柴宗訓)이었다. 조광윤은 군부의 지지를 받아 시종훈을 밀어내고 송나라를 세웠다. 불과 53년 만에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 다섯 왕조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당시 거란은 내전 상태이던 까닭에 후주-송 교체기를 이용할 수 없었다. 

 

송태조(宋太祖) 조광윤은 따뜻하면서도 결기(決氣)가 있는 인물이었다. 조광윤은 현대 중국인이 좋아하는 지도자 중 하나다. 외손자 우문천(宇文闡)을 비롯한 우문씨 황족들을 학살한 수문제 양견과는 달리, 조광윤은 시종훈과 그의 친인척을 극진히 대우했다. 송나라의 시씨 보호는 조광윤 당대뿐만 아니라 북송과 남송 300년간 이어졌다. 이러한 까닭인지 시씨의 후손은 남송 최후에 벌어진 원(元)나라 군대와의 마카오 서쪽 애산도(厓山島) 전투에서 송나라 황실과 운명을 같이했다.  

 

조광윤은 후주 세종 시영이 깔아놓은 천하 통일의 길을 착실히 걸어갔다.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한 남쪽을 먼저 치고, 군사력이 강한 북쪽은 나중에 친다”는 뜻의 선남후북(先南後北) 전략으로 약한 고리부터 차례로 끊어나가면서 중국을 하나로 묶어냈다. 조광윤은 남평(963), 후촉(965), 남한(971), 남당(975)을 차례로 정벌했다. 조광윤을 계승한 동생 조광의(趙匡義)가 통일 대업을 완성했다. 송나라의 중국 통일은 △거란의 내분 △토번의 약화와 토번-서하 전쟁 △고려의 거란 견제 등 국제 정세가 송나라에 유리하게 전개된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  

 

11월 호

■ 맹장 척준경, 두만강 건너가 여진軍 격파하다

고려-거란--서하 4國정립

윤관의 군대는 척준경을 선봉으로 삼아 여진군을 격파하고 함흥평야로부터 두만강 이북 280(700)의 지린성 옌볜자치주 둔화에 위치한 선춘령에 이르는 점령지역에 아홉 개 성(동북 9)을 축조했다. 20만 대군을 동원해 함흥평야와 그 부근만을 빼앗았다는 일부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다.

/육군보병학교(전남 장성군)에 세워진 여진 정벌의 명장 윤관(尹瓘·1040~1111) 동상.[사진제공·육군보병학교]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는 926년 상경(헤이룽장성 닝안)을 수도로 한 발해를 정복한 후 발해 고토(故土)에 ‘동쪽의 거란’이란 뜻의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장남 야율배에게 통치를 맡겼다. 거란 수도 상경은 지금의 내몽골 츠펑(赤峯) 인근 빠린좌치로 홍산문화와 관계가 깊다.

 

1) 압록강 유역서 봉기한 정안국

발해는 고구려와 고려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구실을 다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발해 유민 중 대광현(大光顯)을 비롯한 일부는 고려로 이주했으며, 남은 일부는 요(遼)나라에 대항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압록강 유역에서 봉기한 정안국이 대표적이다. 

 

세종(야율배의 아들)과 목종(태종 야율덕광의 아들), 경종(세종의 아들) 시대 혼란을 극복한 거란은 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 시기에 국력을 회복했다. 어머니 술율(소)씨의 보좌를 받은 성종은 내·외몽골을 아우르고, 간쑤-신장의 위구르를 정벌했다. 성종은 정안국을 토멸(討滅)하고, 여러 차례 이기고 진 끝에 고려도 복종시켰다.  

 

고려를 복종시키는 등 배후를 튼튼히 한 거란 성종은 송나라 정벌을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허베이 방향으로 남진했다. 송나라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진종은 재상 구준(寇準)의 건의에 따라 30만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북상해 전주(邅州)로 향했다. 몇몇 전투에서 거란군이 승리했으나, 전쟁은 곧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요(遼), 송(宋) 두 나라는 타협했다. 요나라가 송나라를 형으로 부르는 대신 송은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요에 바치기로 했다. ‘전연(澶淵)의 맹(盟)’이라 불리는 이 조약을 체결한 후 요·송 관계는 안정됐다. 이후 요나라는 송과 고려, 서하(西夏) 간 세력균형을 이용해 관제와 세제 개편, 법률 정비, 불교 장려 등 내정에 성공해 동아시아 최강국이 됐다. 거란은 유목민과 농경민을 각기 북면관(北面官)과 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원제에 따라 통치했다. 농경을 장려함에 따라 농지는 늘어난 반면, 초지(草地)는 부족해져 대다수가 유목민인 거란족 주민은 궁핍해졌다.

 

동여진 해적 울릉도 약탈

10세기 말~11세기 초 고려 서희(徐熙)와 강한찬(姜邯贊)은 요-송 적대관계를 이용해 고려 영토를 압록강 하구까지 넓혔다. 거란-발해 전쟁 시기 두만강 일대 말갈(여진)계 주민은 별도 세력(동여진)을 형성해나갔다.  

 

고려-거란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 동여진 세력은 주로 바다를 통해 고려 동해안 지역을 침공했다. 동여진 세력은 1012년 경주, 강한찬의 귀주대첩이 있던 1018년에는 울진을 침공했다. 고려는 동여진 세력을 막고자 동해안에 대규모 축성과 함께 상당 규모의 해군을 배치했다. 그러자 동여진 세력은 공격목표를 일본과 울릉도(우산국)로 바꿨다. 

 

1019년 3월 3000여 명이 탑승한 동여진 해적선 50여 척이 쓰시마를 공략했다. 일본은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도이의 적’이라 했다. ‘도이’란 일본어로 오랑캐를 뜻한다. 동여진 해적선단은 쓰시마를 약탈한 뒤 퇴각했다. 쓰시마를 떠난 동여진 해적은 이키 섬에 상륙했다. 동여진 해적은 쓰시마와 이키 섬에서 잡은 포로를 태운 채 4월 초 후쿠오카 인근을 약탈하는가 하면, 하카다만 노코 섬도 공격해 주민 다수를 포로로 잡았다. 

 

일본의 지원 요청을 받은 고려 함대는 귀환하는 동여진 해적선단을 포착·격파하고, 일본인 포로 400여 명을 구출했다. 동여진 해적은 일본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울릉도마저 약탈했다. 해적 침공으로 울릉도는 황무지가 됐고, 그때부터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됐다. 

 

북만주는 고구려-발해 시대에도 변경에 속해 있었다. 금나라 발상지인 하얼빈 인근 야청(阿城)은 흑수말갈(黑水靺鞨) 등 퉁구스족의 땅으로 12세기에 이르러서도 야성을 유지했다. 흑수말갈 계통 15만 완안부족(完顔部族)이 거주하는 삼림·호수 지역은 여름철에는 몹시 덮고 겨울철에는 몹시 추운(酷暑酷寒) 땅이었다. 완안부를 포함한 여진족은 사냥을 생업으로 했으며 뛰어난 전투기술을 갖고 있었다. ‘여진족 1만 명이 차면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용맹했다.

 

2) 윤관, 동북 9성을 쌓다

여진족은 발해가 멸망한 후 요나라에 예속돼 공물(供物) 납부 등 각종 부담을 졌다. 완안부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여진족은 동족 의식을 갖고 고려를 대한 것으로 보인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금나라 시조 완안 아골타의 조상 함보(函普)는 고려(또는 신라) 출신이라 한다.  

 

12세기 들어 영가, 우야소 등이 이끄는 완안부족 침입이 잦아지자 고려는 1107년 윤관을 총사령관으로 해 여진 정벌을 시작했다. 여진 정벌에 동원된 병사는 총 20만 명에 달했다. 맹장 척준경을 선봉으로 한 윤관의 군대는 여진군을 격파하고 함흥평야로부터 두만강 이북 280㎞(700리)의 지린성 옌볜자치주 둔화에 위치한 선춘령에 이르는 점령지역에 아홉 개 성(윤관의 9성)을 축조했다. 20만 대군을 동원해 함흥평야와 그 부근만을 빼앗았다는 일부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다. 고려는 이 ‘동북 9성’을 오래 지키지 못했다. 완안부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기 때문이다. 완안부에는 영가, 우야소, 아골타, 오걸매 등 영걸(英傑)이 잇달아 출현했으며, 이들은 요나라와 고려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지린성 동남부와 두만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의 퉁구스계 부족을 결집해나갔다.  

 

거란(契丹), 서하(西夏), 윈난의 대리(大理) 등 새외민족 국가의 흥기(興起)로 인해 송나라 영토는 당나라 전성기에 비해 절반가량 축소됐다. 서하(탕구트) 민족주의자 경종 이원호(1003~1048)는 서하문자를 창제케 했으며, 1038년 송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고, 황제를 칭했다. 그러자 송(宋) 인종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서하(西夏) 정벌을 시도했다. 1040년부터 3년간 서하와 송나라 간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졌다. 1040년 서하는 산시성 옌안(延安)을 공격했으며, 싼촨커우(三川口) 전투에서 송군(宋軍)을 전멸시켰다. 인종은 범중엄(范仲淹)과 한기(韓琦) 등을 서하 전선에 파견해 서하의 장안(시안) 공격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송군(宋軍)은 다음 해 벌어진 하오수이촨(好水川) 전투와 이어 벌어진 딩촨(定川)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범중엄과 한기는 결국 방어에 치중하는 전술을 채택해 서하의 공세를 겨우 막아냈다.

 

왕안석 신법과 宋 당파싸움

서하도 송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경제교류 단절로 어려움을 겪었다. 1042년 서하가 강화를 요청했으며 송나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1044년 양국은 ‘경력(慶曆)의 조약’을 체결했다. 서하가 송에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은 매년 은 7만2000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 근을 서하에 바친다는 것이 요지였다. 서하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을 매개하는 한편, 한때 간쑤와 신장 지역으로까지 세력을 넓혔다. 닝샤(寧夏)의 인촨(銀川)을 중심으로 농경과 유목 문화가 결합된 수준 높은 서하문화가 탄생했다.  

 

송나라는 군사적으로는 취약했으나 경제적으로는 활력이 넘쳤다. 송은 거란과 서하에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평화를 샀다. 돈을 주고 산 평화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는 조공을 내고도 거란과의 북부전선 및 서하와의 서부전선에 엄청난 수의 수비병을 주둔시켜야 했다. 엄청난 액수의 조공과 군비 부담으로 인해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경제를 회복시키려면 새로운 정책 도입이 필요했다.  

 

왕안석이 도입한 신법(新法)은 기울어가는 송나라 경제를 회복시키고자 고안된 정책이었다. 신법의 핵심은 정부가 영세민에게 저리(低利)로 융자하는 정책으로 청묘법(靑苗法)이라 불렸다. 신법은 빈농과 소상인에게 큰 도움이 됐다. 만성 적자를 보이던 재정이 흑자로 돌아섰으며 막대한 잉여까지 축적했다. 하지만 신법은 형세호(形勢戶)로 불린 호족(豪族)에게는 타격을 주었다. 정부가 저리로 융자해줌에 따라 더는 빈농과 소상인을 대상으로 고리(高利) 이자놀이를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신법은 호족 출신이 주류를 이루던 사마광, 구양수, 소식, 정호 등 구법파(舊法派) 관료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이해관계 차이와 함께 나중에는 개인적 감정까지 개입돼 격심한 당파 싸움으로 변질됐다. 예술가 기질의 무능한 휘종(徽宗)이 행정능력은 뛰어나나 신념도 절조도 없는 인물인 재상 채경(蔡京)과 환관 동관(童貫) 등을 기용하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채경은 구법파 고태후(高太后) 집권기에는 신법을 폐지했다가 휘종 등 신법파가 집권하자 이번에는 폐지된 신법을 기를 쓰고 부활시키는 등 무절조(無節操)의 극치를 보인 인물이다.  

 

당대 최강대국 거란에서도 당파싸움이 벌어졌다. 거란의 당파싸움은 정체성 문제에서 비롯해 감정 대립으로 비화했는데, 나라의 활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송나라에 휘종과 채경, 동관이 있었다면, 요나라에는 천조제(天祚帝)와 야율을신(耶律乙辛), 소봉선(蕭奉先)이 있었다.

 

3) 여진(), 거란()을 멸하다

/중국 허베이성 11세기 묘에서 발굴된 벽화로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생활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러한 시기에 여진족 영웅 완안 아골타는 1114년 요의 대(對)여진(對女眞) 전진기지인 지린성 납림하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국가 존망에 위협을 느낀 천조제가 전국에서 끌어모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의 근거지까지 진군해오자 아골타는 3만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내부 반란으로 갈팡질팡하던 요나라군을 대파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만주 정세가 일변했다. 

 

아골타는 1115년 1월 발해 출신 양박(楊朴)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제로 등극했다. 완안부는 퉁구스족 고유의 흰색을 숭상했으며 원거주지가 하얼빈 부근 안출호수(安出虎水)였던 관계로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여진어로 ‘안출호’는 금이라는 뜻이다. 금나라는 베이징 인근의 연운 16주 회복을 꾀하던 송나라와 발해만(渤海灣) 해상에서 ‘해상(海上)의 맹(盟)’이라는 공수동맹조약(攻守同盟條約)을 체결해 함께 요나라를 공격했다. 금나라군은 1120년 요나라 수도 상경을 점령했다.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주해 인산(陰山) 기슭에 숨어 서하의 지원을 기대했다. 

 

요나라가 멸망하자 황족 야율대석(1087~1143)은 몽골을 거쳐 서역의 우루무치로 도망가 그곳에서 몽골 18부족을 규합했다. 그는 더 서진해 카자흐스탄 동남부 일리 지방을 손에 넣고 서요(카라키타이)를 세웠다. 러시아는 중국을 키타이(Cathay)라 부르는데, 이는 거란과 카라키타이의 이름이 초원의 길을 따라 중앙아시아와 남부 러시아(킵차크)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항공사 캐세이 패시픽(Cathay Pacific Airways)에도 카라키타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요는 금나라에 위협이 됐다. 금나라 서부에 거주하는 거란족이 서요와 손을 잡고 금나라의 배후를 노릴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핵 6자 회담 중국 수석대표로 오랫동안 일한 우다웨이(武大偉)는 다우르족(達斡爾族) 출신이다. 다우르족은 언어, 혈통, 습관으로 미루어 거란족의 후예로 보인다. 요나라 멸망 후 거란족의 한 갈래가 헤이룽장 유역까지 이동했는데, 이들이 다우르족의 선조다. 17세기 중엽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강성해지면서 다우르족은 청에 복속됐으며, 헤이룽장 상류에서 넌장(嫩江) 유역으로 남하해 만주팔기(청나라가 17세기 초부터 설치한 씨족제에 입각한 군사 ·행정제도)에 편입됐다.

/항공사 캐세이 패시픽은 요(遼) 멸망 후 황족 야율대석이 카자흐스탄 동남부 지역에 세운 카라키타이(서요)에서 비롯한 명칭이다.[사진제공·캐세이 패시픽 항공] 

 

, ‘고개 처박은 타조’ 되다

아골타는 군사조직인 맹안모극제(猛安謀克制)를 군사·행정기구로 재편하고 지방행정구획으로 로(路)를 설치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체결한 ‘해상의 맹’에 따라 장성 이남으로 출병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옌징(燕京)의 요나라 망명정부군에 밀려 패배를 거듭하던 송나라군의 요청에 따라 옌징도 점령했다. 아골타는 휘하 장군들과 한족을 포함한 옌징 주민의 반대에도 ‘해상의 맹’을 준수해 옌징을 송나라에 넘겨주었다. 아골타는 옌징 함락 직후인 1123년 북만주의 수도 야청(회령)으로 회군하는 길에 사망했다.  

 

금나라는 ‘해상의 맹’을 지켰으나 송나라는 금나라를 배신하고 서하 및 요나라 천조제 세력과 연결해 금나라 공격을 시도했다. 아골타를 계승한 동생 오걸매(태종)와 그의 막료들은 이러한 송나라를 용서하지 않았다. 1126년 초 금나라군은 다시 옌징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송나라 수도 카이펑에 접근했다. 휘종은 태자에게 양위하고 황급히 남쪽으로 피신했다. 새 황제 흠종(欽宗)은 성리학자인 이강, 서처인 등 주전파와 채경 등 주화파 간 대립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카이펑을 포위한 금나라는 조공 액수를 올리고 중산(中山)과 하간(河間), 태원(太原) 등 3개 진(鎭), 20개 주(州) 할양과 왕족과 대신을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송나라 조정은 강적을 만나 고개를 처박은 타조와 같이 눈앞의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금나라의 요구를 수용했으며 금나라 군대는 포위망을 풀고 철군했다.  

 

금나라 군대가 철군한 후 카이펑에서는 서처인이 권력을 장악해 할양키로 약속한 3진의 군사들에게 금군(金軍)에 저항할 것을 명했다. 송나라의 거듭된 배신에 분노한 금나라는 다시 군사행동을 개시해 카이펑을 포위했다. 40여 일간의 공방전 끝에 카이펑이 함락됐다. 금나라는 휘종과 흠종을 포함한 황족과 궁녀, 관료, 기술자 등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북만주로 끌고 갔다. 이 사건을 ‘정강(靖康)의 변(變)’이라 한다.  

 

제1차 카이펑 포위 시 금나라의 인질이 됐다가 인질 교체로 돌아온 휘종의 9남 조구(趙構)가 1127년 허난성 샹취(商邱)에서 즉위해 송나라(남송)를 이어갔다. 이듬해 금나라는 남벌군을 일으켰다. 금나라군은 쫓아가고 남송군은 정신없이 쫓기는 상황이 양저우(揚州)-진장(鎭江)-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딩하이(定海)-원저우(溫州)까지 이어졌다.

 

4) 압록강 넘은 고려인들

아골타의 아들 완안종필(完顔宗弼)이 지휘하는 금나라군은 창장을 건너 닝보(寧派)까지 고종 일행을 추격했으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송나라 의용병이 반격할 기미를 보이자 철군했다. 창장과 화이허 유역에서 송나라 관군의 공백을 메운 것은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장준(張俊), 유광세(劉光世) 등이 거느린 의용군단이었다. 

 

1139년 금과 남송 두 나라는 남송이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되 금나라는 점령한 영토를 남송에 반환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금나라는 카이펑과 장안 등 점령한 영토 대부분을 일단 남송에 반환했으나 금나라 내부 의견 충돌로 조약이 무효가 됐다. 금나라 강경파는 조약을 파기하고, 군대를 동원해 카이펑과 장안을 다시 점령했다. 과거와 달리 금나라는 악비 등 군벌화된 남송(南宋) 의용군단의 저항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금나라는 만주 다싱안링 방면 거란족 동태도 감안해야 했다. 1142년 금나라 완안종필과 남송 진회(秦檜) 사이에 화의가 성립돼 동(東)의 화이허(淮河)와 서(西)의 대산관(大散關)을 국경선으로 정했다. 매년 남송이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한 것은 물론이다. 금나라는 38맹안, 즉 약 100만 명을 화북으로 이주시켜 점령한 영토를 지배해나갔다.  서하는 금나라가 강성해지자 살아남기 위해 금나라에 칭신(稱臣)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서하는 인산 이남의 땅을 할양받았다.

 

서하는 이제 더 이상 송나라와 국경을 접하지 않게 됐으며, 몽골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약 80년간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금나라가 고려를 부조(父祖)의 나라라고 생각한 데다 고려도 금을 자극하지 않은 까닭에 금과 고려 간에는 충돌이 거의 없었다. 이 시기 고려인들은 점차 압록강을 넘어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금나라 3대 희종(熙宗) 완안단과 4대 해릉왕(海陵王) 완안량 시대에 대규모 살육이 벌어졌다. 희종은 집권 말기 황족과 중신을 대거 살육하고, 재상 완안량과 결탁하고 있다는 이유로 황후 배만씨(裵滿氏)도 죽였다. 완안량은 1149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희종을 살해했다. 

 

발해 왕족 대씨(大氏)를 어머니로 둔 해릉왕은 즉위 후 희종보다 한 술 더 떠 완안종본을 포함한 수백 명의 황족과 중신을 죽였다. 해릉왕은 4세기 갈족(羯族)이 화북에 세운 후조(後趙) 천왕(天王) 석호(石虎) 이상으로 살인을 자행하고, 음란 또한 심했다. 끝없는 일탈로 해릉왕은 점차 금나라 지도층 내부에서 소외됐다.

 

장로합의제→황제독재체제

거란(요)이나 여진(금), 만주(청)와 같이 북방에서 기원한 나라의 경우 건국 초기에는 유목 전통에 따라 장로합의제로 국정을 운영한다. 태조 아골타의 유훈(遺訓)을 어겼다는 이유로 태종 오걸매가 종친 신하들에게 곤장을 맞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유목민족 국가의 경우 장로합의제에서 황제독재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희종이나 해릉왕과 같이 과격한 성격의 황제와 여타 권력자 간 권력투쟁이 발생하면 대규모 희생이 따르곤 했다. 해릉왕은 1153년 야청(회령)에서 옌징으로 천도했다.  

 

해릉왕은 남송을 정복해 중국의 천자가 되려 했다. 수·당 이후 중국의 경제중심지는 화이허 이남이었다. 금나라가 남쪽으로 팽창해 화이허를 남송과의 국경선으로 정했다고는 하나, 경제 중심지는 남송에 있었다. 이에 따라 금나라는 남송과의 교역에서 언제나 입초(入超·수입초과)를 보였다. 금나라는 남송의 쌀과 차(茶), 향료에 의존하는 상태가 됐다. 

 

해릉왕이 남정(南征)을 감행하려 한 데는 이와 같은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1161년 해릉왕은 카이펑에 입성해 여진족, 거란족, 발해 유민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남벌군(南伐軍)을 일으켰다. 남벌군에 징집당한 거란족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서북 변경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족은 몽골족과 싸워왔으나, 장정이 남벌군에 대거 징집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 몽골족을 막아낼 수 없었다. 요양 유수 완안포(完顔褒)가 옛 수도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부 황족과 장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해릉왕은 남벌전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해로로 진출한 2군이 하이저우(장쑤성 롄윈강) 해전에서 남송군에 대패하고, 육로의 본진도 창장 남쪽 채석기에서 화포(火砲)를 사용한 남송군에 패배했다. 세종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야율원의(耶律元宜)가 해릉왕을 시해했다.  

 

금나라군이 철수하자 남송군은 금나라군의 뒤를 쫓아 화이허 이북까지 군사를 보냈다. 세종 완안포는 우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쏟았다. 거란족 내부에서 카라키타이(서요)로 도망하자는 파와 금나라 영토 내에서 계속 싸우자는 파 간 갈등도 벌어져 곧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거란족 반란을 진압한 세종은 군대를 화이허 방면으로 이동해 남송군을 화이허 이남으로 몰아냈다.

 

5) 거란족과 혼인케 했으나…

/중국 네이멍구 츠펑에서 발견된 거란족 생활상을 담은 벽화. 거란족은 유목민으로 말타기에 능했다.

 

1161년 남송 고종은 대금(對金) 주전파와 화평파 간 당쟁에 시달리다 태조 조광윤의 7세손인 조신(효종)에게 양위했다. 이후 남송 황제는 모두 조광윤계가 차지했다. 효종은 주전론자인 장준(張浚)을 총사령관으로 기용해 북벌을 시도했다. 남송군은 처음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 화이허 이북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서북전선에 나가 있던 금나라 명장 복산충의(僕散忠宜)가 화이허 전선에 복귀하자 전세는 곧 혼전양상으로 변했다. 1165년 두 나라는 새로 조약을 체결해 동(東)의 화이허, 서(西)의 대산관을 국경선으로 재확인했다. 

 

남송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세종은 희종과 해릉왕이 강압적으로 실시해온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수정해 여진족 고유의 야성을 회복하려 했다. 세종은 여진 귀족들에게 일정 기간 내몽골 초원에 텐트를 치고, 기마술과 궁술(弓術)을 연마하도록 했다. 여진어와 여진문자 사용도 장려했다. 금나라 4400만 인구 중 여진족 인구는 620만 명에 불과했다. 세종의 노력에도 야성을 상실해가는 화북 거주 여진족의 한화(漢化) 경향을 되돌려놓을 수 없었다. 

 

세종은 중원에 거주하는 빈곤해진 여진족을 구제하고자 한족이 경작하던 관유지(官有地)를 몰수해 여진족에게 분배했다. 토지경작권을 빼앗긴 한족은 금나라 조정에 불만을 가졌다. 세종은 거란족을 감시하고자 거란족만으로 이뤄진 맹안·모극(금나라 때 군사 및 부족 조직에 대한 제도)을 해체해 여진족의 맹안·모극 안에 분산, 편입시켰다. 여진족과 거란족 간 혼인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는 카라키타이와 연락을 끊는 방법이기도 했다. 

 

세종을 계승한 손자 장종(章宗)은 거란문자 사용마저 금했으나 거란족은 결코 여진족에 동화되지 않았다. 거란족과의 갈등은 금나라가 쇠퇴하게 된 최대 원인 중 하나였다. 수렵과 어로(漁撈)로 정착 생활을 하던 여진족과 유목(遊牧)으로 늘 이동하는 생활을 한 거란족은 기질적으로 서로 맞지 않았다.

 

12월 호

■ 한국식 대국숭배 뿌리와 송의 멸망

이이, 송익필, 김장생, 김상헌과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송시열 등 조선 중기 이후 서인·노론 사대부는 주자학 교조주의자였다광해군의 실각(失脚), 김상헌과 삼학사의 청나라에 대한 무조건적 저항은 주자학적 신념에 기초했다주자학적 중화 숭배 인식체계를 고수한 이들의 숭배 대상은 명()에서 개화에 성공한 일본으로 바뀌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에선 미국, 북한에선 소련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21세기인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북송(北宋)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가 시작해 남송(南宋) 주희(1130~1200)가 완성한 성리학(性理學)은 우주 만물이 기(氣)라는 물질로 구성됐다고 본다. 주희는 인간 본성은 본디 맑으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뒤틀리므로 학문을 통해 본성, 즉 이(理)를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리학(주자학)은 선불교(禪佛敎)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1) 대국 숭배 인식과 성리학

/몽골고원. 송(宋)은 몽골고원에서 흥기한 몽골에 의해 멸망한다.

 

성리학은 한족(북송·남송)이 거란(요), 여진(금), 티베트계 탕구트(서하), 몽골(원) 등 새외민족에 시달려 위축됐을 때 등장한 한족 중심 보수적 철학체계다. 성리학에 따르면 우주 질서는 이(理)에 따라 정해진다. 이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예(禮) 등으로 나타난다. 절대선의 우주 질서인 이를 어지럽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성리학에서 명분을 숭상하는 것은 이렇듯 보수적 철학에 기반을 뒀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기존 질서를 존중하고 그것을 절대시하는 학문이므로 권력자에 의해 종종 관학(官學)으로 채택됐다. 성리학은 절개(節槪)가 강한 이를 문명인으로 봤으며 중원 밖 오랑캐는 멸시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여겼다. 성리학은 중국 중심 화이론(華夷論)의 기초다. 

 

주희는 금나라와 화평을 맺는 것을 반대했다.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나라는 우주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라고 봤기 때문이다. 몽골 또한 예(禮)와는 거리가 먼 오랑캐이므로 대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주희의 이론을 심화한 이이, 송익필, 김장생, 김상헌과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송시열 등 조선 중기 이후 서인·노론 사대부는 주자학 교조주의자였다. 광해군의 실각(失脚), 김상헌과 삼학사의 청나라에 대한 무조건적 저항과 예송(禮訟)을 둘러싼 당쟁은 주자학적 신념에 기초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마저 일본 주자학자의 글을 읽고 “이제 왜인(倭人)도 성인의 길을 배우니 다시는 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평했다.  

 

주자학적 중화 숭배 인식체계를 고수한 이들의 숭배 대상은 명(明)에서 개화에 성공한 일본으로 바뀌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에선 미국, 북한에선 소련으로 다시 바뀌었다. 2016년 말~2017년 현재까지 성조기(星條旗)를 동원한 일부 시위에서 보듯 이러한 인식체계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2) 金나라 수도 포위한 몽골軍

남송은 1206년 재상 한탁주(韓侂冑) 주도로 동부 화이허와 서부 산시(陝西) 2개 전선으로 북벌을 감행했다. 산시 방향으로 북진하던 오희(吳曦)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금나라군에 항복했다. 금나라는 화이허 방면에 군사력을 집중해 남송군을 창장 유역으로 밀어붙였다. 금나라는 칭기즈칸의 대두로 위협을 받았으며 산둥에서 민란의 움직임도 포착돼 조속한 화평을 바랐다. 남송도 금나라군이 창장 유역으로 접근해오자 위협을 느꼈다. 양국은 1207년 남송의 조공 액수를 조금 올리는 선에서 타협했다. 칭기즈칸 군대의 말발굽소리가 국경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금나라가 남송 내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마무리한 것이다.  

 

몽골고원에는 유연(柔然) 이후 투르크계와 몽골계 민족이 함께 거주했으나 9세기 위구르족을 포함한 투르크계는 신장으로 서천(西遷)했다. 투르크계가 서쪽으로 옮겨간 후 북만주를 원주지로 하는 북선비(北鮮卑) 실위몽올(室韋蒙兀)이 몽골고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몽골고원은 ‘몽골의 땅’으로 불렸다. 몽골고원은 한랭·건조해 생산성이 낮다. 몽골고원 전체가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120만에 불과해 칭기즈칸이 초창기 거느린 몽골 병사 수는 10만 명을 넘지 못했다.  

 

금나라는 우문선비 계통 거란족으로 하여금 몽골족을 방어케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활용했으며 몽골 부족 내 분열과 대립을 이용해 몽골고원을 통제해왔으나 칭기즈칸이 순식간에 몽골고원을 통합하면서 금나라가 쳐놓은 촘촘한 통제의 그물을 벗어던졌다. 칭기즈칸은 위구르 문자를 채용했으며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겸하는 십호·백호·천호·만호제를 도입했다. 칭기즈칸은 1205년, 1206년, 1209년 3차례에 걸쳐 서하(西夏)를 침공했으며 1211년부터 금나라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시와 허베이가 주요 공격 루트였다.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북만주 싱안링(興安嶺) 산록(山麓)의 거란족은 금나라 통치에 반대해 야율유가(耶律留哥) 지휘 아래 봉기했다. 만주 전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병권을 장악한 흘석렬집중(紇石烈執中)은 무능하다는 이유로 위소왕 완안영제를 살해했다. 몽골군은 이 같은 금나라의 병란을 틈타 산둥까지 유린했다.   

 

1214년 칭기즈칸과 그의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동생 카사르와 카치운(哈眞), 부하 무카리와 제베, 보르추 등이 지휘한 몽골군이 산시와 허베이를 유린하고, 금나라의 수도 연경을 포위할 태세를 취했다. 금나라의 간청으로 화의가 성립돼 몽골군은 일단 회군했다. 몽골군에 겁먹은 금나라는 황허 이남 카이펑(開封) 천도를 결정했다. 군호(軍戶) 가족 100만여 명도 허난으로 이주시켰다. 허베이, 산시 등 황허 이북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망한 나라 君主의 자결

금나라 조정이 카이펑으로 도주하자 칭기즈칸은 다시 남진했으며, 1215년 연경을 점령했다. 금나라는 남천(南遷)하기 전 포선만노(蒲鮮萬奴)를 만주로 파견해 본거지 북만주를 확보하게 했다. 포선만노는 야율유가가 이끄는 거란 봉기군 제압에 실패하자 1217년 아직 몽골의 힘이 미치지 않던 두만강 하류에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칭기즈칸은 연경에서 금나라 관리로 일하던 야율초재(1190~1244)라는 거란족 출신 천재를 얻었다. 칭기즈칸은 친형제나 다름없이 신임하던 무카리를 왕으로 봉해 연경을 다스리게 했다. 무카리는 연경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방으로 군대를 보냈다. 결국 황허 이북은 모두 몽골군에게 점령당했다. 

 

금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남송은 조공을 중단했다. 서하도 금나라로부터 이탈해 남송과 손을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의 카라키타이, 호레즘, 호라산(아프가니스탄) 원정을 떠났다. 서하와 금나라, 고려 등 동아시아 국가에 잠깐이나마 숨 쉴 틈이 주어진 것이다.  

 

서하는 이안전(李安全) 시기에 몽골에 복속됐다가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해 1226년 다시 몽골의 침공을 받아 1227년 멸망했다. 서하 멸망 후 많은 수의 주민이 몽골군에게 살해됐으며, 일부만 오르도스에 남고, 대부분은 남쪽의 윈난, 미얀마, 부탄, 동쪽의 허베이, 서쪽의 티베트 등 사방으로 흩어졌다. 1232년 몽골군은 남송으로부터 길을 빌려 금나라 수도 카이펑으로 쳐들어갔다. 금나라는 남송에 사신을 보내 금나라가 멸망하고 나면 다음 차례는 남송이니 지원해달라고 애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금나라 애종(哀宗)은 남쪽 차이저우(蔡州)로 달아나고, 카이펑은 함락됐다.  

 

남송은 금나라의 애원과 다수 신료의 반대에도 맹공(孟珙)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줘 몽골군과 함께 차이저우를 포위하게 했다. 남송은 몽골에 군량도 제공했다. 1234년 1월 몽골군과 남송군의 합동 공격으로 성은 함락되고 애종은 자결했다. 애종의 죽음은 나라의 군주로서 부끄럽지 않은 최후였다. 조선의 인조와 고종을 필두로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 신라 경순왕 등이 망국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애종은 망한 나라의 군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3) 무뇌아(無腦兒)·무책략(無策略)

/쿠빌라이 칸. 

 

금나라 멸망 과정에서 재상 사숭지(史嵩之)를 비롯한 남송 지도부의 무책략(無策略)은 눈뜨고 볼 수 없을(目不忍見) 정도였다. 남송은 조상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자국 내 길을 빌려주면서까지 몽골을 도와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서하가 망하자 금나라도 망했으며, 금나라 다음은 남송 차례가 될 게 명명백백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상황인데도 금나라 지도부는 무뇌아(無腦兒)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금나라가 망하자 남송 조정에는 고도(古都) 카이펑과 뤄양을 수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다. 재상인 정청지(鄭淸之)가 조범(趙范)·조규(趙葵) 형제의 출병론을 지지하면서 20만 명의 남송군이 북진해 허난으로 들어갔다. 북진은 매우 순조로웠다. 남송군은 폐허 상태의 카이펑과 뤄양을 손쉽게 점령했다. 뤄양성 안에는 수십 가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몽골군은 남송군의 북진 소식을 접하자 북부와 서부에서 밀물과 같이 공격해왔다. 남송군은 상호 연락도 취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남쪽으로 패주했다. 이듬해인 1235년에도 몽골군이 대거 남하했다. 2만 명의 훈련 잘된 가병(家兵)을 거느린 맹공의 활약으로 몽골군의 남하를 일단 저지했다. 고승(高僧)과 같은 풍모를 지녔다는 맹공은 장군으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인물이었다. 맹공은 1239년 고향이자 군사 요충지인 샹양(襄陽)을 몽골군으로부터 탈환했다. 

 

이런 가운데 친형 몽케 대칸(大汗)에 의해 중원 총독으로 임명된 쿠빌라이는 러허(熱河) 금련천에 성곽을 쌓고, 유병충·요추·허형·사천택 등 화북 한인(漢人)을 대거 기용해 허베이와 산둥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1252년 몽케는 쿠빌라이에게 윈난(雲南)의 대리(大理) 정벌을 명했다. 남송 포위책의 일환이었다. 쿠빌라이는 대리를 정복한 후 티베트까지 진출했다. 쿠빌라이의 부장 우량하타이(우량하에서 오랑캐라는 말이 기원했다)는 쿠빌라이와 별도로 북베트남 홍하 유역으로 진격했다.  

 

성리학에 경도된 남송 이종(理宗)은 금나라가 멸망한 1234년 사대부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던 위료옹(魏了翁), 진덕수(眞德秀) 같은 성리학자를 중용했다. 그들은 현실 정치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감행된 조범·조규 형제의 허난 출병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종은 출병 실패 이후 가사도(賈似道)라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현실주의자를 기용했다.

 

4) 이성계와 몽골의 막내 상속

/전쟁기념관이 소장한 처인성전투 기록화. 2002년 그린 것이다.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사르타크(살례탑)를 맞아 싸운 전투를 담은 기록화다.[문화컨텐츠닷컴 제공]

 

대칸 몽케의 몽골군은 서쪽과 남쪽으로 우회해 남송을 공략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몽케는 본대(本隊)를 이끌고 산시(陝西)와 쓰촨을 거쳐 창장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고, 쿠빌라이는 연경 북방에서 출발해 허베이와 허난을 거쳐 창장의 북쪽 지류 한장(漢江)을 따라 남하하고, 부장 우량하타이는 광시에서 후난을 거쳐 북상한 후 창장 중류 위에저우(鄂州)에서 3대가 합류해 남송의 수도 린안(항저우)을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우창(武昌)은 위에저우의 중심도시로 삼국시대 오나라 초기 수도이자 동진(東晋)의 2대 군사요충지 중 하나인 서부(西府)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몽케의 본대가 선택한 진격로는 위나라 종회(鍾會)의 촉한 공격 루트와 거의 같았으며, 쿠빌라이가 선택한 루트는 조조가 유비·손권 연합군을 치기 위해 남하한 길이었다.  

 

1257년 몽케는 대군을 이끌고 수도 카라코룸(몽골고원에 위치)을 출발해 산시와 한중을 거쳐 쓰촨분지로 들어갔다. 몽케는 충칭(重慶)을 공격하다가 조어산(釣魚山)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몽케의 후계 자리를 놓고 둘째 쿠빌라이와 수도 카라코룸에서 감국(監國)을 맡고 있던 막내 아리크부가 사이에 긴장이 조성됐다. 몽케와 쿠빌라이, 아리크부가는 모두 칭기즈칸의 막내 툴루이의 아들이며, 몽골족 등 유목민은 일반적으로 막내 상속을 원칙으로 했다. 몽골 군벌 출신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막내 이방석을 후계자로 정한 것도 몽골 전통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쿠빌라이는 포위하고 있던 우창으로부터 철군해 대칸 지위를 다퉈야 했으나 북베트남에서 출발해 북상하던 부장 우량하타이로 인해 우창을 떠날 수 없었다. 우량하타이가 후난을 거쳐 본대에 합류하자 쿠빌라이는 후퇴를 결정했다. 전황은 몹시 불리했다. 쿠빌라이군은 남송의 우창 주둔군과 한장(漢江) 상류 샹양(襄陽) 주둔군 양쪽으로부터 합동 공격을 받을 공산이 컸다. 더구나 우창에는 남송군 총사령관 가사도가 증원 부대를 이끌고 도착해 있었다. 쿠빌라이는 동진의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여사잠도(女史箴圖) 등 그동안 모아왔던 진귀한 예술품으로 가사도를 매수해 난국을 풀어냈다고 한다. 쿠빌라이군과 우량하타이군은 남송군을 눈앞에 두고 창장의 한 지점인 대도하(大渡河)에 부교를 설치해 큰 손실을 입지 않고 후퇴했다. 그로부터 600년 후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태평천국군의 익왕(翼王) 석달개와 옌안장정(延安長征) 때 홍군이 양자강을 건넌 지점도 쿠빌라이군이 건넌 지점(대도하)과 같다.

 

5) 삼별초, 가마쿠라 막부와 통교

/일본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그린 일본을 침략한 몽골 병사 모습.

 

중국 대륙이 요동치던 그때 최씨 무신정권 주도로 40여 년간 몽골의 침공에 대항하던 고려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고려왕 고종 왕철이 파견한 세자 왕전이 금련천으로 후퇴하던 쿠빌라이를 샹양에서 만나 고개를 숙였다. 왕이 된 왕전이 1270년 개경 환도(還都)를 단행하자 최씨 정권의 사병 삼별초군은 환도를 반대하고 난을 일으켜 진도로 남하했다. 삼별초군은 일본 가마쿠라 막부와 통교했다. 쿠빌라이는 1272년 8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 진도를 빼앗기고 제주도로 옮겨가 있던 삼별초군 처리를 촉구했다. 1273년 2월 1만 명으로 증강된 고려·몽골 연합군은 제주도를 공격해 김통정이 이끌던 삼별초군을 전멸시켰다. 

 

금련천으로 회군한 쿠빌라이는 화북(漢地)에서 육성한 대군을 동원해 4년간의 치열한 내전 끝에 만주를 근거로 한 테무게 옷치긴(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으로 ‘불씨를 지키는 자’라는 뜻) 가문의 지지를 확보해 아리크부가를 굴복시켰다. 쿠빌라이는 1271년 대도(베이징)로 근거지를 옮기고 국명을 원(元)이라 했다.  

 

금나라가 멸망하면서 몽골과 직접 국경을 접한 남송은 전쟁이 일상사가 됐다. 전쟁 비용으로 인해 남송의 경제 상황은 날로 악화됐으며, 농민 반란이 일어날 조짐을 보였다. 우창에서 몽골군을 격퇴한 것으로 알려진 남송 장수 가사도는 수도 린안에 귀환해 재상에 임명됐다. 가사도는 농민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한 쌀의 저가(低價) 강제매입 제도를 철폐하고 공전법(公田法)을 실시해 재정난을 타개했다. 그 결과 가사도는 대지주와 관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됐다. 대지주와 관료들에게는 눈앞의 이익이 더 중요했다. 

 

쿠빌라이는 한장(漢江)의 흐름을 따라 남송 정벌에 나섰다. 남송의 최대 요충지는 후베이성 샹양과 판청(樊城)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1268년 초 샹양과 판청을 포위했다. 샹양과 판청은 한장을 마주 보고 있는 후베이 최대 성시(城市)들로 관우와 조인이 각각 촉한과 위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운 곳이다. 남송(南宋)도 샹양을 사활의 땅으로 인식해 하귀(夏貴) 등이 이끄는 수군을 통해 전력을 다해 샹양 수비군을 지원했다. 

 

남송군의 5년에 걸친 저항은 신무기 사라센 대포(回回砲)로 말미암아 끝장났다. 원(元)의 위구르인 지휘관 아리하이야는 1272년 3월 일한국(汗國)이 파견한 이스마일이 제작한 사라센 대포를 사용해 5년간이나 버텨오던 판청과 샹양의 성벽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사령관 여문환(呂文煥)은 원나라에 항복하기 전 구원군을 기다리느라 수도 항저우가 있는 동남쪽만 바라보았다. 샹양이 함락됨으로써 남송의 명운은 경각을 다투게 됐다. 한장을 거쳐 창장을 따라 내려가면 남송의 요지를 쉽게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미카제(神風)의 유래

원은 일본을 정복하려는 의도로 1268년부터 고려를 통해 3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실력자 호조씨(北條氏)는 몽골 사신을 추방하고, 1271년 몽골 침공에 대비해 고케닌(무사 계급)에게 규슈의 하카타만(博多灣) 방위를 명령했다. ‘조큐(承久)의 난’ 이후 50년이 지난 이즈음 대다수 고케닌은 전쟁을 제대로 할 줄 몰랐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샹양 함락 후인 1274년 10월 원나라는 일본 침공을 시작했다. 고려군 5600명을 포함한 3만여 명의 병력과 900여 척의 함선을 동원한 원나라군은 쓰시마와 이키(壹岐)를 점령하고, 하카타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여·몽 연합군을 맞아 선전했지만 여·몽 연합군의 집단전법과 화약을 이용한 신병기 때문에 고전했다. 일본군은 다자이후(大宰府)까지 후퇴했다. 그런데 다음 날 하카타만에 정박해 있던 여·몽 연합군 함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태풍 때문에 대다수 함선이 침몰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고려로 퇴각한 것이다. 

 

몽골이 일본을 점령하려 한 것은 남송 정벌에 일본군을 동원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고려군이 규슈를 침공한 것에 분노한 호조 가문은 1276년 고려 침공 계획을 세웠다.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재침에 대비해 규슈의 고케닌들로 하여금 하카타만 해안선을 따라 석축을 쌓고, 병력도 증강케 했다.  

 

원나라는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후 일본 원정을 다시 계획해 1281년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 4만 명과 남송의 항장(降將) 범문호(范文虎)가 지휘하는 강남군 10만 명 등 총 14만 명의 대병력을 4400여 척의 함선에 나눠 태우고 2차 일본 침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방벽에 의지하며 2개월간 공방전을 계속했는데, 연합군은 이번에도 상륙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태풍을 만나 괴멸적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14만 명의 병사 중 11만~12만 명이 규슈 바다에 빠져 죽었다. 원나라가 2차 일본 정벌전에 남송군을 대거 동원한 것은 반란을 일으킬만한 남송의 군사 자원을 처분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후에도 수차 일본 정벌을 추진했으나, 광둥과 푸젠, 참파(베트남 중남부 오스트로아시아계 민족 국가) 지역 반란으로 인해 중단했다.

 

6) 몽골, 유라시아를 관통하다

/개성 만월대 출토 유물 남북 공동 전시회 개막식 및 학술회의가 2015년 10월 15일 개성 고려성균관에서 열렸다. 개성 만월대는 고려 왕궁터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원의 1차 일본 침공 이듬해인 1275년 샹양에 이어 커다란 희생 끝에 우창을 점령한 원나라군은 창장의 흐름을 타고 동진하다가 반격을 가해온 가사도의 남송군 10만 명을 난징 근처 우후(蕪湖)에서 대파했다. 바얀이 지휘하는 원나라군은 속공작전을 취해 바로 난징을 점령하고, 곧이어 린안(항저우)으로 향했다. 1276년 린안이 함락되고, 남송은 멸망했다. 

 

문천상(文天祥), 장세걸(張世傑), 육수부(陸秀夫) 등이 마지막까지 충절을 다해 조시(趙是), 조병(趙昺) 등 소년 황제와 함께 저항했다. 원나라군은 이들을 추격해 1279년 마카오 서쪽 애산도(厓山島)에서 따라잡았다. 남송 망명정부군은 처절한 전투 끝에 패하고, 조병과 장세걸, 육수부 등 주요 인물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흉노(匈奴) 저(氐) 선비(鮮卑) 등 새외민족은 화북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강남으로 내려오지는 못했다. 새외민족들이 강남까지 지배한 것은 한화(漢化)된 선비족 왕조 수(隋)·당(唐)대에 이르러서였다. 5대 10국 시대에 활약한 사타돌궐도 화북만 지배했으며, 거란(요)과 탕구트(서하)는 중원에 발만 담그는 데 그쳤다. 여진이 화이허(淮河) 이북을 지배한 데 이어 몽골은 중국과 주변부를 모두 장악했다.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지배를 통해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 간 교류가 촉진됐다. 주치·바투·훌라구·야율초재와 같은 동아시아인이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로도 가고, 마르코 폴로·사두라(薩都剌)·알라딘·이스마일·정학년과 같은 유럽인 또는 중동인이 중국으로 왔다. 몽골제국의 재상 야율초재는 1222년 우즈베키스탄으로 추정되는 하중(河中)에서 임오서역하중유춘(壬午西域河中游春)이라는 긴 제목의 시(詩)를 지었다. 하중은 중앙아시아 2대 하천인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다리야는 투르크어로 강을 의미한다.

 

異域春郊草又青 (타향 땅 봄, 교외에 나오니 풀이 푸른 데)  

故圓東望遠千程 (고향 그리워 저 멀리 동쪽을 바라보니 아득한 천리)

臨池嫩柳千絲碧 (연못가 버드나무 가지마다 푸르고) 

倚檻妖桃幾點明 (난간에 기대니 흐드러진 복사꽃 아름답기도 해라) 

丹杏笑風眞有意 (살구나무는 살며시 미소 짓는데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白雲送雨大無情 (비 내리는 흰 구름 무정도 해라) 

歸來不識河中道 (내린 비 강을 이룬 우즈베키스탄 길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春水潺潺滿路平 (봄비가 길을 덮어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