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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3/ 대통령1/ 대통령의 권한과 의무 - 역대 대통령 이야기1

상림은내고향 2021. 6. 8. 14:14

대한민국3/ 대통령1/

2017.05.01

■ 대통령의 권한과 의무

대한민국은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제도적으로 분립시키고, 국회의 신임 여부와 관계없이 임기 동안 재직하는 대통령이 국가원수인 동시에 행정부의 수반이 되는 대통령제 국가다. 제헌(1948년)에서부터 현행 헌법(1987년 개정)에 이르기까지 정부 형태가 바뀔 때마다 대통령의 헌법상의 지위도 변해왔다.

 

 

/청와대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관저다. /조선 DB

 

□국가 원수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에 있다. 이를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원수는 국내에서는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자격을 가진 국가기관을 말한다. 대통령은 헌법에 의해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외교에 관한 권한을 가진다. 행정부 수반 대통령은 행정 작용의 최종적인 권한을 가지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제4항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는 규정에 의해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의 지위를 가지며, 이것은 정부가 그에 의해 조직되고 영도(領導)되는 것을 말한다.

 

대통령은 정부 조직권과 행정 각부 장의 임명권, 감사원의 조직과 통할권(統轄權)을 가진 기관인 동시에, 국무회의의 의장으로서의 지위, 행정 각부를 지휘하는 최고 지휘자의 지위 등을 갖고 있다. 또한, 공무원에 대한 임면권, 영전수여권* 등을 가진다. 그리고 국군통수권은 국방부가 행정부에 속해있기 때문에 행정부의 수반으로써 가지는 권한이다.

 

* 영전수여권: 대통령이 국가사회에 공로가 현저한 자에 대하여 훈장·포장(褒章) 기타의 영전을 수여할 수 있는 권한.

 

 /대통령 집무실 - 2016년 12월 9일 청와대 사랑채 청와대관 대통령 집무실 모형 모습.(왼쪽), 대통령 기록관 - 2017년 3월 31일 세종시 대통령기록관 역대 대통령 전시실 모습. /조선 DB

 

 

▲위는 대표적인 대통령의 권한이다. 이 밖에도 입법·사법·행정에 관련된 많은 권한이 있다.

 

▶ 법률 제정에 관한 권한 

대통령은 법률안 제출권과 법률안 거부권이 있다. 곧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다른 의견이 있을 때에는 그 법률안을 공포하지 않고, 국회로 다시 돌려보내는 권한이 거부권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하여 행정부로 이송되면 다른 의견이 없는 한 15일 이내에 공포해야 한다는 공포권이 있다.

 

▶ 명령 제정권

민주 국가는 법에 따라 다스리는 법치 국가이기 때문에 국민의 권리·의무 등을 규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오늘날 행정부에서 하는 일이 너무 많아 그것을 하나하나 입법부에서 모두 법으로 만들기가 어려워, 행정부에서 예외로 규정하도록 법률로 허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법률에 준하는 명령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러한 명령에는 위임 명령과 집행 명령이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대통령 의전차량 - 이승만 대통령 의전용 세단(1956), 대통령 경호원 - 제 17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2월 25일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여 경호원들의 호위속에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대통령 전세기 : 대통령전용기로 운항하는 대한항공 보잉 747-400 기종 모습. /문화재청, 조선 DB

 

▶ 일반 사면권

범죄의 종류를 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모든 죄인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형의 전부를 용서하거나, 이미 형의 선고를 받은 사람에게는 형의 집행을 면제하고, 아직 형의 선고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공소권을 없애는 권한을 대통령이 가진다. 일반 사면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 특별 사면권

이미 형의 선고를 받은 특정 죄인에 대하여 형의 집행을 면제하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 불소추 특권

대통령은 재직기간 중 헌법 제84조에 의해 내란·외환의 죄 이외의 범죄에 대하여 형사상 소추(訴追)를 받지 않는다. 이는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대통령의 신분과 권위를 유지하고 국가 원수 직책의 원활한 수행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재직 중이라도 민사상·행정상의 소추, 국회에 의한 탄핵 소추는 받을 수 있다. 또한, 재직 중에 범한 형사상 범죄에 대해서는 퇴직 후에 소추할 수 있으며, 대통령의 재직 중에는 형사상의 소추가 불가능하므로 당해 범죄의 공소시효는 정지된다.

 

※ 직무수행상의 면책특권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행하는 적법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판단 오류 등으로 인한 정책집행의 오류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위법한 행위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법적인 책임을 진다.

 

 

▲(왼쪽부터)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조선 DB

 

현재,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중임할 수 없고 단임제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거나 중임으로 변경하는 개헌은 그 개정안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 이는 과거의 정권이 그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헌을 추진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1948년 제헌부터 1987년 제 9차 개헌까지의 대한민국 정치제도 변천사를 정리했다.

 

/그래픽= 이은경, 사진= 조선 DB

 

■ 대통령의 모든 것'…대통령 퇴임 후 예우는?

청와대는 '청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이라는 뜻으로 대통령의 집무 및 생활 공간이다. 재임기간 동안 대통령과 그 가족들은 청와대에서 생활하게 되며,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받게 된다. 하지만 대통령 재직 중 탄핵결정을 받아 퇴임한 경우에는 연금지급 등 법에 규정된 모든 예우가 박탈된다.

■ 역대 대통령

1대  國父 李承晩 대통령 1948 - 1960.03

3대  李承晩

4대  윤보선 1960.6.13 - 1962.12

5대  영웅 박정희 1963.12.17 - 1979.10

9대  박정희

10대 최규하 1979. 12.21 - 1980.8.31 

11대 전두환(1931.1.18 -) 1979.12.21 - 1980.8.31 

12대 전두환

13대 노태우(1932 -) 1988.2 - 1993.2 노태우(1932 -)

14대 김영삼(1927.12.20-2015.11) 1993.2 - 1998.2 

15대 김대중(1924.1.6 - 2009) 1998.2 - 2003.2 

16대 노무현(1946.9.1 - 2009) 2003.2 - 2008.2 

17대 이명박 2008.2 ~ 2013.2

18대 박근혜 2013.2 ~ 2017.03

19대 문재인 2017.5 ~ 2022

 

■ 역대 대통령 이야기

2017.08.14  우표 속 역대 대통령

▲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역대 대통령 기념우표 속에는 한국의 현대사가 녹아 있다. 이승만(1~3) 대통령은 취임 기념우표 외에도 생일 기념우표도 남겼다. ()대통령에 대한 과잉 충성의 소산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80회, 81회 생일축하 우표도 나왔다.

 

  18년간 장기 재임했던 박정희(5~9) 대통령 시절에는 기념우표도 많이 발행됐다. 다섯 번의 취임 기념우표 외에도 봉고 가봉 대통령, 포드 미국 대통령 등 외국 국가원수들이 방한했을 때나 동남아 순방 때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서거 후에는 추모우표도 나왔다. 육영수 여사 사후에도 추모우표가 나왔다.

/제8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경제발전에 매진하던 시대상이 표현되어 있다.

 

/포드 미국 대통령, 봉고 가봉 대통령, 셍고르 세네갈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기념우표.

 

/박정희 대통령 추모우표.

 

 

전두환(11·12) 대통령 시절에도 많은 기념우표가 나왔다. 두 번의 대통령 취임우표 외에도 방미 기념 우표, 아세안 5개국 순방 기념우표 등을 발행했다.

/최규하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전두환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노태우(13) 대통령부터는 취임 기념우표만 발행하기 시작했다.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나라가 커지면서 더 이상 대통령의 외국 방문이나 외국 수반의 방한(訪韓)이 국가적 경사가 아니게 된 것이다. 김대중(15) 대통령은 예외다.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우표가 나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현 대통령은 갑작스러운 선거와 취임 때문인지 취임 기념우표가 나오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김영삼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우표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이 취소됐다. 연세대·고려대 같은 사립대학 개교 100주년 기념우표도 있었고, 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우표도 있었다. 오래전 얘기지만 슈바이처 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가 나온 적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에 남긴 족적이 그만 못하다는 얘긴가? 입맛이 쓰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친근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6.04.20 명예박사: 김대중 19개, 김영삼 11개, 박정희는?

/사진출처=조선DB


 
朴正熙 정부의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故 金聖鎭(김성진)씨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號()가 없었다고 한다.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은 '박정희란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고 金 당시 대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朴 대통령은 호를 쓴 적이 없다.


  
한 보좌관이 모 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 대통령은 '박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박사 학위가 하나도 없다
   
  
朴 대통령은 私信(사신)을 쓸 때는 절대로 '大統領 朴正熙'라고 하지 않았다. '朴正熙 拜'라고만 했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힌 대로 알려져 한동안 생일이 아닌 날에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한동안 이를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 대통령은 권위적인 것들을 생래적으로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불린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군림을 증오했다. 그는 허례허식도 싫어했다. 항상 淸貧(청빈)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헤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 그리하여 屍身(시신)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 박정희의 자연스런 眞面目(진면목)이었다
   
  
몇년 전 조선닷컴엔 역대 대통령의 名博(명예박사) 통계가 실려 있었다. 김대중 19, 김영삼 11, 박정희 0, 그의 딸은 다섯 개란다. 명예박사 개수에 업적도 비례한다면 좋겠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일보 글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 임기 후 역대 대통령 사저는?

 

 

 

 

 

 

 

 

 

 

2016.11.03 역대 대통령 지지율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직선제가 실시된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을 필두로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임기 초에 높은 지지율을 자랑하다가 임기 말이 될수록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DB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1988년부터 집계해 발표하는 '역대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에 따라, 분기별로 빠짐없이 집계가 된 14대 김영삼 대통령부터 18대 박근혜 대통령까지 모두 5명의 전·현직 대통령의 지지율 추이를 분석했다.

 

※ 한국갤럽 역대 대통령 직무 수행평가의 질문은 "귀하는 OOO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이며 '잘 하고 있다'는 긍정의 답변, '잘못하고 있다'는 부정의 답변으로 집계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금융실명제 실시와 역사바로세우기 정책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등으로 70~80%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어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로 국민의 지지를 얻었지만, 1996년 말 노동법 처리를 강행하며 정권 내부에서도 반발을 사는 등 레임덕이 시작되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아들 현철씨의 특혜대출 비리 사건 연루와 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지지율 급락을 맞았다. 취임 초기 워낙 높은 지지율을 얻었던 터라, 급락 폭이 두드러졌다. 1997년 말 IMF 사태를 맞이하면서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남은 임기 9개월 동안 한 자릿수에 머무르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5년 차 4분기 6%의 지지율로 임기를 마무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사태를 회복하고 경제를 회생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1년 차 1분기 국민 71%의 지지를 받았다. 실제 IMF 사태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업적에,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면서 레임덕의 길목이라 불리는 3년 차 말에도 54%의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진승현·정현준·이용호 등 '3대 게이트'를 통해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었고, 아들의 비리가 발목을 잡았다. 4년 차인 2002년 차남 김홍업씨와 3남 김홍걸씨가 나란히 구속수사를 받으면서 여론이 급격히 돌아섰고,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과 신용카드 대란 등으로 임기 마지막엔 최저치인 24%의 지지율을 얻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초 정치권과의 소통 강화와 연공서열을 깬 능력 위주의 인사 조처로 60%의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 그러나 집권 첫해부터 대북 송금 특검 실시와 이라크 파병, 분양가 원가 공개 거부 등으로 지지세력이 이탈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면서 지지율이 25%에 그쳤다.

 

친형인 노건평씨의 땅 투기 의혹과 측근들의 불법 선거자금 논란, 이후 집권 4년 차에는 부동산 정책 실패와 지방선거 대패 등으로 레임덕이 가속화됐다.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에서도 줄줄이 탈당하는 등 여권 분열을 겪으며 4년 차 4분기에는 지지율 12%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100일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부터 '강부자' (강남에 사는 부자), '고소영' (고대·소망교회·영남출신)으로 대표되는 국무위원 및 청와대 참모진의 인사 난맥 등으로 지지율이 폭락했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촛불 집회 확산으로 52%였던 지지율은 1년 차 2분기에 21%로 곤두박질쳤다.

 

이른바 '광우병 파동'을 시작으로 이 전 대통령이 내세운 대운하, 혁신도시, 의료·수도·가스 민영화 등에 대한 반발로 이 전 대통령의 첫해 지지율은 3분기 24%, 4분기 32%에 그쳤다. 이후 이 전 대통령은 친서민정책 등을 추진하며 30~40%의 지지율을 유지해 오다 집권 말기 친형 이상득 의원과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이 구속되면서 23%의 지지율로 임기를 마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율'이라고 불리며 확고한 지지기반을 다져왔다. 취임 직후 42%로 출발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한 해 3분기엔 60%까지 치솟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30% 이하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으며 굳건하게 지켜왔다.

 

그러나 최근 '최순실 비선 실세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난 10월 마지막 주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로 내려앉았고, 박 대통령의 '90초 대국민 사과' 이후 지지율은 14%까지 떨어졌다. 일부 조사에서는 한 자릿수로 떨어진 상태다. 내일신문과 여론조사 회사 디오피니언이 발표한 박 대통령의 지지도는 9.2%였다.

지지율 최고 vs. 최저는 누구?

 

분석 대상인 5명의 전·현직 대통령 가운데 취임 초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취임 직후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단행한 금융실명제와 역사 바로 세우기,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등의 정책이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해체한 것도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1년차 2~3분기 모두 83%라는 높은 지지율을 자랑했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 사람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5년차 4분기에 6%라는 최저치의 지지율을 기록했는데, 선진국 진입의 관문 격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 1년도 채 안 돼 터진 IMF 구제 금융 사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IMF 사태가 이어지며 임기 말 김 전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여기에 '소통령'으로 불리던 차남 김현철씨가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면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 어느 정부도 '4년 차 징크스'를 피해갈 수 없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대체로 4년차 3~4분기에 지지율 하락세를 면하지 못했다. '4년 차 징크스'라고도 불린다. 1987년 개헌으로 취임한 5년 단임제 대통령들은 친·인척, 측근 비리 때문에 '4년 차 징크스'를 겪을 때마다 거국 내각 요구를 받았다.

/장학로 전 청와대실장(왼쪽),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조선DB

 

김영삼 정부 때에는 4년 차인 1996년에 장학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기업들에서 27억여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고, 이양호 국방부 장관이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돼 구속됐다. 충남 연기군의 관권 선거 의혹을 겪으며 권력의 무게 중심은 유력 대선주자였던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 쪽으로 급속히 쏠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4년 차 초반에 41%였지만 3~4분기에는 28%까지 하락했다.

 

/진승현씨(왼쪽), 이용호씨/조선DB

 

김대중 정부도 집권 4년 차였던 2001년에 이용호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등 정·재계가 연루된 권력형 비리인 '게이트'가 잇따라 터져나왔다. 권력의 추와 정보가 야권으로 옮겨가면서 레임덕에 빠졌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율은 1년 내내 25~31%에 머물렀다.

 

/김재록씨(왼쪽),행담도/조선DB

 

노무현 정부의 집권 4년 차인 2006년에는 임기 후반기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 개발, 행담도 개발 스캔들과 '김재록 게이트',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 사건으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노 대통령의 측근들이 관련됐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으면서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치인 12%까지 떨어졌다.

 

/(왼쪽부터) 이상득씨,최시중씨,천신일씨/조선DB

 

이명박 정부의 4년 차인 2011년은 저축은행 비리를 시작으로 갖가지 부정부패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 측근들과 친·인척이 줄줄이 수사선상에 오르고 구속되면서 지지율이 4년 차 초반 43%에서 연말엔 32%로 하락했다.

 

박근혜 정부도 4년 차의 징크스를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최순실씨 의혹이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새누리당에서도 반발 기류가 일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이미 조짐은 지난 4월 총선에서 나타났다.

 

역대 정부에서 지지율이 4년 차에 예외없이 하락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현직 대통령의 임기가 후반부로 갈수록 여야 차기 대권주자들의 경쟁이 가속화되고 정권에 대한 원심력이 커지면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대권경쟁과 맞물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피로도와 함께 측근·친인척 관련 의혹을 비롯해 국정 난맥상이 부각되는 것도 대통령 지지도를 낮추는 요인으로 꼽힌다.

 

朴대통령, YS의 최저 지지율 기록 깰까?

한국갤럽이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이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지지율은 처음으로 과반 아래인 36%로 폭락했다. 대국민 사과 이후엔 60대 이상의 지지율이 28%로 하락했다. 박 대통령의 확고한 지지층이던 60대 이상 유권자마저 지지를 거두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TK와 60대 이상 지지층의 이탈로 박 대통령의 향후 지지율에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사 기관이 달라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기 어렵지만, 최근 보도된 내일신문과 디오피니언의 11월 정례여론조사에서는 박 대통령의 '텃밭'인 대구·경북(TK)에서 8.8%의 지지율로 전체 평균보다 더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80.5%의 득표율로 박 대통령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던 TK 지역은 총선이 실시된 지난 4월 지지율 50%가 붕괴된 후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다가 최근 지지기반이 상당 부분 무너진 것이다.

 

朴대통령 지지율, 일부 조사서 한 자릿수로 떨어져

[최순실의 국정 농단] 내일신문 - 지지율 9.2%… "2선 후퇴" 67% 문화일보 - 지지율 13.7%… "거국내각" 26%… 文 20.4% 潘 18.9% 安 9.8%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한 자릿수까지 추락하는 조짐이다. 박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를 주장하는 응답층도 절반을 넘는 등 민심이 점점 더 악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일신문과 여론 조사 회사 디오피니언이 1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박 대통령 지지도는 한 달 전보다 25.0%포인트 급락한 9.2%였다. 50대(40.0% →7.9%), 60대(64.5% →20.8%), 대구·경북(44.3% →8.8%), 새누리당 지지자(77.2% →32.4%) 등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에서도 지지도가 급락했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하야)"고 답한 응답층이 67.3%에 달했고, "국내 정치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며 2선 후퇴를 주장한 응답층도 67.0%로 나타났다.

 

이날 문화일보와 엠브레인 조사에서도 박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13.7%에 그쳤다.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부정 평가는 83.7%였다. 최씨 사건의 수습 방안으로는 '박 대통령의 하야'가 가장 많은 36.1%로 나타났고, '탄핵' 역시 12.1%로 조사되면서 어떤 형태로든 박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과반에 가까운 48.2%였다. 반면 '거국 중립내각'은 26.1%, 내각을 교체한 뒤 박 대통령 중심으로 국정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응답은 22.5%에 그쳤다. 여론 조사 회사 리서치뷰가 지난 31일에 실시해 이날 발표한 조사에서도 박 대통령 지지율은 10.4%를 기록했다.

 

박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81.2%였다. 박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 하면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차기 대선 지지도 1위를 기록하는 등 야권이 반사이익을 얻었다. 문화일보 조사에서 문 전 대표는 20.4%를 얻었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8.9%였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9.8%), 이재명 성남시장(8.5%), 박원순 서울시장(5.3%) 등 야권 후보들이 그 뒤를 이었다. 새누리당 후보들은 모두 5% 미만이었다.

 

최순실씨와 관련된 의혹이 연이어 드러나며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고, 수사 이후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어느 선까지 유지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조선일보 구성 및 제작 = 뉴스큐레이션팀

인용 데이터 = 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제233호

 

2017.01.05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비선실세(秘線實勢)의 품격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로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검찰수사와 특검 등이 진행되고 있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위한 심리도 남아 있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역대 정권 치고 대통령 측근이나 비선실세(秘線實勢)의 농단이 없었던 적이 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노태우(盧泰愚) 정권 시절에는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朴哲彦) 장관과 월계수회를 두고 말이 많았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시절에는 차남 김현철씨가 ‘소통령(小統領)’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국정에 개입했다. 김대중(金大中) 정권 시절에는 동교동 가신(家臣)의 우두머리 권노갑(權魯甲),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의 문제가 있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때에는 대통령의 형 노건평(盧建平)씨가 ‘봉하대군’ 소리를 들으며 여러 번 말썽을 일으켰다. 이명박(李明博) 정권 때에는 대통령의 형 이상득(李相得) 의원이 ‘만사형통(萬事兄通)’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거론된 비선실세들은 정권 도중 혹은 정권이 바뀐 후에는 각종 비리 혐의로 사법처리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비선실세들의 문제 때문에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일은 없었다. 도대체 그들과 최순실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 시절인 1991년 4월 박철언 장관이 코리아탁구팀 훈련 과정을 참관하고 있다.

 

  박철언(75) 전 장관은 ‘6()의 황태자’ 소리를 들었다. 그는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 대통령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냈으니, ‘비선’이나 ‘막후(幕後)’라고 하기는 어렵다.
  

  박철언씨는 대구·경북 지역의 명문인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왔다. 1967년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1972년부터 검사생활을 시작, 부산지검, 법무부, 서울지검 등에서 근무했다. 1979년 남조선민족혁명전선(남민전) 사건 담당 검사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79
12·12사태와 전두환 정권의 등장은 박철언씨의 인생에 변곡점이 됐다. 그가 신군부의 2인자였던 노태우 장군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사촌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두환 정권 청와대의 정무비서관, 법률비서관을 거쳐, 1985년부터는 장세동(張世東) 국가안전기획부장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이는 그가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얘기도 했다.


 
그래도 박철언씨는 노태우 대표를 위해 일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6·29선언을 앞두고 민정당에 시국수습 대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하면서 당시 안기부장 특보이던 박철언씨에게도 같은 지시를 했다고 술회했다. ‘이미 그는 그 전부터 별도의 팀을 구성해 나를 위한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있었다’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기록했다.


 
박철언씨는 1987 6·29 선언 후 대선(大選) 기간 중에는 사조직(私組織) 월계수회를 만들어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민정당 전국구 의원 겸 대통령정책보좌관을 맡았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업무영역이 한정되지도 않았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밖으로는 북방외교·남북관계에 간여했고, 안으로는 3당 합당 등을 추진했다.  


 
박철언씨는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던 월계수회를 해체하지 않고 자신의 사조직으로 운용했다. 월계수회는 한창 시절 200만 회원을 자랑했다. 20여 명의 의원이 ‘월계수계’로 꼽혔다.  


 
박철언씨의 기반이 되어 준 것은 노태우 대통령의 신임이었다. 안무혁 국가안전기획부장, 이춘구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박철언씨를 견제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젊은 사람이 일 좀 해 보려고 하는데, 도와줄 생각은 않고 브레이크만 거느냐?”는 취지로 박철언씨를 역성들었다


 
6공 황태자’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그가 열심히 추진했던 3당 합당에서부터 시작됐다. 1990 3당 통합 후 박철언씨는 김영삼(金泳三) 민주자유당 대표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결국 1992 10월 제14대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을 탈당했다


  YS
에게 맞섰던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YS정권이 들어선 후 슬롯머신 업자로부터 6억원을 받은 혐의(알선수재)로 징역 2, 추징금 6억원을 선고받았다.  


  
‘소산(小山)’ 김현철

/1997년 5월 20일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된 김현철씨가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수의 입은 모습으로 대검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선된 직후 친·인척 수십 명을 불러 모아 “돈 싸 들고 접근하는 X파리들을 조심하라. 단돈 100원만 받아도 구속시킬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우환(憂患)이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차남 김현철(金賢哲)씨였다.


 
김현철씨는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86년 귀국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에 맞서고 있던 야권 거물의 아들이 일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이듬해 쌍용투자증권에 입사했는데, 김무성 전 한나라당 대표의 주선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7
년 대선 과정에서 여론조사의 중요성에 눈을 뜬 YS는 김현철씨에게 여론조사기관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김현철씨는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었다. 3당 합당 후 민자당 공식조직을 믿지 않았던 YS는 아들에게 사조직을 만들도록 했다. 김현철씨는 중앙조사연구소를 민주사회연구소로 확대 개편했다. 그는 제14대 대선을 앞둔 1992 6월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를 만들었다.  


  YS
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대통령의 아들에게 힘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한자리하려는 사람들은 돈이나 이력서를 싸들고 김현철씨를 찾았다. 사람들은 그를 ‘소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거산(巨山·YS의 아호)에 빗대 그를 ‘소산(小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박관용 비서실장, 박상범 경호실장 등이 우려의 뜻을 표했지만, 오히려 자리에서 밀려났다.  


 
안기부 기획조정실장, 사정비서관, 민정비서관 등 요소에 그의 사람들이 들어앉았다. 대통령에게 올라가기에 앞서 소산의 앞에 정보가 올라왔다. 안기부장이 그에게 보고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은 공식적인 정보라인에 앞서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정보를 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똑똑하고 기특하다고 여겼다.  


  1997
년 김현철씨의 비뇨기과 상담의인 박경식씨가, 김현철씨가 YTN 사장선임과 관련해 청와대 인사와 통화하는 장면과 내용이 담긴 비디오를 공개하면서 소산의 국정농단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후 한보사건 등이 터지면서 소산은 급전직하, 김현철씨는 기업인 6명으로부터 66억여 원을 받고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징역 3년에 벌금 144000만원, 추징금 5242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국정농단 부분에 대해서는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김현철씨의 30년 친구로 함께 법정에 섰던 박태중씨는 “현철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였다”면서 “그가 변한 가장 큰 이유는 주변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직장에서 선후배 눈치 살피며 자기 처신에 고민하며 살아야 할 나이에, 장관급 인사들로부터 상관(上官) 대접을 받았다. 제 아무리 겸손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라도 주변에서 비위를 맞추고 좋은 소리만 하면, 결국 그 분위기에 취할 수밖에 없다. 


 
김현철씨는 2005년에는 17대 총선을 앞두고 불법 정치자금 2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징역 16월에 추징금 20억원을 선고받았다.


 
김현철씨는 2004년 이후 3차례 국회의원 출마를 시도했으나, YS 시절 국정농단 이력이 걸림돌이 되어 번번이 무산되었다. 2012 19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영입되어 출마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두 차례 유죄선고를 받았던 이력 때문에 경선에도 나가지 못했다. 한동안 박정희·박근혜 부녀에 대해 좋게 얘기하던 그는 공천탈락 후, 두 사람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재개했다.  


  
DJ의 가신과 아들들

/2005년 6월 30일 가석방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가 서울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는 학습능력이 나쁜 종()인지도 모른다. 김현철씨의 국정농단을 보고서도 다음 정권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현철씨 사건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았던 1997년 대선을 치르면서 ‘대통령 친·인척 부당행위 금지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집권 후에는 친가는 8촌까지, 외가는 4촌까지 관리했다. 하지만 그는 재임 중 아들 세 명을 모두 감옥에 보내는 비운을 겪었다.  


 
큰아들 김홍일(金弘一)씨는 아버지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다.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0 5·17조치 이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아버지 DJ의 정치활동을 돕다가 1995년 제15대 총선에서 아버지의 정치적 텃밭인 전남 목포·신안갑에서 당선됐고, 17대까지 3선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인사청탁과 함께 1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2005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 추징금 15000만원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차남 김홍업(金弘業)씨는 경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정치광고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아버지를 도왔고,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을 지냈다. 5·17 당시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6개월간 구금된 상태에서 구타 등을 당했다고 해서 2010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에게도 각종 이권청탁이 몰렸는데, 100% 해결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용호·진승호 게이트 등과 관련, 각종 이권 청탁과 함께 47억원을 받은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벌금 4억원, 추징금 26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런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2007 4·25 보궐선거에서 전남 무안·신안에서 출마, 당선되었다.  

 

/2003년 8월 14일 현대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막내인 김홍걸씨는 고려대 불문과를 나와 미국 UCLA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 최규선씨로부터 돈 3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징역 1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금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1997
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DJ를 오랫동안 모셨던 ‘동교동 가신’들은 DJ가 당선될 경우 공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동교동계의 맏형으로 제13~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권노갑씨도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으로 물러앉았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목포상고 후배로 목포여고 교사로 일하다가 1962년 김대중 의원의 비서관이 됐다. 유신 시절에 두 차례, 신군부 등장 때 한 차례 옥고를 치렀고, 1997년에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법정에 섰다


 
김대중 정권 시절 그는 눈에 띄는 공직은 맡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 사실을 인정해, 새정치국민회의와 악연이 있는 이재춘씨를 주러시아 대사로 내보낼 때에는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그와 상의하도록 하기도 했다. 인사와 이권에 그가 간여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차장에 의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측근 및 아들들과 관련한 소문들을 조사해 자신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2000년 말 국민회의 내 바른정치모임을 이끌던 정동영 최고위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최한 당 간부 초청 만찬석상에서 “권노갑 고문에 대해 시중에서는 부통령이니 현철이니 등의 여론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 최고위원은 권 고문이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이었다. 이후 권노갑씨는 현대그룹의 금강산 카지노사업 인허가와 관련해 현대측으로부터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5년형을 선고받았다
  


  
‘봉하대군’

/2008년 12월 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알선수재 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나온 노건평씨가 보도진의 카메라 세례가 부담스러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검색대를 통과해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3형제(일명 ‘홍삼트리오’)의 국정농단에 대한 반성에서 친인척 및 측근 비리 단속을 다짐했다. 하지만 이런 다짐도 빛을 보지는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안희정씨는 대선 직후에, 삼성그룹 등에서 696500여만원의 불법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2004년 징역 1년에 몰수 1억원, 추징금 49000만원을 선고받았다. 결국 그는 노무현 정권 내내 공직에 나서지 못했다. 또다른 측근인 이광재씨도 대선 때 썬앤문그룹으로부터 불법자금 15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최도술, 선봉술, 강금원씨 등 노무현 대통령 측근들이 각종 비리 문제로 계속해서 법정에 섰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끈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盧健平)씨였다. 1968년부터 10년간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던 그는 노무현 정권 내내 크고 작은 비리 혐의로 언론을 탔다.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노건평씨를 찾아가 인사청탁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노무현 대통령은 방송에서 “좋은 학교 나오신 분이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라며 남상국 사장을 탓했다. 남 사장은 결국 한강다리에서 자살했다.  


 
노건평씨는 결국 남 사장에게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는데, 창원지법에 재판을 받으러 다니면서 판사들이 이용하는 출입문을 드나든 사실이 드러나서 구설에 올랐다. 이후에도 경남 지역에 부임한 기관장은 그를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한다느니, 경남 김해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선거에도 사실상 개입했다느니 하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경남지사나 총선에 출마한 친노 인사들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자인 박연차씨를 움직였다는 논란도 있었고, 국세청 인사를 비롯해 정부 인사에도 개입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렇게 안 끼는 데가 없이 그의 이름이 오르는 바람에 그는 ‘봉하대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인 2008 12월 노건평씨는 세종증권 매각 로비에 개입해 29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2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6 4월에는 2006 2~ 2008 11월 그가 회장으로 있던 전기부품 제조업체의 자금 138000만원을 처남 및 사위 계좌로 빼돌려 개인적인 용도로 쓴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노씨는 2007 3월 경남 통영시 장평지구 공유수면 매립면허 승인 과정에 개입하고 S사로부터 회사 주식 9000주를 받아 135000만원 상당의 이득을 챙긴 혐의(변호사법 위반)로 기소되기도 했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免訴·소송 종결) 판결을 받았다. 2015 6월에는 2007년 연말 특사를 앞두고 성완종 경남 회장 측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그를 특별사면 대상자에 올리려 했는지 여부를 두고 검찰 조사를 받았다.

  
  
만사형통(萬事兄通)

/2012년 7월 3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의원이 저축은행 비리 수뢰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 중수부로 출두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김영삼 정권에 이어 김대중 정권 시절에 아들이 문제가 되었다면, 이명박 정권 때에는 노무현 정권에 이어 형이 문제가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李相得)씨는 당시 이미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원회 의장 등 당 3역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5선 의원이었다. 젊었을 때에는 육사 14기로 입교했다가 그만두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한국나이론(코오롱의 전신)에 입사한 지 17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육사 동기인 이춘구 전 신한국당 대표가 그를 정계에 입문시켰다고 한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는 성실하고 근검절약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수십억 원의 재산가이면서 대중목욕탕에 가서도 수건을 한 장만 쓴다든지,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곰탕으로 때운다든지 하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정치적 감각은 무디지만 성실하고, 챙겨야 할 사람은 꼭 챙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인 동생보다 더 정치경력이 많은 대통령 형님이다 보니, 돈과 청탁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공직 인사 때는 ‘형님 인사’, 대통령 형제의 고향인 포항에 예산이 후하게 배정되면 ‘형님 예산’, 공천 때에는 ‘형님 공천’이라는 말이 돌았다. ‘만사형통(萬事兄通)’이라는 얘기가 회자됐다. 그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씨는 국무조정실 차장, 지식경제부 차관 등을 지내면서 ‘왕차관’이라는 말을 들었다. 말이 많이 나오자 이상득씨는 자원외교를 한다면서 남미나 북아프리카로 외유(外遊)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득씨를 둘러싼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상득씨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후 2007 10월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한테서 불법 정치자금 3억원을 받았다는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12개월을 복역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포스코 측으로부터 군사상 고도제한으로 인해 중단된 포항제철소 증축공사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자신의 측근들에게 포스코의 외주용역을 줄 것을 요구하는 등 금전적 이득을 취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로 2015 10월 불구속 기소되어 2016 11 21일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 야기한 최순실

/2016년 11월 2일 최순실씨가 이틀째 조사를 받은 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나와 서울구치소로 가는 차량에 오르고 있다.

 

박근혜 정권에서 국정농단 시비를 일으킨 최순실씨는 미국 LA에 있는 퍼시픽스테이츠대학교에서 석·박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진전문대 조교수 겸 부설유치원 부원장,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장 등을 지냈다. 다른 정권의 권력실세들과는 달리 공직에서 근무한 경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것은 오직 아버지 최태민 때로부터 이어져 오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사적(私的) 인연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외로울 때 그 곁에 있었고, 국회의원으로 처음 출마했을 때 경제적 도움을 줬고, 테러를 당해 부상을 당했을 때에도 병상을 지켰다. 그게 전부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사적인 인연 말고는, 그에게는 공적인 경력이 전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의 연설과 일정, 공직 인사 등에 개입하는 등 국정을 농단하다가 나라를 대란(大亂)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에 더해 최순실씨는 사이비 교주의 딸이라는 점, 딸 정유라의 학교에 가서 부렸던 패악질, 호빠 출신 젊은이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한층 격이 떨어져 보인다. 그의 딸 정유라도 남의 염장을 지르는 경우 없는 언행 등으로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게 나라냐?”는 성난 함성 속에는 “깜냥도 안 되는 자들이 나라를 분탕질한 데 대한 분노와 좌절이 담겨 있다. 그들로 인해 ‘나라의 격()’이 떨어졌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잘못한 비선실세 모두 품격 없는 것 

  언뜻 생각하면 역대 비선실세들 가운데 최순실씨의 격이 가장 낮다 싶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식으로 격을 따지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대학 나와서 고시 패스하거나 일류 기업에 들어갔던 이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는 아버지를 둔 아들, 민주화운동에 평생 헌신했다는 사람들, 외국 유학 다녀온 이들, 오랜 기간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도 권력에 취해 국정을 농단했고, 부정한 돈을 받았다. 돈과 여자 문제로 인한 구설이 끊이지 않았던 사람도 있다. 공공의 일(res publica)에 대한 책임감, 나라의 의미 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그런 짓을 했다. 최순실씨나 그를 키워 준 박근혜 대통령을 두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배울 만큼 배우고,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개 동네 아줌마’의 국정농단보다 더 고약한 일이 아닐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국정을 농단했던 비선실세들은 다 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린 ‘죄인’들이다.

[월간조선 2017 1월호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7.04.05 통치철학과 시대에 따른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과 화법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을 살펴보면, 개인의 통치철학과 시대 상황에 따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조선시대 봉건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고,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은 군부 정치를 통해 강력한 권위주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민주 정치로 변화하면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포용과 통합, 반권위주의의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은 CEO 출신답게 사업가형 리더십을 보여주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이미지 전략

우리나라에서 대선 후보의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때는 제13대 대통령 선거부터이다. 이때부터 특정 후보의 이미지 관리를 담당하는 전문가와 코디가 선거캠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공약뿐만 아니라 이미지 전략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에게 배워라 - 월간조선 2017. 05월호/ 박정희 - 박근혜

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시민강좌 | ‘대선과 5·16 56주년에 생각하는 국가리더십’

■ “5·16은 대한민국이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도록 한 진군의 나팔”

⊙ 세계 석학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터키의 케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와 함께 3대 혁명가로 꼽아
⊙ “5·16혁명으로 우리나라는 절대빈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
⊙ “자유민주주의체제와 대한민국을 지켜낸 박정희의 5·16혁명은 정당”(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박정희 지도력의 원리는 인간성의 본질을 간파한 상태서 장기적 전략을 세우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짠 뒤 신속 추진한 것”(조갑제 대표)

 

1961 5 16일 새벽, 박정희 육군 소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중앙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했다. 이른바 5·16이다. 5·16에 대해서는 구국의 혁명과 군사 쿠데타로 평가가 극명히 엇갈린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극과 극의 평가를 떠나 5·16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19대 대통령 선거 바로 전날인 5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간조선》과 박정희 대통령기념재단이 연중기획으로 진행 중인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가 열렸다. 7회 강연의 주제는 ‘대선과 5·16 56주년에 생각하는 새로운 국가리더십’이었다. 45회 어버이날이기도 했던 이날 4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행사장에 모였다.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온 사람도 보였다. 행사 2시간 전부터 행사장을 찾은 이도 다수였다. 그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제가 전 세계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몽펠르랭 소사이어티(MPS)에 참석했는데, 거기 경제학자들이 최단 기간에 최대 발전을 이룬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며 “5·16을 가지고 혁명이냐, 쿠데타냐 논쟁이 많은데 5·16 이후 대한민국이 천지개벽했으면 혁명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쿠데타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천지개벽했는지 판단은 참석하신 여러분께 맡기고 싶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당연히 혁명”이라고 했다.   


 
이날 주제 강연은 《불굴혼 박정희》( 10)의 저자인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가 맡았다. 고 대표는 《불굴혼 박정희》를 통해 의식혁명, 경제발전, 조국근대화, 핵개발, 민주주의, 조국통일이라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국가중흥 마스터플랜을 실천해 간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를 총정리했다. 본 행사의 전체 동영상은 《월간조선》 홈페이지(monthly.chosun.com)를 통해 볼 수 있다.  


 
고 대표는 강연에서 5·16에 대해 “대한민국이 경제 최빈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는 진군의 나팔”이라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구체적인 혁명계획을 세운 것은 1960년 초였습니다. 그 무렵 대한민국은 급격한 사회 변화와 혼란, 민족 비극인 전쟁과 그 상처 치료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만, 정부와 정치인들은 국민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한 채 이권다툼 감투싸움에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4·19혁명으로 표출된, 국민이 바라는 개혁은 무엇 하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고민하던 군부는 혁명적 분위기로 차츰 무르익어 갈 수밖에 없었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청년 장교들에게 ‘조국’은 정치와 이념을 뛰어넘는 절대가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1961 5 15일 한강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5·16은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무혈혁명이었습니다.
    

  5·16은 세계 3대 혁명

 

고 대표는 “5·16혁명으로 우리 국민의 잠재된 민족역량이 깨어나고 기적을 만들어 나아가겠다는 소명을 갖게 됐다”며 “5·16혁명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절대빈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 피터 드러커가 ‘20세기 인류사의 기적’이라 격찬한 한국의 국가개혁과 경제개발은 5·16혁명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 대표는 세계 석학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터키의 케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와 함께 3대 혁명가로 꼽는다는 사실도 전했다.   


 
“세계는 오늘날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탁월했던 세계 3대 지도자라고 설명한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 한국 근대화 연구 분야 석학인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석좌교수, 아시아 경제 대가인 와타나베 도시오 다쿠쇼쿠대학 총장,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마홍(2007 10월 별세) 등 세계 석학들은 박 전 대통령을 ‘부존자원 없는 상태의 국가를 교육 확산, 국력 결집으로 성공적으로 산업사회에 진입시킨 대표적 지도자’로 평가한다. 3대 혁명가에게 쿠데타는 목적이 아닌 하나의 방법이었다.   


 
터키 케말파샤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다. 그는 터키의 국부로 위대한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너무나 위대하여 다른 위인들과의 비교 자체가 거부되는 인물이며 터키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만약 그를 모독하는 자가 있다면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형법상의 처벌을 받는다. 이런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터키 국민은 진심으로 그를 숭앙하고 사랑한다. 아타튀르크는 무스타파 케말 장군의 성인데 국부라는 뜻이 있다(‘아타’는 아버지라는 뜻). 1934년 터키가 새로이 성씨 제도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였을 때 터키 국회가 그의 업적을 기려 국부라는 뜻의 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를 케말파샤라 부르는데, 파샤는 장군이란 뜻이다.   


 
터키의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 있으며 아타튀르크라는 명칭의 도로가 존재한다. 공공기관, 학교는 물론이려니와 많은 기업체까지 그의 초상을 사무실에 내걸고 있으며, 큰 도로에 접한 벽에는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활동상을 찍은 사진이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 중에도 지갑에 아타튀르크 사진을 넣어서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의 군인으로서의 무용담은 끝이 없을 정도이며 1차 세계대전과 독립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과 지략은 오늘에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구국의 영웅이었다. 1919년에는 터키독립전쟁을 벌이며 1923년에는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1938년 사망까지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된다. 그는 유럽의 병자였던 터키를 단기간에 광범위한 개혁을 통하여 근대국가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놓게 된다.   


 
이집트 나세르는 1952년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세력 자유장교단의 주역으로, 4년 뒤 모하메드 나기브 초대 대통령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에 올라 범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해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에 오른 직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가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 등을 상대로 수에즈 전쟁을 치러 패했으나 국제사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으며, 11년 뒤인 1967년 이스라엘과 벌인 6일 전쟁도 졌지만, 오히려 반식민주의 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면서 국민적 추앙을 받았다. 이집트 국민은 1970 9월 나세르 전 대통령이 아랍 정상회의 직후 심장발작으로 서거했을 때 열린 장례식에 수백만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애도함으로써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보여줬다. 나세르는 숨진 지 40년이 넘었지만, 이집트 국민은 여전히 나세르를 건국 영웅으로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다.         

 

국내에서 박정희 저평가되는 것 아쉬워     

터키의 케말파샤와 이집트의 나세르는 자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만, 대한민국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진두지휘한 지도자로 칭송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경제개발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라고 깎아내린다.   


 
고 대표의 이야기다.     

“중국 덩샤오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경제모델로 벤치마킹하여 국가 경제를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외교경제 정책을 본받아 실사구시 개방 전략을 펼쳐 미국과 협조 관계를 유지, 중국을 다국적 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천안문사태 때 탱크 군단을 동원, 민주화를 열망하며 광장에 모인 100만 시민에게 거침없이 발포하여 2000여 명이 죽고, 12000명이 다치는 참사를 빚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중국인들은 그를 천하 대란에 빠진 나라를 구한 은인으로 추앙한다. 장제스, 장징궈의 경우는 38년간 계엄령 아래 일당 독재정치를 펼쳐, 경제우선 정책으로 타이완의 발전을 이끌었다. 타이완 국민은 그들을 독재자가 아닌, 나라를 일으킨 지도자로 기억한다. 터키의 케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도 국부라고 불리는데, 우리만 박 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한다.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박 전 대통령이 오히려 고국에서 저평가되는 것이 안타깝다.   

     

해외에서 후한 평가받는 5·16과 박정희     

실제 박 전 대통령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후한 평가를 받는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난 후에나 가능하다. 이런 인물을 독재자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는 누가 뭐래도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라고 극찬했다. 《네 마리의 작은 용》의 저자이자 평소 한국 군사정권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 온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교수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은 없다. 그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고 평했다.   


 
공산권 지도자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박정희 관련 책은 다 가져와라. 그는 나의 모델”이라고 했고, 중국 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은 평소 “박정희는 나의 멘토”라고 말했다. 미국 랜드(RAND) 연구소는 “덩의 개혁은 박정희 모델을 모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청렴 리더십     

고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청렴 리더십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참으로 특이한 지도자였습니다. 청와대 본관 1층과 2층 집무실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았습니다. 변기에 벽돌 한 개를 넣어 물을 아끼고 뜨거운 한여름에도 선풍기조차 돌리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는 밥에 꼭 보리를 30% 섞어서 쌀 절약 혼식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점심은 멸칫국물에 만 국수였습니다. 측근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할 때면 점심때 국수를 먹었습니다. 그는 혁명적인 철학과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헌금, 기부금 때문에 기업인들과의 만남도 거부했습니다. 대통령 일가를 빙자한 이권 개입은 절대 허락지 않았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알리고 강력히 실천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 이후의 지도자들은 어땠습니까. 모두 국정농단 부정부패로 국민에게 실망만을 안겨주었죠.   


 
고 대표는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박 전 대통령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 평했다.   


 
“민족시인 이은상은 말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요.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지만, 《손자병법》에 이르길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상은 아니라고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남북한 체제 경쟁에서 김일성과 싸우지 않고도 이겼고, 세종대왕도 못 이루었던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다’라고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백척간두 휘몰아치는 광풍을 결연히 이겨내고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이 나라 이 민족의 제단에 망설임 없이 몸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박 전 대통령의 사상과 국가통치 능력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역사적 과제요, 번영과 생존을 위한 숙제입니다.     
 

 

 5·16은 정당성 없는 쿠데타였다라는 무지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 토론자로 나선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5·16은 정당성 없는 쿠데타였다라는 무지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고 대표의 주제 발표가 끝나고,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와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가 토론을 이어갔다.   


 
남정욱 대표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얻은 신생국 중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수많은 신생국이 독립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외교적인 독립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의 비슷한 패턴이었는데 우선 건국 초기, 대부분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명망가가 정권을 잡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과 독립은 전혀 별개의 문제지요. 국민의 요구와 국가의 재정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권위주의 통치, 독재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에 반발한 세력이 반정부 혁명(공산 전체주의 세력)이나 쿠데타(군부)를 일으키고 이렇게 들어선 통치자는 이전보다 더 강압적인 통치로 국민을 괴롭힙니다. 그러는 사이 경제 발전은 물 건너가고 이들 독립국은 저개발 빈곤 국가로 전락해 길고 긴 가난한 삶을 국민에게 선물하죠. 이게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의 독립국들이 걸었던 일반적인 경로입니다. 대한민국은 예외죠. 유일한 성공사례입니다.   


 
남 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박정희라는 아주 특별한 인물과 당시 한국 사회와 비대칭의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 군대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100여 개의 신생국 대부분 군이 중요한 위치를 점했습니다. 군부가 권력을 잡은 나라도 여럿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자기 나라를 근대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독재라는 어두운 그림자만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군대의 수준 차이였습니다. 다른 신생국들과 달리 한국군은 6·25전쟁을 통해 양적으로 급속히 성장했으며,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질적인 발전을 이뤘습니다. 일부 아시아, 아프리카 등이 무식하고 힘만 센 ‘군바리’들의 나라였다면 우린 군이 최고의 엘리트였던 나라였던 것이죠.   


 
실제 주한 미국군사고문단은 소수 정예의 엘리트 양산을 위해 육군사관학교(1950 6 1), 한국군 고급 장교 양성을 위해 육군대학(1951 12)과 국방대학원(1956 10)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교육받은 군인들은 최고 엘리트로 성장했다.   


 
남 대표는 박 전 대통령과 5·16 주역들이 이승만 정권이나 장면 정권의 멤버들과 달리 가난한 시골 출신이 많았다는 점도 주목했다. 가난에 증오를 가진 박 전 대통령이 5·16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행운이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의 구성원들은 가난을 ‘겪지 않고 지켜보면서’ 산 사람들이다. 그래서 절실하지 않았다. 농촌에서 사람이 굶어 죽어도 그게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난은 나의 스승’이라고 했던 박 전 대통령과 그를 따르던 5·16 주역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가난과 빈곤의 퇴치는 국가적 목표인 동시에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할 삶의 굴레였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정말 가난을 내쫓고 싶어 했다. 이런 열망을 가지고 박 전 대통령은 과업을 실현해 나갔고, 그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남 대표는 마지막으로 “‘5·16은 정당성 없는 군사 쿠데타였다’라는 무지의 논리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5·16은 국회 인사청문회의 단골 메뉴다. 대부분 말을 흐리거나 쿠데타라고 대답한다. 쿠데타, 맞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유광호 박사는 이를 재미있게 설명한다. 합법성과 정당성이다. 어느 것이 위일까. 일단 하나의 나라가 건국의 이념(대한민국의 경우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을 가지고 건설되면 그때부터는 정당성이 합법성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히틀러의 집권은 합법적이었지만 정당성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의 5·16혁명은 정당하다. 자유민주주의체제와 대한민국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상황에서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할 것인가의 문제다.   


 
프랑스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정당성은 합법성에 종속되지 않으며, 합법성은 반드시 정당성의 근거는 못 된다.         

 

박정희 리더십 12계명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 토론자로 나선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지도력의 원리는 역사의 원리와 인간성의 본질을 간파한 바탕에서 장기적 전략을 세우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짠 뒤 세심한 확인으로 신속하게 사업을 추진한 것”이라고 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단 기간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문명 건설을 이룬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12가지로 설명했다. 다음은 조 대표가 꼽은 박정희 리더십 12계명이다.   


 
(1) 화합형 정책 결정: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이었다. 엉터리 보고라도 끝까지 들어주었다. 좀처럼 즉석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 뒤 주무(主務)장관이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할 기회를 주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라 주무장관이 발안(發案)한 정책이 채택되는 방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야 정책에 대한 주인의식이 생기고 일을 할 때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남을 통해서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2)
민주적 정책 결정: 박 전 대통령은 어떤 회의에서도 먼저 발언하지 않았다. 토론을 시켜 문제가 제기되고 찬반(贊反)의견의 방향이 잡혀가면 그때 결론을 도출하고 필요한 보충지시를 내렸다. 당시의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경제정책의 결정 과정은 민주적이었다.   


  (3)
생산적 회의: 박 전 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무역진흥회의), 청와대 국무회의, 국가 기본운영계획 심사분석회의,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를 정례화하였다. 이들 회의는 대통령이 국정(國政)을 종합적으로 규칙적으로 파악 점검하고 살아 있는 정보를 얻는 기회였다.   


  (4)
철저한 확인과 일관된 실천: 박 전 대통령은 계획수립에 20%, 실천 과정의 확인에 80%의 시간을 썼다고 한다. 중앙부처 및 지방 순시 등 현장 시찰을 자주 한 것도 집행의 확인과 사기(士氣)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계획의 수정이 필요할 때는 토론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했다.   


  (5)
국민의 각성과 참여: 박 전 대통령은 국민이 자조(自助) 정신을 발휘하여 자발적으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인간과 조직의 정신력에 주목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인의 패배의식과 싸워 이긴 사람이다. 그는 경부 고속도로 건설 같은 눈에 뜨이는 구체적 업적을 통해서 국민의 체념과 자학(自虐)을 자신감으로 교체해 갔다.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도 작사, 작곡했다.   


  (6)
정부는 맏형, 기업은 전사(戰士): 박 전 대통령은 경제관료와 기업인이 이견(異見)을 보이면 많은 경우 기업인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 정책을 채택했으나 기업이 엔진이고, 경제전선의 전사는 기업인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기업 엘리트를 존중해 주었고, 기업인들은 대통령을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7)
내각에 권한과 책임 위임: 청와대 비서실이 장관 위에 군림하는 것을 금지했고 장관의 인사권을 존중했다.   


  (8)
관료 엘리트 중시, 학자들은 자문역: 실천력을 중시하던 박 전 대통령은 집행기관장으로서는 학자를 거의 쓰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문역으로만 부렸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서강대학교 교수 출신인 남덕우 부총리였다. 남 부총리도 실무 능력의 검증을 거친 다음에 중용(重用)되었다.   


  (9)
정치와 군대의 압력 차단: 그는 관료들이 국익(國益)과 효율성의 원칙에 따라 소신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군인들과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개입을 차단하고 견제했다. 군대의 힘으로써 집권한 사람이 군대의 영향력을 약화시킨 예는 매우 드물 것이다.   


  (10)
경제발전 우선주의: 박 전 대통령은 경제발전이 결국은 안보와 민주주의 발전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 경제발전, 후 민주화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 따른 비난에 대해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대응했다.   


  (11)
시장(市場)의 한 멤버로서의 정부: 박 전 대통령은 정부가 시장의 규제자가 아니라 한 참여자라고 생각했다. 박 전 대통령 시절의 정부는 시장 지배자라기보다는 시장의 일원으로서 시장 기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정부는 기업가, 은행가, 개혁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전력, 철강 등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부가 공기업을 만들어서 맡아서 하되 경영은 민간기업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관치(官治)경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CEO로 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김용환).   


  (12)
선택과 집중과 고집: 박 전 대통령이 채택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 중점 투자전략, 선 성장-후 분배 전략, 과감한 외자 유치 전략은 모두 성공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정책과 전술은 수시로 변경했지만, 철학과 전략은 18년 동안 그대로 밀고 나갔다.   


 
조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지도력의 원리는 역사의 원리와 인간성의 본질을 간파한 바탕에서 장기적 전략을 세우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짠 뒤 세심한 확인으로 신속하게 사업을 추진한 것”이라고 했다.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박정희의 경제 리더십]

■ 못하는 자가 아니라 잘하는 자를 지원하라

⊙ 화폐개혁 실패 등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 …, () 정권의 경제엘리트 과감하게 기용
⊙ 기업인들의 의견 경청, 현장 중시
⊙ 소성(小成)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
⊙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면 정치적 부담도 감수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 이후 40년 동안 대한민국이 먹고살 거리를 마련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이 이룩한 경제적 업적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비판자들조차 “박정희의 경제발전 업적은 인정하지만 …”이라는 전제를 깔고 그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18년 동안 연평균 9.2%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에 따라 1962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그가 세상을 떠나던 1979년에는 1747달러로 뛰어올랐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한 세대 이상 국민들이 먹고살 거리를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조선,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전자산업 등이 그것이다


 
사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 이후 3저 호황 등에 힘입어 한국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기반을 마련한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사태 이후에는 ‘경제를 살리는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갈망과 함께 박정희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최근 들어 다소 하락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물을 때마다, 박정희는 늘 수위를 차지하곤 했다.  


 
박정희의 정책이나 정책추진 방식들이 지금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수출진흥정책, 보호주의적 산업정책, 정부의 기업에 대한 지원 등은 요즘 같으면 국제무역기구(WTO) 규정 등에 가로막혀 현실에 옮기기 힘들 것이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노조활동을 제한하는 일이나, 정치·경제적 반대를 무릅쓰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어붙였던 것 같은 일도 이제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 리더십 가운데는 아직도 배울 만한 점들, 정권의 색깔을 떠나서 참고할 부분들이 적지 않다.  
 

 
  
유연하게 사고하라

 
첫째는 박정희가 보여준 사고(思考)의 유연성이다

  박정희가 처음부터 경제 전문가는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기성체제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농민들의 빈곤에 가슴 아파하며, 자립경제를 희구하는 ‘제3세계형 민족주의 군인’이었다. 5·16혁명 이후 군사정권이 추진했던 부정축재자 구속, 농어촌 고리채(高利債) 정리, 화폐개혁 등은 그러한 사고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책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62
년 군사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7.1%로 잡았다. 하지만 이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동안에 국민소득을 배증(倍增)시키겠다는 생각에서 역산(逆算)해서 만들어 낸 수치일 뿐이었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없었다. 당시 박정희정권의 정책은 이승만(李承晩)·장면(張勉)정권과 마찬가지로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통한 내포적 근대화였다. 이는 당시 제3세계의 유행이기도 했다


 
그런데 1963년부터 의도치 않게 섬유·합판·철강(함석 등 낮은 수준의 철강제품) 등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62 5480만 달러였던 수출액이 1963년에는 8680만 달러로 급증했다. 특히 공산품 수출이 계획치보다 4.4배나 많은 281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일본 등 선진국들의 산업구조가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한국에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이들 분야에 대한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기존의 경제정책이나 자신의 생각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 않았다.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김정렴·장기영 등도 그러한 방향으로의 정책을 전환하라고 조언했다. 박정희는 경제정책의 중심을 수출 제1주의로 전환하고, 1965년의 수출목표를 1억 달러로 제시했다. 기왕에 추진하던 한일 국교정상화를 서두른 것도 그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군정 초기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대학교수들을 최고회의 의장 고문으로 데려다 놓고, 누가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내면 따라갔다. 하지만 5·16 혁명 이후 2년 반 동안 화폐개혁 등 시행착오에서 교훈을 얻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방의 얘기를 듣고 정책을 결정하는 일이 없어졌고, 대학교수들 대신에 1, 2공화국 시절의 경제 엘리트들을 쓰기 시작했다.  


 
김정렴 전 실장의 말처럼 박정희는 자신이 무너뜨린 민주당 정권의 각료 출신인 태완선(민주당 정권의 부흥부·상공부 장관, 건설부·경제기획원 장관 역임), 김영선(민주당 정권의 재무부 장관,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주일대사 역임), 이승만 정권의 부흥부 장관으로 자신이 감옥에 보냈던 신현확(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 보건사회부·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중용했다.


 
다만 대학 교수는 잘 쓰지 않았다. 이는 혁명정권 초기에 교수 출신을 각료로 기용했다가 실패한 경험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경제과학심의회, 평가교수단 등을 통해 검증을 한 다음에 교수 출신을 장관으로 기용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재무부·경제기획원 장관 역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기업인의 의견을 경청하라

▲1968년 청와대에서 제5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1966~1979년 147회의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었다.  

 

  둘째, 박정희는 기업인의 의견을 경청했고, 현장의 목소리를 중시했다.   


  5
·16 군사정권은 혁명 직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잡아넣었다. 박정희 앞으로 붙잡혀 온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이렇게 항변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 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 운용, 국민교육, 도로·항만 시설 등 국가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당장 세수(稅收)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안다.   


 
박정희는 이 항변을 받아들여 구속한 기업인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이석제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이 반발하자, 박정희는 이렇게 설득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닌가. 우리가 이북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대로 드럼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 차리게 했으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실제로 박정희는 18년 동안 경제건설을 하면서 기업인들을 잘 써먹었다. 그리고 기업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1965년부터 1979 9월까지 146회 개최했던 월례경제동향보고회의나 1966년부터 1979 9월까지 147회 개최했던 수출진흥확대회의는 기업인들의 애로사항을 듣는 장()이기도 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고 하지만, 이는 경제발전을 위한 정부와 기업 간의 소통이자 협력이었다.   


 
박정희는 현장의 국장·과장급 공무원들과도 수시로 소통했다. 각 부처 연두순시 때 브리핑을 잘하는 유능한 공무원들을 눈여겨보고, 그들을 키웠다.         

 

잘나갈 때 미래를 준비하라     

셋째, 박정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했다. 박정희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보세가공무역. 경공업제품 수출에 힘입어 잘되고 있을 때부터, 종합제철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에는 “차도 얼마 없는 나라에서 무슨 고속도로냐? 국도(國道)를 보수·확장하는 걸로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세계은행 관계자들에게 “차가 없는 지금 고속도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한 1973년은 한국이 먹고사는 문제를 막 해결했을 때였다. 1960년대부터 추진해 온 보세가공무역에 의존한 수출정책으로 1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한 것이 1971년이었다. 일부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 경공업제품 수출로 몇 년은 더 먹고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소성(小成)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 등 현장 중심 테크노크라트들의 조언이 있었다.   


 
당시 경제정책의 본산이었던 경제기획원 관료들은 중화학공업정책에 회의적이었다. 박정희는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중화학공업기획단장으로 임명, 청와대에서 직접 중화학공업 건설을 지휘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는 비교우위의 국제적 배치가 지극히 유동적인 세계경제에 과감히 뛰어들어 한국 나름의 비교우위를 모색한 것”이라면서 “몇 년을 더 지체했다면 선진국과의 격차가 너무 벌어져 한국인의 자력(自力)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못하는 자가 아니라 잘하는 자를 지원하라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를 내는 마을을 더 지원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넷째, 잘하는 기업, 잘하는 집단을 지원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이나 집단은 도태시켰다. 이는 못하는 기업과 집단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정부지원 방식과는 반대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새마을사업이다. 박정희 정부는 1971년 새마을가꾸기사업을 시작하면서 전국 3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부대씩을 내려보냈다. 그 시멘트를 사용할 10개의 사업을 예시하고, 마을이 자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이 시멘트를 마을 공공시설 구축 등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어떤 마을은 집집마다 나누어 가졌다. 아무 데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가 시멘트를 못 쓰게 만든 마을도 있었다.   


 
이듬해 정부는 실적이 양호한 16600개 마을을 선별,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을 내려보내 마을 환경구조 개선에 쓰도록 했다. 하지만 실적이 나쁜 나머지 마을에 대해서는 일절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원대상에서 탈락한 마을들은 자기들이 노력과 재원을 투자해서 사업에 나섰다.   


 
이후 정부는 각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분류하고, 자립마을과 자조마을은 차등 지원을 했지만, 기초마을은 지원을 하지 않았다. 여당인 공화당은 선거를 의식, 이러한 방식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은 김종필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균등하게 농촌마을을 지원하는 안()을 통과시켰지만, 박정희는 이를 번복시켰다.   


 
그러자 기초마을은 자조마을로, 자조마을은 자립마을로 올라서기 위해 경쟁적으로 노력했다. 그 결과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1979년 말까지 전국 34871개 마을 가운데 97%가 자립마을로 승격했다. 기초마을은 모두 사라졌다.   


 
새마을운동뿐이 아니었다.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이나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도 잘하는 기업을 지원한다는 원칙이 적용됐다. 수출기업은 각종 금융·세제상의 혜택을 받으려면 해외에서 신용장을 취득해다가 제시해야 했다. 현대자동차는 정부의 금융지원을 받기 위해 국산차를 만들고 수출을 해야만 했다. 정부의 그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이후 지원대상에서 탈락했다. 미국의 아시아경제 전문가인 조 스터드웰은 이를 ‘수출규율’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시장의 힘도 적절히 활용했다. 시장규모가 연간 3만대 수준이던 1973년 정부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신진자동차 세 개의 자동차 회사에 사업을 허가했다. 세 자동차 회사는 작은 내수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후일 신진자동차는 탈락하고 그 자리를 대우자동차가 물려받았다.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다. 이는 국민차를 만들겠다며 하나의 국영자동차 회사를 만들어 국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면서도 수출을 강제하지 않았던, 그래서 결국 내세울 만한 자동차공업 육성에 실패한 말레이시아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당장의 정치적 이익에 매달리지 말라     

다섯째, 박정희는 당장의 정치적 이익보다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했다. 1977년 부가가치세를 도입할 때의 일이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복잡한 세제를 정비하기 위해 이미 1971년부터 부가가치세 제도 도입을 연구해 왔다. 하지만 막상 부가가치세제를 실제로 도입하려 하자 기존 개별소비세제 아래서 과세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사업자들의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가가치세 도입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10대 국회의원 총선을 1년 앞둔 마당에 야당은 물론, 여당인 공화당도 반대했다.   


 
부가가치세 도입을 두 주 앞두고 열린 당정협의회에서 박정희는 김용환 재무부 장관에게 “부가가치세를 지금 꼭 도입해야 하느냐?”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다. 김 장관이 부가가치세 도입의 당위성을 다시 설명하자, 박정희는 부가가치세제를 예정대로 실시하는 것으로 결단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도록 하시오.   

  결국 이듬해 총선에서 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보다 득표율에서 1.1% 뒤지는 사실상의 패배를 당했다. 공화당, 중앙정보부, 언론은 여당 패배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을 꼽았다. 10대 총선 결과는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부가가치세제 덕분에 정부재정은 든든해졌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최규하의 ‘후임자를 위한 침묵’]

■ “재임 중 행위에 대한 증언은 삼권분립에 영향”

⊙ “공직자로서 매너가 되었고, 사심(私心)이 없고, 청렴결백… 일본처럼 안정된 나라 같으면
    
총리도 할 수 있는 사람”(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
12·12사태 당시 “관례가 어쨌든 나는 법에 규정된 절차대로 하려고 하니 국방장관을 찾아오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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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30분 버텨
12·12사태 및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거부는 ‘대통령직()에 대한 존중과 후임자에 대한 배려’로
    
볼 수 있어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96년 11월 14일 12·12 및 5·17 재판과 관련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증언을 거부했다.

 

  1026사태 이후 8개월 동안 대통령으로 재직했던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하 최규하)은 대한민국 현대사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막간극에 잠깐 얼굴을 내밀었던 조연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최규하는 외무관료 출신이다. 일제(日帝)시대에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나와 만주국의 공무원 양성기관인 대동학원(大同學院)을 나왔다. 해방 후 최규하는 3개월 정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용태 전 공화당 원내총무가 이 시절 그의 제자다.  


  1946
1월 최규하는 미()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건국 후에는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외무관료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사심 없는 공직자

  그와 함께 일했던 상사(上司)들은 그를 ‘건국 후 최고의 관료 중 하나’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와 함께 ECAPE(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에 참석했던 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은 1960년대 말 방송에서 “지난 20년 동안 출중한 관리가 3명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최규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규하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송 전 장관에게 “최규하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냐?”고 묻자, 송 전 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공직자로서 매너가 되었고, 사심(私心)이 없고, 청렴결백한 사람이다. 일본처럼 안정된 나라 같으면 관료의 최고봉인 사무차관은 물론이고 총리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와 함께 일했던 유태하 전 주일대표부 대표도 “최규하는 정말 사심이 없는 사람이다. 다들 자리를 기웃거리는데 최규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뭘 시켜도 잘 해낸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반면에 최규하는 외무부 후배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외무부의 3대 거물은 최규하김용식(전 외무부국토통일원 장관, 주미대사), 김동조(주일주미대사) 등이었다. 김용식김동조 전 장관은 자기 이름을 딴 ‘사단’이 있었지만, 최규하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최규하는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썼지만, “사람이 정()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외무부에는 최규하, 김용식, 김동조 세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농담들이 많이 돌았다.


 
“돌다리를 건널 때 김동조는 그냥 건너간다. 김용식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건너간다. 최규하는 남이 건너는 걸 본 후에도 엎드려서 기어서 건너간다.


 
“길에 돈이 떨어져 있으면 최규하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멀찍이 돌아서 간다. 김용식은 일단 본 후 10여 발자국쯤 갔다가 되돌아와서 ‘이게 뭘까’ 하면서 슬그머니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는다. 김동조는 돈을 발견한 즉시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총리 시절 ‘외교총리’ 역할

▲최규하 전 대통령은 외무부 장관 시절 1·21사태 후 사이러스 밴스 미국 대통령 특사(왼쪽)와 담판, 1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아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에는 최규하를 몰랐다. 군사정부 시절 누군가 그를 추천했지만 자유당 말기에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는 말에 “혁명정부가 어떻게 자유당 때 사람을 쓰느냐?”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이동원 외무장관 시절이던 1964년에야 그는 말레이시아 대사로 나갈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면서 말레이시아를 방문했다. 연일 계속되는 공식 오찬만찬에 진력이 난 박 대통령은 “한국식으로 술이나 한 잔 하고 싶다”며 말레이시아 대사관저를 찾아갔다. 다음날 박 대통령은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 대사 말이야. 그런 애국자가 없더라고. 글쎄 그 친구 집에 갔더니 술이랑 안주가 몽땅 국산이야. 막걸리에다 시큼한 김치에다…. 게다가 날 접대한답시고 그 키 큰 친구가 고무신을 신은 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걸 보니 꽤나 부지런해 보여….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든 최규하는 이듬해 6월 외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4년간 재임했다. 1968 121사태 후에는 사이러스 밴스 미국 특사와 협상을 벌여 1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따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최규하와 밴스가 협상을 벌이는 동안 20여 잔의 커피가 들어갔고, 재떨이를 6차례나 바꾸었다. 밴스는 한국을 떠나면서 주한미국대사관 직원들에게 “최 장관의 애국심과 쇠고집, 인내력, 그리고 그가 계속 뿜어대는 담배연기에 손을 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976
년 최규하는 김종필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최규하가 총리로 발탁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후 15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 측근이나 혁명 주체들 중에서 부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나? 김종필 총리도 금전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들이 끊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규하처럼 청렴결백한 사람을 총리로 앉혀서 이완된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다시 잡으려 했던 것 같다.   


 
최규하를 오래 모셨던 정동렬 전 의전수석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최규하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최 총리, 1961년에 권력을 잡은 후, 내정(內政)은 내가 다 장악할 수 있었소. 경제도 발전시켰고, 산림녹화도 했고, 내가 하려고 한 일은 다 내 뜻대로 했소. 그런데 외교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려. 이제 나는 외교에서는 손을 뗄 테니, 당신이 외무부 장관과 의논해서 잘 처리해 주시오.   


 
이 말을 기자에게 해준 이정빈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사람들은 흔히 총리 시절의 최규하 대통령을 아무 실권이 없었던 ‘대독(代讀)총리’로 기억하고 있지만, 유신(維新)체제하의 박정희 대통령 아래서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박 대통령 말기에 ‘외교총리’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동진 외무부 장관이 5년간 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최장수 외교수장(首長)’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 아래서였다”고 말했다.         

 

대통령권한대행에서 대통령으로     

1979 10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됐다. 외교관 출신 총리는 황망 중에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 아무도 18년 동안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대통령의 자리를 메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재야(在野) 세력 일각의 반대가 있었지만, 대통령권한대행이던 최규하가 과도기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형성됐다.   


 
최규하는 11 17일 발표한 특별담화에서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해 12 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는 “1026 이후의 난국에 대해서 순시(瞬時)라도 헌정이 중단됨이 없이 대한민국의 계속성을 견지하고 국가의 보위와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면서 안정과 질서 속에 평화적 정부 이양을 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는 것이 본인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12 6일 취임사에서는 자신이 이끌 정부를 ‘국난 타개를 위한 위기관리 정부’라고 정의(定義)했다.

        

“국방장관을 찾아오라”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1212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측에서는 ‘1026사태와 관련한 정당한 수사’였다고 주장하고, 반대 측에서는 ‘하극상(下剋上)’ 내지 ‘군권(軍權) 장악을 위한 군사반란’ ‘사실상의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630분 총리 공관으로 들어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에 대해 보고하자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은 알고 있느냐?”면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불러오라고 했다. 하지만 노재현 장관은 장관 공관 인근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들리자 잠적해 버린 뒤였다. 정승화 참모총장을 지지하는 세력과 긴장이 고조되자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전두환 측 장성 5명은 930분경 총리 공관으로 들어가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이들은 “과거 관례상 수사책임을 맡고 있는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재가를 받는 것이 지금까지의 수사 관례”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최규하는 “관례가 어쨌든 나는 법에 규정된 절차대로 하려고 하니 국방장관을 찾아오라”고 했다. 결국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장관이 나타난 다음날 새벽 5시경에야 정승화 총장 체포를 재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에서는 당시 대통령에 대한 겁박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당시 일단의 신군부 장성들의 ‘체포 사인 요구’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국방장관의 허가부터 받아오라’며 밤새워 버틴 용기와 대범함은 두고두고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봄’

▲1980년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한 전두환 장군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 11일 후 최 대통령은 하야했다.  

 

  1212사태 이후 권력은 급속도로 신군부로 쏠리기 시작했다. 신군부 측에서는 그것이 자신들이 의도했던 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그것은 진공(眞空)상태를 용납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일 것이다.   


 
최규하를 흔든 것은 신군부뿐이 아니었다. ‘서울의 봄’ 상황에서 대권을 노리고 있던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씨도 ‘최규하 대통령’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80년 들어 정부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하자 최규하가 3김씨 중 한 명이나 혹은 신군부를 비롯한 경북 세력과 손을 잡고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해서 외치(外治)를 담당하는 대통령을 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3김씨는 “빨리 개헌을 하고 물러나라. 엉뚱한 생각을 하면 재미없다”는 신호를 계속 보냈다.   


  1980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유혈사태는 최규하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광주사태 후 ‘계엄업무에 대한 대통령의 자문기관’으로 설립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국민들의 눈에는 ‘군사혁명위원회’로 비쳤다.   


 
결국 1980 8 16, 최규하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 대통령은 대()국민성명에서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하야(下野)가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에 의한 것이고,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군부, 즉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겁박에 의한 ‘강제하야’라고 생각했다.         

 

침묵     

전두환 시대가 끝나자 1212사태와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최규하에게도 입을 열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1988년 광주사태 등 5공 청산 청문회가 열리자 최규하는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라는 동행명령장을 받았다. 최규하는 이를 거부했다. 그를 찾아간 언론인이나 지인(知人)들이 그때의 일을 물어보면, “그런 얘기 그만하자”며 말을 돌렸다.   


  1996
년 김영삼 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며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신군부 핵심인사들을 법정에 세웠다. 최규하도 1996 11 14 1212 517 재판과 관련해 서울고등법원에 증인으로 불려 나갔다. 최규하는 증인선서에 앞서 입장발표를 통해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에 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후일 일일이 소명이나 증언을 하는 것은 국가원수의 지위와 삼권분립상의 독립성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며 “일시적 비난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선서나 증언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최규하는 인정신문에만 대답했을 뿐,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후일 최규하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전두환은 최규하에게 편지를 보냈다. 최규하의 사임과 자신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이 최규하 본인의 의사에 의한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전모를 당당히 밝혀달라는 내용이었다. 전두환은 그에 대한 답신을 받지 못했다. 그 얼마 후인 2006 10 22일 최규하는 세상을 떠났다.   


 
최규하는 모범적인 공직자였지 위기시의 리더는 아니었다. ‘성공한 대통령’도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공직생활 중 보여줬던 ▲법과 절차를 중시하는 자세 ▲공평무사한 인사 ▲청렴결백함 ▲끈질긴 외교협상력 등은 대통령에게도 요구되는 덕목들이다. 그가 격동기의 역사에 대해 침묵하고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리가 많다. 하지만 많은 역대 대통령이 자신의 전임자 혹은 후임자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하는 소리를 했다가 모양새를 구겼다. 때문에 최규하의 침묵은 오히려 ‘대한민국 대통령직()’에 대한 존중과 후임자들에 대한 배려로 여겨지기도 한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전두환의 용인술]

■ 스탠퍼드대 경제학박사 김재익 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 “나보다 유능한 부하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고 방우영 명예회장)
10·26 이후 격동기 끈끈한 스킨십으로 허화평 등 부하 5인방과 함께 5공화국 열어
⊙ 유머감각도 용인술의 하나로 생각 … 대학입시에 낙방한 아들이 백담사 찾아오자,
    
“너만 잘되면 되겠어?
⊙ “한국적 특수상황에선 안보지식이 풍부해야”(1988년 이임 기자회견)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참석자들에게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고 있다.

 

  역사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최근 《전두환 회고록》 1, 2, 3권이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각각 1, 4, 5위에 오르는 것을 보면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여전하다. 역사는 전두환씨를 다는 저울의 한쪽에 12·12사태, 5·17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5공비리를 올려놓을 것이고, 반대쪽에는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경제성장, 단임실천 등을 올려놓을 것이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어느 각도로 기우느냐 하는 것은 보는 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고 방우영(方又榮)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저서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김영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람을 기막히게 쓸 줄 아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머리가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적어도 ‘나보다 유능한 부하를 써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청와대 비서관이나 각료에 훌륭한 사람들이 발탁됐다. 이 바람에 아웅산 사태 후 “인재가 고갈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카네기 묘비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부하로 하고 그와 더불어 일하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 이곳에 잠들다’란 글귀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전두환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 하나는 잘 쓴다’고 느꼈다. 그는 넉살도 좋은 사람이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부둥켜안고 어깨를 두드렸을 정도다.(p.261)  


 
전두환 전 대통령의 용인술은 사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타고난 보스 기질과 부지런함은 그의 지능을 보완하고도 남을 만하였다. 전두환은 “육사 입학시험을 쳤는데 성적이 엉망이었다. 수학은 빵점을 받았을 텐데 마침 외우고 있던 피타고라스 정리가 문제로 나와 영점을 면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전두환은 육사 11기의 200명 모집정원에 28명의 예비합격자를 추가하는 바람에 꼴찌에서 두 번째인 227등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고 실토한 적도 있다. 일단 육사에 들어간 뒤 전두환 생도는 남다른 노력을 폈다고 한다


 
아침 기상점호 40분 전에 일어나 변소에 들어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공부를 할 정도였다. 전 생도는 또 영어는 영어를 잘하는 생도를, 수학은 수학을 잘하는 생도를 찾아가 개인지도를 받는 식으로 공부를 했다. 이것도 일종의 사람관리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전두환 생도의 성적은 해마다 조금씩 올랐으나 졸업 때의 성적은 여전히 하위권이었다. 그 뒤 고등군사반, 육군대학을 거치면서도 그의 성적은 계속 올라갔다고 한다.  

  
  
전두환과 《주신구라》

▲육사 11기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10·26사건 뒤 전두환 소장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권을 한 손에 쥐고 공백이 생긴 권력 중심부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게 됐다. 그는 합동수사본부라는 공적인 조직과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 및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동시에 지휘하고 있었다. 전 본부장은 거의 마음대로 최규하(崔奎夏) 대통령권한대행, 노재현(盧載鉉) 국방부장관,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그는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10
·26사건에서 12·12사태 사이에 전두환 본부장과 함께 권력에의 의지를 다져 가고 있던 핵심 측근으로는 다섯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전두환이라는 핵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릴 때 가장 가까운 궤도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허화평(許和平) 합수본부 비서실장, 허삼수(許三守) 총무국장, 이학봉(李鶴捧) 수사국장. 그 다음 궤도에는 장세동(張世東) 수경사령부 30단장과 김진영(金振永) 33단장. 이 다섯 사람이야말로 5공화국의 씨앗을 뿌리고 배태시킨 권력의 원천이었다


 
장세동 대령은 육사16, 12허 대령은 육사17, 이학봉 중령은 육사18기였다. 5명은 하나회라는 공통점 이외에 전두환 소장과는 깊은 인간적 유대를 쌓은 사이였다. 장세동 대령은 베트남전 때부터 사선(死線)을 함께 넘어 온 사이였고, 김진영 대령은 전두환 소장과 세 번이나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다. 21이는 고참 보안사 요원으로서 전 소장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함으로써 처음으로 같이 일하게 되었으나, 인간적 유대는 그 훨씬 이전부터였다.  


  1979
3월 초 전두환 소장은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자 육본 특명검열단에 있던 허화평 대령을 불러들여 비서실장에, 허삼수 수도군단 보안부대장을 인사처장에 임명해 두 심복을 핵심부서에 심었다. 10 27일 전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기로 돼 있었던 ‘시국수습 대책안’의 기안책임자도 허 실장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5·17 반란 주도 혐의로 조사를 받을 때, 고전소설 《주신구라(忠臣藏)》에서 주군(主君) 아사노 나가노리를 위해 복수하고 할복한 47명의 사무라이들처럼 이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해 몸을 던졌다.   


  
유머감각도 용인술의 하나

  ‘전두환’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신군부, 쿠데타, 철권통치, 백담사, 감옥 등 총구의 화약 냄새와 권력의 쓰라린 종말을 연상한다. 10·26사건의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군복 차림의 육군 소장 전두환 합수부장의 매서운 눈초리, “본인은 …”이라고 시작되는 대통령 전두환의 권위적인 목소리, 일반 국민의 시선에 비친 공인(公人)으로서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차가운 권위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았던 이들은 사인(私人) 전두환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를 하고 있다. 그는 구수한 말투와 다감한 화법,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그의 용인술의 하나로 부하들의 마음을 샀다. 김용갑(金容甲) 전 한나라당 의원은 전두환의 인간미를 이렇게 소개했다.  


 
〈안기부 기조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미국으로 1년간 유학을 떠났다. 그 후 한국에 돌아오는데 청와대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전 대통령이 나에게 민정수석직을 맡길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 일을 맡을 마음이 없었다. 청와대에 들어서자 전 대통령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야, 용갑이. 너 얼굴 참 많이 좋아졌어. 미국 양식이 좋은 모양이지”라고 말했다. 전 대통령의 구수한 말투에 ‘절대로 일을 맡지 않겠다’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용갑이, 민정수석 자리 너를 위해 비워 뒀어.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 알아. 열심히 하고 충성스러우면 되는 거야.


 
대통령이라는 체면도 내세우지 않고 친근한 선배처럼 권유했다.
  

  “일주일 여유만 주십시오. 짐도 싸고 미국의 지인들에게 인사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갑이, 짐은 부인이 알아서 꾸리라 그러고, 미국 사람들한테는 그냥 편지로 때워. 지금 얼마나 급한데 일주일을 주나.
  

  나는 거절은커녕 그날부터 민정수석이 되어 버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당시 통치사료 담당도 했던 김성익(金聲翊) 공보비서관은 이런 말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인재들을 등용,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함으로써 국정수행 능력을 높여 나갔다.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유머를 점차 구사해 나갔다. 전 대통령의 화법은 서민적이고 개방적이다. 투박한 말투와 구수한 입담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화술이나 순발력 등에 스스로 자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부터 군 지휘관으로 남 앞에 나서서 얘기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 대통령은 말을, 사람을 다스리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생각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석에서 자주 만나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소설가 고 이병주(李炳注) 선생은 이런 인물평을 했다.  


 
“작가의 입장에서 저는 인간 전두환을 인간 박정희보다 훨씬 좋게 느끼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술자리에서도 자신을 좀처럼 열어 놓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농담을 해도 그 농담 뒤에 있는 저의를 캐고 있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엘리트 의식은 대단해서 대구사범에 들어간 사실을 자주 자랑합디다. 전 대통령은 어떠냐 하면 우직하고 순진합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콤플렉스가 없어요.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도 ‘제가 경제를 뭐 알아야지요’라는 식이에요. ‘경험도 준비도 없이 대통령을 하다 보니까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실토하는 것이 꼭 구김살 없는 어린아이 같아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연세대 법학과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막내 재만(宰滿) 군이 백담사를 찾아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무 실망하지 마! 내가 이렇게 돼 있는데 너만 잘되면 되겠어? 그런 점에서 우리 앞으로 친해 보기로 하자.
 

  
  
압축성장 비결은 용인술

▲김재익 수석비서관(왼쪽)이 1981년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현안을 설명하며 결재를 받고 있는 모습.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정치는 상당 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전두환 정권은 1980~1988년 사이 세계 1위의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됐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다.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 70%가 됐다.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부대가 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2 3 14일 예일대 신지웅 교수와 만난 자리에서 1980년대 한국경제가 압축성장한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군인이라 무식한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대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대한 서포트해 주었지. 뭐 말년에는 삼저호황(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현상)으로 국제경제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남한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확실히 눌러 버렸던 때도 이때였다. 나는 원래 군사작전 이외엔 전문가가 아니니까 여러 분야를 선발해 보좌진을 쓰고 주요 직을 맡겼다. 개인적으론 전혀 인연 없는 사람을 …. 내가 아는 사람보다 내 보좌진이 아는 사람들을 추천받아 썼고 그 사람들 덕을 많이 봤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 시절부터 경제교사로부터 경제를 배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고 받는 일반정보 가운데 경제정보의 물가, 금리, 환율, 저축률, 경기변동 등 거시경제지표에 관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전 사령관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고 장덕진(張德鎭)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농림수산부장관 역임)에게 가정교사를 추천해 달라고 했고, 장 장관은 박봉환(朴鳳煥) 경제과학심의회 사무국장을 소개했다. 박 국장이 재무부차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바빠지자 한국개발연구원 김재익(金在益) 박사를 소개했던 것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스탠퍼드대학 경제학박사 출신의 김재익을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매일 아침 2시간씩 경제공부를 시작했다. 김재익이 경제의 기본원리부터 당면 문제까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데 감복한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를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이때 김재익이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락조건을 말하자, 전두환이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하고 내맡겼다는 이야기는 세인의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p.268)  


 
경제 성공의 공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닌 김재익 경제수석한테 모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김재익 수석은 1983 10월에 아웅산 테러로 타계, 그 뒤의 경제관리엔 참여하지 못했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전 대통령의 단임 실천을 가능케 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이도 전두환 대통령이다. 이런 호재로 안보 면에서도 대북 우위를 확보했다

  
  
지도자의 덕목

▲1988년 11월 23일 대국민사과 담화문을 발표하고 설악산 백담사에 도착한 전두환, 이순자 부부  

 

  전두환 대통령은 1988 2 3일 연설문 담당 김성익 비서관을 불러 이임 기자회견 문안에 대한 지침을 내리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 가운데 첫째는 건강이라고 본다. 건강하고 체력이 강하면 매사에 자신이 있고 상황 판단이나 분석을 할 때 명확하게 할 수가 있다. 두 번째 요건은 결단력이다. 지도자는 적시(適時)에 결심하고 결단할 수 있는 판단력과 용기, 그리고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는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접촉을 통해서 상대방이 믿음직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 번째 요건은 표현능력이다. 최소한 자기의 뜻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할 수 있는 표현능력이 필요하다. 다섯째는 인내심이다. 여섯째는 한국적 특수상황하에서는 안보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욕심을 부린다면 인간적인 매력이 있으면 좋다. 지도자는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것이 곧 국민을 위하는 마음가짐이다.   


 
리더들에게 용인술은 필수다. 《한비자(韓非子)》를 보면, 하군(下君)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만, 중군(中君)은 타인의 힘을 사용하고, 상군(上君)은 남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말이 나온다. 바꿔 말하면, 훌륭한 리더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타인의 능력을 활용해 메우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19대 대통령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도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용인술을 벤치마킹해야 할 것 같다.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노태우의 경청하는 리더십]

■ “여소야대 13대 총선 이후 사사건건 발목잡은 3() 수시로 만나”

⊙ 당시 청와대 최병렬 수석, 박철언 보좌관 등이 “보수세력 합쳐야 한다” 주장
DJ “노 대통령 심중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
YS 만난 뒤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 생각
JP, 노 대통령에게 “국정을 소신껏 이끌어 가라”고 당부

▲1990년 1월 25일 가칭 민주자유당 공동대표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종필 대표가 만나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귀가 크다. 민주화 열기로 뜨겁던 1980년대 말 그는 큰 귀로 ‘전성기 시절’ 3()과 경청·소통, 혹은 대결하면서 여소야대의 거대한 태풍을 건넜던 인물이다. ‘무결정의 결정’이라는 나름의 경청 리더십으로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金鍾泌) 총재 간 3당 합당을 이뤄 낸 점도 빼놓을 수 없다. 3당 합당은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타협이 만든 산물이었다. 출신·배경은 물론 이념·정책마저 달랐으나, 한국정치사에 가장 이질적인 빅뱅 중 하나로 꼽힌다. 반면 ‘군정(軍政) 종식과 반민주 투쟁’으로 일관한 한국 야당사에 오점을 남겼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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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선(1987 12 16) 직후 치러진 13대 총선(1988 4 26)에서 224석 중 민정당 87, 평민당 54, 민주당 46, 공화당 27, 무소속 10석으로 여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민정당은 노태우 당선의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도 압승을 낙관했었다. 노 대통령은 대선 중 시종 “3김 시대의 종말”을 외쳤었다. 정보기관 보고는 어김없이 2/3 내외의 민정당 압승을 예상했고, 못해도 과반은 넘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국민은 3김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원치 않았다


 
총선 패배를 접한 노 대통령은 3김씨와의 대화에서 ‘필요할 때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3김을 만날 계획을 세웠고 4월 총선 이후에는 여야총재 회담을 수시로 가졌다.


 
노 대통령은 민주당 김영삼(이하 YS) 총재, 공화당 김종필(이하 JP) 총재와 취임 전부터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YS를 만나 보니 사고방식과 판단기준, 시각이 노 대통령과 너무 달랐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내심 ‘극복해야 할 난제가 많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YS 쪽의 노력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힘들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대선 결과도 YS는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YS는 “나는 패배할 수도 없고 패배할 이유도 없으며 틀림없이 승리했다고 확신했는데 개표 결과 왜 패배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식의 대답이었다.  


 
노 대통령은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YS를 위로하고 국정 동반자로 협력하기로 다짐했다

  
  
JP DJ와의 만남

그러나 JP와는 시국관에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JP는 노 대통령에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유신(維新)의 불가피성을 언급했다고 한다. JP의 말이다.  


 
“유신 전에 있은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김대중씨에게 승리했다. 그 차이가 너무 근소했다. 1960년대 한국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위해 박 대통령이 바친 노력은 엄청난 것이다.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1971년 대선 결과는 박 대통령에게 패배와 다름없는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JP
는 박 대통령이 선거 이후 여러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 1972년 유신 조치를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JP는 노 대통령에게 “(노 대통령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으니 이를 기반으로 국정을 소신껏 이끌어 가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과 평민당 총재 김대중(金大中·이하 DJ)과의 대화는 서울올림픽의 협조를 요청하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됐다. 막상 만나고 나니 ‘다른 야당 지도자들과는 다르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한 정치투쟁을 몸으로 겪으며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다. 관찰력이 예리한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 이야기를 한 대목도 놓치지 않았다. 준비해 온 서류 봉투에서 노트를 꺼내 대화 내용을 일일이 메모하고 그것을 보면서 확인하곤 했다. 노 대통령은 속으로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구나’고 생각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DJ에게 서울올림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 민족의 도약의 계기로 삼는 데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 DJ는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양심수와 구속 학생을 석방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구했다”는 내용을 회담 발표문에 꼭 삽입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대화를 통해 과거에는 가져 보지 못했던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흑백논리, 대립관계에서 이제는 야당과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는 것이다.  

  
  
13대 총선과 여소야대 상황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후인 1988년 5월 28일 야당대표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4자 회담을 가졌다.

  

  13대 총선 이후 당시 여권에서는 “여소야대로 정국을 이끌기 어렵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청와대 최병렬 수석, 박철언 보좌관 등은 “보수세력을 합쳐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정치지도자 성향을 보아 YS JP는 보수성향이다.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YS는 어려울 것이니,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한 것이다.   '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후에 정무장관)이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진언을 했다고 한다.   


 
“각하, 상심할 것 없습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각 당, 급진 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박 보좌관에게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YS, DJ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일단 JP는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났는데, 예상대로 쉽게 동의해 주었다. 야당의 두 총재는 박 보좌관이 접촉했는데 YS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DJ는 여러 번의 접촉에도 불구 “협조할 일은 할 테지만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부정적이었다.   


  YS
와의 교섭과정에서 YS의 통일민주당 측에서는 황병태 정책위의장과 김덕룡 의원, 당청(黨靑) 쪽에서는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관여했다.   


  1990
1 3일 노 대통령은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사흘 전인 1989 12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으로 5공 청산 문제가 종결됐으니 더는 과거 문제를 재론하지 말자는 취지였다. 다음 날 YS가 기자회견을 통해 “지방자치제에 앞서 정계개편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 3당 통합의 물꼬를 텄다.   


 
노 대통령은 3김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개별회담을 갖고 정계개편을 포함한 정국운영 전반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여권의 당직을 개편, 민정당 대표위원에 박태준 의원, 사무총장에 박준병 의원, 원내총무에 정동성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YS, JP는 이틀 뒤인 1 6일 골프회동을 갖고 정계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보도됐다. DJ만이 정계개편에 반대의사를 갖게 됐다.  

       

“어디 합쳐 볼 생각이 없으십니까”

▲1992년 8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노태우 대통령이 자신의 회갑오찬에 김대중 민주당 대표를 초청, 악수를 나누고 있다.  

 

  노 대통령은 1990 1 11 DJ를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겸한 단독회담을 갖고 광주보상문제, 민생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들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DJ는 노 대통령의 말에 일일이 메모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제시했다.   


 
대화 중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디 합쳐 볼 생각이 없으십니까”라고 웃으면서 가볍게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DJ
는 “대통령 심중은 이해하지만 여당과 합친다는 말이 나오면 내 입장이 아주 어려워질 것입니다. 비록 여소야대의 4당 체제지만 협조할 것은 해 드릴 테니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원래 보수와 혁신은 합치기 힘든 것이지만 DJ가 사사건건 모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쨌든 노 대통령이 중간평가를 유보하는 과정에서 DJ가 국정을 편하게 펼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일도 있다.   


 
다음 날인 12일과 13 YS, JP를 만나 정계개편, 지자체 선거 실시, 선거 공영제, 경제사회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보수 대연합’, ‘온건 중도세력 총망라’ 등에 대해 인식을 함께했다.   


 
그러나 합당을 추진하는 데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난점은 신뢰의 문제였다. 수십 년간 깊어진 여야 불신의 골을 어떻게 해소하고 신뢰관계를 구축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합당과정에 진통도 많았다.   


  YS
가 “안 돼, 안 돼. JP를 넣으면 이미지가 나빠지므로 넣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박철언 장관의 끈질긴 설득에 “그러면 이야기해 보고, 본인이 흔쾌히 하겠다고 하면 끼워 주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끼워 주는 것이지 주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양보했다고 한다.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YS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이야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3당 합당의 결과     

민주당과는 그해(1990) 1 19일 호텔신라에서 만나 여당서는 박준병 사무총장과 박철언 장관, YS 쪽에서는 황병태·김덕룡 의원이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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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에는 공화당의 김용환 사무총장과 각서를 작성했다. 이틀 뒤인 22일 노 대통령과 YS, JP가 청와대에서 9시간의 장시간 회동 끝에 3당 통합 차원의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각 당별로 5명씩 15명으로 창당준비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내각제 합의는 국민들의 거부와 제1야당인 평민당의 반대를 감안, 비밀리에 추진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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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가칭 민주자유당 공동대표인 노 대통령과 YS, JP 그리고 15인 창당준비위원들이 청와대에 모여 창당 일정을 협의하고 창당 전에 단일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예상했던 대로 DJ(평민당 총재)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반대투쟁을 평화적으로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발표에는 내각제를 지향한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그 내용을 짐작한 평민당은 내각제 개헌 반대 10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이기택 원내총무, 김현규 부총재 등이 3당 합당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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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민정 민주 공화 3당은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합당수임기구 합동회의를 열고 통합 신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민자당은 216(민정계 127, 민주계 54, 공화계 35)의 의석을 보유하는 거대 여당으로 재탄생했다. 3당 합당은 정국의 안정은 물론 대선 공약사업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국민에게 약속한 민주화와 자율화, 주택 200만호 건설을 비롯한 큼직큼직한 국책사업, 방대한 SOC 투자 등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물론 ‘무결정의 결정’이란 노 대통령의 독특한 수동적 리더십이 한국 정치학계의 연구 주제가 된 일이 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가 군부 정권이 점진적으로 철수할 수 있는 퇴로를 만들어 줌으로써 민주화 과정을 비교적 순탄하게 이끌었다’(강정인 서강대 교수)는 평가가 나온다. 또 노 대통령은 ‘전환기적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민주화와 과거청산, 외부적으로 탈냉전 질서에 대응하고자 노력했고, 권위주의 시대의 지배 정치세력이 민주화라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들었다’(서울대 강원택 교수의 《노태우 시대의 재인식》)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 회고록》 참조.)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김영삼의 추진력]

■ 특유의 추진력으로 정치·경제·사회 개혁 이뤄

⊙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며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추진
⊙ 과거 적폐 청산 앞장서 …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청산 등 일사천리 
⊙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사람이 걸어야 할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음) … 휘호로 즐겨 써 
⊙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땐 대담한 승부수 던지는 승부사
⊙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으로 민주화 공헌 …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리더십과 스타십 겸비 … 사람 관리에 능한 인간중심적 리더십
⊙ 인재 발굴 능력도 발군 … 노무현 이회창 이명박을 정치권으로 불러내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14)이 서거한 2015 11 22일은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그의 공과(功過)를 다시 생각해 보는 날이 됐다. 임기 말 외환위기,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를 맞으며 공이 상당 부분 퇴색했지만 군사정권을 종식한 32년 만의 문민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군부에 이르기까지 개혁과 민주화를 이뤄 냈고 선진국 위주의 국제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세계화에 한발짝 더 다가가는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김 전 대통령 서거 4일 후인 11 26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는 〈김영삼의 공과 과, 금융실명제와 IMF 경제위기〉라는 제목으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재임시절 잘한 일’을 묻는 질문에 열거된 답은 1위가 ‘금융실명제 실시’(34.2%), 2위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21.3%), 3위가 ‘하나회 숙청과 정치군부 해체’(18.9%)였다. 또 ‘친일잔재 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11.2%), ‘세계화와 OECD 가입’(3.4%)이라는 답이 뒤를 이었다.   


  2017
2월 《김영삼 평전》을 펴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김영삼은 문민정부를 이끌며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척결, 역사바로세우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 등 파격적인 정치혁신을 추진했고, 격동의 현대사에서 대도무문을 걸어왔던 정치지도자”라고 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을 되돌아보면 하나같이 그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결단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징으로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등은 결단력이 부족하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고, 현재 적폐를 청산하려면 YS 같은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진보부터 보수까지 다양한 인재를 포용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갈등관계에 있는 세력까지 등용하는 통합정신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취임과 함께 개혁조치 발동 

  1993 2 25일 취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개혁을 표명했다. 그는 자신을 “1961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독재가 시작된 이래 32년 만에 탄생한 문민 대통령이며 내가 이끄는 정부는 32년 만의 문민정부”라고 규정하고, 사회 각 분야에 깊숙이 뿌리 박힌 군사문화 청산을 목표로 일련의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날 통행금지 구역이었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시민에게 개방하는 것으로 개혁조치를 시작했다. 군사독재 시절 권위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다. 3월 초에는 공안사범과 일반사범 4만여 명에 대해 특별사면과 감형, 복권을 단행하며 “문민시대의 출범과 함께 지난 30여 년간 쌓인 그늘을 말끔히 거두어 대화합 속에서 새로 출발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4 9일에는 4·19혁명 33주년을 맞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수유리 4·19묘역을 참배하고 헌화하며 “4·19혁명은 3·1운동 다음가는 역사적인 의거로 재평가, 복원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사회 전반의 개혁조치는 공직자 재산공개와 사정, 부정부패와 각종 사회비리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공기업의 민영화와 통폐합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난 정치인·공직자·전현직 군수뇌 및 고위장성들이 잇달아 물러나거나 구속됐다.  


 
김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불리기도 하는 금융실명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도 그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노태우 정권에서는 여러 번 실시를 검토했을 뿐 경제위기와 준비 미비 등의 이유로 계속 유보돼 왔던 과제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후 6개월 만인 1993 8 12일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당시에는 긴급명령이라는 전격적인 방법 때문에 우려를 사기도 했고 며칠간 국내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국내경제는 금세 정상화됐고, 금융실명제는 지하경제를 위축시키고 정경유착 등 각종 불법 정치자금 조성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금융실명제는 이후 이어지는 각 분야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으로 불렸다.  

  
  
역대 최고 지지율 기록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당시 유세장은 인산인해였다.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 부정부패 척결 등 개혁 조치는 일부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국민 대다수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취임 초기(1993 2~3분기)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83%에 달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지지율이다. 금융실명제 실시 시점인 1993 8월에는 비공식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이 무려 90%에 달하기도 했다.   


 
각계 개혁이 한창이던 1994년 초 신년하례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개가 아무리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말을 남겼다. 기득권층의 반발 등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개혁은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높은 지지율은 개혁정책 외에 김 전 대통령의 탈권위주의적 행보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본인을 개그나 풍자의 소재로 삼는 것을 허용했고,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YS시리즈’가 유행했으며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유머집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 청와대 방문객 공식 오찬 식단을 칼국수로 정하는 소탈한 면모를 보여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과거사 바로잡기 앞장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 역사바로세우기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요 업적이다.  

 

  개혁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에 나섰다. 군부독재 청산에 나서는 한편 4·19, 5·18, 12·12 등 현대사 각종 사건에 대해 재평가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첫 번째로 실행한 것은 육사 내부 파벌로 군부독재의 중심으로 불렸던 ‘하나회’ 숙청 작업이다. 하나회는 김영삼 정부 초기에도 군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등 군부독재 적폐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취임 직후인 1993년 초 육사 출신들이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분열돼 물리적 충돌을 빚는 사건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하나회 명단이 공개됐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당시 내걸었던 슬로건인 ‘군정 종식’의 일환으로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행했다. 일주일 사이 40개의 별이 떨어졌을 정도로 하나회는 힘을 잃었다   


 
이후 12·12에 대한 재평가도 시작됐다. 검찰은 1995 11~12월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각각 거액 수뢰 혐의와 반란주도 혐의로 구속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12·12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한 국민의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지면서 김영삼 정부는 1995년 말 5·18특별법을 제정하고 5·18 및 군부 과잉진압에 대해 재평가했으며, 1980년 당시 신군부 핵심인사들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를 적용해 구속기소했다


  
  이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은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건물을 완전히 철거해 일제 잔재를 청산했다. 이를 두고는 과잉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비판도 있다. 이처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친일청산·군사쿠데타 성격규정·광주민주화운동 성격규정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타고난 정치인이자 승부사

▲1993년 8월 12일 오후,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긴급 재정명령’을 발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타고난 승부사’다. 정치인의 최우선 덕목인 결단력과 추진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특히 상황을 읽고 판단하는 능력과 위기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반전시키는 순발력과 돌파력이 돋보인다고 주변 사람들은 평가한다. 흔히 김 전 대통령의 과()로 불리는 3(민정당·민주당·공화당) 합당 역시 김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 승부수였다. 정치에 관한 한 ‘동물적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가 과장이 아닐 정도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김호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영삼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김 대통령은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때는 항상 대담한 승부수로 일관해 왔다. 모든 문제를 정공으로 대응해서 목적을 관철해 온 것이 그의 리더십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승부사가 기습전략을 선호하듯 그도 전격적인 조치로 리더십의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노력한다. 승부사가 관중의 박수갈채를 의식하듯 승부사형 지도자는 대중여론을 의식해 행동한다. 과거 40대 기수론, 단식투쟁, 민추협 결성, 3당 합당, 금융실명제 기습실시 등이 그 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공격성과 개혁성은 있었지만 여론을 업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통치이념과 개혁정책을 접목해 성공할 수 있었다.” 승부사적 성향이 개혁을 위해 바람직한 면도 많지만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사람관리, 건강관리도 철저     

정치인의 주요 덕목 중 하나가 리더십인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사람관리를 매우 중시하는 리더십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부친 김홍조 옹이 멸치어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주변인들에게 명절선물로 멸치박스를 보냈는데 여야나 정치적 대립과 관계없이 멸치선물을 보냈다. 웬만한 정치권 인사들은 ‘YS멸치’를 안 받아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를 따르는 정치 지망생들이 늘 주변을 에워쌌다.   


 
김 전 대통령은 리더십과 스타십을 겸비한 보기 드문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특히 인재를 보는 통찰력과 안목이 뛰어나 이후 정치권을 좌지우지하는 인재들을 대거 발굴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수 또는 대통령일 때 발굴해 낸 인물이 노무현 전 대통령, 이회창 전 신한국당 총재,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총선에서 영입해 정계에 입문했고, 이회창 전 총리를 1996년 총선 당시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바로 여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는데, 당시 민자당 총재이며 공천권자였던 사람 역시 김 전 대통령이다. 이 밖에 손학규, 이재오, 김문수, 정의화, 김기춘 등을 정치권으로 영입한 인물이며 김무성, 서청원 등 민주계의 정치적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개인적인 정()을 중시하다 보니 임기 후반부에 아들(김현철) 등 측근 관리에 실패했다는 평도 있지만, 인재를 보는 안목만은 탁월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은 운동 등 자기관리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1980년대 민주화투쟁 당시엔 민주화 동지들과 함께 등산을 하는 민주산악회를 조직해 뜻을 모으면서 건강도 유지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평생 식사관리와 조깅, 등산 등으로 건강을 관리해 단식투쟁을 해도 사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정치깡패와 대치하는 등 물리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대처하곤 했다. 재임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함께 새벽 조깅을 하기도 했는데, 빌 클린턴 대통령보다 20여 세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속도와 페이스로 조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때     

현재 혼란한 정국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단력과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인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시민사회를 정치 무대에 제대로 정립시켰다”며 “정치적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방향으로 정치적 결단을 내린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군부의 권력 개입을 차단하고 정치자금법을 통과시키는 등의 성과를 이뤄 냈다”고 강조했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가 변화를 끌어내고 변화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야당 지도자들은 김 전 대통령의 결단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이미 중국 및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했고, 측근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김대중의 통합 정신]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 건의…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국비 지원  

⊙ 김대중, 40%로 당선된 후 통합 강조… “야당 협조 없이 난국 극복 어려워”
⊙ 김중권, 엄삼탁, 권정달 등 5·6공 인사 기용해 영남권 향한 ‘동진(東進) 전략’ 구사
⊙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김종필, 박태준과 손잡고 집권해 공동정부 구성
⊙ 전두환, DJ 때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에서 38.7%를 얻은 이회창(李會昌) 당시 한나라당 후보와의 접전 끝에 득표율 40%로 겨우 당선됐다. 이마저도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던 부산·경남, 강원에서 30%를 얻는 등 전국적으로 중도·우파 표를 19.2%를 가져간 이인제(李仁濟) 당시 국민신당 후보의 ‘활약’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국민 중 ‘반()김대중’에 섰던 이들이 58%나 되는 상황인데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망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이 강조한 건 ‘통합’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이다.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올해 1년 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중략)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 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중략) 우리 국민은 해낼 수 있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일어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선두에 서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국난을 극복합시다.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드높입시다.

-1998 2 25, 대통령 취임사 중   


  
“민주주의만 이뤄진다면 보복은 필요치 않다”

집권 이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 지역당의 당수란 이미지와 함께 ‘레드 콤플렉스’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통합’을 역설해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빨갱이’ 또는 ‘용공주의자’란 의혹을 받기 시작한 건 1971 7대 대선에 출마할 때부터다. 당시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 교류 ▲대중 경제 노선 등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북한이 무력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상황에서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김 전 대통령이 만든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한 김삼웅(金三雄)씨가 쓴 《후광 김대중 평전》에 따르면 1979 10·26 이후 실세로 등장한 정승화(鄭昇和)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육군본부로 언론사 간부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다” “김대중은 최고 사령관인 대통령은 고사하고 일개 소위도 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승화를 전격 연행하고 권력을 잡은 신군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국군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강창성(姜昌成) 전 보안사령관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른바 ‘3김’을 비난했다. 그는 “3, 저것들이 설치고 있는데, 저 사람들 가지고는 어디 되겠습니까? 김종필(金鍾泌)이는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金泳三)이는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김대중이는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1987
년에도 김대중은 사상적인 의심을 받았다. 1986 11월에 한 ‘대선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대권 도전 움직임을 보이자 박희도(朴熙道)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기자들과의 간담회 도중 공개적으로 김대중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김대중에 대한 군부의 생각은 1980년과 다를 바 없다는 취지의 얘기를 하면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하면 불행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경고했다. 군 고위 관계자도 사석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된다면 수류탄을 들고 뛰어들겠다”고 말해 대정부질문에서 문제 제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군부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유는 ‘김대중의 불온한 이념’보다도 그가 집권했을 때 광주사태를 내세워 유례없는 정치 보복을 가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유세 당시 “‘김대중이가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추고, 김일성이가 북을 치면 김대중이가 장단을 맞춘다’고 몰고 있다”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군부 내 움직임과 관련해선 “군이 국가방위를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민주주의만 이뤄진다면 보복은 필요치 않다. 나는 보복에 강력히 반대한다” 등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반김대중’ 정서를 불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에 있었던 13대 대선에서 37%로 당선된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 28%였던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보다 뒤진 27%를 얻어 3위에 머물렀다.   

  
  
“거국내각을 만들어 대화합의 정치를 하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적 격변기마다 ‘통합’을 강조했고, 이를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1988 13대 총선 이후, 여소야대 정국을 깨기 위해 민주정의당(125), 통일민주당(59), 신민주공화당(35) 1990 2월 전격적인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김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70)을 포위했다. 14대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호남정당’이란 색깔이 짙은 평민당으로서는 집권할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권 통합을 추진했다. 일단 그는 호남색을 빼기 위해 1991 4월 당 쇄신을 위해 재야운동가를 영입하고 당명을 신민주연합당(新民主聯合黨)으로 변경했다. 그해 8월엔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잔류파가 모인 민주당(세칭 ‘꼬마 민주당’), 바꿔 말하면 1987년 대선 당시 자신을 반대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세력과도 뭉치려 했다. 1991 9, 신민당과 민주당은 6:4의 지분으로 합당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에 도전했지만, 804만 표(34%)를 받아 998만 표(42%)를 얻은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194만 표 차로 패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 다음날인 1992 12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다. 저는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에 도전했다. 그는 1997 5월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 가능성을 얘기했다. 그는 후보 수락 연설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정치 보복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며 “전두환, 노태우씨도 법과 국민 양심의 심판을 받은 이상 죄과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면 국민과 더불어 용서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이 되면 모든 정당, 지역, 계층, 여성과 청년이 다 같이 참가해서 전 국민적인 기반 위에 거국 내각을 만들어 대화합의 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연대

▲김대중(우) 전 대통령은 1997년 15대 대선 당시 ‘박정희 정부의 이인자’ 김종필(좌)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손을 잡았다.  

 

  김 전 대통령은 집권을 위해 야권 통합을 추진했다. 새정치국민회의 합류를 거부했던 국민통합추진위원회 소속 김원기(金元基, 전 국회의장),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 등과 재결합했다. 또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중권(金重權), 6공 실세’ 엄삼탁(嚴三鐸), 민정당 초대 사무총장 권정달(權正達) 등 구여권 인사들을 영입해 영남을 공략하는 ‘동진 전략’을 추진했다. 결정적인 건 역시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이인자였던 김종필 당시 자유민주연합 총재와의 ‘DJP 연합’이었다.   


  1996
4, 15대 총선이 끝난 뒤 당시 김대중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의 이강래(李康來) 상임고문은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 김종필의 자민련과 연합하는 방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했다. 김대중은 이를 수용해 1996년부터 자민련과의 정책 공조를 추진했다. 자민련 내부에선 김대중과 손을 잡는 데 대해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강삼재(姜三載)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α’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수세에 몰린 김 전 대통령은 김종필 전 총리에게 파격적인 양보를 해 ‘DJP 연합’을 결성했다. 이로써 김대중 집권 시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맡고, 16대 국회 때 내각제 개헌을 하며, 경제 부처 임명권은 총리가 갖고, 지방선거 때 수도권 광역단체 중 한 곳을 자민련 후보로 낸다는 데 합의했다.   


 
김 전 대통령과 김 전 총리의 결합은 박정희 집권 당시 포항제철 신화를 일궈 당시의 산업화를 대표하는 박태준(朴泰俊) 당시 의원을 포함해 ‘DJT 연합’이라고도 한다. ‘박정희 독재 정권의 피해자’를 자처해 왔던 김 전 대통령은 ‘DJT 연합’에 대해 “후보 단일화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연대이자,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의 결합이라며 연립정부가 구성되면 권력 독점 시대가 끝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시작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민 통합 차원에서 전두환·노태우 사면 건의

▲김대중(좌측 세 번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청와대로 노태우(왼쪽부터), 전두환, 최규하 등 전직 대통령을 10여 차례 초청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DJ 때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다.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DJT 연합’을 통한 후보 단일화, 이인제 당시 국민신당 후보의 여권표 잠식 덕분에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간발의 차이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됐다. 그 직후 기자회견에서 그는 ‘통합’을 강조했다.   


 
“자민련 김종필, 박태준 두 분 총재께서 정말 헌신적으로 몸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해 협력해 주신 데 대해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우리 당과 다시 힘을 합친 김원기 대표 이하 국민통합추진위원회 여러분 모두의 협력이 큰 힘과 성원이 됐습니다. (중략) 1997 12 18일은 국민 전체가 대동단결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정치 보복이나 지역 차별이나 계층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모든 지역과 계층을 다 같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모든 차별을 일소하고, 모든 국가 구성원의 권익을 공정하게 보장함으로써 다시는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특히 저는 지역 간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일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했다고 알려졌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내란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지만, 국민 통합 차원에서 요청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 12 20일 두 사람을 사면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09 8 14일 폐렴으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그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20 VIP 대기실에서 김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의 면담에서 “DJ 때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 현직이 안 봐주면 전직들처럼 불쌍한 이들이 없지 않으냐”면서 “재임기간 10번 가까이 초대받아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박정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맡고 기념관 건립에 국비 200억원 지원     

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집권 이후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에게 총리를 맡겼고, 내각에 자민련 인사들을 기용했다. 동서화합을 위해 자신의 정적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에 국비 200억원 지원을 약속하고,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으로 참여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변호사는 이에 대해 《월간조선》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도 동서화합을 위한 것이었다. 1998 4, 박근혜 현 대통령이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직전이었다. DJ(김대중)가 나를 불렀다.   


 
“피해자인 살아 있는 대통령이 가해자인 돌아가신 대통령을 용서한다면, 동서화합의 징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나는 신현확(申鉉確) 전 총리, 김준성(金埈成) 전 부총리, 이원경(李源京) 전 외무장관, 정수창(鄭壽昌) 전 대한상공회의소 의장 등 TK 원로들을 찾아가 DJ의 뜻을 전했다. 모두 선뜻 믿지 않았다. DJ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쇼”라는 반응이었다. DJ는 이분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같이하면서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이들은 비로소 DJ의 진심을 믿게 되었다. 그해 5 DJ는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나는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의원을 만나 DJ의 뜻을 전했다. 박근혜 의원도 고마워했다.   


 
현재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41%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다. 지지자보다 반대자가 훨씬 많은 셈이다. 국회 상황도 만만치 않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180석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야 법안 처리가 되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은 120석에 불과하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의 협조를 구하지 않고선 법안 처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국정 안정을 꾀했고, 반대파 배제보다는 화해와 통합을 강조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노무현의 탈()권위 리더십]

■ 기득권·특권 축소, 국민 참여 과감히 확대

⊙ 소탈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국정 수행 … 당선 직후 대중목욕탕 찾기도
⊙ 김대중 정권 시절 ‘ㄷ’자 형태였던 수석비서관 회의장 구조를 토론하기 위해 두 줄로 바꿔
⊙ ‘탈권위’가 대통령 권위 자체 약화로 이어질 수 있어
⊙ 노무현 전 대통령, 거친 발언으로 스스로 자신의 위상 추락시킨 경험

 

2002 12 21  

 

  16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2002 12 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12일 휴가를 떠났다. 그가 여장을 푼 곳은 호텔이 아닌 서귀포시 강정동 내 콘도형 민박집(펜션)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제주로 갈 때도 공군전용기 대신에 김포공항에서 일반 민항기를 이용했다. 노 전 대통령은 “특별한 뜻은 없고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습관의 문제”라고 했다.    


  
2003 1 6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 1 6 26명의 선대위 본부장단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어른 격인 김원기 정치고문을 ‘김고문님’, 2년 선배인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을 ‘정선배’ 혹은 ‘대철이형’으로 불렀다. 정 위원이 대선주자였던 점을 상기하며 “형, 솔직히 내가 부럽지”라는 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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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관들에 대한 호칭도 ‘광재씨(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갑원씨(서갑원 전 의원)’였다. 노 전 대통령은 “새로운 정치를 위해 개혁을 하는 마당에 작은 일부터 바꾸자”며 “약속이 있는 사람은 먼저 나가도 무방하다”고 했다. 실제 김원기·신기남·천정배·추미애·이강래 등은 먼저 자리를 떴다


 
만찬 전 노 전 대통령은 일반 대중사우나에서 목욕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직후에도 대중사우나를 찾아 경호팀을 당황케 했다. 경호팀 2명은 알몸으로 탕 안까지 쫓아갔다고 한다.  


 
당시 경호 관계자는 “멀찌감치서 경호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대통령 당선인과 알몸으로 마주친다는 게 너무 불경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몸 경호’란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일 것”이라고 했다.   


  
2003 1월 중순

노 전 대통령은 간만에 일찌감치 퇴근길에 올라 명륜동 자택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맞는 한가함이 어색했는지 노 전 대통령은 경호원들에게 물었다. “볼링 칠 줄 아는 사람 있나요?” 대답을 못하자 다시 물었다. “다들 볼링을 싫어하는 모양이죠?” 한 경호원이 “좋아한다”고 답하자, 노 전 대통령은 근처 볼링장으로 갔다. 3게임을 쳤다. 처음에는 주뼛거리던 경호원들도 승부에 몰두했다. 볼링장 손님들이 신기해하며 구경하러 몰려들었고, 경기가 끝난 뒤 노 전 대통령은 사인을 해 주느라 20여 분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2003 2 23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관들과의 워크숍에서 “꼭 양주를 마셔야 하는가. 소주를 마시면 안 되는가. 또 꼭 고급 음식점에 가야만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관행처럼 이어진 접대 문화에 대한 일침이었다. 당시 한 비서관이 “오십세주(백세주와 소주를 합친 술)는 괜찮습니까?”라며 우문을 던지자 노 전 대통령은 “오십세주? 오십세주는 괜찮지 않겠나”고 받아 줬다는 후문이다.   


  
2003 2 27

청와대 본관에서 있었던 임명장 수여식. 신임 각료들과 개별 사진을 찍던 노 전 대통령은 멀찍이 서 있던 당시 고건 국무총리와 눈이 마주치자 “잘못하는 것 같다. 총리하고 찍어야 한다”며 촬영을 중단시켰다. 의아해하는 각료들에게 “이래야 (총리 밑) 장관의 소속이 분명해진다”라고 설명했다. 이미 대통령과 사진을 찍었던 일부 장관들은 고 총리와 함께 다시 포즈를 취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고 총리에게 “내가 너무 앞서 나가면 중심을 잡아 달라”는 주문도 했다. 같은 날 노 전 대통령은 기자실이 있는 춘추관으로 이동하면서 신임 장관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이동 과정에서 청와대에 견학 온 어린이들에게 사인을 해 주기도 했다. 경호원들은 통상 대통령의 이동 중 정지를 금기시한다. 노 전 대통령은 경호팀의 걱정을 뒤로했다.  

  
  
2003 2 28 

노 전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장 구조를 바꿨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ㄷ’ 자 형태였던 회의장 구조를 두 줄로 배치, 참석자들이 마주 보게 했다. 평등한 관계에서 토론을 통해 국정을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회의장 구조를 바꾸고 첫 회의를 했던 2003 2 28일 정무수석이었던 유인태 전 의원은 12분 정도 지각했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회의에 늦는 것은 과거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유 전 의원이 늦은 이유가 ‘교통체증’이었기 때문이다.     


  
2003 3 11

노무현 정부의 두 번째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그리 지치지 않았다. 회의 도중 대통령이 제안한 휴식 시간 때문이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회의장 바깥 복도에 마련된 탁자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셨다. 노 전 대통령도, 장관들도 모두 손수 탄 차였다. 경직된 분위기로 진행되던 과거 국무회의에선 휴식도, 커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한 국무위원은 “그런 자리도 처음이지만, 대통령이 직접 차를 타 마시는 것을 보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대통령께 접근하기가 쉬워졌다”고 했다
  

  노무현, 탈권위주의의 상징

▲청와대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건넨 아이스크림을 받아 먹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와 서민의 상징이었다. ‘상고 출신의 인권변호사’였던 그는 집권 후 우리 사회 주류의 기득권과 특권을 축소했고 국민 참여 정치와 행정을 과감하게 확대했다. 임기 내내 그는 소탈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국정을 수행했으며 우리 사회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대통령 당선 전부터 “퇴근길에 남대문시장에 들러 소주 한잔 나눌 수 있는 서민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과거 대통령들이 틀어쥐었던 ‘절대권력’을 포기하고, 탈권위를 실천한 사실은 그의 측근들도 인정한다.   


 
노 전 대통령의 비서 생활을 20년 넘게 한 서갑원 전 의원은 아직도 1992년의 ‘그 사건’을 잊지 못한다. 대학원 졸업 후 노 전 대통령의 수행비서로 일할 때였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 청년특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첫 출근날 승용차 뒷좌석에 모시고 나는 당연히 앞자리로 가서 탔다. 그랬더니 뒤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이리로 오게’ 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노 전 대통령이 ‘이 사람아, 자네 뒤통수를 보면서 어떻게 얘기를 하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주저주저하고 있자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네가 비서지만, 다니면서 뭔 얘기도 하고 일 있으면 시키고 의논도 하고 해야지. 뒤로 오게!’ 처음에는 좀 별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내 옆자리에 동승해 모시다 보니 ‘사람 대접해 주시는 분이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의 회고다. 박 전 총재는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과 건설부장관을 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한국은행 총재에 임명되어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 직을 수행했다. 박 전 총재는 2010년 《한국일보》에 ‘탈권위의 서민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잊히지 않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회의이다. 노 대통령은 주요 경제현안에 대한 정책회의를 자주 저녁에 청와대 관저에서 주재했다. 나는 그동안 이런저런 공직을 겪으면서 많은 청와대 회의를 경험했지만, 대통령 관저에서의 회의는 처음이었으며 또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중략) 회의는 상의를 벗고(때에 따라서는 넥타이도 풀고) 식사를 하며 농담도 주고받으며 진행했다. 그때 노 대통령은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데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과 오랜 세월 일을 함께했던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노 전 대통령은 수평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며 “어떤 정보를 손에 쥔 채 그것을 일종의 힘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스태프들과 공유해서 그들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노 전 대통령의 논리였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본인의 저서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에서 탈권위 리더십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권위적 리더십은 인간을 게으르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보고, 권력은 직위에서 나오는 강제력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적 리더십은 인간은 자기 규제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아 자발적인 추종을 중시한다. 나는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할 때나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할 때나 나와 함께하는 사람을 한결같이 동지로 보았고 그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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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통령 당선인도 노 전 대통령의 이러한 탈권위주의를 되새기고 본받을 필요가 있다.

        

탈권위가 대통령 권위 자체의 약화로 귀결되어서는 안 돼     

다만 ‘탈권위주의 리더십’이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마땅히 요구되는 권위 자체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탈권위가 국정수행의 민주적 리더십으로 이어져야지, 국정수행 자체를 위협하는 권위 자체의 약화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경우 탈권위 성공에도 불구, ‘대통령 권위의 실추’로 이어졌다. 거친 발언으로 스스로 자신의 위상을 추락시킨 탓이다.   


 
노 전 대통령은 ‘속어’를 사용했다. 속어 사용이 서민 이미지에 어울린다고 판단한 듯 보인다. 인권변호사로서 노동자들과 대화할 때 “집회 참석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묻는 것보다 “쪽수가 몇이냐”고 하는 것이 친근감 고취에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표현은 국가원수의 격에 걸맞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은 2003 5월 말 공관장 부부 모임에서 “국외에서 볼 때 한국이 ‘개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도 민주주의 한번 해 보자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개판’ 같은 속어는 소설에서 생동감을 살리는 표현이 될 수 있지만, 대통령이 대사 부부들 앞에서 하는 말로는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3 5 21 5·18 행사추진위원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고 ‘못해 먹겠다’는 시정의 언어를 그대로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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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요인 등을 초청한 자리에서는 방미 성과와 관련, “자기 지지기반에 잘 보여야 할 텐데, 내가 여당인지 야당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어버이날에 보낸 이메일에는 잡초 정치인 솎아 내자는 식의 격문(檄文)과도 같은 어구가 포함돼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 됐다. 4 25일 고영구 국가정보원장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는 국회 정보위에서 여야가 만장일치로 고 원장에 대해 ‘부적절’ 보고서를 채택한 것과 관련,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국정원이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할 때 행세하던 사람이 나와 (고 원장에게) 색깔을 씌우려 하느냐”고 특정 세력을 비난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역대 대통령은 ‘목이 너무 뻣뻣한’ 존재였기 때문에 탈권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다”고 언행에 대해 해명했지만 논란은 임기 내내 계속됐다.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청산한다고 해서 국가의 최고 리더가 갖추어야 할 권위마저 청산 대상에 올리면 사회의 기강은 바로서지 않는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의 언행이 도마에 오를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정세현씨는 인공기 소각 사건과 관련해 대북 유감 표명을 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도 미적거리며 버텼다. 김영진 전 농림부 장관은 “새만금 문제에 항의해 사직하겠다”며 청와대와의 긴급전화 연락망마저 끊고 잠적하기도 했다. 장관마저 대통령의 권위를 가볍게 여기기에 일어난 일이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미국, 프랑스 대통령들은 제왕적 권한이 없는데도 그 나름대로 강력하고 유능하며 리더십 있는 정부를 이끌고 있다”며 “탈권위주의는 견지하되 정당한 도덕적 권위를 지키기 위한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19대 대통령 당선인은 최 교수의 이야기를 새길 필요가 있다.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을 자처했으며 노무현 자서전의 편저자이기도 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부러워했습니다. ‘서민적인 언어를 쓰고 어려운 사람들이 공감하는 말을 하더라도 오바마처럼 절제해서 품격 있게 하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말씀하셨죠.”⊙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이명박의 실용주의 리더십] 

■ CEO 경험 바탕으로 국제 금융위기 잘 넘겨 

2008년 국제 금융위기 터지자 “위기 때에는 현금부터 챙겨야 한다”면서 미국·일본·중국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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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
2009 1~2012 12월 매주 경제각료, 기업인 등 참석하는 비상경제대책회의 145회 개최
⊙ 애견가인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형식적인 선물 아닌 개() 목줄 줘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4월 18일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만났을 때 “내가 카트를 운전하면 어떻겠느냐”며 카트의 운전대를 잡아 부시의 마음을 샀다.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이하 이명박)은 성공한 CEO 출신이었다. 현대건설에 입사한 지 5년 만인 28살 때 이사, 35살 때 사장으로 승진했다. 태국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명박은 1970~80년대에는 중동 건설현장 등을 누비면서 ‘신화(神話)’를 만들어 냈다. 그는 개발연대의 성공 스토리를 체현(體現)한 인물이었다.  


 
이명박의 성공담은 1990년 유인촌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극화되기도 했다. 1992년 이명박은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하지만 국회의원 이명박은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1996년에는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금배지를 잃었다. ‘정치’는 그에게 걸맞은 옷이 아니었다.  


 
CEO 이명박’의 진가는 그가 서울시장 재임(2002~2006)할 때 드러났다. 청계천 복원 사업을 성사시킨 것이다. 말도 많았고 반대도 많았지만 복개했던 도로와 고가도로를 걷어 낸 자리에 청계천이 다시 흐르게 됐을 때, 사람들은 “역시 CEO 출신은 다르다”고 감탄했다. 밤에도 인터넷을 하면서 말을 만들어 내는 정치대통령·이념형 대통령에게 질려 있던 국민들은 2007년 그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내가 현대를 해 봐서 아는데 …”

대통령이 된 이명박은 실제로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라는 자세로 직무를 수행했다. 취임 초부터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 정부임을 선언했고, 대불공단의 차량운행을 저해하는 전봇대를 뽑아 내라고 호령하기도 했다.  


 
이명박의 CEO 리더십은 2008 7월부터 발발한 국제 금융위기 때 빛을 발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위기가 시작되고 세계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보다 10년 전 금융위기를 겪었던 한국으로 눈길이 쏠렸다. 그해 10 14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침몰하는 한국경제’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사흘 후 이 신문은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 세계 금융위기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내 언론들도 ‘위기설’을 전파하는 데 일조했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다. 한국 은행들이 먼저 외환수급(外換需給)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 스와프(CDS) 금리가 연초에 비해 14배나 뛰었다. 그해 3/4분기에만 650억 달러의 외국 자금이 빠져나갔다. 환율이 1달러에 1500원을 넘었고, 연초 2000선에 달하던 주가지수는 900대로 폭락했다. 1997년 외환위기(IMF사태) 같은 위기가 다시 닥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국내 언론들도 ‘9월 위기론’이니 ‘10월 위기론’이니 하면서 위기감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명박은, 비서관이 금융위기가 닥쳐 오는데도 수수방관하다가 “국가부도”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김영삼과는 달랐다. 이명박은 경제각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현대를 해 봐서 아는데 위기 때에는 현금부터 챙겨야 합니다.


 
이명박이 곧잘 사용하던 “내가 현대를 해 봐서 아는데 …”라는 말은 종종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이때는 그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유동성이 부족하면 흑자도산한다”  

먼저 이명박 대통령은 외환수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을 높은 가산금리 때문에 포기한 기획재정부를 질책했다.  


 
“결국 높은 금리로 외평채를 발행했다는 책임추궁을 당하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 위기 상황인데 금리가 좀 높다고 그러면 되겠어요? 공직자들은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은행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비상 시기에는 정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진 해외 금융자산을 모두 팔아서라도 외환유동성을 확보해야 하는 거잖아요. 기업이나 국가나 흑자(黑字)가 나도 유동성이 부족하면 흑자도산하는 거예요.  


 
이후 정부는 ‘유동성’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벌였다. 그 결과가 미국·중국·일본과 체결한 통화스와프 협정이었다. 통화스와프란 약정된 환율에 따라 자국의 통화를 맡겨 놓고 상대국의 통화를 빌려오는 외환거래를 말한다. 통화스와프가 체결되면 약정된 금액만큼 외환을 추가로 보유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중국·일본과 각각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는 ‘거래의 기술’을 발휘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자기들은 유럽연합(EU)이나 일본과 같은 신용등급 AAA 수준의 선진국하고만 스와프 협정을 체결한다면서 스와프 협정 체결에 소극적이었다. 대신 한국이 갖고 있는 미국 국채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자칫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느낌을 국제사회에 줄 우려가 있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국에 “우리가 보유한 미국 국채를 내다팔 경우 한국은 통화스와프 없이도 위기관리가 가능하다”면서 “이 경우 미국의 통화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외환조달을 위해 미국 국채를 팔면 미국 국채 가격이 하락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이 호주와는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면서 경제규모가 더 크고 국제통화기금(IMF) 지분이 높은 한국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미국 정부는 한국과의 통화스와프 협정에 동의했다.  

  
  
“한국이 위기를 통제하는 데 만점을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제 금융위기가 터지자 청와대 지하벙커에 비상경제상황실을 설치하고 퇴임할 때까지 145차례의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스와프 협정에만 목을 매지 않았다. 일본·중국과의 통화스와프도 추진했다. 일본이 스와프 규모를 30억 달러니 70억 달러니 하면서 미적거리자 이명박 정부는 중국에 통화스와프 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강만수 장관은 “한중통화스와프는 위안화가 기축(基軸)통화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셰쉬런 중국 재정부장(재무부 장관)을 설득했다. 중국측이 솔깃해할 얘기였다. 중국은 기존 40억 달러 규모이던 스와프를 300억 달러로 늘리는 데 합의했다. 중국은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지만, 강 장관은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규모인 300억 달러를 주장해서 관철시켰다. 중국과 거래를 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를 배려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은 자기들도 한국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일본은 한일통화스와프 체결을 한중스와프 체결보다 먼저 발표해 달라는 주문을 덧붙였다.  


 
미국·일본·중국과 도합 9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 위기설은 사라졌다.  


  2009
년 들어서면서 이명박은 ‘비상경제정부’ 구축을 선언했다. 1 6일에는 청와대에 비상경제상황실을 마련하고, 그해 1 8일부터는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나중에 경제상황이 안정되면서 국민경제대책회의로 명칭 변경)를 개최했다. 경제부처 장관들은 물론이고 경제5단체장들과 기업인들이 멤버였다. 매주 열린 이 회의는 2012 12월 말까지 모두 145차례 열렸다.  


 
이러한 노력 결과 한국 경제는 국제 금융위기와 뒤이은 국제 재정위기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평균 2.8% 성장하는 동안 한국은 6.1% 성장했다. 2008 10월 한국위기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0 4 28일 자에서는 〈한국이 위기를 통제하는 데 만점을 받았다. 한국은 교과서적인 경기회복을 달성했다〉고 보도했다. 2008년 〈한국이 아시아에서 인도 다음으로 부도위기가 높다〉고 했던 《블룸버그통신》은 2010 11 8일 자 보도에서 〈경기회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과 유럽이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을 겪지 않으려면 한국의 위기대응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보도했다

  
  
IMF 사태보다 더 큰 위기 잘 넘겨

 2009년 유럽발() 국제 재정위기가 발생했다. 이때는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는 종료되었고, 일본과의 통화스와프 잔고는 130억 달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선제적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2011 10 19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와 한일스와프를 700억 달러로 늘리기로 한 데 이어 중국 리커창 부총리와 만나 통화스와프 규모를 560억 달러로 늘리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그해 10월 말에는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이 유럽발 재정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국민들은 2008~2010년 우리가 얼마나 큰 위기를 잘 넘긴 것인지를 모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세계 금융위기로 러시아·한국·브라질 등이 곤경에 빠졌다”면서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는 지금에 비하면 해변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 시절”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에서 은행들이 파산하고 주택 채무자들이 집에서 쫓겨나던 2008년의 국제 금융위기, PIIG(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등이 ‘국가부도’를 맞았던 2009~2010년의 유럽발 재정위기를 ‘해변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듯이’ 보냈다. 2012 9월 미국 신용평가기관 피치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AA- 로 상향했다.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국 중국,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보다 높은 등급이었다


 
한국이 이렇게 연이어 닥쳐 온 글로벌 금융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던 데에는 CEO 출신 대통령의 기여가 컸다. 이명박은 2013 2 14일 퇴임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내가 경제위기를 극복 못했으면 (이를 비판하는) 기사가 어마어마하게 나왔을 텐데 위기 극복이 잘됐으니까 기사가 안 나오는 것”이라며 웃었다
  


  
부시, “내 친구 이명박”

이명박의 실용주의는 외교에서도 발휘됐다. 2008 4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頂上)회담을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할 때의 일이다. 부시에게 줄 선물을 정해야 했다. 외교통상부에서는 늘 하던 대로 자기(瓷器) 복제품, 한류 드라마 CD, 전통 공예품 등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이명박은 부시가 늘 곁에 두고 쓸 수 있는 물건을 선물하기를 원했다. 이명박은 부시가 개를 좋아한다는 데 착안해서 개 목줄을 선물했다. 미국에서는 모든 공직자들이 20달러 이상 선물을 받으면 국고에 귀속시켜야 한다. 그걸 갖기를 원할 경우에는 자기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이명박이 선물한 개 목줄은 20달러 미만이어서 부시가 부담 없이 가질 수 있었다. 부시는 이 선물을 무척 좋아했으며 두고두고 애용했다고 한다.  


 
이명박과 부시는 기업인으로서의 경험, 독실한 기독교 신앙, 자유민주주의적 세계관 등을 공유하고 있었다. 부시는 2008 7 G8 확대정상회의 때 외국 정상들에게 ‘내 친구(my friend)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소개했다. 같은 달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의 영문 명칭과 영유권 표기를 변경하려 했을 때 부시는 “내 친구 이 대통령의 입장이 어렵다. 그가 원하는 대로 처리하라”고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지시했다.  


 
한미 정상 간에 축적된 돈독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미국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중단됐던 정보교환을 재개하기로 했다. 대외군사판매(FMS) 지위도 격상됐다. 미국행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과거처럼 세종로 미국대사관 옆에서 길게 줄을 서지 않게 된 것도 이명박이 직접 부시에게 한국의 비자면제프로그램(VWP) 가입을 요구해서 성사시킨 것이다.  


 
이명박의 리더십은 박정희 대통령의 그것과 닮았다. 현장 중심의 리더십, 실용주의, 그리고 ‘내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국민과 역사가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까지 …. 그것은 현대건설 CEO를 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음을 이명박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정책들은 사사건건 ‘시민단체’와 야당, 심지어 당내 반대파들에 의해 발목이 잡혔다. ‘소통부족’이라는 지적이 그를 따라다녔다. 시대가 달라졌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조선시대 선비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나 이념형 정치인들의 눈에 이명박은 ‘장사치’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고 ‘거래의 달인’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명박이 보여주었던 것 같은 실용주의 리더십이 필요할 때이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박근혜의 대북정책과 국가정체성 정립 노력]

■ 지뢰 도발 당시,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사용

⊙ 개성공단 폐쇄, 연간 1억 달러의 현금이 김정은에게 들어가는 것 막아
⊙ 통합진보당 해산해 ‘진보적 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의 위헌성 고발
⊙ 국사 국정교과서 추진, 전교조 법외노조화 등 정체성 확립 노력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10월 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이하 박근혜)은 지금 폐주(廢主) 신세다.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재임 중 있었던 모든 일들이 ‘적폐(積弊)’로 규정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논란을 무릅쓰고 추진했던 국정 국사교과서는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폐기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사라졌던 청와대 조직들이 부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와는 가치관과 세계관, 역사관이 근본적으로 정반대다. 이래저래 새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는 ‘ABP(Anything But Park)’가 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의 업적을 거론하는 것은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박근혜 정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기억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개성공단 폐쇄

  첫째는 대북(對北)정책에서 모처럼 ‘채찍’을 들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개성공단 폐쇄(2016)와 목함지뢰 도발에 대한 강경대응이다.  


 
개성공단 사업은 2000년 현대아산()과 북한의 합의로 시작되었다. 2005 18개사가 시범단지에 입주했고,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2011 12월 말 123개 입주기업이 가동 중이었으며, 5만명 가까운 북한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일했다. 그때까지 누적 총 생산액은 15649만 달러였다. 개성공단의 노동자들이 우리측 사람들이나 문화와 접촉하면서 부지불식간에 남북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효과도 작지 않았다. 때문에 햇볕정책의 옹호자들은 개성공단 사업을 ‘남북 경제협력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더 나아가 ‘위기에 처한 우리 경제의 활로’라고까지 예찬했다.  


 
하지만 문제도 많았다. 공단에서 지급하는 월급이 북한 노동자들에게 직접 쥐여지는 것이 아니었고, 현금은 모두 노동당으로 들어갔다. 북한측이 일방적으로 노동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일도 잦았다. 북한에 연간 1억 달러의 현금이 들어가는 사업이어서 북핵과 관련한 유엔 제재에 저촉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사시 북한측이 개성공단에 근무하는 1000여 명의 우리 국민을 인질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가 계속 제기되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인 2013 4 3일 북한은 우리 국민이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공단에서 나오는 것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개성공단 근무자들이 북한의 인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는 그해 4 26일 개성공단 내 잔류 근로자 전원을 철수시켰다. 2016 2 10일에는 북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에 대한 제재 차원에서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이러한 조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작년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응해 내놓은 결의 2270(3 2), 5차 핵실험에 맞서 낸 결의 2321(11 30)의 내용들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결의들은 북한 내 금융기관 폐쇄 및 금융거래 금지, 북한과의 뭉칫돈 거래 등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간 1억 달러에 달하는 현금수입을 차단한 이 조치는 북한정권의 급소를 때린 것이었다. 이 조치로 북한의 추가 핵실험이나 미사일 실험을 막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도움이 되는 현금을 우리가 제공했다든가 하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다. 태영호 주영공사의 망명, 중국 북한식당 근무자 13명 집단망명 등에서 보듯 북한 엘리트 및 주민들의 동요가 가시화됐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개성공단 내 우리 국민들이 북한의 인질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으로부터 온 국민이 해방됐다


 
개성공단을 2000만평 규모로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문재인 정부로서는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조치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덕분에 문재인 정부는 향후 대북협상 과정에서 개성공단 재개라는 유용한 카드를 하나 손에 쥐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등을 생각하면 개성공단 재개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개성공단 카드의 가치는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목함지뢰 도발 후 확성기 방송 재개로 압박

▲북한의 목함지뢰 및 포격도발 후 박근혜 정부는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등을 통해 북한을 압박,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사진은 2015년 8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접촉. 사진=통일부 제공  

 

  2015년 목함지뢰 사건 이후 박근혜 정부가 강경대응한 것도 잘한 일이다. 그해 8 4일 북한이 비무장지대를 넘어와 매설한 목함지뢰에 우리 육군 수색대원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우리 군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노무현 정권 시절 중단했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북한은 목함지뢰 매설은 자기들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한편, 인민군전선사령부 명의로 공개 경고장을 내면서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최윤희 합참의장은 “적이 도발한다면 더욱 강력하고 단호하게 응징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은 8 20일 서부전선에서 고사포 포격 도발을 저질렀다. 이와 함께 북한은 전통문을 보내 “48시간 내 대북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상응하는 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결국 북한은 대화를 제의했다. 8 22일 우리 측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판문점에서 북한의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조선노동당 비서와 만났다. 양측은 이틀간의 회담 끝에 8 24일 공동합의문을 내놓았다. 여기서 북한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데에 유감을 표명’했다. 명시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초 북한측이 보였던 도발 위협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북한측이 꼬리를 내린 셈이었다. 북한이 이렇게 나오자 박근혜 정부는 확성기 방송 중단, 남북대화 추진 등을 약속했다.   


 
문재인 정부는 ‘달빛정책’이라는 ‘제2의 햇볕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다고 북한이 문재인 정부가 내미는 손을 덥썩 잡으면서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 도발 등을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도발을 계속하면서 ‘문재인 정부 길들이기’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에도 “우리에게는 ‘달빛정책’ 이외의 대안(代案)은 없다”면서 유화정책만 고집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다. 그 경우에는 ‘채찍’을 들어야 한다. 하다못해 ‘채찍’을 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목함지뢰 사건 당시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등 강수를 두어 가며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고 미흡하나마 유감의 뜻을 끌어냈던 박근혜 정부의 경험은 문재인 정부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진당 해산     

둘째는 국가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석기 RO사건 후인 2013 11 5일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1년여의 치열한 공방 끝에 헌법재판소는 2014 12 19일 통진당 해산을 결정했다(인용 8, 기각 1). 헌법상 위헌정당해산심판제도에 따라 정당이 해산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헌법재판소는 통진당 해산 결정문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이를 기초로 통일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북한을 추종하고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의 대남혁명전략과 거의 모든 점에서 전체적으로 같거나 매우 유사하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민중민주주의 변혁론에 따라 혁명을 추구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고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도 게양하지 않는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석기 등 내란 관련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사정과 피청구인 주도세력이 피청구인을 장악하고 있음에 비추어 그들의 목적과 활동은 피청구인의 목적과 활동으로 귀속되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피청구인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은 1차적으로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최종적으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 이상을 종합하면, 피청구인의 위와 같은 진정한 목적이나 그에 기초한 활동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하였다고 판단되므로,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헌법재판소는 통진당 해산 결정을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니 ‘민중민주주의’니 하는 것들이 대한민국의 헌법질서에 반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현실정치에서는 최근의 정치적 상황변화에 힘입어 옛 통진당 세력이 부활할 가능성이 꽤 높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다른 사건을 다루면서 새로운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통진당 해산 결정 과정에서 나온 헌법적 판단은 계속 유효할 것이다. 그리고 통진당과 유사한 정강정책을 내건 정당의 활동이나 그런 정당과의 정치적 연대는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전교조 법외노조화     

전교조를 법외(法外)노조화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14 10 24일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전교조에 ‘노조 아님(法外勞組)’를 공식 통보했다. 박근혜 정부가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전교조가 교원노조법의 규정을 무시하고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있는 규약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전교조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합법화된 이후 14년 만에 합법노조(合法勞組)의 지위를 잃었다.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교조는 이른바 진보교육감들의 비호 아래 노조로서 누리던 혜택들을 대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 전교조의 활동은 많이 위축되었다.   


 
좌편향 국사 교과서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평가할 만한 일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4 10 12일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하는 내용의 〈중·고등학교 교과용도서 국·검·인정 구분()〉을 행정예고했다   


 
이후 정부는 집필진을 구성,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이름의 교과서를 내놓았다. 이 교과서는 야당과 좌파 시민단체, 학계의 조직적인 반발로 내내 논란에 휩싸였다가 문재인 정권의 출범과 함께 결국 폐기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좌편향 국사 교과서가 어떻게 대한민국 현대사를 왜곡하고 있는지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효과가 있었다. 소위 진보세력은 단 한 학교도 국정 교과서 연구학교 신청을 하지 못하도록 일선학교에 압력을 가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의 독선적·전횡적 행태가 여실히 노출된 것도 성과였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이런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 투철한 이념적 성찰과 전략적 사고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었다. 교육문화수석비서관에 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문을 써 온 영문학자를,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 그런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정치인을 앉혔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교육부 장관과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바꾸었지만, 그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할 당시 청와대 비서관은 “대통령이 1년 반 전부터 이 문제를 얘기했었는데, 교육부에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더라”고 푸념했다. 대통령은 그 문제를 이야기한 후 그것이 교육부 관료들에게 충분히 입력이 되었는지, 지시 사항이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지를 수시로 점검했어야 했다. 만일 대통령이 수시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그렇게 난데없이 제기된 문제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