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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6]/ 〈51〉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더라도 악질을 놓치면 안 된다” - <60회> 마오쩌둥 “고작 260명 죽인 진시황이 무슨 잘못인가”

상림은내고향 2021. 6. 5. 20:11

[송재윤의 슬픈 중국5] 조선일보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51〉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더라도 악질을 놓치면 안 된다”

<1966년 가을 톈안먼 광장에서 차를 타고 군중을 접견하는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모습.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에서 군중독재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공공부문>

 

“죄의유경(罪疑惟輕).” “죄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으면 형벌을 가볍게 한다”는 의미다. <<상서(尙書)>><대우모(大禹謨)>장에서 명신(名臣) 고요(皐陶)가 순(舜)임금의 치덕을 기리며 남긴 말이다. 상고(上古) 시대의 통치자도 형벌 적용에선 최선의 신중함을 기했음을 강조하는 유가(儒家) 경전의 근거다.

 

근대 형법에 따르면, 어떤 피의자든 유죄 확정 이전엔 범죄자로 취급될 수 없다. “무죄추정의 원칙,” “죄형법정주의,” “증거재판의 원칙”은 근대 형법의 3대 기둥이다. 개인의 존엄과 인권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그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문화혁명 당시 “무죄 추정의 원칙”은 완벽하게 폐기됐다. 대신 “유죄 단정의 폭력”이 자행됐다. 군중집단과 국가조직은 “인민의 적”을 모두 색출하는 마녀사냥, 인민재판, 집단테러를 이어갔다. 털끝만큼의 혐의만 있어도 군중집회에 불려나가 무방비로 조리돌림을 당해야만 했던 집단 린치의 시대였다. 그 모든 사태는 “군중독재”를 계급투쟁의 원칙으로 삼았던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최고 지시에서 비롯됐다.

 

유죄 단정”의 테러...4만명 타도 위해 40만명 제거

 지난 회(50회)에서 살펴봤듯, 청계 운동은 1967년 11월에서 1968년 4월까지 여러 성에서 시험적으로 실시됐다. 1968년 5월부터는 중공중앙의 공식적 선언과 함께 전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청계 운동의 과정에서 최소 3천 만이 구속돼서 심문을 받고, 50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가족까지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무려 1억 명에 달했다. 여덟 명 중 한 명이 회복불능의 심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당해야만 했을까?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의 혁명위원회가 주관한 청계운동 군중집회, 1968년 여름 추정>

 

마오쩌둥의 다음 발언에 단서가 보인다. 청계 운동이 한창이던 1968년 10월 5일 저녁 알바니아 사절단과의 대화에서 마오쩌둥은 말했다.

 

“이번에 당, 정, 관, 민 모두가 비교적 큰 규모로 깨끗이 정리됐소. 스스로 청산하고 정리하고, 스스로 폭로를 했죠. 7억 인구라면, 나쁜 자들이 1천 명 중 한 명이라 해도 ‘적아(敵我) 모순’은 엄중하오. 광둥성을 보면, 국민당 사병, 헌병, 경찰, 국민당 군관, 국민당 간부, 삼청단(三靑團, 국민당 청년조직), 일관도(一貫道, 금지된 민간종교) 등이 청산됐는데, 그 숫자는 약 40만 명쯤 되오. 광둥성 인구가 4천만이니까 40만이면 인구의 1프로요. 이 40만이 바로 국민당의 헌병, 경찰, 당원들이지만, 그들 모두가 다 악질분자는 아닐 테죠. 만약 악질분자가 1000의 1이라면 4천 만 중에서 4만 명에 달하오. 앞으로 반년, 혹은 1년 동안 청계 운동을 하면 10년에서 20년 정도 일시적 안녕을 도모할 수 있겠죠. 이번이 완전히 깨끗이 청소했다고 할 수도 없소.”

 

이른바 ‘적아모순’이란 타협 불가능한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 사이의 모순을 이른다. 마오쩌둥은 외국의 사절단에게 광둥성에서 적아모순의 “악질분자” 4만 명을 타도하기 위해 40만을 깨끗이 정리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0.1%의 악질분자를 제거하기 위해 1%를 숙청했다는 발언이다.

 

<<상서>>에 따르면, 순임금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따르지 않았다(與其殺不辜,寧失不經),” 순임금과는 정반대로 마오쩌둥은 설령 아홉 명의 무고한 사람이 희생된다 해도 단 한 명의 악질분자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계 운동은 바로 그러한 마오쩌둥의 계급투쟁의 논리에 따라 전개됐다. 하부 단위에선 투쟁 대상을 최대한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걸려들면, 혁명의 열정이 지나쳐서 저지른 “좌의 오류”라 변명할 수 있지만, 단 한 명이라도 놓치게 되면, 스스로 반혁명분자로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적을 고립시켜 최대로 맹렬히 타격하라”

청계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서 마오쩌둥은 다시금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을 이용했다. 야오원위안은 1965년 11월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을 공격해서 문혁의 뇌관에 불을 지폈던 바로 신예의 비평가였다. 문혁의 절정에서 야오원위안은 이미 4인방의 한 명으로 급성장해 있었다.

 

1968년 5월 13일, 야오원위안은 신화 인쇄공장의 대적 투쟁을 근거로 “청계운동 정책성 문제의 총결”을 작성했다. 마오쩌둥은 곧 바로 야오의 문장을 극찬했다. 중공중앙은 5월 25일 공식적으로 전국망을 통해서 “신화 인쇄공장의 대적 투쟁”을 모범 사례라 발표했다. 중공중앙이 반포한 “중발 [68] 74호”는 청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베이징 신화(新華) 인쇄공장은 1910-20년대엔 북양(北洋) 군벌 시기 창설돼서 1930-40년대 일제 치하와 국민당 지배를 거쳐 갔다. 문혁 당시에는 상하이와 동북 지역의 여러 인쇄공장을 합병한 직원 3천 명의 큰 공장으로 확장돼 있었다.

 

1968년 2월 21일 중앙 경위단의 8341부대는 군관(軍管) 인원을 베이징 신화인쇄공장에 투입해서 5월까지 두 달 넘게 대적(對敵) 투쟁을 전개했다. 군관 인원의 조사에 따르면, 이 공장의 간부들 중에는 과거 국민당에 가입했다가 이후 공산당에 유입된 22명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맹렬한 계급투쟁”의 첫째 대상이었다. 여기서 계급투쟁이란 다수의 군중을 “발동(發動)시켜” 소수의 계급 적인(敵人)을 공격하는 군중독재였다.

 

신화 인쇄공장에 투입된 군관인원은 50여 일에 걸쳐 군중을 발동시키는 계급투쟁의 전초전을 벌였다. 급기야 4월 11일, 4월 16일 신화 인쇄공장에서는 적대세력에 대한 투쟁대회가 개최됐다. 1968년 4월 11일 거행된 1차 대회에서 반혁명분자들을 모두 색출해서 구금했다. 4월 16일 2차 대회는 마오주석을 모욕하고 문화혁명을 방해한 6명의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집중적인 비판투쟁이 전개됐다.

 

그 과정에서 군관 인원은 청계운동의 기본원칙을 다음과 같이 도출했다. 첫째, 마오쩌둥의 훈시대로 ‘적아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을 엄격하게 구별할 것. 둘째, 투쟁의 큰 방향을 견고히 잡을 것. 셋째, 일체의 단결 가능한 사람들을 단결시킬 것. 넷째, 모든 적극적 방법을 다 동원할 것. 다섯째, 소수의 계급적인들을 최대한도로 고립시켜 맹렬히 타격할 것.

 

중공중앙의 명령에 따라 전국의 각 단위에선 신화 인쇄공장의 선례를 본받는 전면적 계급투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청계 운동의 군중독재는 다수 군중이 소수의 계급 적인을 단죄하는 집단 린치의 과정이었다. 집회, 폭로, 비방, 구타, 감금, 고문, 자백 강요 등의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나?

<1968년 11월 30일, 하얼빈의 청계 운동 집회/ 李振盛, “紅色新聞兵”, 245쪽>

 

문혁 중 ‘청계운동' 피해자 3000만명 추산하기도...대규모 국가 테러

 현재 문혁 시기 전체 희생자의 숫자에 관해선 25만 명에서 1500만 명까지 다양한 연구가 발표돼 있다. 정확한 피해자의 규모는 그만큼 논란거리다. 스탠포드 대학의 사회학자 앤드류 월더(Andrew G. Walder, 1953- )의 연구에 따르면, 2010년까지 출판된 2213개 중국 전역의 현지(縣志, 현 정부 백서)에 기록된 문혁 시기 사망자는 27만3000 명, 피해자 1340만 명이다. 사망자의 75% 이상, 피해자의 90% 이상이 정부기관에 의해 자행된 대민 테러였다. 물론 정부의 통계는 실상보다 훨씬 적은 숫자다.

 

현지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정한 결과, 월더는 1966년 6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4년 6개월의 시기 사망자의 총수를 88.7만-198만 명, 피해자의 총수는 3100만 정도로 추산한다. 그 중 90%가 1967년 말- 1968년 말, 1969년 말-1970년 초의 두 시기에 집중돼 있다. 청계 운동 과정의 사망자는 전체 사망자의 54.5%에 달하므로 대략 48만-108만 정도에 달한다.

<“상하이 동방홍 디젤유 공장의 혁명위원회 성립을 열렬히 환호한다!” 청계운동은 각 단위의 혁명위원회를 장악한 군부의 영도 아래 진행됐다./ chineseposters.net>

 

재미 연구가 딩수(丁抒, 1944- )의 연구에 따르면, 청계 운동의 과정에서 각 현(縣) 평균 1만 명이 박해당하고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국적으로 추산하면 피해자는 3천 만, 사망자 50만에 달한다. 피해자의 총수에서 월더와 딩수의 연구는 3천 만 정도로 거의 일치한다. 딩수가 제시하는 청계운동의 사망자 수는 월더가 제시하는 최소 수치에 수렴한다.

 

월더는 청계 운동과 크메르 루즈 정권이 자행한 캄보디아 킬링필드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한다. 폴 포트는 전체 인민 속에 잠복하는 구시대의 불순분자를 모두 청리(淸理, 청소하고 정리)한다는 마오이즘(Maoism)의 영향 하에서 대학살을 감행했다.

 

명확한 증거도, 공정한 재판의 절차도 없이 가상의 계급적인을 색출해 제거하는 마오쩌둥 방식의 계급투쟁은 대규모의 국가 테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계급독재 인민재판 하에서 “무죄추정의 원칙” 대신 유죄 단정의 폭력이 자행됐기 때문이었다. <계속>

 

〈52“나는 결백하다” 스스로 목숨 끊어 저항하는 사람들

<저명한 역사학자, 교육자 잰보짠(翦伯贊, 1898-1968)은 1968년 12월 18일 부인 다이수위안과 함께 수면제를 복용하고 동반 자살했다./ 공공부문>

 

“진정 심각한 철학적 질문은 단 하나, 그것은 자살이다.” 1940년대 초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1942년 발표한 <<시지프스의 신화>>의 첫 문장이다. 당시 그는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의 지하에서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카뮈의 관찰에 따르면, 현실의 ‘부조리’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은 환각에 취하거나 종교적 광신에 빠지거나 자살을 선택한다. 카뮈는 자살이 소극적 도피일 뿐이라 생각했다. 진정한 자유인은 큰 바위를 밀고 산으로 올라가 추락하는 신화 속의 시지프스처럼 성실하게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때문에 카뮈는 무신론자에게도 자살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카뮈의 “부조리' 문학은 1980-90년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이방인>>, <<페스트>> 등 카뮈의 소설은 1980년대 이후 중국의 문인들에게 중국 현실의 부조리를 돌아보는 큰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2002년에야 중국에서 <<카뮈 전집>>이 처음 출판됐지만, 카뮈는 오늘날도 중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20세기 외국작가 중 한 명이다. 문혁 이후 많은 중국의 독자들이 카뮈의 작품을 탐독했다. 일부 문인들은 카뮈의 영향 아래 아방가르드 작품을 창작했다.

 

“공산당원의 자살은 반역이다.”

 중국의 문인들에게 카뮈의 작품이 큰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국의 현대사에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군중 폭력과 국가 테러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 아닐까? 감당키 어려운 혁명의 부조리 속에서 수많은 인민은 자살 충동에 시달렸기 때문이 아닐까? 페스트가 창궐하여 봉쇄당한 가상 도시의 이야기가 중국인들에게 현대사의 어둠을 상기시키기 때문은 아닐까?

<2015년 중국 베이징대학 출판사에서 나온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표지>

 

마오의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1919-1995)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인은 문혁 시절 남편이 혹시나 문혁 개시 직후 갑자기 목숨을 끊은 마오의 비서 톈자잉(田家英)처럼 자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의 부인은 그에게 늘 말했다. “절대 자살하지 마요. 자살하면 우리 모두 끝장나요.” 1950-60년대 중공정부는 개인의 신체를 사회주의 혁명의 도구로 삼았다. 자살은 “당을 배신하고 인민을 저버리는” 최악의 반혁명 행위로 인식됐다. 유가족은 평생 ‘반역자’의 굴레를 쓰고 오지에 추방당해 강제노역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과연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자살을 해야만 했나?

 

51회 이미 살펴봤듯, 1968-1969년 절정에 달했던 청계 운동은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숨어 있는 가상의 적인들을 제거하는 대규모의 국가테러였다. 그 과정에서 3천 만 명이 극심한 피해를 당했다. 그중 적게는 48만 명, 많게는 108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까지 합산할 경우 청계운동의 피해자는 1억 명에 달한다. 7, 8명 중 한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는 얘기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에 알려진 정부의 공식 통계 몇 가지만 짚어보면······.

<베이징 근교 광루좡(廣錄莊) 대대(大隊)에서 벌어지는 “우귀사신 소탕 대회”의 장면/ 공공부문>

 

1. 랴오닝의 다칭(大慶) 유전(油田)에선 1968년 1월-4월 15명이, 5월-6월엔 36명이 잇달아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2. 1968년 1월에서 1969년 5월까지 베이징의 청계 운동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3731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94%가 자살이었다.

3. 비슷한 시기 저장(浙江)성에선, 10만 명이 구속돼서 비투를 당했고, 그 과정에서 9198명이 가혹 행위로 죽거나 못 견디고 자살했다.

4. 1968년 말까지 안후이(安徽)성에선 43만 명이 각종의 악질분자로 낙인찍혀 능욕, 구타, 체벌, 고문, 자백강요 등 10여 종류의 혹형을 받았다. 1969년 4월의 통계에 따르면, 그 43만 명 중에서 188만8225명이 감금당했고, 그 중에서 4646명이 구금 상태에서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자살했다. 산 채로 맞아죽은 사람도 1074명에 달했다.

5. 지린(吉林)성에선 1968년 4월에서 9월 말까지 다섯 달에 걸친 청계 운동의 과정에서 2127명이 자살하고, 3459명이 불구가 됐다.

6. 윈난(雲南)성 혁명위원회 청계 운동 사무소의 집계에 따르면, 1969년 8월, 44만8000명이 잡혀서 조사를 받았다. 그중에서 1만5000명이 “청소하고 정리될” 대상으로 지목되어 가혹행위를 당했다. 그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6979명에 달했는데, “모두가 강압에 못이긴 자살이었다.”

 

물론 상기 사례들은 전체 자살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재미 연구가 딩수(丁抒)는 문혁 초기 자살자의 총수를 10만-20만 정도로 추산한다.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들을 모두 색출해서 군중 앞에 보이라!” 문혁 당시 군중집회의 집단 린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군추도(群醜圖)”/chineseposters.net>

 

공산주의자들은 자살을 반혁명 행위라 비판한다. 문혁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자살자는 일말의 동정도 받을 수 없었다. 20세기 중국문학의 대가 바진(巴金, 1904-2005)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당시엔 모두가 미쳤었다. 잘 아는 사람이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려도 동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집회를 열고 비판을 했다. 고성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악독한 언어를 써서 죽은 자를 공격해댔다.”

 

이처럼 살아남은 군중이 사자(死者)의 영혼까지 짓밟고 찢었음에도 자살자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중공중앙의 주요 인사들은 청계 운동의 강도 조절을 요구하고 나섰다. 1968년 5월 공안부 장관 셰부츠(謝富治, 1909-1972)는 청계 운동의 광열 속에서 자살자가 속출하자 광폭한 “자살풍(自殺風)”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동분자가 자살을 하면 더 많은 악질분자의 색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 캉성(康生, 1898-1975)은 “투쟁의 기술을 정교하게 쓰라” 요구하면서 “몇 명 죽는 거야 상관없지만, 더 중요한 사건의 단서가 소멸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물론 상부의 지시는 자살의 광풍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작가, 언론인, 과학자, 학생들의 목숨 건 저항

카뮈는 어떤 경우라도 자살은 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1949년 이래 중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을 들추다 보면 그들이 어쩌면 목숨을 걸고 부조리에 저항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50년대 초부터 자살자들 중에는 작가, 언론인, 과학자, 학생 등등 지식분자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지식분자들은 자존심이 남다르고 명예를 중시한다. 근대 문명국의 재판과정과는 달리 1950-60년대 중국의 정치운동은 피의자를 군중집회에 끌고 와서 모욕주고 구타하는 인격살해의 폭력이었다. 군중의 집단린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할퀴고 짓밟힌 인간은 사회적 사망을 면할 수 없다. 사회적 사망 선고를 받은 자에겐 어쩌면 자살이 최후의 항변일 수 있다.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제1기 전국 정협(政協)위원으로 활약했던 저우징원(周鯨文, 1908-1985)은 1956년 12월 홍콩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홍콩에 체류하면서 반(反)중공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59년 홍콩에서 출판된 그의 저서 <<10년의 폭풍: 중국 홍색정권의 진면모>>는 50년대 정치 운동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 책에서 저우징원은 1950년대 초반 “진압반혁명분자” 운동 당시 이미 55만이 자살했고, “삼반(三反)·오반(五反)” 운동(1951-52) 당시 25만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이 수치를 입증하는 정부의 통계는 없지만, 1950년대부터 중국에선 대규모의 자살자가 나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살을 막기 위해 상하이에선 수면제의 판매를 금지하고, 목재 절약의 명분으로 위해 관(棺)의 제작도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1950년대 상하이의 공원과 길거리에는 자살자의 시신이 흔히 보였다.

 

예컨대 저우징원의 기록에 따르면, 베이징 강철학원에서 한 학생이 부당한 집회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캠퍼스 중앙의 높은 굴뚝 위에 올라가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한 후, 투신하여 회색 시멘트 바닥에 선혈을 흩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대 정치 운동의 피해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던져 저항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문혁 시기, 스스로 목숨 끊은 지식인들

 지식인의 자살은 문혁 당시 최고조에 이르렀다. 세상에 알려진 구체적인 자살 사례를 뜯어보면, 인격을 유린당한 후 절망의 늪에서 죽음으로 도피한 경우도 보인다. 반면 자살을 통해 불의에 항거한 경우도 적잖다.

 

1945년 영역 출판되어 뉴욕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낙타상자(駱駝箱子, Rickshaw Boy)>>”의 작가 라오서(老舍, 1899-1966)는 문혁 초기 베이징 공묘(孔廟)의 문지방에서 “현행 반혁명분자”의 플래카드를 쓰고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모욕을 당했다. 바로 다음 날 (1966년 8월 24일) 이른 새벽 라오서는 타이핑호(太平湖)에 몸을 던졌다.

<문혁 시기 홍위병에 모욕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작가 라오서의 모습/ 공공부문>

 

현대 중국의 저명한 신(新)유가 철학자 슝스리(熊十力, 1885-1968)는 문혁 발발 직후부터 홍위병의 집회에 불려 나가 수모를 겪었고, 그의 자택은 파괴됐다. 홍위병의 만행에 비분강개한 노학자는 중공중앙에 항의 서신을 쓰는 투쟁을 이어갔다. 청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던 1968년 봄부터 그는 음식을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하다 5월 23일 84세로 서거했다.

 

이밖에도 문혁의 광풍 속에서 자살을 택한 지식인들은 수없이 많다. 자살자의 직업 분포를 보면 대학·전문학교, 문인협회, 예술단체에 집중돼 있었다. 자살의 방법으로는 높은 데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물에 뛰어들거나 고압전류를 만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는 가스 질식사도 빈번했다. 고위 관리들은 수면제 과다복용을 선택했다. 잰보짠(翦伯贊, 1898-1968)과 그의 부인 다이수완(戴淑婉)처럼 지식인 부부가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또 먼저 죽은 배우자를 곧 따라 죽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베이징 대학의 동방어문학부 교수 지셴린(季羨林, 1911-2011)은 “우붕(牛棚, 소우리)”이라 불리던 캠퍼스의 사설 감옥에 갇혀 장시간 구타, 고문, 심문, 강제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30년 가까이 지난 1996년에야 그는 우붕의 실체험을 기록한 회고록 “우붕잡억(牛棚雜憶)”을 출판했다. 그는 고통 속에서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살을 계획했지만, 마지막 순간 가까스로 삶의 지푸라기를 붙잡았다. 이제 지셴린의 체험담에 귀 기울일 때다. <계속>

 

〈53붉은 전문가 아니면 타도...지식분자는 인간 아닌 소·뱀 귀신

<1967년 4월 27일 반혁명수정주의 분자들에 대한 비판투쟁의 한 장면/ 李振盛, “紅色新聞兵”, 169쪽>

 

1949년 이래 중국현대사는 지식인 수난의 역사였다. 사회주의 혁명의 이름 아래 사상, 언론, 양심의 자유는 억압되고, 학술 탐구의 중립성은 철저하게 훼손됐다. 1950년대 이래 숙청된 지식인들 중에는 작가, 언론인, 철학자, 문학비평가, 역사학자 등 인문계열의 인텔리들뿐만 아니라 물리학자, 화학자, 생물학자, 석유화학자 등 자연과학자와 전문기술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1950년대부터 마오는 “붉고도 전문적인”(又紅又專) 인물의 배양을 요구했다. 양자를 똑같이 중시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전문성보다 이념적 선명성이 더 중시됐다. 문화혁명의 개시와 더불어 중국의 모든 과학자들은 다시 한 번 철저한 사상검증의 늪을 헤쳐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수모를 겪고 목숨을 잃었다. 특히 1968년 봄부터 청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지식인들은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됐다. 몇 가지 사례만 일단 짚어보자.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죽음

 1968년 5월 청계 운동이 개시된 직후, 중국의 최고명문 칭화 대학(淸華大學)의 6000명 교직원 중에서 1228명이 조사를 받았다. 그중 16명이 죽음에 내몰렸다. 칭화 대학과 쌍벽을 이루는 베이징 대학에선 전체 교직원의 22.5%에 달하는 900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 중 23명이 비자연적 사망에 이르렀다. (楊繼繩, <<天地飜覆>>, 608)

 

중국과학원 창춘(長春) 광학정밀 기계연구소의 116명, 창춘 응용화학연구소 110명의 노장 과학자와 청년 기술인원이 특무(特務, 특수간첩)의 누명을 썼다. 안후이(安徽)성의 한 강철 설계원에선 978명의 직공 중에서 134명이 가혹한 심문을 당했는데, 대부분 최고의 전문가 및 권위자들이었다. 중국과학원 상하이 연구소에서도 600여명이 특수간첩으로 몰려서 200여명이 격리·심사를 받고 그 중에서 16명이 잔혹하게 살해되거나 자살에 내몰렸다. (楊繼繩, 같은 책, 609)

 

비극적 사례를 하나만 돌아보면, 중국과학원 다롄의 화학물리연구소 샤오광옌(蕭光琰, 1920-1968)은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유공학의 권위자였다. 1951년 신중국의 건설에 기여하겠다는 애국심을 품고 귀국했고, 이후 그는 석유공업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의 석유화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샤오광옌은 1950년대 내내 출신배경 때문에 정치 탄압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급기야 1968년 10월 5일 그는 “우붕(牛棚, 아래 설명)”에 억류당하고 그의 집안은 초토화됐다. 두 달 후 12월 11일 아침 그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당시 노동개조의 과정을 거쳐 가던 그의 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는 이틀 휴가를 내서 14세 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 (白介夫, “我與蕭光琰的苦澀友誼,”<<炎黃春秋>>7기, 2005)

<1966년 추정 중국 문화혁명의 한 장면/ 공공부문>

 

“냄새 나는 9등급의 늙은 무리” 가두는 소 우리 ‘우붕(牛棚)’의 탄생

문혁 시절, 중국 각지의 학교, 관공서, 단체, 공장, 등지에는 반혁명 흑방(黑幇, 검은 무리)을 잡아와서 억류하고 감금(監禁)하는 간이 건물들이 음지의 독버섯처럼 생겨났다. 정부의 묵인 하에 공공연히 운영됐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초법적 집단수용소였다. 사람들은 반혁명분자들이 잡혀 있는 그곳을 흔히 우붕(牛棚)이라 불렀다. 노동 개조를 담당한다는 의미로 노개(勞改, 노동개조) 대원(大院)이라 불리기도 했고, 검은 세력을 가둔 곳이란 의미로 흑방(黑幇) 대원이라 불리기도 했다. 우붕은 문자 그대로 ‘소 우리’라는 의미였다.

 

문혁 시절 우붕은 “우귀사신(牛鬼蛇神)”을 가두는 우리였다. 소 귀신, 뱀 귀신이라는 의미의 “우귀사신”은 문혁 시절 반혁명적 지식분자를 이르는 통칭이었다. “우귀사신”이란 표현은 당(唐, 618-907)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이하(李賀, 대략 790-816)의 환상적 시상(詩想)을 칭송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마오쩌둥은 1960년대 초부터 지식분자를 폄훼하기 위해서 “우귀사신”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문혁이 막 개시되던 1966년 6월 1일자 인민일보 제1면에는 “모든 우귀사신을 소탕하라!”라는 제목의 사론(社論)이 실렸다. 당시 베이징의 언론을 장악한 천보다(陳伯達, 1904-1989)가 마오쩌둥의 의도를 반영해서 작성한 문혁의 포고문이었다.

<1966년 6월 1일자 <<인민일보>> 제1면 사론(社論), “우귀사신을 소탕하라!”>

 

이 사론에서 우귀사신은 “사상과 문화의 진영에 넓게 포진하고 있는 다수”의 “전문가, 학자, 권위자, 조사옹(祖師翁)”이라고 정의된다. 특정 학파 혹은 사상의 개창자를 뜻하는 조사옹은 문혁의 맥락에선 과학기술 분야의 최고 전문가, 사상문화계의 최고 권위자를 의미했다. 우귀사신은 각 분야의 지식인과 전문가들을 무너뜨리는 인격살해의 흉기와도 같았다.

 

문혁 당시 마오쩌둥은 지식분자들을 “취노구(臭老九)”라 불렀다. 냄새나는 늙은 9등급의 무리란 의미였다. 원(元)나라 때 몽고족 지배자 당시 중국의 백성들을 직종별로 10가지로 나눠서 서열을 매겼는데, 이때 유생은 9등급이었다. 8등급인 창기(娼妓) 다음, 10등급인 거지 바로 전이었다. 마오쩌둥은 바로 그 노구 앞에 악취가 난다는 의미의 “臭”자를 붙여서 지식분자들을 취노구라 불렀다. 마오쩌둥의 지식인 혐오증이 그대로 표출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 우리에 갇힌 지식인들: 하오빈의 회고록

 문혁 발발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베이징 대학 역사학과 하오빈(郝斌. 1934- ) 교수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0개월 간 우붕에 억류돼 있었다. 2014년 기념비적인 그의 회고록 “흐르는 물이 어찌 시비를 씻을까?”가 타이완에서 출판됐다. 그의 증언 따르면, 지식인의 우붕 생활은 문혁 초기부터 시작됐다.

 

1966년 9월 27일 베이징 대학 역사학과의 교수 및 직원 23명은 캠퍼스에서 차를 타고 1시간 넘게 가야 하는 베이징 북구(北區) 창핑(昌平) 현의 타이핑좡(太平莊)에 끌려가서 “반공반독 (半工半讀)”의 미명 아래 강제노역과 사상개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67년 늦봄, 초여름부터는 녜위안쯔(聶元梓, 1921-2019)가 이끌던 베이징 대학의 “홍색권력기구”가 쇠락하면서 감시하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흩어졌다. 그 결과 5-6개월에 걸쳐 뜻밖의 해빙기가 있었지만, 곧 청계 운동이 시작되자 그때부터는 상상을 절하는 최악의 인권유린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문화혁명 당시 중국 전역에 나타난 초법적 억류 시설 “우붕”의 모습/ 공공부문>

 

우붕에 갇힌 지식인 포로들은 매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숨 돌릴 겨를조차 없이 비판투쟁을 당하고, 강제노역에 시달린 후, 강압적인 사상개조의 과정을 거쳐 가야만 했다. 창의적인 지식 생산에 전념하던 학자들이 다른 모든 책을 다 박탈당했다. 그들은 오로지 마오쩌둥 어록만을 반복해 낭독하고 암송하는 강제학습의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1969년 여름까지 하오빈은 30개월 동안 일말의 자유도 없는 가혹한 포로의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죽음의 의지조차 박탈당한 지옥: 지셴린의 회고록

베이징 대학 동방언어학과의 지셴린(季羨林, 1911-2009) 교수는 하오빈 교수와는 달리 문혁 초기의 광풍만큼은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머잖아 교내 당파싸움이 가열되면서 그 역시 문혁의 불길에 휩싸였다. 녜위안쯔가 이끄는 신베이다파(新北大派)에 맞서 지셰린 교수는 반대편의 징강산(井岡山)파에 가담했다. 그 결과 그는 정치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셴린 교수는 정치와 무관하게 불교 및 인도의 고대신화를 탐구하던 저명한 학자였다.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학술활동을 해온 결과 문혁 당시 그는 학계의 권위자가 되어 있었다. 1935-1941년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점도 그를 사상범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외국 학위를 가진 학계의 권위자는 곧 “반동학술권위”의 멍에를 쓸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1998년 베이징에서 출판된 그의 회고록 <<우붕잡억(牛棚雜憶)>>은 특유의 해학적인 문체로 문혁 시기 그가 겪었던 갖은 인권유린의 실상을 까발린다. 이 기념비적인 회고록은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으며, 이후 영역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회고록의 간략한 내용만 전하면······.

 

1967년 겨울에서 1968년 봄까지 베이징 대학의 캠퍼스에선 날마다 비판 투쟁이 이어졌다. 비판투쟁에 시달리다 수십 가지 방법으로 날마다 자살을 계획하던 지 교수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 하는데······. 때마침 들이닥친 홍위병들이 온 집안을 박살내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죽음의 의지조차 박탈당해 버린다.

 

1968년 이른 봄부터 5월 3일까지 두 번째 고난이 시작됐다. 100명이 넘는 교직원들과 함께 지 교수는 타이핑좡으로 끌려갔다. 이미 만 쉰일곱 살 고령으로 날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지셴린 교수는 누적된 피로와 영양부족으로 사타구니 새가 퉁퉁 부어 걷지도 못하는 지경이 됐다. 결국 두 시간 기어서 찾아간 의무실의 의사는 그가 흑방(黑幇)이란 사실을 알고는 치료를 거부했다. 진통제 하나 받지 못한 채 그는 다시 왔던 길을 기어서 두 시간을 가야만 했다.

<문혁 시대 억류 시설 우붕의 경험을 기록한 “우붕잡억(牛棚雜憶)”의 저자 지셴린 (季羨林, 1911-2009) 교수의 모습/ 공공부문>

 

이어서 베이징 대학의 캠퍼스로 이송된 지 교수는 많은 흑방들과 함께 자신들이 몸소 들어가 갇히게 될 우붕을 지었다. 우붕이 다 건설된 후, 지 교수는 9개월에 걸쳐서 우붕에 억류당했다. 독충이 득실거리는 우붕에서 밤낮으로 흑방의 포로들을 감시하던 학생들은 악마성을 드러냈다. 그들은 날마다 “고통 최대화의 원칙”에 따라 새로운 방법으로 우붕의 포로들을 괴롭혔다. 우붕의 체험을 통해서 지 교수는 비로소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팔한(八熱八寒) 16개 지옥이 진정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가 보기에 지옥이란 민초가 겪었던 고통스런 현실의 체험이 그대로 투영된 집체적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마르크스가 이미 역사의 진리 밝혀...학문 탐구 무의미”

 마오쩌둥은 왜 그토록 지식인들을 경계하고 혐오했을까? 마르크스 인식론에 따르면, 모든 주장, 모든 지식은 계급적 당파성을 갖는다. 이 전제에 입각하면, 불편부당한 가치중립의 진리탐구란 인정될 수 없다. 또한 마르크시즘은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통해서 역사 발전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다 밝혔다고 주장하는 독단적인 교리다. 이미 마르크스가 진리를 설파했기 때문에 후대 지식인들의 지적 탐구는 사실상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계급적 당파성과 역사적 합법칙성이 마르크시즘의 기본 전제다.

 

이 두 가지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지식인은 존립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지식인의 역할은 고작 마르크시즘의 교리에 따라 계급투쟁의 실천을 행하는 일 밖에 없다. 또한 마르크스가 이미 역사의 진리를 밝혔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리 탐구는 무의미해진다. 마르크시즘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교만과 독선이야말로 20세기 공산당 정권이 예외 없이 참혹한 전체주의로 귀결된 까닭이었다. 문화혁명의 대참사는 마르크스의 치명적 자만과 마오의 조급증이 빚어낸 정치적 도박에서 비롯됐다. <계속>

 

〈54반동세력 타격!… 저우언라이가 기획하고 마오가 승인한 정치 학살

▲1970년 “일타삼반운동” 당시 비투당하는 피해자들의 모습. 사진 속 피해자의 목에 걸린 팻말엔 “삼반분자 주자파, 반군세력의 검은 배후 왕광빈”이라 적혀 있다./공공부문

 

문혁의 광풍 속에서도 1970년대가 밝았다. 중국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천번지복(天飜地覆)의 격변을 예고하고 있었다. 굵직한 사건만 몇 가지 짚어보자.

 

1971년 9월 13일 중공중앙의 2인자 린뱌오(林彪, 1907-1971)의 일가족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몽고와 소련 접경에서 추락한다. 1972년 2월 21일-28일 닉슨은 베이징을 방문해서 마오쩌둥과 접견하는 세계사적 이벤트를 연출한다. 1976년 1월 8일 오전 방광암으로 투병하던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가 7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4월 5일 청명절을 맞아 대규모 군중이 톈안먼 광장에 몰려와서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며 문혁의 광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이를 빌미 삼아 사인방(四人幇)은 덩샤오핑을 다시 축출한다.

 

1976년 9월 9일 0시 10분 마오쩌둥이 사망한다. 바로 다음 달 사인방이 전격 체포되면서 문혁은 공식 종결되지만, 1978년 12월 말이 되서야 덩샤오핑은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오른다. 1979년 1월 29일 덩샤오핑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다. 이로써 30년 간 지속된 중국의 고립주의가 막을 내린다. 1979년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 집권기 27년의 유산을 땅에 묻고 실용주의 노선의 깃발 아래 새로운 경제혁명의 대로로 나아갔다. 덩샤오핑은 “맨발로 미끄러운 돌을 살살 밟으면서 강을 건너는” 경제개발의 대혁명을 개시했다.

 

1970년대의 서막, 일타삼반 운동의 개시

 1970년대는 그렇게 국가운영의 기본 철학이 바뀌는 격변의 시대였지만, 1970년대의 첫 해 중국은 여전히 문혁의 광풍에 휩싸여 있었다. 1970년 벽두부터 수백만을 조사해서 수십만을 체포하고 많게는 10-15만 명의 “반혁명분자”들을 처형한 이른바 “일타삼반(一打三反) 운동”이 전개됐다. 저우언라이가 기획하고 마오쩌둥의 승인 하에 중공중앙이 추진한 이 운동은 또 한 번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의 씨를 말리는 잔혹한 숙청의 드라마였다.

 

1970년 1월 1일 <<인민일보>>, <<홍기>>잡지, <<해방군보>> 등 중국공산당과 중앙군사위의 기관지엔 일제히 “위대한 70년대를 맞이하며”라는 제목의 사설(社說)이 실렸다.

 

“1960년대 초 마오주석께서는 높게 멀리 내다보시고 말씀하시었다. ‘지금부터 50년 내지 100년 동안은 전 세계 사회제도가 철저히 변화하는 위대한 시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과거 그 어떠한 역사 시대와도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60년대의 역사는 마오주석의 위대한 예언을 웅변으로 증실(證實, 사실로 증명)한다”

 

중국의 1960년대는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으로 시작됐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신경제정책은 파괴된 국민경제를 어느 정도 회복시켰지만, 1966년 5월 16일 공식적으로 개시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3년 반의 세월 동안 중국 전역을 산산이 조각내고, 중국사회를 갈가리 짓찢었다. 홍위병의 집단테러, 조반파 “혁명군중”의 탈권 투쟁, 분열된 군중집단 사이의 무장투쟁, 군대에 의한 무력진압, 지방정부의 대민테러, 양민학살, 정치 탄압, 마녀사냥, 대규모의 인신 억류, 광범위한 인권유린, 잔악무도한 인격살해의 연속이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사론”은 “마오쩌둥의 예언”이 적중했다 주장했나? 몽환적 현실인식인가? 노골적 역사왜곡인가? 낯 뜨거운 아첨인가? 그 모두일 수도 있지만, 교묘하게도 인용된 마오쩌둥의 “예언”은 그저 50-100년의 장시간을 두고 장차 인류사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측일 뿐이었다. 비록 1960년대 수천만 명이 굶어죽고 맞아주고 정치적 학살을 당했다 해도 100년 안에 사회주의가 실현된다는 주장이었다. 판에 박힌 공산유토피아의 논리인데, 그 속에 대규모 숙청의 폭약이 내장돼 있었다.

▲1970년 1월 1일, 인민일보 1-2면. 제2면을 장식한 새해 첫 사론 “위대한 70년대를 영접하며”는 1970년 한 해 전국을 휩쓴 “일타삼반 운동”의 기본 논리가 제시돼 있다.

 

사론은 “경각심을 제고하여 조국을 보위할 것!”과 “전쟁을 준비하고(備戰), 재난에 대비하고(備荒), 인민을 위하라!(爲人民)”는 마오쩌둥의 훈시를 강조하면서 다시금 “투쟁(鬪), 비판(批), 사상개조(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전쟁 준비”는 마오쩌둥이 노상 강조한 미국 제국주의와 소련수정주의와의 전쟁을 의미했다. “재난 대비”와 “위인민”의 구호는 당시 중국이 경제 위기와 민생고에 봉착해 있음을 보여준다. 외부의 강적을 상정하고 내부의 모순을 지적하고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 세 구호는 신년 벽두부터 시작되는 “일타삼반 운동”의 논리가 됐다.

 

저우언라이의 생존 전략서 나온 일타삼반 운동

 1969년 11월 12일 전(前)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중국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시 혁명위원회 건물 한 구석의 빈 방에서 만 일흔 한 번째 생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사인(死因)은 악성폐렴과 당뇨합병증이었으나 실은 의료방치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었다.

 

류사오치의 죽음은 특히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큰 충격을 줬음직하다. 1920년대 중국공산당 초창기부터 두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동고동락한 혁명동지였을 뿐만 아니라 1949년 이래 추진된 중공중앙 모든 정책의 공동책임자였다. 게다가 1898년 생으로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한 평생 보필했던 다섯 살 연상의 마오쩌둥과 함께 중공중앙의 트로이카로 군림했다. 15년 간 국가주석의 지위에 있었던 류샤오치는 그러나 마오쩌둥에게 버림받아 처참한 몰락의 길을 갔다. 비정한 정치투쟁의 현실에선 저우언라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실제로 문혁 이래 저우언라이는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문혁 초기 그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사면과 복귀를 제안했다가 중앙문혁소조의 거센 비판에 휩싸였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곳곳에 도사리는 정치적 폭약을 살금살금 피해 생존의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틈만 나면 내부의 적들은 그를 반혁명수정주의자로 몰고 가려 했다. <44회>에서 살펴봤듯 1천 만을 조사해서 10만을 학살했다고 알려진 “청사 5.16 운동”은 저우언라이를 공격하는 소수의 조반파 혁명집단에 대한 반격에서

▲“경애하는 저우언라이 총리, 억만 인민은 영원히 당신을 기억합니다. 저우 총리를 음해한 사인방의 죄행을 맹렬히 폭로하자!” 문혁 직후 제작된 포스터. 포스터의 메시지와는 달리 저우언라이는 사인방과 같은 배를 타고 문혁 시기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핵심인물이었다. / chineseposters.net

 

류샤오치가 타계한 후, 저우언라이는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을 기획하고 나섰다. 수려한 외모, 신중한 언행, 자상한 이미지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저우언라이 역시 닳고 닳은 정치투쟁의 달인이었다. 1970년 1월 신년 벽두부터 그는 사상범, 언론범, 정치범 등 이른바 “현행 반혁명분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거대한 정치 운동을 직접 기획했다. 이름 하여 “일타삼반 운동”이었다.

 

“일타삼반”이라는 운동의 명칭은 저우언라이가 초안을 쓰고 마오쩌둥의 비준을 거쳐 반포된 중공중앙의 두 가지 문건에서 비롯됐다. 일타(一打)는 반혁명분자의 “타격”을, 삼반(三反)은 부정부패, 사치낭비, 투기매매 세 가지의 관료부패를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전자는 비판적 지식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적 마녀사냥이었으며, 후자는 지방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경제 부문의 캠페인이었다. 당시를 직접 경험했던 문혁사가들의 기억에 따르면, “일타삼반”에서 핵심은 바로 정치범을 숙청하는 “일타”에 있었다.

 

“살인”의 행동강령: 침착 정확 맹렬하게 적을 타격하라

 1970년 1월 31일 반포된 중발(中發) [1970] 3호 “반혁명 파괴활동을 타격하는 중공중앙의 지시”에는 이후 전개될 일타삼반 운동의 전략전술이 소상히 밝혀져 있다. 이 문건의 초안을 저우언라이가 직접 썼다.

 

마오쩌둥은 1969년 4월 개최된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경각심을 제고하여 조국을 보위하자!”와 외부의 적대세력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자!”는 실천 강령을 제시했다.

 

이 강령에 입각해서 저우언라이는 “소수의 반혁명분자들”이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혁명세력의 무력을 믿고 망령되이 자신들이 잃어버린 천당을 되찾고자 파괴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면서 반혁명분자들을 타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구체적으로 저우언라이는 “전쟁공포를 조장해서 미혹한 군중을 교란시키고, 국가기밀을 절도해서 이적행위를 일삼고, 비밀결사를 통해 폭동 반란을 음모하고, 투기매매를 조장해서 사회주의 경제를 파괴하는” 검은 세력의 활동을 열거했다. 그는 유반필숙(有反必肅, 반동세력은 반드시 숙청하라!)이라는 마오의 원칙에 따라 침착하고 정확하고도 맹렬하게 적을 타격하는 “온(穩)·준(准)·한(猂)”의 행동 원칙을 강조했다.

▲“군중을 충분히 발동시켜 ‘일타삼반 운동’을 견결히 장악하라!” /공공부문

 

구체적인 행동 강령에서 저우언라이는 군중이 직접 나서서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는 군중독재 인민재판의 절차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깃발을 높이 들고 북소리를 크게 울리며 광범위하고도 심도 깊게 군중에 선전하고 군중을 동원해야 한다. ‘죽여라!”고 판결하기 전에 먼저 군중에게 토론을 시켜서 모든 집집마다 속속들이 알고 사람들이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죽여라!’고 판결할 때는 군중대회를 개최해서 공개적으로 선판(宣判)하고 즉시 집행하라. 이렇게 해야만 사람들의 마음이 시원해지며, 적인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

 

이 문건이 정식으로 발동되기도 전 베이징시는 먼저 행동에 나섰다. 1970년 1월 9일 베이징 시 “공검법 군관위”는 20명의 처결 명단을 발표했고, 1월 27일에는 스타디엄에 10만 명의 군중이 모아놓고 공판 대회를 열어 19명의 사형을 선판(宣判)했다. 2월 11일엔 다시금 55명의 범죄혐의자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서 “공검법 군관위”란 공안국, 검찰청, 법원을 모두 통합한 군사관제위원회를 의미했다. 1949-1953년 건국 직후 실시됐던 제1차 군사관제에 이어 1968-1972년 문혁의 절정에서 다시금 제 2차 군사관제가 실행된 상태였다. 쉽게 말에 군대가 경찰 및 사법의 전 권력을 장악하는 군부독재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중국공산당의 정부조직이 본래 군사조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중국 인민들의 의식 속에서 군부독재는 행정적 일탈로 의식되지 않았다.

▲1970년 “일타삼반 운동” 시가 대회의 한 장면. “반혁명분자를 견결히 진압하라!는 구호가 보인다.” / 공공부문

 

베이징시가 발표한 범죄혐의자 55명의 절대다수는 사상범과 정치범들이었다. 청계운동의 표적은 주로 1949년 건국 이전 국민당과 연루됐거나 자산계급에 복무했던 이른바 “역사(歷史) 반혁명분자들”이었던 반면, 일타삼반운동의 주요 타깃은 문혁의 과정에서 범죄를 저지른 “현행 반혁명분자들”이었다. 문혁 초기 “홍팔월의 테러”는 이른바 출신성분을 근거로 “계급천민”을 제거하는 민에 의한 계급학살(classicide)이었다. 반면, 일타삼반 운동은 정부기관이 직접 나서서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사상범을 학살하는 관에 의한 정치학살(politicide)이었다. <계속>

 

<55회>가짜뉴스로 조리돌림, 재판 전에 인격살해...광풍은 계속된다

<1983년-1986년 중국의 “옌다(嚴打) 운동” 과정에서 공판 대회에 끌려가는 범죄혐의자들의 모습. 이들은 공판 대회에서 사형을 언도 받으면 바로 그날 처형장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중국 인터넷>

 

지금 이 세상에선 과연 피의자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고 있나? 법 앞의 평등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존중되고 있나? 무죄추정의 원칙은? 죄형 법정주의는? 허위선동, 악성루머, 가짜뉴스에 조리돌림 당하고 포승줄에 꽁꽁 묶여 검찰의 포토라인에 섰던 그 수많은 피의자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왜 재판을 받기도 전에 그토록 가혹한 인격살해의 형벌을 당해야만 했나? 어떻게 국가 기관과 공적 매체가 그토록 야만적인 집단린치를 주동할 수 있나? 문화혁명은 50년 전 중국의 흘러간 레퍼토리가 아니다. 바로 지금 문혁의 광풍은 “에코 챔버(echo chamber)”에 갇혀 있는 네티즌의 “폐쇄 회로”를 타고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어둠을 쓸어버리고 악을 제거하라” 소흑제악 운동

 “소흑제악(掃黑除惡, 사오헤이추어).” 오늘날 중국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네 글자 표어다. 직역하면 “어둠을 쓸어버리고 악을 제거하라!”란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실은 암흑세력의 강력범죄를 소탕하라는 의미다.

 

2018년 1월 24일 중공중앙 및 국무원은 당내에 통지문을 발송해서 “소흑제악(掃黑除惡) 전항(專項) 투쟁”을 발의했다. 여기서 “전항 투쟁”이란 암흑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특수한, 전문적인, 체계적인 투쟁을 의미한다. 불과 열흘 후 (2018년 2월 5일), 최고인민법원, 최고 인민검찰원, 공안부는 “암흑세력의 위법 범죄를 법에 의거해 엄하고 매섭게 타격하기 위한 통보”를 발표했다. 그리하여 중국 전역에서 2018년 1월부터 또 한 번의 “옌다(嚴打, 엄타)” 운동이 일어났다.

<“어둠을 쓸어버리고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큰 주먹을 날린다! 완전히 승리하지 못하면 철수하지 않으리!” 2019년 중국 한 도시에 내걸린 “소흑제악 운동”의 표어/ 중국인터넷>

 

공안, 검찰, 법원이 삼두마차처럼 긴밀하게 협응(協應)하는 전통은 문혁 시절의 “공검법 군관위”(공안, 검찰, 법원 군사관제 위원회)를 떠올리게 한다. “옌다(엄타)”란 “형사범죄 활동을 엄격하고도 매섭게 타격하라!”는 구호에서 나왔다. 최초의 “옌다 운동”은 1983년 9월부터 3년 5개월에 걸쳐 중국 전역에서 전개됐던 대규모의 치안(治安) 운동이었다.

 

공안, 검찰, 법원이 삼두마차처럼 긴밀하게 협응

 문혁 이후 사회 개혁개방이 추진될 때 중공 정부는 사회혼란을 선제적으로 막기 위해 강력 범죄와의 전쟁을 추진했다. 19만 7000여 개의 각종 범죄단체를 소탕해서 177만여 명을 체포하고, 그중 2만4000명을 사형(死刑)에, 32만1000명을 도형(徒刑, 노동교양형)에 처했다. 개혁개방의 깃발을 들고 경제개혁을 추진할 때, 덩샤오핑 정부가 치렀던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실제로 “옌다 운동”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인민해방군의 내부조직을 개편해서 무장경찰부대를 창설한 후, 특수훈련을 통해 강력범죄를 제압할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당, 정, 군의 모든 기관이 동시에 움직이고, 또 사형 판결의 권한을 현 단위 지방정부의 인민법원과 현 단위 당위원회 영도에 부여했다. 강력범죄 사범뿐만 아니라 문혁 시절 사인방에 동조하는 반혁명세력에 “엄하고도 매서운 타격”의 대상으로 지목됐다.

 

이후 중공중앙은 1996년, 2001년, 2010년 계속해서 각 시대적 조건에 따라 새로운 “옌다 운동”을 벌였다. 2018년부터 새로 시작된 “소흑제악” 운동 역시도 검은 세력을 소탕하는 “옌다 운동”의 레토릭(rhetoric)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1980년대 공판대회에 압송당해 가는 범죄혐의자들의 모습/ 중국인터넷>

 

반혁명분자 소탕하는 광장의 인민재판 ‘공포공판대회'

 중국식 “옌다 운동”의 뿌리는 1950년대부터 중공중앙이 지속적으로 전개했던 수많은 정치운동으로 소급된다. 1950-60년대는 계급 적인(敵人), 반혁명분자를 소탕하는 정치운동이었다. 반면 1980년대 이후 전개되는 옌다 운동은 총기 범죄, 마약범죄, 강력범죄, 부패범죄 등을 일소하기 위한 치안 운동이란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인민”과 “인민의 적”을 양분해서 암적인 흑류(黑類, 검은 무리)의 일소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처형(處刑)의 방식과 논리가 놀랍도록 유사하다.

 

단적인 일례로 1980년대 “옌다 운동”부터 지속적으로 거행된 수많은 “공포공판(公捕公判)” 대회를 꼽을 수 있다. 중국에선 오늘날도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범죄혐의자를 단죄하는 “공포공판 대회”가 거행된다. 공포란 공개적인 체포를, 공판은 공개적인 형벌의 판결 및 선포를 의미한다. 광장의 군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범죄혐의자의 범죄행위를 심사한다는 점에서 “공심(公審) 대회”라고도 불리며, 판결의 선언에 초점을 둬서 “선판(宣判) 대회”라 불리기도 한다.

 

가장 최근의 사례를 보자. 2020년 6월 28일,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중국 전역이 어수선하던 시기, 광시(廣西)성 허츠(河池)시 둥란(東蘭)현 인민정부는 경기장에 운집한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공포공판 대회를 개최했다. 재판을 담당하는 인민법원의 재판관과 공안부의 요원들은 경기장 관중석에 설치된 단상에 앉아 마스크를 끼고 공판을 구경하는 군중을 면하고 있다. 범죄혐의자들은 운동장 맨 앞에서 1열 횡대로 늘어서 있는데, 모두 방역복을 입고 있었다.

<2020년 6월 28일, 광시(廣西)성 허츠(河池)시 둥란(東蘭)현에서 주최한 공포공판대회/ http://www.donglan.gov.cn/>

 

둥란현은 “악에 물든 무리” 8개 단체 47명, 악한 세력 3개 범죄 집단의 37명을 모두 잡아서 11개의 사건에 연루된 도합 84명을 기소했다. 이들은 그동안 둥란현에서 기민하고도 철저하게 전개한 “소흑제악 운동”의 성과물이었다.

 

“침착, 정확, 맹렬하게 타격하라” 지속되는 문화혁명의 논리

 지방정부 홈페이지의 선전문에 따르면, 둥란현의 “소흑제악 전항 운동”은 중앙정부, 광시성 자치구, 허츠시 위원회와의 통일적 연계 하에서 일사분란하게 전개됐다. 동란현의 “각 정법 기구는 단결 협력하고, 긴밀하게 배합하고,” “침착하고(穩), 정확하고(準), 맹렬하게(猂)”의 원칙을 견지하고 관철했다.” 그 결과 “빨리(快) 정찰하고, 빨리 파괴하고, 빨리 조사하고, 빨리 기소하고, 빨리 심사하고, 빨리 판결하여” 암흑세력을 소탕하는 “소흑제악” 운동의 목표를 달성했다.

 

“침착하고, 정확하고, 맹렬하게”의 원칙은 문혁 시절 반혁명분자를 처단할 때 사용하던 바로 그 용어다. 반복되는 “빨리”의 구호는 1949년 건국 이래 중공중앙 특유의 강박관념이었다. 중국 사회에서 수천 개 지방정부의 선전 문구는 천 개의 강물에 비친 달처럼 중앙정부의 지침을 그대로 반영한다. 문혁은 46년 전 종료됐지만, 문혁시대의 “망텔리테(mentalités)”는 지금도 면면히 중국 전역에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 형법의 근간이 되는 “공개 재판”은 방청객 입회하에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고 판사는 냉철하게 법리를 심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반면 중국식의 공판대회는 범죄피의자의 유죄를 일방적으로 예단하여 “가두 행진시키고 군중에 보이는”(游街示衆)의 인민재판 인격살해에 가깝다.

 

1980년대 공판 대회의 현장 기록을 보면, 단상에 올린 범죄혐의자들의 목에는 커다란 플레카드가 걸렸다. 간수들은 혐의자들의 팔을 뒤로 당기고 뒷머리를 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다. 또 판결을 기다릴 때 혐의자들은 단상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2001년 톈진에서 거행된 공판 대회를 밀착 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공판대회 당일 새벽 4시 반부터 구치소엔 법관 및 공안요원이 결집했다. 새벽 6시 발목에 쇠고랑을 찬 죄수들을 차례차례 100여대의 차량에 태웠다. 7시 구치소를 출발한 차량은 공판대회가 거행되는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1만 명에 달하는 출근길 시민들이 차량에 실려 가는 죄수들을 구경했다. 8시 차량이 스타디움에 도착할 때 이미 군중이 모여들었다. 9시 대회가 판사가 대회의 시작을 선포했다. 그때부터 범죄혐의자의 구체적인 범행을 조목조목 열거한 후 형량을 선고했다. 매번 사형이 언도될 때마다 흥분한 군중은 크게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판결의 선언이 모두 끝이 난 후, 죄수들은 곧바로 차량에 실려 형장으로 이송됐다. 사형의 선고에서 총살까지 몇 시간도 걸리지 않는 즉결처형이었다. “입즉집행(立卽執行)”의 명령 그대로였다.

 

공판대회의 인권침해와 위헌 논란

중국 각지의 지방정부에서 지금도 자행되는 공판대회의 합법성에 대해선 2010년대를 전후해서 중국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강력한 비판여론이 일었다. 장쑤성 인민법원 소속의 한 법률가는 2009년 모욕주기 식 공판대회가 중국헌법이 명시한 인권존중, 법 앞의 평등 원칙에 위배되며, 근대형법의 기초인 “무죄추정의 원칙”을 파괴하며, 범죄 억제의 효과도 없다고 비판했다.

 

광저우(廣州) 대학 법학원의 저명한 법학자 셰후이(謝暉, 1964- ) 교수는 2011년 공판대회는 헌법적 근거도 없이 “권력이 법률을 지배하는 습관성 사실”일 뿐이며, 정부에 대한 인민의 불만을 범죄 집단에 돌리는 교묘한 통치 전술이라 지적한 바 있다. 이밖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공판대회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여전히 중국에선 공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0년 11월 1일 하이난(海南)도 산야(三亚)市 톈야(天涯)진에서 개최된 공포공판 대회의 장면. 200여명의 무장경찰과 공안 민경이 경호하는 이 대회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운동장 바닥에 앉아 있는 중고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날 현장에선 두 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곧바로 처형장에 압송되어 총살당했다./ 중국 인터넷>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은 지금도 한 해 수천 건의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사형 집행 건수를 다 합해도 중국 한 나라의 사형 집행 건수에 크게 못 미친다. 중국의 사형제도와 공판대회에 대해선 전근대 중국문화의 유습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중국공산당이 고안한 공포 통치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문혁 시기 공판대회와 즉결처형이 그런 해석의 설득력을 높여 준다.

 

중국현대사에서 공판 대회의 폭력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바로 1970-72년 “일타삼반(一打三反) 운동이었다. 그 당시 수백만 명의 신상이 탈탈 털리고, 수십 만 명이 조사를 받고, 많게는 10-15만 “현행 반혁명분자”로 처형당했다.

 

누구든 반혁명분자의 낙인이 찍히면 구금 상태에서 가혹한 정신적·육체적 고문에 시달렸고, 강제자백으로 죄목이 확정되면 공판대회에 끌려 나가 형량을 선고받았다. 군중의 조롱과 규탄 속에서 사형을 언도받으면, 곧바로 처형장으로 압송됐다. 그렇게 희생된 일타삼반 운동의 희생자들 중 다수는 1980년대 재심사를 통해 무죄로 판명됐다. 이제 그 무고한 원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다. <계속>

 

<56회>권력자를 비난한 죄? 자유를 위해 순교한 시민들

<1966년 9월 19일 하얼빈 50만 군중이 결집한 “헤이룽장성 무산계급이 자산계급을 멸절하는 조반 점화대회”에서 비투(批鬪)당하고 있는 문혁의 피해자. “극도의 반동, 사상개조를 거부하는 대규모 임대업자 위즈원(于滋文)”/ 李振盛, “紅色新聞兵”, 116쪽>

 

현직의 최고 권력자가 풍자 전단을 뿌린 무(無)권력의 일개 시민을 특정해서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려 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비판 세력을 위축시키기 위함일까? 사적인 모욕감을 못 견뎠기 때문일까? “최고 존엄”의 모독을 용납할 수 없는 측근 간신모리배의 과잉 충성이었을까?

 

법원, 검찰, 경찰의 수뇌부가 모두 최고 권력자의 사람들이다. 연약한 개인이 혼자 법정에서 최고 권력자를 이길 순 없다. 때문에 공화국의 시민들은 공동의 이슈가 떠오르면 집체적인 저항권을 행사한다. 수많은 시민들이 그 문제의 전단을 뿌리면서 “나를 잡아 가라!” 외친다면, 권력자는 궁지에 몰리고 만다.

 

실제로 언론의 거센 비판이 일면서 그런 조짐이 나타나자 권력자는 부랴부랴 고소를 취하했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 했던 권력자의 소송대리전은 그렇게 유야무야 막을 내렸다. 무모한 최고 권력자의 KO패다. 2020년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왜 1960-7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을 재현하려 할까?

<문화혁명 중국 전역에서 벌어졌던 비투 대회의 전형적인 장면/ 공공부문>

일기장에 적은 내용 때문에 반혁명분자 몰려

문혁 시기 중국에서는 수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현행(現行) 반혁명분자”의 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대다수 정치범들은 단지 입을 열고 펜대를 놀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심한 경우 사형을 당했다.

 

그들에 들씌워진 죄명은 소위 “악공죄(惡攻罪)”였다. “악독하게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을 공격하고” “악독하게 무산계급 사령부를 공격하고” “악독하게 사회주의제도를 공격한” 죄였다.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논설을 발표하거나 대자보를 써서 붙이며 적극적으로 저항한 사상범과 정치범들은 법망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들과는 달리 그저 일기장에 적은 한 두 마디 때문에, 실수로 내뱉은 한두 마디 때문에, 혹은 최고 영도자의 사진을 깔고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반혁명분자로 몰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희생자의 거의 대부분은 1980년 전후에서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과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주도한 “발란반정(撥亂反正, 혼란을 수습하고 정상을 회복함)”의 운동 과정에서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었다. 1978년 이후 수년에 걸쳐 재조사해 원심의 판결이 뒤집힌 “발란반정”의 사례가 300만 건을 훌쩍 넘는다. 우선 지면의 제약 상 먼저 문혁의 광기 속에서 총살당해야만 했던 두 명의 “반혁명분자”를 간략히 소개한다.

 

마오쩌둥 비판 혈서 쓴 린자오(林昭) 총살당해

 쑤저우(蘇州)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린자오(林昭, 1932-1968)는 16세부터 자발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지하 조직에 가담했다. 공산혁명에 매료된 린자오는 곧 영국 유학생 출신으로 국민당에 가담했던 부모를 등지고 집을 떠났다. 1949년 “해방” 직전 중국공산당 신문학교에 입학한 린자오는 1950년대 초기 토지개혁 당시 지주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공산당원의 길을 갔다. 문재(文才)가 출중했던 그녀는 베이징 대학에 입학해서 중문과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은 린자오를 정치적 죽음으로 밀어넣은 최초의 함정이었다. 마음 놓고 정부를 비판하라는 마오쩌둥의 양모(陽謨, 공공연한 음모)에 속은 린자오는 공산당의 문제점을 비판했고, 그 결과 이어지는 반우파 운동(1957-1959)에서 우파로 몰렸다. 1958년 9월 신장(新彊)에서 노동개조의 도형에 처해진 그녀는 신병(身病) 때문에 이듬 해 봄 상하이로 이송됐다.

<왼쪽: 미국 듀크 신학대학의 시롄 교수가 편찬한 린자오 전기 “혈서(Blood Letters)의 표지. 오른쪽: 린자오의 마지막 사진 (1962), 같은 책에서 발췌>

 

린자오는 1960년에는 대기근을 비판하는 지하 언론 <<성화星火>>창간호에 두 편의 저항시를 실렸다. 1960년 10월, 린자오는 20년 형을 선고받고 다시 투옥됐다. 병세 악화로 1962년 초 보석으로 풀려난 린자오는 “중국 자유청년 전투 동맹”의 강령과 헌장의 초안을 작성하는 대담한 투쟁을 이어갔고, 1962년 12월 다시 투옥됐다. 질세라 린자오는 계속되는 단식 투쟁과 자살 시도로 저항했다. 아울러 스스로 무죄라 주장하는 항의서를 써서 언론사에 투고했다. 1964년 린자오는 혈서로 스스로의 묘비명을 썼다.

 

1965년 5월 상하이 징안(靜安)구 인민법원에선 “반혁명죄”로 린자오에 도형(徒刑) 20년을 선고했다. 이후 옥중에서 린자오는 머리핀에 피를 찍어서 혈서(血書), 시가(詩歌), 일기(日記)를 쓰고, 과격한 반혁명의 구호를 외쳐댔다. 1966년 말 마오쩌둥의 인격숭배가 하늘을 찌를 때, 린자오는 더욱 강력하게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혈서를 썼다.

 

재판부의 기록에 따르면 린자오는 마오쩌둥을 “미친 듯이 공격하고, 저주하고, 모독했다.” 결국 1968년 4월 29일, 중국인민해방군 상하이시 공·검·법 군사관제위원회는 린자오에 “사형, 즉시집행”을 언도했다. 총살당한 후 시신이 불태워져 폐기됐음에도 린자오의 부모에겐 아무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이후 린자오의 총살에 사용된 총알 비용의 청구서를 받고서야 가족들은 그녀의 사망을 알게 됐다.

 

12년이 지난 1980년 8월 22일, 상하이시 고급 인민법원은 재심을 통해서 린자오의 처형은 원통하게 무고한 사람을 죽인 “원살무고(冤殺無辜)”의 사건으로 판결했다. 이 판결문을 잘 읽어 보면 린자오가 “1959년 8월부터 정신병을 앓았기 때문에” 이후 린자오가 작성한 모든 글은 범죄로 성립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듬해 1981년 12월 30일, 상하이시 고급 인민법원은 “정신병”을 이유로 린자오에 무죄를 선고한 1980년의 법정의 판결 역시도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린자오의 “반혁명행위”는 정신착란의 증세가 아니라 신념에 찬 정치적 표현임을, 합법적 투쟁이었음을 법원이 인정한 셈이었다.

<린자오의 옥중 수고(手稿), 1967넌 10월 24일, 사언시 “체포 7주년의 구호”/ Lian Xi, “Blood Letters”에서>

 

“오늘날 공산당은 특권층” 외친 왕페이잉 즉각 사형

린자오의 죽음은 문혁 시절 계속된 정부에 의한 정치범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1970년 1월 베이징 일타삼반 운동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왕페이잉이었다. 허난성 카이펑 출신의 왕페이잉은 젊고 야심찬 지식인 출신 린자오와는 달리 철도부 철도 전문설계원의 직공으로 1934년 결혼해서 8남매를 낳아 기른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1949년 허난성 정저우의 우체국에서 일을 시작한 왕페이잉은 같은 해 철도국의 비서실로 전출됐다. 1952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5년 베이징으로 이주한 왕페이잉은 철도부 공장 설계사무소 탁아소에서 보육원으로 근무했다. 1960년 남편과 사별한 후, 왕페이잉은 박봉에 시달리며 대가족의 살림을 꾸리면서도 마오쩌둥의 백자(白瓷)상을 사서 집안에 모셔놓을 만큼 신실한 공산주의자였다.

<1950년대 단란했던 왕페이잉의 가족. 왕페이잉은 8남매를 낳아 기른 평범한 어머니였다. 중국 대륙의 비판적 영화감독 후지에의 다큐멘터리 “내 어머니 왕페이잉”에 삽입된 사진. https://www.chinaindiefilm.org/films/my-mother-wang-peiying/>

 

왕페이잉의 재판 기록에 따르면, 대기근(1958-1962)의 참사 이후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정치적 대립이 대중에 알려질 때, 그녀는 류샤오치를 적극 지지했다. 그녀는 “마오쩌둥이 지금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퇴로가 없다”고 생각했다. 1965년 이후 왕페이잉은 공개적으로 류샤오치, 흐루쇼프를 지지하고,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1965년 4월 왕페이잉은 공산당 탈당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과거의 공산당원은 인류의 해방을 위해 고뇌했는데, 오늘날 공산당은 높은 관직과 녹봉을 받는 특권층이 됐다”며 공개적인 탈당의사를 제출했다.

 

1968년 청계운동이 시작되자 왕페이잉은 곧 철도부의 우붕(牛棚)에 갇혀 가혹한 사상개조의 고문과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신세가 됐다. 놀랍게도 왕페이잉은 국가폭력 앞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사상개조를 거부했다. 1968년 10월 중공중앙이 전임 국가주석 류샤오치에 탈당 조치를 취할 무렵이었다. 왕페이잉은 1968년 9월 9일, 9월 30일, 10월 4일 세 번에 걸쳐 우붕의 식당 안에서 목청이 터져라 “류샤오치 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왕페이잉은 과감하고도 무모한 저항을 이어갔다. 공산당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고, 마오쩌둥의 실정과 독단을 질타했다.

 

“인민의 죄인이 되기 싫어서 탈당을 원하노라! 공산당은 비록 혁명의 공이 있지만, 이제 승리에 도취해 이성을 잃고 전진을 멈추고, 이미 인민의 머리 위에 서서 인민을 압박한다!”

 

결국 왕페이잉은 1968년 10월 21일 베이징시 공안국 군사관제위원회에 의해 “현행 반혁명”의 죄명으로 체포됐다. 1969년 하반기 왕페이잉은 베이징 시가지 곳곳을 끌려 다니며 군중 앞에서 인격살해의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왕페이잉은 간부들이 입을 벌리고 벽돌을 쑤셔 넣어 턱뼈가 깨지고 빠지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1970년 1월 27일 베이징 공인 체육장(노동자 운동장)에서 거행된 공판대회에서 왕페이잉은 “사형, 즉각 처형”을 언도받았고, 바로 그날 유명한 베이징 루거우차우(盧溝橋)의 처형장에서 총살당했다. 그날 선포된 판결문에는 다음 내용이 있다.

 

“왕은 완고히 반동의 입장을 고수했다. 1964년에서 1968년 10월까지 1900여 개의 반혁명 표어를 짓고, 30여 편의 반동 시가를 쓰고, 공개적으로 톈안먼 광장, 시단 상가 및 기관의 식당 등 공개장소에서 여러 차례 군중을 향해 반혁명 구호를 외쳤으며, 극도로 악독하게 무산계급 사령부와 중국 사회주의 제도를 공격하고 모멸했다. 왕은 구금상태에서도 인민을 적으로 삼고, 미친 듯이 공산당을 저주했다. 반혁명의 광기가 극에 달했다.”

 

1980년 베이징시 중급 인민법원은 재심을 통해 왕페이핑의 무죄를 판결했다. 역시나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반혁명죄가 성립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2011년 6월 9일, 베이징시 고급 인민법원은 정신분열증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1980년 판결을 철회했다. 왕페이잉의 저항은 정신병 증세가 아니라 신념에 따른 정치적 저항이었음을 41년 후에야 법원이 나서서 공인한 사건이다.

<린자오와 왕페이잉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난징에 거주하는 비판적 영화감독이자 화가 후지에(1958- ), 2015년 사진. https://www.nybooks.com/daily/2015/05/27/chinas-invisible-history-hu-jie/>

 

린자오와 왕페이잉은 문혁의 광기 속에서도 국가폭력에 저항했던 자유의 순교자들이었다. 중국 대륙의 비판적 영화감독 후지에(胡杰, 1958- )는 이 두 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린자오의 영혼을 찾아서”(Searching for Lin Zhao’s Soul, 2004)와 “내 어머니 왕페이잉”(My Mother Wang Peiying, 2011)을 제작했다. 물론 문혁의 절정에서 안타깝게 희생됐던 자유의 순교자들을 통해 중공정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고발한 이 두 기록영화는 현재 중국에선 상영 금지돼 있다. <계속>

 

<57회> 허울좋은 이름 ‘혁명’...실상은 권력 찬탈

<1950년대 초기 중국공산당의 상징적인 4대 영도자들. 좌측부터 저우언라이, 주더(朱德, 1886-1976), 마오쩌둥, 류샤오치/ 공공부문>

 

인간의 정치사에서 혁명(革命, revolution)만큼 오용되고 남용된 단어가 또 있을까? 모든 혁명은 급진적 변화를 수반하지만, 모든 정치 급변이 혁명일 순 없다. 그럼에도 혁명이라 불리는 순간, 최악의 정치투쟁도 숭고한 운동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이름에 속아 실체에 눈을 감는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신석기혁명, 산업혁명, 과학기술 혁명 등은 단기간에 급진적으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고전적 의미의 혁명이었다. 그 결과 장기 지속되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대규모 변동이 발생했다. 반면 문화혁명은 1966년에서 1976년까지 불과 10년에 걸쳐 중국 사회생활의 윤리적 기초를 파괴하고 경제적 성장 동력을 제약한 단기간의 대규모 정치 혼란일 뿐이었다.

 

중국인이 흔히 말하듯 문화혁명은 한 판의 대반란(大叛亂), 대소동(大騷動), 대동란(大動亂), 호겁(浩劫, 대겁탈)이었다. 공식명칭은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었지만, 그 실상은 혁명이 아니라 세계사의 큰 흐림에 거스르는 반혁명의 역류였다. 반혁명을 혁명이라 부르는 전형적인 인지 착오다.

 

많은 문혁사가들이 동의하듯, 문혁은 본질적으로 권력투쟁의 드라마였다. 마오쩌둥이 국가원수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의 제거를 위해 전국의 인민을 들쑤셔서 고의적으로 일으킨 “천하대란”이었다. 류샤오치를 모욕주고 매장시키기 위해 마오쩌둥은 촘촘한 그물을 치고 치밀한 덫을 쳤다. 그 덫에 빠진 류샤오치는 “반도(叛徒, 반역 도당), 내간(內奸, 내부간첩), 공적(工敵, 노동자의 적)”의 죄명을 쓴 채 처참하게 무너졌다. 마오쩌둥의 공격은 크게 다섯 단계로 진행됐다.

 

정적 살해: 마오쩌둥의 무서운 계략

 제 1단계는 이념적 밑밥 뿌리기였다. 문혁 개시 3년 전인 1963년 여름 마오쩌둥은 32세의 선전원 치번위(戚本禹, 1931-2016)로 하여금 관군에 생포된 후 “자술서”를 작성했던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 1823-1864)이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반역자”라는 주장을 펼치게 했다. 바로 그 논리에 따르면, 1936년 국민당이 지배하던 백구(白區, 백색지구)에서 생포됐다가 허위 반성문을 쓰고 풀려났던 61명의 비밀요원들도 반역도당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백구의 북방국 총책 류샤오치가 61명을 탈출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00년 전 항복한 이수성을 반역자로 몰아 결국 류샤오치의 목에 반역자의 칼을 씌우기 위함이었다. (<42회> “정의를 위한 투쟁? 본질은 시기, 질투, 탐욕, 증오”)

<반도, 내간, 공적 류샤오치를 영원히 당에서 축출하라!/ chineseposters.net>

 

제 2단계는 책임 떠넘기기였다. 문혁의 광열에 불을 지핀 후, 마오쩌둥은 남방에 머물면서 혼란 수습의 총 책임을 류샤오치에 떠넘겼다. 1966년 5월부터 7월까지 최초의 50일 간 류샤오치는 문혁의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서 과격분자를 진압했다. 이때 화려하게 베이징에 복귀한 마오쩌둥은 “조반유리”라는 한 마디로 류샤오치를 “혁명군중”을 탄압하는 반혁명의 수괴로 몰아갔다. 그 순간 류샤오치는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허리까지 잠기고 말았다.

(<22회>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결합”)

 

제 3단계는 대중 동원을 통한 직접 타격이었다. 1966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홍위병이 나서서 류샤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눈앞에서 국가원수 류샤오치는 반역도당의 수괴(首魁)로 낙인이 찍혀 파멸의 늪 속에 가슴까지 빨려들었다. (<39회> “군중을 이용해 정적을 제거한다.”)

 

제4단계는 먼지털이식 마녀사냥이었다. 1966년 가을부터 시작된 류샤오치의 뒷조사는 급기야 그해 12월 18일 4인방의 지휘 아래서 이른바 “전안조(專案組, 특별조사단)”가 구성되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장칭의 지시에 따라 특별조사단은 1920-30년대 및 일제 침략기 400만 건의 문서를 샅샅이 뒤졌다. 반역, 배신, 항복의 죄목을 억지로 찾아내서 류사오치를 단죄하기 위함이었다. 1980년 3월 19일 중공중앙의 통지에 따르면, 전안조의 특별 조사는 그야말로 최악의 인격살해였다.

 

“[전안조는] 한 편으론 농허작가(弄虛作假, 허위날조), 단장취의(斷章取義, 과장왜곡), 고문과 자백강요 등의 저열한 수단을 써서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거짓 자료를 동원하고 증거를 위조해서 중공중앙에 보고했다. 또 한 편으론 진상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증언을 억누르고, 핍박에 못 이겨 위증한 사람들의 증언을 여러 차례 뜯어고친 후 1968년 9월 <<반도, 내간, 공적 유소기의 죄행에 관한 심사보고>>를 작성했다.” (중공중앙통지 1980-3-19)

 

제 5단계는 인신구속과 의료방치에 의한 정치적 살해였다. 1966년 8월 1-12일 거행된 중공중앙 제8기 11차 전회(全會)에서 류샤오치는 실제적으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중공중앙에서 그의 서열은 2위에서 8위로 내려갔다. 그해 10월 1일 마지막으로 류샤오치는 국가주석의 지위에서 톈안먼 성루에 올랐다. 이후 그는 정치적 식물로 전락했다. 류샤오치는 은퇴를 자청했으나 마오쩌둥은 조용한 퇴장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 “대비판”을 통해 류샤오치를 죽이는 무자비한 파멸과 생매장의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다. 결국 생애 최후의 1년 동안 류샤오치는 화장실도 갈 수 없고 음식도 씹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무너졌다.

<류샤오치를 비판하는 문혁 당시의 포스터 (1967) 위의 작은 글씨: “모든 게 그릇된 사상이다. 모든 게 독초다. 모든 게 소 귀신, 뱀 귀신이다. 모두를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 절대로 그들이 자유롭게 범람할 수 있게 할 수 없다. - 마오쩌둥” 아래 큰 글씨: “대독초 <<수양>>을 철저히 비판하라!” 여기서 “수양”이란 공산주의자의 품성 수양을 강조한 류샤오치의 저서를 의미한다./ chineseposters.net>

 

인민민주독재가 국가주석을 살해하다

1969년 11월 12일 중국 허난성 카이펑(開封)시 혁명위원회 건물 한 구석. 싸늘한 빈 방 초라한 침상에 눕혀진 전(前)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류사오치는 비로소 숨을 멈췄다. 만 일흔 한 번째 생일을 불과 열흘 앞둔 날이었다. 공식 사인(死因)은 악성폐렴과 당뇨합병증이었으나 사실은 고의적인 의료 방치에 따른 정치적 타살이었다.

 

1969년 10월, 류사오치를 감시하던 간수(看守)는 해어진 그의 바지를 벗기고는 야윈 몸을 침대 시트에 둘둘 말아 들것에 실은 후, 군용 비행기에 태워 허난성 카이펑으로 옮겨갔다. 곧이어 류사오치를 진료한 의사들이 고급 의료품을 요구했으나 상부는 냉혹하게 거부했다. 류사오치는 결국 그렇게 고의적인 의료 방치의 결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숨을 거둔 방 밖에는 중무장한 2개 분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넉 대의 기관총까지 거치(据置)된 상태였다. 삼엄한 경계령이 떨어졌음에도 누구도 방에 갇힌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주자파의 우두머리라는 정보만 전해졌을 뿐이다. 주자파란, 자본주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때는 바야흐로 문화혁명의 만조기(滿潮期)! 주자파로 몰리면 곧 파멸이었다. 목숨을 건사한다고 해도 뭇매를 맞고 불구가 되기 일쑤였다. 외상(外傷)이 경미할 경우에도 회복불능의 정신장애를 겪어야 했다.

 

류사오치의 시신은 이틀 후 어둑어둑한 새벽 어스름을 타고 군용 지프차에 실려서 화장터로 옮겨졌다. 그의 유해(遺骸)는 인민폐 30위안의 상자에 담겨 보관되었다. 유해번호 123, 유해 주인의 이름은 류웨이황(劉衛皇)으로 기재되었다. 여기서 ‘웨위황’이란 황제를 보위한다는 뜻이다. 류사오치는 “죽어서 마오쩌둥을 보위하라!”는 의미일까.

<1967년 11월 12일 카이펑시 혁명위원회 건물에 실려와 감금 상태에서 사망한 류샤오치의 마지막 모습/ 공공부문>

 

그 대참사를 겪고 나서 1978년 베이징 시단(西單) 거리의 붉은 벽돌 벽에는 수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자유와 민주주주의 확대를 요구하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그 유명한 “민주의 벽 (民主牆)운동”이었다. 1978년 12월, 바로 그 “민주의 벽”에 걸린 한 장의 대자보에는 큰 글씨로 다음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체 류사오치가 무슨 잘못을 했지?”

 거의 10년간 그 누구도 입 밖에 내뱉지 못하던 한마디의 질문이었다. “민주의 벽”에 나붙은 바로 그 질문은 류사오치의 복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결국 1980년 2월 최고영도인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 5차 전회에서 “류사오치 동지의 복권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한다. 이 결정문에 따르면, 문혁 당시에 류사오치에게 가해진 처벌은 부당한 박해였다. 또한 “반역자, 배신자, 배반자” 등 류사오치에게 들씌워진 오명은 모두 음해성 누명이었다. 감옥에서 고독하게 숨을 거둔 지 11년 만에 류사오치는 다시금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거듭났다.

 

1989년 톈안먼 대도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반체제 지식인 옌자치(嚴家祺, 1942 - ) 교수는 묻는다. “왜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헌법과 법률의 보호를 받지도 못한 채 반도, 내간, 공적으로 몰려 일체의 재판받을 권리까지 잃어야만 했을까?”

<1980년 복권된 류샤오치는 1980-90년대 중국 인민폐 100원 지폐 위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나란히 4대 혁명 지도자의 한 명으로 올라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이래 중국의 모든 지폐엔 마오쩌둥 한 명의 초상화만 등재돼 있다.>

 

문혁 당시 류사오치의 처단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 수많은 군중을 생생히 기억하는 중국인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때 그 수많은 중국인들이 실제로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류사오치를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했던가? 대기근의 참상에서 중국의 경제를 회복시킨 위대한 공적을 쌓은 바로 그 류사오치를? 왜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토록 그를 잔인하게 죽음으로 몰아가야만 했을까? 진정 류사오치는 왜 그토록 무기력하게, 그토록 허망하게 국가주석의 권력을 완전히 박탈당해야만 했을까? 마오쩌둥은 과연 어떤 방법을 써서 류사오치를 제거했을까? <계속>

 

*본회 ‘인민민주독재가 국가주석을 살해하다 부분'은 졸저(拙著),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 2020), 434-436쪽에서 발췌했다.

 

<58회>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역사를 조작하는 권력

<1967년 4월 베이징, 오른쪽부터 장칭,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공공부문>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오웰의 <<1984>>에서 “오세아니아” 진실부(眞實部, Ministry of Truth) 기록 관리원 윈스턴(Winston)이 고문을 당하며 되뇌인 영국사회당 “잉쏙(Insoc)”의 구호다. “미친” 윈스턴을 “치유하기 위해” 그를 고문하는 진실부의 오브라이언(O’Brien)이 그에게 속삭인다. “현실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오직 마음속에만 있는 거란다······. 당이 진실이라 주장하면 그게 바로 진실이란다.”

 

1948년 완성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의 디스토피아는 문화혁명 시기 중국에서 거의 그대로 실현됐다. 그 당시 중국의 “현재”를 지배하던 마오쩌둥과 사인방(四人幇)은 실제로 정치적 목적에 따라 “과거”의 기록을 뒤틀고 인민의 기억을 바꿔서 중국의 “미래”를 완벽하게 지배하려 했다. 문혁 시절 마오쩌둥의 사주를 받은 관방 역사가들은 혁명의 미명 아래 거리낌 없이 과거사를 조작했다. 정확한 기록에 근거한 엄밀한 실증의 역사학은 “자산계급 학술권위”로 매도되고 배척됐다. 공산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기록은 조직적으로 훼멸됐다.

 

현재 권력이 과거 기록을 바꿔 미래를 지배

정치의 시녀가 된 그 시절의 역사학을 중국에서는 “영사(影射) 사학”이라 부른다. 직역하면 “그림자를 투사(投射)한다” 정도의 의미지만, 여기서 “영사”란 어떤 사물에 빗대 다른 얘기를 ‘넌지시 암시하다’ 혹은 ‘에둘러 얘기하다’의 뜻이다. 결국 “영사 사학”이란 현재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과거사를 왜곡하는 거짓의 역사학을 이른다. 문혁 시절 “영사 사학”은 지식분자를 탄압하고 인민대중을 선동하는 이념투쟁의 폭약이 됐다. 과연 어떤 논리로 문혁 시기 관방 역사가들은 그토록 자의적으로 과거를 조작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논리를 파헤쳐 보면 무덤 속의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벌떡 일어난다.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Highgate)에 세워진 마르크스의 묘비명은 젊은 시절 그가 남긴 잡기장에서 따왔다. “지금껏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한 마디는 이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청년들을 사회주의자로 만드는 주술적 마력을 발휘했다.

 

일면 그럴싸하지만, 20대 철학도의 오만한 발상, 치기어린 궤변일 뿐이다. 세상을 제대로 바꾸기 위해선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깊이깊이 궁구해도 턱없이 모자라다. 현실을 모르는데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나?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의 대실패는 복잡한 현실의 질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마르크스 추종자들이 섣부른 혁명의 정책을 남발한 결과다. 스탈린의 표현을 빌면, “머리가 더운” 좌익혁명가들이 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까닭이다.

 

문혁 당시 “영사 사학”이 득세한 심리적 배경도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를 원용하자면, “지금까지의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역사학은 혁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사회 변혁을 위해서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2019년 2월 16일, 누군가 마르크스의 묘비에 붉은 글씨로 낙서를 했다. 낙서의 내용: "볼셰비키 홀로코스트 기념비, 1917-1953년, 사망자 6천 6백만 명“/ twitter.com>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에 따르면, 모든 주장은 당파성을 갖는다. 가치중립의 객관적 진리란 없다. 실증사학의 “진리”는 부르주아 계급 편향일 뿐이다. 부르주아 계급사관에 맞서 무산계급의 역사학을 세워야만 한다. 진리는 오직 혁명 과업을 이끄는 당이 결정한다. 과거사는 현실의 목적에 복무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오웰이 그린 오세아니아 진리부의 논리 그대로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역사 왜곡이야 말로 숭고한 혁명운동이 된다.

 

거짓 날조와 허위 조작으로 국가주석을 극형에

 국가 주석 류샤오치는 거짓 날조와 허위 조작에 의해서 극형에 처해졌다. 사인방(四人幇)의 사주를 받은 중앙전안심사조(中央專案審査小組, 이하 전안조)는 오로지 류사오치를 잡아넣기 위해서 1920년대 그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과감하게 조작하고 터무니없이 왜곡했다. 1968년 10월 18일 중공중앙은 전안조의 보고서를 근거로 “중발 [68] 155호: 반역도당, 내부간첩, 노동자계급의 공적 류샤오치의 죄행 심층보고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이로써 중공 부주석 및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빠져나올 수 없는 파멸의 늪 속에 머리끝까지 잠겼다.

 

8페이지 분량 “중발 [68] 155호”는 거의 50년에 달하는 류샤오치의 혁명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는 모략중상의 단죄에서 시작된다.

 

“지주 출신인 류샤오치는 극도의 부패 반동으로 충만한 지주계급으로서 자산계급 사상을 실행하는 이기분자다······. 40년 간 그는 꾸준히 반혁명의 양면적 수법을 써서 적에 투항하고, 반란을 획책하고, 외국과 내통하고, 미친 듯이 마오 주석을 대표로 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에 저항하고 무수한 반혁명 행위를 저질러왔다. 그 결과 류샤오치는 당내 반혁명 수정주의 집단의 총 두목이자 자본주의 재건 세력의 총 대표가 됐다.”

<1967년 여름, 중난하이에서 홍위병에 비투(批投, 비판투쟁)당하는 류샤오치의 모습/ 공공부문>

 

그러한 판단의 근거로 전안조는 1925년, 1927년, 1929년 세 차례에 걸친 류샤오치의 변절, 반역, 내부간첩 행위 및 반혁명 죄행을 낱낱이 공개했다. 묘하게도 1959년 이래 국가주석의 직무를 수행해 온 당 서열 2위의 류샤오치를 죽이기 위해 40년 전 행적만을 들춰냈다. 전안조의 보고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925년 상하이 총공회(總工會)의 책임자였던 류샤오치는 병을 핑계로 그 직책을 내려놓았다. 그해 9월 18일 당시 상하이를 지배하던 군벌 싱스롄(邢士廉, 1885-1954)은 총공회를 폐쇄한 후 9월 19일 류샤오치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지하로 숨었던 류샤오치는 11월 몰래 상해를 떠나 후난(湖南)성 창사(長沙)로 달아났는데, 창사의 군벌 자오헝티(趙恒惕, 1880-1971)는 공산당원을 소탕하는 백색공포를 일으켰다. 결국 12월 16일 류샤오치는 체포되어 참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류샤오치의 친형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자오헝티를 찾아가 반혁명적 정치 협상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류샤오치가 살려낸다. 전안조는 이 과정에서 류샤오치가 자오헝티에게 투항한 후 유가경전 <<사서(四書)>>를 하사받고 광둥(廣東)으로 가서 악의를 품고 공산당에 재(再)입당했다고 주장했다.

<“반역도당, 내부간첩, 노동자의 공적 류샤오치를 영원히 출당시키라!” 1968년 당시의 선전 포스터/ 공공부문>

 

2) 1927년 류샤오치는 우한(武漢)에서 후베이(湖北)성 총공회 비서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전안조의 조사에 따르면 그는 “제1차 국내 혁명전쟁으로 혁명과 반혁명의 대결이 첨예하던 바로 그 상황에서” “제국주의 및 국민당 반동파 왕징웨이(汪精衛, 1883-1944)와 천공보(陳公博, 1892-1946)의 주구가 되어 노동자 계급을 팔아먹고 혁명을 파괴하는 내부 간첩의 활동을 전개했다.”

 

전안조에 따르면 류샤오치는 국민당 중앙의 “노동자 운동 소조장(小組長)”에 임명된 후 국민당 정부에 노동운동이 정보를 물어다 주는 특수간첩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1927년 6월 29일 류샤오치는 노동자의 폭동을 막기 위해 “공인 규찰대”를 해산했는데, 전안조는 국민당과 공모한 류샤오치의 반혁명 음모라 단정했다. 바로 그 전날 저녁 류샤오치가 국민당에 공개 체포됐다가 풀려났다는 이유였다. 공개 체포가 연출된 대중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고육계(苦肉計, 제 몸을 해치며 꾸며내는 계략)란 얘기였다.

 

3) 1929년 8월 21일, 랴오닝성 펑톈(奉天, 오늘날 선양)에서 만주성 위원회 서기로 활약하던 류샤오치는 군벌 장셰량(張學良, 1901-2001)에 다시금 체포됐다. 전안조의 발표에 따르면 류샤오치는 장셰량과의 밀약을 맺고 풀려난 후, 만주성위원회와 동북3성의 지하 당조직을 궤멸시키는 파괴적인 매당 행위를 이어갔다.

 

류사오치는 1920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이듬해 그는 막 창당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후 거의 50년의 세월을 중공중앙의 핵심인물로 맹활약을 해왔던 자타공인의 공산주의 혁명투사였다. 1968년 10월 중공중앙은 그러한 류샤오치를 “반당반국(叛黨叛國)”의 반역자로 몰아서 “당 내외 모든 직무를 정지시킨 후, 그의 당적을 영구히 박탈했다.”

 

12년 후, 증거를 조작하고 위증을 교사한 모함으로 밝혀져

1980년 3월 19일 중공중앙은 철저한 재심을 통해서 1968년 전안조의 조사가 모두 허위증거, 과장왜곡, 증거조작, 위증교사, 자백강요 등의 불법적, 비윤리적 방법으로 날조되고 조작된 억지주장이었음을 명백히 밝혔다. 1980년의 재조사에 따르면, 류샤오치에 적용된 “반역도당, 내부간첩, 노동자의 공적” 등의 모든 구체적 혐의는 1920년대의 언론보도, 공산당 및 국민당의 내부문건, 관련자 증언 등을 통해서 빠짐없이 반박된다.

<1998년 류샤오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 우정국에서 발행한 기념우표/ https://www.xabusiness.com/china-stamps-1998/1998-25.ht

 

아울러 중공중앙은 류샤오치에 “반당반국”의 유죄를 선고한 1968년의 원심(原審)은 “린뱌오(林彪), 장칭(江靑), 캉성(康生), 천보다(陳伯達) 무리의 축의함해(畜意陷害, 고의적인 모함)”라 선언했다. 1980년 발표에선 명시적으로 마오쩌둥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1981년 6월 27일 중공중앙은 제11기 6차 전회(全會)에서 채택한 “역사문제 결의문”에서 문화혁명의 최종 책임이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에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류샤오치가 파멸을 늪에 잠긴 후, 12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역사의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진실의 승리를 장담할 순 없다. 역사상 수많은 권력자들은 거짓말로 군중을 격분시키고, 성난 군중을 이용해 정권을 탈취해왔다. 권력을 장악한 후, 그들은 기록을 조작하고 기억을 왜곡한다. 오웰의 통찰대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계속>

 

<59회> 세계적인 반중 감정...6·25전쟁과 문혁 때부터 시작됐다

<2018년 6월 11일, 베트남 호치민시의 반중 시위/ 2018년 6월 11일 https://www.bbc.com/news/world-asia-44436019>

 

현재 중국은 외교적으로 1978년 개혁개방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세계 각국의 반중 감정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PEW 연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2020년 세계 각국에서 중국을 싫어하는 인구의 비율은 일본 85%, 호주 81%, 스웨덴 85%, 덴마크 75%, 한국 75%, 영국 74%, 미국 73%, 캐나다 73%, 독일 71%, 프랑스 70% 등을 보인다. 이들 국가들의 반중 감정은 코로나 19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2017년 이래 점점 강화되는 추세다. BBC의 조사에 따르면, 반중 감정은 독일 35%, 캐나다 51%, 호주 47%였고, 2019 PEW 연구센터 조사에 따르면, 독일 56%, 캐나다 67%, 호주57%였다.

 

2018년 현재 세계190국 중에서 128개국이 중국을 제1 교역 상대국으로 삼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중국과 경제적 공생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중국을 경계하고, 불신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코로나 19의 확산은 반중 감정을 강화시켰지만, 오로지 코로나 19 때문에 글로벌 반중 감정이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 전 세계적 반중 정서의 확산을 설명하기 위해선 1949년 건국 이래 지속돼 온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 인권유린, 중국-중심적(China-centric) 패권주의, 배타적 징고이즘(jingoism)에 주목해야 한다. 반중 정서를 확산시킨 굵직한 사건들만 역순으로 꼽자면, 코로나 19 팬데믹, 1989년 톈안먼(天安門) 대학살, 문혁 시기의 외교참사(1967-1969년), 한국전 파병(1950-1953, 이른바 “항미원조”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영국 대사관 방화...문혁 시기 중국의 외교참사

 1967-1969년 인구 8억의 거대한 대륙국가 중국은 문화혁명의 광열 속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고립무원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967년 8월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영국 대사관에 난입해서 불을 지르는 외교적 망동을 자행했다. (“슬픈 중국” <43회> 영국대사관에 불지른 홍위병들”참조) 이 사건 이후 중국의 외교적 고립주의는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1968년 한 해 중국의 외교는 마비상태였다. 외교참사의 최절정은 1969년 3월 만주의 국경에서 발생한 소련과의 군사 충돌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은 배후에서 북베트남에 무기 및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중공정부에 반미제국주의 선전선동의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들은 날마다 미국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기사로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8년 3월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북베트남과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소련의 중재를 통해 북베트남이 “파리 평화협상”의 제안을 수용하자 중월 관계는 큰 시련에 휩싸였다. 1968년 6월, 광저우(廣州), 쿤밍(昆明), 난닝(南寧)의 베트남 영사관에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쿤밍의 베트남 영사관은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의 외교 전술이 중·월 관계를 위협한 셈이었다.

 

중·소 관계는 1968년 8월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더 큰 위기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해 1월 5일 알렉산더 둡체크( Alexander Dubček, 1921-1992)가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 자유화를 외치는 대규모 군중 시위가 발생했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부응한 둡체크 정부는 경제적 분권화 및 자유화 개혁을 추진했고, 이에 분개한 크렘린은 “공산국가의 배신을 단죄하기 위해” 65만 “붉은 군대”를 급파했다. 본래 둡체크의 개혁을 수정주의 노선이라 비판하던 중공정부는 180도 방향을 틀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편에 서서 소련의 군사행동을 규탄했다. 이후 중·소 대결은 악화 일로였다.

<1968년 8월 소련 점령군 탱크 앞에서 저항하는 프라하의 청년/ 공공부문>

그밖에도 중국은 홍콩 문제를 놓고 영국과 계속 맞서고 있었으며, 인도네시아 및 버마와도 충돌했다. 1967년 말, 베이징의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공격을 당하자 자카르타의 중국대사관에 대한 보복 공격이 가해졌다. 20명의 중국인들이 부상을 당하고, 여러 명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양국은 공관을 모두 철수하는 극한 조치를 이어갔다.

 

게다가 중국은 심층 취재를 빌미로 일본인 기자단을 추방하고, 재중 일본 사업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이 인도의 반군 세력에 무기지원을 감행하면서 중·인 관계도 극심한 위기에 빠졌다. 1969년 5월 5일, 인도를 방문한 소련의 수상 코시긴(Alexei Kosygin, 1904-1980)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양국의 연합을 논했다. 1969년 5월 소련의 의장 포드고르니(Nikolai Podgorny, 1903-1983)는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직접 회유하기도 했다.

 

오직 캄보디아만이 표면상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했다. 미국이 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 병참기지를 공습하자 1968년 초부터 중국은 캄보디아에 군사지원을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그러나 물밑에선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1922-2012)에 저항하는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는 양면전략을 취했다.

 

요컨대 1968년, 문혁의 광열 속에서 중국의 외교는 실종 상태였다. 8억 인구의 거대한 대륙이 고립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 외교적 출로가 막혀버리자 중국은 군사적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뼛속 깊숙이 게릴라 전사였던 마오쩌둥의 모험심이 다시 발동되는 모멘트였다.

<1969년 3월, 전바오다오로 진격하는 중국 병력의 모습/ 공공부문>

1969년 3월 중소 국경분쟁...중의 도발과 소련의 보복

중소 사이의 국경분쟁은 1959년부터 시작되어 1969년까지 해마다 점진적으로 고조됐다. 1966년 이후부터 중·소 이념갈등이 격화되자 국경 다툼도 거세졌다. 특히 1967년부터 중·소 국경은 화약고가 되어갔다. 1967년 1월 헤이룽장(黑龍江)성 북단의 우수리(Ussuri)강에서 최초의 국지전이 일어났다. 1967년 12월 7-9일, 23일과 1968년 1월 말 아무르(Amur)강과 우수리강에서 분쟁이 계속됐다. 1967년 11월까지 소련의 수 개 사단 병력이 몽골에 배치됐다. 이에 중국은 국경 맞은편에 방어적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동남방의 푸젠(福建)성의 병력까지 이동시켜 소련-몽골 국경에 배치하는 대규모 작전까지 펼쳐졌다.

 

급기야 1969년 3월 만주의 북쪽 중소국경의 우수리강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 중·소 군사충돌이 발발했다. 1860년 조약에 따라 청(淸)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국경으로 정해진 전바오다오는 아무도 살지 않고 전략적 가치도 없는 그저 작은 강 위의 섬일 뿐이었다. 이 작은 섬을 두고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두 차례의 격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여파로 10년 넘게 중·소 양국 사이의 어색한 갈등이 지속됐다.

 

전문가의 해석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1차 교전은 중국의 의도된 도발로 보인다. 3월 1일 심야 300여 명의 중공군이 전바오다오에 진입해서 참호를 파고 매복에 들어갔다. 다음 날 오전 11시경 20-30명의 중공군이 구호를 외치면서 소련군을 유인했다. 중국 측 병력의 이상 징후를 포착한 소련군이 병력을 내보내자 중국 측은 선제적으로 총격을 가했다. 7명이 즉석에서 사망했다. 이에 매복하던 300 명의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수류탄, 기관총 및 대전차포를 쏘아댔다. 중공군은 소련군에 돌진해서 백병전을 벌였다. 소련 측 주장에 따르면, 중공군은 19명의 소련군 포로를 생포해서 돌아간 후 즉석에서 처형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3월 15일 중·소 사이에 훨씬 더 큰 규모의 군사충돌이 이어졌다. 확실하진 않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전투가 보복을 맹세한 소련 측 선제공격에서 시작됐다고 해석한다. 중국 측은 2천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수적 열세를 보였던 소련군은 50대의 탱크와 병력 수송 장갑차를 내보내 1만 발 이상의 포탄을 쏘아댔고, 36대의 전투기가 출격했다. 9시간의 전투 끝에 저녁 7시 경에야 전투가 끝이 났다. 소련 측 사상자는 60명, 중국 측 사상자는 800명에 달했다.

<1969년 전바오다오 사건 이후 버려진 소련제 탱크 T62 위에 올라선 중국 병사들의 모습/ 공공부문>

소련의 핵전쟁 위협...마오쩌둥 “세계 인구 절반 죽겠지”

1969년 3월 8일, 격분한 소련 정부는 중국에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최고의 군사협박을 가했다. 3월 15일 2차 전투 이후 소련은 대중 유화책을 펴기 시작했다. 중국도 소련과의 전면전을 원치 않았다. 중국의 입장에서 전바오다오의 군사 충돌은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 국지전일 뿐이었다. 그러나 양국은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한 채 6개월 넘게 격한 흑색선전과 이념적 공방전을 이어갔다.

 

1969년 8월 13일 신장 지역에선 대규모 무력 충돌이 다시 일어났다. 소련은 그해 8월 말부터 다시 중국의 핵시설을 폭격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이에 9월 5일 미국은 중·소 분쟁의 위험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현실적으로 양측 모두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는 현실인데, 외교적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1969년 9월 11일, 소련의 수상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서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담판을 벌였다. 코시긴이 중국의 핵시설에 대한 폭격이 가능하다고 언급하자 저우언라이는 항일전쟁의 경험을 살려 전면적인 지구전에 돌입하겠다고 맞섰다. 두 사람은 잠정적 휴전에 일단 합의했지만, 양국 사이의 군사긴장은 향후 10년 이상 지속됐다.

 

그 당시 소련은 실제로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검토했었다. 당시 중국은 1964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2년 후 열핵(熱核) 실험까지 마쳤지만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 개발에선 여전히 뒤쳐져 있었다. 그럼에도 소련이 핵무기 사용을 포기한 이유는 다름 아닌 중국 특유의 인해전술(人海戰術) 때문이었다.

 

1957년 11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은 공식석상에서 제3차 대전이 일어날 경우 자본주의 체제가 멸망할 것이라 단언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3차 대전이 터지면 최악의 경우 세계 인구 27억 중에서 절반은 죽고, 절반은 생존하겠지. 그렇게 되면 제국주의 국가들은 모두 파멸하고, 전 세계는 사회주의 체제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수년 안에 세계 인구는 다시 27억이 될 터이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연설하는 마오쩌둥의 모습/ 공공부문>

1969년 6월 브레제네프는 국제 공산당 대회에서 중국을 규탄하면서 말했다. “12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마오쩌둥은 놀라운 허세와 냉소를 머금고서 핵전쟁이 나면 인류의 절반이 죽을 것이라 말했죠.” 마오의 발언은 취중의 실언일 수도 있고 엉뚱한 농담일 수도 있지만, 혁명을 위해서라면 세계 인구의 절반까지 기꺼이 걸 수 있는 그의 도박사적 광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민의 목숨을 건 마오의 도박은 신비로운 마력을 발휘했다. 소련은 흐지부지 중국에 대한 과격한 군사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국은 중·소 사이의 벌어진 틈에 비집고 들어가 외교관계를 재건하는 “쐐기 전략”(wedge strategy)을 꺼내들었다. 외교적 고립상태에 빠져 있던 중국으로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야말로 소련을 견제하고 타이완을 탈환할 수 있는 최고의 묘책이었다.

 

놀랍게도 마오의 대(對)소련 군사 도발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물꼬를 텄다. 1971년 4월 11일 미국의 탁구팀과 기자단이 중국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어서 1971년 7월 15일 미대통령 닉슨(Richard Nixon, 1913-1994)은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이듬해 중국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했다.<계속>

 

<60회> 마오쩌둥 “고작 260명 죽인 진시황이 무슨 잘못인가”

<1969년 4월 1-24일, 중국공산당 제9차 전체인민대표회의, 마오쩌둥(왼쪽)과 린뱌오의 모습>

 

정치의 정면(正面)은 아름답다. 불의에 항거하고, 부정을 일소하고, 최선의 정책을 입안하는 호모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의 적극적인 사회 개혁의 활동이다. 정치의 배면(背面)은 추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정적을 제거하고, 대중을 현혹해서 권력을 탈취하는 야심가들의 권모술수, 사기꾼들의 무도(無道) 작란(作亂)이다.

 

고대의 유가(儒家) 경전은 정치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여준다. 예컨대 <<서경(書經)>>엔 문명을 개창하고 교화를 실현한 상고 시대 성왕(聖王)의 행적이 통치의 전범으로 제시돼 있지만, 동시에 폭군의 학정(虐政), 혼군(昏君)의 패정(悖政), 권신(權臣)의 전횡 또한 낱낱이 기록돼 있다.

 

역사서 탐독한 마오, 음모와 술수 파헤쳐

마오쩌둥은 광적으로 과거의 역사서를 탐독했다. 그는 주변에 전통시대 역대 조대(朝代)의 정사 <<25사>>를 통째로 수차례 반복해 읽었노라 자랑했다. 물론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계급혁명을 꾀하는 공산주의자였다. 마르크스는 그에게 계급 철폐, 인간 해방 등 혁명의 당위와 방향을 알려줬지만, 마키아벨리적 지략을 가르쳐주진 않았다. 권력자로서 마오쩌둥은 <<25사>>의 배면에 깔린 음모와 술수를 깊이 파헤쳤다.

 

그는 늘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서 봤다. 주지육림에 빠져 잔악무도한 난정(亂政)을 일삼았던 상(商)나라 최후의 폭군 주왕(紂王)을 높이 평가했으며, 진시황(秦始皇)을 중국사의 최고 인물로 칭송했다. 그는 말하곤 했다. “고작 260명 유생(儒生)을 죽였는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란 말인가?” 그는 “진시황의 사소한 잘못을 과장하고 위대한 업적은 폄하하는” 백면서생의 역사해석을 경멸하고 조롱했다. 고루한 도덕관념에 갇혀 인간사의 진면목을 외면하는 꽁생원의 질시일 뿐이라 여겼다.

 

밤낮으로 문자만 들여다보는 학인들이 대체 정치사의 흑막과 권력자의 간지를 어찌 알 수 있나? 그들의 붓끝에서 만들어진 포폄(褒貶)의 역사학이 어떻게 인간사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나? 고기도 씹어 봐야 그 맛을 알 듯, 권력 역시 직접 누려본 후에야 역사에 기록된 권력자의 높낮이를 평가할 수 있다. 범부의 상식을 거부했던 마오는 역사에 기록된 폭군과 간웅(奸雄)의 행적을 파헤쳐 교묘한 음모의 통치술을 연마했다.

 

1970-71년 마오쩌둥은 배반의 정치, 권력투쟁의 술수를 완성했다. 절대 권력의 장악을 위해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산전수전 함께 겪으며 오랜 세월 혁명의 동지로 살아왔던 중공중앙의 권력자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홍위병은 이미 해체된 후였다. 인민해방군의 군부독재로 천하대란의 혼란상도 거의 끝이 났다. 그럼에도 70대 후반의 마오는 더욱 저돌적으로 권력투쟁에 나섰다. 군권(軍權)의 완벽한 장악을 위해서 그는 군부의 실세들을 제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최종의 표적은 그가 손수 키운 문화혁명의 영웅 당 서열 2위의 린뱌오(林彪, 1907-1971)였다. 더욱 철저히 린뱌오를 제압하기 위해서 그는 30년 간 지근거리서 자신을 보필하며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한 중공중앙의 이론가 천보다(陳伯達, 1904-1989)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중공중앙의 당파 싸움...마오와 린뱌오의 권력투쟁

1970년 중공중앙은 두 패로 갈리어 사생결단의 당파 싸움에 돌입했다. 군 장성 출신 황융성(黃永勝, 1910-1983) 및 우파셴(吳法憲, 1915-2004)은 린뱌오가 이끄는 중앙군사위원회의 핵심인물이었다. 반대편의 장칭(江靑), 캉성(康生),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은 모두 마오쩌둥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중앙문혁의 성원들이었다. 본래 4인방 및 캉성과 더불어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으로 맹활약했던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 이론가 천보다는 장칭 및 캉성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놀랍게도 린뱌오 집단에 참여했다. 결국 이 싸움은 군부를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대원수 린뱌오와 “불멸의 최고영도자” 마오쩌둥 사이의 권력 투쟁이었다.

<1967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8주년을 열렬히 환영하고 경축한다! 마오주석과 함께 영원히 혁명을 하자!” 1967년 문화혁명을 이끈 핵심 인물, 왼쪽부터 캉성,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장칭. 이 중 천보다는 1970년 권력에서 밀려나 투옥되고, 린뱌오는 1971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망명 중 사망한다./

 

양자의 권력 투쟁은 일단 마오쩌둥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됐다. 일반적으로 전체주의 정권의 권력자들은 피붙이를 후계자로 양성한다. 전통시대 황제 지배 체제에서 세자를 책봉해 권력을 이양하는 방식과 같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1922-1950)은 중공군 지원병으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의 창성군에서 유엔군의 공습을 받아 전사했다. 아들을 잃은 마오쩌둥으로선 새로운 권력 승계의 구도를 짤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안한 최초의 방법은 권력의 분할 승계였다.

 

1959년 4월 제2기 전국 인민대표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에 국가주석의 직위를 양도했다. 최고영도자로서 마오는 중국공산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림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주석의 지위는 제2인자 류샤오치에 돌아갔다. 이로써 중공중앙의 정치는 마오와 류 두 사람의 투톱 체제가 구축됐다. 국경일마다 <<인민일보>> 제1면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나란히 같은 크기로 실렸다. 마오쩌둥 역시 외국 사절과의 공식 만남에서 류샤오치를 후계자라 소개한 적도 있다. 당시 누가 봐도 류샤오치는 “포스트-마오(Post-Mao)” 시대의 최고영도자였다. 류샤오치는 그러나 문혁의 광풍 속에서 3년 넘게 시달리다 1969년 11월 12일 카이펑의 혁명위원회 건물에 갇힌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류샤오치가 축출된 후, 마오쩌둥은 제2인자 린뱌오를 일단 후계자로 삼는 공식 절차를 밟았다. 1969년 4월 1일부터 24일까지 베이징시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중공 9차 전체회의에는 2200만 당원 중에서 151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무산계급 독재 원칙 아래서 문화대혁명을 계속 추진하며, “류샤오치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본주의 사령부”의 비판을 최고 의제로 삼았다. 아울러 “중국공산당 장정(章程, 이하 당헌)”의 수정본 초안이 채택됐는데, 그 총강에는 “린뱌오가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라는 구절이 삽입됐다.

 

린뱌오의 권력 승계가 당헌에 명기됐지만, 10년 전처럼 권력 분할의 절차 따윈 없었다. 10년 전 류샤오치를 국가주석에 앉힐 때처럼 마오쩌둥은 행정의 실권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스스로 국가주석이 되기도 꺼려했다. 대외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주석은 외빈을 영접하고 해외순방을 가야 하는 번거로운 자리였다.

 

그렇다고 린뱌오를 국가주석의 자리에 앉힐 수도 없었다. 1950년대부터 전쟁 영웅이었던 린뱌오는 10대 원수 중 서열 3위의 영예를 누려왔다. 1959년 국방장관에 임명된 이래 이미 10년 간 린뱌오는 군부를 강력하게 조정하고 있었다. 마오는 정치권력의 원천이 군사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린뱌오는 군을 직접 지배했고, 마오는 린뱌오를 오른팔 삼아서 군을 지배했다.

 

1969년 중·소 국경의 무장충돌 이후 린뱌오는 더욱 세차게 군부를 장악했다. 문혁 시기 “천하대란”을 정돈하는 과정에서 군부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1967년 초부터 “삼지양군(三援兩軍, 좌파, 농민, 노동자의 지원과 군관 및 군훈)”의 원칙 아래 군부가 정부를 대체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군부는 중공중앙 정치국 위에 군림했다. 중앙 각 부서의 위원회는 물론, 각 성에 들어선 혁명위원회 역시 군대의 통제 하에 있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마오쩌둥 사상의 큰 학교다!” 문혁 시대 군대 내의 인격숭배를 보여주는 포스터/ chineseposters.net>

문혁 발발 이전부터 마오쩌둥은 군부 쿠데타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린뱌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고 나자 그는 곧바로 린뱌오의 권력을 견제하고 나섰다. 마오쩌둥은 헌법에 명시된 국가주석의 직위 자체를 없애려 했다. 이에 중공중앙은 국가주석 직책의 존폐를 놓고 두 패로 갈라졌다.

 

마오 “국가주석 직위를 폐기하라”

1970년 8월 23일-9월 6일까지 장시성 북부 쥬장(九江) 경내의 루산(廬山)에선 중공 9기 2차 전체회의가 개최됐다. 산상에 집결한 155명의 중앙위원과 100인의 후보위원은 린뱌오가 이끄는 중앙군사위원회와 마오쩌둥 직속의 중앙문혁의 성원들로 나뉘었다. 표면상 대연합을 통한 승리를 모토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목숨을 건 정치투쟁이었다. 그 투쟁의 첫 번째 의제는 바로 국가주석 직위의 존폐였다.

 

절대 권력자였던 마오쩌둥으로선 국가주석의 직위까지 탐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아니라면 당헌에 명기된 후계자 린뱌오가 국가주석의 직위를 맡아야 마땅했다. 이미 류샤오치를 국가원수에 앉혔던 경험이 있었기에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권력 강화를 경계하고 있었다.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의 직위 자체를 폐지한다면, 중공중앙에 더는 어색한 쌍두(雙頭)의 권력 충돌 따윈 없을 터였다.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미 1970년 3월 16일 헌법 개정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국가주석의 직위 자체를 폐기하라 지시했다. 3월 17일-20일 이어진 중앙공작 회의에서 이른바 “린뱌오 집단”의 인물들은 국가주석의 직위를 폐기할 수는 없다며 완강히 맞섰다.

<1960년대 초부터 린뱌오는 군대에서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이끌고 있었다./ 공공부문>

당 서열 2위의 실력자로서 이미 당헌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명기됐음에도 린뱌오가 맡은 행정의 직무는 국무원 부총리에 머물러 있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보다 14세 연하였다. 마오의 유고 시 바로 그가 직위 승계의 주체였다. 때문에 린뱌오는 국가주석의 직위를 폐지하는 대신, 마오쩌둥에 직접 국가주석이 되어 달라 읍소했다.

 

노회한 마오쩌둥이 린뱌오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1970년 4월 25일 그는 4인방의 일원인 장춘차오를 데리고 쑤저우(蘇州)에 있던 린뱌오를 불쑥 찾았다. 마오는 린뱌오에 묘한 질문을 들이밀었다.

 

“나는 늙었지만, 자네는 건강이 안 좋잖아. 자네의 자리를 누구에게 승계할지 생각해 봤나?”

 

마오는 80세를 바라보는 고령이었다. 그 때문에 린뱌오가 후계자로 지명됐다. 14세 연하의 린뱌오는 신경쇠약과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린뱌오 역시 후계자를 지명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마오가 왜 하필 군부와 상관없는 상하이 문관(文官) 출신 장춘차오를 린뱌오 후계자로 제안했을까? 직속의 수족으로 하여금 린뱌오의 권력을 빼앗고 군부를 장악하겠다는 신호였다. 아울러 린뱌오가 문혁 시절 공군 사령부에 배속시켜 자신의 후계자로 직접 기르고 있던 그의 아들 린리궈(林立果, 1945-1971)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장춘차오는 린뱌오 집단의 사람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장춘차오를 린뱌오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마오쩌둥의 요구는 마치 한 민주공화국에서 여당의 핵심인물을 데려다 야당의 수장으로 앉히라는 주문과도 같았다. 린뱌오 집단은 격분해서 장춘차오를 향한 이념의 십자포화를 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오 집단 역시 격렬하게 반발했다. 첫 번째 희생양은 한 평생 마오를 섬겨왔던 이론가 천보다였다. <계속>

<문혁 시기 마오쩌둥 어록 “소홍서(小紅書)”를 손에 들고 흔드는 젊은 학생들의 모습. 린뱌오가 편찬한 “소홍서”는 문혁 이전 이미 군대에서 이념 교육용 교과서로 널리 읽혔다. / picture-alliance/d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