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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251. 선정비에 은폐된 구한말 부패 시대 - 260. 용산공원 역사 왜곡 대행진

상림은내고향 2021. 6. 2. 18:19

박종인의 땅의 歷史 2021  조선일보 선임기자

2021.03.17

251. 선정비에 은폐된 구한말 부패 시대

사람들은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까” 탄식하였다

고종 권력 기반인 민씨들
최고권력 ‘내무부’ 장악
견제 받지 않는 독주
개혁 외면한 가렴주구
’쇠갈고리' ‘망나니’ ‘미친 호랑이’
동학군 타깃 된 민영준은
충주에만 소작인 159명 둔
부재지주 ‘토지 王’
1905년 이후 봇물 터진
”빼앗은 옛 땅 반환” 소송 16건
1931년 총독부 예산 2억5000만원일 때
민영휘 재산은 1000만원
조선팔도 민씨 선정비들이 감추고 있는
’폭주하는 권력의 어둠’

▲전국 팔도 곳곳에 선정비들이 서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충남 공주 공산성에 있는 도순찰사 민치상 영세불망비, 강원도 삼척에 있는 관찰사 민영위 유혜불망비와 남한산성에 있는 광주유수 민영소 영세불망비 그리고 공주 공산성에 있는 판관 민두호 영세불망비다. 공덕비가 꼭 진실하지는 않다. 진실한 선정을 베푼 목민관 비석도 있고 강압에 의해 만든 악정비도 있다. /박종인

 

조선 팔도 두루 퍼진 민씨 선정비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초입 비림(碑林)에는 역대 광주 유수 선정비가 즐비하다. 그 가운데 민영소(閔泳韶) 영세불망비가 보인다. 충청남도 공주 공산성 입구에도 비림이 있다. 여기에는 민씨 선정비가 두 개다. 하나는 도순찰사 민치상(閔致庠), 하나는 판관 민두호(閔斗鎬) 영세불망비다. 현종 때 삼척부사 미수 허목의 ‘척주동해비’ 비각이 있는 삼척 육향산 기슭에는 관찰사 민영위 유혜불망비(遺惠不忘碑)가 있다.

 

이들이 누구인가. 민영소는 훗날 ‘일한합방’ 공로로 총독부에서 조선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민치상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살해 대상이 됐던 인물이다. 민두호는 백성 돈 긁는 데 이골이 나 사람들이 ‘민 쇠갈고리’라 부른 관료였다. 민영위는 ‘여주의 망나니’라 불린 사람이었다.(황현, ‘매천야록’ 1권 1894년 이전④ 1.이용직과 민형식 등의 음사, 탐학과 이응서의 선정) 그런데 민영위 비석의 ‘유혜불망’은 ‘남긴 은혜를 잊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과연 그러했겠는가.

 

▲1894년 동학혁명 발원지 전북 정읍 고부면 군자정에 있는 부서진 선정비들. 가렴주구에 지친 조선 백성의 분노가 만든 흔적이다. /박종인


민씨로 채워진 권력 집단

1873년 겨울 고종이 친정을 선언했다. 10년 전인 1863년(양력 1874년) 아버지 대원군 힘으로 오른 권좌였고, 10년 동안 아버지 그늘 속에서 숨죽이며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새로운 권력 기반은 왕비 민씨를 등에 업은 민씨 척족이었다. 그래서 고종 정권, 특히 1880년대를 ‘민씨 척족 정권기’라 부른다.

 

1878년 10월 1일 이조판서 민규호가 예조판서에 임명됐다. 엿새 뒤 고종은 민규호를 우의정에 임명했다. 10월 15일 민규호가 죽었다. 그가 죽기 이틀 전 고종은 민규호 아들 민영소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하라고 명했다. 1, 2차 과거를 면제하고 곧바로 최종 시험인 전시 응시 자격을 주라는 뜻이다.(이상 ‘고종실록’)

 

매천 황현은 이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규호가 죽기 전 정승 직함 하나를 원하므로 즉일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 아들 민영소를 다음 날 대과에 급제시키자 대원군이 고함을 쳤다. “정승 하고 싶다면 정승시키고 급제하고 싶다면 급제시키니, 지금이 민규호 세상인가?”’(황현, ‘매천야록’ 1권 1894년 이전 ⑦ 15. 민규호의 사망) 하급 군인 반란인 ‘임오군란’(1882)과 급진 개혁을 시도한 ‘갑신정변’(1884년)을 청국(淸國)에 기대 진압하면서 척족 정권은 맷집이 강해져갔다.

 

허울 좋은 개혁, 내무부 시대

1884년 5월 고종은 새로운 권력 기구인 내무부(內務府)를 설치했다. 내무부는 왕실 내외 사무를 총괄하는 관청이었다. 청나라를 본뜬 개혁 사무 또한 내무부가 책임졌다.

 

군사에서 재정까지 내무부 권력은 무한했다. 우선 친인척이 같은 부서에서 함께 근무할 수 있었다. 중앙 관직은 물론 주요 5대 지방청인 경기감사와 수령, 개성유수와 강화유수, 광주유수와 수원유수도 내무부 당상관이 겸직할 수 있었다. 1886년에는 재정을 맡은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 또한 내무부 당상관이 겸직할 수 있게 됐다.

 

1887년 이후 민응식, 민영익, 민영환과 민영준이 장기간 내무부 최고 관직인 독판(督辦) 일곱 자리를 장악했다. 1893년과 1894년 2년 동안 독판 과반수가 민씨였다.(한철호, ‘민씨척족정권기 내무부 관료 연구’ ‘아시아문화’12,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이 내무부가 주도한 개혁은 부실했다. 강병(强兵) 정책이 대표적이었다. 군사는 ‘각국 사관이 여러 방법으로 군대를 만들었다.’ 무기는 ‘미국, 일본, 러시아, 프랑스 소총이 모두 섞여서 마치 에티오피아 군대처럼 다양한 총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탄환도 다 각기 달랐다.’(프랑스어학교 교장 에밀 마르텔의 회고, 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일지사, 1969, p170~171) 청나라에서 도입한 무기 공장 기기창은 화약과 극소량 소총 제작과 무기 수리 위주로 운영됐다.(김정기, ’1880년대 기기국, 기기창의 설치' 한국학보 4권1호, 일지사, 1978) 임오군란 후 조선을 속국화한 청나라는 근본적인 근대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척족 정권은 재정과 군사력 장악에 치중하며 자강(自强)을 위한 개혁을 외면했다.(한철호, 앞 논문)

 

▲공주 공산성에 있는 판관 민두호 영세불망비. /박종인


견제 없는 권력

1892년 매천 황현이 이렇게 기록한다. ‘세상에서는 민씨들 가운데 세 사람을 도둑으로 지목했다. 서울의 민영주, 관동의 민두호, 영남의 민형식이 바로 그들이다. 평안도 관찰사와 삼도수군통제사는 10년 넘게 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저 민형식은 고금에 다시없는 탐관오리였다. 백성은 그를 ‘악귀’ 혹은 ‘미친 호랑이(狂虎·광호)’라고 부르기도 했다.’(황현,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오하기문)’, 역사비평사, 2016, p92, 93)

 

1890년 윤2월 19일 고종은 민두호를 ‘특별히 발탁해(特擢·특탁)’ 춘천부 유수로 임명했다. ‘특탁’은 정식 절차 없는 왕명 인사를 말한다. 유수(留守)는 군사 권한까지 가진 강력한 지방관이었다. 개성, 수원, 강화와 광주에 이어 다섯 번째 유수였다.

 

석 달 뒤인 5월 30일 내무부에서 “춘천유수 민두호가 병영 공사비 부족을 이유로 세금 납입이 곤란하다고 한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1887년 이후 상납한 돈과 곡식과 물건을 영원히 받지 않겠다”고 답했다.(1890년 5월 30일 ‘고종실록’)

 

그때 내무부 수장인 독판 중 한 명이 민영익이었다. 각 독판 휘하 협판 가운데 네 협판을 민영환, 민영소, 민영달, 민영준 4인이 맡고 있었다. 민영준은 민두호의 아들이었다.(한철호, 앞 논문) ‘민두호가 부임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강원도 백성은 먹고살기 힘들어져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가 줄지어 일어났다. 백성들은 두호를 ‘민 쇠갈고리’, 민영주를 ‘망나니’라 불렀다. 조선팔도 사람들은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장탄식했다.’(황현, ‘오하기문’, p92, 93)

 

1894년 동학혁명이 터졌다. 혁명군은 “뼈가 부서지더라도 민영준 축출”을 주장했다.(주한일본공사관 기록 1권 2. 전라 민요 보고 궁궐 내 소요의 건 2 (25)일·청 양국군 내한에 따른 국내외 탐정 보고 1894년 6월 12일) 좌찬성 민영준은 백성 재물로 자기 배를 살찌워 원망을 산(聚斂歸怨肥己·취렴귀원비기) 혐의로 유배형을 받았다. 전 통제사 민형식, 민응식, 전 경주부윤 민치헌도 유배형을 받았다.(1894년 6월 22일 ‘일성록’) 1년 뒤 이들은 모두 사면 받았다.(1895년 7월 3일 ‘고종실록’)

 

▲남한산성에 있는 광주유수 민영소 영세불망비. /박종인


월미도 사건과 민영준의 개명

1899년 8월 인천 월미도 일대가 요시카와 사타로(吉川佐太郞)라는 일본인에게 불법 매각된 사건이 터졌다. 요시카와는 ‘일-미-러 3국 석탄 저장고와 민가 53호 외 빈 땅은 대일본인 요시카와 사타로 소유’라는 팻말을 네 군데 걸어놓고 자기 땅이라 주장했다.

 

수사 결과 전 비서원경 민영주가 요시카와에게 뇌물을 받고 벌인 일이었다. 민영주의 아들 민경석은 이를 수사하던 평리원 재판장 김영준에게 사건 무마를 청탁했다. 김영준은 민경석에게 “민영환과 민병석을 죽인 뒤 러시아 공사관에 총을 쏘면 일이 덮일 것”이라고 사주했다.

 

전모가 드러나고 김영준은 교수형을 당했다.(사법품보 乙 29: ‘평리원에서 김영준·주석면·민경식·김규필의 구형에 대해 문의 1901년 3월 18일’ 등, 국사편찬위) 민영주는 유배형을 받았다가 넉 달 뒤 특별사면받았다.(1899년 음 11월 9일 ‘승정원일기’) 평리원 재판장 김영준과 이름 발음이 같았던 민영준은 민영휘로 개명했다.(황현, ‘매천야록’3권 1901년① 8.주석면의 본관 바꿈)

 

▲강원도 삼척에 있는 관찰사 민영위 유혜불망비. /박종인


망국, 그리고 토지왕 민영휘

1931년 잡지 ‘삼천리’ 1월호는 ‘조선 최대 재벌 해부’ 기사에서 민영휘 재산을 농토 5만석(600만~700만원), 가옥 100만원, 주식 100만원을 포함해 1000만원으로 추정했다. 그해 총독부 예산은 2억5000만원이었다.

 

1902년 대한제국 토지대장 ‘양안’에 따르면 민영휘는 충주에 논 133필지 54정보, 밭 90필지에 10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충주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가 도피했던 곳이다. 민영휘는 부재지주였다. 농사는 소작인 159명이 했다. 이 가운데 118명은 땅이 없다시피 한 영세농이었다.(남금자, ‘대한제국기 민영휘의 충주 일대 토지 소유와 경영 사례’, 한국근현대사연구 65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13)

 

나라가 망하던 1905년부터 민영휘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이 봇물처럼 터졌다. 전체 소송 16건 가운데 2건은 아버지 민두호, 14건은 민영휘 본인이 가져간 땅과 돈을 돌려달라는 소송이었다. 1909년 1월에는 소송 9건이 동시에 진행되기도 했다.(1909년 1월 1일 ‘대한매일신보’) 민영휘는 재산을 정리하고 상해로 이민을 시도하기도 했고, 소송을 보도한 ‘제국신문’에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1909년 2월 25일, 6월 29일 ‘대한매일신보’·이상 오미일, ‘관료에서 기업가로: 20세기 전반 민영휘 일가의 기업 투자와 자본 축적’, 역사와경계 68, 부산경남사학회, 2008, 재인용)

 

현재 서울 가회동 북촌한옥마을 제6경으로 꼽히는 가회동 31번지는 민영휘 아들 민대식 소유였다. 5447평이었다. 민영휘는 박영효와 함께 그 위쪽 1번지 땅 2519평을 공동 소유했다. 31번지 일대는 1930년대 주택 개발업자 정세권에 의해 현재 한옥 마을로 재개발됐다. 인사동에 있었던 민영휘 집은 1672평이었다.(서울역사박물관, ‘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 2019, p140) ‘은혜를 백골난망하여 세운’ 저 선정비들에는 이런 사실이 없다.

 

252.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①도덕주의 권력의 위선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 하자 판서들이 앞 다퉈 사직하였다

17세기 조선왕국
백성은 전쟁 구렁텅이
정권은 일신 안녕 추구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 진짜 동생 대신
가짜 왕제(王弟) 보내서
위기 모면
병자호란 때도 가짜 동생 보냈다가
국가 존폐 위기 맞아
백성은 인질로 끌려가는데
고관대작들은
아들 인질 피하려
줄줄이 사표 대행진
’더러운 왕' 못 섬기겠다는
’더러운 신하들'의 위선
’빗자루 쓸 듯 사라진 기강'

 

▲병자호란 때 조선군 200명이 전멸한 남한산성 '전승문'./박종인

 

‘나라는 중국에 의해 난장판이다. 국제 정세는 위기다. 국민은 도탄에 빠졌다. 권력자들은 국가 생존 대신 일신 안녕을 걱정하며 산다. 나라와 국가를 입에 달고 살지만 다 가짜다.’ 위선적 도덕주의자들이 망가뜨린 17세기 조선 왕국 이야기.

 

▲1895년 갑오개혁 정부는 인조가 항복한 자리에 있던 잠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자빠뜨리고 청 사신을 맞는 무악재 영은문도 철거해버렸다. 2년 뒤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영은문 기둥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 비석을 때려눕혔다고 역사가 스스로 바뀔 리는 만무했다. 1916년 촬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1623년 음력 3월 13일 서인 세력이 능양군 이종을 앞세워 광해군을 몰아냈다. 쿠데타 당일 능양군은 경운궁(덕수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 세 무리가 목적이 다 달랐다. 능양군은 왕권이, 서인은 권력이, 광해군에 의해 폐위되고 아들까지 살해된 인목대비는 광해의 목이 목적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인목왕후 폐위와 동생 영창대군 살해)의 패륜과 사대 본국 명나라에 대한 배신 심판 같은 거창한 목적은 명분에 불과했다.

 

목적이 죄다 달랐으니 정권도 엉망진창이었다. 그 권력이 초래한 전쟁이 두 차례 호란(胡亂)이었다. 1636년 3월 부제학 정온이 이리 상소하였다. “장수들은 농장 감독이나 하고 있고 훈신들은 자기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 지킬 계획은 없다.”(1636년 3월 2일 ‘인조실록’) 정묘호란(1627)에 이어 다시 피비린내를 감지한 늙은 대신의 경고였다. 경고는 먹히지 않았다. 그해 겨울 전쟁은 터졌고, 후세 모두가 알다시피 47일 만에 조선은 조목조목 창피한 절차를 통해 패했다.

 

그리고 근 3년 뒤인 1639년 11월 28일(양력 1640년 1월 1일) 인조가 항복한 서울 잠실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섰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조선 정부는 비석을 자빠뜨리고 청 사신을 맞던 무악재 영은문도 철거해버렸다. 2년 뒤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협회가 영은문 기둥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 대(對)중국 종속과 사대(事大)는 청산됐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위선(僞善)과 입만 살아 있는 도덕은 청산할 수 없었다. 그 기록을 본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는 출입문이 네 군데 있다. 북문은 ‘전멸(全滅)의 문’이다. 사령관 김류가 병사들을 성 밖에 매복한 청나라 병사들 가운데로 내몰아 200명을 몰살시킨 문이다. 그런데 ‘전승문(全勝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 안내문’에 따르면 문은 인조 때 만들었고, 이름을 붙인 왕은 정조다.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고 정신승리 혹은 위선의 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박종인


위선의 서막 – 가짜 왕족

1627년 2월 정묘호란 종전 후 청(후금)은 인조 동생 한 명을 볼모로 달라고 요구했다. 인조와 관료들은 정교하게 계획을 꾸몄다. ‘종실 가운데 어린 사람을 가짜 동생으로 만들자.’ 처음에는 이계선이라는 인물의 첩 소생 이보(李溥)를 왕제(王弟)로 둔갑시켰다. 이름을 부(傅)로 바꾼 뒤 수성군(遂成君) 군호까지 내렸다. 이부는 찾아온 관리에게 “본시 천민인데 어찌할꼬”라며 울었다.(1627년 2월 12일 ‘인조실록’) 들통이 나면 경을 칠 일이었으니 수성군은 없던 일이 됐다.

 

하여 이튿날 인조는 종친 원창부령 이구(李玖)를 동생으로 둔갑시켰다. 종친부 종5품 부령(副令) 이구는 하루아침에 군(君)이 되었다. 9촌 아저씨뻘인 이구는 조카의 동생이 되었다. 인조는 원창군에게 예모 강습을 단단히 시키라 일렀다. 조선 정부는 두 달 뒤 ‘이러이러하여 이구를 왕제로 만들어 오랑캐와 화친했으니 천지 부모 같으신 황제께서 애처롭게 여기시라’라고 명나라 황실에 보고서를 보냈다.(2월 14일, 4월 1일 등 ‘인조실록’) 가짜의 서막은 왕이 그렇게 열었다.

 

또 가짜 왕제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 지킬 계획은 없는’ 세월이 10년 흘렀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터졌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조선 조정에 청나라 군사가 협상을 제안했다. 협상 파트너로는 반드시 왕제(王弟)와 대신(大臣·정승)이 나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인조 정부는 ’10년 무탈'을 보장해준 가짜 왕제 원창군을 떠올렸고, 실행에 옮겼다. 이번에는 종친 중에 정4품인 능봉수(綾峯守) 이칭을 정1품 능봉군으로 격상시키고 왕의 동생으로 둔갑시켰다. 역시 대신으로 둔갑한 형조판서 심집과 동행해 산성 아래에서 종전협상을 벌였다. 청나라 장수 마부대가 물었다. “또 가짜 아닌가?”

 

가짜 대신 심집이 느닷없이 이리 말했다. “나는 평생 충과 신을 말했다. 오랑캐라도 속일 수 없다. 나는 대신이 아니요 능봉군은 왕제가 아니다.” 분기탱천한 마부대는 통역관 박난영을 처형하고 왕의 아들, 세자를 인질로 요구했다. (나만갑, ‘병자록’, 1636년 12월 16일 ‘인조실록’) 이게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었다. 가짜의 2막도 각본과 연출은 왕 인조였다.

▲남한산성 전승문./박종인


더러운 군주, 상처받은 새

명분을 입에 달고 사는 서인들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왕을 왕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조를 이렇게 불렀다. ‘더러운 왕(汚君·오군)’.

 

‘사대부가 초야에 물러나면 더러운 임금 섬기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하고(恥事汚君·치사오군) 유생이 과거 보러 나아가려 하지 않으면 하찮은 조정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한다(恥入小朝·치입소조). 다들 일망타진의 변이 일어날까 의심한다. 아아, 혼조(昏朝·광해군) 때에 실컷 듣던 말이다.’(1637년 8월 12일 ‘인조실록’ 대사헌 김영조 상소)

 

서인세력 힘으로 오른 왕위였다. 그래서 인조는 만사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관료들이 과하게 시비를 걸면 “위를 능멸하는 풍조가 생겨 군상(君上)에게 반드시 꼬치꼬치 따지며 대든다”고 주장해보기도 했다.(1629년 7월 4일 ‘인조실록’) 하지만 인조는 상소에 대한 답변은 내시에게 베껴 쓰게 하고 초안은 물항아리에 담가 찢어 뒤탈을 남기지 않았다. 하루 종일 찡그리고 웃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이긍익, ‘연려실기술’23 인조조 고사본말)

 

‘항복한 군주’와 ‘부도덕한 위선’은 그를 끝까지 옥좼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활에 상처받은 새(傷弓之鳥·상궁지조)’라 불렀다.(1643년 10월 11일 ‘인조실록’) 왕이 그러할진대 관료들은 말할 것 없었다. 격(格)이 추락했다. 영(令)도 무너져갔다.

 

더러운 관료, 그들의 위선

항복 조건은 잔인했다. 형언하기 어려운 금은보화는 물론 소현과 봉림 두 왕자 부부도 끌려갔다. 수많은 백성도 끌려갔다. 그 숫자가 50만명(최명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 인구가 200만명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2019, p62) 이는 불합리한 추정이다. 어찌 됐든 ‘너무나도 많은 조선인들이’ ‘하루 종일 수백씩 열 지어 끌려가는 것이 지속됐고, 적진(敵陣) 가운데 조선 포로가 절반인데, 뭔가를 호소하려 하면 청군이 철채찍으로 때렸다.’(나만갑, ‘병자록’)

 

청 황실은 삼공육경(三公六卿), 현직 정승과 판서 아들 또한 인질로 요구했다. 조선 정부가 저항할 싹을 제거하겠다는 뜻이다. 왕의 아들 며느리들이 끌려간 마당에 성리학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때 육경(六卿)이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고 하자 서로 판서 보직에서 교체되려고 잇달아 꾀하였다. 임금이 인질을 들여보낼 시기를 의정부 정승들에게 물었으나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 분개하였다.’(1637년 8월 14일 ‘인조실록’)

 

1639년 1월 29일 형조판서에 임명된 홍보가 즉각 사표를 던졌다. 사표가 수리되지 않자 홍보는 출근을 거부했다. 4월 21일 비변사에서 홍보를 근무 태만을 이유로 파면을 요청했다. 인조는 “아들 인질을 거부하는 것”이라 의심했다.(1639년 4월 21일 ‘인조실록’)

 

그해 11월 5일 형조판서 민형남이 병이 들었다며 사표를 냈다. 민형남은 일찌감치 아들을 인질로 보내지 않도록 여기저기 스스로 해직을 민원하고 있었다.(1639년 11월 5일 ‘인조실록’) 이듬해 4월 9일 인조는 퇴직한 민형남을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했다. 민형남은 아예 집에 드러누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헌부가 인조에게 고했다. “임금을 무시하고 법을 멸시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1640년 4월 9일, 5월 12일 ‘인조실록’)

 

1641년 11월 2일 예조판서 윤의립이 파직됐다. 그 또한 아들을 인질로 보내지 않도록 ‘늙고 병들었다’며 해임을 요구했다. 윤의립은 파면됐고 아들은 인질 신세를 면했다.(1641년 11월 2일 ‘인조실록’) 조정에는 ‘기강이 땅을 쓸어낸 듯이 없어져 육경(六卿) 자리가 장차 비게 되었다.’(1639년 2월 4일 ‘인조실록’)

 

▲남한산성 전승문 현판./박종인

훗날 돈 많고 권세 많은 이들은 포로가 된 가족을 속환금을 내고 귀국시켰다. 1637년 7월 좌의정 이성구가 인질로 간 자기 아들을 데려올 때 1500금(金)을 치렀다. 거금이었다. 이후 속환가(贖還價)가 매우 비싸져서 가난한 백성이 돌아올 희망을 아주 없어지게 하였다.(1637년 7월 7일 ‘인조실록’) ‘돈 없고 빽 없는’ 백성은 가족을 포기했다. 오군(汚君)을 들먹이며 백성을 팽개친 더러운 신하(汚臣·오신)들 덕택이다.<다음 주 계속>

 

253.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②위선의 희생, 의순공주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는 버림받은 공주님이 잠들어 있지’

1650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
”공주 보내라”며 혼인 요구
딸부자 효종은
관료-종친 딸 가운데 물색
정2품 이상 고관대작들
”딸 어리다” “혼인했다” 거부
淸사신 “2품 이상 200명인데
후보자가 4명밖에 안되나?”
비변사 “한낱 여자 희생시켜
국난을 풀 수 있다면!”
10촌 종친 금림군 이개윤
”내 딸이 아름답다” 자청
효종, 양녀로 삼아 보내며
”촌수 꼭 외우라” 당부
의정부 족두리산소에는
의순공주 자결하고
족두리 묻었다는 전설

 

온 백성이 오랑캐에게 끌려간 사이 많은 권력자들은 자기 가족 안위를 챙겼다. 자식을 보내지 않기 위해 삼공육경(三公六卿:현직 정승과 판서)은 앞 다퉈 사표를 냈다.(2021년 3월 24일 ‘박종인의 땅의 역사: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①도덕주의 권력의 위선’ 참조) 난세에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은 약자다. 가난하고 권세 없는 백성이 그 첫째다. 그리고 17세기 또 다른 희생자가 있으니, 여자(女子)였다. 오랑캐에게 한 번, 가짜 도덕군자들에게 한 번.

 

▲경기도 의정부 금오동 산45-21번지 ‘족두리 산소’. 금오동 사람들은 무덤에 의순공주 족두리가 묻혀 있다고 믿는다. 1650년 청나라 친왕 도르곤에게 강제로 시집간 의순공주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 투신자결하고 족두리만 남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추모하며 꽃다발을 가져다놓았다. 17세기 남정네들의 무책임한 위선은 많은 여자들을 불합리한 억압 속으로 몰아넣었다./박종인


청나라 도르곤의 청혼

1650년 봄날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수행원 나업이 왕에게 이리 보고하였다. “상처(喪妻)한 구왕(九王)이 조선 국왕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 국왕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저들이 모두 안다. 혼인이 성사되면 대국에서 전적으로 믿게 될 것이다.” 놀란 왕에게 나업이 말을 이었다. “현재 공주가 두 살이라 하니 저들이 ‘종실 여자 가운데 선택해도 무방하다’고 답했다.”(1650년 3월 5일 ‘효종실록’)

 

인조를 이어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였다. 함께 청나라 심양 인질 생활을 하며 개방과 교린을 꿈꿨던 형 소현세자와 달리 효종은 대청 복수심을 잔뜩 키워온 왕이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따위가 내 딸을?

 

구왕 도르곤(多爾袞·이하 도르곤)은 청 태종 홍타이지 이복동생이다. 1644년 북경을 함락시켜 명나라 마지막 숨통을 끊은 사람이 이 도르곤이었다. 1643년 홍타이지 사후 그 아들 푸린(福臨)이 아홉 살에 황위에 오르자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으로, 황숙부섭정왕에 이어 황부섭정왕으로 격을 높여가며 권력을 강화해온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그 오랑캐 권력자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미 두 달 전인 1월 28일 도르곤은 조선에 여자 간택을 위해 관리를 파견했다.(1650년 1월 28일 ‘세조장황제실록’) 그 관리가 조선 사신과 함께 와서 대기 중이었다.

 

‘두 살 먹은 딸이 있다’는 나업의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효종은 딸부자였다. 여섯은 왕비 장씨 소생이고 하나는 후궁 안빈 이씨 딸이었다. 요절한 맏딸과 결혼한 둘째를 제외하고 모두 미혼이었다. ‘경국대전’은 여자 적령기를 14세로 규정하고 있지만 13세 이하라도 논의에 따라 혼인이 가능했다.(‘경국대전’ 예전 ‘혼가(婚嫁)’) 그때 셋째 숙명공주는 열 살이었다. 1651년 이조참판 심지원 아들 심익현과 혼인할 때 숙명공주는 열한 살이었다.

 

이틀 뒤 청나라 칙사가 효종을 독대해 섭정왕 칙서를 바쳤다. ‘왕 누이나 딸, 혹은 근족이나 대신 딸 중 정숙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자(淑美懿行者·숙미의행자)를 택해 보내라.’(1650년 3월 7일 ‘효종실록’)

 

군주(君主)는 안도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자기 딸은 지켰다는 군주의 이기심이 불 댕긴, 자기 자식은 죽어도 인질로 못 보내겠다며 정승과 판서 자리를 던졌던 도덕군자들의 위선 전쟁.

 

없다가 자꾸 나타나는 딸들

3월 12일 효종은 비변사에 정2품 이상 관리들을 소집하라 명했다. 느닷없는 소집령에 한성 전체가 밤새 시끄러웠다. 이튿날 2품 이상 문신과 음서직(고위직 아버지를 통한 특채 관직)을 조사한 비변사가 보고했다. “한성 좌윤 허계 딸 외에는 다 결혼했거나 어리거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비변사가 무신까지 확대해 재조사하니 판돈령 민형남 손녀, 호조참판 여이재와 양원군 허선의 딸과 무신인 행호군 박심의 딸이 나왔다.

 

오전에는 없었던 문신 여식이 셋이 나온 것이다. 무신 박심의 딸을 대상에서 제외한 비변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네 명'만으로는 시늉만 했다고(塞責·색책) 비난받을까 두렵다.” 과연 청나라 사신들이 따졌다. “2품 이상 녹을 먹는 자가 200인 이상인데 선발된 수가 이와 같이 적음은 무슨 일인가. 품계와 무관하게 여자를 고르라.” 비변사가 보고했다. “한낱 여자를 희생시켜(捐一女子·연일여자) 국난을 풀 수 있다면 신하로서 사양할 바가 아니다. 숨겼다가 드러나게 되면 사법처리하라고 명하시라.”(이상 1650년 3월 13일 ‘비변사등록’)

 

결국 비변사는 문무관과 음서직 3품 이상으로 확대해 처녀 40명과 종실 처녀 16명을 골라냈다. 3월 14일 처녀들을 면접한 청나라 사신들이 말했다. “하나같이 못생겼다. 우리를 시험하는 것인가?”

 

3월 20일 청 사신 파흘내 일행과 조선인 역관 정명수가 창덕궁 내전으로 들어갔다. 내전에는 종실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 나온 파흘내가 말했다. “열여섯 먹은 여자는 행장을 꾸리고 열세 살 여자는 대기시키라.” 마침내 도르곤 아내가 간택된 것이다.

 

청나라로 시집간 의순공주

조정에서 저렇게 난리를 피웠지만 청나라로 보낼 처녀는 일찌감치 간택돼 있었다. 청나라 사신이 효종을 독대하고 이틀 뒤, 종실 관리부서인 종부시 제조 오준이 효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일찍이 성상 하교를 듣고 금림군(錦林君)이 스스로 말하기를 ‘딸이 있는데 자색(姿色)이 있다’고 하였나이다.” 효종이 즉시 대답했다. “이미 선택하여 들어오게 하였다(昨日已令選入矣·작일이령선입의).”(1650년 3월 9일 ‘효종실록’)

 

금림군 이개윤은 왕실 제사 담당관인 대전관(代奠官)이었다. 효종과 10촌지간이었다. 모두가 자기 딸을 감추기에 급급한데 이개윤은 혼사에 관한 ‘성상의 하교를 듣고’ 자기 딸 자랑을 했다는 뜻이었다.

 

3월 20일 청나라 사신들이 창덕궁 내전에서 간택을 하고 나온 열여섯 먹은 처녀가 바로 ‘자색이 있는’ 금림군의 딸이었다.

 

닷새 뒤인 3월 25일 효종은 금림군 딸을 의순공주로 삼았다. 금림군은 품계를 올려주고 비단과 쌀과 콩을 후하게 내렸다. 4월 22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떠났다. 효종은 한성 서쪽까지 나가서 그녀를 배웅했다. 시녀 열여섯 명과 여의(女醫), 유모가 호종했다. 도성 백성이 모두 비참해 하였다.

 

떠나기 전 공주를 호종할 사신들에게 왕이 일렀다. “누가 묻거든 이리 대답하라. 금림군은 내 5촌이고 의순공주는 내 6촌이며 양녀다. 금림의 자식이 아니다.”(1650년 3월 26일 ‘승정원일기’) 효종과 10촌 형제뻘이던 금림군은 5촌 아저씨로 둔갑했다. 11촌 조카딸은 6촌 누이며 동시에 양녀가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5월 1일 의순공주 오라비 이준과 이수가 인조릉인 장릉 종9품 참봉과 행사용 장막 관리부서 전설사 종8품 별검에 임명됐다. 금림군은 청황실에서 보낸 채단 40필과 은 1000냥을 받고 4년 뒤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떠났다.

 

국가와 왕실을 위한 충정으로 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100여 년 뒤 고증학자 이긍익은 아니라고 보았다. ‘오로지 나라를 위함이 아니라 청국에서 보내는 채폐(采幣·혼인 선물)가 많음을 탐낸 것이다. 개윤은 집이 극히 가난했는데 부자가 되었다.’(‘연려실기술’ 효종조고사본말 경인년 3월)

 

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청나라 요구도 요구지만,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도 문제라며 효종은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1650년 3월 23일 ‘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인천시 강화도 해변에 펼쳐진 나문재나물. 해변을 붉게 수놓은 나문재나물은 병자호란 때 백성을 죽음으로 처넣은 한성판윤 김경징 이름을 따 ‘경징이풀’이라고도 불린다./박종인

 

불쌍한 경징이풀, 그리고 위선

13년 전인 1637년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강화도를 지킨 부대장은 한성판윤 김경징이다. 그런데 김경징은 김포에서 자기 가족 친지만 배에 태우고 다른 사람들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빈궁이 외쳤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사람들이 적병에 차이고 밟혀 끌려가거나 빠져 죽어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다. 김경징의 아들 진표는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였다. 할머니와 어머니도 잇달아 자결했다. 일가친척 부인들도 모두 자결했다.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 강화도 갯벌에는 붉은 나문재나물이 자라는데, 사람들은 그 나물을 경징이풀이라고 불렀다.

 

많은 여자들이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환향녀(還鄕女)라 부른다. 1638년 끌려갔던 신풍부원군 장유 며느리가 돌아왔다. 장유는 인조에게 “며느리와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이혼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좌의정 최명길은 “몸을 더럽혔다는 증거가 없다”며 불가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사대부집 자제는 환향녀와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실록은 최명길을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평했다.(1638년 3월 11일 ‘인조실록’)

 

환향녀와 천보산 족두리 산소

1650년 12월 의순공주를 ‘흰 소나무를 닮은 매(白松鶻·백송골: 성해응, ‘연경재전집속집’ 15)’라 반겼던 도르곤이 죽었다. 청실록은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형 단중친왕 보로(博洛)에게 개가했다고 기록했다. 단중친왕마저 죽자 동지사로 갔던 아버지 이개윤이 황제에게 청하여 딸을 데려왔다.(1656년 2월 19일 ‘청실록’) 공주는 도르곤 목소리를 듣고자 무당을 부르며 살다가 죽었다.(1662년 8월 18일 ‘현종실록’, 이덕무, 청장관전서 69권, ‘의신공주’)

 

1948년 소설가 이광수는 ‘인조가 “환향녀들은 홍제천에서 목욕을 하고 들어오라”고 명했다’는 ‘회절강(回節江) 신화’를 만들어냈다.(이광수, ‘나의 고백, 홍제원 목욕’, 이명현, ‘환향녀 서사의 존재 양상과 의미’, 동아시아고대학 60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재인용) 수필에서나마 옛 여자들 한을 풀어준 것이다.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의정부시 금오동 산45-21, 산장아파트 뒷산이다. 사람들은 이 묘에 의순공주 족두리가 묻혀 있다고 믿는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성리학적 도덕주의와 무책임한 남정네들 위선이 만들어낸, 측은한 전설. <다음 주 계속>

 

254.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③고양 벽제관과 매국노 정명수

매국노 하나가 나라를 뒤흔든 시대가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 고양동에 있는 벽제관지(碧蹄館址)는 조선시대 명‧청 사신이 한성으로 들어오기 전 묵었던 객사다. 이들이 서대문 바깥 모화관에 이르면 국왕이 나아가 사신을 영접하곤 했다. 임진왜란 동안 반파된 벽제관은 쓰레기로 덮여 있었다.(1593년 윤11월 21일 ‘선조실록’) 인조 3년인 1625년 조선 정부는 고양군 관아를 5리 북쪽으로 이전하고 벽제관도 함께 이전했다. 6‧25 때 불탄 뒤 주춧돌만 남은 폐허가 지금 벽제관지다.

 

그 사이 대륙은 청(淸)으로 넘어갔다. 벽제관 객사는 청나라 사신이 차지했다. 사신 옆에는 사신보다 유세를 떨며 자기 나라를 등쳐먹은 자가 있었다. 직업은 역관(譯官)이었다. 청나라 권세에 올라타 오로지 일신영달에 매진했던 매국노 굴마훈(孤兒馬紅), 역관 정명수(鄭命壽)다.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던 벽제관. 청나라 사신들과 동행했던 조선인 역관 정명수는 말 그대로 나라를 탈탈 털어서 자기 영달을 추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유리 건판.


누르하치의 만주 문자 창제

1599년 후금 태조 누르하치가 몽골 문자를 응용해 만주 문자를 창제했다. 1632년 그 아들 홍타이지가 이 문자를 개량해 반포한 이후 청은 모든 문서를 한자와 만주어와 몽골어로 기록했다. 청 관리는 한문을 읽지 못했고 조선 관리는 만주어를 읽지 못했다.(김선민, ‘조선통사 굴마훈, 청역 정명수’, 명청사연구 41권, 명청사학회, 2014)

 

청 예부 관리들은 심양에 있는 소현세자에게 “모든 일은 말로 하고 문자는 쓰지 말라”고 했다.(소현세자, ‘심양일기’, 이석호 역, 양우당, 1988, p78) 한문 못 읽는 청나라 관리와 만주글 못 읽는 조선 관리 틈에서 권력이 자라났다. 조선 출신 청나라 역관이다. 문자는 몰라도 조선어와 만주어 회화에 능했던 사람들이다. 굴마훈 정명수가 그랬다.

 

조선 노비, 청나라 칙사가 되다

‘연려실기술(이긍익)’에 따르면 정명수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간 사내였다. 원래는 평안도 은산(현 순천) 관노였다가 만주어를 익히며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전담 역관으로 활동했다. 청으로 귀화한 그는 굴마훈(孤兒馬紅)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토끼’라는 뜻이다.(김선민, 앞 논문)

 

조선은 그를 ‘본래 교활하여 본국 사정을 몰래 고해바친 자’라고 했다.(1637년 2월 3일 ‘인조실록’) 청에서는 ‘조선을 다스리며 황명을 어기고 법도를 거스르며 권력을 남용한 자(把持朝鮮 違旨悖法 擅作威福‧파지조선 위지패법 천작위복)’라고 했다.(‘동문휘고’1(한국사료총서 24집), 원편 38, ‘형부 정명수 감죄 원제 자문’)

세였다. 숱한 백성이 폭압적으로 청나라로 거처를 옮겼고 숱한 여인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폭압적 수모를 겪었다. 부국강병에 더더욱 매진해야 할 숱한 권력자들은 권력으로 금력으로 자기네 몸을 보전했다.

 

난세를 극복하는 졸렬한 방법을, 천출인들 배우지 못했겠는가. 정명수는 호역(胡譯), 정역(鄭譯)으로 불리다가 칙사로 임명돼 정사(鄭使)라 불렸다. 그리고 본 대로 배운 대로 흉내 내며 나라를 영달 도구로 삼았다.

 

노비 정명수의 분풀이

병자호란 이후 기록에 나오는 조선인 출신 청나라 역관은 스무 명 정도다.(김남윤, ‘병자호란 직후 조청 관계에서 청역(淸譯)의 존재’, 한국문화 40권,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7) 김돌시, 박돌시, 이엇석 같은 이름으로 추정컨대 노비 출신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 역관들과 함께 소현세자가 살고 있는 심양관과 조선을 오가며 활동했다.

 

▲경기도 고양시 고양동에 있는 옛 중국 사신 숙소 벽제관지. 명과 청 사신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한성으로 향했다. 평안도 노비였던 정명수는 정묘호란 때 후금 포로가 된 뒤 역관으로 변신했다. 섭정왕 도르곤과 그 수하 용골대, 마부대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정명수는 권력을 휘둘렀다. 조선 지도부는 ‘굴마훈’으로 개명한 이 노비 위세에 눌려 인사와 외교를 농단당했다. 굴마훈 정명수는 그 권세로 자기 일신과 혈족 출세를 앞뒤 가리지 않고 추구했다가 청 황실에 의해 다시 노비로 추락했다. /박종인 기자

 

조선은 용골대와 마부대가 전담했다. 두 사람은 홍타이지 이복동생 도르곤의 심복이었다. 정명수는 조선 사정을 고해바치는 스파이를 자임해 칸(汗)에게서 신임을 얻었다.(1637년 2월 3일 ‘인조실록’) 청나라 실세를 등에 업은 정명수는 그 권력을 마음껏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1633년 정명수는 황해도 평산에서 관아로 달려가 현감 홍집에게 행패를 부렸다. 은산 노비 시절 자기를 곤장 때린 분풀이를 한 것이다.(1633년 10월 22일 ‘인조실록’) 행패를 익히 알고 있던 평안도관찰사 홍명구는 병자호란 때 평양에서 정명수 사위 목을 베어버렸다.(이식, 택당집 별집 9권 ‘홍명구 행장’) 설움과 원한은 복수심을 동반한 권력 남용으로 증폭됐다.

 

하늘 찌르는 오만한 권세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굶주리고 있던 조선 정부 관료들에게 청나라 역관 이신검이 귀띔했다.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면 강화가 가능하다.” 인조는 정명수에게 은 1000냥,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각각 3000냥을 은밀히 바쳤다.(1637년 1월 13일 ‘인조실록’) 17일 뒤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2월 5일 소현세자가 청으로 끌려갔다. 세자가 걸음을 멈추자 정명수는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해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1637년 2월 5일 ‘인조실록’)

 

그 위세는 이용 가치도 높았다. 용골대는 정명수를 통해 소현세자에게서 여자 속환금 명목으로 은 200냥을 받아 갔다. 정명수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여자도 돈 내고 속환하라고 요구했다.(‘심양장계’ 1640년 5월 16일) 도르곤 또한 병이 있다며 귀한 약을 ‘몰래’ ‘넉넉하게’ 구해달라고 정명수를 통해 요구했다.(앞 책 1643년 9월 6일)

 

▲평안도 출신 노비였던 정명수는 정묘호란 때 후금 포로가 된 뒤 역관으로 변신했다. 섭정왕 도르곤과 그 수하 용골대, 마부대에게서 보호를 받으며 정명수는 권력을 휘둘렀다. 조선 고관대작들은 ‘굴마훈’으로 개명한 이 조선 노비 위세에 눌려 인사와 외교를 농단당했다. 굴마훈 정명수는 그 권세로 자기 일신과 혈족의 출세를 앞뒤 가리지 않고 추구했다가 청 황실에 의해 다시 노비로 추락했다. 사진은 매국노 정명수가 제집처럼 드나들던 중국 사신 숙소 벽제관 터./박종인

 

호란 당시 조선 총사령관이던 김류는 용골대에게 자기 서녀 속환금으로 천금을 제시해 가난한 백성 원망을 샀다. 답을 듣지 못한 김류는 정명수를 끌어안고 “판사와 더불어 일을 하게 됐으니 한 집안이니 판사 청은 내가 꼭 따르겠다”며 서녀 속환을 간청했다. 일국 사령관이 일개 역관을 종1품 판사라 불렀다.(나만갑, ‘병자록(남한산성 항전일기)’, 동인 역, 주류성, 2017, p138)

 

패악과 인사 농단

‘두 나라 사정은 일체 그가 조종하는 대로 되었다. 조정에서는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올려주고 피붙이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그가 태어난 고을을 승격해 은산부라고 하였다. 명수가 임금을 업신여겼으나 삼공과 육경은 질책과 모욕을 했을 뿐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오직 돈으로 달래려 애쓸 뿐이었다.’(연려실기술 26권 인조조고사본말 ‘삼학사’)

 

조선 정부는 한심할 정도로 끌려다녔다. 이하는 ‘인조실록' 기록이다.

 

소란을 피우는 자기 기생을 제지한 정6품 병조좌랑을 정명수가 몽둥이로 때려도 그냥 보기만 했다.(1639년 12월 2일) 세자 교육기관인 심양 시강원 종3품 보덕 황감, 문학 신익전은 정명수 요구로 교체됐다. 1644년 사신으로 뽑힌 이덕형도 정명수 요구에 따라 교체됐다.(1641년 3월 8일, 25일, 1644년 4월 29일) 이듬해 사신에 임명된 호조판서 민성휘는 자기가 정명수 심복을 처형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지레 보복이 두려워 사표를 던졌다. 평안감사, 은산부사, 강서현령도 정명수가 갈아 치웠다.(1645년 11월 24일, 1647년 3월 3일)

 

정부 내에 정명수가 심어놓은 간첩도 많았다. 평안도 무장과 수령은 대부분 정명수 청으로 임명됐다. 자연히 정명수는 정보를 장악했다.(1651년 10월 23일 ‘효종실록’) 정명수가 말했다. “우리 이목이 매우 많은데 우리를 속일 수 있는가.”(1650년 3월 1일 ‘효종실록’) 정명수를 ‘판사’라 불렀던 영의정 김류는 “국가 안위가 모두 이 사람 희로(喜怒)에 달려 있다”고 했다.(1645년 8월 25일 ‘인조실록’)

 

세상이 어찌 되든 나와 내 가족만

1639년 조선 정부는 정명수를 조선정부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했다. 임명 날짜를 1628년으로 소급해달라는 청까지 들어줬다. 매부 임복창은 군역을 면제받았다.(1639년 7월 1일) 1644년 정명수가 역관에서 칙사로 승진해 조선을 찾았다. “분수에 넘게 칙사 칭호를 얻었으니 영광이 더 할 수 없다.” 영광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사생(四生)이라는 평안도 숙천 관비가 내 조카다. 일을 시키지 말라. 또 다른 조카 이옥련을 문화현령 시켜줘 고맙다. 그런데 내 부모 묘가 있는 영유현감으로 전근 보내라.” 정부는 요구대로 들어줬다.(1644년 4월 28일)

 

이듬해 이옥련은 평안도 순천군수가 됐다. 품계는 목사급인 당상 통정대부로 승급했다. 이옥련은 친척 여동생인 사생을 첩으로 삼고 살다가 다툼 끝에 사생에게 살해됐다.(1645년 윤6월 6일, 11월 20일) 역시 관노인 처남 봉영운은 만호(萬戶)에서 첨사(僉使)로, 군수로 속속 영전했으나 “나는 천한 노예”라며 사양했다.(1639년 8월 6일 등)

 

1648년 정명수는 정1품 영중추부사로 승진했다. 노비였던 조카 장계우는 그날 종4품 무관 강원도 방산 만호(萬戶)에 임명됐다.(1648년 3월 7일) 처남, 조카에서 동생 사위까지 굴마훈 정명수 혀는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소부재(無所不在)였다.

 

심판당한 매국노

1640년 마부대가 죽었다. 1648년 용골대가 죽었다. 그리고 1650년 12월 도르곤이 죽었다. 섭정에서 벗어난 청 황제 순치제는 죽은 도르곤의 권력 일체를 회수했다. 비빌 언덕 사라진 정명수는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을 보였다.’(1651년 6월 3일 ‘효종실록’) 결국 정명수는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돼 조사를 받았다.

 

1653년 4월 20일 청나라 형부에서 조선에 보낸 정명수 심문 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천작위복(擅作威福‧권력 남용)’. 죄목은 이러했다. ‘조선에 첩을 둘이나 둠. 황명에 앞서 사무 처리. 관리와 상인을 결박해 강제로 거래. 식품 부당 거래. 친인척 인사 농단. 뇌물 수수 등등.’(앞 ‘동문휘고’1 원제) 사형을 면한 정명수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본인은 노비로 추락했다.

 

조선 왕 효종은 “죽이지 않았으니 걱정스럽다”고 했다.(1653년 6월 3일 ‘효종실록’) 걱정을 없애기 위해 정부는 만호에서 현감까지 올랐던 조카 장계우를 처형했다. 정명수 고향 은산은 부(府)에서 현(縣)으로 환원시켰다. 정명수 민원으로 면천됐던 노비들은 모조리 노비로 되돌려버렸다. 패거리 가운데 심한 자는 죽이고 가벼운 자는 유배보냈다.(1653년 7월 3일, 15일 ‘효종실록’)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역관 하나가 남의 나라에 빌붙더니, 자기 집 곳간과 가족들 안녕만 챙기던 조선 지도자들 상투를 쥐고 흔들던, 그런. 정명수에게 붙은 마지막 호칭은 ‘정적(鄭賊)’, 도둑 정가놈이었다.(1657년 8월 19일 ‘효종실록’) <’위선의 계보' 끝>

 

255. 이 땅을 물들인 세 가지 봄 풍경

서산 소나무 숲 속에는 봄이 아득하였다

실용주의 학자 홍만선(1643~1715)이 봄을 즐기는 방법은 냉정했다. 그에게 꽃과 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땅에 맞게 나무를 두루 많이 심는다(隨地所宜 雜植樹木·수지소의 잡식수목). 그러면 봄에는 꽃을 즐기고 여름에는 그늘을 즐기며 가을에는 그 열매를 먹는다. 뿐이랴, 재목이 되고 쓰임이 되니 모두 자산을 늘리는 방법이다(春則賞花 夏則蔭涼 秋則食實 以至材木器用 亦皆取資於是·춘즉상화 하즉음량 추즉식실 이지재목기용 역개취자어시).(홍만선, ‘산림경제’2 나무심기(種樹·종수))

 

‘잡식수목(雜植樹木)’. 모내기를 하듯 처음부터 줄을 맞춰 심는 게 아니라 땅에 맞는 나무들을 되는 대로 심으라는 뜻이다. 그러면 봄에는 꽃을 즐기고 가을에는 그 열매를 취해 먹을 수 있고 재목은 따로 쓸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열매와 재목이 목적이며 꽃은 덤이다.

 

늘 그러하듯 이 땅에 봄이 왔고, 그 봄이 이제 간다. 가을 열매를 위해 피어난 봄꽃들이 대지로 돌아가는 그 풍경을 구경해본다.

 

▲충청남도 서산에는 봄이 폭발하는 중이다. 대대로 서산에 살아온 서산 류씨 집안 유기방씨가 고택 야산에 심은 수선화가 눈을 어지럽힌다. 봄은 꽃을 즐기는 계절이다. 꽃에 정신이 팔려 계절을 놓치면 가을에 거둘 열매도, 수확도 없다. 그래서 실용주의 학자 홍만선은 "봄에 꽃을 즐기되 가을에는 그 열매를 먹고 재목을 거둔다"라고 했다. 봄 풍경에 취하지 말라는 소리다./박종인

안개가 인도해준 고운사 산길

▲신라 말 학자 최치원은 육두품이었다. 성골과 진골 지붕을 뚫지 못하고 좌절한 그는 전국을 떠돌다 홀연히 사라졌다.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고운사는 그가 한 동안 은둔했던 절이라고들 한다. 일주문에서 그가 만든 절집 '가운루'와 '우화루'까지, 산길에 봄 안개가 자욱하다. 좌절한 사내 최치원이 걸어간 길이지만 지금은 아늑하고 신비하다. /박종인

경상북도 의성에 고운사(孤雲寺)가 있다. 신라 말 관료 최치원이 이 절에 머물다 부산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그래서 절에는 최치원 자(字)인 고운(孤雲)이 붙어 있고 부산 바다에는 또 다른 자인 해운(海雲)이 붙어 있다. 절로 가는 길은 봄이다.

 

성골, 진골 다음 신분인 육두품으로서, 최치원은 신분 상승을 꿈꾸며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서기 868년이다. 서기 874년 나이 열여덟에 외국인 대상 빈공과(賓貢科)에 붙어서 관료 생활을 했다. 10년 뒤 귀국한 최치원은 또 894년 진성여왕에게 세상을 개혁할 계책을 담은 시무 10조를 제출했다. 진성여왕은 이를 좋게 여겨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8년 2월) 아찬은 신라 열일곱 관등 가운데 여섯째 관등이다. 육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다. 거기에서 최치원은 한 풀 꺾였다.

 

결국 최치원은 혼란한 세상을 만나 운수가 꽉 막히고(蹇屯·건둔) 움직이면 매번 비난을 받으니 불우함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산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다. 책을 베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그러니 고운사로 오르며 최치원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세상 등지겠다고 작정하고 오르는 산길이었으니까. 그가 시를 쓴다. ‘머나먼 만 리 길 사막 지나오느라 / 털옷은 다 해지고 티끌만 뒤집어썼네(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원섭류사만리래 모의파진착진애)’(최치원, ‘산예(狻猊·사자)’) ‘遠’은 ‘머나먼’으로도 읽히고 최치원(崔致遠)의 ‘원(遠)’으로도 읽힌다. 조심스레 사막을 헤쳐 나오니 옷은 누더기에 먼지투성이라는 뜻이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봄날, 최치원이 쓰린 마음으로 올랐던 그 길이 평화를 준다. 느릿느릿 20분 채 안 되는 길 끝에서 사람들은 피안(彼岸)을 만난다. 텅 빈 공간 가운데 벽도 없고 담도 없는 일주문(一柱門) 하나가 서 있다. 왼쪽 개울 위로 가운루(駕雲樓)가 가로지른다. 고운사에 은둔하며 최치원이 지었다는 건물이다. 가운루와 우화루(羽化樓) 두 집을 짓고서 최치원은 또 사라졌다. 말년에는 합천 해인사에 은둔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는 아무도 모른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다녀간 장소들이 열거돼 있는데, 고운사와 해운사는 나오지 않으니 기이하다. 봄은 거기, 고운사 오솔길 안개 속에서 시작했다.

 

▲수선화.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선화를 본 추사 김정희는 그 꽃밭을 이렇게 묘사했다. '눈 감으면 그만이지만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찌 눈을 가려야 할지요.' /박종인

 

수선화로 강림한 서산의 봄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100년 된 고택에는 봄이 폭발하는 중이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IC에서 그 집 앞까지 4㎞ 도로가 차로 막히지만 꾹 참고 들어가 보라. 일 년에 딱 한 번 폭발하는 봄을 목격할 수 있다. 집 이름은 ‘유기방 고택’이다. 충청남도 민속자료 23호다. 주소는 서산시 운산면 이문안길 72-10이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세운 이 집에는 서산 류(柳) 씨가 산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 이름은 유기방(柳基方)이다. 올해 73세다. 23년 전 옆 마을에 살다가 이 집에 들어왔다. 서산 류씨는 ‘류'로 표기하지만 이 집 공식명칭은 ‘유기방 고택'이다. 집 솟을대문에는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넉넉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과연 넉넉하다. 유기방은 뒷산 대나무 뿌리를 다 뽑아버리고 수선화를 심었다. 모두 2만 평이다. 담벼락 바깥에 빈터가 생기면 그곳에 모조리 수선화를 심었다. 그물처럼 땅속에 얽힌 대나무 뿌리를 다 제거하고 꽃밭을 만들었다. “나무를 심으려면 10년을 보라”고 한 조선 학자 홍만선과 달리, 대한민국 농부 유기방은 자그마치 23년 동안 수선화를 심었다.

 

소나무와 수선화가 이리 어울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제주도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가 벗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수선화가 마치 흰 구름이 멀리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널리 쌓여 있는 듯합니다(漫漫如白雲 浩浩如白雪·만만여백운 호호여백설). 눈 감으면 그만이지만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찌 눈을 가려야 할지요.’(김정희, 완당선생전집3,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5’)

 

김정희를 황홀경에 빠뜨렸던 그 수선화가 서산에 가득 피었다. 봄이 폭발한다. 4월은 입장료를 받지 않으면 대혼란이 벌어질 정도로 인파가 몰린다. 올해는 더하다. 역병에 지친 사람들이 마스크 속에 웃음을 감추고 꽃에게서 위안을 찾는 것이다.

 

▲푸른 소나무와 노란 수선화가 이리 잘 어울린다. /박종인

 

백화산에서 사라지는 봄

서산 수선화밭에서 서쪽으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태안 백화산이 나온다. 포장 잘된 임도변에는 벚나무가 꽃비를 흩뿌린다. 봄이 간다.

 

백화산에는 태일전(太一殿)이 있었다. 태일전은 태일성, 그러니까 북극성에게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다. 태일성은 생사(生死)와 병란, 천지만물 생장을 관장하는 신이다.

 

별에게 지내는 제사를 초제(醮祭)라고 한다. 그런데 태일성이 45년마다 하늘에서 위치를 바꾸니, 태일초제를 지내는 태일전도 함께 자리를 옮겨다녔다. 고려 때 강원도 통천에 있던 태일전은 1434년 세종 때 경북 의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1477년 조선 성종 정부는 경상북도 의성에 있던 태일전(太一殿)을 백화산으로 옮겼다.(1477년 6월 1일 ‘성종실록’) 별이 위치를 바꾼 곳이 강화도냐 인천이냐 1년 가까이 격론 끝에 정부는 별이 태안으로 갔다고 결론내렸다.(1476년 8월 24일, 1477년 윤2월 18일 등 ‘성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일전은 1479년 태안으로 이건이 완료됐다.

 

▲태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을동천. 태안에 살던 김해 김씨들이 자기네 족보를 암벽에 보관한 장보암이다. 뒤쪽 암반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태을암에는 보물로 지정된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다. /박종인

 

어렵게 백화산에 태일전을 만들고 나니 1518년에는 아예 태일전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나왔다.(1518년 9월 4일 ‘중종실록’)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앉힌 사림(士林)이 주인공이다. 성리학에 어긋나는 일체를 배격했던 사림에게 도교 성전은 있을 수 없는 이단이었다. 조선 왕실은 도교 또한 중요한 종교였기에 중종은 어물쩍 이 청을 넘겨버렸다. 하지만 1528년 윤10월 3일 태일전 멍석을 돗자리로 교체하라는 어명 이후 실록에서 태일전은 등장하지 않는다.

 

별은 사라졌다. 그런데 훗날 20세기에 그 태일전 자리에 김해 김씨 가문이 태을동천(太乙洞天)을 지었다. 백제 때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태을암 경내다. 태을과 태일은 같은 말이다. 동천(洞天)은 신령이 사는 영역이다.

 

1923년 태안 지역에 사는 김해 김씨 문중은 태을암 옆 암벽에 태을동천 넉 자를 새겨넣었다. 이듬해 이들은 암벽을 뚫고 새로 만든 족보 한 질을 집어넣었다. 바위 상단 왼쪽이 족보를 넣은 곳이고 오른쪽에는 ‘가락국 기원 1883년 갑자’라고 새겨져 있다. 서기 1924년이다.

 

▲장보암 세부. 왼쪽 뭉툭한 부분에 구멍을 뚫어 족보를 넣고 바윗돌로 막았다. /박종인

 

족보를 넣은 바위를 장보암(藏譜岩)이라 한다. 김해 김씨 장보암은 경남 산청에도 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 건너 절벽에는 1896년 김해 김씨 일파가 족보를 집어넣었다. 전남 광양 다압에도 있고(김해 김씨) 충북 보은에도 있다(기계 유씨 보실과 능성 구씨 보갑). 전북 임실에 살던 경주 이씨는 고조부까지 5세대 족보를 바위에 새겨넣었다.

 

태을동천 족보는 바스러져 폐기됐다.(이왕기 등, ‘태안 김언석 가옥’, 태안문화원, 2015, p72)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충청도로 향불을 들고 별을 좇던 시절도 갔다. 고운사 숲길에서 최치원의 슬픈 뒷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추사를 황홀하게 한 수선화도 한철이다. 새털처럼 많았던, 봄날이 간다.

 

▲태을암 대웅전 앞에 있는 서양란. 공기 속에도 봄이 보인다. /박종인

 

256. 광화문광장 100년 이야기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겠노라

①광무제 고종의 한성 개조사업

▲대한제국 초대황제 광무제 고종이 만든 경운궁 석조전.

 

서울 광화문광장에 공사가 한창이다. 명분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북한산~관악산 국가 상징축과 역시 일제에 의해 왜곡된 광화문 육조거리 복원이다. ‘국가 상징축’ 위에 있는 한강대교 가운데 노들섬에는 이미 공연장인 라이브하우스가 들어섰다. 남대문에서 용산으로 가는 한강대로에는 미래를 상징하는 국가상징거리 조성이 예정돼 있다. 대한제국 황궁 덕수궁 또한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과연 광화문광장은 원래대로 복원 중인가. 과연 한강대로는 미래를 상징하는가. 과연 덕수궁과 대한제국은 제대로 복원 중인가. 100년 전 그때로 한번 돌아가서 과거와 현재를 직시(直視)해보도록 하자.

 

 

1897년 10월 12일 조선 26대 국왕 고종은 소공동 원구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황제국 대한제국을 건국했음을 하늘에 고했다. 고종은 황궁인 경운궁(덕수궁)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비롯해 황궁에 걸맞는 전각들을 건축했다. 그때 대한제국 황도 한성은 대대적인 변신을 한다. 현재 서울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복원작업은 100년 전 그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프로젝트다. 원구단(圜丘壇)은 ‘환구단’으로 표기되지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원리에 따라 ‘원구단’으로 읽어야 옳다.

 

고종이 황제가 되던 날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 광무제가 황위에 올랐다. 광무제 고종은 이날 오후 3시 황궁(皇宮) 경운궁(현 덕수궁)을 나와 동쪽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가 되었다. 여드레 뒤인 10월 20일 1년 동안 파천했던 러시아 공사관에서 궁인 엄씨가 잉태한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은(垠), 훗날 영친왕이다. 이틀 뒤 왕자를 낳은 궁인 엄씨는 귀인(貴人)으로 봉작됐다.

 

11월 21일에는 을미사변 이후 2년 동안 미뤄왔던 왕비 민씨, 명성황후 국장이 치러졌다. 상여는 경운궁 인화문을 나와 새로 만든 길을 따라 황토현으로 북상한 뒤 종로를 지나 홍릉으로 떠나갔다.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에게 제국 선포는 반가운 일이었다. 서재필은 1884년 그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칭제건원은 독립국가 조선이 입헌군주제를 통한 개혁 시발점이었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청국의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나님이 도우사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만드사”라고 찬송했다.(1897년 10월 14일 ‘독립신문’) 천제 이튿날 황제가 선언했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겠노라(欲革舊而圖新·욕혁구이도신).”(1897년 10월 13일 ‘고종실록’)

 

▲서울 소공동에 있는 원구단 황궁우. /박종인

 

무척 조급했던 나날들

이리도 성대하게 진행된 제국 선포였지만, 고종은 이상하리만큼 조급했다. 황제 등극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에도 마지막 의식을 위한 장소는 결정되지 못했다. 제국 선포를 20일 남긴 9월 21일 의전 담당관인 장례원경 김규홍이 “천제 장소를 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리고 10월 1일 고종은 청나라 사신 숙소인 옛 남별궁 자리에 원구단을 지으라고 명했다.(이상 ‘고종실록’) 공사는 10월 7일에 시작돼 닷새 만에 선포식에 맞출 수 있었다.

 

조선 창업 500년 만에 올리는 천제는 그렇게 급하게 준비됐다. 가톨릭 조선교구장 뮈텔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 왕이 천제(天祭) 장소를 준비하기 위하여 옛 남별궁 경내에서 밤낮으로 일을 하고 있다. 웃음거리다!’(‘뮈텔주교 일기’2, 천주교 명동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p211) 대한제국 정부는 제국 선포 다음날에야 한성 주재 외교관을 불러 이를 통보했다. 뮈텔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승인을 서두르지 않기로 한 듯하다”고 기록했다.(앞 책, p25)

 

천지신과 태조고황제 이성계 신위를 모실 황궁우(皇穹宇)는 아예 만들지도 못했다. 황궁우는 이듬해 9월 3일 착공해 1899년 12월 완공됐다. 그나마 신위를 넣는 감실(龕室)도 없이 비어 있었다. 감실은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 뒤인 1907년 12월에야 황궁우에 들어섰다. 신이 기거하지 않는 건물이지만, 황궁우는 3층 높이를 통해 황국의 위엄을 마음껏 과시했다.(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에 관한 연구’, 종교연구 30, 한국종교학회, 2003)

 

▲1896년 2월 고종이 경복궁에서 피신했던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망루만 남아 있다./박종인

 

예정됐던 황궁, 경운궁

황궁이 있으면 황성이다. 황제가 살면 그곳이 황궁이다. 1896년 2월 11일 조선 왕조 법궁인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을 때부터 고종은 경복궁으로 복귀할 생각이 없었다.

 

파천하던 날 왕태후인 헌종 비 효정왕후와 왕세자빈 민씨는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갔다. 석 달 뒤인 5월 16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가서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를 접견했다. 7월 16일에는 또 경운궁에서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라 다카시를 접견했다. 8월 10일 고종은 “여러 임금이 계셨던 경운궁을 수리하라”고 명했다. 8월 31일 그는 자기 초상화를 경운궁으로 옮기라 명했다. 9월 4일 역대 왕 초상화들과 왕비 민씨 관을 경운궁으로 옮겼다. 10월 31일 고종이 선언했다. “왕들 초상화가 있는 진전과 왕비 관이 있는 빈전이 경운궁에 있으니 환궁은 당연히 경운궁이다.”(이상 ‘고종실록’) 그리하여 이듬해 2월 20일 고종은 1년 전 그가 떠나온 경복궁을 버리고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한 달 뒤인 3월 15일 영국인 브라운이 통역관 최영하와 함께 고종을 알현하고 경운궁 지형을 측량했다.(1897년 4월 6일 ‘독립신문’) 목적은 석조전(石造殿) 건축이었다. 석조전 공사 와중인 1901년 황제 고종은 중화전 건축을 명했다.(‘중화전영건의궤’ 1901년 7월 13일 조칙, 김해경 등 ‘덕수궁 석조전 정원의 조성과 변천’,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3집 3호, 한국전통조경학회, 2015, 재인용)

 

제국을 선포하던 해 발의된 석조전은 제국이 멸망하고 두 달 지난 1910년 10월 완공됐다. 황궁우에 신들이 기거하지 못했듯, 황제는 이 서양식 궁전에 살아보지 못했다.

 

석조전을 발의했던 브라운은 대한제국 총세무사였다. 그가 근무하던 해관(海關)은 경운궁과 미국 공사관 사이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해관 관사를 비롯한 다른 해관 건물 부지가 있었다. 제국 황궁인 경운궁은 이 부지를 인수해 그곳에 돈덕전을 지었고 미 공사관 서쪽에는 중명전을 지었다. 총독부에 의해 철거돼 어린이 놀이터로 변했던 돈덕전은 현재 복원 중이다.

 

▲1840년 김정호 수선전도(부분). 경복궁과 종묘(위 붉은 색), 경희궁(파란색) 및 육조거리와 종로, 남대문로와 남대문은 있지만 경운궁(덕수궁, 보라색)은 존재가 미미하다. 육조거리 남쪽 황토현에서 남대문까지 뻗어 있어야 할 지금의 태평로 길도 보이지 않는다.


황제의 황성(皇城) 개조 계획

경운궁은 동과 서로 영역이 급속도로 확장됐다. 동쪽으로는 원구단을 향해 뻗어나갔다. 서쪽 영역은 근대 서양식 건물로 채워졌다. 석조전은 물론 또 다른 양식 건물인 구성헌을 궐내에 소유했고 담 하나 너머 돈덕전까지 가지게 됐다. 그리고 경운궁 북서쪽에는 역대 국왕 초상화를 모신 선원전을 건설했다.

 

경운궁으로 환궁을 결정하기 한 달 전인 1896년 9월 29일 고종은 ‘내부령 9호’를 포고했다. 현재 세종대로 사거리 황토현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종로거리와 남대문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남대문로 정비 계획이다. 이미 을미사변 전 갑오정부에 의해 입안됐던 이 치도(治道) 계획은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했던 한성부윤 이채연이 주도했다. 1896년 말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인 비숍은 “4개월 만에 극동에서 제일 지저분했던 도시가 제일 깨끗한 도시로 변모 중”이라고 했다. (이사벨라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인화 역, 살림, 1994, p497)

 

1897년 제국 선포 직후 고종은 예산을 배정해 원구단 옆으로 소공로를 신설하고 종로 청진동과 외국 공관이 밀집한 정동길도 정비했다. 한성 성곽 바깥인 용산도 정비됐다. 남대문~석우(石隅·현 삼각지 부근)~청파역~용산에 이르는 길도 정비 구역에 포함됐다.

 

그런데 이 정비 계획에 들어 있는 ‘용산(龍山)’은 지금 용산역이 있는 용산이 아니다. 현재 용산은 모래사장이 대부분이라 사평(沙平)이라 불렸다. 주민이 살고 집이 몰려 있던 옛 용산은 이보다 서쪽, 군자감 창고가 있는 마포 인근이었다. 위 치도 계획에 있는 청파역~용산 구간은 현재 서울역~한강대교 구간과 전혀 다른 별개다.

 

용산포구는 한성과 제물포를 오가는 물류 집산지였다. 1892년 제물포에 설치된 조폐소 전환국의 화폐 또한 이곳으로 들어왔다. 전환국은 1900년 군자감 창고 자리로 이전했다. 1899년 고종은 전차도 신설했다. 서대문에서 민비가 묻힌 홍릉 앞 청량리까지 개통됐던 전차는 1901년 1월 옛 용산까지 노선이 확장됐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한성 성곽 내부에서 왕조 500년 동안 유지됐던 도시 구조는 혁명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21세기 덕수궁을 지키는 대한문 수문장들. 서울광장 건너 건물 사이로 원구단 황궁우가 살짝 보인다./박종인

 

무엇을 어떻게 왜 복원하는가

그 혁명적으로 변신한 도시, 100년 전 그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식민시대가 그 대지를 덮었고 전쟁이 그 대지를 파괴했다. 언제 어디까지 복원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 광무제 고종은 제국을 선포하면서 “낡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도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그는 1894년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탈여하는 권한이 바로 군주권”(박진철, ‘고종의 왕권 강화책 연구’, 원광대학교 사학과 박사논문, 2001, p175)이라고 주장했다. 제국 선포 3년 전이다.

 

변화된 서울 중심가 모습에 놀랐던 비숍 또한 ‘(러시아공사관 피난 생활에서) 자신이 안전함을 확인한 왕은 고질적인 인습으로 되돌아갔다’고 기록했다. 그가 시도한 한성 개조 계획은 황궁 확장과 황궁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적 도시 재편 작업이었다. 황제는 1898년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며 “대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의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 황제가 살았던 황궁 경운궁과 그 주변, 그리고 광화문광장과 한강으로 뻗어나간 저 길에서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다음 주 계속>

 

257. 광화문광장 100년 이야기 ②국가 상징축과 광화문광장

‘국가 상징 거리’ 만든다더니, 일제가 만든 길 그대로…

▲1849년 무렵 김정호가 만든 '동여도'의 경조오부도. 당시 사용하던 옛길들이 표시돼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상징축과 한성 프로젝트

2006년 12월 5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세종광장 조성방안과 관광 활성화 방향’ 시민토론회에서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심발전연구단장 김선웅은 이렇게 발표했다.

 

‘일제는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근정전 앞에 총독부 건물을 일본에 의해 강화된 태평로 축에 맞추어 건설함으로써 경복궁의 남북 축을 차단함. 또한 해태상과 광화문을 이전하고 경복궁을 파괴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함. 총독관저(大)~총독부(日)~경성부청(本)~조선신궁(天)에 이르는 일제의 축이 형성됨.’(김선웅, ‘세종광장 조성방안’, ‘세종광장 조성방안과 관광 활성화 방향 학술자료집’,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6, p8)

 

3년 뒤인 2009년 국토해양부는 ‘국가상징거리 조성사업’을 계획하며 이렇게 규정했다. ‘서울은 정도전의 백악주산설에 의하여 조성된 이래 600년 역사의 중심 공간임. 경복궁~서울역~한강(노들섬)을 연결하는 7㎞를 역사와 미래를 아우르는 국가상징거리로 조성함.’ 특히 서울역~한강 구간은 ‘미래 발전 도약의 공간’으로 선언했다.(국토교통부, ‘국가상징거리 조성사업 사전기획 연구 요약문’, 2009, p7, 8) 이후 지금 도심 곳곳에서 역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서울 광화문 앞 도로는 300억원을 투입해 광장으로 변신했고 그 광장은 또 그만큼 돈을 투입해 개조 중이다. 어제 서울시장 오세훈은 현 작업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류는 없는가. 120년 전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이 개조했던 그 황성(皇城)처럼 조급함으로 인해 만인에게 걱정을 끼칠 우려는 없는가.

 

모든 역사는 땅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기록한 옛 사진과 지도에는 진실이 기록돼 있다. 이제 구경해본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국가 축’과 ‘백악주산설로 조성된 도시 한양’이 과연 진실인지.

 

내가 참서를 불태우라 했거늘”

권력을 잡고 17년째인 1417년 태종 이방원이 어전회의에서 말했다. “내가 서운관 참서(讖書)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직 있다는 말인가? 참서를 후세에 전한다면 사리를 밝게 보지 못하는 자들이 깊이 믿을 것이다. 빨리 불살라 이씨 사직에 손실됨이 없도록 하라.” 한마디 더 했다. “도읍을 천도할 때 진산부원군 하륜이 참서를 믿고 도읍을 무악으로 하자고 했다. 나는 믿지 않고 한양으로 도읍을 정했다.”(1417년 6월 1일 ‘태종실록’) 반년 뒤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박은과 조말생이 서운관에 앉아서 음양서(陰陽書)를 모조리 찾아내 요망하고 허탄하여 정상에서 어그러진 것을 골라 불태웠다.’(같은 해 12월 15일 ‘태종실록’)

 

이상한 일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양 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학대사와 정도전과 하륜 사이에 풍수지리 논쟁을 거쳐 이뤄진 일’이 아니었나. 그런데 태종은 풍수지리를 논하는 참서를 태우라 명하고 본인은 “나는 믿지 않았다”고 주장하다니.

 

결론부터 이야기한다. 조선 수도 한성은 오로지 실용적인 기준에 따라 건설된 도시다. 한성 천도와 한성 도시 계획에 풍수지리는 개입되지 않았다. 대신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어서’(1394년 8월 24일 ‘태조실록’), ‘또다시 (큰 비용을 들여) 토목 사업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1404년 10월 4일 ‘태종실록’) 좌청룡 우백호 같은 풍수지리적 해석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다. 게다가 600년 뒤 이 개명 천지 공화국 시대에 도시를 갈아엎는 데 쓰이는 도시 괴담이다.

 

이성계-방원 부자의 천도 계획

고려를 타도한 이성계에게 개성은 떠나야 할 곳이었다. 그래서 많은 인력을 들여 전국으로 새 도읍지를 물색했는데, 그 가운데 계룡산과 한양이 있었다. 계룡산은 너무 멀었고 한양은 가까웠다. 1393년 2월 태조가 계룡산 현장에서 가부를 묻자 무학은 “능히 알 수 없다”고 답했다.(1393년 2월 11일 ‘태조실록’) 그래도 태조는 계룡산 천도를 결정했다. 대토목공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그해 12월 경기좌우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쳤다며 무악(毋岳)을 후보지로 추천했다. 무악은 지금 서울 연희동 부근이다. 이성계는 재상들에게 뜻을 물었다. 정도전이 말했다. “다스림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술수를 쓰는 자(術數者·술수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는가.”(1394년 8월 12일 ‘태조실록’) 태조는 남경(한양) 옛 고려 궁터에 들러 이리 말했다. “조운이 통하고 백성도 편리할 땅이다.”(같은 해 8월 13일 ‘태조실록’) 한양이 도읍으로 확정됐다.

 

그리고 ‘왕자의 난’으로 아들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한 뒤, 정종 동생 이방원이 왕이 됐다. 1404년 9월 13일 태종은 한양 재천도를 선언하고 궁궐수보도감을 설치했다. 그런데 하륜이 또 무악 천도를 주장했다. 그해 10월 태종은 대신, 지관들과 함께 무악을 답사했다. 지관들이 하나같이 무악이 좋다고 주장했다. 태종이 이리 힐난했다. “태조께서 물을 때는 왜 다 나쁜 땅이라 했는가.” 우물쭈물대는 지관들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왜 한양에 있는 궁실을 놔두고 나더러 이 풀 우거진 땅에 토목공사를 하라고 하는가!”(1404년 10월 4일 ‘태조실록’) 지관들을 불신하고 막대한 비용을 추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틀 뒤 태종은 측근 다섯을 데리고 종묘로 들어가 동전을 던졌다. ‘척전(擲錢)’이라는 점이다. 개성과 무악과 한양 가운데 한양이 길2, 흉1로 나왔다.(같은 해 10월 6일 ‘태종실록’) 측근들만 참석하고, 흔적도 남지 않는 동전던지기로 결정을 했으니 이는 결론을 정해놓았다는 뜻이었다. 한양은 그렇게 조선 수도로 결정됐다.

 

무학과 정도전, 종말론적 신화

여기까지가 한양이 조선 왕국 수도로 결정된 경위다. 시작은 풍수지리였으나 천도와 재천도 과정에는 도시 기능과 경비 절감이라는 합리적인 기준이 철저하게 작용했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백악산과 인왕산을 두고 논쟁을 벌이다 정도전의 백악주산설이 승리했다, 그래서 무학이 “200년 뒤 내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리라”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는 공식 기록 어디에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무학-정도전 논쟁과 백악주산설은 차천로(1556~1615)가 쓴 ‘오산설림(五山說林)’에 처음 등장한다. 임진왜란 후 나라가 피폐해지며 ‘땅 잘못 골라 나라 망했다’는 종말론적인 신화가 양산되면서 생긴 신화라는 것이다.(이태진, ‘한양 천도와 풍수설의 패퇴’, 한국사 시민강좌14, 일조각, 1994) 오히려 한양으로 재천도한 태종은 풍수를 포함한 도참 일체를 불신하며 이를 일망타진하라고까지 선언했다. 그 어떤 기록에도 도읍 결정 과정에 주산 논쟁은 눈에 띄지 않는다. 백악주산설이 근거가 없으니, ‘풍수설에 입각해 설계한 한양의 백악-경복궁-남대문-관악산 축선(軸線)’ 또한 근거가 없다.

 

▲1907년(추정) 육조거리 실측도면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광화문~육조거리 축이 휘어 있다. 총독부가 왜곡한 축이 아닌, 본래의 축이다. 가운데 축선은 필자 표시./국가기록원

 

도시 괴담과 국가 대토목 사업

그러니 일제에 의해 국가 축이 훼손됐다는 주장 또한 괴담이다. 없는 축이 어떻게 훼손되는가. 사진을 보면 명확하다. 위쪽 ‘육조거리 실측도(1907)’에 붉은 색으로 표시된 육조거리는 21세기 세종대로와 방향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광화문~월대 구간만 서쪽으로 기울었을 뿐, 육조거리 자체는 100년 전과 지금 똑같다. 무슨 훼손이 있었는가. 그 ‘국가 축’이 일제강점기에 확장돼 광화문통이 되었고, 세종대로가 되었다. 2019년 서울시 공모에 당선된 현 광화문광장 디자인도 동일하다.

 

▲1930년대(추정) 이후 경복궁 쪽에서 촬영한 조선신궁-경성부청-총독부. 조선시대 육조대로와 남대문은 변함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총독관저(大)~총독부(日)~경성부청(本)~조선신궁(天)에 이르는 일제의 축’을 바로잡겠다는 ‘세종광장 조성방안’은 더욱 어이없다. 위 사진을 보면 총독부~경성부청~조선신궁은 이 축에서 동쪽으로 한참 치우쳐 있다. 그런데 총독부와 경성부 청사는 여전히 옛 ‘조선의 축’ 선상에서 그 축 방향으로 건축됐다.

 

이 세 건물이 일본이 의도한 축이라고 주장하려면 논리와 증거가 필요한데, 두 가지가 다 없다. 조선신궁은 1925년 열 군데 후보지 가운데 선정된 남산에 건설됐다. 입지 선정기준에는 ‘일본의 축' 같은 고려는 없었다. 경성부청은 1923년 남대문 옆 남대문소학교가 부지로 선정됐다가 조선인 유력자들의 반대로 화재로 불탄 경성일보 자리인 현 장소에 1926년 건축됐다. 이들 건물은 식민 수도 도시 공간의 상황적 필요에 따라 실행된 임기응변적 조치의 산물이었다. 식민권력은 조선의 전통 풍수를 정책 대상으로 삼을 만큼 아둔하지도, 방방곡곡 혈맥을 찾아다닐 만큼 주도면밀하지도 않았다.(이상 김백영, ‘상징공간의 변용과 집합기억의 발명’, 공간과 사회 28집, 한국공간환경학회, 2007)

 

그런데 대한민국 국토교통부는 이를 역사적 근거로 삼아 ‘국가상징거리 조성사업’을 입안하고 실행 중이다. 서울시는 2009년 ‘세종광장 조성방안’을 통해 광장을 만들었고, 동일한 논리로 지금 그 광장을 뒤집어엎는 중이다. 아둔한가? 주도면밀한가? 둘 다인가?

 

▲도로와 주요 시설을 표시한 위 1945년 항공사진. 가운데 전투기 꼬리 부분에 총독부가 보이고, 일본군 병영 한가운데 직선도로가 보인다. 이 길이 조선 왕조 내내 백성이 사용했던 옛길이다. 국방홍보원 앞에서 현재 미군 20번 게이트로 막혀 있다. 이 길 오른편 산등성이로 조선통신사들이 걸어갔던 또 다른 길이 나 있다. 정부에서 ‘국가상징축 미래 발전 도약 공간’으로 조성 중인 한강대로는 이 병영 왼쪽, 철길 옆에 있다. 일본군이 건설한 도로다./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원출처: 미국립문서보관청(NARA))

 

일본군의 유산 ‘국가상징거리’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위 사진 한 장에 광화문광장과 국가상징축 복원 작업의 모순이 다 폭로돼 있다. 1945년 9월 4일 미군이 서울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 전투기 꼬리 아래에 총독부가 보인다. 그리고 전투기 아래에 당시 일본군 병영이 보이고, 병영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가 보인다.

 

이 길이 바로 조선왕조 내내 백성이 사용했던 후암동 옛길, 두텁바위로다. 지금은 미군 기지 20번 게이트로 막혀 있다. 게이트를 들어가면 남쪽으로 길이 이어지고 동쪽으로 길이 갈라진다. 이 길은 조선통신사들이 한강을 건널 때 걸어갔던 길이다.(김천수,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용산구, 2021, p115~117) 남향 길 끝은 용산가족공원이다. 동쪽 길 끝은 반포대교다. 일본군이 직선화를 했지만 엄연히 존재했고 존재할 역사다.

 

▲경조오부도 남서쪽 부분. 옛길들을 색으로 표시했다. 현재 '한강대로'와 노들섬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 표시는 필자. /한국학중앙연구원.

 

통신사와 백성이 걸었던 이 길들은 ‘국가상징거리’ 계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조가 화성 행궁으로 행차할 때 이용했던 옛 용산길(삼각지~원효로 일대)도 없다. 복원할 역사 혹은 미래에서 삭제된 것이다.

 

▲미군기지 20번게이트로 막힌 옛 후암동길 현 지명은 두텁바위로다. 용산고등학교 남쪽 국방홍보원 가는 길이다. /박종인

 

그렇다면 무엇이 대한민국의 상징이라는 말인가. 사진 왼쪽으로 서울역과 철길이 보인다. 병영과 철길 사이에 도로가 있는데, 이 길이 1908년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부가 만든 현재의 한강대로다. 국토교통부는 이 길을 대한민국 미래를 상징하는 ‘국가상징축 미래 발전 도약 공간’으로 조성 중이다.

 

도로 끝은 한강대교로 연결되는데 다리 가운데에는 노들섬이 있다. 옛 이름은 중지도다. 1917년 총독부가 다리 지지 시설로 만든 인공섬이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이 노들섬을 국가상징축의 상징적 종점으로 설계하고 지난해 콘서트 하우스를 건설했다.

 

하지만 신용산 근대화는 애초부터 조선과 무관했다. 일본인에 의해 오늘날 용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철도를 따라 서쪽 공간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철길 동쪽이 개발된 것은 일본 군사 기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신주백, ‘용산과 일본군 용산 기지의 변화’, 서울학연구 29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7)

 

위에서 던진 질문을 다시 해보자. 아둔한가? 주도면밀한가? 둘 다인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역사를 복원하려는 강한 의지.’(2007년 11월 서울시장 오세훈, ‘세종로의 비밀: 추천사’, 중앙북스, 2007) ‘3·1운동, 4·19, 1987년 민주항쟁에서 촛불시민항쟁까지 늘 광화문광장이 지키고 있었다.’(2019년 1월 서울시장 박원순, ‘광화문광장 설계공모 결과 발표 기자회견’) <다음 주 계속>

 

▲광화문광장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육조거리 유구. /박종인


 258. 돈덕전 앞 회화나무의 비애

400살 먹은 회화나무, 조급한 역사복원에 쫓겨난다

▲100년 전 덕수궁 돈덕전. 정면에 거대한 회화나무가 보인다. 덕수궁(경운궁)을 지키는 가장 늙고 가장 거대한 생명체다. 사진에서는 왼쪽이다. /국립현대미술관

 

1. 광무제 고종의 한성 개조사업 :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겠노라”

2. 국가 상징축과 광화문광장 : ‘국가 상징 거리’ 만든다더니, 일제가 만든 길 그대로…

 

‘국가상징축’ 회복을 위한 광화문광장 건설 공사는 덕수궁 복원 계획과 연결된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상징축을 복원하는 작업이 광화문광장 공사이고, 덕수궁 복원 사업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 훼손, 훼철된 원형 복원’이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외세에 의해 왜곡, 단절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연결해 국가 정체성 확립.’(문화재청, ’2005년 덕수궁 복원 정비 기본 계획') 그래서 복원 기준 연대는 1904년 대화재 후 고종 중창 반포 시점인 ‘1907년’이다. 이제 덕수궁 주요 포인트 세 군데만 답사해본다. ‘국가상징축’으로 시작된 광화문광장 100년사는 덕수궁 복원공사에서 극치를 이룬다.

 

▲고종과 두 아들 이척(순종), 이은(영친왕:맨 왼쪽 아이가 이은이다). 고종은 독일 군복과 철모를 착용하고 있다. /버튼 홈즈, ‘1901년 서울을 걷다’, 푸른길, 2012, p194


기이한 수문장 교대식

조선왕조 518년 동안 덕수궁에 산 왕은 두 사람이다. 처음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 망명하려다 이듬해 환도한 선조다. 경복궁이 불타고 사라져 성종 큰형인 월산대군 집을 궁궐로 삼았다. 두 번째는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가 이듬해 환궁한 고종이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덕수궁은 황궁(皇宮)이 되었다. 그 사이 왕들은 창덕궁에 살았다. 광해군 3년(1611년)부터 고종이 퇴위한 1907년까지 296년 동안 덕수궁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다.

 

대한제국 군복은 서양식이다. 게다가 고종은 신식 군복 마니아였다. 1900년 육군참장(현 준장급) 백성기는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나라 군복을 꼭 외국에서 사와야 하겠는가?”(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그 무렵 두 아들 이척, 이은과 찍은 사진 속에서 고종은 독일 군복과 철모를 착용하고 있다.(버튼 홈즈, ‘1901년 서울을 걷다', 푸른길, 2012, p194) 그런데 1996년부터 25년째 그 대한문 앞에서 열리는 수문장 교대식 군사들은 영·정조 시대 군복을 입고 있으니, 황궁 문턱을 넘기 전부터 불편하다.

 

▲광무제 고종이 만든 경운궁 석조전. 전통 정전인 중화전과 함께 대한제국 정전으로 예정됐지만, 망국 후에야 완공되고 결국 이왕가미술관 구관으로 이용됐다. 앞 정원은 중화전 행각을 철거하고 1938년에 조성한 정원이다. /박종인

 

총독부가 만든 ‘황제의 정원'?

황궁 경운궁에는 정전(正殿)이 두 군데였다. 하나는 중화전이다. 1901년 시작된 중화전 건축은 1904년 끝났다. 그해 바로 대화재로 사라진 뒤 2층짜리가 1층으로 축소 재건됐다. 경복궁 근정전처럼 사방에 행각을 짓고 그 내부에 중화전을 재건했다. 방향은 남서향이다.

 

또 하나는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다. 대한제국 선포 7개월 전인 1897년 3월 대한제국 총세무사인 영국인 브라운의 측량으로 시작한 석조전 건축은 한일병합조약 두 달 뒤인 1910년 10월 종료됐다. 건물 방향은 정남향이다.

 

을사조약(1905),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조약(1907)으로 제국이 껍데기만 남아 있던 1908년, 조선통감부는 석조전을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했다.(1908년 2월 19일 ‘경성신보’) 이미 망국 전부터 석조전은 신식 정전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로도 고종은 이 석조전을 연회장으로 이용했을 뿐 집무실이나 침전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고 두 달 뒤인 1910년 10월 석조전이 완공됐다. 이듬해 3월 총독부는 중화전 서쪽 행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외국 대정원을 모방한 대정원(大庭園) 조성 공사를 시작했다.(1911년 2월 28일 등 ‘매일신보’, 이상 김해경 등 ‘덕수궁 석조전 정원의 조성과 변천’,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3집 3호, 한국전통조경학회, 2015, 재인용)

 

2021년 현재 석조전 앞 정원은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성됐다. 행각을 철거하고 박석들을 걷어내고 잔디를 심었다. 1938년 3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쓰이는 이왕가미술관 건물이 준공됐다. 신축 건물은 조선 고미술을 전시하는 신관(新館), 석조전은 일본 근대 미술을 전시하는 구관(舊館)이 됐다. 1938년 9월 두 건물 가운데 있는 정원에 십자형 통로를 내고 분수를 설치했다. 석조전 맞은편에는 기둥을 올리고 지붕을 얹고 등나무를 심고 벤치를 설치했다. 2021년 공화국 시대 덕수궁을 찾는 대한민국 국민이 석조전 정원을 보며 쉬는 그 쉼터가 이 자리다.(김해경 등, 앞 논문)

 

바로 이 정원을 문화재청은 ‘황제의 정원’이라고 부른다.(‘춘설이 온 날 김경란과 황제의 정원을 산책하다’, 2020년 2월 27일 ‘월간문화재사랑’, 문화재청)

 

사라진 중화전 행각과 비석

그렇다면 망국 후 총독부가 만든 이 정원은 어찌할 것인가. 총독부가 없애버린 중화전 행각은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면 망국 후 광복까지 해마다 온 가족이 총독부에서 180만 엔씩 세비를 받으며 일본 천황가 조선 왕족으로 살았던 고종과 순종을 황제라고 부를 것인가. 그렇다면 ‘외세에 의해 왜곡, 단절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연결한 국가 정체성 확립’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무엇보다 ‘1907년’이라는 덕수궁 복원 기준연도는 어디로 갔는가. 정원은 총독부 때 일본이 원형을 훼손하고 만든 구조물 아닌가. 총독부가 훼손한 행각은 2005년 첫 복원 계획 때부터 복원이 예정돼 있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없다.

 

▲고종이 내린 시제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등이 쓴 시를 새긴 비석. 시는 1909년에 썼고 비석은 1935년 덕수궁 정관헌 옆뜰에 세웠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또 그렇다면 정관헌 옆 뜰에 묻혀 있는 비석(碑石)은 어찌할 것인가. 1909년 전 황제 고종을 알현한 전현직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소네 아라스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비서관 모리 오노리가 ‘일한합방’ 축시를 썼다. 태황제 고종이 내린 시제에 맞춘 시는 이완용의 ‘두 땅이 한집 되니 천하가 봄이라네(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로 끝났다.

 

1935년 조선왕공족을 관리하는 이왕직사무소는 이 시를 돌에 새겨 문화재청이 ‘고종의 연회 장소’라는(문화재청, 위 같은 글) 조선왕조 역대 왕 어진(御眞) 봉안소 정관헌(靜觀軒) 동쪽 뜰에 세웠다. 비석 뒷면에는 ‘태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다(大加嘉賞·대가가상)’고 적혀 있었다.(오다 쇼고, ‘덕수궁사(德壽宮史)’, 1938년, p75) 해방 후 땅에 묻은 이 비석은 어찌할 것인가.


쫓겨나는 역사, 400살 회화나무

비가 내리던 1907년 6월 11일 화요일 오후 2시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경운궁을 방문했다. 데라우치는 경운궁 북서쪽 돈덕전 황제와 황태자, 영친왕에게 속사포 4문과 기관포 2문을 진헌했다.(야마모토 시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기’, 이순우,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 재인용)

 

▲1907년 6월 11일 덕수궁 돈덕전에서 고종에게 대포를 헌상하는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그 부대. 왼쪽 벽면에 회화나무가 보인다. /'日本之朝鮮-일제가 강점한 조선’

 

돈덕전은 1902년 무렵 대한제국 세관인 해관(海關) 부지에 지은 양식 연회장이다. 한 달 뒤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졌다. 고종은 강제 퇴위되고 황태자 이척이 황제가 됐다. 황제 등극식 역시 이 돈덕전에서 열렸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이후 돈덕전은 철거돼 놀이터로 변했다. 사라졌던 그 돈덕전은 지금 문화재청이 복원 중이다.

 

17세기 이후 융희제 순종 즉위까지 그 지난한 역사를 거대한 생명체 하나가 모조리 목격했다. 이 돈덕전 앞에 서 있는 근 400살 먹은 늙은 회화나무다. 덕수궁 내에서 가장 큰 회화나무다. 돈덕전 옛 사진에는 이 회화나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 나무의 가치에 대해서는 2016년 문화재청이 만든 ‘덕수궁 돈덕전 복원 조사 연구’ 보고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회화나무의 역사적 가치 보존할 것.’(p263) ‘1670년 식재 추정. 회화나무 유지하여 정면 외부 공간을 조성해야 함.’(p153). 한마디로 노거수(老巨樹)가 담고 있는 역사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문화재청에 의해, 저 모든 역사를 한꺼번에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요 체험자인 이 늙은 나무가 곧 13m 전방으로 이사 갈 운명이다. “건물과 맞붙어 있어 그냥 놔두면 생장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미 2년 전 잔뿌리를 잘라내 이식 준비를 마쳤다.”(문화재청)

 

근거가 부실한 ‘신축 건물’을 위해 400년을 그 자리에서 늙어온 나무 하나가 몸을 옮겨야 한다. 원래 벽돌식 건물인 돈덕전은 안정성 문제로 일부 철골 프레임 구조로 건축 중이다. 원 설계도면도 없어서 많은 부분은 상상에 의지해 작업 중이다.

 

노거수가 담고 있는 역사성이 가치로운가, 철골 프레임으로 건축 중인 건물의 역사성이 가치로운가. 회화나무 이식은 그 역사성을 한순간에 짓밟는 행위다. 나무는 그 자체가 문화재다. 저 큰 나무를 옮길 의지라면 제자리에서 충분히 살릴 수 있다.”(환경발전재단 이사장 심왕섭·전 대한전문건설협회 조경식재공사협의회장)

 

▲1670년 무렵부터 근 400년을 현 돈덕전 터에 살고 있는 회화나무. 그 오래고 지난한 역사를 목격한 거대한 생명체다. 철골 프레임을 섞어 신축 중인 돈덕전 건물과 맞붙어 있는 탓에, '생장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 터를 떠나 앞쪽으로 이식될 예정이다. /박종인

 

황당한 ‘고종의 길'

그 돈덕전에서 담장 하나 너머 ‘고종의 길’이 있다. 1896년 2월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할 때 이용했다는 길이다. 문화재청은 이 길을 미국 대사관에서 매입하고 25억원을 투입해 고종의 길로 꾸몄다.

 

한 나라 군주의 도주로를 현창하는 이유도 알 수 없거니와, 1895년 5월 당시 미국공사 알렌이 작성한 주변 실측도를 보면 이 길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인지 알 수 있다. 당시 이 길은 사방으로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영국공사관과 미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한 출입구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미·영·러 3국이 소통하던 길이었다. ‘엄 상궁과 함께 가마에 탄 고종이’ ‘경복궁을 출발해’ ‘이 꽉 막힌 길 담장을 넘어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진입하기는 ‘불가능’했다.

1895년 5월 당시 미국공사였던 H. 알렌이 작성한 미공사관 부근 실측도면. 문화재청에서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 때 이용했다고 하는 '고종의 길'(붉은색)은 영국, 미국, 러시아공사관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담장으로 막혀 있었다. 경복궁에서 고종 일행이 이 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는 일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고종의 길 복원 공사를 강행했다. 왜? 역사적 사실이 어찌됐든 ‘일본에 저항해 지켜내려 했던 나라 대한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2005년 덕수궁 복원 계획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종은 열국과 긴밀한 외교적 협조를 통해 일제의 교묘한 침략과 음모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내고자 했다.’

***

현 미 대사관저와 덕수궁 사이에 난 덕수궁길은 일제강점기에 만든 신작로다. ‘1907년’에는 없던 길이다. 그 북쪽 덕수초등학교 옆에 서울시는 소공원을 만들었다. 소공원에 ‘자엽자두나무’ 다섯 그루가 있다. 서울시는 이 나무를 ‘대한제국의 상징’이라고 했다.(2021년 3월 11일 서울시 ‘덕수궁길 정비’ 보도자료) 눈처럼 하얀 오얏꽃과 중앙아시아 원산인 붉은 자엽자두꽃은 완전히 다른 수종이다. 가짜 오얏꽃은 활짝 피고, 육조거리는 영문도 모르며 파헤쳐지고, 나이테 한 줄 한 줄이 역사인 늙은 회화나무는 쫓겨난다. 500년 고도(古都)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끝>

 

▲선원전 터 앞 덕수초등학교 옆에 있는 소공원의 '자엽자두나무'.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박종인

 

터무니없는 ‘국가상징축’ 주장

유물 쏟아지는 육조거리

 

지난 10일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공사 현장에서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발표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외국군과 맞섰던 흥선대원군 시절 합참본부 ‘삼군부’ 청사도 실체를 드러냈다. 삼군부가 사라지고 처음 있는 일이다.

 

광화문광장 복원을 주도한 前 국가건축정책위원장 승효상은 2009년 이렇게 주장했다. “육조거리 위치를 정확히 찾으면 세종문화회관 쪽에 붙게 되는데 이러면 서울의 정확한 옛 축을 볼 수 있다.”(2009년 8월 25일 ‘경향신문’) 2019년 1월 28일 광화문광장 공모 당선작 발표회에서도 심사위원장인 그가 말했다. “육조가로로 쓰였던 곳인 만큼 가운데가 공간이 비워진 곳이어서 유물이 없다. 다만 육조를 형성했던 관어가의 담장 부분은 기초가 발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땅을 파보니 담장 정도가 아니라 삼군부 행랑과 다른 건물터들이 튀어나오는 중이다. ‘원래 육조거리’라고 그가 주장한 공간이 텅 빈 거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서울의 정확한 옛 축’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한산~북악산~관악산을 이은 소위 '국가상징축'.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 이유가 있다. 광화문광장 공사 배경에는 ‘정도전의 백악주산론’이 있다. 600년 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도읍지와 궁궐을 북한산~북악산~관악산 축을 기준으로 설계했다는 이론이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삼각산과 관악산을 잇는 직선상에 경복궁을 축으로 놓습니다. 경복궁을 맨 앞으로 그 뒤로 육조거리, 남대문이 이어지도록 말이죠.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이 축을 틀어버렸습니다.”(승효상, 2013년 1월 ‘월간 디자인’ 인터뷰)

 

터무니없다. 그런 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도에 북한산~북악산~관악산을 잇는 직선을 그어보면 경복궁과 육조거리는 그 축에서 동쪽으로 비껴나 있다. ‘정도전 한양 도시 계획’은 선 하나만 그어 봐도 알 수 있는 괴담이다. 기록상으로도 정도전-무학대사 신화는 임진왜란 이후 탄생한 전설에 불과하다.

 

지난달에도 승 전 위원장은 이렇게 썼다. ‘정도전이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연결선 위에 경복궁을 두고 광화문 앞의 길을 넓혀 양옆에 관아를 설치하면서 육조거리라는 광장 같은 길이 나타났다. 이곳은 오늘날 국가의 축으로도 상징성을 가지며 우리 모두에게 깊이 인식되어 있다.’(2021년 4월 21일 ‘경향신문’)

 

지도 한 장과 역사적 기록이 말해준다. 있지도 않은 축(軸), 그래서 일제에 의한 훼손 자체가 불가능한 축을 복원하겠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터무니없다.

 

259. 풍수(風水)로 세종을 현혹한 술사(術士) 최양선

“다시는 저 허망한 술사를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장면1 – 파괴된 왕자 태실들

경상북도 성주에 가면 세종대왕자 태실(胎室)이 있다. 1438~1442년 연간에 세종 슬하 열여덟 왕자와 손자 단종 태실을 모아 만든 집단 태실이다. 이전 세 왕은 왕자 태실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1443년 세종은 손자 홍위(단종) 태를 여기 묻을 때 근처에 자기 조상 묘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풍수학 제조 이정녕을 해임하고 그 묘를 이장시켰다.(1443년 12월 11일 ‘세종실록’)

 

훗날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사이 좋게 모여 있던 형제 태실 가운데 쿠데타를 반대한 형제들 태실은 파괴됐고 왕이 된 수양대군 태실 앞에는 거북이가 비석을 이고 앉아 있다.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한 길지(吉地)’(1436년 8월 8일 ‘세종실록’)에 태실을 만들었어도 자식들 머리 위 피바람은 피하지 못했다.

 

▲15세기 과학시대를 이끌었던 합리주의 군주 세종은 최양선이라는 풍수가에게 귀를 열고 많은 국가 토목사업을 진행했다. 사진은 경기도 여주 영릉(英陵)에 있는 세종의 발명품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모형. /박종인

 

장면2 – 태양을 직시하는 일성정시의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에 가면 입구 오른쪽에 세종 동상이, 그 옆으로 과학동산이 나온다. 15세기 초반 과학의 시대, 세종과 그 이하 천재들이 만든 과학성과물 복원품들이 전시돼 있다. 1437년에 세종이 발명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모형도 태양을 직시한다. 일성정시의는 해시계와 별시계를 겸용해 밤낮으로 정확하게 시각을 알려주는 최첨단 기계였다.

 

세종은 호기심 많은 지도자였다.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호기심을 논리로 해석해 과학으로 전환시키는 천재 과학자였다. 그런데. 1430년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술사(術士)가 세종 앞에 나타나 1444년까지 호기심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과학적 지도자를 풍수 논쟁을 몰아넣었다. 그래서? 14년 시달림 끝에 세종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후로 최양선이 국가 논의에 참여하면 용서하지 않으리라.”(1444년 윤7월 8일 ‘세종실록’) 그 술사 최양선 이야기.

 

▲경북 성주에 성군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열여덟 왕자와 손자 단종 태실은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서 쑥대밭이 됐다. 계유정난을 반대한 수양대군 형제들 태실은 사진처럼 두서없이 파괴됐다. 왕실 정치는 풍수를 통해 왕실 안정을 희구했던 아버지 세종 바램과 달리 피비린내로 뒤덮였다. 앞쪽 오른쪽 귀부가 있는 태실이 수양대군 태실이다. /박종인

 

풍수지리, 정치 그리고 조선 왕조

태조와 태종이 한성을 도읍으로 정할 때 도시계획 기준은 풍수도 아니요 주술도 아니요 ‘백성이 살 너른 땅과 편리한 교통’이었다.(1394년 8월 13일 ‘태조실록’) 그런데 나중에 왕이 된 세자 충녕에게 그가 이리 말한다. ‘지리를 쓰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일 쓴다면 정밀히 하여야 한다.’(1433년 7월 15일 ‘세종실록’) 합리적이라면 풍수도 수용하라는 당부였고, 많은 사대부들이 땅 기운을 따지는 운명론을 신봉하는 터라 풍수지리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말라는 뜻이도 했다. 효성 깊고 호기심 많은 세종은 이를 지켰다. 그리고 그 앞에 최양선이 나타났다.

 

최양선, 국책 토목공사에 데뷔하다

재위 12년째인 1430년 전직 서운관 하급 관리 최양선이 세종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헌릉(獻陵) 앞을 지나는 고개를 막지 않으면 산맥(山脈)이 끊겨 길하지 못하다.”(1430년 7월 7일 ‘세종실록’) 헌릉은 지금 서울 내곡동에 있는 태종릉이다. 그런데 고갯길이 뚫려서 헌릉 지맥을 사람들이 짓밟고 다니니 ‘끊긴 산에는 장례할 수 없으므로’ 통행을 금지하고 흙으로 산을 다시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최양선이 말한 고개는 천천현(穿川峴)이다. 한성에서 양재를 거쳐 삼남(三南)으로 내려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러니까 대로(大路)를 폐쇄하라는 엄청난 주장이었다.

 

최양선은 이미 태종 때인 1413년 관직 없는 풍수 학생 신분으로 “장의동 문(자하문·창의문)과 관광방 동쪽 고개(숙정문)는 경복궁 좌우 팔이니 사람을 걷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1413년 6월 19일 ‘태종실록’) 이후 자하문은 1623년 인조반정 때 문을 도끼로 부술 때까지 폐쇄됐었고 숙정문은 21세기 초인 2006년 4월까지 닫혀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선왕 당부와 본능적인 호기심으로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에 검토 지시를 내렸다. 한 달 보름 뒤 예조판서 신상이 이리 말했다. “산은 형상이 기복(起伏)이 있어야 좋으니 길이 있어서 해로울 게 무엇이 있습니까.” 또 다른 풍수가 이양달 또한 “발자취가 있어야 맥(脈)에 좋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이리 답했다. “막아도 무방하리라.”(1430년 8월 21일 ‘세종실록’)

 

집요한 최양선, 공사를 쟁취하다

3년째 논의가 유야무야 중이던 1433년 여름, 최양선이 또다시 천천현 폐쇄를 이슈화했다. 세종은 이번엔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집현전 판단은 “폐쇄할 이유 없음”이었다.(1433년 7월 22일 ‘세종실록’) 나흘 뒤 이번에는 국가 정책을 감찰하는 사헌부에서 직격 상소문을 올렸다. 최양선이 옳거나 그르다는 지적이 아니라 풍수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이었다.

 

‘지리의 술법은 오괴(迂怪·구부러지고 괴이함)하고 궁벽하며 지루하고 망령된 것이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이 내리고 악한 일을 하면 재앙이 내리는 것인데 화와 복이 어찌 집터와 묏자리에 연유하는가.’ 세종이 답했다. “최양선은 자기 공부한 바를 임금에게 말했으니 충성하는 사람이지 벌 줄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집을 짓고 장사 지낼 때 모두 지리를 쓴다.”(1433년 7월 26일 ‘세종실록’)

 

관료들 반발이 극심했다. 최양선의 반격도 극심했고 세종의 집착도 극심했다. 다시 4년이 지난 1437년 최양선이 또 고개 폐쇄를 주장했다. “가느다란 헌릉 산맥에 큰 고개가 있어서 왕릉에 해가 된다. 고개를 막아라.” 이조판서 하연이 “불가(不可)”라 하자 세종은 이리 반문했다. “능 옆에 큰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있는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없어야 한다는 말도 없다.”(이조판서) 이조판서는 말문이 막혔고 최양선은 승리했다.(1437년 10월 19일 ‘세종실록’) 세종은 마침내 고개를 폐쇄하고 땅을 덧쌓는 대토목공사를 지시했다.

 

공사 착공 반년 뒤인 1438년 4월 15일 승지 허후가 고갯길 폐쇄 공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산맥에 흙을 덮는다고 국운(國運)이 길어지겠는가. 필요가 없는 공사다.”

 

합리적 지도자인 세종이 과오를 인정했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정지하기에는 때가 늦었다”라 하였다.’(1438년 4월 15일 ‘세종실록’) 공사는 계속됐다. 고갯길은 폐쇄됐다.

 

13년 동안 끊겨 있던 천천현은 1451년 세종 아들 문종 때에야 ‘사람 발에 산맥이 밟히지 않게 돌을 까는 조건으로’ 재개통됐다. 그런데 13년 뒤, 문종 동생 세조가 즉위하고 10년이 지나고서 지방에 은퇴해 있던 최양선이 또 이 고개를 막으라고 상소했다.(1464년 3월 11일 ‘세조실록’) 세조는 이에 혹했다. 고심하던 육조판서들은 납작한 돌을 깔아 맥을 지키자고 절충안을 내놨다. 고개는 겨우 통행 금지를 면했다

 

그 천천현은 훗날 월천현(月川峴)으로 개칭됐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달래내고개가 그 월천현이다.(성남문화원, ‘판교마을지’1, 2002, p37) 근 600년이 지난 지금도 중요한 고개다.

 

막강한 토목공사 자문역 최양선

세종에게 총애를 받은 술사 최양선은 도읍지 한성과 왕릉 주변 풍수에 대해 거침이 없었다. 천천현 고개 폐쇄를 꺼내기 보름 전인 1443년 7월 3일 최양선은 태조와 태종이 입지를 결정한 궁궐, 경복궁 터가 흉지라고 주장했다. “남산에서 보면 한성 주산(主山)은 경복궁 뒤 북악산이 아니라 승문원이 있는 향교동(현 낙원동 부근)의 연한 산줄기이니 창덕궁을 이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은 고희(古稀)를 맞은 노정승 황희까지 대동해 남산에 올라가 지리를 살폈다. 그리고 앞으로 집현전에서 학자들과 함께 풍수학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1420년 실시된 문과에서 장원급제자였던 지신사(도승지) 안숭선이 “잡된 술수 가운데 가장 황당하고 난잡한 학을 어찌!”하고 항의했으나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433년 7월 3일 ‘세종실록’) 세종은 그럴 때마다 “나라를 위해 한 말이니 최양선은 죄없다”라고 답하곤 했다.(1441년 6월 9일 등 ‘세종실록’)

 

풍수에 대한, 그리고 술사 최양선에 대한 세종의 집착은 결국 ‘경복궁을 비롯한 궁성 건축과 남대문 보토(補土) 공사와 소격전 앞 연못 파기 공사와 개천 이건 공사와 남대문 밖 연못 축대 공사 따위에 경기, 충청에서 인부 1500명을 징발하는’ 동시다발 대규모 토목공사로 한성 곳곳을 파헤쳐 놓게 만들어버렸다.(1433년 7월 26일 ‘세종실록’)

 

선을 넘은 최양선과 세종의 회고

최양선이 건드리는 사업은 끝이 없었다. 종묘 풍수를 시비 걸고(1441년 7월 18일), “돌이 울었다”고 주장하더니(같은 해 8월 25일), 세종이 스스로 묻힐 자리로 정해둔 수릉(壽陵) 혈 방위를 틀리게 주장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1443년 1월 30일)

 

마침내 1444년, 세종이 선언했다. “앞으로 최양선이 국정에 끼어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승정원은 동시에 어명에 의거해 그때까지 최양선이 올린 보고서를 모두 불태웠다.(1444년 윤7월 8일 ‘세종실록’)

 

이듬해 정월 세종이 병 치료를 위해 사위 안맹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관료들이 혈자리를 보고 옮기라고 청하자 세종이 이리 말했다. “내가 음양지리의 괴이한 말을 믿지 않는 것은 경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1445년 1월 1일 ‘세종실록’)

 

술사 말을 듣지 않은 탓??

1446년 세종비인 소헌왕후가 죽었다. 세종은 미리 봐뒀던 선왕 태종의 헌릉 옆 땅에 왕비릉을 만들고 그 자리에 자신도 묻히겠다고 선언했다. 최양선이 “맏아들 죽을 곳”이라며 흉지라고 주장한 자리다. 왕비릉을 조성할 때는 인부가 1만500명이 동원됐고 이 가운데 100 여 명이 사고로 죽었다.(1446년 7월 5일 ‘세종실록’) 4년 뒤 세상을 뜬 세종이 합장됐다.

 

과연 맏아들 문종이 요절했다. 그리고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피바람을 몰고 왔다. 1468년 즉위한 예종은 세종 부부 왕릉을 천장하기로 결정했다.(1468년 11월 29일 ‘예종실록’) 지관이 고른 경기도 여주 현 영릉 터에는 세조 반정 공신 한산 이씨 이계전과 광주 이씨 이인손 묘가 있었다. 왕실은 이들 묘를 옮기고 영릉을 조성했다.(1469년 3월 6일 등 ‘예종실록’) 사람들은 술사 최양선 예언이 적중했다고 수군댔다.

 

요동 벌판, 풍수 그리고 대한민국

정조시대 북학파 박제가는 이렇게 주장했다. ‘운명을 말하는 자는 천하의 모든 일을 운명을 기준으로 말하고 관상을 말하는 자는 천하의 모든 일을 관상을 기준으로 말한다. 무당은 모든 것을 무당에 귀속시키고 지관은 모든 것을 장지에 귀속시킨다. 잡술은 하나같이 그렇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과연 어디에 속해야 할까.’

 

주장은 이어진다. ‘요동과 계주의 드넓은 벌판을 보라. 모든 사람이 밭에다 무덤을 만들어 1만리에 뻗어 있는 너른 평원에 무덤이 올망졸망 널려 있다. 애초에 좌청룡 우백호를 따져 쓸 여지가 없다. 조선 지관을 데려다 장지를 찾게 한다면 망연자실하리라. 식견이 있는 사람이 요직에 서게 되면 마땅히 풍수를 다룬 서적을 불태우고 풍수가의 활동을 금지해야 한다.’(박제가, ‘북학의’, 안대회 교감역주, 돌베게, 2013, p263)

 

세종이 최양선을 변호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신하들이 조정에서는 귀신 제사를 금하자고 말하고 집에 가서는 귀신 제사하는 자가 매우 많으니 모순이다.’(1433년 7월 15일 ‘세종실록’) 사대부들이 입으로는 풍수 타도를 외치며 뒤로는 풍수를 좇는다는 지적이었다.

 

▲1904년 2월 3일 미국 '펀치'지 삽화.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중립선언을 한 대한제국 처지를 묘사한 삽화다. 그때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 고종은 궁궐 곳곳에 가마솥을 묻고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 삶았다.

 

근대의 풍경과 풍수와 주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 뒤 윤치호가 일기를 쓴다.

 

‘나는 믿을 만한 소식통을 통해 황제가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서 삶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과 일본의 대의명분을 저주하는 특이한 방법이긴 하다. 황제는 어제 받은, 원산항에서 러시아의 어뢰선이 일본의 작은 연안 연락선인 오양환(五洋丸)을 격침시켰다는 보고 때문에 더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할 것이다. 제물포에서 전쟁이 발발해 끔찍한 연속 폭격이 퍼부어질 때, 훌륭한 군주는 점쟁이를 만나느라 바빴다. 무당들의 요구에 따라 궁궐 뜰 네 귀퉁이에 가마솥을 거꾸로 묻었다. 궁궐 문 밖에도 역시 가마솥이 몇 개 묻혔다.’(1904년 4월 26일 ‘윤치호일기’)

 

지금은? “풍수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반대하던 분들이 어느 날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더니 산소 자리를 잡아달라더군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니냐면서요.”(풍수학자 최창조, 2009년 12월 12일 ‘조선일보’ 인터뷰) 세상은 매우 변하였는데, 이렇게 조금도 변하지 않는 곳도 있는 법이다.

 

2021.06.02

260. 용산공원 역사 왜곡 대행진

일본군 軍馬 위령비가 ‘조선 왕실 제단’이라는 용산공원

지난 5월 ‘광화문광장 100년 이야기’ 시리즈를 통해 왜곡된 역사관을 토대로 진행되는 무모한 국가 토목 사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역사 복원’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많은 논쟁을 덮어버리고 세금과 시간을 들여 엉뚱한 역사를 창작하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늘은 그 번외편, 미국으로부터 반납받은 ‘용산공원’에 얽힌 이야기다. ‘왜곡된 근대사와 군사시설로 절단됐던 생태축 및 역사 복원’이 공원 프로젝트 주요 명분이다.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일본군 군마(軍馬) 위령비를 ‘조선 왕실 제단’이라는 대한민국 정부

왕실이 천제(天祭)를 올리던 ‘남단’

 

국토교통부 산하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홈페이지(www.park.go.kr)에는 ‘용산공원 10경’이라는 슬라이드가 게시돼 있다. 이 가운데 제10경은 조선 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남단(南壇·풍운뇌우단)’이다. 이 ‘남단’은 미군기지 북쪽 캠프코이너 구릉지대에 있다. 얕은 구릉 끝 쪽에 화강암을 깎은 두 기둥이, 그 사이에 자연석이 앉아 있다. 기둥 바깥으로 철 난간이 보인다. 앞에는 ‘훼손 금지’라는 영문 안내판이 서 있다.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과 사적분과위원들이 공식 현장 조사를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아래 두 사진이 그 풍경을 담고 있다. 각각 2016년과 2019년 촬영한 사진이다.

 

▲2005년 문화재청이 ‘조선 왕실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남단 흔적’이라고 발표한 용산공원 부지 석물. 그런데 이 석물들은 남단이 아니라 1941년 이곳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야포병연대의 군마(軍馬) 위령비 부속물들이다. 사진 앞쪽 기단에 박혀 있는 철 난간 또한 위령비 흔적이다. 미군 캠프코이너 부지 북쪽에 있다. /박종인

▲2005년 문화재청이 ‘조선 왕실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남단 흔적’이라고 발표한 용산공원 부지 석물. 실제는 1941년 이곳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야포병연대의 군마(軍馬) 위령비 기단이다. 일본식 축성방식으로 쌓은 기단 모서리가 명확하다./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김천수

 

2005년 문화재청 조사 과정에서 이 터가 발견되면서 1897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서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기 전 조선 왕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의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이곳을 문화재로 가지정했고, 남단 터 북서쪽 주한 미국 대사관 부지는 남단 터만큼 축소됐다. 국토교통부가 내놓은 공원 설계도에는 이 남단으로 진입하는 작은 출입구가 있는데, 출입구 이름 또한 ‘남단 출입구’다. 이제 사실인지 보자.

 

▲문화재청이 ‘남단 유구'라고 주장하는 석물의 정체. 1941년 일본군 제26야포연대가 만든 군마(軍馬) 위령탑이다. ‘愛馬之碑(애마지비)’라고 새긴 비석 몸통이 자연석에 꽂혀 있다. 비석 주위에는 철 난간을 둘러놓았다. 비석을 꽂았던 돌도, 철 난간도, 일본식 돌기단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1940년대 사진엽서 아래에는 馬魂碑 朝鮮第26部隊(마혼비 조선 제26부대)’라고 인쇄돼 있다. 일본군 야포병연대가 포를 운반할 때 동원했다가 죽은 군용 말들을 위해 만든 추모비라는 뜻이다.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김천수

 

日 군마(軍馬) 추모비가 조선 왕실 제단?

2005년 현장 조사에 참가했던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 민간공동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남단 위치가) 거기예요.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 봤더니 있어요. 남단이 있는 게 아니라, 주춧돌과 위에 흐트러져 있는 게 이 자리다, 하는 사이트는 정확하게 짚을 수 있고. 그 남단의 의미는 굉장히 크고….”(2020년 1월 7일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결론부터 말하자. 문화재청이 현장 조사와 문헌 조사를 통해 확정해놓은 ‘조선 왕실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남단(南壇)’은 조선과 무관하고 제단과도 상관없는 ‘일본군 군용마 비석'이다.

 

위 큰 사진이 1941년 이 캠프코이너 부지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26야포병연대가 세운 그 비석이다. 비석에는 ‘愛馬之碑(애마지비)’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자연석, 그 아래 일본 전통 축성 방식으로 쌓은 기단, 기단 위로 철 난간이 보인다. 이 사진은 용산문화원 연구실장 김천수가 발굴해낸 당시 사진 엽서다. 엽서 오른쪽 아래에는 ‘馬魂碑 朝鮮第26部隊(마혼비 조선 제26부대)’라고 인쇄돼 있다. 일본군 야포병연대가 포를 운반할 때 동원했다가 죽은 군용 말들을 위해 만든 추모비라는 뜻이다.

 

이제 세 사진을 비교해보라. 촬영 시기는 1941년, 2016년, 2019년. 80년 세월이 흘렀지만 촬영된 장소와 피사체는 동일하다. 왼쪽 위 사진에는 비석을 꽂았던 자연석과 기단에 설치한 철 난간이 보인다. 왼쪽 아래 사진에는 1941년 사진 엽서에 보이는 일본식 기단이 명확하게 보인다. 모서리 각도는 흔한 일본식 축성 방식과 동일하다.

▲1945년 9월 미군 정찰대가 촬영한 용산기지. 용산고등학교로 가는 현 두텁바위로 옆으로 복개되지 않은 후암천이 보인다. 문화재청이 ‘남단 터’로 발표한 자리(동그라미 표시)에는 계단 좌우로 원형 및 사각형 구조물 윤곽이 보인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청(NARA)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군마비

문화재청장 유홍준과 사적분과위원들이 본 주춧돌은 이 일본군 말 비석 지지석이다. 외형부터 주춧돌과 다르다. 조선 시대 목조 건물 주춧돌과 전혀 형식이 다른, 일본군 작품이다. ‘세종실록'에는 남단 풍운뇌우단 규모가 ‘사방 2장 3척에 높이 2척 7촌’이라고 기록돼 있다.(‘세종실록’ 128권 ‘오례‧단유(壇壝))’ 가로, 세로 각 7m에 높이 80㎝짜리 ‘제단’이다. 토지신과 곡식신 제단인 사직단보다 조금 작다. 두 제단 모두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워야 하는 ‘건물’이 아니라 벽과 지붕이 존재하지 않는 ‘제단’이다.

 

1945년 9월 미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에도 마혼비가 보인다.(위 동그라미 사진) 얕고 좁은 구릉에 계단이 나 있고 구릉 위 왼쪽에는 원형 구조물이, 오른쪽에는 사각형 구조물 윤곽이 나타나 있다. 당시 또 다른 사진 엽서에는 이들 구조물을 건설하던 무렵 공사 현장도 촬영돼 있다. 사진은 많은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또 문화재청이 ‘남단 유구(遺構)’라 한 비석 기단 잔재 옆에는 기다란 화강암 하나가 누워 있는데, 그 형태는 마혼비 비석 자체와 유사하다. “조심스럽지만, 그 돌을 뒤집으면 실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용산문화원 연구실장 김천수)

 

2005년 이후 문화재청은 미군기지 내에 있는 이 구조물에 대해 추가 조사를 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군 말 비석’은 ‘조선 왕실 천제단 유구’로 확정됐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이를 조선 왕실 천제단이라 하고 보존과 복원을 궁리 중이다. 국토교통부는 ‘용산 10경’에 선정했다. 코미디 같은데 웃을 수가 없다.

 

▲1860년대 김정호가 그린 ‘경조오부도’. 남단은 남산 방향인 후암천 북쪽에 표시돼 있다. 지금 삼광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이 추정한 현 남단 터는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위치와 거리가 멀다.

 

여기가 남단 터라고?

현존하는 각종 서울 고지도에는 남단 위치가 어김없이 표기돼 있다. 실측도가 아니기에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물길’과 ‘산줄기’를 찾아보면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1860년대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부속 ‘경조오부도’도 마찬가지다. 위 사진이 경조오부도다(위 항공사진과 비교하기 위해 왼쪽으로 90도 눕혀놓았다).

 

지도에는 ‘남단’이 현 후암천과 남산 사이에 표시돼 있다. 그리고 당시 역참이었던 청파역에서 동쪽이다. ‘풍운뇌우단은 남교(南郊) 청파역동(靑坡驛洞) 송림 사이에 있는데 남단(南壇)이라고 부른다. 남향(南向)이다.’(1486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도에 표기된 남단(하얀 동그라미)은 현재 후암천 북쪽에 있다. 후암천은 1962년 복개돼 남영동에서 용산고등학교로 향한 도로로 변했다. 용산기지 외곽이다. 문화재청이 남단이라고 확정한 용산공원 내 남단 터는 아직 기지 내에 남아 있는 만초천 북쪽 산줄기 끝이다.

 

고지도가 아무리 부정확해도 물길 남과 북이 바뀔 수는 없다. 조사단이 고지도와 현장 지형 변화를 고려하지 못한 게 아닐까. 문화재청이 남단 위치를 조사한 2005년 당시에는 이미 후암천이 도로 아래 복개된 이후였다. 현 추정지는 오류일 확률이 높다.

 

‘용산중학교 동쪽에서 야포대 병영 뜰 북부에 이르는 작은 언덕 ‘남쪽’에 남단이 있었다. 언덕은 깎아서 평탄한 도로가 되었다.’(국역 ‘경성부사’ 1권, 총독부, 1934, p109) 남산에서 용산고등학교에 연결된 언덕은 지금 도로가 나 있다. 그 남쪽에 남단이 있었으니 복개된 후암천 북쪽, 현 삼광초등학교 자리일 확률이 크다.(히라키 마코토(平木實), ‘조선 후기의 원구단 제사에 관하여(2)’, 조선학보 157, 천리대 조선학회, 2005) 1936년도판 ‘경성부사’2권 873쪽에는 ‘야포병영 중앙운동장 남쪽 끝’이라고 돼 있다. 문헌에 대한 검증이 더 필요한데, 이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동여지도(1861)에 표시한 한북정맥과 용산공원 지역. 지도상 공원부지 내 유일한 산줄기인 둔지산 줄기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산경표에 나오는 '한북정맥'은 용산공원과 거리가 멀다./대동여지도=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여기에 백두대간 ‘생태축’이?

현 용산공원 설계자는 네덜란드 조경가 구즈와 이로재 대표인 한국 건축가 승효상이다. 승효상은 ‘대동여지도’를 근거로 ‘한북정맥’에서 이어지는 용산 생태축을 되살려 한강 건너까지 잇겠다고 했다.(2012년 ‘신동아’ 6월호 인터뷰) ‘용산은 한강과 연결해주면 백두산의 어떤 에콜로지컬 엑시스(생태학적 축)가 흘러 한강까지 이어지는 그 와중에 있는 공원이라는 관점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승효상, 2016년 11월 25일 ‘아드리안 구즈와 승효상 용산공원 특별대담회’)

 

‘대동여지도’에는 현 공원 부지에 산줄기가 딱 하나 표시돼 있다. ‘둔지산’이라 부르는 산줄기다. 그런데 ‘단절돼 있던 자연을 다시 잇는 작업’은 터무니없다. 둔지산은 여전히 공원 안에 남아 있으니까. 이 지역과 무관하게 서울 북쪽으로 흘러가는 ‘한북정맥’을 앞세운 ‘생태축 복원’ 주장도 터무니없다.

 

▲용산공원 부지에 산재해 있는 문인석. 옛 둔지미마을이 남긴 흔적들이다. 둔지미 마을은 1916년 일본군 병영 건설을 위해 강제 이주당했다. /박종인

 

복원할 역사, 사라진 둔지방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은 대륙 진출을 위한 군용철도를 건설하는데, 그 정거장 위치가 현 신용산역이다. 철도역 주변과 군사기지를 중심으로 일본인 신시가지가 급속도로 건설됐다. 그 철도 동쪽에 건설한 군사기지를 일본군은 용산기지라고 불렀다.

 

용산공원 역사 설정을 주도한 유홍준은 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기 있는 산을 용산이라고 그랬으니까. 용 용자에 뫼 산자로 해서.”(2020년 1월 7일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유홍준이 말한 ‘거기’는 지금 용산공원 부지를 말한다. 사실이 아니다. ‘거기’에는 용산(龍山)이라는 산도 없었고 따라서 아무도 이곳을 용산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옛 용산은 서대문쪽 안산 줄기에서 한강 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가 용을 닮아 붙은 이름이다. 지금 원효대로 좌우측 지역, 구체적으로는 숙명여대~효창동~공덕동~용문동~원효로2가 지역이 옛 용산이다. 조선 후기 공식 명칭은 ‘용산방’이었다.

 

현재 용산공원 부지 지역은 ‘둔지방(芚芝坊 혹은 屯之坊)’이었다. 용산방은 ‘용산’을 중심으로 한 마을이었고 둔지방은 이곳에 있는 ‘둔지산(屯之山)’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마을이었다. 둔지방에는 둔지미라는 마을이 있었다. 1906년과 1916년 일본군은 둔지미 주민을 보광동 일대로 강제이주시키고 병영을 건설했다.

 

공원 부지에는 각종 석물을 비롯한 둔지미 흔적이 남아 있다. 한성에서 남대문을 나와 한강으로 가던 옛 길도 남아 있다. 공원 설계도에는 둔지미와 이들 옛길에 대한 고려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시는 오히려 일본군과 총독부가 만든 ‘한강대로’를 ‘국가상징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다.

 

어설픈 역사 복원의 재복원

100년 넘도록 외국이 점유했던 땅이었다. 그 땅에 얽힌 역사를 복원하려면 당연히 똑바로 해야 한다. 그런데 2005년 이후 제대로 된 조사 없이 구호만으로 거대한 공원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남단, 옛길, 둔지미 등 역사와 전통에 대한 관심과 고민 그리고 깊이 있는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한다. 남단 터의 어설픈 확정도, 공원 명칭도. 역사를 진중하게 바라보려는 인식이 더 필요하다.”(용산문화원 연구실장 김천수) 여기까지 어설프게 시작해서 어설프게 진행 중인 용산공원 프로젝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