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2021-05/ 조선일보
05.01(토) 삼성家의 미술 안목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상속세 납부 시한을 앞두고 공개한 사회공헌 계획에 따라 이건희 회장이 평생 수집한 개인소장
미술품 1만1천여건, 2만3천여점은 국가 박물관 등에 기증된다. 사진은 기증 작품의 일부. 윗줄 왼쪽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천수관음 보살도(보물 2015호). 가운뎃줄 왼쪽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는 국내 작품인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아랫줄 왼쪽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는 국외 작품인 호안 미로의 '구성',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2021.4.28 [삼성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연합뉴스
삼성그룹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은 대구 삼성상회 시절부터 붓글씨를 즐겼다. 서예가의 글을 모으는 취미도 생겼는데 점차 고서화와 도자기, 골동품으로 확대됐다. “마음의 기쁨과 정신의 조화를 찾는다”는 기준을 정하고 작품을 모았다. 생전에 가장 아끼던 수집품은 청자진사주전자(국보 제 133호)였다. 30㎜ 두께 방탄유리로 만든 진열대에 넣어두고 감상했다. 이 작품 때문에 호암미술관을 지었다는 말도 있다. 호암 덕에 외국으로 유출될 국보를 많이 지켰다고도 한다.
▶이건희 전 회장은 아버지와 다른 심미안을 가졌다. 호암은 청자와 고미술 애호가였지만 이 전 회장은 백자와 현대미술을 사랑했다. 청년 시절부터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지식을 쌓았다. 청화백자는 안료마다 색의 농도를 달리한 복제품을 여럿 만들어 비교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심 정한 가격보다 비싸면 작품이 좋아도 외면한 호암과 달리 “특급이 있어야 컬렉션 전체의 위상이 올라간다”며 명품주의를 지향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못지않은 문화재를 모은 원동력이었다.
▶이건희 전 회장의 누나 이인희 전 한솔문화재단 이사장과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도 전문가 수준의 안목을 가진 컬렉터들이다. 이 이사장이 강원도 문막에 문을 연 뮤지엄 ‘산'은 종이 관련 예술품 컬렉션이 뛰어나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도 유명하다.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도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도 제프 쿤스·김환기·유영국 등 국내외 거장의 작품을 수집했다.
▶이 전 회장 부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은 서울대 미대 재학 시절 국전에 입상한 경력이 있는 수집가다. 결혼 후 시아버지 호암이 주는 돈으로 인사동을 드나들며 수집 공부를 시작했고 리움 관장 시절엔 서양 현대미술에서도 최고로 치는 작품들을 모았다. 남편과 함께 백남준·이우환 등 예술가를 후원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도 지원했다. 과천 현대미술관에 있는 백남준 작품 ‘다다익선’은 삼성이 제공한 TV 모니터 1003개로 제작됐다.
▶삼성의 미술품 기증을 계기로 드러난 ‘이건희 컬렉션’의 방대한 규모와 높은 수준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겸재와 이중섭, 김환기 등 우리 작품 외에도 프랜시스 베이컨, 마크 로스코, 게르하르트 리히터, 알베르토 자코메티,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데이미언 허스트 등 수백억원이 넘는 최고 명품이 즐비하다. 돈만으론 되지 않는 일이다. 대를 이어 안목을 갈고닦은 한 집안의 열정이 이를 가능케 했다. 기업보국에 이은 문화보국이다.
05.03(월) 프로와 아마추어
전성기 시절 장타로도 유명했던 타이거 우즈는 공 칠 때 찰떡 치는 소리가 났다. 금속 클럽과 단단한 공이 부딪히는 데 쫀득쫀득 찰떡을 때리는 것 같았다.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우즈의 임팩트 순간을 보면 단단하던 공이 반쯤 클럽에 짓눌렸다가 ‘푱’ 하고 튕겨 나갔다. 요즘 미국 PGA 투어에선 몸무게를 20kg 불려 헐크처럼 변신한 브라이슨 디섐보가 남다른 소리를 낸다. 국내 남자 골프에는 그만한 선수가 없었는데, 메이저리거 박찬호에게서 그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제대로 맞으면 미 PGA에 내놓아도 10등 안에 들 장타다.
▶어린 시절 스윙의 기본을 익히지 못한 보통 주말 골퍼는 거리 300야드는 꿈도 못 꾼다. 그런데 박찬호는 마음먹고 때리면 370야드를 친다. 그는 “왼발을 축으로 공을 던지는 투구 메커니즘이 왼발을 축으로 체중을 이동하는 골프 스윙과 닮았다”고 했다. 185cm의 키에 탄탄한 몸매를 가진 박찬호는 올해 마흔여덟인데 20~30대 프로골퍼 100여명 사이에 세워 놓아도 가장 운동선수 같아 보였다.
▶지난 주말 군산 CC 오픈에서 한국 KPGA 1부 투어에 아마추어 초청 선수로 나선 박찬호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진 이가 적지 않았다. 워낙 남다른 장타 능력에다 메이저리그에서 124승을 거둔 승부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53명중 꼴찌로 컷 탈락했다. 미 프로농구의 3점슛 도사 스테픈 커리, 미 프로풋볼의 명 쿼터백 토니 로모 같은 선수도 미 PGA 2부 투어와 1부 투어에 도전해 컷을 통과한 적이 없다. 다른 스포츠의 최고수에게도 ‘프로 골프의 벽’은 높기만 하다.
▶같은 골프장이라도 주말 골퍼가 치던 때와 전혀 달라지는 게 프로 대회 코스다. 페어웨이는 좁게, 러프는 길게, 그린은 빠르고 단단하게 만든다. 하루 6언더파를 쳤다고 자랑하던 아마 고수가 프로 대회에서 공 한번 제대로 못 쳐보고 벌벌 떨다 보기 플레이도 못 하는 모습을 본 적 있다. 이번 대회처럼 강풍이 불면 어프로치 샷과 퍼팅도 다른 차원으로 변한다. 자신감 잃은 장타는 러프나 물로 향하기 일쑤다.
▶박찬호가 골퍼 지망생인 큰딸에게 조언을 했더니 “프로도 아니면서…”라고 대꾸하더란다. 그래서 프로 골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세 딸을 둔 그는 “골프는 뭘 해도 사랑스러운데 마음대로 안 되는 셋째 딸 같다”고 했다. 이번 대회에서 성적은 꼴찌였지만 흥행 몰이는 했다. 여자 골프의 인기에 눌린 한국 남자 골프였는데 흥행으로만 본다면 박찬호가 구원 투수 역할은 한 것 같다.
민학수 논설위원
05.04 ‘태양엔 특허권이 없다’
▲신종 코로나 백신 1차 접종자 수가 누적 300만명을 넘어서며 백신 수급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다. 3일 서울 용산구 예방접종센터 백신 전용 냉장고에 화이자 백신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미국 의학자 조너스 소크는 1955년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다. 전 세계적으로 소아마비 환자가 한해 수십만명씩 생길 때여서 그는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신 특허권을 포기하고 백신 생산법을 공개했다. “이 백신 특허권은 누구에게 있느냐”고 묻자 그는 “특허권은 없다. 태양에도 특허권이 없지 않느냐”는 말을 남겼다. 덕분에 인류는 소아마비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백신 부족에 허덕이면서 백신 특허권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미국과 세계무역기구(WTO)는 다음 주 코로나 백신 특허권을 한시적으로 면제하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도 지난해 코로나 백신을 개발할 때 백신 기술 공개에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최근 USTR에 백신 특허 유예가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 등 전직 국가 정상과 노벨상 수상자 등 석학 175명도 얼마 전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같은 의견을 담은 공동 서한을 보냈다. “전 세계 수백만명의 생명이 달린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 목소리도 상당하고 논리도 단단하다. 크게 세 가지 이유다. 먼저 백신 특허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향후 백신 개발의 싹을 자르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논리다. 특허를 보장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제약사가 큰돈 들여 신약을 개발하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화이자·모더나 등 백신 개발회사들은 최근 USTR 등과 가진 비공개 회의에서 중국·러시아에 핵심 기술이 넘어갈 것이라는 점을 들어 특허 포기에 반대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 중엔 뜻밖에도 빌 게이츠도 있다. 그는 자선재단을 통해 코로나 백신 개발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그가 특허 유예에 반대하는 핵심 이유는 안전성이다. 특허를 푼다고 백신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저품질 백신으로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면 누가 책임지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백신 개발회사들이 신속하게 대량 생산해 공급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주장이다.
▶국내 전문가들도 “화이자·모더나 백신은 신기술을 적용해 생산에 고도의 기술과 공장, 인력이 필요하다”며 특허를 푼다고 곧바로 백신을 생산할 수 있다는 기대는 금물이라고 했다. 이런 우려와 논리를 인정하더라도 지금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라도 백신 공유라는 비상수단이 필요하다는 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와 제약업계가 이에 대한 대비는 어느 정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05.05 최고의 결혼, 최고의 이혼
“만약 당신이 지금 버스에 치여 죽는다고 했을 때 ‘아, 죽기 전에 이 말을 꼭 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할 말은?” 빌 게이츠는 답했다. “멀린다에게 고맙다는 말.” 2019년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 말을 하면서 빌은 살짝 울컥했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다큐는 빌과 멀린다가 카약을 타고 서로 노를 저으며 강을 헤쳐나가는 장면으로 3부작을 마무리한다.
▶”최고의 결혼”이라고들 했다. 세계 최고 거부와 평범한 사원의 결혼은 만남부터 미국적이었다. 입사 초기 멀린다는 외근 탓에 회사 만찬에 늦어 비어있던 자리에 앉았다. 끝에서 두 번째였다. 가장 늦게 온 사람이 끝자리를 채웠다. 아홉 살 연상 창업자 빌이었다. 여기서 빌은 데이트를 신청했다. 1년 후 “사랑한다”고 말했다. 한국이었다면 아무리 늦어도 빌의 자리는 제일 앞이었을 것이고, 멀린다는 그 근처에도 못 갔을 것이다.
▶멀린다는 빌의 청혼을 한동안 받아주지 않았다. 그가 결혼에 헌신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의 모든 정신은 일에 있었다. 멀린다는 그런 정신 세계를 “혼돈(chaos)”이라고 했다. “결혼 후 빌에겐 엄청난 페르소나(사회적으로 인식되는 또 다른 자아)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었다. 정말 힘들었다. 난 개인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갈등의 정점에서 빌은 멀린다를 이렇게 달랬다고 한다. “우린 어디를 가든 같이 가는 거야.” 자선 단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둘은 ‘진정한 파트너'가 됐다. 그래서 이혼 소식이 더 당혹스럽다.
▶게이츠 부부는 이혼 성명에서 “우리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는 부부로 함께 성장할 수 없다”고 했다. 멀린다는 2년 전 인터뷰에서 “빌이 하루 16시간 동안 일해 결혼 생활이 힘들다”고 했다. 근본적 속사정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장'할 수 없어서 한다는 이혼. 이것도 ‘황혼 이혼’의 한 종류일까. 그래도 재단은 함께 이끈다고 한다.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 나오는 명대사처럼 “결혼이든, 이혼이든 다 행복을 위한 것”이다.
▶빌 게이츠는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믿는다. 코로나, 원자력발전, 소아마비, 후진국 화장실 문제까지 신기술로 도전한다. 60 중반인 지금도 일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더 열심히 일해(Work harder)”라며 자신에게 말한다고 한다. 그래도 부부 관계까지 해결하진 못했다. 넷플릭스 다큐의 마지막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빌의 완고함이 결국 흠이 되지 않을까.” 이 다큐가 시즌2를 찍을지 모르겠다.
05.06 함께 살아가야 할 코로나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사흘 만에 600명대를 기록한 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에서 방역관계자들이 해외 입국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보건기구(WHO)는 1980년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공식 선언했다. 1796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백신을 개발한 지 184년 지나서였다. 천연두는 20세기에만 전 세계에서 3억명 이상을 죽인 감염병이었다. 인류가 최초로, 그리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정복한 감염병이기도 하다.
▶백신 접종이 늘어나면 신종 코로나도 종식 선언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집단면역 형성이라도 선언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학자들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오명돈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장(서울대 감염내과 교수)은 지난 3일 “백신 접종을 본격화하더라도 집단면역 도달은 어려울 것”이라며 “코로나 바이러스는 토착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변이 바이러스 출현, 아직은 낮은 백신 예방률 때문에 “결국 독감처럼 백신을 맞으며 코로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전문가들도 코로나 집단면역에 비관적이라고 뉴욕타임스가 1면 기사로 보도했다. 미국의 성인 절반 이상이 최소 1회 이상 백신을 맞았지만 전염성이 강한 변이 바이러스 등장과 일부 미국인의 백신 거부감 때문에 최소한 가까운 미래에는, 어쩌면 영원히 집단면역 기준점을 넘어서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신 이 바이러스가 통제 불능이 아닌 ‘관리 가능한 위협(manageable threat)’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최근 전문가들의 결론이라고 했다.
▶감염병 전문가인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코로나가 100년 전 발생한 스페인독감의 길을 갈 것으로 전망했다. 스페인독감은 1918년 발생해 2~3년 사이 당시 세계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5억명을 감염시키고 5000만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치사율은 낮아졌지만 사라지지 않고 변이를 거듭해 현재까지 계절독감 형태로 남아 있다. 요즘 우리가 맞는 독감 백신에도 이 독감의 후손 격인 ‘H1N1’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이 들어 있다.
▶이 같은 논란에 우리 방역 당국은 집단면역 형성의 목표는 퇴치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했다. 방역 당국은 “어느 정도 집단면역을 형성하면 계절독감과 유사한 형태로 거리 두기, 모임 제한 등 없이도 일상생활이 가능할 것”이라며 “현재 이를 목표로 예방접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현 세대는 남은 생을 코로나와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스크 벗고 지인들과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는 날이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05.07 대만 ‘치솟는 몸값’ 비결
TSMC 창업주 모리스 창은 ‘대만 반도체 아버지'로 불린다. 미국 반도체 기업에서 부사장으로 일하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 1987년에 TSMC를 창업했다. 그는 사업 모델을 미국 IT 기업이 주문하는 반도체를 만들어주는 공장으로 설정했다.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 분업망을 개편하려는 흐름에 올라타기 위한 것이었다. “고객과는 절대 경쟁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애플이 세계 최초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TSMC에 주문했다. 양쪽 다 대박이 났다. ‘윈-윈 모델’로 점수를 얻은 TSMC는 퀄컴, AT&T, 엔비디아 등 미국 IT 공룡 기업들을 단골로 확보했다. 세계 주문형 반도체 시장의 60%를 장악, 시가총액 세계 11위 기업이 됐다. 반도체 덕에 대만 경제도 순항 중이다. 지난해 29년 만에 성장률이 중국을 앞섰다.
▶반도체는 대만의 지정학적 가치를 한껏 올려놓았다. 중국 반도체 굴기를 막고 미국 중심 반도체 동맹을 구축하려는 미국 입장에서 대만은 핵심 파트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전략회의’에 TSMC를 초대했고, TSMC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6곳 짓겠다고 화답했다. 대만 정부도 홍콩 사태 이후 미국의 반중 민주주의 연대에 적극 공조하고 있다. 1979년 대만과 단교했던 미국은 대만의 국제 기구 가입을 지지한다는 ‘G7 선언문' 채택으로 보상하고 있다.
▶2015년 중국 시진핑 주석과 대만 마잉주 총통은 싱가포르에서 66년 만의 양국 정상회담을 가졌다. “어떤 세력도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다”면서 ‘세기의 악수’를 나눴다. 하지만 요즘 대만해협엔 전운이 감돈다. 중국 전투기가 연일 대만 항공식별구역을 침범하고, 중국 항공모함이 위력 시위를 벌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 머리기사에서 “대만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됐다”고 보도했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대표는 중국발 대만 리스크에 대해 “우리에게 플랜B는 없다. 모든 게 TSMC의 어깨 위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대만 반도체가 없으면 중국 경제도 망가진다. 대만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 전략자산으로 간주하고 물심양면 지원한다. 최근 극심한 가뭄이 발생하자 대만 정부는 벼 농사까지 중단시킨 채 반도체 공장에 물을 대고 있다. 우리 정부는 어떤가. 미국 대통령이 “저걸 미국에 지었어야 하는데”라고 입맛을 다셨던 반도체 공장에 송전선 연결하는 것조차 도와주지 않았다.
05.08 장관 후보자 아내의 도자기
1976년 봄, 신안 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려 나왔다. 800년 물속에 잠겨 있던 도자기 2만여 점이 세상 빛을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수출품이었다. 1000도 넘는 열을 가해 만드는 도자기는 당시 최첨단 제품이었다. 세계 모든 지역에서 고작 구운 토기를 만들 때, 중국 은나라는 토기에 유약을 발라 고온에 구워냈다. 이 기술을 중국이 1000년 넘게 독점하며 세계 시장을 지배했다. 당나라 청자가 이집트 유적지에서 출토된 적도 있다. 한반도엔 8세기 중반 안사의 난을 피해 도망 온 도공이 전수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조선은 세계 양대 도자기 기술 보유국이었다.
▶18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작센 지역 선제후 아우구스트는 도자기 수집광이었다. 프로이센 왕이 소유한 중국 도자기 151점이 탐나 병사 600명을 내줬을 정도다. 도자기를 직접 만들겠다며 독일 남부 마이센의 고성(古城)에 연금술사를 가두고 도자기 제조법 연구를 지시했다. 수많은 실패 끝에 마침내 1709년 고온 제조 공정을 찾아냈고, 오늘날까지 명성이 자자한 마이센 자기가 탄생했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도자기는 유럽에서 ‘하얀 금’이라 불렀다. 스카우트와 산업 스파이들을 통해 불과 반세기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2차대전으로 동독을 점령한 소련은 마이센의 공장 설비부터 뜯어 갔다. 치열한 기술 경쟁 덕에 200년도 채 안 돼 유럽 도자기 기술은 아시아를 넘어섰다. 중국·일본에 없던 에나멜 채색과 상감 기법을 선보였고 영국 본차이나처럼 고령토 대신 소의 뼛가루를 쓰는 재료 혁신도 이뤘다. 덴마크의 로열 코펜하겐, 헝가리의 헤렌드, 영국의 웨지우드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가 탄생했다.
▶영국 도자기 성지라는 스토크온트렌트의 최대 고객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매장 입구에 ‘환영합니다’라는 한국어 인사가 적혀 있다. 한국에서보다 70% 싸게 명품 도자기를 살 수 있어 인기다. 박준영 해수부 장관 후보자 아내가 대량 밀수한 로열 덜튼과 로열 앨버트 브랜드도 이곳에 매장을 갖고 있다.
▶도자기 기술은 지금도 최첨단 분야에 쓰인다. 우주왕복선이 대기권을 벗어나거나 재진입할 때 발생하는 수천도 열을 견디는데 도자기의 내화 타일 기술이 활용된다. 이 분야에선 미국이 가장 앞섰다. 유럽이 도자기 신기술을 쏟아내고 미국이 지구 밖으로 인류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한국 고위 공직자 아내는 도자기 밀수에 열을 올렸다. 한때 세계 최고 도자기 기술 보유국이었던 나라의 씁쓸한 단면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논설실 논설위원
05.10(월) 명동의 몰락
1956년 이른 봄 명동의 대폿집에서 막걸리 마시던 시인 박인환이 종이에 글을 끄적거렸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옆에 있던 이진섭이 곡을 붙였다. 테너 임만섭이 열창하자 길 가던 행인들이 술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중에 가수 박인희가 노래해 히트한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탄생해 ‘명동 샹송’ ‘명동 엘레지'로 통했다. 명동의 낭만 시대였다.
▶1929년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이 서울 출장소를 지점으로 승격했다. 이듬해 10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백화점 건물을 충무로에 완성했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이다. 4층 커피숍은 모닝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주인공이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고 되뇌는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 결말에 등장하는 장소가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이다. 1920년대부터 상업지구가 된 명동과 충무로 일대는 부와 욕망이 집결하는 상권 그 이상이었다. 문화 예술의 중심이었다.
▶'예술가들은 돈을 귀찮게 생각한다/예술가들은 오로지 사랑에 산다/예술가들의 사랑에선 커피 냄새가 난다.’(조병화의 시 ‘동방살롱) 전흔이 가시지 않은 1955년, 청년 사업가가 명동에 문화 예술인을 위한 ‘동방문화회관’을 열었다. 차 한잔 시켜 놓고 하루 종일 죽치는 가난한 문화 예술인을 위해 1층엔 다방 ‘동방살롱’을 운영했다. 전후 복구가 이뤄지면서 명동에 고층 빌딩이 들어섰고 금융기관 본사가 자리 잡았다.
▶강남 개발로 명동의 독보적 지위도 흔들렸다. 여의도에 금융 중심지 지위도 내줬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제일 땅값 비싼 곳은 여전히 명동이다. 화장품 브랜드 네이처리퍼블릭의 명동 매장 부지가 18년째 공시지가 전국 1위다. 1㎡당 공시지가가 2억650만원으로 평당(3.3㎡) 6억8000만원도 넘는 금싸라기 땅이다. 명동의 활력이 되살아난 건 10여 년 전부터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불황이 닥쳤는데 오히려 명동은 환율 상승(원화 가치 하락)의 특수를 누렸다. 내국인 대신 일본, 중국 관광객이 몰려 명동은 K패션, K뷰티 상품을 파는 관광 코스가 됐다.
▶코로나 확산으로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자 명동이 특히 치명타를 입었다. 임대료 비싼 1층 상가 공실률이 60%쯤 된다고 한다. 명동(明洞)이 아니라 암동(暗洞)이 됐다. 관광객이 다시 찾아오면 어느 정도 매출은 회복되겠지만 화장품 싹쓸이하는 중국 관광객에게만 의존해서는 ’100년 상권' 명동의 명성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일 듯싶다.
05.11 벤츠 차주 마녀사냥
약혼녀가 있는 청년 스티븐이 약혼녀의 사촌 자매인 매기를 납치해 밤새도록 구애한다. 매기는 “윤리에 어긋난 짓을 할 수는 없다”며 집요한 유혹을 뿌리쳤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사촌의 약혼자와 놀아난 부정한 여자’가 돼 있었다. 헛소문이 수습할 수 없을 만큼 퍼졌고 매기는 목숨마저 잃는다. 19세기 영국 소설가 조지 엘리엇의 장편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이야기다. 소설에서 마을 사람들은 무고한 여성을 마녀사냥하고도 “나는 윤리적이다”는 착각에 빠져 도덕적 우월감까지 즐긴다.
▶프랑스 혁명 전야,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혼외정사를 했다는 헛소문에 시달렸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을 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단두대에 올랐다. 오늘날엔 소셜미디어가 가짜 뉴스발(發) 마녀사냥의 온상이다. 미국인 3분의 2가 소셜미디어로 뉴스를 접한다. 퓰리처상 수상 저술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책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뉴스를 가족이나 친구, 페이스북, 트위터에 의존하면 가짜 뉴스를 게걸스레 먹는 괴물에게 먹히는 꼴”이라고 경고했다.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몇 해 전 서울의 한 버스 기사는 버스에서 뛰쳐나간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엄마의 애타는 정차 요구를 외면했다는 사이버 공격에 시달렸다. 버스를 아무 곳에나 세우면 그게 더 위험하다. 프로 배구선수 박상하는 학폭 허위 폭로 때문에 운동을 그만뒀다. 타인을 매도함으로써 정의감을 누리려는 심리, 잘나가는 이들에 대한 반감, 사실보다 흥미를 더 자주 노출하도록 설계된 소셜미디어 알고리즘 등이 공범으로 지목된다.
▶'벤츠 보복 주차 공식 사과문'이란 제목의 글이 엊그제 자동차 관련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재됐다. 홈쇼핑 건물 지하 주차장 두 칸에 걸쳐 차를 댄 벤츠 차주를 비난하며 글쓴이가 제시한 팩트들이 가짜였다고 자백했다. 다른 주차 공간이 있는데도 일부러 벤츠 옆에 바짝 주차한 사실이 드러났다. 벤츠 차주가 이미 자초지종을 밝혔다. 그때 귀 닫고 떼로 몰려가 조롱하고 비난했던 이들이 반성했다는 소식은 없다.
▶2000년 전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모든 악(惡) 가운데 가장 속도가 빠른 악은 입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엔 거의 광속으로 퍼진다. 어느 기업 대표는 포털 사이트에 퍼진 자신 관련 소문을 모두 찾아내 삭제하기 위해 전담 인원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그럴 힘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다.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각성이 일어나고 포털 사이트들이 돈보다 윤리를 중시하지 않으면 인터넷은 ‘헛소문의 지옥'이 될 것이다.
05.12 文 정권식 괴상한 군가
논산 훈련병 시절, 일과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갈 때면 교관들이 군가 ‘팔도 사나이’를 시켰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얼싸 좋다 훈련병~’ 얼싸 좋지는 않았지만 노래를 부르면 기운이 났다. 이래서 군가를 부르는구나 싶었다. 훈련 상황에 맞춰 다양한 군가가 있다는 것도 입대 후 알았다. 구보 때는 손뼉을 치며 고함치듯 부르는 ‘멋진 사나이’가 제격이었다. 열두 시간 행군하던 날엔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행군의 아침’을 불렀다.
▶군가는 연미복 입고 부르는 성악이 아니다. 음치도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쉬워야 한다. 박자는 씩씩한 군인정신을 강조하는 4박자 행진곡풍이 대세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로 시작하는 ‘이등병의 편지’는 군가가 될 수 없다. 애국심과 웅장한 기상을 노래하다 보니 국가(國歌)로 발전한 곡도 꽤 된다. 미국의 ‘스타 스팽글드 배너’가 대표적이다. 1814년 발표된 시 ‘맥헨리 요새 방어전’에서 가사를 따왔고 1931년 국가로 지정됐다. 프랑스와 베트남 국가도 처음엔 군가였다.
▶'멸공의 횃불' ‘빨간 마후라’ ‘전선을 간다’는 시대를 초월해 불리는 군가다. 대한민국 남자면 누구나 안다. 노래방 선곡표에도 오를 정도다. 변화를 겪는 군가도 있다. ‘육군가’는 ‘화랑의 핏줄 타고 자라난 남아’에서 ‘남아’가 ‘우리’로 바뀌었다. ‘여군 1만명’ 시대를 반영했다. 군가의 대표곡이던 ‘진짜 사나이’는 “사나이만 군인이냐”는 지적이 많아 이젠 잘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세태의 변화다.
▶육군이 지난달 새 군가 ‘육군, 위(we) 육군’을 선보였다. 들어보니 낯선 8분의 12박자에 쉼표, 셋잇단음표로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 따라 부르기가 어려웠다. 가사도 정권 홍보곡 같다는 지적을 받는다. ‘아미 타이거’는 이 정부 100대 과제인 4차 산업혁명 관련 내용의 영어 약자다. ‘워리어 플랫폼’ ‘AI 드론봇’ 등 가사 내용엔 실소가 나왔다. 육군 유튜브엔 혹평 일색이다. ‘육군 가려 했는데 이 노래 듣고 해병대 가기로 했다’는 댓글엔 공감 표시가 줄줄이 붙었다.
▶2절 가사엔 ′독립군의 후예답게 이 강산을 내가 지킨다'고 돼 있다. 일본이 잠재적 적대 세력일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우리 생명을 위협하는 눈앞의 적은 아니다. 그 적은 모두가 알다시피 핵무장까지 한 북한 집단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에 아부해 진급하려는 장군들은 북의 눈치를 본다. ‘군사력 아닌 대화로 나라를 지킨다'고 한다. 그러더니 괴상한 군가까지 만들었다.
05.13 부럽기만 한 아이언 돔
지난 2019년 5월 이스라엘을 방문했다가 실전(實戰) 상황을 경험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이 이틀 동안 이스라엘 남부 지역에 로켓탄 700여 발을 발사했다. 이스라엘은 요격 미사일 ‘아이언 돔(Iron Dome)’으로 인구 밀집 지역에 떨어질 확률이 높았던 로켓탄 173발을 요격해 공중에서 폭발시켰다.
▶아이언 돔은 2000년대 들어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하마스’의 로켓 공격 등으로부터 이스라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미·이스라엘 공동으로 개발됐다. 처음에 미국은 요격 거리가 너무 짧기 때문에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며 공동 개발에 부정적이었고 이스라엘 내에서조차 “로켓탄 요격보다 공격 원점 제거 타격이 더 효과적”이라며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2004년 미사일 방어 체계 옹호론자인 대니얼 골드 준장이 이스라엘 국방안보연구개발국 책임자로 취임한 뒤 정치권 등에 대한 설득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어 개발에 착수했다.
▶엊그제 이스라엘 국방부가 팔레스타인 로켓들을 아이언 돔이 요격하는 장면을 SNS에 공개한 영상이 화제다. 20여초간의 짧은 영상에서 아이언 돔은 약 20발의 팔레스타인 로켓들을 불꽃놀이 폭죽을 터뜨리듯 잇따라 요격했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90%의 명중률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아이언 돔은 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동시 요격 능력이 크게 향상됐고, 최대 사거리도 70㎞에서 100㎞ 이상으로 늘어났다. 처음엔 로켓·포탄만 막을 수 있었지만 이젠 탄도미사일 요격도 가능하게 진화했다.
▶지난 2010년 11월 연평도를 방사포(다연장로켓)로 포격했던 북한은 팔레스타인보다 크고 강력한 로켓들을 훨씬 많이 보유하고 있다. 북한은 유사시 최대 340문에 달하는 170㎜ 자주포 및 240㎜ 방사포로 1시간에 최대 1만6000여발의 포탄(로켓탄)을 수도권에 퍼부을 수 있는 것으로 군은 보고 있다. 우리 군도 연평도 도발 직후 아이언 돔의 도입을 검토한 적이 있지만 한반도 상황에는 적절치 않다며 ‘한국형 아이언 돔’ 개발을 결정했다.
▶북한은 지난해 이후 600㎜ 초대형 방사포를 잇따라 시험 발사하는 등 방사포 전력을 계속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형 아이언 돔 개발은 오히려 계속 지연돼 빨라야 2029년쯤에야 도입될 수 있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설마’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보다 얼마나 안전한 나라여서 이렇게 태만한가. 우리 군 수뇌부는 북한의 위협에 대해 어떤 절박감과 위기의식을 갖고 있나. ‘설마'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05.14 입양이라는 축복
호주에 1년간 체류할 때 다니던 한인교회가 마련한 ‘한국인 입양의 날’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날 함께한 파란 눈 호주인들이 한국 출신 입양 자녀를 품에 안고 “내 아들” “내 딸”이라며 이름을 소개했다. 어떤 부모는 “우리 부부에게 아이를 선물해 준 한국에 감사한다”며 아이와 함께 한복을 차려입고 참석했다. 이런 게 선진국이구나 싶었다. 흑인 아이 8명을 입양한 미국인 백인 부부 얘기를 외신에서 읽은 적도 있다. 인종이 다른 아이들과 가족을 꾸린 이유를 묻자 부부는 “사랑을 주고받으면 그게 가족이지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신생아는 대개 생후 100일쯤이면 부모를 알아보고 애착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옹알이를 하거나 눈을 맞추며 웃고 낯가림을 하는 모든 게 애착의 표현이다. 하지만 애착 관계가 꼭 피붙이 사이에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친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분리불안을 겪는다. 육아 전문가들은 아이에게 분리불안에 노출된 시간의 두 배 이상 사랑을 쏟으면 대개 상처를 극복하고 양부모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늦게 입양했다면 조금 더 기다리며 사랑을 주라는 뜻이다.
▶지난해 입양 건수가 492명(해외 입양 232건 포함)으로 통계를 작성한 1958년 이래 역대 최소를 기록했다. 입양 관련 끔찍한 사건도 잇따라 터지며 애써 입양을 결심한 이들마저 주눅 들게 한다. 지난해 10월 정인이가 양부모의 학대로 사망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데, 엊그제 두 살 난 아이를 칭얼댄다고 주먹으로 때려 중태에 빠뜨린 양아빠가 구속됐다.
▶입양 가정 부모들은 입양이 부모 없는 아이에게 베푸는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고 한다. 소설가 김이설의 단편 ‘오늘처럼 고요히’는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입양 이야기다. 소설에서 생리 우울증으로 죽음의 유혹에 시달리던 여자가 엄마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을 앓는 소녀를 딸로 받아들인다. 엄마가 된 여자는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며 삶의 의욕을 되찾고, 엄마가 생긴 아이도 실어증을 극복한다.
▶13일 자 조선일보에 가슴으로 낳은 딸을 키우는 서울 강동구 조호재씨 가족 사연이 실렸다. 남매를 둔 부부는 3년 전 막내 성은이를 입양했다. 조씨 부부는 “아이 덕분에 행복하다”며 “성은이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했다. 그들에게만 선물인가. 잇단 입양아 학대 사건에 상처받았던 국민에게도 조씨 가족 사연은 선물이자 위안이었다. 성은이 가족이 오래 사랑하며 행복하길 바란다.
05.15 공공장소 음주 천국
▲신종 코로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적용으로 모든 요식업과 유흥업소의 영업시간이 끝난 지난 4월 26일 밤 22시 30분이 넘은 서울 서초구 한강시민공원에서 일부 시민들이 음주하고 있다. /연합뉴스
13일 밤 10시 30분쯤 서울 경의선숲길 공원. 한 여학생이 비틀거리다 잔디밭 줄에 걸려 넘어졌다. 그냥 넘어진 정도가 아니라 퍽 소리가 나도록 땅바닥에 쓰러졌다. 같이 산책하던 아내가 “얼굴도 다쳤을 것 같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그제야 일행 남학생들이 부축하려고 몰려들었다. 주변엔 캔맥주 등 술을 마시는 젊은 사람이 가득했다. 코로나로 술집·음식점은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고성은 끊이지 않았다.
▶서울 한강공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의대생이 숨지기 전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사진이 공개됐다. 외국이라면 이 자체가 있기 어려운 일이다. 이 사건 진상과는 별개로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규제하자는 논의도 나오고 있다. 서울시는 한강공원을 금주 구역으로 지정하는 방안에 대해 공청회 등을 열기로 했다 한다.
▶외국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법이나 조례로 강력하게 규제하기 때문이다.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개봉한 술을 갖고 다니는 것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주류개봉금지법이 있는 나라도 많다. 미국 뉴욕주는 공원에서 술병을 내놓고 마시면 1000달러(약 110만원) 이하 벌금 또는 6개월 이하 징역에 처하고 있다. 다른 주도 대부분 법이 비슷하다. 아이오와주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기만 해도 625달러 이하 벌금을 물거나 30일 이하 투옥을 당할 수 있다.
▶호주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으나 길거리·공원·해변 등을 공공장소로 지정해 음주를 금지하고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을 발견하면 경찰이 바로 제재하는데, 술이 깰 때까지 취객을 경찰서 내 임시 거처 등에 격리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오후 10시 30분부터 오전 7시까지, 그리고 주말에 모든 공공장소(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에서 음주가 불가능하다. 어기면 초범은 최고 1000달러 벌금, 누범은 최고 2000달러 벌금과 3개월 실형이다. 태국도 비슷한 규제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술을 아무 곳에서나, 그것도 만취하도록 마시고 비틀거리는 취객이 흔한 나라는 사실상 없다. 그런데도 공공장소 음주를 규제하는 실효성 있는 정책이 없었다. 서울시, 대구 수성구 등이 금주 구역에서 술을 마시고 심한 소음, 악취를 낼 경우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는 조례를 만들었지만 유명무실하다. 제한된 장소에서 적당한 음주는 삶에 즐거움과 활력을 준다. 그러나 선을 넘으면 사고와 타인의 피해로 이어진다. 공공장소 음주에 대한 적절한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민철 논설위원 논설실 논설위원
05.17(월) 쉰 넘긴 ‘젊은 피’
일본 신문 ‘사람’ 면에 은행장 출신 90대 원로 소식이 실렸다. 별세 소식을 알리는 부음(訃音) 기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인사(人事) 기사였다. 40여년 만에 은행 이사에서 물러나 완전히 퇴임한다고 했다. 2000년대 후반 일이다. 일본인 친구에게 “이게 가능한 일인가” 물었다. 그는 “우리 회사 사장은 80대”라고 했다. 일본 경제는 1970~80년대가 전성기였다. 그때 주역이 그 후 ‘잃어버린 20년’ 동안에도 계속 주역을 맡았다.
▶한국 경제는 역동적인 편이다. 해방 후 공업화로 산업의 주역이 싹 갈렸다. 이들과 함께 고도성장을 이끈 베이비붐 1세대는 IMF 외환 위기와 함께 날벼락 얻어맞듯 물갈이됐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고도성장 신화를 앞세워 눌러앉을 세대를 쫓아내 신세대가 진입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열었다. 직후 IT 산업 붐으로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출생이 경제의 중심에 진입했고, 지금은 인공지능 산업 붐과 함께 7080년 세대가 약진하고 있다. 일본에 비하면 활력이 있다.
▶한국 정치권에서 신세대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야당에선 70년대생들이 당권까지 도전하고 있다. 이들을 ‘젊은 피’라고 한다. 그런데 열거된 사람들을 보니 이준석 전 최고위원을 빼면 김은혜·김웅·윤희숙 의원 모두 50대로 접어들었다. 그냥 1970년대 생 초선(初選)일 뿐이다. 경제계였다면 아마 ‘늙은 초짜’로 불렸을 것이다. 베이비붐 1세대가 그 나이 때 눈물을 뿌리면서 대거 퇴장했다. 가장 젊다는 이 전 최고위원 또래 중엔 10번 사업을 말아먹고도 몇조원 가치의 기업을 일군 사업가가 있다.
▶이들 ‘젊은 피’의 반대쪽에서 주호영 의원과 나경원 전 의원이 경쟁하고 있다고 한다. 주 의원은 61세에 5선이다. 나 전 의원은 아직 50대인데도 4선 경력이다. 지금 ‘젊은 피’들 나이 때 그는 3선이었다. 시대를 잘 만난 것일까. ‘젊은 피’ 담론에 나오는 면면들 자체가 그동안 한국 정치가 얼마나 고여 있었는지 보여준다.
▶젊다고 좋지도, 새롭지도 않다. 나라를 젊고 새롭게 이끄는 어젠다(의제)와 추진력이 중요할 뿐이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된 건 40대였기 때문이 아니다. “Yes, We can!”이란 성공 메시지를 밀어붙여 미국 사회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69세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재임 때부터 치매 증상으로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젊은 케네디보다 훨씬 더 미국을 근육질이 강한 젊은 나라로 회춘시켰다. 왜 세대교체를 해야 하나? 대답을 들었으면 한다. 젊은 얼굴이 보고 싶은 만큼 젊은 어젠다도 듣고 싶다.
05.18 머스크의 두 얼굴
일론 머스크는 “어릴 적 별명이 ‘천재’였다”는 모친 말대로 소년 시절부터 유별났다. 열두 살 때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500달러를 받고 게임 업체에 팔았다. 벌목꾼 등으로 고학하다 장학생 대우를 받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 편입한다. 물리학, 재료공학을 공부하며 스탠퍼드대 박사 과정에 진학했지만, ‘제2의 빌 게이츠’를 꿈꾸며 곧 자퇴한다.
▶처음 창업한 인터넷 지도 관련 소프트웨어 업체를 3억7000만달러(약 4200억원)에 팔아 28세에 벼락부자가 된다. 두 번째 창업한 전자상거래 기업 ‘페이팔’은 이베이에 15억달러(약 1조7000억원)에 팔려 31세에 억만장자가 된다. 거금을 쥔 머스크의 시선은 우주로 향한다. “인류 멸종을 막으려면 지구 밖에 제2의 문명을 만들어야 한다.” ’2050년까지 화성에 100만명을 이주시킨다'는 목표로 2002년 우주항공 기업 ‘스페이스X’를 창업한다.
▶화성 100만명 이주에 1회용 로켓을 쓰면 로켓 1만4600개, 제작비 3000조원이 소요되는 반면 재활용 로켓을 만들면 필요 로켓을 1000개 이하로 줄일 수 있다. 재활용 로켓 개발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 시절 ‘왜 우주 사업에 뛰어들었나’라는 질문에 머스크는 “재산을 줄이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답했을 정도다. 로켓 회수 실험은 10번 이상 실패를 거듭한 뒤 2015년에야 첫 성공을 거둔다. 로켓이 원래 발사 자리로 돌아와 사뿐히 내려앉는 장면은 세계인들에게 머스크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전기차, 테슬라의 개발 역시 시행착오가 많았다. 전기차 출시가 지연되면서 공매도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10대 시절 캠퍼스 커플로 만나 쌍둥이, 세 쌍둥이 합쳐 아들 다섯을 낳은 부인과 이혼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온갖 시련을 딛고 일어서 순간 가속 능력이 포르셰를 능가하고 1회 충전에 400㎞ 이상 주행하는 전기차를 완성해 위기를 돌파했다. “스티브 잡스를 뛰어넘는다”(뉴욕타임스)는 찬사가 쏟아졌다.
▶머스크가 가상화폐 오락가락 언행으로 ‘사기꾼’으로 몰리고 있다. 비트코인을 띄우다가 갑자기 악담을 퍼부어 코인 투자자들을 아연실색하게 한다. 시가총액 2조달러를 웃도는 세계 가상화폐 시장이 그의 말 한마디에 휘둘린다. 이런 언행으로 그는 돈을 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증시에서 이런 일을 했으면 중형을 받을 수 있다. 머스크의 진의는 아무도 모른다. 머스크는 “나는 사실 아스퍼거 증후군(의사소통 장애)을 앓고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천재의 야누스 같은 두 얼굴을 보는 것 같다.
05.19 ‘세종 로또’가 된 공무원 특공
올 2월 초 세종시 아파트 청약을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 ‘공무원 특공(아파트 특별공급)’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전체 공급 물량 1350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용 85㎡ 이하 아파트 가운데 신혼부부, 생애 최초, 다자녀 가구 등에 배정하는 특공 물량 58%, 공무원에게 주는 특공 물량 40%를 빼고 나면 달랑 2%, 24가구만 일반 분양으로 나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시에 공무원이 40% 사는 것도 아닌데 공무원 특공을 40%씩이나 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난 여론이 무성했다. 결국 특별 공급을 줄이고 일반 분양을 다소 늘리긴 했지만 ‘공무원 특공’ 비율은 줄어들지 않아 또다시 원성을 샀다.
▶말 많았던 2월 청약의 경우, 390가구 모집에 7만명 넘게 몰려 일반 분양 경쟁률이 183 대 1에 달했다. 경쟁률이 2000 대 1이 넘는 평형도 있었다. 반면 공무원 특공 경쟁률은 한 자릿수였다. 같은 특공이라도 신혼부부 특공이나 생애 최초 특공은 경쟁률이 수십 대 1이었다. ‘공무원 특공’이 국민 눈에 ‘세종 로또’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부동산원 통계로 지난해 세종시 집값은 42.27% 상승했다. 여당 원내대표의 ‘국회 세종시 이전’ 발언이 불에 기름 부은 격이 됐다.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되면서 시세보다 낮은 분양가에 아파트 청약 기회가 주어진다. 청약에 당첨됐다 하면 수억원에서 많게는 10억원 차익이 예상되는 ‘청약 로또’ 지역이 돼 전국에서 청약 신청자가 몰려든다.
▶세종시 아파트 10만 가구 가운데 지난 10년간 ‘특공’ 아파트를 분양받은 공무원은 2만5000여명이다. 작년까지 4000여명이 집을 팔았고 나머지는 보유하고 있거나 거주한다. 지난해 다주택 공직자 19명이 세종시 ‘특공’ 아파트를 매각했다. 평균 보유 기간 4.2년, 차익은 4억원에 육박한다. 주택 정책을 총괄하는 국토부 장차관부터 ‘특공 재테크’로 수억 차익을 얻었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사람들이 특별공급 아파트로 연간 1억원꼴로 과외 수입까지 올린 셈이니 이런 특혜가 없다.
▶관세청 산하 관세평가분류원이 세종시 이전 대상이 아닌데도 예산 171억원을 타내 신청사를 짓고 소속 직원 82명 가운데 49명은 특공 대상으로 아파트 분양까지 받았다. 기관 이전은 취소됐지만 규정이 없어 분양받은 특공 아파트를 취소시키거나 환수할 수는 없다고 한다. 3기 신도시에 투기했던 LH 직원들에 이어, 또다시 국민 속을 긁는 부동산 고문이다.
05.20 사고 확률 ’1000만년에 1번'
한국인이 일생 동안 1번이라도 교통사고로 다칠 확률은 35.2%라고 한다.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은 1.02%다. 대략 3명 중 1명이 사고를 당하고 100명 중 1명이 죽는다. 암에 걸릴 확률보다 높다. 그래도 한국 기업은 매년 자동차 250만대를 생산하고, 한국인은 매년 자동차 180만대를 구입한다. 교통사고로 한해 3000명 이상 죽지만 자동차를 추방하자고 시위하는 사람은 없다.
▶사망 확률이 1만년에 1명인 횡액이 있다. 이 확률이 무서워 수만, 수십만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무언가에 씐 듯 추방 시위를 벌이는 광경을 믿을 수 있을까. 13년 전 광우병 사태 때 광화문 네거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인의 미국산 쇠고기 섭취량과 발병률을 계산하면 감염 확률은 무시할 수준이다. 그런데 전문가 말보다 “한국인의 인간 광우병 감염 확률이 94%”라는 얼치기들의 거짓 주장이 먹혀들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14일 회의에서 경북 울진의 신한울 1호기 원자로에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울진엔 사실상 공항이 없다. 정치적 고려로 만든 울진공항은 취항하는 항공사가 없어 비행훈련원으로 사용 중이다. 원전을 지나는 비행기 항로도 없다. 그런데도 일부 위원이 난데없이 항공기 충돌 사고 가능성을 제기했다.
▶원자력안전기술원 전문가가 미 에너지부 계산 지침에 따라 확률을 제시했다. 1000만년에 1번. 바꿔 말하면 한해에 이 원전에 비행기가 충돌할 확률이 1000만분의 1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제로(0)에 수렴한다. 그러자 한 위원이 이렇게 대들었다. “그러니까 신경 끄자? 그러면 미사일은? 그것도 확률로 따질 거요? 북한 장사정포가 발전소를 까면? 다른 데다 쐈는데 우발적으로 떨어지면?”
▶한국에서 벼락 맞을 확률은 600만분의 1이다.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을 확률은 300만분의 1, 화재로 죽을 확률은 40만분의 1, 화장실에서 다칠 확률은 1만분의 1이다. 세상이 무서워서 어떻게 밖을 나다니는지 모르겠다. 원안위는 작년 11월 이후 이런 식으로 회의만 11번째 하면서 신한울 1호기 운영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어떤 위원은 “쓰나미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전문가 말에 “그러면 홍수 대책을 내놓으라”고 했다. 다음엔 소행성 충돌 대책을 내놓으라고 할지 모르겠다. ‘탈원전' 눈치 보느라 허가해 주기 싫어서 저러는 것이다. 신한울 1호기는 이미 완공됐다. 가동을 못해 생산 못 하는 전기값만 하루 20억원이라고 한다.
05.21 정치인 ‘풍수 테러’
고려 때 송나라 풍수사 호종단은 고려 국운을 꺾으려고 전국 각지를 돌며 비석을 부수고 범종을 녹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명나라 사신 서사호는 고려 말 ‘천자(天子)의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함경남도 단천에 쇠말뚝 다섯 개를 박았다고 한다. 조선 정조는 그래서 북쪽에서 인재가 안 나온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전국 40여곳의 지맥(地脈)을 잘랐다는 말도 있다. 왜군 장수가 경북 선산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땅에 구멍을 뚫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얘기도 있다. 전해 내려오는 ‘풍수 침략설’이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민족 정기를 말살하고자 전국 명산대천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민간 단체에 이어 정부까지 나서서 대대적인 말뚝 뽑기에 나섰다. 하지만 대부분은 토지 측량이나 공사용 말뚝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풍수 길지(吉地)로 유명했던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의 경북 안동 본가 임청각은 일제가 놓은 철도에 반 토막 나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산천에 흐르는 풍수 혈맥이 인생의 화복흥망(禍福興亡)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다. 융성한 집안은 조상 무덤이나 집의 풍수 덕이라 여겼고 그게 끊기면 흉조가 난다고 믿었다. 상대 가문에 원한이 생기면 무덤에 구멍을 파거나 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조선 때 이런 일이 많았는지 곤장·유배·참형으로 엄히 다스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은 방화로 잔디 등이 불탔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엔 오물이 뿌려졌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조상 묘엔 쇠말뚝이 박혔다. 충무공 이순신,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묘소에서도 식칼과 말뚝이 발견됐다. 이 전 총재와 이순신 장군 묘역의 말뚝은 무속인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람들이 목표로 삼는 곳은 대부분 특정인의 묘인 경우가 많다.
▶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 할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지고 인분, 식칼, 부적, 머리카락 등이 발견됐다고 한다. 누군가 윤 전 총장을 저주하려고 ‘풍수 테러'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터넷에선 한때 윤 전 총장을 저주하는 인형과 부적이 나돌았다. 우리 사회엔 잘못된 풍수 사상과 무속적 믿음이 아직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무덤에 말뚝 박고 인분 뿌린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대선이 다가올수록 갈등이 심해져 이런 식의 저주도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풍수 테러는 그나마 나을 수 있다. 김대업 사건과 같은 조작과 사기극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어디선가 이미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05.22 바이든, 文 앞에서 중공군 막은 老兵에 훈장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한국전쟁 명예 훈장 수여식에 참석해 랠프 퍼킷 주니어 퇴역 대령에게 훈장을 수여한 후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뉴시스
1950년 10월 19일 백선엽 장군의 국군 1사단이 평양에 입성했다. 그날 펑더화이의 중공군 주력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중공군 참전 기념일은 19일이 아니라 25일이다. 국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날을 기념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일부 병력도 중공군과 교전했지만 유엔군 사령부는 소규모 중공군이 도강한 줄 알았다. 맥아더는 중공을 얕봤다.
▶11월 25일 중공군 18만이 청천강에서 북진하려던 국군과 미군을 공격했다. 대장정과 국공 내전, 항일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였다. 산악·야간 이동, 침투, 매복, 기습 등이 몸에 뱄다. 밤에 담뱃불 하나 안 들킬 정도로 군기도 잡혔다. 적을 거의 포위한 뒤 공격하는 것이 기본 전술이다. 이런 중공군과 처음 맞닥뜨린 아군은 크게 당황했다. 야음을 틈타 무전기 대신 피리·나팔로 공격 신호를 보내며 사방에서 밀려드니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무식한 ‘인해전술’이 아니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한국군을 집중 공격하라고 했다. 훈련 기강 장비 모두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청천강 오른쪽을 지키던 국군 2군단이 궤멸됐다. 군단장은 그 사실조차 몰랐다. 주력인 미 8군이 완전 포위될 위기였지만 터키여단의 사투 덕분에 겨우 퇴각로를 확보했다. 터키군은 모자를 던져놓고 그 뒤로는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청천강 전투에서 1만명 이상 전사자를 낸 미군은 38선 이북을 포기하고 후퇴해야 했다. 남북 통일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바이든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천강 전투 영웅인 퍼킷 예비역 대령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당시 퍼킷 중위는 수류탄과 박격포탄 파편에 중상을 입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국군 9명이 같이 싸웠다. 미군 ‘명예 훈장’은 한 번의 작전에서 1개 사단당 1명만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이다. 이를 받은 군인에게는 계급과 관계 없이 경례로 예를 표하는 것이 미군 전통이다.
▶문 정부가 임명한 광복회장은 백선엽 장군의 현충원 안장을 가로막았다. 6·25 남침에 공을 세워 김일성 훈장을 받은 김원봉의 서훈을 주장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보다 먼저 시진핑과 통화해 “중국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고 칭송했다. 중국공산당 100년을 “진심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자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이러려고 (6·25 때) 우리가 함께 피를 흘렸느냐”고 분개했다. 문 대통령은 중공군을 막으려고 청천강에 피를 쏟은 미군 훈장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05.24(월) 미사일 지침
한 나라의 힘은 그 나라 무기가 닿을 수 있는 영역과 비례했다. 더 멀리 더 정확하게 적을 타격하는 무기를 선보인 것이 곧 인류의 전쟁사다. 활과 투석기는 화약 추진력으로 멀리 날아가는 발사체 기술로 이어졌다. 중국 당나라 화전(火箭)이 최초다. 발사체 사거리의 획기적 진전은 갈릴레오와 뉴턴에게 빚을 지고 있다. 갈릴레오가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정립하고 뉴튼이 운동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탄도학이 등장했다.
▶독일이 1944년 세계 최초 탄도 미사일 V-2 3000기를 영국으로 날렸다. 사거리 300㎞. 전쟁 말기에 개발됐으니 망정이지 일찍 등장했다면 2차 대전의 승패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V-2 개발자들을 데려오기 위한 미·소 간 경쟁이 벌어졌다. 미군은 브라운 박사와 연구 인력을 손에 넣었다. 소련은 로켓 생산공장을 점령해 부품들을 입수했다. 소련 물리학자 코롤료프는 “이 무기가 일본에 투하된 핵무기와 결합해 궁극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예상대로 됐다.
▶1978년 9월, 충남 국방과학연구소(ADD) 안흥시험장에서 미국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닮은 탄도미사일 ‘백곰’이 불기둥을 뿜었다. 세계 7번째 탄도미사일 보유국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거리 180㎞, 휴전선에서 북한 평양까지 거리다. 연구원들은 가족에게 해외 출장 간다 하고 안가(安家)에 숨어 개발했다. 미국은 백곰이 나이키 허큘리스보다 한 단계 발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미 8군 사령관이 ADD를 직접 찾아왔다. 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공식 서한도 보냈다. 노재현 국방 장관은 ‘사거리 180㎞ 이상은 개발하지 않겠다’고 서한으로 화답해야 했다. ‘미사일 지침’의 시작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으로 휴지기에 들어간 미사일 개발은 1983년 아웅산 테러로 재개됐다. 우리 군은 1986년 백곰을 개량해 정밀도를 높인 탄도미사일 ‘현무’를 선보였다. 하지만 1999년까지도 사거리 180㎞에 묶여 있었다. 그 이후 4차례 개정을 통해 탄두 중량 제한은 풀었지만 사거리는 800㎞가 최대였다.
▶한·미 정상이 양국의 미사일 지침을 폐기하기로 했다. 사거리 제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족쇄에 묶여 42년간 제자리걸음 하는 사이 북한은 사거리 1만㎞ 전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했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완성을 앞두고 있다. 만시지탄이다.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동북아에서 생존하려면 최소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건드리는 나라는 자신들도 크게 다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핵무기를 억지력이라고 내세우는 북한도, 그런 북한을 비호하는 중국도 그 어떤 시비를 할 자격이 없다.
05.25 50대 청년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책으로 천 년을 사는 방법’에는 갈수록 젊어지는 세상에 대한 콩트가 실려 있다. 에코는 자신이 젊었을 시절 20대 중반이면 이미 ‘청년'은 넘어선 나이였다며 향후 펼쳐질 ‘50세 청년’ 세상의 모습을 그렸다. “말씀 낮추십시오. 저는 겨우 쉰 살입니다”라고 말하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요즘 50대가 버스 앞쪽 경로석에 앉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20년 전만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미국의 51세 골프 선수 필 미켈슨이 그제 끝난 PGA 챔피언십에서 사상 첫 50대 메이저 우승 기록을 세웠다. 스무 살 아래 브룩스 켑카와 챔피언조로 나서 승리했다. 준우승한 남아공 루이 우스트히즌도 우리로 치면 40세다. 축구·농구 등 격렬한 종목을 빼면 40대 현역이 흔해지면서 노익장이란 말 자체가 어색해졌다. 체력 소모가 심한 테니스에서 나달·조코비치와 함께 세계 무대를 3분한 로저 페더러도 두 달 뒤면 40세다.
▶골프에서 나이가 문제되는 것은 근력보다는 순간 집중력 저하라고 한다. 미켈슨도 대회 전 “우승은 몸이 아닌 정신적 문제”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2030에 전혀 뒤지지 않는 장타와 함께 높은 집중력도 발휘했다. 스포츠 의학에선 미켈슨이 2030 못지않은 집중력을 유지한 비결로 체력 훈련을 꼽는다. 미켈슨은 껌 씹기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씹는 행위가 뇌 혈류를 최대 40% 늘려 집중력을 높이고 뇌를 젊게 유지한다는 연구도 있다.
▶50대 메이저 우승은 미켈슨이 처음이지만 결코 그가 끝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60대 우승도 나온다. 이미 톰 왓슨이 목전까지 갔다. 도쿄 노인의학연구소가 2007년 87세 노인의 건강과 체력을 조사했더니 1977년 70세에 해당했다. 30년 사이 17세가 젊어졌다. 요즘엔 자기 나이에 0.7을 곱하면 아버지 세대의 신체·정신·사회적인 나이와 맞먹는다고 한다. 지금 87세는 아버지 세대의 61세인 셈이다. 유엔이 65세를 고령자 기준으로 정한 것이 1956년이다. 여기에 0.7을 곱하면 45세다. 65세는 더 이상 노인이 아니란 얘기다. 정년 연장, 더 나아가 아예 정년을 없애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환갑' ‘진갑' 운운도 우스운 시대가 됐다.
▶세계에서 셋째로 평균 수명이 긴 홍콩은 노인을 ‘오래도록 젊다는 뜻’의 장청인(長靑人)이라 한다. 평균 수명 100세를 사는 ‘호모 헌드레드’가 인류를 규정하는 표현이 된다는 전망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길어진 젊음을 어떤 열정으로 채우느냐가 될 것이다.
05.26 ‘백신, 1초라도 빨리 맞는 것이 낫다’
▲25일 서울 도봉구 시립창동청소년센터에 마련된 코로나19 접종센터에서 어르신들이 백신 접종을 받고 있다. /뉴시스
최근 60세 4명이 저녁 모임을 하는 자리. 한 명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접종을 예약했다고 하자 다른 3명이 “그걸 왜 맞느냐”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혈전증과 통증 등 접종 후 이상 반응에 대한 걱정, 좀 기다리면 화이자 등 더 나은 백신을 맞을 수 있지 않느냐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고 한다.
▶AZ 백신에 대한 예약률이 좀처럼 올라가지 않고 있다. 25일 현재 AZ 접종 대상자인 60~74세 911만여명 중 530만여명이 예약을 마쳐 예약률 58.2%를 기록하고 있다. 다음 달 3일 예약 종료인데 40% 이상이 아직 예약하지 않은 것이다. 화이자 백신을 맞는 75세 이상 접종 동의율이 86%였던 것에 비하면 저조한 편이다.
▶혈전증의 경우 60세 이상은 거의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 얘기다. 접종자 10만~20만명에 한 명꼴로 혈소판감소성혈전증이 발생하는데 60세 이상에서는 유의미한 수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혈전증이 발생하더라도 조기에 진단해 치료할 수 있다. 통증·고열 등은 화이자 백신도 마찬가지고 감내할 만한 수준이다. 부작용 없는 백신은 없다. 독감 백신도 마찬가지이지만 전 국민이 아무 걱정 없이 맞고 있다. 백신도 신체의 입장에서는 이물질이기 때문에 접종 후 국소적인 반응은 불가피한 것이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접종자 사망 신고율은 AZ와 화이자가 비슷하며 해외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망설이지 말고 접종해달라”고 했다. 국내의 경우 접종자 10만명당 사망 신고율이 AZ 2.62건, 화이자 2.71건으로 오히려 화이자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이 수치는 신고한 비율이고 지금까지 국내 사망 사례 중 백신 접종과 사망 사이의 인과성을 인정받은 경우는 하나도 없다. 독일도 10만명당 사망 신고가 AZ 0.84건, 화이자 2.63건으로 화이자가 많았다. 당국은 이런 과학적인 데이터를 좀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어느 정도 백신에 여유가 생기면 AZ 접종 연령을 지금(30세 이상)보다 상향 조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AZ에 대한 젊은 층 불안감이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백신의 효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국내 60세 이상에서 백신을 1회만 접종하더라도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이 없다. 치명률 제로다. 1회 접종 후 감염 예방 효과도 90% 안팎 향상을 보였다. 코로나에 감염돼 발생하는 피해는 백신 접종으로 하루 이틀 아픈 것에 비할 수 없이 크다. 나와 가족은 물론 주변 동료를 위해서라도 1초라도 빨리 맞는 것이 좋다.
05.27 도쿄올림픽의 운명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 지사에겐 “한일 합방은 조선인이 원했다” 등의 망언 기록이 수두룩하다. 한국만 아니라 미국, 중국, 여성 등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도쿄지사 때 시작한 것이 도쿄올림픽 유치다. 15년 전 일본 후보 도시 결정 회의 때 한심한 장면을 봤다. 도쿄 유치 반대 연설을 한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에게 그는 “수상한 녀석” “건방진 외국인” 등 막말을 쏟아냈다. 이러고도 도쿄가 후보로 선정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의 영광을 재연해 보자”고 했다. 과거지향적인 구호에 국민은 뜨악해 했다. 그 탓에 2016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에서 탈락했다. 이 분위기를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바꿨다. “올림픽으로 패전(敗戰)에서 일어섰다. 지진에서도 일어서자.” 아베 정권의 지원으로 이시하라의 ‘어게인 1964년'이 부활했다. 80% 국민이 올림픽 유치를 지지했다.
▶정치적 탄생 탓일까. 곡절이 참 많다. 여론이 다시 거꾸로 돌았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 70~80%가 개최를 반대했다. 26일자 아사히신문의 반대 사설 일부다. “선수와 관계자 9만명이 일본에 입국한다. 자원봉사자까지 십수만이 활동하고, 끝나면 각자 나라로 돌아간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들어오고, 각지로 퍼져나갈 우려를 씻을 수 없다.”
▶일본 기자에게 “백신을 맞혀서 데려오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백신을 다른 나라에 보내면 국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내 코가 석자’라는 뜻이다. 일본의 백신 접종은 한국보다 16 순번 아래인 세계 130위다. 1980년대 일본은 약을 잘못 허가해 혈우병 환자의 40%인 1800명을 에이즈에 감염시켰다. 400명이 사망했다. 이런 트라우마 탓에 이번에도 정부가 백신 허가를 질질 끌었다. 일찌감치 1억7000만회 분을 계약하고도 모더나와 아스트라제네카 승인을 낸 게 불과 엿새 전이다. 확진자도 매일 4000명씩 발생한다. 올림픽 반대 여론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유도 국가대표 안창림은 재일 한국인이다. 57일 후 태극 마크를 달고 도쿄 부도칸(武道館)에 서기 위해 일생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올림픽이 사라진다면? 9만명 중 일부가 바이러스를 안고 일본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세계인 9만명이 키워 온 올림픽의 꿈도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200여 국가대표가 청춘을 바쳐 꿈을 키웠다. 쉽게 시작했다고 쉽게 내던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이러스를 꺾어야지 꿈을 꺾어서는 안 된다.
05.28 영호남당의 민낯
캐나다에는 퀘벡 지역에 기반을 둔 퀘벡당이 있다. 이 당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프랑코폰의 지지를 업고 2012년 퀘벡주 총선에서 집권 자유당을 눌렀다. 하지만 퀘벡 분리 독립 주장에 따른 경제적 역풍을 맞고 2019년엔 자유·보수당에 이어 제3당으로 내려앉았다. 독일의 기독사회당도 바이에른 지역에만 후보를 내는 완벽한 지역당이다. 기민당과 연정으로 돌파구를 찾았지만 소수 지역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한때 정당의 지역주의가 극심했다. 남북 전쟁 이후 100년 가까이 남부에선 민주당이 아니면 당선이 불가능했다. 반면 북부는 공화당 차지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미국 주요 기업들이 땅값과 인건비가 싼 남부 ‘선벨트’로 내려가면서 변화가 생겼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남부의 민심에 공화당이 파고들었다. 1980년 두 차례 대선에서 공화당이 남부 주를 석권했다. 90년대엔 거꾸로 북부 지역에서 민주당이 대약진했다. 10~20년 사이 상전벽해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선거가 지역당 구조를 고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1987년 대선에선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후보가 대구경북·부산경남·호남·충청을 분할하는 4분 구도가 나타났다. 1997년에는 호남과 충청이 지역적으로 결합한 ‘DJP 연합’이 생겼다. 이제는 한국 정치를 예측할 때 지역 구도는 제1의 변수가 됐다.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 당원 여론조사 대상을 보니 영남 당원의 비율이 55%를 넘었다고 한다. 호남은 불과 0.8%에 그쳤다. 호남 비율이 너무 작아 뒤늦게 2%로 보정해 높였다고 한다. 영남은 인구 비율(전체의 24.9%)에 비해 2배 이상 많고, 호남(9.8%)은 5분의 1에 그쳤다. 당원 연령도 73%가 50대 이상이었고, 40대 이하는 27%에 그쳤다. 영남의 50대 이상이 전체의 절반에 이른 것이다. 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당원 170만명 중 35%인 60만명이 호남이지만 숫자가 가장 많은 수도권 당원의 상당수가 호남 출신이다. 민주당 당내 경선이 호남에서 이기면 그것으로 승부가 끝나는 이유다.
▶이래선 후진적인 지역 대결 정치를 피하기 힘들다. 당 공천이나 정부 인사 때마다 지역 편중 논란이 일 수밖에 없다. 지역이 번갈아 요직을 차지해 ‘부족국가냐’는 개탄도 나온다. 여야 어디도 이런 비정상적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과연 이번 국민의힘 경선에서 이런 고질적 구도를 깨는 이변이 나올까 지켜보게 된다.
05.29 ‘조족지혈(曺族之血)’ 자서전
/페이스북
흉악범도 자서전을 쓴다. 감형 가능성이 없는 흉악범일수록 솔직하다고 한다. 이런 자서전은 베스트셀러도 되고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제작된다. 연쇄살인범 에일린 워노스의 자서전 ‘몬스터’는 영화로 만들어져 주인공 여배우에게 아카데미 주연상까지 안겼다. 반대로 무죄를 받거나 유죄를 받아도 감형 희망이 있으면 솔직하지 못하다. 거짓과 변명으로 이야기를 꾸며낸다. 오 제이 심프슨의 자서전 ‘IF I DID IT(내가 했다면)’이 대표적이다.
▶이런 경향은 화이트칼라일수록 심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서전 유형이다. 김경준의 ‘BBK의 배신’, 신정아의 ’4001′이 그랬다. 세상 앞에서 벌거벗는 기분으로 자신의 사기 행각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면 한국 사회와 권력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의미 있는 서사(敍事)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변명하고 미화하고 거짓까지 보태 종이만 낭비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조만간 자서전 두 권이 이 대열에 합류할 모양이다. ‘한명숙의 진실’과 ‘조국의 시간’이다. 한씨는 “10년간 슬픔과 억울함으로 꾹꾹 눌러 진실을 썼다”고 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의 억울함과 진실은 무엇일까. ‘대변에 향수 뿌리기'라는 어느 평론가의 논평이 지나친가. 조국씨는 소셜미디어에 집필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가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꾹 참고 썼다.” 그러자 바로 신조어가 탄생했다. ‘조족지혈(曺族之血)’. 조국 가족의 피라는 뜻이다. 앞으로 조씨 지지자들은 이 말을 하찮다는 뜻의 원래 의미(鳥足之血·새발의 피)와 정반대로 사용해야 할 듯하다.
▶이청준은 소설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자서전을 원하는 사람에 대해 “적나라한 진실을 증언할 용기도 없고 자신의 과거와 상관없는 새로운 내력을 갖고 싶어 자신의 삶을 거짓 증언한 위인들”이라고 했다. 진실을 증언할 용기가 있었다면 조씨는 이미 법정에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올 때마다 침묵했다. 하루 300번 증언을 거부한 적도 있다. 이러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자서전인가. 이것은 또 어떤 위선인가.
▶자서전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매우 어려운 장르에 속한다. 참회록을 쓰듯 써야 최소한의 진실에 겨우 다가간다고 한다. 조씨가 그렇다. 참회하는 심정으로 ‘조만대장경’으로 불리는 자신의 위선을 반성해도 책 몇 권은 나올 것이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 일부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이런 자세로 쓰면 된다.
05.31(월) 조리병 혹사 논란
/야전 취사 중인 조리병. /국방일보
요리 연구가이자 방송인이며 기업인으로도 이름난 백종원은 포병장교로 임관했지만 간부식당 관리장교로 전역했다. 부대 간부에게 내놓는 음식이 하도 입에 맞지 않아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며 조리장교를 자원했다고 했다. 그는 조리병들을 제대로 가르치려고 직접 레시피를 연구하고 첫 보름 동안은 칼질을 매일 4~5시간씩 연습하기도 했다. 요리의 기본을 군대에서 배운 셈이다.
▶얼마 전 휴가 후 격리 장병에 대한 부실 급식 문제가 시끄럽더니 이제 조리병 혹사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취사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우리도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한 육군훈련소 조리병은 최근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려 실태를 호소하기도 했다. 평소 휴가자를 빼면 12~14명 정도 조리병이 최대 3000인분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느라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고 했다.
▶과거엔 조리병을 취사병이라 불렀다. 그리 나쁜 보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침과 저녁 점호를 면제받았다. 조리병 위생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1년 내내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는 특혜도 누렸다. 휴일을 제대로 챙기지는 못했지만 그땐 병사 전체가 주말 휴식을 꿈꾸지 못했다. 밥 배식은 최고참이 맡았다. 밥이 모자라는 사고가 터지면 큰일이었다. ‘배식에 실패하면 영창’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깎아서 담아주다 마지막 소대가 오면 고봉밥을 준다고들 했다.
▶요즘 조리병은 조리학과나 식품영양학과 출신, 혹은 식당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신병 중에서 우선 선발한다. 부족한 인원은 3주 후반기 교육을 실시해 충원하고 있다. 대충 병사 50~60명당 조리병 한 명을 뽑는 꼴이다. 그래도 손이 달려 식수 인원 80명부터 민간조리원 1명을 추가로 두고 있다. 300명을 넘으면 민간조리원 수도 그에 맞춰 늘려간다. 수요일과 주말엔 햄버거 같은 반조리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신세대 병사의 입맛도 고려하고 조리병의 근무 여건을 배려하려는 뜻이 담겼다.
▶MZ 세대들은 군대에 와서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거침없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엔 훈련소의 한 조교가 “조교가 훈련병들 눈치 보기 바쁜 군대”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병사 봉급 인상, 휴대폰 사용 허용 등을 치적처럼 자랑해온 정부 여당은 ‘이대남(이십대 남성)’ 병사들의 문제 제기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요구를 한없이 들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보여주기식 대책만 남발하면 불만을 잠재우기는커녕 더 크게 터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