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횡설수설 2021-05/ 05-01(토) 재계 서열 - 05-31(월) DPRK와 PRC

상림은내고향 2021. 5. 31. 11:53

횡설수설 2021-05/ 동아일보

05-01(토) 재계 서열

 

카카오 네이버 넥슨 넷마블 등 정보기술(IT)기업과 바이오제약기업 셀트리온이 그제 발표된 71개 기업집단 중에서 순위가 껑충 뛰어올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의 시장지배력 남용 등을 감시하기 위해 매년 이맘때 ‘자산 5조 원 이상 기업집단’을 지정한다. 자산 규모에 따라 순서가 매겨지기 때문에 ‘정부 공인’ 재계 서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기준이 더 높은 ‘자산 10조 원 이상 상호출자제한기업’에는 최대 그룹들이 몰려 있어 평소엔 순위 변동이 많지 않다. 그런데 초유의 코로나19 사태가 대기업의 서열을 바꿔 놨다. 국민들의 소비 패턴이 급변하고, 저금리와 유동성 증가로 유망 기업의 주가가 급등하면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이 40개로 6개 늘고 순위도 많이 바뀌었다.


▷순위가 크게 오른 카카오(작년 23위→올해 18위), 네이버(41위→27위), 넥슨(42위→34위), 넷마블(47위→36위)은 ‘비대면 트렌드’ 혜택을 받은 IT, 게임 기업이다. 셀트리온(45위→24위)도 코로나 치료제 개발 등으로 코로나19 덕을 봤다. 2015년 처음 자산 5조 원을 넘어선 카카오는 지난해 자산 규모를 20조 원까지 키우며 순위를 빠르게 끌어올렸다. 계열사 수도 118개로 1위인 SK그룹(148개) 다음으로 많다. 최근 뉴욕 증시에 상장한 쿠팡은 단박에 60위로 진입했다. 1위 삼성부터 17위 부영까지는 작년과 순위가 같았다.

 

▷과거 한국의 재계 서열을 가장 크게 뒤흔든 사건은 외환위기였다. 1998년 30대 기업 중 23년이 지난 지금 30위 안에 남은 그룹은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한화 GS 현대중공업 한진 두산 LS 대림 현대백화점 금호아시아나 HDC 효성이다. GS LS가 LG그룹에서, 현대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HDC가 옛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만큼 11곳만 남아있는 셈이다. 재계 3위였다가 해체된 대우그룹을 비롯해 쌍용 동아 고합 진로 해태 등 19개 그룹은 사라지거나 30위 밖으로 밀렸다.

 

▷작은 연못 안에선 커보여도 넓은 세계무대에선 한국 기업 규모가 여전히 작다. 작년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한국 기업은 14개에 불과했고 한국 기업 중 1위인 삼성전자의 순위도 전년도 15위에서 19위로, SK㈜는 73위에서 97위로 밀렸다. 전년도에 비해 순위가 오른 현대차(94위→84위)를 포함해 100위 안에 든 기업은 3개뿐이었다. 반면 500대 기업 중 중국 기업은 119개에서 124개로 늘면서 미국(121개)을 사상 처음 뛰어넘었다. 미중이 벌이는 경제패권 전쟁 속에서 한국 기업들이 경쟁하고 살아남으려면 성공적인 투자와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더 키워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03(월) 개인 공매도

 

올해 1월 20일은 세계 증시 역사에 남을 날이었다. ‘로빈후드’로 불리는 미국 개인투자자들은 이날 “주가 하락에 베팅해 돈을 버는 헤지펀드 공매도 세력을 혼내주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들의 집중투자로 20달러 정도이던 비디오게임 유통업체 ‘게임스톱’ 주식이 1주 만에 483달러까지 급등했다. 헤지펀드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고 손을 들었다. 자본시장의 골리앗을 작은 개미들이 쓰러뜨렸다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작년 3월 코로나19로 중단됐던 한국 증시의 공매도가 오늘 재개된다. 공매도는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식을 증권사에서 빌려 시장에서 판 다음 주가가 떨어지면 싼 가격에 같은 주식을 사서 갚음으로써 차익을 남기는 투자기법이다. 작년 초 글로벌 증시가 폭락하자 한국 등 12개국은 추가 하락을 우려해 공매도를 금지했다. 작년 말까지 10개국이 공매도를 다시 허용했고 남은 둘인 한국, 인도네시아 중 한국이 공매도를 먼저 재개한다.


▷‘공매도를 영원히 금지하자’고까지 주장한 동학개미들을 의식해 금융당국은 거래 규모가 크고 충격에 강한 코스피200, 코스닥150 종목만 우선 공매도를 시작했다. 코스피200은 종목 수로 코스피의 22%지만 시가총액으로는 88%나 된다. 일부 종목의 주가 하락은 피할 수 없겠지만 전체 증시의 충격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 전망이다.

 

▷정보와 자금이 많은 외국인, 기관에만 유리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불리던 공매도 투자판에 개인투자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다. 금융당국은 ‘개인 대주(주식대여)제도’를 고쳐 사전교육을 받은 개인도 공매도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주식을 빌려주는 증권사는 6곳에서 17곳으로, 수백억 원 수준이던 주식대여 규모도 2조4000억 원으로 대폭 늘렸다.

 

▷1만3000여 명의 동학개미가 이미 사전교육을 받고 ‘출격 준비’를 마쳤다. 신규 공매도 개인투자자는 증권사와 약정을 맺고 담보액을 넣은 뒤 60일간 주식을 빌릴 수 있다. 투자허용 한도는 처음엔 3000만 원이었다가 횟수와 거래금액이 쌓이면 7000만 원으로 늘었다가 이후 2년 더 거래를 계속하면 제한이 없어진다.

 

▷문제는 가격이 떨어질 것이란 예상과 반대로 빌린 주식 값이 오르면 증권사는 담보금 증액을 요구하고, 이를 못 맞추면 강제로 공매도가 청산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반 주식투자와 달리 공매도는 원금 전부를 날릴 수 있다. ‘투자는 자기책임’이란 금언을 새삼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로빈후드가 끌어올린 게임스톱 주가는 3개월이 지난 지금 최고 때의 36%로 떨어졌지만 미국 헤지펀드들은 1월에만 197억5000만 달러(약 22조 원)의 손해를 봤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04 코로나 낙인

 

안녕하세요. 공대 확진자입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서울 A대학 게시판에 올라온 사과문이다. 학교 근처 식당에서 소모임을 가진 공대생 10여 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자 게시한 글이다. 방역 수칙을 어기지 않았고 5인 이상 집합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이었지만 “이런 시기에 요란법석 떨다니” 같은 비난 글이 쇄도하자 고개를 숙인 것이다.


▷대면수업 확대로 감염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대학가에 코로나 낙인찍기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환자가 발생하면 신상털이식 개인정보와 함께 “부끄러운 줄 알라”는 험한 글들이 올라온다. 동아리에서 감염자가 나오면 동아리 전체가 ‘×민폐 동아리’로 찍히기도 한다. 서울대 교육부총장은 최근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 “확진자에게 근거 없는 비방과 부정적 낙인을 가하는 건 인권침해이자 위법”이라며 낙인찍기 자제를 호소했다.

 

▷학교 밖 낙인찍기는 생계를 위협하는 수준이다. 지난해 2월부터 8개월간 코로나 완치 후 부당해고 등으로 퇴직한 사람은 1300명이 넘는다(국민건강보험공단). ‘나와 마주친 동료들이 서둘러 마스크를 쓰는 모습에 상처받았다’며 제 발로 나온 이들도 있다. 모 투자회사는 ‘코로나 확진자는 인사상 불이익을 준다’는 공지를 올리기도 했다. 감염병 피해자가 가해자로 찍히면서 2차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서는 ‘코로나에 걸릴까 두렵다’(58.3%)는 사람들보다 ‘확진 후 비난받을 것이 두렵다’(68.3%)는 이들이 많았다.

 

▷감염병은 사람을 매개로 하는 질병이어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쉽다. 코로나 초기 정부가 효율적인 방역을 위해 세세한 개인정보와 동선을 공개하고 구상권 청구를 강조한 것도 감염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에 일조했다. 낙인찍기는 방역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감염자 절반 이상이 완치 1년이 지난 후에도 정신건강 문제에 시달렸으며 사회적 낙인을 높게 인지할수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위험도도 높았다.

 

▷A대학 공대생의 사과문에는 위로의 댓글도 달렸다. “사과할 일 아니에요. 운이 없었던 겁니다.” “당황했을 텐데 무사히 쾌차하세요.” 누군가 억울한 돌팔매질을 당할 때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법. 코로나 완치자들의 차별 실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도 필요하다. 코로나에 걸렸다 회복한 후 직장과 헬스클럽과 단골술집에서 쫓겨난 20대 전직 회사원의 말처럼 “완치 후 일상에 복귀했을 때 사람들이 밀쳐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완벽한 방역”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05 세기의 이혼과 재산 분할

 

1994년 새해 첫날 하와이의 작은 섬 라나이의 호텔들은 손님을 받지 않았다. 주변 섬을 오가는 헬리콥터들도 멈췄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멀린다 프렌치와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파파라치들을 피하기 위해 모든 객실, 헬기를 전세 내버린 것이다. 소수의 친구,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리조트 골프코스에서 결혼식이 치러졌다.


▷27년여 지난 4일 빌과 멀린다의 트위터 팔로어들은 새벽에 날아든 문자에 깜짝 놀랐다.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커플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됐다”는 이혼 고지였다.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둘은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코로나19 퇴치에 나서는 등 이상적 동반자의 전형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한다.


▷멀린다에게 1987년 입사한 MS는 첫 직장이었다. 2년 차 때 사장인 빌과 비밀 데이트를 시작했고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던 중 결혼해 전업주부가 됐다. 하지만 세 자녀를 낳은 뒤 빌과 세계 최대 공익재단을 만들면서 사회활동을 재개해 2016년엔 포보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4위에 올랐다.

 

▷빌은 MS 지분 1.37%를 포함해 1460억 달러(약 164조 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 세계 4위 부자다. ‘동등한 파트너’를 강조해온 만큼 이혼 합의금이 사상 최고액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한 두 사람의 서약이 합의금 결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관심이다. 지금까진 세계 1위 부자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CEO(57)의 2년 전 이혼 때 부인 매켄지 스콧이 350억 달러(약 39조 원) 상당의 아마존 주식을 받은 게 최고였다.

 

▷2위 부자인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72)은 1990년대 초 이혼했다가 재혼했다. 3위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50)는 세 번째 부인인 캐나다 출신 가수 그라임스와 살고 있지만 할리우드 여배우들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는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중에는 2012년 결혼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37)만 이혼 경력이 없다.

 

▷“빌과 멀린다도 회색이혼(gray divorce) 함정에 빠졌다”는 말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나온다. 미국 전체 이혼율은 떨어지는데 50세 이상만 높아지는 걸 설명하는 용어가 회색이혼이다. 1946∼1965년에 태어나 개인 행복을 중시하는 베이비부머들이 배우자의 부정(不貞)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 늘어난 수명과 건강 개선도 주요 원인이다. 66, 57세 부부의 결별 사유가 “함께 성장(grow together)할 수 없어서”란 게 의미심장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06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모순(矛盾)의 영웅’도 드물다. 그는 영웅주의와 비극, 승리와 패배, 진보와 퇴행을 오간 복합적 인물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의 계승자로 칭송되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집권한 샤를 드골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위대한 프랑스’를 주창하며 나폴레옹을 역사에서 소환하면서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나폴레옹이 되살아났다.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다시 보기’가 시작됐다. 나폴레옹재단은 올해를 ‘나폴레옹의 해’로 명명하고 그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할 수 있는 유물과 사료 등의 전시를 곳곳에 마련했다. 그의 극적인 삶에는 분명 실수가 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문화적 유산을 알아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는 취지다.


▷나폴레옹의 공과(功過) 중 과오에 대한 비판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미국의 ‘캔슬 컬처(cancel culture·공인이나 기업이 잘못했을 때 지원을 철회하는 문화)’가 유입돼 프랑스혁명 정신과 미국식 다양성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대혁명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노예제를 부활시키고, 법치의 토대를 이룬 나폴레옹 법전에서 여성의 법적 권리를 남편에게 부여한 양면성의 인물이다. 그래서 인종차별주의자, 여성혐오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어제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섬에서 눈을 감은 지 200년 되는 날이었다. 4년 전 5월 7일 나폴레옹 이래 역대 두 번째 최연소(39세)로 국가원수가 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행보에 관심이 쏠렸다. 대선 출마 때부터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유주의자”를 선언했던 그는 나폴레옹 묘역에 헌화하며 통합의 리더십을 꾀했다. “나폴레옹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훗날의 판단은 미화도, 부정도, 회개도 아니다.”

 

▷프랑스는 기억과 새로움이 조합된 나라다. 정치인과 화가 등을 기려 거리 이름을 짓고 작가의 장례식에 대통령이 참석해 추모사를 읽는 나라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인의 삶은 나폴레옹에 대한 기록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역사를 통해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숨을 거두기 전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라고 했다. 가구를 직접 디자인하고, 샹베르탱 와인을 물에 타 마시고, 신문을 열심히 읽던 나폴레옹의 인간적 면모도 이번에 더 많이 발견되면 좋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5-07 의식 없는 살인도구

 

북한 김정남 암살에 관여한 베트남 여성 도안티흐엉은 4일 SBS와의 인터뷰에서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자신을 한국 유튜버라고 소개한 미스터 와이라는 사람을 만나 암살 두 달 전부터 오렌지주스나 베이비오일 같은 액체를 손에 바르고 사람 얼굴을 만지는 방식의 몰래카메라 촬영을 7, 8차례 했다고 한다. 그는 “암살 당일에도 몰래카메라 촬영을 하는 줄 알고 미스터 와이가 발라준 액체를 그가 지목한 남자에게 묻혔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실이라면 북한이 영문도 모르는 사람을 살인도구로 이용한 기상천외한 수법에 놀랄 수밖에 없다.


▷김정남은 2017년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신경계 작용 독성 물질인 VX에 의해 독살됐다. 손에 독성 물질을 묻히고 김정남에게 몰래 접근해 그의 얼굴을 문지른 도안티흐엉과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는 재빨리 화장실로 가 손을 씻었고 중독 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남은 2시간 만에 서서히(혹은 급속히) 죽어갔다. 당시 그의 사망 사실 못지않게 그를 죽이는 데 사용된 VX의 강력한 독성에 모두 놀랐다.


▷현실은 종종 상상을 뛰어넘는다. ‘공각기동대’나 ‘인셉션’ 같은 SF 영화를 보면 사람의 기억을 조작해 의식 없는 살인도구로 이용한다. 그런 건 아직 공상일 뿐이다. 북한은 유튜브가 전 세계적 인기 매체라는 점, 유튜브에 몰래카메라 상황극 영상이 흔하다는 점, 보통 한번 설정한 상황극 형식에 다양한 장소와 사람을 시리즈로 담는다는 점을 이용해 누구라도 쉽게 속아 넘어갈 방식으로 의식 없는 살인도구를 만들어냈다.

 

▷도안티흐엉이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수 있다. 살인은 살인의 고의나 과실이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 일반인으로서는 독극물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독극물을 전달받아 바른 사람은 단지 살인의 도구일 뿐이다. 총을 쏘거나 칼로 찔러 살인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어도 총이나 칼을 처벌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도안티흐엉은 맨손으로 VX를 만졌다. 독극물인 줄 알았다면 맨손으로 만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해독제를 맞은 증거도 없다. 해독제를 맞아야 했다면 유튜브를 위한 몰래카메라 촬영인지 의심하게 됐을 것이다. 김정남은 평범한 젊은 베트남 여성이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는 독극물 노비초크로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와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을 한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빠뜨렸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김정남 암살은 북한이 러시아를 뛰어넘는 암살 기술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서운 집단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5-08 먹통 카톡

 

어제 하루를 돌아보자. 카카오톡을 이용해 가족 친구와 대화를 하고, 업무 보고를 하고, 생일인 친구에게 선물을 보내고, 동호회원들에게 n분의 1로 회비를 보내진 않았는지. 요즘 하루에 송·수신 되는 카톡 메시지 수가 110억 개라고 한다. 카톡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카톡이 최근 먹통이 돼 2시간 21분 동안 멈췄다.


▷카톡은 5일 오후 9시 47분부터 6일 0시 8분까지 메시지 수신이 원활하지 않고 PC버전 로그인이 안 됐다. 5일이 휴일인 어린이날이라 업무상 피해가 그나마 적었을 수 있다. 카카오는 6일 0시 20분에야 트위터에 사과의 글을 올렸다. 회사 측은 “네트워크와 서버 장애가 아닌 내부 시스템 오류였지만 그 이상의 이유는 영업 비밀이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사과문을 트위터에만 올린 것에 대해선 “평소 서비스 장애 안내는 트위터 위주로 해 왔다”고 했다.


▷카톡은 2010년 3월 세상에 처음 나왔다. ‘초콜릿이 주는 달콤함과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주는 즐거움을 담아’ 서비스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월간 활성 사용자(한 달에 한 번 이상 이용자)가 4635만 명인 ‘국민 메신저’다. 2009년 말 불어닥친 스마트폰 열풍의 흐름에 잘 올라탄 덕이다. 싸이월드 등 국내 포털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해외 업체의 공세에 무너질 때 카톡은 서비스 시작 1년 만에 1000만 가입자를 달성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통신요금 부담이 있는 반면 공짜인 카톡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록인(Lock-in) 효과라는 게 있다. 고객을 묶어둔다고 해서 자물쇠 효과, 잠금 효과로도 불린다. 하나의 서비스로 고객을 잡으면 다른 서비스도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먹통 바로 다음 날 발표된 카카오의 실적은 사상 최대였다. 편리한 ‘공짜의 맛’에 몰려들어 대화(talk)를 하게 된 사람들은 카카오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신사업을 이용하며 카톡 세상에서 돈을 쓴다.

 

▷카톡은 지난해 3월에도 두 차례 먹통이 있었다. 그런데도 무료 서비스라는 이유로 고객들은 이용 불편에 따른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었다. 지난해 12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일명 넷플릭스법)이 시행되면서 비로소 업체 측에 시정을 요구할 근거가 생겼다. 카카오를 비롯해 구글 등 6개 ‘빅테크’ 콘텐츠 제공사업자의 서비스 품질 유지가 의무화된 것이다. 정부가 이번 먹통을 넷플릭스법 적용 대상으로 보고 조사한다니 결과가 주목된다. 올해 1분기에만 1조 원 넘는 매출을 올린 국내 코스피 시가총액 7위 기업 카카오가 먹통의 원인을 상세히 밝히지 않는 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5-10(월) ‘학교 가는 길’

 

5일 개봉한 한국 영화 ‘학교 가는 길’은 장애인 특수학교 건립을 위해 땀 흘린 엄마들의 실화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엄마들의 노력 덕분에 지난해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서진학교가 문을 열었다. 과정은 힘겨웠다. 지역주민들의 반발에 부닥치자 엄마들은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 “귀하게 키운 아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살고 싶은 게, 이게 욕심입니까?”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학교를 다니기란 쉽지 않다. 학생 수에 비해 학교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장애 학생과 가족들은 그저 ‘집 근처에 다닐 학교가 있기를’ 바란다. 2013년 서울시교육청이 강서구 내 특수학교 신설 행정예고를 했을 때 엄마들이 뭉친 이유다. ‘다음 세대 부모들이 나와 내 자녀가 겪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그러나 주민들은 반대했다. “우리는 장애인을 혐오한 적도 차별한 적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 지역에만 사회취약계층 시설이 많이 들어서나.”


▷장애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사회에 대한 어려운 질문들을 마주하게 만든다. 주민들은 조선 의학자 허준을 길러낸 가양동에는 한방병원을 지어 지역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2017년 특수학교 토론회에 참석한 엄마들의 무릎 호소가 알려지면서 학교 건립 찬성 여론이 커져 서진학교가 세워질 수 있었지만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한 숙제를 남긴다. 다큐 영화를 만든 김정인 감독도 “서진학교 건립에 반대했던 주민들을 영화 속에서 악마로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고 했다.

 

▷프랑스에는 ‘시네마 디페랑스’라는 비영리 자원봉사 조직이 같은 이름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장애아와 비장애아가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거나 공연을 감상한다. 발달장애아들은 상영 도중 일어서거나 소리를 내도 비난받지 않는다. 우리와 ‘다를’ 뿐인 장애아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두려움 없이 한 공간에 함께 있기만 해도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애아 엄마들은 말한다. “아이들이 부끄러움 없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릎 호소를 했던 엄마들의 아이들은 이미 자라 서진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들은 “아이 덕분에 내가 조금씩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됐다”고 한다. 엄마들은 스스로를 계주 선수에 비유한다. 앞선 엄마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열심히 달리고 또 다음 엄마에게 물려주겠다고. 김광민이 짓고 노영심이 피아노 친 ‘학교 가는 길’이란 곡이 있다.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해져서 특수학교 학생들의 학교 가는 길이 이 음악처럼 경쾌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5-11 각광받는 20평형대

 

전용면적 84m²(30평형대) 아파트는 오랫동안 ‘국민 주택’으로 불렸다. 3, 4인 가족이 살기에 충분한 공간이어서 수요가 많았다. 아파트를 공급하거나 새 평면을 개발할 때도 늘 30평형대가 기준 역할을 했다. 대도시에서 이런 아파트는 성공한 내 집 마련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요즘 30평형대 대신 20평형대에 수요가 몰린다고 한다. 집값이 너무 오른 데다 1인가구의 소형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수도권에서 전용면적 60m² 이하 소형 아파트 값은 2.69% 올라 중소형(전용 60∼84m²)의 2.28%를 앞질렀다. 거래량도 소형이 약 10% 더 많았다. 가격 인상률과 거래량 모두 소형이 중소형을 앞지른 것은 이례적이다. 소형 아파트 쏠림 현상은 주로 가격 때문이다. 서울의 30평형대는 평균 10억 원을 넘었다. ‘영끌’을 하더라도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1분기 서울 아파트 매입자의 절반이 20, 30대인 점을 고려하면 젊은층의 내 집 마련 한계선이 20평형대인 셈이다.


▷소형 수요가 늘어난 것은 1인 가구 급증의 영향도 컸다. 혼자 사는 집은 2000년 222만 가구였는데 지난해 600만 가구를 넘었다고 한다. 세 집 중 한 집꼴이다. 요즘 MZ세대들은 여럿이 사는 넓은 집보다 작더라도 나만의 공간을 선호한다고 한다.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취업 후 독립하려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이런 세대에게 소형 주택은 취업에 버금가는 ‘꿈’이다. 청년 수요자가 몰리면서 전용면적 30m² 이하 소형 오피스텔도 인기를 끌고 있다.

 

▷새로운 평면 구조도 소형 수요를 늘리는 요인이다. 최근 짓는 20평형대 아파트는 방 3칸과 화장실 2곳을 갖춘 곳도 많다. 주로 30평형대에 적용하던 3베이(방 2칸과 거실을 전면에 배치해 햇볕이 잘 드는 구조)가 20평형대에도 적용되고 있다. 3, 4인 가구도 불편하지 않은 구조여서 눈높이를 낮춘 수요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 수도권에서 소형과 중소형의 가격 차이는 2년 전 1억5000만 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2억2000만 원을 넘는다. 잔뜩 빚을 내기보다 마음 편하고 실용적인 게 낫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주거 공간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단칸방에 여럿이 살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삶의 질이 개선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1인당 주거면적은 2019년 기준으로 32.9m²다. 20평형대에 2명 정도가 사는 셈인데 아주 좁다고 볼 수는 없다. 면적보다 시설이나 주변 환경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공급 물량 못지않게 요즘 생활 방식에 걸맞은 주택 품질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5-12 “혁명은 심장에”

 

독재와 싸우는 국민에겐 힘을 북돋우는 저항시가 있다. 2월 1일 발생한 미얀마 군부 쿠데타 초기엔 이런 시 구절이 회자됐다. “그들 모두를 증오하세요, 아버지.” 어느 시인이 군부에 맞서다 39세로 숨지며 아버지에게 남긴 시였다. 11일 쿠데타 발생 100일을 맞은 미얀마에선 또 다른 저항시가 민주화 세력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다. “머리에 총을 쏘는 그들은 모른다.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것을.”


▷이 시를 쓴 시인 케 티(45)는 8일 군경에 연행됐다가 하루 만에 싸늘한 시신이 돼 돌아왔다.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구절이 밉보였던 걸까. 놀랍게도 심장을 포함한 장기가 제거된 상태였다. 시위 주도세력은 군부가 시위대들의 장기를 국제 밀매조직에 판매한다고 주장한다. 시위대의 머리를 조준하는 이유도 장기 손상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군경의 총격에 사망한 780명 가운데 다수가 젊은이들이다.


▷군경의 탄압이 잔혹해질수록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매일 저녁 국영 TV는 체포된 시위대 얼굴을 공개하는데 학생, 배우, 기자, 의사, 미인대회 우승자까지 다양하다. 고문으로 퉁퉁 부은 얼굴을 보여주는 이유는 겁주기 위해서지만 시청자들은 민주화 운동이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신발 밑창에 쿠데타 주동자의 사진을 붙여 밟고 다니며 수백 곳에서 시위를 이어간다. “두렵지만 내 나라가 암흑의 시기로 뒷걸음질치게 내버려둘 순 없다.”

 

▷미얀마 사태는 내전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지난달 국민통합정부를 구성한 민주화세력은 시민방위군을 창설하고 소수민족 무장단체의 도움으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 3일엔 정부군의 무장 헬기를 격추시켰고, 4일부터 이틀간 정부군과 교전을 벌여 20명 넘게 사살했다. “정부군이 테러집단이 돼가고 있다”며 시민방위군에 합류하는 군인들도 늘고 있다. 탈영한 공군은 80여 명, 육군은 수백 명 규모다.

 

▷미얀마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리비아와 시리아 모델이다. 아랍의 봄 시기인 2011년 카다피 정권이 민주화 시위를 탄압하자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서방 연합군이 군사력으로 카다피를 제거했다. 하지만 미얀마의 경우 중국의 반대로 유엔의 군사 개입 가능성은 높지 않다. 중국은 9일에도 미얀마 군부로부터 25억 달러(약 2조8000억 원)의 투자사업을 승인받았다. 시리아에서도 2011년 반독재 시위가 시작됐지만 종파 간 갈등에 미국 러시아의 대리전까지 겹치며 지금껏 내전 중이다. 심장을 잃어가며 민주화 혁명을 꿈꾸었던 저항시인의 바람과는 달리 미얀마가 시리아의 길을 가게 될까 봐 불안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13 가상 지구의 땅값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1’, 즉 청와대는 현실에선 아무리 높은 값을 치르더라도 개인이 절대 살 수 없는 땅이다. 하지만 가상(假想) 지구인 ‘어스2(Earth2)’에선 땅 주인에게 100m²당 20.935달러(약 2만3500원) 이상 가격을 제안해 잘만 흥정하면 구매할 수 있다. 익명의 이 땅 소유자는 동서로 230m, 남북으로 220m의 청와대 땅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가치는 1만593.11달러(약 1191만6200원)다.


▷어스2는 호주 출신 개발자 셰인 아이작이 만든 가상 부동산 구매 게임이다. 구글 어스 위성사진 지도를 이용해 지구상의 땅을 가로세로 10m짜리 정사각형 ‘타일’로 쪼개 팔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비스를 시작할 때 전 세계 땅 가격은 타일당 0.1달러로 동일한 선에서 출발했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 세계 주요 도시의 땅값은 수백 배로 치솟았다. 지금도 주인 없는 땅을 사거나 욕심나는 땅 주인에게 높은 가격을 제안해 신용카드로 부동산 거래를 할 수 있다.


▷이곳에 땅을 산 투자자들은 어스2가 ‘제2의 비트코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2100만 개로 발행량이 제한돼 희소성을 인정받는 비트코인처럼 가상 지구에선 사고팔 수 있는 땅 타일의 수가 5조 개로 한정돼 있어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이미 한국인이 산 땅의 가격이 457만6000달러(약 51억4800만 원)나 된다. 709만6000달러(약 79억8400만 원)어치 땅을 산 미국인에 이어 2위다.

 

▷많은 이들이 가상 지구의 땅에 관심을 갖는 건 게임 개발업체가 앞으로 이곳에 건물과 도시를 세우고, 자원을 채굴하는 등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메타버스’를 만들 것이라고 홍보하기 때문이다. 복제된 지구에 일종의 ‘사이버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구상이다. 비전은 장대하지만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땅을 돈 받고 판다는 점에서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 할 만하다. 가상 지구가 하나만 만들어지리란 보장도 없고, 업체가 서비스를 중단하면 사 둔 땅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어 게임이 아닌 투자 대상으로 삼기에 대단히 위험해 보인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8년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미래의 빈민촌 청소년들은 가상현실(VR) 기기를 쓰고 ‘이(異)세계’에 접속해 화려하고 모험이 가득한 삶을 즐기며 허름한 현실을 잊는다. 평생 월급을 모아도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렵다는 절망감에 주식,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어스2에 땅을 산다는 말도 나온다. 삶이 각박할수록 더욱 단단히 현실의 땅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14 골든글로브 보이콧

 

1997년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스포츠 에이전시 매니저인 주인공 제리(톰 크루즈)는 풋볼 선수와 우정을 나누며 그를 스타로 키웠다. 선수가 극 중 했던 말 ‘돈을 내놔(Show me the money)’는 세계적 유행어가 됐고 크루즈는 그해 제54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랬던 크루즈가 지금까지 받은 이 상의 트로피 세 개를 최근 반납했다. 공정을 내던지고 ‘쇼 미 더 머니’만 해 온 골든글로브 측에 대한 보이콧이었다.


▷1944년 시작돼 아카데미상과 함께 미국 양대 영화상인 골든글로브상이 존폐 위기를 맞았다. 1996년부터 시상식을 중계해 온 미국 NBC가 내년부터 중계를 중단한다고 밝힌 데 이어 워너미디어와 넷플릭스 등 주요 제작사와 스타들의 보이콧이 이어지고 있다. NBC는 골든글로브가 개혁을 추진해야만 중계 재개를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다.


▷올해 2월 골든글로브의 부정부패가 폭로됐다. 주최 측인 미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가 영화제작사 파라마운트의 협찬을 받아 프랑스로 호화 여행을 다녀오고 곳곳에서 검은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골든글로브의 부패는 역사가 깊다. 1982년 여배우 피아 자도라의 신인상 수상 이면에는 그의 억만장자 남편이 협회 회원들을 라스베이거스로 초청해 벌인 초호화 파티가 있었다. 당시 미 CBS는 그 일로 시상식 중계를 중단했고, 자도라는 이듬해 골든 라즈베리상(최악의 신인상)을 받았다.

 

▷할리우드에서는 골든글로브상을 경박하게 여기는 시선이 많다. 최근엔 인종과 성 차별, 혐오와 편견 등 각종 논란도 빚는다. 협회의 끼리끼리 클럽 문화가 그들의 다양성 감수성을 낮게 만든 탓이다. 협회 회원 87명 중 흑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2월에 밝혀지자 소셜미디어에서는 배우들을 중심으로 골든글로브의 종말을 고하는 #TimesUpGlobes 운동이 벌어졌다. 현재 미국의 주요 배우 10명 중 4명은 백인이 아니다.

 

▷골든글로브가 가진 힘의 비결은 돈이다. 1990년대에 수익원을 찾던 NBC가 생방송 중계에 눈을 돌렸을 땐 이미 CBS가 그래미상, ABC가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중계하고 있어 골든글로브의 파트너가 됐다. 골든글로브는 NBC가 매년 500억 원이 넘는 광고 수익을 올리고 넷플릭스 같은 신흥 미디어가 명성을 쌓는 플랫폼이다. 그런데도 이들 기업이 이번에 보이콧을 했다. 제리 맥과이어에서 톰 크루즈의 명대사가 있었다. “당신은 나를 완성시켜 줘요(You complete me)”. 꼰대문화와 돈맛에 물들었던 골든글로브가 다양한 인종과 가능성을 포용해 부족함을 채워 나가야 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5-15 백신 생산기지 한국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2010년 3월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수장으로 복귀하며 던진 화두다. 얼마 뒤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지하층에 만들어진 실험실에 임직원 12명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해 5월 발표된 삼성그룹 ‘5대 신(新)수종 사업’에 바이오·제약이 포함됐고 이듬해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출범했다.


▷당시 삼성그룹 안팎에선 “100년 이상 앞선 세계적 제약회사들을 따라잡긴 어렵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래서 택한 1단계 전략이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이었다. CMO는 반도체로 치면 미국의 팹리스(설계전문업체) 의뢰를 받아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해주는 대만의 TSMC와 같은 비즈니스다. 반도체처럼 공정관리가 생명인 대형 장치산업이어서 삼성의 기량이 충분히 통할 것이란 이 회장의 판단은 적중했다. 현재 삼성바이오는 36만4000L의 생산능력을 갖춘 세계 1위 CMO다.


▷삼성바이오와 미국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 위탁생산 계약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바이오 측은 “확정된 바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공시를 냈지만 이전 비슷한 소문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했던 것과 온도 차이가 크다. 이 때문에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이 백신동맹을 논의한 직후 계약 내용이 공개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mRNA(메신저 리보핵산)를 이용한 모더나의 첨단 백신은 화이자 백신과 함께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된다. 모더나로서도 삼성바이오와 손잡으면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어 유리한 게임이다. 다만 한국에 당장 모더나 백신이 공급되긴 어렵다. 모더나에서 원료를 받아 후반 작업만 한다면 시점이 앞당겨지겠지만 생산설비를 새로 까는 데에만 최소 6개월이 걸린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이미 미국 노바백스 기술을 이전받아 경북 안동 공장에서 6월부터 백신을 생산하기로 했다. 삼성바이오의 계약까지 성사되면 한국이 동아시아의 ‘백신 생산 허브’로 도약할 기회가 된다. 코로나19는 팬데믹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계속 발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만큼 백신 생산 능력을 갖추는 건 국가경쟁력에까지 영향을 미칠 중요한 문제다.

 

▷선진국에 앞서 한국이 백신을 개발했다면 좋았겠지만 기초역량과 투자 규모의 차이를 고려할 때 금세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바이오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이 백신 생산 위탁기지로 주목받는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 경제의 최대 장점인 빠르고 정확한 대량생산 능력이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인의 생명을 코로나19로부터 구하길 기대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17(월) 랜섬웨어

 

데이터가 곧 돈인 정보통신기술(ICT) 시대가 펼쳐지면서 범죄자들에게는 사람보다 데이터가 더 ‘수지맞는’ 인질이 되고 있다. 최근엔 미국 송유관 운영회사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의 전산 시스템을 공격한 해커조직 ‘다크사이드’가 이 회사 데이터를 인질 삼아 몇 시간 만에 500만 달러(약 56억5000만 원)를 챙기고 숨어버렸다.


▷다크사이드가 쓴 수단이 바로 ‘랜섬웨어’다. 몸값이라는 뜻의 랜섬(ransom)과 악성코드(malware)의 합성어인 랜섬웨어는 주로 이메일 등을 통해 공격 대상 기업, 정부기관 임직원 PC에 심어진다. 이들이 시스템에 접속할 때 회사 전산망에 침투해 자기들만 아는 암호를 중요한 데이터에 걸고 사용하지 못하게 한 뒤 “돈을 내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한다. 억지로 암호를 풀려고 시도하면 데이터를 아예 못 쓰게 망가뜨리기도 한다.


▷사람이건 데이터건 인질이 잡혀 몸값을 요구받는 쪽에선 굴복하지 말자는 ‘주전파(主戰派)’와 타협으로 풀자는 ‘주화파(主和派)’ 사이에 내분이 생긴다. 미국 정부의 기본 원칙은 ‘범죄자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받아들이면 ‘돈이 된다’는 생각에 유사범죄가 폭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 동남부 석유 수요의 45%를 공급하는 콜로니얼은 사회, 경제적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해 몸값을 지불하고 암호해독 키를 받았다.

 

▷16세기 경쟁국 상선에 대한 해적(海賊)질이 국가산업이던 영국처럼 해킹이 주 수입원인 나라들이 있다. 미 법무부는 올해 2월 북한 인민군 정찰총국 소속 해커 3명을 기소했다. 세계적으로 외화, 가상화폐 13억 달러(약 1조4700억 원)어치를 챙기려고 해킹을 시도해 3억 달러(약 3390억 원)를 실제 벌어들인 혐의다. 러시아, 중국에서도 다수의 ‘키보드 해적단’이 활동하고 있다. 미 정부는 콜로니얼 사건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제 해커조직의 움직임이 물 만난 고기처럼 활발해졌다. 비대면, 재택, 원격 근무의 확산으로 기업 등의 시스템 틈새가 커져 공격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시장이 급성장함에 따라 수사기관들의 추적을 피해 몸값을 챙기는 일도 이전보다 수월해졌다.

 

▷한국 배달 대행업체 슈퍼히어로는 14일 새벽 중국발 랜섬웨어 공격을 받아 서버가 다운됐다. 회사 측은 해커에게 비트코인을 주고 35시간 만에 시스템을 복구했지만 3만5000여 개 점포, 1만5000여 명의 배달원이 피해를 봤다. 지난 주말 아일랜드 국가의료 전산시스템도 랜섬웨어 공격을 받아 운영이 중단됐다. 수상한 이메일은 절대 열어 보지 않는 등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개인과 기업, 정부기관들이 언제든 인질극의 대상이 되는 시대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18 실업급여 중독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지난주 미국 물류창고에서 일할 7만5000명 채용 계획을 밝히면서 평균 17달러(약 1만9300원)의 시급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현재 7.25달러인 연방 최저임금을 2025년까지 갑절인 15달러로 올리겠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고려할 때 낮지 않은 급여다. 코로나19 백신의 빠른 접종과 경기회복으로 일감이 많아지는데 일하려는 사람이 적다 보니 높은 임금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 구인난의 원인으로 실업수당이 지목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3월 통과시킨 1조9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구제법안’은 실직한 이들에게 기존 실업수당과 별도로 매주 300달러를 9월 초까지 얹어주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평균 387달러의 실업수당을 받던 미국 실업자의 주당 수입은 687달러로 높아졌다. 연봉으로 치면 3만5700달러이고 소득세도 내지 않는 실속 있는 소득이다.


▷최저임금을 받고 평균적인 근로시간을 일한 미국인이 벌 수 있는 연봉은 1만3000달러다. 일하지 않아도 그보다 2배가 훌쩍 넘는 수입이 생기다 보니 감염 위험이 남아 있는 일터에 복귀하려는 실업자가 많지 않다. 학교가 정상화되지 않아 자녀를 돌봐야 하는 여성들도 재취업을 늦추고 실업수당을 받는 게 이득이다. “실업수당이 구직 활동을 막는다는 증거가 없다”며 버티던 바이든 대통령도 결국 지난주에 “실업자는 적합한 일자리를 제안받으면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혜택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올해 실업급여 하루 하한액은 6만120원, 월 181만 원으로 최저임금을 받고 하루 8시간, 주 5일 일할 때 받는 182만 원과 불과 1만 원 차이다. 정부가 2019년부터 실업급여 혜택을 대폭 늘린 영향이다. 단기간 일한 뒤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 ‘권고사직’시켜 달라고 사업주에게 요구하는 종업원들도 있다고 한다. 5년간 3번 이상 실업수당을 받은 사람이 9만4000여 명이나 된다. 고용보험기금 고갈 위험이 커지자 고용노동부는 수급 횟수가 많아지면 지급액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직장을 잃고 생계의 위협을 받는 이들을 정부가 지원하는 건 당연하지만 과하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 ‘실업급여 중독’ 현상을 앞서 경험한 독일 프랑스 덴마크 등 선진국들은 정부기관의 취업 제안을 계속 거절하는 실업자에 대해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일터 복귀를 유도한다. 한국도 코로나19 이후 세금을 퍼부어 만든 일자리, 실업 대책의 부작용을 서둘러 점검할 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19 유령청사 특공 재테크

 

대전 유성구 대전세관의 한쪽을 쓰는 관세평가분류원(관평원)은 지난해 세종시에 새 청사를 완공했다. 기존 관평원에서 신청사까지는 자동차로 20분 남짓 걸린다. 가까운 곳에 번듯한 새 청사를 짓고, 직원들은 세종시 아파트 특별공급(특공)까지 받게 됐으니 이전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청사는 1년이 넘도록 텅 비어 있다. 애당초 관평원은 세종시 이전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직원의 일터와 업무는 그대로인데 재산은 달라진 것 같다. ‘특공 재테크’로 수억 원씩 차익이 생겼기 때문이다.


▷관평원은 이전 대상이 아닌지 모르고 청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전 담당인 행정안전부는 말렸는데도 지었다고 주장한다. 행안부의 2005년 ‘중앙행정기관 등의 이전계획 고시’에 따르면 대전에 있는 관평원은 이전 제외 기관으로 명시됐다. 이후 세부 규정을 담은 ‘행복도시법’이 나왔는데, 수도권 기관만 구체적으로 다루고 지방 소재 기관에 대해선 따로 언급이 없었다. 법에 지방 기관은 이전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없으니 이전해도 되는 줄 알았다는 게 관평원 입장이다. ‘입법 틈새’를 이용했다고 의심되는 대목이다.


▷행안부는 2018년 초 관평원이 고시를 어기고 청사를 짓는 걸 알게 됐다. 즉시 이전 불가를 통보했지만 관세청이 공사를 밀어붙였다. 진영 당시 행안부 장관은 감사원에 공익감사까지 청구했지만 반려됐다. 정책적 문제가 결부됐으므로 관계기관이 협의해 결정할 사안이란 이유였다. 고시를 어긴 관평원도, 뒤늦게 만류한 행안부도, 171억 원의 예산을 준 기획재정부도 잘못을 묻기 어렵다는 뜻이다.

 

▷관평원 직원 82명은 2017년부터 특공을 신청해 49명이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분양가는 2억4400만∼4억5400만 원이었다. 이 가운데 98.3m² 한 채가 올해 2월 14억9500만 원에 거래됐다. 관평원 직원 다수는 관세청에서 파견을 나와 있다. 이런 이유로 당시 관세청장이 직접 나서 청사 건립을 강행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관평원은 결국 대전에 남았고 기재부는 ‘유령 청사’ 활용을 고민 중이다. 예산 낭비에 불법 논란까지 벌어졌지만 책임지는 당국자가 없다. 세종시는 수도권 분산을 위해 조성됐고, 특별공급은 이사를 와야 할 직원들 몫이다. 그런데 이사할 필요도 없는 인근 공무원들이 편법으로 특공 재테크를 했다. 집값 폭등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김부겸 총리는 어제 특공 당첨을 취소할 수 있는지 법적 검토를 지시했다고 한다. 위법을 따져 수사 의뢰도 하겠다고 했다. 다른 공공기관 특공에도 문제가 없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5-20 No 마스크 논란

 

벗느냐 마느냐. 코로나19 백신 접종에서 앞서가는 미국이 마스크를 벗는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13일 ‘실내 노 마스크’ 허용 방침을 발표하자 의료계와 노동계가 “섣부른 조치”라며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CDC는 백신 접종을 끝내고 2주가 지난 사람은 대중교통과 학교를 제외한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발표했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을 맞은 의료계 종사자 1800여 명을 조사한 결과 2회 접종자는 94%, 1회 접종자는 82%가 면역이 생긴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요 변이 바이러스인 영국 변이에 화이자와 모더나가 충분한 예방 효과를 보인 점도 감안했다. 유통업체 월마트와 코스트코, 스타벅스와 디즈니월드가 CDC의 발표 후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다.


▷문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백신을 맞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 성인의 백신 접종률은 아직 40%가 안 된다. 노동계에선 백신 접종을 않고 마스크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필수 노동자들을 감염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뉴욕타임스가 감염병 전문가 7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80%가 향후 최소한 1년간은 불특정 다수와 실내에 있을 땐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했다. CDC의 발표에도 22개 주는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하지 않았다.

 

▷백신 접종 후 감염되는 ‘돌파 감염’의 위험도 마스크를 선뜻 벗지 못하게 한다. 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에서는 최근 얀센 백신을 맞은 선수와 코치 8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마스크를 벗은 채 라커룸을 같이 쓰고 함께 식사하면서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올 3월엔 켄터키의 한 요양원에서 26명의 확진자가 나왔는데 이 중 19명은 화이자 2차 접종까지 마친 상태였다. 미국에선 2차 접종자 10만 명당 7.5명꼴로 돌파 감염 사례가 나온다. 이스라엘은 돌파 감염자의 바이러스 전파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내기 위해 대규모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마스크 대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2월 미국 CDC는 코로나와 관련해 ‘하면 안 되는 일’ 세 가지를 발표했다. ‘중국 여행 가지 않기’ ‘아시아계 탓하지 않기’ 그리고 ‘마스크 쓰지 않기’였다. 마스크 쓰기는 해될 것은 없지만 손 씻기나 거리 두기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세계 최고의 감염병 전문가 집단도 마스크에 대해선 완벽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접종률이 60%가 넘는 이스라엘은 “실내 노 마스크는 어려운 과제”라고 했다. 접종률이 아직 한 자릿수인 한국에선 마스크 쓰기를 더더욱 게을리해선 안 되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21 6·25 전사자 추모의 벽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국군과 유엔군의 이름이 새겨진 명비(名碑)가 있다. 6·25전쟁의 전사자는 국군 13만7899명, 유엔군 3만7902명. 명비에 이름을 새겨 수많은 희생을 후대에서도 기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비에는 1994년 국군의 이름이 먼저 새겨지고 6년 뒤인 2000년에야 유엔군의 이름이 더해졌다. 정부가 아니라 한 방산업체가 제작해서 기증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에는 여태껏 미군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긴 명비가 없다. 앞서 6·25전쟁 행사 때 생존한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명비의 건설을 촉구한 적도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노력이 뒤늦게 결실을 본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3만6574명, 한국군 카투사 70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의 벽(Wall of Remembrance)’ 착공식이 21일 열린다. 방미 중인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한다.

▷내달 6·25전쟁은 71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번 추모의 벽 건설도 생존한 용사들이 앞장서서 시작했다. 취지에 공감한 한미의 민간단체들이 십시일반 기부금을 모았지만 약 250억 원인 건설비 마련에 힘이 부쳤다.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한국 정부는 뒤늦게 지원에 나섰다.

 

▷추모의 벽은 내년까지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 내 ‘추모의 연못’ 주변에 설치된다. 화강암 판에 전사자들의 이름이 알파벳 순서로 새겨진다. 가장 첫 줄에는 존 에런 주니어(John Aaron Jr.) 육군 이등병이 자리 잡는다. 그는 1950년 7월 27일 하동 전투에서 사망한 300여 명의 미군 중 한 명으로 당시 22세였다. 미 8군사령관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던 월턴 워커 장군의 이름도 새겨질 것이다. 그는 당시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이다(Stand or die)”라고 소리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6·25전쟁에 참여한 미군은 178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제 생존자는 50만 명 남짓이고, 하루 600명 정도가 세상을 뜨고 있다고 한다. 참전용사들에게 예우를 갖추고,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시간마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추모의 벽이 마련되는 것은 다행이다. 미국의 보훈단체들은 ‘더 이상 잊혀지지 않는 전쟁(No Longer the Forgotten War)’이라며 6·25전쟁 되새기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우리도 국가의 부름에 목숨을 내놓고, 명비에 한 줄 이름을 남기고 떠난 수많은 청춘들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5-22 가사근로자

 

가사도우미 없는 한국사회를 떠올리기는 힘들다. 특히 맞벌이 가정에 있어 가사도우미의 도움은 절실하다. 출산 후 산후조리원에서부터 직업소개소에 전화를 돌려 숱한 면접 끝에 맺어지는 가사도우미와의 인연. 이 만남이 얼마나 잘됐느냐 아니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을 돌봐주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그들이 있기에 그나마 여성들이 밖에 나와 일을 할 수 있다.


▷대개의 가정에서 여성들이 맡던 가사노동은 1967년 정부가 직업안정법에 유료 직업소개소를 허용하면서 공공 서비스가 아닌 민간의 직업소개 방식으로 사회에서 ‘거래’돼 왔다. 시장이 커지면서 가사노동자는 베이비시터, 간병인 등의 직종으로 세분됐지만 주로 가사도우미로 불렸다. 그런데 어제 국회 본회의에서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안(가사근로자법)이 통과되면서 이들을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다. ‘가사근로자’다.


▷이 법은 정부 인증을 받은 가사노동 제공기관이 가사도우미를 고용해 최저임금을 보장하면서 퇴직금, 4대 보험, 유급휴일, 연차 유급휴가 등을 제공토록 하는 것이 골자다. 정부가 인증하는 기관이 고용하는 가사도우미에 대해서는 ‘가사근로자’의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가사노동은 68년 만에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정식 근로가 됐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될 당시만 해도 가사노동을 경제행위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가사노동자가 법 적용 범위에서 빠졌던 것 같다”고 했다.

 

▷현재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전국의 가사도우미는 청소만 하는 경우는 13만7000명, 육아와 간병 등도 포함하면 30만∼60만 명이다. 제정안은 앞으로 1년 후 시행되는데, 새 법이 시행돼도 기존처럼 직업소개소를 통해 가사도우미를 직접 고용해도 된다. 정부가 인증기관을 통한 가사근로자와 민간을 통한 가사도우미 고용이라는 두 길을 다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소개소를 통한 도우미에 비해 정부가 인증하는 가사근로자가 믿음직한 건 사실이지만 비용이 최대 20% 정도 비싸진다.

 

▷가사근로자법은 가사서비스와 관련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가사근로자의 고용안정과 근로조건의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 가사근로자에게 휴게시간을 주는 등 적절한 근로환경을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용계약서에 정한 사항 이외의 업무는 요구할 수 없다. 돕는 사람들을 귀하게 대하자는 법이다. 남은 1년, 선의의 피해자나 법을 악용하는 사례가 생기지 않도록 정부는 빈틈없이 준비해야 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5-24(월) 디지털 협력과 경쟁

 

신한은행이 음식 주문 배달 앱 개발에 나섰다. 배달 앱 플랫폼을 만드는 데 140억 원을 쓸 작정이다. ‘배달의 민족’ 같은 전문업체의 개발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은행이 웬 음식 배달일까. 기존 고객만으론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배달 앱 플랫폼에 들어올 음식점 주인과 라이더, 소비자까지 은행의 잠재 고객이다. 디지털 기술 덕분에 가상공간 플랫폼에는 무한정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 이곳을 놓고 전통 금융사와 빅테크, 핀테크 기업들이 금융 협쟁(Co-opetition·협력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2015년 인터넷전문은행이 출범할 때만 해도 대형 은행들은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자본력과 경험에서 우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분 투자로 인터넷은행들에 살짝 발만 걸쳐 놓았다. 하지만 몇 년 새 카카오뱅크는 고객 1600만 명을 모았다.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을 가진 덕분이다. 장외시장에서 카카오뱅크의 시가총액은 대형 금융사 두 곳을 합친 규모다. 핀테크 스타트업 토스도 1800만 회원을 거느린 플랫폼의 힘으로 ‘디지털 금융 지주사’가 됐다.


▷빅테크에 맞서 기존 금융사들은 일단 단합에 나섰다. 국내 8개 카드사는 간편결제 플랫폼을 서로 개방하기로 했다. KB페이 앱에서 현대카드를, 신한페이 앱에서 삼성카드를 결제하는 식이다. 이런 연합으로 지급결제 시장의 절반을 장악한 카카오·네이버 페이에 대항하고 있다. 자사 플랫폼의 덩치 키우기에도 나섰다. KB금융은 계열 은행과 보험, 증권 등을 한데 묶은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생활금융 플랫폼을 구축하겠다”고 했다.

 

▷경쟁자는 동업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은행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사업자를 대상으로 대출 상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미래에셋은 네이버파이낸셜과 손잡고 곧 개인 신용대출 상품을 내놓는다. 은행과 인공지능(AI) 기업이 연합하면 ‘AI뱅커’도 만들 수 있다. 가상의 은행원인 AI뱅커가 투자 상담까지 해준다. 디지털 시대에 금융과 정보기술(IT)의 경계는 없다. 스페인 금융그룹인 BBVA의 프란시스코 곤살레스 전 회장은 “우리는 미래에 소프트웨어 회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개발은행은 요즘 최고의 디지털은행으로 손꼽힌다. 400개 이상의 기업과 손잡고 생활밀착형 플랫폼을 구축한 덕분이다. 은행 플랫폼에서 음식 주문과 배달부터 자동차, 부동산, 게임, 헬스케어까지 해결하는 시대가 됐다. 전문가들은 금융권의 빅뱅과 몰락, 전환이 5년 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승패의 관건은 협쟁이다. 그 과정에서 편리해질 소비자로선 나쁠 게 없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5-25 “100년간 못 본 집값”

 

“100년간 자료를 봐도 집값이 지금처럼 높은 적은 없었다. 투자자들 사이에 거친 서부개척 시대와 같은 사고(思考)가 나타나고 있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그제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 시장에서 발생하는 거품을 경고했다. 미국 주택가격 지표인 ‘케이스-실러 지수’ 고안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2013년)의 말이라 예사롭지 않다.


▷그는 현재 상황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소유권 사회(ownership society) 정책’을 펴던 2000년대 초와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집이 있어야 책임의식이 커진다’며 저소득층의 주택 구입을 장려했다. 대출이 쉬워지자 너나 할 것 없이 집을 사들였고 주택 경기는 과열됐다. 결국 2008년 부실 주택대출 문제에서 비롯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미국 주택가격은 지난 1년 새 10% 이상 급등했고 케이스-실러 지수는 올해 2월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코로나19 발생 직후 전문가들의 전망과 반대다. 파산한 자영업자, 실업자들이 집을 내놓아 집값이 떨어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확장재정, 저금리가 집값을 끌어올렸다. 재택근무 확대로 넓고 안락한 집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실러 교수가 조지 애컬로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쓴 책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의 부제는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다. 실러 교수는 케인스가 대공황 시기 비합리적 경제행동을 설명하는 데 썼던 ‘야성적 충동’이란 말을 원용해 ‘집값이 영원히 오를 것’이란 맹목적 믿음이 자본시장 붕괴로 이어진 글로벌 금융위기의 과정을 설명했다. 자산버블에 있어선 자타가 인정하는 전문가인 셈이다.

 

▷한국 집값에 대해 그에게 묻는다면 “한국 상황을 잘 모른다. 나는 ‘케첩 경제학자’가 아니다”라며 즉답을 피할 것 같다. 그는 2007년 “미국 주택가격엔 버블은 없다”는 학자의 주장에 대해 “전형적인 케첩 경제학”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케첩 2병 값이 1병의 2배 정도면 합리적’이라는 식으로 드러난 숫자로만 판단할 뿐 경제 시스템 이면에 숨겨진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경제학자를 비꼰 말이다.

 

▷한국 아파트 값은 미국 이상으로 급등하고 있다.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에 따르면 4월 서울의 평균 아파트 매매가는 11억1123만 원으로 1년 전보다 17.7%(1억9665만 원)나 올랐다. 전국의 미분양 아파트 수도 1992년 1월 이후 29년 만에 가장 적어졌다고 한다. 공급 부족이 주요 원인이라곤 해도 과도한 쏠림은 거품을 만들게 마련이다. 주택 거품이 꺼질 시기를 한국도 대비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26 문 닫는 힐튼호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그룹 회장이던 1998년 한국을 찾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대우트럼프월드’ 사업 때문이었다. 그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만난 곳은 서울 힐튼호텔 23·24층 ‘김우중 펜트하우스’였다. 남산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트럼프의 맨해튼 펜트하우스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곳이 문을 닫을 처지라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중국과 일본 고객이 줄면서 호텔 경영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이지스자산운용은 ‘밀레니엄 힐튼 서울’ 대주주인 싱가포르계 CDL코리아로부터 호텔 인수를 앞두고 있다. 이지스는 약 1조 원에 인수한 뒤 호텔을 헐고 오피스빌딩을 지을 예정이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호텔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집합제한 탓에 예식 등 부대사업도 어려워졌다고 한다. 대우그룹은 1983년 호텔을 완공했는데 외환위기 여파로 1999년 CDL에 매각했다. 당시 매각 대금은 2600억 원이었다.


▷서울 강남의 첫 특급호텔인 쉐라톤 서울 팔래스 강남은 올해 초 문을 닫았다. 르메르디앙 서울 호텔도 영업을 중단했다. 코로나로 지난해 매출액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영업 중인 호텔들도 상당수 매물로 나와 있다고 한다. 인수를 저울질하는 업체들은 정작 호텔에는 관심이 없다. 팔래스 강남이나 르메르디앙은 주상복합 등 주거 시설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집값이 폭등했으니, 집을 지어 파는 게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특히 아파트 시세가 3.3m²당 1억 원에 육박하는 서울 강남권에서는 호텔 매각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길게 보고 호텔을 키우는 곳도 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이끄는 이마트 자회사 조선호텔앤리조트는 어제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옛 르네상스 호텔 자리에 ‘조선 팰리스 서울 강남, 럭셔리 컬렉션 호텔’을 개장했다. 국내외 예술 작품 400점을 전시한 최고급 호텔이다. 주요 호텔들이 문을 닫으면서 특급 호텔의 피트니스센터나 식당 수요는 충분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세계 맞수인 롯데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자사 호텔의 최상위 브랜드인 시그니엘을 베트남으로 가져가 ‘시그니엘 하노이’ 오픈을 앞두고 있다.

 

▷호텔 문을 닫거나 오히려 확장하는 방안 가운데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맞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런 변신 노력과 코로나 이후 기대감이 맞물려 일부 호텔 관련 주가는 올 들어 오름세를 타고 있다. 남산의 힐튼호텔도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새 오피스빌딩으로 변신해 많은 성공 스토리가 나오길 기대한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5-27 16세 정당인

 

이팔청춘, 과년(瓜年)이란 말도 있지만 16세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의 나이다. 정신적, 지적, 육체적으로 성숙해진 어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당사자인 16세들에겐 ‘경계의 나이’란 표현 자체부터 딱 꼰대적 발상이란 거부감이 들겠지만…. 16세가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당 가입 연령을 18세에서 16세로 낮추는 내용의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낸 것이다.


▷정당 가입 연령을 낮추자는 논의는 최근 몇 년 사이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유럽 국가들의 이른바 유스퀘이크(youthquake) 추세와 맞물려 있다. 유스퀘이크는 ‘젊음(youth)’과 ‘지진(earthquake)’의 합성어. 젊은이들의 행동과 영향력에서 발생하는 중대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말한다. 이는 20대 의원, 30대 총리 등의 출현으로 이어졌고 우리나라도 10대부터 자연스럽게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주장이 분출된 것이다.


▷최근 부패스캔들 위증 의혹으로 곤경에 처하긴 했지만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35)는 전 세계 현직 국가수반 중 최연소다. 중도우파 국민당 당원으로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는 그는 “17세 때 정치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디어와 비전을 공유하고 구현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했다. 쿠르츠 총리에 앞서 최연소 총리 기록을 갖고 있었던 핀란드 산나 마린 총리(36)도 스무 살 무렵부터 사회민주당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핀란드에선 15세 이상부터는 정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할 수 있으며 부모 동의가 있으면 13세에도 가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등은 대부분 당원 가입 연령이 선거 연령보다 낮다.

 

▷우리나라는 만 18세가 넘어야 정당에 가입할 수 있다고 법률에 규정돼 있다. ‘16세 정당인’에 대한 반대론자들은 “방향은 맞지만 시기상조다” “청소년을 선동하는 홍위병법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 이념을 가진 교사들에 의해 학교가 정치판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21대 총선 결과 40대 이하 청년 의원 비율은 4.3%에 불과했다. 국제의원연맹 자료에 따르면 121개국 중 118위로 최하위권이다. 20, 30대는 물론 요즘은 10대들까지 기성세대가 장악하고 있는 정치판에 숨 막힌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치열한 토론이 필요하다. 정당 역사가 깊은 유럽 국가들과 정치 토양이 다르긴 하다. 선진 사례 연구와 함께 합리적인 토론 프로그램 개발 등이 모색돼야 한다. 16세면 고등학교 1학년인데 무슨 정당 활동을 하느냐는 건 시대착오적 생각이 아닐까 싶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5-28 수술실 CCTV

 

부산 영도구 정형외과에서 어깨 수술을 받던 40대 환자가 뇌사 판정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의사가 아닌 의료기기 영업 사원이 대리 수술을 한 것. 2018년 5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정부 방침에 따라 국내 병원 수술실에 첫 폐쇄회로(CC)TV가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경기도는 그해 10월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해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2019년 11월엔 조례를 만들어 경기도 산하 6개 의료원 수술실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고, 의사와 환자가 동의할 경우 수술 장면을 촬영하도록 했다. 지난해 9월까지 6개 병원에서 이뤄진 수술 3900건 가운데 촬영된 비율은 67%. 전국 단위의 수술실 CCTV 설치법은 이보다 앞선 2015년부터 수차례 발의됐지만 번번이 의료계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


▷26일 국회에서 열린 관련법 공청회에서도 찬반 주장이 되풀이됐다. 의료사고 피해자 단체는 수술실 CCTV 의무화가 대리 수술이나 환자 대상 성범죄 예방, 의료사고 발생 시 진상 규명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주장했다. 의사들이 응급실에는 환자 난동에 대비해 CCTV를 설치해달라고 하면서 수술실 CCTV엔 왜 반대하느냐는 지적도 나왔다. 반면 의료계는 수술실 CCTV가 의료진의 인격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촬영 영상 유출 가능성, 위축 진료로 인한 의료 질 저하, 외과의 부족난 심화로 환자들에게도 손해라고 반박했다.

 

▷수술실 촬영은 개인 정보 보호 문제가 걸려 있어 민감하다. 수술실 CCTV를 법으로 강제하는 나라가 없는 이유다. 매년 의료 과실로 40만 명이 사망하는 미국도 수차례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위스콘신주에서는 유방 확대 수술을 받던 여성이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숨지자 2018년 관련법이 발의됐다가 상원에서 부결됐다. 매사추세츠주에서는 수술실 감염 위험과 환자 비용 부담 문제까지 제기되면서 무산됐다.

 

▷어제는 보건복지부가 척추전문 의료기관으로 지정한 인천의 한 병원에서 의사가 아닌 직원이 대리 수술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경찰이 압수수색에 나섰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불법 의료행위 때문에 국민 10명 중 7명은 수술실 CCTV 의무화에 찬성한다. 이것이 어렵다면 수술실 입구의 CCTV 설치를 의무화하고 내부에 CCTV를 둔 병원엔 인센티브를 주는 대안도 있다. 부산 정형외과의 영업사원 대리 수술 사건도 수술실 외부 CCTV 영상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불법의료행위 근절을 위한 의사협회의 자정 노력도 필요하다. 환자가 제 몸 맡기는 의사를 CCTV보다 못 믿는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29 잔여 백신 접종 열기

 

혈전 부작용 논란이 있는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이 귀하신 몸이 됐다. 일반인 AZ 접종 첫날인 27일 당초 우려와는 달리 예약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은 ‘노쇼(no show)’는 2%에 불과했다. 노쇼로 인한 ‘잔여 백신’을 노리던 많은 예약자들은 물량 부족으로 허탕을 쳤다.


▷특히 젊을수록 부작용이 심하다는 뜻에서 AZ 백신을 ‘아재 백신’이라 부르며 떨떠름해하던 30, 40대가 근처 병원의 잔여 백신 수량을 알려주는 네이버와 카카오톡 서비스로 몰리면서 접속 장애도 발생했다. 온라인에는 “아이돌 콘서트 티켓 예매하듯 광클(빛의 속도로 클릭)했는데 놓쳤다”는 실패담이 속속 올라왔다. “해외 출장 가야 하는데 노쇼 백신 알림 받고 아차 하는 사이 놓쳤다” “여름 오기 전에 마스크 벗으려고 수시로 접속했는데 ‘0’만 뜬다”는 것이다. 드물게 “거래처 다닐 일이 많은 자영업자다. 잔여 백신 업데이트 열댓 번 만에 맞고 왔다”는 성공담도 있다.


▷이날 잔여 백신을 맞은 사람은 6만2000명이며 이 중 93.5%가 일찌감치 예비명단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네이버와 카카오 당일 예약으로 접종에 성공한 사람은 4229명뿐이다. AZ는 병당 10∼12명이 맞을 수 있고, 개봉 후 6시간이 지나면 버려야 한다. 하루 예약자가 30명이면 3병을 따는데 남는 6명분에 노쇼 물량까지 병원 인근의 예약자들에게 돌아간다. 잔여 백신 접종은 30세 이상을 대상으로 AZ만 가능하다.

 

▷‘액체로 된 금’이라 불리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은 속도 못지않게 폐기량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백신 복권, 공짜 맥주, 소개팅 앱의 성공 확률 14% 상향 조정 등 온갖 인센티브에도 접종률이 정체되자 20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접종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예를 들어 화이자는 한 병에 6명분이 들어 있는데 접종자가 한두 명만 있어도 병을 따라는 것이다. 미국은 폐기량 비율을 현행 0.4%에서 2%까지 허용할 방침이다. 백신 부자 나라이니 가능한 얘기다.

 

▷백신 가뭄으로 허덕이던 한국이 물량난이 풀리자 성숙한 국민의식에 선진적인 접종 인프라와 정보기술로 버리는 백신 없이 접종 속도를 내고 있다. 27일에는 접종 시작 후 최다 인원인 65만7192명이 1차 접종을 마쳤다. 이대로 가면 상반기 접종률 25% 달성도 가능할 전망이다. 하지만 고령층 예약률이 60%대로 낮아 걱정이다. 잔여 백신에 줄 서는 사람들은 “앞선 접종자들이 괜찮은 것 보고 용기를 냈다”고 한다. 이들의 백신 접종 열기가 고령층의 접종률을 끌어올리는 선순환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31(월) DPRK와 PRC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북한의 국호를 소련 군정이 지어줬는지, 김일성이 만들었는지 논란이 있지만 북한에선 김일성의 창작품이라고 선전한다. 그래서인지 공화국이라는 단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최고의 영예는 ‘공화국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이고, 스스로를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영문 명칭도 ‘North Korea’가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번역한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를 쓴다. 미국 정부는 두 개의 북한 명칭을 혼용하다 최근 DPRK로 통일하라는 지침을 내렸는데, 의도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미중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지난해 5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시진핑 총서기(General Secretary)”라는 표현을 썼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라는 의미가 강한 국가주석(President) 대신 총서기라고 호칭해 공산당의 수장이라는 측면을 부각한 것. 여기엔 중국 정부와 국민을 분리해서 대응하려는 전략이 깔려 있다. 미 정부가 중국의 명칭을 China 대신 PRC(People’s Republic of China)로 쓰기 시작한 것과 같은 흐름이다.


▷북한 노동신문은 어제 “우리의 국호, 그것은 절세위인들께서 안겨주신 영원한 긍지”라며 국호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북한 정권이 미 정부의 국호 표기 관련 조치를 북한에 대한 배려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중국의 전례와 조 바이든 정부의 대북 정책기조에 비춰보면 북한이 마냥 반길 일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북한 정권은 DPRK로, 주민을 포함한 북한 전체는 North Korea로 구분해 주민에 대해선 유화적 자세를 취하더라도 정권의 인권침해, 핵개발 등은 계속 문제 삼을 가능성이 있다.

 

▷미 정부가 국호를 민감하게 여기는 사례로는 미얀마도 있다. 1988년 민주화 시위를 진압한 군부는 1948년 독립 이후 사용하던 버마라는 국호를 1989년 미얀마로 바꿨다. 하지만 지금도 미 정부는 대부분 버마라고 쓴다. 미얀마 미 대사관 명칭도 ‘버마 주재 미국대사관’이다. 독재 세력이 바꾼 나라 이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배어 있다.

 

▷김씨 일가가 3대째 집권 중인 북한, 공산당 일당 지배 체제인 중국 모두 국호에 인민공화국이 들어가 있다. 루마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시절 국호에 인민공화국을 붙였지만 현실에서 인민은 탄압받는 존재였을 뿐이다. 누가 국호를 지었고 미국이 어떻게 표기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북은 국호에 들어있는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를 받아들여 주민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길로 가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