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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1] 다수에 의한 민주독재, - [40] 비트코인도 울고갈 튤립 광기의 전

상림은내고향 2021. 5. 30. 20:31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조선일보

2020.229

[31] 다수에 의한 민주독재, 19세기가 대한민국 정치를 경고했다

민주독재

2020년은 병든 한 해였다. 코비드19가 우리 몸을 병들게 하듯, ‘다수의 압제’라는 열병이 대한민국을 괴롭혔다. 숫자 싸움에서 이긴 ‘다수’는 손안에 들어온 권력을 미친 듯 휘둘렀고, ‘소수’는 별다른 대처 방식을 찾지 못한 채 거칠지만 무능력한 저항을 일삼았다. 올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고르라면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 밭에서 뒹굴며 싸우는 개)’를 택하고 싶다. 후대의 역사가는 현재 한국 정치 상황을 두고 민주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타락해 가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할 것 같다.

▲미국 화가 케일럽 빙엄의 그림‘카운티 선거’. 1840년대 미주리에서 활동한 빙엄은 막 정착되기 시작하던 미국 민주주의의 기괴하고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측면을 화폭에 담았다. 분주하고 번잡스러웠던 미국 민주주의의 첫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위키피디아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선거에서 이겨 정권을 장악한 여당이 자신의 정책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민주주의는 곧 다수결이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을 따르고자 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그렇지만 일찍이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은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맹점이 있으며, 이런 것이 결국 민주 독재(despotisme démocratique)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19세기 중엽에 그가 분석한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오늘날까지 관철되는 것을 보면 실로 탁월한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서병훈, ‘민주주의, 밀과 토크빌' 참조).

 

구대륙의 귀족 출신 문필가이자 정치가인 토크빌이 신생국 미국을 직접 둘러본 결과 얻어낸 결론은 왕정이나 귀족정이 아닌 민주정이 세계사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다. 분명 그 누구도 평등의 확산이라는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 민주주의를 잘 수행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최선의 체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문제의 근원은 평등이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토크빌이 보기에 평등에는 두 종류가 있다. ‘당당하고 정당한 평등’은 평범한 사람도 위대한 사람의 대열로 끌어올려주는 힘이 있다. 반면 ‘저급한 평등’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면서 정의로운 일로 미화한다. 이게 민주 사회의 고질이고,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병 같다. 남이 잘되는 걸 보느니 차라리 강제로라도 끌어내려 다 같이 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결국 다 함께 노예가 되는 수밖에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이며 역사가 알렉시 토크빌(1805~1859).

 

이런 부류의 특징은 열정이 넘치되 성찰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스스로 독자적 판단을 내릴 능력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인정하기는 싫어한다. 이럴 때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수를 따르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이면 더 큰 지혜를 얻는다고 오해하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이 같은 의견을 공유하면 그것이 확실한 진리의 근거라고 믿는다. “국왕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과거의 주장은 이제 “다수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로 바뀌었다. 더 나아가서 다수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망상에 이른다. 쉽게 말해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자기편이 아닌 자들은 오류에 빠져 있고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진리와 도덕을 독점한 열성파 다수는 반대편을 가혹하게 압박한다. 이미 19세기에 토크빌은 이렇게 예견했다. 과거의 군주정에서는 육체에 폭력을 가했다면, 민주 공화정에서는 반대편 사람들의 영혼을 공격할 것이다.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들에게 이방인이다.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끼여서 남아 있겠지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들은 몽땅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이 동료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은 당신을 마치 불결한 물건처럼 피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마저도 자기들도 똑같은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당신을 버릴 것이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조용히 사라져라. 하지만 차라리 죽느니만 못할 것이다.” 정치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저주 섞인 비난을 들어본 사람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안다.

▲1787년 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진행된 미국 헌법 조인식을 그린 미국 화가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의 그림(1940). /위키피디아

 

이처럼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은 정부가 ‘국민의 이름’을 내세워 권력을 행사하면 자칫 민주 독재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과거에는 어느 군주라 하더라도 반대파를 모두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것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법률을 만드는 특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폭압적인 법과 제도를 민주적 방식으로 세련되게 만드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무제한의 권력이 한곳에 집중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체제다. 이론상 국민이 주권자라고 하지만 우리는 단지 몇 년에 한 번 투표를 통해 우리의 주권을 행사했다고 착각할 뿐이다. 일단 권력을 넘겨주고 나면 아무런 통제 가능성이 없다.

 

토크빌은 무제한의 권력을 쥐는 것이 곧 타락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파악했다. 인간은 권력을 분별 있게 행사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폭주하는 권력 집단 내부에서 미약하나마 반대 목소리를 내는 순간 당사자가 얼마나 무자비하게 숙청당하는지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애초에 권력을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에 몰아주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다. 토크빌은 누구든 무한 권능을 잡는 순간 압제를 시작한다고 보았다.

 

민주주의가 자유를 유린하는 이 모순을 해결할 대책은 없는가? 토크빌은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지만 아무리 봐도 속 시원한 이야기는 못 된다. 참여를 늘려 민주주의의 해독을 중화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잘 이해된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태도를 길러야 하며, 우리 모두 절제와 헌신의 습속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 그런 것들이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지만 오늘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19세기에 제시한 문제에 대해 21세기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것은 당장 2021년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할 과제다.

 

<다수의 압제>

권력이 다수에서 나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다수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것이 토크빌이 내내 고민하던 문제다. 그렇다면 다수의 압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토크빌이 말하는 핵심 내용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떤 집단에게도 전권을 몰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토크빌, 이용재 역,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미국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석상. /위키피디아

 

“내가 보기에 무한 권능(toute-puissance)은 그 자체로 나쁘고 위험한 것이다. 무한 권능의 행사는 그 주체가 누구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 아무 통제 없이 활동하고 아무 장애 없이 군림하도록 내버려둘 정도로,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하고 신성한 권위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민이든 국왕이든,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어떤 권력체에 전능한 권리와 능력을 부여한다면, 나는 거기서 압제의 씨앗을 본다. 내가 보기에 미합중국에서 시행되는 민주주의 통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유럽에서 많은 사람이 주장하듯이 그 취약성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막강한 힘에 있다. 아메리카에서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누리는 극단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 나라에는 압제에 맞설 보장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느 개인이나 정당이 합중국에서 부당한 처우를 당한다면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겠는가? 여론에? 여론도 다수로 이루어져 있다. 입법부에? 입법부는 다수를 대표하며 맹목적으로 다수에 복종한다. 행정권에? 행정권은 다수에 의해 임명되며 다수에게 소극적 도구 구실을 한다. 공권력에? 공권력은 무장한 다수와 다름없다. 배심원에게? 배심원은 법령을 공표할 다수다. 더구나 법관들도 몇몇 주의 경우 다수에 의해 임명된다. 그러므로 당신의 심기를 해치는 그 조치들이 아무리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그것에 복종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법부가 다수를 대표하면서도 다수의 변덕의 노예가 되지는 않도록 구성하고, 행정권이 자기에게 고유한 힘을 부여받고, 사법권이 다른 두 개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있다면 압제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불행하게도 2020년 한국의 상황은 정확히 그 반대다.

 

[32] 美·中 패권전쟁 끝은… 2500년전 아테네·스파르타가 보여줬다

‘투키디데스 함정’ 통해 본1인자와 2인자의 충돌

미국과 중국은 장차 필연적으로 전쟁에 돌입할까?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자신의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새로 부상하는 세력이 기존 지배 세력을 대체할 정도로 위협적일 경우 그에 따른 구조적 압박이 무력 충돌로 이어지는 현상은 예외가 아니라 거의 법칙’이라고 설명하면서 전쟁 가능성을 높게 예상한다. 경제·군사적으로 급성장하는 중국에 대해 기존 패권 국가인 미국이 경계심과 공포심을 느끼게 되고, 이런 갈등이 심화될 때 작은 불씨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테네의 급부상이 기존 강국 스파르타에 두려움을 일으켜 양국 간 참혹한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에서 이름을 따와 앨리슨 교수는 이런 현상을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과연 이런 현상이 반복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난 500년 역사에서 세력 교체 사례 16번을 살펴본 후 12번이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이 설명이 맞는다면, 언젠가 미국과 중국은 사망자가 5500만명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을 뛰어넘는 인류 멸망 수준의 전면전을 벌일 것인가?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심의 그리스 동맹군이 페르시아의 침공을 바다에서 막아낸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은 역설적으로 두 도시국가의 대립이 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아테네가 패퇴하는 페르시아를 뒤쫓아 바다 건너 소아시아의 그리스계 도시를 해방시키며 세력을 늘리려 하자, 전쟁 확대를 원치 않았던 스파르타와 도시국가들이 그리스 동맹에서 탈퇴했던 것. 이 대립은 약 20년 뒤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진다. 독일 화가 빌헬름 폰 카울바흐의 유화‘살라미스 해전’(1868년作). /위키피디아

 

2500년 전의 역사 사례를 통해 미래 인류에게 닥칠 운명을 알아낼 수 있을까?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이 필연적으로 전쟁을 초래한 구조적 요인이며, 그와 유사한 현상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분석이 과연 타당할까? “더 길게 되돌아볼수록 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다”는 처칠의 충고를 받아들여 고대 그리스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고대 그리스 세계는 소규모 도시국가(Polis) 수백 곳으로 분할된 가운데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예외적으로 강력한 세력이었다. 막강한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이 두 나라가 중심이 되어 적군을 격퇴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스파르타군이 육상에서 페르시아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지만, 그리스 세계가 승기를 잡은 결정적 요인은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 해군이었다.

 

이후 신흥 강국 아테네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도시국가 수백 곳과 델로스동맹을 맺었다. 연합 해군을 유지하기 위해 동맹국들은 선박을 제공하든지 아니면 돈을 내야 했다. 이렇게 모은 엄청난 액수의 군비는 델로스섬의 금고에 보관하기로 했지만, 실제로 이 돈은 아테네의 경제 번영과 문화 사업에 쓰였다.

 

파르테논신전 건축이 대표적인 사례다. 얼마 후에는 아예 금고 자체를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왔다. 평화협정에서 페르시아의 육군과 해군이 그리스 방면으로 오지 못하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위협은 사실 사라진 상태였다. 급박한 위험이 없는데도 아테네가 계속 군비를 요구하자 일부 동맹국이 지불을 미루거나 거부했다. 그러자 아테네는 자국 군대와 용병까지 동원하여 비협조적인 도시국가들로 달려가 압박했는데, 이는 그리스 세계에서 처음 겪는 충격적인 사태였다. 아테네는 내부적으로는 민주정이 꽃피어났으나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 지배자로 변모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쓴 고대 그리스의 군인·역사가 투키디데스 조각상. /위키피디아

 

이제 그리스 세계가 겪는 갈등과 위험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기존 패권 국가인 스파르타는 아직 아테네나 그 동맹국들에 비해 군사적으로 수세에 몰릴 정도는 아니지만 자칫 주도권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였다. 이것이 결국 두 나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459년,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충돌 사태가 벌어졌다. 간헐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일부 영토를 빼앗았다가 돌려주는 일들을 겪은 후 양국은 30년 평화조약을 맺어 사태를 봉합했다(기원전 446~445). 투키디데스는 아무리 평화조약을 통해 갈등을 완화하려고 해도 그 아래 잠재해 있는 긴장의 원인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고 본다. 아테네는 계속 해군력을 강화하고 교역을 통해 부를 쌓아갔고, 이것이 스파르타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작은 사건이라도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다.

 

국지적인 문제가 어떻게 전쟁으로 치닫는지 한 가지 사례를 보자. 스파르타 동맹국 코린토스와 중립국 코르키라 간 전투가 일어났다. 코린토스가 코르키라에 패배한 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하여 만만치 않은 해상 강국으로 올라섰다. 위협을 느낀 코르키라는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고, 코린토스 또한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상황에서 아테네가 대놓고 코르키라를 도우면 평화조약이 깨져서 스파르타와 다시 전쟁을 벌일 위험이 있지만, 그대로 놔두면 코린토스가 아테네의 제해권을 위협할지 모른다.

 

스파르타 또한 비슷한 전략적 딜레마에 빠졌다. 만일 코린토스를 지원하면 아테네는 이것을 자국의 해상 지배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자칫 전쟁을 개시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코린토스의 지원 요청을 무시하면 다른 동맹국들로부터 신뢰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 코린토스 대사가 스파르타 의회에서 아테네가 저토록 설치는데도 스파르타가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만일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동맹에서 탈퇴할 거라고 위협했다. 의회에서 격렬한 논쟁 후 투표를 한 결과 전쟁 개시를 결정했고, 이에 맞서 아테네 또한 전쟁을 결의했다.

▲존 스티플 데이비스의 도서 삽화‘시라쿠사에서 패퇴하는 아테네군’(1900년作). 펠로폰네소스전쟁 시기 시칠리아의 도시국가 시라쿠사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 세력 간 전투가 벌어졌다. /위키피디아

 

이 시기 아테네나 스파르타 모두 냉철한 이성보다는 흥분한 애국심만 넘쳐났다. 양측 모두 전쟁이 나면 자신들이 단기간에 승리를 얻으리라고 믿었다. 현명한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만이 어느 쪽도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므로 전쟁이 한 세대는 지속하리라고 보았다. 그의 예측대로 거의 30년 지속한 참혹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이 끝난 후 두 나라 모두 공멸의 길을 갔고, 조만간 그들이 야만인이라고 하시하던 북방의 테베와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의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에 복속당하고 만다.

 

과연 이런 분석이 옳을까? 여러 비판이 가능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저명한 역사가 도널드 케이건은 전쟁 전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위협할 정도로 국력이 급상승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이 구조적 요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전쟁의 원인은 양국 지도자들의 잘못된 결정에서 찾아야 한다. 구조적 요인이 전쟁 가능성을 높인다고 해도 그 자체로 전쟁이 시작되는 건 아니며 결국 시민들의 태도와 지도자들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 사실 앨리슨 교수가 투키디데스 함정에 대해 이야기한 목적 또한 미국과 중국 간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그런 위험 요소를 인지하고 이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들만이 같은 역사를 되풀이한다.

 

킨들버거 함정

중국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변화시킬 정도의 강대국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중국의 총생산(PPP·구매력평가지수 기준)은 24조2000억달러로서 미국(20조8000억달러)을 제치고 이미 세계 1위다(2020년 추산치). 그런데 ‘1인당 기준’으로는 1만7206달러로서 세계 73위에 불과하다. 덩치로는 이미 세계 1위지만 내실을 보면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이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세계의 패권을 노린 역대 국가들은 모두 그 시대 최정상급 국가들이었지, 가난한 개도국이 세계 패권을 노리는 것은 희소한 일이다.

 

투키디데스 함정만큼이나 ‘킨들버거 함정(Kindleberger Trap)’에도 유의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역사가이며 마셜 플랜의 설계자 중 한 명인 찰스 킨들버거는 1930년대에 극심한 공황이 발생하고 이것이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원인은 1차 대전 이후 새롭게 패권국이 된 미국이 지난 시대 영국이 했던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 세계에 ‘국제 공공재(안정된 환율 시스템 유지, 금융 위기 시 최후의 대부 역할 수행 등)’를 공급하는 것이 패권국의 역할이다. 이것은 꼭 이타적인 의도가 아니라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패권국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이나 중국 모두 그런 역할을 방기하고 자국 이익만 좇아 고립주의 혹은 무임승차를 고집한다. 중국의 부상을 두려워하는 투키디데스 함정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 모두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지 않아서 생기는 국제 질서의 붕괴라는 킨들버거 함정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두 강대국 모두 요즘 상황이 심상치 않다.

 

 [33] 황후·귀족 때려잡고 식량 푼 네로… 민중은 한때 환호했다

미국을 흔히 로마제국에 비교한다. 간혹 자질이 형편없는 지도자가 등장하여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현상도 비슷하다. 로마 황제 중에 용렬한 인간들은 수도 없이 많으나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재위 서기 54~68년)만큼 세상을 어지럽힌 인물도 드물다. 네로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연결된 유력 왕실 가문 출신이지만, 궁중 암투가 난무하는 시대 상황에서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다. 그가 네 살 때 죽은 아버지는 독살 가능성이 크다. 어머니 아그리피나 역시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들을 겪었으나, 끝까지 버텨서 결국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재혼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나이 많은 남편이 죽은 다음에도 안전하게 권력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야 한다.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그리피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당시, 네로 황제는 로마 시민들과 갈등을 빚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화재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수많은 기독교 신자가 체포돼 맹수의 먹이로 던져지거나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네로가‘황금 궁전(Domus Aurea)’앞에서 기독교인들을 산 채로 화형에 처하는 모습을 묘사한 폴란드 화가 헨리크 시에미라즈키의 그림‘네로의 횃불’(Nero’s Torches·1876년作). 폴란드 크라쿠프 국립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미국, 흔히 로마제국과 비교돼

우선 세네카와 손을 잡았다. 탁월한 철학자·연설가이며 궁정 내 영향력이 큰 인물인 그에게 아들 교육을 맡겼다. 곧이어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약혼시켰고, 얼마 후에는 아예 황제의 양자로 입양시켰다. 이후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해 갔다. 몇 년 새 살해된 원로원 의원만 30명에 달했다. 빨리 제위를 확보하려면 60대의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죽기를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빨리 없애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여러 설이 난무하지만 아그리피나의 주도로 독버섯과 독 묻은 깃털을 사용해서 늙은 황제를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바라던 대로 네로가 제위에 오르자 아그리피나는 사실상 공동 통치자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제국 운영의 중요한 실무 처리를 하고 사절도 접견했다. 당시 발행한 화폐에는 황제와 어머니가 동격으로 그려져 있을 정도다. 그러나 모후가 과도하게 국정에 간여하는 데 반대한 세네카와 호위대장 부루스가 그녀를 견제하여 실권을 빼앗았다. 네로의 교육을 담당했던 세네카는 젊은 황제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방탕한 기운을 용인하고 방치했다. 음악에 소질이 있고 특히 무대에 오르기를 좋아한 네로는 직접 연극배우로 나서기도 했다. 당시 배우는 오늘날과 달리 가장 수치스러운 직업으로서 창녀와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행위는 실로 파격이었다. 그렇지만 세네카는 여전히 덕성스러운 삶과 정의로운 통치를 강조하는 네로의 연설문을 작성했다.

/황제 네로와 모후 아그리피나의 마주보는 얼굴이 새겨진 로마 금화. 서기 54년 주조. /위키피디아

 

‘네로의 초기 5년(Quinquennium Neronis)’ 통치는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후반 통치기에 비하면 그럭저럭 원만한 편이고, 건축 분야에서 성과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정 내부에서는 끔찍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네로로서는 권력을 놓지 않고 사사건건 간섭하려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많으나 네로가 벌인 악행으로 판단하는 자료가 많다. 고대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사고로 위장하여 호수 한가운데에서 아그리피나가 탄 배를 침몰시켰다. 그런데 수영에 능한 아그리피나는 헤엄쳐서 살아나왔다.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사고를 당했지만 무사하다’는 편지를 아들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은 네로는 당황스러워했다. 곧 참모들과 협의한 후 군 병력을 보내 어머니를 살해했다. 공식적으로는 어머니가 아들을 살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가 실패하자 스스로 자결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차례는 황후 옥타비아였다. 황후에 대한 애정이 없던 네로는 다른 여성과 연애하거나 남성과 동성애를 즐겼다. 결국은 죄 없는 옥타비아에게 간통죄를 씌워 처형했다. 그의 치세 동안 계속 정적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모함하여 살해했다. 그런데 일반 국민으로서는 억압적인 귀족들을 제거하는 것이 나쁠 것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황제의 인기가 올라갔다. 네로는 더욱 서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중 영합 정책을 폈다. 집권 후반기에는 수많은 축제를 개최하고, 식량과 선물을 배급했으며, 공공 건축 사업을 크게 펼쳤다. 거대한 황금궁전(domus aurea) 조성 사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네로는 평민을 보호하고 문화 사업을 추진하는 척할 수 있었다. 정치적 갈등이나 재정 문제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다.

 

기독교 신자 산 채로 불구덩이 던져

그의 치세 중 가장 큰 사건은 64년의 대화재였다. 로마 시는 일주일 동안 불에 탔다. 네로가 멋진 궁전을 짓기 위해 일부러 가난한 동네에 불을 질렀고, 불타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수금(竪琴)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현대의 연구자들은 낭설에 불과하다며 부정한다. 당시 로마 시는 목조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가 직접 저질렀든 아니든 초대형 사고는 황제의 평판을 깎아먹는다. 이를 피하기 위해 당시 로마 시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던 기독교도들에게 잘못을 돌렸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짐승에게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다고 한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재혼한 뒤 아들을 황제로 만들었으나, 끝내 아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리치의 그림‘네로와 아그리피나’. 이탈리아‘알라 폰초네 시립 박물관’소장. /위키피디아

 

화재 이후 네로는 본격적으로 도시계획을 밀어붙였다. 황금궁전은 이 시기에 거의 완공했다. 당연히 재정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지방에 기여금을 강요하고,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유량을 3.8그램에서 3.3그램으로 낮추고 은의 순도도 낮추는 식으로 화폐개혁을 감행했다. 이러니 정치와 경제가 엉망으로 망가질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을 구해야 한다는 인사들이 역모를 꾸몄지만 대개 발각되어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자리를 내놓고 떠나 있던 세네카도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네로의 자살 명령이 떨어져서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네로는 두 번째 부인을 죽인 후 스포루스라는 소년을 거세시키고 여성으로 분장시켜 결혼식을 올렸다.

 

재위 마지막 해인 서기 68년, 각지에서 봉기가 터져 나왔고, 일부 지사와 장군들이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네로가 목숨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한밤중에 일어나 보니 호위대를 비롯해 모든 사람이 도망가고 궁전이 텅 비었다. 심지어 자신을 칼로 찔러 살해해 줄 검투사조차 찾을 수 없었다. 테베르 강에 투신자살하려다가 그것도 못 하고 시내의 한 저택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 원로원에서 네로를 광장에서 때려죽이는 방식으로 처형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원로원에서는 여러 의견이 오가다가 사태를 순조롭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네로를 살려두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서 네로를 데리러 사람들을 보냈는데,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것으로 착각한 네로는 서둘러 죽음을 결정했다. 스스로 자결할 용기도 없어서 끝까지 자신을 지킨 비서에게 살해를 부탁했다. “내 안의 예술가가 죽는구나!” 죽으면서 네로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네로 때문에 로마가 망하지는 않았다. 잘못된 지도자가 한때 분탕질을 쳐도 제국 시스템이 건재했기에 로마제국은 그 후 400년을 더 유지할 수 있었다.

 

<네로는 죽지 않았다>

 

원로원 의원들과 귀족, 상층 시민들은 네로의 죽음을 반겼지만, 서민층과 노예, 극장가 사람들은 슬픔에 잠겼다. 그동안 네로의 기행이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네로 시대를 그리워하는 민중의 꿈이 ‘네로의 귀환(Nero Redivivus)’ 전설을 낳았다. 네로는 죽지 않았으며 동방의 한 동굴에서 잠자고 있다가 어느 날 대군을 이끌고 돌아온다는 식의 이야기가 이후 100년 가까이 지속했다. 극심한 탄압을 받던 기독교 신자들은 다른 의미에서 네로의 귀환을 믿었다. 네로는 성경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이며, 신의 분노를 유발하여 대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도 그렇게 해석했다. 얼마 후 얼굴이 네로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용감하게 수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네로라고 자처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조만간 다시 보자”는 퇴임 연설을 한 미국의 전임 대통령과 지지자들도 귀환의 희망을 품고 있을까.

 

[34] 함무라비 ‘눈에는 눈’ 형벌… 古代 보복 살해를 멈춘 公正이었다

함무라비 법전과4000년전의 公正

▲“백성들의 목자이며 유능한 왕으로서 평화를 지키고 악과 부정을 없애겠노라.”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포괄하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한 함무라비 왕은 수도 바빌론 중앙광장에 검은 현무암으로 된 ‘함무라비 법전 석비'를 세우며 서문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이 석비는 고대 국가의 공정과 균형에 대한 감각을 들여다보며 약 4000년이 흐른 지금 인간 사회는 얼마나 더 성숙해졌는지 돌아보게 하는 세계사의 거울이다. 함무라비 왕의 재판 모습을 묘사한 그림/AFP

 

바빌론 왕조의 6대 국왕 함무라비(재위 기원전 1792~1750년 추정)는 뛰어난 군사·외교 능력을 발휘해서 메소포타미아 거의 전 지역을 포괄하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광대한 영토를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정복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함무라비는 법을 정비해서 통치에 이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현재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 ‘함무라비 법전 석비’가 이 사실을 증언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기원전 1754년 제국의 수도 바빌론의 중앙광장에 높이 2.25m의 검은색 현무암 석비를 세웠는데, 후대의 침략자인 엘람(Elam)인들이 기원전 13세기에 수사(Susa)로 옮겼던 것을 1901년 서유럽 고고학자들이 재발견하여 파리로 가져왔다.

 

석비 윗면에는 함무라비가 정의의 신 샤마시로부터 사법 권위를 전해 받는 장면이 있고, 그 아래에 서문 및 맺음말(epilogue)과 함께 282개조의 법령이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함무라비는 서문에서 자신이 ‘인민의 목자이며 유능한 왕’으로서 평화를 지키고 악과 부정을 없애겠노라고 선언한다. 왕은 공포와 변덕으로 통치하는 다른 고대국가의 루갈(lugal·힘센 자)과 달리 법에 의해 통치하는 새로운 제국의 모범을 보인다고 자부하고 있다.

 

법의 내용은 무엇일까? 사실 ‘법전(Code)’이라고 부르지만 282개조의 내용들은 체계적인 원칙에 따른 법조문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던 판결 사례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장래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날 터이니 표준적인 판결들을 참조하여 이 방향으로 법질서를 세우면 좋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법전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원리나 법 철학 같은 것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그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공정성과 균형을 기하려 한 느낌을 받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표현하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talion)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함무라비 석비. 높이 2.25m 돌기둥에 282조 규정을 새겼다. /Mbzt/위키피디아

 

누군가의 눈을 멀게 한 사람에게 자신의 눈을 멀게 만드는 처벌은 고대의 여러 율법과 법령에 나오지만 함무라비 법전이 가장 유명한 사례다. 이것은 과연 공정한 처벌일까? 우리 관점에서 보면 잔혹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고대사회에서 이런 정도면 제법 질서가 잡힌 상태라 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 친족 일원의 눈을 멀게 하면 우리 쪽에서 상대방 집안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쪽에서 우리 집안의 형제를 살해할 수 있으며, 다시 이에 대해 상대방 친족 일원을 살해하는 식으로 보복의 연쇄가 일어나기 십상이다. 이런 혼란 사태를 막으려면 국가가 나서서 공정한 처벌을 가하고 더 이상의 보복 행위를 금지해야 한다. 이때 어느 정도의 벌을 가하는 것이 공정한지가 중요한 문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함무라비 법전의 문구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동해복수를 이야기하는 196조를 정확히 옮기면 이렇다. ‘한 아윌루(awīlu)가 다른 아윌루의 눈을 멀게 하면 그의 눈을 멀게 한다.’ 아윌루란 신분이 높은 귀족을 뜻한다. 똑같이 눈을 멀게 하는 처벌은 같은 신분 내에서만 적용되는 방식이다. 이와 달리 아윌루가 평민의 눈을 멀게 하면 60셰켈(은 10그램 정도를 포함한 은화)을 지불하고(198조), 노예의 눈을 멀게 하면 그 절반인 30셰켈의 은을 지불한다(199조). 바빌로니아 제국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세계가 아니라 신분으로 나뉜 사회이기 때문에 처벌 정도도 신분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런 원칙에 따라 평민이 다른 평민의 뺨을 때리면 10셰켈, 아윌루가 다른 아윌루의 뺨을 때리면 60셰켈의 은을 내고 해결하지만, 만일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아윌루의 뺨을 때렸다가는 공공장소에서 쇠가죽 채찍으로 60대를 맞는다(202조). 여사제를 비난한 자는 머리카락 절반을 밀고 공공장소에서 채찍질을 한다(127조).

 

고대적 의미의 공정과 균형은 우리 생각과는 다른 여러 요소들을 함께 고려한 결과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어느 아윌루가 같은 신분의 임신부를 때려서 그 여성이 유산하면 10셰켈의 은을 낸다. 그런데 만일 그 임신부가 죽었다면? 가해자의 딸을 죽인다! 이런 정도의 고통을 가해야 죄와 벌의 균형이 맞는다고 본 것 같다. 그런 원리에 입각하여 다양한 종류의 신체형이 등장한다. 의사가 아윌루를 치료하는 중에 환자가 죽거나 눈이 멀게 되면 의사의 손을 자른다. 그렇지만 노예를 치료하다가 죽으면 같은 값의 노예를 대신 구해주면 된다. 양자가 자신을 입양한 아버지를 부인하면 혀를 뽑는다. 노예가 주인의 뺨을 때리거나 대들면 귀를 자른다. 유모가 맡아서 키우던 아이를 죽게 하면 한쪽 젖가슴을 잘라낸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손목을 자른다....

▲여러 판례를 수집해 정리한 형태인 함무라비 법전엔 고대의 부부와 남녀 관계에 관한 풍습과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사례와 판결도 적혀있다. 영국 화가 에드윈 롱의 그림‘바빌로니아의 결혼 시장’(1875년), 런던대 소장. /위키피디아

 

재산상의 손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면한 제방을 잘 관리하지 않아서 물이 넘쳐 다른 사람의 농사를 망쳤다면 그 손해를 갚아주어야 한다. 만일 돈이 부족하면 전 재산과 함께 그 사람 자신도 노예로 팔아서 갚도록 한다. 건축사가 일을 잘못해서 집이 붕괴하여 집주인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면 건축사를 사형에 처한다. 만일 이 사고로 집주인의 아들이 죽는다면 건축사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고대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해당할 텐데 처벌 내용이 훨씬 무겁다.

 

함무라비 법전 282개조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당시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평등 사회가 아니라 귀족, 자유민, 노예 등으로 신분·지위가 철저히 나뉜 계급사회였다. 거대한 제국 질서를 유지하려면 과거 전통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안 되고 법적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많은 경우 지나치게 엄격한 처벌을 규정하는 면이 있으나 그래도 통치자와 상층 계급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분명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귀족들에 대한 범죄 그리고 귀족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더 엄한 처벌을 규정한 것을 보면 한편으로 상층 계급을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더 무거운 책임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의 지위는 오늘날에 비하면 훨씬 취약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무방비로 내쳐진 것은 아니고 법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역시 진일보한 면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가혹한 법질서보다는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내미는’ 종교·도덕률이 더 높은 수준인 건 맞지만 현실 사회에서 그런 일은 애초에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공정한 법질서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함무라비 이후 400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 인간 사회가 과연 더 성숙해졌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고대의 결혼과 이혼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일은 먼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고대의 법령들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엿볼 수 있다.

 

만일 한 남성이 아내를 놔두고 다른 지역에 가서 오랜 기간 살았고 그러는 동안 이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고 하자. 그런데 뒤늦게 남편이 돌아와서 그 여성을 다시 아내로 취하고자 한다면? 함무라비 법전은 그 여성이 원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판시한다. 만일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이 이혼을 원한다면? 남편은 결혼 때 아내가 가지고 왔던 지참금을 되돌려 주고 이혼할 수 있다. 원래 지참금 없이 결혼했다면 여성에게 합의금(귀족 여성이면 60셰켈, 평민이면 20셰켈)을 주어야 한다. 반대로 아내가 이혼을 원하는 경우, 아내가 집안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의 명예를 추락시킨 일이 있다면 남편은 한 푼도 안 주고 이혼할 수 있다. 심지어 남편은 다른 여성과 재혼하고 본부인을 이 집에서 노예로 일하게 할 수도 있다.

 

만일 기혼 여인이 다른 남성과 동침하다가 붙잡히면 어떻게 될까? 두 불륜 남녀를 묶어서 강에다 던진다. 다만 남편이 아내를 용서하기로 결정하면 두 사람 다 목숨을 구한다. 한편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주장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 여성은 신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선서한 다음 친정으로 돌아간다.

 

[35] ‘제우스 화신’ 숭배받던 소… 이젠 10억마리, 메탄 뿜는 가축 전락

인류 역사 초기부터 소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기원전 7000년 경부터 번성했던 신석기 시대의 중요한 유적지 차탈휘익(Çatalhöyük)에서는 소를 숭배한 흔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거대한 황소 신을 나타낸 벽화라든지(그림), 건물 내부 깊숙한 곳에 모셔둔 소뿔 같은 것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연구자들은 이 황소 신이 후일 지중해 여러 지역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아피스(Apis)나 그리스의 제우스 같은 황소 형상의 신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신들은 강력한 힘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최고 권좌의 신으로 모셔졌다. 여러 종교 의례에서 소고기를 먹는 것은 이 귀한 동물에 깃든 신성성을 나누어 가지는 상징이었다. 따라서 소수의 귀족 전사들만 벌건 육즙이 도는 소고기를 먹으면서 지배권을 과시할 수 있었다. 반대로 힌두 문화에서는 소가 너무 신성한 존재이므로 오히려 인간들이 함부로 먹지 못한다는 금기가 생겼다. 만일 실수로 신성한 암소를 죽이면 자신이 죽인 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외양간에 한 달 동안 갇혀서 암소들 뒤를 쫓아다니며 발굽에서 이는 먼지를 삼키는 처벌을 받는다.

▲해변에서 놀던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에게 제우스는 한눈에 반해 버린다. 아름다운 소의 모습으로 변신한 신(神)은 공주를 등에 태우고 바다를 헤엄쳐 건너 자신이 태어난 섬 크레타에 다다르고, 그 섬에서 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공주와의 사이에서 크레타의 왕 미노스를 낳았다. 소는 신석기 시대 때부터 최고 권위의 상징이었고, 이집트의 아피스나 그리스의 제우스 등이 황소 형상을 가졌다.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드 트로이의 1716년작 유화‘에우로페의 납치’, 미국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소장. /위키피디아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소고기는 신령한 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귀한 음식이었다. 대귀족이나 부유한 상층 부르주아들만 연중 신선한 고기를 먹었지, 도시의 서민들이나 시골의 농민들로서는 고기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비교적 풍요롭게 고기 맛을 보는 때는 겨울나기 준비를 하는 늦가을 잠깐 동안이다. 목초가 부족하기 때문에 종자 보존용으로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 가축들을 잡는 이 시기에 그나마 살코기와 내장 등을 먹고 남은 고기는 보존용 염장 음식을 만들었다.

 

일반 서민들까지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게 된 건 아메리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지에서 육류를 수입한 이후의 일이다.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에 소⋅돼지⋅말⋅양 등 구대륙 가축들이 들어와 엄청나게 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온 소는 스페인산 롱혼(Longhorn) 종이었는데, 이 소는 워낙 강인하고 튼튼해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다. 새로운 땅의 목초도 잘 맞고 무엇보다 소들을 잡아먹을 만한 대형 육식동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초지에서 소 떼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거의 야생으로 돌아간 영리한 소들은 60㎞ 떨어진 물 웅덩이를 감지할 수 있었고, 송아지들은 웬만한 높이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1700년경 남미의 팜파스 지역에는 이런 소들이 5000만 마리가 넘었다. 카우보이·가우초·바케이루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아메리카의 목동들은 말을 타고 엄청난 소 떼를 몰았다. 문제는 아무리 소가 많고 고기가 넘쳐도 대서양을 넘어 유럽에 판매할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가서야 냉동선과 냉장차, 기차 덕분에 아메리카의 싼 육류가 유럽으로 대량 들어올 수 있었다. 드디어 대다수 사람들이 맘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신석기인들이‘오로크스(멸종된 솟과의 거대 포유류)’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 소는 사냥 대상이자 동시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일종의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터키 남동부 아나톨리아 차탈회위크 신석기 주거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위키피디아

 

그렇지만 사람들은 조만간 싼값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고기 사이사이에 살짝 기름기가 낀 품질 좋은 고기를 원했다. 그런 고기를 얻으려면 일단 소들을 목장에 풀어놓아 목초로 사육하다가 적당한 때에 곡물을 먹여서 지방질이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남아도는 옥수수를 소에게 먹이는 방식으로 그와 같은 고품질 소고기를 생산했다.

 

오늘날 세계의 육류 소비량은 실로 엄청나게 늘어나는 중이다. 사람들은 부유해질수록 더 많은 고기와 유제품을 먹는다. 그렇지만 고기를 얻으려면 더 많은 식량을 가축에게 먹여야 한다. 1칼로리의 소고기를 얻으려면 6칼로리의 사료를 주어야 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10억 마리의 소를 키운다.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고품질 소고기와 유제품을 먹기 위해 소에게 사료를 먹이느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식량 사정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소를 비롯한 가축들의 대량 사육은 지구 환경 악화라는 새로운 문제도 일으키고 있다. 동물들이 메탄과 아산화질소 같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메탄 분자는 한 세기 동안 이산화탄소보다 28배, 아산화질소는 무려 265배 더 심한 온난화를 일으킨다고 한다. 매년 동물 사육에서 배출되는 메탄과 아산화질소는 70t의 이산화탄소에 해당한다.

▲고대 아테네에 세워졌던 것으로 전해지는 미노타우로스 석상의 로마 시대 복제품. 신화에 따르면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미궁 라비린토스를 짓고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뒀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소장. /Marsyas/위키피디아

 

소가 메탄을 많이 배출하는 이유는 독특한 소화기관 때문이다. 인간은 위가 하나지만 소는 배 속에 위를 4개(반추위·그물위·천엽·막창)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강력한 소화기관을 가진 덕분에 사람은 먹지 못하는 풀을 소화해서 살아갈 수 있다. 소가 뜯어먹은 풀은 일단 반추위에 저장했다가 다시 입으로 가져와 씹으면서 소화효소와 섞은 뒤 세 번째와 네 번째 위로 넘긴다. 이때 위 속의 박테리아가 장내 발효라고 불리는 과정을 통해 음식을 분해하고 발효시키는데, 여기에서 메탄이 발생한다. 이 메탄가스는 트림이나 방귀의 형태로 체외 배출한다. 10억 마리의 소들이 내뿜는 트림과 방귀 속 메탄은 지구 환경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 방안 중 하나로 ‘방귀세’를 만들려고 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여기에다가 소들이 내놓는 똥 또한 문제다. 똥은 분해되면서 아산화질소와 메탄, 유황, 암모니아를 배출한다. 한때 신의 대리 형상으로 여겼던 신성한 소는 어느 새 똥·트림·방귀로 지구 환경을 악화시키는 불결한 존재로 내몰리게 되었다.

 

많아도 너무 많은 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극단적인 방안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 가축 사육을 중단하면 많은 문제가 풀린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사람들이 안심·등심·갈비 같은 걸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다른 대안은 대체 고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최신 저서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에서 빌 게이츠는 집안 전통이라는 치즈 버거를 포기하고 대신 식물성 고기를 먹는다고 밝혔다. 또 다른 대안은 실험실에서 고기를 만드는 것이다. ‘배양육(cultured meat)’ ‘세포 기반 고기(cell-based meat)’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 고기는 줄기세포를 배양한 뒤 근육 조직으로 분화하도록 유도하는데, 이 근육 조직들이 뭉쳐서 우리가 먹는 단백질 조직이 된다. 다만 이 방식은 값이 너무 높아서 현실성이 없다. 기술이 더 발전하여 단가가 충분히 내려가면 시장에 나올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 해도 미국의 소 목축업자 단체들의 강력한 로비에 막힐 가능성이 있다. 현재에도 이런 인공 고기를 마트에서 ‘고기’로 분류하는 것을 막는 곳이 17주에 달한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필름 ‘워낭소리’에서 보듯 40년 세월 주인과 소가 고락을 같이하다가 죽은 다음에도 서로 가까운 곳에 묻히는 아름다운 인간-동물 관계는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다. 지구의 안전을 위해 인간과 동물 간 건강한 균형을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영국의 쇠고기]

2005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정치 문제로 영국과 갈등을 겪을 때 “요리를 못하는 나라 사람들을 신뢰할 수는 없다”고 말해 파란을 일으켰다. 발끈한 영국 신문은 다음 날 아침 1면에 영국의 ‘맛집 레스토랑(celebrity chefs)’ 목록을 실었다. 그런데 그 목록을 보면 프렌치·이탈리안 레스토랑이 하나 가득이다. 사실 영국은 오랫동안 자타가 공인하는 ‘요리 후진국’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과도한 쾌락 추구를 자제하는 청교도적 분위기 때문이다. 너무 맛있는 음식을 탐하면 천박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영국인들은 실로 ‘참담한 물건’을 먹었다. 그렇지만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음식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소고기를 많이 먹는 데다가 ‘인위적이지 않고 정직한’ 요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1713년 영국의 문인 헨리 필딩은 세태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영국인들은 훌륭한 소고기 구이를 먹기 때문에 영혼이 고양되고 피가 풍요롭다. 군인들은 용맹하고 궁정인들은 사려 깊다... 그런데 경솔한 프랑스인들에게서 요리와 춤을 배운 다음 모두 헛된 자만심만 늘었다.”

 

[36] 자발적 매춘? 일본은 점령지서 네덜란드 여성들도 끌고갔다

강제동원의 명백한 증거, 1944년 스마랑 위안소 

▲영국 화가 제임스 샌트가 1850년 그린 유화 ‘용기, 근심 그리고 절망-전투를 지켜보는 여인들’. 앞쪽 칼을 든 여인이 전투 상황을 주시하면서 다른 여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여성의 인권은 유린되기 쉽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4년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뒤 ‘적성국 여성 수용소’의 유럽 여성들도 소위 ‘위안소’로 끌고 갔다. 이 추악한 전쟁 범죄가 폭로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네덜란드인 피해자 얀 러프 오헤른(1923~2019) 여사가 침묵을 깨고 용기를 내 증언해주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

 

태평양전쟁 당시 소위 ‘위안부’로 징발된 희생자 중에는 한국과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 여성들 외에 유럽 여성들도 있었다.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일본에 점령당한 이후 위안부로 끌려간 네덜란드 여성들이 그런 사례다. 이 경우 종전 후 전범 재판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사 보고서가 후일 재발견되었고, 여기에 더해 희생자 중 한 명인 얀 러프-오헤른(Jan Ruff-O’Herne, 1923-2019) 여사가 50년 만에 침묵을 깨고 용기를 내어 증언을 한 덕분에 당시 사정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1944년 2월 일본군 당국자와 인도네시아 경찰이 자바 중부 지역에 있는 ‘적성국 여성 수용소’들을 방문하여 18~28세 여성들의 목록을 요구했다. 이들은 며칠 후 다시 나타나 지명된 여성들에게 한 시간 안에 짐을 싸서 차에 타라고 명령했다. 이 여성들에게는 외부에서 노역한다고만 말했을 뿐 위안부 이야기는 숨기고 하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어머니와 가족들이 울부짖으며 쫓아가려 하자 군인들이 공중에 총을 쏘며 제지했다.

 

검진하러 온 일본 의사가 강간

/네덜란드 ‘위안부’ 8명이 쓴 수기집 ‘짓밟힌 꽃’ 표지.

 

징발된 여성들은 스마랑(Semarang) 시 외곽에 있는 식민지 관리소 건물로 끌려가서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다. 당시 이들은 서명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계약서가 일본어로 쓰여 있어서 이해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계약서 내용은 성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일본 의사가 찾아와 검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여성은 의사에게 강간당했다고 증언했다(이 의사는 전후에 자살했다). 곧 이들은 세이운소, 후타바소, 히노마루, 쇼코클럽 등 4곳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본격적으로 영업이 시작되자 군인과 민간인 ‘고객들’은 예약 후 이곳을 방문했는데, 민간인은 3길더, 군인은 1.5길더를 지불했으며, 이 액수 중 30%가 위안부 여성에게 돌아갔다. 위안부 여성은 이 돈으로 음식을 사는 외에, 스스로 돈을 지불하는 대신 쉬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오헤른의 경우 언니가 스마랑 시내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이 병원 의사인 지켈(Dr. Zikel)씨와 그의 일본인 친구 아오야기씨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예약을 한 후 위안소를 방문하지 않는 방식으로 동생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방법도 한계가 있어서 결국 오헤른은 성적 학대를 피할 수 없었다. 다른 여성 중에도 이처럼 외부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조금 나은 생활을 하는 수가 있었다. 반면 일부 나이 많은 여성들은 술 취한 사람 혹은 성병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서 힘들게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스마랑의 위안소들은 개소 후 두 달 만에 급히 폐쇄되었다. 군인들이 찾아와서 이곳 여성들에게 강제로 끌려왔는지 자의로 왔는지를 묻고 갔다는 증언을 보면 아마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군 상부에서 급히 폐쇄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36명의 네덜란드 여성 위안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전황의 변화에 따라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1945년 10월, 네덜란드 정부가 전범 재판을 열고 이에 필요한 증거 조사 작업을 벌였다. 여성들을 강제 동원한 일본군 책임자들은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9년 2월, 바타비아(자카르타) 임시군사재판소에서 13명의 피고 가운데 책임자 오카다 게이지(岡田慶治) 육군 소좌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다른 피고들은 2~20년 형을 선고받았다. 후일 이 보고서의 존재를 확인한 네덜란드 정부가 연구를 진행한 결과, 위안소에 200~300명의 네덜란드 여성이 있었는데 이 중 최소 65명이 명백하게 강제 연행되어 성적 행위를 강요받았다고 확인했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강제 연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예외적 사례로서 의미가 깊다.

 

학술적으로 엄밀한 연구 진행해야

그런데 이 조사보고서의 내용과 오헤른의 증언을 비교해 보면 실상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헤른은 지켈 박사와 아오야기씨가 상당히 힘들게 노력하여 도움을 준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자주 보이는 일이지만, 위안소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았다든지 혹은 외부인, 특히 일본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내용은 웬만하면 기술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기 십상이고, 비난을 초래할지 모르는 내용을 변형시키거나 없애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추측건대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일부 바뀌는 것 또한 이런 현상일 수 있다.

 

여기에 연구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희생자들을 비난하고 몰아붙일 일은 아니다. 이런 사정을 충분히 감안하여 이분들의 존엄을 지켜주면서 최대한 학술적으로 엄밀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희생자들의 진솔한 증언을 최대한 폭넓게 수집했어야 마땅하다. 안타깝지만 이미 많은 분이 유명을 달리하여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클로드 란츠만 사례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1년 동안 전 세계를 돌며 수많은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관련자들을 만나서 총 350시간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를 편집하여 9시간 30분짜리 작품인 ‘쇼아(shoah)’(1985)를 내놓았다. 이 작품에 대한 논란도 많으나, 고난의 기억을 최대한 지켜내려는 지극한 노력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유형의 희생자·가해자·방조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들이 겪어야 했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 앞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램지어, 사료 검토없이 편향적 결론

램지어 교수의 경우 사료에 대한 정밀한 검토 없이 편향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전통적 관점과 수정주의적 관점 사이에 논쟁이 진행 중이고, 그 각각의 주장을 지지하는 많은 자료가 있다. 램지어 교수는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출처도 불확실한 사례 한두 건을 인용한 다음 이 복잡하고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깔끔하게 이론적 정리를 하겠다고 나선다.

 

그 시대 상황에서 친족들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혹은 빚더미에 몰려 일본군을 쫓아간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하자. 그런 딱한 사정에 몰린 사람들을 데려다가 비인간적인 성노예 제도를 운영한 데 대해 면죄부를 주려는 듯, 희생자들을 ‘자발적 매춘부’라고 지칭하는 것은 학문 연구의 기초를 따지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다만 우리 또한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냉철한 학술적 대응이 필요해 보인다.

 

“일본 군인들이 들어와… 난 그저 끌려온 사냥감”

한국 보고 용기낸 오헤른의 증언

 

오헤른씨는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서 1992년 도쿄에서 있었던 일본전쟁범죄국제공청회, 그리고 2007년 미국 의회에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했다. 1994년 출판한 ’50년의 침묵'이라는 비망록에는 그녀가 겪었던 지옥 같은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 소위 ‘위안부’로 징발된 피해자였던 네덜란드인 얀 루프 오헤른 여사는 2015년 본지 인터뷰에서 “100명도 넘는 여성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고, 함께 있던 다른 네덜란드 소녀는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 증언했다. /김형원 기자

 

“일본 간수가 10명의 소녀를 선발했다. 나는 그 열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통역을 통해 짐을 싸서 수용소 정문으로 가서 트럭에 타라고 시켰다. 엄마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의 인사를 해야 했다. 엄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단지 눈을 바라보다가 서로 껴안았다... 위안소에서 기다리는 동안 공포가 온몸을 감쌌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공포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위안소가 문을 연 날, 마침내 한 일본군 장교를 맞아들였다. 나는 그 사람의 정강이를 발로 찼지만, 그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는 나를 침실로 끌고 가서 문을 닫았다. 나는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섞어서 내 의지에 반해 여기 끌려온 것이라고 사정했다. 나는 도망가지 못하는 사냥감처럼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나를 강간하며 때로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때로 심하게 때렸다.”

 

적어도 이 사례를 보면 램지어 교수가 말하듯 여성들이 ‘위험과 금전적 보상을 비교한 후 스스로 매춘 계약을 맺은’ 것 같지도 않고, ‘경매시장의 특성과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연구한 게임이론’을 가져와서 설명할 일도 아닌 게 분명하다.

 

 [37] 강대국의 핵실험 그 끔찍한 후유증

지상낙원 섬을 불지옥 만든 핵실험… 21세기엔 북한만 자행

1954년 3월 1일, 태평양 중서부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環礁) 인근 주민들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뜬 것을 보고 놀랐다. ‘캐슬 브라보(Castle Bravo)’ 핵실험으로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천 배 규모인 15메가톤(TNT 1500만톤의 폭발력)의 수소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날 실험은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다. 원래 과학자들이 기대했던 최대 산출력은 6.5메가톤이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추가적인 핵반응으로 두 배 이상으로 커진 것이다. 그 결과, 엄청난 환경 재앙이 발생했다. 이 지역 환초 중 하나는 완전히 증발해 버렸고, 버섯구름은 160km 이상 날아가 바다로 떨어졌다. 수백만 톤의 오염된 모래와 산호 부스러기가 주변 섬에 5cm 두께로 쌓였다. 미군 당국은 핵실험 사흘 후에야 주민들을 소개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치명적인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주변 해역에 있던 일본 참치잡이 어선 제5 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 선원 23명 또한 ‘죽음의 재’(낙진)를 뒤집어쓰는 큰 피해를 보았다. 캐슬 브라보는 미국이 1946~1958년에 비키니 환초에서 수행한 대규모 핵실험 67건 중 한 건에 불과하다.

▲1946년 태평양 비키니 환초 美핵실험 - 1946년 7월 25일 태평양 중서부 미크로네시아의 비키니 환초에서 미국이 진행한 핵실험으로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고 버섯구름이 퍼져나가는 모습. 미군이 현장에서 촬영한 흑백 원본에 바다와 나무 등의 색을 입힌 사진이다. 해저 27m에서 핵탄두를 폭발시켜,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바닷물이 퍼져나가며 광범위하고 심각한 오염을 일으켰다. 미군은 이해 7월 1일과 25일 두 차례 진행한 이때의 핵실험을 작전명‘크로스로드’라 불렀다. 직전 해인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 뒤 진행한 첫 핵실험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후 1958년까지 비키니 환초에서 대규모 핵실험을 67차례 진행했다. /위키피디아


태평양의 지상낙원이 핵실험 무대가 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4년 일본이 철수한 이후 마셜제도는 미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이후 핵실험 장소를 찾던 미국은 이 지역의 비키니 환초가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다. 군 당국은 주민들에게 ‘인류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모든 세계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하는 일이니 ‘일시적으로’ 자리를 비워달라고 말했다. 쫓겨난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여러 섬을 전전하다가 1974년 고향에 돌아갔지만, 이미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생선·게·코코넛 등을 먹은 후 심각한 증상에 시달렸다. 이 사람들은 1978년 다시 주변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1958년 미국이 마셜제도에서 핵실험을 중단했으나, 곧 영국과 프랑스가 태평양 지역에 뛰어들었다. 샤를 드골 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에 진력하던 프랑스는 1960년 당시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사막 지대에서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런데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자 새 핵실험 장소를 찾다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모루로아(Moruroa) 환초와 팡가타우파(Fangataufa) 환초 지대에서 핵실험을 계속했다. 특히 40번 이상 대기권 핵실험을 한 결과, 방사성 물질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 시대는 태평양 지역에 독립 국가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공식적인 반대가 쉽지 않았다. 1970년에 가서야 피지와 통가가 이의를 제기했고, 남태평양 포럼(South Pacific Forum, 남태평양 국가들의 정상회의)이 프랑스 정부에 핵실험 중단을 요구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가두시위가 빈발하고, 노동조합은 프랑스 선박의 화물 하역을 거부했다.

▲2018년 북한 풍계리 2018년 5월 24일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위한 폭파 작업 당시 갱도 앞을 지키고 있는 북한 군인. 북한은 21세기의 유일한 핵실험 국가다. /사진공동취재단

 

1975년, 뉴질랜드는 ‘핵 없는 남태평양 구역(South Pacific Nuclear Free Zone)’ 설치를 제안했다. 이후 태평양 도서 국가 주민들의 반전·반핵 운동이 강화되었다. 1983년 바누아투의 포트빌라(Port Vila) 회의에서 “태평양 주민들에 대한 억압, 착취, 예속을 즉각 중단하라”는 인민헌장이 발표되었다. 마셜제도에서는 눈과 팔, 머리가 없는 소위 ‘해파리 아기(Jellyfish Babies)’ 문제를 제기하여 세계 여성 운동 조직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그럼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핵실험을 고집하던 프랑스 정부가 결정적으로 흔들린 계기는 1985년 그린피스 워리어(Greenpeace Warrior)호 침몰 사건이다. 반핵 활동가들이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항구에서 선박들을 동원하여 프랑스의 핵실험 반대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7월 10일, 프랑스 정보부 요원 두 명이 그린피스 워리어호에 선체 부착 폭탄 두 개를 설치하여 배를 파손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진사 페르난두 페레이라가 사망했다.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곧 위조 여권을 지닌 프랑스 정보부원이 체포되면서 진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핵실험을 지속하려 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프랑스 포도주를 길거리에 쏟아버리는 식의 항의가 거세게 이어졌다. 마침내 그해 8월 남태평양비핵지대조약(South Pacific Nuclear Free Zone Treaty)이 제정되었다(일본의 방사성 핵폐기물 해양 투하 계획도 조약 제정을 부추긴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미국·영국·프랑스는 1996년까지 이 조약의 모든 의정서에 서명했다.

 

강대국들의 핵실험은 태평양 지역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을까?

▲1971년 모로루아 환초 佛핵실험 - 1971년 폴리네시아 모루로아 환초에서 벌인 프랑스의 핵실험으로 버섯구름이 솟아오르는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최근 프랑스 탐사 보도 매체 디스클로즈는 “프랑스 정부가 폴리네시아에서 1966년부터 1996년까지 핵실험을 193차례 하면서 환경·보건에 끼친 피해를 축소·은폐했다”고 보도했다. 2013년에 기밀 해제된 약 2000페이지의 프랑스 국방부 문건에 대해 영국의 자료 해석 기업과 미국 프린스턴대 연구진의 협력 연구로 2년 동안 분석한 결과다. 특히 오염 가능성이 가장 큰 6번의 핵실험 과정에서 해당 지역 주민들이 입은 신체적 피해를 재조사한 결과, 2006년 프랑스 핵에너지위원회(CEA)의 조사 결과보다 최소 2배, 많게는 10배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그런 차이가 났을까? 예컨대 1966년 모루로아에서 시행한 암호명 알데바랑(Aldébaran) 대기권 핵실험 피해 조사를 할 때 CEA는 주민들이 강물만 마시는 것으로 가정하고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빗물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1974년 시행된 암호명 ‘켄타우로스(Centaure)’ 핵실험 사례를 재조사한 결과는 방사능 피해를 입은 사람이 11만명으로, 다시 말해 거의 모든 주민이 해당하고, 그 가운데 핵실험에 따른 보상이 이뤄지는 국제적 기준보다 5배 이상 많은 피폭량이 확인된 주민만 1만1000명에 달한다는 점을 밝혔다. 당시 주민들에게 사전 예고를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핵실험을 했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그동안 프랑스 정부가 피해 보상에 나서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6년 방사성 낙진으로 인한 폴리네시아 주민들의 피해를 인정했고, 2009년부터 보상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실제 보상받은 사람은 63명에 불과하다. 지금도 폴리네시아 인근 바다에는 거대한 양의 핵폐기물이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더 이상의 핵 위험을 줄이려 1996년 UN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omprehensive Nuclear Test Ban Treaty, CTBT)을 제정했다. 미국·중국·러시아·이스라엘·이집트는 이 조약에 서명했으나 비준을 마치지 못했고, 북한의 경우는 서명조차 하지 않아 국제적 압력을 받고 있다. 북한은 21세기의 유일한 핵실험 국가다. 가공할 위력의 핵실험이 어느 정도의 환경 재앙을 가져오고 있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우리 자신도 여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는 점이다.

 

<차르 봄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핵폭탄은 1961년 10월 31일에 구소련이 북극해의 노바야제믈랴 제도 상공에서 터뜨린 차르 봄바(Tsar Bomba, ‘황제 폭탄’, 공식 이름은 AN602)로 알려져 있다. 60년 만에 비밀 해제된 관련 자료 중 최근 핵실험 영상이 일반에 공개되어 주목을 끌었다. 이 수소폭탄의 산출력은 50메가톤으로 히로시마 원자탄의 3300배에 달한다. 폭발 당시 만들어진 폭 40km의 버섯구름은 67km 상공까지 치솟았고, 섬광은 1000km 떨어진 노르웨이·그린란드·알래스카에서도 관찰되었다. 이 수소폭탄을 비행기에서 지상으로 바로 투하하면 조종사가 폭발을 피할 시간 여유가 없어서 목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낙하산을 이용해 속도를 늦추어 하강시킨 다음 4km 상공에서 폭발시켰다. 폭발 지점 반경 40km 이내가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강도 5.0의 지진이 발생했으며, 지진파가 지구를 세 번 돌았다. 그나마 폭발 강도를 반으로 조정해서 그렇지, 원래 설계 그대로 핵융합을 일으키면 산출력을 100메가톤까지 키울 수도 있다. 이 정도면 인류 전멸의 길로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인류는 이 강력한 힘을 스스로 통제할 지혜를 가지고 있는 걸까?

 

[38] 운하 사고로 본수에즈 152년史

‘세계의 급소’ 수에즈운하… 이집트, 중동戰때 화물선 띄워 6년 봉쇄

1869년 개통한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항로다.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든지 아니면 수에즈 지협(地峽)의 육로를 통과해야 했다. 예컨대 런던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선박으로 이동한 다음 이곳에서 낙타 수천 마리로 승객과 화물, 물과 석탄 등을 홍해 연안까지 옮기고 이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봄베이로 이동하는 식이다. 그나마 철도를 부설한 후 육로 운송이 훨씬 개선됐다. 영국은 이 방식 그대로 유지하면 경제·군사적 우위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최단 항로가 열렸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다. 이집트인 12만명 이상이 희생됐고, 강제 동원된 농민들의 봉기가 계속됐으며, 엄청난 공사비로 이집트 정부는 파산 직전에 몰렸다. 프랑스는 운하가 열리면 지중해의 마르세유가 세계 경제의 허브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증기선 발달과 운하 개통의 시너지로 세계 해상 패권을 장악한 영국이었다. 1869년 11월 17일 사이드 항구에서 열린 수에즈 운하 개통식을 그린 작자 미상의 그림.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때 프랑스가 이집트에 접근해 운하 건설을 제안했다. 1854년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친분이 있던 태수 사이드(Said Pasha)로부터 운하 개통 후 순이익의 15%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운하 건설 허가권과 99년간의 조차권을 획득했다. 곧 자본금 2억프랑의 수에즈운하회사를 설립하고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회사가 발행한 주식 40만 주 가운데 17만7642주는 사이드, 20만7000주는 프랑스인 투자자들, 나머지는 명목상 이집트의 상위 군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차지했다.

 

1859년 4월 착공한 공사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네코 운하 공사 때와 비슷하게 12만 명 이상의 이집트인이 희생되었다. 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이 때문에 강제 동원된 농민들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엄청난 공사비는 이집트 정부를 거의 파산 상태로 몰아넣었다. 원래 계획했던 시간의 두 배인 11년의 공사 끝에 1869년에 가서야 지중해 측 포트사이드(Port Said, 태수 사이드의 이름을 따왔다)와 홍해 측 수에즈 사이 162.5㎞를 수로로 연결했다. 개통 당시에는 하상 부분의 폭이 22미터, 수면 부분의 폭은 60~90미터, 깊이 6미터에 불과했고. 운하 통과 시간은 49시간 걸렸다.

 

프랑스 엔지니어, 이집트의 자금과 인력을 들여 건설했지만 완공 후 운하로 인한 이익은 영국에 돌아갔다. 수에즈운하가 열리면 지중해에 위치한 마르세유가 세계 경제의 허브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 개통 첫해부터 통과 선박 60%가 영국 선박이었다. 차이는 더 벌어져 20년 후 영국 선박이 75%, 프랑스는 8%에 불과했다. 런던~봄베이 항로는 5300㎞나 줄었다.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범선 항해는 석 달이 걸리지만 운하를 이용하는 증기선은 단 3주 만에 갈 수 있었다. 증기선의 발전과 운하 개통의 시너지로 영국이 세계의 해상 패권을 잡았다.

/수에즈 운하

 

영국은 개통 6년 만에 사실상 운하를 지배할 기회를 얻었다. 1875년, 운하회사 대주주인 태수 이스마일(Isma’il Pasha)이 이집트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유 주식 17만6602주를 내놓았는데, 이는 전체 주식의 44%에 해당했다.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르고 엄청난 피해를 본 프랑스로서는 이 주식을 사들일 여유가 없었다. 영국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식 매집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유대인 은행가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에게 397만6582파운드를 빌려 주식을 구매했다. 엄청난 거액을 빌릴 때 담보가 무엇이냐고 묻자 ‘영국 정부요’ 하고 답했다는 고사가 유명하지만, 과연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명확하다. 오히려 로스차일드가 총리에게 먼저 주식 매수 관련 정보를 제공했고, 대출액의 2.5%에 달하는 커미션에다가 연 5% 이자를 받아서 정말로 짭짤한 이익을 챙겼다. 아무런 문서나 담보 없이 두 사람 간 신사협정으로만 이루어졌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많은 거래여서 후일 정치적 비판에 직면했지만, 그런데도 이 파격적 거래 덕분에 영국은 운하의 운영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영국이 더욱 확고하게 운하를 지배하게 된 계기는 1882년 이집트에서 일어난 쿠데타와 그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사태였다. 영국은 합법적 질서를 회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출병해서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쉽게 진압에 성공했다. 이후 운하 지역 정세가 안정을 찾은 뒤에도 영국 점령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영국은 매년 자국군의 점령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결국 20세기 들어서도 비공식적으로 이집트를 지배했다. 1888년 수에즈운하 국제협약을 통해 운하는 모든 국가들에 열려있는 국제 수로라고 선언했지만,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선박의 통과를 거부했다.

 

영국의 지배는 1952년에 종식되었다. 이해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1956년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그대로 두면 중동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유조선을 이집트가 통제해서 경제가 마비될 우려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함께 군사작전을 펴서 ‘평화유지군’을 상륙시켜 운하의 북부 지대를 점령했다.

▲말레이시아를 출발해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가던 파나마 선적 컨테이너선‘에버기븐’이 지난달 23일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한 모습. 일본 회사가 소유하고 대만 해운사가 운영하던 길이 399m, 폭 58m의 거대한 배가 대각선으로 수로를 가로막으며 좌초하면서, 물류 지연으로 천문학적 액수의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달 29일 촬영된 위성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그러나 세상은 1882년과는 달라져 있었다. 이집트는 원유 수송을 막았고, 소련이 이집트 편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헝가리에서 소비에트 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소련군 탱크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하던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 시점에 재선에 성공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칫 세계적인 위기가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몰래 공모하여 중동 지역에서 사고를 쳤다는 식으로 파악했다. ‘극대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앤서니 이든 영국 수상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경제적 압박을 가해서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프랑스는 격분했으나 그렇다고 혼자서 버틸 수는 없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 글로벌 게임을 주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군의 철수 이후 나세르는 운하 통제권을 다시 장악했고, 범아랍주의(Pan-Arabism) 운동의 지도자로 각광받았다. 운하 입구에 있던 레셉스의 동상은 흥분한 이집트 군중이 파괴했다. 그 이후에도 유사한 사태가 재발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갈등이 다시 폭발한 1967년, 이집트는 15척의 화물선(‘yellow fleet’)을 운하에 세워 두어 통행을 막았다. 운하 불통 사태는 1973년에 가서야 풀렸다.

 

수에즈 지역은 역사의 ‘급소’라 할 수 있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길목인 이곳은 고대 이집트와 페니키아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주요 세력들이 부딪치는 지점이다. 하루 50척의 거선(巨船)들이 오가며 세계 상품 교역량의 12%를 책임지는 수에즈운하는 여전히 세계의 핵심 요충지다. 평소 잘 느끼지 못했지만 배 한 척의 사고로 통행이 막히자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지점인지 통감하고 있다.

 

[수에즈 운하 원조는 파라오 때의 네코 운하]

수에즈운하의 원조는 고대 이집트의 네코 운하다. 파라오 네코 2세(재위 기원전 610-595)는 이집트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계획했다. 다만 이 운하는 두 바다를 직접 연결하는 게 아니라 홍해와 나일강의 한 지류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수로의 길이는 뱃길로 4일 걸리는 거리이고, 폭은 삼단 노선 2척이 나란히 노를 저어 항해할 정도로 파냈다. 수로의 물은 나일강에서 수로로 흘러든다. 물길은 부바스티스 시의 약간 남쪽에서 시작하여 파투모스 옆을 지나 홍해로 흘러나간다... 네코 왕 치세에 이집트인 12만명이 수로 공사를 하다가 사망했다. 그런데 네코는 공사 중에 다음과 같은 신탁의 제지를 받고 작업을 중단했다. 즉 그가 후대의 바르바로이(‘이방인’)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네코는 수로 작업을 중단했다.”(헤로도토스)

 

네코 2세는 기껏 외국인에게만 좋은 일을 한다는 신탁을 받고 운하 건설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후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가 이 운하를 완공했다. 그렇지만 토사가 쌓이거나 나일강으로 바닷물이 밀려드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물길이 자주 막혔다. 기원전 3세기 초, 알렉산더 대왕 사후 권력을 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 운하 바닥을 준설하고 확장했으나 이후 다시 물길이 막혔다. 로마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기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이처럼 뚫렸다 막혔다를 반복하다가 어느 시대 이후엔가 토사가 쌓여 완전히 폐쇄되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오늘날의 운하가 개통되었다.

 

[39] 귀족 교양수업이 해외투어 시초… 여행은 병 고치는 약이었다

여행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코로나

코로나19의 발병으로 세상이 얼어붙었다.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던 관광객 인파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현대 세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여행의 보편화일 터인데, 인류는 돌연 먼 옛날로 돌아간 셈이다.

▲영국 화가 에이브러햄 솔로몬의 1862년 작품‘비아리츠에서의 출발’. 요양차 프랑스 비아리츠에 머물던 솔로몬이 공공 합승 마차에 타려던 승객들의 모습을 그렸다. 떠날 준비를 하는 수녀부터 승객들에게 물건을 파는 행상까지 이 그림에는 여행을 준비하는 프랑스인들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지난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갔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조사 결과를 보면 80%의 사람은 자신의 도(départment)를 떠난 적이 없고, 60%의 사람은 태어난 면(commune)에 머물고 있다. 결혼도 대개 고향 사람과 한다. 피레네 산지의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 마을에는 여성이 57명인데 4명 빼고는 모두 10㎞ 이내에서 신랑을 찾았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지라 할 수 있는 도르도뉴 지방의 경우 거의 모든 주민은 자전거가 나오기 전에는 15마일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여행은 극소수 사람에게나 가능한 특권이었다. 17~18세기에 상류층 자제들이 교양을 쌓으려는 목적으로 정해진 코스를 다녀오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 유럽 대륙 순회 여행)가 대표적이다. 여행객을 가리키는 tourist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특히 영국 귀족 자제들은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 나폴리 등지를 찾아가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문화를 직접 경험하며 식견을 넓혔다.

 

일반 여행객도 조금씩 늘었는데, 이 또한 영국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대개 건강을 위해서다. 처음에는 주로 우울증 치료에 좋다는 이유를 댔지만, 일반적인 병에 대해서도 의사들은 여행을 권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여행은 거의 만병통치의 치료술로 여겼다. 당시의 의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질병은 나쁜 물과 공기가 원인이다. 물과 공기가 오랫동안 정체 상태로 있으면 부패하여 장기(瘴氣, miasma,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나오는 나쁜 기운)를 발산한다. 이렇게 해서 생긴 병은 공기가 바뀌면 나으므로,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가면 건강을 되찾는다. 게다가 이동 중에 마차의 요동으로 몸이 흔들리고 떨리면 신체 조직이 강하게 단련되어 건강에 좋다는 그럴듯한 설명도 덧붙였다.

/예전 프랑스 철도회사의 포스터. /위키피디아

 

장기 이론이 쇠퇴하고 19세기 후반에 파스퇴르의 세균 이론이 나온 후에도 공기가 바뀌면 몸에 좋다는 이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파스퇴르 자신이 고도가 높아지면 세균이 약해진다고 주장했다. 해발 1700m 이상 올라가면 세균 군체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산지 휴양소, 더불어 온천 휴양소와 해변 휴양소가 늘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행의 즐거움 자체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꼭 건강 목적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겨울을 보내거나 산속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일이 늘었다.

 

여행객의 증가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관광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상층 인사들은 관광객이 너무 늘어 풍경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1830년대에 조르주 상드는 관광객 인파가 이 시대의 골칫거리이며, 세상의 모든 풍경을 망쳐놓고 명상적인 산책의 즐거움을 방해한다고 불평을 토로했다. 19세기 중엽에 관광 열차(Excursion train, trains de plaisir)가 나오고 대도시 교외의 피크닉 인파도 크게 늘었다. ‘관광 산업’이라는 용어가 1860년대에 등장했다. 철도역과 호텔 같은 관광 인프라가 증가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자연이 더 이상 옛날처럼 순수하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지나친 관광이 자연의 본래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을 막자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1907년 프랑스에서 결성된 엘리트 여행자들 모임인 프랑스 여행 클럽(Touring Club de France)은 자연·문화 파괴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강연을 했다. 1909년에는 파리에서 최초로 경관 보호를 위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국립공원이나 보호 구역 설정으로 귀결되었다. 미국에서는 일찍이 1872년에 옐로스톤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곧이어 유럽에서도 국가 혹은 지방 차원에서 보호 구역이 설정되기 시작했다. 자연을 보호하며 자연을 즐기는 방식으로 각광받은 것이 캠핑이다. 1901년 런던에서 처음 캠핑 클럽이 형성되었다. 이 클럽에 참여하는 엘리트 인사들은 돈을 아끼려는 목적이 아니라 넘쳐 나는 인파를 피해 오붓하게 자연을 즐긴다는 목적으로 캠핑을 선호했다.

/영국 화가 캐서린 리드의 1750년 작품‘로마의 영국 신사들’. /위키피디아

 

세계적인 차원에서 관광이 극적으로 증가한 것은 20세기 후반부터다. 유명 관광지는 몸살을 앓았다. 소위 ‘관광 1세대’는 떠들썩하게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인들은 빠른 속도로 와서 사진 찍고 다시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어서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등장했다. 이들은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한 줄로 질서정연하게, 남에게 폐 안 끼치며, 효율적으로 움직였는데, 루브르박물관 관람에 고작 한 시간만 할애한다는 소식에 파리지앵들이 기겁했다. 다음에 한국인 배낭여행객들이 체력을 앞세워 ‘유럽 15국 돌파’ 하는 식으로 뛰어다녔고, 그다음에 중국 관광객들의 인해전술이 세상을 평정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머리통을 뒤에서 지그시 밀쳐버리고 사진을 찍던 중국인 아주머니의 억센 손길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 많은 관광객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흉측하게 만든다는 반성으로 2018년 플뤼그스캄(Flygskam, 스웨덴어로 ‘비행기 여행의 수치’라는 뜻)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휴가 여행의 증가 그리고 항공 산업의 발전 덕분에 매년 관광객 수억 명이 수천㎞나 비행기로 이동하며 여행을 즐긴다. 그런 행위가 세계의 자연을 망치고 사람들의 삶을 어지럽힌다. 어떻게든 이 인간 메뚜기 떼를 줄이면 좋겠지만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걸 인위적으로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그런데 2020년 팬데믹이 돌연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비행기 여행객 수가 95%나 줄었다. 베네치아의 운하 물이 맑아졌고, 뿌연 공기 속에 가려져 있던 히말라야산이 다시 보이고, 아이슬란드 하천에 물고기가 늘었다고 한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져도 좋은 일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인 모양이다.

 

팬데믹이 지나가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직은 예상할 수 없다. 기다렸다는 듯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날지, 혹은 일부 전문가가 예견하듯 당분간 관광 산업의 불황이 이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차분하게 지내야 하는 이때, 앞으로 다시 여행이 자유롭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자연과 문화에 덜 해로운 방식의 여행이 어떠해야 하는지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여행의 괴로움>

여행이 늘 즐거운 건 아니다. 18~19세기에 프랑스 여행을 하던 영국인들은 프랑스 숙소의 위생 수준에 충격받았다. 벽에는 새카만 더께가 앉아 있고, 부엌에서는 개가 동물의 내장을 뜯어먹고 있었다. 리옹 근처 여관에서 괄괄한 성격의 한 여행자는 조금 전에 개에게 먹이를 주던 그릇에 밥을 내오자 여직원의 머리 위에 쏟아버렸다. 여관방에서 하룻밤에 이 48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입에 안 맞는 음식도 괴로운 일이다. 그날 구운 부드러운 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툴루즈 지방에서처럼 일주일 치 빵을 한 번에 굽는 것은 약과다. 알프스 산지에서는 1년 치, 심지어는 2~3년 치를 굽고는 훈제하거나 햇볕에 말렸다. 돌처럼 단단한 이 빵은 운반과 보존에는 좋지만, 먹기 위해서는 망치로 깨서 5번 삶아야 한다. 주민들은 쐐기풀(nettle) 수프와 함께 매일 먹지만, 많은 관광객은 시골 빵을 먹는 생각에 몸서리치며 자기 비스킷을 가지고 갔다. 피레네 지방의 곰 고기 스테이크 같은 별미 음식도 있으나, 부르고뉴의 여우 고기, 모르방 지방의 다람쥐 고기, 알프스 지방의 마멋(다람쥣과 동물) 고기는 괴이한 냄새와 맛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travel(여행)의 어원은 travail인데, 노동이나 힘든 고역을 뜻한다.

 

 [40] 비트코인도 울고갈 튤립 광기의 전말

투기광풍 원조는 17세기 튤립… 그때도 서민들이 ‘영끌’ 매수

튤립은 오늘날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꽃이 되었다. 4월이 되면 수백만 송이의 튤립이 피어나는 쾨켄호프(Keukenhof) 공원은 천국의 정원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한때 이 순수한 꽃들마저 비트코인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투기 대상이 된 적도 있다.

▲네덜란드 정물화가 한스 불롱히에르의 그림 '꽃이 있는 정물'(1639).흰 꽃잎에 붉은 무늬가 있는 튤립이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로 5500길더였다는 기록도 있다. 미 시카고대에 따르면 5500길더는 현재 가치로 환산할때 약 17만8200달러(약2억원)/위키피디아

 

톈산산맥의 야생초였던 튤립은 페르시아와 터키를 거쳐서 16세기에 유럽에 전해졌다. 처음에 사람들은 단순히 이 꽃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열광했으나 얼마 안 있어 수익성 좋은 투자 기회를 발견했다. 튤립은 간혹 잎과 꽃잎의 배열, 무늬와 색이 다르게 나타나는 변종이 생겨난다. 모양과 색상이 진기하고 화려할수록 높은 값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고가에 매매되는 화려한 튤립은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감염된 병든 꽃이다. 새로운 품종 하나를 개발하는 데에 6~7년이 걸리고, 이 구근으로부터 판매용 새끼 구근을 어느 정도 확보하려면 다시 3~4년이 걸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기한 품종의 구근은 천정부지로 값이 뛰었다. 푸른색과 흰색 바탕에 빨간 불꽃 무늬가 피어오르는 모양의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종은 전문가들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인정받았다. 가격은 1만 길더라는 믿지 못할 수준으로 올랐으나 정작 이 꽃은 너무나 귀해서 실제 거래된 적이 없다.

 

튤립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약간의 투자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많은 사람이 꽃 재배에 달려들었다. 작은 땅뙈기를 사서 꽃을 재배해서 팔 수 있으므로, 이민자들이나 저임금 노동자들도 달려들었다. 네덜란드 전역에서 튤립 매매가 일어나고 구근 가격이 치솟았다. 15길더였던 ‘아드미랄’이 175길더가 되고, 45길더였던 ‘적황색 레이덴’이 550길더가 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 많은 사람이 꽃 재배와 매매에 뛰어들자 가격이 더 크게 올랐고, 이때까지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덩달아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거부가 될 수 있다는 헛된 욕망이 사회를 휘감았다.

 

튤립 매매는 전형적인 투기 양식을 따랐다. 실제 손에 쥐고 있는 꽃만이 아니라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것까지 사고팔게 되었다. 구매자는 선금을 주고 나중에 수확할 꽃을 미리 사두는 것이다. 그가 받는 것은 꽃 모양과 색깔 등이 기록되어 있는 약속어음뿐이다. 사람들은 이 어음을 높은 가격으로 매매했다. 어음의 등장으로 튤립 매매는 현물 없이도 1년 내내 거래가 가능한 사업이 되었고, 갈수록 투기 성격이 강해졌다. 소위 선물거래(先物去來)가 시작된 것이다. 선물시장은 17세기 초에 목재·대마·향신료 같은 상품을 대상으로 형성되었는데, 시장 외부에서 일반인들이 같은 방식으로 거래한 것은 튤립이 처음이다. 이 거래는 누가 봐도 너무 큰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허황돼 보이는 거래를 ‘바람장사(windhandel)’라고 불렀다.

▲튤립을 따라가는 사람들, 그 종착지는 죽음의 바다. 꽃의 여신 플로라가 술을 마시거나 돈을 헤아리는 남녀와 함께 돛 달린 마차를 타고 가는데, 이 마차를 움직이는 것은 말이 아니라 바람이다. 종착지는 죽음이 기다리는 바다. 튤립이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고,신과 사람들은 튤립을 손에 들거나 머리에 꽂았으며 그 뒤를 평범한 시민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뒤쫓는다. 헨드릭 게리츠 포트가 1640년쯤 그린 풍자화 '플로라의 미친 마차'. 당대 네덜란드를 뒤흔들었던 튤립 광풍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수직 이동이 가능한 기회의 나라였다. 하지만 큰 수고없이 거액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달려들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튤립가격은 한순간 투기의 거품이 꺼지며 나락으로 떨어졌다./위키피디아

 

내년 봄에 ‘하우다(Gouda)’ 가격이 폭등하리라고 예상한 상인은 재배농에게서 그 꽃을 선구매한다. 수확 시기에 300길더를 주기로 하고 예치금으로 10%인 30길더를 지불하면 계약이 성사된다. 꽃이 피면 그때 상품을 인수하고 잔금을 지불한다. 예상대로 일이 잘 풀려서 봄에 하우다의 값이 1000길더로 뛰었다고 하자. 그러면 재배농에게 잔금 270길더를 지불한 다음 꽃을 1000길더에 팔아 700길더를 번다. 꽃값이 계속 오르면 상인들은 이렇게 꿈같은 이익을 얻고 재배농들도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가격이 계속 올라준다면...

 

그러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1637년 2월 첫째 화요일, 하를렘발 빅뱅(big bang)이 터졌다. 사람들은 이제 꽃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구근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시장에 물건을 내놓아서 이익을 실현하려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식으로 나오자 순식간에 거품이 꺼졌다. 얼마 전까지 1000길더에 팔리던 상품이 이제 500, 100길더 이하로 떨어지더니 심지어 5길더에 내놓아도 원매자가 없다. 막차 탄 사람들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으리라는 점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튤립 광기에 대해 많은 사람이 거론했던 내용은 대개 여기까지다. 그렇지만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이런 파국이 일어난 다음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대처했느냐 하는 것이다. 꽃값이 폭락하자 원래 계약대로 구매하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정식으로 계약을 취소하려면 거래액의 10%를 지불하고 꽃을 되돌려주면 된다. 그렇지만 정직하게 위약금을 물어주는 사람은 극히 적었고 대부분 지불을 거부했다. 100~200길더는 가난한 사람이 평생 아껴 모은 돈인데, 이 돈을 그렇게 허망하게 날릴 수야 없지 않은가. 반대로 전 재산 털어 밭 사서 꽃 농사 지은 사람 역시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망할 수야 없지 않은가. 당연히 분쟁이 재판으로 이어졌다. 이제 법원에서 판결을 내려 이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런데 네덜란드 법원은 사실상 판결을 내리지 않는 방향으로 갔다. 법원은 이 매매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여 합당한 판결을 내릴 수 없으니, 각 시 당국이 상세한 정보를 찾으라고 명령을 내리고 그동안 계약은 일시 보류 상태라고 선언했다. 시 당국 또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사실상 방치했다. 사법 당국과 행정 당국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보류 상태’가 지속되었다. 말하자면 이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메시지나 마찬가지다. 이 상황에서 구매자들은 원래 규정대로 10%의 위약금을 다 주는 대신 훨씬 값을 깎은 액수를 주고 해결하려 했다. 공증인 문서를 보면, 계약대로 위약금을 달라는 재배농의 주장에 대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하겠다’고 답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드디어 하를렘 시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규정을 내놓았다. 3.5%의 위약금을 지불하면 원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한 것이다. 다른 지역들도 이 기준을 많이 따른 듯하다.

 

이런 해결 방식은 좋은 일이었을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자칫 경제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할 재앙을 비교적 무난하게 넘겼다는 것이 긍정적인 면이다. 법원은 많은 부유한 시민을 일시에 파산 상태에 밀어 넣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크게 밑지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보상을 주고받으며 사태를 마무리하는 방향으로 합의하도록 유도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유례없는 투기 광풍 사태가 벌어졌지만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사회 자체가 충격을 흡수해 버렸다. 그렇지만 이런 해결 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금융 국가였고, 그렇게 된 데에는 사회 전체가 쌓아올린 신용과 믿음이 큰 자산이었다. 그런데 명백한 계약 위반이 벌어졌는데도 뭉개고 있으면 아무런 제재를 안 받는다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이런 것들이 사회의 내적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병든 꽃을 놓고 벌어진 투기 놀음은 경제와 금융 측면보다 사회의 정신과 문화 측면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

▲작자 미상의 17세기 프랑스 그림 '튤립 구근 거래'. 튤립 판매자를 광대처럼 묘사했다/위키피디아

 

부유한 사회, 병든 꿈

‘황금기’로 불리는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번영하는 국가이며 부가 넘쳐났다. 게다가 사회 최하층에서 최상층으로 수직 이동이 가능한 기회의 땅이었다. 바닝 콕(Banning Cocq)이라는 대상인은 그의 아버지가 네덜란드에 들어올 때 유랑 걸식하는 사람이었는데, 단 한 세대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반열에 올랐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오히려 ‘희망 고문’에 불과했다. 도시 장인(匠人)들은 새벽 4시부터 시작해서 하루 14시간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일해서 1년에 300길더 정도 버는데(꽃값 1000길더와 비교해 보라), 이 수준이면 5인 가족이 치즈와 청어에 호밀 빵을 먹으며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아예 희망이 없는 사회면 모를까, 분명 유럽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이고, 돈이 도는 게 보이는 데다가, 실제로 큰돈을 벌어 상층으로 올라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일이다. 한푼 두푼 모으는 방식으로는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 몇 종류 있다. 행운을 바라거나(로또), 남의 돈을 훔치거나(사기), 헛된 기회를 노리거나(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