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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이야기11/ 지리명/ 한국의 도로 번호 부여 체계 - 이런 사실을 아시나요 - 생활속의 12가지 법칙

상림은내고향 2021. 5. 28. 20:34

상식 이야기11/ 지리명/ 

■ 한국의 도로 번호 부여 체계

길에는 고속국도와 일반국도, 특별광역시도, 지방도로, 군도, 시도가 있다.

미국과 같은 도로선진국 못지않게 한국의 도로번호도 아주 체계적으로 부여되고 있다. 다만, 이것에 대한 홍보가 부족한것이 아쉽다. 특히, 산이 많은 한국의 특성상 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도로번호를 활용해서 목적지를 가기는 상당히 힘든 실정이다. 건설교통부에서는 산악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에도 불구하고, 국도의 간선기능을 강화하고, 도로번호의 활용도를 높히기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도로번호부여체계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았다.

1. 고속국도의 노선번호부여체계 :

(파란색 바탕위에 흰색 숫자, 윗부분은 빨간색 왕관모양, 고속도로에서는 사람이 걸어갈수 없으며, 오토바이도 운행할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고속도로가 건설된 순서대로 번호가 1번부터 붙혀졌지만, 최근에는 일반국도의 번호체계와 유사하게, 우리나라 전체지도를 보고 구도를 잡아서 번호를 붙혀나가고 있다.

 

이중, 1번으로 표시된 경부고속도로는 노선번호부여체계에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상징성을 감안하여 부여체계와 상관없이 1번으로 부여되어있다.

 

고속도로번호부여에 있어, 동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는 끝자리가 0이며, 남북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는 끝자리가 5로 되어있다.

 

동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끝자리가 0번)의 경우, 가장 남쪽에 있는 남해고속도로가 10번이 되며, 익산포항선이 20번, 영동선은 50번 등으로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10,20,30,40,50 등으로 증가하게 된다.

 

반면, 남북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끝자리가 5번)는 가장 서쪽에 있는 서해안선이 15, 호남고속도로가 25, 대전-통영선(중앙고속도로)가 35 번 식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번호가 증가하게된다.

 

이렇게 고속도로에서는 기본적으로 끝자리가 0인지 5인지를 보고, 고속도로의 방향을 예측할수가 있으며, 첫번째자리 숫자를 보고 이 고속도로가 한반도의 중앙을 통과하는지, 동해안을 통과하는지, 가장 남쪽 남해안을 통과하는것인지 그 여부를 추측할수가 있다. 

 

한국도로공사홈페이지(http://www.freeway.co.kr)에 있는 고속도로노선지도를 보면 아주 쉽게 고속도로노선과 번호에대해 이해할수있다.

 

(0과 5로 끝나지않는 고속도로 번호도 있고, 세자리 숫자로 된 고속도로 번호도 있는데, 그것들또한 위에서 설명한 0과 5로 끝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고속도로들의 배열을 토대로하여  규칙성을 가지고 부여된다. 

 

고속도로의 번호부여체계 보기. 자세한건 한국도로공사(http://www.freeway.co.kr에 문의할것.

 

 

2. 일반국도의 노선번호부여체계 :

 

(둥근 타원안에 파란색 바탕위에 흰색숫자, 갓길로 사람이 걸어갈수 있으며, 오토바이도 운행할수 있습니다. 여행을 할때 정보가 없다면 왠만하면 지방도보다는 국도를 따라가시면 무난합니다. 지방도가 더 잘 되어있는 곳도 몇몇 있지만, 대부분 국도를 따라가면 외진곳으로 빠지지않고 무난히 여행을 즐길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밤에 어디를 이동해야하는데, 혼자가기가 무서울때 등등.)

 

 현재 일반국도에는 56개의 노선이 있으며, 우리나라 지도상에서 남북방향으로 된 노선은 홀수번호 (1번, 3번, 5번, 7번, 13번 등등)로, 동서방향으로 된 노선은 짝수번호(2번, 4번, 6번, 12번, 22번 등등..)으로 부여가 된다.

 

 국도번호중에 한자리 수로 된 번호는 우리나라의 도로망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축의 역활을 한다. 그림을 그릴때의 구도 역활과 같다고 보면 된다. 즉, 우리나라 국도체제를 이해할려면, 기본적으로 1번, 3번, 5번, 7번과 2번, 4번, 6번, 8번이 각각 어디에서 시작되며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는 대충이라도 알아둬야 한다. 이들 한자리 숫자에 있어서는 번호를 부여하는데 있어 법칙이 있다.(아래 그림 참조. 고속도로노선번호 부여방식과 유사)

 

 반면 두자리 번호는 한자리수로 구축된 도로구도를 바탕으로 양 지역간을 이어주는 간선도로 들이다. (따라서 짧은 노선도 있고, 긴 노선도 있다.).

 

 

또한가지 반드시 알아둬야 할점은 국도에 있어 시점은 동서축에 있어서는 서쪽, 남북축에 있어서는 남쪽이 시점이 된다. 3번 국도의 경우 국도의 시점은 경남 남해가 되며, 종점은 북한의 초산이 된다.

 

(이 규정은 고속국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 중앙의 기점 거리표를 보듯이, 모든 고속도로의 기점은 동서축은 서쪽, 남북축은 남쪽이 된다. 따라서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기점은 부산, 종점은 서울. 중부고속도로의 경우 기점은 통영이 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고속국도, 국도, 지방도를 통털어, 가장 긴 도로는 부산에서 인천을 잇는 657km의 국도77호선이다.(아래참조)

 

일반국도 목록(일람표)

 같은 번호가 부여된 국도가 서로 연결되지못하고 끊어져있는 경우가 많다. 중복구간을 피해서 건설하다보니,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중간에 이렇게 끊어진 구간에는, '기존의 국도'에 '끊어진 국도' 번호를 같이 병행하여 동시에 안내를 하고있다. 아래 그림의 경우, 기존의 2번국도노선이 있는 상태에서 14번을 가설하면서, 양쪽의 14번국도를 서로 연결하지않고, 기존 2번국도를 이용하여 14번이 서로 연결되게 가설된 예인데. 이때에는 중간에 있는 2번국도 구간에 2번과 14번을 동시에 표기하여 서로를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런 표기는 도로표지판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직 시중에 발매되는 교통지도에는 둘중 하나의 번호만 기재되어있는 경우가 많아, 여행시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국도대체우회도로 : 국도의 간선기능을 강화하기위해, 시내 번잡구간을 통과하는 기존 국도 구간을 대체, 시외곽으로 우회도로를 설치하는 국도대체우회도로가 가설되고 있으며, 국가에서 공사비의 일부를 지원해주고 있다. 시외곽으로 국도대체우회도로가 가설될경우,  중간경유지의 번잡한 시가지구간을 통과하지않고도  목적지로 바로 갈수있기때문에 국도의 간선기능이 크게 강화된다. 이와함께, 기존국도가 통과하는 자치단체 역시, 시내구간의 교통정체 부담을 덜어주는 장점이 있다.

 

 

 

3. 국지도 (국가지원지방도)의 노선번호 부여체계 :

(지방도와 같이 사각형 도형속에 숫자를 표기하지만, 숫자가 두자리이다. 사각형 노란색 바탕안에 청색숫자로 표기한다. 지방도의 일종) 

 

국가지원지방도는 도로 건설비의 일부를 국가에서 지원하여 건설된 "국도에 준하는 역활을 하는 지방도"를 말한다. 지방도이지만, 조금 중요한 지방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도로표지판에 번호표기방식 또한 애매한데, 국도와 같이 두자리수로 구성되어 혼돈하기 쉽다.

 

하지만, 일반국도의 표지는 둥근원의 군청색바탕 안에 흰색글씨로 숫자를 표기하지만, 국가지원지방도는 사각형의 노란바탕안에 두자리 숫자로 표시한다. 참고로, 국가지원지방도의 상당수는 노선공사가 완료되면 국도로 승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지방도의 번호부여체계 :

(국지도와 비슷한 사각형 도형안에 표시하지만, 숫자가 세자리 이상으로 구성, 황색바탕에 청색숫자로 표기,  요즘은 지방도도 아주 시설이 잘되어있어서 그다지 큰 문제는 없지만, 아직까지 비포장도로가 많고, 길자체가 외진곳이 많아 초행길에는 상당히 조심해야합니다. 하지만,지방도가 무조건 국도보다 못한 도로는 아닙니다.  곳에따라 국도보다도 도로폭이 훨씬넓고 시설이 잘되어있고, 교통량이 많은 지방도가 많습니다)

 

현재 지방도는 400개가 약간 안되는 노선이 있으며 번호는 세자리나 네자리 수로 구성된다.  여기서 백단위 이상 숫자는 도의 구분을 나타내는데, 경기도는 3XX, 강원도 4XX, 충북 5XX, 충남 6XX, 전북 7XX, 전남 8XX, 경북 9XX, 경남 10XX, 제주도 11XX 으로 각각 부여가 되어있다.

 

뒷자리 번호 XX에 있어서 도단위의 행정구역내에서 남북방향은 홀수,동서방향은 짝수번호를 사용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부여하고 있으며, 노선번호중 1~50까지는 관할지역 내부만을 연결하는 노선에, 51~99까지는 인접 도 등 타지역과 연결되는 노선에 사용하되 타지역의 지방도와 연결·접속될 경우 앞부분의 지역고유번호는 관할도별로 상이하나 뒤의 두자리는 동일한 번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들어 지금 경남지방에 1059번지방도가 있고, 이 길이 경북으로 이어진다면 경북구간으로 넘어가면서 959번 도로가 되어 계속 이어지게 된다. (구입한 도로지도를 펼쳐보면 알겠지만, 지도출판에 있어 지방도의 번호부여 규정에서 많은 실수가 발생하고있다.)

 

5. 특별광역시도

(육각형 도형, 흰색바탕에 청색글씨)

특별시도, 광역시도로 구분되며, 특별시나 광역시 내에서 관리하는 도로다.

 

6. 기타 군, 시도 :

각 시, 군에 따라 서로 부여방식이 상이하다. 번호는 각 시,군별로 부여되어있지만, 노선이 짧고, 번호과다로 인한 혼란방지를 위해 표지판상에는 번호를 표기하지않는다. 지정번호의 부여는 도시내 도로는 도시계획시설로 지정된 순서에 따라 기능 및 도로폭을 기준으로 부여하고 있으며, 군도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노선의 지정순서에 따라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있다.

 

7. 아시안하이웨이 (Asian highway) :

AH1, AH6 으로 표기된 두개 노선이 우리나라를 통과할 예정이다. AH1은 기존의 경부고속도로 노선에 동시표기하며, AH6은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7번국도에 동시표기할 예정으로 있다.AH1은 일본-부산-서울-평양-신의주-중국-베트남-태국-인도-파키스탄-이란-터키,  AH6은 부산-강릉-원산-러시아(하산)-중국-카자흐스탄- 러시아로 이어진다. 자세한 아시안하이웨이 노선도는 http://webhard.gsnd.net/biology 접속후 AH폴더의 ah.bmp파일을 참조하도록 한다.

[출처] 한국의 도로번호 부여 체계 |작성자 스파이

 

■ 서울 25개 구 명칭의 유래

●종로구;

종로(鍾路)라는 명칭은 성문의 개폐 시각을 알려주는 종루(종각·보신각종)에서 비롯됐다. 1943년 구제도를 실시하며 ‘종이 있는 거리’라는 뜻으로 명명했다. 서울 25개 구청과 전국 기초단체 가운데 여전히 행정서열 1위다. 

 

●중구;

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서울의 ‘가운데()’에 있다는 데서 얻은 명칭이다. 서울시청이 있으며 종로구와 함께 서울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 부산·대구·인천·대전·울산광역시에도 中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용산구;

『증보문헌비고』에 ‘백제 기루왕 21(서기 97) 용이 나타났고 해서 용산(龍山)이라 했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형이 용이 있는 형국이라 생긴 이름’이라고 각각 적혀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조선 영조 27(1751) 때 성곽 서쪽에 설치한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9(九坊) 중의 하나인 용산방(龍山坊)이란 지명으로 사용됐다.

 

●성동구;

서울을 에워싸던 ‘성곽의 동쪽(城東)’을 뜻한다. 4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광희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나오면 보이던 들녘이 있었다. 이곳은 ‘동쪽 들녘’이란 뜻의 ‘동교(東郊)’로 불렸다. 

 

●광진구;

1995년 성동구에서 분구됐다. 한강의 나루()였던 광나루에서 유래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한강은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다음에 광나루(廣津)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광나루가 인근 지명인 광주와 상관없이 ‘강폭이 넓은 나루’에서 나왔다는 설도 유력하다. 

 

●동대문구;

“동대문에서 유래했지만 동대문구에 동대문은 없다.” 역사 시험과 퀴즈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문제다. 동대문(흥인지문) 1975년 이전까지만 해도 동대문구 관할이었다. 하지만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동대문구의 창신동이 종로구에 편입됐다. 그래서 창신동에 있던 동대문도 종로구 관할로 넘어갔다. 현재 동대문은 창신동이 아니라 종로 5·6가동에 속해 있다. 

 

●중랑구;

1988년 동대문구에서 분구됐다. 분구의 기준이 됐던 중랑천(中浪川)에서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중랑천의 유래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방여전도』 등에 중량포(中梁浦)라는 지명이 기록돼 있는데 발음이 변했다는 설이다. 대나무()의 잎과 가지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물결()에 비유한 죽랑(竹浪)을 소리 나는 대로 다시 쓰다 보니 ‘가운데 물결’이란 특별한 의미가 없는 이름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성북구;

1949년 서울의 동대문·종로구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의 일부 지역이 합쳐지면서 신설됐다. 성북동(城北洞)에서 나온 지명으로 조선 영조 41(1765) 성곽 수비를 위해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을 ‘성곽 북쪽(城北)’에 설치한 것에서 유래했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소문외계(外契) 성북동()에서 지명으로 쓰였다. 

 

●강북구;

1995년 도봉구에서 분구됐다. 한강 이북(江北)에 위치했다는 뜻으로 강남·강서·강동구와 유래가 같다. 분구 당시 옛 지명인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서 따온 ‘숭인구’, 북한산 인수봉과 인수동에서 따온 ‘인수구’와 경합한 뒤 구명으로 확정됐다. 

 

●도봉구;

1973년 성북구에서 분구됐다. 이 지역 명산인 도봉산(道峰山)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조선 왕조를 여는 길()을 닦은 봉우리()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학문을 연마하고자 도()를 닦았던 봉우리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노원구;

1988년 도봉구에서 분구됐다. 옛날 이 일대는 갈대()만 무성할 뿐 인가가 없어 행인들이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숙식 편의를 제공하는 여관인 원()이 현재 상계동 인근에 세워졌는데 노원(蘆院)으로 불렸다. 이후 노원역(蘆院驛)도 생겼다. 그냥 단순히 갈대()가 많은 들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은평구;

1979년 서대문구에서 분구됐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시대 지명인 연은방(延恩坊)의 ‘은()’자와 상평방(常平坊)의 ‘평()’자를 합성해 은평면()이란 지명을 만든 데서 유래했다. 1949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은 서대문구에 편입됐다가 다시 분구돼 ‘은평’이란 옛 지명을 찾는다. 

 

●서대문구;

“동대문은 동대문구에 없고, 서대문 옛터도 서대문구에 없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서대문(돈의문)을 철거했다. 그런데 1943년 구 제도를 실시하며 서대문 터가 있던 곳을 포함해 서대문구로 명명했다. 그런데 197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대문 터는 종로구(평동)와 중구(정동)의 사이에 놓여 관할권이 서대문구에 속하지 않게 된다. 현재 서대문구 휘장(심벌)에 그려져 있는 문 역시 서대문이 아니라 독립문이다. 

 

●마포구;

1944년 서대문구와 용산구의 일부 지역이 분리돼 신설됐다. 원래 이 지역엔 삼개 혹은 삼포(三浦)로 불리는 호수 세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 ‘삼’으로 발음되는 한자 ‘마()’가 붙으면서 마포(麻浦)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이곳 물가()에 베옷을 짓는 마()가 많이 재배돼 마포가 됐다는 것이다. 

 

●양천구;

1988년 강서구에서 분구됐다. 분구 당시 신정동에서 따온 ‘신정구’와 경합한 뒤 구명으로 확정됐다. 양천(陽川)은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햇볕이 잘 들고 냇가의 물이 맑아 ‘밝은 태양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뜻으로 고려 충선왕 2(1310) 때 처음 지명으로 쓰였다. 

 

●강서구;

1977년 영등포구에서 분구됐다. 한강 서쪽(江西)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부산에도 1989년 생긴 강서구가 있다.

 

●구로구;

1980년 영등포구에서 분구됐는데 중심동인 구로동에서 이름을 얻었다. 옛날 이곳에 ‘9명의 장수한 노인(九老)’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금천구;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됐다. 고려 태조 23(940) 이 지역은 금주(衿州)로 불리며 옷깃 금()자와 처음 인연을 맺는다. ‘옷깃처럼 펼쳐진 넓은 고을’이란 뜻이다. 고려시대 줄곧 금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 13(1413)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됐다. 태종이 인구가 적은 마을의 경우 주() 대신 천()이나 산()으로 개칭하라고 명령해 천()을 붙여 금천이 된 것이다. 금천현이란 이름은 이후 정조 19(1795) 시흥현으로 변경될 때까지 400년 가까이 불렸다. 

 

●영등포구;

무속신앙인 ‘영등(靈登) 굿’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영등(永登)으로 한자가 변형 표기된 뒤 물가를 뜻하는 포()가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구한말 이곳에 경인·경부 철도가 부설되면서 교통·사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943년 구 제도를 실시하면서 영등포구가 생겼는데 1963년 경기도 지역이 대거 서울시에 편입돼 크게 확장된다. 현재 강남구·강동구·송파구를 제외한 한강 이남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당시 면적은 서울시 면적의 3분의 1이 넘는 208. 영등포구는 이후 관악구·강서구·구로구·동작구·서초구·양천구·금천구 등 7개 구로 나눠졌다.

 

●동작구;

1980년 관악구에서 분구됐는데 국립현충원이 있는 동작동(銅雀洞)에서 이름을 땄다. 『해동지도』·『조선지도』·『대동여지도』에 동작(銅雀)이란 지명이 적혀 있다. 이 지역에 많이 분포하던 검붉은 구릿빛의 돌을 뜻하는 옛말인 ‘동재기’를 한자로 적다 보니 ‘동작’이 됐다는 설이다. 구릿()빛을 띠는 참새의 한자어 ‘작()’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관악구;

1973년 영등포구에서 분구됐다. 이 지역 명산인 관악산(冠岳山)에서 유래했다. 관악산은 ‘갓()’을 세워놓은 듯한 산꼭대기의 모습에서 이름을 얻었다. ()은 ‘큰 산’, ‘높은 산’을 뜻하는 한자다. 개성 송악산, 가평 화악산, 파주 감악산, 포천 운악산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으로 꼽혔다. 행정 명칭으로 처음 쓰인 것은 1963년 경기도 시흥군 신림리·봉천리 일대를 영등포구에 편입하면서 출장소를 ‘관악출장소’로 명명하면서다.  

 

●서초구;

1988년 강남구에서 분구됐는데 중심동인 서초동(瑞草洞)에서 이름을 얻었다. 옛날 이곳은 서리풀이 무성했다 해서 이를 한자로 표기한 ‘상초리(霜草里)’ 혹은 ‘서초리(瑞草里)’로 불렸다고 한다. 또 물이 서리어 흐르는 벌판이라 해서 ‘서릿벌’이라고 한 것이 변해 ‘서리풀’이 됐다는 설도 있다. 

 

●강남구;

1975년 성동구에서 분구됐다. 한강 이남(江南)에 위치했다는 뜻으로 서울에서 한강을 중심으로 이름을 짓는 첫 사례가 됐다. 이후 강서·강동·강북구를 명명할 때도 적용했다. 원래 강남은 ‘영등포의 동쪽’을 뜻하는 ‘영동(永東)’으로 불려 1973년 영동출장소가 설치됐다. 이 출장소가 구로 승격하며 ‘강남구’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었다. 

 

●송파구;

1988년 강동구에서 분구됐는데 중심동인 송파동(松坡洞)에서 이름을 얻었다. 송파동의 유래는 세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 조선 문종 즉위년(1450) 기록에 따르면 ‘연파곤(淵波昆) 지역이 물살이 빠르지 않으니 나루터로 하겠다’는 경기관찰사의 요청이 나온다. 이후 연파곤→소파곤(疎波昆)→소파리(疎波里)→송파진(松坡津)으로 음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옛날 이 지역에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어 소나무 언덕을 뜻하는 ‘송파(松坡)’라고 칭했다는 설이 있다. 셋째, 소나무가 서 있었던 언덕 한쪽이 파여 떨어지는 바람에 이곳을 송파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강동구;

1979년 강남구에서 분구됐다. 한강 동쪽(江東)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천호(千戶)출장소가 구로 승격하며 ‘강동구’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었다.

 

■ 한강 28개 다리와 최초 준공 순서

 

한강은 길이 514 km, 유역면적 34, 397 km² 이다. 서울에서 한강의 북쪽도로는 강변북로, 남쪽은 올림픽대로가 있다. 


한강은 6호선, 8호선, 9호선, 분당선 [2010년에 한강을 통과하는 하저터널 건설],

 

인천국제공항철도, 인천 메트로 1호선을 제외한 모든 수도권 지하 철 노선들이 교각 1호선 (용산역~노량진역], 2호선 [강변역~성내역, 당산역~합정역], 3호선 [옥수역~압구정역], 4호선 [이촌역~동작역], 7호선 [뚝섬유원지역~청담역]또는 하저터널 [5호선 (여의나루역~마포역, 광나루역~천호역'이 유일]을 通해 관통하며 2010年, - 현재까지 28개의 다리를 지니고 있다.

 

 

□김포대교[金浦大橋 - 2280m : 외곽순환고속도로와연결]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와 고양시를 잇는 다리로 길이 2, 280m[총연장 1, 475m], 너비 38.2m이다. 차도는 8차선으로 28.8m이고 중앙에는 너비 3.4m의 분리대가 설치되어 있다. 하부구조는 교대가 20기이고, 경간 사이의 최대 거리는 125m에 이른다.

 

서울 외부순환고속도로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한강 다리로는 21번째이다. 한강 다리 중에서 너비가 가장 넓고 길이도 가장 길다. 남쪽은 김포제방도로를 가로지르고 고양시 쪽으로는 자유로를 가로지른다.

 

자유로와는 신평인터체인지로 이어지며, 남쪽에서는 김포인터체인지에서 48번 국도와 이어진다. 최신식 다리인만큼 하부의 교각이 상부구조와 조화를 이루어 미관이 뛰어나다 김포시와 고양시 일산 지역은 물론 문산읍과 파주시, 서울특별시 서부 지역의 교통난을 분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신행주대교[新幸州大橋 - 1460m]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과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을 잇는 다리로 길이 1, 460m, 너비 14.5m이며 1995년 5월 개통되었다.1996년부터는 제2 신행주대교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2000년 12월16일 개통되었다.

이에 따라 신행주대교는 고양시에서 서울 방향, 제2신행주대교는 서울에서 고양시 방향으로 각각 일방통행하게 되었다.각 노선은 편도 3차선이다. 그리고 그 동안 승용차만 다니던 행주대교는 비상도로로 활용하다

가 철거될 계획이다.

□방화대교[傍花大橋 -2559m :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연결]

▲강서구 방화동과 경기도 고양시 강매동을 잇는 다리를 말하는데 연장 2, 559m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구간 중 서울특별시 입구에 건설된 다리이다. 한강을 횡단하는 다리 가운데 27번째로 건설된 최장 교량이며,
특히 중앙부 540m의 아치트러스[arch truss]橋는 비행기의 이착
륙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미관이 뛰어나서 남쪽의 개화산과 북쪽의 행주산성 등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양대교 [加陽大橋 - 1608m]

▲마포구 상암동과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북단은 강변북로와 자유로가, 남단은 올림픽대로가 연결된다. 1994년 12월 착공하여 2002년 5월 31일 준공되었다. 교각과 교각 사이의 거리가 최소 100m, 최대 180m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길다. 교량의 길이는 약 2.5Km로 大橋이다.

□성산대교 [城山大橋 - 1410m]

▲마포구 망원동과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길이 1, 410m. 너비 27m이다. 1980년 6월 30일에 개통되었다.
국도 제1호선 및 국도 제48호선의 일부이며,
서부간선도로'를 거쳐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어진다.

성산로[독립문∼경인고속도로 입구]의 건설과 함께 시공되었으며,
제2한강교의 교통량 분산과, 김포공항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다리는 한강의 12번째 교량으로서 성수대교와 같은 트러스 공법으로 세워졌는데, 외측을 반달형으로 하여 특유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양화대교 [楊花大橋 -1053m]

▲특히 양화대교는 한강다리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60년대의 첫 교량이다. 60년대에 들어서 경제개발이 시작되었고, 1965년 1월 제2한강교라 불린 양화대교가 등장했다.

합정동과 당산동을 잇는 양화대교는 영등포와 인천·김포공항으로
가는 서울의 서부관문이기도 하다. 마포구 합정동과 영등포구 양평동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이다.1962년 6월 20일 착공되어 1965년1월 25일 준공 개통되었다.

준공 당시에는 "제2한강교"라 불리었으며 1982년 9월 현 명칭으로 변경되었다.다리 남쪽에 선유도공원이 있다. 약 1.6KM로 당산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보이는 곳이다.

□당산철교 [堂山鐵橋 -1360m :지하철2호선전용]

▲서울 지하철 2호선의 당산역과 합정역을 연결하는 철교이다. 1983년에 완공되었으며, 1984년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완전 개통으로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한강의 3번째 철교이다.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여파로 당산철교도 교량 점검 후폭풍이 불었
다. 완공 10년 후에 실시된 교량 점검 과정에서, 상판은 물론 교각 자체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견, 전면 재시공이 결정되면서 1996년 末에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어 당산역-합정역 구간이 한때 단절되었다.

이후 약 3년간 당산역과 합정역 및 홍대입구역을 임시로 드나드
는 무료셔틀버스가 운행되었고 2호선 열차가 합정역에 임시로 회차선을 만들어 회차하기도 했다.1999년 가을에 당산철교가 다시 개통되어 현재까지도 별 문제 없이 교량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교량의 길이는 약 1.2km이며, 높이는 약 30m에 이른다

□서강대교 [西江大橋 - 1700m]

▲1999年 준공된 서강대교는 철새도래지인 밤섬을 가로질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한강의 수질보호와 밤섬 철새도래지의 보호를 위하여 콘크리트 상판 960m를 연속압출공법[시공 관리가 용이하고 속도가 빠름]으로 가설하였으며, 아치형 다리로 수려한 미관을 자랑한다.

□마포대교 [麻浦大橋 - 1400m]

▲마포구 마포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잇는 다리이다. 길이는 1.6km이며 왕복 10차선 다리이다. 초기 이름은 서울대교였지만 추후 마포대교로 개명되었으며,1970년 착공되었다.

하지만 이 다리가 건설된 이후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나중에 원효
대교를 건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 다리로 인해 여의도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이 다리는 한강에서 4번째로 설치되었다.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보행환경 개선공사로 왕복 8차선으로 다리가 축소된 적도 있었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은 이 다리와 평행한 하저 터널로 여의나루역과 마포역이 이어진다.

□원효대교 [元曉大橋 - 1470m]

▲용산구 원효로 4가와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잇는다.1978년 7월에 착공, 1981년 10월 27일에 완성되었다.
폭은 20미터(차도폭 15.4미터, 보도폭 4.6미터에, 4차선 규모로
총연장 1, 120미터의 원효대교는 지보공이 없는 프리스트레스트콘크리트 장대교량이다.

원효대교는 독일의 디비닥 공법 및 프리 캔틸레버 공법을 이용하
여 건설되었다. 원래 동아건설(주)에서 건설하여 개통 초기에는 통행료를 징수했으나, 이후 1984년 서울시에 다리의 소유권을 기부한 이후 톨게

이트는 철거되었다.

 

□한강철교 [漢江鐵橋 - 1110m : 지하철1호선과 기타 여러기차전용]

▲한강의 교량 중 최초로 건설된 교량으로, 노량진역과 용산역 사이를 잇는 철교이다.1900년 한강 이남으로 노량진역에서 끊겨 있던 경인선을 용산역과 남대문역[現 서울역]까지 연장하기 위하여 건설된 철도 전용 교량이다.현재 경인선, 경부선등의 열차가 이용하는 교량이다.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당시 건설된 A·B·C선은 2006년에 대한민
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00년 7월 5일 준공된 한강 위에 놓인 최초의 다리한강철교

 

현재는 운송량의 증가와 맞물려 4개까지 늘어났다. 상류에서 하류 측으로 A-B-C-D 순으로 자리 잡은 4개의 한강철교는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데, 철교-A는 용산에서 부평간 경인선 열차가, B는 화물열차, C는 경부선·장항선·호남선 등의 철도가, D는 경인· 경수 전동차가 다니고 있다.

▲사진 : 1912년의 한강철교 공사 - 출처 : 서울시 건설안전본부 홈페이지


□한강대교 [漢江大橋 - 1005m]

▲다리가 연결된 後 17年이 있은 後에는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는 길이라 해서 인도교라 이름 붙여진 한강대교가 건설되어졌다

  

□동작대교 銅雀大橋 - 1330m, 가운데에지하철4호선지나감]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잇는 총연장 1, 330m의 한강 다리이다.한강 다리 중 11번째로 개통하였다. 한강의 5번째 철교이다. 동호대교와 같은 구조의 도로·철도 겸용 교량으로 건설되어,서울 지하철 4호선의 이촌역 - 동작역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연장 1, 330m, 폭 40m. 한강대교와 반포대교 사이에 있다. 도로교와 지하철 4호선 전철교의 복합 교량으로, 그 폭이 한강
다리 가운데서 가장 넓으며 도로교는 6차선 차도 23.6m에 양쪽 인도 5m씩이고, 전철교는 복선 11.4m이다.

서울시가 한강대교와 반포대교의 과밀교통량 분산효과를 기대하고 1978년 10월에 착공하여 1984년 11월에 총공사비 550억 원을들
여 준공하였다.난간이 알루미늄으로 꾸며졌으며, 조명효과를 위하여 메탈할라이

드 램프등으로 가로등을 달았다.

 

□반포대교 [潛水橋, submerged bridge - 1490m]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1980년 1월 착공해 1982년 6월 25일 준공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2층 교량이고, 약 1.2킬로미터이다. 반포대교의 아래에는 잠수교가 있다.

 

이 다리에 설치된 분수대는 2008년 12월 14일 세계 기네스 협회에서 세계 최장 교량 분수로 공식 인증했다. 반포대교와 잠수교, 그리고 달빛무지개 분수는 한강 르네상스프로 젝트로 인해 반포한강공원의 일부가 되었다 

 

□잠수교 [潛水橋, submerged bridge - 795m]

▲홍수 때에는 수면 아래에 잠기도록 낮게 가설한 교량으로 물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떠내려오는 물건이 걸리지 않도록난간 을 설치하지 않는다.

하천관리의 측면에서는 장애물이 되며, 바람직하지 않으나 가설공 사비가절감되기 때문에 시골의 작은 하천에는 비교적 많으며서 울 한강의 잠수교는 좋은 예로, 지금은 그 위에 다시 교량을 가설 하여2층 교량으로 되어 있다.

물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떠내려오는 물건이 걸리지 않도록 난간을
설치하지 않는다. 홍수 때는 교통이 차단되며, 수위가 낮아지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서울 한강의 잠수교는 좋은 예로, 지금은 그 위에 다시 교량을 가설하여 2층 교량으로 되어 있다. 하천관리의 측면에서는 장애물이 되며, 바람직하지 않으나 가설공사비가 절감되기 때문에 시골의 작은 하천에는 비교적 많다.

관광유원지에서의 가교[架橋]는 경관을 해치지 않는 의미에서, 영구구조의 잠수교를 생각할 수도 있다.

보통 주요 도로에는 잠수교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남대교 [漢南大橋 - 917m]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漢南洞]과 강남구 신사동[新沙洞] 사이를 잇는 다리로 한강에서는 네번째로 건설된 교량이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의 진입 관문 역할을 한다.

1966년 1월 19일 착공하여 1969년 12월 25일에 준공되었다.
교통량 증가와 다리의 노후로 1996년 12월기존 다리 서쪽에 새다리를 착공 2001년 3월 개통하였다.

以後 기존 다리는 보수공사를 진행하여 2004년 8월 9일재개통,
현재의 12차로로 구성된 다리가 완성되었다. 양재 나들목과 한남대교를 잇는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이 다리를 건널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제3한강교'였으나 1985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915m의 비교적 짧은 다리이다. 과거 경부고속도로의 종점이었다. 아시아 고속도로 AH 1의 일부이며, 이 다리를 통과한 후 한남로,퇴계로, 국도 1호선을 거쳐 경부고속도로로 향하게 된다. 

 

□동호대교[東湖大橋 -1095m, 가운데에지하철3호선지나감]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1980년 6월 착공하여 1985년 2월 2일 준공되었다. 한강에서 15번째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약 1.2km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의 옥수역과 압구정역을 연결해주는 철교 역할도 하고 있다. 다만, 강변북로에서 어느 방향이라도 동호대교를 타거나 이 대교에서 강변북로 도로로 갈아탈 수는 없다. 

 

□성수대교[聖水大橋 - 1161m]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다. 성수대교는 길이 1, 161m 너비35m[8차선]이며,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7년 4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 준공
하였다.


최초로 120m 장 경간으로 건설 되었으며,
그 구조상 게르버 트러스교로서 교하공간이 넓어 광활한 한강수면에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교량 양단에 완전한 입체교차시설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구조물의 외관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진 최초의 교량이었다.

 

1994년 10월 21일의 붕괴 사고를 겪은 후 1997년 4월에 다시 완공하여 재개통했다. 강변북로에서 강남의 어느 쪽으로 가기 위해선 성수대교 타는 방법밖에 없다.


1979년에 길이 1160m의 캔틸레버식 다리로 완성된 성수대교는
붕괴와 재시공이라는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다.1979년 10월 준공됨으로써 당시 포화상태에 있던 주위의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왕십리 일대의 서울 동부와 영동지구를 연결해 강남지역의 균형 있는 발전을 촉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영동대교[永東大橋 - 1056m]

▲마포대교, 잠실대교에 이어 한강에 건설된 7번째 다리로, 1973년11월 8일 개통되었으며 준공 당시 한창 개발중이던 강남 지역을 바로 연결함으로써 강남 개발을 촉진시키는데 기여했다. 영동(永東)이라는 명칭은 영등포의 동쪽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1970년대 강남 개발 당시에 강남이라는 이름이 자리잡기 전 붙여진 이름이다.

강원도 영동 지방이나 충청북도 영동군, 그리고 영동고속도로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영동이라는 이름은 현재 강남으로 대체되었고, 영동대로나 영동고등학교 등 지역 시설물 일부에 남아 있다.

  

□청담대교[淸潭大橋 - 1025m, 아래층에지하철7호선지나감]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과 강남구 청담동 사이를 연결하는 폭 27m, 길이 1, 211m의 다리이다. 1993년 12월에 착공하여 본교는 1999년 12월 23일에, 접속교는 2001년 1월에 완전 개통되었다.

이 다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복층 교량으로 아래층은 서울 지하철
7호선의 뚝섬유원지역과 청담역 사이를 잇는 철도교이고, 위층은 자동차전용 도로교이며, 동부간선도로의 일부분이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광진구 자양동과 강남구 청담동을 잇는 총연장 1, 065m의 한강 다리이다.동2로에 속해 있고, 동2로의 종점인 남단 교차로에서 영동대로와 연결된다.

  

□잠실대교[蠶室大橋, -1280m]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과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잠실동을 잇는 한강의 다리이다.길이 1, 280미터, 너비 25미터, 6차선이다. 공사비 20억 1300만 원이 들어갔으며 1970년 10월에 착공하였고,1972년 7월에 준공하였다.한강에 건설한 서울의 6번째 다리로,완공 당시에는 마포대교에 이어 한국에서 2번째로 긴 다리였다.

이 길로 곧장 가면 아차산역과 송파 나들목, 성남시가 나온다.이 교량을 중심으로 한 도로망은, 의정부 · 춘천 방면과 도봉구
태릉 · 망우동 · 면목동 · 워커힐 방면 등 서울 동부 변두리 도로들을 서울 도심을 거치지 않고 곧장 경부고속도로와 경수 · 경인 · 김포 등 강남 간선도로로 연결하여 서울의 교통 골격을 이루고 있다.

 

□잠실철교 [蠶室鐵橋, -1270m, 지하철2호선철도옆에 자동차전용도로가 있다]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과 송파구 신천동을 잇는 도로 겸 철도다리이다.1977년 착공하여 1979년 완공하였으며,서울에서 도로와 철도가 같이 통행할 수 있도록 놓인 최초의 다리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역과 성내역을 잇고 있으며,철도 양 옆으로 도로가 놓여 있어 차량이 통행할 수 있었으나,신천동 방향 도로는 자전거도로로 변경되어 차량이 통행할 수 없
게 되었다. 진출입로가 올림픽대로에만 설치되어 있어 통행량은 그리 많지 않다.

 

□올림픽대교 [1225m]

▲광진구 구의동[九宜洞]과 송파구 풍납동[風納洞]을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콘크리트 사장교로써, 길이 1, 225m,너비 32m[6차선] 이며,다리 가운데 4개의 콘크리트 기둥으로 된 88m 높이의 주탑을 세우고, 24개의 강선'을 연결시킴으로써 '24회 올림픽'임을 의미하도록 하였으며, 1985년 11월 20일 착공하여 1990년 6월에 준공하였다.

 

천호대교 ·잠실대교의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강남과 강북의 교통소통에 도움을 주는 한편, 88서울 올림픽 대회를 영구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1985년 착공,1990년 6월 준공되었다.

 

□천호대교 [千戶大橋, 1150m]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잇는 총연장1, 150m의 한강 다리이다. 천호대로 구간에 속해 있으며, 1936年 개통한 광진교가 폭이좁고 오래되어 많은 교통량을 수용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여 건

설되었다.

 

□광진교[廣津橋, 1056m]

▲1937年 광진교

 

광진교가 위치하고 있는 광나루는 예부터 충주를 거쳐 동래로 또는 원주를 거쳐 동해안으로 빠지는 요충지로 유명한 나루터였다. 1920年代에는 화물차나 버스를 발동기선에 실어 도강할 수 있었으나 홍수로 인해 교통이 두절되면 그 불편함을 헤아릴 수 없었다.


1930年을 전후에서 교통량이 격증하여 하루에 도강하는 자동차,
우차, 손수레등이 수백대에 달하게 되어 도로교통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1936年 교량을 건설하게 되었다.조선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다가 1895年[고종32] 개편되어 한성부 양주군 고양면 광진리가 되었으며 1914年 고양군 독도면 광장리가 되었다.


1949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에 해당되던 광나루 일대가 서울특
별시 성동구로 되었다가 1995年 광진구에 편입되었다.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잇는 총연장 1, 056m의 한강 다리이다. 한강에서 세 번째, 도로 교량 중에서는 두 번째로 1936년에 건설되었으나 노후화 및 교통량의 증가로 1997년에 철거되고 현재 2003년 4차로로 새로놓인 다리가 들어서 있다.

2009년 7월에 걷고 싶은 다리 조성공사를 하여 4차로 中 2차로가
보행로와 자전거 전용도로로 새로이 조성되고 다리 중간부분에 하부 전망대를 설치하여 한강 교량 유일의 걷는 다리와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들어 졌다. 이 다리는 구천면길의 종점이다.

 

□미사대교 [渼沙大橋, 1.53km]

▲경기도하남市 망월洞에서 남양주市 삼패동을 잇는한강의 다리이다. 공사中엔 남양주대교라는 가칭으로 불렸으며, 하남시에서 제안한 미사대교와 남양주시에서 제안한 덕소대교 中 미사대교가 선택되어 정식 명칭이 됐다.

서울양양고속도로를 구성하는 고속도로 교량으로, 이 다리가 시작
되기 직전 지점에 서울양양고속도로의 시점이 위치한다. 미사 교차로와 덕소삼패 나들목 사이에 위치하며, 교량 길이는 약1.5km이다.
시공 : 현대산업개발'로 2009年에 完工했다.

□강동대교 [江東大橋 - 1126m, 외곽순환고속도로와연결]

▲서울특별시 강동구 강일동과 구리시 토평동을 잇는 폭은 26.7m,길이 1, 126m 한강의 다리이다.이 다리는 공사기간 중인 1990年 대홍수로 왕숙천에서 내려온 부유물 등이 다리에 걸려 일부가 유실되었다.

1988年 2月 착공되어, 1991年 12月 준공하였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통과하며 강 북단에서 국도 제46호선으로, 남단에서 올림픽대로, 미사로로 진입할 수 있다.다리 남단으로 하남 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와 직결된다. 남단으론 하일 나들목이, 북단으론 토평 나들목이 있다.하일 나들목밑에는 지하철 5호선의 고덕차량기지가 있다.

□팔당대교 [八堂大橋 - 935m]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과 남양주시 조안면을 잇는 총길이 935m,너비 24m의 다리로 1986년 5월 10일 착공하여 1995년 4월에 완공하였다. 총길이 935m, 너비 24m이다. 1986년 5월 10일 착공하여 1995년 4월에 완공하였다.

 

다리의 높이는 12m이고, 경간은 18개이다. 경간 사이가 가장 넓은 곳은 52m이다. 서울에서 가깝고 접근하기 쉬워 수도권에서 경기도나 강원도로 쉽게 이어진다.특히 여름 휴가철과 가을 단풍철의 교통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다리 아래에는 쏘가리와 강준치·민물농어·끄리·피라미 등 다양한 물고기가 서식하고 여울지대가 많아 견지낚시터로 유명하다.


그러나 1999년 잠실대교부터 팔당댐까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
되어 낚시가 금지되었다. 인근에 팔당댐과 팔당유원지 등이 있으며 한강 줄기를 따라 유원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한강다리 순서[강물이 흐르는 순서대로]

[최동단]팔당대교 - 미사대교 - 강동대교 - [암사대교 예정] - 광진교 - 천호대교 - 올림픽대교 - 잠실철교 -잠실대교 -청담대교 - 영동대교 - 성수대교 - 동호대교 - 한남대교 - 반포대교 - 동작대교 - 한강대교 - 한강철교 - 원효대교 -마포대교 - 서강대교 - 당산철교 - 양화대교 - [월드컵대교예정] - 성산대교 - 가양대교 - 방화대교 - 행주대교 -김포대교 - 일산대교[최서단]


□한강다리 순서 [최초 준공 순서대로]

한강철교[1900] - 한강대교[1917] - 광진교[1936] -양화대교[1965] - 한남대교[1969] - 마포대교[1970] -

잠실대교[1972] - 영동대교[1973] - 천호대교[1976] -행주대교[1978] - 성수대교[1979] - 잠실철교[1979] -성산대교[1980] - 원효대교[1981] - 반포대교[1982] -당산철교[1983] - 동작대교[1984] - 동호대교[1984] -올림픽대교[1990] - 강동대교[1991] - 팔당대교[1995] -김포대교[1997] - 서강대교[1999] - 방화대교[2000] -청담대교[2001] - 가양대교[2002] - 일산대교[2008] -미사대교[2009] - 암사대교[2011 예정] - 월드컵대교[2015 예정]


※ 1978年 준공된 행주대교는 폐쇄되고, 1995年에 新행주대교가
건설되어짐

고양시와 김포시를 잇는 최서단 일산대교부터 하남시와 남양주시
를 잇는 최동단 팔당대교 사이에 현재 존재하는 한강다리는 이렇게 총 28개 다리가 있다

.
2011年 준공을 목표로 구리-암사대교가 시공중에 있으며 이번 월드컵대교에 이르기까지 한강에 놓여지는 다리는 점차 늘어
나고 있다. 앞으로는 어디에 어떤 이름으로 다리가 생길지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상상이 될 것 같다.
-from : 국토해양부 '행복누리' 블로그-

 

첫 한강대교는 노들섬과 연결되어 있다.한강대교 외에도 서강대교는 밤섬과 양화대교는 선유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강대교와 양화대교 사이에는 카페형 전망대가 조성되어서 최근에는 연인들끼리 자주 찾는 명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강대교 야경 - 이하출처 : 서울시 건설안전본부

 

■서울의 지명 이야기

양재동(良才洞) 지명 유래

서울 서초구 양재동은 조선조 때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이 있었던 곳으로 종6품 찰방이 있어 그 밑에 12개의 작은 역을 두고 관원에게 말과 숙소를 제공했던 곳이다.

 

양재역을 말죽거리라고도 하였는데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침범하자 인조는 황황히 한양을 빠져 나와 충청도 공주로 피난케 되었다. 도성을 벗어난 임금 일행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허기와 갈증에 지쳐 있었다. 그러자 이곳에 사는 유생들이 급히 팥죽을 쑤어 바치니임금은 말에서 내릴 틈도 없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부랴부랴 떠났다 해서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이야기는 한양 도성에서 이곳까지는 한나절 거리로 지방에서 한양에 도달하려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말의 먹이인 말죽을 먹이는 곳이라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양재동(良才洞)이라는 지명은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재동은 조선 명종 때 벽서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종이 갑자기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그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여 정권을 잡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래서 이로 인한 폐단도 많았는데 이곳 양재역 벽에 붉은 글씨로 "여자가 임금 위에 있고 간신이 그 아래서 국권을 농락하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랴!"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문정왕후는 대로하여 여러 선비를 잡아죽이고 당대의 명현 수십 명을 귀양 보내는 등 이른바 정미사화를 일으켰다.

 

이것을 역사는 `양재역 벽서사옥`이라고 하였다

 

●이태원 지명 유래

서울 용산구 이태원은 서울 속의 외국인 거리다. 점포마다 걸려있는 간판은 모두 외래어이고 오고 가는 행인도 내국인보다는 외국인이 더 많다. 한강과 가까운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 부대가 주둔하기에 적합한 장소인가 보다. 지금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여승인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운종사(雲鍾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왜적이 주둔하면서 여승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조정은 왜군에게 겁탈 당해 낳은 아이들 문제로 고심하였다. 마침내 조정에서는 운종사 여승을 포함하여 왜적의 아이를 낳은 부녀자들을 벌하지 않기로 하고 이곳에 보육원을 지어 그 아이들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때부터 이곳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조선에 귀화하여 여기에 모여 살았으므로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이태원(梨泰院)으로 쓰인 것은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 재배했기 때문에 바뀌게 되었다. <참고자료 : 600년 서울 땅이름 이야기, 김기빈 지음, 살림터 

 

 ●왕십리(往十里) 전설

조선 개국 초기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지금의 왕십리 부근에서 지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한 늙은이가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이 소가 미련하기는 꼭 무학과 같구나.바른 곳을 놔두고 엉뚱한 곳을 보다니..."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무학이 그 노인에게 예를 갖추고 도읍지의 자리를 물었더니 채찍으로 서북쪽을 가리키며 십리를 더 가라고 하였다. 그 말에 따라서 지금의 경복궁 자리를 정하였는데 왕십리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 늙은이는 도선이 현신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서울은 설(雪)울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새로운 궁궐(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쌓으려 할 때

어디서 어디까지 쌓아야 할지 난감했다. 어는 날 큰 눈이 내려 살펴보니 눈이 하나의 선을 따라 선 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선 안쪽에는 눈이 없었다.

 

이 태조는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고 필시 하늘에서 내린 뜻이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도록 하였다. 도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동대문에 있는 낙산을 연결하는 것으로 둘레가 40리(약17Km)에 이른다. 사람들은 눈이 한양의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도성을 눈설(雪)자를 써서 `설(雪)울`이라고 불렀고 설울이 서울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서울이 유래 된 것이다. 

 

●송파구 오금동과 마천동 이야기

서울 송파구에는 마천동(馬天洞)과 오금동(梧琴洞)이 있으며, 부근에는 마산(馬山), 투구봉 등이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임금 일행이 이곳을 황급히 지나다가 백토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게 되었는데 궁궐에서만 생활하던 임금인지라 갑자기 먼길을 달리다 보니 오금이 아파 "아이구 내 오금이야."하고 한탄했다하여 이곳을 오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마천동은  이곳에 있는 마산(천마산)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이 오금동 개롱리에서 농을 열어 갑옷을 입고 천마산에서 나온 용마를 타고 거여동에 있는 투구봉에서 투구를 쓰고 출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개롱리에는 임경업 장군의 증조부 무덤이 있는데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장군의 증조부가 암룡이 변신한 여자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들어간 탓으로

후손 중에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도봉구 번동(樊洞)과 종로구 예이동(刈李洞) 이야기

◐서울 도봉구에 번동이 있고 종로구 효제동에 예이동 또는 종이촌(種李村)이라는 옛 땅이름이 있다.

번동은 본래 벌리(伐李)라 부르던 곳이라 한다.이 이름은 고려 말엽 한양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므로

이씨(李氏)가 일어날 징조라는 참언이 유행하자 이곳에 벌리사(伐李司)를 두어 이를 베어 내게 하였으므로

벌리라고 불렀다가 뒤에 번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종로구 효제동에 있었던 예이동은 종이촌이라고도 하였는데 이씨가 고려를 뒤엎고 한양에 도읍을 정할 것이라는 참설이 나돌자 고려 조정에서 이것을 막기 위해 한양 동쪽에 오얏나무를 많이 심었다가 무성하게 자라면 베어버렸다. 그리고 지명도 오얏나무를 밴다는 뜻으로 예이동(刈李洞)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자 이곳이 이씨왕조를 세운 곳이라는 뜻에서 종이촌(種李村)이라 하였다 한다

 

●남태령(南泰嶺) 지명 이야기

서울 사당동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남태령은 옛 문헌에 호현(狐峴, 여우고개) 또는 엽시현(葉屍峴)이라 하였다. 옛날 길손이 줄지어 넘나들던 산길의의 본래 이름이 여우고개였다.

 

조선시대에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가 불우하게 일생을 마친 것을 슬퍼하여 수원에 있는 능에 수시로 참배를 다녔다. 정조가 수원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는데 한 길은 동작나루를 건너 이 고개를 넘어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다른 한 길은 노량진에서 시흥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이르는 길이었다.

 

정조는 처음 한 동안은 과천을 거치는 길을 택했으나 사도세자를 죽게 했던 영의정 김상로가 과천 태생으로

그의 무덤을 거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시흥 안양을 거치는 길로 노정을 바꾸었다. 어느 때인가 정조가 과천 길을 택하여 수원으로 향하다가 이 고개에서 쉬어 가던 중 시종들에게 고개 이름을 물었다. 이때 과천현 이방이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자 본래 이 고개 이름이 여우고개인 줄 알고 있었던 정조는 거짓말을 한 이방을 나무라고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이방이"본래 여우고개라 하지만 임금께 요망스러운 이름을 댈 수가 없어 꾸며댄 이름으로, 도성에서 남쪽으로 가다가 첫 번째 큰 고개이므로 남태령(南泰嶺)이라 한 것이옵니다."하고 아뢰었다.정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그때부터 여우고개를 남태령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와우(臥牛) 아파트 붕괴 사건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와우산(臥牛山)이 있다. 옛날에는 와우산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 소리와 농바위 부근의 저녁 짓는 연기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서호팔경(西湖八景)으로 꼽혔던 곳이다. 와우산은 서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소가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이름 지어진 것이다.

 

1970년 소의 등허리 부분에 와우아파트가 들어섰다. 무거운 짐을 지게 된 소가 몸을 흔들자 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 33명의 사망자와 4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아직도 부실공사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지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와우는 집이 무너진다는 뜻도 된다.

 

한국전쟁 때 국군과 인민군 사이의 전투에서 2000명의 사상자를 낸 격전지였다니 산을 다치게 하면

결국 사람이 다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 朝鮮八道의 地理的 特性

우리나라에는 조선초기에 이미 八道 라는 行政區域이 있어 그 후 약 5백 년간 이 制度가 존속되어왔다.

즉 경기도(京畿道),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 강원도(江原道),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8도가 그것이다.

 

8道의 名稱의 根源을 살펴보면

경기도(京畿道), 서울() 宮闕 周圍 5百里 以內의 地域을 뜻하는 기()를 합쳐 京畿라 하였고,

충청도(忠淸道)는 그 代表的인 고을인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있어 忠淸으로,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가 있어 全羅로,

경상도(慶尙道)는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를 慶尙으로,

강원도(江原道)는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에서 江原이 되었고,

황해도(黃海道)는 황주(黃州)와 해주(海州)를 指稱하여 黃海로,

평안도(平安道)는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에서 平安으로,

함경도(咸鏡道)는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에서 咸鏡으로

各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八道라고는 하지만 원래 京畿에는 도() 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정칙(正則)이고 京畿道에는 이칭(異稱) 없다.

 

나머지 7도에 대한 異稱과 基準은 다음과 같다.

호서(湖西)는 忠淸道로서 忠北 제천 의림지호(義林池湖)서쪽이라는 뜻이고,

호남(湖南)은 全羅道로서 全北 김제 벽골제호(碧骨堤湖)의 남쪽이라는 뜻이며,

영남(嶺南)은 경상도로서 조령(鳥嶺) 죽령(竹嶺)의 남쪽을 말함이요,  

강원도를 영동(嶺東) 관동(關東)이라 함은 大關嶺 동쪽이라는 뜻이고,

해서(海西)는 黃海道로서 京畿海의 서쪽이라는 뜻이요,

관북(關北)咸鏡道로서 철령관(鐵嶺關) 북쪽을 말함이요,

관서(關西)는 平安道로서 鐵嶺關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朝鮮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조선팔도 사람을 評하라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鄭道傳은

京畿道는 경중미인(鏡中美人)이며,

忠淸道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이고,

全羅道는 풍전세류(風前細柳)이며,

慶尙道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고,

江原道는 암하노불(岩下老佛)이며,

黃海道는 춘파투석(春波投石)이고,

平安道는 산림맹호(山林猛虎) 입니다.

라고 評하였다 한다.

 

이 말을 풀어보면,

京畿道는 거울에 비친 美人과 같고,

忠淸道는 맑은 바람속 밝은 달과 같으며,

全羅道는 바람 앞의 가는 버들과 같으며,

慶尙道는 큰 산의 험한 고개와 같으며,

江原道는 바위 아래 늙은 부처님과 같고,

黃海道는 봄 물결에 돌을 던지는 듯하고,

平安道는 숲 속의 사나운 호랑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李成桂의 出身地인 咸鏡道에 대해서는 評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太祖는 아무 말 이라도 좋으니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였다. 鄭道傳은 머뭇거리며 “咸鏡道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이옵니다”라고 아뢰었고,

 

太祖 李成桂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벌개졌다고 하는데, 눈치 빠른 鄭道傳이 이어 말하길 “그러하오나 咸鏡道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올시다”하니 그제야 용안에 喜色이 만연해졌다고 한다.

 

이전투구(泥田鬪狗)란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猛烈하고 齷齪(악착)스럽다는 뜻으로 淺薄(천박)하다는 意味를 內包하며, 석전경우(石田耕牛)란 자갈밭을 가는 소라는 뜻으로 부지런하고 忍耐心이 强한 性格이라는 좋은 意味를 가지고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 '택리지(擇里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의 立地條件으로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4가지를 들었다. 무엇으로서 人心을 말할 것인가?

 

孔子께서 "마을의 風俗이 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곳을 가려서 살지 아니하면 어찌 智慧롭다 하리오." 하시었고,

 

옛날. 孟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孟母三遷)

아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사람이 살 고장을 찾을 때에 그 착한 風俗을 가리지 않으면 비단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子孫에게도 해가 있어서 반드시 좋지 못한 風俗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 그러니 살 곳을 가리는데, 그 땅의 세상 풍속을 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 八道 가운데

平安道 人心은 순후(醇厚)하여서 제일이요, 다음은 질실(質實) 慶尙道 風俗이다.

咸鏡道는 오랑캐와 接境하여 百姓이 모두 굳세고 사나우며,

黃海道는 山水가 險惡한 까닭으로 百姓들이 거의가 사납고 모질다.

江原道는 산골짜기 百姓으로 몹시 不遜하고,

全羅道는 오로지 狡猾(교활)함을 崇尙하여 그른 일에 움직이기 쉽다.

京畿道는 都城 밖의 야읍(野邑)은 百姓들의 財物이 시들어 ()하였고,

忠淸道는 오로지 세도(勢道)와 재리(財利)에만 따른다.

라고들 한다.

 

■ 우리나라 각 지방의 명칭별 설명

경향(京鄕)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서울과 지방을 뜻하는데, 결과적으로 한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 된다.  여기서  ‘경(京)’이란 일국의 수도, 서울을 말하기도 하고, 우리가 셀 수 있는 숫자의 끝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향(鄕)’이란 본래 시골을 나타내면서 성(城)이나 진(鎭) 이외의 땅을 말하지만, 중국에서는 향이 지방의 작은 행정구역으로 사용되어 오면서 그 범위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였다. 어쨌든 우리의 봉건왕조시대에는 ‘향’이 서울을 제외한 지방을 뜻하였으며, 또 고향이라는 뜻으로 향토나 향수와 같은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근래에 젊은 사학자들 사이에 「향토사(鄕土史)」라는 말 대신 「지역사(地域史)」 또는 지방사(地方史)」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향’이라는 용어가 시골스러움, 저개발과 낙후성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므로 지역균형발전의 차원에서 향토사 → 지역사가 더 지방화시대에 부합된다고 믿는 것 같다.

 

그 점에 대하여 필자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있기는 하지만, 향을 지역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옛 것, 고향다움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단순히 개발과 변화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아서 한 가닥 아픔이 남는다.

 

오늘날 세상은 빠르게 「지방화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 중앙정부의 권한이 지방으로 대폭 이양되고, 지방자치와 지방분권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방균형발전의 욕구도 더욱 거세어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지방 형성은 조선의 8도 체제에 의하여 지금의 지방제도가 그 골격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물론 신라의 9주 5소경이나 그 이전과 이후에도 나름대로의 지방제도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지방명칭은 이 때를 기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 지방이란 어떤 곳에 한 가옥이 들어서고, 그 주위에 취락이 형성되어 마을이 생기면서 시작된다.  마을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고을이 모여 지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만찬가지로 향토사가 모여 지방사가 되고, 지방사의 총화가 곧 한 나라의 역사가 된다. 이런 확산과정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방 명칭을 바로 아는 것 자체가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지방명칭의 유래와 사용시기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8도의 지방명칭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만들어진 이름들이다.  그러나 그 지역의 범위까지 확정된 것은 조선 태종 - 세종 때 서북방면과 동북방면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 두만강 일대를 우리 강토로 회복한 이후부터이며 그 시기는 대략 1500년대 초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00道」라고 할 때의 ‘도(道)’는 “00방면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으로서 원래는 조선시대 역을 관장하는 찰방의 관직 앞에 붙어있었던 명칭과 비슷한데, 조선시대의 광역지방명칭으로 이런 체제를 따르게 된 것 같다.

 

가. 경기도(京畿道) :  

‘경기’란 ‘서울을 둘러싼 그 문지방’이라는 뜻이다. 곧 도읍지의 주변지역을 말한다.  ‘경기’라는 이름은 1018년(고려 현종 9)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충청도의 북부 일부가 들락날락하였으나 대체로 경기좌도는 한강이남 지역, 경기우도는 한강 이북지역이 해당되었다.  (좌.우도는 서열상 좌도가 먼저이다.) 관찰사는 처음 수원에 주재하였다가 뒤에 광주(廣州)로 옮겼으며, 감영을 기영(畿營), 감사(관찰사)를 기백(畿伯)이라 부른 것도 모두 경기의 ‘기’를 붙인 것이다.

 

나. 강원도(江原道) :

‘강원’이란 이름은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의 머리 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강원지방은 삭방도, 춘주도, 동주도, 연해명주도, 교주도 등의 이름으로 불렀으며, 1395년(조선 태조 4) ‘강원’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  관찰사는 원주에 주재하였으므로 감영을 원영(原營), 감사를 동백(東伯)이라 불렀는데, ‘동’은 관동의 ‘동(東)’자를 붙인 것이다.

 

다. 충청도(忠淸道) :

‘충청’이라는 이름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충청’은 1106년(고려 예종 원년) ‘양광충청주도’라고 할 때 최초로 ‘충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대체로 충청좌도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청우도는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 해당된다. ( 좌.우도는 모두 서울의 궁궐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의 방향임) 관찰사의 영은 공주에 두었으므로 감영을 금영(錦營), 감사를 금백(錦伯)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모두 금강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라. 전라도(全羅道) :

‘전라’란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합성지명이다. 1018년(고려 현종 9) 처음으로 ‘전라도’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그전에는 강남도, 해양도, 전광도라고도 불렀다. 1407년(조선 태종 7)군사 행정상 편의에 의하여 좌, 우도로 나누었는데, 동쪽 산악지대를 좌도, 서쪽 평야지대를 우도라 하였다.  관찰사는 전주에 두었으므로 감영을 완영(完營), 감사를 완백(完伯)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완’은 옛 이름 완산주의 머리글자를 취한 것이다.

 

마. 경상도(慶尙道) :

‘경상’이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1106년(고려 예종 원년) 경상진주도라고 할 때 처음 ‘경상’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동남도, 영남도, 산남도, 경상진주도 등으로 불렀으며, 1314년(충숙왕 원년) 경상도로 되었고, 1407년(조선 태종 7) 좌, 우도로 나누었는데, 낙동강 동쪽을 좌도, 서쪽을 우도라 하였다.  관찰사는 대구에 주재하였으며, 그 감영을 영영(嶺營), 감사를 영백(嶺伯)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영’은 지금 영남의 ‘영(嶺)’과 같이 고개를 뜻하는 이름이다.

 

바. 황해도(黃海道) :

‘황해’라는 이름은 황주(黃州)와 해주(海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본래 관내도, 서해도, 풍해도, 황연도라고도 하였으며, 1407년(태종 7) 황해도라 하였고,  그해에 좌,우도로 나누었다.  여기서 좌도는 동쪽, 우도는 서쪽 지방을 뜻하였다. 관찰사는 해주에 있었으므로 감영을 해영(海營), 감사를 해백(海伯)이라 불렀다.

 

사. 평안도(平安道) :

‘평안’은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의 머리 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본래 패서도, 북계, 서북면, 관서라고도 불렀으며, 1413년(태종 14) 평안도로 고친 것이다.  지리적 위치에 따라 동도와 서도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관찰사는 평양에 있었으므로 감영을 패영(浿營) 또는 유영(柳營) 혹은 기영(箕營)이라 하였고, 감사를 기백(箕伯)이라 불렀다.  여기서 패영의 ‘패(浿)’는 패수, 즉 대동강을 말하며, 유영의 ‘유(柳)’는 옛 평양의 이름이 유경(柳京)이었기 때문이다. 또 기영의 ‘기(箕)’는 이곳이 기자의 옛 터전이기 때문이다.  

 

아. 함경도(咸鏡道) :

‘함경’이란 이름은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그전에는 함길도, 삭방도, 동계, 동북면, 영길도 등으로 불렀다.  1509년(중종 4) 함흥부의 감영을 회복할 때 함경도로 고쳤다.  관찰사가 함흥에 주둔하였으므로 감영을 함영(咸營), 감사를 북백(北伯)이라 불렀다. 북백의 ‘북’은 관북의 북을 취한 것이다.

 

○ 지방 명칭의 별칭(또 다른 이름들)

가. 영남(嶺南) :

경상도의 별칭으로 교남(嶠南)이라고도 불렀다.  영남의 ‘영’은 고개를 뜻하며 조령(鳥嶺), 죽령(竹嶺), 추풍령(秋風嶺) 등의 고개가 그 경계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고개 중에서도 대표적인 고개가 조령(제 1관문 - 제 3관문이 있음)이 되므로 조령이남을 영남이라 한다.  교남은 영남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나. 호남(湖南) :

전라도의 별칭으로 금강하류 남쪽을 뜻한다.  대개 호남의 ‘호(湖)’자를 호수를 뜻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김제 벽골제 이남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금강의 옛 이름이 호강(湖江)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호’는 조선시대에 강변이나 바닷가에도 흔하게 붙여져 있었으며, 서울의 동호(東湖,지금 동호대교 부근의 한강), 마호(麻湖, 지금 마포 앞 한강)와 같은 이름들이 많다.  또 고려 때에도 호남을 강남도(江南道)라 불렀는데, 이것도 역시 금강의 남쪽을 뜻한다.

 

다. 호서(湖西) :

충청도의 별칭으로 호중(湖中)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도 ‘호(湖)’를 제천의 의림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금강 상류의 강변에는 호서루(湖西樓)니, 금호루(錦湖樓)니 하는 누정들이 있고, 금강의 옛 이름이 호강으로서 이 강이 충청지방을 휘돌아 흐르기 때문이다.

 

라. 기전(畿甸) :

경기도의 별칭이며, 기중(畿中), 또는 적기(赤畿)라고도 한다. ‘기(畿)’는 원래 중국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5백 리 이내의 땅을 말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서울을 둘러싼 땅, 그 주변지역을 말한다.  곧 ‘기’가 문지방, 뜰, 또는 안마당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 관동(關東)과 관서(關西), 영동(嶺東)과 영서(嶺西) :

강원도의 별칭이며, 관동, 관서의 ‘관(關)’은 대관령이 아닌 철령관(鐵嶺關)의 동쪽과 서쪽을 말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등) 한편 영동과 영서는 대관령 서쪽을 뜻하는 이름이므로 이들이 근래에 서로 혼용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관동은 무방하되, 관서는 평안도를 말하므로 대관령 서쪽의 강원도 지방은 ‘영서’라는 이름으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바. 해서(海西) :

황해도의 별칭이며, 해서의 ‘해(海)’가 해주라는 설,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라는 설이 있다.  당시의 정황이나 벽란도진의 성세를 감안할  때  예성강 하구설이 더 무게를 갖는다.

 

사. 관서(關西) :

평안도 지방의 별칭으로서 철령관의 서쪽을 뜻하는 이름이다.  강원도 지방의 관동, 관서와 혼동하기 쉬우나 관서 = 평안도는 문헌상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이름이다.

 

아. 관북(關北) :

함경도의 별칭으로서 철령관의 북쪽지방이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 최고의 산악지대를 이루는 북쪽지방으로서 철령위 문제, 여진족 침입 문제 등 영토분쟁으로 늘 말썽이 된 곳이다.  그러기에 철령을 중심으로 관서, 관북, 관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 그 외에 사용된 광역지명(廣域地名) 등

앞에서 소개한 우리 나라 8도의 명칭과 별칭 이외에도 왕실이나 조정에서 사용된 지역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을 뽑아서 여기에 풀어보았다.

 

가. 상사도(上四道) :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위(북)에 있는 4개 지방을 말한다.  곧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이다.

 

나. 하삼도(下三道) 또는 삼남(三南)지방 :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이들은 모두 궁성의 남쪽에 위치하므로 하삼남 또는 삼남지방이라고도 하였다.

 

다. 기호(畿湖)지방 :

경기도지방과 호서(충청도)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라. 영호남(嶺湖南)지방 :

경상도(영남)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마. 양호(兩湖)지방 :

충청도(호서)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바. 양남(兩南)지방 :

경상도(영남)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사. 양북(兩北)지방 :

강원도지방과 함경도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아. 양서(兩西)지방 :

황해도(해서)지방과 평안도(관서)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 기타 청남(淸南) 청북(淸北)지방 :

평안도를 나누어 청천강 이남을 청남, 청천강 이북을 청북지방이라 하였다.

 

위의 팔도 지방 명칭 중에서 합성지명(合成地名)을 만들기 위하여 대표적인 고을을 선택하는 방법은, 대개 계수관(界首官)이라 하여 그 도의 경계지역 내에서 가장 품계가 높은 관리가 주둔하는 고을의 명칭을 택하여 그 명칭을 붙였다.

 

이 경우에 두 고을 중에서 어느 고을 이름을 먼저 붙이느냐(앞 자리에)하는 문제는 시대에 따라 바뀌기도 하였지만 대개 두 고을 중 큰 고을 이름을 앞에 붙이거나 역사가 오래 된 고을이름을 앞에 붙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왔다.

 

■ 간월암

간월암(看月庵)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암자이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시에는 뭍과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느껴진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뀌며, 주위 자연경관과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16-11 간월암은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송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위에 떠있는 암자처럼 느껴진다.

 

또한 간월도에서 생산되는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있는데 이 행사는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청결한 아낙네들이 소복(흰옷)을 입고 마을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하여 굴탑 앞에 도착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 풍년 기원제를 지내며 채취한 굴은 관광객에게 시식도 시켜준다

 

 

■ 여의도(너 汝에 어조사 矣)란 말뜻

여러분 이곳 한강 선착장에 오기 위해 지하철 여의나루역에 내리셨죠? 저기 보이는 여의도가 당초 무슨 뜻인지 아세요? 너 여(汝), 어조사 의(矣) 자를 써서 '너나 가져라'라는 의미였지요." 역사학자이자 스테디셀러 '서울은 깊다'의 저자인 전우용 박사의 설명에 청중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선시대 여의도와 밤섬은 강을 왕래하는 배를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곳으로 쓰였다. 국립중앙도서관·조선일보·교보문고가 공동주최하는 '길 위의 인문학'이 14일 '인문학의 젖줄, 한강의 섬을 걷다'를 주제로 2012년 첫 답사를 시작했다. 인문학의 여정에 참가한 100여명은 300석 규모의 전용 크루즈를 타고 여의도 선착장~노들섬~서래섬~난지도 선착장~구암공원~선유도로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선상 강의에 흠뻑 젖어들었다.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강원·충청·경기도를 지나며 어엿한 강을 이루고, 이 강이 금강산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강과 합치는 곳이 양수리(兩水里)다. 여기서부터 남한강과 북한강의 구분이 없어져 그냥 '한강'이 된다. "한반도 제일의 기품과 위엄을 갖춘 이 큰 강은 끝으로 교하(交河)에서 임진강과 만나 강화도 앞까지 달린 뒤 바다가 됩니다."

 

지금의 서울 앞에 도달한 한강물은 북쪽에 우뚝 솟은 북한산, 옛 이름 한산(漢山)을 마주하게 된다. 이 땅에 지리도참설이 도입된 이래 산의 남쪽·강의 북쪽, 즉 산남수북지(山南水北地)를 '양지(陽地)'라 불러왔다. '한양(漢陽)'은 '한산 이남, 한수 이북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 땅에 한양군이라는 이름이 처음 붙은 것은 풍수지리설 도입 초기인 8세기의 일이지요. 이후 한반도 내 많은 지명이 풍수지리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으나 이토록 분명하게 '양지'임을 표시한 이름의 도시는 한양 말고는 없습니다."

 

모든 지명은 다 연원이 있었다. 뽕나무를 기른 잠실(蠶室), 겨울철에 얼음을 캐어 저장하는 빙고(氷庫), 권세가들이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은 압구정·망원정(亭). 뱃길 주변에는 사람과 물자를 싣고 부리기 위한 나루가 만들어졌다. 모래밭이 넓게 펼쳐 있어 너른나루·광진 등으로 불린 광나루, 백로가 많이 날아와 '노들'이란 이름이 붙은 노들나루(노량진), 한강 상류에서 반입되는 모든 화물의 집산지였던 송파나루, 바다를 거쳐 들어오는 해산물의 집산지 마포나루….

 

선유도를 둘러보면서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로부터 섬의 특별한 조경에 대해 설명을 듣기도 했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뜻의 선유도(仙遊島) 공원은 양화대교 아래 선유 정수장 시설을 활용한 국내 최초의 재활용 생태공원이다. 본래 섬이 아니라 산(해발 40m 선유봉)이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의 큰 홍수 이후 한강변에 제방을 쌓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산이 섬으로 변한다.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을 뜯어내고 기둥만을 남겨 담쟁이로 뒤덮인 '녹색 기둥의 정원', 약품 침전지를 재활용한 '시간의 정원' 등에 대해 배 교수는 "벽과 기둥 등 건물 잔해가 주는 쓸쓸함과 쉼 없이 부는 강바람이 자아내는 특유의 모호한 분위기가 '숭고미(崇高美)'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선유도 내 한강전시관에서 '한강의 조선 미술'에 대해 강연한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진경산수화 거장 겸재 정선(1676~1759)의 '선유봉'과 한강 서편의 파산(巴山)·난지도(蘭芝島) 주변을 표현한 '소악후월(小岳候月)' 등의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적막이 감도는 배경 묘사와 적절한 여백 설정을 통해 시운(詩韻) 넘치는 풍경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기 성남여중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미국인 교사 엘리자베스 아폴로니오(24)씨는 "아시아 역사와 문화에 특히 관심이 많아 참가했다"면서 "하나의 강(한강) 주변에 이렇게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가 많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한강에 대한 어린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차 참가했다는 박승규(46) 춘천교대 사회과 교수는 "여러 섬에 내려 직접 걸어 볼 수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조선일보 길위의 인문학

 

■ 우리 동네 이름, 이런 유래였어?

우리가 사는 동네 지명의 대부분은 역사적 사건, 지형의 특성, 특산물, 인물의 행적 등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예컨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은 조선 세조 때 문신 한명회의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이곳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압구정'은 한명회의 호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대가 변해도 지명에선 여전히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조선일보

 

■ 우리나라에서 가장 짧은 지명은 어디에 남아있을까

‘뙡’,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

이 낯선 단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강원도 정선군이 국내에서 가장 짧고, 가장 긴 지명(地名)이라고 주장한 단어다. 정선군 임계면사무소가 정선아리랑연구소에 의뢰해 지난 7일 발간한 ‘정선 임계면 지명유래’에 따르면, ‘뙡’이란 지명은 뙈기밭(큰 토지에 딸린 조그마한 밭)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지역의 특징을 살려 만들어진 이름이다.

 

예전에 ‘뙡’이라 일컬어졌던 지역은 현재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에 있다. ‘뙡’이란 지명은 일제 강점기 이후 마을 이름이 도전리로 바뀌며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으나, 고령 거주민들은 아직 ‘뙡’이라는 지명을 기억한다고 정선군 측은 전했다.

또 국내에서 가장 긴 지명인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와 두 번째로 긴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도 모두 정선에 있다고 정선군은 소개했다.

무려 13자에 이르는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정선군 북평면 숙암리)라는 지명은 큰 바위가 많은 험한 곳의 지역 특징을 따 만들어졌다. 바위가 많아 두 팔을 벌려 바위를 안고 돌고(안돌이), 등을 지고 돌고(지돌이), 다람쥐도(다래미), 한숨을 쉬는(한숨), 바윗길(바우)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또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지명으로 알려진 ‘김달삼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은 제주도 출신 제주인민해방군 소속 남로당 지구당 총책이던 김달삼이 이 근처에서 잡혀 목이 잘렸다하여 이렇게 이름 지어졌다.

 

이 같은 재밌는 지명들은 정선아리랑연구소 진용선 소장이 지난 1994년부터 7년여 동안 임계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250여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조사, ‘정선 임계면 지명유래’라는 책으로 엮어 소개했다. 이 책에는 12개 마을과 골짜기, 산, 물길, 바위 등 900여곳의 지명에 대한 유래와 이름 변천과정, 지역의 인문지리적 특성 등이 수록됐다.

 

임계면 유경수 면장은 “이렇게 정겨운 지명에는 지역의 문화적 상징과 특징을 담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며 “(이번 지명 조사는) 2014년 도로명 주소의 전면 시행을 앞두고 마을의 역사와 삶의 지혜가 담긴 지명을 오래도록 후손들에게 남기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 제주도를 대표하는 자연 경관지

제주도는 180만년 전부터 1천년 전까지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섬으로, 화산지형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을 계기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세계자연유산 등으로 널리 알려진 한라산, 성산일출봉, 용머리 등 제주도의 대표 경관지를 소개한다.

 

▲한라산국립공원

한라산국립공원은 백록담을 중심으로 총면적이 153.332㎢다. 이 가운데 91.654㎢가 1966년 10월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182호)으로 지정됐다. 제주도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한라산은 수십만년 전에서 수천년 전까지의 화산활동으로 생겨났다.

 

해발 1천950m로 남한에서 가장 높고 북한의 백두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영산(靈山)으로 불린다. 돌출한 정상부 바깥 둘레는 대부분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뤄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정상부 안에는 깊이 108m, 둘레 1천720m의 화구호인 백록담이 있다. 한라산 서남쪽 기슭 해발 1천400여m에 위치한 영실기암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이 우거져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국립공원에는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화산체인 40여개의 오름이 산재하고, 백록담을 비롯해 물장올, 사라오름, 소백록담, 동수악, 어승생악 등의 산정호수가 있다. 한라산 동북사면 성판악 등산로 근처에 있는 사라오름(해발 1천324m)의 산정호수는 오름 산정호수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고 경관도 뛰어나다. 식생은 대체로 해발 600m까지는 난대 상록활엽수림대, 600∼1천400m는 온대 낙엽활엽수림대, 1천400∼1천950m는 아한대 또는 아고산대의 다양한 식물 분포대를 이룬다.

 

정상 부근에는 우리나라 특산종인 구상나무가 널리 분포하며 초원지대나 암벽지대에는 시로미, 암매, 구름떡쑥 등 다양한 희귀식물이 자라고 있다. 식물 1천900여종, 곤충 2천500여종이 분포하고, 포유동물은 노루, 오소리, 제주족제비, 박쥐류 등이 서식한다.

 

조류는 매와 황조롱이, 검독수리, 독수리, 새매, 소쩍새, 큰소쩍새 등 19종이 관찰되고 있다. 한라산은 2007년 6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데 이어 2010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은 예부터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 뜨는 광경이 아름다워 ’영주십경(瀛州十景)’에서 제1경으로 꼽혔다. 전형적인 수성화산으로, 높이는 해발 182m다. 원래는 섬이었지만 제주도 본섬과의 사이에 모래와 자갈이 쌓여 연결됐다.

 

정상에는 지름 600m, 바닥면의 높이가 해발 90m인 거대한 분화구가 있다. 사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커다란 암석이 분화구의 사방을 둘러싸 마치 옛 성처럼 웅장한 경관을 자랑한다. 2000년 천연기념물 제420호로 지정됐으며 한라산과 함께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이 됐다.

 

▲만장굴

거문오름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땅 위를 흐르다 만들어진 용암동굴이다. 총 길이 7천400m, 최대 높이 30m, 최대 너비 23m로 용암동굴로는 제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좋다. 일부 구간은 상위동굴과 하위동굴로 나뉘는 다층 구조로 돼 있다. 3개의 입구가 있고 제2입구에서 용암이 흘렀던 상류 방향으로 1㎞ 정도만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내부는 용암이 흐를 당시 용암 수위를 짐작할 수 있는 용암 유선이 이어져 있고 곳곳에 기묘한 형상의 용암 종유석과 석주 등이 있어 지하 궁전을 연상케 한다. 정교하게 빚은 조각품 같은 돌거북은 제주도 형상과 비슷해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동굴 온도는 연중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11∼21도를 유지해 피서지로도 그만이다. 천연기념물(제98호)이자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이다.

 

▲대포동 해안 주상절리 

서귀포시 대포동에서 중문동 사이 해안 약 2㎞에 걸쳐있는 주상절리대를 말한다. 25만년∼14만년 전 인근에 있는 ’녹하지악’이란 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이 해안으로 흘러와 급격히 굳으면서 생겼다.

 

수직기둥 형태의 주상절리 표면은 4각형에서 7각형까지 다양하나 벌집 모양의 6각형이 대부분이다. 누군가가 일부러 다듬은 듯한 높이 30∼40m의 검붉은 돌기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자연의 위대함과 절묘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파도가 밀려와 돌기둥과 부딪혀 높이 솟구치며 산산이 부서지는 장면은 보기 드문 장관이다. 천연기념물(제443호)이자 세계지질공원이다.

 

▲용머리해안 

산방산 해안에 길이 600여m, 높이 20여m로 펼쳐져 있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 지형이다. 마치 용이 머리를 쳐들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형상을 닮았다 해서 ’용머리’란 이름이 붙여졌다. 산방산과 달리 수성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응회환의 일부이다.

 

여러 개의 화구에서 분출한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 3개의 화구에서 분출한 화산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른 흔적과 경사를 달리하는 지층을 관찰할 수 있다. 수평으로 쌓여 있는 퇴적층과 수직절리, 해식동굴, 돌게구멍 등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한라산 등과 함께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정방폭포 

한라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정방폭포는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 폭포다. 천지연폭포, 천제연폭포 등과 함께 제주도를 대표하는 3대 폭포다. 높이 23m, 너비 8m이고 해안인 폭포 아래에 있는 깊이 5m의 작은 못이 바다와 이어져 있다. 폭포 양쪽에 수직 암벽이 발달하고 노송이 우거져 예부터 영주십경의 하나로 손꼽을 만큼 경관이 빼어나다.

 

해안에서 다가가면 절벽에서 해안으로 쏟아지는 폭포의 장엄한 광경이 폭포 음과 함께 조화를 이뤄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한다. 기원전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명을 받고 제주에 불로초를 캐러 왔던 서불(徐市. 市는 슬갑 불)이 폭포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절벽에 ’徐市過之’(서불과지: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란 글귀를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008년 명승 제43호로 지정됐다.

 

■ 평양 주민

북한 수도 평양에 거주하는 17세 이상 성인 남녀 210만8032명의 세세한 신상정보가 담긴 평양 주민자료를 주간조선이 입수했다. 최근 북한·중국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대북 정보통을 통해 입수한 평양 주민자료는 지난 2005년 우리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북한 보위부가 작성한 것으로 평양 주민 210만8032명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 개인정보가 기록돼 있다. 이 자료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통계처리 프로그램인 액세스(access) 파일로 작성됐다. 북한 당국이 작성한 주민 행정자료가 통째로 유입돼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평양시 구역별 인구 분포.

 

이 주민자료에 기재된 평양 주민들에 대한 신상정보는 상당히 다양하다. 이름, 생년월일, 주소뿐만 아니라 소속 정당, 고향, 현 주소, 배우자 이름과 결혼 날짜, 직장 및 직위, 혈액형, 외국 국적 소유 여부도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특히 직장 및 직위와 관련해서는 일반 공무원과 의사, 간호원, 청년 근위대원, 로동자(노동자), 농장원, 학생 등으로 세세하게 분류해 놓았다.

 

평양 주민 가운데 군에 입대했거나 군인으로 타 지역에 복무 중인 사람들도 직업란을 통해 구분이 가능하도록 기록돼 있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 일가를 위시해 1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북한 고위층과 평양 이외 지역에서 유입돼 평양에 근무 중인 군인은 등록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것이 이 자료를 건네준 대북 정보통의 전언이다.

 

이 자료에는 등록된 모든 주민에 대해 2004년 9월 9일 공민증을 발급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날짜를 기해 평양 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공민증 갱신 및 신규 발급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 평양시 행정구역도.

 

이 자료에 등록된 평양 주민 210만8032명이 현재의 평양 주민 수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도 불확실하다. 0~17세의 어린이와 청소년의 수가 제외돼 있을 뿐 아니라 약 1만명에 이르는 특수층도 빠져 있다는 것이 이 자료를 주간조선에 건넨 대북 정보통의 설명이다. 평양 밖에서 유입돼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군인들도 등록돼 있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료에 등록돼 있지 않은 평양 거주 인구를 모두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이 자료 작성 당시 평양 인구는 260만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 자료를 건넨 대북 정보통의 분석이다.

 

이 자료에는 지난해 평양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양에서 제외된 기존의 4개 지역 거주민들도 포함돼 있다. 2011년 2월 통일부가 공개한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기존 평양시 행정구역에서 강남구역, 중화구역, 상원구역, 승호구역 등 4개 지역이 제외돼 평양 인구수가 50만명가량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주간조선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 4개 지역 거주 성인(2005년 당시)은 19만7000명 정도로 나타났다. 통일부의 연감과, 주간조선이 입수한 자료의 인구 수가 30만명 가까이 차이 나는 것은, 주간조선 자료에 어린이 인구 수가 빠진 걸 감안해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정보력에 한계가 있는 게 아닌가 추정된다.

 

이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평양의 성인 인구 구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여초(女超) 현상’이다. 평양의 성인 주민 210만여명 중 여성은 122만여명인 데 반해 남성은 87만여명에 불과했다. 성비가 여자 100명에 남자는 71명이었다. 서울의 남녀 성비가 여자 100에 남자 96(2010년 통계청 자료, 만 18세 이상 기준)에 비하면 평양 성인의 성비 불균형은 심각했다. 2010년 기준 서울 시민 중 여성은 420만명, 남성은 400만명 정도다.

 

평양의 남녀 성비가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남자들은 군복무를 위해 평양 밖으로 다수 전출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평양에 거주했던 실향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광복 이후에는 지방으로 떠난 군복무자가 늘어 평양 도심에서는 남성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여초 현상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평양에서 열리는 각종 대형 행사에 동원되는 여성이 많다는 점도 꼽힌다. 북한에서 고위 간부로 있다가 2007년 탈북한 40대 한 남성은 “평양 주민 10명 중 6명 이상은 여성이다. 평양은 주로 간부급이 사는 곳으로, 남성은  평양시 외곽 지역으로 많이 빠져나가는 반면, 여성은 평양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여성이 많아 성비 불균형이 심각했다”고 말했다.

 

평양 성인 인구의 또다른 특징은 평균 나이가 서울보다 많다는  점이다. 이번 자료에서 분석된 17세 이상 평양 거주민의 평균 나이는 47세로, 서울 시민(만 18세 이상) 평균 나이인 44세보다 대략 세 살 많았다. 평양 성인의 평균 나이(47세)가 서울 시민(44세)보다 높게 나온 이유도 여초 현상 때문으로 분석된다.

 

평양 성인 남녀의 평균 결혼연령은 분석 결과 27세로 나타났다. 이는 서울 시민의 평균 결혼연령(초혼 기준)인 30세보다 세 살가량 낮다. 또 평양 성인 중 80% 이상이 기혼자로 등록돼 있어 이 역시 미혼자와 독신자가 급증하고 있는 한국 사회와는 약간 달랐다.

 

미혼자는 전체 주민의 20% 정도인 41만여명 정도로 대부분 결혼 적령기가 되지 않은 27세 미만자들이었다. 이혼한 사람은 전체 평양 성인 인구 중 약 1%에 해당하는 2만1000여명이었다. 복수의 탈북자들은 “최근 북한에서도 가정 불화가 늘면서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덩달아 재혼율도 높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참고로 2010년 기준 서울의 이혼율은 5% 정도였다.

 

평양 성인들은 도심 외곽지역의 베드타운에 밀집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 주민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만경대구역으로, 총 20만9000여명이 살고 있었다. 이 구역에 거주하는 남성은 8만6000여명, 여성은 12만3000여명으로 역시 여성 비율이 상당히 높다.

 

평양의 ‘구역’은 우리 행정구역상 구 단위에 해당한다. 만경대구역 다음으로 많이 사는 곳은 락랑구역으로 19만여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대동강구역(15만8000명), 강동구역, 룡성구역, 평천구역 등이 인구 10만명 이상 거주 지역으로 나타났다.

 

이들 5개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16개 구역은 성인 인구 10만명 이하로 집계됐다. 선교구역 9만9000명, 형제산구역 9만9000명, 서성구역 9만5000명, 모란봉구역 9만1000명, 사동구역 8만8000명, 동대원구역 8만3000명, 대성구역 7만3000명, 보통강구역 7만1000명, 중구역 6만5000명, 순안구역 6만명, 상원구역 5만4000명, 력포구역 5만2000명, 승호구역 5만2000명, 중화구역 4만5000명, 강남구역 4만4000명, 삼석구역 3만7000명 등이다.

 

성인 인구가 가장 적은 은정구역은 성인 거주 인구가 3만명에 불과해 우리의 읍·면 규모였다. 평양 도심과 외곽지역 중에서 남성 인구가 여성 인구를 초과하는 지역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번 자료 분석 결과, 평양 주민들 중 상당수는 평안도, 함경도 등지의 외부 유입 인구로 채워진 것으로 드러났다. 평양이 고향이면서 현재도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은 절반 수준이었다. 충성도가 높은 지방 주민들이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거주하는 성인 중 노동당원은 전체의 3분의 1 이상인 83만명으로 나타났다. 북한 전체 노동당원이 약 20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 노동당원의 41.5%가 평양에 살고 있는 셈이다. 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은 128만명은 예비 노동당원이거나 노동당원의 가족으로 보인다.

 

이들은 여성동맹이나 농업근로자동맹 등 노동당원이 되기 전에 거치는 산하 단체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 주민 중 상대적으로 노동당원이 많다는 것은 거주민들의 사회적 신분이 타 지역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평양 출신의 한 탈북자는 주간조선에 “노동당원이 아니면 평양에 거주하는 게 어렵다. 현재는 당원이 아니더라도 결국 당원이 되는 과정을 밟는 사람들이 많고 그걸 영예로 생각하기 때문에 평양 주민은 대부분 노동당원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자료에 기록된 평양 시민들의 당적을 보면 노동당 이외에도 4개의 정당이 더 존재한다는 점이다. 평양 주민들이 가입한 정당 중 두 번째로 큰 단체가 남로당(남조선노동당)으로 주민 108명이 당원으로 등록돼 있다. 공산당원도 106명이나 됐다.

 

이에 대해 한 탈북자는 “대부분 형식적으로 정당을 존속하기 위해 서류상 분류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의미 있는 숫자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평양 주민 가운데 52명은 청우당원이고 8명의 민주당원도 존재하는 것으로 자료에 기록돼 있었다.

 

평양에는 미국, 일본, 중국, 소련(러시아), 체코, 캐나다, 프랑스, 레바논 등  14개국 국적자 124명도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주민등록 자료에 나온다. 이 중 일본인이 86명으로 가장 많았고 유럽 등의 국가는 대부분 1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외국인 평양 시민들도 남자(34명)보다 여자(78명)가 많은 게 특징이다.

 

평양 주민의 혈액형은 A형이 가장 많았고 그 뒤로 O형, B형, AB형 순으로 나타났다. 혈액형 판별이 되지 않은 주민도 5000여명 가량 됐다.

 

이번 자료를 보면 평양 시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대체로 직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달랐다. 여성의 경우 직업란에 ‘부양’(우리의 가정주부에 해당)으로 적혀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70대 이상 노인들은 련로보장(연로보장)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직업란의 직책이 축소돼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의 방송통신위원장에 해당하는 북한 차공수 조선중앙방송위원장은 직업란에 장의 직함이 아니라 사무원으로 등재돼 있었다.

 

※ 독자 여러분, 평양에 연고자가 살아 있는지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주간조선이 입수한 ‘평양 성인 210만명 신상자료’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단비 같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6·25 이산가족과 납북자, 국내외 거주 탈북자, 국군포로 등 북한에 연고가 있는 분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가족, 친지, 친구들의 생사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북한은 우리 국민들이 애타게 찾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정보를 한번도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자료는 북한 보위부가 작성한 자료를 온전히 입수한 것입니다. 때문에 북한 당국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번 입수 자료에는 만 17세(1994년생) 이상의 평양 거주 시민의 이름과 생년월일, 성별, 주소, 심지어 혈액형까지 기본 신상정보가 다 담겨 있습니다. 동명이인이라 할지라도 몇 가지 정보만 정확히 알면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번 자료 검색 결과 현재 평양 시민들 중에는 평양 출신뿐 아니라 평양 밖에서 출생한 분들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또 100세 이상 평양 시민도 126명이나 됩니다. 최고령자는 109세의 림수옥 할머니입니다.

 

이 자료는 우리의 인구센서스처럼 2005년 작성된 것이지만 100세 이상 고령자 중 살아계신 분들도 꽤 많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현재 남한에 거주하는 고위 탈북자 중 양친이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계신 분으로부터 양친의 신상정보를 받아 이 자료에서 검색한 결과 생존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연고자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시고 싶은 분들은 이메일(weekly@chosun.com)로 기본 정보를 보내주십시오. 전화(02-724-6895~7)로 문의하셔도 됩니다. 성심껏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 himalaya

히말라야 산맥(─山脈)은 아시아의 산맥으로 인도아대륙과 티베트 고원 사이에 놓여 있다. 넓게는 히말라야 산맥과 이어진 카라코람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 및 파미르 고원의 여러 산맥을 포함해서 말하기도 한다. 에베레스트 산을 비롯한 14 개의 8000미터 봉우리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히말라야 산맥 바깥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안데스 산맥에 있는 6,959 m의 아콩카과 산이므로, 7,000 m가 넘는 산들은 모두 히말라야 산맥에 속하므로,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히말라야 산맥은 파키스탄, 인도, 중화인민공화국 시짱 자치구, 부탄, 네팔에 걸쳐 있으며, 인더스 강, 갠지스 강, 브라마푸트라 강, 창 강 등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히말라야 산맥은 인도가 섬이었다가 아시아에 다가가 합쳐질 때에 생겨났다. 인도가 밀면서 그 힘으로 만들어졌다. 히말라야는 젊으면서도 높은 산맥이다.

 

 

 

■ 만리장성

▲북쪽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진나라 시황제가 증축하면서 쌓은 산성이며 명나라 때 몽골의 침입을 막기위해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소재지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허베이[河北],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산시[山西], 내몽골, 산시[陝西], 닝샤[寧夏], 간쑤[甘肅], 신장[新疆], 산둥[山東], 허난[河南],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쓰촨[泗川], 칭하이[靑海], 그밖의 자치주

 

현황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에 이른다.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峪關]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보통 만리장성의 기원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로 잡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 770~ BC 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통일 왕국인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한 것이다. 당시의 만리장성은 동쪽 랴오양[遼陽]에서 서쪽 간쑤성[甘肅省] 민현[岷縣]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2000
여 년 역사, 시대에 따른 변화

만리장성이 현재 위치에 처음 축성된 것은 6세기 북제(北齊) 시대이다. 처음 건축될 무렵의 길이는 산시성[山西省] 리스 현부터 보하이만[渤海灣]까지 약 1,500㎞였다. 이후 명(明)나라 때 총 길이 2,700㎞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 나라는 15세기~16세기에 만리장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는데, 당시 북방에 있던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淸) 왕조에서는 군사적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때 관광 목적으로 보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만리장성 2,700㎞가 똑같은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중으로 축성된 곳도 있고, 성벽의 높이나 폭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서쪽보다는 동쪽이 견고하게 축성되어 있다. 성을 쌓은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塼), 그리고 돌 등인데 동쪽으로 갈수록 더 단단한 재료를 사용했다. 성벽은 높이 6∼9m, 평균 폭은 위쪽 4.5m, 아래쪽 9m이다. 100여 m 간격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군사적 방어선이자 문화적 경계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을 쌓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왕조의 성격에 따라 만리장성의 중요성이나 만리장성에 쏟는 정성도 달라졌다. 왕조가 공격적이었던 시기보다는 방어적이었던 시대에 만리장성은 더욱 중시되었다.

 

북방 경영에 열심이었던 당나라 때나 전 세계를 무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던 몽고제국과 뒤이은 원나라, 만주에서 일어나서 만리장성 너머까지 다스렸던 청나라 때는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지고, 따라서 개보수 작업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만리장성은 군사적인 역할 이외에 문화적으로는 유목문화농경문화,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에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서 방어벽으로서 역할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관계없이 오늘날 만리장성은 중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이런 사실을 아시나요

로열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는 노래는?

'Happy birthday to you'

1936년 밀드레드와 패티힐이 작곡했는데, 현재까지 로열티를 받는다는 사실을

 

ㅡ 바닷물-

바닷물 속에 있는 염분은 육지를 150m 두께로 덮을 양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ㅡ 니코틴-

포르투칼에 파견된 프랑스 외교관 존 니코트는 귀국 선물로 플로리다산 담배 나무를

받아 정원에 심은후 '아메리칸 파우다'(담배)를 발견했으며, 담배를 처음 수입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담배의 주성분을 '니코틴'이라 한다는 사실을

 

ㅡ 소리나는 꽃-

노란 앵초꽃은 새벽녘에만 핀다.그리고 꽃이 필 때는 마치 비누방울이 터지는것 같은 귀여운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ㅡ 국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국가가 없다.그래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도 국가가 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ㅡ 임신과 아빠-

여자는 7~63세까지 엄마가 되고, 남자는 13~100세까지아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ㅡ발을 따뜻하게 하려면-

양말을 신을 것이 아니라 모자를 써야 한다. 몸의 열기중 80%가 머리를 통해서 빠진다는 사실을.

 

ㅡ사랑은 가슴에서 오는것-

사랑이라는 감정은 가슴에서 오지 않고 뇌하수체에서 온다. 사춘기 이전에 뇌하수체종양 때문에 수술 받은 사람은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ㅡ 결혼이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한 사람에 비해 정신병에 걸릴 확률이 7.5배 높다는 사실을.

 

ㅡ천재라는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왼손으로 글을 쓸 수 있었으며, 미국의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도 오른손으론 라틴어, 왼손으론 그리스어를 썼다는 사실을.

 

ㅡ코카콜라-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전세계에서 단 2명뿐이다. 원래는 7명이었으나 5명은 죽고 2명만 남은 것인데 설탕, 탄산수, 캐러멜,인산, 카페인,쓰다 남은 코카잎과 콜라콩을 혼합한 것이나 1%가 밝혀지지 않아 수많은 화학자가 80년이상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이 두사람도 죽거나 비밀을 잊어 버리게 되면 조지아 신탁은행에 비밀문서를 개봉한다. 그러나 미 약물관리국은 특정한 주원료제품은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ㅡ샴페인잔에 떨어진 건포도는 잔안에서 뜨고

가라앉기를 계속한다는 사실을.

 

ㅡ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고 채소라는 사실을.

 

ㅡ 오이는

채소가 아니고 과일이라는 사실을.

 

ㅡ 감자는

뿌리가 아니고 줄기라는 사실을

 

ㅡ 바나나는

여러해살이 풀이라는 사실을 .

 

ㅡ양파는

채소가 아니고 백합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ㅡ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실험 대상으로 삼고자 우주공간에 보냈던 새들은 모두 굶어 죽었다.

새들은 중력이 없으면 먹이를 삼킬 수 없다는 것을 깜빡했던 것. 새들이 물 한 모금 먹은 뒤 머리를 치켜 올리는 것은 중력을 빌려 물이 내려가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개구리도 토한다. 단지 방법이 특이할 뿐. 개구리는 먼저 위장을 토해 입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다음 앞발로 위장을 쥐어 짜 안에 든 것을 빼낸다. 그러고는 다시 위장을 삼킨다는 사실을.

 

ㅡ 고양이는 7층보다 10층에서 떨어졌을 때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다.

매우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사뿐히 내려 앉지만, 제 스스로 뛰어내리 는 게 아니라면 고양이가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때까 지 평균 8층에서떨어지는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ㅡ악어에게 물렸을 때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찌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ㅡ닭이 가장 오래 허공을 난 기록은

13초라는 사실을.

 

ㅡ사람이 8년7개월6일간 계속 소리를 지를 때 나오는 음파의 에너지를 이용하면

커피 한잔을 끓일 수 있다는 사실을. 

 

ㅡ 개미는 죽을 때

꼭오른쪽으로 쓰러진다는 사실을..

 

■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조상이 한국인으로 밝혀졌다.

미국 워싱턴타임즈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 예일대 연구진이 오랜 동안 조지 부시 대통령의 가계(家系)를 추적한 결과 부시 가문이 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예일대 연구진은 4년 전부터 미국 역사상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을 배출한 부시 가문에 대한 추적을 해왔는데, 부시 가문이 시작된 가계도에서 미국이나 유럽계가 아닌 한국계 인물을 발견하였으며, 그가 부시 가문의 시작점에 있다고 전했다.

 

연구팀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한국인은 성이 부(夫)씨 였는데, 중국과 인삼무역을 하던 중 15세기 경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영국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 정착하여 부시 가문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부(夫)씨는 희귀성 중의 하나로 남한에는 현재 8천여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연구진은 부시 가문이 부씨 성을 가진 인삼장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근거로서 부시 가에서 처음에 사용한 성의 스펠링이 Bussi 였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부시 가문이 대대로 재벌가문으로 유명한데 이 또한 조상이 인삼장사를 하며 상술에 뛰어났던 영향이 크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부시 가문의 조상이 한국인이었던 영향으로 부시 가문에서는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 중의 한명이 지금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라고 연구진은 주장했다.실제 조지 W 부시는 발음이 부정확하고 이상한 영어를 사용해서 ‘English Patient’(영어환자)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연구에 참여했던 한 연구원은 부시 가문의 조상이 한국인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북한이라고 해야 맞다고 말했다. 처음 인삼장사 부씨가 살던 고향이 지금의 황해도 개성이라는 것. 개성은 예로부터 인삼의 산지로도 유명한데 이 곳에서 부씨가 살았으므로 부시의 조상은 북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 밝혀진 더욱 놀라운 사실은 부시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먼 친척이라는 사실이다.

 

연구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삼장사 부씨의 어머니는 전주 김씨였다고 한다. 즉 부씨의 어머니 쪽은 전주 김씨인데, 김정일 위원장이 전주 김씨 33대 손이므로 부씨의 후손인 부시와 김정일 위원장은 서로 먼 친척 뻘이 되는 셈이다.

 

워싱턴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도 얼마 전 이 연구 결과를 보고 받았으나 아직까지는 부시 대통령이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그러나 비공식 채널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조상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자신의 조상이 북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 이상 조상의 나라를 적대시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과도 먼 친척 관계이기 때문에 김위원장에 대해서도 점차 호의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예측 했다.

 

과연 조상의 비밀을 알게 된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할 지 세계의 주목을 확 끄는 시점이다.

 

■ 국내 호텔 최고가 요금 - 2012기준

 

■ 생활속의 12가지 법칙

1. 머피의 법칙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잘못된다.


2.
검퍼슨의 법칙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일수록 잘 일어난다.


3.
질레트의 이사 법칙

전번 이사 때 없어진 것은 다음 번 이사때 나타난다.

4. 프랭크의 전화의 불가사의

펜이 있으면 메모지가 없다.메모지가 있으면 펜이 없다.둘 다 있으면 메시지가 없다.

5. 마궤트의 일요 목수 제3법칙

찾지 못한 도구는 새 것을 사자마자 눈에 띈다.

6. 코박의 수수께끼

전화번호를 잘못 돌렸을 때 통화중인 경우는 없다.

7. 쇼핑백의 법칙

집에 가는 길에 먹으려고 산 초코릿은 쇼핑백 맨 밑바닥에 있다.

8. 호로위츠의 법칙

라디오를 틀면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곡의 마지막 부분이 흘러 나온다.

9. 린치의 법칙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10. 잔과 마르타의 미용실 법칙

내일 머리를 자르려고 작정하자 헤어 스타일이 멋지다는 칭찬이 쏟아진다.

11. 편지 법칙

그럴듯한 문구가 떠오르는 때는 편지 봉투를 봉한 직후이다.

12. 마인스 하트 법칙

타인의 행동이 평가 대상이 되었을 때, 마음 속으로 좋은 인상을 심어 주면 꼭 실수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