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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역사15/ 세계의 기업 - 역사를 만든 부자들/ (1) 마이어 로트실트 - (9)하워드 휴즈 - 노스페이스의 탄생

상림은내고향 2021. 5. 13. 20:53

기업의 역사15/ 세계의 기업

■역사를 만든 부자들 2016-12-28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1) 마이어 로트실트 - ‘로스차일드 국제금융 제국’의 건설자

자신의 노력으로 부를 일군 억만장자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집념의 노력으로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준다.모은 재산을 보람 있게 쓰면서 부의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킨 인물도 적지 않다.이들은 인류의 삶을 바꾸기도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하며,나라나 사회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역사상 수많은 부자가 명멸했다.그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면서 부자와 부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1744~1812)는 ‘로스차일드 금융 왕조’의 창업주다. 이 가문은 영어로 로스차일드, 독일어로 로트실트, 프랑스어로 로실드로 불린다. 지금 수백 개의 작은 조각으로 분산돼 큰 부자는 없지만 다 모으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으로 꼽힌다. 마이어는 가업인 금융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창업주다. ‘국제금융의 설립자’로도 불린다. 18~19세기 당시 지역 영주의 자금을 불리거나 대출을 해주던 ‘동네 장사’ 수준의 금융업을 온갖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글로벌 창의사업’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2005년 포브스가 선정한 ‘모든 시기에 걸쳐 가장 영향력이 큰 20명’에 이름을 올렸다.

 

마이어는 1744년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자유도시였던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태생이다. 현재 유럽중앙은행(ECB)이 자리 잡은 유럽 금융의 중심지다. 유대인 게토인 유덴가세(유대인 골목이라는 뜻)의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암셸은 잡화 교역과 환전 사업을 벌였다. 그 시절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허용된 몇 안 되는 사업이었다. 인근 지역인 헤센-카셀의 군주에게 동전(요즘의 외환에 해당)을 공급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마이어는 친척의 도움으로 1757년부터 68년까지 하노버의 유대인 금융업체 ‘시몬 볼프 오펜하이머’에서 수습직원으로 일했다. 이 위대한 인물이 금융인의 뜻을 키운 계기는 요즘으로 치면 인턴 생활이었던 셈이다. 그곳에서 국제환전과 금융을 꼼꼼하게 익힌 뒤 고향에 돌아왔다. 이듬해인 1768년부터 그는 독일의 작은 국가인 헤센-카셀의 군주 아들인 빌헬름(1743~1821, 나중에 빌헬름 9세로 즉위)의 자금 관리를 맡았다.


청년 유대인, 경제 모르는 군주의 자금을 관리하다

▲영국과 동맹국이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을 격파한 워털루 전투를 그린 그림. / BAIDU 제공

 

마이어가 금융산업을 벌이게 된 연유를 알려면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독일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이뤄진 모자이크 국가였다. 헤세-카셀도 그 중 하나였다. 영토와 권력을 쥔 영주들은 경제를 몰라 주먹구구식으로 재정을 운영하기 일쑤였다. 합리적인 재정운용은커녕 눈앞의 수익을 위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먹는 식의 비상식적인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증거의 하나가 라인강을 따라 늘어선 멋들어진 성들이다. 독일의 축성술·건축술을 자랑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자유로운 통상을 가로막았던 흔적이다.

 

라인 강변에 영지를 둔 수많은 영주들은 지나가는 선박으로부터 통행세를 받기 위해 거액을 투자해 강변에 거대한 성을 건설했다. 성의 망루는 지나가는 배를 감시할 목적으로 높게 세웠고, 성내 숙소에는 통행세를 받는 간부와 군인들이 살았다. 이들은 강에 긴 쇠줄을 걸어놓고 선박 통행을 막고 돈을 받아낸 다음에야 보내줬다. 상인들이 배에 상품을 싣고 라인강을 따라가려면 끝없이 세금을 내야했다. 이러니 교류통상 등 경제활동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 나라가 통일되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세속귀족이나 종교귀족이 비전 없이 운영하는 작은 나라들로 나뉜 탓이다.

 

작은 나라를 운영하는 데도 비용이 상당히 들게 마련이다.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주로 용병인 군인들의 급여·식량·무기·장비·군복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휠 정도였다. 중세 때는 영주들이 부유한 타지역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갚지 못하면 마을 주민 전체를 통째로 넘기는 일이 잦았다. 독일 농부들은 부지런하고 생산성이 높아서 주변 나라에서 이들을 ‘마을떼기’로 데려가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이주한 독일인들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콘스탄틴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에 나오는 루마니아 서북부 트란실바니아 거주 독일어 사용자는 이렇게 마을 단위로 헝가리(트란실바니아는 제1차대전 종전 이전까지 헝가리 영토였다)로 옮겨진 농민의 후예다. 러시아 볼가강변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는 독일계도 마찬가지다.

 

농민을 넘기는 것은 영주 자신의 향후 수입원을 송두리째 포기한다는 점에서 제 살 깎아먹기 수준의 비합리적인 결정이다. 다른 대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독일 영주들은 유대인 환전상에서 대출을 얻는 대안을 찾았다. 게다가 근대적인 화폐와 조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주는 농민들로부터 현물로 세금을 받았다. 필요한 상품을 다른 곳에서 사려면 이를 국제화폐 격인 동전으로 바꿔야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제통상·환전업·금융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을 필요로 했다. 마이어가 헤세-카셀의 후계자인 빌헬름 9세의 돈 관리를 맡아준 것은 이 때문이다. 궁정 재정인이라는 이름으로 군주의 재산 관리와 세금 징수 등을 맡았다.

 

헤센-카셀은 다른 곳에 없는 특이한 사업이 있었다. 바로 파병 사업이다. 군대를 다른 나라에 파병해주고 돈을 받는 것이다. 특히 영국과 많은 거래가 있었다. 여기에는 헤센-카셀의 군주였던 빌헬름 8(1682~1760)의 인연이 작용한다. 그는 팽창하던 프로이센 왕국이 영국과 손잡고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의 동맹에 맞서 싸운 7년전쟁(1756~1763) 때 프로이센과 영국 편을 들어 참전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하노버 왕가와 두터운 관계를 쌓았다.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1720~2785)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딸인 메리와 결혼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독립전쟁(1775~1783)이 터지자 처조카인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대규모 병력을 빌려줘 대륙에서 독립군 진압작전에 투입하게 했다.

 

당시 미국에 파병됐던 3만 독일 병력의 40%가 넘는 13000명이 헤센-카셀 출신이었다. 나머지는 이웃인 헤센-하나우, 안스바흐-바이로이트, 브룬스비크-볼펜뷔텔, 발데크 등 작은 나라에서 보내졌다. 독일 병력은 영국이 북미에 파견한 전체 병력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미국 역사에서 이들은 ‘헤세(헤센의 영어식 발음)인’으로 기록된다. 헤센-카셀 병력이 그만큼 압도적이었고 역할도 컸다는 이야기다. 헤센-카젤은 이 파병으로 영국으로부터 엄청난 금액을 받아 재정을 채웠다.


파병을 기업화한 헤센-카셀의 국제 자금 맡아

17~18세기 작은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돈을 받고 병력을 빌려주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나 헤센-카셀은 유별났다. 18세기 전체에 걸쳐 인구의 7% 정도를 병력으로 유지하면서 국가가 나서 파병 사업을 벌여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일반 용병과 달리 개인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부대 전체가 한꺼번에 파병됐다. 무기·장비·지휘관·편제·제복·깃발을 고스란히 유지했다.

 

마이어가 자금 관리를 맡았던 빌헬름이 바로 미국에 파병한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다. 그는 1785년 빌헬름 9세로 군주 자리에 오를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국제 용병 사업으로 확보한 엄청난 재정수입과 영토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사람으로 마이어를 임명했다. 엄청난 재산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마이어는 상당한 커미션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마이어가 로스차일드 왕조로 불리는 금융망을 유럽 전역에 걸쳐 설치하는 종자돈이 됐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나라 전역이 마비되면서 마이어는 오히려 사업을 확대할 기회를 얻었다. 영국이 헤센 용병에게 지급하는 거액의 급여와 비용을 관리하게 되면서 국제적인 금융·환전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 전쟁이 이어지자 그는 전쟁자금을 빌려주는 국제금융 사업까지 벌이면서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굳히고 재산도 더욱 불렸다.

 

1801년 헤센-카셀의 공식 궁정재정관리인이 된 마이어는 이처럼 빌헬름 9세의 재정 관련 정보와 자금이 큰 몫을 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전역에 혼란이 예상되자 마이어는 사업을 국제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1798년 삼남 나탄(1777~1836, 영어로 네이선)에게 자신의 자금 2만 파운드(현재 가격으로 약 40억원)를 종자돈으로 쥐여주면서 영국 런던으로 보냈다. 산업혁명으로 값싸게 대량 생산되고 있던 영국산 직물을 수입할 의도였다.

 

하지만, 의외의 기회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걱정한 빌헬름 9세가 마이어에게 자신의 자금을 해외에 은닉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마이어는 이 자금을 런던으로 옮겨 나탄에게 관리를 맡겼다. 나탄은 1804년 영국 국적을 얻고 현재 영국의 월스트리트 격인 런던 시티 지역에 은행을 개업했다. 로스차일드 금융업의 시작이다. 이 가문의 첫 외국 지점이다. 유럽 대륙은 전쟁으로 어수선해지면서 경제활동이 얼어붙었지만 마이어는 아들을 런던에 보냄으로써 오히려 금융사업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나탄은 이 돈을 영국군이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파병된 웰링턴 군대의 운영 자금으로 융통해줬다. 금융망과 정보망을 활용해 유럽 전역으로 이동하는 웰링턴 군대에 자금을 대는 것은 물론 영국의 동맹국들에도 전비를 전달했다. 영국과 동맹국이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격파한 1815년 한 해 동안 나탄을 통해 로스차일드 가문이 영국과 동맹국들에 융통해준 전쟁자금이 98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11조원에 해당)에 이른다고 한다. 요즘 가격으로 종자돈 40억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11조 규모로 커진 것이다. 로스차일드의 자금 동원력과 배팅 감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수치다. 일종의 고위험·고수익의 전쟁 벤처 투자였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유럽 대륙에 영국산 공산품이 들어오지 못해 물자 부족이 심화하자 수입 사업을 펼쳐 재산을 불렸다.

 

나폴레옹 전쟁과 관련해 재미난 ‘경제 전설’이 있다. 마이어가 정보망을 활용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패배를 남보다 먼저 확인하고도 폭등이 예상되는 영국 채권을 오히려 팔아치웠다고 한다. 영국이 패배한 것처럼 보이게 해 가격을 폭락시킨 뒤 이를 헐값에 사들여 폭리를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문의 진실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이어는 세습군주나 거액의 자금을 굴리던 시절, 자신의 실력으로 군주 못지 않는 재산을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부문에 영향력을 확보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모시던 군주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았다. 1803년 그가 모시던 빌헬름 9세는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격이 높은 선제후에 올랐다. 국왕보다 한 단계 낮은 자리다. 하지만, 1806년 프랑스에 반기를 든 프로이센을 지원했다가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됐다. 군주 자리는 빼앗겼으며 영토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다스리는 베스트팔렌 왕국에 병합됐다. 빌헬름 9세는 장인인 덴마크 국왕의 영지였던 홀슈타인으로 망명했다가 나폴레옹이 패퇴한 1813년 간신히 귀향해 군주 자리를 회복했다. 그동안 그의 재산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보관했다. 같은 기간 나탄의 런던 금융사업이 고성장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후원자였던 빌헬름 9세보다 많아졌다.

 

마이어는 1811년 막내 야코프(1792~1868)를 프랑스 파리로 보내 본격적인 범유럽 금융 네트워크 구축에 들어갔다. 그는 이 금융 네트워크를 이용해 고급 정보를 수집, 유통함으로써 국제적인 금융사업의 골격을 만들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20년 차남 살로몬(1774~1855)은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 금융사업을 시작했다. 1821년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나폴리를 점령하자 사남 카를(1788~1855)이 그곳에 가서 나폴리 지점을 세웠다. 장남 암셸(1771~1859)은 프랑크푸르트 본가를 지키며 금융업을 계속했다.


경제의 핵심은 글로벌화·정보화·기업가정신과 협력

마이어가 일군 로스차일드 금융가문은 19세기 후반 유럽이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철도·광산·에너지·부동산·농업·와인산업 등 다방면에 자금을 투자해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이어는 남보다 앞선 정보망과 금융망 구성을 바탕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유대계로 신성로마제국 자유시인 프랑크푸르트에서 금융업이라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산업을 키웠다.

 

우편망을 바탕으로 전유럽에 걸친 정보망을 구축하고 이를 이용해 정보를 입힌 새롭고 강력한 금융산업을 개척했다. 그는 다섯 아들을 프랑크푸르트·런던·파리·빈·나폴리(빈과 나폴리는 사후)에 분산 배치해 글로벌 네트워크 금융경영을 시작했다. 전 유럽에 걸친 로스차일드 가문의 네트워크는 시너지를 냈다. 그러면서 기회는 확대하고, 위험은 분산하는 현대적 경영기법을 도입한 셈이다. 아울러 로스차일드의 이런 글로벌 시스템은 기업이 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고 국제주의에 입각해 비즈니스를 펼칠 수 있는 기업인의 세계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로스차일드 금융가문을 창시한 마이어 로트실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제를 받치는 기중인 글로벌화와 정보화, 그리고 동물적인 기업가 정신의 선구자인 셈이다.

 

마이어는 후손들에게 ‘협력(Concordia)’이라는 말을 유산으로 남겼다. 유럽 각국에 지점을 설치한 다섯 아들이 ‘다섯 화살’로 불리는 이유다. 하나의 화살은 쉽게 부러지지만 여러 개를 겹친 화살은 결코 쉽게 부러지지도 휘어지지도 않는다. ‘경제의 기본은 화합’이라는 그의 유지가 울림을 준다. 자손들에게 쓸 돈이 아닌 종자돈과 기회만 물려줘 스스로 재산을 일구게 한 것도 교훈을 준다.

 

(3) 헨리 포드 - 혁신으로 거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경영학의 교과서

헨리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를 활용한 연속 조립 생산방식을 도입한‘포드 시스템’을 개발해 인류에게 마이카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물론 인류의 소비 형태를 송두리째 바꾼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중산층이 자신의 자동차로 여행하는 마이카 시대’, ‘대량생산의 시대라는 두 시대의 문을 연 주인공이 바로 헨리 포드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1863~1947)는 혁신으로 거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다. 포드는 자동차의 발명가도 아니고, 조립라인의 창안자도 아니다. 다만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를 비즈니스에 적용해 사업을 일궜다.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안을 비즈니스에 과감하게 적용해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이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미리 꿰뚫어 보는 수준을 넘어 아예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중산층이 자신의 자동차로 여행하는 ‘마이카 시대’, ‘대량생산의 시대’라는 두 시대의 문을 연 주인공이 바로 포드다.

 

포드는 꿈꾸는 비즈니스맨으로 통한다.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인류가 라이프 스타일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꿈이다. 구체적으로는 정원 딸린 집에서 마이카를 굴리며 사는 중산층의 인간적인 욕구다. 그는 이런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새로운 자동차를 개발하고 이를 중산층이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에 대량 공급할 수 있도록 생산방식을 혁신했다. 그 결과 자동차라는 신기술 산업은 엄청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바꿔놓았다. 이를 통해 자동차 산업과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고 키웠다. 이는 20세기 산업과 경제·생활의 지형도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역할을 했다.

 

그가 도입한 대량생산 기술은 이 꿈을 가능하게 해준 도구였다. 이 도구 덕분에 자동차는 부자들이나 고위층이나 타고 다니는 초고가의 상품에서 중산층 정도면 장만해 생활의 이기로 활용할 수 있는 ‘접근 가능한 실용 상품’이 됐다. 아울러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대량생산이라는 혁신적인 방식은 인류에게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시대를 열게 됐다. 20세기 이후의 삶은 포드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포드는 부자다. <리치스트>라는 잡지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9위의 부자에 올랐다. 그의 재산은 지금 시가로 따져 1990억 달러에 이른다. 지난 3월 포브스의 세계 부자 순위에서 총재산 750억 달러로 1위에 오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의 2배를 넘는 액수다. 그는 혁신을 통해 이런 재산을 모았다. 자신의 성을 단 포드 자동차를 창업하고 혁신을 이룬 덕분에 그는 미국 최고의 부자 중 한명이 됐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됐으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자동차 왕’도 첫 창업은 실패

▲T1모델은 19년 동안 15007034대를 생산하고 1927년 생산을 종료했다. 이 기록은 이후 45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포드는 1863년 미국 미시간주 그린필드 타운십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 1세였으며 어머니는 벨기에 이민 2세였다. 32녀의 맏이로 태어난 포드는 10대 때 부모를 잃고 이웃에 입양돼 자랐다. 어려서부터 호기심과 기계적인 재능, 그리고 집념을 보였고, 15세가 되었을 때는 동네 사람의 시계를 고쳐주는 수리공으로 이름을 얻었다.

 

1879년 포드는 자신이 태어난 농가를 떠나 디트로이트에서 기계 견습공으로, 웨스팅하우스에 증기기관 엔진 수리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계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그는 나중에 디트로이트에 있는 실업학교를 다녔다. 경력을 쌓은 포드는 1891년 에디슨 일루미네이팅사의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1893년 수석엔지니어로 승진한 뒤부터는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중산층 엔지니어의 안락한 삶을 사는 대신에 남는 시간과 돈을 공학 실험에 투자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개발이 한창이던 가솔린 엔진을 개인적으로 시험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실험 데이터를 꾸준히 축적했으며 그 결과 1896년 이를 바탕으로 포드 쿼더리사이클이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개발할 수 있었다. 포드는 이 자동차의 주행시험을 꾸준히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는 브레인 스토밍 방식으로 성능 개량 작업을 진행했다. 포드는 젊어서부터 남의 말을 경청했으며 이는 평생의 습관이 됐다.

 

1896년 포드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을 만나 자신이 개발한 자동차에 대한 칭찬을 들었다. 이에 고무된 포드는 새로운 자동차를 디자인했고, 1899년에는 창업에 나섰다. 그해 8 5일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차리고 생산에 나섰지만 낮은 품질에 비싼 가격의 자동차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 왕’ 포드가 난생 처음 창업한 이 자동차 회사는 1901 1월 파산했다. 포드의 첫 창업은 실패였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창업을 모색한 포드는 해럴드 윌리스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아 1901 10 29마력 엔진을 장착한 새 자동차 모델을 제작했다. 다행히 이 자동차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창업에서 실패가 허물이 아닌 경력이 되는 ‘재기 시스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 번 돈을 바탕으로 머피를 비롯한 다른 주주들은 1901 1130일 ‘헨리 포드 자동차’를 새롭게 창업했다. 자신의 이름을 단 포드자동차에서 포드는 수석 엔지지어를 맡았다. 엔지니어 중심의 기술 경영의 시동을 건 셈이다. 1902년 머피는 헨리 를랜드를 컨설턴트로 고용했으며 이에 반발한 포드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회사를 떠났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속설을 입증한 셈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포드가 떠나자 머피는 회사 이름을 캐딜락 자동차로 바꿨다.

 

레이싱 자전거 선수였던 탐 쿠퍼와 팀을 이룬 포드는 80마력 이상의 출력을 자랑하는 ‘999’ 모델을 개발했고, 이 차는 1902 10월 자동차 경주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이에 용기를 얻은 포드는 디트로이트 지역의 석탄 딜러인 알렉산더 말콤슨의 지원을 얻어 ‘포드&말콤슨’사를 창업했다. 포드의 3차 창업이다. 포드는 자신의 꿈대로 비싸지 않아 중산층도 장만할 수 있는 대중적인 자동차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공장도 임대하고 기계공인 닷지 형제에게 부품도 주문했다. 말콤슨은 투자자를 투자로 모집했으며 닷지 형제에게 자동차 회사의 지분을 받고 부품을 공급해줄 것을 설득했다. 포드&말콤슨사는 1903년 ‘포드 자동차’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회사의 첫 자본금은 28000달러였다. 초기 투자가는 포드 자신과 말콤슨, 그리고 부품 공급자인 닷지 형제, 그리고 말콤슨의 삼촌, 비서, 자신의 변호사 2명이 포함됐다. 그야말로 주변의 자본을 그러모아 만든 기업이었다.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를 기술로 승부를 겨뤘다. 기술의 포드임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속도였다.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를 세인트 클레어 호수의 얼음 위에서 시속 146.9㎞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속도로 달리게 해 회사를 널리 홍보했다. 그 뒤 자동차 경주 드라이버를 미국 전역에 보내 자신의 자동차를 홍보하게 했다.

 

이런 포드에게 전기가 찾아온 게 1908 101일이었다. 지금은 전설이 된 T1 모델을 공개한 날이다. 지금은 일반화된, 핸들이 왼쪽에 달리고,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모두 내장형으로 장착해 외부에선 보이지 않게 한 모델이었다. 포드는 이 자동차에 혁신을 입혔다. 조작이 아주 간단했을 뿐 아니라 고장 수리도 쉽고 비용이 별로 들지 않도록 설계했다. 포드가 엔지니어였으므로 이 자동차의 공학적 설계는 곧 그의 경영 철학을 반영했다. 포드는 이 자동차를 825달러에 시장에 내놨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21000~22000 달러 정도다. 게다가 그는 매년 값을 떨어뜨렸다. 그가 대량생산을 통해 적절한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은 ‘포드 모델T’는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수송수단 분야에서 혁명을 이뤘을 뿐 아니라 미국의 산업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미국이 세계최고의 산업 생산력을 지니고 세계의 공장으로서 위력을 발휘하는 데도 한몫했다. 포드는 독자 판매망을 구축하는 대신 지역 딜러를 활용했다. 그는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국 전역에 T1이 없는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독립 딜러로서 포드의 프랜차이저 가맹주들도 엄청난 돈을 벌었으며 이를 통해 포드는 물론 자동차 드라이브를 하나의 레저로 정착시켰다. 포드는 T1을 농가에도 공급해 이 차들이 시골길을 질주하게 했다. 농부도 자동차를 몰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는 ‘기계의 시대’를 연 것이다.


대량생산한 T1으로 자동차 역사 새로 쓰다

▲포드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모은 재산의 대부분을 포드 재단에 기부했다. 사진은 포드 재단 건물

 

효율 증대와 비용 감축이 경영의 요체임을 간파한 포드는 1913년 그 유명한 이동 조립벨트를 이용한 생산 라인을 도입했다. 이는 생산량을 급속히 증가시키는 효과를 냈다. 지금까지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조립라인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 콘셉트와 개발은 클래런스 애버리, 피터 마틴, 찰스 소렌슨, 해럴드 윌스로 이뤄진 직원들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포드는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생산과 경영 현장에서 활용했을 뿐이다.

 

이 혁신적인 조립라인에 힘입어 포드 자동차의 생산은 1914 25만 대에 이르렀으며 생산 대수가 늘수록 가격은 더욱 떨어졌다. 1918년에는 미국을 달리는 모든 자동차의 절반이 모델 T로 채워졌다. 포드는 T1 모델을 검은색으로만 출시했다. 검은 색으로 출시하면 차주가 차 색깔을 다른 색으로 바꿔 칠할 때 편이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검은색 페인트는 다른 색깔보다 일찍 말라 출시까지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점도 그가 검은색만 고집한 이유였다. 포드는 이후 빨간색 라인을 추가했다. T1모델은 19년 동안 15007034대를 생산하고 1927년 생산을 종료했다. 이 기록은 이후 45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포드는 1918년 포드자동차의 회장직을 아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회사의 경영적인 주요 결정의 최종적인 결정자로 남았다. 1927년 포드사는 새로운 모델 A를 출시했는데 이 역시 대성공을 거뒀다. 이 모델은 1931년까지 400만 대를 생산하고 퇴역했다. 그 다음부터 포드사는 현재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가 하고 있듯이 매년 모델을 바꾸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방식은 경쟁사인 GM이 도입한 것을 포드가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1930년대에는 소비자에게 자동차 구입비를 대출해주는 유니버설 신용사를 설립해 주요 자동차 금융사로 떠올랐다. 포드가 하는 모든 경영 활동은 현대 자동차 산업의 기본이 됐다.

 

포드는 사업이 순탄 가도를 달리는 중에도 경영혁신으로 생산 단가를 체계적으로 낮추기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했다. 비용을 절감해야 기술과 비즈니스 혁신을 계속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는 것이 신념이었다. 그는 딜러를 활용한 프랜차이즈 영업망이라는 판매 방식도 개발했다. 별도의 비용을 들여 독자적인 영업망을 구축하는 대신에 그 비용을 딜러에게 지급해 자발적으로 영업에 충실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이런 딜러 시스템을 북미 대륙은 물론 전 세계 판매망에 도입했다. 이 역시 지금까지 글로벌 스탠더드다.


사회와 후손 모두를 위한 재단 설립

포드는 ‘복지 자본주의’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다. 비용을 절감해서 얻은 돈을 직원들에게 충분한 급여를 지불하는 재원으로 삼았다.

 

포드는 1914년 일당 5달러(현재 가치 120달러)라는 놀라운 고임금제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직원들이 받던 일당을 2.34달러에서 두 배 이상으로 올렸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하루 60달러 수준인 임금을 240달러로 올린 셈이다. 포드는 임금을 높이면 직원들이 안정적인 환경 속에 장기 근무를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채용 비용을 절감하고 직원들은 복지를 누리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당시 일부 매체에서 고임금이 산업계에 먹구름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임금을 높이면서 오히려 이익이 늘어난 것이다. 포드의 역발상이 근로자와 사용주 모두에게 윈윈을 가져온 셈이다. 이런 활동에서 보여준 포드의 경영사상은 기업을 하나의 사회 봉사기관으로 보는 피터 드러커의 경영 철학에 바탕을 제공했다.

 

최고의 직원을 뽑아 충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장기 근속하게 하면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직원채용이 절감된다. 게다가 대우가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나면 인근 지역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엔지니어들이 몰려들게 된다. 인재와 전문가를 충분히 확보한 있는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분 아니라 교육훈련 비용도 아낄 수 있다.

 

디트로이트는 이미 고임금 도시였는데 포드의 조치로 임금을 따라서 올리든지 숙련공을 잃든지 양자 택일을 하게 됐다. 고임금을 받게 된 포드 자동차 직원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자동차를 구입해 타고다닐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누리게 했다. 회사로서는 더 이익이 됐다. 이를 통해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됐다. 일종의 이익 공유라는 입장에서 임금을 높여주면 근로자들은 최고의 생산성과 훌륭한 직장 문화로 화답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아이디어 역시 포드가 스스로 낸 것이 아니었다. 말콤슨의 비서인 커즌이 제안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최고의 경영자이자 혁신가인 포드의 가장 큰 미덕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었다. 포드를 경영학의 교과서라고 하는 이유다.

 

그가 기업 경영 분야에서 남긴 족적은 ‘포드주의’로 불리는 산업 혁신, 경영 혁신의 기법으로 경영학 교과서에 올라 있다. 포드주의는 대량생산을 통해 제품 가격을 낮춰 시장을 확대하면서 직원들에게는 임금 단가를 높여주는 것으로 요약된다. 포드주의의 경영원리는 크게 4가지다. 미래에 대한 공포와 과거에 대한 존경을 버리고, 경쟁을 위주로 일하지 말며, 봉사가 이윤에 선행해야 하고, 값싸게 제조해 저렴하게 팔 것 등이다. 이와 함게 경영 합리화를 위해 제품의 표준화, 부품의 단순화, 작업의 전문화라는 3S운동을 펼쳤다. 이는 지금도 경영의 기본 원리다.

 

포드는 이른 혁신적인 기업 활동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세상을 변화시킨 대가를 생전에 받은 것이다. 그는 그 재산을 후손과 사회 모두를 위해 사용했다.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모은 재산의 대부분을 ‘포드 재단’에 기부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후손들이 포드 자동차를 영원히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포드는 기업인으로선 독특하게 제1차 세계대전 중 반전평화주의를 부르짖었다.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추가로 축적하는 대신 인류의 평화를 앞세웠다. 그는 전쟁 대신 전세계가 글로벌 기업의 상품을 공유함으로써 전쟁을 할 이유를 원천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소비자주의가 글로벌 평화를 위한 핵심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돈을 버는 방법도,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데도, 돈을 물려주는 데도 선각자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5) 알프레드 크루프 - 기술혁신으로 부를 일군 ‘독일의 철강왕’

독일의 기업인 크루프는 철강 생산과 무기 제조로 엄청난 부를 일궜다.그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모은 돈의 상당수를 직원 복지를 위해 재투자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직원 복지의 기반이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독일 기업인 알프레드 크루프(1812~1887)는 기술 개발을 통한 혁신, 시대 상황에 부응하는 기업 활동, 기대를 뛰어넘는 복지제도라는 세 가지 업적으로 세계 부자들의 역사에서 커다란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크루프는 철강 생산과 무기 제조로 엄청난 부를 일궜다. 그가 제조한 대포는 프로이센군의 유럽 대륙 최강의 군대로 군림하는 데 한몫했다. 크루프가 키운 크루프사(Krupp A.G.)는 그의 사후인 20세기 초 독일 철강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며 유럽 최대의 기업으로 군림했다.

 

크루프는 1861년부터 당시 전세계 어떤 기업도 생각하지 못한 사내 복지 제도를 만들었다. 크루프는 근로자들에게 사택을 제공하고 근처를 공원과 학교, 그리고 놀이터와 휴양시설로 채웠다. 깔끔하고 효율적인 시설 때문에 크루프사 직원 거주지는 주변과 확연히 구별됐으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크루프사 본사가 위치한 에센에는 2200명에 이르는 직원이 근무했다. 에센은 거대한 크루프 타운으로 변모했다. 국가 속의 국가와도 같았다. 크루프의 복지 혜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직원이 병에 걸리면 치료비를 지원했다. 직원이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거나 사망해도 그 가족들이 이전과 똑같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직원들에게 무료 의료 서비스와 무료 목욕탕을 제공했다. 사고·생명·질병 보험도 회사에서 들어줬다. 기술과 업무 훈련 교육도 무료로 제공됐다. 이런 혜택을 받은 직원들은 크루프사와 크루프 가족을 국가와 호헨촐레른 왕가를 대하듯이 대했다. 복지 혜택을 주고 직원들의 충성심을 얻은 것이다.

 

크루프사의 근로자에 대한 이 같은 온정주의에서 영감을 얻는 비스마르크 총리는 국가 차원의 사회복지제도를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는 사회주의의 확장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혁명이 아닌 기업과 국가의 제도로서 근로자의 세상을 만들어 준 셈이다.

 

알프레드 크루프는 아버지 프리드리히가 창업한 자그마한 주물소를 물려받았다. 산업혁명의 불을 당긴 영국에 이어 후발 산업국가로 등장한 독일에서 19세기 철강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철로 부를 일궜다. 그는 자신의 기업을 독일 최대의 철강 업체로 키웠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산한 품질 좋은 철을 활용해 대포를 비롯한 무기를 개발해 제조하기 시작했다. 철에 만족하지 않고 품질 좋은 철을 활용해 고부가 상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크루프사는 당시 독일 최대의 철강업체이자 무기회사를 겸하게 됐다. 프로이센 주도로 1871년 통일을 이룬 독일은 융성하는 산업국가이자 막강한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산업국가 독일에 ‘산업의 밀’이라고 할 수 있는 강철을 공급하고, 군가국가 독일에 총포를 비롯한 철제 무기를 공급한 대표적인 기업이 크루프사다. 크루프의 사업 성공은 독일 제국의 부흥과 궤를 함께한 셈이다.


비스마르크에 영향을 준 사내 복지제도

알프레드 크루프는 1812년 독일의 산업도시 에센에서 태어났다. 독일 산업화의 현장인 루르 공업지대의 한복판에 위치한 도시다. 그는 발명가인 아버지 프리드리히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았다. 프리드리히는 라인강변에 수차를 동력으로 쓰는 작업장을 설치할 정도로 뛰어난 발명 기술을 선보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혁신의 엔지니어, 열정의 기업인이었다. 당시는 철강이 지금의 정보기술(IT)인 인공지능(AI) 같은 혁신적인 첨단 벤처산업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당시 철강업의 핵심기술인 주강 제조법을 시험했다. 당시 이 기술은 산업혁명 선발국가인 영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오랫동안 이 기술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결국 1826 36세의 젊은 나이에 실의 속에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14세였던 크루프가 학교를 그만두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염원이던 주철 제조법 연구도 함께 이어받았다. 그는 주물소를 운영하며 낮에는 직공들과 쇠를 만들고 밤에는 아버지가 하다만 기술개발을 위한 실험에 몰두했다. 그는 영국에까지 찾아가 제조비법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영국의 과학기술과 산업에 반해 자신의 독일식 이름인 알프리트(Alfried)를 영국식인 알프레드(Alfred)로 바꾸기까지 했다. 처음 몇 년간은 직공들 임금을 주기에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버텼다.

 

기회는 15년 뒤에야 찾아왔다. 1841년 알프레드는 동생 헤르만의 도움으로 드디어 주강 생산 기술을 확보했다. 주강으로 숟가락을 제조하는 기계까지 만들어 특허를 얻었다. 1847년 이를 바탕으로 주강을 활용한 대포를 처음으로 제조했다. 그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박람회에 쇠를 녹여 한 번에 만든 무게 2000kg짜리 선강 주괴를 제조해 선보였다.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는 45000kg짜리 선강 주괴를 내놨다. 쇳물을 녹여 만든 이 거대한 선강 주괴는 유럽과 북미 전역의 엔지니어 세계에서 센세이션을 불렀다. 이 두 차례의 전시회를 계기로 에센 출신의 크루프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국제적인 브랜드가 됐다.


발명가의 피를 이어받은 혁신의 엔지니어

 

1851 이 회사는 또 다른 혁신적인 발명에 성공한다. 바로 용접하지 않고 통째로 주물로 만든 기차 바퀴를 개발해 미국 시장에 판매한 것이다. 이 성공에 힘입어 회사는 경영 면에서 엄청난 성공을 얻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재정적인 안정을 확보한 알프레드는 공장을 확장하는 한편 발사 속도와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개선된 대포의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하지만, 구습에 젖은 당시 상당수 프로이센 장교들은 이 대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주강 대포를 납품하지 못하게 된 알프레드는 이를 프로이센 국왕이던 프리드리히빌 헬름 4세에게 선물로 바쳤다.

 

왕은 이를 장식용으로 사용했지만 국왕의 동생인 빌헬름은 이 발명품의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뇌졸중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대신 섭정을 맡은 빌헬름은 크루프의 후장식 주강 대포를 312문 사들였다. 이를 계기로 크루프는 프로이센 왕국과 뒤를 이은 독일 제국의 핵심 방위산업 업체로 올라섰다.

 

그 다음 단계는 국제 시장 장악이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도 크루프 대포의 품질에 반해 사들이고 싶어 했지만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어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크루프의 신형 주철 후장식 대포와 구식 황동 전장식 대포의 대결장이 됐다. 그 결과는 프랑스에 충격을 안겨줬다. 이 전쟁에서 보여준 크루프 대포의 성공은 국제적인 군비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크루프사는 영국의 암스트롱사와 프랑스의 슈나이더-크뢰소사를 누르고 전세계에 우수한 독일제 대포를 팔았다. 러시아, 칠레, 멀리 사이암까지 크루프사의 고객이 됐다. 크루프사는 최초의 다국적 무기업체가 됐다. 크루프는 여기서 벌어들인 돈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광산, 네덜란드의 조선소 등을 사들이며 유럽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크루프는 독일 북서부 네덜란드 국경 근처의 메펜이라는 소읍 인근에 세계 최대 규모의 포 사격장을 갖춰놓고 이곳에서 전 세계에서 몰려 든 무기 구매자들 앞에서 1878년과 1879년에 걸쳐 시범 포격을 했다. 그는 46개 국가를 고객으로 유치했다. 크루프는 1887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750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유럽 최대의 철강·군수업체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평생에 걸쳐 24576문의 대포를 생산했다. 이 중 1666문는 프로이센 또는 독일 제국에 납품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13910문은 외국에 수출했다. 크루프사는 글로벌화가 시작된 19세기 말 아무리 무기 업체라도 다국적 기업이리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글로벌 시대 부자의 재산은 글로벌 활동에서 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박스기사] 혁신 소총만 믿고 방심한 프랑스군 크루프의 혁신적인 대포에 대패하다

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이 사용했던 크루프 C-64 주철 대포. / 2. 크루프사가 제작한 독일제국 해군의 함포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전 프로이센군의 전력은 프랑스군에 뒤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군이 보유했던 첨단 샤스포(Chassepot) 소총의 위력 때문이었다. 1868년 프랑스 총포 발명가인 앙투안 샤스포가 공병대와 함께 개발한 이 소총은 훈련에 따라 1분에 8~15발을 쏠 수 있는 첨단 소총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자국의 기술자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가 1836년 발명한 드라이제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드라이제 소총은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후장식 소총이었다. 후장식은 탄환을 총신 뒤쪽에서 장전하는 방식이다. 드라이제 소총은 화약과 뇌관, 탄알이 하나로 결합된 현대식 탄환을 사용한 최초의 소총이기도 했다. 이전의 전장식 소총은 이른바 화승총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들어왔던 조총이 바로 화승총이다. 화승총은 통산 1분에 1~2발 발사가 고작이었으며 고도로 숙련된 병사라도 3발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실탄 재장전은 꿇어앉은 상태에서만 가능했으며 엎드려서 몸을 숨긴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소총수들은 전쟁 때 꼼짝없이 적의 사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점을 한꺼번에 건너뛰는 후장식 소총인 드라이제의 도입으로 프로이센군은 막강한 전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1868년 개발한 신형 샤스포 소총으로 이러한 프로이센군을 압도했다. 샤스포는 보다 가볍고 기계적으로 정밀해 1분에 8~15 발을 쏠 수 있었다. 유효 사거리도 915m에 이르렀다. 드라이제 소총이 365~550m인 것과 비교하면 거의 배에 이르렀다. 게다가 탄환이 가벼워서 병사 한 명이 100발 이상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드라이제 소총탄은 70발 정도 지참하는 게 고작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전술적인 우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살인 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군은 안심하고 독일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방심한 프랑스군의 머리 위로 프로이센군의 무지막지만 크루프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떨어졌다. 혁신에 취하면 새로운 혁신을 하기 힘들다는 교훈을 남긴 사례다. 이는 군은 물론 기업에도 적용된다.

[
박스기사] 혁신기술의 기업이 독일 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포로가 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왼쪽)와 그를 맞이한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오른쪽).

 

크루프의 전성시대는 1870~71년 벌어졌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였다. 이 전쟁은 프로이센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프로이센군은 1870 9 1일 프랑스 동부에서 벌어진 스당 전투에서 12만 병력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전쟁의 승기를 잡은 결정적인 전투였다. 프랑스군은 3000명이 전사하고 10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까지 항복해 포로로 잡히는 수치를 당했다.

 

당당한 군복 정장에 군용 장화와 철모 차림의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의자에 앉아있는 프랑스 황제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그림이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빌헬름 캄프하우젠이라는 독일 화가가 1878년 그린 이 작품은 비스마르크의 느긋한 표정과 나폴레옹 3세의 초조한 표정이 대조적이다. 계속 진군한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한 뒤 근교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의 통일과 ‘독일 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가 제국 총리에 각각 올랐다. 프랑스는 이 전투의 패배로 9 4일 파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나폴레옹 2세의 제2제정이 무너졌다. 전쟁은 프랑스엔 치욕으로, 프로이센에는 영광으로 기록됐다.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크루프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프로이센군의 승리는 곧 자신이 개발해 생산한 철로 제조해 공급한 주강 대포의 승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프랑스군은 황동으로 만든 전장식(화약과 포탄을 포신 앞 부분에서 장전하는 방식) 대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시대와 별 차이가 없는 구식 대포였다.


첨단 기술이 탄생시킨 ‘크루프 대포’

크루프가 만든 대포는 신형이었다. 재료부터 강력한 주강이었다. 포탄을 포신의 뒷부분에서 장전하는 후장식이었다. 발사용 화약이 포탄 내부에 들어있는 일체형 포탄을 사용했다. 고품질의 단단한 주철 포신이 어마어마한 압력을 이겨낼 수 있었기에 강력한 화력의 포탄의 사용이 가능했다. 게다가 포열 안쪽에 정밀한 강선(발사된 포탄이 회전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포신 안에 파는 나선형 홈)도 장착할 수 있었다. 대포 포열 안쪽의 강선은 포탄에 회전 관성을 준다. 이는 포탄에 안정된 탄도를 갖게 한다. 따라서 정밀한 강선은 포 사격의 정확도를 높여준다. 크루프 대포는 프랑스군의 대포에 비해 포격 속도는 2, 정확성은 3배에 이르렀다. 강선 설치에는 과학기술, 그리고 산업 능력이 필요하다. 우선 튼튼하고 품질 좋은 철을 충분히 생산해야 하고 길고 가느다란 구명에 균일한 크기로 얇고 가는 홈을 파는 숙련공도 필요하다. 이를 크루프가 제공한 것이다.

 

프로이센 군은 크루프 대포를 활용해 적을 압도적으로 누를 수 있는 선진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그전까지 포병은 대형 고정 포대에 대포를 설치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포병은 대개 최고 지휘관들과 함께 맨 후방에 집중 배치됐다. ‘혁신의 군대’ 프로이센군은 이 고정관념을 깼다. 말이 끄는 이동식 포대에 대포를 설치해 기동성을 높였다. 포병을 작은 규모의 여러 부대로 나눠 분산 포격을 가했다. 포병 위치도 최전방으로 바꿨다. 이렇게 기동성, 유연성, 즉시성을 갖춘 프로이센 포병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독일 통일이라는 대사건은 크루프 신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크루프가 막대한 재산을 모으는 계기이기도 했다 역사적인 사건이 역사에 남을 만한 부자를 만든다. 기회는 이를 포착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교훈을 크루프는 남겼다

 

(6) 코시모 데 메디치 - 예술 후원자로 르네상스 이끈 피렌체의 수퍼 리치

수퍼 리치는 재산을 바탕으로 보통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정점은 정치권력이다. 권력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늘리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명예까지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역사는 이를 모두 얻은 사람을 기억한다. 바로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의 초대 통치자로 군림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다.

▲​1434년부터 1737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정치 가문의 창업자 코시모 데 메디치

 

코시모 데 메디치는 1434년부터 1737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정치 가문의 창업자다. 그는 전유럽을 대상으로 했던 금융업자로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유럽 전역에 16개 지점을 두고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복식부기를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회계사도 고용해 과학적인 금융업과 기업 경영을 추구했다. 오늘날 글로벌 금융업과 회계업은 메디치 가문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경영자로서의 능력과 재력으로만 권력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견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을 얻고 이를 휘두르려면 거기에 걸맞은 권위가 필요하다. 돈으로 권력을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권위까지 얻기는 쉽지 않다. 명예를 얻으려면 거기에 품위도 필요하다. 거기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시민들의 신뢰도 얻어야 한다. 코시모는 이를 해냈다. 그 원동력은 인문학이었다. 그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바로 르네상스다.

 

코시모는 금융업자이자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정치가였지만 성격은 인문학자에 더욱 어울렸다. 금융업자인 조반니 데 메디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도원 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했다.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는 물론 히브리어와 아랍어까지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모든 학문의 기본이라는 신학은 물론 문학,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학자와 예술가들과 토론도 즐겼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르네상스를 열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코시모 데 메디치 석상

 

그는 고문서 수집에 빠졌다. 당시 고문서는 지혜와 학문의 보고였다. 종교에만 치중했던 중세 시절 잊고 지냈던 고대인의 과학, 예술, 문화의 결정체가 고문서에 풍부하게 담겨 있었다. 고문서는 새로운 인문정신을 일깨워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그래서 코시모는 자신이 사귄 학자와 예술가를 비잔틴 제국 등에 보내 고문서를 구입하게 했다. 고문서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갈 계획을 세웠을 정도였다. 고문서 구입에 재산을 아낌없이 쓴 것은 물론 필경사를 대거 고용해 구입할 수 없는 고문서는 베껴오게 했다.

 

그는 1443년 산마르코 수도원 내부에 메디치 도서관을 만들어 고문서를 분류하고 보관했다. 고대 그리스나 히브리어, 아람어 문서는 당시 유럽의 공용어나 마찬가지였던 라틴어로 번역됐다. 고대 문명을 제대로 번역해 기록한 아랍어 문서도 번역됐다. 이 번역서들은 유럽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학, 문학, 과학의 가치를 전 유럽에 새롭게 확산하면서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됐다. 이에 따라 메디치 도서관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됐다. 이 도서관의 초대 관장을 지낸 토마소 파렌투첼리는 나중에 교황 니콜라오 5세가 됐는데 풍부한 학식 덕분에 ‘인문주의자들의 교황’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더욱 존경스러웠던 점은 엄청난 영향력에도 코시모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의견이나 제안에 대해 입법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말하면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일생을 통해 그는 ‘평등한 시민들 중의 제1인자’를 자처했다. 그의 권력과 권위는 엄청난 재산에서 나왔다. 그는 이 재산을 교육과 예술, 그리고 건축을 후원하는 데 사용했다. 이는 모두 공공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공동체에 헌신하면서 그는 시민의 찬사를 받고 존경을 받게 됐다. 그의 권위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존경에서 나온 권위는 자연히 권력으로 이어졌다.

 

메디치 가문은 원래 약사 집안이었다. 약사는 과학자다. 메디치라는 이름 자체가 약사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메디코에서 비롯했다. 가문의 문장도 동그란 알약으로 이뤄졌다. 메디치 가문이 독약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유지한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난 것도 이런 가문의 전통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처음 약국 운영으로 돈을 벌어들인 뒤 이를 바탕으로 모직 교역으로 업종을 바꿨다. 여기서 자본을 축적한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에 이르러 메디치 은행을 창업해 금융업에 진출했다. 코시모는 그의 장남이다. 코시모는 금융업뿐 아니라 제조업도 운영했으며 그의 생전에 피렌체 시민의 절반 정도가 메디치 가문에서 급료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시모가 1434년 피렌체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코시모는 사업에서 얻은 재산을 바탕으로 권력자로 떠올랐다. 그는 재산으로 권력만 얻은 게 아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를 초청해 피렌체를 문화·예술·건축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모으는 피렌체의 건축물과 수많은 예술작품과 미식문화는 코시모와 그의 메디치 가문 후손들이 이룬 것이다.

 

코시모는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역사 흐름을 바꾸는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르네상스의 후원자를 넘어 실질적인 추진력을 제공했다. 재산을 바탕으로 권력은 물론 존경까지 얻었다. 부가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의 가문은 이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유럽 전역으로 뻗었다. 코시모 메디치는 사후에 ‘국부(라틴어 pater patriae)’칭호를 얻었다. 명예로운 도시국가 피렌체의 명예로운 통치자였던 것이다. 그 힘은 재산을 올바른 시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한 데서 나온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정치 권력을 쥐는 것과는 별개로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집안이었다. 피렌체의 통치자는 물론 레오 10, 클레멘스 7, 레오 11세라는 세 명의 교황까지 배출했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국가였던 피렌체는 물론 유럽의 중심지였던 로마까지 좌지우지한 것이다. 로마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힘을 앞세워 유럽 전역을 사실상 지배했다. 메디치 가문은 그 중심에 있었다.


유럽 역사를 만든 메디치 가문

▲베네초 고졸리의 동방박사 그림 속에 메디치 가문의 인물들이 자리잡은 그림. 가문의 예술사랑 전통과 권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메디치 가문은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스페인 왕실과도 연결됐다. 유럽 각지로 금융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경제력은 물론 정보력까지 갖춘 메디치 가문의 협력을 노린 정략적인 결혼이었다. 거액의 지참금은 기본이었다. 이를 거기에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유럽 최고 수준의 문화를 누리던 피렌체의 문화도 함께 흘러 들어갔다. 메디치와 연결되면 풍부한 자금과 함께 문화도 얻을 수 있었다.

 

그 시초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1492~1519, 1513~1519 피렌체의 통치자)의 딸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프랑스어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 1519~1589). 카트린은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앙리와 결혼했다. 앙리는 나중에 프랑스 국왕 앙리 2(1519~1559, 재위 1547~1559)가 됐고 카트린은 프랑스의 왕비가 됐다. 이 결혼은 카트린의 시아버지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1494~1547, 재위 1515~1547)가 다리를 놓았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를 흠모했다. 피렌체 공화국 출신인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건너와 <모나리자>와 같은 걸작을 완성했으며 프랑스에서 생을 마쳤다. 프랑수아 1세는 미술중개상을 고용해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의 걸작을 프랑스로 옮겨왔다. 오늘날 루브르를 장식하고 있는 숱한 이탈리아 걸작은 그의 치세에 프랑스로 옮겨졌다. 프랑수아 1세는 문화국가 프랑스의 초석을 다진 군주로 프랑스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프랑수아 1세는 메디치 가문과 사돈을 맺기를 원했다. 카트린이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당시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유럽 최고의 문명을 누리던 이탈리아에서 미술, 음악, 무용, 요리 등 수준 높은 문화가 프랑스에 전파됐다. 문화국가 프랑스의 전통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에서 전수받은 셈이다. 문화예술뿐 아니라 음식문화도 함께 프랑스로 들어왔다. 음식을 포크로 먹고 접시에 담아 코스로 줄기는 풍습은 당시 카트린이 시집가면서 프랑스로 처음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유럽국가는 칼 하나 들고 구운 소나 돼지, , 오리, 거위의 살을 쌓아놓은 채 잘라서 먹었다. 양상추, 브로콜리, 완두콩, 아티초크 등 오늘날 서양요리의 기본이 되는 채소도 프랑스에 전해졌다. 파스타, 파르메산 치즈 등 이탈리아산 식재료도 소개됐다. 아울러 당시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던 칠면조와 토마토도 카트린이 프랑스로 시집가는 것을 계기로 메디치 가문을 통해 비로소 프랑스에 소개됐다. 뿐만 아니고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풍요한 음식문화를 뒷받침하던 수많은 소스의 레시피도 전해졌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통하는 ‘오렌지 오리’ 요리도 원래 피렌체에서 나온 것이다.

 

카트린의 후손들은 유럽 역사의 주역이 됐다. 카트린은 10명의 자녀를 뒀는데 7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그의 아들로 메디치 가문의 외손자인 프랑수아 2(1544~1560, 재위 1559~1560), 샤를 9(1550~1574, 재위 1560~1574), 앙리 3(1551~1589, 재위 1574~1589)는 프랑스 국왕을 지냈다. 앙리 3세는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군주(1573~1575)로도 선출돼 폴란드 국왕과 리투아니아 대공 자리를 잠시 지켰다. 하지만 앙리 3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면서 발루아 왕조는 단절되고 같은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조가 뒤를 이었다.

 

카트린의 딸 엘리자베트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1527~1598, 재위 1556~1598)에게 시집가 이사벨 데 발로이스라는 이름으로 왕비가 됐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최전성기의 국왕이었다. 유럽에서는 이웃 포르투갈을 병합하고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 포함),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 공국, 이탈리아 밀라노 공국,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을 지배했다. 유럽 밖에서는 포르투갈을 제외한 중남미 거의 전부와 아프리카 남서부, 인도 서해안,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말라카, 보르네오 섬 등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필리핀이란 국명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종교전쟁 시기에 유럽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레반토 해전에서 오스만 튀르크 해군에 승리해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이렇게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의 군주였던 펠리페 2세가 메디치 가문의 외손녀를 왕비로 삼은 것이다. 펠리페 2세는 평생 4차례 결혼했는데 그의 세 번째 결혼 상대가 프랑스 공주이자 메디치 가문의 외손녀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스페인어로 이사벨 드 발로이스(1545~1568). 결혼 당시 이사벨은 겨우 14세였다. 이사벨은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난다.

 

‘마고’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1553~1615)는 프랑스 서남부 나바라 왕국의 왕자로 부르봉 가문인 앙리 드나바라(1553~1610, 재위 1589~1610) 1589년 결혼했다. 나바라는 발루아 왕가의 마지막 프랑스 국왕이자 처남인 앙리 3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암살 당하자 1589년 앙리 4세로서 프랑스 국왕에 즉위했다. 부르봉 가문은 발루아 왕가와 마찬가지로 카페 왕조의 분가로서 발루아 왕가가 남자 후손을 남기지 못할 경우 프랑스 왕위 계승의 1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코시모의 후원으로 꽃피기 시작한 서양문화

카페 왕조는 10세기 프랑크족의 카롤링거 왕국을 대신해 프랑스의 왕이 된 위그 카페의 후손으로 이뤄졌다. 카페 욍조는 발루아 가문과 부르봉 가문으로 분열하는데 모든 프랑스의 국왕은 이 세 왕조에서 나왔다. 이 중 발루아의 마지막 군주가 메디치 가문의 외손자이고 부르봉의 첫 국왕이 메디치 가문의 외손녀 사위인 셈이다.


신교도인 앙리 4세가 즉위하자 프랑스는 신구교도 간의 내전에 휩싸였다. 마르그리트는 가톨릭 세력의 편에 서서 남편의 왕위가 무효가 되도록 노력했다. 내전은 앙리 4세가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 국민의 인정을 받으면서 진정됐다. 1593년 수도인 파리에 입성한 앙리 4세는 1598년 가톨릭 외에도 칼뱅주의 개신교도 교파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반포해 종교내란인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국가통합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는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와 함께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군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사후인 1658년 부르봉 왕조의 후손인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으로 이를 폐지하면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가 됐다. 상공업자이자 기술자가 대부분으로 프랑스 경제를 뒷받침했던 위그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 영국, 독일, 북미 식민지 등지로 대거 망명했다, 이로써 프랑스 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졌다. 프랑스 혁명(1789) 이후인 1802년에야 위그노에 대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됐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한 이듬해인 1599년 마르그리트와 이혼(형식적으로는 혼인무효)했다. 그는 1600년 메디치 가문 출신인 27세의 마리아 데 메디치(프랑스어로 마리 드 메디시스, 1573~1642)와 재혼했다. 앙리 4세는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지참금을 받아 피폐했던 국가 재정을 정상으로 회복하는 데 사용했다. 프랑스의 영토와 국민통합을 이뤄 대왕으로 존경 받는 앙리 4세는 메디치 가문의 ‘겹사위’인 셈이다. 앙리 4세가 광신적인 가톨릭 교도의 칼에 암살당하자 마리 드 메디시스는 9살의 아들 루이 13세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으로 프랑스를 다스렸다. 부르봉 왕조는 루이 13세와 태양왕 루이 14세로 이어지면서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뤘으며 루이 16세가 1789년 대혁명으로 퇴위할 때까지 프랑스를 다스렸다.

 

이렇듯 메디치 가문의 힘은 18세기까지 전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그 힘의 원천은 코시모가 추구했던 바로 그 인문학과 문화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은 근대 들어 세계 경영에 들어갔다. 오늘날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고 있는 서양의 인문학과 문화예술은 코시모의 후원으로 꽃피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훌륭한 부자는 역사를 만든다.

 

(7)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15년경~기원전 53)는 로마 최대의 갑부였다. 포브스지는 2008년 ‘역사상 최고 부자 75인’이란 기사에서 크라수스의 재산을 현재 가치로 1698억 달러로 추정하며 역대 8위로 매기기도 했다. 그는 그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

▲크라수스는 남에게 베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 달성을 위해서만 재산을 사용했다. 그가 부자였지만 존경받지 못한 이유다. [중앙포토·채인택]

 

1세기 로마인으로 당시 수많은 지식을 모아 『박물지』를 편찬한 백과사전적 학자이자 군인, 관리였던 카이우스 플리니우스(()플리니우스, 기원 23~79)는 크라수스의 재산이 2억 세스테리우스(고대 로마 화폐단위의 하나)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이는 당시 로마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액수다. 그의 재산에 대한 기록은 최소 액수가 17000만 세스테리우스다. 이런 기록으로 미뤄 크라수스가 로마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심지어 세스테리우스의 가치에 대한 평가에 따라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고대 인물일 수 있다는 추정도 있다. 1세스테리우스의 추정 가치 범위가 1~100달러로 상당히 넓기 때문이다. 환산 기준을 금, , 소매상품 등으로 서로 다르게 정할 경우 가치 기준도 함께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크라수스 재산의 현재 가치도 2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까지 폭넓게 추정된다.

 

권력에 집착하는 부자들의 반면교사

크라수스는 원래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87년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700만 세스테리우스라는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됐다. 오늘날 700~7억 달러 또는 그 이상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원로원 의원이자 전쟁 영웅이었으며 기원전 97년 집정관으로도 선출된 유력 인사였다. 푸블리우스는 로마가 민중파 정치인인 가이우스 마리우스(기원전 157~기원전 86)와 귀족파 정치인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기원전 138~기원전 78)가 기원전 87년 내전을 벌일 때 술라 편을 들었다가 마리우스 편에 의해 살해됐다. 크라수스는 부친의 재산을 제대로 물려받기도 전에 마리우스의 숙청을 피해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기원전 84년 술라의 심복이 된 크라수스는 기원전 82년 술라의 로마 진군 때 성문 근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술라의 세상이 된 로마에 돌아온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산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부를 늘렸다. 그가 재산을 불리는 방식은 비열했다. 마리우스파를 숙청하고 처형하는 과정에서 나온 엄청난 몰수자산의 상당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활용한 또 다른 치부 수단은 사설 소방대였다. 스스로 소방대를 조직해 공익 목적이 아니라 사익 목적으로 활용했다. 미리 진화 요금을 지불한 사람이 화재를 당했을 때만 불만 꺼준 것이다. 방재산업과 보험업을 독특하게 결합한 수익 모델이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더욱 악랄한 방식으로 재산을 불렸다. 화재 진압비를 미리 내지 않은 건물에 불이 나면 다 타도록 방치했다가 나중에 건물이 서있던 그 부동산을 시세 이하로 사들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재력으로 불난 터에 새로 집을 짓고 이를 원하는 가격에 세를 놓았다. 이런 방식으로 부동산을 늘리고 재산도 불렸다. 불난 집터를 팔지 않고 새로 짓겠다는 사람에게는 비싼 이자를 받고 자신의 자금을 빌려줬다.

 

이러한 고리대금업과 함께 은광도 소유했으며 농장도 대규모로 운영했다. 자신의 은광과 농장에서 일할 노예도 대규모로 소유했다. 노예를 사고파는 교역도 했다. 노예를 교육시켜 책 읽어주는 사람(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이 맡았던 여러 업무 중 하나), 집사, 그리고 요리사를 양성했다. 교육을 통해 업무 수행 능력이 높아진 수준 높은 노예를 수요에 따라 더욱 비싼 가격으로 팔아치웠다.

 

부잣집 아들 크라수스가 이토록 돈 모으기에 집착한 이유는 돈 자체가 아니라 돈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경제사학자 피터 번스타인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은 금과 은의 시대였다. 이에 대한 수요는 끝이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는 갈리아 원정(기원전 58~기원전 52)으로 지금의 프랑스 지역 대부분을 점령한 뒤 10만 명에 이르는 노예를 이끌고 로마에 개선했다. 이탈리아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 등 로마 영토 곳곳에 있는 광산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 끝없이 돈에 집착하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73년 벌어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의 진압을 맡아 전공을 세운다.

 

당시 부유한 로마인은 자신과 가족의 몸에 달고 다니거나 저택을 장식한 번쩍이는 금으로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 보유한 금화의 양은 곧 재산의 규모를 의미했다. 로마는 독특하게도 공화정 시절은 물론 이어지는 제정 시절에도 재력이 곧 정치력을 의미했다. 금권정치는 로마의 특징이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보다 자신이 보유한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가 국정에 대한 발언권을 좌우했다. 재력은 정치적인 우군을 만드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재력으로 확보한 발언권은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뇌물이나 약탈 획득물을 얻을 수 있는지를 결정했다. 돈과 권력의 상호반응과 순환 구조다. 재력이 권력을 낳고 권력이 다시 새로운 재력 확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금권정치의 특징이다.

 

이렇게 재산을 크게 불린 크라수스는 보다 많은 자금을 관리들에게 뇌물로 뿌릴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다양한 이유로 정부에 몰수된 부동산을 시세보다 훨씬 낮은 헐값에 다량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더욱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크라수스는 거대한 현금 자산과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로마 최대의 갑부로 올라섰다. 이렇게 모은 재산은 크라수스의 정치적 발언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73년 벌어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의 진압을 맡았다. 돈만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자신에게 부족했던 전공을 세울 기회였다. 당시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되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기원전 118년경~기원전 56)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기원전 106~기원전 48)는 모두 로마를 비운 상태였다.

 

반란은 기원전 73년 귀족들의 휴양지인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시작됐다.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 남부) 출신의 검투사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다수의 동료를 이끌고 탈출하면서 시작됐다. 로마는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디우스 글라베르에게 2개 군단을 맡겨 반란을 진압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봄 로마 원로원은 그 해 집정관을 맡은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그나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의 두 사람에게 진압을 맡겼으나 다시 실패했다. 그러자 절망한 원로원은 야심만만한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집정관이 남긴 2개 군단과 새로운 6개 구단을 합친 8개 군단을 맡겨 집압에 나서게 했다.

 

크라수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군단을 가혹하게 몰아갔다. 첫 전투에서 패배하자 군단 전체에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10분의 1(decimatio)’으로 불리는 무자비한 집단 형벌이었다. 군기가 해이됐거나 불명예스러운 일이 발생한 군단을 대상으로 병사 10명 중 1명꼴로 무작위로 처형 대상으로 고른 뒤 나머지 10분의 9의 병사들이 둘러싸고 돌멩이나 채찍, 곤봉 등으로 죽을 때까지 때리도록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형벌이었다. 크라수스의 명령으로 이 형벌 대상이 돼 죽어간 로마 병사는 4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됐다.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 진압 후 집정관으로

▲크라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 체제를 만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야망과 정치력, 크라수스의 재력,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전공(戰功)이 서로를 보완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중앙포토·채인택]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크라수스의 병사들은 악에 받친 채 잔혹한 공격을 파상적으로 벌였다. 그 결과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로마군단 병사들에게 가혹했던 크라수스는 포로로 잡힌 노예들에게는 더욱 잔혹했다. 포로 6000여 명을 전원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노예들의 고통의 소리는 크라수스에게는 정치적 성공의 축포와도 같았다. 문제는 서쪽에서 개선한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군단을 해체해야 로마로 들어올 수 있는 법을 어기고 군대를 데리고 로마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자 크라수스도 자신의 8개 군단을 그대로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원로원에 집정관직을 요구했다. 법을 무시했지만 두 사람은 힘으로 나란히 집정관에 올랐다.

 

원래 로마 공화정은 건전한 공직 체제가 뒷받침했다. 로마 공화정에서 초기 제정에 이르기까지 시민이 맡을 수 있는 공직은 재무관(Quaestor)-안찰관(Aedie)-법무관(Praetor)-집정관(Consul)-감찰관(Censor)의 순으로 위계가 있었다. 공직은 입후보와 시민 투표에서의 선출을 거쳐 각각 1년간 맡았다. 로마의 공직으로 유명한 호민관(Tribunus)은 임시직이며 독재관(Dictotar)은 비정상적인 자리로 로마의 정규 공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호민관은 평민만 입후보해 평민회에서 선출하며 평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독재관은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 심각한 국론분열 등의 국가 비상사태 시에 6개월~1년을 임기로 전권을 맡기는 자리다. 독재관 중에는 임기가 무제한인 종신독재관(Dictator Perpetua)가 있는데,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이 자리에 취임했다가 왕이 되려는 야심이 있다는 의심 속에 암살을 당했다.

 

공직은 힘과 함께 봉사의 상징이었다. 로마는 처음에는 한 공직을 연속으로 맡을 수 없게 했다. 하지만, 난세가 계속되면서 현실적인 권력과 금력이 공직, 특히 최고 관직에 해당하는 집권관 직을 좌우했다. 당대의 실력자였던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부터 100년까지 5년 연속 집정관을 맡았다. 마리우스의 정적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로마에 입성해 권력을 잡은 술라는 같은 공직을 반복해서 맡으려면 10년 터울을 두도록 했다.

 

크라수스는 금력으로 권력을 키워 이러한 제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집정관에 이어 기원전 65년 감찰관에 오른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산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기를 원했다. 빚에 허덕이는 원로원 의원이나 명망 인사들에게 돈을 대주면서 ‘스폰서’가 됐다. 기원전 62년에는 젊은 유력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자금을 대주면서 환심을 샀다. 카이사르는 지금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에서 재무관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상당한 양의 금을 들고 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로마 시민의 환심을 사서 지도자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가 확보한 금으로는 자신의 희망했던 정도의 시민 환심을 살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 최대의 부자였던 크라수스의 돈으로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고 싶어했다.

 

그 사이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카스피해에 이르는 소아시아 및 카프카스 지역과 예루살렘을 로마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이집트를 세력권에 넣었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금력과 함께 군사 지도자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기원전 106~기원전 48)의 인기도 이용하려고 했다. 그래서 갈수록 사이가 벌어져 가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설득해 자신이 포함된 세 사람으로 제1차 삼두정치 체제를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야망과 정치력, 크라수스의 재력,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전공이 서로를 보완해주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는 로마의 전통적인 공직 시스템을 무시한 애삼가와 권력자들의 야합이었다. 기원전 55년 크라수스는 바라는 대로 폼페이와 함께 두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됐다. 초법적인 선출이었다.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크라수스는 로마 영토의 동부를 책임지는 시리아 총독을 5년간 맡아 현지에 파견됐다.

 

크라수스는 자신을 ‘돈 자루’로만 여기는 로마 시민들에게 군사적 재능도 있는 유능한 인물임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업적이 필요했다.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이웃 페르시아인의 나라인 파르티아에 전쟁을 걸었다. 그는 파르티아에 군사적 승리를 거둬 폼페이우스와 카아사르에 필적하는 전공을 세우고 영토를 확장한 인물로 로마 시민들에게 각인되기를 원했다. 영토를 확장하면 엄청난 토지와 노예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토지와 노예는 부와 동의어였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 중무장 보병을 주축으로 한 4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영토인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크라수스는 부주의하게 파르티아 깊숙이 들어갔다가 함정에 걸렸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인 카레(지금의 터키 동부 하란)에서 파르티아 군과 마주했다. 역사상 로마 사상 최대 패배로 기록되는 ‘카레 전투’다. 파르티아 왕 오도데스 2세의 수하인 수레나스 장군은 1만 명의 기마궁 수와 화살을 나르는 1000마리의 낙타로 로마군단을 공격했다. 크라수스는 아들 피블리우스에게 특공대를 맡겨 퇴로를 열려고 했지만 파르티아의 화살은 로마 최대의 유산 상속 예정자였던 젊은 로마 장교를 놓치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아들의 목이 잘려 적의 창끝에 꽂힌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로마 최고 부자의 최후

결국 그는 퇴각 조건을 논의하자는 파르티아군에 속아 협상장에 나갔다가 자신을 생포하려는 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적장을 살해한 파르티아 군은 로마군단을 더욱 맹렬하게 밀어붙였다. 당시 크라수스의 로마군단은 1만 명 정도만 간신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은 시리아 속주를 파르티아로부터 지켜냈으나 더 이상 동진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서 제일 가는 재산가, 3두체제의 한 축으로 로마의 최고 정치 지도자라는 지위도 크라수스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오히려 파르티아는 돈 자랑을 하던 그를 혐오하며 끔찍한 최후를 안겼다. 뜨거운 불에 녹인 고온의 액체 금을 그의 시신 목구멍(일설에는 머리라고 한다)에 들이부은 것이다. 파르티아인의 입장에서 ‘인간으로서 고상함을 잃고 돈에 미쳐 이유도 없이 남의 나라를 침략한’ 로마와 그 문명, 그리고 그 지도자인 크라수스에 대한 경멸을 나타낸 것이다.

 

크라수스만큼 반면교사의 삶을 산 부자도 드물 것이다. 그는 금력으로 권력을 얻으려 했지만 권력 획득에 필요한 전공(戰功)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그런 콤플렉스가 그를 결국 종말로 몰고갔다. 크라수스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으나 수단이 정당하지 못했기에 평판은 낮았다. 돈으로 평판까지 살 수는 없었다. 재산은 모았으나 덕을 쌓지는 못했다. 남에게 베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 달성을 위해서만 재산을 사용했다. 그는 전공으로 평판을 얻어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 했으나 결국 아들과 함께 전쟁터의 고혼이 되는 화를 당했다. 로마에선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8)]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데이비슨 록펠러(1839~1937)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자로 기록되는 인물이다.
현대사에서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인이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은 일과 놀이로 가득 찬 길고 행복한 휴가다

록펠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시작부터 일하고 저축하며 나눠주도록 훈련받았다.

▲록펠러는 인류사를 통틀어 한 개인이 소유했던 재산 중 최고액을 소유했던 부자였다. 그러면서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중앙포토·채인택]

 

포브스에 따르면 록펠러가 최대 재산을 보유했던 시기는 1913년이었다. 그간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2007년 가치를 기준으로 3360억 달러나 된다. 1913년 당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1.5~2%에 이른다. 이 금액은 미국 역사에서는 물론 인류사를 통틀어 한 개인이 소유했던 재산 중 최고로 통한다.

 

아버지는 떠돌이 사기꾼 약장수에다 난봉꾼

눈여겨봐야 할 점은 록펠러가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사람은 드물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존 록펠러의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1810~1906)는 나무꾼으로 일하다 만병통치약 행상으로 전업했다. 전국을 떠돌면서 자신을 ‘생약으로 치료하는 의사 레빙스턴 박사’로 자칭하며 식물 엑기스로 만든 ‘만병통치약’을 팔았다. 한 마디로 번지르르한 말로 소비자를 속이면서 악덕상행위를 일삼는 떠돌이 사기꾼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의약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 사기 행위와 검증되지 않은 자연요법을 결합한 이런 형태의 영업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윌리엄은 10남매의 셋째로 태어나 제대로 물려받은 것이 없이 이렇게 살았다. 본인은 자신이 파는 약의 효과를 제대로 봤는지 95세까지 장수했다. 존 록펠러가 97세까지 산 것으로 보면 유전적으로 장수집안으로 볼 수 있겠다.

 

윌리엄은 못 말리는 난봉꾼이었다. 심지어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여성과 다시 결혼하는 중혼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1837년 존의 어머니인 엘리자 데이비슨과 결혼해 여섯 아이를 낳았다. 윌리엄은 아이들이 10대이던 1855년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그런 뒤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1856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마거릿 엘런과 결혼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자신의 떠돌이 행상을 할 때 사용했던 윌리엄 레빙스턴 박사라는 이름으로 중혼을 한 것이다. 엘리자는 1889년 숨질 때까지 윌리엄과 계속 결혼을 유지했으며 마거릿도 190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윌리엄과 함께 살았다. 윌리엄의 중혼은 상당 기간 록펠러 가문의 비밀이자 수치로 남았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윌리엄이 엘리자와 사는 동안 가정부였던 낸시 브라운과 관계를 계속해 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은 엘리자와 결혼 전에 낸시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엘리자의 아버지가 지참금으로 500달러를 주자 엘리자와 결혼하고 가난한 낸시는 정부로 남겼다. 심지어 엘리자와 결혼한 이듬해인 1838년 본부인으로부터 첫 아이인 장녀 루시(1838~1878), 정부인 낸시로부터 또 다른 딸인 클로린다를 얻었다는 점이다.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1839년에는 미래의 세계 최고 부자인 장남 존 록펠러, 1841년에는 존의 평생 사업 파트너인 차남 윌리엄(1941~1922)이 태어났는데 그 사이인 1840년 낸시와의 사이에서 딸 코넬리아를 얻었다. 윌리엄은 “인생을 스마트하게 살려면 배워둬야 한다”며 자신의 자식들에게 틈만 나면 속임수를 가르쳤다. 한번 장사를 나가면 오랫동안 떠돌다 돌아왔다. 집에는 부정기적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록펠러는 이런 아버지보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 인생을 사는 방식을 배웠다. 어머니는 어렵게 자식들을 키웠지만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정직과 근면, 절약을 가르쳤다. 록펠러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성실하고 총명한 젊은이로 자랐다. 어린 록펠러는 집에서 칠면조를 길러 용돈을 벌었으며 감자와 캔디도 팔았다. 이렇게 번 돈을 동네사람에게 빌려주는 사금융 장사까지 했다. 그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작은 접시를 큰 접시와 바꾸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뛰어난 장사수완을 보였다. 록펠러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시작부터 일하고 저축하며 나눠주도록 훈련받았다.

 

석유 시장의 90%를 통제한 트러스트로 부 축적

▲미국의 명문 사학인 시카고 대학은 록펠러가 1890년 내놓은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사진은 시카고대학 하퍼도서관. [중앙포토·채인택]

 

록펠러는 16살에 취업 전선에 나섰다. 당시로선 흔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한 일은 농산물 중개업체의 점원 보조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20세의 나이에 동생인 윌리엄과 모리스 클라크라는 인물과 동업을 하며 중개업소를 차렸다. 뒤이어 약사인 사무엘 앤드루스도 끌어들여 록펠러&앤드루스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록펠러의 중개업체는 1862년 당시 벤처와도 같았던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미국에선 1859년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석유 붐이 일었다. 록펠러는 남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유전 탐사와 채굴에 열중할 때 부가가치가 더 큰 정제산업에 주목했다. 1867년 헨리 플래글러를 끌어들여 ‘록펠러, 앤드루스 & 플래글러’라는 회사를 차려 지역 정유소를 운영했다.

 

록펠러의 석유 사업이 날개를 단 것은 1870년 오하이오주에서 스탠더드 오일을 창업하면서부터다. 동생 윌리엄과 초기 사업 파트너였던 새무얼 앤드루스, 헨리 플래글러, 재베즈 보스트위크, 스티븐 하크니스 등이 힘을 모았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록펠러는 1911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명령으로 회사가 해산되기 전까지 스탠더드 오일을 운영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등유와 휘발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록펠러의 사업은 눈덩이처럼 성장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관련 기업의 수직, 수평적 결합을 통해 실질적인 시장독점을 이뤘다. 이를 경제사에서는 ‘트러스트’라고 부른다. 미국 석유 시장의 90%를 통제했다. 법률적·경제적으로 독립한 동종사업자들이 상호경쟁의 제한이나 시장통제를 위해 수평적으로결합해 상거래 조건 등에 대해 공동행위를 하는 ‘카르텔’보다 더욱 강력한 형태다. 트러스트는 독점의 가장 강력한 형태로 경제적인 위력도 가장 강하다. 강력한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오일은 록펠러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줬다.

 

시운도 따랐다. 석유는 미국 전역에 걸쳐 수요가 비약적으로 늘었다. 석유를 사용한 등잔은 빠른 속도로 고래 기름 등잔을 대신하면서 새로운 조명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는 전기 조명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전기 시대가 열려 석유등이 하나씩 사라져도 석유 수요는 줄지 않았다. 석유 수요는 오히려 늘었다.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에 걸쳐 자동차 시대가 열리면서 자동차 연료로 석유가 사용됐기 때문이다.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발전소에도 석탄과 함께 석유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석유는 현대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산업혁명을 이끌었다. 이런 산업의 발달은 미국 번영의 토대가 됐다.

 

록펠러는 미국의 철도 산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스탠더드 오일의 석유를 미국 전역에 운반하기 위해서는 거미줄 같은 철도망과 원활한 철도 운용 시스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유 산업은 철도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잘 연결된 철도망은 석유 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다. 이런 철도망은 미국이 세계 최대 산업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다. 석유산업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스탠더드 오일은 1899년 연방 반() 트러스트법 위반 혐의를 인정받아 트러스트를 해체했다. 이어 1911년 같은 이유로 미국 대법원에 의해 아예 기업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탠더드 오일은 34개의 서로 다른 기업으로 분리됐다. 이렇게 분리된 기업 중 일부는 발전을 거듭해 현재 세계 최대 수준의 석유기업인 엑손모빌(ExxonMobil)과 세브론(Chevron) 등으로 성장했다.

 

시카고 대학과 록펠러 재단 세운 기부왕

기업이 분리되면서 록펠러의 재산은 오히려 천문학적으로 팽창했다. 기업이 분사되면서 분사된 기업 가치가 올라 그 합이 원래 하나의 기업으로 존재할 때의 가치보다 더 커지게 된 것이다. 스탠더드 오일은 해체되고 분사됐으나 각 사별 록펠러의 지분은 그대로였다. 분사 초기 그 합은 기존 스탠더드 오일의 가치보다 3~4배가 됐다. 덕분에 록펠러의 재산은 미국 최초로 10억 달러를 넘었다. ‘기회의 땅’ 미국의 첫 억만장자가 탄생했다. 록펠러 재산은 스탠더드 오일이 분사된 지 2년이 지난 1913년 최대에 이르렀다. 록펠러의 나이 74세 때였다. 트러스트 덕분이 아니라 트러스트가 해산된 덕분에 재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석유왕’ 록펠러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와 더불어 미국의 현대 기부문화의 형태를 이루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뉴욕주 웨스트체스트 키쿠이트의 저택에 살았다. 그는 은퇴 뒤 삶의 좌표를 은둔 대신 사회 기여로 설정했다. 이전까지의 삶을 돈을 모으는 데 바쳤다면 이후의 삶은 돈을 쓰는 데 정열을 쏟았다. 1913년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기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기업인 출신답게 돈을 쓰는 데도 치밀하게 접근했다. 좋은 일에 쓰라며 돈을 무작정 기부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사회복지사업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기관에 목적을 부여한 것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미국식 기부의 원조다. 목적 있는 사업을 위한 체계적인 기부를 함으로써 미국식 현대적 기부문화 형성에 기여했다. 그는 자신의 재단을 통해 각종 기관과 학교 등에 사업과 연구 자금을 기부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뤄갔다. 이를 통해 의료, 교육, 과학기술 연구의 발전이라는 의도를 달성했다. 특히 당시 문제였던 황열병에 대처하는 연구에 많은 돈을 내놨다. 요즘 빌 게이츠 회장이 말라리아 퇴치 등 제3세계 풍토병 해결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00년초 미국이 파나마 운하 공사를 시작하면서 현지 풍토병인 황열병으로 수많은 인부가 목숨을 잃으면서 사회문제가 됐다. 운하 공사가 한동안 중단되기까지 했을 정도로 병은 지독했고 전염은 광범위했다. 쿠바의 의사인 카를로스 핀레이가 모기에 전염원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미국 군의관 월트 리드가 파나마 현지에서 방역활동을 통해 황열 발생을 극적으로 감소시켰다. 모기를 퇴치하면 황열병의 확신이 저지된다는 것을 연구로 알아낸 덕분이다. 월트 리드의 이름은 미국 수도 워싱턴 북부 베데스타에 있는 월트 리드 미육군병원에 남아있다. 미국 대통령이 아플 경우 가장 먼저 후송되는 곳이다.

 

청교도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딱 맞는 인물

록펠러 기부 사업의 등뼈에 해당하는 것이 시카고 대학이다. 미국의 명문 시카고 대학은 록펠러가 1890년 내놓은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이 대학은 현재까지 총 8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시카고대학 출신이거나 이 대학의 교수를 지낸 인물로서 수상한 사람의 숫자다. 이는 세계 4위에 해당하는 숫자다. 시카고대학은 교수-학생 비율이 1 5정도로 미국에서 상위권에 해당한다. 게다가 우수 교수를 확보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아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교수진을 확보한 대학의 하나로 평가 받는다. 이런 학구적인 교풍 덕분에 이 대학에서 학부를 마친 학생의 80% 이상이 졸업 뒤 5년 이내에 일반대학원이나 법과대학원·의과대학원 등 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하고 있다.

 

시카고 대학의 법과대학원·의학대학원·경영대학원은 세계적인 전문대학원으로 이름 높다. 시카고 대학은 사회과학에서는 경제학, 자연과학에서는 물리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경제학은 시카고 학파의 산실로 이름이 높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이끄는 학파다. 이 대학 물리학과는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및 ‘아르곤 국립 연구소’와 손잡고 합동 연구를 통해 숱한 실적을 올려왔다. 기업인인 록펠러의 기부로 설립됐음에도 실용 학문보다는 순수 학문에 무게를 두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양 교육에 관심이 많다. 이 대학에 학부생으로 입학하면 2년간 교양과목을 폭넓게 공부하는 ‘리버럴 아츠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 미국에서 학생 공부시간이 가장 많은 대학의 하나다.

 

록펠러는 1901년에는 의학연구를 목적으로 자신의 성을 딴 록펠러의학연구소를 세웠는데 이 연구소는 1965년 록펠러 대학으로 발전했다. 독특하게도 생명과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만 받는다. 미국에서 의학·생명과학 부문에서 최고의 연구 수준을 자랑하는 대학이다. 생명과학과 관련된 노벨 생리의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출신자가 2016년까지 25명에 이른다. 이 대학 교수 중 학술원 회원이 30명이 넘는다. 필리핀의 센트럴 필리핀 대학의 설립에도 그의 기부가 큰 몫을 했다.

 

록펠러는 대표적인 기독교도 기업인이다. 그는 미국 침례교회 교단(ABCUSA)에 소속된 북장로교회의 열렬한 신자였다. 그는 일평생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결혼생활도 평탄했다. 청교도의 후손인 로라 스펠만(1839~1915)을 만나 1864년 결혼해 해로했다. 두 사람은 다섯 자녀를 뒀다. 기독교 신앙은 록펠러의 일평생에 걸쳐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자신의 성공에 기독교 신앙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딱 맞는 인물이 록펠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기업의 성장은 말 그대로 적자생존의 결과라며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성공도, 재산도, 기부도 살아남은 기업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록펠러는 적자생존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기업인이었다.

 

록펠러는 1937년 플로리다주의 휴양지에서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14억 달러의 유산을 남겼는데, 대부분 가족들의 영구 트러스트로 묶인 돈이었다. 록펠러가 세상에 남긴 것은 재산만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를 탓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간 젊은 벤처 기업인의 일생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을 준다. 더구나 그는 안정적인 곡물 거래 대신 위험성이 큰 석유 거래와 정제라는 벤처 산업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런 그는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에게 ‘기업가 정신’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록펠러는 86세가 되던 해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나는 어려서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을 함께 배웠습니다. 내 일생은 일과 놀이로 가득 찬 하나의 길고 행복한 휴가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면서 걱정이란 것을 길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매일 내게 잘해주셨습니다.

 

(9) 하워드 휴즈

하워드 휴즈(1905~1976)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과감한 도전과 열정을 보여주며 온몸을 던진 경영인이었다. 오늘날 기업인에게 가장 요한 덕목이다.

 

▲하워드 휴즈의 삶은 아버지와 삼촌의 경험과 재능을 반반씩 물려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영화와 공학이 그것이다.

 

하워드 휴즈는 괴짜 부자다. 일생에 걸쳐 줄기차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모험적인 기업인이다. 그의 삶을 다룬 <에비에이터> 영화가 2004 마틴 스콜세지 감독 연출,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영화로 나오긴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여전히 생소한 인물이다. 휴즈는 영화와 항공이라는 상반된 분야에서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전후 미국이  세계를 주름잡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기술산업에 도전해 스스로  역사를 썼다. 뜨거운 열정과 과감한 도전은 기본이다. 인습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  자체가 모험이었다. 새롭고 자유로운 발상을 집념어린 노력으로 현실로 이룬 인물이다. 평생 편안히   있는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이를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산업에 투자했다. 이를 통해 재산을 불렸을  아니라 인류의 삶을 바꿔나갔다.

휴즈는 평생 모험적인 투자를 그치지 않은 애니멀 스피리트 기업인이었다. 영화산업과 항공산업은 물론 방위산업, 전자산업, 매스컴, 제조업  광범위한 사업에 투자하고 사업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부동산, 석유 탐사, 유전 운영, 광산업, 컨설팅, 엔터테인먼트 사업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에 과감하게 진출했다. 대부분 성공을 거둬 생전에 전세계에서 가장 재정적으로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받았다. 휴즈는 세상을 떠날  15 달러의 재산을 남겼다. 당시 미국 GNP 1190분의 1 해당하는 액수다. 현재 가치로 625000 달러에 해당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에비에이터>.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가 주인공 하워즈 휴즈를 연기했다. / 중앙포토·채인택

 

휴즈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1920년대 후반부 거액의 제작비를 쏟아부어 관객들에게 새롭고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대형 영화 제작을 선도했다. 거액의 제작비를 바탕으로 다양한 상상을 영상으로 담는  성공한 신개념 고예산영화는 관객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휴즈의 영화는 연속 흥행몰이를 했으며 영상 문화의 수준을 높였다.

영화인으로 성공한 휴즈는 동시에 항공이라는 신산업에 뛰어들었다. 영화 자체도 모험산업이지만 새롭게 진입한 항공산업이야말로 고위험-고수익 개척 산업이었다. 그는 과감한 도전으로  세계에서 위험을 회피하고 고수익을 얻는  성공했다. 1932 휴즈 항공사를 설립한 그는 수많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해 새로운 항공산업의 장을 열었다. 1930년대  엄청난 투자로 항공기 최고 속도의 기록을 여러 차례 갈아치우면서 고속 항공기의 시대를 열었다. 트랜스월드항공을 구입해서 확대하는 한편 에어웨스트항공사를 사들여 이름을 휴즈에어웨스트로 바꿨다. 휴즈는 자신이 직접 항공기를 조종하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때문에 사고 후유증으로 만년에 기행과 불안증, 통증의 삶을살았다. 그의 말년은 은둔과 기행으로 가득찼지만 기부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를 세우고 재산을 기부해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휴즈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과감한 도전과 열정을 보여주며 온몸을 던진 경영인이었다. 오늘날 기업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휴즈의 삶을 하나하나 파보자. 그는 1905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워드 휴즈 시니어는 발명가였으며 삼촌 루퍼트 휴즈는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이었다. 휴즈의 아버지는 회전방식으로 바위를 뚫는 굴착기인 샤프 휴즈 발명했다. 당시 석유 개발붐이 일던 텍사스에서 휴즈 공구사를 세운 그는  혁신적인 석유 시추용 드릴을 판매하는 대신 리스해서 이익을 극대화했다. 이어 뛰어난 사업 수단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해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창조적인 공학적 능력과 경영 아이디어를 동시에 갖춘 사업가였다. 휴즈의 삶은 아버지와 삼촌의 경험과 재능을 반반씩 물려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영화와 공학이 그것이다.

휴즈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과 기술에 흥미와 열정을 보였다. 11 때인 1916 텍사스주 휴스턴의  아마추어 무선통신사가 됐다. 1925 국제아마추어무선연합(IARU) 결성되기도 전에 활동했다. 12 때는 아버지가 발명한 증기 엔진의 부품을 활용해 당시 모터 달린 자전거 불렸던 모터사이클을 만들어서 타고 다녔다. 휴스턴 최초로 이를 몰고 다닌 사람으로 지역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14   비행 교습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캘텍)에서 수학과 항공공학 코스를 청강했다. 금수저 출신의 영재였지만 그는  재능을 안락한 삶이 아닌 모험적인 신사업 개발에 사용했다.

휴즈는 10대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1922 어머니 엘린이 자궁외 임신으로 숨진  이어 아버지인 하워드 휴즈 시니어도 1924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의 사망으로 휴즈 공구사를 비롯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19 생일 이후 법적으로 재산 전체를 관리할  있게 됐다. 부모의 갑박스러운 사망은 그에게  충격을 줬다. 19 때인 1925 자신의 재산으로 의학연구소를 세우겠다는 내용의 서류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휴즈는 어린 시절 실력과 열정을 동시에 인정받은 골프 유망주였다. 20대에 핸디4 기록할 정도였다. 최상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과 수시로 라운딩을 즐겼으나 공식 시합에는 나가지 않아 프로선수가 되지는 않았다.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서서히 식으면서 그는 다른 몰두할 일을 찾아나섰다.

휴즈는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라이스 대학을 다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했다. 연인이던 엘라 라이스와 결혼한  텍사스주를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영화 제작자의 경력을 시작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한 그는 정열적으로 영화사를 새롭게 썼다. 1927 <모두가 연기하고 있어요> 시작한 영화제작은 흥행에서 연속 성공을 거뒀다. 이듬해 제작한 <아라비아의 기사들> 흥행에서 짭잘한 수입을 거뒀을  아니라 아카데미 코미디 부문  감독상까지 거머쥐었다. 1928 제작한 <라켓> 1931 작품인 <프론트 페이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과 거둔 영화인

▲지옥의 천사들] 영화의 한 장면.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직접 촬용해 영화관에서 보여주자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휴즈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현란한 볼거리를 마련함으로써 관객을 끄는 대형 영화 그것이다. ‘소액 투자, 안정 제작, 소규모 이익 구조의 당시 할리우드 영화계를 고투자 고위험 고수익 구조로 이끌었다. 오늘날 블록버스터로 불리는 거대 예산 영화의 원조 격이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항공과 영화를 결합한 작품으로 미국 영화상 사실상 최초의 거대 예산 영화를 제작했다. 항공전을 소재로  영화 <지옥의 천사들>(1930) 그것이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도 많지 않은 시대에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직접 촬용해 영화관에서 보여줬으니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380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해 800 달러를 벌어 들였다. 할리우드의 이전 흥행기록을 모두 바꿔버린 대흥행작이 됐다.  영화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어 아카데미상 촬영상 후보에도 올랐다. 휴즈는  작품에 몰두해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맡았다. 영화와 항공이라는 휴즈의  가지 열정을 모두 구비한 작품이었다. 이를 위해 휴즈는 전쟁터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프로펠러 전투기를 87대나 구입했다. 이를 조종할 최고의 비행사들도 고용했다. 조종사 면허를 보유한 휴즈 자신도 스스로 비행기를 몰고 스턴트 연기에 나섰는데 사고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영화가 영화 역사에서 무성영화와 발성영화(토키영화) 전환기에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작품은 애초에 무성영화로 촬영됐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발성영화의 기술에 끌린 휴즈는 흥행면에서도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해 무성영화로 촬영한 분량을 전량 폐기하고 유성영화로 새롭게 촬영했다. 제작비가 천문학적으로 올라간 이유  하나다. 휴즈가 보여준 불가능에 대한 도전정신이 아로새겨진 작품이다. ‘영화계의 도깨비라는 별명은  작품을 계기로 얻어졌다.

휴즈의 도전 정신을 보여준  다른 사건이 검열과의 싸움이었다. 미국에서는 헤이스 규칙(Hays Code)’으로 불리는 영화 검열 제도가 1934년부터 1968년까지 시행됐다. 미국의 상업영화에서 도덕적으로 수용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규정했다.  규칙에 따르면 영화에는 폭력적인 장면이나 성적 묘사는 물론 하느님’, ‘예수님이란 말의 앞뒤에 욕설이 나와서도  된다. 심지어 목사를 조롱하는 장면도 불가능했다. 서로 다른 인종간의 남녀관계나 목사에 대한 조롱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규제가 심했다. 노출 장면은 당연히 배격됐다. 당시 인기를 끌던 누아르 영화가 주로 타격을 입었다. 휴즈는 이에 과감하게 맞섰다.

휴즈는 1932 영화역사에서도 유명한 <스카페이스> 제작했다. 조직폭력배의 어두운 삶과 근친상간  파격적인 내용이 포함된 작품이다. 1983 브라이언 팔마 감독이  파치노, 미셸 파이퍼 등을 기용해 리메이크한 걸작이다.  <스카페이스> 1943 제작한 <무법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생한 폭력 장면과 과감한 노출 의상으로 검열에 걸려 개봉이 지연됐다. 휴즈는 검열에 타협해 영화에서 문제 장면을 삭제하는 대신 버텼다. 이처럼 검열에 개의치 않는 휴즈의 과감한 영상 도전은 이후 영화산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휴즈는 1954년에는 메이저 스튜디오를 처음으로 단독 소유한 영화인이 됐다. 하지만 이듬해 자신이 소유한 RKO 영화의 TV 방영권을 제너럴 타이어사에 넘기고 영화산업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1957년에는 영화에서 완전히 손을 털고 나갔다. 매카시즘  복잡한 정치상황이 작용한 결과다. 영화산업에 발을 담근 뒤로  할로우, 캐서린 헵번, 에바 가드너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여배우들을 줄줄이 발굴했다. 대부분 그의 연인으로 있다가 떠났다.

 

고속 항공기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되다

▲불시착한 H1 실버불렛과 하워드 휴즈. 그는 이후 끊임없이 도전해 고속 비행이 가능한 H-1레이서를 개발, 1935 9월 자신이 직접 항공기를 몰고 시속 563km의 당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 중앙포토·채인택

 

휴즈는 공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항공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도 함께 벌였다. 물려받은 휴즈 공구사에서 항공사업부를 설치해 자신이 비행할 고속 항공기를 개발했다. 인재 욕심이 많았던 그는 우수한 엔지니어를 영입해 최고 속도로 비행하는 항공기 개발에 몰두했다.  결과 고속 비행이 가능한 H-1레이서를 개발, 1935 9 자신이 직접  항공기를 몰고 시속 563km 당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어  비행기를 몰고 북미대륙 횡단에 성공했다. 1938 7월에는 자신이 세운 휴즈항공사에서 록히드 L-14 수퍼 엘렉트라를 개조해 91시간 만에 세계 일주 비행에 성공했다. 이는 비행 역사에 기록되는 과감한 도전이자 기록이었다. 그의 집념은 고속 항공기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됐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휴즈 항공사는 2 세계대전  미군 당국으로부터 고고도 고속정찰기 XF-11 개발과 100 주문을 받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제기 2대의 제작에 그쳤다. 전쟁이 끝난  휴즈 항공사는 고정익보다 회전익 항공기,  헬기 개발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성공을 거뒀다. 가장 안정적인 헬기라는 휴즈500 개발하고 공격용 헬기, 공대공 미사일  다양한 무기체계를 개발해 미군에 납품했다. 강력한 기술력이 바탕이 됐다. 휴즈 항공사는 나중에 맥도넬 더글러스로 넘어갔으며 휴즈500 MD-500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기술 중심으로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휴즈 항공사는 라이벌인 시코르스키 항공사와 함께 헬기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모험을 마다 않는 과감한 기업가 정신과 함께 휴즈가 남긴 최고의 유산이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HHMI). 하워드 휴즈의 기부를 통해 설립된 비영리 의학연구소다. 1953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설립됐으나 현재는 메릴랜드주 체비체이스에 있다. ‘생명  자체의 기원 포함한 기초의학 연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휴즈는 일생에 걸쳐 과학과 기술에  관심을 보인 것은 물론 10 청소년기에 2 간격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경험 때문에 의학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19세에 작성한 유언장에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 일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의학연구소를 반드시 설립하라고 써뒀을 정도로 의학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열정을 보였다.

휴즈는 자신이 설립했던 휴즈 항공사 주식을 전량 기부해 연구소의 운영을 지원했다.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는 연구소는 현재 자산이 182 달러로 세계 2 규모의 생의학 연구소로 자리 잡고 있다. 과학자의 연구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지원 원칙은 과학발전의 자율성을 높여 과학자의 애니멀 스피리트 자극하는 요소로 평가된다. 모험가 휴즈가 세운 연구소다운 운영 원칙이다. 기부를 빌미로 간섭하려는 일부 부자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

 

2016.01.05 세계 400대 부자 65%가 자수성가… 한국은 '제로'

中 28명·日 5명·러시아 18명·인도 9명이 '자수성가 부호' - 세계 10大 부자도 창업자들 빌 게이츠·베조스·저커버그… 혁신형 기업 만들어 富 쌓아 - 한국은 5명 모두 상속자들 기존 재벌 외 신흥부호 명맥 끊겨 "우리경제 역동성 떨어지는 반증"

우리나라에서 당대에 부(富)를 일궈 세계 최고 부호 반열에 들어간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의 경제정보 미디어 블룸버그가 지난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조사한 세계 400대 부자 목록에 따르면, 이 명단에 포함된 한국인 5명은 모두 부의 원천이 '상속(inherited)'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중국(홍콩 제외)은 명단에 이름을 올린 29명 중 28명, 일본은 5명 모두 자신의 손으로 창업해 부를 일군 자수성가(self-made)형이었다. 한국에서 신흥 부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산업화 성숙단계에 제대로 진입하기도 전에 창의적인 창업 생태계가 고사(枯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의 지난 연말 기준 세계 부호 상위 400명 중 65%인 259명이 자수성가형이었으며, 35%인 141명만 상속형이었다. 자수성가형 비율은 세계 200대 부자로 대상을 좁히면 더 높아져 69%인 138명이 자수성가형인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세계 10대 부호들은 모두 창업 스토리를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시킨 창업자들이었다. MS(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패션 브랜드 '자라(ZARA)'로 유명한 인디텍스의 아만시오 오르테가, 세계 최대 온라인 유통업체인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세계 최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의 저커버그 등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혁신형 기업 창업자들이 세계 최고 부호가 됐다.

 

 

반면, 세계 부자 순위 400위 안에 든 한국인들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모두 재벌 2~3세들이었다. 세계 400대 부호 중에는 아시아 부호가 80명 포함돼 있고, 이 중 63명(70%)이 자수성가형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중국인은 29명이었으며 이 중 1명을 제외한 28명(97%)이 자수성가형이었다. 중국 최고 부자인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13위), 중국 최대 온라인 유통업체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22위), 모바일 메신저 위챗을 운영하는 텐센트그룹의 마화텅 회장(36위), 중국 최대 검색사이트 바이두의 리옌훙 회장(62위), 중국의 게임사이트 넷이즈의 딩레이 회장(95위) 등이 100위권 안에 이름을 올렸다.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로 전 세계 패션 시장을 누비고 있는 야나이 다다시 회장(39위)과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107위), 전기기기 업체 키엔스의 다키자키 다케미쓰 명예회장(137위) 등 세계 400위 부호 랭킹에 든 일본인 5명은 모두 자수성가형이었다. 러시아는 18명 모두, 인도는 14명 중 9명(64%)이 자수성가형 부호였다. 블룸버그는 부호 순위를 매기면서 각 부호들의 독특한 스토리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의 경우 "고교 시절, '저커넷'이라고 이름 붙인 가족 메시징 시스템을 창안했다"고 쓰여 있고,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조스에게는 "일찍이 구글과 에어비앤비, 비즈니스 인사이더 등에 투자했다"는 메모를 적어놓았다. 창의적 아이디어와 창업 의지, 투자 안목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 한국은 신흥 부호 명맥이 끊겼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거의 유일하게 20대 기업군에 새로 이름을 올렸던 STX그룹은 도산했고, 네이버, 카카오, 넥슨, 엔씨소프트 등 신흥 디지털 기반 기업들도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기존 사업에만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젊은이들이 창의성을 기르고 마음 놓고 창업에 도전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패자 부활 시스템을 만들어 줘야 신흥 부자도 나오고 한국 경제도 다시 도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뉴욕=김덕한 특파원

 

2016.04.30 韓·中 '김의 전쟁 … 김 한 장 나지 않는 태국이 웃는 까닭은

김은 우리 어민들에게 효자 상품이다. 작년 한 해 3000억원어치를 수출했으며 이 액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김 수출액은 인삼보다 많다. 주변국들이 이런 사업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다. 중국은 최근 연안에서 김 양식장을 확대하고 있고, 김 한 장 나지 않는 태국은 한국·중국 김으로 과자를 만들어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한국과 중국, 태국 등이 뒤엉킨 '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김 시장 동향 파악에 나선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정명생 수산연구본부장과 장홍석 박사를 동행 취재했다.

/일러스트= 김성규 기자

 

한 해 3000억원 수출 효자 상품

전 세계에서 김을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나라는 한국·중국·일본뿐이다. 대만과 뉴질랜드 등에서도 김을 생산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김'이라는 이름은 1600년대 전남 광양에서 김 양식에 성공한 김여익의 성(姓)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질 좋은 김은 대부분 일본에 수출했다. 과거 일본은 자국에서 생산한 김은 물론 중국과 한국에서 들여온 양질의 김을 모두 먹어치우는 김 종주국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시장이 달라졌다. 일본은 김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줄어들었고, 경제력이 커진 중국과 우리나라의 김 생산과 소비량이 늘어났다. 미국과 유럽, 동남아시아 등에서도 김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과거 미국·유럽에선 김을 블랙 페이퍼(Black Paper)라고 부르며 일종의 혐오식품처럼 여겼으나, 지금은 감자칩을 대체할 수 있는 웰빙 건강 스낵으로 변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김을 '마법의 효능을 지닌 수퍼푸드'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김에는 비타민A와 단백질, 칼슘이 풍부하다. 다만 한국과 일본에선 밥과 함께 김을 먹지만 다른 나라에선 간식이나 술안주용으로 즐겨 찾는다고 한다.

 

현재 김 수출 1위 국가는 한국이고 2위는 중국이다. 한국은 재작년 3000억원어치를, 중국은 1500억원어치를 수출했다. 우리나라 김 수출은 10년 만에 다섯 배 늘어났고, 수산물 가운데 참치 다음으로 수출액이 많다. 김 제품엔 김 해초를 얇게 펴서 말린 뒤 A4용지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절단한 마른김과, 마른김을 더 작게 잘라서 기름과 소금을 가미한 조미김, 마른김을 가공한 김스낵(과자) 등 세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는 조미김 시장의 최고 강자(强者)다. 일본 조미김은 간장과 설탕으로 간을 내 일본 사람 입맛엔 맞을지 몰라도 외국인 입맛엔 맞지 않아 세계화에 실패했다. 반면 고소한 참기름이나 들기름 등과 소금으로 맛을 낸 조미김은 외국, 특히 북미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재작년 미국에 조미김을 700억원어치 팔았고, 자기 나라 조미김을 최고로 치는 일본에도 400억원어치를 팔았다. 우리나라 조미김을 수입한 나라는 10년 전 32개국이었으나 지금은 90여 개국에 달한다. 아프리카, 구소련 연방 국가도 조미김의 고객이다.

 

김 생산량 확대하는 중국

하지만 전문가들은 김 생산 1위국인 중국을 잘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중국 김 생산량은 2003년 60만t에서 2013년 114만 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중국은 장쑤성과 저장성 연안에서 대규모로 김을 생산해왔고, 최근 광둥성과 푸젠성에 대규모 김 양식장을 만들어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김국을 끓일 때나 술안주 등에 김을 사용한다. KMI 장홍석 박사는 "1990년대부터 중국은 일본·대만·홍콩에서 양식 기술과 설비를 도입하는 등 김 양식에 많은 자본을 쏟아붓고 있다"면서 "국거리용 김과 마른김을 주로 생산하다 요즘은 수출을 염두에 두고 조미김과 김 스낵으로 상품을 다양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10년 사이 우리 김 생산량도 20만t에서 41만t(2014년 기준)으로 늘어났으나, 아직 중국의 절반이 되지 않는다. 자국에서 나온 김을 내수에 많이 쓰는 중국이 수출로 방향을 바꾸면 우리나라 김 수출 전선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동남아·일본 등엔 저가(低價)의 중국 김 유입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반면 일본의 김 생산은 중국과 우리나라에 이어 3위로 추락한 상태다.

 

그런데 김의 전쟁에서 주목해야 할 나라가 바로 태국이다. 김 한 장 나지 않는 나라이지만 김 제품 수출이 우리나라, 중국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으며 그 성장세도 폭발적이다. 10년 전 한국과 중국에서 조금씩 마른김을 수입했던 태국은 6년 전부터 수입량을 대폭 늘리고 있다. 요새는 우리나라 마른김의 절반이 태국으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태국은 한국·중국산 김을 김과자로 가공해 다시 수출한다. 사진은 방콕 대형마트 빅시의 김과자 코너 / 방콕=강훈 기자

 

지난 20일 태국 방콕 중심부에 있는 대형마트 빅시(Big C). 과자와 스낵 코너에 있는 길이 15m 진열대 전체가 김 관련 상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미국에서 잘 팔린다는 한국산 조미김은 한 귀퉁이에 몇 봉지 진열돼 있을 뿐, 제품 대부분이 태국산 김과자였다. 기름에 튀긴 튀긴김, 소스를 발라 그릴에 구운 훈제김은 물론 '열대과일의 왕'으로 불리는 두리안을 말려 그 겉을 김으로 두른 두리안김, 우리 된장찌개와 비슷한 �얌꿍의 맛을 낸 �얌꿍김 등 각종 김과자가 가득했다. 맛도 매운맛, 신맛, 단맛으로 다양했다.

 

KMI 정명생 본부장은 "한국과 중국에서 수입한 그 많은 마른김을 김과자로 가공한 것"이라며 "태국은 김과자라는 새로운 제품의 시장을 개척하고 김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했다"고 말했다. 빅시에서 멀지 않은 대형마트 테스코 로터스(Tesco Lotus)의 스낵 제품 코너엔 일부 김과자가 다 팔리고 품절된 상태였다. 쇼핑을 나온 노이(34)씨는 "아이가 김과자를 너무 좋아한다"면서 튀긴김 두 봉지를 사갔다.

 

김과자는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었다. 중량 20g 되는 김과자 봉지를 뜯으니 작고 길쭉한 모양의 튀긴김 6개가 들어 있었다. 그 과자 가격은 40바트(약 1300원)였다. 무게를 기준으로 하면 태국의 다른 과자류보다 최대 10배 이상 비싼 편이라고 한다.

 

김과자 시장 개척한 태국

태국의 김과자 역사는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티팟 피라데차판이라는 타오케노이사(社) 창업주가 김과자를 출시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 사장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인기를 끌었다. 태국 김과자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는 타오케노이는 '터미널21' 등 방콕 시내 여러 곳에 김과자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김과자가 히트를 치자 태국 대기업들도 김과자 시장에 뛰어들었다. 맥주 회사로 유명한 싱하는 지난해 김과자 생산과 판매를 위한 별도 계열사를 만들었다. 후발 주자인 싱하는 한류 마케팅을 적극 구사했다. 과자 봉지에 슈퍼주니어의 규현을 모델로 쓰고, 제품명에 우리말인 '맛있다'를 썼다. 과자 원료인 김이 100% 한국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싱하 공장의 매니저 시라티콘 상산씨는 "경쟁사들은 중국산 김과 한국산 김을 섞어 쓰지만, 우리는 품질 좋은 한국산 김만 사용한다"고 했다. 중국산 마른김이 가격도 싸고 양이 많지만 품질이나 이미지 측면에서 한국산 김을 원료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태국은 김과자 수출에도 성공했다. KMI 장홍석 박사는 "태국의 김과자 수출 금액은 현재 3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되며 그 물량이 매년 늘어나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면서 "태국 김과자는 한국 조미김과 함께 김의 세계화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고 했다. 태국은 김과자를 중국·일본·미국뿐 아니라 호주·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으로 판로를 확대하고 있다. 아시아 식품 강국인 태국은 '세계의 주방(Kitchen of the World)'이라는 정책 슬로건을 내걸고 식품 산업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 참치캔 제조 분야에선 이미 세계 1위 생산·수출국이 됐다.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송미정 방콕 사무소장은 "태국은 한국 김을 원료로 세계 30개국에 김과자를 팔고 있다. 태국 제품을 능가하는 새 형태의 김 제품 개발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근 우리나라 CJ, 동원F&B 등도 김과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정부도 지원에 나서고 있다. 조미김과 마른김 시장을 놓고 우리나라는 중국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고, 김과자 시장에선 태국과 한판 승부를 겨뤄야 하는 것이다.

방콕=강훈 기자

 

2016.09.23 노스페이스의 탄생

 

 

요세미티의 등산용품점(1966)

 

1966년, 샌프란시스코 북쪽 해안가에 사는 톰킨스 부부는 스키용품 및 캠핑용품을 판매하는 등산용품 소매점을 개업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요세미티(캘리포니아 동부에 빙하침식으로 인해 형성된 대계곡) 암벽 등반자들은 그들의 산악용품을 노스페이스에 기증했고, 톰킨스 또한 독자적인 생산보다는 유럽의 장비들을 수입해 판매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개업 첫 날, 당시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히피 문화를 이끌며 주목 받던 그레이트풀데드(Grateful Dead) 밴드가 매장을 방문했다. 톰킨스 부부는 곧장 공연을 위한 장을 마련했고, 당시 매장 근처의 주민들과 산악인들이 함께 모여 축하파티를 즐겼다.

 

Chapter 2 스폰서십을 통한 노스페이스의 성장

케네스 헵 클롭의 경영(1968)

1968년, 더글러스 톰킨스(Duglas Tompkins)는 케네스 하 클롭(Kenneth Hap Klopp)과 함께 취급 상품의 카테고리를 넓혔다. 기존의 스키, 캠핑 아이템을넘어, 아웃도어 제품의 전 범위를 디자인하고 생산했다. 첫 제조공장은 버클리의 텔레그래프 에비뉴에 위치했다.

 

탐험가들과의 강력한 관계 형성(1969)

1969년부터 노스페이스는 본격적으로 탐험가들과 운동선수들을 지원했다. 노스페이스의 제품을 이용한 선수들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디자인과 기능을 개선시켰다. 전문 탐험가들의 '검증시스템(Expedition Proven)'은 제품에 신뢰를 불어넣었다.

 

Chapter 3 R&D를 통한 제품 라인 강화

최초의 돔 형태 텐트 개발(1975)

1975년, 노스페이스는 바람과 폭설에 약한 기존의 A형 텐트를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세계 최초 돔 형태의 오벌 인텐션 텐트(Oval Intetion Tent)를 개발해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수요가 높은 VE-24와 VE-25텐트의 개발로 이어졌다.

 

 

새로운 돔 형태의 텐트 개발에는 리처드 풀러(Richard B. Fuller)박사의 기여가 있었다. 그는 측지선 돔(다각형 골격들이 서로 힘을 분산해 지탱하는 구조물)을 최초로 제안해 텐트에 적용했다. 이는 표면 비율 용적의 극대화, 조립의 간소화, 그리고 강한 바람에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부여했다.

 

고어텍스 섬유 도입(1976)

1976년, 노스페이스는 품질 조절 연구소를 개설했다. 원료공장과 공급자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제품의 재질과 기술력을 발전시켰으며, 이듬해 극한의 환경 속에서 버틸 수 있는 고어텍스(Gore-Tex) 섬유를 도입했다.

 

Chapter 4 끊임없는 도전을 통한 성장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하다(1987)

1987년, 노스페이스 팀은 최초로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한다. 당시 노스페이스의 장비 디렉터 샐리 맥코이(Sally McCoy)는 히말라야 등반 팀에 합류해 함께 산을 올랐고, 이후 '원정 시스템(Summit System)'을 구축했다.

 

일곱 대륙의 정상을 오르다(2006)

2006년, 노스페이스가 후원하는 킷 들로리아(Kit DesLauriers)는 일곱 대륙의 정상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온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당시 USA투데이는 그녀의 도전을 “7대륙의 영광스러운 원정”이라 칭했고, 이는 현재까지 '7개의 정복'으로 기억되고 있다.

두 달간의 릴레이 마라톤(2006)

같은 해, 미국 50개 주에서 50일간 진행된 50개의 마라톤을 후원했다. 2006년 7월 1일, 레드빌(미국 서부 콜로라도주)에서 샘 톰슨(Sam Thompson)에 의해 시작된 마라톤은 미시시피 주(미국 남부)에서 8월 19일에 종료되었다. 도전하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노스페이스는 '도전'의 상징이 된다.

 

2016.10.29 세계 최장수 10개 중 7개가 일본 기업 - 일본 노포의 다섯 개 DNA

▲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포가 모인 일본 교토의 히가시야마 거리. / photo by midoritea4me.pl

 

“뉴요커만 아는, 뉴욕의 깊은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없을까?

뉴욕을 찾는 지인들로부터 이런 주문을 받으면 필자가 주로 안내하는 곳은 오래된 레스토랑들이다. 맛만이 아니라, 평생 기억에 남을 멋을 가진 레스토랑들이다. 당연한 진리지만, 맛이 아니라 멋을 지닌 음식이라야 추억으로 남는다.

 

시간상 여유가 있느냐에 따라 동()과 서(西) 두 군데 중 하나를 선택한다. 먼저 뉴욕 동부 퀸스에 있는 아스토리아(Astoria) 지역이다. 맨해튼 중심인 50번가를 기준으로 할 때 약 25분 거리다. 아스토리아는 그리스 이민자들의 집단 거주지다. 미국 국적의 그리스계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아스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스토리아 중심가는 그리스 레스토랑이나 와인 가게로 뒤덮여 있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의 주식은 시푸드(해산물) 요리다. 지중해에서 즐기던 맛을 뉴욕 한복판에서 다시 맛볼 수 있다.

 

아스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스 해산물 레스토랑은 스타마티스(www.stamatisastoria.com). 그리스계뿐만 아니라 적어도 뉴욕에서 한 세대 이상 산 뉴요커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신선한 데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언제 가도 사람들로 들끓는다. 대부분 그리스 이민자로, 가족 단위 손님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 장소는 맨해튼 50번가에서 35분 정도 떨어진 페리(Ferry)가다. 뉴욕에서 벗어나 서쪽 턴파이크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순간 만나는, 뉴저지주 뉴어크(Newark)의 레스토랑이다. 이른바 포르투갈 커뮤니티 거리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 커뮤니티도 포괄하는 곳으로, 맨해튼과 달리 전봇대와 허공에 드리워진 전선을 볼 수 있다. 마천루의 뉴욕과 대비되는, 타임슬립(Time Slip)형 공간이다. 지중해 주변 지역이 그러하듯 포르투갈도 해산물로 유명하다. 브라질의 경우 육류가 유명하다. 산해진미 모두 즐길 수 있는 뉴욕의 숨겨진 공간이 바로 페리가(). 프랑스, 이탈리아와는 전혀 다른, 원시 그대로의 맛을 자랑하는 포르투갈 도루강(Rio Douro) 주변의 와인도 즐길 수 있다. 페리가 레스토랑 가운데, 필자가 자주 가는 곳은 이베리아 피닌슐라(www.iberiarestaurants.com) 레스토랑이다. 대략 30달러 정도면 와인, 시푸드, 육류, 샐러드를 전부 즐길 수 있다.

 

 

내가 즐기는 맨해튼의 노포

 

특별해지고 싶은 것이 인간 모두의 본능이다. ‘만인의 평등’을 부르짖는 지도자라 해도 남다른 대우와 최상급 의식주에 탐닉하게 된다. 일본산 무공해 쌀을 특별히 주문해 먹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행적은 인간 본능이란 차원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필자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언제부턴가 돈·권력·명예 같은 것이 특별함의 기준으로 정착된 듯하지만, 필자의 접근방법은 조금 다르다. 넓게 널려 있지만, 대부분이 스쳐 지나가기 쉬운 부분들을 찾아내 나만의 가치로 만드는 식의 특별함이다. 넓이가 아니라 깊이라고나 할까? 굳이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자면, 김춘수의 ‘꽃’과 같은 의미로 와 닿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단순히 몸짓으로 남아 있던 꽃을 나만의 꽃으로 만들어가는 특별한 순간과 과정이 나만의 가치다.

 

특별함, 나만의 가치, 넓이가 아니라 깊게 사는 삶, 나아가 김춘수의 꽃…. 이 같은 세계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뭔가 계속 이어져온 것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거창하게 전통이나 역사를 거론하자는 것이 아니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파란만장한 개개인의 삶처럼 그냥 끈질기게 이어진 것에 대한, 세대와 시대를 초월한 관심사다. 노포는 그중 하나다. 간단하고 부담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접할 수 있는, 어제의 흔적을 통해 현재의 나를 확인해볼 수 있는 무대로서의 노포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필자가 지인에게 추천하는 그리스 아스토리아와 포르투갈 페리가의 레스토랑은 미국판 노포의 범주에 들어가 있다. 노포의 특징이나 기준은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가장 일반적 요소는 시간에 있을 듯하다. 100년 이상, 200년 이상이란 시간적 요소가 노포의 기본조건이다. 물론 동의하지만 다른 관점도 추가될 수 있다. 크게 다섯 가지 특징 또는 공통점이 떠오른다.

 

첫째 외골수 세계관이다. 다른 데에 한눈팔지 않고 하나만 일편단심 파는 정신이야말로 노포의 필수조건 중 하나다. 아스토리아와 페리가의 레스토랑은 100년 역사에도 못 미치는 일천한 곳이다. 그러나 두 곳은 여러 면에서 필자가 정의하는 노포의 범주에 들어간다. 아스토리아에 그리스 이민자가 몰려온 것은 19세기 말이다. 독일계에 이어 이탈리아계, 유대계와 더불어 아스토리아에 정착한다. 이후 1960년대 들어 다시 증가하지만, 필자가 찾는 스타마티스는 그같은 역사 속에서 탄생한 그리스 이민사의 흔적이다. ‘피카소’라 불리는 80대 주인은 레스토랑에 들러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다. 문을 연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는 일과다. 최근 부인이 심장병으로 쓰러졌지만 2, 3대 후손들이 레스토랑을 지키고 있다. 메뉴도 50년 전 그대로다. 가격이야 올라가고 있지만, 뉴욕에서 가장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시푸드 레스토랑 중 하나다.

 

뉴어크의 이베리아 피닌슐라도 마찬가지다. 1930년대 대공황 때 몰려온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만든 레스토랑이다. 포르투갈 비즈니스 스타일답게 주인이 세 명이나 된다. 복수(複數)로 이뤄진 경영이나 통치 스타일은 스페인을 포함한 이베리아반도의 전통이기도 하다. 서로 협력하는 동안 지혜도 모으고, 위험도 분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자나 통치자의 수가 복수로 늘어난다. 포르투갈 특유의 나무로 만든 실내장식은 리스본 현지 레스토랑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외골수 세계관에 이어 노포의 두 번째 특징으로 ‘시니어 컬처(Senior Culture)’를 빼놓을 수 없다. 세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터득한, ‘진짜’ 레스토랑이냐 아니냐를 가릴 수 있는 필자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다. 서비스하는 사람들의 연령이다. 레스토랑 내 종업원 가운데 60대 시니어가 보인다면, 더불어 흰머리의 손님들이 많이 앉아 있다면 아무리 허름해도 진짜다. 그리스, 포르투갈 레스토랑의 경우 외골수 비즈니스가 종업원에게로도 이어져 있다. 50~60대 종업원이 서비스를 한다. 한번 고용하면 끝까지 함께 간다. 병이나 이사 등으로 스스로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주인이든 종업원이든 한배를 타고 가는 식이다. 10년 넘게 아스토리아와 페리가를 애용하고 있지만, 항상 가도 똑같은 종업원들이 일하고 있다. 덕분에 주문을 하지 않아도, 신선한 소재로 만든 ‘특별한 요리’를 갖다준다. 비싼 와인을 시켜도 그것보다는 맛이 좋고 저렴한 와인을 추천한다. 외골수 세계관과 더불어, 함께 가는 인생이 노포의 공통분모이자 장점이다.

 

 1691년 창업한 일본의 두부집 사사노유키 / photo by 유민호


노포의 최대 집산지 교토

필자가 10여년 이상 애용해온 노포로, 일본 교토(京都)의 향 전문점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부모 세대가 그러했듯이, 매년 가을이 되면 신세를 진 주변의 지인들에게 작은 선물을 보낸다. 크리스마스, 새해인사, 연하장을 대신한 것이다. 필자는 주로 향을 보낸다. 일본 체류 중 우연히 알게 된 야마다마츠(山田松·www.yamadamatsu.co.jp)가 거래처다. 야마다마츠는 필자에게 후각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영감의 진원지이다.

 

향은 문화의 최고 단계로 통하는, 평화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최고 문화인으로 통하는 직업은 디자이너, 작가, 배우가 아닌 향 전문가다. 먹고살기에 바쁜 나라의 경우 냄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더불어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가장 오래가는 것이 후각이다. 어릴 때 어머니 몸에서 나던 분가루에 관한 기억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돼 있다. 비슷한 냄새가 나는 사람을 거리에서 만나는 순간, 어머니에 관한 수십 년 전 기억이 한순간에 떠오른다. 동방박사 세 명 중 두 명이 향을 예수에게 바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생 기억에 남는 만큼, 신선하고도 신성하다. 노포는 형이하학으로서의 상품만이 아닌, 형이상학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가르쳐준다. 공부하고 배울 수 있는 터전이 노포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포가 모인 곳이 일본의 교토다. 이유는 일왕과 관련이 있다. 일왕이 도쿄로 옮겨간 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시작된 직후인 1868년이다. 에도(江戶)시대, 다시 말해 막부가 권력을 장악했던 시대에는 도쿄가 아닌 교토가 일왕의 거주지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포의 대부분은 황제·교황·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의 기호품에서 시작됐다.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의식주 제공처로 활용된 곳이 노포의 과거사다. 따라서 교황이나 황제, 귀족문화가 번성한 곳이라면 반드시 노포문화가 있다. 일왕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로열패밀리에 해당한다. 로마 교황은 물론, 유럽 그 어떤 나라 황가(皇家)의 역사보다도 길다. 기원전 660 1대 천황에 해당하는 신무천황(神武天皇) 이래 지금까지 전부 125명의 일왕이 대를 이어왔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따라서 일왕을 지지해온 노포문화 역시 탁월하다.

 

전 세계를 통틀어 2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기업의 수는 5586개다.(2014년 기준) 일본은 3146개로, 전 세계 200년 장수기업의 58%나 차지하고 있다. 500년 이상 기업도 147, 1000년 이상 기업은 21개에 달한다. 엄청난 규모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일본 노포는 탁월하다. 최장수 노포 10선 가운데 무려 7개가 일본의 노포다. 1위부터 6위까지가 일본 차지이고, 9위도 ‘메이드 인 재팬’이다.

 

최장수 10선 가운데 흥미로운 노포 3개를 살펴보자. 먼저 세계 최장수 노포 곤고구미(金剛組). 서기 578년에 세워진, 황실이나 사찰 건립·보수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놀랍게도 곤고구미의 원류는 백제다. 쇼토쿠(聖德) 태자가 백제에서 초대한 목수 세 명 가운데 한 명인 곤고(金剛)가 창업한 기업이다. 현재 오사카(大阪)에 있는 국보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곤고구미의 건물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백제발 기업’이 세계 최고의 노포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두 번째는 세계 2위 노포인 니시야마온천(西山)의 게이운칸(慶雲館)이다. 야마나시(山梨)에 있는 숙박시설이다. 서기 705년에 설립된 온천 여관으로 현재 35개 객실을 갖추고 있다. 식사를 포함해 하루 숙박비가 1인당 300달러 선으로 1 365일 손님을 받고 있다. 숙박시설 하나만으로 1311년을 이어온 셈이다.

 

세 번째는 노포 세계 랭킹 5위인 테크 가이하츠(TECH ). 니가타현(新潟県)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 서기 760년에 설립됐다. 원래 칼이나 농구(農具)를 만드는 대장간에서 시작됐지만, 20세기 들어서는 석유시추시설에 이어 정밀기계 전문업체로 성장한다. 놀랍게도 전체 종업원 수는 25명에 불과하다.

 

▲ 세계 최장수 기업 곤고구미. 578년 설립된 사찰 전문 건축회사. / photo by 곤고구미 홈페이지


1717
년 설립한 향 가게

필자가 애용하는 향 가게 야마다마츠는 1717년 약() 전문점으로 출발한 가게로, 교토 내 수많은 노포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필자에게 야마다마츠는 향 거래처로서만이 아닌, 일본 노포 비즈니스의 현장을 이해하게 만드는 모델이기도 하다. 그냥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선물 하나를 하더라도 그에 따른 구체적 상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어떤 종류의 포장지를 선택하고 포장지 표면은 어떤 색으로 할지, 선물을 보내는 사람을 누구로 할지, 선물을 묶는 끈의 색상을 어떤 것으로 하고 어떤 명목으로 선물을 할지 등등이다. 그런 구체적인 얘기가 선물을 주문하면서 오간다. 대충 알아서 하라고 일임할 듯하지만, 노포는 꼼꼼하다. 작은 것이라도 결코 간단히 흘리지 않는다. 선물 내용 자체만이 아니라 장식, 편지, 포장지 하나하나를 상의한다. 편지에 실리는 글자의 색상이나 굵기까지 논의한다. 교토의 노포인 만큼 가격이 비싸지 않을까 우려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 전통 선물과 비교할 때, 절반 정도 가격에 불과하다. 그리스, 포르투갈 레스토랑에서 보듯 적절한 가격은 노포가 가진 세 번째 특징이다. 노포인데도 왜 가격이 비싸지 않으냐고 의문을 달지 모르겠다. “노포니까 비싸지 않다!”라는 것이 답일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비싸다면 노포가 아니다.

 

‘세계 최대 최고’에 관한 뉴스는 최근 들려오는 중국발 뉴스의 주된 수식어 중 하나다. 최대 길이와 높이의 빌딩이나 교량에서부터 전파 망원경과 유인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대 최고가 붙는다. 대국굴기(崛起)라는 21세기판 추상명사도 세계 최대 최고라는 단어에 따라붙는다. 노포란 관점에서 볼 때 필자는 중국의 최대 최고 행진이 너무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경기가 한창때인 지금이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성장이 멈추면서 예산이 줄어들 경우에도 최대 최고를 이어갈 수 있을까?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 가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지 않지만,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줄일 때는 엄청난 희생과 출혈이 요구된다.

 

노포의 네 번째 특징은 비즈니스가 소규모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20세기 말부터 등장한 프랑스산 글로벌 브랜드 제품 같은 예외도 있겠지만, 일본이나 유럽에서 만난 로컬 노포들의 공통분모이다. 길고 긴 역사나 상품의 질적 수준에 비해, 종업원의 수나 연매출의 규모가 너무도 미미하다. 300년 역사를 넘어선 야마다마츠의 종업원 수는 60명에 그친다. 직영 가게도 교토에 한 곳과 도쿄에 두 곳이 전부다. 도쿄 다카시마야(高島屋)백화점 7층에 있는 분점에 간 적이 있지만, 크기가 7( 2) 정도에 불과하다. 결코 무리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안전 비즈니스’야말로 노포의 존재 근거라 볼 수 있다. 갑자기 사업을 확장하거나 세상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식의 화려한 비즈니스와는 거리가 멀다. 가치를 아는 사람들, 그동안 신뢰관계를 유지해온 손님들과의 거래만으로도 충분하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자신은 물론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

 

수백 년 역사의 노포는 산전수전, 우여곡절, 파란만장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결론은, 선조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해나가는 것이다. 크고 강한 것이 아니라, 가늘더라도 길게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큰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 유지하면서 조금씩 발전시켜나가면 만족한다. 결과적으로 거품이 없다. 따라서 길고 긴 역사를 가진 노포일수록 상품의 가격이 비싸지 않다. 거꾸로 말하자면 비쌀수록 노포의 자격이 없어진다.

 

스토리텔링은 노포가 가진 다섯 번째 특징이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흑백필름 시대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특별한 얘기가 노포의 풍경 중 하나다. 스토리텔링의 성격이 그러하듯, 노포에 얽힌 사연 하나하나가 특별하고 새롭다. 그리스, 포르투갈 레스토랑의 경우 이민사에 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마이너리티의 생존 스토리가 떠오른다. 향을 통해 일본 문화를 전수해온 야마다마츠는 교토발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야마다마츠의 상품 중 하나로 문코(文香)라는 것이 있다. 편지 종이 사이에 끼워 보내는 향으로, 글만이 아닌 후각으로서의 기억도 전하려는 상품이다. 수많은 예술가와 문학가의 품과 격을 더해준 액세서리이기도 하다.

▲ 두부집 사사노유키의 런치세트(왼쪽)와 실내 전경. / photo by 유민호


1691
년 설립된 두부 가게의 스토리텔링

사사노유키(笹の雪)는 일본인이라면 한번쯤 즐기고 싶은, 도쿄 노포 레스토랑의 대명사이다. 325년 전인 1691년 이래 두부 하나만으로 손님을 상대해온 곳이다. 무명으로 두부를 감싸는 게 아니라 비단을 이용해 두부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만들면서 명물로 떠올랐다. 원래 교토에서 시작했지만, 도쿄로 옮겨 장사를 계속한다. 사사노유키는 두부의 원래 한자인 ‘豆腐’를 ‘豆富’로 표기한다. 썩은 콩요리가 아니라, 부자가 되는 두부라는 의미다. 필자도 일본에 갈 때마다 들르지만, 한국의 김소월 정도에 해당하는 문학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시() 비석에는 두부의 부드러운 맛을 찬미한 내용이 들어 있다.

 

사사노유키에서 손님 대부분이 주문하는 메뉴는 2200엔짜리 점심용 코스다. 저녁이 되면 배로 뛰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제공되는 우구이스고젠(鶯御膳) 세트다. 전부 4종류로 나눠진 가이세키() 요리다. 같은 두부를 다르게 조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두부 자체를 특별한 비밀 제조법에 의해 각각 다르게 만든다. 비단결 같은 두부, 콩의 무게가 느껴지는 묵직한 두부, 입에 넣으면 그대로 터지는 달걀 같은 두부, 검은콩으로 만들어진 진한 두부…. 2200엔 우구이스고젠만으로도 7가지 두부를 종류별로 맛볼 수 있다.

 

사사노유키의 특별함은 인상 깊은 두부요리만이 아닌, 일본인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의 진원지란 점에 있다. 일본인이 가장 즐겨 읽는 고전인 ‘주신구라(忠臣)’와 얽힌 노포이기 때문이다. 눈오는 겨울 주군의 원수를 처단한 뒤 47명의 사무라이 전원이 책임을 지고 할복하는 것이 주신구라의 중심 스토리다. 한국으로 치자면 춘향전 이상의 고전으로, 연말 연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반드시 볼 수 있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사사노유키는 할복한 47명 사무라이 중 17명이 들러서 두부 식사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7명 중 한 명은 사사노유키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도 전해져온다. ()의 상징이자 사랑의 현장이라는 스토리가 곁들인 노포라 할 수 있다.

 

사사노유키 두부의 맛은 창업 초창기와 똑같다. 325년 전 만들었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주인의 책임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다. 분점을 내는 식으로 확장을 하지도 않는다. 주신구라 사무라이가 즐겼던 맛과 공간적 분위기를 음미하면서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다. 일본이 멸망하지 않는 한, 손님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노포라 할 수 있다.

출처 | 주간조선 2428호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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