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14/ 전경련 외
① 사라진 회장단 회의
2015.02.24 17:06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올해 창립 54주년을 맞았다. 과거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등 창업세대 기업인들이 주축을 이뤘던 시절, 전경련은 경제성장은 물론 88올림픽 유치와 같은 국가적인 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하지만 지금 전경련은 국가 경제정책에 참여하기는커녕, 기업을 대변하는 기본적인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전경련이 이대로 쇠락의 길을 갈 것인지, 다시 제 기능을 회복할 것인지 짚어봤다. [편집자 주]
▲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강신호 전경련 명예회장(동아쏘시오 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왼쪽부터)에 참석했다. /전경련 제공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전경련 정기총회’는 전경련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줬다. 4개로 구성된 중앙 테이블에 재계 30대 그룹의 오너 회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회장단 중 참석자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김윤 삼양사 회장, 강신호 전 전경련 회장(동아쏘시오 회장) 등 3명뿐이었다. 허 회장의 GS그룹 계열사인 GS파워 손영기 사장이 허 회장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전경련은 “회장단은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행사”라고 애써 해명했지만, ‘정기총회’라는 이름에 걸맞은 행사라고는 보긴 어려웠다.
전경련의 진성회원인 오너 회장 대신 기업의 대외업무 담당 직원들이 나와 자리 일부를 채웠다.
이들 중에는 초임 과장이나 대리급 직원도 눈에 띄었다. 전경련 정기총회는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최소 5~6명의 회장단을 포함, 주요 그룹 오너와 임원들이 얼굴을 비쳤던 행사였다.
전경련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 나왔다. 지난 2010년 조석래 효성 회장이 사임한 뒤 7개월간 공석이었던 회장직을 허창수 현 회장이 맡겠다고 했을 때, ‘흔들리는 전경련이 바로 서야 한다’는 의견이 잇달았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전경련의 위상이 높아졌는지 의문이다.
회장단 회의가 비공개로 바뀌면서 내부용으로 전락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경련은 정기총회에서 30대 그룹 오너 경영인 가운데 회장단을 선임하고, 회장단은 1년에 5차례(통상 1, 3, 5, 9, 11월) 회의를 연다. 과거 전경련은 여기서 논의된 사안을 경제 현안에 대한 재계의 의견으로 공표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전경련은 회장단 회의 결과를 따로 공표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3월 “133조원의 투자 계획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성명을 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열린 회장단 회의에선 무엇을 논의했는지, 어떻게 의견을 모았는지 공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재계에선 “전경련 회장단이 재계의 대표성을 상실했다”는 의견이 나온다.
멤버를 봐도 그렇다. 지난 10일 새로 회장단에 선임된 이장한 종근당 회장과 이승철 상근부회장을 포함한 회장단은 총 20명. “전경련 회장단에서 빼주지 않지만, 이미 나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박용만 두산 회장을 비롯해 구본무 LG회장, 김준기 동부 회장 등은 이미 전경련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여기에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등은 대외 활동이 여의치 않다. 결국 허창수 회장과 이승철 부회장을 제외하면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는 4~5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전경련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 회원을 회장단에 가입시키려 노력해왔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모두 고사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네이버·다음 등 2000년대 급성장한 IT업체들은 아예 전경련 가입을 피하고 있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이른바 4대 그룹의 위상이 커진 것도 전경련의 위축의 또 다른 원인이다. 한 10대 그룹 대관 담당 임원은 “4대 그룹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직접 표현하는 것이 여론의 지지를 훨씬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며 “전경련이라는 단체를 거쳐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왕양(汪洋) 중국 부총리와 기업인들의 연쇄회동은 이러한 전경련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지적이 많다. 당시 왕 부총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가장 먼저 만났고, 이후 대한상의를 방문했다. 다음날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과 연쇄회동을 하고 나서야 전경련이 주재하는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조선일보 조귀동 기자
② 영향력 전교조와 동급…기업들도 외면
2015.02.25 15:30
▲ 전경련의 사회적 영향력은 최근 몇 년새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영향력은 2000년대 후반 이후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여론의 지지를 받을 만한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재계의 분석이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2년에 한 번씩 조사해 발표하는 ‘파워조직 영향력·신뢰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25개 안팎의 주요 정치·경제·사회 조직을 대상으로 실시한 영향력 조사에서 전경련의 순위는 2013년 15위로, 2005년 9위, 2009년 12위에서 해가 갈수록 영향력이 떨어졌다.
2013년의 경우, 영향력(5.43점)은 16위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4.80점)을 약간 앞서는 수준에 불과했다. 신뢰도(4.49점)는 13위로, 새누리당(4.49점), 검찰(4.49점)과 같았고 전교조(4.30점)와는 큰 차이가 없었다.
국민들은 전경련이 전교조 수준의 영향력과 신뢰도를 갖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전경련에 대한 재계 내부의 평가도 호의적이지 않다.
4대 그룹에서 대관(對官) 업무를 담당하는 임원 A씨는 “재계 목소리를 대변해줘 고맙기는 한데, 여론에 영향을 미칠 힘은 없는 조직”이라며 “재계에 전반적인 현안이 생겼을 때에도 각 기업들이 대응하는 편이 효과적”이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대관 담당 부장급 직원 B씨는 “대한상공회의소는 수십명 규모의 자문단을 꾸려 규제 개혁과 법인세 문제에 대해 공격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며 “현재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는 전경련이 아니라 대한상의라고 생각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 지난 2013년 12월 준공한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조선일보DB
심지어 “전경련이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전경련은 지난 2011년 주요 회원 기업에 담당할 정치인 명단을 통보하며 로비를 기획했다가 공개돼 파문을 일으켰다.
2012년에는 국회의원 자녀를 대상으로 리더십 캠프를 추진하다 망신을 당했다. 2011년 재계의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1조원 규모의 사회공헌재단을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중간에 취소하기도 했다.
전경련도 이러한 비판을 의식해 2013년, “국가경제 발전과 함께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는 내용의 ‘기업 경영 헌장’을 발표했다.
당시 정치권 이슈였던 ‘경제민주화’ 등에 대응하면서, 전경련의 사회적 입지를 다시 구축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헌장은 일본 경제단체 게이단렌(經團連)의 ‘기업행동헌장’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현재 당시 발표는 전경련 내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다보스포럼의 주요 의제로 올랐을 정도로 글로벌 이슈가 됐지만, 전경련은 이렇다 할 후속행동이 없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 경영 헌장 발표 당시에도 1996년 전경련이 채택한 기업윤리헌장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재탕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며 “새로운 내용 없이 같은 주장만 반복하는 행태가 바로 전경련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귀동 기자
③ "일본 게이단렌의 혁신 배워야"
2015.02.26 17:28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와 일본 재계단체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ㆍ經團連)는 여러모로 닮을 꼴이다.
실제 5·16 직후인 1961년 만들어진 한국경제인협회를 모태로 한 전경련은 창립 때부터 게이단렌을 롤모델로 삼았다. 게이단렌이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 경제의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전경련도 당시 정부의 국가 재건 사업에 기업인들이 기여하겠다는 취지에서 창립됐다.
게이단렌과 전경련 모두 한일 양국의 대표적인 민간경제단체로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 2014년 12월 1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회관 컨퍼런스센터에서 진행된 '제24회 한일재계회의'에 참석한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사카키바라 경단련 회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기념촬영을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조선DB
하지만, 21세기 들어 두 단체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일본 게이단렌 회장은 ‘재계의 총리’로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지만, 한국의 전경련은 2000년대 이후 회장 임기가 끝날 때마다 구인난(難)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전경련은 지난 10일 총회를 열고 허창수 GS회장의 3연임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선임 과정에서 적잖은 진통을 겪었다. 지난 2011년부터 4년 동안 전경련을 이끈 허 회장이 고사(苦辭)한다고 밝혔음에도 마땅한 후임이 없다는 이유로 3연임이 확정됐다.
전문가들은 전경련이 위상 추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게이단렌의 위기극복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게이단렌은 전통적으로 정치자금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업들의 정치헌금을 자민당 등 보수 정치권에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했고, 이는 자민당 55년 집권의 자양분이 됐다.
이 정치헌금이 각종 비리 스캔들로 이어졌고,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게이단렌은 비리구조의 핵심으로 지목됐다. 위기 상황에서 변화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1990년 7대 게이단렌 회장으로 취임한 히라이와 가이시(平岩外四) 전 도쿄전력 회장이다.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가 시작될 무렵 회장을 맡은 그는 1993년 게이단렌이 정치헌금을 알선해 온 관행을 과감히 폐지했다. 또 전후 일본 최초의 비(非) 자민당 정부인 호소카와 정권에서 경제구조개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히라이와 리포트’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대담한 규제 완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경제시스템의 구축을 제창한 이 리포트는 이후 고이즈미 정권이 추진한 개혁의 출발점 역할을 했다.
그는 또 버블 붕괴 직후인 1991년에는 회원 기업의 행동지침을 정한 ‘기업 행동 헌장’을 내놓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게이단렌이 사회공헌위원회를 구성하고 사회적 책임의 실현에 관심을 쏟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사회공헌위원회는 도요타, 미쓰비시 등 일본의 주요 대기업 100여곳이 속해 있다. 최근 게이단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기업 86%는 ‘사회 일원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사회공헌활동에 나선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게이단렌이 우주개발추진회의, 방위생산위원회 같은 24개 상설 위원회를 두고 정부와 정책 대화에 나서고 각종 사회 현안에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이런 변화가 밑바탕이 됐다.
지난해부터 아베 신조 총리의 임금인상 요청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것도 달라진 모습 중 하나다.
아베 총리는 2012년 집권 후 새해를 맞을 때마다 기업들에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내수부진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들의 임금소득이 늘어나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6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경제 3단체의 신년회에서도 “(기본급 인상을) 한다면 지금이라는 생각으로 노력해줬으면 한다. 큰 결단을 갖고 노력해줬으면 한다”고 요청했다.
게이단렌은 이에 화답해 지난해 회원사들에 임금인상을 용인한다는 임금협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그 결과 지난해 봄 일본 대기업의 평균 임금 상승률은 2.28%로 2013년의 1.83%보다 올라갔다. 게이단렌 자체 조사에서도, 작년 여름 보너스 상승률이 전년대비 7.2%로 2013년의 5%보다 높아졌다.
정원석 기자
④ 회원사들 "상근부회장이 전경련 대표?"…폐쇄적인 사무국 운영도 논란
2015.02.27 16:58
▲ 지난 2013년 12월 17일 열린 전경련회관 준공식 /조선DB
“액티브X를 액티브하게 엑스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해 3월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관 합동 규제개혁 끝장 토론회에서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상근 부회장은 이 말 한마디로 주목받았다.
“불필요한 규제 때문에 중국에서 천송이 코트를 구입하지 못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천송이 코트’ 발언에 이어 나온 이승철 부회장의 말은 그의 번뜩이는 재기(才氣)를 잘 보여준 장면이 됐다.
▲ 지난해 3월 20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민관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에서 발언하는 이승철 전경련 상근 부회장
하지만, 재계에서는 이 장면을 의아하게 바라본 시각이 더 많았다. 당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이 부회장이 재계 대표로 발언했다. 전경련의 회장이 아닌 이 부회장이 대통령 앞에서 경제계 대표로 발언한 것은 격(格)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다. 당시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행사에 참석했지만,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재계예선 이날 광경을 재계 큰 어른들인 총수들로 구성된 회장단을 보좌하는 사무국 대표인 상근 부회장이 마치 전경련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는 최근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손꼽고 있다.
애초 전경련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우리나라는 대표하는 주요 대기업 총수들이 회장을 맡으며 국가적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는 회장보다 상근 부회장 등의 목소리가 외부로 나오는 횟수가 잦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것이 회장 선임 과정에서 나타난 잡음들이다. 지난 2010년 조석래 회장(효성그룹 회장)이 건강문제로 전경련 회장직을 사임했을 당시 정병철 상근 부회장은 삼성그룹과 상의 없이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김우중 회장이 대우 부도사태로 물러났던 1999년에도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에 의지를 내비쳤지만, 당시 전경련 사무국의 고위 임원들이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내면서 뜻을 접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최근 전경련 회장 선임과정에서 재계는 물론 전경련 회장단 내부 공론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허 회장의 3연임이 확정된 것도 실제로는 전경련 사무국의 고위 임원들의 계산에서 비롯됐다는 평가가 있다.
주요 기업의 전경련 담당 임원은 “전경련 회장 선임 과정에서 허 회장의 연임이 이뤄지지 않으면 상근 부회장 등 임원진의 대대적인 교체가 있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A그룹의 사장급 인사가 전경련 상근 부회장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면서 “연임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조성된 데에는 전경련 사무국 임원들의 ‘자리보전’ 본능이 있었다”고 말했다.
4대 그룹 고위 임원은 “전경련 회장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사무국에서 당연히 회원사에 차기 회장에 뜻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아봐야 할 텐데, 현재의 사무국은 이런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서 “전경련이 제 역할을 하려면 사무국의 대대적인 인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재계 일각에서는 내부 통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현재의 조직 구조가 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정단체인 대한상의 등은 정부로부터 예산 회계 감사를 받지만, 전경련은 순수 민간 경제단체라는 이유로 이런 통제기구가 없다.
회원사로부터 받는 500억원가량의 예산을 집행하지만, 이사회와 총회 등 형식적 절차만 거치면 외부 감사 없이 사무국에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게 전경련의 지배구조다. 전경련의 연 500억원가량의 예산 가운데 삼성은 110억원, 현대차와 SK는 각각 60억원, LG는 50억원가량을 각각 부담하고 있다.
이같이 부실한 내부 통제는 고위직들의 일탈행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전경련은 지난 2013년 12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해 서울 여의도에 초고층으로 지은 전경련 회관 준공식을 열었다.
하지만, 새 전경련 회관 준공식 불과 사흘뒤인 12월 20일 컨벤션홀에서 사무국 최고위 임원 자녀의 결혼식이 열리면서 재계에 논란이 일어났다.
컨벤션홀 대관 영업이 시작된 것은 2013년 10월부터였지만, 실제 컨벤션홀을 빌려 치뤄진 결혼식은 이 임원 행사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임원은 결혼식 축사에서 ‘딸의 결혼식을 내가 지은 전경련 회관에서 하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원사인 기업들의 회비로 지은 건물을 사무국 임원이 마치 자신의 공적인 것 처럼 치켜세운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경련 회원사인 대기업의 고위 임원은 “전경련은 예산집행과 인사권 행사를 사실상 상근 부회장이 독점하고 있다”면서 “대기업들이 전경련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는 것은 외부와 소통 없는 사무국 조직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리한 의사결정을 한다는 인식이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전경련 관계자는 “전경련 사무국은 이사회와 총회를 통해 결정된 예산과 조직운영 기준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면서 “자체 기준에 따라 예산 집행 등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의 우려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정원석 기자
⑤끝 "기득권 집단 이미지 탈피…변해야 산다"
2015.03.02 16:00
▲ 2015년 2월 10일 영등포구 정경련 회관에서 열린 54회 전국 경제인 연합회 정기총회에서 35대 회장으로 재선임된 허창수 회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조선DB
“전경련에 혁신이 있는 것 같습니까?”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의 위상 재정립에 대한 의견을 묻자, 한 경제부처의 고위 관료로부터 되돌아온 질문이다.
이 관료는 “전경련 회원사 중 우리 경제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IT(정보기술)를 기반으로 한 혁신기업을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이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전경련이 지난해 국내 대표 IT기업인 네이버, 다음(현 다음카카오)에 회원사 가입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것을 꼬집은 것이다.
◆ “오너 2·3세로 바뀌면서 기득권 조직 변질”
전문가들은 전경련이 대대적인 이미지 쇄신부터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광식 연세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외부에서 보면 전경련이 대기업들의 모임인지, 재벌 오너를 위한 조직인지 불분명하다”면서 “재벌의 기득권만 지키는 데 급급한 조직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내지 못하는 한 현재의 위상추락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의 기득권만 대변한다는 인식이 강해진 건, 창업주가 아닌 후세 오너 경영인 위주로 조직이 바뀌면서부터다.
현재 전경련 회장단에서 상근부회장을 제외한 19명 가운데 창업자는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단 한 명이다. 나머지 18명은 모두 2~4세 경영인이다. 이전에는 강덕수 전 STX 회장이 회장단의 일원이었지만 그룹이 해체되면서 물러났다.
전경련에서 창업주 세대가 물러나면서 예전과 같은 기업가 정신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새로운 도전보단 기득권을 지키는 단체로 변질한 것 아니냐는 질타가 나오게 된 건 당연한 일.
주요 그룹에서 대관업무를 담당하는 한 임원은 “전경련의 가장 큰 약점은 ‘재계의 얼굴’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정받는 기업인이 없다는 것”이라며 “회장단이 2, 3세 오너 경영자들 일색으로 구성된 결과”라고 말했다.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나 고 정주영 현대 회장 같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창업 세대 인물이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으면 한 전경련의 약화는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 폐쇄적 조직운영…‘그들만의 리그’
▲ 전경련 회장단 명단
전경련도 이 점을 의식해 다른 창업 경영인과 창업세대 못지않게 기업의 도약을 이끈 ‘1.5세’ 기업인들을 집중적으로 영입하려고 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과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이중근 부영 회장, 이수영 OCI 회장 등이 새 회장단 후보로 거론됐던 이유다.
하지만 이들은 전경련의 요청에 거리를 두고 있다. 오히려 서경배 회장은 지난해 11월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에 선임됐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이만득 삼천리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등도 24일 서울상의 부회장에 선임됐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성장한 인터넷·IT(정보기술) 업종 기업들은 아예 전경련 가입을 거부하고 있다. IT 업계의 대표주자인 네이버 (857,000원▼ 2,000 -0.23%)는 전경련의 회원 가입 요청을 뿌리치고 2013년 말 중견기업연합회에 가입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중소기업과의 상생과 동반성장 약속 이행에 주력하고 있는데, 대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경련에 가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지난해 서비스·벤처·중견기업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SM엔터테인먼트, 하나투어 등 50여 개 사를 회원으로 가입시켰지만, 이들을 전경련의 차세대 리더라 하기엔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 “4대 그룹, 제조업 위주 관행 바뀌어야”
새로 성장한 기업들이 전경련 가입을 꺼리는 이유는 또 있다. 전경련이 회비를 많이 내는 기존 대기업 위주로 움직인다는 인식 때문이다.
내부에서는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눈치다. 한 중견 대기업의 팀장급 대관 담당자는 “대기업들이 자금을 갹출해 운영하는 특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돈을 많이 낸 기업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피 수혈’이라는 과제를 막는 요인이 된다.
경제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은 “경제 환경은 급변하고 있는데 전경련은 여전히 수출·제조업 기반 대기업 중심의 과거의 패러다임을 고집하고 있다”며 “내수·서비스업, 새로 부상하는 IT기반 신생기업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발상 전환이 없다면 전경련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은 정부는 물론 학계·중소기업·시민사회 등 외부 이해관계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세종 중소기업 연구원장은 “전경련은 법인세 인상, 경제민주화 등 대기업의 이해에 반하는 정책이나 이슈가 제기되면 무조건 반대만 한다”며 “국민에게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불리한 사안이 제기됐을 때에도 대화와 협의를 통해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는 “전경련이 상생·협력보다는 경쟁·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조직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며 “일부 재벌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건전한 상생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원석 기자
◆ 기업과 정권의 궁합
2016.06.10 '하이에나 부자'
전관예우 논란을 부른 홍만표 변호사 사건에서 단연 화제는 그의 광적인 '오피스텔 쇼핑'이었다. 홍 변호사는 본인과 아내·처남 명의로 오피스텔 67채를 갖고 있었다. 그가 지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A사 것까지 합치면 총 123채다. 천안의 한 오피스텔 빌딩에선 2개 층 수십 채를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다. 마치 우표 모으듯 오피스텔을 수집했다.
세금 몇 푼 아끼려 꼼수도 썼다. 주거용으로 월세 주면서도 관청엔 업무용으로 신고했다. 업무용은 부가세 10%가 면제되는 것을 악용한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세금 수억 원을 탈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서초동 법조 타운의 사건을 갈퀴로 긁어모은 큰손이었다. 사건 수임료만 수백억을 번 사람이 '푼돈' 몇 억 아끼려 탈세까지 저질렀다.
변호사가 돈 버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해도 너무했다는 점이다.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싹쓸이 수임으로 사건의 씨를 말렸고, 중산층이 소액 투자하는 오피스텔까지 손댔다. 거악(巨惡)에 맞섰다는 특수통 검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탐욕에 눈먼 졸부(猝富)만 있을 뿐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켜져 온 부자의 규칙이 있다. 그 첫째는 돈의 씨를 말리지 말라는 것이다. 경주 최 부자 가문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하라'는 가훈을 지켰다. 이웃 먹을 몫은 손대지 말고 남겨 두라는 뜻일 것이다. 최 부자 집안은 이 가훈을 400년 동안 대대손손 물려주었다.
근래 터진 일련의 사건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재벌의 '졸부화(化)'로 부를 만한 현상이다. 부자는 부자답게 큰 돈벌이를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재벌 오너 일가는 작은 돈벌이까지 내버려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푼돈에 눈독 들이는 졸부 같은 오너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소탐대실의 대표적 케이스다. 그는 한진해운의 내부 정보를 알고 보유 주식을 매각해 손실을 회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렇게 해서 최 전 회장 모녀가 아낀 손실액은 10여억원이다. 보유 자산 2000억원의 재벌가(家) 며느리가 겨우 10억원에 흔들린 셈이다.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김 회장 역시 법정관리 신청 직전 주식을 팔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금감원에 따르면 김 회장의 손실 회피액은 2억7000만원이다. 재벌 회장에겐 '껌 값'일 2억여원을 건지려 했다는 것이다. 금감원 발표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재벌 패밀리가 '푼돈'과 '껌 값'에 손대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서울 소공동 한진빌딩의 E커피숍에 가면 영수증에 대표자가 '조현아'로 찍혀 나온다. 한진가(家)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다. 동생인 조현민 전무도 인하대병원에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다. 대재벌 후계자가 커피숍 주인이라니, 이런 블랙 코미디가 없다.
이명박 정부 때 '재벌 빵집' 논란이 일었다. 롯데·신세계 등의 오너 가족이 빵집까지 경영한다고 여론 몰매를 받았다. 이후 재벌들이 빵집에선 철수했지만 카페며 음식점은 도리어 더 늘렸다. 대기업 계열사나 오너 일가가 운영하는 요식업체는 100여 곳에 이른다. 라멘집·카레식당에서 돼지구이집, 심지어 순대·떡볶이 프랜차이즈까지 있다.
CJ·이랜드 등은 동네 음식점과 경쟁하는 한식 뷔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신세계는 '정용진 맥줏집'으로 불리는 수제 맥주 체인점을 차렸다. 정용진 부회장이 기획했다고 이런 별칭이 붙었지만 결코 명예로운 이름은 아니다.
재벌가의 요식업은 해외 유학파 자제들이 주도한다고 한다. 유학 시절 맛본 음식점 브랜드를 수입해 기업형으로 펼치는 것이다. 외제차와 명품 수입도 재벌 자제들의 단골 아이템이다. 대기업의 자본력과 유통망이 뒷받침되니 땅 짚고 헤엄치기다.
롯데가 장녀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은 뒷돈 의혹에까지 휩싸였다. 롯데면세점 입점 업체에서 '자릿세'를 받았다는 혐의다. 최종 수사 결과는 안 나왔지만 뒷돈 액수는 20억원 정도로 알려졌다. 신 이사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억원 넘는 주식을 갖고 있다. 그런 자산가가 20억원을 탐냈다니 기막히다 못해 서글퍼질 지경이다.
신 이사장은 몇 년 전까지 롯데 계열 영화관의 팝콘 매장 사업을 독점했다. 이번 사건에선 아들 소유 회사에 일감을 몰아준 의혹도 불거졌다. 롯데만은 아니다. 대부분 대기업에서 오너 일가가 기업에 파이프를 박고 사적(私的) 이익 을 뽑아내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많은 진보를 이뤘지만 돈의 철학은 여전히 후진적이다. 돈 된다 싶으면 마지막 살점까지 뜯어먹는 '하이에나 부자'들이 판치고 있다. 재벌가 딸이 커피숍에 손대고, 1000억 부자가 몇 십억에 영혼을 판다. 이러니 부자가 존경받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반(反)부자 정서'가 존재한다면 그 상당 부분은 부자가 자초한 것이다.
조선일보 박정훈 논설위원
2016.07.12 정권과 재벌의 궁합
1998년 초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직후였다. 재계 고위 관계자 A씨가 ‘빅딜’에 대한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여당 실력자 B씨를 찾아갔다. IMF 외환위기 사태에서 5대 그룹의 사업을 맞교환하는 빅딜 논의가 한창이던 때였다.
재계는 만년 야당이던 김대중 정권과의 파이프 라인이 변변치 않았다. 당시 집권 평민당 수뇌부였던 B씨는 뜻하지 않게 속내를 드러냈다. “그동안 삼성과 LG 때문에 우리가 집권하는 데 지장이 컸다.” 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진 민자당 정권에서 두 그룹이 야당에 소홀히 대했다는 뜻으로 A씨는 해석했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의 5대 그룹 빅딜은 삼성과 LG에 불리한 결과로 이어졌다. 사업 맞교환의 방정식이 정권과의 친소(親疎) 관계에 따라 짜였다는 말이 무성했다.
/일러스트=이승범
두가지 요건이 겹쳐지면
사정(司正)의 판이 커진다고 한다.
첫째, 정권과 관계가 소원할 것.
둘째, 재벌가에 내분이 있을 것.
YS와 상극이었던 현대, DJ와는 밀월
정권과 재벌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 김영삼 정부 때 궁합이 안 맞은 대표적 재벌은 현대였다. 정주영 회장이 대선에 출마해 YS의 노기(怒氣)를 샀기 때문이었다. YS정부의 현대 손보기는 집요했다. 현대 계열사가 줄줄이 세무조사를 받고 은행들을 통한 금융제재를 당했다. 정주영 회장은 동생 정세영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경영 은퇴를 선언했다.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YS정권과 상극이었던 현대는 YS의 정적(政敵)인 김대중 대통령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대북(對北) 사업에서 DJ정권과 현대는 파트너처럼 움직였다.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현대가 북한에 5억달러를 주었다는 대북 송금사건이 나중에 불거지기도 했다.
DJ정부에서 재벌 총수 구속 1호는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이었다. 최 회장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DJ정부에 정치자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YS 측에 대선 자금을 주는 등 친(親)상도동 입장을 보인 바람에 DJ정권의 미움을 샀다는 것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인 신명수 신동방 회장과 조양호 한진 회장도 DJ정권 때 구속됐다.
/조선일보 DB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SK가 첫 타자가 됐다. 정권 출범도 전에 시작된 분식회계 사건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위인 최태원 회장이 구속되고 그룹이 풍비박산 났다. SK사건은 전대미문의 대선자금 수사로도 이어져 이건희 삼성 회장을 비롯, 기업인 20여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이 대선자금 수사 한 방으로 노무현 정부는 재계의 ‘군기’를 잡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됐다.
이명박 정부 때는 ‘박연차 게이트’로 시끄러웠다. 태광실업 회장이 정·관계 로비를 위해 뇌물을 뿌렸다는 사건으로 박연차 회장이 실형을 받았다. 박 회장은 노 대통령 측과 친밀한 대표적인 친노(親盧) 기업인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정권의 대변인처럼 행동했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를 둘러싸고 ‘보복 사정’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 재계에선 ‘살생부’가 돌았다. MB정부와 가까웠다는 재벌들 명단이었다. 그중에서 실제로 효성과 CJ의 오너가 구속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효성은 MB의 사돈기업이고 CJ 이재현 회장은 MB정권의 고려대 인맥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스코와 정준양 전 회장에 대한 수사도 전임 정권과 관련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롯데 또한 살생부 명단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롯데는 MB정부 때 가장 잘나갔던 그룹이었다. 박근혜 정권 초기부터 손볼 대상이라는 말이 무성했는데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자 역시 살생부가 맞았다고 재계 사람들은 수군댔다. 두가지 요건이 겹쳐지면 사정(司正)의 판이 커진다고 한다. 첫째 정권과 관계가 소원할 것, 둘째 재벌가에 내분이 있을 것. 효성이나 CJ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롯데 역시 두 요건을 다 갖췄다. 검찰이 칼 휘두르는 스윙 폭을 보면 판이 커질 조짐이 역력하다
박정훈 논설위원 편집=최원철
2016년 01월 21일 “무소불위 입법권력에 경제주체의 24년만의 저항”
▲ 동참 21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직원들이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서명운동’에 서명을 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정주영 대선 출마 이후
권력 對 재계 충돌 양상
국회가 경제 발목잡는 행태
억눌려왔던 기업 불만 분출
정치 프레임 엮는 것은 잘못
‘이번에 입법 안되면 안된다’
시민 공감 얻어 충분한 명분”
경제단체들이 주도해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는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서명운동’은 ‘무소불위’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는 국회 권력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저항’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엄중한 경제 현실을 외면하는 국회 권력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이번 운동을 ‘관제 운동(퍼포먼스)’이라거나 ‘대기업 구하기’라는 프레임으로 세력 대결 구도를 만들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이번 서명운동은 경제민주화 명분으로 규제를 양산하고, 국정감사 때마다 기업 총수 망신주기 등 국회의 횡포에 억눌린 재계의 축적된 반감이 일시에 분출되는 형국이다.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21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서명운동은 경제계의 자구 운동”이라며 “이걸 정치 프레임으로 엮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서명운동의 ‘관제 논란’에 대해서도 “경제계가 하고 있는 운동에 대통령이 지지를 해준 것뿐”이라며 “대통령도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데 그걸 관제라고 볼 이유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야권이 민생 관련 법안을 ‘회장님 법안’으로 규정하고, 대통령이 여기에 서명했다는 논리로 정치대결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이번 서명운동을 ‘기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힘으로 제압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이번 서명운동이 시민들에게도 공감을 얻으며 충분한 명분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정인교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4월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에 경제활성화 법안들이 처리되지 않으면 총선 이후 새로운 국회가 구성돼 가을에나 입법활동이 이뤄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 경제단체들은 충분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정치권은 이번 서명운동이 경제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정서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단체들이 서명운동을 한다고 해도 결국 법을 통과시켜야 할 주체는 국회”라며 “국회 탓만 하기보다 정당한 권리를 내세우며 다각도로 정치권을 압박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했다.
이번 서명운동을 ‘국회 권력’과 ‘경제 핵심 주체’ 간 충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서명운동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24년전인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 처음으로 재계에서 국회 권력에 맞서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면서 “기업을 국민경제의 주체로 보기보다 ‘손보기의 대상’으로 보아온 국회 권력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말했다.
방승배·윤정선 기자 bsb@munhwa.com
2016년 01월 22일 ‘1000만 서명’ 놀라운 참여 열기… 청년·주부·상인 ‘너도나도’
50代 “청년 취업문제 심각… 조금이라도 도움됐으면”
30代 주부 “경기 너무 어려워… 1인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
“서명부 파일 메일 보내달라”… 반상회·가족 참여 문의 급증
▲ 1000만명 될때까지 21일 서울 중구 소월로 CJ그룹 본사 로비에서 임직원들이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명 서명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명 서명운동’이 기업뿐만 아니라 시장 상인과 아파트 반상회 등 다양한 계층으로 퍼지면서 ‘아래로부터 시민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22일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서명운동본부 등에 따르면 산악회 등 동호인 모임, 아파트 반상회를 비롯해 서명 참여를 원하는 일반인 문의가 급증하면서 기업인 중심으로 진행된 서명운동이 일반시민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날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만난 50대 김모 씨는 “경기가 좋지 않아 젊은이들이 취업 문제 등으로 힘들어하는 걸 보면 너무 안타깝다”며 “젊은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서명에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명운동 참여 후 대한상공회의소 운동본부 사무실을 찾은 30대 주부 이모 씨는 “경기가 너무 어려워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며 “일손이 부족하다면 대신 띠를 매고 돌아다니더라도 서명을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 한 상인은 운동본부에 전화를 걸어 “경제 상황이 나아져 시장이 다시 사람들로 붐볐으면 좋겠다”며 서명참여 방법을 물어왔다.
서울 강북구 한 아파트 주민대표라고 밝힌 최모 씨는 “아파트 주민 모임에서 서명운동 얘기가 나와 동참키로 했다”며 서명부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충남지역 한 산악회 회장은 “회원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고 있다”며 “주말에 인기 좋은 등산로 입구에 서명부스를 설치하면 많이 동참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가족단위로 서명에 참가하겠다는 문의도 증가하고 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40대 최모 씨는 “요즘 경기가 예년만 못하다는 걸 체감한다”며 “서명부를 보내주면 가족들에게 서명운동 취지를 설명한 후 서명을 받아 보내주겠다”고 했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일반시민의 문의와 반응이 뜨거워 우리도 놀란 상황”이라며 “특히 온라인 서명운동이 급증한 것은 젊은 세대와 일반시민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윤정선 기자 wowjota@munhwa.com
쩐의 전쟁(1)(2)
각종 범죄 혐의가 샘솟는 효성 분쟁
한·일 양국에서 롯데그룹 경영권을 놓고 벌이는 ‘신격호 대 신동빈’ 부자간, ‘신동주 대 신동빈’ 형제간 싸움이 격화되고 있다. 신씨들의 롯데 경영권 전쟁은 한·일 양국에서 법적 소송으로 번졌다. 또 연일 상대를 비방하고 있다. ‘피보다 진한 신씨들의 쩐(돈)의 전쟁’과 ‘신씨판 막장 싸움’이란 비난에도 롯데가(家) 신씨들의 다툼은 진정될 기미가 없다. 롯데그룹에서만 이 같은 경영권 분쟁이 불거지고 있는 게 아니다. 롯데 외에도 경영권 분쟁에 시달리고 있는 기업이 수두룩하다.
대기업 중 현재 롯데그룹 이상으로 분쟁이 심한 곳은 효성그룹이다. 효성그룹은 ‘아버지 조석래(80) 회장, 장남과 막내 조현준·조현상 대(對) 둘째 조현문씨’ 구도로 다툼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조석래 회장의 장남 조현준(47) 효성 사장과 차남 조현문(46) 전 효성 전략본부 부사장의 싸움은 혈투를 방불케 한다. 효성가 둘째 조현문씨가 지난해 6월과 10월, 두 차례나 형 조현준씨와 그 측근들을 횡령·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효성가 조씨 형제간 싸움이 재벌가의 추악한 면을 폭로하는 창구가 되고 있는 셈이다. 또 효성그룹과 오너가의 기업범죄에 대한 검찰 수사까지 촉발하고 있다.
지난 5월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조석래·조현준 부자의 수천억원대 횡령·배임·탈세 혐의 재판이 열렸다. 이곳에 나타난 조현문씨는 “효성은 불법 비리가 많은 회사다. 그 행동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조현준 사장이야말로 진짜 ‘몸통’이다”라며 형을 향해 직격탄을 퍼붓기도 했다.
▲가족 간 분쟁 중인 효성그룹 오너일가. 조석래 회장(왼쪽부터), 장남 조현준씨, 차남 조현문씨. /이준헌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효성 ‘조석래·조현준 vs 조현문’ 싸움
효성그룹 조씨들은 왜 형사고발을 강행할 만큼 격하게 싸우는 것일까. 2010년대 초, 효성가 둘째 조현문씨는 ㈜효성 부사장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조석래·조현준 대 조현문’ 구도의 심각한 갈등이 시작됐다. 불법과 비리 혐의가 불거지던 첫째 조현준씨의 비상식적 행태에 조현문씨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또 역시 수천억원대 횡령·배임 등 비리 혐의가 있던 아버지 조석래 회장이 장남 조현준씨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며 효성의 조씨 부자·형제간 갈등이 폭발했다.
결국 2013년 2월 조현문씨가 사표를 냈고, 갖고 있던 효성 지분을 제3자에게 매각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후 2014년 6월, 조현문씨는 효성그룹 계열 부동산업체 트리니티에셋매니지먼트와 ㈜신동진의 최현태 대표를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업무상 횡령과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이곳의 최대주주는 조현준씨와 막내 조현상씨다. 최현태씨는 조현준씨의 측근이다. 사실상 조현준씨를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10월에는 형 조현준씨를 정조준했다. 조현준 사장과 그의 최측근 노틸러스효성 류필구 전 대표(현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 부회장) 등 임원들을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업무상 횡령과 배임’ 혐의로 다시 검찰에 고발했다.
조현문씨는 ‘조현준씨가 효성그룹 계열사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와 노틸러스효성, 효성인포메이션 등을 동원해 허위로 용역을 주고, 부당지원을 벌여 회사에 수백억원대 손실을 끼쳤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회사 수익과 전혀 무관한 투자를 하고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주식을 사들였다’는 의혹도 고발을 통해 폭로했다. 이 폭로에 효성그룹과 조석래·조현준 부자는 아들이자 동생인 조현문씨를 강하게 비난했다.
효성그룹 조씨들의 분쟁은 검찰과 법원 등 사법 당국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 건 외에도 효성 조석래·조현준 부자에 대해 ‘조세포탈·횡령·분식회계·해외 재산도피·비자금 조성’ 등 각종 기업범죄 혐의가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현문씨가 고발한 조현준씨의 횡령 사건은 원래 서울중앙지검 조사1부 담당이었다. 하지만 최근 조사1부 대신 특수부에 사건이 재배당됐다. 검찰이 효성가 조씨들의 범죄 수사에 속도를 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②편에 계속>
소송과 맞소송으로 공방이 계속되는 금호그룹
<①편에서 계속>
금호그룹 둘로 쪼갠 ‘박삼구 vs 박찬구’
금호그룹 오너일가인 박삼구·박찬구씨의 싸움 역시 ‘형제의 난’으로 불릴 만하다. 박삼구(70)씨는 금호그룹 회장이고, 친동생 박찬구(67)씨는 금호석유화학 회장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금호가(家) 박삼구·박찬구 형제의 다툼은 그룹을 둘로 쪼개며 서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금호가 박삼구·박찬구 형제의 다툼은 서로에 대해 형사고발과 법적 소송·맞소송으로 번져 있다. 직원을 통해 일정을 몰래 빼내 상대의 동향을 파악했다는 의혹도 있다.
박씨 형제간 경영권 분쟁의 표면적 이유는 박삼구 회장 측이 밀어붙인 대우건설(2006년)·대한통운(2008년) 인수와, 이후 부실에 대한 책임 공방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박찬구 회장 측이 박삼구 회장 측에 부실책임론을 제기했고, 박삼구 회장 측은 이런 동생 박찬구 회장을 회사에서 배제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급기야 2009년 박삼구 회장 측이 이사회를 열어 박찬구 회장을 해임시켰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왼쪽),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조선일보 DB
박찬구 회장도 당하지만은 않았다. 2009년 박찬구 회장은 자신이 해임되기 직전, 갖고 있던 금호산업 지분을 팔고 갑자기 금호석유화학 지분 매집에 나섰다. ‘지분을 확보해 경영권 전쟁을 벌이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동생을 그룹 경영진에서 몰아낸 박삼구 회장도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지분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박찬구 회장이 금호석유화학과 그 관계사들의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박삼구 회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데 성공했다.
이후 양측은 수년간 서로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등 민·형사 고발까지 서슴없이 제기했다. 대표적 사례들이다. 2011년 12월 박찬구 회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됐다. 2009년 금호산업 워크아웃 직전 박찬구·박준경 부자가 미공개 내부 정보를 이용해 불법으로 주식을 매각했고 이를 통해 100억원 넘게 손실을 회피한 혐의였다. 또 자회사와의 거래로 10년간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도 받았다. 당시 박찬구 회장 측은 검찰 수사의 배후가 형, 박삼구라고 지목했다.
박찬구 회장은 지난해 8월 ‘박삼구 회장을 4000억원대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박삼구 회장 측이 4000억원대의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 기업어음(CP)을 금호석유화학 등 10여개 계열사에 사게 했고, 이 CP 발행 직후 두 회사의 워크아웃을 신청해 계열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박찬구 측의 공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올 6월 박삼구 회장과 그의 최측근 기옥 금호아시아나 대표를 상대로 “당시 배임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103억원을 내놓으라”는 민사소송까지 제기했다. 이외에도 박삼구·박찬구 형제는 금호그룹의 상징인 ‘금호’ 상표권을 놓고 소송 중이다. 특히 “금호그룹(박삼구)과 금호석유화학(박찬구)을 계열 분리해 달라”는 소송은 현재 대법원까지 끌고 간 상태다.
부실책임 공방이 경영권 분쟁으로
현대시멘트는 ‘전 오너 대 전·현직 경영진’ 간의 다툼으로 번지고 있다.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이 1969년, 둘째 동생 고 정순영(현대시멘트) 명예회장에게 현대건설 시멘트사업부문을 떼 준 것이 현대시멘트다. 정 명예회장의 장남 정몽선(61)씨가 물려받아 회장을 맡아왔다.<③편에 계속>
규모 상관없이 중구난방에서 벌어지는 경영권 분쟁
<②편에서 계속>
지난 7월 정몽선 회장이 김호일 전 대표 등 전직 임원 3명을 횡령·배임 혐의로 고소했다. 전·현직 경영진에 대한 정몽선 회장의 공세는 계속됐다. 지난 10월 1일 이주환 사장 등 현 경영진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법원에 신청했다. 이들의 경영권 행사를 막겠다는 의도다. 그러자 회사가 반격에 나섰다. 지난 10월 7일 이사회를 열어 정몽선씨를 회장과 대표에서 모두 해임했다. 경영진이 오너를 회사에서 퇴출시켜 버린 것이다.
현대시멘트의 경영권 분쟁은 회사의 부실책임 공방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크다. 현대시멘트는 계열사인 성우종합건설의 채무를 떠안으면서 부실에 빠졌다. 결국 2010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이 책임을 정몽선 회장이 전·현직 경영진에 돌리고 있다. 정 회장의 이 움직임은 사실상 상실한 현대시멘트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평이 있다. 2013년 말까지 그는 현대시멘트 지분을 27.6%쯤 갖고 있었지만, 지난해 무상 감자와 출자전환으로 지분이 2.4%대로 줄었다. 마음대로 경영권을 행사하기는 불가능한 지배력이다. 회사의 부실책임 상당부분을 전·현 경영진에 돌리게 되면 현대시멘트 경영권 유지를 위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반면 전·현직 경영진은 정 회장의 이 같은 행보에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너와 전·현직 경영진 간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는 이유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법원·검찰까지 경영권 분쟁에 엮여
재벌·대기업에서만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경영권 분쟁 중인 중견·중소기업도 많다. 물론 분쟁 양상이 재벌·대기업과는 조금 다르다. 재벌·대기업의 경영권 분쟁은 대부분 부자나 형제간 다툼이다. 하지만 중견·중소기업들의 경영권 분쟁 상당수는 ‘전·현직 경영진 간’ 또는 ‘경영진 대 주주’의 대결 양상이다.
최근 경영권 분쟁이 특히 심한 곳으로는 가구업체 보루네오가 있다. 보루네오는 2015년에만 6월과 7월, 10월 등 벌써 세 번의 공식적인 경영권 분쟁이 터졌다. 보루네오의 경영권 분쟁은 조금 독특하다. 소액주주들이 회사와 경영진을 상대로 경영권 분쟁을 벌인다는 점이다. 현 경영자들과 주주들 간 경영권 행사의 핵심인 ‘이사’ 선임을 두고 격하게 대립 중이다. 지난 10월 28일에는 소액주주들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법원이 소액주주의 손을 들어줬다. 이로 인해 회사 측이 추진했던 주주총회가 무산됐다. 그러자 다음 날 회사가 즉각 이의를 신청했다.
옛 동양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던 동양네트웍스도 경영권 분쟁에 빠져 있다. 동양네트웍스는 회사 경영권을 두고 ‘기존 경영진 대 최대주주’ 간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동양그룹 몰락 후 동양네트웍스는 2013년 10월 회생절차에 들어가 올 3월 회생절차를 졸업했다. 경영권 분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최대주주인 티엔얼라이언스(SGA 포함 지분 23.3%)가 동양네크웍스 경영권 확보에 나섰다. 이에 현 경영진이 재계의 거물인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을 영입하는 강수로 맞섰다. 또 소액주주를 끌어들여 우호지분을 늘리고 있다. 동양네트웍스의 분쟁은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등장으로 세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주총에서 동양네트웍스 현 경영진이 경영권을 일단 방어했다. 하지만 최대주주의 공세가 앞으로 더 거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외에 현재 신일산업 등도 경영권 분쟁이 극심한 상황이다. 한국 기업들의 경영권 분쟁에는 공통점이 있다. 오너·경영진이 저지른 기업범죄와 부도덕함이 분쟁의 단초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동진 주간조선 기자
2016-10-06 'made in Korea' 신화가 저문다 - 조선일보·서울대 工大 공동기획
[제1부]
[1] 알맹이 빠진 제조업 기술 = 빨리 잘 만드는 '제조업 코리아'… 이젠 그런 나라 널렸다
123층 롯데월드타워의 '현실'… 터파기·공기역학 설계 등 첨단기술 모두 외국社가 맡아
원천기술 없는 '양산 기술'… 造船·전자·車 등 한계에 봉착
한국 最高 건축에 '한국 기술'은 없다
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29번지 잠실 롯데월드타워. 지난달 최정상부 첨탑 구조물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지상 123층, 높이 555m인 국내 최고(最高), 세계 5번째 높이의 거대한 빌딩 외관이 완성됐다. 그러나 '단군 이래 최대 건축물'이라는 이 빌딩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75만t의 건물 무게를 견디기 위한 터파기(기반) 설계는 영국의 에이럽(Arup)사, 그 기초 위에 19만5000㎥의 콘크리트와 4만t의 철골을 쌓아 올리는 빌딩의 설계는 미국의 케이피에프(KPF)와 레라(LERA)사, 초속 80m의 강풍에도 견디기 위한 풍동(風洞) 설계는 캐나다의 RWDI사, 총 2만개의 유리벽을 붙이는 외벽 공사는 일본의 릭실(Lixil)사와 미국 CDC사가 담당했다. '한국 건축 기술의 집약체'라는 수식어가 붙는 롯데월드타워가 실제로는 외국 기업의 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콘크리트와 철근만 우리 손으로 쌓아 올리는 셈"이라며 "국내 건설업체들이 해외에 지었던 수많은 고층빌딩도 실상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 /사진=김연정 객원기자, 그래픽=김성규 기자
롯데월드타워는 원천 기술 없이 외적 성장에만 집착해온 국내 산업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는 1993년 조선업 수주 세계 1위, 1994년 세계 최초 256메가D램 반도체 개발, 1995년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에 진입하며 '제조 강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제조 강국 코리아'의 허상(虛像)이 건설과 조선중공업·스마트폰·LCD 디스플레이·철강·자동차 등 주력 산업 곳곳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20년 제조업 신화'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 LCD 디스플레이 제조업체 BOE는 지난해 12월 중국 허페이(合肥)에서 10.5세대 LCD 생산라인 착공식을 열었다. 현재 주력생산라인이 8세대인 한국을 두 단계 뛰어넘어, 한국 TV가 일본 소니를 앞지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의 뒷덜미를 잡은 것이다. 통신장비 사업도 중국에 형편없이 밀리며 1996년 CDMA(미국식 이동통신)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명성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그동안 원천 기술 없이 대규모 투자를 통해 '더 얇고 더 가벼운' 제품을 경쟁 국가보다 '더 저렴하게' 생산하는 데 집중하며 성장해 왔다. 하지만 한국이 주도해온 '양산 기술 혁신'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회로 선폭이 18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미터)인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지만 10나노 미만의 미세 공정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반도체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제조업 몰락'은 20년 넘게 세계 최정상을 차지해 온 조선업에서부터 현실화하고 있다.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조선 3사는 지난해에만 시추선 같은 해양 플랜트 부문에서 약 4조5000억원의 영업 손실을 냈다. '하면 된다' 정신으로 달려들었지만 복잡한 해양 플랜트에 대한 설계 능력은 턱없이 모자랐다. 기본설계는 해외에 맡겼고 이를 토대로 만든 상세 설계도는 발주사로부터 100번 넘게 퇴짜를 맞았다.
결국 건조 비용과 제작 기간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 조선업체 퇴직 임원은 "우리 엔지니어들은 외국 엔지니어 회사들이 만든 기본설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수주 가격을 산정했다"고 고백했다.
제조 기술의 경쟁력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제조업 공동화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원천 기술 없이 제조만 잘하는 나라는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은 베트남으로 생산 기지를 옮겼으며 세계 5위의 자동차 기업인 현대자동차도 지난 18년 동안 국내에서는 생산 공장을 단 한 곳도 추가로 짓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상 최고에 육박하는 청년 실업률(11.8%)은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근로시간은 여전히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최상위권에 머물고 있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산업공학)는 "지금껏 한국 산업은 남이 하는 것을 빨리 배워 따라 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follower ·빠른 추격자)'로 성공을 거둬왔지만, 이런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시행착오의 축적을 통해 백지에서 그림을 그려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능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면서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성훈 기자 정철환 기자
[2] 단기성과 집착하는 기업들
원광大팀의 3차원 반도체 기술, 삼성전자는 거부… 인텔이 '덥석'
스마트폰 핵심기술 되자 "아차"… 제품 양산까지 인텔에 4년 뒤져
국내서 외면한 빅데이터 기술, 獨기업이 사들여 1조3000억 대박
서울대 첨단 지하유전 탐사기술, 프랑스에 고작 14억원에 팔려
스마트폰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구글 아닌 삼성전자에 첫 제의
'산업을 바꿀 기술' 몰라보고 걷어찬 한국
지난해 2월 삼성전자는 "'3차원 반도체(FinFET·핀펫)' 기술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용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반도체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한 기술적 성취"라는 자평도 했다. 3차원 기술로 만든 반도체는 평면 구조의 기존 제품과 비교해 성능과 에너지 효율이 훨씬 뛰어난 데다 칩의 크기도 극소화할 수 있다. 삼성의 스마트폰을 더 얇게 만들고 배터리 사용 시간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 하지만 당시 삼성의 핀펫 반도체 생산은 경쟁사인 인텔보다 4년이 늦은 것이었다.
사실 삼성전자는 오래전에 이 기술을 선점할 기회가 있었다. 15년 전인 2001년 10월 이종호 당시 원광대 교수가 경기도 기흥의 삼성 반도체 사업장을 찾아와 자신이 개발한 '3차원 반도체 양산(量産) 기술'을 공개했었다. 그는 삼성전자 임원들 앞에서 "현재 대세인 2차원 평면 소자로는 고성능 반도체 개발에 한계가 있다"면서 "소자의 구조를 3차원으로 바꾸면 소비 전력과 제품 크기를 줄이면서 성능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석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 교수가 "지금 3차원 반도체 기술에 투자하지 않으면 늦는다"고 호소했지만 참석자들은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 교수는 결국 1년 4개월 뒤인 2003년 2월 인텔(Intel)에 이 기술을 제안했고, 이후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이 회사에 기술 이전을 했다. 인텔은 2011년 세계 최초로 핀펫 반도체 양산에 성공,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라는 위치를 공고히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당시 우리도 3차원 반도체 기술 개발에 나섰던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게다가 당시 세계 반도체 업계가 공급 과잉으로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수천억원의 개발 비용이 드는 기술을 선뜻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은 과감한 기술 투자를 외면하면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가 될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이종호 서울대 공대 기획부학장은 "당시 한국 대기업의 시스템에선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2위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인 독일의 SAP는 2011년부터 모든 소프트웨어를 '하나(HANA)'라는 빅데이터(대규모 데이터) 처리 기술에 기반해 만들고 있다. 이 기술은 기존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보다 읽고 쓰는 속도가 수백배 이상 빠른 메모리 반도체에 대부분의 데이터를 올려놓고 처리한다. 덕분에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속도로 대용량의 데이터 처리가 가능해졌다. 독일 SAP가 지난해 '하나'를 적용한 빅데이터 처리 소프트웨어로 벌어들이는 돈은 10억유로(약 1조3000억원)가 넘는다. SAP에 이렇게 큰 수익을 안겨준 기술 역시 한국에서 태어났다. 지난 2000년 서울대 차상균 교수가 연구실 대학원생들과 함께 데이터베이스(DB) 처리 기술을 연구하다 개발했다.
◇당장 돈 안 되면 관심 없는 한국
'하나' 역시 처음부터 독일 SAP로 넘어가지 않았다. 차 교수는 당시 이 기술을 국내에서 상용화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국내 대기업을 접촉하기도 하고, 직접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을 만들기도 했다. 차 교수는 "당시 한국에는 'IT 붐'이 일고 있었지만, 다들 당장 돈이 되는 기술에만 관심이 있었다"면서 "'하나' 같은 소프트웨어 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투자자나 기업들은 없었다"고 했다.
결국 이들은 2002년 미국 실리콘밸리로 떠났다. 여기서 SAP를 만났다. SAP는 한국에서 온 생소한 기술에 기대 이상의 관심을 보였다. 머지않아 빅데이터 시대가 도래하면 기존 기술보다 훨씬 빠른 데이터 처리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측했던 것이다. 이 기술은 결국 SAP로 매각됐다.
세계 최대의 석유 기업 중 하나인 프랑스 토탈(TOTAL)이 활용하는 첨단 지하 유전 탐사 기술도 우리가 아깝게 놓친 토종 기술이다. 이 기술은 서울대 신창수 교수팀이 2008년 개발했다. 지하에 매장돼 있는 원유를 지진파(地震波)를 활용해 찾는데, 비슷한 원리의 기존 기술보다 해상도(解像度)가 월등히 높아 유전 탐사의 성공률을 크게 높였다.
신 교수팀은 당시 국내 몇몇 에너지 기업에 이 기술을 이전하는 방안을 타진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에너지 업체들 중에서 직접 석유를 찾아 시추하는 곳은 드물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이 기술은 2010년 125만달러(약 14억원)의 기술 사용료를 받고 프랑스 토탈로 이전됐다. 현재 토탈은 이를 통해 중동·북해 등에서 지하 지대를 탐사하고 있다.
◇한국이 거절, 구글로 간 '안드로이드'
넝쿨째 굴러 들어온 해외 신기술을 차버린 사례도 있다. 외신에 따르면 스마트폰용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OS)를 개발한 앤디 루빈(Rubin)은 2004년 안드로이드 OS를 팔기 위해 삼성전자와 접촉했다. 루빈은 한국을 찾아와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사에 무료로 운영 체제를 제공해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사업 전략을 소개하면서 제휴와 투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임원들은 그의 제안을 뿌리쳤다. "수천명의 우리 회사 엔지니어가 못하는 일을 직원 6명인 당신 회사가 한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에서 거절당한 안드로이드는 2주 뒤 구글에 5000만달러(약 567억원)에 인수됐다. 안드로이드 역시 삼성전자가 했다면 글로벌화에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소니도 자사 제품을 글로벌화하려 했다가 수없이 실패했었다. 국내 스마트폰 업체 고위 관계자는 "작은 '나사' 하나 필요 없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사업은 현재 이익률이 70%가 넘는다"면서 "당시 한국이 안드로이드를 인수했더라도 반드시 성공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구글에 완전 종속되는 상황은 피했을 것"이라고 했다.
박순찬 기자 강동철 기자
[3] 경쟁력 막는 '수직계열화 덫'
대기업들, 납품社에 "가격내려라" "우리 경쟁업체엔 납품 말라"
中企, R&D나 투자 엄두도 못내
세계적 우량 中企인 히든챔피언… 한국 23개, 中 68개, 獨 1307개
獨보쉬는 글로벌 기업에 납품… 한국 中企는 특정 대기업 하청신세
지방에 있는 한 부품업체 대표 A씨는 작년 자동차 내부 공조와 엔진 관련 신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요즘 해외시장 판로를 위해 국내 완성차 업체 몰래 해외 출장을 다닌다. 이 사실을 완성차 업체가 알면 납품 물량을 줄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A씨는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중소기업들이 독자 개발한 기술은 인정하지 않고, 3%도 안 되는 마진율로 납품 단가만 깎으려 한다"며 "최악의 경우 국내 완성차 업체와 거래가 끊기는 것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중소기업들은 아직도 특정 대기업의 납품 업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생산 효율성' '제품 기밀 보호' 등을 내세운 대기업의 '수직 계열화의 그물망'에 갇혀 새로운 혁신과 판로 개척은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다.
◇성장 동력이던 수직 계열화, 이제는 경쟁력 약화의 원인으로
수직 계열화는 국내 대기업이 선진 기업들을 빠르게 따라잡는 '패스트 팔로어(fast-follower·빠른 추격자)'일 때 강점이 있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들은 완제품에서 부품까지 일괄 생산 체제를 갖추면서 단기간에 기술 경쟁력을 확보했고, 협력 업체도 안정적 납품 물량을 확보하며 대기업과 동반 성장했다. 수직 계열화는 대기업이 사세(社勢)와 고용을 확대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 계기판, 보관함 등으로 구성된 자동차 대시보드를 생산하는 한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의 생산라인(왼쪽)과 충청남도의 한 자동차 부품 협력업체에서 직원들이 알루미늄과 마그네슘을 활용해 무게를 줄인 경량화 부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신현종 기자
하지만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대기업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수직 계열화는 중소기업의 활력과 혁신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 대기업의 경영 상황이 힘들어지자 과거의 성공 모델이었던 수직 계열화는 '중소 협력업체 쥐어짜기'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이 대기업의 납품 단가 인하 요구다.
자동차용 램프를 생산하는 B씨는 요즘 납품 대기업으로부터 단가 인하 요구를 받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2010년 전까지만 해도 보통 CR(Cost Reduction)이라 부르는 단가 인하 요구는 매년 초 한 차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자동차 완성차 업체들의 경영 상황이 악화되면서 수시로 추가적인 CR을 요구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대기업 구매 담당자가 인건비와 공장가동비, 재료 금액 등을 마음대로 산출해 놓고, 납품 계약서에 사인만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B씨는 "대기업 요구대로 하면 마진율이 3%도 안 된다"며 "연구개발(R&D)은 고사하고, 공장 돌리기도 빠듯하다"고 말했다. 한 전자부품 업체 대표 C씨도 비슷한 처지다. C씨는 "조만간 '경영 진단'이라는 이름으로 대기업의 장부 검열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에 잠이 안 온다"며 "이렇게 매년 납품 단가가 깎이면 미래를 위한 투자는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특정 산업 부진 땐 줄줄이 붕괴
과도한 수직 계열화는 대기업 스스로에도 부담이다. 주력 사업 하나가 흔들리면 관련 회사들이 모두 줄줄이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STX다. 선박 엔진-조선소-해운회사로 수직 계열화를 이룬 STX그룹은 한때 수십조원의 매출을 올리며 재계 서열 13위까지 올랐지만, 해운업이 침체되면서 조선과 중공업 수익 구조도 동반 악화돼 그룹이 붕괴했다.
삼성그룹이 비(非)주력사 매각에 나선 것도 수직 계열화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예전엔 삼성전자의 실적이 개선되면 1차 협력사인 삼성전기의 실적도 덩달아 좋아졌지만 최근엔 이런 공식이 깨지고 있다. 실제로 1분기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갤럭시S7의 판매 호조로 영업이익이 크게 늘었지만 삼성전기는 오히려 작년 1분기보다 실적이 나빠질 것으로 추정된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정부 규제와 소액 주주의 영향력 때문에 계열사들을 대놓고 지원해주기도 힘든 구조"라고 말했다. 조철 산업연구원 주력산업연구실장은 "수직 계열화 안에서는 중소 부품 업체들이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개발할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며 "부품의 경쟁력이 완제품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글로벌 소싱' 시대에는 수직 계열화 모델이 생명력을 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수직계열화
기업이 계열사나 협력업체를 통해 원료에서부터 부품 생산, 완성품의 제조·판매·사후관리까지 수직적 체계를 만들어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자동차 회사가 철강 계열사로부터 차체를, 계열 부품사로부터 브레이크·전장도 공급받는 것이다. 한 발 나아가 특정 중소기업에도 자신에게만 납품하도록 해 사실상의 계열사 역할을 하도록 한다.
김성민 기자 강동철 기자
[4] 벤처 주저앉히는 시스템
대기업 다니다가 벤처 창업한다 하니… 한국에선 "미쳤냐" 미국에선 "축하해"
2012년 말 국내에서 온라인 화장품 유통업체 '소코글램(Sokoglam)'을 창업한 교포 2세 샬럿 조와 데이비드 조 부부는 창업 6개월 만에 미국 뉴욕으로 회사를 옮겼다. 그들은 "한국보다 미국이 벤처를 창업해 키워나갈 환경이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남편 데이비드가 다녔던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은 학생들의 창업을 돕기 위해 각종 창업 실무 수업과 유명 벤처인 초청 강좌를 수시로 열었다. 학생 창업자들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무실과 무료 상담 서비스도 알선해줬다. 특히 '멘토 교수'가 따로 있어 월 2회씩 학생들의 창업 과정을 살펴보고 조언도 해줬다. 창업 자금을 구하기도 쉬웠다. 한국에서는 인맥(人脈)이 닿지 않으면 만나기 힘들었던 엔젤 투자자를 미국에서는 사무실만 찾아가면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창업을 바라보는 시선과 문화가 달랐다. 데이비드와 샬럿 부부는 "한국에서 대기업에 다니다 창업을 한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제정신이냐'라고 말렸지만, 미국에서는 '축하한다. 내가 뭘 도와줄까'라고 했다"고 말했다. 소코글램은 지난해 300만달러(약 34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160억원의 시장 가치를 인정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미국이 여전히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산업 강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이처럼 벤처 창업을 북돋고 키워주는 창업 생태계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는 창업 생태계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창업을 '기회'가 아닌 '위험(risk)'으로만 보는 문화가 만연하다. 서승우 서울대 교수(전기정보공학)는 "한국 공대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들 대기업에 취업하려 하지만, 미국 공대의 최상위권 학생들은 창업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정철환 기자
[5] 중국의 초고속 추월
첨단기술 수출 비중 한국은 줄고… 中國은 14년새 9.4→43.7% 폭증
중국 선전(深圳)에 있는 선전 하이테크 파크는 초입부터 10~20층 높이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도로를 따라 달리면 세계 3대 모바일 메신저·게임 업체 텐센트, 세계 1위 드론(무인기) 업체 DJI, 세계 6위 스마트폰 업체 ZTE 본사가 나온다. 1996년부터 첨단 산업단지로 조성된 이래 현재 11.7㎢(약 354만평)의 면적에 10만여명의 젊은 인재들이 몰려 있다. 이곳에서 창출하는 연간 부가가치액은 100조원 이상. 한국의 판교 테크노밸리와 비교하면 규모는 18배, 부가가치액은 2배가 넘는다.
코트라 선전무역관의 박은균 관장은 "선전은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창업의 성지"라며 "미국·유럽·한국 등 전 세계의 창업자들이 여기로 몰려든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창업 지원 업체 핵스(HAX)가 실리콘밸리의 본사를 지난해 이곳으로 옮겨 왔을 정도다.
중국에는 선전의 하이테크 파크 같은 첨단 산업단지가 베이징·상하이·청두·우한 등 전국 각지에 140곳 넘게 있다. 중국 1위 서버 업체 인스퍼그룹의 왕언둥(王恩東) 부회장은 "과거엔 중국에서 만든 값싼 부품으로 한국이 최종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한국 부품으로 중국이 시스템을 만드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아시아의 첨단 기술 제품(항공기·통신장비·제약·의료기기 등) 수출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6년 5.9%에서 2014년 43.7%로 급등했다. 반면 한국은 2000년 10.7%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강동철 기자
[6] M&A로 제조업 키우는 중국
'원천기술' 통째로 사들이는 해외M&A… 中 1분기 투자액이 한국 1년치의 10배
지난해 3월 세계 5위 타이어 업체인 이탈리아 '피렐리'가 71억유로(약 9조원)에 매각됐다. 인수 업체는 중국 국영 화학업체인 중국화공집단공사(CNCC). 이탈리아 언론은 "세계 최고 자동차 경주 대회 F1에 타이어를 공급하는 피렐리의 첨단 기술이 중국에 넘어가게 됐다"며 허탈해했다. 지난 1월 독일의 기계 전문회사인 '크라우스마파이'를 9억2500만유로(약 1조2000억원)에 사들인 곳도 중국 CNCC였다. 178년 역사의 크라우스마파이는 플라스틱 가공용 기계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다. 한 달 뒤 CNCC는 430억달러(약 50조원)에 세계 최대 종자(種子) 업체인 스위스의 '신젠타' 인수를 추진한다고 밝혀,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CNCC는 연이은 초대형 인수합병(M&A)에 대해 "'중국제조 2025'의 선도 기업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제조 2025는 2025년까지 독일·일본 등 선진국의 제조업 기술력을 따라잡겠다는 것이 목표다. 양평섭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경사무소장은 "중국 기업들은 낮은 브랜드 인지도와 부족한 기술력을 단기간에 보완하기 위해 해외 유망 기업들을 싹쓸이한다"면서 "여기에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M&A 속도와 규모는 압도적이다. 올해 1분기 중국의 해외 M&A 규모는 1080억달러(약 124조원)로 이미 지난해 연간 실적(951억달러)을 넘어섰다. 작년 해외 M&A 액수가 중국의 9분의 1에 그친 한국은 비교가 안 된다.
올해 들어서도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은 삼성전자를 따돌리고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GE를 인수했고, 훙하이그룹은 일본 LCD 기업 샤프를 인수하면서 삼성전자를 경쟁 대상으로 정조준했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국의 M&A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기업을 매각하는 한국의 '방어적 M&A'와 크게 대비된다"고 말했다.
이성훈 기자 김성민 기자
[7·1부 끝] 주요 57개社 설문조사
CTO 88% "한국 제조업 심각한 위기"
한국 주요 기업 최고기술책임자(Chief Technology Officer·CTO) 10명 중 9명은 한국 제조업의 산업 경쟁력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공동으로 제조 분야 대·중소기업 57개사 CTO를 대상으로 한국 산업 경쟁력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57명 중 50명(88%)이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심각하거나 그 이상의 위기'라고 답했다. 이 중 8명(14%)은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답해 한국의 제조업 산업 경쟁력이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위기가 아니다'는 답변은 단 1명에 불과했다.
CTO들은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의 미래에 대해서도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우리 경제가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선진 기업을 추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39명(68%)이 '비관적' 혹은 '매우 비관적'이라고 답변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테슬라 같은 혁신 벤처들이 나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42명(74%)이 '가능성이 낮다' 혹은 '매우 낮다'고 응답했다. 홍성주 SK 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부사장)은 "중국의 추격, 전문 인력 양성의 소홀, 정부의 관심 부족이 산업 경쟁력 하락의 복합 원인"이라면서 "우선은 기업이 먼저 나서야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도 인재 육성과 중소기업의 연구개발 역량 강화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정철환 기자 강동철 기자
[제2부-1] 정부 R&D의 허상
'성공률 96%' 자랑하지만 기술 사업화는 5건당 1건뿐
R&D 예산 10년새 2배 늘어도 경쟁력은 계속 떨어져
"R&D 성공조작은 실패서 배울 기회마저 차단한 범죄"
年19조 퍼붓는 정부 R&D… 70%가 '장롱특허'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2012년 3월 국산 수퍼컴퓨터 '마하(MAHA)'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지식경제부는 "인간 유전체 정보 분석에 최적화된 세계적 수퍼컴퓨터"라고 홍보했다. 마하는 '2014년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도 선정됐다. 마하에는 개발과 운용에 지금까지 300억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ETRI 마하는 국산도, 세계적 수퍼컴퓨터도 아니었다. 마하의 하드웨어는 재미교포 대니얼 김이 세운 미국 회사 '아프로'에서 들여왔고 조립까지 아프로에 맡겼다. 마하 실사에 나섰던 한 수퍼컴퓨터 전문가는 "수퍼컴퓨터의 핵심은 동시에 많은 계산을 하는 '병렬(竝列)연산'인데, ETRI가 개발한 프로그램을 가동하면 병렬연산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퍼컴퓨터의 두뇌인 CPU(중앙처리장치) 상당수가 작동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에서 연구개발(R&D)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기준 4.29%로 세계 1위다. 절대 금액도 미국·일본·중국·독일·프랑스에 이어 세계 6위 수준이다. 올해 정부 R&D 투자액은 19조원이 넘는다. 지난 10년간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 R&D 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2009년 11위에서 지난해 19위로 곤두박질쳤다.
▲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 개발 성공?… 11년된 日기술 그대로 - 올해 2월 3일 운행을 시작한 인천공항자기부상열차 ‘에코비’(왼쪽). 27년간 약 5000억원을 투입해 개발했다. 하지만 핵심 기술의 내용이나 수준이 지난 2005년부터 일본 아이치(愛知)현에서 운행 중인 리니모(Linimo·오른쪽)와 거의 동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현재 시속 500㎞ 급 자기부상열차의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태경 기자·아이치고속교통 홈페이지
여기에는 '정부 R&D 100% 성공'이라는 허상이 자리 잡고 있다. 실패가 두려워 미래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도전적인 연구는 뒷전이고, 성과를 내기 위해 외국이 한참 전에 개발한 기술을 가져다가 포장만 바꾸기도 한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연간 7000억원이 투입되는 정부 원천기술 개발 과제의 지난해 성공률은 96%에 이른다. '우수'에 해당하는 'A' 등급이 52.4%로 가장 많았고 실패를 뜻하는 'D' 등급을 받은 것은 124개 과제 중 단 한 건뿐이었다. 기초연구도 상황은 비슷하다. 평가 대상 650개 과제 중 3.7%만 'C' 또는 'D' 등급을 받았다. 매년 4조5000억원의 예산을 쓰는 연구재단이 지원하는 사업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의미 없는 수치이다. 연구 성과 중에 기업이 돈을 주고 사가거나 사업화에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작년 정부 과제 최우수 평가를 받은 '차세대바이오매스사업단'의 경우 중소기업 두 곳에 각각 1억원과 300만원에 기술이전한 것을 최대 성과로 꼽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 따르면 정부 연구소들이 보유한 특허 중 71.6%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장롱 특허'이다. 장롱 특허 비율은 2013년 66.4%에서 2014년 68.6%, 지난해 71.6%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김창경 교수는 "막대한 세금을 투자하고도 기술이 축적되지 못한 것은 R&D 성공 조작 때문"이라며 "실패에서 배울 기회마저 차단한 사실상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 정철환 기자
[제2부-2] 시류에 휩쓸리는 R&D - 아바타 인기 끌자 '3D' 내놓고… 알파고 붐 일자 '1兆 AI정책' 급조
MB정부의 '녹색 성장'에 맞춘 친환경 전력망 기술 연구
朴정부 '창조경제'로 바뀌자 사업 중단… 수백억원 날려
"R&D정책, 정권마다 급조… 원천 기술 개발 계속 실패"
- 4대강 수질 감시 로봇 물고기
대통령 한마디에 급하게 추진, 기술 개발도 못하고 57억 날려
- 작년 구글 무인차 각광받자…
'한국형 구글카' 시연하고 육성전략 서둘러 발표
MB때 녹색성장센터, 이젠 낡은 카페
이달 초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 1645-1번지. 인적 드문 훤한 공터에 퇴락한 건물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외관은 여기저기 녹슬었고 진입로의 가로등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주변 곳곳엔 시설물을 뜯어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근처 주민은 "SK그룹의 '스마트 그리드 체험센터'가 있던 건물인데, 한동안 버려져 있다가 카페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본래 이곳 구좌읍 일대에는 에너지와 통신, IT(정보 기술) 등 5개 분야 168개 기업들이 신재생 에너지 발전과 전기차 충전 시설 등을 곳곳에 설치해 놓고 있었다. 지난 2009년 '녹색 성장'을 기치로 내건 이명박 정부가 신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이곳을 스마트 그리드(지능형 전력망) 시범 단지로 조성하겠다며 국비 766억원을 포함, 총 2500억원을 끌어들였다.
▲ 친환경 기술 체험관이 녹슨 건물로 -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 ‘SK 스마트 그리드 체험센터’의 6년 전 모습(위 사진)과 현재 모습(아래 사진). 건물 외벽 곳곳이 녹이 슨 채 카페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지난 이명박 정부 당시 이곳엔 재생 에너지와 전기차 기술에 대한 홍보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SK 홈페이지·허재성 객원기자
하지만 지난 2013년 들어선 박근혜 정부가 '창조 경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스마트 그리드 관련 사업이 대부분 중단되거나 방향을 바꾸면서 이곳 실증 사업 단지도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제주 구좌읍의 첨단 스마트 그리드 시설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내버려졌다. 결국 정부 독려로 이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은 생돈만 날린 꼴이 됐다. 이 사업에 참여했던 한 대기업 임원은 "정권이 바뀌자 신재생 에너지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면서 "결국 기반 시설에 수백억원을 투자한 기업만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
정권 따라, 시류 따라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정책이 한국의 과학기술과 산업 경쟁력을 망치고 있다. 세계시장을 주도할 만한 원천 기술은 최소 10년 이상의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을 뒷받침해온 정부 R&D 정책은 정권이 바뀌는 5년에 한 번씩 원점으로 돌아간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병태 교수(경영학)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수퍼컴퓨터 같은 산업의 미래를 바꿀 기술에 대한 R&D 정책마저 몇 주 만에 급조되고 있다"면서 "이런 환경에서 한국의 정부 R&D는 '눈먼 돈 나눠 먹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 3월 미래창조과학부는 "1조원을 투입해 2020년까지 한국형 알파고(AlphaGo)'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구글의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첫 승리를 거둔 지 불과 일주일 만이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관계자는 "미래부에서 '각 연구소가 어떤 인공지능 관련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하라'는 공문이 왔고, 보고서를 제출한 며칠 뒤 곧바로 대책이 발표됐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인공지능 연구가 제외되는 일도 벌어졌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알파고와 비슷한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고, '엑소브레인'이라는 완성 단계의 기술도 갖고 있었지만 과거부터 진행하던 연구라는 이유로 이번 육성책에서 제외됐다"고 했다.
◇시류 따라 정권 따라 급조되는 연구 과제
시류에 따라 대부분의 정책 과제가 '새 술은 새 부대에' 식으로 다시 시작되고, 또 급조되는 것이 정부 R&D 정책의 현실이다. 항상 이런 식이다 보니 특정 기술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know-how)가 제대로 축적되지 않는다.
미래부가 지난 4월 10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한 '한국형 수퍼컴퓨터 사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9년 서울대 '천둥', 2011년 ETRI '마하', 2012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바람' 등 매번 수십억~수백억원을 들여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 연속성 없이 별개로 진행되면서 매번 백지에서 다시 시작했다. 한 국립대 교수는 "담당 공무원이 새로 올 때마다 새 수퍼컴퓨터 과제가 나온다"고 말했다.
급조된 연구 과제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됐던 '로봇 물고기'의 경우,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수질 감시에 로봇 물고기를 쓰면 좋겠다"고 발언하면서 과제가 만들어졌고, 연구비 57억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개발 일정을 서두르면서 기술도 제대로 개발 못 했고, 연구자들은 결국 징계까지 받았다. 과제를 진행했던 한국생산기술연구원 관계자는 "대통령이 아이디어를 냈으니, 무조건 만들라는 식이었다"면서 "담당 공무원은 과제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안 썼다"고 했다.
◇부처끼리 인기 영합한 정책 경쟁 벌여
주먹구구식 R&D 정책은 정부 전반에 만연해 있다. 2009년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가 큰 성공을 거두자 문화체육관광부 등 3개 부처가 '콘텐츠산업 발전 전략'을 내놨다. 2013년에도 여러 부처가 '빅데이터 발전 전략'을 각각 만들었다. 하지만 모두 거창한 대책만 발표됐을 뿐, 뚜렷한 성과를 못 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새로운 사업으로 포장하기 위해 이름만 바꾼 재탕 사업도 많다. 산업통상자원부가 2000년대 초반부터 추진하고 있는 '국가 신성장 동력 사업'도 이름과 가짓수만 바꾼 '재탕'이 반복되고 있다. 신성장 동력 사업, 미래 먹거리 사업 등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한 박사는 "산·학·연 전문가들이 총동원돼 기획했다지만 실제로는 몇몇 공무원들이 만들어 발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면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한다. 산업부 관계자는 "현 정부가 국가 신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 '전략 기술'을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이전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신성장 동력 사업과 녹색성장 기술 사업은 대부분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정부 연구소 한 관계자는 "정부가 전략 기술을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면 곧바로 정부 출연연구소에 '지금 개발하고 있는 관련 기술을 내놓아라' 식의 공문이 내려온다"면서 "정부 전략 기술 사업은 항상 이런 식으로 급조된다"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 정철환 기자
[제2부-3] '정치'가 망치는 R&D사업
지자체 "남들 하는데 우리도"… 정부 출연硏 분원 2000년 이후 50개 생겨
표 얻으려 유치했다 무용지물
44억 들여 세운 하천실험센터, 3년간 연구용역 맡은건 단 1件
10억원의 유지·보수비가 든다.
'지역 균형 발전' 논리에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이 줄줄 새고 있다. 지역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이 선거 때마다 유치 공약을 내걸고 치적(治績)으로 홍보하면서 무분별한 지방 분원 설립이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또 지역 경제를 육성하겠다는 명분하에 R&D 특구나 클러스터(기업·연구소 집합단지)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이 상당수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26일 현재 전국적으로 57개의 정부 출연연구소 분원이 운영 중이고 7개가 건설 중이다. 2000년 이후 생긴 50개 중 37개(74%)가 정치권과 지자체 요구로 만들어졌다. R&D 특구는 전국에 5개, 지자체와 정부가 지정하는 클러스터도 100개에 이른다.
정부는 분원 지원에만 지난해에 6492억원을 썼다. 하지만 상당수가 아예 연구 실적이 없다. 분원 중 13곳은 직원이 10명 미만으로 간신히 건물 관리나 하는 처지이다.
▲ 170억짜리 풍력시험동, 지금까지 13억 용역만 수주 - 전북 부안의 재료연구소 풍력시험동. 풍력발전기용 날개를 시험하는 이 시설은 건설에 170억원, 유지·보수에 연간 10억원씩 예산이 투입됐지만 지금까지 수주한 시험 과제들의 용역비는 총 13억원에 그쳤다. /재료연구소
지방 R&D 특구와 클러스터도 기업이 들어오지 않아 텅 빈 곳이 많다. 그런데도 정치권과 지자체는 이들이 지역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한 지방자치단체 부지사는 "R&D 특구나 클러스터로 지정이 되면 기업들이 쉽게 정부 연구비를 탈 수 있고 지방세와 국세 감면 등 세제 혜택도 크다"면서 "정치인 입장에선 어떻게든 이를 유치해야 실적이 된다"고 했다.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들은 국가 전체적인 정부 연구·개발(R&D)의 효용성을 따지기보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치적 명분을 우선시한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정미정 성과평가부장은 "전국의 출연연 분원에 대한 구조조정을 하고 있지만, 해당 지역에서 강력하게 반발해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정치권과 지자체는 유치에만 적극적일 뿐 비용 부담은 꺼린다. 지난해 지자체는 출연연 분원 운영에 필요 예산의 2.21%인 143억원만 분담했다.
정치권은 '지역 차별'의 논리까지 동원한다. 지난 2010년 정부는 대구광역시와 광주광역시에 R&D 특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국정감사 때마다 "정부 R&D 투자 예산의 70% 이상이 수도권과 대전·충남에만 집중되고 있다"는 영·호남 출신 국회의원들의 지적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새 R&D 특구가 지정되면 기존 R&D 특구에서는 '역(逆)차별'이라고 아우성을 치는 일이 다반사다. 올해 2월 정부가 서울 양재동과 우면동 일대를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키우겠다고 발표하자, 충청권 지자체와 지역 국회의원들이 "대덕 연구단지에 집중된 역량을 분산시키는 일"이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한 전직 장관은 "우리나라가 70~80년대 과학 기술 개발과 산업화를 일굴 때는 R&D 투자의 효율을 무엇보다 우선시했지만 정치 논리가 개입되기 시작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 정철환 기자
[제2부·4] - 美 한인과학자 500명에 퇴짜맞은 한국
- 한국 떠나는 R&D 인재
이공계 박사 해외유출 10년새 3배
"연봉 많이 줄테니 한국 가자" 스카우트 제안했지만 모두 "NO"
지난해 12월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영준 연구지원본부장은 연구단장 3명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들의 목적은 인공지능(AI)과 바이오 등 미래 산업을 이끌 뇌·신경 과학 분야의 박사급 한인(韓人) 과학자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IBS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와 원천 기술 확보를 위해 2011년 설립된 국내 대표적 기초과학 연구 기관이다.
하지만 유 본부장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보스턴 등 주요 도시를 돌며 개최한 '글로벌 탤런트 포럼(GTF)'에서 만난 한인 과학자들에게 '쓴소리'만 들어야 했다. "한국은 승자 독식 사회다. 한번 실패하면 끝 아니냐." "한국식의 '빨리빨리' 문화와 성과 위주 연구 시스템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다."
IBS는 박사후(後) 연구원으로는 파격적인 최대 6000만원의 연봉을 제시했지만 당시 GTF에 참가한 한인 과학자 500여 명 중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행(行)을 선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유 본부장은 "IBS도 과거와 달리 과학자 본인이 원하는 연구를 최대한 지원하려고 하는데 아직 인식의 차이가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첨단 분야의 글로벌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우리나라 주력 산업에서 중국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가운데 연구 개발(R&D)의 중추인 이공계 고급 인력들이 한국을 외면하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 따르면 지난 2013년 현재 한국을 떠나 해외에 있는 국내 이공계 박사는 8931명으로 10년 전(3302명)보다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나마 지금 국내에서 일하는 이공계 박사들도 10명 중 4명은 기회만 되면 해외로 떠나려고 한다.
STEPI 홍성민 인재정책연구단장은 "좋은 인재는 떠나고, 해외 우수 인재는 끌어오지 못하는 심각한 '인재(人材) 불균형'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2부-5·끝] - "치킨·피자는 밥값 청구 안돼"… 초등생처럼 과학자 규제
자율 무시하는 정부규제
극소수 연구원 일탈에 규제 늘려 "모든 연구원 범죄자 취급하나"
- 연구원들 자율이 생명인데…
출장지 위치확인 앱까지 만들어
실험실에서 밤샘 연구했어도 복무점검 한다며 출근 요구
- 고객만족도 조사까지 받아
비정규직 비율 줄이라며 정규직 추가 채용은 막기도
일부 기관장 실적 챙기기 급급
정부과천청사를 방문하는 정부 산하 연구소 직원들은 청사 방문동에 있는 카페나 편의점에 들러 날짜·시간이 찍힌 영수증부터 챙긴다. 대덕 연구단지의 A연구소 관계자는 "과천뿐 아니라 국내 출장을 가면 출장지에 있었다는 증빙을 반드시 첨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직원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스마트폰 응용프로그램(앱)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설치하도록 했다가 개인 정보 침해 논란이 불거지자 사용을 중단했다. 이 앱은 실행하면 출장자 위치가 인사팀에 통보된다. 한 정부 연구소 연구원은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 연구원들을 초등학생 감시하듯이 간섭하는 일이 허다하다"고 말했다.
◇연구원들을 옭아매는 지침 계속 생겨나
정부 연구소들이 이런 규제를 시행한 것은 2013년부터이다. 당시 감사원 감사에서 한국원자력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국내 출장을 허위로 신고한 뒤 출장비를 횡령한 사실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그러자 각 부처는 정부 연구소에 "철저한 관리 시스템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연구소 대부분이 영수증 증빙 등 규정을 만들었다. 연구원들은 일부의 일탈 때문에 2만명에 이르는 정부 연구소 연구자들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고 불만이다. 한 연구소 관계자는 "정부 연구소나 대학에서 문제가 생기면 곧 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침이 내려온다"면서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자율성인데, 오히려 자율성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계속 새 지침이 생긴다"고 말했다.
최근 과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닭집 영수증'도 황당한 규제로 꼽힌다. 정부 연구소는 물론, 정부 연구비를 지원받은 대학에서도 식비로 치킨을 먹을 수 없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관계자는 "모 연구소에서 치킨과 맥주를 함께 시켜 먹은 사례가 나오면서 전면 금지됐다"고 말했다. 일부 연구소에서는 피자도 지출 금지 항목이다. 정부 감사에서 '피자는 간식이지 식사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가 산하기관 종사자의 근태를 점검하는 '복무 점검' 역시 과학계의 업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옭아매기라는 비판이 많다. 연구자들은 연구와 실험을 하다 보면 밤을 새우거나 늦게까지 일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정부 복무 점검은 이런 연구자들의 늦은 출근까지 연구소 평가에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비율 줄이라면서 정규직 전환은 외면
정부 연구소들은 고객 만족도 조사도 받는다. 정부에서 연구비를 받는다는 이유로 산업은행·서울대병원 등과 같은 평가 기준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 연구소 25곳이 매년 수천만원씩 돈 써가며 고객 만족도 조사를 하고 있다. 대덕에 있는 정부 연구소 관계자는 "은행이나 병원과 달리 우리는 고객이라고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면서 "기술 상담을 한 중소기업이나 공동 연구자까지 모두 동원해도 최대 100명 정도에 불과한데, 억지로 고객 만족도 조사를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 정책이 모순되는 일도 허다하다. 공공 기관에 비정규직이 과도하다는 게 사회적 이슈가 되자, 정부에서 연구소의 비(非)정규직 비율을 낮추라고 하면서 정규직 직원 추가 채용은 막는 식이다. 이 때문에 연구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이 만료되는 비정규직을 해고해 목표치를 달성하고 있다. 최근 계약이 해지된 한 연구원은 "계약 연장을 약속받았는데, 정부 방침이 갑자기 내려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면서 "이런 식이면 우수한 박사후 연구원이나 병역 특례 전문 연구 요원을 활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부 연구소 기관장은 연구 성과보다도 보여주기식 실적을 챙기는 데 급급하다. 예컨대 기관장이 다른 기관을 방문할 때마다 어김없이 '양해각서(MOU) 체결식'이 진행된다. 2006년 151건이던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산하 연구소 25곳의 MOU 건수는 2010년 216건, 지난해에는 471건으로 급증했다. 정부 연구소 한 곳이 평균 19건 MOU를 맺은 것이다. 심지어 초·중학교와 맺은 MOU도 많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관계자는 "MOU만 맺을 뿐 별다른 후속 조치가 없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
[제3부] 서울대 김형준 교수 인터뷰 "주입식 이론교육서 벗어나야"
"서울대 공대에서도 학부생들은 반도체칩 한번 만들어보지 못하고 칠판에서 이론 교육만 받고 졸업합니다. 기계를 본 적도, 다뤄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기업에선 도대체 대학에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서울대 재료공학부 김형준〈사진〉 교수는 현행 공학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나친 이론 중심 교육을 꼽았다. 김 교수는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장 등을 지낸 국내 반도체 전문가이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의 모든 공대가 굉장히 이론적인 서울대 공대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며 "공학 교육이 이론적인 지식 함양에 편중돼 기초과학이 중심인 자연대 교육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대안으로 "연구 중심 대학을 제외하고는 대학별로 교육과정을 차별화하고, 이론 교육보다는 회사에 적응을 잘할 수 있는 실무와 기초 교육을 강화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과 연계한 실습 위주의 교육, 다른 학문과의 융합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주입식 교육에서도 벗어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생각과 소신이 없는 사람은 창의적일 수 없다"며 "창의성과 도전 정신이라는 '공대 스피릿(spirit·정신)'을 강화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에서 A+ 학점 받는 방법은 교수 강의를 녹음해 농담까지 다 받아 적은 뒤 시험문제가 나오면 그대로 쓰는 것이라고 한다"며 "또 수업 도중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도 아무 생각 없이 '모르겠다'는 답만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주입식 반복 교육에 익숙한 학생들이 틀리지 않는 공부, 실수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과학 발전의 큰 장애 요인"이라며 "정답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제3부-1]우물안 工大 교육
기업들 "工大선 뭘 가르치나"… 수천만원씩 투자해 재교육
- 미적분 등 기본 개념도 이해못해
전기공학과 나와도 회로 못읽어… 업무 지시하면 "그런거 안배웠다"
- 기업인들 "대학, 변화가 없다"
48% "인재 가뭄은 대학 책임", 53% "트렌드 변화 반영 못해"
"전기공학 전공했다는데 전기회로가 그려진 도면을 못 읽습니다. 재료공학과 출신자에게 '유리·세라믹·구리 중 전기가 가장 잘 통하는 물질이 뭐냐'고 물으면 당황해요. 이래서야 어떻게 세계를 뒤흔들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겠습니까."
프린터 제조업체 대표인 최근수(60)씨는 얼마 전부터 신입사원 선발 때 전공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학점 높고 토익 성적 좋은 학생을 뽑아도 정작 전공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최 대표는 "도대체 공대에서는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며 "적어도 연구·개발에 필요한 기본 개념·기술은 대학에서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산업 현장에서 "당장 쓸 인재가 없다"는 아우성이 나오고 있다. 연구 역량을 갖춘 인력을 선발해 기술 개발에 투입하고 싶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게 기업인들의 말이다. 대기업은 신입사원을 뽑아놓고 결국 한 명당 수천만원을 투자해 재교육한다. 구인난에 자금 여력도 없는 중견·중소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직원을 채용한다. 한 중견기업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석·박사급은 그나마 낫지만, 학부만 졸업하고 입사한 사람들은 실무 능력이 사실상 제로(0) 상태에서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공 지식 떨어지는 공대생
산업 현장에서는 이공계 출신 인력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전문성 부족'을 꼽았다. 본지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산기협)와 국내 중소·중견기업·대기업 250여곳의 임원급 최고기술책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 중 7명(72.4%)이 '맡은 업무 분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답했다. 전공자라고 뽑아도 업무 이해도가 떨어져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공에 대한 기초 소양이 부족하다'(31.2%)는 점도 지적했다. 중소기업 대표 A씨는 "미적분도 제대로 이해 못 하고 공학적 개념도 탄탄하지 않으면서 수박 겉 핥기식의 각종 융합 교육만 맛본 졸업생들이 수두룩하다"며 "업무 지시를 하면 '그런 거 안 배웠다'고 잡아떼는데 채용을 무를 수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대학서 안가르쳐주니 학원에서라도… -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한 학원에서 올해 졸업을 앞둔 공대생 10여명이 캐드(CAD·컴퓨터지원설계)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공과대학 교육의 질이 떨어졌다는 지적이 많아지면서 대학생들이 사설 학원으로 가 기술을 배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진한 기자
기업인들은 '이공계 인재 가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학 교육에 있다'(48.4%)고 입을 모았다. 그중에서도 '대학이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트렌드를 반영한 교육을 하지 못한다'(53.2%)고 답한 기업인이 가장 많았다. 상당수 대학이 매년 같은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산업 현장의 기술 변화에는 눈감은 채 매학기 똑같은 강의만 반복한다는 것이다. 학생은 기출문제 답안지인 족보를 달달 외워 답안지를 채우고, 대학은 실습과 연구에 쓸 실험 도구나 최신 기계 보급에는 지갑을 닫으니 공대생들이 4년 내내 철 지난 이론만 배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산기협 관계자는 "한 대기업에 방문했다가 커다란 캐드실(室)이 따로 있기에 용도를 물었더니 '신입사원들이 6개월간 배우는 교육실'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 IT 업체 대표는 "컴퓨터공학과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코딩(coding·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해보라고 했더니 제대로 한 학생이 거의 없었다"며 "코딩도 할 줄 모르는 공대 졸업생이 입사하면 기업들은 황당할 뿐"이라고 말했다.
◇산학 협력 교육도 지지부진
기업들은 공대 교수들이 기업 현장에 관심이 없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기업 현장에 적합한 인재를 키워내는 것은 결국 공대 교수들의 몫인데, 교수들이 기업을 잘 모르니 제대로 된 교육이 안 된다는 것이다. 강성모 KAIST 총장은 "공대는 산업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의 약점을 알고 도와줄 부분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하는데, 교수들이 적극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기업 현장에 보내 대학의 실습 교육을 보완하는 산학 협력 교육 역시 지지부진하다.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기업들은 자기 직원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 시간·비용 낭비라고 생각하고, 대학도 적당한 기업을 찾는 걸 번거로워한다"고 말했다. 기업 현장의 전문가들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도 마땅치 않다. 대부분의 공대가 교수 채용에서 현장 전문가들은 있을 리 없는 논문 실적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제3부-2] 판박이 工大교과
스탠퍼드·MIT는 가상현실·인공지능 강의, 시장과 호흡하는데… 한국 工大는 10년째 같은 이론 수업국내 工大 컴퓨터공학 과목 중 70%이상이 개설 10년 넘어…
美선 학기마다 응용과목 개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컴퓨터공학 전공 학생들은 '포커봇 대결'이라는 수업을 통해 인공지능(AI)을 배운다. 교수는 인공지능 포커 프로그램 개발을 과제로 내주고 학생들끼리 서로 겨루게 하면서 인공지능의 원리와 응용을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한다. 또 '배틀코드 프로그래밍 대결'이라는 수업은 학생들이 팀을 꾸려 학내 프로그래밍 경진대회에 참가하도록 한다. 총상금이 5만달러(약 5520만원)이다.
구글 출신 교수가 진행하는 스탠퍼드대의 인공지능 수업은 '자율주행 자동차'에 인공지능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등 생생한 사례 중심으로 진행된다. 실리콘밸리 벤처에서 일하는 스탠퍼드대 출신 구정진(34)씨는 "수업 하나하나가 스탠퍼드대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화된 내용으로 짜여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이라는 과목도 학교마다, 교수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배우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스탠퍼드대의 '가상현실(VR) 콘텐츠 만들기' '암호화된 화폐, 비트코인', MIT의 '아이폰용 게임 디자인·개발' 등 IT(정보기술) 산업 동향을 실시간으로 반영한 수업도 많다. 학교 수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산업 현장을 경험하다 보니 학부 저학년생도 일찌감치 창업에 뛰어들 수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구글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을 배출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반면 한국 주요 대학의 공대 전공 수업에서는 이런 '실무형' 강의를 찾기 어렵다.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의 2학기 수업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논리 설계' 등 제목부터 딱딱한 이론 수업 일색이다.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역시 전공 수업 28개 가운데 '논리회로 설계' '소프트웨어종합설계' 같은 과목이 시간대만 바꿔서 2∼3개씩 중복 개설돼 있다. 한 사립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연구실이나 과목 간판만 바꿔 달 뿐 실제 가르치는 내용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며 "서울대를 비롯해 국내 주요 대학 컴퓨터공학과 과목 중 70% 이상이 개설된 지 10년은 넘었다"고 말했다.
MIT에서 공부한 벤처기업인 정수덕(34)씨는 "한국 대학은 시험 문제 풀이 요령을 가르친다면, 미국 대학은 산업 현장의 이슈를 강의실로 가져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울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박건형 기자 강동철 기자
[제3부·3] 창업정신 없는 工大
창업 쓴맛 본 교수들의 조언
한국 공대에서 교수·학생 창업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창업에 도전했다가 쓴맛을 봤던 교수들은 현실감각 부재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10년 이상 연구실에 앉아 특정 분야에만 매몰돼 있다 보니 시장과 산업의 변화를 모른 채 자신의 기술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서울시립대 박선우 전 교수(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는 "창업에서 기술의 중요도는 넷째 정도라고 본다"며 "이런 현실을 모른 채 투자금 조달, 영업, 마케팅 등에 대한 지식도 없이 도전했다간 실패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박 전 교수는 2000년 PDP(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 업체인 'UPD'를 창업했다가 3년 만에 회사를 청산했다. 그는 "연구실에만 있다 보니 시장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며 "기업을 청산하면서 연대보증 때문에 상당한 빚을 떠안았다"고 말했다.
교수와 사업가라는 역할이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학교에서는 교수가 창업했다고 수업을 빼준다거나 논문 제출 건수를 줄여주는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없다. 이렇다 보니 교수직과 기업,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1999년·2014년 두 차례 창업한 서울대 윤의준 교수(재료공학부)는 "벤처기업을 만들어 운영하다 보니 학교에서 바라는 연구나 논문 발표는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며 "연구는 많이 하지만 논문 발표용이 아니다 보니 학교와 기업 양쪽에 모두 집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교수와 학생 창업을 활성화하려면 기업 경영과 재무·법무 등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내부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도 했다. 미국 스탠퍼드대·UC버 클리 같은 대학에는 교수, 학생들이 창업할 때 학내 펀드에서 투자하거나 변호사·마케팅 전문가 등을 연결해주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또 실리콘밸리 일대의 액셀러레이터(창업 지원 기업)나 벤처캐피털(VC)과의 연계도 활발하다. 윤 교수는 "사업과 경영을 아는 사람을 대학이나 정부에서 매칭해줘서 연구실의 기술이 사업으로 연결될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2016.09.23 호봉제 임금체계의 문제점과 ‘성과연봉제’ 도입의 필요성
▲성과연봉제를 저지하기 위한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이 23일 오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총파업 대회를 열고 있다. /뉴시스
금융노조의 ‘성과연봉제’ 반대 투쟁은 잘못이다
금융노조가 ‘성과연봉제’를 막겠다며 9월 23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금융노조는 이날 오전 9시부터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총파업 집회를 열었다. 2014년 9월 관치금융 철폐를 내걸고 파업에 참여한 지 2년 만이다.
노조는 본래 ‘경쟁’을 혐오한다. 노조원들이 평등하게 살아가려면 임금 격차는 독소다. 따라서 노조는 경쟁을 유발하는 ‘성과연봉제’를 결단코 반대한다. 사회주의가 ‘프로’를 배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과연봉제’가 노조의 거부만으로 도입이 좌절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동안 노동계는 ‘호봉제’를 금과옥조로 받들어 왔다. 무한경쟁시대에 금융노조의 ‘성과연봉제’ 반대 투쟁은 잘못이다.
금융 관련 한 공기업 수장(首長)을 지낸 분의 얘기다. 그는 수장으로 3년을 일하는 동안 연구원을 한 명밖에 뽑지 못했다며 한명을 더 뽑지 못한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이유는 호봉제 때문이었다. 성과 내지 않고 가만있어도 호봉에 맞춰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는 호봉제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신규채용이란 그림의 떡이라는 것이다.
연공급 임금체계는 일본에서 도입한 것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호봉제를 도입했다. 일본 노사관계의 3대 특징은 ‘종신고용제도, 호봉제, 기업별노조’로 표현된다. 일본은 1904∼5년간 러일전쟁을 치른 후 기계산업 발전으로 전문인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었다. 정부와 대기업이 나서서 직업훈련학교를 세워 인력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종신고용제도가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신고용제도가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근로자들에게 어떤 인센티브가 주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1920년대에 들어와 기업들은 호봉제를 도입했다. 호봉제는 노동력이 부족하던 시기에 종신고용제도가 뿌리 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가만있어도 호봉에 맞춰 임금이 해마다 자동으로 오르는데 근로자가 구태여 다른 회사로 옮길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호봉제를 우리는 그대로 베껴다가 써왔다.
한국의 임금체계는 기본급이 57.3%로 낮아
100인 이상 기업의 경우 한국의 임금체계는 ‘정액급여(73.7%), 초과급여(8.7%), 특별급여(17.6%)’ 세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정액급여를 구성하는 기본급 비중이 전체 임금 가운데 57.3%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기본급이 낮고 보니, 여러 가지 수당이 ‘걸레처럼’ 붙을 수밖에 없다. 그 원인은 산업화시대에 박정희 정부의 임금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보면, 거의 모든 연도에서 ‘정부예산과 임금 상승률은 10% 규제’로 명시되어 있었다. 산업화시대에 정부는 정부 예산처럼 기업 임금도 상승률을 규제하여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했는데, 그 목적은 인플레이션 예방에 있었다. 임금 상승이 억제되니 고도성장기에 기업들은 ‘각종 수당’으로 근로자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임금체계는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나라의 임금체계의 문제점을 정리한다.
첫째, 일의 가치와 생산성 반영이 미흡하다.
둘째, 일자리 창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생산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호봉제는 호봉에 맞춰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게 되므로 ‘고령자 조기 퇴직, 신규 채용 감소, 고용 외부화’ 등을 유발하여 일자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셋째, 금년부터 시행되는 ‘60세 정년 의무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넷째, 근로자 간 임금격차를 확대한다. 연공에 따른 우리나라 생산직 근로자의 임금격차를 보면, 30년 이상 근속 근로자의 임금이 초임에 비해 3.3배나 높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섯째, 낮은 기본급 비중에다 성과를 반영하지 못하는 호봉제는 근로시간에 따른 보상체계와 연계되어 장시간 근로를 유도한다. 한국은 연간 근로시간이 약 2,000시간으로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박병원 경총 회장, ‘성과연봉제’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다
호봉제의 문제점은 진즉부터 지적되어 대안으로 ‘연봉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상당수 기업들이 현재 실시하고 있는 연봉제는 대부분 무늬만 연봉제일 뿐이다.
박병원 경총 회장은 2016년 초 하루가 멀다고 임금체계 개편을 주장했다. 그는 ‘공정하고 유연한 노동시장을 구축하려면 능력과 성과에 기초한 임금체계를 도입해야 한다’며 그렇게 하면 ‘해고의 필요성이 거의 없어지고 정년도 사실상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박 회장은 ‘성과연봉제’가 전면 도입되면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필요조차 없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금융노조는 이에 맞서서 총파업 집회를 열었다.
임금체계는 어떤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하는가?
지금은 폐기되고 만 상태지만 박근혜 정부는 노동개혁 차원에서 임금체계 개편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고용노동부가 매뉴얼을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현행 호봉제 개편 방향을 정리한다.
첫째, 기본급 중심으로 임금 구성항목을 단순화하고, 기본급 비중을 높여야 한다.
둘째, 기본급에서 연공성을 줄이고, 기업 성과나 근로자의 능력을 반영해야 한다.
셋째, 상여금은 성과와 연동되어야 한다.
호봉제 개편은 네 가지 효과가 있다.
첫째, 신규채용이 는다.
한국은 생산직의 경우 30년 근속 근로자의 연봉이 초임보다 3.3배나 높다. 이는 30년 근속 근로자 1명 임금으로 신규 근로자 3명을 채용하고도 남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임금이 호봉제 대신 생산성이 반영된 직능급으로 바뀐다면 더 많은 신규채용이 가능하게 된다.
둘째, 청년실업 해소에 기여한다.
앞에서 밝힌 대로 30년 근속 근로자 1명 임금으로 초임 근로자 3.3명을 채용할 수 있으니 사용자는 경력이 짧아 임금이 적은 청년 근로자를 선호할 것이다. 따라서 청년실업 해소에 기여한다.
셋째, 비정규직 해소에 기여한다.
노조는 호봉제를 고수하면서 고용보장을 주장하기 때문에 신규채용이 일어나지 않아 비정규직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넷째, 정년 연장에 기여한다.
호봉제가 개편되고, 임금피크제 도입이 일반화된다면 정년 연장은 쉬워진다.
글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2016.10.17 [길 잃은 한국 경제] 전문가 20人 "한국, 5大위기 증후군"
①조선·철강·유화, 中에 밀려… 전자·자동차도 브랜드 훼손
②상장 기업 30% 좀비 기업,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갚아
③가계도 부실… 빚 1200조원대
④귀족 노조 등 기득권층 저항
⑤문제 해결 리더십 안보여
"대한민국에 늘어나는 것은 아파트뿐이다. 아파트만 짓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한국 경제의 현주소에 대해 전문가들이 내린 진단의 공통분모는 "이대로 가면 망한다"는 불안감이었다. 심층 인터뷰에 응한 20명의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기득권 틀에 갇혀 움쭉달싹 못 하고 있다(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 재정복지정책연구부장)" "노령화·저성장으로 망해가는 중이다(전성인 홍익대 교수)" "기업 기술 부족이 만병의 근원이다(김정식 연세대 교수)" "이대로는 제조업에 희망이 없다(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고 했다. 이들의 진단을 압축하면 현재 한국 경제는 5개 범주에서 위기 징후를 보이고 있다.
①경쟁력 잃어가는 주력 산업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견인차인 5대 주력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조선과 철강·석유화학은 중국의 공세에 밀리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남은 전자·자동차 분야도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다. 한국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현대자동차도 흔들리는 상황이다. 현대차는 5대 자동차 메이커 대열에서 탈락했고, 삼성전자는 '갤럭시노트7' 불량 사태로 7조원대의 손실을 볼 처지다. 눈앞의 손실을 넘어 브랜드 훼손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반면 주력 산업의 공백을 메울 차세대 산업은 지지부진하다. 미래 성장 산업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 분야는 한미약품 사태에서 보듯 아직 탄탄한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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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좀비 기업 급증
국내 상장 기업 가운데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다 못 갚는 좀비 기업(한계 기업) 비율이 30%가 넘는다. 기업 정보 제공 업체인 NICE 평가 정보에 따르면 좀비 기업 수가 6년 새 46% 늘었다. 한계 기업에 대한 퇴출, 합병 등 과감한 수술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생긴 일이다. 정부 보증과 은행 빚으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들이 급증하면서 혁신 기업이라는 새 살이 돋아나지 못하고 있다.
③기업에 이어 가계마저 부실
20년 전 외환 위기는 기업의 위기였다. 30대 재벌 중 16개가 문을 닫았지만 가계 부문은 튼튼했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금 모으기 운동' 등 가계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경제는 기업과 가계 모두 부실 덩어리다. 특히 가계는 1200조원대의 빚더미에 짓눌려 있다. 미국 금리 인상, 주택 가격 급락 등 돌발 변수가 우리 경제를 덮치면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완충 지대가 없는 셈이다.
④기득권층의 개혁 저항
한국 경제의 위기 징후들은 20년 전과 달리 내부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중장년층-청년 간 사회 전 영역에서 갈등의 불씨들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선진국들도 우리처럼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지만, 우리와는 달리 존경받는 집단이 있다"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솔선수범)가 없으면 우리는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대기업 '귀족 노조'의 이기심은 노사 개혁의 최대 걸림돌이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1987년 노조 설립 이래 4년을 빼고 매년 파업을 벌였다. 한국 수출의 8%를 차지하는 자동차산업은 파업 여파로 수출량이 1년 전에 비해 반 토막 났다.
⑤문제 해결 리더십의 부재
부실기업 급증, 청년 실업자 급증, 가계 부채 증가, 부동산 시장 과열, 연금제도 개편 등 경제 문제와 경제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 전 분야의 당면 과제들이 누적되고 있지만, 문제 해결의 리더십이 안 보인다. "정부는 어디 있는가"라는 국민의 질문에 청와대와 정부·국회 어느 곳에서도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는 국회를 탓하고, 국회는 대통령을 공격한다. 관료들도 청와대 눈치만 보며 보신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이진석 기자 정한국 기자
2016년 05월 11일 세상에 이런 구조조정은 없다
박학용 / 논설위원
전쟁 통에는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적군은 총을 쏴대고 폭격까지 하며 아군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기세다. 그런데 아군은 응사할 생각은 않고 전비(戰費) 조달과 전사자 보상 궁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장기전 또는 단기전으로 갈지, 전면전 또는 국지전으로 갈지 아직 판단하기 힘든 상황인데 말이다. 육군과 공군 주력 부대는 서로 먼저 진격하라며 티격태격한다. 야전 총사령관 실체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대로 가면 필패다. 작금의 기업 구조조정이 그 꼴이다.
구조조정은 전쟁이다. 속전속결이 승전 비결이다. 어느 나라든 그 수순이 ‘선(先) 구조조정-후(後) 2차 파고(波高) 대응’인 이유다. 그래야 후유증도 줄고 재발도 없다. ‘한국판’ 구조조정은 본말이 완전히 전도됐다.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느니, 실업 대책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느니, 부실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느니 등으로 갑론을박하다 날이 샌다. 죽었다 깨어나도 구조조정이 성사될 리 없다. 오죽하면 한 경제학자는 “세상에 이런 구조조정은 처음 봤다”고 했을까.
왜 구조조정은 전광석화처럼 해야 할까. 이에 답을 주는 일화가 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2011년 1월 부실 저축은행 정리에 전격 착수했다. 취임 직후 작심한 지 2주일 만이다. ‘작전계획’이 외부에 알려지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판단에 청와대에 사전 보고도 하지 않았다. 영업정지 의결을 위한 금융위 소집 30분 전에 청와대에 전화로 “오늘부터 저축은행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알렸을 뿐이다. 이후 저축은행 총자산 100조 원 중 46조 원을 단번에 정리했다. 시장이 출렁대자 비난의 화살이 날아올까 겁에 질린 정치권도 재원 마련을 위한 관련법 개정에 호응했다.
그의 말은 지금 복기해도 심장(深長)하다. “관(官)이 아무 때나 치(治)하면 천박한 관치다. 시장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만 치한다. 그리고 일단 관이 나섰으면 확실한 해결사가 돼야 함은 물론이다.”
구조조정 책임의 종착역은 국민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정부다. 기업과 채권단, 정치권은 그다음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전문가들은 세계 경제가 기나긴 침체기로 들어선다고 입을 모았다. 근인(根因)이 부채였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잦아지자 미국 등 선진국 정부는 집 안에 틀어박혀 지붕도 단단히 묶고 창틀도 교체하고 몸도 만들었다. 반면 우리는 여기저기 기웃대다 집 안은 엉망이 됐고 건강도 많이 상했다. 급기야 조선·해운·건설·철강·석유화학 업종 기업들이 줄줄이 수술실로 실려 갔다. 대우조선해양은 인공호흡기를 낀 채 연명(延命)치료 중이다. 근 20년간 6조5000억 원의 국민 혈세가 투입됐는데도 회복은커녕 병세만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영업 손실만 5조5000억 원, 부채 비율도 7300%에 달한다. 갑갑하고 울화가 치밀 뿐이다.
4·13 총선 때 불쑥 나온 ‘한국형 양적완화’는 꼬인 구조조정 스텝을 더 뒤틀어놨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말대로라면 이 정책은 특정 목적으로 특정 부문에 지원하는 정책금융 정도의 ‘가본 길’이다. 마냥 돈을 풀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미국·일본식 양적완화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대단한 통화정책인 양 작명이 포장돼 구조조정에 발을 안 담그려는 한국은행에 핑곗거리만 되고 있다. 일부 학자와 정치권은 물론 대통령마저 이 용어를 혼동해 사용한다. 그러니 실체 없는 논쟁만 난무하고 오해로 인한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선거용 양적완화 용어는 폐기돼야 한다.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구조조정 주도권도 잃었다. 정치권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밤 놔라 배 놔라 한다. 부실기업에 부실 산업까지 손대야 하는 만큼 그 셈법도 복잡다기해졌다. 채권단의 상시 구조조정과 금융위원장 주도로 해결할 단계는 한참 지났다.
이제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전쟁의 최선두(最先頭)에 서야 한다. 구조조정협의체도 직접 주재해야 한다. 매 순간 비장한 각오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대통령도 부총리에게 절대적인 힘을 실어줘야 한다. 장관들도 손에 피 안 묻히려 하지 말고 온몸을 내던져야 한다. 한은도 숨어만 있지 말고 후방에서 지원 사격에 적극 나서야 한다. 여야정도 합심(合心)해야 한다. 전쟁은 터졌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문화일보
2016년 09월 12일 高임금에 갇힌 국산車
김회평 논설위원
현대자동차 임금협상이 추석 전 타결에 실패하자 노조는 “길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이미 16차례 파업카드를 빼들면서 8만3600대 생산 제동을 건 노조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는 투로 들린다. 임금 5만8000원 인상, 성과급 및 격려금 350%+330만 원, 전통시장 상품권 20만 원, 주식 10주 지급을 내용으로 한 노사 잠정합의안은 조합원 78% 반대로 퇴짜를 맞았다. 한 사람당 돌아가는 몫이 1800만 원 정도라는데 그것도 성에 안 찬다는 것이다. ‘귀족노조의 탐욕’을 비난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지만, 박유기 노조위원장은 “조합원의 기대와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는 지적을 새기겠다”고 했다. 노조 안팎의 시각차는 이렇듯 극단적이다.
다소 오해의 소지는 있다. 현대차의 지난해 평균 연봉은 9600만 원이다. 올해 잠정안이 거기에 1800만 원을 덧붙이는 것은 아니다. 현대차 임금구조는 기본급, 시간외수당, 성과급(일시급·주식 포함), 상여금이 대략 4분의 1씩 차지한다. 변동급이 고정급보다 월등히 높은 기형적 형태다. 매년 노사협상은 기본급보다도 성과급·격려금 크기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여왔다. 조합원은 올해 몫이 예전 같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구조에선 해마다 협상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고, 현대차노조는 최강의 전투력을 앞세워 고율의 임금 인상을 쟁취해왔다.
그러나 현대차 고임금체제는 취약한 구석이 많다. 변동성이 큰 임금구조에선 갑작스러운 경기침체 등 외부 변수에 좌우되기 쉽다. 더 근본적으로는 고임금이 생산성이나 숙련도와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국내 공장에서는 차 한 대 만드는 데 26.8시간 걸리지만, 미국 앨라배마 공장은 더 낮은 임금에도 14.7시간 만에 만들어낸다. 노조는 숙련에 따른 보상 차별화가 내부분열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기피해왔고, 회사도 숙련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고임금과 낮은 생산성·숙련도 간 괴리는 현대차 근로자에겐 잠재적 고용불안 요인이다.
현대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 GM의 고위 임원이 “높은 인건비와 소모적 노사관계가 한국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경고한 것이 벌써 1년여 전이다. 한국GM은 지난해 1조 원 가까운 당기순손실을 냈지만, 올해도 노조 파업으로 말리부 등 인기 신차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5개 완성차의 2014년 평균 임금은 9234만 원으로 일본 토요타(8351만 원)나 독일 폭스바겐(9062만 원)을 앞질러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면 국산차 평균 수출단가는 1만5000달러로 일본(2만3000달러)과 독일(2만7000달러)에 크게 못 미친다. 이래서야 경쟁이 될 리 없다.
‘메이드 인 코리아’ 자동차의 쇠락은 이미 시작됐다. 지난해 국내에서 생산된 자동차는 455만 대로 4년 사이에 2.2% 줄었다. 그 기간 중국은 33%, 미국 39.9%, 일본이 10.5%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홀로 거꾸로 가고 있다. 수출 역시 4년째 뒷걸음질이다. 2000년 이후 국내에선 새로 자동차 조립공장을 짓겠다는 소식이 없었다. 대신 나라 밖으로 향했다. 지난 8일 연 40만 대 규모의 기아차 멕시코 공장이 준공하면서 세계 5위 현대·기아차의 생산능력은 연 848만 대로 늘었다. 이 중 60%인 510만 대가 국외 물량이다. 완성차가 나가면 차 부품업체도 동행한다. 양질의 일자리도 따라나선다. 기아차가 멕시코 공장을 세우면서 직접 고용 3000명을 포함해 1만5000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부러운 고용 기회를 눈뜨고 잃고 있는 셈이다.
생산시설의 글로벌화 전략엔 여러 고려 요소가 있겠지만, 임금과 노조리스크, 생산성 변수를 무시할 순 없다. 각국 정부는 일자리를 유치하려고 파격적인 조건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기업이 위험을 감수하고 한국에 투자하려 하겠는가. 강성 대기업 노조와 짝을 이룬 고임금 체제는 중소기업·비정규직 근로자에게 비용을 전가해 양극화를 키우는 한편, 예비 일자리마저 외국으로 쫓아내고 있다. 이제 현대차노조가 싸워야 하는 상대는 회사가 아니라 외국 공장의 근로자들이다. 생산 주도권이 국외로 넘어가고 있는 마당에 저생산성·고임금으로 마냥 버틸 순 없다. 글로벌 경쟁사에선 적대적 노사관계가 사라진 지 오래다. 파업에 기대는 방식은 시대착오다. 급변하는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길게 보고 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문화일보
2016년 10월 04일 성과制 반대, 시대착오적 선동이다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직무성과 연봉제 도입에 대해 해고연봉제, 성과퇴출제라는 자가당착의 구호를 내세워 반대하는 파업투쟁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맡거나 더 많은 성과를 올린 사람이 좀 더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옳지 않으냐는 것이 어째서 해고나 퇴출로 이어지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으니 선동에 불과하다.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총액에는 변함이 없게 하겠다고 정부와 기업들이 누누이 확인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임금총액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리는 근로자는 당연히 임금을 더 받게 될 것이고, 따라서 연봉제에 반대(反對)하는 것은 이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제 몫을 계속 주지 않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기여에 비해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당장은 노조가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연봉제를 적용하는 기업으로, 특히 연봉제를 당연시하는 외국 기업으로 전직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우리는 최근 노골화하고 있는 중국의 ‘인재 욕심’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다. 성실하고 유능한 인력이 빠져나가는 직장과 나라의 장래가 어떨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나이를 더 먹었다는 이유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심지어는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지는데도 임금이 올라가는 호봉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대원칙에도 어긋나는, 근로자들 상호 간에 공정하지 못한 제도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30%의 기업이 호봉제를 완전히 버리고 연봉제를 채택했으며, 나머지 70%도 상위직부터 연봉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국회가 ‘고령자고용촉진법’에 제19조의 2를 신설해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경영자와 근로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결국, 연봉제 도입에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헛수고가 될 것이다.
필자가 노조 지도자라면, 근거도 없는 구호를 앞세워 근로자들을 파업으로 내몰아 소득 기회를 상실하게 하고 기업의 경영을 위태롭게 해서 임금 지불 능력을 떨어뜨리는 일에 역량을 낭비하기보다 연봉제에 내재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보완책(補完策)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하겠다.
첫째, 호봉제 하의 근로자는 젊었을 때 임금은 좀 낮은 감이 있지만(초임 자체가 지나치게 높은 직종, 기업이 있기는 하다) 해가 가면서 임금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고, 즉 자신이 성실히 평생 근무하면 기대할 수 있는 임금총액을 바라보고 일해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연봉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총(總)기대소득이 너무 크게 훼손돼선 안 된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다.
둘째, 직무의 난이도와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무직의 경우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성과평가가 어렵다. 개인 입장에서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맡을 능력도 있고 더 높은 성과를 올리고 싶었는데 일을 맡겨 주지 않았다고 항변할 여지도 있다. 생산직의 경우 오늘날 대부분 공장이 생산 라인의 속도에 의해 생산량이 결정되기 때문에 성과의 차이라는 게 없다. 이 경우 성과의 차이가 없다고 하면 되지 성과연봉제 도입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영업직·판매직의 경우 성과평가가 비교적 쉽다고 해도 같은 고객을 놓고 다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성과평가의 객관성 확보는 노사(勞使)가 같이 노력해야만 가능하고, 평가의 신뢰도 향상에 따라서 연봉에 반영하는 정도, 속도를 조절하면 될 일이므로 연봉제 도입 자체를 반대하며 허송세월해선 안 된다.
셋째, 평가제도를 오·남용할 우려가 없도록 노조와 당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도 확보해야 한다. 이미 연봉제를 시행하고 있는 경우를 보면 모든 직원의 평가를 최고경영자가 직접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중간관리자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는데, 중간관리자가 오·남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성과연봉제는 경영자가 부담하는 임금의 총액이 그대로라면 노사 간에 이해가 대립하는 쟁점이 아니다. 정부나 경영자를 상대로 투쟁할 일도 아니다. 임금총액을 나누는 방법으로 호봉제와 연봉제 중 어느 것이 근로자들에게 더 공정한가 하는 문제이므로 그들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노조가 저성과자의 편만 들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화일보
◆ 고질병 노조
2016.10.03 '착취와 쟁취'… 1980년대식 투쟁 매달리는 귀족勞組
현대차·철도노조 長期파업 왜]
- '회사·정부는 죽일놈' 인식
현대차 평균 47세, 철도 45세… 국내 전체 근로자 평균 임금인
3619만원보다 2~3배 받으면서 청년실업·비정규직 고통 외면
- 노조 지도부의 '내부 정치'
회사나 정부 입장 받아들이면 어용노조 비판 받아
자리 보전하려 강경투쟁 일관
올해 임금협상을 놓고 7월 19일부터 24차례 파업을 벌인 현대자동차 노조는 4일 울산공장 노조 사무실에서 중앙대책위를 열고 이번 주 파업 일정을 논의한다. 지난 27일부터 성과연봉제 철회를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한 철도노조는 같은 날 지역본부 조합원들까지 모이는 상경 투쟁을 예고했다. 함께 연대 파업을 벌였던 다른 노조들과 달리 여전히 '강경 투쟁'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낡은 프레임에 갇힌 강성 노조
현대차노조는 올해뿐 아니라 최근 5년간 해마다 파업을 하면서 임금을 높였고, 철도노조도 2013년 23일 파업으로 수서역 KTX 자회사 설립을 반대하는 등 '실력 행사'를 자주 해왔다. 두 노조는 민주노총 산하의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에서 가장 조합원 수가 많은 곳이다. 현대차노조의 조합원은 4만9000명, 철도노조는 1만8000명에 달하고, 노조 조직률도 70%대에 이른다. 연봉도 근로자 평균 임금(3619만원)의 2~3배를 받는다.
▲일손 놓고… 화물열차, 평소의 30% 운행 - 올해 노동계의 ‘추투(秋鬪)’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든 가운데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의 대표 격인 현대자동차노조와 철도노조는 임금 인상과 성과연봉제 철회 등을 이유로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위 사진은 지난 30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 앞에서 노조가 파업 집회를 하는 모습. 아래 사진은 철도노조 파업으로 인해 화물열차 운행률이 평시 대비 30%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는 2일 의왕ICD(내륙컨테이너기지)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 /연합뉴스·김지호 기자
'고(高)임금 귀족 노조'라는 비판에도 두 노조의 파업이 계속되는 건 지도부와 조합원들이 착취와 쟁취라는 낡은 노동운동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대차노조와 철도노조 조합원의 평균연령은 47세와 45세로 1980~1990년대의 노동운동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라면서 "노조 파업 집회에서 노조원들은 아직까지 '정부와 회사는 죽일 놈' 식의 일방적인 구호를 외치고 있다"고 말했다. 철도노조는 성과연봉제, 현대차노조는 임금피크제와 임금 인상 억제 등 정부가 중점 추진하고 있는 노동정책에 맞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성과연봉제와 임금피크제, 임금 인상 억제 등과 관련해선 노동계 일부에서도 "능력 위주 임금 체계 도입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격차 해소 등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2014년 조세재정연구원에서 공공기관 근로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직무의 동기부여와 성과를 향상시키는 데 가장 적절한 임금 체계로 성과연봉제(45.4%)를 꼽았다.
◇내부 조직 논리도 파업 장기화의 원인
노동 전문가들은 현대차노조와 철도노조만 끝까지 남아 버티는 건 지도부가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현대차노조의 경우 지난 8월 노사가 내놓은 1차 임단협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됐다. 임금 인상률 등이 전년에 비해 낮다는 점 등이 원인이었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만약 앞으로 나올 2차 합의안도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된다면 관례상 박유기 현 위원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것"이라며 "위원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파업 등 강한 수단을 통해 회사 측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철도노조의 경우 최근 지도부가 사측이 요구한 복지 삭감, 자동 근속 승진제도 폐지, 임금피크제 도입 등을 받아들이면서 '어용 노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훈 현 위원장 등 주요 간부들이 내년 1~2월 노조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사측과 극한 대립을 불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전직 코레일 간부는 "노조는 성과연봉제 등이 도입될 경우 조합원들이 노조 지부장보다는 소속 부서장의 눈치를 보게 되고, 적극적으로 노조 활동을 하는 사람은 근무 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게 되 면서 노조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규창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기업 노조가 워낙 기득권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노동운동 위기를 돌파할 비전과 철학을 갖지 못한 채 낡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며 "청년 실업을 고민하고, 비정규직 등 다양한 고용 형태 근로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노조 중심으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0.03 현대車노조가 날린 일자리
현대차 정말 좋은 회사네. 내 자식은 꼭 현대차에 들어갔으면 좋겠어."
지난 7월부터 임금 협상 문제로 파업을 벌이던 현대자동차노조가 9일간의 여름휴가를 끝내고 복귀한 뒤 다시 파업을 이어간다는 기사를 본 동료 기자가 한 말이다. "파업하다가 휴가 가고, 갔다 와서 또 파업하는 것도 신기한데, 저러고도 회사가 굴러가는 게 더 신기하네."
현대차노조는 사상 최대 규모의 생산 차질 피해를 주며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0일 현재 24번째 파업을 벌여 생산 차질 규모가 2조78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회사 측은 조용하다. 오히려 이런 것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 분위기다. 소비자들이 현대차 파업을 '차 값 인상'이나 '품질 저하'로 받아들이며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차 파업을 알리는 기사에는 '저러고 은근슬쩍 차 값 올리겠지' '다시는 현대차 안 산다'는 댓글이 많이 달린다.
해외 공장 건설은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가 선택한 자구책 중 하나다. 현대차는 지난 20년 동안 해외에 11개의 공장을 지었다. 여기서 4만6000여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반면 국내에서는 1996년 아산 공장을 지은 이후 공장 신·증설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현대차 입장에선 '강성 노조의 파업' '고임금 저생산성' 같은 문제로 골치 아플 수 있는 여지를 원천 봉쇄하는 선택이다. 이 때문에 올 들어 8월까지 국내 자동차 생산량이 사상 처음으로 해외에 역전당했다. 자동차 산업은 전체 제조업 생산액의 12.7%(189조원·2014년 기준)를 차지하고 고용 인원만 176만6000명에 달할 정도로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하지만 생산 공장의 해외 이전 추세가 지금처럼 이어지면 취업난은 더욱 가중되고 피해는 구직에 나선 청년들과 미래 세대가 볼 것이다. 훗날 자식을 현대차에 입사시키려면 이민을 떠나는 것이 유리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울산의 한 지역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현대차노조가 전면파업을 벌였던 지난 26일 월요일임에도 울산 지역 인근의 골프장 예약이 꽉 차는 등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기사를 보고 최근 한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가 생각났다. 그는 현대차 파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군가가 덕을 보면 누군가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본사 노동자가 띵까띵까 할 때 비정규직, 하도급 업체 직원들은 저임금으로 쥐어짜야 회사가 굴러갈 수 있다. 나 같은 하도급업체 직원의 눈물로 본사 직원들은 인생을 즐기고 있다.'
현대차는 평균 급여 9600만원(2015년 기준)인 고수익의 안정된 일자리다. 현대차 울산 공장 사내 주차장엔 그랜저·제네시스 등 서민들은 타기 어려운 대형차가 즐비하다. 좋은 차 굴리며 평일 골프 치는 호사의 이면에 취업 기회를 빼앗긴 미래 세대의 한숨과 고혈(膏血)을 쥐어짜인 하도급 공장 직원들의 눈물이 있다.
10.14 대처 탄생 91주년에...'내부의 적' 귀족노조와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유투브 화면 캪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나, 누구나 존경했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Margaret Hilda Thatcher). 대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도덕적 보수주의’라는 원칙으로 집권 당시 영국이 봉착해 있던 경제적 위기를 타파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오염된 국민성도 위대했던 영국의 그것에 맞게 고쳐 놓았다.
왜 대처인가?
1980년대 영국이 갖고 있던 수많은 문제들을 현재 대한민국이 그대로 갖고 있다. 비대한 행정부,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각종 규제들, 기업과 시장에 대한 국민들의 막연한 혐오감, 복지가 경제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믿음,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적 이념색이 보이지 않는 보수당, 그리고 강성 아니 악성(惡性) 노조(勞組). 다행인 점은 대처 집권 직전의 영국 노조보다는 한국 노조들이 아직은 국민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고, 불행인 점은 우리나라가 대처 같은 정치인이 살아남을 수 없는 정치문화라는 것이다.
대처 탄신 91주년을 맞아, 대처가 대한민국에 줄 수 있는 수많은 메시지 중 노조 개혁에 주목해보고 싶다. 영국병은 영국사회에서 실질적 왕처럼 군림하던 노조문제를 일컬었던 것이고, 대처는 그 노조를 개혁하는 것이야말로 영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시발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노조가 국민의 삶을 어떻게 망쳐 놓는가?
‘가을은 책 읽기 좋은 계절’ 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었다. ‘한국의 가을은 파업하기 좋은 계절' 혹은 '집회하기 좋은 계절’ 이다. 15일째 이어지고 있는 코레일 철도 노조의 파업에 ‘더불어’ 지난 10일 화물연대의 파업이 시작됐다.
두 노조들이 국민경제와 시민들의 삶을 파탄 내면서까지 노동쟁의를 벌이는 명목은 '성과 연봉제 폐지'(코레일 노조)와 '소형 화물차 화물업계 진입 반대'(화물 노조) 이다. 한마디로 기득권 밥그릇 챙기기다.
철도 노조의 파업으로 경부선 총 35대 열차의 운행이 중단됐고 이로 인해 약 3만4300여명의 승객이 열차를 타지 못하게 됐다. 1호선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그야말로 발이 묶인 채 일상 속에서 피해를 보고 있다. 코레일은 급하게 기간제 인력 1000여명을 채용했다. 그러나 미숙련공이 열차를 운행하다 조작 미숙으로 사망한 4호선 사건이 불과 작년이었다.
민주노총 산하 귀족 노조인 이들은 기간제 노동자의 목숨까지 인질로 삼고 있는 셈이다. 방만한 기업운영으로 타국가 대비 경쟁력이 떨어지는 코레일. ‘유인’ 요소를 도입해 성과를 올리겠다는 정부의 지극히 민주주의적 발상에 대해 그 무슨 대단한 억압이라도 받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화물연대의 파업은 국민 생활 뿐 아니라 거시경제에까지 피해를 끼칠 우려가 있으므로 보다 큰 문제다. 육로 수송로가 비상에 걸리면 수출입에 막대한 피해가 오게 되고 국제 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수출입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다. 한진해운 사태로 해운 수송에 비상이 걸린 마당에 육로 수송로를 틀어쥐고 국가 경제를 주무르려하고 있다. 대의도 명분도 없다.
이처럼 대처 집권 직전 영국의 막강한 노조들과 여러모로 닮아 있는 한국의 노조들이다. 우리나라의 노조는 더 이상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비정규직 근로자를 차별하고, 자식에게 일자리를 대물림 해주며, 국민 생활을 볼모 삼아 본인들의 밥그릇(그것도 황금 밥그릇)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애사심도 애국심도 없는 기득권 계층일 뿐이다.
보다 더 우려스러운 부분은 반미좌파, 즉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민주노총 임원들로 위치해 있으면서 파업과 연달아 일어나는 집회들을 전두지휘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들이 이끄는 집회 현장의 구호에 노동자는 없다. 대한민국을 죽도록 미워하는 분노 세력들만 존재할 뿐이다. 대처가 영국 광부 노조들을 ‘상징적으로’ 내부의 적이라 불렀던 것과 다르게, 한국의 강성 노조 중 핵심 세력 일부는 종북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실질적인’ 내부의 적이다.
노동시장 개혁 실패 이유는 노사정협의체에 대한 이상(理想) 때문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비정상의 정상화를 시대정신으로 국가 경쟁력을 키우고 나아가 통일 체력을 쌓을 4대 개혁(금융개혁, 공공개혁, 교육개혁, 노동개혁)을 실시해 왔다. 4.13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이후 개혁 동력이 많이 상실되긴 했지만 이번정부의 국정 목표 중 하나는 여전히 노동개혁이다. 물론 정부가 주장하는 노동시장개혁안에 노조 개혁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고용 시장의 유연화 정도가 목표이다.
이를 위해 노사정협의체(노동계, 기업계, 정부의 협의기구)가 탄생했고 노사정협의체 안에서 노동시장 개혁 내용을 조율해왔다. 그러나 협의 기간의 절반 이상 노동계는 참여하지 않았다. 작년 12월, 기구 자체가 결렬되기 직전 한국노총의 복귀로 합의한 노동개혁 5대 법안에는 노동계의 복지를 강화하는 내용이 4개였다. 결국에는 나머지 하나마저 불용한다며 노사정위의 주체인 한노총 김동만 위원장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협의를 번복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이상 노조가 국민의 삶과 국가 경제를 가지고 장난질 치게 놔둘 수는 없다. 정부는 당장 작년에 협의된 내용보다 강도 높은 내용의 노동시장개혁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노조의 힘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고용법 개정안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노사정 협의체에 대한 이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50프로를 넘겼을 때에도 노사정위는 한 일이 없다. 오히려 노사정위의 존재 때문에 노동시장개혁안이 노동시장 복지 법안으로 탈바꿈해 19대 국회로 넘겨졌었다.
영국의 노조가 제왕적 힘을 발휘하던 시절, 그래서 보수당이 노조와 타협하는 것이 관례이던 시절에 대처는 보수당 내 온건세력을 ‘무른 사람들(Wets)’ 이라 부르며 맹공 했다. 그리고 나라를 좀먹는 ‘내부의 적’과 타협은 없다는 원칙으로 영국병이라 일컬어지는 노조를 개혁했다. 그 결과 방만한 공기업들이 대거 민영화 되었고 기업 경쟁력이 올라가자 수출이 다시 활성화 됐다. 노조들도 더 이상 국민들을 볼모삼지 않았고 파업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게 됐다.
대처 총리는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가족을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 도덕철학으로 영국 사회를 개혁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은 하나의 정치철학이 되어 있다. 대처 탄신 91주년을 맞아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 앞에서 대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우리 모두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라며.
"진짜 중요한 일은 타협하지 않는다."
글 | 여명 자유경제원 연구원
10.24 진화하지 않는 현대차勞組
월마트와 노동조합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집단의 힘으로 더 좋은 거래를 성사하는 조직'이란 점에서 같다고 본다. 월마트는 수많은 점포를 통해 개별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한데 모아 공급자로부터 더 싸게 물건을 확보함으로써 매출과 수익을 올린다. 노동조합도 개별 노동자를 모아서 사측을 상대로 높은 임금을 요구(거래)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이치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노조의 위기를 다시 한번 거론하고 싶어서이다. 지난 14일 현대차노조는 가까스로 내년 임금 협상에 합의했다. 협상 과정에서 올해도 예외 없이 파업 카드가 등장했고, 그로 인한 손실은 3조1000억원, 1차 협력사를 포함하면 4조원을 훌쩍 넘겼다. 그래도 이번엔 사측이 노조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래, 파업으로 4조원 날리는 것보다는 몇 백억원을 노조에 더 주고 말자"고 했을 것이다. 이번엔 달랐다. 우리나라 노사 문화를 망친 주역이란 소리까지 나올 만큼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던 현대차가 왜 갑자기 바뀌었을까.
▲17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 아반떼룸에서 올해 임금협상 조인식이 열렸다. 윤갑한 사장(오른쪽)과 박유기 노조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산업의 패러다임이 달라진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안정적인 대량생산과 과점(寡占) 시스템이 붕괴한 것이다. 그동안 현대차와 같은 과점 기업들은 막강한 수익을 내고 있었기에 노조의 무리한 임금 인상을 자체적으로 흡수하거나 또는 노조의 이익을 들어주고 대신 가격을 올리는 방식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기술력은 비슷해지고, 가격 경쟁은 무한대로 확장된' 무시무시한 정글이 돼 버렸다. 이런 경쟁 격화는 필연적으로 기존 체제를 붕괴시킬 것이다. 이미 현대차는 중국에서 비싸다는 이유로 판매가 급감하고, 한국에서도 비싼 차란 비판에 판매량 감소를 겪고 있다. 더 큰 변화는 소비자의 인식이다. 소비자들은 푸짐한 임금 상승이 반영된 거품 낀 가격에 더는 현대차를 사지 않겠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다시 월마트로 돌아가 보자. 월마트 경쟁력이 전 같지 않다. 월마트의 대량 구매 경쟁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월마트가 지금 방식대로는 아무리 제조업체들을 닦달해도 가격을 낮추는 데 한계가 있다. 새로운 강자는 아마존과 알리바바다. 아마존, 알리바바는 아예 유통 단계를 없애고 직거래를 하니 경쟁력이 더 높다. 닦달해도 얻을 게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그게 바로 위기다. 현대차 노조가 위기라는 것도 이와 유사한 조건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누울 곳을 보고 발을 뻗으라고 했다. 자동차 만드는 경쟁력이 적어도 국 내에선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분석은 엄포도, 엄살도 아니다. 현대차 직원의 임금이 도요타, 폴크스바겐보다 높지 않은가. 지금 경제 민주화 등의 목소리는 자본주의가 또 한 번의 진화를 해야 한다는 요구다. 진화는 사측만 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근로 조건 향상을 위한 노조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노조도 상황에 맞게 진화하지 않으면 그 순기능마저 사라질 수 있다.
2017년 05월 01일 귀족노조 實相 적나라하게 보여준 기아車·현대車 노조
‘귀족노조’로 불리는 소수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 행태가 도를 넘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올해 단체교섭에서 순이익 30% 성과급 지급, 호봉 승급분 포함 기본급 18만2883원 인상, 상여금 750→800% 조정 등을 요구했다. 지난해 실적·급여 기준으로 1인당 연 3000만 원이 넘는 금액이다. 지금도 억대 연봉에 근접한 부자 근로자들이 중소기업 정규직 초봉(평균 2523만 원)보다 많은 돈을 더 달라니 과욕이다. 노조가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며 ‘총고용보장합의서’ 체결을 요구한 것은 ‘철밥통’도 계속 지키겠다는 의도다. 현대차는 지난해 18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올 들어서도 사드 여파 등으로 영업이익이 하락 추세다. 제 주머니 채우기에만 몰두하는 귀족노조의 전형이다.
기아자동차 노조 행태는 더 고약하다. 지난주 조합원 투표를 거쳐 비정규직을 조직에서 배제했다. 기아차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동일 노조를 꾸리면서 노동계 안팎의 호평을 받았지만, 이젠 비정규직 껴안기 흉내조차 팽개친 것이다. 대표적인 강성노조들의 상급 조직인 금속노조마저 “전국 노동자들에게 절망감을 안겨드리게 돼 책임감을 갖고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노동조합의 대의(大義)인 ‘연대’는 팽개친 채 제 이익만을 좇는 귀족노조 실상(實相)이다.
1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지난해 국내 임금 체불 근로자와 체불 임금은 각각 10.1%, 10% 늘었다. 최장 11일 황금연휴도 노동 약자일수록 언감생심이다. 90% 대다수 근로자 처지는 절벽인데, 대기업 정규직은 임금·고용 등에서 다 누리면서 더 달라고 큰소리친다. 비정규직 및 근로자 양극화 문제가 이젠 노·사 문제에 앞서 노·노 문제임을 새삼 보여준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한 국가적 과제인 노동개혁에 대해 제대로 접근하는 대선 후보가 없으니 대선 뒤 경제가 더 걱정이다.
문화일보 사설
◆ 대학생이 생각하는 국내 주요 대기업 이미지
/2016.04.19 기준
2017.04.26 국내 500대 기업 평균 연봉 7400만원…가장 높은 연봉 받는 곳은?
/CEO스코어
국내 500대 기업의 직원 평균 연봉이 지난해 보다 2% 늘어난 7400만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곳은 1억1990만원을 받는 석유화학업체 여천NCC였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는 500대 기업 중 지난해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334개 기업의 직원 평균 연봉을 조사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26일 밝혔다.
조사 결과, 평균 연봉이 1억원 이상인 기업은 모두 12곳으로 석유화학업체가 1~4위를 차지했다. 1위 여천NCC를 이어 한화토탈이 1억1500만원으로 2위에 올랐다. 3위는 GS칼텍스(1억1310만원), 4위는 대한유화(1억1200만원)였다. 이 밖에도 6위 에쓰오일(1억1080만원)과 11위 SK이노베이션(1억100만원)까지 총 6개 석유화학업체가 억대 연봉 기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석유화학업체 외에 억대 연봉을 받는 기업은 재보험회사 코리안리(1억1100만원), 신한금융지주(1억1000만원), 삼성전자(1억700만원), SK텔레콤(1억200만원), 교보증권(1억120만원), NH투자증권(1억100만원) 등 6곳이다.
이밖에 상위 20위 권에는 메리츠종금증권(9940만원), 신한금융투자(9900만원), 롯데케미칼(9800만원), SK하이닉스(9620만원), 신한카드(9600만원), 기아자동차(9600만원), 삼성카드(9500만원), 현대자동차(9400만원) 등이 포함됐다.
전년 대비 인상률이 가장 높은 기업은 36.8%를 기록한 자동차부품 제조업체 대유에이텍으로 나타났으며, SK이노베이션(32.9%), 동원산업(27.3%), KH바텍(26.7%), 현대해상(24.3%), 폴라리스쉬핑(23.4%), 롯데케미칼(22.5%), 동두천드림파워(22.2%) 순이다.
업종별로는 증권업종이 8920만원으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유통업종이 3740만원으로 가장 적은 연봉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안상현 기자
2015-08-11 한국의 장수 브랜드 - 동아일보
<1>동화약품 ‘까스활명수’
독립운동 도운 118년 ‘국민 소화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가 뭘까. 이 질문의 답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96년 한국기네스가 인증한 국내 최고(最古) 브랜드인 활명수다. 액상 소화제인 활명수는 출시 이후 118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품의 이름과 상표(부채표) 등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활명수가 출시 이후 한 세기 넘게 국민의 사랑을 받는 원동력을 들여다봤다.
○ 19세기 제품이 지금도…장수 브랜드 ‘5관왕’
활명수는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 궁중 선전관이던 민병호 선생이 개발했다. 선전관은 임금을 곁에서 보필하는 무관 직책이지만, 민 선생은 평소 의약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궁중 전의에게서 전해들은 비방(秘方)과 양약의 장점을 결합해 한국의 첫 소화제인 활명수를 만들어 냈다.
지금은 소화불량이 큰 병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급체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빨리 먹고 많이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 때문이다. 침술과 탕약 외에는 병을 고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던 당시 활명수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활명수는 118년 동안 국민 소화제로 자리를 굳히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계속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제품 특성을 바꿔가면서 장수 브랜드 자리를 굳힌 것이다. 1960년대 탄산음료가 국내에 도입된 이후에는 탄산 특유의 청량감을 원하는 소비자가 늘었다. 그래서 1967년 발매된 제품이 까스활명수다. 소비자들이 보존제로 처리한 의약품에 불안을 느끼자 2011년부터 모든 활명수 라인업에 ‘100% 무(無)보존제 생산’을 선언했다.
출시 초기 온 국민이 바랐던 소화제 시장을 개척하고, 국민 요구에 부응해 제품을 바꿔간 결과는 한국 최장수 브랜드라는 칭호다. 활명수는 국내 최초의 등록상품(활명수)이자 국내 최초의 등록상표(부채표)이기도 하다. 여기에 활명수와 함께 1897년 설립된 동화약품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업체와 제약회사, 국내 최장수 상장(上場) 기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896년 설립된 박승직 상회(두산그룹 전신)는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인정받지만 제조기업은 아니다.
○ 활명수 판매로 독립자금 지원까지
동화약품은 ‘제약 외길’을 걷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한국 기업들이 1970, 80년대 여러 분야로 신규 진출할 때도 제약업이라는 한 우물만 팠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에서는 다른 어떤 기업보다 진취적인 면모를 보였다. 활명수 판매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 게재된 광고에 따르면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이었다. 이는 설렁탕 두 그릇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고가였다. 이렇게 번 돈의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갔다.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 연락책으로 삼은 ‘서울연통부’는 서울 중구 서소문로 동화약품 본사에 설치됐다. 책임자는 민강 동화약품 사장이었다. 민 사장은 독립운동 때문에 두 차례 옥고를 치르다 결국 48세에 숨을 거뒀다. 동화약품은 민 사장 외에 5대 사장인 윤창식 선생과 윤광열 명예회장 등 3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활명수의 장수 비결을 연구한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화제 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좋은 제품명으로 초기 선점한 것이 활명수의 가장 큰 장수 원인”이라며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세로 회사를 운영한 경영진의 자세도 제품의 장수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박재명 기자
117살, 국내 최장수 상품 브랜드 ‘활명수’ 이야기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그해 9월 서울 순화동에서 기념비적인 약품이 하나 탄생했다. 활명수(活命水),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약이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는 이후 117년간 단 한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화제로서의 입지를 굳혀왔다.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활명수들. 지난 117년간 부채표 상표와 이름 등 본질은 지키면서 시대의 변화에 맞게 제품명과 라벨 디자인을 일부 바꿨다
활명수가 탄생할 무렵의 조선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인 을미사변(1895년)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1896년)을 겪는 등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한편 1885년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이 설립되는 등 의료 분야에서도 근대화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활명수는 궁중의 선전관(지금의 대통령 경호실 간부에 해당하는 무관) 출신의 민병호씨가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창업하고, 궁중의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액제(液劑) 소화제다. 당시 조선에는 소화기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달여 먹는 탕약에만 의존했다. 이때 전통 한약재에 수입 약재를 배합한 활명수는 먹기 편하고 효과가 빨리 나타나 출시되자마자 신비의 명약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민씨는 활명수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이 다니던 정동교회 신도 등에게 나눠주면서 입소문을 확산시키고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고 한다.
기네스북이 인정한 등록상표·등록상품 1호
활명수가 본격적으로 체계와 규모를 갖춰 생산, 판매된 것은 1910년의 일. 그 해 동화약방은 활명수의 상징이기도 한 부채표와 활명수를 상표 등록했다. 이로써 부채표는 국내 등록상표 1호에, 활명수는 국내 등록상품 1위에 등재됐다. 1966년 한국 기네스북협회는 동화약품을 국내 최고(最古)의 제조회사이자 최고(最古)의 제약회사로, 부채표는 최초의 등록상표, 활명수는 최초의 등록상품으로 공식 인증하기도 했다.
발매 초창기 활명수는 상당한 고가였다. 1910년 활명수 1병의 값은 40전이었다. 1870년부터 1933년까지 64년간 일기를 작성한 농부 ‘심원권의 일기’에 따르면 1910년 전후의 쌀 1되는 약 10전이었으므로 당시 활명수 1병은 쌀 4되와 맞먹는 가격이었다. 이를 요즘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2만원으로 놀랄만한 고가다. 활명수 1병의 현 소비자가는 700원 내외다.
활명수는 의약품의 근대화를 넘어서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한 족적이 뚜렷하다. 아버지 민병호씨에게서 동화약방 경영을 맡은 민강 초대사장은 제약회사 경영 못잖게 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하다가 1919년에 투옥되기도 했다. 석방 후에도 민강 사장은 서울 연통부를 순화동 동화약방 본사에 설치하고 활명수 판매 수익금의 상당액을 독립자금으로 제공했다. 서울 연통부는 김구 선생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국외 비밀 연락을 위해 설치한 비밀 행정기관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내의 각종 정보와 독립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동화약방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각각 우승, 3위를 달성하자 조선일보(1936년 8월11일자 4면)에 다음과 같은 축하 광고를 큼지막하게 게재하기도 했다.
▲반도남아의 의기충전 손기정, 남승룡 양 선수 우승 축하
건강한 체력, 견인불발하는 내구력의 근원은 오직 건전한 위장에서 배태된다. 건강한 조선을 목표하고 다 같이 위장을 건전케 하기 위해 활명수를 복용합시다
탄산 첨가한 ‘까스명수’ 등장으로 1위 자리 내줄 뻔
117년 동안 몇 차례의 위기도 있었다. 독립운동에 관여해 옥고를 치른 민강 사장이 1936년 48세의 나이에 타계하자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랄까. 동방약방을 인수한 윤창식 사장은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고 사규를 제정하는 등 경영의 근대화를 단행한 끝에 회사를 크게 신장시켰다.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동화는 동화식구의 것이니, 또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는 윤 사장의 경영철학은 지금도 동화약품의 경영이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윤 사장은 당시 조선 땅에 일제의 총동원령이 내려지는 등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1937년 만주국에 ‘부채표 활명수’를 특허 출원하며 국외로 진출했다. 이로써 활명수는 국외에 상표를 등록한 국내 제품 1호라는 이름도 추가했다.
활명수는 한때 소화제 1위 자리를 위협받기도 했다. 1965년 회사명을 동화약품공업(주)로 변경하고 사세를 더욱 활발히 확장하던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같은해 삼성제약이 탄산가스를 주입해 청량감을 높여 야심차게 내놓은 액제 소화제 ‘까스명수’가 턱밑까지 추격해온 것이다. 활명회생수, 활명액, 생명수 등 60여종의 유사 제품의 도전에도 활명수의 아성은 굳건했지만 이번은 달랐다. 당시 콜라, 사이다 등 탄산음료가 인기였고 탄산가스를 넣은 까스명수는 탄산가스의 발포성 때문에 효과가 빠르다는 느낌도 줬다. 동화약품은 고심 끝에 탄산가스를 넣은 제품을 출시하는 맞불 작전을 폈다. 작전은 적중해서 이듬해 출시한 탄산가스 첨가 소화제인 ‘까스활명수’ 덕분에 까스명수에 빼앗긴 시장을 다시 탈환할 수 있었다. 까스활명수는 1991년에 빠르다(Quick)는 의미의 담은 큐(Q)를 추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액제 소화제로 더욱 승승장구한다.
활명수 누적 생산량 80억병, 이으면 지구와 달 1.5회 왕복
활명수가 국내 액제 소화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동화약품은 정확한 매출액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회사가 대략적으로 추산한 활명수 제품군(활명수, 까스활명수-큐, 까스 활 3종)의 2012년 매출액은 약 460억원이다. 이는 국내 액제 소화제 시장 점유율은 70%를 상회하는 수치로 나머지 시장을 까스명수(삼성제약), 속청(종근당), 위청수(조선무약) 등이 나눠가지고 있다. 활명수의 연간 생산량은 약 1억 병. 동화약품에 따르면 2013년 말까지 약 85억 병의 활명수가 생산되었는데 길이 12cm의 활명수 병을 일렬로 이으면 지구와 달을 1회 반 왕복할 수 있는 엄청난 량이다.
117년간 단 한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은 국내 최장수 브랜드. 이 영광스런 이름은, 브랜드의 본질을 지키는 가운데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한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활명수에 들어있는 11가지 주요 생약 성분은 초창기와 달라진 것이 없다. 유사 제품과 차별화하기 위해 고유 상표인 ‘부채표 캠페인’을 꾸준히 벌여 ‘활명수=부채표=오리지널 소화제’라는 등식을 만들었다. 부채표 캠페인은 1990년대 중반에 집중적으로 진행됐지만 1960년대 제작된 두 편의 TV광고(동영상 참조)에서도 등장한다. 각각 에니메이션과 외국인 모델을 등장시켜 재미있게 연출한 TV광고는 “유사품에 속지 마십시오. 위장약의 원조 부채표 활명수”를 강조한다.
‘100년 전통의 소화제’는 오늘의 활명수를 만든 1등 공신이지만 이것이 활명수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혁신적인 신제품의 도전에 힘없이 주저앉는 ‘올드 보이’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터다. 현재까지 활명수는 이러한 도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듯하다. 활명수는 낡은 이미지를 상쇄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웰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반영해서, 제품의 변질을 막기 위해 기준치 이하로 첨가해오던 보존제마저 사용하지 않는다. TV광고 등 젊은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다양한 시도도 하고 있다. 요즘 방영 중인 삼각 김밥과 햄버거를 등장시킨 재미있는 TV광고도 젊은층을 붙잡기 위한 노력 중 하나다.
▲2013년 10월 유명 예술가들이 디자인한 활명수 한정판 패키지를 출시했다. ‘생명을 살리는 물 캠페인’의 일환으로 판매 수익금은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2013년 10월엔 팝아티스트 홍경택, 사진조각가 권오상, 크리에이터 박서원씨가 디자인에 참여한 세련된 한정판 패키지를 출시하기도 했다. 유니세프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생명을 살리는 물 캠페인’의 하나로, 판매 수익금은 식수와 물 정화시설이 부족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117년, 118년… 활명수의 카운트다운이 궁금하다.
글 | 김공필 행복플러스 편집장 사진 | 동화약품 제공
<2>유한양행 ‘안티푸라민’
3세대 근육통 달래준 82년 가정상비약
▲녹색 철제 케이스에 들어 있는 연고 형태의 안티푸라민 초기 제품(왼쪽). 세월이 흐르면서 안티푸라민 연고는 로션 및 스프레이 형태 등으로 변화를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유한양행 제공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욱신욱신할 때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바로 이것이 생각난다. 특유의 코를 찌르는 멘톨 향과 살결에 닿았을 때 확 퍼지는 시원함, 집안일로 어깨가 아프신 어머니에게, 고된 하루 일로 허리가 쓰라린 아버지에게 발라드렸던 가정상비약. 바로 한국인들의 근육통 완화를 책임지고 있는 유한양행의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다.
○ 한국의 대표적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은 올해로 출시 82주년을 맞았다. 국내 기업들의 평균 수명이 30년, 브랜드 수명은 15년에밖에 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여든을 이미 넘긴 안티푸라민의 역사는 1933년부터 시작됐다. 유한양행을 창립한 고 유일한 박사가 의사 출신의 중국인 부인 호미리 여사의 도움을 받아 그해 처음으로 자체 개발한 약품이 안티푸라민이었던 것.
1926년 유한양행이 설립될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약품은 외국에서 수입해 판매되고 있었다. 이때 유한양행은 국내 제조의 자체 상품 1호로 안티푸라민을 출시한 것이다.
안티푸라민이란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안티푸라민이란 제품명을 처음 제안한 인물에 대한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제품명이 담고 있는 뜻은 지금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반대’라는 뜻의 영어 접두사 안티(anti)에 ‘불태우다, 염증을 일으키다’는 뜻의 영어 단어 인플레임(inflame)을 합쳐 발음하기 좋게 바꾼 것. 즉 ‘항염증제’ ‘진통소염제’라는 뜻이다.
안티푸라민의 주성분은 멘톨, 캄파, 살리실산메틸 등이다. 안티푸라민을 몸에 바른 후 우리의 후각과 촉각이 진동하는 이유가 바로 이 성분들 때문이다. 이 성분들은 소염진통 작용, 혈관확장 작용, 가려움증 개선 작용 등을 한다. 근육통 말고도 벌레 물린 곳에 안티푸라민을 발라도 진정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일반 소비자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셀린 성분까지 함유돼 있어 보습효과도 함께 얻을 수 있다.
○ 안티푸라민의 변화는 현재진행형
안티푸라민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녹색 철제 캔에 그려진 간호사의 모습이다. 이 간호사는 안티푸라민의 디자인이 몇 차례 변경되는 동안에도 안티푸라민의 상징처럼 케이스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 간호사도 처음부터 그려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1961년 케이스 디자인을 변경하면서 간호사를 안티푸라민 케이스에 그려 넣은 것. 간호사는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의 막내 여동생인 고 유순한 여사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있다. 유 여사는 한국 최초로 국제적십자사에서 주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을 받기도 했다. 간호사 그림이 들어가면서 안티푸라민은 가정상비약으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강화됐다.
올해로 82세를 맞은 안티푸라민의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우리가 약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로션 형태의 안티푸라민은 1999년에 출시됐다.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안티푸라민 연고는 사용과 보관의 편리성을 위해 플라스틱 용기에 트위스트캡 형태로 들어 있다. 또 100mL짜리 용기에는 지압봉을 부착해 환부에 안티푸라민을 바르면서 마사지도 함께할 수 있게 했다. 2010년에는 안티푸라민의 파프 제품 5종과 스프레이 타입의 안티푸라민 쿨 에어파스까지 나왔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소비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올 하반기에는 동전 모양의 안티푸라민 코인, 잘라 쓸 수 있는 롤파스까지 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연상 기자 baek@donga.com
<3>롯데 ‘칠성사이다’
▲칠성사이다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캔의 디자인을 바꿔 왔다. 위쪽 사진의 왼쪽 2개 캔은 1980년대 초 디자인이고 3번째는 1984년에 바뀐 디자인이다. 1984년 디자인은 16년 정도 지속되다가 2000년에 현재 우리가 마트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4번째)으로 바뀌었다. 흑백 사진은 1971년보다 매끈한 병 모양으로 바뀐 뒤 신문에 나온 광고다. 롯데칠성음료 제공
40, 50대 독자들이라면 학창 시절 소풍날 아침 이것을 가방에 넣어주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한 번쯤 미소 지었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이것 하나에 김밥, 찐 계란만 있으면 그날 점심시간이 든든했다. 이것은 바로 대한민국 넘버원 청량음료인 ‘칠성사이다’이다.
광복 전 평양 강생회(현 홍익회)의 대표이자 빵과 사이다 등을 팔았던 최금덕 씨는 광복이 되자 함께 일했던 장계량 씨와 모피를 가지고 1947년 남쪽 땅을 밟았다. 이들은 일본에서 청량음료학을 공부하고 광복 전까지 평양의 유명한 음료 제조업체였던 금강사이다의 공장장으로 재직했던 박운석 씨를 만난다. 최 씨와 박 씨는 함께 공장을 차리고 청량음료를 팔기로 합의했고, 1948년 경기 수원시 매산동에 터를 마련한 후 금강청량음료공업사를 설립했지만 실패를 맛본다.
세 사람은 다시 공장을 세우기 위해 정선명 주동익 김명근 우상대 등 4명을 새 사업 파트너로 합류시킨다. 이들 7명이 주주가 돼 1949년 12월 15일 오늘날 롯데칠성음료의 전신인 동방청량음료합명회사를 설립한다. 칠성사이다의 전설은 1950년 5월 9일 롯데칠성음료의 전신인 동방청량음료에서 칠성사이다를 출시하면서 시작됐다. 당초 칠성사이다의 제품명은 주주로 참여한 7명의 성이 모두 다른 점에 착안해 ‘칠성(七姓)’이 거론됐지만 회사의 영원한 번영을 다짐하는 의지로 북두칠성과 관련지어 ‘칠성(七星)’으로 결정됐고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지난해 전체 사이다 시장에서 칠성사이다는 약 80%에 이르는 점유율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했다. 매출액으로 따지면 약 3600억 원에 달한다. 코카콜라의 스프라이트, 펩시코의 세븐업 등 세계적으로 많이 팔리는 사이다들이 끊임없이 한국 시장에 진출했지만 칠성사이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올해로 65세를 맞은 칠성사이다는 국내에서 ‘사이다는 칠성사이다’란 인식이 있을 정도로 브랜드 신뢰도가 높다. 브랜드 파워뿐만 아니라 제품의 질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롯데칠성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롯데칠성 관계자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날 때마다 적절하고도 신속한 대응책을 수립하고 추진한 것이 칠성사이다를 한국을 대표하는 장수제품으로 만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백연상 기자 baek@donga.com
<4>오리온 ‘초코파이’
▲40년 이어진 장수 제품답게 오리온 초코파이의 포장은 계속 바뀌어 왔다. 파란색 외관에 제품의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1974년 출시 당시 모습(위쪽 사진)과 1979년 ‘초코파이’ 이름을 강조하는 새로운 포장(가운데 사진). 아래쪽은 ‘정(情)’을 부각시켜 현재 판매 중인 초코파이 외관. 오리온 제공
1973년 미국 조지아 주에 출장을 간 김용찬 오리온 전 과자개발팀장과 팀원들은 우연히 한 호텔 카페에서 초콜릿을 입힌 과자를 먹게 됐다. 그 맛에 반해 무릎을 친 그는 국내에 돌아와 여러 차례 실험을 했다.
1974년 4월. 국내에서 무게 35g, 지름 7cm, 높이 2.3cm의 작은 파이가 출시됐다. 동그라면서도 도톰한 파이는 초콜릿 용액에 퐁당 빠졌다 나온 것처럼 달달한 초콜릿이 둘러싸고 있었다. 오리온 초코파이였다.
41년이 지난 지금 오리온 초코파이에 정(情)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군대를 다녀 온 남자들은 초코파이에 대한 진한 추억을 갖고 있다. 현재까지 팔린 누적 판매량은 무려 183억 개(2014년 기준). 초코파이를 일렬로 세웠을 때 지구를 32바퀴 도는 길이와 같다.
초코파이가 이처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고유한 맛을 유지하면서도 품질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초코파이는 수분 함유량이 높은 마시멜로와 비스킷, 초콜릿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하지만 41년 전 개발 당시의 맛과 현재의 맛은 다르다. 오리온 관계자는 “소비자들의 변화하는 입맛에 맞추기 위해 미묘하게 맛을 계속 바꿔왔다”고 설명했다.
초코파이가 출시된 이후 경쟁사들이 유사한 제품을 끊임없이 내놓았지만 초코파이 재료들의 특수한 배합 및 제조 비법은 타사의 제품들이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초코파이에는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제품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이 적용돼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초코파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등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해외에서는 제품을 현지화하고 품질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알렸다. 중국에서 오리온 초코파이 ‘하오리유(好麗友·‘좋은 친구’라는 뜻)는 중국 초코파이 관련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장점유율이 85%를 넘어섰으며 지난해 16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오리온은 현지화를 위해 중국인들이 중시하는 덕목인 ‘인(仁)’ 자를 한국의 ‘정(情)’ 대신 초코파이 포장지에 넣기도 했다. 베트남에서도 초코파이는 누적 매출 1조22억 원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베트남 파이 시장에서 38%의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오리온 관계자는 “끊임없는 연구개발은 성공 아닌 생존 전략”이라며 “이러한 노력 끝에 초코파이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사랑받는 장수 제품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2016-05-30 근대 서점 120주년을 앞두고
‘회동서관(匯東書館)은 1897년 고유상이 설립하여 일제 때까지 존속했던 출판사 겸 서점이다. 서적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용품도 취급했다. 또 출판도 병행하여 초창기에는 신소설을, 나중에는 사전과 실용서 특히 산업 발달에 필요한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서울 청계천 광교 앞 신한은행 건물(옛 조흥은행 본점) 화단에 있는 표석의 내용이다.
보충하자면 1897년 고제홍이 고제홍서사(高濟弘書肆)를 설립했고 그의 아들 고유상이 1907년 가업을 이어받으며 이름을 회동서관으로 바꾸었다. ‘문화는 인지(人智)에서, 인지는 학문에서, 학문은 문자에서, 문자는 서책에서’라는 모토를 앞세웠던 회동서관은 근대 출판역사에서도 중요하다. 이해조의 번역서 ‘화성돈전’(워싱턴전·1908년), 이광수의 ‘무정’(1922년 3판, 1925년 6판),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년) 등을 출간했다.
목사이자 신학자 최병헌이 아펜젤러의 뒷받침으로 1894년부터 종로에서 운영한 대동서시(大東書市)는 사설 도서관이자 기독교 서점이었다. 이정용이 1912년에 설립한 불교서관(佛敎書館)은 불교 서적과 용품, 서화를 취급했다. 최초의 근대적 고서점으로는 1932년에 간송 전형필이 인수한 것으로도 유명한 관훈동 한남서림(翰南書林)을 들 수 있다.
1900년경 한남서림을 시작한 백두용이 말한다. “당시 서점이라고 하면 몇 군데도 되지 아니합니다. 중앙서림, 대동서시, 신구서림, 광학서포, 회동서관 그리고 내가 하는 한남서림 등이었으며 한남서림만이 헌책만을 팔았습니다.”(매일신보 1930년 5월 1일)
‘몇 군데도 되지 아니하게’ 출발한 우리 서점은 1996년 5378개로 정점을 기록한 후 20년간 계속 줄어 최근에는 2116개이다.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인천 옹진군, 경북 영양군 울릉군 청송군 봉화군, 전남 신안군 등에는 서점이 하나도 없으며 단 한 곳뿐인 ‘서점 멸종 예정 지역’이 43곳이다.(‘2016 한국서점편람’)
내년이면 고제홍서사(회동서관) 설립 120년을 맞는다. 이를 근대 서점 120주년으로 기념하여 2017년을 ‘서점의 해’로 삼는 것은 어떨까. 마침 1993년에 ‘책의 해’를 선포한 전례가 있다. 또 무슨 식상한 ‘∼의 해’냐 할지도 모르지만, 특별한 해를 선포하고 나서야 할 만큼 많은 서점이 백척간두에 서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