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13/ 재벌가 인사이드
홍성추 프리미엄조선 객원기자(재벌평론가) 조선일보
2015.08.24
(1) 재벌 3세들이 몰려온다-①②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성사는 재계에 많은 시사점을 줬다. 오너 마음대로 인수 합병이 안된다는 사실과 주주들의 힘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삼성 그룹의 3세인 ‘이재용 시대’가 비로소 열렸다는 사실도 중요한 포인트다. 이재용 시대의 개막은 재벌 3세 총수들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삼성 그룹 외에도 3세 시대 개막이 임박한 곳은 현대차 그룹, 효성 그룹, 대림 그룹, 동아제약 그룹 등 해방 직후 사업을 시작한 비교적 오래된 기업들이다.
2세 총수들이 건재한 기업들 역시 ‘후계자’ 수업을 시키며 경영권 이양에 대비하고 있다. 한화 한진 금호 그룹이 이에 속한다. LG그룹이나 CJ 그룹, 삼양사 그룹, 코오롱 그룹은 이미 3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3세 경영인들은 어떤 후계수업을 받았으며 그들은 과연 서바이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창업세대나 2세 총수와 달리 ‘도련님’으로만 자란 그들이 선대 회장이 이뤄놓은 가업을 잘 이끌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아무리 교육을 잘 받고 후계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해도 기업 경영은 이론만으로 안되기 때문이다.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조선일보DB
중국 청나라의 4대 황제인 강희제(姜熙帝)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으로 알려져 있다. 강희제 역시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자식 중 가장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점지하는 만주족 특유의 관습을 이어받아 유일한 적자이자 적장남인 윤잉(胤礽)을 세자로 책봉했으나 황제의 뜻과 다르게 진행됐다. 총명했던 그가 다른 길로 빠졌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당대 최고의 학자를 모셔다가 세자인 윤잉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세자는 황제의 뜻대로 처신하지 못했다. 결국 황제의 눈밖에 나 세자직을 박탈 당하고 만다. 왕자들끼리 치열한 싸움 끝에 4째 아들인 윤진(胤禛)이 실권을 잡는다. 이가 청 왕조를 굳건하게 만든 ‘옹정제(雍正帝)’다. 아무리 황제가 제왕학을 가르치며 대권을 물려주려고 해도 그릇이 안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웬만한 재벌 집안에선 일반인들의 상상 이상으로 자녀들에게 후계수업을 시키고 있다. 어려서부터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철저하게 진행한다. 학과만이 아니라 인성교육까지 최고의 ‘스승’을 붙여 교육을 시킨다. 왕정시대의 세자 수업 만큼이나 재벌 후계자 수업도 철저하고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3세나 4세 교육은 완전한 프로그램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재벌 후손들은 미국 명문대학에서 MBA을 받았다거나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거치는 등 최고의 ‘학벌’과 ‘경력’을 갖고 있다.
재벌 3세 치고 해외 유명 대학에 유학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들은 대부분 경기·경복초등학교, 예원학교, 외국어 고등학교, 유학으로 이어지는 수순을 밟았다. 국내 대학에 다니다 외국으로 유학해 학벌을 세탁한 경우도 많다. 국내 대학에 입학할 실력이 안돼 도피유학을 간 사례나 입학을 했으나 졸업을 못한 경우도 있다. 자녀들 중에 이러한 후계수업을 잘 이행하는 이도 있고, 더러는 일탈해 빈축을 사는 이들도 있다.
/2015년 6월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2015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한 이재용 부회장 /김연정 객원기자
삼성의 후계자인 이재용 부회장의 학벌과 경력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1968년생인 이 부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마치고 일본 게이오대학 경영대학에서 공부했다. 게이오대학에서 바로 미국 하버드대학으로 옮겨 MBA를 수료했다. 그 뒤 하버드대학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다녔다. 한국과 일본,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을 섬렵한 것이다.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를 맡으면서 경영 수업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5년째 부친인 이건희 회장 밑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이 내용만 보면 삼성 회장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또한 이 부회장은 다른 3세와 달리 튀는 행동으로 세인들의 눈총을 받은 적도 없다. 자기 관리도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②편에 계속>
다른 3세들도 이 부회장과 비슷한 전철을 밟으며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이 부회장과 동갑나기인 효성의 조현준 사장은 미국의 사립 명문인 세인트 폴 고등학교를 나와 예일대학에서 공부했다. 예일대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의 게이오대학에서 공부했다. 효성 경영에 합류 하기전 일본의 미쓰비시와 미국의 모건스탠리에서 경영수업을 거쳤다. 학력과 경력에서 결코 이 부회장에 밀리지 않는다. 최근 각종 소송으로 화제가 된 그의 동생 조현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를 마치고 하버드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국제 변호사다. 그 역시 형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효성 경영에 합류했다가 가족 간 갈등으로 효성을 떠났다.
현대차 그룹의 정의선 부회장은 이재용 부회장보다 2살 밑이다. 정 부회장은 휘문고등학교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MBA를 마쳤다. 다른 곳에서 경영수업 없이 바로 현대그룹에 합류 오늘에 이르렀다. 아직은 부친인 정몽구 회장이 건재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지만 외아들인 그가 현대차그룹의 총수가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대자동차 그룹 정의선 부회장/ 조선일보DB
한화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은 모두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명문대학을 졸업해 화제가 되고 있다. 장남인 김동관 상무는 조현준 사장처럼 미국의 세인트 폴 고등학교를 나와 하버드대학을 졸업했다. 동생인 동원씨 역시 미국의 명문 예일대학을 졸업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장남인 동관씨가 상무로 승진하며 본격적인 경영수업이 시작되었으며 차남도 그룹 디지털 팀장을 맡아 경영에 합류했다.
/한화 김동관 상무 /조선일보DB
이들 외에도 한진 그룹의 3세인 조양호 회장의 삼남매가 미국의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C)에서 공부했다. 지난번 ‘땅콩회항’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조현아 부사장과 장남인 조원태 부사장, 막내인 조현민 전무가 전부 동문인 셈이다.
OCI의 3세 경영인인 이우현 사장은 미국의 와튼 스쿨에서 MBA를 마쳤다. 이회림 창업주의 손자인 그는 한화 김동관 상무와 태양광 사업을 놓고 경쟁하는 위치에 있다. 둘 다 미국의 명문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고 같은 업종을 놓고 격돌하는 것이다.
/OCI 이우현 사장 /조선일보DB
재벌가 3세 여성 경영인들 역시 대부분 유학 경험을 갖고 있으나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외국 유학 경험이 없다. 연세대 아동복지학과를 졸업한 순수 한국 학벌을 갖고 있다. 반면 동생인 이서현 제일기획 사장은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공부하고 삼성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LG가의 구지은 아워홈 부사장은 보스턴 대학에서 MBA를 취득했다.
창업 회장들은 2세 교육에도 나름 원칙이 있었다. 아들들은 일본이나 미국 등으로 유학을 보냈지만 여식들은 국내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하거나 예체능계 학과에 보내 가정 생활에 충실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3세에 들어서는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여성들에게도 경영권을 개방, 자연스럽게 경영인으로 나서도록 하고 있다. 이미 삼성가(家)에서 시작했고, 현대가에서도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장녀인 지이씨가 오래전부터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여성들의 경영 참여를 엄격히 금했던 금호가에서도 최근 그 ‘불문율이 깨졌다. 그 주인공은 금호그룹 형제 전쟁의 장본인인 박찬구 회장의 외동딸 박주형 상무다. 박 상무는 7월 1일부터 금호석화 관리담당 상무로 선임돼 본격적으로 그룹 경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향후 그의 행보를 주시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회사 안팎에 나돌 정도다.
/현대그룹 정지이 전무(왼쪽)와 금호그룹 박주형 상무. /조선일보DB
아들이 없는 집안은 아예 딸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키며 경영 전반을 아우도록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서경배 회장이다. 슬하에 딸만 둘인 서 회장은 장녀인 민정씨를 일찍부터 경영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미국 코넬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해 현재 아모레에서 경영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다.
이처럼 3세 경영인들은 누구 못지않은 환경에서 자라 최고의 학부와 최고의 경력을 쌓아 할아버지가 일군 회사에서 ‘화려한 경영인’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화려함’만 있는 것인가.‘도련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3세들도 수없이 많다. (다음 회에 계속)
(2) 재벌가 3세들의 학벌 세탁
자살과 감옥행...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재벌 3세들
이른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재벌가 3세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맞춤형 과외와 해외 유학 등으로 경제적으론 풍족한 삶을 살았을지 모르나 일상은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도 있다. 조그마한 일탈로도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재벌 총수에서 하루 아침에 교도소 수감이라는 ‘나락’에 떨어진 사람도 있다.
최근 법정관리를 신청한 삼부토건은 한때 국내 건설업 면허 1호를 자랑하는 굴지의 건설회사였다. 그러나 창업 3대에 이르러 집안마저 풍비박산에 이르렀다. 조정구 창업주는 ‘성실시공’이라는 모토로 삼부토건을 건실한 기업으로 키웠다. 2세인 조남욱 회장은 경기고 서울법대를 나온 수재형 경영인이다. 한때 정계에 진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조 회장은 자식 교육에도 엄하기로 소문나 있다. 여느 재벌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얘기는 곧 법이었다. 3형제가 있지만 누구하나 아버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러한 철저한 교육이 어쩌면 자식들의 기를 꺾었는지 모른다.
/법정관리를 신청한 삼부토건. /조선닷컴
장남인 승연씨는 지난 1997년 30대 중반에 요절하고 말았다. 둘째인 시연씨는 횡령 등 혐의로 구속돼 현재 교도소에 살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기업마저 부실해 법정관리를 신청한 상태다. 조 회장 가족을 잘 알고 있다는 인사는 “조 회장이 너무 자식들을 엄하게 대해 기를 펴지 못했다”면서 “장남만 살아 있어도 기업의 부실은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남이 없는 상태에서 차남과 3남이 서로 불신하다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3세에 이르러 장남은 요절, 차남은 구속, 3남은 경영권 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동국제강의 장세주 회장은 현재 구속돼 있는 상태다. 회사돈을 횡령, 상습 도박을 벌이다 적발돼 구속된 것이다. 재벌 총수에서 하루 아침에 ‘파렴치범’으로 전락한 케이스다. 3세 경영인인 장 회장은 원래 연세대 체육학과에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 타우슨 주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해 동국제강 경영에 참여했다. 부친인 장상태 회장이 타개하면서 경영대권을 물려받아 ‘회장’으로 있었다. 장 회장은 미국 유학시절부터 도박을 일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함께 유학했던 한 인사의 전언에 따르면 툭하면 도박장에 가 지도교수가 이를 말리느라 엄청 고생했다고 했다. 지난 90년대에도 도박 혐의로 구속됐던 전과가 있다. 재벌 총수가 도박 증독증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손자인 이재찬씨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재찬씨의 부친은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이다. 부친인 이병철 회장의 눈밖에 나 한동안 야인생활을 하던 이창희 회장은 비디오테이프를 생산하는 ‘새한미디어’를 창업, 한때 세계 최대의 비디오테이프 공장을 영국에 건립하는 등 사업에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가 CD에 밀리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기업이 휘청일 때 암 진단을 받아 지난 1991년 세상과 등지고 말았다.
부인을 비롯한 유족들이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합섬을 분가받아 새한그룹으로 도약을 시도했으나 IMF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3남1녀 중 차남인 재찬씨는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0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인사는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놀림을 받았던 어렸을 때의 상처가 컸던 것 같다”면서 “결국 그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현실적응에 실패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 윤형씨도 미국 유학중인 2005년 요절한 케이스다. 국내 대학 재학시절 활발하게 SNS를 통해 의견을 표출했던 그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국내 최대의 재벌 총수의 딸의 요절은 그 뒤 많은 뒷말을 남겼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재벌가 3세들은 갖가지 기행으로 일반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땅콩회항’으로 유명세를 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각종 메스컴에서 조 부사장의 행태를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결국 조 부사장은 5개월 넘게 구치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재벌 3세로서 비판이라는 비판은 다 받아야 했다.
최근에는 동아제약 그룹의 3세 경영인인 강정석 사장이 경비실 직원의 노트북을 부쉈다고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재벌3세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나 할까. 재벌 3세들 중 유별난 친구들도 더러 있다. 모그룹의 3세 경영인은 뮤지컬이나 공연장에 갈 때 표를 3장 구입해 앞줄 2장은 자신 부부가 앉고 1장은 여자친구에게 줘 바로 뒷줄에서 관람하게 하는 ‘독특한’ 취미를 가졌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국내 굴지의 대그룹 창업주의 3세인 J씨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마약을 흡입 한 것으로 유명했다. 재벌가 자제들은 술집도 대부분 가는 곳만 간다. 때문에 동서나 처남을 같은 술집에서 만나 어색해 하는 일도 많다고 재벌가에 정통한 인사가 전했다.
/강정석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 /조선일보 DB
집에서 그렇게 맞춤형 교육을 시켜도 성적이 따라주지 않으면 교묘한 방법으로 학벌을 세탁하기도 한다. 체육이나 음악 특기로 대학에 입학해 일반 학과로 편입하는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재벌 3세중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는 K씨는 하프전공으로 음대에 들어갔다가 전과했다. K대 경영학과를 나왔다고 자랑하는 재벌가 자제들 중 체육 특기로 입학해 전과한 경우가 수두룩하다. 사격이나 승마, 요트, 카누 등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종목을 택해 입학한다. 최근 재벌 3세와 이혼해 화제가 된 S씨는 한양대 체육학과에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 페퍼다인 대학에서 MBA를 받았다. 그의 학력난에는 어디에도 한양대 다녔다는 기록이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집안끼리 경쟁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미국의 8개 유명사립 고등학교( 8 school association) 중 하나인 세인트 폴 고등학교는 입학이 까다롭기로 소문나 있다. 최근 성폭행 등으로 비난이 쏟아진 이 학교는 미국에서도 최상류층 자제들만 다니기로 이름난 학교다. 국내 재벌가 3세 중에는 효성그룹 3세인 조현준 사장과 한화그룹 3세인 김동관 상무가 졸업했다. 이 학교에 들어가려면 단순하게 돈만 있다고 해서 입학이 되지 않는다. 면접관의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나중에 말썽을 일으키면 학교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뜻에서다. 모 재벌 그룹 창업주가 3세를 이 학교에 입학시키려다 망신만 당한 적도 있다. 원하는 금액을 기부하겠다고 해도 학교측에서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재벌 3세들은 미국의 명문고등학교나 명문 대학 입학을 놓고 보이지 않은 경쟁을 하기도 한다.
재벌가 3세 중 한국에 들어오지 않고 외국에 눌러 앉는 경우도 최근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가부장적인 가풍이 싫어서 국내 정착을 꺼리는 것이다. 대림 그룹 이준용 명예회장의 차남인 이해승씨는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다. 한국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것보다 미국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이 더 좋다는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벌 3세는 “누구집 손자라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오히려 반감이 생겼다”면서 “유학중에는 절대로 가정사를 얘기하지 않았다”고 필자에게 털어 놓았다. 재벌 3세가 축복이라면 축복이지만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3) 재벌가 후계자 싸움에 자비는 없다 (1)(2)
재벌가의 후계원칙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장남 우선 원칙은 이미 몇몇 그룹에서 깨지기 시작했다. 계열사를 분할, 자녀들에게 맡겼던 분할 후계 역시 통합 후계로 바뀌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 회장의 두 아들이 ‘재산싸움’을 벌인 것도 이러한 후계 원칙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작년까지만해도 롯데그룹의 후계 구도는 일본 롯데는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한국 롯데는 차남인 신동빈 회장이 맡아서 분할 경영하는 것으로 인식돼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이러한 후계 구도에 변화가 나타났다. 일본 롯데를 경영하던 장남 신동주 부회장이 경영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신동주 부회장이 부친인 신격호 총괄회장과 이복 누나인 신영자 이사장 등을 업고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신동빈 회장의 반격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신 부회장은 일본에서의 배제는 물론 국내 롯데 계열사의 등기이사로 있던 직위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현재의 롯데 그룹은 명실상부한 차남 ‘신동빈 회장’ 체제로 만들어졌다. 차남이 장남을 밀어내고 ‘하나의 롯데,하나의 리더’라는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롯데그룹의 이번 후계자 다툼은 재계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장남에게 우선권을 주던 관행에 쐐기를 박음과 동시에 형제간 기업 분할 방식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일제 강점기 때 단돈 83엔을 들고 현해탄을 넘어 일본에서 껌을 팔아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국에 투자, 국내 재계 5위에 이르는 거대 기업군을 일궜다. 신 총괄회장은 경상도 특유의 보수적인 시각이 확고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장남을 제치고 차남에게 그룹 대권을 물려준 것은 자식보다 기업의 연속성을 더 염두에 둔 결과로 해석된다. 지난 연말 갑자기 장남을 일본 경영에서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차남을 후계자로 점지, 착실하게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조선일보 DB
일찍이 장남을 후계자에서 배제한 그룹은 여럿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장남과 차남을 아웃시키고 3남인 이건희 회장을 그룹 회장으로 만들었다. 장남과 차남이 이병철 회장의 눈밖에 난 것은 부친에 대한 항명과 경영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누구보다 냉철한 기업인으로 평가받았던 이병철 창업주는 철저하게 장·차남을 기업 경영에서 소외시켜 이건희 회장의 등극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했다. 결국 이 회장은 오늘의 삼성전자를 세계 초일류의 회사로 만드는데 성공, 3남으로의 경영권 이양이 적절했음을 보여준 사례가 되고 있다.
아모레 퍼시픽그룹의 서경배 회장 역시 차남 경영인이다. 창업주인 서성환 회장은 장남을 제치고 30대 초반의 서경배 회장을 사장으로 앉혀 경영수업을 시켰다. 현재 아모레 퍼시픽 그룹은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로 거듭났다. 서 회장은 주식 평가액 국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 부호가 됐다.
대웅제약도 3남인 윤재승 회장이 그룹 대권을 이어 받았다. 차남과의 경영권 경쟁에서 창업주인 윤영환 회장이 3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국내 제약 업계 1위인 동아제약 그룹 역시 4남인 강정석 사장이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 받았다. 강신호 회장은 차남인 강문석 사장을 모기업 경영에서 배제시키고 4남에게 경영대권을 이양하고 있다.
이들 기업 대부분은 처음에는 장남이나 사실상 장남이 경영대권 수업을 받았으나 나중에 부친이 경영권을 회수한 케이스에 속한다. 경영 능력이 모자라거나 부친의 기업 운영 방식에 반기를 들었다가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보면 된다. <②편에 계속>
두산-효성그룹의 후계자는 누가 될까?
<①편에서 계속>
그러나 최근의 후계 방식은 철저한 능력 중심으로 후계자를 선정하고 있다. 롯데 그룹이 그렇고 최근 후계자로 부상한 대성산업도 그렇다. 김영대 대성산업 회장의 장남인 김정한 사장이 최근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재계에선 후계구도가 3남인 김신한 사장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최근 재무구조 개선작업이 마무리 수순에 들어감에 따라 김 회장의 뒤를 이어 회사를 경영할 후계구도의 윤곽이 드러났다는 평가다.
대성산업은 김정한 사장이 최근 대성산업 사장직(기계사업부문)에서 사임했고 계열회사인 라파바이오 사장직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정한 사장의 이번 사임과 관련해 재계에서는 대성산업이 지난해부터 추진해 왔던 재무구조 개선작업이 마무리 수순에 들어감에 따라 후계구도를 조기에 가시화하려는 시도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대성산업 안팎에서는 김 회장의 아들 3명 가운데 3남인 김신한 사장이 후계 승계 구도에서 한발 앞서 있다는 분석이 계속 제기돼 왔다. 김신한 사장은 2013년 초 장남인 김정한 사장보다 먼저 등기임원으로 선임된 후 대성산업의 건설·유통사업부문을 맡아 자산매각과 재무구조 개선작업을 주도해 왔다. 김신한 사장은 지난해 11월 대성산업 등기임원에서 물러난 후 현재는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대성산업가스 사장을 맡고 있다.
/김신한 대성산업 사장(왼쪽부터),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 윤재승 대웅제약 회장. /조선일보 DB
두산 그룹 역시 후계 구도에 변화의 바람이 감지되고 있다. 두산은 현 박용만 회장에 이르기까지 형제가 번갈아 가면서 ‘회장직’을 맡는 독특한 구조로 경영권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지난 2005년 형제의 난으로 홍역을 치르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산그룹은 창업 2세인 고 박두병 창업주가 현재 그룹의 모태를 일군 이후 3세대부터 이례적인 형제 경영을 시작했다. 박두병 창업주의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1981년부터 1996년까지 그룹 총수를 역임한 이후 차남인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이 1997년부터 2004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2005년에 동생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창업주의 3남)이 그룹 총수로 추대되자 이에 반발, 검찰에 그룹이 경영 과정에서 편법을 써 비자금을 횡령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며 형제의 난을 일으켰다. 형제들은 그를 가문에서 제명했고, 박용오 회장은 2009년 자살했다. 현재 두산그룹 총수는 창업주의 5남인 박용만 회장이다. 문제는 박용만 회장의 다음 순서다. 박용만 회장 동생인 박용욱 이생 회장이 있으나 박용욱 회장은 일찍부터 그룹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자연 4세 경영인으로 이어질 순서다.
4세 경영인들은 현재 가장 큰 형인 박용곤 명예회장의 아들인 박정원 두산 건설 회장과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아들인 박진원 전 두산사장과 박석원 두산엔진 사장,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박태원 두산건설 사장과 박형원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과 박인원 두산중공업 전무, 박용만 회장의 아들인 박서원 오리콤 사장과 박재원 두산 인프라코어 부장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그룹 주력 계열사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서열상으로는 장손인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이 맡을 차례다. 그룹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두산건설 경영상태가 좋지 않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경영 능력에서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설명이다. 또한 형제 경영에서는 그나마 호흡을 맞출 수 있으나 4촌간 경영은 상당한 애로점이 따를 것이라고 보고 있다. 후계구도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시각이다.
효성 그룹 역시 후계 구도는 현재 오리무중이다. 부친인 조석래 회장은 3형제를 당분간 경영수업을 시킨 뒤 골고루 그룹을 분할, 경영토록하는 그림을 그렸다가 현재는 백지화된 케이스다. 둘째인 조현문 변호사가 반기를 들어 형제간 갈등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장남인 조현준 사장이 앞서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으나 경영 대권은 두고 봐야 할 것이라는 얘기가 그룹 안팎에서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장남이라는 프리미엄 보다 경영 능력 우선이라는 실용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이외에도 몇몇 그룹에서 형제간 분할 경영에서 통합 경영 방침으로 방향이 틀어지고 있는 것이 감지되고 있다. 국내 기업 역사가 60~70년을 넘어서면서 3세 들어 후계구도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능력이 모자라도 장남이나 외아들은 승계자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경영 상태에선 장남 보다 경영 능력이 누가 있느냐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그룹을 쪼개 형제간 분할 경영하는 방식도 능력자에게 모든 권한을 주는 '원톱' 방식으로 옮겨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경영 능력이 없으면 대주주로서 권리만 행사해야 한다. 기업 경영은 잘 훈련되고 능력있는 경영인이 맡아야 기업도 살고 대주주도 살 수 있다는 것은 평범한 진리다.
(4) 10년의 '악몽'을 뚫고 다시 재기한 박삼구 회장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지난 10년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2006년 대우건설에 이어 2008년 대한통운을 인수할 때만해도 금호그룹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한때 대우건설을 인수하려고 중견 건설 회사들과 대기업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적이 있다. 당시 대우건설은 국내 건설 도급 순위 1,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았고 국내외 신인도 역시 최상위에 있었다. 금호 만이 아니라 다른 그룹에서 군침을 흘리며 대우건설 인수전에 뛰어든 이유다. 그러나 다른 기업에 비해 인수금액을 높게 적시한 금호그룹에 낙착되었다. 서울역 앞 ‘랜드마크 빌딩’으로 자리잡은 대우건설 본사 사옥에는 금호그룹의 ‘로고’가 걸렸다.
2년 뒤 대한통운을 인수하면서 금호 그룹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대표적인 자산주로 알려진 대한통운은 알짜 회사였다. 이들 기업의 인수로 금호는 단숨에 재계 순위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승자의 저주’였을까. 금호의 확장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건설경기 불황과 2008년 리먼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그룹에 직격탄을 안겨주었다. 무모한 몸집 불리기에 대한 역풍은 너무 거셌다. 급기야 그룹측은 인수 3년밖에 안된 대우건설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대한통운 역시 매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몰렸다. 주요 계열사를 매각하지 않고는 그룹 자체가 존립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왼쪽)과 박찬구 금호 석유화학 회장. /조선일보 DB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형제간 우애에도 금이가고 말았다. 금호그룹은 박인천 창업주가 사망한 1984년 이후 장남 차남 3남으로 이어지는 형제간 경영이란 독특한 지배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장남인 박성용 회장(2005년 작고)은 만 65세가 되는 해인 1996년 그룹 경영을 동생인 박정구 회장(2002년 타계)에게 물려줬다. 큰 형이 동생에게 경영권을 이양할 때 재계에선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형제간 독특한 의리 경영이 또 다른 경영권 이양 모델로 제시됐다. 두산 그룹 역시 금호를 모델로 삼아 형제간 경영을 실현했다.
차남인 박정구 회장이 갑자기 지병으로 별세하면서 3남인 박삼구 회장이 경영 대권을 물려받았다. 박삼구 회장 재임시절 굵직한 기업 인수 합병(M&A)을 성사시키며 그룹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룹의 유동성 위기라는 절대절명을 맞게 됐다. 이를 주시하던 4남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반기를 들었다. 2009년 초의 일이었다. 박 회장은 금호석유화학의 주식 지분율을 높이며 형인 박삼구 회장의 경영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형제간 갈등이 외부로 표출된 것도 이 시점이었다. 그룹은 경영 위기에 놓여 있는데 우애 좋기로 소문나 있던 형제가 집안 싸움까지 벌이는 사태로 발전했다. 그룹은 그야말로 풍지박산 일보 직전이었다. 박삼구 회장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동생인 박찬구 회장과 동반 퇴진을 결정한 것이다. 이때가 2009년 7월18일이다. 박삼구 회장의 퇴진은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2개군으로 쪼개지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석유화약 분야인 금호석유화학은 박찬구 회장이 독자 경영하는 쪽으로 분가 되었다. 아시아나 항공을 비롯한 다른 계열사들은 채권단 산하에 들어가는 운명을 맞았다. 금호 그룹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잠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박삼구 회장은 채권단의 요구로 2010년 11월 다시 ‘회장’으로 복귀했다. 박 회장은 100대 1로 감자를 실시했고 사재 3300여원을 출연하는 모험도 강행했다. 이러한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그룹 운영에 조금씩 숨통이 트기 시작했다. 현금 자산이 될만한 계열사들이 여지 없이 팔려 나갔음은 물론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지주회사격인 금호산업이 조건부로 워크아웃을 졸업할 수 있었다. 자본잠식 상태에 있던 금호산업은 올해들어 부채비율이 400%까지 떨어졌다. 한때 3만%에 달하던 금호타이어의 부채비율도 200%미만까지 낮출 수 있었다.
2015년부터 박삼구 회장과 주채권단과의 인수가격 협상이 시작되었다. 채권단과 박 회장은 우선 인수권이 채결돼 있었다. 금호산업의 전체 주식 50%+1주를 박 회장한테 팔기로 약정이 되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금호산업 주식 가치를 얼마로 할 것인가에 대해 지리한 협상을 벌어야 했다. 한푼이라도 싸게 사려는 박 회장과 한푼이라도 더 회수하려는 채권단과의 줄다리기가 몇 달 동안 계속 되었다. 그러다 최근 채권단의 최종 가격이 제시되었다. 채권단은 박 회장에게 제시할 경영권 지분(지분율 50%+1주) 인수가격을 주당 4만1213원, 총 7228억원으로 결의했다. 채권단이 처음에 1조218억원을 제시하자 박 회장은 6503억원을 불렀고 박 회장이 다시 7047억원을 제시하자 채권단이 7228억원으로 최종 조정했다.
10년 동안 금호 그룹은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그 와중에 알토란 같은 계열사를 매각해야 하는 아픔도 맛봐야 했고, 형제간 ‘재산싸움’이라는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박삼구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 /조선일보 DB
박삼구 회장은 잃은 것만 있는 것일까. 이번 금호산업 경영권 회복은 박삼구 회장가(家)엔 상처보다 영광이 더 큰 것으로 읽혀지고 있다. 가장 큰 이득은 형제간 지분정리가 ‘깔끔하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박삼구 회장은 위로 두 형이 있고 밑으로 두 동생이 있다. 두 형은 돌아가셨지만 조카들이 모두 건재해 있다. 큰 형인 박성용 회장의 아들인 장조카는 일찍이 경영 일선에 물러나 있었다. 혼혈인 박재영씨는 미국에서 영화사업을 한다며 지분을 정리, 그룹 경영과는 무관해 있었다. 그러나 둘째 형인 박정구 회장의 아들인 박철완 금호석유 화학 상무는 그룹 경영에 관여하며 지분도 똑같이 갖고 있었다.
박 상무가 삼촌간 갈등에서 박삼구 회장편이 아닌 박찬구 회장 편에 들면서 지분 정리가 쉽게 되었다. 결국 박철완 상무는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쪽으로 옮겨가는 형국이 되었다. 박찬구 회장과 그의 아들인 박준경 상무는 당연히 금호석유화학 경영에 나서게 됐다. 현재 박찬구 회장이 경영하는 금호석유화학에는 박찬구 회장의 1남1녀 자식들과 박정구 회장의 아들이 각기 ‘상무’ 직책을 맡아 경영에 합류하고 있다. 5형제 중 막내인 박종구 전 과기부 차관은 처음부터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았었다.
물론 금호석유화학은 지난해 8월 CP 매입과 관련해 배임죄로 박삼구 회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는등 갈등이 안풀렸음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민사소송을 제기해 9월부터 본격적인 재판이 열리고 있다. 형제간 앙금이 아직도 깊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다. 그러나 박삼구 회장은 10년의 인고의 생활을 견뎌내면서 형제간 지분 정리도 ‘자연스럽게’ 이루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형제간 경영의 모델에서 형제간 갈등집안으로 전락했던 금호가(家) 역시 기업 분할로 정리되는 수순을 밟고 있는 셈이다. 박삼구 회장의 금호산업 경영권 회복은 역시 ‘기업 총수 자리’는 나눌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재계에선 이와 유사한 두산가(家)의 다음 경영권 이양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금호가의 지분 정리가 두산가에는 어떤 영향으로 작용할까하는 관심에서다.
홍성추의 재벌가 인사이드
2015.11.18 대우조선 단물 빨아먹은 ‘金·政’ 마피아들이 누구냐 하면...
▲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본사 photo 연합
산업은행 어느 지방 지점장 얘기다. 지난해 5월 화물업체 대표에게 시설자금 명목으로 114억원을 대출해주고, 그 대가로 두 자녀의 해외 어학연수비 명목으로 5700만원을 받았다가 구속됐다.
이 소식을 접한 일반인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산업은행은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곳이다. 동종업계 최고의 연봉과 각종 혜택은 물론 퇴직 후 관련 회사 취업 보장 등 일반 직장인들에겐 꿈 같은 얘기들이 현실로 일어나는 직장이다.
지난 9월 금융소비자원이 금융공기업의 실태를 밝힌 보고서를 보자. 산업은행의 경영 실태를 분석한 결과 지방 근무자에게 1인당 평균 82㎡(25평) 규모의 아파트를 임차해 주고 보증금으로 1억1000여만원의 비용을 지급하고 있으며, 해외 유학자에게는 1인당 평균 1억4000여만원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해외 근무자에게도 교육비 명목으로 1억2000만원을 지급해 왔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특히 직원의 어학연수 명목 등으로 수십억원을 지급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국내 학술연수 명목으로도 1인당 7000만원을 지출하는 등 교육을 빙자해 엄청난 비용을 소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소비자원은 일반 기업에서는 거의 사라진 유학 등의 제도를 국가의 세금으로도 볼 수 있는 비용을 들여가며 굳이 실시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주거래 기업의 고위직으로 재취업
지난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사실은 더 가관이다. 산업은행의 퇴직자 중 3분의 2가 주거래 기업의 고위직으로 재취업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 의원이 분석한 결과, 2011년부터 현재까지 산업은행 출신으로 재취업한 퇴직자 47명 중 31명이 주거래 기업의 대표이사, 상임이사 등으로 보직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31명 중 대표이사(CEO)로는 4명, 재무담당이사(CFO)로는 5명이 취업했다. 감사가 13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밖에 부사장 3명, 사장·고문·이사·상무 등의 직위로 6명이 재취업했다.
재취업 사유를 살펴보면 20명이 ‘PF사업 운영투명성 확보’였고, ‘구조조정업체 경영관리·가치제고’(2명), ‘투자회사의 경영 효율·투명성 확보’(3명) 등의 사유를 들었다. ‘회사 추천 요청’ 사유는 31건 중 3건에 불과했다. 결국 31명 중 28명이 낙하산이라는 얘기다.
산업은행 출신 인사의 낙하산 관행은 2013년 발생한 이른바 ‘동양 사태’를 비롯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산업은행의 전 총재 및 임원들 중, 2003년부터 2013년까지 10년 동안 주거래 기업인 동양그룹의 계열사에 부회장, 고문, 감사, 사외이사 등 고위직으로 13명이 재취업·겸임한 바 있다. 주거래은행으로서 감시와 경영투명성 확보에 목적을 두고 인사를 파견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부실을 방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산업은행은 지난 10월 29일 신규출자 및 신규대출 방식으로 4조2000억원을 대우조선해양에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국책은행 자금을 대거 투입한다는 것은 세금를 퍼붓는 것과 같은 의미다. 대우조선해양은 경영 부실로 올 들어 3분기까지 3조7881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는 등 파산 직전 상태다.
이를 두고 일반 국민들과 재계에선 ‘생선을 먹어치운 고양이에게 다시 생선을 맡기려는 작태’라며 산업은행의 행태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될 때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으로 2조9000억원의 혈세가 들어간 회사다. 이때부터 이 회사를 산업은행이 관리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규모 적자를 본 다른 조선사와 달리 흑자를 봤다고 산업은행이 선전했던 회사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 경쟁 조선사보다 더 많은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올해 3월 산업은행을 퇴직한 김열중 전 부행장은 퇴직과 동시에 대우조선해양 재무관리최고책임자(CFO)로 재취업했지만 재무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선임 후 2개월 동안 대우조선해양의 부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마는 셈이다. 기업을 정상화해 국가경제에 이바지하려는 마음보다 정권 창출에 기여한 인사들의 보은 창구로 활용했던 것이다. 정권과 산업은행이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인사들은 자기 사람 심기와 이속 챙기기에 급급했다.
실제로 2008년 이후 대우조선해양에 임명된 사외이사는 18명으로 교수 3명, 금융권 인사 2명, 대우그룹 출신 1명, 관피아 2명, 정피아 10명이 다녀갔다. 이 중 이명박 정부 시절 총 11명의 사외이사가 낙하산 인사로 분류됐다. 당시 사외이사는 안세영 뉴라이트 정책위원장, 김영 대선 선거대책본부 고문, 장득상 힘찬개발 대표, 김영일 글로벌포럼 사무총장,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등이다.
현 정부에서도 5명의 낙하산 사외이사가 존재했다. 신광식 국민행복캠프경제민주화추진위원, 고상곤 자유총연맹이사는 임기 종료됐으나 이종구 전 국회의원(17·18대), 조전혁 전 국회의원(18대), 이영배 인천시장 보좌관 등 3명은 현재 재임 중이다.
실제로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 및 자회사의 자문과 고문 60명에게 억대 연봉과 각종 비용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2004년부터 대우조선해양과 자회사에 자문·고문·상담역 등으로 취임한 사람은 총 60명으로 이들은 평균 88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전경 photo 연합
60명이 8800만원의 연봉 받아
이 중 최고 연봉은 남상태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으로 2억5700만원에 이른다. 또 대우조선해양은 남 전 사장에게 2년 동안 서울 중구에 있는 사무실 임대료 2억 3000만원(월세 970만원)과 고급차량 및 운용비 등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문역 중에는 산업은행 4명, 수출입은행 2명, 국정원 2명, 방위사업청 1명, 해군 장성 출신 3명도 있었다. 김유현 전 산업은행 재무관리본부장은 자문역으로 1억5200만원, 사무실 임대료 7800만원, 고급차량과 운용비 18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윤우 전 산업은행 부총재 역시 연봉 1억3800만원, 김갑중 전 부행장은 연봉 5100만원, 허종옥 전 이사는 연봉 4800만원을 받았다. 자문료 명목의 이같은 고액 연봉 지급에 대해 2013년 감사원 지적이 있었지만 산업은행의 전관예우는 끈끈했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대우조선해양에 빨대를 꽂아놓고 단물만 뽑아먹은 꼴이다.
이러한 작태는 산업은행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공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코와 KT, 은행권, 공공기관 등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현 정권 들어 ‘정피아’(정치권 출신과 마피아의 합성어) 출신들이 대거 공기업이나 유관 기관에 집중 투입되고 있어 문제다. ‘세월호’사건 전에는 ‘관피아’(관료 출신과 마피아의 합성어)가 주류를 이루다 최근에는 정피아로 자리 바꿈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태생적으로 갑질문화
전문가들은 낙하산 인사 차단만이 ‘고양이에 생선을 맡기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권 3년차를 맞아 낙하산을 가득 채운 비행기가 다시 이륙 중이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대통령 임기 초 임명한 공공기관장들의 임기가 끝나고 있는가 하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들의 활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형 공기업 자리를 놓고 실력자 간 경쟁이 치열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재계 관계자는 “5년 단임제가 정착되면서 정권 창출에 기여한 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거나, 현직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좋은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여기저기 줄을 대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며 “정권 후반기에 낙하산 인사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고 말했다.
한국산업은행은 1954년 정부 출자로 산업자금의 공급과 관리를 위해 세워진 정부출자 은행이다. 정부는 1953년 제정된 한국산업은행법을 기초로 당시 자본금 4000만원으로 회사를 세웠다. 설립 이후 한국산업은행은 정책 금융과 기업 대출 등을 담당하는 국책은행의 역할을 맡았다.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사회간접자본이나 중화학공업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때문에 태생적으로 ‘갑질문화’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산업은행이 특히 비대해진 것은 IMF 당시 굵직한 기업들이 무너지면서부터다. 정부는 공적자금이라는 명분으로 무너진 기업들에 ‘혈세’를 쏟아부었고, 그 관리를 산업은행에 맡겼다. 대형 그룹들이 무너지면서 산업은행이 대신 거대한 ‘재벌’이 돼버린 것이다. 이러한 적폐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2008년 6월 한국산업은행의 민영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를 기초로 산은법이 개정됐고 이듬해인 2009년 정책금융 업무를 ‘한국정책금융공사’로 넘겼다. 같은 해 상업금융 부문만을 떼어내 민간 금융그룹인 산은금융그룹이 출범했다. 산은금융지주가 그룹 지주회사 역할을 맡았고 KDB산업은행은 KDB캐피탈, KDB대우증권, KDB자산운용, KDB인프라 등과 함께 산은금융그룹 계열사로 편입됐다.
2010년 12월 개인대출 업무를 취급하기 시작했고, 2011년 11월 우즈베키스탄 RBSUs를 인수했다. 현 정부 들어선 2015년 1월 KDB산업은행, 산은금융지주, 한국정책금융공사가 통합하여 현재의 통합산업은행이 출범했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총자산은 167조7247억원이다. 국내 5대 재벌에 맞먹는 규모다.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서 금융시장의 불안을 해소하고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해야 한다. 미래 성장동력 발굴,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 상업금융기관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장경제 보완과 시장 선도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립 취지와 무색하게 혈세를 투입한 회사에 정치권 보은 인사를 내려보내는 창구 역할이나 하고 회사를 자신들의 ‘놀이터’로 인식하는 한 제2, 제3의 대우조선해양 사태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밖에 없다.
2015.11.19 SK 家가 화목한 이유
지난 8일 저녁 워커힐 호텔 비스타 홀, 출소후 활발한 활동을 하는 최태원 SK 그룹 회장이 갑자기 단상에 올라왔다. 준비된 원고나 사전 귀띔도 없었던 것 같았다. 사회자가 축사를 해 달라는 요청에 마이크를 잡은 것이다. 최 회장은 “저는 큰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껏 받았다”면서 “어렸을 때 큰 댁에서 잘 때가 많았는데 저를 아들과 똑같이 대해 주셨다”고 미수연을 맞은 노순애 여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노 여사는 SK그룹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1973년 작고)의 부인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들을 보살피면서 살아온 SK그룹의 최고 어른이다. 이날 노 여사의 인사말은 “집안이 화목해야 한다”가 주류였다. 최근 형제들간 잇단 잡음을 일으키고 있는 재벌 집안을 의식한 얘기일 수 있다.
특히 워커힐 호텔은 최종건 창업주가 숨을 거두기전 마지막에 인수한 기업이다. 선경직물로 회사를 창업한 최종건 회장은 회사 설립 20년만인 1973년 1월 정부로부터 워커힐 호텔을 인수했다. 이 호텔 인수로 ‘선경’이 재벌 반열에 들어섰음을 내외에 알렸다. 당시 26억3200만원에 호텔을 인수하자 재계에선 ‘무명의 반란’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최종건 창업주는 그해 11월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지난 8일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최종건 SK그룹 창업주 미망인 노순애 여사의 미수연. /홍성추
‘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원대한 꿈은 동생인 최종현 회장(1998년 타계)으로 넘어간다. 창업 회장이 사망하면서 그룹 경영을 자식이 아닌 동생에게 물려준 것은 최종건 회장 특유의 ‘가부장적 기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창업 회장 자녀들이 어린 탓도 있었지만 최 창업주는 동생이 조카들도 잘 돌보고 그룹 경영도 잘 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때문에 SK가(家)는 다른 어떤 재벌가 보다 분쟁의 소지가 많은 요인을 갖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창업주의 유지를 받든 최종현 회장이 경영을 잘못했거나 창업주 자식들이 욕심을 부렸다면 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현 회장은 그룹을 재계 랭킹 4위로 만들 만큼 역량을 발휘했다. 최 회장은 조카(최종건 회장 자식)들도 모두 친 자식이나 마찬가지라며 돌봤음은 물론이다. 최종현 회장이 돌아가시고 그룹 대권은 장남인 최태원 회장에게 넘어갔다. 이때 재계에선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4촌들이 반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업주 자녀들은 승복했다. 이 이면에는 노순애 여사의 ‘화목론’과 최신원 SKC 회장의 ‘맏형론’이 뒷받침했다. 최신원 회장의 형인 최윤원 회장은 일찍 별세했다. 때문에 최신원 회장이 사실상 SK가의 장남인 셈이다. 최신원 회장은 주식 지분이나 재산도 별로 없다. 그러나 최신원 회장은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 어른으로서의 역할만 했다. 이날 미수연에서도 최신원 회장은 “어머님께서 늘상 해오신 화목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②편에 계속>
자신이 이룬 재산도 아니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재벌가 형제들
현재 형제간 갈들을 빚고 있는 롯데가(家)나 효성가(家)와 대비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국내 주요 재벌가 중에 가족간 분쟁이 일어나지 않은 집안은 거의 없다. LG그룹과 SK그룹 외에는 대부분 재벌 집안이 분쟁을 겪었거나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들의 분쟁 요인은 ‘총수’자리 싸움과 재산싸움이다. 누가 덜 받았냐 더 받았냐와 총수자리에 누가 앉느냐를 놓고 싸움을 벌이고 있다. 수천억원 심지어 수조원대의 재산을 물려 받고도 형제간 송사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 벌어진 롯데가의 분쟁은 재산이라기 보다 ‘총수’자리 싸움이다. 신격호 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은 물려받은 재산만 수조원에 이른다. 그러나 맡고 있던 일본 롯데 홀딩스 대표이사 부회장직에서 해임되자 동생인 신동빈 회장을 상대로 소송전을 일삼고 있다. 신동주 회장은 “자신이 해임된 것은 동생인 신동빈 회장의 음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모든 원인을 신동빈 회장에게 돌리고 있다. 이에대해 신동빈 회장 측은 “신동주 회장이 절차를 무시하고 무리한 투자를 했기 때문에 일본 롯데 홀딩스 이사회와 직원들이 등을 돌렸고 신격호 총괄 회장의 분노를 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동주 SDJ 코퍼레이션 회장(왼쪽)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선일보 DB
이들 형제의 지리한 공방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동주 회장은 지난 12일 쓰쿠다 다카유키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와 일본 롯데그룹 4개 계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동생 신동빈 회장측을 압박하고 있다. 14일 발표된 면세점 특허 연장에도 롯데는 잠실 월드타워점을 잃는 큰 손실을 입었다. 신동주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 호텔 롯데의 기업공개(IPO)를 통해 그룹 지배구조를 개편하려던 신동빈 회장의 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수십 년 전부터 숙원사업으로 추진해온 제2롯데월드 건설이 마무리돼가고 있는 시점에서 입점해 있는 면세점의 문을 닫아야 하는 사실이 뼈아프다. 면세점 특허 재연장에 실패 한뒤 신동빈 회장은 "99%가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결국 경영권 분쟁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동주 회장 책임론을 들고 나올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형제간 분쟁으로 롯데의 그룹 이미지와 임직원들의 타격은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어가고 있다.
효성가 역시 지리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조석래 회장의 차남인 조현문 변호사가 회사와 형을 상대로 형사고소를 해 법정 다툼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잘잘못이 누가 있느냐는 차지하고 재벌가 집안 싸움이라 일반인의 시선도 싸늘해지고 있다.
형제간 분쟁은 대부분 결말이 안좋게 끝나고 만다. 두산 그룹인 경우 2남인 박용오 회장이 형제간 갈등으로 집안에서 ‘파문’을 당한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금호 그룹은 박삼구 회장과 박찬구 회장 두 형제가 그룹을 분리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그 감정의 골은 깊기만 하다. 대성 그룹의 형제간 갈등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장남인 김영대 대성산업 회장과 3남인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간의 반목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종근당의 이장환 회장과 동생인 이덕한 씨는 서로 인사도 안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한진그룹의 조양호 회장과 한진중공업의 조남호 회장 형제 역시 분쟁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
대부분의 재벌 집안이 이처럼 분쟁을 겪고 있는 시점에 SK 가의 훈훈한 화목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하겠다. 누군가 조금만 양보하면 그렇게 볼썽 사나운 모습은 연출되지 않는다. 더 갖겠다는 욕심이나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독단을 버리면 된다. 자기가 이룬 재산도 아니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후손들을 창업주들은 어떻게 바라 볼까.
홍성추의 재벌가 인사이드 주간조선
기업의 창설과 몰락
2015.04.05 장진호(張震浩) 前 眞露그룹 회장이 생애 첫 인터뷰에서 밝힌 政經 유착 20年
최근 선배들과 반주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하다 소주 시장을 석권했던 진로 소주 얘기가 나왔다. 이야기는 장진호(張震浩) 전 진로그룹 회장으로까지 번졌다.
“그 양반 뭐하고 있지”, “어디 외국 있다고 하던데”, “우리가 이렇게 마셔주는데 왜 망한 거야”… 근황이 궁금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한 끝에 그와 간접적으로 연락이 닿았다. 기자가 아는 장진호 전 회장은 3년 전 캄보디아로 출장을 갈 당시 자료를 준비하며 그가 2005년 캄보디아로 도피해 현지에서 KTV(룸살롱의 일종)를 운영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전부였다. 인터뷰를 주선한 사람한테 물었다.
—지금 캄보디아에 있잖아요?
“현재 중국 베이징에 있습니다.”
—왜 인터뷰를 하겠다는 겁니까.
“그동안 DJ(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준 정치자금에 대해 얘기하고 싶답니다.”
—그런데 장진호 회장을 어떻게 압니까.
“예전에 일을 같이했습니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장진호 회장과 연을 맺어 개인 ‘비서’ 격으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종종 중국을 오가며 장 회장과 교류하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DJ 비자금에 대해 밝히겠다는 이유부터 탐탁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장진호’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전직 대통령에게 스스로 거액을 제공했다고 먼저 밝히고자 하는 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관련 기사를 다시 살펴보니 이제껏 인터뷰를 한 일도 없는 듯했다. 꼭 ‘정치자금’ 얘기가 아니더라도 그를 인터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장 전 회장의 주장에는 많은 정치인과 경제인이 등장한다. 그의 주장을 최대한 검증하려 했지만, 만약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월간조선》 5월호에 당사자들의 반론을 실을 것을 약속한다.
‘찬삼락’이란 이름의 캄보디아 여권 소지한 장진
3월 5일 12시 베이징 시내 한 아파트를 찾았다. 2006년 장 회장이 중국에 온 이후 7년째 살고 있다는 그의 자택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를 한 장진호(61) 전 회장이 문을 열었다. 돋보기 안경을 콧등에 걸친 그의 모습에서 한때 24개 계열사를 거느렸던 대기업 총수의 풍채를 느낄 순 없었다.
인터뷰 전 그와 점심을 먹었다. 식탁 위에는 김치, 깍두기, 멸치볶음, 김, 버섯볶음, 잡채, 미역국 등이 있었다. 기자가 온다고 해서 일부러 소박한 밥상을 차린 것일까. 그에게 묻자 “평소에도 이렇게 먹는다”고 답했다. 40분간 식사를 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장 회장은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또 “(내가) 진로 경영권을 확보한 데에는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고도 했다. 그에 따르면 2003년 진로 법정관리 이후는 물론 생애 첫 단독 인터뷰라고 했다.
2003년 9월 장진호 회장은 5496억원을 사기대출 받고 비자금 7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2005년 2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풀려난 그는 가족을 데리고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검찰이 그의 비자금에 대해 내사를 하고 있던 상황이라 도피 의혹이 짙었다. 현재 검찰 내사는 종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는 1991년 진로그룹이 진출한 곳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캄보디아의 최고 실력자 훈센 총리와 친분을 쌓았고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훈센은 자신의 젊을 적 이름인 ‘찬삼락’을 장 회장에게 줬다. 2002년엔 캄보디아 국적도 만들어줬다. 현재 그의 한국 국적은 말소된 상태다.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건 ‘찬삼락’이란 이름이 적힌 캄보디아 여권뿐이란 얘기다. 전직 그룹 총수가 캄보디아 국적을 가지고 중국에 머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게 인터뷰를 결심한 이유부터 물었다. 장 회장은 “이제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DJ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큰 정치 보복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은 2003년 기업정상화를 목전에 둔 진로를 강제로 법정관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등 제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장진호는 누구?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은 (주)진로 창업주 고(故) 장학엽(張學燁) 회장의 차남으로 1982년 진로에 입사했다. 이후 그는 사촌형, 이복형과의 분쟁을 거쳐 진로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1988년에는 진로를 그룹체제로 개편, 사업다각화를 시도해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1988년 그의 회장 취임 당시 진로그룹 계열사는 9개였지만, 96년 24개로 늘렸다. 그룹 총매출은 1987년 4100억원에서 3조5000억원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진로그룹은 1997년 지나친 사세 확장에 따른 유동성 위기를 넘지 못하고 창업 73년 만에 부도처리됐다. 장 회장은 계열사 간 보증, 분식회계, 가지급금 등으로 진로 부실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지목됐지만,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부실계열사 정리, 자산매각 등의 구조조정 계획안을 내놓고 화의(和議)를 신청했다.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진로 화의를 결정, 5년간 채무원금 상환 유예 혜택을 줬지만, 결국 진로는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매각됐다.
“새로운 각하(DJ)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DJ로부터 어떤 정치 보복을 당했다는 겁니까.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일주일에 3일씩 검찰, 안기부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안 될 겁니다. 그 기간에 가택 압수수색도 5번이나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DJ가 나를 조사하라고 두 번이나 그랬대요. 그러니까 1년8개월 동안 계속 족치고, 조져댄 거겠죠.”
장 회장에 따르면,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며칠 후 대검찰청에서 그에게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평소 안면이 있던 윤모 수사관이 그를 맞았다.
윤 수사관은 장 회장에게 다짜고짜 ‘새로운 각하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정리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거였습니까.
“그 얘기를 들으니까 ‘정치자금’ 문제인 것 같긴 한데, 나는 임춘원(林春元) 의원을 통해서 DJ한테 주식하고 정치자금을 준 것밖에 없거든요. 예전에 내 배다른 형하고 엄삼탁씨가 그걸로 괴롭힌 적이 있었는데, 그 자료가 혹시 안기부에 남아 있었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은 그렇다 쳐도 주식은 왜 줬습니까.
“과거 전통(전두환 대통령)과 DJ가 은밀한 거래를 했고, 그 중간에서 제가 담보물로 주식을 제공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습니까.
“5공 초창기 전통은 DJ를 사형시키려 했지만, 미국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DJ를 살려주긴 했는데 그가 나중에 정치활동을 재개하면 광주니, 뭐니 하면서 나올 수 있잖아요. 전통 입장에선 그걸 막기 위해 DJ 발목을 잡을 장치가 필요했겠죠. DJ도 살려면 모르는 척 잡혀줘야만 하는 상황이었죠.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돈밖에 없잖아요?”
—거래 내용이 뭡니까.
“제가 담보물로 DJ 측에 (주)진로 보유 지분 절반을 양도하고, 매년 일정 정도의 정치자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식을 관리하고,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건 임춘원 의원이 맡았습니다.”
“1984년 50억 들여 DJ 쪽에 주식 양도”
고(故) 임춘원씨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68년부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 입시학원의 효시 격인 ‘상아탑학원’을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그는 71년 윤보선, 장준하씨와 함께 국민당을 창당한 적이 있는데, 그 후 DJ와는 70년대 장준하씨의 비밀연락책을 맡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80년대엔 ‘DJ 자금책’, ‘비자금 관리인’으로 세간에 알려졌고 실제 그는 12·13·14대 야당 국회의원을 했다.
—임춘원씨가 왜 그런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까.
“그는 제게 과거 자신이 장준하 계열에 있으면서 정치를 했던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정치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전통과 DJ의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래는 전두환 정부에서 기획한 겁니까.
“임춘원 의원과 5공 정치세력 사이에서 상당히 많은 논의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건 장준하 계열에 있었던 임춘원씨의 정치경력과 성향을 봤을 때 어울리지 않는데요.
“신군부와 어울리는 사람이 DJ 옆에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접근 자체를 할 수 없죠. 그런데 임춘원 의원에 대해선 정치경력이나 성향을 봤을 때 DJ 쪽에서 신뢰할 수 있고, 이쪽(청와대)에 DJ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겠죠. 실제 임춘원 의원은 DJ의 자금관리 역할을 하면서, 그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는 첨병 역할을 했어요.”
—왜 많은 기업 중 진로가 자금원으로 꼽힌 겁니까.
“당시 우리 회사 내부에 문제도 있었으니까 임춘원 의원 입장에선 자기가 이걸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죠.”
—거래가 있었던 시기는 언제입니까.
“1982년 DJ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얘기가 시작됐습니다. 그래야 전통 입장에서 DJ를 안심하고 보낼 수 있잖아요. 실제 주식과 돈이 간 건 1984년입니다. 이후 1992년까지 매년 정치자금을 전달했습니다.”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된 DJ에게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죄목은 ‘반국가단체 결성’이었다. 이후 그는 두 차례 감형을 거쳐 20년형이 됐고, 1982년 12월 정부의 형집행정지에 따라 가족과 함께 신병치료를 이유로 도미했다.
—보유 지분 절반을 무상으로 넘겨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 정도조차 안 하면 담보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식은 언제 양도했습니까.
“1984년 11월 정기주주총회 이전에 거의 양도했습니다. 당시에 50억원 정도가 소요된 걸로 기억하는데 세금이 얼마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주식을 매입한 자금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가지급금으로 했어요. 대부분 (주)진로 가지급으로 했어요.”
가지급금이란 대주주, 임원 등 특수 관계자에게 용도 지정 없이 지급하는 지출금으로 주로 기업자금을 유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5공 땐 특별세무조사 받기도
1984년 11월 관련 기사에 따르면 당시 장진호 상무의 공식 지분율은 전체의 8%였지만, 실제 보유 지분은 30%였다. 같은 해 장 상무는 주총 이전 28억2000만원을 들여 전체 진로 주식 900만 주의 22%인 211만 주를 27명의 이름으로 매입했다. 이에 따른 증여세는 17억8000만원이었다. 즉 장 회장이 주식 매입과 증여세 납부에 총 46억원을 썼다는 얘기다. 따라서 DJ 측에 절반을 양도했다면 약 15%의 지분이란 계산이 가능하다.
—양도한 주식의 명의는 누구로 돼 있었습니까.
“임춘원 의원으로부터 동교기업, 한림장학회, 세광병원 등 DJ 관련 재단에 명의이전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주주명부에 다 나와 있기도 하고요.”
—그곳들은 다 임춘원씨 소유 아니었습니까.
“임 의원이 운영하는 곳이었지만, 그는 그게 다 DJ 소유라고 말했거든요. ‘동교’ 들어간 건 다 그쪽 방면이잖아요? 재단 자산도 우리 주식과 동교동 건물뿐이었는데요. 또 임 의원이 DJ 최측근 자금 담당이란 건 다 알려진 사실이었고, 그가 관리한 재단이 DJ와 관련돼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한림장학회’ 설립 당시 정관을 보면 장진호 회장의 말처럼 재단 자산은 예탁금 5499만원이 전부였다. 이 문건에는 장 회장이 1984년 4월 이 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임기 4년의 이사직을 맡은 정황도 담겨 있다.
—지분 절반이 넘어갔는데 확인작업이 없었습니까.
“임춘원이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내가 직접 DJ에게 확인할 수 없잖아요. 주식이 가기 때문에 서로 신뢰하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전혀 믿지 않았겠죠.”
—청와대 쪽엔 확인해 봤습니까.
“저는 그 일이 있고 나서 5공 정권에서 특별세무조사까지 받았습니다.”
—지금 얘기한 대로라면 당시 정권을 도와준 건데 왜 조사를 합니까.
“혹시 DJ 쪽과 이중 삼중의 다른 관계가 있나 해서 세무조사를 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청와대에 가서 항의했어요. 당시 정무수석이 정순덕(鄭順德)씨였는데, 그를 찾아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우리 회사를 문 닫게 하려고 하느냐?’고 했죠. 물론 고차원적으로 보면 세무조사는 일종의 쇼였을 수도 있죠.”
“청탁성이 아니라 돈세탁 안 했다”
—이후 DJ 쪽에 정치자금은 얼마나 제공했습니까.
“84년부터 92년까지 줬습니다. 처음엔 30억원 정도로 얘기가 있었는데, 진행하다 보니까 보통 연간 40억원, 많이 갈 때는 50억원이 갔어요. 다 합치면 500억~600억원 정도 될 겁니다. 그걸 임춘원이 받아서 DJ에게 가져다줬죠.”
—임춘원씨와는 어떻게 접촉했습니까.
“아침에 만나면 조선호텔(웨스틴조선) 나인스게이트 그릴에서 조찬을 했고요. 오후엔 하얏트호텔 사우나에서 만나 쉬면서 얘기했고, 주말엔 힐튼호텔 이발소에서 만났습니다. 보통 일주일에 2~3번씩 만났어요.”
—그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돈을 전달하는 게 가능합니까.
“그런 곳에선 표(수표)를 주는 거죠. 예를 들어 하얏트 호텔 사우나에서 자연스럽게 내 로커에서 꺼내 가운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주면 아무도 눈치챌 수 없죠. 같이 차를 탈 때도 잦으니까 그 안에서도 하고….”
—돈세탁은 어떻게 했습니까.
“돈세탁은 안 했습니다. 임 의원이 신용금고(동교상호신용금고)를 하나 가지고 있었어요. 수표를 주면 본인이 현금으로 바꾸겠다고 해서 줬죠. 임 의원이 돈세탁하는 창구는 자기 신용금고와 명동 서울증권 매장이었어요.”
장진호 회장은 1990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원을 전달할 때도 돈세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건으로 1995년 말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법원으로부터 실형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100억원을 전달할 때도 돈세탁을 하지 않고 수표로 줬죠.
“그것도 가지급을 해서 갖다준 거죠.”
—지방공단 관련 청탁성 뇌물이었잖아요.
“대통령에게 지방공단을 청탁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건 군수나 도지사에게 할 일이죠.”
—대가성이 없는 정치자금이니까 돈세탁하지 않았다는 얘긴가요.
“수표를 보는 순간 우리 회사 돈이라고 나오는데, 대가성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내가 바보인가요? DJ에게 준 것도 비자금 처리를 할 일이 없었습니다.”
—현금은 부피가 커서 호텔에서 주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전달했습니까.
“초창기엔 제가 임춘원 의원 아파트로 몇 번 갔는데요, 그 뒤부터는 임 의원이 우리 부암동 집에 와서 가지고 갔습니다. ‘임 기사’라고 임 의원 친척이 있는데, 그 사람도 심부름했고요. 그런데 보통 현금은 한 번에 3억원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사과박스 하나에 1억5000만원이 들어가는데요, 그거 들기도 굉장히 어렵거든요. 제일 많이 간 것도 10억원을 넘기진 않았습니다.”
DJ, “나는 돈 몇 푼 받고 장래 망칠 사람 아니다”
—DJ와는 자주 만났습니까.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도와줬는데 한 번도 못 만났습니까.
“우연을 가장해 마주친 적은 있습니다.”
—85년 5월 지은 동교동 사저가 완공된 다음 만난 겁니까.
“정확하지 않아요. 임 의원이 ‘자꾸 비용이 추가돼 미안하다’며 ‘DJ에게 인사를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안을 논의한 결과 ‘조우’하는 형식으로 하자고 결정했어요. 언젠가 힐튼호텔에서 DJ와 임 의원이 점심을 먹고 나올 때 나는 마치 약속이 있는 것처럼 해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그때 DJ로부터 ‘반갑다’, ‘고맙다’란 얘기를 들었죠.”
과거 DJ는 “내 장래를 위해 ‘더러운 돈’은 받지 않겠다”고 얘기한 바 있다. 다음은 67년 6월 4일 7대 총선에 출마한 그가 목포역 광장에서 한 연설 중 일부다.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이랬던 DJ가 자기 발목을 잡는 돈인 줄 알면서 장진호 회장으로부터, 그것도 전두환 정권과의 뒷거래를 통해 지속적으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건 아무래도 납득이 쉽지 않았다.
—돈이 간 내막을 DJ도 인지하고 있었단 얘기입니까.
“‘DJ와 의논하고 합의해서 진행하는 일’이라고 임춘원 의원이 얘기했습니다. 한번은 임 의원이 ‘DJ가 너무 많이 요구해서 힘들지만, 내 선에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DJ는 선거 때마다 흑자 본 사람”
—임춘원씨에게 준 돈이 DJ에게 갔다는 걸 확인한 적 있습니까.
“임 의원이 DJ 측근으로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그 돈을 가지고 들어간 거죠. 전국구 2번을 받았잖아요?”
임춘원씨는 85년 2월 12대 총선 때 신한민주당 전국구 2번을 받았다. 18년 동안 DJ 경호 업무를 담당했던 함윤식(咸允植)씨 저서 《동교동 24시》에 따르면 임 의원은 ‘공천헌금’으로 6억원을 낸 것으로 돼 있다.
—임춘원씨가 자력으로 거액의 공천헌금을 냈을 수도 있는데, 그게 진로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를 만났을 때는 돈이 없었어요. 상아탑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윤보선씨에게 집어넣고, 장준하씨 뒷바라지해서 돈이 없었어요. 저를 만났을 땐 집도 허름한 주공아파트 한 채밖에 없었고요. 그런데 임춘원 의원이 거액을 들고 가서 전국구 2번을 받았잖아요. 그러면서 DJ 돈줄이란 소문이 났는데 돈이 어디서 났겠어요?”
12대 국회에서 임춘원씨와 같은 신민당 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하다가 1987년 DJ의 평화민주당에 함께 입당한 한 전직 의원도 “임춘원이 재력가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실제론 가진 건 많지 않았다”며 “정보부(안기부)와 연결돼 DJ에게 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DJ 자금줄에 대해 들은 얘기는 없습니까.
“임 의원을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참, 그래서 DJ가 나쁜 사람이란 겁니다. DJ의 가장 큰 자금줄은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이란 조직을 통한 모금이에요. 행상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호남 사람 수십만 명이 몇만 원씩 보내잖아요. 그 사람은 선거할 때마다 흑자를 봤거든요. 그럼 자기가 그들을 위해 뭔가 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DJ는 그 사람들의 원을 풀어준 게 아니라 솔직히 전두환 대통령과 거래를 했잖아요? 그것 참 잘못된 겁니다.”
—임춘원씨는 자기를 보호할 장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장 회장께도 그런 게 있었습니까.
“가지급금 받은 내용밖에 없습니다. 은밀한 거래였는데, 그런 물증이 있다면 보증인으로서 임춘원 의원과 내 역할은 필요 없는 거죠.”
—금전거래가 지속적으로 이뤄졌는데 증거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임 의원과는 일주일에 3일 이상 만나는 사이였고, 그럴 때 수시로 요구했기 때문에 일일이 기록은 해두지 않았습니다. 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임 의원에게 돈이 어떻게 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가지급금으로 처리했습니다.”
—가지급금이란 진로가 회장에게 빌려준 돈일 뿐입니다. 그 기록만으론 어디에 썼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효력이 있습니까.
“돈이 나간 걸 공식화하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비자금으로 처리하거나 돈세탁을 했다면 문제가 됐을 때 서로 확인할 수 없잖아요? 한참 뒤에 가지급금 부분이 문제가 됐는데 까발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차라리 처음부터 비자금으로 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보호용이었다면, 장부나 각서 같은 게 더 안전하지 않습니까.
“비자금 처리를 하려면 다른 업체를 통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흔적이 없어지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쓴 게 되잖아요.”
—지금 주장하는 거래가 있었다면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얻은 게 있을 겁니다.
“88년에 5공 청문회를 했잖아요? 임 의원이 얘기하길 ‘청문회 스타 몇 명 만들고 끝날 거다. 소리만 요란하지, 별거 없을 거다’라고 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소리만 요란했던 5공 청문회의 배경
/고(故) 임춘원씨는 1985년 2월 DJ가 귀국한 이후 그의 ‘자금책’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다.
5공 청문회란 88년 13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정부하에서의 비리와 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을 위해 개설한 5공 비리특별위원회의 국회 청문회 활동이다. 당시 임춘원씨는 평민당 소속 특위 위원이었다. 이어지는 장 회장의 말이다.
“청문회를 잘 보면 전통을 굉장히 때리는 것 같지만, 알맹이가 없어요. 방송으로 요란하게 떠들기만 했지, 결정타가 없었다고요. 저는 내막을 알고 봐서 그런지 재미가 없었어요. 그런 것들이 ‘전두환-김대중 묵계’의 산물입니다.”
—장 회장께선 DJ와의 거래를 통해 뭘 얻었습니까.
“DJ가 야당 시절엔 우리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우리를 조이는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임 의원이 얘기해서 다 막아줬거든요.”
—그것밖에 없단 말입니까.
“1980년대 후반 우리가 조선공사를 인수하려 할 때 임춘원 의원한테 부탁한 적은 있어요. 우리 정보가 샜는지 떨어지고 말았지만요.”
—5공으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았습니까.
“나는 정권에 부탁할 일이 없었습니다.”
—진로는 국세청이 관리하는 주류기업인 만큼 부탁할 일도 많았을 텐데요.
“우린 국세청하고 수십 년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청와대가 지시해도 국세청이 막아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까.
“그건 막아줄 수 없죠.”
—청와대에서 대가가 있었을 텐데요.
“대가가 어딨어요?”
—솔직히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5공이 나에게 특혜를 줬다면 거래가 드러날 수 있잖아요. 그건 전통이나 DJ, 서로 간에 치부니까 알려지면 둘이 같이 죽어요. 절대 그런 섣부른 짓은 할 수 없죠.”
—그럼 정권의 도움을 받은 게 없다는 얘기입니까.
“단지 나를 쓰러뜨리지 않았다는 거라고 할까요. 5공 때 쓰러진 곳 많잖아요? 국제 같은 곳 보세요. 그렇죠?”
‘장진호 쿠데타’ 도운 5공 정권
그러나 기자가 접촉한 장 회장의 측근들은 그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가 5공 정권과의 거래를 통해 진로 경영권을 확보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진로는 창업주 고(故) 장학엽 회장의 조카 익용(현 서광 회장)씨가 75년부터 경영권을 승계해 사장을 맡고 있었다. 82년 진로에 입사한 장학엽 회장의 차남 장진호 회장(당시 상무)은 경영권을 빼앗기 위해 2년 동안 준비했다. 그가 주장하는 ‘전-김 거래’가 논의될 때 장진호 상무는 ‘쿠데타’를 모의했고, 84년 정기주주총회에서 이를 실행했다. 그 뒤에는 시나리오를 짜고 진두지휘한 임춘원씨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장 상무는 부사장이 됐고 진로의 실질적인 경영권을 확보했다.
—84년 진로는 경영권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의 도움을 받았겠죠.
“5공 때 친한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까…. 이런저런 문제로 나를 도와준 사람도 있죠.”
—청와대가 장 회장의 경영권 확보에 힘을 써줬다는 얘긴가요.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해준 건 사실이겠죠. 그러나 그걸 놓고서 거래를 한 건 아닌데….”
—청와대에는 자금을 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쪽에 줄 게 뭐 있어요. 이거 하나만으로도 그쪽에 어마어마한 역할을 한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장 회장이 얘기한 게 사실이라면 전두환 대통령은 DJ의 입을 막았고, DJ는 정치자금을 얻었다. 임춘원씨는 DJ 측근으로 있으면서 국회의원을 3번 역임했고, 장진호 회장은 진로를 손에 넣었으니 거래에 참여한 4명 모두 밑지는 장사를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거래는 오래가지 못했다. 92년 5월 임춘원씨는 ‘사당화(私黨化)’를 비판하며 민주당을 나왔다. 이와 관련 장진호 회장은 “당시 임춘원 의원은 용도 폐기돼 동교동 내에서 입지가 없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92년쯤으로 기억하는데, 임춘원 의원이 간암에 걸리고 나서 태도가 갑자기 이상해졌습니다. 사람이 변한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학모(鄭學模) 사장이 나한테 ‘DJ 쪽에서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한다’고 얘기를 해요. 이후로도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했는데, 나는 그냥 만나서 주고, 미국 계좌로 보내라고 하면 그쪽으로 넣어주고, 하여튼 달라는 쪽으로 주기만 했잖아요. 어쨌든 그 시점에 이미 DJ와 임 의원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 정학모씨는 목포상고, 경희대 체육학과를 나와 ‘주먹 세계’에 몸담았던 인물로, DJ의 장남 홍일씨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장 회장은 1978년 서광주방설비를 경영할 때부터 정씨와 함께 일했다.
—임춘원씨가 간암에 걸린 건 96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임 의원이 간암에 걸렸다고 하면 정계 은퇴를 해야 하니까 밝히지 않은 거예요. 실제로는 그전에 간암이 발병했어요.”
—주식은 언제 정리했습니까?
“92년 4~5월쯤에 임 의원이 ‘DJ 때문에 힘들다. 주식을 정리하자’고 해서 돈을 다 주고 주식을 가지고 옵니다.”
—인수금액은 약 150억원입니까.
“예, 그쯤으로 기억합니다. 92년 주식 정리하기 전에 진로 주식을 갖고 있던 세광병원은 아예 인수했습니다.”
—그 돈이 DJ에게 전달됐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DJ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내가) 타깃이 되니까, 난 임 의원이 마지막에 돈을 제대로 안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로 주식 매각대금 126억원의 행방은?
93년 ‘공직자 재산 공개’로 인해 동교기업, 한림장학회가 진로 지분을 보유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14대 대선에서 YS를 지원한 임춘원씨는 당시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재산을 신고하면서 진로 주식 매각대금 126억원을 신고하지 않았다. 다음은 93년 3월 26일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내용이다.
〈임 의원은 지난해 3월 말 현재 동교기업, 한림장학회 이름으로 당시 시가 126억원 상당의 (주)진로 주식 59만2762주(14%)를 갖고 있었으나, 주식명부 확인 결과 지난해 9월 말 이전에 모두 매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주식명부에서 일시에 사라져버린 주식과 매각대금은 어디로 갔는가.〉
《월간조선》이 입수한 ‘동교기업·한림장학회 진로 주식 인수 검토안’에 따르면 당시 진로는 비계열사 우전석유, 우신공영, 개인 명의 등을 통해 동교기업과 한림장학회 보유 지분을 매입한 뒤 최종적으로 진로문화재단에 출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 문건에 따르면 당시 진로는 ‘무신고 취득’과 ‘진로 가지급 처리 후 세탁’을 강조하면서 최대한 주식 인수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92년 7~9월에 동교기업, 한림장학회의 지분을 샀다. 다음은 장진호 회장과의 문답이다.
—주식을 인수해서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받아서 차명으로 바꿔놨죠.”
—그 뒤로 DJ 쪽과 돈거래를 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주식 정리하고 얼마 후 화의에 들어간 상황이라 줄 여유도 없었습니다.”
—DJ에게 이 정도를 전달했다면 당시 집권세력에는 더 많은 돈을 줬겠네요.
“노태우 대통령에겐 나라 위해 써달라고 100억원 준 게 전부입니다. YS에겐 한 푼도 안 갔어요.”
—2003년 임춘원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으로 흘러들어 간 진로자금이 7000억~8000억원”이라고 했는데요.
“그건 아니고.”
강경식 부총리, “진로의 재벌 놀음에 분노 느껴”
—관행적으로 준 건 있지 않습니까.
“그것까지 안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무슨 결벽증 환자도 아니고….”
88년 장진호 회장이 진로를 그룹체제로 개편하고 사업다각화를 추진한 이후 진로는 급속한 외적 성장을 이뤘다. 88년 9개였던 계열사는 96년 24개로 늘었다. 총매출은 87년 4100억원에서 3조5000억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진로의 전성기는 거기까지였다. 97년 4월 진로는 부도를 맞는다. 진로그룹의 주력기업인 (주)진로가 어음 213억원, 당좌수표 83억원 등 총 296억원을 결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진로그룹의 부채비율은 8500%에 달했다. 당시 재정경제원 부총리였던 강경식(姜慶植)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은 그의 저서 《환란일기》에서 “진로의 재벌 놀음에 분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진로그룹은 법원에 화의를 신청했다. 채권단은 ‘경영권 포기’를 주장했고, 장 회장은 버텼다. 결국 진로가 파산하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판단에 따라 화의가 성사됐다.
—1997년 부친이 물려준 진로를 부도냈습니다.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위기를 맞았지만, 우리는 부채보다 자산이 훨씬 많았습니다. 부분적으로 도려내면 정리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진로가 부실해진 원인으로 사업다각화를 꼽을 수 있는데요. 급속한 사세 확장의 배경은 뭡니까.
“‘30년 계획’에 따라 2010년에 일본의 미쓰이, 미쓰비시를 이기려면 시간이 없었습니다.”
—진로는 국내 대표 주류회사이고 사업구조상 웬만해선 부도를 낼 수 없는 회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망했습니다. 지금도 사업다각화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미쓰이나 미쓰비시를 이기려면 장기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다각화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 않나요?”
—왜 유동성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세운 모든 사업계획이 최소 5년 이상 투자해야 하는 장기계획이었습니다. 96년부터 매출이 늘고 구체적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유동성 위기를 맞은 겁니다. 그것만 넘기면 해결되는 거였는데.”
—회사 상황이 심각해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위기를 맞아본 적이 없어 우왕좌왕한 건 사실이지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화의를 신청한 겁니다. 그리고 채권단이 이를 받아들였고요.”
—당시 진로는 장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주로 단기 고리자금을 썼는데, 그 이유는 뭡니까.
“재무 담당자들이 잘못한 부분입니다. 제3금융권에서 일시에 4000억원을 쓴 게 화근이 된 겁니다.”
—그런 일은 회장께 보고가 올라갔을 텐데, 재무 담당자들의 잘못이라고만 하는 건 책임을 회피하는 걸로 보이는데요.
“나중에 유동성 위기가 와서 조사해 보니까 그렇게 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경영자로서 관리, 감독을 제대로 안 한 거네요.
“그렇죠. 그건 그렇다고 봐야죠.”
“내가 7공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은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총풍’, ‘세풍’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장진호 회장은 두 사건에 모두 개입했다
—재벌 2세라서 고생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사업한 것 아닙니까.
“고생을 했다는 의미가 밥을 쫄쫄 굶고 일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73년부터 90년까지 휴가를 간 일이 없습니다. 주위에서 워커홀릭이라고 할 정도로 일만 했습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를 믿었습니까.
“몸집을 불리면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는 큰 회사를 인수한 게 없고 대부분 신설했습니다. 다른 곳처럼 특혜입찰로 받은 게 없어요.”
—당시 진로 부실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것 중 하나가 장 회장께서 진로종합유통에서 빌려쓴 1000억원가량의 가지급금인데요.
“(주)진로와 진로유통의 가지급금을 합하면 1700억원 정도 됐습니다. 그중 이자 부분이 꽤 크죠. 실제 원금은 830억원 정도 됩니다. 여기서 2/3에 해당하는 정도가 DJ 쪽에 간 돈입니다.”
—화의 성사 과정에서 정치권에 어떤 식으로 로비했습니까.
“화의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하는 겁니다.”
—채권자가 정부 입김을 타는 은행들 아닙니까.
“당시는 외환위기가 찾아와서 은행들도 자기들이 생존하는 데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YS 정권 말기인데 누구 말을 듣습니까. 나는 매일 잠도 안 자면서 은행 중역 만나서 설득하고, 자정에 찾아가고, 만나지 않겠다는 사람 만나서 설명했습니다. 우리 사장들도 매일 뛰어다녔고요.”
장 회장은 97년 10월 배재욱(裵在昱) 당시 청와대 사정비서관에게 진로 계열사의 화의 성사를 부탁하며 쇼핑백 2개에 1억원을 담아 건넨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진로가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DJ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상당한 기대감을 가졌을 것 같은데요.
“궁극적으로 DJ를 도와준 거니까 ‘우리가 조금 어려워진 걸 풀어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나를 조이고, 도덕적 문제가 있는 나쁜 놈으로 만들었어요.”
—도덕적 문제를 만들었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내가 탤런트 허모씨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이 돌고 그랬는데, 저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장 회장께선 예전 탤런트들 데려다 술 마시고 그런 재벌 2세 그룹인 7공자로 알려졌잖아요.
“내가 전두환 때 7공자입니까? 노태우 때 7공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70년대에는요.
“70년대는 장모, 박모, 최모 회장이 7공자예요. 내가 무슨 7공자, 8공자입니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7공자를 어느 날 갑자기 갖고 와서 얘길 하니. 구체적인 걸 한번 말씀해 보세요.”
—7공자라면 재벌 2세들 7명이라는 건 다 알잖아요.
“아니, 술장사하는 사람이 손님들 술집에 데려가는 건 당연한 건데, 내가 그걸 피해다녀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리고 술 마시고 바람 한번 피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가 그런 게 있다면 맞는지 틀리는지 솔직히 얘기해 줄 테니까 가져와 보라는 거죠.”
—그래도 꼬투리 잡힐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나온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집 사주고 몇천만 원씩 준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 왜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느냐는 거죠.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탤런트 허모에게 한 달에 몇천만 원씩 주면서 그랬다는데 나는 그 사람 알지도 못해요. 그것 때문에 술집 마담한테 전화가 왔어요. 검찰하고 안기부에서 그걸 확인해 달라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는데도 막 적어 갔다고. 그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손님하고 술집에 가서 접대하고 어쩌다 오입 한 번 했어. 그게 뭘 어쨌기에, 그걸로. 술장사가 그것도 못 하면 어떻게 장사를 해요. 그런 거 가지고 7공자, 8공자라고 하면 대한민국에 공자 아닌 사람 없게요? 도덕적으로 ‘이런 놈’이란 작업을 먼저 해놓으니까 내가 뭐라고 해봤자 먹히겠느냐고요?”
—김영삼 정부 권력 실세, 재벌 2세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았나요.
“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만난 건 맞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술 마시고 일반적인 그거였었지.”
“하루에 보통 룸살롱 2곳 갔다”
—조금만 알아봐도 이 정도로 나오는데 7공자 얘기가 안 나오겠습니까.
“그런 건 사치하고 낭비하는 사람들한테 하는 얘기지, 나는 그런 적이 없어요. 업무 중의 하나니까 일을 열심히 한 건 있어도.”
—YS 당시 오모, 김모씨 등 안기부 사람들과도 어울렸죠.
“오모씨는 대학 선배지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김모씨랑 같이 만난 적도 없어요.”
—주로 어떤 술집에 갔습니까.
“저녁때 자기들 업무 끝나고 나한테 습관적으로 전화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죠. 내가 늦게까지 일하는 거 아니까. 그래서 포장마차에 자주 가고, 감자탕집도 가고 그랬어요. 우리가 방탕한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룸살롱에선 얼마나 썼습니까.
“그때 우리 회사는 술장사를 하니까 당연히 몇 군데 들러야 했거든요. 한 2~3명 가면 1인당 양주 1병 마시는 수준이었죠.”
—룸살롱은 하루에 몇 군데나 갔습니까.
“보통 2곳은 갔죠. 이쪽 업소, 저쪽 업소 분위기가 어떤지 파악을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업소 사람들에겐 회장이 한 번 가주는 게 직원들 몇 번 가는 것보다 효과가 커요. 그러니까 다 그러고 다녔지.”
—업무 차원에서 룸살롱에 갔다는 얘긴가요.
“우리가 ‘임페리얼’을 만들었잖아요. 그게 제일 많이 팔리는 양주였는데.”
97년 DJ 대통령 당선에 기대감 가졌으나…
다음은 장진호 회장의 이야기다.
“처음엔 속으로 DJ가 진로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약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검찰, 안기부에 끌려다니면서 ‘쇼’가 아니란 걸 알았죠. DJ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1년8개월 동안 일주일에 3일씩 가서 난리를 치고, 고생하고. 이건 뭐 복수극도 아니고.”
—DJ가 압력을 행사했다면 대통령 임기는 5년인데, 왜 1년8개월만 조사한 겁니까.
“당시는 DJ가 노벨평화상을 타려고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제가 안기부에 대략 ‘예전 DJ와 이런 일이 있었는데 까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보고가 올라갔는지 조사를 그만뒀어요.”
—10여 년간 정치자금을 줬는데 DJ가 그렇게 할 이유가 있나요. 임춘원이란 방패가 없어져서 그런 겁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마지막에 제대로 이행을 안 했다고밖에 해석이 안 되더라고요. (DJ가) 그렇게 진로를 괴롭힐 이유가 뭐 있어요.”
이에 대해 임춘원씨는 다른 주장을 폈다. 다음은 2002년 12월 그가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김대중씨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체 오너들은 대개 퇴출됐습니다. 김대중씨는 그 사람들의 정치자금으로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내치는, 전형적인 토사구팽(兎死狗烹)식 정치행태를 취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르면 임춘원씨가 장진호 회장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배달사고를 내지 않았더라도 진로는 ‘팽’ 당할 운명이었단 얘기다.
이어지는 장 회장과의 문답이다.
—97년 대선 때 DJ 쪽에 자금을 줬습니까.
“안 줬습니다.”
—그것 때문에 밉보인 것 아닙니까.
“당시 DJ 쪽 인사 이모씨가 우리 장기하 사장을 찾아와서 요구했지만, 우리는 화의에 들어가는 상황이라 여유가 없었습니다.”
—얼마를 요구했습니까.
“얼마나 했는지는 몰라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겠죠.”
—이회창 후보에겐 줬습니까.
“이회창 후보에게도 안 줬는데요.”
장진호 회장이 이회창 후보에게 직접 돈을 전달한 사실은 드러난 게 없다. 그러나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동생 회성씨와 이석희 국세청 차장 등이 23개 대기업으로부터 한나라당 대선 자금을 불법모금한 ‘세풍’ 사건 당시 장 회장이 현금 1억원을 제공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총풍 관련자들에게 공작금 7000만원을 주기도 했다. 총풍이란 9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이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북한 측에 판문점 총격시위를 요청했다가 무위에 그친 사건이다.
—세풍, 총풍사건에 개입한 걸 보면 DJ는 장 회장이 이회창씨를 지원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이유로 악감정을 가질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선거 때 우리에게 자금을 요구한 걸 보면 그동안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의구심이 들어요. 그런 것 때문에 내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너는 風이란 風은 다 맞고 다니느냐?”
/2003년 9월 검찰은 장진호 회장을 배임 등 혐의로 구속했다.
—실제 진로는 문제가 많은 기업이었잖습니까. 조사할 것도 많았겠죠.
“그럼 우리가 부실해져서 자금이 없는데 무슨 선거자금을 내놓으라고 해요. 그런 얘길 하지 말아야지.”
—정치자금은 돈을 준 쪽이 칼을 쥔 것 아닙니까. DJ가 굳이 진로를 건드릴 이유가 있었을까요.
“둘 다 칼날 위에 서 있는 거죠. 어떻게 받은 사람만 서 있겠어요? 대가성이라면 양쪽 다 서 있는 거죠.”
—대가성으로 준 게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아니죠. 대가성이 아니더라도 정치적 거래를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떳떳한 일은 아니죠.”
—검찰이 제시한 자료 중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총풍, 세풍이죠. 그때 김태정 검찰총장이 ‘너는 풍이란 풍은 다 맞고 다니느냐’고 했어요. 또 이회창씨한테 돈 준 거 내놓으라고 하는데 없잖아요. 계속 그 관련 자료만 수십 개 갖다댔어요. 안 준 걸 줬다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회창씨를 만난 적은 있거든요.”
—만나서 무슨 얘길 했습니까.
“얘기한 것도 별로 없어요.”
—목적이 있으니까 만났을 것 아닙니까.
“이회성씨는 내가 혹시 돈이라도 주려나 싶어 자리를 만들었는데, 난 돈이 없으니까 줄 게 없죠. 그래서 덕담이나 하고 나왔죠.”
—한 번 만났습니까.
“두 번입니다. 두 번째도 역시 없으니까 못 준 거고요.”
—그럼 DJ는 만났습니까.
“나는 이회창씨든 DJ든 만나고 싶지 않았다니까요. 이회성씨에게 만나게 해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정학모 사장에게도 ‘내가 DJ를 만나러 가는 것보다는 지금 우리 형편이 좋지 않으니까 당신 선에서 적당히 조정하라’고 하고 물건이나 상품을 지원했어요.”
—얼마나 갔습니까.
“와인 몇 박스, 양주 1000병 이런 식으로 갔습니다. 그건 기증으로 처리할 수 있거든요.”
—당시 누구를 지지했습니까.
“솔직히 되는 사람을 지지하려고 했죠. 아무래도 여당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누가 돼도 나야 큰 문제가 없었고, 회사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파산부 판사와 골드만삭스 측 변호사의 골프회동
진로의 화의 기간은 5년이었다. 이에 따라 진로는 5년간 부채 원금 상환을 유예받으며 자산 매각과 외자 유치를 통한 기사회생을 도모했지만, 2003년 3월 31일 화의 조건에 따른 첫 분기 원금상환을 이행하지 못했다.
같은 날 진로는 “1조600억원의 외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으니 기존 화의 조건을 바꾸고 원금 상환을 추가로 유예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진로 채무는 1조7000억원이었다.
진로는 98년 2월 화의 개시 결정 이후 2002년 말까지 채무 9600억원을 정산했지만, 이는 대부분 이자에 불과했다. 당시 재무구조를 볼 때 채무 1조7000억원에 대한 원리금 상환은 대규모 외자 유치가 없는 한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진로 주요 채권자인 미국계 투자금융회사 골드만삭스는 계열사 세나인베스트먼트를 통해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회사정리절차 개시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골드만삭스의 손을 들어 진로에 법정관리를 선고했다. 이후 진로는 매각 절차를 거쳐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팔렸다.
장 회장은 “연간 영업이익 2000억원을 내는 회사가 법정관리로 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며 긴 시간 동안 격정적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골드만삭스는 1년6개월~2년 전에 진로를 탈취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뒤에는 누군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내 생각으로는 DJ 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로 법정관리는 법원이 결정한 것이다. 여기에 DJ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볼 만한 정황을 찾기도 어렵다.
물론 이 같은 법원의 판단이 내려지는 과정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었다. 골드만삭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한 달 전 골드만삭스 측 변호사가 파산부 수석부장판사와 만나 골프를 쳤기 때문이다. 골프 회동이 법정관리 신청을 위한 사전 모임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됐다.
2003년 3월 8일 골프를 함께 친 인사들은 서울지법 파산부 변모 부장판사, 골드만삭스 측 소송대리를 맡았던 김모 변호사, 강모 변리사, 문모 전 진로 사장 등이다. 진로의 법정관리 개시신청은 4월 3일이다.
“채권 자기거래가 불법인 줄 몰랐다”
진로가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매각된 가장 큰 원인은 장진호 회장 본인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화의 기간 그의 행적은 부채 상환보다 경영권 방어에 치중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장 회장은 2001년부터 2003년 초까지 H사, C사 등 CRC(기업구조조정) 전문회사들에 예금담보 제공 등의 방법으로 자금 897억원을 지원, 약 5800억원대의 진로 채권을 간접 매입했다.
장 회장에 따르면 그는 진로그룹 재무팀장 오모씨에게 6000억원의 채권 확보를 추진하는 CRC 설립을 지시했다. 오씨는 국세청 출신으로 85년부터 진로그룹에서 일하면서 그룹 전체의 자금조달, 자금운영에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한 장 회장의 최측근이다.
장 회장은 CRC를 통해 진로그룹 채권을 헐값인 액면가의 10% 선에서 사들여 약 5000억원의 차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한마디로 회삿돈으로 내부정보를 이용, 헐값에 채권을 매입해 차익을 노렸다는 얘기다.
—채권 매입자금 출처는 어디입니까.
“진로에서 자금을 줬다고 다 나왔잖아요. 그거 예전에 검찰에서 수십 번 한 내용이에요. 다 조사받은 내용이라고요.”
—채권의 자기거래는 법에 어긋나지 않나요.
“자기 채권을 사는 게 왜 불법인지 옛날엔 몰랐습니다. 나중에 불법이라고 하니까 안 거죠. 맨 처음에 검토할 때는 그런 내용이 없었어요.”
—부채 상환보다 경영권 방어, 사익 실현에 집중한 겁니까.
“부채 상환이 뭡니까. 채권을 누가 사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경영권 방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동시에 채무는 소멸하니까 갚는 거랑 다를 게 없는 겁니다.”
그러나 장 회장은 여기에서 별다른 이익을 얻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중간에서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돈 없어 귀국 못 해”
한편 장 회장은 캄보디아로 출국할 당시 아내 명의로 된 집을 담보로 대출받고, 주위의 도움을 얻어 마련한 20억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출국 과정에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했지만, 자금 문제는 그렇지 않다. 20억원을 캄보디아로 어떻게 가지고 갔을까. 장 회장은 “20억원 중 대부분은 ‘코리막스’ 정모씨로부터 송금받은 돈”이라고 말했다.
코리막스는 이탈리아 명품 여성복 브랜드 ‘막스마라’의 한국과 홍콩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로 전국 유명 백화점 대부분에 입점해 있다고 한다. 장 회장은 96년 60억원을 빌려 이 회사 지분을 차명으로 인수했다고 한다. 이 문제로 장 회장과 정씨는 그 후 소유권 분쟁을 벌이게 된다.
장 회장은 캄보디아에서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다. 훈센의 딸 훈마나와 공동명의로 ABA(은행)를 경영했다. 차명으로 KTV(룸살롱)를 소유했고, 부동산 개발업체, 경견장(競犬場) 설립을 추진했다. 이런 사실은 장 회장이 한국에서 재산을 빼돌렸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에 대해 《시사저널》은 2010년 3월 장진호 회장과 관련해서 5개의 기사를 보도했다.
장 회장의 반론을 들어봤다. 그에 따르면 경견장은 허가를 내준 경찰청장이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한다. 부동산 개발도 중단했다. KTV는 그가 돈을 빌려준 강씨 형제에게 사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인수했고, 은행의 경우엔 자본잠식 상태에서 무상으로 51% 지분을 인수해 약 2년 동안 밤잠을 자지 않고 일해 정상화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06년 카자흐스탄 업체에 은행을 매각하고 중국으로 건너왔다.
《시사저널》은 장 회장 측근의 입을 빌려 은행 매각 후 세금을 내지 않아 캄보디아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장 회장은 ‘먹튀 의혹’을 부정하며 “밑에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범죄자여서 캄보디아에서 더는 사업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06년 말 장 회장은 은행 매각대금 2000만 달러로 홍콩에 ‘벌웍스’란 펀드를 만들어 자신의 자금원으로 활용했다. 펀드 지분은 훈마나와 50%씩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에 온 장 회장은 “2006년 다롄에 1300만 달러를 들여 나노기술 관련 연구소를 세워 한국에 상장하려 했지만, 2007년 같이 일하던 고모씨가 국정원 기술유출 단속에 걸려 망했다”고 말했다.
장 회장에 따르면 이 사건은 나중에 그와는 관련이 없는 걸로 판명됐지만, 연구소는 문을 닫았고, 자금을 투자한 ‘벌웍스’도 자산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됐다고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얘기하는 그에게 대놓고 물었다.
—호화 도피 행각, 해외 차명 재산 보유를 전면 부정하는 겁니까.
“작년에 국세청에서 세무특별조사반 3명이 왔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전 대기업 총수 12명의 차명 재산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건 장 회장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사업한 돈들은 해외 나와서 밤잠 안 자고 일해서 번 겁니다.”
그의 주장대로 “국세청 조사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비판할 만한 일은 크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는 건 ‘없다’의 동의어는 아니다.
장 회장은 “국내 문제들을 정리하고 떳떳하게 사업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다음은 그와의 문답이다.
—귀국할 생각은 없습니까.
“초법적 조치로 세금을 물려 한국에 있으면 사회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소송을 해야 하는데 공탁금이 없어요. 또 일일이 대응하려면 그게 다 돈 아닙니까. 그런데 나는 돈이 없거든요. 그래서 내가 여기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다 망했죠. 앞으로 파이낸싱을 통해 광물자원 쪽 일을 해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왜 다 망했습니까.
“내가 이런 상태로 있으니까 뭔가 있는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내가 하는 걸 먹을 수 있다고 접근을 하는 거겠죠.”
—그간 주위 사람들로부터 뒤통수를 많이 맞았습니까.
“내가 이제 떳떳하게 일할 수 있도록 과거의 문제들을 털어야겠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고 싶습니다.”
—금액이 가장 큰 채권 문제는 어떻게 정리할 겁니까.
“잘못한 것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채권 상환금은 국가에 대한 공적자금 회수, 국세 추징 등 국고로 먼저 환수돼야 하겠죠. 법적 절차에 따라 해결할 생각입니다.”
—본인이 책임질 부분에 대해서도 다 털어버릴 각오가 돼 있다는 얘깁니까.
“잘못이 있다면 그에 책임지고 떳떳하게 살고 싶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해서 재기하고 싶습니다.”⊙
출처 | 월간조선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2015.08.06 '93세 청년' 신격호의 83兆 구멍가게
1941년 봄, 종축장에서 일하던 19세의 청년 신격호는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고 현해탄을 건넜다. 수중에 쥔 것이라고는 면 서기 두 달치 봉급 83엔이 전부였다. 갖은 고생 끝에 와세다고등공업학교(지금의 와세다대) 야간부 화학과에 진학한 그에게 한 일본인이 선반용 오일을 만드는 사업을 해보라며 자금을 빌려줬다. 이 계기로 사업가가 된 청년은 패전의 상흔이 짙은 일본 땅에서 미군이 던져주던 달콤한 추잉껌을 보고는 껌을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 일본에 세워진 롯데제과는 껌, 과자, 초콜릿을 성공시키며 일본 제과업계 신성(新星)으로 떠올랐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양국을 오가는 문이 열리자 한국에도 롯데제과를 세웠다.
1973년 4월 26일자 조선일보 2면에는 '반도호텔-구(舊)아서원-국립도서관 대지에 日 롯데서 대규모 호텔'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큼직하게 실렸다. '일본 롯데주식회사가 4800만달러의 투자·차관 자금으로 36층짜리 호텔을 짓는 외자 도입안을 승인한다'는 뉴스였다. 나라 전체에 외자 한 푼이 아쉬웠던 시절 박정희 정부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했어도 외국에 10년 이상 영주하면 외국인 대우를 해준다'는 법 조항을 만들고 신격호를 비롯해 재일교포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팔 걷고 나섰다. 특별 대접을 받으며 호텔 산업에 진출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세계적 호텔을 짓는다는 건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1970년대 오일 쇼크로 롯데호텔 투자비는 당초의 3배 가까운 금액(1억4500만달러)이 들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와 맞먹는다. 그래도 투자를 포기하지 않은 건 가난한 조국을 더 낫게 만들고 싶어 돌아온 기업 보국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70여년 전 83엔을 손에 쥐고 떠난 청년이 83조원 매출을 올리는 한국 5위의 재벌그룹 총수가 되기까지 얼마나 열정과 끈기가 남달랐는지 일화는 숱하다. 90 넘어서도 매일 계열사와 현장을 챙겼다. 오랫동안 지켜봐 온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은 그를 "아흔 나이에도 꿈꾸는 청년"이라고 표현했다. "회장님께 좀 쉬셔야 한다고 하면 대답은 한결같다. '나는 24시간 생각해. 꿈을 꾸고 설계를 하는 거야. 뭐든지 하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는 거야.'"
일에만 열심이지 말수도 조용해 언론 인터뷰도 잘 안 했던 그가 어쩌다 짙은 분장에도 숨길 수 없는 쇠잔한 얼굴로 TV 화면에 등장해 떠듬떠듬 "롯데는 내가 70년 동안 일궈 왔다"고 말하는 초라한 신세가 됐을까. 일본 미쓰이물산 전략연구소는 롯데의 성공과 약점을 이렇게 분석했다. '일본과 한국 양쪽에 기반을 두고 양국 간 경제 격차를 활용해 기업을 성장시켜 왔다. 그러나 지주회사나 그룹의 의사 결정을 하는 공식 구조가 구축돼 있지 않다.'
오늘의 롯데를 키운 것도, 작금의 롯데 막장 극도 공룡처럼 커진 그룹을 창업자 혼자 70년 전 열정, 30년 전 꿈으로 끌어오는 데 익숙해온 '오너 1인 경영'의 명암이다. 두 아들 싸움에 친·인척까지 등장한 '롯데 활극'은 막장 드라마 한 편 본 셈 치면 된다. 문제는 이참에 들여다본 롯데그룹의 민 낯이 불투명하고, 주먹구구식 경영이 판치는 '83조원짜리 구멍가게'라는 데 있다. 그건 롯데가(家)의 문제가 아니라 몸담은 18만명 직원과 그 가족들, 수만개 협력업체에 영향 미치는 사회적 사안이다.
93세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달려나가는 창업자에 대해 "시대가 달라졌다" "그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내부 견제 장치라고는 없는 지배 구조, 무려 400개 넘게 꼬이고 꼬인 계열사 간 순환 출자, 총수는 100만원 단위까지 꼼꼼히 살피고 검소하다지만 직원들 월급까지 지나치게 검소해 협력업체에 도 넘은 갑질 횡포와 금품 유혹을 종종 드러내는 후진적 기업 이미지가 오늘의 롯데그룹이다.
고령화를 연구해온 아툴 가완디 하버드의대 교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르쳐 준 건 굴하지 않는 인내와 끈기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아버지가 삶의 마지막 여정을 걷는 걸 지켜보면서는 한계를 극복하는 용기보다 더 어려운 게 바로 직면한 한계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려놓는 용기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남다르게 역경을 극복한 인물일수록 자신의 한계와 나이 듦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신격호 회장은 입버릇처럼 "내 남은 꿈은 한국에 세계 최고의 제2롯데월드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도 휠체어 탄 몸으로 123층짜리 제2롯데월드 공사 현장을 찾았다. 만약 그가 123층 건물을 짓겠다는 30년 꿈에 집착하는 대신 30년 전부터 '포스트 신격호'에 대신 꿈꾸어 줄 123명 후계자군을 키우겠다는 포부로 회사 경영과 지배 구조를 선진화했더라면 롯데그룹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집안의 진흙탕 싸움에 '83조원짜리 구멍가게'를 움켜쥔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해 남달랐던 애국심과 경영 성과마저 송두리째 폄하되는 상황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큰 구멍가게가 얼마나 투명하고 선진화된 기업군으로 변신할지는 우리 사회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내야 할 롯데그룹의 최대 숙제임에 분명하다.
조선일보 강경희 경제부장
2015.09.02 박성동 쎄트렉아이 대표의 '우리별'
1989년 '우리별 1호' 위해 5명 英 유학
'기술 못배우면 도버해협에 빠져죽는다' 죽기살기로 낮엔 납땜, 밤엔 쪽잠 공부
1992년 우리나라 첫 위성 발사 성공
7년 뒤엔 100% 국내 기술로 제작한 '우리별 3호'까지 쏘아올리는 쾌거
/故 최순달 교수
고등학교 때까지 내 꿈은 의사였다. 그런데 의대가 아니라 KAIST(한국과학기술원) 전자공학과로 진학한 것은 오로지 학비가 무료였기 때문이다. 나는 3형제 중 막내였다. 우리 집은 한 번에 대학생 둘의 학비를 대기 어려웠다. 둘째 형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대학생이던 큰형은 군대에 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내 꿈과 상관없이 대학에 가다 보니 학교생활은 별 재미가 없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쳤을 즈음 운명적 기회가 왔다. 학교가 경비를 대고 영국 서리(Surrey)대에 파견돼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개발할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서리대는 당시 인공위성 기술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대학에 속했다.
나는 "무료 유학이나 가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유학 설명회에 참석했다. 그때 학생들 앞에 선 고(故) 최순달 교수님이 내 인생을 바꿨다. 단돈 25달러를 쥐고 미국으로 유학 간 최 교수님은 선진 기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연구실 쓰레기통까지 뒤졌던 분이다. 나중에 고국에 들어와 전자통신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TDX 전자교환기 개발을 이끌었다. 최 교수는 이후 KAIST로 와서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세웠다.
◇쓰레기통 뒤지며 개발한 우리 별 위성
학생들 앞에 선 교수님은 칠판에 'devotion(헌신)'이란 단어를 쓰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런 좋은 환경에서 공짜로 공부하는 것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너희가 공부하는 데 들어간 비용 중 일부는 시장에서 채소나 생선을 파는 할머니의 전대에서도 나왔음을 명심해라. 그것은 너희에게 이 세상을 좀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바꾸는 데 기여해 달라는 뜻이다. 너희가 받은 혜택의 곱절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가져라. 나는 우리나라의 위성 기술 개발에 헌신할 친구들을 찾는다."
노(老)교수님의 말씀은 별생각 없이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려던 내게 뒤통수를 망치로 친 듯한 충격을 줬다.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내 피를 끓게 할 일을 찾은 것이었다. 그해 나를 포함해 5명이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개발하러 1989년 서리대로 유학 갔고, 이듬해 4명이 합류했다. 최순달 교수님은 "거기 가서 위성 제작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도버해협(영국~프랑스 간 해협)에 빠져 죽어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교수님 말씀대로 목숨을 걸었다. 9명 모두 1년 만에 석사 논문을 마치고 위성 제작에 투입됐다. 적은 인원으로 위성의 전 분야를 책임지다 보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낮에는 전파 수신기를 만드느라 납땜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밤에는 위성과 관련된 열역학 문제를 풀다가 실험실에서 쪽잠을 자기 일쑤였다.
우리는 미국에서 최 교수님이 했던 일을 영국에서도 그대로 했다. 당시 실험실에서는 레이저 프린터 한 대를 여럿이 같이 썼다. 영국 연구원들은 프린터로 자료를 출력했다가 고칠 게 있으면 이미 출력한 자료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 우리는 그들이 없을 때 쓰레기통을 뒤져 참고할 만한 자료를 챙겼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우리가 부족한 부분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데 무엇이 부끄럽단 말인가.
◇세계 3대 소형 위성 업체로 발돋움
그 사이 한국에도 우리와 똑같이 위성 개발을 진행하는 '그림자' 연구팀이 꾸려졌다. 영국에서 우리가 배운 것을 한국에서 그대로 해보고 뭔가 막히면 다시 영국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반복됐다. 덕분에 1992년 8월 11일 우리별 1호 발사에 성공한 지 1년 만에 한국은 금방 '우리별 2호'를 발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9년에는 마침내 100% 우리 힘만으로 만든 인공위성 '우리별 3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소형 위성 분야에서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기쁨은 잠시였다. 1997년 시작된 외환 위기는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1999년 정부는 업무 효율화 차원에서 우리 센터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통합하려고 했다. 나를 포함한 서리대 유학파는 항공우주연구원에도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 있던 연구진은 그렇지 못했다.
그해 12월 나를 포함해 7명이 먼저 퇴직해 국내 최초의 인공위성 전문 기업 쎄트렉아이를 설립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말렸지만 우리는 절실했다. 우리가 만든 인공위성이 실험실에서만 존재하는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외 출장을 가장 많이 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로 내가 대표를 맡았다.
해외에서는 이미 우리별 위성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회사 설립 이후 1년 만에 말레이시아에서 첫 위성 사업을 수주했다. 그때쯤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의 동료 절반이 우리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말레이시아에 이어 싱가포르·터키·아랍에미리트(UAE)·스페인에도 잇따라 인공위성을 수출했다. 국내에서도 다목적 실용위성(아리랑위성)과 통신해양기상위성, 나로호 우주발사체 개발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위성이 별을 관측해 자세를 확인하는 '위성용 고속·고정밀 별 추적기'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쎄트렉아이는 자회사 두 곳과 직원 220명을 둔 회사로 성장했다.
쎄트렉아이는 영국 서리대가 세운 SSTL, 유럽연합의 에어버스와 함께 세계 3대 소형 위성 제작 업체로 통한다. 이제 내 꿈은 우리별에서 시작된 한국의 인공위성 기술이 조만간 세계의 '별'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박성동 대표는…
박성동(48) 쎄트렉아이 공동대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개발한 주역이다.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영국 서리대로 유학을 가서 우리별 위성 제작에 참여했다.
2000년 1월 연구센터 동료들과 인공위성 제작업체 ‘쎄트렉아이’를 창업, 회사를 세계 3대 소형 위성 제작 업체로 키웠다. 2013년 3월 대학 동기이자 함께 창업한 김병진 부사장에게 사장 자리를 넘기고 공동대표 겸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평소 “나는 주연보다 조연이 어울린다”며 주변 사람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적극적이다.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창업 대사’로 선임돼 대덕연구단지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들의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조선일보 이영완 기자
2015.12.29 위기의 한국물류산업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의 인접거리에 현지물류 대기업인 에쿠수포랑카 홀딩스의 국제물류센터가 있다.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에서 생산된 봉제품이 여기로 운반되어 목적지로 가기 위하여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화물의 목적지는 중동이나 유럽이다.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18개국에 약 60개의 물류거점을 확보하여 물류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회사이다.
이처럼 성장성이 높은 시장에 발판을 구축하고 있는 이 회사를 일본기업이 인수하여 엄청난 이익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일본 회사가 에쿠스포랑카를 매수한 이유는 이 일본회사가 갖고 있는 일본과 동아시아의 물류거점과 통합한다면 다양한 서비스제공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산항 감만부두 컨테이너야드 전경. /조선일보 DB
[일본기업 SG홀딩스는 2014년 6월에 약 80억엔에 매수하여 불과 1년도 안된 2015년 5월에 벌써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인수한 스리랑카의 물류회사 에쿠스포랑카를 통하여 인도재벌 관계사의 수송업무를 수탁하였고, 3월에도 미국 스포츠용품 대기업으로부터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의 현지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유럽시장으로 수송하는 업무를 수주하였다. 일본기업 단독으로서는 도저히 취급할 수 없는 업무를, 스리랑카에 기반을 둔 물류회사를 인수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회사 관계자는 말한다. 긴데쯔(近鉄) 익스프레스 산하의 싱가포르 물류회사 APL홀딩스는 콜롬보 근교에서 약 1만 평방미터의 부지에 창고와 컨테이너용 하역부지를 정비하고 있다.
일본 물류회사의 이곳 진출은 오히려 늦은 셈이다. 독일의 DHL은 스리랑카 최대재벌인 존 키일즈 홀딩스와 제휴하고 있고, 미국의 Fedex 등도 이미 이곳에 진출해 있다. 스리랑카 국가차원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항만정비도 진행되고 있다. 콜롬보항에서는 중국의 항만운영대기업 초상국국제(招商局國際)라는 회사가 대형컨테이너 터미널을 정비하여 2013년부터 가동하고 있다. 이 해의 컨테이너 취급물량은 431만 TEU(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길이 20ft의 컨테이너 박스 1개를 나타내는 단위)로 인도의 최대항구인 인도 서해안의 자와할랄 네루항(JNPT)을 추월하여 남아시아 최대항구로 부상하였다. 그럼에도 또 다른 터미널 건설도 계속 진행형이다. 여기에 더하여 현지 당국은 항만이용료를 타국에 비하여 염가로 받고 있다. 인접 인도항만에 비하여 통관절차도 간소화하여 수일 내면 모든 절차가 완료된다. 또한 통관시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인도양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스리랑카에서 동남아시아, 인도, 유럽,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는 수송망을 만들기에 최적지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과거 내전에 시달리던 소국이 국제무역의 요충지로 진화하고 있다. 이 지역은 세계 탱커(석유·가스·휘발유 등을 싣고 다니는 대형선박)의 3분의 2, 컨테이너선의 약 2분의 1이 통과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도양에 면한 약 20개국이 가맹한 환태평양연합(IORA)의 인구는 2040년에는 세계인구의 3분의 1. 세계 GDP의 12분의 1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그래서 스리랑카는 환인도양경제권의 배꼽으로 불린다. <②편에 계속>
허약하기 그지없는 한국 물류산업, 이유는?
<①편에서 계속>
물류산업은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이고, 모든 산업을 이어주는 연결과 소통, 그리고 의사결정의 기초를 이루는 분야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우리 정부에서도 “최근 물류산업은 전자상거래, 드론, 사물인터넷 같은 첨단분야와 융합하면서 고부가가치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변화 속에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물류일자리들이 청년고용으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스리랑카의 물류허브 부상(浮上)에 우리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 나라 국내시장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택배시장 조차 국내 물류회사가 아닌 DHL, UPS, Fedex 등 세계적 물류회사들이 공략을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내 국제택배시장은 DHL 50%, Fedex 와 UPS 가 각 20% 씩 차지하고 있어 우리의 존재감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인천의 한 쿠팡 캠프에서 쿠팡맨 수십 명이 트럭에 배송 상자를 싣고 있는 모습. /오종찬 기
한국 물류산업의 현주소는 왜 이다지도 취약한 걸까? 잘못된 정책과 제도 때문이다. 먼저, 국가로부터 면허를 받은 물류회사들이 책임을 저버리고 지입(持入)제도를 통한 이른바 면허장사로 연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력(운전기사)관리, 위험관리, 관련서비스개발, 해외배송, 물류정보관리 등 주요역량이 지입제 환경에서 개발될 이유가 없다. 다른 하나는 물류산업도 다른 서비스사업과 마찬가지로 재벌이 내부거래로 진출해 있다. 이처럼 안정적인 그룹계열사의 내부시장에서 위험감수와 역량개발을 할 유인이 없음이 자명하다.
우리 물류회사는 고질적인 지입제도로 기초체력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고 하여 지입차주들의 생활이 그다지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화물연대의 운송거부로 물류가 마비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국내물류회사의 건전한 육성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도 이 같은 발빠른 세계적 물류회사의 움직임으로 우리 젊은이들의 미래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중국, 러시아가 인접해 있는 기회의 삼각주 구상도, 통일 후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여 우리의 국부를 일거에 끌어올리려는 거대한 구상도, 기초체력 없는 물류회사들을 두고서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장래의 일은 고사하고, 당장 젊은이들이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도 제도적 장치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여 그 호기를 놓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선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변호사) E-mail : sjchoi@ahpek.or.kr
행정고시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재무부에서 13년 정도 근무했다. 그 후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약 24년간 일했다. 그 사이에 국세청. 기획재정부, 법제처, 감사원, 청와대, 금감원 등에서 법률고문 및 각종 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국민연금과 교직원공제회의 투자심의위원회 위원을 지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YS정부 시절에는 신산업정책의 입안과 부동산실명제 입법에 참여하였다. 대통령표창, 산업포장, 산업훈장 등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대학은 물론이고 정부기관에서 강연활동도 하고 있다. 현재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으로 기업의 글로벌 비지니스에 필요한 법률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도쿄대 법대와 하버드 법대, 독일의 막스프랑크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저서에 ‘논점 조세법’, ‘국제조세법강론’, ‘세정비화’가 있다.
2016.04.17 30대 대기업진단 30년 변천사
현대그룹과 재계 1~2위를 다퉜던 1980~90년대는 대우그룹의 전성기였다. 섬유 사업으로 회사를 세운 대우는 전자·자동차·건설 등으로 빠르게 영역을 넓히며 1980년대 크게 성장했다. 1990년대 초 김우중 전 회장이 주창한 ‘세계경영론’은 한국 기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대우는 당시 진출을 꺼렸던 공산권 국가를 포함해 전 세계 곳곳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대우·쌍용 등 역사의 뒤안길로 … 셀트리온·카카오, 벤처 첫 이름 올려
약 10년 사이 덩치는 확 커졌지만 내실은 그렇지 않았다. 공격적 글로벌화에 따른 과도한 차입 경영의 한계가 외환위기의 삭풍 속에 여실히 드러났다. 1998년 시작한 구조조정마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대우자동차는 GM에 팔렸고 대우전자·대우건설·대우중공업 등 다른 핵심 계열사 역시 줄줄이 채권단의 손을 거쳐 새 주인에게 넘어갔다. 아직 일부 계열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2016년 한국 경제에서 대우그룹의 향기는 거의 사라졌다.
초고속 성장한 삼성 독보적 1위
30년 전인 1986년 국내 30대 그룹 리스트를 보면 지금과 차이가 크다. 최상위권에 속한 기업은 비슷하지만 중하위권 그룹은 순위가 크게 요동쳤다. 주인과 이름이 바뀌지 않은 그룹은 5~6개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집단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이다. 당시엔 4000억원 이상이었다. 2002년 2조원으로 기준이 바뀌었고, 2009년 5조원으로 또 한 번 바뀐 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986년까지만 해도 30대 그룹 중엔 계열사가 2~3개뿐인 곳도 있었다. 대기업이 본격적인 문어발식 확장을 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30대 그룹의 계열사 수는 약 420개였다. 2015년 30대 그룹의 계열사 수는 1036개다.
1986년 30대 그룹에 이름을 올렸던 기업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10개 정도다. 이 사이 삼성그룹은 ‘여럿 중 하나(One of them)’에서 ‘독보적 선두(No.1)’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1993년까지 현대와 대우에 이어 자산 규모 3위였던 삼성은 1994년 처음으로 1등이 됐다. 그룹 내 상장 계열사의 시가 총액도 1993년엔 현대·대우·럭키금성에 이어 4위였지만 1994년 1위에 올라선 뒤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6년에 비해 매출과 시가총액은 각각 32배, 33배로 증가했다. 2012년엔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매출 300조원을 돌파했고, 코스피 시가총액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그룹으로 진화했다. 한때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반도체와 가전, 휴대전화를 중심 축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국내 기업이기도 하다.
1986년 1위였던 현대그룹은 상속 과정에서 현대차그룹·현대중공업그룹·현대그룹으로 분리됐다. 현대차그룹은 분리되기 전 현대그룹보다 덩치가 5배 이상 커졌다. 국내 자동차 업계에선 경쟁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입지가 탄탄하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5~6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품질과 브랜드 인지도면에서도 글로벌 기업으로 분류할 만큼 성장했다. 현대중공업은 3~4년째 이어지는 조선 업계의 불황으로 부침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재계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자산 5조원 기준 바꿔야’ 목소리 높아져
현대그룹처럼 계열 분리한 LG와 GS 역시 사업을 키웠다. 현재 LG는 재계 6위, GS는 9위다. LG는 전자와 화학, GS는 에너지와 유통 업계에서 각자의 영역을 굳혔다. 1986년 재계 10위였던 SK그룹(당시 선경)은 2005년 3위로 올라선 뒤 1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산과 매출, 시가총액 모두 10배 이상으로 늘었다. 대기업집단 중 삼성 다음으로 성장세가 가팔랐다. 1970년대 초반 정유 사업에 뛰어들어 이 분야 1위로 성장했고, 1994년 이동통신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세를 크게 키웠다. 2012년에는 하이닉스를 인수해 다시 한 번 신시장 개척에 성공했다. 지금은 재계 순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롯데가 1986년엔 30대 그룹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것도 특이한 점이다. 1986년 16위였던 두산그룹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순위가 같다.
1986년 재계 순위 5~6위였던 국제그룹과 쌍용그룹은 나란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85년 전두환 정부에 의해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은 국제그룹은 1986년 12월 한일그룹에 흡수됐다. 당시 해체 과정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1939년 비누공장으로 출발한 쌍용그룹은 보험·무역·시멘트·중공업·건설로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사업 영역을 확대하며 1990년대까지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자동차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룹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주력 계열사인 쌍용제지·쌍용자동차·쌍용정유·쌍용중공업 등을 차례로 매각했지만 결국 살아나지 못했다. 한때 그룹의 주축이었던 쌍용건설은 두 번의 워크아웃을 겪고 2014년 상장폐지됐다. 이 밖에 1986년 재계 8위였던 범양상선은 STX그룹에 흡수됐고, 고려합섬은 고합그룹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규모가 크게 줄었다. 부동산 붐을 타고 승승장구했던 진흥기업·삼익주택 등도 사실상 재계 지도에서 사라졌다.
4월 3일 공정위가 발표한 ‘2016 상호 출자제한 기업집단 현황’을 살펴보면 지난해 기준으로 자산총액이 5조원 이상인 기업집단은 총 65개다. 이들이 거느린 계열사는 총 1736개, 자산은 전년 대비 79조원 증가한 2337조원으로 집계됐다. 65개 대기업집단의 재무구조는 전년보다 나아졌다. 부채비율은 줄고, 당기순이익은 늘었다. 당기순이익은 55조원으로 전년 대비 약 13조원 증가했다. 하지만 대기업의 매출액은 3년 연속 감소했다. 65개 대기업 집단의 지난해 매출액은 1403조4000억원으로 전년 보다 6.8% 줄었다. 매출이 줄고 당기순이익이 늘어나는 ‘불황형 흑자’다.
삼성(348조2000억원)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고, 현대자동차(209조7000억원)가 한국전력공사(208조3000억원)를 제치고 2위에 올라섰다. 지난해 28위였던 동부는 구조조정 여파에 45위로 추락했다. 롯데는 활발한 인수·합병(M&A)으로 LG의 4위 자리를 넘보고 있다. 삼성으로부터 4개 계열사를 인수하며 몸집을 불린 한화는 대기업집단 가운데 자산이 가장 많이 늘었다.
새로운 얼굴도 눈에 띈다.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카카오와 셀트리온이 처음으로 대기업집단에 편입된 것. 올해는 카카오·하림·셀트리온을 비롯해 SH공사·한국투자금융·금호석유화학 총 6개사가 새로 추가됐다. 카카오는 올 1월 로엔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하면서 자산이 5조1000억원으로 불었다. 계열사도 45개로 늘었다. 셀트리온은 자산 가치가 5조9000억원으로 상승하며 대기업 집단에 포함됐다. 최근 주가가 크게 오른 덕이다. 하림은 지난해 자산 규모 4조2000억원의 팬오션을 인수했다. 이후 자산 가치가 9조9000억원으로 급증한 하림은 진입과 동시에 순위도 38위로 껑충 뛰었다. 이로써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홍국 하림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에겐 ‘총수’ 타이틀이 붙게 됐다.
대기업-중소기업, 대기업 간 양극화 심화
카카오나 셀트리온 입장에서 ‘대기업집단 편입’은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다.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계열사 간 상호출자와 신규 순환출자, 채무보증, 일감 몰아주기를 할 수 없다. 대규모 내부 거래, 비상장사 중요 사항, 기업집단 현황 같은 경영상 주요 내용도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당장 카카오는 추진 중인 인터넷전문은행 사업에 차질을 빚게 됐다. 현재 국회에는 인터넷전문은행에 한해 은산 분리(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 제한) 원칙을 적용 하지 않거나 완화해주는 법안이 올라가 있다. 그러나 적용 대상을 대기업집단이 아닌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카카오에게 자산 규모가 약 70배 큰 삼성(348조원)과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자산 기준을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높여야 한다고 정부에 공식 건의했다. 대기업집단 지정에 따른 각종 규제 부담이 중견기업의 성장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공정위 역시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곽세붕 공정위 경쟁정책국장은 “대기업집단 관리의 효율성 측면에서 본다면 상향 필요성은 있다”면서도 “추진 방법이나 추진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숱한 위기를 딛고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왔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는 해결 과제다. 일부 대기업이 초고속 성장을 하는 동안 여전히 중소기업은 대기업과의 종속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의 수출 비중이 2013년 66.8%, 2014년 66.1%, 2015년 64.1%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3분의 2가 대기업에 집중돼 있다. 고용 역시 중소기업이 전체의 87% 담당하지만 임금은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62% 수준에 머문다.
대기업 내에서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자산 기준 30위에 속하는 대기업집단 중 삼성·현대자동차·SK·LG 상위 4개 그룹의 자산 총액은 지난 5년 간 27.3% 증가했지만 하위 20개(11위~30위) 그룹의 자산 총액은 1.5% 증가에 그쳤다. 매출 역시 상위 4대 그룹은 지난해 평균 157조6000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하위 20개 그룹의 평균 매출은 11조1000억원 정도였다. 당기순이익도 상위 4개 그룹이 30대 그룹 전체의 90% 차지한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2016.09.22 최은영, 그녀의 카페
"몸 안의 피가 빨려나가는 느낌이랄까. 그런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그곳에는 발을 들여놓기가 싫어요." 한진해운의 젊은 직원 A씨가 담담하게 얘기했다. 섬뜩한 표현을 써가며 A씨가 가기 싫다고 한 곳은 여의도 한진해운 사옥에 붙어 있는 카페다. 7년간 경영한 회사를 부실 덩어리로 만들고 물러난 최은영 회장이 작년에 문을 열었다.
궁금해서 가봤다. '내가 한진해운 직원이라면'이라고 가정하며 카페 문을 열었다. 천장이 높고 실내가 화사하다. 구수한 커피 향이 가득하다. 여유로운 표정의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페 밖에서 한진해운 신분증을 차고 미간을 찌푸린 채 담배를 피우던 사내들의 세상과는 크게 달라 보였다. 불경기에도 백화점에 들어서면 잔뜩 진열된 물건들 덕분에 세상이 잠시 풍요로워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피가 빨릴까 봐'라는 표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한진해운 직원 중엔 이직을 위해 입사원서를 쓰는 이가 많다고 한다. 회사를 부실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나간 오너가 회사 바로 옆에 차려놓은 카페를 보면서 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농락당했다는 기분이 들만도 하다. A씨는 "월급 받은 돈으로 그 카페 매출을 1원이라도 올려주기 싫어서 절대 안 간다. 그런 직원이 많다"고 했다.
최 회장은 외식업뿐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많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내부 벽면에는 한진해운 로고가 있다. 최 회장이 경영하던 시절 이곳의 여러 전시회를 한진해운이 후원해온 덕분이다. 직원들은 한때 현대미술의 중심지에서 회사 로고를 발견하고 뿌듯해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뭔가 배신당한 것 같다고 한다. 회사는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사이 최 회장이 엉뚱한 곳에 돈을 써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기업은 사회공헌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건 경영자가 종업원들을 잘 먹이고 주주들에게 실망을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A씨가 말했다. "신입사원 연수 때 최 회장이 전원을 데리고 예술의전당을 갔어요. 그땐 막연히 멋있는 분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해운업은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없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본말전도라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봐요."
회사가 벼랑 끝으로 떨어진 후에야 최 회장은 사재(私財) 100억원을 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그가 2년 전 퇴직금 등으로 97억원을 받아간 걸 알고 있다. 청문회장의 최 회장은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직원들은 청문회가 끝날 무렵 그가 미소를 짓는 사진을 돌려보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저 카페 하나 경영할 정도의 깜냥을 가진 사람이 오너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대기업 경영자 자리에 올랐다가 임직원·주주를 비탄에 빠뜨리고 국가적 민폐를 끼쳤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런 비극은 한진해운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조선일보 손진석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