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9/ 세계의 기업 대우
★'세계경영' 선봉장 김우중
고정일 작가 조선일보
김우중에게 박정희는 아버지같은 존재…최남선의 <한국해양사>를 선물받아
1979년 10월 27일 시곗바늘은 새벽 5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김우중은 대우자동차 인수 작업을 밤새 지휘하다가 부평공장 야전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서가 다급히 그를 흔들어 깨웠다.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 본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김우중은 뒤통수를 쇠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세상 모든 시간이 멎어버린 듯했다. 청와대 빈소에 들어서자 영정사진이 그를 맞았다. 언제나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박정희 그 얼굴. 김우중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쏟아지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영웅은 죽음을 직시한다. 단순한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의 죽음을 직시한다. 위기에 부딪혀 고귀한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무대에서 훌륭하게 영웅을 연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 그 자체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박정희는 김우중을 자식처럼 여겨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와의 첫 만남이 아련히 마음속에 떠올랐다. 1961년 5.16혁명을 주도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국을 돌며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다잡는 데 힘썼다. 제주도청을 방문하여 회의실에 들어서니 벽에 대구사범 은사 제4대 김용하 제주지사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박정희는 크게 반가워하며,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김용하 선생의 가족을 찾아보도록 했다. 첫 만남 자리에서 박정희는 말했다.
"그래,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세계를 돌며 무역업을 하고 싶습니다."
젊은 김우중의 당찬 말에 박정희는 활짝 웃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꼭 성공하리라 믿네 한국이 살길은 오직 수출뿐이야. 이제까지처럼 외국 물건을 들여와 팔기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어. 그런데 기업인들 거의가 지레 겁을 먹고 이 좁은 땅 안에서만 움츠리고 있으니 걱정일세. 김우중 자네가 앞장서서 세계 수출에 힘써 보는 게 좋겠네.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쓴 '한국해양사'를 꼭 읽어보게나."
박정희는 책 한 권을 김우중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이제 국토의 자연적 약속에 눈을 뜨고 역사적 사명에 정신을 차리고 또 우리 사회의 병들었던 원인을 바로 알고 우리국민의 살게 될 방향을 옳게 깨달아서 국가 민족 백년대계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바다를 안고 바다에 서고 바다와 더불어서 우리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금후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 누가 한국을 구원할 자이냐. 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자가 그일 것이다. … 이 정신을 고취하며 이 사업을 실천함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며 또 영원성의 건국 과업임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다. 경제의 보고, 교통의 중심, 문화수입의 첩경, 물자교류의 대로(大路) 내지 국가발전의 원천, 국민훈련의 도장(道場)인 이 바다를 내어놓고 더 큰 기대를 어디다가 부칠 것이다. … 진실로 인도(引導)하기를 옳게 할 것 같으면 일찍 바다 위에서 유능유위(有能有爲)한 많은 증거를 보인 우리 국민은 금후에 있어서도 반드시 이 장단에 크게 춤을 추어서 다함께 구국의 대원(大願)을 이룰 것이다.'
- 최남선 '한국해양사' 머리글에서
/1977년 4월 방위산업 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우중(왼쪽서 두 번째).
머리글을 읽어보던 김우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바다로 나아가는 자만이 한국을 구한다!' 이때 25세 젊디젊은 김우중 가슴속에 '세계경영' 대우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는 수출로써 나라를 일으키자는 박정희의 크고 깊은 뜻에 매우 공감했다. 박정희는 이 인연을 잊지 않고, 1974년 교통부가 서울역 건너편에 짓다가 만 교통회관을 김우중이 불하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김우중은 그 자리에 '대우센터'를 지어 그룹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 뒤로 대우는 박정희 뜻을 받들어 수출 선봉장 역할에 온 힘을 기울였고, 정부는 대우가 세계시장을 누비는 기업으로 나아가게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출이 곧 국력이라며 힘주어 말하던 박정희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로지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온몸을 바친 박정희,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그만한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김우중의 마음은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그 뒤 김우중은 박정희의 뜻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의 면담으로 추진된 한 해 100만대 생산 목표의 중앙아시아 자동차공장, 강경한 호메이니 정권의 각료가 직접 안내원으로 나서서 유치를 간절하게 바라던 이란의 도로.통신 관련 산업, 대우가 차관까지 주선해주며 수주했던 파키스탄 고속도로, 하노이 시장이 적극 요청하던 베트남 호텔 건립과 생산기지 유치, 군부 실세가 국가기간산업이나 되는 듯이 자랑 삼던 수단의 대우 타이어공장, 새벽 공항에 나와서 김우중을 기다리던 경제 각료들의 리무진 행렬, 국빈 대우 경호행렬, 세계 곳곳 수천 명 대우 가족들과 김우중과의 감동적인 만남들, 코리아는 몰라도 대우 로고가 그려진 작업복을 가장 멋진 나들이옷으로 자랑스럽게 걸치고 다닌 동구권 젊은이들. 이 밖에도 세계경영 김우중의 후광이듯 빛나는 기억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김우중의 아버지 김용하는 1896년 12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나와 도쿄 법정대학 2년 수료 뒤 경성제대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 무렵에 학생 박정희를 가르치며 조선 민족혼을 일깨워주었다. 어머니 전인항은 1902년 9월 평안북도에서 태어났으며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이화여전 보육과 1기 졸업생이 되었다.
김우중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49년 4대 제주도지사로 일한 아버지 김용하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끌려가고 말았다. 5남매는 홀어머니 아래서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가난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김우중은 피눈물 나는 고난의 그 시절을 오히려 자신의 일생 가운데 가장 값진 시간으로 간직한다. 그는 대구 방천시장에서 신문을 팔았다. 하루에 신문을 100부 넘게 사다가 팔았는데, 몽땅 팔리는 날은 돈을 조금 벌었지만 다 팔지 못하는 날은 그만큼 밑져야 했다. 그는 날마다 신문 100장을 사들자마자 방천시장으로 뛰었다. 남보다 빨리 가서 한 부라도 더 팔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듯 아무리 일찍 시장에 가서 이 집 저 집 신문을 넣어도, 이미 다른 녀석이 앞서서 다른 골목으로 뛰어들어서는 신문을 넣고 갔다. 이때 무엇보다 거스름돈이 문제였다. 신문을 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미리 거스름돈을 세모꼴로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를 어쩔까. 고민을 거듭하던 김우중 머리에 번쩍 기발한 생각이 스쳐갔다. 바로 신용거래 방식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무조건 뛰어가면서 집집마다 신문을 먼저 돌리고 되돌아오면서 신문 값을 받았다. 그러자 어느새 방천시장이 몽땅 소년 김우중 것이 되었다. 어쩌다 돈을 떼어먹고 간 사람이 있더라도, 팔지 못해 남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작지만 남다른 생각! 이는 김우중 자신과 가족들을 가난에서 구해내고, 뒷날 대우 32년 세계경영 성공신화의 밑거름이 된다.
김우중은 대학을 마치고 '한성실업'에 들어가 무역부 은행관계 업무를 맡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무역은 걸음마 단계나 마찬가지였다. 김우중의 선임자는 온종일 수시로 서류를 들고 황급히 은행에 뛰어다녔다. 그런데 김우중이 업무를 넘겨받고 보니 그렇게 뛰어다닌다고 해서 능률이 오를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은행결재시간이 오전 오후 한 번씩 있음을 알아낸 뒤 그에 맞춰 하루에 딱 두 번만 은행에 갔다. 결과는 허둥지둥 여러 번 뛰어다닐 때와 마찬가지였다. 또한 김우중은 은행에 갖고 다니는 서류를 하나의 서식으로 만들었다. 매번 수치나 내용이 바뀌는 칸들만 비워놓고 그 밖에 변동이 없는 부분은 미리 인쇄해 놓음으로써 서류 작성 시간을 최소화했다. 그런 만큼 여유가 생기고 능률도 올랐다. 은행에는 수많은 회사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여직원들 도움에 따라 은행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달라졌다. 김우중은 어떻게 하면 은행 직원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곰곰이 머리를 짜냈다. 마침 회사 창고에 수입은 해놓았으나 팔리지 않은 여성 양장 옷감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옷감들을 풀어 은행 여직원들에게 싸게 팔자 그들은 좋은 물건을 싸게 사서 좋고 회사서는 골치 아픈 재고품을 현금화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었다. 이렇게 김우중은 수출입 창구에서 근무하는 여직원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한성실업은 김우중 덕분에 은행 일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1963년 김우중은 동남아 중개무역 중심지 싱가포르에서 무려 37만달러어치 생산계약을 이루어낸다. 겨우 27세 젊은 나이로 이뤄낸 쾌거였다. 한성실업은 합성섬유를 써서 천을 생산했는데 그 무렵 합성섬유는 인도계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었다. 김우중은 천 조각 샘플을 들고 닥치는 대로 업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인도 상공회의소장 라자크가 경영하는 회사와 20만야드 생산계약을 맺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을 본 다른 상인들에게서도 앞다투어 주문이 쏟아졌다. 한성실업만으로는 1년 내내 공장을 돌려도 다 만들 수 없는 분량이어서, 하청을 주고 기한 늘려가며 마침내 주문을 모두 소화했다. 생산된 천은 베트남·태국·필리핀 등 아시아 곳곳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한국 최초 섬유제품 직수출이었다.
주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한성실업의 사업은 크게 확장되었다. 김우중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통금시간을 넘겨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매우 많았다.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다 함께 자장면을 시켜 먹었으며, 그즈음 전기가 없어 밤에는 촛불을 켜 놓고 일을 해야 했다. 이렇게 한번 큰 성공을 거두고 나니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정부에서는 수출만 하면 '시장 개척'이라 하여 3년여 동안 바터(barter·구상무역)권을 보장해 주었다. 수입할 물건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한성실업은 직접 물품을 수입하여 국내에 팔기도 하고, 그 권리를 프리미엄을 붙여 다른 회사에 팔기도 하면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이 모두 김우중이 싱가포르에서 큰 계약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실패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고민하는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만약 1%의 성공 확률이 있다면, 그 1%를 성공의 씨앗으로 삼는 자가 바로 진정한 비즈니스맨이다."
김우중이 남긴 명언이다. 성공 가능성 1%에 주목했던 저돌적 낙관론이 활발한 세계경영의 모토가 되었으리라. 김우중은 꿈을 이루어내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끝없는 도전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차근차근 이익을 따지는 장사꾼이라기보다는 먼저 도전하는 '황무지 개척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한 성향 때문에 그는 박정희 경제개발연대 압축성장 시기에 꼭 필요한 이상적 기업인이었다.
그 시절은 유학만 갈 수 있으면 학비는 장학금을 받거나 현지에서 어떻게든 일하며 벌어서 해결할 수 있었다. 김우중이 한성실업에서 일할 때 그의 큰형은 군인신분으로 유학을 갔고 둘째 형과 누이동생, 막내 남동생도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김우중은 자신의 앞날을 거듭 고심했다. 이렇게 회사원으로서 삶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형제들처럼 유학을 떠날 것인가. 그의 결단은 직접 회사를 차리는 것이었다. 트리코트 원단 생산업체인 대도섬유 사장 도재환, 한성실업 영업부장 조동재, 경기고등학교 단짝 이우복 등과 힘을 모았다. 그러나 자금이 모자랐다. 김우중이 한성실업에서 거둔 실적만 듣고 은행이 큰돈을 빌려줄 리도 없었다. 은행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사정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러자 김우중은 아예 새벽부터 은행 지점장 집을 찾아가 문 앞에서 기다렸다. 지점장 차가 나오면 얼른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처음에는 경비원들 손에 질질 끌려 나왔지만 사흘 때가 되자 마침내 지점장도 두 손 들고 말았다.
"정말 독한 사람이군요. 그런 정신이면 꼭 성공하겠소이다. 좋소, 자금을 빌려드리리다."
<④편에 계속>
<③편에서 계속>
마침내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다. 그때는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이 한창 재벌급 기업을 일궈나가고 있을 때였다. 탄탄한 기업들이 즐비한 적자생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대우'가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며, 창업자 김우중 자신 또한 몰랐으리라. 대우실업은 창업 첫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달러 규모의 수출 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그에게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 격인 ㈜대우를 출범시킨다. '창조·도전·희생'의 대우정신은 박정희 불굴의 의지 '우리도 할 수 있다!'를 이어받은 1970~1980년대 한국 경제 시대 정신, 바로 그 자체였다. 아프리카·동남아의 밀림 오지, 불면의 열대야 속에서 독충들과 싸워야 했던 해외 15만명을 포함한 25만 대우인의 신념이었다.
1967년 31세 나이로 대우실업을 창업할 때부터 김우중의 관심은 오로지 세계시장이었다. 그 무렵 국내 기업들은 수출하면 오히려 밑진다는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김우중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더 기회였다. 국내시장은 한계가 있었지만 세계시장은 한없이 넓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김우중에게는 국경이 없었다. 1984년에는 국제상업회의소에서 주는, 기업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세계기업인상'을 받는다.
대우는 전략적으로 진출 지역을 정했다. 전략거점국가 육성 차원에서 온 세계를 6개 권역으로 나누어 세계화를 추진했다. 6개 권역 전략거점국가로는, 첫째 서유럽의 영국·프랑스·독일, 둘째 동유럽의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체코, 셋째 독립국가연합(CIS)의 러시아·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 넷째 아시아의 중국·인도·베트남·미얀마·북한, 다섯째 아메리카의 미국·멕시코·페루·칠레·브라질, 여섯째 아프리카의 모로코·알제리·리비아·이집트·수단·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다. 이들 6개 권역 국가들은 체제전환국 또는 개발도상국이라는 공통점을 지녔고 인구가 많았으며 자원이 풍부했다. 서슬 퍼렇던 냉전시대였지만 김우중은 국내 기업들이 꺼리던 '철의 장막'을 넘어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의 이른바 '위험국가'들도 과감하게 누비며 시장을 개척하고 외교관계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이는 기업은 '애국'이며 기업이익보다 국가이익이 먼저라는 김우중의 신념과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우중은 자동차산업에 주력했다. 대우는 1979년 새한자동차를 인수했다. 국내 대표적인 노사분규 사업체로 연간 16만대 생산에 머물러 있던 새한자동차는 대우가 인수한 지 6년 만에 200만대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적 규모의 자동차회사로 탈바꿈했다. 대우자동차는 '제미나'라는 구형 모델에서 자체 모델인 '맵시나'등을 생산하여 판매했다. 그리고 1992년에 이르러 GM과 합작관계를 청산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면서 경영혁신운동인 NAC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대우자동차 경영 정상화에 몰두하던 김우중은 부평공장 인근에 아파트를 얻어 지내면서 대우자동차 고유의 고효율 생산방식을 세워나가는 한편, 세계경영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매년 자체적으로 개발한 새로운 차량을 출시하고, 세계 곳곳에서 200만대 규모의 자동차 생산능력을 키울 계획을 세웠다. 그때 국내 자동차 총생산은 100만대에 지나지 않았고, 총 판매량도 20만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4~5년에 한 번도 힘든 신차 개발을 매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열악한 생산기술은 무시한 채 200만대가 무슨 말이냐며, 직원들은 김우중의 말을 새겨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6년뒤 부평공장은 복합생산체제를 이루어 '르망'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군산종합자동차공장이 준공되며 '라노스·누비라·레간자'등과 대형 트럭이 쏟아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창원 공장에서는 경차 '티코'를 생산했고, 쌍용자동차까지 인수했다.
고정일
★부자들의 생각
산업화의 주역: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편집자 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67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우를 창업, 수출만으로 회사를 키워 ‘대우신화’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떠오른 그는,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을 늘 강조하며 젊은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1989년 젊은이들을 위해 펴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최단기 밀리언셀러’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그가 세운 대우그룹은 해외시장 개척과 관련된 수많은 기록을 만들며 한국 전체 수출의 10%를 담당해 왔다. 1990년대 들어 ‘세계 경영’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전 세계 신흥시장을 개척하며 대우를 신흥국 기업 중 최대의 다국적 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현재 베트남에 머물며 한국 젊은이들의 해외 진출을 위한 현지교육(글로벌 YBM)과 취업에 도움을 주고 있다. 2015년 싱가포르 센토사리조트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World-OKTA(세계한인무역협회) 2015년 세계 한인경제인대회’에서의 특별강연록과 ‘김우중作 글로벌 경영전략 용어 베스트 10’을 소개한다.
월드 옥타 세계경제인대회의 개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성대한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를 드리며, 글로벌 경제의 주역으로 활동하시는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반갑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대우를 경영할 때에는 1년의 3분의 2 이상을 해외에 머물면서 일했습니다. 그러니 저 또한 재외(在外) 경제인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으며, 이 점에서 여러분과 깊은 동지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스물일곱에 처음 수주(受注)했던 곳이 바로 이곳 싱가포르였습니다. 그때 수출한 것이 한국 최초의 직수출이 되었습니다. 대우를 설립한 후에는 첫 지사를 싱가포르에 세웠는데 이게 한국 기업 최초의 해외지사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싱가포르는 기회의 땅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외 경제인 여러분은 일찍이 더 큰 세상에 눈을 돌리고 실행하셨던 분들입니다. 그 오랜 성과가 오늘의 여러분을 있게 했고 이처럼 성대한 모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는 바로 여기 계신 모든 분의 보람이자 자부심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발걸음은 미래를 향하되, 눈은 과거를 본다고 합니다. 과거의 연장선에 미래가 있다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개척해 나갈 미래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저나 여러분이 함께 추구했던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시장개척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고 매우 중요한 비결이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경영학의 아버지라는 피터 드러커는 세계 최고의 기업가정신은 단연코 한국인이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사람 그 자체가 경쟁력이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니 미래에도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사람을 더 많이 키우고 이를 통해 발전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과 국가가 항상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바라고 있고 또 이 모임 옥타가 지향하듯이 조국 대한민국은 반드시 선진국 대열에 굳건하게 합류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세대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세계와 호흡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세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역 흑자의 핵심은 탄탄한 제조업
국내 제조업 기반 약화되면 중산층 붕괴돼
첫째는 탄탄한 제조업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현재 세계 일곱 번째 무역대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세계 무역대국 가운데 흑자를 기록 중인 나라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독일 정도밖에 없습니다. 한국이 강한 제조업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성과가 가능했습니다. 한국의 제조업 생산은 세계 5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GDP의 30%이상을 제조업이 차지하고 있으니 탄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우선 국내에서 제조업을 경시하는 경향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업들의 투자도 위축되고 정부의 산업정책도 과거에 비해 약화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수출로 경제의 활로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국내 제조업 기반이 약화되면 경제가 어려워질 것은 뻔한 일입니다. 나아가 일자리 부족과 중산층 붕괴로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과거에 경제력이 강한 나라는 ‘강한 제조업’과 ‘국제수지 흑자’라는 기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전통적 경제강국 중 상당수가 제조업 약화와 국제수지 적자를 겪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흥국 가운데 경제발전이 두드러진 나라들은 제조업 투자가 활발하며 수출이 급증하는 특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은 21세기 들어 세계 경제가 왜 신흥시장 중심으로 재편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과연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여기서 분명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업을 할 때에도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조업이 강하고 수출에 적극적인 나라가 여러분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지금 아시아가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3년 4월, 베트남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진행된 TV조선과의 대담에서 과거 대우의
세계 경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경제활동 인구의 20%가 해외로 진출해야
최근 한국인의 진취적 기상 떨어져
두 번째로 해외에서의 경제활동 네트워크가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제규모에 비춰볼 때 해외에서 활약하는 경제인들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100년이 넘는 해외이주의 역사를 통해 현재 700만명이 넘는 분들이 해외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경제력과 대외활동 규모를 고려할 때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외교부 통계를 보면 해외 이주민의 숫자는 80년대 연간 3만명이 넘던 수준에서 2000년에는 1만5000명 수준으로, 그리고 2010년 이후에는 1000명도 되지 않는 수준으로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비즈니스 목적의 이주는 2000년 2500건 수준에서, 2011년에는 100건도 되지 않을 만큼 축소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통계가 최근 한국인들에게서 진취적 기상이 떨어진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의 20%까지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도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가고 국민들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해외로 진출해야 합니다. 국내와 해외가 힘을 합쳐 더욱 탄탄한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합니다. 제가 세계 경영을 추진하던 1990년대에 대우는 28만명의 임직원 가운데 18만명이 외국인이었습니다. 이 중 백인계 고용인력만 10만명에 달했습니다. 일찍부터 해외로 나갔기 때문에 한국기업을 위해 일하는 외국인 종업원 수가 내국인보다 더 많게 됐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대우 출신 임직원들은 과거 인연을 맺은 국가에서 활발하게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적 기반을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늘려가야 합니다.
우리 중소기업들에는 지금 새로운 도전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보면 회사를 건실하게 키워낸 중견기업 가운데 상당한 자본을 축적한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제 경험과 해외 사례들을 볼 때 저는 이런 건실한 기업들에게 반드시 기회가 주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축적된 자본으로 새로운 성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한번 더 거친다면 이런 회사들은 세계적 수준으로 충분히 올라설 수가 있습니다. 이런 회사들이 많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나라에도 중소기업의 시대가열릴 것이라고 예상해 봅니다. 이런 시대가 되면 모든 것을 하는 대기업과 전문 역량을 갖춘 중견기업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00억 달러 이상 수출하는 중견기업이 100개 이상 생겨나면 우리 경제는 더욱 안정적인 발전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현재 베트남에 머물며 한국 젊은이들의 해외 진출을 위한 현지교육(글로벌 YBM)과 취업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월간조선
해외 비즈니스는 현지에 대한 관심·진심이 머릿속에 있어야 가능해
사람이 곧 資産이자 경쟁력
셋째는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을 바르게 키워내는 것입니다. 옥타에서도 차세대 무역스쿨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도 애국심과 기업가 정신을 합쳐 우리 후대들을 키우는 데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 또한 글로벌 YBM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젊은이들이 진취적으로 신흥시장에 도전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머무는 베트남에서 작은 규모로 시작했습니다. 지난 5년간 매년 수료생들이 100% 취업이 되고 또 직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내심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현재는 베트남과 미얀마,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양성 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 나라에서 각각 150명 정도씩 해서 약 500명을 매년 양성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젊은이들이 현지에 철저히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했습니다. 현지인처럼 생각하고 현지인과 소통할 수 있고 현지에 대한 관심이 진심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아야 비로소 비즈니스를 할 자격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영어와 현지어(語) 교육을 충실하게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현지적응력을 전제로 경영과 회계, 마케팅 등을 실전 경험이 많은 선배들을 통해 배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과거 대우에서 저와 함께 해외를 누비던 동료들이 여기에 기꺼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4년 10월, 서울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대우관 각당헌에서 열린 상경대학 100주년
기념특강에서 '자신만만하게 세계를 품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젊은세대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분명한 未來 있어야 現在 열려
사람이 자산이고 경쟁력입니다. 우리 후대를 잘 키워내는 것이 곧 우리의 경쟁력을 유지·발전시키는 길입니다. 제가 만난 우리 젊은이들은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지닌 열정을 선배 세대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준다면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성취의 길을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하며 승부욕도 강해서 세상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절대로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계를 무대로 야심 차게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로 제 나이가 80이 되었습니다. 1967년 대우를 창업하고 경영자로 활동하면서 오로지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제가 수출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 재외 경제인 여러분과 함께하는 만큼 저에게 뜻깊은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많은분들 앞에서 제 의견을 말씀드릴 기회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 팔십 평생을 동지와도 같은 여러분과의 만남으로 마무리한다는 점에 대해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남은 여생을 우리 젊은이들이 더 큰 세상을 향해 도전할 수 있게 돕는 데 바치려고 합니다. 이들이 꿈을 이루는 모습을 생전에 보게 된다면 저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자 보람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같은 해외 사업가들이 저와 함께 노력해서 우리 유능한 젊은이들을 더 많이 해외로 진출시켰으면 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분명한 미래가 있어야 현재가 열리고, 미래의 비전을 새롭게 할 때 지금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집니다. 비전의 창조자로서 경영자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경영자는 사업에 미쳐야 모든 것이 보이고 미래도 대비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한창 커 나가는 기업에서는 경쟁력의 99%가 경영자에게 달렸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미래를 향해 하루하루 부단히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더욱 큰 발전과 성공을 이어가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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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최원철
★DJ정권은 어떻게 대우를 해체했나
1998년 4월의 일이다. 서울 남산의 힐튼호텔에서 김대중 정부 초대 비서실장인 김중권 실장 주재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후일 재정경제부 장관)이 마주 앉았다. 김우중 회장은 “올해도 수출을 조금만 더 하면 500억달러 흑자 난다. 그것으로 IMF(국제통화기금)에서 빌린 돈 다 갚고도 남고, 내년에 500억달러 흑자 나면 외환보유액(Reserve)이 된다.… 우리가 미국에 귀속해서 가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수출을 도와달라는 취지였다. 강봉균 수석은 “이제 시장경제 중심으로 하니 정부가 나서서 그런 것 못 합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김우중 회장은 “그러면 강 수석은 시장경제 하는데 무엇 때문에 거기 앉아 있나? 시장 중심이면 청와대 경제수석이고 비서관이고 필요 없겠네”라고 했다.
2014년 출간한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김우중 회장이 언급한 일화다. 당시 사건은 1999년 8월 대우그룹 해체 직전, 김우중 회장과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정권교체 후 기세등등 했을 DJ정부 경제관료들의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결국 대우 해체 결정은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가 결정타가 됐다. 바로 전달인 1998년 10월, 일본계 노무라증권이 펴낸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보고서에 이은 연타였다. 김우중 회장 역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와의 대담을 모아 2014년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은 “김우중 회장은 원래 직선적인 성격에다가 31살 때부터 사업을 하면서 말단 사무관부터 시작해 수없이 많은 관료들을 상대했다”며 “결국 이들이 승진해 장·차관, 수석이 됐을 때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실제 대우 해체를 결정한 당시 DJ정부 경제관료들에 대한 대우맨들의 평가는 혹독하다. 지난 1월 31일 별세한 강봉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비롯해, 진념 당시 기획예산위원장,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전윤철 당시 공정거래위원장 등이 그 대상이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한국 경제 사령탑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강봉균 전 장관은 국회에도 진출해 3선 의원까지 지냈다. 이들은 지난 1월 작고한 강봉균 전 장관 주도로 최근까지 ‘코리안 미러클’이란 한국 경제 백서를 편찬하는 작업도 지속해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대우맨은 “아무리 ‘승자(勝者)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기가 자기 백서를 펴내는 것은 자화자찬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IMF 조기졸업 vs 중진국 함정
이런 극과 극의 평가는 외환위기의 원인과 처방에 대한 현격한 시각 차 탓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과 1996년 막대한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실제 1993년의 경상수지는 20억달러 흑자였으나, 이듬해 적자로 돌아서 1994년 44억달러, 1995년 97억달러, 1996년 238억달러로 급속히 불어났다.<표 참조> 또한 정부는 ‘국민소득 1만달러’라는 허울뿐인 타이틀에 집착해 700~800원대의 원화강세를 계속 용인했다. 수출기업에서는 “원달러환율이 900원 이상 되어야 수출경쟁력이 생긴다”며 아우성을 쳤지만 정부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선진국 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을 위한 외환자유화 조치도 위기를 부채질했다. 1994년 24개의 단자사가 종합금융사(종금사)로 간판을 바꿔 달더니, 너도나도 해외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돈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은 “시중은행 대리급 직원들이 종금사 부장으로 스카우트되고, 홍콩·싱가포르 등지에 너도나도 해외지사를 개설해 돈놀이를 하면서 흥청망청했다”고 말했다.
낮은 원달러환율(원화강세)은 수출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을 약화시켰다. 실력 이상으로 강해진 원화로 인해 불요불급한 사치품 수입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로 인해 무역적자가 급증하면서 외환보유고가 거덜나기 시작했다. 결국 동남아 금융위기가 홍콩을 거쳐 한국으로 번지면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김영삼 정부 말기, 재정경제원 차관을 지낸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도 인정한 바 있다. 강 전 장관은 재경원 차관을 마치고 야인(野人) 시절 때 쓴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이란 저서에서 “1993년에서 1996년까지의 8% 단일관세율과 원화의 평가절상은 최악의 정책조합이었다”며 “1997년 외환위기의 결정적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경제관료들은 외환위기의 원인을 정부 정책 실패가 아닌 개별 기업 실패로 책임소재를 몰아갔다. 기업들의 무분별한 차입경영, 문어발식 선단식 경영이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진단이었다. 위기극복 방안을 두고도 현격한 시각 차가 존재했다. 관료집단은 IMF에서 제시한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소위 ‘IMF 플러스’다. 1998년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던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작고한 후 회장대리로 전경련 회장직을 인수인계한 김우중 회장은 정반대의 처방을 제시했다. 원달러환율이 급등했으니 “이제 돌멩이도 팔 수 있다”며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섬유원단을 해외에 팔던 세일즈맨 출신으로 ‘수출의 귀재’란 별명을 얻은 김우중다웠다.
원화약세로 원달러환율이 올라가면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자연히 강화된다. 반면 높은 환율로 인해 불요불급한 사치품 수입은 자연히 억제된다. 또한 외환위기 직전 국내 전체적으로 약 1조달러가량 투자한 설비를 풀가동할 경우 수출확대로 인한 외환보유고 확충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역발상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대우의 수출 네트워크를 활용한 ‘금 모으기 국민운동’을 최초로 제안한 김우중다운 발상이었다. 실제 김우중 회장의 말처럼 원달러환율 급등으로 국내 수출품은 가격경쟁력을 회복했고, 1998년 한 해는 무려 40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반면 관료집단은 김우중 회장의 수출확대를 통한 외환위기 극복방안을 ‘허풍’으로 치부했다. 김우중 회장과 관료집단 사이에서 고민하던 DJ는 결국 경제관료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1998년 정주영의 현대에 이은 재계 서열 2위였던 김우중의 대우는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현 재계 서열 1위인 삼성은 당시 3위에 불과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주축으로 한 대우맨들은 “당시 결정으로 한국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당시 IMF 방침을 금과옥조로 떠받든 DJ정부 경제관료들의 결정 탓에, 기업의 수출과 설비투자에 쓸 자금공급은 막혀 버렸다. 은행들은 기업금융 대신 부동산담보대출(모기지론) 등 손쉬운 개인금융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제조업 기반은 훼손되면서 한국 기업들은 외국 기업에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대우사태 와중에 삼성자동차와의 빅딜이 무산되면서 각각 미국의 GM과 프랑스의 르노가 헐값에 인수해간 대우자동차(현 한국GM)와 삼성자동차(현 르노삼성)가 대표적인 경우다. ‘월드카’를 염두에 두고 조성한 한국의 자동차공장은 GM과 르노의 하청 생산기지로 전락했다. 또한 은행들이 기업금융 대신 손쉬운 모기지론에 치중한 결과 부동산값은 폭등하고 가계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과적으로 당시 결정으로 인해 정리해고의 상시화, 부동산거품이 지속되면서 국민소득 3만~4만달러의 문턱에서 수십 년째 머무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는 주장이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의 활동
전·현직 대우맨들이 ‘대우세계경영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든 목적도 공정한 역사적 공과(功過) 평가를 위해서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발족은 1999년 대우사태 당시 ㈜대우 사장으로 있었던 장병주 전 사장이 주도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고 있는 장병주 전 사장은 서울대 섬유공학과 출신으로 옛 상공부, 재무부를 거쳐 1979년 대우에 입사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대우사태 당시 금융감독위원장)는 경기고 2년 후배인 장 전 사장을 “1999년 대우사태 때 위암과 싸워가며 수렁에 빠진 대우를 살려내느라 고군분투한 인물”로 기억했다. 장 전 사장은 1999년 8월 대우 워크아웃 때는 김우중 회장 대신 눈물을 머금고 대표이사 인감도장을 찍어야 했다. 장병주 전 사장은 “이헌재 부총리와는 재무부에 근무할 때 김용환 장관 밑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며 “김용환 장관이 외환위기 당시 비상경제대책위 당선자(김대중) 측 대표로 취임했을 때 실무기획단장으로 이헌재를 추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우그룹이 몰락한 후 한참 지나 장병주 전 사장이 SK그룹의 비상근고문으로 있을 때다. 그가 사는 여의도에서 종로에 있는 SK빌딩으로 가려면 서울역 앞 대우센터를 지나쳐야 했다. 대우센터는 1977년 준공 당시 국내에서 가장 연면적이 큰 지상 23층의 빌딩이었다. 김우중과 대우의 성공신화를 상징하던 육중한 빌딩으로,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한 젊은이들에게 1960~1970년대 한국의 고속 압축 성장을 이보다 더 잘 각인시킨 빌딩은 없었다. 대우사태 후 미국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에 팔렸다가 지금은 싱가포르의 펀드 소유가 돼 있다. 그랬던 대우빌딩이 리모델링에 들어가더니 ‘서울스퀘어’란 생소한 이름으로 바뀐 것.
이에 장 전 사장은 대우의 공과를 정확히 하기 위해 전·현직 대우맨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원래 대우의 임원급들은 1990년 발족한 ‘대우인회’란 상부상조 조직을 갖고 있었다. 2009년 당시 1600명가량의 회원이 있었는데, 평균연령 70대로 소멸위기에 있었다. 이에 2009년 대우에서 3년 이상 근무한 대리급 이상 직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대우세계경영연구회’란 조직을 발족했다. 그 결과 무려 4700명이 모였다. 회원 중 500여명은 해외에 있어 32곳의 해외지회를 두고 있다.
‘세계경영’ 재평가를 주도해온 곳도 대우세계경영연구회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작고한 이상훈 전 ㈜대우 부사장 주도로 2010년 펴낸 ‘대우 ‘세계경영’ 내용과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세계경영은 당시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붕괴에 따라 출현한 ‘신흥시장’에 있어서 한국 기업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진입 및 선점 전략’ 모델이었다”며 “세계경영은 한국 기업의 세계화 방향을 뚜렷이 제시한 경영전략이었다”고 자평한 바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직전 대우는 396개의 해외 현지법인을 두고 있었다. 해외 현지고용 인원은 무려 15만명에 달했다.
오는 3월 22일 대우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준비하는 곳도 대우세계경영연구회다. 김우중 회장이 ‘세계경영’을 하면서 남긴 어록들을 모아 ‘김우중 어록’을 출간하고, 세계경영과 관련한 사진들을 모아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사진전과 다큐멘터리 상영을 할 계획이다. 대우그룹 해체 직전인 1998년 개관한 아트선재센터는 김우중 회장과 부인 정희자 여사가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보낸 큰아들 김선재씨를 기리기 위해 만든 아트센터다. 3월 22일에는 서울 남산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50주년 기념식도 개최한다. 1983년 개관한 남산 힐튼호텔 23~24층 펜트하우스는 김우중 회장의 집무실이었다. 대우그룹은 1967년 창업 이래 세계경영에 매진해오면서 그간의 역사를 되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1997년 그룹 창립 30주년을 맞아 ‘대우그룹 30년사’를 편찬했으나 외환위기의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40년사는 그룹이 공중분해되어 챙길 수조차 없었다. 세계제국을 세웠으나 글로 된 역사를 남기지 못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과 같았다.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 [2449호] 2017.03.20
★대우의 영욕/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2019.12.10 김우중 영욕의 83년, 대한민국 고도성장 '빛과 어둠' 한 몸에
9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삶은 대한민국의 고도성장 과정을 집약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 쪽에서는 샐러리맨 신화, 세계경영 전도사라는 ‘빛’이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분식회계’, ‘정경유착’ 등 어둠이 있다. 그의 일대기가 재벌 회장의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산업사(産業史) 내지는 경제사(經濟史)적인 의미가 있는 이유다.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김 전 회장은 1936년생이다. 그의 아버지 김용하 전 제주도지사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5남매의 장남으로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고학(苦學)을 해야 했다. 김용하 전 지사는 제주도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나와 도쿄 법정대학 2년 수료 뒤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교사를 지냈고, 해방 후에는 1949년 제주도지사를 역임하면서 관계로 진출했다. 김 전 회장의 첫 사업은 대구 방천시장에서의 신문배달이었다. 하루에 신문 100부 정도를 사와서 배달을 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신문 배달의 핵심은 다른 배달원보다 먼저 신문을 사, 가정에 신문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김 전 회장은 돈을 떼어 먹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신용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배달망을 유지, 확장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경기고와 연세대를 다니면서 열무·냉차 장사에 나섰다. 차비를 아낀 돈으로 책을 사 공부하는 나날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 친척이 운영하던 무역회사 한성실업에 들어가 은행 관계 업무를 맡았다. 자본이 부족하던 시대, 돈줄을 쥐고 있는 은행원들과 관계가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세일즈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냈다. 1963년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킨 게 김 전 회장의 작품이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면서 인도계 기업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37만달러어치의 생산 계약을 따냈다. 한성실업이 1년 내내 공장을 돌려도 다 만들 수 없는 분량이라 다른 회사에 하청을 줄 정도였다.
/1973년 대우실업 상장 직후(위 사진 맨 왼쪽)와 1979년 수출탑 수상(아래 사진). /조선일보DB
자신감이 붙은 김 전 회장은 1967년 서울 충무로에 대우실업을 세운다. 자본금은 500만원. 그의 나이 31세였다. 1915년생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 등 한국 대기업집단의 창업 1세대가 기업 규모를 키우고 있을 때였다. 대우실업은 창업 첫 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다. 이후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혔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설립했다. 정주영, 이병철 등 다른 기업인들이 제조업이나 건설업을 중심으로 기업을 키울 때, 그는 세계 시장을 무대로 무역에 나서 가파른 성장을 일구었다.
◇무역 통한 자본축적…M&A로 영토 확장
1973년 영진토건 인수를 계기로 김 전 회장은 다른 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영진토건은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1982년엔 대우실업과 합쳐 ㈜대우를 출범시킨다. 1978년에는 대한조선공사의 옥포조선소를 넘겨받아 대우조선공업을 출범시키고 조선업에 진출했다. 1979년에는 새한자동차를 인수하면서 대우의 간판 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자동차 사업에 진출했다. 대우전자는 1974년 전자제품 무역업을 위해 만들어진 계열사였는데 1980년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광진전자공업 등의 인수와 함께 금성(현 LG)·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3대 가전사로 성장했다. 무역업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인수합병(M&A)를 통해 기업을 세운지 20년도 안되어 삼성, 현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집단으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은 정부의 1960년대 수출 진흥 정책과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또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김 전 회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연도 도움이 되었다.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회장의 부친인 김용하 전 지사의 대구사범학교 제자였다. 그 인연으로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회장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멘토 역할을 했다. 1974년 교통부가 서울역 건너편에 짓다가 만 교통회관을 김 전 회장이 불하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했다. 이 부지는 대우그룹의 본사가 됐다.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이 1988년 대우 옥포조선소에서 현장 기능공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후반 동구권이 무너지는 것을 계기로 ‘세계경영’을 주창하면서 공격적인 해외 진출 전략을 폈다. 한국 대기업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동유럽, 중동·아프리카·남미 등에 진출했다. 1989년 펴낸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출간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리면서 김 전 회장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기업의 대표 주자로 각인됐다. 해외고용인력은 1993년 2만2000명에서 5년 만에 15만2000명으로 늘었다.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해외 기업 인수 과정에서 공개 입찰을 거친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은 각국 대통령, 총리들과 담판을 짓는 방식으로 기업을 인수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은 그 나라들의 경제개발계획을 세워주고, 각국 정상들의 정책적 니즈를 맞춰주었다.
대우자동차의 성장사는 세계경영의 대표적인 사례다. 김 전 회장은 1979년 새한자동차를 인수 한 뒤 대우자동차의 생산 능력을 연 200만대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기술이나 디자인에서 독립해 자체 개발 모델을 매년 내놓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당시 국내 자동차 생산량은 100만대에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1986년 르망을 출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에스페로, 로얄 등 독자 개발 차량을 내놓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 사회주의국가에서 자동차 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당시 김 전 회장은 해외 체류 기간이 1년에 280일을 넘길 정도로 해외 사업에 매달렸다.
◇고도성장의 선두주자…IMF 위기에 ‘부메랑’
그는 공격적인 해외 진출, 과감한 투자, 적극적인 목표 설정이라는 고도성장기 경제성장 방식의 선두주자였다. "기술이 없으면 사오면 된다",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 는 발언이 말해주듯 과감한 사업 스타일로 일관했다. 하지만 전문경영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 1987~1988년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파업 당시 1년 반 동안 옥포조선소에 머물기도 했다. 대우자동차도 인천 부평 공장에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숙식을 해결하면서 사업에 전념했다. 다른 한 편에선 파격적인 고용 정책도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초 대부분의 기업들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출신들을 기피하고, 채용하지 않았을 때 김 전 회장은 과거를 따지지 않고 채용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과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1999년 해체 직전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을 갖고 있었다. 임직원 수는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에 달했다. 자산 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이었다. 그야말로 ‘대우 제국’에 가까웠다.
하지만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는 김 전 부회장의 경영 방식의 어두운 면을 일거에 드러나게 했다. 공격적인 사업 확장의 결과 기업의 재무 상황이 나빠지자,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와 또 다른 대규모 차입으로 이를 모면하려고 했다. 외환위기 이후 삼성, 현대 등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으로 부채를 줄일 때 대우는 오히려 빚을 더 늘렸다. 대우의 차입금은 1997년말 29조원에서 1998년말 44조원으로 15조원이 늘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 고금리 상황에서 차입금 증가는 치명적이었다. 1998년에 대우가 내는 이자비용은 6조원에 달했다. 여기에 분식회계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1999년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그리고 대우의 모든 계열사는 워크아웃(기업회생)에 들어갔다. 대우로 인한 전체 손실액은 31조원에 이르렀고, 이를 메우기 위해 사실상 세금인 21조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다
김 전 회장의 오랜 해외 생활이 시작된 것도 그 때부터다. 그는 1999년 10월 중국 산둥성의 옌타이 자동차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다. 2005년 국내로 돌아온 뒤,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개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000원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 사면됐다.
◇말년엔 기업가 교육사업…"김우중이 이렇게 할 수 있구나 보여주고 싶다"
2010년 이후 김 전 회장은 해외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Global Young Business Manager·GYBM)이 그것이다. 이 사업은 한국 대학 졸업생을 선발해 동남아 현지에서 무료로 취업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서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했다.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이 밖에 나가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며 "운명적으로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GYBM 사업을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중국,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밖에 나가서 서로 돕고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2010년부터) 이 프로그램을 해보니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공헌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도 말했다.
/김우중 회장이 지난 2013년 베트남 하노이의 한국계 장갑 업체 하이비나를 찾아 공장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김 전 회장인 공장 시찰 직후 이 공장에 취업한 GYBM 교육생들과 만나 환담을 나누었다. /조선일보DB
김 전 회장은 "(GYBM 졸업생들이) 15년 후에 독립했다든지, 중역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면 (나의) 흔적이 남는 것이다"고 말했다. "(YBM 사업이) 20년 후 엄청나게 커져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김우중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실수해서 그렇게 됐지만(대우그룹 해체를 뜻하는 듯)…. (대우 해체에 대해)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YBM 사업을 통해) 김우중이 이렇게 할 수 있구나를 보여주고 싶다"고 그의 교육사업을 계기로 성장한 기업가들로 ‘인간 김우중’이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행사가 마지막이다. 대우그룹 임직원 들은 1999년 그룹 해체 이후에도 매년 창업기념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해왔으며 김 전 회장을 포함해 300여명이 참석해 왔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8월 말 베트남 하노이 소재 GYBM 양성 교육 현장을 방문하고 귀국한 이후 건강이 안 좋아져 통원 치료를 하는 등 대외활동을 자제해오다 12월 말부터 증세가 악화해 장기 입원에 들어갔다고 대우 관계자는 밝혔다.
조선비즈 조귀동 기자
12.10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 첫 조문객은 아주대 교직원들
/1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팔짱을 낀 포즈로 마소를 짓고 있는 영정 앞에 놓인 위폐엔 '김우중'이라는 이름과 '바오로'라는 세례명이 함께 적혔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이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숙환으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가 1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연합뉴스]
10일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베트남 하노이에 머물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지난해 6월 귀국했다. 이후 아주대병원에서 통원·입원 치료를 받으며 투병생활을 했다고 한다. 연명 치료는 받지 않았다.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전 ㈜대우 사장)은 "지난 토요일부터 급격하게 상태가 안 좋아졌다"며 "연명 치료는 본인(김 전 회장) 생각도 그렇고 추세도 그렇지 않으냐. 본인이 가족들에게 (연명 치료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사전에) 밝혔었다"고 말했다.
유언은 없지만 "해외 청년사업가 양성 발전" 당부
김 전 회장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영면에 들어갔다고 한다. 별도의 유언은 없었다.
장 회장은 "김 전 회장이 유언은 남기지 않았지만, 평소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지막 숙원사업으로 진행하던 해외 청년사업가 양성 사업을 잘 유지·발전시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투병 중에도 주변 사람들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주변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있었다고 장 회장은 전했다.
장례는 천주교식으로 진행된다. 김 전 회장의 평소 뜻대로 소박하게 치러졌다. 빈소에는 가족들과 옛 대우그룹 관계자들 일부가 일찍부터 조문객을 맞을 준비를 했다. 고인은 평소 "장례문화가 많이 바뀌어서 소박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유족들도 근조화는 물론 부의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1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 앞에서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연합뉴스]
첫 조문객은 박형주 아주대 총장 등 아주대 교직원들이었다. 아주대학교는 1977년 당시 대우실업 사장이었던 김 전 회장이 "교육 사업을 통해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고급 인력을 키우겠다"며 사재를 출연해 대우학원을 설립하고 인수한 대학이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관계자는 "고인이 아주대학과 병원 등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 빈소도 아주대병원에 차리게 됐다"며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등 대학 등을 키우면서도 경영이나 인사권 등에 개입하지 않고 학교가 잘 운영되도록 교직원들을 독려했었다"고 말했다.
현재 빈소엔 이재정 경기도교육감과 대우그룹 전·현직 임직원들이 조문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남긴 대표 기업인
한편 1936년 대구 출생인 김 전 회장은 경기중·고교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하다 만 30세인 1967년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45세 때인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을 확장해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 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로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1989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역대급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1998년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밤 11시50분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생전 고 김 전 회장이 대우자동차 티코 옆에 선 모습. [뉴스1]
김 전 회장도 21조원대 분식회계와 9조9800억원대 사기 대출 사건으로 2006년 1심에서 징역 10년, 추징금 21조4484억원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징역 8년 6월, 추징금 17조9253억원으로 감형됐으며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베트남 등지에서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젝트도
이후 김 전 회장은 베트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머물며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왔다.
2011년부터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서 1년에 190명의 청년기업가를 양성해 배출하고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측은 "평소 고인이 청년에 각별했다"며 "청년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우리 세대가 잘해서 다음 세대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의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장지는 고인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이다.
수원=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12.11 "나가서 싸워라" 세계 18위 신화 쓴 大宇… 외환위기로 좌초
[김우중 前대우 회장 별세] 김우중 前대우 회장의 明暗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모토
30년간 해외출장 954만㎞ 뛰며 세계경영으로 샐러리맨 신화 창조
차입경영으로 투자자에 큰 손실… 추징금 17조원 미납 문제 남아
/연합뉴스
"경영자는 사업에 미쳐야 모든 것이 보이고 미래도 대비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한창 커가는 기업에서는 경쟁력의 99%가 경영자에게 달려 있다."
9일 별세한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직장 생활 6년 만인 1967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해 국내 2위, 포천 글로벌 18위 기업으로 일궈낸 샐러리맨의 신화이자 '세계 경영'의 선구자다. 이와 동시에 역대 최대 규모 부도를 내고 분식 회계, 사기 대출 혐의 등으로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은 '실패한 기업인'이기도 하다. 1970~ 80년대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을 상징했던 삼성 이병철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과 함께 창업 세대의 막내인 김 전 회장은 자신이 사재(私財)를 보태 세운 경기 수원의 아주대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31세에 창업한 그는 32년 동안 대우그룹을 일궜고, 20년 동안 그룹 해체를 지켜보면서도 후진 양성에 힘을 쏟는 파란만장한 83년을 살았다.
◇세계 경영 대우, 포천 글로벌 18위
'희생, 세계, 청년'.
김 전 회장 지인들은 그의 인생 화두가 이 세 가지로 압축된다고 입을 모았다. 대우그룹 비서실 출신인 심준형 김앤장 고문은 "김 전 회장은 한 세대가 희생해야 다음 세대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30여년간 김 전 회장의 해외 출장 거리는 총 954만㎞, 지구를 240바퀴쯤 돈 거리다. 조찬, 만찬을 2~3번씩 하는 등 하루 6끼 이상을 먹었고, 결혼한 날도 신혼여행을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오후에 올라왔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사진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①지난 1999년 3월 (왼쪽부터) 이건희 삼성 회장, 김 전 회장,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전경련 신임회장단 취임인사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김 전 회장은 1998~1999년 전경련 회장을 지냈다. ②1991년 김 전 회장이 ‘국민차’ 티코를 타고 임원회의에 참석하는 모습. ③김 전 회장이 2013년 4월 베트남 하노이 사범대학교에서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교육생들과 대화하는 모습. 김 전 회장은 GYBM을 ‘인생 마지막 봉사’라고 말했다. /연합뉴스·오종찬 기자
대우그룹은 부실기업 인수를 통해 거대 기업으로 도약했다. 한국기계, 옥포조선소, 새한자동차 등을 잇달아 인수해 그룹 주력 기업으로 키웠다.
1990년대 들어 사회주의 붕괴 등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자, 김 전 회장은 1993년 '세계 경영'을 공표했다. 이를 통해 '신흥국 출신 최대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키는 등 대한민국의 경제 영토를 넓혔다.
대우그룹은 1998년에는 계열사 41곳, 해외 법인 396곳을 거느리며 자산 기준으로 현대그룹에 이어 국내 재계 2위 대기업, 포천 글로벌 18위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직전인 1997년 11월 닥친 외환 위기는 거침없이 몸집을 불리던 대우 신화의 몰락을 초래했다. 김 전 회장은 2014년 내놓은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김대중 정부와의 악연이 대우를 해체한 주범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분식 회계와 대규모 추징금
김 전 회장은 한국 경제성장기에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부실 경영으로 국가 전체를 휘청이게 하고,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입힌 공과(功過)가 극명한 삶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는 1999년 10월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5년 8개월 동안 해외에서 생활했다. 2005년 6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입국할 때 배포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사죄의 글'에서 자신을 '실패한 기업인'이라고 평가했다. 입국 직후 구속된 그는 2006년 11월 항소심에서 징역 8년 6개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대통령 특사로 사면됐지만, 추징금은 지난 14년 동안 미납 순위 1위를 지켜왔다. 법조계에서는 김 전 회장이 별세함에 따라 공범으로 묶여 있는 전직 대우그룹 임원들에게서 남은 추징금을 집행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말년에 베트남에 주로 머물며, 인재 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프로그램에 주력해 왔다. 평생 "젊은 사람에게 미래가 있다" "안에서 다투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고 강조했던 그의 인생관이 담긴 사업이다.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별도의 유언은 없었고, 마지막 숙원 사업으로 진행하던 해외 청년 사업가 양성 사업을 잘 유지·발전시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말했다.
"우리 국민의 20%가 해외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국민이 산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 회장이 생애 마지막 순간에 주변에 가장 많이 한 얘기라고 한다. 그의 한 측근은 "마지막까지 꿈을 꾸었고, 결국은 못다 이룬 꿈을 안고 세상을 떠난 '김우중'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12.12 故 김우중 회장 장례 이틀째... 최태원·신동빈·홍남기·김상조 등 조문(종합)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장례식 이틀째인 11일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등 정·재계 인사의 조문이 이어졌다. 빈소가 마련된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이틀간 8000여명이 방문한 것으로 추산된다.
▲최태원 SK 회장이 11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이는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대표였다. 이어 오전 중 신동빈 회장, 최태원 회장, 이웅렬 코오롱그룹 전 회장,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김윤 전경련 부회장(삼양홀딩스 회장), 이장한 전경련 부회장(종근당 회장),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권영수 LG 부회장, 박지만 EG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이 조문했다.
최태원 회장은 조문을 마친 후 "한국 재계 1세대 기업인이자 큰 어른으로서 청년들에게 꿈과 도전 정신을 심어주셨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허 회장은 앞서 추도사를 통해 "(김우중) 회장님이 걸으신 길은 도전과 개척의 역사였다"며 "우리나라가 일류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면 회장님의 첫걸음 때문임을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의 연세대 후배인 박삼구 전 회장은 고인을 "우리나라 재계의 큰 거인"이라고 칭하며 추모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회장은 "지난 3월 김 전 회장을 마지막으로 뵀는데 말씀하기 힘들어하셨지만 웃어주셨다"며 "올해를 못 넘기실 줄은 몰랐는데 너무나 안타깝고, 내 걱정을 많이 해주신 분인데 마음이 아프다"고 애도했다.
▲홍남기(오른쪽) 경제부총리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11일 오후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 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관계에서는 홍남기 부총리, 김상조 실장, 정세균 전 국회의장,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지원 무소속(대안신당) 의원, 이수성·한승수·이홍구 전 국무총리, 한광옥 전 대통령비서실장,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이 빈소를 찾았다.
홍 부총리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 전 회장의 말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중요한 울림과 메시지를 준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 문 대통령이 참여정부 시절 김 전 회장과 인연을 언급하며 가족에게 위로를 전해달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옛 대우그룹 관계자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장병주 전 대우 사장, 장영수·홍성부 전 대우건설 회장, 강병호·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 등 여러 '대우맨'들은 이틀 내내 빈소를 지켰다. 이날 조문한 김영상 포스코인터내셔널 사장은 "김 전 회장께 글로벌 정신을 배웠다"며 "회장님께서 만든 대우그룹을 이어받은 포스코가 (대우의) 명맥을 유지하고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대우그룹의 첫 시작인 대우실업이 모태다. 김 사장 또한 대우그룹 출신이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전날 4000여명이 조문했다. GM대우 시절 김 전 회장과 인연을 맺었던 당시 노조원들과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운영하는 청년 해외 취업 프로그램 'GYBM' 졸업생들도 찾았다.
▲야구선수 류현진이 11일 오후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 후 조문객들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연예·체육계 유명 인사들의 조문도 계속됐다. 이날은 야구선수 류현진씨와 배우 김정은씨 등이 빈소를 찾았다 . 전날에는 배우 이병헌씨, 송승헌씨, 이회택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하석주 아주대 축구부 감독 등이 찾았다. 특히 이병헌은 생전 고인과 부자처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치러진다. 영결식 조사는 장병주 회장이, 추도사는 손병두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 맡는다. 장지는 충남 태안군 선영이다.◎
조선일보 윤민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