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8/ 현대제국3/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조선일보
21 영어 못한 정주영 첫 국제무대 데뷔 연설에서...
어눌한 말주변에서 달변가가 된 비법(上)
필자가 정회장을 보좌하면서 생긴 일 중 아직도 기억이 새로운 일이 하나 있다.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창립 총회’가 있었던 1974년 6월 24일 일이다. 그날은 바로 정회장이 전경련이 주관하는 공식 무대에, 그것도 국제 무대에 처음 데뷔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전경련의 약 10명 정도로 구성된 부회장단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다소 긴장된 속에서 기대 반 우려 반 속에서 치러졌다. 정회장이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전경련의 대표로서 공식석상에서, 그것도 국제회의를 주재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에서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수출시장은 물론 우리에게 절실했던 해외자본이나 기술력에 있어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조선분야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거기다가 런던은 미국 뉴욕과 함께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 경제계에서는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고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영국과 민간 경제계로 구성된 협력 기구를 결성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74년 6월 24일 ‘제1차 한영경제협력위원회 창립 총회’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창립 총회에는 한국 경제계의 중진 대다수가 참여하였다. 또 영국측에서도 한국의 높은 관심에 호응하여 영국 측 위원장인 로타 프린트 그룹의 지오프리 니콜스 회장을 비롯하여 조선, 화학, 중공업, 금융 등 중요 부문에서 30여 명에 달하는 기업인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서는 태완선 당시 부총리, 영국 측에서는 주한 영국 대사인 윌리엄 피터슨씨가 참석하여 창립 총회의 격을 높여주었다. 당시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사람은 경방그룹의 고 김용완 회장이었다.
전경련의 분위기는 새로 출범하는 ‘한영경제협력위원회’의 한국측 위원장에는 업종 등이 그에 걸맞는 인사가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재계 중진들의 의견이 모아진 것이 정주영 회장을 한국측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정회장은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이 중공업 육성에 역점이 주어지고 있던 그 시점에서 현대건설을 통해 중동 진출을 선도하여 경제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72년 현대조선을 설립, 조선 분야에 뛰어든 정회장은 조선 선진국 영국 경제계의 한국 파트너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회장을 위원장으로 내세우는 데는 몇 가지 우려도 있었다. 정회장은 현대건설, 현대조선, 현대자동차 등 여러 분야의 일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어 너무나 바쁜 일정 때문에 그 당시 전경련 회의에도 얼굴을 잘 내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해외 경제계 인사들과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주역을 맡은 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회장이 영어는 통역을 쓴다고 하더라도 국제 경제 문제에 대한 이해나 의전 지식, 필요한 기지, 대화 기술 등에 있어서 제대로 한국 민간 경제계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대하여 우려를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정회장에 대해 공식석상에서는 물론 평상시에도 말을 아끼고 대단히 수줍어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선 등 영국과 관련 분야가 정회장의 현대그룹이 가장 많기 때문에 결국 ‘한영 경제협력위원회’의 한국측 위원장으로 정회장이 선출되었다. 아직 전경련 회관이 건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회장소는 서울의 타워호텔 내 국제회의장으로 정해졌다.
국제협력기구의 한국측 대표로 추대되는 정회장의 이런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몇 가지 보완책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과 영국의 경제사정에 밝고 영어에도 능통한 몇 사람을 부위원장으로 선정한 것이다. 당시 부위원장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한국은행의 박성상 부총재, 영국 로이드 선박 한국 대표를 맡고 있으며 영국 사정에 밝았던 협성해운 왕상은 회장, 그리고 김우근 외환은행장 등 세 사람이었다. 특히 해운과 함께 은행분야의 인사가 둘이나 포함된 것은 한국과 영국의 금융 분야 협력을 위한 포석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던 정회장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나름대로 아주 꼼꼼하게 기본 자료와 원고를 검토하고 회의 진행 계획에 대해서도 미리 자세히 보고를 받았다. 또 개회 연설문을 어디서 어떻게 말을 끊고 통역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통역을 맡게 된 필자와 미리 계획을 세우고 반복해서 연습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회 당일. 사회자의 개회선언이 끝나고 드디어 정주영 회장이 연단에 섰다. 정회장의 첫 국제무대 데뷔가 시작된 것이다. 회의장을 메운 한국과 영국 정·재계 인사들과 그들의 집중하는 시선, 그리고 끊임없이 터지는 보도진의 플래시, 연단을 비추는 눈부신 조명… 정회장의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정회장의 개회 인사가 시작되었다, 원고를 읽기 시작할 때부터 평소보다 다소 높은 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얼굴 가까이 터지는 보도진의 플래시 조명 때문에 원고마저 잘 보이지 않는지 더듬거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연설이 시작되고 1분이 채 지났을까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잔뜩 긴장한 끝에 원고의 흐름을 놓친 정회장이 읽었던 부분을 또 읽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 서 있던 필자가 눈짓을 보냈지만 원고의 줄을 놓칠 정도로 긴장한 와중에 필자의 눈짓이 보일 리 만무한 일이었다. 그때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연설문의 원고 내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 정회장이 읽고 있는 부분과 관계없이 그 다음의 내용을 영어로 통역하거나 그 상황에 그럴싸한 원고에 없는 내용으로 얼버무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 읽었던 곳을 또 읽고 또 읽고 하니 사람들이 마침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회장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더욱 긴장하여 다시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평상심을 회복한 정회장은 그 나머지 부분을 침착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잔뜩 긴장했던 우리 경제계 인사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표정이 돌아왔다.
그날 이후 20년이 넘는 동안 정회장이 국제 무대에서, 국내에서 보여준 빛나는 재치와 순발력,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 실력과 화술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정회장의 국제 무대 공식 데뷔였던 그날의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창립총회 이후 한국은 영국 금융업계와 조선업계의 협력을 얻어 영국을 교두보로 다른 유럽지역에까지 기술, 자본, 시장 진출을 위한 협력관계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 후가 되는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정회장은 넘치는 재기와 거침없는 화술로 그의 기업가 정신과 철학을 얘기하는 인기 있는 연사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대학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왔고, 방송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프로그램에 담고자 했다. 심지어는 공무원 연수 교육에도 인기 높은 초청 연사가 되었다. 정회장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대부분의 초청에 응했다.(하편에 계속)
22 대학교수가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하시냐?"고 묻자 정주영 왈...
어눌한 말주변에서 달변가가 된 비법(下)
☜ 상편에서 계속
1986년 경 어느 날, 부산의 한 대학에서 정회장 초청 특별 강연회 초청이 왔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특히 노사갈등이 격앙되고 있는 시기라 재벌그룹의 총수가 거침없는 학생들과 만난다는 것이 꺼려지던 시기였다. 이 미묘한 시기에 TV 방영까지 예정돼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정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저, 회장님, 요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번 강연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더구나 TV 방영까지 한다는데 자칫 철없는 일로 학생들과 불미스런 언쟁이라도 붙으면….” 주위에서 우려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학생들이든 노동자들이든 만나자면 만나는 거지, 그리고 소통을 해야지. 재벌 총수가 무슨 죄인이라고 자리를 피하나!”
정회장 초청 특강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특유의 재담에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까지 적절히 섞어가면서도 강연 주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그의 여유 있는 언변 능력은 전문 강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나 지켜보는 필자로서는 불안한 마음이 돌았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시작될 학생들의 걸러지지 않은 거친 질문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회장의 강연이 끝나자 강한 눈빛으로 정회장을 주목하며 열심히 강연을 듣고 있던 학생들의 입에서 거침없는 질문들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재벌들이 오늘날처럼 성장한 배경에는 정권과의 유착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다음 질문들이 이어졌다.
“회장님, 세계가 놀라는 한국의 경제 발전은 우리 힘없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회장님이 누리고 계신 그것들을 노동자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지금 곳곳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대는 노동 쟁의의 주된 진원지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그룹의 총수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 앞에서 섣부른 말 돌리기가 통할 리도 없었고, 대답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또 변명이나 회피는 정회장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저도 우리 경제의 발전의 바탕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땀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는 데도 고쳐나가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노동자들의 과격한 투쟁이 곤혹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손실도 크고 외국 거래선에 대한 이미지에도 타격이 큽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말하고 싶은 것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주장과 입장이 있듯이 경영자에게도 자신의 입장과 주장이 있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양보 없이 밀어 붙이기만 할 때 경쟁력 기반이 약한 많은 기업들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회사가 없어져 직장 자체가 사라진 다음에 노동쟁의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처음에 질문하셨던 학생의 말처럼 과거 정권과 재벌의 관계가 소위 유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당시 한국에서 많은 경우 그와 같은 관계를 맺지 않고는 기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잘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저희로서는 기업을 지속하고 생존하자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점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 사회도 달라 질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 이러한 변화를 주도해야 할 일꾼들이 바로 여러분 학생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질문에서 나는 그런 희망을 갖습니다. 여담이지만 내가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린 중동 진츨을 하게 된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가 현대가 국내에서 정당하게 경쟁하여 공사를 땄는데도 걸핏하면 정경유착이라고들 수근 거리는 것이 듣기 싫어서였습니다. 자동차도 조선도 처음부터 목표가 세계였습니다.”
정회장의 대답은 공감 분위기 속에 그냥 넘어갔다. 정회장이 평소 철칙처럼 여기는 소신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솔직’이다. 학생들의 질문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 돌파한 것 역시 그의 노회한 전략이 아니라 평소의 솔직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부산에서의 특강이 있은 며칠 뒤, 정회장은 태국에서 방한한 각료급 인사를 만나기 위해 롯데호텔을 찾았다. 이야기를 끝내고 로비를 지나는 정회장 앞을 막고 누군가 이야기를 했다.
“아, 정회장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평소 안면이 있던 모 대학 교수였다.
“아, 예. 태국에서 방한한 분들이 있어서 잠시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예∼. 참 며칠 전 회장님께서 부산에서 대학생들과 토론하시는 것을 TV에서 잘 보았습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어쩜 그렇게 말씀도 잘하시고 기지가 넘치는지…. 그리고 학생들의 질문 하나하나를 받아넘기시는 모습을 보고 참 감탄을 했습니다.”
면전에서의 칭찬이 쑥스러웠던지 정회장은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참 너무 당연한 일을 가지고…. 원래 나처럼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말을 잘하는 법이오. 교수님처럼 학식이 높은 분들은 머리에 든 게 많아서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틀릴까’, ‘저렇게 말하면 이렇게 틀릴까’ 마련이 많아 제대로 말을 못하지만 나같이 아는 게 없는 사람은 느끼는 대로 말하니 말이 잘 나오는 것 입니다.”
정회장이 말하는 ‘말 잘하는 비법’이었다.
23 정주영 앞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 3가지 '불가능합니다'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
정주영의 사람 키우는 법(上)
정회장을 처음 보면 결코 미남이거나 자상한 인상을 주는 그런 모습은 아니다.
그 세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180㎝에 이르는 큰 키에 소박하다 못해 다소 무뚝뚝하고 투박한 전형적인 시골사람의 풍모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사 간부회의를 주재할 때는 집요하게 몰두하는 자세와 핵심을 찌르는 질문으로 분위기를 긴장시킨다. 그리고 그는 성격이 매우 급한 편에 속한다. 보고내용이 산만하거나 필요없이 길어지면 바로 결론부분을 제시할 것을 채근한다. 철저한 현장맨인 그가 현장에서 문제를 발견하여 불호령이 내려지면 현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일종의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떤 현장 책임자는 그가 무서워서 그 자리를 면피하고 보려는 속셈에서 일단 줄행랑을 쳤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의 불같은 질타와 호령은 얼마 가지 않아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그러 든다는 것을 그를 오래 보좌했던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정회장이 주위에 사람을 키우고 아끼는 데는 평소 그가 풍기는 분위기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면모가 있다.
1979년이었다. 그 해 정주영 회장과 전경련은 북한에 편향되어 한국에 외교적으로 비우호적인 자세를 보였던 비동맹국인 인도, 나이지리아 등과의 관계 개선에 정부를 대신해서 많은 공을 들였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최고 경영자라고 할 수 있는 정 회장은 이런 일이 생기면 열 일을 제치고 정부를 대신해서 앞장 섰다. 그래서 일정만 해도 자그마치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인도, 나이지리아에 머물며 그 나라의 대통령, 경제각료, 기업인들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다. 정부의 외교적인 접근이 먹혀 들지 않는 이들에게 정치 외교 얘기는 쏙 빼고 경제 협력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접근하는 전략이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미 널리 알려진 현대그룹의 총수이고 한국 대기업 모임인 전경련 회장 정주영은 어느 나라에서건 장관이나 심지어는 국가 원수 보다도 더 환영을 받는 편이었다.
그러나 성과와는 별도로 일정의 중반 쯤에 해당하는 나이지리아에 이르러 한국 경제 사절단 일행은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진행되는 정부 부처 방문과 회의, 상담에다 더위와의 싸움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항상 일에 욕심이 넘치는 정회장이 출발전의 계획된 것보다 더 많은 인사들을 만나고 행사를 추가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의 면담 자료를 새로 만들어 내야 되고, 연설문도 새로 작성하는 등 엄청난 준비 업무가 따라야 했고 이런 일들은 필자의 몫으로 행사가 없는 밤에 해야 했다. 많은 경우 여러 날 밤을 새우기가 다반사였다.
▲정주영 전경련 회장(왼쪽에서 두번째)등 4개 경제단체장이 1984년 10월 13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남북교역 및 경제협력에 관한 합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조선일보DB
일정이 끝나 정회장과 대표단이 귀국한 뒤에도 현지 기관들과 후속사항 협의 등 잔무들을 처리하고 며칠 늦게 귀국했다. 2주가 넘는 긴장 상태와 격무, 그리고 잠을 못 잔 것, 스무 시간 가까운 비행시간, 거기에 시차까지 겹쳐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심신이 거의 파김치가 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정회장은 본인 스스로 일을 놓고 쉬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필자는 그의 호출에 대비해 귀국 다음날 바로 출근을 해야만 했다. 출근은 했으나 컨디션은 그야말로 비몽사몽 말이 아니었다.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한데다 누적된 피로로 인해 몸은 땅속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당시 전경련 사무국은 삼일로 빌딩을 쓰고 있었다. 인터폰이 울렸다. 28 층 회장실에서 정회장이 찾았다.
“박군, 언제 도착했어?”
“어제 저녁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말이야 이번에 만나고 온 사람들한테 각각 내 이름으로 편지를 써.”
“아, 인사 편지 말씀입니까?”
“그래. 자네 우리 만난 사람들 명단 가지고 있지? 한 사람도 빼놓지 말도록 신경을 써서 작성 해. 그리고 의례적인 인사말만 쓰지 말고, 그 사람들하고 나눴던 얘기 내용 메모 가지고 있지? 그걸 가지고 구체적인 후속 업무 제안까지 포함해서 우리측 계획도 이야기하고.”
“알겠습니다. ”
“그리고 말야, 내일 아침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니까 그때 가지고 와서 내 싸인 받도록 해.”
정회장이 지시한 편지란 단순히 시간 내 만나줘서 고맙고, 이야기가 유익했고, 두 나라 사이의 이해 증진에 도움이 되었고, 베풀어준 후의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한국을 방문해 주길 바란다는 식의 형식적이고 획일적인 인사 편지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나눴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경제협력 사업을 위한 실제적인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인적 교류나 향후 추진 계획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되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써 내려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방문 했던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인도의 레디 대통령, 나이지리아의 부하리 석유 장관까지 포함하여 양국의 경제부처 장관들, 기업인 등 자그마치 30명이 넘는 인사들에게 하나하나 상황에 맞춰서, 그것도 하루 저녁 안에 편지를 쓸 일을 생각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게다가 몸과 마음은 어질어질 정신이 없는 상태고, 편지는 영문판과 정회장 결재를 위한 국문판 두 가지로 준비해야 했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타자기로 그 수많은 편지를 그토록 짧은 시간에 정회장 기대에 맞게 작성해 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상황과 전후 좌우 면담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은 필자 뿐인데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안되었다.
그러나 정회장 앞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못하겠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알겠습니다’ 할 수밖에. 그러나 수화기를 내려놓는 내 마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이윽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일종의 묘수를 발견한 것이다.
편지를 세 부분으로 나눴다. 그것은 보통 의례적인 내용이 포함되게 마련인 편지 앞부분의 인사와 다음날 정회장이 서명할 끝부분만 영문으로 타자하여 먼저 준비하고 따로따로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많은 구상과 기안 노력, 시간이 필요한 중간 부분은 우선 그 내용을 정회장이 결재할 수 있도록 우리말로 요약 작성하고 이 부분 영문은 정회장 서명이 들어가는 부분이 아니니까 하루 이틀 시간을 두고 작성하여 먼저의 앞부분과 정회장의 서명을 받아 놓은 끝 부분을 합하여 발송하는 요령이었다.
필자는 일단 집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아무래도 밤새워 일하자면 사무실보다는 집이 편했고, 집에는 여벌의 타자기가 있었다. 그리고 정회장이 볼 우리말 부분을 깔끔하게 정서해 줄 조수 역할을 할 집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밤새 정회장이 접촉한 인사들의 명단을 앞에 놓고 하나 하나 편지를 작성해 나갔다. 물론 중간의 주요 내용은 남겨둔 채 앞부분 첫 장과 정회장이 직접 서명 할 뒷장의 인사 부분이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안 별 내용이 포함되는 가운데 부분은 각각 면담 내용을 기초로 우리말로 내용을 요약해 정회장이 검토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밤을 꼬박 세워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회장 앞에 밤새 타자 쳐놓은 영문 앞부분과 서명부분이 있는 뒷장과 추후에 영어로 채울 중간의 본론 부분 편지 내용의 우리말 요약을 정회장 앞에 내놓았다. 필자가 내민 것을 검토하던 정회장은 이내 가운데 본문 부분이 우리말 요약만 있고 영문 부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해 냈다. 필자는 그것이 물리적인 한계 내에서 최선이었다는 것을 설명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정회장이 갑자기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나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예상했던 것은 꾸중을 듣되 얼마 정도의 꾸중을 듣느냐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네, 밤새 한잠도 못 잤지?”
“예.”
“내 그럴 줄 알면서 일부러 시켰어. 자네가 어떡하나 보려구 말이야. 잘했어. 아주 잘했어. 이제 끝장은 내가 사인을 할거고 중간은 여기 우리말 내용대로 영어로 작성해서 보내면 되겠구만.”
아울러 중요한 수신인에게 보내는 본문 내용 요약을 검토한 후 몇가지 추가할 사항들을 지시했다. 그리고 정회장은 아주 밝은 표정으로 편지 마지막장 한장 한장에 정성들여 자필 서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서명이 된 편지들을 필자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박군, 내가 왜 이렇게 일을 시키는 줄 아는가?”
“…….”
나는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봐, 사람이 일을 하는 데는 물리적인 한계라는 게 있어.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해. 10일 걸릴 일이 있다고 할 때 20일 기간을 주면 일을 두 배 더 잘하는가? 그렇진 않아. 또 5일만 주면 엄청나게 부실해지나? 그것도 아니지. 문제는 말이야 남들하고 똑같이 해서는 남들보다 결코 앞설 수가 없다는 거야. 남들 열흘 걸릴 일이라면 2-3일에 해치우고, 남들 두달 걸릴 일이라면 한 달에 끝내야 앞설 수 있는 거야.”
구체적인 사항이 담긴 본문 내용을 영문화해서 편지는 다음날 발송되었다.(하편에 계속)
24 정주영 회장에게 "병신 같은 거, 나가 죽어" 소리 들은 현대중공업 황전무, 그 후…
정주영의 사람 키우는 법(下)
이렇게 부하직원에게 무리한 일까지 하도록 요구하는 정회장의 스타일은 때로 원망을 받기도 하지만, 이렇게 단련 받아 성장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정주영맨’이자 ‘현대맨’으로 거듭나게 된다. 정회장의 인재 단련의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현대중공업 유럽본부장을 지낸 황전무 얘기다. 당시 정회장이 유럽이나 중동 아프리카 지역 출장 때마다 현지 동원되어 정회장을 보필하며 그가 보여준 모습은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 충성스러운 부하 임원의 차원이 아니라 집안 어른을 공경하듯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과 극진함이 옆에서 보기에도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정회장은 특히 해외출장 시 온도 차가 심한 지역간 이동으로 감기가 들거나 무리한 일정으로 피로하여 컨디션이 안 좋거나 일이 맘에 안 들면 현대 직원들한테 마치 편한 가족들한테 대하듯 짜증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황전무는 정회장에게 어떤 꾸중을 듣든 표정 한번 변함없이 한결같은 태도로 성의를 다하여 정회장을 보필하였다. 그와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필자가 물었다.
“황본부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쩜 회장님을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해 극진하게 모실 수 있습니까?”
“저도 전에는 그분이 그냥 직장 상사, 우리 회사의 창업주 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마산 출신의 황전무는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나와 대한조선공사에서 엔지니어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현대조선에 스카우트된 것은 그의 실무 경험과 능력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현대에는 조선 실무경험자가 많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해외 조선 관련 업체들과의 교섭이나 납기 관리 등의 경험자가 드물었다. 덕분에 그는 현대에 스카우트되면서 젊은 나이에 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당시 정회장은 출범 초기의 현대조선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거의 조선소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젊은 황부장의 의욕적이고 성실한 모습을 지켜보고 많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정회장의 이런 기대는 간부회의에서 구체화되었다.
“앞으로 이번 수주받은 선박 건조와 공기 관리는 모두 황부장이 주관을 하도록 해. 그리고 위의 임원들은 황부장을 지원하란 말이야. 섭섭하게들 생각할 필요 없어. 실무 경험이 많은 친구가 여기 황부장이니까.”
/2014년 현재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느닷없이 선배들을 제치고 선박 건조의 현장 총책을 맡게 된 황부장은 이후 배를 다 만들 때까지 밤낮 없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현장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배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었던 데다 애초에 계약상의 인도 날짜 자체가 맞추기 힘든 무리한 것이었다. 황부장을 비롯하여 모든 직원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배는 납기 날짜까지 만들어지지 못했다. 이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거액의 지연 배상금이 배 값에서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정회장은 황부장과 현장에서 밤낮을 함께 지내며 그의 불같은 작업독려가 시작되었다. 아울러 달라진 게 있었다. 황부장을 대할 때마다 정회장의 입에서는 ‘병신 같은 거, 나가 죽어’라는 말이 수시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는 술회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현대에 얼마나 큰 손해를 끼쳤나, 그리고 그런 소문이 다른 선주들한테 알려지면 앞으로 회사의 수주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면 정말 회장님 말씀대로 딱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때 죽어 버리면 배는 더 늦어 질 것이고 하루라도 더 늦으면 늦을수록 손해가 엄청나게 커진다고 생각하니 죽을 수도 없더군요.”
인도 기일은 지연됐지만 이런 노력 덕분에 배는 오래지 않아 하자 없이 선주에게 인도되었다. 납기 지연에 따른 배상은 당연히 물어내야 했다. 그리고 황부장은 현대를 떠날 준비를 했다.
“현대조선은 물론 이제 한국의 조선업계에선 이미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니까 막막하더군요. 그래서 마산 본가에 있는 형한테 내려가 농사나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회장은 그를 내쫓기는 커녕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승진시켜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누구보다 빨리 이사가 됐고 곧 이어 전무가 되어 해외 핵심 지점인 유럽 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맞게 되었다. ‘병신 같은 놈’이라고 질책을 하며 그를 몰아 부쳤지만, 정회장 역시 그가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나를, 그리고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유능한 재목인가를 간파했던 것이다.
“회장님은 내게 단순한 회사의 상사가 아닙니다. 나는 그분과 회사를 위해서라면 내 모든 죽을 힘을 다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렇게 정회장은 그를 확실한 자기 사람으로 키운 것이다.
25 정주영, 터널공사 때 인부들이 겁에 질려 물러서자 자기가 직접…
타고 난 보스의 사람 사랑과 인재관(上)
1980년대 초 정회장이 출장 중 미국 워싱턴 D.C.에 들리게 되면 공식 일정이 없을 때 현대그룹 현지 지사 대표, 이 비서 그리고 필자 등 소위 ‘집안 식구’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자주 들르던 고즈넉한 한정식 집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한정식 집인데 춘원 이광수의 딸이 해방 후 이민 와서 운영하는 한식집이라고 했다.
정회장은 강원도 통천 산골에서 어린 시절 동네 이장 집에서 틈나는 대로 빌려다 본 책 중에 개화기 시절을 무대로 한 춘원 이광수의 소설들을 감명 깊게 읽었는데 소설에 나오는 도시 얘기에 심취하여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고 그것이 아버지의 소 판돈을 몰래 가지고 서울로 가출을 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자서전에서 술회한 바 있다. 아마 정회장이 이 집을 좋아했던 데는 그런 춘원에 대한 추억과 어린 시절의 향수가 한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일행이라야 정회장을 포함하여 대여섯 명이라서 조선시대 고가구들이 놓여있는 한식 장판방에 자리를 잡았다. 특히 이런데 들어서면 정회장은 자상한 집안의 큰 어른 같은 분위기를 더욱 풍겼다. 이 방의 벽에는 지금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춘원의 글씨로 추정되는 ‘德不孤’ (덕불고)라는 고색창연한 휘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저건 참 좋은 말인데 원래는 ‘덕불고 必有隣 (필유린)’이란 말을 줄여서 쓴 거야. 사람이 항상 덕망을 잃지 않고 살면 마음을 나누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만한 귀중한 가르침이야.”
우리들은 그저 그의 가르침이 황송할 따름이었다.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씨.
이어서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집의 음식을 상에 들여오는 방식이 한식이지만 한꺼번에 미리 다 차려 놓는 것이 아니라 서양식을 절충하여 코스마다 그때 그때 요리 접시를 들여오는 식이었다. 먹기 편하게 미리 토막을 친 큼지막한 생선 요리가 들어왔다.
“그 생선 요리 접시를 이리 줘요.”
우리들이 의아해하는 순간 정회장이 웨이터로부터 접시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는 젓가락으로 그 생선을 한 토막씩 좌중의 우리들 접시에 일일이 직접 옮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자기 몫으로 남겨 맨 나중에 그의 접시에 담는 것은 먹을 것이 별반 붙어있지 않은 초라한 생선 머리와 꼬리 부분이었다. 당황스럽고 황공했지만 우리는 그저 별 수없이 감지덕지 잠자코 음식을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저녁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필자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한 국내 최대 재벌 그룹의 회장이 주재하는 사장단 회의에서 새로 영입되어 아직 그 그룹의 기업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한 사장급 인사가 그럴만한 분위기에 이르러서 소리나게 웃었다고 나중에 그의 책상에 주의하라는 경고 메모가 놓였다는 애기가 생각났다. 또한 선대 창업주에 이어 그룹을 승계 받은 겨우 삼십대 후반의 젊은 회장이 전경련 주관 해외파견 경제 사절단에 참여하기 위해 출국하거나 귀국할 때 공항에서 나이로는 그의 아버지 뻘되는 창업 공신 그룹 사장단 5~6명이 좌우로 도열하여 굽신 거리며 뒤따르던 모습이 함께 교차 되었다. 정 회장의 면모와 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정회장이 사람을 가름하는 특징 중에 하나는 실질적인 알맹이에 비해 언변이 유창한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점이었다. 같은 자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언변이 유창하면 정회장의 눈에 드는데 도리어 손해를 보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대그룹사 사장들 중에는 말솜씨가 아주 돋보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정 회장은 말을 다듬고 조심하는 스타일보다는 소탈하고 솔직하게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어떤 때 비서진이나 그룹사 사장들과의 대화나 업무회의를 듣고 있으면 대그룹 총수와의 대화라기보다 가족들이 집안 어른을 모시고 일을 의논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이러한 것은 정회장 자신의 스타일, 그리고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특징은 거의 14년 가까이 정회장을 보좌하는 동안 국내외에서 그가 외국 인사들을 접견하거나 원고 없이 예정에 없던 연설을 할 때도 통역을 맡은 필자가 큰 어려움 없이 그와 호흡을 맞춰 편하게 내용을 전달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미사여구를 써서 말을 꾸미거나 주부와 술부가 구분이 안 되게 길게 중언부언하는 것을 싫어하는 정 회장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부부와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장 부부와 자녀들의 모습.
정회장이 간부들에게 자주 들려주던 리더의 덕목에 관한 얘기 하나를 소개한다.
“나폴레옹이 흥망을 가름하는 전투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급박해 지고 있었대. 앞의 능선 아래 벌판에서 적군이 벌 떼처럼 진격해 오고 있었대. 그걸 신속히 제압하지 못하여 그들이 우군진영 능선 방어선을 넘어 오게 되면 숫자적으로 절대 불리한 우군이 전멸하게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 되었대. 그걸 제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히 우군의 포대를 사계가 확보되는 능선 위로 올려놓고 몰려오는 적군을 향하여 집중 포격을 해야 되는데 문제가 생긴 거야. 수레에 실은 포대가 못 올라오고 있는 거야. 나폴레옹이 황급히 말을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어. 마침 비가 온 뒤라서 능선 아래 길이 진창이 되었는데 맨 앞의 포차 수레바퀴가 진창에 박혀서 여남은 명의 병사들이 달려 붙어 기를 쓰고 밀어도 수레가 꼼짝도 안하고 있는 거야. 그 옆에서는 말을 탄 지휘관 장교가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는 거야. 이것을 본 나폴레옹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두말없이 병사들과 합세하여 수레를 밀었어. 순간 꼼짝도 안하던 수레는 거짓말처럼 수렁을 빠져나와 능선위로 올라갔고 다른 포차들도 뒤따라서 능선 아래 적군에게 집중 포격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있게 되었대.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 있어. 수레가 움직인 것이 힘이 유별나게 센 장사도 아닌 나폴레옹 장군 한사람의 힘이 더해졌기 때문일까? 아니야, 나폴레옹은 도리어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을 가진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어. 수레가 올라 갈 수 있었던 것은 천하의 나폴레옹 장군이 일반 병졸들과 합세하여 함께 수레를 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의 감동으로부터 새로이 뿜어 나온 물리적 차원을 넘는 용기와 힘 때문이야. 조직을 이끌기 위한 직위와 위계질서, 그리고 권위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단지 군림하는 권위가 되어서는 안 돼. 항상 현장 식구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넓혀가야 현장 사정을 제대로 파악 할 수 있고 제대로 조직을 이끌어갈 수 있는 거야.”
정회장은 이러한 리더의 덕목을 철저히 스스로 실천하고 산 사람이다. 요즈음의 레미콘이 나오기 전 현장에서 삽으로 콘크리트를 그 보다 더 잘 갤 수 있는 건설현장 직원은 없었다. 실제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경부 고속도로 건설 기간 중 대부분 찝 차를 개조한 비좁은 탑차에서 밤잠을 자며 현장에서 보냈다. 뿐만 아니라 터널 난공사 구간에서 착암기를 들고 수직 절개 면의 바위를 부셔낼 때 자칫 보이지 않던 수맥이 터져 순간 토사와 이수가 폭발적으로 분출해 나올 경우 매몰의 위험이 두려워 작업자가 겁이 나서 주저하고 있을 때 정회장은 서슴치 않고 착암기를 뺏어들고 직접 바위를 깨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고속도로 건설에 있어서 국내 업계의 일천한 기술과 경험, 열악한 장비, 부족한 예산, 유난히 산과 계곡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 특성 상 수없이 많은 난공사 구간에도 불구하고 단위 길이 당 세계 최저가, 최단기간 완성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은 정회장의 이러한 현장주의와 리더십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계 토목공사 역사에 ‘정주영 공법’이라는 말로 하나의 전설이 된 아산 방조제 폐선 이용 물막이 공사라는 발상은 늘 현장의 작업 상황을 예리하게 지켜보며 상상력을 발휘한 그의 현장주의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떠오르지 못했을 것인지도 모른다. 정통 토목 공학 교과서나 현장 설계도면 만 들여다보며 몰두해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발상이다. 요즘 많이 얘기되고 있는 창조와 혁신의 극적인 산 예를 일찍이 정회장이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하편에 계속)
26 레이건 대통령과 중동왕 등에게 받은 귀한 선물을 부하들에게 모두 나눠주다
타고 난 보스의 사람 사랑과 인재관(下)
현대그룹 내의 비서실을 비롯하여 정회장을 가까이 보좌하는 간부들과 정회장과의 관계에는 거대한 재벌 그룹에서 흔하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비서실을 예로 들면 다른 재벌그룹과 달리 우선 조직부터 5~6명 정도로 대단히 단촐하다. 비서실 선임자는 임원급이 아니고 부장이나 과장급이 맡고 있다. 이들이 정회장을 보좌하는 자세는 엄격함과 긴장하는 분위기는 보이지 않고 늘 집안의 어른을 모시는 것과 같은 진지함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성의가 배어있는 것이 엿보였다. 정회장이 이들을 대하는 모습도 아버지가 자식들을 대하는 그런 온화함이 있었다.
▲1986년 11월25일 고희를 맞은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부인 변중석 여사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조선일보DB
“어떤 직원을 쓸만하다고 비서실에 데려다 놓고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그룹 전체 간부들 이름과 맡은 일 등, 그리고 나의 회사 밖의 인맥 관계, 그리고 나의 음식 취향이나 습관 등을 잘 알게 되어 나도 더 편해지게 되지. 그러나 내가 편하자고 그런 사람을 비서실에 오래 붙들어 두면 안돼. 왜냐하면 그도 사업 부서에 나가서 실무를 배워서 본인도 유능한 인재가 되고 회사에도 더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경우 유능하고 아끼는 비서 일수록 일정 기간이 지나면 비서실에서 실무 부서로 내보내서 그룹 간부로 성장하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언뜻 밖으로 나타나는 무뚝뚝하고 엄해 보이는 그의 외모와는 달리 휘하 사람을 사랑하고 챙기는 그의 섬세한 면모와 관련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1980년대 초 이미 약 4~5년간 비서실에서 정회장을 보좌했던 한 차장급 비서를 현업 부서로 전보시키게 되었다. 정회장은 다른 비서실 직원을 시켜 송별회 저녁 일정을 지시 했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재벌 총수가 지시한 실무자 급 비서를 위한 송별회 일정이 이채롭다. 우선 맥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 후 함께 연극 구경을 하는 것이었다. 그 뿐 아니었다. 그날 회식이 끝난 자리에서 정회장은 그에게 손목시계를 하나 기념으로 주었다. 그런데 그 시계는 정회장이 중동의 한 왕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대단히 귀중한 것이었다.
그 비서는 그 후 그룹전체의 구매 업무를 총괄하는 통합구매 실장, 주력 계열사 사장, 그리고 정회장 타계 후에는 현대·기아차 총괄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런 동안 그의 업무 자세와 성실성은 유별난 것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 그와 같이한 자리에서 골프 얘기가 나왔다. “나는 골프를 못 치기도 하고 안치기도 합니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고, 또 주중에 외부 사람들과 골프를 쳐야 일이 되는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주말에는 모처럼 가족들과 보내야 하고 일요일엔 교회에 가야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회사에서 맞고 있는 직책과 위치가 있는만큼 골프를 안치는 것이 골프를 치는 것 보다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아예 안칩니다.”
▲25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산에서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유해가 하관한 후 맏상주 정몽구 회장이 시토하고 있다.
그에 대한 정회장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는 일찍이 그의 그러한 성실성과 사람됨을 일찍이 알아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필자와도 친근한 사이라 요즘도 그와 만나고 지내는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정회장 얘기를 할 때면 그는 자세를 가다듬는다. 필자도 정회장의 이러한 면을 체험했다. 1984년 정회장의 백악관 방문을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정회장은 조그마한 선물 상자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필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뭐 와이셔츠에 하는 거라는데 나는 이런 거 안해. 자네가 해.”
정회장 스타일을 잘 아는 나는 사양할 겨를도 없었다. 호텔 와서 열어보니 백악관 문장과 레이건 대통령 사인이 새겨진 금장 커플링이었다. 정회장이 직접 사용하지 않더라도 기념으로 보관할 만도 하지만 정회장의 스타일이 그랬다. 또한 거기에는 필자에 대한 정회장의 사랑과 배려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아직껏 그것을 애지중지 간직하고 있다.
한편 정회장의 인재 양성론에는 한 가지 유별난 집착이 있다.
“건설 사업이라는 세계에는 다른 사업과 아주 다른 데가 많이 있습니다. 건설 사업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 벌판에 현대식 초고층 빌딩들을 세워 도시를 만들기도 하고 험준한 산 밑을 뚫어 길을 내고 강과 계곡 위에 다리를 놓고 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상의 어느 사업 보다 창의력이 요구 될뿐 아니라 항상 엄청나게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요소, 난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최고의 기술도 필요하고,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기후와 자연 재해와도 싸워야 하지요. 유별나게 많은 각종 규제 문제를 해결해야 되지요. 거기다 대개 막대한 투자가 요구되는 것이 건설업입니다. 이런 건설 사업에서 실무와 경영 능력을 쌓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맡겨도 잘 해낼 수 있는 있는 재목이 됩니다.”
실제 현대 건설에서 이렇게 양성된 인재들은 건설 분야 외의 자동차, 철강 등 현대그룹의 타 업종 분야의 창업과 경영에 주역을 담당했다. 관점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후에 나라의 최고 경영자랄 수 있는 대통령이 기업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현대 건설에서 배출된 것도 어쩌면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27 정주영이 '쨍하고 해뜰 날' 부를 때 이명박은 손 흔들며 박자 맞추고...
만능 엔터테이너 재벌 총수(上)
강원도 산골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출하여 쌀가게 배달 소년으로 시작하여 한국 경제사의 이정표를 바꿔놓는 엄청난 업적들을 남긴 정주영 회장. 그런 그를 생각할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실로 상상하기 힘든 다양한 면모들을 돌이켜 보면 신비감을 금할 수 없다.
사실 정주영 회장의 업무 스타일은 상당히 공격적이고 단호하다. 생각했던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불호령을 내리기 일쑤고, 어지간한 일에는 칭찬마저 인색할 정도다. 때로는 밤잠을 못자며 일을 해도 만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일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다. 때문에 정회장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긴장된 자세로, 추호의 실수도 범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어려운 여건이 도사린 도전적 사업의 성취는 물론 유능한 인재를 훈련하기 위한 그의 조련사 기질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정회장이 회식 자리에 나타나면 직원들은 환성을 지르며 반긴다. 이들의 환호는 일반적으로 직장 상사가 회식 자리에 낄 경우 어서 한 잔 하고 가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을 속에 감추고 의례적으로 하는 표현이 아니다. 진정으로 정회장의 출현을 반기는 것이다. 바로 정회장의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질 때문이다. 회식 자리라고 해서 언제나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는 법이어서 때로는 심각한 분위기에서 누군가 성토를 당하기도 하고,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는 불안한 미래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한다. 그러나 정회장이 나타나는 순간 분위기는 삽시간에 ‘회식’ 고유의 활기와 유쾌함으로 가득 찬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북돋우는 정회장의 첫 번째 메뉴는 대개 노래다. 어떤 자리에서든 마이크가 주어지면 마다하지 않을 만큼 노래를 좋아하기도 하고, 또 그만큼 잘하기도 한다. 미성은 아니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몸을 흔들어 정확한 음정으로 박자를 맞춰가며 열창한다. 정주영 회장이 즐겨 부르는 18번으로는 우선 윤항기의 ‘이거야 정말’을 꼽을 수 있다.
‘이거야 정말 만나봐야지 아무 말이나 해볼 걸/봄이 가고 여름 오면 저 바다로 산으로∼ 나 혹시나 만나려는 그 사람이 있을까/이거야 정말 만나봐야지 아무 말이나 해볼 걸’
▲1981년 신입사원 환영식에서 노래하는 정주영 회장(왼쪽)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조선일보DB
그룹의 총수 입에서 이런 대중가요가 천연덕스럽게 울려 나오기 시작하면 직원들은 모두 부담감을 털어내고 재미있고 흥겨운 분위기를 타게 된다. 거기다 마이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단번에 좌중을 휘어잡는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앞으로 나온 직원들과 마이크를 든 채 어깨동무를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이런 정회장의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우리 호랑이 회장 맞아?’ 하고 혀를 찬다.
정회장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데는 활기찬 리듬과 아마 기업 조직에서 직위를 초월한 구성원 간에 만나고 속을 털어놓는 소통과 ‘저 바다로 산으로’라는 진취적 표현이 가사에 들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곤 대개 송대관의 ‘해 뜰 날’이 이어진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슬픔도 괴로움도 모두모두 비켜라/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사실 이 노래는 송대관의 노래라기보다는 정회장의 노래다. 그만큼 시련을 극복하고 도전 정신으로 점철된 그 자신의 역정을 대변한 노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가사를 볼 때 정회장의 자서전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무척이나 좋아했다. 정회장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자신의 지난날을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술기운을 빌어 킬킬대며 수근거린다. “더 이상 해가 어떻게 더 떠? 강원도 통천에서 맨몸으로 가출해서 세계적인 기업 그룹의 총수까지 됐는데 어떻게 더 해가 더 떠?”
이외에도 정회장은 서유석의 ‘가는 세월’도 즐겨 불렀다. 이때는 가사 내용이 그렇듯이 노래를 부르는 정회장도,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도 분위기가 다소 숙연해진다. 할일 많고 의욕 많은 그에게 막지 못하는 가는 세월이 얼마나 야속했으랴.
“아니 정회장님처럼 그렇게 바쁘신 분이 어느 겨를에 그 노래들을 다 배우셨습니까?”
그때그때 유행하는 대중가요를 가사 하나 안 틀리고 유창하게 꿰고 있는 정회장을 보고 누가 물었다.
“서울과 울산을 오가는 차 안에서 카세트 테이프 틀어놓고 배웁니다. 회사의 젊은 식구들과 어울릴 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거든요. 내가 노래를 부르고 흥을 돋아 주면 그들도 세대 차나 회장이다 뭐다 하는 것을 떠나 마음을 열고 다가와요. 그래서 열심히 노래를 배워요. 그들과 노래하고 어깨동무도 하고 그럴 때가 내게도 가장 행복한 때이기도 하고요.”
정회장이 가끔 부르는 노래 중 아주 분위기가 다른 노래가 하나 있었다. 미국 민요 ‘메기의 추억’이었다. 한 번은 외국 출장지에서 수행 기자들도 참석한 회식자리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정회장님, 그 노래는 초등학교 음악 책에는 안 나오는 미국 노랜데 어떻게 배웠습니까?”
짓궂은 한 기자가 농을 걸었다.
“하하, 사연이 있지요. 6·25 때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피난 내려가다가 얼마간 대구에서 어떤 집 문간 방을 얻어서 있었는데 건너 방에는 역시 피난민으로 어떤 목사님이 대학생인듯한 따님과 묵고 있었어요. 난리 중에 뭐 할 일이 있습니까, 전쟁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 걱정만 태산이지. 그런데 그 목사님 따님이 이 노래를 고운 목소리로 부르는데 처음 듣는 노래지만 너무 듣기 좋더라고요. 그래서 가르쳐달라고 졸랐지요. 그래서 배운 겁니다.”
“옳거니, 그때 노래만 배우신 게 아니고 정회장님 혹시 무슨 사연도 있었든 것 아닙니까?”
“아! 아무래도 그러셨을 것 같은데 우리가 기사 안 쓰기로 오프 더 레코드를 합의 할 터이니 회장님 이실 직고하시죠!”
좌중에는 분위기가 고조된 터에 기자들이 취기를 빌어 물고 늘어졌다.
“아, 아닙니다. 사연은 무슨···. 그 여자는 어엿한 대학생인데 촌티가 질질 흐르는 별 볼일 없는 피난길 중년 영감인 내가 감히 언감생심 턱도 없는 일이었죠. 노래 가르쳐 주는 것만도 고마워 감지덕지 열심히 배웠죠. 우리 군이 북한군한테 계속 밀리는 바람에 얼마 후 그 부녀도 어디론가 떠났고 나도 부산으로 내려왔죠. 그게 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 한 순간 옛일을 더듬는 회억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 같았다. 정회장이 ‘메기의 추억’을 부를 때 수십 년이 지나 어느덧 노령에 이른 그의 마음 한구석에 ‘옛날의 금잔디 동산’이 아닌 ‘옛날의 피난길 셋방의’ 그 여인의 모습이 노래 가사 속의 소녀 메기처럼 아직도 그의 가슴 한구석에 아련히 남아있는 건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그냥 노래만 남은 것인지는 그 만이 알 일이었다.
28 정주영 회장의 19금 농담 '돌쇠와 아씨'
만능 엔터테이너 재벌 총수(下)
재벌 총수 엔터테이너 정회장의 역할은 노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간 겪었던 자신의 체험담이나 비화 같은 것들을 격의 없이, 참으로 재미있게 구성해서 들려주곤 했다. 이 중에는 ‘성인용’ 얘기도 포함된다.
1979년 여름 정주영 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명의 한국 경제 사절단 일행이 약 일주일 간의 나이지리아 방문 일정을 마치고 출국을 위하여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마친 그들의 마음은 단순히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일종의 해방과 안도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약 일주일간의 라고스 체재는 거의 견디기 어려운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물론 제일 고급 호텔에 묵었다. 하지만 무지무지하게 더운 날씬데도 호텔 냉방장치가 제대로 가동이 안되었다. 냉장고도 작동이 안되어 시원한 음료 한잔 마실 수가 없었다. 더위를 조금이라도 더는 길은 틈날 때마다 옥외 수영장에 나가 목만 내놓고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었다. 치안이 불안해 공식일정 외엔 한발도 호텔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악몽 같은 상황은 호텔 체크아웃 때 절정에 달했다. 정전이 되어 엘리베이터가 올스톱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공항 시간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언제 들어올지 모를 전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호텔직원들은 제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았지만 20 여명의 짐을 한꺼번에 계단을 통해 로비로 내리기는 역부족이었다. 현지 지사 직원들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정회장을 비롯한 대표단 일부를 제외하곤 땀범벅이 되어 직접 짐을 들고 내려와야 했다. 대부분 10층 이상 객실에 묵고 있던 대표단들이 짐을 가지고 로비로 내려오는 당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악몽이다. 거기다가 대표단 반 이상이 정회장을 비롯하여 김각중 경방 회장, 설원식 대한방직 회장, 최화식 대한 펄프회장, 김입삼 전경련 상근 부회장 등 이미 60이 넘은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들 중 이런 상황에서 행여 건강 이상 사고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잔뜩 긴장해야 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지만 이것이 당시 나이지리아의 형편이었다. 이런 악전 고투의 일정을 마치고 마침내 공항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은 금방 소리 높여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음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공항 사정으로 우리가 탈 비행기가 5시간 정도 연발할 것이란다. 출국의 기대에 부풀었던 대표단의 실망감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공항과 섭외해서 기다리는 동안 대표단이 따로 쓸 수 있는 작은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기다려야 할 앞으로의 5시간은 50시간과도 같이 느껴지는 아득하고 먼 시간이었다. 거기다 그간 고역과 긴장 끝에 마음과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렇다고 주변 상황이 잠을 붙일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이 때 대표단 단장일 뿐 아니라 최고령자인 정회장이 나섰다. 이들의 지루한 시간을 위로할 ‘기쁨조’ 엔터테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반주도 없는 상황에서 노래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사업 얘기도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가 아니었다. 생각 끝에 모두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는 ‘성인용 전설 따라 삼천리’를 내놓기로 한 것이다. 전에도 정회장이 격의 없는 사이의 인사들과 회식 후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가끔 하는 것을 들은 이 장르의 정회장 얘기는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라도 그때 그때의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약간씩 변주해 가며 펼쳐내는, 평소 무뚝뚝해 보이는 재벌 총수 정회장의 이야기 솜씨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한 번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듣는 사람은 화장실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좌중을 매료 시키는 것이었다. 얘기에 나오는 화자 주인공이 바뀔 때마다 말하는 인물과 상황 분위기에 맞는 가성으로 여자면 여자 목소리를 구사해 가며 이끌어 가는 그의 실력은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그 의외성 때문에 충격에 가까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날 라고스 공항에서 그가 한 ‘성인용 전설 따라 삼천리’를 요약 정리하여 소개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아주 커다란 대갓집이 하나 있었겠다. 그런데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것 같은 이 종갓집에도 고민이 하나 있었거든. 백방 노력을 해도 후손이 나질 않는 거야. 지성도 드려보고, 굿도 해보고 몸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어봤지만 도통 소식이 없어. 생각 끝에 씨받이도 들여보고 별 짓을 다해도 씨가 부실한 건지, 밭이 부실한 건지, 원 소용이 없는 거야. 그러다가 마님이 신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어느 깊은 산중 절에 백일 불공을 드리러 갔겠다. 근데, 참 신통하기도 하지, 백일 불공을 마친 끝에 애기가 들게 되었어. 그리곤 달이 차기도 전에 드디어 애기를 낳았어. 귀한 공주님이었지. 어째서 애가 빨리 나왔는지는 나도 몰라. 아마 애비는 하나도 안 닮았대지? 하지만 칠삭둥이면 어떻고 팔삭둥이면 어떤가. 손 귀한 집에 자식이 났으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겠나? 온 동네 사람 불러다 놓고 소 잡고 돼지 잡아 큰 잔치를 여러 날 했지. 물론 그 산중 암자에도 적잖은 시주가 들어갔지.
손에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이 어느새 방년 18세를 넘어 20세의 꽃다운 아씨가 되었단 말이야. 그런데 웬일인지 이 아씨는 시집을 가질 못했어. 그러던 참에 한 두 해를 사이에 두고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 버렸어. 졸지에 큰 종가 가솔을 거느리는 가장이 된 거야. 그러다 보니 혼기를 아주 놓치고 삼십대를 바라보게 되었지. 그 시절엔 처녀가 스물을 갓 넘겨도 과년한 것으로 혼처를 정하기가 어려웠던 처지가 되어버리는 터인데 말이야. 그러던 중 여름이 다 갈 무렵 어느 날 이웃 마을에서 전갈이 왔어. 친척집에 대사가 있으니 꼭 참석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친척집 대사에 빠질 수도 없고…. 그래서 집안 종놈들 중에서 제일 잘나고 건장한 돌쇠란 놈을 뽑아서 앞세우고 나들이에 나섰겠다.
대부분 구중심처 방에만 갇혀 있던 아씨는 밖으로 나오니 마냥 신기한 것 투성이라. 산 구경 물 구경하면서 신나게 걸음을 옮겼지. 그러다 덜컥, 깊지는 않지만 개울을 만나게 되었어. 그런데 다리가 없는 거야. 돌아갈 길도 없고. 버선과 신을 벗고 맨발로 건너는 수밖에. 하지만 어찌 귀한 아씨가 맨살을 드러내고 개울을 건널 수 있겠나. 돌쇠란 놈이 망설이다 성큼 등을 내밀었지. “아씨, 제 등에 업히시지요.” 유달리 더운 날도 아니데 몇 걸음 안 가서 돌쇠는 갑자기 몸이 달아오르고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걸 느꼈어. 이제껏 무거운 벼 한 섬을 질 때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야. 땀이 나기 시작하고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건장한 돌쇠의 등에 납작 업힌 아씨도 어느새 돌쇠처럼 가슴이 벌렁벌렁 온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기 시작했어. 건장한 사나이의 잠뱅이에서 풍겨오는 그윽한 땀냄새에 아씨는 녹아드는 듯 점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어. 전에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증상이었지.
그런데 설상 가상 이게 웬일인가. 냇가 둑에 매어놓은 소 두 마리가 참으로 해괴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바야흐로 육중한 황소란 놈이 암소 등에 올라타고는 입에서는 거품인지 땀인지를 가파르게 내뿜으며 그 짓을 거창하게 하고 있었던 거라. 돌쇠란 놈은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돌렸건만, 이게 또 무슨 조화인지 아씨는 눈이 뚫어져라 소들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자신을 업고 가는 돌쇠 등을 툭툭 치며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가빠지고 있는 숨을 억제하며 속삭이는 듯 물었겠다. “얘, 돌쇠야, 저기 저 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그렇잖아도 아가씨를 등에 업고 몸은 불같이 달아 오른 데다 원인 모를 진땀을 흘리고 있던 참에 돌쇠에게는 아찔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라. 사실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아씨의 물음에 답을 아니할 수도 없고….
순간 궁리 끝에 제 딴에는 꾀를 내어서 대답을 했지.
“아씨, 저 황소란 놈이 더운 날씨에 지금 암소란 놈의 더위를 빼주느라고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요. 저 뜨거운 열기를 못 이겨 땀 흘리는 것 좀 보십시오.”
“오호라, 그렇구나….”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씨는 고개를 연상 끄덕였지. 그러다 어느새 내를 다 건너게 되었어. 둘 다 마음속에는 내를 되돌아갔다가 다시 건너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무도 차마 말을 못 꺼냈어. 아씨도 돌쇠도 아쉬움을 느꼈지만 별 일 없이 이웃 마을까지 잘 다녀왔어.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어. 대갓집 씨종 돌쇠는 원래 팔자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생고생’을 하게 되었어. 틈만 나면 아씨가 돌쇠를 불렀거든.
“얘 돌쇠야! 너 이리 와서 내 더위 좀 빼주어야겠다. 어째 이리 날씨가 더운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근데 참 이상하지. 어찌된 일인지 그 해 여름이 다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이 깊어가도 아씨의 더위빼기 성화와 주문은 계속되었단 말이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1년 11월 21일 아침 서울 종로구 계동 본사옆 공원에서 회사 임직원, 마을주민 등 2백여 명과 함께 간편한 옷차림으로 체초를 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회장의 재기 넘치고 구수한 얘기가 계속되고, 듣는 사람들이 응수하며 박장 대소하는 가운데 나이지리아 라고스 공항의 5시간은 지나 갔다. 그 원전이 어디 있는 얘기를 정회장이 더 재미있게 각색한 건지 아니면 그의 순수한 창작물이었는지 필자는 알 길이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 얘기를 가끔 떠올리면 좀 진한 데가 있긴 하지만 해학과 휴머니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훌륭한 단편 소설의 주제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어쨌던 얼핏 생각하기에는 상상이 안가는 정회장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얘기다. 정회장은 그런 면에서까지 타고난 리더였다.
29 정주영, 이병철 보고 "자기는 부잣집 아들로 고상한 양반이고 나는..."
이병철-정주영 회장의 위대한 화해의 용기(상)
1985년 11월 20일, 전경련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정주영 회장의 고희에 앞서 전경련 자체의 고희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 검소한 것을 좋아하는 정회장인지라 번거롭게 잔치를 벌이는 것을 극구 사양했지만, 전경련 회장단과 원로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회장 고희연을 사무국에 준비시켰다. 전경련 회관 20층에 오찬 형식으로 고희연 자리가 마련되었다. 연회장은 정회장의 고희를 축하해주기 위해 재계 중진들이 많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다. 김용완·이원순 명예회장 등 정 회장 보다 연로한 재계 원로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재계의 현역 중진들과 원로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곧 정주영 회장님의 고희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사회자가 좌정을 권유했다. 여기저기 둘러서서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해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전경련 고문을 비롯한 내빈들의 간단한 축하 인사가 이어지고, 마침내 정주영 회장이 단상에 올랐다.
“이렇게들 모여서 축하를 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축하를 받아도 되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나이 70이 넘도록 사는 사람이 드물다 하여 고래희(古來稀)라고 해서 매우 드문 일로 축하를 해왔습니다만 이젠 고희가 아니라 고다(古多)라고 해야 할 정도로 칠순을 넘겨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런 축하를 받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회장 특유의 재담이었다. 구십 살까지 현역으로 열심히 일하고 그 뒤에나 여생을 즐기겠다는 정회장의 평소 지론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니 그의 말이 터무니없이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뒤늦게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미 모든 내빈이 자리를 잡고 정돈된 상태였던 지라 자연히 모든 이들의 시선은 들어서는 사람을 향해 쏠렸다. 내빈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뜻밖에도 간호사를 포함하여 두 세 명 의료진의 부축을 받고 아주 어렵게 발걸음을 옮기며 들어오는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었다. 사람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985년 11월 25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왼쪽)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고희기념회장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DB
첫째, 당시 이병철 회장은 어려운 지병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외부 거동을 안 하는 상태인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실제 그때 이회장의 얼굴에 나타난 병색이나 몸 거동은 수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을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인데도 그 자리에 이회장이 나타난 데 대하여 그 자리의 사람들은 놀라움과 함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이유는 그때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관계 때문이었다.
이병철과 정주영. 이병철 회장이 1910년생으로 정회장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둘은 1960년대부터 그 시기까지 한국 재계를 이끌어온 쌍두마차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성장 배경은 물론 주력하는 사업, 경영 스타일까지 어느 하나도 공통점이 없을 만큼 판이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찌들게 가난한 집안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출 소년으로 상경하여 온갖 거친 노동자 생활을 거쳐 맨손으로 시작해 상상을 초월하는 도전정신과 뚝심으로 재계의 거목으로 우뚝 선 정주영 회장. 그는 매번 모험을 마다 않고 황소와 같은 추진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건설업부터 시작해 자동차, 조선 공업을 비롯해 한국 중공업 분야의 토대를 이룩한 인물이었다.
반면 이병철 회장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 출신으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확인하며 꼼꼼하고 치밀한 경영 방식을 기조로 하며 주로 가전제품과 소비재 사업을 근간으로 하여 삼성을 한국의 거대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이처럼 두 사람은 삼성이 나중에 참여한 조선과 건설 정도를 제외하곤 사업 영역은 물론 성장과정과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이런 두 사람이지만 무엇이 단초가 되었고 누가 먼저 감정 싸움을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여러 면에서 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현대는 동아일보, 삼성은 중앙일보 지면을 통하여 각기 창업 초기에서부터 사소한 사업 상의 일 등 개인 신변의 일까지 들춰가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불행한 감정 싸움을 오래 지속해오고 있었다.
“그래 자기는 부잣집 아들로 자라 유학도 가 보고 기업을 일궈서 국보급 골동품으로 가득한 서재에 앉아서 고려자기를 쓰담으며 정원에 노는 공작새를 감상하는 고상한 양반이고 나는 막 노동자 출신이라 무식한 사람이라 이거야!”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악화 일로에 있던 시기 측근들과의 어느 사석에서 감정이 북받친 끝에 노기에 찬 정회장의 표현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도 남는다. 이러던 끝에 두 사람 모두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당시 김용완 전경련 명예 회장의 중재로 겨우 표면상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차였다.(하편에 계속)
30 이병철이 타계 2년전에 정주영 회장에게 준 선물
이병철-정주영 회장의 위대한 화해의 용기(하)
☜ 상편에서 계속
이런저런 사연들을 모두 알고 있는 재계 중진들에게 이병철 회장의 등장은 실로 의외의 사건일 수 밖에 없었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이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이병철 회장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정주영 회장의 고희연에 나타난 심중은 무엇일까 하는 데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잠시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 침묵이 흐른 뒤, 이 회장의 손이 조금 움직였다고 느껴진 순간 수행원 중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잘 포장된 상자 하나였다. 그는 조용한 걸음으로 정주영 회장 앞으로 다가가더니 두 손으로 공손히 상자를 바쳤다.
“저희 회장님께서 정주영 회장님의 고희를 맞아 준비한 축하의 선물입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제 상자 속의 내용물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쏠렸다. 좌중에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상자 속에서 나온 물건은 큼지막하고 우아한 모양의 하얀 백자였다. 어느 도공에게 부탁을 했는지 평소 미술품과 골동품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던 이병철 회장의 선물답게 언듯 보기에도 고아한 품격이 배어 나오는 멋진 작품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뭇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 백자를 살펴보던 정주영 회장의 얼굴에 환하게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의 미소는 호탕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백자에는 한국 재계를 이끌어온 견인차로서 정주영 회장에 대한 헌사가 가득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상상치도 못했던 이병철 회장의 등장, 거기에 뜻밖의 선물. 정 회장으로부터 백자를 건네 받은 사회자가 그 내용을 좌중에게 읽어주었다. 이윽고 정 회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하하하, 이거 진정한 우리 재계의 지도자이신 이병철 회장님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고 보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백자에 쓰여진 내용을 들으셨겠지만, 사실 이런 헌사는 바로 저기 계신 이 회장님께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 회장님은 일찌기 전경련의 토대를 마련해주셨고 제가 이나마 전경련 회장으로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알게 모르게 다 이 회장님과 같은 분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부족한 저의 고희연에 직접 참석을 해 주시고 과분한 선물까지 주시다니 정말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고희기념회장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 회장의 감사 인사가 끝나자마자 실내는 온통 박수 소리가 울렸다. 오랜 동안 끌어왔던 재계의 두 거목,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해묵은 감정의 앙금이 한 순간에 녹아 내리는 것을 축하하는 박수였다. 두 사람의 감정적 반목과 대립은 현대그룹과 삼성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결속을 필요로 하는 한국 경제계 전체의 분위기에도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한국 재계의 두 거목 사이의 이러한 감정적 갈등은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한때의 하찮은 계기로부터 응어리질 수 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두 기업 그룹간에 이것이 풀어지지 않고 그대로 승계된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 것이다. 또한 두 그룹 간의 관계를 보더라도 그렇다.
70 고희를 맞았다고는 하지만 50대 못지 않는 건강과 활력, 지치지 않는 열정과 적극성이 넘치는 사람으로 현직 전경련 회장인 그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명성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아직 절정기의 현역이었다. 반면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은 이건희 회장은 기질적으로도 밖으로 잘 나서지 않는 내향적 성격에 당시 나이도 아직 40대 중반으로 창업 1 세대인 정 회장에 비하면 한 세대의 차이가 있었다. 재계 중진들의 모임인 전경련의 회장단에도 삼성은 그룹 창업 원로 중 한 사람인 조우동 회장을 대신 삼성그룹 대표로 참석시키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 사이에서 비롯된 감정의 응어리를 그대로 남겨두지 않고 더 늦기 전에 결자해지 해야 되겠다는 결심이 섰음직도 하다. 그러나 막상 서로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위대한 용기가 필요한가는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때로는 살상을 수반하는 전쟁을 결심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태 후에 이병철 회장은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 회장은 그의 말대로 “90에나 현역에서 손을 놓고 그 다음부터 여생 동안 쉬겠다”는 의욕에는 못 미쳤지만 이로부터 그가 타계할 때까지 약 15년간 계속하여 식지 않는 의욕을 과시하며 사업의 도전, 대통령 출마, 소떼를 이끈 방북 등으로 상징되는 대북 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자신의 고희 및 연설문집 출판기념회장에서 부인 변중석 여사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 정주영 회장./조선일보DB
31 정주영, 제철사업 진출을 놓고 박태준과 정면대결하다
피할 수 없었던 라이벌 정주영-박태준(상)
정주영 회장, 박태준 회장, 이 두 사람은 한국 경제사에서 우리나라가 중화학 공업을 바탕으로 한 선진 공업국으로 진입하는데 가장 중요한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철강은 산업사회의 쌀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래서 한 나라의 산업 측면에서의 국력을 일인당 철강 생산량을 가지고 가늠하기도 한다.
한편 조선과 자동차공업은 이 철에다가 기계, 전자, 화학 등 현대 첨단 기술을 더하여 부가가치 높은 첨단 기술 복합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은 모두 일찍이 이들 분야에 기반을 다짐으로서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어느덧 세계 양대 최강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예외 없이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이 분야 산업 역량 강화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약 반세기 전 우리의 1 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도 못 미치던 최빈국 시절 - 자본, 기술, 경험, 시장 등 모든 여건이 열악한 정도가 아니라 참혹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이를 극복하고 신화같은 업적을 이룩하여 한국 경제도약의 기틀을 만들어 세계를 놀라게 한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국가 경제의 장래를 내다본 통찰력과 불굴의 집념, 불가능하다는 세론을 돌파한 도전 정신과 추진력, 리더십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이 두 사람은 그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정치, 경제적 환경 조성과 적극적인 지원을 당시의 절대 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성장 배경, 출신에서부터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나이도 정회장이 12살이나 더 많다.
철강 생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철광석을 고로에서 녹여 철강을 생산하는 일관제철소와 고철을 녹여 재생산하는 방법이 있다. 생산품은 여러 용도의 철판, 강재, 형강, 철근 등 엇비슷하지만 요구되는 투자규모의 천문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장비의 규모, 기술, 그리고 품질의 고급화 등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선진공업국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철광석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 자체에서도 철광석은 수출하되 자력으로 고로 방식의 일관제철소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일관제철소 건설계획은 자유당 정부, 그리고 민주당 정부 때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시절 그러한 계획은 언감생심 구상과 계획일 뿐 이를 실현하기에는 나라 형편이 턱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관제철소 계획은 5·16으로 정권을 잡고 국가경제 재건과 산업 현대화에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국가 최고 지도자의 강한 집념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박 대통령 정부가 내어놓은 계획을 가지고 1966년 미, 영, 독, 불, 이태리 5개국의 8개 회사가 참여한 타당성 조사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왔고, 이에 따라 1969년 4월에 세계은행은 “한국에서 고로 방식의 일관제철사업은 시기상조라 투자불가”라고 결론지었다.
/박태준 전 포항제철 사장./포항제철 제공
그러나 국가 장래를 위한 이 중요한 계획을 쉽게 포기할 박 대통령이 아니었다. 당시 한일 협정체결로 확보되는 대일 청구권 자금 중 농업분야에 사용하기로 한 2억달러를 돌려서 일관제철소 설립계획에 쓸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전면에 박태준을 내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일 협정 체결 과정 자체에서부터 박태준이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던 점이다. 그는 박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에 8 개월간이나 장기 체류하면서 암암리에 일본 지도층 내의 박 대통령의 인맥, 그리고 자신의 인맥을 접촉하며 한일협정 체결의 물밑 작업을 맡았다. 당시 이러한 일본 측 인사들 중에는 일본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박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어 한일협정 성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세지마 류조씨도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 억달러로는 아직 태부족한 자금, 기술 유출과 세계시장에서 경쟁자를 키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계 철강 업계의 경계 등 넘어야 할 과제들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특유의 추진력과 많은 일화를 남긴 강한 개성의 군 지휘관식 리더십을 발휘하여 수많은 난관을 돌파하고 착공 후 약 5년 만에 대망의 일관제철소를 완공 시켰다. 박태준 회장이 비록 국가의 최고 통치자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공기업을 이끌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그는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와 비유되기도 한다. 흑묘백묘론을 내세워 중국의 경제 도약에 몰두하던 생전의 등소평이 중국 지도층에게 박태준 회장을 주목하라고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철강 제품의 가장 큰 수요처 중의 하나는 거대한 선체와 내부 골격 모두가 철로 되어있는 선박과 역시 차체와 프레임이 철로 되어있는 자동차 산업이다. 포항제철 초기 아직 해외 수출이 미흡했던 상황에서 이 시기 한창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현대 조선과 자동차는 당연히 포항 제철에게 중요한 시장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편에서는 이미 정주영 회장과 박태준 회장과의 라이벌 관계가 배태되고 있었다. 정주영 회장도 고로방식 일관제철소 건설계획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의 포부는 포항제철과의 경쟁차원이 아니고 세계시장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가 조선과 자동차 산업을 계획했을 때도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세계 무대였다. 그는 이런 계획을 표면화하고 이의 구체화를 위해 정부와도 접근을 시작했다.
정 회장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박태준 회장의 반대는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의 저지를 위해 특히 정부 관련 부처 장관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그러나 상대가 포철 신화로 국가적으로 영웅시되고 있던 박태준 회장이라도 이에 순순히 물러날 정 회장 또한 아니었다. 그는 굽히지 않고 이런 계획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현대 조선과 자동차의 성공, 중동 건설 진출로 파산 지경의 국가경제를 구해 낸 정 회장 역시 박 회장 못지않는 명성과 한국 경제계에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박 회장의 저지 노력은 포철 성공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개성만큼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이었다. 가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포항제철의 영업기반 보호, 천문학적 투자와 가장 긴 투자자본 회임기간을 요하는 일관제철소에 대해 국내 중복 투자를 허용하면 제한된 국가 투자재원을 낭비할 가능성 등을 내세우며 왜 포항 제철이 독점적 위치를 유지해야하는지 강변하고 나섰다. 이에 대하여 정 회장은 일관 제철소 역시 크게 세계시장을 목표로 해야 하고, 한 기업에 독점적 위치를 정책적으로 보호해 주는 것은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품질 개선, 그리고 가격 경쟁을 통해 경쟁적 우위를 확보해야 되는 세계 시장을 생각할 때 옳지 않다는 것을 내세우며 강력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포항제철을 시찰 중인 박정희와 박태준.
이런 상황에서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두 주장 중 어떤 한 쪽 주장의 당위성 차원을 넘어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었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군에서 인연을 맺은 선 후배 사이다. 박태준은 10 살 위인 대선배 박정희 장군을 일찍이 그의 인품에 매료되어 극진히 존경하며 그를 따랐다. 박 장군 역시 박태준을 단순히 군 후배 차원을 넘어 모든 면에서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기에 이르렀다. 박태준은 박 장군이 가는 길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꺼이 따라갈 수 있는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박 장군이 5·16 거사를 계획, 실현하는 과정에 행동 일선에서 박태준을 제외 시켰다. 거기에는 비장한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거사가 실패 했을 경우에 대비 박태준이 화를 면하게 해 줌으로서 박 장군의 가족을 돌볼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두 사람 간의 의리와 신뢰 관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나를 잘 말해 준다.
5·16 거사가 성공한 후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박태준 대령을 곧바로 비서실장, 그리고 상공 담당 최고위원 등 그가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중책을 맡긴다. 그리고 1968년 박태준을 새로 출범하는 포항 종합제철 사장에 임명한다. 박 대통령이 극히 어려운 여건에서도 일관제철소 건립에 집념을 보인 데는 산업 현대화라는 경제적 목표 외에 또 다른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자주국방 능력 확충을 위한 방위산업 기반 조성이었다. 방위산업에는 모두 철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국방 부문에 있어도 한국의 최고 우방인 미국이 극히 달가워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이 탱크와 대포 등 중화기를 미국에 의존하게 하는 상태를 견지하는 것이 그들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자주적 국방 역량을 키워야 하겠다는 박대통령의 의지는 견고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군 후배이며 돈독한 의리와 신뢰 관계, 그리고 국가관을 같이하는 박태준에게 포항 제철 사업을 맡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박태준 사장은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고 이 일을 성취해 냈다.(하편에 계속)
32 정주영, 신군부가 박태준을 전경련 회장으로 밀자.
피할 수 없었던 라이벌 정주영-박태준(하)
☜ 상편에서 계속
한편 정주영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 또한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정 회장은 박 대통령의 파트너가 되어 서로 교호하며 혼신을 다 바쳐 국가 산업발전을 위한 대역사 경부고속도로를 완성한 사람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세론의 반대와 비웃음을 무릅쓰고 조선사업, 자동차 사업을 극적으로 성공시켜 국가 산업구조 현대화와 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고, 석유파동의 여파로 국가 재정이 파국에 직면했을 때 중동 진출이라는 파격적 출사표를 내 성공시킴으로써 나라를 구한 고맙고 대견한 경제발전의 민간 반려자였다.
정 회장 역시 박 대통령에 대한 경외심은 단순한 존경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박 대통령 타계 후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어느 계제에서든 박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늘 순간적으로 자신의 자세와 목소리를 엄숙하게 가다듬곤 했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박 대통령은 포항종합제철 독점체제 유지를 강력히 어필하는 박태준 회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기왕에 설립했던 일반 제철소인 인천제철을 키워 나가며 오랜 세월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이렇듯 일관 제철소 건립에 대한 정 회장의 끈질긴 집념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박태준 회장이 포항제철 경영에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또 다른 상황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한국의 대기업들로 구성된 민간경제계의 대표격인 전경련을 둘러싼 두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거대 공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포항제철은 물론 한전, 한국도로공사 등은 이들의 규모나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전경련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전경련 회원으로 가입은 하고 있었지만 그 대표나 임원들은 전경련 회의에 참석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전경련 사업이 정부의 경제 정책, 특히 경제운용과 개발계획, 조세, 금리 등 통화 정책, 각종 규제에 대한 민간 경제계의 의견을 내고 사안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 주된 것인데, 인사나 운영에 대해 정부의 영향 하에 있는 이들 공기업의 입장이 민간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여타 전경련 회원들과의 입장과 같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1979년 10·26 박 대통령이 시해되는 것을 계기로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이후로 전개되었던 상황이다. 준비나 기반이 없는 가운데 정권을 잡은 신 군부가 권력 기반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무리수를 불사하고 힘과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길들이기에 나섰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대상에서 경제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고 권력자의 눈에 거슬렸던 대기업 총수의 기업이 정부 강압에 의해 이런저런 구실로 주인이 바뀌는 일들도 발생했다. 국내의 주요 경제 단체에도 그들의 손이 미쳤다. 무역협회, 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회장들이 그들의 의지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런데 당시 정주영 회장이 회장직을 맡고 있는 전경련은 유일하게 이러한 압력에 저항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정주영 회장은 신군부가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워 밀어붙이고 있었던 대기업 업종별 통폐합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여러 공식 석상에서 이의 부당함을 피력하고 다녔다. 그 당시 서슬이 퍼랬던 신군부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섰던 거의 유일한 경우였다. 그러나 신군부도 이에 지지 않았다. 무리수를 써서라도 정주영 회장을 교체하여 자기들의 위세를 세상에 확인, 과시 하고자 했다.
/정주영 회장(왼쪽)과 박태준 회장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이 새로운 전경련 회장으로 의중에 두었던 인물이 박태준 회장이었다. 거기에는 박 회장이 군 인맥이라는 그들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근본적으로 정부의 직접적 영향력 하에 있는 공기업 대표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표면상 대외적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일단 그들에게 협조적인 전단계 인물을 우선 내세울 계획까지 세워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군부의 의도는 그들의 위압적인 위세에도 불구하고 막상 회장을 새로 선출하는 총회에서 그들이 경제부처를 통해 사전 제시한 시나리오를 배제하고 정 회장 연임을 만장일치로 가결해 버리는 ‘반란’에 의해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후 박태준 회장은 1987년부터 전경련 부회장의 한사람으로서 전경련 회장단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회장단 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전경련 사무국의 각 사업 부서를 담당하는 임원들이 사업 계획을 보고할 때 의견을 개진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한 사업부서 책임자로 업무 보고 차 매번 회장단 회의에 배석했던 필자의 눈에는 민간기업 총수들과 박 회장 사이에는 한국의 철강 산업을 일으킨 그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와는 별개로 사무국이 보고하는 주요 사안에 대한 입장이나 분위기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과 동화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기간 동안에도 신군부 정권이 기회를 보아 박태준 회장을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의지가 계속되었던 것은 여러 정황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정주영 회장과 민간기업 재벌 총수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전경련은 민간 경제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순수한 자율 단체인 점이 존재 이유다. 따라서 회장직을 비롯하여 지도부나 사무국 인사에 대하여 정부의 의지와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그 회장도 민간기업의 입장을 자유롭게 대변할 수 있는 위치의 인사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1987년에 끝나는 임기를 마지막으로 정 회장 자신이 더 이상 연임하지 않기로 한 의지를 굳히고 극구 고사하는 엘지그룹의 구자경 회장을 밀어부치다시피 후임 회장으로 추대하고 이것이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서 종지부를 맺게 된다.
정 회장은 총회를 한 시간 가량 앞두고 그가 소집한 마지막 사무국 임원회의 때 전경련 회장 후임에 대한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의 대화, 그리고 청와대 경제 수석과 해당 경제부처 장관으로부터 받은 언질에 대해 언급했다. 전경련 회장직을 민간 경제계를 대표할 수 있는 인사가 맡게 하기 위한 정 회장의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은 그 시점까지 지속되었던 신군부의 의지를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된다.
박태준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그 자신이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신군부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는 본인 스스로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 회장 못지않게 강한 개성과 추진력을 가진 그가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어떠한 형태로든 한국 민간 경제계에 자신의 방식대로 한번 뜻을 펼쳐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관제철소 독점 문제에 더하여 전경련 회장직과 관련한 미묘한 관계는 오랜 기간 한국 경제사의 두 거물간의 갈등과 라이벌 관계를 겉으로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심화시키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 관계의 단초가 되었던, 정주영 회장의 생전 숙원 사업이었던 현대제철의 고로방식 일관제철소는 그의 후계자 정몽구 회장에 의하여 정 회장이 타계한 5년 후인 2006년 착공, 2010년 1월에 제1 고로, 11월에 제2 고로, 2013년 9월에 제 3 고로에 화입식을 함으로써 완성하였다.
33 LG 구자경 회장 옆에 금발 미녀가 타자 정주영 회장 왈
정주영과 구자경(上)
정주영 회장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서 각계에 걸쳐 매우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LG그룹 구자경 회장과는 대단히 각별한 사이였다. 구 회장이 정 회장보다 열살 연하이고, 창업세대인 정 회장과 2세대인 구 회장, 그리고 너무나 대조적인 두 사람의 성격으로 보아 조화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주위에서 보기에도 흐뭇한 두터운 우정관계를 수십년 유지하였다.
정 회장은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며 잔정이 많고, 재치와 화술, 임기응변력이 뛰어났다. 이에 비하여 구 회장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며 수줍음을 타고, 감정표현이나 말이 너무 솔직하고 직선적이다 못해 퉁명스럽게 보이는 성격이었다. 구 회장이 ‘사람은 모름지기 누가 안보고 혼자 있을 때도 항상 처신을 바로 해야 한다’는 뜻의 ‘신독’(愼獨 – 君子必愼其獨也의 줄임)이라 쓴 휘호를 사무실에 걸어 놓고 이의 덕목을 실천할 것을 늘 휘하에 강조했던 것은 그의 이런 성격의 일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우정이 더욱 각별했던 것은 이러한 성격의 차이점을 서로 있는 그대로 편안한 개성과 장점으로 받아들이고 아껴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경련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도 대단히 적극적이다 못해 때로는 공격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대정부 관계에 있어서도 주요 현안에서 입장 차이가 나도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의 정 회장을 구 회장은 자주 못마땅해 하고 불평하면서도 내면으로는 항상 뒷받침하여 정 회장의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런 관계로 1987년 정회장은 많은 난관과 우여곡절 속에서도 전경련 회장직을 극구 고사하는 구 회장에게 승계시키고 물러나게 된다.
/구자경 LG 명예회장
이러한 두 사람 사이의 두터운 우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매해 신년 초가 되면 전경련은 회장단 연두 기자회견을 갖는다. 전경련의 사업 방향 뿐만 아니라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현안문제에 대해 견해를 언급하기도 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자리가 된다. 또한 전경련의 회장단으로 대표되는 국내 각 재벌그룹들의 새해 구상을 밝히기도 하는 자리다.
1982년 전경련 연두 기자회견장. 이날 따라 정회장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고 얼굴이 환하게 상기되어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반면, 구자경 회장은 어쩐 일인지 심기가 대단히 불편한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가급적 정 회장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아마 이 날 정회장이 처음으로 간단하게 언급한 현대그룹의 전자공업분야 진출계획이 탐탁치 않은 때문인 것 같았다. 이럴 때 눈치 빠른 기자들이 이것을 놓칠 리 만무하다.
이윽고 그들은 짓궂게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을 붙이기 시작했다. 한 기자가 구 회장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모든 사업을 대단히 공격적으로 추진하시는 현대그룹의 정 회장이 전자공업을 시작하신다고 발표했는데 구 회장께서는 혹시 겁이 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심기를 참고 있었는데 대단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었다.
“겁은 누가 겁을 내요? 전자공업은 아무나 합니까? 내 얘기는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전자공업을 한답시고 건설에서 번 것 다 까먹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상대로 구 회장이 얼굴을 붉히며 있는 대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 회장은 불쾌한 표정은 고사하고 친근한 아우의 투정을 대하듯 만면에 웃음을 띄며 구 회장을 달랬다. “내 참, 구 회장은 항상 저런단 말이야. 걱정 말아요. 나는 전자공업을 해도 국내시장이 목표가 아니고 해외시장이란 말이요, 해외시장. 우리는 시작부터 IBM 하고 얘기가 잘 되어 전자부품을 전량 납품하기로 했단 말이요. 구 회장한테 하나도 피해를 안 줄 테니까 염려 말아요.”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그 때 일을 되돌아 볼 때 이 두 사람의 가벼운 설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또 다른 일화들을 더 소개한다.
1984년 2월,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무역역조 시정을 요구하며 대단한 통상 압력을 가해왔다. 급한 나머지 정부는 우선 미국에 대한 성의표시라도 해야 되는 입장이라 대통령이 특별히 파견하는 사절단이라는 격을 부여한 대통령 대미 구매사절단을 구성했다. 정주영 전경련 회장을 민간단장으로 내세워 전경련 회장단을 주축으로 국내 30대 재벌총수들이 직접 참가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게 되었다. 물론 구자경 회장도 참가했다. 미국 행정부 뿐 아니라 백악관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절단을 예우했다. 백악관, 상무성 방문 등 워싱턴 DC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인 뉴욕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다 예약된 기편이 있었으나 백악관에서 극구 특별기 편을 제공하겠다고 나서서 고사 끝에 그 비행기로 이동하게 되었다.
30여명의 대표단 일행이 타면 자리가 꽉 차는 중형 비행기였다. 이에 더하여 백악관에서는 제인 셰이클포드라는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중년쯤 되는 여자 의전담당관을 뉴욕까지 동승시켜 사절단 일행을 수행토록 하는 아주 예외적인 배려까지 하였다. 그녀는 모든 단원이 다 탑승하는 것을 돌보고 난 다음 맨 마지막으로 기내에 들어 왔다. 갑자기 나타난 홍일점, 그것도 빼어난 금발미녀, 외국 여인의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 세련된 화장, 짙은 향수로 기내가 갑자기 환해졌다. 나이 지긋한 한국재벌 총수 남자들로만 꼭 차 있던 기내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이 때 기내 중앙 통로 양 쪽으로 둘씩 앉게 되어 있는 좌석에는 공교롭게도 빈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구 회장의 옆자리였다. 순간에 상황을 알아차린 수줍음 많은 구 회장이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여자 의전관은 좌석을 한 번 둘러 본 후 당연히 유일하게 남은 빈자리인 구회장 옆자리로 다가갔다. 구회장의 얼굴은 순간 홍당무가 되었다.
주위 사람들 얼굴 표정에는 약간 짓궂은 호기심과 긴장이 교차했다. 그 의전관은 구 회장 앞에서 세련된 예를 갖추어 구 회장에게 허리를 굽혀 영어로 “이 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때 뒷자리의 정회장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야, 이거 구회장, 이번 여행에서 제일 수지맞게 되었는걸.”
구 회장의 얼굴은 더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다급한 나머지 구 회장은 한 손은 들어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세워 대고 다른 한 손을 황급히 내어 저으며 영어를 못하니까 딴 데 가서 앉으라는 의사표시를 필사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딴 데는 빈자리가 없었다. 여자 의전관은 대단히 황당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어정쩡 구 회장 옆자리에 앉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정 회장은 구회장을 골려줄 좋은 기회를 잡은 듯 했다.
그런데는 이유가 있었다. 공식 연회장 등에서 정 회장과 나란히 앉은 경우 식탁 위의 소금이나 후추가루 등이 구 회장으로부터 좀 떨어져 있는 경우 자상한 정 회장이 손수 그것을 구 회장에게 건네주면 구 회장은 시치미 딱 떼고 “정 회장, 심부름 잘해서 용돈이라도 많이 주어야겠군” 하는 식의 농담에서부터 정 회장에게 때로는 그 특유의 면박 가까운 농담을 서슴지 않았다.
“귀여워 했더니 이 버릇 좀 봐, 허허허!”
정 회장의 응수였다.
정 회장은 구 회장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게다가 기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은 구 회장에게 쏠리고 이를 의식하는 구 회장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정 회장은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구 회장을 더 조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서울로 다 돌아가도 구 회장은 아무래도 미국에 남아야 되겠는걸. 우리 서울에 돌아가서도 구 회장을 위해서 이 소문은 내지 말기로 합시다.”
백악관 여 의전관은 그래도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극복하려고 애교 넘친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섞어 가며 구 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이 계속해서 긴장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 회장의 표정에도 어느 정도 긴장이 가셔지는 듯 했고 뉴욕 공항에 도착할 쯤 되어서는 구 회장도 간간히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계속)
34 LG 구자경 회장, 정주영 회장의 전기를 책상에 내던지며...
정주영과 구자경(中)
☜ 상편에서 계속
2001년 3월 21일 정 회장이 86세를 일기로 타계했을 때 구 회장의 애틋한 애도의 감정과 상실감이 누구보다도 더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구 회장은 추모사에서 “저와는 10년 연배이신 아산이셨지만 청운동과 원서동에 이웃해서 살면서 격의없이 마음을 주고받았던 선배요, 재계의 동지였다”고 했다. 그러나 구 회장의 심중에는 IMF 여파로 몰아쳤던 1998년과 2000년 사이에 진행되었던 현대 반도체와 LG와의 빅딜 결과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앙금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이 타계한지도 약 5년쯤이 지난 2006년 경 어느 봄날 필자는 연암 문화재단이 있는 성환 농장으로 은퇴해서 지내고 있는 구자경 회장을 찾았다. 구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의 한사람으로 있을 때, 그리고 그가 전경련 회장이 된 후에도 사무국 임원으로 한동안 그를 보좌할 때 그의 총애도 받았던 인연으로 문안을 겸한 방문이었다. 구 회장은 걸음이 약간 불편했지만 골프 카트를 타고 다니며 버섯 재배, 전통 청국장 발효, 그리고 자신이 개발한 별미의 국수도 만들며 취미와 여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전경련 시절 얘기를 나누며 농장에서 만든 별미의 점심 대접을 잘 받은 다음 “이것은 제가 과거 정 회장님과 구 회장님 두 분을 모시며 제 체험담을 엮은 정 회장님과 전경련 얘기를 쓴 책입니다”라며 필자가 쓴 책 ‘이봐, 해봤어?’ 한 권을 앞에 내놓았다. 구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책을 받아서 탁자 옆에 놓았다. 구 회장이 대충이라도 책장을 넘기며 몇 마디라도 옛날 얘기를 건넬 것으로 기대했던 필자는 좀 머쓱할 수 밖에 없었다. 좀 어색한 시간이 지난 후 구 회장이 개발했다는 별미인 마른 국수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아 가지고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돌아왔다.
▲사돈을 맺은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과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이 결혼식장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정 명예회장의 손자 일선씨는 구 명예회장 조카뻘인 은희씨와 지난 1996년 8월 2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결혼식을 올렸다./조선일보DB
거기서 구 회장을 보필하고 있던 사람이 마침 전부터 면식이 있는 사람이라 궁금한 끝에 내가 그 자리를 나온 후 구 회장의 심기에 대해서 전화를 걸어서 물어 보았다. “회장님은 박 사장이 자리를 뜨자마자 앞에 놓였던 책을 들었다 탁자 위에 내 던지시며 ‘에잇 이 영감!’ 하며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하셨다”라고 전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충격과 착잡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정 회장 생전에 두 사람 사이의 아름답고 풋풋한 우정을 오랜 동안 보아와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배경은 앞서 말한 대로 김대중 정부가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탈출을 위한 몸부림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빅딜에 있었다.
당시 빅딜 조정의 정부측 비상대책위원회 기획 단장으로 이 일의 중심 역할을 맡았던 이헌재씨가 근래에 한 중앙 일간지에 빅딜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밝힌 바가 있다. 그는 이 민감하고 어려운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 특유의 기치와 대쪽 같은 기질, 그리고 예리한 판단력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었다. 세상의 관심은 대그룹들에게 수조원의 이해와 주력 기업의 존폐가 엇갈리는 그 살벌하고 엄청난 빅딜 과정에 있어서 대상 기업들 사이에 누가 유리한 입장을 얻어내기 위해 당시 권력의 실세를 대상으로 어떤 로비활동이 있었나 하는 것과, 그 과정과 결과가 공평했었나 하는 데에 모아졌다. 그는 특히 현대 반도체와 LG사이의 빅딜에 관한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연재한 이 글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나 권력의 어느 실세로부터의 영향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진행되었음을 밝히는데 역점을 두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일을 아주 잘한다고. 수고 많았어요”
당시 비대위 김용환 위원장의 소개로 처음 만난 김대중 대통령이 그에게 한 말의 전부였다. 그 뒤 금감위원장과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2년여 기간 동안에도 대통령과 단 한번, 5분간의 독대가 전부였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 살벌했던 구조조정 소용돌이 속에서 DJ는 한번도 개인적인 청탁을 하거나 정책에 대해 간섭한 일이 없었다. 재벌 개혁과 기업 워크아웃, 빅딜, 은행 퇴출……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기업은 쪼개지고 합쳐지고 팔렸다. 그에게 들어온 청탁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도 DJ는 한번도 ‘누구를 봐줘라, 어느 회사는 손봐줘라’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가 내게 물어본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원칙에 맞는 것이오?’ 그리고 ‘절차는 공정했나요?’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정권 초기 나는 온 신경을 정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청와대의 의중을 읽으려고 고개를 기웃거릴 필요도, 지레짐작으로 누굴 봐주고 안 봐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해와 불만도 샀다. 음해도 받았다”라고 술회하고 있다.(계속)
35 LG 구씨 가문이 현대아산병원을 전용 장례식장으로 쓰게 된 사연
정주영과 구자경(下)
☜ 중편에서 계속
현대 그룹과 LG그룹 사이의 반도체 사업 빅딜은 이헌재씨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그는 양측이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서는 과정에서 구본무 회장에게 ‘윗분’을 한번 만나는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 나서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ADL컨설팅회사를 내세웠고 현대는 반도체 내부 시설까지 공개했지만 LG입장은 단호했다. 이헌재씨의 말에 의하면 1999년 1월 6일 구본무 회장은 이 문제를 가지고 드디어 DJ를 만나게 된다.
“반도체는 선친이 물려주신 사업입니다. 기술력과 재무구조도 우수합니다.”
구 회장의 읍소에도 DJ는 굳은 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어렵지만 국가 경제를 위하여 내어 놓겠습니다. 이왕 포기하는 것, 지분 전체를 현대에 넘기겠습니다.”
대통령의 의중을 읽은 구 회장은 드디어 어려운 결정을 토로했다.
“큰 결단을 내려줘서 고맙습니다. 섭섭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DJ가 구 회장의 결단에 화답하며 위로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엄청난 고비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빅딜 인수가격이었다. 구본무 회장은 6조5000억원을 제시했고, 고 정몽헌 회장은 1조 2000억원 이상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너무나 큰 차이였다. 중재에 나섰던 전경련의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어려운 줄다리기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 이헌재씨가 최종 제시한 2조5000억원으로 합의를 보기에 이른다. 양측이 제시한 가격 차액의 산술 평균에 접근하는 액수다. 4월 22일 신라호텔에서 이를 공식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 빅딜의 결과는 몇 해 안 가서 두 그룹 모두에게 재앙을 가져왔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헌재씨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LG반도체를 인수한 현대반도체는 인수대금을 치르느라 자금난에 빠졌고 곧 이어진 반도체 불황에 10조원의 부채를 지고 침몰한다. LG는 데이콤(빅딜 조건 중 하나로 인수)을 다른 재벌 그룹들의 방해에 시달리며 우여곡절 끝에 인수했지만 되레 화가 됐다. 데이콤은 외화내빈, ‘빛 좋은 개살구’였다. LG는 데이콤 정상화에 돈을 쏟아 부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붇기였다. 죽도록 고생만하고 건진 게 없었다.”
이렇듯 IMF사태라는 초유의 경제 회오리 바람 속에 치러진 현대와 LG 사이의 반도체 빅딜은 두 그룹 모두에게 승자가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오해던 아니던, 혹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그룹을 이끌었던 정주영 회장과 구자경 회장 사이의 아름다웠던 우정에도 상처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정부 측 권유로 이 일의 중재 역할을 시도했던 전경련과도 LG그룹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10년 넘게 소원한 관계를 지속해 왔다.
▲2009년 6월 10일 충북 오창산업단지에서 열린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생산 공장 기공식에서 참석자들이 공사 시작을 알리는 버튼을 누르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우택 충북도지사, 구본무 LG그룹 회장,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김반석 LG화학 부회장, 양웅철 현대기아차 사장.
그러나 세상사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재벌그룹 간의 라이벌 관계나 그 대를 이은 총수간의 우정관계도 세월이 흐르며 변함을 보게 된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정몽구 회장과 LG그룹의 구몬무 회장의 관계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선대에 있었던 우정과 상처의 앙금을 해소하는 차원 정도가 아니라 중요한 신사업 분야에서 끈끈한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2007년 10월 고 노무현 대통령 평양 방문에 동참한 때에 정몽구 회장과 구본무 회장간에 이루어진 미래 친환경자동차 사업협력을 위한 의기 투합이었다. 여기에는 전기차 배터리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국내에서 전기차 배터리 사업이 태동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LG화학은 곧바로 충북 오창에 연간 10만대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지었다. 드디어 2009년 7월 LG화학은 현대차 아반떼 하이브리드카에 첫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했다. 이어서 소나타, 기아 K5 등에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가 탑재되고 있다.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시 LG화학 전기자동차 배터리 공장 기공식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해서 축하해 주었다. 미국 내 외국 기업의 기공식에 미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편 현대자동차도 LG화학에 힘입어 토요타를 비롯한 세계 경쟁업체에 맞서서 하이브리드 자동차 메이커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LG화학은 2012년 미국 파이크 리서치 조사에서 세계 최고의 2차 전지 업체로 선정되었다. 이에 앞서 2010년에는 현대 모비스와 LG화학이 합작으로 친환경 자동차용 리튬 배터리를 공동연구하고, 생산 판매하는 회사를 세웠는데 회사 이름도 두 회사의 영문명 앞 글자를 따서 ‘HL그린파워’라고 정했다.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다. 과거 두 그룹간 빅딜 과정에 직접 나서서 뼈아픈 고뇌와 좌절감을 체험했던 구본무 회장에겐 특별히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고 정주영 회장이 세운 현대아산병원은 LG가의 전용 장례식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주영 회장과 구자경 회장간의 한 때 균열이 있었던 아름다운 우정이 복원된 또 하나의 상징이다.
36 신군부가 정주영 때문에 50세 넘긴 전경련 직원들의 병역을 조사한 사연
신군부 정권과 전경련(上)
1979년 한국 사회를 충격과 혼돈에 빠지게 한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은 다시 전두환, 노태우 등 젊은 장교들이 주도한 12·12 사태로 이어졌다.
이들이 장악한 계엄사령부가 실권을 잡은 상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최규하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해가 바뀌었으나 한국 사회는 반정부 시위로 걷잡을 수 없는 극도의 혼란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해 5월 17일에는 전국적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정부의 강경대응에 아랑곳없이 5월18일에는 비극적인 광주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신군부는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국정 전반에 걸친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정치·사회의 격동적 변화에 실질적으로 한국의 유일한 자율적 민간경제단체인 전경련은 자주적 정체성을 고수하는 데 있어서 창회 이래 가장 큰 도전과 시련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신군부는 정치 사회적으로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힘을 과시하는 무리수를 강행했다. 그 일환으로 ‘사회정화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우선 240여 명의 고급 공무원을 자의적 기준을 정하여 숙정하였을 뿐 아니라 비정부 단체까지 일종의 강제 쿼터로 인원수를 정하여 숙정을 강요하였다.
전경련 사무국도 이러한 압력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급기야는 경제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중공업 분야에 대한 투자조정을 단행하였다. 이는 말이 투자조정이지 사실상 강제로 민간 기업을 공사화하거나 통폐합하는 내용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무리수를 계속 펼쳐 나갔다. 주요기업 그룹의 계열사 166개 기업들을 84년까지 강제 정리하는 시책을 발표하였다. 국제경쟁력 강화나 자유시장 논리를 근거로 한 재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군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한 대기업의 회장은 느닷없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울먹이며 자기 그룹의 모든 기업을 정부에 헌납하고 기회를 준다면 전문경영인으로 남겠다는 발표를 하여 경제계는 물론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의 와중에서도 전경련의 저항은 신군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정주영 회장은 경영자총협의회에서 주관하는 한 업계간담회에서 “한국이 사회주의사회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민간이 만든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이에 당황한 경총 사무국 책임자는 당국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정 회장의 발언을 절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전경련 신임 회장단을 청와대로 불러 접견하고 있다./조선일보DB
이와 같은 전경련의 저항에 전두환 정부도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차기 전경련 총회에 앞서 전경련 회장 추대 과정에 개입하여 신군부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주영 회장을 물러나게 하고 그들에게 협조할 수 있는 인사로 교체하려 한 것이다. 신군부 정부는 이미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4단체 중 대한상의,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장을 이러한 기준에 맞추어 그들의 의지대로 교체를 끝낸 상태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정부 일각, 그리고 다른 경제단체 주위에서 심지어 전경련의 무용론과 경제단체 통폐합의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주요 경제 단체장 교체뿐만 아니라 언론의 강제 통폐합을 비롯하여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힘의 과시와 통제력 기반 강화에 집착하는 신군부와 민간 주도 자율단체임을 내세우고 버티는 전경련과의 팽팽한 긴장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국내외 여론과 특히 국제 경제계를 의식하여 정주영 회장을 임기 중에 끌어내리지는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마침 정회장의 전경련 회장 2차 연임 임기가 끝나는 1981년 2월 20차 전경련 정기총회가 다가왔다. 신군부에게 껄끄럽기 그지없는 정주영 회장을 자기들 의지대로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었다. 그들은 그들과 원만한 협조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을 내정해 놓고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사안이 우선 본인 자신의 직접적 거취문제이고, 그다음 앞으로 전경련이 대정부 관련 사업을 펼쳐 나가는데도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2월 총회가 있는 날 아침 정 회장은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놓고 그날 있을 전경련 총회에서 전경련 회장직 연임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전한 다음 전경련 총회장으로 향했다.
한편 신군부 정부 측에서도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정 회장의 교체 과정을 확인하기 위하여 관련 경제부처의 관리 두 명을 전경련 총회에 임석시키는 초유의 조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총회의 신임 회장 추대 회순에 따라서 드디어 정 회장이 연임을 고사하는 발언을 끝냈다. 새 회장에 추대되는 인사가 거명되고 관례대로 추대에 동의하는 박수절차가 끝나면 새로운 회장으로 교체되는 찰나였다.
이때 평소 소신피력에 강직하기로 널리 알려진 롯데그룹을 대표하는 고 유창순 회장이 긴급 의사진행 발언에 나섰다.
“나도 전경련 회장직을 꼭 정주영 회장이 계속 맡아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순수민간 자율경제단체인 전경련의 회장직과 관련한 작금의 배경과 과정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경련이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게 되면 민간경제계를 대변하는 자율단체로서 전경련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전경련 회장에 추대되느냐 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 문제는 그 과정입니다.”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은 순간, 이윽고 돌변한 분위기 속에서 동의의 박수가 회의장을 휩쓸었다. 대안은 만장일치로 다시 정 회장이었다. 서슬이 퍼랬던 당시 분위기를 볼 때 일종의 ‘반란’이었다. 국내외 언론에 공표된 이러한 기정사실을 신군부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감당할 역풍의 부담이 너무 컸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커다란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민간 자율 경제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낸 전경련 역사의 한 장이 마무리 되었다. 당혹감과 분노를 어쩔 수 없었던 정부 측에서는 엉뚱하게 전경련 사무국 임원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회장 추대과정의 이변상황을 그들이 물밑에서 연출한 것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그러나 꼬투리를 잡을 소재가 궁했다.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이미 50~60대를 넘긴 사무국 임원들의 병역미필 여부를 뒤지는 일이었지만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다. <계속>
37 재벌 총수들이 신군부 눈치보고 전경련 정책결정을 미루자 정주영 회장 왈
신군부 정권과 전경련(下)
☜ 상편에서 계속
이런 사태에 이어서 1980년 8월 27일 신군부의 중심인물인 전두환씨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이로부터 정 회장이 새로이 회장직 3연임을 마치는 1987년 6년동안 전경련은 전두환 정부와 경제, 정치,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끊임없이 일었던 파고 속에서 수시로 갈등과 조화가 교차하는 시기를 함께 걷게 된다.
제5공화국 치하에서 전경련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정 회장의 강한 의지와 뚝심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정부의 경제 정책방향이나 정부의 규제, 세제, 금융과 관련된 사안들은 다 같이 국가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과 당위성을 내세우나 그 배경과 접근 방법이나 실천에 있어서는 정부, 경제계, 정치권, 노동계, 사회언론의 입장과 견해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특히 권위주의 정부 통제 하에서는 민간경제계를 대변하여 자유경제체제와 시장경제를 주창해야 하는 전경련의 목소리는 제약을 받게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
따라서 전경련이 어떤 경제 정책 건의나 조사 자료를 언론 등에 공표하려면 특히 정부 당국이나 정치권의 예상되는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안건들은 사전에 전경련의 최고 중진 모임인 회장단 회의에 부의되어 그 취지나 타당성이 검토된 다음 최종 결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더욱이 5공 초기에는 전경련 회장단에 속하는 대기업 총수들은 여러 면에서 정부 권력층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특히 신군부 정권 초기에는 그들의 눈에 나서 대기업에 속하는 회사가 정부의 조처로 하루 아침에 몰락하거나 타 기업에 흡수되어 버리는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여서 조심하는 분위기를 더하게 했다.
따라서 회장단 회의에 부의된 민감한 사항에 대하여는 국내 재벌그룹의 대표들은 극히 발언을 조심하거나 입장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 정 회장은 “아, 여러분은 이런 결정을 하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정부의 눈에 날까봐 그러는군요. 그러나 이번 사안은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말썽이 생길 경우 여러분은 모두 반대했는데 나 정주영이 혼자 우겨서 결정했다고 하십시다.” 이렇듯 전경련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그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신군부 정권 치하에서의 이러한 환경에서도 전경련은 정부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각종 규제 완화와 인허가업무의 축소, 정비, 경제 발전과 성장저해 요인 개선을 위한 건의, 세제 개선, 금융관계법 개정과 같은 중요한 사업들을 부단히 추진하였다. 한국 경제계가 처한 현안에 대한 연구와 전경련의 주장 논리를 보다 견실히 뒷받침하기 위하여 한국경제연구원을 출범시켰다. 전경련은 새로운 산업사회 도래에 대비한 파이오니어적 사업들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를 발족시켰는데 이는 이후 한국의 벤처캐피탈 시대의 문을 연 효시가 되었다. 1983년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정보화 사회에 부응하고 관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민간협의체로 한국정보산업협의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전경련이 유전공학연구조합 설립을 주도한 것은 향후 생명공학의 중요성을 내다 본 사업이었다.
▲1982년 7월17일 재계 원로들이 1박2일간 김해, 울산지역 공장 등의 산업시찰에 나섰다. 산업시찰단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용완 전경련 명예회장, 송인상 동양나이론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등 30여명의 재벌총수로 구성되었다./조선일보DB
특히 이 시기에 전경련은 한국 역사의 빛나는 한 장을 장식한 88서울 올림픽 유치성공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88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위상을 처음으로 전 세계에 드높였을 뿐 아니라 코리아 브랜드 가치를 단번에 몇 단계 올려놓은 한국의 위대한 쾌거이다, 긴장감이 팽배한 남북군사 대치와 테러위협, 경쟁국 일본에 비해 턱없이 열세인 국제사회 영향력, 부족한 시설 인프라와 경험, 이에 더하여 과거 유치했던 1970년 아시안 게임을 능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반납함으로서 국제 체육계에 남겼던 오점, 당시 한국 정부의 인권 시비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은 엄청난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다. 가능성을 기대해 볼만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 못지않은 내부적 난관은 우선 한국 정부 자체는 물론 체육계를 포함하는 사회 각계 어디에도 한국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믿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형식적으로나마 유치 경쟁에 나서는 것은 처음부터 내놓고 포기할 수는 없다는 체면치레 절차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막상 88 서울 올림픽 유치의 주체가 되는 서울시의 당시 시장이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홍보관 개관식 때 현지에 오지도 않았던 것은 이러한 정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거의 ‘망신 대역’으로 유치위원장을 떠맡게 된 정주영 전경련 회장만은 예외였다. 그는 온통 불가능의 구름으로 덮인 하늘 한 귀퉁이에 보이는 작은 한줄기 가능성의 빛을 보고 그 특유의 집념의 불씨를 지폈던 것이다. 전경련은 1970년대부터 영국, 독일, 불란서, 스위스 등 주요 각국의 경제계 중진들로 구성되어 있는 대표적 경제단체들과 국별 민간경제협력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협력위원회들은 그들과 한국 간의 투자, 무역, 기술협력을 증진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이들 국가의 중진 인사들 간의 인적 교류를 통하여 긴밀한 유대 기반을 구축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직을 맡아오며 국제활동 경험과 국제사회에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던 고 유창순 롯데그룹 회장,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등이 합세하여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88서울 올림픽 유치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이는 경제단체인 전경련이 경제영역을 초월하여 올림픽 유치에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역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남겼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연 같아 보이는 한 시기의 역사의 한 과정은 그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에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그 때 만약 신군부의 의지대로 전경련의 회장이 바뀌고 고유의 정체성이 변질되었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과연 전경련이 주도한 역사적 88올림픽 유치가 가능했을까 하는 것을 되짚어 볼만한 일이다.
한편으로 그 간에도 신군부는 전경련에 행사하려했던 영향력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아직도 정부는 전경련 회장직이 대통령 결재를 득해야만 하는 사항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인데 전경련은 앞으로도 절대 이러한 압력에 굴해서는 안됩니다.”
1987년 정 회장이 마지막 임기를 앞두고 새로운 회장을 선출하는 총회 개최 직전 사무국 임원회를 소집해서 한 말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전경련은 창회 이후 과거 50여 년 동안 한국 경제 발전사에서 순수 민간주도 경제단체로 담당했던 이제까지의 역할을 넘어 급변하고 있는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소명에 부응하여 한국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 가치와 위상 정립을 위한 과제와 도전을 앞에 두고 있다.
38 정주영이 위대한 6가지 이유
필자가 고 정주영 회장을 약 14년간 보필하면서 체험한 경험과 감동을 바탕으로 일화적 전기 “이봐, 해봤어?”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지금까지 약 5만부 정도가 읽혔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방송, 대학, 기업인 모임에서 그의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틈틈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강의 후 청중들이 자주하는 질문 중 필자가 답변하는데 늘 어려움을 겪는 질문이 있다. “초등학교 학력, 그리고 가출 소년으로, 부두노동자와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가 어떻게 그런 도전 정신, 통찰력, 번뜩이는 창의력으로 점철된 위대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나?”라는 질문이다. 그는 하늘이 낸 인물이다. 달리 대답이 없다. 이는 정 회장에 대한 피터 드러커 교수의 해답이기도하다.
참혹한 최빈 국가에 속했던 우리나라를 오늘의 선진 공업국 대열에 이르도록 발전시키는데 주역을 한 정 회장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위대한 기업가 정신과 발자취를 돌아보는 데는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관되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그가 본격적으로 사업을 펼쳤던 6~70년대의 우리나라 사업환경은 열악한 정도가 아니라 비참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자본, 기술, 경험, 시장, 어느 하나도 기본적인 수준이나마 갖춘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61년도 우리의 1인당 국민 소득이 80불 수준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천연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사람이라는 자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 시기 노동력의 중심을 이뤘던 30,40대 인력들은 상당 부분이 실질적인 문맹 수준이었다. 60년대 초까지 논산 신병 훈련소가 입소 전 과정으로 한글 교육과정을 운영했던 사실이 당시 실태를 말해 주고 있다. 초등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도 흔치 않았고, 중졸, 고졸 학력은 아주 드물었다. 오직 고통스런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일 해보겠다는 의욕이 그들 자산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들은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부 고속도로 건설, 조선 공업, 자동차 공업, 중동 진출 인력의 주역을 담당해 냈다.
둘째, 그가 이룩한 업적들은 대부분 한 기업가의 성공차원을 넘어 우리 경제사의 이정표를 바꿔 놓은 사업들이라는 점이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박정희 대통령과 교호하며 완성한 경부고속도로, 조선 사업, 자동차 사업, 석유파동을 맞아 국가의 외환 보유고가 겨우 3000만불 수준으로 국가 파산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주위의 반대와 조소를 무릅쓰고 중동 진출을 감행하여 나라를 구한 것들이 이에 속한다.
셋째,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어 감히 다른 기업들이 엄두도 못내는 사업들을 과감하게 앞서 추진, 성공시킴으로서 다른 기업들이 뒤따르게 하여 한국경제 산업화의 활로를 트게 한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 공업과 중동 진출이다.
▲1982년 11월 4일 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울산 현대미포대단위수리조선소 준공식에 참석, 정주영씨의 설명을 듣고 있다./조선일보DB
넷째, 상식적으로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반전시키는 그의 불굴의 도전 정신이다. 6·25 전쟁 와중에 처음 수주한 관급공사인 고령교 복구공사를 기술과 장비, 경험 부족, 그리고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몇 배가 넘은 인플레이션으로 엄청난 손해가 불가피한 것이 자명했으나 형제들의 집을 팔아서 자금을 대며 겨우 완공했다. 그러나 이를 끝까지 완성한 신용으로 휴전 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함으로서 초기 현대건설의 기반을 만들었다. 1965년 처음 수주한 해외 고속도로 공사였던 태국에서의 공사는 역시 경험과 장비, 현지 토질과 기후조사 미흡으로 막대한 손해를 보고 겨우 완성했다.
그러나 이는 몇 해 후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사업을 추진할 때 한국에서 유일하게 고속도로공사를 해 본 업체로 그 주역을 담당하게 했다. 불어 닥친 해운업 불황으로 현대조선 초기에 선주들이 완성했으나 인도해 가지 못하는 배가 늘어났을 때 이를 상선으로 개조하여 현대 상선을 성공적으로 발족시켰다. 포드 자동차는 초기 현대자동차와 한국에서 조립생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장차 아시아 시장을 겨냥하여 현대를 자기들의 조립생산 파트너로 굳힐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유리한 협상 입지확보를 위하여 일종의 길들이기 작전으로 현대자동차가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내세워 정 회장을 압박해 왔다. 경영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당시 현대자동차가 국내 기업 중 최고의 세금 체납자였다는 사실이 당시의 형편이 얼마나 심각했나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자동차 독자개발이라는 출사표를 냄으로서 오늘날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원을 열었다.
다섯째, 그의 주요 업적과 발자취의 특징 중에 하나는 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창의력의 무한한 가능성과 힘에 대한 신봉자였고 그 자신 철저한 실천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고정관념과 교과서적 이론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며 이로부터의 일탈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는 사업에서 도전 요소를 대할 때마다 타고난 직관력과 복잡한 개념을 단순화하는 능력으로 획기적 발상을 했고 이를 과감하게 실천함으로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극적인 예가 폐 유조선을 이용하여 아산 방조제 물막이 마무리 공사를 하여 엄청난 비용절감, 그리고 공기를 단축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세계 토목 공사에 전례가 없는 ‘정주영 공법’이라는 새로운 장을 쓴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조선 사업, 중동 진출, 자동차사업, 88올림픽 유치도 이에 속한다. 당시 이러한 사업들이 가지고 있었던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요소’들을 볼 때 그의 이러한 창의와 혁신정신 없이는 시작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그가 가졌던 특유의 긍정적인 생각과 도전 정신, 그리고 결행의 용기를 들 수 있다. 그는 늘 말했다.
“어떤 일이 아주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그 일이 그만큼 해야 할 가치가 있고 그 열매 또한 크다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나 겨우 할 수 있다면 앞설 수 없으며 결국 도태되게 마련이다. 힘든 일을 앞에 놓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대들면 없어 보이던 방법이 보이고,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있는 길도 안 보이게 되는 거야.”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사업 안건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는 간부에게 불편한 심기가 들 때면 정회장은 그의 위 아래를 훑어보며 그의 성과 직책을 생략한 채 “이봐, 해봤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는 그의 이러한 정신이 농축된 질책과 독려의 표현이었다. 이는 서두에 언급했듯이 필자가 쓴 그에 대한 일화적 전기의 제목이 된 배경이기도 하다.
“아이고 박 사장, 그 소리 정 회장님 모시고 어려운 일 해내며 무수히 듣던 말인데 지금도 그 소리 들으면 가슴이 설레네.”
전에 그를 가까이 보필했던 현대그룹사의 옛 간부들이 이 책 제목을 접하고 하는 말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과거 한국 경제 발전의 반세기 동안 한국에는 많은 대기업 총수들이 있었는데 한국 경제사를 바꾼 그런 큰 사업들을 정 회장이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관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결코 ”아니다”이다. 거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정 회장이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와 뭘 모르고 저러는 거야. 성공할 리가 없는 그 일을 하다가 정회장이 망하는 건 둘째 치고 나라 망신시킬 일이 걱정이야.”
이것이 그가 조선사업, 중동진출, 자동차 독자개발,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때 한국의 기업계는 물론 관련 전문가 집단들이 취한 입장이었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특히 그가 조선사업을 위해 동분서주 할 때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으로서 경제부처의 수장 자리를 맏고 있던 사람은 공식석상에서 “정 회장이 무리하게 추진하는 조선 사업이 성공하면 나는 열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하늘로 오르겠소”라고 했다. 그랬던 그도 그의 타계 전에 출간한 그의 회고록에서 정 회장이 도전 정신과 획기적인 발상으로 한국경제에 크게 기여한데 대한 찬사를 남겼다.
분명 정주영 회장은 그 특성과 업적 면에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세기의 도전자이고 창의적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위대한 인물이다. 우리는 그의 빛나는 면모들을 정신 유산으로 승계 받아서 도전의 용기, 창의력, 긍정적인 사고와 자신감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면모를 세계에 널리 알려서 우리의 우수한 잠재력과 기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부각시켜야한다. 이것은 그의 업적을 누리고 사는 후대인 우리의 책무이기도 하다.
39 피터 드러커 "정주영은 내가 주창한 기업가 정신의 극적인 사례"
정 회장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이었지만 넓은 분야에 걸쳐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세계적인 석학들을 만나는 데는 아무리 일이 바빠도 시간을 냈다. 그중에서도 세계의 석학으로 손꼽히는 피터 드러커 교수와 정 회장의 만남은 그의 놀라운 혜안과 통찰력, 그리고 정 회장과의 진솔한 대화 때문에 특히 기억에 생생하다.
‘단절의 시대’, ‘경제인의 종말’, ‘산업인의 미래’, ‘새로운 사회’, ‘경영의 실제’ 등 수많은 저서로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졌고 특히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날카롭게 분석함으로써 경영학의 태두라는 세계적 찬사와 함께 경제 사회 분야의 미래학자로서 명망이 드높았던 피터 드러커 교수가 한국을 찾았던 것은 1977년 10월 이었다.
피터 드러커 교수의 한국에서의 일정은 명성에 걸맞게 한치의 빈틈도 없이 꽉 짜여져 있었다. 그만큼 그를 만나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연일 이어지는 강연회와 언론사 인터뷰는 물론 그에게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하는 국내 기업인들의 면담 요청도 줄을 이었다. 그 중 몇 사람이나 실제 드러커 교수를 만날 수 있었는지 지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정주영 회장은 오히려 드러커 교수 스스로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한국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현대경영학의 창시자 '피터 드러커' 교수.
그해 10월 12일, 짧은 방한기간 중 짬을 내어 드러커 교수는 정주영 회장을 찾아왔다. 1915년생인 정주영 회장은 당시 62세, 환갑을 갓 넘긴 나이였고 드러커 교수는 1909년생으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환갑을 넘긴 한국 재계의 거목과 세계 경영학계의 거목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시간은 오후 2시를 갓 넘겼을 때였다. 맑고 투명한 가을 하늘이 창밖에 드리워진 가운데, 세계적인 석학과 보통학교 출신의 걸출한 기업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계 경영학의 태두이신 교수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정 회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무슨 말씀을….”
두 사람은 모두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통역을 하는 필자에게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정 회장도 달변이었지만, 드러커 교수 역시 그에 못지 않는 달변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정 회장의 말이 매우 빠른 반면 드러커 교수는 그에 비해 조금 느린 편이었다.
“지금 정 회장께서 저를 경영학의 태두라고 불러주셨는데, 참으로 과분한 말씀입니다. 오히려 정 회장님을 뵈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선 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경제 성장 모델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전망했지만 한국처럼 오랜 식민지 피지배와, 2차 대전과 6·25라는 두 개의 큰 전쟁을 치르고, 극도의 빈곤과 열악한 성장 여건 하에서도 급성장한 독특한 모델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또 이런 전후의 황무지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 경제를 선두에서 이끈 정주영 회장님과 같은 아주 독특하고 위대한 기업경영 사례에 대해서도 역시 연구를 못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정 회장님께서 발휘하신 기업가 정신이 제가 주창하고 가르쳐 온 핵심인데, 이를 실천한 가장 극적인 정 회장님 사례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저 제가 한 일이라고는 앞 뒤 안 가리고 열심히 기업을 이끈 것 뿐이지요. 그게 한국 경제발전에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봐주시니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드러커 교수께서는 이미 경영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널리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신 경영학의 태두 아니십니까? 비단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경영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세계적으로 누구나 교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교수님의 그 놀라운 통찰력과 미래 예측에 놀랄 뿐입니다.”
당시에 이미 경부고속도로 건설 주역, 중동 진출, 현대조선 설립, 한국 최초의 독자적 자동차 모델 개발 등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는 정주영 회장과 세계 경제의 현안과 흐름에 탁견을 가지고 있는 드러커 교수와의 만남은 그 의미가 각별한 것이었다. 다시 드러커 교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제가 솔직하게 말씀 드리자면, 제가 정 회장님만큼 돈을 벌 자신이 있었다면 아마 저도 경영학 교수 안 하고 바로 사업을 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제가 경영학 교수에 머물고 있는 것은 막상 그럴 배포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일개 이론가일 뿐입니다. 제가 한국경제와 정주영 회장님을 뵙고 깨닫게 된 것은 경영은 학식과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론과 머리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업가의 정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기질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죠. 정 회장님은 그런 점에서 천성을 타고 난 분입니다.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 요소, 난관이라는 안개로 가리워진 먼 앞의 사업 기회를 날카로운 예지력을 가지고 간파해 내고 이를 강력히 실천해 내는 리더십과 결행력을 정 회장님은 이론 이전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분입니다. 저는 한낱 이론가일 뿐이죠.”
이날 드러커 교수가 말한 경영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훗날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지식근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흔히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대학교수, 학자 등의 이론적인 지식인과 실천적 지식인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다. 칭찬인지 분석인지 모를 드러커 교수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정 회장은 바로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렇다면 드러커 교수님, 저처럼 기업을 하시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예 우리 둘을 합치면 어떻겠습니까? 교수님의 머리와 저의 기질이 만난다면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하지 않을까요?”
배석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던 정 회장이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교수님께서 우리 한국경제에 대해서 아직 잘 분석을 하지 못하셨다고 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곳곳을 잘 둘러보시고 좋은 충고를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희들은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잔뜩 움츠린 개구리가 더 멀리 뛴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이제 교수님 같은 세계적 석학을 만나고 보니 지금이라도 우리 경제와 기업 현실을 새롭게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 안 그래도 한국 경제와 정 회장에 대해 깊이 연구해 볼 생각으로 한국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금껏 제가 접할 수 없었던 매우 독특한 경제성장 사례이기 때문에 제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드러커 교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뭔가 더 할 얘기는 있지만 말을 아끼는 듯 망설이던 끝에 드러커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한국의 경제 성장은 정말 눈부실 정도입니다. 그 열악한 환경을 딛고 오늘날의 발전을 이룬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첫째는 바로 한국 경제가 너무 눈앞의 현실에 치중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당장의 현실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 드리자면 그것은 바로 한국의 노사관계입니다.”
앞서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자였던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한국에도 노동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한국의 기업가들에게 노동문제는 많은 경우 물건을 만들고 파는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드러커 교수는 일단 말을 꺼내자 자신의 견해를 차분히, 그러나 단호하고 솔직하게 피력했다.
/전태일의 일기장 내용을 특종 보도한 11월 22일자 주간조선.
“짧은 기간이나마 제가 한국 경제계를 둘러보니 한국의 노사관계는 거의 종속적인 정서와 이해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노동자를 경영의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노동자도 기업가도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까지 한국경제를 잘 이끌어왔지만, 동반자로서의 노사관계를 새로 정립하지 않으면 어느 시점에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될지 모릅니다. 한국도 이제는 보다 성숙된 자본주의와 산업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앞서서 이 과정의 시련을 거친 선진국들의 사례를 참고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무언가 정 회장으로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누다 정 회장과 드러커 교수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정 회장과 드러커 교수가 만난 2년 뒤, 한국은 노사문제가 단초가 된 소위 ‘YH사건’을 기폭제로 부마사태, 10·26 궁정동의 총소리로 이어지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사문제의 진통은 그 후 신군부 통치하 5~6년 간의 억압기를 거쳐 1986년과 1987년에 이르러 다시 폭발적인 분출 사태로 이어졌다. 드러커 교수도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예지력을 새삼 되돌아 보게 한다.
40 60대 정주영, 30대 수영선수 출신을 다이빙 시합에서 이기다
“박군 더운데 뭐하고 있어, 나오지?”
“네, 알겠습니다.”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전경련 사절단 일행들이 나이지리아 라고스를 찾은 것은 1979년이었다. 목적은 당시 북한 쪽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비동맹국 나이지리아와의 경제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이를 기화로 북한의 방해로 껄끄러워진 나이지리아와의 외교 관계를 정부를 대신해서 개선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대사관은 아예 없었고 라고스에 진출해있던 코트라도 추방명령이 발부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청와대 외교 안보 팀과 관련 정부 기관이 전경련 정주영 회장에게 나서 줄 것을 요청했고 정 회장 쪽에서도 엄청난 산유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나이지리아와의 사업 기회를 타진해 보기 위한 경제 사절단 방문이었다. 이에 동참하여 20여명의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사절단에 참가했다. 그때 우리가 묵고 있었던 곳은 나이지리아에서 최고급이라는 수도 라고스의 에코이 호텔이었다.
그러나 열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날씨는 우리들이 견디기에는 너무도 무더웠고, 호텔의 시설은 열대의 혹독한 열기를 막아주기에는 너무도 열악했다. 방마다 마련된 에어컨은 선풍기 이상의 기능을 해내지 못했고, 냉장고에 넣어둔 물이며 음료수도 겨우 뜨거움을 면할 정도였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 일행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피서법은 호텔의 옥외 수영장을 이용하는 것 밖에 없었다. 정 회장이 나오라고 한 곳도 바로 수영장이었다.
나이지리아와의 경제협력문제도 물론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비동맹국 나이지리아와의 외교문제 개선에도 신경을 써야 했던 우리 일행의 스케줄은 대단히 빡빡하게 짜여져 있었다. 나이지리아 경제계 인사들을 고루 만나는 것은 물론 가급적 많은 정부 인사들과의 교분을 위해 각종 회합과 오찬, 만찬 일정이 빈틈없이 짜여져 있었던 것이다.
▲1979년 4월 10일 한-나이지리아 경제협력위 제1차 합동회의를 마치고 나이지리아 산업성 장관 아에들레예(Aedleye) 박사를 방문한 한국측 대표단 일행./전경련 제공
하지만 이렇게 빡빡한 일정 중에도 우리는 틈이 나면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그 외에는 더위를 식힐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영장을 간다고 해서 제대로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도 없었거니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수영장으로 내려 가서 더위를 식히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수영장 속에 몸을 담근 채 목만 내놓고 왔다 갔다 하다가 시간이 되면 후닥닥 방으로 뛰어올라와 옷을 갈아입고 약속 장소로 떠나고, 일정이 끝나면 다시 부랴부랴 호텔로 돌아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내려가고 하는 더위와의 전쟁이었다.
정 회장과 함께 서둘러 수영장으로 내려가니 먼저 내려간 일행 중 몇몇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그나마 오후 늦은 시간이라 다음 일정까지는 다소 여유가 있는 때문인지 제법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준비운동이고 뭐고 우리는 먼저 물에 뛰어들었다. 아침부터 몇 차례나 물 속을 들락거린데다 준비운동 하는 시간마저 아까울 정도로 더위를 식힐 물이 그리웠던 때문이다. 풀을 몇 번이나 돌았을까? 다소 더위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어보니 정 회장이 수영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 어딘가를 주의 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정 회장이 눈길을 주고 있는 쪽을 바라보니 이번 사절단에 실무 팀의 한사람으로 참여한 삼미그룹의 이 이사가 막 다이빙대에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아 박군, 저기 좀 보게. 저 친구 아주 수영을 잘하는군 그래.” “회장님, 이 이사는 원래 부산고등학교 수영선수 출신이랍니다.”
“그렇군. 근데 말이야, 내가 저 친구하고 수영 시합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이 이사와 시합을요?”
그때 정 회장은 이미 환갑을 넘어 7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게다가 정 회장의 수영실력은 강원도 통천 시골 개울에서 어릴 때 배운 소위 ‘개헤엄’이 바탕일 것이고, 30대의 이 이사는 당당한 수영선수 출신이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시합이었다. 하지만 일단 입에서 말이 나온 이상, 그대로 물러설 정 회장이 아니었다.
“박군, 저기 가서 이 이사 좀 불러오게.”
나는 서둘러 이 이사가 수영을 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 정 회장의 이야기를 전했다. 얘기를 전해들은 이 이사의 표정은 무척이나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초 상대가 되지 않는 시합이지만, 일부러 져주는 것이 통할 정 회장도 아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하늘 같은 어른 정 회장의 부탁 아닌 부탁인 것을. 결국 이 이사는 나를 따라 정 회장이 서 있는 다이빙대 앞으로 가서 섰다.
“이봐 이 이사, 나하고 시합 한 번 하세.”
“예. 그런데 어떤 시합을….?”
“아, 딴 게 아니고, 자네 다이빙하는 걸 보니 아주 멋지더군. 그래서 말이야, 자네하고 나하고 다이빙 시합을 해봤으면 하네. 여기서 다이빙을 해서 물속으로 누가 더 멀리 가나 내기를 하자는 거지.”
정 회장이 눈 여겨 보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보통 수영 선수들은 스타트 신호가 울림과 동시에 물 속으로 뛰어들어 처음 한동안은 물 속에서 앞으로 나가며 속력을 내다 한참 지난 뒤에야 물 밖으로 나와 역주를 계속하게 된다. 지금 정 회장이 시합을 하자고 하는 것은 바로 물 속으로 누가 더 멀리까지 가나 하는 것을 겨뤄 보자는 것이다. 본격적인 수영시합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 역시 정 회장과 이 이사는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30대의 폐활량과 환갑이 넘은 노인의 폐활량이 같을 수도 없지만, 물살을 차내는 근육의 힘 역시 어림 없는 일이다. 어쨌든 정 회장의 제안대로 시합이 시작되었다. 정 회장과 이 이사의 진기한 시합 소식을 듣고 고 김각중 당시 경방 회장을 비롯하여 김입삼 전경련 상근 부회장, 설원식 대한방직 회장,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고 장우주 당시 현대종합상사 사장 등이 모두 다이빙 대 근처로 몰려와 관중이 되어주었다. 먼저 이 이사가 다이빙 대에 섰다. 자세를 잡더니 이내 멋진 폼으로 몸을 날려 입수를 했다. 물속에서 그가 헤엄쳐 나가는 방향 수면위로 물결 소용돌이가 선을 그으며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 후에 그는 수면 위에 얼굴을 내밀고 섰다. 어림 짐작으로도 꽤 큰 수영장의 반을 훨씬 넘은 지점이었다.
“오 역시 멋지군. 자네 거기 똑바로 서 있어! 움직이지 말고.”
그리고 정주영 회장이 ‘관중’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 다이빙대 위에 섰다. 정 회장의 표정에 얼핏 비장한 결의가 보이는 듯 했다. 사실 구경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 회장이 이기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기대를 했다기보다는 얼마나 이 이사 근처까지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한편 별일 없을까 하는 걱정도 뒤 따랐다.
이윽고 크게 심호흡을 한 정 회장이 물에 뛰어들었다. 입수는 역시 어색했고 물을 튀기는 첨벙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제법 시간이 흐른 다음 정 회장의 얼굴이 물 밖으로 나왔다. 장하게도 이이사가 선 지점을 조금 지나서였다. 일순 다이빙대 근처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 일행들 뿐만 아니라 당시 수영장을 찾았던 외국인들 역시 노 회장의 승리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봐, 내가 이겼지! 분명히 내가 이겼지?”
수영장 밖으로 올라오면서도 정 회장은 연신 자신의 승리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필자가 정 회장의 손을 잡아 수영장 밖으로 끌어올리면서 보니 그의 얼굴 한쪽 눈밑 부위에 시퍼런 페인트가 잔뜩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다이빙 입수 시 물속에서 멀리 가기 위해 욕심을 내어 깊이 잠수를 하려다 보니 바닥에까지 내려가 얼굴을 수영장 바닥에 긁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수영장 바닥에 최근 방수 보수공사를 했는지 방수 페인트가 덜 말라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 회장에게는 시합에서의 승리가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필자에겐 정 회장이 크게 다치지나 않았나 하는 것과 얼굴의 페인트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 잠시 후 당시 나이지리아 정부 최고 실세인 석유상 부하리 장군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서둘러 정 회장을 모시고 객실로 올라갔다. 그러나 페인트를 어떻게 지워야 할지 난감했다. 더운물을 받아 닦아보았지만 턱도 없는 일이었다. 현지 현대 수행 팀이 어디선가 약용 알코올을 구해왔다. 이것을 수건에 묻혀 차근차근 닦아내니 그런대로 페인트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한참 알코올 뭍힌 수건을 들고 닥아 낸 끝에 페인트를 지우고 보니 이번엔 페인트가 묻었던 자리가 뻘겋게 부풀어 있었다. 그냥 바닥에 얼굴을 긁은 정도가 아니라 꽤 단단히 부딪혔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정 회장은 얼굴을 찡그리거나 고통스러워 하기는 커녕 연신 소년같이 기분이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이봐, 분명히 내가 이겼지? 응?”
“그럼요, 회장님.”
옷을 갈아입고, 장관을 만나기 위해 나가는 순간까지도 정 회장의 기분 좋은 표정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날 부하리 장군과의 면담은 물론, 우리의 나이지리아 방문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성공리에 마쳤다. 어쩌면 이런 성과에는 정 회장의 좋은 기분 상태가 한 몫 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41 정주영 회장이 가장 싫어했던 인간형
정주영 회장의 건강관리법(상)
‘현장이 있는 곳에는 정 회장이 있다.’
현대맨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만큼 정 회장은 현장을 중시하고, 무엇이든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는 현대건설 초창기부터 환갑과 칠순을 넘길 때까지 시종일관, 그의 원칙이자 철학이었다. 때로는 17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는 숨도 돌리지 않고 바로 헬리콥터나 차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강행군을 견디게 해주는 힘은 바로 타고난 그의 건강과 체력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평소 정 회장은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선천적으로 강건한 체력을 물려준 부모님께 감사하는 표현이었다. 건강에 대한 정 회장의 자신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딱 90살까지만 현역으로 뛸 거야. 그리곤 은퇴해서 한 10년 동안은 골프도 치고 쉬다가 그 다음은 하늘에 맡겨야지. 그러나 은퇴 후라도 현대그룹의 최고 경영자는 내가 직접 임명할 거야. 그때까지 치매 같은 것에 걸리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나는 치매에 걸릴 염려가 없는 사람이거든.”
해외 출장 중 둘이서 차를 타고 이동할 때와 같이 한적한 시간을 보낼 때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듯 하던 정 회장은 문득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것은 나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기보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자신감과 또한 그런 바람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렇게 타고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우선 부지런한 천성에 일찍 일어나 새벽길을 걷는다거나 바쁜 중에도 틈을 내서 테니스나 수영 등으로 체력을 유지하고,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었다. 입에 맞는 음식이 물론 따로 있겠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며 수많은 내외국인을 접대해야 하는 그에게 있어서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자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또 주로 동해안에서 열렸던 사원 연수회 등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씨름을 즐기는 모습도 재벌 총수로서 사원들에게 보여주는 애정의 표시이자 자신의 젊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였던 것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90세까지 현역으로 뛰지는 못했지만, 남들은 은퇴해서 쉴 나이인 70, 80이 넘어서도 현장에 있기를 고집했던 철저한 ‘현장맨’이었다.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하는 정주영 전 회장. 새내기 사원들과의 승부에서는 배치기 같은 큰 기술로 승부를 내곤 했다./아산정주영닷컴 제공
이런 정 회장이 가장 혐오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게으름이다. 그리고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느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주어진 일을 정해진 시간 안에 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정 회장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할 일은 하고야 마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준비가 그만큼 철저했다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흔히 정 회장을 황소와 같은 고집과 뚝심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는 어떤 일을 하든 나름대로 앞뒤를 꼼꼼히 살피고 철저하게 준비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준비성은 특히 해외 현장 시찰 때 잘 나타난다.
해외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어려움을 겪는 것이 바로 시차에 대한 적응이다. 열 몇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비행기 안에서 밤낮이 바뀌고 만다. 때문에 현지에 내려서도 곧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시차적응과 같은 문제로는 거의 고생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것은 물론 타고난 체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시차 적응을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현장의 시차를 줄이기 위해 정 회장이 택한 방법은 바로 잠이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그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잠을 자기 시작해서 내릴 때에야 깬다. 역시 장거리 비행기를 많이 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편안한 좌석이 주어진다 해도 비행기 안에서 몇 시간씩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정 회장의 비결과 준비가 돋보인다.
정 회장은 해외 현장에 나갈 일이 생기면 비서진에게 우선 비행기 시간부터 챙기게 한다. 어떤 국적의 어떤 비행기를 탈 것이냐가 아니라 출발 시간과 도착 시간을 점검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급적 일정상에 큰 무리가 없다면 해가 있을 때 출발해서 오전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고른다. 정 회장이 밝힌 이유는 비행기 안전과 관련한 통계 기록이다. 즉 항공기 운항 사고에 대한 통계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사고는 이착륙 시에 일어났으며, 또 그 사고의 대부분은 시야가 어두운 밤에 발생했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야 어쩔 수 없겠지만 최대한 안전한 비행시간을 고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비행기 좌석은 옆의 좌석을 추가로 예약한다. 비행 중 최대한 편안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당일, 출발시간을 몇 시간쯤 남겨둔 상태에서 정 회장이 찾는 곳은 테니스장이나 수영장이다. 테니스를 할 경우 대부분 정 회장을 수행했던 이병규 비서팀장이 상대가 되었다. 장거리 여행을 앞두고 웬 운동이냐고 의아해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것이 바로 정 회장만의 장거리 여행 비법이다. 테니스장이나 수영장에서 몇 시간씩 땀을 쭉 빼서 체력을 소진하고 나면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몸이 알아서 잠을 청해주기 때문이다. 좌석에 앉으면 보다 평온한 수면을 위해 가벼운 식사와 몇 잔의 위스키로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릴렉스시킨다. 그리고 잠에 빠진다. 오전 시간에 도착지에서 내리면 거뜬한 컨디션으로 바로 현장으로 가서 뛰고 그날 저녁 다시 잠을 푹 자는 방식으로 정상적인 신체리듬을 회복하는 요령을 실천했다.(하편에 계속)
/인력개발원에서 테니스를 즐기고 있는 정주영 전 회장(1981년)./아산정주영닷컴 제공
42 무쇠 체력 정주영 회장도 감당 못했던 이 병
정주영 회장의 건강관리법(하)
☜ 상편에서 계속
70이 넘은 나이에도 신입 사원 젊은이들과 씨름을 겨루던 무쇠 같은 건강을 가진 정주영 회장에게도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커다란 건강상 약점이 있었다. 정 회장 건강의 아킬레스건은 자신의 심경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을 때 불 같은 성격에서 오는 ‘화병’이다. 한국 최고 그룹의 총수로서 세상에서 겪을 만한 일 다 겪었고, 볼 것 못 볼 것 다 체험한 그였고 또 누구보다 큰 배포를 가진 그였지만, 한 번 화가 났다 하면 꼭 그것이 몸의 탈로 연결되었다. 물론 아래 사람의 업무상 실수 같은 것은 불호령 한 번으로 끝나지만 어떤 일로 깊은 마음의 상처라도 입게 되면 그것이 ‘화병’이 되고 마는 것이다. 평소 누구보다 건강했던 정 회장이 자신의 장담대로 100 세는 커녕 현역을 지키고 싶어했던 90세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도 어떻게 보면 ‘화병’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 회장의 아킬레스건인 화병이 탈이 되었던 한 사례는 1987년, 5공 정권 막바지 때의 일이었다. 1987년, 7년 임기의 마지막 해를 맞은 5공 정권은 재야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었다. 그해 초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고문 끝에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 국민적인 분노를 샀고, 전두환 대통령의 호를 딴 일해재단 설립도 그의 퇴임 후 ‘섭정을 위한 장치’로 알려지면서 여론과 재야의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날로 격해지는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사회는 불안에 휩싸였다. 어떤 심각한 사태로 이어질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현대중공업 현장을 배경으로 선 정주영 회장./아산정주영닷컴
이런 정국 속에서 국내의 대표적인 한 일간지의 사주가 상을 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주요 일간지 사주의 집안 상이라면 국내 유력인사들이 모두 문상을 가게 되는 자리였다. 정 회장 역시 조문을 위해 상가를 방문했다. 때가 저녁 무렵이었다. 정 회장이 조문을 마치고 막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눈이 마주치는 사람이 있었다. 5공 정권의 막강한 실세로 알려진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인 청와대 수석 비서 모씨였다. 마침 상을 당한 상주의 언론사는 그가 언론인으로 재직했던 곳이기도 했다. 제법 넓은 마당 여기저기 쳐놓은 차일 밑 자리 중 하나에 앉아 있다가 정 회장과 눈이 마주친 그는 이미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만난 옛 직장의 선 후배들과 상당한 전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눈이 마주친 사람이 누군가 확인하는 듯 하더니 곧 손을 흔들어 정 회장을 불렀다.
“이보쇼, 정 회장, 나 좀 봅시다.”
정 회장한테 나이로 아들벌인 그의 말투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이미 그가 만취한 사실을 눈치챈 정 회장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의 부름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냥 인사나 하고 가자는 심정으로 앉아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 수석님 안녕하셨습니까? 그 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뭐, 죄송할 거까지는 없고…. 내 오늘 만난 김에 정 회장한테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요즘 이래저래 어렵다고들 하는데, 전경련 회장으로서 정 회장 생각은 어떻소? 도대체 뭐가 어려운 거요?”
그가 혀가 꼬인 말로 정 회장에게 물었다.
“글쎄요, 뭐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다고들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들이 힘을 모아서 잘 헤쳐나가야지요.”
딱히 할 말도 없었던 데다 사실 그 당시의 어려움이야 5공 정권이 초래한 어려움이었으니 정 회장으로서는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이미 취한 사람을 상대로 무슨 조리있는 대화가 될 것 같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 회장은 일단 자리를 피하기 위해 두루뭉술하게 둘러대었다. 그러나 그는 정 회장에게 시비를 걸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좀체 놓아줄 기색이 아니었다.
“다들 ‘어렵다’고 한다? 그러면 분명히 뭔가 어렵긴 어려운 모양인데, 그게 대체 뭐요? 그리고 그런 어려움이 있다면 당신들도 뭔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 아니오? 어디 전경련 회장님 대답 좀 들어봅시다.”
말끝마다 시비조로 나오는 바람에 정 회장은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아예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로 작정하고 구실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만….”
그리고 정 회장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 때였다. “가긴 어딜가요!” 그가 돌아서는 정 회장의 바지 자락을 잡아 챈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 때문에 정 회장은 그만 땅바닥으로 고꾸라져 넘어지고 말았다. 정 회장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그러잖아도 정 회장과 그의 대화를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듣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칠순을 넘은 노인을 잡아챈 그에 대한 노여움과 당황스러움이 교차했다. 그러나 아무도 면전에서 그의 행동을 나무라지는 못했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정 회장은 곧 일어났지만 삭이지 못하는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있었다. 막상 나이와 상관 없이 정정한 정 회장의 체력으로 보아 그와 한번 육탄전을 벌여도 될 법 했지만 정 회장은 가쁜 숨을 쉬며 분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눈에는 주위 사람들의 표정도, 정 회장의 분노에 찬 얼굴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내가 얘길 하고 있는데 가긴 어딜 가?”
정 회장은 침묵한 채 애를 써서 말을 삼켰다. 옷을 두어 번 툭툭 턴 정 회장은 아무런 말도 없이 뒤돌아서 대문을 향했다. 그는 정 회장의 뒷모습을 바라만 볼 뿐 더 이상 정 회장을 붙잡지 않았다.
그날부터 정 회장은 며칠 동안 집에서 꼼짝 않고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그날 밤 내내 화병으로 토사곽란을 한데다 갑자기 시력에도 문제가 생겨 시야가 어릿어릿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 회장은 출근은 물론 그 다음날로 예정돼 있던 88올림픽 시설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전 국민적인 관심 속에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두루 모이는 그 자리에 전경련 회장이자 대한체육회장, 그리고 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인 그가 불참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정 회장은 눈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 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이때 정 회장이 겪어야 했던 ‘화병’은 어쩌면 일과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 회장 말년의 건강 문제는 정 회장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뒤 김영삼 정부로부터 국민당 해체 압력을 시작으로 장장 5년 동안 현대그룹, 그리고 정 회장 개인의 운신까지도 엄청난 제재를 받아야 했던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어쩔 수 없이 속에 삭이고 살아야 했던 불 같은 성격의 정 회장을 생각하면 그의 건강이 이 시기에 급격히 눈에 띄게 쇠락해 갔던 것은 피할 수 없었던 귀결로 보인다.
43 "조국 근대화 기반시설은 대부분 정주영 주도로 건설"
명예박사 학위 수여사에 담긴 정 회장의 일생(上)
1995년 3월 18일 고려대학교는 정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명예박사 학위 수여사에서 대학원의 위원회는 정 회장의 일생의 위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며 그 추천의 이유를 밝혔다. 정 회장 일생의 위업과 그 가치, 그의 정신과 인품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담겨져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 소개한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정 회장과의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아산 정주영 선생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워 세상의 이치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깨우쳤고, 소학교를 졸업하면서 점차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동시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꿈을 키워 갔다. 그러나 선생은 집안의 장손이라는 전통적 멍에에 묶여 자신의 꿈을 속으로만 간직한 채 펼치지 못하다가 결연히 초지를 관철하고자 혈혈단신 맨손으로 상경하였다.
상경한 후 선생은 낮에는 공사판의 막노동, 쌀가게 점원 등 온갖 힘든 생활을 잘 견디어 냈고, 밤에는 배움의 의지를 불살라 통신강의록을 읽곤 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청소년기에 근로와 고학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착실하게 다졌다.
선생은 천성이 강하고 씩씩하며, 생각이 뛰어나게 지혜로웠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근검함과 성실함을 본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타고난 천성과 교양을 바탕으로, 신의와 실력만이 당당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길이라는 처세훈을 자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에 착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주위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자진해서 도와주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새로운 것에 대한 습득과 도전으로 기업을 선도하는 아이디어 개발에 앞장섰다. 이러한 결과로 아도서비스 공장, 현대토건 등을 시작으로 건설, 조선, 자동차 등 제반의 산업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쟁력을 갖춘 오늘의 현대그룹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무릇 큰 일은 큰 인물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이다. 1960년부터 전개된 역사적인 조국근대화의 대역사의 근간시설은 거의 현대그룹에 의해 주도되었다. 소양강 다목적댐, 경부고속도로, 울산조선소, 원자력발전소 등 국내 굴지의 대공사들은 지난 날 우리 민족이 새로 개척하고 창조해야 하는 미증유의 사업들이었다. 만약 선생과 같이 개척자 정신과 겁없이 뛰어드는 패기, 강인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 그리고 투철한 신의와 신심을 가진 분이 없었다면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큰 시행착오 없이 이루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선생은 이렇게 국내에서 쌓아 올린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중동으로 진출하여 20세기 최대의 공사인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리에 마침으로써 국제 경쟁 무대에서 신화를 창조하였다. 이리하여 한국인의 슬기와 능력을 세계에 과시함은 물론 당시 궁핍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렇게 현대그룹이 이루어 놓은 대역사 그 모두가 개척적이고 창조적인 것들로 가히 역사적인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그룹의 성장과 확장은 바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척도가 되었고, 기업이 커짐에 따라 증대된 고용능력, 생산력의 증강, 수출의 증대는 국민의 생활 향상과 국가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직접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 선생은 단순히 기업의 경영인에 머물지 않고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길을 모색하여 교육, 학술, 언론, 문화, 체육 등 광범위한 ‘국민복리’의 실천을 위해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은 낙후된 지역에 병원을 지어 의료혜택을 베풀었고,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 1만 5천여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대학의 학술연구를 지원하여 산·학·연 협동체제를 구축하는데도 앞장섰다.
또한 언론의 창달에도 관심을 기울여 관훈클럽을 지원하고, 신영연구기금을 조성하는 등 언론인의 자질향상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선생은 문화예술과 국민체육 진흥에도 적극 참여하여 여러 분야의 스포츠단의 창단을 통해 국민의 체력 및 국제 경쟁력 향상에 이바지했다. 특히 한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선양하는데 가장 직접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0여년 전 선생은 넓은 농토를 원하셨던 선친의 유업을 받들어 천수만 개척사업에 투신하여 가장 어려웠던 최종 물막이 공사를 이른바, ‘유조선 공법’ 이라는 묘안으로 성공시킴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경탄케 하였다. 이것은 선생의 수많은 시련과 경험 속에서 터득된 선생 특유의 예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94년에는 아시아위크지가 선정하는 5대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영광을 누렸다.
선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빈 손으로 일어나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한국 최대이자 세계굴지의 기업을 구축했다. 이것은 입지전적인 인간승리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선생은 대성한 뒤에도 어렸을 때의 가난을 되새겨 검소함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고, 기업을 일으킬 때의 어려움을 기업관리의 신조로 삼아 조금도 사치하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그저 타고난 천성대로 부지런하고 건실하게 살아갈 뿐이었다.
이제 선생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생의 여정에도 연륜이 쌓여 80세라는 ‘대년(大年)’에 이르렀다. 옛날에는 큰 허물이 없이 80세를 산 노인에게는 수직(壽職)을 내리고 ‘선생’이라는 호칭도 붙여졌다. 하물며 선생과 같이 입지전적인 인간승리의 본보기를 보여 준 사람에게 있어서랴! 이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위원회는 선생이 간직한 인간 본연의 질박함과 일생동안 인류의 생존에 유익한 사업을 해 온 공덕을 기리어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할 것을 의결하고 고려대학교 총장에게 추천하는 바이다.”(계속)
44 천하의 정주영도 무정한 세월 앞에 무너지고
명예박사 학위 수여사에 담긴 정 회장의 일생(下)
☜ 상편에서 계속
또 이날 홍일식 고려대학교 총장은 인사말에서 정 회장의 일생의 업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일반졸업식이 새로 지은 배를 처음으로 먼바다로 떠나 보내는 진수식에 비유된다면 이 명예박사학위수여식은 무거운 짐을 싣고 먼 항해를 떠났던 배가 무사히 역정을 마치고 성공적으로 귀항하는, 이를테면 ‘인간승리호’를 맞이하는 환호와 경축, 위로와 존경, 그리고 한껏 선망을 보내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은 그 어느 의식보다도 경쾌하면서도 융중(隆重)하고, 권위적이면서도 성스럽기까지 한 대학 특유의 성사입니다.
▲1995년 3월 고려대 명예철학박사 수여식에서 연설하는 정주영 전 회장./아산정주영닷컴 제공
따라서 이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는 분의 공적은 바로 인류사회가 추구해야 할 보편가치의 구체적 사례가 되고, 배움의 길을 걷는 젊은 지성들에게는 자아를 실현하는데 더없이 친근한 본보기가 되며, 이는 또한 대학이 인류사회를 평판하는 지엄한 잣대이자 대학이 추구하는 인재양성의 지고한 표상인 것입니다.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주영 선생은 무에서 유를 창출해 낸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그 분의 원대한 구상과 정밀한 설계, 지혜로운 방책과 과감한 추진력, 그리고 필생의 신념과 ‘공성신퇴(功成身退)’하는 질박하고 담담한 인생관은 나날이 왜소해지고 부품화되어 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대한 꿈을 가꾸고 전체를 종합적이고 유기적으로 보게 하는 안목을 길러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기계의 부속품이 되기보다는 그 기계를 제어하는 경영주체로서의 인간을 길러 가는데 산교훈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창조자, 시대의 선각자에게 저희 고려대학교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바로 고려대학교의 교육이념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저희 고려대학교는 [바른 교육, 큰사람 만들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지식인을 양산했을 뿐 예지로운 지성을 길러내지 못하였으며 부품적 기능인은 배출했어도 우주와 인간을 경영할 수 있는 창조적 대인물을 길러 내는데는 소홀했습니다. 이제부터 저희 고려대학교는 선생님과 같이 새로운 시대의 창조자, 시대의 선각자를 길러 내어 우리 민족을 보다 높고 넓은 차원에서 학술과 도덕과 문예의 진선미를 추구하고, 건강한 체질과 우아한 기품을 바탕으로 항상 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선량한 민족을 가꾸어 가는데 선도적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정주영 선생께서는 60여년 전 저희 고려대학교의 중심 건물인 본관을 지을 때 몸소 주춧돌을 놓아 주신 분입니다. 그 후 고려대학교는 그 건물을 기점으로 거대한 종합명문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선생께서는 많은 기업을 창건하고 국가의 기간산업을 일으켜 세계 유수의 기업인으로 대성하셨습니다.
이제 선생이 초석을 놓으신 그 학교가 60여 성상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신념으로 인간승리의 길을 걸어 오신 선생께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게 되니, 60여년이 지난 오늘은 인간승리의 본보기가 되시어 고려대학교의 정신적 주춧돌을 또 하나 보태신 셈입니다.”
필자는 이 수여식이 끝난 후 정 회장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다. 그의 손은 불같이 뜨거웠고 이미 핏기가 가신 얼굴의 피부는 떠 있었다. 정 회장이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필자를 알아보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이윽고 반가운 듯 미소가 들었다.
“아, 자네! 지금 뭐해?”
“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꼿꼿하게 서 있는 그의 자세에서 양복 바지 겉으로 솟아 보이는 허벅지 근육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런 거인에게도 세월은 이토록 예외없이 무정한 것인가. 얼마 후 그는 대기하고 있던 흰색 에쿠스를 타기 위해 어렵게 몸을 가누며 한 발을 차 문턱에 올려놓고 있었다. 역시 여느 때처럼 주위에서 부축하는 것을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뭉클한 무엇을 느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어오는 눈시울을 닦았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정 회장이 탄 차를 안보일 때까지 바라 보았다. 그를 보좌했던 14년 세월의 순간들이 스쳐갔다. 끝
* 정주영 그는 누구인가?
2014-12-24 정주영의 돼지몰이론-빈대론
2015년은 한국 기업사(史)에서 큰 의미가 있는 해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소 판 돈을 들고 야반도주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 한국 최고의 기업가로 성공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이자 역사이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은 세계 5위의 자동차그룹도, 세계 최대의 조선그룹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 대부분이 불모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년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잿빛 전망이 쏟아져 나온다. 건설과 조선업종의 대기업들은 분기당 수천억 원에서 최고 2조 원에 이르는 부실을 털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화학과 유화업종은 중국 특수(特需)가 꺼지면서 구조적 불황으로 빠져들 조짐을 보인다. 투자와 소비 어느 것 하나 온기가 도는 곳이 없다. 이처럼 어려운 때이기에 좌절과 포기를 몰랐던 정 회장의 일생은 종전보다 훨씬 더 값진 교훈을 던진다.
1996년 스웨덴의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정 회장을 추천한 적이 있다. ‘대학교는커녕 중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사람에게 노벨경제학상이 웬 말이냐’고 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정 회장의 ‘돼지몰이론’과 ‘빈대론’은 지금의 한국 경제에 어떤 고급 경제이론보다도 훌륭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정 회장은 ‘고정관념’과 ‘적당히 주의’를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가 유조선을 가라앉히는 기막힌 아이디어로 서산 천수만 물막이 공사를 성공시키고 미포만 갯벌 사진 한 장으로 그리스에서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한 것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고정관념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이 역(逆)발상을 강조한 정 회장의 ‘돼지몰이론’이다. 돼지를 우리에서 내몰 때는 앞에서 귀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꼬리를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돼지몰이론은 시장 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경비 절감에만 매달리는 기업들도 귀담아들어야겠지만, 그보다는 정치권이나 정부가 더 뼈아프게 새겨야 할 이야기다.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 법인세를 올리자거나, 기업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내부유보금에 과세를 하는 등의 발상이 모두 앞에서 돼지 귀를 잡아당기는 행동이다.
다음으로, 정 회장이 ‘적당히 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평소 강조했던 것은 ‘빈대론’이다. 빈대론은 정 회장이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할 때 직접 겪었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정 회장은 잠을 자는 동안 빈대에게 물어뜯기지 않기 위해 갖은 꾀를 낸 끝에, 밥상 다리 네 개를 물이 담긴 큰 그릇 4개에 담그고 밥상 위에서 잠을 잤다. 빈대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해자(垓字)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빈대의 공격이 재개됐다. 빈대들은 밥상 다리를 기어오를 수 없게 되자,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사람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고공침투’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정 회장은 빈대론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렇게 덧붙였다.
“찾지 않으니까 길이 없는 것이다. 빈대처럼 필사적인 노력을 안 하니까 방법이 안 보이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도 더이상 “투자할 곳이 없다”, “미래의 먹거리가 안 보인다”고 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자문(自問)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해보기는 했어? 빈대만큼이라도….”
천광암 동아일보 산업부장 iam@donga.com
2015.03.28 '노동자 정주영'의 100년
"나는 부유한 뇌동자(노동자의 사투리)이지 재벌이나 자본가가 아니야."
생전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하 정주영)이 자주 했던 말이다. '재벌'이란 용어는 세계적 경제지인 월스트리트저널이나 파이낸셜타임스도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영어로 표기할 정도로 우리 대기업을 지칭하는 국제 통용어가 됐다. 하지만 정주영은 '재벌'이란 표현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주영은 노동자가 맞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기억에 '노동자 정주영'의 모습은 또렷하다. 신입 사원과 씨름하고, 하계 수련회에서 어깨동무하며 노래 부르는 모습만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난항을 겪자 그는 직접 착암기를 들고 터널을 뚫으러 들어갔다.
그런 정주영이 11월이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얼마 전 14주기 제사에 그의 가족이 모였다. 100주년 행사 관련 얘기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아직 들리는 게 없다.
정주영의 삶을 조명한 책 '이봐, 해봤어?'를 보면 정주영과 세계적 석학인 피터 드러커의 대담 장면이 나온다. 1977년 10월 12일.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인 정주영은 경영학의 창시자라고 칭송받는 피터 드러커를 앞에 두고 진심으로 존경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욱 존경심을 나타낸 것은 피터 드러커였다.
"내가 돈을 벌 자신이 있었다면 경영학 교수를 안 하고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기업가 정신이란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기질에서 나오는 것이더군요. (정주영 회장의) 불확실성과 싸움을 할 수 있는 용기, 미지에 대한 예측력과 추진력을 존경합니다."
정주영은 한국 경제 기적의 증거이자 원동력 그 자체였다. 가능성이 전혀 안 보이는 영역에서 일을 벌였고, 사업을 성공시켰다. 가장 가난했던 나라 한국이 조선업과 자동차산업, 중동 건설을 보란 듯이 성공시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정주영 탄생 100년을 맞으면서 그가 이뤄내지 못한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었으면 하는 게 있다. 바로 노사 문제다. 37년 전 그날도 노사 문제 얘기가 나왔다. 정주영과 피터 드러커의 대담 말이다. '한국 경제에 충고를 해달라'는 정주영의 질문에 피터 드러커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너무 눈앞만 보고 달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사 문제다"고 답했다. 그때 드러커가 지적한 노사 문제는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코앞까지 쫓아온 중국의 무서운 추격에다가 무한 경쟁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자동차가 생존하기 위해 풀어야 할 절체절명의 숙제는 자명하다. 소모적 갈등의 노사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때마침 현대차 노사가 모처럼 새로운 노사 협약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한다. 세계가 놀라는 자동차를 만들어낸 현대차가 이번엔 세계가 놀랄 만한 노사 문화를 만들어내면 어떨까. 오는 11월 25일 정주영 탄생 100주년이 그런 날이었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뇌동자 정주영'을 뛰어넘는 날로 기억될지 모른다.
이인열 조선일보 산업1부 차장
현대자동차의 랠리 도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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