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7/ 현대제국2/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 정주영의 신화1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조선일보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담당 상무를 약 14년간 역임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일할 때 국제업무를 보좌했다. 태평양 경제협력위원회(PBEC) 한국 위원회 사무국장과 유니파이 컴뮤니케이션스 코리아 대표를 지냈다. 중견기업 연합회 국제담당 부회장도 역임했다. 지금은 국제 프로젝트 컨설팅, 무역, IP 개발사업을 하는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로 재직중이다.
저서에 정주영 회장 일화를 묶은 ‘ 정주영 - ‘이봐, 해봤어 ?’’가 있으며,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방송 출연, 기고, 학교 강의, 경제모임 강연 등 활발한 홍보활동을 하고 있다.
1 정주영 회장, 경부고속도로 공사상황을 묻는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길이 없으면 만들어라" 경부고속도로 건설(上)
정주영은 한국경제 성장신화의 대명사이다.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고, 국민소득이 80달러에서 2만6000달러까지 오르는 물꼬를 텄다. 참혹하고 열악한 당시 현실에서 엄두도 못낼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자동차 독자 개발, 조선사업, 중동 진출, 올림픽 유치 등이 모두 그랬다. 그가 희대의 사업에 출사표를 던질 때마다 사람들은 “초등학교 밖에 못나와 뭘 몰라서 그런 무모한 일에 달려드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전했고 창조했다. 그리고 한국경제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 내년 정주영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이 역사적인 인물의 업적을 시리즈로 짚어본다./편집자
“정 사장,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공구가 난공사라고 하는데…”
고속도로 공사현장 상황을 들어보기 위해 현장에 있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현대건설 사장)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얘기를 건네던 박정희 대통령은 순간 말을 멈추었다. 앞에 앉아서 얘기를 듣던 현장 작업복 차림의 정 회장이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이 모자란 데다 겹친 피로로 몰려오는 수마에 대책 없이 깜빡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대로 조용히 정 회장을 넌지시 바라고만 있었다. 몇 십초가 지났을까.
“아이고 이런,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
정 회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깨서 당황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니요 정 사장, 내가 미안하오, 그렇게 고단한데 좀더 자다 깨었으면 좋았을 것을.”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놓고 두 사람이 함께 쏟았던 열정과 집념,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잘 말해 주는 일화이다.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 부부(1964년)./조선일보DB
아스팔트를 섞고 콘크리트를 개는 일부터 암반 굴착기를 쓰는 일까지 어떤 현장 인부들보다 실무를 잘 알고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가진 현장맨 정 회장에게는 공사 현장이 일터일 뿐 아니라 밥 먹는 곳이고 잠자리였다. 당시 50대 초반의 강철 사나이 정주영은 공사를 독려하고 공사 현장에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거의 하루 종일 현장에서 보냈다. 미군의 폐지프차를 개조해 만든 비좁은 탑차에서 그 큰 체구를 웅크리고 잠을 때우는 일도 다반사였다. 터널 굴착 시 수맥을 잘못 건드리면 폭발적인 강력한 힘으로 한꺼번에 토사가 섞인 이수가 분출되어 사람이 매몰되어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따르게 된다. 이럴 때 인부가 머뭇거리면 정 회장은 직접 착암기를 뺏어들고 앞장 서는 혈기를 보였다.
한편 청와대에서는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 공사 현황이 적힌 상황판을 집무실 뿐 아니라 침대 머리맡에도 비치해놓고 점검하며 수시로 착안점과 지시사항을 메모하는 열정을 쏟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예고 없이 현장으로 정 회장을 찾아가 현장을 함께 점검하고 막걸리를 나누며 격려해 주기도 했다.
5·16 군사 혁명 이후 5년이 남짓한 1960년대 중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정권 기반 자체도 아직 불안정한 시기였다. 당시 우리의 절대 부족한 식량은 미국 잉여 농산물 공여 계획인 PL 480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춘궁기에 끼니를 거르는 세대가 많은 형편이었다. 국방 부분에 있어서도 무기, 탄약, 차량, 연료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부분의 일반 보급품과 군 의료 부분에서도 붕대, 아스피린, 간단한 소화제까지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더욱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권을 그 태동기부터 껄끄럽게 여기고 있는 점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박 대통령이 서울과 부산, 한국의 종축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물론 미국의 영향권에 있는 세계은행도 고속도로 건설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나섰다. 명분은 한국의 경제 수준에 비해 아직 시기상조이고 민생 부분 등 더 시급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제 정치에서 오늘날 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 더우기 그토록 경제 국방 등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판단을 외면하고 재원 확보 대책도 없이 밀고 나간다는 것은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모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의지는 집요했다.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산업발전 기반을 조성하는데 있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무엇보다도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러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동기로는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소위 라인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이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 기반에 더하여 잘 구축된 아우토반 고속도로였다는 것을 독일 방문 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또 군 시절 뛰어난 작전통 이었던 그가 전쟁에서 주 보급로 (MSR)구축이 얼마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인가를 절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도 고속도로 건설에 집착한 이유였다.
2 "길이 없으면 만들어라" 경부고속도로 건설(下)
☜ 상편에서 계속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직면한 도전은 여러 면에서 너무나 엄청난 것들이었다. 최우방국인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관계와 경제 부처는 내놓고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내 비치지는 못했지만 같은 입장이었다. 학계 등 전문가 집단도 반대했다. 야당은 물론, 당시 집권 세력의 주축인 5·16 혁명 주체들로 구성된 공화당 핵심 그룹에서도 반대의견이 거셌다. 우선 극도로 궁핍한 나라살림에 막대한 소요재원 조달 방안이 없다. 또 미국이 반대하는 마당에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국가 경제가 파국에 이르게 되면 앞으로 경제개발 계획의 성패는 차치하고라도 민생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결과 민심이 이반되면 혁명 자체가 실패할 수 있는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너무나도 확고한 의지와 그의 개성을 잘 아는 이들은 누구도 먼저 나서서 박 대통령에게 반대 의사를 전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이때 이들이 생각해낸 인물이 있었다. 공화당 당의장과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씨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대구사범 시절 그의 은사였다. 박 대통령은 그가 통치에 대해서 부정적인 조언를 해도 경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를 앞세우고 중진 몇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 철회를 위해 청와대로 대통령 설득 방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박 대통의 의지는 요지부동이었다.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이 고속도로는 1965년 11월 현대건설이 최초로 해외공사로 수주했다. 이 건설경험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기술적으로 도움이 되었다./조선일보DB
그러나 현실은 박 대통령에게 큰 난제들을 가지고 압박해 왔다. 초기 예산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피땀어린 급여를 담보로 독일로부터 겨우 얻어온 차관,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받는 파월 장병의 피와 생명을 건 급여, 그리고 일부 시장에서 현금화한 PL 480 대금 등 성격으로 보아 참으로 가슴 저리게 눈물겨운 재원을 겨우 마련했다. 그러나 그 못지 않은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국내에 어느 누구도 고속도로를 건설해본 경험이 있는 회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예산을 세울지, 설계는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확보할 지 막연한 상태였다.
이때 떠오른 것이 정주영 회장의 현대건설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추진되기 몇해 전인 1965년 현대건설이 처음으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의 짧은 구간 공사를 해 봤기 때문이었다. 이 공사는 현대건설이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현지기후, 지질, 장비, 기술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대비도 없이 그야말로 멋모르고 뛰어들어 엄청난 적자를 보며 겨우 공사를 끝낸 뼈아픈 경험을 하게한 공사였다. 이런 배경에서 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가 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스런 귀결이었다.
우선 일차적으로 소요 예산을 파악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우리 국토의 지형적 특성상 유별나게 산과 계곡이 많고 뚫어야 될 터널도 많은데 누구도 이런 조건에서 일반도로도 아닌 고속도로 예산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현대가 태국서 해본 것도 규모나 지형 등 조건에서 너무 차이가 커서 크게 도움이 못되는 형편이었다. 박대통령은 넓게 의견을 구해 본다는 취지에서 정부 관련 기관에 예산 작업을 지시했다. 먼저 주무 부처인 건설부가 650억원, 수도권 도로 공사 경험이 있다는 서울시가 180억원, 예산 전문 부처인 재무부가 330억원, 군사도로 공사를 많이 해본 육군 공병감실이 440억원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민간 업체인 현대건설이 280억원을 제시했다. 되돌아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하기로서니 고속도로라는 국가적인 대역사를 앞에 놓고 한국의 엘리트들이 모인 전문기관에서 낸 예산계획 이란 것이 30~40%가 아닌 400% 가까운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이는 경부고속도건설이라는 대역사에 대하여 우리의 여건과 준비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미흡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일례였다.
▲1969년 12월 10일 경부고속도로의 서울-대전 구간이 완공되어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관련인사들이 테이프를 끊고 있다(위). 1970년 7월 7일 최종 공정을 끝내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경부고속도로(아래)./조선일보DB
이러한 어려움과 극적인 우여 곡절을 거친 경부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의 혼신을 다 바친 열정과 집념, 그리고 처음 해보는 공사지만 사력을 다해 열심히 일한 현장근로자들의 헌신과 희생에 힘입어 정 회장이 제시한 280억 예산에 근접한 비용으로 완성했다. 이것은 세계고속도로 건설역사상 단위 거리 대비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그리고 수없는 난공사 구간에도 불구하고 최단 시일 내 완공이라는 대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경부 고속도로는 그 후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에 역동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국가 대동맥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오일쇼크에 나라 달러 바닥나자 정 회장 "가자, 중동으로!"
빈사 상태의 한국 경제를 구한 기상천외한 발상, 중동 건설 진출(上)
1974년 말 삼일로 빌딩 28층에 있던 전경련 회장실에서 긴급 회장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날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서 에너지 파동에 의해 심각해진 국내경제 상황에 대해 특별 면담을 마치고 나온 당시 김용완 전경련 회장이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소집한 회의였다.
"대통령께서도 현실이 너무 엄청나 정부로서도 당장 어떤 뚜렷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석유가가 5배 이상 뛰고 수출 길도 막혀 공장에 일거리가 없는 형편에서 기업이 수명을 연장하며 기회를 기다리는 길은 당장 공장 문을 닫고 직원들을 출근시키지 않게 하여 비용을 줄이는 것인 줄 알지만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회장단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70 중반을 넘긴 나이에 고혈압으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김 회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일터를 폐쇄하여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되면 경제문제에 더하여 사회가 요동치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될 터이니 큰 기업들이 솔선하여 급여를 일부라도 지급하며 고용을 유지해 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었나를 잘 말해주는 실화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우리의 가용 외환 보유액은 3000만달러 정도로 바닥이 나 있었다. 이는 오늘날 한 중소기업의 일 년 수출액 정도에 지나지 않는 액수다. 그간 아무리 우리 경제 규모가 커졌다 하더라도 요즘 우리의 외환 보유액이 35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거리를 다니는 자동차에 쓸 석유도, 발전소를 돌릴 석탄을 수입할 외화도 대책 없이 바닥이 난 셈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현장을 돌아보는 정주영 회장.
"돈을 벌려면 세계 돈이 몰려 쌓이는 데로 가야돼!"
정주영 회장의 중동진출 발상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몇 차례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참패를 거듭한 중동 산유국들은 세계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OPEC(석유수출국기구)이라는 석유 수출국 카르텔을 결성하여 인정사정없이 석유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고 있었다.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세계의 돈이 어쩔 수 없이 중동 산유국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모든 에너지 시스템이 석유소비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어서 석유가 없으면 순식간에 마비되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정 회장의 출사표는 언듯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러나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발상이었다. 대체적으로 당시 한국 사회는 경제계를 포함하여 중동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중동의 문화, 언어, 사회, 경제에 대하여 지식이나 경험이 일천하였고 이 분야 전문가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중동전이라는 사건으로 겨우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였다.
더구나 한국 기업이나 인력이 사막이라는 기후환경을 체험해본 경험은 전무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중동 건설시장은 과거 식민지 시절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을 통하여 관계를 돈독히 해온 영국을 비롯한 유럽,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세계 세력으로 부상한 미국이 외교적 영향력과 앞선 기술과 자본, 그리고 인맥을 기반으로 탄탄한 기득권을 구축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사실 당시 엄청난 중동 건설 시장은 이들 선진국들의 내로라하는 세계적 토목, 건설, 엔지니어링, 컨설팅회사들이 선점하고 있는 독무대였다.
한편 한국의 건설 회사들의 해외 공사 경험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해외 공사 입찰 자격을 따내는 것도 문제지만 입찰을 딴다 해도 국제 기준에 맞추어 입찰 서류를 제대로 만드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우리는 국제 기준에 맞게 설계에 필요한 자료를 만들거나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설 분야 전문가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죽기 살기로 부딪치고 밤낮 없이 배워가며 해냈지요."
중동 건설 진출 초기에 참여했던 한 건설 기술자의 술회다. 이렇듯 현실적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정 회장의 중동 건설 진출 계획은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반대와 비웃음에 직면하게 된다.
"정회장이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박대통령이 밀어준 데다 운이 좋아 성공하더니 보이는 것이 없나봐, 중동이 어디라고."
"정회장이 뭘 모르기 때문에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현대건설이 망하는 건 둘째 치고 한국이 망신하게 되는 게 문제야." 그런데 이러한 반대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 하편에 계속
4 중동진출 반대하는 동생 축출…
"형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갖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에 우리가 잘 모르고 덤볐다가 큰 손해를 보고 겨우 마무리한 태국 고속도로 공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려운 여건이 너무 많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룹 내 2인자인 큰동생 정인영 부회장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정 회장에게 감히 이런 반대의 말을 하며 맞설 사람은 정인영이 유일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정 회장과는 달리 그는 일본 유학까지 한 학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6·25 전쟁 발발 전 동아일보 공채 1기 기자로 일했다. 전쟁 중 형 정 회장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일거리를 찾던 그는 능통한 영어 실력 덕분에 미군 부대 공병대의 영선반 통역 일자리를 얻게 된다. 역시 일거리를 찾던 정주영 회장은 동생의 주선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물밀듯 부산으로 입항하는 참전 미군병사들의 막사를 짓는 일이었다.
정 회장은 이를 시작으로 전후 복구공사에 참여하며 현대건설의 토대를 만들게 된다. 그 후도 정인영씨는 명실공히 2인자로서 형을 도와 그룹 내의 국제통으로 회사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정 회장의 야심찬 중동 건설 계획을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서니 정 회장으로서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때 현대건설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이 사장, 오늘 오후 회장님이 주재하는 중동진출회의 때 말이지 자네도 반드시 반대해야 돼. 자네도 알다시피 말도 안 되는 일 아냐?"
부탁이 아니라 협박에 가까왔다. 정인영 회장은 이명박 사장뿐 아니라 그룹 내 주요 사장 및 임원급 간부들에게 같은 어조로 중동건설 반대 대열에 동참할 것을 윽박지르며 강요하고 나섰다. 형 정주영 회장의 중동 시장에 대한 야망은 국제 사정과 경제에 밝은 그에게는 그만큼 터무니없는 일로 보였던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회사를 위해서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좀처럼 생각을 바꿀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정 회장은 주위를 놀라게 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룹 내 알짜 기업으로 건설 중장비와 발전 설비 등을 만드는 현대양행(후에 한국중공업을 거쳐 오늘날 두산중공업이 됨)을 떼어 주어 그를 그룹에서 내보냄으로써 그룹 내 중동진출 반대 세력을 제거해버리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아직 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부분은 배우며 하면 되고, 길이 없으면 만들며 해결하면 돼. 사막이 뜨겁다고 하지만 밤에는 서늘하다고 하니 일하는 사람들을 낮에는 에어컨 켜놓은 데서 재우고 밤에 불 켜놓고 일하게 하면 되잖아. 또 물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차로 길어오면 되고, 어차피 건설장비는 임대해서 쓰는 거니까 문제없어. 자금도 현대신용 가지고 빌려서 해결하면 돼."
그의 해답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한편 그가 내심 품고 있던 비장의 승부수는 입찰가격이었다.
"오라 그거였구나. 정 회장이 수주 욕심에서 무리한 최저가로 낙찰은 받았으나 그 가격으로는 턱도 없는 공사야. 보나마나 엄청난 손해로 손을 들고 말거야. 공사이행 보증을 선 한국 은행들도 큰 손해를 볼 걸."
초기 정 회장이 중동 건설 사업 낙찰에 성공한 수주 가격을 보고 그와 입찰을 놓고 겨뤘던 세계의 건설회사 대표들은 혀를 찼다. 그리고 결과를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그의 승부수를 성공으로 실현할 또 하나의 필살기를 가지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장을 돌아보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그것은 공사기간 단축이었다. 건설사업에서 공기(工期)는 바로 돈이다. 공기를 단축하여 완공을 앞당기면 공사대금을 빨리 받게 되고, 장비임대료·인건비·융자금의 금융비용은 절감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돈이다. 정 회장의 이런 자신감은 약 7~8년 전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체험한 한국 건설인력 특유의 근면성과 적응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정 회장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면서 악조건 하에 체득한 장비와 물류 조달, 현장관리 경험을 중동에서 백분 활용하여 엄청난 수익을 내며 공사를 완공함으로써 세계 건설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편으로는 중동 각국의 지도자들이 눈을 부비며 한국 건설사업 능력을 다시 보게 하고 신뢰를 갖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동 건설이라는 황금 기회를 향하여 건너야만 하는 다리, 그러나 수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요소로 아무도 감히 엄두를 못 내던 그 위험천만한 지푸라기 다리. 정 회장은 그 다리를 과감하게 먼저 건너가 지푸라기가 아닌 돌다리임을 확신시켜 줌으로서 한국의 많은 건설업체들이 중동 건설 시장에 뒤따라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이들이 당시 한국 경제가 그토록 갈구했던 외화를 벌어들인 주역들이다.
정 회장의 당시 중동 진출은 여러 면에서 많은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선 당시 에너지파동으로 대책 없이 빈사상태에 놓여 있던 우리 경제가 회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3000만달러도 안 되던 절박한 외환보유액 위기에서 1975년 중동 진출 첫해에 1억 3000만달러를 송금해왔고, 다음해에는 9억 3000만달러라는 실로 꿈같은 규모의 외화를 본국에 송금해왔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총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짚어야 할 의문들이 있다.
첫째, 그 당시 중동 건설 진출이라는 활로가 없었다면 우리 경제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했을까.
둘째, 겨우 가발과 싸구려 섬유제품, 봉제완구 등 저기술 노동집약적 제품을 싼 임금에 의존하여 수출 발돋움을 하고 있던 우리 경제가 그 때 부도가 났더라면 20여년 후 우리가 자동차, 조선, 반도체, 고급가전 제품, 철강, 중화학 제품을 수출하는 능력을 갖춘 상태서 맞았던 1997년 외환 위기와는 그 양태와 후유증이 어떻게 달랐을까.
셋째, "정 회장이 무식하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모두들 매도했던 그 ㄹ.hhrmnf 때의 정황으로 보아 그가 아니었다면 중동 건설 진출이라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할 한국의 다른 건설업체가 과연 있었을까.<계속>
5 정주영 회장, 미국 대사의 "자동차 독자개발 포기하시오" 압박 발언에…
"내 생애에 성공 못해도 디딤돌 놓으면 후회 없어"
“정 회장님, 이미 여러 계제에 말씀드렸지만 오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동차 독자개발을 포기하십시오.”
1977년 5월 어느 날 오후 미국대사관에서 예약해 둔 조선호텔 스위트 룸에서 정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리처드 스나이더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던진 첫 마디였다. 통역을 위해 유일하게 배석했던 나는 순간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당시 언론, 그리고 전경련 중진들과의 회합에서 정 회장이 밝힌 자동차 독자개발에 대한 집념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던 터에 스나이더 대사의 발언이 주는 충격이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스나이더 전 주한 미대사/사진=국가기록원
그는 말을 이었다.
“정 회장님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포니가 토리노 자동차 쇼에서 호평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자동차 사업을 성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의 자동차 회사는 최소 50만대 규모의 생산량이 뒷받침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자동차산업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외국산 자동차의 조립업체 모두를 합해도 채 30만대가 안됩니다. 일인당 국민 소득이 불과 몇 천 달러밖에 안 되는 마당에서 내수 시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수출시장을 생각한다고 하시는데 다른 공산품과 달리 자동차 수출이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 안전 규제 등 얼마나 그 장벽이 높은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또, 자동차를 만들려면 수 만개의 부품들이 필요한데 지금 한국의 공업기술 수준으로는 그 기반이 너무 취약합니다. 거기다 100년 가까이 기술과 명성을 축적한 기라성 같은 선진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정 회장은 별 표정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스나이더 대사는 말을 이었다.
“제가 제안을 하겠습니다. 독자개발을 포기하신다면 제가 모든 힘을 다 해서 정 회장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포드든, 지엠이든, 크라이슬러든 선택하십시오. 현대가 원하는 유리한 조건대로 조립생산을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뒤에서 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차 내수 시장은 물론 일본을 제치고 동남아와 중국시장 진출도 가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중동 건설 시장에서도 현대 건설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제안입니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현대는 미국뿐 아니라 여러 해외사업에서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대사라는 직함이 원래 ‘특명전권대사’를 줄인 말로서 그 나라의 국가 수반을 대신해서 그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다. 스나이더 대사의 이러한 압박은 당시 금융과 무역 등 국제사회에 대한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에 배경을 둔 것이었다. 중동 건설시장에서도 미국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스나이더 대사가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자 당분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정 회장이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우선 내 사업을 염려해 주시는데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나도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사님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순간 스나이더 대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나라를 인체에 비교한다면 그 국토에 퍼져있는 도로는 인체의 혈관과 같은 것이고 자동차는 그 혈관을 돌아다니는 피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로가 발달하고 그 위를 자동차가 원활하게 다니면 피가 몸에서 원활하게 흐를 때 인체가 성장 발달하고 활력을 갖게 되듯이 그 나라의 경제가 생동력을 가지고 발달할 수 있게 됩니다.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 값싸게 공급하는 것은 인체에 좋은 피를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하는 소년기에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자동차 공업의 발전은 그만큼 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조만간 우리나라의 일인당 국민 소득도 5천불 수준이 되어 조금씩 내수도 살아날 것입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열심히 노력하면 수출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또한 자동차 산업은 기계, 전자, 철강, 화학 등 전 산업에 미치는 연관 효과나 기술 발전과 고용창출 효과가 대단히 큰 현대 산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공업은 앞으로 한국이 선진 공업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분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님께서 염려하는 대로 내가 건설사업을 해서 돈을 모두 쏟아붓고 실패한다 해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 후대에 가서라도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성공하는데 필요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그것으로 보람을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담하나 힘이 실린 어조로 정 회장이 말을 맺었다.
통역이 끝났는데도 스나이더 대사는 말문을 열지 못하고 정 회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 회장의 말이 너무 결의에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 회장의 자동차 독자개발을 막고 한국을 미국 자동차산업의 조립기지화 하기 위한 초강대국 미국 정부와 막강한 자동차 업계를 대표하는 스나이더 대사의 압력을 정 회장은 그렇게 받아넘겼다.
▲현대 포니 엑셀 신차 발표회장에서 신차를 살펴보고 있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당시 한국의 공산품 기술과 품질 수준이 단순한 공구류를 수출하는데도 바이어들이 품질이 못 미더워서 선적 전에 반드시 지정하는 대리인이 품질 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 상례인 정도였다. 수출품은 아직도 저가 섬유제품과 경공업 제품이 주를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자동차 독자개발을 고집하는 대신, 막강한 미국 자동차회사와 제휴하여 한국에 대규모 조립공장을 건설하여 부상하는 동남아와 중국시장을 겨냥하여 일본을 제치고 확대해 나가기를 바랐던 미국의 생각이 상식적으로는 타당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즈음 정 회장은 자신의 자동차 독자개발 포부와 관련하여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외국자동차 조립생산은 우리도 해봤지만 속빈 강정이야. 당장은 편하고 안전할지 모르지만 말이야. 차종도 저희들 맘대로 고르고 생산 장비도 저희들 것을 들여와야지, 중요한 부품들은 그들이 정하는 곳에서 그들이 정하는 값에 사와야지, 수출 시장 진출도 맘대로 못하지, 계약 조건에 따라 특허·라이센스비 등 이것저것 다 제하면 겨우 인건비 떨어지는 장사야. 장래성이 없어.”
정 회장이 꿈꾸었던 대로 한국의 자동차 독자개발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전문가들의 예측을 깨고 그후 기적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의 자동차는 자동차 공업 종주국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동남아, 중국, 인도, 러시아, 중남미에 퍼져나가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몇 년 안에 연산 1000만대 시대를 내다보고 있다. 최초 포니 개발 당시 일제 차와 포드 등 미국차 조립생산을 포함하여 한국의 다섯 군데 자동차회사 전체 생산량이 연산 30만대도 못 미쳤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꿈같은 일이다.
“자동차는 말이야 일종의 바퀴달린 국기야.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 팔면 이것들이 굴러다니면서 한국의 기술과 공업수준을 세계에 선전하고 다니는 것이 되거든.”
정 회장이 틈 있을 때마다 자동차공업의 보람을 표현한 말이다. 자동차공업이 한국의 공업 선진화와 경제발전에 미친 공헌, 그리고 전체적으로 한국 공산품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 제고에 미친 영향은 그 가치를 가름하기 힘든 것이다. 되돌아볼 때 그의 무서운 예지력과 집념, 그리고 도전정신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6 정주영 회장, "유조선 건조일정 단축은 불가능한 일"
한국 조선업에 신천지를 개척하다(上)
게딱지 같은 어촌 몇 채가 보이는 조선소 부지 모래사장 사진과 어설픈 설계도면을 보고 정 회장에게 대형 유조선 2척을 주문하여 현대조선의 활로를 열어준 그리스의 세계적 선주 리바노스. 그에 대하여 정 회장은 “그때 나처럼 미쳤던 또 한사람”이라며 후일담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세계 선주들에게 현대조선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만큼 현대조선 초기의 수주 활동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수주 팀은 배 한척을 수주 받기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사력을 다했다.
수주 상담이 성공적으로 계약 단계에 이른 시점에서는 조선소 사장과 현장 임원들은 성취감에 들떠있게 마련이다.
“계약서 최종서명은 인사도 드릴 겸 직접 정 회장님을 뵙고 합시다.”
선주 대표가 제안을 했다. 계약 조건들이 이미 다 합의가 되어있는 상태여서 서명만 하는 단계이고, 또 정 회장 앞에서 그동안의 수고에 대해서 칭찬을 들을 수도 있는 기회이니 사장과 담당 임원들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회장님 그 동안 만족할만한 협상과정을 거쳐 계약을 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선주 대표가 말을 꺼냈다. 조선소 간부들은 득의양양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달을 거쳐 협상내용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한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추가 부탁이라고 해야 별게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조선소 간부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얘기를 듣고 있었다.
“본사에서 오늘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확보해야할 선복량이 앞당겨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합의한 계약서상의 배 인도시기를 3개월 정도만 앞당기는 것으로 수정해서 계약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1975년 현대조선소의 모습/조선일보DB
선주 대표의 말에 일순간 조선소 간부들은 경악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공정관리가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초기인데다 이미 건조가 진행되고 있는 다른 배에 안배해야할 작업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새로 수주한 배의 건조에 필요한 새로운 중장비와 기자재의 확보 일정도 빠듯해서 사실상 기존 계약상의 인도 기일도 이미 벅찬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소 간부들은 입에 침이 마르게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정 회장과 선주대표와의 대화를 자르고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정 회장을 바라보며 절대 수락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눈길만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이런 분위기와 아랑곳 없이 몇 초의 주저함도 없는 정 회장의 즉답이 나왔다. 선주 대표들의 표정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 조선소 간부들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계약서 서명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선주 대표들을 보낸 뒤 정 회장과 조선소 간부들과 후속 회의가 열렸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그 납기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야말로 걱정으로 죽을 상이 된 현장책임 임원이 용기를 내서 읍소를 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정 회장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보통은 이런 경우 날벼락이 떨어질 터인데 사정을 듣고자하는 정 회장의 태도에 그는 용기를 얻었다.
“회장님 원래의 인도 계획도 그들의 요구로 대단히 빠듯하게 잡은 것입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다른 배의 작업량도 있지만 그보다도 큰 문제는 이번 배를 건조하는 공정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용량보다 훨씬 큰 대형 운반 크레인을 수입 발주해야 하는데 크레인 회사 사정으로 볼 때 오늘 발주해도 제때 도착 시키는 것이….”
그 임원이 말을 계속 이으려 할 때였다.
“이봐, 해봤어?”
이윽고 정 회장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질문 아닌 질책의 말을 던졌다. 그 다음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불가능해 보일만큼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아직 모든 방안을 강구하여 가능하도록 해본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정 회장의 의중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보였던 정 회장의 모습은 그가 특히 어려운 일을 놓고 간부들과 회의를 할 때 보고하는 내용이 맘에 안 들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 보이는 특유의 제스처와 표현이다.
먼저 그는 상대에 대한 호칭부터 “김사장” “이전무” “박 상무” 등 성과 직급을 생략하고 “이봐”로 대신한다. 그다음 얼굴 위아래를 훑어보며 질책을 한다. 정 회장의 이런 호칭과 표정이 나오면 먼저 긴장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를 오래 보좌한 현대그룹사의 간부들 사이에는 하나의 요령이 되어 있었다.
/하편에 이어집니다.
7 해외유학파 관료,"(초등학교 졸업한) 정 회장이 조선소 사업을 성공시키면
한국 조선업에 신천지를 개척하다(下)
정회장 "된다고 생각하면 안 보이던 길도 보이고
안 된다고 생각하면 있는 길도 안보이게 된다"
☜ 상편에서 계속
3개월 인도시기를 앞당긴 계약은 정 회장의 “이봐, 해봤어?” 한 마디로 끝났지만 조선소 현장 임원들에게는 앞이 캄캄했다. 조선사업은 건설이나 토목 공사와 마찬가지로 공기의 단축이 채산성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특히 조선사업에서는 계약한 인도 기일이 지연될 경우 지연된 일수에 따라 지연 배상금을 원래의 계약상의 배 값에서 깎아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 통례다. 이러한 조건을 노린 약삭 빠른 선주들은 의도적으로 그들이 실제 필요한 것 보다 인도기일을 빠듯하게 요구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해서 무리하게 앞당긴 인도기일에 배가 인도되면 크게 불리할 것이 없는 반면, 만약 조선소가 인도 기일을 못 맞추면 지연 배상금을 제하고 그만큼 배를 계약가격보다 싸게 인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선소 현장 책임자들에게는 모든 사정으로 보아 3개월이나 인도기한을 단축한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또한 무리한 공기를 맞추기 위한 건조 과정에서 현장 맨 정 회장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 현장에서 소매를 걷어부치고 그들을 무섭게 몰아 부칠 것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른 새벽 아들들과 함께 삼청동 자택에서 계동 사옥으로 도보로 출근하고 있다. 왼쪽에 몽구씨와 오른쪽에 몽헌씨가 호위하고 있다. 1988년 1월 6일/조선일보DB
정 회장은 후일 이런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물론 해 내기가 벅찬 일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힘들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고 그것을 해 내면 그 대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큰 용량의 크레인을 수입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제작회사가 정해놓은 관례대로 발주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제때 조선소에 도착시키기가 어렵다고 하면 안 된다.
어차피 우리가 중요한 고객인데 주문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람을 보내어 특별히 부탁하여 제작해서 가지고 온다든가 그래도 안 되면 웃돈을 줘서라도 앞당겨 선적하게하면 될 것이다. 왜 일상적인 관행이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인원이나 장비가 부족하면 더 늘리면 되고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면 작업시간을 늘리면 된다. 우리가 기술이나 경험이 뒤져있는데 선진국 근로자들이 어떤 일을 일 년 걸려 완성하는 일이라고 우리도 일 년 걸리면 어느 세월에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있겠는가? 열 달, 여덟 달, 아니 할 수 있으면 그 보다도 더 빨리 완성할 수 있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앞당긴 납기를 맞추면 이익도 많이 나고, 그 과정에 우리의 역량도 늘어난다. 또 이런 소문이 세계 선주들 사이에 퍼지면 우리 조선소가 좋은 배를 가장 싸고 빠르게 만드는 회사로 알려져 다음 수주를 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만사는 된다고 생각하면 안 보이던 길도 보이고 안 된다고 생각하면 있는 길도 안보이게 되는 것이다.”
정 회장의 이런 발상력과 도전정신은 앞서 조선소 건설 때 조선소 도크 건설 완공과 동시에 26 만톤급 대형 선박을 최단 시일에 가장 저렴한 가격에 완성·진수시키는 초유의 기록을 달성하게 만들었다.
“정 회장이 조선소 사업을 성공시키면 나는 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하늘로 오르겠소.” 정 회장이 대형 조선소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국내외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국제 감각이 뛰어났던 해외 유학파 경제 전문가 출신인 한국 정부의 한 경제 각료가 한 말이다. 합리적 잣대로 볼 때 당시 열악하기 그지없던 한국의 기술, 경험, 자본, 인력수준 형편과 선진국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제 조선업계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그런 생각에 무리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 바다에 떠다니는 대형 선박 3척 중 한척은 한국에서 건조한 것이라고 한다. 세계 10대 조선소 중에 상위 7위까지가 한국 조선소라고 한다. 근래 일부 저가 대형 조선 일감이 싼 임금 때문에 중국으로 가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도 엔진이나 주요 장비와 부품을 현대 중공업이나 삼성, 대우 등 여타 한국업체 것을 탑재하도록 선주가 지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동안 선박 엔진 등 주요 선박 장비들에 대한 기술 개발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해 놓은 결과다. 특수 기술을 요하는 고부가가치 선박이나 해양 플란트 분야에 우리 조선 업계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한국 조선 공업의 성공은 포철 등 한국 철강 산업발달의 젖줄 역할을 해 주었다. 정 회장의 “이봐, 해봤어?” 정신으로 성취한 한국 조선 공업은 한국 경제가 선진 공업국 대열에 진입하는 데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다.
8 외국 경제사절단이 오면 정주영 회장이 꼭 데려간 곳
1970년대 한국경제의 전시장이었던 현대조선 현장
“박 군 외국에서 경제사절단이 한국에 오면 그들의 관심분야가 조선사업과 관심이 있든 없든 반드시 현대 조선소를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
1970년대 중반 전경련 국제부에서 국제경제협력 위원회와 경제 사절단 업무를 맡고 있던 필자에게 정 회장이 틈 있을 때 마다 당부하는 말이었다. 그 당시 전경련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스칸디나비아 각국을 포함해 약 13개 국가의 전경련과 성격이 같은 주요 민간 경제 단체들과 민간주도 경제협력 위원회를 결성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아직 너무 몰라. 특히 투자든, 무역, 기술 제휴, 자본협력이든 한국이 그들의 경제협력 파트너로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 몰라. 이런 점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 한국 경제계 인사들이 열심히 해외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을 불러들여 한국을 보게 해야 돼. 그러면 사업 협력 분위기는 자연히 생기게 되는 거야.”
정 회장은 전경련의 이러한 민간주도 국제 경제협력 사업에 각별한 열성을 보였다. 전경련 중진회원사 대표들로 구성된 경제 사절단이 수시로 해외로 나가 상대국 경제단체와 경제협력위원회 합동회의를 개최했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갖는 방문국 기업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와 사업기회를 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도 특히 선진국의 경제단체들이 한국에서 합동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답방 형태로 경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현대 울샨 조선소./조선일보DB
전경련은 어떤 때는 한 달에도 몇차례씩 이러한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우리 공업화 수준은 아직도 가발과 저가 섬유제품 등 저임금에 의존한 경공업제품 수출이 주를 이루고 있는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무장관과 무역 관련 정부 기관 책임자들, 그리고 경제계 대표들이 참석하는 정례 수출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적극성을 보이는 시기였다. “수출입국”이라고 쓴 박 대통령의 친필 휘호 영인본 액자는 주요 관련 정부 부처는 물론 경제단체 뿐만 아니라 웬만한 무역업체 사무실에는 반드시 걸려있는 비품이었던 것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국제 수출시장에서 한국 수출품에 대한 기술이나 품질 수준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낮은 수준이었다. 한국은 세계무역기구가 기술수준이 낮은 못사는 나라들의 경공업 제품들에 대하여 선진국 수출이 용이하도록 별도로 수입관세 인하를 해주는 제도인 GSP의 수혜국이었다. 기술도입과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하여 고부가가치 수출산업으로의 구조 개선이 절실한 시기였다. 한편으로 특유의 근면성과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고 적응하는 한국 사람들의 탁월한 자질에 외국투자자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외국 경제 사절단의 한국 방문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그들의 관심업종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업체는 물론 세계시장을 향하여 발돋음 하고 있는 한국 산업계의 전체적인 환경 상황과 잠재력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기 그들에게 보여 줘서 한국 사람의 저력에 대하여 신뢰를 심어주는데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이렇다 할 산업 현장이 별반 없는 형편이었다. 정 회장은 이러한 현실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당시 국내는 물론 해외 매스컴에 연일 크게 화제가 되고 있는 울산 현대 조선소 대형 선박 건조 현장이었다.
거기에는 외국 경제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데 필요한 감동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일단 조선소 현장에 들어서면 대형 빌딩만한 까마득한 높이의 건조 중인 선체와, 거대한 크레인이 그 위를 물 흐르듯 오가며 장비와 선박 조립 부품들을 운반하는 위용은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하늘위로 높이 솟은 선체 외벽 밧줄에 매달린 패널에 몸을 의지하고 여기 저기 점처럼 보이는 작업자의 손에서 작열하는 눈부신 전기 용접 섬광, 주위 지상에서는 선체의 설계도면에 맞추어서 마치 옷감을 재단하듯 두꺼운 철판을 레이저 절단기로 오려내고 있는 작업자의 집중하는 모습, 햇볕에 검게 그을린 진지한 얼굴에 맺힌 땀방울과 걷어 부친 소매 아래로 불거진 근육, 그리고 땀 냄새…. 이러한 것들은 누가 보아도 분명 당시 한국 사람들이 가졌던 성취욕과 열정, 발전하는 장래를 희구하는 결의, 잠재력의 웅변적 상징들이었다.
“아니, 영국이나 북구의 조선 강국보다 더 현대적이고 거대한 규모인 이런 조선소가 한국에 있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현장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로부터 나오는 이구동성의 감탄사였다. 여기에 정 회장 특유의 적극성이 더해졌다.
“손님들이 조선소를 방문할 때 회사 주인이 직접 손님들을 안내 하는 것이 성의를 보이는 것이고 또한 예의야.”
세상에서 제일 바쁜 ‘주인’ 정 회장은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제치고 외국 경제 사절단이 현대 조선소를 방문할 때 마다 현장에 내려가 직접 손님들을 맞이하여 안내하고 조선소 안에 설치된 영빈관에서 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수시로 외국 사절단들을 현지 수행하고 정 회장 통역을 해야 했던 필자는 70년대 현대조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는 가장 많이 현대조선 산업 시찰을 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한국의 잠재력을 세계 경제계 인사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쏟은 정주영 회장의 열정은 자신이 현대 조선소 창업자라는 입장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당시 한국 민간 경제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이라는 사명감도 작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김재익 전 경제기획원 운영국장(왼쪽)과 오원철 전 경제수석./조선일보DB
방한하는 외국 경제 사절단 일정에 반드시 포함하도록 정 회장이 지시한 부분이 또 있었다. 그것은 당시 경제기획원 운영국장을 맡고 있던 고 김재익 박사에게 한국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듣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종로 미 대사관 옆 건물에 있던 경제기획원의 회의실은 수수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차분한 어조에 유창한 영어와 해박하고 논리 정연한 그의 브리핑은 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브리핑은 이들에게 한국의 의욕에 찬 경제개발 계획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심어주는데 빈틈이 없어보였다.
그 다음 기계공업이나 중화학공업 분야 관련 인사들에게는 중화학 공업 담당 청와대 경제수석과 중화학공업 추진기획단장을 겸하고 있는 오원철 씨를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앙청 앞 정부 종합청사 기획단 회의실에서 외국 사절단들을 맞았다. 일본식 영어 발음이지만 열정에 넘치는 그의 브리핑은 외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현대조선, 자동차, 중동건설 성공사례를 앞세워 한국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그의 열정적 활동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민간 경제계를 대표하는 경제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을 순방하며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를 그들에게 심어 주었다. 한국이 수입보다 수출을 훨씬 더 많이 하는 무역 역조로 불만에 차서 한국에게 시장 개방 확대와 무역 보복 압력을 가해 오는 미국과 캐나다 같은 나라에 대하여는 정부가 못하는 부분을 민간 경제계 대표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대응 논리를 표가며 방어노력에 앞장 서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이 시기에 명실 공히 한국의 ‘민간경제외교 수장’으로 눈부신 활동을 하며 한국경제 발전에 또 다른 차원의 일익을 담당했다.
9 88올림픽 유치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은 온 천하에 정주영 회장 뿐이었다
서울 올림픽 유치(1)
88 올림픽 이야기가 나왔던 1981년 초, 이것을 한국이 유치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아니 온 천하에서 정 주영 회장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은 올림픽 유치 얘기가 나오기 10여 년 전 1974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했었다. 아시안 게임은 개최국의 능력, 그리고 참가국 수나 동원되는 자원의 규모면에서 올림픽에 비하면 지역 행사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국이 개최 능력이 안 된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반납한 적이 있다. 이것은 국제 스포츠계에 약속을 부도 낸 일종의 ‘전과’ 기록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또 하나의 복병이 있었다. 그것은 북한이었다. 한국이 올림픽 유치를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지지표라도 많이 나오면 상대적으로 남한에 비하여 북한의 국제적 위상이 떨어질 것이라는데 대하여 그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시기는 북한이 남한의 신군부 권력을 강력히 비난하며 세계 비동맹국들을 중심으로 북한의 위상 강화를 위해 적극적인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던 때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될 경우 대대적인 테러를 감행하겠다는 말을 암암리에 국제 사회에 퍼뜨리고 있었다. 아랍 무장 게릴라 검은 구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하여 집단 사살한 1972년 뮌헨 올림픽의 악몽 때문에 올림픽에서 테러 가능성은 개최국 선정에서 배제해야하는 절대적 금기 사항이었다.
▲1972년 9월 5일 새벽4시, 무장한 '검은 9월단'소속의 테러범들이 뮌헨올림픽 선수촌에 난입, 이스라엘선수중 2명을 살해하고 9명을 인질로 삼았으나 서독경찰과 테러범들간의 총격전으로 인질들은 모두 숨지고 테러범들도 사살 또는 생포되어 세계를 경악케 했다./조선일보DB
서울은 이러한 위협을 가하는 북한과는 불과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남북을 가르는 비무장지대 양측에는 엄청난 살상무기로 중무장한 양진영이 살벌한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올림픽 개최지로는 생각하기 힘든 선택임이 분명했다. 이에 더하여 한국에게는 실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라이벌 일본이 있었다. 나고야를 개최지로 내세우고 나선 일본은 기반시설, 넘치는 자금력, 과거 도쿄 올림픽 개최 경험, 국제스포츠계에 막강한 인맥과 로비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한국은 라이벌이 안 된다고 단정지었다. 일본은 자기들의 88올림픽 유치를 기정사실화하고 대대적인 유치 성공 기념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정적인 시각은 한국 국내에도 팽배해 있었다. 유치에 성공할리도 만무하지만 유치한다 해도 턱없이 부족한 재원과 엄청난 시설건설에 따른 재정 적자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았다. 올림픽 개최 후 막대한 적자 부담을 겪은 이전 개최국들의 낭패 사례들을 예로 들고 나왔다. 정부도 소극적 이었다. 그러나 국가 체면상 개최국을 결정하는 올림픽위원회 참가는 해야 했다. 승산이 없는 결과가 뻔했지만 누군가는 이 달갑지 않은 일에 앞장서야했다.
이 역할을 떠밀려서 맡게된 것이 정주영 회장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성사되게 하기 위하여 없는 길도 찾아 만들었다. 특유의 발상력과 기치를 발휘했다. 산재한 걸림돌들을 디딤돌로 만들며 유치 작전에 앞장섰다. 그는 이런 논리를 폈다.
▲올림픽대회가 열리는 88년의 서울모습. 서울시가 3천5백만원을 들여 제작, 1월23일 시청을 8천분의 1로 축소해 만든 것./조선일보DB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무력 개입에 항의하여 미국과 그를 지지하는 국가들이 불참하여 반쪽 올림픽이 되었다. 그리고 4년 후 개최되는 미국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을 이번에는 소련이 보복 차원에서 그 지지국들과 함께 불참하기로 해서 또 반쪽 올림픽이 되게 됐다. 그런데 올림픽 정신이 뭐냐? 인종, 종교, 정치적 이념을 초월한 세계 평화와 친선, 화합이다. 한반도는 아직도 동서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분단지역이다. 올림픽 정신이 두 번이나 손상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차기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올림픽 정신을 회복하고 실현할 수 있는 큰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북한이 테러 위협을 하고 있지만 막상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온 세계로부터 지탄을 받게될 터인데 그것이 그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손해를 끼칠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은 국제사회와 협조하여 그들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올림픽 개최 후 재정적자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로 외국 선수들의 숙소를 처음부터 일반 시민용 아파트로 지어 사용한 다음 후에 시민을 대상으로 일반분양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88 서울 올림픽이 확정된 직후 한 세계적인 시사 주간지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기사를 실었다.
“5000년 역사를 가졌다는 한국 - ‘고요한 아침의 나라’ 그리고 ‘은자의 왕국’이라는 정체와 퇴영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 지배, 참혹했던 한국 전쟁, 빈곤, 끊임없는 사회 소요로 점철되었던 한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축제로 범세계 사람들의 긍정적 관심의 대상이 되게 되었다.”
맞다. 조금 자존심을 가렵게 하긴 하지만 사실이었다. 세계 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산업고도화의 명성에 한 차원을 더하여 88 서울 올림픽은 한국 사람들의 역량을 세계에 새롭게 부각시킨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의 하나가 되었다.(2편에 계속)
10 정주영 회장, 서울시에 올림픽 프리젠테이션 예산 빌려 주다.
서울 올림픽 유치(2)
☜ 1편에서 계속
다음은 1987년 정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이임하면서 가졌던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직접 밝힌 88 서울 올림픽 유치 일화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내가 전경련 회장을 하며 이렇다 하게 내놓고 얘기할 것을 굳이 찾는다면 경제 외적인 일로 88올림픽을 체육계의 협력을 얻어서 전경련이 주도해서 우리 경제인들이 유치했다고 얘기해도 크게 잘못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88올림픽이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일본에 이겨서 한국에 가져온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 못했을 겁니다. 그런 얘기를 왜 할 수 있느냐 하면 대한체육회가 김집 부회장을 동경에 보내서 일본측에 제의하기를 88올림픽을 우리하고 일본이 경쟁하고 있는데 우리가 취소하고 일본이 하도록 해줄 테니까 86아시안게임을 우리가 하도록 해달라고 얘기했답니다. 체육계 비사지만 일본이 퇴짜를 놨습니다. 88올림픽은 자기네가 된 걸로 다 자축 건배까지 했는데 우리가 왜 구질구질하게 86년 아시안게임 한국 개최 지원이라는 짐을 지느냐면서.
/1984년 10월 13일 정주영 당시 전경련 회장 등 4개 경제단체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조선일보DB
그러니까 그것은 대한체육회가 포기한 거나 같죠. 그때는 문교부에 체육국인가가 하나 있을 때에요 올림픽 개최국이 1981년 9월 30일에 결정되는 일인데 그렇게 생각한 것이 그 해 4월 달이었어요. 물론 내가 전경련 회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문교부 장관이 대통령 결재까지 맡았다고 하며 민간 7인 위원회라는 것을 누런 종이에 시커멓게 프린트한 것을 들고 나한테 왔어요. 국장이 정부의 체면이 서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그런데 거참, 88올림픽을 어떻게 유치하는지, IOC위원이 누구인지 알기나 합니까? 그래서 한번 회의를 갖자고 했지요. 88올림픽은 대한민국 국가가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시가 유치하는 것이므로 서울시장, 그리고 문교부장관, 대한체육회, KOC위원들 다 나오라고 해서 롯데 호텔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서울시장은 안 나오고 국장이 나왔고, 조상호 KOC회장, 최만립 총무가 나왔습니다.
유치하려면 서울시가 올림픽을 유치할만한 여러 가지 환경과 제반 여건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30분짜리 영화를 만들어서 전시장에 가서 선전을 해야 됩니다. 경기장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IOC위원회가 열리는 나라에 가서 활동을 해야 합니다. IOC위원을 모셔다가 다 보여주고 해야 하는데 그때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1억 7천 몇 백만 원 정도가 들고, 그것을 서울시가 줘서 즉각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시가 예산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국회가 예산 주는 것이 아니라 국무총리에게 추가 예산을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 했더니 그렇게는 안 하겠다고 해요. 가봐야 비용만 나고 돈만 없어진다 그런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예산은 언제 세우는 거냐니까 명년에 세운다는 겁니다. 명년에 예산을 세워서 내가 입체(나중에 받기로 하고 돈을 대신 지급함)를 하면 주겠느냐고 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 못하겠다 말을 않드라고요. 그러나 내가 입체해서 만들었고, 그 후에 예산 세워 내돈 돌려줄 줄 알았지만, 기부체납 도장 찍으라고 해서 내돈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거기에 가서 활동을 하는데 민간측인 전경련에는 유럽 각국 경제협력위원장이 있어요. 한영 경제협력위원장은 그때 내가 겸임을 했고, 한불은 조중훈씨 등 각국이 다 있습니다. 그것을 동원하고 그 다음엔 국제적 감각이 있고 안면이 있는 유창순씨께 부탁해서 동원하고 그 다음엔 건설회사들, 가령 동아가 스웨덴에서 무엇을 했다 하면 스웨덴을 책임지고 건설업자를 통해서 그 나라 IOC위원을 만나고, 전부 각 위원들이 자기네가 친한 그 나라 업자를 통해서, 그리고 경제협력위원장을 통해서 그 나라 IOC위원을 만나는 것입니다. 올림픽을 한 나라는 IOC위원이 2명이고, 안 한 나라는 1명입니다. 우리나라는 1명이고 일본은 2명이죠. IOC위원이 82명인데 몰라서 그렇지 얼굴만 알면 82명 쫓아다니고 표만 모으면 또 되는 거죠.
그래서 난 그때 거기 가서 영국, 벨기에 쫓아다녔습니다. 그때 남덕우총리가 스칸디나비아 쪽에 회의가 있어 그 길에 영국으로 왔는데 스칸디나비아국 IOC위원들이 안 만나주더랍니다. 한국은 머리 속에 없다 이거죠. 난 영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몇 나라 돌고, 전상진 대사는 남미쪽, 또 김운용 IOC위원도 몇 나라 돌고 했습니다. 그러나 IOC위원 쫓아다니고 점심 사주고 저녁 사주고 해야 하는데 자동차 없이 걸어 다닐 수는 없죠. 정부에서는 1전도 안 주니까요. 어쨌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열흘동안, 참, 아마 내 생애에 그렇게 계획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뛰어 다녀보긴 처음이었습니다.
▲1988년 6월 29일 올림픽조직위원회는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주한 외교사절 부부를 올림픽 공원으로 초청해 각종 시설물과 공원 내부를 관람시켰다./조선일보DB
거기와 있는 모든 사람들이 특파원들까지 동원하고, 각국 대사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오고 해서 현지에 한 6~70명 왔는데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한 표라도 주워 모으는데 합심해서 노력한 것은 일생에 처음이에요. 분위기가 그렇게 되었어요. 자유진영 표중 한 20표라도 얻으면 나라 체면유지가 된다고 했지요. 새벽부터 밤까지 뛰고 10시에 모여서 표를 점검하는 거에요. 매일 그렇게 했는데 첫번째는 체면유지고 그 다음엔 어떻게 하면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에요. 일본 친구들이 전시장 만들고, 한국도 만들고, 동계올림픽 신청국도 세군데 만들었고, 참 혼신의 정력을 기울이는 거죠.”(3편에 계속)
11 정 회장, 올림픽 유치 방해공작하는 북한 사람들에게…
서울 올림픽 유치(3)
☜ 2편에서 계속
“그런데 일본 사람들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우리를 방해를 하는 거에요. 20명이 나와서 뛰고 있는 거죠. 일본이 어떻게 얘기를 하냐 하면 남북이 대치해있기 때문에 휴전선에서 자동차로 불과 1시간 거리인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는 것은 88올림픽을 취소하는 거나 같다고 선전해요. 그러니 북한은 일본을 위해서 일하는 셈이죠. 소위 중간지역국가들 단체 있죠? 비동맹국가들, 우리는 거기에 못 들고 북한은 들어있잖아요. 북한은 비동맹국가 표를 일본에 모아 주는데 활동하고 동구권 표도 모아주는데 활동하는 거죠. 일본은 IOC위원들에게 세이코 시계를 나눠 준다는 정보를 들었어요. 우리는 그러고 있는데, 내 참, 서울시장이 서울에서 들어오지를 않아요. 일본은 20일부터 일본 선전관 개관이 되었고 일본 IOC위원, 나고야 시장 등이 18일에 다 들어와서 활동을 하는데 우리는 IOC위원도 서울 시장도 안 들어와요.
IOC위원이 안 들어오면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 하면 IOC위원들은 신변보장 때문에 한 호텔에 모아놓아서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요 IOC위원이 만나겠다고 허가한 사람만 들어가서 만나는 거죠. 건물에 들어가야 활동할 텐데 IOC위원이 안 들어와서 호텔을 들어갈 수가 없는 거에요. 장기영씨와 월터정, 그분들이 IOC위원에 면식이 있어서 준 IOC위원 대접으로 그 호텔에 묵게 됐어요. 그 양반들을 면회한다고 들어갔죠. 그분이 들어오라고 해서 활동을 하기는 하는데 부자유스럽죠. 그 후에 김택수씨가 22일 저녁에 왔어요. 그래서 잘 왔다고 우리가 IOC위원들에게 화환을 보내려고 했는데 당신이 안 와서 못했는데 당신 이름으로 보내려고 준비를 해 놓았다고 하니 그분 얘기가 영어로 뭡니까 – 무슨 “콜” (프로토콜-의전)에 위배되어서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같은 IOC위원인데 IOC위원들에게 꽃을 보내느냐” 이거에요. 한국이 올림픽 유치하려고 하니 그런거 떠나서 보내자 했더니 자기 격이 떨어져서 안 된대요. 할 수 없이 내 이름으로 보냈죠.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날 알기나 합니까. 어쨌든 꽃은 꽃가게에서 일일이 정성을 들여서 기가 막히게 해서 보내게 했습니다.
한 이틀 있다가 서울 시장이 왔어요. 앞서 보낸 꽃이 3-4일 지내면 시드니까 과일 상자를 해서 시장이름으로 보내고 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주효했어요. 리셉션 때 만나면 일본 사람으로부터 시계를 받았다고 고맙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아름다운 꽃을 보내서 고맙다고 내놓고 인사하는 거에요. 방안 제일 좋은 곳에 근사한 꽃이 있으니까 잘 만나주고요. 아무것도 아닌데 큰 효과를 봤어요. 미국 IOC위원들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구요. “잘해보라”고 하는 표는 미심쩍지만 일본이 이러저러하니까 한국은 이렇게 하라고 코치하는 표는 우리 표에요. 감을 잡아서 그 표는 우리 표라고 생각하는 거죠. 독일의 아디다스가 올림픽 공식후원업체인데, 그 사람들을 내세워 남미국가들 표를 얻고 남미나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의 IOC위원들에게는 부부를 한국에 초청한다고 조중훈씨가 왕복 비행기표를 보낸다고 해서 그게 주효했어요. 그래서 표를 얻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초청하는 사람이 왕복비행기표를 주는 거니까요. 그 사람들 입이 크게 벌어졌어요. 이렇게 했는데 마지막에는 될 것 같다고 생각이 됐어요.
한편 우리는 방해하고 다니는 이북 사람들에게 참 잘 대해 주었어요. 거기에 온 북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해도 우리는 웃으면서 대응하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같이 싸우면 IOC위원들이 남북한이 긴장 상태라 안되겠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북한 사람들이 목청을 높여도 우리들이 웃으면서 대응하면 외국사람들은 우리가 농을 언성을 높여서 하는 줄 알 거다 하면서요. 좋은 얘기만 하고 이북의 명산대천, 온천, 원산해수욕장 등 좋은 것만 칭찬해주니까 입이 이렇게 커지고 하나도 싸울 일이 없어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2월 19일 나가노 국제21호텔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마란치 위원장으로부터 올림픽훈장을 받았다./조선일보DB
개표 전날 서독신문이 우리를 막 때렸어요. 하계올림픽은 일본에서 하는 걸로 다 끝났는데 한국사람들 울면서 돌아가야 할 것들이 아직도 웃으면서 표 얻으러 다닌다고. 전날 아침에 이북 대표를 만났는데 그들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정선생 그만 수고하고 돌아 가시죠.”
“왜 돌아갑니까? 끝장을 보고 돌아가야죠.”
“엊저녁 서독신문 봤죠?”
“독일 말 몰라서 못 봤습니다.”
“다 끝났다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시죠. 도저히 되지도 않을 것, 몇 표 나오지도 않을 텐데, 왜 애 쓰고 다닙니까?”
“몇 표 나올 것 같습니까?”
“세 표 나올 겁니다.”
“어디어디 표가 나옵니까?”
“한국표 하나하고, 대만표 하나, 미국표입니다.”
“세 표면 됐습니다. 안심입니다.”
다투어도 소용없거든요.
개표 전날 우리나라 어느 특파원이 나를 보고서 “정회장님 자기하고 내기하자”고 해요.
“어디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난 한국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됩니다.”
“그럼 내기 합시다.”
“당신 걸고 싶은 데로 걸으시오.”
마음먹고 20불 걸었어요. 나도 20불 해서 이병규 부장을 주었어요. 우리가 되니까 그 돈 내가 싹 먹었죠. 개표하니까 52표 대 27표 되었어요. 우리 경제인들이 분발해서 각국 별 경제협력위원장들, 회장단 등 모두 갔었습니다. 대한체육회가 포기했던 것을 우리 경제인이 독일 바덴바덴에서 유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전경련 회장을 안 했으면 끌고 갈 힘이 없었고 생각도 해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경련 재임 중에 전경련 바깥 일이긴 하나 국가를 위해서 한 덩어리가 되어서 그렇게 일해 본 것이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보람되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12 소떼 몰고 방북한 정주영,
통일에 대한 갈망과 집념(上)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회장은 83세의 노구를 이끌고 평생 그리던 북쪽의 고향을 향해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온갖 살상과 파괴의 무기로 동족끼리 서로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을 걸어서 넘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는 큰 몸집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비폭력적이고 인내심이 강하다. 그리고 근면과 희생정신의 상징인 가축이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떠난 순수한 한민족 민초의 상징을 소에 부여한 것이다. 여생을 얼마 안 남긴 그가 소떼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은 것은 남북한 동포, 그리고 세계를 향하여 통일의 열망을 알리는 그의 마지막 절규였고 세기적인 시위였다. 특히 말년에 정회장의 통일에 대한 갈망과 집념은 거의 신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음은 그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여러 계재에 측근들에게 피력한 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필자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 어리석은 데가 많아. 거기에는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이데올로긴가 뭔가 하는 것이 도대체 뭐야. 제가끔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내 놓은 것인데 그 결과가 뭐야? 서로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로 생긴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더욱 큰 모순은 이런 비참한 전쟁으로 고통 받고 목숨을 잃는 희생자들은 대부분 ‘이데올로기’의 ‘이’자도 모르는 민초들이고 노인들이고 어린이들이고 부녀자들이란 말이야. 잘 들여다보면 각기 추종자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가 정말 백성을 위하는 건지 저희들 기득권 쟁취를 위한 구실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 이런 모순에서 초래된 비극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어. 북한 사람들이 누구야 ? 다 김씨, 이씨, 박씨, 정씨, 최씨들 아닌가 ? 남한의 우리들하고 말이 다른가 피부색이 다르길 하나. 그런데 비참한 살상의 전쟁을 치른 후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까지 나라 땅 한군데를 떡 갈라놓고 피붙이 부모형제 처자식간에 만나게 하기를 하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마음대로 소식을 전하게 하나. 이것은 외세의 영향이 어쨌건 결국은 우리 민족의 수치야. 인륜에 대한 배반이야. 통일은 가능한 한 가까운 장래에 성사되어야 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8년 10월 27일 오전 통일대교 부근에 마련된 환송행사장에서 소의 고삐를 잠시 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조선일보DB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정치하는 사람이나 지식인들까지 이렇게 절실한 통일문제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고 좁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도리어 통일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 그런 생각의 이유 중 하나가 소위 통일비용에 대한 부담인 것 같은데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해. 왜 엄청난 분단 비용은 생각 못해? 매년 늘려야 하는 국방비 부담과 한창 나이에 학업이나 일 할 나이에 모든 것을 중단하고 군복무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해봐. 그 기회 비용이 얼마야. 북한은 일반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 실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지.
또 하나 아주 중요한 게 있어. 그것은 통일이 가져오는 엄청난 통일 이익이야. 통일이 되어서 우리나라 국력이 한층 강력해지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저희들의 영향력과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우려하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걱정할 일이야. 그러나 우리들이 통일에 대한 부담을 걱정하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야. 통일이 가져다 주는 이익에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것들이 있어. 북한에는 발전이나 제련 등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연탄, 철광석, 동, 희토류 등 중요 광물 자원이 약 7000조 원어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 그런데 이런 자원들은 남한에는 거의 없어서 우리나라에서 지구 정 반대 쪽 브라질에서 까지 막대한 외화를 쓰며 수입해 온단 말이야. 그런데 북한은 돈도 없고 기술도 부족해서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고 있어.
또 한가지 중요한 게 있어 그 것은 북한의 노동력이야. 그 동안 북한 정권이 북한 사람들에게 몰아부친 강도 높은 노동 동원으로 단련되어 있어서 북한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근면하고 생산성이 높은 노동력을 가지고 있어. 남한이 가지고 있는 기술, 자본, 경험, 세계 시장 기반, 경영 능력을 북한의 노동력과 결부시켜 봐. 그 경쟁력이 얼마나 대단하겠나. 일본이나 중국이 두려워할 일이지. 이렇게 되면 북한 사람들이 소득이 올라가고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에 대한 구매력이 크게 늘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지. 남북한을 통 틀어 7000만 인구의 활발한 내수시장이 생기게 되는 거지.
여기엔 중요한 정치적 의미도 있어. 북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 그들이 살고 있는 체제와 정치현실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기게 되어 있어. 민주화에 대한 의식이 자연히 싹 트는 것이지. 배고픈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공산주의가 잉태되지만 정작 배 부른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 공산주의가 자리를 잃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고 경제협력이 원활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한 수준의 통일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돼. 너무 늦으면 안돼. 왜냐하면 북한도 도로도 넓히고, 발전소도 짓고, 항만 건설도 해야 하고 광산 개발도 해야 하는데 돈도 없고 기술도 없어. 당연히 중국이나 러시아에 손을 내밀게 되어있지. 그렇게 되면 나중에 통일이 되어도 이러한 사업은 그들의 기득권으로 그대로 남아있게 되거든.
▲1998년 10월 30일 밤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오른쪽)의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를 받문한 북한의 김정일이 정 명예회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현대그룹 제공
통일이 늦어질수록 남한의 사업기회는 그만큼 그들에게 선점 당하는 결과가 되어버려. 그런데 북한을 접근하는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어. 그것은 정부 차원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어떤 좋은 협력제안을 해도 대개는 속으로야 어떻든 거부를 하거나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게 되어있어. 정치적으로 체면과 위신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그들이 밤 낮으로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국민들이 고생하고 못사는 것으로 귀에 못이 배기도록 선전을 해놨는데 그런 남한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되겠어. 체제유지에 위협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민간이 나서면 북한의 부담이 덜하게 되지. 여러 가지 명분 구실을 붙일 여지가 많이 있거든. 교류도 비정치적인 분야인 스포츠, 문화, 관광 같은 분야를 많이 내세워야 해. 경제 분야는 우선 북한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나, 그들이 추진하는 수출자유지역 사업, 국제관광시설 개발 같은 것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 사회간접자본 건설 사업이나 광산개발 사업 같은 것은 분위기가 성숙되면서 기회를 보면 돼. 중요한 것은 어찌됐던 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해. 관광사업이 단순한 수익사업 차원을 넘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정치적인 부담이 적은 일들부터 시작해 자주 만나면 서로를 알게 될 기회도 많아 지게 되지. 그러면 서서히 경계심도 늦춰지게 되고 신뢰감도 쌓이게 되지. 물론 지금까지 체험한 것 같이 북한의 체제 특성상 중간 중간에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일이 생길 것이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두려워한 나머지 위축되어선 안돼. 역사 흐름의 대세는 통일로 가고 있기 때문이야. 문제는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통일이 되느냐 하는 거야. 그리고 결국 그것은 우리 손에 달려있어.”(하편에 계속)
13 고르바초프 만나 북한 경유하는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유용성을 역설
통일에 대한 갈망과 집념(下)
북한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통천은 그에게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채 뼈가 굳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허리가 휘는 농사일을 했던 만감이 서린 고향이다. 그 곳은 그가 평생토록 그토록 추모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과의 어린 시절의 애절한 추억이 서린 영원한 그의 영혼의 고향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면할 수 없는 배고픔이 싫어서 떠났던 고향이지만 분단되어 맘대로 갈 수 없는 곳이었기에 더욱 안타깝게 그리운 고향이었다.
세계적인 기업인이 되고 억만장자가 된 그는 어린 시절 시골 초가집에서 식량이 떨어졌을 때 찐 감자를 으깨서 고추장을 넣고 썩썩 비벼먹던 일을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하면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 고향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는 굶주리고 헐벗은 가난한 북한 동포의 실상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유난히 가슴 아파했다. 그 분단의 벽을 허무는 일을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헌신할 사명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인다. 정 회장은 남한의 정부나 정치인이 아니고 개인 경제인 자격인 정 회장 자신이 북한의 권력층에게 가장 정치적 부담이 적은 대상일 것이라는 데 착안했다. 또한 그의 고향이 이북이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북한 경제문제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실질적으로 기여를 할 가능성이 높은 인사로 그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데에 정 회장은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중점적으로 몇 가지의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금강산관광 개발사업이었다. 금강산은 그의 잊지 못하는 고향일 뿐 아니라 세계에 드문 명승지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타당성 못지않게 통일분위기 조성을 위해 반드시 개발해야 할 중요한 상징적 가치를 가지는 사업임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산관광사업은 사업의 채산성 측면만 가지고 그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20일 금강산 입구의 목란관 앞에서 친척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 회장이 대북경협에 가졌던 또 다른 비전이 있었다. 그것은 북한을 경유하며 가깝게는 자원의 보고인 시베리아, 그리고 멀리는 소련대륙을 횡단하거나 중국대륙을 횡단하며 옛 실크로드를 거치는 유럽대륙으로의 무역물류 철도 수송로를 여는 것이었다. 시베리아는 우리가 절대로 필요한 원유, 가스, 임업자원과 광물의 보고이다. 북한을 육로로 경유하여 남한으로 이들 자원의 수입로를 확보하는 것은 한국경제에 큰 활력을 가져다 줄 계기가 될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지도자 고르바체프 같은 인사들도 열심히 만나고 다녔다. 현재 바다로는 부산을 출발해서 유럽 중심의 독일이나 프랑스까지, 약 2만km 거리에 27일이나 걸린다. 그러나 철도로 북한을 경유해서 중국이나 소련을 횡단할 경우 그 운송거리가 절반가량 줄어 시간이 약 10일로 단축되며 컨테이너당 수용비용도 해로보다 반 이하로 줄어들어 우리 수출이 그만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실현하는 데 강한 의욕을 가졌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 회장은 정부의 햇볕정책에 힘을 얻어 적극적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하였다. 비료와 곡물 지원, 우호적 관계 개선을 위한 일부 현금 지원, 개성공단, 경수로 프로젝트, 남북 연결 경의선 철도 복원, 금강산관광 등이 햇볕정책 안에 포함되었던 정부의 경제 지원 정책이었다. 이러한 대북 경제 지원은 특히 국내 보수 진영으로부터 ‘퍼주기 식’ 지원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요즈음 들어서도 북핵 문제가 더욱 심화됨에 따라 대북 경제지원에 대한 타당성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남북한 관계의 현실에서 남북문제에 대한 정 회장 평생의 집념과 노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동안 남북문제에 대한 각계의 견해가 대단히 혼란스런 양상을 보여왔다. 진보와 보수, 그리고 여러 계층이 받아들일 수 있는 평가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통일이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분명히 느끼게 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에 대한 독일 드레스덴 연설은 이런 흐름에 중요한 비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 혼신의 열정을 남북간 경제협력 사업들을 내세워 통일사업에 쏟아 부었던 정회장도 유한한 생명의 천리를 거스르지 못하고 많은 미완의 과제를 남긴 채 2001년 타계했다. 그리고 남북한 문제에 있어서 북한을 포용하는 햇볕정책으로 정 회장과 호흡을 같이 했던 김대중 대통령도, 이러한 남북관계 기조를 이어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도 이제는 다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앞서 과거 김대중 정부와 합세하여 민간 경제계의 대북 사업을 주도하였던 현대그룹은 그 후 새로 들어선 정부로부터 화를 모면할 수 없었다. 특히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전달되었다는 지원금의 적법성 문제가 온통 나라를 뒤흔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대그룹을 이어 받았던 정몽헌 현대건설 회장이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 사옥에서 투신자살 하는 비극이 발생하여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정몽헌 회장의 극단의 선택에 대한 시비를 떠나 정회장은 그의 아들마저도 그가 말년 열정을 불태웠던 남북 통일사업이라는 제단에 바치게 된 셈이 되었다.
▲북한에서 김정일을 면담하고 돌아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11월 2일 청와대를 방문,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조선일보DB
그러면 이토록 ‘무리’에 가까운 열정을 바치고 뼈아픈 상처를 감내하면서까지 남북경협사업에 몰두한 정 회장의 심중에는 어떤 의지와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정 회장은 나라의 법은 원칙적으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민족적 숙원인 남북통일이라는 진로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뛰어 넘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측근에 비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데올로기던 실정법이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시대의 사상가나 정치 세력이 만들어낸 것이고 이해 집단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시대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서 변화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족 통일이라는 대 역사는 이러한 것들에 의해 장애를 받기에는 너무나 절실하고 지고하며 영속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시비에 대한 평가를 최종적으로 후대와 역사에 맡기고 그의 신념을 그 특유의 행동력으로 실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을 위한 길은 앞으로도 험난할 것이다. 그간 우리 민간 경제계에서는 다른 누구도 엄청난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는 북한 과의 경제협력 사업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정 회장은 과감하게 앞장서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 많은 시련과 영욕을 겪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지고한 과제인 통일로 가는 길에 그가 생전에 깔아놓은 유형 무형의 발자취는 앞으로 통일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14 정주영, 대선 경쟁자했던 YS가 외환위기를 맞자...
대선 출마(上)
정 회장은 타계하기 몇 해 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자신이 대통령에 출마했던 일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심경을 밝혔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대통령에 출마했다 낙선한 것을 내 인생의 결정적 실패라고 말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쓴 고배를 들었고 보복 차원의 시련과 수모도 받았지만 나는 실패한 것이 없다. 실패자는 우선 그를 선택해서 국가 부도를 맞아 고통을 받은 국민이고, 그 다음은 국가를 부도 낸 대통령으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사람이 가장 큰 실패자다. 나는 단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
그는 말미에 “나는 내 평생 늘 그랬듯이 내가 확신을 가졌던 바를 위해 세평에 연연하지 않고 해봤다”라고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통해 일관되었던 도전과 행동원칙, 그리고 정신이 그대로 나타난 말이다. 국민이 정 회장 대신 선택한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세계 경제환경과 한국의 주요 수출 시장의 호황, 무역환경, 환율, 원유와 주요 원자재값 안정 등에 힘입어 당시 한국 경제의 선진국 진입 기반을 확실히 다질 수 있는 호기를 무산시키고 국가를 부도 내어 국민을 혹독한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지속된 박정희 정권에서는 강력하고 일관된 정부정책 주도하에 재벌 기업들을 독려하여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공업기반을 구축하고 수출을 증대시킴으로써 백 달러에도 못 미쳤던1인당 국민소득을 1만 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수출주도 성장 정책,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개발 독재’의 개가라고 평가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정부 주도 경제정책은 부분적인 왜곡은 있었다 치더라도 경제성장 목표에 맞추어 제한된 투자 재원을 일관되게 효율적으로 배분, 투입하는 등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부분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것을 계기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 1987년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약 12년간의 신 군부 정권 통치 시기는 한국경제에 있어서 국민경제적 당위성이나 자유시장경제의 원칙보다는 집권 세력이 그들의 정치적 입지와 권익을 위해 민간 경제계 위에 군림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경제력 집중, 부정 축재 제재, 기업 통폐합, 인허가, 세금, 금융 제재 등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명분과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민간 경제계 위에 군림하는 집권 세력의 이러한 막강한 영향력은 필연적으로 불법 정치자금과 정경 유착을 유발시켰고 경제정책이나 경제의 시장기능에 모순과 왜곡을 가져 왔다.
이러한 와중에서 특히 이들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았던 일부 한국의 대기업들은 엄청난 고충을 겪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정 회장이 거느린 현대그룹의 기업군이 한국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리고 마침 이 시기 10여 년에 걸쳐 한국 민간 경제계의 중심인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어 명실상부 한국 민간 경제계의 대표라 할 수 있었던 정주영 회장은 매번 그 격랑의 중심에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부조리와의 타협을 싫어하는 정 회장의 강한 성격은 집권 세력의 핵심 인물들과의 갈등과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전두환 신 군부 정권이 들어선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전경련 회장 사퇴압력, 기업 강제 통폐합 등 그들의 압력에 정 회장이 다른 재벌 총수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히 응하지 않고 반발하자 신 군부 실세 일부가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현대그룹을 싹 쓸어 버리겠다”라며 위협을 했던 일화는 당시 그들이 민간 경제계를 보는 의식구조와 함께 정 회장과의 갈등의 정도를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권에서 비롯되는 격동과 부조리를 항상 그 중심에서 절실하게 체험한 정 회장은 그것을 헤쳐나오며 단지 비분강개하는 아픈 경험으로만 간직하지 않았다. 그의 심중 한편에는 이러한 체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정치 풍토의 개선, 보다 잘 할 수 있는 국가 경영과 경제정책 아이디어가 차근차근 쌓여가고 있었다. 그는 평생 그가 처한 위치와 틀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지 않고 닥쳐오는 시련과 도전에 분명히 대응하며 언제나 획기적인 발상과 아이디어, 그리고 무서운 행동력으로 세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수한 업적들을 남긴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극적인 삶의 궤적으로 볼 때 그가 정치에 직접 나서서 그의 경륜을 펼쳐 볼 꿈이 싹트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정치꾼이나 군인에게 나라를 맡겨 피해자나 방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치에 나서보는 것이었다. 그는 점차 그것이 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해야 할 일생 일대의 사명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성 정치인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대통령 출마 결심을 술회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책임제에서 나라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은 나라의 선장인 대통령에 달려 있다. 크게 비약해야 할 21세기의 문턱에서 경제는 중병에 걸려 있고 잘못된 정치는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그들은 권력을 막강한 힘으로만 알고 막중한 책임에 대한 인식은 없다. 한 나라의 국력은 그 나라의 경제력인데 정치는 잘못되고 있는데 경제만 잘 나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나라가 이 모양인데 그냥 앉아서 정치하는 사람들 욕이나 하며 내 자신과 내 기업의 안전만 도모하는 것이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근로자의 의욕과 기업인의 열의, 국민의 힘을 한데 모아 정치를 개혁하고 선진 한국, 통일 한국을 완성해 보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자 목표다. 그리고 나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고 성공할 자신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엄청난 시련 가운데 기업을 성공시켰듯이 나는 새롭게 도전할 일감으로 5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위한 정치 참여를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존경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며 그 인품을 부러워한 일은 있지만 대단한 권력에 존경심을 품거나 그것을 부러워해 본 일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하편에 계속)
15 정주영 회장이 대선때 내건 획기적 주택문제 해결 공약
대선 출마(下)
☜상편에서 계속
정주영 회장이 1992년 국민당을 새로 창당하고 대통령 출마를 공표하자 예상대로 한국사회는 들끓었다. 그의 나이 78세의 일이었다. 그가 그의 일생에서 추진했던 획기적인 사업을 발상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가족과 형제들을 포함해서 그의 주위 모두가 반대하고 나섰다. 대부분의 언론과 정치권은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부와 권력을 모두 탐하는 노욕이다”, “노망의 발로다”, “기업 성공 경험만 믿고 오만해서 비롯된 돌출 행동이다.”
▲1992년 3월 28일, 당시 정주영 대표 등 국민당의 14대 총선 당선자들이 당선자대회에 앞서 당사 현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를 아끼는 지인들의 만류도 대단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그만큼 성공했는데 왜 그 나이에 편한 여생을 보내야지 그 고생의 길을 택하느냐?” “만약 실패하면 현대그룹이 당할 보복을 어떻게 견뎌내려 하느냐?” “아무리 정 회장이 건강해도 건강이 걱정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가야 할 길을 간다는 결심을 했을 때 언제나 그랬듯이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반대 설득 논리다. 그는 개의치 않고 그의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
그의 신생 국민당은 창당 45일만에 치른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득표율 16.3%인 400만 표를 얻어 31명의 의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뿌리가 깊이 내린 기존 정치권의 이해관계, 지연, 동서 지역감정이 함께 얽혀있는 두터운 벽을 극복하는 데는 국가 장래를 위한 타당한 명분만으로는 정치 아마추어인 그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기성 정치권은 “장사해서 부자가 된 그에게 정치권력까지 주어서는 위험하다”라는 주장과 반 기업정서를 조화시켜 유권자들을 이간시켰다. 그리고 그의 실제 건강과는 무관하게 그의 고령을 들어 노망든 노인으로 매도하는 흑색선전이 불행하게도 많은 유권자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결국 그가 품었던 국가의 장래를 위한 이상과 포부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한 그 특유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이 국민들에게 이해되고 채택되기에는 너무 앞서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80년대에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도 그들을 직접 겨냥하여 늘 규제와 관피아의 적폐를 질타했었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집단이 능력과 전문성을 떠나 논공행상 형태의 나눠먹기식 요직 배분에서 오는 부조리를 기회 있을 때 마다 질타하며 이를 위해 정치를 ‘정치꾼’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정부의 규제와 간섭도 경제 발전과 운용효율을 위한 당위성보다는 민간 경제계에 대한 관이나 정치권력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를 유지하기 위한 요소가 많다고 볼 수 있다.
▲1992년 6월 25일 오후, 당시 김대중 민주당 대표, 정주영 국민당 대표가 국회 귀빈실에서 열린 양당 첫 대표회담을 가졌다./조선일보DB
엄청난 파워와 기득권의 연대화로 반세기 이상 동안 뭉쳐진 관피아의 적폐는 이러한 토양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 이의 혁파는 그야말로 혁명에 준하는 거국적 결의가 없이는 음양으로 막강한 저항에 부딪쳐 유야무야 되기가 십상이다. 이러한 규제의 폐해를 사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체험한 그에게 이의 타파는 가장 우선 순위가 높은 목표 중의 하나였을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 선거 유세 중 이러한 규제와 적폐에서 비롯되는 간접비용 제거와 토지 공급제도를 혁신하여 서민아파트 반값 공급 계획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하기도 했었다.
결국 정회장이 그의 치열한 도전정신으로 점철된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 선택한 대통령 출마라는 대 모험은 그가 외면할 수 없었던 운명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옳다고 생각하고 그가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섰을 때 상식이나 세인의 평가가 두려워 행동에 옮기는 것을 외면해 본 일이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일관되었던 행동 선택의 기준은 그것이 쉬운 길이냐 어려운 길이냐가 아니라 그 것이 해야 할 일이냐 아니냐 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고 상황을 직접 주도하는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는 그가 가졌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 ‘해봤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끝까지 정 주영이었던 것이다.
16 정주영, 현대중공업 시위대에 4시간 동안 갇혔을 때 하고 싶었던 일
"나는 노동자"(上)
“나는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노동자일 뿐 재벌이 아니다.”
그가 자주 했던 이 말은 언뜻 말장난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평생 그의 심중 깊이 자리 잡았던 노동이라는 가치에 대한 숭상,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애정과 동류의식이 배어있는 말이다. 실제 그가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것이 인쇄물이든, 구두 보고든 ‘재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면 역정을 내곤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굶주리는 것이고, 그 다음은 병들어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것이고, 그 다음이 똑똑한 자식을 돈이 없어 못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이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죄다. 이것이 방치되면 그런 사회에서는 결국 돈 있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온전할 수 없다. 이를 해결하려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 해 주어야한다. 이것은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책무다.”
그가 틈 있을 때마다 한 말이다. 어린 시절 누구보다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해 봤고, 다니던 보통학교에서 음악을 빼 놓고 일등을 했지만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어 뼈가 채 여물기도 전에 아버지를 따라 허리가 휘는 농사일을 해 본 그의 말이라 각별한 울림이 느껴진다.
식구들이 비를 가리고 살 수 있는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자식들 세 끼니를 굶기지 않을 수 있고, 학교에 갔던 애들이 월사금을 못내 집으로 쫓겨 오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해뜨기 전에 일터로 나가 달 보며 집에 오는 일자리라도 감지덕지하던 현실이 우리의 60~70년대 형편이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 형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박봉을 받으며 수출 공장에서, 봉제공장에서,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해외 공사장에서 땀 흘려 일하며 한국 경제성장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경제도 성장했고 세상도 바뀌었고, 자신의 권리와 몫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식도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수출 주도 성장정책 아래 국제 경쟁력에 턱없이 못 미치는 기술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임금과 처우 면에서 계속적으로 그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노사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욕구 표출은 억압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0년 평화시장 봉제공이었던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이 터졌고, 1974 년엔 밀린 임금을 떼어먹고 외국으로 달아난 악덕 사업주로부터 임금을 받아 달라고 야당 당사를 점거하고 농성하던 어린 여공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한명이 추락사한 소위 YH사건이 발단이 된 김영삼 제명 파동, 그리고 이것이 도화선이 된 부마 민중항쟁 확산은 끝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 사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사회안정 유지라는 명분으로 정치 탄압과 함께 노동계의 목소리도 억압하는 정책을 견지했다.
▲1979년 8월 YH무역이 문을 닫자 200여 여공들이 실직에 항의 신민당사에 몰려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것을 달라"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농성하고 있다./조선일보DB
1987년 전두환 정권이 끝나가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같은 군부를 기반으로 재집권을 노리는 노태우 세력은 6·29 민주화 선언으로 국민에게 어필했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신군부 강압 통치하에서 억압되었던 각계의 욕구는 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과격한 노동자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거의 모든 사업 현장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오랫동안 억압, 밀봉 되었던 욕구와 의사 표출은 그만큼 그 반동의 강도가 컸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사태로 번졌다.
여러 산업 현장이 불타고 있었다.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쟁의 형태는 많은 경우 노동 쟁의의 본질과 목적을 벗어나고 있었다. 경인 고속도로 가도의 공장 벽에는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 xxx 사장아 너 죽고 나 죽자!”라는 표어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6.29 민주화 선언을 내걸고 집권한 세력은 그 정신을 견지 한다며 국가적인 경제 붕괴 위기 상황에서도 “노사문제는 노사 스스로가”를 되뇌며 뒷짐 진 채 방관하고 있었다.
중소기업 사주들의 절망감은 말할 것도 없고, 대규모 사업장의 생산 시설의 파괴는 물론 당장 수출 납기를 지키지 못하게 된 대기업 총수들로 구성된 전경련 회장단의 위기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거의 매일 회장단이 모여 비상 대책회의를 열었으나 상황을 종합해보는 일 외엔 정부의 공권력 개입이 배제되는 상황에서 아무리 힘 있는 대기업 집단을 가지고 있는 이들일지라도 쟁의 현장의 폭력적 상황은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선 상태였다.
“정부가 뒷짐 지고 있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산업현장이 파괴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는 것보다 우리 스스로 어떤 대책을 강구해 봅시다. 과거 일본이 쟁의현장 불법폭력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대기업들이 일종의 자경단 같은 것을 만들었던 일이 있는데 우리도 그런 방안을 모색해봅시다.”
자기 사업장의 심각한 사태를 울먹이며 설명하던 한 재벌 총수가 격정 끝에 낸 제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노사관계 역사와 경제사에 큰 오점을 남길 수 있었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다. “김 회장, 아무리 지금 상황이 급박해도 그건 위험한 생각이오. 지금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더 인내하며 멀리 봅시다.” 원로급 총수들의 신중론으로 그 안은 더 이상 논의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국 최대 규모 노동현장인 현대 중공업 울산 조선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현대 조선소의 격렬해지는 노동자들의 시위현장은 전국적인 사태의 가늠자 격으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조선소 임원들과 사장이 앞서서 수습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울산 현대중공업 노사분규./조선일보DB
정회장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군중 심리에 휩싸여 이성적인 대화와 통제가 어려운 시위 현장의 위험성을 들어 모두 만류했으나 철저한 현장주의자인 정회장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수 천 명의 시위노동자들과의 직접 대화가 어려운 상황이라 강당같이 생긴 대형 작업장 건물 내에서 일정 기준을 정하여 대표들을 들어오게 한 다음 얘기를 시작하려했다. 그러나 건물 밖의 수천 명 시위자들은 “밀실 야합 반대”를 외치며 정회장이 밖으로 나와서 전체를 상대로 얘기할 것을 외쳐대었다. 정회장이 밖으로 나와 급조된 연단에 섰다. 황급히 마련한 마이크와 스피커 성능도 문제였지만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여기저기서 제가끔 구호와 함성, 야유를 외쳐대는 수 천 명 시위 노동자들과의 대화는 불가능해 졌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정회장은 대책 없이 수 천 명의 시위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위기감에 겁에 질려 정회장을 보호하려는 몇 명의 조선소 간부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큰 파도 앞의 갈대와 같이 역부족이었다. 이제는 현대 조선소의 노사 대화보다, 당시 이미 70대 중반에 들어선 노구라 할 수 있는 정회장 신변의 안전이 전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중요 TV와 라디오가 상황을 생중계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사태가 거의 4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다행히 시위 노동자들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틈을 타서 정회장은 현장을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정회장이 아무리 건강해도 그 연세에 4시간 동안이나 선채로 흥분한 시위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아수라장의 분위기 속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갇혀 있었으니 심신이 탈진 상태일거다. 아마 어디 병원에라도 가서 몇 일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할 거야.”
뉴스를 지켜 본 많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특히 전경련 임원들은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을 빗나가는 완전한 기우였다. 상경한 정회장은 그날 저녁 전경련 명예회장 자격으로 당시 현직 회장이었던 구자경 회장을 비롯하여 전경련 사무국 임원회를 소집하여 대책논의에 들어갔다. 그의 심신의 상태와 표정은 바로 몇 시간 전 그런 일을 겪었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현장에 진압작전을 펴 진입한 경찰./조선일보DB
“그런데 말이야, 그 친구들한테 둘러싸여 한참 구호와 함성을 듣고 있자니까 한 순간 나도 머리띠 두르고 그 친구들 사이로 내려가 함께 하늘로 주먹을 뻗으며 구호와 함성을 지르고 싶어지더라고. 원래 내가 노동자라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봐. 그런데 나는 누구를 향해서 구호를 외쳐대야 하나 생각하니 안 되겠어. 그래서 그만 두었어, 하하하!”
회의 중간에 느닷없이 던진 그의 말에 우리는 너무 어이가 없어 태연히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할 말을 잃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언뜻 수긍이 안가는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노동에 대한 경외심과 노동자들에 대한 속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부두 노동자로, 건설 현장 노동자로 무거운 돌짐을 지고 가파른 비계를 오르며 허리가 휘는 노동을 해봤던 경험을, 고난의 시기로 기억하기보다 노동과 땀의 참된 가치와 보람을 느끼게 했던 값진 수양의 기회로 회고하며 흡족해 하였다. 따라서 의외로 들리는 그의 말에는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햇볕에 그을고 땀 맺힌 모습의 현장 노동자에 대한 그의 지극한 애정과 동료 의식이 깊게 배어있는 것이다.(하편에 계속)
17 정주영, 현대건설 상장 후 큰 돈이 생기자...
"나는 노동자"(下)
“어떤 일이건 각기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그들이 하는 일들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면 좋은 세상이 되는 거야.”
이런 생각을 가졌던 정회장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를 소개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80년대까지 광화문 교보빌딩 뒷 쯤에 장원이라는 고급 한정식 집이 있었다. 나이 든 재계 원로들 모임이나 한식을 좋아하는 외국 경제계 인사들을 대접할 때 정회장이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다. 여기에 고등학교 1~2학년 쯤 되었을까 자그마한 키에 볼이 항상 사과 같이 빨개가지고 수줍음을 많이 타고 눈빛이 유난히 맑았던 명옥이라고 하는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있었다. 그의 하는 일은 조리실에서 준비된 음식 접시들을 연회장 식탁에다 격식을 맞추어 날라다 놓는 일이었다. 항상 뛰다시피 하는 종종 걸음으로 음식을 나르며 잰 손놀림으로 정성스럽게, 그러면서도 그릇 놓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극진한 정성으로 상을 놓는 그의 모습을 정회장은 놓치지 않았다. “나는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제일 예쁘더라.”
연회가 끝나고 나올 무렵 그 소녀가 안 보이면 조리실 입구까지 가서 그를 찾아서라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하곤 했다. 한국 재벌 총수 정주영 회장 ‘할아버지’의 이런 칭찬을 받는 그 소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가지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쯤 50 줄에 들어섰을 그 소녀도 어디선가 이따금씩 옛날 정회장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 장발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정회장이 장발을 대단히 싫어해서 현대 그룹 내에 젊은 직원들은 장발은 엄두도 못내었던 것으로 알려 졌다.
“나도 젊은이가 어울리게 장발을 하고 있는 모양이 싫치는 않아. 그러나 머리가 길면 감을 때 물 많이 쓰지, 비누 많이 들지, 말리고 빗질하는데 시간 많이 걸리지.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한창 때 그런데 시간과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짧은 머리를 하면 간단히 목욕을 하고 머리도 수건으로 몇 번 툭툭 털면 바로 일하러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학생들과의 대담에서 장발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그에게 노동은 항상 그 자체가 삶에 절대 가치와 보람을 주는 숭앙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아직 내가 현대 건설을 기업 공개하여 주식을 시장에 내 놓지 않는 것을 가지고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다. 주식을 공개하면 주식을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 그것은 돈있는 사람들과 기관들이다. 그런데 현대 건설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키운 사람들이 누군가? 국내에서, 이역만리 뜨거운 열사의 중동 공사 현장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식을 살 형편이 못된다. 엉뚱한 사람들한테 혜택이 돌아가서는 안 된다. 나도 따로 생각이 있어 준비를 하고 있다.”
당시 전성기에 있던 현대 건설의 기업공개는 그 엄청난 가치와 주식 시장에 미칠 파급 때문에 경제계뿐만 아니라 온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때였다. 80년대 초 기업 공개가 늦어지는데 대한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돌고 있는데 대하여 사석에서 밝혔던 그의 입장이었다.
/서울시 풍납동에 위치한 서울아산병원.
그 후 정회장은 현대 건설 기업공개를 했다. 그리고 지분의 반 정도를 이미 77년에 설립되어 있던 아산 재단에 할당했다. 그리고 그 재단의 재원을 가지고 여러 개의 사회 복지, 교육 사업에 투입했다. 병원도 첨단 장비를 갖추었다. 지방의료 시설로 치료가 안 되는 환자의 진료를 위해 서울아산 병원 외에 강릉, 보성, 정읍, 영덕, 울산과 같은 소위 돈이 안 되는 지방도시에 여러 개의 병원을 설립하는데 기업공개 후 생긴 재원을 썼다. 그렇게 그는 평생 그의 도전과 성취에 동참해준 노동자들에게 대한 존경과 의리를 실천했다.
한편 이러한 정회장이 창업한 현대 자동차는 오늘날 유사한 기능의 다른 일터와 비교하여 단연 월등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경영권 참여와 더 많은 회사 이익 배분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삼는 강성 노동조합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앞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 기술 개발과 시장 경쟁의 세계 자동차 공업계에서 연산 1000만대 생산과 세계 4대 메이커로 발돋움 하려는 현대 자동차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상이다. 이것은 생전의 정회장이 생각했던 노사 협력의 모양은 아닐 것이다. 그는 지금 저승에서 우리가 더 성숙한 산업 국가로 발전을 하기 위하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노사관계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18 정주영, "개방화 부작용으로 중국이 좌초할 수 있다"는 키신저 말에...
1975년 미국은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가 주도한 소위 핑퐁외교로 세계에 대하여 폐쇄되어있던 중국의 ‘죽의 장막’을 걷어내게 하여 개방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미국은 여러 면에서 일종의 ‘자기 성공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도전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아시아에서의 그들의 입지가 그러하였다. 13억 인구와 아시아 전역에 걸친 광대한 국토 면적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도대체 향후 세계무대에서 미국에 어떤 상대로 부상할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이중에서도 지정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와 문화적으로 중국과 가장 인접해있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것은 미국에게 하나의 속앓이에 가까운 고민거리였다. 왜냐하면 한국은 미국에게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혈맹’이고 그들이 이 지역에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가 한창이던 1985년 7월, 전경련의 초청 형식으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여기서 ‘초청 형식으로’라는 표현에는 이유가 있다. 키신저와 같은 비중의 인사가 방한할 때는 실제 방한 동기가 정부 또는 정치권 초청인 경우에도 형식상의 초청기관은 전경련 같은 민간 기구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함으로서 특히 한·미 간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안 사항이 있을 경우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희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국제 무대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비중이 원래 크기 때문에 그가 왜 어디서 누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는가에 대해선 항상 국내외 언론기관과 각국의 정보 수집 채널이 암암리에 촉각을 세우고 있기 마련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그는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라는 컨설팅 회사 명함을 가지고 다녔다. 몇 명의 보좌진과 비서가 있을 뿐 모든 컨설팅 자원은 그의 머리, 경륜, 인맥에 있었고 그 수준과 가치는 방대한 전문가 연구 조직을 가지고 있는 컨설팅 회사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계 거물들은 그와 만나는 기회를 가지려 했고 몇 십 분의 대담을 한 대가로 거금의 자문료를 건네는 일이 많았다. 키신저의 한국 방문은 이전에도 이미 수차례 있었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시 진행되고 있는 남북관계상황을 파악하고, 한국 측에서는 그의 조언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또 당시 시장개방에 가속도를 내고 있는 중국의 변화와 이를 둘러싼 한반도의 정세는 미국 정부와 키신저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아직 한국이 정식으로 중국과 수교를 하지 않은 상태지만 모든 정황으로 보아 한·중 관계의 급속한 발전은 시간 문제이고 우선 경제 교류로 시작될 한·중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이러한 발전이 미국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하여 전전긍긍하고 있을 시기였다.
키신저의 방한은 정주영 회장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중국 시장의 개방은 한국에 있어서도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막상 변화의 실상과 전망이라든가, 미국 등 강대국의 입장, 한국 경제계의 바람직한 대응책이 무엇이고 어떤 위험 요소가 있는가 등의 문제들을 가지고 고심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중국의 최고위층들과의 넓은 지면, 그리고 중국과 관련한 그의 경륜을 기반으로 중국에 대한 특급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 방문이 중국으로 등소평을 만나러 가는 길임을 밝혔다. 따라서 정 회장과 전경련 중진 인사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의중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 회장을 비롯한 전경련 회장단 인사들과 롯데 호텔 별실에서 간담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참석인원을 10명 내외로 한정할 것과 내용을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 통역은 필자가 맡았다. 키신저는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한국 경제에 대한 관심부터 표명했다. 외교적 수사를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선 정회장께서 한국 경제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름대로 한국에 관심을 쭉 가져왔지만 아무래도 경제에 대해서는 정 회장께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한국 경제는 발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키신저 박사께서도 알고 계시는 바대로 여러 분야에서 어려운 점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나가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선진국들의 보호무역 정책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 구미 각국이 자국의 실업자 문제, 국제수지 적자 등을 이유로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기 때문에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가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추세로 간다면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낮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장률을 낮춘다면 어느 정도까지…?”
“한 6∼7% 사이가 될 것 같습니다.”
“6∼7%라구요? 놀랍군요. 미국이라면 6% 성장은 대단한 것인데 말입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은 분명히 다르지 않습니까. 미국 경제는 이미 다 큰 어른이나 마찬가집니다. 반면에 한국 경제는 이제 어린애나 마찬가집니다. 미국이 한 걸음 내디딜 때 우리는 열 걸음 이상을 쫓아 가야 겨우 뒤따라갈까 말까 할 정도입니다. 한국의 1%와 미국의 1%는 분명히 다르죠.”
그러나 여기까지는 일종의 전주와 같은 대화었다. 키신저나 정 회장을 비롯한 한국 측 참석자의 진짜 관심은 중국에 관한 것이었다. 키신저는 한국의 경제계 지도자들이 중국과의 경제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 했고 한국 경제계 중진들은 앞으로 본격화 될 한국과 중국과의 경제관계에 대해서 미국의 입장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했다. 또 흑묘백묘론을 내세워 실사구시의 기치를 내 걸고 있는 등소평을 만나러 가는 키선저로부터 중국 정부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시기는 한·중 수교 전이었고 중국을 방문하거나 중요인사들을 접촉할 경우 반드시 안기부의 통제를 받게 되어있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를 감지한 듯 키신저 박사는 자신의 본 영역이랄 수 있는 중국에 대한 화두를 꺼냈다.
“정 회장께서는 세계시장에서 한국의 주요 경쟁 또는 새로운 기회의 대상이 어떤 나라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홍콩을 비롯하여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이 한국의 경쟁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싱가포르는 조금 주춤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대만 역시 산업구조 면에서 한계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국은 경공업을 앞세워 곧 세계의 전면에 나설 것으로 봅니다. 만일 중국이 세계 무대에 진출한다면 우리로서는 상당히 벅찬 상대를 만나게 되겠지만 거기에는 기회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빨리 중국이 시장을 더 개방하고 세계 무대에 나섰으면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중국 시장에 기대하는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중국은 이미 경제 교류가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충분치 못합니다. 한국과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 이전까지는 오랜 교역국가였습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자원 부존 면에서도 보완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특히 인천에서 배를 띄우면 중국까지 한나절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입니다.”
이어서 키신저에게 정 회장이 물었다.
“중국 시장에 진출할 계획은 가지고 있지만 아직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박사께서는 중국 시장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현재 중국은 두 세력간의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두 세력이란 바로 전형적인 모택동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는 등소평을 지지하는 세력입니다.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모택동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전형적인 중국 사람이자 공산주의자입니다. 반면에 등소평은 아주 특이한 인물로서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등소평식 현대화에 찬성하고는 있지만 이에 반발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중국의 미래는 아직도 불투명합니다.”
“불투명하다면 중국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 갈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최근 등소평이 공식석상에서 누차 이야기했던 것이 아마 좋은 해답이 될 것 같군요. 등소평은 각종 연설에서 ‘현재 중국은 현대화라는 거대한 실험을 치르고 있다. 따라서 그 결과가 좋다면 이 방식대로 계속 추진할 것이고 문제가 발생한다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등소평은 이런 이야기를 한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새삼 꺼낸다는 것은 반발세력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도 되고, 등소평이 그만큼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시사하는 것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키신저 박사가 보기에 두 세력간의 무게 추는 어디로 기울어질 것 같습니까?”
“앞으로 3년간이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금과 같은 현대화 정책을 앞으로 3년 정도만 더 지속한다면 중국은 다시는 과거 체제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은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 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겠지만 과거 ‘철밥통’ 체제로 돌아가는 데는 더 크고 어려운 문제들이 생기죠. 따라서 이미 되돌아 갈 수 있는 회귀점을 지나갔다고 봅니다. 이번에 중국을 방문할 예정인데, 그때 가서 등소평을 비롯하여 호요방과 조자양 등 중국 지도층들을 만나보면 나의 이런 생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저는 중국 현대화와 관련하여 조자양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더 일한 만큼 더 잘 살 수 있다는 유인정책이 골자가 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그랬더니 조자양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그렇다면 공산당이 아닌 사람들을 중국에 더 많이 들여놓겠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중국 사람들은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앞으로 3년만 더 현대화 정책이 지속된다면 중국 공산주의는 결국 하나의 관념으로서만 그 명맥을 유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이 공산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경제만 시장 경제체제로 간다면 그 동안 공산주의 체제에 익숙했던 의식구조와 관행이라는 타성과 소득격차 확대에 의한 계층간의 불만과 갈등으로 인한 사회 불안이 야기되어 좌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 파장은 중국 자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파장이 엄청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경제계도 이런 점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키신저로서는 한국 경제계에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띄우는 것 같았다.
“키신저 박사님 제 견해는 다릅니다.”
정 회장이 키신저의 말을 바로 받았다.
“나는 미국 사람들이 중국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미국이 태동도 하기 수 천년 전부터 정치와 외교, 특히 장사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경험과 수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과 반세기 정도 공산주의 체제 속에 살았다고 해서 이들 피 속에 뿌리 깊이 수천 년 내려 내려온 최고의 장사꾼 기질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과정에 다소 혼란과 차질은 겪게 되겠지만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몇 십 년 안에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것입니다.”
정 회장의 확신에 찬 단호한 표현에 키신저는 다소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동석한 경제계 중진들도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허허 하기는 그렇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개방 체제를 계속해도 문제가 있고 옛날 체제로 돌아가도 문제가 있을 것이라면 문제가 덜한 쪽으로 가는 것이 중국의 선택이 되겠지요.”
역시 키신저다운 대답이었다. 1989년 중국은 천안문 사태를 겪기도 했다. 그 후 한·중간에는 1992년 수교가 이루어졌다. 1997년 홍콩 반환을 앞에 두고 세계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홍콩이 공산주의 중국 통치 하로 돌아가면 아시아 자유 무역 허브로서 홍콩의 역동성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라고. 100년 홍콩 조차기간 동안 홍콩에 기반을 두고 번영을 구가했던 많은 서방세계 다국적 기업들이 짐을 쌌다. 부동산 가격은 급락했다. 오늘의 홍콩을 보면 공산주의이기에 앞서서 ‘장사꾼’ 중국사람에 대한 이들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었었나를 알 수 있다.
19 정주영 회장, 호텔서 슬리퍼 끌고 다니던 사우디 현장소장 보자...
"나는 큰손이기도 하고 구두쇠이기도 한 사람"(上)
“첫째 질문, 정 회장님은 재벌회사 회장님이신데 지금 주머니에 돈을 얼마나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둘째 질문은 정 회장님에 대한 소문은 대단히 씀씀이가 큰 분이라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대단한 구두쇠라는 소문이 있는데 어떤 것이 진짜인지 궁금합니다. 특히 구두쇠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회장님 댁 소파는 몇 십 년 된 낡은 것이고, 시계도 옛날부터 차시던 오래된 것이고, 구두도 그렇고 옷도 새 것을 안 입으신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부산의 모 대학에서 정 회장의 강연이 끝나자 한 학생이 던진 질문이었다. 1980년대 중반 특히 대학가에서 정주영 회장의 강연이 인기를 모으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젊은이들을 좋아했던 정 회장은 바쁜 일정을 쪼개 강의 초청에 응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내 주머니에는 한 몇 만원 쯤 있는 것 같고,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큰손이라는 말과 구두쇠라는 말 두가지가 다 맞는 것 같습니다.”
정회장의 답변에 실망한 듯 학생들 사이에 다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말장난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큰 손도 되고 구두쇠도 된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돈을 쓸 때 쓰이는 돈의 자릿수를 생각하지 않고 그 돈이 쓰이는 가치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일이라면 큰 돈이라도 선뜻 써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단돈 몇 만원이라도 나는 그 용처를 조목조목 따집니다.”
정 회장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열심히 땀 흘려 번 돈을 모았다가 귀중한데 써야지 왜 한번 지나가고 말면 없어지는 일에 돈을 써버려? 양복만 하더라도 추을 때 입을 것하고 더울 때 입을 것 해서 두벌이면 되지 왜 그런데 돈을 써?”
틈 있을 때마다 젊은 직원들한테 강조하던 말이었다. 사실 15년 가까이 국가수반과의 회합이나 연회 등 국내외 중요한 자리에 정회장을 수반했던 필자도 가끔은 정회장의 이런 면에 다소 아쉬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옷차림은 말쑥해 보이는 새 옷을 입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늘 수수한 분위기의 입던 옷차림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건강한 체질인지라 겨울에도 내복을 입는 경우는 드물었고 다만 추운 날에는 늘 초록색 털실로 짠 조끼를 입었다. 그런데 이 조끼가 잘 들여다보면 고색창연하기가 그지없는 것이었다. 변중석 여사가 손수 굵은 털실로 뜬 것으로 알려진 이 조끼는 세련미나 맵시와는 관계없이 그야말로 다소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는데 몇십 년을 입어서 가장자리에는 낡은 모양이 역력했다. 색깔도 배추 초록색인 이 조끼는 정 회장이 즐겨 입었던 진한 회색계통의 정장과 잘 조화도 안 될 뿐 격에도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바로 이런 소박한 면을 좋아 해서 그 조끼를 애용하는 정회장에게 그 옷에 대해 감히 다른 의견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신었던 낡은 구두.
십년도 넘었을 그의 구두 또한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우선 정 회장은 신고 벗을 때마다 끈을 매고 풀어야하는 구두를 싫어했다. 끈 없이 신고 벗을 수 있는 슬리퍼 형 구두를 주로 신었다. 이는 구두를 신속히 신고 벗을 수 있는 ‘기동성’이 뛰어나다는 면에서 정 회장의 성향과 부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의석상이나 손님을 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무실에서 혼자 있을 때나 차안에서는 늘 뒤축을 찌그려 슬리퍼처럼 구두를 신는 습관을 가졌던 정 회장에게는 필요한 때 손가락을 넣어 쉽게 구두 뒷축을 올려 신을 수 있어서 이런 구두를 애용 했음직하다. 구두의 앞코 부분이 쭈글쭈글하게 찌그러져 있게 마련인 이런 모양의 구두는 더욱 낡아 보였다. 그러나 단정한 옷차림에 대한 그의 기준은 엄격했다.
“사람을 만날 때 좋은 옷이건 수수한 옷이건 단정한 의관을 갖추는 것은 나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갖추는 것이야.”
85년 7월 중순 쯤 몹시 더운 어느 날의 일이었다. 미 백악관에서 온 경제관련 인사들과 신라호텔 23층에 있는 별실에서 아침식사를 겸해 회의를 마치고 정 회장을 수행하여 필자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외국인사들 서너 명이 함께 탔다. 몇 층 내려와 중간층에 엘리베이터가 서자 햇볕에 검게 그을린 모습의 50대 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밝은 색 남방셔츠와 반바지 차림, 그리고 맨발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아,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정회장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황급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외부사람을 대할 때 늘 그랬듯이 정 회장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회장님 저는 현대 사우디 현장의 김정석 소장입니다. 본사에 현장 소장들 회의가 있어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현대 회사 식구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의 위아래를 한 번 더 훑어본 정회장. 입을 굳게 다문 얼굴 표정은 갑자기 돌변하며 냉기가 돌았다. 회사에 돌아온 정회장은 건설 사장과 담당 임원들을 긴급 호출하였다. 날벼락이 떨어졌다.
“가족들을 떠나서 멀리 현장에서 고생하는 것은 알지만 뭐하는 짓들이야! 외부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회사식구들끼리 회의하는 건데 왜 서울에 와서 그런 비싼 호텔에 묵고 그래. 그리고 업무회의를 한다고 온 자들이 호텔에서 슬리퍼나 찍찍 끌고 다니고 복장이 그게 뭐야, 서울이 휴양지인줄 알아!”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날로 서둘러서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했다. 신입사원들과 휴양지 모래 밭에서 씨름도하고 회식 장소에서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몇 곡이고 몸을 흔들며 메들리로 노래를 불러대는, 격의 없이 ‘화끈’한 것으로 알려진 정 회장이지만 그가 가졌던 절도의 기준을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하편에 계속)
/1981년 현대건설 시절 강릉 경포대 하계 수련회에서 정주영 회장(왼쪽), 가운데는 사원(현대 배구단 소속)들과 함께 디스코 추는 이명박 전 대통령.
20 정주영 회장이 가장 싫어했던 옷
나는 큰손이기도 하고 구두쇠이기도 한 사람"(下)
☜ 상편에서 계속
정 회장의 의복과 관련한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한다. 정 회장이 극히 혐오하는 옷이 한 가지 있었다. 그러나 그 옷은 정 회장이 입고 안 입고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옷이었다. 그 것은 턱시도라는 의전용 검은색 정장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화려한 복식과 같은 겉치레를 싫어한 그였지만 특히 외국에서 국가수반이 주최하는 만찬이나 리셉션에 나갈 때 턱시도가 의전 복식으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정 회장이 특히 싫어했던 이 복식은 특히 와이셔츠의 구조가 문제였다. 그 위에 나비넥타이를 매게 되어있는 이 와이셔츠는 위 칼라가 있는 아래 세 개의 단추 부분에는 단추 대신 단추가 없고 안밖 양 겹에 단추 구멍만 뚫려 있다. 이것을 세 개의 커프링크와 같은 것으로 각각 하나씩 잠가야 하게 되어있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이 링크 버튼의 크기가 보통 와이셔츠 소매 끝에 하는 커프링크의 몇 분의 일 크기 밖에 안되는 작은 것으로 밖으로 보이게 되어 있는 머리 부분이 콩알보다 작은 검정색 오닝스라는 준 보석으로 되어있다. 안쪽의 잠그는 장치도 아주 작을 수 밖에 없다. 손이 작은 편에 속하는 필자 같은 경우도 이것을 제대로 체결하자면 몇 번씩 놓치는 경우가 많다.
1980년대 중반에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여 한국의 30대 그룹 총수들로 구성된 대규모 경제 사절단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일이 터졌다. 정 회장이 민간 측 단장이었다. 정 회장은 그들에게 전 대통령 못지않게 중요한 귀빈이었다. 그날 저녁 독일 수상 주최의 공식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다. 의전 복식이 턱시도였다. 모두들 각기 호텔 출발에 앞서 준비에 분주했다. 정해진 출발시간에 맞추어야지 특히 이런 부분에 민감한 전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의전상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총수들의 보좌진을 포함하여 모두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긴장하여 서두르고 있었다. 필자가 민간 경제 사절단 전체의 일정을 총괄해야 한다는 사정을 안 정 회장은 현대그룹 독일 지점의 정 과장을 동원하여 현지에서 정 회장을 수발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 대통령을 필두로 한 한국 대표단이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정 회장이 안보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필자는 급히 정 회장의 호텔방으로 달려갔다. 방에 들어선 나는 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턱시도 바지와 와이셔츠를 겨우 입은 정회장은 그 큰 몸집을 구부려 침대 밑에 머리를 디밀고 무언가를 황급히 찾고 있었고 정 과장은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땀범벅이 되어 방 한 켠에서 침대 시트를 털어대고 있었다.
사정은 이랬다. 옷을 입거나 하는 신변 일에 누가 옆에서 거드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의 정회장이 정과장이 턱시도 와이셔츠 링크 단추를 채워 주려는 것을 마다하고 당신이 직접 채우려다 한 개를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이것이 어디 가서 박혔는지 안 보였던 것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크고 굵은 정회장의 손가락으로 그 작은 물건을 다루다 보니 더욱 놓치기 쉬웠을 것이다. 세 개 중에 하나만 안 채워도 와이셔츠 앞에 내려져 가려주는 넥타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벌어진 와이셔츠 틈새로 앞가슴 부분의 속옷이 보이게 되어있어서 그냥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정회장이 몹시 짜증을 내었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필자까지 포함한 세 사람의 합동 작전으로 침대 및 한 켠에서 잃어 버렸던 것을 찾아 해결하고 한 10분 늦게 대통령 일행과 합류하여 출발할 수 있었지만 의전 상 큰 실수는 어쩔 수 없었다. 호텔 방을 나올 때 세 사람은 모두 얼굴에 땀이 흥건하였다. 후에 정회장은 측근들에게 그일을 떠올리며 “무슨 놈의 옷이···”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전두환 대통령(가운데)과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1982년 11월 4일 울산 현대미포대단위수리조선소 준공식에 참석, 정주영 전 회장의 설명을 듣고있다.
정회장의 이런 면모는 음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도처를 다니며 갖가지 음식 문화권에서 별별 최고의 음식 접대를 받아야했던 정회장은 근본적으로 못 먹는 음식이 없었다.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다. 그리고 여간해서는 남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 입에 맞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식사 후에 다소 거북해 하는 기색을 보일 때 “회장님, 좀 남기시지 그러셨어요”라고 하면 “이봐 내가 그걸 맛있어서 다 먹은 줄 알아. 대접을 받으면 그게 입에 안 맞더라도 맛있게 다 먹어주는 게 보여야할 예의야”라고 답했다. 철저한 국제 비즈니스맨 다운 그의 일갈이었다.
아주 젊었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필자가 정 회장을 처음 만난 50대 후반의 정회장은 담배를 안 피웠고 술을 취하게 마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리셉션이나 만찬장에서 웨이터가 정회장에게 들고 싶은 위스키나 와인의 이름을 물어왔을 때 상류층이면 다 아는 흔한 위스키나 와인 이름을 하나 제대로 대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었다.
“자네가 아무거나 주문해.”
항상 선택은 필자의 몫이었다. 대체적으로 그는 양념이 복잡한 음식보다는 어떤 것이든 담백하고 단순한 음식을 좋아했던 것 같다.
"자네 감자 푹 쪄서 으깬 다음 고추장 넣고 썩썩 비빈 것 먹어봤어?”
“네 먹어봤습니다.”
필자의 고향이 정회장처럼 강원도가 아니더라도 모두 어려웠던 1950~60년대 성장기를 보낸 필자도 먹어본 맛이긴 했다.
“그거 참 맛있는데 요즘사람들 그 맛을 모르는 것 같아!”
입맛을 다시며 그 맛을 그리워하던 재벌 총수, 그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 오른다. 몸에 밴 이러한 그의 소박하고 검소한 품성은 재벌 총수가 된 후에도 그의 평생 변함없이 그의 인성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돈에 대한 그의 가치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정 회장은 잘 알려진 대로 이북 출신 실향민이었고 젊은 시절 온갖 고된 노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시절 알고 지냈던 옛 지인들을 포함하여 사업 관련 인사들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계를 망라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개중에는 이북 고향에서 내려온 옛 친구도 있었고 재벌 총수가 된 그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찾아오는 지인도 있었다. 문화사업이니 사회사업을 한다며 후원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누가 되었던 그들을 막는 인의 장막을 치는 것을 그는 허용치 않았다. 어떤 경우든 그를 찾아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때 마다 진땀을 빼야 되는 것이 비서진이었다. 분명히 촌지를 주라고 할 터인데 손님과 만날 때 배석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화 내용을 엿들을 수도 없는 일 이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를 준비해야 하는가를 가늠하기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봐, 세 개만 준비해와.”
손님과의 얘기가 끝나고 정회장이 비서를 불러 하는 지시는 이런 식이었다. 세 개가 30만원인지, 300만원인지, 3000만원인지 대화의 내용을 모르는 비서진으로서는 도저히 감을 잡기가 힘든 일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쓸데없는 일에 돈쓰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정 회장이 아닌가. 어쨌든 야단을 맞기로 말하면 좀 안전한 쪽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가급적 낮은 단위서부터 올라가는 요령을 썼다. 당시 정회장을 비서팀장으로 오래 보좌했던 비서실 담당자들은 정회장이 심중에 두고 있는 액수를 비교적 잘 짚어내는 편이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세 개라니까.”
정회장이 생각했던 돈의 단위가 틀렸을 때 다시 가져오라는 지시였다. 이렇게 착오가 몇 번 반복되고 난 후 최종 준비하게 되는 액수는 때에 따라서는 억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씀씀이가 큰 부자였고 한편으론 검소하기 이를 데 없는 부자 ‘구두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