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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역사6/ 현대제국1/ 한국 경제의 불도저 정주영 - 막오른 정의선 시대, 빛과 그림자

상림은내고향 2021. 5. 7. 22:26

기업의 역사6/ 현대제국1

◆ 한국 경제의 불도저 정주영 

주간조선 고정일 작가
   1940
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청계천으로자유문학수상. 1956~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상)...한겨울 잔디공사 수주에 낙동강변 보리 옮겨 심어

 

▲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이한림 건설부 장관, 박정희 대통령 부부,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왼쪽부터). photo 연합


큰 뜻을 품고 올라온 서울. 그러나 학력도 기술도 내세울 것 없기에 공사판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안암골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신축공사장. 정주영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 머리보다 큰 돌덩이들을 한가득 등짐을 져 날랐다.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고 다리는 후들거렸으나 그는 이를 꽉 악물고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어느 날 인부 한 사람이 돌을 내려놓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땅에 쿵 떨어진 돌은 훌렁 뒤집히더니 바로 옆에 서 있던 정주영의 발뒤꿈치를 호되게 쳤다. 순간 찌르르 전기 흐르는 듯한 충격과 함께 정주영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뒤꿈치에 피가 흐르고 퉁퉁 부어올라 며칠 꼼짝없이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사고를 당하고도 정주영은 공사장을 떠나지 않았다. 동생들이 공부할 터전을 자기 손으로 짓는다는 생각이 그를 고려대학교 공사판에 묶어 둔 것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끼겠지. 두고 봐, 비록 나는 그리 못하겠지만, 열심히 돈 벌어 내 동생들만큼은 이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할 테다!
   
   
정주영은 1915 11 25일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의 6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가 그의 고향이다. 그는 코흘리개 나이인 열 살 때부터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정주영은 열다섯 살 때 송전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게 마땅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이 발목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중학교에 가면 그 학비를 대느라, 동생들이 보통학교도 못 다니게 될까 걱정했다. 동생들에게는 적어도 자신처럼 보통학교는 나오게 해주고 싶었다. 정주영은 학업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부지런히 밭을 갈고,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해왔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이 늘 먹먹하기만 했다. ‘농사꾼으로 살다 죽을 거라면, 뭐 하러 학교에 다닌 걸까? 부모님이 집집마다 고개 숙이며 학비를 빌려 나를 학교에 보낸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밑거름을 마련하라는 뜻이었을 텐데….
   
   18
살 되던 해 정주영은 소 판 돈 70원을 움켜쥐고 집을 뛰쳐나와 서울로 올라간다. 2년여간 공사장을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복흥상회’란 쌀가게의 배달원으로 취직한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회계업무를 맡는 등 차곡차곡 돈을 모아서, 23세 되던 해인 1938년 마침내 쌀가게 ‘경일상회(京日商會)’를 연다. 1940년 정주영은 서울 최대 경성서비스공장 직공이던 이을학에게서 아현동의 자동차수리공장 ‘아도서비스’ 인수를 권유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아도서비스 경영은 뒷날 정주영이 현대자동차라는 세계적 기업을 만드는 모태가 된다. 일제강점기 열악한 경제상황과 제한된 기업 활동에서도 정주영은 직접 자동차 수리에 매달렸다. 1943년부터 잠시 운수업을 벌였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여 다시 자동차 정비업을 해 나갔다. 어느 날 정주영은 관청에서 건설업자들이 거액의 공사비를 수금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건설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947 5 25일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 간판을 올린다. 이어 6·25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미군 숙소를 지으며 큰돈을 모았다.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대통령숙소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현대토건은 완벽한 시공으로 미군으로부터 “현다이 넘버 원!” 찬사를 받았다. 그 뒤 한겨울에 부산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 달라는 미군의 요청에, 정주영은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가?”라며 낙동강가의 보리를 옮겨 심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일을 계기로 미8군의 공사는 몽땅 정주영의 일이 되다시피 했다.
   
   1957
9월 현대는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 내어 국내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성장을 거듭하여 1962년 국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한다. 현대건설은 마침내 1965 9월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해외로 진출한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공사에서 준설공사 경험을 쌓아 중동 진출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어서 1967년에는 일본 기술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바꿔 예산을 절감하며 소양강댐을 완공해낸다.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 중반, 고속도로 건설은 한국으로서는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였다. 그 무렵 한국 경제 수준으로 볼 때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며 국내외에서 부정적 의견과 반대가 극심했다. 야당 대표인 김대중, 김영삼은 결사반대에 나서서 양재 공사판에 이불 깔고 드러눕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민의 피땀 어린 열정과 노력을 결집, 실로 눈물겨운 역경을 극복하고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해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감독, 정주영 회장이 현장소장이었다. 정주영은 공사판에서 밤낮을 보내는 열정을 쏟았다. 공사 도중 지반의 수맥이 갑자기 뚫려 자갈과 진흙이 엄청난 압력으로 터져 나와 인부들이 몇 미터씩 떠밀려 매몰되는 현장에서도 그는 위험을 마다않고 앞장섰다. 박정희 대통령도 청와대 집무실과 침실 머리맡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상황 지도를 걸어 놓고 진척 상황을 챙겼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새벽 3시에도 예고 없이 불쑥 현장에 나타나 장화와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정주영을 찾아가 격려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한 세계기록을 세웠다. 1968 2월 착공, 2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주영’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 역작이었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여건, 비슷한 거리인 400㎞ 구간의 일본 도메이고속도로 건설에는 경부고속도로에 비해 무려 여덟 배의 건설비가 들어간 것도 실로 극적인 대조다. 경부고속도로는 오늘날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는 인프라 건설과 기간산업 발전을 가속화해 주었고, 한국 국민 자신감의 상징이 되었다.
   
   
‘바다로 나아가는 자만이 한국을 구한다!’ 육당 최남선의 이 말을 늘 마음에 품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을 세계 으뜸가는 조선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포항제철의 성공으로 자체적으로 철강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박정희는 영국·미국에서 한국인 최초 선박검사관으로 활동하던 신동식을 불러들였다. 신동식은 1951년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6·25전쟁 피란길에 부산 부두에서 미군 수송선 뱃짐을 점검하는 일을 했다. 산더미만 한 배를 날마다 바라보며 ‘바다를 정복하면 세계를 정복하는 것’임을 굳게 다짐했다. 서울대학교의 교육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여 교수도, 번듯한 교재도 없었다. 그는 졸업한 뒤 머나먼 스웨덴으로 건너가 현지 조선소에 일자리를 구했다. 기능공 양성소에서 밤낮없이 꼬박 5개월간 혹독한 교육을 받은 뒤 설계도 보는 법, 철판을 자르고 붙이는 법 등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다. 마침내 신동식은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미국선급협회 등 국제기구로부터 한국 최초의 검사관으로 선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동식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다. 해사(海事) 부문을 담당하게 된 그는 ‘한국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대형 선박을 만들 자본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계획은 비아냥을 받았다. ‘쓰레기통에선 장미가 피어나지 않는다’란 냉소적인 외신까지 나올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조선업을 개척할 인물로 현대건설 정주영을 점찍었다. 정주영 또한 건설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처음에는 배를 만드는 것도 공장 짓는 것과 뭐가 다르냐며 자신감을 가졌다. 문제는 돈이었다. 차관 도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정주영은 일본과 미국을 뛰어다니며 돈을 빌리려 했지만 ‘코리아 같은 작은 나라가 어떻게 배를 만들 수 있겠느냐’며 모조리 거절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앞세우고 청와대로 찾아가 박정희에게 호소했다.
   
   
“각하,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그동안 미국과 일본 여기저기를 돌며 교섭해봤으나, 저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며 모두 ‘아직 초보기술 단계에 있는 너희 한국이 무슨 몇십만 톤 조선을 하느냐’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조선업에 나라의 미래가 걸렸소”

   정주영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질식할 듯한 침묵이 잠시 흐른 뒤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일국의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적극 지원하는데도 역부족이라며 포기하겠다니, 내가 정 회장 그릇을 잘못 본 거요? 막중한 국책사업을 맡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완수해내야지, 겨우 한 번 시도해보고 어렵다며 반납하겠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건설계 거인이라는 사나이의 역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오금이 저려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벌개진 얼굴로 정주영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박정희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 회장, 조선업은 정 회장 개인 사업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가 걸린 사업이오. 일본·미국에 다녀왔다니, 이제 유럽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기 마련이오.” 마음을 다잡은 정주영은 1971 9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발이 닳도록 투자자를 찾아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정주영은 선박 컨설팅 회사인 A&P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 이야기를 들었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 은행으로부터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곧장 롱바텀 회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롱바텀 또한 현대의 자금력과 기술력에 의문을 나타냈다. 끈질기게 설득했으나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주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지갑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이 거북선이란 것입니다.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지요.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선박 강국의 잠재력은 아직도 한국에 살아 있습니다.
   
   
지폐 속 거북선을 살펴보던 롱바텀 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한동안 말 없이 생각에 잠겼던 그는 정주영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당신은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정주영의 임기응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롱바텀의 추천서를 손에 넣기는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수출신용보증국은 현대조선소의 배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야만 차관 제공을 허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아직 짓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배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정주영은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게딱지 같은 초가집 몇 채 서 있는’ 초라한 백사장이 담긴 울산 미포만 사진 한 장을 손에 쥔 채 세계 곳곳으로 배를 팔러 다녔다. 마침내 정주영은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자 세계해운업계 거물 리바노스를 만나 26t급 배 2척을 주문받는 데 성공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다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들을 내걸어 리바노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러한 시련 끝에 울산시 미포만 일대에 거대한 ‘현대조선소’ 건설을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조선소 도크를 파고 동시에 한편에서는 선체의 부분들을 재단·용접하기 시작했다. 조선소는 1972 3월 착공해 23개월이 지난 1974 6월 준공되었다. 최단 시일 내에 조선소를 완공함과 동시에, 26t급 유조선 2척을 건조, 바다에 띄우는 사상 초유의 대기록을 세웠다. 배를 인수하러 온 거물 리바노스는 “내가 이제껏 봐 온 배들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졌다”며 극찬했다. 이 일은 지금도 세계 조선사에 남아있는 유명한 일화다. 사진 한 장만을 갖고 이뤄낸 정주영만의 특별한 신화였다. 그 뒤 현대조선은 1975년 확장공사를 통해 최대 선박 건조능력 100t, 드라이도크 3 240t 시설을 갖춘 세계 최대 조선소가 되었다.
   
   
선박 건조 계약 중에 중요한 요소는 완성 선박의 인도 시기이며, 수주자 입장에서는 인도 일자에 맞추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한다. 보통 선주들은 실제 필요할 때보다 가급적 아주 촉박한 선박 인도 기일을 정하는 경향이 있다. 선박 건조대금을 깎을 때까지 깎다가 안 되면 그 대신 선박 수주 날짜를 확 당겨 제시하는 것이다. 선박 건조 계약은 인도 기일을 어길 경우 그 날짜만큼 손해배상 형태로 배 값을 깎아나가는 조건을 다는 게 관례이다. 날짜를 지켜 주면 예상보다 빨리 배를 움직일 수 있어 좋고, 날짜를 못 지키면 그만큼 배 값을 깎을 수 있으니 선주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대조선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초기에 중동에서 선박 제조 의뢰가 들어왔다. 최종 계약 자리에서 서명 직전에 선주는 갑자기 인도 날짜를 턱없이 앞당길 것을 요구했다. 실무자들은 난감해 했다. 그 날짜에 맞춰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정주영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봐, 해봤어?
   
   
“회장님,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선 안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수주해 온 것들보다 아주 큰 배라서, 엔진도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것을 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엔진을 들어 배에 올릴 만한 크레인이 없습니다. 스웨덴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당장 주문하더라도 이들이 요구하는 날짜까지 크레인이 도착할지조차 불확실합니다.
   
   
누가 봐도 타당한 말이었으나, 정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봐, 해봤어?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태연한 얼굴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었다. 선주 측은 함박웃음을 짓고, 현대조선소 실무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 기일을 맞추기 위해 정주영의 불같은 독려로 피를 말릴 일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선주들이 돌아가자, 정주영은 조선소 책임자들을 불러 말했다.
   
   
“해봐. 되는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돼. 내가 해봤더니 그렇게 되더라고.
   
   
그 뒤 완성된 배는 계약 날짜에 정확히 맞추어서 인도되었다.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물동량이 급격히 늘어나자,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권유로 정주영은 자동차 생산을 결심한다. 그 무렵 한국 자동차산업은 삼륜차 정도가 제조되고, 승용차는 반제품 조립생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천하의 정주영이라도 한국에서 감히 어떻게 자동차를 독자 개발한단 말인가?” 이것은 미국·일본 등 세계 자동차공업 종주국 업계 전문가들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한국 내의 비웃음도 만만찮았다. 그들은 말했다. “무모한 짓 벌여서 건설업으로 번 돈 몽땅 날리지 마시오. 그렇게 자동차 사업을 하고 싶으면, 미국 자동차회사 하청생산이나 하는 게 좋을 거요.
   
   
정주영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미국 자동차업계를 대신하여, 정주영의 자동차산업 진출 의지를 꺾기 위해 집요하게 설득하는 미국 대사에게 정주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동차산업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내가 번 돈을 다 털어댄다 해도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 세대에 성공을 못한다 해도 후대들에게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정주영은 먼저 해외 기술제휴선을 찾았다. 미국·유럽·일본 여러 업체를 수소문한 끝에, 타 업체와 달리 경영권 참여를 조건으로 내걸지 않은 포드로 정했다. 포드 쪽에서도 여러 한국 기업을 평가한 뒤, 신용도와 자본력에서 가장 믿음이 가는 현대와 계약하기로 결정했다. 박정희의 적극적 지원으로 자동차 제조 허가를 받은 뒤 정주영은 울산시 양정동에 1968 10 13000여㎡ 규모의 현대자동차를 세웠다.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 조립차종으로 ‘코티나’와 ‘D-750’ 트럭을 생산했다. 그 뒤 ‘포니’가 생산될 때까지 현대자동차는 승승장구했다. 포니는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강조한 ‘국산기술 자동차’로 손색이 없는 데다, 국내 도로사정에 적합해 한국 최초 소형차 시대를 열었다. 포니는 90%의 국산화율로 만든 ‘토종 차’로, 현대자동차는 당시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고유모델을 가진 자동차회사로 이름을 드높인다.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포니는 세계 자동차업체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행사에서 ‘우수한 스타일링과 한국 최초의 자동차’라는 점이 현지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3대 일간지인 이탈리아의 ‘라 스템파’는 ‘한국이 이제 자동차공업국의 대열에 올랐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는 정부로부터 차관도입 허가를 받아 종합 자동차산업을 위한 제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발목을 잡고 나섰다. 미국 자동차업계는 한국을 장차 유력한 잠재시장으로 보고 있었으며, 더불어 우수한 한국인 숙련공들을 활용하여 일본 자동차업계를 누르고 아시아시장을 제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까지 현대·기아·GMK·아시아 등 한국 자동차회사들은 해외모델 조립·생산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현대가 독자 모델을 개발하여 호평을 받은 것이다.

   <
다음 호에 중편 계속>

주간조선

 

(中)①-④ 선진국이 하는 어려운 일에 같이 뛰어들어야 한다

1977 5, 정주영은 주한 미국대사 리처드 스나이더의 면담 요청을 받고 서울 조선호텔에서 그와 만났다. 스나이더가 입을 열었다.

“자동차 독자 개발을 그만둬 주십시오. 포니 개발로 기술력은 증명했다지만, 한국의 조립생산업체 모두를 합쳐도 한 해 고작 30만대 수준인 생산능력으로는 현대자동차의 존속 자체가 위험합니다. 더욱이 지금 국민소득 수준으로는 한국인이 자동차를 사줄 리가 없고요. 정 회장께서는 수출을 염두에 두신 모양인데, 쟁쟁한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신생업체인 현대차가 얼마나 잘 팔릴지 의문입니다. , 한 가지 제안하지요. 독자모델 개발을 그만두신다면 포드든 GM이든 크라이슬러든, 현대가 원하는 조건대로 조립생산을 할 수 있게끔 여러 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한국 내수는 물론 아시아 시장 전체가 현대의 몫이 될 것입니다.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현대차를 해외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의연했다. “조만간 한국의 1인당 GNP 5000달러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또한 몇 년 전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는 등 도로 여건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자동차산업은 기계·전자·화학 등 여타 산업 분야에 미치는 막대한 연관 효과나 고용창출 능력으로 볼 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 무렵 한국은 자동차산업 성공에 꼭 필요한 관련 기술과 소재·숙련공·자본·내수시장 기반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나 정주영은 그것을 큰 장애물로 여기지 않았다. “첨단산업을 쫓아가려면 날아가는 비행기에 뛰어올라가 동승해야 가능합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가면 됩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길이 열리는 법입니다. 선진국들은 자기들이 하고 남은 부분만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이 하기를 바라지만, 그런 분야는 남는 것이 없거나 별 볼 일 없는 것들입니다. 

 

▲1984 LA 올림픽에 참석해 교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대한올림픽위원장 정주영. /주간조선

 

“어려운 일에 뛰어들지 않으면 도태” 

 긍정적 사고와 무서운 행동력의 화신인 정주영 앞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들도 굴복하고 문을 열어 준 셈이었다. 정주영은 1977년 제13대 전경련 회장에 취임하여 1987년까지 10년 동안 회장직을 최장기 연임하며 한국 민간 경제계의 본산인 전경련을 이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전경련의 오랜 숙원이던 회관 건립을 위해 기금 출연에 스스로 앞장서서, 1977년에 착공하여 1979년에 완공시켰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10월유신,10·26사건, 신군부 등장,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기를 거치며 그때마다 우리 사회와 경제에 거세게 불어닥쳤던 거센 풍파를 맨 앞에서 대응해야 했다.

“위험을 피하고, 편안하고 실패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려운 일에 뛰어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도태되는 길이다.” 정주영은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마다 자신을 만류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이 말은 단지 건설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살며 도전했던 사업과 그의 행동 특성들을 한데 모아 요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동 건설시장 진출이라는 일대의 모험은 그런 정신이 없이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중동은 지리적으로도 한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문화·종교·인습·언어 면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생소한 지역이다.<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열사와 사막기후는 그때까지 한국인 어느 누구도 겪어 본 적 없는 혹독한 환경이었다. 거기다가 중동에는 이미 선진국 일류기업들이 기득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중동 주요국의 왕족이나 고위관료 등 지배층과 과거 식민지 관계 때부터의 연고와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있고, 사업 기회의 정보도 한 단계 앞서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설계나 시공 기술과 자본력, 시공 장비 어느 하나도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운 장벽은 도리어 정주영의 도전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중동에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몇십 배 오른 석유 값으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이 넘쳐난다. 그들은 몇십 년, 몇백 년을 내다보고 도로·항만·주택·공공시설 등 건설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다. 물론 우리 건설업계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난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두 번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우리나라는 외화가 바닥나서 국가 부도 직전에 놓여 있다. 외화를 벌어들일 돌파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석유파동 당시 시내주유소에서 석유를 사려는 시민들이 몰려 석유통을 줄지어 내려 놓은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조선일보 DB


너무 엄청난 위험요소 때문에, 현대그룹 창업의 일등공신 역할을 한 형제들까지도 적극적으로 정주영의 중동 진출을 만류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동 진출을 강행했다.

정주영은 1975년을 ‘중동 진출의 해’로 선포하고, 아랍어로 현대건설 홍보영화를 만들어 중동에 배포토록 했다. 그리고 오일달러가 가장 풍부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의 해외건설 수주를 위한 전략팀을 구성했다. 그 결과 바레인 아스리조선소 건설공사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아스리조선소 공사는 공사금액 13700만달러로, 그때까지 국내 건설업체가 중동에서 수주한 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이 공사로 말미암아 한국은 명실공히 새로운 중동 진출 시대를 열게 된다. 아스리조선소 공사는 1975년 착공, 2년여 만인 1977년에 완공되었다. 이 공사는 바레인의 무하라크섬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매립지에 드라이 도크를 세우는 공사였다. 현대는 이 공사를 위해 토목공사 33만명, 건축공사 26만명, 전기공사 25만명 등 연 90만여명을 투입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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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0만달러 아스리 공사 수주

아스리조선소 공사에 이어 현대는 두 번째로 대형공사를 수주했다. 이 공사는 사우디아라비아 해군기지 확장공사로, 동부 주베일 지역의 기존 군항을 확장하는 사업이었다. 이 공사는 지금까지도 ‘신()의 공사’ ‘20세기 최대 대역사’로 불리고 있다. 현대는 이 공사를 따내기 위해 사활을 걸었으나, 구미 선진국들이 독점하고 있는 사우디 건설시장에서 현대가 입찰을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미국·영국·독일 등 세계 9개 국가에서 경쟁을 벌인 이 공사에서 정주영은 승리를 위한 ‘히든 카드’를 제시한다. 100% 토종기술’로 건립한 울산 현대조선소의 기술 노하우를 사우디 정부 측에 보여준 것이다. 그 결과 현대는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공사금액은 무려 93000만달러. 이 금액은 국가예산 30%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공사 수주가 발표되자 국민은 국가적인 경사로 받아들이며 기뻐했다. 그러나 막상 시공권은 따냈지만 공사가 문제였다. 50t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주베일항 공사는 신도 시도하기 어려운 공사로 평가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은 모든 기자재를 울산에서 제작, 사우디까지 운반토록 했다. 외화유출을 한 푼이라도 줄여보자는 취지였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2000, 경부고속도로를 무려 15번 왕복하는 거리다. 재킷 철 구조물 하나만도 무게 550t으로, 10층 빌딩 크기였다.<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정주영은 세계 최대 태풍권역인 필리핀 바다를 지나 동남아 해상, 인도양을 거쳐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끌고 가는 금세기 최대 대양 수송작전을 감행했다. 수심 30m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리며 중량 550t짜리 재킷을 한계오차 5㎝ 이내로 꼭 20㎞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신의 공사’였다. 공사를 완벽하게 끝내자 세계는 경악과 동시에 찬사를 보냈다. 이로써 ‘현대’의 명성은 누구라도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확고한 것이 되었다.

정주영의 해외무대는 중동에 그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 영하 50도의 알래스카 맥켄리산 기슭에까지, 사업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정주영은 이렇게 강조했다. “현장을 한눈에 꿰뚫고 있어야 문제가 생겼을 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현장을 모르는 최고경영자의 말을 현장 사람들은 존중하지 않는다.

정주영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에 놀라고, 뛰어난 창의력에 다시 한 번 놀란다고 한다. 정주영의 아이디어가 최고로 빛을 발한 것이 서산 간척사업에서 보여준 이른바 ‘정주영 공법’이다. “남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고, 남이 하는 일과 다르게 해야 남과 다를 수 있으며 그들을 앞설 수 있다.” 정주영 일생의 행적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행동 특징이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철저히 신봉했고 또 이를 실천했다. 건설·조선·자동차·철강 등 천하의 대기업가인 정주영은 뜻밖에도 늘 “농사짓고 싶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이것은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평생을 성실하게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정주영은 서산만 개발이라는 대공사를 앞두고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흡족해 하시도록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으며 서산 공사현장에 각별한 열정을 쏟았다.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현대기아차그룹 제공


서산 간척사업은 일제강점기부터 계획했지만 넓은 간척 면적에다 유난히 간만의 차가 심하여 토목기술상으로 대단히 험난한 공사였으며 번번이 포기해야 했던 일이다. 정주영은 이 대사업을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고 1982 B지구, 1983 A지구 방조제 연결공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A지구였다. 9.8㎞나 되는 물막이 제방공사는 양쪽으로부터 둑을 쌓아감에 따라 물이 흐르는 양 둑 사이의 간격이 약 270m 정도 남았을 때 최대의 난관에 부딪혔다. 유속이 초속 8m가 넘는 밀물 때 엄청난 압력을 가진 물살의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자동차만 한 바위도 들어가는 순간 쓸려 내려갈 정도로 무서운 속도의 급류였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 만든 20t 가까이 되는 바윗덩이도 순식간에 나무토막처럼 물살에 쓸려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쌓은 둑도 점점 물살에 쓸려 나가기 시작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토목공학 지식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수십 년 경력의 일류 토목기사들도 속수무책 갈팡질팡했다.


고철 유조선을 물막이용으로 끌어오다

그때 정주영의 상상력이 번뜩였다. 그는 해체하여 고철로 만들려고 수입해 울산 앞바다에 대어 놓은, 길이가 332m나 되는 226000t급 대형 유조선을 생각해 냈다. 그는 그것을 끌어다가 물이 흐르는 양 둑 사이에 대고 유조선에 바닷물을 가득 채워 가라앉혔다. 제아무리 센 물살도 그 육중한 배를 밀어내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 사이 무난히 둑을 연결하여 물막이 제방을 완성했다. 그런 다음 유조선의 바닷물을 퍼내 배를 띄워 다시 울산으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공사기간 단축은 물론 공사비를 290억원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정주영은 여의도의 약 33배에 달하는 15537만㎡(4700만평)의 국토를 새로 만들어서 나라의 지도 모양을 바꾸어 놓았다. 이 놀라운 ‘정주영 공법’은 ‘뉴스위크’와 ‘타임’ 등 세계 유명 언론에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소개되었으며, 영국 런던 템스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맡았던 회사에서는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서산간척지는 제염작업을 거쳐 1987년 처음으로 벼를 심었고, 지금은 연간 50만섬 이상의 식량을 얻는 ‘보고(寶庫)’가 되었다.

1970
년대 끝 무렵, 한·미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정부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강하게 비난을 퍼부었고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79 6 29일부터 7 1일까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은 군사·정치·경제·외교 문제 어느 하나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주한미군 철수를 1981년으로 미루는 것만 결정되었다. 불안정한 한·미관계 향방에 따라 한국 경제도 크게 요동칠 것이 틀림없었다. 1979 7월 전경련 모임에서 정주영은 신임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의 특별강연회를 열자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해 8 8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예상 인원보다 훨씬 많은 300여명이 참석하여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④편에 계속>

 

기적과 같은 88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

 <③편에서 계속>
글라이스틴 대사는 첫마디부터 한국의 안보 상황, 특히 한국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해 아주 격앙된 어조로 불만을 쏟아놓았다. 남북한이 팽팽한 군사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에 정치·외교적 영향력이 필요할 때마다, 7함대와 주한미군 공군력이 한국의 군사력과 합해져야 북한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세워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이미 1971년 미 7사단 철수,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태도 등을 겪어 온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를 개발하면 미덥지 않은 미국의 손에 좌우되는 일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한국을 구할 수 있으리라 다짐했다. 물론 미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서울올림픽 유치 성공

전경련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경제 관련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한국 정치 상황과 자주국방 노력, 즉 핵개발에 대한 강력 반대 ‘경고’만을 늘어놓았다. 그는 “오늘 내 이야기가 한국 정부와 언론에 새어 나간다면 나는 곧 미국에 소환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듣는 입장에서는 ‘최후통첩’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리 강연 형식이라 해도 그가 한 말들이 한국 정부와 언론에 전해지지 않을 리 없으며, 노련한 외교관인 그가 그 사실을 예상하지 못할 리 없었던 것이다. 글라이스틴의 강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술렁거리던 청중은 흥분하여 앞다투어 항의성 질문들을 쏟아냈다. 이 강연을 추진했던 정주영과 전경련 회장단은 당황하여 서둘러 강연회를 마쳤다. 10 6일 글라이스틴은 자신이 한 말대로 미국으로 강제 소환되었다. 국제외교 관례상 대사 소환은 극단의 조치에 속한다. 이는 1958년 이승만 정권의 보안법 파동 이후 21년 만에 이루어진, 자주국방으로 핵개발을 강력히 추진하는 박정희 한국 정부에 대한 엄중한 항의 표시였다.

그로부터 20일 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만다. 10·26사건으로 인해 한국은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12·12사태와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뼈아픈 격동의 암울하고 긴 터널로 들어선다. 거의 완성단계였던 박정희 핵개발은 꺾이고, 그 자료들은 모두 미국으로 넘겨졌다고 한다. 그날 강철의 사나이 정주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깊게 탄식했다. “한국 역사에 박정희만 한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88 서울 올림픽. /조선일보 DB


1981
9, 독일 바덴바덴에서는 역사적인 발표가 있었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서울을 올림픽 개최지로 발표한 것이다. 대한민국 전체는 축제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민족의 숙원사업을 정주영이 앞장서서 이뤄내는 순간이었다. 88서울올림픽은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빈곤, 정쟁과 사회혼란, 쿠데타, 부정부패 그리고 지구상 동서냉전의 마지막 군사 긴장 대치지역 등으로 세계인의 기억에 새겨진 한국의 얼룩진 이미지를 40여 년 만에 떨쳐버리고 한국의 저력을, 한국의 활력을 처음으로 세계만방에 드러내 보인 역사적인 세계 축제 이벤트였다. 올림픽은 평화·화합·우의를 다지는 세계인의 잔치다. 그것을 개최하기 위해서는 선진국 수준의 경제력과 기반시설, 대규모 국제대회 경험, 동서양 진영으로부터 고루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국제적인 외교 기반, 그리고 무엇보다 올림픽을 테러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치를 수 있는 정치 사회 안정이 최우선 조건이다. 그러나 한국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남한에 비해 열세에 빠질 것을 우려한 북한이 방해공작에 나섰다. 북한은 “남북이 군사 대치를 하고 있는 휴전선에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7년 뒤에 개최될 올림픽 개최지를 서울로 정하는 것은 올림픽을 죽이는 길이 될 것”이라며 개최지 투표권을 가진 올림픽 위원들에게 반대 설득에 열을 올리고 다녔다. 그들 뒤엔 그들 편을 들어 줄 소련과 중국, 그리고 비동맹권 국가들이 있었다.

그만큼 88올림픽 서울 유치 성공은 기적에 가까운 반전이었다. 이 기적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집요하게 집행한 주역은 바로 정주영이었다. 당시 정주영이 88올림픽을 유치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이 막판까지 신경전을 벌일 때, 정주영은 한국 IOC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꽃바구니를 하나씩 각국 IOC 위원 방에 넣어 주었다. 그 꽃바구니는 현대그룹의 해외 파견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꽃바구니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 다음 날 각국 IOC 위원들은 꽃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최고급 일본 손목시계를 선물했던 일본에는 감사인사가 없었다. 결국 비싼 선물보다 ‘정성’을 택한 한국의 정주영은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은 역경을 기회로 만들고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해서 많은 대업을 성취한 정주영의 극적인 면모를 또 한 번 세계에 드러낸 것이다.

 

(하) 정주영, “나는 땀 냄새 나는 노동자”...

▲ 1987년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면담하는 정주영 전경련 회장.

 

정주영은 건설·자동차에 이어 조선·엔진·발전설비 등 중화학 분야에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편다. 잇따른 해외 수주를 바탕으로 현대조선은 1978 28.1%, 1979 8.8%, 1980 55.75%의 고속성장을 하면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인다. 또 해운업인 아세아상선(뒷날 현대상선)을 설립해 미주·유럽의 거대 선주들로부터 적잖은 외화를 벌게 된다.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정주영은 현대전자를 통해 그룹의 사업구조 다각화를 시도한다. 기존의 건설·자동차·조선·철강 등 중화학산업에서 반도체·통신·금융업 등 고부가가치 사업 분야로 영역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삼성과 LG 등 선발 업체가 있음에도 불구, 현대전자를 창업한 것은 정주영의 과감한 승부수였다. 단순한 가전에서 탈피하여 반도체와 통신기기, 멀티미디어 등 첨단제품을 생산한 현대전자는 1996 31672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2000년에는 215000억원이라는 기록적 매출을 이루어냈다.
   
   
또 사업구조 다각화를 위해 뛰어든 금융업과 무역업에서 정주영은 두각을 보였다. 동방화재보험(현대화재해상의 전신)은 자동차보험업계에서 정상을 달렸고, 뒤늦게 출범한 현대증권도 서서히 뿌리를 내리며 업계에서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정주영은 무역업에도 진출, 현대종합상사를 창업하면서 1990년 이전까지 ‘6년 연속 업계 1위’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현대종합상사가 1989년 인도네시아 베카시공단 개발사업을 수주한 것은 국내 최초의 해외공단 개발사업 수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정주영은 사업다각화에 주력하면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열사 60, 근로자 21만명을 거느린 거대한 ‘현대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정주영은 ‘노동자’를 사투리로 ‘뇌동자’라고 발음했다. 스스로를 항상 ‘뇌동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들의 작업복에서 배어나오는 땀 냄새를 사랑했고, 그들의 진지한 눈빛과 질박한 웃음을 사랑했다. 햇볕에 그을리고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에 깃든 그들의 열정과 패기를 사랑했다. 정주영은 재계 인사들과 어울릴 때보다 회사 노동자들과 어울릴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과 있을 때 그의 꾸밈 없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고, 그들과 운동을 할 때나 여흥을 즐길 때 그의 객기 또한 한껏 발휘되었다.
   
   
그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직원수련회 등에서 20대 젊은 직원들과 씨름이나 팔씨름을 하기도 하고 테니스나 야구장에서 그들과 몸을 부딪치고 땀 흘리면서 행복해 했다. 그럴 때면 그의 얼굴은 소년처럼 붉게 상기되곤 했다. 평생 그가 노동자에게 가졌던 애정과 동료의식은 그의 인성에 깊이 뿌리박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채 뼈가 굳기도 전인 어린 시절에 아버지 밑에서 허리가 휘는 농사일을 해봤고 고향을 떠나 하루 세끼 벌이를 위해서 인천부두에서 뱃짐을 날랐으며, 고려대학교 본관 공사장에서 돌짐 지고 숨이 턱에 차도록 사다리를 오르는 강도 높은 중노동을 해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지 고통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땀 흘려 성실히 일하는 노동 자체에 항상 삶의 귀중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본디 돈을 벌고 큰 사업가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다. 늘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부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재벌이 아니고 “부유한 뇌동자”라고 말했다. 대기업 총수가 된 그가 스스로를 ‘노동자’로 분류한 데는 그만큼 진지한 내면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1987
년 이른바 6·29선언, 봇물처럼 전국을 휩쓴 노동쟁의는 그동안의 제도적 억압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 폭력화하였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신군부정권은 노동자들의 표를 의식해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었고, 한국의 주요 수출시장인 선진 각국에서는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노동자들과 연기로 휩싸인 생산시설들을 날마다 보도하고 있었다.
   
   
그동안 땀 흘려 쌓은 한국의 경제기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사용자 주체인 전경련에서는 재계 대표들이 연일 심각한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입장에 있던 정주영은 그러한 사태에서도 노동자들을 매도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노동자들에게 기업과 경제의 실상을 솔직히 이해시키고, 서로 인내하고 양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우리 ‘뇌동자’들의 땀과 희생이었음을 늘 상기시켰다.
   
   
세계의 기업가들뿐 아니라 세계의 정세를 주도하는 정치가들에게도 한국의 현대 정주영은 대단히 익숙한 이름이다. 그들에게 정주영은 극히 열악한 조건에서도 자동차·조선·중동건설 등 기적 같은 대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한국의 눈부신 성장을 견인한 경이롭기 그지없는 기업인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들은 그런 정주영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 때문에 민간경제인 자격으로 한국의 대통령을 수행하여 유럽이나 동남아 등 외국을 순방할 때면, 방문국들의 정치인들이나 기업계는 대통령에게는 의전상 의례적인 예우를 할 뿐 정주영에게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서, 정부수행원이나 정주영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정부에서 각별히 신경을 쓰는 순방국 언론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막상 대통령의 방문 의미나 일정은 통상적인 언급 정도에 그치는 반면, 정주영의 성공 이야기나 그가 제시하는 자국과의 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기사를 대서특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그를 ‘한국 경제의 나폴레옹’이라고 평했다.
   
   
정주영은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 폰 하이에크, 헨리 키신저 등 당대 세계적 석학들과의 만남 기회를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했다. 경제나 기업경영과 같은 주제뿐 아니라 사상·정치·문화 등 사회의 미래·과학기술의 발전 방향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이야기에 심취했으며 그들로부터 거시적 비전에 관한 영감을 얻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들 머릿속에 한국의 저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에 걸쳐 정주영이 전경련 회장이라는 위치를 활용하여 한국의 정치·외교에 크게 공헌한 부분이 있다. 이 시기는 한국이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10월유신, 그리고 박 대통령 시해 이후에 이어진 신군부 독재시대였다. 이를 계기로 악화된 한국에 대한 세계 여론을 활용하여, 북한은 특히 비동맹국을 비롯하여 세계무대에서 그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세계는 냉전체제 아래에서 미국과 소련을 양대 축으로 갈라진 동서 진영과 약 100여개국으로 구성된 비동맹권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적극적인 외교공세가 먹혀 들어간 비동맹권의 여러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비동맹권 리더 격인 인도도 한국과 정식 외교관계는 가지고 있었지만,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외교 현안에서 남한의 입장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는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계속 거부하며 한국대사관도 들어설 수 없게 하고 있었다. 최대 도시 라고스에 겨우 사무실을 유지하고 있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나이지리아 당국의 철수명령을 받았다. 정부 외교 채널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더 이상 주효하지 못했다. 대화 자체가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어느 나라를 가도 정부나 기업계가 관심을 갖고 환영해 주는 정주영을 떠올렸다. 기업 현지 진출이든, 무역이든 경제협력안을 내세워 정주영이 앞장서기로 했다. 국내외로 현대가 벌여 놓은 사업으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게 바쁜 정주영이지만, 그는 나라를 위해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한 번에 2주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을 기꺼이 견디며 인도로, 아프리카로, 동남아로 향했다. 그는 방문국의 국가 원수나 경제 각료들, 기업계 대표들을 만나 그 특유의 순발력과 재치로 경제교류 확대 방안을 제시하고 한국과의 교류가 갖는 장점들을 설파하며 설득해 나갔다. 나이지리아에는 정주영이 방문 2년 뒤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92 1 10일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창당위원장(오른쪽 두 번째)이 서울 평동 서진빌딩에서 창당발기인대회를 마친 뒤 창당준비위원들과 현판식을 갖고 있다. photo 한영희


   
정주영은 70세이던 1985년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여생의 마지막 소망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경제정책을 소신대로 해보는 자리에서 한 5년간만 일해 봤으면 해요. 한 가정이 일어서는 데는 평생이 걸리지만 한 나라가 일어나는 데는 10년이면 족해요.” 그때 그것이 설마 마음속에 품은 대통령 선거 출마의 뜻을 표현한 것임을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은 광복 이후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일어난 정치·경제·사회의 커다란 소용돌이들을 그 한가운데서 체험해야 했다. 그런 체험 속에서 그는 특히 한국의 정치현실 모순의 뿌리가 무엇이며, 그것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우리 경제와 사회발전에 어떻게 족쇄로 작용하는가를 뼈저리게 느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원래 정주영은 그것을 울타리 밖에서 그대로 관망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일생의 행적이 그랬다. 그 도전의 길이 고난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안 되었다. 중요한 것은 가야 할 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족의 번영을 위한 미래와 역사의 방향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당리당략에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민족의 사활이 걸린 경제나 사회정책도 거기에 맞추어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정치꾼’들에게 계속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정주영은 한국에 자유경제체제를 제대로 뿌리내려 경제력 기반을 굳히고 명실상부하게 선진국으로 진입하도록 해야겠다는 야망을 가졌다. 또한 그는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구체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포부와 야심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여생을 바칠 국가와 민족의 부름이라고 믿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그의 무수한 위대한 업적들이 세인들의 눈에 하나도 순탄하거나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성공적으로 해냈던 것처럼 그는 확신에 넘쳤다.
   
   
정주영은 대통령 출마 선언과 함께 1992 2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국민당은 창당 45일 만에 치른 14대 총선에서 의석 31석을 확보하는 정치폭풍을 일으켰다. 이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식상과 변화 욕구, 그리고 경제발전에 대한 국민의 희망이 표출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한편 정주영의 라이벌들은 그의 대통령 출마 동기를, 그의 많은 나이를 빗대어 ‘노망’ 또는 ‘노욕’으로 비하했다. 또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더니 이제는 권력까지 탐낸다”며 네거티브 공세를 폈다. 무엇보다 뿌리 깊은 지역주의가 정치 아마추어인 그에게는 극복하지 못한 벽이 되고 말았다. 정주영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대통령 선거를 두고 사람들은 나더러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큰 실패자는 그들이 뽑은 대통령 때문에 IMF 외환위기를 맞아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했던 국민들이고, 그 다음은 국가를 부도 낸 대통령으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사람이 실패자입니다. 나는 단지 국민들에게 뽑히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려일실(千慮一失)이었다.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소를 팔아 받은 돈을 쥐고 무작정 집을 나와 서울로 왔습니다. 그 뒤 나는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이제 가출할 때의 소 한 마리가 1000마리가 되어 빚을 갚기 위해 고향으로 갑니다. 이번 방북이 한 개인의 고향 방문 차원을 넘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鄭周永 현대그룹명예회장이 1998 6 16일 오전 임진각에서 같이 북으로 갈‘소떼'와 함께 있는 모습. /조선일보 DB

 

1998 6월과 10, 정주영은 소떼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했다. 세계에 마지막 남은 분단과 대치의 벽 한반도의 38선에서 83세의 한국인 기업가 정주영이 연출하고 주역을 맡은 이 희대의 퍼포먼스에 온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이것은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세계 만방에 전파하기 위한 비장한 절규였다. 당시 프랑스의 세계적 문학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했다.


그토록 강해 보이던 정주영도 고향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강했으며,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목이 메곤 했다. 그는 통일의 물꼬를 자기 손으로 마련하겠다는 열망이 대단했으며, 대북사업도 이런 차원에서 추진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사업적 측면에서도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정주영은 중국이 장기간 사회주의를 겪었으나 경제개방 이후 무서운 성장을 기록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북한도 사람들의 의지와 인내력이 뛰어나 개방만 된다면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정주영은 이와 함께 북한이 개방될 경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사회간접자본 확충이며, 미리 기반을 닦아 놓는다면 이에 대한 기득권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정주영은 남북 간의 경제협력이 통일로 가는 가장 주효한 방법임을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쪽 모두 다른 분야보다 정치적인 부담은 적은 반면, 양쪽의 필요가 가장 잘 들어맞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노동력·자원·기술·경험·경제현실 등 모든 면에서 양쪽에서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보탤 수 있는 엄청난 보완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특히 일부 사업추진에 있어 실정법을 위반할 수도 있겠지만, ‘통일’이라는 것은 실정법 체계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잘못이 있다면 역사에 평가받고 책임지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정주영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술회를 했다. “겨울에도 바지저고리를 한 벌만 가지고 입었는데, 그러다 보니 옷 속에 이가 많이 생겨. 할머니가 이를 잡아 주시는데 눈이 나빠서 잘 안 보이시니까 옷을 벗겨 애들을 한 이불 속에 몰아넣고 바지저고리를 밖에 추운 눈 위에다 펼쳐 놓아 이들이 얼어 죽게 하는 거야. 그런 다음 소여물 끓이고 남은 불을 담은 화로에, 옷에 남아 있는 죽은 이들을 툭툭 털어서 입혀주셨지.

정주영은 가난이 무엇인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에 대한 연민이 그의 심중 깊은 곳에 일생 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업의 본체 격인 현대건설의 기업공개 압력을 언론과 사회로부터 집중적으로 받던 시절 다음과 같이 그의 심경을 말했다. “현대건설을 기업공개 하면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이 그 주식을 사서 땀 안 흘리고 돈을 벌게 될 뿐, 돈 없는 소외계층에는 아무 혜택도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정주영은 주식을 공개하기 전에 총 주식의 반가량을 복지재단에 기증하고, 나머지만을 주식시장에 공개했다. 전국에 종합병원들을 지은 것은 그렇게 해서 설립된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다. 그는 첨단시설과 연구진을 집중할 필요가 있는 서울 아산병원 말고는, 다른 의료재단들이 채산성 때문에 기피하는 오지 지방 도시들에 병원을 설립하거나 지방 병원들과 의료협력을 구축했다. 그렇게 설립된 것이 보성·정읍·영덕·보령·홍천·강릉·금강에 세운 아산병원들이다.

정주영은 이런 의료시설들을 돌아보며, 그리고 그가 만든 재단이 지원하는 불우 어린이 시설들을 방문하여 어린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조선소에서 만든 어마어마하게 큰 배, 출고를 기다리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회와 행복감에 젖은 것이다.

정주영은 마지막까지 대북사업에 온힘을 쏟았다. ‘소떼 방북’을 했고, 3개월 뒤인 1998 11월 현대그룹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의 역사적 첫 출항이 이루어졌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밟게 된 것이다. 이는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 정주영은 대북사업을 전담할 수 있는 현대아산을 설립했으며, 금강산 개발에 이어 개성공단 개발 등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분단 이후 반세기간 진행된 남북사업 전체보다도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2001
3 21. 검은 구름에 광풍이 몰아쳤던 이날, 한반도에선 큰 별 하나가 사라졌다. 재계의 거목 정주영이 타계했다. 정주영은 대북사업에 열정을 갖고 있던 시기에, 맨주먹으로 이룩한 현대그룹을 영원히 뒤로한 채 결국 생을 마감한다.

 

2015.11.07 정주영이 즐겨부른 '보통 인생'에는 그의 아쉬운 세월이 녹아 있어

2001년은 정주영 생애의 마지막 해가 되고 만다. 그해 봄빛이 물들어오는 3월 초, 정주영은 청운동 자택에서 위경련으로 누워 있다가 잠시 뜨락으로 내려와 일흔셋 나이의 집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봐, 자넨 나이도 어린데 왜 그렇게 머리가 하얀가?

집사는 정주영의 짓궂은 농담에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눈이 내려서 온 세상이 저렇게 하얀데 저라고 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정주영은 온 얼굴을 활짝 펴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웃었다. 그 며칠 뒤 정주영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급히 아산중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때는 이미 손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2001 3 22, 정주영은 여든여섯 살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생을 접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에 올 때 내 마음대로 온 것은 아니지만/ 이 가슴에 꿈도 많았지/ 내 손에 없는 내 것을 찾아/ 뒤돌아볼 새 없이 나는 뛰었지/ 이제 와 생각하니 꿈만 같은데/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 후회도 많아/ 스쳐간 세월 아쉬워한들 돌릴 수 없으니/ 남은 세월 잘해 봐야지’.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대중가요 ‘보통 인생’이다. 참으로 보통 인생의 노랫말과 같이 가슴에 꿈도 하도 많아 뒤돌아볼 새도 없이 뛰었던 그의 한평생이었다

 

/아산 정주영. /조선일보 DB

 

정주영은 배우 최불암, ‘객주(客主)’의 소설가 김주영과 더불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세 사람 모두 꽤 술을 좋아하는지라 밤늦도록 상다리를 부여잡고 부어라 마셔라 했다. 어느새 모두 잠들었고, 문득 최불암과 김주영이 눈을 떠 보니 방에 이불을 펴고 누워 있었다.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어 주인에게 물어보니, 정주영이 두 사람을 방으로 옮겨 물을 먹인 뒤 이부자리를 챙겨 덮어주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어느새 새벽에 나가고 없었다. 정주영은 늘 술을 함께 마셔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최불암과 김주영의 술에 취한 모습을 한번 보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두 사람은 반대로 그 기회를 통해 정주영의 큰형님 같은 자상함을 느꼈다.

정주영은 ‘지역사회교육협의회’ 운동을 펼쳐나갔다. 지역사회교육협의회 운동은 미국 자동차 회사인 GM이 시작한 것으로, 초·중등학교 운동장 등 시설을 이용해 지역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평생교육 방법을 찾아보는 사회교육운동이었다. 정주영은 1969년 이 프로그램을 한국에 도입했다. 서울대 박동규 교수 등 교육계 인사들과 유익한 시간을 함께하면서 사회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정주영은 한국어린이재단에서 일하고 있던 최불암에게 ‘좋은 일 좀 같이 해보자’며 지역사회교육협의회 참여를 권했다.

1985
년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이 들어섰다. 정장현 사장은 최불암과 동창이었는데 그가 최불암에게, 백화점 안에 자리를 내줄 테니 지역사회 기여 차원에서 극단을 운영해 보라고 권했다. 이듬해인 1986 12월 최불암은 150석 규모의 ‘현대예술극장’을 열었다. 개막 첫 작품 ‘애니’에는 정주영 내외가 관람을 왔다. 공연 뒤 330(100) 규모의 연습장을 빌려 개장 고사를 지내는데 정주영이 참석하여 “가난하긴 하지만 예술은 원래 이렇게 출발하는 거요”라며 격려해 주었다. 정주영은 평소 예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정주영은 평소 “내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며, 아버지로 인해 땀과 부지런함 그리고 가난을 알았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가난이 싫어 집을 뛰쳐나왔다가 서울에서 아버지에게 붙들렸을 때 아버지는 정주영에게 창경원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어린 아들 정주영만 들여보내고 자신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최불암이 말했다.

“현대 마크가 삼각형인데 회장님께서 통천~서산~울산을 잇는 삼각형을 표현하신 것이지요? 파란색은 들판, 노란색은 벼가 익은 모습이고요.

정주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상상력이 참 대단하구먼.

정주영은 이북 출신 실향민이었고, 젊은 시절 온갖 고된 노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그런 시절에 알고 지낸 옛 지인들과의 만남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사업 관련 인사들, 문화·예술계를 망라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다. 그중에는 이북 고향에서 내려온 옛 친구들도 있었고, 재벌 총수가 된 그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찾아오는 지인도 있었다. 문화사업이나 사회사업을 한다며 후원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누가 되었든 어떤 경우든 간에 찾아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비서진은 진땀을 빼야 했다. 분명히 촌지를 주라고 할 텐데, 대체 얼마를 준비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보게, 세 개만 가져 와.

정주영은 손님과의 대화가 끝나면 이런 식으로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세 개라는 것이 30만원인지, 300만원인지, 3000만원인지 비서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쓸데없는 일에 돈 쓰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정주영이었다. 어쨌든 야단을 맞더라도 안전하게 적은 금액부터 올라가는 요령을 썼다. 정주영은 자신이 생각한 액수가 아니면 바로 다시 가져오게 했다. 이렇게 몇 번 어긋난 뒤 마지막으로 준비하게 되는 액수가 때에 따라서는 억대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렇게 정주영은 ‘씀씀이’가 큰 부자였고 한편으론 검소하기 이를 데 없는 냉철한 ‘구두쇠’였다. <②편에 계속>

 

값싼 중국 노동력을 제친 정주영과의 팔씨름 한 판 승부

<①편에서 계속>

잭 웰치와 팔씨름 시합

 

정주영은 1983년 현대전자를 설립한 뒤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합작투자법인 설립안을 협의하기 위해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mpany) 회장 잭 웰치를 찾아갔다. 잭 웰치는 사업계획서를 살펴본 뒤 좀 떨떠름한 기색으로 물었다.

GE에는 기술이 있지요. 그런데 현대에는 무엇이 있소?
“우린 노동력이 있습니다.

그러자 웰치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값싼 노동력은 중국에도 널려 있습니다.

웰치는 전기·전자에는 문외한인 분단국가 한국의 기업이 돈 좀 벌기 시작했다고 달려와서 수작을 거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정주영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우리말로 욕설을 내뱉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잭 웰치는 통역에게서 방금 정주영이 한 말이 욕설임을 듣고는 황당해 했다. 그러나 사람을 볼 줄 알았던 대기업가인 그는 다시 정주영을 불러들였다.

 

/1976년 현대중공업에서 해외 선주들을 안내하고 있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현대중공업

 

“현대 측의 사업계획서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업은 계획서만으로 되는 게 아니지요. 현대가 건설이나 중장비는 전문이지만, 전자 분야는 초보 아닙니까.

그러자 정주영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자동차도 몰랐고 배도 몰랐지만 지금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 조선소가 되었고, 앞으로 자동차는 아메리카 대륙을 뒤덮을 것이오. 마찬가지로 전자도 곧 미국 당신들을 따라잡을 것이오.

그러나 잭 웰치의 냉철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 정주영이 말했다.

“나와 팔씨름 한번 해봅시다. 만약 당신이 진다면 우리를 파트너로 받아들여 주시오.

잭 웰치도 거참 흥미롭다는 듯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미국인 대부분이 그렇듯 거구의 체형인 잭 웰치는 동양의 한국인쯤이야 가볍게 생각했다. 그 또한 승부욕을 타고난 기업가였다.

“팔씨름에 꽤 자신이 있나 보군요. 좋소, 한번 겨뤄 보지요.

잭 웰치의 팔뚝은 웬만한 여자의 다리통만 했다. 그는 대학 때 골프선수였고 평소 운동을 즐기는 스포츠맨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정주영이 잭 웰치보다 스무 살이나 많아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시합 같았기에, 다들 정주영이 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서로 손아귀를 잡고 힘을 주자마자 의외로 단숨에 힘없이 잭 웰치의 팔이 테이블에 쓰러진 것이었다.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정주영은 신이 나서 외쳤다.


“우리 조인트 벤처 하는 거다!

이때부터 잭 웰치는 현대의 적극적 조력자가 되었다. 그는 GE 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현대전자를 지원했고, 현대전자는 단기간에 세계 2위 메모리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주영은 잠잘 때만 빼놓고 거의 모든 시간에 끊임없이 생각했다. ‘생각하자’ 하고 의도하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스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사업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아주 작은 생각이 자신의 마음속에 새파란 보리 씨앗으로 자리를 잡으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끊임없이 그것을 가꾸고 키워서 머릿속의 생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커다란 일거리로 확대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그는 단 하나의 씨앗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씨앗을 함께 품고 둥글리면서 키워가다가, 그중의 하나나 둘을 끄집어내어 현실화했다.

예를 들면 주한미군 공사를 하면서 정부 발주 공사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곧 해외시장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식이다. 이처럼 그는 생활 속에서도 사업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태풍 속으로 나를 따르라!

정주영은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참견하고 지시만 내린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두려워 망설이고 있을 때는 언제나 직접 기꺼이 앞장을 섰다.

1974
년 여름, 현대중공업이 한국 최초 26t급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하여 한창 제작하고 있었다. 그때 초대형 태풍이 울산을 강타하여 현장 작업자들은 모두 철수했다. 모두가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 기어이 일이 벌어졌다. 브리지 부근에 있던 작은 강철 구조물 하나가 흔들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배 전체 크기에 비하면 작은 철 구조물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그 무게만 수십t이 나가는 쇳덩이였다. 더구나 브리지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쇳덩이가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배 위로 떨어지는 날에는 배 만드는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르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마침 정주영은 현장주의자답게 그곳 휘몰아치는 강풍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브리지를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비바람을 뚫고 도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모두가 놀라서 황급히 막았으나 소용없었다. 정주영은 모두의 손을 뿌리친 뒤 비바람을 뚫고 선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주변에 있는 와이어로프를 끌어당겨 흔들리는 쇳덩이를 고정하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작업자들도 너나없이 결연히 따라나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 브리지 위로 정주영을 따라 올라와 모두 함께 사투를 벌였다. 말이 철 구조물 고정이지, 엄청난 비바람 속에서 목숨을 건 무모한 작업이었다. 마침내 구조물이 고정되어 배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③편에 계속>
 

신기루 같은 시베리아 개발

 <②편에서 계속>
정주영은 1989년 금강산 개발로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데 이어 그 이듬해인 1990 10, 당시에는 아직 정식 국교조차 맺지 않았던 소련을 방문하여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3시간 반 동안 환담했다. 그 자리에서 정주영은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은 한국 기업이 주축이 되어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어려운 형편의 북한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번영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부탁도 빼놓지 않았다. 시베리아 개발에 대한 그의 행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주영은 그 무렵 한국의 미래가 전적으로 시베리아 개발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극한의 동토를 개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혹독한 중동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못할 것도 없다는 자신감을 정주영은 갖고 있었다.

정주영은 모두 세 차례나 러시아를 방문했다. 그는 시베리아 스베틀라야 산림 공동개발과 함께 시베리아에서 남북한을 관통하여 부산까지 이어지는 가스파이프라인을 설치하자는 데 이어, 마침내 시베리아의 천연가스를 일본에까지 연결한다는 거대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당재터널 공사현장의 심완식(왼쪽)과 정주영(오른쪽에서 둘째). /조선일보 DB

 

끝내 이루지 못한 시베리아 개발 꿈

무엇보다 정주영은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목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일제강점기 조선독립군의 전초기지였다. 정주영이 존경하는 조선 근대 최초 경제기업인이며 고려대학교 창학자인 이용익 선생이 조선 독립 천추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곳. 그곳을 개발해서 시베리아 진출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지리적으로나 기후 면에서 유리하다고 본 것이었다. 부산에서 선박을 이용한다 해도 30여시간이면 갈 수 있어 먼 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미국·일본·호주 등 여러 나라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뛰어들어 각축을 벌이고 있었기에 정주영은 못내 아쉬웠다. 거기에다 그 무렵 현대는 중국에 대한 투자도 매년 늘려가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자원도 자원이지만, 시장으로 따진다면 지구촌에서 중국만 한 나라도 없다고 정주영은 판단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시베리아의 자원 확보가 우선 시급하다는 그의 주장이 때마침 열리기 시작한 중국이라는 새로운 거대 시장으로 말미암아 탄력을 받지 못했다. 때문에 시베리아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자꾸만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 새로이 등장한 거대 중국 시장에서 연이어 낭보가 날아들었다. 현대는 중국과 합작으로 ‘베이징 현대 지하철도차량공사’를 설립, 중국 대륙 전역에 건설될 지하철의 전동차 독점생산 계약을 이루어낸 데 이어 자동차·전자·조선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투자 기회를 열어가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언제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때 정주영은 그룹 경영권을 넘겨준 데다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주영의 시베리아 개발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현대그룹에서 뒤늦게야 중국에서 시베리아로 눈길을 돌렸을 때는 이미 총수를 잃은 뒤였다. 정주영은 이 세상에 없었다. 총수를 잃고서 그만 방향을 선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주영은 1996년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이는 참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파격적인 추천이었다. 한국 언론에 이런 내용이 간략하게나마 소개된 것은 그해 10월 초순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그해 12월로 예정된 노벨상 시상식을 앞두고, 언론에는 수상자들의 명단이 흘러나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제임스 멀리스 교수와,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윌리엄 버커리 교수를 공동으로 그해의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한다는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정주영은 탈락했다. 하지만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한국인이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이때에 추천장에 밝힌 정주영의 주요 공적사항은 ‘맨손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으켰으며 한국의 경제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기업인이지 순수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가 평생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업적을 증명해 보였지만 독창적인 경제학설이나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정주영은 젊은 시절 노동판에서 생존 경험을 체득했다. 이른바 ‘빈대의 교훈’이다. 인천 부둣가에서 등짐을 질 때의 일이다. 저녁에 짐꾼 합숙소 자리에 누우면 빈대가 이리저리 물어뜯는 통에 밤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일거리를 찾아야 했으므로 빈대의 공격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밥상 위로 올라가 잠을 청해도 빈대는 기어코 상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물어뜯었다. 빈대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양재기에 물을 채워 다리마다 받쳐 놓았으나 소용없었다. 빈대들은 악착같이 벽을 타고 올라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빈대 가운데에도 본능적으로 똘똘한 녀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찮은 빈대라 할지라도 눈앞에 가로놓인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나름대로 절실하게 노력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또 다른 깨달음으로 ‘청개구리의 교훈’이 있다. 나뭇가지가 너무 높은 탓에 서너 번 뛰어도 닿지 못하다가 계속 시도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고야 만다는 청개구리 이야기이다.

한 번 시도해서 안 되면 두 번, 그래도 안 되면 세 번 네 번 하는 식으로 계속하다 보면 반드시 뜻을 이루기 마련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이것이 노동판을 전전하며 고생하던 정주영에게 한 줄기 희망을 준 빈대와 청개구리의 교훈이다

 

11.14 자동차 수리공장 주인 정주영, 구상과 친해져

① 자동차 수리공장 주인 정주영, 구상과 친해져

 여류시인 모윤숙의 집은 서울 화양동에 있었고 그 집에서 문인들의 모임이 자주 열렸다. 그런데 모임 때마다 후줄근한 차림의 중년 사나이가 윗목에 조용히 앉아 문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담아듣곤 했다. 어느 날 구상이 모윤숙에게 “저 사람은 누굽니까?”라고 물었다. 모윤숙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저 아래 초입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는 정주영이란 분이에요. 문인 선생님들께 문학과 인생에 대해 배우고 싶다더군요. 그 뜻이 가상해서 참석을 허락했지요.


이헌구, 김광섭, 서정주, 이하윤, 구상 등 문단의 쟁쟁한 인물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이때부터 정주영은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원산에서 내려온 구상에게 두터운 친근감을 느끼고 가까이 지냈다. 나이는 정주영이 네 살 위였다. 수필가 전숙희나 성악가 김자경과도 그때부터 교류해 왔다. 김자경은 음악도이면서도 자주 문인들 모임에 끼곤 했다. 모임이 끝나면 으레 김자경이 노래를 맡아 했고, 정주영도 유행가를 즐겨 불렀다. 정주영은 춤도 한국춤, 서양춤 할 것 없이 고루 추며 흥을 돋우었다. 정주영은 문인들을 특히 좋아하여, 그들의 시()라든가 소설의 명문장들을 줄줄 외며 그들을 즐겁게 하고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가 모윤숙의 ‘렌의 애가’를 줄줄 외우고 시 낭송을 하자 모두들 놀라워하며 박수를 쳤다

 

/소설가 김동리(오른쪽 두 번째)와 함께한 정주영(오른쪽에서 세 번째). 아산은 한국 문단의 원로작가들과 문학과 인생 이야기를 같이 나누며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 /정주영닷컴 제공

 

훗날 정주영은 1985년부터 여름철마다 경포대에서 열린 ‘해변 시인학교’에 참가해 문인들과 어울리며 문학과 인생에 대해 토론을 즐겼다. 수강생들과 시 강의도 듣고 낭독회에도 참여하고, 주최 측 요청으로 특강에 나서서 자신이 좋아하는 한시(漢詩)를 풀이하기도 했다. 일과를 마치고 나서는 황금찬 교장을 비롯한 참가 시인들과 어울려 바닷가 주막에서 이슥하도록 술판을 벌였다. 그 뒤 10여년간 여름이면 거의 거르지 않고 해변 시인학교를 찾아 시인들과 바다를 즐겼다. 정주영이 그저 교양 있어 보이려고 겉멋으로 문인들과 어울리며 모임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문학적 감수성과 글솜씨가 뛰어났으며, 어린 시절 신문 연재소설 이광수의 ‘흙’과 박화성의 ‘백화’ 등을 읽으면서 문필가의 꿈을 키웠었다. 정주영이 쓴 ‘새봄을 기다리며’라는 수필에서 로맨티스트 정주영의 문학적 재능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새봄을 기다리며

‘창밖으로 내리는 부드러운 함박눈은 오는 봄을 시샘하는 것인가? 예로부터 입춘 지나서 오는 눈은 꽃을 시샘하여 내린다 하여 꽃샘 눈이라고 부른다. 초봄의 여신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마음속에 흐뭇하게 안겨 준다. 인왕산 골짜기엔 해빙의 물소리가 졸졸 흐르며 삼라만상을 에워싼 대기에는 약동하는 새봄의 기운이 서렸음을 알려 준다. 춥고 지루하던 겨울은 지나가고 깊고 깊은 겨울밤의 사색에서 깨어나 긴 기지개를 켜는 봄을 바라본다. 이른 봄 먼 곳에서 동경의 여인이 살며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새봄을 기다리며 인왕산 음지의 잔설에 아쉬움을 보낸다. (중략) 봄기운은 생명 속의 오염된 찌꺼기를 씻어 내는 맑은 냉수와도 같다. 새벽녘 경복궁의 중후하고 긴 돌담장 옆을 달리며 아직은 찬 침묵 속이지만 봄의 태동을 곳곳에서 느낀다. 조춘의 감격을 가슴 그득히 들이마시며 아직 밝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봄은 간 곳 없이 사라진다. 비단 봄뿐이 아니고 모든 절기의 변화에 대하여 그 반사감각은 무디어지고 어린 시절의 먼 감상을 되씹는 일밖에 없다. 계절이나 자연은 그때에만 민감할 수 있고 유정(有情)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린 날의 순박한 자연은 어느새 멀리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고향을 등진 도시의 유랑민처럼 거북한 긴장 속에서만 살아온 일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세월이 ‘제2의 천성’으로 화하여 다년간의 생활 감정도 이런 습관에 이어져서 바람직하지 못한 개별의 나를 형성해 놓았다. 오늘의 현실은 4·4분기제의 소득확대 추구를 위한 치열한 적자생존 투쟁으로 채워지는 4계절뿐이다. 기업인에게는 환희의 4계절이나 낭만적 4계절은 연분에 닿지 않고 대자연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심정에 다가서지 않아 멀고 먼 데에 있는 것과 같은 실정이다. <②편에 계속>

 

② 모윤숙이 1960년대 사막을 방문한 이유  

<①편에서 계속>

가난하고 어리석은 젊은 계절에 궁핍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굶주림과 헐벗음을 딛고 일어서기 위하여, 그리고 구멍가게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기업인으로서 불안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또한 그 일을 기점으로 하여 내 생애의 발목이 잡힌 후 오늘까지 모험과 투쟁 속을 헤쳐 나왔다. 나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 혼신의 집중과 정열과 전심전령(全心全靈)을 소진하는 질주의 기나긴 행로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편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지는 아니한다. 기업의 대열에 서 있는 여러 기업 동지들이 이와 같은 형편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남이 잘 때 깨고, 남이 쉴 때 뛰어가지 않으면 기업의 육성은 불가능하다. 처절하다고 할 만큼 각박한 경합 사례들을 수없이 치러 내면서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봄이 와도 봄의 줄 밖에 서서 혼미한 어둠에 몸을 적시고 있는 수가 많다. 경쟁에 이기는 것만이 삶의 전부로 생각해 온 폐쇄적 열기에 갇혀 지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봄은 환상 속에만 있는 관용의 여인과 같다. 봄은 만인이 듣는 복음일 것이다.

 

/1994년 ‘토지’의 완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아산. 왼쪽부터 박완서, 박경리, 정주영. /주간조선

 

그러나 실제로 봄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온다. 춥고 음침한 긴 겨울을 힘겹게 견디어 낸 사람들에게 봄은 더욱 따스하다. 살며시 스며드는 봄은 자애의 어머니 같은 성품 그대로이다. 포근하고 훈훈하다. 언제나 긴장하고 서두르면서 마음의 안식이라곤 없는 기업인들은 하늘의 별을 딸 듯한 기세로 달려가지만 정치가나 공직자 또한 성직자들의 비판 앞에서는 자라목같이 움츠러들기를 잘한다. 그 허약한 기업 군상들. 유구한 유교의 사상이 그러했고 사농공상의 선조들이 실정이 그러했거니와 제아무리 천만금을 손에 잡은 사람이라도 봄바람에 녹은 잔설과 같은 인간적 허약의 일면을 숨길 수 없다. 기업의 사무실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화려한 순환도 속절없이 스쳐 지나가며 다시 새봄이 와도 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때가 많았다. ‘空地에 無花草하니 春來不似春이다.(빈 대지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 기업인들이 봄을 기다리는 건 하늘에 별을 붙이고 돌아오는 여인을 기다리는 바나 다름없이 공소(空疎)한 경우가 되곤 했다.


그런데 봄이 또 왔다. 인왕산의 잔설을 밟으며 계절의 은혜를 새삼 되뇐다. 봄별이 하루하루 짙어져 간다. 천지가 새봄이다. 이제부터 기업의 단하(壇下)에서 봄을 만끽하고 싶다. 경제단상(壇上)에서 호기 있게 일하는 연출자들의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심정의 여유를 가지고 이 봄을 즐기리라. 봄눈이 녹은 들길과 산길을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위대한 자연을 재음미하고 인정의 모닥불을 피우리라. 천지의 창조주 앞에 경건한 찬미를 바치리라. 인생은 여러 가지이다. 온화한 삶과 질풍처럼 달리는 삶이 있으나 궁극의 염원은 한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평화와 자족을 느끼는 마음이다. 봄이 온다. 마음 깊이 기다려지는 봄이 아주 가까이까지 왔다. (서울신문 1981 2 25일자)


어휘 선택이나 문장 표현에서 섬세함이 가득 느껴지는 글이다. 구상은 정주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산은 문인들과 사귀기를 좋아한다. 아니, 그는 스스로 시문(詩文)을 사랑하고 즐긴다. 그는 천성 시심(詩心)의 소유자이다.” 위 글을 보면 이 평가가 빈말이 아님을 더없이 잘 깨달을 수 있다. 정주영은 그 뒤에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문인들과 교류를 넓혀 나갔다. 조경희, 박경리, 김남조 등과도 인연이 있었다. 이화여대 총장이던 김옥길과도 자주 만나 냉면을 앞에 놓고 세상살이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영원한 문학청년이었다.


“신이 미처 다 못한 일 마무리하는 것”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1960년대 중반, 정주영은 여러 남녀 문인들을 그 꿈의 현장으로 초청했다. 모윤숙, 전숙희 등은 처음으로 머나먼 나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한국 여성이 되었다. 황사를 날리며 끝없는 사막을 달려 이른 곳은 푸른 지중해변이었다. 바닷가에는 ‘현대’라는 큰 간판이 붙은 영빈관이 있었다. 일행은 그곳에 짐을 풀고 하룻밤 묵은 뒤 이튿날부터 사막을 달렸다. 이 황무지에서도 쉼 없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삶의 신비와 끈질김에 모두는 큰 감동을 받았다. <③편에 계속

 

③ 조선일보 사옥도 화끈하게 지은 정주영 

②편에서 계속>

사우디아라비아는 풍부한 원유를 바탕으로 막 경제성장의 첫걸음을 떼고 있었다. 현대건설은 기술자·전문가·노동자 수만 명을 총동원해 그 선봉에 서 있었다. 정주영이 직접 안전모를 쓰고 현장을 지휘했다. 다음 날 정주영은 일행과 함께 큰 배에 올라 지중해로 나아갔다. 부둣가에는 배로 싣고 온 철골이며 건설장비들이 산더미처럼 늘어서 있었다. 전숙희가 정주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현대건설이 많은 일을 하는 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버려진 사막과 바다와 사람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햇볕을 가리려고 농사꾼처럼 벙거지를 쓴 정주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저 신()께서 미처 다 못하시고 버려두신 세상을 제가 좀 정리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정주영은 자연을 사랑하고, 신을 존경하고, 인간의 삶을 위하는 마음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몸소 노무자들과 함께 일하며 뛰었다. 정주영은 어쩌다 고려대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늘 이렇게 말했다.


“뭐, 고려대학교요? 그거 내가 지었지요.


그러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럼 회장님이 설립자이신가요?” 하고 우문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면 정주영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닙니다. 거기야 다 임자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고려대학교가 지어질 때, 하얀 돌덩이를 한 장 한 장 내가 이 어깨에 가마니를 펴고 얹어 날라다 지었습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내가 지은 학교이지요.


농담이 아닌 눈물 겨운 진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정주영은 솔직하고도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다

 

/충남 안면도에서 열린 해변시인학교에서 황금찬 시인(오른쪽)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아산. 가운데 앉은 이는 박목월 시인의 부인 유익순 여사. /정주영닷컴 제공

 

“도와 줄 때는 조건 없이”

1967년 태평로에 있던 조선일보 사옥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었다.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차관 도입으로 호텔을 짓기로 했는데, 20층짜리 건물을 지을 자금이 한 푼도 없었다. 여러 경로로 자금조달 교섭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마침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한 현대건설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우영은 정주영을 찾아갔다. 초면이었으나 건장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관상이 눈에 띄었다. 성격이 당차기로 이름난 방우영은 이런 사람에게는 사무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탁 털어놓고 통사정하는 것이 상책일 듯싶었다.


“아시다시피 당장 돈이 없습니다. 신문사 하나 살려주는 셈치고 건물을 지어주신다면 신문을 팔아가며 갚아 나가겠습니다.


정주영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방우영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나도 어려서부터 민족지 조선과 동아를 꽤 애독했지요. 바로 일을 시작합시다.


아무 조건 없는 수락이었다. 코리아나호텔이 완공된 뒤 정주영은 방우영에게 약속했다.


“앞으로 조선일보 건물은 내가 맡아 지을 테니 그리 아십시오.


그 약속대로 1987년 조선일보 정동 별관, 1990년에는 평촌 공장이 지어졌다. 그 의협심은 참으로 기업인의 귀감이라 할 만했다.


1983
년 연세대학교 동문회장을 맡고 있던 방우영은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을 짓기 위해 모금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더 정주영을 찾아가 부탁했다.


“연세대, 고려대는 우리나라 인재를 키우는 명문이지요. 나는 배우질 못했으나, 내 아들 몽헌이가 연세대를 나왔으니 고맙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정주영은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 5억원 약속어음을 떼 주었다. 얼마 뒤 연세대 이사회에서, 한국경제발전 공로로 정주영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정주영이 웃으며 방우영에게 농담을 건넸다.


“이봐요, 방 사장. 돈 적게 기부했다고 상 주는 게 아니죠?


1968
년 봄 성악가 김자경은 한국 최초 오페라단을 세울 결심을 했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가 극심했다. 돈 좀 있다 하는 남자들이 해도 집까지 날릴 판에 여자 혼자 어떻게 해나가겠냐는 것이었다. 김자경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정주영이 선뜻 손을 내밀었다. 김자경은 모윤숙 문인 모임에서 그를 만나 친분이 있었다. 정주영은 장소와 준비 비용은 물론, 차량과 기름과 인력까지 대주었다.


김자경은 그 차에다 포스터를 붙이고 오페라단 기를 달아 전단을 뿌리며 서울을 누비고 다녔다. 오페라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때라 사람들은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마침내 1968 5 1, 한국 최초 오페라 ‘춘희’가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정주영은 자신이 도왔다는 것을 생색내기 싫어서 굳이 오페라를 관람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자경이 하도 졸라서 한번 관람하게 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주영은 말했다.


“손뼉을 하도 많이 쳐서 손바닥이 아파 혼났습니다.

김자경과 배우들은 웃으며 감사해 했다. 그런데 정주영이 물었다.

“내가 왜 그리 손뼉을 많이 쳤는지 아십니까?
“좋은 공연 즐거워서 그러신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끝나는 게 좋아서 쳤지요.
그 말에 모두들 크게 웃었다. 그처럼 정주영은 유머가 넘쳤다

 

2015.11.24  호랑이 회장님 애창곡은 ‘쨍하고 해 뜰 날’ 화끈한 분위기 메이커

▲ 정주영은 매년 여름 경포대 해변에서 현대건설 직원들과 씨름을 하며 도전의식을 불어넣곤 했다photo 이의호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이듬해인 1971, 매우 뜻깊은 도로가 완공되었다. 바로 서울과 문산을 잇는 통일로 공사였다. 겨우 40여일 만에 40㎞ 구간이 완성된 놀라운 공사였다. 통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에게 직접 권유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박정희는 전용차에 정주영을 태우고 문산 쪽으로 달리면서 물었다.
   
   
“서울에서 판문점까지 4차선 도로를 내려고 하는데, 정 회장이라면 오는 12 5일까지 끝마칠 수 있겠소?
   
   
의견을 묻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상 그렇게 하라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12 5일 그날 북한에서 박성철 제2부수상을 단장으로 하는 남북 조절위원회 방문단이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올 예정이었다. 박정희는 깨끗이 포장된 도로 위로 그들을 달리게 하여 그들의 콧대를 꺾고 대한민국의 국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와 마찬가지로 전투와 같은 공사가 밤낮없이 이어졌다. 기한이 너무 짧았으므로 삼부토건·동아건설·대림산업 3개 업체도 참여했다. 현대건설은 고양군 곡릉천의 벽제교(碧蹄橋) 구간을 포함한 9.5㎞ 구간을 맡았다. 전체 구간에서도 가장 난공사가 예상되는 구간이었다. 워낙 사정이 다급하여, 모든 구간에서 인부들이 한꺼번에 달라붙다시피 공사를 진행했다. 정주영은 날마다 새벽 5시쯤이면 현장에 도착해 작업을 지휘했다.
   
   
촉박한 시간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겨울에 접어들자 기온이 크게 내려가 어려움이 컸다. 북한 대표단 일행이 오는 그날 아침까지도 공사가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북한 대표단이 벽제교를 통과하도록 예정된 시각인 10시 바로 직전에 가까스로 포장을 끝냈다. 미처 굳지도 않은 아스팔트에서 김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기에 정주영은 무척이나 애간장이 탔다.

 

북한 대표단의 차가 오기 전에 인부들과 장비들을 서둘러 숨겼다. 벽제교에서도 교각 밑에 임시 받침판을 받쳐놓은 채로 행렬을 통과시켜야 했다. 행여 다리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다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정주영은 노래를 무척 좋아하여, 만찬이나 그룹 행사에서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몇 곡은 쉬지 않고 연달아 불렀다. 스무 곡 넘게 부를 때도 있었다. 그는 윤항기의 노래 ‘이거야 정말’을 가장 즐겨 불렀다. “이거야 정말 만나 봐야지 아무 말이나 해볼 걸~” 하고 노래가 시작되면 좌중의 분위기는 단박에 고조되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몸까지 흔들어 대면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였다. 일단 마이크를 잡으면 한 곡으로 끝나는 법 없이 다음 노래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 서유석의 ‘가는 세월’도 자주 불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노래를 부르고 흥을 돋우면 직원들도 마음을 열고 다가옵니다. 그들과 어깨동무하고 한껏 흥겹게 놀 때 가장 행복합니다.
   
   
누군가 어떻게 그 많은 노래를 외웠느냐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울산에 조선소를 세울 때 자주 내려갔었는데, 가는 데 다섯 시간 넘게 걸리다 보니 너무 따분하더라고. 그래서 카세트테이프 수십 개를 사 가지고 내내 노래를 들으면서 내려갔지. 그러다 보니 몰랐던 노래도 차츰 귀에 익더군. 같은 노래를 아마 수백 번 들었을 걸.
   
   
이 집중력이야말로 오늘의 정주영을 있게 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정주영과 비슷한 인물로 미국 억만장자 하워드 휴를 들 수 있다. 그는 좋아하는 영화를 160번이나 되풀이해서, 그것도 음식 먹던 것까지 잊어버린 채로 몰두해 보곤 했다
   
   
‘타임’지는 하워드 휴가 괴벽한 성격을 갖고 있긴 했지만, 한 가지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집중력과 정열 덕분에 그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집중력과 지구력은 정주영과 무척 닮아 있다. 정주영의 머릿속은 늘 사업 생각뿐이었다. 철저한 직업의식, 그것이 바로 정주영으로 하여금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낳게 한 원동력이었다.
   
   
정주영은 해마다 현대건설 신입 청년사원들과 씨름을 겨루었다. 씨름 시합을 통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사원들에게 도전의식을 불어넣은 것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창 팔팔한 신입사원들과 샅바를 부여잡고 힘을 겨룬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여름철 수련대회의 모래밭은 그래서 더욱 더 뜨거웠다.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은 현대건설 직원들에게 하계 수련대회를 통해 젊음과 정열을 마음껏 발산하고 진한 동료애를 확인하는 곳이었다. 씨름뿐만 아니라 배구나 달리기 시합도 벌어졌다. 창업주인 정주영을 중심으로 현대건설이라는 조직의 정체성과 신참 동료들 간의 단결력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캠프파이어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마이크를 잡고 신나게 몇 곡조씩 뽑았다. 직원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가사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쯤되면 그룹 총수와 새내기 사원들 사이의 거리감은 순식간에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그 모습이 낯선 직원들은 “저분이 정말 우리 호랑이 회장님인가?” 놀라기 일쑤였다.
   
   1971
년 영동고속도로 일부 구간이 개통되면서 경포대 현대호텔이 문을 열었다. 이 호텔은 수련대회 근거지였다. 서산농장이 만들어지면서 한때 그 근처의 몽산포해수욕장에서 수련대회가 열리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는 금강산으로 장소가 바뀌기도 했으나, 역시 현대건설의 대표적 수련대회 장소는 경포대였다.  


   
“우리 올림픽 한번 해봅시다”

   “여보! 정주영 회장, 우리 올림픽 한번 해봅시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정주영은 신바람이 났다. “우리같이 조그마한 나라가 올림픽을 치른다, 한번 해 보는 거야! 1978 10 10,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을 정상천 서울시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 발표했다. 다음해 10·26사건이 일어났어도 민족적 과업인 올림픽을 중단할 수 없었다. 올림픽 유치 선정 마감일인 1980 11 30일을 눈앞에 두고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가 떨어졌다.

 

1981 2월 하순,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제24회 올림픽대회 유치 신청에 따른 제반문서와 자료를 완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접수했다. 이로써 서울은 일본 나고야와 함께 올림픽 개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올림픽 개최권을 따낼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 IOC 위원이 있으니 0표의 굴욕은 없을 것이라며 안도하는 한심한 인사도 있었고, 올림픽 유치는 일본에 양보하고 1986 아시아경기대회나 열자며 일본과 물밑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이 10억달러 적자를 보았다는 소식에, 경제사정이 훨씬 좋지 않은 한국이 과연 개최해서 무슨 득이 있을까 하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았다. 1981 5 19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올림픽유치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민간기구로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정주영이 위원장을 맡아 ‘서울올림픽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해 6 9, 국제육상연맹회장 폴렌이 국제경기연맹(ISF) 조사단을 이끌고 23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그날 저녁 롯데호텔에서 열린 만찬에는 유치준비위원장 자격으로 정주영이 정부와 체육계 인사들과 함께 참석했다. 정주영은 중요한 견해를 피력했다.
   
   
“막대한 돈이 드는 올림픽 개최는 우리나라 경제에 큰 위험을 줄 거라며 반대가 큽니다. 그러나 올림픽 예산으로 짓기로 한 지하철이나 도로 공사 등은 올림픽과 관계없이 언젠가는 해야 할 일들이고, 이미 건설 중인 잠실경기장을 비롯한 여러 체육시설은 아시아경기대회를 위해 추진 중인 것이므로 이것 또한 올림픽과 무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림픽 개최를 위한 추가비용만을 계산하면 되는데, 그 금액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조롱과 반대뿐인 상황을 뚫고

1981 9월 하순의 IOC 총회를 앞두고 유치단은 9 20일 무렵 독일 바덴바덴에 집결, 막바지 활동을 벌였다. 현지 여론은 한국 유치단이 마치 금기의 땅에 발을 들여놓기라도 한 것처럼 혹독했다. 일본 개최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조롱과 반대뿐인 상황에서 한 사람이라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유치단은 온 힘을 다해 악전고투를 벌였다.

 

발전한 서울의 모습들로 전시실을 훌륭하게 꾸미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들과 미스코리아 입상자들을 안내요원으로 배치해 놓았다. 구심점은 당연히 정주영이었다. IOC 위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건네고, 방에 꽃바구니와 선물을 보내고 정성 들여 접대하며 전심전력 열과 성의를 다하는 모습에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국 MIT에서 유학 중인 정몽준 등 가족들도 힘을 보탰다.
   
   
투표 하루 전날인 9 29일 유치 도시 설명회가 열렸다. IOC 위원 80명 가운데 한국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직접 와본 사람은 몇 없었고, 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을 합쳐도 겨우 10여명뿐이었다. 나머지는 한국을 막연히 아프리카 수준의 후진국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15분짜리 한국 소개 영화를 상영했다. 빌딩숲, 외국인 쇼핑객이 넘치는 백화점, 선진국 못지않은 시설과 한국인들의 상냥하고 멋진 모습이 화면을 메우자 장내가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저기가 정말 한국의 서울이란 곳인가? 혹시 도쿄의 모습은 아닌가? 미국과 유럽의 대도시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이어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다소 가시 돋친 질문도 있었지만, 예행연습 그대로 훌륭히 답하여 청문회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9
30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한국의 시골 가을 같은 화창한 아침. 정주영의 얼굴도 하늘만큼 밝았다.
   
   
“하늘도 축복하는군요. 오늘 통일의 대문이 열리는 날입니다.
   
   
마침내 발표 시간, 사마란치 위원장이 단상에 섰다. 프랑스어로 “쎄울!” 첫마디에 대표단은 만세를 부르며 벌떡 일어섰다. 52 27, 기적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나고야를 압도한 것이다. 다음 날 정주영은 바덴바덴에서 가장 좋은 식당을 빌려 축하파티를 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한국인 밴드까지 초청했다.

 

IOC 위원들도 거의 모두 참석했다. 모두가 손에 손을 맞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했다. 정주영은 빙긋이 웃는 박정희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손기정 옹과 더불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서울올림픽을 결정한 IOC에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며 극찬했다.
   
   1980
년대 초 중소기업중앙회는 회관을 새로 짓게 되었다. 서울시의 배려로 여의도 땅 일부인 8925(2700)를 불하받았다. 대지는 확보했으나 자금 마련이 문제였다. 건물 규모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중앙회 임원들은 돈이 여의치 않으니 13220(4000) 정도로 짓자고 주장했으나, 회장 유기정은 무리를 해서라도 33000(1만평)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당장 형편이 안 된다고, 그 좋은 자리에 조그마한 건물을 세워놓으면 뒷날 틀림없이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인들의 긍지를 드높이기 위해서도 건물은 크고 우람해야 했다. 유기정은 현대건설 정주영을 찾아갔다
   
   
“정 회장님, 나만 보면 잘 봐 달라고 하시는데, 나도 한번 잘 봐 주십시오. 중소기업중앙회 회관을 짓는데, 공사비를 사정상 평당 120만원밖에 들이지 못합니다. 상공회의소 건물은 아주 그럴듯하게 잘 지어놓았는데 중소기업회관만 초라하면 형편 모르는 사람들 입방아에 오를 것 아닙니까?
   
   
그러자 정주영이 말했다.
   
   
“그래, 상공회의소만큼 으리으리하게 짓고 나서 돈은 평당 120만원만 받으라, 그 말이오?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좋소, 해 주지.
   
   
유기정은 깜짝 놀랐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오긴 했지만 그 또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공사비보다 50억원 이상 싼 가격이었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현대건설의 몫이었지만 정주영은 개의치 않았다. 삼화인쇄 창업자이기도 한 유기정은 그 배포와 결단에 감동해 큰절을 올리다시피 인사를 했다.
   
   
정주영은 문인 백 명을 초대해 울산의 현대 공장들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시인·소설가·수필가·극작가·평론가 등 다양했고 기자들도 몇몇 껴 있었다. 자동차공장을 찾은 일행은 그 방대한 시설이며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들, 빠져나오는 매끈한 차들을 보며 탄성을 연발했다. 조선소에서는 그 웅대한 규모에 압도당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제 한국인이 이런 기술을 익혔단 말인가. 감개가 솟구쳤다.
   
   
일정을 마친 뒤 정주영은 영빈관에서 만찬을 열고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데 슬그머니 ‘돈’ 문제로 이어졌다. ‘글쟁이들은 가난해서 뭘 하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 도와주십시오.’ 번갈아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어느 신문사 기자는 아예 구체적이었다.
   
   
2억이든 3억이든,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정 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참다 못한 한운사가 정주영을 위해 벌떡 일어나 말을 돌렸다.
   
   
“정 회장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 시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던 일제강점기, 그 시대를 생각하니 오늘 이 바닷가에서 구경한 것을 한국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가, 감탄하고 감격했습니다. 이런 것을 이룬 정 회장님의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사람과 돈의 만남이지요”

   장내가 숙연해졌다. 정주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고 할 거예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옛날엔 여기가 그냥 보통 해변이었지요. 바닷물이 밀려오면 철썩, 밀려갔다 또 밀려와서 철썩…. 거기가 이렇게 됐습니다. 5·16 군사정변 뒤 우리도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잘살아 보자고 말이에요.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르라고 해서 갔더니, 배 한번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하시잖아요. 제가 ‘무슨 수로 배를 만듭니까?’ 했더니 ‘배는 사람이 만드는 거지 어디 딴 동물이 만드나, 한번 연구해 보자’ 하시더군요. 나와서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강원도 산골 출신인 내가 배를 어떻게 만드나, 뭘 가지고 만드나, 돈은 어디서 나고?
   
   
소박하고도 거침없는 이야기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물 흐르듯 순하게 이어졌다. 자금 조달을 위해 무작정 울산 바닷가 사진을 들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던 일,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설득한 일,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겨우 수주를 받아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 시작했던 일들….
   
   
“언제나 고비가 있었지만 의지 하나로 극복해 왔습니다. 대한민국, 옛날엔 아무것도 없었던 나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살던 고장이었지만,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언제나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배짱을 존경하면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열심히 일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다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나직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 글 쓰는 분들을 나는 존경합니다. 옛날 강원도 고향 통천에서 어린 나이에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이광수의 ‘흙’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아니, 변호사가 될까도 생각했습니다. 부질없는 꿈이었고, 지금은 돈만 생각하는 사업가가 됐습니다. 선비는 자고로 청빈하다는데, 돈이 필요할 때가 있지요. 서울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가 말입니다. 그 길을 알면 그쪽으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돈 좀 내놓으라던 사람들까지 활짝 웃으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기뻐했다. 영빈관 만찬이 끝난 뒤 기념촬영이 있었다. 정주영이 맨 앞줄 한복판에 섰다. 사진사의 요청에 모두 조용해졌을 때, 정주영에게서 두서너 사람 건너에 있던, 늘 재치 넘치는 한운사가 물었다.
   
   
“정 회장님, 이게 무슨 만남입니까?
   
정주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람과 돈의 만남이지요.
   
   
그 자리에 있던 문인 백 명은 그 말을 다 들었다.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학을 하는 당신들은 사람이고, 경제를 다루는 자신은 돈이라는 비유였다. 어느 누가 이런 표현을 쉽게 할 수 있을까.
   
   1984
년 수필가 조경희는 예총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당선은 되었지만 사무실도 운영비도 없는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경희는 무엇보다 회관을 마련해야 했고, 그러려면 이동하기 편하게 자동차가 있어야 했다. 자동차를 구입할 돈을 마련하려 문공부 장관에게 호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걱정에 싸여 있던 어느 날,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조경희가 받고 보니 정주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런데 정주영이 다짜고짜 “화이트, 화이트” 하는 게 아닌가. 흰색 자동차가 마음에 드느냐는 말이었다. 조경희도 “화이트, , 좋습니다”라며 크게 대답했다.

 

그간 자동차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털어놓은 푸념이 정주영의 귀에까지 들어가, 흔쾌히 차 한 대를 주겠다는 전화를 한 것이었다. 검은색 차가 주류이던 시절, 조경희는 흰색 스텔라를 몰고 다니며 백일점이 되었다. 그 차를 타고 다니며 애쓴 결과 마침내 동숭동에 예총회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출처주간조선 2382    고정일 소설가

 

2015.09.23  정주영 탄생 100주년 청운동 자택 내버려두는 이유는?

▲매년 8 16일이면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집 앞은 수행원과 취재진들로 북적인다. 정 명예회장의 부인인 고() 변중석 여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범()현대가 식구들이 이곳에 집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이곳은 조용했다. 고인의 제사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자신의 용산구 한남동 자택으로 옮겨서 지냈기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은 큰형인 정몽필씨가 일찍이 교통사고로 죽은 뒤부터 사실상 장남 역할을 대신해 왔다. 2001년 정 명예회장, 2007년 변 여사가 별세한 이후 범현대가 식구들은 매년 3월과 8월이면 청운동 자택에 모여 제사를 모셔 왔다. 범현대가 식구들이 청운동이 아닌 곳에 모여 창업주 부부의 제사를 지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0
년 가까이 모셔온 제사 장소를 옮긴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지난 8 18일 종로구 청운동의 정주영 명예회장 자택을 찾았다. 서울 청운초등학교 뒤편에는 인왕산 끝자락인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언덕에 위치한 집들 사이로 난 골목길을 따라 걸어서 5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굳게 잠긴 회색 쇠문이 있다. 근처에 다가가 보니 집 주위로 푸른 나무가 우거져 있을 뿐 오가는 사람도 없이 한적했다.
   
   
이 철문 안쪽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자택이 있다. 철문 양쪽에는 5m가 넘는 높은 돌담이 있고 철문 안으로 오르막길이 한참 이어져 있다. 양쪽 돌담 너머로는 집이 각각 한 채씩 있는데 두 집 모두 정 명예회장의 이웃집들이다. 정 명예회장의 집은 철문 안쪽 오르막길을 더 올라가면 또 다른 철문이 나오는데 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 철문 밖에서는 집이 보이지 않는다. 외부인에게 보이는 것은 잘 가꿔진 소나무 몇 그루가 전부다.
   
   
정 명예회장이 40년 이상 살았던 이 집을 고인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바꾼다는 이야기는 2001년부터 꾸준히 나왔다. 올해도 정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 집을 고인의 생애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바꾼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 집에는 정 명예회장이 쓰던 낡은 구두와 TV 등 고인이 생전에 쓰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20여년 전부터 써온 소파와 17인치 TV 등 가구도 그대로 보존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을 느끼기 위해 후손들이 가구와 집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택의 관리를 맡고 있는 현대차그룹 측은 기념관 건립과 관련해 아직 별다른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룹 홍보팀의 한 관계자는 “이 집을 기념관으로 바꾸는 방안은 아직까지 검토 중일 뿐 확정된 사안은 없다”며 “변중석 여사의 기일을 올해 한남동에서 모신 이유는 청운동 자택 내부를 수리 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집이 아직도 세간의 관심을 받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때 재계 서열 1위에 있었던 옛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 명예회장은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엄청난 성공을 이룬 만큼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특히 정 명예회장이 1958년 지은 청운동 집은 호사가들의 단골 입담거리였다.
   
   
정 명예회장은 이 집을 짓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1961년 청운동 자택의 소유권을 등기한 그는 별세할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으로 일구기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매일 이 집에서 계동의 현대 본사까지 걸어서 출근했다고 한다. 자택과 사옥 간의 거리는 3㎞로 걸으면 45분 정도 걸린다. 매일 걸어서 출근하다 보니 구두 밑창이 일찍 닳았고 이를 막기 위해 굽에 징을 박아 신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워낙 큰 성공을 일군 이가 살던 집인 만큼 이 집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풍수가들은 이 집이 들어선 위치를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당이라고 평한다. 인왕산을 뒤에 두고 청계천을 앞에 둔 청운동은 예로부터 명당으로 꼽힌 곳이다. 특히 정 명예회장의 집이 위치한 인왕산 중턱은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궁궐터로 정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밖에서 집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특이한 점 중 하나다. 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아예 산 위에서 보면 모를까 오르막길인 집 아래쪽에서는 집 내부는커녕 건물 자체가 눈에 띄지 않는다.

 

청운동 토박이로 인근에서 부동산을 10년째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김모씨는 “실제로 집을 지을 당시 정 명예회장이 풍수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집터를 직접 골랐다”며 “풍수지리학상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집은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해 일부러 외부인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집을 지은 걸로 안다”고 했다.
   
   
지가도 꾸준히 올랐다. 1995년 ㎡당 40만원대(국토부 개별공시지가 기준)였던 가격은 매년 올랐다. 올해 기준으로는 ㎡당 241만원에 달한다. 정 명예회장 본인도 1998년 펴낸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에서 “우리집은 청운동 인왕산 아래 있는데 집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서 있고 산골 물 흐르는 소리와 산기슭을 훑으며 오르내리는 바람소리가 좋은 터이다”라며 자택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위치는 손꼽히는 명당이지만 집 자체는 검소하다. 슬래브 지붕에 2층집 구조로 된 건물이 ‘ㄴ’ 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다. 집터는 905㎡ 규모에 건물 연면적은 650( 196)쯤 된다. 생전에 검소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정 명예회장인 만큼 집에도 돈을 들이지 않았다.

 

공인중개사 김씨는 “(정 명예회장이) 워낙 집에 투자를 하지 않는 분이라 수십 년 된 집인데도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은 안 하고 그냥 사셨다”며 “고인들의 제사를 모실 때면 이곳에서 가족들이 모이기 때문에 지난 봄부터 장남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주도해 내부 공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빗물이 새거나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소규모 보수공사는 있었지만 눈에 띌 만큼 큰 공사는 아직까지 없었다는 설명이다.
   
   2001
년 정 명예회장이 별세한 이후 이 집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상속받았다. 하지만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현대가 일가는 없다. 대신 관리인 두세 명이 상주하면서 집 내부를 유지하고 관리하고 있다.

 

 본래 정 명예회장 아래에 있었던 관리인들도 재산이 상속되면서 함께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 소속으로 들어갔다. 관리인들은 “이 생가를 기념관으로 바꾸는 방안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며 구체적인 답변은 꺼렸다.
   
   
현대차그룹 홍보실 측은 “정몽구 회장이 사실상 장남이라 범현대가 전체를 대표해 청운동 집을 상속받았고 관리하기는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전체의 창업주인 만큼 청운동 집은 현대차그룹뿐만 아니라 범현대가 전체에 의미 있는 집”이라고 덧붙였다.

출처 | 주간조선 2373    | 배용진 주간조선 기자

 

10.15 왜 지금 '아산'인가①②  아산이 바라본 '경제적 민족주의'

2015년은 현대그룹의 창립자로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끌어낸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1915~2001)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스무 명의 학자들은 아산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번 연구에서는 ‘아산, 그 새로운 울림: 미래를 위한 성찰’이라는 주제를 ‘얼과 꿈’ ‘살림과 일’ ‘나라와 훗날’ ‘사람과 삶’이라는 네 권의 책으로 묶어서 문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아산의 삶과 사상을 새롭게 조망함으로써 거인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의미 분석과 가치 평가를 시도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아산을 소환(召喚)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아산이 우리 사회에 던지고 간 물음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산이 던졌던 물음들과 그에 대한 해법으로부터 우리의 사회문제 해결에 필요한 어떤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1998 10 27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부근에 마련된 소떼 방북 환송행사장에서 소의 고삐를 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응종 기자


아산의 ‘얼’에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산은 절대 빈곤과 농사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조부가 가르치는 서당에서 유학 경전들을 익히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으며, 이때부터 이미 ‘우리의 것’에 대한 가치를 체득하고 있었다. 청년 창업가로서 아산은 유교적 가치와 현대적 자본주의를 결합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경제적 민족주의’의 길을 모색했으며, 소비재 중심의 내수시장만이 대세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수출주도형 중화학공업에 승부수를 던지는 과감한 결행을 하였다. 이러한 아산의 시도가 실패했더라면 오늘날 우리 경제의 번영과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산은 경제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교육, 문화, 스포츠, 정치 영역에서도 광범위한 사회활동을 펼쳐나갔다. 우리는 경제대통령으로서의 아산의 모습뿐만 아니라 사회복지가, 문화예술계의 후원자, 체육지도자, 대통령 후보자로서 아산의 면모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77
년에 아산은 자신이 소유한 현대건설 주식 절반으로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여 가난하고 병든 소외계층에 희망의 빛을 던져 주었다. ‘바덴바덴의 기적’(1981)으로 유치한 서울올림픽 개최(1988) 역시 아산의 희생과 노력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아산의 꿈과 목표는 ‘근로자의 의욕’과 ‘직업인의 열의’ ‘국민의 희망’을 한데 모아서 ‘선진 한국, 통일 한국’을 완성하는 데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1992년의 대선 참여와 1998년의 두 차례 소떼방북 사건에서 아산의 정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아산이 구상한 한국형 경제발전 모델은 유교적 복지국가의 건설과 궤를 같이한다. 그리하여 아산은 사회복지, 교육복지, 의료복지와 같은 미래형 복지국가 건설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산의 삶과 사상에서 가난과 궁핍을 이겨낸 희망사상은 물론이고, 시련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담담지심(淡淡之心)’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산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철학이나 빅토르 프랑클의 로고테라피(의미치료)를 배우거나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유사한 철학적 사유세계를 향유하고 있었다. 전자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좌우명에서, 그리고 후자는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라는 좌우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①편에서 계속>

한국 현대사의 기적

여기에다 그는 문화발전적 통찰을 바탕으로 인류의 궁극적 목표인 문화복지국가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기에, 칸트의 최고선과 문화철학까지를 내용적으로 아우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산은 “나는 이 나라를 잘살게 할 수 있다”라는 문화발전론적 이념에 근거한 좌우명을 바탕으로 우리 후대가 앞으로 더 나아지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아산은 우리 자신들뿐만 아니라 기업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잘되도록’ 노력한다면, 전후 독일과 일본이나 현대의 중국처럼 10년 이내에 선진 문화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아산의 ‘선진국가 부상론(浮上論)’이다. 아산은 우리가 선진국가로 진입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인의 책임이 크지만 국민의 정치적 책임도 그에 못지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산의 문화사적 관점을 계승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 속에서 문화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역사적 활동에서 최고선()은 바로 문화이고, 이는 시간 계열에서의 무한한 전진이나 접근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산에게는 ‘운()’이란 그저 시간일 뿐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그 시간과 때를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가에 따라서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바르고 정의롭게 행위하려는 노력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제대로 기술하지 않을 경우에, 우리 후대의 그 누구도 우리 역사에 대해서 자긍심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아무도 우리 역사를 배우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산을 단순히 재벌 기업가나 경제인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의 문화적 관심과 이해 노력을 문학, 예술, 문화, 스포츠, 사상, 사회복지, 정치, 경제 등 전 영역으로 확대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아산의 지혜와 문화복지 자산들을 제3세계 시민들에게도 전파해 인류의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야말로 아산의 문화사관에서 강조되고 있는 인류문화의 발전이라는 문화·철학적 가치를 세계시민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아산의 가르침이나 우리 모두는 ‘미성숙성으로부터 계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칸트의 가르침은 큰 틀에서 볼 때 선진국가론이나 문화발전론을 지향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아산을 배우면서, 아산처럼 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를 선진국가로 우뚝 서게 하는 지름길이다. 100년 전, 아산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현대사의 ‘사건’이자 ‘현상’이고 ‘기적’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산의 진정한 모습은 ‘부유한 노동자’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통일된 문화복지국가의 건설을 그 자신의 정치적 최고선으로 상정했던 정치인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산을 소환하여 현 시대를 반성할 수 있는 거울로 삼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10.19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 탄생 100년- 기업인을 기억하지 않는 나라

오는 11 25일은 아산 정주영 탄생 100년이 되는 날이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는 각계의 관심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현재 거의 모든 미디어에서 정주영 탄생 100주년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다. 지난 8 26일부터는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도 발행되고 있다. 이 기념우표는 탄생 105년을 맞은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 발행되었다.
   
   
아산 정주영은 대한상공회의소가 2007년 일반인과 교수 및 현직 최고경영자(CEO)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 1(34.1%)에 뽑힌 바 있다. 특히 현직 CEO(50%)와 교수(27.7%)들의 아산에 대한 지지도(평가도·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아산 정주영은 항목별 여론조사에서 ‘한국 경제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기업인’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아산 정주영은 평소 “나는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을 해서 재화(財貨)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정주영에 대한 해외의 찬사와 평가, 인물연구는 지면으로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면, 홍콩의 경제전문 주간지인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는 1999 11월 ‘20세기 아시아 10대 인물’에 정주영 회장을 선정하면서 “정 회장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을 막강한 산업국가로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기업가이자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주도한 기업인이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놀랍게도 한국사 교과서에는 정주영·이병철 같은 기업가들은 아예 취급조차 되지 않거나 그들의 활동과 역할이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功보다 過만 기록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현재 고등학교에서는 기존 6종의 교과서와 신종(新種) 8종의 교과서를 합쳐 14종의 한국사 교과서가 사용되고 있다. 2011 8월에 나온 기존 6종 교과서는 현재 고3 학생까지만 사용하고, 1·2학년부터는 작년에 나온 8종의 신종 교과서로 공부하는 셈이다.
   
   
모든 한국사 교과서는 근·현대사 부분에서 우리의 경제성장 과정을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먼저 현재 고3들이 사용하고 있는 6(삼화출판사·천재교육·미래엔컬처그룹·지학사·비상교육·법문사) 교과서를 살펴보았다. 이들 교과서 중 ‘삼화출판사’ 한 곳을 제외하고는 정주영과 이병철을 언급한 교과서가 하나도 없었다.
   
   
‘삼화출판사’ 교과서는 6종 교과서 중 유일하게 이병철·정주영 회장의 사진을 넣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인 이병철은 삼성을, 정주영은 현대를 창업하여 한국 경제를 세계적인 규모로 끌어올렸다”라는 짧은 설명을 달았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소개하면서 그 공을 노동자와 유학생과 공무원으로 소개했을 뿐 기업인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박정희 정부’ 대신 그냥 ‘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기업가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전경련은 2011년 김종석 홍익대 교수, 박효종 서울대 교수, 전상인 서울대 교수 3인에게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중에 경제발전 과정 서술 부분의 정밀 분석을 의뢰한 바 있다. 김종석 교수(현 여의도연구원장)는 “당시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반()시장경제와 반기업 이념을 부추기는 내용이 많았다”며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경제발전의 기적적인 성공 역사와 그 뿌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미래에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정주영과 이병철이 빠진 그 공간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가 있을까. 6종의 모든 교과서가 노동운동가 전태일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래엔컬처그룹’의 교과서는 전태일의 생애를 한 쪽 전체를 할애해 다루었고, ‘천재교육’은 한 쪽의 3분의 1정도 분량으로 실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도 한번 살펴보았다. 기자가 살펴본 5종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정주영·이병철 회장이 언급된 곳은 없었지만, 전태일에 관해서는 5종 모두가 그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우리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설명하면서 기업과 기업인의 역할을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가 불거진 것은 2002년 검정을 통과한 7차 교육과정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부터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10년이 넘게 좌편향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현재 사용 중인 고교 한국사 교과서들. photo 전기병 조선일보 기자     


   
경제성장도 정치적 해석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교과서에 전태일을 게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제발전에 기여한 주요 기업과 기업인도 공정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교과서에서는 전혀 반영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더 큰 문제는 우리 교과서가 기업이 노동착취를 통해 부를 이루었다는 등의 기업에 적대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전경련 측의 우려처럼 실제 모든 한국사 교과서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역사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기저에 일관된 반()기업 정서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기업에 적대적인 기술 방식은 기존의 6종 교과서, 새로 발간된 8종 교과서 중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7종이 사실상 대동소이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두산동아’ 국사 교과서를 예를 들면, 경제성장 과정에서 정부와 대기업의 유착관계가 심화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대기업을 정경유착, 외환위기를 가져온 장본인으로 지목한 부정적인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저리 융자에 의존하여 기업을 확장하는 경영 방식은 한국 경제의 팽창을 촉진하였지만,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305)
   
   
“그러나 급격한 자율화와 경제 개방은 무분별한 외화 도입,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등 문제점을 드러내어 1997년 외환위기를 맞기도 하였다.(306)
   
   
‘미래엔’의 현대사 교과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중화학공업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반재벌적 묘사와 함께 경제성장을 정치적인 내용으로 비판하고 있다. 특히 1970년대에 꾸준히 성장이 이루어지고 임금도 상승하여 삶의 질이 향상된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기업 부담이 늘어나자 국민생활도 힘들어졌다. 이러한 경제적 고통이 가중되고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339)
   
   
‘조갑제닷컴’은 작년에 2014년부터 새로 사용되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8종을 분석한 ‘대한민국 교과서가 아니다’라는 책을 펴냈다. 한국사 8종에 대한 ‘분석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앞선 2011년에는 6종 국사 교과서의 왜곡 사례를 분석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거짓과 왜곡 바로잡기’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는 8종의 신종 국사 교과서 중 ‘천재교육’의 한국사 교과서 분석을 맡았다. 조갑제 대표는 “천재교육 교과서엔 전태일 같은 노동운동가, 이한열·박종철 같은 민주화운동가에 대해선 파격적인 지면과 사진으로 집중적으로 부각시켰지만 백선엽·워커·맥아더 같은 6·25 영웅과 이철승 같은 건국 공로자, 정주영·이병철·이건희 같은 세계적 기업인들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 국사 교과서가 ‘교학사’를 빼고는 민중사관으로 쓰였기 때문”이라며 “민중사관은 곧 계급투쟁사관이며, 이는 노동자·농민을 역사의 주역으로 보는 사관(史觀)이며, 소위 민주화 투쟁의 당사자를 역사의 주역으로 삼다 보니까 자연히 자본가와 기업인은 적으로 분류하거나 무시하는 서술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집필자의 역사관 때문에 이런 교과서가 탄생했다”고 분석했다.

 

노동운동가 전태일 사진과 전태일의대통령에게 드리는 글이 실린 비상교육 한국사 교과서(2013 8월 교육부 검정판). 대부분의 교과서가 기업과 기업인들의 역할은 다루지 않고 있다.  


  
반기업 정서 부추기는 교과서  

   현재 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문제를 두고 여야의 공방이 격렬하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10 7일 현행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대해 “출판사별로 일관되게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반()대한민국 사관으로 쓰여 있다”며 “좌파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학생들에게 민중혁명을 가르치는 의도로 보여진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2011년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 37명 중 28명이 2014년 교과서 집필에도 참여했다”고 밝혔다. 원 원내대표는 “한국사 교과서 7종의 근현대사 분야를 22명이 집필했는데 그중 18명이 특정 이념에 경도된 사람들”이라며 “‘전교조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조갑제닷컴’이 2011년 발행된 6종 교과서 필진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좌파 성향 교수와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대거 필진으로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9명의 교수 출신 필진 가운데 8명이 좌파 성향이며, 28명의 교사 출신 필진 가운데 9명이 전교조 출신이었다. 당시 분석에서 ‘조갑제닷컴’은 총 37명의 필진 가운데 적어도 19(51%)의 필진이 좌파 성향인 것으로 확인했다.
   
   
오랫동안 반()전교조 활동을 해온 이계성 반국가교육척결연합 대표는 “결국 기업에 대한 적대적 시각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민중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교과서를 만들었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우리를 배불리 먹고살게 해준 사람들이 정주영·이병철 같은 분들인데 이들을 적대시하는 교육을 펴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교과서의 편향성과 반기업 정서는 사실 한국사 교과서만의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자유경제원 현진권 원장은 “교과서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학습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문학, 역사 등의 교과서에서 매우 일관된 좌편향 행태가 드러났다”며 “과목은 달라도 서술 태도에 드러나는 문제점은 동일했다”고 말했다. 자유경제원은 교과서의 반기업 정서와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차례 연속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현진권 원장은 “자본주의에 살면서 자본주의(기업경제)를 스스로 부정하는 교육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말”이라며 “자라나는 학생들이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면 우리나라가 자유를 바탕으로 한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저커버그 같은 기업가를 키우려면

   한국사 교과서 분석에 참여했던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문제는 현재 이들 일부 좌파 사상가들에 의해 쓰인 교과서가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져 미래를 책임질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경련은 2011년 고등학교 일부 교과서가 반기업·반시장 이념을 부추긴다며 이를 시정해 줄 것을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에 건의한 적이 있다. 전경련은 당시 “세계 역사상 전례 없는 경제발전으로 노동자, 농민을 포함한 대다수 한국민의 전반적인 생활수준과 복지제도, 국가위상이 지난 50여년간 현저하게 상승하였음에도 우리 교과서는 외국자본 의존, 대외의존, 산업불균형, 빈부격차, 근로자와 농민의 희생이라는 부정확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자가 확인해 보니 전경련의 건의 이후에도 교과서에서 별로 달라진 내용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모든 교과서가 경제성장 부분을 다루기는 하지만, 곧바로 경제발전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해 이를 상쇄하는 기술 방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기업과 기업가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이렇게 애당초 누락하고 기술하지 않은 부분은 교육부의 수정권고 사항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김종석 여의도연구원장은 “우리의 경제발전은 박정희라는 리더십과 그 리더십에 호응한 민간 부문의 두 위대한 기업가(정주영·이병철)가 동시대에 살았던 결과”라며 “이 두 리더십의 보완적 협조가 없었으면 수출국가 건설과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많은 개발도상국가가 우리 경제발전을 흉내 내려 하지만, 민간 영역에서 정주영·이병철 같은 비전을 가진 기업인이 없기 때문에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과서는 이러한 경제발전 과정의 핵심을 뺀 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국은 교과서에서 훌륭한 기업인을 다루고 있는데 이런 토양 속에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위대한 기업가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주간조선 2015.10.12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6.11.28  정주영 탄생일’에 보는 위대한 ‘말(語錄)’

며칠 전 서울아산병원 1층 로비 한 모퉁이에서 ‘천금(千金)’이 담긴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A4 용지 1장 분량의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초대 이사장 말씀’이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이 마련한 인쇄물이었다.

 

 1915 11 25일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2001년 생을 마감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현대자동차는 작년 ‘정주영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크게 치렀다. 그러고 보니 지난 11 25일은 정 회장의 101번째 생일이다. 그의 어록을 잠시 읽어보자.

 

 “나는 젊었을 적부터 새벽 일찍 일어난다. 왜 일찍 일어나느냐 하면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의 기분은 소학교 때 소풍가는 날 아침, 가슴이 설레는 것과 꼭 같다. 또 밤에는 항상 숙면할 준비를 갖추고 잠자리에 든다. 날이 밝을 때 일을 즐겁고 힘차게 해치워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외국 학자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경제에는 기적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온 국민의 진취적인 기상, 개척정신, 열정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적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작은 일에 성실한 이를 보고 우리는 큰 일에도 성실하리라 믿는다. 작은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는 사람은 큰 약속도 틀림없이 지키리라 믿는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사람은 보통 적당히 게으르고 싶고, 적당히 재미있고 싶고, 적당히 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적당히’의 그물 사이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빠져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매한 짓은 없다.

 

“인간은 일을 해야 하고, 일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기심을 버린 담담한 마음, 도리를 알고 가치를 아는 마음, 모든 것을 배우려는 학구적인 자세,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야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정 회장의 ‘도전정신’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소중히 여긴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말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혹자는 기업 성장 과정에서의 정경(政經)유착, 인생 말년 대선(大選) 출마와 소떼 방북(訪北) 등을 거론할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그의 공과(功過)를 다투고 싶지 않다. ‘최순실 사태’로 국가리더십이 사실상 붕괴된 상황에서 정주영 회장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긴 큰 족적(足跡)을 되새김으로써 난국(難局) 해법을 잠시나마 생각해보자는 차원이다.

 

‘잠룡, 그 누구도 경제ㆍ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11 25일자《한국경제》의 1면 톱 제목이다. 이른바 ‘잠룡(潛龍)’이라는 자들이 민생(民生)ㆍ안보(安保)에는 귀를 닫고 촛불에 얹혀 자기 장사만 하며, 난국 수습책 대신 ‘표밭’ 생각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터뷰에 응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리더는 많은데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속수무책인데 각 정파 지도자는 각자도생, 아전인수이니 이게 바로 나라가 기울어지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신문은 “잠룡이 아니라 잡룡(雜龍)으로 불러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최근에 만난 전직 경제부처 고위 관료는 “근대화ㆍ산업화를 거치면서 우리는 위대한 리더십을 보인 훌륭한 정치인ㆍ기업인들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선대 리더십을 제대로 이어받지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위기와 관련해 “경제의 경우,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 수립한 경제 시스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대승적 차원에서 승화(昇華)하되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구조로 완전히 개조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와 경제 모든 것이 엉켜버린 지금, ‘정주영’의 반()이라도 되는 ‘리더’가 그립다.

[=백승구 기자]

 

◆ 막오른 정의선 시대, 빛과 그림자

2000 9월 현대자동차 그룹이 현대그룹과 결별, 독자그룹으로 출범했을 때 얘기다. 당시 재계에선 정몽구 회장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과연 현대차 그룹을 잘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경영능력’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때 현대그룹 CEO출신 K씨를 필자가 만난 적이 있다. K씨는 한때 잘 나가는 전문경영인이었다가 왕회장(정주영 창업주)의 눈밖에 나 쉬고 있었다. K씨는 “다른 것은 몰라도 정몽구 회장이 다른 형제들 보다 왕 회장의 사업가 DNA는 가장 많이 물려 받았다”면서 “주어진 사업만은 충분히 이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항간의 소문과 전혀 다른 주장이었다. 당시 필자는 K씨의 얘기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으나 그 후 현대차 그룹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K씨의 말에 동의했다.


정몽구 회장은 사실상 왕 회장의 장남이면서 그룹의 적통은 동생인 정몽헌(2003년 사망) 회장에 밀리고 ‘왕자의 난’으로 가까스로 자동차 부분을 분리, 독립했었다. 항간의 우려에도 자동차 그룹을 재계 2위 그룹까지 끌어올린 최고 경영자다. IMF이후 유수의 세계 컨설팅 회사들은 ‘한국에서 자동차 메이커는 힘들고 유명 메이커 생산기지가 맞다’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내기 바빴다. 그러나 현대차는 이를 보란 듯이 극복했다. 현재 현대차는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 우뚝섰다. 자동차, 제철, 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거대한 제조그룹이 됐다. 조선과 물류 부분을 빼고는 옛 현대그룹의 위상을 다 찾은 셈이다. 왕 회장이 그토록 염원했던 ‘일관제철소’의 꿈도 이뤄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과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조선일보 DB

 

이러한 현대차 그룹에 조용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의 시대를 알리고 있는 변화다. 그 첫 번째 신호탄이 지난 4일 동대문 플라자에서 있은 ‘제네시스’ 선포식이다. 제네시스는 새로운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다. 현대차가 이제 고급 차 부분에서 독일의 ‘벤츠’나 “BMW, ‘아우디’, 일본의 ‘렉서스’와 당당하게 경쟁하겠다는 ‘선전포고’다. 이 선전포고를 정몽구 회장이 아닌 정의선 부회장이 들고 나왔다. 정 부회장은 “이 날을 위해 10년을 기다렸다”며 “안주하는 것은 현대차 정신이 아니다. 제네시스를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전할 것”이라며 세계 자동차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왕 회장이 살아 있을 때의 정몽구 회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990
년대 초반 한 월간지에서 정몽구 회장의 기사가 실리자 기사를 주도했던 홍보 임원 보직이 바뀐 적이 있다. 이때 몽구 회장 측은 부친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아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불충’아니냐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번 ‘제네시스’ 로고 런칭은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현대차의 미래를 결정하는 행사장에 정의선 부회장이 등장, 이를 주도하도록 했다. 이로써 후계구도가 앞당겨질수 있다는 사실을 내외에 천명했다. 제네시스는 앞으로 현대차의 모든 고급 차량에 현대차 로고 대신에 쓰이게 된다. 어쩌면 현대차 역사상 대변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를 정의선 부회장이 주도하면서 재계 자동차 시장에 ‘정의선’을 알렸다고 할 수 있다.<②편에 계속

 

정의선 부회장이 제네시스를 들고 나온 이유

<①편에서 계속>

정의선 부회장의 전면 등장은 양날의 칼을 동시에 쥐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재벌가 3세들의 무임승차에 대한 세간의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전면에 나서면 부담이 따른다는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진정한 승계는 곧 있을 연말 인사에서 어떤 색깔을 낼 것인가에 귀착될 것이라고 그룹 안팎에선 진단하고 있다. 지난해 12 26일 현대차그룹은 인재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진행하는 형태의 정기임원 인사를 발표했다. 당시 정기임원 인사는 현대자동차 141, 기아자동차 60명 등 계열사 27곳 총 433명 규모의 임원승진 인사였다. 직급별로는 부사장 17, 전무 44명 등이었다. 연구개발, 기술부문의 승진자가 전체 대상자 중 가장 높은 43.6%를 차지했다. 핵심기술 경쟁력과 직결되는 R&D 부분의 승진에 주안점을 뒀다. 연구개발 및 품질, 영업 및 마케팅 부문의 승진자 비율 확대, 핵심 기술분야 신규 연구위원 승진 임명, 여성 임원 및 발탁 승진의 성과자 우대 등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라진다. 세계 1위 자동차 메이커인 폭스바겐이 국제적으로 코너에 몰린 상태에서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이 어부지리를 얻는 형국이다. 현대차가 얼마나 많은 과실을 딸 수 있을까는 오직 현대차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정기 인사는 ‘정의선 사람’들의 전면 등장을 예측할 수도 있다고 주변에서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또 하나의 관심은 현재 부회장으로 있는 인사들의 유임 여부와 더 확대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재 부회장으로는 정의선(현대자동차) 부회장을 비롯, 김용환(전략기획), 양웅철(연구개발), 윤여철(노무·국내생산), 이형근(기아자동차), 우유철(현대제철), 김해진(현대파워텍), 정태영(현대카드) 부회장이 있다. 한때 14명의 부회장이 있었으나 많이 줄어든 상태다. 정태영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사위이기 때문에 ‘오너경영인’에 가까운 인사다

 

▲2015 11 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현대자동차‘브랜드 비전 및 전략 발표회’에서 정의선 부회장이 고급차 전용 브랜드‘제네시스’공식 출범을 발표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이 보다 더 시급한 것은 지분 확보다. 현재 정의선 부회장의 현대차 지분 소유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정 부회장은 최근 현대차 지분 316만주를 확보했다. 매매대금은 5000억원에 달했다. 이를 두고 지분 승계 작업도 본격화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따랐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이 안심할 수 있는 지분을 확보하려면 현대모비스 주가와 현대글로비스의 주가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대차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모비스 주식을 갖지 않고 있는 정 부회장으로서는 모비스 주가가 하락하고 대주주인 글로비스(지분 23.29% 소유) 주가가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글로비스 주가가 생각만큼 오르지 않아 고민이다.


현재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따라서 순환출자 구조 중 현대모비스 지분의 확보가 곧 경영 승계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정의선 부회장은 기아차 주식 1.75%만 갖고 있어 승계 작업이 요원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때문에 업계에선 정의선 부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현금화하거나 현대모비스와의 합병을 추진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영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것 역시 정 부회장의 승계 시나리오에 넘어야 할 최대 관건이다. 1999년 현대차 구매실장, 2000년 현대차 국내영업본부 전무, 2008년 기아차 해외담당 사장을 거쳐 2009년 현대차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10년만에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며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됐다. 하지만 주주들 사이에서는 정 부회장이 아버지 그늘에 가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이 나왔다. 정 회장이 보여줬던 강력한 리더십이 정 부회장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정의선 부회장이 ‘제네시스’를 들고 나왔다. 승부를 걸겠다고 대내외에 천명한 셈이다. 제네시스로 차기 최고경영자(CEO)의 시작을 알린 만큼, 제네시스의 성패가 정의선 체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세계 고급차 시장이 연간 10% 이상씩 커가는 상황에서도 제네시스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경영능력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제네시스가 세계 고급차 시장에서 인정 받는다면 정의선 부회장의 승계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진다.


제네시스’를 들고 나온 정의선 부회장. 그의 성패는 3세 경영인에대한 ‘풍향계’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홍성추 작가

 

2016.03.09  1조 원을 깎아야 사는 현대그룹

현대그룹이 존폐 위기에 놓여 있다. 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핵심 계열사 현대상선 때문이다

현대상선은 최근 몇 년간 해운업계에 몰아닥친 불황의 파도를 맞고 침몰 중이다. 지난해 2535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2011년부터 5년간 내리 적자다. 올해 만기(4, 7)가 돌아오는 회사채 규모는 3600억 원. 내년부터는 부채부담이 1조 원으로 늘어난다.

현대그룹은 20개 계열사가 있지만 핵심 계열사인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엘리베이터가 그룹 전체를 먹여 살리는 구조다. 국내 엘리베이터업계 1위인 현대엘리베이터가 ‘캐시 카우(자금줄)’ 역할을 한다. 지난해 매출액 14487억 원, 영업이익 1565억 원으로 10%대의 영업이익률을 거두는 등 10년 넘게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해 냈다 

현대증권은 지난해 2976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매물로 나온 상태다. 현대상선은 현대증권의 최대주주이고,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상선의 최대주주다. 그동안 자금난에 빠진 현대상선은 현대증권의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현대엘리베이터로부터 차입금을 조달했다. 3형제 중 두 동생이 어려움에 처한 장남을 도와준 셈이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은 고민에 빠졌다. 놔두자니 회사가 망할 것 같고, 도와주자니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고…

 

급기야 채권단은 현대상선에 최후통첩을 했다. 자구안(自求案)을 들고 오라는 것이다. 자구안이 미흡하면 현대상선은 법정관리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현대증권을 매각하고 현대상선마저 잃으면 현대그룹의 존재는 유명무실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지난달 300억 원의 사재를 출연하고 이달 3일 현대상선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하는 등 강력한 경영 정상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채권단이 꼽는 최우선 과제는 용선료(傭船料) 인하. 용선료는 배를 빌리는 대가로 선주에게 지불하는 비용이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선박 125척을 운영하고 있다. 이 가운데 85척을 해외에서 빌려 쓴다. 용선료는 1015년의 장기계약으로 이뤄진다. 현대상선은 이미 오래전 맺어 놓은 장기계약 용선료 때문에 한 해 2조 원을 쓴다. 호황이면 상관없지만 불황에 연간 2조 원의 용선료는 치명적이다. 

채권단은 현재의 구조에서 현대상선에 추가 지원을 해도 그 돈이 해외 선주로 흘러 들어간다고 보고 있다. 이동걸 신임 산업은행 회장이 “목숨 건 협상을 해야 한다”며 용선료 인하 노력을 압박할 정도다 

현대는 현재 용선료 조정 실무단을 구성해 외국 선사들과 협상 중이다. 현대 측 요청은 “무조건 깎아 달라”는 것이다. 선사들에 매달려 용선료를 절반인 연간 1조 원 수준으로 낮추는 게 목표다. 


현대 측 논리는 이렇다. “지금 해운업 시황이 워낙 안 좋아서 싼 배들이 널려 있어. 근데 우리가 예전에 너희와 비싼 계약을 맺는 바람에 용선료를 많이 내고 있잖아. 만약 너희가 안 깎아주면 우리 회사가 법정관리로 들어가. 그러면 채무 동결로 너희한테 배를 돌려줘야 해. 너희도 배가 남아돌잖아. 그러니까 딱 잘라 절반으로 깎아주고 계속 용선료 받는 게 신상에 좋을걸?

대북경협 사업을 하는 현대그룹은 개성공단 폐쇄로 악재가 겹쳐 있다. 용선료 협상이 실패하면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1998년 ‘소 떼 방북’을 할 당시 현대그룹은 계열사 수 62개에 자산 73조 원으로 재계 1위였다. 그랬던 기업이 1조 원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2003년 남편 사별 이후 현대그룹을 떠안은 현정은 회장이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때다.◎
김상수 경제부 차장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