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4/ 삼성국
1 삼성家 가계도
2016.08.17 15:50
2016.01.13 삼성전자 올해 휴대폰 생산량 4억1312만대…작년보다 1.6% 감소
[삼성전자 내부보고서 단독 입수]
삼성전자는 올해 스마트폰과 피처폰(일반 휴대폰) 등 휴대폰 시장이 정체를 맞을 것으로 보고, 글로벌 휴대폰 생산계획을 작년보다 700만대 적은 4억1300만대로 하향조정했다. 또 삼성전자의 휴대폰 생산량 가운데 국내 생산 비중은 불과 6%에 불과했다. 삼성전자의 휴대폰 생산공장은 한국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6개국에 분산되어 있다.
프리미엄조선이 12일 단독 입수한 삼성전자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갤럭시 S 등 스마트폰과 피처폰을 올해 총 4억1312만대를 생산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작년 약 4억2000만대의 휴대폰을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수치에 근거해 보면 올해 생산물량은 작년 1.6% 감소한 수준이다.
삼성전자의 대표적 스마트폰인 갤럭시S는 2010년 6월 출시한 이후 2013년까지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HMC투자증권에 따르면,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2011년 3억3800만대, 2012년 4억1700만대, 2013년 5억1300만대의 휴대폰을 생산했다. 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업을 관할하는 IM사업부는 2013년 3분기에 영업이익 6조4000억원을 올려 분기별 영업이익의 최고수준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휴대폰 생산은 하향세를 타기 시작해 2014년 4억3100만대, 2015년 4억2000만대로 줄었으며, 올해에는 더 감소할 전망이다. 삼성전자의 휴대폰 생산량 감소는 인원 재배치, 감원과 마케팅 비용 축소로 이어질 전망이다. 또 삼성전자를 제일 큰 고객으로 두고 있는 홍보대행사 제일기획을 비롯, 그룹내 거래 계열사들의 수익성도 악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김현중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삼성전자 휴대폰의 국내 생산 비중은 6%에 불과하다. 국가별로 보면, 한국 약 2600만대(6.3%), 베트남 약 1억7200만대(41.7%), 인도 약 5400만대(13.1%), 중국 약 1억2850만대(31.1%), 인도네시아 약 1350만대(3.3%), 브라질 약 1898만대(4.6%)이다. 한국에서는 구미공장에서 전량이 생산되고, 중국에서는 톈진과 휘저우 공장에서 생산된다.
휴대폰 시장조사업체인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국내 구미 공장은 국내와 고가 제품 위주로 생산한다. 인도 공장은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 판매할 휴대폰을 생산한다. 인도네시아는 중국, 인도에 이어서 신흥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의 인도네시아 공장은 현지 시장용 제품을 만든다. 브라질 공장의 휴대폰은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시장에서 판매된다. 중국 톈진 공장의 제품은 주로 3세대 이동통신인 CDMA 제품으로 전 세계로 팔리고, 휘저우 공장의 제품은 중국 내수 시장에 주로 공급된다. 가장 많은 물량을 생산하는 베트남 공장은 특정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 시장에 휴대폰을 보급한다.
스마트폰 시장의 도래와 함께 삼성전자는 애플과 양강 구도를 이뤘다. 구미공장은 양강 구도를 형성하는 보급기지였다. 이곳에서 애니콜, 갤럭시의 신화가 탄생했지만, 인건비 상승과 외국 공장의 물량 확대로 내년 구미공장의 생산 비중은 불과 6.3%에 그치게 됐다. HMC투자증권은 "2006년에는 구미공장에서 8000만대 규모의 휴대폰이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 때와 비교해보면 올해 구미공장의 생산량은 32%에 불과하다.
삼성전자 휴대폰의 주요 생산지는 베트남과 중국 공장이다. 이 두 나라에서 72.7%를 만든다. 인건비 등 생산비용과 유통비용을 낮추기 위해 구미공장 대신 외국공장 확충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이다. 인건비만 보면 베트남 공장이 제일 낮다. 삼성전자는 작년에 인력 재배치 차원에서 구미공장의 차장급 직원 100명을 베트남 공장에 재입사시키기도 했다.
삼성전자가 한해에 생산이 가능한 휴대폰 수는 5억대로 추정된다. 올해 계획대로라면 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업부 가동률은 82% 수준이다. 노근창 HMC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프리미엄조선이 입수한) 삼성전자의 올해 생산계획대로라면, 2013년 95%로 최고치를 기록한 삼성전자의 휴대폰 공장 가동률은 올해 최저치에 근접하게 된다”며 “휴대폰 수요가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정 비용이 적은 곳 위주로 생산기지와 인력을 배치할 수 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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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 다시 보는 후쿠다 보고서
지금부터 꼭 23년 전쯤이다. 1993년 6월 6일 프랑크푸르트 출장을 떠나는 이건희 회장의 가방에 후쿠다 다미오 당시 삼성전자 고문이 작성한 서류가 담겼다. 그 유명한 '신경영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후쿠다 보고서'였다. 거기엔 일본 교세라 출신인 후쿠다 고문이 제안한 의견이 삼성 조직에 하나도 먹혀들지 않는 사례들로 가득했다.
10여년 전 취재 과정에서 구한 '후쿠다 보고서'에는 흔히 알려진 13장짜리 '경영과 디자인'(1993.3) 보고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룹 주요 임원들에게 '사내한(社內限)'으로 배포된 56장짜리에는 '삼성전자가 확보해야 할 기술에 관한 제언'(93.1), '상품 개발 프로세스에 관한 제언'(92.5), 사업부제 실시에 따른 디자인 매니지먼트 방안'(91.10) 등 후쿠다 고문이 쓴 총 4건의 보고서가 있었다. 당시 3년째 삼성전자에 몸담고 있었던 후쿠다 고문은 앞서 수차례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이건희 회장에게는 전달도 되지 않고 사장(死藏)됐던 것이다.
얼마 전 '후쿠다 보고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는 당시 후진적인 삼성전자의 수준에 대한 질타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 봐도 참고할 내용이 많았다. 우선 이건희 회장은 왜 디자인 전문가인 후쿠다의 보고서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후쿠다 보고서를 읽다 보면 관통하는 키워드는 '디자인'이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제대로 된 개혁을 하려면 근본부터 바꾸라'였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 회장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안팎에서 '삼성 제품은 디자인이 문제'란 얘기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후쿠다 보고서 곳곳에는 '디자인이란 색(色)이나 모양(形)이 아니다'는 대목이 나온다. 기구(機構) 설계와 금형 기술은 하류(下流)적 디자인이고, 핵심 디자인이 상품 기획이라고 했다. 삼성은 상품 기획부터 안 된다며 상품 기획서에 담아야 할 25개 세부 항목까지 적시했다. 그리고 보고서 말미에 '삼성의 문제'를 이렇게 요약했다.
'삼성의 문제는 상품 기획의 문제, 기구 설계의 문제, 경영 전략의 문제, 자사 보유 기술 문제, 관련 회사의 문제, 디자인 결정 방식의 문제, 구매 문제 등이 혼재돼 있다. 이유를 명확히 하지 않기 때문에 전부 디자인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 (어느 하나만 고쳐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디자인 문제만 해결한다면 대증(對症) 치료법일 수밖에 없다.'
후쿠다의 23년 전 삼성에 대한 진단은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접목해도 유효할 듯하다. 우리가 맞은 위기는 정치나 경제 등 어느 한 분야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 대신 대증적 처방만 쏟아지니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사건이 터지면 즉흥적이고 감성적인 대응에 너무 쏠린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후쿠다 보고서'가 필요하다. 물론 이 보고서를 제대로 이해할 리더의 필요성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2017.06.29 아놀드 파머가 이병철 삼성회장에게 해준 원포인트 레슨
1997년 6월 2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양CC. 지인들과 오후 1시쯤 라운드를 시작했는데 앞 조에 누가 휠체어를 타고 페어웨이를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페어웨이에는 카트도 진입금지인데 휠체어가 다니는 게 이상해 캐디에게 물어보았다. 주인공은 김기수씨(전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1941~1997)였다.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았지만 워낙 골프를 좋아하다 보니 골프장 허락하에 휠체어를 타며 한 손으로 자치기를 하듯 샷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8일 후 그의 부음(訃音)을 들었다.
이 세상에 골프를 사랑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김기수씨에 이어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1901~1987)을 들까 한다. 이 회장 역시 혼자 걷기 힘들 정도로 병이 깊었지만 별세하기 21일 전인 1987년 10월 27일 안양CC에서 해질 무렵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불을 켠 채 생애 마지막 라운드를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회장은 평생 못 이룬 세 가지가 자식, 조미료 사업(미원), 골프였다고 한다. 남들이 일생 동안 한 번도 못 하는 홀인원을 세 번 기록할 정도면 아마추어 골퍼로서는 소원을 성취한 셈인데 골프 욕심은 정말 남달랐던 모양이다.
이 회장은 1970년대 중반, 당시 골프 황제였던 아놀드 파머(1929~2016)를 경기도 군포에 있는 안양CC에 초대해 동반 라운드를 했다. 이 회장은 드라이버샷 300야드를 넘게 날리는 파머에게 기가 눌려 라운드 중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고 한다. 라운드 후 식사를 하면서 초청료 5만달러(현재 가치로는 100만달러 이상)가 마음에 걸렸는지 파머는 이 회장에게 원포인트 레슨으로 ‘Head Up!’을 적어 건넸다.
세계적인 프로골퍼가 골프 잘 치는 비결로, 팁을 준다는 게 고작 헤드업 주의하라는 것이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실망스럽긴 하지만 아마추어 골퍼에게는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 ‘머리 들지 말기’ 아닌가. 골프 시작할 때 누구나 코치에게서 듣는 소리가 “어깨 힘 빼는 데 3년, 헤드업 고치는 데 3년”이다. 하지만 아마추어에게는 평생 동안 고치기 힘든 게 이 두 가지다.
얼마 전 에이지 슈터를 기록한 바 있는 40년 구력의 70대 중반 유명 인사와 라운드를 했는데, 그 역시 18홀 동안 서너 차례 헤드업을 하며 미스샷을 저질렀다. 필자는 10여년 전 지인에게서 원포인트 레슨을 받고 비교적 헤드업을 적게 하고 있다. 그는 “매번 샷하기 전, 춘향이가 옥(獄)에서 목에 칼 찬 걸 연상해 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도 꽤 효과를 보고 있다.
오래전 라운드에서, 어떤 동반자는 골프화에 ‘MDK라고 써 놓았길래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너스레를 떨면서 하는 소리가 “M(머리) D(들면) K(개XX)”라고 하지 않는가. 하도 헤드업이 고쳐지지 않길래 어드레스 때 눈 아래의 글귀를 쳐다보며 각성을 한다고 했다. 그래도 고개를 들면 골프화에 침을 뱉는다고 해 세 명의 동반자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헤드업 방지에는 적지 않은 효과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엔 고개를 끄떡인 기억이 난다.
출처 | 주간조선 2463호
2 정권의 탄압
2016.07.29 항거불능자에 칼질: 삼성 이건희 회장을 이렇게 대접할 수 있나?
▲ 삼성 이건희 회장 / 사진출처=조선DB
최근 발표된 포춘 잡지의 연례(年例) 행사인 ‘그로벌 500대 기업 랭킹’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매출액 기준으로 작년에 이어 세계 13등이다.
1. 월마트 매출액 4820억 달러
2. 중국電力회사 3296억 달러
3. 중국국영석유회사 2993억 달러
4. 중국석유化工그룹(Sinopec Group) 2943억 달러
5. 로열더치셀 2722억 달러
6. 엑슨모빌 석유 회사 2462억 달러
7. 폭스바겐 2366억 달러
8. 도요타 자동차 2365억9200만 달러
9. 애플 2337억 달러
10. BP 2260억 달러
11. 버크셔 해서웨이 2108억 달러
12. 맥키슨 1925억 달러
13. 삼성전자 1774억 달러
14. 글렌코어 1705억 달러
15. 중국상공은행 1672억 달러
16. 다임러(벤츠) 1658억 달러
17. 유나이티드헬스그룹 1571억 달러
18. CVS헬스 1533억 달러
19. EXOR그룹 1526억 달러
20. GM 1524억 달러
21. 포드 자동차 1496억 달러
22. 중국 건설 은행 1479억 달러
23. AT&T 1468억 달러
24. 토탈 1434억 달러
36. 혼다 자동차 1216억 달러
44. 아마존 1070억 달러
삼성전자는 제조업 회사로서는 독일의 폭스바겐, 일본의 도요타, 미국의 애플에 이어 세계 4위이다. 산업혁명을 세계에서 가장 늦게 시작한 나라가 이런 회사를 배출한 것이다. GM, GE, 포드, 다임러(벤츠) 같은 세계적 대기업이 삼성 아래이다. 작년에 미국 시애틀에 갔을 때 교민들이 '이곳은 마이크로소프트, 보잉, 스타박스의 본사가 있는 도시이다'고 자랑하길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삼성전자는 그 세 개 회사의 매출액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회사입니다. 나는 삼성전자가 본사를 둔 서울에서 왔습니다.'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한 때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관광수입액을 합친 것과 비슷하였다.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작년 인터브랜드의 年例 조사 결과 세계 7위였다.
•Apple (#1, +43%)
•Google (#2, +12%)
•Coca-Cola (#3, -4%)
•Microsoft (#4, +11%)
•IBM (#5, -10%)
•Toyota (#6, +16%)
•Samsung (#7, 0%)
•GE (#8, -7%)
•McDonald’s (#9, -6%)
•Amazon (#10, +29%)
삼성전자를 포함한 삼성그룹의 부가가치 생산액은 한국 GDP의 약 10%로 추정된다. 이는 인구가 2억을 육박하는 방글라데시와 거의 같은 규모이다. 삼성전자의 수출액은 인구가 8000만 명이 넘는 터키의 그것과 비슷하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삼성그룹과 관계하면서 먹고 사는 인구는 100만 명을 넘을 것이다.
‘삼성’ 하면 일류(一流)를 연상하게 된다. 과거 이병철 시대엔 국내 일류(一流)였지만 이건희 시대로 넘어와서는 세계 일류(一流)로 올랐다. 한국의 국가 목표가 자유통일을 한 다음에 일류국가를 만드는 것이라면 먼저 세계 일류가 된 삼성이 한 교과서일 것이다.
삼성은 기업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류성(一流性)을 실증(實證)하였다. 삼성이 손을 대면 일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삼성의료원, 성균관대학, 리움 미술관.
삼성의료원을 통한 장례예식 개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한국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리움 미술관은 전국 국보(國寶)의 약 12%를 점하는 47개를 소장하고 있으며 훌륭한 현대미술품도 사들여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미술관이 되었다.
이런 일류를 만든 사람들이 일류이고 그런 일류를 지도한 사람은 더 일류이다. 삼성의 성공엔 물론 돈의 힘이 결정적이었지만 돈을 많이 버는 능력만으론 일류가 되지 않는다. 돈을 잘 쓰는 능력이 결합되어야 일류를 만든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은 교양과 인격, 그리고 公的 마인드를 가진 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인격(人格) 없는 전문가는 잘 훈련된 개와 같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로 오늘의 삼성이 만들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확고한 오너십의 뒷받침을 받는 교양 있는 전문가 그룹이 투명한 경영을 해야 세계 일류 기업을 만들 수 있다. 삼성은 세계 최강의 기업 모델을 만든 회사이다.
세계 일류 기업이 많아야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 포춘 글로벌 500 랭킹에 들어간 회사가 나라별로 몇 개인가를 집계해보면 국력 랭킹으로 나타난다.
1. 미국 134개 회사
2. 중국 103개 회사
3. 일본 52개 회사
4. 프랑스 29개 회사
5. 독일 28개 회사
6. 영국 26개 회사
7. 한국 15개 회사
7. 스위스 15개 회사
9. 네덜란드 12개 회사
10. 캐나다 11개 회사
500대 기업 수 랭킹에서 한국이 7위라는 사실은, 한국이, ‘인구 5000만 이상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PPP기준)이며, 민주주의를 하는 일곱 나라’ 중 하나라는 점과 관계가 있다. 경제력은 민주주의와 복지의 바탕이다. 한국의 민주화와 복지는 삼성전자로 상징되는 대기업의 기여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안정된 일자리와 소득을 제공하고, 세금을 많이 내어 강력한 상비군을 유지하며, 과학과 기술 발전의 요람과 무대가 되고,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각종 문화 예술을 뒷받침하는 것이 경제력이고 이의 가장 많은 부분을 제공한 것이 삼성그룹이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인만큼 평균 수명이 늘고 평균 체격이 커진 나라는 없다. 사람의 운명이 달라진 것이다. 이 또한 경제력의 뒷받침이 있어 가능하였다. 대학 진학률 80%라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교육열도 돈의 힘이 있어 가능하였다. 이런 문명건설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회사가 삼성전자이고 가장 큰 공을 돌려야 할 분은 이병철(李秉喆), 이건희(李健熙) 두 사람이다. 인간의 도덕성을, ‘남의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측정한다면 두 사람은 한국인들 중 가장 도덕적인 인물이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을 창업할 때 기업 철학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인재제일(人才第一), 합리경영(合理經營), 사업보국(事業報國)
李 회장은 유교적 윤리에 자본주의의 합리정신을 접목시킨 위대한 기업 철학가였다. 아버지의 死後 삼성그룹의 총수가 되어 30년간 삼성을 이끈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 안목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회사를 세계 제일의 회사로 키웠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경제적으로 호령하는 ‘글로벌 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아버지와 다른 차원의 또 다른 위대한 기업인이다.
이건희 회장은 2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 그의 아들이 경영을 책임지고 불황 속에서도 선전(善戰)하고 있다. 분기(分期)별로 상성전자의 영업실적이 발표될 때마다 “그래도 참 잘 버티어주네”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고마워하는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삼성의 흥망(興亡)이 바로 대한민국의 흥망으로 직결되지는 않겠지만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무한경쟁의 세계 경제 무대에서 뛰는 한국의 대표 선수이다. 이건희, 이재용은 김연아 선수와는 다른 차원의 응원을 기대할 자격이 있다. 국민들(정치인, 언론인, 관료, 지식인, 종교인들까지도)은 이런 선수를 지원해야 할 의무와 실리(實利)가 있다.
최근 한 방송이 이건희 회장의 私生活을 몰래 촬영한 동영상을 공개하였다. 유튜브에도 올라가 조회수가 1000만에 육박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신성(神聖)한 것으로 간주하여 보호하는 개인의 사생활을 몰래 찍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이를 공개하는 것은 범죄이다.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와 公人의 특수성을 들어 이런 공개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이 경우엔 설득력이 없다.
1. 공개된 동영상은 이건희 회장의 허가 없이 몰래 찍은 것이고, 그 내용은 국민 다수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안이 아니다. 훔쳐보기 습관이 없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영상이다. 개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거나 공분(公憤)할 것도 없는 동영상이다. 화장실에 CCTV를 설치하여 찍은 동영상을 방송으로 공개하면서 “찍힌 사람이 공인(公人)이니 공개할 권리가 있다”고 강변하는 격이다.
2. 언론계에선 문제의 동영상을 가진 인물이 복수의 언론사와 접촉, 돈을 받고 넘기려 한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 동영상을 방영한 방송사는 이 의혹에 대하여 해명할 의무가 있다. 비윤리적으로나 불법적으로 취득한 정보를 돈으로 매수하여 방송하였다면 이는 언론의 정도(正道)를 벗어난 것이다. 언론은 뉴스 소스를 보호하기 위하여 감옥에 가더라도 침묵해야 한다는 속설(俗說)이 있지만 이 사건엔 해당되지 않는다. 누구나 감추고 싶어 하고 또 감추어야 하는 행위를 몰래 촬영한 동영상을, 방송을 통하여 공개하면서 촬영한 경위와 촬영한 사람, 그리고 이 동영상을 입수한 경위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는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취득 경위를 공개할 용기가 없다면 공개하지 않았어야 했다. 명예훼손에도 윤리가 있다.
3. 최근 플로리다 주 파이넬러스 카운티 법원 배심원단은 프로 레슬러 호건의 성관계 영상을 공개한 가십 뉴스사이트 거커(Gawker) 측에 위자료와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1억1500만 달러(약 1337억 원)를 지급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성관계 영상이 일반에 공개돼 호건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대가 6000만 달러(697억5000만 원), 징벌적 손해배상금 5500만 달러(639억3000만 원) 등이다. 호건 측은 '유명인이라도 사생활은 보호돼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거커 측은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내세웠다. 호건 측 변호인 데이비드 휴스턴은 재판이 끝난 뒤 성명을 통해 '이번 재판은 비단 호건의 개인적 승리가 아니다'면서 '황색 언론에 피해를 본 모든 사람의 승리'라고 밝혔다.
4. 독재와 전체주의의 차이는 사생활(私生活) 보호 여부이다. 독재는 인간의 공적(公的) 생활을 통제하지만 사생활엔 간섭하지 않는다. 전체주의는 다르다. 가정을 포함한 사생활까지 간섭한다. 자유민주국가에선 이건희의 사생활이든 노숙자의 사생활이든 그 누구의 사생활도 신성하다. 인간이면 누구나 사생활 중에서도 가장 깊게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람을 사서 몰래 카메라를 부착시킨 후에 들여보내 촬영을 하고 이를 세계 앞에서 공개하는 것은 사생활의 파괴를 넘어서 공동체 파괴 행위, 즉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그런 짓을 언론 기관이 언론의 이름으로 자행하였다고 하더라도 전체주의적이고 인간성 말살이며 모듬살이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신뢰관계도 깨는 反공동체적 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법치주의는 언론에 한하여 사생활을 넘볼 수 있는 특권을 준 적이 없다.
5. 이 방송은 재판정의 판사처럼 ‘성매매’라고 단정하였다. 공개된 동영상에선 마사지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보도에 반론을 해야 할 이건희 회장은 2년째 의식불명인 채로 병석에 누워 있다. 말하자면 항거 불능인 상태이다. 삼성그룹도 ‘회사 차원이 아니라 개인 차원의 문제 운운’하면서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못한다. 이 방송은 항거 불능인 인물에 대하여 비수를 꽂은 셈이다. 몰래 촬영한 동영상은 비윤리적 행위이고, 그런 결과물을 방송으로 공개한 것은 범법행위인데 이보다 더한 부도덕은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 항거 불능의 노인을 향하여 이런 짓을 했다는 점이다. 反인륜적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사실 보도에 국익(國益)은 부차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회장에 대한 이런 보도가 삼성전자의 해외 판매에 미칠 영향은 고려 대상도 아닌가? 미국 언론이 스티브 잡스를 이렇게 까발린 적이 있나?
6. 이건희 회장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 방송사는 부도덕한 짓을 하면서도 李 회장의 부도덕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자축할지 모른다. 가장 많은 한국인들에게 먹고 살면서 즐길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건희 회장은 한국인 중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다. 선비나 종교인의 도덕과 기업인의 도덕은 같을 수 없다. ‘혼자서 고고(孤高)’하기란 오히려 쉽다. 밤낮이 없는 세계시장에서 남보다 좋은 물건을 남보다 빨리, 남보다 싸게 만들어 팔기 위한 무한경쟁의 현장에서 도덕성은 과정이라기보다는 결과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은 한국 기업인의 애환(哀歡)을 요약한다. 세계에서 反기업 정서가 가장 강한 나라가 한국으로 꼽힌 적이 있다.
한국의 기업인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마라톤을 하고 있는 격이다. 그렇다고 부자와 기업인은 하루 열 끼를 먹나? 김정일처럼 한 끼가 300만 원하는 식사를 하나? 잠을 하루에 30시간을 자나? 기업인에겐 하루가 100시간인가? 한국의 기업인 치고 외국의 부자처럼 펜스를 친 다음 왕국처럼 꾸미고 그 안에서 말 달리고 사냥하는 사람이 있나?
기업인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좋지만 그 기준은 달라야 한다. 천재에게 ‘예절’을 요구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 정도는 달라야 한다. 이건희 회장에게 사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한국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제대로 기능한다고 볼 수 없다.
7. 이런 농담이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보통사람.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정치인.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기업인.>
이건희 회장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건강을 해치고 병석에 누워 있다. 가장 깊숙한 사생활 동영상을 몰래 찍어 全세계 앞에서 공개한 행위야말로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행위일 것이다.
<하인에겐 영웅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영웅이 영웅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하인이 하인이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가장 위대한 이야기'(The greatest story ever told)로 불리는 대한민국 70년의 10대 영웅 중 한 분이다. 그런 영웅을 하인처럼 대우해선 안 된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보듯이 그를 영웅처럼 대접해야 한다. 이건희 회장뿐 아니라 그런 인물, 그런 회사를 만드는 데 수고를 보탠 우리 모두가 영웅이니까(문제의 방송사 기자는 빼고).
이건희 회장의 쾌유를 빈다.
글 | 조갑제(趙甲濟)조갑제닷컴대표
2017.08.26 이재용 5년형 선고 이유가 '마음속 청탁'이라니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가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측에 승마 지원과 동계스포츠재단 지원을 통해 뇌물 88억원을 준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삼성이 경제정책에 대해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에게 (경영 승계 과정의) 도움을 기대하고 거액 뇌물을 제공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다만 삼성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204억원에 대해선 '청와대가 전경련을 통해 결정한 것에 대해 수동적으로 응한 것'이라며 무죄라고 판단했다.
이 사건 핵심 쟁점은 2015년 7월 25일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 2차 독대가 있은 후 삼성이 최순실-정유라 모녀를 지원한 것이 박 전 대통령이 경영권 승계를 도와준 대가였느냐는 점이다. 삼성은 "독대에서 박 전 대통령이 승마 지원이 지지부진하다고 역정 내며 승마협회에 파견된 두 삼성 간부 교체를 요구했다"면서 "대통령의 질책에 깜짝 놀라 승마 지원에 나선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역시 독대 1주일 전에 이미 이뤄진 상태여서 선후(先後) 관계로 볼 때 승마 지원 대가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독대에서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명시적(明示的)으로 청탁한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에게는 경영권 승계라는 현안이 있었고, 이 부회장은 승마 지원이 최순실에 대한 지원이며 그것은 곧 대통령에 대한 금품 제공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묵시적(默示的) 부정 청탁'을 주고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사이에 경영권 승계에 관한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이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도와줄 걸로 기대하고 승마 지원을 했고 박 전 대통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경영권 승계를 도왔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부회장이 서로 마음속으로 청탁을 주고받았는지는 이들 마음속에 들어가보지 않는 이상 확인할 수 없다. 두 사람이 이심전심 청탁을 주고받았을 수도 있고, 반대로 박 전 대통령의 요구에 이 부회장이 어쩔 수 없이 응한 것일 수도 있다. 이쪽이면 유죄고 다른 쪽이면 무죄다. 이는 증거가 아니라 판사의 판단에 달린 문제다.
형사재판은 민사재판과 달리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재판이다. 그래서 형사재판의 대원칙은 합리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혐의가 입증될 때 유죄를 선고한다. '두 사람이 말은 안 했어도 마음속으로 청탁을 주고받지 않았느냐'는 추정은 과연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형사재판에서 양쪽 가능성이 다 있다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법률을 적용하는 것도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엔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법률을 적용했다.
삼성뿐 아니라 큰 기업치고 현안이 없는 기업이 없을 것이다. '마음속 청탁'이라는 판단 기준이라면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을 낸 기업 모두가 뇌물죄에 해당할 수 있다. 다른 기업 모두 현안이 있었는데 이 경우엔 대통령에게 바라는 마음을 품었다고 보지 않는 이유는 뭔가. 이 부회장에 대해 이 부분만 뇌물에서 제외한 것은 법리 때문이 아니라 다른 기업 전체를 뇌물죄로 모는 데 대한 부담 때문 아닌가.
이 부회장은 대통령 앞에 불려가 승마 지원을 제대로 안 했다고 질책당한 처지다. 재판부 논리대로라면 이 부회장은 승마 지원을 강요한 대통령 요구를 거절했어야 유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다면 이 부회장은 재판부 표현대로 '경제정책에 대해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으로부터 보복(報復)당했을 것이다. 이 부회장 처지에서 보면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보복을 당하고, 들어주면 뇌물죄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어떤 한 사람이 스스로 먼저 한 행위도 없이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이런 처지인 사람에게 5년 실형을 선고하는 것이 법적 정의인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최초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정리했다. 이것을 특검이 들어오면서 '뇌물 사건'으로 성격을 바꿨다. 새 정권은 이 재판을 국정 과제 '제1호'로 내세우고 유죄판결을 이끌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의 뇌물 수수가 유죄로 인정돼야 새 정부의 도덕적 정당성이 더 강화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이 부회장을 희생양으로 이용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어쨌든 1심은 새 정권과 특검 측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은 사법부가 유형무형으로 쏟아지는 법정 밖 압력에 개의치 않고 법과 증거에만 입각해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느냐는 측면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청와대는 재판 진행 도중 청와대 캐비닛에서 발견됐다며 문서들을 특검을 통해 제출했다. 심지어 현직 장관급 인사가 재판정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첫 번째 구속영장을 기각했던 판사에게는 '삼성 장학생' '아들 취업 약속' 등의 매도 문자 폭탄이 쏟아지고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세기의 재판'이라 했던 사건이다. 국민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명쾌한 판결을 기대했지만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정치 외풍과 여론 몰이 속에 진행된 재판의 판결 이유가 석연찮은 '이심전심의 묵시적 청탁'이다. 상급심의 판단을 주목한다.
조선일보 사설
2018.02.05
· 이재용 항소심, 특검의 完敗... '무리한 수사' 였나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433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50)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 결과는 이 부회장 측의 완승이었다. 이 재판은 ‘세기(世紀)의 재판’이라고 불릴만큼 관심을 모았다.
1심에서는 뇌물공여와 횡령, 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 국회 위증 등 5개 범죄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됐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최씨의 딸 정유라씨 승마지원 일부만 뇌물로 인정하고, 나머지 혐의에 대해선 모두 원심을 파기했다.
이에 따라 이 부회장의 형량도 징역 5년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형으로 감형됐다. 이 부회장은 구속 353일만인 5일 오후 풀려났다.
이번 재판 결과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특검이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됐다./성형주 기자
· ◇특검의 ‘무리한 수사’ 결론
이번 재판에서 다툰 이 부회장의 범죄 혐의는 모두 다섯가지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작년 2월 이 부회장을 기소하며 정유라씨 승마지원 213억원(약속 135억원 포함)과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원,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 16억원 등 총 433억원의 뇌물 공여 혐의를 적용했다. 또 이와 연결된 횡령, 범죄수익은닉, 재산국외도피 혐의를 포함했고, 국회에서 이 부회장이 최씨 모녀(母女)를 잘 모른다고 증언한 것도 허위라며 위증 혐의를 적용했다.
특검팀은 항소심에서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이 세 차례 독대를 한 것 외에 ‘0차 독대’가 있었다고 공소 사실을 추가했고, 1심때 단순 뇌물과 제3자 뇌물로 구분했던 뇌물죄를 “두 가지 성격이 다 있다”며 공소장을 변경했다. 그리고 1심과 같이 징역 12년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특검팀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뇌물공여 혐의에 대해서는 정유리씨가 실제 사용한 말과 차량 이용대금 36억원만 인정했다. 특검팀이 주장한 나머지 승마지원과 미르·K스포츠재단,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등에 준 돈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청탁이나 어떤 대가를 요구했다는 증거가 없다”면서”특검의 주장은 사건 본질이나 의미와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뇌물로 인정된 36억원이 삼성전자의 돈으로 지급된 만큼 횡령과 범죄수익은닉 혐의는 일부 인정했다. 그러나 법정 최고형이 가장 높았던 재산국외도피 혐의는 1심에서 36억원이 인정된 반면 항소심에서는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장차 사용하기 위해 국내 재산을 은밀히 해외로 빼돌려두는 것이 도피의 개념”이라며 “이 부회장은 최씨에게 뇌물을 준 것이지 몰래 빼돌려 놓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0차 독대’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0차 독대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실은 아니다”라며 “이 역시 안봉근의 진술만으로는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포괄적·묵시적 청탁 없어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에서 논란이 됐던 ‘청탁’ 부분에 대해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1심은 삼성물산 합병 등 개별 현안에 대한 명시적, 묵시적 청탁은 없었다고 하면서도 이 부회장이 경영과 박 전 대통령 사이에는 포괄적,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 봤다. 개별 현안들이 이 전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의 과정에 있었고, 이를 위해 뇌물을 줬다는 특검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개별 현안들이 이 부회장의 승계를 위한 일이라고 볼 증거가 없다”면서 “설사 승계작업이 존재하더라도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도와달라는 청탁을 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또 하나의 쟁점이었던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공범인지 여부에 대해선 1심과 같이 ‘공범 관계’가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은 이 부회장에게 뇌물을 요구하고, 측근인 최순실씨가 승마지원 등을 통해 뇌물을 받아가도록 조종한 것으로 보인다”며 “두 사람은 공동의 의사에 따라 기능적 지배를 통해 범행을 실행했으므로 공동정범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작년 5월 23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공판에서 나란히 법정에 앉은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조선DB
◇“국정농단의 주범은 朴과 崔”
특검팀은 이 사건을 삼성이 경영권 승계 대가로 박 전 대통령과 측근들에 뇌물 준 정경유착 사건의 전형이라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도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공소 사실의 핵심인 포괄적 현안으로서 승계작업과 부정한 청탁의 존재 인정할 수 없고, 삼성이 추진한 개별 현안들이 이 부회장에게 미치는 영향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날 양형 이유를 설명하며 “국정농단 사건의 주범은 대통령의로서의 지위 권한을 사인에게 나눠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위세를 등에 업고 사익(私益)을 추구한 최순실씨로 봐야 한다”며 “결국 이 사건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채 이 부회장이 수동적으로 뇌물공여로 이르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최재훈·고성민 기자
이재용, 항소심서 징역 2년6월에 집유 4년 '감형'… 353일만에 석방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이재용(50) 삼성전자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됐다.
이에 따라 이 부회장은 지난해 2월 17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구속된 지 353일 만에 석방됐다.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은 5일 이 부회장 등 삼성그룹 전·현직 임원들의 선고 공판을 열고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원판결을 깨고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1심에서 징역 4년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던 삼성그룹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과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도 이날 석방됐다.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은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은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감형됐다.
재판부는 “포괄적 현안으로서 경영권 승계작업, 부정청탁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며 “계열사가 추진한 개별 현안이 인정될 경우 삼성전자,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력 확보에 직간접적으로 유리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각 계열사의 합목적성을 부인할 수 없고, 이 부회장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크기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승마 지원 용역 계약도 처음부터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지원 목적이 아니었다”며 “다른 승마선수들도 삼성의 후원을 받아 올림픽에서 성과를 거두려던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의 계획으로 승마지원 규모가 커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법원이 인정한 유죄 금액은 적은 금액이 아니지만 특검 주장에 비하면 공소사실의 상당 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특검의 주장은 사건 본질이나 의미와 거리가 있다”며 “(이 부회장 등이) 원심에서 유죄로 인정된 횡령액 전액을 삼성전자에 반환해 피해를 회복했고, 박 전 대통령에게 어떤 특혜나 대가를 요구하거나 취득했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5일 오후 서울구치소를 나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취재진이 몰려들고 있다./뉴시스
재판부는 “국정농단 주범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사인(私人)에게 나눠준 박 전 대통령과 그 위세를 등에 업고 사익을 추구한 최씨로 봐야 한다”며 “결국 이 사건은 최고 정치권력자인 박 전 대통령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 경영진을 겁박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최씨는 그릇된 모성애로 사익을 추구했고, 이 부회장 등은 뇌물임을 인식하면서도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채 뇌물공여로 나아간 사안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조선일보 오경묵 기자
02.06 이재용 사건, 피해자를 범죄자 만든 것 아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353일 만에 석방됐다. 전직 삼성 임원 4명도 모두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앞서 1심은 최순실 측에 대한 삼성의 승마 지원 등에 대해 개별적이고 구체적 청탁은 없었다면서도 '묵시적(默示的) 청탁'은 있었다는 이유로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 실형을 선고했다.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라는 현안에 관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속 청탁'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판사가 증거가 아니라 다른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속 청탁'을 발견했다는 것은 다시는 있어선 안 될 판결이었다.
이런 무리한 판결은 2심에서 대부분 바로잡혔다. 2심은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청탁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다. 실제 제시된 증거가 없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나 삼성생명 금융지주사 전환이 순전히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때문에 진행됐다고 볼 수 없다고 했고, 박 전 대통령이 삼성 승계 작업 추진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했다. 청탁을 하지도 않았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마음속 청탁'의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처음 수사했던 검찰은 사건 성격을 '박 전 대통령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정리했었다. 그걸 특검이 '뇌물 사건'으로 방향을 틀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더 심한 형(刑)을 가하려고 사건 구도를 바꾼 것이다. 그런데 뇌물이 성립되려면 뇌물을 준 사람이 있어야 한다. 강요당한 사람이 갑자기 뇌물 공여 범죄자로 바뀌었다. 희생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기업들을 겁박하고 강요한 사건을 기업의 뇌물 상납으로 바꾸기 위해 정부는 고비마다 재판에 개입했다. 청와대는 재판 도중 캐비닛 문건을 찾아 특검을 통해 법원에 제출했고, 공정거래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증언대에 서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특검은 이 사건을 "정경 유착의 전형"이라고 했지만 2심 재판부는 "권력과의 뒷거래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나 불법·부당 대출 등 전형적인 정경 유착의 모습을 이 사건에선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 억지로 '정경 유착' 모양을 만들려고 했다면 수사가 아니라 정치 공격이다.
이 사건 본질은 애초부터 강요 내지 공갈에 가깝다는 견해가 많았다.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이득을 주려고 기업들을 겁박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했다면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 그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도 2심 역시 삼성의 일부 승마지원금을 '뇌물'이라고 판정했다. '거절하기 힘들었다 해도 공무원 부패에 조력(助力)해선 안 된다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며 뇌물죄 유죄를 선고했다. 말은 맞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현 정권에서도 기업들은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인은 대통령 요구를 거절해도 감옥 가고 거절하지 않아도 감옥에 가야 하나.
작년 1월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던 판사는 '삼성 장학생'이라는 매도와 문자 폭탄 피해를 입었다. 누구라도 이런 사회 분위기에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미 사법부 지도부도 정권과 코드를 맞추는 사람들로 교체됐다. 이 상황에서 재판부가 순전히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에는 아직 법과 양식(良識)을 우선하는 꼿꼿한 판사들이 있었다. 2심 판사들도 온갖 공격을 당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를 받치는 기둥이 아직은 건재하다고 느낀다.
조선일보 사설
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
1997-04-01 「신사유람단」과 장보고
너도 나도 국제화를 이야기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국제화를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성공적인 국제화를 위해서는 사람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 바깥 세상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데 아직도 「나는 한국인이다. 국내에서는 그래도 최고다」하는 발상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특정지역에 국한되는 국내용 관리자의 옛 모습에서 벗어나 전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글로벌 전략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의 국제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남을 거부하고 내 것만 지키려는 폐쇄적 자세로는 다른 문화를 포용할 수 없다. 의식의 배타성을 타파하고 과감하게 마음의 창을 열어야 한다.
▼ 「글로벌 전략가」 육성을
▼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에티켓도 겸비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예의범절만 지켜도 되지만 이와 함께 국제적인 에티켓이 몸에 배어 있어야 진정한 국제적인 문화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외국어능력은 기본이다. 스위스 독일과 같이 잘 사는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국민이 모국어 이외에 두 세가지 외국어를 구사한다.
글로벌 전략가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두 가지 정도의 외국어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무한경쟁에 접어든 오늘날 기업 차원에서는 글로벌 전략가를 조기에 육성,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다. 국내시장에만 안주해 있는 국내용 관리자를 글로벌 전략가로 키우기 위해서는 이들을 해외로 내보내 현지의 역사와 문화 풍습을 직접 익히게 하거나 국내 부서에 외국인을 채용하여 이들을 통해 국제적 감각을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백년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구미에 파견했던 심정으로 국내용 관리자를 조속히 해외에 보내 글로벌 전략가로 육성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기업의 기본적 책임이다.
국제화를 갈구하는 심정 못지 않게 우리에게 또 한가지 필요한 것이 張保皐(장보고)와 같은 개척정신과 활동력이다. 장보고는 신라시대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당의 장수까지 되었다. 하지만 해적들에게 붙잡혀 노예생활을 하는 동포들의 참상에 분개한 나머지 고국으로 돌아와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이라는 해군 진영을 설치했다.
그 때부터 동남아 해상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고 군사적으로 해상권을 장악했다. 우리 상품을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고 중국 일본상품을 운송 중개했다. 그의 지도력으로 이루어진 국제해운과 삼각무역은 오늘날의 무역에 비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는 신라 번영에 크게 이바지했다.
▼ 「제2 청해진」 세울 때
▼ 장보고와 청해진의 명성은 오늘날 스페인 포르투갈과 같은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활약에서 보듯이 우리 민족은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보다도 우수했고 국제적 감각 또한 탁월했다. 이런 우수한 민족이 당파싸움과 쇄국정책으로 위축된 나머지 오랫동안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 됐고 끝내 나라까지 두 동강으로 쪼개지기에 이르렀다. 오늘의 경제전쟁에서 우리의 위치는 1천년전 청해진을 세울 때와 비슷하다. 이러한 때에 민족적 자부심으로 힘을 합해 「제2의 청해진」을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04-02 제2의 이완용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년전, 우리는 서구 열강이 벌이는 식민지 쟁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생하다가 결국 나라를 잃어버린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다. 민족 지도자들의 노력과 의병활동도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우리에게 나라를 지킬 만한 국력, 즉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수많은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온 국민이 합심 노력하여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90년대의 우리 현실을 구한말과 비슷한 상황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동안 첨예하게 대립해 오던 냉전체제를 종식하고 이제는 바야흐로 경제전쟁의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 무역전쟁 갈수록 가혹
▼ 지금 세계는 강대국간의 정치 군사적 경쟁체제에 의해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지고 경제적 실리를 앞세운 새로운 경쟁에 돌입했다. 과거 강대국은 약소국을 자기 영향권에 두기 위해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군사적으로 보호해주었다. 반대로 약소국은 강대국의 보호와 지원을 얻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정치적 양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국가 생존조건은 지금 변하고 있다. 이념아래 보호되던 국가간의 조약도 상황이 변하면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되고 있다. 국제원조도 국가의 실리적 계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실정이다.
만약 무력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경제전에서는 우리가 전쟁이라고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순간에 마치 끓는 냄비 속에 갇힌 개구리처럼 무기력하게 당할 수 있다. 경제전쟁은 무력전쟁과는 달리 눈에 확연히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전쟁을 하고 있는지 또는 전쟁에 지고 있는 지도 모르면서 망해간다. 보이지 않는 이 전쟁의 패자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패자를 보호해줄 이념이나 당위성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대부분은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예로 전자 자동차 조선 등 주요 산업의 핵심부품을 거의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다면 우리의 대일 의존도는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기계와 같은 자본재도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오는데 이 수입대금이 대일무역적자에서 제일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부품과 기계의 전적인 대일의존은 우리의 큰 약점이다. 그러나 핵심부품을 만들 기술을 개발하고 기계를 만들 공장을 지으려면 장구한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 의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일본 경제의 호황 불황에 따라 우리의 신세가 좌우된다. 따라서 자칫 잘못하면 일본의 경제식민지가 될 수도 있음을 냉철히 인식해야 한다.
▼ 對日의존 심각한 지경
▼ 우리는 지난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 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를 매국노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1백년이 지난 지금이야말로 내가 김완용 박완용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제2의 이완용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때다.
04-08 럭비 정신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한때 투견(鬪犬)이 성행한 적이 있었다. 투견을 훈련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면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투견 챔피언으로 만들려면 보통 생후 6개월에서 1년된 어린 놈을 골라서 싸움부터 시키는데 그 대상이 은퇴한 챔피언이다. 은퇴한 챔피언은 나이가 들어 힘은 약하지만 워낙 노련해서 젖내나는 어린 투견이 힘이 빠질 때까지 적당히 싸우다
30분 정도 지나면서부터 어린 놈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은퇴한 챔피언이 이길 때쯤이면 조련사가 그 놈들을 떼어 놓는다.
▼ 패배주의 극복이 우선
그렇게 한번도 패하지 않으면서 퇴역 챔피언이 갖고 있는 기술을 전수받은 투견은 대회에 나가면 대부분 챔피언이 된다. 그러다가 한번이라도 지면 그 날로 은퇴시킨다. 싸움에 한번 진 투견은 다시는 챔피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나 기업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잘 나가던 일류 인재나 일류 기업이 한번 패배해서 이류 인생, 이류 기업이 되고 나면 다시 일류로 올라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패배 자체의 타격보다 패배의식이 심중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후의 잿더미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성장을 일구어 냈다. 그 동안 만난 외국의 여러 인사들은 이런 성장과 발전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같은 기적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패배의식은 이런 가능성을 잠재운다. 패배의식이 공포를 불러오고 의지와 행동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지금 불황의 단면들이 곳곳에서 보이는데 어떤 이는 공황(恐慌)의 조짐까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공황이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히는 일이다. 경제적 공황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만 심리적 공황은 한번 빠지면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럭비의 정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럭비는 한번 시작하면 눈 비가 오더라도 중지하지 않고 계속 한다. 걷기조차 힘든 진흙탕에서도 온몸으로 부딪치고 뛴다. 오직 전진이라는 팀의 목표를 향해 격렬한 태클과 공격을 반복하면서 하나로 뭉친다. 그
래서인지 럭비선수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럭비팀으로 모이기만 하면 사회적인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가 된다고 한다.
▼ 정신적 인프라 구축을 악천후를 이겨내는 불굴의 투지,
하나로 뭉치는 단결력, 태클을 뚫고 나가는 강인한 정신력, 이것이 럭비에 담긴 정신이다. 물론 야구 골프 등의 운동에도 저마다의 소중한 룰과 정신이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것은몸을던져서라도 난관을 돌파하는 럭비의 정신으로 현재의 정신적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이런 정신이 한 사회의 정신적 인프라(Infrastructure)로 자리잡을 때 그 사회는 위기를 이겨내는 저력이 생긴다. 어느 국가 사회 기업을 막론하고 진정한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그 힘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04-10 退溪學의 재조명
조선 중기의 학자 퇴계 李滉(이황)선생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 오늘날 고속도로의 개념인 신작로(新作路)를 전국에 걸쳐 동서로 다섯개, 남북으로 세개 만들 것과 집집마다 소를 두 마리씩 기를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그런데 당시 조정의 모든 대신들은 한결같이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큰 길을 내면 오랑캐가 쳐들어오기 쉽다고 하는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이유에서였다. 만일 그때 조정이 퇴계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우리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고유의 실용학문
▼ 큰 길을 내려면 대형건설 토목 장비가 필요하고 그런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강한 쇠를 많이 쓰게 되니까 철강업이 발달했을 것이고, 그 결과 병기를 만들 능력이 생겨나 임진년(壬辰年)의 전쟁에서 일본에 그토록 무참히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철기가 발달하면 국토개발과 영농기술도 발전하게 되니 농업 생산량이 증대했을 것이고, 수송수단이 발달하고 큰 길을 따라 물자수송이 원활해져 경제가 크게 발달했을 것이다.
또 소를 기르게 되면 사료 생산과 저장법이 발달할 뿐 아니라 우생학 수의학 등이 발전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공생(共生)이라는 공동체 원리가 사회 전반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더구나 소를 많이 기르려면 사람들이 말을 타게 되고 쉴 곳을 위해 그늘이 필요하니 식목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말과 소가 소득을 가져와 목축업이 부흥할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기마병을 만들어서 전투력이 높아졌을 것이다.
퇴계학은 이처럼 나라를 튼튼히 하고 국민 경제를 살찌우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현실을 밝혀주는 우리 고유의 자본주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상의 지혜가 있는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자꾸만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한 국가가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부(富)와 강(强)만 갖고는 안되며 그 사회를 지탱하는 지도적 원리가 있어야 한다.
특히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지각변동에 비유될 정도의 변화가 닥치는 만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퇴계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사회 전반에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술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은연중에 기술자를 「장이」로, 상인을 「장사꾼」으로 가벼이 여기고 있다. 아직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의식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기술과 경제가 주도하는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발돋움하기 어려워진다.
▼「士農工商」의식 벗어야
▼ 국제사회에서는 기술이 뛰어난 나라가 큰 소리치며 떵떵거리고 있고 장사 잘해서 돈 많이 번 나라는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주도한다. 퇴계선생 역시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신(新)사농공상」을 얘기했을 것이다. 사(士)는 수준높은 이론으로 든든한 받침이 되어 주고, 농(農)은 풍성한 수확으로 국민의 힘이 되어 주며, 공(工)은 좋은 기술로 사람이 잘 살아가는 물질적 환경을 만들어 주고, 상(商)은 깔끔한 매너로 국제사회를 리드해 나가는 것으로 말이다.
04-14 캐처가 되자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프로야구에서 승패의 70%는 투수에 달려있다고 한다. 따라서 투수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항상 쭈그리고 앉아 투구 하나하나를 리드하고 투수의 감정을 조절해가며 수비진 전체를 이끌어가는 포수가 없는 야구를 상상할 수 있는가.
비록 드러나지는 않지만 팀의 승패를 실제로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포지션이 바로 포수인 것이다. 기업이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빛나는 성공 뒤에는 항상 주목받지 못하는 그늘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포수 같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 묵묵히 자기역할 수행
▼ 과거 기업에서는 「일하는데 머리만 있으면 되지 마음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차갑고 냉정하더라도 일만 똑부러지게 잘하면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부하들로부터 악명이 드높더라도 저돌적으로 밀어붙여 주어진 과제를 반드시 해내는 사람은 오히려 유능한 관리자로 평가받았다. 모든 평가가 업적과 능력에만 기준을 두고 상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바라기형 관리자」를 양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보화사회 지식사회에서는 휴먼네트워크가 더욱 중요하다. 각자가 보유한 정보와 지식은 인간관계의 결속에 의해 합쳐질 때 훨씬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혼자 똑똑한 사람, 차가운 사람보다는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함께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강점을 갖게 된다. 길을 가는데 어린아이가 넘어져 있으면 아무리 급해도 뛰어가서 일으켜 주는 마음, 남의 불행을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마음을 가진 훈훈하고 미더운 사람이 보다 요구되는 세상이다.
결국 인간미의 본질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상대방을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에 있다. 「직장인으로서 성공의 80%는 지능지수가 아닌 감성지수(EQ:Emotional Quotient)에 의해 결정된다」는 최근의 연구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조직생활에 있어서도 지식이나 학식 이전에 따뜻한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평가도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이 사람을 잘못 평가하게 되면 기업의 전 구성원이 평가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고 일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는 등 손실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포수와 같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많아지려면 자기 일보다 동료 일을 먼저 도와주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사람 평가기준 달라져야
▼ 그러려면 평가기준을 인간미 도덕성 등 감성적 요소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동시에 윗사람만의 단면평가 뿐만 아니라 반드시 동료 하급자의 평가까지 균형있게 고려하는 3백60도 다면평가의 개념을 하루 속히 적용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포수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포수처럼 그늘에 숨은 영웅이 대우 받고, 그들이 보람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는 기업, 국가가 바로 선진기업, 선진국인 것이다.
04-15 「업종통합」시대
「메카트로닉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기계(Mechanics)와 전자(Electronics)가 결합한 새로운 기술을 의미한다.
이처럼 최근에는 기술과 기술이 합쳐 새로운 형태의 기술이 탄생하고 있으며, 기술간의 벽이 무너지면서 업종의 성격도 모호해지고 상품의 개념까지 변하고 있다.
일례로 시계는 정밀기계기술의 결정체로 과거 수백년 동안 기술적 측면에서 큰 변화없이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따라서 정밀공업이 발달했던 스위스가 시계왕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세이코엡슨이 일렉트로닉스 기술을 도입한 전자시계를 만들어내면서 굳건하던 스위스의 지위가 무너지고 그 자리를 일본이 차지했다. 지금 각 산업의 개별 기술들은 성숙할 대로 성숙해 당분간 에디슨 같은 신발명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따라서 기술 융합(融合)은 개별 기술이 안고 있는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물론 신기술 신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꼭 없던 것을 발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있던 것을 잘 합치는 것도 새 시대가 요구하는 또 다른 의미의 발명인 것이다.
▼ 기술융합 또다른 발명
▼ 이러한 기술융합, 업종복합의 사례는 자동차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자동차는 부품가격으로 볼 때 전기전자 제품비율이 30%를 차지한다. 물론 누구도 자동차를 전자제품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내에 이 비율은 50% 이상으로 올라갈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과연 자동차인지 전자제품인지 모호해진다. 그때 가면 아마 전자기술, 반도체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자동차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지도 모른다. 업종복합은 한 지역을 융성시키기도 한다.
나는 항상 서울의 명동같이 땅값이 비싼 데서 칼국수 식당이 왜 잘될까 의문을 품었다. 결국 백화점과 옷가게, 액세서리점에서부터 온갖 상점들까지 다 있으니까 사람들이 모이고, 칼국수 집도 손님들이 문전성시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 첨단산업 업종 복합체
▼ 21세기 첨단산업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알고 보면 모두 다양한 업종의 복합체다. 의료기기는 광학 정밀 컴퓨터 필름산업이 합친 것이고 우주공학 에너지 전자산업도 기계 전자 소재 및 반도체 등이 결합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앞으로 단품, 단일업종으로는 성장의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오로지 「하나」에만 매달리다보면 기술융합이 어려워지고 기술과 시장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변화하는 업종의 개념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과 일본에서 많은 적자를 내는 기업들을 보더라도 대부분 단일업종의 기업들이다. 반면에 GE같이 기계 전자 가전 반도체 토목 미사일이 다 합쳐 있는 기업은 점차 전에 없던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따라서 문어발식 경영이라는 종래의 편견은 어느 정도 수정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국가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가 전체가 업종과 산업의 복합 개념을 잘 이해하고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04-16 두마리 토끼사냥
모순이라는 말은 서로 상치하는 것이 공존한다는 뜻이다. 우리들 주위에는 대립되는 것, 모순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자율과 규제, 시장개방과 산업보호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시장을 개방하면 미성숙한 산업이 타격을 받고 그렇다고 국내시장을 보호하면 국제경쟁력이 약화된다.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쪽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투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낮은 원가와 높은 품질, 본업 중심 경영과 다각화 경영 등은 상충하는 목표다. 예를 들어 다양한 제품을 만들려면 제조원가가 비싸진다. 그래서 값싸고 동시에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일은 한번에 잡을 수 없는 「두 마리 토끼」처럼 보인다.
▼ 「양자택일」은 끝났다
▼ 지금까지 기업들은 둘 중 더 낫다고 생각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두가지 중 어느 한가지만 뛰어나도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양자택일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값도 싸고, 품질도 좋고, 종류도 다양하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제품을 원하고 있다.
이제 어느 한 종목만을 잘하는 선수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모순되어 보이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만능선수가 필요한 때이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 혼다는 좋은 엔진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혼다의 성공요인은 바로 모순을 슬기롭게 극복한데 있다. 당시 자동차는 고출력과 고연비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엔진의 출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연비를 희생해야 하고 연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엔진의 출력을 낮추어야 한다. 혼다가 둘 중 어느 하나에만 집중했다면 오늘날의 혼다는 없었을 것이다.
혼다는 상충하는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여 결국 가장 힘세고 기름이 적게 드는 엔진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하루 빨리 양자택일의 사고(思考), 대립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대립되는 것, 모순되는 것들이 융합되는 시대이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것, 서구의 합리성과 동양의 지혜가 만나는 공존과 융합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흑백논리의 전개도 양자택일처럼 똑같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양자택일의 난처한 경지를 모순의 수용으로 극복한다면 흑백논리는 퍼지사고의 수용으로 극복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이분법적 사고, 즉 흑백논리에 따르다보면 이것이 상당히 경직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흑과 백 말고도 수없이 많은 색이 있다. 흑과 백사이에도 다양한 명도의 회색이 있다. 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퍼지식 사고이다.
▼ 퍼지식 사고 필요한 때
▼ 기업의 전략이 양에서 질로 바뀌었다는 것을 흑백논리로 본다면 양을 버리고 질만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퍼지사고로 보면 양과 질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퍼지사고는 모든 요인을 총체적으로 보고 복합적으로 판단하며 동시에 창조적인 발상을 할 때 가능하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회색을 수용할 줄 알아야 미래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
04-21 1人10色의 시대
흔히 요즘을 개성의 시대라고 한다. 몇 년 전만해도 남의 눈에 띄는 옷을 입으면 너무 튄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오히려 남이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고까지 한다.
그래서 남다른 옷, 심지어 일부러 옷을 찢어서 입고 다니기도 한다. 개성에 대한 강조는 옷과 같은 상품뿐 아니라 사회제도에도 나타나고 있다.
결혼식과 같은 의례까지도 개성을 강조하여 남다른 체험의 장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스킨스쿠버 장비를 갖추고 물 속에서 결혼식을 올리는가 하면, 비행기를 통째로 전세내어 1만m 상공에서 결혼식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것을 단지 신세대의 취향으로만 인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역사적 흐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개성 경영」 필요
▼ 후기 산업사회를 뒷받침하는 사조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들 수 있다. 효율과 질서를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논리와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통일과 획일을 거부하고 개성과 자율을 강조한다.
바로 이런 차이를 경영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제 개성경영이 필요한 때이다. 개성시대를 살아가는 고객들은 차별화된 서비스와 상품을 원한다. 최근의 경영혁신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면 고객만족 경영은 고객의 개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성경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미래는 물론이고 당장 살아 남기 위해서도 개성경영은 시급히 요구되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개성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10인1색→10인10색→1인10색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는 「남들 만큼」의 풍요를 추구하던 시절이었다.
10인1색의 시대였다. 옛날에는 자동차 한대 산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무슨 차인지, 무슨 색인지 묻지도 않았다. 소비자들의 욕구는 단순하고 상품 본래의 기능만 있으면 만족했다.
그러다가 사람마다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득수준이 향상되고 물자가 풍족해지면서 사람들은 「남들 만큼」에는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개성화 차별화를 추구하는 10인10색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 물건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상품의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빨간색 차라든지, 중형차라든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동차를 골라서 사는 세상이 되었다.
▼고객의 개념 변화
▼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같은 종류의 자동차를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취향이 천차만별이다. ABS브레이크가 있어야 하고 에어백이 있어야 하고 선루프도 있어야 하고 타이어는 이런 걸로, 휠캡은 이것으로 등등 자동차 한대에만 해도 수많은 취향이 있다. 이렇게 까다로워진 고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맞추기 위해 선진기업들은 피 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제는 더 나아가 한 사람의 고객이 마치 카멜레온처럼 시간과 장소에 따라 소비스타일을 바꾸는 시대가 됐다. 1인10색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단순히 재화를 써서 없애주는 존재로서의 소비자(Consumer)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개개인의 취향까지도 맞춰 주어야만 하는 대상으로서의 고객(Customer) 개념이 자리잡게 됐다.
04-22 기업의 「윈-윈」전략
바다거북은 산란기가 되면 바닷가로 올라와 5백개에서 많게는 1천개에 이르는 알을 낳는다. 어미 거북은 먼저 모래 속 깊이 구덩이를 판 다음 1백개 정도의 알을 무더기로 낳은 후 모래를 끌어모아 그 위를 덮는다.
이런 식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알을 낳는다. 그런데 이렇게 무더기로 낳은 알에서 부화한 새끼거북들은 어떻게 모래웅덩이를 빠져나오는 것일까.
1백마리나 되는 새끼들이 뒤엉킨 상태에서 그 깊은 구덩이를 과연 빠져나올 수 있을까. 동물학자들의 관찰 결과 새끼거북들은 역할분담과 협력을 통해 빠져나온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좁은 구덩이에서 막 깨어난 새끼들 중 꼭대기에 있는 녀석들은 천장을 파내고 가운데에 있는 것들은 벽을 허물고 밑에 있는 새끼들은 떨어지는 모래를 밟아 다지면서 다 함께 모래 밖으로 기어 나오더라는 것이다.
또 실험을 하면서 알을 한 개씩 묻어 놓았더니 27%, 두개씩 묻어 놓았을 때에는 84%, 네개 이상을 묻어 놓으면 거의 100%가 알에서 깨어 구덩이 밖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이처럼 새끼 거북들은 협력을 통해 구덩이로부터의 대탈출에 성공한다.
▼반목-대립은 소모적
▼ 오늘날 세계의 흐름 역시 반목과 대립에서 벗어나 경쟁자에게도 내 것을 주고 협력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을 돌아보면 우리는 아직도 좁은 테두리의 소모적 상쟁(相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파이를 키워 나가기 보다는 얼마 되지도 않는 파이를 나누는데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고 있다.
원래 나눌 몫이 작다보면 피를 나눈 가족간에도 이기적인 갈등과 대립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아직 우리는 파이를 더 크게 키우는 성장에 힘을 쏟아야 하는 단계에 있다. 대승적 차원에서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는 상생(相生)의 길이 장래에 더 큰 몫을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기업은 기본적으로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기업경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성장하고 이익을 내기 위한 것이지 경쟁기업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시장개방에 따라 우리 기업들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다국적 기업들과 국내시장에서 일 대 일로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자칫하면 우리 기업의 상당수가 이런 도전에 언제든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공존하는 기업정신 필요
▼ 이웃 일본의 자동차 업계는 11개의 대형회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우리보다 시장경쟁이 훨씬 치열한데도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체가 진심으로 협력하고 있다. 대미 통상마찰에 대한 공동대응이라든지 환경관련 기술의 공동개발, 부품의 공용화와 협력업체의 공동이용 등 일본 자동차 업계의 협력은 잘 알려져 있다.
기업활동은 그 자체가 경쟁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이 경쟁을 하면서도 다 함께 공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역사의 흐름이나 사회발전의 흐름으로 보더라도 반목과 대립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 완승하거나 완패하는 게임, 모든 것을 얻거나 잃어버리는 게임보다는 모두가 이기는 「윈―윈(Win―Win)」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오래 전부터 서로 힘을 합쳐 상부상조하는 「두레정신」이라는 좋은 전통이 있었다. 지금 이 시대, 우리 공동체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협력과 화합의 상생정신일 것이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이 때, 빠른 시일 내에 국민적 화합과 통합의 전기를 만들어가는데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04-24 「두뇌」가 경쟁력
우리는 지금 르네상스나 산업혁명과 같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현재가 자본주의사회라면 미래는 지식의 내용 그리고 부와 명예를 결정짓는 지식사회다.
지금은 총 칼로 싸우지만 미래는 머리와 맨손으로 싸우는 시대다. 창조적 소수집단의 역할이 증대되고 머리로 승부하는 뇌력사회(腦力社會)인 것이다. 수천명, 수만명이 한 사람의 봉건영주를 먹여 살리는 시대가 과거였다면 미래는 한 사람의 비범한 천재가 수만명을 부양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 획일적 교육은 안된다
▼ 이러한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직 앳된 얼굴의 컴퓨터 천재 빌 게이츠는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좌지우지하며 세계 최고의 부호로 부상했다.
어디 그뿐이랴. 이탈리아 특급디자이너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세계의 패션방향을 뒤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트 디즈니의 만화가들이 창조한 캐릭터 상품 하나가 우리나라가 자동차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의 몇배나 되는 수익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영화 스타워즈는 20년이 지나 재개봉돼도 여전히 달러박스에 오른다. 앞으로 다가올 지식사회에서는 창조적 천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바둑 1급 실력을 갖춘 10명이 머리를 싸매고 함께 달려들어도 1단을 이기기 힘든 이치와 같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영재를 키우고 모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실상을 보면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교육만 하더라도 과거 산업사회를 지배해왔던 양적 논리에 얽매여 「획일적인 교육」을 통한 「평범한 인재」의 양산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론이 무서워 우열반을 운영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영재에 대한 무관심」 「입시 위주의 암기식 교육」은 잠재력 있는 우수한 인재마저 거꾸로 2류로 만들어버린다. 청년기사 이창호는 비록 정규 대학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조훈현이라는 당대 최고수의 직접 지도를 받아 세계의 바둑계를 석권하고 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비뚤어진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거나 외톨이로 취급하는 분위기에서 천재성이 꽃 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선진기업들과 직접 경쟁하고 있는 기업도 실상은 마찬가지다. 개성이 강하고 「끼」있는 사람을 「건방지다」 「말을 함부로 한다」하여 기를 죽이는가 하면 주위의 시기심과 「뒷다리 당기기」 때문에 우수인력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고인 물에서는 큰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잊히고 있다.
▼ 인재 키워주는 사회를
▼ 또한 21세기에 과학선진국 기술선진국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국적을 초월하여 전세계의 우수인재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전세계의 천재가 한 곳에 모여 서로 협력하고 경쟁할 수 있는 두뇌천국을 만들어야 한다.
전화기부터 반도체까지 미국이 소프트, 하드웨어를 다 점령하고 엄청난 돈을 버는 원동력도 따지고 보면 이 나라가 세계 각국의 두뇌들이 모인 용광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스스로 인재를 키우고 아끼는데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인도 중국 러시아의 우수한 두뇌자원도 적극 활용하는 인재전략이 필요하다.
04-28 女性없이 미래 없다
며칠간 굶긴 암수 여러 마리의 쥐를 상자에 가두고,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지나가야만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했더니 찌릿찌릿한 전류 때문에 전선을 건너지 못하고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한다.
다음에는 어미쥐를 새끼와 함께 상자에 넣었는데 어미쥐도 처음에는 몇 번을 되돌아오다가 마침내는 먹이를 물고 새끼에게 돌아왔다. 실험결과는 모성애의 힘이 자신의 생명까지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주요 자원 낭비해서야
▼ 사자처럼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집단에서 사냥을 하고 새끼를 키우는 것은 암컷의 몫이다. 사람도 동물이니 이 원리는 비슷하다. 남자가 힘세다고 자랑해도 아이를 기르는 여자의 끈질김과 섬세함에는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여성의 발언권과 의사결정권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신문을 구독할 때 80%는 여성이 결정한다. 가정에서 쓰는 생필품 구입은 전부 여성이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기업에서도 여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들게 됐다. 지금까지 남성만의 고유영역이라고 생각해온 분야에도 이제는 여성들이 거의 다 진출해 있다.
조선소의 용접공 가운데도 여성이 많고 지게차 운전이나 버스 운전을 하는 여성들도 있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분야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여성의 능력이 증명되어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대처여사와 같은 철의 여총리가 있는데도 「대처니까 그렇지」라든지 「여자도 아니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남녀평등 사상이 상대적으로 빨리 자리잡은 서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이런 차별적 인식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우리나라만큼 여성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여성중 90%는 시집가서 집안일만 돌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설혹 어렵사리 우수한 여성인력을 선발해 놓아도 못배겨나게 배척하는 분위기 때문에 자꾸 밀려난다. 다른 나라는 남자 여자가 합쳐서 뛰고 있는데 우리는 남자만 홀로 분투하고 있다. 마치 한 바퀴에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경주를 하는 셈이다.
이는 실로 국가적 인적자원의 낭비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여성의 구매력이 커지고 기업에서도 여성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여성고객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고 여성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할 수밖에 없다.
▼ 취업지원 인프라 시급
▼ 여성인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남녀차별 관행을 모두 걷어내야 한다. 오늘날 기업의 어느 부분을 살펴보아도 여성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국가 차원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탁아소나 유치원을 많이 지어 제공함으로써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켜 주어야 한다. 기업도 여성에게 취업문호를 활짝 열고 취업활동을 지원하는 인프라를 구비해 주어야 한다. 이제는 우리 사회 모두가 여성의 잠재력을 활용하는 데 눈을 떠야 한다.
04-29 이제는 「지구촌경영」
과거 우리는 국산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지상과제로 알고 노력해왔다. 우리 자본으로, 우리 근로자의 손으로 우리 나라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한 국산제품이 일제 미제와 경쟁해 세계시장에 당당히 진입했을 때 우리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기뻐했다. 이는 경제발전의 초기단계에 국내 생산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 세계적 분업 일반화 하지만 나라별로 경쟁력이 차별화하고 사람 자본 정보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범세계적인 분업이 일반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GM의 이름으로 미국에 판매되고 있는 국산 자동차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국상표가 붙어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엔진과 전자부품은 일본 회사에서 조달하고 디자인은 독일 회사가 맡는다. 기타 일반부품은 대만 회사에서 조달한다. 마케팅은 영국 회사에 맡기고 미국시장 진출의 전략은 GM과 뉴욕주변호사가 담당한다.
결국 국내 자동차회사가 담당하는 것은 일부 조립생산뿐이다. 이 자동차는 과연 어느 나라 자동차일까. 이제 제품의 경쟁은 국가간 경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좋고 가장 싸게 그리고 가장 잘 팔 수만 있다면 한 제품의 생산 판매를 위해 여러 국가의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국내 기업들도 국내 임금이 올라가고 국내 입지조건의 한계를 느끼자 현지생산의 이점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중국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 유럽연합(EU)의 적극적인 정부지원 등 보다 나은 경영자원을 찾아 쉴 새 없이 이동하고 있다.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만드는가(Made in)는 의미가 없어지는 반면 누가 만드는가(Made by)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 국산제품 만들기가 우리의 지상과제였던 것처럼 이제는 세계분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사명이 된 것이다. 무국적 상품의 제조를 가능케 하는 경영환경을 우리는 초국적 기업의 번창에서 실감한다. 초국적 경영은 기업의 국제화에서 진일보한 또 다른 형태의 기업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 「누가 만드는가」 더 중요 기업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국제화는 단지 해외시장에서 물건을 잘 팔기만 하면 되는 경제적 이유에서 이루어져왔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노동비가 싼 지역에 현지공장을 건설하고 물건이 팔리는 지역에는 판매거점을 세우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양적 국제화」는 어느 사이엔가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 나라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기업은 그 나라 소비자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세계 유수의 선진기업들은 양적 국제화에서 한발 전진하여 「질적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바로 초국적 경영이 질적 국제화의 실체라 하겠다. 전세계 1백40여개국에 무려 1천3백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ABB라는 회사는 취리히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사내에서의 공용어는 영어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자회사의 의사결정은 현지인으로 임명된 책임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국내에서 결정하겠다는 「우물 안 개구리」식의 발상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05-02 권위와 권위주의
경영을 하다보면 때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위있는 전문가에게 자문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 경우 권위란 지위나 직책에 관계없이 인품이나 학식 능력이 뛰어나 타인이 스스로 신뢰하고 승복하게 하는 힘을 말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는 권위는 사라지고 권위주의만 난무하고 있다. 권위주의란 직위 권력 경제력 등 우월한 요소를 내세워 남을 「억지로」 따르게 하거나 지배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 형식―격식 너무 집착
▼ 남을 복종시킨다는 면에서는 권위와 다를 바 없지만 강제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권위주의는 중앙집권 군사문화의 잔재로서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하고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체육대회를 하면서 임원의 운동모자에는 금테를 둘러야 한다느니, 사무실의 책상과 의자가 직급별로 차이가 있어야 하고, 하다 못해 의자 등받이라도 높아야 한다는 발상이 그것이다.
이같이 지나친 형식과 격식에 집착하는 권위주의는 언로를 막고 독선을 가져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도층의 권위주의는 사회의 공적(公敵)이라 할 수 있다. 기업도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회의시 토론은 실종된 채 일방적인 상의하달식 의사전달만 쏟아지는 것은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윗사람에게만 굽신거리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잘나가는」 왜곡된 현상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본다. 이런 권위주의로 인해 사람은 오그라들고 조직은 황폐화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권위주의가 아닌 권위이다. 진정한 권위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학식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남의 인권을 존중하고 겸손할 줄 아는데서 생겨난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孟思誠(맹사성)과 黃喜(황희)는 최고의 명재상으로 손꼽히고 있다.
맹사성은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예의를 갖추고 대문 밖까지 나와 맞이했으며 손님에게 반드시 상석을 내주었다. 황희는 노비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겸손하다는 것만으로 권위를 얻을 수는 없다. 모든 조직의 관리자는 윗사람다운 실력, 선배다운 인격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권위주의를 없앤다고 조직을 방임해서는 안되며 조직원의 잘못된 부분을 가르쳐서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내야 한다. 권위주의는 조직을 딱딱하게 만들지만 권위가 없으면 조직의 질서가 무너진다.
▼ 권위갖춘 어른 아쉬워
▼ 지금 우리 사회는 권위를 갖춘 어른이 필요하다. 사회의 잘못에 대해서 용기있게 꾸짖을 수 있고 방향을 못찾고 헤맬 때는 스스로를 불태울 수 있는 등불이 있어야 한다. 기업 경영자도 사무실에만 칩거하여 측근이 전해주는 장밋빛 소식에 솔깃해서는 이내 권위주의에 빠지기 쉽다.
「문제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고객과 협력업체로부터 솔직한 의견을 들을 뿐 아니라 아랫사람이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어야 한다. 사회 지도층인사나 기업 경영자부터 아집과 독선의 권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형식적인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참된 권위가 존중받는 사회가 바로 선진사회로 가는 길목인 것이다.
05-06 디지토피아
1970년대에는 바늘 대신에 숫자로 시간을 나타내는 전자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디지털이라고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전자시계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디지털 제품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다.
컴퓨터는 이미 일상용품이 됐고 레코드판은 CD로 바뀌었으며 액정 TV까지 등장했다. 디지털기술은 연속적인 전기파로 표현되던 아날로그 신호를 0과 1의 비트(Bit)정보로 표현하는 첨단기술이라 할 수 있다.
▼ 「디지털세계」무궁무진 예를 들어 지금까지 사진은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피사체를 찍은 후 사진관에서 현상하여 앨범에 보관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디지털기술을 카메라에 응용하면서 이러한 개념은 크게 바뀌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카메라 외에도 DVD, 디지털 TV, 지능형 자동차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미래는 디지털이 만드는 유토피아 즉 「디지토피아(Digitopia)」라 단언해도 좋을 듯하다.
디지털 문명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과거에는 물건을 사려면 시장에 가야 했고 골프연습을 하려면 골프장에 가야 했다. 하지만 이같은 상식이 이제는 흔들리고 있다.
컴퓨터의 화면상에 떠오르는 물건들을 구경한 다음 선택키만 누르면 시장에 가지 않고도 물건이 배달되어 온다. 실내에서 스윙만 해도 푸른 잔디위를날아가는흰공을볼수 있다.
집에 있어도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업무의 진행상황을 체크할 수 있고 업무결과는 통신망을 통해 보내면 된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도 바꾸어야 한다. 다가올 미래에는 가짜가 진짜처럼 느껴지는 가상의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인터넷 열풍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 수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디지털의 세계가 반드시 핑크빛 「디지토피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 세계각국은 자국의 디지털 기술과 제품을 세계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세계 유수의 전자업체들도 서로 편을 달리하여 다국적 연합군을 구성하고 생사를 건 기술개발, 제품개발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디지털 사회는 엄청난 재도약의 기회를 가져다 주는 것이 틀림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나마 1만달러 소득을 가능케 한 산업화시대의 경쟁력마저 무용지물로 만들 위협이 될 수도 있다.
▼ 기회는 준비한 자의 것 과거 산업화시대의 우리 경제발전 전략은 선진국으로부터 사양산업을 인수하고 기술을 이전 받아 모방해가는 것이었다.
기술격차가 20년이상 나는 영원히 뒤쫓아가는 후발의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디지털 분야는 아직 미개척 상태이고 비교적 선진국과의 기술격차가 그리 크지 않은 분야이므로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디지털 선진국으로의 진입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부호분할다중접속(CDMA)통신장비 등 디지털 분야에서의 몇 가지 세계적 선도기술은 이러한 전망을 더욱 더 밝게 해준다. 기회는 변화를 선점하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찾아오고 주어진다. 우리도 디지털 시대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디지털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그 육성에 국력을 집중해 나가야 한다.
05-08 시간으로 승부하자
시간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먼 옛날 원시시대에는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지면 밤이라는 두가지 시간개념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농경사회 초기에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활 패턴이 정착되면서 하루 세끼 밥 먹는 아침 점심 저녁이 사람들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이 되었다.
그러다가 자급자족에서 벗어나 교역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하루를 12등분한 십이지(十二支)라는 좀 더 세분화된 시간개념으로 발전했다. 지금도 사주를 이야기할 때면 두 시간 단위인 자시 축시 등을 사용하고 있다.
▼ 「나노초」를 다투는 시대
▼ 산업사회를 맞이하여 공산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교역의 범위가 넓어지고 빈도도 높아지면서 현재와 같은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보화시대가 다가오면서 시 분 초의 단위는 그대로이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필요한 활동을 하지 않으면 기회를 잃고 마는 시대가 되었다. 경영컨설팅 법률자문은 시단단위로 가격이 매겨지고 증권거래 선물거래는 찰나에 가격이 바뀐다.
시간의 가치가 극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며칠에 걸쳐 해야 할 정보처리를 1초 안에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쩌면 초단위의 시간개념도 의미가 없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이미 컴퓨터의 성능을 비교할 때는 10억분의 1초인 나노(nano)초를 다투는 시대가전개되고있지않은가. 그러나 한때 우리 사회에는 코리안타임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시간가치의 개념이 희박하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은 한번 놓쳐버리면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자원이다.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시간도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내시간이귀중한만큼 남의 시간도 천금같이 아껴주어야 한다. 이같은 시간의 중요성은 기업경영에도 적용된다. 과거의 기업경쟁이 가격과 품질의 경쟁이었다면 앞으로는 시간경쟁력이 승부를 좌우할 것이다. 즉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시간 한 단위가 갖는 가치가 점점 높아지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는 바를 누구보다도 빨리 만족시켜주는 쪽이 경쟁우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서울∼부산간 기차요금은 비행기 요금보다 저렴하지만 도쿄∼오사카간 신칸센 요금은 같은 구간의 비행기 요금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시내에서 공항까지 가고 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신칸센을 타고 가는 것이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 국가경쟁력 시간이 좌우
▼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고객의 시간낭비에 따른 비용을 얼마나 줄여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 행정서비스의 스피드 경쟁력도 제고되어야 한다.
복잡한 업무절차와 규제는 국가 전체의 시스템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우리나라의 사회간접자본 및 인프라 부족으로 인한 물류비용과 시간적 손실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정부가 앞장서서 민간기업과 협력하여 교통 정보 통신인프라 구축에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할 것이다.
05-12 PPM 품질관리
퍼센트 즉 백분율은 1백개 중 몇 개인지를 나타내는 단위다.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척도이기 때문에 불량률도 퍼센트로 관리해왔다. 품질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시절에는 이렇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 하나의 불량도 기업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품질불량을 경험한 고객 한 사람이 최소한 두세명의 잠재고객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는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불량제품은 곧 癌나는 기업에 있어서의 불량을 암에다 곧잘 비유한다. 불량제품이 해당 고객을 잃게 하는 데서 그친다면 굳이 암이라고까지 부르지 않아도 되겠지만 어느 회사 제품의 질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급속도로 번져나가게 되어 있다.
떡은 사람을 건널수록 줄어들고 말은 건널수록 보태진다는 말 그대로다. 암세포의 분열과 전이를 그대로 닮은 것이 바로 불량제품에 관한 소문이다.
초기에 발견해서 잘라내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그냥 버려두면 사람을 죽게 하는 것까지 똑같다. 이 암도 내버려두면 기업을 죽게 한다. 결국 암적증상의 조기 발견과 퇴치가 기업의 존폐를 좌우하게 된다.
비행기는 1백만개 이상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불량률이 1%라고 가정한다면 무려 1만개 이상의 불량부품을 달고 하늘을 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비행기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은 아마 기적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항공산업은 보잉사 등 품질 수준이 극도로 높은 소수의 기업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이들 기업은 품질을 관리하는 단위로 당연히 PPM을 사용하고 있다.
PPM은 Parts Per Million의 두음자를 딴 것으로 백만분율을 나타낸다. 백분율보다 정밀성이 1만배나 높다. 세균이나 박테리아의 유무를 가릴 때 사용하는 것을 봐도 그 정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신분야에서 세계 초일류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모토롤라는 품질수준의 극대화를 경영이념으로 정하고 「6시그마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6시그마란 통계학 용어로 백만개 중 3,4개 정도의 불량만을 허용하는 고도의 품질수준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회사가 세계적 품질수준을 자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양적 경영만 중시하던 시대에는 불량의 개념조차 잘 몰랐던 것이 우리 기업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생활의 질이 달라졌고 소비자의 의식이 달라졌다.
더구나 세계와 경쟁하는 국제화 시대다.지금은 質의 시대제품의 질은 더 이상 퍼센트로 관리하기가 불가능해졌다. 퍼센트로 불량을 관리하는 기업은 조만간 말기암 증상으로 쓰러진다.
그런데 말기암 증상은 보험창구나 슈퍼마켓에서도 생길 수 있다. 품질불량이 제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비스업에서도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량률 제로를 만들겠다는 각오는 제조업 뿐만 아니라 서비스 산업까지 전산업에 걸쳐 일어나야 한다. 우리 기업도 이제는 PPM단위로 품질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세계무대에 명함을 내 놓을 수 있다.
지금은 질이 대접받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05-14 기록문화
어떤 나라가 일류이고 어떤 나라가 이류인지는 경찰 산림 어린이교육을 보면 알 수 있다. 엄정한 기강 속에서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경찰, 무성한 숲, 어린이 천국이라 할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나라는 예외없이 선진국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기록을 잘하고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나라일수록 일류이다.
▼ 유용한 지식 묻혀버려
▼ 일본이나 유럽의 50년 된 회사와 5년 된 회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축적된 과거 데이터의 양이다. 생생한 데이터, 사례연구, 역사 같은 것들은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기록문화가 너무 없다. 무엇인지를 규칙적으로 기록한다는 것 자체를 귀찮아 한다. 일본 주부들은 90% 이상이 가계부를 적는데 한국 가정에서 가계부를 쓰는 사람은 30%도 채 안된다고 한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각종 노하우의 기록 보관 자체를 소홀히 하고 있어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의 전파가 느리고 때로는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
선진기업에 연수를 보내 보면 「연수생마다 늘 같은 질문만 반복하고 돌아간다」는 뼈있는 비판을 듣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과거 우리 역사에 대한 기록도 불충분한데다가 해방 이후에는 군사혁명 등 여러 차례 정치적 불안과 혼란속에서 기록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살기에만 급급한데도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나만 잘 되겠다는 이기주의도 기록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청기와를 만들어 파는 상인이 있었다.
청기와는 보통기와보다 훨씬 단단한데다가 빛깔이 고와 매우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제법 짭짤한 재미를 본 기와장수는 이 재미를 독점하겠다는 욕심으로 그 독특한 제조기술을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자식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다. 청기와뿐만 아니라 고려청자 조선백자 거북선 같은 선조들의 훌륭한 기술이 전혀 전수되지 못했다. 반면에 이웃 일본은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도자기 기술을 가져다 계속 발전시켜 오늘날 세계적인 도자기 수출국이 되었다. 이와 같이 기록문화가 자리잡지 못하고 노하우가 제대로 전승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정보화 사회에서 제대로 경쟁력을 갖추기는 더욱 더 힘들다. 정보화 시대에서는 누가 먼저 필요한 정보를 갖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작은 데이터에서 정보가 축적되고 축적된 정보 속에서 지혜가 나오는 법이다.
▼ 축적된 정보는 자산
▼ 정보화 시대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는 생활주변의 사소한 것이라도 챙겨서 기록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선 주부들은 가계부라도 매일 매일 꼼꼼히 적어보자. 직장인들은 타임 다이어리를 꾸준히 작성해보고 일년쯤 뒤 평가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매년 정월 초에는 지난 해 스케줄에 대한 통계를 내보곤 한다. 해외여행 몇 건, 거래선 면담 몇 건, 경영회의 몇 건, 골프회동 몇 건 등 지난해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일별하기만 해도 금년엔 무엇을 해야겠다는 큰 그림이 머리에 들어온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소한 것을 따지고 기록하는 것에 대해 쩨쩨하다고 생각하는 실속없는 대범증부터 고쳐 나가야 한다. 이런 허세가 대충대충 마무리하는 타성으로 이어져 우리 제품, 우리 사회의 기본을 흔들리게 한다.
05-16 야구공의 실밥
지금 세계는 냉전보다 더욱 무서운 기술전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기술력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대국 미국은 특허 분쟁, 지적재산권 분쟁을 자주 일으킨다.
미국은 기술료로 매년 2백억달러에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핵심기술을 도입하고 이를 상품화하는데 특기를 발휘하여 오늘날의 경제대국을 이루어 냈다. 선진국들은 과학기술을 국가안보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과학기술이 부족하면 경제식민지가 될 뿐 아니라 국가안보마저도 남의 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기술패권시대 21세기
▼ 19세기가 군사력, 20세기가 경제력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기술패권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한때는 과학기술 선진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속활자 한글 동의보감 거북선 측우기가 그렇고 특히 김치와 같은 우리의 고유음식에서 보듯 발효에 대한 개념까지도 이미 갖고 있었다.
정보화와 관련해 본다면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의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글은 기막히게 과학적인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수했던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오늘날 뒤떨어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먼저 과학기술을 천시했던 사회풍토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성인 교양인으로 행세하려면 피카소나 셰익스피어는 알아야 하지만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이나 반도체를 발명한 쇼클리 박사는 몰라도 된다는 사람이 많다.
역사에 대한 보존의식도 희박하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박물관은 그 숫자와 소장품의 질에 있어서 선진국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인식도 아직은 미흡하다.
그림이나 불상은 오래 전부터 문화재로 지정해 왔으나 물시계 해시계 등이 과학기술 문화재로 인정된 것은 불과 10여년 전이다. 기술전쟁의 시대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경쟁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멋진 상품을 개발, 먼저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기술경영을 실천해야 한다.
과거처럼 낮은 임금을 앞세우거나 남이 하는대로 따라가는 「미 투(Me Too)전략으로는 생존 자체가 어렵다. 최근 불황을 맞이한 일부 기업에서 기술에 대한 투자를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당장 오늘이 어렵다고 내일의 희망마저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술투자는 미래에 대비한 종자(種子)이다. 아무리 배고프다고 종자로 떡을 해먹을 수는 없는 법이다.
▼ 과학 생활화가 지름길
▼ 도레이가 듀퐁으로부터 나일론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자본금보다 많은 기술료를 치렀던 것은 일찍이 기술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 입국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의 생활화 대중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어릴 적부터 장난감 동화 놀이 속에서 과학을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야구공에 실밥이 있는 것은 물리학의 공기저항 원리를 이용하여 공의 스피드를 높이고 다양한 구질을 만들어 낸다는 과학의 이치를 쉽게 깨우쳐 주어야 한다. 대통령이 되고 법관이 되기보다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고독한 과학자의 길을 가겠다는 어린 새싹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05-20 소비자의 「회초리」
작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가 무려 2백억달러를 넘어섰다. 경제불황의 골이 깊어지자 사회 전반적으로 외제품 선호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물론 지금과 같이 국가 경제가 어려울 때 국민이 국산품을 애용해준다면 불황을 극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제가 후진국 수준을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국산품애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비록 품질이 나쁘더라도 국산품을 구입해야 한다고 장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국내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입을 철저히 규제했으므로 밀수를 통하지 않고는 외제상품을 구입할 방법도 없었다.
▼ 맹목적 국산권장 잘못
▼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사람이 혼자서 살 수 없듯이 국가나 기업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됐다. 없는 것은 사 오고 있는 것은 내다 팔고, 기술을 서로 가르쳐주고 배워 가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독불장군이 되어서는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면할 길이 없다. 국경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소비자들이 개인의 기호에 따라 상품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제행위이며, 값싸고 품질좋은 상품을 구입하고자 하는 것은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이다.「우리 국민은 당연히 국산품을 사주어야 한다」는 식의 안이한 사고는 또 다른 정신적 패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청소년들의 외제문화 외국상품에 대한 탐닉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대학가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봐도 외제물건 하나쯤 지니지 않은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다. 왜 우리 젊은 학생들이 우리 제품을 외면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지 애국심에 호소하여 국산품을 애용하자고 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 따끔한 충고가 애국심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산품에 대한 과보호가 아니라 소비자들의 엄정한 평가와 까다로운 품질개선 요구, 그리고 이에 대응하려는 기업들의 진지한 노력이다. 까다로운 일류 소비자가 있어야 일류 품질과 제품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일류제품은 불량률이 적다.
가령 전자업의 경우 불량률이 3%라면 그 회사는 망한다. 그래서 나는 삼성 임직원들에게 「불량은 적이다, 불량은 악의 근원이다」라고 되뇌면서 일하라고 강조한다.
혼다가 미국에서 생산된 차를 일본으로 역수출할 때의 일이다. 미국의 품질기준에 합격했던 차가 일본에서는 소비자들의 클레임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문이 열렸을 때 보이는 문 안쪽에 묻은 먼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소비자들은 국산품을 구입해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기업이 품질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완전한 시장개방까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국내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소비자들은 국산품에 대해 사랑의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건설적인 비판과 충고를 아껴서는 안된다. 이것이야말로 글로벌경쟁시대의 진정한 애국심인 것이다.
05-21 주인의식
아무리 비싼 돈을 주고 일을 시켜도 가정부가 한 일은 집의 안주인인 주부가 하는 일과는 질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주부에게는 「이 일은 내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주인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인의식을 갖고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의 이념경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던 것도 개인의 사유재산권, 즉 「내 것」을 인정했던 것이 결정적인 힘이 됐다. 구 소련에서는 소출의 개인적 처분이 가능한 개인 텃밭의 생산성이 집단농장의 생산성보다 무려 2.7배나 높았다는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주인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 내탓보다 남의 탓
▼ 우리 민족은 일을 할 때 제 스스로 흥에 젖고 신명이 날 때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하지만 자기 배짱에 맞지 않으면 평양감사도 마다하는 우직한 일면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명과 일의 재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실력을 인정해 주고 실리도 주어야 한다.
민주사회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고도의 주인의식을 발휘해야 제대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동안 선진국에 비해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고 그나마 대부분을 타율적 군사문화에 시달렸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주인의식을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 결과 모든 문제를 내 탓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사회풍토가 자리잡게 되었다. 스탠드에 편안히 앉아 그라운드에서 땀 흘리며 뛰는 선수를 탓하는 관중의 역할에 안주하게 되었다. 자기 생색만 내면서 남의 공을 가로채고 실패의 책임을 다른 데로 전가하는 이기주의적 풍토에서는 「주인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도 정부 기업 국민 등 책임있는 경제주체들이 주인의식의 부재(不在)가 주는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한 데 있다. 국가 경제에 큰 충격을 주는 대형 금융사고도 따지고 보면 은행을 주인없이 방만하게 경영한 데 그 원인의 일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면한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국민이 자기의 맡은바 책임을 다하는 건전한 주인의식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은 궂은 일이라도 몸을 사리지 않고 내가 먼저 앞장서겠다는 자기 희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대대적인 「주인 찾기」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정부 기업 국민 모두가 자신감을 되찾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신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공장의 기계마다 「김철수 기계」라는 등 주인명찰이 붙을 때 한번이라도 더 기름칠하고 닦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자기 일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공사 실명제, 규제 실명제 같은 것도 적극 도입해 봄직도 하다.
▼ 신바람을 일의키자
▼ 정부는 기업과 국민이 신바람이 나서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하고 기업은 우리 경제의 주인이라는 책임감을 갖고 스스로 혁신하여 경제회복에 앞장서 나가야 한다. 가정에서도 어린 자녀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을 계획하고 결과에 대해 당당히 책임지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어릴 때부터 주인의식에 눈을 뜨도록 해야 한다.
05-26 영화감상과 「입체사고」
경영이 무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경영이든 일상사든 문제가 생기면, 최소한 다섯번 정도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원인을 분석한 후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자기 중심으로 보고 자기 가치에 의존해서 생각하는 습관을 바꿀 것을 권한다. 한 차원만 돌려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 나무심으며 숲을 생각
▼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처럼 모든 환경이 초음속에 비견될 정도로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보면서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입체적 사고(立體的 思考)」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입체적 사고가 습관이 되면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라 「일석오조(一石五鳥)」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무를 심을 때 나무 한 그루만 심으면 그 가치는 몇 십 만원에 지나지 않지만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면 목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홍수방지 공해방지 녹지제공 등 여러 효과를 거두게 되고 재산가치도 커진다. 나무를 심더라도 숲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입체적 사고이자 소위 1석5조일 것이다.
사실 과거에는 1석2조만 해도 성과가 높다고 인정받았으나 이제는 최소한 1석5조는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 변화의 폭이 넓고 빨라지는 시기에 단품(單品)이나 단일 업종만 갖고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것처럼 단일 목적만으로는 환경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더구나 선진국가를 뒤쫓아가는 우리의 처지에서 한 가지 목적, 한 가지 효과만을 생각해서는 결코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몸에 밴 평면적 사고의 틀을 단숨에 바꾸기는 어렵다. 일상의 주변에서 쉬운 것부터 찾아 사물의 본질을 생각하고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훈련이 필요한데 그 훈련의 한 방법으로 조금은 특이하게 들릴 영화감상법을 권하고 싶다.
영화를 감상할 때는 대개 주연 쪽으로 기울어서 보게 된다. 주연의 처지에 흠뻑 빠지다 보면 자기가 주인공인양 착각하기도 하고 주인공의 애환에 따라 울고 웃는다.
그런데 스스로를 조연이라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면 전혀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나아가 주연 조연뿐 아니라 등장 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느끼게 된다. 거기에 감독 카메라맨의 자리에서까지 두루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무슨 영화를 그렇게까지 골치 아프게 보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보면 평면의 스크린 위에 비치는 영화가 입체적으로 보이면서 등장인물들의 인생관이 느껴지고 작가의 철학을 알게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 조연 입장에서 보자
▼ 그저 생각없이 화면만 보면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하지만 그처럼 여러 각도에서 보면 한 편의 소설, 작은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면 처음에는 무척 힘들고 바쁘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하나의 「사고의 틀」이 만들어지고, 음악을 들을 때나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또 일을 할 때에도 새로운 차원에 눈이 떠지게 된다.
05-27 기업의 「홍익인간」
몇해 전 영국의 총리가 교통법규를 위반해 벌금을 냈다는 해외토픽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국민들은 고급공무원이 벌금을 낸다는 소식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영국이라는 나라에는 공인정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이 살아있던 적이 있었다.
▼ 옛 선비정신 배우자
▼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금전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더라도 사회지도자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국민과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희생정신도 가지고 있었다. 서양에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선비정신이 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사고에 이어 대형 금융부정사건 등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고 있다. 한국에서는 연극을 보러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고나면 주인공이 바뀌면서 새로운 사건들이 터지니까 뉴스를 팔아먹는 사업을 하면 국제수지개선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듣기도 했다.
선조들의 훌륭한 선비정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대신 오그라진 소인정신과 배금주의 보신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면 기업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사회지도층 인사에게 선비정신이 있었다면 기업인에게도 널리 인류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를 쓰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있다.
풍요로운 세상,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는데 기여하는 기업의 사명이 바로 홍익인간의 정신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 기업을 경영하는 한사람으로서 과연 홍익인간의 정신에 충실해 왔는지, 모자람은 없었는지 자문하면서 때때로 스스로를 채찍질해 볼 때가 많다.
기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계속 성장한다. 부도를 내지 않아야 하고, 오래 살아야 하고, 기업시민으로서의 사회적 인격도 갖추어 나가야 한다. 부실공사를 일삼고 특혜로 돈을 버는 것은 기업이 걸어야 할 바른 길이 아니다. 이런 변칙은 암이나 독약같이 종내는 스스로를 망치게 한다.
이제 우리 기업도 세계적 기업으로 커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정서속에 면면히 흐르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정신적 기둥으로 삼고 경영력과 기술력으로 당당하게 승부하려는 각오를 다져야 하겠다.
▼ 지도층 정신력이 중요
▼ 아직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와 진보없이 그대로인 상태에 있다. 이는 그 나라의 정치 사회 지도자들이 깨지 못하고 국민과 공동체를 위한 공인정신 공복(公僕)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각 분야의 지도층 인사와 기업 경영자는 자라나는 후손을 위해서라도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선비정신과 홍익인간의 이념을 앞장서서 구현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삼성 임직원들에게 「인류를 위한다」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말일지는 몰라도 최소한 국제사회에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말기를 자주 당부한다. 한 나라 역사의 진보와 퇴보가 사회지도층의 정신력에 달려있다는 로마제국의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05-31 손발묶고 뛰라니…
한때 우리나라의 고속전철 수주를 놓고 프랑스의 TGV, 독일의 ICE,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이 치열하게 다툰 적이 있다. 결과는 프랑스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이 수주전에서 각국은 재계와 언론은 물론이고 국가 수반까지도 기업을 지원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총력전을 폈다.
이것을 보면 이제 기업 혼자의 힘만으로는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우리는 국제화 개방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내로라하는 기업 수십 개를 합친 것 보다도 규모가 더 큰 일본의 도요타나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같은 기업들과 국내시장에서 일대 일로 맞붙어 경쟁해야 한다.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조차 국가적 지원을 등에 업고 있는 마당에 경쟁력이 미미한 한국 기업들이 홀로 나선다면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 규제와 획일 이제 그만
▼ 결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국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국민 정부 기업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돼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서고 우리 기업이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정부는 정책을 통해, 국민은 따뜻한 이해와 격려로 기업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에 대해 기업은 좋은 물건을 빨리 값싸게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다 팔고 거기서 얻는 이윤으로 국민과 사회에 공헌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규제와 획일」이라는 패러다임을 먼저 바꿔야 한다. 규제는 뛰려는 사람의 손발을 묶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손발을 묶고서야 어떻게 세계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겠는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신라시대 장보고의 청해진, 고려의 금속활자, 조선의 각종 과학발명 등에서 볼 수 있듯이 2등 가라면 서러워 할 능력과 자질을 갖고 있다.
또 미국에서 조사한 각국 14세 아동의 수학(修學)능력을 보면 선진국이라는 미국이 2백55점, 영국이 2백60점인데 비해 우리나라는무려3백18점에 이른다. 이처럼 두뇌로 보나 과거의 역사로 보나 우리는 충분히 일류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
▼ 빌딩짓는데 도장 천 개
▼ 그런데 오늘의 우리 사회는 이 모든 능력과 자질을 규제와 획일로 묶어놓고 있다. 규제와 획일은 타율과 타성을 가져오고 결국에는 인간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막아 모든 사고와 행동을 오그라지게 한다.
최근 우리 기업이 고물류비 고임금 고지가 고금리의 「4고(高)와 인허가 도장이 많고, 행정처리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2다(多)」에 허덕이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규제와 획일에서 연유한 것이다. 실례를 들어 서울에 빌딩을 하나 신축할 때 필요한 행정 관서의 결재단계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1천1백15개의 도장이 찍혀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21세기를 향해 앞다퉈 달려가고 있는데 한참을 뛰고 달려도 부족할 우리가 이런 규제에 묶여 있다가는 선진 국가 선진기업과의 격차만 더욱 벌어질 뿐이다.
06-04 큰사람 작은사람
나는 선친으로부터 「기업은 곧 사람」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내자신 삼성의 회장으로서 제일 힘든 일이 사람을 키우고 쓰고 평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사람(적재·適材)을 키워 필요할 때(적시·適時) 필요한 곳(적소·適所)에 쓰는 일이야말로 기업 경영자의 의무인 것이다.
▼ 실력보다 연줄에 집착
▼ 손자병법에서도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에 못미친다고 하여 사람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지 않았던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인 것이다.
그동안 경영활동을 해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고 경험도 해 보았다. 조직을 살찌우고 활성화하는 훌륭한 사람도 보아 왔고 조직을 망치는 사람도 경험했다.
사람의 유형을 보면 우선은 「예스맨」과 「소신파 인간」을 들 수 있다. 예스맨은 해바라기형으로 언제나 듣기 좋은 말만 한다. 그러나 자신의 소견은 없다. 문제는 숨기고 본질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말하지 않는다.
소신파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프로기질과 책임감도 있다. 당당하게 주장을 펼친다. 고집이 세 타협이 어렵지만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쪽은 역시 소신파다.
부지런히 학연 지연 혈연을 찾아 연줄을 만드는 「스파이더맨(거미줄인간)」도 있다. 이들은 실력보다는 연줄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런 유형은 파벌을 조성하여 인화를 해칠 우려가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권위주의에 젖은 「관료화된 인간」도 있다. 관료주의적 사람 밑에는 권위주의자 형식주의자들이 많이 모인다. 이들 밑에서는 큰 인물이 자랄 수 없고 자율과 창의가 꽃을 피울 수 없다. 다음으로 생색이나 내고 자기를 과시하는데 열심인 「화학비료형 인간」도 경계해야 할 유형이다.
조직에는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퇴비형 인재」도 많지만 화학비료형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예스맨」 「관료화된 인간」 「화학비료형 인간」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능숙한 말솜씨로 여러가지를 말하는데 대개 1인칭이 아니라 3인칭 화법을 즐겨쓴다는 점이다. 「내가 하겠다」가 아니라 「사원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다. 나는 똑같이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한 사람은 회사가 꼭 필요로 하는 「핵(核)이 되는 사람」이 되는가 하면 또다른 한 사람은 많은 사원중의 하나, 즉 「점(點)이 되는 사람」도 보았다. 두 사람을 결과적으로 이렇게 다르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 주인의식 가질 필요
▼ 「핵이 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누구의 지시를 받기 전에 먼저 일을 찾아서 한다. 눈가림이나 생색을 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만큼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자기 책임을 다한다.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니 자율과 창의도 넘친다. 그러니 핵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것이 내 일이라는 주인의식이나 「왜」라는 문제의식도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은 점 이외에 무엇이 되겠는가. 결국 사람은 「주인의식」의 유무에 따라 큰 사람이 되기도 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의식이란 참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06-06 변해야 생존한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 경제적 환경변화는 우리에게 강도높은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변화불감증」 「복지부동」에 대한 비판과 질책만이 비등(沸騰)할 뿐 실질적인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바닷속의 조개는 주위가 조용하면 기어나와 활동을 하다가도 시끄러우면 두꺼운 껍데기를 꼭 닫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수비적인 자세가 바로 발전의 걸림돌이다. 미래에는 무겁고 두꺼운 껍데기를 과감히 깨뜨리고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
▼ 우선 나부터 변하자
▼ 즉 「변화의 일상화」만이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 성공을 거두었던 수많은 변화들의 공통점은 세가지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공통점을 올바른 변화의 계명(誡命)으로 삼아 기업경영에 적용하려 애써왔기에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해 볼까 한다.
첫째, 모든 변화는 「나부터의 변화」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의 파문이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져 호수 전체로 확산돼 나가는 것과 같이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부터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나는 준비되었으니 너부터 먼저 변해 봐라」는 식의 방관적인 태도나 「나는 이렇게 열심히 뛰는데 너는 앉아서 편히 쉬느냐」고 남을 탓하는 태도,
또는 「나는 쉬는데 너만 혼자 뛰기냐」며 뛰는 동료를 질시하거나 뒷다리를 잡는 태도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변화의 장애물이다. 「나부터의 변화」 「너부터의 변화」는 비록 획 하나의 차이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전부(全部)와 전무(全無)의 차이인 것이다.
둘째, 변화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커다란 배를 서로 반대방향에서 잡아당기면 배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변화가 가져올지도 모를 불편, 불이익에 저항하는 이기주의의 전형적인 예가 「총론찬성, 각론반대」이다.
그러므로 변화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공감대를 확보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시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부분최적화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나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미로 속을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하는 모르모트와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변화의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속도를 조절하는 「변화의 관제탑」으로서 사회지도층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모든 변화를 이루려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 쉬운일부터 차곡차곡
▼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혁명이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아무리 실력있는 산악인도 처음부터 에베레스트 등정을 하지 않는다. 인수봉을 비롯하여 비교적 덜 험난한 국내의 산악코스를 두루 거친 후에야 티베트로 향한다.
변화란 이처럼 쉬운 일, 간단한 일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야 한다. 작은 변화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변화가 가져다 주는 좋은 맛을 느껴보고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부터, 한 방향으로, 쉬운 것부터」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변화과정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06-09 먼저 숲을 보자
내가 일을 하고 챙기는 데는 내 나름의 몇 가지 원칙과 습관이 있다. 먼저 목적을 명확히 한다. 보고를 받는다면 보고의 목적과 결정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한다.
다음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악한다. 본질을 모르고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본질이 파악될 때까지 반복해서 물어보고 연구한다. 나는 자주 「업(業)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이 하는 일의 「업의 개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한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며 달을 보라고 외치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만 쳐다보고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 대소완급 구분해야
▼ 목적과 본질 파악이 나의 원칙이라면 숲을 먼저 보고 나무를 보려고 하는 노력은 나의 습관이다.
동양과 서양은 크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주소 표기법이다. 우리는 「국가」 「시 도(市道)」 「시 군 구(市郡區)」 「동 읍(洞邑)」의 순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은 그 반대이다. 나는 동양의 주소 표기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을 함에 있어 대소완급(大小緩急)의 구분도 매우 중요하다. 이런 구분은 곧 일의 본질에 바탕을 두고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일이다.
어떤 공장을 방문했을 때 본공장 건설이 한창인데 조경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공장건설이 최우선인데 정원을 먼저 가꾸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대소완급을 구분하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다. 최종결심을 하기 전에 챙겨봐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일은 정보의 확인과 활용이다. 통상 우리는 있는 사실(데이터)과 정보(인포메이션)를 구분하지 못한다. 지금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가의 사실 파악은 데이터이지 정보가 아니다. 정보란 그같은 사실을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율이 올랐다는 사실은 데이터이다.
▼ 「일의 주인」이 되자
▼ 환율이 오르는 데서 오는 득실은 무엇이고 환차손을 줄이고 환차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곧 정보이다. 데이터를 보고 읽는 관점에 따라 정보의 내용과 질은 달라진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관점을 달리하고 이를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것이 곧 정보활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목적과 본질을 알았고 숲과 나무를 보았으며 대소완급의 판단아래 관련 정보까지 활용하여 최종 결심을 했다면 다음은 일이 되도록 진행시켜야 한다.
일을 하는데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능동적인 사람과 「시키는 대로 한다」는 수동적 사람이 그것이다. 수동적인 사람은 일에 이끌려 가는 노예가 되어 자율과 창의가 없다. 그래서 나는「일의노예」가되는 사람보다 「일의 주인」이 될 줄 아는 사람을 찾아 일을 맡긴다.
06-12 디자인이 결정한다
몇년전 미국의 어느 경영학자가 쓴 글에서 「과거 기업들은 가격으로 경쟁했고 오늘날은 품질로 경쟁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디자인에 의해 기업의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라는 내용을 읽고 매우 공감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실제로 유럽지역을 대상으로 제품 구매시의 디자인 비중을 조사했더니 디자인의 중요성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눈앞에 와 있었다.
당시 고객들이 물건을 사면서 디자인을 고려하는 정도가 전자제품이 48%, 자동차는 38%, 산업용 장비가 3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소비자가 외국제품을 구매하는 동기를 조사해도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디자인이 좋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상품의 경쟁력은 기획력 기술력 디자인력의 세 가지 요소로 볼 수 있다. 이것이 과거에는 각각 더해지는 합(合)의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각각 곱해지는 승(乘)의 개념이 되었다.
▼ 디자인이 가격-품질보다 우선
▼ 즉 과거에는 세 가지 결정 요소 중 어느 한 가지가 약하더라도 다른 요소의 힘이 강하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곱셈식으로 표시되는 요즈음에는 기획력과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디자인이 약하면 다른 요소까지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고, 결국 경쟁이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앞으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가 진전되면 고객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하나 다른 제품을 만들어 제공해야 하는 시대가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품을 보면 한결같이 디자인 마인드가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아직도 우리는 제품을 기술적으로 완성한 뒤 미적 요소를 첨가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디자인이라고 여기고 있다.
골프를 해본 적도 없고, 심지어 골프장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골프웨어 골프용품을 디자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삼성은 물론 대부분의 기업들의 상품 디자인에서 통일된 이미지를 찾을 수 없다.
반면에 자동차의 벤츠, 전자의 소니 등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우리 제품이 해외시장에 나가 일본 제품과 상대하게 되면 꼭 「마무리(finaltouch)」가 부족해서 문제가 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무리뿐만 아니라 외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제품의 외관이 선진 제품보다 뒤지는 탓에 국내외 시장에서 고객에게 외면 당하고 제 값도 못받고 있다.
▼ 조기교육 통해 육성을
▼ 한국의 문화가 배고 자기 회사의 철학이 반영된 디자인 개념을 정립하는 작업을 혁명 차원에서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치열해지는 경제 전쟁에서 배겨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 경영자는 젊은이들과 자주 대화하고, TV 인기 드라마도 보면서 유행을 알고 디자인 감각을 키워야 한다.
또 개별 제품의 디자인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해 섣불리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10대들이 쓰는 용품의 디자인을 50대 경영자들이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칫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결과를 가져온다. 디자인력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디자이너의 수준이다.
일본의 마쓰시타가 디자이너를 4백50명이나 보유하고 있는데 같은 전자 회사인 삼성전자는 1백30명 수준에 불과하다. 국내외에서 천재급의 디자이너를 확보하고, 어려서부터 감각이 있는 청소년들을 디자이너로 육성해야 한다. 또 디자이너들에게 세계 최고급품을 얼마든지 사서 쓸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등 경영자 못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명품(名品)이 나온다.
06-13 실패는 보약이다
나는 평소 임직원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을 저질러 보기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기업경영에 있어 실패경험 만큼 귀중한 자산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패는 어느 사람에게만 특별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가 인생에서 혹은 사업에서 한두번씩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하게 마련이다. 위대한 과학적 발명과 발견도 쓰라린 실패의 경험속에서 그 열매가 맺힌다.
신약이나 신물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평균 1만2천번의 실패를 거쳐야 하고, 석유탐사에서도 최소한 25번은 실패해야 비로소 하나의 유정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같이 실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인데도 실패 자체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오그라진 사람이 많다.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시인하고 실패를 자인하는 용기있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
나는 기업경영에서 작은 성공의 누적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작은 성공으로 자만심에 빠져 더 큰 실패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운전면허를 한번에 쉽게 딴 사람의 교통사고 발생률이 어렵게 딴 사람보다 세배 정도 높다고 한다.
작은 성공에 만족하는 평범한 「사람」보다는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도전적 「인물」이 앞으로 조직과 회사를 살찌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실패의 원인을 꼼꼼히 살펴보면 대개는 피할 수 있는 실패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실패가 될성부른 일은 시작하는 단계부터 그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사전준비 부족, 안이한 생각, 경솔한 행동이 실패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실패는 그대로 방치해 두면 독약이 되지만 철저히 원인을 분석하고 교훈을 찾아내면 오히려 최고의 보약이 된다. 세간에는 삼성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고 하지만 나는 임직원들에게 다리가 없더라도 건너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험을 각오하고 선두에서 달려가야 기회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유있는 실패는 나무라지 않지만 터무니없는 실패,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대하고 있다. 이유있는 실패까지 나무라면 조직내 창의성이 말살되고 복지부동의 자기 보신주의만 남는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라 동일한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아직 실패를 교훈으로 삼고 자산화하는 데 매우 인색한 것 같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가 주는 교훈을 벌써 망각하고 있다. 역사에 나타난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는 작금의 현실도 따지고 보면 실패를 자산화하지 못하고 실패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패를 결코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만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 오늘의 실패를 미래의 자산으로 만들어 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과거의 실패사례에서 배우지 못하고 역사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회는 진보나 발전이 없다.
06-17 3천만원짜리 도마
일본에는 「히노키」란 나무가 있다. 히노키는 강수량이 많은 일본의 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고유수종이다. 다 자란 히노키의 키는 30m가량 된다. 이 나무는 생김새가 독특할 뿐 아니라 가지 끝에 달리는 조그만 갈색 방울과 얇게 세로로 벗겨지는 붉은 껍질이 있어 어느 것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미래산업의 중요성그렇지만 이 나무는 일년에 겨우 25㎝밖에 자라지 않는다. 그러니 다 자라려면 약 1백년이 걸리는 셈이다. 대신 이같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은 그만한 값을 한다. 그윽한 향과 견고성은 아주 비싼 고급 가구를 만드는데 이상적이어서 장인(匠人)들은 오래 전부터 그 가치를 높게 인정하고 있다.
한 예로 히노키로 만든 요리용 도마 하나의 가격이 무려 3천만원을 호가하고 있을 정도다. 기업도 「저성장 고기술」의 시대인 21세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히노키와 같은 고부가가치형 수종사업(樹種事業)을 보유해야 한다.
사실 지금 세계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선진기업들의 성공비결도 알고 보면 히노키같은 수종사업을 남보다 앞서 발굴하고 진출한데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들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히노키는 찾아보기 힘들고, 치수(治水)역할과 땔감으로서의 가치밖에 없는 잡목과도 같은 사업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실상이다. 이제 모든 기업들이 미래형 사업구조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20년 후까지의 사업전개도를 만든다든지 하여 미래전략을 사전에 정리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시류에 따라 흔들리지 말고 장기적으로 일관된 사업전략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본전기(NEC)가 컴퓨터와 통신을 두 축으로 하는 C&C개념을 제창하여 미래의 사업전략을 대내외에 명확하게 인식시킨 것은 좋은 예다.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때도 사업 자체의 타당성만을 분석하기보다는 그 사업에의 진출이 기존사업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기업의 비전과 대비하여 전략적 일관성이 있는지 등을 분석해야 한다.
단순히 외형을 키우기 위한 다각화보다는 사업간의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한편 전략적으로 결정된 수종사업에 대해서는 히노키를 키우는 마음으로 집중투자해야 한다. 수종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조직내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편 핵심인력을 투입, 사업의 추진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모토롤라의 용기반면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만성적인 적자사업에 대해서는 포기의 미학을 발휘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해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사업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출생 성장 성숙 소멸이라는 순환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므로 신규업종이 탄생하고 쇠퇴업종이 정리되는 것이 순리(順理)다. 반도체 통신기기 가전제품사업에 집중해오던 모토롤라는 1970년대에 일본기업들이 원가경쟁력을 앞세워 공격을 해오자 TV 라디오 등 부가가치가 낮은 가전부문을 과감히 포기하고 반도체와 통신에만 경영력을 집중했다. 그 용기 때문에 모토롤라는 오늘날의 초일류기업으로 거듭 날 수 있었음을 우리 기업들은 상기해야 한다.
06-23 「미국 재기」의 교훈
경쟁력 강화는 우리의 현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신의 강 약점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도 변화의 자극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거울의 중요성을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거울이란 「남이 나를 보듯, 내가 나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즉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해 준다. 객관적인 시각을 상실하면 자칫 자만심에 빠지기 쉽다. 지난 80년대 후반에 미국경제가 침몰의 위기를 겪은 것도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 겸허히 배우는 자세를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등국가로서의 위상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미국기업들 사이엔 자만심이 폭넓게 자리잡았다. 아무에게도 배울 것이 없다고 느꼈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강점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전세계에서 소송이 가장 많은 나라, 변호사가 가장 잘 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이처럼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와 기업간의 두꺼운 벽이 미국의 국가경쟁력을 잠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화려하게 경제적 재기에 성공했고 선진국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 경제력 회복의 근저에는 「벤치마킹」이라 불리는 겸허한 배움이 숨어 있다.
이제 미국에서 남에게 배운다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각자가 보유하고 있는 강점들을 공유함으로써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지혜마저 갖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기업의 풍토는 어떤가. 과거 위기에 처했던 미국의 경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세계 삼류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경각심을 느끼기보다는 국내 정상이라는 우물 속의 평온함을 즐기고 안도감에 젖어 있기를 원한다. 그런가하면 남의 말, 나보다 나은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소위 텃세가 심한 것이다. 어렵사리 모셔온 기술고문들의 노하우를 겸허히 배우려하기보다는 「배워서는 안되는」 온갖 이유를 찾아 내려는 오그라진 행태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우물안 개구리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한 국가경쟁력 제고는 환상에 불과하다. 하루빨리 우물에서 뛰쳐나와 우리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선진제품과의 비교전시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품질과 성능의 격차를 인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국내정상이 세계3류
▼ 최고를 모르고서는 최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몇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형매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수북이 쌓인 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버린 한국산 전자제품의 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의 안타깝고 아찔했던 경험이 최근 들어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디지털전화 등 몇몇 세계적 첨단기술을 개발하는데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또한 기술고문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존중하는 한편 인간적으로도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소중한 노하우라도 스스로 가르쳐주고 싶어할 정도가 돼야 한다.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자기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뛰어난 사람에게서 장점을 배우고, 잘못된 사람에게서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06-28 中企 위하는 대기업
양산조립(量産組立)업을 주축으로 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협력회사를 제외하고 대기업의 경쟁력을 논할 수 없다. 우선 독자적으로 제품을 완성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동차의 경우 부품이 2만개, VTR가 8백∼9백개인 것을 감안하면 70∼80% 이상은 중소기업에서 생산되는 부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제품이 생산돼 고객에게 전달될 때까지 거치게 되는 수많은 공정중 상당부분을 협력회사가 담당하게 된다.
▼ 공동운명체로 인식
▼ 만약 어느 한 곳에서 불량이 발생하면 그동안 투입된 부품 노동력 자금 등의 경영자원을 버려야만 하는 손실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구매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을 하청(下請)업체라 부르며 마치 상전이 부하를 대하듯 해왔다. 지금도 환갑이 넘어보이는 중소기업 사장이 새파랗게 젊은 사원이나 간부에게 거래대금을 받기 위해 굽신거리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다. 중소기업을 공존공영의 동반자가 아닌 원가절감의 대상으로서만 인식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일방적인 거래는 대기업에도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마지못해 가격을 인하하고 낮은 마진을 감수해야 했던 중소기업들은 「그저 검사에만 안걸릴 정도로 적당히 넘어가자」는 생각에 빠지게 됐다. 또 품질향상에 대한 동기부여가 적었기 때문에 높은 불량률과 납기지연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결국 대기업은 품질에 대한 고객의 신뢰와 당장 손에 잡히는 원가절감을 맞바꾼 셈이 됐다.
이제부터라도 중소기업은 고객만족과 품질향상을 위해 함께 뛰는 「2인3각」의 파트너로서 위상이 재정립돼야 한다. 하청업체가 아니라 「자식까지 대를 물려가면서 거래하는」 공존공영의 협력회사로 자리매김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대기업은 하드적인 자금지원은 물론 소프트적인 정보제공 기술지도 경영컨설팅까지 해주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검사과 검품과라는 부서가 점차 없어지고 있다. 애당초 불량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력회사를 지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협력회사라고 무조건 감싸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불량을 눈감아주는 것은 고객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를 함께 저지르는 공범자의 자세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자율과 경쟁이라는 원칙하에서 「배우자를 얻는다」는 마음가짐으로 협력회사와 동반관계를 맺어야 한다.
▼ 정부도 적극 지원을
▼ 정부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치논리에 의한 과보호장치보다는 대기업과의 실질적인 협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부동산 담보위주의 대출제도도 시급히 개선돼야 할 과제다. 경영자의 생활철학 신념 기술의 깊이를 고려하여 대출해주는 선진국에 비한다면 우리나라의 금융관행은 아직도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편 중소기업의 경영자도 장인정신과 프로정신을 발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영자」라는 기업가정신을 길러야 한다. 품질개선과 기술개발에 노력하여 대기업이 「제발 제품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류 중소기업이 되는 것이다.
07-03 무점포시대의 경영
주변에서 정보화사회라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은 많지만 그 사회가 산업화사회와 얼마나 다른 세상인가를 생각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나이가 제법 든 사람이라면 학창시절 사랑하는 사람에게 러브레터를 띄운 뒤 답장이 올 때까지 며칠 또는 몇 주일을 가슴 죄며 기다렸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떤가. 휴대전화나 삐삐 등의 통신수단을 이용해 수시로 연락하거나 PC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해 전자우편을 띄울 수 있기 때문에 편지는 별로 필요없는 세상이 됐다. 이미 전보도 긴급한 일을 전달하기 위한 매체로서의 기능을 잃은지 오래다. 바로 이것이 컴퓨터와 통신기술이 만들어내는 정보화시대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정보화는 실물이 필요없는 「무실물(無實物)의 시대」를 가능케 한다. 예전에는 공부를 마치고 기업에 입사하면 맨 먼저 서류를 깨끗이 작성하기 위한 펜글씨 연습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서류를 손으로 작성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웬만한 조직에서는 서류없이 컴퓨터 통신망에서 전자결재가 이루어진다. 종이가 필요없는(Paperless) 시대인 것이다.
또한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신입사원이 도심에 있는 높다란 빌딩에 출퇴근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신입사원이 채용되면 으레 책상과 의자 그리고 사무집기 세트를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굳이 사무실에 개인별로 책상이 있을 필요가 없다. 최소한의 공동작업 공간만 있으면 충분하다. 실제로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도 집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재택근무를 흔히 볼 수 있고, 심지어는 해외출장 도중에 떠있는 비행기 속에서도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사무실이 필요없는(Officeless)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상거래는 어떠한가. 물건이 필요할 때 전화로 주문하면 몇 분내에 가정으로 배달되는가 하면 최근에는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상거래(Electronic Commerce)까지 등장했다. 이제 기업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가장 유리한 조건의 구매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는 공급자 입장에서는 더이상 넓은 가게와 커다란 창고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미 배달주문만을 취급하는 음식점도 생겨나고 있으며 통신판매 전문업체도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바야흐로 무점포(Storeless)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화가 인류사회에 가져다주는 효과는 실로 막대하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비용절감의 효과이다. 서류작성, 사무실 임대, 가게 인테리어 작업에 소요되는 실물투자를 거의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효과는 기업경영이 시공(時空)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4차원 경영을 통해 얻어지는 시장 고객 정보와 빠른 의사결정은 기업에 기회선점은 물론 발빠른 환경대응력을 가져다준다. 이런 변화는 산업화 시대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07-08 「빨리」서 「먼저」로
과거에는 기업을 경영하려면 돈 사람 설비 기술이 필요했었다. 이들이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주된 경영자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만으로는 다른 기업과 차별되는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어렵게 됐다. 바로 시간이 새로운 경영자원으로 부각됐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기업경영의 요체가 됐다.
▼ 때 놓치면 헛수고
▼ 그동안 우리는 자본이나 기술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간이라는 경영자원을 적절히 활용, 짧은 기간내에 고도성장을 이룩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남들이 쉬고 있을 때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남보다 빨리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우리 건설업체가 해외에서 횃불을 켜놓고 밤샘공사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공기단축과 돌관작업은 한국건설업체의 트레이드 마크로 정평이 나 있다. 반도체산업이 세계 정상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도 남들은 2년씩이나 걸리는 공장 건설을 우리는 반년만에 끝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빨리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은 근면과 그것을 촉발한 헝그리 정신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빨리」만으로는 안 통하는 세상이 됐다. 국제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우리의 「빨리 경쟁력」을 후발개도국이 답습, 추격해 오고 있다.
우리 자신 또한 빈곤탈출의 결과로 과거와 같은 근면성을 계속 유지하기가 힘들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시간 경쟁력의 질적 차원을 한단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빨리의 개념」을 기회를 선점하는 「먼저의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 나는 10년전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면서부터 기회선점 경영을 특별히 강조해왔다. 기술과 자본력에서 훨씬 앞서 있는 미국 일본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시간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경영 1기 3년 동안에는 질 중심 경영을 강조해 왔지만 신경영 2기에는 「먼저」 「빨리」 「제때」 「자주」의 스피드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반도체산업이 그 좋은 모델인데 내 자신이 직접 타이밍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남보다 먼저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 시간과 피나는 싸움을 벌여 왔다.
▼ 「上之上」의 경영전략
▼ 아직도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는 「먼저의 개념」이 미흡한상태에있다. 하지만반도체나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디지털전화와 같은 몇몇 분야에서는 세계시장 선점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반도체분야에서는 세계 최초로256메가D램 1기가 D램을 개발했고 CDMA 분야에서는 모토롤라보다도 먼저 상용화기술을 개발했다.
손자병법에서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상지상(上之上)전략을 경영에 도입하면 결국 남보다 먼저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기업경영의 승패는 시간자원을 누가 더 먼저, 누가 더 빨리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에게 미래가 있다. 지난 고도성장기에 우리의 장점으로 작용했던 「빨리의 시간 경쟁력」에서 벗어나 「먼저의 시간 경쟁력」을 갖추는데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업의 새로운 지평이 될 것이다.
07-11 「자본」서 「지식」으로
과거 농경사회는 생산의 기본적인 요소가 땅이었기 때문에 지본(地本)사회라 부른다. 그런데 산업사회에 들어와 생산의 기본단위가 공장으로 바뀌면서 공장과 설비를 운영하는 자본이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하는 자본(資本)주의 사회가 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해지고 생산효율의 향상도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미래에는 지식과 정보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지식사회가 될 것이다. 오늘날 국제무역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지적재산권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 미국 경쟁력의 핵심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던 미국이 1980년대 들어 일본에 역전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미국은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은 9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 전면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제조업의 경쟁력은 잃었어도 미국에는 지식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도체 생산은 일본과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지만 그 반도체를 이용해서 부가가치가 높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은 미국 기업이다. 수십년간 제조업에서 위상을 떨치던 회사들의 매출이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보다 뒤진다. 좀 분야가 다른 얘기지만 금융산업에서 고수익을 거두는 것도 역시 미국은행들이다.
자산규모는 일본은행이 1등부터 20등까지를 거의 독차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익을 내는 것은 미국의 투자은행이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이제 지식은 고매한 학자들만의 사치품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지식에도 값이 매겨지는 지가(知價)사회에 살고 있다. 미국이 거액을 투자해서 정보 슈퍼하이웨이를 건설하는 것도 지식의 원활한 교류를 위한 것이다. 지식이 경쟁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본(知本)사회가 된 것이다.
지식과 정보경쟁에서 미국이 앞서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993년에 일본을 찾은 피터 드러커 교수는 그때 벌써 일본이 겪는 불황이 경기침체가아니라 「이행(移行·Transition)의 진통」이라고 지적했다. 드러커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가 지식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군대식 대규모 조직이 정보형 소규모 조직으로 분해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런 현상을 거품을 제거하는 노력의 한가지로만 봤으나 드러커 교수의 의미 부여는 이처럼 좀 다르다.
▼ 「조직의 소형화」 특징
▼ 그렇다면 지식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기업이나 사회 전반에 어떤 특징적 현상이 나타나는가. 드러커 교수는 미국과 일본을 비교해 가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몇가지 기억나는 지적을 소개해 본다.
우선 대기업 노동자가 줄어드는 대신 중견기업이나 지식을 자본으로 삼는 업종의 고용이 늘어난다. 중간조직이 줄고 제너럴리스트보다는 스페셜리스트가 늘어난다. 지적 생산성은 성과주의로 판단되는데 미국은 이 제도가 낯설지 않지만 일본은 고민에 빠진다. 이런 현상이 부분적으로 우리에게도 나타난다면 우리도 이미 지본사회에 접어든 것이다.
07-16 미래의 경영자像
기업경영을 하다보면 「경영은 종합예술」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뛰어난 영화 뒤에는 반드시 명감독이 있듯이 훌륭한 경영의 뒤에는 탁월한 경영자가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기업을 발전시키는 주체는 사람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경영자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경영자의 조건은 무엇일까? 환경변화의 요구에 따라 경영자의 자질도 바뀌어 가기 때문에 딱 부러지는 정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 환경따라 조건도 변화 과거 60∼70년대에는 경리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인재가 대체로 경영자로 성장했다. 만들기만 하면 팔렸던 시대였기 때문에 거둬들인 수입을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이 경영의 요체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업체간의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싸게 만들고 많이 파는 능력이 중요하게 됐고 자연히 경영자도 생산과 판매부문에서 많이 나오게 됐다.
90년대에 들어서는 고객과 시장의 니즈(Needs)에 맞는 기술과 상품을 개발하고 기회를 선점하는 전략이 중요해졌고 이에 따라 기술과 전략부문 출신들이 경영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특정기능의 전문가만으로는 부족하다. 21세기형 경영자는 변화자체를 만들어가고 유연한 조직문화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조직내에 전파할 수 있는 철학자의 경륜이 요구된다.
아집의 철학(鐵學)이 아니라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유학(柔學)을 갖춘 철학자적 경영자가 필요하다 하겠다.
21세기 미래경영자가 갖춰야 할 조건은 네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우선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사물과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미래 변화에 대한 통찰력과 직관으로 기회를 선점하는 전략을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관리의 실패는 언제라도 회복이 가능하지만 방향을 잘못 선정한 전략의 실패는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현상에 안주하기보다는 항상 새로움에 도전하는 변화추구형 경영자가 돼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는 변화기피형 경영자가 더 많다. 스스로 혁신에 앞장서기는 커녕 부하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까지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좌절시킨다.
결국 부하들은 지시받은 일에만 매달리고 조직 전체적으로는 「나 몰라라」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된다. 또한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환경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영자 스스로가 고감도 고부가가치 정보의 수발신자(受發信者) 역할을 해야 한다.
▼ 통찰력 넓은 안목 갖춰야 정보의 홍수속에서 남보다 많은 정보를 먼저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해답을 알고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경영자는 비좁은 국내시장에 얽매이기 보다는 넓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적 감각은 미래의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건이다. 나는 21세기를 대비하는 경영자라면 최소한 지혜 혁신 정보력 국제감각의 네가지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07-17 남다른 기술로 승부
요즈음 우리는 기술의 위력을 실감하곤 한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가 체스게임에서 인간을 이기는가 하면 통신망의 발달로 집에 가만히 앉아서 회사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가 과거에 꿈꾸었던 대부분의 것들이 이미 상용화됐거나 개발중에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이라면 시대를 앞서가는 최첨단 기술만을 생각하게 된다.
▼ 연필깎는 것도 기술
▼그러나 기업경영에 있어서 첨단기술(Hi―technology)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세계 일등 기업이 반드시 세계최고의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다. 기술경영이 최근 기업들 사이에 많이 회자(膾炙)되고 있지만 기술경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기술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기술경영의 요체를 끊임없는 첨단기술에의 도전과 남과 다른 차별성을 확보하는 두가지 축으로 생각한다. 요즈음 연필을 손으로 깎는 어린이가 드물다고 한다. 모두가 연필깎이 기계를 사용하는데 혼자만이 손으로 능숙하게 깎는다면 이것도 훌륭한 기술이다.
세계 최고의 호텔이 되기 위해서는 첨단 전산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전산시스템이 훌륭해도 프런트의 직원이 고객의 이름 철자 하나만 잘못 입력하면 그 고객에 대한 정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호텔은 도어맨부터 시작하여 모든 직원들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신호로 고객이 단골인지 아닌지, 고객의 취향이 어떤지를 주고받는다.
한참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도요타 자동차의 「간판 방식」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간판(看板)이라는 조그만 카드를 가지고 부품과 재고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다. 서구 기업들이 막대한 돈을 들여서 정보시스템을 구축할 때 일본기업들은 간단한 카드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경쟁우위를 가졌던 것이다.
나는 기업경영에서 생산 연구개발뿐 아니라 판매 경리 노무관리 등 투입물을 산출물로 바꾸는 모든 경영활동이 기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박사급 고급인력들이 장기간 연구해서 개발한 첨단기술뿐만 아니라 앞에서 예로 든 호텔직원과 도요타 자동차 직원들의 차별된 숙련기능(Hi―technique)도 훌륭한 기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기발한 발상 필요하다
▼손자병법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했다. 기초연구가 부족하고 자금여력도 충분치 않은 우리 기업들이 세계일류기업들과 첨단기술 경쟁에서 승리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나름대로 차별화된 기술을 가질 수 있다면 세계시장에서 우리 몫은 제대로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언젠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가 있다는 「맥가이버」라는 TV 프로그램을 잠시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아무런 첨단장비 없이도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누구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기발한 발상(Hi―thinking)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이 아닌가 생각한다.
07-25 패러독스 경영
우리는 보통 양면적이라는 말에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을 갖는다. 예로부터 심지가 굳고 일편단심으로 꼿꼿한 지조를 지켜온 사람들이 높은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소신이나 신념이 자주 바뀌면 곤란하겠지만 양면성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 변화-안정 조화 이뤄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들 중에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신중하면서도 추진력이 있는 양면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아인슈타인 모차르트 피카소 등 저명한 과학자와 예술가들은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생각한 군자(君子)도 외유내강형의 양면적 인간이다. 어떤 연구결과를 보니 남성과 여성의 특성이 잘 조화된 양성적인 사람이 적응력도 높고 성취욕구도 크다고 한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우수기업이나 오래도록 장수(長壽)한 기업들은 상반되는 요소를 조화시키는 「패러독스 경영」에 강점을 갖고 있다. ABB라는 회사는 사원이 20만명이 넘는 큰 기업이지만 마치 중소기업처럼 움직인다.
인텔은 펜티엄 칩으로 큰 수익을 거두면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차세대 MMX칩과 RISC칩을 개발했다.
반면에 50년대 반도체 분야의 선두기업이었던 RCA는 변화와 안정이라는 두가지 패러독스 요소를 조화시키지 못해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기업경영에서 상충되는 요소들은 사실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잘하는 경영이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우수한 여성인력을 많이 뽑아놓아도 남성문화가 지배하는 직장에서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여성적 요소와 남성적 요소가 잘 어우러져야 상승효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획일적인 이분법 논리와 흑백논리가 판을 치는 우리 현실에서 양면적인 「패러독스 경영」을 잘 해 나가기는 쉽지 않다. 내가 94년 신경영을 주창하면서 질(質)경영을 수차례 강조하니까 앞으로 양(量)경영은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익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매출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 양면성 살려야 더 큰힘
▼기업경영에 있어서 질과 양, 매출과 이익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느 한쪽에만 의존하는 경영은 반대 차로를 보지 않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물론 양면적인 경영을 한다고 죽도 밥도 아닌 경영이 돼서는 곤란할 것이다. 앞으로 이와같이 상충되는 요소를 잘 조화시키지 못하는 기업은 이류는 될 수 있어도 일류기업은 되기 어렵다.
세상 만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밀물이 지면 썰물이 온다. 세상의 근본원리는 상반되는 요소가 잘 어우러지면서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기업을 잘 경영하려면 자본이나 기술도 필요하지만 외견상 상충되는 경영요소를 슬기롭게 관리해 나가는 능력도 필요하다. 이와같이 양면성을 이해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기업이 다가오는 21세기에도 계속 번영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07-30 에티켓도 경쟁력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에티켓이란 용어를 자주 접하게 되는데 입간판(立看板)을 뜻하는 프랑스 단어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에는 궁전에서 「화원(花園)을 다치지 않도록」이라고 적혀 있던 입간판의 문구가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에는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이라는 의미로 통하게 됐다.
▼ 우리것만 고집 곤란
▼기업활동이 국제화되면서 우리 기업들도 사원들의 에티켓 교육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에티켓 전문강사를 초빙하여 식사예절이나 비즈니스 에티켓을 가르치기도 하고, 사원들을 직접 외국에 내보내 현지의 문화를 체험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국제화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현지인과 골프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고, 식사초대를 하거나 또는 초대에 응하기도 해야 한다. 사소한 에티켓을 소홀히 해서 중요한 상담을 망쳤다면 국제화된 기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에티켓을 잘 알고 지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국가가 각기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의범절도 훌륭한 에티켓이지만 국제사회에서 독불장군처럼 우리 것만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국제인으로서의 교양과 품위를 유지하려면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에티켓이 몸에 밸 수 있도록 연습과 훈련도 해야 한다.
기업경영에도 국제사회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다. 과거 우리 기업들은 눈 앞의 이익 때문에 기업간의 약속을 저버린 적이 많았다. 일류기업의 브랜드를 허락없이 도용해 모조품을 만들거나 소프트웨어를 무단복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개인으로 말하자면 「한번 보고 말 사람」이라는 식으로 행동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은 행동은 한두번 눈가림으로 이득을 볼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신용을 잃게 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결국 그 기업은 국제사회에서 발붙이기가 힘들게 될 것이다. 내가 골프를 삼성의 3대 스포츠중 한 종목으로서 권장하고 있는 이유도 사실은 골프가 심판이 없는 유일한 스포츠로서 자율과 에티켓을 가장 중시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 편법구사는 이류경영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PGA 골프대회에서 있었던 일화는 에티켓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어느 중견골퍼가 뛰어난 성적으로 라운딩을 마치는 순간 골프장은 우승자에게 보내는 갤러리들의 환호로 가득했다.
그러나 기록실로 다가간 그 골퍼는 아무도 몰랐던 자신의 부정행위를 스스로 신고했다. 당연히 그의 우승은 무효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상금과 우승의 영광을 마다하고 골프장을 떠나는 그에게 보내는 갤러리의 박수는 우승자의 것보다 훨씬 컸다.
비겁한 우승보다는 양심과 룰에 따라 떳떳한 패배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켰던 것이다. 이제 개인과 기업을 막론하고 남을 속이고 편법을 구사하는 이류행동, 이류경영으로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신용과 신의라는 에티켓만이 진정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08-11 기업 長壽論
「기업수명 30년설」은 미국과 일본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30년 전의 1백대 기업중 아직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16개에 불과하며, 10대 기업 중에서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그만큼 기업의 생명력이 약하다는 증거다.
▼ 변신통해 새생명 얻어
▼기업은 살아있는 유기체로 볼 수 있다. 그대로 놔두면 마치 생물체처럼 노화하고 소멸한다. 창업기에 활발하게 성장하던 기업들이 곧 성숙기를 맞고, 그 시점에서 변신하지 못하면 몰락한다.
수많은 기업들이 이런 영고성쇠(榮枯盛衰)의 길을 걸었다. 어떤 산업도 번영의 정점에 도달하면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기업 역시 이 흐름에 떼밀려 흘러가면 언젠가는 망하게 된다.
스스로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각고의 변신 노력이 있어야 한다. 「발전―성숙―변신―재발전」이라는 기업수명 사이클의 선(善)순환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기업은 변신을 통해 얼마든지 새 생명을 얻고, 장수기업을 넘어 영속기업으로 갈 수 있다.
뒤퐁, 엑슨, GE처럼 1백년을 넘은 기업들이 세계일류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시대정신을 앞서가는 변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조만간 고도성장기에서 안정성장기로 접어든다. 이 때는 경영환경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많은 기업들이 도산할 것이라는 우울한 시나리오가 설득력있게 들린다.
내가 보기에 장수기업으로 가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다음 세가지를 갖추면 최소한 「기업수명 30년설」은 깨뜨릴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차원 높은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위기의식은 비록 사업이 잘되고 업계 선두의 위치에 있을 때라도 항시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다. 경영 어려움에 빠져 부도를 걱정하는 것은 공포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위기의식을 가지려면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우리 기업이어느위치에있는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는 변화에 대응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우선 조직과 사업에 있어서 필요없는 군더더기를 없애야 한다. 아무리 효율적인 조직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몸이 불면서 관료주의화 된다. 이런 불필요한 군살을 줄이고 그 힘을 미래변신 쪽으로 돌려야 한다.
▼ 미래지향적 사업경영
▼다음 단계로는 장기적 미래지향적으로 사업을 경영해야 한다. 단기적인 안목으로 사업을 하다보면 변화하는 환경에 시달려 결국은 탈진하고 만다. 시류에 편승하여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업(業)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나가는 경영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율과 창의가 발휘되는 기업문화가 필요하다. 기업은 성장할수록 중앙집권적이 되기 쉬운 속성을 갖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결코 창조적 변화가 생겨날 수 없으며 정보사회 지력사회로 대변되는 21세기 환경에 적응할 수 없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속출하고 생정보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한 조직만이 미래를 얻을 수 있다.
08-15 녹색경영
지난 84년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인도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돼 무려 2천8백명이 사망했다. 그 사고로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사고 수습에 들어간 비용 때문에 10만명에 이르는 종업원을 반으로 줄여야 했다.
▼ 환경친화제품 선호
▼ 기업경영을 떠나 삶의 환경과 관련하여 보더라도 환경오염은 매우 심각한 실정이다. 산업화와 동시에 진행된 지구환경 파괴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는 압축된 산업화 덕분(?)에 상대적으로 자연환경 파괴가 더욱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연안지역과 마주하고 있는 서해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염이 심한 바다로 변한 지 오래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환경문제가 인류 공동의 관심사로 대두돼 범지구적 차원에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그린라운드(GR)가 진행중에 있으며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기 위한 기후변화협약이 지난 92년에 채택됐다. 이런 변화는 미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우리 기업경영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OECD 가입에 따라 이산화탄소의 배출량 감소에 있어서 개도국의 혜택을 받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선진국에서는 환경기준에 미달하는 제품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수입을 규제하고 있다. 수입제품이 환경을 파괴하거나 국민의 건강을 해친다고 판단될 경우 수입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생산조차 못하게 압력을 넣는다. 또한 소비자의 환경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상품은 세계시장에 내보낼 수 없게 됐다.
미국 소비자의 약 70%가 환경친화제품을 선호하며 유럽지역은 80%가 넘는다. 이제는 어느 기업도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제품을 만들어서는 생존할 수 없다.
언젠가 독일의 폴크스바겐을 방문했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자동차 만드는 회사가 폐차장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폐차장을 운영해서 돈을 더 벌겠다는 것이 아니라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책임을 지자는 것이었다. 생산부터 폐기까지 자동차의 전 생애를 관리하는 환경전략의 일환인 것이다. 작업장의 환경오염도 또 다른 의미에서 신경을 써야 한다. 나는 작업환경을 중요시하고 이를 특별관리한다. 작업장의 조도(照度)가 낮거나 소음이 심하면 근로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사람의 몸까지 상한다. 이런 문제는 공장을 건설할 때 건설비의 20∼30%만 더 들이면 충분히 해결되며 그 투자도 몇년이면 회수된다.
▼ 환경산업 거대시장
▼ 환경산업의 세계시장 규모는 2000년에 연간 5천4백억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항공산업보다도 규모가 더 커진다. 우리 기업들도 오염방지기술, 대체에너지개발 등에 투자를 늘려 이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도 환경친화경영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제는 기업들도 제조공정과 생산방법에서 환경오염을 줄이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환경보전과 자연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우리가 미래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깨끗한 자연과 쾌적한 환경일 것이다.
08-21 기업용어의 개발
나는 평소에 임직원들에게 조직내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가급적 통일시켜 나가고 조직의 철학과 가치관이 함축돼 있는 독특한 용어를 개발해 나갈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조직내 언어인 용어는 경영활동의 실행수단이 될 뿐 아니라 바로 그 조직의 질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조직의 질적수준 가늠
▼ 내 자신도 신경영을 추진하면서 종업원이 신경영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와 예화 중심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느라 많은 고심을 했다.
한가지 예로 신경영에서 강조한 「변화」는 결코 중단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보잉 747기의 이륙과정을 비유로 설명한 것을 들 수 있다. 보잉 747기가 일단 활주로를 달려 공중으로 뜨게 되면 불과 몇분 안에 1만m까지 올라가야 되는데, 만약 이 시간 안에 올라가지 못하거나 중간에서 멈추게 되면 추락하거나 공중폭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삼성의 신경영도 한번 시작한 이상 방향을 바꿀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다시 내려 올 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조직내 용어는 통일시키는 것이 좋다. 이것은 개성을 무시하는 획일화와는 다른 차원이다. 용어를 통일시키면 서로 뜻이 이심전심으로 통하게 돼 의사소통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고 오해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직의 비전과 경영방침에 대한 공감대를 쉽게 형성해 나갈 수 있다.
용어는 또한 시대변화를 리드하고, 때로는 한 사회나 조직의 철학을 대변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삼성이 하청업체가 아닌 협력업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조직내에 널리 인식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나이 많은 사람을 노인층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실버층으로 부르는 것이 훨씬 멋지고 낭만적으로 들린다. 실버층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넘어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노련미와 경륜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고 할 수 있다.
▼ 「소비자」보다 「고객」
▼ 상품을 써서 없앤다는 뜻을 지닌 소비자(Consumer)라는 표현이 점차 사라지고 고객(Customer)이란 용어가 일반화되는 것도 이제는 기업이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춤식으로 대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객만족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월트디즈니에서는 독특한 자신만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종업원들을 쇼의 출연진이라는 뜻의 「Cast Member」라고 칭함으로써 엔터테인먼트사업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에게 회사가 기대하는 바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또한 고객에 대해서는 집에 초대한 손님이라는 뜻의 「Guest」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회사내에서는 이 단어가 문장 어디에 위치하건 반드시 대문자 G를 쓰도록 의무화함으로써 고객의 중요성을 조직내에 확산시키고 있다.
이 두가지 용어가 오늘날의 월트디즈니를 만들어 낸 비장의 무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기업도 이제 이러한 용어개발과 사용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기업의 용어 아이덴티티를 확립해 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기업경영에 철학과 문화를 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08-26 개를 기르는 마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1취(趣) 1예(藝)」는 있어야 삶의 질이 윤택해진다고 얘기하면서 애견을 키워보라고 권한다. 사실 젊은 시절 정력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 정신적 허탈감에 빠지는 것은 은퇴 후에 즐길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6.25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부친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혼자 있다보니 개가 좋은 친구가 됐고 사람과 동물간에도 심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 동물과 마음의 대화를
▼그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귀국했는데 당시에는 반일(反日)분위기가 매우 팽배해서 일본에서 갓 돌아온 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개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항상 애견을 길러왔다.
20 몇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진도개가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세계견종협회에서는 진도개의 원산지가 한국임을 증명해 주지 않았다. 요구조건이 까다롭기도 했지만 확실한 순종(純種)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진도에 가서 사흘을 머물며 장터에도 가고 또 순종이 있다는 이 집 저 집을 찾아 30마리를 사왔다. 그리고 사육사와 하루종일 같이 연구하고, 외국의 전문가를 수소문해서 조언을 받아가며 순종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처음 들여온 30마리가 1백50마리로 늘어날 때쯤 순종 한 쌍이 탄생했고, 마침내 79년 세계견종협회에 진도개를 데리고 가서 한국이 원산지임을 등록시킬 수 있었다.
나는 아무리 취미생활이라도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깊이 연구해서 자기의 특기로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취미를 통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지금 아이들을 보면 보호받는 데만 익숙해 있지, 남을 보호하거나 남에게 베풀 줄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이 애견이든 새든 동물과 교류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동물을 키우다보면 말 못하는 동물의 심리를 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을 생각하는 것이 저절로 몸에 밴다.
또 어미로부터 새끼를 받아내고 키우는 과정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내년 어린이날에는 몇 만원씩 한다는 외제 장난감을 사주기보다 강아지 한 마리, 새 한 쌍을 선물하면 어떨까.
▼ 어린이날 강아지 선물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유럽 언론들이 한국을 「개를 잡아먹는 야만국」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 보도가 나가자마자 영국 동물보호협회가 대규모의 항의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상품의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끝에 그 동물보호협회 회원들을 서울로 초청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개를 기르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애완견 연구센터, 맹도견(盲導犬)학교 등 우리나라의 애견문화 수준이 녹록치 않음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시위계획이 취소되었고 더 이상의 항의도 없었다.
09-01 감원과 경영합리화
지난 92년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삼성전자를 방문했을 때, 자동화 라인을 둘러보다가 『자동화 체제를 갖추면 사람이 필요 없겠다』며 매우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나는 『그래도 기업경영의 기본은 사람』이라고 답하면서 『자동화로 절감된 인력은 연구소나 창의성이 필요한 부문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전체 인력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 직원사기 고려할 필요
▼ 80년대부터 시작한 경영 합리화가 지금은 불황을 맞아 거의 모든 기업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데 합리화 작업의 첫 단추는 대부분 인력감축부터 시작한다. 허리띠를 졸라매서 성과를 더 내겠다는데 반대하거나 싫어할 기업주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줄이는 합리화에는 반대한다. 경영이 조금 어렵다고 사람을 줄여서 해결하겠다는 안이한 발상은 종업원들의 심리적 반발을 사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 회사발전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어떤 분야, 어떤 방식의 합리화도 작업자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만드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생산성은 저절로 올라가고 또 이것이 일하는 사람들을 자극해서 더 열심히 일하는 선(善)순환이 생긴다.
오로지 생산성만을 강조하면 작업자의 근로의식이 나빠질 뿐만 아니라 조직활력과 사기가 저하된다. 축구경기에서 옐로카드를 자주 꺼내는 심판도 레드카드만큼은 잘 쓰지 않는다. 경기의 흐름이 끊길 뿐 아니라 퇴장 당한 선수의 앞날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90분 동안의 경기도 이러한데 몇십년, 몇백년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기업에서 레드카드를 자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합리화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조직과 선진국의 조직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국가든 기업이든 학교든 전 분야에서 50% 정도의 비효율이 보인다. 그리고 아무리 효율적인 조직이라도 그 속에 불필요한 일이 30% 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합리화는 쉬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합리화에는 필연적으로 인력감축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합리화의 관건은 사람을 줄이기 이전에 줄일 사람들을 어떻게 교육시켜 어느 곳에 활용할지부터 계획하는데 있다.
▼ 직무전환 교육 우선
▼ 일례로 공장합리화로 사람이 남게 되면 자회사나 협력업체의 현장 지도요원으로 파견할 수도 있고, 다른 일을 해보겠다는 사람에게는 거기에 맞게 직무전환교육을 시킨 후 그 일을 맡길 수 있다.
신규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기존 사업분야에서 발생하는 여유인력 활용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많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개인들 역시 지금처럼 환경의 변화가 급박하고 기술이 빠르게 진보하는 시대에 한 곳에서 하나의 직무에만 매달리겠다는 생각은 이제 불가능하게 됐음을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이 여러개의 직무를 동시에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몇 년간 해왔던 직무와는 전혀 다른 직무를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곳에서 어떠한 일을 맡아도 처리할 수 있는 전방위(全方位) 대응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09-10 교통난과 7시출근
이제 우리나라의 교통문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얘깃거리가 되어 버렸다. 특히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교통사정은 체증이니 지옥이니 하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다.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왔던 사람도 갖은 고생을 하며 직장에 도착하고 나면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가 되니 이래가지고서야 일의 능률이 오를 리 만무하다.
▼ 정부탓 해봐야 뭐하나
▼ 삼성이 몇년 전부터 출근시간을 아침 7시로 바꾼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개개인의 생산성도 문제지만 기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운송이나 물류도 큰 문제이다. 고속도로나 산업도로는 항상 막히고, 항만시설도 부족하거나 상태가 좋지 않다. 물류비 운송비 부담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고, 심지어 교통사정 때문에 바이어와의 상담을 망치거나 제품선적이 늦어져서 수출납기를 못 맞추는 경우까지 있다.
이 정도가 되면 우리나라가 객관적인 기업경영 여건 평가에서 낮은 순위를 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도로 항만 공항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은 원칙적으로 정부에서 담당해야 할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통문제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선진기업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부를 탓한다고 갑자기 교통여건이 좋아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기업경영자들은 나름대로 교통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지금은 세계최고의 화물운송기업으로 성장한 페더럴 익스프레스의 성공비결은 창업자인 프레데릭 스미스가 대학 시절에 생각한 「거점중심 운송방식」과 「다음 날 아침 배달」이라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모두들 허무맹랑한 생각이라고 비웃었지만 오늘날 페더럴 익스프레스의 성공은 이런 창의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마찬가지로 기업경영자들은 교통사정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회사의 물류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 경영자 발상의 전환을
▼ 반드시 실물(實物)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가, 공동집배송은 불가능한가, 효율적인 물류를 위해서는 어떤 정보시스템의 뒷받침이 필요한가 등등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얼마든지 있다.
또 하나 우리 기업들의 경우에 「물동량(物動量)」도 문제이지만 「인동량(人動量)」도 문제다. 월요일 아침에 특히 교통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기업이나 관공서들의 회의 때문이라고 한다. 회의를 한다고 하면 무조건 다함께 모여야 하는 건지, 회의는 꼭 아침에 해야 하는 건지, 정보시스템을 통해 해결될 수는 없는지, 그냥 얼굴만 내비치려 참석하는 회의는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통문제가 세계에서 제일 심각하다고 비난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정부 기업 국민 모두가 교통량을 줄이고 교통효율을 높이려는 작은 노력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09-17 무엇을 가르치나
요즘 사(私)교육비 문제다, 학원가 비리다 해서 온 나라가 걱정이다. 아이 과외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어머니들이 파출부로 나서기도 하고, 과외비를 마련하지 못한 소심한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가 막히는 일도 있었다. 직장에서도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식을 둔 간부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그 첫번째가 교육문제,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교육비용 문제다.
▼ 창의력 빼앗는 교육
▼ 교육전문가라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왜 이렇게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속 시원하게 풀리지가 않는다.
우스갯소리지만 교육문제, 교통문제만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분이면 선거 때 표를 찍어주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나는 기업경영을 하다보니 비용과 효용을 따져보는 습관이 몸에 젖어 있다. 지금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출하는 교육비용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모든 학부모가 갖은 고생을 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남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더 나은 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교육비 지출의 직접적인 효용은 좋은 직장에의 취직, 바로 그것인 셈이다. 그러나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교육이나 학벌 그 자체 보다는 새로 기업에 들어온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이다. 아무리 우수한 학교를 나온 수재라도 입사 후에 평범하고 정해진 일만 잘한다면 그 사람의 효용은 별로 크지 않다. 흔히 사람들은 삼성을 인재의 집단이라 한다.
나는 항상 이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삼성의 인재들이 세계 유수기업의 인재들과 비교해서 창의력이나 혁신적인 사고가 더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별로 자신이 없다. 삼성에 들어온 인재들은 대부분 표준화되고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제도에서 가장 잘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은 오히려 부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삼성의 잘못도 아니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삼성에 들어온 사람들의 잘못도 아니다.
교육을 일류 직장에 취업하기 위한 도구로 만든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잘못이다. 교육의 기본목적은 사회에 필요한 수많은 일들을 잘할 수 있는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에 들어가는 돈도 이런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한다. 그 돈이 학부모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느냐, 나라의 재정에서 나오느냐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교육의 목적이다.
▼ 학벌아닌 능력길러야
▼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은 일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 「순위 매기기」에 쓰이고 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기업들은 학벌이 아니라 능력을 원한다. 앞으로 인력이동이 좀더 자유화된다면 내외국인에 관계없이 능력있는 사람들을 쓸 수밖에 없다. 천문학적인 교육비용이 기껏 자리매기는 데 쓰이고 있다는 것은 기업에나 사회 전체에나 크게 불행한 일이다. 교육행정가들은 이렇게 막대한 사회적 재원을 실질적인 능력을 만드는 일에 쓸 수 있는 방법을 하루빨리 찾아내야 한다.
09-22 우리문화 색깔찾기
얼마전 TV방송에서 고대 우리나라 문화의 발자취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동양 최대 규모였던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재현해 본 것이나, 석굴암의 건축학적 우수성을 파헤친 프로그램은 나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특히 석굴암이 당시 불교문화권의 석굴양식을 기초로 했으면서도 신라인 특유의 손길로 더욱 발전시킨 점이라든가 현대 기술로도 쉽지 않은 방습 및 환풍기능을 갖추었다는 점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이런 프로그램이 좀더 자주 방영되어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 문화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이 피라미드의 신비에만 몰두하지 말고 석굴암에 대해서도 상상의 날개를 맘껏 펼쳐보았으면 한다.
사실 우리 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에 견주어 결코 손색이 없다. 일본말로 「구다라나이」는 형편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다라」가 바로 백제(百濟)를 말한다.
구다라나이의 본래 의미는 백제에 없는 물건은 시시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또 신라때 장보고만 해도 그렇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데 가보면 지금도 장보고라는 이름이 나온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문화적 유산을 보아도 우리 민족은 문화적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문화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우열을 비교할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란 단지 다를 뿐이다. 외국인과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놓는 물건보다는 다른 엉뚱한 물건에 관심을 더 갖는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과연 문화적으로 우리들 나름의 색깔이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별다른 특색을 찾기 힘들다. 거리에 나가 보아도 가로의 풍경이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다른 나라들과 문화적인 차이를 금방 느끼기가 어렵다.
반면에 우리가 우리보다 못한 나라라고 약간은 업신여기는 동남아 나라들만 가보아도 우리와는 다른 문화적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과거에 우리가 무엇무엇을 세계최초로 발명했느니, 서양보다 몇백년이나 앞섰느니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현재 우리 문화의 색깔이 있느냐, 우리나름의문화정체성이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미국 NBA 선수들의 옷차림과 운동화를 사고, 그들의 노래를 흉내내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가? 왜 우리나라의 기념품 가게들은 파리를 날리는가?
세계 어디를 가도 일본식 초밥집은 왜 고급식당으로 대우를 받는가? 문화적 특성이 강한 나라의 기업은 든든한 부모를 가진 것과 같다. 기업활동이 세계화되면 될수록 오히려 문화적 차이와 색깔은 점점 더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된다. 전통문화의 우수성만 되뇐다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적인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09-29 「문화 인프라」키우자
외국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문화생활에 관한 것이다. 작은 도시라도 전통깊은 교향악단이나 훌륭한 극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부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정작 부러워하는 것은 하드적인 인프라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한 그들의 마음자세나 태도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일상생활에서 잘 활용하고 있다. 외국의 도시에서는 이른 아침이면 유명한 유적지나 문화재 주변에서 산책이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문화재가 생활의 일부가 됨으로써 정신적인 문화 인프라도 풍부해질 수 있다.
▼ 생활속에 뿌리내려야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문화재하면 「보호」라는 말부터 떠오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조깅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곳에는 예외없이 튼튼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선진국들의 문화가 「열린 문화」라면 우리는 「닫힌 문화」다. 우리는 일단 문화라고 하면 먹고 사는 일상생활과는 다른 「특별한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는 21세기에 필요한 문화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소양이 자라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국들처럼 박물관 전시관 음악당 등 문화시설을 충분히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이런 하드적 시설이 없이도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문화의 지방화를 추진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관할 동(洞)이나 구(區)의 주민들 중에서 자원자를 뽑아 악단을 운영하거나 조그만 미술전시회를 가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연주나 그림의 수준이 좀 떨어지더라도 상관이 없다. 고급문화만이 훌륭한 문화는 아니다.
사람들의 문화적 감수성은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면서 듣고 보며 형성되는 것도 있다. 옆집 아저씨나 아줌마가 연주하는 동네 음악회를 보며 자란 아이와 어쩌다 부모 손에 이끌려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공연을 보러 가는 아이 중에 누가 더 문화적 안목이 커질지는 자명하다. 특별한 사람들이 향유하는 고급문화만을 문화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기껏해야 비뚤어진 엘리트문화 의식만 생길 뿐이다. 기업들도 이러한 문화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기업의 문화활동이라면 문화행사에 돈이나 내는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기업 스스로도 사회조직의 하나로서 문화활동을 할 수 있다.
▼ 21세기엔 중요한 자산 앞으로는 기업이 만드는 제품에도 그 기업의 문화와 이미지가 담겨야 한다. 문화적인 경쟁력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문화적 자산이 만들어지면 그 효과는 신제품 몇 개 개발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다. 기업들은 거창하게 「메세나 운동」같은 것만 찾을 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적 인프라를 향상시키는데 한몫을 해야 한다. 기업자체가 사회의 일원이고 21세기는 문화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01 기업인의 마음가짐
사업에 성공한 사람을 놓고 간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업을 해 본 사람은 운이 좋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공을 하려면 그에 값하는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하고 수많은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친은 사업 성공의 요체로 운(運) 근(根) 둔(鈍) 세가지를 꼽으셨는데 여기에 내 나름의 해석을 보탠다면 먼저 운이란 환경변화에 적응하는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운의 이면에는 남모를 고뇌와 노력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근이란 고객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한 끈기와 집념을 의미하고 둔은 잔꾀를 부리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 인재 홀대땐 오래 못가
▼ 나는 선친이 말씀하신 운 근 둔을 염두에 두면서 사업하는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정해 두고 있다.
먼저 사업 초기에 다졌던 초심(初心)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기업인이 잠시의 성공이나 실패에 흔들리면 큰 성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업의 호불황 때마다 내가 이 사업을 왜 시작했는지를 자문하면서 초심을 다시 새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둘째는 일시적 이익보다는 신용을 얻으려고 해야 한다. 어떤 고객이든 좋은 품질과 친절한 서비스를 원하지 불량품이나 불친절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객에게 한번 신용을 잃게 되면 아무리 좋은 품질, 싼 가격으로도 고객의 발길을 되돌려놓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일본의 기업인들을 본받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은 고객을 향해서는 발도 뻗지 않는 사람들이다.
셋째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을 소홀히 하는 기업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본다. 기술 발달이 자동화를 실현하고 첨단 컴퓨터가 시스템화를 불러온다 해도 일의 중심은 언제나 사람이다. 나는 경영자로서 사람을 소홀히 해서 얻은 돈은 무의미하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기업의 부실경영은 기업주나 경영진만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종업원과 그 가족의 생계, 협력업체의 경영에 부담을 주고 나아가 국민경제 전체에 주름살을 만든다.
▼ 사회적인 책임 자각해야
▼ 나는 기업을 잘못 경영하여 부실하게 만드는 것은 경영상의 범죄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기업인은 모름지기 기업경영의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기업을 알차고 살찌게 만들어 가야 한다.
나는 천년 로마가 멸망한 것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의 모순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최근 경영난에 빠진 기업들도 그 근본원인은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양적 성장에 자족하여 저성장 시대가 요구하는 질적 전환이나 구조조정을 소홀히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인은 항상 조직에 나타나는 자만과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 사업이 자기 힘만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태만과 부패가 시작되고 고객이나 제품개발에 소홀하게 된다. 자연히 신용과 이미지 추락이 뒤따르고, 그렇게 되면 그 기업에는 더 이상 앞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에세이 연재를 50회로 끝맺습니다. 이회장과 높은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에세이는 동아일보사 출판국에서 단행본으로 펴낼 예정입니다.》
2017.09.23 “삼성, 지난 100년간 혁신 이끈 아시아 최고기업”
포브스, 창간 100년 맞아 5곳 선정
핵심 성장동력은 경영자 리더십… 이건희회장 1993년 품질경영 선언
세계최고 수준 기술기업 이끌어… 알리바바도 마윈 리더십 밑바탕
소니-도요타는 위기 대처능력 꼽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지난 100년간 세계 경제 판도를 바꾼 아시아 기업 5곳을 꼽으면서 그중 하나로 삼성그룹을 선정했다. 삼성전자 외에 일본의 소니와 도요타, 인도주택개발은행(HDFC),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가 함께 꼽혔다.
이 기사는 20일(현지 시간) 포브스 창간 100년을 기념한 특집 기획기사로 다뤄졌다. 포브스는 “지난 한 세기 아시아는 혁명의 시대를 보냈다”며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포브스는 “1917년 중국은 분열됐고,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가난한 국가였다. 2017년 현재 인도와 중국은 가장 큰 경제대국이 됐다. 아시아는 이제 서구 시장과 동등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포브스는 5개 기업 중 삼성을 가장 먼저 꼽았다. 포브스는 삼성의 성장 과정을 설명하면서 “199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지금의 위상에 올라서기 위한 진정한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내용으로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삼성은 제품의 품질을 높이는 데 주력했고, 매출은 1993년 28조6800억 원에서 지난해 201조8700억 원으로 늘었다. 포브스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삼성을 그저 그런 전자업체에서 오늘날 세계 두 번째 규모의 기술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글로벌 컨설팅업체 ‘레퓨테이션인스티튜트(RI)’에서 발표한 ‘2017 글로벌 CSR 순위’에서 지난해 20위에서 무려 69계단 하락한 89위에 머물렀다. 포브스가 혁신기업으로 삼성을 꼽은 것과 반대되는 결과다. 재계 관계자는 “RI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점으로, 포브스는 장기간에 걸쳐 기업이 이룬 혁신을 중점으로 봤기 때문에 다른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는 “부회장 구속으로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개별 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아시아의 혁명을 이끈 나머지 기업의 핵심 성장 동력도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포브스의 분석이다.
인도 기업 중 유일하게 선정된 인도 민간은행 HDFC의 아디트야 푸리 최고경영자도 1994년부터 지금까지 23년에 걸쳐 은행을 이끌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 ‘신뢰가 자산’이라는 모토 아래 소액 은행업무, 도매 은행업무, 장기금융 등 혁신적인 상품 개발을 주도해 은행의 성장률을 10년 넘게 25∼30%의 높은 수준으로 유지했다. 인수합병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2007년 403개의 지점과 5000여 명의 직원을 보유한 은행 ‘센추리온 은행 펀자브’를 인수할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HDFC는 3개국에 4700여 개 지점을 보유한 인도 최대 민간은행으로 성장했다.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기업으로 성장한 알리바바는 마윈 알리바바그룹 회장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포브스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서비스가 전무했던 1999년, 중국 내 인터넷 서비스를 처음으로 선보인 마윈 회장의 ‘혜안’이 알리바바를 키웠다고 분석했다.
일본 업체 소니와 도요타는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이 꼽혔다. 소니는 1980년대 초 세계 경기 침체로 매출 급감을 겪었지만 꾸준한 혁신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포브스는 설명했다. 포브스는 “소니는 음악으로 시작한 뒤 오디오와 비디오, 영화산업으로까지 진출해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리더로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도요타는 제2차 세계대전을 기회로 삼아 1950년 초 미국과 브라질에 공장을 개설하고 세계 시장으로 진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4 삼성을 일군 윤종용
①이건희와 더불어 삼성을 일군 윤종용
윤종용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한국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인물이다. 그는 1966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1997년 삼성전자 총괄 대표이사 사장, 2000년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이후 삼성전자를 세계 1위에 올려놨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그가 없었다면 현재의 삼성도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기까지 윤 위원장은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
<이코노미조선>은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 윤 위원장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가 보는 한국 경제위기의 해법은 무엇인지. 윤 위원장은 위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위기는 잘 될 때에 싹트기 시작합니다. 방심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돼 미래 대비에 소홀해지기 때문이죠. 반면 어려울 때는 모든 조직원이 긴장하고 위기를 탈출하려고 노력합니다. 잘 될 때가 더 위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위기는 항상 반복되고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최근 한국 사회는 ‘안일주의’에 빠져 있다. 도전정신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윤 위원장은 “현재 우리 사회는 무기력증에 빠졌다”며 “저성장의 늪에 빠졌고 일자리가 제대로 창출되지 않아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로 “최근 30년 동안 민주화에만 초점을 맞춰 경제성장 동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초기 30년 성장론’을 역설했다. 한국경제가 이제부터 새로운 30년을 써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력은 혁신이다. “급변하는 현 사회에서는 환경변화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돌연변이적인 진화, 혁신 없이는 성장·발전하지 못합니다.”
/윤종용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윤종용(尹鍾龍). 과거 삼성전자의 초고속성장을 이끈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가대표 CEO(최고경영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현재는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을 맡고 있다. 취재진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4일, 5일, 11일 세 차례에 걸쳐 서울 강남에 위치한 윤 위원장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어린 시절 성장 밑거름은 무엇이고, 어떻게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의 CEO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동안 겪은 수많은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를 물었다. 나아가 한국경제 위기의 해법을 윤 위원장의 삶에서 찾아봤다.
꼼꼼했다. 윤 위원장의 첫 인상은 그랬다. “먼저 질의서를 보내주면 인터뷰를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가 박용선에게 한 말이다. “인터뷰를 꽤 많이 했어요. 그런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쌍방이 고달픕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못할 때가 제일 아쉽더군요. 기사 쓰는 사람도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을 정리한 후 인터뷰를 하는 편입니다.”
비서실에서 질의서를 만들어줄 거라는 박용선의 생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보통 CEO 또는 고위관료 인터뷰는 비서실 또는 홍보팀에서 질의서를 작성한다. 이후 인터뷰 대상자는 확인하고 수정·보충한다. 윤 위원장은 달랐다. 그가 보낸 질의서 답변을 봐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인터뷰 하루 전인 8월4일 윤 위원장이 “차 한 잔 하자”며 박용선을 불렀다. “질의서 답변은 잘 봤죠?” 그가 물었다. “네. 잘 봤습니다.” 박용선이 답했다. 윤 위원장은 “내일(5일) 인터뷰 방향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싶어 인터뷰 전에 만나자고 했다”고 말했다.
전 삼성전자 부회장, 전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회장, 전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한국공학교육인증원 이사장,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윤 위원장의 경력이다. 화려하다. 하지만 그에게선 권위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소탈했다. “박 기자~ 시원한 음료수 한 잔하면서 천천히 얘기해 보자고. 초면인데 어떻게 한 번 보고 기사를 쓰겠어요.”
8월5일 인터뷰는 편집장이 진행했다. 내가 물었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이시죠? 시골 소년이 어떻게 세계적인 경영자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테이블에 놓인 안경을 쓰며 윤 위원장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릴 때부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면 끝장을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안 했어요.
사실 백부께 한학(漢學)을 배운 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백부께서는 평생 공부만 하셨는데, 집안에 젊은 사람들이 있으면 집으로 데려다가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 등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가르쳤습니다. 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2~3년 동안 매일같이 새벽에 백부께 찾아가 배웠습니다.” <②편에 계속>
②윤종용의 인생철학 '격물치지'
성장 밑거름은 호기심과 책임감
그는 “어린 나이에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그렇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백부께서 전날 배운 것을 다음 날 외우도록 하고, 뜻까지 설명하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뜻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수업이 끝나고 놀면서도 배운 것을 계속해서 되새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면서 ‘책임감’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학문의 기초를 만들어 주신 백부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성장 밑거름은 ‘호기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면 항상 궁금해 했습니다. 직접 만져보고 체험하지 못하면 참질 못했어요.” 그러면서 어렸을 때 별명이 ‘5마력 발동기’가 된 에피소드를 설명했다.
“동네에 큰 정미소가 있었습니다. 발동기도 엄청 컸습니다. 발동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습니다. 사람 힘을 들이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어린 나이에 신기했나 봅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정미소에 가서 발동기를 관찰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 발동기를 사달라고 했는데 돈을 주셨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발동기를 사기에는 적은 돈이었습니다. 바로 정미소로 달려가 ‘발동기를 사려고 한다’고 하자 주인이 웃으며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동네에서 ‘5마력 발동기’라고 불렸습니다.”
동네 사람들 눈에는 우스워 보였을 수도 있지만 ‘꼬마 윤종용’은 진지했다. 사실 성공한 사람을 보면, 대다수가 호기심이 강했다.
호기심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의 집무실 한쪽 벽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쓴 휘호가 걸려 있다. 어렸을 때 호기심에서 시작해 ‘본질을 꿰뚫어 보고 지식을 얻으려고(격물치지)’ 노력한 윤 위원장의 인생철학이 단번에 느껴졌다.
삼성에 입사한 후에도 ‘사회 초년생 윤종용’의 호기심과 책임감은 빛났다. 일을 맡으면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책임감도 강해 일을 마무리하기 전까지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능력을 인정받았다. “사실 입사 동기와 비교해 승진이 그리 빠르지 않았습니다. 중하 정도였어요.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 초년생에게 “어떤 일이든 맡겨지면 최선을 다하고 도전하라”며 “그러면 능력을 키우게 될 것이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에 취업한 이들에게 “기죽지 말고 능력을 키우는 데 힘쓰라”고 강조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구멍가게에서 시작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삼성전자도 30여명 직원으로 시작했어요. 중소기업에 입사해 여러분이 그 회사를 대기업으로 키우면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중소기업이 일하는 환경은 어렵지만 대기업보다 다방면의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를 잘 활용하세요.”
그는 취업을 준비하는 청소년에게는 “스펙(Spec)보다는 실질적인 능력 계발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했다. “스펙은 무시하세요. 스펙은 기계나 제품에 붙여지는 기능과 성능의 표시입니다. 인간에게는 본인도 알 수 없는 스펙을 넘어서는 무한한 잠재적 능력이 있습니다. 이 잠재적인 능력을 개발하도록 노력하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의 통사(通史)뿐만 아니라 산업사, 과학사, 경제사, 문화사 등 다방면의 역사책을 많이 읽어 시야를 넓히고 선견력과 통찰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는 “입사 초기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 공장 건설현장에서 일한 것도 값진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한국비료 공장을 건설하고 시운전을 하는 2년 동안 공장 기본구조는 물론 시스템, 운영 방법을 배웠습니다. 신입사원일 때였지만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이후 업종은 달라졌지만 그 때 배운 것이 CEO로서 삼성전자를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③편에 계속>
③롯데 분쟁은 있을 수 없는 일…믿음과 신뢰의 문제
문제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
윤 위원장에게 기업 경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기업 경영이란 자원을 (경영)프로세스에 투입,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판매해 이익을 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위원장은 “특히 ‘사람’과 ‘생산 현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일의 성패는 사람에 의해 결정됩니다. 경영의 성공과 실패도 경영을 책임지는 관리자와 구성원에 의해 좌우됩니다. 때문에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경영 자원을 보강하는 것입니다. 또 생산·판매·서비스 등 기업의 모든 일은 사무실과 책상 위가 아닌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문제도, 답도 현장의 현물과 현상에 존재합니다.”
그는 ‘스피드’도 강조했다.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모든 경영 프로세스와 의사결정에는 스피드가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재 조금이라도 스피드가 떨어지고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어느 기업이건 바로 경쟁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스피드는 단순히 속도가 빠른 게 아니라 방향 즉, 목표를 지닌 ‘벡터(vector)’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도중 집무실 TV에서 롯데가(家) 경영권 분쟁 뉴스가 흘러 나왔다. 그는 보통 TV(뉴스)를 켜 놓는다. 세상 변화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다. 신문 스크랩도 매일 하고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롯데 경영권 분쟁 사태를 어떻게 보시나요?” 내가 물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이 1922년생인데, 현 상황이 닥치기 전에 정리를 깔끔하게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는 믿음과 신뢰를 강조했다. “이번 롯데 사태는 믿음과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롯데뿐 아니라 다른 기업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 믿음과 신뢰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믿음과 신뢰는 사회를 구성하고 성장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기업과 조직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신뢰가 없으면 와해될 수밖에 없다는 게 윤 위원장의 생각이다.
윤 위원장은 이건희 회장과 함께 삼성전자를 이끈 인물로 꼽힌다. 윤 위원장은 1966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1997년 삼성전자 총괄 대표이사 사장, 2000년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이후 삼성전자를 세계 1위에 올려놨다. 삼성전자 CEO만 12년이다. 그동안 그가 겪은 위기만 해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그는 우선 위기를 정의했다. “위기는 잘 될 때에 싹트기 시작합니다. 방심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돼 미래 대비에 소홀해지기 때문이죠. 반면 어려울 때는 모든 조직원이 긴장하고 위기를 탈출하려고 노력합니다. 잘 될 때가 더 위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위기는 항상 반복되고,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1. 2007년 10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2007 남북정상회담’ 경제분야 간담회에 참석한 윤종용 위원장(오른쪽 두 번째). 2. 1970년대 삼성전자의 흑백TV 생산라인. /조선일보DB
혁신이란 돌연변이적인 진화
윤 위원장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했다. 미리 준비하면 근심할 게 없다는 것이다. 사실 위기는 혁신과 밀접하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현 상황이 위기이고,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이다. “환경이 변화할 때,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보면, 종(생물)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합니다. 지구상에서 살아남은 생물은 강한 자가 아니라 환경변화에 순응한 자입니다. 더 큰 종으로 진화하려면 돌연변이적인 진화를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는 또 “과거 농경 및 산업화 시대에는 환경변화에 따라가면 생존이 가능했지만 지금같이 급변하는 환경에서는 환경변화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퇴보의 길을 가는 것”이라며 “돌연변이적인 진화와 혁신 없이는 성장발전이 없다”고 말했다. <④편에 계속>
④밀려났을 때, 역사 공부하러 다닌 윤종용
그가 삼성에서 겪은 첫 번째 위기는 ‘기술력 부족’이었다. 1970년대 당시 삼성은 반도체, 컴퓨터, VTR 등을 성장동력으로 삼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직접 챙길 정도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윤 위원장은 TV 설계를 맡았다. 삼성전자는 당시 TV 설계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흑백 TV 설계 연수를 위해 일본 산요전기를 방문했다. 1971년이었다. 2년 후에는 미쓰비시전기에 가서 컬러 TV 설계 연수를 받았다.
당시 일본은 성숙된 산업시대에 들어간 선진국이었다. 도쿄(東京)올림픽도 개최했고, 시속 250㎞를 자랑하는 세계 최초의 고속전철 신칸센(新幹線)도 달리고 있었다. 한국은 농경사회를 벗어나 산업사회로 진입하려고 박정희 정권이 발버둥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당시 일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고 말했다. “연구실, 설계실, 생산현장에서 만난 엔지니어의 기술력과 관리방법은 제 상상력을 초월했습니다. 저도 서울대 공대를 나와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한탄스러웠습니다.”
일본 기업의 기술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선 언어가 문제였다. 일본에 가기 전 6개월 동안 아침에 1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했지만 현지에 가보니 의사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의사소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본 사람들이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온갖 현장을 따라다니며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고 배웠다. 관련 기술 서적, 보고서도 엄청 읽었다. 일본 엔지니어와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업무가 끝난 후 술도 같이 많이 마셨다.
사실 기업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문제다. 윤 위원장은 삼성전자 CEO 때나 지금이나 늘 ‘기술’을 강조한다. “역사는 도구 발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발전해 왔습니다. 기업도 기술 개발 없이는 성장·발전할 수 없습니다. 기술을 등한시하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죠. 또 기술 개발과 응용은 사람밖에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최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그는 “국내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비용은 국가 전체로 보면 선진국 기업보다 절대금액은 적으나 국내총생산(GDP) 비율로는 최상위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연구개발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연구개발 체제나 평가 방법이 효율적이지 못하고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술 개발은 실패를 반복하면서 성공하는 것”이라며 “끊임없는 도전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삼성 밖에서 삼성을 보다
그의 두 번째 위기는 필립스행(行)이었다. 당시 그가 이끌고 있던 VTR 사업부는 매우 어려웠다. 그는 여러가지 이유로 삼성을 그만두고 1986년 네덜란드 필립스 본사에서 1년을 보냈다.
그는 “필립스로 가면서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꼈고 심적으로 힘들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기회로 전환했다. 그는 “필립스에서의 생활은 삼성 밖에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말을 이었다. “필립스 본사를 모두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계적인 서양기업의 경영 방식을 습득할 수 있었으니 엄청난 경험이었죠. 또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제가 좋아하는 유럽 유적지를 다니며 역사 공부를 했습니다.” 위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세상에는 과거 실수나 실패를 운운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는 국면 전환이 빨랐고 담담했다. 그는 “과거 선택한 일을 후회하면 돌이킬 수 있냐”며 “과거는 빨리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뛰어난 누군가가 있으면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그 장점을 배우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CEO로서 성공한 비결이 아닐까. <⑤편에 계속>
⑤일본으로 또 밀려난 윤종용, 전화위복으로 삼아
그는 1995년 말 삼성 일본본사 사장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것도 위기이자 기회였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으로 향할 때 회사의 주류에서 멀어진다는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동경지점장 때보다는 더 넓게 일본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의 1년 역시 제 인생에 있어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1996년 한국으로 돌아와 삼성전자를 총괄 지휘했다.
최근 한국 사회를 위기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안일주의’에 빠져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윤 위원장은 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현재 우리 사회는 무기력증에 빠져 있습니다. 저성장에 빠져 있고, 일자리가 제대로 창출되지 않아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를 잘 못 느낍니다. 왜일까요? 민주화로 인해 경제성장 동력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우리는 5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성장을 주도했던 세대가 이제는 없습니다. 굶주리며 밤 낮 구분 없이 일했던 분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세대가 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정신과 문화는 유지돼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과거 고생은 모르고 부(富)를 누리는 사람들만 넘쳐납니다. 또 민주화를 외치던 세대가 사회 주축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경제성장이 아무런 노력 없이도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민주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며 “민주화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최근 30년 동안 민주화에만 초점을 맞춰 경제성장 동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잃어버린 30년’을 보낸 것이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초기 30년 성장론’을 역설했다. “나라든 기업이든 설립 후 초기 30년이 중요합니다. 뿌리를 잘 다지며 성장동력을 만들어 놓으면 수백 년 유지되는 것입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기업으로 얘기해 보죠. 창업주가 회사를 설립한 후 30년 동안 잘 다져 놓으면 그 기업은 대기업이 됩니다. 구멍가게나 중소기업에서 시작해 대기업이 되고, 이후 혁신을 하면서 성장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한국경제가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30년을 써 내려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민주화로 인해 경제성장 동력 약화
윤 위원장은 “사회지배구조 개혁, 즉 정치·노동·교육·국민의식 등을 개혁해 경제성장의 밑거름을 다져야 한다”며 “그래야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규제는 과감히 풀고 노동문제 역시 개혁해야 한다”며 “기업은 국내 1등이 글로벌 기업이 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고 세계 시장을 무대로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집단 2세, 3세에게도 한마디 했다. “재계가 2세, 3세 시대로 들어왔습니다. 2세, 3세들은 선대 설립자의 철학과 일하는 방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도전해야 합니다.”
그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를 높이 평가한다.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은 순간적인 판단력과 추진력이 대단합니다. 오너의 판단과 월급쟁이의 판단은 다릅니다. 오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실패했을 때 모든 것을 잃는 것이죠. 반면 월급쟁이는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런 판단을 거듭하며 기업을 일군 게 두 창업주입니다.”
윤 위원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멘토로 알려졌다. 그는 “삼성전자 부회장 시절 국내 회의를 하거나 해외 출장을 갈 때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다녔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현장 경험을 살려주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룹 기획실에서 제품 개발, 구매, 생산, 판매 등 모든 경영 프로세스를 읽을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왔다.
현재 이건희 회장은 와병 중이다. 윤 위원장에게 삼성 측에서 찾아와 조언을 구하냐고 물었다. 그는 “현직을 떠난 후 이재용 부회장과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며 “그룹 계열사 사장들과는 만나고 있지만 삼성 내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⑥편에 계속>
⑥윤종용이 말하는 이건희
그는 삼성을 어떻게 바라볼까. “현재 삼성에서 일하고 있는 임직원들은 저와 길게는 수십 년, 짧게는 몇 년을 일한 후배입니다. 잘하네, 못하네 하는 것은 제가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삼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있습니다. 기업의 실적은 상대적인 부분이 존재합니다. 시장 속에서 다른 기업과 경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절대적으로만 바라봅니다. 상대적이란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너무 숫자에 매몰돼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는 8월11일로 이어졌다. 윤 위원장은 ‘까칠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삼성이라는 큰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 카리스마는 필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해다”라며 설명했다. “사실 저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까다로워집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일할 때가 많은데 그들은 아직 일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훈련이 안 돼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다소 날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는 삼성 시절 권한위임형 CEO로 통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임과 권한을 확실히 부여하고 독자적인 책임 하에 운영되는 수평형 프로세스 조직은 의사결정이 빠르고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는 “조직은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이양하고 자율적인 관리와 경영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부 관리자는 현장 실무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자율성을 부여할 때 창의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습니다.”
▲윤종용 위원장과 이재용(오른쪽 두 번째) 삼성전자 부회장이 2007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 2007’에서 이재용(빨간 넥타이를 맨 사람)씨와 함께 삼성전자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조선일보DB
이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기도 했다. 윤 위원장은 “이건희 회장은 큰 숲을 중시했다”며 “작은 솔방울은 잘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은 오너-전문경영인 체제로 성공한 기업이다. 삼성의 대표 전문경영인이 바로 윤 위원장이다.
그에게 오너-전문경영인 체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謨攻)편의 승리로 가는 길을 보면 ‘장수가 유능하고 군주가 조종, 간섭하지 않으면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오너-전문경영인 체제가 이와 같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되, 그렇지 못하더라도 맡겼으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하 간에 믿음과 신뢰만 있다면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기업을 보면, 오너가 소소한 일까지 간섭하고 결제해 경영자가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너의 지시에만 따르는 수동적인 경영만을 합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다
윤 위원장은 “역사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는 역사를 통해 예측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상에 놓인 미래, 현재의 원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 미래가 있습니다. 사계절을 보세요.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상상하고 꿈을 꾸면서 만들어지는 미래가 있습니다. 과거 르네상스 시대 천재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하늘을 나는 꿈을 꿨습니다. 이후 약 400년이 지난 뒤 인간은 하늘을 날게 됐습니다. 역사는 수천년 동안 인간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지식과 지혜의 보고(寶庫)입니다.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합니다.”
그는 특히 “기업을 경영하려면 산업사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롭게 등장하는 산업은 기존 산업이 발전하면서 축적한 자본과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탄생합니다. 그리고 기업의 흥망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기업을 경영하는 CEO가 이런 현상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는 농경·산업·디지털 사회를 모두 겪은 인물이다. 그는 농경사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다녔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산업화 초기 시대를 보고 배웠고 삼성전자 CEO가 되면서 디지털 시대를 리드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4년 <초일류로 가는 생각>을 출간했다. 이 책은 대항해 시대, 산업화 시대,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설명하고, 기업 경영은 무엇인지, 그리고 개인·기업·국가가 어떻게 ‘초일류’로 가는지에 대한 윤 위원장의 생각을 담고 있다. “초일류? 별거 없습니다. 통찰력과 선견력을 가지고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혁신에 도전하는 것이죠. 말은 쉽지만 사실 매우 어렵습니다.”
박영철 이코노미조선 편집장 조선일보
박용선 이코노미조선 기자
5 수입 자동차 개인 보유 1위 이건희①②
KTX보다 빠른 수퍼카 포함해 보유차량 124대 가격이 무려 477억원
주간조선이 입수한 국토교통부(장관 유일호)의 ‘1억원 이상 수입 자동차’ 자료에 따르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명의로 등록된 1억원 이상 수입 자동차는 총 124대다. 124대의 차량 가운데 가장 비싼 자동차는 ‘부가티 베이론(9SA15)’으로 국토부에 등록한 금액은 26억6337만원에 달한다. 이 회장이 보유한 1억원 이상 자동차 가운데 가장 싼 차는 일본 닛산의 ‘GT-R R35’로 등록금액은 1억454만원이다. 이 회장이 가진 124대의 차량 가액을 다 합하면 약 477억2428만원에 달한다.
/부가티 베이론. /주간조선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매니아’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는 삼성자동차(현 르노삼성차)를 세워 자동차산업 진출을 꾀했고,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의 스피드웨이(자동차경주장)에서 직접 헬멧을 쓰고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자동차 매니아’ 이건희 회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델의 차를, 몇 대나 보유하고 있는지는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졌었다. 이건희 회장 소유의 차량 목록과 등록 가격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차 중 26억원으로 가장 비싼 ‘부가티 베이론(9SA15)’은 한때 일반도로에서 합법적으로 주행할 수 있는 차량 중 가장 최고가의 차였다. ‘부가티 베이론’은 독일 폭스바겐에 인수된 이탈리아의 스포츠카 전문생산업체 부가티가 생산한 차로, 최대 출력 1200마력에 최고 시속 431㎞를 자랑한다. 최고 속력 300㎞의 고속열차 KTX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중국 상하이(上海) 푸동(浦東)공항에서 운행 중인 독일 지멘스가 생산한 자기부상열차의 운행최고속도(최고속도 431㎞)와 같은 스피드다. 두 번째 고가 차량은 ‘포르쉐 918 스파이더’로 12억3400만원이다.
이건희 회장이 보유한 차량 가운데는 ‘수퍼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차가 많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퍼카 중 하나인 ‘SSC 얼티밋 에어로(Ultimate Aero) TT’는 7억6000여만원에 구입한 것으로 돼 있다. ‘SSC 얼티밋 에어로 TT’는 미국의 수퍼카 생산업체 SSC(셸비 수퍼카)가 생산한 자동차로, ‘부가티 베이론’과 기네스북의 자동차 세계 최고 속도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 람보르기니의 ‘무르시엘라고 LP670-4’ ‘아벤타도르 LP700-4’ ‘가야드로 LP560-4 스파이더’ 모델이 있고, 영국의 수퍼카 애스턴마틴 ‘DBS’ 모델은 두 대 갖고 있다. 독일 아우디의 수퍼카 ‘R8’은 5대다.
수퍼카만 있는 것도 아니다. 9억6000만원짜리 ‘롤스로이스 팬텀 EWB’와 ‘벤틀리 아나지 Final Series’ 등도 있다. 독일의 BMW가 인수해 생산하는 ‘롤스로이스 팬텀 EWB’는 ‘마이바흐 62S 랜덜렛’과 함께 이건희 회장이 평소 즐겨 타던 차량 중 하나다. 이건희 회장의 ‘롤스로이스 팬텀 EWB’의 차량 가격은 9억5700만원이다. 이건희 회장이 회사 출근 때나 공식행사 참석 시 가장 즐겨 타던 ‘마이바흐 62S 랜덜렛’의 국토부 등록 가격은 2억1000만원이다.<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같은 모델명의 차를 수대 이상씩 보유하고 있는 것도 이건희 회장의 독특한 자동차 사랑을 보여준다. 페라리는 무려 19대, 포르쉐 911시리즈는 35대 보유하고 있다. 80대만 한정 생산된 것으로 알려진 7억8000만원짜리 ‘페라리 SA Aperta’도 있다. 포르쉐 911시리즈는 35대나 돼 그 이유가 관심을 끈다. 이 중 모델 이름이 ‘911터보’인 게 12대로 가장 많다. 같은 모델인데 각각의 차량 등록가격이 차이가 나는 것은, 연식과 생산량 등에서 차이가 나는 차를 소위 ‘프리미엄’을 주고 구입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벤츠 SL65 AMG’도 6대를 보유하고 있다.
124대에 달하는 자동차는 이건희 회장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 차고와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 등지에 분산 보관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건희 회장은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 인근에 삼성화재교통박물관(자동차박물관)을 만들어 ‘클래식카’를 전시해 두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124대에 달하는 이건희 회장의 애마(愛馬)들은 이 회장의 와병 후에는 사실상 방치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회장의 가족들도 1억원 이상 고가 수입차를 여러 대 가진 것으로 보인다. 부인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명의로는 각각 2억2000만원, 2억7000만원인 ‘벤츠 S600L’과 ‘아우디 A8L 6.0 quattro’가 있다.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아버지보다 차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으로 보이는데, 국토부 자료에는 이재용 명의로 1억원대 ‘BMW 650i’, ‘BMW X5’, ‘아우디 A8L 4.2 quattro’가 있다. 여기에 나온 이재용이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인지는 불명확하다.
/국토교통부의 '1억원 이상 수입 자동차' 목록에서 이건희 상성전자 회장 명의로 등록된 자동차 명단. /국토교통부 제공
담철곤 오리온 회장도 고가 수입차로 유명하다. 그는 2011년 스포츠카 ‘람보르기니’ 등을 위장 계열사를 통해 리스했던 일이 드러난 바 있다. 담 회장 개인 명의로 돼 있는 1억원 이상 수입차는 모두 9대다. 10억원이 넘는 초고가 수퍼카 ‘엔초 페라리’가 있고, 9억8000만원인 수퍼카 ‘마세라티 MC12’, 6억9000만원 대형 세단 ‘마이바흐 62S’, 4억5000만원의 ‘페라리 수퍼아메리카’ 등이다. 합하면 모두 44억원 상당이다.
오리온그룹 법인 명의로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대형 세단이 등록돼 있다. 벤츠 ‘S500L 4Matic’과 아우디 ‘A8 4.2 FSI quattro’ ‘A8 LWB 4.2 FSI quattro’ 모두 1억5000만원 안팎의 수입차다.
김효정
주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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