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史] 역사학자 동아일보
2020.12.22
<141> 이름 없는 백성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세밑에 돌이켜 보면 세상은 항상 힘들고, 어렵고,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연말연시가 되면 인정을 나누고, 따뜻한 한마디를 던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올해 연말은 그런 노력이 죄스럽게 느껴진다. 끝나지 않은 고통이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새해를 기다리고 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런 경우도 있기는 했다. 음력 기준, 1636년 12월 15일 오후 인조와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한 달 이상 남한산성에서 국운을 건 수성전이 벌어진다.
유달리 추웠던 그해 성벽 위의 병사들은 해진 가마니를 덮고, 화톳불을 쬐며 밤을 새웠다. 수성전이라고 성벽만 지키지는 않는다. 간간이 성문을 열고 야습과 기습을 감행했다. 청군은 야전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고, 조선군은 실전 같은 훈련조차 부족했던 군대였다. 청군은 조선군은 싸움을 모르는 군대라고 비웃었지만, 실전을 시작하자 조선군의 능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때 이수림과 오영발이라는 두 명의 용사가 등장했다.
조선군은 전통적으로 백병전에 약한 군대였는데, 이수림은 선두에서 돌진해 칼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 넘었다. 밀집 창병 대열과 마주치자 창 밑으로 들어가 적을 베었다고 한다. 이수림은 최하급 무직인 권관이라는 군관 출신이었다. 그의 숙부 한 명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했고, 한 명은 황진의 부대에 있었다고 하는데,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듯하다.
인조는 이런 집안 내력과 용기에 감동을 받아 “당상관을 주라, 장수로 등용하라”고 말했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관료들은 규정을 따졌다. 당상관은커녕 이수림이 받은 관직은 하급 명예직이었다.
전사했다는 이수림의 숙부는 이름도 모른다.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다고 말은 잘하지만 정작 나라를 위해 분노하고 헌신한 사람들은 찾아 기록하지도 않고, 포상은 자기 살 베어주듯이 아낀다. 그것이 수백 년간 이 땅에 축적된 분노가 되었다. 새해에는 달라질까?
<142> 현재와 소통하는 과거
영국에는 임피리얼 전쟁박물관(IWM·Imperial War Museum)이라고 불리는 전쟁기념관이 여러 개 있다. 우리의 전쟁기념관 같은 종합적인 IWM은 런던 케닝턴에 있다. 다른 곳들은 전함, 탱크, 항공기 등 주제별로 특화됐다. 맨체스터에도 IWM이 있는데,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 전문이다.
1914년에 발발한 1차 대전은 그 규모는 물론이고 러시아 혁명, 2차 세계대전, 블록경제와 경제공황, 전투기와 탱크의 등장 및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는 인플루엔자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세계사의 방향을 결정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너무 충격적인 영향 때문인지, 무모한 희생 때문인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임에도 연구나 대중매체 양측에서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런 이유로 맨체스터 박물관에 기대가 컸다. 기대가 너무 컸던 때문일까 실망도 컸다. 맨체스터 운하 옆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박물관 전경을 볼 때만 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좀 싱거웠다. 첫 번째 입장객이 우리와 미국에서 온 관광객이었을 정도로 외국인들도 적지 않게 오는데, 의외를 넘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IWM이라는 이름이 아깝잖아”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있는데, 박물관의 연구와 소통 기능이다. 디스플레이만 화려하다고 훌륭한 박물관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공감이다. 재미로 접근하는 전쟁이 아니라 지금 젊은이들의 3, 4대 선조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던 사건, 그들의 고통과 실수, 잘못을 유물 앞에서 체험하고 지금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는 지성을 갖추게 하는 것. 이것이 전시와 연구의 근본 목적이다.
어느 유럽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다. 역사 선생이 1차 대전 전적지에서 열변을 토하는데, 학생 몇은 병사의 묘지 뒤에 숨어 선생과 죽은 자들을 비웃으며 마리화나를 피운다. 과거를 맹목적으로 미화해도 안 되지만, 과거에 한풀이나 하고, “너희가 우리에게 해준 게 뭐 있어”라고 비아냥거리는 나라는 이미 위기에 접어든 것이다.
2021-01-05 03:00
<143> 정치가 지닌 분노
한 교수님의 수업시간에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분이 약혼녀를 데리고 시골집에 인사를 갔다. 할아버지는 손자 며느릿감을 보고 아주 흡족해하셨다. 그러다가 성(姓)과 집안을 물어보더니 “이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호통을 쳤다. 여성분 집안이 조선시대 당쟁의 라이벌 집안이라는 것이었다.
당쟁도 전쟁이다. 아니, 정치판도 전쟁이다. 총칼로 싸우지는 않아도 결국에는 피를 부르더라는 점도 닮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피와 살육, 직접적인 폭력과 잔혹성이란 점에서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 말의 본의는 ‘정쟁(政爭)이 전쟁으로 발전한다’가 아니고, 국가 간의 갈등을 가능하면 무력을 동원하지 말고, 전쟁보다는 정치로 풀자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토록 참혹한 전쟁이 화해가 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일부였던 페가수스 작전을 지휘했던 존 하워드 소령은 전후에 건너편에 있던 독일군 지휘관 한스 루크 대령을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
반면에 정쟁은 화해가 안 된다. 카메라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악수해도 돌아서면 칼을 꽂는다. 더 황당한 건, 정치인들보다 화해하기 힘든 사람이 그들의 선동에 휘둘리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증오하고, 하지도 않은 일에 평생토록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다.
선동가들은 세상의 문제를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한다. 이것만 해결하면 내 삶이 바뀐다고 말이다. 그래서 정치가에게 기대를 걸고 과도하게 흥분한다. 전쟁도 비슷하게 선동을 한다. 그러나 전쟁터를 다녀온 사람들, 적을 사살하고 폭사시킨 사람들은 이를 깨닫고 화해를 한다. 일상의 전쟁은 이게 안 된다. 그래서 정치의 분노는 끈질기다. 정치가 이 대립을 푸느냐, 이 분노에 기생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격과 운명이 달라진다. 전쟁의 승리와 패배가 국운을 바꾸는 것처럼.
<144> 기록을 지배하는 것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해서 문관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문무 겸비는 기본이었다. 야전에서 전투를 벌이는 능력은 없다고 해도 병서를 읽고, 군을 지휘하고, 동원·병참 등 군사행정을 처리할 줄은 알아야 했다.
남원의 선비였던 조경남은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을 모두 겪었다. 임란 때는 의병장으로 전투에 참전했다. 문무 겸비에 실전 경험까지 갖춘 그는 3대 전란을 기록한 난중잡록과 속잡록이란 전사(戰史)를 남겼다. 전사 기록물이 안타까울 정도로 부족한 우리 역사에 저자의 경력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희귀하고 소중한 기록이다.
조경남의 저서는 다른 기록에 비하면 설명도 구체적이고 풍부한 편이다. 그러나 전사로서는 여전히 소략하고 구체성이 부족하다. 본인의 잘못도 아닌 것이, 그가 참조한 기본 사료와 문서들이 간략한 보고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이해하지만 ‘가짜 뉴스’, 감정적이고 단순한 전황 분석은 누구의 탓일까.
조선은 그 어떤 사회보다 문맹률도 낮고 식자층도 많은 나라였지만, 철학적 사변과 문학적 글쓰기에 너무 치중해서 실용적 사고, 육하원칙에 의한 과학적 설명과 실용적 글쓰기 훈련이 너무나 부족했다. 이런 글쓰기 문화는 역으로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고 사건을 목격해도 눈과 두뇌가 현장 상황을 분석하기보다는 평론이 앞선다. ‘장군이 겁을 먹어 병사들이 무너졌다’, ‘장군이 큰 소리로 호령하고 도망치는 병사의 목을 베자 병사들이 용기백배해서 싸웠다’는 식이다.
전장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건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아군과 적의 무장 상태가 어떻고, 어떤 지형에서 몇 m를 돌격했는지 이런 문제는 관심도 없다. 수많은 변수가 지배하는 전장을 한두 가지 요소로 재단해 버리니 세상을 단순하게 보게 되고, 분석보다는 감정적 비방이 앞선다. 이러니 가짜 뉴스에도 쉽게 속는다.
조선은 500년 동안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안타까운데, 21세기가 된 요즘 교육이나 지적 풍토가 도리어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145〉 관료주의의 망령
임진왜란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정찰병을 보내지 않아 적이 다가오는 줄 몰랐다. 경계병을 세우지 않아 야간 기습에 당했다. 임란 후반기에 선조가 이런 한탄을 한다. “전쟁 초기라면 실전 경험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 도대체 전쟁이 몇 년째인데, 달라진 게 없는가.” 40년 후의 병자호란 때도 이는 반복된다. 조선의 무장들은 정찰과 경계라는 군사의 기초도 몰랐던 걸까.
이런 보고엔 억측과 소문, 지휘관에게 패전 책임을 전가하려는 마녀사냥식 보고가 섞여 있다. 감시원을 세웠다고 도난을 100% 방지하지는 못한다. 감시 시스템 실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양란 때도 정찰대를 운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찰대를 파견해도 적을 탐지하지 못하거나 적에게 살해되고, 심한 경우 겁을 내서 제대로 임무수행을 하지 않은 거다. 경계 실패도 마찬가지다. 초병이 졸거나 사각지대가 넓었던 것이다. 즉, 상식이 아니라 능력의 실패였다. 정찰장교, 정찰병은 지휘관급 안목과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전사여야 한다. 평소에 전문가 집단을 양성하지 않으면 전시에 활용할 수 없다.
4군 6진을 개척한 세종 때 ‘체탐자’라는 특수수색부대를 창설해서 운영했다. 조선판 네이비실인 이 부대는 적진 정찰, 침투, 수색, 각종 특수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16세기에 국경이 안정되자 이 부대는 제일 먼저 없어졌다. 특수임무는 사고 위험이 크다. 책잡힐 일은 기피하고 보는 관료주의의 결과였다. 임란 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래도 관료주의는 죽지 않았다. 병자호란 전에 체탐자 같은 부대가 잠시 운용됐지만, 극소수 임시직으로 마무리됐다. 세계 최강의 기병부대를 상대해야 했던 병자호란 때 전문 정찰부대의 결여는 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군대가 관료화하고, 관료가 군대를 지배하게 되면 국방은 실패한다. 우리 군사력이 세계 6위라는 통계가 나왔다. 자랑스러운 결과지만 궁금하다. 군사력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백 년을 괴롭혀온 관료주의는 과연 떨쳐냈을까.
〈146〉 선의를 실현시키려면
누르하치가 푸순을 점령하고, 명나라 세력을 요동에서 몰아내려고 하자 명은 전력을 기울여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참전을 요청받은 조선은 1만 명이 넘는 대병력을 파병한다. 1619년에 벌어진 사르후 전투에서 명의 대군이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만주를 상실하고, 결국은 멸망했다. 조선군은 유정이 지휘하는 동로군에 속해 전진했는데, 청군에 패해 유정은 아들과 함께 자살하고, 조선군의 절반 이상이 전사한다.
120근이나 되는 대도를 사용한 유정의 별명은 유대도였다.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던 유정은 명나라에선 평이 제일 좋은 장수였다.
함양 출신의 의병장 정경운이 저술한 고대일록에는 그 지역에 시찰 왔던 유정을 만난 기록이 있다. 지역 유지들을 만난 유정은 전쟁으로 고통 받는 조선의 실정에 깊이 동정하고, 병사들이 약탈하거나 민간인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곤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아무리 엄하게 단속해도 내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불법이 발생할 것이다. 그걸 해결하려면 여러분이 신고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최대한 성실하게 처리하겠다.”
정경운은 유정을 좋게 평가했고, 이 말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신고할 수 있었을까. 유정의 군대가 함양에서 조직적인 약탈을 하거나 범죄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다만 기념품을 챙겨가는 좀도둑질, 우마 징발 등의 사건이 있었다. 정경운은 불평을 토로했지만 신고하지는 않았다.
리더가 아무리 선의를 갖고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선의가 실현되려면 정밀한 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호의로 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도 있다. 리더는 선의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리더들이 선의를 남용한다. 선의를 내세워 감정에 호소하니 프레임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선한 리더에게 의존하지 않고 방법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147〉 나 홀로 자강론
구한말 조선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라는 4대 강국의 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오랜 쇄국으로 국제 정세에 문외한이었던 조선은 주일 청나라 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을 만나 자문했다. 이때 황준헌이 김홍집에게 써 준 글이 ‘조선책략’이다.
조선책략의 요지는 “현재 조선을 위협하는 국가는 러시아다. 조선이 생존하려면 중국과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하고, 일본과 우호를 맺고, 미국을 새로운 우방으로 끌어들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책략에는 중국의 입장이 반영됐고, 이미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의 국력을 엄청나게 과장했다. 각론에서도 비판할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조선에 주는 교훈은 국제사회에서 독자생존이란 불가능하다는 것, 조선은 지금 위기 상황이니,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 정세에서 미래의 이익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30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청, 일본, 러시아의 전쟁터가 되었고, 결국 나라를 잃었다.
이 글이 소개되자 국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영남 유생들이 올린 영남 만인소이다. 유림을 자극한 첫 번째 요소는 개방정책이 기독교의 유입을 허락해 유교 국가인 조선의 기틀을 허물 것이란 위기감이었다. 서학이 상공업 육성을 장려한다는 것도 불만이었다. “농업이 산업의 근본이고, 재정이 풍족해지려면 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해야 한다. 세상의 물화는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기술이란 요술을 발휘해 소수가 장악하면 나중에는 임금도 굶주리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답답한 부분은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원수인 일본을 비롯해 낯선 미국과 교류했다가 그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재산을 뺏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어찌 보면 일리가 있는 말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교류를 끊고 우리가 고고하게 독야청청하면 다른 나라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까?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이런 ‘나 홀로 자강론’이 다시 고개를 든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력이 성장하자 교만해진 것일까. 역사는 세계 최강 대국도 나 홀로 자강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148〉 소금보다 후추
가장 기본적 향신료인 소금조차 고대·중세에는 흔하거나 값싼 물건이 아니었다. 성 안에 전략물자를 비축할 때도 소금은 필수 물품이었다. 상업과 무역에서도 주요 상품이었다. 당연히 소금 생산지는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대항해시대의 향료 전쟁은 소금 전쟁보다 훨씬 대규모이고 국제적으로 벌어졌다. 후추는 고대 로마에도 소개되었지만 이때는 육로로 힘들게 운송됐다.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향료가 상선으로 수송될 수 있게 되었다.
향료 가격은 시대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후추, 육두구, 시나몬 등 대표적인 향료는 전성기엔 거의 금값과 맞먹었다. 향료는 유럽 강대국들이 해양에 투자하는 계기이자 동력이 되었다. 아프리카, 인도양을 돌아 동남아까지 함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과 희생이 필요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단가가 높은 상품이 필요했다. 향신료만큼 여기에 적합한 상품이 없었다.
상인과 군인, 해적의 구분이 거의 없던 시기였다. 유럽 각국의 선박이 동남아에 나타나면서 향료 생산지와 무역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유럽 각국끼리 싸우기도 했지만 원주민 왕국, 중국, 일본 해적까지 얽힌 국제 전쟁이 벌어진다.
소금과 달리 향신료는 없어도 생존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소금보다 더 처절한 국제적인 분쟁을 야기했다. 나중에 ‘육두구가 페스트를 예방한다. 만병통치약이다’ 등 명분이 붙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다. 이런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인생을 살아보면 개인의 삶은 결국 의식주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의식주는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이지만, 점차 유복한 삶을 위한 조건이 된다. 더 나아가면 자기 과시와 권위를 위한 요소가 된다. 더 훌륭한 집, 더 우아한 인테리어, 더 풍요로운 식탁, 그것을 추구하는 자체도 인간의 기본 욕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때로는 전쟁까지 이어지고, 무자비한 탄압과 비열한 범죄로까지 확산된다.
〈149〉 러일전쟁의 희생자
19세기 말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서 랴오둥반도를 할양받자 러시아는 소위 삼국간섭을 통해 이 조치를 철회하고 자신이 차지했다. 그리고 뤼순항을 요새화하기 시작한다. 분노한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군비 증강에 돌입했다. 이때부터 10년 동안 당시 화폐로 7억 엔이 넘는 투자를 통해 군비를 10배로 늘렸다.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제3국 관찰자들은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문제는 러시아의 시간이었다. 지정학적 여건상 러시아가 만주에 군대를 투입하기는 일본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러면 몇 배로 더 노력해야 하는데, 위기는 인식했으되 위기의 시간은 멀리 떼어 놓았다. 러시아는 일본의 군사력을 극도로 과소평가했다. “일본의 군사력은 유럽의 최약체 국가보다 약하다. 독일군을 모델로 배우고 있지만, 성취도는 형편없다.”
러시아는 느긋했고, 부패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뤼순 요새화에 천문학적 자금을 낭비했다. 러시아 함대는 훌륭했지만 비용 절감을 이유로 제대로 훈련은 하지 않았다. 러시아군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수병은 세계 최고다. 다만 (훈련을 하지 않아) 포를 쏠 줄 모른다.”
일본은 늙고 굼뜬 제국의 약점을 파고들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일본은 강대국으로 발돋움했지만 승리의 교훈을 활용하는 데 오류를 저질렀다. 러시아가 패전한 교훈은 성찰하지 않고 자신의 승리 요인에만 감동했다. 이것이 과한 선전정책과 결부되면서 자기 최면에 빠졌다. 예를 들어 무모한 돌격전은 엄청난 희생을 냈지만, 세상에서 일본군만 할 수 있는 전투 방식이라고 미화했다. 자기 착각은 반세기 동안 성장해 태평양전쟁에서 비극을 낳는다.
패배한 적을 무시하고, 자신의 승리에 도취하면 반드시 자신을 해친다. 다음의 승리를 위해서는 적을 존경하고,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선전선동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선동을 진리로 믿게 되면 눈이 멀고, 눈먼 칼은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상하게 한다.
〈150〉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
정묘호란 당시 의주성을 지키던 장수는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따라 임진왜란에 종군한 덕에 실전 경험도 풍부했고, 이순신 장군의 통솔법을 배워 엄하면서도 용기 있고, 책임감이 투철한 리더였다.
조정에서도 이런 능력을 높이 평가해 의주성을 지킬 장수는 이완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침공 첫날, 후금군의 특공대가 의주성 수문으로 침투해 성문을 열었다. 의주성은 허무하게 함락됐고, 이완은 시가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다. 그를 동정한 사람도 있지만, 이완은 경계 실패의 책임과 함께 큰 비난을 받았다.
병자호란 최악의 패전으로 알려진 쌍령전투에서도 정찰과 경계를 하지 않아 적이 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고려시대 몽골군이 침공했을 때, 황해도 정방산성 근처 동선령에서 몽골군이 접근하는 줄 모르고 쉬던 고려군이 기습공격을 받아 대패한 적도 있다.
크게 패배한 전투마다 경계나 정찰병을 세우지 않아 기습을 당했다는 기록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임진왜란 중에 이런 보고가 자주 올라오자 선조가 한탄했다. 조선군 지휘관들이 어리석어서 경계병조차 세우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 경우가 없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장에 없던 사람들이 결과만을 보고 비판하는 말은 정확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경계병을 세울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경계 방법을 몰랐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훈련과 운영 시스템 부재가 진정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고 백선엽 장군도 6·25전쟁 당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런 경우라면 지휘관을 처벌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최근 휴전선에서 경계 실패 사례가 여러 번 발생하고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불비한 원인은 냉철하게 점검하고 개선해야 한다.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전시(戰時)라면 용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다.
〈151〉 비극이 벌어진 이유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벌어진 시위는 이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지방에서도 조직적인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필연적으로 과격해졌고 충돌이 발생했다.
일본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4월까지 벌어진 시위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는 정확하지 않다. 일본 측 통계는 대략 사망 400∼600명, 부상자 900∼1400명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 군경, 민간인 희생자도 약간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편찬한 사료집에 따르면 사망자가 7500여 명, 부상자는 1만5000여 명이다. 어느 쪽이 맞느냐보다는 어느 쪽이 진상에 가깝냐가 정확한 질문일 것이다. 임시정부의 통계는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조사 방법상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본의 통계는 축소 보고가 확실하지만, 얼마나 어떻게 축소되었는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임시정부의 통계가 맞거나 더 많았다고 가정하면 국지전의 희생자를 상회하는 수치이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649명, 부상 1038명, 영국군 피해는 전사 258명, 부상 444명이었다. 일본 측 통계를 따라도 아르헨티나군 피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피해였다고 한다면 한국 민중으로서는 그야말로 맨주먹과 돌, 목소리로 싸웠던 전쟁이었던 셈이다. 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항거할 수밖에 없었고, 비극이 벌어졌던 이유는 간단하다.
시위에 참가했던 어떤 여학생의 경험담이 남아 있다. 전차를 타고 시위 현장에 가던 그녀는 도중에 사전단속을 벌이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찰이 물었다. “너는 독립을 원하느냐?”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립할 것이냐? 군대나 군함이 있느냐? 너희를 도와줄 우방국가가 있느냐?”
〈152〉 운문사와 화랑의 탄생
경북 청도군에 소재한 운문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현재는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운문승가대학이 자리 잡고 있어 웅장하면서도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운문사는 오랜 세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시대에 이곳에는 5개의 사찰이 포진해 있었는데,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내린 가실사가 그중 하나이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하사한 것이다. 왕건은 운문사 북방 문경-진위-청송 지역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여러 번 혈전을 벌였다. 이때 후방의 운문사 세력이 왕건을 지원했던 것 같다.
고려말기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발발한 곳도 이곳이고, 한말 의병항쟁기에는 최세윤 의진의 지역분대가 운문사에 설치되었다. 1908년 권병호 부대도 운문산에 잠복해서 활약했다. 운문사가 위치한 가지산은 경주-울산에서 대구-경산 지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 권역을 연결하는 요지이면서 가파른 산들이 첩첩이 놓여 있어 방어전이나 게릴라 활동에 대단히 유리한 지형을 제공한다.
원광의 세속오계에 ‘임전무퇴’가 들어 있는 것이 전에는 그저 귀산과 추항이 화랑, 무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곳 지형을 보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삼국이 전쟁의 시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이곳은 신라의 전진기지가 될 수도, 최후 방어선이 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원광이 이곳에 머무르고 이곳에서 화랑도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화랑도는 신라의 전쟁에 큰 기여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임전무퇴’라는 계율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지만, 진짜 기능은 골품제라는 폐쇄적인 정치체제의 외연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성공 후에 화랑도는 제거된다. 이유는 둘 중 하나다. 화랑도가 초심을 잃었거나, 신라의 진골세력이 화랑도를 내쳤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교훈은 같다. 권력자들의 탐욕이 자신들에게 권력을 안겨준 이유를 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권력이라는 바퀴는 언제 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까
〈153〉 한 병역기피자의 인생
1913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빈민자 합숙소에서 살던 한 청년이 황급히 짐을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그가 숙소를 떠난 이유는 병역기피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21세가 되면 징집 대상이 되어 신고해야 하는데, 이를 피했던 것이다. 그의 본적지 린츠시에서는 청년을 병역기피자로 수배했다.
이때 청년은 고국을 떠나 독일 뮌헨에서 살고 있었다. 외국에 있다고 안심했지만, 당국은 외국에서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술집에서 그림엽서를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이 청년의 거주지를 찾아냈다. 뮌헨 경찰에 협조를 구했고, 형사가 찾아와 그를 체포했다.
이 병역기피자가 아돌프 히틀러이다. 만약 그때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로 송환되어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했다면 우리가 아는 나치당 당수 히틀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사관이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본국 송환을 보류하고 독일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호의를 베풀었다. 우방이긴 하지만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국방력 강화에 절실하지는 않았으므로 법정은 가난하고 몸이 약해서 병역을 수행할 수 없다는 히틀러의 변명에 손을 들어 주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한다. 바로 전에 병역기피자였던 사람이 그것도 타국의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무슨 마음인지 그는 입대를 신청했고 통과됐다. 그의 운은 계속된다. 1차 세계대전은 엄청난 살육전이었다. 개전 초 최전선에 투입된 병사가 종전까지 살아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히틀러가 최초로 배속된 연대도 금세 연대장을 포함해 3분의 2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다.
외국인에다가 중학교 졸업의 학력에 아무런 사회적 경력도 없던 히틀러가 대중선동가에서 정치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유일하게 뒷받침이 되었던 경력이 바로 이 참전 경력이었다. 히틀러가 병역면제와 외국인의 특권에 만족했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인생이 아이러니인 것은 맞는 듯하다.
〈154〉 미얀마의 평화
1945년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부대가 국경을 넘어 버마(현재의 미얀마)와 태국 사이 샨족의 땅으로 숨어들었다. 추격해 오는 중국 공산군과 이들을 몰아내려는 토착민 샨족, 버마군, 태국군과 무력 생존투쟁을 벌인다. 이들 부대의 이야기는 홍콩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아주 복잡하고, 국제적으로 여러 가지 후유증을 남긴다.
국민당군은 현지에서 샨족을 훈련시켰는데 그중 쿤사라는 병사가 있었다. 나중에 쿤사는 국민당군과 대립하며 소위 골든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던 지역에서 마약을 재배했다. 월남전을 계기로 미군 병사에게 마약을 판매하던 그는 미국 시장을 장악하는 마약왕이 되고 버마에서 독립을 꿈꾸던 샨족 군벌과 결탁해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다.
국민당군을 지원했던 미국은 국내에 범람하는 마약으로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이 사태의 진정한 피해자는 버마일 수도 있다.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점령당했다. 종전과 함께 독립을 코앞에 둔 시점에 버마족 지도자였던 아웅산이 암살된다.
아웅산 암살로 버마 정부의 군부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는데, 국민당군을 몰아내려는 전쟁으로 군부의 세력은 급속히 강해진다. 이것이 1962년 군부 쿠데타의 배경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네윈은 아웅산의 딸 수지를 감금하고 30년간 철혈통치를 했다. 네윈이 물러나고 수지가 집권하면서 미얀마에 민주주의와 평화가 찾아왔나 싶더니 다시 군부의 쿠데타와 피를 부르는 항쟁이 시작되었다.
민주화 투쟁이 성공한다고 해도 난관은 첩첩이 쌓여 있다. 미얀마 인구의 60%는 버마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40여 개의 소수민족이다. 개방을 통한 경제개발 정책은 인도, 중국, 태국, 캄보디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 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미얀마에 하루빨리 평화와 번영이 찾아오기를 바라지만, 미얀마 국민의 노력, 화합과 함께 국제사회의 협력과 현명한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155〉 조선 제일 기피 병역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운명에 맞서야 했고, 역사에 커다란 굴곡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수군은 조선에서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병사들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중기 이후에는 7가지 천역의 하나로 간주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수군이 상대적으로 적고 약했던 것도 아니다. 경상, 전라, 충청 지역은 수군이 육군보다 훨씬 많았다.
수군이 천대받은 이유는 고되고, 죽거나 병들 위험도 훨씬 높았기 때문이었다. 권력형 부조리와 학대의 주된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바닷가 지역 공물에는 해산물이 많았다. 소금은 전국적인 상권을 지닌 상품이었다. 수군 병사들은 군 복무 기간에 소금 생산과 해산물 채취 사역에 동원되었다. 당시의 전선들은 풍랑과 파도에 극도로 취약했다. 각종 질병과 전염병에 걸릴 확률도 높았다. 도망치는 병사들이 늘자 정부는 수군 세습제라는 극약처방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수군역은 더욱 힘들고 기피하는 역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100년 이상 이어졌다. 임진왜란 전 전쟁 준비를 해야 하는데 수군은 병력도 물자도 부족했다. 이순신이 휘하 부대를 순시하면서 불비한 점을 지적하면 장수들이 고충을 얘기했다. 백성들이 지쳤고, 물자도 여력도 부족합니다. 이순신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래도 해야 한다”였다. 그리고 정운처럼 끝내 해내는 부하를 좋아했다. 만약 법대로 사역시간을 줄이고, 야간 사역을 금지했다면 이순신 부대의 승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면 당장 비판을 받는다. 이런 논리가 악용된 사례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나 비리를 원천봉쇄한다고 맹목적으로 정의로운 법을 세우고 시행을 강제했더라면 조선이 붕괴되었을 수도 있다. 정의롭지 않아서 정의로운 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기에 정의로 포장한 어리석은 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법으로 금지할 사안과 운영으로 풀어야 할 사안이 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더 큰 비극을 초래한다.
〈156〉 훈련되지 않은 군대의 재앙
1948년 5월 14일 저녁, 벤구리온은 방송을 통해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건국 선언서는 구약성서로 올라가는 이스라엘의 역사, 홀로코스트까지 이어지는 유대인의 긴 고난,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아랍인과의 공존과 공동 발전을 모색하겠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음 날인 5월 15일을 말 그대로 ‘재앙’이라고 규정한다.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잔혹하고 무자비한 이주정책이 시행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렸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열광했다. TV와 라디오 앞에서 박수를 치고, 거리에서는 음식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훗날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이자 수상이 된 이츠하크 라빈은 이스라엘군의 젊은 장교로 병영에서 부하들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이스라엘로 이주해 총을 잡았던 열혈 시오니스트였다. 라빈은 18세에 영국군이 조직한 유대인 특수부대에 입대해 비시 프랑스군(나치 독일에 협조한 프랑스군)과 싸웠다.
이스라엘 독립에 대한 그의 감격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열혈 독립투사였던 라빈은 벤구리온의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TV를 끄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이 독립선언을 하자마자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등 주변 5개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라빈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준비 없고 무모한 전쟁에 분노했다. 그는 많은 동료와 부하들이 희생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라빈이 비관적으로 봤던 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기적 같은 승리’라고 불리지만 현대 군사가들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말한다. 강대국 지원도 결정적이었지만 아랍 군대의 훈련 수준이 너무 낮았다. 이것이 진짜 원인이었다. 병력, 무기, 정신력, 명분…. 이 모든 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훈련되지 않은 군대는 제 역할을 못 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슬픔을 깊이 동정하지만,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가 없었다는 것이 비극의 원인이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157〉 무능한 지도부가 초래한 파국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중동전쟁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하자 주변 5개 아랍 국가가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은 1947년 11월 유엔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리독립안이 통과되자마자 양측 대결은 전쟁 수준으로 번졌다. 처음에는 카페에서 총을 난사하고, 상점에 폭탄을 터뜨리는 형태였지만 이내 영토 확장책으로 발전했다. 서로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려고 했고, 조직적으로 병력을 동원했다.
독립 전에는 영국이 위임통치를 맡고 있었지만, 양측의 무력충돌에 속수무책이었다. 예루살렘, 갈릴리 등 접경지역과 전략요충지에서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중 하나가 하이파다. 하이파는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제일 크고 발전된 도시였다. 1948년 4월 하이파는 아랍인 거주구역과 유대인 거주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간에 영국군 수비대가 주둔했다. 양측 민병대의 공격을 견디다 못한 영국군은 19일 밤 몰래 항구지역으로 이동했다. 아침이 되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완충지대가 텅 비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서로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총격이 시작되었고, 이내 시가전으로 번졌다. 이틀간 전투 끝에 하이파는 이스라엘 것이 되었다. 결정적인 요인은 팔레스타인 군 지도부의 무능과 주민들의 공포심이었다. 팔레스타인 지도자의 증오는 대단했지만 전투 현장에는 없었다. 민간인들은 공포에 떨었고, 이 약점을 간파한 이스라엘이 시가지로 박격포를 발사하자 공황이 일었다.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남아서 싸우기보다 안전한 도시로 이주하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축출 정책은 악명이 높다. 이스라엘의 잘못도 있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왜 자신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이스라엘에 그런 꼴을 당해야 했는지도 분석해야 한다. 분열,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 리더십 결여, 고난을 마주하려는 투지 부족이 원인이었다.
〈158〉 알렉산드로스의 결단
알렉산드로스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내달렸다. 용사이자 전략가로서 알렉산드로스는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왜 쉴 새 없이 달려서 인도로 향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는 파키스탄을 넘어 인도 북부로 침입했지만 동쪽 해안까지는 가지 못했다. 마케도니아군 정예 중의 정예이면서 심복이던 은방패 부대라고 불리던 영예로운 장창보병대가 더 이상의 진군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부대는 부왕 필리포스 2세가 창설한 부대였다. 고참병은 50, 60대가 넘어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전쟁터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고,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충성도도 절대적이었다.
그런 이들이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거부했고, 최초의 패배를 안겼다. 이들이 거부하는데도 진군을 계속했다면, 이 소문이 부대에 퍼진다면 다른 부대들은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2대째 충성을 바쳐온 부대들마저 진격을 거부하는 상황이라면 어떤 부대가 반란에 동참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은방패 장창병들이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버렸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 알렉산드로스를 사랑했고,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버린다. 형식적으로는 두둑한 보상금을 주고 퇴역시켰다. 그들을 위한 각종 영예와 포상제도도 마련해 주었다. “그동안 너무나 수고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편히 노년을 보내도록 하라.” 은방패 부대원들에게는 날벼락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옆에 남아 친위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싶어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냉혹하게 거절하고 그들과 단절한다. 그들은 여전히 강했지만 더 이상 정복전쟁을 수행할 부대가 아니었다.
공과 은혜는 잊지 않지만, 집단의 이기적 목표와 타협할 수는 없다. 알렉산드로스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결단의 결과를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만은 역사가 명확하게 증명해 주었다. 그 후 은방패 부대는 타락했고 자신들의 주군을 모두 파멸시켰다.
〈159〉 놀런 대위의 만용
1854년 10월 크리미아반도의 발라클라바 항구로 러시아 대군이 진격해 왔다. 러시아군의 상대는 영국, 프랑스, 오스만 연합군이었다. 러시아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항구로 오는 진입로 지형을 이용해 4개의 보루에 포대를 설치했다.
러시아군은 먼저 4개의 보루를 공격했는데, 오스만군이 포탄이 떨어지자마자 도주했다. 보루 간에 지원도 잘 되지 않아서 4개의 보루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빠르고 무참하게 함락됐다. 2선의 스코틀랜드 부대는 기세가 오른 러시아군 기병의 돌격을 잘 막아냈다. 이 승세를 타고 영국 중기병대가 돌진했다. 수가 훨씬 많은 러시아 기병이 양쪽에서 영국 기병대를 포위하려고 했다. 영국 기병대는 전혀 겁을 먹지 않고 돌진을 감행해 러시아 기병의 중앙부를 가르고 돌파했다. 그러자 나머지 영국 기병대가 러시아군을 향해 돌격했다. 사기가 꺾인 러시아 기병대는 도주하고 말았다.
기병이 도주했지만 러시아 본대와 포병, 예비 기병대는 단단히 대오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때 영국군 15경기병대가 본대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러시아 포병이 일제히 사격했고 기병대는 측면과 정면의 십자포화에 갇혔다. 포연이 사라지기도 전에 영국군 경기병대는 주검으로 변했다.
영국군 경기병대의 무모한 돌격에는 명령서 오기, 명령 전달 방식 오류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면 돌격을 주장했던 놀런 대위의 만용이다. 그는 최고의 기병 전문가로 훈련법과 전술에 관한 저서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병의 능력과 자신의 전술을 늘 과신했다. 평소에 이런 자신감과 용기는 매력적이고 헌신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실전에서 그는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포탄의 제물이 되었으며, 동료와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전쟁에서 잘못된 용기와 신념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160〉 우리는 언제나 말에 속는다
스파르타는 최강이다. 그리스 전쟁사, 중장보병의 실루엣과 청동 창과 방패의 충격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파르타에 매료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최강’이란 단어에 메스를 대 보자.
전술적으로 분석하려면 스파르타군이 최강이 아니라 스파르타군이 최강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을 찾아야 한다. 기본적인 요소로 지형, 상대의 병종, 전술목표를 들 수 있다. 시가에서 청동의 대열을 형성하고 경보병이나 다른 도시의 중장보병을 막아내는 전투라면 스파르타는 최강이다. 평원에서 중장보병끼리 승부를 겨룬다면 최강일 수 있다. 경보병이 돌파를 시도한다면 아예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경보병 게릴라 부대를 추격해 섬멸하는 작전이라면 중무장을 하고 느린 중장보병은 쫓아갈 수가 없다. 그리스는 아무리 평원지대라도 조금만 이동하면 바위산 돌산을 만날 수 있다. 경보병이 그 비탈로 뛰어 올라가면 추격은 고사하고 보기 좋게 패배할 수도 있다. 비탈에 흔한 어린아이 머리만 한 돌은 중장보병의 방패와 투구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사막에서 유목기병을 만난다면, 밀집대형을 펼칠 수 없는 숲에서 바바리안 전사들에게 둘러싸인다면, 스파르타와 똑같이 아니 더 뛰어난 체격조건을 갖추고 고도의 훈련을 받은 중장보병대와 마주한다면…. 스파르타군이 약한 군대가 될 조건은 수도 없이 많다.
마키아벨리는 용병은 돈을 위해 싸우고 시민군은 가족을 위해 싸운다고 말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이 설을 한마디로 반박했다. 시민군도 부랑아, 낙오자로 채우고, 훈련과 규율이 없으면 용병과 다름없다.
프리드리히도 인정했지만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식의 말에 너무 쉽게 속는다. 실상을 보지 않고 단어에 가치를 부여하고 성급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유, 공정, 정의, 평등, 세금,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일수록 옳게 작동하는 환경, 조건,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돌에 황금이란 레테르(상표)를 붙인다고 황금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