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다큐15/ 정치7/ 안치용의 Secret of Korea 조선일보
안치용
재미 탐사보도전문기자
E-mail : jesim56@gmail.com
조선일보가 ‘뉴욕의 저승사자’로 표현한 탐사보도전문기자로 1인미디어인 ‘시크릿오브코리아’를 운영하고 있다. MB집권 2년차에 현직 대통령의 사돈인 효성일가의 해외부동산 불법매입 사실을 폭로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노정연씨의 불법환치기도 밝혀냈다. ‘전두환 등 전직대통령 비자금’, ‘SK 해외비자금 5억달러’, ‘MB사위 조현범 일가의 하와이부동산 불법매입’ 등 권력자와 재벌 일가의 해외 비밀을 잇따라 특종보도했다. 특유의 끈기와 집요함으로 ‘상식이 통하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탠다는 생각이다.
1967년 울산에서 태어나 1992년 부산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9월 경상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1992년말부터 미국 뉴욕의 미주조선일보와 TKC방송국에서 근무한뒤 1995년부터 YTN 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2003년 도미, TKC방송국에서 6년간 일한뒤 2009년 5월부터 1인미디어로 나서 그해 8월말 시크릿오브코리아를 개설했다. 2012년 3월 ‘시크릿오브코리아’, 그해 9월 ‘박정희의 대미로비 X파일’ 등 3권의 책을 썼다.
2014.01.13 김형욱②
"수출진흥에 이바지한 내가 왜 부도덕한 기업인인가?" 장용호 사장 35년만의 단독 인터뷰
지난 1979년 유신정권 붕괴의 단초가 됐던 YH사건의 장용호 사장이 사건 발생 10여년뒤 청와대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만나 언성을 높이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었다고 밝혔습니다
장 사장은 또 박정희 전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와 동향이어서 5·16 이전부터 육 여사와 알고 있었고, 박 전대통령의 큰 사위인 한병기씨와 절친한 사이여서 한씨와 함께 여러 차례 청와대에서 박 전대통령과 육 여사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대규모 목장을 공동소유한 것으로 밝혀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는 김씨의 미국도피 전부터 절친한 시이였다고 털어놨습니다.
31세 국회의원 출마, 36세 YH무역 설립, 41세 수출 1천만달러 달성, 철탑산업훈장 수상, 44세 대한민국 개인소득세 7위, 50세 YH 사건…. 장용호 사장은 바람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회사 설립뒤 5년만에 대한민국 수출 순위 15위 기업이 됐지만 회사가 망하는 데는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35년간, 그는 깊은 잠을 자듯 긴 침묵을 이어갔습니다. 1979년 8월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이던 YH여공 강제진압 당시 뉴욕에서 한두차례 자신의 입장을 밝힌 뒤로는 철저하게 은둔했던 장씨가 지난 6일 전화 인터뷰에서 35년만에 처음으로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습니다.
YS대통령된 뒤 청와대서 만나 격렬 항의
올해 86세(한국 나이 87세)로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장씨는 YH사건에 대한 심정을 묻자 “이제 YH 이야기는 접었으면 합니다. 이제 잊으려고 합니다, 좋은 회상이 되지 않는 그런 얘기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깜짝 놀랄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장씨는 ‘속상하고 억울해서 오죽하면 김영삼 대통령(YH 사건 당시 야당인 신민당 총재)과 싸움, 싸움이라면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언성을 높이고 했겠습니까” 라며 김영삼 전대통령과의 청와대 만남을 고백했습니다.
“아니 언제 YS를 만났습니까? 청와대에서요?”라고 묻자, 장씨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미국의 한인단체장이 청와대를 방문한다고 해서 (뉴욕한인회장 이었던) 자신도 함께 가서 김 전대통령을 예방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장씨는 줄을 서서 김 전대통령과 악수를 할 때 “제가 바로 YH무역의 장용호입니다. 어째서 저를 부도덕한 사업가라고 했습니까. 장학회도 만들고 자수성가해서 수출진흥에 이바지했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라며 말했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 전대통령은 “아 미안하다, 나는 비서진에서 그렇게 말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장씨는 주장했습니다. 당시 신민당총재이던 김 전대통령은 지난 1979년 8월 11일 새벽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강제진압된 약 한달뒤인 9월 4일 “기업인이 권력의 비호 아래 재산을 해외에 빼돌려 불법치부하는 것이 부정부패의 한 예이며, YH무역의 사주인 장용호라는 자는 이런 부정부패의 대표적 장본인”이라고 말했었습니다
닷새뒤인 9월 9일 장씨는 뉴욕에서 합동통신 한창섭 특파원을 만나 “부정부패의 대표적 장본인이라고 공언한 김영삼 총재가 공개사과하지 않는 한 그를 명예훼손죄로 고발하겠다”고 밝혀 언론에 대서특필됐었습니다. 장씨가 청와대에서 김 전대통령을 만나서 항의한 것은 바로 이 9월 4일의 발언과 관련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나는 미국에서 사업 일으켜 모국에 투자한 사람…비참하고 억울”
장씨는 거듭 YH사건 당시 회사 폐업 등에 대한 입장을 묻자 “다시 말씀드리지만 YH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장씨는 ‘도산(도시산업선교회를 이름)때문에 망했습니다, 잘 아시죠? 노조 바람에 결국 회사 넘어가고 불명예스러운 꼴 당하고…이젠 잊으려고 해요. 재산상 손해는 말도 못합니다”라며 너무 억울하고 비참하다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그는 “나는 미국에 사는 사람인데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아팠다”며 “나는 미국에서 사업을 일으켜 자수성가하고 그 돈을 모아서 내 조국에 투자해 수출을 도운 사람”이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1979년 11월 3일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 영결식장의 유족 및 친척들. 앞줄 왼쪽부터 상주 지만생도, 큰영애 근혜, 작은영애 근영, 뒷줄 왼쪽부터 김종필 전총리와 장녀 예리씨, 육인수 공화당중앙위의장 부처, 한병기 주캐나다대사 내외/조신일보DB
한병기 대사와 절친…청와대서 박 전대통령 내외 여러차례 만나
장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묻자 “혹시 한병기 대사 아세요”라고 물었고, “네, 박재옥씨 부군, 유엔부대사도 하셨고” 했더니, “아 그전에 뉴욕에서 영사를 했어요. 그때부터 알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장씨는 박 전대통령의 큰 사위인 한병기 대사와 뉴욕총영사관 영사를 하던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서 그와 함께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몇차례 만났다고 밝혔습니다.
한병기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첫 부인 김호남씨와 사이에서 출생한 큰 딸 박재옥씨의 남편으로 5·16 다음해인 1962년 뉴욕총영사관 영사로 부임했습니다. 1970년대초 유엔부대사 직함으로 뉴욕에서 유엔대표부 건물이 아닌 별도의 사무실을 마련,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지휘했었습니다.
장씨가 1962년 12월부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뉴욕무역관에 근무했음을 감안하면 장과 한, 두사람이 비슷한 시기 뉴욕에 부임하면서 의기투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씨는 “한씨가 지금 서울 한남동에 살고 있으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 얼마전 전화를 걸었으나 직접 통화할 수 없었다”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러나 장씨는 “한씨의 부인인 박재옥씨는 아직도 건강하시다”고 근황을 전했습니다.
육여사, 친모 아니어도 친사위처럼 따뜻하게 대해
장씨는 또 “고향이 충북 옥천이신데 혹시 육영수 여사를 아느냐”는 질문에 “육 여사의 부친 육종관씨가 우리 옥천의 제일 부자였어요. 우리 집안과 친분으로 5·16 전에도 육 여사를 알았고 한병기씨와 함께 청와대에서 친구의 장모인 육 여사를 몇차례 만났어요”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은 장씨 또한 1960년 31세의 나이에 고향 옥천에서 제5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음을 감안하면 장씨도 옥천의 유지여서 육씨와 장씨 집안간 왕래가 있었을 개연성은 큽니다.
육 여사가 비록 한씨의 부인 박재옥씨의 친모는 아니었지만 한씨를 친사위처럼 따뜻하게 대해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장씨는 육 여사와는 동향으로 이미 알고 있었고, 박 전대통령 집권시에는 친구의 장인장모로서 박 전대통령 내외를 수차례 만났던 것입니다.
장씨는 또 “육여사님이 참 불행합니다. (박 전)대통령도 그렇게 되고,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존경하고 그럽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 11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1천만달러를 달성한 장용호 YH무역 사장에게 철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MBC방송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30회 YH사건 2편 캡쳐. YH무역의 1970년 수출실적은 1천만달러지만 100만달러로 잘못 방영됐다.
“뉴욕 한복판서 메이드 인 코리아 박스 나르던 기억 생생”
YH사건에 대해 언급을 꺼리는 장씨에게 “사업하면서 기억나는 일이 있느냐”고 묻자, 몇가지 사례를 들며 “나름대로 보람있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장씨는 “대한민국이 1970년 사상 처음으로 수출 10억달러를 달성했고, 그해에 YH무역도 1천만달러 수출을 달성해 대통령 산업훈장을 받았다”며 “박 전대통령이 꾀를 내셔서 수출진흥을 할때 상을 탔었다”며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YH무역은 1970년 11월 30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당시 대우실업 대표)등과 함께 수출 1천만달러 달성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으로부터 철탑산업훈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으며, 당시 YH무역은 대한민국 수출순위 15위였습니다. 당시 한국 전체수출이 10억달러였으니 YH무역이 1천만달러로 1%를 담당한 셈이며, 지난해 한국정부 수입보다 매출액이 많은 삼성그룹은 그 수상명단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었으니 대단한 실적을 올린 것입니다.
장씨는 “197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 맨해튼 32가에 빌딩을 매입했다”며 “현재는 코리아타운이 형성됐지만 당시는 한국식당이나 가게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맨해튼 32가 거리에서 매일 아침 직원들과 ‘메이드 인 코리아’가 새겨진 박스를 날랐다”며 “한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지. 매일 직원들과 아침마다 ‘YH무역, 코리아’라고 쓰여진 어깨띠를 두르고 거리청소도 했습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맨해튼 32가에 YH무역 뉴욕지사가 자리잡은 뒤 뉴욕곰탕이 들어섰고 또 조금 지나자 서울하우스, 인천집(인기가수 조용필씨 누나가 운영)등이 생겼다”며 “그렇게 모여들면서 코리아타운이 형성됐으니 YH가 첫 깃발을 꼽은 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에게 뉴욕곰탕은 두달전 건물을 팔고 문을 닫았다고 전해주자 그는 “아 그렇군요. 유리회사 바로 맞은 편이 곰탕이었습니다. 세월이 가니 다 변하는군요”라며 “강서회관도 잘 안다”고 말했습니다. 강서회관 사장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곽현규씨인데 한국에 들어간지 몇년됐다”고 했더니 “부인이 하는데 좀 어려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강서회관은 맨해튼 코리아타운의 식당으로 한국정치인이 즐겨 찾으며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이 식당에서 한국 정치인들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이 검찰조사에서 드러났고 박회장과 곽현규 사장이 절친한 사이라는 사실도 당시 밝혀졌었습니다.
옥천장학회 설립, 심장병어린이 수술 도와
장씨는 또 “1972년부터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하지드 대령의 부인과 함께 한미재단을 만들어 한국의 심장병 어린이돕기 사업을 통해 2백명 정도의 한국어린이를 초청, 미국에서 수술을 받게 했다”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고 수술전, 수술후 아이들을 우리집에서 돌본뒤 한국으로 돌려보내곤 했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한국어린이들은 롱아일랜드 노스쇼어 병원에서 주로 수술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고 뉴욕 최고병원중 하나인 이 병원은 장회장의 그레잇넥 집에서 10분거리입니다.
장씨는 “1965년 사업을 시작하며 옥천장학회도 같은 해 탄생시켰다”며 “작게라도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사업을 시작해서 큰 돈을 벌게 되면 마음이 변할까봐 회사 설립과 동시에 장학회를 만들었고 지금 그 후배들이 총영사 등으로 성장했다”고 말했습니다. 장씨는 “1962년 코트라 부관장으로 뉴욕에 온뒤 1965년 미국에 이민할 결심을 하고 그해 여름 한국에 돌아가서 3개월정도 더 근무하다가 사표를 냈다”며 “미국근무를 시켰더니 눌러앉았다는 말을 듣기 싫었고, 그런 말은 후배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국에서 더 근무하다 사표를 내게 된 것”이라고 전후상황을 설명했습니다.
5남매중 3명이 하버드졸업…장남은 스탠포드 의대 부학장
장씨는 여기까지 말한 뒤 “마음이 편지 않으니까 죄송하지만 그만 하면 좋겠습니다”라며 전화를 끊으려 했으나 재빨리 자녀관계를 물어봤습니다.
장씨는 장남인 상익씨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현재 스탠포드대 의대 부학장, 장녀 은희씨 역시 하버드대를 졸업한뒤 변호사로 일하다 은퇴했고 차녀 은주씨도 하버드대를 졸업했다고 밝혔습니다. 2남3녀중 3명이 하버드대를 졸업한 것입니다. 또 “차남도 다트머스대를 졸업한뒤 NYU 메디컬스쿨을 마치고 UCLA에서 인턴을 한뒤 현재 정형외과 전문의로 개업했고, 삼녀는 스탠포드대학을 졸업했으며, 현재 손자손녀가 10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언제 주거지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느냐는 질문에는 “여기가 뉴욕보다 기후가 좋아서 1999년께 이주했다”고 했으나 이때 전화기 너머에서 부인 장순경씨가 1997년이라고 장씨에게 말해주는 목소리가 들렸고, 장씨는 “1997년에 왔으니 벌써 16년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1929년생으로 알고 있는데 맞느냐”고 묻자 “사실은 1928년생인데 1년 늦게 호적에 올라갔다. 왜 옛날에 시골에서는 어떻게 될지 몰라서 늦게 올리지 않느냐”고 말한 뒤 “이제 한국 나이로 하면 87세가 되는 셈이어서 목소리는 젊지만 여기 저기가 불편하다”고 전했습니다.
최치환 소개로 김형욱과 친분…김동환, 최두고 등과 어울려
마지막으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의 친분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김형욱 부장을 아느냐”고 묻지 않고 한단계 건너뛰어 “김형욱 부장과 언제부터 친하게 지냈습니까”라고 묻자 마침내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어렵게 입을 뗀 장씨는 “누구”라고 되물었고 “김형욱, 김형욱씨”라고 하자 “네에? 누구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김형욱, 김형욱 부장”이라고 하자 그제사 “아아”하고 탄식이 나왔습니다. 장씨는 “아, 그 돌아가신 양반, 그 양반과 가까운 걸 어떻게 아셨어요”라며 “그 양반이 그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당했지만, 그 사람이 잘못했죠,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비행을 한다는 게, 좀 미련한 짓을 했죠, 그래서 제 명을 못사신 분인데”라고 말했습니다.
장씨는 “한국에서 김동환씨, 돌아가신 김동환 의원, 최두고 의원, 그다음에 최치환 의원 등을 알고 지냈고 육인수 의원도 알고 지냈습니다. 아마 최치환 의원 소개로 김형욱을 알게 된 것 같고, 김동환·최두고·김형욱 등과 자주 만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김동환 의원은 김형욱과 육사 8기 동기생으로 5·16 혁명주체이며, 공화당 초대 사무총장, 원내총무 등을 지낸 인물이며, 육인수 의원은 육영수 여사의 오빠입니다. 김형욱이 1971년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 유신전까지 1년 남짓 국회의원을 했기 때문에 아마도 1971년부터 김과 장, 두사람이 교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김형욱은 장씨가 가까운 친구라고 밝힌 한병기씨와 친했고, 김형욱이 다른 사람 말은 무시해도 한씨의 말은 귀담아 들었다는 것이 이들을 아는 사람의 전언이고 보면 김형욱과 장씨가 이리 저리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장씨는 “한국에서부터 김형욱씨를 알았느냐”고 재차 확인하자 “네, 한국에 있을 때 알게 되서 그 양반이 미국에 온 뒤에 골프도 같이 치고, 그래서 친하게 왕래하게 됐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장씨는 김씨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묻자 “지금 전화가 들어오는데 그만 하겠습니다. 뉴욕에 가면 또 한번 연락을 드리겠습니다”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 인터뷰 과정 : 1월 6일 35년만에 말문, 7일에는 장씨가 전화
장씨와의 인터뷰는 장씨가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는 사실을 알아낸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장씨의 전화로 추정되는 번호 몇개를 입수, 미동부시간 지난 6일 오후 3시 52분 전화를 걸면서 이뤄졌습니다. 처음에 신호가 울리자마자 자동응답기로 연결돼 “장용호 회장님 댁입니까. 저는 ---”하면서 메시지를 남기려는 순간, 장씨가 전화를 받으면서 “누구시요”라고 답을 하면서 은둔 35년만의 인터뷰가 시작됐습니다. 또 다음날에는 미동부시간 7일 낮 12시 19분 장회장이 다시 전화를 걸어오면서 인터뷰가 이어졌습니다. 장씨는 6일에는 50대로 들릴 만큼 건강한 목소리였으나 7일에는 다소 목소리가 좋지 않았고 6일 오후 필링이 좋지 않아 병원에 들러서 MRI를 찍고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고 밝혔습니다. 장씨는 특히 인터뷰 내내 정중해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을 실감케 했습니다. 그러나 87세라는 세월의 무게를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YH 트레이딩의 뉴욕주 국무부 약식조회 캡쳐, 1965년 3월 22일 장용호 사장이 자신의 집을 법인주소로 해서 설립한뒤 1969년 용인더스트리스로 이름을 변경했으며, 1982년 폐쇄했음을 알 수 있다.
코트라 재직때 이미 미국에 YH무역 설립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미국 등기소나 뉴욕주정부에 보관된 서류를 검토해본 결과 장씨의 주장에 몇가지 의문점이 떠올랐습니다. 먼저 코트라 퇴직 당시의 상황입니다. 장씨는 1965년 한국에 들어가서 3개월 근무뒤 사표를 냈다고 했고, 언론들도 왕십리에 가발공장을 차린 것은 1985년말 또는 1966년초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욕주 국무부 확인 결과 YH무역, 즉 뉴욕에 YH 트레이딩(Y. H. TRADING COMPANY, INC.)을 설립한 것은 1965년 3월 22일, 설립자는 장용호, 당시 법인주소는 뉴욕 포레스트힐의 한 아파트로 확인됐습니다. 당시 코트라에서 마련해 준 장씨 주거지로 추정됩니다.
이는 장씨가 코트라에 사표를 내기 전에 이미 미국에 YH 무역을 설립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국에 보냈더니 사표내고 눌러앉았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한국에 들어가 근무하며 3개월뒤에 사표를 냈다”는 그 자신의 말이 맞다고 해도 코트라 월급을 받으면서 자신의 사업을 구상하고 일부 실천에 옮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또 일부 언론에 1969년 용인더스트리를 설립했다고 보도됐으나 뉴욕주 확인결과 1965년 설립된 YH무역의 이름을 1969년 12월 4일 용인더스트리(YONG INDUSTRIES, INC.)로 변경했으며 1982년 12월 29일 폐쇄됐습니다.
장씨가 “나는 미국에서 사업을 일으켜 모국에 투자한 사람이며 원래 미국에 살던 사람인데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은 일부는 맞는 사실입니다. 장씨는 1969년 제8대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돼 뉴욕에서 한인회장직을 수행했으므로 그가 한국의 YH무역은 다른 사람에게 대표이사를 맡기고 자신은 미국에 살면서 미국지사 일을 수행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척이 한국 YH무역의 대표를 맡는 등 실질적으로는 한국 YH무역의 실소유주였음은 분명하므로 YH사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YH사건 이후에도 미국에 대형빌딩 등 3개 보유
또 하나 부동산 문제입니다. 장씨는 YH사건이 발생한뒤 사실상 모든 사업을 접고 사람들도 피한채 칩거하며 조용히 심장병어린이돕기만 계속했습니다만 적어도 미국에 3개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972년 장용호 사장이 매입한 뉴욕 맨해튼 25 WEST 32ND ST 6층 빌딩. 1984년 한국중앙일보에 팔렸다가 현재는 한아름마켓이 입주해 있다./구글맵 캡쳐
첫번째 부동산은 뉴욕 맨해튼 32가의 빌딩입니다. 이 빌딩은 1972년 장씨 개인명의로 매입하고 1년뒤 CSKY부동산에 팔렸습니다만 이 CSKY 대표가 장씨 자신임이 뉴욕 맨해튼 등기소에 보관된 계약서 확인결과 드러났습니다. 장씨는 이 빌딩을 12년간, 그러니까 YH사건 이후에도 5년간 소유하다 1984년 한국중앙일보에 매도했고, 현재는 미국내 최대 한인수퍼마켓인 한아름(H마트) 창업자인 권중갑 서울식품회장에게 팔려 맨해튼 한아름마켓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빌딩의 가격은 1천4백만달러 상당입니다.
/1972년 이전부터 장용호 사장이 살던 뉴욕 롱아일랜드 그레잇넥의 주택./낫소 카운티 등기소 제공
두번째 장용호씨의 뉴욕 롱아일랜드 그레잇넥 집입니다. 장씨가 언제 이 부동산을 매입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맨해튼 빌딩을 매입할때 계약서에 기재된 장씨 주소가 그레잇넥 집이었던 것으로 미뤄 적어도 1972년 이전에 이 집을 매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집은 장씨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던 1997년 9월4일 67만달러에 매도했고, 가장 최근에는 2007년 9월 1백75만달러에 거래됐으며, 부동산중개회사들은 현재 가치를 1백34만달러에서 1백50만달러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부동산은 장씨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50대 50의 지분으로 보유했던 미국 조지아주의 323에이커에 이르는 광활한 목장입니다. 자신의 아내와 장녀 명의로 이 목장을 소유했던 장씨는 김 전부장의 부인 김영순씨과 함께 1992년과 1994년 두차례에 걸쳐서 매도했습니다. 즉 YH사건 이후에도 13년에서 15년동안 이 땅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김 전부장 사후 1981년말 작성된 재산상속서류에 따르면 이 땅의 지분 절반의 가치는 20만1천여달러 상당이었으며 현재 가치는 2백만달러 상당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장씨는 YH사건 이후에도 상당기간 적어도 3개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했습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안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YH무역은 망했지만 실소유주 장씨의 미국부동산은 끄떡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장씨는 15억원, 3백만달러상당의 YH 물건을 미국으로 가져간뒤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자기 기업에 손해를 끼치면서 마침내 회사가 문을 닫고 5백명의 어린 여공들이 일자리를 잃었지만 장씨는 미국에 적지 않은 재산이 있었던 셈이어서 부도덕한 기업인이라는 논란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장씨는 장학회, 심장병어린이 구하기 등 좋은 일을 했고, 특히 미국에서 사업을 일으켜 모국에 투자, 수출진흥에 이바지함으로써 한국을 일으켜 세우는 데 큰 힘을 보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YH무역 실소유주로서 기업과 직원들, 특히 여공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 김형욱 전 부장이 스스로 밝힌 미국재산은 3백50만달러, 프레이저청문회가 시티뱅크 등의 보고서를 근거로 추산한 재산은 2천만달러가 훨씬 넘었습니다. 김형욱은 미의회 증언에서 15만달러를 가져오는 데 2년이 걸렸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의 재산으로 미뤄볼 때 이말은 거짓말로 추정됩니다만 그만큼 외화유출은 힘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김형욱은 부정축재한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미국으로 보낼수 있었을까, 그 비결이 궁금해 집니다.
☞ 장용호 씨, “YH 사건은 YH노조사건이다, YH는 도산(도시산업선교회) 때문에 망했다”
장용호 YH 무역사장은 YH사건은 YH노조사건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며 YH무역은 도시산업선교회 때문에 망했다고 거듭 주장했습니다
장용호 사장은 미국 동부시간 1월 13일 아침에 이메일을 통해 어제 프리미엄조선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를 잘 읽었다고 밝히고, “도시산업선교회, 즉 도산이 들어오면 공장이 망한다는 정설대로 도산이 우리공장을 망하게 했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앞으로 YH사건이 아니고 YH노조사건으로 표기되면 좋겠다”며 “YH회사가 아니고 도산노조가 한 짓이니 YH노조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고 의견을 전했습니다.
장 사장은 “자신이 YH노조사건 당시 외화도피하고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기사와 미국대사에게 소환을 요청한 내용의 도산의 글을 당시 주한미국대사로 부터 받은 일도 있었다”며 “너무나 억울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내가 YS가 말한 부도덕한 한국인이 절대 아님을 다시 말씀드리고 싶다”며 “미국에서 52년, 뉴욕에서 35년을 살았지만 인심 잃을 짓은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장 사장은 또 “한미재단을 통해 한국 선천성 폐질환 어린이 2백여명을 데려다 미국병원에서 수술을 시켰다. 그러나 나 혼자 한 일은 아니며 뉴욕에 사는 많은 재미동포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탰다”며 그 점을 꼭 알려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장 사장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조지아주에 구입한 땅은 목장이 아니고 그저 대지 3백에이커 정도 40만평의 땅이었다”며 “소 한마리 기른 일이 없고, 절대 목장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장 사장은 당시 1에이커당 1천달러로 계산하고 대지도 323에이커지만 3백에이커로 계산, 30만달러에 매입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장 사장은 또 코트라 퇴임전 뉴욕에 회사 설립, YH무역 폐업 뒤에도 미국에 부동산을 3채 이상 보유했다는 등 인터뷰에서 지적한 의혹에 대해서는 일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역사의 장에 사실 그대로를 밝혀야 할 때”라며 YH사건에 대한 상세한 전말을 설명해 달라는 답장을 보내자 “억울한 옛 생각이 떠올라 말씀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분이 차서 못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이라는 말로 메일을 끝맺었습니다
01.23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상)] 미국, 전투기 동원해 북한 공군기지
[미국 비밀문서로 드러난 푸에블로호 피랍 전말]
북, 피랍 3일전부터 토끼몰이식 추적…가장 유리한 원산 공해서 나포
미군 전투기 일본서 오산에 급파…그러나 일몰전 원산 도착 불가능해 출격포기
존슨 대통령, "30분 거린데 왜 피랍 때 공군이 출격 못했나?"
전투기에 장착된 핵무기 폭탄을 일반 폭탄으로 교체하다 시간 지체
푸에블로호 무전보고도 1-2시간씩 지연 전달돼 혼선 빚고 초동대처 못해
푸에블로호에 비밀 장비와 문서 많아 공군기로 격침 계획
김성은 국방장관, '김신조 청와대 습격때는 가만 있더니'격노
/1968년 북한에 의해 나포됐던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북한은 현재 푸에블로호를 1866년 미국의 서먼호를 격침시킨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겨와 미국의 대북 침략행위에 대한 선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부터 46년전인 1968년 1월 23일 낮, 북한의 미그기와 초계정은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동해의 공해상에서 나포해 북한으로 끌고 갔습니다.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시도한 것이 이틀전인 1월 21일.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군 함정이 피랍되면서 한반도는 순식간에 전쟁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푸에블로호는 피랍 사흘 전부터 북한의 추적을 받고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고, 미군은 푸에블로호 피랍을 막기 위해 전투기를 출격시키려 했으나 일몰 전에는 현장에 도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피랍 직전 선원들은 첩보장비와 비밀문서를 파기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으며, 피랍을 알리는 긴급무전보고는 몇시간씩 늦게 전달되는 등 혼선을 빚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푸에블로호 피랍 당시의 이러한 긴박한 상황은 최근에 비밀해제된 미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CIA(미국 중앙정보국), NSA(미국 국가안보국), 연방의회 등의 비밀문서에서 나타납니다. 이 문서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2012년 9월의 국가안보국 NSA의 푸에블로호 사건 보고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은 1968년 1월 23일 낮 미국 해군과 NSA가 공동운용한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의 공해상에서 북한 미그기와 초계정에 의해 나포된 사건입니다. 푸에블로호는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미 육군이 건조, FP-344로 명명된 850톤급의 화물선 이었으나, 1966년 4월 미 해군에 인도된뒤 콜로라도주 푸에블로 카운티의 이름을 따서 푸에블로호로 명명됐고, 시애틀의 미해군 조선소에서 1년간의 개조작업을 거쳐1967년 5월 정보수집함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2012년 9월 비밀해제된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푸에블로호사건 조사보고서
당시 이처럼 미해군과 NSA가 공동운용한 정보수집함은 배너호와 푸에블로호 2척이었고 1967년 11월 미 해군성은 1968년 1월부터 7월까지 7개월간 이 두 함정을 한달씩 번갈아 가며 북한 해안과 동해, 동중국해, 소련의 페트로파브로프스크 인근을 정찰하게 한다는 이른바 핑크루트 작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 핑크루트 작전 계획의 제1작전이 바로 푸에블로호의 북한해안 정찰작전으로, 1968년 1월 5일부터 2월 4일까지 한달간 푸에블로호로 하여금 공해상에서 북한해안을 정찰하고 지형지물을 파악하도록 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푸에블로호는 사실상 첫 출동에서 나포된 것입니다
/2012년 9월 국가안보국 NSA의 푸에블로호사건 보고서
푸에블로호는 1월 4일 주일미해군사령관으로부터 북한 정찰을 위해 즉각 출항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으며, 당시 작전명령은 푸에블로호가 감시당할 때, 즉 적에게 들켰을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무선교신을 할 수 없고, 북한이나 소련 영토에서 최대 13해리(13 NM), 즉 가장 가까운 공해상까지만 접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푸에블로호는 1월 5일 일본 도쿄 인근 요코스카 해군기지를 출항, 큐슈의 사세보항에 정박했다가 한국시간 1월 11일 오전 6시(이하 한국시간) 사세보항을 출발, 대한해협(작전명령서에는 쓰시마 해협으로 표기됨)을 거쳐서 북진, 약 42시간만인 1월 12일 오후 11시 30분 작전구역에 도착했습니다.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감지된 것은 그로부터 8일뒤인 1월 20일이었습니다. 이날 일몰 직후인 오후 5시50분 4천야드, 즉 3.6킬로미터 전방에 북한 구축함 35호(SC-35)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북한 영토에서 15.4마일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피랍뒤 국방부 등에서 모든 상황을 종합한 뒤에야 이때가 바로 첫 위기였음을 알았으며, 당시 푸에블로호는 이를 전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바로 이날 푸에블로호의 존재를 확인하고 피랍에 가장 유리한 지점인 원산공해상에 진입할 때까지 조용히 뒤를 밟았습니다. 북한이 토끼몰이를 하듯 치밀한 작전에 나섰고 토끼를 때려잡는 지점은 원산공해상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푸에블로호는 1월 22일 아침 원산 인근 공해상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이 정한 토끼사냥 지점에 도착하자 갑작스런 이변이 속출합니다. 북한이 사냥을 개시한 것입니다. 이날 낮 12시 25분 만야드, 즉 9킬로미터 전방에 북한 어선 2척이 나타나기 시작해 한척은 1.3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다른 한척은 90미터까지 붙었습니다. 특히 이날 오후 3시 다시 북한 어선이 나타나 30미터까지 접근하며 푸에블로호를 살폈습니다. 사실상 푸에블로호를 북한해역으로 몰아붙이려는 시도였습니다. 푸에블로호는 이날 오후 4시부터 1월 23일 오전 10시까지 정체불명어선들과 18차례나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는 안타깝게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1월 11일 사세보항을 출항한 이래 1월 22일 오후 6시 25분 처음으로 시그널을 날렸습니다. 메세지없이 콜사인만 교환했다고 합니다.
1월 23일 오전 8시 30분과 오전 10시에 다시 위치만 보고한뒤 오전 10시 50분 첫 교신을 하게 됩니다. 교신내용은 백척간두의 위기상황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더 이상 감시받지 않음, 침묵유지로 변경’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장 등은 간부식당에서 평화롭게 아침식사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오전 11시 35분 주위에 갑자기 배들이 많아진 것을 보고 비로소 위험상황 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국방부 비밀문서는 푸에블로호가 이때 처음 위험을 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감시받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보고한지 채 1시간도 안된 때였습니다.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이로 부터 25분뒤인 23일 정오 북한 구축함 35호(SC-35)가 나타났습니다. 사흘전 조우했던 바로 그 북한 함정으로 북한이 서서히 토끼몰이를 하며 뒤쫓아 왔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북한 구축함은 항복을 요구했고 푸에블로호는 우리는 공해상에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지점은 북한영토로부터 16마일 떨어진 지점으로 공해상이 명백했지만 북한은 미군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신의 앞마당이라고 판단하고 막무가내로 몰아부쳤습니다.
이때부터 대치가 계속됐지만 사실상 주도권은 이미 북한에 넘어갔습니다. 푸에블로호는 이날 낮 12시 52분 다시 무전을 통해 ‘가능한 한 현장에 체류하고 불가피할때 서서히 북동쪽으로 철수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또한 현실과 동떨어진 낙관적 보고였습니다. 그로 부터 23분뒤인 오후 1시 15분부터 18분 사이에 초계함 3척이 더 나타났고 마침내 미그기 2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실상 게임이 끝난 것입니다. 오후 1시 26분 북한은 발포를 하겠다고 말한뒤 총을 쏴댔고 1시 28분 푸에블로호에 강제로 승선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때 푸에블로호는 발포사실 등을 긴급보고하고 일부 무전기와 비밀문서 파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파기라는 것이 도끼로 무전기와 첩보장비를 부수고 일부 비밀문서를 불태우는 수준이어서 비밀문서의 90%가 북한에 압수됐다는 것이 NSA의 분석입니다.
긴급보고를 받은 주일미해군사령부는 오후 1시 35분 미 5공군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비밀문서를 살펴보면 그 지원은 한참 뒤에나 이뤄지며 푸에블로호는 손한번 못써보고 끌려가게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2년 9월 비밀해제된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푸에블로호사건 조사보고서
오후 1시 40분에서 50분 사이 다시 급박한 무전이 날라갑니다, ‘원산항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오후 2시에도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북한의 발포로 3명이 부상당했으며 그중 1명은 다리가 날라갔다. 무기는 한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는 비참한 보고였습니다. 연방하원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푸에블로호의 무기는 캐리버 50이 2정, 톰슨 반자동소총이 10정, 45구경 권총 7정, 30구경 라이플 1정이 전부였습니다. 승무원이 83명인 반면, 총은 20정에 불과한 사실상 비무장상태였으며, 그나마 배 선체 하단에 보관돼 있어 응사가 불가능했습니다.
오후 2시 25분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피랍사실이 보고됐고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은 2분 늦은 오후 2시27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후일 밝혀지지만 푸에블로호의 보고는 유관부대에 한시간 내지 두시간씩 늦게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주일미해군사령부가 미 5공군에 지원요청을 한 것은 오후 1시 35분이었지만 5공군사령관이 태평양사령부에 전화를 하고 18전술비행단에 비상명령을 내린 것은 1시간도 더 지난 오후 2시 46분이었습니다. 곧이어 2분뒤인 오후 2시 48분 5공군사령관은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기지에 대기중이던 전투기에 대해 오산으로 출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출격은 즉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출격명령으로부터 1시간 23분이 지난 오후 4시 11분에야 전투기들은 오산으로 출격했고, 이때 이미 5공군사령관과 태평양공군사령관은 한발 늦은 출격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령관은 ‘전투기가 해지기 전, 즉 일몰 전에 현장에 도착할 수 없으므로 푸에블로호를 지원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작전은 불가능하다’고 인지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일몰 15분 뒤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죠. 당시 전투기들은 출격명령을 받아도 즉각 출격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당시 전투기에 장착된 무기가 문제였습니다.
전투기가 일본 카데나 공군기지에서 오산으로 출격한지 4분뒤인 오후 4시 15분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참모들과 푸에블로호 피랍상황과 언론발표계획 등을 논의했고, 10분뒤 오후 4시 25분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피랍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미국시간 새벽 2시 25분이었습니다. 35분뒤인 오후 5시 북한 함정에 끌려가던 푸에블로호는 마침내 원산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로부터 36분뒤인 오후 5시 36분 사방천지는 어둠에 뒤뎦였습니다. 일몰, 해가 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정부도 깜깜한 암흑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미 국방부가 오산에 전투기를 출격시키는 등 응급조치를 한데 이어 미 국무부는 외교적인 해결방안을 찾았습니다. 데이비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이날 오후 5시 55분 소련 주재 미국대사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부장관이나 접촉가능한 최고위층을 만나 미국선박이 공해상에서 북한에 납치됐음을 설명하고, 소련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선박과 선원을 즉각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의 이같은 제의에 대해 미국과 북한이 당사자간에 직접 해결할 문제라는 냉정한 입장을 전했습니다,
/1068년 1월 23일 오후 11시 5분 본스틸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사령관에게 보낸 비밀전문. 1405Z는 ZULU TIME으로 그리니치 표준시를 의미하며 9시간을 더해야 한국시간임.
한편 한국 정부가 미국측으로부터 피랍사실을 공식통보받은 것은 푸에블로호가 원산항에 도착한지 1시간30분 뒤인 오후 6시30분이었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사령관에게 보고한 비밀전문에 따르면 본스틸 주한미군사령관은 상부의 승인을 받은뒤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김장관은 격렬하게 항의했다고 돼 있습니다. 김 장관은 이틀전 발생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때는 미국이 판문점 군사정전위 소집만 요구하는 등 북한에 대해 미온적 대처를 하다가 푸에블로호가 납치되자 한국정부에 사전통보도 없이 F-105S를 오산기지로 출동시켰다며 노발대발했습니다. 김 장관은 지금 북한에 대해 보복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또 다른 중대한 도발을 할 것이라며 강경입장을 전한뒤 아무 것도 미국측에 약속해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미국이 북한의 청와대 습격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한다면 향후 한국의 대응자세 등에 대한 보장을 해줄 수 없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말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사실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자세는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과의 밀월관계가 끝나며 파열음을 내는 계기가 됩니다. 박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미국이 자국의 이익만 챙긴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 결국 자주국방을 외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이제부터는 미 행정부만 믿을 것이 아니라 입법부인 의회를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한국의 입장을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결국 코리아 게이트로 이어지게 됩니다. 푸에블로호 사건 브리핑을 받는 과정에서 김 장관의 격렬한 항의는 바로 박 대통령과 한국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실망, 그리고 불신을 반영한 것입니다.
미국은 한때 북한공군기지 공격, 전투기를 동원한 푸에블로호 격침까지 고려했습니다. 린든 존슨 대통령 기념도서관에 보관중인 비밀문서에서도 미국이 북한 2개 목표물을 공격하거나 북한공군 무력화작전에 따른 미국의 손실을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또 CIA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기를 출격시켜 북한전역, 특히 군사기지에 대한 정밀사진을 촬영한 것도 바로 북한공격을 염두에 둔 조치였습니다. CIA가 북한을 공습하는 등 군사행동을 취하기 전에 반드시 북한군 상태를 정밀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한 백악관 안보회의 회의록을 보더라도 미국이 북한 공격을 옵션 중 하나로 검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 힘들다는 현실적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불과 1주일뒤인 1월 30일 베트남에서 월맹군이 구정 대공세를 감행함으로서 북한공격은 무산됩니다. 그리고 사흘뒤인 2월 2일 미국정부는 북한과의 비밀협상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북한영해침입을 시인, 사과하는 대신 승무원 송환에 합의하는 것입니다. 푸에블로호 피랍사건과 관련,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CIA, NSA 등 많은 부처에서 극비보고서를 작성했고 일부 문서는 오래전에 공개됐지만 일급 비밀들은 최근에야 공개되고 있고 아직도 일부는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미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푸에블로호 특별조사위원회는 1969년 7월 26일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보고서는 43년만인 2012년 9월 14일에야 공개됐습니다. 또 NSA가 작성한 푸에블로호 종합보고서는 2006년 일부만 공개된뒤 역시 2012년 9월에야 전문이 공개됐습니다
/2012년 9월 비밀해제된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푸에블로호사건 조사보고서
이들 보고서에 따르면 푸에블로호가 1월 23일 12시 50분께 날린 무전교신은 주일미해군사령부에 23분뒤에, 태평양사령부 본부에는 2시간 10분 뒤에, 합참본부에는 2시간 34분 뒤에야 각각 전달됐습니다. 또 제 7함대에는 1시간 24분, 태평양사령부 함대와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에는 1시간 40분 늦게 전달돼 피랍저지 작전이 제대로 수립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 카데나 공군기지에서 오산으로 긴급 출격했던 미공군 조종사는 인터넷에 게재한 기명수기를 통해 오산기지에 F4팬텀기 3대가 대기중이었으나 2대는 고장이 나서 부품을 기다리던 중이었고, 1대는 핵무기가 장착돼 있어 출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카데나 기지에서 출동한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이 조종사는 카데나 공군기지의 모든 F105S가 오산기지 이동명령을 받아 12대가 해질녁에 출격했으며, 당시 F105S는 모두 핵폭탄을 장착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1대당 5백파운드 폭탄 16개로 교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종사는 푸에블로호 격침 임무를 부여받고 대기했으나 푸에블로호 승무원 석방 때인 그해말까지 출격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우리 전투기가 푸에블로호에서 30분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도대체 뭐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만 그 해답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합니다. 결국 미국이 공해상에서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는 북한의 불법행위를 멍하니 넋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전투기에 장착된 무기가 많은 이유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푸에블로호 부쳐 선장 미망인과 선원 등 5명이 연방법원에 북한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장을 북한정부에 송달했다는 DHL의 송달증명서.
/북한 정부는 푸에블로호측 5명에게 6천5백여만달라를 배상해야 한다는 미국 연방법원의 2008년 12월 30일자 판결문.
그로부터 38년뒤 푸에블로호 부처 선장의 미망인과 선원 등 5명은 미국에서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승소하게 됩니다. 이들은 2006년 4월 24일 워싱턴DC 연방법원에 북한을 상대로 16억2천5백만달러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고, 놀랍게도 이 소송장은 같은해 9월 8일 오후 2시 3분 북한 정부에 송달됐고 DHL은 소송장 접수인의 서명까지 받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연방법원은 2008년 12월 30일 북한의 잘못이 인정된다며 6천5백여만달러 배상판결을 내렸고, 부처 선장의 미망인들은 미국 재무부 외국자산통제국의 협조를 받아 2010년 2월 18일 시티뱅크 등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자산 등 미국내 북한자산 3천4백여만달러를 압류했습니다. 이 소송장에는 북한이 부처 선장 등에게 남한간첩을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스파이행위를 자백하라고 강요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 NSA 자료에 나오는 푸에블로호 관련 사진
/푸에블로호 납치에 가담한 북한 초계정.
/푸에블로호에 발포한 북한 구축함.
01.26 김형욱④
국민들이 돼지고기 반근도 겨우 구하던 시절, 김형욱은 미국 카지노에서
김형욱 사망판결 뒤 미국 카지노들이 줄소송 내
도박벽으로 잦은 부부 싸움…아내는 2차례나 자살 시도
장남도 도박 빚 때문에 카지노에서 소송 당해
35년전 파리의 도박장에서 실종돼 불귀의 객이 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실종뒤에도 도박빚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형욱이 도박으로 탕진한 돈은 확인된 것만 174만달러정도. 여기에다 그의 장남 김정한도 카지노에서 거액을 탕진했으며 사후에 카지노로 부터 7만여달러, 3건의 도박 빚 상환소송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35년전인 1979년의 174만달러는 미국 노동부 인플레이션 추정방식으로 계산해도 현재 7백만달러, 실질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1천5백만달러(159억원)에 상당하는 돈입니다.
김형욱은 지난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의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지금까지 그를 본 사람이 없어 사망한 것이 확실시됩니다. 김형욱 실종 뒤 그의 부인 김영순씨 등은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법원에 실종에 따른 사망판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최종 목격된 날로부터 5년뒤 사망선고를 할 수 있다는 법규에도 불구하고 실종 1년 6개월뒤인 1981년 4월 8일 사망판결을 내렸습니다. 김형욱이 마지막 목격됐던 장소가 파리의 도박장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도박에 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김형욱 재산상속서류 중 부채부분. 4개 카지노가 도박대금을 청구했음이 명시돼 있다.
김형욱 사망판결 뒤 유족들이 뉴저지주 유산상속법원과 미 국세청에 보고한 재산상속서류에 따르면 김형욱 실종뒤 카지노로부터 도박빚을 갚으라는 소송이 잇따랐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서류에 따르면 보드워크 리젠시라는 카지노가 20만달러를 청구했습니다. 보드워크 리젠시는 뉴저지주 남단 아틀랜틱씨티라는 도박도시의 시저스카지노를 운영하는 업체입니다. 리조트 인터내셔널도 5만달러를 청구했습니다. 리조트 인터내셔널의 소재지는 기재돼 있지 않지만 아틀랜틱씨티에 있는 MGM 카지노로 추정됩니다. 서부의 라스베가스에 버금가는 동부의 카지노천국이 아틀랜틱씨티며, 김형욱의 저택이 있는 뉴저지주 알파인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김형욱이 이 아틀랜틱씨티의 카지노를 섭렵하며 거액을 탕진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시저스팰리스 카지노 또한 8천달러를 청구했으며, 시저스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카지노입니다.
미국 국내 뿐이 아닙니다. 산후안 호텔이라는 곳에서 6만3백75달러를 청구했습니다. 산후안은 플로리다주 아래, 카리브해의 푸에르토 리코의 수도임을 감안하면 이곳에 있는 카지노 리조트 산후안 호텔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김형욱은 라스베가스, 아틀랜틱씨티 등 미국내 카지노는 물론, 세계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로 꼽히는 카리브해 연안의 카지노까지 돌아다니면서 흥청망청 돈을 쓰며 도박으로 큰 돈을 날렸습니다.
/IRS가 1975년 8월 씨티뱅크에 김형욱의 시저스월드 카지노 출입과 관련, 정보를 요청하자 시티뱅크의 김형욱 담당 매니저가 작성한 보고서./프레이저보고서 7권 86페이지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의 한미관계청문회, 즉 프레이저청문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형욱은 1969년 7월 31일부터 1972년 8월 1일 사이에 라스베가스의 시저스 카지노를 출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같은 사실은 미 국세청이 이 기간중 김형욱이 시저스월드 카지노에서 거액을 잃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1975년 세원추적을 위해 씨티뱅크에 김형욱의 재산에 대해 문의하면서 밝혀졌습니다.
1969년부터 1972년이라면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피하기 전이며, 특히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던 시기입니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기 전까지 김형욱은 국회 외무위 소속 위원으로 국정감사를 위해 미국 등을 돌아다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김형욱은 국민의 세금으로 해외출장을 하는 동안에 카지노를 출입하며 미 국세청에 추적될 정도의 거액을 잃은 것입니다. 또 1969년말 중정부장에서 해임된 뒤 세계일주여행을 떠났을 때도 카지노를 출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김형욱은 당시 세계일주여행을 떠날때 자신의 후임인 김계원 중정부장에게 중정에 재직중이던 동백림사건의 주역 양두원을 비서 겸 통역자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프레이저청문회에서 증언했습니다. 이 당시 씨티뱅크가 국세청에 보고한 서류에는 김형욱의 주소는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의 트라팔라로드 60번지, 계좌번호는 10557208로 기재돼 있었습니다. 이는 씨티뱅크의 보고시점인 1975년의 상황입니다. 김형욱의 계좌번호는 체킹어카운트로, 프레이저보고서 다른 페이지에 수록된 김형욱 일가의 계좌번호 내역과 일치합니다. 또 은행의 보고서류에는 전 중정요원 이백희씨를 의미하는 BH LEE가 김형욱의 통역 및 보좌관 역할을 한다며 그의 전화번호가 기재돼 있고, 그에게 전화를 했으나 캘리포니아에 여행중이어서 통화하지 못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김형욱의 외동딸 김신혜씨 결혼식날 촬영된 사진. 좌측에 앉은 사람이 장남 김정한, 우측에 앉은 사람이 김형욱의 사촌동서로 알려진 김용길(현 김길 목사), 좌측에 서있는 사람이 이백희씨이다. 우측에 서있는 사람은 태권도 사범인 이모씨.
이백희씨는 중정요원으로 베트남에 파견근무 중 후일 베트남 부수상을 역임한 베트남 중앙정보부장의 딸과 연애, 그녀와 결혼을 원했지만 중정 내규상 불가능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형욱이 이백희의 결혼을 전격 승인, 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피하자 그를 따라 나섰으며, 김형욱의 처남격인 김용길(현 김길 목사)과 함께 집사역할을 하며, 김형욱 사후에도 자녀들의 결혼 등을 챙긴 사람입니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김형욱 도박과 관련, 씨티뱅크 계좌에서 시저스카지노로 88만달러가 송금되는 등 모두 142만달러가 빠져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프레이저보고서 7권 43페이지
이처럼 프레이저 청문회는 김형욱의 카지노 도박행각을 끈질기게 추적했고, 씨티뱅크 김형욱의 계좌에서 시저스카지노로 송금된 돈만 88만달러임을 밝혀 냈습니다. 또 뉴욕 은행에서 카지노로 송금된 돈은 모두 1백42만달러에 달했다고 프레이저보고서 부록 7권은 기재하고 있습니다. 김형욱은 1백30만달러정도라고 주장했지만 프레이저청문회는 1백42만8천달러라며 그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결국 김형욱은 1978년 프레이저보고서 작성때까지 최소한 1백42만8천달러를 노름으로 탕진한 것입니다.
이 돈에다 그의 사망판결뒤 4개 카지노가 청구한 금액 31만8천여달러를 합치면 그가 도박으로 탕진한 돈은 적어도 1백74만달러를 넘습니다.
특히 김형욱의 광적인 도박행각은 부인 김영순씨와의 갈등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김형욱은 도박 때문에 수시로 부인과 부부싸움을 벌인 것은 물론 부인 김영순씨가 도박문제로 적어도 2번 이상 자살을 기도했었다는 것이 큰며느리 김경옥씨의 설명입니다
/김형욱의 장남 김정한씨가 사망한 뒤 2003년 김영순씨가 큰 며느리를 상대로 뉴저지법원에 제기한 소송장. 김정한씨가 노름빚과 관련해 3건의 소송을 당했다며 사건번호와 금액이 명시돼 있다. 김영순씨는 김정한씨 명의 주택의 지분 51%는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카지노측은 김정한의 지분인 49%에 대해서만 노름빚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욱의 장남 김정한씨는 국민학교에 다닐때 아버지 김형욱과 휴전선 접경지대에 사냥을 갔다 지뢰를 밝으면서 발목을 크게 다쳤으며, 평생 부모인 김형욱 부부와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미움으로 갈등했었습니다. 김정한씨도 2002년 9월 사망 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씨가 큰 며느리 김경옥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도중에 카지노 빚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김영순씨가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 따르면 김정한씨에게 제기된 노름빚 소송은 모두 3건이었습니다. 샌즈로 잘 알려진 아틀랜틱씨티의 카지노인 ‘그레이트베이호텔 앤 카지노’가 3만천백여달러, 역시 아틀랜틱씨티의 ‘트럼프 타지마할’도 2만7백여달러 지급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또 김형욱에게 20만달러 상환을 요구했던 보드워크 리젠시라는 카지노도 김정한씨에게 2만8백여달러를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들 3개업체의 소송액을 합치면 모두 7만2천7백여달러, 결국 김형욱과 아들의 도박탕진액은 확인된 것만 182만달러에 달했습니다. 김형욱은 이외에도 프랑스와 스위스 등에서도 카지노를 즐겼기 때문에 그 탕진액은 더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돼지고기 한근도 아닌 반근을 사서 신문지에 둘둘 맞아 집으로 와 김치찌개를 끓이던 시절, 한때나마 이나라 고위공무원이었다는 사람이 도박으로 거액을 탕진한 것은 국민의 피땀을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02.03 전재용, "벌금낼 돈 없다"…천만에!
지난달 24일 검찰은 60억원의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재용(50)씨와 처남 이창석(63)씨의 조세포탈액을 27억원으로 낮춰 공소장을 변경했습니다. 경기 오산 땅을 팔면서 다운계약서를 쓰고 임목비(토지에 심은 나무 가격)를 허위 계상해 양도소득세 60억원을 포탈한 이들의 혐의 가운데, 다운계약서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는 전재용씨 측 주장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전씨는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 사건 재판에서 변호인을 통해 “아버지의 추징금을 내느라 남은 재산이 한푼도 없어 벌금 낼 돈이 없는 상황”이라며 “임목비 부분도 무죄임을 입증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재용씨와 부인 박상아씨 부부가 매입했던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240만달러(25억9000만원) 상당의 저택이 아직 이들 부부 소유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박상아-전재용 소유의 뉴포트비치 저택
미국의 부동산 등기서류에 따르면 이 주택은 지난 1월 24일 현재 전재용씨의 부인 박상아씨 소유이며, 관리인은 장모인 윤양자씨입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주법에 따르면 배우자는 자동적으로 50%의 소유권을 갖게 됩니다. 전씨가 이 집의 지분을 50% 소유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LA 인근 저택을 팔면 조세포탈액 27억원의 상당 부분을 납부할 수 있음에도 전씨는 벌금낼 돈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상아 명의의 캘리포니아 뉴포트비치 주택 매입증서
박상아-전재용 커플은 지난 2003년 조지아주 아틀랜타 주택을 구입했다 매도한데 이어, 2005년 9월 27일 캘리포니아주 LA 인근 오렌지카운티의 부촌 뉴포트비치의 저택을 224만달러에 매입했습니다. 이 뉴포트비치는 해외부동산 불법매입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조현준 효성사장의 4백만달러대 저택,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5백만달러대 저택 등이 소재한 캘리포니아주의 대표적 부촌입니다. 이 주택의 주소는 1825 PORT MANLEIGH PL, NEWPORT BEACH CA 92660로 이들 커플은 이 주택을 매입할 때 전재용씨 이름은 쏙 빼고 박상아씨 명의로 매입했습니다
/라스베가스를 관할하는 네바다주 클라크카운티 웹사이트에서 검색된 박상아-전재용 커플의 결혼 내역
특히 박상아씨는 이미 지난 2003년 5월 12일 결혼하고 5월 15일 라스베가스에서 전재용씨와 결혼신고를 마친 상태였으나, 이 매입계약서에서는 자신을 '싱글우먼'이라고 속였습니다. 캘리포니아주 주법은 결혼한 부부의 경우 둘 중 한사람 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하더라도 나머지 배우자에게 자동적으로 50% 소유권이 인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 중 한사람이 자신의 단독재산으로 하기 위해서는 배우자가 소유권포기 각서를 제출하는 절차를 밟게 됩니다.
조현준 효성 사장이 뉴포트비치에 4백여만달러의 호화저택을 불법매입했을때 그의 부인이자 전재용씨의 동생 전재만씨의 처제인 이미경씨는 소유권포기 각서를 제출, 등기를 했던 것입니다. 또 전재용씨의 동생, 전재만씨도 부인 이윤혜씨가 샌프란시스코의 콘도를 불법매입했을때 매입 당일 소유권포기 각서를 제출해 세금추징을 막았습니다. 전재용씨 커플은 이같은 법을 피하기 위해 박상아씨 단독명의로 한 것은 물론, 박상아씨가 독신여성이라고 기록하는 등 꼼수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매입 당시 결혼한 상태였고 전재용씨가 소유권포기각서를 제출하지 않은 이상 박상아씨 명의의 이 주택 지분 50%는 전재용씨 소유가 명백합니다.
/전재용씨의 장모인 윤양자씨가 관리인으로 되어 있는 캘리포니아 뉴포트비치 주택의 신탁 서류
이들 커플은 또 이 집을 박상아씨 명의로 매입한 1주일뒤인 2005년 10월 4일 다시 소유권을 이전함으로써 재산추적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박상아씨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은 주체는 '더 포트 만레이 트러스트'이며, 이 트러스트의 재산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트러스티는 전재용씨의 장모 윤양자씨입니다. 즉 새 주인은 이 부동산 주소를 따서 이름지은 '더 포트 만레이 트러스트'이며 이 트러스트의 관리인이 윤양자씨로 윤씨는 관리만 할 뿐 입니다.
트러스트는 재산을 맡기는 신탁인(트러스터·TRUSTOR)와 재산을 관리하는 피신탁인(트러스티·TRUSTEE), 그리고 트러스트의 수혜인(BENEFICIARY) 등으로 구성됩니다. 이 주택의 새 주인 '더 포트 만레이 트러스트'의 신탁인 트러스터와 진짜 주인을 일컫는 수혜자는 바로 전재용씨의 부인 박상아씨였습니다. 따라서 박상아씨가 법인으로 명의만 변경했을 뿐 법적으로 실제 주인은 박상아씨이며, 매도계약서에도 실제 주인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양도세는 부과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상아가 미혼여성으로 적혀 있는 은행대출 서류
전재용-박상아 커플이 이 주택을 매입할 때 1백33만4천여달러를 30년 기한, 5.375%의 고정금리로 은행에서 대출받았습니다. 이후 트러스트로 소유권이 이전됐음에도 트러스트의 실제 주인이 박상아이기 때문에 여전히 이 대출계약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이 주택이 박상아씨 소유라는 증거입니다. 소유주가 바뀌면 당연히 은행에서 대출금을 회수하고 새 주인은 다시 대출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부동산관련 등기서류에는 첫 대출계약서 외에 대출금을 모두 갚았다는 서류나 다시 대출을 받았다는 서류는 전혀 없습니다. 소유주가 동일인이기 때문에 첫 대출이 유효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 주택은 오렌지카운티에 재산세를 내지 않아 일시 차압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도 명목상 주인은 트러스트이지만, 캘리포니아주 주법 2924B 조항에 따라 실제 주인이며 트러스터이자 수혜인인 박상아에게 통보가 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따라서 캘리포니아주 뉴포트비치의 저택 주인은 여전히 박상아이며, 이 주택의 지분 절반은 전재용씨 소유입니다.
전재용·박상아 커플은 한국 정부의 추징에 대비해 가능한 한 빨리 이 부동산을 매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 부동산의 현재가치는 2백40만달러 상당으로 전씨는 '센투리21 서니힐스'라는 부동산중개업체에 이 주택을 2백39만9천9백달러에 팔아달라고 의뢰했다가 매각되지 않자 지난해 12월 4일 2백29만9천9백달러로 4.6% 가격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재용·박상아 커플은 캘리포니아주 뉴포트비치에 2백40만달러 저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백배 양보해 전재용씨의 몫만 따지더라도 이 주택 지분의 절반, 즉 백20만달러가 전재용씨 소유입니다. 또 이 주택을 살때 백33만여달러를 대출받았으며 30년 기한중 8년이 지났으므로 약 30%를 갚았고, 남은 대출금은 93만달러 상당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2백40만달러에 매도한다면 은행빚을 갚도고 약 백47만달러 상당이 남는 것입니다.
현재 검찰은 전재용씨와 이창석씨의 조세포탈액을 당초 60억원에서 27억원으로 크게 줄였습니다. 그러나 전씨는 ‘나 돈 없어.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2백40만달러 저택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월 24일자 환율로 약 25억9천만원에 달하며, 은행빚을 갚고 남게 되는 돈 백47만달러는 16억원에 상당하므로 조세포탈액 27억원의 상당부분을 납부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불법은닉한 전씨의 재산이 확인된 만큼 사법당국은 더이상 전씨에게 매달리지 말고 당장 캘리포니아저택을 압류, 조세포탈액을 추징하는 조치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사법당국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이 직접 나설수 있습니다. 조세포탈은 국가에 피해를 끼친 범죄행위이며, 국가는 물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이므로 납세자면 누구나 피해당사자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피해당사자인 납세자가 미국법원에 박상아-전재용의 미국재산에 대해 직접 집행해 달라고 요구하는 소송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전재용·박상아 커플이 한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부동산이 미국 내에 존재하므로 미국 연방법원의 재판관할권이 성립됩니다. 만약 이 소송을 한다면 증거조사명령이 내려지므로 전재용·박상아 커플은 증거조사의 방법중 하나인 데포지션(deposition·재판의 양 당사자가 법정밖에서 대면해 증언이나 증거서류를 확인하고 조정하는 작업)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포지션을 받게 되면 다른 재산이 밝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 전재용·박상아 커플의 은행 서류를 비롯해 이들과 관련된 모든 서류를 제출하도록 명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신용카드 회사에 이들의 신용카드 신청서류를 제출하도록 명령할 수 있습니다. 전재용이 타고 다니던 은색 벤츠승용차에 대해 벤츠 딜러에게 매매계약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수표로 돈을 받았다면 수표 사본을 내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재판과 미국 재판의 가장 큰 차이인 디스커버리(discovery)의 위력입니다. 소송당사자들이 법원의 허락하에 마치 검찰이 수사를 하듯 각자 상대방을 직접 조사하고 관련서류도 직접 제출받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법당국에 의지하기 보다는 미국에서의 국민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전두환 비자금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전재용의 부동산이 미국에 있으며, 현재 전씨가 추징금을 낼 돈이 없다고 버티는 것은 국민들에게는 오히려 큰 행운으로 생각됩니다. 미국에서 소송을 하면 판도라의 상자는 열릴 수 밖에 없습니다.
02.04 김형욱⑤ 김형욱, 일하지 않고 이자-배당금만으로 한국인 연간소득 87배 챙겨
김형욱 세금보고서 최초 공개
임금은 0, 이자와 배당금으로 연 9만달러 소득
부정축재로 놀고 먹는 ‘수퍼리치’, 미국인 평균보다 6~7배 고소득
가장 큰 수입원은 제심부동산회사, 연 2만~3만달러씩 받아
당시 한국인 국민소득 수십배 자녀학교에 기부
고소득 수입에도 136만달러 주식-174만달러 도박탕진은 여전히 설명 ‘불가능’
막대한 부정축재자금을 미국으로 빼돌려 도박, 주식투자 등으로 탕진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부부는 미국에서 임금소득은 단 한푼도 없었고 이자와 주식배당금으로 약 9만달러 정도의 연소득을 올렸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김형욱이 적어도 실종되기전 3년간 미국에서 단 한번도 직장을 가진 적이 없고 스스로 돈을 번 적이 없으며, 오로지 부정축재한 뒤 미국에 도피시킨 재산으로 호화생활을 이어갔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김형욱 부부의 연간소득(약 9만달러)은 당시 미국인 가구 평균소득의 7~8배에 달하지만, 이 소득으로도 1백36만달러어치의 주식보유와 174만달러의 도박탕진 등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부인 김영순씨가 1981년 김형욱의 재산상속을 위해 뉴저지주 상속법원에 제출한 서류에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의 3년치 개인소득보고서 서류(세금보고서)가 고스란히 포함돼 있었습니다. 또 이 서류는 김영순씨가 2003년 큰 며느리를 상대로 제기한 재산관련 소송에도 첨부됐습니다. 한국의 연말정산처럼 미국에도 1년에 한번씩 개인소득을 국세청(IRS)에 보고하며, 김형욱 부부도 부부공동으로 이른바 1040 양식에 의거, 개인소득 보고서(US INDIVIDUAL INCOME TAX RETURN)를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김형욱 부부 1977년분 미국세청 개인소득보고서
김형욱 부부의 1977년도 세금보고 서류에 따르면 김형욱은 부부와 자녀 3명을 포함해 가구 구성원이 5명이라고 밝혔으며, 임금이나 월급 등은 단 한푼도 없다고 신고했습니다. 즉 자신이 땀흘려 번 돈은 10원짜리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77년 이들 부부의 이자소득만 4만8천4백여달러에 달했고, 주식배당금과 투자배당금 등 이른바 배당금이 4만2천6백여달러로 전체소득이 9만천달러를 넘었습니다. 1977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천43달러로, 김형욱은 일하지 않고 이자소득과 배당소득으로만 한국 국민 87명의 연간소득을 벌어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사업상 2천달러의 손실을 입었다며 실질소득은 8만9천여달러라고 신고했습니다.
씨티뱅크가 발행한 김형욱 부부의 주식투자내역서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1976년말 주식보유액이 매입가로 최소 1백36만달러 이상이었습니다. 1977년 주식배당금이 4만2천여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배당금은 3.1% 정도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은행 장기예금 금리보다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1977년 미국의 가구당 평균소득은 1만2천1백달러로 김형욱 부부는 손가락 한번 까딱않고 가만히 앉아서 미국인 평균의 7.3배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미국인 가구 연평균소득, 연도-가구수-가구평균소득, 미연방센서스국 통계
/김형욱 부부 1978년분 미국세청 개인소득보고서
1978년도에도 임금이나 월급 등은 단 한푼도 없었던 반면, 이자소득만 5만3천7백여달러, 주식배당금과 투자배당금 등 이른바 배당금이 4만천5백달러로 이른바 금융소득만 9만5천2백여달러였습니다. 이들은 3천달러의 사업상 손실을 입었다며 실질소득은 9만2천2백여달러라고 신고했습니다. 1978년 미국인 가구당 평균소득은 1만3천5백여달러로, 김형욱 부부는 미국가구 평균의 6.8배에 달하는 수입을 올린 수퍼리치였습니다.
/김형욱 부부 1979년분 미국세청 개인소득보고서
김형욱이 실종되던1979년에도 무위도식은 이어졌고 임금은 한푼도 없었지만 소득은 오히려 조금 늘었습니다. 이자소득은 5만3천5백여달러, 배당금 소득은 4만3천6백달러로 전체수입이 9만7천백여달러, 사업손실 3천달러를 제외하면 실제 수입은 9만5천5백여달러로 미국인 가구평균보다 6.3배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연 9만달러의 고소득으로도 백36만달러의 주식보유, 백74만달러의 도박탕진 등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주머니가 있었던 것입니다.
/김형욱부부 1977-1979년 개인소득보고서 중 이자 및 배당금수입 상세내역
그렇다면 과연 세금보고서상 김형욱 부부의 유일한 소득원으로 나타나는 이자소득과 배당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977년 이자소득은 씨티뱅크의 김형욱 및 김영순 예금, 타인에게 빌려준 모기지 소득 등이었으며, 특히 제심리얼티, 즉 제심부동산이라는 정체불명의 회사에서 받은 이자수입이 3만3천여달러로 가장 많았습니다. 또 배당금은 이들 부부의 씨티뱅크 주식투자에 따른 것으로 김형욱이 2만2천여달러, 김영순이 2만여달러였습니다.
그러나 1978년 이자소득에는 못보던 항목이 하나 추가됐습니다, 부부의 씨티뱅크예금, 모기지 등은 그대로 였지만 미드아틀랜틱뱅크가 눈에 뜁니다. 1978년에 김형욱은 씨티 외에 다른 은행에 새 예금계좌를 개설한 것입니다. 이 해도 역시 제심리얼티의 이자소득이 2만8천여달러로 가장 많았습니다. 배당소득도 김씨부부의 씨티뱅크 주식투자분의 배당소득이며 전년과 같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전해와 배당소득이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주식 배당금은 해당회사의 주총이나 이사회 결정에 영향을 받지만 주식보유액이 그 전해와 큰 차이가 없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1979년 이자소득이 나온 곳은 1978년과 일치했습니다. 이때도 제심리얼티에서 받은 이자수입이 2만3백여달러에 달했고 이들 부부의 주식투자에 따른 배당금 수입은 1년전보다 더 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부간 마음을 합친다는 뜻의 제심. 이 정체불명의 제심부동산이 도대체 무엇일까. 왜 적지 않은 이자수익을 주는 것일까. 엄청난 부동산을 소유한 것은 아닐까. 궁금증이 더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형욱 부부 1977년분 미국세청 개인소득보고서에 첨부된 기부금 증명서
한편 김형욱은 월급 한번 받은 적이 없지만 거액을 폼나게 기부했음이 세금보고서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1977년에는 김형욱이 자신의 외동딸 김신혜가 재학중이던 학교에 무려 2만달러를 쾌척했습니다. 김형욱은 1977년 소득보고 때 뉴저지 더마레스트 소재 ‘홀리앤젤스 아카데미’ 교장이 작성한 서류 1장을 첨부했으며, 이 학교는 김형욱 저택이 있는 알파인 바로 옆동네의 사립학교입니다. 1978년 1월 26일자로 작성된 이 서류에서 교장은 “김형욱이 1977년 9월 수표로 2만달러를 기부했으며, 이 돈은 학교의 테니스코트 건설비용으로 사용했다”고 밝혔습니다.말하자면 김형욱이 연소득 중 2만달러를 기부했으니 세금에서 공제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1977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천43달러, 따라서 2만달러는 한국국민 20명의 연소득에 해당합니다. 김형욱이 단 한푼의 임금도 벌지 못했다고 신고한 점을 감안하면 한국 국민 20명의 피땀을 자신의 딸을 위해 선뜻 내놓은 것입니다. 또 이 돈은 미국인 가구의 1977년 평균소득 만2천달러의 약 두배에 달합니다.
/1975년 6월 8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김형욱 관련 기사
세금보고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김형욱의 기부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김형욱은 외동딸 학교 기부보다 2년 앞선 1975년 뉴저지의 라이더 칼리지라는 학교에 만5천달러를 기부했습니다. 이때는 하루에 33만달러의 주식을 매입하는 등 광적으로 주식을 매입하던 시기였습니다. 뉴욕타임스 1975년 6월 8일자는 뉴저지주의 주도인 트렌튼발 기사에서 “남한의 김형욱 장군이 자신의 아들이 재학중인 라디어칼리지에 만5천달러를 기부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프랭크 엘리엇 라이더 칼리지 총장이 김형욱이 기부한 돈중 만2천달러는 한국 등 극동지역 도서확충에, 3천달러는 이 학교의 인터컬쳐럴 스터디 프로그램에 할당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1975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7달러로 만5천달러는 한국인 25명의 연소득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김형욱은 자식들을 위해 그야말로 물쓰듯 펑펑 돈을 퍼줬다는 표현이 딱 어울립니다
김형욱은 이외에도 1978년 1월 18일 오전 9시 55분 프랑스 파리에서 뉴욕 JFK공항을 통해 입국하면서 현금 6만9천9백여달러를 숨겨들여오다 미국 세관에 적발됐습니다. 이때 적발된 약 7만달러는 김형욱의 1978년 세금보고서상 연소득 9만2천여달러의 70%에 달하는 것입니다만 세금보고서 어디에도 이 돈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정체불명의 돈인 것입니다. 작고한 재미언론인 문명자씨는 국내에 방송된 다큐멘터리에서 “김형욱이 고무줄로 다리에 돈을 묶고 여자 팬티호스(스타킹의 일종)를 입은채 들어왔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세관은 김형욱의 보통 양말 밑바닥에서 달러뭉치를 찾아냈다는 적발 당시에 작성한 상세한 보고서를 프레이저 청문회에 제출했습니다.
이처럼 김형욱의 재산은 파도 파도 마르지 않고 줄지 않는 화수분이었고 당해년도의 소득과 지출만을 신고하는 IRS 제출 세금보고서만으로는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였습니다.
02.05 가수 김장훈이 노후보험까지 깬 뉴욕 타임스스퀘어 독도-위안부 광고비 5만달러 사라져
한국계 광고대행사, 미국 광고회사에 광고비 미납으로 소송당해
MBC 무한도전의 비빔밥 광고비도 중간에서 증발
광고대행사, “미납은 인정”…다른 사실은 전혀 언급 안해
기부천사 김장훈씨가 한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부담했던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고비 약 10만달러(약 1억원) 가운데 5만3000달러가 미국 광고회사에 입금되지 않고 중간에 깜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이 광고비는 재미 한국인이 운영하는 광고대행사를 통해 미국 광고회사에 최종 입금되어야 했으나, 미국 광고회사는 이 돈을 받지 못했다며 광고대행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나머지 4만7000달러의 사용처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가수 김장훈/사진=허영한 기자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와 호흡을 맞추며 전세계에 한국문화를 알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독도영유권 등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는 데 온몸을 불살랐던 김장훈씨. 그는 지난 2012년 10월부터 3개월간 전세계의 중심인 뉴욕 타임스스퀘어 빌보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노후보장연금보험마저 깨며 광고비 전액을 부담했었습니다. 그는 이 광고비를 부담하면서도 더 좋은 위치의 빌보드를 얻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 전 국민을 숙연케 했었습니다.
/2012년 10월 4일자 김장훈씨의 미투데이. 타임스스퀘어 빌보드광고를 위해 자신의 전재산인 보험까지 깼음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위치를 잡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2년 10월 3일자 서경덕 교수의 트위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리는 광고를 타임스스퀘어 빌보드에 게재했음을 알리고 있다.
당시 김장훈씨가 부담한 광고비의 정확한 액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서 교수는 3만여달러씩 3번정도라고 말했습니다. 약 10만달러 상당입니다. 그러나 이 광고비는 미국의 옥외광고회사인 시티아웃도어사에 전달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 회사는 결국 지난해 6월 뉴욕주 법원에 광고에이전시인 ISEA 커뮤니케이션(대표이사 조현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서 교수는 정확한 액수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김장훈씨에게 광고비를 받아 조사장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했고, 조 사장은 광고비를 받았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은채 시티아웃도어에 광고비를 지급하지 않은 사실만 시인했습니다. 김장훈씨가 애국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자신의 생명줄인 보험까지 해약했지만 광고대행사가 광고비를 지급하지 않음으로써 안타깝게도 그의 숭고한 뜻이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2012년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 빌보드에 걸린 광고는 ‘당신은 기억하십니까’(DO YOU REMEMBER)로 잘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는 광고와 독도는 우리땅임을 알리는 애국 광고입니다. 광고대행사의 잘못으로 사실상 ‘한국’이 광고비 미납으로 제소당한 셈이 됐습니다.
2012년 11월 6일자 무한도전 김태호PD의 트위터. 서경덕 교수와 무한도전이 의기투합해 60초짜리 비빔밥 동영상 광고를 한다는 서교수의 트윗을 리트윗했다.
/시티아웃도어사가 ISEA를 상대로 뉴욕주법원에 광고비 지급소송을 제기하며 증거로 제시한 비빔밥 동영상광고 계약서. 한달 광고비는 4천달러이며 1시간 1분, 4주간 방영된다는 조건을 담고 있다.
ISEA라는 광고대행사가 광고비를 미납한 것은 김장훈씨 광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팀이 2012년 11월 한달간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내보낸 비빔밥 동영상의 광고비도 옥외광고회사에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뉴욕주 법원에 증거로 제출된 계약서를 확인한 결과 60초짜리 하루 24회, 한달간 7백20차례 방영된 비빔밥 광고비는 4천달러였습니다. 서 교수는 무한도전팀이 모든 비용을 부담했으며 ISEA측에 분명히 전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서 교수 주장이 맞다면 이 역시 조 사장이 광고비를 중간에 떼먹은 셈이 됩니다.
그러나 서 교수는 김장훈씨의 빌보드광고와 무한도전팀의 비빔밥광고 등 두건 모두 광고계약서조차 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고, 한달에 7백20회 방영된 비빔밥 광고가 한달에 천5백회 방영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옥외광고회사와 광고대행사간의 계약과는 별도로, 서교수가 광고대행사와 계약을 체결해야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계약서는 작성하지 않았고 인보이스(청구서)만 받아서 돈을 지급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서교수는 자신이 비빔밥 광고비로 조사장에게 준 돈이 2만달러가 넘는 것 같다고 말해 계약서상 금액과 5배정도 차이가 났습니다.
서 교수의 말이 맞다면 조사장은 광고비를 5배나 부풀려서 받으면서 그나마 그 20%에 불과한 돈도 지불하지 않은 셈이고, 거꾸로 서교수는 광고계약서 등을 확인하지 않음으로서 다른 사람이 부담해 준 피같은 광고비를 낭비한 셈입니다. 광고비가 얼마인지, 내가 낸 광고는 과연 몇회 방영되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조 사장은 전화 통화에서 미국 광고회사에 광고비를 지급하지 않은 사실만 인정하고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뉴욕총영사관 명의로 ISEA를 상대로 뉴욕주 법원에 5만달러 반환을 요구하며 제출한 소송장. 피고 앤드류 조씨의 이름이 앤드류 최로 기재돼 있다.
이 ISEA라는 회사는 지난해 10월 뉴욕총영사관으로부터도 5만달러를 반환하라며 뉴욕주법원에 피소됐습니다. 지난 2012년 5월 뉴욕총영사관에서 10만달러를 받기로 하고 K-POP 관련 홍보물을 제작하려다 불발에 그친뒤 선수금 5만달러를 반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송은 ‘총영사도 모르는 총영사관 소송’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파견된 영사가 공관장인 총영사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뉴욕총영사관 명의로 소송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이 영사는 “뉴욕총영사관 명의의 변호사 선임계도 내가 서명했다”고 털어놨고 “총영사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3개월이 넘도록 소송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총영사는 지난달 22일 뒤늦게 이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이 영사에게 즉각 소송을 취하하라고 지시했고 기자가 경위를 묻자 “영사의 독단적 행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재외공관의 공직기강이 극도로 해이해졌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나마 영사가 공관장 모르게 제기한 소송도 엉터리였습니다. 소송장에 피고인 ISEA의 회사 이름을 잘못 적은 것은 물론, 사장인 앤드류 조(한국명 조현준)씨의 이름을 앤드류 최씨로 기재했습니다. 또 미국 민사소송법은 원고가 소송장 송달을 책임지도록 돼 있지만 소송장을 아예 전달하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고의로 조사장을 봐주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입니다
02.10 기차-해군수송선-특별열차-여객선-민간항공기
1948년 런던올림픽 출전 장면 담은 미 극동사령부 비밀전문 첫 공개
사상 첫 ‘대한민국’ 이름 하의 올림픽 출전…정부 수립 전야제 방불
미 군정 주선한 배와 비행기에 쌀 김치 싣고 20일만에 런던 도착
67명의 선수단…손기정씨가 수석코치로 참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호를 걸고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보름전에 개막된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이었습니다. 그해 1월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도 참가했지만 대규모선수단을 파견한 것은 이때가 사실상 처음이었습니다. 1944년 열릴 예정이던 런던올림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되고 8년만에 열린 하계올림픽에는 59개국이 참가했고 대한민국도 당당히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 만은 않았습니다.
런던올림픽은 1948년 7월 29일 개막됐고, 이때는 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에 하마트면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쓰지 못할 뻔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이로부터 딱 16일뒤 입니다. 한국 체육계는 이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해방 다음해인 1946년 7월 올림픽대책위원회를 설치했고, 1947년 6월 2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정기총회에서 가입승인을 받음으로써 회원자격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전이었기 때문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대한민국을 회원으로 받아줄 것인가 논란이 일었고, 미국 등 우방국의 적극적 도움으로 가까스로 정식가입에 성공합니다.
1947년 1월 12일 24군단이 극동사령부와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미국 올림픽조직위원장이 한국은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 단독으로 참가할 수 없다. 즉 내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고 발표한 사실을 두고 논란이 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군단장인 하지 미 군정장관이 그 전해 12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24군단은 이 전문을 통해 올림픽위원회는 정부기구가 아니며 이같은 입장은 국무부의 입장도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또 국무부가 미국 올림픽조직위원회에 한국이 올림픽에 참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전하고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라고 설득했다고 밝혔습니다. 24군단은 한국이 비록 내년(1948년) 여름까지 국가를 만들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훌륭한 선수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한국이 한국이란 이름으로 올림픽참가를 원하는 만큼 만일 미국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이를 성사시키면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런던올림픽은 8월14일까지 16일간 개최됐기에 대한민국이란 국호로 출전,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리는 화려한 전야제와 같은 역할을 한 셈입니다.
66년전 대한민국이 이역만리 영국의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은 그야말로 간난신고의 대역정이었습니다. 미 극동사령부가 공개한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군정이 실시되고 있던 한국으로서는 미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미 극동사령부의 주선으로 열차와 배, 그리고 또 열차와 항공기를 번갈아 타고 런던에 도착했었습니다. 그야말로 산넘고 물건너서 런던까지 갔던 것입니다.
1948년 6월 11일자 전문은 한국이 1947년 여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함으로써 그동안 일본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 한국국적임을 알리지 못했던 설움을 싣고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처음 출전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 1947년 5월 국제올림픽위원회 가입을 위해 스톡홀름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추락해 전경무씨(조선 체육회 부회장)이 숨지기도 했고 1947년 7월에는 올림픽조직위원회 초대위원장이던 여운형이 암살되기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전문에는 한국선수단 단장이 옥스포드대에서 교육을 받은 정항범 박사이며, 부단장은 신기준, 치프트레이너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선수단 본부위원)이며, 한국선수단의 건강을 위해 유명요리사와 쌀, 김치 등도 준비했다고 돼 있습니다
미 극동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 그리고 국무부는 1948년 6월 12일에도 런던올림픽 한국 선수단 수송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세부지침을 하달하는 전문을 교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전문에는 철저한 시간계획과 한국선수단을 위해 침대 등 숙박시설을 갖춘 특별열차를 준비하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8개항으로 된 이 전문의 1항은 ‘한국올림픽선수단 최대인원은 66명(실제는 67명)이므로 요코하마에서 홍콩으로 갈 배를 차질없이 예약하라. 또 홍콩에서 런던으로 이동할 2대의 여객기를 준비하고 선수단에게는 주한미군사령부가 발행한 신분증과 비자등을 지참토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항 이하의 항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항 : 주한미군사령부 장교가 선수단을 요코하마까지 에스코트하고, 첫 기착지인 하카타(후쿠오카)에서 또 다른 연락장교 1명이 합류하며, 이 2명의 장교가 일본을 떠날 때까지 여행비용과 식대 등을 모두 준비한다.
3항 : 요코하마에서 런던까지 가는데 소용되는 비용 등은 선수단이 한국출발에 앞서 항공편 등을 담당하는 부킹에이전트계좌에 입금시켜야 하며, 런던에서 사용할 비용도 출발에 앞서 런던은행에 입금시켜라.
4항 : 완박한 영어를 구사하며 유럽여행경험이 많고 올림픽에 정통한 사람에게 인솔을 맡겨라.
5항 : 6월 23일 주한미군사령부 해군 특별수송선을 통해 부산을 출발, 하카다에 선수단이 도착하면 밤9시 기차를 탈 수 있도록 빈틈없이 준비하고 24군단이 발행한 초청장도 휴대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6항 :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출발하는 만큼 8군에도 이를 알리고 혹시 모를 긴급사항에 대비, 대안도 준비하라. 특히 선수단이 하카다를 떠나서 요코하마로 갈 때 숙박시설을 갖춘 특별열차를 대기시키고 저녁식사도 준비토록 하라.
7항 : 경비지불 방법으로 일본에서 소요되는 비용은 엔화로 지불하되, 만약을 대비해서 미화 현찰을 충분히 준비하라.(이하 생략)
6월 17일에도 전문은 이어졌습니다. 6월 17일 일본에 주둔중이던 극동사령부는 주한미군사령부에 보낸 전문을 통해 선수단은 6월 23일 낮 12시까지 하카타에 반드시 도착해야 하며, 숙박시설이 완비된 특별열차는 15시 47분에 떠나서 요코하마에는 6월 24일 16시 18분에 도착, (선수단을 홍콩으로 싣고 갈) 선박 옆에 정차시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주한미군사령부 연락장교는 3만5천엔으로 티켓을 사라는 등의 세세한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같은 날 주한미군사령부도 극동사령부에 전문을 보냈습니다.
첫째, 한국선수단은 이들을 에스코트할 주한미군사령부 경리장교를 제외하고 최대 67명이며 이 장교가 서울에서부터 선수단과 동행한다.
둘째, 선수단의 열차이동(하카타에서 요코하마까지의 이동)과 관련, 미해군특별수송선인 ‘시티 오브 이리’호 편으로 하카다에 6월 23일 오후 2시 이전에 도착, 특별열차와 연결되는 부두에 정박한다. 6월 23일 15시 47분 하카다를 출발, 6월 24일 18시 17분에 요코하마에 도착하며 에스코트장교가 엔화이든 미화이든 모든 경비를 책임질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선수단의 첫 올림픽 출전을 위해 물샐틈없는 군사작전이 준비됐던 것입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홍콩으로 한국선수단을 수송했던 제너럴 미그스호.
그뒤 대표단은 6월 26일 아메리카 프레지던트 라이너(해운회사)의 ‘제너럴 미그스’호(2차대전과 한국전 때는 군용선으로 사용되기도 함)를 타고 홍콩으로 갑니다. 그리고 1진은 7월 4일, 2진은 7월 7일 런던으로 출발하며 모든 선수단이 7월 11일까지 런던에 도착, 휴식을 취하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토록 한다는 내용도 다른 전문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66년전 대한민국 국호를 단 첫 올림픽 선수단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하카타까지는 미해군수송선으로, 하카타에서 요코하마까지는 다시 특별열차로, 요코하마에서 홍콩까지는 배로, 홍콩에서 런던까지는 민간항공기로 이동했습니다. 기차와 배, 특별열차, 다시 여객선에서 항공기로 무려 5번을 갈아타며 서울에서 런던까지 전 선수단이 이동하기까지는 약 20일이 걸렸고 미국이 모든 것을 제공했습니다.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단이 66년전 정부가 미처 수립되기도 전에 대한민국 국호를 걸고 당당히 세계열강과 맞섰던 그 감격과 투혼을 되살려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02.12 문선명 "알래스카에서 낚시나 하시죠?"
김일성 "부시가 초청하면 가겠소"
1991년 문선명 통일교 총재 방북 관련 주한미대사관 비밀전문 첫 공개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대사 “김일성, 문선명에 부시 건네줄 친서 안줬다”
‘통일교 30억달러 대북투자, 김일성 부시 친서 휴대’ 등 일본 언론보도는 사실무근
문선명 2시간 설교에 북측과 일촉즉발 위기…“김일성과는 죽이 맞았다”
김일성 “부시 만나게 해달라. 통일교 산하 기업도 북한에 투자하라” 요청
김달현 북 부총리, 박보희에게 “북한은 사실 고아나 다름없다” 토로
김정일, 표면에 안나섰지만 방북 총괄지휘…진전상황 하루 1회 이상 보고 지시
김일성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깝다고 알려진 문선명 통일교 총재. 1991년 그가 방북했을때 김일성이 부시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거나 30억달러 투자를 약속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은 파악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개방정책을 주장하다 지난 2000년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김달현 전 북한 부총리는 통일교 관계자를 만나서 문선명 방북을 논의하다 ‘북한은 사실상 고아나 다름 없다’고 말했던 것으로 주한미국대사관이 미국 국무부에 보고한 비밀전문에는 기록돼 있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총재(왼쪽)가 1991년 평양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난 모습./통일교 제공
문선명 통일교 총재는 지난 1991년 11월 30일부터 12월 7일까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12월 6일 함경북도 함흥에서 김일성과 면담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방북으로 대한민국 국적보유자였던 문총재 일행이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에 휩싸이는 등 엄청난 파문이 일었었습니다. 당시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는 방북 2개월여뒤인 1992년 2월 11일과 2월 12일 문 총재의 방북성사배경, 김일성과의 면담내용 등 주한미국대사관이 파악한 내용을 정리, 미 국무부에 보고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가 1991년 2월 1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중 김일성-문선명이 '죽이 잘 맞았다'고 보고한 부분.
2월 11일 전문은 주한미대사관 정치담당이 문총재의 핵심 측근과 중국 북경에 주재하며 방북문제를 준비했던 북한인 등 2명을 면담한 내용을, 2월 12일 전문은 경제담당이 통일교측과 공식적으로 나눈 대화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월 11일자 전문에 따르면 문선명이 방북한 뒤 한때 북측 관계자와 긴장이 감돌기도 했으나 한마디로 “(문선명은) 김일성과 죽이 잘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1991년 가을 통일교 2인자인 박보희씨가 북경에서 김달현 북한 부총리 겸 대외경제위원장과 담판을 지음으로써 방북을 희망한지 1년6개월만에 성사됐다고 밝혔습니다. 박씨는 북한이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통일교 총재를 초청한다면 전세계가 북한의 개방정책의 진정성을 인정할 것이라고 김달현을 설득했고 김정일이 방북을 최종승인했다고 돼 있습니다. 특히 김정일은 방북기간 중 단 한번도 문 총재를 만나지 않았으나 준비과정에서 관계자들에게 최소한 하루에 한번 이상씩 그 진전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등 사실상 장막뒤에서 방북을 총괄지휘했다고 합니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가 1991년 2월 1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중 북한이 문선명 방북 사실을 극비에 붙였고 윤기복도 마지막 순간에 알았다고 보고한 부분.
또 문 총재의 방북 전날 밤까지도 방북 사실은 극비에 붙여져서 김일성과 김정일, 김달현 부총리, 그리고 김일성의 최측근 1명 등만 이 사실을 알았고, 11월 30일 공항에서 특별기편으로 평양에 도착한 문 총재 일행을 영접했던 윤기복 조선해외동포위원회 위원장에게도 불과 몇시간 전에 손님의 정체를 알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문 총재는 약 2시간 동안 통일교에 대해 설교하고 북한에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말해, 카운터파트인 윤기복이 “우리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형한다”고 경고할 정도로 갈등이 고조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12월 6일 함흥에서 김일성을 만나면서 놀라울 정도로 일이 잘 풀려나갔다고 하며 이 전문은 김일성-문선명 두 사람이 죽이 맞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가 1991년 2월 1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중 문선명이 알래스카 낚시를 제안하자 김일성이 부시가 초청하면 가겠다고 화답했음을 보고한 부분.
김일성은 문 총재에게 미국 정부와의 중개역할을 부탁했습니다. 문 총재는 이에 대해 “알래스카에 가서 저와 낚시나 같이 하시죠”라고 말했고, 김일성은 “부시 대통령이 초청하면 가겠다”고 화답한 것으로 전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레그 대사는 아직도 정보 제공자의 이름 등은 삭제된 채 공개된 이 전문의 말미에 정보 제공자들이 매우 사려깊고 주의 깊은 관찰자들이라고 언급, 이들이 제공한 정보가 신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가 1991년 2월 1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중 정치공사가 만난 정보제공자에 대해 언급한 부분.
특히 이 정보 제공자가 문 총재와 동행해 방북하지는 않았지만 1989년과 1990년, 1991년 북한을 방문했다고 언급했고, 방북 직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매우 흥미롭고 김정일의 업무스타일을 알 수 있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튿날인 2월 12일자 그레그 대사의 전문은 ‘2월 11일자 전문 관련내용’이라고 명시한 뒤 더욱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전문은 경제담당이 통일교와의 공식적인 대화를 중심으로 보고한 것으로 김일성이 부시 대통령에게 전할 친서를 주거나 통일교의 30억달러 대북투자 등은 사실이 아니라고 통일교측이 설명했다고 전했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가 1991년 2월 12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중 김달현 북한 부총리가 ‘박’에게 ‘북한은 고아나 같다’고 언급한 부분.
이 전문에는 방북성사 배경을 설명하면서 ‘박’이라는 사람과 ‘김’이라는 사람과의 대화를 전하고 있는데, 바로 전날 그레그 대사의 전문 등을 감안할 때 박은 박보희씨, 김은 김달현 부총리로 추정됩니다. 박은 “북한은 세계의 보수적인 지도자들과 평화를 추구해야 하며, 특히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은 놀라운 답변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김은 박의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북한은 지금 고아나 다름없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개방을 주장했다던 김달현에 대한 평가에 걸맞게 전세계로부터 사실상 고립된 북한의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한 것입니다.
김은 또 당시 통일교가 중국에서 추진하던 팬더자동차 프로젝트에 깊은 관심을 표현한 것으로 전했습니다. 이때 통일교 관계자는 경제 담당에게 중국내 팬더자동차 프로젝트가 아무 문제없이 수행된다고 설명했으나, 그레그 대사는 실제로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가 1991년 2월 12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중 김일성이 문선명에게 미국과 관계개선에 중개역할을 부탁했음을 언급한 부분.
김일성-문선명 면담에 대해 통일교 관계자는 김일성이 국제정세 변화로 북한이 위협받고 있다며 통일교에 북한 투자를 요청했으며, “부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문 총재가 중개역할을 해달라”고 넌즈시 말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또 문총재에게 “북한 인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또 통일교 관계자는 북한이 기름 부족과 전력 부족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놨으며, 특히 1992년 원유구입비용 1억5천만달러를 지원해주면 추후 북한에 대한 채권(크레디트)로 인정해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측은 문총재가 미북관계개선의 중개역할, 1억5천만달러 지원요청 등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으며, 조선해외동포위원회와 경제협력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지만 사실 세부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즉 알맹이가 없는 발표였다라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가 1991년 2월 12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중 금강산관광 독점권 등 경제협력부분을 언급한 부분.
한가지 재미난 것은 문 총재가 두만강 경제특구 등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사실은 금강산 관광 독점권 획득이 가장 큰 관심사였으며, 북측이 이에 대해 현대와 2년전 체결한 금강산개발권은 이미 그 시효가 만료됐다고 말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레그 대사는 현대의 독점권 만료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에 그같은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다며 지난주에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이 금강산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가 1991년 2월 12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중 통일교의 30억달러 투자, 김일성의 친서전달 등은 사실이 아니라고 언급한 부분.
그레그 대사는 또 문총재 방북과 관련, 언론들의 과장 또는 부정확한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아무개(삭제)에 따르면 문 총재는 30억달러 투자약속을 한 적이 없고 김일성은 부시 대통령에게 보낼 친서를 문 총재에게 주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이 2가지 내용은 일본 언론이 보도하면서 한국언론 등 전세계에 전해졌으나 그 뒤 김일성이 부시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입증되지 않은 것으로 미뤄 김일성이 이를 주지 않았다는 이 전문의 통일교 주장이 설득력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번째 전문은 통일교 관계자와의 공식대화라는 제목과 한국의 실정법을 지키겠다는 등의 여러 내용으로 미뤄 통일교측이 자신들의 입장을 미국측에 전달하는 자리였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레그 대사는 전문 말미에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그는 김일성이 삶의 질, 국제적 고립 등을 언급한 것으로 미뤄 북한이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벗어나 경제난 해결을 위해 무엇인가 준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며 변화의 기운이 감지된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레그 대사의 이 진단은 사실상 틀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진단이 정확했다고 하더라도 그 뒤 북한은 이 진단과는 영 딴판으로 흘러갔습니다. 1991년말 “북한은 사실 고아나 다름없다”는 김달현 부총리의 진단은 강산이 두번이나 변한다는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이 시간 평양을 방문중인 그레그 대사는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진단할지 궁금해 집니다.
02.18 붕괴된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은 어떤 건물?
17일 대형참사를 빚은 경주의 마우나오션리조트체육관은 무허가 건축물이 아니라 지난 2009년 9월 9일 사용승인을 받은 일반철골구조물로 확인됐습니다. 마우나콘도 정식명칭은 '마우나빌휴양콘도미니엄’입니다.
/17일 오후 9시쯤 경북 경주시 양남면에 있는 경주 마우나리조트 내 체육관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해 119구급대원 등이 구조작업을 펼치고 있다. /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이 건물의 건축물대장 등 관련서류를 확인한 결과 마우나오션리조트는 경북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에 소재한 코오롱그룹 산하의 마우나오션개발주식회사 소유로 회원제 골프클럽인 마우나오션컨트리클럽과 마우나오션콘도 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히 지붕붕괴사고가 난 마우나리조트체육관은 마우나오션콘도 B동 옆에 위치한 건물로 지난 2009년 6월 12일 허가를 받았고 2009년 9월9일 사용승인을 받았습니다.
이 체육관의 주구조는 일반철골구조, 주용도는 운동시설, 지목은 체육용지로 분류돼 있으며 높이는 10m, 연면적 및 건축면적은 각각 1205.32㎡, 즉 364평입니다. 연면적과 건축면적이 동일하다는 것은 체육관이 단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체육관의 건폐율은 29.92%, 용적률은 29.92%로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이 건물은 2009년 6월 12일 건축허가를 받은뒤 6월 25일 착공해 두달여만에 공사를 끝내고 9월 9일 사용승인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체육관 역시 건축주는 마우나오션개발주식회사이며 설계자와 공사감리자는 이상묵 건축사사무소(반석)이며 공사시공자 겸 현장관리인은 송원종합건설(대표 박남신)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또 주구조는 철골조인 반면, 지붕은 그라스울판넬구조로 드러났습니다.
/붕괴된 마우나리조트 체육관 내부 모습./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건축 전문가들은 최근 건축공법의 발달로 판넬형 조립건물의 경우 2개월이면 이번에 붕괴된 건물 정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건축 당시에 예상한 하중을 고려해 보면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해 오랜 기간 동안 지은 체육관 건물과는 강도가 비교할 수 없을 듯 합니다. 따라서 이번처럼 예상하중을 넘어선 눈이 왔을 때 체육관 시설 이용을 통제했어야 한다고 지적을 합니다. 건축을 할 때 법적인 한도나 규정은 지켰지만, 우발적 위험수준을 낮게 예상한데다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인명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마우나빌휴양콘도미니엄은 이 체육관을 제외하고 주건축물 13동, 부속건축물 6동으로 이뤄져 있으며, 2003년 12월 31일 사용승인을 받았습니다. 주건축물은 단독형 콘도 10동, 빌라형 콘도 3동 등 모두 13동이며, 부속건물은 가스탱크, 숫불구이장, 오윤센터, 정수장, 콘도안내실, 콘도관리실 등 6동입니다. 이 중 숯불구이장과 정수장, 콘도안내실, 콘도관리실 등 4개 건축물의 지붕구조가 샌드위치 판넬로 확인됐습니다.
02.19 청와대 방공용 짝퉁 대공포 400만달러 사기 사건
청와대 상공을 방어하는 오리콘 대공포가 두동강 난 군납비리사건이 밝혀진지 3년이 지났지만 정부는 단 한푼의 손해배상도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방위사업청 등이 무기중개업자들에게 계약불이행에 따른 권리행사를 늦추는 등 늑장행정을 하는 바람에 회수가 늦어지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가 미국 연방법원 캘리포니아 중부법원에 제출한 소송장 및 최광혁 주미한국대사관무관 진술서.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달 30일 미 연방법원 캘리포니아 중부법원에 트라이던트 오토텍 등을 상대로 ‘트라이던트 등은 오리콘 대공포 몸통 납품 계약 불이행과 관련, 4백77만여달러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사건번호 2:2014 CV-00731). 한국정부는 이 소송에서 소송장과 함께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판정 정본과 영문번역본, 오리콘 대공포 몸통 납품관련 계약서, 최광혁 주미한국대사관 주재 무관의 진술서 등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소송장에서 한국정부가 트라이던트 오토텍과 6건의 오리콘 대공포 몸통 납품계약을 체결했으나 계약이 불이행됐다고 밝히고, 지난해 8월 26일 대한상사중재원이 ‘트라이던트와 넥슨이 한국정부에 원금 3백97만여달러에다 지연이자 연 20%를 가산해 배상하라’는 중재판정을 내린 만큼 중재판정을 외국에서도 인용하고 강제집행토록 보장돼 있는 뉴욕협약에 따라 이를 집행토록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한국정부가 미국 연방법원 캘리포니아 중부법원에 제출한 증거 중 오리콘 대공포 몸통의 일자별 계약체결 현황.
소송관련 증거를 살펴보면 한국정부의 배상요구 원금 3백97만여달러는 오리콘 대공포 몸통 납품계약과 관련, 트라이던트에 지급한 예산 전액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져 한국정부는 엉터리 대공포 몸통납품사실이 밝혀진지 3년이 지났지만 단 한푼도 배상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리콘 대공포 납품비리를 보도한 조선일보 2011년 2월 12일자 및 2011년 5월 20일자 신문.
트라이던트(정식법인명 TRIDENT AUTOTECH CORPORATION, 이하 트라이던트)와 에이전트인 한국의 넥슨주식회사가 엉터리 오리콘 대공포 몸통을 납품, 청와대 상공을 방어하는 대공포 몸통이 두동강났다는 사실은 지난 2011년 2월 12일 조선일보 등에 보도됐으며, 특히 정부가 이같은 사실을 알고 수사를 한 것은 2010년 초라고 언급됐습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이 사건을 수사한지 4년, 국민들이 언론보도를 통해 이 사실을 안지 3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국민의 혈세를 단 한푼도 회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국정부가 미국 연방법원 캘리포니아 중부법원에 제출한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판정 정본 사본.
이 소송장에 첨부된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판정을 살펴보면 사건전말은 이렇습니다. 방위사업청(당시 국방군수본부)이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트라이던트로부터 미국 CSMI사가 제작한 오리콘포 몸통을 공급받기로 물품구매계약을 체결한 뒤 미화 397만여달러를 지급하고 오리콘포 몸통 79개를 납품받았습니다. 이때 에이전트인 넥슨은 트라이던트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와 연대해 책임지고 하자발생 통보뒤 6개월내 해결하지 못하면 즉시 국방군수본부에 현금으로 손해배상한다는 연대보증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넥슨대표 안선태씨는 무기제작기술과 경험이 전혀 없는 영일 CNC에 오리콘포 폐몸통과 자재 및 역설계한 설계도면을 주고 몸통을 주문, 제작한 뒤 이를 일반물자품목으로 위장해 해외로 내보낸뒤 트라이던트로 하여금 CSMI사 원산지 증명과 시험성적서를 첨부, 다시 이 몸통을 국군군수사령부 항만단으로 보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쉽게 말하면 무기라고는 전혀 만들어 본적이 없는 철공소에 폐기된 오리콘포 몸통과 엉터리 설계도 등을 주고 ‘똑같이 만들어라’고 한 뒤 이 몸통을 국외로 내보냈다가 다시 미국에서 수입하는 수법으로 미국 CMSI사가 제작한 정상제품인 것 처럼 국방부에 납품한 것입니다.
/한국정부가 미국 연방법원 캘리포니아 중부법원에 제출한 증거 중 오리콘 대공포 납품계약서.
특히 방사청은 2012년 2월 15일에야 계약불이행 사실을 지적하고 계약해제를 통보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처럼 중재판정에 따르면 이미 2010년 국방부는 엉터리 대공포 몸통에 대해 수사를 시작했고, 2011년 2월 대공포 몸통이 국내에서 제작된 짝퉁이라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이던트에 계약불이행 사실을 통보한 것은 그로부터 1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이 1년간 정부는 짝퉁 대공포에 쏟아부은 국민의 혈세를 되찾을 수 있는 절차를 밟지 않고 무엇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짝퉁 오리콘 대공포 몸통을 납품 받았으니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었습니다. 청와대 등 서울상공을 방어하는 대공포는 훈련사격 도중 균열이 생기거나 파손됐고, 2011년 3월에는 마침내 포 몸통이 두동강 나버리는 웃지 못할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청와대를 방어하는 대공포는 모양만 대공포일뿐 사실상 발사도 할 수 없는 모형대공포(dummy missile)였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정부의 대응은 신속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미국 연방법원 캘리포니아 중부법원에 제출한 증거 중 넥슨 연대보증서 및 법인인감증명서.
또 계약에 따르면 계약자인 트라이던트는 계약불이행 통보 30일 이내에 이를 해결해야 하며, 연대보증자도 계약불이행(하자) 발생 통보뒤 6개월내에 계약자와 연대해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2012년 2월 15일 계약불이행을 통보했으므로 1개월 뒤인 같은 해 3월 15일에는 계약자인 트라이던트에, 6개월 뒤인2012년 8월 15일에는 연대보증자에 대한 예산회수에 돌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사청이 대한상사중재원에 중재신청을 한 것은 2012년 말로 추정되며(트라이던트에 중재신청이 송달된 것은 2013년 1월 7일로 확인됨) 이 때는 이미 계약불이행 통보를 한 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판정은 신청으로부터 최소 7개월이 경과한 지난해 8월에 내려졌습니다. 방사청은 또 이로부터 5개월이 흐른 지난달에야 트라이던트 소재지인 미국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늑장행정이 반복됐습니다. 방사청은 또 계약서등을 통해 트라이던트의 사장이 헨리 박씨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소송의 피고로 박씨를 명시하지 않고 트라이던트와 무명씨 10명(JOHN DOE 1-10)에게만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방사청은 소송장에서 무명씨 10명의 존재를 알 수 없다며 추후 확인이 되면 무명씨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겠다고 밝혔지만 방사청이 트라이던트의 사장이 헨리 박씨임을 알면서도 왜 그를 무명씨로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트라이던트의 사장 헨리 박씨는 분명히 피고에서 배제된 상태입니다.
/캘리포니아주 국무부 웹사이트 트라이던트법인 약식조회내역.
이 시건의 피고 트라이던트는 로스앤젤레스를 사업장 소재지로 해서 1991년 8월 2일 캘리포니아주 국무부에 법인설립신고를 했고 2014년 2월 11일(미 동부시간) 현재 법인은 폐쇄되지 않은 상태로 확인됐습니다. 이 사건 첫 공판은 다음달 14일로 예정돼 있습니다.
한편 넥슨대표 안씨는 방위사업청을 속여 납품대금 397만여달러를 가로챈 혐의 등으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사기)죄와 관세법위반죄로 지난 2011년 9월 9일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에 벌금 3천만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안씨와 검찰은 1심 판결에 불복해 양측 모두 항소했고, 2012년 5월 23일 부산고등법원은 징역 4년에 벌금 3천1백5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안씨는2심 판결에도 불복, 상고했고 대법원은 2002년 8월 30일 안씨의 상고를 기각했습니다. 397만여달러를 가로챈 특가법상 사기죄에 해당된 안씨에게 1심 법원이 선고한 벌금은 3천만원, 2심 법원이 선고한 벌금은 3천1백50만원이었고, 대법원은 2심판결을 확정한 것입니다.
02.23 전두환-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최고수준인 국빈방문(state visit) 못해
역대 한국대통령들의 미국 방문 기록
지난 2011년 10월 미국을 국빈방문(state visit)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백악관 국빈만찬 비용은 20만3천여달러로 오마바 대통령 취임 초기 3년간 5차례의 국빈만찬(state dinner) 비용 중 가장 저렴한 비용이 들었다고 미국 CBS방송이 보도했습니다. 또 한국 대통령 중 전두환, 노무현 두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했지만 최고 수준인 국빈방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미국은 외국 정상들의 외교적 방문을 예우 수준에 따라 국빈방문(state visit), 공식방문(official visit), 공식실무방문(official working visit), 실무방문(working visit), 사적 방문(private visit) 등 5개 수준으로 나누며, 국빈방문의 예우 수준이 가장 높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CBS 방송이 정보공개를 요청한지 13개월만인 지난 11일 입수한 ‘백악관 국빈만찬 비용’에서 밝혀졌습니다. CBS 방송은 오바마 대통령 1기, 즉 2009년부터 2012년까지의 국빈만찬 비용을 공개하라고 요청했지만, 국무부는 2012년 3월 14일 열렸던 데이빗 카메룬 영국 총리에 대한 만찬비용은 제외한 채 첫 3년간의 비용만 공개했습니다. 그러나 CBS가 입수한 이 백악관 국빈만찬 비용은 1년여전 다른 언론매체가 입수한 국빈만찬 비용과는 큰 차이가 있어서 과연 국빈만찬이 얼마인지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백악관이 제작, 배포한 이명박 대통령을 위한 국빈만찬 안내문.
/CBS가 지난 11일 보도한 국빈만찬 비용.
CBS 방송에 따르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뒤의 첫 국빈만찬은 2009년 11월 24일 만모한 싱 인도총리를 위한 만찬입니다. 57만2천여달러의 예산이 투입됐으며, 팝스타 비욘세가 엔터테이너로 초대돼 기량을 마음껏 뽐냈습니다. 2010년 5월 19일 백악관 만찬은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을 위한 만찬으로 비용이 56만3천여달러였습니다. 2011년 1월 19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위한 국빈만찬에는 41만2천여달러가 투입됐습니다. 또 2011년 6월 7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위한 국빈만찬에는 이명박 대통령 만찬비용과 비슷한 21만5천여달러가 들었습니다. 인도와 멕시코 정상을 위한 국빈만찬 비용은 56만-57만달러로 엇비슷한 반면, 중국은 41만달러로 중간 정도였고, 독일과 한국 정상은 20만-21만달러로 인도 등에 비해 3분의 1정도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수행단의 인원수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백악관 국빈만찬 메뉴표(국빈만찬 안내문)를 살펴본 결과 이때 백악관은 4가지 코스요리를 대접했습니다. 메인코스는 텍사스산 ‘와규’로 이른바 ‘고베 쇠고기’와 비슷한 소고기로 만든 요리였고 미국산 와인이 코스마다 제공됐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쇠고기를 제공하는 등 백악관이 이명박 대통령을 푸대접했다고 한국 언론들이 밝혔습니다만 그게 바로 이 메뉴에 기록된 텍사스산 와규 쇠고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이날 만찬에 초대된 엔터테이너로는 한국인 피아노 3중주단으로 잘 알려진 안트리오 자매였습니다.
미국 외교의 꽃이라는 백악관 국빈만찬 회수를 보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35회로 가장 많았고,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21회,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회, 아들 부시 대통령은 6회로 집계됐습니다.
/백악관이 제작, 배포한 이명박대통령을 위한 국빈만찬 안내문.
또 이명박 대통령을 위한 국빈만찬 안내문에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전두환, 노무현등 2명의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방문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이 안내문 마지막 페이지에는 한국의 예전 국빈방문 사례가 언급돼 있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7월,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7월,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6월 각각 미국을 국빈방문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짧은 기간 재직했던 윤보선 대통령이나 최규하 대통령을 제외하면 미국을 방문했던 대통령 중 국빈방문이 아닌 실무방문으로 국빈대접을 받지 못한 대통령은 전두환, 노무현 전 대통령 2명인 것입니다.
/미 국무부 웹사이트의 한국 수반 미국방문 내역.
전두환 전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시절인 1981년과 1985년 두차례 미국을 방문했지만 모두 공식방문(official visit) 혹은 공식실무방문(official working visit)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인 2003년과 2005년, 2006년 세차례 미국을 방문했지만 모두 실무방문(working visit)이었습니다. 전 전대통령의 경우 인권과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미국 정부가 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 운동 진압과 관련해 전 전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옵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반미 성향이 강해 미국 정부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재임기간에 미국을 가장 많이 방문한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으로 모두 7차례였습니다. 이 가운데 1번은 국빈방문이었으며, 4번은 G20정상회의·핵안보회의 등 세계 각국 정상들이 모이는 회의 참석을 위한 방미였습니다.
한편 CBS가 보도한 국빈만찬비용은 약 14개월전 워싱턴 이그재미너가 입수한 백악관 만찬비용 청구서와는 큰 차이가 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012년 10월 25일 워싱턴 이그재미너는 백악관이 국무부 의전실로 보낸 국빈만찬비용 청구서 2장을 공개했었습니다. 국빈만찬비용은 국무부 예산에서 부담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백악관측이 만찬비용을 보전해 달라며 국무부에 청구서를 보낸 것입니다.
/워싱턴 이그재미너가 입수해 공개한 만모한 싱 인도 총리 국빈만찬 비용 청구서.
놀랍게도 이 청구서에 따르면 2009년 인도 총리를 위한 만찬비용은 48만7천여달러로 CBS가 보도한 57만2천여달러보다는 약 9만달러정도 적었습니다. 반대로 2010년 멕시코 대통령을 위한 만찬비용은 무려 97만달러로 CBS가 입수한 56만3천여달러보다는 40만달러나 많았습니다.
이 청구서에는 인도 총리를 위한 만찬, 멕시코 대통령을 위한 만찬 등 항목이 분명히 명시돼 있었기 때문에 착오가 생겼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워싱턴 이그재미너가 입수해 공개한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 국빈만찬 비용 청구서.
당시 워싱턴 이그재미너는 인도 총리 만찬에는 338명이 참석, 1인당 1485달러가 투입된 셈이고 멕시코 대통령 만찬에는 203명이 참석, 1인당 약 4770달러가 들었다고 상세한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CBS의 최근 보도와 워싱턴 이그재미너와의 보도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 과연 어느 것이 맞는 지 알 수 없고, CBS는 만찬 액수만 보도할 뿐 국무부로부터 제공받은 원본문서는 공개하지 않고 있어 만찬비용 논란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워싱턴 이그재미너의 보도 1주일 뒤인 2012년 11월 1일 하원 정부개혁 감사위원회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백악관 만찬비용 공개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클린턴 장관은 자신이 퇴임할 때까지 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02.25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미국 극동사령부 비밀문서 첫 공개]
‘과연 나는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나 자신도 국적을 알 수 없다’
‘왕궁 등 한국내 재산 고국에 돌려주고 일본내 재산 처분하고 싶다’
‘재정 여건이 되면 미국 영주권 얻고 싶고 아들도 미국서 공부시키겠다’
미, ‘한국내 재산은 한국 정부 소유, 일본내 재산은 한-일 양국 협의해야’
미, ‘한국 및 일본 국적법에 의해 영친왕은 일본 국적이 명백’
‘대조전, 인정전 등 궁궐과 전각은 내 재산’ 영친왕 재산목록도 눈길
영친왕 일본 저택은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별관, 참의원 의장공관 대여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영친왕 이은이 해방 직후 자신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의 이민의사를 미국측에 밝혔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영친왕 이은./조선일보DB
이같은 사실은 맥아더 극동사령부의 외교부장이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치고문인 윌리암 제이 세발드가 영친왕 이은의 요청으로 그를 만난뒤 황태자의 국적문제, 재산목록 및 처분문제, 미국이민을 포함한 장래계획 등 면담 내용을 정리해 1948년 10월 12일 국무부에 보고한 비밀전문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전 한국왕족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이 전문은 한마디로 나라 잃은 비운의 황태자의 인생역정이 객관적으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이 전문에 따르면 영친왕 이은은 극동사령부측에 국적법상 과연 자신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의심스럽다며 유권해석을 의뢰했고, 한국과 일본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가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자신이 한국에서 한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났지만 일본에 오래 살았고 일본인과 결혼했으며 일본 황족의 지위를 얻었으므로 과연 어느 나라 국적인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영친왕 이은은 1897년 고종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나 1907년 이복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 황태자에 책봉됐고 1926년 순종 사망 뒤 왕위를 계승, 제2대 이왕에 즉위했었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황태자 책봉 직후 10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 마사꼬(한국명 이방자)와 결혼했으며, 일본군 제51사단 사단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를 헤쳐온 비운의 황태자였습니다. 사정이 이랬기에 해방을 맞이한 영친왕 이은은 과연 자신의 국적이 어디인지, 스스로도 깊은 회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영친왕 이은은 또 자신의 재산, 즉 서울의 왕궁 등은 한국 정부에 모두 기증하고 일본내 재산은 생계를 위해 소유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즉 한국의 황실 재산은 모두 고국에 돌려주는 반면, 일본내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고 싶은데 법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장래 계획에 대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며 자신의 이름을 한국에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어떠한 한국 정파의 계획에도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어서 영친왕 이왕은 충격적인 소망을 밝히게 됩니다. ‘재정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미국에 장기간 체류하거나 영주권을 얻고 싶다. 지금 16세인 아들(1931년생인 차남 이구를 의미)도 미국에서 교육시켰으면 좋겠다’ 는 소망이었습니다. 일본내 재산을 모두 팔아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미국 측에 통보한 것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10살때 일본으로 끌려간 뒤 타의에 의해 일본 황족으로 살아오다 마침내 조국 해방을 맞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어정쩡했기에 결국 미국 이민을 가려했던,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 이은의 고민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친왕 이은의 이같은 고민에 대해 맥아더의 정치고문 세발드는 같은 전문에 극동사령부의 견해를 담았습니다. 영친왕 면담때 극동사령부의 담당 참모를 배석하게 했고, 그들과의 논의와 영친왕 관련서류 및 법규 검토를 마친 뒤 그 내용까지 포함해서 국무부에 보고한 것입니다.
세발드는 국적 문제와 관련, 영친왕 이은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상세히 설명한 뒤 일본 황실과의 혼인 등으로 미뤄 이은 왕자는 일본에 귀화한 것이므로 한국 국적을 상실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또 1948년 5월 11일 제정된 한국 국적법에 따르면 영친왕은 한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일본 황실로의 입적 등을 취소한다면 한국 국적을 회복할 수 있는 권리는 있지만 현재는 일본 국적자임이 분명하다고 기록했습니다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포함된 영친왕의 재산목록을 재정리한 것.
세발드는 재산문제와 관련, 영친왕이 소유권을 주장한 한국과 일본의 부동산 목록을 상세히 기록하며, 한국내 영친왕의 재산은 한국정부의 소유이며 다만 일본에 있는 그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지가 이슈라고 전했습니다. 특히 이 전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4페이지 분량의 영친왕 재산목록입니다.
일본내 재산과 한국내 재산으로 나뉘어 기록된 이 재산목록에서 영친왕은 일본 아카사카내 저택과 토지 등 모두 6개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며 주소와 건평, 건립연도, 현시가(단위: 엔화)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 한국내 재산으로는 창덕궁내 대조전 등 궁궐과 종묘, 토지 등 모두 17건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돼 있습니다. 이 재산목록에 기록된 영친왕의 재산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조전, 순정전, 인정전, 낙선재, 동명전, 명정전, 함영전 등의 궁궐내 전각과 종묘정전, 종묘, 사찰, 토지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또 소재지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지명이 돼 버린 와룡동, 훈정동 등으로 기록돼 있으며 경기도의 서울이라고 표기돼 있습니다.
세발드는 이슈가 된 영친왕의 일본내 재산에 대해 일본 동경 중심부에 위치해 일본정부나 대사관 등이 사용하기에 좋은 건물이며 1947년 10월 11일 극동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일본정부 관리하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1947년 12월 15일 일본 정부가 영친왕의 저택을 일본 참의원 의장 공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영친왕과 임대계약을 맺었으며, 월 임대료 10만엔을 영친왕에게 지급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정부가 이같은 임대계약서를 극동사령부에 제출했고 극동사령부는 약 한달뒤인 1948년 1월 21일 이 계약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즉 승인 통보를 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1929년 10월 신축돼 영친왕이 거주했던 일본 동경 아카사카의 4층 저택. 후에 프린스호텔 별관이 된다.
일본 참의원의장 공관으로 임대됐던 영친왕의 자택은 바로 일본 동경 아카사카에 있는 프린스호텔의 별관으로 영친왕은 이 집을 사실상 강요에 의해 임대명목으로 내준 뒤 같은 주소지의 조그마한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고 전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문에 포함된 재산목록에 따르면 1929년 10월 바로 이 아카사카에 4층 주택 한채와 2층 주택 한채가 신축된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영친왕은 1948년 당시 4층 저택은 내준 뒤 집사나 신하들을 위해 지었을 법한 2층 주택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발드는 또 한국 정부는 영친왕의 일본내 재산에 대해 (대한제국의) 황실이 이땅을 사고 건물을 짓기 위해 많은 돈을 지출했으므로 한국 국유재산으로 이해하고 있고 서울의 왕궁 등은 영친왕 이은의 이름이 아니라 이왕직 장관의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세발드는 이 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친왕 이은의 일본내 재산처분에 대해 현재 극동사령부는 아무런 입장이 없으며 한국정부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이 문제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 문제는 한·일 양국 정부가 해결할 문제’라고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한·일 양국이 해결할 문제이므로 극동사령부가 골치아픈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발드는 이 전문에 한국국적법, 영친왕의 한국과 일본내 재산목록, 1947년 10월 11일의 극동사령부 명령, 1948년 1월 21일의 영친왕 자택 임대 관련 승인서류 등을 첨부했습니다.
세발드의 국무부 보고에 이어 미국무부 한국대표부도 약 한달뒤인 1948년11월 6일, 영친왕 관련사항에 대한 견해를 국무부에 보고하고 이를 극동사령부에도 전했습니다. 한국대표부는 이 전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이라고 전제하고 영친왕은 일본 국적 보유자이며 영친왕의 한국내 재산은 한국정부 소유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일본내 영친왕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한국과 일본정부간의 외교적 협상을 통해 정해질 것이며, 영친왕이 이들 부동산을 한국 정부에 주고 싶다면 한국정부는 사용료를 내겠다는 입장이라고 전했습니다.
또 이 전문에 동봉된 11월 5일자 보고서는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대표부는 이은 왕자의 국적문제에 대해 1947년 9월 25일 미군정청내 법무실이 이미 검토했다며, 영친왕이 일본황제의 조카와 결혼했기 때문에 일본국적법 736조에 의거, 일본국적자로 간주되며 한국법상으로도 한국국적자는 아니라고 정리했습니다. 영친왕의 한국내 재산에 대해서도 미군정청측은 영친왕 개인의 재산이 아닌 한국정부 소유라는 명쾌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대한민국 조약 1호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조협정’이 담긴 1949년 1월 19일자 대한민국 관보.
영친왕은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의 한국내 재산은 모두 미군정청 소유이며, 1948년 9월 11일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간에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가 미군정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넘겨받았으므로 영친왕 재산은 한국정부 소유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일본내 재산은 한국정부 소유로 추정되지만 이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로 생각된다며 다시 검토해야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INITIAL FINANCIAL AND PROPERTY SETTLEMENT OF 1948)은 대한민국 조약 1호로 1948년 9월 11일 대한민국 대표 이범석, 장택상과 미국 대표 존 무초 간에 체결됐습니다. 일주일뒤인 9월 18일 국회비준을 얻은 뒤 이듬해인 1949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공포됐고 다음날인 1월 19일자 관보에 4페이지 분량으로 게재됐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사용중인 서울 시내 주요 호텔등 12건의 부동산에 대해 ‘임시무상차용’을 허용하는 등 협상과정에서 숱은 갈등을 낳았던 이 협정의 제1조에는 '미국 정부는 좌기 재산에 대하여 미국이 보유하였던 일체의 권리, 명의와 이익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함’이라고 규정돼 있으며 이에 따라 영친왕의 재산은 한국 정부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한국대표부 역시 영친왕의 재산에 대해 한국법은 한국내 재산에 대해서만 결정할 수 있으며 일본내 재산소유권문제는 1948년 10월 12일 세발드가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서 제안한 대로 한국과 일본정부에서 이 문제를 해결토록 기다려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일본내 재산에 대한 결정은 유보하고 한·일 양국에 이를 맡기자고 건의한 것입니다.
이 전문들에서 알 수 있듯이 영친왕 이은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가능하다면 일본내 재산을 처분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했습니다. 그가 미국 유학을 시키려던 차남 이구는 미국으로 건너가 MIT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영친왕은 아들 졸업식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정치권의 반대 등으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 이민까지 고려했던 영친왕 이은은 5·16 혁명뒤인 1962년 12월에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해방 18년만인 1963년 11월 박정희 전대통령의 주선으로 늦게나마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귀국, 고국에서 7년여를 살다 1970년 5월 1일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또 그의 아들 이구씨는 MIT졸업뒤 미국내 최고의 건축설계회사인 아이엠 페이에서 건축사로 일했습니다. 아이엠페이는 1993년 김영삼 정부때 미국물리학회의 건물을 사들여 신축한 뉴욕의 현 한국유엔대표부 건물을 설계한 회사입니다. 마지막 황세손으로 불리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는 2005년 일본 아카스카 프린스호텔 별관, 즉 영친왕의 일본 자택이었다가 참의원 의장공관으로 사용됐으며 마침내 호텔로 변해버린 그 ‘한많은 저택’에 투숙했다 운명하게 됩니다.
02.28 수백만달러 재산가 김형욱이 남긴 재산은 18만달러 불과
[김형욱 재산상속 신고서 최초 입수]
불의의 사태 예감? - 1975년 일찌감치 유언장 작성
미 법원, 법규정 깨고 김형욱 실종 1년 6개월만에 사망판결
재산은 주식-예금 등 18만달러 불과…자녀 등 명의 재산 가능성
/김형욱이 1975년 1월 작성한 유언장.
35년전인 1979년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미국 법원은 실종뒤 1년6개월만에 이례적으로 ‘조기’에 사망판결을 내렸으며, 김형욱은 미국 도피 직후인 1975년 이미 유언장을 작성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수백만달러의 주식을 보유했고 도박으로 수백만달러를 탕진했던 김형욱이 남긴 재산은 81만달러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도박빚을 제외하면18만달러에 불과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은 자신의 반국가적 행위로 인해 실종 또는 죽음에 이를 수 있음을 미리 예견한 탓인지 1973년 4월 5일 미국으로 도피한지 약 1년 8개월 정도가 지난 1975년 1월 25일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미국 법원에 제출된 그의 유언장은 1975년 1월 25일 미국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트라팔가 소재 자신의 집에서 작성된 것으로 유언 내용을 담은6매의 유언장과 증인 3명의 서명 등을 담은 문서 1매 등 모두 7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김형욱은 이 유언장에서 만약 내가 죽으면 동산과 부동산, 부채를 포함한 모든 자산의 50%를 나의 아내 김영순에게 주고 나머지 50%는 장남 김정한, 차남 김정우, 딸 김신혜 등 자녀들에게 나눠주라고 말했습니다. 즉 부인에게 50%, 세자녀에게 각각 16.65%씩을 주라고 한 것입니다. 김형욱은 자녀들이 21세, 성년이 되기 전에는 자녀들에게 상속되는 자산을 아내 김영순이 관리하며, 유언장 집행과 자녀양육도 아내 김영순에게 맡긴다고 밝혔습니다. 또 자신과 아내, 두 사람이 동시에 사망한 경우를 대비한듯 “만약 나의 아내가 유언장을 집행하지 못할 경우 ‘이백’에게 유언장 집행을 맡긴다. 또 신탁재산의 관리인으로 ‘이백’을 지명하며 아내 김영순이 사망할 경우 자녀양육도 ‘이백’에게 맡긴다”고 명시하고 자필서명을 했습니다.
/김형욱이 1975년 1월 작성한 유언장의 자필 서명.
/김형욱이 1975년 1월 작성한 유언장의 증인서명 부분.
이 유언장 맨 뒷장에는 유언장 증인 3명의 이름과 주소, 서명이 기재돼 있으며, 3명의 증인은 매리 앨런 멜버리, 이담풍, 유봉섭씨 등 3명이며 이들은 김형욱이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유언장을 작성해 서명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유언장에서 ‘이백’이라고 표기된 사람은 전 중앙정보부요원으로 김형욱의 미국도피 당시 비서역할을 했던 ‘이백희’씨를 말합니다. 또 증인으로 서명한 이담풍씨는 이백희씨의 부인으로 옛날 월남에서 부총리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인물의 딸이기도 합니다. 김형욱은 이처럼 실종 4년여전, 비장한 마음으로 유언장을 작성했고 그의 부인 김영순씨는 1979년 10월 김형욱이 실종되자 뉴저지주 법원에 ‘실종에 따른 사망’을 선고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미국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법원의 김형욱 사망판결문.
미국법상 ‘실종에 따른 사망’ 선고는 ‘최종목격된 날로부터 5년이 지난 뒤’에 사망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형욱에 대한 사망선고는 이례적으로 조기에 내려지게 됩니다. 1981년 4월 8일, 그러니까 정확히 김형욱 실종 1년 6개월만에 김형욱은 미국 법원에 의해 사망으로 간주됩니다. 실종 1년 6개월만에 적어도 미국에서는 사망자가 된 것입니다. 뉴저지주 버겐카운티법원 하비 스미스 판사는 1981년 3월 30일 김형욱의 가족들을 불러 제반사항을 조사한 뒤 1981년 4월 8일 김형욱이 법적으로 사망했다고 판결했습니다. 숱한 논란을 낳았던 김형욱 실종사건은 이 단 2장의 판결문으로 김형욱 사망사건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뉴저지주 법원이 김형욱에게 이례적으로 조기에 사망판결을 한 것은 예외조항, 즉 ‘사망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했을 경우’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법원 심리과정에서 가족들이 재판부에 김이 사망했음을 확신시킨데 따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미국 법원이 김형욱 사망 판결을 내리자 부인 김영순씨는 본격적인 유산상속 절차에 돌입합니다. 김영순씨는 사망판결 약 보름 뒤인 1981년 4월 22일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상속법원에 유언장 집행인 자격인정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약 20일 뒤인 5월 12일 김영순씨를 유언장 집행인으로 지정합니다. 이 자격인정 소송과정에서 유언장 작성때 증인이었던 이백희씨의 부인 이담풍씨가 법정에 출석, 유언장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순씨는 유언장 집행인 자격을 획득한 뒤 유산 상속을 위해 ‘김형욱에게 채권이 있는 사람은 모두 신고하라’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하는 등 관련절차를 진행했고, 마침내 약 8개월뒤에 미국 국세청에 김형욱 재산상속 신고서를 제출합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미 국세청에 제출한 김형욱 재산상속 신고서.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미 국세청에 제출한 김형욱 재산상속 신고서. 사망장소 및 원인부분은 'UNKNOWN'으로 기재돼 있다.
프리미엄조선이 단독입수한 김형욱 재산상속 신고서는 모두 15매로 1981년 12월 10일자로 작성된 것으로 유언장 집행인인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자필서명한 것입니다. 미 법원에 제출되기도 한 이 신고서에 망자 김형욱의 생일은 1925년 1월 16일이며, 주소지는 뉴저지주 알파인의 하이우드 소재 주택인 반면, 사망장소와 사망원인은 ‘UNKNOWN’(모른다)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이 신고서에서 김형욱의 재산은 81만5천7백여달러지만 부채와 비용 등이 63만여달러로 드러났습니다. 김형욱의 재산중 부동산은 장용호 YH무역사장과 공동매입한 조지아주의 40만평 나대지의 50% 지분이 유일하다고 밝히며 자산가치를20만1천6백달러라고 신고했습니다. 또 주식 및 채권(BOND)은 41만4천3백여달러로, 엑슨·휴렛패커드·GE·맥도널드 등 17개 종목의 주식을 보유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예금과 현금은 19만9천8백여달러로 시티뱅크의 당좌예금계좌(계좌번호 10557208)에 6만2백여달러, 시티뱅크의 리볼빙타임디파짓계좌에 13만8천달러, 시티뱅크 투자자문계좌에 8백여달러라고 밝혔습니다. 현금은 한푼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김형욱의 재산은 부동산과 주식 및 채권, 예금 등 3개부분에 모두 81만5천7백여달러였습니다.
그러나 보드워크리젠시카지노 20만달러, 리조트인터내셔널 카지노 5만달러 등 도박빚이 32만달러에 달했고 자신의 장남인 김정한에 대한 채무가 11만3천2백여달러, 시티뱅크에서 빌린 10만달러 등 부채가 모두 53만1천6백여달러에 이른다고 신고했습니다. 시티뱅크에서 빌린 돈 10만달러는 ‘의류업체’가 빌린 돈에 대한 공동보증 성격으로 자신의 집사 등에게 가게를 열어주고 빚보증을 서준데 따른 돈으로 추정됩니다.
김영순씨는 이외에 그동안의 생계비 등 비용도 공제해야 한다고 신고했습니다. 김형욱 실종에 따른 법원소송 등에 소요된 변호사 비용이 2만2천달러, 행정비용이 2만8천달러, 딸 김신혜에게 빌린 돈이 3만2천여달러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김형욱 실종 뒤인 1979년 10월 7일부터 1980년 7월 23일까지 42주간 생계비로 매주 2백달러씩 8천2백달러가 사용됐다고 밝혔습니다. 1979년 당시 법원이 인정하는 4인 가족의 생계비가 매주 2백달러, 1년에 만6백달러정도여서 당시 만달러 정도의 돈이 지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큰 돈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채나 비용에서 장남에 대한 채무, 외동딸에 대한 채무 등이 모두 15만달러에 달해 미심쩍은 부분이 많지만 국세청은 이를 모두 인정했습니다.
결국 김형욱이 남긴 재산은 부채와 비용 등을 빼고 약 18만달러에 불과했고, 이중 절반인 9만여달러는 부인, 나머지는 자녀들에게 상속된 것입니다.
1976년말 김형욱 부부가 보유중인 주식만 백36만달러에 달했지만 김형욱 사망 때 김의 주식보유액은 41만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1979년 그가 회고록 ‘혁명과 우상’의 출판을 포기하는 대가로 실종전까지 최소한 50만달러이상을 받았지만 그같은 현금보상의 흔적은 이 재산상속 신고서에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같은 현금보상은 출처가 불분명한 돈을 미국에 들여올 수 없다는 점에서 스위스은행 등에 예치됐거나 은행예금 등이 아닌 다른 형태로 보관됐고 미국에서의 재산신고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재산상속 신고서에 나타난 김형욱의 재산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적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김형욱’ 자신 명의로 된 재산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김형욱의 부인이나 자녀들의 재산은 포함되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 회에는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김형욱의 치밀한 미국도피 작전과 재산은닉 의혹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03.03 미국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 NSA(국가안보국) 국장
군사-정보전문가들, 국장실 TV 인터뷰 화면 집중분석
전 미국 NSA(국가안보국) 계약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NSA 무차별 감청 의혹 폭로로 유명해진 미국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 NSA. 요즘 미국의 군사-정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 최고의 통신감청과 암호해독 기관의 책임자가 감청과 도청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극비통신장비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미국 CBS 방송의 시사프로그램인 '60 MINUTES'가 지난해 12월 15일 방영한 'INSIDE THE NSA’에 노출된 NSA국장 집무실.
사정은 이렇습니다. 미국 유명 시사프로그램인 CBS 방송의 ‘60 minutes’은 지난해 12월 15일 NSA 특집을 방송했습니다. 이 때 이례적으로 케이스 알렉산더 NSA 국장이 직접 출연, 자신의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갖고 NSA활동의 필요성을 설명했습니다(http://www.cbsnews.com/videos/inside-the-nsa-the-copts). 그러나 알렉산더 국장 스스로 TV방송과는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다고 밝힌 이 프로그램에서 NAS국장 집무실이 공개되면서 의도하지 않게 그의 책상 등에 설치된 컴퓨터와 화상전화, 비화기 등이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전세계 군사전문가-정보전문가들의 포럼 등에는 이에 대한 분석이 한창입니다.
CBS에 공개된 알렉산더 국장의 집무실은 메릴랜드주 포트 조지 미드 군사기지 내에 있는 NSA 본부단지의 2B 빌딩 8층에 있습니다. 내부는 책상과 회의용 대형탁자, 또 한쪽에는 소파와 커피탁자 등으로 꾸며져 일반기업 CEO(최고경영자) 집무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통신장비 등은 각종 보안장치로 무장돼 있었습니다
/안치용의 씨크릿 오브 코리아.
/미국 CBS 방송 시사프로그램인 '60 MINUTES'가 지난해 12월 15일 방영한 ‘INSIDE THE NSA’에 노출된 NSA국장 집무실.
CBS 방송을 통해 확인된 알렉산더 국장 집무실의 극비통신장비는 화상전화와 비화기, 레드폰, 국가안보국 내부에서 주로 사용하는 NSTS 전화, 컴퓨터 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극비통신 장비는 과연 어느 회사가 만든 장비이며,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탄드버그사의 화상통신시스템./인터넷 캡쳐
먼저 알렉산더 국장 책상의 왼편(화면 기준)에 대형 모니터가 보입니다. 화상전화 모니터이며, 바로 위에 카메라가 달려 있습니다. 이른바 VTC, 즉 비디오 텔리컨퍼런싱(VIDEO TELECONFERENCING) 스크린으로, 노르웨이 통신회사 탄드버그(TANDBERG)사가 제작한 것입니다. NSA로부터 ‘타입1’, 즉 ‘1등급 보안인증’을 받은 장비이며, 이 회사는 지난 2010년 미국 시스코시스템스에 인수됐습니다. 이 장비는 1급 비밀까지 안심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장비로 정보기관 등이 이용하는 보안IP망인 JWICS망을 통해 영상과 음성이 전송되는데 이때 암호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L3 커뮤니케이션의 STE./인터넷 캡쳐
알렉산더 국장의 왼쪽 어깨 뒤로 보이는 전화가 이른바 비화기 STE(SECURE TERMINAL EQUIPMENT)로, 이 집무실에 설치된 장비는 L3 커뮤니케이션이 생산한 장비라는 것이 정보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이 비화기 역시 1급 비밀도 음성통화가 가능하도록 인가된 것이며, 통화 상대방이 동일한 전화기를 사용하거나 이에 준하는 비화기를 사용할 때만 상호통화가 가능합니다.
이 비화기는 1980년대 후반까지 미국에서 사용된 비화기 STU-3 시스템의 뒤를 이은 장비로 알려져 있으며, 미 정부와 군, 군계약 사업자 등에 약 40만대가 설치되어 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극도의 비밀사항은 이 전화로는 논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레이시온사의 IST./인터넷 캡쳐
다음 알렉산더 국장의 뒷쪽 컴퓨터 책상의 오른편에 있는 흰색전화, 이 전화는 국방부와 각군 지휘부 등의 통신에 사용하는 비화기입니다. IST(INTEGRATED SERVICES TELEPHONE)폰으로 알려진 전화기로 집무실에 설치된 전화는 흰색입니다만 국방부레드스위치교환망(DEFENSE RED SWITCH NETWORK)를 통하게 되므로 레드폰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집무실 내 이 흰색 IST폰은 일렉트로스페이스시스템에서 개발하고 레이시온사가 제조한 것입니다.
/텔리코어사의 IST2./인터넷 캡쳐
/미국 오바마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텔리코어사의 IST 2./백악관 공개 사진
지난 2003년부터는 2세대 모델인 이른바 ‘IST-2’폰이 보급됐습니다. 지난 2009년 3월 29일 백악관이 공개한 오바마 대통령의 집무실 사진에서도 2세대 레드폰(텔리코어사 IST-2폰)이 설치된 사실이 공개됐습니다만 NSA국장은 구모델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의 시스코IP 폰과 루슨트 테크놀로지의 전화기./백악관 공개 사진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11년 7월 21일 백악관이 공개한 사진에서 집무실에 시스코 IP 폰과 루슨트폰을 설치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각부 장관의 직통전화를 위해 특수보안IP망을 사용한 시스코 IP폰이 지급됐지만 NSA 국장 집무실에 신형 IP폰은 보이지 않습니다. NSA국장과 대통령과의 직통라인은 없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이는 NSA가 국방부 산하에 있으며 미국의 모든 국가정보활동은 국가정보국장 지휘 하에 있기 때문에 NSA국장이 아닌 국가정보국장과 대통령 사이에 직통전화가 구축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미국 CBS 방송의 시사프로그램인 '60 MINUTES'가 지난해 12월 15일 방영한 ‘INSIDE THE NSA’에 노출된 NSA국장 집무실.
알렉산더 국장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왼쪽 어깨 STE 폰 옆으로 하얀색 코드가 보입니다. 이 코드는 국가보안전화시스템(NSTS)망에 접속된 전화기이며, 1급비밀까지 논의할 수 있는 전화기로 NSA 내부에서 주로 이 전화기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노르텔사의 M3904./인터넷 캡쳐
이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NSA 내부화면에서는 NSTS 전화기로 캐나다 통신장비회사인 노르텔에서 만든 전화기인 노르텔 M3904 모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전화기는 이스라엘 총리(2012년 12월)와 영국 총리 집무실에서도 목격됐습니다. 노르텔은 지난 2009년 미국의 통신회사 아바야(옛 이름 루슨트 테크놀러지)에 인수됐습니다.
알렉산더 국장이 사용하는 컴퓨터는 책상 뒷편에 놓여 있으며 모니터 2개와 그 사이에 휴렛 패커드의 키보드 한개가 보이며 ‘KVM 스위치’라고 쓰여진 컬러 스티커가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이들 전문가들은 CBS에서 스쳐 지나가는 단 한프레임의 화면도 놓치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고 이는 한장의 사진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매우 소중한 정보가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KVM스위치(키보드-비디오-마우스 스위치)란 하나의 컴퓨터 장비로 각각 보안등급이 다른 전산망에 접속, 다른 비밀등급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장비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스위치를 조작함으로써 대외비, 이급비밀, 일급비밀 등 각각 다르게 관리되는 보안전산망에 접속할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화면에 보이는 KVM스위치는 아보슨트사가 개발한 ‘스위치뷰 SC4’라는 장비라고 합니다
/아보슨트사의 KVM스위치-스위치뷰 SC4./인터넷 캡쳐
알렉산더 국장 집무실에 설치된 컬러 스티커에는 비밀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녹색과 이급비밀을 의미하는 붉은 색, 일급비밀을 의미하는 오렌지색이 표시돼 있는 것으로 미뤄 이 3개 망에 접속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국장은 오는 14일 퇴임하며 후임에는 마이클 로저스 해군제독이 임명됐습니다. 알렉산더 국장이 CBS 방송에 출연한 것은 에드워드 스노든의 거듭된 폭로로 미국 국가안보를 지키는 NSA가 마치 악의 축처럼 오도되는 상황에서 NSA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CBS의 ’60 minutes’ 방송 직후 CBS가 국가정보기관의 사생활 침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NSA의 홍보물로 전락했다는 비난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같은 배경 속에서 CBS가 이례적으로 NSA 국장 집무실에 접근할 수 있었고 그 바람에 NSA 국장이 사용하는 첨단 통신장비가 노출된 것입니다. 전세계의 정부-군사 기관 뿐 아니라 민간인의 통신까지도 사찰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NSA의 첨단 통신장비가 노출 됨에 따라 이번에는 NSA와 미국 정부가 감청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나 할까요.
03.05 美 의회조사국(CRS),
"한국은 미-중-일-독 이어 세계 5위 제조업 강대국"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투자비율은 세계 1위
과실 분배 의미하는 임금상승률도 세계 2위
한국이 제조업 분야의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투자비율 전세계 1위를 차지하는 동시에 그 과실의 분배를 의미하는 임금상승률에서도 세계 2위를 기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미 의회조사국(CRS)이 지난 2월 20일 발표한 미국 등 주요국가의 제조업 현황을 종합비교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주요국가 중 제조업 분야 노동생산성 증가율 부문에서 1위, 제조업 투자비율도 1위, 제조업 생산액에서 5위, 제조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위, 제조업 연구개발비 투자 2위, 임금상승률 2위 등을 기록, 전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동시에 생산성과 임금이 동시에 증가하는 균형잡힌 성장을 해나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2012년 기준 주요국가별 제조업 부가가치 생산액(유엔통계)을 보면 중국이 2조5560억달러로 미국(1조9940억달러)을 제치고 지난 2010년 이래 세계 1위의 제조업 국가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어 일본, 독일, 한국 순이었습니다. 한국은 3150억달러로 5위를 차지하며 2330억달러의 프랑스와 2200억달러의 영국 등을 크게 앞질렀습니다. 러시아, 인도보다도 많은 제조업 생산액을 기록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지난 1980년대 초반 전세계 제조업 생산의 30%를 차지했지만 감소를 거듭해 오늘날 17% 내지 18%에 머물고 있으며, 일본도 1993년 21%에서 현재 10%로 줄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제조업이 전체 국가경제에서 점유하는 비율, 즉 제조업의 부가가치비중은 중국이 31%로 가장 높았고 한국이 28%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독일은 20%, 일본은 19%였습니다. 미국은 12%에 불과해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제조업의 비중이 미미했습니다.
특히 한국은 제조업의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GDP대비 제조업 투자비율에서 독보적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의회조사국은 컨퍼런스보드 발표를 인용, 지난 2002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의 제조업 노동생산성이 91% 증가, 주요국가중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습니다. 2위는 타이완으로 82% 증가했고, 미국도 53% 증가하면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습니다. 반면 일본은 36%, 독일은 33%, 영국은 30%, 프랑스는 25%에 그쳤습니다.
의회조사국은 미국의 제조업 생산성이 향상됐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조립공정의 자동화, 노동자의 학력수준 향상 등이 그 원동력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보고서는 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를 인용, 2009년 GDP 대비 제조업 투자비율 부문에서도 한국이 7.4%를 기록해 독보적 1위를 차지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는 2위인 이탈리아(3.7%)보다 2배, 3위인 독일(2.4%)보다는 3배나 많습니다. 프랑스(1.7%), 미국(1.4%) 보다는 5배 정도 많습니다.
제조업 연구개발비 부문에서도 한국은 지난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약 2배 증가해 7배 상승을 기록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습니다
대만이 한국에 조금 못미치는 연구개발비를 투자해 3위를 기록한 반면, 이탈리아·일본·미국·독일·프랑스 등은 그야말로 미미한 증가에 그쳤습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를 보여주는 임금상승률 또한 세계 2위를 기록, 생산성 증가 등에 못지 않게 그 처우도 크게 향상됐다고 미 의회조사국은 지적했습니다. 미 노동통계국이 조사한 2000년부터 2012년까지의 제조업 분야의 연금과 보험 등을 포함한 시간당 임금 상승률을 보면 브라질이 158%로 약 2.6배로 상승해 1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이 115%로 2.15배로 증가해 2위를 기록했습니다. 같은 기간 이탈리아가 105%로 3위, 캐나다가 100%로 4위를 기록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80%대, 미국과 일본은 각각 40% 정도 상승한 것으로 집계됐고 대만은 30%에 불과했습니다.
의회조사국은 중국과 인도는 같은 기간 임금상승 통계가 잡히지 않고 있으나 2009년 중국의 제조업 시간당 평균임금이 1.74달러로 2005년 이후 110%, 즉 2.1배 올랐으며 2007년 인도의 제조업 시간당 평균임금은 1.46달러라고 덧붙였습니다. 반면 시간당 임금의 절대적 액수는 아직 한국이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2012년 제조업 시간당 평균임금은 독일이 45.79달러로 가장 높았고, 프랑스가 39.81달러로 2위, 캐나다가 36.59달러로 3위로 나타났습니다. 뒤를 이어 미국은 35.67달러로 3위, 일본은 35.34달러인 반면, 한국은 20.72달러로 유럽국가의 절반수준, 미국과 일본의 60%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대만은 9.46달러로 한국의 절반 정도였습니다
또 2012년 제조업 각 분야별 시간당 임금은 한국의 경우 자동차생산 산업이 25.74달러로 가장 높았고, 화학산업 24.25달러, 기계장치산업 19.24달러, 제지산업이 18.08달러였습니다. 반면 섬유산업이 13.41달러로 가장 낮았습니다. 자동차생산분야의 시간당 임금을 국가별로 비교해 보면 독일이 59달러, 프랑스가 45.8달러, 미국이 45.3달러로 나타나 한국보다 약 2배 가가이 높았으며, 미국과 비교하면 제지산업과 기계장치산업이 2배 가량의 임금격차를 보였습니다.
의회조사국은 미국의 제조업생산이 지난 10년간 대부분의 유럽국가나 일본보다는 증가했지만 중국과 한국보다는 뒤쳐졌으며, 미국의 제조업분야 고용도 최근 10년간 매우 큰 폭으로 줄었지만 이는 일본 및 유럽국가와 비슷한 경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미국의 제조업분야 연구개발투자도 다른 나라들보다는 많지만 중국, 한국, 대만의 연구개발투자가 더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의 연구개발투자는 첨단기술분야, 특히 의약품개발과 전자기기에 집중된 반면, 다른 나라들은 중간급 기술분야, 예를 들면 자동차생산이나 기계생산분야에 집중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22페이지 분량의 이 보고서는 미국 경제분야에서 가장 큰 관심사로 떠오른 제조업의 건강도를 조사한 것으로 미국과 중국, 영국, 프랑스, 한국 등 주요국가들의 제조업 관련 주요지표들을 비교분석해 지난 20일 연방 상하원의원 등에게 제공한 최신자료입니다. 의회조사국은 미국 입장에서 미국 제조업을 진단했지만 보고서에 인용된 제조업관련 각종 지표들은 한국 제조업이 급속하게 성장,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으며 성장에 걸맞게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투자도 전세계 1위인 동시에 임금도 동반상승, 과실을 고르게 나누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03.10 보조연료장치 7개 추가 장착한 이건희 회장 새 전용기의 전모
이건희 삼성 회장 전용기(상)]
중간급유 없이 8000마일 비행, 인천서 미국 직행해도 기름 남아
4만1000 피트 고도로 날아도 6500피트로 느껴지게 하는 첨단장비 설치
인테리어 1년만에 도색까지 완료해 도입준비 끝
인테리어 300억원 포함해 총 1150억원 가량 투입
인테리어비 업체와 하청업체 소송으로 도입시기는 미정
연방항공청 등록서류-감항증명서-보수승인서 등 단독 입수
삼성이 지난 2012년 보잉사에서 매입한 새 전용기에는 보조연료탱크가 7개나 달려있으며, 삼성은 지난 2012년 5월 31일 웰스파고뱅크 노스웨스트 트러스트와 이 회사 명의로 항공기를 등록하는 신탁계약을 맺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또 이 전용기는 지난 2012년 9월 뉴질랜드에서 인테리어 작업을 시작한 지 정확히 1년 만인 지난해 9월 도색작업까지 마친 채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그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미 연방항공청은 지난 2012년 8월 2일 삼성 새 전용기 N705JM이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는 증명서인 감항증명서를 발행한데 이어, 9월 14일 이 항공기의 기체보수 사항을 점검한 뒤 다시 기체에 이상이 없음을 인정하는 증명서를 발행해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3년 9월 16일 도색작업을 마치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삼성 새 전용기(상)와 2012년 9월 17일 인테리어를 위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도착한 삼성 새 전용기(하). 빨간색 동그라미안에 N705JM이라는 편명이 선명하다.
연방항공청이 9월 14일 승인한 기체 보수 및 교체 내역에 따르면 삼성 새 전용기는 연방항공청의 승인을 받은 정비업체인 델라웨어주 조지타운의 ‘PATS 에어크래프트’에서 보조연료탱크, 연기탐지 및 화재진압시스템, NAVLINK 시스템, 객실고도하향조정설비 등을 추가로 장착했습니다.
/삼성이 매입한 새 전용기가 보조연료탱크 등을 추가 장착한뒤 연방항공청이 9월 14일 발행한 기체 보수내역 점검 확인서.
삼성 새 전용기는 연방항공청 승인을 받은 제품인 보조연료탱크 7개를 추가 장착했으며 이중 2개는 앞부분에, 5개는 뒷부분에 장착했다고 돼 있습니다. 보잉사가 제작한 737-7EG 모델의 전용기에는 6875갤런짜리 주연료탱크가 장착돼 있으며, 1갤런당 0.78마일을 운행할 수 있기 때문에 한번 주유로 5300 마일을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천-LA 간 운항거리가 약 5900마일, 인천-뉴욕 간 운항거리가 6900마일인 점을 감안하면 주연료탱크 만으로는 인천에서 미국까지 운행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삼성은 연방항공청으로부터 항공기 기체개조승인을 얻어서 보조연료탱크 7개를 추가 장착함으로써 전체 연료탱크 용량을 1만167갤런으로 늘렸고 이로써 중간급유 없이 7930마일, 즉 한국과 미국을 단번에 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습니다.
이 전용기에는 또 객실에서 느끼는 고도를 낮춰줌으로써 승객들이 보다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객실고도하향조정설비가 장착됐습니다. 이 항공기는 고도 4만1000피트에서 날아가면 객실에서 느끼는 고도는 8000피트로 설계돼 있지만 이 장비를 장착, 체감 고도를6500피트로 낮춰줌으로써 훨씬 안락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연방항공청이 2012년 8월 2일 발급한 삼성 새 전용기 N705JM 감항증명서.
연방항공청은 또 이 항공기가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이 있다는 증명서인 감항증명서를 같은 해 8월 2일 발급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방항공청이 2012년 8월 2일 발급한 삼성 새 전용기 N705JM 등록증명서. 이 임시증명서를 팩스로 먼저 보내준 뒤 정식등록 증명서를 전달했다.
이에 앞서 보잉사는 2012년 4월 17일 연방항공청에 10달러를 내고 N705JM이라는 편명을 삼성전용기에 부여할 수 있도록 편명예약신청을 해 당일 승인을 받기도 했습니다.
/웰스파고뱅크가 2012년 8월 2일 연방항공청에 제출한 삼성 새 전용기 N705JM 등록신청서.
또 등록 명의자인 웰스파고뱅크가 2012년 8월 2일 연방항공청에 제출한 서류에 따르면 같은해 5월 31일 신탁자, 즉 삼성과 계약을 맺고 소유권신탁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날 웰스파고뱅크는 이 전용기를 정식으로 연방항공청에 등록한 것은 물론, 같은 날 시애틀에서 캐나다까지 국제비행신청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실제 이 항공기의 운항내역을 확인한 결과 BOE135라는 콜사인으로 2012년 7월 24일 첫 비행에 성공했으며, 항공기 등록을 마친 다음날인 8월 3일 보조연료탱크 장착을 위해 시애틀의 보잉필드를 출발, 델라웨어주 조지타운으로 날아갔습니다. 이때는 정식등록을 마쳤기 때문에 N705JM이라는 콜사인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항공기는 미 동부시간 기준으로 8월 3일 오전 11시 3분 보잉필드를 출발, 약 5시간만인 오후 3시 56분 조지타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또 연방항공청이 연료탱크장착 등을 검사한 뒤 승인서를 발급받은 날인 9월 14일 인테리어를 위해 뉴질랜드로 출발했습니다. 이 전용기는 미 동부시간 9월 14일 낮 12시 49분 델라웨어주 조지타운 공항을 출발, 오후 5시 53분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머문 뒤 다음날 뉴질랜드로 출발, 9월 16일 일요일 오후 오클랜드공항에 도착했고 그 다음날 크라이스트처치 공항 인테리어회사에 입고됐습니다.
/삼성이 새로 구입한 보잉 737 제트기가 로스앤젤레스와 뉴질랜드 오클랜드간 동일기종 비행속도 세게신기록을 수립한 뒤 오클랜드 공항에서 기념촬영을 한 조종사와 관계자들./보잉사 웹사이트
특히 이때 새 전용기는 로스앤젤레스와 뉴질랜드 오클랜드 간을 논스톱으로 13시간 7분 54초에 주파, 동일기종 비행속도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관련기관의 공식인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오클랜드 간 운항거리는 5658마일이며, 비행을 마친 뒤에도 연료가 37% 정도 남아있었습니다. 연료만으로는 약 9000마일을 비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잉사의 설계연비는 1갤런당 0.78 마일이지만 실제 이 비행에서는 1갤런당 0.88마일의 높은 연비를 보였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현재 이용중인 전용기 HL7759(상)와 삼성이 새로 매입한 전용기 N705JM(하). 두 항공기 모두 꼬리날개에 삼성의 S자를 상징하는 듯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한편 이 항공기는 인테리어를 위해 뉴질랜드에 도착한지 정확히 1년만인 지난해 9월 16일 도색까지 완료한 채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고, 한 아마츄어 사진가가 새 전용기의 모습을 촬영,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놓았습니다. 사진에서 알 수 있는 새 전용기는 이 회장이 현재 이용 중인 전용기와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도색이 같습니다.
당초 인테리어는 10개월에서 1년 정도로 예상했으며, 정확히 1년만에 도색을 마친채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인테리어가 끝났다는 추측이 우세합니다. 즉 지금 당장이라도 국내로 들여와 등록을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진가는 이메일을 통해 이 항공기가 지난 6일 현재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그대로 머물고 있으며, 이 항공기가 떠나는 모습을 촬영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삼성은 이 전용기의 인테리어를 위해 뉴질랜드의 인테리어 회사와 3400만 뉴질랜드달러, 한화 300억원의 인테리어 계약을 맺었으나 이 인테리어회사와 하청회사 간에 분쟁이 발생해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졌었습니다. 보잉사 B737 기본가격이 7500만달러, 한화 약 85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삼성은 이 전용기에 인테리어비를 포함, 1150억원 이상을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삼성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테리어업체들끼리 소송전에 돌입함으로써 도입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전용기의 인테리어는 완료된 것으로 보이지만 국토교통부 확인 결과 7일 현재까지 삼성은 아직 이 항공기를 국내에 들여오지는 않았습니다. 삼성이 이건희 회장 전용기인 B737을 2002년 여름, 2008년 봄 등 매 6년마다 교체했다는 점에서 올봄이 새 전용기를 들여오는 시점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새 항공기를 한번 타보기도 전에 소송에 휩싸였기 때문에 과연 이건희 회장을 올 봄에 모실 수 있을 지는 미지수입니다.
03.17 김승연-조양호 회장은 보잉사, 구본무-최태원 회장은 걸프스트림사
헬기는 미국 대통령과 같은 시코르스키사 제품 선호
국내 기업 중에서 현재 보잉 737기를 전용기로 이용하는 그룹은 삼성, 현대차, 한화, 대한항공 등 4개사입니다. 한화는 지난 2006년 9월 15일 제작된 19명이 탈 수 있는 보잉 737 항공기를 2010년 9월 30일 국내로 들여왔습니다. 한화케미컬 명의로 등록된 이 항공기는 HL7227이라는 편명으로 운행중이며, 김승연 회장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도 가끔식 그룹 임원들을 태우고 비행을 했었습니다.
/2014년 1월 6일 미국 라스베가스 국제공항에서 목격된 한화전용기 HL7227./사진=R.벡스터
/한화그룹 항공기 등록현황./자료=국토교통부
대한항공도 2009년 7월 27일 제작된 16명이 탈 수 있는 보잉 737을 2010년 7월 14일 국내로 들여와 HL8222라는 편명으로 운행하고 있습니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할 때 이용한 항공기가 바로 이 전용기입니다.
/2011년 12월 15일 스위스 제네바 국제공항에서 목격된 대한항공 전용기 HL8222./사진=질레스 브라이언
삼성과 현대차 등이 보잉 737 비즈니스 제트기를 선호한다면 SK와 LG는 걸프스트림을 애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SK는 SK텔레콤 명의로 지난 2009년 9월 17일 걸프스트림 최신 모델인 G-550 모델을 들여와 HL8200 이라는 편명으로 운행하고 있습니다. 모두 14명이 탑승할 수 있습니다.
/2013년 1월 22일 스위스 취리히 국제공항에서 목격된 SK전용기 HL8200./사진=크리스챤 질
/SK그룹 항공기 등록현황./자료=국토교통부
LG도 LG전자 명의로 지난 2011년 2월 23일 SK텔레콤과 같은 모델인 G-550 걸프스트림을 들여와 HL8288이란 편명으로 운행하고 있으며, SK텔레콤보다 2명 적은 12명이 탑승하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2011년 5월 5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제공항에서 목격된 LG전용기 HL8288./사진=알렉산드르 발리킨
/LG그룹 항공기 등록현황./자료=국토교통부
LG는 이에 앞서 지난 2008년 4월 29일에도 2003년 8월 제작된 걸프스트림 중고 비행기를 들여왔기 때문에 약 1년 4개월 정도는 걸프스트림 2대를 운용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도입된 HL7799 걸프스트림은 2012년 6월8일에 등록이 말소됐고 현재는 HL8288 한 대만 갖고 있습니다.
또 하나 재미난 것은 대기업 총수들은 대통령이 이용하는 시코르스키사의 헬리곱터를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미국대통령이 이용하는 헬기, 일명 ‘마린 원’이 바로 이 시코르스키가 제작한 헬기입니다. 삼성을 제외한 현대자동차, SK, LG, 한화 등은 모두 시코르스키사가 제작한 S-76 헬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현대차는 같은 모델을 2대 운용하고 있습니다. LG도 S-76 헬기를 2대 보유했지만, 지난해 12월 3일 서울 강남에서 충돌사고가 발생해 등록이 말소됨으로써 현재는 한대만 운용하고 있습니다.
SK가 운용중인 HL9250 헬기는 조종사 포함 14인승입니다. 이에 비해 LG가 운용중인 HL9252 시코르스키 헬기는 조종사 포함 8인승이며 VIP 용으로 개조됐습니다. 가죽 시트 등이 장착돼 있고 조종사 바로 뒤 2좌석은 360도 회전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현재 LG는 이 헬기를 매각하기 위해 국제시장에 내놓은 상태입니다.
/LG그룹이 매물로 내놓은 시코르스키사 헬기. 헬기 표면에 LG 로고가 선명하다.
또 포스코도 S-76을 2대 보유하고 있으며, 대우조선해양과 대한항공 등도 각각 시코르스키사 헬기를 1대씩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삼성은 삼성 계열사 내에 헬기를 5대 보유하고 있지만, 시코르스키는 한대도 없습니다. 삼성은 유로콥터사가 생산한 EC-155B1 모델의 대형 헬기 3대와 오서스타 웨스트랜드가 생산한 AW139 헬기를 2대 보유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삼성그룹 항공기 등록현황./자료=국토교통부
03.18 이화여대, 졸업생 학력정보 불법유출 논란
김운용 전 대한체육회장 며느리 학력 정보 뉴욕 한인회에 이메일 통보
며느리 김씨, “본인 동의도 없이 이럴 수가 있나, 명백한 불법” 이의 제기
뉴욕한인회 “이화 여대에서 이메일 받았다” 시인
이화여대 “이메일 보냈지만 학력조회 공식문서 아니다” 부인
개인정보의 불법 유출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이화여대가 김운용 전 대한체육회장 며느리의 학력을 본인동의없이 무단 조회, 제3자에게 유출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 전 회장의 며느리인 김민선씨는 뉴욕한인회의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며, 민승기 뉴욕한인회장과 갈등을 빚고 있는 와중에 이번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화여대는 지난해 9월 22일 “김민선씨의 학력을 확인해 본 결과 입학이나 졸업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메일을 뉴욕한인회에 보냈습니다.
/이화여대가 뉴욕한인회에 보낸 김민선 뉴욕한인회 이사장의 학력정보 관련 이메일.
이 대학 학생처 유모씨는 ‘이화여대 업무연락, 학력조회에 대한 회신’이라는 이메일에서 “이화여대 학생지원팀 000입니다”라며 자신의 신원을 밝힌 뒤 “보내주신 김민선에 대한 학력의뢰를 확인해본 결과 1960년 00월00일 김민선에 대한 입학이나 졸업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유씨는 또 “성명이나 생년월일이 정확한 정보인지요. 다시 한번 정확한 정보를 보내주십시요. 000 드림”이라고 기재, 성명과 생일을 보내주면 다시 한번 김씨의 학력을 조회해서 알려주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표명했습니다.
유씨는 이메일 말미에는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처’라고 적은뒤 전화번호와 주소, 그리고 자신의 이화여대 이메일 주소(000.ewha.ac.kr)를 기재했으며, 이화여대 홈페이지를 살펴본 결과 학생처에서 증명서 발급업무를 담당하는 간부직원으로 확인됐습니다.
현행법상 대학졸업증명서는 본인이 온라인을 통해 공인인증서를 제시하고 발급받거나 직접 방문해 주민등록증등을 제시하고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대리인은 온라인으로는 발급이 불가하고 위임장을 작성해 대학이나 구청, 주민센터등을 방문, 위임인(증명발급대상자)과 신청인(위임받은 사람)의 신분증 사본을 제출해야 발급이 가능합니다. 이화여대도 홈페이지를 통해 이같이 위임 발급 절차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씨는 18일 기자와 통화에서 '지난해 이같은 메일을 보낸 것은 맞으며 본인의 동의서나 위임장은 없었다''며 '그러나 이 이메일은 절대로 학력조회 공문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자가 정식공문은 아니지만 ‘입학이나 졸업한 사실이 없다’ 등 중요한 정보가 모두 포함돼 있다고 질문하자 “저는 단지 더 자세한 상황을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지 학력조회를 해 준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습니다. 유씨는 다른 기관에서도 이메일로 학력조회 요청이 올 경우 동의서도 없이 입학, 졸업 여부를 확인해 줬느냐는 질문에 “절대로 그렇지 않다. 동의서가 없으면 일체 확인해 주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증명서 발급 등을 담담하는 학생처의 신하윤 처장은 학생처장실과 연구실로 전화를 했으나 자리를 비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이화여대 측의 이 같은 주장과 달리 당사자인 김민선씨는 지난 14일 뉴욕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그 누구에게도 나의 학력을 조회하라고 위임장을 작성하거나 동의한 사실이 없다”며 “이화여대가 본인 동의없이 무단으로 학력을 조회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난 5일자로 이화여대 교무처장이 발행한 졸업증명서를 제시했습니다. 이 증명서에는 1960년 00월 00일생인 ‘김정배’씨가 음악대 관현악과를 1979년 3월에 입학, 1983년 2월에 졸업했다고 기재돼 있었습니다.
/김민선 뉴욕한인회 이사장
김씨는 이와 함께 청주지방법원으로부터 졸업 직후인 1983년 4월 ‘김정배’에서 ‘김민선’으로 이름을 바꾸는 개명허가를 받았다며 자신과 부모는 물론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이름까지 명시된 호적등본까지 제시하며 해명에 진땀을 흘렸습니다. 김씨는 “이화여대가 본인 동의도 없이 학력을 무단조회하고 그 결과를 제3자에게 유츌시킨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며 “개인정보유출, 사생활침해, 허위사실유포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뉴욕한인회는 파문이 커지자 “이화여대로부터 뉴욕한인회 도메인의 이메일주소를 통해 결과를 통보받았으며, 이메일 암호는 4명밖에 모르는 데 그 내용이 어떻게 유출됐는지 모르겠다”고 밝혔습니다.
김운용 전 대한체육회장의 큰 며느리인 김씨는 뉴욕한인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지난해 민승기 현 회장의 공금유용의혹을 적발, 상환을 촉구했습니다. 그러자 민회장측이 김씨의 학력을 무단으로 조회했고, 누군가가 이화여대의 이메일을 SNS를 통해 유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김민선 뉴욕한인회 이사장이 제시한 자신의 개명 관련 서류.
03.19 [드러나는 김형욱의 미국내 은닉 재산(상)]
미국 도피 2년전 부인 명의로 현시가 250만달러 호화주택 매입
미국 도피 1년전 법인 명의로 현시가 1500만달러 대형 쇼핑몰 매입
부동산 소유법인 서류 통해 쇼핑몰 사장 김형욱 부인으로 드러나
1974년 부인 명의 27만달러 저택매입 – 박대통령 사위집보다 비싸
실종 직전 부인 명의 알파인 주택부지 매입 – 회고록 포기대가인가?
실종 두달도 안돼 부인 주택용지 7개 필지 무더기 매입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미국 내 부동산은 장용호 YH사장과 공동매입한 조지아주 나대지 40만평이 전부였지만, 실제로는 미국 도피 이전부터 부인 명의로 주택과 대형쇼핑몰을 매입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6년여를 중앙정보부장에 재직하다 1969년 10월 해임된 김형욱은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의원을 지내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1973년 3월 유정회에도 포함되지 못하자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판단해 1973년 4월 15일 미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지난 2007년 국정원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본명 신영순)은 1973년 1월 5일 시무식의 어수선한 틈을 타 일본인 명의의 위조여권으로 미국으로 출국했고” 김형욱은 수차례 간청 끝에 해외여행 승낙을 받아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며 같은 해 4월 15일 대만으로 출국한 뒤 미국으로 줄행랑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김형욱 일가의 부동산을 추적한 결과 김형욱은 이보다 2년 앞선 1971년부터 미국으로 도피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이 확인됐습니다. 당시 그의 2남1녀 자녀들이 이미 미국에 유학중이었음도 그가 해외도피를 염두에 두었음을 의미합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의 1971년 1월 4일자 뉴저지 주택 매입계약서
미국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등기소 확인결과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은 1971년 1월 4일, 뉴저지주 테너플라이 트라팔가로드 60번지 주택을 매입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주택은 대지가 1.3에이커, 약 1600평에 건평이 81평이며 매입가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16만5천달러에 달했습니다. 당시 미국 이민자에게 반출이 허용된 정착금이 1인당 2백달러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16만5천달러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이었습니다. 김형욱이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것이 1971년 5월임을 감안하면 그 이전부터 미국도피 계획을 착실하게 추진했던 것으로 풀이됩니다.
/1972년 1월 21일자 제심부동산회사 법인설립신고서. 하단에 알란 싱거 변호사와 김용길의 자필서명이 보인다.
이뿐이 아닙니다. 김형욱이 부인 명의로 집을 구입한지 1년이 지난 1972년 1월 21일 뉴욕주 국무부에 김형욱의 치밀한 망명계획을 엿볼 수 있는 서류가 접수됐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서류는 법인설립 서류로 법인의 이름은 제심리얼티코프(JESIM REALTY CORP), 우리말로 하자면 제심부동산회사가 설립됐던 것입니다.
이 법인은 1972년 1월 18일 김형욱의 고문변호사로서 후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동행하기도 했던 알란 디 싱거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설립돼 3일뒤인 1월 21일 정식으로 뉴욕주 등록을 마쳤습니다. 43년전 뉴욕주 국무부에 제출됐던 이 법인의 설립신고서 등을 확인한 결과 법인서류에는 알란 디 싱거와 김형욱의 처사촌 동서로 비서와 경호 역할을 담당했던 전 중정요원 김용길(현 김길 목사)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습니다. 김용길은 1960년대 후반 중정요원으로 뉴욕으로 파견돼 영사로 일했으며, 김형욱은 그를 통해 미국 도피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1973년 8월 21일자 제심부동산회사 명의의 알란 싱거 변호사 주소변경신고서. 하단에 사장 김영순의 서명이 보인다.
또 하나의 서류는 이 제심부동산회사가 사실상 김형욱 소유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문건이었습니다. 이전의 서류에는 법인 소유주가 누구인지 명확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1973년 8월 21일자 서류에서 주인이 밝혀지게 됩니다. 법인의 지배인 역할을 맡은 알란 디 싱거 변호사의 주소가 바뀌었음을 뉴욕주 국무부에 통보한 이 서류에는 법인의 사장이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으로 기재돼 있으며 사장으로서 서명까지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사장인 제심부동산회사 명의로 된 1972년 4월 3일자 웨체스터카운티 그린버그타운 쇼핑몰 매입계약서.
특히 이 제심부동산회사는 1972년 1월 법인설립 뒤 두달만인 같은해 4월 3일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 그린버그타운에 대형쇼핑몰을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때는 김형욱이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시기로 미국 도피 1년전입니다. 김형욱이 해외로 밀반출한 부정축재재산이 1971년 1월 테너플라이 주택 구입으로 잠깐 그 흔적을 비친데 이어 마침내 뭉칫 돈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린버그쇼핑센터의 주소는 77-97 크놀우드로드, 와잇플레인으로 대지가 무려 11.5에이커, 1만4천평규모이며 대형 수퍼마켓체인이 2개, 상영관 4개를 갖춘 극장, 3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을 완비한 식당 등 대형 상점 10여개가 입주한 대형쇼핑몰입니다.
/웨체스터카운티 그린버그타운의 쇼핑몰.
매매계약서 확인 결과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사장인 제심부동산회사는 이 쇼핑몰을 백78만달러의 기존 은행융자를 안은채 현금 79만8천달러를 지불하고 매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매매가는 2백60만달러, 이중 80만달러는 현금으로 지불한 것입니다.
현재 이 부동산의 가격은 카운티 정부에서 재산세 부과를 위해 책정한 공시가격만 천2백만달러에 달합니다. 실제 부동산가격은 공시가격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거래가는 최소 천5백만달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김형욱은 최소한 미국 도피 2년전부터 미국으로 거액을 빼돌려 부동산을 매입했고 자신의 이름이 아닌 부인 명의, 또 부인이 사장인 법인 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함으로써 그가 사망했을때 사실상 자신이 실소유자인 이들 부동산은 상속서류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김형욱 일가의 미국 부동산쇼핑은 미국 도피 뒤에도 계속됩니다. 김형욱의 미국 도피 1년 4개월뒤인 1974년 8월 21일 김형욱 일가는 뉴저지 최고의 부촌인 알파인으로 옮깁니다. 바로 이날 김영순은 뉴저지주 알파인의 하이우드 플레이스에 27만달러짜리 저택을 매입합니다. 이 저택은 대지가 1.5에이커, 1천8백평 규모로 현재 공시가격은 2백50만달러에 달합니다. 한가지 재미난 것은 알파인에 있는 주택은 대부분 실제 주소를 사용하지 않으며 이 주택 또한 하이우드 플레이스에 있는 7채의 주택중 한채일뿐 번지수는 계약서에 기재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계약서에는 주택의 자세한 위치, 즉 번지수 없이 옆건물로부터 얼마나 떨어졌고 도로로부터 얼마나 떨어졌는지 등이 표시돼 있을 뿐이었습니다.
27만달러 짜리 저택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평가할 수 있는 좋은 비교대상이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1976년 11월 30일자에 보도된 박정희 전대통령의 큰 딸 부부인 한병기-박제옥 부부의 뉴욕저택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중세 성모양의 이 붉은 벽돌집이 박 대통령이 권좌에서 내려올 경우 미국 피난처라는 소문이 있다고 보도했었습니다. 유엔부대사였던 한병기–박재옥 부부는 1976년 8월 17일 이 주택을 20만5천달러에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형욱이 1974년에 매입한 집의 가격은 27만달러였고 뉴욕타임스에 박대통령의 피난처라고 보도될 정도의 저택이 1976년에 매매된 가격은 20만5천달러였습니다. 더구나 김형욱보다 2년이나 지난 뒤의 거래가가 20만달러 상당임을 감안하면 김형욱이 얼마나 많은 돈을 미국으로 빼돌렸는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1979년 8월 24일 매입한 뉴저지주 알파인의 나대지에 김형욱 실종뒤 호화주택이 건립됐으며, 현재 김영순과 차남 김정우, 외동딸 김신혜와 손녀가 살고 있다.
김형욱의 부동산 추적결과 실종 직전인 1979년 가을 회고록 출판협상과 관련, 액수 미상의 돈을 누군가에게서 받았음을 추론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역도 발견됐습니다. 국정원 진실화해 보고서에도 김형욱이 회고록 포기에 따른 대가로 1백50만달러 또는 2백만달러를 받기로 했던 것으로 기록됐습니다. 다만 김형욱은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실종되기전 이미 2차례 파리를 방문했었습니다. 김형욱은 1979년 8월과 1979년 9월 파리를 방문했고 1979년 3번째이던 10월 방문에서 실종된 것입니다. 김형욱이 1979년 8월 10일 파리를 방문한 직후인 8월 24일, 김영순은 지금 유족들이 살고 있는 뉴저지주 알파인 주택의 나대지를 사들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알파인 언덕의 M로드의 맨마지막 막다른 곳의 이 대지는 2에이커, 2천5백평 규모로 김영순 명의로 17만2천5백달러에 매입한 것으로 게약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의 1979년 11월 29일자 뉴욕주 라클랜드카운티 오렌지타운 나대지 7필지 매입계약서.
이상한 거래는 또 있습니다. 김형욱이 10월 7일 실종된지 채 두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29일, 김영순은 뉴욕주 라클랜드카운티 오렌지타운의 주거용 나대지 7필지를 매입했습니다. 매입가격은 20만달러였습니다. 남편 실종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황에서 또 다시 부인은 부동산을 매입한 것입니다. 과연 이 돈은 미국으로 도피하면서 빼돌린 자금인지, 아니면 파리나 스위스에서 누군가에게 받은 돈인지는 본인들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김형욱 사망선고 뒤 상속재산이 80만달러 정도, 그나마 빚을 빼면 20만달러밖에 없었다는 그 수수께끼의 해답은 바로 그의 부인을 통해 재산을 숨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부동산을 추적한 결과 김형욱이 실제 미국 도피 2-3년전부터 치밀한 탈출계획을 세운 것은 물론 자신은 철저히 숨긴 채 부인 명의로 거액의 부동산을 사들였고 실종 직전 파리를 다녀온 뒤에는 또 다시 출처 불명의 돈으로 땅을 매입하는 등 파렴치하고 미심쩍은 행적이 낱낱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03.19 김형욱이 숨겨 남긴 재산 650억원 넘을 듯
드러나는 김형욱의 미국내 은닉 재산(하)]
김형욱 실종뒤 아내가 알파인에 대저택 신축
뉴저지 등에 주택-콘도 등 대거 매입
플로리다 웨스트보카에는 여름별장
한국의 재산몰수 판결 후 미국 쇼핑몰 등 헐값에 매각
호화주택과 대형쇼핑몰 매입 등을 통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미국으로 도피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그 가족들은 김형욱 실종 뒤에도 대저택을 신축하고 콘도 등을 대거 구입하는 등 호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김형욱이 지난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되기 약 한달전인 1979년 8월 24일 그는 부인 김영순 명의로 뉴저지의 대표적 부촌인 알파인에 나대지를 구입했었습니다. 이 나대지는 2에이커(8264㎡) 규모입니다. 이 지역은 1필지 당 2에이커 이상의 땅으로 구성된 부촌입니다. 그 이하 규모의 주택은 들어설 수 없습니다. 알파인은 이후락 전중앙정보부장의 딸과 LG그룹의 2세 등 국내 부호들은 물론, 미국내 대부호들이 사는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의 1979년 8월 24일자 뉴저지주 알파인 저택부지 매입계약서.
김형욱 실종 뒤 1981년 재산상속 등을 마무리한 부인 김영순은 1982년부터 알파인에 저택 신축에 나섰습니다. 이 저택은 뉴욕에서 조지워싱턴 브릿지를 지나 팰리세이즈 파크웨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2번 출구로 빠져나갑니다. 그 다음 클로스터로 내려가는 급경사 중간 쯤에서 오른쪽으로 빠져서 언덕 위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의 막다른 곳에 있는 집입니다.
머리 메이저 드라이브의 맨마지막 집으로 도로변 대문에서 다시 작은 언덕을 따라서 올라가야 실제로 집이 나타나게 됩니다. 2층 주택은 물론 올림픽수영장 규격의 대형 수영장이 설치돼 있고 특히 집안의 정원수가 일품입니다. 이 집을 짓는데는 거의 2년 가까이 걸려 1984년 완공됐고 공사비만 2백만달러 상당이 들었다는 것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증언입니다. 한때 김영순씨와 큰 며느리와의 법정분쟁 때 이 집 공사비용이 1백50만달러에서 2백만달러를 넘어서며 전액이 현금으로 조달됐다는 주장이 제기됐었습니다. 건축전문가들은 30년전이라해도 공사비가 최소 2백만달러 이상이며, 현시가는 6백만달러 이상으로 추정했습니다.
김형욱이 실종된 뒤 남긴 재산이 80만달러, 그중에서 빚을 빼면 20만달러 정도여서 도저히 상속재산으로는 저택 공사비를 충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김형욱이 자신 명의가 아닌 다른 사람 명의의 부동산이나 거액의 부동산이 있었음을 사실상 입증하는 대목입니다. 이 집도 다른 알파인 저택들과 마찬가지로 주소가 알려지지 않은 채 집주소가 우체국 사서함 번호로만 표기돼 있습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2002년 9월 26일 알파인 대저택의 소유권을 ‘김영순 트러스트’로 이전한 서류.
버겐카운티 등기소 확인결과 이 저택은 줄곧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 소유로 돼 있다가 지난 2002년 9월 5일 장남 김정한이 지병으로 숨지자 20일뒤인 9월 26일 김영순 트러스트로 소유권이 바뀌었습니다. 이 김영순 신탁의 관리인은 차남인 김정우씨와 외동딸 김신혜씨였습니다. 김영순은 또 1982년 5월 21일 뉴저지 포트리에 콘도 한채를 매입합니다. 이른바 하이트맨하우스콘도로 9만천7백40달러에 5E호를 사들였으며, 4년여뒤인 1985년 2월 28일 14만5천달러에 매도해 약 5만달러, 즉 50%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김형욱의 장남 김정한은 김형욱 실종 1년뒤인 1980년 오랫동안 입주 가정교사로 일했던 여성과 결혼했고, 외동딸 신혜씨는 1985년 결혼했습니다.
/김형욱의 외동딸 김신혜씨 부부가 1985년 9월 16일자로 매입한 뉴저지 포트리 콘도 펜트하우스 계약서.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등기소 확인결과 김신혜씨와 남편 한모씨는 1985년 9월 16일 뉴저지 포트리의 콘도를 부부 공동명의로 매입했습니다. 이 콘도 주소지는 200 올드 팰리세이드 로드이며, 이들이 매입한 콘도는 최고 꼭대기층인 펜트하우스였습니다. 가격도 당시로서는 거액인 48만9천달러, 30년이 지난 요즘 이 지역의 2층 단독주택이 50만달러 상당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액이며 호화콘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김형욱의 유일한 사위가 되는 한모씨는 5공때 청와대에 근무한 고위공직자의 사촌동생이었지만 결혼 4년만에 헤어지게 됩니다. 1989년 8월 25일 버겐카운티등기소에 등기된 서류에는 이들 부부가 이혼하게 됐고,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 합의에 따라 이 콘도가 김신혜씨 단독 소유로 변경됐다고 기재하고 있습니다. 그 뒤 김신혜씨는 1995년 5월 2일 이 콘도를 50만달러에 매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뉴저지 포트리 하이트맨하우스 콘도를 1982년 매입했던 김영순은 1989년 5월 9일 포트리에서 가장 유명한 콘도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아트리움 콘도를 사들였습니다. 매입가격은 48만3천달러였습니다. 김영순은 약 5년뒤인 1994년 4월 18일 16만달러를 손해본 32만8천달러에 이 콘도를 매도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해인 1995년 9월 장남 김정한도 아트리움 콘도 한채를 35만달러에 매도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형욱의 장남 김정한씨의 상속자인 큰며느리와 김영순이 2004년 8월 13일 뉴저지주 알파인 주택을 매도한 계약서.
장남 김정한은 초등학교 시절 김형욱을 따라 휴전선 부근에 사냥을 나갔다가 발목지뢰를 밟아 다리를 다친뒤 치료를 위해 미국에 홀로 보내져 힘든 시간을 보냈고, 김형욱 실종 뒤 크게 상심해 방황하다 플로리다주로 내려가 동물들을 키우는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었습니다. 김정한의 사고와 관련, 발목지뢰가 아니라 김형욱의 오발사고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사고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영순은 플로리다로 내려갔던 장남 정한이 뉴저지로 돌아오자 2001년 8월 15일 알파인 처치스트릿에 백만달러짜리 단독주택을 사줬습니다.. 김영순 자신이 이 집 지분을 51% 소유하고 정한이 49%의 지분을 갖는 공동소유형태였습니다. 이 집은 김영순의 대저택과 차로 1분거리에 있으며, 2002년 9월 5일 정한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2년뒤인 2004년 8월 13일 백53만5천달러에 매도했습니다. 2년만에 집값이 50%나 오른 것입니다. 장남 정한이 죽자 김영순이 며느리와 법정분쟁을 벌인 부동산이 바로 이 알파인 주택이었습니다.
이외에도 김영순은 일찌감치 알파인 주택 1채와 웨체스터에 대형 쇼핑몰을 소유하고 있었고, 김형욱 사후 플로리다의 웨스트 보카에 별장용 주택을 매입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형욱의 부인 김영순이 1982년 2월 8일 뉴욕주 웨체스터카운티 그린버그타운의 대형쇼핑몰을 매도한 계약서.
김영순은 미국 도피 이전인 1972년부터 제심부동산회사의 사장 자격으로 뉴욕주 웨체스터카운티 그린버그타운에 대형쇼핑몰을 소유했었습니다. 현금 80만달러에 모기지 등을 껴안고 2백60만달러에 매입한 쇼핑몰이었습니다. 그러나 김형욱 실종 2년여가 지난 1982년 2월 8일에 이를 매도하며 가격은 백70만달러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은행융자 미상환액 37만5천달러도 새주인에게 넘겼지만 10년전 살때 보다도 훨씬 싸게 팔았습니다. 10년전 현금 80만달러를 준데다 10년간 은행에 상환한 돈이 백40만달러로 2백20만달러가 들었지만 팔때는 오르기는 커녕 50만달러를 손해본 것입니다. 김영순이 지금까지 이 쇼핑몰을 소유했다면 천5백만달러 상당의 자산이 됐겠지만 이처럼 손해를 보면 헐값에 허겁지겁 대형쇼핑몰을 처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피한 뒤 1977년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자 6개월뒤인 같은해 12월 반국가행위자 재산몰수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1982년 3월 궐석재판을 통해 김형욱에게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과 함께 전재산몰수형을 선고했습니다. 김영순은 김형욱에 대한 궐석재판이 진행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재산몰수형 선고 직전에 헐값에 쇼핑몰을 팔아치운 것입니다.
김영순은 또 김형욱 실종 약 한 달여 뒤인 1979년 11월 29일 매입했던 뉴욕주 라클랜드카운티 오렌지타운의 주택용 나대지 7필지도 1982년 3월 30일 23만5천달러에 매각합니다. 라클랜드카운티는 허드슨강을 끼고 있는 풍광이 아름다운 지역으로 대부호들의 여름별장이 늘어선 지역입니다. 그렇지만 20만달러에 매입해서 약 15% 오른 값에 팔아치웠습니다. 이때가 바로 재산몰수형이 선고된 직후임을 감안하면 몰수를 우려해 허겁지겁 매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판결 뒤 김형욱이 남긴 재산은 20만달러에 불과했지만 실제로 그의 재산은 2천만달러에서 3천5백만달러에 달한다는 것이 언론과 측근들의 추측입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1978년 12월 8일자 기사에서 김형욱의 재산을 ‘아마도 스위스은행인듯한 해외계좌예치금을 포함해 2천6백만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했습니다.
또 프레이저청문회는 김형욱의 재산을 천5백만달러에서 2천만달러로 추정했고 국정원도 2007년 보고서를 통해 ‘천5백만달러에서 2천만달러를 보유했다’고 추정했습니다. 뉴저지 지역 최대일간지인 버겐레코드는 1981년 3월 31일자 기사에서 김형욱의 재산을 천5백만달러로 추산된다고 보도했습니다.
지난 2005년 8월 국내 주간지가 김형욱의 측근 L씨의 주장을 인용, 김형욱의 재산을 3천5백만 달러라고 전했습니다. 이 주간지 보도내용을 살펴보면 측근 L씨는 김형욱의 비서 역할을 하고 유언장 등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이백희씨가 분명합니다. 김형욱이 자기 입으로 측근에게 재산이 3천5백만달러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내용을 종합하면 김형욱인 남긴 재산은 2천만달러에서 최대 3천5백만달러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김형욱의 국내 사망선고 직후 김영순씨 등이 한국내 재판을 통해 삼성동 주택과 신당동 대지 등을 돌려받았고 그 금액만 3백억원에 달합니다. 이 돈을 포함한다면 김형욱의 전체 재산은 6천만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03.21 "선장동지, (미그기-미사일 숨긴) 컨테이너 위를 설탕 21만 포대로 덮으시오"
선장 비밀지령문으로 드러난 북한 청천강호 극비무기수송작전
이중 선창 아래에 쿠바에서 구입한 미그기-미사일 등 무기 숨겨
무기 담긴 컨테이너 위에 21만개 설탕포대로 파묻어
“파나마에 무기신고 말고, 불가피할 땐 발전기로 신고하라”고 지시
2012년 12월 청천강호가 한국 항구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돼 있어 의문
/리영일 청천강호 선장에게 하달된 무기수송관련 비밀지령문.
지난해 7월 파나마에서 무기를 불법수송하다 적발된 북한 화물선 청천강호는 2중 선창구조로 돼 있으며, 선장은 ‘콘테나 우에 사탕으로 덮으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설탕 21만포대로 사실상 무기콘테이너를 파묻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무기선적사실을 숨기기 위해 청천강호가 북한과 교신할 때 무기컨테이너는 ‘기계부속’ 등으로 표기하는 등 사전에 암호를 정했고, 파나마 정부에 무기선적사실을 신고하지 않되 만약 불가피하면 발전기로 신고하라는 지령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유엔 대북제재위원회는 리영일 청천강호 선장으로부터 ‘청천강 선장앞(비밀)’이라고 표기된 지령문을 입수해 최근 공개했습니다. 이 지령문에는 무기를 일컫는 일명 ‘추가짐’과 관련해 2페이지 분량의 상세한 지시가 기록돼 있습니다.
지령문은 “꾸바-조국 추가짐 때문에 추가적인 항차지시를 준다”며 “지시내용을 선장, 정치부장, 보위원까지만 알고, 부선장에게는 아바나 입항 5일전에 알려주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배에는 선원들 외에 노동당 간부로 추정되는 정치부장 등이 승선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청천강호는 사실상 공작선이므로 선원 외에 이들을 감시하고 공작을 지휘할 공작원이 탑승한 것입니다. 지난달 북한이 파나마 정부에 70만달러의 벌금을 내고 청천강호와 선원 32명이 풀려났으며, 당시 파나마 재판에 회부된 3명은 바로 이 배의 선장과 이 전문에 언급된 정치부장 등으로 추정됩니다.
/1977년 북한 남포에서 건조된 청천강호.
지령문은 또 “아바나에서 20피트 콘테나 26개를 상선하며 콘테나를 먼저 싣고 다음 항구에서 콘테나 우에 사탕 만톤으로 덮어 콘테나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와 관련해 전문을 보낼 때는 “콘테나는 기계부속, (콘테나의) 개수는 지함수라고 표기토록 하라”고 지시한데 이어 “기계부속 26지함 상선함”이라는 식으로 보고하라고 그 예를 제시했으며, 일보(일일보고)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전문에서 ‘콘테나’는 무기를 실은 ‘컨테이너’를 의미합니다. 파나마 운하를 건널때 파나마 정부 신고와 관련해서도 세밀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일단 파나마 세관에 무기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통보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지시도 내렸습니다. 특히 파나마 세관보고 여부에 대한 추가지시에 대한 암호도 하달했습니다. “파나마에서 채용금 26K조직하였음”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은 파나마에서 신고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반면 “파나마에서 채용금 26K 조직하지 않았음”이라고 하면 세관신고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때 만약 ‘채용금 조직’ 전문이 하달되면 파나마 세관에 “하바나에서 선적한 발전기, 26개 패키지, 127톤을 싣고 있다고 신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경의라는 말로 끝맺은 이 비밀지령문의 하단에는 전문을 받고 이해하면 ‘빠나마 채용금 지시’를 접수했다고 본사에 확인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유엔대북제재위 보고서 중 청천강호 행적 부분.
유엔 대북제재위원회 보고서에 리영일 선장이 언제 이 지령을 받았는지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항해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북한을 떠난 이후 무전을 통해 비밀지령문이 하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청천강호는 4월 11일 북한을 출발, 4월 11일에서 17일 사이에 러시아의 항구에 정박해 재급유를 받은 뒤 파나마 운하를 거쳐 쿠바의 아바나로 항해했습니다. 청천강호는 6월 1일 파나마 운하를 통과, 사흘뒤인 6월 4일 쿠바 아바나에 도착해 9일까지 정박하면서 북한에서 싣고 온 열연강판 등을 하역했습니다.
/유엔대북제재위 보고서 중 청천강호 행적부분.
이 배는 9일 다시 출항했으나 쿠바 북부 해역에 상당 기간 대기한 뒤 6월 20일 마침내 마리엘 항구에 도착, 미그기 등 무기컨테이너 25개를 선적했습니다. 이 배에서 발견된 전문을 보면 청천강호는 쿠바의 북한대표부격인 ‘꾸바경제무역참사부’에 무기선적을 담당할 사람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초조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천강호가 아바나를 출발한 뒤 상당 기간 쿠바해상에서 대기했던 이유였습니다.
무기를 선적한 뒤 청천강호는 22일 마리엘 항구를 출발, 이틀뒤인 24일 푸테르토 페드레에 도착해 사탕, 즉 설탕 만톤을 선적했습니다. ‘콘테나 우에 사탕 만톤으로 덮어라’는 비밀지령문의 지시를 이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설탕 만톤을 선적하고 남포로 출항하기 까지는 열하루가 걸렸습니다. 아마도 이중 선창아래의 무기 컨테이너를 더 잘 숨기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청천강호는 모든 준비를 끝낸뒤 7월 5일 드디어 남포항으로 출발, 7월 11일 파나마 운하 입구의 크리스토발 항구에 도착했고, 파나마정부는 이 배에 마약이 숨겨져 있다는 제보를 입수, 배를 샅샅이 뒤져 7월 15일 무기가 선적된 컨테이너 하나를 발견하고는 수색을 확대했습니다.
/청천강호가 파나마 정부에 제출한 허위 화물내역서. 2개 화주의 화물 설탕 21만포대만 선적돼 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청천강호는 파나마 정부측에 파나마운하 통과를 위해 배의 항해기록과 화물내역을 제출했습니다만, 무기컨테이너는 제외한 채 설탕만 싣고 있다고 신고했습니다.
7월 4일자로 작성된 화물내역서에 따르면 ‘북한 선적의 청천강호에는 화주 2명의 화물을 싣고 있으며 선하증권 1번의 화물은 50킬로그램짜리 설탕 20만18포대와 빈포대 2천개이며 선하증권 2번의 화물은 50킬로그램짜리 설탕 만포대라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니 50킬로그램짜리 설탕포대 21만여개로 이중선창 아래 무기컨테이너를 숨긴 것입니다. 사실상 무기를 설탕으로 파묻은 셈입니다.
/청천강호가 파나마 정부에 제출한 운항기록신고서.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파나마 정부에 제출한 청천강호의 파나마 운하 통과기록과 운항기록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청천강호는 2013년 5월 30일과 2008년 8월 5일 두차례에 걸쳐 파나마 운하 통과를 위해 파나마 운하 입구에 도착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무기선적을 위해 쿠바로 가기 위해 파나마 운하에 도착한 것이 바로 2013년 5월 30일, 통과한 것이 6월 1일 이었습니다.
다른 항구통과 기록도 나와있습니다만 청천강호가 무기를 실었던 마리엘항구에 정박한 사실은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2012년 12월 16일 청천강호가 한국의 KOJONG이란 항구에 정박했다고 기록돼 있어 과연 KOJONG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한국을 방문한 것이 사실인지 궁금해 집니다.
/청천강호 선창 내역 및 청천강호가 무기컨테이너를 숨기기 위해 그린 선적도. 청천강호는 파나마 정부에 이 선적도와 다른 설탕만 실었다는 허위선적도를 제출했다.
/청천강호 이중선창. 설탕 21만포대 아래 또 다른 선창이 있는 이중선창 구조다./AP
이처럼 북한은 쿠바에서 무기를 선적, 극비리에 북한 남포로 수송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며, 특히 1977년 남포에서 건조된 길이 155미터의 청천강호는 이 선창이 무기수송 등을 위해 이중 구조로 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유엔 대북제재위원회 조사결과 청천강호에 실렸던 무기는 미그21기 2대, 미그 21기 엔진 15개, SA-2 지대공미사일 3개, SA-3지대공미사일 및 레이더 6개, 미사일 발사와 관련한 트레일러 트럭 6대와 탄약 등으로 약 240톤에 달했습니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무기들은 40피트짜리 컨테이너 16개, 20피트짜리 컨테이너 9개등 25개 컨테이너에 담겨 5개 선창중 2번, 3번, 4번 등 3개의 선창에 선적됐고, 뚜껑을 닫은 뒤 그 위를 설탕 만톤으로 덮었습니다. 선창별로 살펴보면 4번 선창에는 40피트짜리 컨테이너가 8개, 3번 선창에는 40피트짜리 컨테이너 7개와 20피트짜리 컨테이너 4개, 2번 선창에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가 5개 실렸고, 그 위 빈공간에 대공미사일 관련 지휘차 2대, 배전차 2대 등 모두 6대의 트럭이 실렸습니다. 이외에도 무기부속품들이 담긴 나무 상자 6개도 발견됐습니다.
/파나마 정부가 청천강호를 샅샅이 수색, 발견한 무기 컨테이너 25개와 컨테이너별 무기내역.
북한이 너무 꼭꼭 숨기다보니 지난해 7월 15일 첫 컨테이너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 컨테이너를 발견한 것은 8월 8일로 23일이 걸렸고, 컨테이너 내 품목검사가 완료된 것은 8월 12일로 거의 한달이 소요됐습니다. 무려 21만개의 설탕포대 아래 이중구조의 선창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나마 정부는 무기가 실린 3개 선창중 4번 선창을 시작으로 2번 선창, 3번 선창순으로 검사했고, 이중 2대의 미그기와 15개 엔진을 실은 컨테이너가 12개에 달했습니다. 나머지 13개 컨테이너에는 볼가로 알려진 SA-2 지대공미사일과 페초라로 알려진 SA-3 지대공미사일, 그리고 레이더 등이 적재돼 있었습니다.
/파나마 정부가 청천강호에서 발견한 리영일 선장의 현금영수증.
또 이 배에서 리영일 청천강호 선장이 서명한 현금수령증도 발견됐습니다. 이 수령증에 따르면 청천강호는 청천강해운회사 소속으로 리영일 선장은 꾸바 경제무역참사부로부터 사탕가루 2백톤 수송운임으로 미화 만2천달러를 받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한편 북한은 파나마 정부가 청천강호를 압수수색하자 무고한 선원을 선실에 가두고 설탕포대를 막대기로 찌르는 등 화물을 훼손하고 있다고 항의하다가 무기가 드러나자 7월 16일 쿠바가, 7월 17일에는 북한이 ‘쿠바가 수리를 위해 맡긴 무기’라고 둘러댔습니다.
03.25 '돈없어 일당 5억원 노역?
천만에 !' 허재호 대주그룹 전회장, 부인 개명까지 해가며 뉴질랜드서 재산은닉 의혹
2004년 회사설립 뒤 지난해말 KNC로 회사명 변경
허 회장과 부인이 76% 최대 주주, ‘중동 등서 대규모 공사설’
허 회장 지난해말 이사 사퇴 뒤 일가 추정 허숙씨가 이사로 피선
부인은 이름 변경 뒤 현재도 주주 겸 이사
부도난 대주건설 아직도 주주, 감사보고서에는 투자 사실 전무
지난 2002년 오클랜드 초호화콘도 ‘메트로폴리스’ 매입
일당 5억원의 노역장 유치를 선택한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자신의 부인과 함께 뉴질랜드에서 대형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오클랜드의 초호화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허 회장은2004년 이 회사를 설립했으며, 2010년 부도처리된 대주건설이 현재도 대주주이지만 대주건설의 감사보고서 등에는 이 회사에 대한 투자내역이 전혀 없어 허회장이 일찌감치 회사돈을 뉴질랜드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2004년 9월 7일 뉴질랜드 정부에 제출된 대주건설 뉴질랜드법인 설립신고서.
특히 이 회사는 지난해 8월 회사 이름을 변경했으며, 허 회장과 함께 이 회사 대주주인 허 회장 부인은 지난해 10월 이름까지 바꾸는 등 해외은닉재산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대주건설(뉴질랜드법인) 2014년 3월 23일 현재 주주현황.
/2004년 9월 7일 뉴질랜드 정부에 제출된 허재호 주식소유내역서
/2004년 9월 7일 뉴질랜드 정부에 제출된 대주건설 국내법인의 주식소유 내역서.
/2004년 9월 7일 뉴질랜드 정부에 제출된 황길순 주식소유 내역서.
뉴질랜드 정부의 법인내역을 확인한 결과 허 회장은 지난 2004년 9월 7일 뉴질랜드에 대주건설(영문명 대주 컨스트럭션 앤 엔지니어링 코 리미티드, 이하 대주건설)을 설립했으며, 이 회사의 주식은 모두 백만주로 허 회장 자신이 46%, 부인 황길숙씨가 30%, 대주건설이 24%의 지분을 소유했습니다. 특히 대주건설은 주소지가 광주시 동구 남동36-9번지로 기록돼 있어서 대주그룹의 모회사가 확실하며, 이 회사는 지난 2010년 부도처리됐지만 3월 24일 현재까지 아직도 뉴질랜드 회사의 지분 24%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대주건설의 감사보고서를 확인한 결과 2004년말 이후 감사보고서에 뉴질랜드 회사의 지분보유 사실은 물론, 투자내역 등이 일체 기재돼 있지 않았습니다. 또 설립 당시 이사는 허 회장 본인과 부인인 황길순씨 등 단 2명이었음이 뉴질랜드 정부에 제출된 이사동의서 서류 등을 밝혀졌습니다. 허 회장은 올해 귀국해 일당 5억원의 노역을 살아 벌금을 털어내기로 결심한 듯 지난해 하반기부터 뉴질랜드 법인의 이름을 바꾸는 등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13년 8월 29일자 뉴질랜드 정부가 발급한 대주건설 법인명 변경 확인서.
이 회사는 2004년 회사설립 이후 줄곧 대주건설이란 명칭을 사용해 오다 지난해 8월 29일 뉴질랜드 정부에 법인명 변경신청을 내고 KNC 컨스트럭션 앤 엔지니어링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2004년 9월 7일 대주건설 창립 이후 현재까지의 이사 및 재직일자.
/2013년 10월 17일 뉴질랜드 정부에 제출된 황길순씨의 성명변경 확인서.
허 회장도 회사설립 뒤 10년간 이사로 재직하다 지난해 10월 1일 사임했으며, 특히 부인 황길순씨는 지난해 10월 17일 자신의 이름이 황세원으로 바꿨다며 뉴질랜드 정부에 이름변경 신청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또 귀국 직전인 지난 7일 허 회장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허숙씨를 올해 1월 1일부터 새 이사로 선임했다는 서류를 제출, 현재는 허회장이 빠지고 허숙씨와 허 회장 부인 황세원씨 등 2명이 이사인 상태입니다. 지난 19일에는 회사의 주소지 변경신청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3년 KNC 건설(뉴질랜드법인)의 브로셔중 주요프로젝트 사진.
특히 이 회사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엘리엇타워’라는 67층짜리 초고층 빌딩을 신축하려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뉴질랜드 일대는 물론, 카타르, 두바이, 태국, 대만, 자카르타 등지에서 대형 건설공사를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이 회사 홈페이지는 공사중(UNDER CONSTRUCTION)이라며 폐쇄됐지만, 이 회사가 2013년 이후 제작한 브로셔에는 2013년까지의 연혁과 함께 뉴질랜드와 중동, 동남아는 물론 국내에서도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허재호 회장 일가가 살고 있는 초호화 아파트 메트로폴리스의 웹사이트.
또 법인설립 신청서, 주주현황 보고서, 이사동의서 등에 나타난 허 회장 부부의 주소지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5성급 호텔식 아파트로 유명한 메트로폴리스 아파트 3305호로 기재돼 있었습니다. 이 아파트는 오클랜드의 35층짜리 초호화 아파트로 33층 이상을 펜트하우스급으로 소개하고 있었으며 허 회장의 집은 33층이었습니다. 허 회장은 이 아파트를 뉴질랜드 대주건설 설립 이전인 2002년 3월 1일 495만 뉴질랜드달러에 매입했으며, 현재도 소유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뉴질랜드 메트로폴리스 아파트. 허재호 전회장은 이 아파트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3305호 펜트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다.
/뉴질랜드 메트로폴리스 아파트 3303호 내부. 허재호 전회장은 이보다 규모가 큰 3305호를 소유하고 있다.
한편 허회장은 지난 2007년 5월 대주건설 명의로 오클랜드 타카푸나의 9 CLIFTON ROAD 주택을 1100만 뉴질랜드 달러에 매입했다는 사실이 뉴질랜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뉴질랜드 언론은 한국의 억만장자 비지니스맨이 오클랜드에서 가장 비싼 집을 사들였으며, 이 집은 가로, 세로가 각각 1㎞에 이르는 대저택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허회장은 이 주택을 허물고 6채의 타운하우스를 건립할 계획이라고 언론들은 전했습니다.
/2007년 5월 허재회 대주그룹 회장의 회사가 1100만달러에 호화주택을 매입했다는 뉴질랜드 헤럴드의 보도.
또 허 회장이 2002년 3월 오클랜드 호화아파트를 매입한 것으로 미뤄 2004년 대주건설에 앞서 이미 2002년에 뉴질랜드에 다른 회사를 설립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허회장이 회삿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이미 부도난 대주건설이 현재도 이 뉴질랜드회사의 주주라는 점 등 새로운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검찰 등 사법당국이 이 부분에 대해 수사할 지 주목됩니다.
한편 외교부는 2011년 6월 홈페이지에 ‘뉴질랜드 개황’의 ‘한국과 뉴질랜드 경제관계’라는 글에서 대주그룹이 3500만 미국 달러를 투자했다고 기재하고 있어서, 대주그룹이 뉴질랜드 투자 사실을 금감원에 보고하지 않았음에도 허 회장 내지 대주그룹의 뉴질랜드 거액 투자설을 상세히 파악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03.27 허재호 전 대주 회장 석방되자마자 뉴질랜드 재산과 지분 제3자에 양도
일당(日當) 노역 5억원’ 판결로 논란이 되고 있는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뉴질랜드에서 16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된 후 가족들의 지분과 이사직을 제3자에게 넘기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뉴질랜드와 한국 검찰의 재산 추적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검찰은 허 전 회장의 국내외 재산을 추적하기 위해 허 전 회장의 형(刑) 집행정지를 결정했다. 허 전 회장은 지난 26일 노역을 멈추고 교도소에서 나왔다.
KNC 엔터테인먼트로 이름을 변경한 대주엔터테인먼트는 뉴질랜드 시각 27일 낮 12시 2분(한국시각 8시 2분) 허 전 회장의 아들로 알려진 스캇허씨가 소유했던 지분 46%를 정애경씨에게 양도했다고 신고했다. 스캇허씨가 소유했던 이 회사 지분 46%는 허 전 회장으로부터 전량 넘겨받은 것이어서 허 전 회장 일가가 뉴질랜드 재산추적을 막기 위해 급히 주주를 변경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이 회사 이사인 허 전 회장의 인척 허숙씨와 이병인 민주평통 뉴질랜드협의회 회장 등 2명의 이사도 조금전 모두 사퇴했다.
/스캇허 지분양도 문서
이병인 이사의 사퇴서는 낮 11시 3분 접수됐으며 허숙 이사의 이사사퇴서는 낮 12시 3분 접수됐다. 또 스캇허로부터 지분 46%를 넘겨받은 정애경씨는 이 법인의 새 이사로 선임됐다는 이사동의서를 11시 17분 뉴질랜드 정부에 접수했다.
대주그룹이 320억원을 투자한 뉴질랜드 주력기업 대주하우징도 주주 1명을 추가로 선임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빅토리아타워개발로 이름을 바꾼 대주하우징은 뉴질랜드시간으로 오늘 낮 11시 12분 허 전 회장의 인척 허숙씨를 새 이사로 선임했다고 뉴질랜드 정부에 신고했다.
/허숙 빅토리아타워 이사 동의서
허숙씨는 빅토리아타워개발의 대주주인 유토피아타워의 이사로도 선임된 것으로 확인됐다. 허숙씨는 조금전인 뉴질랜드시간 오전 11시 13분 주주동의서를 뉴질랜드정부에 제출했다. 유토피아타워는 허 전 회장과 부인 황길순씨가 각각 50%씩의 지분을 가진 회사로 대주하우징(현 빅토리아타워개발)의 지분 76%를 소유한 기업이다. 허 전 회장은 대주건설이 320억원을 투자한 빅토리아타워개발의 지분 76%를 소유하고 있다. 여러차례 지분을 세탁한뒤 2008년 유토피아타워를 설립, 자신의 빅토리아타워개발 지분 전체를 양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