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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다큐9/ 정치1/ ys김영삼 편(황장엽 탈북 비화 외) - 김수한(金守漢) 편

상림은내고향 2021. 4. 21. 20:34

비하인드 다큐9/ 정치1/

■김영삼 편

2015.11.23  YS 금고지기 홍인길 인터뷰

1996년 총선(總選) 때 신한국당에 지원된 이른바「안기부 자금」은 신한국당이 별도로 조성한 정치자금을 안기부 계좌에 넣어 돌린 것이다

1992년 대선(大選) 때 쓰고 남은 돈은 없다

 

● 신한국당에서 내 총무수석 계좌로 보내 준 5억원이 안기부의 국고수표였다. 당시 신한국당 관계자로부터 「(1996년 총선용) 자금을 용광로에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세탁을 위해 안기부라는 용광로에 돈을 넣은 것이다
1988년 총선 때 노무현(盧武鉉) 후보에게 10억원 이상을 지원했다. 돈을 쏟아 부었다.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 부산에 내려와 그때 신세를 갚겠다며 크게 술을 한번 샀다
● 노무현(盧武鉉) 캠프는 노무현 대신 돈을 받을 사람도 없어. 참모들이 3000만원 주면 3000만원 받고, 1억원 주면 1억 받고, 각설이 수준으로 한 거다
● 김현철의 정치자금을 만진 박태중에게 『태중아, 너하고 나하고 둘이는 정치자금으로 제일 먼저 감옥간다.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 청와대 총무수석 시절 야당 사람들에게도 자금을 지원했다.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이 『형님, 야당 아이들 간 키워 주지 마시오』라고 경고했다
●「박지원(朴智元)씨에게 2억원을 주었다」는 說에 대해 『정성을 전한 것이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보여 주라고 박지원에게 편지를 써 줬다』
● 정치자금을 쌓아 두지 않는다는 게 내 돈철학, 정치자금은 내게 3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

 

상도동 시절의 인연

 지난 18일 오후 4. 서울 광화문의 한 음식점으로 홍인길(洪仁吉·61) 前 청와대 총무수석이 성큼 들어섰다. 하늘색 세로 줄무늬 와이셔츠 때문인지 가뜩이나 장신인 그가 더욱 크게 보였다. 洪수석의 키는 187cm이다
  
 
저녁 영업을 준비하던 식당 종업원들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洪仁吉이네』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정치자금 관리라는 비밀스런 작업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체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오』 
  
 
그는 큰 손으로 기자의 손을 오랫동안 잡았다. 자리를 방으로 옮겼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은 여전했다
  
 
기자는 1992년 한 해 동안 金泳三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을 담당했다. 새벽에 상도동을 찾아가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것으로 고단한 정치부 기자의 하루가 시작됐다. 상도동의 아침 메뉴는 소박했다. 밥 한 그릇에 우거짓국, 김치와 갈치 한 토막 정도가 나왔다
  
 
김영삼(金泳三) 최고위원은 출근하려고 2층에서 내려와 응접실을 지나가면서, ()을 치고 있는 20~30명의 기자들을 향해 『수고 많아요』라고 한마디 던지고 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식당에서 기자들과 어울려 아침 밥을 먹고, 응접실에서 기자들을 붙들고 상도동의 입장을 전하는 일은 李源宗(이원종) 前 정무수석의 몫이었다
  
 
「혈죽(血竹: 핏대라는 말을 한자화한 것임)」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원종(李源宗) 당시 민자당 부()대변인은 기자들과의 언쟁(言爭)을 불사했다. 기자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일은 洪仁吉 비서의 몫이었다. 洪비서는 늘 여유가 있었고, 실없는 농담을 잘했다. 피튀기는 치열한 정치판을 소요(逍遙)하는 듯한 느낌을 줬다
  
 
부잣집 외아들로 양지에서 자란 「보스」와 분위기가 흡사했다
  
 
홍 前 수석과 한참 동안 그 시절 이야기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

「김영삼 자금 관리인」, 「김영삼의 금고지기」

 

  이런 수식어가 홍 前 수석의 이름 앞에 늘 따라 붙는다. 20代 초반부터 국회의원 김영삼의 지역구(부산 서구)를 관리했고,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초 서울로 올라와 金泳三의 정치자금을 본격적으로 관리했다. 40년 가까이 「김영삼의 돈」을 주무른 것이다
  
  1993
년 金泳三 정권 출범과 함께 총무수석 비서관으로서 청와대 살림과 金泳三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를 맡았다. 1996 4월 총선에서 정치적 고향인 부산 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보비리와 관련해서 1997 2월 처음 구속됐고, 刑 집행 정지 중에 청구건설의 대구방송 인허가 비리와 관련해서 다시 한번 옥고를 치렀다. 그가 첫 구속되기 직전에 여동생이 사망(1997 2)하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님 상(:1998 3)과 어머니 상(1999 8)을 치러야 하는 시련이 밀어닥쳤다
  
  2000
년 광복절 사면으로 석방돼 36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쳤다
  
 
홍 前 수석은 지난해 연말, 거처를 부산 서구로 옮겼다. 몇몇 주간지에는 「홍인길 前 수석이 부산 서구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홍 前 수석은 『국민들이 알아서 좋은 일이 있고, 모르고 그냥 가는 게 좋을 경우도 있다』, 『여러 사람에게 累()가 된다』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그를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며 서울로 모시는 데 상당히 힘이 들었다
  
 
홍 前 수석은 인터뷰에 응하게 된 심경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건 정치를 시작하려는 게 아니고 낙향(落鄕)한 겁니다. 고향은 거제지만, 부산이 제2의 고향이거든요. 총선 출마 안 한다고 주변에 다 얘기를 했어요. 정치를 접었고, 김영삼 시대도 끝나고 김대중 시대도 끝났으니까, 한번 옛날 얘기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요』 
  
 
오후 4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9시까지 이어졌다
  
 
홍 前 수석은 1970년대 신민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민주화 투쟁을 흥겹게 얘기했다. 김영삼씨의 40代 기수론 제창과 1971년 대선(大選), 신민당 당권(黨權) 장악, 강력한 대여(對與) 투쟁…. 그때가 가장 순수했고,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다
  
  1960
년대, 1970년대의 일에 대해서 그는 많은 얘기를 했다. 하지만 기자는 홍 前 수석이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비서로 상경한 1980년 이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터뷰 기사를 정리했다. 가급적이면 그의 主특기였던 정치자금 문제로 주제를 압축했다.   

  
 
『홍길동이가 전화 걸었다고 해도 바꿔라. 光化門이 걸었다고 하면 바꾸지 마라』

  인터뷰를 하는 동안 기자를 부르는 홍 前 수석의 호칭이 『金차장』에서 『金기자』로, 그리고 『연광씨』로 변해 갔다. 홍수석의 어투를 그대로 살렸다
  
 
―왜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습니까
 
『정치를 오래 한 선배들을 보면 마지막에 모양이 안 좋더라고. 끝까지 뭔가 한 자리 얻어 보겠다고 서울을 떠나지 않는 게 보기가 안 좋았어요. 「정치를 끝내면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평소 생각대로 실천했어요』 
  
 
―주변에서 총선 출마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요. 소위 「열린우리당」이 洪수석에게 공을 꽤 들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왜 없겠어요. 작년 11월에 마음을 다 정리했어요. 참모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나는 떠날 때가 됐다. 떠날 때를 알아야지, 그걸 모르고 계속하겠다고 난리 치는 건 내 스타일에 안 맞다」고 했어요』 
  
 
―평생 정치에 몸을 담았는데,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정치는 재미가 있어야 해요. 「오야붕」모시고 대통령까지 만들었으면 됐지, 지금 내가 국회에 가서 무슨 영화를 보겠어. 조금 있으면 홍위병 아이들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짤라라」고 난리를 칠 거 아니야. 내가 그 친구들 손에서 생살여탈(生殺與奪)이 결정되는 꼴이 돼야겠어요. 딱 접었지. 마음이 아주 편해요. 잘 한 것 같아』 
  
 
홍 前 수석은 『달라진 시대에 이제 내 스타일은 맞질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평생 「안 됩니다」는 소리를 안 하고 살았어요. 누가 찾아와서 어렵다고 얘기하면 「도와드려야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고 했지, 「절대 안 된다」, 「못하겠다」고 하질 않았어요. 나는 사람을 가려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 비서들에게 「홍길동이가 전화했다고 해도 바꿔라. 그렇지만 광화문(光化門)이 전화했다고 하면 바꾸지 말라」고 했어요. 아무나 다 바꾸라는 얘기지. 홍인길이를 찾는 사람한테 「왜 전화 걸었습니까」, 「용건이 뭡니까」 묻지 말라고 했어요. 청와대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한보비리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과는 친형제 같은 사이

  ―홍수석이 김영삼 前 대통령의 6촌 동생뻘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하게 어떤 관계입니까
 
『우리 할머니가 마산 김홍조(金洪祚) 어른의 제일 큰 고모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홍조翁() 아버지의 누나지. 그러니까 우리 부친하고 홍조翁하고 고종사촌이에요. 金대통령이 재종형(再從兄·6촌형)이에요. 홍조翁도 외동아들이고, 우리 아버지도 외동아들이었어요. 같은 마을에서 살고, 어장(漁場)이 붙어 있어서 金대통령하고 나하고는 6촌이 아니라 친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예요. 뭐든지 다 터놓고 얘기했어요』 
  
 
―한보 청문회 때 야당 의원들이 「홍수석이 김홍조翁의 어장을 관리했다」, 「오래 전부터 김영삼 집안의 재산 관리인이다」고 주장을 했죠. 김영삼 대통령 댁의 재산을 관리한 적이 있습니까
 
『그때 야당 의원들이 나를 「청지기다, 집사다」하고 깎아내렸어요. 나는 스스로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라고 자부하고 살아왔어요. 정치인 김영삼의 정치자금을 관리했지, 그 댁 어장을 관리해 주고 그런 일은 없었어요. 지금은 내 조카가 홍조翁 어장을 같이 봐주고 있어요』 
  
 
―김영삼 대통령 집 어장하고, 홍수석 댁 어장하고 어느 쪽이 컸습니까
 
『홍조翁 어장이 컸어요. 그런데 정치망(定置網: 고기떼가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쳐두었다가 거둬들이는 방식) 어장이니까, 어획량은 얼마나 목이 좋아서 많이 잡느냐에 달렸어요. 그것 가지고 노인들이 평생 사셨어요. 1960년대에 그 재산을 팔아서 부산이나 마산으로 나갔으면 아마 큰부자가 됐을 거예요. 두 양반들이 외동이니까 고향을 못 떠난 거지』 
  
 
―김영삼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은 언제 부터입니까
 
『거제(巨濟)에서 부산으로 올라와서 김영삼 대통령의 사촌인 김영호씨 댁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동아大 법학과에 다닐 때부터 金총재의 부산 서구 선거를 도왔어요. 아르바이트로 한 게 아니고 서석재(前 총무처 장관) 형하고 본격적으로 뛰었어요. 金총재는 나를 완전히 믿고 다 맡긴 거지. 조개표 석유를 했던 신중달씨, 동아大 교수를 한 박규상씨(후일 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와 붙었을 때는 위태위태했어요. 정말 힘겨운 싸움이었어요. 金총재가 이 두 고비를 넘기고, 7選·8選의 거물로, 대통령으로 갈 수 있었던 겁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부친이 사 준 집을 팔아서 총선 선거자금을 쓰고 나면, 아버지가 또 집을 사 주셨다』고 했습니다. 홍수석은 어땠습니까
 
『나도 기본적으로 재산이 있으니까, 큰 아쉬움 없이 활동했지. 부산에서 사업하는 친구들이 성심껏 도와줬고. 남한테 「힘들다. 얼마 도와달라」고 해보지 않았어요. 민주화 투쟁한다는 명분도 있었고, YS 20代부터 국회의원 하면서 쌓아 놓은 단단한 인맥이 있으니까, 김대중씨 돈을 마련한 노갑이 형님(권노갑 前 민주당 고문)에 비하면 나는 별로 고생을 안 한 편이에요』  

  
 
상도동 비서들에게 월급을 처음으로 지급

 홍 前 수석은 1980년 봄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김영삼의 정치자금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총재 생일 때 가족들이 다 모였어요. 金총재 생일 이틀 뒤가 손명순 여사 생일이어서 겸사겸사 많이 와요. 金총재가 생일날 「인길이는 이제 여기 있어라」고 해서 눌러 앉았어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김영삼 시대가 왔다」는 분위기가 확 돌았어요. 나도 金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홍 前 수석이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곧바로 「서울의 봄」이 깨져 버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꿈은 다시 멀어졌다홍 前 수석은 『오야붕이 연금되는 바람에 부산으로 갈 수도 없고, 서울에 있어도 낙이 없는 처지가 됐다』고 했다
  
 
상도동 자택에서 연금된 김영삼의 곁을 지킨 사람은 홍인길과 장학로(張學魯) 두 비서뿐이었다. 집권 가능성을 보고 상도동으로 밀려들던 돈은 바짝 말라 버렸다
  
 
『현대자동차에서 월부금을 안 낸다고, 金총재 차()를 압류하겠다고 통지를 했어요. 신민당의 문정수(文正秀) 총무국장에게 「왜 자동차 월부금을 안 냈느냐」고 물었더니, 「좋은 시절에 그쪽에서 할부금을 내지 말라고 해서 안 냈다」고 해요. 꽃집, 술집 주인들이 외상을 받아야 하는데 상도동 집에 들어올 수 없으니까, 내용증명을 보냈어요. 이런 사정인데 부산으로 내려갈 수가 있겠습니까? 金총재가 제일 큰 시련을 맞고 있는데 이건 넘기고 내려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지. 고생 많이 했어요』 
  
 
홍 前 수석이 상도동 캠프에 합류해서 제일 첫 번째 한 일은 金총재의 개인비서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다. 김영삼씨가 단식투쟁(1983 5)을 벌이고, 단식 1주년을 기념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해 정치를 본격화한 이후에는 비서들에 대한 월급 지급이 자리를 제대로 잡았다고 한다
  
 
1980년에 上道洞에 와보니까 비서들한테 월급을 안 주고 있어요. 각자가 알아서 쓰는 거야. 내가 「월급을 줘야 한다. 주인과 고용인 관계는 아니지만, 정치지망생이라도 밥은 먹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걱정 안 하고 일할 수 있다. 또 비서들이 각자 돈을 만들면 말썽의 소지가 많다」고 했어요. (金泳三 대통령이) 「돈이 어디 있나」고 해요. 「돈은 만들면 됩니다. 비서들 월급은 반드시 줘야 합니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비서들 월급을 줬어요』 
  
 
―월급을 주는 비서가 몇 명이나 됐습니까
 
1980년 봄에 열 명 정도였고, 민추협할 때는 더 많았고. 제일 어려웠던 때에도 돈을 마련해서 비서들에게 월급을 줬어요』 
  
 
―그 무렵 상도동의 돈 사정은 어땠습니까
 
『선거를 치르면서 전국구를 팔았다가, 사기당하고 그런 험한 꼴은 안 당했어요. 金총재가 제도권 안에서 투쟁을 했고, 어려운 시기에 국민과 함께 살아왔잖아요. 그게 큰 힘이지』 
  
 
1990년의 3黨합당 전까지는 송두호(宋斗灝) 前 의원, 엄기현(嚴基鉉) 회장, 전병기(田秉奇) 사장 같은 부산 인맥들이 김영삼씨의 주된 정치자금원이었죠
 
『그 양반들은 간판으로 내세운 거고. 정치하면서 맥이 닿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도와줬어요. 경남高 출신들이 얼마나 돼요. 정당을 이끌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합니까. 경남高, 서울大 인맥만은 아니었어요. 좀더 폭넓은 재정지원자 그룹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YS는 돈 떨어지면 기가 팍 죽어』

  1993 3월 청와대 총무수석이 될 때까지, 洪수석 개인명의의 은행 계좌가 하나도 없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직원 계좌에 넣어 두고 쓰면 되지, 내 명의가 뭐하러 필요해요. 다 나눠 줄 건데』 
  
 
―金泳三 대통령도 돈을 쌓아 놓고 체계적으로 지출하는 타입은 아니죠
 
『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어요. 아무 대책이 없는 양반이야. 돈을 모르고, 있으면 다 나눠 주는 스타일이에요. 주머니에 한 시간도 돈을 못 갖고 있어요. 金대통령은 약속이 오후 117분에 한 명, 123분에 한 명 이런 식으로 촘촘하게 정해져 있어요. 돈 있으면 만나는 순서대로 다 나눠줘요. 「대한민국을 다스릴 사람이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배짱으로 살아온 분이에요. 그래도 이 양반이 돈이 떨어지면, 기가 팍 죽어요. 정치인은 힘이 있으면 돈이 따라요. 돈이 마른다는 건 세가 약해졌다는 얘기지』 
  
 
―상도동 캠프에서 돈을 만진 사람은 洪수석 하나라고 보면 됩니까
 
『그래요. 1987년에 大選을 치르고, 그 후에 통일민주당을 이끌었지만, 3黨합당(1990) 이후 (상도동의) 정치자금 규모가 커졌어요. 내가 감옥 가고 고생을 좀 했지만, 「洪仁吉이 정치자금을 다 받았다. 김영삼이는 돈 안 받는다」는 인식이 보통사람들 사이에도 박혀 있잖아요. 지금 김영삼 대통령이 돈에 대해서 얼마나 편한 위치예요. 요즈음 큰소리 빵빵 치는 게 돈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김영삼 대통령이 들어오고 나가는 정치자금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합니까. 결산(決算)을 한다고나 할까
 
『누가 왔다는 건 얘길 하죠. 「오야붕」한테 반드시 얘기를 해요. 안 하면 큰일 나지. 「오늘 金회장하고 누구누구가 왔다갔다」고 하면, 돈이 들어왔겠다고 짐작하는 거지』 
  
 
―김영삼 대통령은 누가 와서 돈을 주고 갔다는 정도만 파악하고 있는 겁니까
 
『누가 도와줬다는 걸 다 기억하지.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하지만 정확한 수입·지출 내역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도 보고 안 하고, 모르는 거지』


 
『태중아, 너하고 나는 제일 먼저 감옥 간다』

 1980년대에 이미 수서(水西)사건 등으로 정치인들이 수뢰혐의로 심심치 않게 구속됐습니다. 큰 덩어리의 정치자금을 만지면서 「내가 정치자금을 만지다가 큰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까
 
『내가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있을 때 장모님 칠순(七旬)을 맞았어요. 김해(金海)에서 잔치를 했는데 현철이가 왔어요. 金爀珪(前 경남지사), 朴淵次(태광실업 회장, 盧武鉉 대통령의 후원회장 강금원씨의 용인 땅을 매입했다)가 오고, 현철이 친구 박태중이도 왔어요. 내가 태중이한테 「태중아, 너하고 나하고는 정치자금으로 제일 먼저 감옥에 들어간다. 조심해라」고 얘기를 했어요. 나중에 박태중이 청주교도소에서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 「아저씨, 그때 참 기분이 나빴는데, 아저씨 말이 어찌 그리 맞았나 싶습니다. 그때 어떻게 내가 감옥에 갈 줄 알고 계셨습니까」라고』 
  
  (
박태중씨는 金泳三씨의 사조직인 「나라사랑운동본부」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金泳三 前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의 大選殘金 120억원을 관리했다
  
 
―정치자금을 만지는 게 위태로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법을 넘어섰고, 잘못된 일이니까…. 하지만 수요가 있는데 공급이 있어야 할 것 아니오. 하루 아침에 딱 끊을 수가 있나. 누군가 공급을 해야 했고, 내가 그 일을 한 거지』    

  
 
YS 『인길아, 니 조심해라』

  ―金泳三 대통령은 1992 12월 大選에서 승리한 후 곧 바로 『앞으로 재벌들로부터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與野 정당들은 大選자금 비리를 놓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金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일절 안 받겠다」고 선언하면서, 洪수석에게 앞으로 정치자금에서 손을 떼라고 지시했습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인길아, 내가 앞으로 일절 정치자금을 안 받는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딴 사람은 어떡 하라는 겁니까」하고 물었어요. 金대통령이 「나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못 한다」고 그래. 그 얘기야 맞지. 당신이야 대통령까지 됐으니까,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그러면 金大中씨는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하고 大選을 치르겠어. 남 골탕 먹이는 일 비슷하게 되는 것 아니오. 金대통령은 계속 「나 아니면 아무도 못 한다」고만 그래. 그러면서 「인길아, 니 조심해라. 니가 받으면 내가 받았다고 생각한다. 니는 조심해라」고 당부를 해요』 
  
 
―뭐라고 그랬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지. 金대통령은 그때 「이 나라와 정치를 내가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에 불타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게 하루 아침에 되나. 앞으로 선거가 수도 없이 있고, 우리 사람들을 당선시켜야 하는데…. 돈 안 쓰면 정치인들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선거판이 하루 아침에 깨끗해집니까…』 
  
 
―총무수석으로 정치자금 조달을 계속한 겁니까
 
『그때 대통령 기밀비가 한 해에 12억원쯤 되는데 여기서 10%쯤 가져와서 내가 썼어요. 축의금도 나가지, 조의금도 내야지, 예산으로는 되지를 않아요. 초창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이 지방에 갔다왔다며, 올린 서류를 보니까 전부 여관에서 잔 걸로 돼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정말 여관에서 잡니까? 호텔에서 자지. 가서 지방 유지에게 신세지는 거예요. 그러고 무슨 民情(민정) 조사가 되겠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쓴 대로 다 올려라. 내가 처리한다」고 했어요. 크게 돈을 만든 건 아니고, 청와대 살림하고, 정치하는 후배들 조금 도와주는 정도였어요. 돈을 쌓아 놓고 한 건 아니고, 국정운영비하고 합쳐서 고비고비 막았어요』 』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 받겠다」는 金泳三 대통령 선언과 돈을 써야 하는 현실의 틈새를 洪수석이 메웠군요
 
『「돈 안 쓰는 정치한다」고 말만 하면 정치가 금방 깨끗해지나. 되질 않아요. 나는 이런 비유를 종종 합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 손에 쥔 사탕을 뺏으려고 해봐라. 아이가 사탕을 더 세게 움켜 잡는다. 그러면 項羽(항우)장사도 펴질 못한다」. 정치자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살 달래 가면서 뺏아야 합니다』 
  
 
―「金泳三 청와대」를 5년간 출입했던 선배기자로부터 『청와대의 수석들과 주요 비서관들이 洪仁吉 수석에게서 돈을 타 썼다』, 『洪수석이 돈 관리를 전담했기 때문에 다른 수석들이 검은돈의 유혹에서 벗어난 측면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석비서관들에게 얼마씩이나 지원했습니까
 
『비서실장에게 보고도 안 하고 수석실마다 한 달에 500~1000만원씩 보조했어요. 그래도 그거 가지고 되나. 정무수석실은 다른 수석실보다 훨씬 더 많이 지원했어요. 정무수석이 사람 만나는 자리니까. 그리고 공보수석이 멍청하게 제 방이나 지키고 앉아 있으면, 국정 홍보가 안 돼요. 내가 알아서 도왔지』  


 
金正男 수석, 『洪수석, 미안한데 다 떨어졌다』

 ―경제수석실도 지원했습니까
 
『韓利憲씨가 경제수석으로 왔을 때 내가 「당신 기분 나쁘겠지만 한마디 해야겠다. 재벌들이 찾아와서 용돈 쓰라고 돈 준다고 절대로 받지 마라」고 했어요. 韓수석이 「그러면 경제수석실에서 쓸 돈은 형님이 갖다 주십시오」라고 해, 「그래, 그건 내가 하겠다」고 했어요(한이헌씨는 1994 10월부터 1996 2월까지 경제수석으로 근무했다). 金正男 교육문화 수석은 在野 출신 아닙니까? 그 사람한테 누가 10원 한푼 갖다 주겠어요. 그 밑에 김영준이라고 비서관이 在野를 담당했는데, 내가 「在野 사람들 만나면 밥 사 주고, 차비라도 좀 주라」고 했어요. 딴 수석실이야 얻어 먹을 데라도 있지만, 교육문화수석실은 그런 형편이 아니거든. 金수석이 참 순수해. 그 양반이 누구한테 손 벌릴 사람이 아니잖아요. 수석회의 끝나고 슬며시 내 방에 내려와서 「洪수석, 미안한데 다 떨어졌어」라고 얘기해』 
  
 
―上道洞의 오랜 家臣인 張學魯 부속실장이 1996년에 수뢰혐의로 구속됐죠. 金泳三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이었는데
 
『참 미련한 짓을 한 거지. 지가 뭐하러 돈을 모으나』 
  
 
1992년 大選 때는 선대위원장을 맡기로 했던 朴泰俊 최고위원이 선거 직전에 탈당해서 자금 모금이 힘들었죠
 
『돈도 돈이지만 마음 고생을 많이 했죠. 鄭周永(정주영), 朴哲彦(박철언), 金龍煥(김용환) 의원 등이 민자당 주변을 맴돌면서 새로 黨을 만들자고 朴泰俊씨를 집요하게 공략했어요. 鄭石謨씨가 일본에 가 있는 朴泰俊씨에게서 편지를 하나 받아 왔어요. 「마음으로 巨山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자필 서신이었어요. 내가 이걸 공개해 버리고, 鄭石謨 의원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하도 급해서 공개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고 했어요. 鄭의원이 「나라도 그 처지였으면 공개했겠다」고 양해를 해줬어요』 
  
 
―민자당이 집행한 1992년 大選자금의 총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전부 조직 가동비로 쓰였어요. 장외 집회하면 버스 전세 내고, 사람들 1인당 점심값 얼마씩. 그런 식으로 따져 보면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있는 거지』 
  
 
―막판에 지구당별로 5~10억씩을 내려보냈는데, 이것만 해도 민자당의 조직 가동비가 최소한 3000~4000억원이 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金大中·鄭周永 후보도 똑같이 조직을 동원하는 선거전을 펼쳤으니까, 상당한 돈을 썼어요. 鄭周永씨야 재벌이니까. 세 후보가 돌아다닌 유세 횟수하고, 동원한 청중 규모를 생각해 보면 金泳三 후보만 천문학적인 돈을 쓴 건 아니에요. 그때만 해도 벌써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에요. 지금 잣대로 평가하는 건 무리입니다』


 
徐廷友씨가 감옥에 간 까닭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로 한 朴泰俊씨가 탈당하는 바람에 민자당의 대선자금 조달이 난관에 봉착했고, 金泳三 후보가 직접 나선 걸로 압니다. 그래서 金泳三 후보가 지방에서 선거유세를 하다가도, 저녁이면 꼭 서울에 올라와서 재벌 오너들을 만났던 것으로 압니다. 재벌들이 정치자금을 내면서, 보스와의 對面 접촉을 반드시 원한다면서요
  
 
『「절 모르고, 시주 안 한다」는 말이 있어요. 주지 스님이 내가 시주했다는 걸 알아야, 나중에 나를 위해 念佛(염불)해 줄 것 아닙니까. 주지 스님과 얼굴 마주치지 않고, 큰돈 시주하는 사람이 있나요. 보스를 못 만나면 그 다음 실력자라도 만나야 돈을 냅니다. 사무총장이 黨의 살림을 맡는 2인자라고 하지만, 그건 잠깐 2인자예요. 徐廷友(서정우: 李會昌 후보의 법률특보)가 왜 감옥에 갔느냐? 徐廷友씨가 李會昌 후보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니까, 평생을 함께 갈 사람이니까 재벌들이 마음 놓고 돈을 건넨 겁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 때 徐廷友를 통하면 반드시 李會昌에게 연결될 테니까
  
 
재벌들이 盧武鉉 후보를 싫어한 측면도 있지만, 눈을 씻고 둘러봐도 盧후보 주변에 믿고 큰돈을 줄 2인자가 없는 거야. 자기들끼리는 李光宰·安熙正이를 「왼팔, 오른팔」이라고 하지만, 재벌들이 그런 어린 친구들을 어떻게 믿고 돈을 주겠어. 그래서 李光宰·安熙正이가 대선자금이라고 받은 돈이 몇천만원, 몇억 정도밖에 안 되는 거요』 
  
 
―「상도동은 洪仁吉, 동교동은 權魯甲」이 정도가 돼야 큰돈이 움직이는 거군요
 
『그렇지. 그래야 돈을 확실하게 주지. 지금 바빠서 (兩金을) 못 만나지만, 적어도 洪仁吉이나 權魯甲이한테 돈을 주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주지가 나를 위해 염불해 준다」는 확신이 서는 거지』 
  
 
1992년 민자당 대선자금의 全貌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으로 洪수석이 늘 지목됩니다
 
『다른 게 있는지 모르지만, 黨에 모였던 건 다 알지. 총무보좌役이었으니까, 나는 선거 때 어디 가지도 않고, 돈 흐름만 챙겼으니까』

  
 
『신한국당, 1996년 총선자금 별도로 모집』

  ―청와대에 들어갈 때 가지고 들어간 대선잔금이 얼마나 됐습니까
 
『청와대에 빈손으로 들어갔어요』 
  
  1992
년과 대선자금과 관련해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1996년 총선 직전 안기부 계좌에서 신한국당으로 넘어간 돈의 성격이다. 2003 923일 서울지법은 「강삼재 의원 등이 안기부 예산을 특수 활동비 명목으로 인출해 차명계좌에 넣어 세탁한 뒤 1996년 신한국당 총선에서 사용한 점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姜三載 의원은 판결이 나오자 『안기부 예산을 黨 자금으로 쓴 적이 없다』고 밝힌 뒤 의원직을 사퇴했다. 지난해 연말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안기부 예산이 빠져나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자체 감사결과를 보고했다
  
 
그렇다면 1심 재판부가 「안기부 예산」이라고 판결한 856억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政街에는 「金泳三 대통령이 1992년 때 쓰다 남긴, 대선잔금을 안기부 계좌에 넣었고, 이를 신한국당이 사용했다」는 大選잔금說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였다
  
 
한나라당 崔秉烈 대표는 『金泳三 대통령이 입을 열어야 한다』며 고해성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洪 前 수석은 『그 돈은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여러 번 못을 박았다
  
 
―안기부 계좌에서 나온 돈이 金泳三 대통령의 大選잔금인 게 분명한 것 아닙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月刊朝鮮 2001 2월호 인터뷰에서 『1992년 大選 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왔는데 무엇 때문에 안기부 돈을 받느냐』고 밝혀, 「大選잔금설」이 정설로 굳어졌지 않습니까
  
 
『아니지. 그건 오해예요. 1992년 大選을 치르고 남은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현철이가 1992년 私조직을 운영하다가 남긴 殘金 120억원은 검찰 수사에서 다 밝혀졌잖아요. 대선잔금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은 그게 전부입니다. 나하고 金榮龜(김영구) 사무총장이 관리했던 민자당 대선 자금에서는 남은 게 없어요. 끝날 때 「實彈(실탄)」을 다 썼어요. 金대통령이 정치 인생의 마지막 승부인데, 선거자금을 남겨 두겠어요. 선거 2~3일 앞두고 지역구에 내려 보낸 돈은 지구당 위원장들이 다 쓰지도 못했어요. 그 사람들이 대선잔금 재미를 봤지』  
 


 
총무수석에게 온 신한국당 돈 5억이 안기부 수표

―대선用으로 모은 돈을 消盡(소진)했더라도,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재벌들로부터 받은 「당선 축하금」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당선되고 며칠 뒤에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 받겠다」고 선언했는데, 어떻게 재벌들한테 축하금을 받아요. 대선자금을 만진 金榮龜 사무총장이 살아 있고, 내가 있는데 대선잔금을 속일 수가 있나. 1992년 대선잔금은 절대 없습니다』 
  
 
―대선잔금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큰돈이 안기부 계좌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신한국당이 1996년 총선을 위해 총선用으로 정치자금을 별도로 모은 겁니다. 그 돈은 절대로 안기부 예산이 아니고, 1992년 대선잔금도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신한국당이 별도로 모은 정치자금이라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총선用으로 정치자금을 모은 거지. 받아서 세탁한다고 안기부 계좌에 넣었고, 그걸 꺼내 쓴 거예요. 대통령은 안 받는다고 했지만, 黨은 선거 치를 자금이 필요했을 것 아닙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안 받는데, 신한국당이 1000억원에 가까운 정치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됩니까
 
『되지요. 집권당인데. 야당 후보인 李會昌씨가 맑아졌다는 2002년 大選 때도 차떼기로 수백억원씩 거둔 것 봤잖아요』 
  
 
―그렇다면 金泳三 대통령이 『「안기부 총선자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다. 대선잔금이 아니고 신한국당이 모은 돈이다』고 밝혀야 할 것 아닙니까
 
『자신이 총재로 있는 黨이, 「나는 돈 안받는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모금했다고 밝혀서 金泳三 대통령에게 무슨 보탬이 됩니까. 도덕성에 흠집만 나는 거지. 그래서 가만있는 거예요』 
  
 
―洪수석도 2001 1월 검찰에 불려가서 1996년 이른바 「안기부 예산의 총선자금 전용」과 관련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1995년 안기부 자금 수억원이 청와대로 유입됐고, 총무수석실 직원 명의로 배서된 뒤 운영경비로 쓰였다」고 돼 있습니다. 어떤 점을 추궁받았습니까
 
『검찰이 「당신이 청와대 근무할 때 신한국당의 돈 5억원이 총무수석 계좌로 입금됐다」고 추궁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요. 총무수석 계좌에 돈이 들어오고 나간 기록이 있으니, 내가 쓴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내가 받아서 썼다. 정치자금이었고 10원도 私用(사용)한 게 없다」고 했어요. 받은 5억원 가운데 1억원이 어디로 갔는지 구멍이 났는데, 검찰이 이건 신경도 쓰질 않았어요』 
  
 
―그러면 신한국당에서 洪수석에게 준 5억원이 안기부의 國庫 수표였다는 얘기입니까
 
『그래서 검찰이 나를 조사한 거지. 청와대 있을 때 黨에 있는 사람한테서 「용광로에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신한국당이 총선 자금을 거둔 뒤에 돈세탁을 하려고, 「용광로」인 안기부 계좌에 넣었다가 꺼내 쓴 걸로 짐작하고 있어요』 
  
 
―신한국당이 1996년용 총선자금을 만들 때 간여했습니까
 
『그때 나는 부산에서 출마해 내 선거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한보 대출비리의 「몸통」

한국경제는 IMF 경제위기로 돌진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번 파열음을 내고 주저 앉았다. 한국경제가 만난 큰 암초 중의 하나가 한보 대출비리 사건이었다. 1997년 벽두에 신한국당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提高하기 위한 「노동법 개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의 후유증으로 李洪九(이홍구) 대표가 사표를 냈고, 金泳三 정권은 레임덕에 빠졌다
  
 
姜慶植 경제부총리는 IMF 경제위기가 올 때까지 「금융개혁 법안」 통과를 위해 종종걸음을 쳤다. 노동법 개정에, 금융개혁 법안에 저항했던 金大中씨와 야당은 金泳三 대통령을 경제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1997
년 한보 대출비리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들을 보면, 언론과 야당은 정태수 회장에게 5조원의 시설자금 지원을 가능케 한 「몸통」을 찾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우리 사회는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야, 前근대적인 한국기업과 은행의 금융관행이 한국경제를 망가뜨린 「몸통」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洪仁吉씨는 「1995 1월부터 1996년말까지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1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대체로 시인했고, 이 죄로 대법원에서 징역 6, 추징금 10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검찰수사와 국회 한보청문회를 통해, 한보 대출비리의 「몸통」으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그는 왜 자신이 한보사건의 몸통으로 비난받아야 하는지 지금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행장들 참, 웃기는 사람들이야. 돈 장사하는 사람들이 따져 보고 돈을 줘야지. 내가 뭘 알아요. 허허벌판에 말뚝 꽂을 때는 돈을 5조원이나 대줬다가, 공장 다 짓고 운영자금 3000억원을 안 주는 게 말이 됩니까. 애당초 시설자금을 주지 말던가. 한보를 부도 내서 우리 경제가 얼마나 손해를 봤어요』 
  
 
―洪수석이 은행장들에게 대출 압력 전화를 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도와줄 수 있으면 좀 도와주라고 한 거지. 은행장들이 검찰에서, 청문회에서 「洪수석 전화를 압력으로는 생각 안했다」고 얘기했잖아요』 
  
 
―한보 청문회에서 정태수 회장이 『洪의원 외에는 누구에게도 대출을 부탁한 적이 없다. 洪의원에게 부탁해서 은행장을 통해 대출이 이뤄졌기 때문에 洪의원을 하늘같이 생각했다』고 말했죠
 
『누가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하면, 내가 「안 된다」는 소리를 못 해요. 정태수 회장 얘기를 듣고, 대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어요. 대출 청탁 代價로 돈을 받은 게 아닙니다. 은행장들한테 「3000억원 대출을 안 해줘서, 5조원을 날리는 건 내가 생각해도 상식에 어긋난다」고 얘기했어요. 그 정도 한 거예요
  
  3000
억원만 추가 대출하면 되는데, 李錫采 경제수석이 1997 2월에 그대로 부도를 내버린 것 아니오. 나는 「부도내면 안 된다」고 얘기했어요. 야당은 「현철이가 한보비리의 배후다」고 물고 늘어졌어요. 李錫采 수석에게 「현철이가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한보를 죽일 필요까지야 있느냐」고 했어요. 결국 나라가 풍비박산 난 거 아니오. 생각해 보세요. 한보를 그렇게 처리한 게 잘한 건지』


 
깃털

 1997 211일 구속되기 직전에 金泳三 대통령을 만나 억울함을 호소했다면서요
 
『청와대는 안 가고 신한국당 姜三載 사무총장을 만났어요. 姜총장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위로를 해요. 출두하기 전날 서울 양천구의 한 호텔로 李源宗 정무수석을 불렀어요. 「정태수한테 받은 돈 내가 썼나?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냐. 내가 내일 검찰에 나간다. 네가 앞장을 서라」고 하니까, 李수석이 벌벌 떨더라고. 「내가 흙탕물에 손 짚고 발 짚고 있을 때 내 등 밟고 지나간 놈은 깨끗하고, 흙탕물에 있던 나만 나쁜 놈이냐. 어른 그렇게 모시면 안 된다」고 큰 소리를 쳤지. (1999 8) 어머니 喪家에 찾아왔기에 다 용서했어요』 
  
 
―구속되기 직전에 『나는 깃털일 뿐』이라는 말을 해서 人口에 두고두고 膾炙(회자)됐죠.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하게 된 겁니까
 
『구속되기 딱 1주일 전(1997 25)에 여동생 喪을 당해 울산으로 내려갔어요(洪 前 수석의 여동생 홍길순씨의 남편이 당시 울산시장이었던 沈完求씨다). 시신을 입관도 못 했는데 기자들이 「좀 보자」고 난리야. 기자들이 「당신이 실세로 은행들에 압력을 넣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어요. 「난 이미 1995 12월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런데 무슨 實勢냐. 권력이란 내 손 안에 있을 때 힘이 있는 것이지,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깃털보다 더 가벼운 것이다」고 했어요. 그게 어떻게 「나는 몸통이 아니고 깃털이다」고 보도가 됐어요』 
  
 
―깃털 얘기는 평소에 생각했던 겁니까
 
『내가 고스톱하고, 포커할 때 하던 얘기예요. 친구들이 「어이 實勢가 돈 좀 풀어라」 하면, 「이 사람들아, 내가 권력 핵심에서 떠난 지가 언젠데 實勢야. 나는 지금 깃털처럼 가벼워」라고 대꾸를 했어요. 그 얘기 그대로 한 거예요』 
  
 
―그 깃털 발언 때문에 「洪仁吉은 깃털이고, 몸통은 따로 있다」는 얘기가 힘을 얻었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비겁하더라도 「나는 깃털이고, 實勢는 따로 있다」는 얘기를 하겠어요. 목숨이 끊어져도 그런 변명은 안 하지. 언론이 이 洪仁吉을 한없이 왜소하게 만들었어요』 
  
 
―동교동에서 정치자금을 만진 사람이 權魯甲 前 고문인데, 두 분이 친하게 지냈습니까
 
『인의동에 신민당 당사를 내고, 金大中씨가 (1984) 미국에서 귀국하고 오면서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仁石(李敏雨 당시 신민당 총재)에게 선물할 때 둘이 상의를 해서 비슷한 가격으로 맞췄어요. 그전에 민주화 투쟁할 때도 친했고. 처음 만났을 때 權고문이 「洪비서, 내 나이가 몇이나 돼 보이노」하고 물은 기억이 나요. 權고문이 상도동계의 黃明秀(황명수·前 신한국당 사무총장)씨하고 나이가 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나보다 열두 살이나 나이가 많은데도, 워낙 童顔(동안)이시잖아요』   


 
權魯甲과 朴智元

  ―權魯甲 前 고문이 『야당 시절 하도 정권의 탄압이 심해서, 수첩에 아무 기록을 안 하고, 정치자금 주는 사람의 전화번호, 약속장소, 약속시간을 전부 외웠다』고 하더군요. 洪수석은 어땠습니까
 
『세 사람이 돈을 가져왔어요. 나 혼자 알 수 있게 세 사람 姓만 적어 놓고, 그 밑에 돈의 액수 「30」을 기록했어요. 정보기관에 끌려갔는데 「30이 뭐냐. 30억이냐」고 물어요. 3시 약속시간」이라고 둘러댔어요. 남이 내 수첩을 보면 완전히 간첩 문서예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버릇이 돼서 누구한테 돈을 받고 나서 절대로 흔적을 안 남겨요』 
  
 
―정치자금을 낸 사람이 수표추적을 통해 다친 적이 있습니까
 
『나는 한 번도 빵구가 안 났어요. 수표로 정치자금을 받았지만 사고가 안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을 했어요. 중림동 통일민주당 당사를 25억원에 샀어요. 정보기관에서 우리 돈을 추적했을 것 아닙니까. 안기부에서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돈을 흔적없이 세탁했느냐」고 놀라. 그건 내가 9단쯤 될 거야. 「서울의 봄」이 왔을 때 崔炯佑 의원이 許完九(허완구) 회장에게서 돈을 좀 받아 썼어요. 한일관에서 밥을 먹고 낸 500만원 때문에 許完九씨가 정치자금 준 게 드러났어요. 李鶴捧(이학봉)이 학교 선배라고 봐줘서 다행이었지, 許회장이 진짜 혼났어요』 
  
 
―수표추적을 피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현금으로 받지는 않았습니까
 
『대부분 수표로 받았어요』 
  
 
―요즈음 「차떼기」가 유행어가 됐는데, 1992년 大選 때 현금으로 정치자금을 준 재벌들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徐廷友식 「차떼기」는 YS가 만든 거예요. 금융실명제가 그렇게 겁나는 거예요. 10만원권 수표도 다 추적이 되니까. 그전에는 정보기관이 그렇게 악착스럽게 수표추적을 하지 않았어요. 야당에도 숨쉴 구멍을 준 거지. 이제 시대가 변했어요』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돈 준 사람이 불가능한 민원, 사기성 불법민원까지 해결해 달라고 들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친절하게 해서 돌려 보내는 거지. 담당 부서에 연락해서 「절대로 안 되는 민원이라면, 말이라도 잘해서 돌려 보내라」, 「꼭 해줘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해라」고 부탁을 하죠』 
  
 
―민원 해결을 조건으로 제공하는 정치자금도 가끔 받았을 것 아닙니까
 
『돈을 줄 테니까 무얼 해결해 달라, 그런 식으로 접근해 온 사람의 돈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건 곧바로 감옥 가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정치자금이라는 게 급할 때 권력의 도움 받으려고 주는 거니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죠』

  
 
權魯甲은 2인자 욕심에 무리하게 돈 모아

―동교동계의 금고지기인 權魯甲씨는 金大中 정부 시절부터 여러 수뢰사건으로 계속 옥고를 치르고 있습니다. 金大中 정권과 현대그룹이 공모해서 5억 달러를 金正日에게 비밀 송금하는 와중에 현대로부터 200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金大中 총재를 대통령 만들었으면 됐지. 2인자 되면 뭐해요. 그 형님이 자기가 다음 정권에서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고 욕심을 내니까, 분수에 넘게 돈을 모으고, 여기저기 얽혀 든 거예요. 권력이라는 게 허무한 건데, 그 형님이 헛고생한 거요』 
  
 
―朴智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하고도 아주 가까운 사이죠
 
『朴실장이 처음에는 全敬煥(전경환·全斗煥 前 대통령의 동생)씨 쪽에 줄을 댔어요. 나중에 金大中씨가 미국에 망명하면서 인연이 닿았지. 한국에 들어와서 金大中씨에게 정말 충성을 다했어요. 신문 보도를 모니터해서 새벽에 동교동에 찾아가서 보고하고. 그만큼 노력을 했으니까, 본류를 제치고 중심으로 간 거예요』 
  
 
―한나라당 洪準杓(홍준표) 의원이 1998 1029일 대구지검 국정감사에서 『분당 차병원에서 입원 중인 洪仁吉 前 수석이 朴智元 공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2억원이나 주었는데 날 죽이려고 하는가」라고 얘기한 게 감청됐다』고 폭로를 했습니다. 2억원을 줬습니까
 
『야당이 얼마나 어려워요. 내가 李源宗 정무수석한테 「겁나서 야당에 돈 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야당도 지원해 주고 더불어 같이 가야 한다」고 자주 얘기했어요. 한번은 내가 S 한정식 집에서 야당 대변인 하던 朴智元씨를 만났더니, 李源宗 수석이 「형님, 야당 아이들 간 키워 주지 마십시오. 이게 뭐하는 겁니까」라고 해요. 내가 「이제 내 뒷조사까지 하고 다니나」 하고 들이받았지』 
  
 
―정무수석실에서 洪수석을 감시한 겁니까
 
『정무가 한 게 아니고, 안기부가 동태 파악했다가, 건네 준 거지』 
  
 
―「2억원 지원說」이 사실에 가까운 얘기군요
 
『그렇게 크게는 아니고, 작은 정성을 준 거지』 
  
 
―洪準杓 의원의 폭로가 나오고 나서, 朴智元 공보수석이 청와대 안에서 곤란했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구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朴智元 수석에게 편지를 한 통 써줬어요』 
  
 
―편지는 왜요
 
『金大中 대통령한테 보여 주라고』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朴수석, 친구를 도와주려고 한 게 검은돈이나 뒷거래한 것으로 그려져서 미안하다. 어려울 때 술 한잔 나눠 먹고, 정을 준 것뿐인데, 공연한 오해를 받는 것 같다. 그 자리가 정말 어렵고 조심해야 할 자리다. 열심히 金大中 대통령 모셔라」 
  
 
그런 내용이었어요』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습니까
 
『야당 대변인하면서 나한테 큰돈을 받아 썼다고, 洪準杓 의원이 폭로를 했으니, 金大中 대통령이 朴智元씨를 의심할 거 아니오. 「편지를 하나 써 줬으면 좋겠다」는 뜻이 간접적으로 내게 전달됐어요』 
  
 
―朴啓東(박계동) 의원이 1995 1019일 「盧泰愚 비자금 4000억원」을 폭로하면서, 『청와대 洪仁吉 총무수석이 全貌를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盧泰愚씨가 4000억원을 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박계동이 한번 해본 소리지. 내가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나. 소송하겠다」고 했더니, 「형님, 한번 봐주소」 해서 넘어갔어요. 盧泰愚 4000억원은 금융실명제 때문에 불거진 거예요. 언젠가는 들통날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盧武鉉 선거운동에 돈을 막 갖다 부었다』

  ―盧武鉉 대통령이 金泳三 총재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의 공천으로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 영입에 간여했습니까
 
『내가 盧武鉉씨를 嚴회장(金泳三씨의 친구인 嚴基鉉씨) 서초동 집에 데려다 놓고, 金총재를 만나게 했어요. 공천 주고, 선거자금 챙겨 주고 다 했지』 
  
 
―盧武鉉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뭡니까
 
『국회의원 안 한다고 사표 던지고 도망간 일이지. 우리는 한 석이 아쉬운데, 정치 못 하겠다고 튀어 버렸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하여튼 특이한 사람이오』 
  
 
―같은 黨 소속이었던 李仁濟 의원이 盧武鉉씨를 찾아내서 정치를 계속하라고 설득했다고 하던데
 
『속리산에서 盧武鉉씨를 찾아낸 건 한국일보의 李有植(이유식) 기자였어요. 李기자가 바퀴에 껌이 붙으면 도로에 달라붙을 조그만 차를 끌고 가서 숨어 있던 盧武鉉씨를 만났어요. 李기자는 특종했다고 좋아했대. 그런데 盧武鉉씨가 「정계에 복귀하는 논리를 어떻게 만들면 되겠느냐」고 묻더라는 거야. 은퇴 선언을 번복하려고 자문을 구하니까, 李기자가 기가 찼다고 해』 
  
 
―총선에 나선 盧武鉉 후보에게 자금을 얼마나 지원했습니까
 
『많이 했지. 최고로 많이 지원했어요. 민정당의 許三守(허삼수) 조직이 워낙 단단하니까, 총력을 기울였어요. 최고 격전지니까 돈을 막 갖다 부었지. 10억원은 넘었을 거야. 선거 전날 밤에 YS가 한 번 더 내려가 지원유세를 했어요』 
  
 
1988년에 10억원이라면, 지금 돈으로 20~30억원쯤 되는 것 아닌가요. 盧武鉉 대통령이 2000년 총선 때도 『돈을 원도 한도 없이 써봤다』고 얘기했는데, 돈 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도와준 걸 자기도 잘 알고, 고마워하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 부산에 내려와서 「옛날에 신세진 것 갚는다」며 크게 술을 한번 샀어요. 횟집에서 회 먹고, 파라다이스 호텔 지하 술집에서 한잔 했어요. 영화 「南部軍(남부군)」을 만든 정지영 감독도 자리를 같이 했어요. 盧대통령과 그 무렵 골프도 한 번 쳤어요. 그러고 나서도 「밥 먹자」, 「골프 한 번 치자」고 연락이 왔는데 「밥 한 번 먹었으면 됐다. 또 대접받을 일 없다」고 사양했어요』 
  
 
―부산에서 술을 마시고 돈을 盧武鉉 장관이 냈습니까? 혹시 강금원씨나 문병욱씨 같은 기업인이 「스폰서」로 따라 나오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냈어』 
  
 
―여러 신문이 洪수석을 「盧武鉉의 부산 인맥」으로 소개했습니다. 최근에 盧대통령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나하고 송기인 신부님하고 친하니까. 그렇게 연결을 시키는 모양이지. 최근에는 盧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盧武鉉 진영 대선자금 모금은 각설이 수준

2003년 봄 민주당 경선 때 盧武鉉 후보가 직접 문병욱 회장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를 했고, 수행비서 여택수와 함께 나가서 현금 5000만원을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받았느냐, 여택수가 받았느냐가 쟁점이 되는 딱한 상황입니다. 정치자금 관리가 영 엉성하고, 질퍽댄다는 느낌을 줍니다
 
『돈은 한 창구에서 들어오고 나가야지, 창구가 여러 개 되면 규율이 안 잡히고, 여러 사람이 다쳐요. 돈을 모으고 나눠 주는 게 투명해야 해요. 돈 모으고 집행하는 데 권위와 카리스마가 없으면 당근을 줘도 효과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이번 4월 총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누가 5000만원 주겠다는 데 나가서 밥 먹고 안 합니다. 그 정도 돈이면 전화 한 통화하고 비서 내보내지. 盧武鉉 후보는 財界와 확실한 줄이 없고, 주변에 진열된 상품도 안 좋으니까, 돈을 제대로, 체계적으로 걷질 못한 거예요』 
  
 
―진열된 상품이라는 게 무슨 얘기입니까
 
『참모 말이오. 盧武鉉 후보를 대신해서 돈 받을 사람이 없는 거야. 李相洙(이상수·민주당 大選 선대위 총무위원장) 의원이 고려大 인맥 등을 동원해서 조금 움직였어요. 安熙正·李光宰 이런 친구들이 3000만원 주면 3000만원 받고, 1억원 주면 1억원 받고, 각설이 수준으로 한 거지』 
  
 
―젊은 참모들이 너나없이 돈에 손을 댔다든지, 장수천이라는 생수회사를 만들어서 정치자금 조달을 시도했다든지 한 것은, 정치자금과 관련한 경험 부족 때문 아닐까요
 
『사람들 바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心性(심성)이 훈련받는다고 바뀌나. 강금원이가 盧武鉉씨를 좀 도와줬다고, 「부통령」 소리를 들을 정도로 큰소리를 뻥뻥 쳤잖아. 나도 강금원씨를 잘 알지만, 이 사람은 盧武鉉 대통령을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친한 「술친구」 정도로 여기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함부로 하는 거지. 기업인들이 정치자금 냈다고 강금원씨처럼 떠들었으면, 金泳三·金大中씨가 숨도 못 쉬고 살았을 겁니다. 함량 미달인 사람들이 盧대통령 주변에 너무 많아』 
  
 
―盧대통령은 계속 『내가 불법 모금한 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우리는 티코, 한나라당은 그랜저』라며 위기탈출에 나섰습니다. 상대적으로 깨끗하니까 별 문제가 안 된다는 자세인데
 
『盧武鉉씨가 요사이 참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불법은 불법이지 무슨 차이가 있어요. 盧武鉉 캠프가 가져온 돈 거절한 것 있습니까. 사람을 죽였는데, 90세 노인 죽인 거하고, 갓난아이 죽인 거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요. 그걸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아야지, 대통령이 그런 자세를 보이면 안 됩니다. 아들이 열 명 있으면 고무신을 열 켤레 사야 되고, 아이가 둘이 있으면 두 켤레만 사면 되는 거예요. 한나라당은 덩치가 크고 돈을 많이 소비하는 정당이고, 민주당은 야당 체질이라 돈이 덜 드는 정당 아닙니까』 
  
 
1997년 大選 때 金泳三 대통령이 李會昌씨를 좀 챙겨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돈은 못 주더라도 李仁濟 의원의 탈당 출마는 막아 줄 수 있었지 않나 싶은데
 
『오야붕(金泳三 대통령)이 다음 정권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어요. 아들 현철이가 구속되고 나니까 정신이 없고, 완전히 기가 꺾여 버렸어요』


 
李會晟의 지원 요청

  ―李會昌씨 쪽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은 없었나요
 
1997년 大選 때 감옥에 있었는데, 李총재 측근이라는 황우려 의원이 변호사 자격으로 한 번 찾아왔고, 李會昌씨 동생 李會晟(이회성)씨가 한 번 찾아왔어요. YS의 직계 중 직계라고 하니까 찾아온 거야. 李會昌씨 그 사람 참 작데. 내가 李會晟씨한테 「YS를 자꾸 쳐다보는데, YS는 李仁濟를 주저 앉힐 힘이 없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적어도 민주계인 韓利憲 金♥桓(김운환)이는 불러서 국민신당에서 탈당시키겠다. 열흘만 내보내 달라」고 했어요. 李會晟씨가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감감 무소식이야』   
  


 
金泳三 대통령은 지금 빈털털이 

  ―洪수석이 갖고 있는 李仁濟의 아킬레스건은 뭐였습니까
 
『돈이지. 내가 오라고 하면, 李仁濟씨가 오게 돼 있어요. 金泳三 대통령은 10원 한푼 안 주고, 내가 李仁濟씨 선거를 다 도왔어요. 경기도지사 후보 되는 과정도 어려웠어요. 내가 가서 교통정리를 했지』 
  
 
―金泳三 대통령은 지금 돈이 좀 있습니까
 
『완전히 빈털털이예요. 최근에 어떤 행사를 하고 밥값 300만원이 없다고 해서, 내가 해결해 드린 적도 있으니까. 三水會(삼수회·金泳三씨의 경남高 동창 모임) 회원들이 이제 초대도 안 하고 슬슬 피해요. 金대통령만 오는 게 아니고 경호원 수행원들이 따라 오니까, 밥값이 만만치 않거든』 
  
 
―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국정 간여가 金泳三 정부 시절 내내 말썽이었습니다. 단속이 안 됐던 겁니까
 
『아들 단속을 왜 못하느냐고 하는데, 현철이는 金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라고 보는 게 정확해요. 대통령의 장성한 아들들이 정치에 몸을 담고 있으면 현철이처럼 돼요. 金大中 대통령 아들 홍업이, 홍걸이도 감옥에 갔잖아. 이 아들들이 아버지 선거를 얼마나 치렀어요. 홍업이는 아버지를 도와서 정치에 개입했기 때문에 감옥에 갈 수밖에 없어요. 정치자금을 받아 놓고 모른 척 할 수가 있나. 홍걸이 문제는 성격이 약간 다르고』 
  
 
―현철씨는 고향인 경남 巨濟에서 출마한다고 움직이고 있는데, 돈이 있습니까
 
『현철이는 돈이 좀 있는 것 같아. 추징당하고 했는데 좀 남아 있는 모양이야』 
  
 
―洪수석의 재산은 지금 얼마나 됩니까
 
『얼마 전에 全斗煥 前 대통령이 내지 않은 추징금이 화제가 됐을 때, MBC PD수첩」 취재팀이 나를 취재하러 부산 서대신동의 내 아파트에 내려왔어요. LPG 가스통을 밖에 내놓고 연결해서 쓰는 걸 보더니 별 얘기가 없더라고. 한보사건으로 구속될 무렵 주변에서 「분당집하고 거제의 선산 땅을 남의 명의로 돌려 놓으라」고 해요. 「대한민국 최고권력에 있었고, 국회의원인 사람이 돈 몇 푼에 그런 짓은 못 한다」고 했어요. 검찰이 1997년 말 대법원 판결이 나자마자 분당집, 아버지가 물려주신 巨濟 선산 세 정보를 다 가져갔어요. 나머지는 회수불능으로 면탈됐습니다. 서대신동 아파트가 全 재산입니다』 
  
 
―법정에서 『내게 들어왔던 돈은 사흘을 멈춰 있지 않았다』, 『개인 치부는 안 했다』고 항변했던데…
 
『정치자금이 고이면 안 됩니다. 고이면 그걸 자기 걸로 생각하고, 지키려고 딴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정치자금은 내 돈이 아닙니다. 내가 정치자금을 만지면서, 내 동생들, 친척들에게 단 한푼도 돈을 준 적이 없습니다. 매제 심완구는 정치를 하니까 도와준 거고. 내가 청와대 수석할 때 밑에 비서관이 「수석님, 이제부터 총선 준비를 하십시오」라고 해요. 「돈을 좀 모아두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왜 선거하려고 돈을 모아 두나」라고 했어요. 1996년 총선 때 회계를 후배에게 맡겼고, 나는 정치자금 들어온 장부도 한 번 안 봤습니다. 「정치자금은 쌓아 두면 안 된다. 없으면 안 쓴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시원시원하게 정치자금을 풀었다

  ―정치인 金泳三 밑에서 일할 때 洪수석 손을 거쳐간 돈은 얼마나 될까요. 6000억원은 넘겠죠
 
『전혀 기억이 없어요(웃음). 정치자금을 시원시원하게 풀었지, 내 손이 이렇게 크잖아. 검사가 「한 호텔 수영장 여자코치에게 당신 수표 300만원이 갔다」고 추궁을 해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시저와 나폴레옹이다. 내가 애인이 있어 돈을 주면 많이 주지, 그렇게 쩨쩨하게는 안 준다」고 했어요. 검사가 더 묻지를 않더라고』 
  
 
―수감생활 중 고혈압과 심장질환으로 여러 차례 교도소 밖의 민간병원에 입원했는데, 요즈음 건강은 어떠십니까
 
『혈압이 한때 220까지 올라갔고, 지금은 정상을 유지하고 있어요. 고혈압 약을 평생 먹어야 해요』 
  
 
긴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뷰를 한 방 바로 옆방에 洪수석의 후배 4명이 洪수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洪수석이 『늦었으니 저녁이나 먹고 가라』며 기자를 끌어당겼다. 洪수석은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더니, 「이제부터 진짜 잘 모시겠다」는 후배들이 줄을 섰다』며 웃었다
  
 
洪수석은 최근 동대신동 천주교회 신도회의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내 일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며 『안양의 「나자로 마을」을 돕는 일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洪수석의 후배가 밥값을 냈다. 洪수석은 서빙한 여종업원에게 1만원짜리 한 장을 팁으로 건넸다
  
 
헤어지면서 洪 前 수석은 『국민들은 그때그때 시대의 대세를 선택했고, 정치자금은 필요악이었다』면서 『지금 기준으로 옛날을 욕만 하지 말고, 정치인들이 변화된 현실에 빨리 적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金泳三의 자금 관리인 洪仁吉은 3金시대가 저물어 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정치인생을 서둘러 정리하고 있었다
  
 
후배의 승용차에 올라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출처월간조선 2004년 2월호    김연광 전 월간조선 편집장

 

2015.11.25 김영삼의 생전 비화(秘話) 토로: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육영수

 

1987 58일 무교동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전두환(全斗煥) 정권에 의하여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51일 통일민주당 창당 기념식에서 金총재가 한 취임연설이 서울올림픽을 나치 치하(治下)의 베를린 올림픽과 비교했다 해서, 또 정강정책에 나타난 통일관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해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될 참이었다. 이날 대화는 정치인과 용기의 문제로 흘렀다.

 

 ―전에 야당지도자들 인품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한 분을 빠뜨렸습니다장면(張勉) 총리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장면(張勉)씨에 대해서… 나는 장면씨를 잘 알지요. 참 부통령으로서 그때 그 양반이 최고위원이니까 우리 당(민주당)을 같이 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오라고 연락이 와요. 그때 부통령이면 출입도 잘 못하고 집에 있는 것 아닙니까? 매시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게 자기 일이거든요.

 

참 그 양반이 집요합니다. 아침에 차를 한 잔 먹자 오후에 차를 한 번 먹자 혹은 저녁을 먹자 점심을 먹자 이런 식으로 자기가 스케줄을 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루도 빈틈없이 그렇게 해요. 그때 그것 보면 좀, 야당 안에서 대부분 분위기가 어떤 것이 있었느냐 하면 자유당 안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승만 박사가 임기를 못 채울 거다 하는 국민들이 많았어요.

 

걸음도 잘 못 걷고 말이 점점 시원찮아지고 그런 기우도 있었지만 우리 당내에 자연히 조병옥 박사 장면 박사 둘이 놓고 생각할 때 이번 4년 동안에는 이승만 박사가 죽을 거다, 그러면 장면씨가 계승을 할 거다 하는 그런 뭔가 모르는 흐름이 있었어요. 그래서 민주당 안에서 집권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리 모이는 것입니다. 장면씨를 볼 때 뭔가 지도자로서 그렇게 당당한 것 같지 못해요. 조병옥 박사는 당당한 데가 있습니다. 또 너무, 장면씨는 섬세하다고 할까요.'

 

 ―소심합니까.

 '그렇지요. 소심하다고 하는 말이 정확한 말일 거에요. 정치인으로서 소심해요. 그러니까 5·16 때 수녀원에 들어가서 안 나왔지요. 그게 어디 지도자로서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 같으면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런 거지. 그래서 역사를 바꾸어 놓았잖아요.'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을 10·26 뒤에 세 시간 동안 만났을 때 그 분한테서는 이상한 걸 안 느꼈습니까.

 '전혀 정치인으로서 존경심이라든가 그런 것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정치인이 아니예요.'

 

 ―이 시국을 자기가 책임지고 민주화해 보겠다는 그런 것도 없었어요?

 '그런 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말로서는 아주 정직하게 심판 노릇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지만 두 번째 만나니까 심판 노릇 하겠다고 안합디다. 그러니까 또 다르지 뭐에요. 자기가 뭘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거지.'

 

 ―우리나라에서 결정적인 시국에서 우리가 민간인 지도자로서 장면 박사하고 최규하, 그리고 윤보선 이 세 사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교인으로 유명한 목사 중의 한 사람인데 그런 말을 해요. 우리나라에 하나님이 너무 오래 벌을 주셨다고 이러면서 역사의 큰 길목에서 꼭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가지고 우리 길을 가로막아 버렸다. 윤보선이 그랬고 장면이 그랬고 최규하가 그랬고, 그 사람 얘기는 정○○이 이○○까지를 얘기했는데 지금 여기서 이○○ 얘기 정○○ 얘기는 안하는 게 좋겠어요. 윤보선까지는 넣어놓지.'

 

 

―그런데 이 세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 목숨을 걸었으면 역사가 바뀌었겠지요.

 '바뀌었지. 나는 지도자로서 중요한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면 박사가 선량한 면은 있지요.

 '. 선량해요. 그런데 선량하면서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욕심이 너무 많으면 일을 그르쳐요. 자기가 집권하겠다는 욕심, 그것은 굉장한 거지요. 마지막에 큰 일을 그르쳐 버렸어. 그때 장도영이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 안했어야지요. 자기 고향사람이라고 임명했다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됐어요. 군대 안에서 제일 지지 못 받고 비판을 제일 많이 받던 장군인데 지명을 했단 말이에요. 이승만이, 이기붕이한테 최고 충성하던 사람을…'


 
김영삼 총재의 오기는 용수철 같아서 세게 누를수록 더 튄다. 1987 59일 대화에서도 그런 성질을 느낄 수가 있다.

 

 (검찰) 소환에 안 응하시면 저쪽에서 구인장을 발부할 가능성이 있는데요.

 '힘으로 하면 내가 끌려가겠지요. 구속이 된다든가 끌려간다든가 하면 그것은 영광이지요. 이 시대에서 어떤 의미에서 이 정권으로부터 핍박받는다는 것은 복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받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해 준다면야 최고의 영광이지요. 기자들이 물어서 한 마디만 했는데 이 시대에 제일 보람있는 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내가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그러면 그것은 참 행복한 거지요.'

 

 ―만일 소환하면 일단 불응하시고 그러면 구인장 발부….

 '구인장 가지고 오더라도 강제로 나를 잡아가기 전에는 안 갈 거에요. 구인장 가지고 왔으니까 갑시다 하는 정도 가지고는 안돼요. 강제로 나를 싣고 가면 나야 폭력에 못 이기지요.'

 

 ―그리고 그쪽에서 조사를 받으시면 침묵하실 겁니까.

 '거짓말하는 인간들하고 내가 대화할 필요가 없어요.'

 

 ―이번 국회를 열 때는 잠시 조용해서 의외라고 생각했는데요.

 '본색이 드러난 거지요. 독재자의 말기가 되면 이성을 잃고 앞뒤를 가리지 못합니다. 아까 (기사에 보니) 무솔리니가 재미있는 얘기 했대요. 앞뒤를 못 가린다. 이것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 가리지 못하게 된다. 잘못 됐다고 판단될 때는 늦었고.'

 

 ―그쪽(정권측)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실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내 생각은 그래요. 절대 나를 구속 못한다고 봐요. 이것은 나한테 하나의 협박용으로 하는데 야당사람들에게 총재도 이렇게 한다는 협박용인데 내가 협박이 통하는 사람 같으면 괜찮아요. 그 의미를 알아 듣겠지요. [아이구, 내가 그런 것 있으면 되겠나, 자제도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 같으면… 그런데 나는 솔직히 말해서 더 뛰어버리는 사람이거든요. 죽음이 두렵다든가 해서 이것을 피할 방법이 뭐야 이렇게 생각하는 차원은 벌써 지나버렸으니까.

 

 요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단식 후에 내가 시국을 보는 생각도 그렇고 내 자신에 가해지는 박해 정도 이런 것 가지고요, 이 시대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내가 감옥에 못 가서 그런데 20일밖에 감옥에 안 가 있었단 말이에요. 5·16 후에 집회를 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계엄령 그때 무더기로 잡혀갔단 말이에요. 군법회의 재판 도중 갑자기 재판 도중인데 나가라고 해서 나왔는데 이 시대에 감옥에 간다는 것은 참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나는 내가 감옥에 간다고 그러면 한국 민주화가 빨리 된다… 그 계기가 된다고 봐요.'

 

 (기자 注 : 이때 검찰이 문제삼은 것 중 하나는 통일민주당의 정강정책 중 기본정책 항목이었다. [민족통일이 정치적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는 민족사적 제1과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국정의 제1목표로 삼는다]라는 기본정책이 자유민주주의 아닌 다른 체제로의 통일도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한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통일민주당은 기본정책보다 상위 개념인 강령에선 [의회민주주의·시장경제를 수호한다]고 못박아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용공으로는 볼 수 없다는 통일민주당측의 해명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여기서 하나 유의해 볼 점은 [체제와 이념보다 민족 통일이 더 중요하다]는 이 정신이 1993 2월 金泳三대통령의 취임사에 그대로 반영됨으로써 초기 대북(對北)정책의 기조가 혼란에 빠지는 한 요인이 됐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민족통일]이란 개념은 비()과학적인 용어선택일 뿐 아니라 북한의 통일정책과 맥을 같이 한다. 한민족은 한반도 이외의 세계도처에 흩어져 있다. 이들까지 통합한다는 의미의 [민족통일]은 전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해외에 사는 한민족(韓民族)은 각 해당 국가의 구성원이 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국가통일, 즉 이념과 체제의 통일이다. 같은 정치 원리로의 통일이다.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듯이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통일이다. , 북한이 자유민주화돼 남한과 이념 및 체제가 같아지는 [체제 통일]인 것이다. 남북통일의 시작과 끝은 [북한의 민주화]일 뿐이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인데도 [민족]이란 단어에 취해서 [이념·체제를 초월한 민족통일]을 부르짖다가 북한 노동당에 이용되고 남한의 국론을 분열시킨 것이 김영삼 정부였고, 그런 실책의 씨앗이 87년에 이미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재규(金載圭)와의 비화(秘話)

 아무래도 김영삼 총재에게 있어서 운명적 라이벌이었던 이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었다. 朴正熙와 얽힌 이야기를 할 때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기억도 생생했다. 金 총재는, 1979 5·30 전당대회 직전에 정보부가 자신을 탄압한 일에서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김재규가 한 건 아니지만 국장, 차장보 이런 사람들이 내 측근 사람들을 전부 다 만나서 총재 절대 출마하지 말게 하라, 절대 안되게 한다고 말했다더군요. 정보정치에 (야당인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얼마 안 남았는데도 우리측 사람들이 총재 자신 있으니까 나보고 나가라고 얘기할 때입니다.

 

 (1979년 봄) 김재규가 롯데에서 한 번 만나자고 해서 저녁에 만났어요. 그때 얘기 다 기억은 못하겠지만, 이건 일반에게 안한 얘기입니다. 정보부장과 만난 거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 말도 안하고 그대로 있는 것은 좋은 방법 아니다, 직접 만나는 게 좋겠다 하는 생각에서 만났어요. 얘기가 상당히 길었어요. 이런 얘기였죠.

 

[박정희 대통령이 김 총재를 기어이 총재 안 시키려 한다. 정부의 최종 방침이다. 우리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고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일만은 김 총재가 들어주면 좋겠다. 그 외에는 총재가 원하는 무엇이든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시대에 박정희라는 사람이 강력한 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김 총재가 이렇게 하려고 하면 희생된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절대로 총재가 탐이 나서 입후보하려는 것 아니다]라고 얘기했죠. 신민당 총재로 나오려고 할 때죠."

 

 1979 5·30 신민당 전당대회 훨씬 전입니까.

 '그렇죠. 공작을 시작하려고 할 때니까. 천하를 다 준다 해도 타협은 안합니다. 그따위 얘기를 할 수 있습니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정보부 국장 차장보가 만나서 나에게 출마 포기를 권유하도록 했다는 걸 그때 다 들었습니다. 3국장이 설치고 다닐 때인데 3국장이면 정치국장입니다. 3국장에게 내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누가 누구 만나고 누가 누구 만나는 거 다 들었는데 계속 이런 짓을 하면 신문에 제대로 안 나가지만 다 폭로하겠다]

 

지금 살아 있어서 이름을 대지 않겠지만 (김재규가) 누구를 도와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제의하더군요. 그러면서 마치 나를 위하는 것 같은 말투로 [박정희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예봉을 잠시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고 얘기하더군요. 기억나는 건 이 정도입니다.'

 

 *김재규(金載圭) : '일가(一家)로서 충고한다'

 ―김재규가 세 시간쯤 얘기하고 朴대통령께 보고했다 하더군요.

 '맞을 겁니다.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장시간이었습니다.'

 

 ―朴대통령 반응은, '김총재 만날 필요 없다. 정보를 보니까 떨어지게 되어 있는데 왜 만났느냐'면서 오히려 역정을 냈다고 하더군요.

 ', 그래요. 그때는 총재 안되도록 하는 일에 정보부만 개입한 게 아니고 청와대에서도 했습니다. 정권 전체가 개입했죠. 나도 그때 보면 강단 있었습니다. 그 정권과 싸울 생각했으니.'

 

 -10·26 사건 후 김재규의 진술에 따르면 차지철은 신도환씨와 이철승씨를 밀었다고 하더군요.

공화당에서 이철승만 밀면 되지, 왜 신도환까지 밀어 표를 분산되게 하느냐고 했다더군요. 나중에 김총재님이 당선되고 나자 김재규가 자기 스태프들에게 차지철을 욕하면서 '왜 신도환 조종해서 신세 망치게 했느냐'고 했다더군요.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인간 김재규에 대해.

 '김재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얘기 사람들에게 안하는데…) 그 사람 김녕 김씨입니다. 그때 연락한 사람도 김녕 김씨 간부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인데 꼭 만나주라 해서 만나게 된 겁니다. 김재규가 만나서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나는 어찌 됐든 박정희 대통령하고 있지만 김총재가 불행하게 되는 것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일가가 아니었으면 나도 안 만났을 겁니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 정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보통 결심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일가라는 것을 내세워 나를 회유하더군요.'

 

 ―김재규가 속이는 것 같진 않았습니까.

 '모르겠어요. 정보부장이 좋은 일 하는 것도 아닌데 칭찬하기는 이상하지만 그런 얘기할 때는 언뜻 듣기에 나를 걱정해서 하는 걸로 들리기는 하더군요. 그런 얘기를 나에게 했지만 너무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때 굴복했으면 우리나라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박정희(朴正熙) 죽은 뒤 용서하는 심정으로 문상

 ―朴대통령이 저격 당한 건 몇 시쯤에 알았나요.

 '저녁 9시에 죽었죠 아마. 다음날 새벽에 미국에 있는 교포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텔레비전에 죽었다고 나온다면서 알려주었습니다. 저녁에는 몰랐다가 새벽 45시경에 알았습니다.'

 

 ―그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솔직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올 때가 왔다고 생각했죠. 그 다음날 아침에 윤반웅 목사가 찾아왔더군요. [박정희 역적은 죽었지만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과격하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죽은 사람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얘기했죠. 나는 죽은 박정희를 용서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문상을 가겠다고 하니까 자기는 못 가겠다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문상 가지 밀라고 말렸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원수도 용서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죠. 빈소가 마련됐다는 얘기 듣고 28일 청와대에 갔습니다. 장례식도 참석하고 입관하는 데도 참석했습니다.'

 

 ―인간 박정희에 대해 측은하게 생각했나요.

 '결국 자기가 선택한 길이다, 처절한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죠.'

 

 *육영수 여사는 좋은 인상

 ―라이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던가요. 朴대통령의 좋은 점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박정희가 좋다는 생각은 안합니다. 육영수 여사는 점잖은 사람입니다. 어디서 만나면 나에게 [총재님 건강하십니까]라고 말하곤 했죠. 그렇다고 무슨 말을 나눈 건 아니고 그저 인사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1975 5월에 만난 건(박정희 대통령―김영삼 신민당 총재 단독회담) 그 내용을 내가 공개를 안했어요.

 

(朴대통령이) 그런 건 다 공개되면 통치하는 데 지장 있다고 해서 말을 안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말을 안했습니다. 인간이란 한 번 만나면 정이 드는 법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나하고 만나고 나서 나한테 더 가혹하게 했습니다. 그때 만나서 나는 절대 민주주의 안하면 안된다 얘기했고 박대통령은 자기 입으로 안한다는 얘기 안했어요.'

 

 ―두 분 만날 때 청와대 비서관들도 참석했나요.

 '참석 안했어요. 그쪽이 참석하면 내 비서도 참석해야죠. 참석하게 안했죠. 당시 육영수 여사가 죽고 얼마 안되었을 때에요. 처음 만나고 위로의 말을 했어요.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위로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문을 열자 박 대통령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았어요. 바깥이 굉장히 넓었는데 나무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어요. 박 대통령이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김총재가 정확히 봤다. 이렇게 외롭게 되었다. 내가 욕심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욕심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그런 류의 말이 문제에요. 외롭게 산다고 하니까 동정이 가더군요. 평소 육영수 여사를 좋게 봐서인지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그후에 보니 잔인한 사람 같더군요. 굉장히 잔인해요. 인간사회에서 한 번 만났다는 건 정이 생기는 건데.'

 

 ―金총재님이 오해도 받았죠. 朴대통령과 밀약이 있지 않았나 해서 말입니다.

 '그렇지요. 나를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탄압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국민들에게 배신을 많이 했습니다. 군인으로 돌아간다고 선서도 하고 울고, 그 사람 잘 울어요. 이러다가 다시 나중에 보면 또 배신하고 나중에 또 울면서 또 참여해야 한다,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 하면서 또 울고 말이야, 그 사람 묘한 사람 같애.'

 

 ―눈물이 참 헤픈 사람 같나요.

 '그랬죠. 손수건으로 눈물 닦더라고, 참 마음이 안됐더라. 민주주의하겠다. 하는데 언제 하겠느냐 이렇게 안 물었어요. 그때 내 마음같이 생각한 거지. 그때 임기가 얼마 안 남았어요. 2년 남았으니 그때까지 하고 그만두겠지. 이때까지 참았는데 그거 못 참나 2년만 참자. 그렇게 생각하고 안 물어보고 나 혼자 판단한 것이 잘못이지. 시한을 두고 언제 할 거냐고 해야 하는데 얘기가 꼭 그렇게 안되더군요. 그런 아쉬운 마음 있었지만 내가 따지러 간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마음이 잘 변한다 말이에요. 연극을 했는지 속임수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 속을 모르니까 근본을 아는 건 아니니까.'  

 

 * '박정희를 놔두면 우리 국민 다 죽이겠다.'

 ―언제 거짓말이란 걸 알았습니까.

 '자기 입으로 그랬거든. 정권 놓는다는 걸 얘기하면 정권 유지하는 데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그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내가 정권을 잡아본 것도 아닌데 오죽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겠나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점점 짙어가더군요. 결정적으로 그렇게 되는 게 내 비서실장 잡아갈 때, 그때부터 정권 놓을 사람 아니다, 죽을 때까지 놓을 사람 아니라는 생각이 차차 강해지더군요.'

 

 ―인간적인 배신감을 많이 느꼈습니까.

 '느꼈어요. 박정희를 용납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79년도에 총재 안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가처분하고 제명까지 하고… 그래서 나는 박정희를 타도해야겠다,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나라 국민 다 죽이겠다, 타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뉴욕타임스 스톡스 기자와 문제의 인터뷰를 하실 때 구속될 것 같다는 정보나 느낌이 있었나요.

 '정부가 구속하려 한다는 얘기가 많았어요. 나는 원래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자리에서 그 말이 나왔습니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신경질을 내면서 '신민당 사람들 비행조사서 가지고 있으면서 왜 처리하지 않느냐. 잡아넣어야 하지 않느냐'고 면박을 줬어요.

'김총재를 구속하라고 했는데 유혁인(당시 정무수석)이 말려서 안했다. (유혁인이 말린 이유는) 브라운 국방장관이 한미 국방회담 때문에 오게 되어 있는데 그 전에 구속하면 안된다며 말렸다'.

김총재님 구속관계 건이 그날 화제로 나왔습니다. 구속을 상당히 검토한 것 같습니다.


"'
허허 그때 구속을 했어야 하는데." 

 

김영삼의 생전 비화(秘話) 토로(2) : "박정희(朴正熙)가 경제 후퇴시켰다"

1987 5월 무교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인터뷰 도중 '잠이 온다'면서 커피를 시켜서 마시고는 일어나 실내(室內)를 오가면서 답변을 이어갔다.

 

1979 10월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을 때 한 유명한 코멘트는 즉석에서 한 겁니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잠시 살기 위해서 영원히 죽을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입니다. 지위도 중요하고 재산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전부를 내버리는 것이고요. 인간에게 어느 것보다 중요한 건 명예입니다. 내가 심각하게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을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평소부터 생각하던 말입니까.

', 유명한 말이 됐지요.'

 

―혹시 댁에서 나오실 때 미리 생각하고 나오신 얘기입니까.

'생각하고 왔지요. 의사당 떠나면서 기자회견 할 때 그 말을 했습니다. 기자들도 다 울었어요.'

 

―총재 되고 나서 집에 대해 사찰을 많이 했나요.

'많이 했어요.'

 

―눈에 드러날 정도였나요. 잠복을 했나요.

'눈에 띄게 했지요. 언제나 학교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친구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지 못했어요. 친구 집에도 못오는 건 불행한 일이지요. 내가 친구집에 갔다가는 동창생들에게 난리가 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그게 아주 강화됐었어요. 그래서 친구들 집에 못갔어요.'

 

―물론 전화도 잘 못했겠지요.

'전화는 내 전화가 아니니까.'

 

―혹시 긴요한 연락을 할 때는 암호를 썼나요.

'정치인들끼리 전화할 때는 내용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일반 친구들과 전화하는 일은 별로 없었지요. 가끔 중앙정보부가 다 듣고 있다는 걸 모르고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니 여보 전화로 그런 중요한 얘기 다하면 어쩌나. 이거 중앙정보부 전화 아니요'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이래요. '언제부터 중앙정보부로 갔어요'. '그 말이 아니라 내 전화는 중앙정보부에서 24시간 녹음하는 거 아닙니까' 하니까 '아 그렇습니까' 하면서 조용하게 전화를 끊었어요. 그 일이 안 잊어집니다.'

 

―전화 끊은 분이 김 총재님을 정보부 직원으로 착각하진 않았겠죠.

'그 사람이 순간적으로 착각을 일으킨 거죠.'

 

YH 사건 났을 때 신민당에서 당사를 농성장으로 제공해 주겠다고 제의를 했나요.

'그때 문동환 목사하고 고은 시인이 우리집으로 찾아왔어요. 오늘 신민당에 YH 여공들이 찾아가는데 좀 따스하게 보호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누구든지 오면 따뜻하게 보호하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지요. 사실 가볍게 생각했어요. 당사에 도착해보니 벌써 와 있더라고요. 숫자가 상당히 많더군요.'

 

―한 2백명 됐죠.

'3층으로 회의실로 안내를 하라고 얘기하고 저녁도 굶고 아침도 굶었다기에 밥을 준비하라고 말했어요. 밥하는 시간이 걸린다기에 빵이라도 사서 요기하도록 해주고 밥을 준비하라고 했지요. 나중에 그 사람들이 밥먹고 나서 위로하는 얘기를 했지요.'

 

―그때는 농성한다는 예상을 못했죠.

'고소하러 왔다고 생각했지요. 어린애들이 밥을 굶고 왔다는데 안줘서 되느냐는 생각만 했지요. 나중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농성하겠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오죽하면 이렇게 하겠느냐는 생각에서 간부들에게 시켜서 회사쪽과 보사부와 교섭해보라고 말했죠. 그래서 회사에 보내고 장관에게 연락을 한 거죠.'

 

―여당이 주장한 대로 정치적 목적으로 한 건 아니었습니까.

'생각조차도 못했지요.'

 

―그러다가 강제 해산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일이죠.'

 

―치안본부장인가 전화했죠.

'시경국장인가 치안국장인가 그럴 겁니다.'

 

―전화받았습니까.

'쳐들어 와서 강제해산하겠다고 해서 '무슨 미친 소리냐, 이런 상태에서 희생자가 난다,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고 말했죠.'

 

*마포서 과장 뺨 때린 사연 

―그때 나오셔서 마포서 과장 뺨을 때렸죠.

'그 당시 나 자신도 맞아 죽을 뻔 했어요. 그때 당내 국회의원들이고 당원들이고 다 부상당하고 당이 완전히 부서졌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나가니까 마포서 과장이 막는 시늉을 하더라고요. 김경숙이가 떨어져 죽고 YH애들이 끌려가는 상황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지요, 순간적으로 흥분된 상태였죠. 그런데 과장이란 게 막는 시늉을 하더라고. 그래서 발로 차고 '이 나쁜 놈들 니가 인간이면 이런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고 중상을 입고 어린애까지 죽지 않았느냐'하고 말했죠.'

 

―남에게 손찌검하신 건 몇십 년 만에 처음이었죠.

'학생 때 싸우고는 처음이었죠.'

 

79년에 김총재님 연세가 51세였죠. 그때하고 지금하고 생각이 어떻습니까.

'생각이 확실히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아요. 그전에는 누가 말하면 즉석에서 답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요즘은 우선 좀 생각해보자고 말하죠. 그 차이가 큽니다.'

 

*신앙심과 기도는 엄청난 힘

79년에 기도를 많이 했습니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를 많이 합니다. 연금 당하였을 때 많이 했지요. 기도 안하면 성경 읽고 글을 썼지요. 뭔가 안하면 잡념이 생겨서 안됩니다.'

 

―어떻게 기도합니까.

'일어날 때와 자기 전, 식사 때는 반드시 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나 중요한 연설, 중요한 모임에 참석해야 할 때도 반드시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마음이 평정됩니까.

'위로와 소망 가지게 됩니다. 단식 후의 변화를 들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함들 것입니다. 또 하나 욕심이 없어졌습니다. 과거에는 죽기 살기로 대통령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지금의 내 심정은 민주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민주화를 위해 도구로 쓰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민주화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생각입니다. 연금(軟禁) 때 내가 다시 사람 앞에 설 기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생각을 감히 못했습니다.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지요.

 

감옥에 가는 건 연금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감옥에 가면 변호사도 만나고 신문에 쓰든 말든 재판정에서 말할 기회도 있습니다. 연금은 사람을 다짜고짜 가두어 놓고 아무데도 못가게 합니다. 아무도 올 수 없습니다. 말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 생활을 몇 년 했는데 최고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옥에 있으면 법정에 나갈 때 거리도 볼 수 있지요. 단식하다가 병원에 실려갈 때 세상이 그렇게 신기하게 보이더군요. 바깥을 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조깅하면서도 생각이 된다.'

김영삼씨의 자기 확신을 더욱 강화시켜준 것은 기독교의 영향일 것이다. 그가 다닌 교회는 한국 프로테스탄트 가운데서도 가장 보수적이라는 고려신학파―합동측 교파였다. 그는 기도의 힘을 믿는 이였다.

 

―요즘처럼 정부가 4·13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 호헌(護憲) 쪽으로 가고 사태가 급박하게 될 때는 생각이 어떻습니까.

'새벽에 일어나면 한참 기도합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기도합니다. 기도가 안될 때도 있습니다. 일반 사람은 모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깅을 550분부터 645분까지 합니다. 오늘 아침도 뛰었습니다. 운동하면서 땀을 흘리면 마음이 정리됩니다.'

 

―뛸 때는 생각이 안 나죠.

'생각납니다. 오늘도 기자회견을 할 때 이런 말을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김 총재님은 낙관적인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가능하면 희망적으로 보려 합니다.'

 

―성선설을 신봉하십니까.

'그렇죠.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많이 속았습니다.'

 

―안 속아야겠다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죠. 그러나 나를 속이는 사람이 더 나쁘지 속는 게 더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 기독교 신앙과 연관이 있습니까.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현재 종교라기보다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미래의 종교입니다.'

 

―자주 읽는 성경구절 있습니까.

'이사야서 41 10절과 시편 121편 전문입니다. 이사야서 41 10절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인데,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시편 12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은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내가 연금중에 이 시편을 많이 읽었습니다. 찬송 중에는 383장을 즐겨 부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라는 이 찬송을 우리 집사람과 아침 먹기 전에 부르고 기도합니다. 긴 연금생활을 하면서 환난 중에 늘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딴 찬송도 좋지만 제일 마음에 위로를 줍니다. 때로 눈물이 나고 위로가 됩니다.'

 

―노래 잘하십니까.

'음치예요.'

 

―모임에 가면 노래하십니까.

'잘 못하지만 동창회 같은 데서 시키면 [선구자] [메기의 추억]을 부릅니다.'

 

―미래를 희망차게 보려면 사람을 좋게 봐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군요. 이 세상에 죽일 만한 악질은 없다고 보십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악질은 소수입니다.'

 

*기독교인이 1천만인데 왜 사회는 어두워지나?

 

―사형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형제도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나는 설교할 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 사회가 하루하루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작년보다 어제보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천주교도 2백만, 기독교 8백만 합쳐서 인구 4천만 중에 기독교인이 1천만명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인데 왜 사회는 점점 더 악해지나''

 

―그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기독교인들이 자기만을 위해 기도하고 남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잘못된 게 아니죠. 기독교가 물질에 너무 사로잡히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웃과 사회의 아픔에 동참해야 합니다. 수배자, 고난받는 자, 감옥에 간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을 교회가 기도하고 걱정해야 합니다. 보수교단은 이런 점이 부족합니다.'

 

―개인 구원에만 충실하죠.

'큰 문제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계셔야 하고 나를 위해 우리나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교회가 먼저 민주화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민주화되고 교회가 이웃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한 달도 못 가 민주화가 될 겁니다. 예수님이 권력에 조금만 아첨했으면 안 죽었죠. 핍박을 각오하고 그 길을 걸었습니다. 권력에 아부하는 기독교인은 반성해야 합니다.'

 

*박정희(朴正熙)가 경제 후퇴시켰다

―정치인으로서 박 대통령의 자질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정도 만나서 알 수 없지요. (그걸로) 전체를 평가하는 건 잘못이지요.'

 

―인간 박 대통령은 그렇지만 정치인 박 대통령은 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찌 되었건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박정희씨가 3선 개헌 안하고 그만두었으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등 민주주의를 했으니 상당히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흔히 정치는 나쁘게 생각하지만 경제적인 업적은 좋게 평가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정희씨를 전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러나 그때 시대 상황이 경제적으로 좋아질 수 있는 여건에 있었습니다. 만일에 박대통령이 아니고 민주주의 정권이었으면 경제적으로 굉장히 커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박정희씨 때문에 경제가 발달됐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요. 경제인들 말 들어보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경제가 6년을 후퇴했다 하더군요. 80년대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34년 후퇴했다고 하더군요.'

 

10·26과 비교해 지금 상황이 더 나쁘다고 보십니까.

'지금 상황을 확답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준, 젊은 사람·중간 집단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습니까.

'그게 큰 차이입니다. 당시 몇백불 소득과 지금 2천 불 소득은 큰 차이입니다. 7년간 교육 수준도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그 수준만큼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지요. 제일 소중한 게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기자注 : 여기서 金泳三 총재는 경제성장으로 소득이 높아지니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진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경제성장을 이끈 군사정권의 功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역사관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크게 수정되지 않았다. 前정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다가도 외국순방중 교포들 앞에서는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떳떳하게 행세할 만큼 커졌다'고 자랑함으로써 사실상 前정권의 업적을 이용하기도 했다.) 

 

*책은 서문만 보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읽어본 책 중에 관심 있는 거 있습니까.

'요새 솔직히 책을 못봤습니다. 책읽기는 좋아하지만.'

 

―직접 볼 시간은 없겠지요. 주변에서 요약해 주지 않나요.

'그런 일이 많지요. 서문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것 중에서 성경 이외에 감명 받은 책은 어떤 겁니까.

'내가 중학생 때 3학년 때 본 건데 일본 말로 된 [부활]이라는 세계문학전집이었습니다. 톨스토이 소설이죠. 그것을 하룻밤에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가장 감명 깊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울었습니다. 지금 내용은 기억도 못합니다.'

 

―울었다는 것만 기억하십니까.

'책 중에서 제일 감동받은 책입니다.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1979 10월 국회에서 김 총재를 상대로 의원직 제명을 할 때 공화당 유정희 쪽에서 반대표가 하나 나왔는데 혹시 누군지 아십니까. 한 표가 반대였습니다.

'모릅니다.'

 

―김종필(金鍾泌)씨 같습니다.

'모르겠어요.'

 

―얼마 전에 만나니까 자기가 유일한 반대표를 던졌다고 했습니다.

'아아…'

 

―그즈음에 김종필(金鍾泌)씨와 통화하거나 만난 적 있습니까. 김종필씨와 인간적으로 통할 것 같다는 느낌을 못받았습니까.

'특별한 접촉 없었습니다. 내 자신이 통할 수 있다 생각은 했어요.'

 

―저 분과 정치하면 같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요.

'그런 생각 했습니다.'

 

―부담 없는 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적 있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그게 어떤 점에서는 비극입니다. 서로 라이벌이라 하더라도 사석에서 만나 부담없이 술도 마시고 했으면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성립되었을 텐데 아무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김대중(金大中)씨도 박 대통령과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못만났다더군요. 완전히 여야가 적과 같습니다.

'그게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점이지요. 필리핀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이 여자의 몸으로 썩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양반이 작년 말에 일본에 왔을 때 와세다 대학에서 연설을 했어요. 연설문을 읽어보니 아주 소박하게 말했더군요. [나는 주부로서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서 남편이 살아있을 때까지 끼어들지도 않았다. 지금 커피잔을 나눠 준 남편의 친구들이 내 밑에 장관을 하고 있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렇게 잘하고 있다는 것은 사랑과 화해라고 생각해요. 특별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군대를 장악한 것도 아니고 노동조합을 장악한 것도, 학생 계층을 장악한 것도 아닌데 힘을 가지고 모든 계층 다스리는 것은 바로 사랑과 화해의 힘입니다. 우리나라 현재 정치인과 집권당도 그런 차원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어떻게 즈거 편이 될 수 있어?'

 

―작년 초반기만 해도 정권 쪽에서 김대중씨는 좋지 않게 생각하고 김 총재님은 대화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을 겨울이 되면서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서 김 총재까지도 아예 대화 상대로 생각하지 않고 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짐작인데 나는 자기 편이 될 수 있겠다고 멋대로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런 거 같지 않거든, 대화를 안해봤지만 아, 우리 편이 될 수 없구나 하고 생각한 거겠지요. 내가 어떻게 즈거 편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내가 민정당 편이 될 수 있어. [, 이런 사람들이구나] 하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편이 될 수는 없죠.'

 

―박 대통령도 그렇고 지금 정권도 그렇고 김 총재님을 오판하고 있나요.

'그런 위협 공작에 넘어갈 가능성은 0.0%도 없습니다. 솔직한 얘기로 죽인다고 위협한다고 위협이 되나, 돈으로 매수를 할 수 있나. 어떤 경우든지 그 사람들 돈 받을 생각없어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5.11.26 YS가 밝힌 비화 - 김영삼(金泳三)과 황장엽(黃長燁)

⊙ 재임 중 황장엽씨와 면담 약속, DJ 관련 정치공작 오해 우려해 취소
⊙ “안기부로부터 ‘황장엽이가 망명하려는 것 같다’는 보고 미리 받아”
⊙ 장쩌민에 비밀편지, “형제처럼 지내자”고 한 것 상기시키며 황장엽 보내줄 것 요구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0 12일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황장엽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나는 2010 10 11일 상도동 김영삼(金泳三) () 대통령 자택에서 김 전 대통령과 점심식사를 했다. 한 달 전에 잡힌 약속이었는데, 마침 그날은 황장엽(黃長燁) 선생이 사망한 다음 날이었다. 아침 신문들에는 김 전 대통령이 황 선생 장례위원회 명예위원장을 맡았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김 전 대통령은 점심 식탁에 앉자마자 이렇게 기도를 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한국 땅에도 참된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에서 망명해서) 조국을 위해 고통과 고난의 험난했던 삶을 살다 가신 황장엽 선생의 애통한 죽음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나라 민족을 사랑하사, 지금도 북한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북한에서 독재의 압제에 고통받는 동포들을 하루빨리 구원하여 주시고, 악의 무리들이 멸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유를 찾아온 황장엽 선생의 영원한 안식을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김 전 대통령은 1997 2월 황장엽씨가 망명할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었고, 그의 한국행 실현을 위해 중국 장쩌민(江澤民) 주석에게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김 전 대통령은 한 달에 한 번꼴로 황 선생과 점심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를 유지해 왔고, 황 선생이 위원장을 맡으며 결성했던 ‘북한민주화동맹’(2004 1월 결성)과 ‘북한민주화위원회’(2007 4월 결성)의 명예위원장을 각각 맡기도 했다. 또 그런 사정 때문에 김 전 대통령과 황씨는 함께 북한의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1일 오찬석상에서 황씨를 ‘황 선생’ 또는 ‘황 서기’라고 부르면서, “황 선생의 사망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 “그분은 정말 애국자”라고 했다.


  
“황 선생은 훌륭한 애국자”

  김 전 대통령의 말이다. “황 선생이 미국에 갔다 와서(2003년 가을) 나를 만났는데, 어느 재미(在美) 사업가가 그러더라는 거야. 황 선생이 북한에서 한국으로 왔는데, (김대중 정부의 반대로 그동안 미국에 오지 못하다가 망명한 지 7년이 다 돼서야 겨우) 이렇게 어렵게 미국으로 왔으니까, 자기가 생활비 다 부담할 테니까 아예 미국으로 망명을 하라고 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황 선생이 ‘아니, 내가 미국으로 망명할 사람이면 뭣 때문에 한국에 왔겠느냐고, 나는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조국으로 돌아간다’고, 그렇게 말하고 이 양반이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참 대단한 사람이고, 훌륭한 애국자예요.(김 전 대통령은 이 이야기를 12일 황씨 빈소에 조문 갔을 때도 되풀이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11일 오찬 때 이런 말도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황 선생은 평소 나와 점심을 하면서, ‘하루에 점심 한 끼만 먹는다’고 하더라. 사람이 어떻게 하루 식사 한 끼로 버티나. 소식(小食)도 좋지만 그건 너무 적은 양이다. 어느 정도는 먹어야 한다. 식사하고 나갈 때 보면 비틀비틀하더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안 하는데, 황 선생이 갈 때는 늘 계단 아래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내려갔다. 너무 안 잡순 것 때문에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몸무게가 40kg밖에 안됐다는데, 최소한 60~70kg은 돼야지…. 
  
 
김 전 대통령과 황씨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다. 나는 김 전 대통령이 퇴임한 후 지난 몇 년간 김 전 대통령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던 일이 있다. 그 인터뷰 내용들 가운데 황씨 관련 부분을 추려서 여기에 정리한다.(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흔히 ‘각하’로 불렸기 때문에, 인터뷰 때 나도 늘 그 호칭을 사용했고 요즘도 그렇다.)


  
DJ 관련 정치공작 오해 우려해 황장엽씨 면담 취소

2003 1 16일 서울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한 황장엽씨가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황씨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한국으로 망명해 온 지 6년이 지난 2003 1 7일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일찍이 대통령 재임 중 황씨를 만나고자 했으나 사정상 이뤄지지 못했고, 김대중 정부 5년간은 정부의 통제로 면담이 불가능하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 한 달 전인 2003 1월에야 첫 면담이 성사된 것이다.
  
 
황씨의 한국 망명이 성사되도록 장쩌민 주석에게 친서까지 보낼 정도로 직접 나섰던 김 전 대통령이 정작 재임 중 황씨를 만나지 못했던 사연은 이렇다. 김 전 대통령의 말이다.
  
 
“그때(1997년 대통령 재임 중) 내가 황씨 만날 날짜까지 잡아, 황씨로부터 이북의 실상을 한번 들으려고 했거든. 물론 황씨의 동의를 받았지. 그랬는데 하루는 아침 신문에 ‘김대중의 비밀을 황장엽씨가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크게 났어요. 아마 황씨 만나기로 잡아둔 날짜보다 2~3일쯤 전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내가 ‘어이쿠, 이거 내가 얼마 있다가 대통령을 그만두는데, 내가 공작이나 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뒤집어쓰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면담을 취소했어요. 아무래도 비밀이 없으니까 내가 황씨 만난 것이 뒤에 알려지면 내가 공작을 한 사람처럼 될 거 같더란 말이야. 나는 평생 정치공작을 제일 싫어하던 사람인데. 그래서 결국 내가 재임 중에는 황장엽씨를 못 만났어요.
  
 
―당시 황장엽씨가 필리핀에 있다가 서울로 들어오기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여러 가지 말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이 서울 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 그동안 남한에서 북한하고 내통했던 사람들, 다 밝혀질 것 아니냐. 그중에 하나가 송두율 같은 사람이죠. 사실 황장엽씨가 와서 얘기 안 했으면 알 수 없는 건데. 그걸 한나라당의 정형근 의원(당시 정세분석위원장)이 ‘황씨가 들어오면 그동안 누가 북한하고 줄이 닿아 있었는지 황장엽 리스트가 나올 수 있다’는 식의 말을 당내 회의에서 했지요. 실제로 그런 것이 나중에 조사되고 밝혀진 게 있었습니까?
 
“내가 황장엽씨를 지금도 만나거든. 이북의 서기니까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다 가지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지금, 가령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거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있어요. 나도 물론 물어보지도 않지마는. 내가 보니까 황장엽씨가 꽤 생각이 깊은 사람이더라고….


  
CIA도 황장엽씨 조사해

1997 4 20일 오전 귀순 67일 만에 서울공항에 안착한 황장엽(왼쪽)-김덕홍씨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기 전 만세를 부르고 있다.

 

―당시에 각하가 미국과 멕시코로 정상외교를 나가 있을 땐데, 서울에서 김대중 민주당 총재가 기자들 만나서 황장엽씨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대중 총재는 그때(1997) 사실, 가을에 대통령선거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황장엽씨가 넘어왔고, 황장엽 리스트가 있느냐 하는 걸 언론들이 다 썼기 때문에, 자신도 관심사였을 겁니다
  
 
그런데 김 총재는 ‘내가 미국 쪽 인사들한테 들은 이야기’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신문에 나라고 얘기한 거겠지요. ‘미국 CIA(중앙정보국)에서 황장엽씨를 면담하고 갔다. 범죄인 신문하듯 할 수 없으니까 미국 전문가 네 사람이 와서 황장엽씨한테 세미나하듯이 했다더라. 거기 이야기가 황장엽 리스트라는 것은 없다고 결론이 났다더라.’ 실제로 미국 사람들이 와서 황씨 심문을 좀 했습니까?
 
“나는 그런 기억은 있어요. 권영해 안기부장이 말이지, ‘자꾸 미국 CIA에서 사람이 와서 황씨를 좀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묻는 거야. 그래서 나는, ‘만나게 해줘라. 만나게 해주는 게 우리 한국에도 이익이 된다. 이북의 여러 가지 신()정보를 미국이 알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이 사람이 실제 그 안에 있던 중요한 열 명 중 한 사람인데 말이야, 만나게 해주는 게 좋다’고 했어요. 그래서 황씨가 한국에 와서 얼마 안됐을 때 미국 사람들도 만나게 해주었어요. 물론 우리 안기부에서 제일 먼저 조사를 했고, 그게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당시 안기부로서는 ‘황장엽 리스트’의 실재 여부를 확인하려고 상당히 애를 썼을 텐데요.
 
“그랬겠지요.
  
 
―그런데도 끝내 ‘리스트’라고는 밝혀진 것이 없는 걸 보면, 황씨가 끝내 그런 이야기는 안 한 모양이죠?
 
“안 했다고 봐요.
  
 
―다른 것은 좀 알아낸 게 있나요? 가령 송두율 같은 좀 더 레벨이 낮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물급 관련 ‘황장엽 리스트’는 없는 듯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봐야 되겠지. 상당히 얘기한 거 아닌가 싶어요. 당시에 안기부장이 나한테 그런 문제들도 보고했을 텐데, 지금은 다 기억을 못하지. 
  
 
실제로 기억을 못해서인지, 아니면 한때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재임 중 공무(公務)로 지득(知得)한 사실에 대해 비밀을 지키려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 전 대통령의 대답은 거기까지였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인 2000 11 27일 상도동 자택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자신이 그날 황장엽씨와 상도동 자택에서 면담을 추진했으나 무산되었다면서, “김대중씨가 과거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황 전 비서가 내게 말할까 봐 두려워 면담 방해를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일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씨의 과거 공산당 활동’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민주당 박병석 대변인은 “YS의 망언은 코미디의 극치”라고 비난하는 촌평을 냈고, 한 부대변인은 “김대중 대통령의 좌익 관련설은 지난 수십 년의 정치 역정 동안 이미 검증을 받아 ‘아닌 것’으로 정리가 된 얘기”라고 일축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일련의 인터뷰에서 ‘황장엽 리스트’에 대해 들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대답을 신중하게 하려고 했고 절제하는 듯했다. 몇 번 질문을 해보았지만 늘 같은 대답이었다. 아마 김 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황씨가 적어도 한국 사회를 뒤흔들 만한 수준의 거물급 인사들이 관련된 ‘리스트’를 실제로 진술한 것은 없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황장엽씨는 1997 2월에 베이징에서 우리 총영사관으로 넘어왔습니다. 귀순하기 전에 친필로 쓴 ‘나의 귀순 동기’를 한국 측에 보낸 것을 <조선일보>가 입수해서, 귀순 직후 크게 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황장엽씨가 몇 달 전부터 베이징에서 우리 한국 사람을 만났더라고요. 그걸 <조선일보> 기자가 미리 알고, 넘어오기 전에 그 자필 ‘동기’를 받았습니다. <조선일보>가 안다는 것을 두 달 전에 이미 우리 기관에서도 알았고요. 그래서 마지막 결행 과정만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거사는 한다고 마음을 정했더라고요. 그 후 일본 행사에 참석했다가 일본에서 망명 결행이 불가능하자 북한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이징에서 뛰쳐나온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망명 계획을 각하는 혹시 어느 정도 미리 좀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그날 일본 갔다가 베이징 가서 정말 딱 넘어오고 나서야 아셨습니까?


  
“미리 안기부로부터 보고받았다”

▲망명 직전이던 1997 2 7, 일본 도쿄에서 열린 주체사상국제세미나에 참석한 황장엽 당시 노동당 비서.

 

“지금 내가 모든 걸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안기부장이 보고한 것 중에 그런 것도 (사전에) 조금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정보가 있다, 정보부에서 말하는 거는 전부 정보니까, 확실한 거는 아니고. 황장엽이가 망명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는 것, 그런 정보는 내가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 지금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어요.
  
 
―처음 접촉은 한국의 사업가 A씨가 미리 김덕홍씨와 주로 접촉했습니다. 김덕홍씨는 베이징에 사업으로 나와 있었죠. 황장엽씨가 김덕홍씨를 통해서 우리 측에 연락을 해 왔고, 우리는 1996 6월부터 알았다고 합니다. 그해 11월에는 이 A씨로부터 ‘김덕홍뿐 아니라 황장엽씨도 만났다. 기회를 보고 있다. 친필 서신까지 받았다’는 진전 상황을 알 수 있었고, 그렇게 거사를 기다렸다고 합니다(황씨의 장례식 전날인 13일 그의 수양딸인 김숙향씨(68)는 서울 아산병원 빈소에서 <문화일보> 기자에게, 1995년 베이징에서 김덕홍씨 소개로 황 선생을 처음 만났으며 이후 2년간의 교류 끝에 황씨가 망명을 결심한 것이라고 밝혔다고 <문화일보> 14일 보도했다). 그런 황장엽씨가 우리 베이징 총영사관으로 넘어오자마자 그 다음 날 밤에 김정일 전처의 조카인 이한영씨가 성남 아파트에서 피살됐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황장엽씨한테 ‘서울 가면 죽는다’는 경고인데…. 황씨가 우리 공관에 들어온 다음 날 북한이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내고 ‘황장엽이 한국에 납치됐다면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망명을 추구했다면 그건 변절자니까 변절자는 갈 테면 가라는 게 우리 입장이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는 의외로 북한이 쉽게 포기하는 걸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 황장엽 망명 때 베이징 영사관 포위하고 ‘죽인다’ 협박

황장엽씨의 망명 당시 중국 정부는 무장병력을 동원해 한국대사관 영사부 건물을 보호했다

 

“그런데 실제로 하는 짓은 안 그랬어요. 실제는 북한 부총리가 중국에 갔어요. 가서 장쩌민까지 다 만났어요. 그러고는 이북의 청년들, 기차 타면 베이징에 바로 가잖아, 상당수를 보내 우리 영사관을 포위해 굉장했어요. 죽인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처음에는 중국이 병력만으로 우리 영사관을 지키다가 안돼 장쩌민이가 장갑차까지 동원한 거야. 중국 입장에서도, 황씨가 한국 영사관에 있는데 북한 청년들한테 탈취된다면 그것도 말이 안되는 거잖아요. 그 정도로 심각했어요. 그러니까 황장엽씨도 반 죽은 거야, 그 안에서. 그 영사관이 대단히 큰 데도 아니고 말이야. 대사관 같으면 어느 정도 크지만. 그러니까 북한이 중국에다가 직접 그랬다고 봐야지. ‘황장엽이 내놔라. 남한에 가면 바로 죽이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 장쩌민 주석한테 황씨를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신호를 계속 보냈거든. 그리고 내가 비밀편지까지 했거든. 장 주석이 다 결정을 하니까. 그리고 내가 편지 내용에 대해서도 기억을 하는데, 우리가 (정상회담 때) 만났을 때 ‘형제간처럼 지내자’고 장 주석이 말했고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한 일도 상기시켰어요. 그런데 만일 북한 압력에 못 이겨서 중국이 황장엽씨를 이북에 도로 보내는 경우가 생기면 황씨는 반드시 총살된다, 그러면 중국에 대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자유주의 국가들이 인권을 무시하는 나라라는 비판을 하게 될 거다, 그리고 중국하고 나하고의 관계는 심각해질 거다, 그런 내용으로 편지를 했어요. 기필코 황씨를 한국으로 보내야 된다고 했지.
  
 
그런데 아무 답이 없는 거야. 그런 법이 없거든. 세계 정상들끼리 편지를 하면, 뭔가 답이 오고 이러거든. 그런 일이 없는데, 답이 안 와요. 그래서 그때 한국 말 잘하는 장정연 중국대사를 하루 오후에 통역도 없이 청와대로 불러서, ‘장쩌민 주석이 내게 이럴 수 있나. 내가 이런 내용 편지를 보냈는데 어째서 답장이 없나. 세계 어느 나라든 정상이 친서를 보내면 답이 온다. 그런데 답을 안 한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장 대사한테 이야기했더니 ‘오늘 중에 장쩌민 주석이 볼 수 있도록 자기네가 보내는 방법으로 보내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암호로 어떻게 보낸다는 말이겠지. 그래서 꼭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얼마 후에 연락이 왔는데 ‘황씨를 바로 한국으로 보내기가 어렵다’는 거였어요.

  
  
중국, 황씨 바로 한국으로 보내기 어렵다 연락

황장엽씨가 1997 1월 자신의 귀순 의사와 동기를 담아 한국 정부에 보낸 편지의 원문.

 

황장엽씨가 베이징에서 우리 영사관으로 넘어온 뒤에 김영삼 대통령이 장쩌민 주석에게 친서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우리 국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일본 언론에는 보도가 됐다. 황씨가 넘어오고 나서 6일 만이었으니까, 보도된 날짜를 하루만 빼더라도 최소한 김 대통령은 친서를 사건 발생 5일 이내에 보냈다는 이야기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 대통령의 친서 요지는 ‘황씨 망명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며,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고 한다. 이 친서를 정종욱(鄭鍾旭) 주중대사가 중국 외무차관에게 전할 예정이며, 중국 외교부는 이 같은 사실을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에도 통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본 측 보도에 대해 한국 정부는 그런 일 없다고 부인했다.
  
 
황씨 망명 직후 한동안 중국 정부는 황씨를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한국 정부의 독촉에 대해 한국 뜻을 존중해 주겠다는 식의 신호를 전혀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보도된 황씨의 자필 ‘귀순 동기’를 보면, 황씨가 오래전부터 망명을 준비했음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중국 정부는 처음에는, 황씨 망명이 순수히 자유의사에 의한 것인지 확인되면 망명을 위한 중국 출국을 허락하겠지만 한국 정부의 공작에 의한 것이면 중국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중국에서는 중국 당국이 한국 영사관에 있는 황씨의 의사를 직접 확인한 뒤부터 조금씩 ‘인도적으로 처리’한다는 식의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황씨를 제3국인 필리핀으로 보내는 거였죠.
 
“중국이 황씨를 제3국으로 보냈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보내면 좋겠느냐고 한국 희망을 물어왔어요. 그때 일본도 생각하고 그랬는데, 제일 나하고 가깝고 믿을 수 있는 사이가 필리핀 라모스(Ramos) 대통령이더라고. 그래서 필리핀으로 보내달라, 그렇게 말했어요. 그때 반기문(潘基文)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비밀 특사로 임명해 마닐라에 보냈어요. 다섯 시간이면 가니까, 가서 라모스 대통령을 밤에 만났어. 라모스는 나하고 굉장히 친하니까, 황씨를 바로 받겠다, 자기네 정보기관이 가진 아주 안전한 거처가 과거 미군기지 안에 있다는 거야. 그렇게 이야기가 잘돼서 황씨를 필리핀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당시 필리핀 야당에서, 그때 필리핀 야당이 그리 세지도 않았는데, 그게 북한 대변인 비슷한 소리를 하는 거야. ‘왜 시끄럽게 우리나라(필리핀)가 이런 사람(황씨) 맡아서 말이야, 얼른 보내버려라’고…. 그래 라모스 대통령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아이고, 제발 빨리 데려가 달라’고
  
 
그때 내가 라모스 대통령에게 기간은 이야기 안 하고 좀 맡아 달라고 했거든. 처음에 황씨를 필리핀으로 보내면서 중국하고 우리는 최종적으로 한 달 동안 필리핀에 두고 있다가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했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또 중국에 연락을 했어요. 지금 라모스가 오래 더 못 데리고 있겠다는데, 지금 한국으로 데려오면 어떻겠느냐고. 그런데 중국은 절대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라모스한테 그 고충을 이야기할 수도 없고, 곧 데려온다 곧 데려오겠다, 계속 이러면서 중국 요구대로 한 달까지 기다린 뒤에 우리 비행기를 보내서 데려왔어요.


  
YS, 황장엽 면담 때 기관원 배석하자 “너 나가라”고 호통

황장엽씨가 서울에 오기 전 한 달간 체류했던 필리핀 내 안가 부근에서 산책 도중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황씨가 넘어왔다는 보고를 처음 받았을 때, 물론 당면과제는 안전하게 이 사람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이었겠지만, 이것이 북한 체제에는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줄 것이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김정일한테 어떤 쇼크를 줄 것이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지요. 김정일 체제는 무너진다, 북한 체제는 무너진다, 이렇게 완전히 판단했어요. 
  
 
―서방 정보기관들에서도 그렇게 보는 경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당시 미국이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황씨 조사를 좀 하겠다고, 미국 본토에서 정보기관 사람들이 와서 전부 조사를 하고 갔어요.
  
 
―미국이 만족할 만큼 조사를 했습니까?
 
“그랬다고 봐야 해요.
  
 
―각하가 황씨를 처음 만난 것은 황씨가 망명한 지 6년 후인 2003 1월이었습니다
 
“나는 재임 중 황장엽 서기를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퇴임한 후 홀가분한 상태에서 그를 만나고자 했어요. 그러나 김대중 정부 기간 내내 황장엽 서기는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었다고 봐야 돼요.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 마지막 판에 정치적 압박이) 조금 느슨해지는 틈을 타서 황 서기가 상도동을 방문했지. 그런데 기관원이 내가 황 서기를 만나는 식탁에까지 따라 들어왔어요. 사람을 만날 때 반드시 정보부 사람이 보호하고 경호한다는 구실로 감독을 했던 거지. 그래서 내가 ‘너, 나가라’ 하고 쫓아냈어요. 내가 (기관원에게) ‘너 당장 나가라, 누가 옆에서 듣고 기록을 하냐. 우리 집에는 그런 역사가 없다’고 했더니, 사색이 되어 나갔어요. 그 장면이 황 선생에게는 감동이었던 것 같아요. 황 선생으로서는 통일과 자유의 길을 찾아 한국으로 넘어온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기관원이 없는 자리에서 마음속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나중에 황 선생이 ‘김영삼 대통령 참 대단합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하기에 내가 ‘나는 원래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어요.
  

 

김 전 대통령을 지금도 보좌하고 있는 김기수(金基洙) 비서실장은 “황 선생은 각하와의 오찬을 위해 내가 전화를 드리면 언제든지 즉각 ‘가지요’라고 반갑게 응답했다”면서 “황 선생은 각하께서 자주 불러주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황 선생이 별세하기 전 두 달간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 지난 10 12일 황 선생 빈소를 찾은 김 전 대통령은 수양딸 김숙향씨에게 “내가 이분(황 선생)을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났는데, 돌아가시기 전에는 두 달을 못 만난 것 같아요. 그렇죠? 아이, 내가 참 너무 아쉬워요.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김 교수(김숙향씨)는 어떻게 그렇게 연락을…(하지 않았어요?)”이라고 말했다.
  
 
수양딸 김씨는 “(황 선생님이) 추석(9 22) 지난 후에 기다리셨어요. ‘연락 왔나, 연락 왔나?’ 하시면서요”라고 대답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도 황씨가 평소 식사량이 적었고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북한 지도부는 절대 개방 못 할 것”

  황장엽씨는 1997 2월 망명하기 전인 1996년 중반쯤부터 망명 의사를 굳히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고, 나중에 그의 수양딸로 삼은 김숙향씨와는 1995년부터 접촉하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황씨는 그 전부터 중국 등지로 출장을 나올 기회가 자주 있었다. 다시 김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1994 1월 중순에 황장엽씨가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갔습니다. 비공식 방문인데, 황장엽씨는 당시 북한 최고회의 외교위원장이었습니다. 그때 나온 보도들이 뭐냐 하면, 북한이 중국식 개방정책을 취하기 위해 대표단을 많이 이끌고 배우러 가는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북한이 당시에 중국식 개방을 도입하기 위해서 경제 관료들을, 가령 김정우 대외경제사업본부장 같은 사람들 인솔하에 중국에 대규모로 보내고, 실제로 개방하려고 한다는 보도들이 있었는데, 각하는 재임 당시 이런 움직임들에 대해 좀 보고를 받았던 게 있습니까?
 
“그때 그런 보고를 수없이 받았는데 나는 그게 아니라고 봤어요. 북한은 절대 개방을 못 한다, 이렇게 봤어요. 개방을 하면 김일성이고 지금 김정일이고 다 무너진다고 봤어. 지금 인민이라는 사람들은 (바깥세상의 실상에 대해) 절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워낙 못살고 가만히 앉아서도 붕괴될 판이니까 그래도 중국식으로 개혁 개방해야 된다는 주장이 내부에서도 있었을 테고, 그러기 때문에 중국에 가서 좀 배워 와라 이러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런 지혜가 없단 말이죠, 이북에. 일반 사람들은 더욱더 지혜가 없고. 윗사람들도 그러면 붕괴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못 한단 말이야. 윗 사람들은, 개방하면 우리 자리도 없어지고 잘못하면 영 전체적으로 망한다, 이렇게 본다니까. 절대 나는 개방 못 한다고 봐. 요새도 그런 말 있는데, 개방 못 한다고 봐요. 김정일이가 그런 자세는 절대 없거든요. 그러고 주변 사람들이 그런다고 봐야 되고. 이렇게 국민을 굶주리고 죽어가게 하는 게 자기네가 통치하는 데는 편하단 말이야. 그리고 군사정권이 아시아 지역에도 여러 나라 있지마는, 북한에서는 군이 너무 힘을 가지고 장악하고 있으니까….
  
 
황장엽씨는 한국에서 재독 간첩 혐의로 기소됐던 송두율씨에 대해서도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황장엽씨가 이야기한 것은, 송두율은 확실히 공산당이라는 거야. 확실히 공산당 했다고 그러더라”고 말했다.
  
 
“황 선생은, ‘김철수 북한 노동당 후보위원’이 바로 독일 대표 송두율이라는 것을, 활동상황 등 관련서류를 봐서 알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노동당 내 관련부서에서 ‘송두율의 이름을 김철수로 바꿔야 되겠습니다’라고 서류가 올라와서 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는 거야. 1990년 이후 송두율이 평양을 10여 차례 드나들었다고 해요. 황 선생은 그런 내용을 한국 국정원에서도 알고 있을 줄 알고 여기 와서 대수롭지 않게 당연한 걸로 이야기했는데, 그게 국내 언론에 보도되고, 고발도 당했잖아요. 그래서 김대중 정부가 그렇게 대응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이야기를 안 할 걸 그랬다는 거야.
  
 
1994 7월 각하와 김일성 주석이 열기로 합의했던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으로 무산되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회담 준비 상황이나 죽음에 대해 황씨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김일성, 나와 정상회담 앞두고 굉장히 흥분했다고 들어
  
 
“당시 김일성이 굉장히 신경을 썼던 거 같아요. 회담 준비를 하느라고 매일 한 번씩은 서기 회의를 하고 때로는 두 번도 했다고 하거든. 그게 황장엽씨 이야기야. 그때 나도 김일성이 준비를 많이 한다는 정보를 들었거든요. 그 당시에 물론 여러 가지 서로 만나고 하니까 그렇겠지마는, 이북의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어요. 회담 준비에 엄청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매달렸던 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황씨가 이야기하기로는, 김일성은 당시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여서, 6월로 예정돼 있던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평양 방문을 연기시켰고, 좀 쉬어야 할 형편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6 13일 평양을 찾아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맞이했고, 그 이후 죽기 전까지 나(김영삼)와 정상회담을 한다고 내내 흥분해 있었다고 해요.
  
 
―김일성도 그때까지 주로 밤에 일하는 체질이었습니까?
 
“아니 김일성은 안 그랬어요. 김정일이 그랬지.
  
 
―김일성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자는군요.
 
“뭐, 김정일은 아침까지 술 먹고, 도저히 그거는 정상인이 아니야.
  
 
―김일성은 묘향산에서 죽었잖습니까? 그러면 회담 준비를 위해 일부러 평양에서 묘향산에 갔다는 건가요? 아니면 수시로 갔습니까?
 
“그때는 회담 준비를 위해 갔지만, 수시로 그랬다는 거야. 거기 별장이 있잖아요. 김일성이 카터 전 대통령의 방문을 받고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한 것은 결국 (핵문제로) 미국과 끝까지 상대하는 게 굉장히 겁이 났기 때문이라고 봐요. 만주로 도망을 쳤잖아, 6·25전쟁 때 맥아더가 밀고 올라갔을 때는 만주로 도망쳤잖아. 그러니까 그런 사태는 다시는 안 일어나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벼랑 끝까지 밀고 나가다가 막바지에 미국하고 타협하고, 그렇게 했어요. 지금하고 어쩌면 그렇게 같은지 모른다니까. 이번에 와세다 대학에 가서 특강 할 때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하여튼 어쩌면 김정일이가 그렇게 김일성과 똑같이 닮은 짓을 하는지 몰라요.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하는 것,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 내쫓는 것….
  
 
―김일성은 당시 회담을 앞두고 주로 어떤 것을 많이 준비했던 것 같습니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도 상당히 준비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외무부는 외무부대로, 안기부는 안기부대로, 통일부는 통일부대로, 또 청와대 안보수석실은 안보수석실대로, 또 자기들끼리 정보 교환도 하고 이러면서…. 그래서 최종적으로 가기 전에 그것을 내가 종합해서 보고를 받을 계획이었죠. 그런데 그때 2주일이 남았기 때문에…(미처 보고를 받지 못하고 없던 일이 됐어요). 나도 나대로 생각했던 것들을 따로 노트에 이것저것 메모를 해두었는데, 그 뒤에 그 노트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황씨, 망명 전 이미 북이 핵무기 갖고 있다는 사실 알아

  ―북한 핵무기에 대해 황장엽씨는 정보를 좀 갖고 왔습니까? 황씨 망명 후인 1997년 미국 워싱턴 타임스에 이런 보도가 있었습니다. CIA가 만든 보고서라면서, 황장엽씨가 ‘북한이 이미 핵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했다’고요. 이 보도가 나오고 나서 우리 정부에서는 ‘아직 황씨는 미국 정보부 사람들을 만난 일이 없다’고 부인했던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안기부를 통해서 들었지마는, 황씨가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는 거였어요. 그것은 아주 확실하게 자기가 (북한의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다는 거야. 핵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몇 개나 된다든지, 언제쯤 만들었다든지….
 
“그때 한 서너 개 된다고 했던 것 같아. 지금도 그거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각하 재임 중일 때나 요즘(인터뷰 시점은 2006년 북한의 첫 핵실험이 실시되기 이전임) 한국 정부는 북한이 진짜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 의심을 갖고 있고, 미국 정부도 비슷한 것 아닌가요?
 
“내가 퇴임 후 황장엽씨를 처음 만났을 때(2003) 얘기했어요.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황 서기가 자꾸 하는데, 미국이 정보가 상당히 빠르고 정확한데,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직 북한이 핵을 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황 서기가 그런 말을 자꾸 하면 황 서기를 여러 가지로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너무 강조하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결국은 황씨의 말이 맞았을지 모르겠습니다.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라는 압둘 카디르 칸 박사도 2004년에, 자신이 1990년대 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 미사일에 장착된 핵탄두를 목격했다고 증언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 거 보면 이미 그때(황씨가 북한에 있을 때) 만들어진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때는 미국의 정보가 상당히 정확하다고 생각했고, 또 황장엽씨를 내가 한국에 오게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불신하는 사람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아서 그런 얘기를 했던 건데….


  
황씨, 김대중 정부 때 활동 제약 심해 불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03 6 16일 자택으로 찾아온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에게 일본 국회의원들이 황씨의 일본 방문을 제의한 초청장을 전달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3 1 7일 상도동 자택에서 황씨와 처음 만난 후 그 내용의 일부를 사흘 뒤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황씨가 “지금도 미국 의회에 가서 북한 실정에 관해 증언하고 싶지만, 당국이 못 가게 막고 있다”며 김 전 대통령에게 방미(訪美) 희망을 거듭 피력했다는 것이었다. 황씨는 방미 희망 외에도 “활동을 좀 하고 싶은데 당국이 못 하게 막는다”는 말도 했다고 김 전 대통령은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가 물러나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2003 6 16일에도 상도동 자택에서 황씨와 만난 뒤, 정부가 계속 황씨의 방미를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온 사람인데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지, 정말 한심한 일”이라면서 “일본에서는 ‘납북자문제 해결을 위한 의원 모임’ 대표인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회장이 황씨에게 조만간 방일을 요청하는 초청장을 내게 주어서 내가 대신 황씨에게 전달했고, 나는 황씨가 일본에 가는 데 찬성”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변인 격이던 박종웅(朴鍾雄) 전 의원은 “김 대통령의 말은, 한국 정부가 황씨 방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신변안전 보장에도 불구하고 황씨를 보내지 않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며, 황씨를 미국에 보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그 이틀 뒤인 6 18일 나와의 인터뷰에서는 “황 선생은 그저께 나에게 ‘솔직한 이야기’라면서 ‘미국보다는 일본을 더 가고 싶다’고 말하더라. 어찌됐든 간에, 자유를 그려서 목숨 걸고 와 가족까지 다 죽고 (김 전 대통령은 다른 인터뷰에서, 황씨가 망명한 이후 북한에 남아 있던 부인과 아들이 자살하고 딸도 죽었다고 들었고, 황씨도 이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내게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됐는데, 그만한 사람인데,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지금 저 사람을 완전히 포로처럼 삼아가지고…”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황씨가 일제 때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말하면서, 일본에 가보고 싶어 하는 그의 희망을 이해해 주었다. 옆에 있던 김기수 비서실장은 “오죽하면 황 선생이 북한에 있던 칠십 년보다 한국에 와서 십 년이 더 괴롭다고 하겠느냐”고 거들었다.
  
 
그 무렵 한승주(韓昇洲) 주미대사는 워싱턴에서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황장엽씨는 미국에 올 수 있을 거다, 노무현 정부도 이 문제에 상당히 개방적이고, 일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게 있는데 곧 해결될 거다, 며칠 안에 성사되기는 무리이지만, 그렇다고 1년씩이나 걸릴 일도 아니다’고 말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황씨의 방미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배경은, 황씨가 미국에서 북한 내부나 남북관계, 한국 정부 등에 관해 도대체 어떤 폭발성 있는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황씨가 미국 망명을 선언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 무렵 김 전 대통령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황 선생의 방미를 막으려고 황 선생에게 ‘당신 미국 가고 싶으면 여기(국정원)에서 나가서 혼자 택시 타고 공항으로 가라’고 협박까지 했다더라”고 말한 적도 있다. 당시 황씨는 국정원 내 안가에서 보호되고 있었다. 결국 그 후 황씨는 국정원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이후 ‘경찰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황씨는 국정원이 자신을 내보낸 데 대해 불편한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막상 경찰 보호를 받으며 바깥생활을 한 이후에는 그게 더 편하고 경찰이 여러모로 잘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김 전 대통령에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2007 4 10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민주화위원회 창립대회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황장엽씨 등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장승길 망명사건 

  당시 한국 정부가 황씨의 방미를 6년여 동안 막았던 데는 이런 핑계(?)도 있었다.
  
 
황씨가 한국으로 망명한 지 6개월 뒤인 1997 8, 이집트에 있던 북한 장승길 대사 부부가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형제가 망명했는데 형은 프랑스 파리의 무역대표부에 있다가 부부와 아들, 딸이 일주일 먼저 파리에서 사라졌고, 일주일 뒤에는 이집트의 장승길 대사가 부인과 같이 미국 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한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 측이 곧바로 우리 정부에도 알려주었고,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장 대사의 아들은 그보다 1년쯤 전에 유럽에서 실종됐는데, 당시 보도에 의하면 그 아들은 캐나다나 미국에 망명한 것으로 보였다. 장승길 대사 부인은 북한의 정치선전 가극 ‘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 최혜옥이라는 인민배우 출신인데, 김정일의 총애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승길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가 한국으로 오지 않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미국 관계기관과 상당히 사전 접촉이 있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그러니 장승길이 미국에 간 뒤에는 미국 CIA에서 조사를 다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국 정부가 ‘우리도 그 사람 조사 좀 하자. 장승길을 서울로 데려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가 조사관을 미국으로 보낼 테니까 조사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걸 거절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국정원은 ‘황장엽씨가 왔을 때 우리는 CIA 관계자들이 서울에 와서 조사하게 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지기도 했지만, 끝내 소용없었다는 겁니다.
 
“만일 장승길의 미국 망명이 사전에 미국 측과 상당한 접촉 끝에 이뤄진 것이라면 미국으로서는 자기네 비밀을 한국 측이 알게 되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고 보았을 수도 있겠지요. 내가 잘은 모르지만 말이지. 어쨌건 현직 대사의 망명이라는 것은 큰 사건이거든. 금방 바로 되는 일이 아닐 거란 말이에요.
  
 
어쨌거나, 황씨는 2003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일주일 정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물론 ‘망명’은 시도조차 없었다. 황씨의 미국 일정 마지막 날에 해당하는 11 3일 상도동에서 이뤄진 나와의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은 “방미 일정 연기는 한국 정부 반대로 잘 안 되는가 봐요. 망명 얘기는 처음부터 가능성 없는 얘기라고 나는 봤어요. 한국에 목숨 걸고 찾아왔는데, 아무리 여기서 속이 상하지만 미국으로 망명할 리가 없지”라고 말했다.
  
 
황장엽씨는 워싱턴을 떠나기 전날인 11 3(현지시각) 당시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조선일보> 김대중 이사기자(理事記者)와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기자는 11 6일자 <조선일보>에 ‘손발 묶인 황장엽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명(記名)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황장엽씨가 미국 워싱턴에 머물던 마지막 날인 3, 황씨 측의 주선으로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호텔로 찾아갔다. 그쪽에서 시간과 장소까지 정해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황씨는 그를 경호(?)한다는 한국 측 요원들의 강력한 제지로 호텔방을 나올 수 없었고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던 기자는 전화로 통화만 하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화로 ‘만나서 할 얘기도 있고 미국 얘기도 듣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다’며 나중에 서울에서나 보자고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4 1, 황장엽씨가 위원장이던 ‘북한민주화위원회’(2000 3월 결성)를 중심으로 여러 탈북자단체를 모아 결성한 ‘북한민주화동맹’에서 황 위원장의 요청에 따라 명예위원장을 맡았다.
  
 
그해(2004) 12월 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의 핵심 간부가 통일부의 대북접촉 승인을 받은 뒤 중국으로 출국, 북한의 통일전선부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여기서 “김영삼, 황장엽 역적들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라”는 지시를 받은 일이 있다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8 9 30일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발표했다.
  
 
김 전 대통령과 황장엽씨에 대한 살해 협박은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후반인 2006 6, 자유북한방송 사무실 앞에서 김 전 대통령을 겨냥한 플라스틱 상자가 발견됐다. 거기에는 “김영삼이가 계속 망발을 한다면 상자 속의 인형처럼 될 것”이라는 협박문과 함께 칼이 꽂힌 인형이 들어 있었다. 자유북한방송은 2004 2월 김 전 대통령과 황씨가 공동으로 설립했었다.  

  
  
北의 살해협박

  황씨에게도 적어도 두 차례 이상 살해 위협이 전해졌다. 2004 3월엔 황씨가 회장으로 있던 탈북자 동지회 사무실에 ‘죽여버리겠다’는 문구가 적힌 영정사진 크기의 황씨 사진이 중앙에 30cm 길이의 식칼이 꽂힌 채 배달됐다. 황씨가 일본 의회를 방문해 북한 인권에 대해 증언하기로 한 직후의 일이다. 2006 12월엔 자유북한방송 사무실 앞에 황씨를 겨냥한 협박 소포가 배달됐다. 소포 안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얼룩진 황장엽 전 비서의 사진이 약 37cm 길이의 손도끼와 함께 들어 있었고, 동봉된 한 장짜리 협박문엔 11월 황씨의 국회인권포럼 초청강연 내용을 언급하며 ‘황장엽은 쓰레기 같은 그 입을 다물어라’ ‘배신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등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번에 황 선생이 별세한 뒤, 김 전 대통령은 이런 회고를 했다.
  
 
“김대중 시절, 정부는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고 황 선생을 국정원 안가에서 쫓아냈다. 그가 미국 등 해외방문 의사를 굽히지 않자 안가에서 쫓아내면서 ‘택시 타고 공항으로 갈 테면 가라’고 했다. ‘외국에 가고 싶으면 가라, 대신 우리는 보호 못 한다’는 협박이었다. 당시는 북한에서 나(김영삼 전 대통령)와 황 선생을 죽인다고 할 때였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고 보호해야 할 상황인데 황 선생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박해를 받았다
  
 
황 선생은 ‘(김영삼) 대통령 때문에 살아갈 용기와 힘이 생겼습니다’, ‘남한에 내려와서 각하 같은 어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제일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북한민주화동맹 사람들에게도 사무실에 내 사진을 자기 사진과 나란히 걸라고 지시했다. 황 선생은 또 ‘김대중 정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북은 무너졌을 텐데, 다 무너져 가는 북한 정권을 구해줬으니 김대중은 그야말로 민족의 반역자다’라고 자주 말했다.”⊙

출처월간조선 2010년 11월호 김창기 조선뉴스프레스 대표

 

■김수한 편

2016.01.27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털어놓은...

 

8·15 해방을 맞은 것은 추풍령에 있는 경북중학교 동기의 자형() 집에서였다. 추풍령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청운(靑雲)의 꿈을 키웠다.
  
 
경북중 3학년에 다니던 내가 추풍령에 가 있었던 것은 당시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글라이더 사건’ 때문이었다. 경북중에는 거물 친일파(親日派)인 문명기가 일본군에 헌납한 글라이더가 한 대 있었다. 일제는 학교 운동장 한쪽에 격납고까지 설치하고, 이 글라이더를 금덩어리처럼 애지중지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천으로 된 글라이더 날개에 그려져 있던 일장기를 칼로 도려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학교 앞 대봉파출소의 나가시마(長島) 형사가 나를 호출했다. 나를 용의자 중 하나로 지목한 것이었다. 아마 그로서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조사해 본 후에 나를 불렀을 것이다. 아버지는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학교)을 나온 인텔리로 고향인 왜관에서는 나름 대접을 받는 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가시마 형사는 처음에는 “젊었을 때에 그런 만용을 부릴 수도 있는 거지”라면서 나를 살살 구슬렀다.
  
 
유도신문(訊問)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나가시마 형사는 나를 어르다가 위협을 하는가 하면, 하숙집에 가서 내 신발을 가져다가 글라이더 기체 위에 있는 족적(足跡)과 대조해 보기도 했다. 1주일 후에 나는 대구경찰서 고등계로 넘겨졌다. 사무실에 나중에 제8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대우(李大雨)씨가 경찰관으로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경찰은 고문(拷問)까지는 아니지만, 따귀를 때리면서 취조(取調)했다. 하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범인이 아니었으니까….
  
 
나를 용의자로 지목한 것은 평소 행동에서 나를 반항적이라고 볼 대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련(敎鍊)시간에 전교생이 행진을 해야 할 때에 일부러 움직이지 않아 대열을 흐트러뜨린 적도 있었다. 우리가 ‘남중좌(南中佐)’라고 불렀던 배속교관(配屬敎官)이 달려와 군도(軍刀)로 나를 때렸다. 내가 그런 반항적 태도를 취한 것은 기숙사 생활이 갑갑해서이기도 했고, 재학 중에 가세(家勢)가 기울어서 마음이 우울해진 탓도 있었다.
  
 
아마도 일제(日帝)하 마지막 항일(抗日)운동 사건이었을 이 사건의 범인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나 학교로 돌아오니 후지사와(藤澤) 교장이 나를 불렀다. 교장실에는 담임선생님(이가야 모모히코)도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도저히 너를 학교에 둘 수가 없게 되었다. 학교성적도 그렇고, 품행도 그렇고…. 어떻든 간에 요시찰인(要視察人)처럼 되어 버렸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좀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하자면 자퇴(自退)권고였다. 담임선생님은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 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했다. 내가 국회의원 시절 그분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반항적인 나를 바로잡아 보려 애를 태웠던 일들을 회고했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둔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해방 즈음에는 추풍령에 있던 친구 자형 집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추풍령 기상관측소 옆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자형 집에 들러 “당신들은 이제 해방이 됐다”고 말했다.

  
  
대구폭동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교육청에 근무하던 덕산초등학교 동기 오()모씨와 내 복교(復校)문제를 의논했다. () 군정청에서도 일제 말기에 항일운동 관계로 제적(除籍)된 학생들을 무조건 복교시키라는 지시를 내려 놓고 있었다. 그런데 대화 중에 두 분 사이에 언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경북중에 복교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대구중학교 기성회(期成會)를 조직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다니던 대구제1중학교를 접수해서 한국인 중학교로 전환한 것이다. 나도 대구중으로 진학, 1회 졸업생이 되었다.
  
 
대구중 시절, 나는 학생자치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응원단장, 체육부장 등도 지냈다. 당시 대구중은 귀국한 해외동포나 피란민의 자제,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늦은 나이에 복교한 학생 등이 뒤섞여 교풍(校風)이 엉망이었다. 나는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가 끝난 후, 단상에 올라가 바람직한 교풍에 대해 일장훈시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지역사회의 학생리더 중 하나로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946
10 1일 대구폭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우익(右翼)인사나 경찰관들이 타살(打殺)됐다. 거리 곳곳에는 경찰관들의 시신(屍身)이 널려 있었다. 깨진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뇌수(腦髓)가 빗물에 흘러갔다. 대구경찰서 앞에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라고 하는 일본 절이 있었다. 거기에는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처럼 경찰관 시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군중들이 “쌀이 왔다! !”이라고 외치며 몰려갔다. 대구공회당 앞에서는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주듯이 쌀을 나누어 주었다. 아마 어디선가 약탈해 온 쌀이었으리라. 미군(美軍)들은 사진촬영만 할 뿐 폭동을 진압할 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병원도 좌우(左右)로 나뉘었다. 좌익 부상자들은 경북대 병원으로, 우익 부상자들은 미션스쿨인 계명중학교 계열의 동산병원으로 실려 갔다.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의 파업으로 철도가 멈춰 섰다. 대구·경북 일대는 지옥이 됐다. 경북 영천에서는 대낮에 불구덩이 속으로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잠시 후면 “뻥”, “뻥” 하면서 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구 10·1폭동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다. ‘인민혁명’이었다. 이런 아수라장을 목도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런 것이 혁명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는 대구폭동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만은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했다. 대구대에는 신현확(申鉉確·전 국무총리), 백남억(白南檍·전 공화당 의장), 이재철(李在澈·전 인하대 총장)씨 등이 교수로 있었다. 대개 고향 어르신들로 우리 집안과도 인연이 닿는 분들이었다.

  
  
“육군소장 전두환, 인사드리겠습니다”

2014 4월 영남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6·25 당시 학도병으로 지원하면서 애국의 결의를 담은 글귀를 적었던 태극기를 기증했다.

 

6·25전쟁이 터졌다. 대구폭동 등을 통해 공산주의의 잔혹함을 체험했던 나는 육군 제3사단 사령부로 달려가 혈서(血書)를 쓰고 자원입대했다. 학도병 1기였다. 대구 동부국민학교에 대구 일대의 대학교 및 중고교 출신 학도병들로 편성한 학생대대가 만들어졌다. 3개 중대를 편성했는데, 나는 제2중대장이 되었다. 우리 중대에는 대구공업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도 있었다.
  
 
당시는 물론, 그 후에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2·12사태 후 ‘서울의 봄’ 때였다. 한번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경복궁 옆에 있는 보안사령부로 갔다. 사령관실에서 기다리는데, 전두환 사령관이 들어섰다. 그는 깍듯이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면서 말했다.
  
 
“육군소장(少將),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의원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의원님을 오래 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라면서 6·25 때 내 중대원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저는 이후 포병학교를 만들 때 차출되어 갔다가 육사(陸士)에 들어가 11기로 임관, 장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의원님께서 활동하시는 걸 먼 데서 보면서 ‘참 놀라운 분, 애국심이 강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늘 존경해 왔습니다.
  
 
솔직히 보안사령부에 갈 때만 해도 조금 긴장했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푹 놓였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국회 개헌특위(改憲特委) 위원이었다. 정국(政局)에 대해 한마디 할 법도 한데, 그는 그에 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 끝에 나는 “군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무슨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들에게 욕먹지 않는 방향으로 깨끗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전두환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은연중에 나를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인지 떠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내색을 일절 하지 않았다.
  
 
이후 내가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시절, 대통령이 된 그는 명절 같은 때에 우병규(禹炳奎) 정무수석비서관을 통해 술이나 양복지 등을 보내 주기도 했다.
  
 
얼마 전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서울대 병원 빈소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고비마다 그와 만나곤 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건강해 보였다. 정치 얘기 등은 하지 않고 건강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東菴 徐相日 선생과 혁신계

▲동암 서상일 선생(왼쪽 안경 쓴 사람) 5·16 후 혁신계 활동을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언젠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해 보고 싶다, 정치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내가 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해방을 앞두고 추풍령 저수지를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키우던 시절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젊은 시절 내가 존경한 분은 동암 서상일(東菴 徐相日) 선생이었다.
  
 
일제하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였던 선생은 해방 후에는 제헌(制憲)의원, 5대 민의원(民議員)을 지냈다.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면서 이승만(李承晩) 정권과 맞서 싸웠던 그는 1952년 독립운동가 출신 김시현(金始顯)씨 등이 시도한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거물 정치인이었던 그가 마냥 좋았다. 해방 후 젊은 시절에도 이승만 박사나 김구(金九) 선생은 잘 몰랐다. 내가 아는 건 ‘동암 서상일 선생’뿐이었다.
  
 
서상일 선생은 ‘혁신계(革新系)’였다. 1955년 민주당 창당을 앞두고 야권은 ‘민주대동파(民主大同派)’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장택상(張澤相), 서상일, 김성수(金性洙) 등 민주대동파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혁신계인 조봉암(曺奉岩)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도연(金度演), 윤보선(尹潽善), 조병옥(趙炳玉), 장면(張勉) 등 ‘자유민주파’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조봉암 선생은 진보당을, 서상일 선생은 민주혁신당을 창당했다. 민주혁신당에는 독립운동가 장건상(張建相) 선생, 젊은 사람으로는 후일 민주사회당 당수와 제11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정훈(高貞勳)씨 등이 있었다. 내가 정치활동을 시작한 정당도 바로 이 민주혁신당이었다. 나는 민주혁신당에서 섭외부장, 청년부장 등을 지냈다.
  
 
조봉암 선생이 진보당을 창당하지 않고 서상일 선생과 함께 혁신정당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제시대에 공산당 전력이 있는 조봉암 선생은 혁신계 활동을 하더라도 ‘우파(右派)’의 기치를 분명히 했어야 했다. 그가 해방 후 한국민주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서상일 선생과 함께하면서 좀 더 우파적 모습을 보였더라면, ‘진보당 사건’으로 혁신계가 궤멸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4
·19 후에 실시한 7·29총선에서 이동화(李東華·대구戊), 최석채(崔錫采·전 《조선일보》 주필), 서상일(대구乙), 양호민(梁好民·대구丁) 등 쟁쟁한 인사들이 대구에서 출마했지만, 서 선생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낙선했다. 나도 대구병()구에서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대변인

  김영삼·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그 시절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그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선거소송을 한다고 법원에 드나들 때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1960
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민주혁신당, 노농당(당수 전진한) 등 야권에서는 민권수호 국민총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석기 민주당 원내총무가 총무부장, 내가 조직부장, 그리고 김대중씨가 선전부장을 맡았다. 민권수호 국민총연맹 회합이 있을 때면, 우리들의 이름도 신문에 거명되곤 했다.
  
  1960
4 18, 서울 시내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돌아가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당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야권인사의 평()을 실으려 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 속에서 조재천(曺在千) 민주당 대변인마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장이욱(張利郁) 박사, 태윤기(太倫基) 변호사 등이 만든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대변인이었다. 《동아일보》에서 내게 소감을 물어 오자 나는 “학생들의 행동은 뜨거운 애국심의 발로”라고 답했다. 이 발언을 《동아일보》는 크게 실었다. 《동아일보》의 담당 기자가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이었다.
  
 
고려대 학생회장으로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학생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이기택(李基澤) 전 민주당 총재는 경찰을 피해 서울 청파동에 있는 우리 집으로 피신을 하기도 했다. 해군 군복을 입고 우리 집을 찾아온 이기택씨는 내가 집에 없다는 아내의 얘기에 “큰일났다”며 난감해했다고 한다. 아내는 급히 밥을 해 주고 하룻밤 재웠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벌써 뒷담을 넘어 다른 곳으로 도피했더라고 했다.
  
 
나의 이런 활동을 좋게 봐 준 분이 있었다. 장면 정권의 재무부 장관이던 김영선(金永善)씨였다. 그는 30대 초의 젊은이였던 내게 해운공사 감사 자리를 내주었다. 이렇다 할 기업이 없던 시절, 해운공사는 대한중석공사 등과 더불어 국내 굴지의 회사였다. 해운공사 감사 자리는 좋은 자리였다. 때문에 시기도 좀 받았다.  

  허정과 윤보선

대일 굴욕외교반대 집회에서 연설하는 김수한 대변인. 뒤에 박순천 여사, 장택상씨(오른쪽)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시절도 5·16 쿠데타가 나면서 끝났다. 5·16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박순천 여사, 홍익표 전 내무부 장관, 조흥만 전 치안본부장, 송원영 전 의원 등과 함께 국제구락부에서 “5·16은 무효”라면서 헌정(憲政)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런 일로 수배를 받았을 때, 내가 신세를 진 분이 김기철(전 농림부 차관)씨였다. 공군대령으로 공군 정훈감을 지낸 그는 성김 전 주한미국대사의 큰아버지였다. 한번은 나, 김기철씨, 김기완(성김 대사의 아버지) 등이 안국동 윤보선씨 집 앞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종로경찰서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그 집에서 불온한 모임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김기철씨가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원충연 대령 명의로 된 동생의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어디서 감히!”라고 호통을 쳤다. 육군대위가 종로경찰서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걸 본 경찰관은 “잘못된 신고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후 나갔다. 나는 그길로 혜화동에 있는 김기완씨의 집으로 가서 2주 가까이 신세를 졌다.
  
  1963
년 군사정부는 민정(民政) 이양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야권 인사들은 정치재개를 서둘렀다. 홍익표 전 내무부 장관 등이 옛 민주당의 법통을 이어 받겠다면서 민주당을 창당했다. 나는 이 민주당에서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나중에 민주당의 정식 총재는 박순천 여사가 맡았다. 민정 이양 과정에서 야당 세력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했다.
  
 
이 와중에서 나는 허정(許政) 선생이 이끄는 국민의 당에 몸담았다가 1963 11·26 6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국민의 당 시절 김대중(DJ), 송원영 전 의원 등은 허정 선생의 신교동 집을 드나들면서 성명서 작성 등 일을 많이 했다. 마포 셋방에 살던 그 시절이 DJ에게는 참 비참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한한 노력가였다. 나도 열심히 일했지만, DJ에게는 나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흑석동에 살던 내가 아침 일찍 신교동 허정 선생 댁으로 간다고 갔지만, DJ가 먼저 와 있었다. 그런 점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명망이 있었고, 허정 선생 주위에는 행정경험이 풍부한 인재들이 있었다. 윤 전 대통령은 허정 선생을 경쟁자로 생각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불운한 지도자였다. 특히 5·16이 일어났을 때 “올 것이 왔다”면서 쿠데타 진압을 포기한 것은 잘못이었다.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 등을 통해 쿠데타 군을 진압할 생각을 했어야 했다. 국군끼리 충돌하는 내전적(內戰的) 상황을 우려해서였다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의 판단 때문에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동안 군사통치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배경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내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군사정부조차 그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정치생활 초기에 실패를 거듭하던 나도 그분과 행보를 같이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나는 1964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대일(對日)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기 시작했다.  


  
신한당 대변인

1960년대 말 어떤 행사장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가운데)과 함께한 김수한 대변인. 윤 전 대통령 옆에 JP가 앉아 있다

 

1965년 윤보선 선생의 민정당과 박순천 여사의 민주당은 민중당으로 통합했다. 대표최고위원으로는 박순천 여사가 선출되었다. 민중당은 창당할 때, 한일협정이 국회에서 비준될 경우 의원 전원이 사퇴하기로 결의했다. 그해 8 14일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반발한 윤보선, 김도연, 정해영, 정일형, 윤제술, 서민호, 김재광, 정성태 등 8명의 의원은 즉각 민중당을 탈당했다. 당시 헌법에 의하면, 국회의원이 탈당을 하면 의원직을 자동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가 슬그머니 국회로 복귀하고 말았다. 윤보선 등 탈당파 의원들은 1966 2월 신한당을 창당했다. 나는 신한당 대변인으로 있으면서 그분들을 사육신(死六臣), 생육신(生六臣)에 비유하고, 의원직을 유지한 민주당 의원들을 ‘사쿠라’라고 비난했다.
  
 
‘사쿠라’는 겉으로는 야당 활동을 하면서 속으로는 여당과 내통하는 야당 정치인들을 비꼬는 얘기였다. 원래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이 선거유세를 갔을 때에, 군중 속에 섞여 있다가 “옳소!” 하는 식으로 호응해 주는 사람들을 ‘사쿠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해방 후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사쿠라’라는 말이 널리 퍼진 것은 제3공화국 이후부터였다.
  
 
나는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와 신한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점차 윤보선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자리를 굳혀 갔다. 유세가 끝나고 윤 전 대통령이 군화를 찾으면, ‘아, 오늘도 시위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민중당과 신한당은 제7대 대선을 앞두고 1967 2월 다시 합당했다. 당명은 신민당. 합당은 했지만, 누굴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당시 민중당 당수는 유진오(兪鎭午) 전 고려대 총장이었다. 민중당은 제1야당이었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의 신한당은 현역 국회의원을 한 사람도 갖지 못한 원외(院外)정당이었다. 소속 의원수를 생각하면 유진오씨가, 명망을 생각하면 윤보선 전 대통령이 후보가 되어야 했다.  
 

 
  
4자 회담

  1967년 대선을 앞두고 필동 유진오 박사 집에서 ‘4자 회담’이 열렸다. 유진오, 윤보선 두 분과 재야 원로인 백낙준 전 참의원 의장, 이범석 전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4자 회담’은 그 이전에 수면 아래서 3~4차례 진행되다가,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댁과 필동 유진오 당수 댁에서 열렸다. 마지막 날 발표는 내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회담이 끝난 후 이범석 전 총리가 방에서 나와 내게 만년필을 주면서 “받아 적으라”고 했다. “오늘 4자 회담에서는 오랜 토론 끝에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하나,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으로 한다!
 
, 당 대표는 유진오로 한다! .
  
 
“합의내용 1, 2, 3” 하면서 이범석 전 총리가 불러 주는 내용들을 받아 적는데 손이 벌벌 떨렸다. 밖에는 기자들이 아마 100명 이상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가서 발표를 하자 난리가 났다.
  
 
그날 회담에서 윤보선 후보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짐작하건대 윤 후보를 강력하게 민 사람은 이범석 전 총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백낙준 전 의장은 묵묵히 들으면서 동의했을 것이고…. 아마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 전 총리로서는 친일시비가 따라다녔던 유진오 당수보다는 독립운동을 했던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호감이 더 갔을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당내 기반에서 뒤지기는 했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는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쌓아 올린 명성이 있었다. 나도 그 투쟁을 함께 하면서 한일기본조약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공부를 참 많이 했다. 그러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도 높일 수 있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는 “신한당은 윤보선의 얼굴하고 김수한의 입 말고 무엇이 있느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있었다. 김중위 전 의원도 “윤보선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김수한 대변인의 언변으로 후보가 되었다. 굴러들어온 돌이 후보를 차지한 것이다. 정당 사상 이런 일은 유례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반면에 유진오 당수는 학자 출신이라는 한계가 있었고, 건강도 안 좋았다. 회담을 마치고 안국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은 내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변인, 수고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좀처럼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 분이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속에는 온갖 의미가 다 녹아 있었을 것이다. ‘이 김수한이와는 내가 끝까지 같이 가겠다’는 생각, 그리고 내 전국구 문제까지도 결심을 했을 것이다.

  
  
‘돈 안 낸 신민당 전국구 1번’

  나는 1967 6 8일 실시한 제7대 총선에서 신민당 전국구 16번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15번은 후일 신한민주당 총재를 지낸 이민우(李敏雨)씨였다. 그해 총선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 중 정치헌금을 하지 않고 당선된 사람으로는 내가 ‘1번’이었던 셈이다. 그만큼 윤보선 전 대통령이 나의 투쟁을 인정해 주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김대중 의원이 출마한 목포에 내려가서 그의 선거를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했다. 김병삼(金炳三) 공화당 후보를 지원하려고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에 내려가 국무회의를 주재하기까지 했다. 신민당에서도 김대중 의원 지원에 나서려 했다. 하지만 김대중 의원은 “나와 김수한, 두 사람이면 된다”고 자신했다. 나는 유세장에서 박정희 정권의 실정(失政)과 관권선거 획책을 소리 높여 규탄했다. 청중들은 열광했다. 흥분한 청중들은 김병삼 공화당 후보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집기를 부수었다. 상황이 거의 ‘폭동’ 수준으로 번지자, 당에서는 내게 빨리 서울로 올라가라고 했다. 내가 ‘폭동’을 사주(使嗾)한 것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때가 내가 ‘김수한 대변인’으로 한창 이름을 떨칠 때였다. 그 시절 내 연설을 듣고 정치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국회의장 김수한’은 기억하지 못해도 ‘신민당 대변인 김수한’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의 보람도 없이, 총선보다 한 달여 전에 있었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에게 패했다. 4년 전 대선에서 15만 표에 불과했던 표차는 100만 표로 벌어졌다. 국민들의 눈에는 젊은 군인 출신으로 경제건설을 이끄는 박정희 후보가 신선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윤보선 등 노쇠한 지도부가 이끄는 야당이 기득권 세력이었다. 국민적 지지를 받기에 당시 야당 신민당은 부족했다. 국민들은 신민당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다음 지도자를 정하는 데 있어서 너무 자기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국민이 바라는 정치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생각해서 확실하게 정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유진산 총재

▲유진산 총재(오른쪽)는 당권을 잡은 후 대변인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국민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1970년 전당대회에서 신민당이 총재로 선택한 인물은 유진산(柳珍山)이었다. 유진산 총재는 총재를 맡은 후, 내게 대변인을 계속해서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선생님, 솔직히 말해 제가 아무리 철면피라고 해도 어떻게 ‘진산 대변인’을 하겠습니까?
  
 
그 소리에 유 총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 지금 뭐라고 했나? 
  
 
“선생님, 제가 신한당 대변인 시절을 비롯해 그동안 선생님께 ‘사쿠라’라며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매도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하루아침에 선생님의 대변인으로 변신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유진산 총재는 조니워커 한 병을 땄다. 그는 술을 한 방울도 안 남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봐, 김 의원. 김 의원이 해위(海葦·윤보선)에게 한 것의 10분의 1만 내게 해 줘. 나를 위해 해 달라는 게 아니라, 당을 위해 해 달라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어!
  
 
이처럼 그에게는 개인의 체면을 넘어서 당과 국가를 생각하는 면모가 있었다. 선이 굵었다. 1961 5·16쿠데타가 났을 때, 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국내로 들어오면 체포될 상황이었지만, 그는 자기 발로 귀국해서 당당하게 감옥으로 갔다. 홍익표씨 등 옛 정치인들과 어울리면서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젊은 사람 얘기도 들어 보자”고 할 만큼 열린 면도 있었다. 살림살이도 무척 검소했다. 화장실도 옛날 화장실 그대로였다. 정치자금을 만졌고 풍류를 즐겼지만, 자기에게 들어온 돈을 개인적으로 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여(對與)투쟁에서는 곧잘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로서는 ‘어차피 안 되는 일을 가지고 고집을 피우기보다는 적당히 양보해 주고 다른 것을 얻어 내는 것도 방법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71년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인 장덕진(張德鎭)씨가 서울 영등포에서 출마했다. 그곳은 진산의 지역구였다. 그러자 진산은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신민당 전국구 1번이 됐다. 이른바 ‘진산파동(珍山波動)’이었다. 그때도 진산은 ‘여야가 있는 건데, 여당에서도 될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상대방인 공화당 김진만(金振晩) 의원에게 생색도 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일절 변명하는 법이 없었다.
  
 
야당 의원들은 나름 서로 통하는 여당 의원들이 있었다. 유진산 총재는 김진만 의원과 잘 통했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고흥문 의원 등을 통해 공화당의 양순직 의원 등과 소통하는 것 같았다.
  
 
의회정치라는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선명한 투쟁을 원했다. 그래서 유진산 총재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대중적 인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에게는 그 점이 부족했다. 당내에서도 윤보선 전 대통령 같은 절대적인 권위는 부족했다.
  
 
유진산 총재도 자신의 한계를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대권(大權)도전보다도 당권(黨權)을 장악하는 수준에서 자족(自足)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YS, 내게 애완견 선물한 적도

당시 국회의원들이 가장 원하는 상임위원회는 재정경제위원회(재경위)였다. 상임위를 배정하는 데는 김영삼 원내총무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나는 원래 재경위원으로 내정됐다. YS가 신경을 써 준 것이었다. 그런데 문공위로 배정을 받은 한통숙 의원(장면 정권 시절 체신부 장관)이 “적성에 안 맞는다”면서 상임위를 바꾸어 달라고 했다. 그 바람에 몇몇 의원들이 상임위를 이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희망 상임위로 재경위를 고집하자, 유진산 총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김수한 의원을 좀 본받으시오. 김 의원은 재경위로 배정되었는데도 ‘전투하는 데로 보내 달라’면서 내무위로 갔어요!
  
  YS
는 미국 등을 다녀온 후 《우리에게 기댈 언덕은 없다》라는 책을 냈다. 나는 경북중 선배가 일하는 동아출판사에서 이 책을 낼 수 있도록 주선했다. YS는 자기가 좋아하던 도베르만 종()의 개를 내게 준 적도 있다. 이래저래 나를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 내가 YS에게 “왜 그렇게 나를 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답은 간단했다.
  
 
“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하거든!


  
40대 기수론

1960년대 후반 김영삼 원내총무(가운데), 김대중 의원(오른쪽)과 함께. 두 사람은 이후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선에 도전했다.

 

결국 YS 1971년 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旗手論)’을 제창하고 나섰다. 40대 기수론’은 YS 1960년대 초 미국을 방문했을 때 40대 초이던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 대권에 도전하는 걸 보고 영향을 받아서 나온 것이었다. 40대 기수론’은 60~70대 장로(長老)들이 지배하고 있던 야당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진산 총재는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이를 일축하려 했지만, 이미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이어서 김대중, 이철승(李哲承) 의원도 대권 도전 의사를 표했다. 40대 젊은 의원 세 사람이 대통령 후보 자리를 향해 경쟁하면서 오랫동안 침체해 있던 야당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도 유진산 총재에게는 아직 힘이 있었다. YS와 이철승 의원은 유 총재가 자신을 후보로 지명해 주기를 내심 바랐다. 유진산 총재는 내게 개탄한 한 적이 있다.
  
 
“소석(素石·이철승)은 참 우둔해. 내가 파월(派越)장병 위문을 가는 데까지 따라와서 자기를 지명해 주기를 바라는데, 왜 그렇게 눈치가 없는지 모르겠어. 내가 사람들 눈도 있는데 어떻게 고향(전북)이 같은 소석을 지명할 수 있겠나?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이철승 의원은 1950년대 이후 줄곧 야당 소장파(少壯派)의 리더였다. 그가 지프차를 타고 가면 “저기 소석이 간다”면서 모두 쳐다볼 정도였다.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댁에서 일을 할 때에도 “소석이 왔다”고 하면 상당한 중진 지도자가 온 것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해관계에 밝고, 이후 정치적 고비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한 것이 흠결이 되어 YS DJ에게 밀리게 되었다.
  
 
신민당 내에서 줄곧 ‘진산계’였고, ‘진산의 황태자’로까지 일컬어졌던 YS는 자신이 후보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YS는 전당대회 전날,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방심과 오만이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반면에 DJ는 유진산 총재가 절대로 자기를 밀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밑바닥 대의원들을 공략하고 다녔다. 전당대회 전날에도 DJ는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방을 누볐다. 결국 DJ는 대선 후보 경선 2차 투표에서 이철승 후보의 표를 흡수하면서 대선 후보가 됐다. DJ는 이철승 의원에게 ‘대권은 DJ, 차기 당권은 이철승’이라는 이면(裏面)각서를 써 주었다고 알려졌다. 물론 이 각서의 내용은 이행되지 않았다.
  
  DJ
가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부산 출신인 YS보다는 호남 출신인 DJ가 후보가 되는 것이 대선에서 수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정치를 해 오고, 당시 현장을 지켜본 나의 느낌이다.


  
유신 선포

1960년대 후반 만화가 안의섭 화백이 그린 만평. 신민당 김수한 대변인이 신동준 공화당 대변인(왼쪽) KO시킨 모습이다.

 

1971 5 25일 제8대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됐다. 나는 서울 영등포을() 선거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8대 국회의원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10 17일 ‘유신’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수원에 있는 경기도청에서 국회 내무위원회 국정감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최종 총괄질의를 내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손수익(孫守益) 경기도 지사가 국정감사를 받는 와중에 들락날락했다. 평소 하던 걸로 봐서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앙정보부 출신 내무위 위원들도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나는 바로 유진산 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지금 공기가 이상합니다. 거기는 별 조짐이 없습니까?
  
 
유 총재가 대답했다.
  
 
“안 그래도 나쁜 정보가 있소. 뭔가 큰 변혁이 오늘 있을 것 같아. 김 의원, 거기 일을 빨리 끝내고 올라오시오. 
  
 
“제가 마지막 질의를 해야 하는데요. 그렇게 상황이 급박합니까?
  
 
“그렇소. 지금 견지동 사무실(진산계 사무실)에 다 모여 있으니, 대변인도 어서 오시오.
  
 
“알았다”고 한 후 회의장으로 돌아와 보니, 공화당 의원들이 보따리를 싸고 슬글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공화당 소속인 김용호 내무위원장에게 호통을 쳤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거야? 백주(白晝)에 쿠데타 하는 거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그때는 아직 정식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가 진주하기 전이었다. 손수익 지사도 내게 “공기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계엄령이요?
  
 
“그에 준하는 사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인민군이 쳐내려온 것도 아니고, 무장공비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계엄령이라니…. 나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거요? 그럼 다 끝이다! 그래, 한번 해보자! 감옥밖에 더 가겠나?


  
‘참여 속의 개혁’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기에 앞서 1971 12월 국가비상사태선언을 하자, 신민당 의원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김수한(오른쪽 끝), 김영삼(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대중(오른쪽에서 6번째).

 

유신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상현, 최형우, 조윤형 의원 등은 계엄령 선포와 함께 보안사령부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유신헌법이 통과됐다. 중앙정보부는 선거 전에 일부 야당 의원들에게까지도 유신체제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나도 그런 압박을 피부로 느끼기는 했지만, 노골적인 위협을 받은 적은 없다. 나는 항상 ‘내가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나는 떳떳하다. 잘못돼도 감옥밖에 더 가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1973
2 9일 제9대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됐다. 사실상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임명하는 유정회 제도와 함께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뽑은 중선거구제가 도입되었다. 유신체제하의 국회에 참여하느냐 하는 것은 정치인에게 갈등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국회라는 정치의 장()을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유진산 총재가 들고 나온 ‘참여 속의 개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유진산 총재의 주장은 이랬다.
  
 
“세상이 더럽다고 수양산에 가서 고사리 캐 먹다가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 그 수양산은 누구의 땅에 있는 것이냐? 결국 한국 땅에 있는 것 아닌가? 고사리 캐 먹다가 지사(志士)답게 죽어야 하느냐? 아니면 그 체제 속에 파고들어서 그 안에서 개혁을 하면서 진로를 찾아야 하느냐?
  
 
백이
숙제(伯夷叔齊)의 고사를 끌어와 한 말이었다. 하지만 유 총재도 유신 체제 아래서 진정한 정치는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참여 속의 개혁’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73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유신 선포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던 DJ는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로 떠돌았다. 재일거류민단 내에는 ‘베트콩파()’라고 하는 좌파세력이 있었다. 조총련과 선을 댄 이들은 민단 내에서 좌파세력을 확장하면서 민단을 내분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역대 민단 단장들은 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 좌파세력들이 1973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걸 만들고, 대표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DJ를 추대했다.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던 DJ를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이 때문에 DJ는 그해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 귀국했다

  
  
긴급조치 1

1974 1월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반대활동을 금지하는 대통령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신민당은 긴급 정무회의를 열었다. 내가 제일 먼저 발언을 했다
  
 
“야당도 사생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무슨 의논이 있겠습니까? 오직 행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나의 제안에 따라 기획위원회와 실행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기획위원장은 당의 원로였던 김의택(金義澤) 전 의원, 실행위원장은 내가 맡았다.
  
 
그날 밤 중앙정보부 이용택 수사국장이 보낸 수사관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같이 좀 가셔야겠습니다.
  
 
“오냐, 가자. 내 차로 가는 게 좋겠나? 당신들 차로 가는 게 좋겠나?
  
 
“의원님 차로 가시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일단 안도가 되었다. ‘내 차로 가자는 걸 보니, 집에 돌아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더니, 이미 YS와 김의택 전 의원도 연행되어 와 있다고 했다. 이용택 국장이 내게 말했다.
  
 
“그런 결의를 다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그럼 긴급조치가 나왔는데, 야당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무얼 할 생각이셨습니까? 
  
 
“앞으로 정권이 하는 걸 봐 가면서 대응할 생각이었소. 그러기 위해 기구부터 만든 거고….
  
 
중앙정보부에서도 더 이상 험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통행금지가 해제된 후, 이용택 국장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김영삼 총재 등장

얼마 후 유진산 총재는 점심식사를 하다가 먹은 게 체한 것 같다며 병원 에 입원했다. 마침 서민호 전 의원의 사회장(社會葬)이 있던 날이었다. 행사에 참석 중인데, “세브란스병원으로 빨리 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아들 유한렬(柳漢烈) 등이 와 있었다. 나는 전에 맹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유진산 총재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수술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한국일보사 앞에서 내과병원을 하던 서정삼 박사 등이 “별 거 아니니 걱정 마시라”고 안심을 시켰다. 유 총재는 수술을 받고 1주일쯤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다. 얼마 후 유 총재는 몸이 안 좋다며 유성온천으로 내려갔다. 유 총재를 찾아갔던 고흥문 의원이 유 총재의 건강이 안 좋은 걸 보고 다시 서울 을지로 메디컬센터에 입원시켰다. 그곳에서 유 총재는 1974 4 28일 세상을 떠났다. 긴급조치 제1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렸던 신민당 정무회의가 유진산 총재가 주재한 마지막 회의였다.
  
 
이어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가 총재로 당선되었다. YS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유신정권에 맞섰다. 이듬해 5 21,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YS는 개헌 문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 등에 대해 따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가 암살된 후 자신의 적적한 심정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언제까지나 대통령을 할 것도 아니고…” 하는 식으로 YS의 감성에 호소했다고 한다.

  
  
각목 전당대회 때 지붕 위로 도망간 YS

영수회담이 끝난 후,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밀약(密約)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식의 얘기가 돌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정치를 하는 이상 YS를 만난 자리에서 뭔가 부드러운 얘기, 장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얘기를 했을 수는 있다. 적어도 그런 자리에서 “당신, 죽고 싶어?” 하는 식의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얘기에 YS가 고무(鼓舞)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정치의 여백’과 같은 것이다. 영수회담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YS가 유연해진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내가 아는 한, YS는 값싼 대가(代價)를 받고 자신의 뜻을 바꾸거나 권력에 편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YS에게 반대하는 비주류(非主流)연합은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했다.
  
  1976
5 25일 신민당 전당대회는 흔히 ‘각목대회’라고 한다. 비주류 측은 각목을 휘둘러 주류 측 대의원들을 몰아내고 전당대회가 열린 시민회관을 점거했다. 이들은 집단지도체제로의 당헌 개정안을 통과시킨 후, 김원만(金元萬)을 대표로 선출했다. 관훈동 신민당사로 쫓겨간 주류는 단일지도체제 당헌을 고수하면서 YS를 총재로 다시 선출했다.
  
 
신도환 의원이 동원한 각목부대는 관훈동 당사까지 쳐들어왔다. 나는 YS, 이충환 의원과 함께 총재실에 있었다. 각목부대가 쳐들어오자 김동영 총무국장은 셔터를 내렸다. 각목부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3층에 있던 우리는 그들을 피해 달아났다. 회의실 옆에 있는 작은 문을 박차고 나갔더니, 어느 음식점 지붕이 나왔다. YS가 지붕 위를 달리는데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나도 정신없이 달렸다. 슬레이트 지붕이 무너져 내릴 뻔했다. 아래에는 국밥집의 펄펄 끓는 솥단지가 있었다.
  
 
그런 난리를 치렀으니, 그 결과에 승복할 리가 없었다. 양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누가 적법한 당수인지를 물었다. 선관위는 양자 모두 부적격하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1976
9 15, 16일 다시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첫날에는 최고위원을 선출했다. 이충환, 유치송, 김재광(주류), 이철승, 신도환, 고흥문(비주류) 등이 최고위원으로 뽑혔다. 이튿날에는 대표 선거가 열렸다. YS, 이철승, 정일형, 세 사람이 나섰는데, 2차 투표에서 이철승 최고위원이 YS를 누르고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 무렵 나는 이충환계(李忠煥系)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야당 정치는 계보정치였다. 나도 선수(選數)가 높아지고, 여러 세력이 이합집산하는 와중에서 언제까지나 남의 밑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충환 의원을 대표로 모시고, 내가 그 밑에서 실질적으로 간사장(幹事長) 역할을 하는 이충환계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YS와 잠시 소원해졌던 최형우 의원 등이 우리 계보에 속해 있었다.

  
  
이철승도 나를 끌어당기려 노력

이철승 대표는 ‘중도통합론’을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것인데,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자연히 ‘반()박정희’라는 기치를 분명히 한 YS DJ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나는 이철승 대표에게 “당신의 노선은 이상적인데, 실제 행동은 애매모호한 게 탈이다.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 중반 직선제 개헌 반대 투쟁 때에도 내각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도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은 나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는 국제위원장 직을 신설, ‘당6()’이라며 나를 중요 당직자로 대접해 주었다.
  
  1979
2월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다. 나는 서울 관악구에서 212062표를 얻어 전국 최다 득표를 했다. 신민당은 의석에서는 공화당에 뒤졌지만, 득표율에서는 1.1% 앞섰다.
  
 
이제 국민들은 유신정권에 당당하게 맞설 ‘선명야당’을 원하고 있었다. 1979 5·30전당대회가 열렸다. 민심을 업은 당심(黨心) YS를 선택했다. 당 밖에 있던 DJ도 동교동계를 통해 YS를 지지했다. 내가 속해 있던 이충환계도 YS를 지지했다.
  
  YS
는 두 번째로 총재가 된 후,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YH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전당대회 대의원 가운데 부적격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들어갔다. 법원은 YS의 총재직 수행을 정지시키고, 총재권한대행으로 정운갑(鄭雲甲) 전당대회의장을 지명했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이었다.
  
 
당시 언론에는 정운갑 대행이 내게 원내총무를 제안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어 YS가 국회에서 제명되고, 부마사태가 발생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1979 10 26,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출처월간조선 1월호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6.03.05 김수한(金守漢) 전 국회의장이 이제야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YS에게 “DJ가 함정 파 놓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서울의 봄’이 왔다. 김영삼(金泳三·YS), 김대중(金大中·DJ), 김종필(金鍾泌·JP) 등 세 사람은 대권(大權)을 향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YS
는 자신이 1979 5·30전당대회 이후 ‘선명(鮮明)야당’을 기치로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결국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DJ에게는 1971년 대선(大選)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그는 19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돌아오기 전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성을 고발했다. 또 국내에 들어와서는 재야(在野)세력과 연대(連帶)해서 박정희 정권과 싸웠다.
  
 
두 사람 모두 대권 가도(街道)에서 자신이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980년 봄 내내 DJ의 신민당 입당 문제를 놓고 두 사람은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은 결별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신군부(新軍部)였다. 물론 YS DJ의 갈등이 없었더라도 신군부는 정치에 개입했을 것이다.

  
  
가스가 잇코 일본 민사당 위원장의 의리

1980 5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확대조치’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어 광주(光州)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무력(武力)으로 진압한 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해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1980 11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전두환 정권은 과거 공화당이나 신민당 등에서 활동하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으로 흡수하고, 일부는 관제(官製)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 한국국민당(국민당) 등에서 정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협조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이런 조치가 있기 전에 신군부가 정치인들을 면담해 민정당이나 민한당에 참여할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아마 1980년 초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만났을 때(《월간조선》 2016 1월호 참조), 내가 “군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김수한은 회유해도 안 따라올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권력에 굴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니들 마음대로 해 봐라. 정 안 되면 지게라도 지면 된다. 설마 내가 밥을 못 먹기야 하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내에게도 “체통 구길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그 시절 알게 모르게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시절을 견뎌 준 아내가 고맙다. 때때로 이철승(李哲承)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신경식(辛卿植, 13~16대 국회의원) () 헌정회장 등과 테니스를 하면서 소일했다.
  
 
그 시절의 일로 가스가 잇코(春日一幸) 일본 민주사회당(민사당) 위원장이 나를 찾아 준 일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한일의원연맹 활동을 같이 하면서 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는 1981 3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축하사절로 방한(訪韓)했다. 그는 취임식에 참석한 후 일본대사관 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는 관심이 없다. 김 의원이 무사한지 보려고 온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拷問)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느냐?”면서 내 몸을 만져 보기까지 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신군부, YS에게 渡美 권유

아마 전두환 정권은 민한당이라는 ‘가짜 야당’을 앞세우고, 자기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한 4년 정도 정치활동을 못하게 묶어 놓으면 저절로 사그라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엄혹한 시절에도 물밑으로는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1983
5 18, YS는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斷食)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은 권익현(權翊鉉) 민정당 사무총장을 보내 YS를 설득했다. 항공권이며 체재비 등을 다 제공할 테니 미국으로 나가 달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YS는 “국민들이 군사통치의 억압 아래 있는데, 내가 국민 곁을 떠날 수는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군사정권 시절, ‘죽으나 사나 국민과 함께’라는 자세로 한 번도 국민의 곁을 떠나지 않고 국내에서 투쟁했다는 것이 YS의 큰 특징이었다. 10월 유신 선포 당시에도 그는 일본에 있었지만,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했다. 이 점에서 YS는 유신선포 후 한동안 해외를 떠돌았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미국으로 나갔던 DJ와 달랐다.
  
 
단식투쟁 이후 YS는 민주산악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활동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이어 갔다. 나도 거기에 참여해서 힘을 보탰다. 1984 9월경이 되면서는 물밑에서 신당(新黨) 창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민추협은 재야에서의 민주화운동을, 신당은 원내(院內)로 진출한다는 투 트랙(two track)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YS였다. DJ는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에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보나마나 이듬해 제12대 총선(總選)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남은 정치활동 피()규제자들을 해금(解禁)할 것이 뻔했다. 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했다. 나는 창당선언문, 당헌·당규안(黨憲·黨規案) 등을 가지고 안기부의 감시를 피해 김재광(金在光, 6~10,12~14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전 의원 등을 찾아다니면서 신당 창당에 대해 논의했다. 이런 연유로 신한민주당이 창당된 후, 창당 기념행사 때에는 내가 창당선언문을 낭독하곤 했다.
  
 
민한당에 참여하고 있던 고재청(高在淸, 9~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의원 등이 자기들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면서 정국(政局)추이를 살폈다.


  
新黨돌풍

신한민주당 관악지구당 창당대회. 1980년 이후 5년간 억눌려 왔던 민심은 2·12총선에서 폭발, ‘신당 돌풍’을 일으켰다.

 

1985 1 18일 신한민주당은 창당을 선언했다. 정치규제에 묶여 있는 YS DJ를 대신해 이민우(李敏雨, 4,5,7,9,10,12대 국회의원) 전 국회부의장을 총재로 선출했다. 하지만 신당 간판으로 출마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언론에서도 총선을 치르면 민한당이 80~90석을 차지해 제1야당의 자리를 지킬 것으로, 신한민주당은 30~40석 정도를 얻어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는 성공할 것으로 보았다.
  
 
지금은 선거 때 공천(公薦)경쟁이 치열하지만, 그때는 신한민주당 공천으로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내로라하던 옛 신민당의 중진(重鎭)들도 자신 없어 하면서 억지로 나서는 듯한 모양새였다. 서울 관악, 영등포 쪽에서 출마하려는 사람은 나와 박한상(朴漢相, 6~10,12대 국회의원 역임) 전 의원 정도였다.
  
  1985
2 12, 군사정권의 억압 아래서 숨을 죽이고 있던 민심(民心)이 드디어 폭발했다. 신한민주당은 지역구(50)와 전국구(17)를 합쳐 67석을 차지하면서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민한당은 모두 35석을 얻어 제2야당으로 추락했다. ‘이변(異變) 중의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 관악에서 출마한 나는 43%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국회로 돌아왔다. 2위로 당선된 임철순(任哲淳, 11,12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은 29.3%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이렇게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제10대 총선 당시 61.4%라는 전국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면서도 이후 전두환 정권 아래서 정치규제에 묶여야 했던 나에 대한 유권자들의 동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신한민주당이 내건 ‘직선제(直選制) 개헌’이라는 구호가 먹혀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유신 이후 ‘체육관 대통령 선거’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자’는 외침에 열광했다

  
  
‘이민우 구상’

▲신한민주당 개헌추진본부 대구시 및 경상북도 지부 출범식을 마친 후. 왼쪽부터 신도환, 김수한, 이민우, 김영삼, 김동영.  

 

이러한 국민의 호응에 힘입어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 투쟁에 나섰다. 이에 대해 민정당은 의원내각제 개헌 주장으로 맞섰다. 국민의 희망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주장이었다. 당시 일각에서는 DJ는 대통령직선제를 고집하겠지만, YS는 의원내각제 개헌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전혀 사실무근인 얘기였다. YS도 직선제 개헌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의원내각제 개헌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철승(李哲承, 3~5,8~10,12대 국회의원 역임)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이었다. 나는 그에게 “제발 의원내각제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라. 그런 소리를 하니까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이다”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직선제 개헌 투쟁이 2년 가까이 계속되면서 정국은 교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6 12월 나온 것이 ‘이민우 구상’이었다. 이민우 총재는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중립 보장, 국회의원 선거법 협상, 지방자치제도 도입 등을 전두환 정권이 받아들이면 의원내각제 개헌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당시 신민당 대변인이던 홍사덕(洪思德, 11,12,14,15,16,19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의 조언이 있었다.
  
  아마 이민우 총재는 “전두환 정권이 저렇게 버티는 한 직선제 개헌은 어렵다. 차라리 의원내각제 개헌을 받고, 어느 정도의 민주화라도 이루어 보자”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도 정치인인 이상 개인적인 야심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내각제 개헌이 되면 실권(實權)이야 있건 없건 간에 자기가 수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전두환 정권이 “의원내각제 개헌이 되고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이민우 대통령-김영삼 수상도 가능하다”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정호용, “장난 치지 말라

하지만 ‘이민우 구상’은 그를 신민당 총재로 내세웠던 YS DJ에게는 일종의 ‘배신’이었다. YS DJ는 자신들을 따르는 의원들을 탈당(脫黨)시켜 통일민주당을 창당, 이민우 총재를 무력화(無力化)했다
  
  통일민주당이 창당에 들어가자 전두환 정권은 1987 4월 조폭들을 동원해 폭력으로 창당방해에 나섰다. 이른파 ‘용팔이사건’이다.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창당행사가 있던 날, 나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YS 등과 함께 일종의 장행회(壯行會)를 가진 후, 김현규(金鉉圭, 10~12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 등과 지구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구당 사무실은 이미 폭력배들에게 점령을 당한 후였다. 결국 대회는 다른 곳에서 약식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박용만(朴容萬, 9,10,12,13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과 함께 정호용(鄭鎬溶, 내무·국방부 장관, 13,14대 국회의원 역임) 내무부 장관을 찾아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당시 사건의 배후에 안기부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 장관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오히려 우리보고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경북고를 졸업한 정 장관은 경북고 중퇴인 내게는 후배였다. 이때의 일 때문에 그는 경북고 행사 같은 데서 나를 만나면, 미안해한다.
  
  1987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致死)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했다.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이 높아졌다. 전두환 정권은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5()헌법에 따라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의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되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민정당이 노태우(盧泰愚)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6 10일을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요구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안 수용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국민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정권교체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YS DJ는 다시 분열했다. 국민들은 두 사람에게 ‘단일화’를 요구했다. 두 사람도 ‘단일화’를 다짐했다. 하지만 그건 자기로의 단일화였다. 시일이 지날수록 두 사람이 갈라설 것이라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졌다.


  DJ, “내가 출마 안 하면 큰일난다

두 사람의 분열이 목전에 닥치자,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의원총회를 열어 YS DJ에게 “하나가 되어 달라”고 호소하는 결의를 채택한 후, 두 사람에게 대표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대표단은 나를 비롯해 고재청 의원 등 7~8명으로 구성했다.
  
  YS에게 전화를 걸어 대표단이 찾아가겠다고 알렸다. YS는 “나는 의총(議總) 결의에 따를 테니, 내게는 굳이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DJ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라”고 했다.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 DJ를 만났다. DJ는 한참 동안 자기가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서 민주화 과정에서 고생한 이야기, 감옥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이야기 등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출마하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자기가 출마하지 않으면 지지자들이 여러 명 목숨을 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런 분들을 설득해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하고, 군정(軍政)을 종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YS가 양보할 리도 없었다. YS는 자신이야말로 정통야당의 적자(嫡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반면에 DJ는 비주류(非主流)였다. 나중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호남 출신이 주도하던 민주당 내에서도 소외된 편이었다. 심지어 1967 6·8선거 당시 야당 일부에서는 DJ의 지역구이던 목포에 DJ 대신 나를 출마시키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때 DJ는 한일국교정상화 비준반대투쟁 과정에서 비교적 온건한 행보를 보였다는 이유로 야권 강경파 인사들로부터 훼절했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나는 정통야당의 주류로 성장해 온 YS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 시점에서는 순리라고 생각했다. 당내에서도 말로는 ‘단일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두 사람의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DJ는 제13대 대선(大選)을 앞둔 1987 11,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YS DJ가 분열한 결과, 그해 대선 승리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돌아갔다.
  
  이듬해 4 26, 1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1971년 제8대 총선 이후 17년 만에 다시 소선거구제가 도입됐다. 내 지역구인 서울 관악을()은 호남세(湖南勢)가 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경북 출신인 나는 평소 지구당 간부에 호남 출신 인사들을 많이 썼다. 나도 그들에게 잘해 주려 애를 썼고, 그들도 내게 잘해 주었다

  
  분당 후 평민당 이해찬에 낙선

  하지만 DJ가 평민당을 창당하고 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호남 출신 참모들은 내게 “DJ에게 가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나로서도 총선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게 유리했다. 하지만 나는 자유당 시절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을 할 때부터 DJ를 잘 알고 지냈다. 정치적 입장, 성격 등으로 보아 우리는 맞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나는 DJ에게는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YS와 잘 맞는 편이었고, YS도 일찍부터 내게 잘해 주었다. 나는 평민당 행을 호소하는 지구당 간부들에게 “정치를 그만두었으면 그만두었지,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통일민주당을 떠나 평민당으로 옮겨갔다. 그때의 안타까움, 아쉬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평민당에서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인 이해찬(李海讚, 13~17,19대 국회의원, 국무총리 역임)씨를 후보로 내세웠다. 나를 겨냥한 ‘표적공천’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이희호 여사는 선거 기간 중 내 지역구에 세 번이나 다녀갔다. 결국 나는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말았다.
  
  13대 총선 결과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되었다. YS는 대선에서는 2위를 했지만, 총선에서는 호남을 기반으로 한 DJ의 평민당에 밀려 제3당이 되었다. 아마 YS는 절치부심(切齒腐心)했을 것이다. 5공 청산 등으로 정국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원외(院外)인 나는 정국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1990 1 22 YS가 노태우 대통령, JP와 함께 3당 합당(合黨)을 발표했다. 그러한 움직임을 잘 모르고 있었던 나는 깜짝 놀랐다.
  
  YS라고 해서 왜 고민이 없었을까? 하지만 정치인에게는 뭔가 성취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硝酸)테러, 1976 5·25전당대회 당시 깡패들의 습격, 전두환 정권 시절의 단식투쟁 등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그때까지 견뎌 온 YS로서는 자신의 나이 등을 생각할 때, 뭔가 인생의 승부를 걸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3당 합당을 결행했다”는 YS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3당 합당이라는 YS의 결심을 지지했다.
  
  YS도 그런 나를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었다. 원외였지만, 민자당 당무위원으로 밀어 주었다. 3당 합당을 한 후 민자당 지구당 조직책을 뽑을 때의 일이다. ()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에서 인선(人選)위원을 선정해 지구당 조직책을 선정하기로 했다. 원외인 나는 아무래도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때 나는 한일친선협회 행사로 일본 도쿄에 있다가 지구당 조직책에서 탈락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YS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얘기를 했더니 “씰데 없는 소리!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결국 나는 지구당을 지킬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나를 챙겨 준 Y

YS 1990년 소련 방문 당시 고집을 부려 방문단에 김수한 의원을 포함시켰다. 왼쪽부터 박종률 의원,YS,김수한 의원, 황병태 의원

 

1990 3 YS는 소련을 방문했다. YS는 방문단에 원외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나를 포함시켰다. 명단은 박준병(朴俊炳, 12~14대 국회의원 역임) 민자당 사무총장을 거쳐 청와대로 올라갔다. 청와대에서는 현역 의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를 제외했다. 박준병 사무총장은 YS에게 “김수한 전 의원 대신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다. YS는 “안 된다. 김수한은 꼭 넣어야 한다”고 했다. 얼마 후 박 사무총장이 재차 나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고 요청하자 YS는 “그럼 나도 안 간다”고 말했다. YS의 고집 때문에 결국 나는 방소단(訪蘇團)에 포함될 수 있었다.
  
  YS가 그렇게 나를 챙겨 준 것은 “다른 세력과 싸울 때에는 김수한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김수한이 나서서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YS의 그런 믿음과 배려에 대해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도 YS에게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했을 때였다. 나는 이른 새벽 황 선수가 1위로 골인한 직후 YS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여야(與野) 간에 정쟁(政爭)을 하지 말자고 제안하라”고 건의했다. YS는 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좋은 제안을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3당 합당 이후 YS는 우여곡절 끝에 민자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쟁취했다. 대선 기간 중 손명순(孫命順) 여사가 정병국(鄭柄國, 16~19대 국회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임) 비서관을 데리고 내 지역구인 서울 관악구 난곡의 판잣집들을 누비는 모습을 보면서 동정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문민(文民)정부가 들어섰다. YS는 하나회 숙정(肅正), 금융실명제, 공직자재산공개 등 개혁작업을 밀어붙였다. 나는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으로 YS의 개혁작업을 응원했다.
  
  1995 8 15 YS는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했다. 나도 그날 행사에 내빈 중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YS와는 가볍게 목례만 나누었다. 행사가 끝난 후 하얏트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데스크에서 나를 찾았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YS와 연결됐다. 그는 “오늘 내 연설이 어떻던가요?”라고 물었다. “아주 좋았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역사바로세우기’가 당시 YS의 화두였다. 그해 11~12월에는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을 부정부패 및 12·12군사반란, 5·17내란 혐의로 구속했다. ‘역사바로세우기’ 와중에 JP도 민자당에서 밀려났다. 일각에서는 “YS가 그래도 JP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었다”, 심지어는 “YS가 자기 다음은 JP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JP는 독한 사람이거나 권력의지에 불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YS JP를 대통령 후보로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JP가 퇴출(退出)된 후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로 돌아왔다. 지역구가 아니라 전국구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8년 만에 의정 단상으로 복귀한 것이다.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YS를 만났다. 그는 “이번에 국회의장을 맡아 주어야겠다”고 했다 


  全國區로 8년 만에 국회 복귀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내가 국회의장으로 지명되자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박상천(朴相千, 13~16, 18대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통합민주당 대표 역임) 원내총무가 DJ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DJ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YS 인사를 보면 잘못된 게 많았는데, 이번에는 YS가 의장을 잘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반대하지 마세요.
  
  참새들이 떠들어도 황새가 한마디 하면 다 조용해진다고 했던가? DJ가 한마디 하자 야당 안에서 반대의견을 쏙 들어가 버렸고, 나는 여야의 고른 지지를 받아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동교동계와도 관계가 원만했다. DJ가 미국에 나가 있던 1980년대에 권노갑(權魯甲, 13~15대 국회의원 역임)씨 등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나중에 DJ에게 합류한 사람들은 몰라도, 동교동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국민회의 소속 신 모 의원은 나와 자꾸 부딪쳤다. 그러자 한영애(韓英愛, 15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은 “신 의원, 의장님이 밥도 사 주고, 우리를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는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동개혁법안 날치기 통과

  ▲1996 12, YS정부는 노동 및 금융개혁법안들을 국회에 제출했다. 논란 끝에 이 법률들은 국회를 날치기로 통과했다. 야당과 재야는 거리로 몰려나왔다. 일련의 혼란 속에서 경제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결국 이는 외환(外換)위기로 가는 단초가 되었다.
  
  나는 이수성(李壽成) 국무총리에게 노동개혁법안을 가급적 빨리 국회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어차피 국회에서 논란이 될 것이 뻔한 법안이었다. 그렇다면 국회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시간을 갖고 검토해서 김을 빼 놓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쳤음에도 야당이 끝내 법안 처리를 거부한다면, 여당이 단독으로 강행처리하더라도 국민들이 이해해 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YS에게도 법안을 빨리 국회로 보내서 논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그런데 YS는 천만 뜻밖의 얘기를 했다.
  
  “의장이 그러는 게 일본 가는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닙니까?” 당시 나는 국회의장이 된 후 일본 국회로부터 방일(訪日) 초청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중의원(하원)·참의원(상원) 합동회의에서 연설도 예정되어 있었다. YS는 내가 방일 일정에 차질을 빚을까 봐 법안 처리를 서두르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일본을 내 집 드나들 듯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일본에 못 가서 병날 사람입니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DJ가 함정을 파 놓고 있는 게 안 보입니까? 노동개혁법안 처리가 잘못되면 DJ는 정권타도의 불길을 불러일으키려 들 것입니다.
  
  1997년은 대선이 있는 해였다. 내가 보기에 DJ는 노동개혁법안을 원만하게 통과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노동개혁법안의 날치기 통과를 유도한 후 노동계를 비롯한 재야세력들이 거리로 나서서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벌이고 이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어 YS정권이 무력화(無力化)되는 상황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YS에게 노동법안을 빨리 국회로 보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DJ는 지금 춘계공세(春季攻勢)를 준비하고 있어요.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하지만 YS나 정부는 태평이었다. 날치기로라도 노동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만 하면, 이후 연말연시(年末年始)의 들뜬 분위기에 묻혀 날치기의 기억은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뒤늦게 노동개혁법안을 국회로 보낸 후, 이홍구(李洪九) 신한국당 대표와 서청원(徐淸源, 11,13~16,18,19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역임) 원내총무는 의장공관으로 와서 법안 처리를 해 달라고 조르기만 했다. 나는 “법안 처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가는 큰일난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설득하지 못하자 오세응(吳世應, 8~11,14,15대 국회의원 역임) 부의장에게 의사봉을 잡게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파국(破局)이었다.
  
  민심의 흐름을 그렇게 잘 읽던 YS가 왜 그랬을까? 아마도 상황을 너무 쉽게 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DJ는 그걸 읽고 있었다. 그는 밑밥을 놓고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YS정부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YS, 1997년 이회창, 이인제 중 누굴 지지했나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는 1997 9 9일 이인제 경기지사와 만났지만, 이 지사는 결국 독자출마를 강행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서는 한때 9()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여러 사람이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이회창(李會昌, 국무총리, 15,16,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총재 역임) 대표와 이인제(李仁濟, 13,14,16~19대 국회의원, 노동부장관, 경기도지사 역임) 경기도지사로 후보가 압축되었다. 이 지사는 YS가 ‘깜짝 놀랄 젊은 후보’를 이야기하면서 부각된 인물.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競選)에서 이회창 대표가 이겼지만, 이인제 지사는 1997 9 13일 신한국당을 탈당해 출마를 선언했다.
  
  이인제 지사의 탈당을 두고 말이 많았다. 자신과 갈등을 빚던 이회창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마뜩지 않아 하던 YS가 이 지사의 탈당을 은근히 조장했다거나, 대선 막바지까지도 YS가 이인제 후보에게 ‘끝까지 버티라’고 독려했다거나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YS는 누가 신한국당 후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정해 놓고 있지 않았다. 이회창은 절대로 안 된다거나, 이인제를 밀어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애매했다.
  
  9 9일 이인제 지사가 탈당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오자 나는 YS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인제 지사가 탈당한다고 합니다. 이 지사가 출마하게 놔 두어서는 안 됩니다.
  
  YS는 “의장께서 말리도록 하세요”라고 했다. YS는 자신의 영향력이 이인제 지사에게 미치지도 않거니와 자기가 직접 나서면 오해를 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인제 지사를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
  
  “이 지사가 대선 후보로 나가도 DJ를 꺾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일만 이상하게 되고 맙니다. 나가지 말고 다음을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회창 대표에게는 내가 잘 얘기해 놓겠어요.
  
  이 지사도 내 말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는 “63빌딩에서 이회창 대표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기자들에게 “이인제 지사는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회창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인제 지사를 만나거든 엎드려서 ‘제발 살려 달라.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무조건 낮은 자세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회창 대표는 YS가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반응이 영 미덥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장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에게서 제1보가 왔다.
  
  “의장님, 다 틀렸습니다!
  
  그의 얘기로는 이회창 대표가 이인제 지사를 만나는데, 마치 적장(敵將)의 항복을 받는 장수처럼 뻣뻣한 자세로 맞았다고 한다. 이 지사는 나와 통화한 것도 있고 해서 내심 이회창 대표가 유화적으로 나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회창 대표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빈정’이 상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두 사람 모두 율사(律師) 출신으로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이인제 지사는 독자출마를 강행했다. 15대 대선에서 DJ 1032만여 표, 이회창 후보는 993만여 표, 이인제 후보는 492만여 표를 얻었다. 이회창 후보가 이인제 후보를 놓치지만 않았어도 선거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제 복()을 차 버린 셈이다.


  DJ의 ‘要職’ 제안

대통령에 당선된 DJ 1997 12 26일 국회를 방문, 김수한 국회의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DJ의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사무실은 국회 내에 있었다. DJ는 당선자 시절 주요 외빈(外賓)들을 맞을 때면 새로 준비한 귀빈실을 곧잘 이용했다. DJ가 의장실에 들를 때면 옛날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DJ가 박정수(朴定洙, 10,11,13~15대 국회의원 역임) 외교통상부 장관을 보내 요직(要職)을 제안했다. DJ는 “의장께 걸맞은 자리는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라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맡아 달라”고 전해왔다. 깜짝 놀랐다. 단순히 모사(謀事)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발상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DJ의 심려(深慮)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장관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내가 걸어온 길이나 ‘국회의장’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생각할 때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 DJ가 내게 직접 제안을 하지 않고 박정수 장관을 통해 제안을 해 온 것도 그런 내 입장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큰 부담 없이 “제안은 고맙지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얼마 후 YS정부에서 국무총리와 신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홍구(李洪九)씨가 주미(駐美)대사로 나간 걸 보면, DJ는 내게만 그런 제안을 해 온 것이 아닌 듯했다.
  
  후일 청와대에서 몇몇 인사들의 만찬(晩餐) 행사가 있었다. 국무총리였던 JP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DJ는 “김수한 의장은 참 대단하신 분”이라면서 자기가 내게 이러이러한 제안을 했는데 거절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DJ는 험한 정치역정을 밟아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 정치 초년병 시절에는 ‘호남 민주당’ 내에서도 철저하게 냉대를 받았다. 호남에서는 발가락 하나 넣을 틈도 얻지 못해 지역구를 찾아 강원도 인제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했고, 부단히 공부를 했다. 성명서의 90%는 본인이 직접 쓴 것이었다.
  
  반면에 YS는 정치적으로는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정치적으로 발목을 잡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어진 비옥한 밭을 경작하는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구김이나 꾸밈이 없었다. 그에게는 천진난만한 동심(童心)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에게 사람이 많이 몰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JP와는 걸어온 길이 달랐지만, 한일(韓日)의원연맹 일 등으로 많이 만났다. 그는 일본 문화, 예술, 정치, 그리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기의 역사 등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였


  JP 총리 인준 부결

1998 3 2 JP의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표결 도중, 투표 중단을 선언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김수한 의장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DJP연대(連帶)를 통해 대통령이 된 DJ JP를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JP DJ와 연대하는 바람에 대선에서 패했다고 생각한 한나라당은 JP를 비토하고 나섰다. 사실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투표 전 여야 원내총무 회담 때는 이상득(李相得, 13~18대 국회의원 역임) 원내총무도 총리 인준에 부정적이 아니었다.
  
  나는 어차피 JP가 국무총리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거기에 반대하는 것은 못 먹는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선 패배의 한()을 품은 한나라당은 결국 JP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기로 했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여당과 타협을 해 놓고서 이렇게 뒤집으면 의회정치가 안 된다. 이 총무는 원내총무 이전에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1998 3 2일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투표가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기표소에 들어가지 않거나 기표소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사실상의 공개투표였다.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들은 내게 몰려와 “저걸 두고만 볼 거냐?”고 아우성을 쳤다. 나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북한에서나 하는 공개투표를 하고 있는 거냐?”고 야단을 쳤다. 하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국회의장으로서 공개투표를 두고 볼 수는 없다”면서 투표를 중단시켰다.
  
  이후 JP는 그해 8월까지 ‘국무총리 서리(署理)’ 딱지를 떼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경색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나는 여야 원내총무 회담을 여러 번 주선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박상천 원내총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이정무(李廷武, 13,15대 국회의원, 건설교통부 장관 역임) 원내총무는 원만한 사람이었다. 이상득 한나라당 원내총무도 모난 사람은 아니었다. 꼬인 정국이 풀릴 듯도 했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이상득 총무에게 전화가 걸려 오곤 했다. 나가서 전화통화를 하고 돌아오면 이 총무의 입장이 바뀌었다. 박상천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는 화가 나서 내게 “의장님, 차라리 이회창 총재 보고 이리 나오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상득) 총무, XX 단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소?

  “이 총무, XX 단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소? 어떻게 하나하나 전화로 지시를 받아 가면서 일을 합니까?
  
  문제는 원내총무에게 재량(裁量)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나는 1960년대 말 신민당 원내 부총무를 하면서 정해영(鄭海永, 3,5~10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원내총무가 일하는 것을 지켜본 일이 있었다. 정 총무는 여당인 공화당과 선거법 협상을 하면서 통 크게 협상을 했다. 어차피 안 된다 싶은 것은 과감하게 던져 주고, 대신 받을 것은 받았다. 선거법 협상 결과를 당에 보고하자 유옥우(劉沃祐, 3,4,5,8,11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이 “정해영이가 당()을 팔아먹는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정 총무는 “뭐? 내가 당을 팔아먹는다고? 그럼 니가 해 봐라”라고 맞받아쳤다. 서로 서류와 물컵을 집어던지며 난리가 났다. 그래도 당시 원내총무는 재량을 가지고 회담장에 나왔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자기 당을 설득하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원내총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의원총회에서도 전과 같은 열정이 사라졌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달리는 자기집착도, 문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오기도 사라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생연후(我生然後)라는 자세로 힘 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지 않고 살아남고 보겠다는 기회주의 때문 아닐까?
  
  정치를 하는 동안, 그리고 정치를 그만둔 이후에도 내가 힘을 쏟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한일관계이다.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에는 한일의원연맹 부회장을 지냈고, 1993년부터는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현해탄을 넘으면 與野가 없다

▲1997 5월 일본을 방문, 사이토 류조 참의원 의장(오른쪽) 등과 만나 의원외교를 펼쳤다.

 

  젊은 시절 나는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6·3사태 등 우여곡절 끝에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지만, 그 전도는 굉장히 암담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한일 양국 간에는 이렇다 할 정상적인 대화와 교류의 통로가 거의 없었다. 한일 양국 간에는 ‘손 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한일관계 초기에는 학연(學緣)이 큰 역할을 했다. 예컨대 제8,9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세경(崔世卿) 전 의원 같은 경우는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아버지) 전 일본 외무대신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인연으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정권과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일제(日帝)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많아야 얼마나 되었겠는가? 이런 식의 교류로는 한계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 양국에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의원내각제 국가였다. 국회의원들이 정치의 중심이었고, 다방면에 영향력도 강했다. 한국에도 국회가 있는 이상 학연을 비롯해 각종 인연을 더듬어서 공식적인 대화창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서 1972년에 한일의원간친회(懇親會)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일본측 대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대장(大藏)대신을 지낸 거물 정치인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의원이, 우리측 대표는 처음에는 차지철(車智澈, 6~9대 국회의원, 경호실장 역임) 의원이, 나중에는 JP가 맡았다. 차지철 의원이 간친회 대표가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었다.
  
  가야 의원과 차지철 의원 사이는 할아버지와 손자뻘 되었다. 하지만 가야 의원은 차 의원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먼저 자리를 양보하고 45도 각도로 인사를 하는 걸 보면서 ‘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일본측 간사는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의 최고 정치참모가 되는 다나카 다쓰오(田中龍夫) 의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20년대에 일본 총리를 지낸 조슈(長州)군벌의 거두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였다.
  
  나도 간친회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때 우리는 ‘일단 현해탄(玄海灘)을 넘으면 여야(與野)가 없다. 오직 대한민국 대표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한일의원연맹에 참여하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국내에서는 서로 머리가 터지도록 싸워도, 일단 현해탄을 넘어서 일본에 가면 대한민국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한일의원연맹 출범

간친회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이다 보니, 참석자들의 발언이 자유롭고 운신의 폭도 넓었다. 가야 오키노리 의원은 일본 정계의 거물이다 보니 한일협정이 서둘러 처리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들을 살피고 보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간친회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도 한일굴욕외교반대에 앞장섰지만, 당시 야당은 ‘더러운 돈 몇 푼을 받아서 우리 민족의 혼()을 팔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강했다. 반면에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하자면 일본에서 들여오는 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당시는 일본측과 만남이 있을 때에, 일본측 인사들이 가져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고도 신기해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못 참을 것을 참아서라도 일본으로부터 투자를 받고, 재일동포들의 재산을 들여와서 경제발전을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다. 결국 그렇게 들여온 청구권 자금이나 차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등을 만들었다.
  
  일본 야당 중에는 가스가 잇코 의원이 이끄는 민주사회당(민사당)이 있었다. 친북(親北)노선으로 일관한 사회당과는 달리 반공(反共)노선을 분명히 하는 정당이었다. 민사당도 31명의 의원 가운데 한 명만 빼고 모두 간친회에 들어오기로 했다. 이때 가스가 잇코 의원은 “‘간친회’라는 이름이 뭔가 부정한, 일종의 유착(癒着)과 같은 인상을 준다. 안 그래도 청구권 자금을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간친회는 1975년 한일의원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공명당도 한일의원연맹에 들어오면서 사회당은 외톨이가 되었다. 일본의 민노총이라고 할 수 있는 총평(總評·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일본의 전교조(全敎組) 격인 일교조(日敎組·일본교직원조합)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당은 이후로도 “대한민국은 정통성 없는 괴뢰정부이며,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사회당과 교류의 물꼬를 트다

1997 5 9일 아키히토 일본 천황을 예방한 김수한 국회의장.

 

  1988년 통일민주당은 내가 중심이 되어 일본사회당과의 교류를 추진했다. 나는 일본 민사당 대회에서 연설하는 기회에 “사회당은 이제 한국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회당 의원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한 해에 수백만 명의 일본 국민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사회당이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일본 국민들이 이런 상황을 납득하겠느냐?”고 따졌다. 사회당 내에서도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廣三·무라야마 정권에서 관방장관 역임) 의원 같은 이는 “사회당이 지금처럼 계속 과격 좌파노선을 걸으면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다가는 고립되고 만다”고 주장했다. 결국 일본사회당도 뒤늦게 한일의원연맹에 가입하겠다는 뜻을 표시해 왔다. 그러자 사회당에 비판적이던 가스가 잇코 민사당 위원장은 “한국이 사회당 같은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나가겠다”고 반발했다. 1988년 일본사회당의 이시바시 마사시(石橋政綱) 위원장이 방한(訪韓), 청와대를 예방(禮訪)했다. 일본사회당으로서는 가히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도이 다카고(土井多賀子) 의원 같은 사회당 내 좌파 인사들은 DJ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한국을 찾았다.
  
  YS 시절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일본 총리가 됐다. 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고집 세게 지키는 무라야마 총리를 좋아했다. 나는 양국 사이에서 가교(架橋)역할을 했다. YS도 한일관계와 관련해서는 내 의견을 경청했다.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당선자 신분으로 일본 언론과 첫 인터뷰를 할 때 통역을 한 것도 나였다. YS가 한국어로 짧게 이야기하면, 나는 거기에 살을 붙여 전달했다. 일본 기자는 “YS가 하는 말은 짧은데, 당신이 하는 말은 왜 그렇게 기냐?”고 묻기도 했다.


  
한일친선협회

국회의원들이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일 양국 간의 진정한 우호협력을 위해서는 풀뿌리 차원에서의 교류, 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한일친선협회였다. 1976년 일본에서 일한(日韓)친선협회가, 이어 한국에서도 한일친선협회가 출범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1961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친선협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나왔다. 처음으로 친선협회가 만들어진 곳은 나가사키였다. 일본 정계의 거물인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일본 외무대신)의 비서 출신인 나카무라 고카이(中村弘海)씨가 주동이 됐다. 그는 “지금 한국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 자유진영의 불침번으로서의 희생적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우리가 본체만체해서야 되겠느냐? 도와주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아들인 나카무라 가쓰스케(中村克介) 씨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가사키 한일친선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나가사키의 뒤를 이어 야마구치, 구마모토, 시마네, 오이타, 히로시마 등에 협회가 만들어졌다
  
  일본에는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에 일한친선협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광역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기초자치단체 수준에도 한일친선협회가 설립되어 있다. 특히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부산·경남지역이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한일의원연맹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통(日本通)이 된 나는 1993년부터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을 맡았다. 친선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데라우치(寺內) 문고의 반환이었다.
  
  데라우치 문고는 초대(初代)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총독 재직 중 조선에서 수집한 서화(書畵), 서적 등을 말한다. 그는 일본의 골동품 및 서예 전문가들을 총독부의 별정직 공무원으로 데려와 조선 곳곳을 누비면서 추사(秋史)나 퇴계(退溪) 선생의 글씨나 전적(典籍)들을 수집하도록 했다. 은퇴하면 자신의 수집품들로 개인박물관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수집한 유물들은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에 있는 야마구치현립대학(구 야마구치여대)이 소장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 박영석(朴永錫) 국사편찬위원장이 데라우치 문고의 존재를 알고, 직접 현지에 가서 이를 확인했다. 박 위원장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림과 글씨, 책들이 대학 창고에서 썩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는 공노명(孔魯明·외무부장관 역임) 주일대사를 찾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공노명이도,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그 문화재들은 이미 개인의 것이고, 일본에 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간 교섭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한 방법은 인간적인 차원의 호소, 민간 레벨인 친선협회 차원에서의 호소밖에는 없습니다. 이걸 해결할 사람은 김수한 회장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문제는 내게 넘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일한친선협회 회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다나카 다쓰오 씨였다. 그의 아버지 다나카 기이치 전 일본 총리는 같은 조슈 군벌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직계(直系)였다. 다나카가()와 데라우치가는 인척(姻戚) 간이기도 했다. 나의 파트너이자 가까운 사이였던 다나카 다쓰오 회장,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중의원(衆議員)이 열심히 나서 주었다.
  
  야마구치대학에서는 당초 자신들에게 유물들을 기증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 후손들이 도장을 찍어서 동의를 하면 유물을 넘겨주겠다고 했다. 나와 다나카 회장은 일본 가나자와에 사는 데라우치의 후손을 수없이 찾아갔다. 일본 언론이나 문화계에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맹렬히 반대했다. “문화재 반환 길이 이렇게 열리게 되면, 둑이 무너지듯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오게 된다”는 논리였다.
  
  데라우치의 후손들과 야마구치대학은 1995년 북한 지역에서 수집한 유물들을 제외한 98 135점의 유물을 돌려주기로 했다. 김생, 흥선대원군, 김정희, 성삼문, 서경덕, 정철, 고경명, 곽재우, 신흠, 임제, 장유 등의 글씨, 이황의 책,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세자시강원에 입학하는 장면을 묘사한 〈정축입학도첩〉 등 보물급 이상의 가치를 가진 유물들이었다.
  
  그런데 기증식을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동아일보》에서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데라우치가 약탈해 간 유물들이 돌아온다’는 취지의 보도를 한 것이다. 데라우치의 유족들은 자기들이 유물들을 도둑질해 갔다는 얘기냐면서 기증식을 거부했다. 자칫하면 그때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나는 《동아일보》 출신인 최시중(崔時仲) 한국갤럽 회장에게 부탁해서 정정(訂正)보도를 내보내도록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유물들을 일본과 가까운 경상남도에 위치한 경남대에 기증했다.◎

김창기 월간조선 발행인/편집인   정리 배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