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다큐6/ 국방 정보
■2015-01-22 전직 CIA 요원의 1·21 사태 증언
21일은 1·21사태 47주년이었다.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무장간첩 31명을 서울에 침투시킨 사건이다. 이때 남한에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 소속 무장간첩 중 유일한 생존자가 김신조 씨다. 김신조 씨는 훗날 전향을 했고 기독교에 귀의해 목사로 활동했다.
김신조 씨의 전향을 설득한 이가 한국계 미국인으로 전(前) 미국 CIA 요원이었던 마이클 리 씨다. 마이클 리는 1·21 사태 당시 미 502 군사정보단 소속이었다.
502군사 정보단에서 마이클 리가 한 일은 대공(對共) 업무였다. 당시 미군은 <한미양해각서 미8군 G2 정보 훈령 I-65>에 따라 대공 수사, 대공 정보활동을 주도적으로 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활동에 따른 비용도 미국 정부가 지출했다. 한국 정부는 미군이 주도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은 74년 미국이 한국 정부에 권한을 이양할 때까지 이어졌다.
마이클 리는 전직 CIA 요원으로서는 국내 언론사 최초로 2014년 ≪月刊朝鮮≫ 9월호와 10월호에서 기자와 2회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당시 마이클 리는 김신조에 대한 설득 과정을 소상하게 밝혔다. 김신조가 감방 벽에 머리를 부딪뜨리고 혈관을 이빨로 물어뜯는 등 전향을 거부하며 자해 소동을 벌였던 이야기가 소상하게 소개돼 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다. 마이클 리 1인칭 시점으로 그의 증언을 소개한다.
<1·21사태로 생포된 김신조는 공비소탕 작전이 끝난 후에 대방동 수용소에 후송됐다. 나는 김신조를 그곳에서 4개월간 심문했다. 그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남한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매사에 반항적이었고 비협조적이었다. 그는 체포될 때 자폭에 실패한 것을 원망스럽게 생각했고 청와대 기습 작전에 실패한 것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에 대한 무한한 불충(不忠)으로 생각했다.
그의 반항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그를 1주일 이상 정상적으로 심문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나는 그를 회유하고 설득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는 자결하겠다고 식사를 거부했고 수용소 감방 벽에 머리를 부딪뜨리고 손목의 혈관을 이빨로 물어뜯고 온갖 소동을 벌였다. 수용소 측에서는 그의 자해(自害)를 방지하기 위해 감방 바닥과 사면 벽을 모두 매트리스로 덮고 24시간 수갑을 채운 채로 특수 감시 장비를 통해 감시했다.
그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반항할 체력이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접근했다. “자네가 죽기는 왜 죽어” 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꼭 하나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것은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며 그 다음엔 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사람이 사내자식으로 태어나서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실인지 알기도 전에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이 말에 수긍이 가는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문 채로 내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김신조가 수그러진 후에 나는 그의 수갑을 풀게 하고 식당에 특식을 주문하여 먹게 한 뒤 본격적인 심문에 들어갔다.
“김 군, 자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도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 무엇이 바른 길인지 판단을 하자.”
이때 김신조는 북에서 배우고 들은 이야기와 자기가 아는 진실이 무엇인지 나를 설득하려는 마음으로 대화에 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날이 가고 인간적인 냄새를 서로 맡으면서, 남북한의 건국 과정과 가짜 김일성의 정체와 자유세계의 실상을 이야기하고 들으면서 그는 서서히 새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약 3주 후부터는 수용소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사람의 하나가 되었고 가장 많은 분량의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심문 도중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그가 출소하면 꼭 교회에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한국 정부는 그가 전향하여 최대한으로 협조를 했고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1970년에 합법적인 남한 주민으로 정착하게 하였고 불행히도 북에 있는 그의 가족은 모두 처형되었다.
김신조와 얽힌 아찔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김신조가 대방동 수용소에 도착한 1주일 후 미8군 G-2 오란도 준장과 나 그리고 보안사 서빙고분실 보안과장 이학봉 소령이 김신조를 앞세우고 헬리콥터를 이용해 전방으로 갔다. 124군부대의 31인조가 통과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철 기둥 북쪽에서 공병가위로 수직 약 1m가량 자르고 통과한 후 다시 내려놓으면 철 기둥 남쪽 밖에서는 순찰대나 조사관들의 눈에 띄지 않게 돼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김신조로부터 침투 당시의 상황, 이동 과정과 아군 경비태세의 허점을 구체적으로 듣고 모든 것을 기록했다. 조사 후 우리 일행은 그 지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미군 GP로 이동해 망원경으로 비무장지대 반대쪽 북한 초소의 동향을 감시했다. 그때 예기치 못한 참사가 발생했다.
우리가 헬리콥터로 그 초소를 떠난 약 10분 후 북한 초소에서 발사한 포탄이 우리가 방문했던 바로 그 초소로 날아왔던 것이다. 포탄이 폭발하면서 미군들이 폭사하고 부상을 입었다. 참으로 아찔한 사건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10분만 더 머물렀더라면 우리도 그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그때 동행했던 이학봉 소령은 훗날 1986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2차장을 지낸 후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에 김신조는 놀랍고도 새로운 사실을 증언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 작전에 실패한 31인의 공비들 중에 살아서 북으로 돌아간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2000년 9월 11일에 김정일의 특사로 서울을 방문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김용순을 수행한 박재경 대장이었다는 것이다.
박재경은 그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었으며 김정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 왔을 때 신라호텔에서 남측 인사들을 만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하중에게 칠보산 송이버섯을 전달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청와대 기습 작전에 실패하고 북으로 도주할 때 노고산에서 추격하는 국군 수색대와 교전을 하고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을 사살한 장본인이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내려왔던 그가 선물 꾸러미를 들고 청와대를 방문했다니, 이걸 놀라운 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코미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성동 조선pub 기자
■2015-08-11 1·21 청와대 습격 보복작전...핵심 장교들의 최초 증언 - HID 對北 작전 秘史
68년에 공작원 6명이 DMZ 북한군 GP 공격, 소련군 1명 포함 23명 사살
공작원 6명이 DMZ의 북한군 GP 공격, 소련 군사고문단 1명 포함 23명 사살
사형수와 무기수 32명으로 「선갑도 부대」 창립, 서해 옹진군의 무인도서 훈련
● 6·25 때 毛澤東은 밀사 보내 유엔군 38선 돌파시 중공군 개입 경고했다.
● 일본의 「오무라 난민수용소」를 對北 침투 우회 루트로 이용했다.
● 1972년 7·4 南北공동성명 최초 막후 교섭자는 첩보부대 장교였다.
北派공작 장교 모임 「眞白會」
▲북파공작원들의 훈련 모습. 각본에 의한 것이 아닌, 실전처럼 훈련했다고 한다.
2002년 3월15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는 20여 통의 LPG 화염이 치솟고 쇠파이와 투석이 난무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피 칠을 한 돼지와 닭도 내던져졌다. 정부에 대해 자신들의 실체 인정과 北派(북파)공작 활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북파공작원(HID)들의 시위였다. 陰地(음지)에서 陽地(양지)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은 충격이었지만, 그들의 요구는 언젠가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였다.
당시 기자는 북파공작원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벌여온 對北(대북) 침투공작과 희생 사례를 수집하고 있었다. 20여 명의 북파공작원을 만나는 도중 북파공작 활동에 참여한 장교들의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95년에 창립된 「眞白會(진백회)」라는 모임이었다. 육군첩보부대 출신으로 3년 이상 공작부서에서 근무한 장교 출신들의 모임이었다.
육군첩보부대의 효시는 美 군정청 산하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다. 육군첩보부대는 1948년 국군 창군 후 육군본부 정보국內에 소속돼 있다가 1951년 3월에 독립했다. 1972년에는 「육군정보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0년에는 陸海空軍(육해공군) 정보부대가 통합돼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가 됐다.
眞白會 회원 대부분은 육군첩보부대에서 근무를 시작해 육군정보사 시절 전역을 한 장교들이었다. 대부분이 北派공작과 對北 보복공격이 활발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공작활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1960년대 훈련을 받는 북파공작원들의 모습. 체력단련은 북파공작원 교육의 기초였다
기자는 당시 眞白會 회장인 金元漢(김원한·78·예비역 대령)씨를 만날 수 있었다. 충주사범학교 졸업 후 1953년에 갑종 61기로 임관한 金씨는 육군첩보부대, 정보사령부를 거치면서 공작과장·첩보과장·남산대장을 역임했다. 그 과정에서 對北 보복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1960년대 말에는 전방부대에서 특수공작원을 동원한 보복공격 지휘 등을 담당했다.
그에게 對北 첩보공작과 관련한 증언을 요청했지만 『회장이라고 해서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다. 회의를 열어서 결정하고 결과를 알려 주겠다』고 했다. 결과는 『증언을 하지 않겠다』였다. 그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수행한 對北 첩보전을 우리 사회가 너무 흥미로만 보고 있고, 아직은 장교 출신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비밀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년여 동안 틈틈이 『모임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라도 증언해 달라』고 金씨를 설득했지만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金씨와의 만남이 끊긴 지 3년여가 되던 지난 4월 기자는 북파공작 장교 출신들이 또 다른 모임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임의 이름은 「특수임무수행자 복지진흥회」였다. 모임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총회가 열린 지난 4월26일 총회장소인 서울 용산구 소재 「용사의 집」을 찾아갔다.
60代 이상으로 보이는 50여 명의 對北 첩보업무에 종사했던 전직 장교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당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북파공작 등 특수임무수행자에 대한 보상에서 장교 출신을 제외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금전적인 보상보다 이들을 더 화나게 한 것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한 일 자체를 당국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4년간의 설득 끝에 證言
▲李春國
1930년 경북 포항 출생. 육군대학 졸업. 육본 정보국 특수요원. 갑종 22기. 5·16 후 첩보부대 공작·기획 장교, 駐越사령부 군사정보부대 작전과장 겸 공작과장, 9사단 지구대장, 육군 첩보부대 작전과장·정보단장, 대령 예편.
「특수임무수행자 복지진흥회」의 회장은 眞白會 회장이었던 金元漢씨였다. 金씨는 그 자리에서 기자에게 모임의 명예회장인 李春國(이춘국·78·예비역 대령)씨를 소개해 주었다. 李씨는 6·25전쟁 발발 후 육본 정보국 소속 특수요원으로 낙동강 전선 敵(적) 후방에서 유격대 활동을 벌이다 갑종 22기로 임관했다.
첩보부대 작전과장과 정보단장을 역임한 李씨는 1950년 7월 육군본부 정보국에 들어갔는데, 그해 10월 밀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다 체포된 毛澤東(모택동)의 밀사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1968년 1·21 사태 후 「선갑도 부대」, 「설악개발단」 등의 對北공작 특수 부대 창설을 기획하고 훈련 등의 실무를 지휘했다. 다대포 간첩사건 逆(역)공작 작전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1979년 8월에 전역한 후에는 「陸軍情報史(육군정보사) 40年史」, 「육군정보 교범」, 「국군정보 50년사」를 책임 편찬했다.
金元漢씨는 李春國가 어떤 분인지 소개해 주었다.
『李명예회장은 對北첩보와 관련한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비슷한 연배의 첩보부대 출신들도 있지만 그분들은 자기가 소속해 있던 한 부분만 잘 알지 李회장처럼 對北 첩보전 전체는 알지 못하죠. 李회장은 현장에서는 물론이고 첩보부대 본부에서 공작과 작전 전체를 기획한 분입니다. 책도 편찬하셨고요』
李春國씨는 金元漢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金회장은 저를 첩보부대의 산 역사라고 하는데, 사실은 金회장만큼 對北 공작활동이나 첩보활동을 많이 알고 직접 체험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金元漢
1930년 충북 충주 출생. 충주사범·육군대학 졸업. 갑종 61기. 5군단 첩보부대 공작조장·과장, 첩보과장, 월남파병 맹호부대 초대 정보부대장, 남산지구대 공작과장, 6군단정보부대장, 남산901부대장, 속초지구대장, 대령 예편. 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 수여.
기자는 두 사람에게 對北 공작활동과 관련한 증언을 다시 요청했고,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지금까지 첩보부대 출신의 공작 장교들은 자신들의 지난 활동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2005년 10월 첩보부대장을 지낸 金東石(김동석·84)씨가 회고록 「金東石 이 사람!」을 통해 첩보부대 시절 자신의 공작활동을 소개하는 책을 내고, 일부 장교 출신들이 그 활동상에 대해 반박하는 등의 일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장교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가겠다」던 이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특수임무수행자 복지진흥회의 수석 부회장인 朴貞夫(박정부·67·예비역 중령)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휴전협정 위반, 공작활동의 노출 등 국익에 반하는 폭로들이 이미 추스를 수 없을 만큼 이어졌어요. 우리가 가슴에 품고 무덤까지 가져가려던 것들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시대가 된 거죠. 그것도 너무 왜곡돼서 말이죠. 최소한 우리 첩보부대에 대한 왜곡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로잡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명예회복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북파공작 등 특수임무수행자에 대한 보상에서 우리 공작장교들을 제외시켰다는 것은 우리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목숨을 걸고 敵지역 침투 공작에 참여한 사례가 무수히 많은데 왜 장교만 보상 대상에서 빠져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모욕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담보로 남북 분단 체제에서 최전선에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음지에서 대한민국을 지켜 왔다는 긍지와 명예를 반드시 찾을 겁니다. 우리는 현직에서 떠났어도 애국심과 명예를 먹고사는 장교들입니다』
毛澤東의 밀사
▲朴貞夫
1940년 경남 김해 출생. 부산高·육군대학 졸업. 갑종 156기. 첩보부대 공작과장, 속초지구대 팀장, 공작운영 장교, 중령 예편.
두 예비역 영관 장교들의 증언은, 月刊朝鮮 사무실 등에서 첩보부대 두 元老(원로)의 증언 후 朴貞夫씨가 다시 확인과 보충설명을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3명이 증언에 참여한 셈이다.
이들은 증언을 통해 『6·25 전쟁 당시 중국 毛澤東이 9·28 서울수복 무렵 서울로 밀사를 보내 38선에서의 휴전 제의와 함께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경우 중공군의 개입을 경고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또한 『공군의 「실미도 부대」처럼 육군도 對北 특수공작부대인 「仙甲島(선갑도) 부대」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까지 운영했다』고 증언했다. 32명의 부대원들은 사형수와 무기수들로 사면을 조건으로 채용됐다고 한다.
두 예비역 영관장교들의 증언에 의해 그동안 逆공작을 통한 간첩 검거 가능성이 제기돼 온 1983년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의 逆공작 주체가 당시 안기부와 정보사령부였음을 확인했다.
다음은 一問一答(일문일답)을 통한 李春國씨의 증언이다.
―중공軍 개입을 정보보고를 통해 조기경보했다고 하는데, 그 정보는 어디서 얻은 겁니까.
『제가 국방부 정보국에 있을 때였는데 毛澤東이 보낸 밀사가 체포된 후 우리 부대로 보내졌어요. 밀항을 통해 서울로 잠입하다가 체포된 거죠.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입니다』
▲2005년 1월11일 오후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북파공작원 전사자 위패 봉안식 행사. 영송원들이 전사자 74명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탑으로 봉송하고 있다
『중공軍 개입 경고했다』
―당시 정보국장은 누구였습니까.
『장도영 장군이었죠. 맥아더 회고록에 보면 「중공군이 개입할 줄 몰랐다」고 돼있는데 저는 그게 궁금해요. 우리가 올린 첩보가 중간에서 차단된 건지 맥아더 사령관이 보고를 받고도 무시한 건지 지금도 궁금해요』
―밀사의 신분과 지위는 어땠습니까.
『제가 감시 역할을 하면서 그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었어요. 중공군 문화부사단장인데 이름은 金平(김평)이었어요. 조선사람이었죠. 제가 이 사람이 진술한 것을 받아적은 후 일일보고 하고 그랬죠. 자기 스스로 「毛澤東의 지령을 받고 왔다」고 했어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겠네요.
『그렇지 않아요. 제 기억으로는 40代 초반의 나이였는데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어요. 사람이 깡말랐는데 인상은 학자 타입이었죠. 옆에서 지켜본 그 사람은 인텔리였어요』
―어디에서 그 사람과 함께 있었습니까.
『그때 우리가 있던 安家(안가)가, 서울 종로구의 옛날 화신백화점 자리 뒤에 천도교 회관이 있었는데, 그 건너편에 민씨 집이라고 있었어요. 지금도 흔적이 조금 남아 있던데요. 거기서 자고 하던 때가 1950년 10월입니다』
―한국으로 밀항한 목적이 뭐였답니까.
『그 사람의 주장은 「중공군에 관한 것을 李承晩 대통령이나 맥아더 장군을 만나게 해주면 이야기하겠다」는 거예요. 나중에 목적을 이야기했는데 「유엔군이 더 이상 북진하지 말고 38선에서 휴전을 하자」는 거였어요. 만약 돌파하면 중공군이 개입하겠다는 거였죠. 그 사실을 계통을 통해 다 보고했죠』
―그 이후 金平은 어떻게 됐습니까.
『저도 그 이후로는 그 사람의 생사를 몰라요. 생사를 모르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죠』
李씨는 당시 「중공군 개입」 경고 정보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됐는지 안 됐는지가 지금도 궁금하다고 거듭 말했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밀사」 金平이 서울에 와서 전한 毛澤東의 제안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외상 周恩來(주은래)는 1950년 10월1일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데 이어, 3일에는 베이징 주재 인도대사를 불러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온다면 중공도 개입할 것』이라는 말을 미국에 전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정말 중공군의 개입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웨인트로브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는 그의 저서 「맥아더의 전쟁」에서 6·25 전쟁에서 맥아더의 가장 탁월한 전략은 인천상륙작전이었던 반면, 가장 큰 실책은 중국의 참전을 예상치 못한 것을 들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15일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열린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했다.
6·25 전쟁 참전자들의 회고록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 가능을 높게 보고 있으면서도 개입을 방조함으로써, 차제에 중국 공산당까지 공격하기 위한 기회로 삼으려 했을지 모른다」는 분석에 힘을 주고 있다.
특수임무공작부대 창설 기획자
▲북파공작원들의 수중침투 훈련 장면. 북파공작원들은 지상과 수중침투는 물론 공중침투 훈련까지 받았다.
李春國씨는 1968년에 향토예비군 설치법이 시행되는 데에 첩보부대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태 후 그해 2월에 국무회의에서 「향토예비군설치법안」이 의결됐는데 야당의 반대가 심했어요. 그때 일본 東京에 나가 있는 우리 공작팀에서 북한 영화를 입수해서 보냈는데 그걸 국회에서 상영한 후 법안이 통과됐죠』
―무슨 영화였습니까.
『「불패의 힘」이라고, 우리로 말하면 예비군에 해당하는 북한 노농적위대의 훈련상황을 보여 주는 내용이었죠. 與野 국회의원들이 그 섬뜩한 장면을 보고 우리도 예비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거죠. 국회에서 영화 상영 다음 날 법안이 통과됐어요』
―그때 북한으로부터 필름 입수공작을 벌인 분은 생존해 있습니까.
『김상열이라는 분인데 당시 계급이 소령이었어요. 영어도 잘하고 일본어도 잘하는 사람인데, 작년에 캐나다로 이민 갔어요』
1·21 사태는 양지에서는 향토예비군을 탄생시켰지만, 음지에서는 남북 간 전쟁에 버금가는 피의 보복戰(전)을 벌이게 했다.
―1·21 사태 후 영화로 유명해진 「실미도 부대」 같은 對北 특수임무공작 부대들이 탄생하게 되는 거죠.
『「실미도」 부대는 공군이 했고, 우리 육군은 「선갑도」 부대에서 對北 특수임무공작원을 교육시켰어요』
선갑도는 서해에 있는 섬으로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승봉리다. 현재 무인도이며, 선갑산의 높이는 352m다. 6·`25 전쟁 때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 駐韓(주한)연락처 8240부대가 주둔했었다.
―창설 시기는 역시 對北 특수공작단인 「설악개발단」과 비슷하겠네요.
『그렇죠. 1968년에 창설됐어요. 창설 준비를 기획하고 있을 때 저는 월남에 파견 나가 있었는데, 부대장이 귀국하라고 해서 돌아왔어요. 부대장한테 귀국 신고한 직후부터 특수공작부대 창설을 제가 실무적으로 지휘했어요. 전략목표·전술목표·훈련계획 등을 정하고 현장 지도도 했죠. 선갑도 부대가 803대, 중앙물색조를 훈련시키는 809대, 설악개발단 909대가 그때 창설됐죠』
仙甲島 부대원은 사형수·무기수 출신
▲1968년 1·21사태 때 유일하게 체포된 김신조씨. 이 사건 후 육해공군에 對北 보복공격을 위한 특수부대가 설치됐고, 향토예비군법이 시행되었다.
―영화 「실미도」에서 보면 죄수들을 공작원으로 선발하던데 선갑도 부대도 그랬습니까.
『오히려 실미도 부대는 민간인들을 선발했고, 우리 선갑도 부대가 무기수와 사형수들을 선발했죠. 32명이었어요. 실미도 부대는 우리와 게임이 안 되죠』
―어떤 代價(대가)를 주고 선발한 겁니까.
『사형수나 무기수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면시켜 주는 조건이었죠』
―仙甲島 부대원 중 생존자들 증언에 따르면 사면 외에 현금 3000만원을 주기로 했다는데요.
『그 당시 기준으로 3000만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런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그 부대를 만들 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없습니다』
―훈련 도중 상부 지시에 의해 같은 부대 동료가 동료를 목졸라 죽이는 일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던데요.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선갑도 부대가 창설된 후인 1970년 초 양구부대장으로 갔는데, 제가 본부에 있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생존 부대원들이 실미도 사건이 요란하게 떠벌려진 이후 혹시 우리도 그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저는 제가 양구로 간 이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실제 對北 침투작전을 했습니까.
『1969년에 백령도까지 2회 출정했었는데 중앙정보부 승인이 안 떨어져서 돌아왔어요. 명령은 중앙정보부장이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이철희씨가 했죠. 그분도 첩보부대 출신입니다. 그분이 의지가 없었어요. 「그만두라」고 했어요. 잘못하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까』
선갑도 부대원들 모두 사면조치
―부대원들은 모두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전부 해고했습니다. 1971년 8월에 있었던 실미도 부대원들의 난동사건도 부대 해체에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약속한 보상은 해주었습니까.
『1인당 당시 150만원을 지급했고 사면도 해주었습니다. 당시 150만원은 생활기반을 잡을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어요』
―당시 선갑도 대원이었던 생존자들은 「제대로 보상을 못 받았고 사면도 엉터리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돈을 줘가지고 사면증을 만들어서 우리 보안장교가 선갑도 부대원의 고향까지 데려가서 경찰서에 인계했어요. 당분간 보안조치해 달라고 부탁한 거죠』
―범죄 사실이 완전히 사면조치됐다는 말씀이네요.
『네, 그래요. 완전히 사면했어요. 사면하는 데 법조항이 없다고 해서 제가 관계 법률을 전부 뒤져서 해당조항을 찾아냈어요. 그때는 장관급의 승인이 있으면 사면이 된다는 예외 조항이 있더라고요』
1968년 1월21일 발생한 청와대 피습 미수 사건에는 북한군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동원됐다. 당시 31명 중 김신조씨 1명이 생포됐고, 확인된 시신은 27구였다. 3명이 사라진 것이다.
사실은 이때 사라진 3명 중 2명이 당시 생포돼 북파공작에 길 안내인 역할을 맡았다는 소문이 최근까지 있었다. 李春國씨와 金元漢씨는 『당시 현장에서 사라진 사람이 3명인 것은 맞지만 그중 2명이 우리 공작원들이 북파될 때 길안내를 맡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침투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중 김신조씨 외에 남한에 생존해 있었거나 현재 있는 사람이 정말 없다는 말씀입니까.
『김신조씨 외에 현장에서 사라진 세 사람이 더 있었던 것은 맞아요. 그중 한 명은 평양으로 귀환해 인민군 고위간부가 됐어요. 일부 언론에 보도가 됐잖아요. 2000년 9월 金正日 특사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를 수행해 송이버섯을 전달하고 간 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담당 부총국장 박재경이고, 나머지 두 명은 도주 도중 사망했어요』
―그 두 명의 시신은 확인했습니까.
『그들을 추적하다가 연대장 한 명이 적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들은 유격전에 이런 게 있어요. 세 사람이 함께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아요. 항상 삼각개념으로 움직여요. 서로 위험하면 도움을 주고 하면서. 북한산 뒤로 해서 송추로 해서 도망갔죠. 우리 대간첩작전 부대가 포위를 했는데 그 상황에서 연대장이 총을 맞은 거죠.
그 당시 참모총장이 김계원씨였는데, 「잡으면 뭐할 거냐」면서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105mm 무반동총 등을 퍼부었어요. 그때 두 명이 죽고 한 명은 넘어간 거죠. 사살된 2명의 시신이 확인됐을 겁니다. 그때는 우리가 對北 침투공작을 담당하는 공작과장 첩보과장할 때인데, 1·21사태 때 생존자를 길 안내자로 쓴 적이 없어요』
1960년대 말 1·21 사태와 울진삼척지구 간첩침투사건, 휴전선 일대에서 벌어진 상호 간의 보복공격 등으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전환점이 된 것이 1972년 7월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오기 전까지 남북한은 1971년 11월부터 1972년 3월까지 대한적십자사의 鄭洪鎭(정홍진)씨와 북한적십자사의 김덕현이 각각 실무자로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벌였다.
▲1983년 12월16일 부산 다대포 간첩침투사건에서 체포된 이상규씨와 전충남씨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하고 있는 김신조씨(맨 오른쪽). 다대포 사건은 그동안 逆공작에 의한 간첩체포사건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7·4 남북공동 성명의 최초 비선
이 접촉을 바탕으로 1972년 5월에는 李厚洛(이후락) 당시 중앙정보 부장의 평양 방문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서울 방문이 이루어짐으로써 7·4 남북공동성명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남북 비밀접촉을 먼저 제안한 쪽은 어디일까. 첩보부대 출신 영관 장교들의 주장에 의하면 북한 金日成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鄭洪鎭·김덕현 비밀접촉 이전에 양측 공작 장교들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李春國씨의 증언이다.
『우리는 문산·전곡·운천·양구·속초 등 전방지대에 6개 공작대를 두고 있어요. 이 6개 공작대에서 한 달에 보통 1건 내지 2건 침투공작을 펼치죠. 몰래 適地에 들어가서 잠복하다가 순찰대·통신소·중계소 같은 데에서 죽이고 두들겨 부수고 했으니 전쟁 아닙니까. 그쪽은 하도 당해서 창피하니까 함부로 對南방송도 못 했어요. 그런 공작이 있은 후에는 판문점 유엔감시단에서 전화가 와요. 「그런 일 있느냐, 없느냐」고 물어오는 거죠. 그 전화를 제가 받는데 「그거 그 사람들 상투적으로 하는 주장인데 그걸 믿으면 어떡합니까」 하면 나중에는 서너 번 하다가 아예 전화도 안 해요』
金元漢씨의 이어지는 증언이다.
『우리의 보복공격이 격렬하니까 金日成이가 「우리 이렇게 싸울 것 아니지 않느냐, 우리 서로 만나서 의논하자」고 한 거예요. 그랬던 것인데 서로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라인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요새는 많지만 그때는 라인이 없으니까. 그 라인이 우리 첩보부대 2중공작 라인이었다는 거죠. 더블류 라인이죠. 왔다 갔다 주선한 사람이 남북 모두 거물급 인물이었죠』
―구체적으로 누구였습니까.
『원래 국군 장교였다가 전쟁 후 북쪽에 잔류한 사람이 있어요. 국군 장교였다가 인민군 고위 장교가 된 사람이에요. 그 정도로만 이야기하죠』
장교 참여 보복공작으로 23명 사살
▲1972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金日成. 이 남북 접촉의 최초 비선은 첩보부대 2중공작 라인이었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침투공작이 1980년대에도 있었죠.
『1980년대까지 한 걸로 알고 있어요』
조종관으로서 공작조를 이끌고 여러 번 북방한계선을 넘었다는 金元漢씨가 자신이 직접 지휘한 보복공격 사례를 한 가지 소개했다. 이 공격으로 소련군 군사고문관을 비롯 인민군 23명이 사망했다.
金씨는 그 사례를 소개하는 이유를 『당국이 북한공작원 보상 대상자에서 장교 출신들을 제외했는데, 장교 직분의 공작원들이 일반 공작원들과 똑같이 훈련하고 침투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은 金元漢씨의 증언이다. 金씨는 보복공격을 감행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68년 초에 첩부부대장이 남산대·인천대·전곡대·우리 운천대 4개 부대를 합쳐서 보복공작을 하라고 했어요. 제가 공작과장할 때였죠. 현역 소위 4명, 중위와 대위 각 1명씩 6명을 선발하고 4개 부대를 통합해서 계획을 세웠어요. 6사단하고 3사단의 경계선 지역(철원)이었는데, 일반 부대들은 우리가 들어오는 걸 싫어해요. 우리가 보복하고 나오면 걔들도 보복이 들어오니까. 지형 정찰 이런 것을 수십 번 했어요. 실제 북쪽 지역으로 들어가는 침투 훈련도 했고요. 들어가서 공격하는 날은 1968년 11월16일로 정해졌어요. 지금도 저는 그 날짜를 안 잊어버려요.
그날 아침 10시였어요. 우리 쪽 GP에서 장교 공작원 6명과 공작원 6명이 잠복해 있는 상대편 목표 지역을 보니까 안개가 끼었는데, 목표지역 敵 GP로 지프와 호송차가 들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그 순간 크레모아가 터지고 두 시간 동안 기관단총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격전이 벌어졌어요. 지프 안에는 소련軍 군사고문관이 타고 있었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참 초조했어요. 그때는 포병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비상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낮 12시쯤 넘으니까 한 사람씩 돌아오는 거였어요. 하나 둘 나오는데 한 사람만 안 나왔어. 보니까 제가 데리고 있던 김일동 소위가 파편을 맞았어요. 제가 「너 피난다」 하니까 그때부터 절룩거리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몰랐던 거죠. 정신상태가 대단한 거예요.
그날 제가 들어갔던 우리 측 GP에 조종관인 정인배 소령하고 키퍼를 머물게 했어요. 혹시 밤에 저쪽 GP에서 보복공격이 나올지 모르니까 그렇게 했죠. 아니나 달라요. 그날 밤에 걔들이 습격을 왔어요. 정인배 소령이 들어오는 걸 그냥 막 갈겨 버렸죠』
요도號 납치사건 당시 인민군 역할
▲1970년 3월 김포공항에 기착한 요도號 승객들이 인질상태에서 풀려나고 있다. 金元漢씨는 납치범들이 김포공항을 평양공항으로 오인하도록 하기 위한 공작지시가 상부에서 내려지자 인문군 상좌복장을 하고 김포공항으로 출동했다고 한다.
―빠져나오지 못한 한 명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중에 빠져나왔어요. 저는 지금도 그 공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요. 하나도 희생 없는 게 얼마나 좋던지』
이날의 공로로 이들 팀에는 충무무공훈장 5개 등 훈장이 12개가 수여됐다고 한다.
―지프에 타고 있던 사람이 소련軍 군사고문관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다음해에 그쪽 GP장이 귀순했어요. 유 무슨 소위였는데 신문 과정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어요. 우리는 한 명의 피해자도 없는데 그쪽은 23명이 죽었다는 거예요. 공격 당시 큰 성공이라는 것은 직감했지만 그 정도 전과를 올릴 줄은 몰랐죠. 혹시 귀순한 GP장의 이름이 필요하면 확인해 줄 수 있어요』
金元漢씨는 요도號 사건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요도號 사건은 1970년 3월31일 일본 赤軍派(적군파) 9명이 東京(도쿄)發(발) 후쿠오카(福岡)行(행) 항공기 요도號와 승객·승무원 129명을 납치해 북한으로 가려다 기장의 기지로 김포공항에 착륙한 사건이다.
3일간 한국 軍警(군경)과 대치 끝에 적군파 9명은 인질로 잡고 있던 승객들을 풀어 주고 대신 일본 정무차관을 인질로 삼아 평양으로 갔다. 그 과정에서 범인들에게 김포공항을 평양공항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인민공화국기를 걸고 원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들, 다발총을 든 인민군들을 동원했다.
이 가짜 인민군 30여 명을 김포공항으로 이끌고 간 사람이 金元漢씨였다. 첩보부대 첩보과장 시절이었는데 본부에 인원이 없어서 속초첩보부대원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金씨는 인민군 상좌 계급을 달고 가짜 인민군을 인솔해 갔다고 한다.
평양으로 향하던 요도號를 김포공항으로 유인한 공작 주체가 당시 중앙정보부인지 국방부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요도號를 김포공항으로 유인한 것도 일종의 공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공작 주체는 어느 기관이었습니까.
『공작은 중앙정보부와 첩보부대의 협조로 이루어졌습니다. 中情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죠. 우리 부대원들이 김포공항에 가서 대기하고 있던 곳이 中情이 세관업무를 하는 곳으로 위장해 사용하고 있던 100호실이었어요. 당시 첩보부대는 대부분의 업무를 中情의 지시를 받아서 하는 상태였습니다』
정보사령관이 다대포 간첩 逆공작 자문 요청
―가짜 인민군들의 현장 투입은 왜 안 했습니까.
『청와대에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고 철수했어요. 만약 비행기가 억류돼 있는 곳으로 투입됐다면 총격전이 벌어졌을 겁니다』
月刊朝鮮 2002년 5월호에 기자가 쓴 북파공작원들의 비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 북파공작원들이 투입된 對간첩작전은 1983년 12월에 있었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에서는 전충남·이상규 등 두 명의 무장간첩이 생포되었다. 두 사람을 직접 생포한 사람은 李起建(이기건)씨와 金奉夏(김봉하)씨였다.
이들은 당시 계급이 각각 병장과 상병으로 알려졌고, 육군 7376부대 소속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언론에는 두 사람의 기자회견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회견에서 두 사람은 『총을 쏘며 뛰어나가 총 개머리판으로 이들을 때리고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고 말했다.
사실은 다르다. 이들은 북파공작원들로 당시에 이들의 손에 있던 것은 총이 아닌 박달나무 몽둥이 한 자루씩이었다. 金奉夏씨는 『당시 개머리판 얘기는 기자회견 전에 만들어진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었다』면서 『우리 북파공작 요원들이 단장을 포함해서 36명이 당시 작전에 참여했고, 나는 계급이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다』고 말했다.
다대포 사건은 그동안 1960년대에 귀순한 간첩을 이용한 逆공작에 의한 「작품」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金씨의 증언은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부터 체포작전훈련 후 현장에 투입됐다』고 金씨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李春國씨는 증언을 통해 1983년 다대포 간첩사건은 국가안전기획부와 정보사령부가 합작한 逆공작이라고 단언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차장이 朴世直(박세직)씨였는데, 당시 정보사령관이었던 李相珪(이상규)씨와 두 사람이 육사 동기예요. 이상규 사령관이 안기부로부터 전향한 간첩을 이용한 逆공작 제안을 받고 저한테 자문을 해왔어요. 저는 하라고 그랬어요. 최초에 구상할 때 저도 참여한 셈이죠. 공작원만 침투시키는 게 마음이 안 놓이니까 장교 하사관들도 투입했어요. 이 사령관은 머리가 약간 없는데 가발까지 쓰고 현지 정찰을 했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逆공작이에요』
對北공작에는 직접침투 외에 우회해서 침투하는 방법이 있다. 주로 제3국을 통한 우회침투에 첩보부대가 동원되었었다고 한다. 지금은 노출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에 대한 우회침투로로 활용되던 곳이 일본 오무라(大村) 수용소였다고 한다.
전방을 통한 위장 귀순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오무라 수용소는 한국인 밀항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공작원이 밀항을 통해 일본에 가면 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된다. 일부러 죄를 짓는 것이다. 오무라 수용소에서는 수용자가 北으로 갈지 南으로 갈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점을 이용해 北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金元漢씨의 一問一答식 증언이다.
―실제 오무라 수용소를 통해서 북한에 많은 침투를 했습니까.
『공작 차원에서 간 사람은 있어요』
―그렇게 해서 성과는 나옵니까.
『오랜 시간이 걸려서 하는 일이라 기대에는 못 미쳐요. 우리나라 전선에서 위장 귀순시키는 것 있잖아요? 그것도 잘 성과를 못 봤어요. 북쪽에 연고가 있는 사람을 보내 위장 귀순시키는데, 걔들은 귀순한 사람을 3년간 교육을 해요. 그렇게 의심이 많으니까 성과를 내기가 어려웠죠』
일본을 통한 침투 이야기가 나오자 李春國씨가 1973년 대구에서 정보단장으로 있던 시절 자신이 직접 추진하다가 중단한 공작사례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6·25 전쟁 때 인민군 중좌로 포병대대장을 하던 김일신(가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고 인민군이 후퇴를 시작하자, 이 사람은 후퇴를 하지 않고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돌아갔다.
김일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동안 부산 등지를 다니면서 장사를 하다가 고향이 수복이 돼서 돌아왔다고 둘러 댔다. 그런데 인민군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당원증, 장교신분증, 권총을 자기 집 지붕 밑에다 숨겨 놓았다.
김일신은 훗날 면서기로 취직해서 경리를 담당하다가 나중에는 면장까지 됐다. 면장이 된 후 새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갔다. 김일신이 살던 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지붕을 고치다가 6·25 때 前 주인이 숨겨 둔 당원증·장교신분증·권총을 발견해 신고했다.
중앙정보부 대구지부에서 조사를 했는데 지역 주민들의 탄원서가 들어왔다. 「새마을사업에 공로가 많고 과거에 인민군을 했어도 사실상 귀순한 거나 다름없으니 석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A급 요시찰인으로서 사면을 받았다. 대신 더 이상 公職(공직)에는 못 나가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있던 李씨의 후배가 김일신을 활용한 공작을 해보라고 권했다. 김일신을 만나서 지금 북한에 알 만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했다. 20여 년 이상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북한 소식을 모르는 그에게 사진과 함께 북한 인물 자료를 보여 주었다.
함경도에 있는 7군단장 이을설 등을 기억해 냈다. 李씨는 그에게 『모든 신분을 책임질 테니까 공작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하겠다』고 답했다.
李씨는 『일본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서 「대한민국 도저히 못 살겠다, 다시 장군님께 충성을 다하겠다」고 한 후 아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서 다시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안착이 되면 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장기 공작이었다.
김일신은 일본으로 가서 인민군 7군단장 이을설 등과 연락이 돼서 북한으로부터 들어오라는 답변까지 받았다.
―그분은 지금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에요. 지금도 활동하고 있으면 이런 얘기 못 하죠. 공작이 얼마나 장기간 진행되는 일도 있는가를 이야기해 주려는 거죠. 막 보내려는 순간에 중앙정보부에서 중단하라고 해서 못 했어요』
―왜요.
『외교문제도 있고, 그런 것 안 해도 정보수집이 가능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해서 안 했어요』
짐처럼 짊어지고 가야 할 이야기들
―첩보부대에서는 對北공작만 합니까.
『아니에요. 결과적으로 對北첩보 수집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요원들이 中東(중동) 같은 데도 나가고 그랬었어요. 우리와 수교하기 전 태권도 사범으로도 내보내고, 신분을 완전히 세탁해서 이슬람교인을 만들어서 내보내기도 했죠』
―구체적으로 그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그건 안 돼요. 여기까지만 합시다』
이 첩보부대 예비역 영관장교들에게는 아직도 가슴에 묻어둔 채 짐처럼 짊어지고 가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보였다.●
출처 | 월간조선 2007년 6월호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2015.10.15 전두환 정부, 김일성 조기퇴진에 대비한 회의 연 뒤'''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4년 5월 16일 김일성은 특별열차 편으로 함경북도 청진(淸津)을 출발, 46일간 소련,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8개국을 순방했다. 우리 정부는 김일성의 순방 목적이 무엇인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간 대부분의 공산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외국 순방을 좋아하지 않았던 김일성이 17년 만에 8개국을 방문한 만큼 배경에 주목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가동할 수 있는 라인을 총동원해 철저한 베일에 가려진 김일성의 행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동구(東歐)순방 목적이 아들 김정일을 잘 부탁하기 위한 인사외교(人事外交)였던 사실이 드러났다.
건강에 문제가 있던 김일성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방문한 자리에서 내년(1985년)까지는 김정일에게 주석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현역에서 은퇴, 명예직만 유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는 내용을 외무부 정보라인이 입수한 것이다. 비밀해제된 외교부 자료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구성했다.
불가리아·루마니아에서 흘러나온 김일성 조기퇴진론
1984년 6월 23일 주일 대사관의 유병우 1등 서기관은 일본 외무성 관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첩보를 입수했다.
〈①최근 불가리아 정계 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김일성의 건강은 반드시 양호하지만은 않다고 함. 이미 명예 있는 정권승계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며 김정일로의 정권 이양 시기가 일반이 추측하는 것보다 상당히 빠르지 않을까 생각됨.
②불가리아 지브코프 의장(국가원수)은 명년(明年) 중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나 그때 김일성이 주석으로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음.
③나(일본 외무성 관계자)에게 6월 20일 이런 이야기를 전달한 불가리아 외무성 부장은 소문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는 단순한 소문이라기보다는 금번 김일성의 소련 및 동구 순방 시기의 건강상태 및 권력이양 시기에 대해 동구 측이 감촉한 바를 상기와 같이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됨.〉
루마니아 쪽에서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정보가 돌았다. 주일 대사관의 김용규 정무과장이 일본 외무성의 다른 관계자로부터 파악한 내용이다.
〈6월 21일 루마니아 외무성 고관은 현지 일본대사관 고위 직원에게 김일성의 금번 소련, 동구 방문은 그가 멀지 않아 은퇴, 김정일에게 뒤를 물려주기 위한 준비의 의미가 있다.〉
이에 최경록(崔慶祿) 주일대사는 두 내용을 취합, 이날(6월 23일) 곧바로 외무부 장관에게 전보를 보냈다. 최 대사가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가리아 외무성 고관-김일성의 건강은 반드시 좋다고만은 할 수 없으며 주석직을 물러나 명예적인 지위에 취임할 것이라 함. 그 시기는 연내라고 하는바 지브코프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예정한 1985년에는 장남인 김정일이 주석이 되어 있을 것임.
○루마니아 외무성 고관-금번 김일성의 소련 동구 순방은 그가 멀지 않아 은퇴,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준비의 의미가 있음.
*동 사실에 대한 출처 보안을 각별히 유념 바람.〉
김정일과 김평일 대결 두려워했던 김일성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일성은 생전 김정일과 둘째 부인 아들인 김평일이 대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김일성이 46일간 순방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온 후(1984년 7월 1일)에도 ‘김일성 조기퇴진’ 정보는 계속 돌았다. 7월 4일 최상섭(崔常燮) 주 인니(印尼·인도네시아) 한국대사도 주 소피아(Sofia·불가리아에 있는 도시) 인니대사로부터 김일성 조기퇴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일성의 건강이 매우 나쁘다. 1~2년 이내에 물러날 것 같다. 또 김일성은 첫째 처의 아들인 김정일과 둘째 처의 아들인 김평일이 대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최 대사는 이날 들은 정보를 정리해 외무부 장관에게 보냈다.
〈◆김일성은 1984년 6월 15~17일간 불가리아를 방문하고 우호협력협정에 서명함. 우호협정 내용은 막스·레닌주의 및 국제 프롤레타리아 이즘 원칙에 따라 우호, 단결, 협력, 학술, 문화, 교육, 통신, 사회생활에 관한 상호보완적 협력강화, 사회주의 단결, 제국주의의 정치공세 및 무력도발 대항, 무기감축, 세계 여러 지역에 비핵지대 설치 등을 위해 양국이 협력함(김일성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 평화적 민주적 한반도 통일내용이 협정문에 포함).
◆김일성은 1~2년 이내에 정권을 이양할 것으로 보임. 그 이유로는 김일성의 건강이 매우 나쁘고(걸음이 부자유스러움), 비록 둘째 처(김성애) 아들(김평일)이 어리지만 첫째 처(김정숙) 아들(김정일)과 정권대결을 두려워하기 때문으로 보임. 김은 명예직에서 아들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추측.
◆김일성 일행은 300명이 넘었으며, 200여 명은 경호원들로 보였음.〉
전두환 정부, 김일성 사후대책 논의
김일성의 조기 은퇴 보고가 여러 루트를 통해 들어오고, 북한도 권력이양이 임박해 있는 듯한 분위기(《노동신문》은 김일성의 동구권 방문기간 중인 6월 20일 김정일의 노동당에 대한 지도를 대대적으로 찬양, 김정일의 지도가 정치 건설 경제 문화 군사 외교 등 국정분야에 미치고 있다고 지적함과 동시에 김정일의 이른바 사상 이론을 당의 혁명사상으로 격상. 이는 그간 계속돼 온 김정일 찬양 캠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담성을 보인 내용이었음)를 조성하자 7월 11일 박세직(朴世直) 안기부 제2차장은 ‘김일성 사후대책 관련 실무국장회의를 열었다.
당시 회의에는 박 차장을 비롯하여 홍순영(洪淳瑛) 청와대 정무비서관, 이연택(李衍澤) 총리실 조정관, 권동만(權東萬) 외무부 정보문화국장, 임사빈(任仕彬) 내무부 민방위국장, 홍세기(洪世基) 내무부 치안본부 제2부장, 정탁(鄭濯) 국방부 정훈국장, 원용호(元容虎) 국방부 정보본부차장, 이경식(李庚植) 문공부 홍보조정실장, 김찬재(金贊宰) 문교부 교육정책실장, 박찬세(朴贊世) 통일원 교육홍보실장, 송한호(宋漢虎)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장, 안기부 3, 5, 6국장이 참석했다.
회의는 14시30분부터 17시30분까지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회의에서는 권력승계 비판·대남도발 대비·남북교류 검토 등 다양한 내용의 이야기가 오갔다. 외무부 외교문서를 토대로 당시 회의를 재구성했다.
〈박세직 안기부 제2차장〉
“김일성의 이번 동구 순방은 김일성시대를 종식하는 고별 순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노동신문》 논설에도 김일성이 평생 신었던 혁명의 장화를 벗겨 드려야 한다는 것이 김정일의 의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김일성 동구 국가 방문 기간에 총 17편의 사설, 논설을 통해 김정일의 치적 및 지시 관철을 선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징후로 봤을 때 조기에 권력이양이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김일성이 퇴진하면 한반도 정세 변동이 불가합니다. 저희 쪽에서 분석한 바로는 우선 신진세대(김정일 세력)와 소외세력(김일성 세력) 간 갈등이 생길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 군사 강경노선을 지속할 것이며 강력한 주민통제 사업과 주민복지의식 과시를 병행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기만적 위장 평화공세를 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1988년 한미 대통령 교체기, 1988년 올림픽 개최 및 북한군 훈련 양상 등의 면에서 1988년 4월이 가장 취약합니다. 이에 우리의 대안은 첫째 우리는 우선 김정일에 대한 도전세력을 선동, 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대한 회의를 유도해 ‘김정일 체제’ 북한 폐쇄주의를 점진 파괴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변 4강과 전쟁억지를 위한 외교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소련과는 친소 유동 정책, 중공과는 현 수준 대북 영향력 유지를 목표로 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미국과는 북한의 대외개방 유도를 둘러싼 이견을 조정해야 하며,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역할 증대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세 번째는 친북 교포 조직을 와해하고, 남한의 국력이 절대적 우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국방정보본부 자료를 보면 남한의 최대군사비 지출능력이 84년 400억 불인데 반해 북한은 75억 불밖에 안 됩니다. 4년 뒤인 88년에는 540억 불(남한) 대 90억 불(북한)로 그 격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일성이 병고로 퇴진할 시에는 김정일로의 순조로운 이행이 가능하겠지만, 테러 등의 사망 시에는 북한 내에서도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인 만큼 위기관리 기구를 설치할 방침입니다.”
안기부의 김일성 시대 종식 이후와 우리의 대응방안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홍순영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입을 열었다.
〈홍순영 청와대 정무비서관〉-“김일성이 퇴진하면 비상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각하의 특별담화(시국선언문)를 발표할 것입니다. 저도 안기부 생각과 비슷한데 김일성이 병고로 퇴진할 시에는 김정일이 정권강화 조치에 주력할 가능성이 커 도발을 자제할 것 같은데, 사망 시에는 평화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화전양면 전법을 사용하여 도발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송한호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장이 홍 비서관의 말을 받았다.
〈송한호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장〉 -“정부 차원에서는 평화적 남북관계 개설, 평화추구 정책 불변을 골자로 한 온건론적 입장의 논평, 성명을 낼 것입니다. 이 논평, 성명에는 우리의 안보태세를 신뢰해도 된다는 대국민 홍보도 포함할 것입니다. 다만 언론매체를 통해서는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이 저지른 6·25 도발 등 역사적 죄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성 기사가 나가게 할 것입니다.
“김일성, 민족의 반역자인 것 홍보해야”
이경식 문공부 홍보조정실장의 의견은 송한호 통일원 국장과 달랐다. 온건론적인 입장표명보다는 김정일의 잔인, 포악성을 폭로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경식 문공부 홍보조정실장〉
“김일성의 죽음은 건국 이후 최대의 홍보 기회입니다. 홍보를 잘하면 범국민적 승공(勝共)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남도발 폭로 규탄(북한국민탄압 등 반민족적 행위 포함)을 해야 하며 북한 공산집단의 본질은 불변한 만큼 김정일의 잔인, 포악성을 알려야 합니다. 김일성이 병고로 퇴진할 시에는 평화적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평화공세를 전개할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전략적으로 역이용해야 합니다. 공세적인 홍보를 펼 것입니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경우 김일성이 민족의 반역자였다는 사실을 홍보할 것입니다. 모택동 사망 시 자유중국의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침묵했지만, 나중에는 통일의 방해자, 반민족주의자라는 평이 나왔습니다.”
권동만 외무부 정보문화국장도 비슷한 견해를 내놨다.
〈권동만 외무부 정보문화국장〉
“권력승계 시 세습왕조를 규탄하는 대북성명을 발표해야 합니다. ▲김일성의 역사조작을 통한 가계 우상화 ▲공산주의 사회 최초의 세습왕조 구축 ▲김정일의 포악성을 집중폭로 및 인권유린 등을 대북성명에 포함해야 합니다. 외무부는 북한의 대남도발을 막기 위해 주한미군에 경계태세 강화를 요청하고, 주요 우방 주재공관(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핀란드·호주 등)에 북괴권력 내부동향 파악을 지시할 방침입니다.”
홍세기 내무부 치안본부 제2부장은 “유언비어 막는 대국민 계도와 주민신고 체제를 강화하는 등의 후방방위에 신경 쓰겠다”며 이같이 이야기했다.
〈홍세기 내무부 치안본부 제2부장〉
-“김일성 퇴진으로 권력을 잡은 김정일은 권위 과시를 위한 모험을 자행할 가능성이 큽니다. 소련으로부터 공격형 무기 도입을 하고, 88올림픽을 방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경우 대공활동을 강화해야 합니다. 대공 위해 요소를 특별관리하고, 해외여행자에 대한 보안교육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신고체제 강화는 물론 불순분자 우회침투를 대비하기 위해 경찰 작전능력을 제고해야 합니다. 동시에 내륙 작전훈련을 강화, 동서 어로를 보호하고 피랍을 방지해야 합니다. 이 밖에 요인경호, 폭발물 유출방지, 방호시설물 설치 등 주요시설 경계를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원용호 국방부 정보본부차장은 “부분전, 전면전 모두 대비할 것이며, 80년대 대남 경쟁에서 완전히 패한 김정일이 86년 아시안, 88년 서울올림픽 등 우리의 국제행사를 파탄시키고자 충격적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이를 위한 대처방안을 확실히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정탁 국방부 정훈국장은 군인 교육은 정부방침에 따를 것이며 전투 대세 방비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랑군사건 들춰내면 불리할 것”
▲김일성이 생전 김정일과 함께 서해갑문 건설현장을 지도하는 모습.
이날 회의에서는 ‘랑군’ 사건이 남북회담의 장애요소가 될 것이란 이야기도 오갔다. 랑군 사건은 1983년 버마(現 미얀마)의 수도 랑군(現 양곤)에서 일어난 아웅산 테러 사건을 뜻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테러였다. 당시 전 대통령은 5분 정도 행사장에 늦게 도착해 목숨을 건졌으나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안기부 6국장은 “랑군 문제 처리가 난제”라며 “전진적이고 의연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홍순영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남북회담에 장애요소가 될 것 같다. 들춰내면 불리하게 작용할 듯하다”고 했다. 권동만 외무부 정보문화국장은 “랑군 사건 1주기(1984년 10월 9일) 때 정부 대변인의 대북성명을 통한 대화 재개를 제의하겠지만, 북괴 측의 공식 시인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며 “김일성이 84년 5월 시아누크 방북 시 자신은 랑군 사건을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언급함으로써 랑군 사건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만큼 공식 시인을 거듭 주장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아국의 대화 자세에 부정적 인식을 심을 수 있다”고 했다.
김일성 사후대책 보고서
외무부는 이날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취합, A4 용지 8장 분량의 〈김일성 사후 대책〉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서 내용 중 주요 부분만 발췌해 소개한다.
김일성 사후 대책
①대(對)북한 경계태세 강화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한 아국군의 경계태세 강화 및 주한미군 경계태세 강화 요청.
-미·일 주요 우방국들과의 긴밀한 안보협조 체제 유지(한·미 상호방위조약 이행 재확인, 미·일 정부 및 의회 지도층과의 접촉 교섭).
-미·일로 하여금 소련 및 중공이 북한에 대해 전쟁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교섭.
②김정일 내부 권력변동 추이 관찰 및 신중 대처
-전 재외공관을 통한 대북한 정보수집 활동 강화.
-중립국에서의 북한 공관원 활동 파악.
-평양 상주공관을 가진 중립국과 군사정전위 중립국 감시위원단에 북한 내부상황 파악 요청.
③김정일 정권의 비(非)정통성에 대한 은밀한 홍보활동 전개
-간접적인 방법으로 서방권은 물론 공산권 사회에서도 김정일 권력세습을 인정치 않도록 하는 분위기 조성.
-김정일은 김일성 왕조의 연장선상에서 김일성의 권력을 개인적으로 세습하여 최고권력을 장악한 것이며 북한 대중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님을 강조.
-김정일 정권은 반민족적, 반민주적 정권이라는 점에서 김일성의 경우와 전혀 다를 바 없음을 설명.
-서방국가는 물론 비동맹 및 중립국 국가들의 정부관계자들에게 상기 내용의 발언 유도.
-주요 외신(AP·AFT·UPI·REUTER 등)의 김정일 정권 비난 기사 게재 노력.
④대(對)동구권 관계개선 노력 강화
-실질적 대동구권 관계개선 적극 추진(직접교역, 국내투자 허용 및 현지상사 설립, 동구권 상사 국내 진출 허용)〉
시나리오별 대북성명
▲1985년 11월 13일 새벽 전두환 대통령이 중서부전선에 있는 육군부대를 예고없이 찾아 부대장으로부터 최근 북한군의 동향과 이에 따른 대비태세를 보고받고 장병들을 격려하는 모습.
보고서에는 시나리오별 대북성명도 담겼다. 김정일 권력승계가 이뤄질 시 문공부 장관이 발표할 대북성명을 김일성 생존 시와 사망 시 두 경우로 나눠 마련한 것이다.
김일성 생존 시 성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 정권은 해방 후 지금까지 김일성의 신격화 및 김일성 부모 우상화 작업 등을 통하여 김일성 일가의 가계를 조작함으로써 신성한 민족의 항일투쟁사 등의 민족역사를 날조해 왔다. 더구나 북한은 최근 김정일 권력승계로 공산주의 사회에서조차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습 왕조를 구축하였는바, 이는 북한 백성의 뜻을 외면한 반민족적, 비합법적 행위이다. 김정일은 지난 83년 10월에 있었던 랑군 테러 사건 등의 무자비한 대남도발을 주모해 왔던 인물로서 알려졌는바, 앞으로도 그가 그와 같이 무모한 도발을 해 온다면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될 것이며 우리도 또한 그의 반민족적인 행위를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을 경고한다. 김정일 정권은 하루빨리 민족 앞에 사죄하고 민주 한국을 건설하는 데 동참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김일성 사후 시 성명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염원인 남북한 통일을 외면하고 한반도 분단을 획책하여 이를 영구화시켰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야기시켰던 민족의 배반자 및 전쟁범죄자로서 김일성을 규탄한다. 조국강토의 절반을 땀 흘려 가꾸어 오늘의 성장을 이룩하면서 우리는 북쪽의 동포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해방 후 지금까지 2000만 북한 동포들에 대해 무자비한 집단탄압을 해 온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그릇된 자세를 하루속히 시정할 것을 촉구한다. 한반도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들의 인도적 고통을 해소하고 민족을 전쟁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 통일이 하루빨리 달성되어야 하는바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북한은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민족통일을 위한 대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전두환, 對美 유대 희생으로 하는 韓蘇 관계개선 금지 명령
두 성명은 비난 대상 및 내용, 강도(强度)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우선 김일성 생존 시 성명의 공격 대상은 사실상 김정일이다. 그리고 2대 세습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거론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던 랑군 문제와 관련한 이야기도 나온다. 반면 김일성 사망 시 타깃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이 6·25 전범(戰犯), 독재자, 북한 주민을 도탄에 빠트린 장본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비난의 강도는 김일성 생존 시보다 덜했다. 전두환 정부의 이런 결정은 김정일이 김일성 사망 시 위기상황 조성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무부는 〈김일성 사후 대책〉 보고서와는 별도로 1984년 8월 〈김일성 퇴진에 대비〉라는 제목의 문건도 마련했다.
◇북한 공관원 접촉, 회유 활동 강화 ◇전략문제연구소 및 저명 국제정치학자 또는 북한 문제 접촉, 김정일 후계체제 향방 추이 중점 탐색 ◇김일성 사망 시 김정일 대권승계 행사 관련 동향 파악, 생존 시에는 권력이양 동향 파악 ◇김정일 신정권에 대한 각국 반응 조사 ◇김일성 퇴진 직후 1개월간 김일성 집중 규탄 후 1~2개월간 대북비방 전면 금지 ◇김일성 퇴진 2~3개월 후 정부 차원의 대북성명을 통해 남북 대화 재개 강력 요청 등의 내용이 눈에 띄었다.
전 대통령은 외무부의 〈김일성 퇴진에 대비〉 문건을 검토하고 각계 정부 부처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했다.
〈○안보정세 보고는 청취에만 그치지 말고 이를 참고해 각 부처는 대비책을 작성, 시행토록 하라.
○본인은 김정일이 실질적 통치자이며, 김일성은 형식적 통치자라고 본다. 김정일 반대세력은 김일성 추종세력으로 생각하라.
○대륙세력은 침략적이나, 미국은 영구한 우방이 될 수 있다. 미국을 우리 안보의 주축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정부 각 부처가 총동원하여 대미 유대 강화에 노력하라.
○일본은 한일 관계가 그들에게 불리하면 북한을 카드로 이용하는 기회주의적 정책을 써 왔다. 때문에 우리가 일본을 진정한 우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도 안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이것은 본인의 가장 중요한 방일 목적이기도 했다.
○대미 유대를 희생으로 하는 한소 관계 개선은 절대 금물이다. 소련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만,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다.〉
동구권 정보로 김일성 조기퇴진설 기정사실화했지만…
정부는 김일성이 방문했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외무성 고위 관리가 일본 외무성 고위직에 말한 정보를 근거로 김일성의 조기퇴진을 기정사실화하고, 1984년 6월 말부터 9월 말까지 3개월간 대비책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1984년 10월 4일 미국 국무부 관계자가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에게 “최근 일련의 동향으로 볼 때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일반적 평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며 “외교 문제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강력한 권한을 계속 행사하겠다는 조짐도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미국 국무부 관계자는 그 근거로 김정일이 주 평양 소련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국제 문제를 취급하지 않은 점과 이시바시 마사시 일본 사회당 위원장이 김정일을 면담하지 못한 것을 꼽았다.
이후 잠잠해졌던 김일성 조기 퇴임설은 1년 뒤인 1986년 11월 17일 ‘김일성 사망설’이 돌면서 다시금 불거졌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김일성 사망설’이 해프닝으로 끝이 났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94년까지 생존했고, 사망 전까지 김정일로의 공식적 정권이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일성 사망 직후 정권을 이어받은 김정일은 죽을 때까지(2011년 12월 17일) 독재를 했다. 김정일로부터 독재권력을 세습한 아들 김정은도 현재 할아버지,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다.
출처 | 월간조선 10월호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2016.05.23 전두환 작성 1급기밀..中, 日과 군사적 대결 ‘백두산 계획’은?
▲백두산 계획을 마련 중이었던 1984년 6월 3일 전두환 대통령이 8시간에 걸쳐 중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있는 육군부대를 차례로 시찰, 북한 군사동향과 대비태세를 보고받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전두환(全斗煥) 정부가 1984년 3월, 한반도 통일 이후 주변국과의 역학관계를 예견하고 군사적 대결을 상정한 국가급 군사전략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청와대는 이 문서를 국가기밀 1급으로 분류, 관계부처에 이관했다.
전두환 정부가 작성한 총합적 총력 국가전략(Comprehensive all-out grand strategy)의 명칭은 ‘백두산 계획’으로, 통일 이후 한민족의 생존전략을 담고 있다. 특히 만주와 이어도 일대에서 중국-일본과의 영토 분쟁 시 군사적 지원 방안까지 포함하고 있어 주목된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윤성민(尹誠敏) 국방부 장관과 이기백(李基百) 합참의장에게 “통일 이후 한국의 방위전략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합동참모본부(합참)는 1984년 3월 14일 합참 내에 ‘전략연구위원회’를 조직해 백두산 계획의 기획·입안에 착수했다.
이 기획에 참여한 예비역 A장군은 “백두산 계획은 통일 이후 한국의 국가전략과 군사전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판 슐리펜 계획’”이라고 증언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군 참모총장을 지낸 알프레드 슐리펜 장군이 프랑스와 러시아 두 강대국과의 동시결전에서 승리하려면 ‘선(先)프랑스, 후(後)러시아를 공격해야 한다’면서 기동전을 통한 승전 묘책(妙策)을 제시한 것으로, 백두산 계획이 그와 유사한 국가전략 문서라는 것이다.
이기백 합참의장의 지시에 따라 합참의 전략기획국 주도로 백두산 계획 입안 작업에 착수해 그해 11월 말 보고서를 완성했다. 전략연구위원회는 보고서를 작성, 이기백 합참의장 보고를 거쳐 1984년 12월 1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장세동(張世東) 비서실장은 30분 정도의 보고시간을 잡았다가 위원회가 “보고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 늘려달라”고 하자, 한 시간으로 연장했다. 보고를 받은 전 대통령은 크게 만족해하며 “잘 발전시켜 보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백두산 계획 작성한 육사11기생들
▲이기백 합참의장이 1983년 10월 31일 필리핀 클라크 미 공군기지에서 귀국, 국립묘지에서 아웅산묘소 암살폭발사건으로 순직한 외교사절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사진=조선일보
백두산 계획은 2030년 한반도 ‘통일 이후’의 국가전략을 담고 있는 문서다. 따라서 북한 정권을 제거하고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부대배치와 부대운용 등의 내용을 담은 군사전략 문서와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참고로 북한과의 대결을 상정한 한국군의 공세전략들은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공세전략을 처음 주장한 이는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金弘壹) 장군이다. 김 장군은 1949년 출간한 그의 저서 《국방개론》에서 한반도의 종심(縱深)이 좁아 만주에서 결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2년 육군본부 전쟁기획실은 1년간의 연구 끝에 한국 단독의 한반도 전역에서의 독자적인 방어와 반격계획인 ‘태극72계획’을 마련했고, 이후 이 계획은 미국의 눈을 피해 ‘무궁화회의’로 명명한 비밀회의에서 한국군의 독자적 군사력 운용계획으로 확립했다. 이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1974년 국방부는 제1차 전력증강계획(율곡 계획)을 수립했다.
한국군이 독자적 군사전략을 확립함에 따라 7사단이 철군하면서 설립한 한미 제1군단의 홀링스워드(Hollingsworth) 사령관은 수도 서울의 안보 취약성 때문에 보다 강력한 화력의 집중으로 공자(攻者)의 전투력을 조속히 고갈시켜 전국(戰局)의 전환점을 일주일 이내에 마련하는 공세전략을 수립했다.
1977년 후반 군은 육본에 전력증강연구위원회(80위원회)를 창설해 이병형(李秉衡) 중장 주관으로 1980년대 육군발전계획을 마련했다. 이 계획은 주한미군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자주적 억제력을 갖추기 위한 장기전략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군사전략은 1980년대 접어들면서 공세적 전략에서 소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1980년대 초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정통성 측면에서 심각한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대미관계 개선을 통해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 때마침 신보수주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미 레이건 행정부의 실용주의 노선과 박자가 맞아 불편했던 한미관계를 일소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독자적인 억제전략을 구사하는 적극적 자주국방을 추진한 반면, 전두환 정부는 보다 안정된 한미관계의 유지를 위해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대북전략은 한미연합 억제전략하 ‘작계 5027’의 울타리에서 추진했다.
그러나 예비역 소장 A씨는 “전두환, 이기백 등 육사11기생들이 대북전략은 한미연합 억제전력에 의존했지만, 안정된 한미관계를 토대로 ‘통일 이후’의 국가전략을 비밀리에 마련했다는 사실은 평가할 만하다”면서 “지휘부의 반대로 백두산 계획에 대북 통일전략까지는 포함시키지 못했지만, 만약 대북 통일전략까지 포함했더라면 완벽한 문서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80페이지에 달하는 전략문서
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백두산 계획은 한민족 생존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한다. 위원회를 이끌었던 예비역 B모 대령은 “통일 한국이 당면할 국제적 상황, 군사적 대응에 대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그는 “전략계획 프로젝트에 ‘백두산’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남북관계를 떠나 고토(古土)의 회복을 암시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엄연히 살아숨쉬는 국가기밀 문서의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작전명령 시트의 제1항이 상황설정인 것처럼, 백두산 플랜 그림을 그릴 때도 그와 같은 상황설정을 담았다”고 했다. 백두산 계획에는 한반도 통일 직후 육상으로는 만주 지역의 고토 회복, 해양으로는 이어도와 7광구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았다.
대륙붕 한일공동개발구역(7광구)도 2030년 무렵 한중일 간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이 해역의 석유와 가스 매장량은 흑해유전과 맞먹는 72억t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과 일본이 이 구역을 공동개발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7광구가 지리적으로는 일본에 더 가깝지만 당시 대륙붕 연장론이 우세했던 국제정세에 입각해 1970년 5월 한국이 먼저 7광구를 개발해 영유권 선포를 했으나, 일본의 반대에 부딪혀 1974년 한일대륙붕 협정을 맺었다. 협정에 따르면, 어느 한쪽이라도 자원탐사 및 채취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개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비역 B모 대령은 “2009년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UN CLCS)에서 영토분쟁 해결을 위한 기준안을 마련하기 위해 관련 51개국에 관할권을 주장하는 보고서 제출을 의뢰했으나, 일본과 중국은 각각 수백 쪽의 대륙붕 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한 반면, 우리는 100여 쪽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어 놓고도 8쪽의 예비보고서만 제출했다”면서 “2028년 50년 기한의 한일대륙붕협정이 만료되기 전까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국제해양법에 따라 7광구 대부분이 일본 측에 넘어간다”고 했다.
그는 “백두산 계획에는 7광구를 비롯해 해양영토와 자원분쟁을 뒷받침할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을 담았다”면서 “대륙으로 해양으로 커다란 그림을 그려놓으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무기체계가 필요한지 즉각 알게 된다”고 했다.
홍산문화와 균형자론, 고슴도치 전략
▲미국 해군의 핵추진 잠수함 ‘오하이오함’(SSGN-726)이 2012년 10월 24일 해군작전사령부 부산기지 부두에 입항하고 있다. 오하이오함은 1600㎞ 떨어진 목표물을 정확히 요격할 수 있는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154기와 MK48 중어뢰, 각종 특수전 장비 등을 갖추고 있다. 백두산 계획에 적시된 고슴도치 전략에는 원자력추진 잠수함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뉴시스
백두산 계획의 서론은 ‘5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국가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쳤는데 그 요결(要訣)이 무엇인가’라는 다소 철학적 내용을 담았다고 한다. 예비역 B모 대령은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 홍산문화(紅山文化)를 언급해 고구려와 발해를 연결시켰다”며 “홍산문화를 언급했다는 것은 만주가 고구려 강토(疆土)였다는 강력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현재의 그 지역 국가들과 연합전선을 펴 중국을 압박하자는 논리”라고 했다.
홍산문화는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의 츠펑시(赤峰市)의 훙산(紅山)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신석기 유적지로, 홍산문화를 창조한 주역은 동이족으로 알려졌다. 예비역 L모 대령은 “영국의 헨리8세와 프랑스의 루이14세가 통치 지역의 지도를 보며 제국주의의 꿈이 시작됐다”며 “만일 광개토대왕이 아들 장수왕에게 강역(疆域) 지도를 그리게 했다면 만주 지역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 계획에는 균형자론(均衡者論)도 등장한다. 균형자론은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지역에서의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 우리나라의 외교안보 비전이다. 20년 전 작성한 백두산 계획에 이미 통일 이후의 전략으로 균형자론을 내세웠다고 한다.
예비역 C모 소장은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가 엄청난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라면 미국이라는 동맹의 끈 하나로는 통일 한국이 지탱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면서 “미국 위주의 일방적 동맹 관계에서 탈피해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과 러시아와도 관계개선을 모색해 동북아 지역에서 균형자적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예비역 C모 소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중 균형자론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균형자론이 국제정치학에 등장하는 용어이긴 하지만 ‘혹시 백두산 계획을 열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면서 “노태우 정부 시절, 백두산 계획의 균형자론은 중국·소련과의 수교 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 계획은 한반도 방어의 범위를 1000km로 상정하고, 공세적 적극방어전략, 즉응전략을 담았다고 한다. 검도에서 다가오는 적을 선제적으로 한칼에 쓰러뜨리는 것처럼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 전략도 포함시켰다.
예비역 A장군은 “1990년대 이후 세간에 알려진 고슴도치 전략(Porcupine strategy)은 이미 백두산 계획에 들어 있었다”며 “고슴도치 전략은 강대국이 영향 능력을 발휘해 얻어낼 수 있는 이득보다 더 큰 손실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안전하다는 전략”이라고 했다. 이 전략의 수행을 위해 약소국은 신뢰도 높은 반격 능력을 위해 대량파괴무기가 필수적이다. 핵무기 보유, 원자력 추진 잠수함, 레이저 유도무기 등이 고슴도치 전략의 핵심적 수단들이다.
“백두산 계획 확대발전시켜야”
백두산 계획은 한국군의 5개년 국방계획을 뛰어넘는 훨씬 장기플랜이었다. 예비역 A장군은 “당시 군비를 담당하던 장성들이 옛날식 중기계획이나 얘기할 때 합참의 영관급 엘리트 장교들은 50년 이후의 원대한 통일 이후 전략을 그리고 있었다”며 “백두산 계획이란 장기 국가군사전략이란 큰 그림을 그려주면 군비 담당자들이 5개년 계획 등 하부 계획을 수립할 때 예산 낭비를 막고 요긴한 지침서로 활용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백두산 계획 문서에 사인한 후, 32부를 발행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국방부, 각 군 본부, 군사령부 등 관계기관에 각 1부씩을 배포해 보관토록 했다. 현재 국방부가 보유한 국가기밀 1급은 전력증강연구위원회(80위원회)의 율곡 계획 문건과 백두산 계획 문건 등 2개로 알려졌다.
예비역 A장군은 “백두산 계획은 군사전략이라기보다 철학이자 국방정책”이라며 “총합적 총력 국가전략”이라고 했다. 예비역 B모 대령은 ‘국가기밀의 존재사실을 왜 공개하는가’라는 물음에 “안보 관계자들에게 우리 군도 동북아 정세를 조망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 문서를 더욱 확대·발전시키라는 취지”라며 “백두산 계획의 큰 그림을 합참의 해당 부서가 오늘의 군사력으로 적용시켜 나간다면 동북아에서 우리의 군사적 위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글 | 오동룡 기자 뤌간조선
■2016.11.05 ‘로버트 김 사건’으로 군복 벗은 백동일(白東一) 전 주미 해군무관
⊙ 해사 27기 임관 후 국내 최초로 미국의 ‘혼합공기(헬륨+산소) 심해잠수과정’ 이수
⊙ 1994년 9월 제네바 미·북 합의 직전 해군무관 파견… 1995년 11월 로버트 김 처음 만나
⊙ 로버트 김, ‘K파일’ 만들어 백 대령에게 전달… ‘북한의 내부소요 진압용 무기구입’첩보도 포함
⊙ 미국, 북 상어급 잠수함 침투 정보를 미·북 관계 악화 우려해 사전에 알고도 쉬쉬했나?
⊙ 이스라엘, 거물 스파이 조너선 폴라드 구명 위해 지도자들 총력전… 김영삼 정부는 외면
지난 9월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샹제리제센터 컨벤션홀.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기념회는 200명이 넘는 재미동포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76)의 가족과 후원자들로 붐볐다. 스파이 혐의로 옥살이를 했던 김씨가 2005년 10월 출소부터 10년가량 후원자에게 쓴 편지 425통 가운데 80여 통을 추려 책으로 펴낸 것이다.
김씨가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있다 보니 우리말도 어눌해지고 컴퓨터도 잘 다룰 줄 몰랐는데, 많은 분의 도움으로 고국에 ‘러브레터’를 매주 보낼 수 있었고, 책으로까지 선보이게 됐다”고 인사말을 할 때, 건너편 테이블의 한 노신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로버트 김을 응시하고 있었다.
행사를 마치자 로버트 김은 노신사에게 다가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노신사는 ‘로버트 김 사건’의 빌미가 됐던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 백동일(白東一·68)씨였다. 로버트 김의 부인 장명희(張明熙)씨, 동생인 김성곤(金星坤) 전 국회의원(한민족평화통일연대 이사장), ‘로버트 김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인 박성현(朴成鉉) 청해엔지니어링 대표 등이 이들의 재회를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미국 비자신청 두 차례나 거부당해”
▲지난 9월 21일 강남구 샹제리제센터에서 열린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기념회에서 저자 로버트 김(왼쪽 둘째)과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 백동일씨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김씨의 부인 장명희(왼쪽)씨가 지켜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9월 22일, 백동일 예비역 대령(해군 정보여단장 역임)을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사건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의 해군무관이었다. 1996년 9월 24일 로버트 김이 주미 대사관 국군의 날 리셉션장에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당한 지 20주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1978년 미국 해군정보국(ONI)에 들어가 그곳에서 19년간 손꼽히는 베테랑 정보분석가로 일하던 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북한 관련 정보를 넘겨준 혐의로 체포돼 징역 9년에 보호관찰 3년형을 받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백동일 대령의 운명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나가던 해군의 정보장교 백 대령은 졸지에 미국의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됐다. 백 대령은 외교관의 면책특권으로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군과 관련한 모든 업무에서 백 대령을 배제시키라고 한국 국방부에 요구했다.
― 로버트 김 사건이 터지면서 곧바로 전역하셨나요.
“무관이 기피인물로 지목된다는 것은 진급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와 관련된 보직은 일절 맡을 수 없습니다. 미 국방부는 주한 미군과 거의 접촉이 없는 기술정보부대장 보직까지도 문제로 삼았고, 그 바람에 국군정보사 해군정보여단 내 공작기지(UDU) 부대장으로 갔습니다. 사건 후 1999년 김동진(金東鎭) 국방부장관님과 유삼남(柳三男) 해군참모총장님의 배려로 대령 계급장을 달고 해군준장 보직인 국군정보사 해군정보여단장(910여단장)을 지냈습니다. 2001년 1월 28년간의 군 생활을 접고 회한을 품은 채 군복을 벗었습니다.”
현재 백동일 대령은 20년째 미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심지어 미 교통안전국(TSA)이 ‘주요 경계대상 인물’로 등재해 놓는 바람에 국내외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공항관리의 허락을 받아야 탑승이 가능했다. 백 대령은 “미국에서 치러진 큰아들의 결혼식도, 둘째 아들의 졸업식도 참석할 수 없는 아버지가 돼 버렸다”며 “미국 비자를 두 차례에 걸쳐 신청했으나 모두 거부당하는 바람에 미국에 거주하는 큰아들 가족과 캐나다 밴쿠버에서 만나고 있다”고 했다.
― 로버트 김의 구속으로 인해 심적 고통의 나날을 보내셨군요. 로버트 김 구명활동에도 참여하셨습니까.
“수감 직후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을 때, 로버트 김은 ‘당신과 나는 하늘이 점지해 준 형제’라고 카드를 보내 오히려 저를 위로했어요. 저도 사건의 당사자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달려가 재판에서 그를 변론하려고도 했으나, 국방부에서 사건의 확산을 우려해 미국행을 막았습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미국과 정상회담 때 로버트 김 조기석방과 보호관찰형 면제를 요청해 줄 것을 ‘로버트 김 석방위원회’를 조직해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UDU 지옥훈련 이수하고 해군 UDT에 EOD 창설
▲1980년 1월 미국 ‘혼합공기(헬륨+산소) 잠수과정’ 유학시절, 약 150kg에 달하는 심해잠수 장비를 착용 중인 백동일 소령. 사진=백동일 단장
1948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한 백동일 대령은 1968년 해군사관학교에 27기로 입학했다. 1973년 해사를 졸업한 백동일은 제독을 꿈꾸며 함정병과를 선택했다. 함정병과는 육군의 보병, 공군의 조종병과처럼 초급 장교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는 상륙함(LST)과 초계함(PCE)의 포술장과 작전관을 거쳐, 해군첩보부대의 특수전정규과정(UDU 기초과정)을 마치고 평소 동경하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76년 7월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 폭발물처리과정(EOD)을 이수하고 귀국한 그는 1977년 해군 최초의 해군특수전여단(UDT/SEAL)으로 발령받아 폭발물처리반(EOD) 학교를 창설했다. 그는 내친김에 1979년부터 2년간 ‘지옥훈련코스’라는 심해잠수과정(Diving & Salvage HeO2 Officer’s Course)에 도전한다. 그는 수도 워싱턴과 버지니아주 훈련장에서 쌀 두 가마 무게인 150kg의 혼합공기(헬륨+산소) 다이빙키트를 착용하고 국내 최초로 100m 심해잠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0년 뒤늦게 정보로 병과를 옮긴 그는 해군 정보부대의 UDU와 관련한 부대에서 활동했다. 1988년 국방부 국방정보본부, 1990년에는 해군본부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평가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988년 국방정보본부의 러시아 주무장교로 3년간 근무하다 1992년 대령 계급장을 달고 버지니아주 미 국방정보본부 연합전략정보과정(CSITP)을 이수하러 떠난다. 본격적인 정보전문가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1994년 그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에 해군무관으로 선발돼 파견된다.
백 대령은 “국방정보본부에서는 소련을 담당했던 백동일 대령을 러시아 무관 후보로 검토했으나 김홍렬(金弘烈) 해군총장의 추천으로 미국 무관에 지원해 미국 무관요원으로 선발됐다”면서 “당시 미국 무관은 소속군인 해군에서 추천을 받아야 했고, 각 군 총장의 의중을 미국에 잘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실력뿐만 아니라 총장의 신임을 얻어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고 했다.
해군무관의 첫 임무
▲1994년 10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핵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는 로버트 갈루치 대표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오른쪽). 미국은 북핵 폐기 조건으로 중유 50만t 그리고 경수로 제공, 미·북관계 개선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사진=조선일보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합의가 타결되기 한 달 전, 9월 23일 백동일 대령은 주미 무관으로 파견됐다. 당시 박용옥(朴庸玉) 육군소장이 주미 국방무관(국방부차관 역임)으로 부임해 있었다. 백동일 대령은 무관의 기본임무인 첩보수집, 군사외교, 방산물자 수출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고 한다.
백 대령은 미국이 북한과의 합의를 위해 어떤 물밑 대화를 나눴는지, 1994년 김일성(金日成) 사망 직후 조문파동 이후 남북관계를 단절한 북한이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는 일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백 단장의 말이다.
“정보장교 눈에 미국은 첩보의 보고(寶庫)였습니다. 한국에선 한참을 기다려야 파악이 되는 태평양함대의 함정배치 상황, 7함대사령관 등의 교체 등 휴민트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돌아다녔습니다. 활동한 만큼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에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 한국군에 필요한 자료들을 열심히 획득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 국방부에서 매년 발행하는 《국방백서》는 무관들에게 5부만 배당되던 것을 50권씩이나 확보해 본부에 보냈습니다.”
백 대령은 적극적 활동 덕분에 미국 근무 2년 동안 연속으로 최우수 무관에 선발되기도 했다. 한미연례안보회의(SCM) 참석차 워싱턴을 방문한 김동진 국방부장관은 주미 대사관을 찾아 박용옥 국방무관에게 “백동일 대령이 누구냐”라며, “자료 잘 보고 있어, 열심히 해”라고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해 주기도 했다.
― 첫 임무는.
“1994년 10월에 부임하자 미·북 간 제네바협상이 막바지로 진행 중이었습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미·북 간 협의에서 한국이 배제된 것에 크게 상심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북핵을 저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한을 배제하고서라도 미·북 관계를 개선하려 했습니다. 미·북 간 ‘밀월관계’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습니다. 기본적으로 제네바협상은 한국의 외교부, 미국의 국무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미 국방부에서 관련 정보를 얻어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무관들이 죽어났습니다. 훗날 국정원 최고수장에 올랐던 김모 참사관은 ‘백 무관, 운동도 하고 바깥 바람도 쐬 가며 하거래이 …’라고 했지요.”
‘K파일’로 만들어 우편으로 배달
▲1996년 9월 24일 미 알링턴국립묘지 내 포트 마이어(Fort Myer) 육군장교회관에서 열린 한국 국군의 날 리셉션 행사. 이날 오후 행사장에서 FBI가 로버트 김을 “당신 자동차가 접촉사고를 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슬며서 연행해 간 직후, 백동일 해군무관 부부가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백동일 단장
1995년 11월 28일 해군은 워싱턴DC에서 한미해군정보교류회의(IEC)를 개최했다. 백동일 대령과 로버트 김은 이 회의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주미 해군무관으로 나가 있던 백동일 대령은 회의 준비를 맡게 됐고, 미국 측이 통역 겸 안내장교를 미 해군성 정보국(ONI)에 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로버트 김에게 맡기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했다. 미군 측이 호의를 베푼 것이다.
― 로버트 김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참 선한 인상이셨어요. 19년 동안 한국 군인 구경도 못하다 갑자기 만나니 애국심이 발동했던 것 같아요. 로버트 김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부친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공화당 의원을 지낸 김상영(金尙榮) 선생(로버트 김 석방 5개월 전인 2004년 2월 90세로 작고)이었어요. 고향집엔 부친이 가훈으로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써 놓았다고 했습니다.”
― 처음 만나 나눈 대화를 기억하세요?
“‘출처개척’ 차원에서 로버트 김에게 ‘백색요원’으로 첩보수집에 한계를 토로하며 기밀이 아닌 사항에 한해 북한군 관련 첩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국에서 사귀었던 주한 미군들이나 국방부에 근무하는 한국계 미국인들 모두 내 소관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던 상황이었거든요. 한국의 열악한 정보력을 알게 된 로버트 김은 기밀로 정해지지 않는 정보에 한해 협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로버트 김은 백동일 대령에게 비밀로 지정되지 않는 자료 중 한국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취합해 ‘K파일’로 만들어 우편으로 보내 왔다. 로버트 김에게 받은 정보는 70여 건으로, 일반적인 북한 동향도 있었지만 비중이 있는 내용도 30여 건에 달했다.
백 대령은 “주미 대사관이 파악한 김대중, 최형우(崔炯宇) 등 당시 한국의 차기대권 주자들의 성향에 대한 분석자료도 받았지만, 북한 군사 동향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본부에 보고하지 않고 세절(細切)해 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로버트 김이 전달한 정보가 전체적으로 미국 측 주장처럼 국가 안위와 직결될 정도로 비도(秘度)가 높은 내용은 아니었다”며 “스파이라면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우편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 북한주민과 북한군의 내부 소요 가능성도 로버트 김에게 타진했습니까.
“민감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북한의 내부 소요 진압용 무기 구매 첩보였습니다. A4 2장짜리 문건으로, 미국 첩보수집부서에서 무기 중개상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죠. 북한이 내부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권총과 수류탄을 구매하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국방부의 ‘북한붕괴 시나리오’를 만들 때 큰 기여를 했습니다.”
― 엄청난 정보들이 올라오니까 국방부는 깜짝 놀랐겠습니다.
“신문기자로 말하면 특종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보본부 담당자들은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국방부장관이 브이아이피(VIP)께 들고 가는 정보라는 뜻이죠. ‘추가자료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아 밤낮없이 뛰느라 무좀까지 생길 지경이었습니다.”
독이 든 사과
― 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한 미국의 정보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당시 북한은 잠수함을 동해로 자주 보내 남한의 정세를 살폈고, 심지어 제주도 근해까지 잠수함을 보내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북한의 이 같은 동향은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들임에도 우리의 감시수단 부족으로 ‘눈뜬장님’이었습니다. 미국은 무기를 수송한 북한 선박들을 주목해 추적했죠. 우리의 대잠초계기가 남포항에서 빠져나온 북한 선박 A를 서해상에서 촬영하면서 컨택은 하지만, 이후 행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한미해군정보회의 때, 그들은 5분도 안 걸려 북한 선박 A의 경유지와 함께 그 선박이 파키스탄 항구에서 물품을 하역 중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줘요. 한국군 정보장교들은 미군의 정보력에 혀를 내두르죠.”
기자가 “평소 FBI가 로버트 김과 만나는 것을 감시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느냐”고 하자, 백 대령은 “오랜 기간 전화를 감청하고 우편물을 검열해 왔다는 것을 사건이 터진 후에야 알았다”고 했다. 백 대령은 “로버트 김 재판과정에서 검사가 ‘한국의 백동일 무관은 주한 미군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장교(inquisitive officer)였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 미국 도착 직후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한 것으로 본다”며 “결국 미국이 건넨 ‘독이 든 사과(poisoned apple)’를 베어 물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미국 FBI의 백 대령 감시는 조직적이었다. 미 해군은 1995년 C4I(지휘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관련 장비를 한국에 팔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백 대령은 로버트 김에게 미국의 C4I 상황을 문의했고, 로버트 김에게 한미 해군 대 해군회의(ROK-US Navy to Navy Talks)에 참석한 해군 대표단 가운데 해군대령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1996년 3월 30일 백 대령은 워싱턴 셰러턴호텔에서 그 해군 대령을 소개받았고, “이 시스템이 한국 실정에 잘 맞지 않으니 심사숙고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백 대령의 말이다.
“로버트 김과 유선상으로 한국 해군대령이 투숙하고 있는 셰러턴호텔 객실 번호를 이야기해 주며, 랑데부 시간을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 FBI가 이것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미간 회의를 마치고 복귀 시 호텔 측으로부터 ‘숙소에 폭발물 설치가 의심되니 묵고 있는 투숙객 전원을 소개(疏開)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때 FBI가 한국대령이 묵고 있는 객실에 CCTV를 설치했을 겁니다. 재판과정에서 객실 내 대화내용이 공개됐으니까요.”
로버트 김이 전한 마지막 정보
▲1996년 9월 18일 무장간첩 25명을 싣고 왔던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안에 좌초된 채 떠있다. 사진=조선일보
1996년 9월 18일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으로 북한의 상어급 소형 잠수함이 침투해 좌초된 초대형 도발사건이 터졌다. 대대적인 대간첩작전이 펼쳐졌고, 우리 군은 교전 끝에 간첩 13명을 사살했고, 11명은 자결한 것으로 추정(1명 생포)됐다. 우리 군인과 민간인도 17명이 숨졌다.
1996년 9월 19일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두 당사자(two parties)가 추가적 도발을 말아 주기를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11월 19일 《뉴욕타임스》는 “국무부 직원들이 한반도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한국 정부라고 생각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미 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주미 한국대사를 소환하는 등 격노했다.
백동일 대령도 미국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사흘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미 국방부의 정보본부(DIA)와 미 해군성의 정보 참모부(I-2) 등 관계관들을 찾아가 자료를 요청했다. 로버트 김에게도 이와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 당시 우리 정부가 북한 잠수함에 대해 파악한 내용은.
“국방부는 원산 송전반도에 있는 북한 해군 잠수함 기지에서 두 척의 상어급 잠수함이 출동했으나, 한 척만 송전반도로 돌아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나머지 한 척은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과 연루돼 있음을 파악했고, 미국의 정보력이라면 잠수함의 이동경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주미 대사관에 파악 지시를 했던 겁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북한 잠수함이 한국 영해로 들어온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정보를 한국 정부에 통보해 주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 거죠.”
― 로버트 김이 그걸 확인해 주었나요.
“결론적으로,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은 확인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어요. 로버트 김은 ‘미국은 북한 잠수함을 거의 3시간 간격으로 이동경로를 관측하고 있었다. 한국의 영해로 들어온 북한 잠수함은 두 척이었다. 그중 한 척이 동해안에 좌초한 것이고, 다른 한 척은 남해안 부근에 행적이 나타났다. 동해 연안을 따라 제주도 남단으로 행적이 이어져 있었다’고 뒤에 밝힌 바 있습니다. 그게 로버트 김의 마지막 정보제공이었고, 6일 후 간첩 혐의(espionage)를 받고 리셉션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한국에 정보를 안 준 까닭
▲로버트 김(오른쪽)이 2004년 6월 1일 오전 미국 버지니아주 애시번 소재 자택으로 귀가, 부인 장명희씨와 식사를 마친 뒤 나란히 앉아 있다. 사진=조선일보
― 로버트 김이 백 대령님께 컴퓨터로 접하는 정보마다 기밀등급과 제공표시가 있었다고 했다면서요.
“한국으로 제공하는 첩보는 ‘Released: R.O.K(한국군 제공, ‘REROK, 리락’이라 부름)’라고 표시하고, 제공하지 않는 정보는 ‘NOFORN(외국전파금지, No Foreign Dissemination Allowed, ‘노폰’이라 부름)’이라는 자막이 표시됩니다. 당시 높은 레벨의 첩보는 한국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반도 관련 정보조차 영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 다른 우방국에는 전달했지만, 당사자인 한국에는 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북한 관련 민감한 정보는 오히려 한국 측에 전달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보 전문가들은 소위 ‘정보출처 보호’라고 말합니다. 북한정보가 남한에 전달돼 유출되기라도 하면, 북한은 미군을 정보출처로 파악해 곧바로 자신들의 정보출처를 차단합니다. 미국은 이것을 우려하는 것이죠. 제가 로버트 김에게 받아 국방부에 보고한 북한주민의 내부 소요 가능성 첩보도 결국 통일부에서 언론에 유출시키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 미국과는 혈맹인데도, 정보를 제한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무관 생활을 해 보니, 한국은 미국을 동맹이니 혈맹이니 하면서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지구촌을 대상으로 대전략(grand strategy)을 구사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때그때 국익(國益)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주미 한국대사관 국방무관대리로 근무 중이던 백동일 무관(가운데)이 1996년 6월 25일 워싱턴의 한국전쟁기념비(Korean War Memorial)를 찾아 6·25전쟁 참전기념 행사에서 박건우 주미대사(왼쪽)와 함께 헌화하고 있다. 사진=백동일 단장
― 미국 정보 관계자들의 마인드는 어떻습니까.
“미국은 정보나 첩보를 ‘목숨’처럼 여기고, 우리는 ‘가십거리’로 여깁니다. 미국은 엄청난 국방비를 쏟아부어 가며 취득한 정보자산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려 합니다. 첩보(인포메이션)를 수집·융합해 정보(인텔리전스)라는 ‘모범답안’을 만드는 일이 너무나 힘든 과정이거든요. 그렇게 애써 만든 정보를 한국 측에 주면 관계기관 종사자들이 입이 근질거린 나머지 출처 보호를 하지 않고 떠들고 다니는 판에 미군들이 골머리를 앓는 겁니다. 국가안보와 국익차원에서 볼 때, 보안의식이 결여된 자격 미달들입니다.”
― 로버트 김이 왜 우편으로 기밀을 전달했을까요.
“상호 비밀로 분류된 내용은 수수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기에 편리한 방법을 취한 것이 우편교환이었지만, 우리 식으로 적당히 생각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요. 그리고 만약 흑색활동을 전개했더라면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해서는 안 될 일이고, 더욱이 미국이라는 완벽한 방첩시스템을 갖춘 국가에서 비밀리에 공작차원의 활동을 시도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리이고 위험한 처신이지요. 한미 간의 관계를 봐서라도 말이지요. 하여간 첩보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비밀로 분류됐던 자료를 신중하게 다루도록 유도하지 못했던 저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 로버트 김이 왜 주미 무관에게 선선히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십니까.
“로버트 김은 비록 국적은 미국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한 뼛속까지 한국인인 사람입니다. 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 미국 주류사회로 편입하는 것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한국을 그리워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스파이를 M(Money), I(Ideology), C(Compromise), E(Ego) 등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로버트 김이나 이스라엘의 조너선 폴라드(Jonathan Pollard)는 이데올로기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조국에 대한 이념이 투철한 사람들이죠. 로버트 김 사건 이후 한국정부의 항의로 ‘노폰’과 ‘리락’이 사라진 것도 그나마 한미 정보교류에 긍정적 효과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향후 북한이 2020년 핵보유국 위치를 확고하게 하면, 미·북 간 제네바합의 때처럼 한국을 배제하고 양자간 대화를 할 가능성이 높겠군요.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국익에는 우방이 따로 없습니다. 해군무관 시절, 버지니아 관사 옆에 패망한 베트남 국방무관 육군소장이 살았는데, 함께 조깅을 하면서 그가 ‘공산 적과 싸워 이기는 한국이 부럽다’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해 우리 머리 위로 치명적인 비대칭 무기가 날아다니는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북한에 쌀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현실에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조너선 폴라드의 경우
▲로버트 김이 근무했던 미 해군 정보국에서 장교로 재직 중 아랍 국가들의 군사 정보를 이스라엘에 넘긴 혐의로 1985년 미국 수사당국에 체포돼 종신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조너선 폴라드(60)가 가석방됐다. 그동안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오랜 석방 요구를 줄곧 거부해 온 미국이 미국과 이란 간의 핵 협정 타결로 인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냉각될 것을 우려해 오바마 정부가 회유 차원에서 내놓은 처방이란 견해가 나오고 있다.
― 로버트 김에게 향응이나 식사대접을 하진 않으셨나요.
“로버트 김은 한국의 첩보수집이 열악한 상황을 알고 아무런 대가 없이 기밀로 지정되지 않은 정보들을 수집해 보내주었습니다. 그분은 의식적으로 저와 식사나 골프를 하지 않았습니다. 체포 직전 식사를 한 번 하고, 골프를 한 번 친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돈은 1센트도 건넨 적이 없고요.”
― 1996년 10월 피터 긴스버그 변호사를 선임하고 검찰 측과 플리바겐(Plea Bargain)을 시작했는데, 협상이 이듬해 5월까지 끌었지요?
“당시 로버트 김의 변호를 맡고 있던 변호사는 제게 넘긴 자료가 뉴질랜드나 호주 등 다른 우방국에 이미 공개된 자료라며, 정보를 유출시킨 것으로 볼 수는 있으나 간첩 혐의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연방법원에서 ‘간첩음모죄’로 9년형 징역에 3년의 보호관찰 선고를 받고, 펜실베이니아 알렌우드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된 겁니다.”
― 1999년 11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로 우리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했습니다만.
“한국 정부와 김영삼 대통령은 로버트 김이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미국 법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고요, 이후 우리 정부는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열심히 정보수집에 몰두한 죄(?)밖에 없는 저에게도 ‘개인적인 욕심으로 빚어진 일’이라며 ‘미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했으니, 모자를 벗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물 간첩 조너선 폴라드는 공교롭게도 로버트 김이 근무하던 미 해군정보국의 군무원으로 재직하던 기간, 스파이 혐의로 1985년 체포된 뒤 사형까지 거론됐다. 중동권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스파이 행위와 관련된 기밀문서 사본을 이스라엘 당국에 넘겨준 혐의였다. 그에게 사형선고까지 거론되자 이스라엘 국민들은 물론 역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폴라드의 석방을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했다.
이스라엘 정부의 조직적 압박으로 폴라드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노스캐롤라이나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했다. 2014년 3월 벤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폴라드 석방을 위해서라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혔다. 덕분에 폴라드는 2015년 11월 27일 30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백동일 대령은 “로버트 김 사건으로 로버트 김과 백동일, 두 사람의 청춘은 송두리째 날아갔다”면서 “국가가 국가생명과 국익을 위해 희생한 사람의 공적조차도 ‘개인적 욕심’으로 치부해 외면한다면, 누가 사명감과 명예심을 갖고 국가를 위해 일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월간조선 2016년 11월호 / 글=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2017.06.01 연천 530GP 피격 사건 미스터리… 검찰 재조사로 풀리나
최초 “북한 측 미상(未詳) 화기 9발 피격, 5명 사망” 보고… 1시간도 안 돼 ‘내부 총기난사’로
⊙ 유족, 부검 군의관 검찰 고발… 검찰, 3월 초부터 유족 등 관계자 불러 조사
⊙ 정동영 장관, 정상회담 조율 위해 방북… 리동수 북한군 하사 검거하며 차단 작전 실시
⊙ 최초 “북한 측 미상(未詳) 화기 9발 피격, 5명 사망” 보고… 1시간도 안 돼 ‘내부 총기난사’로
⊙ 김동민 일병이 범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자백뿐
⊙ 유족들, “대간첩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한 8명의 대한민국 아들들이 명예를 회복하길”
2005년 6월 19일 국군 장병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은, 일명 ‘김일병 사건’으로 불리는 ‘530GP 피격 사건’의 진실이 12년 만에 밝혀질까. 3월 30일 오전 10시경 기자는 서울중앙지검 516호에서 ‘530GP 피격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진술을 했다. 10년 전 피격 사건 생존자를 인터뷰했기 때문이었다.
올 3월 검찰은 12년 전 발생한 ‘김일병 사건’에 대해 전면 재수사에 착수했다. 2005년 6월 19일 새벽 연천의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경계초소(530GP) 내무반에서 발생했다는 ‘김일병 사건’은 김동민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 1발을 던지고 기관총 44발을 난사해 GP장 김종명 중위(ROTC 42기) 등 장병 8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혔다고 발표된 사건이다.
국방부는 “평소 선임병들에게 괴롭힘과 가혹행위를 당하던 김동민 일병이 근무를 나갔다가 수류탄과 실탄 등을 확보, 소초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세면장, 식당 등에서 총기를 난사해 장병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형이 확정된 김 일병은 국군교도소에 12년째 수감 중이다.
하지만 일부 유족과 연천 530GP 피격 사건 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대표 송영인 회장)는 “북한군의 소행을 남북관계를 위해 조작·은폐했다”며 수년간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했고, 이번에 시신을 검안했던 군의관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재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이들은 사망한 장병들의 상처가 수류탄 파편이나 소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사고 당시 최초 보고에는 ‘미상(未詳)의 화기 9발 피격’이라고 돼 있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유성호 대위가 ‘총상에 의한 삽입구는 거리에 상관없이 형태가 일정하며 탄환의 직경보다 작다’는 기존의 총기 법의학적 이론을 부정하고, 20~30mm 심지어 50~60mm 크기의 파편 상처도 K1 소총에 의한 총상의 삽입구로 허위 검안했다고 주장했다.
남북관계 경색 막으려는 조치?
만약 군 수사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북한군 침투조의 이동을 막기 위한 차단 작전 중 북측의 발포로 발발한 교전이었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왜’ 사건을 조작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 송영인 회장은 “2005년 6월 21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해 전력 지원, 쌀 지원,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등 굵직한 현안들을 논의했다”며 “전방 GP 교전이 알려지면 남북한 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뻔했고 정부와 군 당국이 이를 우려해 벌인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후 남북은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지원을 통해 ‘우호적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까지 성사시켰다”고 했다.
사건 당시 청와대에는 노무현 대통령, 김우식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이종석 NSC 사무차장, 이재정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정부는 이해찬 국무총리를 필두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 윤광웅 국방부 장관 등이 재임하고 있었다.
당시 군 수사기록과 상황 보고서, 부대일지, 장병 진술서, 530GP 병력 현황, 시체 검안서, 증거물 감정서 등을 입수해 유족들의 주장과 대조해 보면 의문점투성이다.
2005년 6월 19일 오전 2시30분경 경기도 연천군 28사단 81연대 530GP에서 ‘꽝’하는 폭음과 총성이 울렸다.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 “대응사격은 했는가” “상황을 보고해라” 등 전시 상태를 방불케 하는 무전이 오갔다.
GOP대대 상황병은 ‘미상 확인 적으로부터 9발 피격’이라는 급전을 날렸다. 81연대에는 북한군의 공격 시 발령하는 매트릭스가 발령됐다. 다른 부대 및 상급 부대에도 상황이 전파됐다. 연대 간부들도 모두 비상 소집됐다. 이 상황은 고속지령대(각급 부대 지휘관 간의 긴급통신망)를 통해 합동참모본부(합참)에까지 보고됐다. 이 부분까지는 문서로 확인된 ‘팩트’다.
차단 작전 중 적 포탄에 피격
▲2010년 6월 8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시민단체들과 유가족들이 ‘연천 530GP 피격 사건 진상규명 촉구 국민협의회’를 발족, 기자회견을 갖고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유가족들은 숨진 장병들의 시신 사진과 엑스레이 사진, 전역한 동료 장병들의 증언들을 모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2005년 6월 19일 530GP에는 육군 28사단 81연대 수색중대가 경계 중이었다. 2005년 6월 19일 오전 2시 530GP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수색중대 병력 14명은 해당 지역에 발령된 ‘진돗개 둘(대침투 작전 단계)’에 따라 인근 지역에서 ‘차단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GP에서 실시하는 차단 작전은 월북하려는 적이나 불순세력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사고 발생 2일 전인 6월 17일 오전 6시55분,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한 북한군 리동수(20세) 하사를 5사단 지역 철원군 대마리에서 검거하면서 군은 ‘진돗개 둘’을 발령했던 것이다. 이튿날 6월 18일 28사단 81연대는 GP주야간 차단 작전, 수색매복 실시 등 최고조의 경계근무 태세를 유지했다.
군 관계자들은 “차단 작전은 보통 주간 작전(14~16시)과 야간 작전(23~1시)으로 나눠 실시한다”며 “통상 오전 1시 이후에는 적으로 오인할 수 있어 1시 이전에 복귀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530GP 피격 사건은 6월 19일 오전 1시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당시 530GP 주둔 병력 가운데 차단 작전에 참가한 사람은 상병 이상. 전군에 최고 수준의 경계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이라 ‘실제 교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지휘관 김종명 중위가 ‘고참’만 데리고 노루골 지역으로 작전을 나갔다고 한다.
차단1조는 김종명 중위(사망), 통신병 김인창 상병(사망), 소총수 차유철 상병(사망)이었고, 차단2조는 전영철 상병(사망), 이태련 상병(사망), 유민호 일병(경상), 임창용 일병(부상 없음)이었다. 지원조는 조정웅 상병(사망), 신태준 상병(경상), 박준영 일병(경상)이었고, GP에 대기한 지휘조는 부GP장 최충걸 하사(부상 없음), 통신병 김유학 일병(경상), 의무병 현규대 일병(부상 없음), 소총수 정은총 상병(부상 없음) 등이었다.
군 발표에 의하면 김동민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을 난사했는데, 내무반에 대기하고 있던 지휘조만 온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차단 작전을 수행하던 1, 2조와 지원조에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는 것은 내무반 내 총기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차단조가 나간 사이, 갑자기 ‘쾅’하는 폭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인수인계를 위해 미리 GP에 와 있던 후임 소대장 이인성 소위는 남은 병력에게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GP에 남아 있던 신병들은 긴장했다. 폭음은 곧이어 6~7회 더 들렸다. 그러고는 정전이 됐다. 북한군 침투조의 RPG-7 공격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신임 소대장과 GP에 남아 있던 병력은 즉각 상황을 대대 상황실에 알렸다. 대대 상황실은 ‘고속지령대’를 통해 연대 상황실과 사단 사령부, 육군본부, 합동참모본부 상황실에까지 당시 상황을 알렸다. 이때 530GP에서 처음 보고한 상황 전파 메시지는 이랬다. “북한 측 미상화기 9발 피격, 5명 사망.”
“진지 점령 후 복귀하다가 사고 발생”
2005년 6월 19일 오전 1시 무렵, 530GP 주둔 중이던 수색중대 병력 14명은 철책선 전방 1.5km 지점에서 차단 작전을 수행한 뒤 복귀 중이었다. 이때 RPG-7로 추정되는 로켓추진폭탄 7~9발이 날아들었다. 순식간이었다. 적은 차단 작전을 하던 병력 주변과 530GP 옥상에 화력을 집중했다. 아군이 대응할 틈은 없었다.
연대 본부는 상황에 따라 즉시 ‘원칙’대로 대응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1시간도 채 되기 전에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내부 총기난사’로 결론을 내더니 사상자들을 옮겨 시신을 내무반, 욕실, 취사장 등에 배치하고는 사고 현장을 위장했다.
부대일지를 근거로 530GP의 개인화기 K-1/K-2는 모두 34정이었으나, 수사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무기를 반납한 사진에는 20정뿐으로 14정이 부족했다. 차단 작전에 나갔던 인원은 14명. 유족들에 따르면 사고 후 부대에서 보내온 사망자 유품에 전투복이 없었다. 국방부 발표대로 취침 중 사망했다면 전투복은 장병들의 관물대에 깨끗하게 개켜져 있어야 했다.
새벽 2시에 김종명 중위는 체력단련장에서 사망했고 조정웅 상병은 취사병이 아님에도 취사장에 있었다 했다. 상처는 총상이라 하기엔 너무 크고 포격으로 인한 열상(裂傷)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들의 응급후송도 4시간이나 늦춰졌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도 발생했다.
사건 발생 당일 새벽, 유족들은 연대 지휘통제실장이었던 정판영 대위(수색중대장)로부터 “폭탄이 폭발해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지, 누구도 ‘내무반 총기사고’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2007년 10월경 기자는 ‘차단 작전’에 참가했던 박준영 일병을 그가 복학해 다니던 안산공대에서 만났다. 그의 진술은 너무도 구체적이었다.
“사고는 진지 점령 후 복귀하다가 발생했다. 내무반에서 난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귀하다가 당한 것이다. 당한 곳에서 GP까지의 거리는 700미터 정도였다. 앞쪽에서 꽝 소리가 들렸다. 포탄은 거의 동시에 떨어졌고 상황은 몇 초 만에 끝났다. 복귀하자마자 전투복을 벗으라고 해서 벗었고 그걸 다 태우더라. 최초 군이 비디오를 찍은 시각이 6월 19일 오전 7시15분이었다면 그 시간이면 사후처리 다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내가 병원에 있을 때 7시 뉴스를 보았다.”
박준영 일병은 당시 부상당한 발뒤꿈치를 걷어 올려 기자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는 않았으나, 기자에게 당시 상황과 함께 사건 이후 행적에 대해 들려줬다.
“수사를 받는데 짜증이 났다. 헌병대 수사과장이 맨날 갈구고 여기저기 끌려다녔다. 병원에 있을 때 국방장관이 왔고 기자들도 왔다. 병원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네 말 한마디에 따라 여파가 크니까 적절히 둘러대라고. 뭘 어떻게 둘러대라는 것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들이 질문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뉴스를 보니 박준영 일병만 진술 내용이 다르다, 저 애만 이상하다는 식으로 나왔다. 병동에서 나만 나쁜 놈이 됐다.”
박준영 일병은 상부의 감시와 압박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헌병 수사과장이 와서 뭐라고 했다. 너 친구한테 전화해서 말한 적 있느냐 하기에 부모님한테만 말했다고 했다. 너 그러지 마라. 그러면 구속된다고 겁을 주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왔다. 나를 간부병실에 뒀다. 내가 나갈 때마다 간호장교가 따라다녔다. 수사받기 전에 각서를 썼다. 네가 말한 내용에 대해 밖에서 누설하면 안 되고 어기면 처벌받는다는 식으로 정신교육을 했다. 휴가를 가서도 친인척만 만나고 다른 사람 만나면 안 된다고 했다. 대대장이 그랬다. 전역하고 나서도 보급부대에서 챙겨주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박 일병은 사건 직후 부상자들의 응급처치와 후송이 늑장조치된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는 “(차단 작전에 나갔다가) GP로 옮겨진 부상자들에 대해 아무도 치료하지 않았다”며 “겁이 났다. 그래서 피가 질질 나오는 데도 그냥 뒀다”고 했다. 그는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자, 그때 그냥 수건을 대주는 정도만 했다”며 “다 끝나고 나서 부GP장(최충걸 하사)이 오더라”고 했다.
김동민 일병 가혹행위자들이 국가유공자라니…
▲연천 530GP 피격 사건의 희생자들. 530GP 피격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날, 이들은 전사자로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30GP 사건’ 이후 군 당국의 행태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고 김종명 대위·전영철·조정웅·박의원·이태련·차유철·김인창·이건욱 병장 등 희생된 장병들의 전투복에는 피가 묻어 있었는데 이들의 피복과 총기를 증거물로 보전하지 않고 모두 소각처리 했다고 한다. 또한 사건이 일어난 ‘530GP’는 즉시 폐쇄하거나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소초 옥상을 흙으로 덮고 휴게시설을 만들었다.
‘530GP 사건’의 ‘범인’이라는 김동민 일병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다는 다른 소대원들은 모두 조기 전역한 뒤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았다. 해당 부대 지휘관 가운데 김동민 일병에게 가혹행위를 저지른 데 대한 지휘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다. 단지 부GP장 최충걸 하사와 그의 당번병 김동민 일병만이 각각 상관명령 불복종 혐의로 징역6월(집행유예 2년), 530GP 총기난사 사건의 ‘악당’이 됐다.
송영인 회장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되었음에도 국가유공자가 없었다”며 “단순 하극상으로 일어났다는 530GP 사건에서는 어찌하여 생존자 23명 중 김동민 일병을 폭행했다는 7명을 포함해 21명을 국가유공자로 선정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시 한명숙 전 총리가 국가보훈심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530GP 사건’ 당시 군 주요 관계자들은 윤광웅 국방장관, 이상희 합참의장, 김장수 육군참모총장, 김관진 육군 3군사령관, 김은상 육군 28사단장, 오주석 81연대장 등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국가안보실장, 국방장관, 주중대사 등을 역임하거나 3군 부사령관(중장 보직), 미군기지이전사업 총괄팀장 등으로 영전했다. 당시 시신을 검안한 군의관 유성호 대위는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상주행
▲송영인 회장은 ‘530GP 사건’의 의혹을 풀 수 있는 세 가지로 북한군 리동수 하사의 행적, 최충걸 하사의 입, 12년째 사형집행 대기 중인 김동민 일병 등을 꼽고 있다.
송 회장은 국방부에 ‘2005년 6월 17일 인접 5사단 지역 철원군 대마리에서 생포된 북괴군 리동수 하사로 인해 군 차단 작전이 실시됐고 이 작전 중에 530GP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생포된 북괴군 리동수의 신병처리는 어찌 되었으며 그는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변해 주기 바란다’는 질의서를 보냈다.
송영인 회장은 전 국정원 제주부지부장 출신으로, 전직 국정원 간부 21명의 모임인 국정원을 사랑하는 모임(국사모) 회장을 지냈다. 송 회장은 “국방부 답신에 따르면 리동수가 귀순의사를 표시해 국정원 산하 하나원으로 보내 교육을 마치고 한국 사회로 편입됐다”며 “하나원에 물었더니 확인할 수 없었고 노무현 정권이 2005년 체포 당시 북으로 돌려보냈을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지난 4월 26일 기자는 송영인 회장과 함께 경북 상주로 최충걸 하사를 만나러 갔다. 10년 만의 방문이었다. 2006년 10월 22일 고 조정웅 상병의 부친 조두하씨(한국폴리텍대 교수)는 상주에 있는 최충걸 하사의 집을 찾아가 최충걸 모친을 만나 진술을 들었다. 녹취록 내용이다.
“그 애(최충걸 하사)는 당시 폭발소리에 정신이 다 나갔었고 그 뒤로는 전혀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이 아들한테 시신 배치까지 시켰다고 하더라. 피를 닦고 시체를 덮는 걸 충걸이가 혼자 다 했다고 하더라. 군대에서 지시하니 어쩔 수 없이 협조한 것이다.”
조두하 교수는 2007년 3월 20일 또다시 상주로 찾아가 최충걸 하사의 말을 녹음하는 데 성공했다.
“사고는 야간 차단 작전을 하고 돌아오다가 당한 것이다.” “걔들은 억울하다.” “전투복을 입고 나갔다.” “시신이동을 잘했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사고를 당한 지점은 GP로부터 직선거리 800미터, 길을 따라가면 1200미터 정도 될 거다.”
기자와 송영인 회장은 아침 서울을 출발해 상주 그의 집 앞에서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기다렸다. 그때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최충걸 하사의 모친을 만났다. 그녀는 “제대 후 유족들도 찾아와서 윽박지르는 통에 아이가 민감해져서 부모라도 말도 붙이기 힘들 정도였다”며 “지금은 결혼해 겨우 안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최 하사의 아버지 최모씨는 “4남매의 막내로 부모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군에 갔다가 6개월 만에 사고를 당해 징역형을 받고 전과자 신세가 된 아이가 딱하다”며 “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없는 살림에 변호사비 1500만원을 마련하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기자는 최충걸 하사 부모에게 연락처를 남기면서 “양심선언으로 본인의 명예도 회복하고, 저세상으로 간 동료 전우들의 명예도 살려라”는 말을 남기고 상주를 떠났다.
김동민 일병,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2016년 6월 19일 대전 국립현충원 사병2묘역에서 연천 530GP 사건 1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유가족들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 생존병사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정낙인
2012년 9월 13일 당시 국회 국방위 소속 김형태 의원은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동민 일병을 찾아가 면담했다. 김 일병은 “네가 진짜 범인이냐, 아니냐를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김 의원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번에는 “2008년 5월 7일 고등군사법정에서 말한 것이 지금도 유효하냐”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 의원이 물은 ‘고등군사법원에서 말한 것’은 당시 김 일병이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장에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재판장이 “무슨 질문이냐”고 했다. 김 일병은 자신의 범행이 “말뿐이지,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재판장은 “직접 증거는 없지만 주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판결을 한다”고 했다. 김 의원은 이것을 재차 확인한 것인데 김 일병은 자신의 자백에 대해 ‘노코멘트’로 바꾸었다. 당시 김 의원과 동행했던 보좌관은 “김 일병이 내내 울기만 했다”라고 전했다.
송영인 회장은 “국회 국방위 소속 의원인데도 까다로운 면담절차를 거쳐야 했다”며 “사형이 확정돼 형 집행을 기다리는 군 출신 기결수는 통상 민간교도소로 이감되는데, 김동민은 이상하게도 12년째 장호원 국군교도소에서 철저하게 면회를 통제당하고 있다”고 했다.
송영인 회장은 “김동민 일병의 범행을 목격한 목격자가 한 명도 없고 국과수 감정서에는 김 일병이 범행에 사용한 총이나 수류탄 고리에도 지문이 없었고 손에서도 화약반응이 나오지 않았다”며 “현재까지 김 일병이 범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자백뿐이다”라고 했다.
3월 초부터 검찰이 ‘530GP 사건’ 재조사를 시작했다. 검찰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노무현 정권의 민정수석을 지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연천 530GP 피격 사건 박영섭 유가족 대표 회장은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존립 기반을 뒤흔드는 천인공노할 사건”이라면서 “검찰은 대한민국 국군 장병이 북한과 친북 세력에 의해 희생되고 사건이 조작·은폐된 사실이 있었는지 정확한 조사를 통해 진실 여부를 명확하게 가려내야 한다”고 했다.
송영인 회장은 “독일을 위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1894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한 기자의 노력으로 100년 만에 프랑스군으로부터 무죄라는 사실을 인정받았다”며 “드레퓌스 대위 본인은 살아생전 명예회복을 보지 못했으나 자손들만은 오욕을 씻고 명예를 회복한 것처럼, 연천 530GP에서 대간첩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한 8명의 대한민국 아들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6월호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2017.07.27 이승만 대통령, 판문점 휴전회담장 파괴 지시 비화
HID, 1951년 7월부터 세 차례 판문점 휴전회담장 파괴
“현재로선 남북통일이 어렵습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판문점 회담을 어떻게든 깨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휴전이 성립되면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되지만, (휴전이) 깨지면 前進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모릅니다”(李承晩)
⊙ 판문점 중립 지역에서 공산군 측 중공군 장교와 병사 8명 납치
⊙ “李承晩은 휴전으로 분단이 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예감했다”
▲판문점 중립 지역에 설치된 회담장 천막
1951년 7월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휴전회담을 시작, 휴전과 분단 가능성이 커지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비밀리에 판문점 회담장 파괴를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판문점 무장공격은 1951년 초 창설된 육군 4863부대(육군첩보부대)가 주도했으며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약 한 달 간격으로 3차례 진행했다.
판문점 회담장 공격은 이 대통령의 지시로 육군첩보부대장 이극성(李極星) 중령과 김진수(金晋洙) 소위가 주도했다. 당시 국내 언론에는 비밀에 부쳐졌던 사안이다.
《월간조선》은 당시 판문점 습격을 직접 지휘했던 김진수(86·육군본부 공작처장 역임·예비역대령)씨를 만났다. 육군 보병학교 갑종간부 제2기로 입교,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1951년 3월부터 HID에 복무하면서 모두 250여 차례 북한에 침투, 공작활동을 벌여 20여 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월간조선》 2006년 4월호 참조). 특히 적진에 침투해 인민군 부사단장 이영희 대좌를 생포해 귀환시킨 일도 있다.
그는 “가슴에 묻어둔 비밀 하나를 털어놓고 싶다”며 60여 년간 봉인된 판문점 회담장 파괴의 진상을 고백했다.
“1951년 7월 12일쯤 이극성 첩보부대장이 저를 불러서 갔더니 ‘내일 경무대에 들어가자’는 겁니다. 그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리라 생각도 못 했어요. 이튿날 새벽 대구에서 출발, 경무대에 오전 11시쯤 도착했어요. 그 시절엔 요즘 같은 고속도로도 없었고 포장구간마저 적었지만 무척 긴장하며 서둘러 지프를 몰았어요.”
경무대에 도착한 그들은 비서실의 안내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다른 배석자 없이 4명이 마주 앉았는데 대통령과 이극성 중령, 나,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당시 高在鳳) 아니면 경무대 서장(당시 金國振)이 배석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곽영주(郭永周) 경무관(당시 경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뭐라고 하던가요?
“판문점 회담으로 휴전이 되고 분단이 되면 민족통일이 어렵다는 취지의 말씀이었어요. 어떻게 해서든 휴전을 반대해, 아니 못 하게 막아 북진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말씀이었죠. 또 휴전회담이 성립되면 영원히 통일을 못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육군본부 공작처장 출신의 김진수씨
잠시 후 이 대통령은 두 사람을 부른 속내를 털어놨다. 김진수씨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이 대통령의 발언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현재로선 남북통일이 어렵습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판문점 회담을 어떻게든 깨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휴전이 성립되면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되지만, (휴전이) 깨지면 전진(前進)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를 내렸나요.
김진수 예비역대령의 말이다.
“이 대통령께서 ‘회담장소를 야간에 침투해 파괴하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저는 ‘문제없습니다. 그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죠. 그랬더니 ‘그럼 부탁하네. 가까운 시일 내에 휴전회담을 못 하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경무대 한 인사가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말고 대통령과 우리 세 사람만 아는 비밀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속으론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일촉즉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판문점 회담장을 파괴하라니…’
1차 擧事는 1951년 7월 16일… 휴전합의를 깨라!
▲이승만 대통령과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왼쪽).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측 사이의 휴전회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1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공산군 측은 자력으로 한반도를 적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엔군 측도 힘에 의한 응징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1951년 6월 30일 유엔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이 휴전회담 제의를 했고 7월 8일 개성 광문동(光文洞)의 한 민가에서 예비회담이 열렸다. 장소를 옮겨가며 진행된 회담은 유엔군과 공산군 측의 거친 신경전으로 소득없는 논쟁만 되풀이되었다. 유엔군 측은 국제적십자의 포로수용소 방문과 전쟁포로에 관한 협의를, 공산군 측은 38도선 문제와 유엔군 철수 문제를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첫 판문점 습격은 언제인가요?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다. 널문리란 널빤지로 만든 문짝마을이란 뜻. 그러나 널문리는 회담의 공용어(한글·중국어·영어) 가운데 중국어로 표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널문을 한자로 쓰면 ‘판문(板門)’인데 구멍가게를 의미하는 ‘점(店)’이라는 글자를 넣어 판문점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널문리는 구부러진 밭뙈기와 초가 몇 채, 작은 주막이 전부인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으나 판문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세계 전사에 남은 현장이 되었다.
“7월 16일 아직 야심한 새벽이었을 겁니다. 민간인 복장의 대원 10명을 이끌고 판문점 남쪽 철조망을 절단기로 끊고 판문점 회담장으로 진입했어요. 다행히 회담장은 텅텅 비었고 초소에도 사람이 없었어요. 회담장 앞에 중공군 지프인지, 인민군 지프인지 모르겠지만 주차된 지프를 미제 칼빈 총으로 쏴 전소시켰어요. 회담장 주변엔 4~5개의 천막이 있었는데 한쪽은 유엔군 측이 쓰고 다른 한쪽은 공산군 측이 썼어요. 총을 난사해 회담장 천막을 모두 쓰러뜨리고 탁자니 의자니 기물도 부쉈어요. 불탄 천막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복귀했어요.”
주변에 중공군 1개 소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고, 아군(유엔군)도 판문점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누구도 대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인명 피해나 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김진수 소위와 함께 파괴공작에 참여한 대원들은 HID 문산파견대(제2파견대) 장단분견대 소속이었다. 판문점 공격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장단분견대와 함께 대덕산분견대, 두매리분견대도 조직돼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현역 군인 신분이 아니었다. 판문점 근처 장단군(長湍郡·지금은 파주시와 연천군에 모두 편입)과 대성동(大城洞) 마을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파주 장단에 ‘도라산 전망대’가 있고, 대성동은 군사분계선 남쪽 DMZ 안에 위치한 유일한 민간인 거주 지역이다.
김진수 소위와 장단분견대는 왜 하필 7월 16일을 거사일(擧事日)로 정했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전날인 7월 15일은 유엔군과 공산군 간 휴전회담장 통제규칙을 두고 합의가 성사된 날이었다. 양측은 ‘개성 중심으로 반경 5마일 내에 중립지대를 설정하고 회담장 주변에 무장병력도 두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바로 이 합의를 깨뜨리려 했던 것이다.
판문점 일대에 민간인 유격대 출몰… 2차 판문점 공격 감행
▲육군첩보부대 장교 시절의 김진수(뒷줄 오른쪽 끝).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 젊은 시절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으로 구성된 공산군 측은 판문점 회담장이 쑥대밭이 되자 분기탱천했다. “유엔군 병사들이 판문점을 향해 사격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휴전회담은 경색될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전사(戰史)에는 공산군 측이 ‘비록 부상자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중립 지역 내의 무장행위라고 비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반면 유엔군 측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합의문 서명 직후 발생한 ‘중립협정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즉각 조사에 착수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고, 공산군 측도 내심 휴전을 바랐던지 더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김진수 소위는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경무대로 찾아가 작전 성공을 보고했다고 한다. 직접 이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경무대 한 인사로부터 “이 대통령 뜻을 받들어 목숨 바쳐 싸워줘 고맙다”는 격려를 받았다.
1951년 8월이 시작되자 휴전회담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됐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 간 신경전이 치열했다. 그해 8월 4일에는 중공군 1개 중대가 휴전회담 지역을 침범, 유엔군 측이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8월 13일에는 공산군 측이 “판문점 교량 부근에서 40명의 유엔군 부대가 교량을 봉쇄하고 비무장 공산군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유엔군 측은 조사에 착수했으나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공식 성명을 통해 “그때 그곳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유엔군이나 공산군 측도 모르는 군사적 충돌을 누가 일으키고 기획한 것일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를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나왔다.
〈(1951년) 8월 19일 중립 지역인 송곡리(판문점 서쪽 1km 지점)에서 중공군 헌병소대가 순찰 도중에 습격을 받아 소대장이 사망하고 소대원 1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군 측은 즉각 유엔군 측이 중립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유엔군 측의 조사결과 그 시간에 송곡리 근처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
그런데 민간인 목격자에 의하면 “중공군을 기습한 대원들은 민간복장을 하고 있었고, 전에도 이곳에 나타난 적이 있다”는 증언을 하였다. 이에 유엔군 측에서는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유격대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판단하였다.〉(p155, 《6·25 전쟁사》 9권)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유격대의 독자적인 행동’을 한 이들이 HID 대원들이죠?
김진수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모두 우리가 한 일입니다. 민간인 복장으로 아군이나 유엔군의 지시 없이 독자 행동한 것이죠.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 있고 그해 8월 중순쯤, HID 장단분견대는 2차 판문점 회담장을 파괴했어요. 구체적 날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2차 판문점 회담장 공격은 어떤 방식이었나요?
“1차 공격 때와 같은 방식으로 판문점 주변 철조망을 끊고 침투해 회담장 천막을 쓰러뜨리고 주변을 총으로 난사, 무력시위를 했어요. 추측건대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비난했을 겁니다.”
1951년 8월 하순 들어 유엔군과 공산군 측 간 충돌과 분쟁이 계속됐다. 서로가 무장병력을 동원, 중립협정을 위반했다며 비난했고 상대방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조작”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양측은 8월 24일 휴전회담 중단을 선언하고 말았다.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 한 단락이다.
〈이로써 공산군 측에 의한 중립협정 위반사건의 날조와 이에 대한 비난이 거듭된 끝에 결국 공산군 측이 유엔군 측에 휴전회담을 중단한다고 통보함으로써 8월 24일부터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공산군 측은 “8월 29일 유엔군 항공기가 개성 중립 지역에 조명탄을 투하했고 30일에는 유엔군 부대가 판문점 교량 너머로 사격하여 공산군 순찰대를 공격했으며 9월 1일에는 유엔군 항공기가 두 번째로 개성을 폭격했다”고 비난하였다.
이때마다 유엔군 측은 “현장조사 후 어떠한 유엔군 항공기도 결코 그러한 사건을 범한 일이 없으며 지상사건에 관해서는 아마 유격대원의 소행일 수도 있다”고 해명하였다.〉(p156~157, 《6·25 전쟁사》 9권)
3차 공격, 공산군 측 장교와 병사 8명 생포
▲1951년 7월 휴전회담장인 개성 내봉장(來鳳莊) 앞뜰에 선 공산군 측 휴전회담 대표들. 왼쪽부터 중공군 대표 셰팡(解方), 덩화(鄧華),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 북한군 대표 이상조와 장평산.
1951년 9월 초 김진수 소위와 HID 장단분견대는 3차 판문점 공격을 감행한다. 대원들은 판문점 주변에 쳐진 철조망을 끊고 회담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판문점 외곽 경비를 맡고 있던 공산군 측 장교와 병사 8명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우세한 HID 부대원들은 이들을 모두 생포했다.
“제 기억으로 성이 위(偉)씨인 중공군 소위가 기억납니다. 모두 납치해 아군(육군 1사단)에 넘기고 우리도 이들을 심문한 기억이 납니다. 이들은 나중 포로수용소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공산군 측 경비대를 납치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물론입니다. 다만 유엔군 측이 HID 장단분견대가 주도한 것을 알게 됐어요. 어느 날 미 8군이 우리 부대에 오더니 대원들을 강제로 두 대의 트럭에 나눠 실었어요. 한참을 달려 임진강을 건너자 대원들을 내리게 하고선 ‘판문점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고 경고하곤 떠났어요.”
김진수 소위는 그 후 다시 경무대를 찾아갔다. 전후 과정을 설명했더니 경무대 한 인사가 이런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젠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 대통령께서 ‘그 정도 했는데도 휴전회담이 계속되니 할 수 없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저도 안타까웠지만 그게 민족의 운명이라 생각했어요.”
―이 사실을 지금 공개하는 이유는 뭔가요.
“휴전회담 당시 이 대통령께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휴전으로 분단이 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예감했던 겁니다. 통일을 위해 휴전회담을 망치고 싶었던 것이죠. 당시의 절절하고 급박했던 대통령 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HID 부대가 후방으로 물러나자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의 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1951년 9월 10일 미군 폭격기 한 대가 항로이탈로 북측 개성지구에 진입, 보호차 기총사격을 했다. 공산군 측이 항의하자 유엔군 C·조이 중장은 9월 11일 유감을 표명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번에는 9월 18일 DDT를 실은 한국군 트럭이 판문점을 넘었지만 공산군 측은 항의 없이 간단한 조사만으로 병사 4명과 트럭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후 2년여의 오랜 줄다리기 끝에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의 종식을 위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출처 | 월간조선 2015년 8월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17.08.17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6·25전쟁 이후 북한과 미국이 실제로 전면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때는 언제일까. 많은 역사학자들이 1976년 8월 18일이라고 의견을 모은다. 이날은 그 유명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알린 1976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1면.
이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는 한미 경비병과 노무자 5명이 남측 관측소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북한군이 가지를 잘 치는 법을 알려주는 등 작업이 순조로웠다. 그때 북한군 박철 중위가 부하들을 데리고 와 ‘가지치기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는 이를 묵살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박철이 북한군 30여 명을 추가로 불렀다. 이들은 손에 쇠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쪽 사람들을 포위한 상태로 박 중위가 재차 작업중단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보니파스 대위가 요구에 따르지 않자 박 중위는 손목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감싼 뒤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죽여!”
보니파스 대위는 도끼에 머리가 찍혀 현장에서 즉사했다. 마크 바렛 중위 역시 북한군으로부터 습격당한 사병을 도우려다 사망했다. 미군 기동타격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북한군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간 다음이었다.
▲왼쪽부터 보니파스 대위, 바렛 중위.
당시 유엔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미 육군대장은 일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전투기 뒷자리에 탑승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이튿날(8월 19일)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북한은 불참했다. 그러면서 “미군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다. 그 순간 갑자기 미군이 도끼를 던져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되던졌는데 보니파스 대위가 맞아 죽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주한유엔군과 한국군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준전시체제에 돌입했다.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를 발동해 전군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이렇게 양쪽이 맞서는 가운데 미군은 ‘폴 버니언 작전’을 세웠다. 표면적으론 ‘미루나무를 자른다’는 것이지만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한 곳까지 진격한다는 내용이었다.
8월 21일 오전 7시. 한미 호송차량 23대가 북한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미군 공병대원 16명은 전기톱과 도끼로 미루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미군 보병이 탄 다목적 헬기 20대와 공격용 헬기 7대가 떠 있었다. 그 위로는 B-52 폭격기 가 전투기 엄호를 받으며 선회 중이었다. 대구에는 핵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는 F-111 편대가 미국 아이다호 주에서 날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에는 미드웨이급 항공모함과 순양함 5척이 대기 중이었다.
▲폴 버니언 작전 수행 사진.
북한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미루나무를 모두 자르는 순간 폴 버니언 작전은 끝이었다. 그러나 일꾼으로 위장해 현장을 엄호하고 있던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 64명은 그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M16 소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손에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북한군 초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차례로 북한군 초소 4곳을 파괴했다. 미군 트럭 운전병이 이들을 막아서려 하자 권총으로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
이들이 미군과 맞서면서까지 북한 초소로 쳐들어 간 건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한 뒤 박 대통령은 “우리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 내 군화와 철모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 특공대를 만든 것부터 박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 북한에서 반격한다면 박 대통령은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보였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고 강도 높게 북한을 비판한 박정희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한 1976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1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침입해 난장판을 만들자 북한군은 초소를 비우고 도망가고 말았다. 이날 북한군 부대 통신을 감청한 미군은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고 했다. 상황이 모두 끝난 뒤 북한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 한주경 소장이 미국 측 수석대표에게 비밀 면담을 요청했다. 한 소장은 그 자리에서 유감을 표명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했다. 미국은 논란 끝에 이 친서를 사과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일성은 친서에서 “판문점에서 사건이 벌어진 건 유감(regretful)”이라며 “우리는 앞으로 절대 선제도발을 하지 않을 것이고 도발이 있을 때 자위적 조치만 취할 것”이라고 썼다.
이 사건 이후 북한이 직접 미국을 상대로 무력도발을 벌인 적은 없다. 방송에서는 미국을 맹비난해도 실제로 건드린 적은 없는 것.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9·11 테러 때는 오히려 테러리즘을 맹비난하면서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북한은 이번에도 “괌을 공격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김정은 노동위원장이 “미국 놈들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발을 빼는 분위기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2017.08.19 8.18 판문점 도끼만행... 한국이 전쟁에 가장 가까이 갔던 날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살해당했다. /조선DB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15명의 韓美(한미) 경비병과 노무자들이 남측 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북한군 장교 박철이 부하들을 데리고 오더니 가지치기를 중단하라고 했다. 미군 장교 아서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묵살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서 1년 기한의 한국근무를 3일 남겨두고 있었다.
박철이 북한병력을 불렀다. 30여 명의 북한군이 트럭을 타고 왔다. 손에는 쇠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가지치기를 하던 노무자들을 에워쌌다. 박철은 한국군 장교를 통역삼아 미군 장교에게 다시 작업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이를 무시하고 등을 돌리는 순간 박철은 손목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싼 뒤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보니파스 대위의 목을 손으로 쳐 쓰러뜨렸다.
동시에 북한군인들은 韓美 경비병과 노무자들을 덮쳤다. 보니파스 대위는 몽둥이와 도끼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다른 미군 장교 마크 바렛 중위는 사병을 도우려다가 맞아죽었다. 미군 기동타격대가 도착했을 때는 북한군이 분계선을 넘어가 정렬을 끝낸 뒤였다.
이 뉴스가 워싱턴으로 전해졌을 때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캔자스시티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으로부터 공산당에 대해 너무 무르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이 부재 중인 관계로 키신저 국무장관이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미국 CIA 요원은 이런 요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돈 오버도퍼 著 《두 개의 코리아》).
<우발적인 사고는 아닐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기간에 주한미군에 대한 반대 여론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합참을 대표해서 나온 해군참모총장 제임스 I. 할러웨이 제독은 “북한이 남침에 성공하려면 기습을 해야 하는데 이미 우리가 만반의 경계태세에 돌입한 이상 북한의 대규모 군사공격은 없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이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포드 대통령과 통화한 뒤 “북한놈들이 이번에는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리처드 스틸웰 駐韓(주한) 유엔군사령관은 회의 전에 합참으로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 버리자는 보복案(안)을 냈으나 키신저는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태도였다.
긴급대책회의는 구체적인 보복방안을 결정하지 않고 먼저 한국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기로 했다. 오키나와 기지로부터 팬텀 편대를 한국으로 이동시키고, 아이다호州에 있던 F-111 전폭기를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괌에 있는 B-52 전략폭격기를 휴전선 상공까지 보내 폭탄투하 연습을 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에 있던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대를 대한해협으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의식하지 않고 상당히 강경한 보복안들을 쏟아 냈다.
‘도끼만행’이 감정적 반응을 부른 점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 선박 나포에 이어 북한 해안선 인근 해역에 核(핵)폭탄을 터트리자는 안도 나왔다. 북한 측 휴전선의 동쪽 끝 부분을 폭격하자는 발상도 있었다. 美 합참은 미루나무를 베어 버린 뒤 초정밀 유도병기나 地對地(지대지) 미사일로 북한의 전략적 기간시설을 파괴하는 응징안도 냈다. 키신저도 미루나무만 자르는 행위는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온건론으로 귀착되었다. 美 국방부와 해군 측에서는 “강경한 조치가 또 하나의 한국전쟁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포드 대통령도 ‘한반도에서 지나친 무력과시는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 적정한 수준의 병력 사용으로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심각성에 놀라 먼저 전투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평양에선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요인들은 지하 방공호로 들어갔다. 全전선에서 북한군은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도 경계태세를 데프콘(Defcon) 3으로 높이고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유엔군 측은 즉각 군사정전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북한은 즉시 이에 응했다. 이것을 본 스틸웰 사령관은 “판문점 사건이 북한 측의 우발적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날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평상시처럼 집무했다. 오전에는 朴東鎭(박동진) 외무장관의 보고를 받았고, 오후엔 金龍煥(김용환)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관련한 보고가 있었다. 오후 4시20분부터 1시간30분간 朴대통령은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대해 소극적이던 南悳祐(남덕우) 부총리를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다.
워싱턴에서는 이 시간 긴박한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戰時(전시)는 물론이고 平時(평시) 작전통제권도 갖지 못한 朴대통령으로선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이날 밤 朴대통령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오전 10시30분경 판문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인 유엔군 장병 11명이 곤봉·갈고리 등 흉기를 든 30여 명의 북괴군의 도전으로 패싸움이 벌어져서 유엔군 장교(미군) 2명이 사망하고, 한국군 장교 1명과 병사 4명이, 미군 병사 4명, 계 9명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전쟁 미치광이 金日成(김일성)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목하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개최 중인 비동맹회의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정치 선전에 광분하고 있는 북괴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하나의 계획적인 만행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제까지 참아야 할 것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젠가는 고쳐 주기 위한 철퇴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사건 다음날인 8월 19일 오전(9시50분부터 45분간) 청와대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徐鐘喆(서종철) 국방장관, 盧載鉉(노재현) 합참의장,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 崔侊洙(최광수) 의전수석은 통역으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朴대통령은 대화 내내 차분하고 사려 깊었으며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고 스틸웰은 워싱턴에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북한 측에 사과 배상 재발방지 등 최대한으로 강력한 항의를 전달해야 하겠지만 나 자신도 이것이 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북한에 교훈을 주기 위해 적절한 군사적 대응조치를 하되 화력을 사용하는 것에는 반대이다.>
그 다음날(8월20일)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청와대로 와서 오전 11시부터 45분간 朴대통령에게 워싱턴에서 결정된 보복계획을 보고했다.
“미군이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서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 버린다. 만약 이때 북한군이 대응공격을 한다면 우리도 즉각 무력으로 대응하여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이 진격하여 수도에 대한 서부전선의 근접성을 해결한다”고 스틸웰 사령관이 보고했다고 한다(배석했던 金正濂 비서실장 증언).
‘두 개의 코리아’를 쓴 돈 오버도퍼가 美 국방부 문서를 인용한 내용은 좀더 구체적이다. 미국 정부가 스틸웰 사령관에게 승인한 보복계획은 ‘북한군이 소총으로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방해할 경우에는 작업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박격포와 대포를 쏜다. 북한군이 (분계선을 넘는) 지상공격을 해올 경우엔 대기 중인 지원부대가 인근의 북한군 목표물에 대한 집중포격을 개시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는 제2의 한국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뜻했다. 이런 경우에는 유엔군과 한국군이 개성과 연백평야까지 진출하되 더 북쪽으로는 전선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 같다.
스틸웰 유엔사령관의 보고를 들은 朴正熙 대통령은 “군사작전은 미루나무 절단에 한정하고 북한이 확전할 때만 우리도 확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 한국은 중화학공업 건설이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평화만 깨지지 않는다면 체제경쟁에서 김일성에게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도끼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그런 평화가 중단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이해 1월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엔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날 朴대통령은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에게 주문을 하나 했다.
“공동경비구역이 미군 관할이라고 해서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없다. 미군 지휘관을 제외하고 절단작업, 경호, 근접지원 등 제1선 임무는 한국군이 맡고 미군은 제2선을 맡도록 했으면 한다.”(金正濂 비서실장 증언)
1976년 8월21일 오전 4시쯤 美 2사단內 RC4 체육관. 한국 공수부대원으로 구성된 특공대원 64명이 출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朴熙道(박희도) 여단장은 특공대 장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일단 교전이 붙으면 누가 먼저 발포했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교전 결과가 중요하다. 일단 우리 편의 피해가 없어야 한다. 敵(적)의 공격이 예상되면 그 즉시 선제 기습이 이뤄지도록 특공대장 이하 간부들이 즉각 조치하라. 내가 현장에서 직접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특공대장의 판단하에 움직여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朴熙道 여단장은 무기를 숨겨 가라고 지시했다. 방탄조끼를 입고 계급이 없는 철모를 쓴 특공대원들은 몽둥이(곡괭이 자루)만을 든 채 트럭 3대에 나눠 탔다. 방탄조끼 안에는 권총과 수류탄이 숨겨져 있었다. 이러한 무장은 공동경비구역內의 규정과 스틸웰 사령관의 ‘비무장 지시’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한국 특공대 병력이 공동경비구역으로 가는 전진 기지인 키티호크 캠프(注: 이 캠프는 후에 8·18 도끼만행 사건으로 사망한 미군 대위의 이름을 따 ‘보니파스 캠프’로 바뀌었다)에 도착한 것은 잠시 후였다.
이날 오전 7시 韓美호송 차량 23대가 북한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미군 공병대원 16명은 전기톱과 도끼로 미루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북한이 멋대로 설치한 두 개의 바리케이드도 철거했다. 한국군 특공대가 이 작업을 엄호했다. 하늘에는 미군 보병이 탄 20대의 汎用(범용)헬기와 7대의 코브라 공격용 헬기가 굉음을 내면서 선회 중이었다. 상공에서는 B-52 전폭기 편대가 韓美 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선회하고 있었다. 오산에는 중무장한 F-111 편대가 대기 중이었다. 해상엔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대, 판문점 가까운 전선에는 韓美 보병, 포병이 방아쇠를 만지고 있었다.
미루나무 절단작업이 시작된 직후 유엔군 측은 당직 장교를 통해 북한 측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유엔사 작업반은 8월21일 JSA(공동경비구역) 안에 들어간다. 그것은 지난 8월18일 당신네 경비병들의 도발로 마무리짓지 못한 작업을 평화적으로 완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측 작업반은 유엔사 초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나무를 베어 낼 것이다. 작업반은 임무가 끝나는 대로 JSA에서 철수할 것이다. 이 작업반이 아무런 도발을 받지 않는 한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김정렴 비서실장과 최광수 의전수석은 이미 오전 6시에 청와대로 출근하여 유엔군 사령부 지하 벙커에 있는 유병현 합참본부장과 전화 통화를 한 뒤 비서실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부와 연결돼 있는 핫라인을 통해 작전 진행 상황을 파악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절단 작전이 시작되었을 즈음 朴正熙 대통령은 본관 2층 거실에서 아래층 집무실로 내려왔다. 金 실장과 崔 수석은 유엔군 사령부에서 보고가 들어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첫 번째 보고는 ‘지금 작업반이 들어가 미루나무를 베고 있다’였다. 崔 수석이 집무실로 가 朴 대통령에게 이 내용을 보고했다. 崔수석은 작전이 끝난 오전 7시55분까지 두 번 더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전 7시22분쯤 ‘敵 200여 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방향으로 오고 있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敵이 다리를 넘어오지는 않고 사진만 찍고 돌아갔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였다.
이날 전방의 북한군 부대 통신을 감청한 미군은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고 평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쪽에서 북한군은 미루나무가 작전 개시 42분 만에 잘려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20분 후 북한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 한주경 소장이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고자 미국 측 수석대표에게 비밀면담을 요청했다. 김일성이 유엔군 사령부에 편지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내용은 ‘유감표명’이었다.
미국 측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였다. 절단 작전이 끝난 뒤 김정렴 실장은 최종 보고를 하러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 대통령은 서류를 보면서 보고를 다 듣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래, 끝났다고, 알았어”라고 말했다.
얼마가 지난 뒤 金 실장은 朴 대통령의 인터폰을 받았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이 국방장관, 합참의장, 참모총장, 그리고 스틸웰 사령관에게 애썼다는 말을 전해 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폭격·봉쇄 등 강경한 보복조치를 생각했다가 온건한 대응으로 물러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북한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1967년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號 납치, 1969년의 미국 전자첩보기 격추 때도 미국은 무력시위에 그쳤다.
북한이 一戰不辭(일전불사)의 자세를 취하니까 미국으로서도 제2의 한국전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강경대응이 어려웠던 것이다. 6·25 전쟁에서 미군이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 하나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군과 절대로 육상전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도끼만행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韓美공동작전을 위한 지휘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때부터 韓美연합사 설치를 위한 협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박정희 전집 12권에서 발췌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월간조선 2018.05월 호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글 : 이지영 조갑제닷컴 기자
■북한 정권의 이대용-신영복 교환 공작은 이래서 좌절되었다!
뉴델리 비밀회담 외교 문서 입수
북(北)은 남파간첩이나 재일동포 간첩보다 ‘남선(남한) 혁명가’ 신영복 등을 데려가는 데 더 집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자국민 송환 불가’ 입장을 고수, 신영복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수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 “이것(1 對 7 교환)은 김일성 수령님의 명령이다”(조명일 북측 수석대표)
⊙ 한국은 이대용 공사 등 3명을 구출하기 위해 21명의 남파간첩 등을 보내주기로 합의했으나 북한이 ‘남조선 혁명가’에 집착하는 사이에 다른 채널로 교환 없이 구출에 성공하였다
⊙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둘러싼 북한과의 갈등, 유대인 아이젠버그 등장으로 활로를 찾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신영복 교수(왼쪽). 그는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관이었다.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은, 겨울철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것을 정겹게 일컬어 ‘원시적 우정’이라 했습니다. 오늘 세계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의 우정이 강원도의 추위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리라 믿습니다.〉
(2018년 2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의 평창 동계올림픽 리셉션 연설 중)
▲1979년 5월 17일 자 이범석 대사의 보고. 북한이 인도받기를 원하는 대상자 이름 중에 ‘신영복’이 보인다.
1978년 12월 인도 뉴델리, 북한 측 대표단이 입을 열었다.
“이 회담은 남선(南鮮·남한-편집자 주) 혁명가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선 인원과의 교환을 위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입장에 있는 남선 측은 재판관인 북선(北鮮·북한-편집자 주)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출생지와 거주지에 관계없이 당연히 이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남선 측은 남선 출신 ‘혁명가’들을 연고자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 가족을 함께 받을 용의가 있다.”
북한이 이토록 애타게 데려가고 싶어 했던 ‘남선 혁명가’는 누구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 동계올림픽 리셉션 환영사에서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라고 밝혀 새삼 조명된 신영복(申榮福·1941~2016) 성공회대 교수다. 이 사실은 2016년 외교부가 ‘베트남 억류공관원 석방교섭 회담(뉴델리 3자회담)’ 외교문서철을 비밀해제하면서 밝혀졌다. 재미(在美)언론인 안치용씨가 이 사실을 최초 보도했던 2016년 7월 당시에는 이 외교문서철이 전문(全文) 공개되어 있었으나, 기자가 2018년 3월 외교부 산하 외교사료관을 방문해 문서를 확인했을 때는 일부 비공개로 전환된 상태였다. 다행히 국가기록원에서 외교부가 비공개 처리한 기록물의 사본을 열람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 억류된 외교관들
/이대용 전 주월공사.
남(南)베트남이 패망한 1975년 4월 30일, 공산화된 베트남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우리 외교관은 9명이었다. 이들 중 최선임자는 이대용(李大鎔) 공사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남베트남 한국대사관 무관(대령)으로 재직하였고 1968년 준장 진급 후 다시 파월(派越)되어 한국대사관 공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6·25 남침 직후 6사단 장교로서 춘천 지역 방어에서 공을 세웠고, 북진 때는 가장 먼저 압록강에 이르러 일시적으로 통일의 기분을 만끽하였던 이다.
북(北)베트남 공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북한은 이들 한국 외교관 9명의 신병(身柄) 인도를 요구하고 나선다. 외교관은 ‘빈 협약’에 의거 면책특권(免責特權)을 가진다. 어떤 형태의 체포 또는 구금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형사재판 면제권을 가진다. 교전(交戰) 당사국 내에 상대국인 적국(敵國) 외교관이 머물러 있어도 제3국을 통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당시 한국은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 측에서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전쟁을 치렀고, 북한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잔류 한국 외교관들을 북한으로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9명의 외교관 중 6명은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퇴거 조치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3명은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사이공에서 계속 억류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이 바로 그들이다. 이 공사와 안 영사는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서 경무관은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 소속 총경으로 대사관 내에서 정보를 다루는 특수 신분이었다. 때문에 북한이 ‘거물급 인사’로 표적 삼아 북송공작(北送工作)을 벌인 것이다.
특히 이대용 공사는 황해도 출신의 현직 외교관이자 6·25 참전 영웅으로서 선전 가치가 매우 컸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은 이 공사를 전향(轉向)시켜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일곱 차례에 걸쳐 신문하며 설득하였다. 북한에 남아 있는 누님과 조카를 들먹이며 회유하는 한편 ‘북반부에서 도망친 도주범’이라며 평양으로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북베트남 특수경찰들도 시시때때로 이 공사를 신문하며 ‘가이따우(改造·사상전향)’하지 않으면 총살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협박했다. 이 공사는 치화형무소의 햇볕도 안 드는 방에 갇혀 78kg이던 몸무게가 46kg이 되도록 인권유린을 당하면서도 끝내 그들이 요구하는 ‘북한 망명 자술서’를 쓰지 않았다.
이대용 공사는 저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외교관을 강제로 납치해 간다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다. 그러나 자의(自意)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불법이 아니다. 내가 자의에 의해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서명한다면, 그것으로 나의 평양행은 합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한 노동당 3호 청사 측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베트남 안닝노이찡(安寧內政·베트남 특수경찰)과 협조하여 나에게 참기 어려운 굶주림, 육체적 고통, 공갈, 협박, 그리고 함정으로 몰아넣는 회유책을 쓸 것이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수도 없이 많이 이루어질 신문에서 어떠한 강압적인 변고가 일어날 것인가? 죽어야 할 시기가 오면 깨끗하게 목숨을 끊어야 한다. 나는 결심을 더 굳게 다졌다.〉
뉴델리 3자회담과 ‘남한 출신 혁명가’
▲이대용 공사 송환을 위한 남북대화 때 우리 측 수석대표였던 이범석 당시 주인도 대사
한국 정부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이들 억류 공관원을 석방하기 위해 프랑스, 미국, 스웨덴, 유엔 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베트남에서 반응이 왔다. 주(駐)베트남 프랑스 대사가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고위층 인사에게 한국 외교관 석방을 권유하자 “북한이 한국 공관원 석방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조치와 계기 없이는 석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우선 목표는 억류 공관원들의 조기(早期) 석방”이라는 지침을 주었다. 프랑스의 중개로 한국에 억류 중인 북한 간첩들과 우리 공관원들의 교환 교섭을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다. 1978년 극비리에 진행된 ‘베트남 억류 공관원 석방 교섭을 위한 뉴델리 3자회담’이 그것이다.
우리 정부는 3자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치화형무소에 갇혀 있는 이대용 공사에게 이순흥 베트남 교민회장을 통로로 외무부 장관 훈령을 전달한다. “현재 억류된 3명의 외교관 석방을 위해 한국, 북베트남 공산 정부, 북한이 3자회담을 하고 있으며 본인 의사에 반해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북한 요원의 협박과 공갈에 겁내지 말고 버텨라”는 내용이었다.
1978년 7월 24일 막을 연 3자회담 본회담에서 우리 정부는 이범석(李範錫·외무부 장관·대통령비서실장 역임. 아웅산사태 때 순국) 인도 대사가 수석으로, 하태준 중앙정보부 제1차장보와 공로명(孔魯明·외무부 장관 역임) 외무부 아주국장, 송한호(宋漢虎·통일원 차관 역임) 중앙정보부 아주국장이 대표로 나섰다. 북한 측은 조명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수석대표로 박영수, 한영국, 김완수 등이 대표로 참석했다. 북측 대표로 참석한 박영수는 억류된 이대용 공사를 찾아가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회유, 협박, 신문했던 사람이다.
간첩보다 ‘남한혁명가’ 더 중시
▲1978년 11월 17일 이범석 대사의 보고. 북한 측이 ‘수령님의 명령’ 운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한국과 북한,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3자 비밀협상은 사실상 한국과 북한의 양자(兩者) 대화로 진행됐다. 회담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남한에서 복역 중인 북한 간첩’들과 베트남에 억류된 공관원들의 교환으로 이해하고 회담에 나섰던 우리 측에 북한이 ‘체포 구금된 남조선 혁명가들’로 교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 실랑이가 시작됐다. 교환 비율에 있어서도 우리 정부는 1대 1을, 북한은 1대 70을 요구하고 나섰다. 무려 4개월여의 논쟁 끝에야 비로소 억류 외교관 1명당 7명, 총 21명을 북한에 인도하기로 합의했다.
교환 비율 합의 과정에서 이범석 대사가 서울에 보낸 긴급 전보에는 중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교환 비율의 타결이 임박했던 1978년 11월 17일, 조남일 북측 수석의 요청으로 이 대사가 개별접촉을 갖는다. 조 수석은 북한이 제시한 1대 7 타결안을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까 안달하는 모양새로 이런 말을 덧붙인다.
“1대 7이 사실은 김일성 수령의 명령이다. 우리들 체제상 ‘수령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은 남측도 잘 알지 않는가?”
이 3자회담에 김일성이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다음엔 북한에 인도할 21명의 명단 선정이 쟁점이 되었다. 우리는 북측에 인도받길 원하는 21명의 명단을 일괄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北)은 1차 회의에 1명, 2차 회의에 1명 등 산발적으로 이름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가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람”이라고 답하면 사형 집행 증거를 제시하라는 등 무리한 주장을 계속했다. 우리 측 대표가 “더 이상 개별 확인은 없다”며 명단의 일괄 제시를 강력하게 요구하자 3차 회의에서 7명, 4차 회의에서 12명, 총 21명(1~4차)의 명단을 전달해 왔다.
북한이 제시한 21명을 확인해 보니 사형이 집행된 자가 13명, 무기수(無期囚) 7명, 유기수(有期囚) 1명이었다. 살아서 복역 중인 8명은 모두 남한 출신이었다. 복역 중인 8명 중 3명이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남한 내 지하당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었다. 우리 대표는 “북괴 측은 우리의 회담 진전을 위한 성의를 역이용, 이 회담을 대남(對南) 간첩의 재고조사를 위한 기회로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편 교환 대상에 남한 출신은 포함될 수 없으며 남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도 넘겨줄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유지했다. “억류 인원의 교환 결과로 말미암아 비인도적 결과, 즉 이산가족 발생이라는 비극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측 대표가 북한 출신 남파간첩 및 재일교포 출신 중형자(重刑者)들의 명단 제시를 권하자 북측은 “필요치 않다”며 남한 출신 복역자의 인도를 다음과 같이 끈질기게 고집했다. 이는 북한 정권이 남파간첩이나 재일교포 간첩보다는 남한 내의 김일성 추종자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北, “가족도 함께 받을 용의 있다”
〈“남한 출신 혁명가는 정말로 넘겨줄 수 없는가? 남한 출신 혁명가를 남한 내 가족문제로 인하여 넘겨주기가 곤란하다면 가족과 함께 넘겨주면 어떤가? 이 경우 그 가족도 21명 속에 계산할 용의가 있다.”(1978년 12월 4일 1차 회의)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한다면 회담이 성립될 수 없다.”(1978년 12월 8일 3차 회의)
“이 회담은 ‘남선 혁명가’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선 인원과의 교환을 위한 것으로서 ‘남선 혁명가’ 중에는 남한 출신자가 당연히 포함된다. 남한 출신자를 인도할 수 없는 입장이 진정 강하다면 이 회담은 결렬될 수밖에 없다.”(1978년 12월 11일 4차 회의)
“남한 출신자는 진정 인도가 불가한 것인가? 그렇다면 회담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형편이라면 월남(북베트남 공산 정부)을 시켜 회담을 그만두도록 할 수밖에 없다.”(1978년 12월 15일 6차 회의)
“억류 인원의 교환에 있어 요청자의 의사에 따라 인원을 넘겨준다는 것은 국제관례에 비추어서도 당연한 것이다. 피고인의 입장에 있는 남선 측은 재판관인 북선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출생지와 거주지에 관계없이 당연히 이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1978년 12월 16일 7차 회의)
“21명 중 기(旣) 사형 집행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있으나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러나 현재 살아 있는 8명에 대해서는 어떤 성의를 보여주어야 다음 명단 토의에 들어갈 수 있을 것 아니냐?”(1978년 12월 21일 양측 대표 개별접촉)
“살아 있다고 한 8명에 대해서는 이들을 전원 인도해 주고 기 사형 집행된 자에 대해서는 믿을 수 있도록 납득시켜 주어야 다음 명단 토의에 들어갈 수 있다.”(1978년 12월 26일 양측 대표 개별접촉)
“남선 측은 남선 출신 ‘혁명가’들을 연고자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 가족을 함께 받을 용의가 있다고 시사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천명코자 한다.”(1978년 12월 28일 남북 대표 4자회담)〉
북한이 간절하게 데려가고 싶어 했던 사람, 신영복
북한 대표들이 집요하게 ‘남한 출신 혁명가’를 인도해 달라고 주장하는 강도(强度)로 미뤄 교환 비율 합의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직접 관심사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산가족 발생이 우려된다면 “가족과 함께 넘겨주면 어떤가”라고까지 물고 늘어진다. 심지어 “이 회담을 통해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 동(同) 사실을 월남에 통보해 주면 월남은 억류하고 있는 남한 외교관 3명을 월남법에 따라 재판해 사형을 집행하고 그 사실을 신문에 공포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우리 정부는 자국민 보호 원칙을 내세우는 한편, “북괴 측이 남한에 본적을 두고 있는 자들의 인도를 통하여 남한에도 자생 혁명가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 가족까지 데려가려는 의도는 가족을 인질로 하여 재차 남파시킬 것과 가족들이 대한민국에 염증을 느껴 북으로 왔다고 국내외 모략 선전에 이용할 것으로 사료되므로 인도 불가”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우리 정부는 북한 출신으로 구성된 21명의 자체 명단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북측은 이어 우리가 제시하는 북한 출신 10명, 북한이 제시하는 남한 출신 11명으로 명단을 확정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북한이 제시한 남한 출신 11명이 진정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최후의 최후까지 간절하게 원하던 사람들 중에 바로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던 신영복이 있다. 신영복의 이름은 3차 회의에서 북한이 제시한 7명 명단에 처음 등장한다. 북측은 “신영복은 독신자로 이산가족이 생기는 ‘비인도적 결과’가 초래하지 않는다”며 끈질기게 인도를 요구했다.
당시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 관련 반(反)국가 단체인 ‘민족해방전선’ 결성 모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당(地下黨) 조직으로서 북한 노동당의 지령과 공작금으로 운영됐으며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 요인암살·정부전복을 하려다가 일망타진되었다.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로서 김질락 등 통혁당 사건의 핵심 인물들과 자주 만나 지시를 받고 청년들을 포섭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서울(외무부)에서 회담 대표자들에게 보낸 ‘북한 요구 교환 대상자에 대한 인적사항’ 자료에는 신영복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남한 출신 무기수, 재북 가족 없음, 1968년 8월 16일 간첩죄 등으로 검거, 형 인도일 1970년 4월 30일, 전향일 1970년 12월 21일, 근면 성실.〉
서울에선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린다.
“북괴 측이 요구한 이○○, 신영복은 이북에 연고자가 없으며 검거 후 조기에 사상 전향하여 남한 내 가족들과 긴밀히 접촉을 지속하고 있으므로 ‘출신지에 관계없이 전향한 좌익수를 본인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지난 훈령에 준하여 절대 인도 불가하다.”
이어 남한 출신 전향 좌익수의 인도문제에 대해 “출신지가 남북한 어디이든 간에 기히 전향한 좌익수를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국가의 자국민 보호원칙, 우리의 반공정책,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절대 불가하며, 대상자의 전향 여부도 밝히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시하고 있다.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북한 관계 급랭(急冷)
시간낭비만 하며 이견(異見)이 좁혀지지 않는 회담만 계속되던 1978년 12월부터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북한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우리 측 수석대표 이범석 주(駐)인도 대사가 응우옌 반 신(Nguyen Van Sinh) 인도 주재 베트남 대사와 비공식 개별 접촉을 해보니 초기 베트남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트남 대사는 개인 의견을 전제로 “베트남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이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억류하고 있는 3명의 한국 인사를 북한에 인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다. 이어 북한 측이 남한 측에 한, “남한 외교관 3명을 월남법에 따라 재판해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위협 발언에 냉소적 논평을 한다.
“하노이 정부가 나와는 별도로 조명일과 직접 통신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본국 정부로부터 그런 훈령을 받은 바도 없고 사람을 죽임으로써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이 월맹 정부의 방침이다.”
1979년 1월 12일 자 《로동신문》은 사설에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관련하여 “월남이 캄푸차(캄보디아)의 독립과 주권을 유린했다. 월남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월남의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인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신용추락”이라고 비난했다. 양측 관계가 급랭(急冷)하기 시작한 것이다. 3자회담에 대표로 참석했던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 변화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79년 3월 19일 이범석 대사와 신 베트남 대사의 접촉에서 이 대사가 북한이 교환 대상자 명단 접수를 거부하고 있어 회담의 진전을 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베트남이 중간 역할을 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베트남 대사는 “현재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는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는 말을 했다. 그 전날의 접촉에서도 신 대사는, 이범석 대사가 “인도차이나 정세가 많이 변화된 이때, 하노이 정부가 이 문제를 재평가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고 묻자 “아직까지 그런 시사를 받은 적은 없으나 북한 태도에 베트남이 불유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덧붙였던 것도 주목되는 일이었다.〉
회담 결렬
이 무렵 3자회담에 임하고 있던 한국 대표단에 상부로부터 특별훈령이 하달됐다.
〈가. 현재 진행 중인 회담은 적절한 명분을 내세워 모양 좋게 즉시 결렬시킬 것. 결렬 이유는 억류 중인 우리 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기 때문임.
나. 향후 북괴 측에서 회담 계속을 종용하는 태도로 나오더라도 북괴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명분을 내세워 회담을 결렬시키고 이를 정식으로 북괴 측에 최후 통첩할 것.
다. 회담 결렬 직후 월남 측에 대해 북괴의 무성의한 태도 및 비인간적 처사로 인하여 북괴와의 회담 지속은 무의미하며 시간낭비이므로 부득이 회담이 결렬됐음을 정식으로 통고할 것.
라. 동 회담 결렬 사실을 인도 정부 측에도 적절히 통보하되 결렬 책임이 북한 측에 있다는 점을 설명해 둘 것.〉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억류 외교관 3명을 자력(自力)으로 구출할 수 있으니 회담을 결렬시키라는 지시였다. 이범석 대사는 훈령에 따라 1979년 5월 23일 남북한 비공식 회담에서 회담 종결을 선언했다. 북한 수석대표 조명일은 “한국 측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회담을 깨버릴 생각이 없다”고 매달렸지만 이 대사는 회담 종료 후 신 베트남 대사를 만나 남북한 회담 종결을 통보했다. 교환 비율 결정에 4개월, 명단 선정에 7개월. 근 일 년의 지루한 공방에서 ‘남한 출신 혁명가’를 고집하던 북한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자국민 북송은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기에 신영복씨는 한국에서 여생(餘生)을 보낼 수 있었고 여러 권의 책을 썼으며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10·26으로 중단되었다가 성공
▲이대용 공사를 회유·협박해 북으로 데려가려 했던 북한의 박영수.
우리 정부는 3자회담 진행 중에도 억류 공관원들의 석방을 위해 우방국들의 협력을 모색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3명의 억류 공관원들을 살려내라”는 지시를 받은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외교 공관망과는 별도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1979년 초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던 독일 출생의 유대인 상인 사울 아이젠버그가 등장하였다. 그가 “이대용 공사 등 3명의 한국 외교관을 서울에 데려올 수 있다”고 장담하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접근해 왔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무역상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며 턴 키 베이스의 기간산업 건설과 이에 따른 외자(外資) 알선으로 떼돈을 벌었다. 1969년에는 한국 정부 고위층에 캐나다의 중수로(重水爐) 원자로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재규 부장은 즉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외교관들을 데려올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3자회담을 뒤엎었다. 특별훈령 중 “억류 중인 우리 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다”는 대목이 바로 아이젠버그를 이용한 방안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이종찬(李鍾贊·국가정보원장 역임) 국제정보국 과장에게 아이젠버그를 통한 억류 외교관 3명의 송환을 일임한다. 김 부장이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는 비밀 임무였다. 순조롭게 송환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 아침, 태국 주재 한국 대사가 외무부로 급전(急電)을 보냈다.
“ESCAP 총회 도중 구엔 코 탁 베트남 외교담당 국무상을 만났는데 그가 억류 공관원 송환에 대해 ‘아이젠버그를 통해 연락해 주겠다. 시간문제이니 최대한 보안에 유의해 달라’고 했다”는 전문(電文)이었다. 이는 즉시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됐지만 그날 밤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서거했고 김 부장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2012년 5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10·26사태 후 중정(中情)이 추진하던 기존의 사업들은 사실상 마비됐다. 나는 구출 공작건(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2·12사태 후 사태가 안정을 찾기를 기다려 12월 말, 나는 보안사로 찾아가 전(全) 사령관 면담을 신청했다. 전 사령관은 17년 만에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간의 억류 외교관 구출 공작에 대해 설명하고, 그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김재규를 만나 관련 서류를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사령관은 김재규와의 만남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연금(軟禁) 중이던 김재규의 비서실장 김갑수 장군이 보관하고 있던 관련 서류를 입수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은 5년여의 수감생활 끝에 석방되어, 1980년 4월 12일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스웨덴 외무부 차관 라이프란드와 외무부 비서실장 넬슨이 이(李) 공사 일행을 인수하였고, 아이젠버그의 하노이 지사장 그윌크맨이 구출 공작의 실무를 맡았다고 한다.
“통일혁명당은 없었다”는 신영복
북한의 강력한 희망을 한국 측이 받아들였다면 여생을 북한에서 보낼 수도 있었던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아 복역한 지 20년 만인 1988년 8월 14일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 중 한 사람인 김질락은 처형되기 전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이라는 옥중 수기를 남겼는데, 여기에 신영복을 어떻게 포섭했고 신영복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자세히 썼다.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우리 집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중위 신영복은 이미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교양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들의 인품과 사고의 특수성을 간파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다. 적어도 이들 두 사람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ABC를 알고 있었고, 자진해서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왔다. (중략) 나는 그들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종태 삼촌으로부터 불온문서를 받아 신영복에게는 〈청춘의 노래〉, 이진영에게는 〈제야의 종소리〉를 주며 읽어보라 했다.〉
〈신영복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기독교 학생단체인 CCC 내의 경제복지회와 서울상과대학 내의 경우회에 관련하고 있었고, 구성원의 대개가 이화여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여학생 서클을 하나 지도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기존 서클에 당원을 침투시킨다는 지하당 조직방법은 신영복에게 있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신영복을 향해 조직을 함에 있어서 너무 덤벼서는 안 된다고 수차에 걸쳐 당부했다.〉
출소 이후 신영복은 각종 인터뷰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1989년 1월 김정수 신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학생운동) 과정에서 여러 선후배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는데, 대학 선배이고 또 《청맥》이라는 잡지사를 경영하고 있던 김질락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발표되면서 다른 사람들 이름도 알게 되고 제가 관여하고 있던 학생 서클이라든가 학생운동 전체가 통혁당의 이름 밑에 전부 망라되어서 커다란 피라미드의 하부를 이루는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저도 그 피라미드의 메커니즘 속에 일정한 자리를 찾아 도표에 올라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확실한 자료로서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문제 제기를 시작한다.
이후 1992년 10~11월 정운영씨와의 대담에서는 “《청맥》지 편집을 맡고 있던 김질락과의 인연으로 집필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학생 서클 운동에 열심이었던 때라 기관지나 교재 편집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청맥》의 편집에 관여해 서클의 교재로 이용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맥》에 글을 쓴 적은 없지만 김질락 선배와 잡지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 논의를 많이 했고 이 과정에서 법률적 용어로 포섭당하게 된 셈”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발전한다. 포섭 자체가 공안당국의 누명이라는 뉘앙스다. “통일혁명당은 조선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는 발언도 덧붙인다.
사상 전향 부인
《인물과 사상》 2007년 11월 호에 실린 인터뷰에서는 더 대담해진다. 아예 통일혁명당이 만들어졌고 주요 간부라는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제가 학생 서클 운동의 1세대입니다. 사실, 당시엔 통일혁명당이란 게 없었어요. 감옥에 들어간 후에 만들어졌다는 걸 들었죠. 아무튼 감옥에 가게 되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줄 전혀 몰랐죠. (중략)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서울대 학생 서클 간부 하나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해요.”
이런 신씨의 주장은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좌파 진영 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2015년 5월 9일 자 《한겨레》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는 기자가 이렇게 단정해 쓰고 있다.
〈스물일곱의 신영복은 육군 중위로,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1968년 8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그는 ‘간첩’이 되었다. 대학의 독서회와 연합 서클 세미나를 지도한 이력이 ‘반국가단체구성죄’로 ‘구성’되었다.〉
1970년 9월 안양교도소에서 신영복이 전향서를 쓴 것에 대해서는 이런 면죄부를 준다.
“교도소 당국은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전향을 했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가족들도 통혁당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도 전향서에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인적사항을 적고,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전향의 변’ 난을 메워 전향서를 작성했다.”(한홍구, 《신영복의 60년을 돌아본다》 중)
신영복씨는 1998년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물론 사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밖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가족들이 그게 좋겠다고 권해서 한 겁니다. 전향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사상 전향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
신영복씨는 옥중에서 쓴 서신 모음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일약 ‘스타 교수’ 반열에 올랐고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이름났지만 근래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로 더 유명하다. 문 대통령이 2월 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을 앞두고 열린 리셉션 행사에서 한 발언은 신씨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인용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 북한의 김영남, 김여정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신영복 교수의 서화(書畵)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고, 각 비서관실에 신영복 교수가 쓴 춘풍추상 액자를 선물해 걸도록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사람이 먼저다’ 슬로건은 신영복 글씨체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관저에 걸려 있다고 알려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 족자도 신영복씨의 친필이다.
문재인 대통령(당시 민주당 전 대표)은 2017년 1월 신영복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신 선생은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라는 당명(黨名)을 주고 가셨다. 선생의 ‘더불어숲’에서 온 말이다. 여럿이 더불어 함께하면 강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많은 촛불이 모이니 세상을 바꾸는 도도한 힘이 됐다. 촛불과 함께 더불어 정권을 교체하고 내년 2주기 추도식 때는 선생이 강조하신 더불어숲이 이뤄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영복을 사상가로 존경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사상은 이처럼 구체적 행동이나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영복의 사상이 김일성주의라는 점은 확정된 재판으로, 그리고 그를 이대용 공사와 맞바꿔 데려가려고 그토록 집착하였던 김일성 정권의 행태로 뒷받침된다. 좌파 정권 시절에도 신영복은 재심 신청을 하지 않았고 과거사 조사 항목에서도 통혁당 사건은 빠졌다. 평양엔 통일혁명당의 주범으로 사형된 김종태의 이름을 딴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이 있다. 남북한 정권의 수뇌부가 통일혁명당의 핵심 인물들을 같이 존경하고 있는 셈이다.⊙
월간조선 05월 호 글 : 최우석 기자 글 : 김성훈 기자
■1987년 외교문서로 본 南과 北 - 북한 87년 대선 40여 일 앞두고,
“노태우가 될 것 같지만 혹 김대중이 되더라도 큰 기대 안 한다”고 말해
⊙ 노태우 당선이 확실해서?… 북한은 왜 87년 대선 직전 KAL기 폭파사건 일으켰나
⊙ 제3 땅굴 건설에 조언한 일본 건설업체 대표 하야시 데쓰(林哲)는 누구?
⊙ 일본 정부가 앞장서 자국의 건설업체 대표가 방북, 땅굴 건설에 조언하게 한 이유
⊙ 현재 북한의 땅굴 기술은 전시 민간 전투지휘소까지 모두 지하에 건설했을 정도로 발달
1987년 6월 27일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대표가 직선제를 하자고 하면 그걸 수용하는 담화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29일 ‘독자적인 구상’인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온 노태우의 선언에 국민은 깜짝 놀랐다.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국민 기본권 신장 등을 대통령께 건의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것을 ‘5공 정부의 대(對)국민 항복’으로 받아들였고, 전국은 일시에 축제 분위기가 됐다. 6·29선언은 6월 항쟁의 소중한 결과물이자 ‘87년 체제’로 알려진 대한민국 민주화의 기점이기도 했다. 이로부터 권위주의 청산이 시작됐고 시민사회가 성장했다.
여야 합의로 마련된 새 헌법은 10월 27일의 국민투표(제9차 대한민국 헌법 개정을 위해 찬반 직접투표)에서 93.1%의 지지로 확정됐다. 대통령 선거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했다. 선거일은 12월 16일이었다. 6년 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현실에 국민은 환호했다.
87년 11월 7일 일본으로부터 날아온 대외비 문건
1▲987년 11월 7일 《요미우리》 방북 관련 주일대사 보고 문서. 1987년 대선에 대한 장웅 당시 올림픽 사무국장 등 북측 인사들의 의견이 담겨 있다.
대선을 40여 일 앞둔 시점인 11월 7일 이규호 주일대사(제8회)는 최광수 외교부(당시 외무부) 장관에게 대외비 보고 문건을 보냈다.
제목은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북한 방문 관련’이었다. 문건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겼다. 1987년 대선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선이었다. 1874년 창간한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 최대 일간지로 하루 1300만 부 이상을 발행한다. 2015년에는 지령 5만 호를 돌파했다.
다음은 문건의 내용이다.
<《요미우리》 외신 면에 3회에 걸쳐 게재될 취재 내용이다. 《요미우리》(기자)의 북한 체류 중 주요 접촉인물은 장웅 올림픽 사무국장, 한득보 사회과학원 연구사 및 조선 국제여행사의 김 과장 등 3명이었다. (《요미우리》는) 한국 대통령 선거 전망에 대해 물었으나, 대답은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고, 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남조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함.>
당시 올림픽 사무국장이었던 장웅은 현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IOC 총회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 IOC 위원으로 선출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야당 대표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4자회담을 갖고 있는 모습. 사진=조선DB
북한은 1987년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승리한다고 거의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당시 민주화 열풍 속에 국민은 야당 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분열 때문에 결국 여당 대통령이 당선되고 말았다. 선거 결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36.6%로 당선됐고 김영삼(28%), 김대중(27.1%), 김종필(8.1%) 순으로 득표율을 기록했었다. 양 김의 표를 합하면 노태우 후보보다 416만 표가 많았다.
북한이 “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남조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고 말은 했지만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보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KAL기 폭파사건이다. 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오던 KAL858기가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공작원들에 의해 공중 폭발, 탑승객 115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위대한 보통사람, 믿어주세요”를 외친 노태우 후보가 승리한 데에는 3김의 분열도 있었지만, 이 사건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노 후보를 당선시킨 것은 5김(3김과 KAL기 폭파범 김승일·김현희)”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1997년 김대중 후보는 4번째 도전만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71년 대선 첫 도전 이후 26년 만에 이룬 꿈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김정일과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만약 1987년에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면 남북정상회담 시기는 앞당겨졌을까. 북한이 했던 행동으로 봐서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소련 출신 김정일 백두혈통 만들기
▲1987년 11월 7일 《요미우리》 방북 관련 주일대사 보고 문서. 금강산댐 건설 관련, 김정일 우상화 작업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북한 방문 관련’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금강산댐은 계획은 끝났으나 물자 부족으로 본격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음. 요미우리 취재로는 평양시내 건설에만 시멘트 약 200만 톤, 철근 24만 톤(1개월 1만 톤)이 소요돼 물자 부족을 겪고 있음.>
1986년 10월 당시 5공 정권은 “북한이 서울의 3분의 1을 삽시간에 물바다로 만들 수 있는 최대 저수능력 200억 톤 규모의 금강산댐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그 댐을 터뜨리면 여의도 63빌딩 허리까지 물이 차고 국회의사당은 지붕만 보일 것이다.”
북한 수공(水攻)에 대응할 댐 건설을 위한 대대적인 성금 모금이 시작됐다. 총 모금액은 661억원. 평화의 댐은 1년 만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북한은 금강산댐 공사를 중단했다. 수공 위협설은 ‘정권 후반기에 시국안정과 국면전환을 위해 조작한 것’으로 결론 났다.
이런 내용도 있었다.
<백두산 쪽 동쪽 두만강변의 무포가 김정일의 어린 시절 낚시를 하던 곳으로 성역화되고 있음.>
북한은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일성 일가를 ‘백두산 혈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 백두산은 신성(神聖)의 영역이다. 이를 위해 김씨 일가는 백두산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거짓 선전을 해오고 있다.
김정일은 지난 72년 5월 자신의 출생지가 백두산이라고 말하면서 자칭 ‘백두산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간부들과 백두산 산행을 했다고 주장한 김정일은 이렇게 말했다.
“백두산은 수령님의 혁명역사와 더불어 빛나는 혁명의 성산이며 나의 고향입니다. 나는 백두산의 아들입니다.”
김정일은 지난 42년 2월 소련 하바롭스크 인근 병영 브야츠크에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 이름도 소련식의 ‘유라’였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82년부터 출생지를 백두산으로 조작, 이를 사실화하기 위해 현지를 우상 성역화해 주민들과 방북 인사들의 필수 참관 코스로까지 지정했다.
북한은 그 후계자 김정은에 대해서도 “김 대장은 백두혈통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김정은의 어머니는 재일교포 출신이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은 김일성과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을 정도로 ‘백두혈통’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3 땅굴 건설에 조언한 하야시 데쓰는 누구?
앞선 내용이 담긴 문건은 지난 3월 30일 외교부가 공개한 1987년 비밀 해제 외교 문서(모두 1420권 23만여 쪽) 중 하나다. 정부는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심의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23만 쪽의 외교 문서 중 총 4권으로 구성된 ‘일본·북한 관계’ 문서에는 앞서 공개한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북한 방문 관련’ 제목의 문건이 담겼는데, 이외에도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북한이 1983년에 일본 기술자를 초청해 땅굴과 관련한 조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 건설업자가 직접 땅굴을 둘러보며 자문까지 해줬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북한 관계’ 문서 내 ‘북한방문자 특이진술내용 보고’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1948년 11월 14일생인 하야시 데쓰(林哲)는 1983년 7월 일본 건설성의 요청으로 토목건축기술 심포지엄 참석차 북한을 방문했다. 심포지엄 후 북한 측 요청에 의해 판문점 부근에 있는 북한 측 땅굴을 시찰했다. 하야시는 “북측 땅굴 매몰 작업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점 및 주변 지반 변화에 따른 문제점 등에 대한 추가적인 자문 요청에 따른 시찰이었다”고 밝혔다.
‘북한방문자 특이진술내용 보고’에는 하야시의 2박 3일간의 북한 방문 일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7월 10일(83년)
04:00경: 일본 해상 보안부 소속으로 보이는 선박으로 일본 니이가다(니가타) 항 출발
18:00경: 원산항 도착
◆7월 11일
승용차로 평양 도착→토목 건축 기술 심포지엄 참석(주제: 토목적인 특수기술 및 특수기계의 소개, 참석인원: 일본 측 8명, 북한 측 25명)
◆7월 12일
오전: 상기, 심포지엄 중 북한 측 요청에 의거, 판문점 부근에 있는 북한 측 땅굴 시찰(북측 땅굴 매몰 작업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점 및 주변 지반 변화에 따른 문제점 등에 대하여 추가로 자문요청에 따른 시찰)
저녁: 원산항 출발
◆7월 13일
오전: 일본 니이가다 항 도착>
이 같은 사실은 1987년 12월 하야시의 한국 비자 신청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하야시는 관광비자로 한국을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일본 해상보안부 소속으로 보이는 선박을 타고 방북한 이유와 북한 땅굴에 대해 어떤 자문을 했느냐는 우리 측 질문에 “일본 건설성에 문의하라”며 침묵했다.
하야시가 시찰한 것으로 보이는 판문점 부근 땅굴은 ‘제3 땅굴’일 가능성이 있다. 제3 땅굴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해 판 땅굴이다. 1978년에 발견됐으며 폭 2m, 높이 2m에 총 길이 1635m다. 한 시간 안에 북한 병력 3만명이 이동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현재까지 발견된 북한의 대남 침투용 땅굴은 총 4개로 1974년 11월 발견된 제1 땅굴은 경기도 연천군 비무장지대 내에 있으며, 1시간에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이동할 수 있다. 1975년 3월 발견된 제2 땅굴은 강원도 철원군에 있다. 1973년 11월,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 2명은 지하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나는 수상한 폭음을 듣고 상부에 보고했다. 우리 군은 ‘폭음청취반’을 편성해 폭음의 원인을 밝히는 조사에 나섰다. 이어 북한이 땅굴을 팠다는 탈북자 증언까지 나오자 1974년 11월 본격적인 지하수색을 시행해, 마침내 제2 땅굴을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설치한 지뢰와 폭탄에 의해 수색대원 8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제2 땅굴은 총 길이 3.5km에 높이 2m, 폭 2.1m 규모다. 한 시간에 최대 2만4000명의 무장병력이 침투할 수 있고, 탱크까지 통과할 수 있는 크기다. 제4 땅굴은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 동북방 26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됐다. 이후 현재까지 땅굴 발견 사례는 없다.
결론적으로 보고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일본 해상 보안부 소속으로 보이는 배를 타고 북한에 방문한 일본인 건설자 하야시 데쓰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해 판 제3 땅굴을 시찰하며 자문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야시가 ‘북한 땅굴에 대해 어떤 자문을 했느냐’는 우리 측 질문에 “일본 건설성에 문의하라”고 답한 것을 봤을 때 하야시의 방북은 일본 정부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
당시 북·일 관계 살펴보니
북·일 관계의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박창건 국민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국민대 일본학연구소 부소장)가 쓴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북·일 관계의 변화’의 일부분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북·일 관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동아시아 냉전구조의 핵심을 이루었던 미·중 관계에 실질적 변화에 의한 ‘데탕트’가 도래하면서부터이다. 이는 1973년 5월 4일 미국 닉슨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외교교서’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동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은 냉전체제로부터 공동이 책임을 부담하는 다극화 체제로 세계질서 전환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이념적 차원보다 실질적 차원에서 외교정책을 재평가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대(對)중국외교에 있어서 역사적인 제휴(association)를 통해 과단성 있는 정책적 공조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동시에,
세심한 주의와 신뢰를 지적했다(외교통상부(2005)). 이러한 상황적 변화를 이용하여, 1970년 8월 일본 사회당은 나리다 도모미(成田知巳) 위원장을 단장으로 북한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노동당과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의 요지는 미 제국주의와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재침략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일본과 북한 인민의 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 사회당 대표단은 일본 군국주의자가 미 제국주의와 공모 결탁하여 남한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 침투를 강화하는 것을 강력히 규탄했다. 또 일본 정부는 한일조약을 폐기하고 북한에 대한 적시정책을 중지하며 북·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북한 노동당은 일본 사회당이 미·일 안보조약 폐기, 미 군사기지 철거, 오키나와(沖繩)의 즉시 무조건적인 전면 반환, 일본 제국주의의 파쇼화 반대 및 평화헌법의 고수 주장 등을 통해 아시아의 평화 확립을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은 당 대(對) 당의 비공식 접촉은 대일관계에서 북한 측 교섭 외교의 형태를 변화하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예컨대 김일성은 1971년 9월 《아사히 신문》 고토모토(後藤基夫) 편집국장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과의 국교를 수립하기 이전에도 가능한 범위에서 기자, 기술자 등의 왕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경제 및 문화 교류 활동을 전개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는 전향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1972년 1월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북일 교섭의 전제조건으로 내걸던 한일기본조약 파기에 대해 북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 남한과 맺은 기본조약이 자연히 소멸할 것이라며 일본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월간 《북한》 1983년 9월호에 실린 성황용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일본이 보는 북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아베(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아버지) 외상은 2월 중의원에서, 그리고 3월 중의원에서의 발언을 통해 “일본은 북한과 민간급의 교류를 확대해 나갈 것이며 남북대화의 환경 조성을 위해 계속 그 교류의 폭을 넓혀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중략) 이를 뒷받침하듯 5월 동경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법률자문회의에 북한 대표를 초청하였고, 리셉션장에서 아베 외상이 북한 대표를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특별한 호의를 보여주어 주변의 이목을 끈 바 있다. 뒤이어 지난 6월 28일에는 일·한 우호촉진의원연맹 회장 구노 쥬지(久野忠治) 자민당 소속 의원 일행이 북한의 초청을 받아 7월 6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평양 방문 중 구노 의원 일행은 현준극을 비롯한 북한 당국의 수뇌들과 만나, 일본·북한 간의 무역 촉진을 위한 무역연락소의 설치, 일본·북한 간의 복수의 기자 교환, 항공로의 설치 등으로 민간교류를 적극화시킨다는 데 합의하였다고 나카소네 수상에게 귀국보고를 하였다. 동시에 구노 의원은 북한 측이 82년 6월 말 기간 만료와 함께 자동 실효된 일본·북한 민간어업협정의 재체결 문제에도 응할 의사를 보였다고 밝혔다.>
북한 땅굴 굴착 기술 발달
▲하야시 데쓰가 시찰했을 가능성이 있는 ‘제3땅굴’ 내부. 사진=조선DB
북일 관계와 관련한 여러 논문 및 자료를 분석했을 때 하야시의 방북과 땅굴 자문은 일본이 북한과 민간급의 교류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의 땅굴 기술은 전시 민간 전투지휘소까지 모두 지하에 건설했을 정도로 발달돼 있다. 북한에는 593부대, 667부대, 744부대 등 땅굴을 전문적으로 파는 군부대가 있다.
북한은 자신들의 땅굴 굴착 기술을 미얀마,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 등에 수출하기도 했다. 미얀마 망명 언론들이 노르웨이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버마 민주주의소리(DVB)’ 방송은 지난 2009년 6월 24일 북한이 미얀마가 뚫는 땅굴 작업에 개입한 사실을 보여주는 미얀마 군부의 정보문서와 사진들을 확보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올 초 미국은 제2 한국전쟁에 대비해 ‘땅굴 전투(tunnel warfare)’ 훈련을 대폭 강화했다. 미국 공영라디오 NPR은 2018년 1월 9일 “그동안 미 육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같은 폐쇄적인 환경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1~2개 여단 규모로 땅굴 전투 훈련을 했으나, 북한 위협이 커지면서 참여 여단을 늘렸다”며 “야간 투시경 등 땅굴 작전에 필요한 특수 장비를 추가로 구매하고, 지난 몇 달간 패트리엇 미사일과 정밀 유도 폭탄을 구매했다”고 전했다.⊙
주간조선 [2575호] 2019.09.23
■北 ‘푸에블로호’ 사건 구소련 외교문서 극비해제
▲ 북한 평양 보통강변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푸에블로호. photo AP·뉴시스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당시 북한 내부 사정을 다룬 구(舊)소련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푸에블로호 사건은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보수집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피랍된 사건을 가리킨다. 피랍 과정에서 미 해군 승조원 1명(듀엔 호지스)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푸에블로호의 초대 함장인 로이드 부커 중령 등 82명의 승조원이 북한 당국에 의해 구금됐다. 이들은 같은 해 12월 23일 석방되기까지 구타와 고문 등 11개월간 비인간적인 가혹행위를 당했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만에 발생한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으로 미 해군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필두로 한 항모 3척이 원산 앞바다까지 출격했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비롯해 오키나와(일본에 반환 전)와 괌 등 미군기지에는 공격대기 명령이 내려졌다. 1950년 6·25전쟁 이후 무려 82명의 미군이 북한군에 인질로 생포된 것은 처음으로,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국면이 조성됐다.
주간조선이 입수한 구소련 외교문서는 푸에블로호 승조원의 석방과 본국 송환이 마무리된 직후인 1969년 3월, 푸에블로호가 나포됐던 원산을 방문한 주(駐)북한 소련대사관 외교관(영사국 비서관) 카푸스틴이 같은해 7월 본국에 타전한 ‘원산시 방문 기록 정보문’이란 제목의 비밀문건이다.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51년 만에 국내에 공개된 이 문건은 푸에블로호 피랍을 전후해 소련 외교관에 의해 목격된 북한 내부 사정과 원산 주민들의 생활상 및 심리 상태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문건이 국내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주북한 소련대사관 작성 기밀문건
소련 외교관에 의해 작성된 이 문건은 모두 4부가 만들어져 소련공산당 대외연락부 라흐마닌 제1부부장 등 간부 3명에게 보고됐고, 1부는 보관소 문서철로 들어갔다.
이 문건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립현대사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사람은 러시아 학자인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국민대 선임연구원)박사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문건 작성자인 카푸스틴씨가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했고 통화도 했다”며 “카푸스틴은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러시아를 방문해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립현대사문서보관소를 약 2개월 동안 드나들면서 해당 문건을 찾아내 주간조선에 제공했다. 지난 9월 16일 주간조선과 만난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크렘린궁 인근에 있는 러시아 국립현대사문서보관소는 옛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자료를 보관하는 곳”이라며 “소련 해체와 함께 소련공산당이 망하면서 자료 접근이 다른 기관에 비해 오히려 쉬워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경 기밀해제된 이 문건은 소련 외교관 카푸스틴이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의 하선 과정을 목격한 원산 거주 소련 국적의 고려인 여성 타티야나 리와 안나 송 등을 면담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문건을 작성한 카푸스틴은 “소련 국민 의료지원을 구실로 소련대사관 의무관 케키세프와 함께 원산을 방문했다”고 적고 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북한은 1967년부터 여행증명서 제도가 실시돼 외교관도 지방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며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진 원산을 방문하기 위해 ‘의료지원을 구실로’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기밀문서 공개로 푸에블로호 나포가 북한의 단독행동이었다는 기존 연구에도 힘이 실리게 됐다. 푸에블로호 피랍 직후부터 풀리지 않는 의문은 당시 푸에블로호 나포를 북한이 독자적으로 주도했느냐는 것이다.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 당시 미국의 린든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전(戰)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북한이 해군 함정 6척과 미그기 2대를 동원해 푸에블로호를 공해상에서 나포하자 미국에서 즉각적으로 터져나온 반응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감행한 행동”이란 것이었다.
푸에블로호 나포 이틀 전, 남한을 상대로 감행한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달리 푸에블로호 나포는 미국의 직접적 반발을 초래할 것이 뻔했다. 북한으로서는 상당한 위험감수를 요하는 작전이었다. 이에 북한의 단독행동은 불가능하고 공산권 차원의 사전공모 내지 역할분담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실제로 푸에블로호 사태로 미국의 시선이 북한으로 돌려진 와중인 1968년 1월 30일 음력설(구정),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이 대대적인 ‘구정공세’를 벌여 미국이 수세에 몰리는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기밀해제된 외교문건의 생산일자와 푸에블로호를 언급하는 비중 등을 근거로 푸에블로호 나포가 북한의 단독행동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대사 이하 외교관들은 매일 정보 보고를 하는데, 푸에블로호가 피랍된 지 1년여 후에야 원산을 찾은 소련 외교관이 당시 사건을 주요 현안처럼 심각하게 보고한다는 것 자체가 사전공모가 없었음을 뜻하는 증거”라고 했다.
▲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선임연구원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구타와 약탈 등 가혹행위 현지 목격
실제로 문건은 “원산에서 살고 있는 조선 사람도 소련 국민도 거의 모든 이야기에서 푸에블로호 사건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한다”는 언급으로 시작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언급한 구소련 외교문서는 아직까지 접해본 적이 없다”며 “북한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소련 측 공식기록을 통해 푸에블로호에 관한 사실이 드러난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기밀해제된 구소련 외교문건을 통해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에 대한 구타와 약탈 등 가혹행위 역시 재차 확인됐다.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에 대한 구타와 약탈 등 가혹행위는 승조원들에 대한 사후 심문과 부커 함장이 1970년에 펴낸 수기(手記)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졌다. 소련 외교관 카푸스틴 역시 당시 푸에블로호 승조원 하선 과정을 실제 목격한 자국민과의 면담을 통해 승조원들에게 가해진 구타와 약탈 등 가혹행위를 본국에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은 뒤로 손이 묶인 채 눈가리개를 쓰고 푸에블로호에서 하선했다. 문건은 “당시에 신문에 나온 사진은 조작에 불과하다”며 “함장(로이드 부커)이 부상을 당해 얼굴과 옷이 피투성이였다”는 소련 국적의 고려인 여성 타티야나 리의 말을 인용해 전한다. 타티야나 리씨는 “많은 사람에게 구타 자국이 있었고, 하선 과정에서 약탈을 당했다”며 “포로들이 차고 있던 시계를 떼내갔고, 주머니를 뒤졌고, 하선 과정에 항의한 일부 승조원을 무리의 눈앞에서 때렸다”고 증언한다.
증언자가 이 과정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푸에블로호 승조원 하선 과정이 현지 주민들에게 공개됐기 때문이다. 문건은 “무리(북한 주민) 대부분, 특히 북한 청년들은 호송병의 행위에 지지를 보였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분노를 표시했다”고 적고 있다. 부커 함장이 훗날 수기에서 밝힌 “이들은 우리가 대기하고 있는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온갖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며 “사전 조직활동이 없었다면 주민들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통지를 받고 저렇게 통제된 광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겠는가”란 하선 과정에 관한 언급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 ‘원산시 방문 기록 정보문’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미군 머리에 담뱃불 비벼 끄자 주민 반발
당시 푸에블로호 승조원에게 가해진 구타와 약탈은 일부 주민들의 반발과 불쾌감을 초래할 정도로 가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건에 따르면, 푸에블로호 승조원 하선 과정을 지켜보던 북한 노인은 포로 호송병 중 하나가 눈가리개가 씌워진 채 호송버스를 기다리는 미군 포로의 머리에 담뱃불을 비벼 끄자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에 북한 군인은 이 노인을 발길질로 차낸 다음에 출발했다고 한다. 타티야나 리씨는 “당시 사건을 본 많은 조선인들은 불쾌한 감정을 받았다”고 소련 외교관에게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타티야나 리가 비록 북한 남성과 결혼한 고려인이지만, 국적이 소련이란 사실이 중요하다”며 “북한 국적이었다면 감히 이런 말을 소련 외교관에게 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푸에블로호 승조원 대부분은 나포된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23일,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거쳐 본국으로 송환된 후에도 고문으로 인한 우울증 및 후유증에 시달렸다. 부커 함장 역시 고문후유증으로 지난 2004년 사망했다.
1968년 1월부터 같은 해 12월 승조원 석방에 이를 때까지 11개월간 푸에블로호가 나포돼 있던 원산시의 북한 주민들이 미군의 폭격 위협에 시달렸던 것도 추가로 밝혀졌다. 푸에블로호가 나포 직후 소련 접경인 나진항으로 잠시 옮겨지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문건은 안나 송이라는 소련 국적자의 말을 인용해 “가장 긴 공습경보는 1968년 11월 1일에 있었다”며 “이날은 도시 전체 인구가 도시에서 밖으로 나가고, 도시 근처에 있는 언덕 속에 숨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전했다.
▲ 평양에 전시된 푸에블로호에 걸려 있는 미군 포로 사진. photo AP·뉴시스
평양의 제너럴셔먼호와 푸에블로호
1968년 나포 직후 줄곧 원산항에 묶여 있던 푸에블로호는 피랍 30년 만인 1998년 말,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으로 옮겨져 대동강변 쑥섬에서 북한 주민들을 비롯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공개됐다. 대동강 쑥섬은 구한말인 1866년,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온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킨 곳이라고 전해진다. 평양감사 박규수의 지휘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신미양요’(1871)의 도화선이 된다.
북한은 이곳에 ‘미제 침략선 셔먼호 격침기념비’란 거대한 비석을 세워두고 제너럴셔먼호 격침이 “애국자인 김응우의 주도로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양 만경대에 살았다는 김응우는 김일성의 증조부이자 김정일의 고조부다. 같은 미국 국적 선박인 제너럴셔먼호와 푸에블로호를 사실상 동격에 놓고 김일성·김정일 일가 우상화와 체제 선전에 활용해온 셈이다.
김정은 집권 후인 2013년부터 푸에블로호는 대동강의 지류인 보통강가에 있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져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평양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은 서울의 용산 전쟁기념관과 유사한 곳으로, 미군과 한국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이 대거 전시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째르치즈스키 박사 역시 지난 2014년 1월, 관광객 신분으로 평양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을 방문해 푸에블로호에 직접 승선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이곳에서 푸에블로호 나포 작전에 참가했다는 박인호 북한 해군 대좌(한국군의 대령과 준장 사이에 해당하는 계급)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관광객 안내를 맡았던 박인호 대좌는 자신이 푸에블로호 나포작전에 참가한 가장 어린 병사였으며 지금은 김정은의 지시로 푸에블로호 안내를 맡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고 말했다.
사실 북한이 애지중지하는 푸에블로호는 고물 화물선을 개조한 배에 불과하다. 냉전 시기 소련 및 공산권 국가를 상대로 한 정보수집 작전인 ‘방아벌레 작전’의 하나로, 퇴역 직전 화물선을 개조해 통신감청 및 정보분석 장치를 싣고 주로 공해상에서 활동했다. 대외적으로는 ‘환경조사선(GER)’으로 위장한 푸에블로호가 피랍 당시 제대로 된 저항이나 도주조차 못하고 나포된 까닭은 ‘공해상’이란 확신과 함께 빈약한 무장과 부실한 성능 탓이 컸다.
고물선인 푸에블로호는 지금도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쓸 수 있는 유력한 카드 중 하나다. 북한 김정은으로서도 푸에블로호의 상징성을 십분 활용해 미국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하는 지렛대로 쓸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다. 재선을 준비 중인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도 언제든지 탐낼 만한 카드다. 최근 경질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역시 지난 5월, “푸에블로호 송환을 논의할 적절한 시기”란 언급을 하기도 했다. 미 하원에도 지난 6월과 7월, 푸에블로호 송환을 촉구하는 2건의 결의안이 발의된 상태다
1960년대 북·소 관계의 실상은
北 “고려인은 소련 간첩” 가족까지 감시
▲ 나탈리아 마트베예바
기밀해제된 구소련 비밀문건 가운데는 1950년대 후반부터 극도로 악화된 북한과 소련 관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문건도 상당수다. 스탈린 사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6년 스탈린을 공개 비판하면서부터 북한과 소련 관계는 ‘수정주의’ 논쟁으로 서서히 악화된다. 같은 해 8월, ‘만주파’의 수장인 김일성을 타도하려 한 ‘8월 종파사건’으로 고려인 중심의 ‘소련파’가 ‘연안파’와 함께 일제히 숙청되면서 북·소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주간조선에 관련 문건을 제공한 나탈리아 마트베예바(영국 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SOAS) 박사과정·북한경제사 전공)씨는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주(駐)북한 소련대사는 알렉산드르 푸자노프였는데 매우 무능한 외교관인 탓에 대사 재임 시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가 사라졌다”며 “1961~1962년부터는 노골적으로 마오쩌둥을 지지하고 내부 자료에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호칭하고 비난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번에 비밀해제된 문건 중에는 1962년 1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창만이 당간부들 앞에서 ‘국제정세’를 강의한 내용도 등장한다. 당시 강의에는 “흐루쇼프가 제국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구걸을 하였다”라는 거친 표현도 등장한다. 김창만은 연안파지만 ‘8월 종파사건’ 때 김일성에 대한 충성맹세로 숙청을 피한 바 있다.
북·소 관계 악화로 북한에 체류 중인 소련 국적 고려인들 역시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북한 소련대사관 1등 서기관 티타렌코는 노동당 정치국원이었던 남일의 부인 마리아 남과의 대화록을 남기면서 “(북한 당국은) 고려인을 ‘소련의 간첩’으로 본다”며 “남일마저 외국 사람과 접촉이 제한되고 공식 대접에 초대장을 받지 못하고 가족이 받는 감시는 강화됐다”라고 마리아 남의 말을 인용해 적었다. 소련 국적의 고려인 출신인 남일은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휴전협정 북측 수석대표를 지냈다.
티타렌코의 기록에 따르면, 남일의 부인 마리아 남은 “저희는 소련으로 출국만을 꿈꾼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대화 당시 마리아 남은 이미 남편 남일과 함께 북한으로 귀화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비록 북한으로 귀화했다고 해도 소련 출신 고려인이란 신분 때문에 노동당 정치국원과 가족마저 감시대상이 된 셈이다. 남일 역시 1976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이 같은 문건을 보면 당시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푸에블로호 나포를 사전공모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틀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