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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다큐5/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 공군첩보대 비화 유일한 女 북파 공작원을 만나다!

상림은내고향 2021. 4. 18. 11:23

비하인드 다큐5/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논픽션 다큐멘터리 -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신동아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  마지막회 휴전선 넘어 고폭실험 확인한 3인의 정보요원

 

오 세 영 
1954년 충남 홍성 출생  
경희대 사학과 졸업 
1993년 역사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글쓰기 시작  
저서 : ‘만파식적’ ‘화랑서유기’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구텐베르크의 조선’ 외

 

2010-04-29  05월 호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 6·25전쟁 발발 60주년, 그 사이 남과 북은 수많은 험난한 사건과 곡절을 넘어서 왔다. 뿌리를 함께하는 한 민족인 동시에 일촉즉발의 대치를 이어가야 하는 상대. 그 세월 동안 남과 북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일부는 그 실체와 함의가 충분히 기록되지 못한 채 쓸쓸히 묻혀갔다. 역사의 이면에 남아 있는 이들 사건을 논픽션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정리한 역사작가 오세영의 연재를 시작하는 것은, 이 작업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나갈 남북관계의 길에 필요한 새로운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작가는 해당 사건들의 관련 자료를 찾고 흩어진 기록을 모아 사실을 확인했고, 일부 자료가 부족한 부분은 객관적 정황을 유추했다고 밝혔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소설적 스토리텔링 기법을 일부 사용하기도 했다. 각각의 사건에 담긴 역사적 함의가 작가 특유의 내러티브를 통해 독자에게 더욱 생생히 전달될 것이라 믿는다. <편집자>

▲북파 20여 년 만에 호림부대 생존자들이 국방부로부터 정식으로 동료들의 전사통지서를 받았다고 전한 ‘동아일보’ 1970 725일자. 

 

1949 629.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산자락을 한 무리의 무장군인들이 소리를 죽이고 전진하고 있었다. 250여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인원이다.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꽤나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북한 인민군 복장에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어둠 속을 조심스레 전진하는 사이에 먼동이 텄고 비도 그치면서 산봉우리의 윤곽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산봉이군. 

일행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고산봉은 38선 너머 300m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38선을 넘었다는 말이 된다. 무장군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긴장의 빛이 서렸다.

“정지! 잠시 휴식한다! 

지휘관이 지시를 내리자 38선 이북으로 침투한 무장군인들은 되는대로 주저앉으며 휴식에 들어갔다. 

북파공작원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던 북파공작원들의 실상이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공작원이라면 흔히 북쪽에서 파견한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연상되지만, 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어서 남쪽에서 북파했던 공작원도 상당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실미도 북파 특공대는 청와대 기습을 노리고 남파됐던 북한의 124부대에 대항해 조직된 부대였다.  

북파공작대의 뿌리는 의외로 깊다. 6·25전쟁 중에는 미군 정보기관이 주도한 켈로부대(KLO)와 북한의 반공인사들이 주축이 된 구월산유격대 등이 북한에 침투해 후방을 교란했고, 휴전 후에는 육군첩보부대에서 관할하는 HID가 대북공작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최초의 북파공작대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 629 38선을 넘은 호림부대(虎林部隊). 격전 끝에 대원 대다수를 잃은 채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간 호림부대. 그들은 무엇 때문에 위험한 임무를 띠고 38선을 넘었을까.  

‘너희가 내려오면 우린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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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전쟁의 공식적인 시작은 1950년이지만, 전쟁은 사실상 1949년에 이미 시작됐다. 광복은 분단을 낳았고 남과 북은 끝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1948년에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 이후 남과 북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자주 벌어졌다.  

남한은 북한이 1949 1월부터 10월까지 563회에 걸쳐서 모두 7만명의 병력을 남파시켰다고 발표했다. 그중 4214명을 사살했고 국군은 320명이 전사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북한도 선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같은 기간에 남한이 432회에 걸쳐 49000명을 북파하는 도발을 자행했고, 남한 비행기가 71회나 북한 영공을 침입했으며, 남한의 해군 함정도 42차례에 걸쳐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양쪽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남과 북은 매일 평균 1.5회가량 교전을 벌였고 날마다 3.7명이 전사한 셈이다. 가히 전시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는 상황이었다. 

남과 북은 그렇게 극렬하게 대립했지만 내부 문제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북한은 일사천리로 노동당의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해갔지만 대한민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남로당은 여전히 활개를 쳤고, 군대도 반란에 동조하는 형편이었다. 과연 신생 대한민국은 안팎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을지,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수·순천10·19사건이 진압되면서 사태는 조금씩 수습되기 시작했다. 남로당은 와해됐고 지리산과 태백산 일대에서 준동하던 빨치산도 대부분 토벌됐다. 여기에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도 탄탄해졌다. 신생 대한민국은 한 고비를 넘긴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반대로 주변 정세는 북한에도 고무적이었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밀려나고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배후가 든든해진 것이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핵무기는 이제 더 이상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칼을 뽑으면 휘두르고 싶고, 말을 타면 경마를 잡히고 싶은 법이다. 최악의 상황을 극복한 남과 주변 여건이 유리해진 북은 서로 상대방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자연히 38선에서 충돌이 잦아졌고 규모도 커졌다. 본격적인 충돌은 1948 114 180여 명의 북한 인민유격대가 오대산으로 침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패주 중인 여순반란사건 패잔병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서둘러 남파된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장비도 부실했기 때문에 출동한 군경에 의해 쉽게 토벌됐다.  

그러나 1949년에 접어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북한은 61 400여 명의 대규모 인민유격대를 백두대간을 통해 남파시켰다. 국군 8사단이 급히 출동해서 토벌에 나섰지만 100여 명은 끝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남파 목적은 지역 공비들과 합류해 산간 오지의 주민들을 모아 해방구를 설치하고 장기투쟁을 꾀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소지한 위조지폐는 도시로도 침투해 지하당을 조직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전의 우발적인 충돌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남파였다.

남한 당국을 더욱 긴장시킨 것은 무장유격대의 남파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이었다. 북한은 평양 인근의 강동정치학원에서 월북자들을 대상으로 남파유격대원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너희가 내려오면 우리도 올라간다.’ 남측 군 당국은 북측의 인민유격대에 상응하는 무장유격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속속들이 공개된 창설 소식 

▲1949 8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호림부대 생포대원들에 대한 재판 장면. 북한이 촬영한 필름을 6·25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것이다.

 

호림부대는 서북청년단을 주축으로 국방부 산하 유격부대로 창설됐다. 서북청년단은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월남한 평안도 청년들이 구성한 단체인데, 흔히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을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하는 데서 부대의 명칭을 호림부대로 정했다고 한다.  

호림부대는 1947 7월에 서북청년단 영동지구본부가 중심이 되어 창설한 계림공작대(鷄林工作隊)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부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부 제4국 소속 동해특별대(東海特別隊)로 개편됐다. 사설 군사단체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는 준군사단체로 승격한 셈이다. 이범석 국방부 장관은 동해공작대에 큰 기대를 걸고 대원 150여 명을 선발해 3개월간 특수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할 방침으로 창설됐던 동해공작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과 북의 충돌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미 군사고문단의 압력으로 국방부 제4국이 해체되면서 동해특별대도 함께 해체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인민유격대 남파가 이어지는 마당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군 당국은 동해공작대의 소속을 1949 225일자로 국방부에서 육군으로 이관시키고 명칭도 호림부대로 바꿨다. 마침내 월남청년들의 사설 군사단체가 국방부 관련단체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 소속 북파공작대로 탈바꿈한 것이다. 소속이 육군으로 이관됐다고 하지만 호림부대는 정식으로 육군에 편제된 부대는 아니었다. 호림부대원들은 대북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면 그때 정식 군인이 되는 조건부 신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생환한 호림부대원들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억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1949
228일에 대구로 이동한 호림부대원들은 18연대에서 기본 군사훈련을 받았다. 지휘관은 정보국 특무과장 한왕룡 소령. 그곳에서 기본 훈련을 끝낸 호림부대원들은 수원의 육군수색학교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유격교육을 받았다. 당시 교관 이희성 소위는 먼 훗날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훈련을 마친 호림부대원들은 경상남도 거제도와 경상북도로 이동해 그곳 지방 게릴라 토벌에 투입됐다. 일종의 실전경험이었던 셈이다. 토벌전을 마친 호림부대는 525일 서울로 귀환해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의 사열을 받았다. 당시 신문들은 국방부 제2국 소속의 호림부대 대원 557명이 총리의 사열을 받았는데 이들의 지휘계통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에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을 거쳐 정보과 5과장 한왕룡 소령으로 이어진다고 보도했다. 선전효과를 위해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고 매스컴까지 동원한 것. 이는 기밀을 엄수해야 할 북파공작대에는 큰 패착이었고, 정부와 군 수뇌부의 안일한 판단은 나중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가 출발부터 잉태하고 있던 비극의 씨앗이다.  

그런데 신문에 보도된 지휘계통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557명이라는 숫자도 정확하지 않았다. 북파된 호림부대원의 총인원은 동해특별대를 모체로 하는 5대대와 오대산유격대를 모체로 하는 6대대를 합쳐 252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호림부대에는 이들 5대대와 6대대 외에 2대대와 3대대의 두 개 대대가 더 있었다. 2대대는 서부전선을 맡고 있었고 3대대는 5대대와 6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신문이 557명이라고 보도한 것은 2,3대대원까지 전부 포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실제로 북파된 인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숙군작업을 통해 남로당원들이 대거 군에서 축출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암약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에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시작부터 비극의 씨앗을 안고 있던 호림부대 5대대와 6대대 대원들은 1949 623일에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 횡성을 거쳐 동부전선에 도착했다. 그리고 629일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38선을 넘는다. 사흘 전인 26일에 백범 김구 선생이 포병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 채.

 

“비상! 비상! 

1949 73, 설악산 봉정암.  

 

해가 한참 긴 때지만 산중의 어둠은 일찍 찾아왔다. 5대대와 6대대 대원들은 비장한 얼굴로 서로의 손을 힘껏 잡았다. 짧게는 몇 달 동안, 길게는 수년째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들이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여기서 헤어지면 다시 못 볼지 모른다. 대원들은 서로 무운을 빌며 힘껏 부둥켜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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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무사히 넘은 부대원들은 점봉산을 넘고 오색촌을 지나 대청봉에 올랐고, 그곳에 자신들의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묻으며 생무덤을 만들어 결사의 의지를 다진다. 이제부터 5대대는 동해안을 타고 북상해 함경남도로, 6대대는 내륙으로 침투해 평안남도로 이동해야 한다. 호림부대의 목표는 원산과 평양을 잇는 평원선을 차단해 군수물자 수송을 저지하는 것. 원산을 통해 대거 유입되는 소련 군수물자로 인해 북의 군사력은 남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빨리 저지하지 못하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질 것이고, 북측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호림부대는 전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북파된 셈이었다.

험한 산지를 통과하는 평원선에는 터널이 여러 곳 있다. 5대대는 함경남도 고원으로, 6대대는 평안남도 양덕으로 진출해 터널을 폭파하고 철로를 파괴해서 군사물자 수송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군 수뇌부는 평원선을 교란하면 북한의 남침 의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지의 반공인사들을 포섭해 장기 주둔할 예정이었으므로 호림부대는 남으로 귀환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었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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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 백의곤이 선두에서 대대원들을 이끌었다. 그는 동해특별대를 이끌던 사람이다. 5대대원 120여 명은 군장을 챙겨들고 행군에 나섰다. 대대라고 하지만 실제 병력은 중대 수준에 불과했다.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유격대는 병력을 실제보다 부풀려 보일 목적으로 정규군과 편제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집결지는 양양군 강현면 상복리. 흔히 핏골이라 불리는 곳으로 지금의 설악동 C지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금 설악동 C지구에는 각종 숙박시설과 위락시설이 즐비하지만 당시는 호랑이가 나올 것 같은 산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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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가 산기슭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을 확인한 6대대장 김현주는 대대원들에게 출발을 명했다. 오대산유격대를 이끌며 태백준령을 넘나들던 김현주 대대장은 설악산을 제 손금 보듯 하는 사람이다. 6대대원들은 다음 집결지인 백담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산중이긴 해도 이미 이북 땅에 들어선 마당이다. 나무꾼, 심마니들과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른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이동하는 걸 보면 그들은 즉시 내무서에 연락할 터. 6대대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같은 시각, 인제군 인민위원회.  

38경비여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책임비서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무성으로부터 1949 614일자로 인제군 인민위원회에 훈령이 내려와 있는 상황이었다. 춘천에 주둔하는 남조선 괴뢰국방군 192부대에서 특별공작대 130명을 북으로 침투시키려 하니 예상지역을 철저히 수색하라는 내용이었다. 38경비여단의 전화는 이 수색에 인민들을 동원하라는 통보였다.  

“비상을 걸고 인민들을 전부 집합시키시오! 

비상소집이 떨어지자 인제 군민들은 총동원되어 500m 간격으로 늘어서서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38경비여단은 이미 24시간 출동대기에 들어갔다.  

호림부대가 경상북도에서 공비 토벌전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해 이범석 총리의 사열을 받은 것이 525일이고 횡성으로 이동해 대대편성을 마친 게 620일이다. 그런데 북한 내무성은 이미 614일에 인제군에 경계강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호림부대는 출범하면서부터 줄곧 감시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더구나 북한 내무성 훈령은 신문에 보도된 557명이 아니고 130명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물론 소속이 정확하지 못하고 사복 차림이라는 훈령 내용은 사실과 다르지만, 남쪽 깊숙이 잠입한 다음에야 침투 사실이 알려졌던 남파 인민유격대와는 판이한 상황이었다.  

호림부대원들이 특수훈련을 받았고 인제군이 첩첩산중이라고는 해도 사전에 정보가 새면 몸을 숨기기 힘들다. 호림부대원들은 그들 앞에 이미 포위망이 쳐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한발 한발 북진을 감행했다.  


2차 기사문리 전투 

1949 74, 막 자정을 넘긴 시각. 강릉 8사단 10연대 상황실.

상황실 창틈을 뚫고 환한 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연대장 송요찬 중령을 중심으로 대대장 고백규 소령과 중대장 원선경 중위, 연대 참모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형 상황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달려온 한왕룡 소령이 몹시 초조해 하며 시계와 상황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도 사단장 각하께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대장 고백규 소령이 연대장 송요찬 중령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

 

별명을 얻은 맹장 송요찬에게는 ‘석두장군’이라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특유의 못 말리는 고집을 빗댄 별명이었다. 국군은 1949 512일을 기해 여단을 일제히 사단으로 승격시키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강릉에 주둔하는 8사단 사단장은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으로 잘 알려진 이형근 준장. 8사단 예하의 10연대장인 송요찬 중령은 지금 사단장에게 알리지 않고 모종의 작전을 추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호림부대는 어디까지 진출했소? 

고백규 소령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왕룡 소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단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병력을 동원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연대장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5대대는 상복리에, 6대대는 백담사에 도달했을 겁니다. 

한왕룡 소령이 상황판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호림부대의 침투를 돕기 위해 양동작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10연대에 38선에서 가벼운 총격전을 벌여줄 것을 요청한 것인데, 연대장 송요찬 중령은 이참에 아예 38선을 넘어 진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좋아. 고산봉까지 치고 올라간다! 

송요찬 중령을 더는 만류할 자신이 없는 고백규 소령은 난감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2차 기사문리 전투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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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인접한 양양군 기사문리는 지금은 하조대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는 기사문리에 기지를 둔 북한 해군과 강릉에 주둔한 대한민국 육군 10연대가 날카롭게 대치하던 장소다. 당연히 충돌이 잦았다.

1949 2월에는 인민군 2개 중대가 38선을 넘어 천교리까지 내려와서 주민을 학살하고 돌아갔다. 당시 10연대장 백남권 중령은 즉각 보복공격을 명령했고, 105㎜ 곡사포 5발을 기사문리의 북한 해군기지를 향해 발사했다. 포격은 총격과는 또 다르다. 자칫 전면전으로 치달을 위험이 크다. 미 군사고문단은 기겁했고 재발방지를 이유로 대포 조준경을 회수해 가버렸다. 이때의 충돌을 두고 남과 북은 각각 고산봉 전투와 제1차 기사문리 전투라고 불러왔는데, 그 기사문리에 지금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연대장 송요찬 중령이 무리해서 북진도 불사하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부전선은 옹진반도와 개성지구에서 개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동부전선은 악재가 거듭돼 지휘관과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거듭되는 인민유격대 남파에 이어 춘천 주둔 6여단 8연대 소속 2개 대대가 통째로 월북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북측은 대대적으로 선전에 나섰고 미국은 한국군을 제2의 장제스 군대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그 미묘한 시점에 호림부대가 38선을 넘은 것이다. ‘석두장군’ 송요찬이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북진 명령을 내리게 된 배경이었다.

대대장 고백규 소령의 명령을 받은 중대장 원선경 중위는 즉시 중대원을 인솔하고 38선을 넘었다. 정규군 중대병력이 38선을 넘는 일이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다. 중대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38선이라고 해봐야 표지판 하나 썰렁하게 서 있을 뿐 철책선 같은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근 주민들은 눈치를 보며 가끔 오가기도 했다. 하정광리와 상정광리를 차례로 지나고 기사문리에 이를 때까지 북한군은 눈에 띄지 않았고, 일찍 잠이 깬 어부들만이 놀란 눈으로 국군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북측 해군기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국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기지에는 보초도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10연대 장병들은 기습을 단행했고 놀란 북한군들이 도망가면서 해군기지는 싱겁게 점령됐다. 

원선경 중위는 당혹스러웠다. 소란을 피우는 게 목적인데 소란 대신 기지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기대 이상의 전과에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북진해 소란을 피우자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더 깊이 들어가다가는 나중에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원선경 중위는 일단 두 소대장 최석천 소위와 김경배 소위를 불러 북한군의 반격에 대비해서 중대원들을 전투 배치할 것을 명령하고, 무전기를 통해 고백규 대대장에게 하회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고백규 소령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이 예상 밖의 방향으로 풀려버린 것이다. 

“상부에서 철수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지키고 있는 수밖에. 혹시 놈들이 반격해 올지 모르니까 방어태세를 철저히 갖추도록.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원선경 중위는 중대원들에게 서둘러 신형 60㎜ 박격포를 거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북한군의 반격은 없었고, 철수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다. 호림부대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북한군도 10연대가 기사문리를 기습점령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후가 되자 비로소 북한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고작 중대 병력으로 적지 한복판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는 일이다. 중대장 원선경 중위는 미련 없이 철수를 명령했다. 임무는 충실히 완수한 셈이었다. 2차 기사문리 충돌이라고도 불리고 양양 돌입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군 정규 병력이 처음으로 38선을 넘는 시작과는 달리 그렇게 조금은 맥없이 끝이 났다. 그러나 그렇듯 소동이 벌어지는 사이, 호림부대는 한발 한발 목표 지점을 향해 북상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은 길길이 날뛰며 무단으로 월경 작전을 벌인 10연대 지휘관들을 엄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처벌은 경미했고 오래지 않아 이들은 모두 원대복귀하게 된다. 한국군 수뇌부에서 그들을 감싸고돌았던 것이다. 정작 중벌을 받은 사람들은 급한 철수과정에서 개인화기와 박격포를 놓고 온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모조리 춘천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개전 이후에야 원대복귀하게 된다.  


남파를 준비하는 사람들 

/평양 재판정에 선 호림부대 전월성 대원.

 

1949 74일 오후 7, 속초항.
 
선적을 앞둔 보급품이 항구에 쌓여 있었다. 일일이 확인을 마친 김달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해가 한참 긴 때라서 보급품을 꼼꼼히 살필 수 있을 만큼 주위가 환했다.  

“선적하시오. 

인민유격대장 김달삼이 부관 강철에게 보급품을 배에 실을 것을 지시했다. 3병단으로 호칭되는 김달삼의 인민유격대는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남하해 경상북도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장기투쟁을 벌일 예정이었다.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 보급품은 배편으로 내려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1948
년 말부터 1950년 초에 걸쳐 10차례 이어지는 인민유격대의 남파 가운데 가장 주력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제3차 남파에 해당하는 1949 7월의 제3병단이었다. 앞선 두 차례의 남파는 정찰 성격이 강했고 그 후 여섯 차례의 남파는 김달삼의 제3병단을 지원하는 성격이었다. 3병단장 김달삼은 제주도 4·3사태를 주도했던 유명인물로,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려고 제주도를 빠져나갈 때 탈출을 돕기 위해 소련 잠수함이 제주도 앞바다에 출동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월북한 그 김달삼이 무장유격대를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최신병기로 무장하고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제3병단의 목표는 경주 보현산과 대구 팔공산 일대에 해방구를 세우고 그곳을 거점으로 경찰서와 관공서, 군부대를 습격하는 이른바 아성공격(牙城攻擊)을 감행하면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의 그날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또한 여수와 순천 일대의 패주병들을 이끌고 호남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이현상과 제2병단을 돕는 것도 임무에 포함돼 있었다. 이후로는 이호제와 김상호가 이끄는 제1병단이 3병단의 뒤를 이어 남파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가 원산 침투를 목표로 속초에 이르렀을 무렵, 최정예 남파공작대인 제3병단은 경주를 목표로 속초에 집결해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기사문리 해군기지를 탈환했다고 합니다. 

작전참모 임창원이 새벽에 발생했던 기사문리 사건이 마무리됐음을 보고했다.

“아무래도 북파공작대를 위한 양동작전인 것 같습니다. 

임창원은 육사 4기 출신으로 좌익에 포섭돼 월북한 인물이다. 당연히 남측의 작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김달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육군유년사관학교 출신으로 제주도 게릴라를 이끌었던 그 역시 군사전문가다.

감시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호림부대가 설악산에 들어서면서 추적이 그만 끊기고 만 터였다. 38경비여단은 물론 인제군과 속초군 인민들까지 총동원해 산을 뒤지고 있지만 호림부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저들의 북파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3병단 지휘부는 신경이 쓰였다. 그들이 월북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호림부대원들은 월남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우리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대장 하준수가 날카로운 눈매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부대장 하준수는 제3병단의 후발대를 지휘해 추후 남파될 예정이었다. 공수도의 달인이며 장대한 체격에 미남형인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야산대를 조직해 일본 경찰에 대항했던 오리지널 빨치산이다. 남쪽으로 내려가 부산까지 이르겠다는 의미의 남도부(南到釜)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남도부는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재차 남파될 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이름이고, 당시에는 그냥 하준수라는 본명을 쓰고 있었다. 김달삼도 본명은 이승진. 김달삼은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그의 장인이 쓰던 가명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럼 하 동지가 그 일을 맡아주시오.

김달삼이 즉각 수락했다. 남파공작도 좋지만 북파공작대를 저지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곧 상세한 정보가 올라올 겁니다. 

임창원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게릴라는 현지민들의 도움이 없으면 활동할 수 없다. 그들로부터 식량도 지원받고 정보도 수집해야 한다. 남한에 좌익인사가 있다면 북한에도 반공인사가 있게 마련이다. 북파공작대는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테지만 그들 중에는 변절자가 끼어 있다. 임창원은 머지않아 반공인사들 틈에 섞여 있는 첩자로부터 연락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저들의 소재가 파악되는 대로 출동하겠습니다.
하준수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하 동지를 믿고 우린 먼저 출발하겠소.
김달삼이 하준수의 손을 힘껏 잡았다.  

북파된 호림부대와 같은 시기에 가까운 장소로부터 남파된 인민유격대. 그렇게 시작된 둘의 인연은 훗날 국사봉까지 진출했던 호림부대 5대대가 원산의 인민군 제3사단과 인민유격대의 협공으로 전멸하고 한때 경상북도 일대를 장악하고 기세를 떨쳤던 인민유격대가 호림부대에 토벌되는 악연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시대의 비극이 낳은 악연의 두 부대 모두 세월이 흐르면서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간다. 

당연히 지휘관들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호림부대의 백의곤과 김현주 두 대대장은 장렬하게 전사했고 김달삼은 1950년 봄 강원도 정선에서 부관 강철과 함께 토벌대에 사살된다. 대부분의 빨치산 지도자들이 휴전 직후에 최후를 맞은 것에 비해서 김달삼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도부는 살아남은 빨치산들을 이끌고 경상도 일대에서 끝까지 투쟁하다 휴전 직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가장 특이한 경우는 제3병단 작전참모 임창원. 국군 장교로 있다가 월북했던 그는 다시 전향해 제3병단 토벌에 적극 협력한다.


대대적인 추격전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총책임자로 활약하다 붙잡힌 남도부의 공판. 1954 1011일 촬영된 사진이다. 

 

인민유격대가 남파를 준비하고 있던 그 시기, 호림부대 6대대는 처음부터 무리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심스레 북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38선 이북 200㎞에 위치한 평원선까지 북진해 외부의 지원 없이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민유격대가 이남에 해방구를 만들면 우리도 이북에 자유지역을 만들겠다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에서 비롯된 무리한 임무였다. 그것은 남파 인민유격대도 마찬가지였다. 해방구의 설치와 아성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기대했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경찰서를 기습하고 우익인사를 살해하는 정도였다. 그것이 인민유격대의 현실적 한계라면 호림부대의 용대리 기습도 그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백담사에 다다른 6대대는 인제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체포해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고 74일 용대리 내무소를 기습해 내무서원 3명을 사살한 뒤 소비조합에서 식량을 노획했다. 보복과 보급투쟁을 단행한 셈인데 그로 인해 위치가 파악되고 말았다. 38경비여단과 인근 부대로 편성된 토벌대가 추격에 나섰다. 무리한 행보를 벌인 6대대는 38선을 넘자마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초전에 위치가 탄로 난 6대대가 과연 평원선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먹구름이 6대대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용대리 뒷산으로 철수했던 6대대는 토벌대의 규모가 연대 병력에 이르는 것을 확인한 뒤 교전을 포기하고 서둘러 서화리로 이동했다. 이제 은밀한 침투는 포기해야 할 참이었다.

6
대대에 비하면 5대대는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편이었다. 6대대가 용대리에서 쫓기고 있을 무렵 5대대는 여전히 종적을 감춘 채 북행을 계속했고, 75일 예정대로 화채봉에 도착해 현지 정보원과 무사히 접선했다. 이미 일대에 경계령이 펼쳐진 터였다. 2,3일 쉬면서 식량을 보충하는 동안 북한군의 수색을 피할 곳을 마련해야 했다. 대대장 백의곤은 고심 끝에 다음 목표지를 상복리 핏골로 정했다. 그곳은 심마니나 화전민들도 쉽게 찾지 않는 오지였다.

“마침 그곳에 김종모 동지가 살고 있습니다.
현지 정보원이 동조했다. 대대장 백의곤은 아직 피곤이 풀리지 않은 5대대원들에게 출발을 명했다.
“여기를 빠져나간다! 

1949
77, 인제군 서화리.  

소양강 맑은 지류가 흐르는 인제군 서화리는 지금은 각종 리조트 시설과 음식점이 풍치 수려한 곳마다 들어서 있는 명소지만, 당시에는 화전민들이나 사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가마골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말 그대로 깡촌이었다.  

그 가마골에 150명이 넘는 남자가 지친 몸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용대리에서 북한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은 6대대는 이틀 동안 필사의 도주를 단행한 끝에 서화리 가마골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에 잡은 포로가 30명이나 돼서 일행은 오히려 15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대대장 김현주는 망원경을 들고 일대를 살폈다. 멀리 진부령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차하면 그쪽으로 도주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양구와 철원, 평강을 거쳐 평안남도 양덕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은 수정해야할 것 같았다. 우선은 추격을 뿌리치는 게 급선무였다.

“북한군이 쫓아왔습니다!

 

경계를 서고 있던 1소대장 이영수가 허둥대며 달려왔다. 그는 죽음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생환한 몇 안 되는 6대대원 중 한 사람이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대대장 김현주는 얼른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새까맣게 밀려오는 북한군을 보고 절망에 빠져들었다. 연대 병력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왔을까. 곳곳에 감시의 눈길이 번쩍이며 6대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북한군에 통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대장 김현주는 6대대의 최후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관총에 박격포까지 있습니다. 

첨병의 보고대로 토벌대는 맥심 수랭식 중기관총에 소련제 61㎜ 박격포까지 지니고 있었다. 전면교전이 불가피한 마당인데 6대대원들의 무장은 일본군의 구형 99식 소총과 10㎏의 다이너마이트가 전부였다. 99식 소총은 발사할 때마다 손으로 노리쇠를 조작해야 하는 5발 장전의 볼트액션 방식. 북한군이 소련제 모신 장총만으로 무장했다면 그런대로 싸워볼 만하겠지만 61㎜ 박격포와 맥심 중기관총 무장이라면 대적하기 힘들 것이다.

아무래도 임무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일단 포위망을 빠져나간 후에는 각자 알아서 남으로 귀환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많이 불리하지만 대원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았고 산을 타는 데 모두 능숙했다. 그리고 38선이 그리 멀지 않다. 

“여기를 빠져나간다!” 대대장 김현주의 탈출 명령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곧이어 박격포탄도 떨어졌다. 6대대원들은 신속히 응사에 들어갔다. 포로로 잡힌 내무서원이 상당수 있는 데도 북한군은 전혀 개의치 않고 총을 발사했고 포를 쏴댔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고 6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총탄이 날아들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응사하던 한형욱(가명)은 도주하는 일행을 따라 계곡 아래로 내달렸다. 동료들은 모두 허겁지겁 골짜기 아래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미 지휘계통은 무너졌다. 

콩 볶는 듯한 총성과 박격포탄 터지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는 적을 향해 던진 것이거나 자폭한 것일 게다. 다행히 아무것도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한형욱은 정신없이 내달았다.  

차츰 총성이 멀어졌다.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일까. 골짜기를 따라 내달리던 한형욱은 허름한 집을 발견하고 그리고 뛰어들었다. 화전민이 살다가 떠난 듯한 집에는 동료 세 명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네 사람은 일단 이곳에 몸을 숨기고 정황을 엿보기로 했다. 워낙 외진 곳에 있는 오두막인지라 추격대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포위망을 빠져나온 대원은 몇 명이나 될까. 출정할 때 이미 죽음을 각오한 마당이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직면하니 새삼 두려움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임무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이 내린 밖은 이제 조용했다. 그 사이에 기운을 추스른 네 사람은 탈출을 결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네 사람은 기겁해서 총을 겨누었다.  

“나다.
들어선 사람은 소대장이었다.  

“대대장님께서 장렬하게 전사하셨다. 

소대장이 울먹였다. 한형욱은 가슴이 아팠다. 대대장 김현주는 오대산유격대 시절부터 모시던 상관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도 대대장이 죽기로 뒤를 막아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꾸물거릴 수는 없었다. 추격대가 오기 전에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원통 쪽으로 탈출하는 게 좋겠습니다.
누군가 의견을 제시했다.  

“마을마다 자경대원들이 쫙 깔렸을 거야.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게 안전해.
소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어느 쪽이 옳을까. 앞뒤를 헤아리고 있는데 갑자기 총탄이 날아들었다. 그러면서 문가에 서 있던 김병제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예상보다 빨리 추격대가 쫓아온 것이다.

“내가 뒤를 맡을 테니 빨리 빠져나가라. 

김병제가 고통을 참으며 수류탄을 뽑아들었다. 소대장과 세 대원은 눈물을 머금고 뒷문으로 나와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가전리 쪽으로 탈출한다. 부연동 골짜기에 가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거야.

소대장이 앞장서서 대원들을 인솔했다. 수류탄 두 발이 연속적으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김병제가 북한군을 유인해 자폭한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다. 네 사람은 어둠이 깔린 계곡을 부지런히 내달렸다. 그 순간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네 사람은 일제히 몸을 내던졌다.  

“헉!
맨 뒤에서 일행을 따르던 한형욱은 발을 헛디디고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마지막 행로 

1949 78일 새벽 4, 설악산 상복리 핏골.  

5
대대는 강행군 끝에 양양군 강현면 상복리 핏골에 이르렀다. 일찍 발각되어 궤멸된 6대대와는 달리 5대대는 아직 꼬리를 잡히지 않고 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상당히 먼 길이로군요. 고원이면 고성과 회양, 안변, 그리고 문천을 거쳐야 하는데….

김정배의 표정이 어두웠다. 속초애국동지회 소속의 반공인사로 호림부대를 돕기 위해 이리로 달려온 사람이다. 핏골에 당도한 5대대 간부들은 이곳에서 속초애국동지회 반공인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숙의하고 있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유격대에 현지인들의 도움은 필수다. 특히 속초는 반공 열기가 뜨거운 곳이다. 최종목적지인 함경남도 고원은 위도가 북위 3950분에 해당해 직선거리로도 무려 200㎞를 북진해야 한다. 그러니 현지인들의 도움 없이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무서를 기습해 식량을 탈취할 생각이오. 

대대장 백의곤이 입을 열었다. 김정배의 고심대로 심심산골에서 무려 120명에 달하는 대원의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 인민위원장이 아주 악랄한 자라고 들었소.
중대장 김종익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자 때문에 많은 동지가 목숨을 잃었지요. 

집주인 김종모가 90인 사건 때 끌려갔던 동지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반공 열기가 뜨거운 속초에서 많은 반공인사가 체포되고 있었다. 내무서를 기습해 무기와 식량을 탈취하고 인민위원장도 처단하면 일석이조인 셈이다. 대대장 백의곤이 간부들을 둘러보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출발한다! 

대대장 백의곤이 출발을 명하자 집밖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5대대원들이 얼른 무기를 챙겨 들었다. 길 안내는 속초애국동지회 청년이 자청하고 나섰다. 핏골은 첩첩산중이어서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북한군이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토벌대가 조직되더라도 그 사이에 5대대는 내금강의 깊은 산중에 몸을 숨길 수 있다.

피로를 회복한 5대대원들은 별 어려움 없이 핏골 내무서를 기습하는 데 성공했고 필요한 식량을 확보했다. 목표대로 인민위원장과 보안대원 6명도 처단한데다, 신형 무기를 노획한 것은 망외의 성과였다. 사기가 충천한 5대대원들은 다음 목표지로 이동했다. 도중에 소대 규모의 현지 보안대가 저항을 했지만 5대대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들을 간단히 제압한 5대대는 북상을 계속했다.  

무사히 평원선에 이를 수 있을까. 그러나 시차를 달리하며 5대대에도 불행이 찾아왔다. 하나는 속초애국동지회에 침투해 있던 공산당원으로 인해 5대대의 행보가 북한군에 예상보다 빨리 발각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속초에 출정 채비를 마친 제3병단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김정배의 처조카 이종구의 신고로 북한군에는 즉각 비상이 걸렸고 5대대는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렇지만 5대대는 쉽게 뒤를 잡히지 않았다. 치고 빠지며 북상을 계속해 79일에는 신선봉에, 12일에는 마산리에 당도했다. 마산리에서 처음으로 토벌대와 조우했지만 1개 소대 병력의 북한군은 정예 호림부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교전 끝에 북한군은 8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했다.

 

1948 10월 제주도 9연대를 방문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일행의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송요찬 연대장, 그 다음이 채병덕 총장이다.

 

예상보다 일찍 발각되었지만 대대장 백의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향로봉으로 우회하면 얼마든지 추격을 따돌릴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남한에서 빨치산을 토벌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경찰이나 지역 주둔군은 관할지역 경비에만 신경 쓸 뿐 추격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유격대가 관할지역을 벗어나면 미련 없이 추격을 포기했다. 5대대는 이미 38경비여단의 관할지역을 통과했다. 그리고 아직은 원산에 주둔하는 북한군 3사단의 관할지역이 아니다. 그 사이에 산재해 있는 내무서나 보안대 따위는 호림부대의 상대가 못됐다. 5대대는 향로봉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교량 2곳을 파괴하고 트럭을 기습해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금강산에 이르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5대대의 무운은 거기까지였다. 그들만큼이나 산악행군에 능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정예 유격대가 추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삼치령으로 출동한다! 

3병단 후발대 지휘부는 속속 답지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5대대의 행로를 그렇게 추정했다. 그래서 향로봉 쪽으로 달려 금강산으로 침투할 것이라 예측하고 삼치령과 노루메기, 대방골로 통하는 선에서 이들을 저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중삼중의 포위망 

1949
715, 삼치령.  

소양강의 발원지이기도 한 삼치령은 아침부터 짙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적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정찰병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대대장 백의곤에게 보고했다. 백의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이미 전방에 원산에서 출동한 인민군 3사단이 매복해 있음을 확인한 터였다. 대대장 백의곤은 그동안 상대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후회에 휩싸였다. 빨리 사지를 탈출해야 했다.  

“측면이 약한 것 같습니다. 

중대장이 선제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어차피 은밀히 빠져나가기는 틀린 마당이다. 대대장 백의곤이 손을 들자 5대대원들은 자세를 낮추고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짙게 낀 안개 속을 조용히 전진했다. 그리고 포위망 30m 앞에 이르렀을 무렵 5대대원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요란한 총성이 이어졌고 수류탄이 터지면서 고요하던 삼치령이 일시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5대대원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불리한 상황에서의 교전이었던 터라 사상자가 속출했다.

“엄호할 테니 빨리 탈출하십시오! 

전월성이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PPsh41 기관단총, 속칭 따발총을 난사하며 후미를 엄호했다. 삽시간에 71발들이 드럼탄창이 동이 났다. 그 사이에 5대대원들이 속속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전월성이 탄창을 갈아 끼우는 찰나, 옆에서 엄호하던 임석순과 김정덕 대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총탄에 맞은 것이다. 눈에 불꽃이 인 전월성은 그대로 몸을 벌떡 일으켜 전방을 향해 따발총을 갈겨댔다.  

안개 속에서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요란한 폭음과 함께 황급히 엎드린 전월성의 몸 위에 흙먼지가 쏟아졌다. 전월성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느새 차가운 총검이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1949
716, 설악산 한계령. 

지금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지만 당시는 오색령이란 이름의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고개였다. 한형욱은 오색령 정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심한 하늘에는 하얀 구름만이 한가로이 떠돌고 있었다. 대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대장은 무사히 탈출했을까. 김현주 대대장이 전사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속초 쪽으로 진출한 5대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왠지 그쪽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재롱밭까지 가면 몸을 숨길 곳이 있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화전민은 걱정이 되는지 자꾸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재롱밭 일대는 본래 중석 광산지대로 일제강점기에는 사람들로 붐빈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광복이 되면서 대성광산과 설악광산이 문을 닫고 일본인 기술자들도 철수해 지금은 화전민들도 잘 찾지 않은 오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갑시다. 

한형욱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 돌아가 호림부대의 비화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버티고 온 마당이었다.

 

이북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던 호림부대원들이 탈출에 성공한 데는 현지 화전민들의 도움이 컸다. 그들 중에는 호림부대원을 따라 월남한 사람도 있고, 나중에 체포되어 처형된 사람도 있다. 호림부대는 비록 원래 목표였던 평원선 폭파에는 실패했지만 북한 당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반공인사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성과를 올린 셈이었다.


1949
716, 국사봉. 

해발 1385m의 국사봉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삼치령을 탈출한 5대대원들은 밧무재로 빠져나와서 국사봉 삼각고지에 집결했다. 국사봉은 38선에서 70㎞나 북쪽에 위치한 내금강 초입. 상당히 멀리 올라온 셈이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했다. 추격대에 꼬리를 잡히기 전에 빨리 녹음이 우거진 금강산 골짜기에 몸을 숨겨야 한다.

그렇지만 한복판에서 위치가 발각된 유격대의 최후는 비참한 것이었다. 이미 이중삼중으로 포위망이 펼쳐졌고 퇴로마저 끊긴 채 한 명 두 명 쓰러져갔다. 어차피 처음부터 완수가 불가능한 임무였다. 여기까지 진출하는 동안에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고 대원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용감하게 싸워주었다. 대대장 백의곤은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각자 알아서 탈출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라! 

탈출명령이 떨어지자 DP 보병용 경기관총이 맹렬하게 불을 뿜었다. 삼치령에서 노획한 이 소련제 무기는 분당 500발을 발사하는 경기관총이었다. 순식간에 47발들이 탄창이 비워져나갔다. 5대대는 삼치령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48명의 적을 사살하고 많은 소련제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곧 북한군의 응사가 시작되었다. 5대대원들은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며 대항했지만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사상자가 속출했고 서북청년단 단장으로 동해특별대를 이끌며 일찍부터 반공전선에서 활약했던 대대장 백의곤도 그곳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저쪽이다! 

중대장 김종익이 남은 대원들을 인솔하고 삼각고지 아래로 내달았다. 그리고 사지를 무사히 탈출하고 그날의 처절했던 싸움을 생생하게 전하는 주역이 된다.


8
월 평양 모란봉극장 

1949 629 38선을 넘은 최초의 북파공작대 호림부대는 그렇게 716일 국사봉에서 북진을 멈췄다. 북한 당국이 729일에 호림부대 토벌이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공표한 것으로 봐서 국사봉 교전 이후에도 일부 대원이 산발적으로 저항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지휘계통이 와해된 다음이었다. 252명의 대원 가운데 38선을 넘어 무사히 귀환한 대원은 5대대 23, 6대대 12명 등 도합 35명뿐이었다.  

북한은 호림부대원 106명을 사살하고 44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호림부대가 주민 11명을 납치하고 29명을 살해했으며 가옥 11채를 파괴하고 소 15마리를 죽였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38선 인근 전답 11859평에서 농사가 방해받았고 4800평에서 제초를 하지 못했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덧붙였다. 호림부대가 북한 당국에 안겨준 적지 않은 충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월성, 조석풍, 이한기, 고찬석, 김인환 등 포로가 된 호림부대원들은 1949 828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판을 받았고 모두 사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911일 형이 집행됐다.

그렇게 역사의 저편에 묻혀버렸던 호림부대는 1990 KBS에서 생포된 호림부대원들이 공개재판을 받는 장면을 방송하면서 다시 세인의 관심을 받았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이 필름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재판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빛바랜 화면 속에서 머리를 박박 깎은 포로들은 굳은 표정으로 북한 검사의 신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호림부대원들이 자신들의 최후를 생생하게 증언한 그 필름은 2000 6월에 MBC에서 다시 한 번 방송됐다 

 

무사히 생환한 대원들도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좌절과 실망뿐이었다. 정식 군인이 아닌 데다 부대의 창설도 6·25전쟁 이전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국가로부터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나라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전적비를 세우는 일조차 순탄치 못했다. 북침의 증거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당국에서 만류하고 나섰던 것이다. 생존 호림부대원들이 중심이 되어 꾸준히 노력한 결과, 1986 9월에 야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호림부대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호림부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던 장소에 37년 만에 그들의 원혼을 달래줄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너희가 경상도에 해방구를 설치하면 우리는 함경도에 자유지역을 만든다’는 식의 즉흥적이고 감정적 대응의 산물이었던 호림부대는, 그렇게 시대의 희생물이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는 남파된 인민유격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06월 호

②남로당과 북로당, 미군 간의 숨 막히는 첩보전

전운 감도는 1950년 초

  • 1950
  • 년 초 고요한 한반도는 폭풍의 핵이나 다름없었다. 남과 북은 첩보전에 혈안이 되었고 변절자와 이중첩자가 속출했다. 그런 혼란의 시기에 대조적인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몰락한 남로당을 살리기 위해 평양에서 안간힘을 쓴 이승엽이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북로당 직속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남한 총선에 적극 개입하려 한 성시백이다. 두 사람이 각기 평양과 서울에서 서로의 숨통을 끊으려고 칼을 겨누는 사이, 미군은 본국의 군사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때때로 적의 적인 남로당과 손잡고 북의 동향을 파악했다.

/1949 6월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의 경위를 전하는 당시의 신문기사 

 

1950314, 서울 종로5. 시각은 이미 오후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 수사관들은 허름한 골목길 끝에 위치한 한 주택으로 소리를 죽이고 접근했다. 정보가 틀리지 않다면 저 집에 김삼룡이 숨어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골수 좌익이었던 김삼룡은 박헌영이 월북한 이후로 남로당을 이끌고 있는 거물이다.
 
김임전 주임이 신호를 하자 앞선 수사관이 몸을 날리며 담을 뛰어넘었다. 그가 문을 열자 나머지 수사관들이 일제히 들이닥쳐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삼룡이 이미 도주한 것이다. 정황으로 봐서 급히 달아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김임전 주임은 즉시 일대를 봉쇄하고 주변을 샅샅이 뒤질 것을 지시했다.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집을 뒤지고 길을 막고 행인을 검문하자 조용하던 동네가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주민 대부분은 순순히 수사에 응했지만 더러는 집을 뒤지는 경찰에게 따져 묻는 사람도 있었다. 가가호호 철저히 수색했지만 별 소득이 없자 김임전 주임은 초조해졌다. 현장에서 체포하지 못하면 김삼룡은 검거하기 힘들다.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특기인 변장술로 벌써 포위망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 경찰은 주민들 중에 김삼룡과 연령이나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모조리 시경으로 연행했다. 주민들이 무더기로 끌려오면서 시경 취조실은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한강에서 뺨 맞고 남대문에서 눈을 흘긴다고, 취조실을 메운 무리 중에는 경찰관에게 항의하다 괘씸죄로 끌려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김삼룡을 놓친 데 따른 분풀이를 주민들에게 해댄 셈이다. 그런데 그런 분풀이성 마구잡이 연행 덕분에 김삼룡을 놓친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뜻밖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꼴이다.

“저자는 이주하입니다” 

잘못한 게 없는 데도 괜히 겁을 먹고 있는 사람, 생사람을 왜 잡아왔느냐며 대드는 사람,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눈을 감고 꼼짝도 않고 있는 사람들로 시경 사찰과가 난장판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중에 유독 수사관의 신경을 거슬리는 영감이 있었다.

“아니, 이 영감이! 

수사관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예지동에서 연행해온 영감이 아까부터 계속 취조실 바닥에 가래를 뱉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수사관이 호통을 치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주눅이 들게 마련인데 이 영감은 달랐다. 침도 마음대로 뱉지 못하느냐며 오히려 핏대를 올리고 나섰다. “대체 저런 골치 아픈 영감을 왜 잡아온 거야?” 수사관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보시오, 김 주임. 

김임전 주임이 어찌 처리할까 고심하는데 누가 뒤에서 불렀다.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김창룡 소령이 서 있었다.  

김창룡. 나중에 특무대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암살을 당하는 김창룡은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일제강점기부터 공산당 색출에 남다른 솜씨를 발휘했던 인물이다. 김창룡은 광복이 되자 군에 입대해 특무대의 전신인 육군 정보국 방첩대에서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 색출에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1949년이 되면서 뿌리가 거의 뽑혔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부는 살아남아 암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좌익 색출에 공조하고 있었는데, 일선 수사는 시경 사찰과에서 관장하고 군은 시경 사찰과에서 이첩된 자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육군 방첩대장으로 군검경합동수사본부 국장을 겸하고 있던 김창룡 소령은 뒤치다꺼리보다 일선에서 뛰는 게 생리에 맞는 사람이다. 그래서 수시로 시경 사찰과를 기웃거리며 이래라저래라 수사에 참견을 했다.  

그런 김창룡의 눈에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는 영감이 걸려든 것이다. 왠지 억지를 부리는 듯한 자세가 그의 동물적 감각을 자극했다.

 

“저 영감을 내가 데리고 가겠소. 

김창룡 소령이 소란을 피우는 영감을 지목했다. 그렇지 않아도 처리 곤란하던 차에 김임전 주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대답을 해놓고 나서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룡이 누군가. 성깔 고약한 영감 훈계나 하고 있을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김창룡이 잠깐 자리를 뜨자 김임전 주임은 얼른 영감을 옆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급히 홍민표를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김임전 주임은 황급히 달려온 홍민표를 이끌고 옆방으로 갔다. 얼마 전까지 남로당 서울지부 책임자로 있다가 전향한 홍민표는 김삼룡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김임전 주임은 영감이 김삼룡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남로당 간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홍민표를 찾았던 것이다. 

“김창룡이 웬 영감을 찍었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홍 선생이 한번 확인해주시오.
“그러지요. 

김창룡이 찍었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며 문을 열고 들어서던 홍민표가 영감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흠칫 놀라며 뒷걸음쳤다. 뒤따르던 김임전 주임도 덩달아 긴장이 됐다.

“주임님, 저자는 이주하입니다. 

 

의문스러운 김삼룡 검거 

김임전 주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주하라니? 상스럽게 가래침을 뱉으며 욕설이나 퍼붓던 저 노인이 거물 이주하란 말인가. 당시 이주하의 나이는 56. 그 시절에는 그런대로 영감 소리를 들을 만한 나이였다. 토종 공산주의자로 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이주하는 김일성과 불화를 겪다 남쪽으로 쫓겨 내려와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이끌고 있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얼떨결에 거물을 체포한 김임전 주임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이주하는 신분을 숨기고 예지동에서 젊은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김삼룡으로 인해 일제단속이 실시되면서 얼떨결에 시경에 끌려왔지만 이주하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수사관들이 자기가 이주하라는 사실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렴 경찰서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다, 이럴 때는 적당히 소란을 피워 수사관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빨리 빠져나오는 방법 중 하나다 하는 생각으로 일부러 침을 뱉으며 소동을 부린 것인데, 하필 그 자리에 육본 정보국 방첩대의 김창룡이 나타났던 것이다. 공산당 잡는데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김창룡에게 그런 식의 어설픈 행동이 통할 리 없었다. 이주하는 꼼수를 쓰다 제손으로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불운이 또 겹쳤다. 이주하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홍민표가 직전에 전향을 해서 시경 사찰과를 돕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창룡은 펄쩍 뛰었지만 시경 사찰과가 이주하를 순순히 내줄 리 만무했다. 시경 사찰과는 뜻밖의 개가에 환호성을 질렀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김삼룡은 어디로 갔을까? 시경 사찰과 수사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김삼룡의 뒤를 쫓았지만 김상룡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수사도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느닷없이 치안국 중앙분실에서 김삼룡을 검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치안국 중앙분실은 시경 사찰과의 상급기관이면서 라이벌이기도 하다. 김삼룡과 관련된 정보는 일선에서 수사를 하는 시경 사찰과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데 시경 사찰과에서 놓친 김삼룡을 치안국 중앙분실에서 무슨 재주로 검거했단 말인가? 사찰과 과장 최운하와 주임 김임전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6
·25전쟁이 발발하기 석 달 전인 1950 3월은 남로당이 최후의 거친 숨을 몰아쉬던 시기였다. 폭동과 반란, 파업과 선동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조직은 전부 노출돼 괴멸 직전에 놓여 있었다. 이제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 받은 대한민국은 혼란을 종식시키고 안정의 길로 접어드는 것일까? 그러나 정국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폭풍 전야의 고요가 한반도를 뒤덮고 있었다.

위기의 조짐은 연초부터 감지됐다. 1950 112일에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된다”고 발언한 것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것이다. 나중에 애치슨 장관 발언의 진의는 ‘향후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민족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발언 당시에는 미국이 여차하면 대한민국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고, 무력남침을 준비하고 있던 북한에 고무적으로 작용했다.

 

백형복의 최후 

/1948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좌익 지도자들. 왼쪽부터 백남운 근로인민당위원장대리, 허헌 남로당위원장, 박헌영 남로당부위원장, 홍명희 민주독립당위원장. 

 

“어서 오시오.
 
이승엽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백형복을 끌어안았다. 남한 치안국 중앙분실장이 의거월북을 했다. 남로당은 껍데기만 남았다고 괄세하던 북로당에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되었다. 대공사찰을 총괄하는 사람의 월북을 경계의 눈초리로 대하는 북로당과 김삼룡을 체포한 당사자를 환영하는 남로당. 묘한 상황만큼이나 평양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백형복은 이승엽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내무성 사회안전부 예심국에서 일하게 되었고 함께 월북한 조용복은 인민검열위원회에 자리를 잡았다. 예심국에 배치된 백형복은 월북자들의 위장월북 여부를 판정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백형복이 위장월북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끌려가서 처형을 당하는 자들이 속출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그들 중에는 진짜 북이 좋아 38선을 넘은 사람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이 계속되자 북한 당국은 백형복을 대남연락부 산하 중앙연락소로 보냈다. 그곳은 북로당이 주관하는 대남사업을 파악할 수 있는 자리다.

공개된 기록에 의하면 위장월북을 권고 받고 겁을 먹은 백형복 총경에게 니콜스 특무상사는 이승엽이 뒤를 봐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백형복 총경은 전쟁이 끝나고 다른 남로당 간부들과 함께 처형을 당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대신에 ‘목숨이 두 개가 있어도 다 바쳤어야 할 만큼 죄가 크다’ ‘새로운 삶을 알려준 당과 공화국에 감사한다’ ‘백번을 죽어도 당과 인민에게 범한 과오를 씻을 길이 없다’ 등 시구를 연상시키는 말을 남긴 남로당 간부들처럼 북한을 찬양하는 최후의 증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공업무의 총수에서 의거월북, 이어 간첩죄로 체포되고 북한을 찬양하는 말로 최후를 마친 백형복 총경. 대단히 복잡한 상황인데 아무튼 백형복 총경이 니콜스 특무상사의 권유로 월북했고 이승엽의 비호를 받았으며 북로당의 대남공작을 주도하는 자리에서 일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로당원이 시경 사찰과에 전향했고 그로 인해 ‘권위 있는 선’ 성시백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진다.  

1950
56. 조선중앙일보. 굳게 닫힌 사장실에서 성시백이 김명룡과 머리를 맞대고 벌써 몇 시간째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530일에 실시될 예정인 제2대 총선이 24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성시백은 동조세력을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대한국민당은 대거 낙선할 겁니다. 민주국민당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김명룡이 예상 선거 결과를 보고했다. 제헌의회 의석수는 총 198.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대한국민당이 71석으로 제1당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다음이 민주국민당이다. 민주국민당은 내각제를 주장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기에 야당으로 통하지만 둘 다 보수우익정당이란 점에서 친이승만 세력이다. 성시백은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고 북한에 우호적인 좌파진보정당을 만들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를 채택하고 있었기에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는 의원이 다수를 이루면 합법적으로 이승만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이자들이 무소속 출마자 가운데 우리와 뜻을 함께할 가능성이 있는 후보들이란 말이지?

성시백은 명단을 훑어보며 말했다. 다수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심정적으로 좌익에 동조하는 인사는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독선에 불만을 품고 있는 우익과 박헌영의 독주에 반기를 들고 떨어져 나간 중도파를 모두 포섭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필요한 자금은 이미 확보했다.  


성시백 검거와 급박한 상황 전개 

남로당은 무리한 공작을 펼치다 자멸했다. 하지만 남반부정치위원회는 다르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그런 나라에 자본주의는 맞지 않는다. 과격 색채를 빼면 사회주의는 충분히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성시백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중용도 물고 늘어져야 한다. 반일과 민족 자결은 언제든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이슈다. 한 해 전에도 그것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지 않았던가. 국회에서 기반을 마련하고 남북평화 통일안을 상정시키는 게 1차 목표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오면 이승만을 몰아내고 새로 대통령을 뽑을 수도 있다.

“회동일이 언제라고 했나?
510일 서소문 동아호텔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내가 직접 참석하겠다.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김명룡이 안전을 염려해 만류했다.  

“걱정할 것 없다. 남조선에서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선거가 목전에 당도했는데 뒷전에서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다. 

성시백의 말대로 그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신문사 사주가 대낮에 호텔 출입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마든지 정치 지망생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위치다. 그리고 그동안 특별히 눈에 띌 만한 발언을 하지도 않았다. 남로당과는 전혀 다른 공작에 수사기관은 그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있던 성시백에게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1950 510일 동아호텔 2층에서 잠복하고 있던 시경 사찰과 수사관들에게 마침내 검거된 것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천적이라는 게 있다. 성시백의 체포에는 남로당 쪽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성시백의 얼굴을 아는 남로당원이 자수를 해서 그의 정체를 확인해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일성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시종일관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성시백은 체포된 지 25일 만인 69일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이 초스피드로 진행된 셈인데 집행은 그보다 더 빨랐다. 1950 627일 새벽 5. 포성이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일단의 무장군인들이 육군형무소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사형수 성시백을 형장에 세웠다. 서울에서 철수하면서 사형을 앞당겨 집행한 것이다. 그때 김삼룡과 이주하, 그리고 김수임도 처형됐다. 성시백은 종교에 귀의할 의향이 있느냐는 목사의 물음에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을 남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역사에서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성시백이 그때 체포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확연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지도 모른다. 6·25전쟁 당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서 사흘을 더 머문 이유는 남로당의 호언대로 남한 민중의 봉기를 기다린 것에도 있지만, 북로당 나름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선출된 2대 국회의원들 중에서 서울에 남은 사람들을 찾아 새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합법적으로 친북정권을 수립한 다음에 북과 통합할 계획이었다. 전쟁 직전에 실시된 2대 총선에서 보수우익인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은 각각 22석과 23석의 초라한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반면에 무소속은 무려 120석을 차지하며 원내 과반수를 이루었다. 무소속 모두가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야당으로 분류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서울에 인공기가 휘날리기 직전에 성시백이 검거되면서 포섭 공작은 수포로 돌아갔고 많은 의원이 한강을 건너면서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을 병합하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그리고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남한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전력이 많이 약화된 반면에 북한은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의용군들이 속속 귀환하면서 군사력이 크게 증강해 남과 북의 전력 차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남과 북이 각각 북진통일과 국토완정을 내세우며 으르렁거리고 있는데, 1950년으로 접어들면서 힘의 균형이 점점 북으로 기울고 있었다. 정말로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할 용의가 있는 것일까? 시커먼 먹구름이 1950년 봄의 한반도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월북 남로당의 위기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 비서 이승엽은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모란봉 능수버들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는 걸로 봐서는 봄이 오긴 온 모양인데 마음은 여전히 한겨울이었다. 월북해서 사법상을 거쳐 대남사업을 책임지는 당 제2비서를 맡고 있는 남로당 2인자 이승엽은 요즘 심사가 편치 못하다. 그를 대신해 서울에서 남로당을 이끌고 있던 김삼룡과 이주하 두 동지가 남한 당국에 차례로 검거됐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승엽은 화가 치밀었다. 남로당 지도부는 대부분 검거되었고 조직은 전부 와해되었다. 30만명에 달했던 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상당수는 전향해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돕고 해방구를 설치하기 위해 10여 차례에 걸쳐 남파시킨 인민유격대는 전부 토벌되었고 이현상이 이끌고 있는 빨치산은 지리산에서 쫓겨나 소식조차 두절된 상태다.  

지금 평양에서는 조선노동당의 헤게모니를 놓고 남로당과 북로당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남로당이 붕괴되면서 월북한 남로당 지도자들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고 있었다. 근자에 들어서 북로당은 대놓고 남로당을 무시하고 있었다. 비록 셋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조선공산당의 법통은 어디까지나 박헌영 선생이 이끄는 남로당에 있다. 이승엽은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삼룡과 이주하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잡히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조직이 많이 노출되긴 했어도 두 동지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이승엽은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해 전 6월에 한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일이 있었다. 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대대병력을 이끌고 38선을 넘은 것이다. 엄청난 쾌거였지만 그와 관련해 서울의 남로당 지도부에게 아무런 지시를 내린 적도, 보고를 받은 적도 없었던 이승엽은 크게 당황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누가 공작을 편 것이 분명한데 내가 모른다면 혹시 북로당이 따로 조직을 가동하고 있는 걸까?’ 은밀히 알아보려던 참에 김삼룡과 이주하가 동시에 검거된 것이다.  

“찾으셨습니까? 

문이 열리면서 이강국이 들어왔다. 여간첩 김수임의 애인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 중에 공산주의자가 됐다. 광복이 되자 여운형을 도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하다 월북해 외무성 부상을 거쳐 지금은 무역성 산하 조선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삼룡 동지와 이주하 동지가 체포되었소.
“알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해.
이승엽이 의혹이 가득한 눈길로 이강국을 쳐다봤다.  

“어디서 정보가 샌 게 분명해.
이승엽의 눈매에 의혹이 가득했다.  

“하면…?
이강국의 안색이 변했다. 남반부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이승엽이 모르고 있는 정보라면 뻔할 것이다.

 

“북로당과 직접 선이 닿는 자가 서울에서 공작을 펴고 있는 것 같아.
이승엽은 북로당에서 김삼룡과 이주하를 남한 당국에 밀고했을 거란 심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사실이라면 서울에서 알아보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이강국이 의견을 전했다.  

“그래서 안영달 동지에게 그 일을 맡길 생각이오. 

이승엽은 북로당과의 일전을 마다하지 않을 각오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북로당에서 남로당의 뒤통수를 친 게 확인되면 곱으로 돌려줘야 한다. 만만하게 보였다가는 한도 끝도 없이 밀린다. 당과 조직의 생리를 잘 아는 이승엽은 이럴 때는 피의 보복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안영달 동지라면 정확한 진상을 알아낼 겁니다. 

이강국이 동의를 표했다. 안영달은 일제강점기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던 이승엽의 오랜 동지다. 그라면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보고할 것이다.  


미국인 위장망명과 남로당 

/1950년 초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던 김삼룡과 이주하. 북한이 남측에 민족진영 지도자 조만식과의 맞교환을 제의했을 정도로 거물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안영달이 김삼룡을 치안국 중앙분실에 밀고한 장본인이었다. 배신은 피를 부르게 마련이어서 안영달은 나중에 이승엽에게 죽임을 당한다.  

“현 앨리스와 이사민 말입니다.
이승엽이 한숨을 돌리려는데 이강국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을 빨리 해외로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내무성의 수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현 앨리스는 하와이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으로 광복 후에 미군정에서 잠시 일한 여인이다. 현 앨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49년 초에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북한으로 망명했다. 현 앨리스는 상해임시정부에서 박헌영과 일했던 적도 있다. 이사민은 현 앨리스와 함께 북한으로 망명한 재미 공산당원이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중용되었다. 현 앨리스는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 배치되었고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으로 일했다. 그런 두 사람을 얼마 전부터 내무성에서 감시하기 시작했다. 미 첩보기관의 사주로 위장망명한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공산국가 출신 미국 시민권자들을 모국으로 망명시켜 첩보를 수집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 북한 내무성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망명 동기가 의심스럽다며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이승엽과 당시 외무성에서 일했던 이강국이 적극적으로 신원보증을 서는 바람에 평양에 들어왔던 것이다.

CIA
의 위장망명 프로그램은 그런대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나기도 했다. 위장망명자가 마음을 바꿔 진짜로 망명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어서 CIA의 공작에 따라 1949 11월에 입북했던 재미교포 조창영 부부가 마음을 바꿔 자수를 했고 그로 인해 현 앨리스와 이사민이 위험에 처한 것이다. 현 앨리스와 이사민이 간첩죄로 체포되면 북로당은 그들을 비호했던 이승엽은 물론 박헌영까지 끌고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두 사람을 빨리 빼돌려야 한다.

“박헌영 동지께 부탁해서 두 사람의 비자가 빨리 나오도록 조치하겠소.
이승엽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북로당의 포위망은 여기 평양에서도 서서히 좁혀오고 있었던 것이다.

 

현 앨리스와 이사민은 박헌영과 이승엽의 도움으로 북한을 탈출하지만 모스크바 공항에서 북한 관헌에게 체포돼 평양으로 송환된다. 그러면서 그들을 보증 섰던 박헌영과 이승엽은 처지가 곤란해진다. 6·25전쟁이 끝나고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은 미국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처형을 당한다. 남한에서는 김일성이 남로당을 패전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최근에 공개된 미국 비밀문서에 의해 북한 측 주장이 상당 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자료는 당시 남로당 수뇌부가 미국 정보당국과 선이 닿아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와 관련해서는 차차 밝히기로 하겠다.  

이승엽은 필요하면 변신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서 변신이란, 필요하면 멀리 있는 적과 손을 잡고 가까운 곳의 적을 치는 일종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술을 말한다. 이승엽은 일제강점기에 전향해서 보도연맹의 일종인 대화숙(大和塾)에 가입했던 적이 있고, 남로당 내분 때는 장안파를 버리고 재건파와 손을 잡으며 박헌영의 측근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이 재판 과정에서 밝혔듯이 월북하기 전에는 레오나르도 버치 중위나 해럴드 노블 고문 등 미군정의 정보담당자들과 수시로 만나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이승엽에게 다시 한 번 변신을 해야 할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란성 쌍둥이의 운명 

한반도는 동서냉전이 열전을 향해 치닫던 시기에 폭풍의 중심이었다. 남과 북은 첩보전에 혈안이 되었고 배신과 음모가 횡행하면서 변절자와 이중첩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의 시기에 대조적인 삶을 사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몰락한 남로당을 살리기 위해 평양에서 안간힘을 쓰던 이승엽이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북로당 직속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남한을 직접 관장하려 한 성시백이다. 변절과 초지일관의 신념으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두 사람은 각각 평양과 서울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성시백은 남로당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서, 이승엽은 그런 성시백을 제거하기 위해서.

남로당과 북로당. 티격태격하며 서로 형임을 내세우던 이란성 쌍둥이는 남과 북이 따로 정부를 수립하면서 그만 애증의 세월을 마감했다. 명암이 확연하게 갈린 것이다. 지하에 숨어 지내던 조선공산당은 광복을 맞아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박헌영이었다. 김일성이 소련군의 후원으로 쉽게 북한을 장악했지만 경력과 지명도에서 박헌영의 상대가 못되었다. 코민테른은 일국일당주의를 택하고 있다. 그래서 김일성은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중앙위 산하 북조선분국 책임자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후의 세월은 김일성 편이었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쫓겨 다니는 동안에 평양의 북조선분국은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조선공산당은 1946 11월에 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하면서 남조선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우익과 대결하기 위해 세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간판을 바꿔달자 북조선분국은 일국일당주의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우기며 슬그머니 북조선공산당으로 격을 높였다. 연후에 연안파의 조선신민당과 합당하며 북조선노동당을 칭하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서 김일성이 박헌영과 동격이 되었다. 남로당 간부들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월북해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에 더는 큰 소리를 칠 수가 없었다.

비록 셋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공산당의 정통성은 여전히 남로당에 있었고 남로당은 남한에서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48 8월에 해주에서 개최된 인민대표자회의에서 남로당은 건재함을 과시했다. 남로당은 최고인민회의 전체 대의원 572석 가운데 과반수인 360석을 차지했고 35인에 달하는 주석단에서도 다수를 점하며 북로당을 압도했다. 당시 박헌영은 남한 인구 1800만명 가운데 남로당원이 77%에 달한다고 호언했고, 김일성과 김두봉, 김책 등 북로당 지도부는 박헌영의 위세를 인정하며 뒤에서 박수를 치는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남로당은 급격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남로당이 주도한 폭동과 반란이 차례로 진압되면서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친정이 망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북로당은 남로당에 합당을 요구했다. 말이 합당이지 사실상 흡수합병이었다. 남로당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지만 싫다고 버틸 형편이 못됐다. 결국 1949 624일에 조선노동당이 새롭게 결성됐고,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마침내 김일성이 공산당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조선노동당의 출범으로 공식적으로는 북로당과 남로당이 사라졌지만 헤게모니 장악을 둘러싼 양 계파 간의 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박헌영은 국토완정-통일전쟁에서 반격 국면을 찾기로 하고 남로당원들의 무장봉기를 호언하며 통일전쟁을 재촉하고 나섰다. 하지만 북로당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미 식물인간에 불과한 남로당에 기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북로당은 대남사업을 직접 챙기기로 하고 적합한 인물을 물색했다. 그리고 적임자로 성시백을 발견했다. 김일성은 성시백에게 북로당 직속의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도록 은밀히 지시했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와 직접 연결된 이른바 ‘권위 있는 선’이 서울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한의 정보당국은 물론 남로당에도 극비 사항이었다.


미군의 미온적인 군사원조 

1950 4월 중순. 미 군사고문단장실.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개하면서 겨우내 찌들었던 서울 거리가 환하게 탈바꿈했다. 서울시민들은 산으로 들로 나들이를 나서고 고궁을 찾으며 화창한 봄날을 즐겼다. 그러나 전쟁의 먹구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미국과 대한민국 정보 책임자들의 표정은 화창한 봄날과 대조적으로 몹시 어두웠다.

“조선의용군들이 입국을 완료하면서 현재 북한은 10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연대의 편성이 완료되었소. 

육군 정보국 장도영 대령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북한군의 총병력은 135000명에 달하는 데 반해 국군의 총병력은 8개 사단 98000명에 불과해 엄청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병력을 계속해서 늘리고 있었다.  

합동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다섯 명. 한국군은 육군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과 방첩대장 김창룡 소령이 자리했고 미군은 군사고문단장 라이트 대령과 CIA 책임자 싱글로브 소령, 그리고 미 공군 첩보대(OSI) 소속의 니콜스 특무상사가 합석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장갑차를 겨우 27대 보유하고 있을 뿐인데 북한은 탱크를 무려 150대나 보유하고 있소. 

장도영 국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당시 육군 정보국에는 나중에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인물들이 전부 집결해 있었다. 국장 장도영은 5·16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과장 이후락 소령은 대통령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그리고 북한반장 김종필 중위는 국무총리를 지낸다. 여기에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예편됐던 박정희가 촉탁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6·25전쟁의 전개과정과 결과가 소상히 알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미군이 정말로 손을 뗄 것인지, 저들의 호언대로 남로당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인지, 전투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육군 정보국은 다만 비교적 소상하게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전쟁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남과 북의 군사력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소. 당장 전쟁이 터진다면 초반에 전선이 붕괴될 것이오. 

장도영 국장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소련이 적극적으로 북한에 군사원조를 하고 있는 데 반해 미국은 미온적이었다. 군사원조를 요구할 때마다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제7함대가 있네, 5공군이 있네 하며 군원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는 사이 남과 북의 전투력 차이는 점점 벌어져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1분당 발사탄수에서 남한은 북한의 10분의 1의 불과한 절대 열세에 놓이고 말았다.  

“군사원조가 시급한 것은 본관도 잘 알고 있소. 그렇지만 맥아더 사령부가 반대를 하고 있소. 윌로비 장군은 대한민국이 대만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군원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오. 

라이트 대령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국부군이 대륙을 공산군에게 빼앗긴 이유는 장제스(蔣介石) 군대의 무능과 부패 때문이다. 그에 실망한 맥아더 사령관의 정보참모 윌로비 장군은 한국을 대만과 같은 부류로 간주하며 군사원조에 반대하고 있었다. 미국으로선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이승만 대통령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윌로비 장군은 작년의 일을 잊지 않고 있소. 

라이트 대령의 지적에 장도영 대령과 김창룡 소령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할 말이 없었다. 사실 한 해 전 발생한 2개 대대의 월북은 맥아더 사령부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군에 침투한 남로당이 모조리 색출되었으니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김창룡 소령이 나섰다. 김삼룡과 이주하마저 체포되었으니 남로당은 이제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군에 암약하고 있는 자들이 있소” 

CIA
요원인 존 K. 싱글로브 소령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싱글로브 소령은 1970년대 주한미군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방침에 반기를 들다 면직됐던 강경파 인물로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시절부터 만주에 주둔하면서 한국 청년들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공작을 지휘하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북한 정세에 밝았다.

“우리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작년 8연대 2개 대대의 월북은 남로당과는 다른 선에서 공작을 한 것 같습니다. 

싱글로브 소령의 말에 김창룡 소령은 뜨끔했다. 미군이 벌써 거기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방첩대에서도 그러한 정황을 포착하고 은밀히 내사를 하던 중이었다.

“한국군은 좌익분자들을 모두 색출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군 내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자들이 있소. 군비증강에 앞서 정군(整軍)이 철저하게 단행되어야 할 것이오.

라이트 대령이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하면서 누굴 탓하려 드느냐는 듯 두 한국군 장교를 몰아붙였다. 장도영 대령과 김창룡 소령은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합동회의는 그렇게 각각의 주장만 펼친 채 특별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이 났다. 전쟁이 임박한 마당에 정체불명의 첩자가 군 내부에 침투해 있다는 사실에 두 정보 책임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군사고문단장실을 나섰다. 라이트 대령이 두 한국군 장교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서면서 단장실에는 싱글로브 소령과 니콜스 특무상사 두 사람만 남았다.

“한국군 정보국은 아직 별 단서를 포착하지 못한 것 같은데?
싱글로브 소령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물이 암약하고 있는 건 분명한데 정체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니콜스 공군 특무상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도널드 니콜스 특무상사. 훗날 싱글로브 소령은 그를 ‘최고의 첩보원’이라 칭했는데 첩보전을 얘기할 때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계급은 특무상사에 불과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할 만큼 깊은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북한은 니콜스 특무상사를 ‘천의 얼굴’이라 부르며 그의 목에 현상금까지 걸어놓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또 닦달하겠군요.
“그러니 빨리 손을 써야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네. 

“무슨 문제가?
니콜스 특무상사는 싱글로브 소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덩달아 긴장했다.

“모스크바 지국에서 통보가 왔는데, 현 앨리스와 이사민이 모스크바에서 체포되었다고 하네.
싱글로브 소령이 풀어 죽어 말했다. 이제 위장망명자를 통한 공작에 더는 기대를 걸 수 없게 된 것이다.

 

적의 적과 손을 잡다 

“그렇다면 사람을 새로 보내야겠군요. 

니콜스 특무상사가 대책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국 기록은 니콜스 특무상사가 직접 평양에 침투해 이승엽을 지칭하는 듯한 ‘남로당 고위간부’를 만나고 돌아온 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정황과 기록, 그리고 결과로 봐서 니콜스 특무상사와 이승엽이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밝혀지면서 이승엽은 미제 간첩으로 처형당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승엽이 미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북로당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적의 적과 손을 잡고 이해가 일치하는 한도에서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공작을 펼쳤을 것이다. CIA가 공작을 주도한 한국계 미국인들의 위장망명을 이승엽이 적극 지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음모와 배신이 판을 치던 시절에 대척점에 서 있던 두 사람. 변신의 달인과 공작의 귀재에게 공통의 적이 생겼다. 아직은 실체가 안개에 가려 있지만 남로당의 기반을 허물며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가 두 사람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손을 잡을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당시 정보획득의 주요 수단은 사람이 직접 정보원(情報源)에 접근해 정보를 수집하는 ‘휴민트(humint)’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군의 경우 북한 후방의 정보는 월남민을 통해서, 그리고 전방 배치 상황은 정보요원이 38선 이북으로 침투해서 취득해온 것에 의존하고 있었다. 미군은 따로 침투시킨 고정간첩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고급정보를 얻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면 위장귀순을?
싱글로브 소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발각될 염려가 크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전향해버릴 수도 있어 웬만하면 쓰지 않는 공작이다.  

“상황이 급합니다. 

니콜스 특무상사는 강행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개전이 임박한 것은 분명하다. 빨리 맥아더 사령부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군이 장제스 군대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군 정보당국도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자가 서울에서 암약하고 있는 사실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굴까? 어쩌면 평양의 남로당 간부들도 모르는 북로당의 비선(秘線)일지 모른다.  

니콜스 특무상사가 위장전향자로 정한 사람은 치안국 중앙분실장 백형복 총경. 바로 얼마 전에 김삼룡을 검거한 인물이다. 그렇게 되어 6·25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 대한민국의 대공사찰 총수가 월북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북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요직에 앉혔다.  


인민공화국 영웅 1 

1950 4월 말, 서울운동장 부근 이발소. 영업이 끝난 이발소 문은 굳게 닫혔는데 그 앞에 어울리지 않게 미제 뷰익 승용차가 서 있었다. 굳게 닫힌 이발소 안에서 승용차 주인 성시백과 이발소 주인 김명룡이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대로 찍었군. 좋아. 촬영을 계속하도록 해.
영월발전소를 촬영한 사진을 자세히 살피던 성시백이 만족을 표했다.

성시백. 인민공화국 영웅 1호로 부드러움과 강함을 겸비한 데 더해서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지닌 인물로 나중에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내는 성자립의 부친이기도 하다. 1905년생이니 박헌영보다는 다섯 살 아래고 김일성보다는 일곱 살 많은 데, 동갑인 이주하가 김일성을 막냇동생처럼 다룬 것과 대조적으로 성시백은 최후의 순간까지 김일성에 대한 충성스러운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김일성은 성시백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수시간 전에 총살당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상해임시정부 출신으로 서울에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있던 성시백은 당대 최고의 스파이며 투사라고 할 수 있다. 박헌영과 이승엽, 김삼룡, 이주하 등 남로당 간부들이 일제강점기에 모진 옥고를 치렀음을 들어 조선공산당의 적자임을 주장했지만, 투쟁에 관한 한 성시백이 그들보다 한 수 위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밀명을 받고 장제스 군대에 침투했던 성시백은 혼전 중에 홍군의 포로가 되었다. 우군에게 잡힌 꼴이니 정체를 밝히고 빠져나올 수도 있었건만 성시백은 정체를 숨긴 채 모진 고문을 겪으며 5년의 감옥생활을 참아냈다. 그런 성시백을 국부군이 신뢰하는 것은 당연했다. 성시백은 기밀에 쉽게 접근했고 중요한 군사비밀을 빼돌렸다. 

남로당은 과격 일변도의 투쟁으로 자멸을 초래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박헌영의 오만한 성품도 한몫을 했다. 타협과 용서를 모르는 박헌영은 중도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장안파 출신 남로당원들도 적으로 돌려버렸지만 성시백은 달랐다. 포용력을 십분 발휘해서 중도 성향의 인사들을 하나둘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행동하는 남로당과 달리 사업가 행세를 하며 대낮에 떳떳하게 돌아다녔다. 남로당과는 너무 다른 행보에 대한민국 수사기관은 그를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성시백은 사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공작에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남한은 북한에서 송전을 중단하면서 양초와 카바이트 수요가 급증했다. 성시백은 카바이트 무역에 뛰어들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가 소유한 금비나호가 북한 진남포와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카바이트와 양초를 싣고 인천과 부산항에 들어오면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았다. 성시백은 그 돈을 밑천으로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을 인수하고 신문사를 경영했다.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언론사주를 간첩으로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한 성시백은 서울 시내 13곳에 아지트를 두고 은밀히 공작을 추진해나갔다 


친북인사 당선시켜야 

“선거가 얼마 안 남았다. 

성시백은 사진을 한쪽으로 밀쳐놓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2대 총선이 530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총 의석수는 210. 성시백은 그중에서 상당수를 친북인사로 채울 계획을 진행 중이었다.

“미군 철수에 동조했던 의원들을 중심으로 포섭 대상을 선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년 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통에 일이 어려운 점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김명룡이 보고했다. 그는 성시백의 심복으로 이곳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다. 작년의 일이란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해서 노일환, 이문원 등 국회의원 13인이 남로당에 포섭된 혐의로 체포된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을 말한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 화제에 오르자 성시백은 화가 치밀었다. 따로 국회에 동조 세력을 포섭하고 있던 성시백은 프락치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그간의 공작이 수포로 돌아가는 쓴맛을 봤던 터였다. 남로당이 하는 짓이 그렇지. 성시백은 혀를 찼다. 제주도도 그렇고 대구와 여수도 마찬가지다. 괜히 소란만 떨었지 얻은 게 뭐가 있느냐 말이다. 결국 조직만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에 비해서 남반부정치위원회는 착실하게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한 해 전, 2개 대대 월북 공작과 이승만·장제스의 진해 회담 정보를 빼돌린 것도 성시백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을 설득해 남북연석회담에 참석케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틈틈이 남한의 군사시설을 촬영해 보내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정보다.  

성시백의 목표는 뿔뿔이 흩어진 남로당원들과 그동안 남로당에서 소외됐던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해 새롭게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당면한 과제는 목전에 당도한 총선에서 친북인사를 최대한 많이 당선시켜 남북평화통일안을 국회에 상정시키는 것. 공작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목표를 향해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성시백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오제도 검사와 방첩대장 겸 합동수사본부 국장인 김창룡 소령, 그리고 시경 사찰과 최운하 과장과 김임전 주임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마주 앉아 있었다. 대공수사기관의 책임자들이 전부 모인 자리인데 꼭 있어야 할 사람이 한 명 빠져 있었다. 치안국 중앙분실장 백형복 총경이 돌연 38선을 넘어 월북한 것이다.

 

발칵 뒤집힌 남한 정보기관 

대공수사기관의 책임자가 월북한 초유의 상황이 몰고 온 충격은 엄청났다. 2개 대대 월북에 비견될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백형복 총경이 대공비밀서류를 들고 월북한 바람에 일선 수사기관이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치안국은 물론 시경과 방첩대, 육본 정보국이 발칵 뒤집혔고 경무대는 엄중문책을 공언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 한국군을 제2의 장제스 군대로 의심하고 있는 마당에 이게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그래서 군검경합동수사본부가 긴급회동을 한 것이다.  

“이상합니다.
김창룡 소령이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용복이 월북을 주도했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왠지 수상합니다.

조용복은 안영달과 함께 김삼룡 체포에 협조한 남로당 간부다. 그 두 사람이 전향하면서 김삼룡 체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다시 치안국 간부를 포섭해서 북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배신과 음모가 횡행하는 현실이라고 해도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이다. 혹시 미군 당국에서 시도한 공작이 아닐까. 김창룡 소령은 니콜스 특무상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미군 첩보대에서?
최운하 과장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분간 지켜보는 게 좋겠군. 

오제도 검사도 위장망명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미군 첩보대에서 공작을 펼치는 중이라면 일단 지켜보는 게 좋다. 다른 기관에서 추진하는 공작에는 간여하지 않는 게 이쪽 세계의 불문율이다. 남로당과 북로당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수사기관과 미군 정보당국은 사안에 따라 협조하기도 하고 따돌리기도 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라이벌 의식이 더해져 군과 경찰이 경쟁을 하고, 같은 경찰이라도 치안국과 서울시경은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미군과 치안국에서 펼친 공작이라면 육군 정보국과 시경 사찰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꼴이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럴수록 냉정해야 한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체포의 기회가 남아 있다.  

“그동안 뭐 좀 알아낸 게 있나? 

최운하 과장이 김임전 주임을 지목했다. 지금 수사기관의 촉각은 정체불명의 거물에 쏠려 있었다. 미군 첩보대의 공작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별로 없습니다만 남로당과 별개로 움직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김임전 주임이 풀이 죽어 보고했다. 전향한 남로당원들을 아무리 닦달해도 더 알아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에 체포해야 해. 

오제도 검사가 엄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전쟁의 징후는 날로 짙어가고 있는데 총선이 목전에 당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될 것인가? 여론이 예전만 못하면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럴 때 꺼진 불씨가 다시 살아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뭔가 단서가 있어야 수사를 할 텐데 도무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미군 첩보대의 공작이 사실이라면 혹시 북쪽에서 무슨 정보가 내려오지 않을까?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문제는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다. 김임전 주임은 무거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07월 호

③ 얼어붙은 장진호와 중국군의 참전, 그리고 기적의 흥남철수작전

  •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유엔군은 38선을 넘으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1950 101 38선을 돌파한다. 그리고 1124일 미 육군 7사단 선발대가 압록강에 도달한다. 유엔군의 진군은 거기까지였다. 전세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앞세운 중국이 30만 대군을 파병하면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 해병 1사단도 얼어붙은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돼 전멸의 위기를 맞는데….

/1950 12월 흥남 사단묘지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 희생자 추모예배에서 미군 해병대 대원들이 전사자들에게 경례하고 있다. 

 

19501124일 함경남도 장진군 유담리.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장 로버트 테플렛 중령은 쌍안경에서 눈을 뗐다.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과 사정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광활한 개마고원과 얼어붙은 장진호.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왔다.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북진을 계속해서 마침내 개마고원에 이르렀다. 애초의 임무는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로 진격하는 것. 그러나 갑자기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무평리로 진격해 서부전선에서 퇴각 중인 8군을 돕는 것으로 임무가 수정되었다. 중국군 따위는 두렵지 않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 속에서 험준한 낭림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은 솔직히 겁이 났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작전장교 케니 소령이 쌍안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테플렛 중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역전의 두 해병 장교는 기분 나쁜 정적 속에서 서서히 조여오는 공포의 실체를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마치 눈 덮인 계곡 사이사이에 하얀 악마가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테플렛 중령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정찰을 마치고 캠프로 돌아오자 해병대원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차가운 비탈길에 쭈그리고 앉아 공수된 칠면조 고기를 뜯고 있었다. 이날은 마침 추수감사절이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 질린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 해병들을 보며 테플렛 중령은 과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호언대로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지 회의가 일었다. 대대 지휘소 천막에 걸린 화환에 ‘메리 크리스마스, 제기랄!’이라고 쓰인 글은 해병들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적은 두렵지 않지만 솔직히 빨리 싸움을 끝내고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보급도 걱정이다. 흥남항에서 125㎞나 떨어져 있는데 보급로라고는 오로지 첩첩산중 사이를 지나는 외길뿐이다. 그 길이 차단되면 해병 1사단은 꼼짝없이 얼어붙은 장진호에 고립될 판이었다.

테플렛 중령은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빌며 상황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테플렛 중령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하갈우리의 사단 사령부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긴급 하달된 것이다.  


맥없이 끝난 원산상륙작전 

1950 6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총공격을 감행하면서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북한군은 무서운 기세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국군은 패주를 거듭하며 낙동강까지 쫓겨 갔다. 이대로 한반도는 적화통일되고 마는 것일까. 그러나 미국이 참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의 허리를 끊고 낙동강 전선에서도 반격을 개시하며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에 섰던 미 해병 1사단은 서울이 수복되자 전선을 육군에 인계하고 다시 배를 타고 원산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세기의 도박’이라는 인천상륙작전과는 달리 원산상륙작전은 맥없이 끝났다. 북진 속도가 워낙 빨라서 해병대가 상륙하기 전에 육군이 이미 원산을 점령한 것이다. 별 어려움 없이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강계로 진격했고 마침내 얼어붙은 장진호에 당도한 것이다.  

평균해발 1000m에 달하는 개마고원은 한반도의 지붕이고, 장진호는 발전을 위해 장진강 상류에 일제가 조성한 면적이 64㎢에 이르는 넓은 인공호수다. 개마고원 한복판에 있는 함경남도 장진군은 겨울이면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체감온도가 무려 영하 40℃까지 떨어진다.  

꽁꽁 얼어붙은 장진호에 도달한 미 해병 1사단은 사단 사령부와 포병 11연대를 장진호 초입의 하갈우리에 설치하고 예하의 3개 보병연대 중에서 5연대와 7연대를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그리고 1연대를 후방 고토리에 배치했다. 장진호 동쪽은 한·소 국경으로 진출하려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가 이동해 있었다.

 

/1950 1129일 미국 해병 1사단 7연대와 5연대 소속 군인들이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북한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의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모습. 미 해병대 사진사가 철수 도중 눈이 수북이 쌓인 산길에서 휴식하는 병사들을 찍었다.

 

하갈우리에 보급품이 엄청나게 쌓이기 시작했다. 북진이 계속되면서 보급로가 자꾸 길어졌다. 보급로가 끊기면 작전에 큰 차질을 빚는다. 그래서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이 하갈우리에 중간 보급기지를 설치한 것이다. 사단 사령부에는 C47 수송기도 내려앉을 수 있는 대형 활주로가 임시로 깔렸는데 이 활주로는 나중에 철수할 때 큰 역할을 한다. 

불행하게도 스미스 장군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중국군이 갑자기 참전하면서 미 해병대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중국은 북한의 패망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1950 930,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지만 맥아더 원수는 무시하고 북진을 결정했다. 101 38선을 돌파한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1020일 평양을 탈환했다. 낙동강으로 밀릴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서 1124일에는 미 육군 7사단 선발대가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되면서 미국은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대치하게 되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조선을 도와서 미국과 싸운다. 중국은 참전을 결정했고 보병 30개 사단에 포병 1개 사단, 그리고 철도병 1개 사단으로 구성된 30만명의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었다. 총사령은 펑더화이(彭德懷). 서부전선 사령은 린뱌오(林彪). 그리고 동부전선 사령은 쑹스룬(宋時輪). 모두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이다.

기습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중국군이 1025일에 온정과 운산에 출현했다. 하얀 눈 속에서 유령군대가 돌진해 오면서 전선은 대혼란에 빠졌다. 꽹과리를 요란하게 울려대며 한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중국군을 보며 미군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전선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8군은 퇴각에 들어갔다. 전세가 다시 뒤집힌 것이다.


중국군의 포위 

맥아더 사령부는 미 해병 1사단에 후퇴하는 8군의 엄호를 맡겼다. 그렇지 않아도 경무장의 해병대가 내륙 깊숙이 진격할 것을 염려하고 있던 스미스 사단장에게 고민이 더해졌다. 낭림산맥을 넘어 진격해야 하는데 작전지역이 너무 넓어진다. 그렇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 해병 1사단은 산악지대로 진출할 채비를 서둘렀다. 다행히 중국군이 아직 동부전선까지는 진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그러나 그것은 미군 수뇌부의 착각이었다. 이미 은밀히 이동을 마친 중국군은 멀지 않은 곳에서 해병대가 더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중국군이 미 해병 1사단과 장진호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를 겹겹이 포위한 다음이었다. 그렇게 되어 미 해병대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면 전멸이다. 철수작전은 진격보다 더 어렵다. 지원받기 힘든 산악지대는 특히 더하다.  

거기에 해병대를 압박하는 적이 하나 더 있었다. 무시무시한 동장군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퇴로가 끊긴 채 추위에 떨고 있는 해병 1사단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과연 미 해병대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사히 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이목이 얼어붙은 장진호에 집중되었다.


1950 1126일 덕동고개 

하갈우리와 유담리를 연결하는 해발 1400m의 덕동고개는 유담리까지 진출한 해병 5연대와 7연대의 보급로를 통제하는 이른바 감제고지다. 덕동고개를 빼앗기면 2개 연대는 고립될 위험에 놓인다. 미 해병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1개 중대를 덕동고개에 배치해 놓고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소대 지령관 양근사가 손을 들자 정찰조는 일제히 눈밭에 엎드렸다. 발각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미 해병들이 경기관총이 어는 것을 막기 위해 허공에 대고 사격을 하는 모양이었다. 덕동고개의 미 해병대 진지를 정찰 중인 양근사는 정찰조에게 계속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방한복은 안쪽이 흰색이어서 뒤집어 입으면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2006 2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로부터 흥남 철수작전에서 피란민을 구조한 공로로 대휘장을 받은 로버트 러니 씨(사진)와 부인. 러니 씨는 “공산치하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나선 피란민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피난민 철수가 결정되자 피난민들을 가득 실은 전마선들이 수송선으로 몰려들었다. 미처 보트를 얻어 타지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들어 배를 향해 헤엄쳐갔다. 그렇게 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던커크 철수에 비유해서 한국의 던커크라고도 불렸던 흥남철수작전은 민간인 철수라는 또 하나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1950 1221일 흥남항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으로 입항하고 있었다.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가 레너드 라루 선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미군과의 계약에 따라 항공유를 싣고 흥남항으로 향하던 중에 전세가 급변하면서 입항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냥 돌아갈 것인가. 라루 선장은 부두에 몰려든 피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라루 선장이 피난민들을 태울 것을 지시하자 46명의 선원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 모두의 생각이 같았던 것이다. 승선이 허락되자 전마선들이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향해 몰려들었고 삽시간에 갑판이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무려 14000여 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매서운 바닷바람을 가르며 부산을 향해 항로를 잡았다. 피난민들은 파도를 뒤집어쓰고 살을 에는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남쪽으로 가는 배에 탈 수 있게 된 행운에 감사했다. 대부분 그동안 공산당의 학정에 치를 떨다 남쪽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조용하던 갑판에서 갑자기 소동이 일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있는 여인을 에워싸고 욕설을 해대고 있었다. 그 여인의 남편이 공산당 간부였던 것이다. 공산당 간부를 남편으로 둔 여인이 왜 피난민 대열에 섞였을까. 말 못할 사연이 있겠지만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은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일어섰다. 그리고 선원들이 채 말릴 틈도 없이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차가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남편을 놔두고 어린아이와 함께 배에 오른 여인에게 사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어린 자식과 전쟁이 없는 땅에서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 하나만 가지고 배에 올랐을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렇지만 기쁜 일도 있었다. 사흘 동안 항해하는 사이에 5명의 새로운 생명이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탄생한 것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부산을 거쳐 1224일 거제도에 도착했다. 14000여 명이 사흘 동안 찬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면서 무사히 자유의 땅을 밟았다. 가히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영국의 기네스협회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등재했다. 그리고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배에서 내려 수도사의 길을 택했다. 신의 놀라운 은총에 남은 생을 감사와 봉사의 삶으로 마무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거제도에 상륙한 피난민들은 현지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삶의 기반을 마련해갔다. 낯선 땅, 물선 곳이지만 동포애는 뜨거웠다. 거제도민들은 성심껏 피난민들을 도왔고 피난민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갔다.  

많은 수의 피난민이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옮겨갔다. 그들 중에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누이동생과 헤어진 채 국제시장에서 장사치가 된 금순이 오빠도 섞여 있었다.

 

/1952 6·25전쟁 당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중국군 소속 수송부대 병사들이 리어카에 탄약을 싣고 줄지어 행군하고 있다. 당시 중국군은 현대식 무기보다는 인해전술로 연합군을 압박해 전황 반전을 시도했다. 

 

“돌아간다.
 
양근사는 정찰조에게 서둘러 본대 복귀를 지시했다. 그는 나중에 비학산 전투에서 폭탄을 안고 해병대 진지에 뛰어들어 자폭함으로써 중국과 북한 양국으로부터 동시에 영웅 칭호를 받는다. 미 해병들도 이제는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한 듯 잔뜩 긴장해서 경계하고 있었다. 총공세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양근사는 이를 악물며 본대를 향해 내달았다. 일제 기습으로 완전 섬멸을 노려야 한다. 퇴로를 차단했다고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상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미국 해병대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현지인들 말로는 금년 겨울은 유난히 춥다고 했다. 양근사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동장군은 든든한 우군이다. 9병단 병사들은 대부분 만주 출신으로 추위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세계 최강이라는 미 해병대를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찰조는 날 듯 본부로 향했다.


1950 1127일 유담리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장진호가 하얗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제재소가 눈에 들어왔다. 5연대 3대대 G중대가 맡은 정찰구역은 거기까지다. 소대장은 손을 들어 휴식을 명했다.  

M1
소총을 내려놓는 잭 라이트 상병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파일캡에 셀 파카를 입은 데다 속에는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어서 걷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추위가 사정없이 살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껴입어도 동상환자가 속출했다. 

무전병이 무거운 M1 소총을 휴대해야 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카빈 소총은 추위에 약해서 불발되기 일쑤니 어쩔 수 없다. 장진호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상대적으로 추위에 강한 M1 소총도 밖에 오래 두면 윤활유가 얼어붙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판이다. 라이트 상병은 쉬면서도 집게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방한용 벙어리장갑은 방아쇠를 당기게끔 집게손가락을 따로 내놓게 되어 있어 자주 움직여주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위험이 있다. 추위는 전투의 양상도 바꿔놓았다. 총은 제대로 발사되지 않았고 수류탄도 불발이 다반사였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체력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중국군의 대공세로 서부전선의 8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괜찮은 걸까? 라이트 상병도 철수명령이 떨어진 것은 알고 있었다. 중국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일까? 우호적인 현지민들 중에는 미 해병대를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미 해병대가 세계 최강이라 믿고 있는 라이트 상병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는 아무래도 집에서 보내기 힘들 것 같았다. 아무렴 어떤가. 이 지긋지긋한 추위로부터 속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라이트 상병은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출발, 귀대한다. 

소대장이 기지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정찰 결과 별다른 이상은 감지되지 않았다. 저들도 미 해병대의 명성을 알고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큰 어려움 없이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잭 라이트 상병의 바람은 거기까지였다.


중국군의 대공세 

중국군 9병단은 1127일을 기해 일제히 공세를 단행했다. 9병단 산하의 79사단과 89사단은 유담리의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를, 59사단은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그리고 58사단은 고토리의 제1연대를 향해 일제히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미 육군 7사단 31연대는 80사단과 76사단의 협공으로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미 해병과 육군의 총병력은 25000.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은 13만의 대군. 거기에 미 해병대는 동장군이라는 무시무시한 적도 상대해야 했다.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면 전멸이다. 평지인 서부전선과 달리 산악지대인 동부전선은 후퇴도 용이하지 않다. 상급부대장인 10군단장 아먼드 소장은 해상으로 철수하기로 하고 해병대에 흥남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흥남은 일제가 대규모 질소비료공장을 건설하면서 조성된 함흥 남쪽의 항구도시다. 우리에게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귀에 익은 흥남철수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워싱턴은 긴장했다. 이미 서부전선에서 미 제1기병사단 8연대 3대대가 중국군에 포위되어 모조리 포로가 되는 사태가 발생한 마당이다. 그런데 해병 1사단은 그보다도 나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흥남까지 가려면 우선 유담리의 해병 5, 7연대와 장진호 동쪽의 육군 7사단 31연대를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로 불러들여야 한다. 그리고 1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고토리로 철수한 다음에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로 이동해야 한다. 일단 진흥리까지만 가면 거기서부터는 길도 좋고 철로도 있어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철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스미스 사단장은 5연대와 7연대에 후퇴를 명했고 고립된 31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를 긴급 편성했다.  


1950 122일 덕동고개 

경기관총이 요란한 총성을 내며 불을 뿜었다. 고개 아래에서 중국군이 새까맣게 밀려오고 있었다. 중대장 바버 대위는 중대원들에게 결사항전을 명령했다. 고지를 빼앗기면 유담리에 있는 5연대는 퇴로가 차단되면서 그대로 고립된다. 철수작전은 121일 오전 8시를 기해 개시되었다.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는 23. 덕동고개를 넘는 게 가장 큰 고비다. 마지막 부대가 덕동고개를 넘을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지를 사수해야 한다.

마침내 연대의 최후미를 담당한 해롤드 쉬러 대위의 중대가 덕동고개에 당도했다. 해병들의 팔이 모두 퉁퉁 부어 있었다. 추격하는 중국군을 따돌리기 위해서 무려 1000개 이상의 수류탄을 던졌던 것이다.  

포병 11연대의 155밀리 곡사포와 105밀리 곡사포가 덕동 수비대를 엄호했지만 효과는 별로 크지 않았다. 찬 공기는 공기밀도를 높였고 그로 인해 포 사정거리가 짧아져서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중대 자체 화력인 81밀리와 60밀리 박격포도 마찬가지였다. 딱딱해진 땅으로 인한 반동 때문에 포판이 자주 파열되었던 것이다. 소총도 불발되기 일쑤였고 중대원들의 체력은 추위로 크게 떨어져 있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국군을 보며 바버 대위는 전멸을 각오했다.  

그때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남쪽하늘에서 콜세어 전투기 편대가 날아왔다. 포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해병항공대의 콜세어 전투기와 해군의 스카이레이더 전투기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다. 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해병대는 무사히 철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급강하시에 특유의 금속성 마찰음을 내서 ‘죽음의 휘파람새’라는 별칭이 붙은 콜세어 전투기가 지상으로 내리꽂히며 중국군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어서 폭탄을 투하한 콜세어는 급상승을 시도했는데 어찌나 낮게 나는지 고지 위에서 공습을 지켜보고 있는 해병들은 전투기가 밑에서 솟아오르는 기이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해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반격에 나섰다. 해병들은 비록 지금은 후퇴하지만 함흥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반격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이오지마(유황도) 전투에도 참전했던 중대장 해롤드 쉬러 대위는 나중에 자신이 치른 전투 중에서 유담리 철수작전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추락한 콜세어 전투기 

해병 323전투비행대대 소속의 조지 웰커 중사는 덕동고개를 향해서 몰려들고 있는 중국군을 확인하고 급강하를 시도했다. 중국군들이 일제히 대공사격을 개시했지만 큰 위협은 못됐다. 기총소사를 끝낸 조지 웰커 중사는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고 기체를 상승시켰다. 항공모함 ‘바도잉 해협’에서 발진한 F4U 콜세어 전투기에는 5인치 로켓포와 500파운드 폭탄 4발이 장착되어 있었다.  

편대기 4대가 차례로 기총소사와 로켓 공격을 하자 고지로 밀려들던 중국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승해서 고도를 회복한 웰커 중사는 다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선회에 들어갔다.

 

/중국군과의 첫 조우였던 운산전투. 맥아더 원수는 중국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국군은 이미 12만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놓았다. 중국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그런데 대공사격에 피격된 것일까. 급강하를 시도하던 웰커 중사는 앞쪽에서 하얀 연기가 이는 것을 목격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오일 냉각기가 파손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항모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 낙하산으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불시착을 시도할 것인가. 빨리 결정해야 한다. 낙하산으로 탈출하기에는 고도가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기체가 요동치더니 엔진이 멎었다.  

웰커 중사는 불시착하기로 하고 하얗게 눈이 덮인 평원을 향해 콜세어 전투기를 하강시켰다. 덕동고개를 스칠 듯 지나친 콜세어 전투기는 썰매처럼 설원을 미끄러지며 불시착했다. 다행히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저쪽에서 한 무리의 군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중국군이라면 포로가 될 판이다. 웰커 중사는 권총을 얼른 뽑아들고 기체에서 뛰어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군인은 다행히 해병대원들이었다. 웰커 중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1950 123일 장진호 동쪽 풍류천 미 육군 7사단 보급기지

7사단 13공병대대 소속 래비 헤이어 하사는 크레인을 향해 내달렸다. 보급창 일대는 새어나온 휘발유로 바닥이 철벅거렸다. 공병대대원들이 돌아다니며 드럼통마다 구멍을 내고 있었다. 후퇴하기 전에 전부 불 질러버리려는 것이다. 크레인 해체를 책임진 헤이어 하사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작업을 마치기 전에 어디서 불똥이라도 날아들면 큰일이었다.

미 육군 7사단 31연대의 임무는 한·소 국경을 향해 진격한 한국군 1군단을 지원하는 것이다. 장진호 동쪽에 주둔한 7사단 31연대는 해병대보다 큰 어려움에 처했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철수하려면 얼어붙은 장진호를 가로질러 유담리 해병 연대로 가든지 포위망을 뚫고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까지 가야 하는데 지원 부대인 31연대로서는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1대대장 페이드 중령은 포위망을 뚫기로 하고 취약한 지점을 향해 화력을 집중했다. 하갈우리에서 급파된 특공대가 합세하면서 31연대는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대대장 페이드 중령은 전사했다. 페이드 중령에게는 나중에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된다.  

철수작전의 마무리는 공병대 몫이다. 하갈우리의 해병대 기지도 그렇지만 풍류천 육군 기지에도 엄청난 보급품이 쌓여 있었다. 철수하기 전에 보급품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조리 없애야 한다. C레이션 박스는 일차로 불도저로 밀고 그 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휘발유는 드럼통에 구멍을 낸 다음에 중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할 것이다. 탄약도 폭파시키면 된다. 문제는 불도저와 크레인 등 각종 중장비와 트럭들이다. 놓고 가기에는 아깝고 가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장비들이다. 그렇다고 부숴버리는 것도 쉽지 않다. 대피하라는 고함과 함께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곧 유류고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잠시 후면 탄약고도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고심하던 헤이어 하사는 결심을 하고 크레인에 올라탔다. 분신과도 같은 크레인을 그냥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크레인이 철수 대열에 끼어들자 뒷줄에 선 트럭들이 클랙슨을 요란하게 눌러댔다. 느림보 크레인이 앞장선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1950 124일 하갈우리 

추위와 과로로 기진맥진한 해병들이 느릿느릿 기지로 들어왔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게 마치 유령의 행렬 같았다. 5연대와 7연대는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마침내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당도했다. 일주일 동안 23㎞를 행군한 것이다. 기습과 추위로 137명이 죽고 4400여 명이 부상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철수였다. 

5
연대와 7연대, 그리고 육군 7사단 31연대 병력이 속속 집결하면서 하갈우리 기지는 1만명에 달하는 병력과 1000여 대의 차량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었다. 다음 목표는 고토리. 그곳에서 1연대와 합류해서 진흥리를 거쳐 함흥으로 철수해야 한다. 일단 진흥리까지 가면 큰 위기는 벗어난 셈이다. 스미스 소장은 부대를 재편성하기로 했다. 1130일부로 장진호 일대의 모든 부대는 해병 1사단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과연 해병대는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미국 해병대 1개 사단의 전멸이라는 전례 없는 참사가 벌어질 것인가. 전세계가 숨을 죽이고 중국군과 미 해병대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미 해병 1사단은 이중, 삼중으로 포위되었지만 그렇다고 외부와 연락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하늘길은 열려 있었다. C47 수송기가 수시로 하갈우리의 비행장에 착륙하며 보충병을 내려놓았고 부상병을 후송했다. 그리고 실전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헬리콥터도 큰 몫을 했고 공중투하되는 보급품도 해병대에 큰 힘이 되었다.


종군기자들의 취재  

활주로 끝에 간신히 착륙한 C47 수송기에서 한 무리의 민간인이 쏟아져 내렸다. 해병 1사단을 취재하기 위해서 종군기자들이 하갈우리로 몰려든 것이다. 스미스 사단장이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향(In Other Direction)으로 진격 중’이라고 한 말도 이때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거듭되는 중국군의 기습과 밤이면 체감온도가 영하 40℃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추위. 현격히 떨어진 체력. 절망의 끝에 서 있는 해병대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자는 경계를 서는 한 해병대원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지금 가장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은 무엇인가? 

조국과 명예, 자유 수호와 불굴의 투지. 혹은 무사 탈출과 부모형제. 아니면 고향집과 따뜻한 잠자리…. 대략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질문한 기자에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제기랄, 아무 생각도 없소. 가끔 좋아하는 여배우 얼굴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해병의 무뚝뚝한 대답은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미녀로 소문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 여기자가 취재감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다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는 해병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마거릿 히긴스 기자는 통영상륙작전에 종군했을 때 ‘한국 해병대는 귀신도 잡는다’는 기사를 쓴 사람이다.

“지금 가장 힘든 게 무엇인가.
극한 상황에 처한 해병들을 오로지 취재원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비정한 모습에 누군가 뒤에서 톡 쏘아붙였다.  

“옷을 15㎝ 두께로 껴입고서 겨우 8㎝ 밖에 안 되는 물건을 꺼내놓고 소변을 보는 것이다.

그 말에 주위의 해병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아직은 농담을 건넬 여유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양모 내복에 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목 스웨터와 방한 바지를, 다시 그 위에 파일 재킷, 야전 상의, 파카와 방한 후드가 달린 셀 파카를 차례로 걸치면 몸을 움직이는 게 불편할 정도다. 그리고 소변이 그대로 얼어붙는 추위에서 물건을 꺼내놓는 것은 사실 큰 고역이었다.  

모처럼 크게 웃은 해병들은 다시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멀고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불굴의 해병 정신으로 반드시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을 완수해야 했다.


1950 125일 하갈우리 

C47 수송기가 요란하게 쌍발 엔진음을 울리며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종사 폴 프리츠 대위는 새 기록에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긴 날개로 인해 알바트로스란 별명이 붙은 C47 수송기는 본래 민간 여객기인 DC3을 군용으로 개조한 것으로 비교적 짧은 거리에서 이착륙이 가능하면서 물자와 인원도 많이 실을 수 있어 군용기로도 크게 각광받고 있었다. C47 수송기의 승무원 정원은 조종사와 부조종사, 통신사와 수송담당관 등 4. 그리고 수송인원 정원은 27명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부상병을 한 사람이라도 더 후송해야 할 상황이다. 하갈우리와 함흥의 연포 비행장을 오가며 보급품을 나르고 부상병을 후송하고 있는 수송기 조종사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후퇴가 결정되었을 때 전원 항공기로 철수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반대했다. 가능성도 별로 크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되면 최후까지 남아서 비행장을 수비하는 부대는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중장비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대부대가 뭉쳐서 싸우며 철수하는 것이 피해가 적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해병대의 전통과도 부합된다. 그래서 부상자만 비행기로 후송키로 한 것이다.

수송담당관으로부터 지금까지 최다 탑승자 기록이 38명이라는 말을 들은 프리츠 대위는 만만치 않은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갈우리의 임시 비행장은 활주로 길이가 750m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미 공군 21공수비행단의 명예가 걸려 있는 문제다. 프리츠 대위는 그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우리는 40명이다. 

프리츠 대위의 지시가 떨어지자 수송담당관이 얼른 부상병 2명을 더 태웠다. 정원 27명의 공간에 40명이 밀려들었으니 기내는 숨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일단 태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륙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프리츠 대위는 나머지는 천운에 맡기기로 하고 수송기를 활주로 끝으로 몰았다. 그때 프리츠 대위의 눈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부상병 두 명이 들어왔다. 아마도 지휘관으로부터 후송을 허가받았음에도 더 이상 탑승하는 게 무리임을 알기에 그대로 서 있는 해병대원들일 것이다. 비행기로 후송되려면 세 차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동상자와 부상자는 트럭으로 후송되었고 웬만한 경상자는 도보로 후퇴한다.  

“제기랄! 저들도 태워. 

프리츠 대위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주춤하던 수송담당관이 얼른 뛰어내리더니 두 부상병을 되는 대로 기내로 밀어넣었다. 활주로 길이가 충분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우고 이륙하기는 힘들 것이다. 프리츠 대위는 브레이크를 질끈 밟고서 출력을 최대로 높였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방식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기적의 이륙 

고막을 찢는 엔진음과 공포에 질린 얼굴들. 코를 찌르는 악취. 프리츠 대위가 브레이크를 놓자 C47 수송기는 맹렬한 속도로 활주로를 달려갔다. 그러나 활주로 끝에 다 이르도록 수송기는 이륙에 충분한 힘을 얻지 못했다. 이대로 활주로를 벗어나면서 땅에 처박히는 것일까. 프리츠 대위는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당겼다.  

다행히 C47 수송기는 땅을 박차고 올라갔다. 승무원과 부상병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비행고도로 상승하기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프리츠 대위는 거칠게 숨을 토해내고 있는 양쪽 날개의 쌍발엔진에 눈길을 주며 간절한 마음으로 제발 힘 내줄 것을 빌었다. 위에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고지를 점령한 중국군이 상승하는 비행기를 내려다보고 총을 쏘고 있었다.  

사격이 멎어들면서 프리츠 대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무사히 이륙에 성공한 것이다. 42명의 부상자에게는 생과 사를 가르는 고비를 넘은 셈이다.

해병대가 하갈우리에서 철수할 무렵, 서부전선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8군은 125일에 평양을 포기했는데 서울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붕괴된 서부전선과 전멸의 위기에 처한 동부전선. 트루먼 대통령이 수차 부인했음에도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워싱턴 정가를 떠돌고 있었다.  


1950 126일 하갈우리 

전열을 재정비한 해병들은 철수를 재개했다. 다음 목표는 1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고토리. 그곳에서 1연대와 합류한 후에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까지 가면 일단 포위망은 빠져나오는 셈이다.

철수 준비를 마친 해병들이 소대별로 정렬했는데 피로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은 기온이 1℃씩 내려갈 때마다 능률이 3%씩 떨어진다고 한다. 벌써 보름 가까이 강추위 속에서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전투에 시달렸으니 몰골들이 말이 아니었다. 비교적 생생한 대원은 인천상륙작전에서 가벼운 부상을 입고 일본으로 후송되었다가 복귀한 해병들이거나 본토에서 날아온 보충병들이다. 해병 1사단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에 참전을 자원했던 그들은 현지의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이었다.

 

/흥남 철수 당시 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상륙정에 다투어 타고 있다.

 

철수하는 해병들의 주머니가 불룩했다. 철수를 앞두고 PX 물자를 모두 나눠준 것이다. 캔디며 초콜릿은 얼어붙은 C레이션보다 훨씬 유용한 식량이 될 것이다. 해병대원들은 불도저가 전우들의 시신 위에 눈을 덮는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며 꼭 돌아와서 전우의 시신을 수습할 것을 맹세했다. 처음에는 시신도 공수했지만 상황이 나빠지면서 현지에 가매장하기로 했다.

초신 퓨(Chosin Few). 장진호 철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중에 모임을 만들었다. 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발음으로 당시는 일본사람들이 만든 지도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해병대는 장진을 그렇게 불렀다.

출발을 앞두고 대대장 로버트 테플렛 중령이 돌아다니며 대대원들이 총열을 제대로 닦았는지, 군화끈을 확실하게 말렸는지를 일일이 검열했다. M1 소총의 총열에 물방울이 맺히면 총열이 파열될 염려가 있고 군화끈이 얼어붙으면 군화를 벗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철저히 물기를 제거해야 한다. 슬리핑백 검열도 빠뜨릴 수 없었다. 지퍼가 얼어서 슬리핑백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철수 중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꼼짝없이 중국군에게 포로가 된다. 함흥까지는 100. 함흥에 도착할 때까지 해병대원들은 계속해서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노숙을 해야 한다. 추위는 중국군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철수는 7연대부터 시작되었다. ‘몬테주마에서 트리폴리까지…’. 하갈우리를 철수하는 해병대원들의 입에서 미국 해병대 찬가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이어서 포병대와 육군 7사단 31연대가 철수길에 올랐다. 사단 지휘부는 헬기편으로 철수했다. 마지막으로 5연대가 철수할 차례다. 3대대가 최후미를 방어하기로 하고 1대대와 2대대가 먼저 하갈우리를 빠져나갔다. 전차를 비롯해서 중장비는 철수 대열의 후미에 섰다. 행여 고장이 나면 길이 막혀 철수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하갈우리 기지에 남은 병력은 5연대 3대대뿐이다. 삽시간에 텅 빈 기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사이로 하얗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장진호. 악마의 입김과도 같은 삭풍. 3대대원들은 형용키 힘든 공포에 휩싸였다.


피난민의 합류 

조금 있으면 이곳은 맹렬한 불길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폭약 설치를 마친 공병들이 황급히 차에 올랐다. 여기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 대대장 테플렛 중령은 철수를 명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본대에 합류해야 한다. 다행히 아직 중국군은 쫓아오지 않고 있었다.

“대대장님! 

갑자기 후미의 경계병이 고함을 질렀다. 그 사이에 중국군이 나타났단 말인가. 테플렛 중령이 고개를 돌리니 수천 명의 무리가 이리로 몰려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대병력이라도 이렇게 대낮에 정면 공격을 감행해온 적은 없었다. 테플렛 중령은 황급히 전투배치를 명했다.  

“쏘지 마시오! 

대대에 파견된 한국인 연락관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소리쳤다.

“저들은 우리를 따라 가려는 피난민들입니다. 

피난민이라고? 그러고 보니 중국군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와중에 피난민을 데리고 철수할 수는 없다. 테플렛 중령은 연락관을 통해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피난민들은 막무가내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쏠 수도 없는 일이다. 테플렛 중령은 그 이상 만류하지 않았고, 피난민들은 머리에 짐을 지고 아이 손을 잡은 채 터덜터덜 후퇴하는 해병대의 뒤를 따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난민의 수는 자꾸만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해병들처럼 당장은 함흥으로 후퇴하지만 곧 전열을 정비해서 재반격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때까지 잠시만 집을 떠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선 피난길은 정든 가족, 고향과 영영 이별의 길이 되고 말았다.

 

하갈우리를 출발한 일행은 하루 종일 눈 속을 행군하며 5㎞를 전진했다. 밤이 되면 또 중국군의 지긋지긋한 인해전술이 시작될 것이다. 해병들은 지옥 같은 밤에 대비하며 경계에 들어갔다. 낮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화력이 월등히 우세한 데다 콜세어 전투기들이 교대로 날아와서 철수를 엄호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밤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중국군이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었다. 공포심을 자아내는 호각 소리와 꽹과리 소리. 산골짜기 사이로 난 외길을 따라 철수하는 해병들을 향해 중국군은 벌떼처럼 밀려들었고, 해병대는 정찰조를 산등성이에 매복시키고 그들과 대적했다.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에 나머지 병력은 그대로 길에 주저앉거나 누워서 잠을 잤다. 작렬하는 포탄과 엄습해오는 추위. 당번병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해병들을 깨웠다. 30분 이상 잠이 들면 동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잠깐 눈을 붙였던 해병들은 교대로 정찰조에 편성되어 산등성이로 올라갔고 사력을 다해 교전에 임했다.  


1950 129일 고토리 

철수 병력은 사투 끝에 마침내 고토리에 도착했다. 중국군은 9군데에 매복지를 설치하고 끊임없이 해병대를 괴롭혔지만 해병대는 난관을 모조리 돌파하고 무사히 고토리에 당도한 것이다. 고토리까지 오는 동안에 86명이 죽고 506명이 부상했지만 그만하면 성공적인 철수였다.

이제 남은 마지막 관문은 황초령을 넘는 것. 상당한 거리를 후퇴했고 사단 병력이 전부 집결했으니 큰 고비를 넘긴 셈이지만 늘어난 부상자와 바닥을 보이는 체력이 큰 부담이었다. 부상자와 동상자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위생병들로 고토리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위생병들은 모르핀 앰풀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앰풀을 입에 넣고 뛰어다녔다. 피도 얼어붙은 마당이니 수혈이 쉽지 않았다. 찬 음식 때문에 대원들은 설사가 났고 한기가 노출된 항문을 파고들면서 항문 동상환자가 급증했다. 폐렴환자도 늘어나고 있었다. 강추위는 호흡 횟수를 떨어뜨리고 심한 기침을 유발한다. 빨리 난방시설로 옮기고 강심제를 먹이지 않으면 폐렴에 걸릴 염려가 있는데 그게 쉽지 않은 현실이었다. 해병들은 1m 이상 쌓인 눈을 헤치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한풍을 맞으며 전진을 계속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서.  

스미스 소장은 부대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진흥리로 철수하기로 했다. 5연대와 영국군 해병대와 7사단 31연대 일부 병력이 제1 그룹이고, 7연대와 31연대 임시대대와 사단 지휘부가 제2 그룹. 그리고 고토리에서 합류한 1연대와 31연대 2대대, 사단 본부대대가 제3 그룹이다.

최대 관문은 신라 진흥왕이 북변을 시찰하고 순수비를 세운 해발 1200m의 고지 황초령이다. 황초령에는 수문교가 있다. 장진강발전소는 유역변경식 발전소여서 장진호의 물을 황초령으로 역류시켜 발전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군이 황초령 수문교를 파괴하면서 해병 1사단은 퇴로가 끊겼다. 퇴로는 그것뿐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문교를 복구해야 했다. 해병 1사단 시설대대와 육군 185공병대, 그리고 58교량중대가 복구에 나섰지만 여의치 않았다. 파괴된 부분은 채 10m가 되지 않지만 완전한 복구를 하려면 특수장비인 트레이드 웨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선 공병대에 그런 특수장비가 있을 리 없었다. 일본에서 가지고 와야 하는데 문제는 트레이드 웨이를 어떻게 황초령으로 수송하느냐다. 이 상황에서 방법은 하나. 공중투하뿐인데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동안 공중투하했던 식량이나 탄약, 연료와는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공수사령부는 긴급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중국군은 계속해서 해병대를 괴롭혔고 언론들도 쉬지 않고 호들갑을 떨었다.


1950 1210일 황초령 상공 

OY2 스팀슨 정찰기에서 10군단장 아먼드 소장이 고뇌에 잠긴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총공세 조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망원경으로 하얀 설원을 살피던 보좌관 알렉산더 헤이그 대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헤이그 대위는 훗날 키신저에게 발탁되어 미국 국무장관까지 승진하는 인물이다.

 

/흥남 철수 당시 부두로 몰려든 피난민들. 

 

철수 대열은 파괴된 황초령의 수문교 앞에 멈춰서 있었고 중국군 58사단과 59사단, 60사단 4만여 병력은 해병대의 후미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60사단 산하 179연대는 미리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에 포진해 있었다. 꼼짝없이 포위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동안에 중국군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기에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이 전투력을 회복하기 전에 빨리 황초령을 넘어야 한다. 공수작전이 성공을 거둘까. 철수의 성공 여부는 이제 교량 복구에 달렸다. 아먼드 군단장과 헤이그 대위는 손에 땀을 쥐고 공중투하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요란한 엔진음을 울리며 C119 대형 수송기 8대가 날아왔다. 플라잉 박스 카(Flying Box Car)란 별칭이 붙은 C119는 최대 이륙중량이 38000㎏에 달하는 초대형 수송기로 숙천과 순천 공수작전 때는 105밀리 곡사포를 투하했던 적도 있었다. 공수 담당관들은 트레이드 웨이를 8개로 분리해서 8대의 C119에 싣고 공중투하하기로 한 것이다.

황초령 상공을 선회하던 8대의 C119 수송기는 지상에서 신호가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차례로 트레이드 웨이를 낙하시켰다. 세계의 매스컴이 주목하고 있는 해병대 철수작전의 클라이맥스였다. 아먼드 소장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제발 파손되지 않고 아군 수중에 무사히 떨어져야 할 텐데. 8개의 트레이드 웨이는 낙하산에 매달린 채 황초령을 향해 떨어져 내려갔다. 8개 중에 6개만 있으면 파괴된 수문교를 복구할 수 있다.

기도가 통했는지 다행히 8개 중에서 6개가 무사히 회수되었다. 한 개는 파손되었고 또 한 개는 중국군 지역에 떨어졌다. 아먼드 소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정찰기를 돌릴 것을 명령했다.

해병과 육군 공병대는 신속하게 작업에 들어갔고 복구된 수문교 위로 철수 병력 전원과 1200여 대의 차량이 이틀에 걸쳐 무사히 통과했다. 마침내 해병대는 중국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것이다. 진흥리에 중국군 일부가 매복해 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었다. 함흥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과 한국군이 급히 진흥리로 출동해서 철수하는 해병대를 엄호했다.

사지를 헤쳐 나온 해병들은 진흥리에서 전원 기차와 트럭에 나누어 승차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을 만큼 해병대는 절박한 상황을 무사히 극복한 것이다.

장진호 포위전은 미 해병대보다 중국군에게 더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쑹스룬 9병단장은 자재를 일본에서 공수해서 황초령 수문교를 복구하는 것을 보고 미국의 엄청난 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해병 1사단이 9병단과 혈투를 벌이는 동안에 함경북도까지 진격했던 미군과 한국군 1군단은 큰 손실 없이 무사히 철수했다. 그리고 전력을 소진한 9병단이 전선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중국군은 춘계공세에서 큰 차질을 빚게 되었고 미군과 한국군은 재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1950 1212일 흥남 

비릿한 바다 냄새로 가득한 흥남 벌판에 전에 없던 풍경이 생겼다. 하얀 십자가가 줄을 이어 꽂힌 것이다. 흥남으로 무사히 철수한 해병대는 가장 먼저 묘역을 만들고 전사자들을 안장시켰다. 반기로 게양된 성조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조총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스미스 사단장은 묘지를 일일이 돌며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땅에서 귀한 생명을 바친 전사자들에게 나중에 반드시 데리고 갈 것을 약속했다. 그래도 이들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고토리, 혹은 길가에서 눈에 덮인 채 방치된 시신들에 비하면 행복한 편일 것이다.

철수는 1212일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철수 병력은 장진호에서 철수해 온 해병 12000명을 포함해 전체 105000명에 달했는데, 피해가 큰 해병 1사단이 첫 번째로 승선했다. 철수작전에 참가한 크고 작은 수송선 200여 척으로 흥남항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중국군이 간헐적으로 공세를 펼쳤지만 철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오히려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철수 병력과 맞먹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로 꾸역꾸역 밀려든 것이다. 피난민은 후송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막무가내로 배에 태워줄 것을 간청하는 그들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군 지휘부는 고심 끝에 피난민 승선을 결정했다.

 

 

08월 호

④ 빨치산과 토벌군의 지리산 대혈투

남북 모두에 버림받은 이현상, 최후를 맞다

  • 적의 총탄보다 더 무서운 게 내부 권력투쟁이다. 6·25전쟁 중 남한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당장 자신들부터 구빨치와 신빨치로 나뉘어 소모적인 노선투쟁을 벌였고, 북한 정권이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를 축출하면서 ‘조국’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는 운명이 됐다. 그 와중에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2개 군단의 막강 전력이 대대적인 지리산 토벌에 나서자 총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을 ‘세 가지 각오’를 했다는 빨치산들도 궤멸할 수밖에 없었다.

/지리산 빨치산을 이끈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19517월 초.

신록이 우거진 덕유산 송치골에 빨치산 지도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남한에서 활동하는 6개 도당의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긴급 회동한 이유는 그동안 빨치산 투쟁을 하면서 쌓은 서로의 경험을 교환하고 향후의 투쟁 방침을 확정하기 위해서다.  

“중국도 휴전에 응할 용의가 있는 것 같소.
속칭 남부군으로 불리는 빨치산 독립제4지대를 이끌고 있는 이현상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했고 급기야 14일에 다시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평택과 원주를 잇는 선까지 후퇴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서 322일에 서울을 재탈환했지만 중국군의 춘계대공세로 또 한 차례 위기를 맞았다. 이후로 유엔군과 공산진영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전선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됐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휴전 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 힘으로 완승을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휴전 제의를 중국 당국이 수락하면서 양측은 710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휴전은 한반도가 다시 남과 북으로 갈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남한에서 투쟁하고 있는 빨치산은 어떻게 되는 건가. 빨치산 지도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휴전회담을 지켜보았다.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투쟁을 가일층 강화해야 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부대를 대단위로 재편할 필요가 있소. 

“찬성할 수 없소. 전선이 소강상태로 돌아서면 남조선은 대규모 토벌대를 편성할 것이오. 그에 대비하려면 부대를 소규모로 전환할 필요가 있소. 앞으로의 투쟁은 아성공격(牙城攻擊)보다는 인민들 속으로 침투해서 장기투쟁을 꾀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오.

이현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준표가 반대하고 나섰다. 교사 출신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전북도당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다. 전북도당은 남부군 못지않게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도 방준표 동지의 의견에 찬동하오. 이제부터는 지역별로 분산해서 소단위 투쟁에 치중해야 할 것이오.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방준표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속칭 ‘전평(全評)’ 간부 출신으로 방준표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다. 방준표와 박영발은 사사건건 이현상을 물고 늘어졌다. 빨치산을 통합해 강력한 제2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현상과, 오히려 소규모로 분산시켜 인민들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는 방준표·박영발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회의장에 터질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舊빨치와 新빨치의 갈등 

빨치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전쟁 전부터 좌익활동을 하던 속칭 구빨치,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서 낙오한 인민군들과 북한 점령하에서 공산당에 협력한 사람들로 구성된 신빨치가 그들이다. 빨치산 부대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에서 직접 파견한 이현상의 독립제4지대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별로 조직된 도당 유격대다.

두 종류의 빨치산 부대는 지금 휴전을 앞두고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현상은 남로당 대남총책 이승엽으로부터 직접 임명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전체 빨치산을 통괄하려 했는데 박영발과 방준표는 순순히 그의 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방준표와 박영발도 본래는 남로당 출신이지만 북한군이 호남 일대를 점령했을 때 북로당에 의해 각각 전북도당과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북로당과 직접 선이 닿아 있었다.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는 휴전에 대비해 남한에 강력한 근거지를 마련해둘 필요가 있었다. 남한에 강력한 빨치산 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남로당 지도부가 평양에서 큰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의 원천. 그래서 6개 도당의 유격대를 이현상의 독립제4지대 지휘 아래에 두기로 한 것인데 현지 도당 위원장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방준표와 박영발이 강력 반발하고 나서자 충남도당과 충북도당, 경북도당, 그리고 경남도당 위원장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양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독립제4지대와 전남, 전북도당 유격대는 빨치산의 주력을 이루는 부대다. 그런데 지금 어느 쪽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현상 동지는 이승엽 동지로부터 미해방지구 투쟁에 관해 전권을 위임받았소. 이현상 동지가 통합지휘를 결심한 이상 마땅히 각 도당은 직할 유격대를 그에게 넘겨야 할 것이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남부군 정치위원 여운철이 발언을 하고 나섰다. 공산국가 군대에서 정치위원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정치위원이 당의 결정을 들먹이며 이현상의 편을 들고 나서자 방준표와 박영발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한발 물러섰다.


“정치위원의 말이 옳다고 봅니다. 


경남도당의 김삼홍이 거들고 나섰다. 경상도 만석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그는 평소에도 이현상에게 호의적이었다. 다른 도당 위원장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이현상은 빨치산의 총수가 되었고 독립4지대의 별칭이던 남부군은 남한 전체 빨치산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남부군의 거점을 지리산으로 옮기겠소. 각 도당은 휘하의 유격대를 서둘러 지리산으로 집결시키고 연락책과 비선을 새로 조직해서 도시로 침투시키시오.


이현상은 지리산으로 돌아갈 것임을 공표했다. 지리산. 그곳은 구빨치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봄날은 가고 

빨치산의 유래는 일제강점기 야산대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무장을 갖추고 투쟁에 나선 것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 이후부터다. 남로당 간부로 평양에 머물며 모스크바 유학을 준비하던 이현상은 여순사건 소식을 듣고 급히 남쪽으로 내려왔다. 여순사건은 남로당 지휘부의 지시 없이 현지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한때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던 반군은 진압군이 출동하자 곧 패퇴했고 여순사건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패주병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전부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던 남로당원들을 규합해서 빨치산을 조직했다. 이현상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고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는 이현상을 지원하기 위해 인민유격대를 차례로 남파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인민유격대는 모조리 토벌되면서 지리산 빨치산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런데 가물가물하던 불씨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불타올랐다. 토벌대에 쫓겨 덕유산을 헤매던 이현상은 그곳에서 북한군이 이미 서울을 점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것이다. 마침내 조국해방의 그날이 온 것인가. 용기백배한 빨치산들은 인민군 부대로 달려갔고 무장을 새로 지급받고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활발하게 유격전을 전개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국토완정의 대업을 이룰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국군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전세가 일시에 역전된 것이다.

 

김병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안진규는 김병진에 앞서 북에서 내려온 밀사다. 그런데 안진규는 도중에 국군에게 체포되어 전향을 했다. 방준표와 박영발은 전향한 채 지리산에 온 안진규를 의심했지만 이현상이 감싸준 바람에 그냥 넘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안진규가 도주를 한 것이다.  

“어쨌거나 한번 종결된 사건인데 이제 와서 다시 거론하는 것도 그렇고….솔직히 이현상이 남로당 지도부를 비판할지 의문이오. 


방준표는 죽을 맛이었다. 북에서는 몰아붙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지만 현지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북에서 빨치산을 외면한 마당이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에게 대든다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럼 중앙당 지령을 무시할 셈이오?

김병진이 언성을 높였다.  


“그럴 리가 있겠소.

방준표가 허둥대자 김병진이 표정을 찡그리며 대안을 제시했다.


“정 그렇다면 이현상을 영웅으로 만드시오.

“그게 무슨 말…? 


방준표가 깜짝 놀라며 김병진을 쳐다봤다. 그러나 김병진은 입을 다물었고 방준표도 더 묻지 않았다. 그 이상의 질문은 우문일 것이다.  


“북의 방침이 그렇다면 아무튼 910일 전에 다시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겠소.

잠시 사이를 뒀다가 방준표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김병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한 것이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소. 가능하면 기일을 앞당기도록 하시오.


할 말을 마친 김병진은 몸을 일으켰다. 남로당은 이미 뿌리가 뽑힌 마당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쯤 영웅으로 남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살아 있는 영웅은 필요 없지만.


“하면 박영발 동지와 연락해서 이현상을 일단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도록 하겠소.

방준표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굴러들어온 ‘떡’ 

1953 917일 새벽 5. 용강 서전경사 제2연대장실.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정보를 종합해보건대 두 사람의 진술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선뜻 출동을 결심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예하 618부대가 쌍계사 부근에서 보급투쟁에 나선 빨치산 두 명을 체포했는데 뜻밖에 김지회부대원들이었다. 이현상의 친위대인 김지회부대원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투항한 것도 이상한 마당에 두 사람이 이현상 생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김지회부대원이 이현상 생포를 자처하고 나서다니, 함정일까. 그렇지만 빨치산은 이미 함정을 파고 기습할 능력도 없는 상태였다.


“내부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수색대 김용식 경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전향 빨치산 출신인 그는 당연히 그쪽 사정에 정통했다. 차일혁 총경도 그리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남로당 지도부의 몰락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얼마 전부터 산을 내려오는 빨치산이 크게 늘어났다. 

“거짓 투항은 아닌 듯합니다. 


김용식 경사가 출동지시를 재촉했다. 꾸물대다간 남 경사에게 공을 넘기는 수가 있다. 지금 빗점골에선 남 경사 소속의 56연대가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정보가 확실하다면 괜히 대병력을 동원해서 소란을 떠는 것보다 소수 정예병을 길목에 매복시키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문제는 역정보일 경우 몰살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 차일혁 총경은 고심했다. 진술에 따르면 이현상은 96일 개최된 도당 위원장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서 10호에 따라 평당원으로 강등된 상태다. 박영발의 발의로 채택된 결정서 10호로 이현상의 직할 세력인 제5지구당 요원들과 직속 김지회부대원들은 전부 각 도당에 분산 배치됐다고 했다.  


“그럼 이현상은 지금 호위병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평당원에게 호위병이 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김지회부대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마당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차일혁 총경은 결정을 내렸다. 상황이 묘하게 전개되는 것 같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전후관계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김지회부대원은 이현상을 살리기 위해서 투항한 것일지도 모른다.  


“출동이다. 


차일혁 총경은 더 생각하지 않고 출동명령을 내렸다. 차일혁 총경은 나중에 아무도 이현상의 시신을 인수하려 하지 않자 적장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시신을 화장한다.


이현상의 최후 

시계는 벌써 2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5시에 출동했으니 그 사이에 18시간이 흐른 것이다. 김용식 경사가 지휘하는 2연대 수색대원 38명은 빗점골로 통하는 길목 6곳에 분산 배치 중이었다. 투항한 김지회부대원들의 정보에 의하면 17일 밤부터 18일 새벽 사이에 이현상이 경남도당으로 이송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흘렀건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매복하고 있어야 하나. 정보가 정확하다고 해도 어느 길로 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수색대원들은 나머지는 천운에 맡기기로 하고 빗점골에 매복해 있었다.  


천하의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도당으로 끌려가다니. 틀림없이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판해야 하는 굴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용식 경사는 투항을 한 김지회부대원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이현상을, 동지를 고발하는 굴욕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충성일 것이다.  


김용식 경사는 무명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샐 때까지 쉬지 않고 순찰을 돌 생각이었다. 이상 없이 매복하고 있음을 확인하는데 갈미봉 방면에서 사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수색대원들은 일제히 자세를 낮추고 사격 자세를 취했다.

 

과연 조금 있다가 일단의 사람들이 종대로 늘어서서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몇 명일까. 매복하고 있는 수색대원은 4명에 불과했다. 아직 인원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매복을 눈치 챈 것일까. 다가오던 일행이 걸음을 멈췄다. 거리는 15m 정도 떨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던 일행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발각된 것 같았다. 수색대는 일제사격을 했고 응사가 이어지면서 조용하던 빗점골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김용식 경사는 수색대원들을 독려하며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교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주를 했는지 응사가 멈췄다. 놓친 것일까. 수색대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부근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총을 맞고 죽은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나머지는 도주한 모양이었다. 김용식 경사는 입맛이 썼다. 생포는 못해도 전원 사살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김용식 경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야광시계는 918일 오후 11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차일혁 총경이 현장으로 달려왔고 투항한 김지회부대원들이 피살된 사람이 이현상임을 확인했다. 평생을 공산당 활동에 바쳤고 5년의 세월을 풍찬노숙하며 빨치산을 이끌던 이현상은 그렇게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지리산에 총성은 멎었어도… 

그날 빗점골에서 교전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현상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군은 교전 중에 사살된 것이 아니고 군 수색대에 의해 그 전날 이미 사살됐다고 주장했다. 군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현상의 사망일자는 1953 917일이 된다.

군과 경찰이 서로 공을 다투자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 그리고 경찰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되어 이현상의 공식적인 사망일자는 918일이 됐다. 그런데 평양 애국열사릉의 이현상 묘비에는 917일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에 근거해서 이현상은 경찰도, 군도 아니고 뒤에서 쏜 총에 피격됐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공식 발표대로 918일 경찰과 교전할 때 죽은 것인지, 아니면 남 경사의 주장대로 그 전날의 교전에서 이미 사살된 상태였는지, 또 일부의 추측대로 뒤에서 쏜 총에 맞은 것인지 이제 와서 그 이상 상세한 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이현상으로서는 어느 쪽에서 쏜 총이든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이현상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물론 시신이 묻혀 있지 않은 가묘다. 비록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이송되던 중에 죽었지만 그래도 간첩으로 몰린 박헌영과 이승엽에 비해 행복한 사후를 맞은 셈이다. 나머지 빨치산 간부들도 1953년 말과 1954년 초에 걸쳐서 차례로 최후를 맞았는데 대부분 신념을 지킨 채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그 후에도 제법 오랫동안 지리산을 헤매고 다닌 빨치산들도 있지만 좀도둑에 불과한 망실공비(亡失共匪)일 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지리산 골짜기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쓰러져갔다. 그들 중에는 신념을 가지고 입산한 사람보다는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휩쓸렸던 사람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지리산에서 총성이 멎으면서 한반도는 비로소 평온을 되찾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정전(停戰)에 불과했다. 남과 북은 계속해서 첨예한 대립을 이어갔다.

 

/태백산과 지리산 일대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1950 12월 창설된 전투경찰사령부

 

낙동강 전선에서도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면서 빨치산은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상길에 올랐다. 백두대간을 따라 북으로 도주하던 이현상은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평생 동지이자 상관인 이승엽과 재회했다. 이승엽은 빨치산을 독립제4지대, 속칭 남부군으로 개편하고 사령관에 이현상, 정치위원에 여운철, 그리고 부정치위원에 김일성대학 교수 출신인 차일평을 임명했다. 새로 남부군 사령관이 된 이현상에게는 속히 남하해서 유엔군의 후방에 제2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 무렵 남로당은 전쟁 실패에 따른 책임 소재를 놓고 북로당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빨치산이 남한에 제2전선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로당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남부군의 임무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퇴각 중인 국군과 미군의 후방에 제2전선을 형성하고 교란작전을 펴는 것. 2전선을 형성하려면 국군과 미군보다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현상은 남부군을 인솔해 서둘러 남하했고 속리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후방 부대를 기습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며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1951 3월에는 청주를 점령하는 개가도 올렸는데 도청 소재지가 빨치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남부군은 재귀열이라 불리던 발진티푸스가 창궐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이때가 남부군에는 전성기였던 셈이다. 빨치산은 당시까지 국토완정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군의 춘계공세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전선은 교착되었고 휴전회담이 거론되면서 남부군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이 끼었다. 휴전이 되면 국군은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할 것이다. 멀어져간 통일의 꿈과 눈앞에 닥친 냉혹한 현실. 빨치산 지도자들은 향후 투쟁 방향을 정하기 위해 덕유산 송치골에 모였고 그 결과 도당 유격대는 모두 이현상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덕유산을 출발한 남부군은 1951 8월에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1년 반 만이었다. 지리산에는 낙동강에서 후퇴할 때 낙오된 이영회부대가 먼저 들어와 있었는데, 이어서 송치골회의에 따라 각 도당 유격대가 속속 지리산으로 들어오면서 남부군은 대부대로 재편됐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격전장으로 변한 지리산 

전에 쫓겨 갈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인원에 신식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지만 여건은 그때만 못하다는 사실을 이현상은 잘 알고 있었다. 빨치산과 주민은 물과 고기의 관계다. 그만큼 현지 주민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그런데 주민들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들도 휴전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초모(招募)사업과 보급투쟁이 어려움을 빚었다. 더 이상 제 발로 입산하는 자는 없었고 제 손으로 식량을 내놓는 주민도 거의 없었다. 강제로 끌고 가고 빼앗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차츰 등을 돌렸다. 더욱이 신빨치들은 남쪽에 따로 연고가 없는 마당이다.  

그렇지만 남부군은 열심히 싸웠고 지리산 일대는 그야말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인 세상이 됐다. 남부군이 활발하게 투쟁하면서 평양에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연락부가 창설됐다. 대남사업 비서는 사법상 이승엽이 겸했고 부장은 배철이 맡았다. 임화와 이강국, 설정식 등 남로당 출신들이 요직을 장악했다. 남부군은 남로당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렇게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에 제2전선을 구축하고서 소규모 해방구를 조직해가던 가운데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다시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국군의 본격적인 토벌전이 시작됐다. 총성이 뜸해진 전선을 대신해 눈 덮인 지리산이 격전장으로 변한 것이다.  


‘쥐잡기작전’ 카운트다운 

1951 1130. 지리산 상공.  

난기류를 만난 듯 L19 연락기가 심하게 요동쳤다. 남원을 이륙한 연락기는 성삼재를 지나고 반야봉을 넘어 운봉을 향해 비행하고 있었다. 백야전사 사령관 백선엽 소장과 참모장 김점곤 대령, 정보참모 유양수 대령이 작전 개시를 앞두고 현지정찰에 나선 것이다.

 

간간이 작은 부락이 보이고 계단식 논이 눈에 들어왔지만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원시림 그대로였다. 저 넓고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빨치산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지형지물을 살피던 백선엽 소장은 걱정이 됐다.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후방을 교란하는 빨치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백선엽 장군에게 맡겼다. 백선엽 장군은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백야전사를 새로 창설하고 수도사단과 8사단을 백야전사에 배속시켰다. 그동안 빨치산 토벌을 맡고 있던 서남지구전투사령부도 백야전사 휘하로 편입되었고, 또 전투경찰로 구성된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도 백야전사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백야전사는 3개 사단과 4개 전투경찰 연대를 휘하에 둔 2개 군단 규모의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빨치산은 여태까지의 군경들과는 전혀 다른 막강한 토벌대를 상대해야 한다.  


“제법 큰 마을인데 아이가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모장 김점곤 대령이 쌍안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비행기가 날아오면 호기심 왕성한 아이들이 뛰쳐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렇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은 필시 빨치산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규모에 비해서 밥 짓는 연기가 많이 나는 마을도 일단 의심해야 한다.  


연락기는 운봉에서 방향을 틀어 남원 사령부로 향했다. 지리산 토벌작전-쥐잡기작전(Operation Rat Killer)- D데이 H아워는 122일 오전 6.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121 0시를 기해서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대전 이남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될 예정이었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로 봐서 아직 정보가 새지 않은 듯합니다.


유양수 대령이 말했다. 쥐잡기작전의 성패는 기동타격대를 맡을 송요찬 준장의 수도사단과 최영희 준장의 8사단 등 2개 사단을 여하히 은밀하게 이동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속초에 주둔하던 수도사단은 해군 LST를 타고 여수로 이동해 지리산 남쪽에 집결했다. 영천의 8사단은 김천과 전주를 거쳐 지리산 북쪽으로 이동해왔다. 토벌부대는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낮에도 커튼을 내린 채 막사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빨치산에게 우호적인 현지민들이 작전을 빨치산에게 알리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간인 전화선은 이미 절단했다. 작전 내용이 사전에 새어나가면 빨치산들이 소규모로 분산해서 깊은 산골짜기로 숨을 것이다.


정보참모는 정보가 새지 않았다고 보고하지만 백선엽 장군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무려 2개 사단이 이동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그만한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다보면 적의 정보망에 포착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비행장을 닦고 포로수용소를 세우느라 현지 주민들을 동원하면서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을 테니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머지않아 대규모 토벌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정보가 새면 빨치산들은 소규모로 분산해서 더 깊은 산속으로 도주할 것이고 그러면 쥐잡기작전은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것이다.


토벌대 우습게 보다 궤멸 

그런데 백선엽 장군의 우려는 사실로 판명이 났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빨치산들은 대규모 토벌을 간파하고도 깊은 산속으로 도주하는 대신에 과감하게 정면승부를 걸어온 것이다. 전북도당과 충남도당은 300여 명을 지리산에 파견하며 남부군을 도왔다. 한마디로 토벌대를 우습게 본 것인데, 이는 빨치산들은 그동안 제대로 된 토벌대를 상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빨치산 토벌은 현지 경찰이 주도했는데, 관할구역 개념이 강한 현지 경찰은 빨치산을 추격하다가도 그들이 자신의 관할구역을 벗어나면 미련 없이 추격을 중단했다. 이를 잘 아는 빨치산은 관할구역을 넘나들며 토벌대를 손쉽게 따돌렸다. 그러니 그간 토벌대는 빨치산들에게 그리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전방에서 차출된 정예 2개 사단이 기동타격대가 되어 끝까지 추격하고 지역 정보에 밝은 전투경찰이 예상 도주로에 매복하고 있다가 패주하는 빨치산을 덮치는 것이 쥐잡기작전의 요체다. 쥐잡기작전이 개시되면서 강릉에 주둔하던 한국 공군의 F51 머스탱 편대도 사천으로 이동해서 지상작전을 지원했다. 빨치산들은 이제 하늘로부터도 쫓겨야 할 판이다.  

지리산이 온통 횃불로 일렁였다. 토벌대들이 추위를 녹일 목적으로 횃불을 피운 것이다. 매복전에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행위는 절대 금물임에도 횃불을 밝힌 것은 그만큼 토벌대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을 환하게 밝히며 포위망을 좁혀오는 횃불을 보며 빨치산들은 비로소 공포의 실체를 똑똑히 체험하게 되었다. 그동안 상대하던 현지 경찰과는 차원이 다른 토벌대였다.  


백야전사는 주민 선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에는 빨치산들에게 쌀 한 톨, 김치 한 쪽만 줘도 통비(通匪)분자로 몰렸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입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포로도 관대하게 처분해서 강제로 끌려갔거나 죄가 가벼우면 훈방조치했다. 그것은 체포되면 무조건 죽는 걸로 알고 있었던 빨치산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왔다.  


1951 1129일에 시작된 쥐잡기작전은 1952 314일부로 종결됐다. 100여 일에 걸친 작전이 종료되면서 남부군은 피살 7000여 명에 포로 6000여 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러면서 남부군은 후방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에서 지역의 치안을 교란하는 존재로 의미가 격하됐다. 그렇지만 남부군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갔고 지리산에서는 총성이 그치질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빨치산들은 정전협상에서 자신들의 북송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실망해야 했다. 국토완정의 꿈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오지의 주민들도 갈수록 비우호적이었다. 남은 희망은 북으로 돌아가는 것. 당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다. 빨치산들은 그 희망 하나로 힘든 현실을 참아냈다.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했건만 


1952 4월 초. 지리산 대성골.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할 텐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걱정하던 이진범은 인기척을 느끼고 얼른 자세를 낮췄다. 일본군 부사관 출신인 그는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이 되어 투쟁에 앞장서왔다.  


“날세.


송관일이 보급투쟁에 나섰던 동지들을 인솔하고 달려왔다.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봐서 보급투쟁이 신통치 못한 모양이었다.  


“갈수록 인민들이 비협조적이야. 


송관일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도 이진범과 마찬가지로 여순사건을 주도한 14연대 부사관 출신이다. 쥐잡기작전 이후로 우호적인 주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화전민들도 대놓고 빨치산을 멀리했다. 보급투쟁에 나선 빨치산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초모사업도 큰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자진해서 입산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강제로 끌고 와도 틈만 나면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제 지리산은 더 이상 빨치산의 고향이 아니었다.


인지상정. 누굴 탓할 것인가. 이미 대세가 기운 마당이다. 이진범은 패자 편에 서지 않으려는 주민들을 탓할 마음이 없었다. 겨우 감자 두 포대로 보급투쟁을 마친 빨치산들은 대성골 아지트를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조금 있으면 인근 세석평전은 온통 철쭉으로 붉게 물들 것이다. 계절은 분명 봄이건만 빨치산에게 봄은 아직 먼 것 같았다. 이진범은 어쩌면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다시는 인공기가 휘날리던 해방구를 볼 수 없을 것인가. 태평양전쟁에도 참전했던 이진범은 패전의 징후를 잘 알고 있었다.


“수고들 했소.

/1953년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 제2연대장으로 이현상 체포작전을 지휘한 차일혁 총경. 그는 아무도 이현상의 시신을 인수하려 하지 않자 ‘적장’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시신을 화장했다.

 

아지트에 당도하자 여맹위원장 조복애가 얼른 뛰어나왔다. 그녀는 산청 천석꾼의 딸로 모스크바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 여성이다. 나중에 조복애는 월북 지령을 받고 하산해서 친지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 북한으로 가는데, 그것이 침투공작으로는 마지막이었다. 이후로는 지리산을 내려가는 대로 모조리 체포됐다. 주민들은 더 이상 빨치산을 숨겨주지 않았다. 

여성 빨치산들이 재빨리 싸리나무로 불을 때기 시작했다. 싸리나무는 연기가 나지 않아서 산중 취사에는 안성맞춤이다. 대원들은 허기진 얼굴로 밥 짓는 걸 멀거니 쳐다보았다. 빨치산이 되려면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총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 그리고 얼어 죽을 각오. 지리산의 겨울은 혹독하다. 밤이면 체감온도가 영하 30℃까지 떨어진다. 골짜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매서운 바람과 계속되는 토벌, 그리고 굶주림. 언젠가는 토벌대를 피해 얼음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반나절을 버틴 적도 있다.


주야로 계속되는 정치학습과 걸핏하면 열리는 오락회. 그 와중에도 산 생활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빨치산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었다. 희망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한 빨치산들에게도 그것은 너무도 두려운 존재였다.


씨가 말라간다 

저 아래로 마을의 불빛이 차가운 공기에 깜빡깜빡 흔들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집 생각이 나는 것일까. 산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것일까. 보급투쟁을 마치고 돌아온 이진범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순사건에 가담했다가 입산한 것이 1948 10. 정신없이 남북을 오가며 전투를 벌이다 다시 지리산에 돌아온 지도 1년이 넘었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이어질까. 고향이 여기서 멀지 않다. 죽기 전에 고향땅을 다시 밟아볼 수 있을까. 왠지 자신이 없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다. 빨치산이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갈수록 가슴 한가운데가 허전한 것이 사실이었다.

식사를 받아든 이진범은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대원들 틈에 끼었다. 보급투쟁이 어려워지면서 먹는 게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빨치산들에게는 식사 때가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빨치산들이 식사하는 모습은 특이하다. 손과 동시에 발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동상을 예방하려면 쉴 새 없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야 하는데 그것은 총을 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진범은 나중에 북쪽과 연락하기 위해 북으로 가다가 월악산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된다.


“회의를 합시다. 


정치위원 여운철이 묵묵히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현상에게 다가왔다. 이현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간부들을 소집했다. 부대를 이끌고 있는 이진범과 송관일, 김홍복, 이영회, 그리고 조복애가 모였다. 쥐잡기작전이 끝나면서 조금 여유를 얻었지만 토벌이 재개되기 전에 안전한 곳에 아지트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머지않아 개최될 6개 도당 전원회의에 대비하는 것이다.  


남부군 간부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박영발과 방준표를 위시한 도당 위원장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쥐잡기작전은 지리산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토벌대가 회문산과 백운산, 운장산, 내장산, 덕유산 그리고 민주지산을 휩쓸고 다니면서 전북도당과 전남도당, 충남도당, 경남도당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애초부터 제대로 된 병력이 없었던 충남도당은 아예 씨가 말라버렸다.  


그에 비하면 지리산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남부군 직속인 81사단과 92사단은 그런대로 건재했다. 물론 사단이라고 해봤자 정규군 대대에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병력이지만.  


도당 위원장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이현상이 실정을 무시하고 부대를 대단위로 재편하는 바람에 훨씬 큰 피해를 봤다고 생각했다. 빨치산이 겁 없이 백야전사에게 정면대결을 시도했다가 피해를 키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현상이 못마땅하던 차에 도당 위원장들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또 생겼다. 쥐잡기작전이 한창이던 1952년 초에 흔히 ‘94호 결정서’라고 불리는 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 명의의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당 사업과 조직에 대해서’라는 문건이 지리산에 전달된 것이다. 94호 결정서는 휴전에 대비해서 남한을 5개 지구로 나누고 기존의 도당 조직을 새로 조직된 지구당에 이관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서울과 경기도를 제1지구로, 울진군을 제외한 강원도를 제2지구로, 논산군을 제외한 충청남북도를 제3지구로, 경상북도와 울진군 및 낙동강 이동의 경남지역을 제4지구로, 그리고 전남·전북과 경남의 낙동강 이서 지역 및 논산군, 제주도를 제5지구로 나누어 새롭게 투쟁을 전개하라고 지시했다.  

빨치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한 제1, 2, 3지구는 별로 문제 될 게 없다. 누가 주도하건 새로 지구를 정비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제4지구는 당연히 경북도당의 박종근 위원장이 승계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거물급 빨치산 지도자들이 즐비한 제5지구다. 누가 제5지구당 위원장을 맡을 것인가. 일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유력하지만, 전남도당 박영발과 전북도당 방준표가 이번에도 순순히 조직을 내놓을지는 의문이었다.


이현상의 불안한 헤게모니 

그렇게 무거운 기운이 지리산을 내리누리는 가운데 마침내 6개 도당 전원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 예상했던 대로 박영발과 방준표는 94호 결정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94호 결정서가 작성된 것은 쥐잡기작전이 개시되기 전인 1951 831일로, 그 사이에 상황이 크게 변했음을 들어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조치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나머지 도당 위원장들도 이현상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지침을 내렸다며 이현상은 물론 대남사업 비서 이승엽과 정치위원 여운철까지 싸잡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헤게모니 쟁탈전은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팽팽하게 대치하던 회의는 북로당에서 파견한 부정치위원 차일평과 중앙민청 부위원장 오운식이 도당 위원장들의 편을 들고 나서면서 이현상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이현상은 맥없이 물러나지 않았다. 이현상이 강력한 주장을 펼치면서 6개 도당 전원회의는 이현상이 제5지구당 위원장, 박영발이 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절충했다. 위상이 예전만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현상은 여전히 빨치산의 상징이었고 박헌영, 이승엽과 직접 이어지는 선은 아직도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이현상은 구빨치 시절의 제2병단장에 이어 독립제4지대장, 남부군 사령관을 차례로 거치고 제5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일단 남로당 지도부의 뜻은 관철됐지만 여태까지의 지도자적인 위상과는 달리 다른 도당 위원장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상호견제를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5지구로 새롭게 체제를 갖춘 빨치산은 군사조직도 개편했다. 남부군 직속의 81사단과 92사단은 각각 김지회부대와 박종하부대로 개편됐고 전북도당은 패주병들을 끌어 모아 항미연대와 복수연대로 재편됐다. 휴전에 대비해서 소부대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지고 

토벌대에 쫓기며 지리산 일대를 전전하는 가운데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 여름,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겨울은 빨치산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다. 그야말로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기 딱 좋은 계절이다. 그렇지만 사람 목숨만큼 모진 것도 없다고, 빨치산들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짐승과도 같은 생존본능을 이어갔다.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차가운 얼음물에 뛰어들기를 예사로 하며 지리산 골짜기를 누비는 사이에 해가 바뀌어 1953년이 되었다.

 

새해의 아침이 밝았다. 빨치산들은 구름을 뚫고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원을 빌었다. 여태까지 모질게 생존을 이어온 1500여 빨치산의 소원은 살아서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빨치산들에게 생존은 최우선 과제였다.  

이 무렵부터 빨치산들은 ‘사찰유격대’라는 새로운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전향한 빨치산들로 구성된 사찰유격대는 빨치산 전술에 익숙한 데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토벌에 나서는 바람에 빨치산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지원도 끊긴 마당에 주민들은 등을 돌렸다. 거기에 이제는 옛 동지들과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처지가 된 것이다.


세석평전에 철쭉이 만발할 무렵에 기쁜 소식과 암울한 소식이 동시에 들려왔다. 기쁜 소식은 곧 휴전이 될 것 같다는 것이고, 암울한 소식은 유엔군이 제안한 빨치산의 북송에 대해서 북한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휴전이 성립되면 당연히 북으로 돌아갈 줄 알고 있던 빨치산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회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당에서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지리산 빨치산들은 구월산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반공유격대와 맞교환될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힘든 세월을 이겨나갔다.  


그렇지만 그 실낱같던 희망도 1953 7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절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북은 끝내 빨치산 송환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빨치산에게 남은 선택은 둘. 투항하는 것과 신념을 지켜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다. 당에서는 개별적으로 도시로 잠입해서 장기투쟁에 대비하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연고가 있는 구빨치들도 내려가는 족족 체포되고 있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대책을 마련하던 이현상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소식이 또 전해졌다. 이승엽을 비롯해서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들이 줄줄이 체포된 것이다. 이강국과 임화는 미국 간첩이라는 혐의로 체포됐고 대남사업비서 이승엽도 철직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부수상 박헌영은 간신히 체포는 면했지만 언제 끌려갈 지 모르는 처지였다.


조선공산당의 법통을 이은 남로당이 어떻게 이리 허망하게 몰락한단 말인가. 이현상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망연자실했지만 남로당 지도부의 몰락은 휴전과 더불어 예견된 것이었다. 호언했던 국토완정이 실패로 돌아간 데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울 필요가 있었던 북한 지도부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남로당은 제격이었다. 평양 남로당 지도부의 몰락으로 인한 후폭풍은 조만간 지리산에도 미칠 것이다. 이현상은 토벌대에 포위됐을 때보다 더한 공포에 휩싸였다.  

 

“조직적, 사상적 총정리 책임을…”
1953 826일 지리산 빗점골.  

휴전 이후 처음으로 제5지구당 지도부가 한자리에 모였는데 예상대로 회의는 험악한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반당분자 박헌영과 이승엽은 종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남반부의 실정을 무시하고 94호 결정서와 111호 결정서를 남발함으로써 무수한 전사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각 도당의 혁명 역량을 소갈시켰소. 


깡마른 몸에 눈매가 날카로운 박영발이 독기를 뿜으며 남로당 지도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아직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박헌영까지 공공연하게 반동분자로 몰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헌영을 향한 화살이 궁극적으로는 이현상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현상은 94호 결정서와 ‘미해방지구에 있어서 우리 당사업을 더욱 강화하는 데에 대해서’라는 이름의 제111호 결정서에 의해 명목상이나마 각 도당을 통괄하는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다.  


이현상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섣불리 남로당 지도부를 옹호했다가는 반당분자로 몰리게 될 판이다.

 

“반당분자의 술책에 속아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몬 데 대해 나부터 자아비판하겠소. 그리고 부위원장을 사퇴하고 평당원으로 돌아가겠소. 

박영발이 사퇴선언을 하며 이현상을 몰아붙였다. 지도부의 시선이 일제히 이현상에게 쏠렸다. 박영발의 사퇴는 당신도 위원장에서 물러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부위원장이 평당원을 자처한 마당에 위원장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현상은 박영발과 방준표, 김상홍, 김선우, 남경우와 조병하, 노영호 등 참석한 지도부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치위원 여운철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현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소. 그래서 부위원장과 마찬가지로 평당원으로 돌아가서….

“당연히 자아비판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남도당 부위원장 겸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선우가 이현상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는 틈만 나면 독서를 하는 학구풍의 사람이다.  


“그렇소. 부위원장이 사퇴를 한 마당에 위원장까지 자리에서 물러나면 혼란만 가중될 것이오. 수습이 우선이오. 


노영호가 거들고 나섰다. 서울대 공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노영호는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경남도당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삼홍과 더불어 온건파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반발하고 나서려는 박영발의 팔을 방준표가 슬며시 붙들었다. 강성으로 따지면 박영발에 뒤지지 않는 그다. 하지만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좋지 않다. 사실 북로당이라고 지금 무조건 큰소리를 칠 마당도 아니었다. 빨치산의 북송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고조된 마당에 북로당 출신으로 사사건건 남로당을 견제하고 구빨치들을 무시했던 부정치위원 차일평은 토벌군에게 체포된 후 전향해서 투항방송을 하고 다녔다.


“그럼 이현상 동지는 910일까지 제5지구당의 조직적, 사상적 총정리를 책임질 대책을 마련토록 하시오. 


방준표가 발언하고 나섰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되어 빗점골회의는 ‘반당, 반국가적 파괴 암해분자, 종파분자인 박헌영, 이승엽 반역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근절, 청소하기 위한 제반 대책’이라는 긴 이름의 결정서 9호를 채택하고 해산했다.


“산을 내려가시오” 


이현상은 암담한 심정으로 일어섰다.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일까.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렇지만 나 하나만을 믿고 여태까지 따라온 저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현상은 퀭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빨치산들을 애써 외면하며 골짜기로 향했다. 결정서 9호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떠넘긴 것이다.


골짜기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계절이 바뀌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현상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존경하는 박헌영 선생과 이승엽 동지를 비판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이현상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은 끝났고 인민해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무모한 희생은 막아야 한다. 이현상은 원하는 사람은 모두 하산시키기로 결심했다. 오로지 나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들. 그들에게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자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부군 전성시절을 이끌던 용장 박종하와 이진범, 송관일, 그리고 여장부 양봉순, 더 멀리 제2병단 시절의 김지회와 지창수의 얼굴이 그 뒤를 이었다. 모두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옛 동지 중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경남도당으로 배속된 이영회 정도다.  

“선생님. 


고개를 돌리니 하수복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간호사 출신으로 빨치산에 합류한 하수복은 이현상의 ‘산중처’-내연의 여인-로 통하고 있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이현상이 소리를 죽이며 하수복에게 다가갔다.  


“기회를 봐서 지시를 내릴 테니 그때 저들을 따라 산을 내려가시오.


이현상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 호위병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산을 내려가라는 말은 투항하라는 뜻이다. 하수복이 깜짝 놀라며 이현상을 쳐다봤다.


“예전과 달리 하산하는 빨치산을 관대하게 다룬다고 들었소.


이현상은 아직은 어린 하수복을 허무하게 산속에서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현상은 부들부들 떠는 하수복에게 아무 말하지 말라고 이르고 두 호위병에게 가까이 올 것을 지시했다. 이현상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김지회부대 소속의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해서 다가왔다.


‘죽은 영웅’ 만들기 

910일이면 너무 늦은 것 아니오? 

회문산 전북도당 아지트에서 방준표를 기다리던 김병진은 결정서 9호 내용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현상을 숙청하기 위해서 북에서 급파된 사람이다.


“이현상은 아직도 빨치산에게는 상징적인 존재고 김지회부대도 무시할 수 없소.

김병진이 몰아붙이자 방준표가 불만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마냥 꾸물댈 수는 없소. 중앙당에서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잘 알고 있소. 


김병진이 중앙당을 들먹이자 방준표는 정색을 했다.  


“우선 제5지구당을 해체하고 이현상을 평당원으로 강등시키시오. 그리고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판토록 하시오. 또 김지회부대도 해체하고 부대원들을 각 도당에 분산시키시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오. 김지회부대원들은 이현상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오. 무리해서 몰아붙이면 아무리 중앙당 지령이라고 해도 반발할지 모르오.


방준표가 신중히 행동할 것을 권했다.  

“안진규 사건을 적극 내세우시오.

 

 

09월 호

1·21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나포, 휴전 15년 만에 전쟁 먹구름

“박정희 목 떼러 왔다!

  • 1968 121일 밤 930. 31명의 군인이 이열종대로 보무당당하게 청와대 코앞의 세검정길로 들어섰다. ‘훈련 후 귀대 중인 국군 방첩대’로 자처한 이들의 실체는 “박정희의 목을 떼러 온” 북한 특수부대 124군 부대원들. 이들이 촉발한 1·21사건은 피아 간 5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토벌전으로 이어지고, 불과 이틀 후엔 동해에서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나포되면서 한반도는 휴전 15년 만에 다시 전면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북한의 전매특허인 ‘벼랑 끝 전술’은 이 무렵 첫선을 보이는데….

/수도경비사령부 요원들이 생포된 김신조와 함께 사살된 124군 부대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1968118일 새벽 2시 임진강 고랑포.

철조망에 바짝 붙어 있던 한 무리의 남자들이 갑자기 납작 엎드렸다. 철조망을 절단하다 실수로 절단기를 떨어뜨린 것이다. 소리를 들은 걸까. 서치라이트가 이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경계병이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 31명의 무장 침투조와 안내원은 숨을 죽이고 살을 에일 듯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강기슭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동자세로 한 시간 이상 버틸 수 있게끔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30
분이 지나자 안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다. 철조망을 뚫은 무장 공작원들은 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전진했다. 적진을 돌파할 때는 부대와 부대의 경계면을 노리는 것이 상식이다. 양쪽 모두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31명의 북한 공작원이 노리는 코스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의 전투지경선에서 미군 쪽으로 300m 향한 곳. 딱 한가운데보다는 상대적으로 경계가 허술한 데다 한국인을 구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미군 쪽으로 조금 처진 쪽이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고랑포에서 더 하류로 내려가면 해수의 역류로 임진강이 겨울에도 결빙하지 않는 때가 있다. 그래서 침투조는 미군과 한국군의 전투지경선에 있는 얼어붙은 고랑포를 침투지점으로 선택한 것이다. 

최근에 한국군은 휴전선 전 구간을 신형 철조망으로 교체했지만, 미군은 구형 철조망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미군은 철조망을 교체하는 대신 베트남전쟁에서 효능을 보인 전자감응기에 의존키로 했다. 그러나 베트남과는 달리 겨울이 몹시 추운 한국에서는 전자감응기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북한 공작대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결빙했다고 하지만 아직 사람이 지나갈 만큼 단단히 얼지는 않았다. 위장용 흰 붕대를 머리에 감은 공작원들은 얼음에 바짝 엎드려 아주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에 간이 콩알만해졌지만 모두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다. 여기서부터 공작원들은 안내조 없이 행동해야 한다. 안내조는 31명의 공작원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온 길로 되돌아갔다.

“동 트기 전에 법원리까지 이동한다. 

대장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대원들에게 신속히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청와대.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는 것이 목표다. 공작원들은 배낭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연속된 긴장과 살을 에일 듯한 추위로 기진맥진했지만 계획에 맞추려면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1967
년에만 170회 넘게 무력충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컸다.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고 한반도는 폐허로 변했다. 남과 북 모두에 피해복구는 최우선 과제였다. 먹고살기 급한 상황에서 인권이며 민주는 뒷전이었다. 자연스럽게 이승만과 김일성은 권력을 강화해갔고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1960
년대로 접어들면서 격화된 동서진영의 냉전도 그들이 독재권력을 강화하는 데 한몫을 했다. 남과 북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첨예한 대립을 이어갔다. 누가 먼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설 것인가. 단기전에서는 통제경제가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남한보다 먼저 피해복구를 마친 북한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북한이 일사천리로 재건을 추진하는 동안에 4·19 5·16을 겪으며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한민국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역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달러는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기틀이 됐고, 브라운 각서에 따라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가 현대화하면서 크게 기울었던 군사력 격차도 많이 해소됐다.

북한은 베트남전쟁을 기대와 초조의 두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기대는 미국이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철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데 기인한 것이고, 초조는 남한이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은 남한이 더 쫓아오기 전에, 그리고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결판을 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포성이 멎은 지 15년 세월이 흐른 한반도를 향해 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북한은 대대적으로 도발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휴전선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고 총성이 그치질 않았다. 1967 1년 동안 남과 북은 무려 170여 차례에 걸쳐서 무력충돌을 빚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교전을 벌인 셈이다. 충돌은 전방 경비병들의 단순한 총격전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7 119일에는 고성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을 보호하던 대한민국 해군 당포함이 북한 해안포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1967 4월에 7사단 포병대가 북한을 향해 무려 585발의 포격을 가했다. 비무장지대에서의 소규모 총격전이 발단이 되어 급기야 사단 포병대가 화력을 총동원해 북한 지역을 맹폭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전면전으로 번질 충돌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휴전선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학자들 중에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를 ‘제2차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해군 함정이 침몰되고 포격이 이어졌다면 전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총에는 소총, 대포에는 대포. 동부전선에서 남과 북이 일촉즉발의 대규모 공방을 벌이고 있는 동안 서부전선에서는 소규모 도발이 주로 미군에게 집중됐다. 미군들을 전사시켜 미국민의 전쟁 혐오증을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가뜩이나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아시아에서 미군이 철수하기를 요구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1968년으로 접어들면서 베트남에서의 열전과 한반도에서의 냉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에 지친 미국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 대남침투용 특수부대 창설 

중앙정보부 강인덕 분석과장은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중에 초대 통일원 장관이 되는 강인덕 과장은 해병대 정보장교로 근무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서 중앙정보부로 옮겨 대북정보 분석을 관장하고 있었다. 강 과장은 지난해(1967) 말에 대통령과 국방장관, 중앙정보부장, 합참의장과 3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이 참석한 자리에서 ‘최근 북한의 대남침투에 관한 분석-북한의 동계 게릴라 침투 예상 보고’를 브리핑한 적이 있다. 브리핑은 북한이 신년(1968) 초에 무장 게릴라를 남파할 조짐이 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그 결과 1968 16일 원주 1군사령부 회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해서 군 주요지휘관과 경찰, 검찰, 도지사 등 각급 기관장이 참석한 안보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그때까지 중앙정보부에서 맡던 대간첩작전 주도권을 합동참모본부로 이관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대간첩작전 주도권이 합동참모본부로 이관됐다고 해서 중앙정보부의 책임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정보수집과 분석은 힘들고 중요한 직무였다.

강인덕 과장은 자신의 분석을 자신하고 있었다. 북한은 1967 4월에 대남침투를 목적으로 특수부대 ‘정찰국’을 창설했다. 정찰국장 김정태는 6·25 때 전선사령관을 지낸 김책의 아들인데, 북한 군부에서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최근에 체포된 간첩들을 신문한 결과 북한이 동계 게릴라전을 획책할 것이란 정황이 포착되고 있었다.

 

정녕 미국은 마오쩌둥의 말대로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존재일까. 도도한 자세로 밀어붙이는 북한과 점점 저자세로 변하는 미국. 대한민국은 속앓이를 하며 양자의 밀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북한에서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는 대가로 도주 중인 124군 부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요구할 것이란 어처구니없는 소문도 나돌았다.

어수선한 가운데 수색전은 계속됐고 124군 부대원들은 잇달아 토벌됐다. 131일까지 1명이 생포되고 27명이 사살됐다. 무장간첩의 총인원은 31. 아직 3명이 남았지만 비상상태를 마냥 끌고 갈 수는 없다. 대간첩작전본부는 일단 수색작전을 종결짓기로 했다.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에 아군도 23명이 전사하고 52명이 부상했다. 민간인도 7명이 죽었다. 적지 않은 피해였다.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 3명의 124군 부대원 중에 1명은 나중에 양주에서 시체로 발견됐지만 두 명은 끝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였다.


1968 131일은 그해의 음력 설날이다. 베트남은 전쟁 중에도 구정에는 휴전을 하는 전통이 있다. 그런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협정을 어기고 대대적으로 ‘구정 공세’를 감행하며 미국을 몰아붙였다.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국을 조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의 전쟁은 아시아인들에게!
미국에서 반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암살당할 뻔했는데도 미국이 북한에 질질 끌려 다니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한국민은 비로소 자주국방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됐다. 영화 ‘실미도’를 통해 잘 알려진 684부대는 그때 124군 부대에 대항해서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된 부대다.

그러나 자주국방을 이룰 때까지는 싫든 좋든 미국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번에는 한국이 미국을 압박할 차례다. 한국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 파병이라는 확실한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 4번째로 팬텀 전폭기 보유 

/박정희 대통령이 1968 2월 초 북한의 1·21 청와대 기습 공격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직후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즉각적인 보복을 요구하며 보낸 서신.

 

1968 211일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은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사이러스 반스 특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파월(派越) 한국군 철수’라는 엄포는 즉각 효과를 발했고, 존슨 행정부는 박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서 급히 특사를 파견한 것이다. 파월 한국군 철수 외에 한국군의 단독 북진도 충분히 미국을 긴장시킬 수 있는 카드였다. 물론 한국군은 단독으로 지속적인 전쟁을 벌일 능력은 없지만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도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북은 나를 죽이려 했소! 


박정희 대통령은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이 브라운 각서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베트남에 파병한 전투병력을 철수시킬 것임을 분명히 했다. 당시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한 육군 2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여단은 미군에게 너무도 절실한 존재였다. 반스 특사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1억달러의 추가 군원(軍援)을 약속했다. 베트남 파병은 또 한번 효자 노릇을 했다.  


군장비 현대화는 모든 군의 숙원사업이다. 미국이 1억달러 추가 군원을 약속하자 각군은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로비를 펼쳤다. 육·해·공군은 각기 시급한 현안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해병대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했다. 공군 전력의 현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꼽은 것이다. 1969 829. 6대의 F4D 팬텀 전폭기가 태평양 12000km를 가로질러 대구 기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되어 한국 공군은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로 미국과 영국, 이란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최강의 전폭기 팬텀을 보유하게 됐다. 250만명의 향토예비군이 조직된 것도 그때의 일이다. 그러면서 한참 기울었던 남과 북의 군사력 균형이 어느 정도 엇비슷해졌다.  


일단 저질러놓고 떼를 써라! 

1968 112일 경북 울진군 고포 해안.  

어둠이 깔린 해안에 고무보트가 당도하더니 수십명의 무장군인을 내려놓았다. 잠시 지형지물을 살피던 그들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1030일 원산을 출발한 124군 부대 120여 명은 8개 조로 나뉘어 삼척과 울진 해안에 상륙했다. 또다시 무장병력이 남파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은 1·21사건과 달랐다. 대규모 병력이 해상을 통해 침투했고, 서울 대신 울진과 삼척, 봉화와 정선 등 오지를 목표로 택한 것이다.  


124군 부대원들은 산간부락 주민들을 모아놓고 사상교육을 시켰다. 해방구를 설정하고 장기투쟁에 들어가겠다는 것으로 6·25전쟁 전의 빨치산을 재현한 것인데, 북한 지도부는 여전히 남한 주민들의 인민봉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하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학살이 자행되면서 적개심만 심고 말았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죽은 이승복 소년의 일도 이때 발생했다. 울진과 삼척에 침투한 124군 부대원들은 해를 넘기기 전에 거의 다 사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울진·삼척 침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도 변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를 범한 꼴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정말로 아직도 남한 주민들의 봉기를 통한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북한 전문가들은 관심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봤고, 해가 바뀌어 1969년이 되면서 의문이 풀렸다. 1969 1월에 김일성은 민족보위상 김창봉과 대남사업국장 허봉학, 그리고 정찰국장 김정태를 극좌강경파로 몰아 숙청했다. 대남공작 실패에 따른 책임을 물은 것인데, 민족보위상 김창봉은 김일성의 동생으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맡고 있던 김영주와 ‘포스트 김일성’을 다투던 실세였다.


그렇게 되면서 휴전을 전후해 몰락한 남로당과 1958년의 종파투쟁으로 뿌리가 뽑힌 연안파와 소련파에 이어 군부의 강경파마저 깨끗이 제거되어 이제 누구도 김일성의 권좌에 도전할 수 없게 됐다.  


김일성은 1973년 남북대화를 위해 평양을 방문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1·21사건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전달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1·21사건은 자기도 모르게 강경파들이 꾸민 짓이라고 했다. 1·21사건이 숙청의 명분이 됐음을 밝힌 것이다

 

북한은 1968 1223일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뚝심 있게 몰아붙인 끝에 미국으로부터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 푸에블로호 납치는 사실 현지 지휘관들의 판단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자칫 큰 위기를 자초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핵 항공모함이 원산 앞바다에 출동하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미국을 밀어붙이면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떼를 쓰면 상대는 양보하게 돼 있다. 


북한은 벼랑 끝 전술의 유혹으로 빠져들었고, 그것은 또 한 차례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

 

그리고 1968년이 미국 대통령 선거의 해라는 사실도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공화당 후보로 유력시되는 리처드 닉슨은 벌써부터 닉슨 독트린-‘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에게’-을 내세우며 베트남에서 철수할 뜻을 비치고 있었다. 북한으로서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좋은 기회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긴장을 야기시키면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그래서 강 과장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가 동계침투를 감행할 것이라 판단하고 줄곧 상황실에서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본래 겨울은 게릴라전을 수행하기에 불리한 계절이다.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데다 식량조달도 힘들다. 게릴라는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 산악지대로 침투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니 동계침투라면 산간벽지보다는 도시를 노릴 확률이 높다. 그래서 강 과장은 북한 특수부대가 서부전선을 뚫고 서울로 침투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그즈음 정부 당국은 북한 특수부대의 침투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최종 목표가 청와대라는 사실과 그들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강 과장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날이 바뀌어 120일 토요일이 됐고 시침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도 그냥 넘어가려나. 그는 그만 퇴근하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청와대 기습 후 당일 귀환’ 

119일 오전 5시경에 1차 집결지인 법원리에 도달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 공작원 31명은 그곳에서 하루를 쉬며 소진된 기력을 회복했다.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김정태가 서울 기습을 목표로 창설한 124군부대의 당초 목표는 청와대를 비롯해 미국대사관과 육군본부, 사상범들이 수감된 서울교도소와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6곳을 동시에 습격하는 것. 그렇지만 무리라는 판단에 따라 목표를 청와대 한 곳으로 한정했다. 그러면서 남파 인원도 76명에서 31명으로 축소됐다.  

전원 함경도 출신으로 구성된 31명의 124군 부대 공작원은 황해북도 사리원의 인민위원회 청사를 청와대로 꾸미고 맹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남파 직전에 전원 군관으로 특진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들을 훈련시킨 교관 우명환은 3년 전 송추유원지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전향한 고정간첩이 고발하는 바람에 체포될 뻔했지만 도주에 성공했고, 총에 맞아 삐져나온 창자를 움켜잡고 5일 만에 임진강을 건너 복귀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친 31명의 124군 부대원은 각자 AK소총 1정에 실탄 300, TT권총, 대전차용 수류탄 2발과 방어용 수류탄 10발씩으로 무장하고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단검도 1자루씩 휴대했음은 물론이다. 117일 새벽에 북한군 최남단 초소인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한 124군 부대원들은 그곳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철조망이 신형으로 교체되기 전에는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를 타고 해안으로 침투하는 것은 더 쉬웠다. 당일치기 공작을 의미하는 ‘당야공작’은 남파 공작원들 사이에서 소풍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래도 한겨울에 서부전선으로 침투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몰아치는 추위로 124군부대원들의 체력은 급격히 소모됐다.  


법원리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124군 부대원들은 다시 이동할 채비를 서둘렀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계획은 21 20시를 기해 청와대를 기습하는 것. D데이를 21일로 잡은 것은 그날이 일요일이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머무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계획은 순식간에 기습을 끝내고 차량을 탈취해서 당일 북으로 귀환하는 것. 강도 높은 훈련과 치밀한 예행연습을 거친 124군 부대원들은 자신감에 넘쳤다.


“어…!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출발하려는 그들 앞에 나무꾼 행색의 민간인 4명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124군 부대원들은 26사단 마크가 붙은 국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무꾼들은 검정색 운동화와 AK47 소총을 든 그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다. 무사히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124군 부대원들은 처음으로 돌발상황에 직면했다.

게릴라전에서 침투 중에 우연히 만난 상대는 적군이건 민간인이건 죽이는 것이 원칙이다. 민간인 4명을 죽이는 것은 124군 부대원들에게는 일도 아니다. 문제는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다. 발각되지 않으려면 제법 깊숙이 땅을 파고 매장해야 하는데,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별다른 도구도 없이 언 땅을 파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고심하던 대장은 무전을 쳐 상부의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신속히 답신이 들어왔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들이 가진 음어표로는 도무지 해독이 되질 않았다. 저들을 어찌 처리할 것인가.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시간은 자꾸 흘러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빨리 결론을 내리고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대장은 할 수 없이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살려주자는 쪽으로 결과가 나왔다. 시간도 없는 판에 고생해서 언 땅을 파기 싫었던 것이다.


124군 부대원들은 나무꾼 형제에게 “신고하면 곧 따라 내려올 우리 후속부대에 처형당할 것”이라 겁을 주기도 하고, 또 손목시계를 풀어주면서 그들을 구슬려 돌려보낸 뒤 서둘러 다음 집결지로 이동했다.  


30kg 군장 메고 시속 10km 이동 

그것은 임무 실패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124군 부대원들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기습과 경계, 그리고 탈출에서는 최고의 베테랑이지만 돌발적인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그것은 어쩌면 급조된 유격대의 한계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때 해독이 되지 않은 답신의 내용은 ‘원대복귀’였다. 상부에서는 124군 부대원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귀찮은 데다 통신이 원활치 않았기에 그리 결정한 것이지만, 나무꾼 형제를 살려준 것은 그들이 신고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중에 울진과 삼척에 대거 침투한 공작원들이 오지에 해방구를 만들려 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남파공작원들은 남의 노동자, 농민들이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나무꾼 형제는 마을로 돌아온 즉시 경찰서에 신고했고, 124군 부대는 군사분계선을 넘은 지 하루 만에 정체가 파악되고 말았다. 나무꾼 형제들이 현지 경찰에 신고한 시각은 오후 9. 대간첩작전본부인 합동참모본부에는 자정 무렵에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강인덕 과장이 무장 침투조가 남파됐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새벽 2시경. 마침내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기습의 생명은 은밀이다. 정체가 탄로난 기습 공작원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124군 부대원들은 예정된 종말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법원리를 출발한 그들은 서울을 향해 급속행군에 들어갔다. 그들은 미타산과 앵무봉, 노고산,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남행을 했는데, 30kg의 장비를 지니고서도 시속 10km라는 놀라운 속도로 이동했다. 신고를 받은 군경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저지선을 돌파한 다음이었다.  


124군 부대원들의 최종 집결지는 북악산 팔각정 부근. 그곳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21) 오후 8시에 청와대를 기습할 계획이었다. 예정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거듭된 행군과 체감온도가 영하 20℃에 이르는 추위로 기력이 많이 떨어졌음에도 강행군에 들어갔다. 합동참모본부에 보고가 들어갔을 때 그들은 이미 앵무봉을, 그리고 중앙정보부에 보고됐을 때는 벌써 노고산을 통과하고 있었다. 오전 9시경에 보고를 받은 김성은 국방장관이 곧장 청와대로 달려가고 서울 일원에 갑호비상이 발령됐을 때 124군 부대원들은 북한산 비봉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악산이 아니로군.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대장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것 같습니다. 


지도와 지형을 대조하던 부대장 김춘식도 표정이 흐려졌다. 서둘렀던 탓에 124군 부대는 북악산이 아니라 북한산에 당도한 것이다. 부대원들은 여기서 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봉착했다. 아직 시간은 있다. 북악산으로 이동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여기 매복해 있다가 청와대로 향할 것인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을 가정한 침투기습 공작은 이렇게 또 한 번 삐걱거리게 됐다.  


124군 부대원들은 그냥 여기에 있다가 어두워지거든 작전을 개시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비상이 걸린 것으로 봐서 나무꾼 형제들이 신고를 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훤한 대낮에 눈 쌓인 계곡을 행군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나흘간의 강행군으로 부대원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대장은 북한산 승가사 부근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상황과 두 차례 조우했지만 그때껏 검문을 한 번도 받지 않았던 124군 부대원들은 기습을 자신하고 있었다. 


하산 후 보무당당하게 청와대行 

124군 부대원들이 북한산 승가사 부근에서 휴식에 들어가 있을 무렵에도 대간첩본부는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신고에 의하면 무장공비들은 법원리를 19일 오후 8시에 출발했다. 그런데 24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종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무장공비의 행방은 오리무중.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당시 수도권을 관장하던 6관구 사령관은 김재규 중장. 청와대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은 전두환 중령. 그리고 30대대 작전참모는 장세동 소령이었다. 나중에 10·26 12·12의 주역들이 머리를 맞대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송추유원지를 수색하던 부대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탄창과 음식물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송추유원지는 북한산 북쪽자락이다. 설마 벌써 그곳까지 이동했단 말인가. 당시 한국군은 완전무장한 병력의 산악행군은 아무리 빨리도 시속 4km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군 지휘관들은 정보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했다. 무장공비들이 벌써 거기까지 진출했을 리 없다고 판단한 것. 그렇지만 김성은 국방장관은 생각을 달리했다. 6·25 때 해병대 지휘관으로 그 지역에서 전투를 한 그는 그곳 지리에 정통했다. 어쩌면 무장공비들이 이미 차단선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고 봤다. 정말로 무장공비들이 차단선을 빠져나갔다면 큰일이다. 청와대 경비를 책임지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제외하면 마땅히 출동시킬 병력도 없다. 김성은 장관은 급히 채원식 치안국장에게 연락했다. 급한 대로 경찰을 출동시키기로 한 것이다.


터질 듯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20일이 저물고 운명의 21일이 밝았다. 124군 부대원들은 숨을 죽이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어둠이 내리면 작전이 개시될 것이다. 추위에 긴장으로 심신이 극도로 지쳐 있지만 그래도 하루를 쉰 덕분에 어느 정도 피로를 회복했다.


마침내 짧은 겨울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서 서울에 다시 밤이 찾아왔다. 대장은 시계를 들여다봤다. 21일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행동에 들어갔다. 오후 930분경에 하산을 완료한 124군 부대원들은 세검정으로 통하는 도로로 접어들었다. 이제부터는 몸을 숨길 필요가 없다. 한국군 방첩대원 행세를 하며 청와대로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이열종대를 유지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청와대를 향해 걸어갔다. 사기는 여전히 높았고 임무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침투조가 청와대 경비병력을 제거하고 탈출조가 탈출 차량을 노획하는 동안에 습격 1조는 박 대통령이 있는 2층을, 습격 2조는 부속실인 1층을, 습격 3조는 경호실을, 습격 4조는 비서실을 기습해서 몰살시킬 것이다. 계획대로 움직이면 3~4분 내에 충분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민주경찰이 사람을 쳐? 

/1968 121일 교전 끝에 체포된 김신조.

 

습격 2조 조장으로 1층 기습을 맡은 김신조 소위는 잔뜩 긴장해서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르는 조원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같은 날 소위로 임관됐지만 하전사 경험이 있는 김신조와 달리 조원들은 군대 경력이 없는 자들이었다. 124군 부대원들 중에서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는 나중에 목회자가 되어 신앙인의 길을 걷는다.  

세검정길을 따라 걷던 그들은 경찰 검문을 받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방첩대 소속임을 내세워 간단히 따돌려버렸다. 자유당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특무대의 후신인 방첩대는 경찰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군 정보기관이었다. 청와대는 이제 몇 분이면 당도하는 거리에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 무장간첩에게 피살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124군 부대가 자하문에 이르러 경찰이 다시 검문을 하고 나섰다. 대장은 계속해서 훈련을 마치고 귀대하는 방첩대라고 둘러댔지만, 종로경찰서 소속의 박태안·정종수 두 형사는 전처럼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방첩대라고 해도 갑호경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검문도 제대로 하지 않고 통과시킬 수는 없었다.  


“그럼 우리 부대까지 따라와! 

대장은 그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실제로 방첩대 본부가 부근에 있어서 따라오라는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낌새가 수상하지만 그렇다고 비무장 형사 둘이서 저 많은 인원을 대적할 수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장이 지원병력을 대동하고 달려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두 형사는 대열의 후미에 선 부대장 김춘식을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걸며 시간을 끌었다.  

두 형사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헤드라이트 불빛이 이리로 달려왔다.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병력을 인솔하고 달려온 것이다. 대장은 다시 방첩대를 들먹이며 허세를 부렸지만 최 서장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청와대가 코앞이다. 종로경찰서는 청와대의 외곽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데 지금은 갑호비상이 내려진 마당이다. 나중에 김신조는 강하게 버티고 선 최 서장을 보며 처음으로 공작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124군 부대로서는 세 번째, 그리고 최대의 난관에 봉착한 셈이다.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124군 부대원들과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으려는 종로경찰서 경찰관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공갈이 먹혀들어가지 않으면 먼저 친 사람이 당황하게 마련이다. 124군 부대원들은 완강한 제지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야! 민주경찰이 사람을 쳐? 

그때 누가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순간 경찰관들의 얼굴빛이 싹 변했다. 분명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때까지 진짜 방첩부대원들이 경찰을 우습게 보고 행패를 부리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던 경찰관들도 이제 상대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했다.

“수류탄이다! 


비명과 동시에 사람들이 일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곧이어 요란한 폭음이 일고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상황이 벌어지면서 124군 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박정희의 목을 떼러 왔다”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최규식 서장은 현장에서 전사했고 마침 다가오던 시내버스를 지원병력인 줄 알고 공비들이 일제 사격을 가한 바람에 민간인도 여럿 목숨을 잃었다.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에서 계속해서 조명탄을 쏘아올리면서 토벌전이 시작됐다.

 

/2000 911일 서울 신라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열린 북측 송이버섯 전달식에서 박재경(오른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 김종환 국방부 정책보좌관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81mm 박격포가 토해내는 조명탄으로 주위가 대낮처럼 환했다. 김신조 소위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이미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탈주계획엔 차량을 탈취해 문산 방면으로 도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일단 비봉 쪽으로 몸을 피하기로 돼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다른 부대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각자 알아서 비봉 쪽으로 도주하고 있겠지. 뒤를 돌아보니 습격 2조 조원들이 겁에 질려서 따라오고 있었다. 김신조 소위는 흩어지라고 소리쳤지만 두 조원은 막무가내로 쫓아왔다.

김신조 소위는 정신을 가다듬고 방향을 가늠해봤다. 추격대가 쫓아오기 전에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한다. 일단 인왕산 쪽으로 도주하기로 하고 경복고등학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조원들이 뒤를 따랐다.  


그때 총성이 울리면서 조원이 쓰러졌다. 그렇지만 뒤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김신조 소위는 날아오르듯 경복고등학교 담을 넘었다. 누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는데 무장군인 같지는 않았다. 조원이 그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수류탄이 터지면서 쫓아오던 경복고등학교 수위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후문으로 향하는데 총성이 일면서 뒤를 따라오던 조원이 쓰러졌다. 이제 혼자가 된 김신조 소위는 경복고등학교를 빠져나와 인왕산 기슭을 향해 내달렸다. 사방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지휘계통은 이미 무너졌다. 단신으로 복귀가 가능할까. 자신이 없었지만 가는 데까지 가볼 수밖에 없다. 김신조 소위는 지니고 있던 무기를 전부 내려놓았다. 임무가 실패로 돌아간 마당에 무고한 살상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폭용 수류탄 한 발만 지니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누구냐! 


그곳에는 이미 잠복병이 배치돼 있었다. 김신조 소위는 반사적으로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잠복병은 혼자가 아니었다.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이 바위를 비추더니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잠시 후 사격이 멎더니 투항을 권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김신조 소위는 자폭을 결심하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다가오던 수색병들이 놀라서 엎드렸다. 1, 2, 3초…. 그런데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수색병이 얼른 달려와서 수류탄을 걷어차고 김신조 소위를 결박했다. 시계는 22일 오전 1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날이 밝아왔다. 그 사이에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가 4명을 사살했고,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된 김춘식은 몸수색을 하는 과정에서 수류탄이 터지면서 폭사했다. 5명 사살에 1명 생포. 그리고 오후에 북한산에서 다시 1명이 사살됐다. 나머지 무장공비들은 이미 서울을 빠져나간 듯했다. 전방 부대들이 총동원돼 예상 도주로를 차단하고 수색에 들어갔다.


공포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서 국민들은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됐다. 생포된 김신조를 통해서 124군 부대의 규모와 침투목적이 밝혀진 것이다.


“박정희의 목을 떼러 왔다! 

김신조의 말은 방송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됐고 국민은 경악했다.


토벌전 와중에 푸에블로號 나포 

1968 123일 정오 무렵, 동해 원산 앞바다 40km 해상.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함장 로이드 뷰커 중령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북한 초계정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정선을 명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도 초계정이 근접한 적이 있지만 지금처럼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정확한 위치는?
“북위 3924, 동경 12759분 공해상입니다. 


항해사가 얼른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들의 지시를 따를 이유가 없다. 뷰커 함장은 북한 초계정을 주시하며 그대로 항해를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몇 차례의 퇴역을 거쳐 재취역한 푸에블로호는 겉보기에는 허술한 중고선이지만, 그 안에는 미국안전기획국(NSA)에서 운영하는 최첨단 통신감청기기가 탑재돼 있다. 1967 12월에 일본 사세보 항을 출항한 푸에블로호는 북한 영해에 근접한 공해를 오르내리며 북한과 소련, 그리고 중국의 무선을 감청하던 중이었다.  


굉음을 울리며 최신예 MIG21 전투기 2대가 나타나더니 저공비행을 하며 푸에블로호를 위협했다. 아무래도 단순히 시위가 아닌 것 같았다.  


“본부에 긴급 구조요청을 해. 그리고 전속력으로 여기를 빠져나간다!


푸에블로호는 서둘러 침로를 변경했지만 최고시속이 12노트에 불과한 푸에블로호는 곧 북한 초계정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뷰커 함장은 나포에 대비해서 통신장비를 파괴하고 기밀문서를 파기하라고 명령했다. 수병들이 도끼를 들고 통신장비실로 달려갔고 선내는 곧 기밀문서를 소각하는 연기가 자욱했다. 미처 소각하지 못한 기밀문서들은 침강용 백에 넣어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혀야 한다.  


뷰커 함장이 침강처리가 가능한지 수심을 확인하는데 총성이 울리며 25mm 기관포탄이 날아들었다. 북한 경비정에서 발포한 것이다. 저항할 수단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뷰커 함장은 정선을 명했다.  


북한 수병들이 서둘러 푸에블로호로 넘어왔고 함교문을 거칠게 열며 총을 겨눴다. 뷰커 함장은 순순히 손을 들었고 푸에블로호 승무원 83명은 포로가 됐다. 1968 123일 오후 145. 북부 수도권 일대에서 무장공비 토벌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 해군 함정이 동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장 북으로 쳐들어갈 기세야” 

주한미군사령관 본스틸 대장은 부관에게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찰스 본스틸과 딘 러스크. 우리와는 인연이 깊은 이름들이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국무부 전쟁국 3부조정위원회 소속이던 두 사람은 38선을 기준으로 남한엔 미국이, 북한엔 소련이 주둔하기로 결정한 장본인들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국무성 중급관리였던 러스크는 장관이 됐고, 대령이던 본스틸은 대장으로 승진해서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딘, 나일세. 


러스크 국무장관이 나오자 본스틸 대장은 거침없이 장관의 퍼스트 네임을 불렀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 중에서 가장 파워가 셌던 것으로 알려진 본스틸 사령관 재임시절에는 포터 주한미국대사는 물론 맥나마라 국방장관도 한반도 문제에서 조연으로 밀려나 있었다. 본스틸 사령관은 주요 현안이 발생하면 직접 러스크 장관을 상대했다.


“정보선이 북한에 나포된 거라면 나도 보고를 받았네.

러스크 장관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 게릴라 때문에 골치가 아픈 판에…. 한국 쪽 반응은 어떤가? 대사관 보고로는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라고 하던데.


“한국군 고위 지휘관들은 몹시 흥분해 있네. 당장 북으로 쳐들어갈 기세지. 박정희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고. 


본스틸 사령관이 현지의 분위기를 전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 베트남전쟁이라는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는 미국은 지금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다. 더구나 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고, 지금 미국민들은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염증을 내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막아야 할 텐데 북에서 대통령 관저 기습을 시도했으니 남한더러 마냥 참으라고 할 수도 없다. 한국군에도 강경파 장군이 많이 있다. 지난해 동부전선에서 충돌이 벌어졌을 때 일선 사단장이 자신의 재량으로 북한에 수백발의 포격을 가한 바람에 전쟁이 벌어질 뻔한 적도 있다. 한국군에 파견된 군사고문들로부터 한국군이 전쟁에 대비해서 군수물자를 비축하고 있다는 보고가 벌써 올라온 상태였다. 본스틸 장군은 돌발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일단 한국군에 유류를 공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미 해군 정보수집선이 동해상에서 북한에 피랍된 것이다. 미국 처지에서는 청와대 기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큰 사건이었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나포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通美封南의 원조? 

“우선 푸에블로호가 정말로 공해상에서 나포된 것인지를 확인하고서 승무원들의 안전한 귀환에 최우선을 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걸세. 

러스크 장관이 침통한 목소리로 미국에서도 이 사건을 크게 염려하고 있음을 전했다.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수역은 북위 3925, 동경 127543. 해안의 기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공해가 될 수도 있고 북한 영해가 될 수도 있는 애매한 곳이다.


“현지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나? 


러스크 장관이 북한이 미국과 전면전을 각오하고 시도한 나포냐, 아니면 우발적인 행동이냐를 본스틸 사령관에게 물었다.  


“우리와 싸울 생각까지는 없는 것으로 보네. 


본스틸 사령관은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북한의 노림수는 대통령선거 해를 맞아서 미국 시민들에게 압박을 가해 아시아에서 손을 떼게끔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사적 대응보다는 정치적 해결이 바람직할 것이다. 결국 포로송환이 쟁점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의 통화가 길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북한 게릴라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한, 불과 40시간 전의 상황이 두 사람에겐 그리 중요한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다음날 판문점에서 소집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미국은 공해상에서 해양환경을 조사하던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강제로 끌려갔음을 강력하게 항의했고 승무원과 배의 즉시 송환을 북한에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해서 첩보활동을 했다고 완강히 버텼다.  


“푸에블로호는 어디 소속인가?

“미 해군 7함대 소속이다. 


북한 수석대표 박중국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엔 수석대표 스미스 소장은 엉겹결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북한의 술수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유엔군 사령부 소속이 아니니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다.


박중국은 푸에블로호 문제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아니고 별도의 협상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직접 협상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발언인데, 그렇게 되면 124군 부대는 남과 북의 문제, 푸에블로호는 미국과 북한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이 의도하는 바다.  


어쨌거나 80명이 넘는 승무원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면서 31명의 무장 게릴라가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전대미문의 사건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한국에선 연일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동시에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32년 후 송이버섯 들고 서울로 

앵무봉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재경은 뒤를 따르는 2명의 조원에게 잠시 쉬어갈 뜻을 비쳤다. 세검정에서 교전을 치른 박재경은 비봉 쪽으로 펼쳐진 포위망을 뚫고 이곳 노고산에 다다른 것이다.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앵무봉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야영을 하고 고랑포 쪽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을 생각이다. 벌써 세 밤이 지났으니 오늘은 124일일 것이다. 남파 때에 비해 형편없이 느린 행군이지만 경계망을 뚫고 북상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부대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여러 명이 사살됐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리를 수차례 들은 터였다.

“수색대입니다! 


조원이 놀라서 박재경을 불렀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박재경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소총을 겨냥했다.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겨울산에 1개 대대는 될 것 같은 병력이 골짜기를 샅샅이 뒤지며 올라오고 있었다.  


광적면 일대를 담당하던 1사단 15연대는 무장공비 3명이 노고산 기슭에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수색대를 출동시켰다. 연대 병력이 신속하게 포위망을 펼치는 것을 확인한 후에 연대장 이익수 대령은 이들을 생포하기로 하고 투항을 권고했다. 이미 퇴로는 차단됐고 수색대는 20m 전방까지 접근한 마당이었다.  


숨 막힐 듯한 대치가 계속됐다. 박재경은 조원들을 돌아봤고, 그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빠져나가기는 틀린 듯했다.  


죽기를 각오한 124군 부대원들이 AK47 소총을 일제히 발사하자 수색대도 응사에 나섰다. 흙먼지가 일고 총탄이 튀면서 조용하던 노고산이 일시에 전장으로 변했다. 124군 부대원들이 결사항전을 하는 바람에 수색대는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고 현장에서 지휘하던 연대장 이익수 대령도 전사했다.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에 이어 또 고위 지휘관이 전사한 것이다.


교전 중에 잠시 틈이 벌어진 것을 놓치지 않은 박재경은 죽을힘을 다해 골짜기 아래로 내달렸다. 뒤따르던 조원의 비명이 들렸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총탄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발을 헛디딘 것일까. 박재경은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골짜기 아래로 사정없이 굴러 떨어졌다. 박재경은 굴러 떨어지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북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일념을 버리지 않았다.  


박재경은 끝내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32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0 911, 김용순 당 중앙 비서를 수행해서 서울에 온 북한군 총정치국 부총국장 박재경 대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손에는 총 대신 송이버섯이 들려 있었다.


한국이 꺼내 든 對美압박 카드 

한반도에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서울 북방은 비상경계령이 펼쳐진 가운데 도주하는 124군 부대원과 추격하는 우리 군이 교전을 계속했고, 동해상에는 핵항모 엔터프라이즈호를 비롯해서 미 해군 구축함 여러 척이 집결해 원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필리핀 기지의 미 공군 전폭기들이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북한 폭격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여기에 미국이 전술핵을 사용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더해지면서 세계의 이목이 온통 한반도로 집중됐다. 한반도는 또 한 차례 전쟁에 휩쓸릴 것인가.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미국과 북한은 푸에블로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폴란드에서 비밀 접촉을 가졌다. 미국에 1·21사건은 여전히 뒷전이었다.  

미국은 강경하게 나갔지만 북한은 겁먹지 않았다.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미국이, 더구나 벌써 레임덕 현상을 보이는 존슨 행정부가 83명이나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리란 것을 간파한 것이다. 북한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영해를 침범했다고 시인한 자백서를 제시하며 미국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10월 호

⑥ 바다에서 당한 지 1년 만에 하늘에서 큰코다친 미국 

  • “이번엔 공중이다!” 미군 정찰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해 벼랑 끝 전술의 단맛을 본 북한이 이번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1969 415 31명의 미군을 태운 최신예 EC121을 동해상에서 격추한 것. 미국의 위성 감시를 피해 미그21 2대를 분해한 뒤 열차로 옮겨 재조립, 발진시킨 기상천외의 작전이었다. 베트남전에 시달리던 미국은 이번에도 북한의 전격도발 앞에 무기력했다.

/미 해군 정보기 EC121. 

 

1969 3월 초. 

EC121
워닝스타(Warning Star) 정찰기는 강력한 3400마력 라이트 R-3350 엔진 4기를 가동시키며 동해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일본 도쿄 인근의 아쓰기 해군기지에서 발진한 미 해군 제1정찰대 소속의 전자정찰기 EC121의 임무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북상해서 소련 태평양함대의 동태를 탐지한 후 동해를 따라 남하하면서 북한 연안을 정탐하고 귀환하는 것.

레이더를 들여다보던 전탐 담당 하사는 따분한 듯 하품을 했다. 기지를 이륙한 지 7시간이 지난 지금 정찰기는 북한의 항구도시 청진 상공을 날고 있었다. 발진에서 귀환까지는 통상 10시간가량 소요되는데, 비좁은 공간에서 30명 넘는 인원이 뒤섞여 지내려니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대로 남하를 계속해 북위 40도에서 방향을 틀고 일본 기지로 귀환하면 임무는 끝인데 이때쯤이면 슬슬 긴장이 풀리게 마련이다.  

그 순간 레이더에 휘점이 번쩍거렸다. 레이더가 뭔가를 감지한 것이다. 정찰기에 탑재된 APS-95 레이더는 반경 400㎞를 샅샅이 훑는 최신형 레이더다. 전탐사는 얼른 정찰기의 위치를 살폈다. 정찰기는 현재 청진 앞바다 150㎞ 지점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명확히 공해상이고 접근하고 있는 정체불명 비행체도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탐관에게 보고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전탐사는 고개를 돌려 전탐관을 찾았다.

“미확인 비행체가 접근 중입니다. 

“어랑에서 출격한 미그15 같군. 50㎞ 이내로 접근하거든 보고해.

전탐관이 레이더를 살피더니 크게 우려할 일이 아니라는 듯 계속 감시할 것만을 지시했다. 북한 공군의 미그기들이 출격해서 동해상을 정찰비행하는 EC121을 요격하는 일은 그동안 몇 차례 있었지만 큰 위협은 아니었다. EC121의 고성능 레이더는 동해안은 물론 북한 전역의 군사기지를 샅샅이 훑고 있기에 이륙하는 미그기를 즉시 포착했고, 미그기가 요격 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충분히 대피할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북한은 매우 호전적인 나라다. 지난해(1968)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피랍 된 바 있고, 1965 428일에는 동해상을 정찰비행 중이던 미 공군 RB47 스트라토 정찰기가 북한 공군 미그17의 공격을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 간신히 요코다 기지로 귀환하기도 했다. 그 사건 이후로 미군은 정찰기를 고성능 레이더를 탑재한 신형 EC121로 교체했고, 정찰비행 노선도 연안으로부터 80㎞ 공역에서 150㎞ 공역으로 후퇴시켰다. 그렇게 되면서 미그기의 요격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됐다.

휘점은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역시 위협비행이었다. 정찰기 EC121은 아쓰기 기지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 ‘한국은 1일 작전권’ 경고 

1969년은 무엇보다도 인류가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해로 기억될 것이다.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는 1969 7월 달에 무사히 착륙했고 우주인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디면서 인류는 새로운 역사를 향해 힘찬 출발을 했다.  

그렇게 인류가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아시아에서는 위기가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한반도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고, 베트남은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지루한 전쟁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푸에블로호 사건을 겪고 베트남에서 구정공세를 당하면서 미국의 반전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존슨 대통령은 결국 재출마를 포기했고, 아시아에서 철수를 공언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은 정말로 아시아에서 손을 뗄 것인가. 그것은 남과 북 모두에 지대한 관심사였다. 군사력은 북한이 한국보다 우세하다. 그러니 미군의 철수는 곧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이 그리 간단하게 포기할 대상이 아니었다. 한반도가 공산화하면 일본의 안보도 위협을 받게 되면서 미국의 태평양 전략은 큰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어느 한 국가가 공산화하면 아시아 대륙 전체가 공산화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이 불변의 철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미국은 ‘벼랑 끝 전술’로 재미를 본 북한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낼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 1969 3월 포커스레티나 훈련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포커스레티나 훈련은 완전무장한 공정대원 2500여 명이 미 본토에서 C141 대형 수송기로 31시간 만에 한반도로 긴급 공수되는 사상 최대 규모의 공수훈련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미 본토에서 1일 작전권에 들어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북한에 섣부른 오판을 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한 것이다. 미국은 지상군이 일부 철수하더라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철저하게 준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오산 미 공군기지 주기장에 F106A 델타다트 전투기 편대가 특유의 삼각형 날개를 번쩍이며 줄지어 서 있었다. 미 본토에서 오산기지로 긴급 이동한 제318요격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들이다. 그리고 활주로 건너편에는 오키나와 나하기지에서 날아온 82요격전투비행단 소속 F102A 델타대거 전투기들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양쪽 다 지난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이후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긴급 전진배치된 전투기들.


공중도발 타깃은 서해 5? 

이즈음 한국군과 주한미군 수뇌부들은 한시도 경계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은 포커스레티나 훈련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1969)는 북한 김일성 수상의 회갑이다. 군부에서 위대하신 수령 동지에게 뭔가를 선사하려들 지 모른다. 도발을 한다면 이번에는 공중일 것이다. 군 수뇌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북한은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를 통해서 지상과 해상 도발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공중 도발을 감행한다면 타깃은 어딜까. 서울은 휴전선에서 불과 40㎞밖에 떨어지지 않아 전투기가 발진 수분 만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군 수뇌부는 서울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서울 공습은 곧 전면전인데 북한이 전면전에 대비하고 있는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북한 공군은 어디를 노릴까.  

정보당국은 백령도를 포함한 서해 5도를 유력한 후보지로 꼽고 있었다. 백령도는 북한의 옹진반도가 바로 건너다보이는 곳으로, 북한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면 고립될 위험이 있다. 북한이 백령도를 기습 점령해버리면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원치 않는 워싱턴 당국은 확전 대신에 북한의 서해 5도 점령을 현실로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 베트남전쟁을 통해 미군은 아시아 전쟁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차하면 미국이 발을 뺄 것이란 소문이 퍼지면 동요가 걷잡지 못할 정도로 극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북한이 노리는 바다. 기습침공에 취약한 서해 5도와 흔들리는 미국. 그야말로 국지전의 효과를 극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군 정보당국이 백령도를 꼽은 데는 중국의 금문도 침공도 큰 참고가 됐다. 금문도는 중국 푸젠(福建)이 코앞에 건너다보이는 대만의 영토로 여러모로 한국의 백령도와 비견되는 섬이다.

중국은 금문도와 그 옆의 마조도를 기습점령하기 위해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이에 대응해 대만 공군이 요격에 나서면서 1958 823일에 금문도 상공에서 대대적인 공중전이 벌어졌다. 중국은 미그15와 미그17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대만 공군은 F86F 세이버 전투기로 대항했는데 공중전 결과는 29 0. 중국의 미그기가 29대나 격추되는 동안에 대만 공군기는 단 1대도 피격되지 않았다. 대만 공군은 공대공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겨냥하고 발사하는 기관포와 적기 꽁무니의 열을 감지해서 추적하는 미사일 간의 싸움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전탐관이 비명을 질렀다. 전탐관이 기장에게 보고를 하려는 순간 미그21이 스치듯 EC121을 가로지르는 게 창문을 통해 똑똑히 보였는데 북한 공군을 상징하는 붉은 별과 기수에 새겨진 기체번호 803이 전탐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피시베드’는 서방에서 미그21에 붙인 별칭이다.  

도대체 미그21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당황하던 전탐관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그21이 초저공으로 비행하다 급상승해서 치고 빠지는 일격이탈 전술로 쏠쏠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현재 위치는 청진 동북방 152㎞ 상공으로 분명히 공해상이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 없다. 북한은 아주 호전적인 국가고 EC121은 아무런 무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꼬리 내린 닉슨 행정부 

현기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마침내 미군 정찰기가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이제 남은 마지막 고비는 K13 미사일로 격추하는 것. 현기수는 격추는 요기에 맡기기로 하고 EC121의 앞을 가로질렀다. EC121이 급히 회피기동을 하는 것과 요기에서 미사일이 발사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명중인가. 그러나 기대와 달리 미사일은 목표를 제대로 추적하지 못하고 허공 속으로 날아갔다. 연료는 무서운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다. 현기수는 얼른 기체를 선회했다.

미군 정찰기는 해면을 향해 급강하를 시도했다. 반사파를 이용해서 미사일 추적을 따돌릴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다가는 미군 정찰기를 놓쳐버린다. 현기수는 비장한 각오로 두 번째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번에도 명중시키지 못하면 그대로 미군 정찰기를 들이받을 각오였다.

날개 끝에서 작은 진동이 전해지면서 K13미사일이 미군 정찰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회피기동을 하려는 미군 정찰기를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쫓아갔고 곧 후미에서 번쩍하며 섬광이 일었다. 명중이었다. 명중을 확인한 현기수는 급히 기수를 틀었다.

31명의 승무원을 태운 미 해군 정찰기 EC121은 불길에 휩싸인 채 동해상으로 추락했다. 시곗바늘은 1969 415일 오후 3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기수는 그 공로로 공화국 영웅이 됐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추천됐다.  

북한은 영공을 침입한 미군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닉슨 행정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푸에블로호 때 존슨 행정부는 북한에 사실상 굴복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82명의 승무원이 무사히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아올 승무원이 없다. 북한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인가. 아니면 미국은 역시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것인가.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가 숨을 죽이고 사태를 지켜보았다.  

상황은 전과 비슷하게 진행됐다.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북한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동해에 항공모함을 파견해서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북한이 큰소리를 치는 것도 똑같았다.

군사정전위원회 북한 대표 이춘선은 미군 정찰기의 소속을 들먹이며 도리어 유엔 수석대표인 냅 미군 공군소장을 몰아붙였다. 미국을 직접 상대할 테니 유엔군 대표는 빠지라는 것이었다. 이춘선은 기세등등했고 한국은 아무 소리 못하고 사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치킨 게임의 승자는 이번에도 북한이었다. 처음에는 펄펄 뛰며 대량보복을 호언하던 닉슨 행정부는 조금씩 말꼬리를 내리더니 결국 어물쩍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아시아인들에게’를 표방하며 당선된 닉슨에게 아시아에서의 또 다른 전쟁은 너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또 한 차례의 벼랑 끝 전술이 성공하면서 북한은 미국과 대등한 상대가 됐고 대한민국은 남북문제에서 국외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북한과 속절없이 밀리는 대한민국.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아직은 경제력도 군사력도, 그리고 국제사회에서의 명분도 북에 밀리는 현실이었다.  

북한은 종이호랑이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적화통일을 달성할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이 이번에도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번영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여전히 짙은 구름이 한반도 상공을 덮고 있는 가운데 1970년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면서 남과 북은 영구집권과 세습화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시선은 동해 상공에 머물고… 

/1969 3월 포커스레티나 훈련에 참가한 미군 공정대원들이 C141 수송기를 타고 한반도로 이동하고 있다. 

 

금문도 기습점령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군 수뇌부는 백령도는 경우가 다르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11년 전 대만 공군이 완승을 거둔 이유는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 반대였다. 북한 공군의 전력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공군의 주력인 F5A로는 북한 공군의 신예 미그21을 대적하기 힘든 게 엄연한 사실. 거기에다 북한 공군은 한국 공군에는 없는 IL28 경폭격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IL28 경폭격기는 서해 5도 기습전에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미 공군은 F102A 델타대거와 F106A 델타다트 전투기 분견대를 오산기지에 급파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리의 하늘을 미 공군에 맡길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알토란 같은 추가 군원 1억달러를 공군력 강화에 집중적으로 쏟아 부었고, 그 결과 피스 스펙테이터 프로그램(Peace Spectator Program)에 따라서 한국 공군은 최신예 팬텀 전폭기를 보유하게 됐다. 하지만 팬텀기가 실전배치(1969 8) 되기 직전인 1969 4월에 먹구름이 한반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함경북도 김책시 북한 공군대학. 동해안의 항구도시 김책시는 일제강점기까지 성진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묵묵히 지도를 들여다보던 공군대학장 김기옥 소장은 천천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밤늦게 출어를 하는 걸까, 유진단 쪽에서 어선의 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김기옥은 6·25전쟁 때 미 공군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였던 토머스 젤레스 대위가 몰던 전투기를 격추하면서 북한 공군 최초로 공화국 영웅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1994년에 70회 생일을 맞았을 때 김정일로부터 직접 생일상을 받았을 만큼 북한 공군에선 독보적인 존재였다.

김기옥 소장은 입맛이 썼다. 뭔가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데 마땅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해군은 푸에블로호 납치로 수령 동지에게 큰 칭찬을 들었다. 공군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데 어디가 좋을까. 다시 상황판 앞으로 돌아온 김기옥은 서해에서 휴전선 전역을 거쳐서 동해상으로 차례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 서울은 아니다. 전면전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기옥의 눈이 백령도에 머물렀다. 역시 저곳이 좋을까.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안포로 포격하고 IL28 경폭격기로 폭격한 다음 병력을 상륙시키면 백령도를 수비하는 한국 해병대는 고립될 것이다. 긴급발진한 남한 공군의 F5 전투기는 태탄기지의 미그21이 차단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한미군의 F102 F106 전투기들이 문제였다. 미 공군과 공중전을 벌이면 자칫 전면전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  

김기옥은 시선을 동해 쪽으로 돌렸다. 지도에 미군 전자정찰기가 동해상을 비행하는 경로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발진하는 미군 전자정찰기는 제집 드나들 듯 동해 상공을 비행하며 북한을 정찰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거슬리던 참인데 차제에 저걸…. 정찰기는 주한미군 소속이 아니니 전면전으로 번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격추하느냐는 것인데…. 잠시 생각하던 김기옥은 결심을 한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차를 대기시켜라. 평양으로 가겠다. 

김기옥이 급히 기호군관을 불렀다. 


또다시 몰려오는 전운(戰雲) 

지금은 남과 북의 경제 규모가 비교도 되지 않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북한이 군사력은 물론 경제력에서도 남한을 능가하고 있었다. 1956년에 시작된 ‘천리마운동’은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뒀고 식량도 괄목할 만큼 증산됐다. 그리고 배급제 실시로 1100만명의 북한 주민은 최소한 굶지는 않게 됐다. 굶주림 해결이 최대의 현안이던 당시로서 굶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분명 내세울 만한 업적이었다.  

평양은 전쟁의 상흔을 완전히 복구하고 번듯한 현대도시가 됐고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갔다. 북한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에 이어서 문화대혁명의 광기로 혼란을 겪고 있는 중국보다도 잘살았으며 당시 아시아에서 생활수준이 높은 나라에 속했다.

 

/1960 86일 김포공항에서 일반에게 공개된 북한의 미그15 제트기. 사흘 전 북한 공군 소속 정낙현 소위가 타고 귀순한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2800만 국민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일념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경제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출발은 북한만큼 순조롭지 못했다. 나라 살림은 외국 원조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었고 거리는 실업자로 넘쳐났다.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고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의 8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였다. 미국은 필리핀 원목으로 만든 가구를 한국에서 수입했다. 필리핀에서 직접 수입하는 것보다 원목을 한국으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가공해 수입하는 게 더 경제적일 만큼 한국 노동자의 인건비가 쌌다.  

1965년을 ‘열심히 일하는 해’로 정한 정부는 1966년을 다시 ‘또 열심히 일하는 해’로 정하고 국민에게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당부했다. 오로지 죽어라 하고 일하는 것만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 믿은 것이다. 그러다가 1·21사태 이후엔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로 표어가 바뀌었다. 일만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출발은 힘들었지만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대한민국은 조금씩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나갔다. 아직은 북한보다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뒤지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막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 한반도에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위기를 무사히 극복하고 번영의 길로 올라설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전쟁의 폐허로 굴러 떨어질 것인가. 지난해(1968)부터 시작된 위기는 해가 바뀌고도 계속되었다.

공군 소장 오극렬을 중심으로 김기옥 소장과 조명록 대좌가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있었다. 급히 평양으로 달려온 김기옥은 공군의 두 실력자와 비밀회동을 갖고 있었다. 남한과 미국은 지금 포커스레티나 훈련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수령 동지의 회갑 선물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세 사람은 긴급 회동을 했고 공중기습을 감행할 것에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IL28을 출격시켜 백령도를 때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만하면 해군 쪽보다 큰 선물이 될 텐데.


김기옥-오극렬-조명록 회동 

시선이 줄곧 백령도에 머무르고 있었던 조명록 대좌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남한과 미국에서 반격하기 전에 충분히 서해 5도를 무력으로 점령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1977년부터 1995년까지 18년 동안 공군사령관을 지내는 조명록 대좌는 북핵 위기 때 북한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한 바로 그 인물이다.

“백령도는 위험해. 자칫 전면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소. 

김기옥이 반대를 했다. 사실 그는 김책시를 출발할 때 이미 복안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대수입니까. 그까짓 남반부 군대야 우리 인민군이 얼마든지 밀어붙일 수 있고 미군들은 종이호랑이 아닙니까. 전쟁이 나면 꽁무니를 뺄 겁니다. 베트남전을 통해서도, 또 작년의 푸에블로호 납치를 통해서도 미국이 종이호랑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조명록 대좌가 호기 있게 받았다.  

“수령 동지께 선물을 드리자는 것이지 전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오.

김기옥이 핀잔을 주었다.  

“백령도를 치더라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남반부에서는 펄쩍 뛰겠지만 미국이 뒤를 잡고 늘어질 테니까요. 미국은 지금 전쟁을 벌일 형편이 아닙니다.

 

조명록 대좌는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공군사령관 시절인 1981년과 1983, 두 차례에 걸쳐 미그기와 IL28 경폭격기를 동원해서 백령도를 위협한다.

“포커스레티나 작전은 괜히 하는 게 아니오. 그것은 미국이 절대로 남조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보내는 것이오. 

“그러면 김기옥 소장 동지는 무슨 좋은 복안이라도 있소? 

오극렬이 입을 열었다. 혁명투사 집안으로 김정일 위원장과는 어릴 적에 같이 자란 사이인 오극렬은 나중에 공군사령관과 인민군 총참모장을 역임하는 인물이다.

“내 계획은…. 

김기옥이 지시봉으로 동해 상공을 가리키자 오극렬과 조명록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군 정찰기가 동해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고 있소. 

김기옥이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았다 


‘소련군도 불가능한 일’ 

/오극렬과 조명록(오른쪽). 

 

“그럼 미군 정찰기를 격추하자는 겁니까? 미군 정찰기는 육지로부터 150㎞ 떨어져서 비행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오극렬이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1931년생이니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의 공군 지휘관 중에서는 제일 연하지만 그래도 당 서열은 그가 가장 높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소련 해군도 미군 정찰기를 손보려 하고 있지만 마땅한 요격 수단이 없어서 참고 지내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재주로 미군 정찰기를 격추하겠다는 겁니까.

조명록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본 아쓰기 기지에서 출격하는 미 해군정찰대 소속 EC121 전자정찰기는 북한은 물론 소련에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지만 현실적으로 마땅한 요격 수단이 없었다.  

“하늘을 나는 정찰기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정찰함과 경우가 다르지 않소?

오극렬 소장은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정찰함과 정찰기는 경우가 다르다. 솔직히 정찰함 나포는 배짱으로 밀어붙일 수 있지만, 정찰기 격추는 고도의 수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비행기가 떨어지면 승무원이 전부 죽을 테니 협상 수단도 마땅치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가능성도 희박하고 실리도 별로 없어 보이는 모험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요격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오.

김기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미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미군 정찰기를 요격한 선례는 있다. 4년 전에 미그17이 긴급발진해서 북한 연안으로부터 80㎞ 떨어진 공해상을 비행하던 RB47 스트라토 미군 정찰기를 공격했던 적이 있다. 미군 정찰기는 피격은 가까스로 면했지만 상처투성이가 돼 귀환했다. 그 사건 이후 미군은 정찰비행 코스를 연안으로부터 150㎞ 공해상으로 바꾸었고 기종도 최신예 EC121 워닝스타로 교체했다. 비행코스가 70㎞나 더 멀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요격이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미그15는 최고속도가 시속 652마일에 달해서 최고속도가 시속 290마일에 불과한 EC121을 쫓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EC121에 탑재된 신형 APS-95 레이더는 반경 400㎞를 샅샅이 훑으면서 북한 공군기의 출격을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있기에 미그기가 접근하면 즉시 안전지대로 피할 것이다. 무리해서 추격하다가는 미그기의 연료가 떨어져 바다에 추락할 것이다. 연안으로부터 150㎞ 떨어져 비행하는 적군 정찰기를 격추하는 것은 당시 소련 공군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미그21로 일격이탈” 

그걸 모를 김기옥이 아니다. 그런데 왜 자꾸 요격을 고집하는 걸까. 오극렬과 조명록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김기옥을 쳐다봤다. 김기옥은 절대로 무모한 계획을 입안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어랑기지에서 미그15를 긴급발진시키면서 미군 정찰기의 대응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소.

두 사람은 잠자코 듣기로 했다.  

“그 결과 미그21이라면 미군 정찰기를 격추할 수 있을 거란 결론을 얻었소.

김기옥이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그21은 애초부터 소련에서 미국의 B52 전략폭격기를 요격할 목적으로 개발된 전투기다. 긴급발진해서 적기를 요격하고 신속히 이탈하는 일격이탈 성능은 베트남전에서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미그21이라니…북창기지의 미그21을 말하는 겁니까? 

조명록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최신예 미그21기는 평안남도 북창기지에 배치돼 있다.

“그렇소. 

김기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명록은 여전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신예 미그21이 기존의 미그15나 미그17에 비해서 뛰어난 성능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150㎞나 떨어져서 비행하는, 그것도 고성능 레이더를 장착한 정찰기를 격추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미그21을 어랑기지로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정찰위성이 북한 전역을 훑어보고 있었다. 미그21이 북창기지를 떠나 어랑기지로 이동을 하면 즉각 정찰위성에 포착될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소. 

오극렬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며 난색을 표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 정찰위성이 평양을 촬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소. 그래서 정찰위성의 감시를 피할 방법을 강구해냈소.

미그21을 출격시켜 미 정찰기를 요격하는 것은 사실 다음 문제다. 급선무는 미그21을 어떻게 미국의 감시를 피해 어랑기지로 옮기느냐는 것이다. 김기옥은 첫 번째 과제에 대해서는 이미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  

“미군 정찰기가 기지를 이륙하는 시간을 정확히 알고 싶은데, 그 일은 아무래도 노동당 연락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소. 

김기옥은 벌써 두 번째 과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저리 자신을 하는데 더 반대할 수 없었다. 두 공군 지휘관은 적극 도울 뜻을 비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명의 이륙 

드넓은 여주평야 훈련장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위시해서 국내외 VIP들이 관람대에 자리를 잡고서 미 본토에서 긴급 공수된 미 육군 102공정사단의 낙하산 강하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의 공수작전과 이어서 포항에서 벌어질 한미 해병대의 연합상륙훈련은 한미합동 포커스레티나 훈련의 하이라이트다.

드디어 미 본토에서 직접 날아온 C141 스타리프터 장거리 수송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를 따르는 C130 허큘리스 중거리 수송기는 일본에서 발진한 것인데, 곧 미 육군의 공정대원들이 낙하를 하면서 여주벌 하늘에는 하얀 꽃이 만개할 것이다.

 

/1969년 포커스레티나 훈련 당시 여주벌에 낙하한 미군 공정부대원들. 

 

훈련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즉각 한국에 병력을 파견할 의사를 분명히 했고 또 그럴 능력도 있음을 과시했다. 그런데도 공수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다. 북한은 계속해서 포커스레티나 훈련을 비난하고 있었다. 훈련을 구실 삼아 또 다른 도발을 획책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푸에블로호 사건을 통해서 북한은 벼랑 끝 전술의 단맛을 톡톡히 보았다.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면 닉슨의 공화당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까. 궁금하기는 북한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쓰기 시는 편리한 교통과 수려한 주변 환경을 갖춘 전원도시다. 4월의 이아야마벚꽃 축제와 8월의 은어 축제가 유명한데 이때가 되면 인근 도쿄와 요코하마는 물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이 도시로 몰려든다.

시 외곽에 위치한 미 해군항공대 기지에서 중형 비행기 한 대가 굉음을 울리며 기지를 이륙하고 있었다. 긴 동체에 특징인 수직꼬리날개 3. 기체 위로 높이 솟은 탑에는 고성능 정찰장비들이 탑재돼 있다.  

쓰레기통을 옮기던 청소부는 이륙하려는 기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길이는 38.6m, 너비는 35.4m, 그리고 높이가 8.23m에 무게는 65.8t이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눈어림으로 봐서 대충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비행기가 전자정찰기 EC121이 틀림없을 것이다. 청소부는 얼른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조총련 지부에서 EC121이 이륙할 때마다 정확한 시각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시각을 확인한 청소부는 미리 정해놓은 암호를 상기하며 서둘러 공중전화로 향했다.  

EC121M-일련번호 135749-워닝스타 정찰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길고 지루한 임무지만 참고 귀대하면 외출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31명의 승무원은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각자가 담당한 계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들에게 닥칠 운명을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미그21 분해해 열차로 이송 

정비사들을 독려하던 지도원이 김기옥 소장과 현기수 대위를 보더니 황급히 달려왔다.

“떼어내는 것도 그렇게 어려웠는데 조립하는 건 더 힘들었습니다.

미그21 2기가 분해돼 열차편으로 어랑기지로 이송됐다. 정찰위성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김기옥 소장이 그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다시 조립을 해야 하는데 좁은 천막 안에서 작업을 하려니 정비사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답답하지만 미국 정찰위성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천막 안에서 작업을 한 것이다.  

“수고 많았다. 이제 천막을 걷어도 좋다. 

천막이 걷히자 두 대의 미그21이 위용을 드러냈다. 미국의 정찰위성 사모스가 까마득한 고공에서 북한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 1960년대에 개발된 사모스 정찰위성은 지금의 키홀 위성과 달리 동시간으로 정보를 전송하지 못하고 지정된 장소에 이르러 필름 박스를 투하하면 대기하고 있던 정찰기가 공중에서 박스를 수거해서 정보부대에 인계하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 필름 투하와 회수, 그리고 이송과 분석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 출격이 임박한 마당에 정찰위성은 더 이상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김기옥이 현기수에게 물었다. 김기옥은 정찰기 EC121을 격추하는 임무를 최고의 조종사 현기수 대위에게 맡겼다. 김기옥 소장이 북창기지에서 가지고 온 비행기는 미그21 중 개량형인 BIS. BIS형은 추력 7500㎏의 투만스키 R-25 엔진을 장착해서 급상승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 고공 요격용 전문 기종이다.  

일단 조립은 마쳤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당장 시급한 것은 발진이다. 긴급발진이 특기인 미그21은 상대적으로 활주거리가 짧은 편이지만 그래도 활주로가 최소한 800m는 돼야 하는데 구식 기종을 운용하는 어랑기지의 활주로는 600m에 불과했다.

 

“기관포를 제거해서 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이면 그럭저럭 이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현기수가 기체를 꼼꼼히 살피더니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나 김기옥은 여전히 신중했다. 장착된 GSH-23 기관포를 제거하면 무게가 훨씬 가벼워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무기는 AA-8 공대공 미사일밖에 남지 않는다. 미사일은 명중률이 많이 떨어진다. 더구나 AA-8 미사일은 열추적 방식이어서 제트기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열을 발하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맞히는 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김기옥은 기관포를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무사히 이륙하더라도 접근이 쉽지 않을 겁니다. 

산 넘어 산이다. 현기수와 함께 출격할 동료 비행사가 다음 문제를 제기했다. 최고속도가 마하 2.1에 달하는 미그21이 느린 정찰기를 쫓아가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성능 레이더를 피해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물론 쉬운 임무가 아니다. 동무들은 공화국 최고의 비행사란 사실을 명심하라.

김기옥이 두 조종사를 격려했다. 북창기지에서 제일 우수한 조종사 둘을 선발해온 터였다.

“정 안 되면 들이받겠습니다” 

그 무렵 대한민국은 44000명에 달하는 지상군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하고 있었지만, 베트남에 전투병력을 파병한 것은 남한보다 북한이 먼저였다. 북한은 베트남에 공군을 파병했는데 북한 공군 203비행연대 소속의 전투비행사들은 북폭을 감행하는 미국 전투기들을 상대로 요격에 나서 최신예 F105 선더치프와 F4 팬텀을 격추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당연히 북한 공군에는 실전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조종사가 여럿 있었다.

“출격일은 415일이다. 수령님 생일선물로 이만한 게 없을 것이다.

150㎞ 떨어져 비행하는 정찰기를 요격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임무가 아니다. 갔다가 돌아오기도 벅찬 거리다. 하지만 정확한 비행 스케줄을 안다면 위험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아쓰기 현지에서 정찰기의 출격 시간을 면밀히 살핀 결과 김기옥은 출격 일자를 415일로 정했다.  

두 조종사는 말없이 상황실로 향했다. 답답한 것은 예행연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랑기지에 미그 21이 배치돼 있다는 사실이 미국 정찰위성에 포착되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비행정보가 정확하다면 일단 조우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상황판을 들여다보는 현기수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흘렀다. 요격 예상 지점은 청진 동남방 152㎞ 해상. 그곳은 미군 정찰기의 비행코스 중에서 육지와 가장 근접한 곳이며 어랑기지에서도 가까운 지점이다.  

현기수가 ‘일단’이란 단서를 붙인 것은 이륙에 성공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연료를 가득 실으면 시간상으로는 요격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미그21은 연료탱크가 기체의 앞쪽에 편중돼 있어 연료가 소모되면서 기체의 무게중심이 뒤쪽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최소한 20%에 해당하는 150갤런은 남겨놓아야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공중기동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 150갤런을 남겨놓아야 한다면 아무리 길게 봐도 요격 가능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현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5분이면 각 기에서 공대공 미사일을 겨우 1발씩 발사할 수 있는 시간밖에 안 된다. 첫 발에 명중시켜야 한다는 얘긴데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1969 9월 주한 미8군 사령관직을 떠나는 찰스 본스틸 대장 부부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 이임 인사를 하고 있다. 

 

“까짓거, 정 안 되면 그대로 들이받겠습니다.

요기(僚機) 조종사가 비감한 얼굴로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현기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미군 정찰기에 근접한 다음의 일이다. 당장 시급한 것은 무사히 이륙해서 접근하는 것이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1969 415. 어랑기지. 

두 대의 미그21이 활주로 끝에 정렬했다. 관제탑에서 이륙을 지켜보는 김기옥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성공 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천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필요한 연료 350갤런과 공대공 미사일 외에 불필요한 장비는 모두 제거했다. 이론상으로는 이륙이 가능하지만 단 한 차례도 예행 훈련을 실시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억눌렀다.

기지의 레이더는 벌써부터 미군 정찰기의 비행경로를 추적하고 있었다. EC121 정찰기는 지금 블라디보스토크 소련 해군기지를 정탐하고서 남하 중이다. 곧 청진을 지나서 경성, 어랑에 이를 것이다. 고도와 항로 모두 예상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미그21이 강렬한 엔진음을 토해내며 활주로를 질주했다. 삽시간에 활주로 끝에 다다른 미그21은 곧 기수를 쳐들었고 맹렬한 기세로 하늘로 솟아올랐다. 김기옥은 비감한 얼굴로 두 대의 미그21기를 응시했다.  

레이더 화면을 들여다보던 전탐사는 슬슬 지루함을 느꼈다. 아쓰기 기지를 떠난 지 벌써 7시간이 흘렀다. 긴장이 풀리면서 슬슬 싫증이 날 때다. EC121 전자정찰기의 승무원은 모두 31. 해병대 소속 전탐사 1명을 빼면 전부 해군 소속이다. 

“…!

전탐사가 하품을 하려는데 레이더에 휘점이 번쩍였다. 또 북한 어랑비행장에서 미그기를 출격시킨 것인가. 전탐사는 얼른 위치를 확인했다. 북위 12941, 동경 4129. 틀림없는 공해상이다. 심심하면 한 번씩 시도하는 출격으로 별 위협은 못 됐지만 그래도 보고는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전탐사는 의자를 돌리며 전탐관을 찾았다.

“뭐야?

“북한 전투기가 긴급발진을 한 것 같습니다. 

“어랑기지의 미그 15겠지. 잘 지켜봐! 

전탐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레이더에서 정체불명 비행체의 항적이 사라졌다. 그새 기수를 돌렸나? 전탐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근거리 공중전을 주임무로 하는 미그15는 항속거리도 짧은 데다 자체 레이더가 없어서 정찰기를 쫓아올 수 없다.

바닷속으로 처박힐 듯 급강하를 시도한 두 대의 미그21은 수면에 닿을 듯 초저공으로 비행했다. 무사히 이륙했으니 두 번째 고비를 넘긴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더 있다. 어떻게 미군 정찰기에 몰래 접근하느냐는 것과 제한된 시간에 격추해야 하는 일이다.

 

/1969년 개최된 군사정전위원회의 북한 측 대표 이춘선.

 

두 대의 미그21기가 속도를 높이며 정찰기 EC121을 향해 접근을 시도했다. 어랑기지 지상관제소와는 이미 교신이 끊겼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추적해야 한다. 미그21에는 소형이지만 자체 레이더가 장착돼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레이더를 작동시킬 때가 아니다. 출력 100kW짜리 I밴드 레이더를 작동시키는 순간 미군 정찰기에 즉각 포착될 것이다. 예측이 정확하게 들어맞을까. 현기수는 모든 것을 천운에 맡기기로 하고 조종간을 움켜잡았다. 연료가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공기 저항이 심한 수면 위를 비행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청진 남동쪽 150㎞ 해상에 이르렀다. 예상대로라면 고도 1m 상공에서 미군 정찰기가 비행하고 있을 것이다. 현기수는 고개를 돌려 나란히 비행하고 있는 동료기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조종간을 힘껏 당기며 급상승을 시도했다. 그리고 미그21의 고도가 3000m에 이른 것을 확인하고는 레이더를 작동시켰다.

EC121의 전탐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난데없이 파장 990pps 전파가 정찰기를 향해 날아들고 있던 것이다.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웬 탐지파란 말인가. 출력이 약하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EC121 정찰기를 추적하고 있었다. 전탐사는 얼른 전탐관을 불렀다.

“뭐야? 근처에 해군 함정이라도 떠 있나? 

전탐관도 선뜻 상황 판단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해군 함정에서 발사한 전파치고는 출력이 너무 약했다. 그렇다면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근방에 나타났다는 얘긴데….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화면을 응시하는 전탐사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미확인 비행체는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장에게 보고해야 할 것 같았다. 전탐관은 신속히 인터콤을 들었다.


숨막히는 추격전 

현기수 대위는 레이더에 미군 정찰기가 포착되는 것을 확인하며 쾌재를 불렀다. 이것으로 세 번째 고비를 넘긴 셈이다. 현기수는 방향을 잡으며 레이더를 추적용 모드로 전환했다. 지금쯤 미군 정찰기에서도 전파를 탐지했겠지만 미그기의 위치는 쉽게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고성능 레이더라고 해도 해면반사 때문에 바로 아래서 수직상승하는 기체는 추적하기 힘들다.  

“사이클이 추적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전탐사가 비명을 질렀다. 정체불명 비행체에서 발사하는 전파의 사이클이 990pps에서 1800pps로 바뀐 것이다. 전탐관은 가슴이 철렁했다. 990pps짜리 수색용 사이클과 1800pps짜리 추적용 사이클을 사용하는 레이더라면 미그21에 장착된 스핀 스캔 레이더인데…그렇다면 미그21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EC121 정찰기가 비행하는 수역에는 미그21이 배치된 비행장이 없다. 그리고 미그21이 이동배치됐다는 첩보도 없었다.

“접근하는 기체가 있는가? 

“없습니다. 

레이더 담당 하사가 큰 소리로 보고했다. 전탐관은 황급히 레이더를 살펴봤지만 이곳을 향해 접근하는 기체는 탐지되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전탐관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슨 일인가? 
인터콤에서 기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그21의 추적 레이더에 미군 정찰기가 정확하게 잡혔다. 거리는 4. 미군 정찰기는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서방에서 아톨 미사일이라고 부르는 K13 공대공 미사일의 유효사정거리는 5㎞지만 열추적방식인 만큼 프로펠러 비행기를 격추하려면 더 접근해야 한다. 연료 잔량을 확인한 현기수는 출력을 최대로 높였다. 시계를 힐끗 보니 바늘이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웃! 피시베드(Fish Bed)! 

 

11월 호

⑦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8·18 도끼만행 사건

  • 푸에블로호 납치, EC121 정찰기 격추. 해상과 공중에서 거듭 미국의 허를 찌른 북한은 1976, 이번엔 육상에서 미국의 뺨을 후려쳤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을 급습, 2명의 미군 장교를 살해한 것. 이번만큼은 미국도 강경대응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으나 결국 미루나무 제거라는 상징적 보복에 그치고 말았다. 오히려 한국군 특전사 요원들이 미군 몰래 북한군에게 본때를 보여줬다.

/1976 8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현장. 

 

유난히 더웠던 1976년의 여름은 8월로 접어들면서 폭염을 더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유엔 측 제3경비초소에 이른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미루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엄청나게 큰 키에 무성한 잎은 시계(視界)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제5경비초소에서 전혀 관측되질 않겠는 걸.
“그렇습니다. 3경비초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부중대장 마크 바레트 중위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칭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바로 앞에 있는 유엔 측 제3경비초소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초소로 통하는 곳이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북한 측 제4초소에서 수시로 도발을 감행하는 상황에서 퇴로가 북한 측 제8경비초소와 제5경비초소에 막혀 있어 마치 적지 한가운데 고립된 형국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큰 사고 없이 지낸 것은 언덕 위의 유엔 측 제5경비초소에서 제3경비초소를 관측하고 있다가 이상이 감지되면 즉시 경비병력을 출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문제가 생겼다. 3경비초소 부근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면서 제5경비초소에서 제3경비초소를 제대로 관측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지를 쳐야겠다. 노무자들을 부르게.
미루나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보니파스 대위가 결정을 내렸다

“경비장교 회의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장소가 장소인 만큼 바레트 중위는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권했다.

“그럴 필요 없어. 즉시 작업을 지시하게. 

보니파스 대위는 더 생각할 필요 없다는 듯 성큼성큼 지프로 향했다. 지프는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게끔 방향을 튼 채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만큼 제3경비초소는 긴장이 감도는 곳이다.

신중한 성격의 보니파스 대위가 그답지 않게 서두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국 근무 임기가 만료된 상태로 후임자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후임자에게 어려운 일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는 미루나무가 있는 위치가 유엔군 측에서 관할하는 구역이기 때문이다. 판문점 안에 분계선이 생긴 것은 1976 818일에 일어난 이른바 ‘도끼 만행’ 이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는 유엔 측과 북한 측이 자유롭게 오갔고 필요한 곳에 경비초소도 설치해놓고 있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는 통행이 자유로웠지만 그래도 잠정적으로 정해놓은 분계선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미루나무는 묘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면상으로는 분명히 유엔 측 관할구역이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꼭 북한 측 관할처럼 보인 것이다. 물이 높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은 제주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프는 속도를 높이며 제3경비초소를 빠져나왔다. 지원기지까지 가는 동안에 북한 측 제8, 6, 그리고 제7경비초소를 지나쳐야 하는데 그 앞을 통과할 때마다 북한 경비병들의 사나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그만큼 유엔 측 제3경비초소는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쇠못 구두’의 사나이 

북한 측 제5초소는 한국적십자 건물 바로 앞에 위치해서 도발적으로 출입문을 노려보고 있다. 그곳에서 보니파스 대위 일행을 줄곧 감시하고 있던 북한 판문점 경비대 소속 박철 중위는 신경질적으로 쌍안경에서 눈을 뗐다.  

“저 미제국주의 놈들이 왜 저기서 어물쩍거리는 거야!

 

/도끼만행 사건 이튿날 판문점 옥외에서 열린 경비장교회의. 북한 장교가 부상한 북측 경비병의 사진을 보여주며 언성을 높이고 있다.

 

박철 중위는 도끼눈을 하고 멀어져가는 미군 지프를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박철 중위는 신경질적으로 초소 안을 배회했고 그럴 때마다 또각또각하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의 군화 앞에 날카로운 쇠못이 박혀 있었다. 그는 하전사로 복무하던 중에 근성을 인정받아 군관이 된 이른바 직발군관이다. 그 전해 6월에 유엔군 측 경비부사령관 윌리 핸더슨 소령이 북한 경비병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박철 중위의 쇠못 구두는 악명을 떨쳤고 그날 이후로 그의 쇠못 구두는 미군들 사이에서 신형무기로 통하고 있었다.  

“철저히 감시해. 


박철 중위는 지시를 내리고 제5경비초소를 나섰다. 8경비초소를 둘러본 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제4경비초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박철 중위가 제5경비초소를 나서는데 한 무리의 관광객이 유엔 측 건물인 자유의 집에서 나왔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인 판문점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돼 있었다. 어쩌다 들르는 남한 견학단은 잔뜩 긴장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데 비해서 미국 관광객들로 보이는 무리는 거리낌 없이 희희낙락하며 제멋대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박철 중위는 싱글거리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미국인에게 인상을 써 보이고는 휑하니 지프에 올라탔다.


남북 지도자의 머릿속 

베트남전쟁은 1975 430일에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공산당 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6·25전쟁이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첫 번째 전쟁이라면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첫 번째 패전을 기록한 전쟁이다.  

그 무렵 한국은 심각한 내부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에 이어 10월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해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국민은 맹렬하게 저항했고 정권은 인기가 땅에 떨어졌으며 해외에서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공산화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래도 미국이 손을 댄 전쟁인데 설마…. 그런데 설마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몰렸고 국민은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반면에 북한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김일성은 일당독재를 확립했고 북한 주민들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시끄러운 한국과는 대조적이었다. 베트남의 통일은 더욱 고무적이었다. 끈질기게 밀어붙이면 미국도 결국 손을 들고 만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더구나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하면서 남한에는 이제 2사단만 남은 상태였다.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은 북한이 남침을 하면 핵무기를 쓸 것임을 시사하며 북한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베트남에서 철군의 명분을 찾기에 급급하던 미국의 경고가 이미 여러 차례의 벼랑끝 전술로 재미를 본 북한에 얼마나 먹힐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면서 날씨보다 더 뜨거운 전쟁의 열풍이 1976년 여름의 한반도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절대권력을 확립한 김일성에게 남은 문제는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후계자를 정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한 흐루시초프에 의해 사후에 격하됐고, 중국의 마오쩌둥도 후계자 류사오치와 린뱌오에게 차례로 배신을 당했다. 역시 믿을 것은 혈육밖에 없는 것 같았다. 김일성은 장남 김정일에게 권좌를 물려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김정일은 1974 2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정치국은 당 규약을 해석하고 당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최고 권력기구로,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국의 결정에 반하는 행위는 ‘반동’으로 처단된다. 그런 최고 권력기구에 공산국가에서는 ‘새파란’ 젊은이 축에 드는 33세의 김정일이 당 원로들을 제치고 입성한 것이다. 공산국가에서는 권력서열 순으로 정치국 회의에 입장한다. 새로 정치국 위원이 된 김정일은 주석 김일성, 부주석 김일, 정무원 총리 이종옥,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에 이어 정치국 회의에 다섯 번째로 입장했다. 당당하게 권력 5위에 오른 것이다. 김정일은 1975년부터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주도하며 차츰 자기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 무렵부터 김정일을 ‘당중앙’이라 호칭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제1차 권력승계로 본다.

 

/절단된 미루나무. 도끼만행 사건 1년 뒤 촬영한 것이다.

 

“옵니다! 

과연 그들 중 한 명이 천천히 다리 위를 건너오고 있었다. 미군들은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발포 여부는 현장 지휘관이 결정하기로 돼 있다. 이미 소총을 결합해 놓은 64인의 결사대원은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김종헌 소령은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북한군이 발포를 하면 지체없이 응사한다. 그리고 발포 없이 접근할 경우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절반 이상 넘어서면 공격의사로 간주하고 선제 발포를 명령할 생각이었다. 총격이 벌어지면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전사 대원들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오던 북한군이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이쪽을 노려보더니 돌아섰다. 기싸움에서 특전사가 이긴 것이다. 미군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공병들은 다시 엔진톱을 작동시켰다. 톱날이 또 부러지기를 몇 번. 마침내 오전 745분에 12m 높이의 거대한 미루나무는 잘려나갔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됐지만 그래도 무사히 임무를 달성했다. 미군들은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64인의 결사대에겐 은밀히 부여된 임무가 하나 더 있었다. 북한군이 유엔군 지역에 불법으로 설치한 초소를 때려 부수는 것. 물론 미군 지휘부는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64인의 결사대는 평소 유엔 측 제3초소를 배후에서 위협하던 북한 측 제5초소와 제8초소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소총은 이미 결합해놓은 상태였다.


한국군 보복에 北 침묵 

“한국군이 총을 갖고 있다!
“한국군이 미쳤다! 다 때려 부순다. 


긴급 무전이 날아들면서 폴 번연 작전의 성공을 기뻐하던 캠프 키티호크 상황실은 일시에 공포 분위기로 변했다. 한국군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것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더구나 초소 파괴를 거부하는 미군 운전병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는 일도 있었다. 미군 지휘부는 화가 폭발했다. 강경 보복을 자제하기로 한 워싱턴의 결정이 한국군의 일개 현장 지휘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다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상황은 미군 수뇌부의 우려와는 달리 별 탈 없이 종결됐다. 북한군은 일절 반격을 하지 않았고 현장에 진입했던 병력 110명은 무사히 철수했다. 그리고 작전이 종결된 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에서 대표 한주경을 통해 미군 장교가 피살된 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는 김일성의 친서를 유엔 측 수석대표 마크 푸르덴 해군 소장에게 전달했다. 크고 작은 도발사건으로 점철된 정전 23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이고 사건을 종결짓기로 했다.  


이어 825, 북한은 사건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공동경비구역도 분할할 것을 제의했다. 원래는 유엔 측에서 제의한 것인데 이로써 판문점에도 분계선이 그어지게 됐다.


군사적으로는 데프콘2부터 전쟁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1976 821일에 ‘군사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던 셈이다. 64인의 결사대가 참가한 미루나무 절단 작전은 흔히 한국의 엔테베 특공작전으로 불린다. 엔테베 특공작전은 한 달 보름 전인 1976 73, 이스라엘 특공대가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으로 날아가서 억류돼 있던 인질들을 구출해낸 작전이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3800㎞를 날아간 데 비해서 한국군 특전사는 트럭으로 30분 거리의 판문점에 진입한 것이지만, 전면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든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도끼만행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군 박철 중위는 그다운 최후를 맞았다. 8년 후인 1984 1123일 판문점에서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의 외교관 바실리 야고브레비치 마싸작이 한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저지하려는 북한군 경비대와 탈출을 도우려는 유엔 경비대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때 유엔 경비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사망한 북한군 군관이 바로 박철 중위였다.  


문 닫은 세습왕국 

그 후 북한의 권력세습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김정일은 1980 10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를 통해서 정치국 서열 4, 비서국 서열 2, 그리고 당 군사위원회 서열 3위로 올라섰고 호칭도 ‘당중앙’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바뀌었다. 세습에 한발 더 다가선 것이다. 김정일은 1990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면서 후계자의 위치를 굳혔다. 그리고 김일성이 사망하고 3년이 지난 1997 108일 당 총비서직을 승계하면서 명실상부한 김정일 시대를 연다.

북한이 폐쇄주의를 고집하는 동안에 한국은 개혁과 개방으로 경제적 풍요를 이뤘고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화를 달성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최초의 나라가 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고 개발도상국의 모델이 됐다.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랐지만 처음부터 올바른 방향을 선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3월에 천안함 폭침사건이 발생했다. 4월과 6월에는 이용철과 이제강 등 2명의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죽었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요직 중의 요직으로 꼽히는 자리. 이제강 제1부부장은 교통사고로 죽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문가들은 권력구조 개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은 지난 9 44년 만에 노동당 대표자회의를 열고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3대 세습의 길을 연 것이다. 세습이 이어지는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 공산권은 붕괴했고 대한민국은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지구촌의 리더로 부상했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여전히 문을 굳게 닫고 있는 북한이다.

 

세습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금기시되는 일이다. 김일성은 서두르지 않기로 하고 유일지도체제라는 우회로를 택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립한 현실은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것은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남과 북의 지도자들은 필요에 따라 긴장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장기집권과 세습통치에 적절히 이용해나갔다.

대표적인 긴장 완화 사례로는 1972 74일의 남북공동성명을 들 수 있다.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 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남과 북은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남북공동성명은 그해 가을에 유신이 선포되면서 짧은 해빙 무드를 종결지었다.


감시와 탄압이 심해질수록 민주화 열기는 고조됐고 체포와 구금이 줄을 이었다. 1976년으로 넘어오자 꼭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쾌거는 답답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한 모금의 청량제였다.  


贊세습 vs 反세습 

/1970년대 후반 30대 초반이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은 창광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평양 거리는 평소에도 사람이 그리 많이 다니지 않지만, 계속되는 더위 때문인지 그날따라 더 한산해 보였다. 묵묵히 창광거리를 내려다보던 무관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모스크바에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데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수상을 역임한 남일이 지난 3월 트럭에 치여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남일은 휴전협정 당시 북한 대표였고 나중에 소련대사도 지낸 거물인데, 소련대사관에서 그의 죽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가 소련 시민권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련대사관은 남일의 사망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어쩌면 권력세습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평양에서는 권력세습의 밑그림이 천천히 그려지고 있었다. 김정일이 당중앙으로 추대되면서 당 원로들이 하나둘씩 이선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정권 수립 이래 줄곧 제2인자 자리를 지켜온 최용건은 와병으로 거의 활동을 못하고 있었고(1976 919일 사망), 최현은 514일에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오진우에게 넘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부주석 김일도 활동이 예전만 못했다. 소련대사관 무관은 이들이 세습을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파악했다. 


무관은 세습을 지지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나머지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부총리 김창주와 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봉주, 대외경제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우, 평양시당 책임비서 강현수 외에 계응태, 강성산, 전병호, 한성룡, 서윤석을 꼽은 무관은 계속해서 신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을 필두로 김만철 상장, 오극렬 상장, 백학림 상장, 이을설 상장, 주도일 상장 등 군부 실세들의 이름을 리스트에 올렸다.  


이번에는 세습을 반대하는 인물들을 꼽을 차례다. 무관은 항일 빨치산 출신의 당 원로로 당서열 3위인 부주석 김동규를 시작으로 차례로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김동규는 6월에 열린 정치위원회에서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만 우대하면서 당 원로들을 노쇠했다고 비난한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최현과 김일, 그리고 오진우 등이 김정일의 뜻이 잘못 전달된 것이라며 김정일을 거들었지만 김동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기회에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놓을 생각이었다. 김동규가 워낙 대차게 나가자 김일성도 한발 후퇴해 김정일에게 당 원로에게 사과할 것을 명령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그 후 앙금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노동당 대남사업담당 비서 유장식. 대표적인 당 이론가로 꼽히는 그는 7·4남북공동성명 때 서울을 방문하면서 남쪽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인민무력부 부부장 장정환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의 삼촌이면서도 김정일의 세습에 반대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의문사를 당한 남일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

 

바다, 하늘…이번엔 땅에서? 

/도끼만행 사건 직후 판문점은 세계의 기자들이 몰려든 취재경쟁의 현장이었다. 땅바닥에 엎드려 메모를 정리하는 외신기자.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며 무관실 요원이 들어섰다.  


“뭐 좀 알아낸 게 있소?

무관이 보고서를 덮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쩐 일인지 그 동네 사람들이 모조리 이사를 갔습니다. 아무래도 북한 당국이 강제로 보낸 것 같습니다. 


역시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었단 말인가.  


“현장을 살펴보니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여 도저히 교통사고가 날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농로의 폭도 트럭이 다닐 수 없을 만큼 좁았습니다. 


평양 교외의 한적한 시골길에서 트럭에 치여 죽은 게 이상해서 무관실 요원을 현장으로 보낸 것인데, 사고 현장은 트럭이 다닐 수 없는 좁은 농로일 뿐 아니라 사고를 낸 운전사도, 목격자도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면 사인은 명확하다.  


“아마도 다른 곳에서 살해하고 시신을 그곳에 내다버린 것 같습니다.


요원이 현장을 살피고 돌아온 의견을 가감 없이 전했다. 살해라면 세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련에 넓은 지지 기반을 가진 남일이 강력하게 반대하면 세습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아무래도 세습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습은 북한 내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소련에서 염려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세습을 완성하기 위해 북한 당국은 내부 결속을 다지려 할 것이다. 이럴 때 효과적인 방법은 외부에서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번에도 예의 벼랑끝 전술을 구사할 것인가. 무관은 긴장이 되었다. 벼랑끝 전술은 언젠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번에는 북한이 어디를 노릴 것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밀어붙일 것인가.


북한이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가. 아무래도 그것이 보고서의 핵심이 될 것 같았다. 베트남의 공산화로 북한 군부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고 공공연하게 ‘해방전쟁’을 입에 담았다. 723일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남북한 교차승인과 유엔 동시가입을 제안했다. 남과 북을 유엔이라는 국제무대로 끌어들여 한반도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북은 ‘영구 분단 획책’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며 남북관계를 강경일변도로 밀어붙였다. 여기에 군부 강경파들을 고무시키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미국 의회가 1973 11월 대통령의 해외파병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전쟁이 임박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전쟁의 징후는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럼 우리 몰래 중국과…? 당시 소련은 중국과 영토분쟁을 겪으면서 서로를 비방하고 있었고 서로 북한의 환심을 사려고 원조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무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련이나 중국이나 지금 또 다른 전쟁을 획책할 상황이 아니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결국 개입하게 될 것이고 일본의 재무장도 불 보듯 했다. 일본의 재무장을 초래할 수 있는 동북아의 불안정은 소련과 중국 모두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 바다(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와 하늘(1969년 정찰기 EC121 격추)에 이어 이번에는 땅에서…? 뭔가 불길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건 확실한데 도무지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다. 무관은 답답한 심사를 추스를 생각에 창가로 향했다. 느낌이 그래서일까. 무거운 기운이 거리를 걷는 평양 주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즈음 무슨 일이 꼭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는 평양도 서울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참담한 워게임 시뮬레이션 

용산 미8군 상황실에 모인 주한 미군 수뇌부의 얼굴에 짙은 고뇌가 서렸다. 워게임(War Game) 시뮬레이션 결과가 예상한 것보다 휠씬 나빴던 것이다.  

“심각하군. 석 달 만에 주전선이 붕괴될 거란 말이지. 


주한미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대장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렇습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90일을 기점으로 전세가 급격히 우리 쪽에 불리하게 전개될 것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신임 참모장 싱글로브 소장 역시 표정이 밝지 못했다. 정보장교로 전쟁 전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던 싱글로브 소장은 나중에 미군 감축안을 놓고 카터 대통령과 대립하다 해임되는 강경파 군인이다.  


상황실에는 주한미군사령관과 참모장 외에 부사령관 번즈 공군 중장, 한미1군단장 쿠시만 중장 등 고급 장성을 위시해서 주한미군사령부의 작전참모와 정보참모, 그리고 상급부대인 태평양사령부에서 파견된 정보책임자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세계를 여러 개의 권역으로 나눠놓고 분쟁에 대비하고 있는데, 각 사령부에서는 예상되는 전쟁에 대비해서 작전계획을 작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실시한 워게임 시뮬레이션 결과가 너무도 비관적이었다. 북한이 전면 남침을 시도했을 때 미군의 증원 없이 서울 방어가 가능한 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지상군 24개 사단과 594대 전투기를 주축으로 하는 북한의 전투력에 대항해서 28개 한국군 사단과 미 2사단, 그리고 한국 공군과 주한 미 공군의 전투력을 구체적인 수치로 환산해서 슈퍼 컴퓨터에 입력,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해본 것이다. 추가로 증파되는 미군을 제외한 것은 미군의 해외파병이 여의치 않은 현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예상한 것보다 휠씬 나빴다.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90일을 기점으로 전세가 급격히 북한으로 기울면서 19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216일 만에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끝날 것임을 워게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가정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상황이 벌어지면 주일 공군과 오키나와의 해병대는 즉시 투입할 수 있고, 하와이의 25사단도 빠른 시간 내에 출동태세를 완료할 수 있습니다.


싱글로브 참모장이 워게임 결과에 너무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즉각 참전할 것임을 여러 차례 천명했고, 1969년의 포커스 레티나 훈련과 1971년의 프리덤 볼트 훈련을 통해 이것이 빈말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1976년부터는 매년 갖기로 한 팀스피리트 훈련도 두 달 전에 첫 번째 훈련이 실시됐다. 미국은 베트남 공산화로 자신을 얻은 북한에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거듭 경고하고 있었다.  


위기의 그림자 

그러나 북한이 전면전을 감행해올 경우 과연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미국 내 반전여론은 여전히 높았고 대규모 지상병력을 파병하려면 의회의 의결을 거쳐야 했다. 1976년은 남과 북의 국력이 역전되기 시작할 무렵이지만 군사력은 여전히 북한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주먹은 우리가 더 세다”고 큰소리친 김일성의 말은 괜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전임 한미1군단장인 홀링스워드 중장이 제안한 ‘9일 속결전’. 북한이 전면전을 시도하면 처음 5일 동안 B-52 폭격기를 하루 1000회 출격시켜 북한을 초토화하고 나머지 4일 동안 지상군을 투입해서 9일 만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구상이었다. 제공권을 확실하게 확보하고 있음을 과시한 계획이지만 그만큼 지상전력이 약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 그것이 퇴역을 앞둔 노장군의 목표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북한의 강경파들이 계속 목소리를 높이며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는 상황에서 본토의 지원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일상적인 진지 구축 외에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보참모가 휴전선에서 특별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1976년은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다. 북한은 절대 그런 호기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스틸웰 대장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북한이 내부 결속을 목표로 뭔가 일을 벌일 것만 같은 분위기에서 8월로 접어들며 당장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후텁지근한 날이 계속됐다. 과연 한국은 이번에도 위기를 무사히 넘길 것인가.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여태껏 겪은 위기보다 휠씬 더 심각한 위기가 될 것이다.  


818일은 아침부터 날이 화창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중대장 보니파스 대위는 출발을 명령했다. 사흘 뒤면 한국 근무도 끝이다. 미루나무 가지치기는 마지막 임무가 될 것이다. 인솔자 보니파스 대위, 부중대장 바레트 중위 외에 통역을 맡은 한국군 김 대위와 경비병 7, 그리고 가지치기를 할 노무자 5명을 태운 트럭은 캠프 키티호크를 빠져나와 제3경비초소로 향했다. 


운명의 818 

대성동 마을을 통과한 트럭은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섰고 제2경비초소를 지나 제3경비초소에 이르렀다. 3경비초소에 도착하자 긴박감이 전해졌다. 앞뒤로 북한 측 제4경비초소와 제8경비초소, 그리고 제5경비초소에 둘러싸여 마치 적진 한복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보니파스 대위는 문제의 미루나루를 올려다봤다. 12m가 이렇게 높은 것인가. 오늘따라 가지들이 더 무성한 것 같았다. 저 무성한 가지들을 제거해야 제3경비초소의 안전이 보장된다. 보니파스 대위는 작업을 서두를 것을 지시했다. 노무자들이 신속하게 사다리를 설치했고 경비병들은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기동타격대를 대기시켜 놓았지만 그래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15분쯤 지났을 무렵 트럭 한 대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오더니 북한군 군관 2명과 전사 9명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북한 경비원들이 옵니다. 


바레트 중위가 경계태세를 취하며 보고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군관 중 한 명이 박철 중위임을 알아봤다. 매우 호전적인 박철 중위는 미군들 사이에서 유명인물로 통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건가?

박철 중위가 인상을 쓰며 보니파스 대위에게 다가왔다.  


“관측에 방해가 되는 가지를 치고 있다. 


보니파스 대위의 답변은 한국군 김 대위를 통해 박철 중위에게 전달됐다. 보니파스 대위는 미루나무의 위치가 잠정적 관할선에 따라 유엔 측에 속했기에 경비중대장 직권으로 보수작업을 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하고 북측에는 통고하지 않았다. 잠정적 관할선은 나중에 경계선으로 확정되는데, 문제의 미루나무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쪽에 치우쳐 있기는 해도 분명히 유엔 측 관할구역이었다.  


북한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애매한 지형으로 인해 착각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북한군이 처음부터 호전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북한군은 말없이 가지치기 작업을 지켜보기만 했다. 개중에는 노무자에게 가지 치는 방법을 조언하는 자도 있었다.


북한군이 출동하면서 고조된 긴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라앉았고 가지치기 작업은 속도를 냈다. 그러나 시계를 확실하게 확보하려면 더 잘라내야 한다. 보니파스 대위는 손을 댄 김에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북한 경비병에게 피살된 두 미군 장교의 유해가 1976 820일 본국으로 떠나기 위해 수송기에

옮겨지고 있다.

 

“죽여!”…3분여 만에 상황종료 

“그만! 그 이상 자르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돌연 박철 중위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작업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귀관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보니파스 대위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당장 내려오라! 


보니파스 대위가 물러서지 않자 박철 중위는 가지를 치고 있는 한국인 노무자들을 향해 소리쳤고 겁에 질린 노무자들이 슬금슬금 사다리를 내려왔다.  


“작업을 계속하시오! 


보니파스 대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1년간의 판문점 근무를 통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양보를 유약의 신호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보니파스 대위가 강경하게 나오자 박철 중위가 험악한 인상으로 병사를 불렀다. 그의 지시를 받은 병사는 황급히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달려갔다. 지원병을 데리고 오려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기동타격대에 연락하는 게 좋겠습니다.


바레트 중위가 긴장해서 다가왔다. 판문점에 근무한 지 한 달밖에 안 되는 바레트 중위는 이처럼 긴장된 분위기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보니파스 대위는 물러서지 않았다. 공갈에 밀리면 끝이 없다. 틀림없이 경비장교 회의에서 생떼를 쓰고 나올 것이다.


눈치를 보던 노무자들은 슬금슬금 다시 사다리로 올라갔다. 빨리 작업을 끝내고 이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라 판단한 것이다.  


“저기!


갑자기 경비병이 소리쳤다. 북한군들이 우르르 밀려왔는데 줄잡아 30명은 될 것 같았다. 미처 대피할 틈도 없었다. 북한군은 신속하게 사방을 에워쌌다. 그제야 보니파스 대위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터질 듯한 긴장이 감돌았다.


박철 중위는 손목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더니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보니파스 대위는 그의 눈에서 살기를 느꼈다. 위험하다. 빨리 여기를 떠야 한다. 그러나 이미 퇴로가 차단당한 상황이었다.  


“죽여!


박철 중위가 소리치자 북한군이 일제히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에게 달려들었다. 그중 한 명은 달아난 노무자들이 놓고 간 도끼를 집어들더니 도끼로 보니파스 대위를 찍었다. 1976 818일 판문점에서 빚어진 충돌이 ‘도끼만행’으로 명명되는 순간이었다.


쓰러진 보니파스 대위에게 무수한 발길질이 집중됐다. 황급히 유엔 측 제3경비초소로 쪽으로 대피하던 바레트 중위도 북한군에게 잡혀 집중구타를 당했다. 두 사람 외에 미군 경비병 4명과 한국군 경비병 2명이 부상했는데, 불과 3~4분 만에 상황이 종료되는 바람에 출동한 기동타격대가 구조할 틈도 없었다.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는 헬기로 긴급 후송됐지만 도중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은 마침 자유의 집에서 무비카메라로 근방을 촬영하던 미군 상병에 의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고, 세계는 북한의 잔인한 행동에 공분했다. 나중에 북한은 그것을 가지고 도리어 미군이 도발을 유도한 증거라고 우기기도 했는데, 아무튼 지난 23년 동안 판문점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됐지만 미군 장교가 맞아죽은 것은 처음이었다. 한반도는 급속히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도끼만행 사건 직후 나무 절단 작업의 경비를 위해 투입된 공수1여단. 미국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동소총과 수류탄, 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작전을 벌인 것이 드러나 한미 간에 갈등이 일었다. 출동 직전 특전요원들을 격려하는 박희도 여단장(오른쪽). 

 

긴급연락을 받은 워싱턴 특별위원회 멤버들이 속속 지하 상황실로 도착했다. 키신저 국무장관이 백악관을 비운 포드 대통령을 대신해 위기관리팀을 소집한 것이다. 포드 대통령은 석 달 뒤에 있을 대통령선거와 관련해서 소집된 공화당 전당대회 때문에 캔자스시티에 있었다.
 

“한반도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했소. 장교 2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서 죽었소.

 

키신저 국무장관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워싱턴 특별위원회에서 그에 따른 대응책을 마련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벌써 몇 번째입니까. 북한 영토를 폭격하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윌리엄 하일랜드 국가안보 부보좌관이 강경대응을 주장하고 나섰다.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스코크로프트는 포드 대통령을 수행해서 캔자스시티에 있었다.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은? 


키신저 국무장관이 할러웨이 합참의장 서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책을 정하기 전에 그 점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었다.  


“북한이 전면전을 기도할 것 같은 징후는 없습니다. 일단 문제의 미루나무 제거 작업을 강행하고 차후에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해군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북한의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제한 보복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할러웨이 해군대장이 제한 보복을 주장했다.  

“아무튼 이번에도 군사정전위에서 항의하다 마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 동조하고 나섰다. 키신저는 CIA 국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중앙정보국의 의견을 확인할 차례였다.  


“아직 정확한 의도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우발적인 사고라고 보기에는 동원된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CIA도 의도적 도발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무를 베어버리는 정도로는 부족하겠군. 


결론을 내린 키신저가 대통령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도끼만행을 고의적 도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우발적인 사고로 볼 것인가. 당시 위싱턴의 수뇌부는 고의로 보고 전면전을 불사하는 강경대응을 주장한 반면, 서울의 스나이더 미국대사와 스틸웰 주한 미군사령관은 우발적인 사고로 보고 신중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신중론이 옳은 선택이었지만, 당시는 더는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강경책도 만만치 않게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패한 후로 미국은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전해인 1975년 캄보디아가 미국 민간 상선을 나포하고 승무원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캄보디아도 미국을 우습게 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강하게 대응했다. 즉각 해병대를 출동시켜 구조에 나섰다. 끌려다니다가는 한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린 푸에블로호와 정찰기 EC121 사태. 그리고 강경하게 대응한 상선 마야구에즈호 사태. 그렇다면 미국이 이번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세계는 숨을 죽이고 한반도를 지켜봤다.

 

남북 모두 비상사태 돌입 

/1976 99일 북한 경비병들이 JSA 군사분계선 유엔군 측 지역에 있는 자신들의 초소에서 집기를 꺼내고 있다. 유엔군 측 지역에 있던 북측 초소 4개를 새 협정에 따라 북측이 인원과 장비를 동원해 철거했다.

 

데프콘 3가 발령나면서 서울 거리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전쟁 위험 정도에 따라 5단계로 나뉜 데프콘(DEFCON)을 발령하는데 데프콘이 한 단계 격상되어 데프콘 3-라운드 하우스-가 발령된 것은 초유의 상황이었다(한국은 평시에도 데프콘 4를 유지하고 있었다). 

데프콘 3가 발령됨에 따라 휴가병들은 서둘러 귀대했고 실탄을 지급받은 병력들이 전방 진지에 투입됐다.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서울 시민들은 위장망을 치고 질주하는 군용 지프들을 보며 불안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공설운동장마다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열렸고 시민들은 김일성의 허수아비를 화형시키며 북한을 규탄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3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훈시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미국의 대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전시는 물론 평시 작전권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었다.


북한군도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북한군은 819일 오후 5시를 기해 전투태세에 돌입했고 평양은 전시체제로 전환됐다. 평양 시민 30만명이 일시에 지방으로 하방(下放)되면서 갑자기 도시가 텅 빈 느낌이었다. 전쟁에 대비해 소개한 것이지만 이번 기회에 성분이 나쁜 자들을 평양에서 추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학생들은 교도대로 소집됐고 각 가정은 비상 배낭을 준비했다. 등화관제로 거리는 어둠으로 변했고 생필품 확보를 위해서 배급도 당일제가 됐다. 주민들은 전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장 미군이 쳐들어올 것 같은 공포의 그림자가 평양의 밤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운데 20일 아침이 밝았다. 그 사이에 미국은 미드웨이를 비롯해서 항공모함 3척을 한국 해역으로 급파했고, 오키나와의 F4 팬텀 대대와 괌의 B52 전략 폭격기, 그리고 본토의 F111전폭기 대대를 한국으로 이동시켰다. 물론 푸에블로호 납치 때도 그랬고 EC121 격추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미국이 꼬리를 내릴 것이라 장담할 순 없었다. 최근 들어 미국은 강경 분위기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전쟁이 벌이지는 것이 아닐까. 긴장이 고조되면서 유신을 반대하는 남한의 시위도, 세습을 반대하는 북한 내부의 움직임도 뒷전으로 물러나게 됐다.


美 공병-韓 특전사 연합작전 

820일 오후 1145. 서울 용산의 주한미군 상황실.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 대장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싱글로브 소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합참에서 작전을 승인했네. 


합참의장 서리 할러웨이 제독의 작전승인은 리스닝 사일런스(Listening Silence) 시스템에 의해 주한미군사령부의 상급부대인 태평양사령부의 게일러 제독과 예하부대인 한미 1군단 쿠시먼 중장, 미 육군 2사단 브래드 소장에게도 동시에 전달됐다.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라고 명명된 작전은 병력을 투입해서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것. 그나마도 사전에 군사정전위를 통해 통보하는 형식으로, 여태껏 검토된 보복조치 중에서 가장 강도가 약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루나무를 폭격하는 것도 고려됐지만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지점을 폭격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공병을 투입해 절단키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또 한번 뜨뜻미지근하게 대응키로 한 것이다.


구체적인 작전 계획은 주한미군사령부의 몫. 스틸웰 사령관은 현장 지휘를 판문점 경비대대장 비에라 중령에게 맡겼다. 그런데 폴 번연 작전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어떻게 대응하는 게 효율적인지를 똑똑히 보여줬다.

 

821일 오전 6. 문산 부근 미군기지 캠프 스탠튼. 20여 대의 UH1 헬리콥터가 먼지를 일으키며 차례로 연병장에 내려앉자 대기하던 미 2사단 9연대 브라보·찰리 중대원들이 신속히 탑승했다. 알파 중대원들은 이미 트럭을 타고 공동경비구역으로 출발했다. 이들 9연대 병력은 폴 번연 작전을 수행하는 공병대가 북한군의 기습을 당할 경우 즉각 투입돼 공병과 경비병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탑승에 앞서 중대장이 비감한 얼굴로 중대원들에게 “인식표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번과 이름이 적힌 인식표는 전사한 병사의 신원을 확인하는 표지다. 인식표를 확인하라는 지시는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함을 의미한다. 헬기에 탑승한 미군들은 비감한 심정으로 멀어져가는 기지를 내려다봤다. 사단장은 이미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주한미군 사령부는 21일을 기해서 데프콘 3를 다시 데프콘 2로 격상했다.


같은 시각 캠프 키티호크. 공동경비구역 경비대의 후방기지인 캠프 키티호크에 110여 명의 무장 군인이 잔뜩 굳은 얼굴로 집결해 있었다. 미루나무 절단 작업을 담당할 제2공병대대 브라보 중대 소속 공병 16명과 보병 2사단 9연대 알파 중대에서 차출된 경비병 30. 그리고 그들을 특별 경비하기로 한 한국군 특전사 대원 64명이었다.


당시는 평시 작전권도 주한미군사령관이 가진 데다 피살자도 미군 장교들이어서 한국군은 폴 번연 작전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런데 스틸웰 장군이 폴 번연 작전을 수행하는 미군 공병대의 경비를 한국군에게 맡기면서 한국군이 드디어 상황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


한국군 지휘부는 미군을 지키기 위해 현장에 투입되는 64인의 결사대를 특전사에서 선발했다. 그런데 미군은 특전사가 휴대하는 무기를 몽둥이로 한정했다. 한국군은 태권도를 잘하니까 상황이 발생하면 육탄으로 저지하라는 말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적지로 들어가는 부하들에게 곡괭이 자루만 들려보내라는 게 말이 되는가. 한국군 지휘부는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스틸웰 장군은 요지부동이었다. 사소한 충돌도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령이라도 부하들을 맨몸으로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 한국군 지휘부는 미군 몰래 무장키로 했다. 64인의 결사대는 권총, 그리고 분해해서 감춘 M16 소총을 지니고 출발했다. 선제공격은 하지 않지만 안전이 위협을 받으면 교전도 불사할 각오였다. 지휘부는 그 판단을 현장 지휘관 김종헌 소령에게 일임했다.  


64인 결사대의 비밀 임무 

점검을 마친 비에라 중령이 출발명령을 내리자 트럭 23대가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 속으로 나아갔다. 미군은 한국군들의 배낭 속에 분해된 M16 소총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오전 6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트럭은 3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북한 측 초소는 모두 비어 있었다. 공병들은 즉시 절단 작업에 들어갔고 특전사 대원들은 사주경계에 나섰다. 신속하게 절단을 마치고 북한군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정말 공병 대대장의 호언대로 미루나무를 5분 만에 절단할 수 있을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는 스틸웰 대장의 질문에 공병 대대장은 “단 5분”이라고 자신 있게 보고했다. 공병들은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엔진톱을 서둘러 가동시키며 절단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마철에 물기를 잔뜩 머금은 미루나무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 톱날이 자꾸만 부러지면서 공병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5분은커녕 30분이 걸려도 일을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미군들의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북한군이 나타났습니다! 


전방을 경계하던 특전사 대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현장 지휘관에게 보고했다. 어림잡아 200명은 될 것 같은 북한군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쪽에 집결하고 있었다. 저들이 다리를 건너오면 몽둥이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군이 휴대한 권총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12월 호

⑧서울 → 필리핀 → 가봉 → 미얀마 15년 이어진 질긴 암살극의 끝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 1968 1·21사태로 시작된 북한의 남한 대통령 암살 기도는 무려 15년간 거듭되다 1983 10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로 막을 내린다.
  •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과정에 대통령 영부인과 여러 수행원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 국내와 필리핀, 가봉, 미얀마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국가원수의 목숨을 노린 무모한 도발의 실체를 추적했다.

/1983 109일 아웅산 테러 당시 묘소에 도열한 각료들. 진혼 나팔이 울리면서 천장에 장치된 폭탄이 폭발하기 몇 분 전의 모습이다. 

 

1981 5. 오스트리아 빈.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던 제임스 최와 찰스 스티븐 야노버는 호텔 방문이 열리자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곧 경계를 풀었다. 들어온 사람은 둘이서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두 달 만이군요. 잘 지내셨소? 

방으로 들어선 사람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빈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직함을 가진 그는 ‘35호실’로 불리는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으로 제임스 최와는 구면이었다.  

“평양에서 재가가 떨어졌소. 

공작원이 초조하게 기다리던 두 사람을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북한 공작원과 전문 킬러 야노버는 지금 반한(反韓)활동을 벌이고 있는 캐나다 교포 제임스 최의 중재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을 모의 중이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남조선 대통령은 7월에 필리핀을 방문할 예정이오.공작원이 가능하겠느냐는 얼굴로 야노버를 쳐다봤다.  

7월이면 시일이 촉박한데…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오.

야노버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니 자세한 정보를 주시오. 

“그야 물론이오. 지금 알려진 사실은 7월 중에 필리핀을 방문할 것이란 사실뿐이오.

“착수금은…. 

제임스 최가 중재하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음 달에 마카오에서 한 번 더 만나기로 합시다. 그때 자세한 정보와 착수금을 전달하겠소.

공작원은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국제 킬러와 손잡다 

민주정에 조종을 울린 유신체제는 1979 10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그 끝을 맞았다. 그렇다고 강권통치가 종식된 것은 아니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실세로 부상하면서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80 827일에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국민에게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12·12와 ‘광주’라는 ‘원죄’를 안고 있었다. 자연히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해외 교민들은 격렬하게 반정권 활동을 벌였다.

안에서 잃은 인기를 밖에서 만회할 셈으로 전두환 대통령은 다른 대통령보다 부지런히 해외 순방에 나섰다. 미국은 현실을 인정하고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1981 3월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번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선출됐지만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남과 북은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이후로 이렇다 할 큰 충돌 없이 지내고 있었다. 전쟁에 의한 통일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남은 군사정권 유지가, 북은 후계자를 굳히는 게 더 시급한 문제였다.

 

그렇게 남과 북의 대결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던 동안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동구권이 급속하게 몰락하면서 냉전체제로 대표되던 국제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소련과 중국은 개혁과 개방의 대세를 받아들이며 새로운 체제에 순응했지만 북한은 사정이 같을 수 없었다. 북한에 개방은 곧 체제 붕괴를 의미했다. 초조해진 북과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남. 먹구름이 다시 한반도를 향해 몰려왔다. 

인기가 없는 한국 대통령을 제거하는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북한은 그렇게 판단하고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981년 전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반한 교포들이 암살을 모의한 적이 있다. 모의 단계에 그친 일이지만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북한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장소는 역시 외국이 좋을 것이다. 전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외국을 순방하고 있었다. 북한은 공작원을 직접 파견하는 대신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키로 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그쪽이 위험부담이 덜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캐나다의 반한 인사 제임스 최를 통해 국제 킬러 야노버와 손을 잡았다. 제임스 최와 야노버는 무기 밀거래를 통해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냄새’ 맡은 캐나다 경찰 

휘황찬란한 빛이 도박과 환락의 도시 마카오의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빈에서 헤어진 세 사람은 한 달 후 이곳 마카오에서 재회했다. 이번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나하고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요. 

야노버가 동료 알렉산더 마이클 제롤을 소개했다. 북한 공작원은 살피듯 제롤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소란스러운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된 호텔 방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조선 대통령의 필리핀 방문 일정이 76일에서 8일까지로 확정됐소.

북한 공작원이 입을 열었고 제임스 최가 즉시 통역했다. 야노버와 제롤 두 사람의 얼굴이 흐려졌다. 중순도 아니고 초순이면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미리 현장을 살피고 예행연습도 해야 하는데 시일이 너무 촉박하오.

“알고 있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그리 알고 준비를 철저히 하시오.

북한 공작원이 딱 잘라 말하자 야노버와 제롤은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보에 의하면 양국 정상은 방문 둘째 날에 푸에르토 아줄이란 곳에서 골프 회동을 할 예정이오.

공작원의 말이 이어졌다. 푸에르토 아줄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70㎞ 떨어진 곳에 있는 고급 휴양지로 해안을 따라 조성된 골프 코스는 경관이 빼어나 명문 코스로 통했다.

캐나다 연방경찰수사국(RCMP) 국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찰스 스티븐 야노버 

극우 백인폭력집단인 쿠 클랙스 클랜(KKK)에도 관계한 백인 우월자로 전문 살인청부업자. 카리브의 도미니카공화국 전복 음모에도 가담했던 적이 있음. 최근에는 국제 무기 거래에도 관여하고 있음. 


알렉산더 마이클 제롤 

야노버의 오랜 동료로 그와 함께 테러에 여러 차례 가담한 적이 있음.


제임스 최  

부친은 한국군 예비역 장성으로 캐나다에 체류 중인 반한 인사. 제임스 최는 합법적인 사업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여러 종류의 불법 거래에 가담하고 있음. 야노버와는 석탄 거래를 이유로 토론토에서 여러 차례 회동한 적이 있음. 지난달에 그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했음. 이번 달에는 야노버 외에 제롤까지 대동하고 마카오를 다녀왔음.

 

공작조가 설치하는 폭약은 두 종류. 하나는 베트남전쟁에서 그 실용성이 입증된 클레모어이고 또 하나는 소이탄이다. 지향성 지뢰로 구분되는 클레모어는 화약의 힘으로 700여 개의 쇠구슬을 날려보내는 무서운 무기. 클레모어가 폭발하면 유효살상거리 50m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집이 된다. 그리고 소이탄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고열을 일으켜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북한 공작조는 증거를 깨끗이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야 해. 

진 소좌가 클레모어를 설치하는 신기철 대위에게 주의를 줬다. 클레모어는 지향성 지뢰여서 앞에 있으면 벌집이 되지만 뒤에 있는 사람은 별다른 해를 입지 않는다. 그러니 남조선 대통령이 설 자리를 정확하게 조준해야 한다. 신 대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익숙한 솜씨로 설치를 끝냈다. 이제 수신기를 달 차례다. 클레모어는 통상 유선으로 폭발시키지만 북한 공작조는 원격조종장치를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선은 발각될 염려가 작은 반면 매복 위치와 수신기 사이에 장애물이 놓이면 안 된다는 단점이 있다.

주변을 면밀히 살핀 신 대위가 손을 들었다. 마땅한 장소를 찾았다는 표시다. 이제 여기서 꾸물댈 이유가 없다. 경비병이 순찰을 돌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망을 보고 있는 강민철 대위가 아무도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세 사람의 공작조는 얼른 묘소를 빠져나왔다.


폭발…수행원 17명 사망 

/아웅산 사건의 총책임자로 알려진 장성우 당시 소장. 최근 북한의 최고실세로 자리매김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친형으로 지난해 8월 사망했다.

 

1983 109일 오전 10.  

인야레이크 호텔을 출발한 수행원 일행은 아웅산 묘지에 도착하자 서석준 부총리를 필두로 차례로 도열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영접을 맡은 미얀마 외상이 도착하지 않아 영빈관에서 출발이 늦어지고 있었다. 외국 국가원수 영접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수행원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지만 미얀마 외상의 지각은 결과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셈이 됐다.  

시간의 흐름이 멈춰선 것과 같은 풍경, 그리고 왠지 나사가 빠진 것같이 허술한 일처리. 그러나 미얀마는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였다. 한국이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못했을 때 이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으며 축구는 아시아를 호령하고 있었다.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의전담당관의 통보에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던 정부 요인들이 다시 도열하기 시작했고 기자들은 취재준비를 서둘렀다. 의전서열대로 서석준 부총리가 맨 오른쪽에 섰고 이어서 이범석 외무부 장관과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국무총리비서실장, 그리고 이기백 합참의장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만 도착하면 된다.  

“저기 대사가 오는군요. 

대통령이 당도하기 전에 대사가 와야 할 텐데 하며 초조해하던 의전담당관이 반색을 했다. 과연 태극기를 매단 대사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묘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이계철 대사는 얼른 대열로 끼어들었다. 이 대사의 위치는 의전서열에 따라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과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사이. 공교롭게도 대열의 딱 한가운데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최상급자로 오인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시곗바늘은 벌써 10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조선 대통령의 도착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몸을 숨기고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공작조는 자꾸 초조해졌다.

“차가 들어옵니다. 

강민철 대위가 반색을 했다. 그의 말대로 태극기를 단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묘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예정보다 30분 정도 늦었지만 아무튼 이제라도 도착했으니 다행이었다. 진 소좌는 시한폭탄 대신 원격조종장치를 사용하기를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한폭탄을 사용했다면 벌써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웅산 사건을 일으킨 북한 공작원들에 대한 특별재판(1983 11). 왼쪽에서 두 번째가 진모 소좌이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강민철 대위다.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공판정 구내와 외곽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고 진 소좌 옆에는 9, 강 대위 옆에는 8명의 교도관이 배치됐다.

 

 승용차에서 내린 남조선 대통령이 대열의 복판에 서자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진혼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다. 진 소좌는 신기철 대위에게 폭발시킬 것을 명령했다.

진혼 나팔소리가 울리자 도열한 사람들의 얼굴에 ‘뭐야, 이제 와서 예행연습을 하나…’ 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매끄럽지 못한 의전절차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미얀마의 서툰 일처리로 전두환 대통령은 또 한 차례 위기를 넘기게 됐다.

그때 클레모어가 폭발하면서 묘소가 일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때는 109일 오전 1028. 그 시각에 전두환 대통령을 태운 승용차는 아웅산 묘지에서 1.5㎞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날아갔고 일대는 전쟁터로 변했다. 시신이 사방에 널브러졌고 부상자들은 피를 흘리며 구조를 요청했다.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해서 수행원 17명이 사망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전 대통령은 순방을 전면 취소하고 급거 귀국했다.


15년 암살 기도 종지부 

미얀마는 경호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후속조치는 그런대로 신속했다. 즉각 범인 수색에 나섰고, 탈출하려던 북한 공작조를 모두 검거했다. 소이탄이 불발하면서 현장에 남은 증거가 공작조 체포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검거 과정에서 신기철 대위는 사살됐고, 진 소좌와 강민철 대위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됐다. 진 소좌는 다음 해에 사형이 집행됐지만, 신문과정에서 순순히 자백을 한 강민철 대위는 종신형으로 감일등됐고 미얀마 감옥에서 25년을 복역하다 2008 5월에 병사했다.

1968 1·21사태로부터 시작된 북한의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기도는 1983년의 아웅산 묘지 폭사사건으로 끝을 맺는다. 이후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치열하던 외교전은 대한민국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은 군부독재를 끝냈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국제 정세에도 큰 변화가 있어 소련이 해체되면서 동서냉전과 이념의 대립은 역사의 유물이 됐다. 산업화를 달성한 한국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화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고 그러는 동안 남과 북의 경제력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남과 북의 오랜 대립은 자유와 개방을 선택한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국장은 아무래도 캐나다 합동수사본부(CFSEU)에 통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캐나다 연방경찰수사국은 야노버와 최가 자주 회동하는 이유가 무기 불법 거래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며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의 행적으로 보니 아무래도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무기 거래라면 굳이 빈이나 마카오까지 가지 않아도 됐다. 제롤이 합류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국제 테러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합동수사본부에 통보하고 공조수사를 펼치는 게 좋을 것이다. 합동수사본부에 통보하면 미국 FBI CIA도 수사에 나설 것이다.  

“야노버를 철저하게 감시해. 
수화기를 든 국장은 담당 수사관에게 야노버를 밀착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까다로운 타깃 

1981 71. 푸에르토 아줄 앞바다. 보트 한 척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가롭게 떠 있었다.

“타깃은 제대로 들어오는데 도주로가 마땅치 않아. 

지형지물을 살피던 제롤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코스로 유명한 푸에르토 아줄의 골프 클럽은 숲으로 이어지는 아웃코스와 바다로 이어지는 인코스로 나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마땅한 저격 장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주일 전 마닐라에 도착한 야노버와 제롤은 푸에르토 아줄 휴양지의 호텔에 숙소를 잡고 며칠째 코스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야노버가 코레히돌 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표가 마피아 두목이라면 이쯤에서 저격하고 보트를 타고 전속으로 코레히돌 섬으로 도주하면 그런대로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번 타깃은 일국의 원수다. 마피아 두목과는 경호의 차원이 다르다.

그럼 아웃코스에서 노릴까. 그 쪽도 문제가 있다. 제대로 조준하려면 300m까지 접근해야 하는데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거기까지 접근할 자신이 없었다. 설사 요행히 접근했다 해도 무성한 숲과 수행인들 때문에 타깃이 조준선 안에 들어오는 시간이 너무 짧아 저격할 자신이 없었다.  

“폭탄을 쓰면 어떨까? 

제롤의 말에 야노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한폭탄은 타깃을 정확하게 노려야 하는 요인 암살에는 무용지물이다. 원격조종 폭탄을 작동시키려면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야 하는데, 이 경우 저격보다 탈출이 더 힘들다. 폭탄 탐지견을 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환영객으로 가장하고 가까이 접근해 권총으로 저격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념에 따른 저격이라면 모를까, 돈을 받고 암살하는 살인청부업자에게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1982 8월 아프리카 순방길에 오르는 전두환 대통령 부부. 

 

“일단 호텔로 돌아가자.

야노버가 보트를 돌리라고 했다. 막상 현장을 둘러보고 일을 시작하려니 두 사람은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국제 킬러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여태 처리해본 타깃은 기껏해야 폭력단 두목이나 극렬단체 지도자들이었다. 경호가 삼엄한 국가원수는 사정이 같을 수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제롤과 야노버는 입맛이 썼다. 아무래도 일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제임스 최를 통해서 착수금으로 이미 60만달러를 받은 터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는데 캐나다에 있는 한 패로부터 전화가 왔다. 캐나다 경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FBI도 개입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벌써 꼬리를 잡혔단 말인가. 야노버와 제롤의 안색이 일시에 창백해졌다. FBI가 개입했다면 추적의 손길을 피하기 어렵다. 어쩌면 필리핀 당국에도 이미 통보됐는지 모른다. 당장이라도 필리핀 경찰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야노버와 제롤은 서둘러 짐을 꾸렸다

 

“이번엔 우리 손으로 직접…” 

1982 2월 말. 평양 노동당 중앙청사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실. 대남사업을 관장하는 노동당 작전부와 통일전선부, 그리고 대외연락부는 평양시 대성구역 합장동에 신축한 3호 청사로 옮겨갔지만, 대외공작을 전담하는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는 조선노동당 중앙청사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3 5호실을 쓰는 관계로 통상 35호실로 호칭되는 대외정보조사부에 인민군 정찰국 소속의 젊은 군관 세 사람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으로부터 긴급호출을 받고 달려온 길이다.  

“작년에 우리는 서양인에게 남조선 대통령 암살을 맡겼다가 실패했소.

부부장이 세 사람을 차례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야노버와 제롤에게 맡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전에 정보가 샜는지 양국 정상은 급히 골프 회동을 취소했고, 야노버와 제롤은 1982 224일 캐나다 경찰에 체포됐다. 북한은 돈만 날린 꼴이 됐다.

“남조선 대통령이 8월에 아프리카를 순방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소. 이번에는 우리가 직접 손을 쓰겠소. 

국제 킬러를 고용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지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북한은 직접 공작조를 파견하기로 방침을 수정하고 정찰국에서 최정예 공작조 3인을 선발했다.

“잘 알겠습니다. 기필코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조장이 비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동건애국호를 보내 동무들을 지원하겠소. 구체적인 계획은 그쪽 일정이 알려지는 대로 수립할 테니 그리 알고 준비하시오. 

부부장이 공작조 3인과 차례로 굳은 악수를 나눴다. 동건애국호는 나중에 아웅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얀마 수역에 머물고 있던 바로 그 공작선이다. 대외정보조사부는 조총련이 1976년에 기증한 6000t급 화물선 동건애국호를 해외 공작선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해외 순방 계획이 확정됐다. 1982 817일 동아프리카의 케냐를 시작으로 19일 나이지리아를 거쳐 22일 가봉을 순방하고 24일 세네갈에 들른 다음에 대서양의 어업전진 기지 라스팔마스 섬에 기착했다가 28일에 캐나다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열대우림 속 北 공작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그치질 않는 가운데서도 한국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국내에선 혼란이 이어졌지만 해외에서의 평가는 조금씩 회복됐고, 마침내 1981 9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드높이게 됐다.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가 된 한국을 보는 세계의 눈이 달라졌다. 전 대통령의 1982년 아프리카 순방은 대한민국 외교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남한이 경제력에서 북한을 추월했다고 하지만 군사력은 여전히 북한이 우세했고 외교에서도 앞서가고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 대륙은 남과 북 외교전쟁의 최전선이었다. 국력은 보잘것없지만 유엔에서 당당하게 한 표씩을 행사하는 아프리카의 국가 원수들을 남과 북은 경쟁적으로 초청하고 극진히 대접하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남한은 가봉에 백화점을 지어줬고 북한은 앙골라와 콩고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사려했다.

순방 일정이 확정되자 청와대와 관계 부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챙겨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닌데 그중에서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대통령 경호다. 국가원수의 해외순방시 경호는 공식 방문이면 초청한 나라에서, 비공식 방문이면 대통령 경호실에서 담당하는 게 관례다. 아프리카 순방은 공식 방문이어서 경호는 해당 국가의 소관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경호실이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남북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은 수차 한국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다. 1970 6월에는 대통령의 국립묘지 참배를 노려 현충문에 폭발물을 설치하려다 실패했고, 1971 7월과 1974 4월에도 청와대 폭파를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바 있다. 그리고 1974 815일에는 육영수 여사가 암살범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고, 전두환 대통령도 미국 뉴욕과 필리핀에서 각각 한 차례씩 암살 미수를 겪은 바 있다.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 장세동이 경호실장에 임명되면서 대통령 경호실은 더욱 막강해졌고, ()테러를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도 창설됐다. 외국에선 국가원수 암살 시도가 정신 이상자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벌이는 시위성 행사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한국은 경우가 달랐다. 대통령 경호는 군 작전의 일환이었다.  

철통같은 경호 때문에 이런저런 불만이 나오긴 했어도 대통령 암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해외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해외 순방의 경우는 대한민국 경호실이 상황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아무리 호전적인 북한이라 해도 해외에서 테러를 감행하는 경솔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의 경호 시스템이 선진국에 비해서 많이 뒤떨어진다 해도 시위성 수준의 테러라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경호실 관계자들은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비행기에 올랐다. 그 시각 북한 공작원이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을 내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제3의 루트’ 

도요타 랜드크루저 한 대가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콩고의 열대림을 헤치며 질주하고 있었다. 탑승 인원은 모두 5. 북한에서 급파한 공작조 세 사람과 현지에서 채용한 안내원 2명이 그들이었다. 세 사람의 공작조는 외국인 행세를 하며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했다. 콩고에 입국할 때도 일본과 니카라과 여권을 사용했다.  

콩고 브라자빌의 북한대사관에서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과 재회한 3인의 공작조는 그동안 현지 사정을 면밀히 살피고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아프리카는 넓다. 그리고 국가원수의 공식 방문엔 삼엄한 경호가 따라붙는다. 공작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나중에 문제가 될 것과 관련해서 공작원의 탈출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결과 공작조는 테러 장소로 가봉을 택했다. 해상을 통한 탈출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현지에 접근하느냐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동양인은 금세 눈에 띈다. 더구나 남한 대통령이 순방하는 나라에서는 동양인을 더 철저하게 검색할 것이다. 그러니 공항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공작조는 육로를 이용해서 가봉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탈출은 때맞춰 가봉에 입항할 동건애국호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육로로 가봉에 들어가는 방법으로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브라자빌에서 음빈다까지 기차를 타고 간 다음에 그곳에서 가봉의 프랑스빌까지 산악 택시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은 프랑스빌에서 650㎞ 떨어졌는데 프랑스빌에서 트랜스가봉 철도를 타면 1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다. 이 루트를 택하면 전체 일정은 5일 정도 소요된다. 제일 쉬운 이동이지만 단점은 트랜스가봉 철도의 검문이 까다로운 편이라는 점. 둘째 방법은 브라자빌에서 기차를 타고 루보모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트럭을 타고 두살라를 거쳐 느덴데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리브르빌행 기차를 타는 방법이다. 검문은 비교적 느슨한 편이지만 한시가 아쉬운 마당에 일정이 하루 더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외교전 승리의 상징국 가봉 

마지막 루트는 직접 지프를 몰고 프랑스빌로 가서 인접국 적도기니로 우회한 다음에 바다를 통해 리브르빌로 침투하는 것이다. 지프를 몰고 무려 4000㎞의 험로를 달려야 하는 위험한 루트지만, 검문을 받을 염려가 없는데다 오웬도 항에서 동건애국호를 만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공작조는 마지막 루트를 택한 것이다. 테러 예정일은 822. 방법은 원격조종장치로 폭탄을 터뜨리는 것. 그리고 신속히 오웬도로 이동해서 동건애국호를 타고 공해상으로 빠져나가면 임무 끝이다.  


“속도를 더 높여!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조장은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속도를 높일 것을 요구했다. 조금만 더 가면 가봉 남동부 오토코우 주의 주도이자 가봉 제3의 도시인 프랑스빌이 나온다. 국경도시 프랑스빌에 도착하면 브라자빌의 북한대사관에 최종 연락을 해야 한다. 3인의 공작조는 덜컹거리는 지프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험로가 계속됐지만 사실 아프리카 열대림은 그들에게 그리 낯선 곳이 아니었다. 북한은 자이레(콩고민주공화국)의 까마뉼라 사단과 짐바브웨의 폭풍여단에 북한 정찰국 소속의 교관들을 파견해서 군사훈련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3인 공작조는 그들 교관 중 엄선된 요원들로 구성됐다.  

조금만 더 가면 프랑스빌에 당도한다. 시계를 들여다보던 조장은 갑자기 중심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앗!

비명과 함께 지프는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1982 817. 케냐의 조모케냐타 공항. 전두환 대통령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하면서 한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이 시작됐다. 북한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반미세력이 강한 아프리카에서 외교 우위를 점했지만 이제 전세가 역전될 처지가 됐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한국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고,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한국 대통령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전 대통령의 케냐 방문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방문 일정을 마친 전 대통령은 다음 순방국인 나이지리아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동안 북한은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선전했는데, 한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을 통해 한국은 미국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해서 훌륭하게 경제자립을 이룩해낸 모범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이지리아를 이륙한 비행기는 다음 방문국인 가봉의 리브르빌의 레옹음바 국제공항을 향해 기수를 높였다.  

가봉 강 북쪽 어귀에 위치한 오웬도 항은 광석을 비롯한 가봉 천연자원 수출의 전진기지이자 고급 호텔과 호화 요트가 즐비한 고급 휴양지다. 호화 요트의 주인은 대부분 수출입업에 종사하는 프랑스 사람들인데, 1978년에 가봉 횡단 철도가 개통되면서 리브르빌과 코코비치, 메두노, 캉고, 그리고 내륙의 은졸레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며 오웬도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오웬도 항에 동건애국호가 조용히 입항했다. 무역선을 가장했으나 테러를 감행한 공작조를 태우고 가봉을 빠져나오는 것이 주임무다. 남한 대통령이 방문하는 때에 리브르빌에서 10㎞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웬도에 북한 배가 입항하는 것은 충분히 주의를 끌 만했지만, 가봉 당국은 선원은 상륙하지 않고 물자만 하역하고 출항하겠다는 동건애국호의 입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립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1960년에 프랑스에서 독립한 가봉은 아프리카 중서부 해안에 위치한 나라로 석유, 망간, 우라늄, 원목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외국인 투자가 활발해서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잘사는 편에 속하는 나라다. 수도는 인구 25만명의 리브르빌. 적도기니와 카메룬, 콩고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한국과는 1962, 북한과는 1974년 수교했다.

가봉은 아프리카 외교전의 최전선이었다. 남과 북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제3국가들로 구성된 AA그룹을 주도하고 있는 가봉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은 가봉공화국 봉고 대통령의 방한을 기념해서 우표와 담배도 발매했고, 새로 개발된 승합차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봉고’로 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리브르빌에 15층짜리 백화점도 지어줬다. 당연히 가봉에서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시설을 갖춘 빌딩이었다. 공을 들인 결과 가봉은 유엔에서 한국을 지지했고 한국은 외교전의 승자가 됐다.

아프리카 순방에서 외교전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가봉을 빠뜨릴 수는 없다. 가봉에 당도한 전두환 대통령은 봉고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그런데 다가오고 있는 위협을 예고라도 한 것일까. 가봉 의장대가 애국가 대신에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공작조, 국경을 넘다 

검문소에 당도한 공작조 3인은 바짝 긴장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면했지만 지프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도보로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게 됐는데 검문이 예상보다 삼엄했다. 가방을 열면 무기와 폭탄, 그리고 원격기폭장치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달리 방법이 없다. 조장은 태연한 척 심사대로 향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시오. 

조장의 입에서 능숙한 일본말이 나왔다. 공작조는 일본 상사원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있었다.

“우라늄. 

조장이 우라늄 사업으로 입국하는 것임을 밝히면서 여권을 들여다보는 경비병에게 슬쩍 달러를 찔러줬다. 경비병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얼른 통과 스탬프를 찍어줬다. 공작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검문소를 빠져나왔다.  

“무사히 국경을 통과해서 한시름 덜었지만 이제 어떻게 합니까? 겨우 50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조원이 걱정을 했다. 지프가 구르는 바람에 예정대로 계획을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기차를 타면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조원이 기차를 탈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조장은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 리브르빌은 경계가 엄중할 것이다. 기차로 이동하는 동안 수차 검문을 거쳐야 할 텐데 그때마다 무사히 피해간다는 보장이 없었다.  

“예정대로 적도기니를 통해 들어간다. 공항으로 가자. 

잠시 생각하던 조장이 손을 들고 택시를 불렀다. 공작조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제발 비행기 시간이 맞아야 할 텐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적도기니의 음비니로 향하는 비행기 편이 있었다. 

“음비니에서 자동차로 코코비치로 이동한 다음에 코코비치에서 피로그(모터가 달린 통나무배)를 빌려서 무니 강을 건넌다. 가봉의 코고에 상륙하면 시간 안에 리브르빌로 갈 수 있다.

조장이 수정된 계획을 두 조원에게 알렸다. 과연 비행기가 제 시각에 이륙할지, 자동차와 배를 제때 빌릴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지만 예정대로만 움직이면 예정된 시간에는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루트가 복잡해지면서 신분이 노출될 염려가 커진 점이다.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신분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다.

“철수한다” 

공작조는 일단 프랑스빌 시내로 돌아가기로 했다. 비행기가 출발하려면 아직 시간이 있는 데다 변경한 계획을 상부로부터 승인받아야 했다. 프랑스빌로 돌아와 호텔을 잡은 조장은 얼른 브라지빌의 주()콩고 북한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부부장은 자기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며 회답을 줄 테니 호텔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조장이 생각해도 부부장이 단독으로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여긴 조용하군. 짐바브웨는 온통 난민들로 들끓었는데. 

조원이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지난해 군사고문단으로 짐바브웨에서 폭풍여단을 이끌고 군사작전을 벌인 바 있다.  

“동건애국호는 예정대로 오웬도 항에 들어왔겠지요?

 

다른 조원이 물으나마나한 것을 물었다. 불안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평양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까. 설사 암살에 성공하고 무사히 동건애국호로 도피하더라도 국경검문소와 공항을 거치면서 드러난 행적으로 인해 꼬리가 잡힐 위험이 큰 상황이다. 북한의 소행임이 드러나면 대가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가봉은 물론 아프리카의 47개 국가와 전부 단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조장은 겁이 덜컥 났다. 새삼 지프가 뒤집힌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최종 결정은 어디에서 내려올까. 김일성 주석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갈까, 아니면 김정일 조직지도부장이 결정을 내릴까. 조장은, 김일성 주석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면 중단 지시가 내려올 것이고 김정일 조직지도부장이 최종 결정을 한다면 결행을 불사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조장은 숨을 크게 내쉬고서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두 조원이 긴장해서 조장을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지시사항은 간단명료했다. 조장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철수한다. 

조장의 입에서 짧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마지막 기회는 미얀마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군부 철권통치에 의한 인권탄압은 계속되고 있었다.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번영이 뒤엉키면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국내와 해외에서 정반대로 나타났다.  

전두환 대통령은 국내의 불만을 외교의 성공으로 만회할 생각으로 계속해서 해외 순방에 나섰다. 1982년에 아프리카 순방을 성공리에 마친 데 이어 1983년에는 서남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오세아니아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기로 했다.

첫 순방국은 미얀마.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지만 비동맹국가회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순방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미얀마를 시작으로 스리랑카와 인도, 호주와 뉴질랜드를 차례로 돌 예정이었다. 한국은 5년 후 올림픽을 치른다. 그런데 아직 한국의 안보와 내정을 우려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다. 적극적인 외교와 홍보를 펼칠 필요가 있었다. 

평양 인민무력부 정찰국. 장성우 소장은 세 사람의 공작조와 차례로 악수를 나눈 뒤 앉으라고 했다.  
“남조선 대통령이 다시 해외 순방에 나선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해선 안 된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실패는 이동경로가 너무 길어 돌발상황에 대처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기 않을 겁니다.

공작조장 진모 소좌가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찰국에는 공작조가 여럿 있는데 그들끼리 묘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만하지 마라! 이번에도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실망시켜 드려서는 안 되니까.

장성우 소장이 조장 진 소좌를 비롯해서 조원 신기철 대위와 강민철 대위에게 차례로 눈길을 줬다. 세 사람의 공작조는 정찰국에서 추리고 추린 최정예 공작원이다. 이들은 미얀마를 순방하는 전두환 대통령을 수도 양곤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장성우 소장이 상을 찌푸렸다.

 

/1974 8월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의 공판 광경.

 

“역시 저격이 확실하지 않을까? 폭약보다는 그쪽이 확실할 것 같은데. 

공작조는 폭약을 이용해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장성우 소장은 별로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동안 북한은 여러 차례 한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다. 전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가장 성공에 근접한 것은 문세광의 저격이었다. 비록 대통령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가까이 접근해서 총탄을 날렸던 것이다. 그에 비해 폭약에 의한 암살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설치하기도 쉽지 않지만 제때 터뜨리는 건 더 어렵다. 이미 국립묘지 현충문에서 실패를 맛본 적이 있다.
 
“여러 정황을 검토한 결과 폭약이 제일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한폭탄이 아니고 원격조종으로 폭발시킬 생각입니다. 

진 소좌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공작조도 저격을 고려했다. 하지만 원거리 조준저격을 하려면 주변에 고층건물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미얀마의 양곤 거리에는 마땅한 고층건물이 별로 없었다.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근접 저격을 해야 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근접사격을 하려면 환영객으로 가장해서 저격 대상에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미얀마는 더운 나라라 두툼한 옷을 입을 수가 없기에 권총을 숨기기가 마땅치 않다. 그리고 무사히 빠져나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된다는 것은 철칙이었다.

“소이탄을 함께 터뜨릴 생각입니다. 그리되면 일대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폭파 담당 신기철 대위가 보충 설명을 하고 나섰다.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현지에 당도하거든 지형을 잘 살피고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행여 전파가 차단당하거나 교란당할 우려가 없는지도 면밀히 살피고.

장 소장이 꼼꼼하게 챙겼다. 폭파 공작에는 여러 변수가 따르게 마련이다.
“잘 알겠습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진 소좌가 그를 안심시켰다. 이 무렵 북한은 극도로 초조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동안 추진한 암살 계획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얀마가 마지막 기회가 될 확률이 높았다.


동건애국호가 내려놓은 보트 

1983 106. 양곤 앞바다 시리암 섬. 동건애국호가 항구에 입항했다. 입항 목적은 시리암 섬에 있는 주석 제련소에 물자를 하역하는 것. 북한은 4년 전부터 시리암 섬에서 주석제련소를 가동하고 있었다. 미얀마 통관 당국은 동건애국호가 물자만 내려놓을 것이라 하자 순순히 입항을 허가했다. 남과 북은 40년째 첨예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지만 외국인에게는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의하지 않으면 공식 행사에서 국기가 바뀌어 게양되고 상대의 국가가 연주되는 일도 빚어졌다.  

어둠이 깔리자 동건애국호에서 소리 없이 소형 보트가 내려졌다. 소형 보트에 승선한 5명은 신속하게 배를 저어 시리암 섬으로 다가갔다. 보트에 탄 다섯 사람은 정찰국 소속의 공작조 3인과 승무원 2. 공작조 3인은 시리암 섬에 이르러 제련소 직원으로 위장하고 본토로 잠입할 예정이다.  


“여깁니다.

/1983년 아웅산 묘소 암살 시도 때 북측 공작원을 미얀마에 잠입시킨 것으로 밝혀진 북한 공작선 동건애국호.

 

 기다리고 있던 현지 안내원이 다가왔다. 조장 진 소좌와 두 조원이 날랜 동작으로 섬에 상륙했고 보트는 동건애국호로 돌아갔다. 공작조의 손에는 묵직한 가방이 들려 있었다.  

“어찌 됐소? 

진 소좌가 가방을 챙기며 안내원에게 물었다.

“남조선 대통령의 아웅산 묘지 참배는 9일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습니다. 

진 소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일정이 변경되지 않았다.

“현지 경비는? 

“특별히 강화된 것은 없습니다. 

그것도 다행이었다.  

“작업복은 준비됐소? 

공작조 세 사람은 주석제련소 직원을 가장하고 양곤 시내로 잠입할 예정이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닙니까? 

“시간이 없소. 꾸물대다 경비가 강화되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오. 그런데 가방이 괜찮을까? 

진 소좌는 폭발물과 원격조종장치가 들어 있는 가방이 자꾸 신경 쓰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련소 직원이 외출 나가는 거라면 열어보지 않을 겁니다. 물자를 구입하러 종종 양곤 시내로 나가곤 하니까요. 

안내원이 걸음을 서두르며 대답했다.  


천장에 클레모어, 소이탄 설치 

승용차를 살펴본 경호처장은 만족을 표했다. 티타늄과 강화 플라스틱으로 보강된 차체는 38구경은 물론 45구경 권총으로도 뚫을 수 없다. 혹 타이어가 터지더라도 옆으로 돌거나 전복되지 않도록 특수 서스펜션과 프레임이 추가돼 있었다. 솔직히 미얀마의 경호 능력에 회의적이었는데 둘러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적어도 근접저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원거리 조준저격은 현지 여건상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경호에서 가장 위험한 때는 환영 인파로 인해 차량이 서행하거나 경호대상이 답례하기 위해 몸을 노출할 때인데, 그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퍼레이드는 모두 생략됐다.

1호 차량 앞뒤로 동일한 종류의 차량을 1대씩 더 배치하고 좌우로 경호원을 6명 배치하겠다고 하는군요. 

미얀마 당국의 경호계획서를 살피던 경호부처장도 만족을 표했다. 장기 독재통치를 펼치고 있기 때문인지 경호만큼은 선진국 수준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북한 정찰국 공작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북한의 공작조가 침투한 마당에 한국 대통령 경호실은 직접 경호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지를 못했다.  

어둠이 깔린 아웅산 묘지를 향해 검은 그림자 셋이 쏜살같이 접근했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아웅산의 석관묘가 안치된 건물의 천장에 폭탄을 설치했다.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의 영웅으로 미얀마를 방문하는 외국 원수들은 반드시 그의 묘지를 참배하게 돼 있다. 전두환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어서 미얀마의 최고 실력자인 사회주의계획당 네윈 의장과 회담하기 전에 아웅산 묘지를 참배할 예정이었다. 북한 공작조는 그 시각에 맞춰 폭탄을 터뜨릴 계획이다. 어느 나라나 국립묘지는 교통편도 편리하면서 조용한 곳에 있게 마련이서 아웅산 묘지도 양곤 번화가와 고급 주택가 사이의 구릉 숲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11.01월 호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강릉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 기나긴 작전이었다. 1996 915일 밤 북한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 안인진리 앞바다로 침투하면서 시작된 끈질긴 추격전은 무려 51일 만에야 막을 내렸다. 침투 공작원 25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아군 8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4명이 목숨을 잃는 등 우리 측 피해도 컸다. 더욱이 그 와중에 미국에서는 로버트 김이 체포되고 러시아에선 최덕근 영사가 피살되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1978 1125일 오후 6, 경기도 안양 인근 수리산.  

해가 짧은데다 산속이다 보니 일몰시각까지 30분이나 남았지만 주위를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그렇게 어둠이 깔린 수리산을 특전사 1개 중대가 소리를 죽이며 수색하고 있었다. 특전사는 일반 보병과 편제를 달리하기에 1개 중대라고 해도 병력은 겨우 10명을 상회한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 침투한 북한 공작원 3명이 군의 포위망을 뚫고 어느새 안양까지 북상했다. 더 이상 북상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대간첩작전본부는 정예 특전사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다.  

선두에 선 선임하사가 뭔가 이상을 감지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며 정지 신호를 보냈다.

“뭡니까?
중대장이 자세를 낮추며 다가왔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선임하사가 낙엽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용케도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공작원의 발자국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 않소?
중대장은 신중했다.  

“발자국이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 2~3인이 빠른 속도로 뛰어간 흔적입니다. 이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마당입니다. 등산객일 리 없습니다. 북한 공작원이라고 봐야 합니다.

선임하사는 당장 쫓아가자고 했지만 중대장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상대는 북한의 최정예로 꼽히는 정찰국 소속의 공작원들이다. 섣불리 행동하다 포위망이 뚫리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꾸물대면 꼬리를 놓친다. 상부에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할 것인가. 아니면 중대 독단으로 추격할 것인가. 잠시 고심하던 중대장은 쫓아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담배촌 쪽으로 빠져나가려 할 텐데, 병력을 반으로 나누겠소. 내가 추격할 테니 선임하사는 대원들을 인솔하고 담배촌에 먼저 가서 매복하고 있으시오!

“알겠습니다. 

선임하사는 대원 중에서 6명을 지목하더니 앞장을 섰다. 대원들은 M16 소총을 꼭 쥔 채 선임하사의 뒤를 따랐다.  

출동할 때 잔뜩 긴장했던 특전사 대원들은 막상 교전이 임박하자 평정을 되찾았다. 상대가 정찰국 소속의 공작원이라고 해도 대한민국 특전사가 그들을 제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대원들은 부지런히 선임하사의 뒤를 따랐다.  

“너! ! 저기! 그리고 너! 너는 저기! 

선임하사가 매복지점을 정해주자 대원들은 신속하게 매복에 들어갔다. 선임하사의 예측이 틀리지 않다면 곧 북한 공작원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전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인기척이었다. 대원들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추격하던 중대원들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지원병력에게 위치를 알리기 위해 쏘아 올린 신호탄은 공교롭게도 매복 대원들 앞에 떨어졌고 가뭄으로 바짝 마른 나뭇잎에 불이 옮겨 붙었다.

“불이다! 

갑작스러운 산불로 매복 대원들은 허둥댔고 그 사이에 북한 공작원은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긴급 출동한 특전사는 북한 공작원을 체포 혹은 사살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한 달 넘게 활보하다 월북 

1978 114일 광천읍 학성리 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정찰국 소속 공작원 3인은 인근의 군사시설을 탐지하던 중 나무를 주우러 산에 올라온 부근 주민들에게 발각되자 그들을 살해하고 북상, 도주했다. 군은 즉각 비상경계망을 펼쳤지만 북한 공작원들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들은 홍성과 예산, 그리고 온양과 천안을 거치며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여러 명이 피살됐다.

긴급 출동한 군은 안양 수리산에 이어 부평, 김포에서도 공작원들과 마주쳤지만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여러 차례 포위망을 빠져나간 공작원들은 김포군 운양리 천현부락 뒷산에서 북에서 내려온 안내원을 만나 124일 자정 무렵 감암포에서 강을 건너 무사히 북으로 귀환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지역사단과 서부전선에 주둔한 해병부대, 특전사와 전투경찰, 그리고 예비군까지 총동원돼 한 달 이상 충청도부터 군사분계선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공작원들은 보란 듯 포위망을 벗어나 월북한 것이다.


공작원 3명이 무려 한 달이 넘도록 충청도와 수도권 일대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다 다시 북으로 돌아간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1968년에 청와대와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간첩이 남파됐을 때도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귀환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때는 휴전선에서 가까운 곳이거나 험한 산악지대여서 이번과 경우가 달랐다.  


공작원들을 놓친 데는 군의 예상이 틀린 것도 큰 몫을 했다. 낮에는 비트를 파고 숨어 있다가 밤에 산골짜기를 타고 도주할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북한 공작원들은 환한 대낮에 대로로 이동한 것이다. 도주하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일지에 의해 공작원들은 평택에서 병점까지 기차로 이동했고 관악산 입구 매점에서 빵을 사 먹은 사실이 밝혀졌다. 완전히 허를 찌른 행동이었다.  


탈출경로가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문책이 뒤따랐고, 해당부대는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문책을 당한 부대 중에는 지휘관 이하 부대원 전원이 삭발을 하고 매일 10㎞를 구보하며 복수를 다짐한 곳도 있었다. 

 

wag the dog

산업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군부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도 걷히기 시작했다. 한국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동안 북한은 세습을 마무리지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김정일의 후계자 승계는 속도를 더했다. 김정일은 1990년 최고인민회의 제9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되면서 사실상 세습을 완성했다. 김일성은 노동당 총비서와 국가주석 자리만 차지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국과 세습을 달성한 북한. 그런데 사회주의의 패배는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세기 내내 지속되던 이데올로기 대립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자유진영이 이기고 공산진영이 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해 저절로 붕괴할 것이라 했는데, 그전에 사회주의가 먼저 무너져버린 것이다. 자본주의도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사회주의의 허구성에 비해서는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소련은 해체됐고 공산권 국가들은 개혁과 개방을 서둘렀다. 개혁과 개방만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지만 북한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 식’을 내세우며 폐쇄를 고집했다. 섣불리 문을 열었다가는 체제가 붕괴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동독이 맥없이 서독에 흡수통일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본 터였다.  


이대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체제를 유지할 수는 없을까. 자연히 비대칭전력이 북한 지도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비대칭전력은 불리한 전세를 한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무기다. 그리고 비대칭무기의 대표는 핵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면 동북아의 안보는 근본부터 흔들리게 된다.  


영변의 핵시설에서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면서 한반도에 다시 위기가 몰려왔다. 북한은 원자로임을 들어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미국은 여차하면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할 기세였다. 북한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자 노릇을 하면서 고비를 넘겼고,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됐다. 그러나 큰 기대를 모은 남북 정상회담은 1994 78일 김일성 주석이 급서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서 흐지부지 넘어간 북한 핵은 두고두고 후환을 낳게 된다. 

그 무렵 북한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홍수와 냉해로 곡물 수확이 크게 줄어들면서 주민들은 배를 곯아야 했고, 그동안 석유와 가스를 외상으로 대주던 러시아가 현금 결제를 요구하면서 연료도 모자라게 됐다. 공장은 멈춰 섰고, 전등이 꺼진 거리는 암흑 세상으로 변했다. 춥고 배고픈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인민들의 입에서 ‘그래도 수령님 시절이 좋았는데…’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과연 김정일은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세습이 이뤄져도 김정일이 신격화한 김일성을 대신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내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밖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의미로 ‘왜그 더 도그(wag the dog)’이라고 한다. 1996년으로 넘어오면서 북한의 상황이 그러했다. 정보당국은 긴장해서 북한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350t 상어급, 잠항하다 

/잠수함 침투 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야산에서 군인들이 도피 중인 무장간첩을 수색하고 있다

 

1996 913, 함경남도 낙원군 퇴조 해군기지.
 

승용차가 어둠이 깔린 기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해상처장 김동원 대좌가 김대식 상장을 맞이했다. 출정에 앞서 공작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정찰국장 김대식 상장이 기지를 찾은 것이다. 김대식 상장은 도열한 침투요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를 나와서 한국군의 특전사령관에 해당하는 정찰국장이 된 특이한 경력을 지녔다. 인민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대남 강경파 김격식 대장이 그의 사촌이다.


“출전 채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함장 정영구 중좌가 굳은 얼굴로 결의를 다졌다.  


“목숨을 걸고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수호하겠습니다. 


안내조장 유림 소좌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잠수함 승조원 22명과 차례로 악수를 나눈 김대식 상장은 마지막에 도열한 세 사람의 정찰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들은 소속이 달라 함장은 물론 해상처장도 이들의 정확한 신상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조장은 소좌이고 2명의 조원은 대위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귀관들의 무운을 빌겠다. 


김대식 상장이 정찰조 세 사람의 손을 힘껏 잡았다. 승조원들과 악수할 때와는 달리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기필코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정찰조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승선!

함장 정영구 중좌의 명이 떨어지자 22명의 승조원과 3인의 정찰조는 신속하게 잠수함에 승선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김동원 대좌가 김대식 상장에게 경례를 하고 마지막으로 승선했다. 이미 두 차례나 잠수함 공작을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는 김동원 대좌는 자신이 있었다. 22명의 승조원과 3인의 정찰조를 태운 상어급 잠수함은 서서히 퇴조항을 빠져나갔다. 시계는 1996 914일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전에는 모선에서 분리된 반잠수정을 이용해 해안침투를 시도하던 북한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침투수단을 잠수함으로 바꿨다. 그쪽이 불순한 일기에 안전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해안경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순한 일기가 휠씬 큰 장애였다. 침투에 동원하는 두 종류의 잠수함 중 80t짜리 유고급은 노동당 3호청사 작전부에서 직접 운용하고, 350t짜리 상어급은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에서 지원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승조원과 정찰조는 서로 소속이 달랐다.

 

잠수함은 스노켈(외부 공기를 빨아들여 엔진을 가동, 축전지를 충전하는 시스템)만 수면 위로 올려놓고 남쪽으로 향했다. 북한 영해지만 미국 정찰위성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수중으로 항해하는 중이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스노켈마저 내리고 완전 잠항해야 한다. 한국 해군은 P3C 대잠초계기를 도입하면서 해상감시 능력이 크게 강화됐다. 그렇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동해는 잠수함이 활동하기에 여건이 아주 좋은 바다다. 항구는 수심이 깊어 숨기가 쉽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면서 생기는 수괴는 레이더와 소나를 교란시킨다. 해수의 밀도가 해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탐지능력을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다. 해상침투에서 정말로 두려운 것은 갑자기 악화되는 일기였다.  


파도 뚫고 해변으로 

/무장간첩의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수색대가 춘천 소양댐 선착장에 군 초소를 설치,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 미국 해군 정보국.

정보분석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해를 항해 중인 잠수함 프로비던스에서 미세한 음향을 포착했는데 그게 잠수함인지 여부가 확실치 않았다. 로스앤젤레스급 공격잠수함인 프로비던스의 후미에 달린 예인 소나는 500㎞ 떨어진 적 잠수함의 움직임까지 탐지한다. 북한 잠수함이 은밀히 잠항 중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 속단할 수는 없다. 물 속을 항해하는 잠수함의 움직임을 정확히 탐지하는 것은 최고의 탐지 기술을 가진 미국 해군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물고기떼와 수괴가 종종 잠수함으로 오인되곤 한다. 정확한 수문(水紋)을 탐지하려면 북한 퇴조항 입구에 수중 청음망을 설치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예인 소나에 잡히는 신호음이 조금씩 커졌다. 수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분석관은 얼른 수중파 리스트 프로그램을 작동하고 수신되는 음문과 비교해봤다. 사람마다 음성이 다르듯이 잠수함도 각국의 잠수함마다 내는 소리가 다르다. 미국 해군은 여러 종류의 수중 음문 리스트(Underwater Parameter List)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놓고 있었다.


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확실치는 않지만 상어급으로 추정되는 잠수함이 남쪽으로 항진하는 것 같았다. 분석관은 아무래도 상부에 보고해야겠다고 판단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996 917일 오후 9, 강릉 안인진리 해안. 

갈수록 파도가 거세졌다. 파고가 2m는 될 것 같은데 이 상태라면 헤엄쳐서 잠수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정찰조장 유림 소좌는 잠수함을 해안 가까이 불러들이기로 하고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퇴조 기지를 출항한 잠수함은 15일 오후 8시에 강릉 안인진리 해상에 당도했고, 안내조 2인과 정찰조 3인은 야음을 틈타 해안에 상륙했다. 강릉 일대의 군사시설과 비행장, 발전소의 위치를 촬영하는 것이 이번 침투의 목적이다. 대한민국 해병대가 유사시에 원산에 상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듯이 북한 해군은 강릉을 상륙 예정지로 정하고 있었다.


일단 공해상으로 물러갔던 잠수함은 16일 늦은 오후에 정찰조와 안내조를 태우기 위해 다시 해안으로 접근했지만, 파도가 갑자기 세지는 바람에 접선을 포기하고 먼 바다로 돌아가야 했다. 하루를 기다려 17일 늦은 오후에 재차 접근을 시도했지만 파도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잠수함은 무리지만 해변에 다가가기로 했다.


“육상으로 탈출한다! 

이 무렵 한국군은 해안 경계에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민 편익을 이유로 해안 철조망이 속속 철거됐고, 경계 부대도 현역 사단에서 예비군이 주축인 동원사단으로 교체됐다. 사실 해안을 철벽같이 경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군을 모두 해안 경계에 투입해도 50m당 초병 1명을 세우게 된다. 그렇게 해본들 침투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북한 공작원들은 그날로 귀환하는 당야공작을 ‘소풍’에 비견하고 있었다.

물론 군도 문제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육군은 열상관측장비를 배치했고 해군은 초계기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최고의 우군은 험한 날씨. 수시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남에는 우군이 됐고 북에는 최강의 적이 됐다.  


이렇게 파도가 센 날 잠수함을 무리해서 접근시켰다가는 자칫 좌초될 위험이 있다. 더구나 여기는 암초지대다. 해안 70m까지 접근한 함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해상처장을 쳐다봤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고심하던 해상처장이 결단을 내렸다. 상황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정찰조와 안내조를 그냥 놔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

 

“부상(浮上)한다. 천천히 후진하라!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은 스크루를 역회전시키며 천천히 후진했다. 함장 정영구 중좌는 부상해서 후진하는 쪽을 택했다. 그쪽이 암초를 피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면서 잠수함은 심하게 요동쳤다. 함장은 잔뜩 긴장해서 좌우를 살폈지만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암초들을 찾아내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둔탁한 느낌과 함께 잠수함이 그대로 멈춰 섰다. 해안을 50m 남겨놓고 암초에 걸린 것이다. 우려하던 일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앞으로 빼라! 

함장이 허둥대며 전진을 명령했다. 그러나 엔진을 최대로 가동시켜도 잠수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암초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함내에 침묵이 흘렀다. 날이 밝으면 잠수함은 눈에 띌 것이다. 해상처장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7 2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지체할 수 없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잠수함을 포기하고 육상으로 탈출한다.

해상처장은 기밀서류 소각을 명했다.  


생사를 건 추격전 

/무장간첩 수색에 나선 군인들이 1996 920일 강릉시 강동면 한 야산에서 지도를 보며 소탕작전을 숙의하고 있다

 

1996 918일 새벽 117, 안인진리 해안 경계초소.

파도가 허연 입을 벌리고 쉴 새 없이 밀려오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해수욕객들로 붐비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해변은 어느새 썰렁한 바닷가로 변해 있었다. 이런 날은 야간 근무가 더욱 지루하다. 초병은 아직 한참 남은 교대 시간을 원망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저게 뭘까. 해안가에서 불빛이 보였다. 이렇게 파도가 센 날 밤에 누가 저곳에…? 혹시 배가 염려된 어부가 자다가 달려 나온 것일까. 한참을 지켜보던 초병은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때가 135분경. 비슷한 시각에 안인진리 해안도로를 운행하던 택시기사가 수상한 자들이 해안을 서성이고 있다고 경찰서에 신고했다.  


그만하면 발견과 신고는 신속하게 이뤄진 편이다. 그렇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 현장 정찰을 실시한 것까지는 좋은데,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면서 상부 보고가 지체된 것이다. 대간첩작전을 총괄하는 합동참모본분에 보고가 들어온 시각은 오전 415. 합동참모본부는 오전 5시를 기해 강원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발령했는데, 그때는 잠수함 승조원들이 이미 산속으로 도주한 다음이었다.  


초기 대응은 늦었지만 이후의 조치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합동신문조가 현장으로 급파되어 상황 분석에 나섰고, 예상 도주로에 따라 저지선이 신속하게 펼쳐졌다. 예상 도주로는 1968년에 울진·삼척, 그리고 1978년에 광천으로 남파된 무장간첩들의 복귀로를 분석해서 작성했다. 


반면에 북한 공작원들은 이전에 남파된 적이 있는 공작원들로부터 탈출로를 교육받고 있었다. 북한 공작원들은 평안남도 평원군 어파리에 있는 북한 정찰국 남파공작원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그곳 교관들은 남파 경험이 있는 공작원들로 구성돼 있었다. 교관들 중에는 여러 차례 남파된 사람들도 있는데, 교도대지도국 군단장 임태영 중장은 무려 27번이나 남파돼 공화국 이중영웅이 된 사람이다.  


검증받은 탈출로를 따라 필사의 탈출에 들어간 북한 공작원과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대간첩작전본부. 쫓고 쫓기는 생사의 추격전이 1996 9월에 강원도 강릉 일대에서 벌어졌다.

 

승조원 11명 자결 

1996 918일 오후 4, 강릉시 연곡면 청학산.  

잠수함을 탈출한 공작원 12명이 숨을 헐떡이며 청학산 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저게 노인봉, 그리고 저쪽이 매봉인 것 같습니다. 


지형지물을 파악하던 부처장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잠수함을 포기하고 상륙한 지 6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이미 제1차 저지선을 돌파하고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있었다. 이대로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면 휴전선에 이르지만, 승조원들의 얼굴에서 희망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찰조와는 달리 정식으로 침투공작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그들은 이미 탈진한 상태였고 무장도 변변히 갖추지 못했다. 1차 저지선은 용케 빠져나왔지만 계속해서 저지선을 돌파할 자신은 없었다. 수색대는 이미 바로 뒤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정찰조는 빠져나갔을까요? 


함장이 물었지만 해안처장인들 알 턱이 없었다. 미리 상륙한 정찰조와 안내조 5명 외에도 상륙해서 도주하는 과정에서 8명이 흩어졌는데 그들의 생사도 궁금했다.


헬기 소리가 나자 승조원들이 일제히 몸을 숨겼다. 벌써 발각된 것일까. 헬기 여러 대가 날아오더니 능선에 병력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달아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갖가지 상황에 대비해 여러 종류의 훈련을 받은 그들이지만 걸어서 북으로 복귀하는 경우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해상처장이 비장한 얼굴로 승조원들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죽음으로써 장군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내가 앞장설 테니 모두 뒤를 따르라. 


말을 마친 해상처장이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댔다. 일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해상처장이 쓰러졌다. 승조원들 모두 울먹이며 무릎을 꿇고 앉자 함장 정영구 중좌가 그들의 머리에 총을 대고 차례로 방아쇠를 당겼다. 승조원들은 ‘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고 마지막으로 함장만 남았다.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결하려던 정영구 중좌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산속을 향해 내달렸다.  


승조원 11명이 탈출을 포기하고 청학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즈음 그들과 떨어져서 혼자 산속을 헤매던 이광수 상위가 생포되면서 비로소 공작원들의 소속과 규모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총인원은 25. 1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명이 생포됐다.


19일로 넘어가면서 전과가 이어졌다. 오전 1015분 강릉시 강동면 단막골 망덕고개에서 특공연대가 3명을 사살한 데 이어 오후 410분에는 긴급 출동한 특전사가 칠성산에서 도주하는 승조원 3인을 사살했다. 비슷한 시각에 철벽부대가 강동면 산성우리에서 1명을 더 사살했는데 그는 조원들과 헤어진 정찰조장으로 밝혀졌다. 미리 상륙해 있던 정찰조와 안내조는 잠수함이 좌초된 것을 알고 도주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조장은 조원들과 헤어져 단독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작전이 계속되면서 속속 전과가 보고됐다. 어차피 잠수함 승조원들과 안내조는 북으로 복귀할 능력이 없다. 문제는 남은 정찰조 2. 그들은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도주할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대간첩작전본부는 특전사에 그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아군 피해도 속출 

1996 921일 오전 9, 강릉시 칠성산 부근 982고지. 

헬기에서 로프가 내려지면서 특전사 대원들이 익숙한 솜씨로 로프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섰다.


“빨리 움직여! 


선임담당관 장기용(가명) 상사가 대원들을 독려했다. 공작원들이 칠성산 쪽으로 도주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긴급출동한 길이다. 현지까지 남은 공작원들은 안내조장과 안내원, 함장과 기관장, 그리고 문제의 정찰조 2인이다.  


레펠링을 끝낸 특전사 대원들이 신속하게 전투대형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헬기로 정상으로 이동해서 밑으로 훑고 내려가는 수색은 효과가 큰 만큼 위험도 따른다.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른다. 상대가 북한 정찰조라면 더욱 경계해야 한다. 출동한 특전사는 바로 18년 전 안양 수리산에서 북한 공작원을 눈앞에서 놓친 그 부대.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끝에 마침내 명예회복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982고지에서 목격된 공작원들이 정찰조라고 확신했다. 두 번의 패배는 없다. 장 상사는 대원들을 3 1조로 편성하고 수색에 들어갔다. 


예측이 틀리지 않다면 정찰조는 이 부근에 비트를 파고 어두워질 때까지 꼼짝 않고 은신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측이 너무 정확했던 것일까. 예상보다 빨리 교전이 벌어졌다. 982고지 9부 능선에 이른 특전사는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정찰조 2명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거리는 불과 7~8m.  


“엎드려! 


장기용 상사는 고함을 지르며 얼른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뒤따르던 대원도 재빨리 피할 곳을 찾아 자세를 낮췄다. 그런데 후미에 섰던 대원이 마땅한 엄폐물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총격전이 이어졌고 중대장이 지원병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정찰조는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중사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최초의 아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이다.

 

안양에 이어 또 한 차례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대원들은 이를 갈았다. 1978년에 북으로 복귀한 공작원들이 정찰국의 교관으로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잠수함을 타고 내려온 정찰조는 그들이 양성한 공작원들일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장기용 상사는 비장한 낯빛으로 대원들을 독려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전과는 이어졌다. 22일 새벽 120분 칠성산에서 공작원 1명을 사살했는데 안내조로 확인됐다. 그리고 새벽 645분에 칠성산에서 함장 정영구 중좌가 사살됐다. 남은 공작원은 안내조장 유림 소좌와 기관장 마일춘, 그리고 정찰조 2. 장기용 상사는 상황판을 응시하며 정찰조의 예상 도주로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그 사이에 노도부대와 화랑부대에서도 전사자가 발생했다. 수색전이 계속되면서 아군의 피해도 점점 늘고 있었다.  


北 잠수함 뜨자 로버트 김 체포 

924일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 포트마이어 미 육군 장교클럽.

워싱턴 DC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장교클럽에 미군 고위 장교들과 워싱턴 주재 각국 무관들이 속속 도착했다. 한국대사관 무관부에서 국군의 날을 기념해서 스탠딩 뷔페 형식의 파티를 연 것. 파티는 미국인들에겐 생활의 일부다. 참석자들에게는 교류와 정보 교환의 장이기도 하다.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파티는 무르익어갔다.  


그때 파티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색의 남자 셋이 빠른 걸음으로 한국 무관들과 담소를 나누던 초로의 신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이 신사에게 자동차 접촉사고 신고가 들어왔다며 잠깐 밖에서 얘기하자고 했다. 신사는 의아해 하며 그들과 함께 나갔고, 이를 지켜보던 해군 무관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FBI입니다. 로버트 김, 당신을 국가기밀유출 혐의로 체포하겠소.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 해군 정보국 컴퓨터 전문가로 근무하던 로버트 김은 그렇게 파티 현장에서 FBI 수사관들에게 연행됐다. 로버트 김은 조국의 뒤떨어진 첩보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북한과 관련이 있는 정보를 한국 해군 무관에게 여러 차례 넘겨준 적이 있었다.


로버트 김이 그동안 한국 무관에게 전달한 정보들은 북한의 정세와 지원 식량의 배급 실태, 탈북 현황 등으로 극비로 분류될 사안은 아니었다. 상대국이 영국이나 캐나다라면 얼마든지 미국 정부 차원에서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의 정보들이었다. 더욱이 로버트 김은 정보 제공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에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떠나온 고국에 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일인데, 그의 ‘법적 고국’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로버트 김은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유를 잃고 살게 된다.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해 미국이 지나칠 만큼 신경을 곤두세운 데는 불편하던 당시 한미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민족은 이념보다 우선한다’는 말로 취임사를 장식한 김영삼 대통령은 낭만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북한을 포용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한미공조에 틈이 벌어진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핵 위기 이후로 낭만적 민족주의를 포기했지만 한번 금이 간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때 북한에서 잠수함이 내려온 것이다. 당시 퇴조항을 출항한 잠수함은 2. 1척이 다시 귀항한 것까지는 한국 정보당국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1척은 어디로 갔을까. 일단 외해로 빠져나가면 추적이 힘들다. 디젤 엔진의 열기를 감지하려면 정찰위성이 있어야 하고, 엔진 음문을 탐지하려면 특수 소나 장치를 부착한 공격형 잠수함이 있어야 하는데 둘 다 한국군에는 요원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미 해군 정보부는 상어급 북한 잠수함이 강릉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한국에 통보하지 않은 것일까. 로버트 김이 그와 관련이 있을까.


이와 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어느 나라나 정보탐지 능력은 극비사항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기밀유지를 위해서는 우방국의 안보도 희생시키는 게 그쪽의 법칙이다.


진작부터 로버트 김을 감시하고 있던 FBI는 강릉에 잠수함이 출현하자 주저없이 로버트 김을 체포했다. 그는 불운한 시기에 주목받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현실감이 결여된 정책 때문에 순수한 애국심이 억울한 대가를 치르게 된 셈이다.

 

/1996 105일 최덕근 영사의 유해가 든 관이 태극기에 싸여 빈소에서 영구차로 옮겨지기 전 유족들이 관을 부여안으며 울부짖고 있다.

 

928일에 성산면 보광리에서 안내조장 유림 소좌가 일출부대에 의해 사살되면서 잠수함 공작원 색출작전은 1단계를 마감했다. 북한은 방송을 통해 잠수함은 조류에 밀려 표류한 것이며 공작원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천배백배 보복할 것임을 천명했다.  

정찰조를 제외한 전원이 이미 사살되고 체포된 마당이다. 군 지휘부는 수색전에 동원된 부대들을 복귀시켰다. 그러면서 대간첩작전본부 지휘관도 군사령관에서 군단장으로 하향조정됐다. 언제까지 대간첩작전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북한이 저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휴전선에서 제한적 도발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찰조는 이미 제3 저지선까지 돌파했을 것으로 예상됐고 수색에 동원된 병력은 대폭 축소됐다. 이제부터는 포위와 매복 대신 추격에 주력해야 한다. 합동신문조는 정보 수집에 매달렸고 특전사는 출동태세를 완비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도 1978년처럼 공작원을 북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특전사 대원들은 이번만은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출동명령을 대기했다.


101,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한이 호언하던 천배백배 보복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10월이면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다. 오후 6시밖에 안 됐지만 거리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최덕근 영사는 퇴근 걸음을 재촉했다. 완성하지 못한 보고서를 아파트에 돌아가서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공작관인 최덕근 영사는 최근 북한의 나진·선봉지구 및 중국의 훈춘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 하산을 다녀왔다.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북한은 적극적으로 마약 밀수에 매달리고 있었다. 최 영사는 마약을 조사하던 중에 북한이 위조 달러 제조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지로 달려간 것이다. 위조지폐 제조는 마약 밀조와 차원이 다르다. 국가의 안보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범죄다. 미국 정보당국은 진폐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정밀 위조지폐, 이른바 슈퍼노트의 출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던 최 영사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웬 남자가 바짝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남자의 손이 더 빨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최 영사는 칼에 찔렸고 아파트 계단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부검 결과 ‘네오스티그민브로마이드’가 검출됐는데 이는 북한 공작원들이 휴대하는 만년필 독침에 사용되는 독물이었다.  


마지막 기회 

도대체 정찰조 2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921일 칠성산에서 특전사의 추격을 뿌리친 정찰조는 그 후로 종적이 묘연했다. 이미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귀환한 것일까. 북한에서 조용한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리무중이던 정찰조의 행방은 108일 오대산 재미재에서 파악됐다. 정찰조가 우연히 마주친 민간인 3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것이다. 오대산에서 종적을 감춘 지 8일 만의 일이다. 일단 월북하지 못한 것이 확인됐으니 아직 기회는 있다. 특전사는 더 상세한 정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출동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1016일에 두 번째 정보가 들어왔다. 정찰조가 인제군 군축교 부근 도로에서 민간인에게 목격된 것이다. 군이 긴급 출동해서 도강을 저지하고 나섰지만 정찰조의 대응이 더 빨랐다. 차단을 예상하고 남쪽으로 우회해 신남리를 거쳐 양구대교 부근에서 강을 건넌 것이다. 정찰조는 그 와중에서도 군축교와 3군단 사령부를 촬영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두 사람의 정찰조는 거듭되는 포위 속에서도 여전히 북으로의 복귀를 자신하고 있었다.


이틀간에 걸친 차단과 매복이 허사로 돌아가자 군은 초조해졌다. 그 상황에서 생포된 이광수는 기자회견에서 정찰조의 북한 귀환을 장담하고 나섰다. 소양강을 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철책선뿐.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장기용 상사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지역대장에게 달려갔다.


“현장으로 출동하기로 했소. 


지역대장의 말에 장기용 상사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뒤를 쫓아가서는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정찰조는 틀림없이 소양강을 우회해서 도강할 것이다. 칠성산에서 놓쳤을 때도 그랬다. 그러니 현장으로 출동하는 것보다는 미리 양구대교로 가서 매복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지휘부의 판단은 그렇지 않았다.  


아쉽지만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특전사 대원들은 비장한 각오로 헬리콥터에 올랐다. 아무리 저들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체력이 많이 소진됐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라 경계병들의 눈을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분신과도 같은 K2 소총을 꼭 쥐며 결전의 순간에 대비했다. 이번 출동도 허사로 돌아가면 지역대장에게 특공조 편성을 강력하게 건의할 생각이었다.

 

1022일 양구군 남면 청3리 인근 군부대.  

군부대 촬영을 마친 정찰조 2인은 신속하게 이동했다. 산기슭에 마련해놓은 비트로 빨리 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한다. 정찰조는 쫓기는 중에도 정찰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칠성산에서 특전사와 교전하고 도주한 정찰조 2인은 농가에 잠입해 음식물을 훔치고, 빈집에서 밤을 지내며 북상을 계속했다. 그동안 정찰조가 전혀 발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민과 우연히 만난 것도 여러 번. 그렇지만 정찰조는 당당하게 행동하며 의심을 사지 않았다. 평창에서는 대범하게도 용평스키장의 오락실에 잠입해서 잠을 자기도 했다. 의표를 찌르는 행동이었다.  


절치부심의 기억 

자신을 얻은 정찰조는 대낮에 이동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군축교에서 민간인에게 들킨 것이다. 아무리 한국군으로 위장했어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정찰조는 남쪽으로 우회하는 방법으로 출동군의 허를 찌르며 북상을 계속했고 군부대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비트로 돌아가던 정찰조가 걸음을 멈췄다. 사격장 부근을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운전병과 마주친 것이다. 운전병은 한눈에 그들이 공작원임을 알아보고 기겁을 하고 돌아섰지만 정찰조의 손이 더 빨랐다.  


일단 비트로 돌아온 정찰조는 서둘러 이동에 들어갔다. 운전병을 찾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리 쪽으로 복귀하려던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정찰조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군사분계선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정찰조도 지금이 고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종적을 감췄던 정찰조가 2사단 구역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대간첩작전본부가 즉각 출동했다. 정황으로 봐서 틀림없는 정보 같았다. 그동안 번번이 놓친 이유 중에는 확실치 않은 정보도 큰 몫을 차지했다. 매복 중인 군인을 정찰조로 오인한 신고도 있었고 잡고 보니 무단 이탈병인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허둥대는 사이에 정찰조는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간 것이다. 


그런데 2사단 구역에서 목격된 정찰조의 행방이 다시 묘연해졌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접수된 신고 중에서 1023 2340분 군축교 부근의 외딴집에서 주인을 습격하고 달아난 무리와 다음날 오전 830분경 인제읍 부근 산 능선을 타고 급히 달아나다 헬기에 관측된 두 사람이 정찰조일 가능성이 컸다.  


동쪽으로 우회해서 고성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는 의도일까. 그렇지만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그저 도둑일 수도 있고 뒤늦게 버섯을 채취하러 산에 오른 사람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수일 전 부근에서 무장 탈영병이 발생한 것도 골칫거리였다. 대간첩작전본부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기무부대원들을 출동에 동행시키기로 했다.


장기용 상사는 정찰조가 동쪽으로 우회할 것이라 확신했다. 18년 전에도 이와 흡사한 상황이 있었다. 안양에서 교전을 벌이던 북한 공작원들은 관악산을 우회해 부천을 거쳐 김포반도로 빠져나간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초임 하사 시절에 지휘관을 위시해서 대원 전원이 삭발하고 구보하며 절치부심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치욕을 겪을 수는 없다. 특공조 편성을 상신한 장 상사는 지휘부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기무부대장 전사 

/1996 922일 오전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칠성산에서 사살된 무장간첩 2명의 유류품이 언론에 공개됐다.

 

114일 오후 3, 향로봉 전방진지.  

철책선까지 10㎞밖에 남지 않았다. 인제와 고성 쪽으로 돌아 산머리곡산에 이른 2인의 정찰조는 비로소 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이 들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 넘는 기간의 도주도 이제 끝이다. 여러 번 남파된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긴 시간을 쫓기다 귀환한 예는 없었다. 북에 돌아가면 틀림없이 영웅이 될 것이다. 1025일 북에서 지령이 내려왔지만 난수표를 태워버린 바람에 해독하지 못했는데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곧 북으로 복귀할 것이다.  

도주가 40일 넘게 계속됐지만 두 정찰조는 여전히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동안 빈집을 털며 끼니를 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전선 일대는 벌써 겨울이지만 이제 하루만 참으면 된다. 훔친 운동복을 껴입은 정찰조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곳입니다.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심한 탓일까. 후미 경계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돌아보니 진지 주변 제초작업을 하던 병사가 낫을 들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병사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러나 미처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정찰조의 단검이 날아갔다.

군단 직할 산악특공연대가 급히 병사가 피살된 용대리 연하동 일대로 급히 출동했다.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3군단 기무부대장이 동행했다. 연하동 일대는 6·25전쟁 전에 북파된 호림부대가 남쪽으로 귀환할 때 경유한 곳인데 이제는 반대로 남파공작대가 이곳을 거쳐 북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새벽 428. 날이 바뀌어 115일이 됐다. 현장에 출동해서 탄피를 살핀 기무부대장은 북파 공작원의 소행임을 확신했다. 정황으로 봐서 멀리 달아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병력을 증원해서 일대를 완벽하게 포위해야 한다. 


“공작원 소행이 틀림없어, 즉시 증원을 요청하시오. 


기무부대장이 특공연대 정보장교에게 지시를 내리는 순간 총성이 울리며 두 사람이 쓰러졌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정찰조가 총을 발사한 것이다.  


아군의 응사가 시작됐고 지프에 거치된 106㎜ 무반동포가 불을 뿜으며 일대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출동병력이 급히 추격에 나섰지만 정찰조는 이미 현장을 빠져나갔다.


기무사 대령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지면서 수색에 나선 특전사 대원들의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스치고 지나갔다. 군사분계선이 지척이다. 여기서 놓치면….


장 상사의 손가락이 빨랐다 


날이 밝으면서 수색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부근에서 핏자국이 발견됐다. 정찰조가 106㎜ 무반동포에 부상을 당한 듯했다. 그렇다면 아직 연하동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그렇게 판단하고 골짜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선불 맞은 짐승은 사냥꾼에게 달려든다. 정찰조가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하면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장 상사는 예상 은신 지점을 향해 천천히 접근해 들어갔다. 특공조를 편성할 여유도 없었다. 장 상사는 단독으로 추격에 나서기로 했다.  


복수를 다짐한 것은 특전사 대원만이 아니었다. 정보장교, 병사를 잃은 특공연대원들도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그러면서 묘한 경쟁심이 일고 있었다.  

“…!

살기가 전해왔다. 장기용 상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순간 총성이 울렸는데 총탄이 날아간 곳은 반대 방향이었다. 은신해 있던 정찰조가 맞은편에서 접근해오는 수색대를 보고 발사한 것이다. 곧 정찰조와 특공연대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장 상사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다. 정찰조 둘이 예상 지점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장 상사는 숨을 멈추고 조준에 들어갔다. 타깃이 정확하게 조준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상대는 2명이고 특수훈련을 받은 정찰조다.  


살기를 느낀 것일까. 순간 정찰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얼른 총구를 장 상사에게 겨누었다. 그러나 장 상사가 더 빨랐다. 총성이 2발 연속해서 일었고 정찰조 두 사람은 차례로 쓰러졌다. 이것으로 특전사는 18년 전의 빚을 갚았다.  


115일 오전 1030, 정찰조 2인이 용대리 연하동에서 사살되면서 강릉에 침투한 공작원 25명이 51일 만에 전부 사살 또는 생포되었다.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예비군을 포함해서 무려 160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출동했고 8명이 전사했다. 민간인도 4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도 3명이나 됐고 의무경찰과 예비군도 각각 1명씩 목숨을 잃었다.


강릉 잠수함 사건은 애초부터 무장간첩 남파를 목적으로 한 침투는 아니었다. 잠수함이 좌초되는 바람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장간첩 남파와 주민 선동은 더 이상 공작수단이 되지 못했다.

 

이후 남쪽에도 변화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내세우면서 남과 북은 화해 무드로 들어갔고 북한을 보는 국민의 눈도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전쟁의 위험에서 해방된 것일까. 속단은 금물이다. 북핵과 장거리 미사일이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한 것이다.

 

 

02월 호

 마지막회 휴전선 넘어 고폭실험 확인한 3인의 정보요원, 그러나 포착 못한 ‘관 속 원심분리기 설계도’

북한 핵 개발 

  • 이처럼 많은 이가 뛰어들고도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한 이슈가 또 있을까. 1990년대 초 불거진 북한의 핵 개발은 엄청난 자산과 인원을 동원한 각국 정보기관의 추적과 차단작업에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북한 전역을 손금 보듯 관찰하는 정찰위성과 휴전선을 넘나든 정보요원들의 활약도, 상상조차 어려운 방식으로 파키스탄과의 핵 커넥션을 구축한 평양의 행보를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북한 영변의 핵 단지 위성사진. 2007 4월 촬영된 것이다.

 

정찰위성 키홀(Keyhole)의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며 평안북도 대관군 금창리에 초점을 맞췄다. 미국은 해상도 10㎝의 초정밀 카메라가 장착된 정찰위성 키홀을 지상 300㎞ 까마득한 상공에 띄워놓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금창리를 주목한 이유는 수일 전에 래크로스 정찰위성이 이곳에서 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이 가는 건물을 촬영했기 때문이다. 가시광선에 의존하는 키홀 위성과 달리 래크로스 위성은 합성개구면레이더(SAR)로 촬영하기 때문에 구름이 낀 날이나 밤에도 감시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해상도가 1m에 불과해 대상물을 명확하게 식별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미국 국가안전국은 정확한 촬영을 위해 기상조건이 최적인 때를 맞춰 키홀 정찰위성을 평안북도 대관군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고정밀 센서가 탑재된 2.3m의 대구경 망원렌즈가 일대를 정밀촬영하기 시작했다. 촬영된 물체들은 미국 버지니아 포트벨보어의 지상기지 중계를 거쳐 NSA와 중앙정보부(CIA)의 사진해석센터에 실시간으로 전송돼 수분 내에 판독된다. 

1997
년 초여름. 네 사람이 어둠이 깔린 천마산 기슭을 조심스레 전진하고 있었다.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었지만 해가 진 천마산 골짜기는 등골이 시릴 정도로 서늘했다.

“저깁니다. 

앞장을 선 조선족 길잡이가 골짜기를 가리켰다. 접근해서 살피니 골짜기 사이에 상당히 큰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위치와 형태로 봐서 미국 정보당국이 지목한 건물이 틀림없었다. 과연 저 건물에서 미국이 의심하고 있는 대로 고폭실험이 준비되고 있을까. 세 명의 대한민국 정보기관원은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관측에 들어갔다.  

위성정찰 결과 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금창리 일대에서 고폭실험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려면 요원을 직접 현장에 투입시켜서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 정보기관에 협조를 요청했고 그에 따라 전현직 정보장교들로 구성된 팀은 위험을 무릅쓰고 천마산에 잠입했다.  

북한은 정말로 고폭실험을 하고 있을까. 사실이라면 북한은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기폭장치 제조기술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하다. 핵분열을 일으키려면 기폭장치가 꼭 필요한데 기폭장치 제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수십, 수백 차례의 고폭실험을 거치며 시행착오를 개선해나가야 비로소 제대로 된 기폭장치를 만들 수 있다. 고폭실험에는 핵을 장착하지 않는다. 일종의 공포탄 사격인 셈이다. 기폭장치가 완성되면 그때 핵을 장착하고 핵실험을 한다. 만약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면 이는 1994년 제네바합의 위반이고, 한반도에 다시 전쟁의 암운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세 명의 정보요원은 한참을 지켜봤지만 시설물을 출입하는 차량도 사람도 관측되지 않았다. 어쩌면 미국 정찰위성이 지나가는 시간을 고려해서 은폐공작을 펼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지켜볼 수는 없었다. 주변 일대를 촬영한 요원들은 서둘러 나뭇잎을 줍고 주변의 흙을 퍼 담았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시든 나뭇잎들과 부근의 토양성분을 분석하면 고폭실험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사일 팔아 핵을 사다 

북한의 핵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89년 프랑스의 상업위성이 영변의 핵시설을 촬영하면서부터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영변에 5MW 규모의 원자로를 가동하고 있음을 진작부터 확인한 바 있고, 1984년부터 줄곧 정찰위성으로 이 일대를 감시하고 있었다. 영변의 5MW 원자로는 전력생산을 명분으로 북한이 소련에서 도입한 것이지만, 미국은 평양이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과정에서 핵폭탄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흔히 핵을 비대칭무기라고 한다. 재래식 전력이 현저히 뒤지는 나라도 핵을 보유하면 강대국과 상대할 수 있다. 당연히 약소국은 핵 보유의 유혹을 느끼게 마련이다. 골골거리는 병자도 총만 있으면 얼마든지 건장한 사람과 일대일로 맞설 수 있다.

그렇지만 핵은 비대칭무기에 더해서 주변국으로 확산되는 속성도 있다. 한 나라가 핵을 보유하면 이웃 국가들도 덩달아 핵을 보유하게 된다. 핵을 가진 상대와 맞서려면 자기도 핵으로 무장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과 소련, 인도와 파키스탄이 경쟁하듯 핵을 개발한 것이 그 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면 동북아 주변국들, 즉 대한민국과 일본, 대만도 앞 다투어 핵을 보유하려 할 것이다. 세계경찰을 자임하며 핵 확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2006 11월 공개된 파키스탄의 가우리 미사일.

 

핵 확산 방지를 위해 결성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세계 각국에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NPT에 가입하면 의무적으로 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NPT에 가입하지 않으면 경제제재를 비롯해서 미국의 강력한 응징을 각오해야 한다.  

북한은 소련의 권유에 따라 1985년에 NPT에 가입하면서 IAEA의 사찰을 받을 의무를 지게 됐다. 그러나 미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북한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사찰을 거부했다. 더 이상 미룰 까닭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할 계획을 세웠다. 1994년의 한반도 위기,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1994 10월 미국과 북한이 극적으로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내면서 한반도는 가까스로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됐다. 합의 결과 북한은 플루토늄 제조가 가능한 기존의 흑연 원자로를 폐기하는 대신 재처리가 어려운 경수로 건설을 이해 당사국들로부터 지원받게 되었다. 경수로가 완성되는 동안에는 중유를 공급받는다는 조건이었다. 


제네바합의는 결과적으로 NPT 의무를 불성실하게 이행한 나라에 큰 보상을 해준 꼴이 되고 말았다. 북한은 제네바합의를 통해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둬들였다. 특유의 장기인 벼랑 끝 전술이 빛을 발한 것이다. 전쟁의 먹구름은 걷혔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이렇듯 제네바합의로 인해 북한은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없게 됐고, 플루토늄이 없으면 핵폭탄을 제조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정보당국은 북한이 고폭실험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의혹은 한국 정보기관에서 제공한 토양 분석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북한은 왜 고폭실험을 하는 걸까. 혹시 제네바합의 전에 핵폭탄 제조에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을 이미 확보해놓은 것일까. 그렇다면 이는 제네바합의의 허점을 교묘히 파고든 것이 된다. 제네바합의는 원자로 봉인 이전에 추출했을지 모르는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제네바합의의 허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미국이 금창리 시설을 놓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무렵인 1997 12, 파키스탄의 육군참모총장 제항기르 카라마트 장군이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커넥션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에 또 하나의 허점이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핵폭탄은 탄두 이상으로 운반수단이 중요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B-29 폭격기에서 핵폭탄을 투하했지만, 현재로서는 신뢰하기 어려운 방법이 됐다. 탄두를 장착해 발사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이 중요해진 이유다.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경량화된 핵탄두와 장거리 미사일을 모두 갖고 있어야만 진정한 핵보유국으로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북한은 1993년에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기반으로 하는 최대 사정거리 1500㎞급의 노동미사일을 자체개발하면서 미사일 강국으로 부상했다. 1500㎞라면 일본도 사정권에 들어가는 준중거리 미사일이다. 주변국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 미사일은 무기일 뿐 아니라 효자 수출품목이기도 했다. 주요 고객은 이란과 파키스탄. 북한은 기술수출에도 적극적이어서 파키스탄의 가우리 미사일과 이란의 샤하브 미사일 개발에 적극 관여했다. 이란은 이라크와, 파키스탄은 인도와 날카롭게 대립하던 중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장거리 미사일을 제공하는 북한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을 필요로 하는 파키스탄은 반대로 북한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갖고 있었다. 이미 파키스탄은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평가받는 상태였기 때문. 사실상 보유국이란 말은 언제든지 핵 실험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미국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핵실험을 강행하지는 못했지만 파키스탄의 기술력은 이미 핵실험이 가능한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상대국 인도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을 보유하게 된 일련의 과정은 핵 확산의 속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실례였다. 중국은 1960년대 소련과 갈등을 겪으면서 핵을 보유하게 됐다. 소련과 맞서려면 중국도 핵무장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핵을 보유하자 이번에는 중국과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던 인도가 핵 개발에 나섰다. 인도가 핵 개발에 나서자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와 날카롭게 대립하던 파키스탄도 서둘러 핵 개발에 들어갔다.

 

‘온 국민이 풀뿌리를 먹고사는 한이 있어도 핵을 개발하겠다’고 선언한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는 해외의 인력들을 불러들였고, 총력을 기울인 결과 마침내 핵심기술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핵은 강대국만이 보유하는 무기였다. 그들은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지 않는 한 핵을 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을 보유하게 되면서 추상적인 위협으로 존재하던 핵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변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은 크게 줄었지만, 국지전에서도 핵이 쓰일 수 있다는 개연성은 오히려 커졌다. 핵의 공포는 사실상 확대된 것이다.  

핵이 필요한 북한과 장거리 미사일을 원하는 파키스탄.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나눠 갖고 있던 두 나라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공포의 확산 

1998년 초, 오산 미 공군기지. 고공정찰기 U-2가 특징인 긴 날개를 활짝 펴고 활주로를 향해 하강하자 지원차량이 속도를 맞추며 뒤를 따랐다. U-2기는 이륙할 때 바퀴를 지상에 떨어뜨리기 때문에 착륙할 때는 지상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휴전선 지상 15000m의 고공을 날며 60㎞ 적진까지 감시할 수 있는 U-2기는 정보수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하고 있었다.  

이 무렵 워싱턴과 한국의 정보당국은 주 관심사가 조금 달랐다. 워싱턴은 북한의 핵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주한미군과 한국군 정보당국은 그보다는 북한의 장사정포가 더 큰 관심거리였다. 휴전선 최남단인 개성직할시 판문군에서 서울 광화문까지는 40㎞에 불과하다. 북한군은 1997년에 평안남도 덕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61포병여단과 제62포병여단을 임진강 부근으로 전진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계속 전방에 대규모 화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새로 구축한 진봉산 진지의 170㎜ 자주포와 240㎜ 방사포는 서울을 직접 사정권에 두고 있었다. 전진 배치된 장사정포는 이런저런 논란이 이는 핵과 달리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공사가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는 것 같소. 


항공사진을 들여다보던 미군 정보여단 분석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한국군 정보장교에게 사진을 넘겼다. 한국군 정보장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U-2기에서 촬영한 사진은 북한군이 진봉산 북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었다. 북한군은 240㎜ 방사포를 이쪽에서 타격하기 힘든 북쪽 사면에 배치했다.  


분석 결과 진봉산 진지는 출입문이 20㎝ 두께의 강철로 된 것으로 판명됐다. 웬만한 포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두께였다. 북한은 이 지역 일대에 170㎜ 자주포 100여 문과 240㎜ 방사포 200여 문을 배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서울은 불바다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은 공격징후를 더욱 신속하게 포착하기 위해 대북감시를 강화했고, 방사포를 제압하기 위해 사정거리 40㎞의 다연장로켓(MLRS)을 전진 배치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북핵은 꾸준히 진보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1998 46일 사정거리 1500㎞의 준중거리 미사일 가우리2호 발사에 성공했다. 건국 영웅의 이름을 딴 이 미사일로 파키스탄은 숙적 인도의 중심부를 강타할 수 있게 됐다. 파키스탄이 적극적으로 북한에 접근한 것은 인도에 비해서 지형적으로 불리했기 때문. 인도의 수도 뉴델리는 두 나라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는 그렇지 못하다. 인도는 단거리 미사일을 가지고도 파키스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지만 파키스탄은 그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노동미사일을 기반으로 한 가우리2호가 개발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번에는 파키스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 북한이 요구조건을 내세울 차례다. 북한-파키스탄의 핵 커넥션이 본격적으로 작동하면서 제네바합의로 한 고비를 넘겼던 북핵 위기는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핵 커넥션의 후풍풍은 인도 쪽에서 먼저 불어왔다. 파키스탄 미사일의 사정권에 들어간 인도는 즉각 핵 실험을 감행하고 나섰다. 더 이상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인도는 그해 511일에 라자스탄주 사막지대의 포크란에서 핵실험을 감행했고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는 핵보유를 공식 선언했다. 아울러 신형 트리슐 미사일도 공개했다. 트리슐은 사정거리가 50㎞에 불과한 단거리 미사일이지만 국경에 배치해도 충분히 파키스탄의 중심부를 타격할 수 있다.  


이번에는 파키스탄이 받아칠 차례였다. 파키스탄도 핵실험을 공언하고 나섰다. 우려했던 핵 확산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파키스탄 샤리프 총리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핵 실험 준비를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 대가로 미국이 전략적으로 수출을 금지하고 있는 F-16 전투기를 파키스탄에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국가의 생존이 걸린 파키스탄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미국은 먼저 인도의 핵실험을 막았어야 한다.” 샤리프 총리는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매정하게 거절하고 529일 발루치스탄의 차가이 실험장에서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렇게 인도는 지구상의 여섯 번째, 파키스탄은 일곱 번째 핵보유국이 됐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쿠바, 이스라엘과 더불어 NPT 미가입국이다. IAEA를 앞세운 제재에는 한계가 있다. NPT는 핵 확산 금지에는 효율적이지만 기왕에 핵을 보유한 국가들과 NPT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들에 대해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북한은 이 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 일단 핵을 보유하면 미국은 현실을 인정하고 제재 대신에 보상을 택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격한 것이다. 소련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NPT에 가입했던 북한에 NPT는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카드였다.  


파키스탄이 필요했던 이유 

장거리 미사일의 성공적인 발사와 핵 실험 성공은 파키스탄과 북한에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북한이 미국과, 파키스탄이 인도와 갈등할수록 두 나라는 더욱 밀착했다. 사실 북한과 파키스탄은 핵 커넥션 이전부터 서로를 주목하고 있었다. 1994 12월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고, 이듬해 12월에는 북한 인민무력부장 최광이 이슬라마바드를 답방하며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당시만 해도 상황은 유동적이었고 각각의 미사일과 핵 능력은 아직 본궤도에 오르기 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북한은 제네바합의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핵폭탄을 제조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고농축 우라늄 폭탄에 주목한 북한에 파키스탄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북한은 파키스탄이 고농축 우라늄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핵폭탄에는 고농축 우라늄으로 만든 것과 플루토늄으로 만든 것 두 종류가 있다. 우라늄은 천연에 존재하지만 플루토늄은 우라늄을 재처리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인공물질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우라늄에는 질량수 235 238의 두 종류 동위원소가 섞여 있는데 그중에 핵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1% 미만에 불과한 우라늄 235. 채굴된 우라늄 중에서 99%는 쓸모없는 것이다. 우라늄 238과 우라늄 235는 원심분리기를 통해 분리되는데 여기서부터 IAEA의 감시가 따른다. 저농축 우라늄은 원자력발전의 원료로 쓰이지만 고농축 우라늄은 핵폭탄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NPT 가맹국들은 IAEA로부터 우라늄을 고농축하지 않았음을 검증 받아야 한다.  


플루토늄 폭탄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플루토늄은 원자로에서 사용하고 남은 저농축 우라늄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면 얻을 수 있다. 핵 선진국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폭탄은 거의 전부가 플루토늄으로 만든 것이다. 핵분열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을 얻기 위해서는 원심분리기 여러 대를 오랫동안 돌려야 하지만 플루토늄은 상대적으로 손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효율에서도 플루토늄 폭탄 쪽이 훨씬 앞선다. 우라늄 폭탄은 5%만이 에너지로 변하고 나머지는 허공으로 날아가지만 플루토늄 폭탄은 그보다 효율이 수십 배 높다.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북한의 흑연 원자로 폐기에만 주목한 채 서둘러 체결된 제네바합의는 두 가지 허점을 안고 있었다. 하나는 합의 전에 북한이 플루토늄을 이미 추출했을 경우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북한은 제네바합의 이전에 핵폭탄 1~2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이미 추출해놓았다. 다른 하나는 고농축 우라늄 핵폭탄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기 수출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던 미국이 통제체제를 지나치게 과신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고, 제네바합의를 통해 챙길 것을 챙긴 뒤 미련 없이 우라늄 핵폭탄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한이 필요하기는 파키스탄도 마찬가지였다. 개발에 성공한 장거리 미사일 가우리2호는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구형이어서 실전에서는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액체연료는 부식성이 강해서 미리 넣어둘 수 없으므로 발사 직전에 연료를 주입해야 한다. 분초를 다투는 현대전에서는 결정적인 약점이다. 파키스탄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신형 미사일을 원했다. 물론 북한은 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1997년 말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 제항기르 카라마트 장군은 은밀히 평양을 방문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핵 커넥션이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네바합의 이전에 재처리를 끝낸 플루토늄과 핵 커넥션을 통해 얻게 된 고농축 우라늄. 양손에 떡을 쥔 북한이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고농축 우라늄 폭탄은 비교적 간단한 기폭장치로도 폭발시킬 수 있지만 플루토늄 폭탄에 쓰이는 내폭형 기폭장치는 제조에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제대로 작동하는 기폭장치를 완성하려면 수십, 수백 차례의 고폭실험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평북 구성시와 대관군 일대에 비밀 실험장을 만들고 고폭실험을 진행하던 차에 미군 정찰위성에 포착된 것이다. 


칸 박사와의 회동 

/2009 2 5년간의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직후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드는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

 

1998 67,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교외. 도심을 벗어난 승용차는 속도를 높여 카후타의 연구소로 향했다. 핵실험 성공으로 파키스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지만 차 안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차가 멎고 승용차 문이 열리자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 경제참사관 겸 창광신용공사 파키스탄 주재원인 강태윤이 얼른 차에서 내렸다. 강태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쫓기듯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창광신용공사는 북한 국방위원회 산하 제2경제위원회 제4기계산업국 소속으로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관장하는 곳이다. 강태윤은 파키스탄에 노동미사일을 수출하는 실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던 파키스탄 고위층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동석한 사람을 소개했다.  


“연구소장 압둘 카디르 칸 박사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소. 


칸 박사가 손을 내밀었다. 파키스탄 핵 개발의 주역인 그는 이후 1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북한의 핵개발에 적극 관여한다.  


“신형 미사일을 개발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강태윤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소. 우리는 사정거리 2500㎞ 이상의 미사일을 원하고 있소.


파키스탄 고위층이 탐색하듯 강태윤을 노려보았다. 그즈음 파키스탄은 인도의 심장부를 강타할 수 있는 가우리3호 미사일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만한 위력을 지닌 미사일을 보유한 나라라면 미국과 러시아를 우선 꼽아야겠지만, 두 나라는 모두 파키스탄에 대해 미사일 수출은 물론 개발기술 전수도 금하고 있었다. 그래서 파키스탄은 북한을 상대로 지목하고 조심스럽게 접근 중이었다.  


“우리는 곧 신형 미사일을 실험 발사할 것입니다.

강태윤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는 고체형 연료를 원하고 있소.

고위층은 조건을 확실히 했다.  


“물론입니다.

강태윤은 거침이 없었다. 이 무렵 북한은 사정거리 2000㎞가 넘는 대포동1호 미사일 개발을 완료하고 있었다.  


“성능이 확인되면 미사일 12기를 기당 600만달러에 구입하겠소.

파키스탄 고위층이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미사일 12기면 1개 여단을 무장할 수 있다.


“그리고 기술자도 파견해주어야 합니다.

“평양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강태윤은 일단 수락하고서 칸 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북한에서 요구조건을 내걸 차례다. 그만한 가격이면 나쁜 조건은 아니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우리는 원심분리기를 원합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원자로용으로 제작한 미사용 연료봉. 2009 1월 촬영된 것이다

 

 강태윤이 분명하게 말했다. 고농축 우라늄 폭탄은 정교한 기폭장치 없이도 폭발시킬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제네바합의에서 수용한 IAEA의 감시도 피해갈 수 있다. 그렇지만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숫자의 원심분리기가 필요하다.

“원심분리기는 미국이 수출금지품목으로 지정하고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어서 손에 넣는 게 쉽지 않소.

고위층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P-2형 원심분리기입니다. 


강태윤이 북한의 정보력을 우습게보지 말라는 듯 두 사람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P-2형 가스 원심분리기는 오스트리아의 게르노트 지페 박사가 개발한 것으로, 미국의 원심분리기와 작동방식이 달라서 미국의 통제를 빠져나갈 여지가 많았다. 북한은 칸 연구소가 이미 14000여 대의 지페형 원심분리기를 확보하고 있음을 확인해둔 상태였다.


“그야…. 하지만 당신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 연구소를 지켜보고 있는 눈이 한둘이 아니오.


칸 박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CIA는 물론 인도 정보부도 칸 연구소를 불철주야 감시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모사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란에 미사일을 수출하고 있는 북한은 모사드의 주요 감시대상이었다.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설계도와 한두 대의 샘플입니다.


핵폭탄 1개를 제조할 고농축우라늄을 얻으려면 원심분리기 100대를 5년 동안 돌려야 한다. 북한은 1000대를 보유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양을 전부 수입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북한은 설계도와 샘플을 구해 자체 제작할 계획이었다. 원통형으로 생긴 원심분리기는 그리 크지 않아서 샘플 몇 대 정도는 감시의 눈을 피해 빼돌릴 수 있다. 강태윤은 이미 구체적인 계획까지 마련해놓고 있었다. 


“설계도와 샘플이 있다고 누구나 원심분리기를 제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제조에 꼭 필요한 머레이징 강철은 특수재료라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소.


칸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부식방지 처리가 돼 있는 머레이징 강철은 18~25%의 니켈이 포함된 강철합금으로 원심분리기 제조에 꼭 필요한 재료지만, 칸 박사의 지적대로 미국이 철저하게 수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다. 칸 연구소는 카이로와 카사블랑카, 두바이, 그리고 콸라룸푸르 등지에 출장소를 두고 핵 개발에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고 있었지만, 머레이징 강철만은 늘 골칫거리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부분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강태윤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이 없다. 더구나 인도가 장거리 아그니 미사일 개발을 완료했다는 정보도 입수된 마당이다. 그에 대응하려면 사정거리 2000㎞ 이상의 미사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파키스탄은 북한의 요구를 거부할 처지가 못 됐다.


“상부에 보고하겠소. 


고위층이 대답했다. 실무 책임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것은 사실상 승낙을 의미한다.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강태윤은 흡족한 표정으로 연구소를 나섰고, 그를 태운 차는 이슬라마바드 시내를 향해 달렸다. 남은 문제는 원심분리기를 어떻게 북한으로 가져가느냐다.


미국 정보기관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하고 있다. 카라치와 남포를 오가는 화물선 구월산호로 운반하면 좋겠지만 구월산호는 인도의 칸들라 항을 경유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정보가 새어나가면 인도 첩보부대가 들이닥칠 것이다. 칸들라 항에 들르지 않는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인도 해군이 공해상에서 배를 검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한-파키스탄 핵 커넥션의 상대방은 미국과 인도다. 두 나라는 당연히 공조할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국의 감시를 따돌려야 한다. 


한 발의 총성 

강태윤이 고심하는 사이에 차는 외국인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가에 들어섰고 강태윤의 관사 앞에 멈춰 섰다.  
“지금 오세요?

부인 김신애가 마중을 나왔다. 강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집안으로 향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저격용 라이플로 강태윤을 겨누고 있는 자가 있었다. 강태윤의 머리가 정확하게 조준선에 들어왔다. 저격수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갑자기 강태윤이 몸을 돌리더니 다시 차로 향했다. 놓고 온 게 있는 모양이었다. 저격 순간을 놓친 저격수는 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총에서 눈을 뗐다.

 

/2010 11월 북한이 공개한 원심분리기가 모방한 것으로 추정되는 네덜란드 알메로 원심분리기.

 

 그때 저쪽에서 또 한 대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격수는 당황했다. 혹시 정보가 샌 것일까. 차는 자꾸 다가오는데 강태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저격의 목적은 경고에 있다. 꼭 강태윤을 저격하지 않아도 된다. 저격수는 목표를 바꿔 강태윤의 처 김신애를 겨눴다. 그리고 김신애가 조준선에 들어오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조용한 이슬라마바드의 밤거리에 일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수일 뒤,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라치 공항에 도열해 있었다. 북한 외교관들과 파키스탄 정부 관계자들이 평양으로 공수되는 김신애의 시신을 영결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김신애의 사망은 의외로 조용히 처리됐다. 범인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파키스탄 당국은 정체불명의 괴한 소행으로 결론을 지었고 북한도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크게 떠들어댈 상황이 아니었다. 김신애의 시신이 담긴 관이 애도 속에 운구를 마치자 파키스탄 공군 소속의 C-130 수송기가 굉음을 내며 이륙했다. 목적지는 북한 순안비행장이었다.  


P-1, P-2 원심분리기 20여 기가 북한으로 유출된 것은 훗날 페르베즈 무샤라프 전 파키스탄 대통령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미국과 인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까지 나서서 그토록 철저하게 감시를 했는데 어떻게 파키스탄을 빠져나갔을까. 미국 정보당국은 북한이 신형 원심분리기의 설계도와 필요한 샘플을 평양으로 운구된 김신애의 관 속에 숨겨 옮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정보기관의 분석이 사실이라면 위기를 기회로 바꾼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발상인 셈이다. 저격은 인도 정보부에 의해 기도됐을 공산이 크다.


남은 문제는 원심분리기 제조에 반드시 필요한 머레이징 강철과 특수 알루미늄을 손에 넣는 것. 북한은 이들 재료를 입수하기 위해 집요하리만큼 매달렸다. 이 무렵 영국 세관은 모스크바의 한 연구소가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표부로 보내던 머레이징 강철을 경유지에서 압수한 바 있고, 프랑스 정부 역시 북한이 독일의 한 회사에서 구입한 22t의 특수 알루미늄을 프랑스 선적의 배로 운송하려는 것을 수에즈 운하에서 적발했다. 적발되지 않고 북한에 들어갔다면 원심분리기 400대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얼마나 많은 양이 적발되지 않고 북한에 들어갔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Weapons of Mass Deceit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2002년이 또 한 차례의 핵 위기를 한반도에 몰고왔다. 105일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부장이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면서 수면으로 떠오른 위기였다.  

흔히 핵을 ‘사용할 수 없는 무기’라고 한다. 핵을 사용하면 공멸이다. 따라서 핵은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인 동시에 대량공갈무기(Weapons of Mass Deceit)인 셈이다. 그렇다면 벼랑 끝 전술로는 최고의 수단이다. 


제네바합의를 통해 벼랑 끝 전술의 실체를 파악한 미국이 압박의 수위를 높이자, 북한은 이번에는 플루토늄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IAEA의 감시하에 있던 폐연료봉 8000개를 재처리했다는 주장이었다. 이로써 제네바합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고, 북한 핵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다. 2001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과 파키스탄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커넥션에도 변수가 생겼다. 커넥션을 주도했던 칸 박사가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면서 급격히 위세를 잃었고, 그간의 기술교류 상황은 낱낱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북한이 어떤 종류의 핵폭탄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북한은 필요에 따라 이를 은폐하기도 하고 과장하기도 한다. 다만 앞서 말했듯 핵에는 탄두 못지않게 운반수단도 중요한데 북한은 운반수단만큼은 감추지 않고 공개하고 있다.


북한이 1998 831일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실험발사한 대포동1호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2000㎞에 달한다. 2단 분리형에 부분 고체연료를 채용한 대포동1호 미사일은 일본 전역을 사정권에 두었다. 이내 일본 열도는 공포에 휩싸였고 미국도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북한이 향후 미국도 사정권에 들어가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해 나서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북한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1998년말 진행된 북미 간 미사일 협상에서 평양은 미사일 수출 중단을 요구하는 미국에 그 대가로 최소한 3년간 10억달러씩 보상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미사일은 전략무기인 동시에 주요 수출품이고, 강력한 대미협상용 카드였다. 이후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과 핵을 동시에 협상의 주요카드로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북한은 2006 75일 무수단리에서 대포동 2호를, 그리고 강원도 안변군 깃대령에서 스커드B 계열 5발과 노동1호 미사일 1발 등 총 7발을 동시에 발사하며 무력시위에 나섰다. 백화점에 물건을 전시하듯 보유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미사일을 발사한 셈이다. 스커드 미사일은 한국을, 노동1호는 일본을, 대포동2호는 미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핵과 미사일,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세트로 묶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뜨리면서 주변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북한의 핵 시리즈는 그때마다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장거리 미사일로 주변국들을 긴장시킨 북한은 다시 카드를 바꿔 2006 10월에는 함경북도 길주에서 지하 핵실험을 감행했다. 실험에 쓰인 폭탄은 플루토늄 폭탄인 것으로 알려졌다. 칸 박사는 1999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 3개의 핵장치(Nuclear Device)를 봤다고 증언한 바 있다. 제네바합의 이전에 추출해놓은 플루토늄으로 제조한 폭탄이 2006년 핵실험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북한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할 시간을 벌었고, 상황은 점차 악화됐다. 2003년 시작된 6자회담은 2007 2·13합의 등을 도출해냈지만 사안을 마무리 짓지 못했고, 오히려 북한의 추가 핵실험으로 이어졌다. 북한은 필요에 따라 핵 개발은 에너지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자위수단이라고 내세우기도 하며 협상의 줄을 밀고 당겼다. 


폭주기관차의 종착역은 

북핵은 정녕 합의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일까. 우선 ‘합의’라는 것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합의는 말이 통하는 상대끼리 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려면 최소한의 상식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한발 물러서 양보하면 따라서 물러서는 상대가 있고, 양보를 유약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올라타려는 상대가 있다. 

‘햇볕정책’이라는 말이 이솝 우화에서 나온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솝 우화에는 햇볕과 나그네 이야기만 나오는 게 아니다.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도 나온다. 양치기 소년은 결국 늑대에게 물려죽는다.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에 끌려 다니다 최악의 결과를 맞는다. 처음부터 소년을 호되게 꾸짖었다면 소년은 늑대에게 물려 죽지고 않았을 것이고, 소년의 부모는 자식을 잃는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벼랑 끝 전술은 우유부단과 좌충우돌을 기반으로 한다. 신속하고 단호한 대처는 벼랑 끝 전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강력한 무기다. 핵은 비대칭무기지만 쉽게 사용할 수 없는 무기다. 현실적으로는 무분별한 공포심과 내분이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할 비대칭무기일 것이다.


제네바합의로도, 6자회담으로도 막지 못한 북핵은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레일 위를 달리는 폭주기관차다. 이렇듯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한민국의 해군 함정이 폭침되고 영토가 포격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남과 북은 휴전 이후 최고 수위의 긴장상태에 놓이게 됐다. 성급하게 ‘제2 6·25전쟁’을 입에 담는 해외 언론이 있을 정도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서 세계가 놀라워하는 발전을 이룩하며 여기까지 왔다.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최초로 원조를 받은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어렵게 이룩한 번영이 또다시 잿더미로 변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서 번영을 이어갈 방도는 없는가. 역사는 의외로 간단히 답하고 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고 말이다.

 

■2013.12.21 대북 첩보전의 세계 

김대중정부 시절 정권 실세였던 정보기관 최고위급 간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관련한 내밀한 첩보를 사석에서 발설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안줏거리 삼아 말을 꺼낸 것이다. 김정일이 평양 관저에서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던 한 여성과 나눈 대화 내용이었다. 당시 이 여성은 김정일을 ‘자기’라고 부르며 자신이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는지 맞혀보라는 등의 말을 건넸다. 두 사람 사이의 농도 짙은 통화 내용은 지극히 사적인 사항이었다.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언급한 게 적절한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당국이 수습에 나서 공론화하는 걸 막았지만 김 대통령은 상당히 진노했다는 후문이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20일 “당시 김정일과 대화한 여성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생모인 고영희였다”고 귀띔했다. 고영희는 유선암 치료를 위해 파리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004 5월 현지에서 숨졌다. 김정일은 28년간 함께한 고영희를 위해 고급 관이 실린 특별기를 보내 시신을 운구했고, 평양 대성산 묘역에 안장토록 했다. 김정일에게 버림받은 뒤 우울증에 시달리던 첫사랑 성혜림(장남 김정남의 생모)이 모스크바에서 쓸쓸하게 숨진 것과 비교된다.

 통신 감청은 대북정보 수집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평양 로열패밀리 간의 은밀한 대화는 베일에 싸인 권력 내부의 퍼즐을 맞추는 데 유용하다. 사적인 내용이라 해도 이를 통해 두 사람 사이의 역학관계나 권력 변화의 단초를 확보할 수 있다. 북한 내부의 통신에 비해 평양과 외부를 연결하는 국제통화는 훨씬 감청이 용이한 데다 고급 정보가 담겨 있다. 정보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야다. 물론 관련국과의 대북정보 공조가 사전에 완벽하게 이뤄져야 가능한 일이다.


한·미 연합 ‘제777부대’ 감청 주도


 지난 12일 ‘국가전복음모’ 혐의로 전격 처형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경우도 생전에 해외에 체류하거나 여행 중인 처조카들과 통화가 잦았다고 한다. 마카오 등지를 떠돌던 김정남은 장성택에게 ‘고모부님’이라며 깍듯하게 대했다. 장성택은 김정남의 뒤를 보살펴주며 애틋하게 대했다. 숙청 직후 장성택이 유사시 김정남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려 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을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후계자 낙점 과정에서 김정남과 ‘평양판 형제의 난()’으로 불린 갈등을 빚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두 사람 사이의 이런 관계를 의심한 것도 극단적인 결정을 한 이유일 수 있다는 얘기다. 정보 관계자는 “장성택은 스위스에서 유학한 김정은과 정철·여정(김정은의 친형과 여동생)과도 가까운 편이었다”고 말했다. 김정은도 고모 김경희뿐 아니라 장성택과도 친밀한 통화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2008년 여름 김정일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한·미 정보 당국은 대북정보망을 풀가동했다. 그때 흥미로운 감청이 이뤄졌다. 김정일의 병실을 지키는 책임부관에게 고위인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전화로 나지막이 “장군님(김정일을 지칭) 자나, 아주 자나?”라고 물은 것이다. 정보 당국은 대화에 담긴 의미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아주 자나’라는 표현이 식물인간 상태나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김정일의 병세가 위중한 상태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 같은 대북감청의 경우 한·미 연합으로 경기도 성남 지역에 운용 중인 ‘제777부대’(일명 쓰리세븐)가 주역을 맡고 있다. 양측이 공동 근무하는 시스템의 이 부대의 책임자는 한국군 소장이 맡는다.

 미 첩보위성 KH-12(일명 키홀) 등을 활용한 북한 영상정보도 요긴하다. 과거 북한 영변 원자로의 연기 포착이나 주요 시설의 신축·리모델링 등을 잡아내는 것은 이민트(IMINT·영상정보)의 몫이었다. 김정은 전용열차나 승용차를 추적·촬영하는 것도 위성이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집권 이후 주로 열차보다 차량 이동이 많아 추적에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김정은이 서해 섬 방어대를 방문하기 위해 작은 목선을 타고 움직였다고 선전하지만 우린 북한군 서해함대사령부에 들른 뒤 부두에서 함정에 올라 섬 가까이에서 작은 배로 옮겨 타는 쇼를 벌인 걸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당국은 김정은의 대남 위협이 계속된 지난봄 그의 동선을 속속들이 촬영한 위성사진을 언론에 공개해 그를 위축시키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한다.

 북한 정세를 파악하는 데는 휴민트(HUMINT)망도 가동된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수집 수단인 휴민트는 직접 정보요원이 현장에 투입되거나 협조자를 통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말한다. 김정일 건강이상 당시 청와대 인사가 “혼자 양치질은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언급했다 논란을 빚은 건 대표적 사례다. 양치질 상황까지 파악한다는 건 김정은 지근거리에 휴민트가 가동되고 있다는 걸 드러낸 것으로 자칫 대북정보망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정부 당국자는 “관련 정보를 제공한 미국 측 정보기관에서도 강한 항의가 들어왔고 우리 내부에서도 부적절한 언급이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탈출한 고위 망명인사를 잡기 위한 관련국들의 정보전도 치열하게 벌어진다. 최근 장성택 처형 사태를 계기로 중국 등지에 그의 측근 세력이 줄줄이 망명 신청을 했다는 설이 제기되면서 경쟁이 달아올랐다. 핵 개발 관련 정보를 들고나왔다는 얘기까지 나돌며 관심은 증폭됐다. 우리 정부 당국은 언론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실체가 드러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지적이다. 이집트 주재 장승길 북한대사와 그 동생인 장승호 프랑스 주재 경제참사관의 1997년 미국 망명에서 볼 수 있듯이 핵심 정보를 쥔 ‘영양가 있는’ 고위 인사의 경우 한국이 개입할 여지가 좁은 편이란 점에서다. 전직 정보 당국 간부는 “북한의 대()중동 미사일 판매 정보를 쥐고 있던 장 대사 형제의 경우 초기부터 미 중앙정보국(CIA)이 직접 개입해 데려갔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망명한 고영희의 여동생 영숙씨 부부, 성혜림의 언니 혜랑씨와 딸 남옥의 경우도 로열패밀리 내부의 고급정보를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1990
년대 북핵 의심 지역서 흙 가져와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대북침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한 우려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1990년대 말 우리 군 정보기관 요원들이 북한의 ○○지역 핵 의심 시설에 접근해 토양을 채취해왔다. 한·미 당국의 정밀 조사 결과 방사능이 검출되는 등 증거가 확보돼 새로운 핵 시설로 ‘시인’(첩보가 믿을 만한 정보로 확인됐다는 의미의 정보용어)됐다. 당시 이들 요원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총리실에 제출된 공적 조서에 내용이 기재되지 않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실무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린 일도 벌어졌다.

 북한 신의주와 마주한 중국 단둥이나 동북 3성 지방, 베이징 등도 대북정보 수집을 위한 우리 정보요원들의 주요 활동 무대다. 탈북자뿐 아니라 중국을 오가는 북한 고위인사와 무역업체 일꾼(북한에선 간부라는 의미) 등이 흘리는 정보를 탐지하기 위해서다. 이런 정보전의 세계에서는 미인계를 동원한 휴민트망도 종종 가동된다. 네덜란드 출신의 ‘마타하리’(본명 마그레타 젤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 사이를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한 인물로 지금까지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한 관계자는 “해외 근무 정보요원들의 경우 가장 무서운 게 여자와 술”이라며 “북한판 마타하리에 당해 정보원을 노출당하고 서울로 소환돼 옷을 벗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 측에 신원이 드러나 위해를 당하거나 납북되는 경우도 있다. 98 3월에는 단둥 인삼공사 지사장으로 위장 근무하며 대북정보 수집활동을 벌이던 정보사령부 소속 정모 중령이 북한으로 납치됐다 6개월 만에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북한이 그에게 이중간첩 임무를 준 사실도 집중신문을 통해 드러났다. 김대중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위해 이 사건을 공개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고 군 내부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 시기 남북 간에 베이징과 북·중 국경지역을 무대로 정보전과 충돌이 잦자 중국 공안 당국은 칼을 빼들었다. 선양 주재 대한항공 부지점장 직책으로 나가 있던 국가정보원 간부와 수십 명의 우리 정보요원을 동시에 체포한 뒤 한국으로 강제 송환한 것이다.

 평양의 권력 핵심부에 우리 국정원이나 미국 CIA 등의 정보 협조망이 얼마나 뻗쳐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철저한 감시체계가 가동되고 있고, 김정은을 비롯한 로열패밀리에 대한 접근은 차단돼 있다. 하지만 정보 관계자는 “극히 제한된 숫자겠지만 누군가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매우 뜻밖의 인물일 수 있다”고 말했다. 동·서독 냉전 과정에서도 ‘의외의 인물’이 간첩으로 드러난 사례가 있다.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의 비서인 귄터 기욤이다. 그의 스파이 혐의는 귄터 놀라우 헌법보호청장이 1973 5월 내무장관이던 겐셔에게 기욤이 간첩용의자라고 처음 보고하면서 드러났다. 기욤의 부인 크리스텔도 스파이임이 밝혀졌다.

 장성택 사태의 충격파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대북정보망을 확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 3일 국회 정보위에 ‘장성택 실각 가능성’을 보고함으로써 대북감시망의 촉수가 살아있음을 과시했다. 하지만 숙청과 공포정치로 인한 김정은 체제의 동요나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변신이 요구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19일 열린 국가정보학회 주최 세미나에서 “동북아 정세의 격동과 북한의 불안정성 증가로 국가 정보 역량 강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라며 “국회의 국정원 개혁 논의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 하루빨리 정보업무 효율화를 위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 이영종 기자

 

■2015.10.27  KLO 소속 유격백마부대원 6·25 때 이들이 없었으면 오늘날 NLL도 없다

‘제64주기 유격백마부대 전몰용사 추도식’이 10 26 12시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서 열렸다. 유격백마부대는 6·25 전쟁 당시 서해안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북 도서 12곳을 점령하고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 유격전을 벌였던 부대로, 전쟁 중 552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날 행사에는 윤종오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하여 KLO 8420 유격백마부대 전우회 관계자들 100여 명이 참석했다.

 

유격백마부대 전우회 최성룡 회장(납북자 가족모임 대표)은 인사말에서 “평북 정주군의 청년과 학생들로 구성된 유격백마부대원들은 서해안 일대에 있는 애도대화도, 신미도, 압록강 입구, 청천강 입구 등을 무대로 유격전과 첩보수집, 본토내륙에서 특수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유격전 사상 찬란한 성과를 이룩하였다”며 “이들의 영웅적인 활동과 희생이 없었으면 오늘날 북방한계선(NLL)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평북 정주군민회 박원근 회장은 “평안북도 일대의 치안대원과 오산학교 학생 등 나이 어린 청소년들이 모여 군번도 계급도 그리고 올바른 무기도 지원없이 오직 나라 위한 일념에서 북위 40도 선을 넘나들며 싸우기를 3, 이름없는 섬과 험한 산골에서 적탄에 쓰러진 전몰자가 552위에 이르렀다”며 유격백마부대원들의 희생을 추도했다.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은 추도사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 갈등의 뿌리는 광복 후의 좌우 갈등에서 시작하여 6·25 전쟁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아직도 종북 좌파들이 조국의 적화를 위해 준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편안히 잠들어야 할 호국영령들을 안심시켜 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송구할 뿐”이라고 말했다.

 

 

유격백마부대의 전신은 정주군 일대 13개 면에 조직돼 있던 치안대다. 유엔군이 북으로 진주할 때 평북 정주군 오산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학생과 청장년들은 향토 사수와 자유를 외치며 궐기하여 치안대를 조직하고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무기도 없고 훈련도 안 된 상태에서 정규군인 중공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최대의 위기에 몰린 정주군 각 면의 치안대들은 포구인 각산면 본저리로 집결했다. 각 면의 치안대들은 1950 11 22일 이곳에서 육군본부 G2 요원인 김응수(2003년 작고)를 부대장으로 추대하고 유격백마부대를 창설했다.

 

1971 9월 작성된 <국방부 장관의 전 유격백마부대에 관한 사실 증명>이란 자료를 보면 이 부대는 창설 후 서해의 여러 섬을 전전하면서 대공 유격전으로 북괴군 3000여명을 사살하고, 중공군 600여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애국 청년 2800여명과 동포 1 5000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외 적의 보급로 파괴(차단)와 중요 시설 기습 등 실로 빛나는 전공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격백마부대는 병력이 2600여 명으로 20개 유격부대 중 규모가 가장 컸으며, 이들 각 유격부대는 처음에 미 8군에서 관장하다가 1952 11월 미 극동사령부 정보처로 이관되었다. 휴전 후 국방부 산하 8250 부대로 흡수되어 유객대로 존속되어 오다가 1954 2월 국군으로 정식 편입되면서 해체되었다.

 

서해안을 지배하며 적에 대한 기습공격과 해상수송로 봉쇄 작전에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던 이들 유격백마부대원들은 1953 7 22일 휴전협정을 1주일 앞두고 유엔의 지시로 서해 북위 40도선 부근 12개 섬을 적들에게 넘겨주고 남하해야 했다. 그야말로 피와 목숨으로 점령했던 북쪽 지역의 모든 섬을 포기하고 남하를 한 것이다.

 

당시 심정을 한 유격백마부대 노병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가 고향땅을 찾으려고 그 수많은 동지의 피를 흘리며 싸운 건데 고향을 눈앞에 두고 떠나올 때의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NLL을 양보하느니 마느니 논란들이 있는 것 같은데 서해 푸른 바다 밑에 있을 우리 동지들의 넋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통곡하고 있을 겁니다. 나와 동지들이 지키고자 했던 우리의 영토는 그 NLL보다도 훨씬 이북 지역에 있던 곳입니다. 차라리 전투를 통해 빼앗긴 지역이라면 덜 억울하겠습니다.(월간조선 2013 8월호)

 

이날 추도식에서 최성룡 회장은  유격백마부대 전우회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였다.

-국방부는 우리 영토에 대하여 절대 타협하지 말라.

-국방부는 북한이 또 다시 도발, 공갈, 거짓말을 하면 북의 수뇌부를 쓸어 버려라.

-대통령은 확고한 공권력을 집행하고, 엄격한 법집행을 행하라.

-북한은 이산가족, 납북자, 국군포로에 대한 전면적인 생사 확인을 할 것이며, 천륜을 가지고 장사를 하지 말라. 정부는 떳떳하게 전면 생사 확인을 요구하라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6.09.05 "1946년 백의사(白衣社)의 김일성 암살 미수 사건 가담"

 

김인호(金仁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은 정정했다. 1928년생(호적상으로는 1926년생), 구십을 바라보는 그 연세의 어른 가운데 평탄한 삶을 산 이가 얼마나 있으랴만 그의 삶은 특히 신산(辛酸)했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독립운동자금 전달을 위해 압록강을 넘었다.


청년 시절에는 김일성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고 반공·반소(反蘇)운동을 하다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됐다. 학살의 와중에 구사일생한 후에는 유엔군 산하에서 대북첩보공작을 했다. 북파(北派)공작원 1세대인 셈이다. 그는 “세상에 공짜 밥 없듯 공짜로 굴러들어오는 평화는 어디에도 없다”며 “전쟁을 모르고 풍요만 아는 젊은 세대에게 내가 겪은 김일성 치하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1945 10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처음 등장한 김일성. 김인호씨도 이날 현장에 있었다.

김인호 부회장의 고향은 평북 영변이다. 그는 “북한 핵시설이 있는 그곳”이라고 했다.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은 할아버지가 달아준 셈이다. 평안북도 박천의 유지였던 할아버지(김용제·金用濟)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명룡으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전해 받고 이를 다시 등사해 평북 영변·정주·운산·태천·선천·구성·박천군에 전파(傳播)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사했다. 할아버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아버지(김은교·金殷敎)는 가족을 처가인 평북 영변으로 옮긴 후 만주로 망명했다. 1~2년에 한 번씩 일본 경찰 몰래 국내로 들어왔다. 김인호 부회장의 고향이 영변이 된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소년 김인호는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만주로 갔다.


만주 봉천에서 아버지를 만난 그는 아버지의 동지들 틈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한번 떠나면 기약이 없었다. 그를 보살펴준 여성이 있었다. 김원희라는 여성이다. 그는 나중에 아버지와 결혼했다. 계모였지만 김인호에게는 친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김인호는 계모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했다. 계모는 평양 중심지 본평양에 이화여관이라는 여관을 열었다. 이화여관은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거점이었다. 평양에는 경일여관이라는 임정 거점이 하나 더 있었다. 얼마 후 아버지도 평양으로 들어와 함께 여관을 경영했다. 김인호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는 부모 대신 압록강을 넘어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1945
5, 경찰이 이화여관을 덮쳤다. 아버지가 체포됐다. 아버지는 10일 만에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20여 일을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아직 독립운동을 입증할 증거와 증인이 없어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채 석 달이 되기도 전에 해방이 됐다. 김인호는 평양체신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체신전문학교는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와 전문대학의 중간쯤 되는 교육 과정이었다. 소련군이 들어왔다.


1945
10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가 열렸다. 너도나도 ‘전설의 김일성 장군’을 보러 운동장으로 몰려갔다. 김인호도 그중 하나였다.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받는 젊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사내답게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피부가 검었다.


백의사의 김일성 암살 미수

1946 2월 중순경이었다. 여관 마당으로 들어서자 어머니가 김인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관 뒤채에는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다. 서울에서 온 백의사(白衣社) 대원들이었다. 그들이 이화여관을 찾아온 것은 백의사가 임시정부의 신익희 선생과 연결돼 있었고 이화여관이 선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평양에 온 것은 3·1절 기념식장에서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대장은 이성열이라는 젊은이였다. 그는 “생전에 학생 아버지를 뵌 적이 있다”면서 도와달라고 했다. 김인호는 친구 이응용, 김병기를 끌어들였다. 그들은 이들의 거사 뒤에 살포할 삐라를 만들기로 했다.


“공산당을 타도하고, 소련군을 몰아내자!” “신의주 학생들의 피는 지금도 끓고 있다!


거사일이 가까워 오면서 다른 친구들이 가담했다. 3·1절 기념식은 평양역전에서 열렸다. 백의사 대원들은 모두 6개조로 편성되었다. 김인호와 친구들이 그들을 한 명씩 안내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김일성을 비롯해 김책, 강양욱, 최용건 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소련군 지도부와 함께 단상에 올랐다.


연설을 마친 김일성이 내빈들에게 인사를 하는 순간 백의사 대원 김성만(김학준의 《북한50년사》에는 김형집으로 되어 있음)이 단상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야코프 노비첸코 소련군 소위가 단상에 떨어진 수류탄을 주워 던지려는데 수류탄이 터졌다. 노비첸코는 한쪽 팔과 눈을 잃었다.


행사장은 난장판이 됐다. 김인호 등은 그 틈을 타서 반공 삐라를 뿌렸다. 김성만은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열은 다음날 아침 돌아왔다. 김일성 암살이 실패하자 백의사는 김일성의 외종조부인 강양욱을 노렸다.


원래 목사였던 강양욱은 김일성이 들어오자 공산세력에 붙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으로 출세했다. 마침 강양욱의 장남이 약혼을 했다. 백의사는 강양욱의 집을 습격해 폭탄을 던졌다. 강양욱은 집에 없었다. 대신 아들과 아들의 약혼녀를 비롯해 가족 여러 명이 죽었다. 살아남은 강양욱은 후일 북한의 국가부주석까지 올랐다.


이성열 등은 남쪽으로 탈출했다. 후일 김인호는 월남한 후 이성열을 몇 번 만났다. 서북청년회 감찰부장을 지낸 이성열은 명동 주먹들로부터 ‘형님’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김일성 암살 미수 사건 후 김인호 등 4명은 학교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특별히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니었지만 무기정학 처분이 떨어졌다.


조양단을 만들다

1947 10월 김인호는 평양 시내에 있는 여러 학교에 다니던 10명의 친구들과 함께 반공비밀조직 조양단(朝陽團)을 만들었다. ‘조선의 태양’이라는 뜻이었다. 여기에는 김일성의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외사촌 강창옥도 가담했다. 여성인 강창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조양단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화여관 지하실에서 등사기로 반공·반소 삐라를 찍었다. “조선은 소련의 식민지가 아니다!” “소련의 꼭두각시 김일성 일당을 타도하자!” 이런 삐라를 5000부 찍어 11월 초 집집마다 신문을 넣듯이 삐라를 투입했다.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학생들의 집에도 투입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시내에 불온한 내용을 담은 삐라가 나돌고 있다. 발견하는 대로 학교나 인민위원회에 신고하기 바란다”고 했다.


1948
년 음력설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내무서원(경찰관)들이 김인호의 집에 들이닥쳤다. 죄목은 결사반동죄(結社反動罪)였다.


배후를 캐기 위한 고문이 계속됐다. 널빤지에 묶어 뉘어 놓고 호수로 물을 들이부었다. 물을 잔뜩 먹어 배가 모란봉만 해지면 군홧발로 배를 짓밟았다. 개집만 한 공간에 사람을 밀어넣는 ‘비둘기장’이라는 고문도 있었다. 사지를 쪼그리고 며칠을 들어가 있었다. 밥은 안 주고 물만 조금 주는데 배고픔보다는 갈증이 더 심한 고통이었다. 학춤이라는 고문도 있었다. 밧줄로 허리를 묶어 철봉 같은 데 매다는 고문이었다. 몸이 축 늘어지면 내무서원들은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면 몸이 뱅뱅 돌았다. 한 시간 정도 매달려 있으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산당은 조양단 사건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남조선 특공대가 평양에 침투해 학생들을 선동해 만든 지하조직’이라고 발표했다. 김인호 등은 재판에 회부됐다.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단장 강명삼, 부단장 임희찬 등은 평양교화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지역장 이원용, 김용식, 황일남, 박춘근 등은 평양교화소(교도소), 아오지탄광, 본궁수용소 등에서 복역 중 소식이 끊겼다.


본궁특별노무자수용소

김인호는 평양교화소에 갇혔다. 벽이나 마룻바닥에는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교화소에는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성자(聖者) 같은 사람도 있었다. 김화식(金化湜)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같이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희망을 주시는 분”이라며 그를 격려해 주었다.


김 목사는 둥근 뿔테 안경에 이마가 넓었다. 눈매는 날카로웠고 지적(知的)인 분위기가 강했다. 항상 평온한 모습으로 동료 수감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김 목사는 거의 식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식사를 양보했다. 그런 김 목사가 보기 싫었는지 간수들은 시도 때도 없이 김 목사를 불러내 고문하고 폭행했다. 어느 날 김 목사는 앉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월남한 후에야 김인호는 김화식 목사가 ‘가고파’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김동진 선생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석 달 동안 평양교화소에서 지낸 후 김인호는 함흥의 본궁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감됐다. ‘본궁(本宮)’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임금 자리에서 물러난 후 머물렀던 곳으로, ‘함흥차사’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본궁특별노무자수용소는 악명 높은 아오지탄광에 버금가는 강제노동수용소였다.


이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흥남비료공장에서 하루 18시간씩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어린애 주먹 크기의 주먹밥 세 덩어리가 하루 식사의 전부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직접 뜨개질을 한 털양말이 차입품으로 들어왔다. 까칠까칠한 느낌이 들어 만져보니 털실과 머리카락으로 함께 짠 양말이었다. 김인호는 대성통곡을 했다. 동료들도 “세상에 이런 어머니는 없다”며 “나가면 어머니를 잘 모셔라”고 했다.


6
·25 소식을 접한 것도 수용소에서였다. 수용소 당국은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말라”고 포고했지만 수감자들은 동요했다. ‘국군이 쳐 올라오면…’하는 기대가 생겼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인민군이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학살

/1950 10월 공산당은 후퇴를 앞두고 함흥교화소 등에서 수감자들을 대량 학살했다.

10월 초순 어느 날 밤, 간수들이 죄수들을 불러냈다. 마흔 명 정도가 불려나갔다. 그들 중에는 죄수들의 존경을 받던 김진수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간수들은 식량이 부족해 이들을 함흥교화소로 이감(移監)한다고 했다. 김인호와 눈이 마주친 김 목사는 눈으로 “안심하라”고 말했다. 죄수들이 트럭에 올라탔다. 한 시간쯤 지나 빈 트럭이 돌아왔다. 이런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1950
10 14일 새벽, 마지막 남은 80여 명의 죄수들이 불려나갔다. 총으로 무장한 간수들은 왠지 허둥대고 있었다. 이들은 인근 니켈광산을 향해 끌려갔다. 나이 든 사람들은 갱도 속에 죄수들을 몰아넣고 죄다 죽일 것이라고 했다. 저 멀리 니켈광산의 입구가 보일 무렵, 국군 전투기가 나타났다.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해대는데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간수들만 나가떨어지는 것 같았다.


전투기가 사라진 후 죄수들이 다시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려 할 즈음, 총소리가 들려왔다. 교전이 아니라 신호음 같았다. 그 총소리와 함께 간수들이 사라졌다. 아마 간수들에게 철수하라는 신호였던 것 같다. 죄수들이 살아난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무장한 청년들이 나타났다. 공산당이 패퇴한 후 함흥에서 결성된 자치대원들이었다.


10
16일 국군이 함흥에 입성했다. 북진하기에 바쁜 국군은 반공청년들에게 후방의 치안을 맡겼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김인호와 동료들도 치안대에 들어갔다. 수감자 출신 김원덕씨가 대장이 되었다. 보름쯤 지났을 때 특무대(CIC) 3지구대가 흥남에 들어왔다. 부대장 공병익 소령은 김인호를 비롯 이응용, 김병기, 김병국, 조치호 등 조양단 출신 다섯 명을 불렀다. 공 소령은 이들을 현지 입대시켜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군번과 계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 국군 병사들은 치안대가 경비를 서고 있는 수은공장, 인조보석공장에 들어와 수은과 보석을 약탈해 가기도 했다. 국군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던 김인호 등은 실망했다.


애국지사시체발굴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처음 발굴을 시작한 곳은 함흥교화소였다. 100여 개가 넘는 감방마다 총에 맞아 죽은 처참한 시신들이 가득했다. 오물통에서는 도끼로 머리를 맞아 골이 쏟아진 시신들이 나왔다. 교화소 뒷마당에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든 김인호가 돌들을 들추어보니 피가 묻어 있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돌무더기를 헤쳐보니 도끼에 난자당한 여자들의 시신이 나왔다. 교화소에 있는 세 개의 우물에서만 1000여 구의 시신들이 나왔는데 대부분 여학생들의 시신이었다.


함흥교화소에서의 시체발굴 작업이 끝날 무렵 이승만 대통령이 함흥을 방문했다. 환영대회가 함흥시청 앞에서 열렸다. 김인호 등은 ‘반공애국지사’ 자격으로 특별석에 앉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발굴단원들을 불러 노고를 치하했다. 이날 행사가 끝난 후 김인호와 동료들은 며칠 동안 심하게 앓았다.


함흥교화소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산속 동굴들에서도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을 몰아넣은 후 총을 난사하고 다이너마이트로 굴을 폭파한 것이다. 시체가 훼손돼 도무지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 15000여 구의 시신을 합장한 후 위령제를 지냈다. 덕산의 니켈광산에서는 2만 구에서 3만 구 정도의 시신이 발굴됐다.


김진수 목사의 시신은 흥남교화소 뒷산, 신의주학생의거로 수감되었다가 학살된 학생들의 시신 사이에서 발견됐다. 1957년 김인호는 한경직 목사를 만난 자리에서 김화식 목사와 김진수 목사의 순교 상황을 전했다. 한 목사는 김인호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다.


귀향

CIC의 공병익 소령은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장교훈련소에 가서 훈련을 받고 오면 정식 장교로 임관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김인호 등은 고향행을 택했다. 고향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됐고 부모와 가족들을 보고 싶었다. 공 소령은 귀향휴가증과 특무대원 증명서, 소개서 등을 써주었다.


흥남에서 평양으로 가려면 원산 근처의 덕원으로 갔다가 마식령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지금 김정은이 스키장을 지은 바로 그곳이다. 이들은 몰랐지만, 그들이 평양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을 때 역사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장진호(長津湖)전투였다. 이들은 국군이나 미군부대를 찾아가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고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쫓기는가 하면 중공군과 조우하기도 하면서 평양 가는 길을 재촉했다.


이들이 평양에 들어선 것은 1951 1 7일이었다. 이미 국군과 유엔군은 남으로 철수한 지 오래였다. 평양은 다시 공산당 세상이었다. 가족과 감격의 재회를 한 것도 잠시 이들은 다시 숨어 사는 신세가 됐다. 김인호는 삼촌과 함께 집 마당 변소 아래 지하호를 만들었다. 친구 이응용이 유인용이라는 친척 형을 소개했다. 전쟁 전 보건성에 근무했던 유인용은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이었다. 김병기, 이응용·이응주 형제 등 옛 동지들이 지하호로 와서 같이 숨어 지냈다.


다시 지하조직을 만들다

/6006부대를 이끌었던 도널드 니콜스 미국 공군중령(오른쪽 끝).

지하생활에 지쳐갈 즈음 강창옥이 찾아왔다. 얼마 후 강창옥은 최명신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왔다. 최명신은 광택이 나는 종이 꾸러미를 풀어놓았다. 공민증을 만드는 용지였다. 손재주가 좋은 이응주가 공민증을 위조했다.


그해 6월 이들은 대한민국통일촉진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김인호 등 옛 조양단원들을 남으로 탈출시킨 후 한국군이나 유엔군의 정보기관과 손잡고 북한공산당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기림리에는 제7포로수용소가 있었다. 3000~5000명이 수용돼 있었다. 당연히 인민군의 감시는 철저했다. 수용소 내에는 급수시설이 부족했다. 콜레라와 이질이 번지자 인민군은 일부 포로들이 물을 길으러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용했다. 이들 중 일부가 강창옥과 연결이 됐다.


1952
7월경이 되자 인민군 철도국원 노평헌과 그의 약혼녀 이희숙(강창옥의 친구), 노평헌의 친구 석기봉 등이 연결됐다. 석기봉은 강화도의 6004호크부대 소속 공작원이었다. 6004부대는 미국 CIA(중앙정보국) 요원인 도널드 니콜스 공군 중령이 지휘하는 특수부대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강창옥도 니콜스의 정보원 중 하나였다. 어떻게 이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1940년대 후반 니콜스가 북한에 첩보망을 만들 때 이미 포섭이 된 것 같았다. 강창옥은 김인호 등에게 북한이 포섭해 대남공작원으로 남파하려는 국군포로 명단 등을 전달했다.


6006부대

/부대원 한정숙씨의 훈련 수료증. 한국 공군 정보국장 명의로 되어 있다.

 

7 7일 김인호 등은 남으로 향했다. 천신만고 끝에 남한에 도착한 이들은 도널드 니콜스가 지휘하는 6006부대에 배속됐다. 이 부대는 공군 20특무전대, 공군 5392부대 등으로 불린 한국공군특수부대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부대였다. 이 한국공군특수부대는 후일 실미도부대의 모체가 됐다. 6006부대와 5392부대는 한 몸과 같은, 한미공군 합동특수부대였다. 김인호 등은 특수요원양성소인 종로구 원남동 수산물 검사소에 있던 공군심문학교를 마친 후 교동도에 있는 이글부대로 나갔다. 탈출한 국군포로 출신 정의석이 부대 책임자, 김인호가 공작과장, 이응용이 감찰과장을 맡았다.


그해 9월 김인호 등은 평양으로 침투했다가, 탈출 포로, 공작원, 월남을 희망하는 북한 기관 근무자 등 12명을 대동하고 귀환했다. 이들이 가져온 정보에는 미림비행장 등 북한 주요 비행장 위치 및 현황, 국군 및 미군포로수용소 관련 정보, 철도 등 북한의 운송 체계와 소련의 보급물자 수송로 등에 관한 정보들이 있었다. 중국 다롄(大連) 앞바다까지 침투해 중국 선박을 나포해 오기도 했다.


희생도 많았다. 1953 7 27일 휴전이 된 후 북한 귀순병을 심문하던 김인호는 그로부터 고향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와 강창옥 등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강창옥과 최명신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후 공개처형되었고 어머니와 삼촌은 15년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김인호와 이응용 등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평양방송과 《로동신문》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보상금 시비

김인호씨는 1957 6006부대를 떠났다. 그의 아들 김대진씨에 의하면 미군들과 함께 일했던 경험을 살려 자동차공장을 하거나 미군 물품을 취급하면서 한때 돈을 좀 만지기도 했다고 한다.


2006
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김인호씨도 11470만원을 보상받았다. 얼마 후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보상금을 토해내라고 했다. 그는 미국 공군 소속의 6006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김인호씨는 “조사관들에게 12시간 넘게 닦달을 당했다”고 분개했다. 그는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미국 공군 6006부대와 한국 공군 5392부대는 혼성부대로 사실상 한 부대라는 것을 입증해 겨우 승소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미국 공군 첩보요원으로 일했다. 그건 내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고 대한민국을 위해 일했다. 내 보상금을 환수하려 든 것은 주한미군 철수, 맥아더 동상 철거, 한미 FTA 반대 등과 같은 우리 사회 일각의 반미(反美)사조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8억원 넘게 보상해 주면서 나라를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지(死地)를 넘나들었던 사람을 이렇게 홀대한다면 앞으로 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겠는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2019. 10월 호

국정원 출신 친목모임 양지회장 송봉선

■‘정보요원’ 생활 27년 동안 그가 겪은 사노맹 검거 등 秘話 고백

⊙ ‘후배’ 최종흡·김승연 재판을 빠짐없이 방청한 ‘의리파’
⊙ ‘DJ 비자금 뒷조사’ ‘국정원 댓글사건’은 언젠가는 재조명돼야
⊙ 양지회원들의 수사 상황 적은 메모 한 장 때문에 檢 조사 받아
⊙ “국정원 ‘메인 서버’에 담겼던 극비자료, 변호사·검사들에게 유출”
⊙ 사노맹과 조국, 그리고 ‘박노해 검거’
⊙ ‘이름 없는 별’ 중 한 명인 故 최덕근 영사 暗殺 비화
⊙ 장승길 이집트 주재 北대사 아들 만나 ‘망명 의사’ 최초 포착
2018년 한 해에만 1200여 명 脫北… 文 정부하에서도 이어지는 ‘탈북 러시’

宋鳳善
1946
년생. 양정고, 고려대, 연세대 대학원 졸업 / 駐사우디대사관 서기관, 駐이집트대사관 영사관·참사관, 국가안전기획부 북한연구조사실 중국팀장·단장, 인하대 초빙교수, 고려대 북한학과 겸임교수, 북한연구소 소장 역임 / 저서 《사생활로 본 김정일》 《김정일 철저 연구(일어판)》 《북한은 왜 멸망하지 않는가》 《중국을 통해 북한을 본다》 등 

        

 

국가정보원(국정원) 출신들의 친목모임인 사단법인 양지회는 문재인 정권 출범과 함께 불어닥친 이른바 ‘적폐청산’의 유탄을 맞았다.
 
 
‘국정원 댓글사건’에 양지회 회원들이 개입했다는 이유로 검찰 조사 대상에 오른 것이다. 양지회는 압수수색을 당하는 한편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이 소환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을 누구보다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본 이는 송봉선(宋鳳善·73) 양지회장이다. 조사 대상자 중 대다수가 송 회장의 국정원 후배였기 때문이다. 송 회장도 자택을 압수수색당하는 한편, 검찰에 불려가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양지회가 ‘융탄폭격’을 맞았음에도 송 회장은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일간지에 “北 ‘해킹 외화벌이’ 대응 강화해야” “文·金 공조가 한·미 동맹보다 우선인가” “국정원 對共수사권은 유지돼야 한다”는 제하의 칼럼을 꾸준히 게재하며 문재인 정부의 안보정책과 대북정책을 매섭게 비판했다.


 
의리파

/국가정보원 청사.

 

취재차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송봉선 회장이지만, 그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건 ‘DJ 비자금’ 의혹을 취재하면서다. 송 회장은 최근 ‘DJ 비자금을 뒷조사했다’는 혐의(국고 손실 등)로 구속수감된 최종흡 전 국정원 차장과 김승연 대북전략국장 재판을 빠짐없이 방청했다. 재판을 방청하러 갔을 때, 그에게 인사를 건네면 으레 “어이, 조 기자 왔어?”라며 안부를 물었다. 송 회장이 매번 방청한 이유는 간단했다. 두 사람 다 ‘아끼는 후배’여서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은 그런 송 회장을 ‘의리파’라고 입을 모은다.
 
  1973
년 중앙정보부에 입부(入部)한 그는 중동(中東) 등지에서 해외 정보관 생활을 오래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시절엔 북한연구조사실 단장을 맡아 대북 정보 분석에 있어서도 전문가로 불린다. 2000년 국정원에서 퇴직한 그는 현직 시절의 전문성을 살려 북한 관련 서적도 다수 집필했다.
 
 
송 회장은 올해 말, 3년 임기의 양지회장직을 마무리 짓는다. 송봉선 회장으로부터 재임 중 겪은 ‘양지회 수사’를 비롯해 국정원을 개혁 대상으로 바라보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시각, 현직 시절의 비화(秘話) 등을 들어봤다.
 
 
2017년 양지회가 ‘국정원 댓글사건의 본산(本山)’이라는 식의 보도가 나와 떠들썩했는데, 곧 잠잠해졌습니다.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댓글과 국정원 특활비까지 포함해 총 39명의 전·현직 국정원 직원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죠.
 
 
― 그중 인신구속된 사람은 몇 명입니까.
 
22명이죠. 재판 과정에서 집행유예로 나온 사람도 있고, 구속기간 만료로 나온 사람도 있어요. 1년에서 1 6개월 형 받은 분들은 거의 다 만기 출소한 상태예요.
 
 
― 전직 국정원 심리전단장들이 주로 고초를 겪고 있던데요.
 
“‘댓글 혐의’를 받은 유성옥 전 단장은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받아 수감 상태입니다. 민병주 전 단장은 대법원에서 집행유예 확정 판결을 받았고요.
 
 
― 양지회에서 전·현직 간부 중 직접적인 혐의를 받은 사람은 누군가요.
 
“전직 양지회장 두 명 중 한 명은 집행유예, 다른 한 명은 무죄를 받았어요. 전직 기획실장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습니다.


 
메모 하나로 검찰에 불려가

/2017 8 23일 서울 서초구 양지회 사무실에서 국가정보원 댓글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압수수색을 마친 후, 압수품이 담긴 상자를 옮기고 있다. 사진=뉴시스

 

  ― 전직 회장들이야 전() 정권 시절 회장을 지냈으니 이해가 가는데, 본인은 왜 조사를 받은 겁니까.  “한창 검찰 조사가 이뤄질 때 양지회 차원에서 대책회의를 연 적이 있어요. 대책회의라기보다는 티타임 수준의 간담회였죠.
 
 
― 그게 조사받을 이유가 됩니까.
 
“그때 내가 A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조그맣게 메모를 한 게 있어요. 누가 어떤 이유로 조사를 받았고, 어떻게 됐는지를 적은 메모였죠. 그걸 가지고 검찰이 ‘왜 이런 걸 썼느냐’고 묻더라고요. 내가 ‘명색이 양지회장인데 당연히 우리 회원이 어떤 경위로 조사를 받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죠. 두 번이나 그렇게 조사를 받았어요. 우리 집도 압수수색당하고.
 
 
― 당황스러웠겠습니다.
 
“건수만 하나 있으면 구속하려고 그러는데…. (검찰이) 전직 회장 중 한 명에게 ‘국정원으로부터 격려금 500만원씩 받고 (양지회가) 댓글을 썼다’고 몰아붙였는데, 나중에 돈 받은 적이 없는 걸로 확인돼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죠.
 
 
― 별건(別件) 조사로 의심되는 정황은 없었습니까.
 
“우리 여직원 중 한 명이 컴퓨터에서 어떤 파일을 실수로 지워나 봐요. 그걸로 그 사람은 여섯 번이나 검찰에 불려갔어요. 검찰에서 여직원한테 ‘(송봉선) 회장이 (지우라고) 지시했냐’고 물어봤다는데, 내가 시킨 적이 있어야죠. 그 여직원도 ‘그런 적 없다’고 했고요. 결국 컴퓨터를 가져가 뒤지고 했는데, 특별한 건 안 나왔어요.
 
 
― 양지회 회원들이 했다는 댓글 조작이 말 그대로 조직적인 거였습니까.
 
“난 몰랐는데, 우리 사무실 지하에 컴퓨터가 두 대 있었대요. 회원들이 사무실 오면 가지고 놀던, 뭐 그런 거였나 봐요. 거기서 뭘 좀 한 거 같더라고.
 
 
― 문제의 댓글을 읽어봤는데, 대선(大選) 당락에 영향을 주는 그런 내용이라고 보십니까.
 
“그런 건 아니죠. 좌파들의 체제 전복 활동을 비판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국정원 퇴직자 중 김모라는 사람이 ‘(국정원이) 안가(安家)에서 댓글 작업 하고 있다’고 현직 여직원을 고발하는 바람에….


 
사노맹과 조국, 그리고 ‘박노해 검거’ 秘話

/1991 3, 안기부 수사관들이 박노해가 조직원들과 함께 각종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 관련 유인물을 만들어온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지하인쇄소를 수색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 국정원 여직원이 고초를 겪었죠.
 
“민주당 인사들이 그 여직원 오피스텔로 몰려갔잖아요. 나중에 보니 민주당을 직접 겨냥한 댓글이라기보다는 좌파 세력의 준동을 비판한 댓글에 불과했어요. 사실 국정원이라는 데가 뭐하는 뎁니까. 좌파들의 활동에 맞대응하는 곳 아닙니까. 지금은 일이 이렇게 돼버렸지만, 이 사건은 언젠가 반드시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얼마 전 출소한 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최근에 만나봤습니까.
 
“만났죠.
 
 
―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이병기 원장 얘길 들어보니깐 박근혜 전 대통령하고 독대(獨對)를 못 해봤대요. 이병호 원장도 아마 독대를 몇 번 못 한 것 같아요. 원세훈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을 수시로 만났거든요. 대통령은 정보 수장(首長)인 국정원장의 얘길 들어야 하는데 박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좀 부족했던 게 아닌가….
 
 
―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인터뷰 당시 후보자 신분)로 인해 정국이 시끄럽습니다. 조국 후보자가 연루됐던 ‘사노맹 사건’에 대해 과거 안기부 수사관 얘길 들어보니 ‘평생 그렇게 적발하기 어려운 공안사건은 처음이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어땠습니까.
 
“일단 조국씨의 역할은 그리 별 볼 일 없었어요. 사노맹에 가입한 게 아니라 사노맹의 연구단체 격인 ‘남한사회과학원’에서 사회주의 관련 유인물을 제작하는 정도에 불과했죠. 수사망에 들어왔을 때에도 안기부는 (조국씨에 대해)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요.
 
 
― 그때 안기부가 동원한 수사 인력만 1000명이 넘는다고 하던데요.
 
“주범은 박노해 부부, 그리고 백태웅이었죠. 수사에 관여했던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박노해 검거 과정이 재밌었다고 해요. 박노해가 하도 신출귀몰하니까 수사관이 머리를 썼어요. 박노해 아내한테 ‘당신 남편이 어디서 연애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속임수를 쓴 거죠. 그 얘길 듣고 아내가 화나서 남편의 소재지가 어딘지 밝혔다고 하더라고요. 그 덕에 검거할 수 있었던 거죠.

 
 
DJ 비자금 뒷조사 재판, 본말이 전도”

/‘DJ 비자금 뒷조사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최종흡 전 국정원 2차장. 사진=조선DB

 

― 얼마 전 ‘DJ 비자금 뒷조사’ 관련해 최종흡 국정원 차장과 김승연 대북전략국장의 1심이 마무리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1심에서 두 사람 모두 실형을 받았습니다.
 
“본말이 전도된 판결이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당시 도○○ 미국 시애틀 영사가 보내온 DJ 비자금 관련 첩보를 최종흡·김승연 두 사람이 맡아 조사한 게 답니다. 왜 조사를 했냐? 첩보의 내용이 ‘DJ 비자금으로 의심되는 돈 중 일부가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려는 정황이 있다’는 거였기 때문입니다. 의심되는 비자금의 총액은 ‘135000만 달러’였고, 그중 ‘1억 달러’가 북한으로 들어간다는 게 도 영사의 첩보였어요. 국정원은 그걸 응당 추적해야 할 의무가 있죠. 손 놓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근데 재판부는 사안의 본질은 간과하고 회계 처리의 미비만 가지고 두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 당시 ‘원세훈 국정원’이 관련 ‘수표 사본(寫本)’을 확보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월간조선》이 그에 대해 보도를 했습니다만.
 
“제일 중요한 게 그겁니다. 1억 달러 수표 사본이 존재하는 것과 그 수표를 인출하기 위해선 네 사람의 코사인(co-sign·공동서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네 사람이 누군지도 재판에서 언급됐어요. 사인한 장소인 한 호텔, 거기다 사인한 증서(證書)까지 다 입수했다고 해요. 증거가 명확한 셈이죠. 그런 건 안 따져보고 무슨 회계 처리 미비 어쩌고….
 
 
― 도○○ 전 영사는 최종흡·김승연에게 유리하게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유리하게 했어요. 유리하다기보다는 사실대로 얘기했죠. 근데 그렇게 말해봐야 뭐해…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요.
 
 
DJ 일가와 친분이 깊고,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A씨를 만났더니 비자금에 대해 모른다는 입장입니다.
 
“그렇겠지. DJ 일가가 다치니까. A씨는 조사를 받았나?
 
 
― 참고인 조사도 받은 적이 없답니다.
 
“그렇다면 DJ가 흠집 날까 봐 국정원 쪽만 치는 거 아닌가. 말이 안 되는 얘기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회계가 본질이 아니고 ‘DJ 비자금과 그중 일부가 북한으로 유입되려는 정황이 있었다’가 본질이죠. 언젠가 다시 조사해서 《월간조선》이 또 특종하세요.
 
 
― 최종흡·김승연 두 사람 면회도 갑니까.
 
“엊그제도 갔어요.
 
 
― 최종흡 차장과 김승연 국장은 어떤 성격의 소유자입니까.
 
“열심히 하는 친구지. 최종흡은 과거 이병호 국정원장이 말레이시아대사로 있을 때, 거기서 같이 일해서 두 사람이 가까워졌죠. 최종흡씨는 러시아에도 있었고요. 열심히 일하는 친구야. 의리도 있고요. 김승연은 나랑 같이 일했는데, 육사를 나오고 아주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 일만 없었으면… 미국의 어느 회사에서 일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출소하면) 머리가 좋은 친구라 잘될 거예요.


 
文 정부 국정원 개혁은 잠복 중… 총선 승리하면 再浮上할 수도

/2019 5 28일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을 항의 방문해 양정철 민주연구원장과 서훈 국정원장의 만찬 회동에 대해 “국정원의 정치 관여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혀라”며 서 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국정원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만든 ‘국정원 적폐청산위원회’가 ‘슈퍼컴퓨터를 열람해 비밀자료를 열어봤다’는 등 의심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걸 원() 내부에서는 흔히 ‘메인 서버’라고 부르는데, 그걸 열었다는 거잖아요. 그래 뭐, 서버를 열어서 보는 건 그렇다 칩시다. 문제는 그 자료가 특정 변호사는 물론, 판사들의 사무실에까지 들어가 있다는 거죠.
 
 
― 극비자료가 그런 식으로 유출돼 있다고요?
 
“일부가 그렇게 가 있나 보더라고. 보안상 문제가 커요. 아무리 적폐청산이 중요하다고 해도 대외비(對外秘) 자료를 그렇게 다루면 안 되죠.
 
 
― 한창 적폐청산 운운할 때, 이 정부가 국정원의 명칭을 ‘대외안보정보원’으로 바꾸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잠잠해졌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국내 정보 파트를 없앤다면서 그 얘기가 나온 건데, 사실 국정원은 그 어떤 이름을 써도 상관은 없어요.
 
 
―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 개혁 의지가 퇴색했다고 봐도 되는 겁니까.
 
“퇴색이라기보다는 현재는 개혁 드라이브를 잠시 중단하고, 잠복하고 있는 걸로 보여요. 내년에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다시 또 수면으로 떠오를 수 있어요.
 
 
― 국내 정보가 막혀 있다 보니 서훈 국정원장도 (국내) 정보에 목말라하는 거 같습니다.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을 만난 것만 봐도 그렇고요. 최근엔 ‘문재인 국정원’도 민간인 사찰을 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이게 다 국내 정보 수집이 안 돼 빚어진 문제 아닙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죠. 정보기관이 국내 정보 수집을 안 한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중요한 건 두 사람(서훈·양정철)이 만난 자리에서 어떤 정치적 밀약(密約)이나 국정원이 선거에 도움 주겠다는 얘기가 없었어야죠. 그간의 약속이랑 배치되니까요. 김태우 전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이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조국씨가 민정수석으로 있을 때 하는 일을 유심히 봤는데 옛날 국정원이 하던 일을 하고 있더랍니다. 이게 뭘 말하는 거겠습니까.
 
 
―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이 마치 정치 개입으로 비친 감이 있죠.
 
“국내 정보 수집을 안 한다고 국정원이 공언했지만, 정보라는 건 국내외·대북 정보가 전부 같이 맞물려 돌아갑니다. 국내 정보는 반드시 해외나 북한으로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이 세 개는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국정원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게 바로 선거에 개입하는 겁니다.


 
‘이름 없는 별’ 중 한 명, 故 최덕근

/2018 7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원 청사에 설치된 ‘이름 없는 별’ 조형물 앞에서 묵념을 한 후 방명록을 남기고 있다. 사진=뉴시스

  

  ― 서훈 원장 얘기가 나와서 여쭤봅니다. DJ 정부 시절 국정원 고위직을 지낸 사람에게 물어보니 서 원장 자체는 ‘나이스(nice)하다’고 하던데요.
 
“흔히 말하는 왼쪽 성향은 아니에요. 지금 저쪽 진영에 속해 있으니까 아무래도 성향이 그렇게 비치는 감은 있죠. 성격도 원만하고 괜찮은 사람이에요. 서훈 원장을 훈육한 훈육관도 그렇게 평가하고요. 운동도 만능이었다고 해요.
 
 
―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마찬가지로 안기부 시절 ‘학원사찰’ 업무를 하지 않았습니까.
 
“학원과에서 근무했었죠. 거긴 잠깐 있었고, 그다음엔 남북대화 담당하는 전략국에 있었어요.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일을 맡아 2년가량 북한에 가 있었죠.
 
 
― 그때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 게 없습니다.
 
“북한에 있었으니까 우리로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죠.
 
 
― 서훈 원장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세 정권에 몸담으며 남북정상회담을 세팅한 주역(主役)입니다. 북한 김정일은 생전에 ‘서훈 동지’라고 부르면서 서 원장의 안부를 묻곤 했다는데, 왜 그랬을까요.
 
“글쎄… 유능하니까 ‘저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뭔가 좋아할 만한 구석이 있었겠죠.
 
 
KEDO에 있을 때 북한 고위층과도 안면이나 교분을 쌓지 않았을까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죠.
 
 
― 국정원 원내에 ‘블랙요원(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요원)’ 임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한 이들을 위해 세운 ‘이름 없는 별’이란 조형물이 있지 않습니까. 이들이 수행한 임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잘 알겠지만 보안상 요원들의 개별 활동에 대해선 밝힐 수 없어요.(웃음) 《조선일보》 기자도 그것 좀 자세히 알려달라고 그랬는데 알려줄 수 없었어요.
 
 
― 몇 개만이라도 좀….
 
“생각이 잘 안 나네. ()에서도 보안사항이라 안 알려주려고 합니다. 《조선일보》 기자도 못 얻고 돌아갔다니까요.
 
 
― 그중 한 명이 1996년 북한에 의해 암살된 최덕근(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영사)씨 아닌가요.
 
“최덕근을 알아? 최덕근씨는 원래 우크라이나 영사를 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명령이 나서 갔다가 변()을 당했어요.
 
 
― 최덕근 영사도 원래 국정원에서 오랫동안 정보분석하던 분 아닙니까.
 
“그 사람 애널리시스(analysis·분석) 하던 분인데 안타깝게도 안전에 조금 소홀한 면이 있었죠. 너무 안됐지.
 
 
― 안전이요?
 
“그 양반이 안타까운 게 원래 새 임지에 부임하면, 보안시설이 다 돼 있는 전임자의 숙소로 입주하는 게 관례예요. 근데 최 영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새 집으로 들어갔대요. 문제는 그 집이 CCTV가 제대로 안 돼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보안이 허술했던 거지. 그래서 북한 놈들이 냄새를 맡고 살해한 거 같아요.


 
장승길 駐이집트 北대사 망명 비화

/장승길 전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 사진=KBS 뉴스 캡처

 

  ― 이듬해 황장엽 북한노동당 비서와 장승길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가 망명했는데, 장승길 대사 건()은 본인이 관여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관여하고) 있었죠. 사실 장승길 아들 중에 장철민이라고 있어. 걔가 이집트 영국문화원에 영어를 배우러 오곤 했어요. 그때 아마 열일곱 살이었을 거예요. 담배도 피우고 그랬는데…. 근데 그놈이 우리 대사관저에 전화를 해 ‘내가 북한대사 아들인데 남조선으로 가고 싶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만나서 ‘너 정말 (남한으로) 가고 싶어?’ 그랬더니 ‘가고 싶다’고 그래요. 왜냐고 물으니까 ‘조선이 싫다’고 하더라고요.
 
 
― 그랬더니요.
 
“본부(안기부)와 장철민을 국내로 송환할지 여부를 두고 의논을 했습니다. 본부 입장은 ‘(장철민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국제 분쟁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다’였어요. 납치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러는 와중에 장철민이 이스라엘로 튀었어요.(웃음) 아마 미국하고 접선(接線)을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캐나다로 간 거까지 확인했는데 그 뒤는 모르겠어요.
 
 
― 장승길 대사는요?
 
“그로부터 얼마 안 있다가 장승길이 탈출한 겁니다. 난 장승길을 이집트공항에서 만난 적도 있어요.
 
 
― 그건 장승길 망명이 이뤄질 때의 얘긴가요.
 
“그전에 우연히 봤을 때 얘기죠. 그때 장승길더러 ‘여긴 어쩐 일입니까. (김일성·김정일) 배지가 좋아 보입니다’라고 농()을 하니까 ‘에티오피아에서 손님이 와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대요. 그러더니 나한테 ‘여기(이집트)에 한국 사람 많이 나와 있죠’라고 물어봅디다. 내가 ‘많이 있습니다’ 했더니 ‘그 사람들 돈은 얼마나 받습니까’라고 또 묻대. ‘한인 식당 주방장의 경우, 3000달러 받습디다’ 했더니 ‘어이구, 그렇게 많이 주느냐’며 놀라더라고.(웃음)
 
 
― 실제로 그렇게 많이 줬어요?
 
“맞아 그랬어. 사실 북한대사 봉급이 얼만지 내가 빤히 알았거든. 그때 북한대사 봉급이 250~300달러 정도였어요. 그 돈 가지고 생활이 불가능하죠. 담배나 술을 ‘프리숍(free shop)’에서 싸게 사 갖고 시중에 비싸게 팔면서 이익 챙기는 게 일이었어요.
 
 
― 결국 쪼들리는 생활비와 아들 때문에 장승길이 탈출을 감행한 거군요.
 
“그때 장승길의 친형이 프랑스 북한무역대표부 대표로 있던 장승호였어요. 장승길이 장승호한테 연락해 형제가 같이 미국으로 갔죠. 그 뒤로 우리가 심문을 요청했는데 미국이 거절해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우리가 관여도 못 했고요. 아마 아들하고 부인하고 다 같이 미국 정부의 보호하에 살고 있는 거 같아요.
 
 
― 장승길 부인이 북한에서 유명한 배우였죠.
 
“유명한 북한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에 나오는 배우 최혜옥이었지. 굉장한 미인(美人)이고 키도 커요.
 
 
“‘흑금성’ 김정일 안 만나… 만나줄 級 아냐”
 
 
― 작년에 개봉해 화제가 된 영화 〈공작〉 아시죠. 영화의 실제 주인공 ‘흑금성’ 박채서가 벌인 대북공작 역시 본인이 직접 관여했던 걸로 압니다.
 
“관여라기보다는… 뭐 잘 알곤 있죠.
 
 
― 박채서가 ‘김정일을 만났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만난 거 맞습니까.
 
“안 만났어. 박채서 본인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 정도 급()은 김정일이 만나주질 않아요.
 
 
― 당시 안기부도 박채서의 움직임을 다 파악하고 있었죠.
 
“그렇지. 그때 대선(1997)을 앞두고 있었잖아요. 박채서가 우리랑 일을 벌이면서 동시에 정치권 유력 인사들하고도 선()이 닿아 있더라고요.
 
 
― 일종의 ‘이중 플레이’ 같은 건가요.
 
“보기에 따라선 그렇죠. 영화에서는 흑금성이 북한에 가 김정일을 만나고, ‘총풍(銃風)사건’을 기획했다는 식의 얘기도 나오던데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북한에서 광고 촬영권을 얻어 사업을 하겠다는 게 다였지, 그 외에는 사실이 아니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북한은 박채서를 이용해 선거 정국에서 나오는 정보를 좀 얻으려고 한 거 같아요. (박채서는) 그 이후에 작전교범을 현역 육군 소장한테 건네 받아 북한에 준 걸로 한 번 더 걸렸을걸요?
 
 
― 자신의 3사관학교 선배인 현역 소장한테 받아 유출한 걸로 2010년 구속됐죠. 그 장성(將星)은 보직해임돼 구속됐고요. 중장 진급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장성씩이나 된 사람이 아무리 공개된 교범이라고 해도…. 그건 말이 안 되지. 잘못된 거죠.
 
 
― 총풍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그건 ‘김영삼 청와대’가 직접적으로 연관됐던 거 아닙니까.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공작원하고 접촉해 ‘이회창씨 당선을 위해 휴전선에서 총을 쏴달라’고 부탁한 경남 마산 출신의 B씨를 안기부가 검거했죠. 우리(안기부)가 정보 수집을 통해 처음 포착한 겁니다. 당시 안가가 꽉 차 있어 내가 우리 부()의 정모 심문관한테 ‘김포공항에서 B의 신병을 인수한 뒤 모텔로 가 조사하라’고 지시했어요. 사실 총풍은 안기부하고는 전혀 무관해요. B씨가 ‘청와대 비서관 누구누구하고 친분이 있었다’는 얘기만 있을 뿐이죠.
 
 
―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총선 직전, 안기부 예비비를 선거자금으로 썼다는 이른바 ‘안풍(安風)사건’도 있었습니다.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그 돈을 받아 지구당(현재의 당협위원회)에 뿌렸다는 건데요.
 
“국회 차원에서 돈을 받아 여당이 쓴 건 확실해요. 중요한 건 (안기부 돈을) 여당만 받아 쓴 게 아니라는 거지.


 
― 김대중씨가 총재던 새정치국민회의나 김종필씨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도 받아 썼다는 얘긴가요.
 
“여당이 좀 더 많이 받았겠지만 야당도 받아 썼어요. 지금은 큰일 날 일이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안기부 돈을 여야(與野)가 나눠 쓰는 게 별문제가 없었나 봐요. 나도 국회 예결위원장 출신 중진 국회의원한테 들은 거예요.


 
지금도 ‘탈북 러시’는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북한 동향을 계속 분석하고 있는 송봉선 회장은 “보도가 안 돼 그렇지 지난해에만 1200여 명의 북한 주민이 탈북했다”고 귀띔했다. 통상 2000명 수준이던 데 비해 감소한 수치지만, 문 정부하에서도 남한으로 향한 ‘탈북 러시’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렇듯 북한 정권이 무너져가고 있음에도,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숨통 틔워주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요지의 비판도 했다. 그의 말이다.
 
 
“이 정부는 북한에 맹목적이에요. 대화에 굶주려 있어서 그런지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을 유리잔같이 조심스럽게 다루려고만 해요. 반면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비난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어요. 문재인 정부를 이용해 어떻게든 제재 국면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 정부는 그런 북한에 기대나 하고… 걱정이 커요.
 
 
송 회장은 “오는 11월 부산에서 ‘한()-아세안 정상회담’이 열리는데, 이때 정부가 전격적으로 김정은을 초청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한반도 무대’를 넘어 김정은을 ‘국제 무대’에 데뷔시켜준다는 의미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가) 내년 총선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김정은의 방남(訪南)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도 내년 재선(再選)을 앞두고 있어, 미국 입장에서도 그리 나쁘지 않은 카드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2021. 04월 호  공군첩보대 비화

■유일한 女 북파 공작원을 만나다!

“밤 11시 공동묘지 데려가 담력 훈련시켜”

⊙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고 정의는 승리합니다”(어느 90대 공작원의 고백)
⊙ “첩보 공작원을 낙하산으로 침투. 인민군 집결지와 보급 수송 방법 확인”
⊙ “첩보대 평양파견대와 도널드 니콜스 美 6006부대 고문단장… 김일성宮 접수”
⊙ “휴전협정 직전 美 헬기를 탔던 북파 공작원 수백명… 대다수 못 돌아와”

/어느 90대 북파 공작원의 책상에 놓인 자필 문구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라고 믿고 있었다.

  

공군 특무부대(훗날 공군 첩보부대) 출신 노병(老兵)들을 만났다. 이름하여 ‘북파 공작원들’이다. 대개 민간인 신분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해 만들었다는 ‘실미도 부대’가 바로 그들이다. 남북대치라는 극한 상황이 만든 비극적 희생양들이었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베일에 가려졌으나 서해 함박도 논란이 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이 그들의 주 무대였기 때문이다.(《월간조선》 2019년 10월호 ‘충격증언 함박도 공군 첩보대원들’ 참조) 앞서 2003년 12월 24일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실미도 부대의 존재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서울 구로구에서 90대 북파대원을 만났다. 자식들은 모두 출가하고 아내는 사별해 혼자 살고 있었다. 그의 책상 한 귀퉁이에 적힌 자필 문구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진실을 외면하면 그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고 정의는 승리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보이려 쓴 글이 아니었다. 신(神)에 대한 겸손한 기도였다.

 

  공군 특무대는 6·25전쟁 당시 서해 NLL상의 여러 섬을 기지로 대북공작을 펼쳤다. 또 이 섬에서 파견부대를 운영했는데, 파견부대가 있던 섬으로 강화도, 백령도, 연평도, 납섬(평안북도), 교동도, 주문도, 말도, 어화도 등이 있다.
 
  북파 요원들은 공작원, 통신원, 호송원, 선원 등으로 구성되며 대개 민간인 신분이었다. 다만 대원들을 관리하는 파견대장은 장교와 문관, 상사 계급이었다. 이들은 미 극동공군 6006부대와 정보를 교환하며 북파공작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일부는 한국군이 아닌 미 6006부대 소속 첩보요원들이었다


  공군 첩보대의 대북 첩보활동 비화

  공군 북파 첩보대원 수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공군 정보전우회를 통해 확인한 자료를 대략 종합하면 약 400명 안팎이다. 이들 중 100여명 정도는 북파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공군 정보전우회 관계자의 말이다.
 
  “2004년 10월 집권당인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에 근거해 3년에서 5년에 걸쳐 최소 9500만원에서 최대 2억8000만원에 이르는 보상금을 북파 공작원에게 지급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작전 수행을 객관적으로 증명 못 한 이들은 아직 보상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생존자는 10여명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과 고령에다 정신착란에 시달리며 비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건강이 점점 나빠져 하루하루가 고비다.
 
  기자는 이들의 활동상을 정리한 ‘자필 문서’를 공군 정보전우회 관계자로부터 건네받았다. 이 문서는 공군 특무대를 이끌던 윤일균 장군(尹鎰均·1926~2017)이 생전에 남긴 일지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문서 제목은 ‘6·25전쟁 발발 후 공군 첩보대의 대북 첩보활동 비화’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보았다. 일부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이름을 일부 가렸고 오탈자를 고치고 비문을 바로잡았다. 독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긴 문장은 임의로 나누었다.
 
  현재 국방부는 이들의 활동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혹은 이들의 당시 신분이 미 공군 소속 6006부대와 관련 있다는 이유로 공적(功績)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6·25전쟁 발발 후 공군 첩보대의 대북 첩보활동 비화
  미 6006부대 고문단과 韓美 합동 첩보작전으로

/6·25전쟁 당시 B-26폭격기들이 북한 군사기지와 보급시설 등에 네이팜을 퍼붓고 있다. 공군 폭격은 당시 공군 첩보대 북파 공작원의 정보 제공이 큰 역할을 했다.

 

 [1] 6·25전쟁 발발 후 공군 정보 종사자들은 김포비행장과 여의도비행장에서 각기 철수하여 수원에 집결하였다. 윤일균 대위 지휘하에 집결 인원을 점검하고 7월 4일 주명○ 소위와 이경○ 중사, 김복○ 하사를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침투시켜 남하 진격 상황을 파악하고 귀대하였다.
 
  그해 8월 1일 처음으로 미 6006부대 고문단과 한미 합동 첩보작전으로 적지인 인천지구와 전남 지역에 첩자 공작원을 낙하산으로 투하해 침투시켰다. 이들을 통해 인민군 집결지와 보급 수송 방법에 대해 파악하고 소련제 T-34 탱크의 야간 이동과 위장 상태를 확인한 뒤 무사 귀환하였다.
 
  [2] 1950년 8월 5일 아군의 대전차포와 박격포에도 끄떡하지 않는 소련제 T-34 탱크 한 대가 평택시 교외 노변에 정차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일균 대위가 김원○ 하사와 이기○ 상병을 적진에 침투시켜 포복으로 탱크에 접근했다.
 
  이들은 탱크 안으로 침입하여 조사한 결과, 탱크 안에 방화에 대한 방어 장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귀대하여 이 정보를 미 5공군사령부 상황실에 통보했다. 이후 T-35 탱크 공격을 항공기에 의한 *네이팜(Napalm)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그 후 각 전선에서 까맣게 탄 T-34 탱크를 다수 목견(目見)할 수 있었으며, 낙동강 전선에서 T-34 탱크의 출현을 한 대도 목견할 수 없었다.
 
  (*네이팜: 알루미늄 비누와 휘발유를 혼합하여 만든 고농도 연료다. 화염 방사기에 사용하며 이 연료를 충전한 폭탄이 네이팜탄이다. 네이팜탄은 3000℃의 열이 발생하여 목표물을 태워버린다.)
 
  [3] 1950년 9월 7일, 1차로 정보요원 58명을 모집, 일본의 미군기지에 급파하여 단기 첩보교육을 실시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9월 18일 2차로 경찰 통신사 25명과 정보요원 15명 등 40명을 모집해 일본 미군기지에서 첩보 수집 방법을 교육받고 귀국했다.
 
  이후 미 6006부대 고문단과 한미 합동 첩보작전으로 격전지인 낙동강 전선 후방과 경인지구에 C-49 수송기에 (북파 공작원을) 실어 낙하산으로 침투시켰다. 해상으로는 인천 지역에 경찰 통신사가 통신장비를 휴대하고 침투하여 인민군 집결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교신으로 통보하였다. 이후 군사 목표물을 맹폭격하여 유엔군과 국군의 전선 전투 지역에서 승리하는 전과가 여러 차례 있었다

 
  민간인 反共동지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2020년 9월 24일 오후 서해 대연평도에서 군인들이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서해상은 한국전쟁 당시 공군 첩보대의 주 무대였다.

 

  [4]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될 때 양동작전으로 공군 첩보대는 미 6006부대 고문단과 합동으로 미 고속정을 타고 함경남도 연포비행장에 침투 주둔하였다. 정봉○ 상사를 파견대장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 정보 하사관 5명과 공군 헌병 20명을 중무장시켜 비행장 주변의 해안과 인민군 동향을 감시하다가 2개월 후 전격 철수하였다.
 
  [5] 유엔군과 국군이 1950년 10월 15일 평양에 입성할 때 이건○ 중위를 평양 파견대장으로 임명했다. 이 중위와 14명의 정보 하사관, 그리고 미 6006부대 도널드 니콜스 고문단장과 미군 4명이 김일성궁(宮)을 접수, 주둔하면서 김일성이 사용하던 고급 승용차와 통신 장비, 가재 도구, 서적 등을 소련제 지프로 운반해 서울로 후송하였다. 또 각종 군사 정보를 수집한 후 철수하였다.
 
  [6] 1950년 10월 18일 윤일균 대위는 별도로 현역 정보 하사관 7명을 대동하고 평양 변두리와 함경남도 지역을 둘러보았다. 이들은 현지 민간인 반공(反共) 동지를 통하여 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인민군의 후퇴 경로 및 무장 상태를 파악하고 철수하였다.

 

/2020년 9월 24일 오후 서해 대연평도에서 군인들이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서해상은 한국전쟁 당시 공군 첩보대의 주 무대였다.

 

[7] 1951년 1·4후퇴 후 공군 첩보대는 평안북도 선천 앞바다에 있는 신미도와 납섬을 장악하고 파견대를 주둔시켰다. 또 철산리, 애도, 운문도, 백령도, 연평도, 대수압도, 강화도, 숙도, 교동도, 말도, 주문도, 어화도에도 파견대를 설치하는 등 서해 지역 20여 곳에 파견대를 장악,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인민군 미그-15 전투기와의 공중전이 잦았는데, 미 공군 조종사들에게 “북한 지역 목표물을 폭격하다가 피격당했을 때 서해지구 도서 해상에 불시착하라”고 알렸다. 이후 서해지구 파견대 요원들이 추락한 여러 명의 미 조종사들을 구출하여 귀환한 사실이 있었다.  

   
  추락한 여러 명의 미 공군 조종사들 구출

/미 극동공군 6006부대 창설자 도널드 니콜스는 6·25전쟁 당시 美 중앙정보국(CIA)의 첩보대장이었다

 

  [8] 1951년 4월 10일 만주 접경 상공에서 미 F-86 전투기(일명 F-86세이버 전투기로 ‘쌕쌕이’로 불렸다)와 공중전에서 추락한 미그-15 전투기의 잔해를 특수 공작원 김중○ 외 18명이 평북 신미도에 낙하산으로 침투하여 미그기 중요 부품을 회수하고 전원 무사히 귀환한 사실이 있었다.
 
  [9] 1951년 4월 17일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모래사장에 불시착한 미그-15 전투기 부품 탈취 작전에 미 6006 고문단장 니콜스와 윤일균 대위, 이봉○ 소위 외 9명의 하사관이 C-119 수송기를 타고 낙하산으로 침투했다.
 
  미그-15 주요 부품을 분쇄 탈취하여 H-19형 헬리콥터로 수송해 귀환하였다. 그 결과, 미그-15기의 제원(諸元)을 파악하여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작전 가담자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10] 1952년 6월 13일부터 10월 30일 사이 납섬에 맥아더 장군의 ‘만주(滿洲) 폭격작전’ 구상에 따른 각종 정보수집을 위해 김기○ 파견대장과 공작원 김진○ 외 29명, 공군 현역 통신사 1명, 공작선 선원 3명이 주둔했다.
 
  이들은 중국 어선 3척과 중국 선원 14명을 생포하여 서울 공군 첩보부대 본부로 후송하였고 신의주, 선천, 곽산, 압록강을 거점으로 막강한 적의 대공 포진지 배치와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 후 진입에 대한 현황 정보를 수집하였다.
 
  또 미 F-86 전투기와 적(敵) 미그-15 전투기 간 공중전에서 추락한 미군 조종사 구출 작전을 여러 번 성공리에 완수하고 전원 철수하였다.
 
  같은 시기에 납섬 부근의 애도 파견부대에 15명의 공작원이 주둔하면서 각종 군사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중공군의 보복 기습 공격으로 2명만 생존하고 전원이 전사했다.
 
  [11] 평북 철산리 파견대장 유명○(93) 준위는 중공군 개입으로 수도 서울이 재차 공산 치하에 들어갔을 때 최북방 파견대장으로 임명받았다. 그는 김종○ 중사와 함께 평북 고향에서 피란 나온 임두○·이명○·이기○ 등을 포섭하여 첩보 수집 방법을 교육시켰다.
 
  이들은 고향 친척과 연고자를 점조직으로 활용하면서 중공군과 인민군의 남하 이동 상황과 보급물자 수송에 대해 위치 정보를 공군에 제공했다.
 
  이후 항공기에 의한 폭격 전과(戰果)가 많았다. 이로 인해 중공군과 인민군 사기가 현저히 저하되었음을 인민군 포로의 진술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강화도 파견대장이던 유 준위는 강화도에 피란 온 이들 중에 반공사상이 투철한 이들을 선발해 군사 첩보 수집 방법을 교육시키고 각자 고향 연고지로 야반 침투시켰다. 이들은 옹진반도와 개성지구 전방의 인민군 군사 정보를 수집해 귀환했다.
 
  이들의 첩보는 미 5공군사령부 상황실과 강릉 공군비행장 작전 상황실로 전달돼 폭격 전과가 다대(多大)하여 윤일균 첩보대장에게 노고를 칭찬받았다.
 
  그는 3년 전부터 치매 증세가 심하여 집에서 요양 중이다.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신청을 모두 3차례에 걸쳐 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증거 불충분이 이유였다. 그러나 불복해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2]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후 한상○(90)씨는 서해 NLL 최전방인 용매도 공군 첩보대 파견대장이었다.
 
  당시 파견대 공작원 김승○, 강명○, 조광○, 장재○, 김의○, 이봉○, 박남○ 등이 자기 고향 연고지에 나룻배를 타고 10회 이상 야반에 침투해 점조직을 구축하고 정보를 수집해 한상○ 파견대장에게 제공했다. 이 정보는 아군에 직보되어 신속한 폭격이 이뤄져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또 육군HID 인천 첩보대장이 직접 용매도 공군 파견대를 찾아온 일도 있었다. 그는 최전방 폭격물 위치, 김일성 고지, 백마고지에 대한 항공기 지원 사격을 요청해 육군 지상군과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그 결과, 강릉 공군비행장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일명 호주기)가 100~200회 이상 출격하여 맹폭격, 중공군과 인민군의 사기가 저하되어 전의(戰意)를 상실하였다.
 
  용매도 파견대는 DMZ, 서해 NLL에 가장 가까운 위치여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에도 북한의 군사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자주 공작원들을 침투시켰다.
 
  공작원을 호송할 선원이 부족해 한상○ 파견대장이 직접 참여해 (용매도) 전방 개성 지역의 군사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특수임무수행자’ 신청을 하였으나 자료 부족과 인우 보증인의 사망으로 지금껏 보상을 받지 못한 상태다.


  첩보대의 유일한 女공작원

/미 극동공군 6006부대 창설자 도널드 니콜스는 6·25전쟁 당시 美 중앙정보국(CIA)의 첩보대장이었다

 

  [13] 박순희(朴順姬·86)씨는 공군 첩보대의 유일한 여성 공작원이었다. 다른 여성도 첩보대에 있었으나 모두 중도에 포기했다고 한다.
 
  고향은 평양으로 1950년 10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 가장 앞장서서 반겼다고 한다. 당시 박씨는 인민군이 후퇴할 때 미처 운반하지 못한 보급 물자창고와 인민군 주둔지를 국군에게 제보한 일도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자 그녀는 도보로 혼자 월남해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개성, 해주 등지에 머물다가 인천 교동도로 피란해 정착했다.
 
  기자는 지난 3월 10일 인천 부평에서 박순희씨를 만났다.
 
  “공군 특무대(당시 첩보대)가 무얼 하는 곳인지 모르고 가담했어요. 교동(도)파견대에서 자고 있는데 밤 11시경 군인들이 저를 깨워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 담력 훈련을 시키더군요. 무서워 덜덜덜 떨며 이틀간 교육을 받았죠.”
 
  그때가 1952년 9월 중순 무렵으로 기억한다. 박씨는 “훈련은 받았어도 북한에 정말 갈지는 몰랐다”고 했다. 박씨는 1954년 8월 21일까지 공군 제90특무대, 공군 제20특무전대 5392부대 등지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군인들이 뗏마(작은 배)에 태워 동료 공작원 김○○씨와 함께 북에 침투시켰어요. 김씨의 고향(황해도 연백군 금산면)에 머무르며 정보를 수집했죠. 제가 활동할 당시 휴전을 위한 남북회담이 진행 중이었는데도 서부 전선의 중공군과 인민군의 병력이 계속 증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또 병력 이동과 보급차량 이동 상황, 개성 송악산과 해주시 야산 계곡에 야전포와 중화기를 설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며칠 후 마중 나온 뗏마를 타고 교동파견대로 돌아왔어요.”
 
  박씨는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한 정보로 많은 전공(戰功)을 올렸다. 한미(韓美) 전투폭격 비행단이 주요 목표물을 정밀 타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휴전협정 이후 교동파견대에 함께 있던 공작원 이응용씨와 결혼해 슬하에 2남 2녀를 낳았다. 남편 이씨는 1992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특수임무수행자’ 신청을 했으나 그때마다 기각됐어요. 근거 자료 부족에다 미 6006부대 소속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글쎄… 당시 미군 병사들의 얼굴을 본 적조차 없는데 미군 소속이라니…. 먼저 떠난 남편도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그날이 올까요?”
 
  박씨가 기자에게 건네준 문서에는 정부의 보상기각 결정 사유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상자 박순희님의 특수임무수행 관련 대내 자료 확인 및 참고인 등 대외 조사 결과, 첩보부대에서 근무한 사실이 없는 자로 확인됨에 따라 법률 제2조 제1항 2호 및 시행령 제4조 제1항에 의거 비대상자로 판단되어 본 건 신청을 기각합니다.〉
 
  박씨는 이렇게 말한다.
 
  “6·25전쟁 때 사선을 넘던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함박도 어민 납치사건을 목격하다!

/공군 장교에서 예편한 뒤 북파 공작에 참여한 정영훈씨.

 

 [14] 기자는 2019년 9월 공군 예비역 대위 출신 정영훈(鄭英壎·91)씨를 만나 1965년 10월 29일 서해 함박도(말도 부근)에서 일어났던 어민 피랍사건을 《월간조선》을 통해 보도한 적이 있다.
 
  그는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군에서 예편(그해 8월 31일)한 상태였고, 공작자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비로 배 두 척과 공작대원 5명을 모았다.
 
  “그 무렵, 황해도 해주의 사리원비행장에서 북괴 무장 인민군 300여명이 AN-2기에 나눠 타고 서울 여의도와 마포나루터로 기습한다는 첩보를, 당시 위장 귀순한 간첩 한정서와 이월규의 신문(訊問) 과정에서 확인했어요. 우리 국군의 월남파병과 한일 국교정상화를 막으려 한다는 것이었죠.”
 
  정영훈과 북파 공작원들은 1965년 9월 30일 무렵 말도에서 배를 타고 2시간30분가량 올라가 황해도 해주 인근 앞바다의 ‘돌산도’에 잠복했다. 그곳에서 10월 4일까지 사리원비행장의 동향을 정탐한 결과, 첩보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임무를 마친 뒤 그들은 어민 244명과 배 5척에 나눠 타고 10월 29일 함박도에 조개잡이를 나갔다.
 
  “중무장한 인민군 20명이 기다렸다는 듯 따발총과 수류탄으로 포위하는 바람에 어민 135명은 구출했지만 109명은 결국 납치되고 말았어요.”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남녀 어민 각각 53명과 51명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지만 침몰한 배의 선장과 기관장, 잡혀간 어민 3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또 어민통제 요원으로 공작에 참가한 정씨의 동생 영국씨는 어민 구출 과정에서 바닷물을 너무 많이 먹어 3년 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저는 당시 어민 104명이 송환된 후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었지요. 그러나 자비로 썼던 공작자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
 
  그는 또 자신의 ‘특수임무수행’과 관련한 보상금 신청이 수차례 좌절됐다. 동료 대원들의 인우 보증을 받아 관련 서류를 제출했지만 근거가 부족하다는 통지만 받았다.
 
  “1972년 6월 실미도 폭동사건 이후 자기네들이 불리한 대북 첩보 공작 관계 서류와 전사(戰史) 자료를 모두 소각 인멸해버리고 말았어요.”
 
  그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제가 국가를 위해 한 일은 분명한 사실이고, 아직 살아 있으니 반드시 밝혀지리라 확신합니다. 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휴전 후 북파 공작원들의 안타까운 죽음

  “‘잉여인간들’을 북파에 투입시켰다. 생사는 모른다”(도널드 니콜스)

/언론인 출신의 소설가 최금산씨가 2016년 《한미 연합 첩보전 6006, 첩보왕 도널드 니콜스》(경지출판사)라는 소설을 펴냈다. 픽션이지만, 6·25 당시 미 첩보대장 도널드 니콜스의 회고록과 첩보요원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였다. 최씨는 “스토리 텔링이 조금 필요했지만 관련 사실은 전부 팩트”라고 귀띔했다


  이 책의 ‘서해 말도 반란’장(章)에 북파 첩보원 이야기가 나온다. 때는 휴전협정으로 38선이 생긴 직후다. 북파 공작원의 처리 문제가 불거졌다. “북파돼 귀환하면 평생 편안히 먹고살게 해주겠다”며 전국을 물색하여 끌어들인 첩보원들이 애물단지가 된 것이었다.
 
  일부 북파 요원들은 군번과 활동기간에 따른 보상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미 당국은 비밀 첩보부대를 운영, 공작원을 북한에 보냈다는 것을 시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널드 니콜스는 미 극동사령부에다 북파 공작원들의 신원 문제를 질의하였으나 답이 없자 이들을 재(再)북파시켜버렸다.
 
  〈… 나는 극동사령부의 답을 기다리다 지쳐서 첩보요원들을 개성 지역으로 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황해도 해주 상공 800m 지점, 서해 주문도에서 직선거리로 76km. 미군 헬리콥터로 첩보요원들을 하나씩 뱉어내기 시작하였다.…〉(286쪽)
 
  미군 헬기를 탔던 북파 공작원 수가 수백명에 달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니콜스는 북한 구월산에서 서해 말도로 철수하는 특수부대 군인 400여명을 첩보요원들을 통해 수장시킨 일도 있었다.
 
  〈… 휴전협정 5개월 전에 나는 끔찍한 비밀공작을 펼쳤다. 한명이라도 부담을 덜어보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구월산에서 말도로 철수하는 특수부대 군인 400여명을 수장시켰다. 이들이 탄 배를 첩보요원들에게 북한의 배로 오인하게 하여 침몰시킨 것이다.…〉(291쪽)
 
  우군이 우군을 물귀신으로 만들었다. 말도에 귀환하면 예우를 요구할 것 같아 니콜스는 ‘적군의 공격으로 위장하여 400여명을 고기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설은 니콜라스의 음성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 그 후에도 나는 여러 차례 이들 잉여인간들을 북파 활동이라는 명분을 달아서 북한으로 투입시켰다. 그 후 그들의 생사 여부는 하나도 확인이 안 되었다.…〉
 
  여기서 ‘잉여인간들’이란 바로 북파 공작원을 말한다. 소설을 쓴 최금산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증언과 자료로 쓰인 진실에 가깝습니다. 도널드 니콜스는 1992년 10월 18일 66세 나이로 플로리다 양로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한국전쟁 당시에 모았던 골동품과 달러와 금을 미국 어디론가 수송기를 이용해 10여 차례나 실어 갔다고 합니다.
 
  그가 수집한 골동품 가운데는 국보급도 상당수 있었고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갖고 온 사료도 있었다고 해요. 그러나 그의 사후 니콜스의 유품과 일지, 그리고 비밀장부가 남김없이 사라졌다는 풍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