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 이야기7/ 2021 코메디언 구봉서 편
'한국 코미디의 代父' 구봉서
"평생 웃겼지만… 우습게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웃으면 복이 와요
자꾸 웃을 일 만들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야죠
그것이 행복입니다
애칭처럼 '막둥이' 됐네'
후라이보이' 곽규석이랑 최고의 콤비였죠
배삼룡과도 잘 맞았고… 그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거실 바닥이며 탁자, 소파가 하도 깨끗해 파리가 낙상(落傷)할 듯했다. 모든 물건이 군대 관물대처럼 반듯하게 각 잡혀 정리돼 있었다. 주인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다. 이윽고 안방 문이 열리며 구봉서(具鳳書)가 나타났다. 흑백 TV의 이미지로 고형화(固形化)돼 있던 그를 실물로 대면하는 일은,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추억은 되새기는 것만으로 늘 짙은 농도의 웃음을 선사해준다.‘ 웃으면 복이 와요’시절을 얘기하던 구봉서가 환하게 웃었다. 그는“개그콘서트처럼 소재 제약이 거의 없이 연기하는 후배들이 부럽다”며“우리 때는 남자가 여장을 해도 방송 금지였다”고 말했다.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올해 86세인 그의 낯빛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멋지게 센 머리는 잘 정돈돼 있었고 쥐색 양복바지엔 주름 하나 없었다. 다만 오래전부터 불편한 왼쪽 다리와 오른쪽 귀에 꽂은 보청기, 그리고 드문드문 핀 검버섯이 한국 희극의 나이테처럼 보였을 뿐이다. 일찌감치 세상 떠난 서영춘, 곽규석, 그리고 1년여 전 병상(病床)에서 영원히 내려온 배삼룡까지, 한국의 제1세대 코미디언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변함없이 후배들에게 격려를 주는 1세대는 구봉서와 송해(85)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방 악극단을 떠돌던 배삼룡은 물론, 작곡가 서영은의 동생 서영춘, 남철·남성남 콤비, 남보원, 이기동, 이상용을 발굴해 TV에 데뷔시킨 구봉서는 어쩌면 코미디언이라기보다 '한국 코미디 최초의 프로듀서'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른다.
지난 11일 서울 잠원동 자택에서 만난 그에게 "'막둥이'란 별명이 1세대 코미디언 중 제일 마지막까지 계실 분이란 뜻인가 보다"고 하자 그가 웃었다.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가 이제 살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자료로 쓰려는 건지 요즘 갑자기 신문·방송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아요. 너무 많아서 좀 귀찮을 정도예요. 그래서 대부분 다 사양하고 있어요." 그는 코흘리개 때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고 자란 젊은 손님에게 꼬박꼬박 존대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예전에 영화 촬영하다가 다친 왼쪽 다리를 그 후에 두 번이나 더 다쳐서… 지팡이를 짚어야 걸어 다녀요. 매주 화·목·토요일은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하고, 월·수·금요일은 재활치료를 해요. 일요일엔 교회에 가니까, 일주일 내내 출근할 데가 있는 거지. 바빠요, 아주." 그는 1965년 영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다.
―한동안 서예(書藝)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2년 전에 욕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뒤론 못해요. 그때 뇌수술을 받는 바람에 죽었다는 소문이 많이 났어요. 미국에서 전화가 왔더라고. 혹시 죽었느냐고 물어요. 전화받고 있는 사람한테 죽었느냐고 물어, 참 나."
―작년에 코미디언 후배 100여명을 점심 초대해서 화제가 됐었죠.
"아니 윗대가리 한 열 명쯤 오라고 했더니 100명이 넘게 왔어요. 할 수 없이 다 치렀지."
―그만큼 존경받는다는 뜻이겠죠.
"존경은 무슨… 어려워하긴 하겠죠."
―그 몇 달 전 배삼룡씨가 돌아가셨죠. 그래서 후배들을 대접한 것도 있습니까.
"그게… 나는 옛날 얘기는 안 해요. 약이 올라서."
―약이 오르다니요.
"옛날 얘기 하면 그립고 약이 올라요. 가수 애들이 '내가 젊었을 때 인기가 어쩌고저쩌고' 하면 내가 불러서 말해요. '야, 네가 뭘 그렇게 인기가 대단했니. 그랬다 해도 그게 다 옛날이야. 현실에 살아. 아무리 난다 긴다 했어도 옛날 얘기만 하는 건 바보야.' 삼룡이 생각은 늘 해요. 잠 안 올 때 가만히 생각하죠. 그 자식 있었으면 전화해서 '내일 좀 만나자' 했을 텐데, 그런 생각."
―생전에 그만큼 친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걔하고 나하곤 성격이 달라서. 나는 좀 다혈질이에요, 급하고. 걔는… 하여튼 걔가 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아무리 바빠도. 원래 느긋한 사람이에요."
희극배우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던 1960년대 초 구봉서의 모습.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갑내기 배우인 배삼룡에 대한 구봉서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배삼룡이 병상에서 의식을 잃자 병실에 찾아가 "야 인마, 빨리 죽어. 네가 빨리 죽어야 네 딸들이 고생을 안 하지"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통곡했었다. 그 얘기를 꺼내니 구봉서는 "의식이 없어서 못 듣고 말도 못하니까 '빨리 죽으라'고 그랬지, 아니었으면 그랬겠느냐"고 쓰게 웃었다.
구봉서는 1997년 펴낸 자서전 '코미디 위의 인생'에서 배삼룡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정말 타고난 광대였다. 사람들은 배삼룡이 바보스러운 말을 하는 걸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건지 정말로 못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는 대사를 외우지 못했다. 대사를 너무 못 외워 극 중 가족 이름도 다르게 부르고, '탕수육 한 접시에 고량주 다섯 병' 해야 할 걸 '탕수육 다섯 병에 고량주 한 접시' 하기 일쑤였다. 시청자들은 그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더 많이 웃었다. 상대 코미디언은 예측할 수 없는 그의 연기와 대사에 맞추느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는 과장도 잘해서 그의 말은 언제나 10분의 1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화폐개혁'이라고 부르곤 했다."
―배삼룡씨보다 곽규석씨와 콤비였다면서요.
"그렇죠. 농심 라면 광고에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했던 것도 규석이죠. 한 10년 전쯤엔가 제가 규석이한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를 늙은 얼굴로 다시 한 번 하자고 했어요. 걔도 좋다고 하고 농심에서도 좋다 했는데, 그만 규석이가 아프기 시작했죠."(미국서 목회를 하던 곽규석은 99년 71세로 숨졌다)
1926년 평양서 태어난 구봉서는 첫돌을 서울에서 맞은 사실상 서울사람이다. 치과 의료기기상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교동초등학교 시절 이미 라디오에 출연해 '국어 독본'이란 프로그램에서 책 낭송을 했다. 물론 이때 '국어'는 일본어였다. 어려서 오르간을 연주했고, 고교 때 아코디언을 배운 그는 광복되던 해 대동상고를 졸업하고 현제명 선생의 사숙(私塾)에서 그를 사사한 성악가 지망생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당시 최고 인기가수 김정구와 그의 친형 김용환이 이끌던 '태평양 가극단'에 들어간 것이 그 삶의 물줄기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유명한 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데 들떠서 아버지께 '딱 사흘만 한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 게 그냥 내 길이 됐어요. 사흘이 나흘 되고, 나흘이 열흘 된 거죠." 여전히 그는 음악을 사랑한다. 악기는 더 이상 연주하지 않지만 특히 라틴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라틴 음악을 들을 때가 많다고 했다.
―코믹 연기는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마포에 있던 도화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갑자기 조연을 맡은 희극배우가 사라진 거예요. 단장이 무조건 나더러 대신 무대에 올라가라는데 정신없이 하고 내려오니 한 선배가 '잘했다'고 칭찬을 해요. 그 길로 영원히 발목을 잡힌 거죠."
―어려서 꿈은 책방 주인이었다면서요.
"나는 대학을 못 다녔지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건 모두 어려서부터 읽었던 책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때 이미 '레미제라블'을 일본어로 읽었어요. 도스토옙스키도 모두 일본어로 읽었죠. 지금도 일본 문예지를 많이 읽어요. '문예춘추'는 매달 꼬박꼬박 읽다가 최근엔 그렇게 못해요. 일본에서 매달 책을 보내주던 친구가 죽었거든. 그래서 요즘엔 문고판 소설을 많이 읽지요. 책을 꾸준히 읽었기 때문에 '웃으면 복이 와요' 원고도 쓸 수 있었어요."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요것도 내가 다 만든 거요"
―'웃으면 복이 와요' 원고를 직접 썼습니까.
"그럼요. 한 2, 3년 썼죠. 그땐 코미디 작가가 없었거든."
평생 단짝이던 구봉서와 배삼룡은 무대에서 시작해 TV로 진출했다가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지난 1999년 악극무대에 두 사람이 함께 선 모습.
―배삼룡씨나 이기동씨도 원고를 썼나요.
"걔들은 책이나 글과는 거리가 멀었어요.(옆에 있던 부인이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하고 묻자) 안 읽어. 걔들은."
―그럼 그때 '배 수한무…'로 시작하는 히트작도 직접 썼습니까.
"내가 썼지요. 일본책 뒤져서 쓴 거예요. 수한무(壽限無),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이게 다 책에 나오는 거죠."
―그럼 '사까이야소 호리호리야소'나 '모리모리 셋뽀리깡'도 일본 책에 나오는 겁니까.
"하하하. 그건 그냥 엉터리로 지어낸 거지. '난다이난다이 지기지기난다이'도 지어낸 거고. 아니, 이 사람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당시에 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죠. '양반 인사법'도 엄청난 히트였잖아요.
"그건 죽은 박시명이 쓴 원고를 내가 윤색했어요."
'양반 인사법'은 두 상민이 양반이라고 속여 혼담을 주고받는데 등을 맞댄 채 양반 말투를 적은 쪽지를 보며 대화를 하는 내용의 코미디다. 구봉서와 배삼룡이 각각 혼주이고, 박시명이 인사법을 적어 준다. 그 시작은 이렇다. ▲구봉서: 별 밑에 인사법! ▲배삼룡: 그건 제목이오. ▲구: 처음 면상하겠습니다. ▲배: 상면이오. 면상이 아니라. ▲구: 아명은 일봉이라 합니다. ▲배: 아명은…(쪽지를 보여주며) 이거 무슨 글자요? ▲구: 심하다, 심해. ▲배: 아명은 심해라 합니다.
희극인의 길도 희극처럼
가극단 조연배우 잠적해 엉겁결에 무대 올라갔지
잘한다고 칭찬하대요
그 길로 영원히 발목 잡혔죠
이 이야기를 할 때쯤 구봉서의 얼굴에 전성기 때 그 웃음이 피어났다. 그는 "약이 올라서 옛날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여전히 옛날을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웃으면 복이 와요' 이전엔 악극단 활동만 했습니까.
"극단에서 악기 연주도 하고 희극 배우도 하고, 6·25 때는 라디오 진행도 했어요. '홀쭉이' 양석천씨하고 둘이 했었죠. 무슨 내용이었는지 다 잊어버렸는데, 하나만은 기억해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 아나운서는 참 예뻤다는 거. 그때 스튜디오에 가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는데, 참 예뻤어요. 하하하. 그리고 KBS 개국, TBC 개국 때도 방송 출연했죠. 개국 때 초대받지 못한 건 이번에 TV조선 뿐일걸 아마?"
―'영화배우 구봉서'는 요즘 사람들에겐 덜 알려졌죠.
"1956년에 '애정파도'로 영화에 데뷔해, 400편 넘게 출연했어요. 그중에서도 1958년에 찍은 '오부자'가 내 출세작이지요. 을지로4가에 있던 국도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제작자가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국도극장 얼마면 살 수 있느냐'고 말하고 다녔으니까."
나도 영화배우다
'오부자' 등 400편 넘어요 따르는 소녀팬들 엄청났죠
스캔들 있었냐고?
에이, 아내가 듣고 있는데…
'오부자'는 4형제를 장가보내는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코믹 드라마로, 구봉서는 '영·웅·호·걸' 4형제 가운데 막내인 '걸' 역할을 맡았다. 그때 붙은 별명이 '막둥이'로,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애칭이 됐다. 구봉서는 "그때 처음으로 '인기'라는 것이 내게 있음을 실감했고 '배우도 화장실에 가나요?' 같은 소녀팬들의 질문도 받아봤다"고 말했다.
―여자 팬들도 많았을 텐데 스캔들은 한 번도 없었네요.
"(아내 쪽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데 그럼 있었다고 해야 돼요?"
젊은 구봉서에겐 물론 여자 팬이 많았다. 젊은 시절 '두주불사 청탁불문(斗酒不辭 淸濁不問)'으로 술을 좋아했던 그는 총각 시절 꽤 화려한 연애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눈 감고 손을 뻗으면 걸리는 게 여자일 만큼 여자가 많이 따랐다"고 했다. 그러나 스캔들이 없었던 데 대해서는 "본래 스캔들이란 남이 지어내서 퍼뜨리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이 표시를 내기 때문에 나기 마련"이라고 썼다. 그는 아내 정계순(74)씨를 중매로 만나 두 달 만에 결혼했다. 6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젊고 건강한 정씨는 구봉서의 노년에 큰 힘이 되는 듯했다. 정씨는 "우리가 결혼할 때도 덕성여고 애들이 '오빠, 오빠' 하면서 따라다녔어요. 그 애들이 얼마 전까지도 찾아오고 그랬어요. 다들 같이 노인이 돼가는 처지인데도요"라고 했다.
코미디 없앤다? 택시 없애!
70년대 문공부장관이 코미디는 저속하다고 난리야
박정희 대통령께 달려갔지
어쩌긴? 없던 일 됐지
―박정희 대통령에게 '코미디 없애려거든 택시도 없애라'고 했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70년대에 문화공보부 장관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코미디를 모두 없앤다고 했거든요. 그때 마침 박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 나하고 곽규석이 갔어요. 내가 '저속한 코미디 한두 개 있다고 코미디를 다 없앨 거면, 가끔 교통사고 내는 택시도 모두 없애야겠네요' 식으로 말했죠.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웃더라고요.
그래서 없던 일이 됐죠."
시인 양병호는 '구봉서와 배삼룡'이란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밤 웃고 웃어도/ 와야만 할 복은 기별조차 없는데/ 흑백으로 단순명쾌한 세상은/ 빚 독촉하듯 서두르며 출렁출렁 흘러만 갔다" 구봉서는 "'웃으면 복이 와요'를 군사정권 시대의 마취제로 해석한 사람도 있다"는 말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나는 그저 주어진 무대에서 배우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웃으면 복이 와요'는 1985년에 폐지됐죠.
"좋은 작품이 안 나오더라고요. 나도 지쳤고. 우리가 아이디어 다 짜내서 주면 작가가 그거 엮어서 고료 받고, 우리한테는 여전히 얼마 안 나오고. 코미디를 너무 우습게 봐요. 지금도 개그맨들 하는 거, 그거 다 걔들이 직접 하는 거예요. 얼마나 받고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사업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했죠. 한 번 했다가 망했어요. 처남이 하는 재생 플라스틱 사업에 돈을 대고 '회장' 직함까지 얻어서 우쭐했었죠. 그리고는 오일쇼크가 와서 완전히 망해 집까지 날리고…. 그 뒤로는 절대 욕심 때문에 내 일이 아닌 것에 덤비지 않아요."
―배삼룡씨도 음료수 사업을 했다가 망했었죠.
"그게 원래 나한테 왔던 겁니다. 나한테 누가 찾아와서 '아무 일 할 필요 없고 회장 직함 갖고 이름과 얼굴만 빌려달라. 그러면 수익을 드리겠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좋은 걸 왜 나한테 가져왔느냐'며 거절했죠. 그걸 삼룡이가 덥석 하겠다고 하더니 망한 거예요."
난 재미없는 남편·아빠였다
애들이 날 우습게 볼까봐 코미디도 못 보게 했다
'얼마 줄테니 한번 웃겨봐' 이 말이 제일 싫었으니까…
―한국을 대표하는 희극배우였으니 무척 재미있는 아버지였겠네요.
"그 반대였죠. 나는 아주 재미없는 남편에다가 무서운 아버지였어요. 아들 넷을 뒀는데, 어렸을 때 코미디를 일절 보지 못하게 했어요. 아이들 친구들이 코미디언 흉내를 내고 내 이름을 친구 부르듯이 했으니까요. 나는 아이들이 아버지인 나를 우습게 알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코미디를 못 보게 했죠. 그런데 아이들이 내가 아버지인 걸 감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가 코미디언 구봉서냐?'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아니, 이름만 같은 구봉서야'라고 했거든요. 그렇지만 결국엔 알려질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들은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 되게 웃긴다'고 말하면 '그게 웃기는 거냐? 연기하는 거지'라고 쏘아붙이고, 때론 그런 이유로 친구와 싸우고 들어오곤 했지요."
―지금껏 살면서 언제가 가장 힘들었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얼마 줄 테니 한번 웃겨보시오'라고 말할 때예요. 정말 그럴 때는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어요. 아이가 어릴 때 소풍에 잠깐 들렀더니 선생님도 같은 반 아이들에게 '구봉서 아저씨가 오셨어요. 우리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라고 하더군요. 코미디언이라고 언제나 누구 앞에서나 웃겨야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땐 어떻게 힘들고 괴로운 것을 이겨냈습니까.
"이기긴 뭘 이겨요. 그냥 꾹 참는 거죠. 아니면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거나."
그렇게 말했지만 희극배우란 직업에 대한 그의 긍지는 대단하다. 작년에 개그맨 이홍렬이 공개해서 화제가 된 편지가 있다. 이홍렬이 일본에서 공부하던 1991년 구봉서로부터 받은 것으로, 편지지 5장을 꼬박 채운 이 글 말미에는 "한국의 코미디언은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연장시키는 사람들"이라며 "자네가 귀국하면 한국인 평균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생각하네"라는 구절이 있다.
―노년을 보내는 데 종교가 큰 힘이 됩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기독교를 정말 믿기 시작한 건 마흔이 넘어서예요. 그때 우리 집 안방에서 시작한 성경공부에 고인이 된 하용조 목사가 전도사로 참여했고, 남진·서수남·윤복희·정훈희·김자옥도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우리 집 안방이 좁아지면서 세운 게 연예인교회예요." 1976년 서대문에서 시작한 연예인교회는 현재 '예능교회'로 이름을 바뀌어 수많은 연예인이 일요일마다 찾는 곳이 됐다.
―아프리카에 '구봉서 학교'가 있다면서요.
"글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다리가 아파서 가보지도 못했는데…." 부인 정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전도집회 나가서 사례받은 걸 꾸준히 기부했더니 그 돈으로 우간다에 학교를 세웠대요. 너무 멀어서 못 가봤는데, 그 학교에 그런 이름이 붙었대요."
―사람이 행복해서 웃는 겁니까, 아니면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까.
"…웃기 때문에 행복한 거예요. 자꾸 웃고, 웃을 일을 만들고, 웃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죠. 말 그대로 웃어야 복이 오는 거예요."
―희극배우로 데뷔한 지 67년이 됐습니다. 그 외길 인생은 희극이었습니까.
"글쎄요… 워낙 내 인생이 비빔밥이어서 한 가지로 말할 수가 있나…."
구봉서는 안방 침대 옆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나 죽으면 저 사진 나올 거요"라고 말했다. 배삼룡의 부음을 듣고 그가 한 말도 "이제 내 차례인가 싶다"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일요일엔 온 가족과 점심을 함께하며 고요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명대사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구봉서는 총을 맞은 뒤, "죽으면 안 돼!"라고 외치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죽으면 너희를 누가 웃기니?"
https://www.youtube.com/watch?v=SLfG1UepWoo&feature=player_embedded
2012.01.14 조선일보 한현우 이철원
2016.08.27 구봉서가 있었지 라고 기억해주면 고마울 것 같아요. 멘트로 정리한 구봉서의 삶
구봉서는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이자, 삶이 고달픈 서민들에게 웃음으로 행복을 주고자 한평생 노력했던 '광대'였다.
해학과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그의 코미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견뎌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가 4년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주옥같은 멘트들을 통해 그의 삶을 정리해봤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 국민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었으니 저는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박장대소하면서 웃는 걸 볼 때 가장 좋아요. 그런 거 보면 코미디가 제 운명이지요."
"열아홉 살 때 아코디언을 들고 거리를 걸어가는데 누가 불러요. 악사가 부족하니 같이 하자더라고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 형제가 이끄는 태평양 가극단 사람이어서 솔깃했어요. 아버지는 제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고 정말 엄격하셨습니다. 또 당시는 '딴따라'라고 말하며, 배우에 대한 비하가 심할 때였죠. 김정구 선생의 형, 김용환 선생이 집에 찾아와 아버지께 간곡히 사정해서 '그럼 딱 사흘만 해라'는 허락을 받았어요.
구봉서의 학창시절 모습
그 사흘이 나흘이 되고 열흘이 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배우 한 명이 사라진 거예요. 김용환 선생이 저보고 대신 올라가라고 해서 얼떨결에 무대에 서게 됐죠. 앞이 깜깜하고 정신이 없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대사를 지어내서 했는데, 손님들이 웃고 난리가 난 거예요. 그날로 악사에서 희극 배우가 되었어요. 물론 집에서는 내놓은 자식이 되었고요. 김정구, 김용환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제 인생에 있어 정말 큰 행운이었어요. 아니었으면 어려움 모르고 자란 안하무인의 몹쓸 인격자가 되었을 지도 몰라요."
"4.19혁명으로 영화계가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검열이 사라지면서 5.16 전까지 한국 영화가 전성기였죠. 그때는 전면적인 사회 비판은 아니더라도 희극화하는 방법으로 세태를 풍자했지요. 그런데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죠. 1961년에 나온 '구봉서의 벼락부자'는 돈만 아는 세상에 대한 풍자였는데, 제가 돈이 너무 많아 돈을 뿌리고 다니는 장면이 나왔어요. 그것도 뭐라고 하더라고요. 귀중한 돈을 뿌리다니 말이 되냐면서. 그렇게 걸리는 게 많았어요. 도대체 뭘 하면 걸리지 않을까 해서 거지를 했더니, 그때는 또 우리나라에 거지만 있는 줄 알겠다며 또 난리더라고요."
"'안녕하십니까? 구봉서입니다'는 1963년에 시작된 동아방송 개국 프로그램인데, 매일 아침 저 혼자 5분 동안 하는 라디오 원맨쇼였어요. 그때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 라는 유행어도 낳았죠. '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5분만 해서 이거 되겠습니까? 안됩니다'라고 쓴 팬레터가 왔던 게 기억이 나네요."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이 1969년 '수학여행'이라는 영화를 찍었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정극이었는데, 제가 주인공인 섬마을 선생님 역할이었죠. 유 감독이 이 영화를 국제영화제에 내보내기 위해 A급 영화로 문공부에 제출했어요. 그런데 문공부에서 B급 판정을 준 거예요. 희극배우가 주연한 영화라는 게 이유였어요. 그러면서 유 감독보고 하필이면 그런 영화를 출품하려고 하냐고 했대요. 창피하다는 거죠. 이 영화가 그해 테헤란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어요. 방송국에서 인터뷰하러 몰려왔기에 '나라의 높은 분들이 B급 영화라고 했는데, 상을 받았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수준이 문공부 관리들보다 못한 모양이죠'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문공부에서 주최하는 축하 파티에도 가지 않았어요."
1970년대 MBC ` 웃으면 복이와요 ` 의 한 장면. ( 왼쪽부터 ) 임희춘, 구봉서, 서영춘 씨 [ 사진제공 = 문화체육관광부, 중앙포토, 임희춘 ]
"MBC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는 1969년부터 1985년까지 장장 15년 8개월을 한 작품이에요. 대본은 거의 우리 코미디언들이 썼어요.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는 귀한 자식을 오래 살게 하려고 지은 이름인데, 70자가 넘어요. 이름이 너무 길어 생기는 에피소드를 매회 다뤘는데, 인기가 좋았죠. 우리끼리도 코미디하면서 정말 많이 웃었어요.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져 NG를 많이 냈어요.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하면서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칠까를 상상하면 벌써 웃음이 나는 거예요. 배삼룡이나 양석천 씨는 그래도 웃음을 잘 참았는데, 서영춘 씨는 웃음소리를 안 내려고 온갖 인상을 쓰면서 신음 소리를 냈어요. 그럼 또 웃음이 빵 터지고 그랬죠."
"그냥 남을 웃기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 안 하는 것을 생각하려고 많이 고민했죠. 평소에도 사람들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요. 의사는 진찰을 어떻게 하는지, 목사님은 어떤 말투를 쓰는지, 트럭에서 짐 내리는 것도 한참 쳐다보고요. 평소에도 계속 웃음의 코드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요. 책도 많이 읽고요. 사람을 웃기기 위해서는 치밀한 사전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 나게 웃어봤습니다'란 말이 저는 가장 듣기 좋아요. 한국의 코미디언은 한국인의 수명을 늘려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웃음은 울적한 사람, 심심한 사람, 피로에 지친 사람, 화가 잔뜩 나 있는 사람의 기분을 돌려놓을 수 있거든요. 한번은 문공부에서 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장관이 큰일 났다며 앞으로 조심하라는 거예요. 초등학교 아이들한테 존경하는 사람 이름을 쓰라고 했는데 구봉서를 쓴 아이들이 꽤 많았나 봐요. 코미디언을 존경한다니 말이 되냐며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었나 봐요. 그렇게 한편에서는 인정을 받고, 한편에서는 홀대를 받고 그랬죠. 사람들이 구봉서를 떠올리며, 그래 옛날에 구봉서가 있었지, 그 사람 코미디할 때 좋았어, 지금은 살았나 죽었나, 그래주면 고맙고 좋을 것 같아요."
"찰리 채플린과 같은 눈물이 있는 코미디를 좋아합니다. 구봉서의 코미디도 가슴이 찡한 코미디이길 바랍니다. 채플린의 영화는 분위기가 어두워요. 바닥에 깔린 슬픔을 반전시키며 웃음을 자아내죠. 이렇듯 코미디는 사람을 단순히 웃기는 것이 아니고 메시지가 있어야 해요. 웃음 가운데 진실이 우러나오는 게 코미디입니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이 오래도록 인기가 있는 거 아닙니까? 영화 볼 때는 웃다가도 집에 돌아갈 때 눈물이 나오는 거죠. 사실 웃음을 끌어내는 희극과 눈물을 뿌리게 하는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에요. 눈물을 알지 못하면 웃음 또한 알 수 없죠. 만날 까르륵 까르륵 말초적으로만 웃기는 게 코미디가 아닙니다. 눈물 스민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 진짜 코미디죠. 그러니까 코미디언은 보는 사람을 깨우쳐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인 거예요. 이게 생명이죠."
"이 때까지 늙었다는 생각 안 하고 살았어요. 왜냐하면 내 마음이 젊으니까. 후배들을 오랜만에 만날 때 한 번씩 같이 늙어가는구나 할 뿐이죠. 나이가 드니까 힘이 달려 못하는 일이 생기긴 하지만, 그 외에는 다 할 수 있어요. 다만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오늘 죽더라도 후회를 남기지 말자 그래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약속을 꼭 지키세요. 그리고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두 마디면 세상에 다툴 일이 크게 줄어든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또 나로 인해, 내가 하는 일로 인해 상처 받는 사람이 없나 잘 살피면서 살아야죠."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2016.08.29 "웃기 때문에 행복한 거예요. 웃어야 복이 오는 거예요."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별세]
1세대 희극인 배삼룡·곽규석과 60~70년대 코미디 전성기 이끌어
"내가 재미있게 말하면 너희들은 웃었지. 슬플 때에도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슬프겠지.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별세, 그는 누구?
'막둥이’ 구봉서(왼쪽)가 젊은 시절 고(故) 배삼룡과 함께 코미디 연기를 펼치고 있는 모습. 27일 별세한 구봉서는 배삼룡과 함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의 간판이었다. 이들은 서영춘 곽규석 등 1세대 희극인들과 함께 1960~19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조선DB
간판 프로 '웃으면 복이 와요'서
'김수한무 거북이와…' 유행어도
고인은 서영춘·배삼룡과 함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의 간판이었다. 1969년부터 1985년까지 MBC에서 방송한 이 프로그램에 786회 개근하며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으로 이어지는 '최장 길이' 유행어를 내놨다. 70자가 넘었다. 물건 훔치러 집에 들어왔던 좀도둑이 넋을 잃고 방송을 봤고, 도둑 들었거나 말거나 집주인은 박장대소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는 우스개가 돌던 시절이다.
평생 단짝이던 구봉서와 배삼룡은 무대에서 시작해 TV로 진출했다가 다시 무대로 돌아갔다. 지난 1999년 악극무대에 두 사람이 함께 선 모습./조선DB
그는 고(故) 배삼룡·곽규석·이기동 등의 1세대 희극인들과 함께 1960~1970년대 한국 코미디 전성기를 이끌었다.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죽어가는 거지 왕초가 부하들에게 장안의 부잣집 생일, 제삿날, 혼인 날짜를 알려주는 '위대한 유산', 상놈끼리 서로 양반이라고 속이며 혼인을 맺으려고 하는 '양반 인사법' 같은 콩트를 펼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코미디언은 당시 광고 섭외 1순위였다. 고인은 곽규석과 함께 라면 광고에 출연해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코미디 공연을 해야 했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희극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제한된 소재는 벽이었다. 코미디에 의사를 등장시키면 의사협회가 항의하고, 거지를 출연시키면 '한국에는 거지가 없는데 왜 거지가 코미디에 나오냐'는 항의를 받았다.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그럼 도둑만 등장시켜야 하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예능 작가가 없는 시기라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2~3년 동안 직접 대본을 써야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RtLc01Bo1M&feature=player_embedded
https://www.youtube.com/watch?v=934qYdQnlrY&feature=player_embedded
구봉서 곽규석 출연 문화영화 잘살아보세
그는 아들 4형제가 코미디언 아버지를 우습게 알까봐 TV를 보지 못하게 했다고도 회고했다. 코미디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구봉서가 열심을 다한 이유다. 정석희 TV평론가는 "구봉서는 정극 배우로도 활동하면서 희극인을 낮춰보던 당시 분위기를 바꿔놓았다"고 했다. 그는 희극과 정극을 가리지 않고 400편 가까이 되는 영화에 출연했다. 고인의 별명이었던 '막둥이'도 영화 '오부자(1958)'에서 4형제 중 막내 역할을 맡으며 붙었다. 1970년대 김성진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코미디를 모두 없애겠다고 선언했을 땐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저속한 코미디 한두 개 있다고 코미디를 다 없앨 거면 가끔 교통사고 내는 택시도 모두 없애야 하지 않냐"고 따졌다. 코미디 프로를 폐지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바뀌었다.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던 1960년 대 초 구봉서의 모습./양지호 기자
고인은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양친을 따라 상경했다. 1945년 태평양가극단에 들어가면서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장병들에게 위문 공연을 해주는 군예대로 복무했다. 2009년 뇌출혈로 수술을 받기 전까지 배삼룡과 함께한 '그때 그 쑈를 아십니까'(2002)를 비롯해 무대 활동을 이어갔다. 2013년 대중문화예술상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0년 별세한 배삼룡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그는 배삼룡 빈소에서 "저 놈(배삼룡)이 죽으면 난 친구도 동기도 누구 하나 남지 않는다. 이제는 내 차례"라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였던 그가 영면한 27일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에서 한창 연기를 준비하던 후배 코미디언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단체로 묵념했다. 송해·윤복희를 비롯해 유재석·강호동 등 후배 희극인들이 서울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개그맨 전유성은 "힘들고 못살고 추웠던 시절에 서민들이 웃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코미디 덕분이었다"고 했다.
2016년 8월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의 빈소./김지호 기자
생전 "잘못된 정치·사회 풍자한
진실이 담긴 코미디 해야" 강조
그는 웃음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력을 믿었다. 1991년 일본에서 유학하는 개그맨 이홍렬에게 보낸 편지에 '코미디언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킨다는데 자네가 귀국한다면 평균 수명이 100세는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가 악극단 활동을 시작한 1945년 한국인 평균수명(기대 수명)은 35세 전후였다.
WHO(세계보건기구)는 지난 6월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81.2세로 추산했다. 그가 전해준 웃음이 45년이나 늘어난 평균수명에 한몫했을 것이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잘못된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진실이 담긴 코미디를 해야 한다"던 대한민국의 '찰리 채플린'은 가을비 속에 우리 곁을 떠났다.
구봉서, "후배 코미디언들이 돈만 쫓아다니지 않았으면…요즘 개그는 말장난이 많다"
암울했던 시절 웃음으로 고단한 서민들 삶을 위로했던 '구봉서'
요즘으로 치면 그는 개그맨, 가수, 프로그램 진행자, 예능 기획자를 겸했다. 1956년 데뷔해 영화 400여 편에 출연한 연기자이기도 했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막둥이'라는 별명도 영화에서 얻은 것이다. 1958년 히트작인 '오부자'에서 막둥이로 출연한 것이 계기였다. '오부자'는 당시 관객이 몰려 상영 극장이 부서질까 걱정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65년엔 영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다.
▶구봉서는 바보스럽고 망가지는 연기를 해야 하는 코미디언이었지만 그 스스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구봉서는 작가 역할까지 맡았다. '김~수한무' 같은 코미디 소재도 책을 읽다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1997년엔 '코미디 위의 인생'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웃음이 깔려 있는데, 그걸 딱 제치면 거기서 슬픔이 나와야 해요. 코미디가 그런 거야." 구봉서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코미디는 잘못된 정치와 사회를 은연중 비꼬고 비판하는 풍자여야 한다고도 했다. 구봉서는 1990년대 한 후배 개그맨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 코미디언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시원한 한 방 웃음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은 여러 의학 연구의 공통적 결론이다. 그가 1945년 악극단 생활을 시작으로 70여 년 국민에게 선사한 웃음은 국민 수명을 늘려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구봉서(具鳳書)/조선DB
[생전 인터뷰] "평생 웃겼지만… 우습게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한국 코미디의 代父' 구봉서
동갑내기 배우인 배삼룡에 대한 구봉서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배삼룡이 병상에서 의식을 잃자 병실에 찾아가 "야 인마, 빨리 죽어. 네가 빨리 죽어야 네 딸들이 고생을 안 하지"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통곡했었다. 그 얘기를 꺼내니 구봉서는 "의식이 없어서 못 듣고 말도 못하니까 '빨리 죽으라'고 그랬지, 아니었으면 그랬겠느냐"고 쓰게 웃었다.
구봉서는 1997년 펴낸 자서전 '코미디 위의 인생'에서 배삼룡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정말 타고난 광대였다. 사람들은 배삼룡이 바보스러운 말을 하는 걸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건지 정말로 못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는 대사를 외우지 못했다. 대사를 너무 못 외워 극 중 가족 이름도 다르게 부르고, '탕수육 한 접시에 고량주 다섯 병' 해야 할 걸 '탕수육 다섯 병에 고량주 한 접시' 하기 일쑤였다. 시청자들은 그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더 많이 웃었다. 상대 코미디언은 예측할 수 없는 그의 연기와 대사에 맞추느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는 과장도 잘해서 그의 말은 언제나 10분의 1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화폐개혁'이라고 부르곤 했다."
―배삼룡씨보다 곽규석씨와 콤비였다면서요.
"그렇죠. 농심 라면 광고에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했던 것도 규석이죠. 한 10년 전쯤엔가 제가 규석이한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를 늙은 얼굴로 다시 한 번 하자고 했어요. 걔도 좋다고 하고 농심에서도 좋다 했는데, 그만 규석이가 아프기 시작했죠."(미국서 목회를 하던 곽규석은 99년 71세로 숨졌다)
1926년 평양서 태어난 구봉서는 첫돌을 서울에서 맞은 사실상 서울사람이다. 치과 의료기기상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교동초등학교 시절 이미 라디오에 출연해 '국어 독본'이란 프로그램에서 책 낭송을 했다. 물론 이때 '국어'는 일본어였다. 어려서 오르간을 연주했고, 고교 때 아코디언을 배운 그는 광복되던 해 대동상고를 졸업하고 현제명 선생의 사숙(私塾)에서 그를 사사한 성악가 지망생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당시 최고 인기가수 김정구와 그의 친형 김용환이 이끌던 '태평양 가극단'에 들어간 것이 그 삶의 물줄기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유명한 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데 들떠서 아버지께 '딱 사흘만 한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 게 그냥 내 길이 됐어요. 사흘이 나흘 되고, 나흘이 열흘 된 거죠." 여전히 그는 음악을 사랑한다. 악기는 더 이상 연주하지 않지만 특히 라틴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라틴 음악을 들을 때가 많다고 했다.
―코믹 연기는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마포에 있던 도화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갑자기 조연을 맡은 희극배우가 사라진 거예요. 단장이 무조건 나더러 대신 무대에 올라가라는데 정신없이 하고 내려오니 한 선배가 '잘했다'고 칭찬을 해요. 그 길로 영원히 발목을 잡힌 거죠."
―어려서 꿈은 책방 주인이었다면서요.
"나는 대학을 못 다녔지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건 모두 어려서부터 읽었던 책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때 이미 '레미제라블'을 일본어로 읽었어요. 도스토옙스키도 모두 일본어로 읽었죠. 지금도 일본 문예지를 많이 읽어요. '문예춘추'는 매달 꼬박꼬박 읽다가 최근엔 그렇게 못해요. 일본에서 매달 책을 보내주던 친구가 죽었거든. 그래서 요즘엔 문고판 소설을 많이 읽지요. 책을 꾸준히 읽었기 때문에 '웃으면 복이 와요' 원고도 쓸 수 있었어요."
연기 40년만에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제2탄' 무대에 같이 서는 배삼룡(왼쪽), 구봉서/ 조선DB
―'웃으면 복이 와요' 원고를 직접 썼습니까.
"그럼요. 한 2, 3년 썼죠. 그땐 코미디 작가가 없었거든."
―그럼 그때 '배 수한무…'로 시작하는 히트작도 직접 썼습니까.
"내가 썼지요. 일본책 뒤져서 쓴 거예요. 수한무(壽限無),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이게 다 책에 나오는 거죠."
―그럼 '사까이야소 호리호리야소'나 '모리모리 셋뽀리깡'도 일본 책에 나오는 겁니까.
"하하하. 그건 그냥 엉터리로 지어낸 거지. '난다이난다이 지기지기난다이'도 지어낸 거고. 아니, 이 사람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당시에 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죠. '양반 인사법'도 엄청난 히트였잖아요.
"그건 죽은 박시명이 쓴 원고를 내가 윤색했어요."
'양반 인사법'은 두 상민이 양반이라고 속여 혼담을 주고받는데 등을 맞댄 채 양반 말투를 적은 쪽지를 보며 대화를 하는 내용의 코미디다. 구봉서와 배삼룡이 각각 혼주이고, 박시명이 인사법을 적어 준다. 그 시작은 이렇다. ▲구봉서: 별 밑에 인사법! ▲배삼룡: 그건 제목이오. ▲구: 처음 면상하겠습니다. ▲배: 상면이오. 면상이 아니라. ▲구: 아명은 일봉이라 합니다. ▲배: 아명은…(쪽지를 보여주며) 이거 무슨 글자요? ▲구: 심하다, 심해. ▲배: 아명은 심해라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쯤 구봉서의 얼굴에 전성기 때 그 웃음이 피어났다. 그는 "약이 올라서 옛날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여전히 옛날을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웃으면 복이 와요' 이전엔 악극단 활동만 했습니까.
"극단에서 악기 연주도 하고 희극 배우도 하고, 6·25 때는 라디오 진행도 했어요. '홀쭉이' 양석천씨하고 둘이 했었죠. 무슨 내용이었는지 다 잊어버렸는데, 하나만은 기억해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 아나운서는 참 예뻤다는 거. 그때 스튜디오에 가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는데, 참 예뻤어요. 하하하. 그리고 KBS 개국, TBC 개국 때도 방송 출연했죠. 개국 때 초대받지 못한 건 이번에 TV조선 뿐일걸 아마?"
1972년 4월8일 불우이웃돕기 운동으로 열린 연예인 1일 구두닦기행사에 참가한 구봉서씨/ 조선DB
―'영화배우 구봉서'는 요즘 사람들에겐 덜 알려졌죠.
"1956년에 '애정파도'로 영화에 데뷔해, 400편 넘게 출연했어요. 그중에서도 1958년에 찍은 '오부자'가 내 출세작이지요. 을지로4가에 있던 국도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제작자가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국도극장 얼마면 살 수 있느냐'고 말하고 다녔으니까."
'오부자'는 4형제를 장가보내는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코믹 드라마로, 구봉서는 '영·웅·호·걸' 4형제 가운데 막내인 '걸' 역할을 맡았다. 그때 붙은 별명이 '막둥이'로,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애칭이 됐다. 구봉서는 "그때 처음으로 '인기'라는 것이 내게 있음을 실감했고 '배우도 화장실에 가나요?' 같은 소녀팬들의 질문도 받아봤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코미디 없애려거든 택시도 없애라'고 했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70년대에 문화공보부 장관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코미디를 모두 없앤다고 했거든요. 그때 마침 박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 나하고 곽규석이 갔어요. 내가 '저속한 코미디 한두 개 있다고 코미디를 다 없앨 거면, 가끔 교통사고 내는 택시도 모두 없애야겠네요' 식으로 말했죠.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웃더라고요. 그래서 없던 일이 됐죠."
―'웃으면 복이 와요'는 1985년에 폐지됐죠.
"좋은 작품이 안 나오더라고요. 나도 지쳤고. 우리가 아이디어 다 짜내서 주면 작가가 그거 엮어서 고료 받고, 우리한테는 여전히 얼마 안 나오고. 코미디를 너무 우습게 봐요. 지금도 개그맨들 하는 거, 그거 다 걔들이 직접 하는 거예요. 얼마나 받고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사업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했죠. 한 번 했다가 망했어요. 처남이 하는 재생 플라스틱 사업에 돈을 대고 '회장' 직함까지 얻어서 우쭐했었죠. 그리고는 오일쇼크가 와서 완전히 망해 집까지 날리고…. 그 뒤로는 절대 욕심 때문에 내 일이 아닌 것에 덤비지 않아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랑 최고의 콤비였죠
배삼룡과도 잘 맞았고… 그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희극배우였으니 무척 재미있는 아버지였겠네요.
"그 반대였죠. 나는 아주 재미없는 남편에다가 무서운 아버지였어요. 아들 넷을 뒀는데, 어렸을 때 코미디를 일절 보지 못하게 했어요. 아이들 친구들이 코미디언 흉내를 내고 내 이름을 친구 부르듯이 했으니까요. 나는 아이들이 아버지인 나를 우습게 알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코미디를 못 보게 했죠. 그런데 아이들이 내가 아버지인 걸 감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가 코미디언 구봉서냐?'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아니, 이름만 같은 구봉서야'라고 했거든요. 그렇지만 결국엔 알려질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들은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 되게 웃긴다'고 말하면 '그게 웃기는 거냐? 연기하는 거지'라고 쏘아붙이고, 때론 그런 이유로 친구와 싸우고 들어오곤 했지요."
―지금껏 살면서 언제가 가장 힘들었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얼마 줄 테니 한번 웃겨보시오'라고 말할 때예요. 정말 그럴 때는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어요. 아이가 어릴 때 소풍에 잠깐 들렀더니 선생님도 같은 반 아이들에게 '구봉서 아저씨가 오셨어요. 우리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라고 하더군요. 코미디언이라고 언제나 누구 앞에서나 웃겨야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땐 어떻게 힘들고 괴로운 것을 이겨냈습니까.
"이기긴 뭘 이겨요. 그냥 꾹 참는 거죠. 아니면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거나."
그렇게 말했지만 희극배우란 직업에 대한 그의 긍지는 대단하다. 작년에 개그맨 이홍렬이 공개해서 화제가 된 편지가 있다. 이홍렬이 일본에서 공부하던 1991년 구봉서로부터 받은 것으로, 편지지 5장을 꼬박 채운 이 글 말미에는 "한국의 코미디언은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연장시키는 사람들"이라며 "자네가 귀국하면 한국인 평균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생각하네"라는 구절이 있다.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具鳳書)/조선DB
자꾸 웃을 일 만들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야죠
그것이 행복입니다
―노년을 보내는 데 종교가 큰 힘이 됩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기독교를 정말 믿기 시작한 건 마흔이 넘어서예요. 그때 우리 집 안방에서 시작한 성경공부에 고인이 된 하용조 목사가 전도사로 참여했고, 남진·서수남·윤복희·정훈희·김자옥도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우리 집 안방이 좁아지면서 세운 게 연예인교회예요." 1976년 서대문에서 시작한 연예인교회는 현재 '예능교회'로 이름을 바뀌어 수많은 연예인이 일요일마다 찾는 곳이 됐다.
―아프리카에 '구봉서 학교'가 있다면서요.
"글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다리가 아파서 가보지도 못했는데…." 부인 정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전도집회 나가서 사례받은 걸 꾸준히 기부했더니 그 돈으로 우간다에 학교를 세웠대요. 너무 멀어서 못 가봤는데, 그 학교에 그런 이름이 붙었대요."
―사람이 행복해서 웃는 겁니까, 아니면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까.
"…웃기 때문에 행복한 거예요. 자꾸 웃고, 웃을 일을 만들고, 웃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죠. 말 그대로 웃어야 복이 오는 거예요."
―희극배우로 데뷔한 지 67년이 됐습니다. 그 외길 인생은 희극이었습니까.
"글쎄요… 워낙 내 인생이 비빔밥이어서 한 가지로 말할 수가 있나…."
구봉서는 안방 침대 옆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나 죽으면 저 사진 나올 거요"라고 말했다. 배삼룡의 부음을 듣고 그가 한 말도 "이제 내 차례인가 싶다"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일요일엔 온 가족과 점심을 함께하며 고요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명대사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구봉서는 총을 맞은 뒤, "죽으면 안 돼!"라고 외치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죽으면 너희를 누가 웃기니?"
조선일보 양지호 기자 편집=뉴스큐레이션팀
2016.09.01 위대한 코미디언들의 시대
구봉서와 배삼룡, 이기동, 박시명 등이 출연했던 TV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는 흑백의 기억으로 또렷하다. 우리나라에 컬러 TV가 도입된 1980년 이후로도 이 프로그램이 5년간 더 방영됐으나 그 시절보다는 1970년대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았던 풍경만 생각난다. TV 앞에서 눈물 나고 배 아플 만큼 웃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어쩐 일인지 그 시절 TV를 모셔뒀던 안방 풍경도 흑백으로만 떠오른다. 컬러라고 할 만한 물건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옷과 신발은 죄다 희거나 검었고 검은색 자개장롱과 흰색 밥그릇이 그랬으며 책과 공책, 연필을 비롯한 학용품들도 대개 흑백이었다. 어린 시절의 컬러풀한 풍경이란 고작해야 나무와 꽃, 노란 세숫대야, 그리고 빨랫줄에 널려 있던 빨갛고 파란 이불 홑청 정도인 것 같다.
'웃으면 복이 와요'는 대단히 웃기는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유머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도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머니도 저녁 설거지를 미룰 정도로 열광했었다. 식구들 모두 코미디 프로에 몰려 앉은 모습이 못마땅해 멀찌감치서 다 읽은 조간신문을 들추던 아버지도 웃음을 못 참아 근엄한 이미지에 손상을 입기 일쑤였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구봉서와 배삼룡이 출연한 '양반 인사법'이란 코미디다. 두 장돌뱅이가 양반이라고 속여 등을 맞대고 혼담을 주고받는데 양반 말투를 적은 쪽지를 보며 대화를 한다. 구봉서가 "별 밑에 인사법!" 하자 배삼룡이 "그건 제목이오" 한 뒤 "에헴 하고 기침한다"라고 한다. 구봉서가 "처음 면상하겠습니다" 하자 배삼룡이 "상면이오. 면상이 아니라" 하는 식이다. 이런 대화가 이어지다가 결국 마주 본 두 사람이 "새우젓 장사 배가 놈 아냐?" "장돌뱅이 구가 놈이 웬일이냐" 하며 나자빠지는 게 끝이다.
이기동 일행이 술집에 갔는데 빈 테이블 없이 만원이다. 이기동이 한 테이블에 가서 "지금 선생님 댁에서는 배고픈 아이들이 '아빠, 일찍 들어와' 하고 울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연기하자 손님들은 "그래그래, 애들 생각해서 일찍 들어갑시다" 하고 일어선다. 이기동이 일행한테 외친다. "여기 자리 났어. 빨리 와!"
의사가 막 운명한 환자와 유족 앞에서 자기 눈을 까뒤집은 뒤에 "운명하셨습니다" 말하는 코미디도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처음 등장했다. 원래 이는 MBC에서 한 드라마를 촬영하던 도중 신인 배우가 저지른 NG 장면이었는데 코미디언들이 놓치지 않고 써먹었다.
/이철원 기자
요즘 '아재 개그'라고 하는 것들보다 시시하게 느껴지는 이런 코미디에 왜 그렇게 배를 잡고 뒹굴었을까. 그때 아마도 별달리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동사무소에서 틀어주는 '새마을노래'의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 하는 가사를 들으며 학교로 일터로 향했고 저녁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 바칠 것을 태극기 앞에 서서 다짐하던 시절이다. 한국 사회 전체가 차려 자세를 하고 있던 때였다.
'웃으면 복이 와요'가 첫 방송을 한 것이 1969년이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237달러로 지금의 100분의 1도 안 되던 때다. GDP가 그랬으니 모든 것이 지금의 100분의 1에 불과했다. 웃을 일도 지금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 TV 속 코미디언과 코미디 프로그램은 웃음을 보장해주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이들이야 그저 코미디라서 좋아했겠지만 어른들은 '잘 살아보세 시대'의 고단함을 막둥이와 비실이, 땅딸이의 슬랩스틱을 보면서 잊곤 했을 것이다.
지난 27일 작고한 구봉서 선생을 4년 전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했었다. 당시 86세였던 그는 몸이 불편한 와중에도 강원 삼척이 고향인 부인 정계순씨를 소개하면서 "나한테 시집 안 왔으면 지금쯤 오징어나 말리고 있겠지" 하며 연방 농담을 했었다. 그는 "눈물을 알지 못하면 웃음도 알 수 없고, 그런 페이소스가 깔린 코미디가 진짜 코미디"라고 했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 역시 자서전에서 " 유머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부침(浮沈)을 견뎌낼 수 있다. 유머는 엄숙함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드러낸다"고 했다.
구봉서 선생의 부고(訃告)를 읽으며 우리 부모님 세대의 1960~70년대를 위로해준 한국 1세대 코미디언들을 새삼 생각해본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궈낸 부모님 세대가 삶의 부침을 견뎌내게끔 도와준 그 희극배우들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조선일보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웃음을 사랑한 영원한 코미디언' 한국영상자료원 故구봉서 추모 특별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영상자료원(원장 류재림)은 지난 8월 27일 타계한 코미디언 故 구봉서를 기리고자 '웃음을 사랑한 영원한 코미디언: 故구봉서 추모 특별 상영'을 오는 6일부터 11일까지 서울 마포구 영상자료원 상암 본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한다고 5일 밝혔다. 구봉서는 '구봉서의 벼락부자', '남자 식모'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코미디 장르의 활성화라는 한국영화사상 중요한 성과를 이루어 냈던 배우로, 이번 상영을 통해 희극에 대한 그의 애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모든 상영작은 무료로 상영된다. 사진은 신세 좀 지자구요에 출연한 구봉서.
입력 : 2016.09.05 20:19
사진은 신세 좀 지자구요에 출연한 구봉서.
사진은 팔푼이 사위에 출연한 구봉서(오른쪽).
사진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한 구봉서.
사진은 당나귀 무법자에 출연한 구봉서.
사진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한 구봉서(왼쪽 하단).
ⓒ 조선일보 & Chosun.com
2016-08-27 코미디계 거목 구봉서 별세, 향년 90
원로 코미디언이자 한국 코미디계의 거목으로 불렸던 구봉서(90) 옹이 27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5년 악극단에 들어가면서 희극배우의 삶을 시작했다. 각종 TV 코미디 프로그램은 물론 400여편의 영화, 980여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1958년 영화 '오부자'에서 막내 역을 맡으며 인기를 끌어 '막둥이'란 별명을 갖기도 했다. 또 라디오 프로그램 '홀쭉이와 길쭉이', '노래하는 유람선' 등에서 승승장구하며 옥관문화훈장·문화포장을 받았다.
특히 1969년부터 '웃으면 복이와요'를 비롯한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배삼룡·곽규석·서영춘·김희갑 등과 함께 1960~70년대 코미디 황금기를 이끌었다. 유행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의 주인공도 고인이다.
2000년에는 MBC코미디언부문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2006년 제1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예예술발전상을 받았다.
장례식장은 서울 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평창동 예능교회가 주관한다. 29일 오전 6시 발인이며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서울=뉴시스】
이주일 이야기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4P_E-Hvi2yo
이주일의 화보 및가요무대 출연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IJ4kGL7BhQk
2021 01.20 대통령을 품에 안았을 때 ‘종이처럼 가벼웠다’
심수봉上 <무궁화>
아버지는 미국 출장 중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가 근무하던 병원의 앰뷸런스 기사 아저씨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무시로 드나들던 아저씨였다. 우리의 등교 준비를 서두르던 어머니가 현관에서 아저씨를 맞았다. 놀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나도 현관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대.”
그 당시는 인터넷이 물론 없었다. 텔레비전 아침 방송도 없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저녁 6시부터 밤 12시경까지 방송을 하고 그 다음날 저녁 6시까지 모든 텔레비전 방송국이 송출을 중단했다. 간밤에 일어난 일을 아는 방법은 조간신문을 보거나 라디오 뉴스를 듣는 것뿐이었다.
대통령 유고 소식은 당연히 우리에게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 같은 소리였다. 현관에 어머니, 나, 기사 아저씨가 서 있을 때 전화가 울리고 어머니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였다. 이미 미국에도 뉴스가 나갔다. 그다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잠시 뒤 도착한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는 제목이 실렸던 것 같다. 청와대 바로 아래 궁정동에 있던 ‘안가’에서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알리는 조선일보 호외.
독재정권 하에서는 흉흉한 소문들이 많이 돈다. 여름이 되면 크리스마스 때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겨울이 되면 6월에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1년 내내 전쟁 소문이 돌았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커다란 개 인형을 사 주셨다. 나는 매일 밤 그걸 머리맡에 놓고 자면서 ‘자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가더라도 이걸 잊지 말고 꼭 끌어안고 가야지’라고 마음먹고 잠을 잤다.
아직도 기억나는 덕산 제과라는 회사가 만든 왕돌이라는 불량식품은 포장지에 북한 간첩들의 암호가 들어 있다는 소문이 돌아 과자 이름을 금돌이로 바꿨지만 결국 사라졌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도 그런 소문 중 하나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뉴스를 보고 전화를 하고, 조간신문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평상시처럼 수업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들 앞이라도 무거운 분위기를 숨길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통행금지를 두 시간 연장해서 밤 10시부터 실시했다.
술집들은 9일간의 국장 기간 아예 문을 닫은 집들도 있었다. 밤 8시만 되어도 서울 시내는 텅텅 비었다. 박정희 대통령 살아생전 그와 극한 대립을 했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곧바로 오판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북한에게 날렸다.
장례식 날은 임시 휴교였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방송을 봤다. 광화문 거리는 인산인해였다. 전국에서 애도 인파가 몰려들었는지 당시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던 갓을 쓴 사람까지 보였다. 운구차가 광화문 거리로 내려오자 할머니들이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곡을 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까지 나는 대통령은 죽지 않는 줄 알았다. 아니 죽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태어나 그날까지 본 유일한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은 내가 알고 지냈던 10여 년 짧은 세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2020년 12월 연말연시를 어머니와 보내기 위해 귀국했다. 2주간의 격리가 끝나고 나 혼자 서울성곽을 구간별로 차근차근 돌아보기로 했다. 서울성곽 여섯 개 구간 중 가장 힘들다는 백악 구간을 오르던 날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궁정동을 지나며 생각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나의 우주가 혼돈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그 몇 시간 전 눈앞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 냄새를 맡고, 그 피로 옷이 흠뻑 젖었던 심수봉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못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가요사에 길이 남을 싱어송 라이터(Singer-Song Writer) 심수봉이 그 음악적 재능을 맘껏 펼쳐보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시련이 있을지 그때 그녀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생의 마지막 날까지 듣던 노래
심수봉을 이야기하는데 <그때 그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노래이고,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긴 노래이다. 《대학가요제》에서 피아노를 치며 ‘뚜룻 뚜룻 뚜루루’ 하며 노래를 시작할 때까지는 좋았다. 어라? 그 뒤부터 나오는 노래가 그 당시 용어로 뽕짝 즉 트롯이었다.
트롯은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노래는 이런 부류의 사람만이 듣는 것’이라는 편견의 벽을 깨면 심수봉이 본선에 진출한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영상을 찾아보면 긴장한 듯 평소보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지만, 하얀 호루겔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부르던 그녀의 노래는 영혼을 후비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대학가요제》 본선에서는 낙방했지만 <그때 그 사람>을 녹음해 발매하며 데뷔하게 된다.
소문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그 노래를 좋아해 음반을 사들여 돌렸기 때문에 음반 판매고가 올라갔다고 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생의 마지막 날까지 듣던 노래이니 좋아했던 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단 그 노래는 대통령 도움 없이도 방송만 조금 타면 크게 히트할 좋은 노래였다.
요즘 들어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들을 때면 ’박 대통령은 그 노래의 어떤 점이 끌려 좋아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외로운 병실에서’ 하는 대목에서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아내를 생각했을까? 1974년 8월 15일 죽어가는 아내를 병원에 남겨두고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 개통식으로 가야 했다. 그가 결국 임종을 지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육영수 여사 사후 5년여 그가 삶의 의욕이 없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오래 살 이름, 심수봉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이름을 본명 심민경에서 심수봉으로 바꿨다. 어머니가 역술인에게 물어서 유명해지고 오래 살 이름이라고 받아 왔다고 했다. 처음 들을 때는 그 이름이 촌스러워서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래 살 그 이름 덕에 그날 그 자리에서 그녀가 목숨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항간에는 그녀가 못생겼다고 박정희 대통령이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3년 그녀가 《주병진 쇼》에 출연해 이 소문이 가짜임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아무리 못생겼다고 사람을 불러놓고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인심이 한국에 어디 있어요?”라고 했다.
<그때 그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방송에 종종 나오던 노래 두 곡이 있다.
하나는 <여자이니까>이다. 숭례문시장 남산 쪽 출구로 나가면 단암빌딩이라는 고층 건물이 있다. 외국 대사관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사무실 빌딩인데 1970년대에는 도큐 호텔이라고 서울에서 알아주는 호텔 중 하나였다. 심수봉은 《대학가요제》 출전 이전부터 이곳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유명한’ 무명 가수였다. 나훈아는 그녀의 노래를 듣자마자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음반 취입을 주선하기도 했다.
음반은 무산되어 나오지 못했지만, 그때 녹음하려고 했던 <여자이니까>는 <그때 그 사람>과 함께 떴다. 이 노래는 최홍기 작사, 작곡으로 되어 있다. 나훈아의 본명이다. 그녀의 노래가 얼마나 훌륭했으면 나훈아가 곡까지 써주며 데뷔를 주선했다.
또 하나의 노래는 <축제 이야기>이다. 내 기억에 국제 가요제에 출품했던 곡이다. 세 곡의 노래 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인데 유감스럽게도 방송에 그리 자주 나오지는 않았다. 당대 최고의 아이돌 스타였던 전영록이 함께 불렀다.
이 시기 심수봉은 《순자의 가을》이라는 드라마의 자작곡 주제가를 불렀다. 하필 ‘여사님’의 이름이 순자였다. 당연히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다. 1983년 방미가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라는 제목으로 다시 불렀는데 당시 인터뷰에서 심수봉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아가며 불렀다고 한다. 노래를 들어보면 왜 야단을 맞았는지 알 것 같다.
녹음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앞에 나오는 심수봉의 백코러스이다. 후에 심수봉이 같은 제목으로 재취입했다. 같은 노래도 심수봉이 부르면 이렇게 맛이 난다는 것을 느꼈다.
<순자의 가을>이 금지곡이 된 것은 그녀가 당할 고통의 서막에 불과했다. 단지 그때 그녀였다는 이유로 심수봉은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하고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시절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하는 아픔도 겪었다.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해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끝에 해금되며 내놓은 곡이 1984년에 나온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이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흘러나오는 흐느끼는 여자의 이야기가 심수봉의 콧소리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오랜만에 돌아온 심수봉은 이 노래로 단번에 스타의 자리를 되찾았다. 큰 히트였다. 심수봉뿐 아니라 이듬해 여름 나의 미국 유학 송별회 모임에서 소주병에 숟가락 꽂은 것을 마이크 삼아 콧소리까지 섞어 이 노래를 부른 나도 스타가 되었다.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얼 보았니
MBC 예능 '놀러와'에 출연해 파란만장했던 노래 인생을 풀어 놓는 심수봉. 방송 화면 캡처
‘이제 심수봉이 맘껏 음악 활동을 하나 보다’ 하던 것도 잠시였다. 그녀가 발표한 <무궁화>가 또 금지곡이 되었다. 심수봉은 제작비도 건지지 못해 또다시 큰 타격을 받았다. 나는 이 노래를 텔레비전의 군부대 위문 프로그램에서 처음 들었다. 음산한 콧소리로 망자의 혼이 찾아온 듯 부르던 그녀의 노래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군인 장병들도 열광했다. 이 노래가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는 노래라는 소문이 돌았다. 노래를 들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한창 자신이 부각되어야 할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살아온 듯 섬뜩했을 것이다. 심수봉 자신은 딱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노래는 아니라고 한다.
대중가요의 가사는 대중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가야 하기에 꼭 한 가지 사건을 꼬집어 가사를 쓰지는 않았다. 조사 나온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누누이 설명했지만, 그런 설명이 먹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서 완전히 다르게 보고를 하는 바람에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다. 최고 권력자가 제왕이 되는 것의 반 이상은 선동하며 미쳐 날뛰는 과잉 충성자의 책임이다.
나는 <무궁화>를 요즘도 즐겨 듣는다. 2절의 시작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얼 보았니.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라는 구절이 좋다. 문뜩문뜩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이 사실이다. 심수봉이 펴낸 자서전 『사랑밖엔 난 몰라』의 10·26 장면을 세 번 정도 읽었다.
심수봉이 총에 맞고 피가 흘러나오는 박정희 대통령을 품에 안았을 때 ‘종이처럼 가벼웠다’는 말을 했다. 난 <무궁화>의 2절 첫 구절을 들을 때마다 심수봉의 그 말을 생각한다. 18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그였지만 마지막 가는 길 어린 가수가 품에 안았을 때 종이처럼 가벼웠다.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 심수봉 下편에서 계속...
조선일보 글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심수봉 下 <비나리>
서울성곽 여섯 개 구간 중 가장 힘들다는 백악 구간을 오르던 날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궁정동을 지나며 생각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나의 우주가 혼돈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그 몇 시간 전 눈앞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 냄새를 맡고, 그 피로 옷이 흠뻑 젖었던 심수봉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못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가요사에 길이 남을 싱어송 라이터(Singer-Song Writer) 심수봉이 그 음악적 재능을 맘껏 펼쳐보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시련이 있을지 그때 그녀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수봉 上편에 이어...
심수봉의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1996년에 나온 <비나리>이다. 지금의 남편을 짝사랑하며 쓴 구애의 노래이다. 지난 고통을 딛고 사랑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심수봉의 목소리를 타고 폐부 깊이 파고든다. ‘큐피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된 날’ 큐피드의 화살이 가슴을 뚫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힘이 없다.
그녀의 ‘운명의 페이지는’ 또다시 넘어간다. 뜻하지 않게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이유로 당한 고통과 방황하며 했던 결혼과 이혼을 돌이켜 본다면 이제 또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사랑 때문에 아파본 사람은 두렵고 지쳐 이제 더이상 사랑할 힘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은 늘 새로운 용기와 에너지를 함께 가지고 찾아온다.
또 페이지를 넘긴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 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참 구차하다. 사랑해도 되냐고 물어보니 말이다. 더 구차한 건 그 말조차 하지 못하고 눈짓만 계속 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면 구차가 구차로 보이지 않는걸 어쩌랴.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버린다. 아무리 밥을 씹어도 넘어가지 않고, 먹어도 살은 쪽쪽 빠진다.
우리 사랑 연습도 없이 벌써 무대로 올려졌네’
황당할 거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건만 마른 섶에 옮겨붙은 불처럼 사랑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사랑에 가장 필요한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력과 용기이다. 바로 다음 구절에도 나온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
어차피 사랑은 모 아니면 도이다. 한낱 꿈일지도 모르지만 아주 달콤한 꿈이 될 수 있다. 물론 앞의 사랑처럼 끔찍한 고통을 줄 수도 있다. 고통이 두려우면 포기하면 된다. 대신 ‘어땠을까?’라는 평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갖고 살아야 한다. 심수봉처럼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여럿 겪은 사람은 하늘이 나를 저주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늘에 대고 절규하며 묻는다.
‘하늘이여, 저 사랑 언제 또 갈라놓을 거요.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 거요.’
2절로 넘어가면 둘이 처음 만나던 때를 노래한다. ‘예기치 못했던 운명의 그 순간 당신을 만나던 날’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드러난 내 상처 어느새 싸매졌네.’ 여기서 심수봉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열리지 않았나 한다.
내 주변에 수녀원에서 살다 여러 사정으로 수녀원을 나온 분이 있다. 2〜3년 힘들게 살아가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수녀로서의 삶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던 때라 고민했다. 이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새벽 2시에 그 수녀원 문 앞으로 갔다. 모두가 잠든 밤 그녀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옛집 문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문을 붙잡고 울도록 옆에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결혼을 결심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많은 상처들 때문에 ‘내 인생에 일상의 행복은 허락되지 않았나 보다’ 생각할 때 누군가 그 상처를 진정으로 받아들여 주면 그 상처는 ‘어느새 싸매져’ 치유된다.
-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한 심수봉이 직접 피아노 반주하며 부르는 '비나리'.
내가 이 노래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이 2절 끝부분에 나온다.
‘사랑이란 작은 배 하나, 이미 바다로 띄워졌네.’
사랑하는 두 사람 좀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사랑은 세상이란 바다에 떠 있는 배이다. 세상이 협조해 주지 않으면 사랑은 폭풍 만난 똑딱선 신세가 된다. 그녀는 이미 자식이 둘이 있는 상태에서 재혼했으니 그들의 사랑이 녹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절에서 ‘이 사랑 언제 또 갈라놓을 거냐’고 하늘에게 묻던 심수봉은 2절에서 단호히 말한다.
‘이 사랑 또 눈물이면 안 돼요.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 줘요.’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여태 이만큼 당했으면 하늘에 대고 요구할 자격이 있다 생각했나 보다. 노래는 여기서 끝나는 듯하다. 여기서 끝나도 음악적으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마치 보너스 트랙처럼 네 소절이 더 들어 있다. 거의 떼쓰다시피 마지막에 뱉는 한 마디 ‘아~~ 사랑하게 해 줘요.’ 이 부분이 매력 포인트이다.
이 노래를 처음 만들고 친구에게 들려줬더니 노래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해서 추가했다고 한다. 그 친구에게 감사한다. 심수봉의 콧소리가 애원하듯, 떼쓰듯, 물고 늘어지듯 부르는 이 마지막 구절이 없었다면 훨씬 심심한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 캐롤 킹이 있다면, 한국에는 심수봉이 있다
심수봉의 노래 중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노래가 자작곡은 아니지만 그녀가 러시아 노래를 개사해 부른 <백만 송이 장미>이다. 이 노래는 임주리도 같은 제목으로 불렀는데 가사는 완전히 다르다. 임주리는 TBC-TV 전설의 드라마 《야, 곰례야》의 주제가를 불러 유명해진 가수이다. 그 뒤로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크게 히트했다.
《엄마의 바다》라는 주말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우울할 때면 이 노래를 계속 불러 유명해졌다. 임주리의 목소리도 특이하고 좋아하는데 <백만 송이 장미>는 심수봉의 가사를 더 좋아한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사랑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캄캄한 밤하늘 수많은 별 속에 별똥별 하나가 사랑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를 피우려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그려보며 심수봉의 콧소리를 듣다보면 신화적이라고 할까 신비한 느낌이 든다.
유튜브에 심수봉이 장기하와 얼굴들의 콘서트에 특별 출연해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르는 비디오가 올라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둘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니 종종 찾아 듣는다.
<그때 그 사람>의 재즈 버전도 유튜브에 있다. 피아노와 재즈 반주로 시작하는데 ‘이 노래가 이런 면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굳이 재즈의 기분을 과하게 내려 하지 않는 심수봉의 노래가 아주 좋다. 피아노와 드럼에 가끔 플루트 소리가 들리면 얼마 전 타계한 프랑스의 재즈 피아니스트 클로드 볼링(Claude Bolling)이 전설적인 플루트 연주자 장-피에르 랑팔(Jean-Pierre Rampal)과 녹음한 ‘바로크와 블루(Baroque and Blue)’ 분위기가 난다.
심수봉은 작사, 작곡 능력도 뛰어나지만 피아노, 드럼 등의 연주도 상당한 수준이다. 이 버전에 나오는 피아노와 드럼 연주가 혹시 그녀의 연주가 아닐까 한다.
애절한 목소리 만큼 굴곡진 그녀의 삶
심수봉의 매력은 우선은 특이한 목소리이다. 특유의 콧소리는 때로는 흐느끼는 듯하고, 때론 영혼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일부러 콧소리를 낸다는 느낌 없이 콧소리가 나는 것이 매력이다. 거기에 더해 심수봉은 심금을 울리는 곡 해석력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노래가 자작곡이니 잘 부르지 않겠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곡은 잘 쓰는데 그 곡을 남이 불렀을 때 훨씬 빛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하나 있다. “미국에 캐롤 킹(Carole King)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심수봉이 있다.”
캐롤 킹은 1960년대부터 당시 남편이던 작사가 제리 고핀과 함께 수많은 곡을 썼다. 때로는 자신이 피아노를 치며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유명 가수들에게 줘서 120여 곡을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린 불세출의 싱어-송 라이터이다. 캐롤 킹도 노래를 잘하는 가수이지만 그녀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같은 노래만 들어도 아리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버전이 훨씬 좋다.
심수봉은 작곡과 악기 연주에 있어 캐롤 킹에 뒤지지 않지만 여기에 작사 능력까지 갖춘 데다가 자신의 노래를 그 누구보다 소화를 잘하는 만능 뮤지션이다.
심수봉은 사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10·26을 자신의 생에서 지워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부터도 심수봉의 음악 세계를 존경하고 좋아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하는데 10·26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10·26 이후의 정치 상황 때문에 그녀의 귀중한 10여 년을 잃었다.
앞으로 그녀가 얼마나 더 오래 신곡을 발표하고 노래할지는 모르지만 될수록 오래 활동하길 바란다. 그리고 심수봉도 그 어느 누구도 정치인들의 싸움 때문에 그들의 삶과 고결한 예술세계가 짓밟히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하고 바래본다.
글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02월 08일 “백건우, 누나 보살핌 원치않았다” vs
“남매들, 윤정희 재산 생활비로 써”
▲ 피아니스트 백건우(왼쪽)와 부인 윤정희가 2011년 9월 진행된 문화일보와의 파워인터뷰에서 전북 부안군 위도해수욕장 해변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신창섭 기자
■ 尹남매들 - 백건우 ‘윤정희, 프랑스에 방치’ 공방
윤정희 남동생들 단독인터뷰 “白, 누나 납치하듯 佛로 떠나”
“우리 남매들은 그저 누나(윤정희)가 남은 생을 평온하게 지내길 바랍니다.”
알츠하이머 투병 중인 원로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가 프랑스에 방치돼 있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대해 7일 남편이자 피아니스트인 백건우가 소속사 빈체로를 통해 “거짓이며 근거 없다”고 해명한 데 이어 8일 윤정희의 남동생들이 문화일보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이를 재반박하고 나섰다.
◇윤정희 동생들 = 미국에 거주 중인 윤정희의 셋째 남동생 손병우 씨와 국민청원을 직접 올린 다섯째 손병욱 씨는 이날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나서게 된 이유를 자세히 밝혔다. 그들은 “후견인 소송에서 패소한 후 기가 막힌 상황을 호소하기 위함”이라며 “백건우와 그의 딸이 비행을 감추고 호도하기 위해 재산 문제를 내세우며 모함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생들은 2019년 5월 백건우가 한국에 머물던 윤정희를 데리고 돌연 프랑스로 간 것은 요양원 문제로 인한 다툼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손병우 씨는 “2019년 1월 모친상으로 가족이 모였을 때, (백건우가) 너무 지쳐 더 이상 윤정희를 보살피지 못하겠다. 형제들이 맡아야겠다고 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생각해 우리가 기꺼이 맡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이 요양원으로 비용이 상당한 국내 대기업이 운영하는 곳을 알아보자 ‘그만한 돈은 없다’며 윤정희를 납치하듯이 데리고 떠났다는 것이다. 이후 동생들은 후견인 자격을 놓고 프랑스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가 지난해 11월 최종 판결에서 패소했다. 이들은 “프랑스와 서울에 아파트 5채를 소유 중이라며, 이 중 한 채만 처분해도 간병비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손병우 씨는 “후견인 개시 신청은 보통 배우자가 하고 1순위인 배우자가 후견인이 되지만 백건우는 보호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던 아내가 늙고 병들었다고 저버린 것이다. 후견인으로 지정된 딸도 엄마의 간병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며 소송에선 졌지만 앞으로 누나의 구출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재산 운운에 대해서는 모욕죄로 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백건우측, 남매들 주장 반박 “진흙탕 싸움 비화… 안타까워”
◇백건우 지인들 = 백 씨와 가까운 한 인사는 윤 씨의 형제자매들이 오랜 기간 윤 씨의 재산으로 생활비를 일부 충당해왔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는 이날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6남매 중 1명이 윤 씨의 재산을 관리해왔는데 정확히 어디에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식사 준비나 스케줄 관리 등 단순 체재비 지출을 뛰어넘는 금액이 지속적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백 씨는 2019년 초 윤 씨가 모친상 당시 귀국했을 무렵 남매들 가운데 한 사람이 윤 씨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후 한국의 요양병원 몇 군데를 알아보다가 그해 5월 파리 근교에 윤 씨의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 지인은 또 ‘후견인 신청을 하지 않은 백 씨가 윤 씨의 보호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는 가족의 주장에 대해선 “1년 내내 공연 일정 때문에 해외 각지를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후견인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한편 빈체로가 7일 내놓은 원고지 약 4.5매 분량의 입장문은 백 씨가 문구를 소속사와 조율하며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입장문에서 백 씨는 청와대 청원과 관련해 “거짓이며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두 사람은 평생 함께 연주 여행을 다녔지만 몇 년 전부터 윤정희의 건강이 빠르게 악화해 동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요양병원보다 딸의 아파트 옆집에서 가족과 법원에서 지정한 간병인의 돌봄 아래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윤정희는 주기적인 의사의 왕진 및 치료와 함께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백 씨의 또 다른 지인은 “입장문에 재산 관리 등의 내용을 넣지 않은 것은 법적 판단이 끝난 상황에서 가족 문제가 불필요한 오해를 부르는 상황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잉꼬부부’로, 또 국민에게 위로를 전하는 예술가로 살아온 두 사람이 주변인들과 분쟁에 얽혀 진흙탕 싸움을 벌이게 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 5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외부와 단절된 채 쓰러져가는 영화배우를 구해 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와 논란에 휩싸였다.
문화일보 김인구·나윤석 기자
02.08 윤정희 동생들 패소 석달 뒤…“치매 배우 방치” 청원 올라와
윤정희(左), 백건우(右)
배우 윤정희(77·왼쪽)와 피아니스트 백건우(75·오른쪽) 부부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달 5일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영화배우 ***를 구해 주세요”라는 글이 게시됐다. “배우자와 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외로이 알츠하이머와 당뇨와 투병중”이라는 내용. 윤정희 배우라는 추정 속에 7일 현재 2700명이 동의했다. 이에 백건우씨는 7일 공연기획사 빈체로를 통해 “거짓이며 근거 없는 주장이다. 윤정희는 가족의 따뜻한 돌봄 아래 생활하고 있다. 파리고등법원의 최종 판결과 함께 마무리된 부분”이라고 반박했다.
백건우와 딸이 후견인 지정되자
동생 3명, 프랑스 법원에 소 제기
법원 “보살핌 못받는단 근거 없어”
백건우 측 “가족 돌봄 아래 생활”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2년 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부인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 사실을 공개했다. 인터뷰엔 딸 진희씨가 동행했다. 당시의 인터뷰, 이달 국민청원, 백건우의 입장문, 파리고등법원의 지난해 판결문을 종합하면 투병 공개 이후 2년 동안 윤정희의 동생들은 백건우 부녀를 상대로 프랑스에서 소송을 제기했고, 패소했다. 국민청원 게시글은 파리고등법원의 판결 3개월 만에 올라왔다.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증세는 10여 년 전 시작됐다. 백건우는 인터뷰에서 “10년 동안 둘이서만 해결해보려 했다. 전 세계 연주 여행을 둘이 다녔는데 얼마 전부터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정착할 곳을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던 부부는 2019년 초 윤정희가 모친상을 당하면서 한국에 들어왔고, 이때 요양원 등 머물 곳을 찾았다. 백건우는 “하지만 한국에서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좋지 않겠다 싶었다. 그때 딸이 돌보겠다고 해 딸 집 근처에 조용한 집을 하나 얻었다”고 했다. 딸 진희씨는 “제가 아는 사람 중 알츠하이머를 돌보는 간호사들이 있어 어머니를 살펴봐 주고 있다”고 했다. 파리 근교에 윤정희의 거처를 마련한 때는 2019년 5월이었다.
윤정희의 세 동생은 2019년 프랑스 파리의 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프랑스 법원이 백건우와 진희씨 부녀를 윤정희의 재산·신상 후견으로 지정한 데 대한 이의신청이었다. 지난해 9월 패소한 이들은 파리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두달 뒤 최종 패소했다. 판결문에서 고등법원은 “손미자(윤정희의 본명)가 배우자 및 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며 “현재 그녀는 안전하고 친숙한 환경에서 안락한 조건을 누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녀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고 금전적 횡령이 의심된다는 주장은 서류를 살펴본 결과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했다. 백건우와 딸 진희씨의 후견인 지위도 유지했다.
백건우 측은 이날 입장문에서 “(국민청원) 게시글에 언급된 제한된 전화 및 방문 약속은 모두 법원 판결이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고등법원 판결문은 “손미자의 형제자매들이 그녀와 통화하거나 방문해 그녀가 배우임을 상기시키고, 영화 촬영에 관해 이야기하며 피성년후견인(윤정희)의 심적 불안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딸 진희씨는 2019년 인터뷰에서 “나무와 호수가 보이는 곳에 집을 구했다. 칸 영화제 사진첩을 만들어 드렸다. 아버지는 방문하실 때마다 작은 화분을 발코니에 놓고 온다”고 했다.
1960년대 대표적 배우인 윤정희는 백건우와 76년 결혼, 프랑스에 정착했다. 딸 진희씨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프랑스의 오케스트라에서 활동 중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02.09 윤정희 여의도 집 2채, 동생들 "돈 때문 아니다"…진실은
“윤정희는 강제로 별거 당했다.”
복잡해진 '윤정희 청원'의 사실은
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의 5세 아래 동생인 손병우씨가 8일 중앙일보에 보낸 글의 일부다. 그는 윤정희의 배우자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소속사 빈체로가 7일 발표한 ‘윤정희 방치 국민청원에 대한 입장문’을 반박했다. 손병우씨는 “윤정희는 백건우와 함께 수십년 살던 집을 떠나 다른 집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며 “강제로 별거 당했다”고 주장했다.
윤정희는 손아래 형제자매 5인을 두고 있다. 그 중 손병우씨를 비롯한 손미현ㆍ병욱씨 3인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의 고등법원에서 윤정희 후견인 자격 취득에 실패했다. 이어 이달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영화배우 ***를 구해주세요”라는 호소문을 올렸다. 백건우는 이달 7일 소속사 빈체로를 통해 “근거없는 주장”이라며 “가족의 따뜻한 돌봄 아래 생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윤정희의 동생들은 이 반박문이 “완전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손병우의 반박문, 손미현ㆍ병욱의 중앙일보와 8일 전화 인터뷰, 백건우의 입장을 종합해 ‘윤정희 방치’ 사건의 쟁점을 정리했다.
혼자 방치됐나
윤정희의 동생 중 프랑스에 거주하는 손미현(6남매 중 둘째)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프랑스는 한국과 달라 간병인이라는 게 없다. 24시간 붙어있는 사람이란 없고, 있다면 굉장히 비싸다”고 했다. 알츠하이머와 당뇨를 앓는 윤정희가 간병인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손병우씨는 "지난해 여름 누나의 생일에 전화를 했지만 불통이었다"고 했다. 동생들이 최근에는 윤정희를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손병우씨는 중앙일보에 보낸 반박문에서 윤정희가 백건우와 살던 집이 아닌 딸의 옆집으로 옮겨간 데에 의혹을 제기했고 ‘강제 별거’라는 표현을 썼다. 또한 "한사코 아내를 피하고 있다"고 했고, 동생들은 "윤정희가 프랑스에 정착한 초기부터도 전화를 해보면 어둡고 불안한 모습이었다"고 주장했다. 손미현은 "2019년에 언니를 찾아갔지만 딸이 고리를 건 채 문도 열어주지 않고 언니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 후에 딸이 후견인 신청을 한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도 언니를 함께 돌보기 위해 후견인 신청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윤정희의 거처에 대해 백건우 측은 “딸 백진희의 아파트 바로 옆 집에서 백건우 가족과, 법원이 지정한 간병인의 따뜻한 돌봄 아래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백진희씨는 2019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내 옆 집에 엄마 집을 구했고, 마침 내 친구 중에 알츠하이머를 전문으로 한 간호 인력이 있어 도와주고 있다”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집을 구했을까. 백건우ㆍ윤정희 부부의 지인인 한 문화계 인사는 8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백건우가 한 집에서 생활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며 “피아노 연습도 할 수 없었고,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간병인이 윤정희를 돌볼 수 있는 새로운 거처가 필요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윤정희 세 동생의 후견인 자격 부여를 거부한 파리고등법원의 판결문은 “(윤정희는) 안전하고 친숙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노인요양시설에 입소하지 않고 매우 안락한 조건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또 “건강 상태를 고려할 때 (윤정희의) 여동생 자택에서 거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처럼 프랑스 법원은 윤정희의 동생보다는 백건우와 백진희씨의 의견을 사실로 판단했다. 하지만 윤정희 6남매 중 다섯째인 손병욱씨는 8일 전화 통화에서 “시작부터 불공정한 재판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나라에나 자국민 보호라는 게 있다. 백진희는 프랑스 시민이다. 하지만 후견인 신청을 한 세 사람(동생들)은 외국 국적이다”라는 이유였다.
돈 때문인가
윤정희는 서울 여의도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여의도의 한 공인중개사는 “윤정희는 24평, 36평짜리 두 채를 2000년대 초반에 구입했으며 24평은 임대를 줬고, 36평에는 윤정희의 막내 동생이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파트 시세는 각각 18억ㆍ22억 원 정도이고, 오래된 아파트이기 때문에 전월세 가격은 낮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윤정희의 아파트에 거주 중인 여동생은 이번 소송에선 빠졌다.
윤정희의 동생들이 프랑스 소송 패소에 이어 국민청원을 게시하면서 금전 문제가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돈 때문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손미현씨는 “금전적 문제는 전혀 없다”고 했고 손병욱씨는 “우리 형제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전혀 없다”고 했다. 손병욱씨는 “형제 둘은 미국에, 한명은 프랑스에 있다. 누나의 돈과 전혀 상관없이 산다. 서울에 있는 남동생은 자기 일 하는 데 바빠 이번 일에 신경 쓸 겨를도 없다”고 설명했다. 또 “직계 가족이 있는 형제 명의의 재산을 어떻게 노릴 수가 있나. 가능하기나 한가”라고 되물었다. 손미현씨는 “우리가 원하는 건 큰 언니(윤정희)의 건강과, 편안한 여생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분쟁 커질까
윤정희의 동생 3인은 2019년 윤정희가 프랑스로 옮겨간 후 프랑스 파리 지방법원에서 후견인 소송을 시작했고, 두 차례 패소했다. 이에 이달 청와대 국민청원에 호소문을 올렸다. 손병욱씨는 “이후에 한국에서 법적 조치를 할 계획은 현재로선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오래 살아 한국 실정도 잘 모르고, 재산을 노려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손병욱씨는 “누나의 여생이 걱정되고, 잘 돌봐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오죽하면 국민 청원을 올렸겠나”고 말했다. 손미현씨도 “(백건우 측과) 입장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도 신중하게 발언하려 한다”면서 “언니는 한국에 와서 동생들과 같이 사는 게 최선이라고 본다”고 했다. 백건우 또한 8일 현재 추가 입장표명을 계획하지 않은 채 11일 귀국해 26일 대전에서 독주회를 시작하는 일정을 준비 중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02.10 청룡영화 여우주연상 품은 라미란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41회 청룡영화상
제4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9일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라미란이 소감을 전하고 있다. 인천=허상욱 스포츠조선 기자
1990년대 대기업에 입사한 말단 여직원들의 애환을 따스하게 묘사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제41회 청룡영화상 3관왕에 올랐다. 지난해 최다 관객(475만명)을 동원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9일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린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우조연상(이솜)과 미술상(배정윤), 음악상(달파란) 등 3개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이 영화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한국 영화계가 홍역을 앓고 있던 지난해 10월 개봉해서 관객 157만명으로 선전(善戰)했다. 고교 졸업 직후 대기업에 들어간 여직원 3인방(고아성, 이솜, 박혜수)이 사회적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내용을 경쾌하고 코믹하게 그렸다. 특히 여우조연상을 받은 이솜은 직장 내 성희롱을 겪으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여직원 ‘유나’ 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올해 청룡영화상은 코로나 사태로 최악의 위기를 겪었던 한국 영화계에 보내는 따스한 위로가 됐다. 신인 감독의 데뷔작과 독립 영화 등 그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주목받을 기회가 적었던 작품들에 과감하게 주요 상을 수여하는 변화와 혁신을 선택한 것이다. 이날 시상식에서 홍의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었던 영화 ‘소리도 없이’는 남우주연상(유아인)과 신인감독상(홍의정) 등 2개 부문을 차지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지난 10월 개봉한 ‘소리도 없이’는 드라마 ‘비밀의 숲’의 배우 유재명과 영화 ‘베테랑’과 ‘사도’의 유아인을 주연으로 캐스팅해서 화제를 모았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유아인은 “여기 계신 선배님들이 제가 꿈을 키운 영감이었다”며 “언제나 사용당할 준비가 돼 있으니 가져다 쓰십시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라미란은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며 “앞으로도 배꼽 도둑이 되겠다”고 말했다. 유아인과 정유미는 이날 시상식에서 ‘청정원 인기스타상’을 받았다.
제41회 청룡영화상이 9일 인천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남우주연상 유아인과 여우주연상 라미란이 포즈를 취하고있다. 인천=정재근 스포츠조선 기자
영화 ‘윤희에게’의 연출과 각본을 맡았던 임대형 감독은 감독상과 각본상을 동시에 거머쥐면서 ‘청룡의 스타’로 떠올랐다. ‘윤희에게’(순제작비 10억원)와 ‘소리도 없이’(순제작비 13억원) 같은 중소 규모의 작품들은 예전에는 100억~200억원 규모의 대형 블록버스터에 가려서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 속에서 청룡영화상은 이 작품들을 통해서 한국 영화의 미래에 주목했다.
‘남산의 부장들’에 이어서 지난해 영화 흥행 2위를 기록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435만명)도 남우조연상(박정민)과 촬영조명상(홍경표) 등 2관왕에 올랐다. 영화에서 박정민은 트랜스젠더 여성 역할로 화제를 모았다. ‘기생충’과 ‘설국열차’에서 촬영을 맡았던 홍경표 감독은 현재 할리우드와 충무로를 넘나들면서 활동하는 최고의 촬영 감독으로 꼽힌다.
신인남우상은 유태오(‘버티고’), 신인여우상은 강말금(‘찬실이는 복도 많지’)이 받았다. 2019년 말 825만명 관객을 동원한 영화 ‘백두산’은 이날 기술상(진종현)과 최다 관객상을 받았다. 올해 청룡영화상은 2019년 10월부터 1년간 개봉한 한국 영화 174편을 대상으로 영화계 전문가들의 설문 조사와 심사위원 8명의 심사, 네티즌 투표 결과를 거쳐서 선정했다.
1963년 첫 개최 이후 청룡영화상은 공정한 진행과 엄격한 심사를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 잡았다. 그 비결은 시상식 당일 심사에 있다. 매년 시상식이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수상자를 결정한다. 심사위원들은 수능 출제 위원들처럼 휴대전화를 주최 측에 사전 제출하고, 심사 결과는 시상자들이 무대로 올라가기 직전까지 밀봉된다. 이 때문에 후보들도 수상자 호명 직전까지는 심사 결과를 모르는 채 시상식에 참석한다. 시상식 다음 날 심사위원의 선택과 이유를 상세하게 공개하는 ‘심사 결과 공개’도 한국 영화상 최초로 도입했다. 한국 영화인들이 청룡 트로피를 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다.
제4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9일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배우 유아인, 정유미가 청정원 인기스타상을 수상하고 있다. 인천=허상욱 스포츠조선 기자
조선일보 김성현 박돈규 기자
02.10 이철재 변호사의 라떼가요
노래는 개인과 사회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어느덧 라떼 세대가 된 필자가 좋아했던 노래들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곱씹고 노래와 얽힌 기억들을 회상한다. 우리 가요와 사회의 반세기의 이야기가 풍요롭게 펼쳐진다. 나이 든다는 건 기억이 풍성해 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임신 8개월, 유부남인 줄 모르고...가수 현미와 김추자를 발굴한 그 작곡가
이봉조上 <무인도>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갈 때 텍사스주로 간 것은 그곳에 나의 작은외삼촌이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작은외삼촌과 외숙모는 1950년대에 대학을 다니러 미국으로 갔다가 졸업하고도 그냥 정착해 살고 계셨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내가 주말에 쉬러 가면 어디를 가도 나를 늘 달고 다녀서 사람들이 내가 보이지 않으면 “조카는 어디 갔어요?” 하고 물을 정도였다.
일요일마다 들르던 한국 식료품점에도 같이 갔다. 1980년대에는 이미 미국 내 대도시에는 한국 식당과 식료품점들이 깔려 있었다. 헌데 이 한국 식료품점에 198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상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의 방송사들이 자신들의 드라마, 쇼, 뉴스 등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미국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테이프들은 다시 전국의 한국 식료품점으로 퍼져나갔고, 그들은 가게에 비디오 기계를 여러 대 놓고 그 테이프들을 복사해 손님들에게 대여했다. 처음에는 테이프 하나에 1달러 정도 했다.
80년대 초반 미국의 한국식료품점에서 한국 드라마나 쇼, 뉴스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대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테이프 하나 대여료는 1달러 정도였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미국으로 건너온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 내에서 한국은커녕 동양 문화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2019년 현재 텍사스주 휴스턴 주재 한국 총영사관 집계로 휴스턴 지역 한인 수가 17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가 휴스턴으로 이주한 1962년에는 그들이 휴스턴의 유일한 한국인 부부였다.
그 당시 휴스턴에는 한국인이라고는 전쟁 때 미군과 결혼해 그곳으로 이주한 미시즈 스미스라는 한국인 여성이 딱 한 명 살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아버지도 휴스턴에서 5년간 공부하셨지만 그때는 어머니와 결혼 전이었고 외삼촌과 외숙모가 텍사스주의 다른 도시인 오스틴이라는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휴스턴의 유일한 유학생이었기에 미시즈 스미스와 남편 미스터 스미스도 잘 알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가 휴스턴으로 이주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 서로 엇갈렸다.
실향민들의 유일한 위로, 한국 드라마
이미숙과 유인촌 주연의 드라마 <장희빈>.
한국 식료품점이나 식당 하나 변변한 것이 없던 이 시절 미국에 살던 한국인들 중에는 북한에서 온 실향민이 유난히 많았다. 남한도 어차피 타향인지라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들은 자동차로 두세 시간 가는 거리는 이웃으로 생각하며 몇 되지 않는 한인들끼리 모여 미국에 있는 재료로 한국 음식 비슷하게 만들어 먹는 레서피를 공유하고 이북 말씨를 계속 사용하며 그들만의 한인 문화를 만들며 살았다.
한국은 10년 가까이 한 번도 방문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외삼촌 친구 중 한 분은 국제전화 값이 너무 비싸 한국에 전화해서 어머니가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만 듣고 끊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무용담처럼 해준 적도 있다.
어린 나이에 고향 등지고 피란 내려와 새로 정착한 곳에 정 붙일 틈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온 그들에게 한국에서 날아오기 시작한 비디오테이프들은 가뭄의 단비였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잊고 살던 고국에 대한 향수를 깨웠다.
외삼촌과 외숙모도 1981년 이미숙과 유인촌 주연의 <장희빈>부터 한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삼촌 댁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어 근처 친하게 지내던 한인 부부 집에서 늘 함께 시청하곤 했는데 그 부부가 싸움을 크게 하고 한 달 이상 냉전 중일 때 드라마가 너무 궁금해 비디오 플레이어를 사가지고 보기 시작했다.
내가 미국으로 이사했을 때는 외삼촌, 외숙모 두 분이 거의 중독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일요일에 한국 식료품점에 가면 음식물 사러 간 건지 비디오테이프 빌리러 간 건지 구분이 힘들었다. 나는 대학 시절 차가 없었고 학교 동네에 한국 식품점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한국 식품점을 갈 수 없었다. 외삼촌 댁에 가야 한 번씩 한국 비디오를 보고 왔다.
학년이 올라가 공부가 바빠지면서 외삼촌 댁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도 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늘 가면 외숙모의 맛깔난 이북식 김치와 내가 온다고 신경 써서 만든 별식을 먹고 나를 위해 버리지 않고 모아 놓은 한국 신문의 미주판을 통해 한 달도 지난 한국 소식을 읽고, 저녁식사 후에는 함께 앉아 한국 드라마를 봤다.
때로 일제 강점기나 6·25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볼 때면 외삼촌과 외숙모는 비디오를 아예 멈춰 놓고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식들에게 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평안도에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에게 듬뿍 해줬다.
한번 오랜만에 외삼촌 댁에 갔더니 그날은 전에 없이 《가요무대》를 빌려다 놓으셨다. 그 비디오테이프에는 ‘떠날 때는 말없이- 이봉조 특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는 이봉조의 대표곡 중 하나이다. 비디오를 틀고 김동건 아나운서의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 하는 인사말이 끝나고 곧이어 이봉조가 얼마 전 별세했고 이번 《가요무대》는 이봉조 추모특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봉조는 외삼촌과 외숙모의 세대였지만 1960-70년대 한국 문화를 거의 접하지 못하고 산 두 분에게는 낯선 인물이었다. 오히려 어린 내가 “앗, 이봉조 씨가?” 하며 깜짝 놀랐다.
가수 현미와 김추자를 발굴한 그 작곡가
가수 현미와 이봉조의 이야기를 다룬 TV조선 프로그램 '인생다큐 마이웨이'. ⓒTV조선 화면캡처
1970년대 MBC의 ‘여대영과 그의 악단’, KBS의 ‘김강섭과 그의 악단’과 더불어 ‘아무개와 그의 악단’의 트로이카를 이뤘던 TBC의 ’이봉조와 그의 악단‘의 이봉조는 TBC 간판 쇼 프로그램이었던 <쇼쇼쇼>를 비롯한 모든 음악 프로의 반주를 맡았고 편곡도 자주 했다. 작곡가로서 수많은 명곡을 썼으며 요즘으로 치면 기획자로 현미, 정훈희, 김추자 등의 빅 스타를 발굴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이봉조는 한때 서울 시청의 토목과 공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미 1950년대 학생 시절부터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폰 실력을 인정받던 터라 결국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뮤지션으로 살기 시작했다. 역시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현미와 1962년 미국 노래 을 <밤안개>로 개사하고 빠른 재즈풍으로 편곡해서 앨범을 냈다.
이후 1963년 간첩 혐의로 처형당한 김수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나는 속았다>에서 이봉조가 작곡한 주제가 <보고 싶은 얼굴>을 현미가 불러 스타 커플이 되었다. 그 뒤에도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을 히트시키며 둘 사이에 아들까지 둘을 낳았지만, 이봉조에게 법적인 부인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현미의 요구로 헤어졌다.
이봉조는 '가요제 전문 작곡가'라는 별명답게 현미, 정훈희 등과 동경 가요제, 그리스 가요제, 칠레 가요제 등에 수차례 참가해 매번 수상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이봉조가 아직 살아있다면 이제 9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그의 데뷔 시절 이야기는 나도 주워들은 이야기들이다.
한국 가요의 고전 <무인도>
내 기억에 이봉조가 깊게 각인된 첫 사건은 그가 정훈희와 함께 칠레 가요제에 출전해 <무인도>로 동상을 받고 정훈희가 최고가수상을 받고 돌아와 방송에 출연했을 때이다. 그게 1975년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한 번 따 보지 못한 처지였기 때문에 누가 국제 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는 것은 온 국가의 경사였다.
1974년 홍수환이 김기수 이후 최초로 권투 세계 챔피언이 되고 몇 달 후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당시 적국인 소련(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을 하고 돌아왔을 때는 시내에서 카퍼레이드까지 할 정도였다. 가요제 3위 입상은 카퍼레이드까지는 아니었지만 신문과 뉴스에 크게 보도가 될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언젠가 정훈희가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와 그때의 뒷이야기를 하는 것을 봤다. 이봉조가 무대에 오르기 전 그렇게 긴장을 많이 했다고 한다. 옆에서 보다 못한 정훈희가 “슨생님예, 뜰다 떨어지나 안 뜰다 떨어지나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생각하시면 돼요” 했다고 한다. 위대한 공연예술가들의 공통점은 이렇게 긴장하고 떨다가 일단 무대에 서면 무섭게 몰입한다.
텔레비전에서 본 칠레 가요제 실황에서 이봉조도 그랬다. 마치 ‘내가 떨었어?’ 하는 것처럼 색소폰을 목에 걸고 전주와 간주에 연주를 하면서 정훈희가 노래할 때는 열정적으로 지휘를 했다. 정훈희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노래를 했다.
그녀가 스페인어로 노래를 시작하자 청중들이 열광했다. 하지만 정훈희의 말은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곳에 정박 중이던 한국 원양어선 선원들이 객석에 앉아 초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했고 자신은 그 태극기만을 바라보며 노래를 했다고 한다. 휘날리는 태극기의 바람을 타고 정훈희의 끝을 모르는 고음이 독수리가 비상하듯 하늘 높이 솟구치며 노래가 끝났다. 그녀는 동양의 가수로 유일하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KBS2 '불후의 명곡'에 소개된 이봉조. ⓒKBS 화면캡처
그 후로 40여 년이 흐른 지금 <무인도>는 우리 가요의 고전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어왔지만 나이 들며 들어보면 참 기가 막히게 곡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연주하는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정경화 씨는 어쩌면 비발디가 적어 놓은 시를 읽고, 그걸 음악으로 연주해서 사계절의 모습이 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게 할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비발디는 <사계>의 매 악장 앞에 그 악장의 주제에 맞게 짧은 시를 적어 놨는데, 새소리, 물소리, 폭풍우, 가을걷이의 기쁨, 을씨년스런 겨울날의 풍경 등이 시 없이 정경화의 음악만 들어도 눈에 보인다. <무인도>를 듣다 보면 같은 생각이 든다.
<무인도>의 가사는 그리 길지 않고 무인도의 풍경을 간략하게 그린다. 가사의 분위기와 곡조가 그렇게 잘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노래의 가사가 없어도 가사에 나오는 그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보일 것 같다. 노래 전반부 ‘파도여, 슬퍼 말아라. 파도여, 춤을 추어라. 끝없는 몸부림에 파도여, 파도여 서러워 마라’ 할 때는 리듬과 멜로디가 마치 무인도로 몰려와 부서지는 파도처럼 느껴진다.
‘솟아라 태양아’에 가서는 갑자기 트럼펫 반주가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마치 열대의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머리를 쑥 내미는 것 같고, ‘불어라 바람아. 드높아라 파도여, 파도여…’ 하는 대목에서는 폭풍우가 밀려오는 듯하다.
재즈풍의 <밤안개>
가요제에 출품하는 곡들은 대부분 웅장하고 클래식한 오케스트레이션 편곡을 하기 마련이지만 이봉조는 불세출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답게 노래와 편곡 곳곳에 재즈적인 요소들을 가미하여 놓았다.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인의 곡들처럼 클래식하게 연주해도 좋고 완전히 분위기를 바꿔 재즈곡으로 연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은 정훈희가 불러 크게 히트한 <안개>에서도 받는다. 두 곡 다 반주의 규모를 축소해 피아노와 드럼, 색소폰 반주에 맞춰 재즈풍으로 부르면 아주 좋을 것 같다. <밤안개>도 원곡인 ‘It’s a Lonesome Old Town’을 벤 버니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연주곡으로 듣거나, 냇 킹 콜,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로 들으면 상당히 느리고 로맨틱한데 이봉조가 바꿔 놓은 <밤안개>는 재즈풍이다. 특히 윤복희가 1968년에 녹음한 것을 들으면 원곡의 형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즈 냄새가 난다.
조선일보 글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https://youtu.be/InnHSnH5RD4 - 정훈희가 부르는 <무인도>. 칠레가요제 실황(1975)
희대의 바람둥이 작곡가가 ‘두고두고 못다 한 말'
<떠날 때는 말없이> 이봉조下
1970년대 MBC의 ‘여대영과 그의 악단’, KBS의 ‘김강섭과 그의 악단’과 더불어 ‘아무개와 그의 악단’의 트로이카를 이뤘던 TBC의 ’이봉조와 그의 악단‘의 이봉조는 TBC 간판 쇼 프로그램이었던 <쇼쇼쇼>를 비롯한 모든 음악 프로의 반주를 맡았고 편곡도 자주 했다. 작곡가로서 수많은 명곡을 썼으며 요즘으로 치면 기획자로 현미, 정훈희, 김추자 등의 빅 스타를 발굴했다.
이봉조 上편에 이어서...
이봉조가 매년 TBC-TV 신년 특집 쇼에 나와 부르던 <떡국>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봉조 이외의 다른 가수가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봉조가 새해 말고 다른 날 나와 부르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신은 공평한가 보다.
작곡과 재즈 색소폰 연주에서 천재적 재질을 갖고 있던 이봉조는 걸걸한 목소리에 그저 음치보다 조금 괜찮은 노래 실력을 지녔다. 하지만 ‘뜩국 맛이 그르케도’ 하는 경상도 억양을 구수하게 섞어 부르는 노래가 듣기 좋아 우리 삼형제는 신년만 되면 언제 이봉조가 나와 <떡국>을 부를까 기다렸다.
작곡과 재즈 색소폰 연주에서 천재적 재질을 갖고 있던 이봉조. ⓒSBS 화면 캡처
이봉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리 형제들은 가끔 <떡국> 이야기를 하며 아마 그 노래를 아직 기억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튜브에서 <떡국>을 찾아보니 웬일! 이봉조가 현미, 정훈희와 함께 녹음한 스튜디오 버전까지 있다.
우리만 아는 노래로 생각하고 애정을 가졌었는데 생각보다 꽤 유명한 곡이었나 보다.
보고 싶은 그 얼굴 이봉조, 하지만 '떠날 때는 말없이'
<보고 싶은 얼굴>은 대학 때 외삼촌 댁에서 봤던 이봉조 추모특집 <가요무대> 비디오에서 처음 들었다. 지금 생각에 최성수가 불렀던 것 같다. 최성수는 내가 즐겨 듣는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날 노래를 아주 잘 불렀던 기억이 난다. 영화 주제가였으니 영화의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북으로 도주해 그곳에서 역시 간첩 혐의로 처형된 연인 이강국을 그리워하는 김수임의 마음을 그린 노래인 것 같다.
<가요무대>의 이봉조 추모특집의 피날레는 역시 이봉조와의 사이에 자식을 둘이나 둔 현미가 장식했다. 그녀가 그날 오열하며 부른 노래는 <떠날 때는 말없이>였다. 이 노래 역시 <가요무대>에서 그날 현미의 목소리로 처음 들었다. 듣는 즉시 매료되어 지금도 나의 애창곡 중 하나이다.
당대의 스타 커플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동명 영화의 주제가를 당대의 스타 커플 이봉조-현미 콤비가 만들어 불렀다. 작사는 유호이다. 유호는 유명한 극작가 겸, 방송작가, 시나리오작가, 작사가이다. 자신이 집필한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가 가사를 늘 직접 쓰곤 했는데 하나같이 걸작들이었다.
이 노래가 피날레로 정해지고, <가요무대>의 제목이 <떠날 때는 말없이- 이봉조 특집>으로 정해진 것은 유호가 이봉조의 인생을 미리 보고 쓴 것처럼 이 가사와 이봉조의 인생이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미와의 만남, 이별 그리고 죽음이 노래에 모두 들어있다.
시트콤의 원조인 미국의 유명한 <왈가닥 루시(I Love Lucy)>의 주인공 루실 볼과 데지 아르네즈는 시트콤 시작할 당시 실제 부부였다. 후에 이혼을 했지만 데지는 늘 자식들에게 농담으로 “너희 엄마랑 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게 아냐. 처음 만나고 한 5분쯤 있다가 사랑에 빠졌지”라고 했다. 만나자마자 불같이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역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람이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만나는 순간부터 불꽃이 튀더라는 경우가 많다. “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 똑같은 순간에 똑같은 마음이 달빛에 젖은 채 밤새 불렀죠.” 그렇게 현미와 이봉조는 사랑에 빠졌다. 똑같은 순간에 둘이 한마음이 되어 밤새 달빛에 젖어가며 불같은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노래 후반부에서 이제 그 사랑은 떠나고 달빛 대신 그는 비에 젖어 ‘아, 그 밤이 꿈이었나’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말한다. ‘두고두고 못다 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2절은 후반부만 다른데 그건 마치 남겨진 현미의 노래인 것 같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나 어이 달래라고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떠났는가.’
본부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현미는 이봉조와 헤어지고 그 후로 13년 그녀는 이봉조가 본부인에게 돌아간 줄로만 알았다. 마지막 그를 만났을 때 그가 현미를 그리며 홀로 13년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평생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이 늙고 병들어 틀니를 끼고 색소폰을 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재결합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처 합치기도 전에 이봉조는 혼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떠날 때는 말없이 그렇게 가버린 것이다.
정훈희, 김추자의 대마초 파동과 함께 묻힌 곡
https://youtu.be/oUD707DykRA -
가수 현미가 라이브로 부르는 <밤안개>.
<밤안개>는 내가 즐겨 듣는 버전이 몇 가지 있다. 현미가 라이브로 부르는 것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2012년에 올라왔는데 언제 쩍 영상인지 흑백이다. 현미의 모습이 나이가 지긋하다. 현미의 목소리 상태도 최고고 라이브에서 흥이 돋을 대로 돋아 스캣까지 넣어가며 소울풍의 느낌을 가미해 신나게 노래를 불러제낀다.
윤복희가 1967년에 녹음한 <밤안개>도 좋다. 현미의 조카인 노사연도 신인 시절 종종 기타를 치며 <밤안개>를 불렀는데 유튜브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OST에 삽입된 스팅이 부른 ‘It’s a Lonesome Old Town‘은 밤에 불 끄고 침대에 누워 잘 듣는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봉조의 노래 중에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다. 소월의 시에 이봉조가 곡을 붙이고 이은하가 부른 <초혼>이다. 처음 들을 때부터 홀딱 반했는데 자주 부르지도 않고 흐지부지 사라졌다.
<무인도>는 정훈희와 함께 1970년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디바였던 김추자가 칠레 가요제에 나가 부르려다 여러 사정으로 정훈희가 출전했다. 현미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정훈희와 이봉조의 스캔들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 ‘헛소문’을 잠재우고자 정훈희가 나가도록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정훈희는 현미에게 “언니 나 믿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고 칠레로 떠났다.
김추자의 버전도 몇 번 들었는데 내게는 정훈희의 목소리가 더 귀에 익다. 칠레 가요제 몇 개월 후인 1975년 12월 연예계 대마초 파동이 크게 터져 정훈희, 김추자 등을 비롯한 톱 가수들이 무더기로 출연 정지를 당하면서 한동안 <무인도>도 방송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조기 은퇴한 김추자와 달리 정훈희는 성공적으로 재기해 지금까지 노래를 계속하면서 <무인도>를 자주 불렀다.
“이건 훈희 겁니다"... “언니 나 믿어줘서 고마워”
이봉조는 자신이 발굴해 키우고 여러 차례 함께 가요제에 나가 상을 타온 정훈희에 대한 스승으로서의 애정이 남달랐나 보다. 그녀가 대마초 사건으로 가수 활동을 중단한 중에 <꽃밭에서>라는 노래를 써 놓고 그녀가 무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 노래는 1979년 TBC 세계가요제에서 패티김이 게스트로 출연해 <이렇게 좋은 날>이란 제목으로 한 번 불렀다. 패티김이 노래를 탐내 녹음하고 싶어 했고, 주변에서도 이런 고음을 소화할 수 있는 가수가 있을 때 녹음하라고 권했지만 이봉조는 패티김에게 “이건 훈희 겁니다”라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떠날 때는 말없이>는 역시 현미의 노래가 최고이다. 하지만 의외로 박인희가 부른 것도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현미처럼 다이나믹하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박인희가 예전에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낭송해 톱 가수의 노래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도 마치 시를 낭송하듯 그녀의 작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른다. ‘이 노래에 이런 분위기도 있었네’라는 생각이 든다.
토냐와 라라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가슴을 움켜쥐고 마지막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쓰러져 죽은 지바고처럼 두 여인 사이에서 살다 말없이 떠나버린 이봉조. 혹자는 두 여인 모두 사랑했을 것이라 하고, 혹자는 두 여인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음악 세계를 흠모하는 팬으로서 단 하나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이봉조가 가슴을 움켜쥐고 세상을 떠나면서 ‘두고두고 못다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나오지 못한 절절한 한 편의 노래가 아닐까? 들어봤으면.
https://youtu.be/76e79Pjbqm8 - 가수 현미가 부르는 <떠날 때는 말없이>
https://youtu.be/cicbYmUaEiw - 가수 현미와 정훈희가 함께 부른 <떡국>
글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