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소식
2014.02.19 배우 황정순씨 89세로 별세
연극·영화·TV를 아우르며 큰 사랑을 받은 원로 배우 황정순씨가 1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9세.
1925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15세였던 40년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이후 극단 신협을 중심으로 250여 편의 연극 무대에 섰다. 70대에 접어든 99년에도 ‘툇자 아저씨와 거목’에 특별출연했다.
영화는 ‘그대와 나’(1941)에 단역으로 데뷔해 강대진 감독의 ‘마부’(61), 유현목 감독의 ‘장마’(79) 등 370여 편에서 활약했다. ‘육체의 고백’(64)의 카리스마 넘치는 나이트클럽 마담, ‘민며느리’(65, 최은희 감독)의 악독한 시어머니 등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한 그는 김희갑과 부부로 출연한 ‘팔도강산’(67)을 통해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를 널리 알렸다. ‘팔도강산’은 노부부가 전국 각지에 사는 자녀를 만나러 유람여행을 다니는 이야기다.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국책홍보영화임에도 큰 흥행성공을 거둬 ‘속 팔도강산’(68) ‘내일의 팔도강산’(71) ‘아름다운 팔도강산’(72) 등 시리즈가 이어지는 인기를 누렸고,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이후 TV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보통사람들’(82~84, KBS) 등 숱한 작품에 출연했다.
그와 ‘혈맥’(63) ‘갯마을’(66) ‘산불’(67) 등 20여 편의 영화를 함께 찍은 김수용 감독은 “어떤 배역이든 걸음걸이·말투·표정 등 온전히 그 인물이 되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지독하게 한 배우”라면서 “전문 교육을 따로 받을 수 없던 시대에 연기를 몸으로 익히며 배우의 지적 세계를 넓혀왔다”고 회고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62)를 함께 찍은 임권택 감독은 “젊었을 때부터 어머니·할머니 역할을 주로 맡으며 우리들 가슴 속에 ‘한국영화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새겼다”며 “한국영화계가 꼭 기억해야 할 큰별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은 “거동이 불편하실 때도 부산국제영화제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영화계 행사마다 영화 속 이미지처럼 인자하고 배려 많은 모습으로 후배들을 챙겼다”며 “해방 전부터 활동한 ‘한국영화의 어머니’이자 명실상부한 한국영화의 역사”라고 추모했다.
별세 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은 “우리 시대의 영원한 어머니로 살아오신 분” “흑백TV에서 김희갑씨와 연기한 기억이 생생하다” “어릴 적 드라마에서 너그러운 할머니 역할로 자주 나오셨는데 인상이 부드러웠다” “언젠가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고 먼저 간 동료배우들의 이름을 불러 눈시울이 뜨거웠다” 등 세대별로 다양한 기억을 쏟아내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사랑’(57)으로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 최우수여우상, ‘혈맥’으로 대종상·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갯마을’ 등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92년 보관문화훈장, 2004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07년 여성영화인상 공로상을 받았다. 2006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남편 이영복씨와는 51년 결혼해 77년 사별했다
1963년 개봉한 유현목 감독의 영화 ‘김약국의 딸들’에 한약방을 하는 김성수(김동원 분)의 아내 한실댁으로 출연한 황정순씨(왼쪽에서 둘째). 왼쪽부터 여배우 엄앵란, 황정순, 최지희, 강미애, 이민자가 연기하고 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2018.04.17 최은희 씨 별세하다
톱스타→부부 납북→극적 탈출… “500년 산것처럼 모진 시절”
‘영화같은 삶’ 최은희 별세
‘사랑방 손님’ ‘춘희’ 등 130편 출연… 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 이끌어
홍콩서 남편 신상옥과 함께 피랍… 8년만에 빈 주재 美대사관 망명
납북 11년만에 다시 고국으로
고 최은희 씨(오른쪽)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년). 고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의 연출을 맡았으며, 고인은 옥희 어머니를 연기했다. 동아일보DB
16일 별세한 원로 배우 최은희 씨(본명 최경순)는 은막의 스타이자 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고통스럽게 증언한 역사의 증인이다.
1926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3년 배우 문정복의 소개로 극단 아랑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광복 전까지 활동했다. ‘새로운 맹서’(1947년)로 데뷔해 신상옥 감독의 ‘코리아’(1954년)에 출연했고, 이후 신 감독과 결혼했다. 앞서 18세에 김학성 촬영감독과 만나 결혼했지만 6·25전쟁 때 피란길에서 헤어졌다.
고인은 지난해 11월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고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영화제인 ‘제1회 신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 휠체어에 앉은 채 참석했다. 원로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은 “휠체어에 타고 온 최은희 선생이 사람들을 만나며 무척 반가워했다”며 “몸은 비록 나약한 모습이었지만, 정신은 아주 좋은 상태였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최은희 선생은 한국 분단 역사의 희생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며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겸손하면서 한 시대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연기자였다”고 말했다. 올해 4월 10일에 열린 신 감독의 12주기 추도식에는 신영균 문희 정진우 이장호 씨 등 영화계 원로들이 참여했다.
이장호 영화감독은 “남북한에서 톱스타 그 자체였던 고인이 눈을 감으셨다니 한 세대가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고 추모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은 “한국 영화사의 큰 별, 한국 영화 역사 그 자체인 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원로 연기자 전계현은 “후배들이 선생님 댁에서 촬영대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는 등 따뜻하면서도 멋지고 당찬 선배셨다. 돌아가셨단 소식에 허전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춘희’(1959년) ‘돌아온 사나이’(1960년) 등 고인이 출연한 작품들은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성춘향’(1961년)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고, 이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1961년) ‘열녀문’(1962년) ‘쌀’ ‘로맨스 그레이’ ‘강화도령’(1963년) ‘벙어리 삼룡’ ‘빨간 마후라’(1964년) 등 대작들을 연달아 발표하며 한국의 여성상을 오롯이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5년에는 영화 ‘민며느리’로 한국영화 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으로 데뷔했다. 1966년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신 감독과는 1976년 이혼했다.
1983년 3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가운데)이 초청한 연회에서 남편 신상옥 감독(오른쪽)과 상봉한 배우 최은희 씨. 동아일보DB
이후 고인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1978년 안양영화예술학교 교류 사업차 방문한 홍콩에서 돌연 북한으로 납치된 것. 평양 남포항에서 고인을 마중 나온 김정일이 건넨 첫마디는 “최 선생. 내레 김정일입네다”였다. 김정일이 납치를 지시한 장본인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고인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납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 위원장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내가 슬퍼하니까 ‘최 선생, 나 좀 보시오.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네까’라고 해 웃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2007년)에서 “김정일은 나에게 온갖 배려와 친절을 베풀었지만 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썼다.
납북 5년째인 1983년 김정일로부터 연회에 초대받은 고인은 그 자리에서 신 감독을 만나게 된다. 신 감독은 고인이 납북된 그해 7월 사라진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다가 북한으로 끌려갔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사랑 사랑 내사랑’ 등 17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옛 전성기 때를 재연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후 영화 ‘춘향전’에 쓸 부속품을 구하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갔다가 그곳 성당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1986년 베를린영화제 참석 뒤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극적으로 망명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에서 체류하다 1989년 귀국했다. 11년 만이었다. 고인은 ‘최은희의 고백’의 서문에서 “500년을 산 것처럼 길고 모진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1984년 ‘돌아오지 않은 밀사’로 체코국제영화제 특별감독상을, 1985년 ‘소금’으로는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대한민국영화제 특별공로상(2006년), 한민족문화예술대상(2008년), 대한민국 무궁화대상(2009년), 대종상 영화공로상(2010년)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균 상균 씨와 딸 명희 승리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19일 오전 8시. 02-2258-5940
조윤경 yunique@donga.com·장선희 기자
故 최은희 씨 빈소…영화인·후배 배우들 발걸음 이어져
17일 오후, 전날 92세로 세상을 떠난 배우 최은희 씨의 빈소에는 원로 영화인과 후배 연기자 등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이들은 핑크빛 장미로 곱게 둘러싸인 최 씨의 영정 사진 앞에 헌화하며 추모했다.
최근까지도 최 씨의 자택을 찾았던 오랜 벗인 배우 신영균 씨(90)는 “배우는 화려한 직업인데 나이가 들면서 병들고 쇠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며 “하늘나라에서도 신필름을 만들어 잘 운영하셔서 나중에 신필름에 있었던 이들끼리 모였으면 좋겠다”고 애도했다.
평소 자녀들에게 “원로와 현역 영화인들이 소통하며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혀왔다는 고인의 빈소에는 모처럼 배우와 감독, 제작자 등 각계각층 영화인이 모여 북적였다. 별세 소식을 접하고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빈소를 지킨 ‘신필름 사단’의 막내 배우 한지일 씨(71)는 “최은희 선배님 세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천만 관객의 한국영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이라며 “유명해져도 항상 고개를 숙이라고 가르치시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울먹였다. 1960, 70년대에 활동하며 고인과 함께 멜로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윤일봉 씨(84)도 오랜 시간 빈소를 지키며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애통해했다.
1970년에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으로 부임할 정도로 후학 양성에 힘써왔던 최 씨의 빈소에는 후배 배우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배우 정혜선 씨(76)는 “후배들에게 늘 따뜻하고, 한마디로 천사같은 분이셨다”고 고인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실제 고인은 2007년 펴낸 자서전 ‘고백’의 발간 계기 중 하나로 “내 기록을 통해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진정한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조언하는 등 후배들을 향한 애정을 나타냈다.
고인은 최근까지도 휠체어에 의존하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영화계 후배와 옛 지인들을 꾸준히 만나왔다고 한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북한에서 탈출한 뒤 이들 부부와 오래 교류하며 ‘최은희 신상옥 납북수기, 김정일 왕국’을 쓴 김일수 전 동아일보 기자는 “1년에 한 두번 정도는 꼭 만났는데 매번 소녀처럼 반가워하며 다정하게 근황을 묻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며 “나이가 들어도 항상 곱게 차려입고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고 회상했다.
빈소에는 영화인들 외에도 고인과 생전에 다양한 인연을 간직한 이들의 흔적이 가득했다. 고인의 아들인 신정균 영화감독은 “평양에서 활동 중인 어느 배우의 따님이란 분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며 “탈북 전 북한에서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뉴스로 소식을 접한 뒤 애도하고 싶은 마음에 왔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은 “최은희 소화 데레사님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빈다.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고인은 영화 속 변화무쌍한 역할을 통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신 분으로 기억한다”는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고인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사후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알려왔다.
빈소에는 김국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이해용 한국영화인원로회 이사장, 김영효 영화감독 등 원로 영화인은 물론, 이병헌 박중훈 전도연 등 현재 왕성하게 활동 중인 후배 배우들도 조화를 보내 고인을 애도했다.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영화인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장선희기자 sun10@donga.com
김민기자 kimmin@donga.com
다시 무대에 서는 崔銀姬의 진한 체험
삶과 예술, 南과 北, 사랑과 증오
두 번 납북됐다가 두 번 탈출,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한국 최고 여배우가 말하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
배우 崔銀姬(최은희·71)씨가 칠십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대에 설 준비로 땀을 흘리고 있다. 출연 작품은 극단 新協(신협·1950년에 이해랑·김동원씨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 연극 예술의 수립과 창조」를 목적으로 만든 新劇協議會의 약칭)과 서울 신필름이 제작 기획한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헤밍웨이 원작의 이 뮤지컬에서 崔銀姬씨가 맡은 배역은 게릴라부대의 지휘자 파블로의 늙은 아내 필라役이다. 연출은 崔씨의 「영원한 감독」이자 동료이고 또한 애인이자 남편인 申相玉(신상옥·75) 감독이다.
『욕심 같아서는 영화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맡았던 마리아役을 맡고 싶지만, 칠십을 넘은 여자에게 누가 마리아役을 주겠어요? 그러나 이제는 필라役이 더 마음에 듭니다. 겉으로는 거칠면서도 내면적으로 여자다운 애잔한 정을 가지고 있는 필라가 마리아 못지않게 아름답게 느껴지거든요』
崔銀姬씨는 데뷔 시절 읽은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론」을 평생 잊지 못한다. 마음으로 배역과 일체가 되지 않으면 감동적인 연기를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 스타니블라스키 연기론의 핵심이다. 이후 배우로서 崔씨의 삶은 이 지침에 완벽하게 가까워지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실망, 그리고 새로운 도전으로 점철되어 왔다.
뮤지컬의 공연 날짜는 내년 1월8일부터 1월27일까지 2주일간, 무대는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이다. 그러니 지금쯤 崔銀姬씨는 맡은 배역 필라와 일체가 되기 위해 필라의 삶에 동화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다. 內戰 당시의 스페인, 아니 파쇼와 이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용광로처럼 끓고 있던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 자신을 던져넣어야 하고, 산 속으로 내몰린 「공화파」 유격대들의 짓밟힌 삶 속에 몰입해야 한다.
그리고 남자 못지않게 거칠면서도 여성다운 가녀린 정을 지니고 있는 소설 속의 필라에게 동화되어야 한다. 무대에서나 카메라 앞에서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崔銀姬씨는 「배역과의 일체화」에 성공할 것이고, 관객들은 이 노련한 배우의 원숙한 연기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崔씨는 「현실 같은 허구」의 세계를 재현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이다. 즉 허구의 세계이다. 연극보다 더 연극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자신의 삶의 세계, 즉 「허구 같은 현실」은 어떤 모습으로도 남에게 완전히 보여줄 수가 없다. 배우 崔銀姬씨가 지닌 또 다른 아픔이다.
6·25 때 한 번 인민군에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청천강 부근에서 탈출했고, 1978년 북한의 최고 권력자에 의해 다시 한번 납치되었다가 무려 8년 만에 申相玉 감독과 함께 서방으로의 극적인 탈출에 성공했던 그 이야기는 일찍이 어떤 영화 제작자도 상상할 수 없었던 드라마였다.
냉전과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감수해 왔지만 崔씨처럼 극적으로 현대사의 질곡을 한몸에 끌어안아야 했던 사람도 없었다. 배우 崔銀姬씨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그가 연기해 온 연극과 영화 등 예술의 세계뿐만 아니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처럼 극적인 삶을 이 탁월한 배우는 어떻게 소화시키고 있는가, 어떻게 아파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뮤지컬 준비와 회고록을 쓰느라고 바쁘게 살고 있는 崔씨를 만나보았다.
崔銀姬씨 옆에는 그림자처럼 申相玉씨가 함께 있었다. 아니, 申감독 옆에 그림자처럼 崔銀姬씨가 있었다. 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 게다가 평생 그렇게 해 왔듯이 지금도 역시 申감독이 연출하는 뮤지컬에 崔銀姬씨가 출연하고 있다는 남다른 관계를 감안하고도 두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함께 있었다.
崔씨가 인터뷰하는 동안 申감독은 옆에 앉아 있거나 가끔 일 때문에 들락거리면서 『아니, 그건 그렇게 얘기할 것이 아니고…』 『崔여사, 거 왜, 이런 일도 있지 않았어?』 『이야기의 구성과 주제를 이렇게 잡으면 어떻겠소?』 하는 등 崔씨에게 간섭(?)을 했고, 필자에게도 감독다운 의견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그러한 태도가 뜻밖이라는 느낌이었으나 崔銀姬씨의 지나간 삶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어가면서 「아, 역시 두 사람은 따로 떼어놓고 이해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야말로 한몸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그래서 아예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崔씨보다 申감독에게 『그 때 상황은 어땠습니까?』 하고 묻는 형식으로 인터뷰는 진행됐다.
崔銀姬가 필라役에 어울릴까
―미국에 살고 계신 줄 알았는데, 언제 한국에 들어왔습니까?『
『벌써 3년째입니다. 1999년에 들어왔으니까』
―위험을 느끼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대한민국을 각종 敵性(적성) 테러로부터 제일 안전한 지대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金正日의 조카가 의문의 살해를 당했고, 황장엽씨도 여태까지 활동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처음 미국에 살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암살지령까지 있었으니까요. 워싱턴에 살면서 전화번호는 애틀랜타의 번호를 사용하고, 슈퍼마켓에 갈 때도 같은 곳에 단골로 다니지 않고 이곳 저곳 번갈아 다녀야 한다든가, 늘 경호하는 사람이 지켜 주고 있다든가, 線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만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뭐, 어떻게 하겠어요. (저쪽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제 또다시 우리를 해쳐서 이익이 없다는 걸 알겠지요』
이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화제를 연극 쪽으로 돌렸다.
―필라役을 맡았다니 조금 놀랍습니다.
『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
―조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럴 거예요. 저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는 현모양처형이거든요. 動的(동적)이 아닌 靜的(정적)인 인물상입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어머니役, 「성춘향」의 춘향役, 「상록수」의 채용신役이 모두 한국적인 미덕을 갖춘 청순한 여인役이었어요.
연극을 할 때도 그랬어요. 셰익스피어를 많이 했는데 「오델로」에서는 데스데모나役을, 「햄릿」에서는 오필리아役을 했기 때문에 현모양처형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배우가 한 색깔만 내는 고정적인 이미지에 갇혀버리는 것은 불행입니다. 저도 그 고정된 이미지가 답답해서 뛰쳐 나오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어요.
「로맨스 그레이」(1963·감독 申相玉)에서 빠 걸로 나와 변신을 시도했어요. 그랬더니 팬 레터가 왔는데, 「崔銀姬씨도 그런 역을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역시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하고 인정을 한 후에 덧붙이기를 「그러나 앞으로는 제발 그런 역을 하지 마라」는 거예요. 그 후로 한 번도 그런 役을 맡지 못했어요』
현모양처役으로 굳어져버린 게 유감
―動的인 연기와 靜的인 연기 중에 어느 쪽이 더 어렵습니까.
『모두 다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動的인 역할이 소화하기 쉽다는 것이 정설이고, 제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계속 내면적으로만 흐르는 연기는 정말 소화해 내기가 어려워요. 그런 의미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개인적으로도 무척 아끼는 작품입니다. 그 영화를 찍을 때의 얘긴데, 옆에서 도금봉, 김희갑씨가 나오는 장면을 찍을 때는 스태프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제가 나오는 장면을 찍을 때는 숨소리 하나 안 들리는 거예요. 연기를 하면서도 「내가 이거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겁이 나기도 할 정도였어요.
연극 무대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어요. 데스데모나役을 했을 때의 얘긴데, 지금 연극계의 大배우인 박정자씨가 그때 중학생으로 내 연기를 보고 감동받은 일을 지금도 얘기합니다. 데스데모나가 마지막 목 졸려 죽을 때 관객석의 여학생들이 흐느껴 울었는데 그 여학생들 속에 박정자씨도 있었나 봐요.
그런데 추운 겨울에 감기가 든 상태로 얇은 드레스만 입고 죽어서 무대의 마룻바닥에 누워 있노라니 기침이 나서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참다 못해 기침을 했더니 관객들이 「와, 살았다」 하고 환성을 지르는 거예요. 연극은 그런 재미도 줍니다』
申相玉 감독에게 물었다.
―배우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외부로부터 강요되거나 만들어지는 겁니까.
『어느 한 작품이 히트하면 그대로 굳혀져버려요. 崔銀姬씨가 고정된 이미지를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지금까지 잘 되지 않았던 게 다 이유가 있어요. 배우는 하나의 상품인데, 제작자들로서는 어떤 배우가 한 작품에서 성공하면 그 이미지를 그대로 써먹으려고 합니다.
인간이란 정숙하게 생겼다고 다 정숙한 것이 아닌데 무대와 스크린에서는 만들어진 이미지가 상품화되어 계속 대중에게 팔리는 것입니다. 문예봉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배우인데 영화 속의 이미지와 분위기가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나름대로의 독특한 이미지를 가진 大배우가 된 거지요. 다른 역할은 본인이 하고 싶어도 주어지지 않으니 하나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뮤지컬에서의 필라役은 지금까지 崔銀姬씨가 굳혀온 이미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역할이 아닐 수 없다. 崔씨는 『아, 저 배우가 옛날의 그 崔銀姬 맞느냐』고 놀랄 정도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대단한 각오를 보인다. 자신의 삶이 곧 몇 마당의 연극이었는데, 그 아픔을 소화해 내면서 극 속의 「남의 인생」에 열중하고 있는 崔씨야말로 타고난 배우였고, 배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글자 그대로의 배우였다.
극단 아랑
崔銀姬씨는 1930년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으나 해공 신익희 선생과 함께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사람으로 崔銀姬씨가 태어난 직후 농사일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하여 우체국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슬하에 아홉 남매를 두었으나 넷을 어려서 잃고 다섯 남매를 키웠는데 이 중 崔銀姬씨는 셋째였다. 위로 언니 둘이 있고 아래로 남자 동생 둘이 있는 사이에 셋째딸로 태어난 것이었다.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다. 서울 신당동에 살면서 종로 6가에 있는 보통학교를 나온 崔銀姬(본명 慶順)씨는 집안 형편도 어렵고 스스로도 집안 살림을 돌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진학을 포기한 채 놀고 있었다.
이 무렵 극장이라고는 이웃에 사는 친구를 따라 딱 두 번 갔었는데, 한 번은 야마구치 도시코의 영화, 그리고 한 번은 「나그네 설움」인지 「임자 없는 나룻배」인지를 보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별세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아득하여 헛된 꿈으로 밀쳐버렸다.
일제 말, 崔銀姬씨의 나이 열 여섯 때였다. 서울에도 미군기의 공습에 대비하여 방공호로 대피하는 훈련이 자주 벌어졌다. 이웃에 사는 친구와 함께 대피훈련으로 방공호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여배우 문정복(문정숙의 언니·越北―필자 注)을 보았다. 문정복을 알아본 친구가 崔銀姬씨를 꾀었다.
『얘, 저 사람 유명한 배우야. 우리도 배우 시켜달라고 부탁해 보자』
『감히, 어떻게』
『넌 가만 있어. 내가 말해 볼게』
친구는 口辯(구변)이 좋았다. 문정복에게 가까이 가서 속닥거리더니 崔銀姬씨에게도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내일 사무실로 나가는데 같이 가 보자. 거기서 소개해 줄 테니까』
극단 阿娘(아랑)의 사무실은 서울 종로 6가 2층 건물의 2층에 있었다. 두 처녀는 여기서 동양극장을 무대로 인기 절정에 있던 유명 배우 黃澈(황철·越北)에게 소개된다. 黃澈은 두 처녀를 살펴보고 몇 마디 말을 시켜본 다음 조건을 달았다.
『좋은데, 부모님 승낙이 있어야 해』
무대를 향한 탈출
배우들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와는 별도로 배우라는 직업 자체를 천시하는 풍조가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부모님 승낙을 받는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변 좋은 친구는 『이럴 줄 알고 미리 승낙을 받고 왔어요』 하고 둘러댔다.
『그럼 이제부터 매일 나와 공부를 해 봐』
大배우 崔銀姬씨가 극단 아랑의 연구생으로 입단한 것은 이런 인연이었다.
『극단의 선배들 중에는 뒷날 越北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학구적인 분위기였어요. 그들의 영향을 받아 연구생 시절 엄청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 오늘날까지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인생 공부를 연극을 통해 한 셈이지요』
운도 좋았다. 黃澈이 이 햇병아리 배우를 크게 자랄 재목으로 보고 적극 뒤를 밀어준 것이 그 하나였고, 두 번째 운은 우연하게 찾아온 것이었다. 「연구생」 몇 달 만에 이들 두 처녀에게 기회가 왔는데 崔銀姬씨가 아닌 친구에게 먼저 왔다. 그러나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던 黃澈이 그 친구의 음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崔銀姬씨에게 그 役을 시켜버렸다.
첫번째 무대는 성공이었다. 崔銀姬씨의 배우인생이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안 부친은 금족령을 내리고 때로는 방 안에 가둔 채로 방문을 밖에서 걸어 잠가버렸다. 그러나 崔銀姬씨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하여 무대로 돌아간다. 「탈출」은 아마 崔銀姬씨의 숙명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만 없었더라도 일제 말기에 이미 大배우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崔씨는 아쉬워한다.
첫번째 영화 출연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겨울 토월회 멤버들이 다시 모여 광복의 감격을 담은 「40년」을 무대에 올렸다. 崔銀姬씨는 토월회의 멤버는 아니었으나 찬조출연을 해 달라는 교섭을 받고 나갔다.
여기서 그녀는 소녀 역할을 맡아 무대에서 노래도 불렀다. 이 공연에서 처음으로 복혜숙, 문예봉(越北), 김소영 등 꿈에 그리던 배우들을 만나고 함께 공연하는 영광을 가졌다.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은 일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최초로 영화 출연 제의를 받은 것이었다.
『최운봉 선생이 제의해 왔어요. 「영화 들어가는데 해보겠느냐」고요. 나는 당돌하게도 「대본을 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했지요. 대본을 보니 학도병으로 끌려간 애인을 기다리며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어촌 처녀의 이야기였어요. 제목은 「새로운 맹세」였고, 감독은 신경균씨였어요』
―연극에서 영화로 갈 때는 특별한 훈련이나 사전에 해야 할 준비는 없습니까? 그냥 무대에 서다가 어느 날 카메라 앞에 서면 그만인가요?
『같은 연기니까 본질적으로는 같기 때문에 특별한 훈련은 필요치 않았어요. 다만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되니까 고심을 많이 했지요. 무대에서는 관객을 대상으로 연기하고, 객석의 반응도 직접 와 닿는데 영화에서는 시커멓고 차가운 기계 앞에 혼자 서서 연기하는 거니까 쑥스럽고 거북하지요.
주연으로 출연하기로 결정해 놓은 다음 최운봉 선생이 영화는 연극과 달리 한 컷 한 컷 찍어 편집하는 거니까 그에 따라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둥 설명을 해줬어요.
신인 배우들이 애 먹는 일 가운데 하나가 오랜 기간에 걸쳐 한 컷 한 컷 지지부진하게 촬영을 하는 동안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배역에 대한 감정 연결이 잘 안 된다는 점인데, 연극 무대에 섰던 사람들은 이 점에서 보통의 신인들과는 달리 전체적인 흐름과 감정 연결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유리했습니다.
연극은 표현과 동작이 커야 하는 데 비해 영화는 동작이 섬세하고 내면 연기가 중요한데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과장된 연기가 나오기 쉬워요. 처음에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영화 만드는 일은 참 재미있는 일이 많았어요.
스태프들의 일 중에 촬영 기록이라는 일이 있어요. 오늘 찍었던 장면과 연결된 장면을 내일 찍으려면 배우의 옷고름이 어느 쪽으로 날렸는가 등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일치시켜야 하거든요. 그 시절 「기록」을 맡은 사람은 그 상황을 스케치하듯 그림으로 그려 두었다가 다음 촬영 때 참고로 했어요.
이런 일도 재미가 있어서, 연기를 하면서 한편으로 기록 같은 스태프의 일까지 도왔어요. 미리 계획된 줄거리 속에서 그것을 하나 하나 뜯어 부분적으로 만든 후 마침내 원래 계획했던 작품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이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같은 해(1947)에 김승호도 「해방된 내 고향」으로 데뷔한다.
결혼, 6·25
영화 데뷔작인 「새로운 맹서」를 찍는 동안 보통 젊은 신인 여배우들에게 흔히 일어나기 쉬운 일이 崔銀姬씨에게도 일어났다. 촬영을 맡았던 김학성이 적극 구애를 했고, 영화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 초년병은 김학성의 구애와 김학성의 누나인 여배우 김연실(6·25 때 越北―필자 注)의 적극적인 요청에 따라 덜컥 결혼을 하고만다. 김학성은 前妻와의 사이에 아이 둘을 낳은 홀아비였다. 그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고스란히 崔銀姬의 몫이었다.
이 결혼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김학성은 술을 마셨고, 손찌검까지 했다. 결혼생활이 속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을 때 6·25가 터졌다. 그때 김학성은 결핵으로 앓아 누워 있었다. 김학성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미처 피난 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서울은 인민공화국이 됐다.
며칠 동안 방 안에서 숨어 있던 崔銀姬씨는 양식도 구할 겸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아볼 겸 밖으로 나왔다. 명동 가까운 길거리에서 『동무, 崔銀姬 동무 맞지요?』하고 부르는 남자가 있었다. 越北한 배우 심영이었다. 심영은 다짜고짜 崔銀姬씨를 데리고 명동성당에 진을 치고 있던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대 합주단에 합류시켰다. 합주단에는 수백명의 연극 영화 종사자들이 끌려와 있었다. 崔銀姬씨와 같은 해에 영화에 데뷔한 김승호, 그리고 연극 배우 김동원도 있었다.
탈출 1
국군의 인천 상륙 후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이들을 北으로 끌고갔다. 한꺼번에 움직이는 데 따른 위험을 분산시키려 했음인지 인민군은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개성 방면으로, 또 한 그룹은 춘천 방면으로 인솔해 갔다. 崔銀姬씨는 김승호와 함께 청량리를 거쳐 춘천방면으로 이동했다.
『후퇴하면서, 그 경황에도 낮에는 시골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연도 하면서 밤에는 걸어서 北으로 이동했어요. 저는 김승호씨와 같은 팀이었어요. 기회를 봐서 김승호씨에게 가만히 말했어요.
「어디까지 끌고 가려는 거지요? 도망을 쳐야겠어요」
그랬더니 김승호씨는 특유의 코웃음으로 「흥」하고 말아요. 그때 김승호씨는 취사 담당이었는데, 취사 담당은 식량 실은 트럭을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우리처럼 걷는 고생도 안하고 팔자 편하게 갔지요.
어느 날 이동 중에 김승호씨가 갑자기 배가 아파 죽겠다고 데굴데굴 굴렀어요. 자동차나 사이드카에 태우려 해도 막무가내로 「죽는다」고 하는 바람에 감시하던 인민군이 「꼼짝 말고 있으라. 의사를 불러오겠다」고 잠깐 간 사이에 김승호씨는 탈출을 해버린 거예요. 어느새 춘천에 닿았는데 오현명씨가 또 탈출하고, 탈출자가 늘어나는데 나는 꼼짝 못하고 끌려가면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밤에만 걸어서 청천강까지 닿으니 발가락이 썩어 지금도 고생하고 있습니다. 청천강에 닿으니 미군과 국군의 낙하산 부대가 새까맣게 하늘에서 떨어져 후퇴하는 인민군의 퇴로를 막고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도망을 쳐서 마침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서울로 돌아올 목적으로 南으로 내려오는데 성천에서 국군 부대를 만났어요. 우리 신분을 확인한 부대장이 「우리 부대도 마침 정훈공작대를 모집하고 있던 중이니 우리와 함께 가자」고 하는 바람에 거절하지 못하고 일을 했어요』
정훈공작대가 하는 일은 국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공연이었다. 여기서 崔銀姬는 테너 홍진표와 듀엣으로 노래도 부르고 「태극기」 같은 단막극을 만들어 공연도 했다. 일행은 7~8명이었다.
이 정훈공작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다시 후퇴하는 도중 서울에서 해산됐다. 그녀는 대구로 피난하여 거기서 극단 新協의 옛 동료들과 반가운 해후를 했다. 新協은 대구 문화극장을 무대로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영화의 보급은 본격화되지 않고 전쟁의 공포와 피난살이의 고달픔을 달래 줄 볼거리가 많지 않던 때여서 사람들은 극장문이 미어터지게 몰려왔다. 新協이 무대에 올린 레퍼토리는 유치진 선생의 작품과 셰익스피어 작품이었다. 崔銀姬씨는 오랜만에 연극에 미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의외로 깊고도 넓었다. 내무성 경비대 합주단에 붙잡혀 있는 동안이나, 그후 北으로 끌려가는 동안에는 공포와 고생이 말이 아니었으나 여자로서의 그녀에게 별일은 없었다. 그러나 인민군에서 탈출한 뒤 국군 부대로 넘어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가 생겼다.
더욱 나쁜 것은 「헛 소문」이었다. 『인민군 일개 소대에게 당했다』는 악랄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사람이 있었다. 거기에 날개를 달아 『그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얘기까지 보태졌다. 이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잡지에 쓴 사람이 있어 오늘날까지도 독자들은 그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상처도 있었다. 대구에서 연극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는 사람이 무슨 모임이 있다고 하길래 따라가 보니 국군의 최고 지휘부에 있는 장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슬 퍼런 장성의 손을 뿌리치고 나오면서 「전쟁을 지휘해야 할 사람이 이따위 짓이나 하고 있어서야…」 하는 깊은 환멸을 맛보았다.
그런저런 환멸의 이야기, 부끄러운 이야기, 잘못된 헛소문의 발원지를 낱낱이 들추어내어 회고록으로 엮는 작업을 崔銀姬씨는 지금 진행 중에 있다.
『책이 나오면 온통 부끄러운 이야기뿐이라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려요.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이기 때문에 있었던 일 그대로 모두 밝히겠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일에는 고통도 따른다. 그래서 崔銀姬씨의 회고록 쓰는 작업은 넉넉하게 시간의 저쪽을 바라보는 여유가 아니라 지금도 아픈 고통을 반추하는 작업일 것이다.
야심찬 감독의 등장
이런저런 소문은 가뜩이나 삐걱거리던 남편 김학성과의 사이를 건널 수 없는 강으로 벌려놓았다. 그리고 崔銀姬씨는 결혼 5년 만에 김학성과 갈라선다. 그녀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다시 홀로 서게 된 崔銀姬씨 앞에 운명은 뒤늦게 「사랑」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申相玉 감독의 등장이 그것이다. 휴전을 앞둔 1953년 젊고 야심찬 신인 감독 申相玉이 홍보영화 「코리아」에 삽입할 「춘향전」을 찍자고 제의해 온 것이 시작이었다.
「코리아」는 한국을 종합적으로 알리는 내용의 영화로 그 속에 「춘향전」의 몇 장면을 삽입하기 위해 극단 新協의 멤버들에게 교섭을 해 온 것이었다. 한 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여자와 총각 감독의 만남은 이렇게 영화 찍는 일로부터 시작됐다.
『銀姬씨가 출연한 연극은 「코리아」에 출연하기 전 옛날부터 다 봤어요. 銀姬씨를 꼭 내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어요』
『銀姬씨는 내가 꿈꾸던 배웁니다. 銀姬씨를 보고 있으면 앞으로 찍을 영화들이 자꾸 떠올라요. 銀姬씨는 내 상상력의 원천입니다. 나하고 함께 영화를 해보지 않겠습니까?』
이같은 수사는 단순히 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임시처방으로 둘러대는 남자들의 화려한 약속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실제로 申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崔銀姬와 함께」 해 왔다. 1960년대 초 영화계 최대의 화제였던 「춘향전」과 「성춘향」의 대결에서 申감독은 20代의 김지미에 맞서 30代의 崔銀姬를 내세웠다. 단순히 자신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그랬다면 그건 영화를 그만두겠다는 자살행위였다.
북한에 납치되어 간 후에도 申감독은 최서해의 소설 「탈출기」에서 20代, 30代의 여배우가 적격인 여자 주인공역에 50代의 崔銀姬씨를 출연시킨다. 강경애의 소설 「소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大성공이었다. 북한 영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국제적인 평가를 받았으니까. 그러므로 『함께 영화를 해보자』는 젊은 감독의 말은 연애에 빠진 남자의 虛辭(허사)가 아니었음이 후일 입증된 셈이다.
황금기
두 사람은 결합한다. 그러자 헤어졌던 첫 남편 김학성이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한국 영화사상 간통죄 사건 제1호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스캔들을 일으킨 연예인은 그것으로 생명이 끝이었다.
여론은 「선배 영화인의 마누라를 가로챈 젊은 감독」에게 돌팔매를 들었고, 「병든 남편을 버리고 젊은 남자에게 간」 여배우에게도 채찍을 들었다. 언론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 무렵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셀리니 감독이 비슷한 스캔들을 일으켜 세상을 즐겁게 했으나 그건 저쪽 세계의 일이고 한국에서는 그저 「부정한 일」일 뿐이었다. 간통죄로 고소를 당한 후 조사를 받으러 갔더니 검사가 서류를 보다가 말했다.
『이건 간통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건이잖소. 당신들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구만』
혼인신고를 빨리 하자고 崔銀姬씨가 졸랐으나 김학성이 웬일인지 미적거리다가 헤어진 것인데 그 때문에 간통죄가 성립되지 않아 사건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나 세인들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두 사람 다 최악의 경우 한국 땅에서 영화일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한 결혼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申相玉 감독은 승승장구했다. 덩달아 崔銀姬씨의 인기도 함께 올라갔다. 申감독은 자신의 아내인 崔銀姬씨를 주연으로 내세워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년), 「지옥화」(1958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춘희」, 「동심초」, 「자매의 화원」(이상 1959년), 「로맨스 빠빠」, 「이 생명 다하도록」, 「백사부인」(이상 1960년) 등을 내놓았다.
감독뿐만 아니라 신필름이라는 영화사를 차려 제작자 겸 감독으로 종합예술인 영화를 총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때마침 영화는 연극을 제치고 사상 최대의 부흥기를 가져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戰後의 허허로운 마음을 영화라는 허구 속에서 달랬듯이, 한국 전쟁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음 달랠 수 있는 것도 영화뿐이었다. 그리하여 영화는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한가운데에 신필름이 있었고, 申相玉과 崔銀姬라는 커플이 있었다.
「춘향전」과 「성춘향」의 대결
신필름의 한국 영화 지배체제를 굳혀 준 것은 1961년 설날 동시에 개봉된 「성춘향」과 「춘향전」의 대결이었다. 「춘향전」은 홍성기 감독이 자신의 아내인 김지미씨를 춘향으로 내세웠고, 「성춘향」은 申감독이 아내인 崔銀姬씨를 내세워 두 커플의 대결로 흥미 만점의 게임을 벌였다. 이런 대결의 요소 외에도 두 편의 춘향전은 국내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영화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그만큼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춘향전」 쪽이 제작자(국제극장)와 감독, 즉 돈을 대는 물주와 영화 만드는 사람이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비해 「성춘향」 쪽은 제작, 감독이 일원화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화를 소신껏 만들기에는 후자가 유리할 것 같은데 그것도 밑천이 풍부할 때의 이야기이고 제작비에 쪼들리는 신필름으로서는 물량면에서 불리한 여건 속에서 출발한 게임이었다.
『그 전에 일본에서 열린 영화제에 참석하는 길에 천연색 영화에 필요한 준비를 해 왔어요. 천연색 영화의 효시는 춘향전으로 하기로 미리 계획을 세워놓았고 영화계에서는 모두들 알고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홍감독 쪽에서 「춘향전」을 한다고 먼저 치고 나온 거예요. 우리도 준비를 해 왔으니 포기할 수 없어 함께 시작한 건데 그것이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할 줄은 몰랐지요.
경쟁은 처음부터 불리했어요. 신문들은 「40代 춘향과 10代 춘향의 대결」이라고 과장되게 표현했고요. 어쨌든 김지미씨는 생기발랄한 새파란 배우였고 나는 30代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사실 우리는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기왕 시작한 일이니 잘해보자고 열심히 했습니다』
결과는 「성춘향」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申감독은 그 원인을 『춘향전이 지닌 차원 높은 해학을 잘 소화했고, 소박한 서민생활을 화면에 담아 옛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崔銀姬씨의 분석은 다르다.
『나중에 저쪽 영화도 봤는데…, 처음부터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영화를 다소 안일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화면이 우리것보다 훨씬 화려했고, 물량이 많이 투입된 작품이었는데 영화가 지닌 가장 소중한 생명력의 그 무엇이 결여되었다는 느낌이었어요』
신필름의 사형선고
「성춘향」 이후 1960년대는 申감독과 崔銀姬씨의 시대였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연산군」(이상 1961년), 「폭군 연산」, 「열녀문」(이상 1962년), 「로맨스 그레이」, 「강화도령」, 「철종과 복녀」, 「횃불」, 「쌀」(이상 1963년),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이상 1964년), 「배비장」, 「청일전쟁과 여걸민비」(1965년), 「다정불심」, 「꿈」, 「마적」, 「이조잔영」, 「산」(이상 1967년), 「여마적」, 「대원군」, 「무숙자」, 「여자의 일생」, 「내시」(이상 1968년), 「사녀」, 「천년호」, 「이조여인 잔혹사」, 「장한몽」, 「육군 김일병」, 「여성 상위시대」, 「(속) 내시」(이상 1969년) 등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중 대부분의 작품에서 崔銀姬씨는 주연으로 활약했다.
申감독이 직접 감독한 작품 말고도 신필름에서 제작한 작품의 수는 이보다 몇 갑절이나 많았다. 전성기 한 때 신필름은 직원 수가 200명이 넘는 큰 회사였다. 명실공히 한국 영화 그 자체였다.
신필름은 朴正熙 대통령과 金鍾泌의 도움으로 안양의 2만5000평 부지 위에 영화촬영소를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 촬영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을 양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해에 28편의 영화를 찍은 해도 있었다. 한 달에 두 편을 제작하려면 동시에 다섯 편을 찍어야 한다. 그 북새통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상도 많이 받았다. 1958년에 생겨 2년 만에 없어진 문교부 영화상은 1회와 2회 모두 주연 여배우상이 崔銀姬씨의 차지였다. 1961년에 생긴 공보부 영화상도 1, 2회 연속 주연여배우상을 崔銀姬씨에게 수여했다. 1961년 제정된 대종상도 1회와 4회, 5회에 걸쳐 崔銀姬씨가 주연 여배우상을 수상했다. 崔씨는 또 홍콩에서 개최된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주연여배우상을 수상했다.
이때쯤 申감독은 국내 영화시장이 너무 좁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한다. 活路는 수출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검열이 너무 심해서 그런 제도 아래서 만든 작품으로 해외에서의 경쟁력이 생길 까닭이 없었다. 한국 영화의 활로는 목을 죄고 있는 검열의 족쇄를 푸는 길밖에 없었다. 모든 감독들, 작가들, 배우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풀기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때는 3選 개헌을 지나 유신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검열제도를 완화하여 예술의 생명인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영화계는 申감독에게 총대를 메게 한다. 申감독 스스로 그 총대를 멨다고 볼 수도 있다. 국내 검열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申감독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역할을 기대하여 영화인들은 그에게 먼저 감독협회장으로 추대하고, 이어 영화인협회장으로 추대했다.
다음은 申감독의 회고다.
『그 시절 각 예술단체에 정부의 지원금이 나왔는데 영화인협회에 나오는 지원금은 중앙정보부와 협회가 갈라먹고 있었습니다. 내가 회장이 되어 그 짓을 못하게 하니까 불편한 사람들이 朴대통령에게 내가 젊은 감독들에게 이 체제 하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선동했다는 식의 무고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사 간판을 내리게 하고 여권까지 회수해 버렸어요』
발단은 오수미가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장미와 들개」(1975년)의 예고편 때문이었다. 검열에서 삭제된 내용 3초짜리를 예고편에 집어넣어 상영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짧은 3초 때문에 20년에 가까운 연륜의 거대한 영화사 신필름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었다.
이혼
불행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게 마련이다. 1970년대 들어 한국 영화계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른바 외화 쿼터제 때문에 제작자들은 국산 영화를 할리우드 영화 수입권을 따내기 위해 제작 편수나 채우려고 만들 뿐이어서 생명력이 뿌리부터 시들어 가고 있었다.
여기에 본격적인 TV 시대의 개막으로 관객을 안방극장에 빼앗기고 있는데도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 申감독의 아성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더 이상 이 땅에서 영화 찍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이 무렵 崔銀姬씨는 안양 영화예술학교 교장으로 후배들 가르치는 일에 빠져 있었다. 崔銀姬씨에게는 신필름의 허가 취소에 못지 않은 고통스러운 일이 다가와 있었다. 오수미의 등장이 그것이다. 崔銀姬씨가 오수미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이미 오수미가 申감독의 아이를 낳은 후였다.
처음에 崔銀姬씨는 가정을 방어하기 위해 보통 여자들이 했던 것처럼 행동했다. 申감독에게 대들어 보기도 하고 오수미를 찾아가 이야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申감독의 태도였다.
『기다려 달라. 해결하겠다』고 하면서 좀처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연민이 그로 하여금 냉정하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다가 둘째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崔銀姬씨가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申감독도 마침내 이혼에 합의했다. 법원에서 만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다음 申감독은 말했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우리 관계가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그래도 나는 감독이고 당신은 배우야. 또 만나게 될 거요.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쉽게 끝날 관계가 아니오』
그 말대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더욱 드라마틱한 상황 속에서 새롭게 이어졌다.
북한에서 원도 없이 영화를 찍다
1978년 1월14일 崔銀姬씨는 홍콩에서 북한에 납치된다. 崔씨를 납치해 간 장본인은 당시의 지도자 동지, 지금의 국방위원장인 金正日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崔씨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해외로 떠돌던 申감독도 똑같은 루트를 통해 북한으로 납치된다.
申감독의 자유를 향한 탈출극은 납치 다음 해인 1979년 1차로 시도된다. 1979년 12월30일 申감독은 밤나무골 초대소 앞에 세워둔 벤츠 승용차를 훔쳐 타고 韓中 국경 쪽으로 탈출하다가 붙잡혀 3년 반 동안 정치보위부 특수감방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金正日이 연출하고 감독한 이 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해후는 예정(?)보다 훨씬 늦어져 1983년 3월에야 이루어졌다.
일단 申감독의 전향(?)을 믿은 후부터 金正日은 이들 부부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북한 영화를 발전시키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속에 감추어진 진짜 이유는 한국에서 유명한 두 사람을 데려다가 국제적으로 실추된 북한 정권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유효하게 써먹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여기서 일생 최대의 연기를 한다. 북한에서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얻기까지 「충성」을 다하여 金正日의 요구에 부응키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힘을 모아 북한 영화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한다.
金正日도 열성적이었다. 申감독과 崔銀姬씨가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아마 그곳이 북한 땅이 아니었고, 납치된 몸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에게는 일생동안 가장 속 편하게 영화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마당을 만난 셈이었다.
1983년 이후 1986년 3월13일 서방으로 탈출하기까지 약 3년 동안 그들 두 사람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는 「돌아오지 않는 밀사」를 비롯하여 「탈출기」,「소금」, 「사랑 사랑 내 사랑」, 「심청전」, 「방파제」, 「 불가사리」 등 7편이나 된다. 이데올로기의 장벽과 숨이 막히는 체제만 아니었다면 생애 중 원도 없이 영화를 만들어 본 행복한 세월로 기록됐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든 작품은 모스크바 영화제를 비롯하여 공산권의 각종 영화제에서 북한 영화 사상 가장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내친 김에 서방의 영화를 능가하는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과 함께 金正日은 두 사람에게 동구권을 비교적 자유스럽게 여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두 사람은 이 자유를 그들 자신들의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1986년 3월13일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극적인 탈출을 감행, 서방세계로 돌아왔다.
『죽을 때까지 영화 찍고 연극하다 가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질문에 두 사람 다 입을 맞춘 것처럼 『죽을 때까지 영화 찍고, 연극하다가 가면 그만』이라는 대답이었다.
그 말대로 그들은 탈출 후 미국에 정착하여 신변이 안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찍고 연극하는 일을 계속했다. 미국에서 만든 첫 작품은 「마유미」(1990년)였다. 대단한 의욕과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두 번째 작품은 「쓰리 닌자스」(1993년). 이 작품은 디즈니社가 배급권을 사 갈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에 자신감을 얻은 申감독은 계속하여 「쓰리 닌자스 2」(1994년)와 「쓰리 닌자스 3」(1995년)을 내놓았고, 그 사이에 정보부장의 실종사건을 다룬 「증발」(1994년)도 내놓았다.
그들은 초기 워싱턴에서의 「갇힌 생활」을 청산하고 할리우드에 정착하여 「큰 바닥」에서 새로운 영화인생을 개척했다. 그 사이 崔銀姬씨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연극 무대에 섰다. 1997년 로스앤젤레스의 극단 「서울」이 만든 봄맞이 연극잔치 첫번째 공연작품인 「오, 마미」에서 주인공인 할머니역을 맡아 연기가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는 1999년 귀국, 한국 땅에서 다시 예술혼을 불태울 기회를 잡았다. 이미 두 사람 다 고희를 넘긴 나이여서 「새로운 출발」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그들을 이 땅의 영화계로부터 단절시킨 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崔銀姬씨는 『납치되지 않고 그대로 활동했다면 얼마나 많은 활동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납치극으로 손해 본 세월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했다. 연극배우로서는 누구보다도 오랜 캐리어를 가지고 있는 崔여사는 그러한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번에 공연할 뮤지컬에 있는 힘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申감독은 서울 신필름을 재건하여 영화도 만들고 있다.
하필이면 왜 우리였나
―북한의 金正日이 두 사람을 납치한 진정한 이유가 어디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1970년대 들어 북한은 국제적으로 나쁜 이미지가 깊어가고 있었지요. 그것은 체제상의 모순에서 비롯된 일이므로 그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데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남한에서 사람을 데리고 가서 선전에 이용할 생각이나 하다가 우리를 찍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하필이면 왜 나와 申감독이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쪽에 가서 알고 보니 (金正日이) 우리 팬이었습니다. 우리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전부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분은 정치적인 납치극의 피해자이면서도 정작 납치해 간 장본인을 대놓고 비난하거나 하는 대신 저쪽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기색마저 보일 때가 있습니다. 뭐 빚진 일이라도 있습니까?
『빚진 일이라니요. 저쪽에서 영화를 만들도록 많은 지원을 해 준 사실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그 이상으로 갚았습니다. 북한 영화를 외국에 소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만큼 대외적인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다만 남쪽이나 북쪽이나 사실을 제대로 알고 서로를 이해해야만 대화도 가능하고 통일도 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그런 안타까운 마음에서 저쪽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던 것뿐이에요』
―두 분이 1994년에 쓴 「내레 金正日입네다」는 날이 갈수록 북한 지도층을 이해하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책에 쓴 일들이 모두 사실입니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진실만을 기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북쪽에서 보고 처음에는 화가 좀 나더라도, 진실을 썼으니 결국은 왜 우리가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그리고 서둘러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고요』
―金正日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이해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영화에 대한 이해와 열정 모두 보통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상숭배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향해 목이 터져라 찬양하는 인민들이나 당간부들을 보면서 「저거 다 가짭네다」 할 정도로 현실인식 능력도 가졌으나 그 뿐이지요.
사물을 안다는 것과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과는 별개니까요. 아무리 영화에 대한 이해가 높다 해도 북한에서 만든 영화는 우상숭배의 도구 이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면이 다 그래요. 그것이 金正日과 북한 체제의 넘을 수 없는 한계라고 봅니다』
―「내레 金正日입네다」를 보면 金正日의 성격이 무척 소탈하고 막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던데 아무나 잘 만나고 막힘없이 대화를 하는 편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아주 만나기 어려운 신비한 존재지요. 윤이상씨가 우리에게 지도자 동지를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으니까』
『애인이지요』
崔銀姬씨와 申相玉 감독 모두 金正日 개인에 대한 문제나 북한 체제에 대한 문제를 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많이 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굳이 입을 다물고자 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요즘 한국 사회가 「햇볕」의 조명 아래 金正日과 북한을 보는 시각과 그들이 직접 북한 땅에서 보고 느낀 것 사이에 발생한 괴리 때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崔銀姬씨는 북한에서 申감독을 만나 이혼을 원인무효시키는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들처럼 그들은 그렇게 다시 결합했다. 그 사이 오수미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방황하다가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두 사람이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1960년대 신필름의 전성시대에 崔銀姬씨는 남편인 申감독을 두고 『감독은 만점, 남편은 영점』으로 채점했다. 영점에 머물던 남편으로서의 점수가 달라지고 있다.
『요즘은 벽에 못도 박을 줄 알고 살림에도 신경을 쓸 줄 아니 이제야 남들처럼 나도 남편을 가진 기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申감독이 감독이기를 포기하고 남편으로 역할해 달라는 주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감독 申相玉과 배우 崔銀姬는 영화에서나 현실 속에서나 늘 그렇게 동료였다.
―두 사람은 정확하게 어떤 사이입니까?
崔銀姬씨는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딱 들어맞는 어휘가 없어 불만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인이지요』●
최은희 신상옥 납치 경위 담은 1984년 안기부 문건
김정일, 배우 윤정희 납치에 실패하자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을 지녀 호감 있던 최은희 납치
납북 당시 김정일과 함께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두 사람은 영화 17편을 찍으면서 김정일의 신뢰를 얻었다. 사진=엣나인필름
영화계의 최고 스타였던 배우 최은희가 1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고인은 부군 신상옥 감독이 2006년 4월 타계한 뒤,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쇠약해져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월간조선》은 과거 취재 중 최은희 납치경위, 김정일이 최은희, 신상옥 납치 주범 등의 내용이 담긴 1984년 안기부 자료를 입수했다.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최은희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 김정일의 지시로 이뤄진 납치였다. 같은 해 납북된 신 감독과는 1983년에서야 북한에서 재회했다.
다음은 안기부 문건에 실린 내용이다.
①최은희 납치 경위
-77년 8월경 홍콩거점 북괴 공작책 이상희(58세)는 최은희를 납북시키라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77년 9월경 하수인 신필림 홍콩지사장 김규화(62세, 간첩죄로 징역 15년형 확정 복역 중)에게 최은희를 홍콩으로 유인하는 데 필요한 초청장을 입수하라고 지시.
-77년 9월경 김규화를 통하여 영화부로카(브로커) 홍콩거주 중국인 왕동일(57세)을 하수인으로 매수(홍콩화 7천불)한 후 ‘왕’으로 하여금 한국에 입국, 최은희를 만나 77년 12월 개최 예정인 홍콩 카니발에 참가해 달라는 가장 구실하에 홍콩으로 유인하도록 조종.
-이에 따라 왕동일은 77년 9월 29일 국내에 침투하여 서울 중구 충무로2가 소재 대원호텔, 남산동 소재 퍼시픽호텔 및 안양 예술학교 등지에서 최은희, 김00, 태00 등과 접촉, 3인으로부터 홍콩 카니발 초청 수락을 받은 다음 77년 10월 13일 홍콩으로 돌아가 이상희에게 동 사실을 보고.
-77년 10월 김규화는 이상희의 지시에 따라 홍콩영화제작업자로부터 동사 명의의 최은희 초청장을 입수하여 이상희에게 제공.
-왕동일은 77년 11월 이상희의 조종에 따라 최은희에게 “홍콩 카니발 초청은 현지 사정으로 취소되었고, 홍콩영화 ‘양귀비’의 주연을 맡기려고 하니 와서 상담하자”고 유혹하여 응락을 받은 후 77년 11월 말경 이상희가 최은희에게만 초청장과 비행기 표를 우송.
-이 술책에 말려든 최은희는 78년 1월 11일 19:00 CPA-411편으로 출국, 동일 22:00경 홍콩공항에 도착하여 김규화, 왕동일, 중국인 영화 부로카 이영생 등의 영접을 받고 홍콩 프라마 호텔 1612호실에 투숙.
-78년 1월 13일 김규화의 안내로 수상 터미날에서 귀국 선물을 쇼핑한 후 동일 19:00~23:00간 구룡소재 국빈반점에서 김규화, 이상희 모녀, 이영생 부부, 재향 영화감독 남상진 등 7명과 석식.
-동 석식 도중 최은희는 김규화를 통하여 안양예술학교 강정희 교장에게 1월 20일 귀국하겠다고 국제전화 후 김규화에게 비행기 표 예약을 부탁.
-이상희는 최은희와 브랜디 1병을 음주하면서 국제적인 규모의 일본 모 재단 대표를 소개해 주겠다고 언동.
-이상희는 석식 후 최은희를 숙소까지 안내.
-다음날인 78년 1월 14일 17:00경 투숙 호텔인 프라마호텔 1612호실에서 이상희 등 북괴공작원에 의해 피납.
②신상옥 납치경위
-78년 1월 27일 하수인 김규화는 최은희 납치에 성공한 후 이상희의 조종에 따라 신상옥에게 “최은희가 실종되었다”고 국제전화 하여 홍콩으로 유인.
-홍콩에 도착한 신상옥은 김규화로부터 최은희가 실종된 전후 상황을 듣고, 자신이 평소 정체를 의심하고 있던 이상희에 의해 최은희가 강제 납치되었음을 직감하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음날인 78년 1월 28일 홍콩을 떠나 미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불란서 등을 전전하면서 해외 영화계 친지 등을 통하여 최은희의 행방을 탐문하였으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78년 7월 14일 홍콩에 다시 입국하여 최은희의 행방을 계속 탐문하던 중
-78년 7월 19일 신상옥의 홍콩 체류사실을 포착한 북괴공작원에 의해 강제 피납되어 공작선편으로 납북.
③김정일이 최은희 신상옥 납치 주범
최은희 신상옥 납치지령 및 배경
○ 64년 북괴 김정일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영화예술 담당 지도원이 되자 직접 북괴의 대표적 연극단체인 만수대 예술단을 지도하며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의 영화, 영극 제작에 깊이 관여하는 과정에서
○ 폐쇄, 통제된 북한사회에서 활동해 온 배우와 연출가로서는 남한 실정과 자본주의 사회를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적나라하게 묘사, 비판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예술성마저 남한보다 뒤떨어져 있음을 통감하여 오던 중
○ 75년 김정일이 대남공작부서를 관장하게 되자, 그 타개책으로 남한의 유명 배우와 연출가를 납치하여 이용키로 결심하고
○ 77년 4월 남한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적 매력을 지닌 여배우는 윤정희라고 지칭한 후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겸 영화 제작에도 이용할 목적으로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 이정용(60세)에게 재불 영화배우 윤정희를 납치토록 지시하고 과장 허묵(본명: 허무, 47세, 남노당 출신이며 전 북괴최고인민회의의장 허헌의 아들)을 유고 자그레브 주재 북괴영사관 상무관으로 위장, 현지공작책으로 임명하고 행동대원 수명으로 납치공작조를 구성 파견하여,
○ 77년 7월 29일 유고의 자그레브공항에 북괴 비행기를 대기시켜 놓고 현지 경찰을 매수하는 등 치밀한 계획하에 공작을 진행, 윤정희 부부를 유고의 납치 예정 장소인 자그레브 교외에 있는 별장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 윤씨 부부가 동 장소에 잠복, 기회를 엿보던 허묵의 조발상태, 의복 등을 보고 명석하게도 자신들을 납치하려는 북괴공작원임을 직감하고 기지를 발휘하여 동 장소를 이탈, 미국영사관으로 피신하여 납치에 실패(당시 허묵은 납치 실패 책임으로 연락부 과장에서 벽지학교 교원으로 좌천되었음.)
○윤정희 납치에 실패한 김정일은 77년 8월 평소 전형적인 한국여인상을 지닌 여배우로서 호감을 갖고 있던 최은희와 영화감독 신상옥을 재차 납치키로 결심하고 공작담당부부장 강해룡(58세)에게 이
를 지시.
○ 동 지시를 받은 강해룡은 홍콩 현지 공작책 이상희를 조종, 78년 1월 14일과 78년 7월 19일 최은희, 신상옥을 각각 납치한 것임.
2007년 12월 14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최보식 기자 직격 인터뷰] 피아니스트 백건우·윤정희 부부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1977년 8월 1일 윤정희-백건우 부부는 당시 공산국가였던 유고의 수도 자그레브로 유인됐다가 북측에 납치될 뻔했다. 당시 이들 부부와 동행했던 이는 이응노 화백의 부인 박인경씨였다. 박씨는 우리 정부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된 인물이다. 사건 직후 그녀는 주불대사관의 소환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백건우 부부는 지금까지 박씨를 북측 납치공작의 공모자로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박씨는 “백건우 부부가 그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고 반박한 적 있다. 이 사건으로 백건우 부부는 이응노 화백 부부와 영영 절연했다. 이응노 화백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89년 숨졌다. 그 뒤 박씨는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몇 달 전 그녀는 대전에 ’이응노 미술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최은희 납치 공작선 해주항 입항 시, 김정일이 현지 마중
○ 김정일은 최은희를 홍콩에서 납치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의 쾌감에 도취되어 납치공작선이 해주항에 입항할 시
○ 대남공작 담당비서 김중린, 연락부장 정경희 등을 대동하고 직접 해주항 부두에 나와 마중.
○ 당시 수행원들이 김정일에게 “날씨가 추우니 공작선이 입항할 때까지 승용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권유하였으나 김정일은 이를 듣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침착지 못하게 안절 부절하며 부두에서 대기.
○ 납치공작선이 부두에 도착하자 미친 듯이 뛰어가 최은희를 직접 마중하고 자신의 벤츠 승용차에 탑승시켜 평양까지 동행하였다.
1984년 안기부가 작성한 문건
"북한에서 나보고 '자진 월북했다'고 말해달라고 할 때도 나는 '말 같지 않은 말 하지 말라'고 악을 썼다"
최은희씨는 2007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북한 땅으로 납치돼 처음 대면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 선생 보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습네까?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네까'라면서 껄껄 웃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후 북한에서 3년 동안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어야 했다. 이때 함께 만든 영화 '소금'으로 최은희는 1985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많은 영화를 찍으면서 두 사람은 김정일의 신뢰를 얻는다. 덕분에 영화 촬영을 핑계 삼아 1986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갈 수 있었고 그곳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곧바로 국내에 들어올 수 없었다. 당시 '두 사람은 애초 납북된 게 아니라 월북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최은희는 이에 대해 2013년 인터뷰에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면서 "북한에서 나보고 '자진 월북했다'고 말해달라고 할 때도 나는 '말 같지 않은 말 하지 말라'고 악을 썼다"고 했다. 최은희는 미국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199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영화배우 고 최은희가 16일 오후 서울 강서구 화곡동 자택 인근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9일, 장지는 경기 안성천주교공원묘지이다.
원로배우 최은희 씨가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장남인 신정균 감독은 최은희 씨가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갔다가 임종했다고 밝혔다.
고 최은희 씨는 1942년 연극으로 처음 데뷔한 뒤 1948년 영화계로 나서 김지미, 엄앵란 씨와 함께 1950∼60년대 맹활약했다.
1954년 신상옥 감독과 결혼한 뒤엔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여성감독으로도 활동했던 고 최은희 씨는 신 감독과 이혼 후 1978년 1월 혼자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고 같은 해 7월 역시 납북된 신 감독을 북한에서 다시 만났다.
이후 북한에서 17편의 영화를 찍는 등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두 사람은 1986년 오스트리아 방문 중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했다.
그리고 10년이 넘는 망명생활을 하다 1999년 영구 귀국했다.
북한 피납 6년째에 상봉한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정일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북한으로 납치됐다 탈출한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1986년 5월 미국 워싱턴 워터게이트호텔에서 기자회견장에 도착하며 미소짓는 모습
1978년 북한으로 납치돼 남포항에 도착한 뒤 연락부 부장 이완기(오른쪽)와 강해룡 부부장과 함께 해안을 산책하는 최은희 씨.
북한을 탈출한 최은희 신상옥 부부가 영화 제작차 동유럽에 있을 당시의 모습.
1953년 8월 한국전 휴전이후 미군 사진병 폴 굴드 슐레징거가 촬영한 배우 최은희.
1953년 8월 한국전 휴전이후 미군 사진병 폴 굴드 슐레징거가 촬영한 배우 최은희.
북한으로 납치됐다 미국 망명 생활을 거쳐 귀국한 최은희 신상옥 부부가 1989년 5월 귀국기자회견하는 모습
북한으로 납치됐다 미국 망명 생활을 거쳐 최은희 신상옥 부부가 1989년 5월 귀국하는 모습.
1961년 신상옥 감독 작품 '성춘향'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최은희 씨.
2003년 11월 서울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2003 굿모닝 신한증권 후원 팝페라와 함께하는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모델로 나선 원로배우 최은희 씨.
원로배우 최은희가 2017년 11월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한국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신(申)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모습.
원로배우 최은희가 2011년 9월 5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대한민국예술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56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시상식에서 연극·영화·무용부분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는 모습
조선일보
춘향전 일부 영상
故 신상옥 감독은
‘꿈’등으로 문예영화 붐 조성… 관련산업 발전 이끌어
신상옥(사진) 감독은 1926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해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東京)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귀국 후 그는 고려영화협회 미술부에 입사해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이론과 촬영기술을 겸비한 영화감독 최인규 밑에서 기초를 닦은 신 감독은 신프로덕션을 설립했고, 1954년 영화 ‘코리아’를 제작하면서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최은희와 결혼했다.
신 감독은 한국영화산업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1년 한국 최초 기업형 영화사인 신필름을 설립,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자체 조달했으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를 통해 예술성이 있는 문학작품을 알리려고도 노력했다. 심훈의 ‘상록수’와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이광수의 ‘꿈’ 등을 영화화해 영화를 통해 문학성 있는 작품을 관객들에게 알리며 문예영화 붐을 일으켰다.
또 그는 영화의 사회적인 역할을 중요시했다. 영화가 대중의 사고와 사상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매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계몽영화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영화 ‘상록수’는 일제강점기 가난한 농촌에서 민족주의 사상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는 6·25전쟁 직후 혼란기에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여건 조성을 주장했다. 영화 ‘쌀’에서도 전북 무주 구천동의 실화를 바탕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를 담아냈다. 이런 그의 신념은 결혼생활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인 최은희 씨가 출산과 내조에 충실하기보다는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영화인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도록 뒷받침했다.
그의 삶은 영화 같았다. 1978년 최 씨가 납북되자 신 감독은 북한으로 갔다가 부인을 데리고 1986년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 후에도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 1994년 한국인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2006년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 감독은 과거에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미래를 살았다. 안양영화예술학교 설립과 이장호 감독을 비롯한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끄는 후배감독 양성을 통해 한국영화의 미래를 준비했다. 영화가 경제적 수익을 내는 산업이나 감성을 표현하는 예술만이 아니라 국민의 의식과 사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매체라는 것을 일찍이 강조했다. 그는 미래를 살다가 간 우리나라 영화계의 선각자였다. 신 감독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인이다.
실화로, 소설로, 영화로… 모습은 변해도 늘 푸른 ‘희망’
▲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은 여성 농촌운동가 최용신을 모델로 했다. 경기 안산시 상록구에는 최용신이 야학을 운영했던 천곡교회(현 샘골감리교회)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신상옥 감독作 영화 ‘상록수’ 속 안산시
지하철을 타고 가다 만나는 경기 안산시 상록수역(4호선)은 심훈의 소설 제목을 따온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통해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자 했다. 작품 속 주인공 채영신은 여성 농촌운동가인 최용신(1909∼1935년)을 모델로 하고 있다. 최용신은 바로 이곳 상록수역 일대에서 문맹 퇴치 등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극 중 남자 주인공 박동혁은 충남 당진에서 농촌운동을 하던 심훈의 조카 심재영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소설의 주된 무대로 등장하는 청석골은 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샘골이다. 상록구와 상록수역이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록수역의 최초 명칭은 소설 속 실제 주인공 최용신의 이름을 딴 용신역이었다. 이곳에 최용신의 묘가 그대로 보존돼 있기도 하고, 작품의 배경이었기 때문이었다.
▲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은 문학작품을 역명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다.
하지만 당시 철도청에서는 특정 인물보다 소설의 제목이 더 낫다고 판단해 1988년 상록수역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이로써 상록수역은 문학작품을 역명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가 됐다.
상록수역에서 남쪽으로 가면 본오3동 야트막한 동산에 상록수공원이 있다. 샘골 강습소가 있던 자리인 이곳에 최용신의 얼을 기리기 위해 최용신기념관이 설립됐다. 기념관은 최용신의 제자였던 홍석필이 기부한 기금으로 만들었으며 1층에는 최용신이 활동하던 샘골 강습소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또한 최용신이 야학을 운영했던 천곡교회(현 샘골감리교회)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고 당시 최용신이 심은 나무들도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다.
최용신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고향인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샘골에 안장돼 있으며 살아생전 그의 약혼자였던 김학준도 함께 잠들어 있다. 소설 속에서 과로와 영양실조로 쇠약해진 채영신이 박동혁을 찾아와 휴식을 취하고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는 바닷가는 아산만 한진포구(한진나루터)와 그 주변 일대다. 현재는 부곡공단이 들어서 있고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지난 1961년 고 신상옥 감독은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소설 ‘상록수’를 영화화했다. 이 영화는 늘 푸른 나무로 상징되는 청년 박동혁(신영균)과 채영신(최은희)의 헌신적 농촌계몽운동과 그 과정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애틋한 사랑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 피폐한 농촌 현실과 온갖 고난 속에서도 순박함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탁월한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문학교 출신의 동혁과 영신은 농촌계몽에 뜻을 두고 각기 고향으로 내려간다. 동혁은 마을회관을 세워 농촌 청년들을 선도하고 영신은 학당을 세워 문맹 퇴치를 위해 노력한다.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동혁이 일본 경찰에 잡혔다가 풀려 나오던 날 영신은 과로로 병에 걸려 농촌에 대한 정열을 꽃피우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상록수는 원작자인 심훈이 직접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소설가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지내기도 했지만 1927년 일본 유학 중 영화제작 기술을 익히고 귀국한 후 영화감독으로도 활약했으며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로 유명한, 일제에 항거한 민족시인이었다. 심훈은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려다가 35세 나이로 요절했다. 소설이 장면 중심으로 이뤄진 것도 영화적 기법과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소설이 나온 후 26년이 지나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신 감독이 소설 상록수를 영화화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심훈은 영화나 소설을 통해 일제하에서 핍박받는 대중의 의식과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신 감독 역시 영화란 상업성이나 오락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작이 지닌 정신을 최대한 살리며 영화 ‘상록수’를 만들어냈다.
신 감독은 심훈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영화 예술가들은 어느 정도는 현실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며 영화에는 흥미를 넘어선 인간 승리와 정의, 사필귀정 등의 당위적인 진리가 살아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생각과 들어맞는 것이 소설 상록수였고 관객과 국민을 위해 정말 순수한 심정으로 영화 상록수를 제작했다.”
영화 상록수는 실현 가능한 농촌운동의 좌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이후 새마을운동의 근거가 됐고 영화가 대중의 사고와 사상에 영향을 주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또한 계몽영화로서의 역할을 인정받아 2003년 칸국제영화제에 회고작으로 초청됐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배우 최은희의 연기 또한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청석예배당에서 어린이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은 낙후된 농촌에서 한 여성의 신념과 의지가 농민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변화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는지 잘 보여준다. 채영신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강인한 여성의 굳은 의지를 잘 표현한 최은희는 제1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미모는 물론 당당하게 연기력까지 인정받았다.
▲ 영화 ‘상록수’에서 채영신을 연기한 배우 최은희.
▲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의 얼을 기리기 위해 경기 안산시 본오3동 상록수공원에 설립된 최용신기념관
심훈은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 3·1 운동에 가담했고, 옥고를 치른 뒤 중국과 일본으로 유학 갔으며 1923년 귀국해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지만 1933년 충남 당진 부곡리로 내려가 자신이 직접 설계한 자택 필경사(筆耕舍)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이곳에서 그는 농촌계몽의 뜻을 품고 경성(서울)에서 청석골(샘골)로 내려와 안타깝게 숨진 최용신의 사연을 접했다. 그는 심재영이 당진에서 농촌계몽활동을 했던 터라 소설의 주인공 채영신이 사랑한 인물로 끌어냈다. 심훈은 샘골에 세 차례 정도 방문한 뒤 최용신과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해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은 농촌계몽운동을 상록수에 담아냈다.
현재도 부곡리에 필경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필경사란 붓으로 논밭을 일군다는 의미로 농촌계몽을 통해 조선인들의 생활이 윤택하게 되기를 바랐던 작가의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필경사 옆에는 심훈의 묘가 있으며 상록수를 집필할 때 사용했던 책상과 농촌계몽에 사용된 서적 등이 심훈기념관과 상록수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심훈기념관에서는 지금도 그의 계몽사상과 민족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한 시낭송회가 열린다.
영화 상록수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기 안양시 석수2동의 안양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됐으며 촬영은 광릉수목원과 인천 대이작도에서도 이뤄졌다. 안양영화촬영소는 1957년 홍찬 수도영화사 사장이 설립한 동양 최대의 영화종합촬영소였다. 당시 웨스트렉슨 사운드 시스템과 미첼 영화촬영기 3대를 도입하는 등 촬영, 편집, 현상, 녹음, 분장 등 모든 부문에서 제작이 가능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1963년부터는 신 감독이 촬영소를 인수해 운영했다. 현재 촬영소 자리에는 현대 석수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으며 안양시에서는 안양영화촬영소를 기념하기 위해 동안구 갈산동 평촌아트홀에 한국영화 사료실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상록수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준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는 소설로서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1960년대에는 영화로 농촌계몽을 통해 경제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1970년대 가수 김민기는 노래를 통해 어둡고 암울한 여건 속에 있었던 당시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으며 최근에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김민기의 노래 ‘상록수’를 합창하면서 민주화운동을 기리기도 했다. 비록 시대에 따라 그 의미는 조금씩 달랐지만 영화와 소설 그리고 노래를 통해 상록수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늘 푸른 나무 상록수’같이 젊은 청년으로 살기를 바라고 있다.
글·사진 = 양경미 영화평론가·한국영상콘텐츠산업연구소장
‘과거’를 간직한 도시… 전통윤리에 발묶인 ‘애틋한 사랑’
▲ 신상옥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촬영지인 경기 수원시 북수문(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전경. 아래 사진은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속 장면.
▲ 영화 주 촬영지인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에 위치한 한옥(위)에는 촬영지임을 알리는 현판이 붙어 있다. 아래 사진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한데우물.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촬영지… 경기 수원시 행궁동
역사와 문화의 도시 경기 수원시, 그중에서도 행궁동은 조선 정조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볼 수 있어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왕이 본궁을 떠나 잠시 머물던 행궁(行宮)인 화성(華城)은 220년 전에 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성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을 뿐만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도 그때와 같이 흐르고 있다.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 또한 현재에도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수원 화성은 이렇듯 과거의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재촉한다.
◇행궁동에서 만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행궁동의 하늘은 유난히 낮다. 머리를 맞대고 늘어선 건물들이 키를 재기라도 하는 듯, 아이들처럼 올망졸망 귀엽게 늘어서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행궁동 주변은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개발이 제한되었으나 주민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뜻을 모아 골목골목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특색을 지닌 수원을 대표하는 문화거리로 재탄생시켰다.
행궁동 일대는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1961년 신 감독은 주요섭이 1935년 조광(朝光) 창간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영화화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거친 역사보다 당시 우리 고유의 풍습과 시대상에 초점을 맞췄다. 여섯 살 난 옥희의 눈을 통해 비친 어른들의 애틋한 감정을 순수하게 그리며 사랑의 상상력을 한층 증폭시킨다.
이 영화는 시어머니(한은진)와 청상과부인 며느리 정숙(최은희)이 살고 있는 시골의 명문가에 서울에서 내려온 죽은 남편의 친구인 화가 한선호(김진규)가 찾아와 사랑방에 머물게 되면서 시작된다. 선호와 정숙은 어린 딸 옥희(전영선)를 사이에 두고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가지만 당시 수절해야 하는 관습을 거스를 수 없었던 정숙은 선호의 구애를 거절한다. 결국 시어머니는 선호를 서울로 돌려보내게 되고 정숙은 뒷산에 올라가 애틋한 마음으로 선호가 탄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본다.
이 영화의 주 촬영지는 팔달구 행궁로에 위치한 한옥이다. 현재까지도 잘 보존돼 있는 이 한옥은 1937년 지어진 전통가옥으로, 한국 영화 역사의 한 축으로서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했던 대문의 왼쪽, 즉 사랑방 손님과 식모가 드나들던 출입구는 다소 변형돼 있긴 하지만 선호가 정숙을 내다봤던 창문과 정문 등의 외형은 촬영 당시 그대로 유지돼 있다. 그리고 건물 벽면에는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리움의 장소, 화홍문 언덕 = 신 감독은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절, 원작에서 보여준 한국의 보수적인 윤리를 비판적으로 되새기며 그 속에 담긴 전통적인 여인상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 영화에서 선호와 정숙은 사회적 관습과 통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사상의 잔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재혼을 두려워했다. 신 감독은 주인공들을 통해 그릇된 사회적 통념이 개인의 삶과 행복을 얼마나 억압하는지를 보여줬다.
배우 최은희 또한 이 영화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열연했다. 그 배경에는 신 감독과의 재혼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최은희는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로 은막에 등장했다. 당시 영화 촬영감독이었던 김학성과 결혼한 뒤 이혼한 그는 1954년 신 감독과 재혼했다.
당시 사회관습을 고려하면 최은희는 신 감독과 재혼하면서 사회의 보수적인 시선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출연해 수절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상의 표본으로 높이 평가됐고, 국내는 물론 동양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각인됐다. 인터뷰를 통해 최은희는 본인의 아이디어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멀찍이 떨어져 걸어가고 그 사이를 옥희가 오가는 장면을 연출했다고 말하며 영화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 이러한 설정으로 두 주인공이 서로 쑥스러워하며 감정을 숨길 때, 순수한 아이가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한데우물(집 울타리 밖에 있는 우물) 또한 보존돼 있다. 한옥과 불과 20m 떨어져 있는 우물가는 작품 속에서 식모가 계란 장수를 처음 맞이한 장소이자, 옥희가 사라지자 정숙이 옥희를 찾으러 다니던 중 우물 속을 살펴봤던 곳이다. 그리고 정숙의 거절에 힘들어하던 선호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밤에 두 사람은 우물가에서 단 한 번의 포옹을 하기도 했다. 또한 마을 아낙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때 시어머니가 선호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듣고 서울로 보내는 계기가 됐다. 한데우물은 한때 소실됐지만 지금은 외형만 복원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화홍문도 영화 속 촬영 장소다. 사랑방 아저씨와 옥희는 금방 친해져서 뒷동산에 놀러 가고 돌아오는 길에 옥희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친구들은 옥희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린다. 옥희는 사랑방 아저씨에게 아버지가 돼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이 팔달구 북수동에 위치한 화홍문 주변 일대다. 옥희와 사랑방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던 곳은 화홍문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한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이라는 정자(亭子)이며, 옥희가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곳은 그 옆 북암문이다.
화홍문은 영화 속에서 꽤 자주 등장한다. 정숙이 사라진 옥희를 찾으러 다닌 곳도 화홍문이며 옥희와 친구들이 놀이터 삼아 놀던 곳도 이곳이다. 화홍문의 수문을 통해 흐르는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정숙과 선호는 서로를 향해 애틋하게 바라보며 마음을 나눈다. 무엇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정숙이 선호를 떠나보내며 그리움에 사무쳐 하는 장면도 화홍문 주변 언덕에서 촬영됐다. 화홍문 바깥이 서울 방향인데 정숙과 옥희는 서울로 떠나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이다. 화홍문은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을 갖춘 수문으로 화강암으로 쌓은 다리 위에 지은 문이다. 7개의 수문을 통하여 맑은 물이 넘쳐흘러 물보라가 생길 때면 햇살 사이로 생겨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든다.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맞선 삶 = 주요섭은 사랑을 통해 불합리한 사회관습과 제도를 비판하려 했다. 당시의 사회적 제도와 관습은 ‘사랑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 그리고 ‘첫사랑 값’ 등 일련의 연애소설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는 작품에서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과 편견이 개인의 행복을 얼마나 억압하는가를 보여줬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옥희의 어머니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는 유교 관습을 떨치지 못했다. 주요섭 역시 유학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상대가 조선인이 아니었다는 것과 조국이 처한 식민지 현실 때문에 헤어져야만 했다. 주요섭은 자신의 작품이 사랑을 주제로 했기 때문에 애정소설 작가 또는 통속소설 작가로 그릇되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는 사랑을 통해 사회관습과 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자 한, 사회의식이 강한 작가였던 것이다.
신 감독이 주요섭의 소설을 택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연출한 많은 영화에서 신 감독은 현대와 과거의 경계에서 갈등을 빚어내는 전통 윤리의 부당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신 감독 자신이 유교적인 가치관을 저버리지는 못했지만 봉건 윤리에 저항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했던 것은 그의 영화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단편소설을 각색해 만든 문예영화의 가작(佳作)이면서 동시에 신 감독의 영화미학과 삶의 가치관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어찌 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세운 조선 후기 최대 신도시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최후를 열한 살 때 목격한 정조는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곳이다. 1789년 건립된 화성행궁은 국내에 있는 행궁 중에서도 규모나 기능 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며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우리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가 복원됐다.
220년 전 행궁이 잘 보존된 덕분에 행궁동 일대는 최근에도 영화촬영지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화성행궁을 비롯해 이곳 카페와 문화거리에서 촬영됐다. 곽재용 감독의 영화 ‘클래식’도 수원에서 촬영했고, 김하늘, 강지환 주연 영화 ‘7급 공무원’ 역시 수원 화성과 장안문을 촬영지로 삼았다. 최근에는 이준익 감독의 ‘사도’가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조와 수원화성, 행궁 등이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았다.
사회적 관습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같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사회적 관습과 통념도 중요하겠지만 개인의 자유와 행복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녹음이 짙어가는 6월, 행궁동에서 만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자칫 통속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통해 진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글·사진 = 양경미 영화평론가·한국영상콘텐츠산업연구소장
2018.11.04 영화계 큰 별이 지다..'국민배우' 신성일 별세(종합)
강신성일 '손가락 하트'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김승욱 기자 =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밝게 빛난 '별'이 안식에 들었다.
'국민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30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 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이날 끝내 숨을 거뒀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고(故)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사용했으며, 이후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60년 신상옥 감독·김승호 주연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을 남기며 독보적인 스타 자리에 올랐다.
출연작품 편수도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레드카펫 밟는 강신성일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기록적 다작 속에서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친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하다"며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 증거"라고 평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아울러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강신성일 '신사의 품격'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며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차려졌다. ☎ 02-3010-2000(대표번호)
밝은모습의 신성일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배우 신성일이 18일 오후 중구 초동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한국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신(申)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배우 신성일(강신성일)이 4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 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새벽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이날 끝내 숨을 거뒀다.
고인의 젊은시절./온라인커뮤니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고인은 1937년 경북 대구 태생으로 본명은 강신영이다. 도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경북중을 거쳐 경북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면서 고교 졸업후 상경해 호떡장사 등으로 학비를 벌며 서울대 입학을 노렸지만 실패한 후 배우의 꿈을 꾸게 된다.
어렵게 연기학원을 다니며 배우 데뷔를 노리던 중 1957년 당시 최고의 영화제작사였던 신필림의 신인연기자 공모에서 2640 대 1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이후 신필름의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을 담고 신성일(申星一)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본명과 예명을 합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고인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후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청춘 멜로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국민배우 지위를 누렸다. 고인은 한동안 대한민국 대표 미남배우로 군림하며 ‘세기의 미남’으로 불린 프랑스 배우 알랭 드롱과 비교돼 ‘한국의 알랭 드롱’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고인의 대표작 ‘맨발의 청춘’ 포스터. 고인은 이 영화에서 일생의 짝이 될 엄앵란과 연기했다./조선DB
실제 고인이 남자주연을 맡은 횟수만 약 510회로 이는 광복 이후로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전성기 시절 한 해 동안 65편이나 주연으로 출연한 적도 있었다. 1960년대 초 고인의 출현으로 한국 영화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사랑, 캠퍼스, 뒷골목 건달 이야기 등을 다룬 ‘청춘물’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단 18일 만에 만든 맨발의 청춘(1964년 개봉)은 당시 관객 동원 23만명이라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안개' '만추'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길소뜸' 등이 고인의 대표작이다. 전성기 고인이 출연했던 영화는 대부분 흥행했고 주제가도 덩달아 히트곡이 됐다. '하숙생' '동백아가씨' '별들의 고향'과 같은 곡이 유명하다.
고인이 1980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연합뉴스
고인은 전성기였던 1964년 당대의 톱스타 엄앵란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결혼했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를 비롯해 ‘아낌없이 주련다’ ‘청춘교실’ ‘새엄마’ 등 9~10편의 영화에서 상대역은 아니었지만 호흡을 맞췄던 한 살 연상의 엄앵란과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작품은 ‘배신’이었다. 키스신 촬영에서 엄앵란에게 실제로 입을 맞춰 자신의 마음을 처음 알렸던 그는 이후 촬영 도중 벌어진 화약 폭발 사고로 얼굴을 다친 엄앵란을 극진히 간호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하객과 모여든 일반 시민의 수가 3400여명에 달했고, 초청장이 엄청난 가격에 암거래되는가 하면 결혼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호텔 측에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결혼식은 당시 외신에도 보도됐으며 지금까지도 ‘세기의 결혼식’으로 회자되고 있다.
고인은 정치활동도 했다. 1978년 제10대 서울특별시 용산·마포 중선거구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박경원 전 내무부 장관의 특별보좌역으로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2000년 대한민국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돼 4년간 활동했다. 2001년에는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냈다
고인이 2011년 자서전 출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인은 옥고도 치렀다. 국회의원이던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옥외 광고물 업체 수의계약과 관련해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2005년에 징역 5년에 추징금 1억 8700만원을 선고받아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됐다. 2007년 특별사면됐다.
고인은 2011년 본인의 불륜 관계를 담은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를 출간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불륜을 저지른 유명인의 실명을 공개해 비난에 휩싸였다. 고인은 이후 불륜 폭로 발언이 자서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부인 엄앵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고인은 최근까지도 투병중인 몸을 이끌고 대중앞에 모습을 보였다. 올해 3월 문화방송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해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을 다독이며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드러냈다. 이어 올해 10월에는 건강 악화 속에서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는 등 끝까지 영화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고인은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20대 국회 강석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고인의 조카다.
고인이 올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고 있다./OSEN
조선일보 김문관 기자
11.05 원조 꽃미남, 그의 이름은 '靑春'이었다
신성일 별세, 빈소에 조문 줄이어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의 신성일 빈소에는 동료 영화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60~70년대 활동했던 원로 영화감독과 배우의 조문이 4일 오후 이어졌다. '밀회' 등 신성일과 20편이 넘는 작품을 함께한 정진우 감독은 "배우 학원에서 만난 신성일의 눈빛에서 불량스러움을 봤고, 젊은이의 고뇌를 그릴 최적의 얼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며 "당시 그는 완벽한 흥행 보증 수표이자 영화 감독에게는 가장 쓸모있는 배우였다"고 했다.
이날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배우 최불암은 "우리 또래 연기자로 더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반짝 별이 사라졌다"며 "생전 농담을 아주 좋아하고 솔직해 가끔 나보다 철이 없어 보일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배우 이순재는 "1960년대 영화 발전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라며 "그가 남긴 자료가 영화를 공부하는 후학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4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신성일. /송정헌 기자
후배 영화인들은 '스타들의 스타'였던 그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온 배우 김수미는 "얼마 전 같이 찍은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를 내 유작으로 하려 했는데, 선생님의 유작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며 "불과 한 달 전 통화할 때 '암을 이겨낼 수 있다'며 자신 있어 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배우 안성기는 "1960~70년대 수많은 스타가 있었지만 신성일이라는 별빛을 따라갈 이는 없었다"며 "갑자기 떠나셔서 허망하다"고 말했다. 배우 박상원은 "배우가 스타라 불리며 대중의 주목받는 영광의 시대를 연 선배"라며 "추억이 있는 고향을 잃어버린 심정이다"고 했다.
1990년대까지 꾸준히 영화에 출연했던 신성일은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작품 활동을 거의 접었다. 2013년 18년 만에 영화 '야관문'에 주연으로 출연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거센 비난을 받으면서도 아내 엄앵란과 별거하는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난 사실을 떳떳이 공개하기도 했다.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소설가 김홍신은 "당시 성일이 형은 저와 함께 국회 회의 시작 전 도착해 끝나야만 일어나는 '국회 바보클럽' 일원으로 유명했다"며 "남한테 욕먹고 비난받을 것을 알면서도 바보처럼 자기 줏대를 꺾지 않는 이 시대의 걸물(傑物)이었다"고 했다.
신성일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다소 엇갈리지만, 그가 1960~7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별들의 고향'을 연출한 이장호 감독은 "신성일은 한국인이 한국 영화를 보게 만든 배우"라며 "외국 영화와 비교해서 한국 영화는 질적으로 뒤처진다 여겼던 당시 대학생들도 '신성일 나오는 영화는 봐야 한다'며 영화관을 찾았다"고 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성일 회고전을 열었는데, 작품이 500개가 넘어 선정하는 데 진땀을 뺐다"며 "전 세계 영화사에도 이런 기록은 없다"고 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화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신성일은 내년 이장호 감독과 안성기와 함께 영화 '소확행'을 제작할 예정이었다. 아내를 잃은 남자(안성기)와 옛날 물건에 집착하며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장인어른(신성일), 그리고 이와 반대로 디지털 세대를 사는 딸의 세대 갈등을 아내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AI 프로그램을 통해 풀어간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복수하고 잔인하게 서로 죽이는 막장 영화가 아니라 따뜻한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기획을 시작했지만, 결국 출연하지 못하게 됐다.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를 보고 각색까지 참여하셨다"며 "근래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동안에도 영화 얘기만 계속했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열정적이었다"고 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6일 오전 11시. 유족으로 아내 엄앵란, 아들 석현·경아·수화씨가 있다.
2020 현재 연예인 나이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