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3] - 문화혁명 이야기 조선일보
2020.09.05
<21> 최고 영도자의 독선, 재앙적 파멸을 부른다
권력자의 독단(獨斷, dogma)은 나라를 망친다. 지도자의 독선(獨善)은 사회를 해친다. 독단은 오도된 자기 확신에서 나온다. 독선은 정신병적 유아론(唯我主義, solipsism)의 발로다. 경험이 짧고 견문이 좁은 인간은 독단의 우물 속에 머무른다. 사상의 다양성,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독선의 늪에 빠져든다. 범부의 독단, 필부의 독선도 위험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수억 인구의 비대한 대륙국가 최상권력자의 독단, 최고영도자의 독선임에랴.
파멸을 부른 최고 영도자의 독단
1949년부터 1976년까지 27년 동안 마오쩌둥의 절대주의 통치 아래서 수천만이 희생되고 1억 1천만 명 이상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인류사 최장(最長)의 문명을 창건하고 확산해 온 중화대륙에 왜 그토록 처참한 재앙이 발생했나? 절대 권력자의 독단, 최고 영도자의 독선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중엽 스스로 “역사의 합법칙성”을 밝혀냈다고 확신했던 독단론자였다. 그가 제창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소외된 “무산계급”에 유토피아의 희망을 주었지만, 돌이켜 보면 공산주의는 “인민의 아편”일 뿐이었다. 20세기 모든 사회주의 정권은 관료행정의 부패와 빈곤의 트랩에 빠져 처참하게 실패했다. 20세기 공산전체주의 정권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1억 명을 초과한다. 공산정권의 실패는 마르크스의 이념적 독단에 기인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만세!” chineseposters.net>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물사관은 젊은 마오쩌둥의 뇌리에 무서운 독단의 씨앗을 뿌렸다. 과도한 집산화로 최대 4500만이 아사하는 대기근을 초래한 후에도 마오쩌둥은 “자나 깨나 계급투쟁”을 외치며 전 중국을 혁명의 광열 속에 몰아넣었다.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기치를 높이 들고 만신창이 중국인민을 다독이며 말했다. 바닥이 미끄러운 “돌을 발로 살살 밟으며 강을 건너자!(摸着石頭過河)”고. 중국이 오랜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현실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계급투쟁 대신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새 시대의 모토가 되었다. 그 간단한 실용의 지혜를 얻기 위해 전 중국이 실로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상하이 양푸(楊浦)구 수앙양(雙陽)로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1950년대의 벽화 http://www.globaltimes.cn/content/979982.shtml>;
문화혁명의 국제적 배경: 마오쩌둥 사상의 수출
마오쩌둥은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을 이어 사회주의 혁명의 구루(guru)가 되려 했다. 1966년 8월 초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 저작선”을 대량으로 출판·유통하기로 결정한다. ‘마오쩌둥 사상’을 널리 보급하고 확산하기 위함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은 마오쩌둥이 스스로 고안하고 제창한 정치, 군사, 경제이론의 체계를 이르는데, 중공정부는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공산주의 신상품을 전 세계 사회주의권에 수출하려 했다. 그 배경에는 반미(反美)제국주의와 반소(反蘇)수정주의가 깔려 있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1966년 여름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됐다. 그해 5월 세 명의 승려가 반미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한다. 5월 말 미군사상자가 최고조에 달하자 미국의 존슨대통령이 전면전을 선포하고, 6월 말 미 공군은 최초로 북베트남의 주요도시를 공습해 정유시설을 파괴한다. 한편 소련은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이후 알렉세이 코시긴(Alexei Kosygin, 1904-1980)의 지도 아래 이윤동기와 상품판매를 골자로 하는 탈(脫)스탈린 수정주의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규탄하면서 동시에 소련의 수정주의노선을 비판했다. 언론은 날마다 베트남 전쟁의 실황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미제(美帝)를 규탄하기에 여념 없던 시절이었다. 중공중앙은 또한 사회주의의 정도를 이탈한 소련공산당을 향한 비판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예컨대 1966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의 공동성명엔 “소련수정주의자들은 세계혁명의 반역도당”이란 선언이 담길 정도였다.
문화혁명의 밑바탕엔 중국만이 세계혁명을 주도할 수 있으며, “마오쩌둥 사상이 세계혁명의 지도이념”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자국중심의 몽환적인 현실인식과 일인숭배의 종교적 광열이지만, 문혁 초기 전국에서 일어난 홍위병들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마오쩌둥 사상”을 흡입했다.
“마오쩌둥 사상을 보위하라!”
국방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는 1966년 3월 11일 “공업·교통의 전선에서 마오주석의 저작을 공부하고 활용하자”는 제목의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나라는 위대한 무산계급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다. 7억의 인구가 있으니 반드시 통일의 사상, 혁명의 사상, 올바른 사상이 필요한데, 바로 마오쩌둥 사상이 그것이다. 이 사상이 있기에 왕성한 혁명의 에너지를 견지할 수 있으며, 올바른 정치의 방향을 확정할 수 있다. ······ 마오쩌둥 사상은 노동인민이 자발적으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마오주석이 직접 위대한 혁명 실천의 기초 위에서 천재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또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경험을 종합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첨단의 새로운 단계로 제고한 것이다.”
<“마오쩌둥 사상의 태양빛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도로를 비추네!” 1966년 8월, “상하이 인민미술 출판사 선전 화가 조직” 작품. chineseposters.net>
린뱌오는 문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인민해방군에서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까지 자체 개발해서 100년의 국치를 씻고 소련에 필적하는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한 직후였다. 린뱌오는 이제 중국이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최첨단의 혁명이념을 통해 세계혁명의 주도국이 돼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이 소련을 제치고 세계혁명의 지도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불가분의 정신적 무기였다. 위의 글에서 린뱌오가 마오쩌둥 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넘어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새로운 단계라 선전하고 있는 까닭이다.
<1966년 여름, “마오주석 어록”을 손에 들고 행진하고 있는 어린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곧 이어 어린 학생들이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라!”는 린뱌오의 당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966년 5월 29일 청화대학 부속중학(중고교)에서 최초의 홍위병이 결성되었다. 그날 교내에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 “마오쩌둥 사상의 절대권위를 특별히 사수해야 한다!”고 선언했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곧 홍위병 조직의 전국적 발흥으로 이어졌다.
6월 초, 베이징지질학원(=대학) 부속 중고교, 베이징석유학원 부속중고교, 북경 대학 부속중고교, 베이징광업학원 부속중고교 및 베이징 제25중고교의 학생들이 연이어 홍위병, 홍기(紅旗), 동풍(東風) 등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이들의 선언문엔 다음 구절이 포함돼 있다.
“우리는 홍색 정권을 보위하는 위병(衛兵)들이다. 중공중앙과 마오주석은 우리들의 큰 산이다. 전 인류의 해방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책임이다. 마오쩌둥 사상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의 최고 지침이다. 우리는 선언한다. 중공중앙을 보위하고, 위대한 영도자 마오주석을 보위하기 위해 우리는 견결하게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흘릴 것이다.”
마오쩌둥 사상은 7억 인구를 하나로 묶는 “통일의 사상, 혁명의 사상, 올바른 사상”이었나? 1966년 6월 21일 인민일보 제1면 오른쪽 상단 “마오쩌둥 어록” 박스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올바른 정치 관념이 없다면,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 여기서 올바른 정치 관념이란 물론 마오쩌둥 사상을 이른다. 최상 권력자의 독단, 최고 영도자의 독선이 어린 학생들의 뇌수를 파고드는 과정은 그러했다. 절대 권력자의 독단, 최고 영도자의 독선은 이제 7억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유일사상이 되었다. <계속>
<1966년 6월 15일자 인민일보 1면 상단. 우측 박스에는 마오주석의 어록 중 한 구절이 발췌돼 있다. “올바른 정치 관념이 없다면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22>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결합...군중 앞세워 인민 통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쥐고 텐안먼 광장에 몰려든 군중, 1967-69년 경/ https://allthatsinteresting.com/cultural-revolution#4>;
좌우막론 독재정권은 군중(群衆)을 앞세워 인민(혹은 국민)을 통제한다. “군중”은 일반적으로 다수대중을 지칭하지만, 다수대중은 실체가 모호하다. 광장의 군중이 전체 인민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광장의 군중에 반대하는 밀실의 개개인이 오히려 다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독재정권은 군중을 앞세워 다수를 선점한 후, 곧 바로 다수를 내세워 인민(혹은 국민)을 사칭한다.
다수독재, 민주주의의 암흑
근대의 정치 사상가들이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와 민주주의를 결합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제창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군중지배(mob rule)는 곧 다수독재며, 다수독재는 곧 ‘민주주의’의 자멸임을 역사의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대로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아나키가 된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은 “진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혁명운동은 최악의 아나키로 만들고 말았다. 홍위병을 앞세운 인민독재는 결국 마오쩌둥 일인의 황권통치에 불과했다. 이제 마오쩌둥이 10대-20대의 청소년과 결합되는 정치적 마술쇼를 되짚어 보자.
노회한 게릴라 전사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1965년 11월 중순 홀연히 호화열차를 타고 베이징을 떠나 우한과 항주 등지의 호화빌라에서 무려 8개월을 머물렀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수도의 중난하이(中南海)에 머무는 동안 당권파의 쿠데타로 권좌에서 밀려나는 악몽에 시달렸다는 내부자의 증언도 있다. 도망치듯 남방으로 내려간 마오쩌둥이 1966년 2월 측근의 군부 장성들에 지시해 베이징의 수도방위대를 퇴각시킨 후 선양(瀋陽)의 부대를 동원해 수도를 포위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야사(野史)의 “2월 병변설(兵變說)”도 있다.
수도를 벗어나 있던 8개월 간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베이징의 권력층을 완벽하게 허물어뜨렸다. 그는 베이징 시장을 축출하고, 베이징 시위원회를 해체하고, 중앙의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다. 물론 그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노리고 있었지만, 직접 권력투쟁의 메가폰을 잡기 보단, 그들에게 문화혁명을 지휘하게 맡겼다.
1966년 6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50일간 류샤오치는 문혁을 지휘했다. 그는 “비판투쟁”의 현장에 대규모의 공작조를 파견했고, 그의 명령에 따라 공작조는 질서 있는 계급투쟁을 연출하려 했다. 마오가 의도했을까? 공작조와 과격분자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됐다. 대학가의 급진세력은 마오쩌둥 사상을 내걸고 “혁명은 조반”이라며 갈수록 과격한 시위를 벌이며 폭력 양상을 보였다.
<1966년 3월 25-31일 파키스탄 방문 중의 국가주석 류샤오치/ 공공부문>
6월 말부터는 류샤오치의 딸 류타오(劉濤, 1944- )가 재학하던 칭화대학에서 가장 극적인 투쟁이 전개됐다.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가 칭화대학에 공작조의 중책으로 파견된 상태였다. 칭화대학 조반파의 창끝은 결국 류샤오치를 겨누고 있었다. 그중 공정(工程) 화학과 3학년생 콰이다푸(蒯大富, 1945 - )는 칭화대학 조반파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됐다. 모욕을 느낀 류샤오치는 콰이다푸를 집중 비판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6월 24일 공작조는 콰이다푸를 비판하는 “변론회”를 열었다. 그 현장에서도 콰이다푸는 “교수대에 오르더라도 나는 혁명가임을 선포하겠노라!”는 터무니없이 대담한 자기변호로 일관했다. (현장에 있었던 중국의 저항언론인 양지성이 당시 콰이다푸의 배후에 마오쩌둥의 측근이 있었다고 의심할 정도였다.) 7월 4일 공작조는 그를 우파로 몰아 구금하는데, 7월 28일 마오쩌둥의 뜻에 따라 공작조의 전면 철수가 결정되면서 콰이다푸는 청화대학 홍위병 대표로 태어나게 된다.
<1966년 홍위병 집회에서 연설하는 콰이다푸의 모습/ 공공부문>
마오쩌둥, 홍위병과 결합하다!
1950-60년대 내내 이념교육, 정치세뇌, 공포정치, 대중동원, 정치숙청이 이어졌다. 당시 중국의 정치적 토양은 문혁의 발아를 위한 최적 조건이었다. 그 비옥한 투쟁의 토양에서 싹튼 혁명의 맹아들이 바로 홍위병(紅衛兵)이었다. 그들은 여릿한 뇌수의 청소년들이었지만, 일단 사회주의 혁명 투사의 완장을 차고 나선 잔인한 집단 광기에 휩싸였다. 그들이 내면에 잠복된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마오쩌둥이 홍위병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7월 16일 마오쩌둥은 양쯔강에서 수영대회에 참석해 큰 강의 급류를 따라 16킬로미터를 떠다니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틀 후 8개월 만에 베이징에 복귀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7월 24일-26일, 마오쩌둥은 작심한 듯 공작조의 파견을 큰 잘못이라 비판했고, 7월 28일 공작조의 전면적 철수를 명령했다. 곧 이어 8월 1일부터 개최된 중공중앙 11차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의 공작조 파견은 “부르주아지의 편에 서서 무산계급의 혁명을 탄압한” 행위라고 비판한다. 류샤오치는 이미 실권을 잃고 그로기 상태에 내몰렸다.
비틀거리는 류샤오치를 더 코나로 몰기 위함이었을까? 마오는 회의 현장에 자신이 홍위병 조직에 보낸 서신을 복사해서 배포하게 했다. 7월 28일 칭화대학 부속중등학교의 홍위병 조직은 마오쩌둥에 “무산계급 혁명 조반 정신 만세!” (1, 2) 두 장의 대자보를 보냈다. 제1 대자보 (1966.6.24.)의 핵심 테제는 “조반유리”였다. 제2 대자보(1966.7.2.)의 핵심 테제는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라는 이른바 사구(四舊)의 완전한 소멸이었다. 대자보를 읽고 난 마오쩌둥은 홍위병에 처음으로 답신을 보냈다.
“그대들은 6월 24일과 7월 4일 두 장의 대자보를 통해서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분자 및 혁명파를 착취하고 억압한 지주계급, 자산계급, 제국주의, 수정주의 및 그들의 주구를 향해 분노와 비난을 표출했으며, 반동파에 대한 ‘반란이 정당함’(造反有理)을 설명했다. 이에 나는 그대들에 열렬한 지지를 표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다. 무산계급은 자신의 해방을 넘어 인류 전체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전 인류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무산계급 스스로도 결국 해방을 얻지 못한다. 동지들이여! 이 도리를 주의하라!”
마오의 답신이 아직 공개되기 전 청화대학 부속중등학교 홍위병들이 제3대자보(1966.7.27.)를 작성했다. 마오주석을 향한 어린 학생들의 존경심이 혁명적 전투의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오쩌둥에 열광하는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우리들은 마오주석의 가장 충실한 홍위병이다! 마오주석께 무한 충성하며, 가장 견결히, 가장 용감히, 가장 충실히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최고지시를 집행해야만 한다. ‘조반(造反)!’이라는 마오주석의 최고지시를! 조반은 무산계급 혁명의 전통이다. 홍위병이 계승하고 발양해야 할 전통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반란을 일으켰고, 현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장래에서 계속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계급과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한 반란을 일으킨다. 모순이 존재하는 한, 반란을 일으킨다. 혁명적 조반정신은 1백년, 1천년, 1만년, 1억년 동안 계속 필요하다.... 홍위병 전사여,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끝까지 밀고 나가자! 위를 우러러 보며 앞으로 나아가자! 혁명의 대폭풍이 더욱 맹렬히 몰아치도록! 무산계급 혁명조반 정신 만세! 만만세!”
요컨대 마오쩌둥은 “조반유리”라는 한 마디로 홍위병들과 일심동체로 결합됐다. 홍위병들은 “조반유리”의 깃발을 들고 “대반란”의 광열(狂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80년 중공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66년 8월-9월 베이징에서만 3만3695호가 털리고, 8만5196호의 가정이 축출되고, 1772명이 홍위병에 맞아 죽는 이른바 “홍팔월(紅八月)”의 서막이 올랐다. <계속>
<“마오쩌둥의 커다란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 혁명무죄 조반유리!” “자산계급 반동노선과 당내에 자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소수의 당권파를 향해 맹렬해 불을 지르자!”/ chineseposters.net>
<23> “반동의 후예는 반동”...홍위병, 광란의 대학살
<홍위병의 비투 장면. 절반만 삭발하는 “음양두(陰陽頭)” 처벌>
역사 상 수많은 권력자들은 편집증에 시달리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심신이 피폐해지기 때문일까.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의 비유대로 권력은 중기(重器)다. 한 평생 “무거운 그릇”을 얻기 위해 쟁투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교활하고, 치졸하고, 잔인해진다. 오죽하면 권력투쟁을 진흙창의 개싸움이라 할까. 계략, 음모, 사기, 술수, 협잡, 공갈, 협박, 식언, 망언, 망동, 거짓말, 린치, 테러···.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정치범죄의 사악함은 상상을 절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성년층을 정치투쟁의 불쏘시개로 써먹는 수법이 최악이다.
미성년을 정치투쟁의 불쏘시개로...홍위병의 준동
전체주의 정권은 집요하게 청소년층을 파고 든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 파시스트 이태리의 바릴라(Ballia), 소련의 콤소몰(Komsomol) 등은 대표적인 전체주의 정권의 준(準)군사적 청소년 조직들이었다. 2차 대전 막바지까지 가장 필사적으로 연합군에 맞섰던 독일병정들은 10대의 “히틀러 유겐트”였음은 잘 알려진 바다.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히틀러 유겐트”의 규모가 급팽창한다. 1939년 3월 이후 17세 소년들이 강제 징집 대상이 되고, 1941년 이후 10세 이상의 남녀 청소년이 모두 징집된다./ 공공부문>
어린 시절 “히틀러 유겐트”로 활약했던 저명한 역사학자 헤르만 그라믈(Hermann Graml, 1928-2019)은 당시 청소년들이 나치정권에 매료된 이유를 열거하면서 제 3라이히의 강력한 정치권력, 나치정권의 선전선동 및 애국교육, 비밀결사 형식의 조직 활동, 히틀러 인격숭배의 흡입력, 나치정권이 연출한 모던한 분위기 등을 꼽는다. 아울러 그는 나치정권이 청소년들에게 가부장적 질서와 종교적 권위 등 “전통과 금기”를 파괴하는 정치적 폭력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설명한다.
그라믈의 설명은 문혁 시절 홍위병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절대적 권위를 갖는 최강의 권력기구였고, 중공정부는 이미 20년 공산주의 이념으로 청소년을 세뇌하고 훈습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살아 있는 인격신으로서 청소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사상은 “낡고, 늙고, 병들고, 뒤쳐진”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근대화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문화, 사상, 관습, 습관 등 “네 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고 “네 가지 새로운 것”을 세운다는 이른바 “파사구(罷四舊) 입사신(立四新)”의 구호가 이를 압축한다. 결정적으로 마오쩌둥은 청소년들에게 초법적인 “반란”의 권리를 보장한 후, 그들을 정치투쟁의 최전방에 내몰았다.
1966년 7월 8일, 마오쩌둥이 부인 장칭에 쓴 편지엔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위해서 천하대란(天下大亂)을 일으키겠노라!”란 말이 포함돼 있었다. 1966년 8월 “천하대란”을 일으킨 주체는 바로 홍위병이었다. 이른바 홍팔월(紅八月)의 학살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1960년대 후반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류사오치 겨냥...“사령부를 폭파하라!”
1966년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중공중앙위원회 제8기 11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1966년 8월 5일,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필로 끼적였다. 이틀 후, 약간 수정된 그 글의 복사본이 전체회의에 배포했다. 200자 원고지 1장 분량의 짧은 글 속에서 마오쩌둥은 “지난 50일간 중앙에서 지방까지 어떤 영도 동지가 반동적 자산계급의 입장에서 자산계급의 독재를 실행해 왔고,” “자산계급의 위풍을 조장하고 무산계급의 의지와 기개를 훼멸했다”고 비난했다.
마오가 “대자보” 속에서 언급한 그 “영도 동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국가원수 류샤오치였다. 마오의 창끝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목을 겨눈 상황인데, 마오는 어설프게 실명을 들어서 그들을 공격하진 않았다. 문혁은 “대중노선”에 따라 대중의 의지대로 진행돼야 하는 민중의 혁명이었다. 마오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류와 덩은 혁명대중의 자발적 봉기로 권좌에서 축출되고 숙청돼야만 하는 “자산계급”의 주구(走狗)였다.
<그림 속의 누런 색 문건은 마오쩌둥의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이다. 벽보에는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라!”가 적혀 있다.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이 외친 “조반유리”와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구호는 홍위병 폭력으로 이어졌다. 1976년 8월 문화혁명 집단화보 창작팀의 작품. 1976년 9월 마오 사망 한 달 전까지도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구호가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증거/ chineseposters.net>
8월 8일 마오의 주도 아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공중앙위원회의 결정 16조”가 채택된다. 그 대강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문혁은 군중이 스스로 해방되어 자발적으로 혁명을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다. 마오주석이 즐겨 말하듯 누구든 수영을 배우려면 직접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사회주의 혁명투사로 거듭나려면 직접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마오쩌둥 사상 대중노선의 원칙에 따라 중공중앙은 무조건 "군중을 신뢰하고, 군중에 의지하고, 군중의 지휘를 존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손을 놓고 군중을 발동(發動)시켜야만” 한다.
혁명의 과정에서 인구의 5%에 불과한 “가장 반동적인 우파들,” “극단적 반동 자산계급 우파분자들”을,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들을 고립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해선 95%의 인민이 대동단결을 해야만 한다. 인민의 단결을 위해선 문혁소조, 문혁위원회, 문혁대표대회가 군중노선의 구심이 돼야 한다.
16조의 마지막은 “마오쩌둥 사상이 문혁의 지도이념”이라는 테제다. 요컨대 16조는 마오쩌둥 사상과 군중노선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중공중앙의 공식 문건이다. 16조의 행간 마다 류샤오치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읽힌다. 그가 바로 투쟁의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군중을 억압한 반동집단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전체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류샤오치의 몰락은 이미 공식화됐다. 중공중앙 정치국상무위원회 서열 제6위였던 린뱌오가 제2위로 올라가고, 서열 제2위의 국가원수 류샤오치는 제8위로 밀려났다.
<1966년 8월 9일자 인민일보의 제 1면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공중앙위원회의 결정 16조가 게재됐다. 16조는 이후 문화혁명에 관한 중공중앙의 기본원칙이 된다.>
때려죽이고, 매달아죽이고...10대 홍위병, 잔혹한 학살극
“혁명은 무죄다!” “혁명은 곧 폭동이다!” “반란은 정당하다!” “사령부를 폭파하라!” “낡은 것을 파괴하라!” “혁명을 일으켜야 혁명을 배운다!” 1968년 8월 공적 매체를 통해 날마다 전 중국에 하달되고 있던 마오쩌둥의 행동 명령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은 바로 “군중의 자발적 반란”이었다. 군중의 자발성을 억압하는 모든 조치는 반동적 자산계급의 음모로 인식되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홍위병 조직은 일시에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대학 및 중등학교에 국한됐던 홍위병의 활동은 초등학교까지 확산되고, 수개월 후면 급기야 노동자·농민 계급의 혁명운동으로 비화된다.
당시 언론에선 일언반구도 다루지 않았지만, 그해 여름 베이징에선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졌다.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난 홍위병 폭력은 “1949년 해방” 이전의 지주, 자본가 및 그 후예를 지칭하는 ‘계급천민’과 반동적 지식분자들에 가해졌다. 홍위병은 “반동의 후예는 반동”이라는 이른바 "혈통론(血統論)을 처형의 이유로 내세웠다. 사회주의 혁명이 빚어낸 새로운 신분제가 아닐 수 없었다.
10대의 홍위병들은 민가를 급습해 샅샅이 뒤지고 터는 “초가(抄家)”의 폭행을 일삼았다, 그들은 모든 유물을 박살내고, 계급 적인(敵人)을 색출해 살육하는 백주의 테러를 이어갔다. 베이징의 창핑(昌平)현과 다싱(大興)구에선 특히 잔혹한 학살극이 펼쳐졌다.
비판적 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의 기록에 따르면, 곤봉으로 때려죽이고, 작두로 썰어 죽이고, 밧줄로 매달아 죽이고, 심지어는 영유아의 팔다리를 짓밟고 당겨 찢어 죽이는 광란의 대학살이었다. 1980년 “북경일보” 12월 20일자는 1966년 8월-9월 사이 베이징에서 홍위병에게 “맞아 죽은” 피해자의 숫자가 1772명이라 보도하고 있다. 10대의 청소년들이 대체 어쩌다 이토록 잔혹한 학살극의 주역이 되었나?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24> “혁명 무죄!” 10대 홍위병, 학살의 주체가 되다
<1966년 8월 26일, 하얼빈 홍위병 집회에서 헤이롱장성 서기 겸 하얼빈 시위원회 제1서기 런중이(任仲夷)가 비투(批鬪)당하고 있다. 당시 사진기자 리전성(李振盛, 1940-2020)의 작품집에서 발췌. 李振盛, <<紅色新聞兵>> (香港中文大學, 2018), 103>
나치 정권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은 1961년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스스로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라 살았다고 진술했다. 그 법정을 참관한 철학자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는 아이히만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악의 상투성(the 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개개인은 정교한 기계 속의 작은 부속이 되어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 길들여지면 끔찍한 정치범죄도 일상의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
1966년 8-9월 10대의 홍위병들은 분명 바로 그런 “악의 상투성”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그들은 살인이 허용되는 무법 상태에서 혁명의 사명감에 들떠 학살을 감행했다. 그 밑에는 법질서의 해체와 도덕적 아노미(anomie)가 깔려 있었다. 물론 그들은 최고영도자의 암시를 따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홍위병, 집단 구타로 교사 살해...학교에서 시작된 홍색공포
홍위병 폭력은 교내에서 시작됐다. 1966년 8월 5일, 베이징 사대 부속여중의 교감 볜중옌(당시 50세, 여)이 홍위병의 집단 구타로 사망했다. 홍위병이 살해한 최초의 교사였다. 8월 중순을 지나면서 폭력은 교외로 확산됐다. 홍위병의 테러행위는 민가의 급습 및 약탈, 문화유산의 조직적 파괴, 대량학살의 3단계로 전개되었다.
홍위병들은 반동세력의 재산을 조사하고 몰수한다는 이른바 “초가(抄家)”의 명분으로 민가를 습격했다. 중국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8월 말부터 약 한 달간 베이징에선 3만3695호의 민가가 홍위병의 습격을 받았다. 상하이에선 8월 23일에서 9월 8일까지 “자산계급”의 거주지 8만4222호와 교사 및 지식분자의 거주지 1231호가 파괴됐다.
베이징에서만 10만3000량의(5.7톤) 금, 34만 5200량의 은, 554만원의 현금, 61만3600점의 골동품이 압수됐다. 상하이에서는 금은 등 보석 외에도 미화 334만 달러, 330만 위안화 상당의 외화, 370만 위안의 현금과 채권 등이 압수됐다. 1966년 10월, 공산당의 공식문건엔 전국의 홍위병들이 “착취계급”에게서 65톤의 금을 압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1966년 9월,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을 접견하는 홍위병의 환호/ 공공부문
홍위병의 반달리즘: 역사유적의 파괴
홍위병들은 또한 문화유산과 공공재산을 파괴했다. 문혁 10년 동안 베이징의 국가지정 유적지 6843 곳 중에서 4922 곳이 훼멸됐는데, 그중 다수가 1966년 홍팔월(紅八月)의 테러로 파괴됐다. 홍위병들은 자금성(紫禁城)을 파괴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군대를 급파해 접근을 막았다.
1966년 11월 베이징의 홍위병 수백 명은 기차를 타고 산둥성 취푸(曲阜)로 내려가 4주간 머물면서 그 지역 홍위병들과 합세해서 공부(孔府, 공자 유적지)의 문화재 6618점을 파괴했다. 공자(孔子)에 대한 적개심은 지식분자에 대한 경멸로 표출됐다. 홍위병들은 역사유물 뿐만 아니라 공공 도서관도 파괴했다. 문혁 기간 전국 1100개의 현(縣) 단위 이상의 도서관 중에서 3분의 1이 폐관되었다. 랴오닝, 지린, 허난, 장시, 꾸이저우 등지에서만 700만권의 서적이 훼멸됐다.
다섯 부류의 검은 집단 색출해 살상
홍위병 집단의 주요 타격대상은 흑오류(黑五類), 곧 ‘다섯 부류의 검은 집단’이었다. “해방” 이후 17년이 지난 후였다. 지주, 부농, 반동분자, 파괴분자(전과자 등), 우파 등의 흑오류는 이미 제거되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홍위병들은 법적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정치천민을 색출해 박해했다. 1966년 8월 18일에서 9월 15일까지 베이징 인구의 1.7프로에 달하는 7만 7000여 명이 축출됐다. 전국적으로는 39만 7000명이 도시에서 추방됐다. 보금자리를 잃고 추방된 정치 천민들은 헐벗고 굶주린 채 객사(客死)하거나 유민(流民)으로 떠돌았다
<홍위병의 문화유산 파괴/ 공공부문>
홍위병들은 계급의 적인들을 잡아와선 구타하고, 고문하고, 모독하는 광기의 비투(批鬪)를 이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홍위병의 독타(毒打, 표독한 구타)에 맞아죽었다. 모멸감을 못 이긴 사람들은 자살을 택했다. 중국의 관방 통계에 따르면, 1966년 가을 베이징에선 1772명이 살해됐다. 같은 해 9월 상하이에선 704명이 자살하고, 534명이 살해됐다.
홍위병은 왜 폭력화됐나?
홍위병들이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1966년 8월 6일, 칭화대학 부속중등학교(이하 부중), 런민대학 부중, 베이징항공대학 부중의 홍위병 집단은 폭력행위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긴급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인신 난타(亂打), 부랑행위, 국가재산 파괴행위” 등을 일삼는 “가짜 좌파조직을 해체하자”고 선언했다.
1966년 8월 13일 ‘베이징 공인(工人) 체육장’(경기장)엔 7만 명의 홍위병들이 운집했다. 폭력의 근절을 위해 “소유맹(小流氓, 부랑아)” 십여 명을 단상에 올리고 비투(批鬪)하는 집회였다. 본래 취지와는 달리 집회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난폭한 집단구타가 발생하고 말았다. 중앙문혁소조의 부조장 왕런중(王任重, 1917-1992)이 그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들의 폭력행위를 방치했다. 당시 7만의 관중은 어떤 메시지를 받았을까. 현장 참석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바로 그 집회가 홍위병이 폭력화되는 중요한 계기라고 주장했다.
<‘낡은 세계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새계를 창립하자!’ 홍위병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호/ 공공부문>
1966년 8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톈안먼 광장에서 모두 10차례나 큰 집회가 열렸다. 마오쩌둥은 군중과의 직접 대면을 원했고, 중공중앙은 무료로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면서 전국의 홍위병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도합 1200만 명의 군중이 톈안먼 관장에 모여 마오쩌둥을 “알현(謁見)”하는 영광을 누렸다.
1966년 8월 18일이 그 첫 집회였다. 새벽 한 시부터 몰려온 백만의 홍위병 군중이 텐안먼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새벽 5시 군장(軍裝) 차림으로 톈안먼의 성루에 올라 눈앞의 군중을 내려다보았다. 문혁 시절 서열 2위였던 린뱌오는 대규모 군중 앞에서 황홀경에 빠진 채 17분간 연설을 했다. 평소 신경쇠약으로 골방에서 벌벌 떨고 있던 린뱌오는 군중 앞에선 생동의 에너지를 내뿜었다. 그는 홍위병들을 향해 낡은 것을 깨부수라며 “파사구(罷四舊)!”를 외쳤다.
<“마오주석을 꼭 붙잡고 큰 바람과 파도를 헤쳐 앞으로 나아가자!” 당시 홍위병과 마오쩌둥의 공고한 심적 결합을 표현한 포스터/ 공공부문>
절정의 순간은 18세의 쑹빈빈(宋彬彬, 1949- )이 마오쩌둥의 왼쪽 위팔에 홍위병 수장(袖章)을 달아줄 때였다. 마오는 어린 소녀의 이름을 물었고, “쑹빈빈”이라 답하자 마오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빈(彬)이냐?” 되묻고 나선 “요무마(要武嘛, 무[武]가 필요하지?)”라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흘린다. 언론의 대서특필로 이 대화가 알려지자 홍위병 집단을 들끓었다.
<1966년 8월 18일 “경축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백만인 대회.” 마오의 팔에 홍위병 수장을 달아주는 쑹빈빈. 얼마 후 쑹빈빈은 쑹야오우(要武)로 개명하고 홍위병의 대표로 활약한다. 이 대회가 열리기 13일 전 베이징 사대부여중 교내에서 교감 뱬중앤은 홍위병의 구타에 못 이겨 사망한다. 당시 쑹빈빈은 바로 그 홍위병 조직의 리더였기에 훗날 큰 논란에 휩싸인다./ 공공부문>
열흘 전 제8기 11차 전회에서 중공중앙이 채택한 “16조” 제 6항에는 “요용문투, 불용문투(要用文鬪, 不用武鬪)”라는 구절이 명시돼 있었다. 무력투쟁을 금지하고 글(文)로 투쟁하라는 주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요무(要武)란 한 마디로 중공중앙이 채택한 “문투(文鬪)의 원칙”을 조롱했다. 홍위병을 향해 무장투쟁에 나서라는 최고영도자의 주문이었다.
“혁명은 무죄이며, 반란은 정당하다.” 이제야 홍위병은 그 의미를 파악했다. 그들의 눈앞엔 살인까지 허용되는 무법천하가 펼쳐졌다. 학교 수업은 중단된 상태였다. 책 대신 곤봉과 몽둥이를 든 어린 학생들은 성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대신 잔혹한 학살의 경쟁을 시작했다. <계속>
<25> 마오를 “계몽군주”라 숭배했던.. 홍위병들이 부른 파멸
<“마오주석은 세계 인민의 마음속 가장 붉고도 붉은 홍태양!” 광저우 미술학원 혁명위원회, 1969년 선전화>
2020년 바로 오늘날도 전체주의 폭압정권의 세습전제군주를 “계몽군주”라 칭송하는 시대착오적 ‘지식분자’가 남아 있다. 20세기 인류는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김일성, 폴 포트 등의 전체주의 정권을 경험했다. 이들 전체주의 정권은 공통적으로 인권유린, 인격숭배, 사상통제, 언론검열, 국가 테러리즘의 양상을 보였다. 이에 덧붙여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2차 대전 직후 “전체주의의 기원”을 밝히면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생명은 바로 열광적인 군중(masses)의 지지라고 분석했다.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독재자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인격숭배와 테러정치로 점철된 이들의 통치는 18세기 계몽주의의 합리성을 조롱하는 반(反)이성의 극치였다. / 공공부문>
전체주의 정권의 궤변론자들
마오쩌둥의 전체주의 역시 열광적인 군중의 지지 위에서 실현됐다. 문혁 초기 중앙문혁소조의 왕리(王力, 1921-1996), 관펑(關鋒, 1919-2005), 치번위(戚本禹, 1931-2016) 등 3대 필간자(筆杆子, 붓대, 문인)라 불리던 극좌의 ‘지식분자’들은 마오쩌둥이 인민을 계몽하고 영도하는 “불세출의 영묘한 수령”이라 칭송했다. 권력의 정당성을 고작 한 개인의 “영웅적인” 카리스마에서 찾는 허술한 논변이다.
정상적인 문명사회에서 그런 몰상식한 궤변을 설파하는 ‘지식분자’는 사회적 매장을 면할 수 없을 테지만, 1960년대 중국에선 그 허술한 논변이 마술적인 집단최면의 효과를 발휘했다. 마오를 절대의 “계몽군주”로 숭배하는 군중의 광열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파괴하고 가족윤리를 해체하는 파멸적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의 모친을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총살시킨 한 홍위병의 참회가 당시의 상황을 웅변한다.
<“만물은 태양에 의지해서 생장한다!” 1970년대 초반, 셰즈가오(謝志高)와 후전위(胡振宇)의 작품. 상하이인민출판사. 마오쩌둥을 태양에 비유하는 문혁 시절의 인격숭배는 김일성을 태양으로 떠받드는 북한의 인격숭배에서 그대로 답습된다. / chineseposters.net>
마오쩌둥의 뜻을 받드는 홍위병들
1966년 8월 18일 쑹빈빈은 톈안먼 성루에서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왼쪽 위팔에 홍위병 수장을 달아주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만 17세의 쑹빈빈은 베이징 사범대학 부속 여중 홍위병 조직의 부주석이었다. 쑹빈빈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군 출신으로 1980-90년대 8대 원로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쑹런치웅(宋任窮, 1909-2005)의 딸이었다. 쏭빈빈이 전국 홍위병의 대표가 되어 “백만 군중” 앞에서 마오쩌둥에 홍위병의 수장을 달 수 있었던 데는 중국공산당 내부의 “꽌시(關係)”가 작용했다.
바로 다음 날 (1966. 8.19.) 베이징의 ‘인민일보’는 제1면에 홍위병의 수장을 단 마오쩌둥의 사진과 함께 톈안먼 광장의 백만군중 집회를 대서특필했다.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막 생겨나던 홍위병 조직의 성원들은 직접 홍위병 수장을 하고 있는 마오쩌둥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감동의 도가니에 빨려들었다. 최고영도자 마오주석이 직접 어린 홍위병들을 향해 바로 그들이 혁명의 주체임을 확인시켜줬기 때문이었다
<1966년 8월 19일자 “인민일보” 제1면 (왼쪽). 쑹야오우란 이름으로 게재된 쑹빈빈의 칼럼(오른쪽)>
1966. 8월 21일 자 ‘인민일보’에는 그날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의 팔에 수장을 달아 준 쑹빈빈의 칼럼 “내가 마오주석께 수장을 달아드렸다”가 게재됐는데, 본명 대신 쑹야오우(宋要武)란 새 이름을 걸고 있었다. 지난 회 언급했듯 바로 그날 마오쩌둥은 쑹빈빈에게 이름을 묻고는 “야오우마(要武嘛, 무가 필요하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쑹빈빈이 마오의 뜻을 받아 쑹야오우로 개명했다는 사실은 전국의 홍위병의 심장에 다시금 불을 지르는 계기였다.
어머니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죽게한 홍위병
당시 안후이성 구전(固鎭)현에서 소학교를 막 졸업한 12세의 한 소년은 “쑹야오우”의 혁명정신에 큰 자극을 받았다. 소년은 즉시 본명을 버리고 장홍빙(張紅兵)으로 개명했다. 붉은 병정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로부터 3년 6개월 후, 1970년 2월 13일 밤, 16세의 홍위병 장홍빙은 모친 팡중모(方忠謀, 1926-1970)를 ‘반혁명죄’로 고발했다. 곧바로 무장한 군인들이 몰려와 모친을 트럭에 짐짝처럼 싣고 가버렸다. 이후 장홍빙은 군중의 틈에 섞여 인민법정의 재판관이 모친의 판결이 선독(宣讀)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사형에 처한다! 즉각 집행!” 두 달이 채 못돼 모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향년 44세.
<2016년 5월 31일 문혁 발발 50주년을 맞아 중국의 봉황위성방송(鳳凰衛星視) “차갑고도 따뜻한 인생(冷暖人生)”에 출연해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죄를 참회하는 장홍빙씨>
소년의 모친 팡중머우는 1949년 해방 이전 간호병으로 인민해방군에 참가했다. 기초 보건지식만 갖고 의료현장에 투입됐던 이른바 “맨발의 의사(赤脚醫生)”였다. 1965년엔 구전현 병원의 문진(問津)부 부주임을 역임했는데, 문혁이 시작되자 곧 남편이 주자파로 몰려 비투(批鬪)당하면서 온 집안은 고난의 급물살에 휩싸였다. 1968년 5월부터 시작된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 1968-1969) 운동은 흔히 “3천 만을 타격하고 최소 50만에서 최대 150만을 학살했다”는 최악의 전체주의적 테러였다. 그 시기 팡중머우는 “특무(特務, 특수간첩)”혐의의 지주분자로 몰려 구금 상태에서 날마다 문초당해야만 했다. 1950년대 초 그녀의 부친이 지주계급으로 분류돼 숙청됐다는 이유였다.
1970년 2월 13일, 장홍빙은 모친의 낡은 수첩에 적힌 “고귀한 자가 가장 우둔하고, 비천한 자가 가장 총명하다”는 어귀를 발견했다. 이 문구는 그 당시 마오쩌둥이 직접 인용해서 널리 회자됐었는데, 장홍빙은 모친에게 소리쳤다. “팡중머우!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 마오 주석을 폄하하려는 건가?” 격분한 모친은 류샤오치는 무죄라 주장하며 격렬하게 마오쩌둥의 인격숭배를 비판했다. 남편과 아들이 반혁명행위라며 무섭게 질책하자 그녀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까지 들고 와선 불태워버렸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 그녀는 난생처음 담배를 물고 뻑뻑 피웠다고 한다. 장홍빙의 부친은 신고를 한다며 뛰쳐나갔다. 혹시나 부친이 마음이 약해져서 신고하지 못할까 우려했던 장홍빙은 그날 밤 직접 모친의 반역행위를 고발했다. 먼 세월이 지나서야 변호사가 된 장홍빙은 문혁 당시 혁명의 광열에 휩싸여 스스로 씻지 못할 중죄(重罪)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통곡했다.
당시 장홍빙의 양친 모두 반동분자의 혐의를 쓰고 수난을 겪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문혁이 고조되면서 지주나 부농 집안 출신의 홍위병들은 더더욱 과격한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성분(成分)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그들은 더 극단적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당시 상황에서 친모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하는 행위는 혁명성을 표출하는 극단의 조치였다. 출신 성분을 만회하려는 한 소년의 처절한 처세술이었다.
홍위병 집단의 내분에 관해선 앞으로 차차 상술하기로 하고, 일단 문혁 시대 중국에서 널리 유행했던 혁명가곡의 가사를 되짚어보자.
하늘땅이 크다 해도
당(黨)의 은혜처럼 크지 못하지
양친부모가 가깝다 해도
마오주석처럼 가까울 순 없지!
마오쩌둥 사상은 혁명의 보배
누구든 그를 반대하면 우리들의 적!
마오쩌둥은 “대원수 스탈린”을 이어서 지상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전 인류의 절대 “계몽군주”가 되길 염원했지만, 인격숭배와 테러정치를 일상화한 그의 통치는 반(反)계몽의 극치였다. 하물며 전체주의 세습전제정의 잔악무도한 폭군임에랴.
<계속>
<26> 누가 알았을까 귀족이 될 줄… 권력 잡고 특권층 된 정의의 사도들
<“학교로 돌아가 철저히 혁명을 일으키자!” 베이징 중·소학교 혁명 사생(師生) 조반(造反)위원회 선포 1967년 2월“/ 공공부문>
돼지 나폴레옹이 인간 필킹턴씨와 마주 앉아 카드놀이를 하는데, 창밖에서 그 모습을 엿보는 동물들은 돼지와 인간을 분간조차 할 수 없다. 조지 오웰(1903-1950)의 “동물농장”의 마지막 장면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스탈린의 테러정치로 변질되는 과정을 고발한 이 작품은 문학사에 길이 빛날 알레고리다. 요사이 오웰의 풍자가 더욱 빛을 발한다.
“혁명세력”의 반칙과 특권이 날마다 폭로되고, 표리부동한 권력집단에 분노하는 대중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혁파, 착취의 종식, 부패의 척결, 적폐의 청산···. 혁명의 구호를 외치며 등장한 “정의의 사도들”이 권력을 잡고 나선 스스로 특권층이 돼버린다. “돼지”가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나? “인간”이 “돼지”의 마스크를 벗어던졌나?
<중국의 인터넷 검열을 풍자한 만화. 2018년 2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 등은 중국의 인터넷에서 금칙어가 됐다. https://www.zerohedge.com/news/2018-03-02/great-firewall-china-government-bans-orwells-animal-farm-letter-n>;
특권과 특혜 누리는 혁명 유공자 자녀
권력의 세습과 특혜의 독점에서 중국공산당을 능가할 조직은 드물다. 2012년 시진핑 집권 당시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3명이 혁명원로의 아들 또는 사위였다. 중국인들은 흔히 이들을 전통시대 황실귀족에 빗대서 태자당(太子黨)이라 부른다. 태자당엔 늘 홍이대(紅二代), 홍후(紅後), 홍귀(紅貴) 등의 꼬리표가 붙는다. 대를 이어 권력을 누리는 “붉은 귀족”이란 의미다.
<“중국공산당 8대 가족, 거부를 해외에 숨겨 두다!” 뉴욕에서 출간되는 반중공(反中共)언론 “명경월간” 제75기 (2016년 4월)의 표지>
태자당을 장쩌민계의 상하이방(上海幫)과 후진타오계의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단파)에 맞서는 제3의 당파라고 오인하기 쉽지만, 태자당은 독립적 당파라기 보단 혁명투사의 자손들에 부여된 세습적인 엘리트의 지위를 의미한다. 당파와 상관없이 장쩌민, 리펑, 후진타오의 직계 자녀들이 모두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오늘날도 태자당은 중공정부 조직의 주요보직이나 국영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해 막대한 권력을 누리고 있다.
태자당 293명의 경력을 추적한 마카오대학의 토니 장 교수는 2019년 연구에서 중공정부의 권력승계는 “집체적 엘리트 재생산”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중국공산당의 파워-엘리트 집단은 대를 이은 권력의 승계에 집요한 관심과 노력을 경주해 왔다.
건국 초부터 일찍이 중국공산당은 혁명의 유공자들을 정관계의 요직에 앉히는 논공행상의 권력 배분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혁명 유공자의 자녀들은 교육, 취업, 승진 등 모든 방면에서 남다른 특권과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문혁이 막 시작되던 1966년 여름, 중국 중등학교 학생들은 이미 출신성분에 따라 신분서열이 나뉘어져 있을 정도였다.
“부모가 영웅이면 아이는 호걸, 반동이면 아이는 먹통”
1966년 8월 이후 홍위병 운동은 “보수파”와 “급진파”로 양분됐다. 이후 두 집단은 각각 보황파(保皇派)와 조반파(造反派)라 불렸다. 사전적으로 “보황”은 “황제를 보위한다”는 뜻이다. 문혁의 맥락에서 황제란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을 지칭한다. 조반파 역시 마오의 뜻에 따라 “반란을 일으키는” 마오주의자 집단이었다. 두 집단 모두 마오쩌둥의 호위세력을 자처했으나 출신성분과 정치노선에서 양자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문혁 초기 고위간부의 자제들은 각 학교에 배치된 공작조의 지시를 따라 선제적으로 계급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혁명간부, 혁명열사, 혁명군인, 공인 및 농민 집안 출신임을 내세워 이들은 스스로를 홍오류(紅五類, 다섯 붉은 무리)라 불렀다. 홍오류는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파괴분자 및 우파분자 등 흑오류(黑五類)를 계급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홍오류는 “봉건사회”의 착취계급 및 부르주아 잔류세력의 완벽한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흑오류를 “개새끼들”(狗崽子)이라 불렀다. 흑오류의 입장에선 터무니없는 신분적 멸시와 계급차별이 아닐 수 없었다.
1966년 8월 12일 베이징 공업대학 문혁소조의 조장 탄리푸(譚力夫, 1942- )가 써 붙인 대자보엔 이런 대련(對聯, 대구)이 적혀 있었다.
부모가 영웅이면 아이는 호걸이고(老子英雄兒好漢)!
부모가 반동이면 아이는 먹통이다(老子反動兒混蛋)!
최고 검찰원 부검찰장의 아들이었던 탄리푸는 전형적인 “붉은 귀족”이었다. 8월 20일 학생 변론회에서 그가 행한 연설이 매스컴을 타면서 그의 “혈통론”은 전국적 반향을 일으켰다.
<“부모가 영웅이면 아이는 호걸!” 소위 “혈통론”을 선전하는 포스터. 홍군이 인민을 해방하는 장면을 통해 혁명분자의 혈통이 신성함을 드러내려는 의도인 듯. 1966년 추정. 출처미상>
“반동 부모를 배반하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중공중앙의 당권파를 축출하기 위해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혈통론을 부르짖는 홍오류는 대부분 고위관료, 혁명간부 등 중앙권력층의 자녀들이었다. 마오의 입장에서 혈통론이란 당권파에 복무하는 신분유지의 궤변일 뿐이었다.
마오의 계급론에 따르면, 출신성분 뿐만 아니라 정치사상과 혁명 활동이 중시된다. 출신성분이 좋아도 사상과 활동이 불량하면 정치천민으로 전락할 수 있다. 돌려 보면, 사상과 활동이 출중하면 성분의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1966년 8월 초 중앙문혁소조의 장칭과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탄리푸의 혈통론을 비판하면서 다음의 새로운 대구를 제시한다.
부모가 영웅이면 아이는 [부모를] 계승하고(老子英雄兒接班)!
부모가 반동이면 아이는 [부모를] 배반해야(老子反动兒背叛)!
이후 혁명가곡이 되어 널리 불린 이 대구는 흑오류를 일깨우는 신분해방의 나팔소리였다. 비록 부모가 반동이라도 그러한 부모를 “배반”만 할 수 있다면, 흑오류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해 8월부터 조반파는 급속하게 동지들을 규합했다. 급기야 1966년 9월 6일 “수도 대전원교(大專院校, 고등교육기관의 통칭) 홍위병 조반 사령부”가 성립됐다. 물론 조반파의 구성원 모두가 흑오류는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중간 계급 출신이 지도부를 구성했고, 더러 홍오류도 조반파로 넘어왔다. 요는 문혁에 참여하려는 흑오류는 모두가 조반파에 속했다는 사실이다. 출신성분이 나쁠수록 과격한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결국 ‘신분차별’이 조반파의 폭력화를 설명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10월 9일 총리 저우언라이는 탄리푸의 혈통론을 전형적인 “형좌실우(形左實右, 겉만 좌파, 실은 우파)”라 비판했다. 10월 16일 천보다는 “혈통론”이 반동적이라 비판했다. 10월 24일 급기야 마오쩌둥이 입을 열었다. “학생들 일부는 출신 성분이 안 좋을 수도 있지. 설마 우리 모두 다 출신이 좋겠어?” 이 모든 발언은 이미 혁명의 주체로 급성장한 조반파의 활약에 대한 마오쩌둥 계열의 사후 승인이었다.
<“무산계급 혁명 조반파는 연합하여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밀고 가자!"/ chineseposters.net>
그해 12월 혈통론을 외쳤던 탄리푸는 투옥되고 비투당했다. 보황파는 1966년 말에서 1967년 초 세를 잃고 와해된다. 중앙문혁의 지지를 받은 조반파가 홍위병의 주류가 되지만, 그들 역시 결국 마오쩌둥에 버림받고 말았다. 곧 이어 문혁의 바람이 교정을 넘어 노동자, 농민에까지 퍼져나갔다. 앞으로 보겠지만, 보황파와 조반파의 갈등은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비화됐다.
2020년 7월 말 베이징대학의 비판적 지식인 정예푸(鄭也夫, 1950- ) 교수는 “누구를 위해 강산을 지키나?”란 문제의 칼럼에서 오늘날 중국정부는 집권세력과 특권세력의 보위에 천문학적 국부를 사용하는데, 그 자식들은 미주와 유럽에 살며 사치와 향락에 탐닉한다는 통렬한 특권층 비판을 쏟아냈다. “혈통이냐, 능력이냐?” 대대로 특권을 물려주는 “태자당”의 공화국에선 언제나 “그것이 문제로다.” <계속>
<27> 자기편 봐주고 반대편은 티끌도 처벌...이게 독재의 술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진핑 정부의 풍자. 반체제 만화가 바듀차오(Badiucao)의 작품/ foreignpolicy.com>
독재정권은 법을 악용한다. 자기편의 들보는 덮어주고, 반대편의 티끌은 처벌한다. 반대세력은 억압하고, 비판집단은 탄압한다. 의법(依法)통치를 가장하지만, 독재정권의 법률행위는 편파적이고, 파당적이다.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이다. 독재자는 법의 보편성, 공정성, 합리성을 무너뜨린다. 법치의 파괴가 바로 독재의 시작이다.
법에 따라 집행한다며 반대세력만 골라 처벌
사법적 “내로남불”을 학술용어로는 선택적 법집행(selective enforcement of law)이라 한다. 한비자(韓非子)가 제시한 전제군주의 통치술이다. 가혹한 법령을 장시간 집행하지 않으면, 백성 대부분이 범법자가 되고 만다. 그때 군주는 반대자만 표적삼아 처벌할 수 있다. 한비자에 따르면 “이형거형(以刑去刑)”이다. “형벌로 형벌을 없앤다!”는 뜻! 본보기로 몇 명만 처벌하면 모두가 복종한다는 이야기다.
선택적 법집행은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통치술이다. 시진핑 정부의 반부패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법률은 극히 엄격한데, 1980년대 이래 법집행은 대체로 느슨했다. 그 결과 대부분 공직자들은 “부패”를 생활화했다. 2012년11월 “호랑이와 파리 떼”의 척결을 목표로 중국정부는 연평균 50여명의 고위직 간부를 구속했다. 당·관·군 고위직의 30퍼센트가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조족지혈이었다. 게다가 부패혐의로 처벌된 최고위직 부패관료 다섯 명은 모두 중국공산당 반(反)시진핑 세력의 핵심인물들이었다.
베이징 인민대학의 장밍(張鳴, 1957- ) 교수는 반부패 운동을 주도하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중공중앙의 지침만을 따른다”고 비판했다. 베이징 대학의 허위에팡(賀衛方, 1960- )교수는 진정한 “반부패개혁”의 실현을 위해선 절대다수의 관원들이 사형을 당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법치의 파괴를 규탄하는 양심의 경고였다.
<문혁시절 전형적인 비투(批鬪, 비판투쟁)의 현장. 무죄추정의 원칙, 피의자 인권보호 등 인간의 기본권을 모두 무시한 인민재판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투쟁 대상의 목에 걸린 팻말에 각각 “삼반분자,” “완고한 교화불능의 주자파,” “대반도”라 적혀 있다./공공부문>
민주집중제 내세워 삼권분립 부정
중국의 헌법은 삼권분립을 부정한다. 대신 입법부와 행정부를 하나로 묶는 “의행(議行)합일”을 강조한다. 형식상 행정부와 사법부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종속된다. 행정, 입법, 사법의 권력이 통일된 “단일체(單一體) 국가”의 이상이지만······.
전국인민대표회의는 명목상의 국가 최고의 권력기구일 뿐이다. 국가권력의 핵심은 바로 중공 중앙상무위원회다. 전국인민대표는 중공중앙 상무위의 거수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중국헌법에 명시된 “인민민주독재”와 “민주집중제”의 당연한 귀결이다.
특히 문혁 시기, 중국의 인민은 인치(人治)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 1967년 이래 전국 지방정부는 “혁명위원회”에 장악됐다. “일원화 영도(領導)”를 표방한 혁명위원회는 지방정부의 당, 정, 군을 장악했다. 그 결과 인민법원과 인민 검찰원(檢察院) 등 각 지방의 사법기구는 군조직의 감시 하에 놓였다. 혁명위원회에 관해선 차후 상술하고, 문혁 시절 사법살인의 케이스를 살펴보자.
문화혁명의 시대, 사법 살인의 사례
1970년 3월 5일, 목요일. 베이징 노동자 경기장에는 10만 명의 군중이 꽉 들어차 있었다. “타도하라!” 혁명의 구호를 복창하는 성난 군중들 앞에 19명의 정치범들이 끌려 나왔다. 단상에 세워진 19명의 머리 위에 “사형, 즉시 집행”이란 판결이 선포됐다. 그들은 모두 어디론가 끌려갔고, 판결에 따라 곧 총살당했다. 가족들도 그들의 최후를 전혀 알지 못했다.
19명의 사형수들 사이엔 스물여덟 살의 위뤄커(遇羅克, 1942-1970)도 끼어 있었다. 그는 베이징 인민 기기(機器)공장의 견습공이었지만, 정치평론으로 문명을 날린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1966년 2월 13일, ‘문회보(文滙報)’에 사인방 야오원위안의 비평을 반박하는 그의 평론이 실렸는데, 큰 방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의 진정한 출세작은 혁명세력의 신분세습을 비판한 “출신론(出身論)”이었다. 1967년 1월, 동인지 “중학문혁보(中學文革報)”에 여섯 차례에 걸쳐 게재된 “출신론”은 대중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67년 1월 18일자 “중학문혁보” 창간호에 실린 위뤄커의 “출신론”. 베이징 기계공장의 견습공 위뤄커는 이 글에서 “혈통론”을 봉건시대의 낡은 사상이라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사상은 실천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주장으로 출신성분에 따른 신분차별의 부당함을 고발한 이 글은 전국적 반향을 불러왔다. 결국 1968년 1월 5일 체포되었고, 1970년 3월 5일 19명의 정치범과 함께 베이징 노동자 운동장에서 개최된 10만인 대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즉시 총살되었다.>
혈통론 비판한 워러커, 형장의 이슬로
지난 회 살펴봤듯, 문혁 초기 출신성분이 좋은 홍위병들은 “부모가 영웅이면 자식은 호걸”이라는 구호로 신분세습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당내 당권파의 축출을 목표로 했던 중앙문혁 소조는 “혈통론”을 반동이라 비판했다. 1966년 12월 말 “혈통론”을 제창했던 탄리푸(譚力夫, 1942- )는 투옥됐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위뤄커의 “출신론”은 출판 직후 널리 유포됐는데, 그의 정연한 논리가 되레 중앙문혁소조의 신경을 건드렸다.
“출신론”에서 위뤄커는 우선 당시의 “혈통론”이 신분제적 발상이며, 그 이론적 기반은 자산계급의 형이상학이라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혈통론”이 “사회주의 제도 아래 다시금 새로운 특권계급을 만드는 반동의 카스트제도”라 질타했다. 신분제적 차별이 초래할 중장기적 사회적 문제를 분석한 후, 그는 “표현의 중요성”(重在政治表現)을 강조했다. 출신성분 보다는 개개인의 구체적 언행, 표현,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인데, 그 근거는 바로 마오쩌둥의 발언이었다.
<1967년 위뤄커 최후의 사진/ <<遇羅克: 遺作與回憶>>에서 발췌>
위뤄커는 철저하게 마오쩌둥 사상의 내에서 논리를 전개했다. 1957년 마오쩌둥은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의 대학생들이여, 비록 많은 사람들이 비(非)노동자 집안 출신의 자녀라 할지라도 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애국자며, 모두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마오쩌둥의 발언에서 혁명의 공리(公理)를 도출하고, 그 공리에 따라 “혈통론”의 불합리를 논증하는 영리한 레토릭(rhetoric)이었다. 누구든 위뤄커를 공격하는 순간, 마오쩌둥을 부인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위뤄커는 바로 그 “출신론” 때문에 필화에 휘말려 형장의 이슬로 스러졌다.
역시나 문제는 위뤄커의 출신성분이었다. 그의 부친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전력 기술자였다. 전문분야에서 기술혁신으로 업적을 쌓았음에도 그는 1957년 “반우파투쟁” 당시 우파로 몰려 노동교양형에 처해졌다. 모친 역시 우파로 몰려 갖은 수모를 겪고 극빈의 생활고를 견뎌야 했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위뤄커였지만, 우파의 낙인 때문에 세 번이나 대학입학을 할 수 없었다. 위뤄커의 “미천한” 출신성분이 문제였을까? 일개 정치천민, 흑오류(黑五類, 검은 다섯 부류)의 아들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혁명세력의 권력세습을 비판한 게 문제였을까?
대독초(大毒草)로 낙인, 법의 이름으로 처형
1967년 4월 14일 중앙문혁소조의 어용(御用) 논객 치번위(戚本禹, 1931-2016)는 위뤄커의 “출신론”을 대독초(大毒草)라 선언했다. 문혁 시기 “대독초”의 낙인은 곧 사형선고였다. 곧 바로 위뤄커에 미행이 붙고 신변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68년 1월 5일, 위뤄커는 체포됐다. "반혁명 여론 조성, 반동사상의 유포, 암살활동 추진 음모, 반혁명조직 결성 등의 죄명이 들씌워졌다. 2년 후 그는 10만 명 앞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즉시 처형됐다. 마지막 순간 그의 몸은 문혁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쳐진 셈이었다.
1978년 겨울, 위뤄커의 모친은 끈질기게 아들의 명예회복을 요청했다. 1979년 11월 21일, 베이징시 인민법원은 위뤄커의 무죄를 선고하고, 그의 부모에 약간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대체 한 편의 평론이 무엇이기에 중공정부는 법의 이름으로 그를 죽여야만 했을까? 일개 견습공의 정연한 논리가 두려웠던 것일까? 지금도 중국 안팎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그를 “중국인권의 선구”라 칭송하고 있다. 독재정권은 제멋대로 법을 비틀어 위뤄커를 죽였지만, 좌익독재 특권세력의 자기모순을 꼬집은 그의 “출신론”은 “정신적 노예의 해방선언”이라 일컬어진다.
<“위대한 영수 마오주석께서 홍위병을 검열하시다!”/ 공공부문>
<28> 혁명은 영구 집권을 꿈꾼다...권력을 놓치면 처형되니까
<1794년 7월 파리 혁명광장에서 거행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의 처형식 / 공공부문>
혁명은 도박이다. 성공 확률은 낮지만, 승자는 모든 권력을 독식한다. 도박꾼은 일확천금을 노린다. 혁명가는 정권의 획득을 꿈꾼다. 모든 도박꾼이 혁명가는 아니지만, 모든 혁명가는 도박 근성이 있다. 집권한 혁명가는 권력을 담보로 더 대담한 도박을 한다. 20세기 모든 사회주의 혁명이 테러정치로 귀결된 까닭이다. 유토피아의 환상에 사회의 모든 재원과 인력을 걸었다가 다 날렸기 때문이다. 거듭되는 정책 실패로 정치 밑천을 탕진한 후에도 혁명가는 영구집권을 꿈꾼다. 권력을 놓치는 순간, 스스로 “자코뱅의 단두대”를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문화혁명, 권력 탈취하는 정치투쟁
사회학적으로 혁명은 단기간의 광범위한 급진적 변화를 의미한다. 경제체제의 급속한 전환, 사회구조의 과격한 변동, 정치권력의 파격적 교체 등은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경제적 퇴보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음에도 정치권력의 파격적 교체라는 점에선 가히 혁명적이었다. 당시의 표현을 빌면, 문혁은 탈권(脫權, 권력탈취)의 정치투쟁이었다.
1965년 11월 초부터 1966년 7월까지 마오쩌둥은 베이징 중앙권력의 탈취에 성공했다. 국가주석 류샤오치가 이끌던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는 권위를 잃었다. 덩샤오핑이 지휘하던 중앙서기처는 기능을 멈췄다. 대신 중앙문혁소조가 중앙정치를 움직였는데, 중앙정부 내에 급작스레 설립된 마오 개인의 사조직과 같았다.
<1966년 9월 15일 톈안먼 성루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선 중앙문혁소조의 성원들. 왼쪽부터 장춘차오, 창칭, 저우언라이, 야원위안, 마오쩌둥, 치번위, 왕리, 관펑, 무신(穆欣, 1920-2010) / 공공부문>
1940년대 이래 비밀정보 및 정찰 업무를 도맡아 온 캉성, 문예선동의 대모(代母) 장칭, 문혁 3대의 어용문필가 왕리, 관펑, 치번위, 상하이 주재 좌익평론가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등이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행정적 실무능력이나 분야별 전문성보다는 그저 권력투쟁과 선전선동에 능했던 이념과잉의 투사들이었다. 명나라 말기 황제를 업고 국정을 농단했던 동창(東廠)의 환관들과 닮았다 할까.
마오는 이들을 이목(耳目)으로 삼고 수족으로 부렸지만, 그의 실권은 총구에서 나왔다. 당시 마오는 군부를 온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어디로든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기에 그의 절대 권위가 유지됐다. 적어도 1966년 말까지 그는 스스로 군을 그렇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듯하다.
마오쩌둥 “전국의 전면적 계급투쟁을 위하여 건배!”
1966년 12월 26일 74세 생일을 맞아 마오는 중난하이(中南海)의 관저에 일곱 명을 초대했다. 모두 중앙문혁소조의 핵심멤버들이었다. 식사 때 마오가 말했다. “중국현대사를 보면, 혁명운동은 모두 학생운동에서 시작됐지만,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분자를 통해서만 성과를 냈어. 이건 객관적 법칙이야. 5.4운동도 그랬어. 문화혁명도 마찬가지야. 자, 전국의 전면적 계급투쟁을 위하여! 건배!” 아마도 이때 쯤 마오는 스스로의 중앙권력 장악을 확신했던 듯하다. 그러한 확신 위에서 마오는 무산계급을 향해 미증유의 “천하대란”을 일으키라 요구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전면 승리 만세!” 1966년 8월 초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을 작성한다. 마오의 대자보는 이후 문화혁명의 탈권 투쟁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됐다. 여기서 “사령부”란 중공정부 내부의 당권파들의 지휘본부를 가리킨다./ 공공부문>
1966년 8월부터 12월까지 넉 달 동안 베이징에서 시작된 문혁의 돌풍은 바야흐로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베이징의 중앙 일간지들은 날마다 문혁의 현황을 보도하며 혁명의 구호로 군중을 선동하고 있었다. 공적 매체를 통해 날마다 반복되는 문혁의 선동은 대(對)인민 총동원령의 효과를 발휘했다.
그해 8월부터 11월 말까지 마오쩌둥은 8차례에 걸쳐 매번 100만 이상, 심지어는 250만이 모였다는 홍위병 집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합 최대 1300만의 홍위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수도 베이징으로 모여들었다. 이른바 대천련(大串聯, 직렬연결)의 드라마였다.
전국의 홍위병들은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는 물론, 옌안(延安), 징강산(井岡山) 등 혁명의 성지를 순례하며 혁명정신을 벼렸는데······. 뇌막염 등 전염병이 돌기 시작해 11월 경 절정에 이르렀다. 항생제 부족 때문에 정부는 서유럽의 제약회사에서 대량의 치료제를 급매했지만, 이듬해 2월까지 무려 16만 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마오에게 그 정도 사태는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문혁의 전면적 확산에 쏠려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상하이가 문혁의 중심이 돼야 했고, 학생들 대신 노동자가 전면에 나설 때가 됐다.
<1966년 가을 쓰촨성에서 상경한 세 명의 “혁명 소장(小將)”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직접 마오쩌둥을 접견한 후 그 순간의 감동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모습/ 공공부문>
베이징 홍위병, 상하이를 흔들다!
교통의 요충지 상하이는 전국 최대의 공업도시이자 소비도시였다. 당연히 상하이는 홍위병의 집결지가 됐다. 1966년 12월 12일의 통계에 따르면, 석 달 동안 403만 5천 명 이상의 외지 혁명분자들이 상하이를 방문했다.
1966년 8월부터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세 차례에 걸쳐서 상하이로 “남하(南下)”했다. 그들은 이미 베이징에서 1772명이 학살당하는 홍팔월의 광기를 체험한 후였다. 마오의 말대로 혁명이란 “한 계급이 무력으로 다른 계급을 전복하는 폭동”이었다. 그들은 그 생생한 혁명의 체험을 상하이의 천진난만한 홍위병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1966년 8월 26일, 상하이 시장 차오디츄(曹荻秋, 1909-1976)는 홍팔월의 대학살에 대해 듣고 있었다. 중앙정부가 백주의 집단학살을 수수방관한 사실에 분개하면서 그는 중공 상하이 시위원회(이후 상하이 시위)의 간부들에게 베이징 홍위병에 대한 공세적 대응을 주문했다. 그의 예상대로 베이징 홍위병들은 곧 상하이 시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시민들 중 일부는 그런 베이징 홍위병에 적의를 표출했지만, 현지의 홍위병은 베이징의 홍위병에 동조하고 나섰다. 무엇보다 베이징 홍위병들은 상하이의 노동자들에게 문혁의 바통을 전했다. 문혁 10년사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1966년 말 상하이 조반파의 투쟁 현장을 묘사한 포스터. 홍위병의 깃발과 나란히 “상하이 공인 혁명조반대”와 “상하이 농민 혁명조반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결합돼서 전면적 “계급투쟁”으로 확산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https://www.shobserver.com/news/detail?id=688>;
인민의 권력 탈취, 마오를 위한 것이었을 뿐
상하이 “공인(工人, 노동자) 혁명조반 총사령부”(이하 공총사[工總司])가 대표적이었다. 공총사는 전국 최초로 생겨난 최대 규모의 노동자 조반파 조직이었다. 1966년 11월 6일 30명의 대표단이 모여 발족한 공총사는 상하이 국면(國棉) 17공장의 보건위생과 간사 왕홍원(王洪文, 1935-1992)의 리더십 아래서 상하이시 전체의 대규모 노동자 혁명조직으로 급성장했다. 왕홍원은 이후 중국공산당 서열 3위 중공부주석의 지위에 올라 맹위를 떨쳤다. 그는 “4인방”의 막내였다.
발족 직후 공총사는 합법성을 인정하라며 상하이 시위를 압박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11월 10일 공총사 소속의 수만 명 노동자들은 기차를 탈취해 베이징으로 북상하는 극적인 시위 장면을 연출한다. 두 시간 정도 북상하던 기차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 북부의 안팅(安亭)역에 멈춰 선다. 기차에서 내린 노동자들은 철로에 드러누워 시위를 이어간다. 상하이 철로 교통이 마비되자 중앙문혁소조는 장춘차오를 급파해 노동자 대표와 담판을 벌인다. 담판의 결과는 공총사의 합법화였다.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상하이로 돌아간 공총사의 노동자들은 이제 본격적인 권력탈취의 투쟁에 나선다. 마오쩌둥의 지지를 확신한 노동자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1967년 1월 초 공총사는 상하이의 주요 언론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1967년 1월 6일, 상하이 시위를 점령한 후, 공총사는 “상하이 인민공사”의 성립을 선언한다. 인민공사란 코뮌(commune)을 의미한다. 인민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도시의 권력을 탈취했다는 점에서 "상하이 인민공사'의 성립은 1871년 파리코뮌을 연상시켰다. 물론 둘 사이엔 결정적 차이점이 있었다. 파리코뮌과는 달리 상하이 인민공사는 절대 권력자 마오의 지지를 받는, 마오를 위한, 마오의 호위조직이었다. <계속>
<1967년 1월 공총사는 상하이 시장, 부시장을 모두 축출하고 상하이 시위 각급 기관의 권력을 탈취 한다. 2월 5일, 공총사는 “상하이 인민공사”라는 이름으로 상하이의 신정권을 창출하지만, 2월 23일 마오쩌둥의 제안에 따라 “상하이시 혁명위원회”로 개명한다. 이후 중국의 각지에선 조반파들이 다양한 명칭의 임시정부를 세우게 된다. 위의 사진은 1967년 2월 상하이의 혁명군중이 시정부를 에워싸고 상하이인민공사의 성립을 선포하는 장면/ 공공부문>
10.31
<29>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조직’에서 나온다...혁명을 빼앗다
<“혁명위원회가 좋다!” 1967년 2월 마오쩌둥의 발언. 1958년 마오쩌둥은 “인민공사가 좋다!”는 한 마디로 전국에 인민공사를 설치했다. 상하이 1월 폭풍 이후 마오쩌둥은 “인민공사”를 거부하고 대신 “혁명위원회”를 설치한다./ 공공부문>
민주공화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주권의 원칙을 밝힌 보편명제다. “생명의 근원은 물”이라는 말처럼 지당하지만, 공허한 언명이다. 현실정치에서 권력은 ‘조직’에서 나온다. 국가는 관료조직과 군경조직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반면 조직되지 못한 군중은 무기력하다. 근대의 입헌민주주의 이론가들이 ‘결사의 자유’를 중시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빼앗기면 개개인은 국가권력에 예속되고 만다. 결국 특정세력의 인신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다.
단체행동권 없는 중국의 노동자들
지금도 중국에선 크고 작은 노동분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결사의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현재 중국에선 “중화 전국 총공회(總工會)”만이 유일무이한 전국단위의 합법적 결사체다. 성(省), 시, 현, 마을 단위까지 위원회가 설치된 전국에 걸친 피라미드 구조의 조직인데, 이 역시 중국공산당에 종속돼 있다. 게다가 1982년 헌법 개정 이후 중국의 노동자들은 단체행동권까지 박탈당한 상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기본권이 제한되고 있는 아이러니다.
1966년 11월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사상 최초로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대규모 결사체를 만들었다. 지난 회에 이미 살펴봤던 ‘상하이 공인 혁명조반 총사령부(공총사)’가 그것이다. 이로써 문혁의 주도권은 홍위병에서 노동자 계급으로 넘어갔는데, 조반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실제로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중국공산당 자체가 비밀결사로 출발했다.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 조직의 파괴력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중국에선 작업장을 벗어나는 노동자의 결사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1966년 8월 공포된 중공중앙 문화혁명 “16조”의 제14조는 “혁명을 견지하고 생산을 촉진하라!(抓革命 促生産)”를 명시했다. 문화혁명과 경제성장의 병진정책인데, 결국 노동자와 농민을 작업장에 묶어두는 효과를 발휘했다. 문혁의 광풍이 전국으로 확산됐지만, 노동자들이 쉽게 혁명에 동참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66년 가을 상하이에 도착한 베이징 홍위병들이 노동자의 정치화를 촉발했다. 베이징 홍위병들을 통해서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문혁의 기본 정신이 탈권(奪權, 권력의 탈취)이며, 그 최종 목표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등 당권파의 축출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규모 결사체의 조직은 위험천만이었다.
<“무산계급 조반파여 연합하라! 혁명조반 정신 만세!” 노동자들의 본격적인 혁명투쟁을 촉구하는 포스터/ 공공부분>
마오쩌둥, 노동자들을 문혁의 중심으로
상하이 공총사 지휘부는 우선 헌법에 명시된 ‘결사의 자유’를 검토했다. 총공사 주비(籌備) 위원회의 문건엔 헌법을 들춰 봤던 기록까지 보인다. 헌법과는 달리 중공정부는 결사의 자유를 허용한 전례가 없었다. 마오쩌둥은 노동자의 행동을 촉구하는 듯했지만, 확신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1966년 11월 9일 조직의 결성을 선포한 직후, 공총사는 제일 먼저 시정부에 합법성을 인정하라 요구했다. 상하이 시장이 완강히 거부하자 바로 다음 날 공총사는 기차를 탈취해 베이징을 향했고, 20분 후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기차가 멈춰서자 안팅역(安定驛)의 철로에 드러누워 교통방해의 시위를 이어갔던 것이다.
11월 14일, 마오쩌둥은 1954년 헌법에 명시된 “결사의 자유”를 들어서 상하이 공총사의 합법성을 인정했다. 최고영도자가 녹슨 칼집 속의 보검의 빼서 근로대중에 전달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마오는 1966년 7월 “조반유리”라는 한 마디로 공작조에 저항하는 홍위병 집단을 문혁의 주체로 일으켜 세웠다. 이제 그는 상하이 공총사를 합법화함으로써 그는 노동자들을 문혁의 중심무대에 올렸다. 반면 상하이 시위원회는 순식간에 반동조직의 낙인을 받고 파멸의 위기에 직면했다.
상하이 1월 폭풍, 권력 탈취의 드라마
이후 50여일 간 상하이 공총사는 시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대담한 탈권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1967년 1월 4-5일 양일에 거쳐 노동자들은 상하이 주요언론사를 장악했다. 1월 6일엔 상하이 시장과 부시장을 위시한 상하이 시위원회 수백 명의 간부들을 불러내서 단죄하는 가혹한 인민재판을 이어갔다. 혁명의 광풍을 타고 상하이엔 32개의 조반파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수천 명의 간부들, 지식인들, 전문가들을 끌고 나와 도시 곳곳으로 끌고 다니는 가혹한 비투(批鬪)를 이어갔다.
<“열렬히 환영!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중앙문혁소조에서 상해시의 각 혁명조반 단체에 축전을 보내왔다!” 1월 12일 상하이 인민광장의 집회/ 공공부문>
인민일보를 위시한 중앙의 언론은 일제히 상하이의 탈권을 칭송했다. 1월 11일엔 중공중앙위원회,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중앙문혁소조가 상하이 공총사를 위시한 32개의 혁명조직에 축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수십만이 운집한 상하이 인민광장엔 시장과 부시장을 끌려 나와 집단모욕을 당했다. 시민들은 트럭 뒤에 무릎을 꿇린 채로 이리저리 실려 다니는 시장과 부시장의 비참한 몰골을 목도했다.
1월 15일부터 사흘 간, 상하이 시정부의 49개 기관의 권력은 동시다발적으로 탈취됐다. 상하이 전역 건물벽마다 “탈권!”의 구호가 나붙었다. 마침내 2월 5일 노동자가 직접 세운 혁명정부 “상하이 인민공사”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른바 “상하이 1월 폭풍(혹은 1월 혁명)”의 스펙터클이었다.
인민공사를 혁명위원회로 바꿔 군이 장악
중공의 기관지들은 한 목소리로 중국에 파리코뮌이 부활했다고 칭송했다. 장춘차오는 "상하이 인민공사'의 성립이 파리코뮌을 넘어 10월 혁명에 비견되는 사건이라고까지 칭송했다. 진정 상하이의 “1월 폭풍”은 문혁의 향방을 뒤바꾸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곧바로 혁명의 진동이 베이징, 헤룽장성, 산둥성, 구이저우성, 산시성 등지로 확산됐다.
<1967년 2월 23일, “상하이 인민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상하이시 혁명위원회”로 개칭된다./ 공공부문>
이제 문혁은 노동자의 궐기에 의한 지방권력의 교체를 의미했다. 코뮌의 번역어인 “인민공사”라는 낱말 속에는 노동자 계급의 자발성, 자율성 및 독립성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1958년 마오는 “대약진 총노선”의 기본단위로 노동령의 총동원을 위해 “인민공사”를 설치한 바 있었다. 대약진의 처참한 실패 때문이었을까? “상하이 인민공사 출범” 직후부터 중공의 기관지들은 “인민공사” 대신 “혁명위원회”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67년 2월 12일 마오는 장춘차오를 불러서 “상하이 인민공사”에서 “인민공사”의 명칭을 버리는 게 좋다고 말했다. 2월 20일 구이저우성에서 또 한 번 탈권이 일어나자 마오는 “혁명위원회”란 명칭을 제안했다. 마오가 인민공사라는 단어 자체를 꺼렸음이 확실하다.
이후 1968년 9월까지 전국의 각성 단위에 “혁명위원회”가 들어섰는데, “인민공사”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조직이었다. 혁명위원회는 인민해방군, 혁명 간부 및 혁명 군중의 “삼결합(三結合)”이었다. 주도권은 물론 인민해방군에 있었다. 결사의 자유를 외치며 일어선 노동자들이 세운 혁명정부가 지방의 군부에 하이재킹 당한 형국이었다. 그 과정은 전혀 순탄치 않았다. 1967년 군부의 개입은 대규모의 무장투쟁과 대량학살의 악순환을 몰고 왔다. <계속>
11.07
<30> 한 사람이 영도하는 당의 군대, 문화혁명의 주도권을 잡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마오주석께서 친히 창건하시고, 영도하시고, 지휘하시는 인민의 군대다!”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공공부문>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국가는 배타적 영토 내에서 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모든 구성원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조직이다. 공권력의 합법적 행사가 국가의 근본 책무이며, 존립이유다. 공권력의 양대(兩大) 축은 군대와 경찰이다. 군대의 명령계통이 무너지고 경찰의 지휘체계가 흔들릴 때, 정부는 사실상 작동을 멈춘다. 국가의 기초가 이미 허물어진 상태다.
그러한 극한의 상황이 닥치면, 개개인은 자위(自衛)의 무장을 한다. 사회 전역에선 독버섯처럼 무장집단들이 돋아난다. 역사에서 종종 보는 “군웅할거”의 대혼란은 중앙정부의 체계적 붕괴에 따른 지방 세력의 군사화를 이른다. 지난 20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증명하듯, 지방의 군사화는 내전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1978년 12월 13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폭로된 자료에 따르면, 문혁 10년 간 무려 4300여 건의 대규모 “무장투쟁”이 발생해서 12만3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공산당의 전일적인 일당독재 하에서 과연 어떻게 그토록 참혹한 무정부의 대혼란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중국 인민해방군은 마오쩌둥 사상의 대학교,” 문혁 당시 군대의 주도권을 보여주는 포스터/ 공공부문>
“인민해방군, 혁명간부, 혁명군중의 三結合”
1966년 12월 말 중앙문혁소조 장춘차오는 상하이 공총사의 영수 왕홍원(王洪文, 1935-1992)에 본격적인 탈권의 투쟁을 개시하라 지시했다. 상하이에서 탈권의 투쟁이 전개되자 즉시 상하이의 지역 군대가 공총사를 엄호했다. 상하이 1월 폭풍은 군·당·민의 합작품이었다. 그 결과로 등장한 혁명위원회는 인민해방군, 혁명간부 및 혁명군중의 삼결합(三結合)을 표방했다. 군대가 혁명군중의 투쟁에 개입해서 문혁의 주체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1967년 1월 상하이의 “탈권”을 지켜보던 전국 각지의 노동자·농민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조반(造反) 투쟁에 나섰다. 1967년 1월 31일 헤이룽장(黑龍江)성에 첫 번 째 “혁명위원회”가 들어섰다.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동북지역의 새로운 새벽이 밝았다”고 격찬했다. 곧이어 전국 각지에서 성(省) 정부의 권력을 허무는 권력 탈취의 투쟁이 벌어졌는데·······. 1967년 상반기까지 탈권에 성공한 지역은 고작 헤이룽장, 산둥, 괴이저우, 산시(山西), 베이징 정도에 그쳤다. 1월 18일 베이징에선 세 개의 상이한 조반파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탈권(奪權)을 시도했지만, 정부의 승인은 석 달 후(4월 20일)에야 떨어졌다. 1968년 말엽에야 전국에 혁명위원회가 들어설 수 있었다.
<“베이징 혁명위원회 탄생 열렬히 환영!” / 공공부문>
군대 내 하극상 조짐...무력 진압
당시 마오쩌둥과 중공중앙은 군중조직에 세운 혁명정부를 가볍게 승인할 수 없었다. 첫째, 군중조직의 정체성이 문제가 됐다.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는 군중조직들은 서로 극심한 이념대립과 노선차이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 조직 하나만을 선택해 탈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란 쉽지 않았다.
둘째, 인민해방군 고위급 장성들은 반발이 격심했다. 혁명군중은 중공중앙의 류샤오치, 덩샤오핑에서 말단 지방정부의 관료집단 모두를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수정주의 반혁명세력이라 규탄한 상황이었다. 군부의 장성들 역시 고위 관료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도 불시에 조반파의 탈권 투쟁이 닥칠 수 있었다. 이미 군대 내부로 번져 군부 지휘체계에서 하극상의 조짐이 가사화된 상태였다. 규율과 질서를 생명으로 삼는 군대의 입장에선 방치할 수 없는 혼란이었다.
1967년 2월 11-16일 엿새 동안 인민해방군의 최고위 원수들은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중앙문혁소조를 비판한다. 아울러 치안과 질서를 파괴하는 조반파를 군이 나서서 강력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발언을 쏟아낸다. “2월 역류(逆流)”라 불리는 원수들의 반항이었다. 곧 이어 군에 의한 조반파에 대한 무력 진압(“2월 진반”)이 시작되어 그해 여름까지 지속됐다. 군이 문혁의 제1 주체가 되면서 발생한 필연적인 사태였다.
<“공업에선 다칭 유전(油田)을 배우고, 농업에선 다자이 마을을 배우고, 전국은 인민해방군을 배운다!” 군대가 문혁의 지도부로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포스터/ 공공부문>
혁명위원회 80% 이상 군인이 맡아
1967년 2월에서 1969년 말까지 전국의 각 지역에 280만의 군대 병력이 파견돼서 이른바 “삼지양군(三支兩軍)”의 임무를 수행했다. 여기서 삼지란 군대가 좌파군중, 노동자, 농민의 세 집단을 지원(支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양군이란 군관(軍管, 군사적 관제) 및 군훈(軍訓, 군대식 훈련)을 의미한다.
전국의 9개 성, 25개 대도시, 수십 개의 전구(專區), 수백 개의 현(縣)에서 전면적인 군대의 관제가 실행됐다. 현급 이상 혁명위원회의 80% 이상의 주임직을 군인들이 맡았다. 윈난성과 후베이성의 경우 그 비율이 97%에 달했다. 철도부, 교통부, 우편·전신부, 주요 신문·방송 등의 분야에서도 군정체제가 실시됐다. 문화혁명에 군대가 개입하면서 중국의 전 지역엔 혁명기 비상체제의 군부독재가 확립된 셈이었다.
대규모의 병력이 지방에 투입돼서 군이 직접 문혁을 이끌게 된 후, 1967년 여름 중국 곳곳에선 대규모의 무장투쟁이 발생했다. 군중집단, 지방정부, 군부대가 복잡하게 뒤엉키며 맞부딪힌 결과였다. 그 중 대표적 세 사건을 잠시 들춰 보면·······.
후난성 다오현(道縣)에선 1967년 8월 13일에서 10월 17일까지 66일 간 4193명이 도살당하고 326명이 자살했다. 인근 지역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는 9000명을 초과했다. 1967년 여름 후베이성 우한에선 좌·우 두 패로 나뉜 대규모의 무장조직이 내전에 돌입하여 무려 18만4000명의 사상자를 낳은 우한사건(7·20 사건)이 발생한다. 1968년 7월부터 8월까지 1개월 간 광시성에선 무려 8만4000여명의 "계급적인(階級敵人)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한다. 이 사건들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중국공산당의 군사적 기원을 돌아보자.
<1968년 2월 5일 후베이성 혁명위원회 성립/ 공공부문>
인민해방군, 중국공산당이 창건한 당의 군대
다당제의 민주국가에서 군대는 정치적 중립을 생명으로 하는 국방군이다. 반면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이 “창건하고, 영도하고, 지휘하는” 당군(黨軍)이다. 그 역사를 추적해 보면, 20세기 초반 군벌시대(1916-1928년)까지 소급된다. 군벌시기 12년 간 중국 전역에선 무려 1300여 명의 군벌들이 140번 이상의 대규모 성급(省級) 전쟁을 벌였다. 1921년 창당된 중국공산당 역시 자체 무장을 통한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출발했다.
이후 중일전쟁(1937-1945)과 국공내전(1946-1949)을 거치면서 중국공산당은 군사적 점령을 통해 “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 장기간 전쟁의 참화 속에 있었던 중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딱히 공산당의 이념에 동조했기보단, 모두가 중공정부의 군사력 앞에 항복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공포를 피해 ‘리바이어던’의 지배 속에 들어간 원초적 사회계약이었다고 할까.
<1949년 5월 27일 상하이에서 인민해방군을 환영하는 인파/ 공공부문>
이후 문혁 발발 직전까지 17년의 세월 동안, 중국에서 단 한 번의 대규모 무장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최대 4500만이 아사하는 대기근(1958-1961) 시기에도 중공정부의 전일적 지배구조는 흔들림 없이 유지됐다. 마침내 1964년 핵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중공정부는 다시금 정권의 정통성을 입증했다. 가장 강한 조직이 통치의 정당성을 갖는 “군사독재”의 적나라한 면모다.
요컨대 중국공산당은 막강한 군사력을 지렛대 삼아 정치권력을 독점한 철저한 관·군 합일의 조직이다.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직후, 마오쩌둥이 부리나케 혁명위원회를 설립해 인민해방군에 문화혁명의 주도권을 쥐게 한 소이가 거기에 있다. 1938년 11월 6일, 마오쩌둥은 말한 바 있다.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건 우리의 원칙이다. 총이 당을 지휘하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이후 당의 대표로서 총을 지휘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1971년 9월 13일 린뱌오를 숙청해야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