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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1] <1회> “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 전 인민이 난투극을 벌이다 - <10회> 4500만 굶어죽게 한 폭정에도 어떻게 권력 유지했나

상림은내고향 2020. 6. 26. 17:14

[송재윤의 슬픈 중국1] - 문화혁명 이야기  조선일보

"한국 권력자들이여, 변방의 중국몽에서 깨어나라"

'슬픈 중국' 출간한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집단이 개인에 우선, 공산당은 무오류' 앞세워
수천만명 죽인 중국정부의 인권유린 방관 안돼
현 정부의 반미친중 흐름의 뿌리는 NL자주파에
홍콩 시위가 중국 체제 변화의 신호탄 될 것

신간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는 중국의 역사와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내년까지 제2권 ‘문화대반란 1964~1976’, 제3권 ‘대륙의 자유인들 1976~현재’ 등 3부작으로 출간할 계획인 저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공산당 일당독재로 유지되고 있는 중국은 한마디로 ‘슬픈 중국’이라고 했다. 이메일로 질문하고 답변을 받았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슬픈 중국'을 쓴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

 

 

―책 제목이 ‘슬픈 중국’이다.
“오늘날 중국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국가다. 1949년 건국 이래 1976년 마오쩌둥 사망 때까지 중국의 인민들은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에 보장된 인간의 기본권을 거의 모두 박탈당한 채 비참한 극빈의 늪에서 허우적댔다. 집산화가 절정에 이르렀던 대약진운동 시기 중국의 인민은 대규모 집단농장에서 국가의 농노로 전락한 채 인류사 최악의 기근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3000만에서 4500만에 이르는 인민이 굶어죽고, 맞아죽고,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숨졌다.

이어지는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 중국인들은 다시 또 ‘10년의 대동란(大動亂)’에 내몰렸다. 1978년 12월 13일 중공중앙 부주석 예잰잉(葉劍英·1897~1986)의 담화에 따르면, 문혁 기간 10년 동안 무려 전체 인구의 9분의 1에 달하는 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많게는 23만이 4300 여 건의 큰 규모 무장투쟁에서 희생됐고, 억울하게 죽임 당한 숫자는 수백만을 넘어 심지어는 2000만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정확한 피해의 규모는 영원히 밝힐 수 없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상상을 절하는 극단의 역사였다.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중국은 30~40년에 걸쳐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이어갔지만, 정치체제의 기본골격은 바뀌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일당독재의 권위주의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 헌법 전문과 총강령 제1조는 중국이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라 명시하고 있다. 중국의 인민들은 여전히 인간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한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표현의 자유는 극히 제한돼 있다. 사상, 종교, 양심의 자유도 보장되지 못한다. 거주 이전의 자유, 출산, 양육 등 사생활의 자유도 제한된다. 인구 14억의 ‘비대한 대륙 국가’인데 여전히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 중국의 현대사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슬픈 중국’이 아닐까.”

―앞 부분에서 홍콩 시위 이야기를 썼다. 홍콩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 중국의 미래이기도 하고,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 중국의 문제가 곧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홍콩의 미래에 관한 단기 전망은 어두울 수 있겠지만, 장기 전망은 매우 밝다고 생각한다. 홍콩 사람들은 자유, 민주, 인권, 법치 등 인류 보편의 가치를 체득하고 날마다 영어로 전 세계의 정보를 흡수하는 세계시민들이다. 그들은 베이징의 중공정부가 원하는 중국인들이 될 수가 없다. 2019년 홍콩 시민들은 ‘반송중(反送中)’의 구호를 들고 나왔다. 반송중의 영어 번역은 ‘No extradition to China’이다.

 

“하늘이 중국공산당을 멸망시킨다!(천멸중공(天滅中共)” 2019년 11월 13일 홍콩중문대학의 시위에서 등장한 구호. Studio Incendio 사진. '슬픈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24쪽.

 

 

홍콩 시민들이 중국에 범죄인을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 셈이다. 일국양제에 의하면 홍콩은 중국의 일부이며, 홍콩시민들 역시 중국인들일 테지만, 홍콩시민들은 스스로를 홍콩어(Hong Kongers)라고 자칭한다. 홍콩 중문대학의 시위에서는 ‘천멸중공(天滅中共)’ 곧 ‘하늘이 중국공산당을 멸망시킨다!’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이 책의 제1장에 그 장면의 사진이 증거로 포함돼 있다.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과의 교신을 통해서 어렵게 입수한 사진이다.

2019년 홍콩의 반공산당 자유주의 운동은 곧바로 타이완의 선거혁명으로 이어졌음에 주목해야 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해외 중국계의 인구는 5000만에 달한다. 홍콩, 타이완, 해외 중국계 인구로 연결되는 자유의 벨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라 볼 수도 있다. 2000년 존속되던 황제 지배체제를 종식한 중국 공화혁명의 아버지 쑨원은 홍콩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했다. 1895년 홍콩의 흥중회(興中會)가 일으킨 혁명의 마파람이 결국 15~16년에 걸쳐 청조를 무너뜨리는 민국혁명으로 이어졌다. 2019년 홍콩의 자유화 운동의 여진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전 세계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친중 이데올로그들은 흔히 중국공산당의 능력주의(meritocracy), 시진핑의 탁월한 지도력, 공산당에 대한 중국인민의 압도적 지지 등을 강조하지만, 중국체제에 관한 그 모든 찬사는 중공정부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중국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살펴보라. 빈부격차, 지역갈등, 도농갈등, 낙후된 의료시스템, 관료주의, 부패구조 등등 중국은 흡사 큰 화물을 싣고 육중하게 굴러가는 저거너트(Juggernaut)를 연상시킨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다시금 증명되었다. 중국의 문제는 더는 중국만의 문제일 수가 없다. 세계는 더 이상 중국공산당의 전체주의적 인권유린 및 정치범죄를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다. 중국은 변해야만 존속할 수 있다. 홍콩의 시위는 그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

―홍콩 이후엔 대만, 대만 이후엔 한국이 중국 지배에 들어갈 것이란 우려도 있다. 시진핑 주석은 한국이 원래 중국 것이었다고 한 적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잘 돌아보자. 타이완과 홍콩은 모두 기민하게 중국발(發) 입국을 막았다. 그 결과 2020년 4월 1일 현재 타이완의 확진자는 329명, 홍콩은 714명으로 통제되고 있다. 일국양제 하에서 홍콩은 중국의 일부이다. 타이완의 제1교역국은 바로 중국이다. 대중국 수출이 전체 수출의 27.9%에 달한다. 그럼에도 타이완은 기민하게 중국발 입국을 막았다. 타이완은 또한 홍콩과 긴밀한 경제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홍콩은 타이완의 제3교역 대상이다. 결국 타이완과 홍콩의 시스템이 연동돼 있음을 보여준다. 타이완과 홍콩 모두 중국 현실에 빠삭하기 때문에 기민한 봉쇄(containment) 전략으로 방역(防疫)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과연 중화인민공화국이 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타이완과 홍콩을 흡수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듯하다. 2019년 홍콩의 시위를 보라! 날마다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지만, 중공정부는 1989년처럼 무력진압을 시도할 생각조차 못한 듯하다. 이미 중국은 전 세계와 무역을 하는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덩치를 키웠다.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수 없다. 세계가 실시간으로 홍콩의 상황을 감시하는데, 베이징이 어떻게 1989년처럼 시민들에게 탱크부대를 보낼 수 있겠는가?

홍콩, 타이완, 한국, 일본, 베트남, 몽고 등 중국을 에워싼 모든 국가들은 강력한 ‘자유’의 연대를 결성해야 한다. 중국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s)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인류를 위한 보편 이념을 창출하지 못한다. 기껏 ‘부강(富强)’을 제1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아편전쟁 이후 자강운동 당시의 모토 그대로이다. 100년 국치를 극복하고 부강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일념이다.

과거 중화제국은 동아시아에 통용되는 세계적 가치를 창출했다. 변방의 지식인들이 중화제국의 가치에 매료됐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오늘날의 중국은 인류를 감동시키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중국 정부는 자유주의가 서구의 가치이므로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면 ‘문화침략’이라 맞선다. 마르크스-레닌이즘 역시 서구에서 발원했으며, 인권은 서구의 가치가 아니라 보편가치이다.

오늘날 중국은 열린 대륙이 아니라 닫힌 섬과 같다. 인구는 많고 국토는 방대하지만, 이념적으로 너무나 왜소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존속하기 위해선 앞으로 보다 민주적이고(more democratic), 보다 자유롭고(more liberal), 보다 헌정적이고(more constitutional), 보다 열린(more open) 체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 모든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에 투명한 정보의 개방과 국제기준의 확립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은 내전 승리를 위해 일본에 정보를 넘기고 대가를 받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런 일을 중국인들은 알지 못하나.
“이 책의 3, 4장에서는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군의 만행이 집약된 ‘창춘 홀로코스트’를 다룬다. 창춘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중에는 당시 7세의 소녀 엔도 호마레(遠藤譽)가 있었다. 이 소녀는 이후 중국 정치를 연구하는 학자로 성장해 최근까지도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엔도 선생은 창춘 홀로코스트의 체험을 세밀하게 기록한 넌픽션을 발표했고, 이어서 중일전쟁 당시 중국공산당의 친일행각을 고발하는 문제작 ‘마오쩌둥: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를 발표했다. 한국어 번역본도 나와 있다(‘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엔도 선생의 고발에 의하면, 국공내전 당시 마오쩌둥은 일본과 공모한 친일분자다. 창춘 홀로코스트의 생존자가 역경을 딛고 일어나 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중국공산당에 무서운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 정부는 대외적으로 200만의 인원을 고용해서 인터넷을 감시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의 인터넷은 실시간으로 감시를 받는다. 중국의 언론통제, 소셜미디어 감시는 상상을 초월한다. 여러 사람이 가입한 소셜미디어의 단톡방 메시지에서 문제가 되는 한 두 텍스트를 핀셋으로 집듯 잡아내기도 한다. 2014년 이래 중국 정부는 개개인의 모든 신상정보를 취합해 등급을 매기는 사회신용시스템까지 구축해가고 있다. 때문에 인터넷 공간에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거나 ‘불온’ 메시지를 주고받기 쉽지 않다. 시진핑 집권 이후로 더더욱 언론통제가 강화되고 표현의 자유가 위축됐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여성의 신체 통제에 대해 썼는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나.
“1자녀 정책(One Child Policy)이 대표적이다. 책의 2장에 다루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아이를 낳기 전에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혼외임신, 특히 미혼임신일 경우엔 낙태가 강요된다. 모든 가임기 중국 여성의 신체는 국가의 통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당시 중공 정부는 1자녀 정책을 도입한 이래 3억 3800만 명의 인구가 덜 태어났다며 성과를 자랑했다. 또 중공 정부는 1979년 이래 여성의 몸속에 강압적으로 자궁내 피임기구(IUD)를 삽입했는데, 2015년 이후에는 그 기구를 빼라고 강요하고 있다. 인간의 신체에 가해지는 무시무시한 오웰적 전체주의 통제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코로나 사태가 중국발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 통계상 중국에서 코로나는 잠잠해진 것으로 돼 있는데 이 역시 조작으로 보나.
“중국 정부로선 코로나 바이러스의 외부 유입설을 주장해야만 대내적으로 정부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통계를 보면, 중국 측 주장을 진실로 믿기는 어렵다. 3월 31일 현재 코로나 발원지 중국의 확진자는 8만여 명인데, 미국은 이미 20만에 육박하고 있다. 홍콩대학 생물통계학 전문가 가오번언(高本恩) 교수의 추산에 의하면, 중국 내 확진자의 실수(實數)는 4월 1일 현재 이미 23만을 초월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해외 전문가들 중에 중국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역사를 돌아보면, 통계조작쯤은 경범죄에 속한다. 공산 유토피아 건설을 목적으로 추진됐던 대약진운동이 수천만 인명을 앗아가는 대기근을 초래한 이유도 바로 정부기관의 허위보고, 통계조작 및 폭력구조에 기인했다. 중국의 반체제 아티스트 왕펑(王鵬, 1964~)의 주장대로 ‘집단은 개인에 우선하며, 공산당은 무오류’라는 두 가지 전제가 중국 정부를 지배하는 ‘인민민주독재’의 실상이다.

물론 중국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통제에 큰 성과를 발휘했을 수도 있다. 전체주의적 격리 및 통제의 방법으로 전 인민을 감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며칠 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뉴욕, 뉴저지 일대의 전면적 출입금지(lock-down)를 언급한 직후 뉴욕주의 주지사 쿠오모(Cuomo)는 불법(illegal)이라 맞서는 장면을 보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비상의 위기관리에서 입헌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가 중국식 인민민주독재보다 비효율적일 수 있다. 입헌민주주의에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중국식 인민민주독재가 입헌민주주의보다 우월한 체제라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이 중국 지배권에 속하면 안 되는 이유는? 그리고 어떻게 해야 중국 지배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책은 중국 건국 비사(祕史)에서 대기근까지 약 15년의 세월을 중국 헌법 총강 제1항에 명시된 ‘인민민주독재’라는 그릇된 정치이념이 빗어낸 비극이라 해석하고 있다. ‘인민민주독재’는 1949년 6월 마오쩌둥이 인민일보에 발표한 논설을 통해 정식화한 중국 정부의 통치 원칙이다. 마오쩌둥은 인민민주독재는 “반동 세력의 발언권은 박탈하고, 인민만이 발언권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중국공산당은 인간을 ‘인민’과 ‘적인’으로 나눈다. 인류를 인민(people)과 “비인민”(non-people)으로 양분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20세기 역사를 돌아보면, 바로 그 인민의 이름을 특정계급, 혹은 특정 종족이 선점하고 사칭할 때, ‘비인민’에 대규모 인종청소, 인권유린 및 정치범죄가 자행되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이념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정사는 자유, 인권, 법치의 확장 과정이었다. 선거를 통해 수차례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제도의 정착 과정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지식계 및 정치계에 널리 퍼져 있는 친중·사대주의는 중국현대사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반미·친중’의 사상적 근저에는 1980년대 NL 자주파의 ‘민족해방’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지는 않나? 당시에는 NL자주파는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쳤다. 그들은 북한과 손 잡고 ‘미제를 몰아내자’고 주장했었다. 그들에게 중국은 민족해방운동의 종주국과도 같았다. 그들로서는 중국과 한국이 ‘운명공동체’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더 깊이 보면 일본제국의 범 아시아적황색인종주의에까지 소급될 수도 있다. 당시 일제는 ‘귀축미영(鬼畜美英)’이란 구호로 미국과 영국을 악마화했다.

수학과 과학은 인류의 공동유산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와 인권은 서구의 가치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가치다. 한국현대사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수렴해 가는 과정이었다. 한국현대사의 성공사례가 중국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 역(逆)은 역사의 퇴보이며, 문명의 쇠퇴이다.”

―책은 3부작으로 예정했다. 책을 관통하는 궁극적 메시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제2권 ‘문화대반란 1964-1976’을 집필 중에 있다. 가능하면 올해 안에 마치고, 내년에는 제3권 ‘대륙의 자유인들 1976- 현재’를 쓸 계획인데, 과연 끝낼 수 있을지 두렵다. ‘문화대반란’은 오늘날 중국의 정치문화를 만든 10년의 대참사를 조명한다. ‘대륙의 자유인들’은 마오쩌둥 사망 이후 전개된 중국 민주화 운동의 도도한 흐름을 조망할 예정이다.

궁극적 메시지를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아마도… 한국인들이여, ‘변방의 중국몽’에서 깨어나 ‘세계시민의 눈’으로 현대 중국의 슬픈 역사를 직시하자! 보다 자유로운, 보다 민주적인, 보다 헌정적인, 보다 열린 미래의 중국을 위해 ‘대륙의 자유인들’과 더불어 세계시민의 자유 연대를 이루자!”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2020.04.17  "문화혁명은 10년간의 커다란 겁탈"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광기의 시대'
481만명 반혁명분자 낙인 찍어, 200만명 사망
"1억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 입었다"
문화혁명 주도한 마오쩌둥 지금도 신격화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가 쓰는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를 매주 연재합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송재윤 교수는 3부작으로 구상 중인 책의 1권인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를 최근 출간했습니다. 이번에 쓰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중국을 바라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1회> “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 전 인민이 난투극을 벌이다

◇1966년부터 10년 간 “광기의 시대”

 

2년 전 초가을이었다. 필자가 가르치는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중국인 유학생 황타오(黃燾·가명)가 메일을 보내왔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했다는 그는 학부 4학년생 ‘문화혁명’ 수업에 참가하고 싶다며 정중히 허락을 구해왔다. 메일 말미에 자신이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1968년 4월 중국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의 한 공장 창고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여러 차례 난창대학을 방문한 경험이 있기에 나는 황타오의 이력에 더 큰 호기심이 일었다. 어려서 문화혁명을 직접 경험한 산 증인을 학부 수업에 매번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교육적 효과가 있겠는가? 흔쾌히 그의 청강을 허락했다.

 
며칠 후 설레는 마음으로 첫 수업에 들어갔는데, 황타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열 명 정도의 전공생들만 들어오는 소규모 세미나 수업이었다. 여느 때처럼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세미나실 타원형 테이블 앞에 둘러 앉아 좀 어색한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남녀비율도 엇비슷했고, 흑, 백, 황, 갈의 인종비율도 적절했다. 지난 10년 간 매해 문화혁명 세미나를 개설해 왔지만, 첫 시간엔 언제나 가슴이 뛰고 손에는 땀이 쥐어진다. 커튼을 치고 프로젝트를 켜고 준비한 슬라이드를 흰색 스크린 위에 띄웠다.

 

송재윤

 

“China’s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반짝이는 학생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중국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 문화혁명, 문혁. 1966년 5월 16일 중공정부의 공식적인 선언과 함께 시작된 문혁은 1976년 10월 4일 4인방의 체포로 막을 내렸다. 서구의 학자들은 문혁을 “마오쩌둥 최후의 혁명”이라 부른다. 극단의 시대, 광기의 역사, 상실의 세대, 상흔(傷痕) 문학….

 

◇중국인들 “10년 간의 커다란 겁탈”

 

그때 문이 빼곡히 열리더니 스포츠형 짧은 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청바지 차림의 중년 사내가 고개를 디밀었다. 검게 탄 피부, 근육질의 다부진 몸집, 무신경한 옷차림인데, 안경 너머 눈빛만은 형형했다. 얼핏 보면 짐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장시간 지적 연마에 힘써온 학인(學人)의 얼굴이었다. 학생들에게 황타오의 “특이한” 이력을 소개했다. 학생들은 큰 박수로 그를 환영했다.

학생들의 박수에 당황한 듯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 그에게 물었다. “중국 사람들은 문화혁명을 보통 뭐라고 부르지요? 중국어로 얘기해 주세요.” 황타오는 씩씩하게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십년호겁(浩劫)!”

 

“China’s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반짝이는 학생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중국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 문화혁명, 문혁. 1966년 5월 16일 중공정부의 공식적인 선언과 함께 시작된 문혁은 1976년 10월 4일 4인방의 체포로 막을 내렸다. 서구의 학자들은 문혁을 “마오쩌둥 최후의 혁명”이라 부른다. 극단의 시대, 광기의 역사, 상실의 세대, 상흔(傷痕) 문학….

 

◇중국인들 “10년 간의 커다란 겁탈”

 

그때 문이 빼곡히 열리더니 스포츠형 짧은 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청바지 차림의 중년 사내가 고개를 디밀었다. 검게 탄 피부, 근육질의 다부진 몸집, 무신경한 옷차림인데, 안경 너머 눈빛만은 형형했다. 얼핏 보면 짐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장시간 지적 연마에 힘써온 학인(學人)의 얼굴이었다. 학생들에게 황타오의 “특이한” 이력을 소개했다. 학생들은 큰 박수로 그를 환영했다.

학생들의 박수에 당황한 듯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 그에게 물었다. “중국 사람들은 문화혁명을 보통 뭐라고 부르지요? 중국어로 얘기해 주세요.” 황타오는 씩씩하게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십년호겁(浩劫)!”

타이완 매체 전구중앙잡지(全球中央雜誌) 2016년 6월호, “대륙문혁 50년: 한판의 집체광란 호겁”/송재윤

 


호겁(浩劫)의 사전적 의미는 ‘대재난’이다. 글자를 뜯어보면 ‘커다란 겁탈(劫奪)’의 의미이다. 겁탈이란 위협이나 폭력을 써서 타인에게서 무엇인가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이른다. 중국인들은 문화혁명의 광기와 폭력에 치를 떨면서 그 시대를 한마디로 “겁탈의 시대”라고 부른다. 과연 문화혁명은 어떤 사건이었나? 왜 하필 “겁탈의 시대”인가? 우리는 왜 바로 지금 여기서 문혁의 역사를 공부해야만 할까?

◇“481만명 반혁명 분자 낙인, 200만명 사망·실종”

2013년 10월 25일 베이징(北京) 대학 스탠포드(Stanford)센터에서는 ‘마오쩌둥시대를 기록하다(寫毛澤東時代)’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학술대회에서 중국의 자유 성향 저널 ‘염황춘추(炎皇春秋)’의 편집자 양지성(楊繼繩·1940- )은 ‘노선·이론·제도: 문화혁명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는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문혁 발생의 근본 원인은 17년 간 중국을 지배해 온 이념(ideology)과 정치노선이라 주장한 후, 청중의 눈앞에 충격적인 자료를 공개했다. 바로 1978년 12월 13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앙위원회 부주석 예잰잉(葉劍英·1897-1986)이 직접 폭로한 문혁 피해자 규모 관련 수치였다.

그의 폭로에 따르면, 문혁 10년의 세월 동안 1)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55만 7000명이 실종되었다. 2)대규모 무장투쟁이 4300 여 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12만3700 여명이 사망했다. 3)250만 명의 간부들이 비투(批鬪·비판투쟁)의 미명 아래 집단 린치를 당했고, 30만2700 명의 간부들이 불법 구금되었으며, 그 중 11만5500 명의 간부들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4)도시에서는 481만 명의 각계 인사들이 “역사 반혁명”, “현행 반혁명”, 계급이기(異己·적대)분자, 반혁명수정주의 분자,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낙인찍히고, 그 중 68만3000 여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5)농촌에서는 520여만의 지주, 부농(대부분의 중상농 포함)과 그 가속들이 박해를 받아 약 120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1984년 4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이하 중공중앙)에서는 2년 7개월에 걸친 조사, 검증을 통해 새로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 발표에 따르면 문혁 10년 동안 420만 명이 구금 상태에서 취조 당했고, 172만 8000여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13만 5000여 명이 현행 반혁명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무장투쟁으로 27만 7000여 명이 사망했고, 703만 여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7만 여 가정이 파괴되었다.

 상하이의 학생들이 비투 대상을 짓밟는 장면. 적인에 대한 마오쩌둥의 투쟁수법을 직접 체현하는 장면이다. 타이완 매체 전구중앙잡지(全球中央雜誌) 2016년 6월호, “대륙문혁 50년: 한판의 집체광란 호겁”, 55./송재윤

 


과연 두 조사 중에서 무엇이 문혁의 현실에 부합하는지 확정하기는 이르다. 다만 1978년 12월은 중국공산당이 문화혁명의 유산을 청산하고 개혁개방의 노선을 공식 당론으로 채택하던 시점이다. 인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긴급히 4인방을 체포한 후, 서둘러 문혁 피해자들의 복권을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문혁 당시 옥중에서 병사한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1898-1969)의 명예는 1980년 2월에야 복권된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중공중앙으로선 반드시 문혁의 광기를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혁 당시 “개혁개방”을 주장하면 곧 반혁명수정주의의 멍에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1984년이면 이미 개혁개방이 추진된 지 다섯 해나 지난 시점이었다. 중공중앙은 상품경제의 개념을 도입해 경제자유화 및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이미 문혁 피해자들에 대한 대규모 복권이 이뤄진 후였다. 개혁개방의 당위를 역설하기 위해 문혁의 피해를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1978년의 발표가 더 신빙성이 있는 듯하지만, 중공중앙은 1984년의 조사를 공식통계로 채택하는 듯하다.

◇수백만 명 죽음으로 내몬 마오쩌둥을 신격화

그림 한 장이 수천 단어를 능가한다. 피해자의 수치는 분명 수백 편의 논문을 압도한다. 스탈린은 대숙청(Great Purge, 1937-1938)으로 68만에서 120만을 학살했다. 히틀러는 홀로코스트(Holocaust, 1941-1945)를 자행해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다. 문혁 기간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1억 1300만 명에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 수백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바로 그 마오쩌둥이 지금도 중국에선 최고의 영도자로 신격화되어 있다. 모든 지폐 위에 그의 초상화가 있고, 모든 대학 캠퍼스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중국의 어디를 가나 건물 벽에 적힌 그의 ‘명언’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놀란 학생들의 입이 벌어져 있다. 뒤통수를 한 대씩 얻어맞은 표정이다. 문혁 시절 난창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황타오는 스크린에 펼쳐진 통계수치를 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 다. 아마도 그 통계를 직접 본 적은 없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음 순간 보라색 비단 히자브(Hijab)로 두 볼과 목을 감싸고 있는 아미라(Amira)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런데 왜 문화혁명이라고 부르나요? 문화 자체를 바꾸는 혁명이란 의미인가요? 아니면 문화를 통해서 사회를 바꾸는 혁명인가요?” <계속>

 

<2회> “문화를 바꾸면 인간 본성을 교정할 수 있다”

"마오쩌둥, 사상을 바꿔 인간을 교정하라"

 

◇“낡은 사상, 낡은 풍속을 척결하라”

 

아미라는 학부 2학년 때 내가 가르치는 ‘현대중국(Modern China)’을 수강했었다. 좋은 질문을 던지곤 해서 나는 그녀를 또렷이 기억한다. 토론토에 정착한 아프가니스탄 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친구다. 그 아미라가 첫 질문을 던졌다. 문화혁명은 문화를 바꾸는 혁명인가? 문화를 수단 삼아 사회를 바꾸는 혁명인가? 문화의 혁명인가? 혁명의 문화인가?

 

산시(陝西) 북부 옌안(延安)에서 대략 70만 당원을 이끌던 ‘동굴의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은 1940년 1월 9일 문화협회의 강연에서 “문화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문화혁명이 정치혁명에 복무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이론에서 ‘문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문화는 수단이다. 목적은 혁명이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미화 포스터: "사구(四舊)를 척결하라! 사신(四新)을 세우라!" 왼쪽 깃발속의 문자는 마오쩌둥이 내걸었던 문화혁명의 구호 "조반유리(造反有理)." /송재윤

 


그럼에도 마오는 문화혁명이 정치혁명과 통일전선을 이룬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를 바꾸면 인간의 본성까지 교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60년대 마오는 전 인민들을 향해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습관(舊習慣)”을 척결하라 요구했다. 이른바 파사구(破四舊)의 슬로건이다. 낡은 것들을 제거하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마오는 힘들지만 가능하다 생각했다.

왕양명(王陽明, 1472-1529)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마음의 양지(良知)를 움직여 성인(聖人)이 될 수가 있다. 양지란 악의 기미(幾微)를 자각하고 제거하는 마음의 힘을 이른다. 양지 대신 마오는 “비판과 자아비판”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공산당원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또 누구나 스스로를 감시하고 비판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구폐(舊弊)와 악습(惡習)을 청산하고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날 수 있다.

1850~60년대 ‘태평천국의 난’을 주도했던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은 어느 날 천상에 올라가 몸속의 썩은 장기를 들어내고 새 장기를 다시 받는 꿈을 꾸었다. 어려서 홍수전을 흠모했던 마오쩌둥은 전 인민의 재탄생을 희망했다. 그는 당원 모두에게 전면적인 “사상개조”를 강조했다.

명목상 마오의 문화혁명은 이기적 존재를 이타적 존재로 교정(矯正)하는 사회공학의 실험이었다. 인간의 뇌를 송두리째 세척한 후, 흰 천에 수를 놓듯 마르크스-레닌이즘을 아로새기는 작업이다. 외과의가 메스를 놀려 환자의 뇌 속에서 암세포를 도려내는 듯한 발상이다.

◇교차비판으로 티끌만한 허물까지 서로 폭로

1940년대 초엽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충칭(重慶)에서 힘겹게 항일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반면 오지에 비껴나 있던 마오쩌둥은 공산당 조직의 재정비를 위해 정풍운동(整風運動, 1942년-1944년)을 시작했다. 그가 문화혁명을 언급한지 불과 한 해 뒤의 일이었다.

당시 국민당 점령지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도시의 청년들이 4만 여명 옌안으로 몰려들었다. 마오는 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사상개조”의 캠페인을 실시했다. 사상개조의 방법은 “비판과 자아비판”이었다.

마오는 큰 집회에 청년들을 모아 놓고 교차비판을 통해 티끌만한 허물까지 폭로하게 했다. 쉽게 말해 서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게 하는 야만의 폭력집회였다. 동료는 적이 되었고, 친구는 밀고자로 둔갑했다. 비판은 광기의 마녀사냥이었다. 자아비판은 강요된 고백성사였다.

마녀사냥으로 “중죄”가 “폭로”된 청년들은 투옥된 상태로 국민당 간첩으로 몰려서 고문을 받았다. 채찍질, 손목 묶기, 무릎 꿇리기 등 전통적 고문방법 외에도 장시간 수면박탈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1943년 8월 15일 마오는 말했다. 너무 빨리 치지도 말고, 너무 오래 끌지도 말라. 잘 보고 있다가 딱 적당할 때, 바로 그때 일격에 교정하라! 누구든 고문에 못 이겨 간첩행위를 했다고 고백하면 인민재판에 불려나가 공범을 폭로하게 했다.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면 밧줄에 묶여 구치소로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많게는 1만 명이 처형되었다.

 대략 1944년 경 옌안의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는 마오쩌둥의 모습. 이 당시 그는 정풍운동(1942-1944)을 일으켜 당원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송재윤

 


지금 우리는 1942-44년간 거행된 옌안의 정풍운동(整風運動)을 돌아보고 있다. ‘10년 대겁탈’의 문화혁명은 바로 1940년대 정풍운동의 전국적 확대였다. 1940년대 이후 마오는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의 정치는 온통 대중동원, 집단감시, 상호문책, 동료고발, 자백강요, 인민재판, 즉결처형, 우파사냥, 사상개조의 연속이었다.

옌안 시절 마오는 공포정치의 테크닉을 마스터했다. 1966-1976년의 문화혁명은 1940년대 정풍운동의 전국적 확대라 할 수 있다. 일평생 그는 문화혁명을 추구했다. 문화혁명은 중국 헌법 서언(序言)에 명시된 마오쩌둥사상의 요체였다.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마오, 소련에서 130만달러 지원받아 당권 장악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역사를 접하는 학생들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초콜릿 껍질을 까서 입에 넣고 씹으면서 제니퍼가 물었다. 곱슬머리를 정성스럽게 땋고 두 볼엔 아기살이 통통한 흑인 아가씨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인가요? 인간 개조를 강조했던 마오의 순수한 의도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해요.”

“어떤 식으로든 인간 본성의 근본적 개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누구든 진정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진정 마오주의자(Maoist)라 할 수 있으리라.”

마오쩌둥을 오로지 공산 유토피아를 꿈꾸는 순수한 몽상가라 보면 큰 오산이다. 정풍운동 직전까지 마오는 당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일대의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라이벌 왕밍(王明, 1904-1974)을 밀어내고 당내 최고지위를 획득했다.

왕밍은 모스크바 유학시절 소련공산당의 지도를 받은 ‘28명의 볼셰비키들’의 영수였다. 때문에 마오가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노선을 갔다고 해석하지만, 구소련 비밀문서에 따르면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마오는 오히려 스탈린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정치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40년 3월 마오의 오른팔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는 모스크바에 직접 가서 미화 30만 달러의 혁명자금을 얻어 왔다. 1941년 7월 3일에 스탈린은 중공중앙에 미화 100만 달러를 추가 지원했다.

 

 “모주석은 우리들 마음 속의 가장 붉고 가장 붉은 홍태양!” 마오쩌둥 인격숭배는 1940년대 옌안에서 시작됐으며,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최고조에 이르렀다. /송재윤

 

 

소련의 지원을 확보해 당권을 장악한 마오는 이제 스스로 스탈린이 되고자 했다. 1941년 8월 마오는 1930년대의 기록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931년-1934년 중공 내부투쟁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마오는 스스로 당내의 독단론자, 주관주의자 및 좌파 기회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중국의 현실에 맞게 마르크시즘을 토착화했다고 자부했다. 또한 그는 레닌과 스탈린의 저작물을 깊이 탐구해 중국식 공산혁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선전했다.

역사를 새로 쓴 마오는 이제 당원들을 향해 인격숭배를 요구했다. 정풍운동이 거세질수록 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마오에게 문화혁명은 권력 강화의 주문(呪文)과도 같았다. <계속>

 

<3회> 공포 정치와 군중 집회를 결합하다

끝없는 군중집회로 집단 최면

 

키 크고 핸섬한 푸른 눈의 키란(Keiran)은 러시아 혁명사 ‘오타쿠’다. 고교 시절 그는 구소련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 문양 아래 CCCP(소련공산당)이란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즐겨 입고 다녔다. 대학에 들어와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의 ‘수용소군도’를 정독하면서 그는 스탈린 정권의 폭력성에 눈을 떴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러시아 현대사를 전공하고 있다. 옌안 시절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키란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1940년대 초반이면 스탈린의 대숙청(1936-1938)이 이미 끝난 시점인데, 혹시 마오는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통제를 모방하지는 않았나요?

그 당시 공산권 전역에서 스탈린이 누렸던 절대의 권위를 모른다면 결코 던질 수 없는 예리한 질문이다.

◇소련의 고문취조·사상검증 기법 전수받아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아 정풍운동을 기획한 제1의 인물은 바로 캉성(康生, 1898-1975)이었다. 1936년 캉성은 모스크바에서 소련 비밀경찰(NKVD)과 긴밀한 협조 아래 수백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서 숙청했던 인물이다. 스탈린 시대 소련경찰의 축적된 비밀정찰, 고문 취조 및 사상검증의 기법이 캉성을 통해 그대로 중국공산당에 전해졌다. 이 역시 스탈린의 기획으로 보인다. 1937년 11월 바로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활약하던 왕밍(王明, 1904-1974)과 캉성을 전용 비행기에 태워서 옌안에 급파했기 때문이다.

옌안에 도착 한 후, 캉성은 곧 왕밍을 저버리고 절대 권력으로 떠오르는 마오쩌둥의 편에 선다. 캉성의 예측대로 모스크바도 마오쩌둥을 중국공산당의 최고영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38년부터 소련의 지식계에선 게릴라 혁명투사 마오쩌둥을 칭송하고 숭배하는 사회분위기가 나타났을 정도였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축약본도 그 즈음 모스크바에서 출판되었다.

마오에게 캉성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캉성은 누구보다도 모스크바 유학파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모스크바의 정치상황에 밝았으며,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마오처럼 캉성도 서예와 시작(詩作)에 깊은 조예가 있어 둘 사이엔 넓은 공감대가 있었다.

캉성은 또 1930년대 상하이 은막의 스타 장칭(江靑, 1914-1992)을 마오에게 연결한 인물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이 장칭의 방종한 행실을 들춰내자 캉성은 장칭의 방패막이가 되어줬다. 결국 1939년 11월 19일 마오쩌둥은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 1910-1984)을 버리고 장칭과 네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놀랍게도 캉성과 장칭은 1930년대 초반 밀애를 나눴던 애인 사이로 알려져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캉성은 절대군주를 포섭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 간교한 인물이다.

지금 캉성과 장칭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까닭이 있다. 장칭은 이후 문화혁명 4인방 중의 우두머리로 맹활약했으며, 캉성 역시 마오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문화혁명을 주동했던 핵심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문혁 당시 장칭과 캉성은 마오쩌둥에 고삐 잡혀 달려가는 쌍두마차의 두 말과도 같았다. 마오의 분신(分身)으로서 캉성은 스탈린식 공포통치의 상징이었으며, 장칭은 대중선동의 구심이었다.

 

 1966년 12월 26일 홍위병 접견식. 뒷줄 왼쪽부터 장칭, 저우언라이, 캉성. 포스터: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마오쩌둥, 스탈린 저작 부지런히 읽어

 

1935년 1월 대장정(大長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불과 한 달 보름 전 공산당군은 후난(湖南)성 상강(湘江) 유역에서 국민당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려 4만의 병력이 궤멸되었다. 마오쩌둥은 꾀이저우(貴州)성 북부 준이(遵義)회의에서 모스크바 유학파 리더 보구(博古, 1907-1946)에 전패의 책임을 물어 논쟁에서 승리한 후, 이른바 ‘28 볼셰비키’를 제치고 당권을 장악한다.

1936년 겨울 옌안에 입성한 공산당군은 바닥부터 혁명의 진지를 다시 건설해야만 했다. 마오쩌둥은 토굴에 칩거하면서 원대한 공산혁명의 청사진을 그렸다. 그가 꿈꿨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선 다섯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었다. 1) 강력한 군사력, 2) 소련과의 연대, 3) 대중조직의 확대, 4) 이념의 통일, 그리고 5) 절대적 리더십이었다. 장제스와의 투쟁을 통해서 마오쩌둥은 깨달았다. 혁명은 낭만적 모험이 아니라 목숨을 건 전쟁이다. 혁명전쟁의 승리를 위해선 전 당원을 결속할 수 있는 완벽한 이념이 요구됐으며, 무엇보다 절대적 리더십이 필요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스탈린은 캉성을 마오쩌둥에 파견했다. 스탈린은 옌안 시절 마오를 “동굴의 공산주의자”라 불렀다. 기껏 게릴라전사라 낮춰 봤다는 이야기다. 캉성은 스탈린식 공포정치를 체득한 인물이다. 스탈린은 그런 캉성을 마오 곁에 붙임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이 잔혹한 사회개조의 실험임을 일깨우려 했던 듯하다. 스탈린의 의도대로 캉성은 옌안에 몰려든 꿈 많은 청년당원들을 겁박하고, 고문하고, 조련하고, 개조했다.

물론 최종책임자는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저작을 부지런히 읽었다. 대공포의 실상에 대해서도 그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 1930년대 그가 남긴 혁명저작을 읽어보면, “대원수 스탈린”에 그의 존경과 흠모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마오는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스탈린의 통치술을 답습했다. 요컨대 마오와 캉성의 조화로운 결합은 스탈린주의가 중국 땅에서 토착화했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 속에서는 스탈린과 마오의 상하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 속의 마오는 왼손에 레닌의 저서를 들고 있다. (PUBLIC DOMAIN)

 

 

◇“군중집회는 혁명의 연속”

정풍운동을 통해서 마오는 인신구속, 강제구금, 고문취조, 수면박탈 등 스탈린식 공포로 당원들을 감시하고 처벌했다. 아울러 마오는 군중집회를 일상적으로 개최해서 선전선동과 집단최면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군중노선과 군중집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군중노선이란, 군중의 요구와 제안을 수용하는 민중주의적 정책수립을 의미한다. 군중집회란, 관판대회 혹은 관제집회를 의미한다. 시간, 장소, 목적 및 세세한 구호는 물론, 운집하는 군중의 규모 역시 정부가 알아서 정했다.

 

 1950년 12월-1951년 10월, "진압반혁명운동"(진반운동)의 한 장면.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한 후, 중국 전역에선 반혁명분자를 색출하는 대규모 정치 캠페인이 벌어졌다. 미국과의 전쟁은 마오에게 내부결속을 다지고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절호의 기회였다.(PUBLIC DOMAIN)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군중집회의 연속이었다. 매번 중요한 정책이 입안되면, 중공정부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서 그 정책을 선전하고 또 합리화했다. 군중집회야 말로 사상을 개조하고 인격을 교정하는 가장 요긴한 집체적 최면 의식이었다. 그는 군중집회를 “혁명의 연속”이라 생각했다. 그는 오직 대규모 집회를 통해서만 군중의 계급의식을 벼리고 혁명정신을 고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집회에 불려나간 인민은 정부의 요구대로 사회주의 건설의 당위를 부르짖고, 집산화의 깃발을 흔들고, 반혁명세력을 비판하고 투쟁해야만 했다. 인민은 일찌감치 집회와 시위의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였지만, 거의 매일 같이 집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집회에 나서지 않는 인민은 적인(敵人, 인민의 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군중집회는 곧 집체적 정신무장의 의식(儀式)이자 강제적 사상개조의 과정이었다.

요컨대 문화혁명(1966-1976)은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마오쩌둥의 군중집회의 결합이었다. 날마다 개최되는 군중집회에서 성난 인민은 스탈린식 테러리즘으로 적인(敵人)을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마오가 직접 제창한 “인민민주독재”가 인민의 광장에서 광적으로 펼쳐졌다. 중국 헌법 총강 제1조에 명시된 바로 그 “인민민주독재”이다. <계속>

 

1950년대 초반 진압반혁명운동의 한 장면. "견결히 반혁명분자를 진압하라!" 학생들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이어 마오쩌둥과 맨 뒤에 김일성의 사진까지 들고 행진하고 있다. 당시는 200여만의 중공군이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을 치르고 있었다.(PUBLIC DOMAIN)

 

<4회> 비판적 지식인을 숙청하라!
"펜대만 돌리는 지식분자... 부패한 영혼 교정"

'우파 사냥' 위해 "당의 오류 지적하라" 격려
속내 털어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숙청 나서

 

◇마오쩌둥, 반지(反智)의 제왕

문화혁명은 반우(反右)투쟁, 곧 우파 사냥이었다. 우파의 대부분은 지식분자들이었다. 문화혁명은 결국 지식분자를 숙청하는 반지(反智)의 폭력이었다. 반지(反智)란 지성을 거부하고 지식을 폄하하는 문명-파괴적 태도를 이른다. 마오는 지식분자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혐오했다.

독재정권은 지식인을 탄압한다. 1920~30년대 스탈린은 다수의 작가, 언론인, 예술가들을 학살했다.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정권이 제거한 20만의 반정부세력 대다수는 지식인들이었다. 1970년대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Pol Pot, 1925-1998) 역시 수십 만 명의 지식인을 학살했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의 오른팔 캉성(康生, 1898-1975)은 공개적으로 폴 포트의 노선을 지지했다. 폴 포트 노선이 마오주의의 분파였음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증명한다. 스탈린에서 마오를 거쳐 폴 포트로 이어지는 반지(反智)의 계보이다.

마오의 지식인 혐오는 뿌리 깊다. 그는 1921년 7월 말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 참석했던 13인 중의 한 명이었다. 혁명가로선 최고의 이력을 얻었지만, 당시 그는 베이징 대학 도서관의 사서에 불과했다. 당시 베이징 대학 캠퍼스는 다양한 사상이 만개하던 백가쟁명의 해방구였다. 그 캠퍼스에서 마오는 우쭐대고 뽐내는 거만한 대학생들에 열등감을 느꼈다. 그 열등감이 이후 복수심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오는 1950년대 내내 언론인, 학자, 문인은 물론, 과학자들까지 일상적으로 탄압했다. 그는 무산계급의 노고를 모르는 채 “펜대만 놀려대는” 지식인들의 “부패한 영혼”을 교정하려 했다. 교정의 방법은 강제노역이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책잡힌 지식인들은 모두 ‘라오가이(勞改)’에 감금됐다. 황무지나 광산에 위치한 라오가이에 끌려가면 노예노동의 일상이 펼쳐졌다. 한 연구에 따르면, 마오가 지배하는 27년 간 연평균 100만 명씩 도합 2700만 명이 라오가이에서 처형되거나 자살하거나 과로사했다.

 

Harry Wu, Laogai: The Chinese Gulag, p. 72

 


◇동굴 속 뱀 꺼내기 위해 연기를 피우는 인사출동(引蛇出洞): 우파사냥의 기술

1939년 12월 1일 중공 중앙위원회에서 마오는 선포했다. “지식인들의 참여 없이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하다! 지식인들을 포섭하라!” 중공 점조직을 타고 젊고 발랄한 도시출신 지식층이 몰려들자 마오는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옌안의 정풍운동(1942-1944) 당시 마오는 캉성을 통해서 불온분자를 가려내게 했다. 그 방법은 놀랍게도 “표현의 자유”였다. 마오는 청년당원들을 향해 자유롭게 당의 오류를 지적하고 문제점을 비판하라고 격려했다. 마오가 거듭 다그치자 순진한 청년들은 속내를 털어놓고 중공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마오는 180도 방향을 틀어 그들을 숙청했다. 동굴 속의 뱀을 꺼내기 위해 연기를 피우는 인사출동(引蛇出洞)의 속임수였다. 마오는 이후 그 방법을 양모(陽謨)라 불렀다. 공공연한 음모(陰謀)라는 의미이다.

1956년 말부터 마오는 바로 그 케케묵은 양모를 또 들고 나왔다. “비판 없는 발전은 없다”며 그는 지식인들에 대정부 비판을 요구했다. 전국 곳곳에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의 구호가 나붙었다. 이미 당할 대로 당해 온 지식인들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오는 그들을 부추기며 유혹했다. 열린 비판과 다양한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마오의 연설이 관영매체를 타고 날마다 전국에 울려 퍼졌다. 비판자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는 공개적인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용감한 지식분자들이 먼저 입을 열었고, 머뭇거리던 자들도 이내 뒤따랐다. 그들은 일제히 성난 비판의 언사를 내뿜기 시작했다. 날마다 대자보가 나붙었고, 정부기관엔 항의의 격서가 쏟아졌다.

 

1957년 백화제방 운동 당시 온 벽을 채운 정부 비판의 대자보/ PUBLIC DOMAIN

 

 

지식인들의 비판이 위협적이었지만, 마오는 꾹 참고 그들의 항의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숨어 있는 우파들이 모조리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기다리는 전술이었다. 급기야 1957년 7월 쯤 중공정부는 일제히 공개적인 우파사냥을 개시했다. 2년간 지속된 반(反)우파 운동으로 대략 55만 명이 라오가이로 직행해야 했다.

마오에게 숙청당한 지식인은 두 종류였다. ‘도덕적 비판자’들과 ‘전문가 집단’이었다. 마오는 도덕적 비판자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갔으며, 정부의 요직에 전문가들 대신 “붉은 투사”를 기용했다. 그 결과 언론계, 문화계, 교육계, 과학기술계는 어용(御用) 지식인들만 득실거렸다. 대장부(大丈夫)는 사라지고 아전(衙前) 무리만 넘쳐났다. 진실추구의 과학자는 간 데 없고 영혼 없는 기술자만 잔류했다.

이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 마오는 대약진운동(1958-1962)을 개시한다. 그는 우선 대규모 집산화를 추진했다. 농민들은 텃밭을 빼앗기고, 아궁이를 잃고, 사생활 모두를 차압당한 채 집단농장의 농노로 전락했다. 그들은 누천년 축적해 온 자생의 지혜를 상실한 채 굶주리기 시작했다.

마오는 농민들을 향해 15년 만에 미·영을 따라잡자며 대규모 철강생산을 요구했다. 그의 주문에 따라 농촌 마을 뒷마당에는 작은 용광로들이 생겨났다. 과학 상식을 부정하는 최악의 정책이었지만,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읊조리는 어용지식인이 펜과 마이크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관료집단은 통계를 조작하고, 관영매체는 가짜뉴스를 생산했다. 과장하고 조작하는 부과풍(浮誇風), 획일적 규정을 강요하는 공산풍(共産風), 단숨에 큰 성과를 내려는 광열성(狂熱性)이 만연했다.

무비판의 궤도에서 막 달려간 일당독재의 폭주였다. 결과는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이었다. 대약진 기간 중 대략 3000만-4500만, 출생하지 못한 인구를 포함하면 7000만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조반유리(造反有理)”: 무법적 인권 유린이 정당하다는 선언

불과 4년 후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일으켜 더 큰 규모로 지식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1969년 마오는 홍위병을 낙후된 농촌에 하방(下放)시켜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했다. 그는 하방된 홍위병들에 “지식(知識)청년”이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책과 연필 대신 농기구를 들고 혁명정신을 배우라는 주문이었다. 참된 지식은 노동에서 나온다는 반지(反智)의 발상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인식론에 따르면, 모든 진리주장은 계급적 당파성을 갖는다. 1930년대부터 마오는 입버릇처럼 지식인은 인민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의 눈에 비판적 지식인들은 계급적 당파성을 버리고 인민을 배신한 반동 세력일 뿐이었다.

 

 문화혁명 당시 “비투”(비판투쟁)의 한 장면. “반당 흑방분자 뤼샤(黎俠)”/ PUBLIC DOMAIN

 

 

마오가 직접 나서서 칼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마오를 추종하는 좌파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광기의 마녀사냥을 이끌었다. 그들의 선동에 이끌린 10대-20대의 홍위병 조직은 반혁명 세력을 색출해 집단폭행을 이어갔다. 마오쩌둥은 그들을 향해 “조반유리(造反有理)!”라 말했을 뿐이었다. 반란을 일으킬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홍위병식 인민재판, 광장의 집단린치, 무법적 인권유린이 정당하다 선언하는 전체주의 절대군주의 초법적 발언이다.

50-6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문혁의 유령은 2020년 현재 중국 전 대륙을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해 12월 말 인터넷에 신종 폐렴의 진실을 알렸던 젊은 안과의 리원량(李文亮, 1986-2020)은 악성루머를 유포했다는 죄명을 쓰고 경찰의 취조에 시달리다가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망했다. 리원량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들이 검열의 틈새를 타고 중국의 인터넷에 물밀 듯 쏟아졌다. COVID-19를 애써 “우한폐렴”이라 부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아름다운 도시 우한이 무슨 잘못이랴. 미주의 반중언론은 이미 “중공바이러스(CCP virus)”라 명명한 바 있다. 그 근본을 추적해 보면, 우리를 괴롭히는 이 괴질(怪疾)의 병인(病因)은 “문혁 바이러스”가 아닐까. <계속>

 

<5회> 마오쩌둥, 경제 망치고 이념 투쟁에 올인

◇21세기 서구에서 진행 중인 “문화혁명”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크고 작은 ‘문화혁명’이 지속되는 듯하다. 2017년 3월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저명한 심리학자 조단 피터슨(Jordan Peterson, 1962- )이 멀지 않은 맥매스터 대학 캠퍼스를 방문했다. 그는 “PC(정치적 올바름)와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강연을 할 계획이었다. 강의실엔 100여 명 이상의 학생들이 운집해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격렬한 시위대의 항의로 피터슨은 강연을 못하고 말았다. 일부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싶다”고 외쳤지만, 과격한 소수가 결국 다수를 압도했다.

2016년 캐나다 하원은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의 인권보호를 위해 그들을 호칭할 때 원하지 않는 특정 대명사의 사용을 금지하는 이른바 C-16 법안을 통과시켰다. 피터슨은 그 법안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했던 소수파 지식인이었다. 때문에 그날 시위대는 “혐오발언엔 표현의 자유 없다(no freedom for hate speech)”라는 구호를 내걸고 “트랜스 공포증 똥덩어리(Transphobic piece of shit)”란 욕설을 외쳐댔다. 피터슨은 시위대를 향해 당당하게 집단적 사유를 버리라 촉구하며, 논리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2017년 3월 17일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 피터슨 교수가 시위대에 휩싸여 있다. 사진 https://www.insidehighered.com

 

 

제이콥은 그날 현장에 있었다. 머잖아 그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피터슨 교수의 ‘열두 가지 인생의 법칙’을 정독했고, 시위대의 항의가 한 “정교한 사상가”에 대한 부당한 폭력이라 생각했다. 이후 그는 바로 그날 피터슨 교수를 캠퍼스로 초빙했던 동아리 “차이를 극복하라!(Overcome the Gap)”에 가입해서 주요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했다. 첫 강의가 끝난 후, 그가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마오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해놓고선 비판지식인들을 숙청했다 하셨는데, 대기근이 발생한 후에도 중국인들은 마오를 전혀 비판하지 못했나요?


◇3~4년 사이 4500만명 사망, 참상을 어떻게 덮었을까?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은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했다. 불과 3~4년 새 중국 전역에서 최대 4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약진은 대실패였다. 홍콩 언론이 풍자했듯 “대약진(The Great Leap Forward)”이 아니라 “대역진(大逆進, The Great Leap Backward)”이었다. 앞이 아니라 뒤로 달려간 혁명이었다.

제이콥이 중요한 질문을 했다. 대기근 이후에도 중국인들은 마오를 비판조차 할 수 없었나? 그는 어떻게 계속 절대 권력자의 권좌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

물론 용감하게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비판한 인물이 있었다. 1959년 8월 여산(廬山)회의에서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가 대표적이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면서 마오를 향해 근본적인 정책수정을 요구한다. 격노한 마오쩌둥은 당장 그와 그의 직속 부하들을 파면한다. 펑더화이를 파면한 마오의 이미지는 명나라 충신 해서(海瑞, 1514-1587)를 파면한 가정(嘉靖) 황제를 꼭 빼닮았다. 1961년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희곡 ‘해서파관’을 베이징 경극단이 상연하면서 선풍을 일으킨다. 바로 이 희곡은 1965년 11월 말부터 전 중국에 몰아닥친 “문혁” 폭풍의 눈이 된다.

 

1967년 7월 홍위병 집회에서 비투(批鬪)당하는 펑더화이. 당시 69세.

 

 

펑더화이의 파면 이후 모두가 숨죽이며 마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결국 국가원수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가 나섰다. 1962년 1월 11일-2월 7일 대약진운동의 오류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7천인대회”가 열린다. 중앙과 지방정부의 주요 간부들 7천 명이 참석한 사상 최대 규모의 “중앙 공작회의”였다. 대약진운동의 성과와 실패를 점검하는 이 대회에서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대기근의 “3할이 천재(天災), 7할이 인화(人禍)”라 선언한다. 마오를 겨냥한 예리한 공격이 아닐 수 없었는데, 놀랍게도 마오는 그 자리에서 대참사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순순히 인정한다. 빅브라더의 인간선언일까? 과연 그는 진실로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했을까?

7천인대회 이후 마오는 베이징을 떠나 남방을 순회한다. 중앙의 제1선을 류샤오치에 맡긴 후, 스스로 제2선으로 물러난 셈이었다. 일단 그 정도에서 책임추궁은 멈췄다. 대기근의 책임에선 중공중앙의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대약진운동 당시 중공 중앙위원들은 모두 혁명열(革命熱)로 “머리가 더워져서” 마오의 급진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이념투쟁 “사회주의 교육만이 수정주의를 막는다!”

마오쩌둥은 제2선으로 물러났지만, 그의 상징적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다. 최고영도자 마오는 경제를 망친 후 이념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이념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1960년 마오는 이미 농촌에서 반(反)부패, 반(反)낭비, 반(反)관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삼반운동”을 일으켰다. 곧 이어 그는 정풍·정사(整風·整社)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농촌에선 간부들의 가혹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모두 중앙의 무리한 할당량을 맞추려는 지방의 자구책이었지만, 마오는 바로 그런 악질 간부들이 모두 국민당 잔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1962년 9월 마오는 부르짖었다.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 1963년 2월 류샤오치의 연설 중에 마오쩌둥이 끼어들며 발언했다. “요즘 돼지고기 세 근, 담배 몇 갑 정도에 매수되는 자들이 참으로 많아. 오직 사회주의 교육만이 수정주의를 막을 수가 있다!”

이로써 사회주의 교육운동(1963-1966)이 개시되었다. 정치, 경제, 조직, 사상 측면에서 모든 부패를 일소하는 사청운동(四淸運動)이었다. 교육운동이 아니라 실제로는 숙청의 시작이었다. 그 2~3년의 세월 동안 7만7560명의 간부들이 학살됐고, 도시와 농촌에서 532만7350명이 박해를 받았다. 5760개의 사회조직이 반당·반사회주의 집단으로 몰렸으며, 27만6250명이 적대세력으로, 또 55만8220명이 인민내부의 모순세력으로 지목돼 고난을 당했다. 많은 학자들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문화혁명의 전초전이라 해석한다.

 

1965년 3월. 헤이롱장(黑龍江)성 아청(阿城)현 아선허(阿什河) 공사 둥환(東環) 대대의 사청운동의 대적(對敵) 투쟁 대회의 한 장면: 사진 리전성(李振盛)>

 

 

대기근을 일으킨 후 마오는 어떻게 비판의 화살을 피해 갈 수 있었는가? 우선, 그가 벌였던 숱한 정치운동에 주목해야 한다. 실정을 가리기 위해 그는 계급투쟁의 깃발을 흔들었고, 반혁명세력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모든 언론 통제, 대기근 실상 알려지지 않아

경제를 망치고도 마오가 비판을 피해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당시 중국의 모든 언론은 완벽하게 정부의 통제 아래 있었다. 대기근의 실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개개인의 기록도, 은밀한 입소문도 큰 전파력을 갖지 못한다. 고난의 실체험자들은 모두 소멸했고, 지방정부의 파편적 기록은 문서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때문에 아무도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마오의 오른팔로 군부를 장악한 린뱌오(林彪, 1907-1971)는 군대에서 먼저 마오에 대한 인격숭배를 개시했다. 머잖아 마오는 날마다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하는 인격신의 경지로 격상된다.

독재권력은 필사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기록을 윤색한다. 집체의 기억은 정치적으로 재구성된다. 인류의 역사는 너무나 쉽게 정치적으로 조작되고 편의적으로 왜곡된다. 나태한 지성은 절대로 역사의 실상을 알아낼 수 없다. 목숨을 건 역사투쟁 없이 진실은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도 망각의 늪에 잠겨버릴 수 있다.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는 마오쩌둥 신화가 일깨우는 불편한 진실이다. <계속>

 

<6회>"절대악과 싸운다" 투사의 정치가 대재앙을 불렀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과학기술 분야도 투사가 득세, 야만적 정치투쟁 계속
경제성장과 개선책 도모하는 관리자형 지도자는 몰락

 

◇투사형과 관리자형의 싸움…매번 투사가 관리자 무너뜨려

문화혁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하버드대 맥파쿼(Roderick MacFarquhar, 1930 - ) 교수는 중공지도자들을 크게 투사(鬪士, militant)와 관리자(管理者, manager) 두 유형으로 나눠서 분석한다.

투사형 지도자들은 정치투쟁을 일삼아 권력의 기반을 닦고, 넓히고, 굳힌다. 그들은 숭고한 이념을 제시하고, 정치적 의제를 설정하고, 혁명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인간집단을 인민과 적인(敵人), 아군과 적군,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등으로 양분한다. 자신들이 절대(絶對) 선(善)의 편에 서서 절대 악(惡)과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사냥개처럼 정적(政敵)을 물어뜯고, 피의 숙청을 감행한다. 현실정치에서 붉은 투사들은 강력한 권력을 발휘하곤 한다. 인민의 목을 조이는 공산 유토피아의 고삐가 그들의 손에 꼭 쥐여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관리자형 지도자들은 크고 작은 정책을 입안하고, 행정상의 실무를 처리한다.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한다. 그들은 현실적 한계를 점검하고 점진적 개선책을 모색한다. 논쟁을 통해 이념적 정당성을 인정받기 보단, 현실에서 정책적 성과를 입증해 사후적으로 “수행적 합법성(performative legitimacy)”을 획득하려 한다.

중국현대사 최고의 투사형 지도자는 단연 마오쩌둥이다. 문화혁명을 주동했던 중공중앙 부주석 캉성(康生, 1898-1975), 국방부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와 장칭(江靑, 1914-1991)을 위시한 “4인방” 또한 대표적인 투사들이다.

관리자형 지도자로는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중앙서기처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경제관료 천윈(陳雲, 1905-1992) 등을 꼽을 수 있다.

투사와 관리자가 맞붙어 싸우면 어떻게 될까? 과연 누가 이길까? 대약진운동에서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정치사를 돌아보면, 매번 투사가 관리자를 잡아 패고 무너뜨리는 야만적인 정치투쟁의 연속이었다. 왜 관리자들은 늘 붉은 투사의 공격을 받고 그로기 상태로 내몰렸을까? 중국정치사의 수수께끼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승리 만세!” “마오주석을 대표로 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 승리 만세!” 왼쪽부터 캉성,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陳伯達, 1904-1989, 마오의 비서), 장칭/ chineseposters.net



◇타고난 투사 마오쩌둥, 잠재적 비판자까지 색출 “극한까지 가야한다”

마오는 타고난 투사였다.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정책의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잠재적 비판자들까지 모두 색출해서 격리시켜버렸다. 이어서 그는 특유의 대중노선으로 전 인민을 이끌고 “정신승리”의 늪으로 서슴없이 들어갔다.

1927년 3월 서른다섯 살의 공산주의자 마오는 “후난(湖南)성 농민운동 고찰보고”를 발표했다. 중국의 농민운동에서 공산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한 마오는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선 한계를 넘어 극한까지 가야 한다!”는 묘한 말을 남긴다. 수천 년 “봉건제도”의 모순을 일소하려면 극좌(極左)노선의 맨 끝까지 밀고가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말 속에는 이미 특유의 혁명적 조급증이 드러나 있다.

그가 제시한 “대중운동의 법칙”에 따르면, 노동자와 농민은 불굴의 혁명정신과 삶의 지혜를 체득한 무산계급(無産階級)이다. 마오는 무산계급의 혁명정신이 강력한 지도력과 만나면 대약진의 경제성장이 가능해진다고 믿었다. 그가 제창했던 대중노선(大衆路線)의 핵심이다.

마오는 프롤레타리아 정신이야말로 최고의 철학, 문학, 과학기술을 낳는 창의성의 원천이라 믿었다. 일례로 1957년 중국문단의 작가는 1천 명 미만이었는데, 1958년 전국적으로 20만 명의 작가들이 양성되었다. 엄격한 문학수업을 거친 전문작가들 대신에 삶의 경험을 진솔한 언어로 표현한 모든 사람들에 작가의 칭호를 부여했다. 과학·기술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오는 전문가 대신 붉은 투사를 선호했다.

 

"마오주석을 꼭 잡고서 큰 바람, 큰 파도를 헤치며 전진하자!” 문화혁명 당시 마오의 인격숭배를 보여주는 포스터. 최고영도자와 인민의 직접적 결합이 강조되고 있다. /PUBLIC DOMAIN


마오의 이론에 따르면 지식계의 위계질서는 최상위에 노동자·농민이, 그 아래 기술자와 과학자가, 또 그 아래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가 위치하고 있는 역(逆)피라미드의 구조였다. 과학·기술자 중에서도 기술자가 맨 위를 차지하고, 수학이나 이론물리학 등 순수과학은 맨 아래를 차지했다. 순수이론 과학자, 탐미주의 문학가, 실존주의 철학자 등등은 반(反)혁명의 멍에를 써야만 했다.

마오가 동경했던 혁명적 무산계급은 이념적 허구일 뿐이었다. 홉스가 간파했듯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며,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한 인간을 향해 마오는 이타심을 발휘해 혁명에 희생하라 요구했다. 그 결과는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분열…짧았던 관리자형 전성시대

1962년에서 1965년까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유감없이 국가적 위기를 책임지고 타개하는 관리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들이 추진했던 경제회복운동은 머잖아 큰 효력을 발휘했다. 몇 가지 경제지표를 살펴보자.

1960년 대기근의 악재로 최저점(1억 4천 5백만 톤)까지 떨어졌던 농업생산량은 1965년에 이르면 1957년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사탕수수 등 비(非)곡물 생산량도 대약진 이전 수준까지 회복했다. 곡식은 10%, 면화는 50%, 채유(菜油) 생산량은 60%나 늘어났다. 육류 및 재목의 생산량도 1957년보다 40% 증가했다. 1965년 3천 3백만 헥타르에 관개사업이 이뤄졌고, 또한 그 중 25%의 농지는 기계 펌프로 관수됐다.

왼쪽부터 덩샤오핑,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대약진 이후 신경제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인물들. 팔에 “홍위병” 밴드를 차고 있음을 보면, 문화혁명이 막 시작된 1966년 여름으로 추정된다. /PUBLIC DOMAIN

 


산업부문의 성과도 두드러졌다. 1963-1965년 경공업은 연평균 27%, 중공업은 17%의 증가량을 보였다. 1965년 철, 전기, 시멘트, 중기의 생산량은 1957년의 두 배 수준에 이르렀다. 소비재 생산량도 현격히 늘어났다. 재봉기계는 네 배, 자전거는 두 배 더 많이 생산됐다. 석유 및 석유화학 생산부문도 큰 성과를 보였다. 1965년 국내총생산량은 1957년보다 29%, 1962년보다 51% 증가했다.

“투사의 정치”는 국민경제는 망쳤지만, “관리의 리더십”은 경제를 살렸다. 가시적 성과를 냈음에도 류와 덩은 왜 보다 적극적으로 신경제정책을 옹호하지 못했을까? 류와 덩을 단순히 합리적 관리자일 뿐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도 뼛속 깊숙이 공산혁명의 투사였다. 실용적으로 “백묘(白描)”의 방법을 채택했을 뿐이지만, 이념적으로 그들은 모두 “흑묘(黑苗)”를 자처했다.

지난 주 언급했듯 5백 30만의 직·접적 피해자를 낳은 사회주의교육운동(1963-1966)은 마오쩌둥이 제창했다. 붉은 투사 마오는 스스로의 경제적 실정을 가리기 위해 다시금 계급투쟁의 기치를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류샤오치는 사회주의교육운동을 직접 주재하고 나선다. 그 과정에서 류와 마오가 갈라섰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 문헌을 살펴보면 류가 주도적으로 잔혹한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음이 분명해 보인다.

1962-1966년 류샤오치는 경제정책의 방향을 우측으로 선회했다. 동시에 그는 계급투쟁의 깃발을 들고 지방의 간부들을 숙청하는 붉은 투사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정주의의 오명을 벗기 위한 방어적 제스처였을까? 주자파(走資派)란 낙인을 피하기 위한 연극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류샤오치가 강한 신념의 공산주의자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자의 신념을 견지한 채로 그는 신경제정책을 실시했다.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 후에도 류샤오치는 공산주의 이념 자체에 대해선 회의하지 않았다. 고작 실용주의라는 허술한 명분으로 경제적 이윤동기를 슬그머니 인정했을 뿐이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였다. 이상과 현실의 분열이었다. 그 점이 바로 류샤오치 최대의 패착이었다. <계속>

류샤오치, 투항하지 않으면 그를 멸망시켜라!” 문화혁명 당시 류샤오치를 비판하는 포스터. 소련 수정주의의 추종자로 묘사하기 위해 류샤오치의 코를 크게 그려 놓았다./ chineseposters.net

 

<7회>  "홍콩이 몰락하면 중국 경제도 무너진다"

◇나라를 배반하고 홍콩을 어지럽힌 4인방?

지난 해 홍콩의 시위가 격화되자 중국의 관영 매체는 일제히 "홍콩의 4인방"을 비난하고 나섰다. 대규모 시위의 배후에 대중을 선동하고 폭력시위를 교사하는 네 명의 반역자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인민일보를 위시한 중국의 언론들은 그 네 명을 꼭 집어 나라를 배반하고 홍콩을 어지럽힌 "반국란항(叛國亂港) 4인방"이라 명명했다. 난데없이 왜 4인방이 홍콩에 나타났나?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 화궈펑(華國鋒, 1921-2008)은 한 달이 채 못돼 "4인방"을 체포한다. 그들은 국정을 농단하고 대중을 선동해 "10년 대재앙"을 초래한 네 명의 "원흉"으로 지목된다. 당시 중공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4인방에 모든 책임을 전가한 혐의가 있다.

지난 해 중공정부는 홍콩의 시위대를 "선동하고 오도한" 4인방이 필요했던 듯하다. "문혁의 4인방"은 마오의 부인 장칭과 세 남자이다. 마찬가지로 "홍콩의 4인방"도 한 명의 여인과 세 남자이다. 홍콩 정무사(政務司) 사장(司長) 안슨 찬 (Anson Chan, 陳方安生, 1940- ), 홍콩 민주화의 거두 마틴 리(李柱銘, 1938- ), 홍콩 민주당의 지도자 변호사 알버트 호(Albert Ho, 1951- ), 독립 출판업자 지미 라이(Jimmy Lai, 黎智英, 1960- )이다. 성비(性比)와 연령차가 문혁의 4인방과 엇비슷하다. 장칭이 안슨 찬, 장춘차오(1917-2005)가 마틴 리, 알버트 호가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 지미 라이가 왕홍위안(王洪文, 1935-1992)을 연상시킨다.

"문혁의 4인방"과 "홍콩의 4인방"



"문혁의 4인방"과 달리 "홍콩의 4인방"은 명망 높은 민주화운동가들이다. 그들은 정부매체로 대중을 선동하지 않았고, 같은 조직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 점에서 "홍콩의 4인방"은 정치적 마타도어일 뿐이다. 중국의 관영매체는 "홍콩의 4인방"을 비판함으로써 홍콩시민들을 기껏 선동당한 홍위병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였다. 마오야 홍위병은 반란을 고무·격려했지만, 민중의 광장정치를 극구 꺼리는 문혁 이후의 중공정부는 홍위병을 미화할 수 없다.

지난 해 중국의 언론들은 짠 듯이 홍콩의 4인방을 향해 폭언을 퍼부어 댔다. 미국 위해 투쟁하는 매국노, 국가안전 위협하고 홍콩 혼란 초래하는 반국(叛國)집단, 분열세력, 매판(買辦), 주구(走狗) 등등…. 원색적인 인신공격은 "말의 전쟁"에 머물지 않았다. 중공정부는 4인방에 대한 법적 조치를 서둘렀다. 4인방은 반역죄를 비롯한 14개 정치범죄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급기야 2020년 4월 17-18일 4인방 중 3명을 포함한 15명의 홍콩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구속되었다. 82세의 마틴 리는 1980년 홍콩기본법을 입안하고, 1990년 홍콩 민주동맹을 창건한 "홍콩 민주화의 아버지"이다. 40년 걸친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그는 한 번도 구속되지 않았다. 준법투쟁과 평화시위를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구속되던 날 그는 말했다.

"그동안 젊고 총명한 수많은 청년들의 구속과 처벌을 봐왔는데 드디어 내가 피고인 명부에 속했다니 마음이 편안하고 자랑스럽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추구할 뿐이다."

◇하늘이 중국 공산당을 멸하리라 “천멸중공(天滅中共)” 구호

2020년 5월 24일 홍콩의 거리에는 수천 명 시민들이 다시 몰려나왔다.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홍콩 관련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질세라 홍콩의 시위대는 "천멸중공(天滅中共)"의 구호를 들고 나왔다. 문자 그대로 "하늘이 중국공산당을 멸하리라! (Heaven will destroy the CCP)"라는 의미이다.

유가경전 ‘상서(尙書)’에 따르면, 하늘의 명령을 거역하는 정권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하늘은 정권을 교체한다. 민생을 책임질 새로운 통치자가 나와 천명(天命)을 부여받는다. 새롭게 들어선 정권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통치에 실패하면 곧 천명을 잃기 때문이다.

인구 7백 만의 홍콩이 14억 대륙국가의 중앙정부와 대적할 순 없다. 그럼에도 시위대는 일국양제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가장 강경한 구호를 들고 나왔다. 퇴로를 차단한 채 사즉생(死卽生)의 싸움에 나선 셈이다. "천멸중공"을 외치는 홍콩의 시위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2020년 5월 24일 홍콩 아일랜드에서 반(反)악법 투쟁에 나선 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천멸중공(天滅中共)"의 구호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 구호는 작년 가을부터 등장했는데, 올해는 홍콩 시민을 규합하는 공동의 정치 슬로건이 되었다 . http://www.iask.ca/news/world/2020/05/564688.html



◇홍콩을 위기에 빠뜨려 중국에 타격을 주는 ‘람차오 전술’

현재 홍콩에 살면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20대 중반의 역사학도 세바스찬(Sebastian, 가명)에 의하면, 홍콩의 시위대는 현재 치밀한 계산 하에 "람차오(攬炒)"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광둥어로 람차오는 옥이나 돌이나 다 함께 탄다는 의미의 "옥석구분(玉石俱焚)"을 의미한다. 이들은 실제로 중국공산당의 붕괴를 위해 투쟁하는 젊은 혁명가들이다.

"람차오 전술의 핵심은 홍콩경제를 위기에 빠뜨려 중국경제에 큰 타격을 주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무역전쟁 속에서 최근 몇 년 간 중국의 경제는 슬럼프를 겪고 있습니다. 금융시장에 거품이 잔뜩 끼어 있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람차오 전술이 기적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 전통의 여러 왕조처럼 중공정부의 정당성은 바로 능력주의(meritocracy)라 할 수 있습니다. 인민을 배불리 먹여 살리지 못하면, 중공정부는 천명을 상실하고 말겠죠. 우리는 중공의 종말을 보려 합니다."

개혁개방 이후 중공정부는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세워 인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있다. 지난 해 홍콩의 시위가 격화되자 베이징은 이제 노골적으로 일국양제의 기본전제를 허무는 국가안보법의 제정을 추진했다. 중공정부가 홍콩의 자치권을 허물어버리면, 국제금융의 허브로서 홍콩이 갖는 매력은 소멸되게 된다.

현재 홍콩의 경제규모는 대륙 전체의 3% 정도에 불과하지만, 중국의 대외무역 통로로서 홍콩이 갖는 중요성은 여전하다. 중국의 부패한 권력자들이 돈세탁의 창구로 홍콩을 이용해 왔음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홍콩의 몰락은 곧 중국경제의 몰락이며, 그 중국의 권력자들이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세바스찬의 말대로 바로 지금이 중국의 민주화를 이루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때문에 홍콩의 시위대는 극한의 람차오 전술로 중공정부와 긴장을 이어가려 한다. 골리앗의 머리에 돌팔매를 하고 재빨리 달아나는 다윗을 연상시킨다.

◇홍콩은 ‘자유의 오아시스’…중국, 국제적 고립 자초

물론 과격한 람차오 전술에 반대하는 홍콩시민들도 많다. 그 사실을 잘 아는 홍콩의 시위대는 최대한 많은 시민을 포섭하는 다양한 전술의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다. 2014년 우산혁명 때 투쟁의 전술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분파들 사이의 싸움이 운동의 동력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화·이·비(화평, 이성, 비폭력)의 평화적 방법과 무장투쟁을 마다 않는 용무(勇武) 전술이 혼용되고 있다. 시위대는 "형제들이 함께 산을 오르지만 각자 노력을 해야 한다"며 "갈라서지 말고, 싸우지 말고, 밀고하지 말자!"를 외치고 있다.

아울러 국제사회의 협조를 이끌기 위한 국제전선의 활동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2019년 11월 미국의 의회에서는 상·하원의 초당적 지지를 받아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이 통과됐다. 요컨대 홍콩의 시민들은 특별한 지도부도 없이 다양한 전술을 동원해 본격적으로 중공정부와의 싸움에 나섰다. 그들의 투쟁이 자못 무모해 보이지만, 중공정부는 현재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중공 외교부는 국가안보법은 국가분열과 체제전복을 꾀하는 극소수의 과격분자들과 외국의 간섭을 막기 위한 국가주권의 행사라 주장한다. 홍콩 자치의 종말일까. 홍콩인들의 등 뒤에는 미국의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이 있다. 마틴 리의 표현대로 중국에서 홍콩은 "자유의 오아시스"이다. 4인방이 구속된 그 오아시스에 문혁의 회오리가 일고 있지만, 오아시스가 진정 말라버릴 수 있겠는가? 이번 여름 우리에게 홍콩의 마파람은 또 무슨 소식을 전해줄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계속>


2020년 5월 24일 홍콩 시위 현장에 나온 어린이들. 가방 문구는 왼쪽부터 "도와줘요! 나의 자유는 어디 있나요?" "옥처럼 부서질지언정 안 깨진 기왓장이 되진 않으리!(장렬하게 옥쇄할지언정 비굴하게 살지 않으리!)." Studio Incendo

 

 <8회> 코로나 잡은 'QR코드 전체주의'...빅브라더가 되어가는 중국

◇중국 관영매체 연일 “위대한 중공의 영웅적 리더십” 칭송

현재 중국의 관영매체는 살짝 들떠 있다. 날마다 “위대한 중공의 영웅적 리더십”을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다. “오만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코로나에 보기 좋게 당했기 때문이다. 2020년 5월 30일 현재 미국의 확진자가 180만에 육박하고, 사망자는 10만을 이미 넘었고, 백만 명당 사망자는 316명이다. 세 지표 모두에서 단연 세계1위다. 반면 중국은 여전히 확진자 8만2천999명, 사망자는 4634명이고, 백만 명 당 사망자는 3명에 불과하다. 설상가상 미국에선 성난 군중의 폭력시위가 터졌지만, 표면적으로 중국은 꽤나 안정돼 보인다.

“미국도 바이러스에 속수무책 무너지는데, 다섯 배 인구의 중국임에랴!” 방역 초기 패닉 상태로 내몰렸던 중국의 인민은 미국의 고전을 보면서 자신감을 회복했다. 방역의 자신감은 애국주의를 부추긴다. 국제사회와의 여론전에 중국의 인민이 나서고 있다.

지난 4월 2일 100명의 중국인 학자들은 미국을 향해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그들은 “한 세기 가장 위험한 전염병에 직면한 지금”, 중국을 향한 “손가락질(finger-pointing)”을 멈추라 촉구했다. 그들은 또한 “바이러스의 정확한 진원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며 “중국은 바이러스의 피해국”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중국은 세계에 모범이 되는 방역 성공 국가라며 중공 정부를 칭송했다.

민간의 학자들이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을 비판하는 애국투쟁을 전개하자 중공정부는 더더욱 고무된 듯하다. 지난 5월 28일 중국 전인대(全人大)는 과감하게 국제사회의 비판에 아랑곳없이 99.7%의 찬성으로 대(戴) 홍콩 국가안전법을 승인했다. 미국이 위기에 내몰리자 중국은 체제전쟁의 선수(先手)를 친 듯하다. 방역대국 중국의 체제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은 걸까? 그보다는 오히려 내부의 결속을 다지려는 전술 같다.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는 브에노스 아이레스 출신 예술가 막소마틱(Max-o-matic, Maximo Tuja, 1975 - )의 콜라주(collage) 작품. https://maxomatic.net/>



◇검역 대가로 신상정보 통제, 디지털 독재 착착 진행

무릇 독재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먹고 자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공정부가 추진해 온 디지털 전체주의를 확립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중공정부는 이미 2020년부터 개개인의 모든 정보를 통합·관리하는 사회신용시스템을 실시할 것이라 예고해왔다. 공교롭게도 전국적 시행을 코앞에 두고서 역병이 발생했다. 음모론을 부추길 필요는 없다. 역병이 아니라도 도입될 중공정부의 디지털 독재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중국 대부분의 도시에선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데도 갈 수가 없다. 어디를 가든 검역원들이 체온계를 들이댄다. 체온검사 후엔 모든 사람이 휴대폰을 내밀어야 한다. 모든 휴대폰엔 의무규정으로 신원확인 앱(APP)이 깔려 있다. 휴대폰을 열고 QR코드를 스캔해야만 건물마다 설치된 검역라인을 통과할 수 있다. 개개인의 동선은 “빅브라더”의 관제탑에 실시간 보고된다. 인민은 자발적으로 휴대폰의 QR코드를 내민다.

<윈난성 쿤밍시에서 체온을 재고 QR코드를 스캔하는 사람들, 2020년 2월 경> https://www.nytimes.com/2020/03/01/business/china-coronavirus-surveillance.html



위기를 틈타 국가권력은 인민의 사생활에 침투한다. 그 모습이 숙주의 세포에 결착되는 바이러스를 닮았다. 인민은 사생활의 큰 부분을 포기하지만, 검역(檢疫)의 혜택을 누릴 수는 있다. 이제 중공정부는 오웰적(Orwellian) 사회통제의 시스템을 완성해 가고 있다.

홉스의 통찰대로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데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빅브라더의 통제를 수용한다. 검역의 대가로 중공정부는 개개인의 신상정보를 고스란히 앗아간다. 실시간 휴대폰을 털리는 개개인은 정부에 모든 약점을 노출하고 만다. 순종하면 무사하지만, 저항하면 약점이 까발려진다. 바야흐로 QR코드 전체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한일기 작가 팡팡은 매국노”…새 문혁의 전조?

건국 초 한국전쟁의 발발은 마오쩌둥에게 내부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후 중·소 분쟁은 문화혁명의 좋은 토양이 되었다. 미국과의 체제전쟁도 예외일 수 없다. 외부의 적국이 설정되면, 인민은 적인(敵人)과의 투쟁을 강요받는다. 표면상 친정부세력과 반정부세력의 투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관민이 결합되어 일사분란하게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정치 캠페인이다.

2020년 1월 25일 우한의 유명작가 팡팡(方方, 1955- )은 블로그에 ‘우한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작가는 대부분 인터넷에 글을 쓸 때 스스로 작품을 “검열”한다. 팡팡은 그러나 날마다 수백만의 평범한 우한의 시민들이 겪은 격리의 공포를 깨알같이 기록했다. 봉쇄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국가기관의 일상적 폭력도 핍진하게 묘사했다. 팡팡의 일기가 큰 반향을 일으키자 정부는 블로그를 폐쇄했다. 현재 영역 중인 ‘우한일기’는 2020년 8월 18일 미국에서 출판 예정인데······.

<팡팡의 '우한일기' 영역본 및 작가 팡팡(1955- ), 2020년 8월 미국에서 출간 예정> https://thetyee.ca/Culture/2020/05/27/Wuhan-Diary-Book/



상당수 중국 지식인들은 팡팡의 작품이 미국에서 출판되는 상황이 영 마뜩치 않다. 후난(湖南)대학 웨루(岳麓)서원의 라이상칭(賴尙淸, 1976 - )교수는 4월 10일 한 문예지에 팡팡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칼럼을 기고했다.

“서방인의 시각에서 중국사회 및 정부를 비판하는데 이러한 비판은 완전히 객관적인가? 현재 서방 정부의 방역 통제는 실수투성이며, 심지어 실패했다 할 수도 있다. 서방이 팡팡의 일기를 이용해서 역병 통제의 실패와 정부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곳곳에서 팡팡을 옹호하는 인사들은 말한다. 루쉰도 ‘광인일기’를 쓰지 않았는가? 그들의 이러한 비판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왜냐면 루쉰의 ‘광인일기’는 어떻게 읽든 결국 허구의 문학작품이지만, ‘우한일기’를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읽든 모두 저명한 작가 팡팡이 우한에서 직접 기록한 진실의 문헌이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칼럼의 결론에서 라이교수는 묘한 말을 남긴다.

“한 개인은 시대의 한 톨 작은 먼지인가, 아니면 큰 산인가? 이는 그가 보편적 공공이익을 통찰할 수 있는지, 또 그 길을 따라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이름이 천하를 덮을수록 더더욱 그 사람은 발을 헛딛고 나락으로 추락하게 될 터이다.”

작가의 심장을 겨눈 날카로운 비수가 아닐 수 없다. 라이교수의 비판을 분석하자면, 1) 팡팡은 공공이익을 통찰하지 못했으며, 2) 매명의 욕구에 사로잡혀 3) 중국의 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고, 4) 그 결과 서방세력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팡팡은 이미 매국노의 오명을 썼다. 서방에서 ‘우한일기’가 주목받고 팔릴수록 중국에서 팡팡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섬뜩한 정치투쟁의 화약내음이 난다. 과민방응일까? “10년의 대동란(大動亂)” 문화혁명(1966-1976)은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한 편 희곡에 대한 한 평론가의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나락으로 추락하게 될 터”란 라이교수의 문장을 접할 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까닭이다. <계속>

<9회> "빅 브라더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음모 꾸미는 국가 속의 깊은 국가(deep state), 정부 속의 그림자 정부

국가 속에 더 “깊은 국가(deep state)”가 있다. 정부 안에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가 있다. 그들은 밤낮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정보를 조작하고 사실을 변조한다. 우리는 그들이 지어낸 판타지만 볼 수 있다. 그들이 꾸며낸 스토리만 들을 수 있다. 현실은 가상이다. 진실은 착각이다. 자유는 예속이다. 모르는 게 힘이다. 비밀을 지키려면 먼저 스스로를 속여야만 한다. 1948년 영국에서 작가 조지 오웰이 간파했듯, “지금도 빅 브라더께서 너희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2020년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오늘의 현실일 수도 있다.

그는 국가 속에 더 깊은 국가를 세우고 정부 안에 그림자 정부를 만들었다. 그가 꾸민 음모는 치밀했다. 그가 친 덫은 촘촘했다. 그는 철두철미 스스로를 속여서 비밀을 유지했다. 스스로 100% 속았기에 그는 인민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다. 국가 속의 “깊은 국가”에 칩거하면서 그는 혁명의 시나리오를 썼다.

1981년 6월 27일 중공중앙은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66~1976년 중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은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이 직접 기획해서 일으킨 일대의 동란이었다. 그 드라마의 “시즌 1 에피소드 1”은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서 끝까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이어가자! 혁명은 무죄다! 반란을 정당하다!" 문혁 당시의 포스터, chineseposters.net>

 


◇명나라 충신 다룬 우한의 해서파관(海瑞罷官) 처음엔 극찬… 반혁명 분자로 몰려

“해서파관”은 1961년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이 쓴 베이징 오페라단의 경극(京劇) 대본이었다. 해서(海瑞, 1514-1587)는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7)에 직언했던 명나라 충신이다. 우한은 명태조(明太祖, 재위 1368-1398)의 전기 ‘주원장전(朱元璋傳)’으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명대사(明代史) 연구자다. 문필가로 최고의 문명을 날렸던 그는 당시 베이징시 부(副)시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1958년 12월 마오쩌둥은 후난성 창사(長沙)의 전통 악극 "생사패(生死牌)”를 관람한 후부터 "해서의 정신을 배우라!"고 훈시하고 다녔다. 허위 보고를 일삼는 간부들을 질타하기 위함이었다. 명대사에 정통한 우한은 마오쩌둥의 특명을 받아 ‘해서파관’을 썼다. 일곱 차례 수정을 거쳐서야 그는 간신히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대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명나라 수상 서계(徐階, 1503-1583)는 은퇴 후 귀향한다. 그의 아들 서영(徐英)은 부랑아다. 그는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고, 농민 조옥산(趙玉山)의 아들을 죽게 한다. 그도 모자라 조옥산의 손녀딸 소란(小蘭)이를 납치한다. 소란의 어머니 홍씨는 관아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나 매수당한 현령 왕명우(王明友)는 조옥산을 처형하고 홍씨를 쫓아버린다. 마침 응천부 순무(巡撫)로 부임한 해서는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서계는 해서에게 토지를 헌납할 테니 덮고 가자 제안한다. 해서는 불법 점유지는 백성의 것이며,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격분한 서계는 조정의 신하들을 움직여 해서를 탄핵한다. 신임 순무 대풍상(戴風翔)은 해서의 눈앞에 파면의 칙서를 내미는데, 해서는 황제의 직인을 보면서도 굽힘 없이 죄인들을 참수한다.

<1960년대 초반 베이징 경극단에 의해 상연된 역사학자 우한의 "해서파관". 우한의 역사극은 문화혁명의 불쏘시개로 이용된다. 공공부문>



극본이 발표되고 경극이 상연되자 언론의 찬사가 이어졌다. “풍부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관중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는” 수작, “역사연구와 현실참여의 능숙한 결합,” “옛날을 빌어 오늘날을 풍자하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의 전범 등등. 역사연구를 혁명의 무기로 활용했다는 긍정평가도 있었다. 마오쩌둥 역시 경극을 관람한 후 작품을 칭찬했다.

경극의 성공에 고무 받은 우한은 1961년 10월부터 1964년 7월까지 베이징시위원회 기관지 ‘전선(前線)’에 언론인 덩퉈(鄧拓, 1912-1966), 작가 랴오모샤(廖沫沙, 1907-1991)와 함께 우난싱(吳南星)이란 필명으로 60여 편의 풍자성 칼럼을 3년 간 연재한다. 풍부한 역사지식을 활용한 이들의 칼럼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큰 인기를 누린다.

1965년 11월 말 우한은 폭풍의 눈에 말려 들었다. 갑자기 그는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린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비판의 화살이 그를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렸다. 곧이어 덩퉈와 랴오모샤에 불똥이 튀었다. 두 사람이 나서서 우한을 변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이마에도 반혁명분자의 낙인이 찍혔다. 그들은 항변을 이어갔지만, 더 극심한 비난과 매도가 잇따랐다. 그들이 써온 모든 글들은 반혁명의 활동으로 매도되었다. 당시의 글을 하나 들춰보면 섬뜩한 언어에 머리칼이 솟는 느낌이다.

“이들의 반(反)당, 반(反)인민, 반(反)사회주의의 추악한 면모는 이미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공명정대한 노동자, 농민, 병사들과 혁명 간부, 혁명적 지식인들이 ‘삼가촌’ 반당집단에 대한 올곧고 엄격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들의 글은 모두 ······· 독초들이다.”

<왼쪽부터 덩퉈, 우한, 랴오모샤, 문혁 초기 최초의 공격대상>



집단광기의 표적이 되어 수개 월 비난과 욕설에 시달린 사람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섬세한 감성의 시인 덩퉈는 반년 간 지속된 집단적 언어폭력을 견디지 못했다. 1966년 5월 17일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중공중앙이 저 유명한 “5.16통지”를 돌려서 문혁을 공식화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우한은 덩퉈처럼 자살할 기회도 없었다. 3년 간 홍위병 집회에 끌려 다니던 우한은 1969년 감옥에서 60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둔다.

◇마오쩌둥, 류사오치 숙청 위해 측근부터 잘라내

정부 안의 “그림자 정부”에서 마오쩌둥은 혁명의 시나리오를 짰다. 숙청의 “쓰리쿠션”을 치기 위함이었다. 우한은 베이징시장 펑전(彭眞, 1902-1997)과 절친했다. 펑전은 국가원수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의 측근이었다. 마오는 류를 실각시키기 위해 펑을 노렸고, 펑을 잡기 위해 우를 먼저 쳤다. 베이징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자르려는 의도였다. 우한은 결국 문혁의 불쏘시개가 되고 말았는데, 우한에 대한 마오의 뿌리 깊은 증오심도 작용한 듯하다. 그 점에 대해선 나중에 상술하기로 한다.

마오는 중공중앙이 장악한 베이징 대신 상하이를 혁명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상하이 배우출신 장칭(江靑, 1914-1991)을 내려 보내 그곳에서 문혁의 이너서클을 만들게 했다. 상하이 문예계의 중심인물 장춘차오(張春橋, 1917-2005)는 장칭과 긴밀하게 연결된 문화계 핵심인사였다. 장춘차오는 만34세의 신예 문학평론가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을 발탁했다. 이들은 이후 4인방의 핵심 멤버로 맹활약한다.

마오의 밀유(密諭)에 따라 야오원위안은 우한의 “해서파관”을 공격하는 비평문을 집필했다. 마오는 야오가 제출한 아홉 번 째 수정본을 출판 직전 세 차례나 직접 첨삭했다. 야오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평”은 18개의 미주(尾註)까지 달린 200자 원고지 100매에 달하는 긴 글로 완성되었다. 국가 속의 “깊은 국가”에서 마오가 기획하고 감독하고 수정한 문혁의 뇌관이었다.

마오는 베이징의 언론을 뚫으려 했으나 ‘인민일보’는 야오의 글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득이 야오의 글은 1965년 11월 10일 상하이의 ‘문회보(文滙報)’에 먼저 실렸다. 20일이 지나서야 같은 글이 ‘인민일보’ 5-6면 “학술연구”면을 장식하게 된다. 그 20일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계속>

<문혁 당시 역사학자 우한을 공격하는 홍위병들. 위의 포스터에서 홍위병의 창살이 뚫은 "삼가촌(三家村)"은 우한, 덩퉈, 랴오모샤가 연재했던 칼럼을 의미한다. 우측상단을 보면, 한 홍위병의 손에 야오원위안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이 들려 있다. 공공부문>

 

<10회> 4500만 굶어죽게 한 폭정에도 어떻게 권력 유지했나

◇리더십이 국가 운명 가른다…마오의 총체적 실패

리더십이 국가의 명운을 가른다. 리더십은 종합적 국가경영의 능력이다. 국가의 리더는 정부의 중장기 목적을 설정하고, 발전전략을 창안한다. 행정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액션플랜을 설계한다. 복잡다단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크고 작은 위기를 관리한다. 의사소통의 능력과 행정상의 추진력도 빼놓을 수 없다. 좋은 리더십은 경제를 살리고 사회를 안정시킨다. 나쁜 리더십은 경제를 후퇴시키고 사회를 해체한다. 리더십에 따라 국가의 근본가치와 사회·경제적 기본제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유교의 전통에서 리더십의 총체적 실패를 폭정(暴政)이라 부른다. 폭정을 초래한 나쁜 지도자를 폭군(暴君)이라 부른다. 폭군의 폭정은 최악이다. 경제를 망쳐서 민생을 위태롭게 한다. 사회갈등을 조장시켜 야만적 폭력의 상황을 초래한다. 다수 지지를 얻어 등장한 권력일지라도 정책실패로 위기를 초래하면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천명(天命)이 뒤바뀐다. 천명이 바뀌면, 정권의 교체를 넘어 국가체제의 근본적 전환까지 요구될 수 있다. 폭군의 폭정은 그렇게 혁명의 모멘트를 배태한다.

폭군의 폭정은 멀리 있지 않다. 마오쩌둥 통치 하의 중국의 경제는 총체적 대실패를 면치 못했다. 소련식 경제 5개년 계획(1953-1957)으로 중국경제는 4%의 성장을 이뤘으나 대약진운동(1958-1961)으로 중국경제는 몰락했다. 대기근으로 3천만에서 4천5백만의 인민이 아사했다. 미(未)출생인구까지 보면 대략 7천6백만의 인구가 희생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그는 분명 희대의 폭군이었다.

<“노동자계급이 일체를 영도해야 한다!” 1970년, 작자미상.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은 늘 노동자 농민 계급의 영도력을 강조했다. chineseposters.net>

 


◇마오, 덩샤오핑이 경제 살리자 ‘문혁’ 일으켜 숙청

무너진 경제의 재건을 위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과감하게 농업우선정책(1961-1965년)을 추진했다. 그 결과 연평균 9.6%의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폭정을 선정(善政)으로 뒤바꾼 스마트한 실용의 리더십이었다. 대기근을 초래해 이미 천명을 상실한 마오는 정치적 계략에 몰두한다. 그는 중공중앙의 권좌에서 류와 덩을 몰아내기 위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마오는 “10년의 대동란”을 통해서 죽는 날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역시나 경제였다. 마오의 권력이 유지될수록 경제는 더욱 얼어붙었다. 1967년 한 해 산업생산량은 무려 14%나 감소했을 정도다. 식량 배급분이 줄어들고 가용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삶은 갈수록 각박해졌다. “살림살이 고달픈데 혁명이란 웬 말인가?” 1976년 4월 청명절을 맞아 중국인민들은 톈안먼 관장이 몰려나와 광란의 정치를 규탄하며 울분을 토로했다.

5개월 후 9월 9일 마오는 마침내 숨을 거둔다. 죽기 며칠 전 그는 부인 장칭과 후계자 화궈펑을 앞에 두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한 평생 장제스와 전쟁하고 문화혁명을 했다. 전자의 공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후자에 대해선 다른 견해도 있는 듯하다.”

마오의 사망은 급변을 예고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올랐다. 다음 달 그는 미국으로 날아간다. 공산권 지도자로는 최초의 방미였다. 중국의 변화 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1962년 덩샤오핑은 이미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의 비유를 들며 실용주의 개혁을 주도했었다. 문혁 기간 동안 그는 두 번이나 가혹한 숙청을 당했다. 그의 동생은 자살했고, 아들도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세계는 덩샤오핑의 진심을 신뢰했다.

1978년에서 2005년 사이 중국은 연평균 10%의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경제가 매해 10%씩 성장하면, 매 7년마다 2배, 4배, 8배, 16배씩 기하급수적으로 경제규모가 팽창한다. 개혁개방은 중국을 송두리째 바꾼 포스트-마오 시대 중공정부의 혁명적 결정이었다.

어떻게 그 큰 변화가 가능했을까? 국가경영의 기본노선이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마오의 공산 근본주의 대신 덩의 경제적 실용주의가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 되었다. 중국철학의 개념을 빌자면, “엄(嚴)”의 통치가 “관(寬)”의 통치로 뒤바뀐 결과다. 마오쩌둥은 과연 어떻게 폭군의 폭정을 초래하고도 권력을 유지했을까? 정치학적 난제가 아닐 수 없다.

<1983년 9월 26일자 타임지 표지 “마오의 유령 추방하기”>

 


◇“敵我를 식별하고 단 하나의 적에 공격 집중하라”

1965년 12월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오를 숭배하는 지식인들은 일사분란하게 4년 전 발표됐던 그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공격해댔다. 우한은 학계 및 예술계에 똬리 튼 반혁명·수정주의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마오쩌둥의 혁명이론에 따르면, 혁명은 언제나 아군과 적군의 식별에서 시작된다. 적아(敵我)구분의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단 한 명의 적에 공격을 집중하는 것이다. 우한을 향한 문예계의 비판이 고조되자 그를 옹호하는 집단이 순식간에 부각되었다. 우한의 “해서파관”을 놓고 중국의 학계와 문예계가 두 편으로 선명하게 갈라졌다. 언론의 기고문과 관영매체의 선전을 통해 얼마 후 마오를 추종하는 극좌(極左)세력의 라인업이 실체를 드러냈다.

문혁의 제1선에는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와 치번위(戚本禹, 1931-2016) 등 30대 신예들이 배치됐다. 제2선에는 관펑(關鋒, 1919-2005), 장춘차오(張春橋, 1917-2005), 왕력(王力, 1922-1996) 등 40대의 중견지식인들이 포진했다. 그들의 뒤에는 천보다(陳伯達, 1904-1989), 캉성(康生, 1898-1991), 셰푸즈(謝富治, 1909-1972)와 장칭(江靑, 1914-1991)이 있었다. 문혁의 사령탑 꼭대기에는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이 떡 버티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호화열차에 몸을 싣고 베이징을 떠난 후였다. 그는 우한과 항저우의 고급 빌라에 머물면서 문혁의 정치판을 원격조정했다.

<“마오주석을 따라서 영원히 혁명을 일으키자!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8주년을 열렬히 경축하며!” 1967년 작. 작가: 왕후이(王暉). 문화혁명의 지도부: (왼쪽부터) 캉성,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장칭 chineseposters.net>

 


마오의 투쟁이론에 의하면, 내부의 적과 투쟁하기 위해선 우선 외부의 적을 인지해야 한다. 문혁 발발 직전 마오가 감지한 외부의 적은 미소 양국이었다. 야오원위안의 우한 비판이 게재된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 제1면 헤드라인은 저우언라이 총리의 연설문을 보도 하고 있다.

“전 세계는 현재 대격변, 대분화, 대개조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오와 세계인민의 혁명역량은 신속하게 확대되고 있다. 거대한 반미(反美)혁명의 새로운 폭풍이 일어나고 있다! 미(美)제국주의에 맞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위하고, 무산계급과의 국제연대와 세계혁명의 인민대오를 결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흐루쇼프 수정주의에 반대해야만 한다.”

반미·반수(反修, 반수정주의)의 국제적 맥락은 어렵잖게 짐작된다. 1964년 8월 베트남북부 해역에서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의 존슨행정부는 베트남에 18만 4천 명의 전투병을 배치했다. 베트남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중국의 언론은 날마다 반미 선전문구를 쏟아냈다.

1965년 9월부터 소련에서는 흐루쇼프의 후임 알렉세이 코시긴(Alexei Kosygin, 1904-1980)이 집권했다. 그는 임금인상, 노동복지, 소비재공급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1965년 소련경제개혁”을 개시했다. 소련의 과감한 경제개혁은 당시의 류와 덩이 이끄는 경제개혁과 절묘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국제정세에 대응하여 마오는 소련식 수정주의의 비판이야 말로 미제국주의의 준동에 맞서 공산혁명의 생명을 지키는 숭고한 투쟁이라 선전했다. 비로소 그는 미·소 양국을 모두 외부의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내부의 적을 소탕하는 이념의 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마오는 경제를 망치고 민생을 위기로 내몬 폭정의 폭군이었다. 그럼에도 마오는 인민의 심장에 불을 질러 정적들을 모두 도려낼 수 있는 음모와 계략의 최고수였다. 폭군의 권모술수, 거기서 현대중국의 모든 비극이 시작됐다.<계속>

<1966년 6월 베이징 시내를 행진하는 홍위병의 모습. 문혁 당시 10대의 청소년들은 마오쩌둥 권력의 원천이었다. / 공공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