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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 이야기3/ 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1)'하드 보일드’ 장동휘 - <마지막 회> 지나치게 잘생겼던 사나이 남궁원

상림은내고향 2019. 12. 20. 17:19

2011년 신동아 04월 호  글 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  오승욱 영화감독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눈짓 한 번 주먹 한 방으로 영화계를 평정한 사나이


  • 1960~70년대는 액션 영화 전성시대였다. 수많은 전쟁과 피가 튀는 격투, 사내들 사이의 배신 복수 의리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박노식의 ‘용팔이 시리즈’는 전국에 전라도 사투리를 유행시켰고, ‘미국에서 날아온 태권스타’ 한용철은 ‘외다리 시리즈’로 동네 꼬마들을 달뜨게 했다. 영화 ‘킬리만자로’로 한국 액션 영화의 새로운 전범을 만든 오승욱 감독이 이소룡과 할리우드 웨스턴이 우리 스크린을 정복하기 전, 짧지만 뜨거웠던 한국 액션 영화 전성기를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첫 순서는 ‘팔도 사나이’의 김두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분대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1세대 액션 스타 장동휘다. 눈썹을 조금 움직이거나 눈매를 약간 비트는 것만으로도 시대와 사회의 어둠을 표현했던 매력적인 악당, ‘절대적 큰형’ 장동휘를 추억한다. <편집자 주>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1978년작 ‘경찰관’에서 자긍심 넘치는 경찰을 연기한 장동휘. 그는 개성 있는 연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액션 스타였다. 

 

옛날 옛적 종로의 밤거리.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거리 한복판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내가 서 있다. 하얀 목장갑을 낀 사내는 꽁꽁 얼어붙은 종로 거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친다.

“나가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용팔인디, 서울 종로에서 제일 센 놈이 뉘기여! 얼릉 나와서 나랑 한번 붙어보자고!”
 
행인들은 사내의 위세에 눌려 힐끔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도망치고, 술집 창문 사이로 사내를 훔쳐보던 술꾼들은 사내의 부리부리한 눈과 마주치자, 얼른 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건방진 사내의 도발에 못마땅해 하던 종로의 깡패 똘마니 두엇이 덤볐다가 쌍코피를 흘리며 도망친 뒤라 나서는 자는 이제 아무도 없다. 바람이 불어 사내의 저고리 옷깃이 날리고, 그가 서울 종로 거리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돌아서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난다. 사내는 말없이 검은 가죽장갑 낀 손을 단단히 여미고 주먹을 쥔다.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리며 쉴 새 없이 지껄이던 용팔이는 상대가 지금까지 맞붙었던 여느 똘마니와는 격이 다른 무시무시한 기세를 지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문다. 마주 선 두 사내 사이로 바람이 분다. 꼼짝 않고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내. 고함을 지르며 용팔이가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에게 달려든다.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는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번개같이 주먹을 뻗는가 싶었는데, 큰소리 치던 용팔이는 단 한 방에 종로 거리에 큰 대자로 나뒹군다. 그는 자신이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이 믿기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덤벼들지만 검은 가죽장갑을 낀 사내의 주먹에 또 나가떨어진다. 임자를 만난 것이다. 용팔이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검은 장갑의 사내에게 넙죽 큰절을 하며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그러자 검은 장갑의 사내는 미소를 짓고, 용팔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지금까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연다.

“좋은 동생이 생겼구나.”  

영화 ‘팔도 사나이’(김효천 감독, 1969)의 한 장면.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는 영화 속에서 김두한을 연기한 장동휘이고, 전라도에서 올라왔다는 용팔이란 사내가 박노식이다.







 
한국 영화 최고의 주먹 

어린 시절, 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동네 극장 드나든 경력을 과시하면서 하는 말이 액션 영화 최고의 주먹이 누구냐는 것이었는데, 이때 항상 1, 2위를 다투는 인물이 장동휘와 박노식이었다. 물론 이대엽을 이야기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바로 무시당하곤 했다. 누가 더 센지를 놓고 다투다가 ‘팔도 사나이’에서 장동휘, 박노식의 종로 거리 대결 장면을 기억해낸 아이들은 장동휘의 주먹이 더 센 것으로 합의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박노식을 더 좋아했고, 박노식이 한국 영화 최고의 주먹이라는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았으며, 장동휘는 너무 폼만 잡아서 별로라 생각했다. 그 결과 아쉽게도 나는 어린 시절 장동휘와 영화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2000년대 초반,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의 사무실에서 한국 액션 영화에 대한 잡담을 나누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한국 액션 영화배우 중 가장 매력적인 남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기자들은 본 영화가 없으니 입을 다물었고, 어려서부터 한국 영화를 무지막지하게 섭렵한 40대 여자 편집장과 내가, 영화광들이 서로의 혈액형을 탐색하는 그들만의 놀이를 시작했다.  

소설 ‘살인자들의 섬’으로 유명한 데니스 루헤인의 범죄 소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중 한 편에는 이런 상황이 나온다. 탐정인 켄지가 사건의 핵심을 알고 있는 자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는데, 반신불수에 투박한 심성을 지닌 정보 제보자는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정보 제보자가 말끝마다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다가, 켄지에게 남자 배우 중 최고는 누구냐고 묻는다. 켄지가 대답을 않자, 정보 제보자는 “랭커스터. 절대적으로”라고 한다. 켄지 역시 “절대적으로 미첨”이라 답한다. ‘절대적으로’라는 말은 오직 그 하나만을 최고로 좋아한다는 것이고, 그 이외에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 따위는 없다는 뜻이다. 결국 두 사내는 상대방의 배우 취향에 경의를 표하고 서로 친해진다.  

나는 ‘절대적으로’ 두말할 나위 없이 박노식이었는데, 여자 편집장은 ‘절대적으로’ 장동휘라는 것이다. 의외였다. 최무룡을 지목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폼만 잡는 배우 장동휘에게 여자가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여자 편집장은 그를 좋아하는 이유로 “다른 남자 배우들과 달리 그의 연기에서는 허무주의자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는 점을 들었다. 장동휘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다니, 여자라서 남자들이 못 보는 면을 보는 건가 싶었고, 그 후 영상자료원에서 장동휘 주연의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나와 장동휘 영화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눈으로 연기하는 배우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임권택 감독, 1971)를 보자. 장동휘가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박노식과 문희, 그녀의 아버지가 일어나 인사를 한다. 결혼 전 양가의 상견례 자리다. 아름다운 여인 문희와 그녀를 사랑하는 청년 박노식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신사 장동휘. 그 옛날, 전쟁통에 고아가 된 박노식이 깡통 하나 달랑 들고 명동 거리를 배회하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를 거둬주고 친자식처럼 아끼고 돌봐준 이가 바로 장동휘다. 그는 박노식에게 친아버지 이상의 존재다. 그런 박노식이 아름다운 문희를 아내로 맞이하는 자리에서 장동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다. 사랑하는 딸 최지희가 박노식을 짝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날, 최지희는 꿈에 부풀어 박노식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했고, 장동휘는 자기 딸과 믿음직한 박노식이 가정을 꾸미기를 바랐다. 그런데 박노식에게 최지희는 그냥 여동생일 뿐이었고, 그에게는 문희가 있었다. 실연한 딸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친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박노식과 그가 사랑하는 여인 문희를 바라보는 아비 장동휘. 그가 감정에 휩싸여 있을 새도 없이 위기가 닥친다. 장동휘와 박노식은 암흑가의 깡패들이다. 양가 상견례 자리는 공교롭게도 라이벌 조직의 구역이다. 라이벌 조직은 장동휘와 박노식이 자신들의 구역에 온 것을 도발이라 보고 그들을 치려고 한다. 이때 장동휘가 나서서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눈감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승냥이 같은 라이벌 조직의 깡패들은 대가를 요구하며, 장동휘의 배에 칼날을 깊이 박아 넣는다. 칼에 찔린 몸으로 문희와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둘의 사랑을 축복하는 장동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는 1970년대 초 수없이 만들어진 깡패 영화들 중 주인공들의 증오와 사랑의 감정이 가장 첨예하게 스파크를 일으켰던 흔치 않은 영화였고, 장동휘는 양아들 박노식과 김희라, 그리고 딸 최지희가 사랑과 증오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아버지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배우 장동휘가 매우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표정을 과장되게 만들거나,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배우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고, 그의 감정 표현은 눈썹이 조금 움직이거나 눈매가 비틀어지는 것 정도다. 그래서 당시 평론가들은 그에게 ‘눈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찬사를 바쳤다.




 


매력적인 니힐리스트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한국 액션 영화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후 장동휘는 ‘만무방’(사진, 1994) 등 멜로 영화에서 노년 연기를 하다 세상을 떠났다. 

장동휘가 연기를 극도로 자제해 더욱 매력이 드러나는 괴작으로는 ‘암살자’(이만희 감독, 1969)가 있다. 테이블 위에 사진이 한 장 놓여 있고, 야비한 미소를 시종일관 입가에 달고 있는 남궁원과 사나운 매의 눈을 가진 신경질적인 사내 오지명이 그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유명한 킬러 장동휘. 남궁원과 오지명은 장동휘에게 암살을 의뢰하러 가는 조직의 똘마니들이다. 장면이 바뀌면, 커다란 창문이 있는 어두운 방 안. 창밖에는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친다. 그리고 그 화면 위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른다. 침입자가 인기척을 내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칼이 날아간다. 방안에 불이 켜지고 침입자의 코앞에 칼이 꽂혀 있다. 칼을 던진 이는 바로 킬러, 장동휘다. 죽음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표적의 마지막 얼굴을 보고 싶어 킬러 일을 한다는 장동휘는 옛날에 자신이 죽인 자의 어린 딸을 키우고 있는 정말로 괴상망측한 자다. 시종일관 관념적인 대사를 읊조리며 자신이 죽여야 할 자를 찾아가는 장동휘는 라스트 신에서 남궁원에게 배신을 당해 쓰러지면서 자신도 죽음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쓴다. 이만희 감독이 장 피에를 멜빌의 ‘사무라이’(1967)를 보고 그것에 필적하는 킬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만들었음이 분명한 이 영화에서 장동휘는 알랭 들롱의 고독한 킬러와 대비되는 니힐리스트 킬러 역을 해낸다.  

편의상 장동휘의 영화를 네 시기로 구분해보면, 데뷔작부터 이만희 감독과 만나기 전, 즉 1957년부터 1962년까지가 첫 번째 시기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하며 악역 조연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시기가 두 번째 시기. 그리고 그의 연기가 무르익고,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 제작을 하는 말 그대로 전성기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를 세 번째 시기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액션 영화가 시대의 조류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후, 멜로 영화에서 노년 연기를 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시기를 네 번째로 보자. 그러면 ‘암살자’와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는 그의 연기가 무르익었던 세 번째 시기에 속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한국 누아르 전성시대 

장동휘가 데뷔한 때는 6·25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서 한국 영화가 ‘춘향전’(1955) ‘자유부인’(1956)의 흥행 성공으로 점차 활기를 찾던 시기였다. 인천에서 태어난 장동휘는 중국에서 연극 단원 생활을 하다 광복 후 귀국, 전쟁을 겪고, 악극단과 연극단 생활을 하다 김소동 감독의 권유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그의 데뷔작은 1957년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 나운규의 ‘아리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 영화 첫 출연작임에도 장동휘는 나운규가 연기했던 영진 역을 맡는다. 오랜 악극단과 연극단 경험으로 그의 연기는 데뷔 당시에 이미 인정을 받았다. 미남형이 아닌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우리는 그를 성격파 배우라고 한다. 장동휘는 데뷔와 동시에 성격파 배우로 이름을 알리며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1950년대 말, 6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액션 영화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일본군과 싸우는 독립군의 무용담을 그린 전쟁 영화와 범죄 스릴러다. 특히 ‘한국 누아르의 시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여러 편의 범죄 영화가 만들어진다. 미국과 프랑스의 누아르 영화에 영향을 받은 범죄 영화들이 스릴러라는 상업적 꼬리표를 달고 수십 편 만들어진 것. 음울한 청춘 범죄 영화의 걸작 ‘지옥화’(신상옥 감독, 1959)를 시작으로 한국 누아르 영화의 걸작이라 부를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0)이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다.  

당시 누아르 영화의 제작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그로테스크한 취향으로 성(性)과 권력의 관계를 파헤치는 걸 즐기던 김기영 감독까지 장동휘가 자신을 형무소로 보낸 형사 김진규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몸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하고 김진규의 집으로 돌진하는 ‘아스팔트’(1964)를 만들고, 평론가들이 “쏟아져 나오는 범죄 영화들이 스릴러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아쉽다”며 “왜 이렇게 범죄 스릴러가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을 정도였다. 성격파 배우 장동휘는 이 시기에 주로 악역 조연으로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해 한국 액션 영화의 악역 3인방 중 한 자리에 오른다.  

한국 액션 영화의 악역 삼인방은 장동휘 허장강 황해, 이 세 사람을 말한다. 허장강이 유들유들한 사기꾼 기질의 사악한 악당이라면, 황해는 제임스 케그니를 연상케 하는 정신분열적인 악당 역을 주로 했다. 그에 비해 장동휘는 하드 보일드. 이 한마디로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투박하고 선이 굵은 악당 역을 전담했고 ‘파멸’(1961) ‘지상의 비극’(1960)에서 지긋지긋한 악종을 연기해 상찬을 받았다.  






 


품격 있는 맏형 

모든 배우가 그렇듯 배우는 감독과의 만남에서 그의 행로가 결정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셀지오 레오네, 존 웨인과 존 포드, 알랭 들롱과 장 피에르 멜빌이 그렇다. 좋은 감독을 만나지 못한 배우는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장동휘는 운명적으로 한국 최고의 감독 이만희를 만나 자신의 캐릭터를 확립하는 두 번째 시기를 연다. 장동휘와 이만희의 첫 만남은 ‘다이얼 112를 돌려라’(1962)였다. 문정숙을 괴롭히는 잔혹한 전 남편으로 출연해 첫 호흡을 맞춘 장동휘는 이듬해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한다. 수륙양용정 안에 한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창밖에는 검푸른 파도가 넘실거리고, 적의 폭탄이 바다에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륙양용정을 뒤흔든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앞으로 치르게 될 전투에 대한 불안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자신의 분대원들을 바라본다. 그는 말이 없다. 다만 자신의 분대원들을 바라볼 뿐이다. 인천 해안에 수륙양용정이 다다르면 적의 총알과 폭격으로 수륙양용정 안의 분대원들은 반 이상 죽을 것이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의 공포를 이해해주고 그들을 격려한다. 과묵하지만 믿음직스러운 분대장. 그가 바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장동휘다. 장동휘는 단호하지만 너그럽고, 사병들의 애환과 고통을 잘 알지만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전쟁광이라는 오해를 받고 부하들 사이에 증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사실 그는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프로페셔널이며, 그의 가슴속에는 부하들의 죽음과 고통을 괴로워하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장동휘는 최고의 스타가 되고, 미남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 조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갖게 된다. 가진 것 없는 비천한 출생이지만, 덕이 있고 품격이 있는, 그래서 수하 누구나 그에게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는 맏형이라는 캐릭터다. 이런 캐릭터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안성기가 ‘무사’(김성수 감독, 2000)에서 고향을 떠나 수년간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포졸 고참 역을 인상 깊게 해낼 때까지 장동휘만이 유일하게 관객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캐릭터였다.




 


고뇌하는 악당 


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영화 속에서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품격 있는 맏형’이었던 배우 장동휘.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듬해 장동휘는 지금까지 그가 해냈던 악역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영화에 출연한다. 바로 ‘검은 머리’(이만희 감독, 1964)다. 악당 두목 장동휘는 자신의 패거리들에게 엄혹한 규율을 세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부하 장혁의 얼굴에 길게 새겨진 상처 자국이 바로 그 증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장동휘의 엄혹한 규율을 그의 아내 문정숙이 어긴 것이다. 과거에 죗값을 치른 장혁이 나서서 규율대로 처단해야 한다고 한다. 장동휘는 자신이 만든 덫에 빠졌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 문정숙은 부하 장혁의 칼에 의해 얼굴에 흉측한 칼자국을 새기고 쫓겨나게 된다. 문정숙은 마약 중독자 정부(情夫)의 협박에 의해 길거리의 창녀로 전락한다. 자신이 세운 규율에 의해 자신이 몰락하는 악당 장동휘는 아내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규율을 스스로 어기고 부하들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된다. 이 영화에서 장동휘는 한국 액션 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 악당을 탄생시킨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스카페이스’(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1984)의 알 파치노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오해는 마시라. 영화광들의 과장벽은 세상의 그 어떤 특효약으로도 고칠 수 없으니. 이 영화를 찾아보고 나에게 돌을 던지지는 마시라는 말이다. 어쨌든 단세포의 재미없는 악당들만 날뛰던 한국 액션 영화에 장동휘와 이만희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오셀로 같은 고민하는 악당, 시대와 사회의 어둠이 깃들어 있는 비극적인 악당을 탄생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광 편집장이 매력을 느낀 니힐리스트 장동휘가 바로 이 시대의 장동휘인 것이다.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과 새로운 유형의 인간상을 창조해내던 한국의 범죄 영화들은 아쉽게도 걸작을 만들어내기 전 군사정권의 영화 탄압에 의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다. 1965년 장동휘가 출연한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 필름이 압수되고, 이만희 감독이 북괴찬양·반공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교도소에서 실형을 산 때부터 한국의 범죄 영화는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인기 절정의 장동휘는 그 시기 수많은 영화에서 비슷비슷한 분대장 역이나 악랄한 인민군 간부 역, 미치광이 같은 일본군 장교 또는 헌병대장 역을 연기한다. 장동휘가 한국 액션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면서 시작된 그의 두 번째 시기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시대의 종말 

장동휘가 그와 자웅을 겨루던 악역 삼총사 허장강, 황해와 의기투합해 ‘동인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만들고, 1966년 ‘영화인 고액 납세자 리스트’ 10위 안에 이름을 올린 때부터 그의 최고 전성기인 세 번째 시기가 시작된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액션 영화, 그것이 바로 ‘팔도 사나이’다. 김두한이라는 살아 있는 전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두한 역으로 출연한 장동휘는 맏형이 돼 조선 팔도의 난다 긴다 하는 주먹들을 규합해 일본 야쿠자들과 종로 바닥을 놓고 겨룬다. 이것은 총과 말이 없을 뿐 할리우드 웨스턴의 신화와 같은 세계였다. 장동휘는 훗날 이대근에게 김두한 역을 물려주기 전까지 오랫동안 1대 김두한으로 이름을 날린다. 사실 김두한 역에 그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깡패 영화 ‘팔도 사나이’는 흥행에 성공해 속편에 속편을 거듭 만들었으며, 그 여파로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우락부락 사내들이 판치는 깡패 영화가 수십 편 만들어졌다. 그 영화들에 장동휘는 꼭 감초처럼 출연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비슷비슷한 영화의 홍수 속에서 ‘이거다’ 싶은 걸작은 앞서 말한 몇 편을 제외하고는 찾기 힘들게 된 이상한 시기였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이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홍콩의 무협 영화와 할리우드 액션 영화와 비교할 때 한국 액션 영화의 만듦새는 형편없는데 관객의 눈이 높아진 것이다. 이소룡 영화와 홍콩 쿵푸영화. 007 시리즈, 아메리칸 뉴시네마 등 홍수처럼 몰려들었다. 수준 높은 이들 외국 영화 앞에서 저예산으로 졸속 제작된 한국 액션 영화는 맥을 못 췄다. ‘절대적 큰형’ 장동휘의 이름도 서서히 잊혔다.  

1978년 ‘경찰관’(이두용 감독) 이후 장동휘를 영화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그 나이에 걸맞은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 주기에 한국 영화계는 각박했다. 결국 1990년대 ‘만무방’(엄종선 감독, 1994) ‘말미잘’(유현목 감독, 1998) 등을 끝으로 그의 파란만장하던 영화인생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아쉬운 것은 장동휘가 한창 일을 해야 할 50대 무렵, 개성적인 캐릭터를 살릴 수 있는 영화를 만나지 못한 점이다. 1960년대에 그와 함께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던 이만희 감독은 권력에 의해 사사건건 자신의 영화가 만신창이가 되는 것에 울화병이 도져 세상을 뜨고 말았고, 1970년대에는 위장 한국·홍콩 합작 영화와 호스티스 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쓰느라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악역으로 출발한 어니스트 보그나인이나 리반 클립이 50대와 60대 때에 젊은 시절과는 다른 멋진 캐릭터로 왕성하게 활동한 것과 비교하면 그는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다.  








②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거칠고 뜨거웠던 영화 천재, 스크린에 ‘한국 사내’를 남기다

 

  • 그는 뜨거웠다. 술 한 잔 들어가면 선배도, 공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 엄혹하던 군사정권 시절, 툭하면 경찰을 때려눕히는 배우는 결단코
  • 박노식 한 명뿐이었다. 수시로 감옥을 드나들다 그 체험을 바탕 삼아
  • 영화 ‘집행유예’를 연출한 괴짜. 그가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은
  • 대상은 영화였다. 땀 냄새 풍기는 뒷모습만으로도 1960년대
  • 가난한 사내들의 절망을 표현할 줄 알았던 배우.
  • 수준 높은 B급영화를 연출했던 천재 감독. 폼 나게 살고 싶었으나
  • 비극적으로 몰락한 ‘용팔이’ 박노식을 추억한다.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영화에서나 삶에서나 ‘마초’ 그 자체였던 배우 박노식.

1968년 4월22일 오전 1시. 대구의 금호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영화배우 박노식이 김진규·장동휘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넘어져 호텔 깡패가 자신을 때렸다고 생트집을 잡고, 호텔 기물을 파괴했다. 또 박노식의 폭행 사건이 터졌다. 박노식은 이전에도 크고 작은 여러 폭행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것. 사건 발생 후 시간이 지나 사건의 전모가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났다. 박노식과 호텔 깡패, 두 사람 사이에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던 일행, 즉 장동휘와 박노식 간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 일로 박노식은 형사 입건됐는데, 폭행 사건으로 입건되기로 따지자면 영화계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박노식이 쓴 자서전을 인용해 그날 그 사건의 전모를 재구성해보자. 유현목 감독이 영화 ‘카인의 후예’(1968) 촬영 장소로 선택한 대구의 어느 곳. 촬영을 마치고 의기투합한 김진규와 장동휘 그리고 박노식은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며 회포를 푼다. 오랜만에 자신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배역을 맡은 박노식은 의욕이 넘쳐흘러 술자리를 싸늘하게 식혀버릴 말을 내뱉고 만다. “두 형님들 날 싸가지 없는 놈이라 욕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잉” 하고는 그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김진규와 장동휘를 노려본다. “이번 대종상은 나가 꼭 타야 쓰것는디, 형님들이 양보하쇼. 그리고 형님들이 암만 몸부림쳐도 말입니다잉. 이 영화에서 역할로 보나 비중으로 보나, 나의 연기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잉. 아예 단념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천하에 이런 당돌한 말이 어디 있는가? 점잔 빼는 선배 김진규는 태연하게 ‘알았다’며 받아넘겼지만, 천하의 장동휘가 어떤 사람인가? 이 따위로 막가는 후배를 그냥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박노식의 성격이 불같다면 장동휘는 활화산이다. 장동휘 왈.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타라면 누가 못 탈까봐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놈의 새끼 보셨습니까?” 박노식 이왕 저지른 것 끝까지 간다며 대드는 순간. 장동휘는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박노식의 머리에 내리친다. 선혈이 흐르고, 술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상은 박노식 자서전 ‘뻥까오리 백작’에서 인용한 것이다.




 


“박노식, 절대적으로!” 

사실 박노식은 상복이 별로 없었다. 항상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 같은 미남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악역 조연만을 맡거나, (그런 미남 배우들이 출연하지 않은 영화라서) 자신이 단독 주연을 한 작품은 각종 영화제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출연작 ‘카인의 후예’는 황순원 원작·유현목 감독의 야심작으로 박노식이 보기에 매우 훌륭한 작품이었고, 게다가 자신이 맡은 역이 비록 조연이긴 하지만 대단히 에너지가 넘쳐서 배우로서 혼신을 바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노식의 연기에 대한 욕심과 자부심이 드러나는 사건이자, 그의 성공과 몰락을 예상할 수 있는 사건이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1970년대 초, 그가 감독 주연한 ‘박노식 표’ 영화가 극장가를 휩쓸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당시 왕우와 이소룡, 스티브 매퀸, 알랭 들롱에 빠져 박노식 영화를 좀 유치하게 생각하는 건방진 꼬마였기에 그의 영화와 극장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삼촌을 따라가서 한국 최초의 입체영화 ‘천하장사 임꺽정’을 보긴 했지만 박노식은 전혀 기억에 없고, 오직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과 창날에 깜짝 놀랐던 일과 종이 선글라스 안경이 몹시 거추장스러웠던 것만 기억날 뿐이다. 그가 콧수염을 기르고 찰스 브론슨을 흉내 내며 아들과 함께 우유 광고에 나와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하던 화면 속 모습이 지금 내 기억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내 유년기 박노식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골목길에 붙어 있던, 1970년대 당시에는 유별났던 영화 선전 포스터 속 모습으로 남아 있다. 분노에 찬 그의 얼굴과 일본 해적들이 무시무시한 귀면(鬼面)을 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일본해적’ 포스터. 검은 가죽 옷 지퍼를 반쯤 내려 가슴골과 하얀 속살이 드러난 여자의 상반신이 강렬했던 ‘쟉크를 채워라’, 쇠사슬에 묶여 있는 박노식의 처절한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보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집행유예가 뭐냐고 물어보게 만들었던 ‘집행유예’, 박노식의 부릅뜬 황소 눈이 사나웠던 ‘나’라는 외자 제목 영화 등등.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된 나는 TV 한국영화특선 시간에 술병에 맞아 머리가 깨지면서까지 연기에 욕심을 냈던 바로 그 영화 ‘카인의 후예’를 보게 됐다. 그때까지 나는 박노식을 철모르는 어린애들이나 좋아하는 깡패 영화배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까치집같이 엉망인 백발의 머슴 박노식에게는 천하게 일생을 살아온 사람 특유의 회한의 응어리가 있었다. 그는 광복 직후 북한에서 토지 개혁이 시작되자 ‘내 세상이 됐다’며 광기에 차서 날뛰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은 갑자기 변해 날뛰는 아버지에게서 돌아서버렸다. 딸이 변한 것이 김진규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박노식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옛 상전의 아들이자 딸이 사랑하는 남자이며 무산자 계급의 적이라 증오해야 하는 김진규와 땀과 흙 범벅이 되어 싸움을 한다. 늙었지만 힘이 장사인 그는 어느 순간 김진규를 죽이지 못하고, 죄의식 때문일까?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한순간에 소진해버린다.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장대하면서도 비극적 라스트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이 영화로 나는 박노식의 연기에 감탄했다. 세월이 흘러 또 30대가 된 1990년대의 어느 날, 케이블 TV에서 ‘돌아온 팔도 사나이’(편거영 감독, 1969)를 보게 됐고, 나는 대한민국 남자 배우 중 절대적으로 누구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박노식, 절대적으로!”라고 말하게 됐다.  


 

쓸쓸한 그의 뒷모습 

용팔이 박노식은 주먹질로 살았던 과거를 뉘우치고, 이제는 주먹으로 사는 깡패가 아니라 꽃처럼 아름다운 아내 사미자를 위해 날품팔이라도 땀 흘려 일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남을 위협해서 먹고살았던 과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 예전에 그가 몸담았던 깡패 조직은 그의 주먹을 이용하려 용팔이 주변을 맴돌며 유혹한다. 용팔이 박노식은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꽁치 두어 마리를 사서 연탄불에 구워 아내와 함께 먹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런 용팔이를 깡패 조직은 용납지 않는다. 용팔이를 다시 주먹의 세계로 돌아오게 하려 간악한 흉계를 꾸미는데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겁탈하고 그의 가정을 박살내는 것이다. 오늘도 용팔이는 동대문시장에서 지게를 지고 날품팔이를 한다. 오늘따라 번번이 손님을 놓친 용팔이. 공치나보다 하고 풀이 죽어 있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그를 불러 사과 두 상자를 배달시킨다. 평소 받는 돈보다 두어 배의 웃돈을 쥐여주며. 사과 두 상자를 받을 사람은 동대문시장에서 저기 광화문을 지나 아현동 고개를 넘어 신촌로타리의 서강대학교에 근무하는 여교수님이다. 지게에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진 용팔이는 동대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지금처럼 택배가 있는 것도 아니요, 퀵 서비스가 있는 것도 아니던 시대였다. 오로지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서 배달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솔찬이 힘든데 말이지…” 하며 아현동 고개를 오르는 용팔이. 그 시간. 깡패들은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납치해 골방에 가두고 강간하려 한다. 용팔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서강대에 도착하는데, 이미 해는 지고 사과 두 상자를 받아야 할 여교수님은 퇴근을 하셨단다. “아이고 이거 어쩌면 좋을까잉 그러면 여교수님 댁이 어디가요잉.” 수위 왈. “여교수님 집은 저기 아차산 너머 광나루를 건너 천호동….” 용팔이는 사과 두 상자를 고쳐 메고 신촌에서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그의 땀에 젖은 어깨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과거의 주먹을 숨기고, 가정을 위해 굽신거리며 비굴한 성실함으로 살아야 하는 사내. 나는 영화 속 박노식의 모습에서 1960년대를 살았던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았다.




 

사내됨의 비애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폭행 사건에 연루돼 남대문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있는 젊은 날의 박노식. 

멋진 배우는 걷는 연기가 훌륭하다. 주구장창 걷기만 하는 영화 ‘사무라이’에서 알랭 들롱은 고독한 늑대의 우수에 찬 걸음을 보여주었다. ‘황야의 7인’에서 율 브리너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상체를 뒤로 젖히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그가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는 남자인지를 보여주었고, 같은 영화에서 제임스 코번은 목숨을 건 칼 던지기 내기에서 단호하고 냉혹한 걸음걸이로 허세에 가득 찬 상대방을 압도해버린다. ‘돌아온 팔도 사나이’에서 박노식은 아현동 고개를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지고 걸으면서 그 시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며 힘겨운 노동을 했던 대한민국 사내들의 비애를 표현했다. 나는 이런 연기를 다시 해낸 한국 영화 속의 배우를 아직까지 보지 못 했다.

눈 내리는 남포동 밤거리에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선다. 사내는 회한에 찬 눈으로 거리를 바라본다. 얼마 만에 돌아온 거리인가? 한쪽 팔이 없어 바람에 휘날리는 소매가 사내의 어두운 과거를 말해준다.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임권택 감독, 1971).


1960년대 말, 70년대 초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깡패영화는 거의 모두 비슷한 이야기였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주먹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 저지른 어두운 죄들은 대가를 치르라며 지독하게 쫓아온다. 당시 만들어진 깡패 영화들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되며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흔치 않은 예가 바로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이다.

박노식은 문희를 사랑한다. 그래서 둘은 이제 결혼하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박노식이 전쟁 직후 깡통 하나를 들고 명동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다 굶주림에 지쳐 죽어갈 때 그를 거두어준 아버지 같은 존재인 깡패 두목 장동휘가 살해된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 장동휘의 아름다운 딸 최지희는 오빠 박노식을 사랑한다. 박노식과 함께 거리에서 거두어져 박노식을 좋아하지만 그를 넘어서고 싶어하는 동생 김희라는 최지희를 사랑한다. 엇갈린 사랑의 감정들이 부글부글 용암처럼 터지기 직전, 눈이 하얗게 쌓인 숲 속. 최지희와 박노식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최지희는 자신의 사랑이 깨져버리자 자포자기해 자신을 짝사랑하는 김희라에게 몸을 맡겨버렸다. 두 사람 사이로 겨울바람이 분다. 실연당한 여자의 분노. 박노식은 최지희의 감정을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문희가 있기 때문이다. 최지희는 그저 귀엽고 소중한 여동생일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 장동휘를 죽인 자가 바로 동생 김희라인 것을 알고 난 후의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다. 박노식이 힘들게 입을 열어 최지희가 마음을 잡고 사랑하려는 자가 바로 아버지를 살해한 자임을 밝히는 순간, 최지희는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를 듯 크게 입을 벌린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너무나도 괴롭고 비통한 감정이 주변의 모든 소리를 지워버린다. 묵음. 침통한 박노식의 옷자락이 겨울바람에 펄럭이지만 역시 소리가 없다. 그리고 갑자기 카메라가 멀리 뒤로 빠지고, 눈에 젖은 시커먼 나목들과 눈, 그리고 그 속에 선, 감정이 격앙되었지만 표정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작은 모습을 비춘다.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가 그들의 폭발한 감정처럼 터져 나오고 최지희가 비틀거리며 박노식에게서 달아나는 발소리, 흐느낌 소리가 홍수처럼 눈 덮인 숲 속에 쏟아진다. 1970년대 한국 액션 영화 중 주인공들의 극도로 격앙된 감정을 뛰어나게 연출하고 연기한 최고의 명장면이다.


 


괴짜 마초 

자, 이쯤에서 배우 박노식이 아닌 영화 감독 박노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960년대 말. 야간 촬영을 마치고 청진동 해장국집을 향하던 박노식의 지프가 경찰 검문소의 바리케이드에 부딪혀 뒤집혔다. 차에서 기어 나온 박노식은 그를 잡으러 달려온 경찰을 뿌리친다. 경찰이 넘어져 아스팔트 위로 나뒹굴며 헬멧이 벗겨진다. 경찰 폭행. 거듭된 폭행 사건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박노식은 감방의 창살 아래서 수많은 생각을 한다.

“이게 뭔가? 나는 왜 이렇게 사고를 저지르는가?”  

청와대 수위를 구타한 일로 구속당한 것을 포함해 공권력을 가진 자를 폭행한 두 번째 사건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박노식. 너 인간 사표를 써라!”라는 외침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나는 폭행 배우인가? 여기서 죽으면 나는 무엇으로 남게 되는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나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  

이렇게 해서 박노식 감독·주연·제작·각본의 영화 ‘인간사표를 써라’(1971)가 탄생한다. 이 세상의 과잉이란 과잉은 전부 들어 있는 괴물 같은 영화의 탄생이었다. 아마도 그의 꿈은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같은 멋진 액션영화를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위험한 스턴트와 숨 막히는 자동차 추격 장면, 잔혹한 폭력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괴상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멀리 타향에서 죽은 사랑하는 동생의 아내에게 주려고 하고, 그 눈은 끝내 주인을 못 찾고 마는 기괴한 신체 훼손과 라스트의 장대한 비극이 이 첫 번째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대한민국의 관객은 이런 영화를 처음 만났다. 흥행에 청신호가 켜지고 가속도가 붙었다. 그는 연이어 ‘나’(1971) ‘쟉크를 채워라’(1972) ‘지프’(1972)를 연출했다. 그리고 또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이번에는 죄도 없이 사회 각층의 대표적인 폭력배를 검거하라는 지시에 의해 시범 케이스로 걸린 것이다. 2년 전 술을 마시고 시비가 붙어 술집 웨이터를 폭행한 사건이 빌미가 됐다.  

교도소에 수감된 박노식은 30일 구류를 살고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받고 석방됐다. 서대문교도소 문을 나서며 하도 집행유예를 많이 당해 이번에는 집행유예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바로 ‘집행유예’(1973)다. 이후 그는 또다시 큰 폭행 사건을 저지른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검찰에 연행된 박노식은 만취해 대검찰청 현판을 떼어내 양손에 들고 검찰청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깨버리는 난동을 부린 것이다. 이제 내리막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그는 감독 인생 중 가장 뛰어난 두 편의 영화를 만든다. ‘왜?’(1974)와 ‘집행유예’다. 사회적으로는 폭력 배우란 악명을 얻고 요주의 인물로 찍혀버렸지만, 서너 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경험이 쌓인 그는 특유의 욕심과 에너지로 점점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기괴한 매력의 B급 영화가 박노식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눈부신 ‘B급’ 영화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박노식의 출연작 포스터. 그는 1960~70년대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당대의 스타였다.

여기서 말하는 B급 영화란, 저예산으로 밀수업자들처럼 돈에 눈이 멀어 대충 뚝딱뚝딱 표절과 막치기로 만드는 영화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B급 영화는 저예산과 혹독한 검열 속에서 자의식이 넘치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감독이 불균질하지만, 압도적인 에너지로 관객을 설득하는 그런 영화다. ‘왜?’와 ‘집행유예’ 이전의 박노식 감독 영화들은 그의 에너지에 비해 너무나 조악해서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욕심이 많은 감독이니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공부했을 테고, 설익은 공부가 오히려 그의 영화를 조악하게 만들었을 게다. 그런데 ‘왜?’에서는 그런 조악함이 많이 사라졌다.  

영화가 시작되면 ‘인간사표를 써라’부터 시작된 박노식 특유의 악취미인 울긋불긋 괴상한 의상을 입은 박노식이 관부(關釜)연락선 상에 등장한다. 항상 달고 다니는 그의 영원한 부하 용칠이 장혁과 함께 갑판 위에서 누군가를 본 용팔이 박노식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무엇 때문에 천하의 용팔이가 저렇게 허겁지겁 도망칠까? 용팔이는 남의 객실을 무단 침입하고, 여기저기를 들쑤셔 한바탕 소란을 벌이고 어느 문 앞에 이르러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화장실! 하하하. 이게 뭐냐? 용팔이는 무서운 적을 만나 도망친 게 아니라 화장실이 급했던 것이다. 황당한 개그 연출이 실소를 자아내지만 화가 날 지경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 이전의 박노식 영화들은 이 정도의 장면들조차 앞뒤가 안 맞고, 말이 안 됐다. 일본에서 여권을 잃어버린 그들은 경시청에 잡혀간다. 가방에 여권이 있을지 모른다며 가방을 연 순간. 가방이 폭발하고 시커멓게 재를 뒤집어쓴 경찰들과 용팔이, 용칠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관객들이 생각하려는데 용팔이와 용칠이가 관객을 등지고 돌아선다. 그러면 그들의 너덜너덜해진 등판이 관객을 향하는데 용팔이의 등에는 ‘왜’라는 글자가. 용칠이의 등에는 커다란 ‘?’가 새겨지며 타이틀이 시작된다. “뭐야 이거?”

아. 화내지 마시라. 이 영화에는 미녀들이 덤블링을 하며 발바닥으로 배신자의 뺨따귀를 때리며 응징하는 장면과 그네 단두대(guillotine)까지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라스트가 준비돼 있다. 타이틀이 사라지면 일본의 커다란 거실에 온몸에 문신을 한 남녀 야쿠자들이 도열해 있고 그 가운데 야쿠자 두목이 있는데 박노식이다. 아! 1인2역. 게다가 일본 야쿠자 두목 박노식은 자신의 첫 영화 ‘인간사표를 써라’의 주인공과 똑같은 헤어스타일과 콧수염을 하고 있다. ‘팔도 사나이’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용팔이와 자신이 첫 영화에서 만들고 이후 계속 자신의 영화에 등장시키는 비정한 하드보일드 캐릭터와 대결을 시키려는 것이다.

마지막에 용팔이 박노식과 야쿠자 두목 박노식이 대면하는 장면이 매우 흥미롭다. 얼굴이 똑같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친다. 잠깐의 놀람에 이어 폭소가 터진다. 몸이 꽁꽁 묶여 위기에 처한 용팔이와 용칠이. 그리고 음모의 희생자인 여동생. 용팔이와 얼굴이 똑같이 생긴 야쿠자 두목과 그의 부하들 모두가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박노식의 분열된 자의식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장면이다.  






 


“나한테 한방 맞아주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천방지축, 부러울 것이 없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꿈에 그리던 배우가 된 뒤 10여 년 만에 대한민국 최고의 액션 스타이자 고소득자가 된 박노식. 그가 가진 두 모습. 무서울 것 없이 검찰이고, 깡패고 마음에 안 들면 주먹부터 올라가는 거친 마초. 동시에 성실한 비굴함으로 대한민국을 사는 1960년대 가난한 사내들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남자 배우. 이 상반된 두 가지의 모습이 ‘왜?’라는 영화 속에서 용팔이와 야쿠자 두목으로 분열돼 표현된 것이다.  

아마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상반된 모습을 가진 자는 항상 비극적인 몰락의 주인공이 된다. 이후 박노식은 폭력 배우로 긴급조치에 걸려들어 배우 정직(停職) 처분을 당하고 미국으로 쫓겨난다. 1980년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 용팔이는 더 이상 한국 영화 시장에서 재기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박노식의 말년.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스티브 매퀸이 생을 접은 마지막 거처였던 병원에 입원해 으스스 떨면서도 재기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이제 일어나서 다음 영화 만들어야지” 하며 자신을 찾아온 지인들에게 다짐했지만 끝내 다음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만다.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도시 뒷골목을 누비던 청춘, 처진 어깨 무력한 눈빛의 사내가 되다



  • 주먹 잘 휘두른다고 해서 아무나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좋은 배우는 카메라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영화 속 캐릭터 그 자체가 된다. 신성일이 그랬다.
  • 번듯한 외모와 젠체하는 말투에 가려졌지만, 그는 인물의 감춰진 심연과 고독을 그 누구보다도 잘 표현하는 연기자였다.
  • 흔들리는 눈동자와 번들거리는 땀방울로 청춘의 우수와 중년의 비루함을 두루 드러냈던, ‘미남 배우’그 이상을 성취한 ‘한국의 알랭 들롱’ 신성일을 추억한다.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젊은 시절 잘생긴 외모로 승부를 건 신성일은 연기 경력을 쌓아가며 차차 원숙한 배우로 성장했다. 

 프랑스에 알랭 들롱이 있다면 한국에는 신성일이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 영화배우 신성일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20여 년 전 이 말을 영화계 선배들에게서 들었을 때 나는 196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최고 미남 배우에 빗대어 ‘같은 시대를 풍미한 한국 최고의 미남 배우는 신성일’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생각했다. ‘최무룡도 신성일에 뒤지지 않는 미남인데 왜 알랭 들롱에 맞서는 인물로 이야기되지는 않지?’ 하는 생각도 했다. 알랭 들롱이 출연한 영화 중 인상 깊은 영화가 거의 모두 범죄 스릴러 영화였던 데 비해 신성일은 멜로 영화에 많이 출연한 배우라는 인상을 갖고 있어서 두 배우의 비교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가 가진 신성일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동네 극장에서 본편 시작 전에 상영한, 신성일 주연의 제목이 기억 안 나는 영화 예고편이다. 인기 가수가 노래하는 주제가가 나오면서 예고편이 시작되면, 당시 꿈에서나 볼 것 같은 빨간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신성일의 모습이 등장한다. 큼지막한 영화 제목이 화면 위에 뜨고, 고개 숙인 신성일의 수심이 가득한 얼굴 위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줄줄 흐르고, 그 반대편에 선 여자도 비를 맞으며 울고 있다. 제목이 사라지고 뒤이어 두꺼운 붓으로 힘차게 휘갈겨 쓴 ‘사랑’이라는 글자가 뜨면, 여자와 신성일은 뚝섬의 아름드리 나무 사이를 달린다. 강 건너 잠실의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눈부신 역광으로 연인들을 비추고, 연인들은 나무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키스를 하고는 껴안고 뒤엉켜 풀밭 위를 뒹군다. ‘사랑’이란 글자가 사라지면 ‘갈등’이란 글자가 휘몰아치듯 화면 위로 뜨고 신성일과 또 다른 잘생긴 남자 배우, 남궁원이라든지, 이대엽 같은 배우가 서로 마주서서 노려보고 있다. 그러고는 곧 뒤엉켜 주먹을 교환한다. 그들이 싸우는 장면의 배경은 해변의 모래밭이거나 갯벌이고, 수평선 너머로 석양이 물들고 있다. 두 남자가 엉켜서 한 번씩 주먹을 주고받으며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다시 새로운 글자가 뜬다. ‘이별.’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비가 내린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삼키던 신성일이 여자를 남겨두고 천천히 돌아서서 걷는다. 그리고 뜨는 글자.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어린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랑 갈등 이별이라는 자막이 영화의 전체 스토리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과 여자를 홀로 두고 떠나는 수심이 가득한 신성일의 얼굴이었다.  

 


여자들만 흠모하는 

두 번째 기억은 1970년대 중반, 당시 소년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미녀 여배우들이 나오는 영화에 항상 나오던 중년의 화가·대학교수 또는 시인, 신성일이다.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 안인숙. 그들이 출연하는 멜로 영화를 보는 것은 또래의 아이들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어른의 세계를 엿본 것 같은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학교 지도부 선생들과 극장 안에 기생하는 양아치들의 무서운 눈길을 피해 보았던 ‘별들의 고향’ ‘속(續)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모두에서 신성일은 아름다운 여배우의 상대역으로 나왔다. 그는 ‘겨울 여자’에서 젊고 아름다운 장미희와 연애를 하는 중년 남자였고, ‘별들의 고향’에서는 역시 젊고 아름다운 안인숙과 사랑을 하는 중년 화가였다. 1970년대의 멜로 영화에서 신성일은, 젊고 싱그럽지만 자신의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병들어가는 여자들을 위로하거나 그들의 몰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중년 남자였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신성일은 울고 있는 여자를 두고 돌아서서 심각한 얼굴로 떠나가는 젊은 남자이거나,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들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김추련이나 백일섭같이 그녀들을 몰락시키는 악마 같은 남자들에 비해 양심적이기는 하지만 무기력한 중년의 지식인 남자였던 셈이다.  

나는 그가 사내다운 매력을 물씬 풍기는 액션 영화배우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신성일은 여자들이 좋아하고 흠모하는, 한마디로 남자들은 보지 않는 영화에 나오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내게 한국 남자 영화배우는 장동휘 박노식 이대근 같은 투박하기 짝이 없는 액션 배우들이 전부였다. 멜로 배우인 신성일에게는 관심도 없고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본 것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제3부두 고슴도치’(이혁수 감독, 1977)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어린 시절 저녁 때면 나와 동생들을 라디오에 귀 기울이게 만든, TBC 라디오의 인기 연속극 ‘목격자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것이고, 당시 ‘김두한 시리즈’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신세대 액션 배우 이대근이 주연을 맡았다. 박노식과 장동휘의 시대가 가면서 떠오른 새로운 액션 스타 이대근은 1974년 ‘김두한’(김효천 감독)으로 등장한 액션 영화의 새로운 바람이었다. 그의 팬이었던 나는 개봉관 스카라극장으로 달려갔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대근은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쉴 새 없이 지껄이며 천방지축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주먹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는데, 고슴도치라는 별명을 지닌 이대근 앞에 나타난 살모사라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여자를 울리고 심각한 얼굴로 돌아서던 남자, 신성일이었다.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1979년 작 ‘도시의 사냥꾼’에서 신성일은 미녀 배우 정윤희와 짝을 이뤄 무기력한 중년 지식인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는데, 주인공인 고슴도치 이대근보다 나쁜 놈임이 분명한 신성일에게 빠져드는 것이었다. 살모사 신성일은 성질 급하고 투박한 부산 제3부두의 전설적인 주먹 고슴도치 이대근을 요리조리 따돌리고 깐죽거리고 놀려먹으며, 능청스럽고 뻔뻔하게 나대는 악당 역을 너무나 멋지게 해냈다.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가 엎치락뒤치락 경쟁하며 사나이의 의리를 진하게 느끼게 해준 영화 ‘볼사리노’(자크 드레이 감독, 1970)의 한국판을 본 느낌이었다. 그 뒤 나는 신성일이 주연으로 나오는 액션 영화를 기대했으나 ‘제3부두 고슴도치’의 살모사 역에 비교하면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도 없는 재미도 없고 새롭지도 않았던 ‘협객 시라소니’(이혁수 감독, 1980) 이후, 그는 나의 기대를 충족해주는 액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제3부두 고슴도치’로 신성일이 여자를 울리고 심각한 얼굴로 도망치는 그런 역만 하는 배우가 아니라 액션 영화에서도 멋진 역을 한다는 소중한 사실을 깨우치게 됐다. 그 후 배우 신성일의 진가를 알게 된 영화들을 만났다. 이두용 감독의 ‘장남’(1984)과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이다.  



 

청춘이 떠난 뒤 얻게 된 것 

영화 ‘장남’에서 신성일은 고향이 수몰돼 서울의 아들을 찾아온 황정순의 큰 아들로 나온다. 40대 초반의 신성일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빠듯한 살림살이와 중산층이 되기를 열망하기에 불만이 가득한 아내와 아이들, 아파트 생활이 불편한 노모. 그 사이에서 신성일은 무기력한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슬픔을 진하게 표현한다. 자신의 일과 가정 때문에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생들한테 떠맡기기 위해 무더운 서울의 거리를 걷는 피곤한 얼굴의 신성일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의 ‘걱정 말라’는 배려와 미안해하는 마음, 끊임없이 ‘네가 장남인데’ 하는 장남 타령이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고, 그래서 화가 나고, 동생들의 ‘딱한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를 맡을 수 없다’는 거절의 말과 함께 ‘큰형이면 큰형답게 알아서 하라’는 듯한 무언의 질책에 화가 난다. 늙은 어머니를 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걷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어머니의 말에 화를 내고 소리치려다 참고, 자신의 무기력에 화가 치밀어 오르다 참는 그의 연기는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은 과장된 몸짓이나 표정 연기가 아니었고, 얼굴의 모든 근육을 아주 최소한으로만 움직여 주인공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이듬해 상영된 ‘길소뜸’에서 신성일은 그의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역시 무더운 여름. 한눈에 보기에도 고단하고 가난한, 서울 생활에 지치고 지친 중년의 40대가 분명한 신성일이 여의도의 한 방송국 광장에 서 있다. 광장에는 지난 30여 년간 헤어져 살았던 혈육, 또는 친구들을 찾기 위해 쓴 게시물이 빽빽하게 붙어 있다. 신성일은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길소뜸에서 전쟁 때문에 헤어진 여자와 아들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난다. 이미 중년의 여인이 된 김지미다. 그 서먹한 순간. 그 당시 수많은 만남이 있었겠지만, 모두가 눈물을 자아내는 감동적인 만남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지미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제법 성공했지만, 신성일은 과거를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의 가정을 가난하고 어둡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의 행동을 답답해하고 힘들어하는 아내 오미연의 푸념과 질책에 신성일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에게서 등을 돌리고 담배를 피운다. 어두운 방 안에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신성일이 피우는 담배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저렇게 쓴 담배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지미와 신성일은 그들의 아들 한지일을 찾아간다. 시골 어느 변두리의 개장수가 돼 가난에 찌든 험한 인생을 살아온, 천하고 상스럽게 되어버린, 이제 서로의 간격을 결코 좁힐 수 없게 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 한지일과 신성일은 집 뒤편 음지에서 5m 간격을 두고 서로 바라본다. 그들 사이로 매미가 청승맞게 울어댄다. 저 사람이 내 아들이라니, 도저히 인정하기 힘들다. 험한 인생을 살며 망가진 저 사람이 내 아들이라는 게 슬프기도 하지만 전쟁 탓으로만 돌리기엔 자신의 죄가 크다. 하지만 아들 한지일을 밑바닥 삶에서 구해내기에 신성일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생활고에 찌들어 있다. 수십 년 만에 처음 만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 아버지의 고통을 축 처진 어깨와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 더러운 손수건으로 표현한다. 한때 싱그럽고 사랑의 열정으로 환하게 빛나던 소년이 세월을 겪으면서 몰락하고 몰락해 여기까지 왔다. 주름살이 진 그의 얼굴과 슬쩍 치켜뜨는 눈. 그렇게 그립고 안타까워 찾아 헤맸지만, 신성일은 아무것도 해낸 것이 없다.





 


 

한국의 알랭 들롱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갓 서른 된 신성일이 문희의 상대역으로 젊은 매력을 선보인 1967년 작 ‘밀월’의 한 장면.

액션과 대사에만 의지해 자신의 캐릭터를 표현해서는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없다. 최고의 배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카메라 앞에만 서 있어도 영화 속 캐릭터를 표현하는 마술사 같은 존재다. 아들 한지일을 만나고 돌아서는 길, 한때 미칠 듯 사랑했던 김지미를 보내고 매미가 우는 들판에 홀로 남아 서 있는 남자. 그는 역사의 질곡을 겪으며 몰락한 비극적인 남자 그 자체였다. 이 두 편의 영화로 나는 신성일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 알게 됐다. 그의 1960~70년대 영화의 목소리는 모두 성우의 입을 빌린 발성이었다. 나는 ‘길소뜸’에서 비로소 신성일의 본래 목소리를 들으며 거짓의 장막을 걷어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신성일이 중년이 돼 뿜어내는 원숙한 연기에 찬탄했지만, 그가 1960년대 최고의 배우이고 알랭 들롱에 비교된다는 것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 신성일 주연 이만희 감독의 ‘원점’(1967)을 보게 됐다.
 
영화가 시작되면 적막하고 어두운 밤거리에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신성일이 나타난다. 굵고 진한 눈썹 밑으로 세상 어떤 것도 믿지 못하는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빌딩으로 침입한 그는 금고에서 기밀 서류를 훔쳐낸다. 성공이다. 이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지기만 하면 되는데, 어디서 실수를 했는지 비상벨이 울리고 경비원이 나타난다. 적막한 빌딩 안. 신성일과 경비원이 격투를 벌인다. 계단에서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며 엎치락뒤치락. 영화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신성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거친 숨소리와 신음뿐. 안간힘을 쓰며 달려드는 경비원의 집요함에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셔터 사이에 경비원의 목을 끼우고 눌러 죽인다. 산업 스파이 신성일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며 이 짓을 그만두기로 한다. 그러나 조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은 신성일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도피를 돕는 척하며 감시역으로 창녀 문희를 붙인다. 신성일은 조직이 자신을 배신해 킬러를 보낸 것도 모르고, 문희와 신혼부부로 가장해 설악산으로 도피한다. 가짜 신혼부부는 서로의 정체에 대해 아무 말 않고 한방에서 지낸다. 살인자 신성일과 창녀 문희. 먼저 정체가 드러난 것은 창녀 문희다.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문희를 알아본 남자가 그녀가 창녀임을 소문낸 것. 문희는 신성일에게 자신이 창녀라는 것과 감시자라는 것을 고백한다. 자신이 조직에 배신당했고, 누군가 죽이러 온다는 것을 알아차린 신성일. 하지만 신성일은 끝까지 문희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지 않고 스스로를 봉인하며 고독 속에 칩거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의 절망적인 고통은 서서히 서로에게 감염되며 사랑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늘은 과거를 지닌 두 사람을 결코 행복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킬러가 다가오고, 설악산의 가파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계단에서 신성일과 킬러는 최후의 대결을 펼친다.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가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자, 신성일은 혁대를 꺼내 자신의 손목과 계단의 난간을 묶는다. 더 이상 도망치지도 않고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는 자포자기한 자의 결의다. 결투가 시작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빌딩의 가파른 계단을 구르면서 싸웠듯 이번에는 더욱 가파른 설악산의 절벽 계단에서 격투를 벌이는 것이다. 신성일에게 남은 것은 추락이 아니면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르는 것뿐. 산 정상으로 도망쳐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절망적인 고통과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수 없는 고독. 자신의 세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킬러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부부로 가장한 창녀뿐. 내가 1960년대 한국 영화 속에서 처음 신성일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순간이다.  

매혹적인 절대 고독 

그의 연기가 가장 매혹적일 때는 그가 자신의 속내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립시켜 고독할 때였다. 대한민국의 남자 배우 중 그만큼 고독한 남자의 모습을 잘 표현하는 배우가 있던가? 그의 고독에는 원죄가 후광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원죄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곳에서 매혹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탱크들이 굉음을 내며 38선을 넘어 돌진해온다. 탱크는 괴물이다. 괴물은 나무와 집, 사람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앞을 막는 모든 것을 씹어 삼키며 앞만 향해 돌진한다. 탱크라는 무섭고 기괴한 물성은 그것을 막아보려 애쓰는 인간들의 인간성을 너무나 초라하게 만들어버린다. 돌진해오는 탱크를 당해내지 못하고 후퇴하는 국군의 행렬 속에서 걷던 중대장 신성일이 걸음을 멈춘다. 그러고는 자신과 함께 후퇴하던 병사에게 말한다. 군인의 임무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군인의 임무를 저버리는 죄를 저질렀다. 어디서부터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보다 약해서 적을 물리치지 못하고 패배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군인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배신자가 해야 할 일은 죽는 것뿐. 이때부터 대위 신성일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 전장을 헤매는 고독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는 죗값을 쉽게 치르지 못한다. 사랑하는 동료들만이 죽어가고, 신성일이 죽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는 살아남는다.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감독, 1974)의 한 장면이다.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신성일은 1964년 작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부잣집 딸내미 엄앵란에게 위악적인 허세를 부리는 두수 역을 연기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는 검열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지만, 죄의식을 등에 지고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 신성일의 빛나는 연기만큼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주먹을 잘 휘두르고 마초적인 열기만 발산한다고 액션 영화의 멋진 남자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어두운 심연과 고독을 표현하는 신성일이라는 배우 때문에 한국 영화는 범죄 액션 영화와 전쟁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얻게 된 것이다.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대구 출신 신성일은 당시 영화 제국 신필름에 입사했고, 첫 출연작은 ‘로맨스 빠빠’(신상옥 감독, 1960)였다. “저는 로맨스 빠빠의 둘째아들 고등학생 바른이입니다. 어이쿠, 학교에 늦겠습니다”라며 영화 속에서 자기소개를 했던 신성일은 신필름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단역에만 머물다가 1964년 작‘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으로 1960년대 최고의 남자 스타가 된다.

‘태양은 가득히’(르네 클레망 감독, 1960)의 알랭 들롱은 궁핍하고 굴욕적인 삶을 사는 사기꾼 청년 리플리를 연기한다. 그는 부잣집 아들인 필립에게 기생하며 온갖 수모를 당하지만, 필립의 애인과 필립의 천대에 대한 복수를 악마적으로 실행해나간다. 알랭 들롱이 필립의 방에 들어가 옷장을 열어 그의 옷과 신발을 신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장면이 있다. 남의 것을 손에 넣은 천진한 악당 같은 미소를 짓다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곧 우울해지는 알랭 들롱의 얼굴은 열등감과 욕망 때문에 생긴 사악한 심성을 고스란히 내보인다.

4년 뒤 만들어진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은 털 달린 깃을 세운 가죽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짙은 눈썹 아래 세상에 대해 적의를 가진 눈을 번뜩이며 부잣집 딸내미 엄앵란을 희롱한다. 그가 엄앵란을 대하는 태도는 신분상승을 하려는 것도 멋진 연애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천하고 상스러운 처지에서 우러나온 위악적인 행동일 뿐이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 신성일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 있다. 스포츠머리에 아직은 앳된 하얀 얼굴. 엄앵란이 신성일 앞에 와서 부잣집 딸내미답게 당돌하고 세상모르는 소리로 대시한다. 이 때 신성일의 행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눈이 부시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엄앵란을 짐짓 외면하는 것이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지금도 패러디가 되곤 하는, 성우의 목소리를 빌린 그의 젠체하는 대사는 익숙지 않은 부류의 여자 앞에서 가난한 신분과 고독을 감추려는 위악적인 허세일 뿐이다.  








 

위악적인 청춘에서 비루한 중년까지 

2011년까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만 500여 편에 달하는 신성일은 1967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총 185편의 영화 가운데 51편의 주연이었다. 한 해 동안 51편의 영화에 출연하다니! 한 달에 4편꼴로 영화를 찍은 셈이다. 이런 경우 빈정대는 말이 있다. 영화를 무슨 연탄 찍어내듯이 찍나? 하지만 1967년 그가 출연한 ‘안개’ ‘원점’ ‘까치소리’ ‘밀월’ ‘역마’ 같은 영화들이 한국 영화사의 걸작이고, 그도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었으니 할 말이 없다. 아마도 이때 신성일은 시간 단위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며 하루 두세 편의 영화 현장을 오가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이런 시기가 1964년부터 72년까지 이어진다. 한 해 평균 30편 이상을 찍어야 했던 시기다. 입에 담기도 힘든 막치기 영화에도 출연하고, 어떤 영화에서는 스케줄이 바쁜 신성일만 따로 세워놓고 상대 배우 없이 찍어버린 뒤, 나중에 상대 배우가 와서 그의 대사에 답을 하는 것이 분명히 느껴지는 조잡한 장면들도 발견된다.  

신성일이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영화 경력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그가 워낙 인기 있는 스타 배우였기 때문에 1960년대 그의 연기가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더구나 신성일의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 그리고 본명과 예명의 다름으로 인해 낙선했다며 강신성일이란 이름으로 다시 출마한 사건은 그를 정치판으로 뛰어들어 오점을 남긴 ‘한때 스타 배우’들 중 하나로 비웃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신성일은 영화를 찍으면 찍을수록 원숙해진, 한국 영화사에서 보기 드믄 배우였다.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잘생겼다. 연기도 잘했다. 연출력은 뛰어났고 영화를 향한 열정은 끓어 넘쳤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 “운명의 근본은 무엇인가? 인생의 해석은 또 무엇인가? 신이여.
  • 우리 주먹으로 해결하자!” 영화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토해낸 최무룡의 분노는 결국 그의 생을 갉아먹었다. 40대 한창 나이에 스크린에서 외면당하고 변두리 재개봉관에서 쇼 공연을 하던 영화 천재의 쓸쓸한 눈빛, 몰락한 풍운아의 처져 있던 어깨를 추억한다.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 신성일, 윤정희, 문희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은 영화 ‘두 아들’(1970). 최무룡은 엘리트 검사 장남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1975년 어느 날이었다. 서울역 뒤편, 서부역 근처의 봉래극장에 홍콩 무술영화를 보러 들어간 나는 말로만 듣던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를 만나게 됐다. 당시 서울의 재개봉관에서는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라, 남진 나훈아 같은 가수와 최무룡 김희라 박노식 같은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한두 곡씩 부르는 쇼프로가 드문드문 있었다. 이런 날이면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보다 가수와 영화배우의 노래를 듣고 직접 얼굴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동시상영관이던 봉래극장에는 그날따라 관객이 꽤 많았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를 직접 보게 됐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오직 이소룡과 왕우만을 좋아하는 열혈 홍콩 무술영화광이어서 객석을 채운 사람들의 쇼를 기다리는 벅찬 심정은 몰랐고, 빨리 쇼프로가 끝나고 영화가 상영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환하게 밝혀진 무대에 누군가 등장했다. 최무룡이었다. 밴드의 전주가 시작됐고,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에 그날 최무룡은 노래를 상당히 잘 불렀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무렵의 최무룡은 거의 영화를 찍지 않고 있었다. 1972년에만 해도 20여 편에 달하던 출연작이 1973년 8편으로 줄더니 1974년에는 한 편도 없었고, 1975년에는 단 두 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1976년 ‘보통여자’(변장호 감독) 단 한편에 출연한 최무룡은 이후 1987년 그의 마지막 감독 작품을 찍기까지 영화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최무룡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왜 그렇게 지쳐 보였을까?  

 


한국의 제임스 딘 

한 사나이가 지하수로를 달리고 있다. 그 사나이는 조금 전 은행을 털고 복개공사 중인 청계천의 어두컴컴한 지하수로의 썩은 물을 첨벙첨벙 밟으며 경찰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퇴역군인인 그는 일자리를 얻으러 돌아다녔다. 아무리 다녀도 일할 곳은 없다. 답답한 가슴을 안고 대폿집에 들어가 술 한 잔을 한다. 술집에 들이닥쳐 깽판을 치는 상이군인들. 손목부터 잘려나간 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그들은 바로 사나이와 함께 참전했던 동료들이다. 사나이는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뱃속 저 아래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 분노 때문에 그는 은행을 털었고, 그 결과 시궁쥐가 우글거리는 컴컴한 지하수로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기를 멈춘 사나이. 어디선가 아기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지하수로에 아기 울음소리라니, 환청인가? 사나이는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점점 더 크게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 어두컴컴한 지하수로의 시멘트 기둥 사이로 뭔가 허연 물체가 보인다. 그 앞으로 달려간 사나이는 얼어붙고 만다. 아기를 업은 젊은 여인이 시멘트 기둥에 목을 매 자살했던 것. 사나이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그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 찬다. 배우 최무룡을 처음 내 머릿속에 각인시킨 영화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1)의 청계천 지하수로 시퀀스다.

1980년대 중반 영상자료원에서 ‘오발탄’을 처음 봤을 때, 같이 영화를 본 친구는 양공주로 전락해 밤거리를 헤매는 누이동생과 그를 사랑했던 윤일봉의 미래를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나는 최무룡이 준 강렬한 인상에 취해 비틀거리며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부는 서초동 거리를 걸었다.  

1956년 최무룡은 자신의 재능을 빛내줄 수 있는 감독과 조우한다. 유현목이다. 데뷔작 ‘탁류’(이만흥 감독, 1954)에서 조연으로 출발해 다섯 번째 작품 ‘유전의 애수’(유현목 감독, 1956)를 촬영한 뒤, 그는 어지간히 감독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유 감독과 처음 작업한 ‘유전의 애수’가 비평적으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도 다음 작품에서 같이 일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유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며, 8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최무룡의 여섯 번째 작품은 ‘잃어버린 청춘’(1957)이다. 제대군인인 주인공 최무룡은 셋방 얻을 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뜻하지 않은 살인을 하게 돼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가 된다. 필름이 사라져 이제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에 대해 당시 신문은 ‘대단한 열연이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오발탄’의 청계천 지하수로 장면을 보고 ‘잃어버린 청춘’의 연기를 유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지만, 최무룡은 범죄를 저지르고 쫓기는 남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 그 연기로 배우로서 인정받는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최무룡을 할리우드의 제임스 딘과 비교하며 절망에 찬 우울한 청춘의 표상이라 칭찬한다.  

1959년. 최무룡은 25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다음해에는 23편, 그 다음해에도 23편. 한 해 2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는 최고 전성기였다.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스캔들에 휩싸인다. 모두 아는 최무룡 김지미 간통 사건. 이 일로 최무룡은 구치소에 수감되고 전처와 이혼한 후 김지미와 결혼한다. 간통 사건이 있었지만, 그의 인기에는 별 영향이 없었고 전과 다름없이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건재를 과시한다. 김지미와 새로운 살림을 차리고 모든 것을 얻은 최무룡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며 솟아난다. 감독이 되고픈 것이다. 이미 유현목 감독과 함께 ‘잃어버린 청춘’을 제작했던 그는 배우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작·감독까지 겸하고 싶어했다.

 













분노와 광기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이 좌·우익이 대립하던 6·25 전쟁 중 서울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는 인물을 연기한 1966년 작 ‘잃은 자와 찾은 자’의 한 장면.

결국 1965년 일을 저지른다. 감독·제작을 겸한 영화 ‘피어린 구월산’을 만든 것이다. 자신이 주연까지 하고픈 유혹을 이겨내고 신영균과 장동휘, 박노식 등 당대의 스타를 총출동시켜 만든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시나리오가 표절 시비에 휩싸였고, 감독 역량이 부족한 실패작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듬해 최무룡은 절치부심 대단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그의 세 번째 작품이며 자존심과 트라우마,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걸작 ‘나운규 일생’이다.  

산언덕에 위치한 카메라가 먼 아래 해변을 보여준다. 해변에는 한 남자가 서 있다. 다음 장면은 해변에 서 있는 남자의 정면. 나운규로 분한 최무룡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카메라 프레임을 만들어 풍경을 바라본다. 나운규의 손가락 프레임 안으로 오몽녀와 한 남자가 들어온다. 그들은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 ‘오몽녀’의 출연 배우들이다. 나운규의 손가락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연기를 시작한다. 쇼트가 바뀌면서 영화 속 장면이 실연되고, 그들의 감정이 고조될 무렵 미친 듯이 연기를 지시하는 나운규의 허벅지까지 파도가 밀어닥친다. 나운규는 가슴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에도 아랑곳 않고 연기를 지시한다. 영화감독의 광기와 집념이 고스란히 표현된 멋진 장면이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쓰러진 나운규를 배우들이 해변으로 끌어내면서 카메라는 다시 산언덕으로 올라가 장면을 마무리한다.

이 장면을 보는 내내 나는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조강지처 아내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병든 어린 딸을 냉혹하게 외면하고 동가식서가숙 장안의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무의미하게 인생을 방기하는 삶. 그것은 자신의 영화를 검열해 가위질하는 숨 막히는 현실에 대한 자학적인 저항의 모습이다. “어차피 아쉽게 끝날 운명. 어차피 아쉽게 끝날 영화. 어차피 아쉽게 끝날 사랑”이라며 자신의 생명과 재능을 낭비해버리는 삶을 택한 나운규는 폐병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신(神)에게 묻는다. “운명의 근본은 무엇인가? 인생의 해석은 또 무엇인가? 신이여. 우리 주먹으로 해결하자!”

나운규의 모습을 빌려 최무룡은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검열과 자신에 대한 저평가에 대해 분노한다. 나운규의 영화에 대한 집념과 광기로 숨 막히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피를 토하고 혼절해서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고 누워 있는 병실에서도 나운규는 “진행! 진행! 내일 촬영 준비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화를 끝내고 싶다”며 기어이 일어나 ‘오몽녀’를 촬영하기 위해 촬영장으로 들어서서는 “이 나운규의 생명을 절약합시다” 소리치고 ‘레디 고’를 외쳐 영화의 라스트 장면을 찍고 “내 가슴이 뽀개진다”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숨을 거둔다.

영화의 라스트. 완성된 ‘오몽녀’가 극장에 걸리고 극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극장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수천의 관객, 표를 사려고 줄을 선 수많은 관객 옆 도로에 나운규의 영정을 든 장례행렬이 지나간다. 자신의 목숨을 불살라 하얗게 타버릴지라도 자신이 만든 영화를 많은 사람이 보았으면 하는 영화감독의 욕망. 그것은 나운규의 열망이었고, 최무룡의 열망이기도 했다.  










 

저평가된 명장  

걸작 ‘나운규 일생’을 만든 이후 최무룡은 액션 영화를 한 편 만드는데 그것이 ‘제삼지대’(1968)다. 영화가 시작되면 울퉁불퉁한 돌덩이가 화면에 가득 찬다. 물론 진짜 돌덩이가 아니라 스티로폼을 깎아 그 위에 색칠한 가짜 바위이긴 하지만 그다지 조악해 보이지는 않는다.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빠지며 화면 안으로 세 개의 돌덩이가 더 드러난다. 돌을 깎아 만든 한자 영화 제목 제삼지대! 타이틀 시퀀스가 끝나면 어디선가 날아온 잭나이프가 나무에 박히고, 잭나이프를 피해 고개를 숙여 화면 아래에 있던 박노식이 몸을 일으키며 액션 신이 시작된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여섯 명의 악당을 노려보는 박노식의 앙각(仰角) 바스트 샷으로 신을 열고 카메라는 박노식의 액션을 나눠 찍지 않고 한 호흡으로 멀리서 길게 찍어낸다. 어라. 최무룡은 액션신도 잘 찍는 걸! 박노식이 악당들을 모두 처치하자 다시 카메라는 액션신의 첫 화면과 같은 앵글로 돌아와 땀에 젖은 박노식의 앙각 바스트 샷으로 마무리된다. 신의 열림과 닫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이는 첫 액션 신이다.

자기 이름을 당시 화제를 모으며 등장한 모노레일에서 딴 ‘모노레로 박’이라 하며 허세를 부리고 술을 마시기 위해 싸움질을 하고, 사람을 패야 밥이 나오고, 주먹질을 해야 잠자리가 생긴다며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박노식에게는 동경대를 다니며 김지미와 사랑을 약속한 지식인 동생 최무룡이 있다. 잘난 동생이 어머니에게 효도할 기회마저 빼앗아간다고 화를 내는 한심하고 극악무도한 형 박노식은 폭행 청부를 받고 사람을 찌를 때 한 치 한 푼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고 정확하게 찌른다며 호언장담하는데 그가 범죄를 저지른 현장이 공교롭게도 동생 최무룡과 김미지의 데이트 장소였다. 최무룡은 사람을 찌르고 도망친 형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형무소로 간다. 동생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형 박노식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며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가서 훈련을 받고 지도원이라는 감투를 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까지 북에서 배운 고문 기술을 쓰는 잔혹한 짓을 저지르며 입신출세에 모든 것을 건다. 출감한 최무룡은 사랑하는 김지미가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갔다는 말에 낙심해 자신을 이름도 성도 없는 무법자라 칭하며 점점 폭력의 길에 들어서고, 급기야 민단의 고문을 지키는 요짐보(用心棒), 즉 보디가드가 된다. 이쯤 되면 관객은 박노식과 최무룡 형제의 피 튀기는 대결과 화해를 예상할 것이다. 당시 모든 영화가 그랬듯 악당 박노식은 최무룡에 의해 죽어가며 길고 긴, 그래서 하품까지 나오는 대사를 읊조리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리라.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마주 선 형과 아우는 대결을 하지 않고 박노식이 슬쩍 빠지면서 조총련계 야쿠자 20명과 최무룡 혼자서 대결하는 조건을 걸고 싸움이 시작된다. 20대 1의 대결은 장검을 휘두르는 액션이다. 최무룡은 그동안 검도를 익혔는지,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액션장면을 연출한다. 1960년대 말 홍콩 무협 영화 ‘방랑의 결투’(호금전 감독, 1966)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장철 감독, 1967)가 한국에 상륙해 홍콩 무협영화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최무룡은 당시 인기 있는 액션 장면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고 자신의 취향을 따른 액션신을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이른 침몰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1971년 작 ‘미스 리’. 

20명과의 대결이 끝날 무렵 야쿠자 두목이 총을 빼들고 이때쯤 박노식이 나타나 최무룡을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데,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최무룡 혼자서 야쿠자들을 모두 처치해버린다. 드디어 라스트. 도대체 어머니까지 죽었는데 박노식은 어디 간 거야? 영화 중간 조총련 내부에 민단 쪽의 첩자가 있다며 혹시 박노식이 민단 쪽 첩자였다는 것이 밝혀질까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아 있는 최무룡. 그는 이제 조총련들의 악랄한 짓을 처단하는 처단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것이 피를 나눈 형일지라도 자신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묘지를 나오는 최무룡 앞에 박노식이 서 있다. 박노식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냉혹하게 지나치는 최무룡. 박노식에게 다가온 형사 오지명이 그에게 앞으로 형제간에 피바람이 몰아치겠다고 하지만 박노식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이 멀어져 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제삼지대’는 같은 시기의 액션 영화들에 비해 통속으로 빠지지 않고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를 만들려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제작자이자 감독인 최무룡이 아무리 오락 영화인 액션 영화라도 불량식품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뭔가 석연찮다. 박노식의 바쁜 스케줄 때문에 영화가 저렇게 이상해진 것일까? 아니면 일본 로케이션이라는 부담 때문에 박노식의 등장이 많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속편에서 둘의 대결을 그리려는 속셈인가? 다음해 이 영화의 속편 ‘흑점. 속 제삼지대’(최무룡 감독, 1969)가 만들어지지만,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아 영화를 볼 수 없다.  

‘제삼지대’와 속편이 흥행에 성공했지만 최무룡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거듭된 영화 제작과 현실 감각 없던 돈 씀씀이로 그는 빚만 짊어진 채 김지미와 이혼한다. 당시 그의 빚은 살고 있는 집과 전 재산을 다 처분해도 도저히 수습이 안 되는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서울은 만원이다’(1967) 같은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담긴 영화부터 ‘지하여자대학’(1970) 같은 호스티스 영화, ‘북한’(1968)같이 정권에 밉보인 자신을 만회하려는 선전물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지만, 서서히 침몰한다.





 

빚더미에 오른 천재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이 영화계의 외면을 받던 시기인 1981년 윤정희와 함께 출연한 영화 ‘자유부인’의 한 장면.

1970년 22편. 1971년 37편. 자신의 최고 전성기 때의 작품 수를 능가하는 출연횟수를 기록한다. 빚 때문이었을까? 이 무렵 최무룡은 깡패영화에 다수 출연한다. 명동 시리즈, 종로 시리즈 등등. 나는 이 시기에 그가 출연한 수많은 깡패 영화들 중 인상적인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명동 잔혹사’(1972)는 세 명의 감독이 세 명의 배우를 데리고 일제강점기, 6·25전쟁 직후, 1960년대 말 이렇게 시대를 구분해 만든 옴니버스 영화였다. 박노식, 김희라, 최무룡 세 명의 배우가 주연을 했다. 그중 최무룡이 주연한 에피소드는 다른 두 편의 에피소드를 초라하게 만드는 박력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 윤정희를 만난 깡패 최무룡. 그는 윤정희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지옥불까지 마셔버릴 기세다. 두목을 찾아간 최무룡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이제는 손을 씻겠다고 한다. 어찌된 일인지 두목은 순순히 그의 말을 들어준다. 다만 조건이 있다! 라이벌 깡패 집단의 두목을 살해하면 소원대로 해주겠다는 것이다. 지옥불까지 마셔버릴 기세인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최무룡은 장검을 들고 혼자서 상대편 깡패 집단을 찾아간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던가? 최무룡의 두목은 최무룡의 행동을 배신이라 여기고 그를 처단할 생각으로 상대편 깡패두목에게 최무룡의 습격을 미리 통보해 대비토록 하고, 경찰에게 알린다. 두목의 배신을 모르는 최무룡은 장검을 휘두르며 깡패 두목을 살해하지만, 경찰에 잡히면서 윤정희와 결혼하는 꿈은 갈가리 찢기고 만다.

세월이 흐른 후 최무룡은 출소해 다시 명동거리로 찾아온다. 사랑하는 윤정희. 그녀만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명동은 주인이 바뀌었다. 윤정희는 소식도 없이 사라진 최무룡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새로운 명동의 패자 윤양하의 지극정성 어린 헌신에 마음을 열고 이미 그의 아내가 되어버렸다. 남의 아내가 된 윤정희 앞에 유령처럼 나타난 최무룡은 그 유명한 최무룡만의 전매특허, 자신을 3인칭 어떤 사람으로 놓는 긴 대사 읊조리기를 감행한다. “먼 옛날 어떤 바보가 있었습니다. 그 바보는 한 여인만을 생각하며 감옥의 벽돌 하나하나에 그녀의 얼굴 새겨 넣고 긴 세월을 참고 기다렸답니다. 운운” 한다. 모두가 안다. 오직 최무룡만 모르고 있다 “사랑은 변하는 것.” 윤정희는 이미 윤양하의 여자다. 그녀가 괴로워하며 자신을 따라가겠다는 결심을 못하자 최무룡은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들고 윤양하를 찾아간다. 윤양하의 부하들이 서슬 퍼렇게 지켜보는 가운데 최무룡은 윤양하와 담판을 짓는다. “내놔라” “못 내놓는다” “내가 너보다 더 윤정희를 사랑한다”“아니다 내가 더!” 절대 끝날 수 없는 말싸움. “그러면 칼로 해결하자”며 최무룡이 윤양하와 자기 사이의 테이블에 단도를 꽂는다. 이때 윤정희가 달려와 “내가 없어지면” 하면서 자결을 하고 최무룡은 테이블에 꽂힌 칼을 집어 들고 윤양하도 품에서 칼을 꺼내 서로를 찌른다. 최무룡의 칼이 조금 더 깊고 빨랐다. 거목이 쓰러지듯 윤양하의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짐과 동시. 윤양하의 부하 수십 명이 최무룡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 깊숙이 칼을 꽂아 넣는다. 부하들의 몸이 최무룡에게서 떨어지자 온몸에 구멍이 뚫린 최무룡의 몸이 기우뚱 쓰러지고 화면은 어두워진다.


 

지쳐버린 사나이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내놓으라며 싸우는 최무룡이 “정 그렇다면 여자를 칼로 잘라 반으로 나누자!”라고 광기를 보였다고 착각했다. 다시 영화를 보니 그런 무지막지한 대사는 없었고, 최무룡의 지독히 어두운 감정에 이입된 내가 만들어낸 환청이었다. 여기서 배우 최무룡의 개인사에 빗대어 그의 분노와 회한을 이야기한다면 너무 억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쏟아져 나온 수많은 깡패 영화 중 이 정도로 감정이 순식간에 폭발하는 영화는 본 적이 없다. 

1960년대 배우 생활을 했던 연기자와 감독들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최무룡을 꼽는다. 최무룡이 감독한 작품 ‘나운규 일생’에 출연해 그의 됨됨이를 곁에서 지켜봤던 배우 이순재는 가장 존경하고 연기 잘하는 배우로 단연 최무룡을 꼽으며, 자기 대사의 템포를 가진 메소드 연기의 대가이자 확고한 원칙과 ‘폼’이 잡혀 있는 최고의 배우였다고 상찬한다. ‘제삼지대’의 한 장면. 헤어졌던 김지미와 최무룡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다. 김지미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됐고 최무룡은 김지미의 남편에게 고용돼 예기치 않은 만남이 이뤄지는 장면이다. 신문지로 얼굴을 덮고 누워 있던 최무룡에게 다가오는 김지미. 김지미가 인사를 하자 최무룡이 일어난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기 전, 몇 초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최무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얼굴을 덮었던 신문을 접고 고개를 드는 섬세하고 계산된 연기로 서로를 알아보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또 다른 예가 최무룡이 박노식의 소굴에서 그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장면이다. 박노식은 선이 굵고 투박한 연기를 한다. 그의 몸놀림은 상당히 크고 가만히 서서 눈을 부라리기만 해도 대단한 기세를 내뿜는다. 그런 박노식 앞에 선 최무룡은 그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같이 눈을 부라리는 것이 아니라 얼굴 표정을 섬세하게 바꿔 죄의식과 허세가 가득한 박노식에 대항해 자신의 증오를 표현한다.  







 


돌려차기의 명수, 태권황제 챠리 셸

 

긴 다리와 우수에 찬 눈동자로 태권영화 전성시대를 이끌다

 

  • 나팔바지를 입은 그의 다리가 악당을 향해 날아갈 때면 스크린에서 폭풍이 부는 것만 같았다. 수려한 얼굴과 곧고 길게 뻗은 다리, 발바닥으로 악당의 뺨을 스무 번쯤 ‘갈길’ 수 있는 발차기 솜씨를 갖춘 챠리 셸은 이소룡 죽음 이후 마음 둘 곳 없던 1970년대
  • 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는 심지어 긴 앞머리를 늘어뜨린 채 시선을 모로 떨어뜨리는 우수에 찬 표정까지 갖고 있었다.
  •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단 2년에 불과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스크린을 장악했던 불세출의 액션스타 챠리 셸을 추억한다.

 

돌려차기의 명수, 태권황제  챠리 셸

영화 ‘돌아온 외다리’에서 발군의 액션 실력을 선보인 챠리 셸. 

1973년 늦가을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와 친구들은 국민주택단지를 만들기 위해 구획 정리 중인 허허벌판을 걷고 있었다. 낮은 언덕과 숲을 불도저로 싹 밀어내고 콘크리트로 신작로를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신작로에는 콜타르를 칠한 나무 전봇대가 아닌 콘크리트 전봇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새로 세운 전봇대에 영화 포스터가 풀로 붙어 있었다. 이소룡의 영화 ‘당산대형’ 포스터였다. 황토색 바탕 위에 이소룡이 이단 옆차기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진이 아니라 거친 붓으로 멋지게 그려 넣은 그 모습 앞에서 우리 조무래기들은 넋을 잃고 섰다. ‘이소룡이 공중으로 3m를 날아오르며 이단 옆차기를 하는가? 아니면 4m를 날아오르는가?’를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스스로 그의 흉내를 내며 이단 옆차기를 해보았는데, 우리는 기껏 땅에서 30㎝ 높이밖에는 날아오르지 못한 채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가 이소룡의 이단 옆차기를 흉내 내던 그 무렵 이소룡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해 7월20일 이소룡은 죽었다. 네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미완성 필름을 남기고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파장이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전역을 휩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73년 7월 이소룡 영화 ‘정무문’이 한국에서 개봉했고, 몇 달 후인 10월에 ‘당산대형’이 개봉했으며, 그해 12월 ‘용쟁호투’도 개봉했다. 그가 죽은 후에야 밀어닥친 ‘이소룡 폭풍’은 한국 액션 영화 팬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고, 그 폭풍은 한국의 영화인들에게도 밀어닥쳐 그해 가을, 충무로의 한국 영화계에서도 이소룡의 쿵푸 영화와 비슷한 영화를 만들기 위한 배우 오디션이 진행됐다. 

 


태권도가 뒤질쏘냐! 

‘중국에서 쿵푸 영화를 만들어 대히트를 했다면 우리에게는 태권도가 있다. 우리라고 못할 게 뭐냐! 우리는 태권도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초고속으로 시나리오가 나왔다. 제목은 ‘용호대련’. 감독은 태권도로 액션 영화를 만들면 홍콩의 쿵푸 영화 못지않은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이두용이었다. 오디션에 참가하려면 무조건 태권도 유단자여야 했다. 이두용 감독은 전국을 돌며 진행한 여러 오디션을 통해 300명을 뽑고 그 가운데서 또 30명을 추려냈다. 하지만 뭔가 성에 차지 않았던 그는 제작부에 다시 한 번 ‘무조건 다리가 긴 사람을 찾아내라’고 했다. 지금이야 잘 먹고 잘살아서 다리 길고 늘씬한 청년이 많지만 1973년 한국 남자의 체형은 그렇지 않았다. 찾고 찾은 끝에 결국 아는 사람 소개로 미국에 살고 있는, 미국 나이로 19살 된 청년이 물망에 올랐다. 일주일 걸려 머나먼 한국으로 온 그 청년을 보고 이두용 감독은 만족스러웠다. 정말 다리가 늘씬하게 쭉 뻗어 있었다. 태권도 실력은 보잘것없어 겨우 빨간띠에 불과했지만, 고개를 숙인 그의 반 측면 얼굴은 이소룡과 흡사했다. 무엇보다도 다리가 길어 태권도의 발차기를 시원스럽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한용철. 미국 이름은 챠리 셸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감독이 액션 장면을 멋있게 연출하면 되는 것이지, 배우가 꼭 무술 고수일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태권도 실력보다 중요한 건 카리스마와 연기력이라고 생각했다. 태권도 실력이 뛰어난 무술감독 겸 배우 권영문이 든든하게 뒤를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신인 챠리 셸을 주연 배우로 캐스팅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 김선경 감독도 태권도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목은 ‘마지막 다섯 손가락’. 김선경 감독은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보다 태권도 실력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그가 발탁한 인물은 주한미군 태권도 사범 박종국이었다. 더불어 가라테를 익힌 미8군 출신 흑인 제임스 쿡을 기용해 언뜻 동서양 액션 스타가 총출동한 세계적인 액션영화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1964년. 스페인의 황야. 이탈리아 감독 셀지오 레오네가 너무 비싼 헨리 폰다 대신 미국에서 데려온 무명 조연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데리고 짝퉁 웨스턴을 찍고 있었다. 이스트우드는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의상까지 준비하란 말에 ‘이게 뭐하는 짓이람’ 하면서 샌타모니카의 중고 의류가게에서 급하게 사온 블랙 진과 모자, 망토 스타일의 판초를 걸치고, 너무 말랐으니 수염을 기르란 말에 ‘거, 되게 주문도 많군’ 하면서 못 피우는 담배를 입에 물고 콜록거리며 ‘이거, 이거. 아내와 공짜로 유럽여행하는 셈치고 왔는데, 장난 아닌 걸?’하면서 ‘황야의 무법자’를 촬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레오네의 촬영지에서 몇 ㎞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스페인의 어느 들판에서 엉성하게 세트를 지어놓고 검은 망토에 검은 옷과 모자 차림의 프랑코 네로가 진흙탕에서 관을 끌고 힘들게 걸으며 셀지오 콜부치 감독의 ‘장고’를 찍고 있었다. 아마도 촬영장 근처를 지나치던 스페인 사람들은 ‘뭐야 이거? 서부극을 스페인 벌판에서 찍어? 웃긴다’ 했겠지만.











 

챠리 셸 VS 박종국 


돌려차기의 명수, 태권황제  챠리 셸

태권도 영화 스타 챠리 셸은 긴 다리와 빼어난 발차기 실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당시의 스페인 상황과 비슷하게, 대한민국의 1973년 가을과 겨울. 지금은 골프장이 된 철원 벌판의 어느 곳과 뚝섬유원지, 잠실 벌판에서 이소룡 영화를 흉내 낸 태권도 영화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촬영장 근처 잠실의 뽕나무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중국옷을 입고 싸움질하는 태권도 영화의 촬영 장면을 보았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일은 그렇게 진행됐다.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라는 멜로 영화로 데뷔한 이두용 감독은 그 사이 몇 편의 코미디 영화와 멜로 영화를 만든 터였다. 하지만 정작 그가 만들고 싶은 건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와 주먹이 난무하는 액션 영화였다. 멜로 영화감독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던 이두용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찍기 위해 제작자를 설득해야만 했다. ‘이소룡 영화’가 1973년 이 땅에 상륙하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당시 유행했던 박노식, 최무룡, 김희라 주연의 깡패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그에게 ‘이소룡 영화’는 앞으로 만들어야 할 영화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계시였다. ‘이소룡 영화’의 매력은 당시 검객 영화나 권격 영화에 없는 호쾌한 발차기와 ‘이소룡’이라는 걸출한 배우이자 액션 연출가의 존재라는 걸 간파한 그는 태권도의 발차기를 특화시키면 분명 색다른 액션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제작자를 설득했다.  

비슷한 시기 바로 옆, 우이동 계곡 또는 왕십리 너머 장안평 벌판에서 역시 태권도 액션 영화 ‘마지막 다섯 손가락’을 촬영하고 있던 김선경 감독은 1972년 ‘잘살아다오 내 딸들아’란 멜로영화로 데뷔한 인물이다. 검객 영화 촬영장 조감독으로 잔뼈가 굵은 그 역시 안전한 흥행을 위해 멜로 영화로 데뷔했지만 두 번째 작품에서는 ‘이소룡 영화’를 뛰어넘는 무엇을 만들고 싶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1973년 겨울 촬영됐고, 1974년 2월과 5월에 각각 개봉했다. 챠리 셸과 박종국의 대결! 결과는 챠리 셸의 압승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긴 다리  

‘마지막 다섯 손가락’은 박종국과 제임스 쿡. 동서의 태권도 실력자를 한 팀으로 조합해 내세웠지만 흥행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지막 다섯 손가락’과 ‘용호대련’의 신문 광고와 포스터가 기억난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신문을 펴보고 ‘헉!’하고 침을 삼켰던 일도 선명하다. 신문 하단 4분의 1을 차지한 ‘마지막 다섯 손가락’ 광고의 중앙에는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험상궂은 얼굴의 박종국이 인상을 쓰며 주먹을 쥐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그 뒤엔 아름다운 여인의 전라 뒷모습이 보였다. 박종국보다 뒤의 여인에게 눈이 가는 건 당연했다. 그와 비교할 때 ‘용호대련’의 포스터는 하늘을 찌를 듯이 긴 다리를 차올리는 챠리 셸의 모습이 주르르 겹쳐 있는, 말 그대로 호쾌한 액션영화 신문광고였다. 그 후 나는 두 영화를 모두 보았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는 단 한 사람만이 남았다. 챠리 셸, 그였다.  

1974년 당시 나만 그랬던 게 아니다. 거의 모든 이가 박종국을 잊고 챠리 셸만을 기억했다. 황량한 만주 벌판. 마차 한 대가 달려온다. 독립군 군자금을 운반하는 마차다. 악당들이 마차를 세우고 마차 안을 뒤진다. 그러나 군자금은 간 곳이 없고, 금을 노리는 사나이들만 파리처럼 꼬이면서 영화 ‘용호대련’은 시작한다. 더러운 파리 같은 사내들 중 독특한 사내가 있다. 어디서 왔는지, 뭘 하는 놈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어마어마한 태권도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10대 1로 붙어도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고 해치워버리는 무시무시한 놈! 긴 다리 미끈한 허벅지에 딱 달라붙은 나팔바지. 다부진 몸매를 감싼 검은색 비단 조끼에 하얀 실크 셔츠. 적들 앞에서 고개를 모로 꼬고 살짝 숙이면 긴 머리카락이 그의 한쪽 눈을 덮는다. 그가 입에서 바람을 불어 머리카락을 날리면 머리카락에 감춰져 있던 번뜩이는 눈에서 광채가 난다. 그리고 그 눈과 마주친 악당들은 뺨에 그의 발바닥 도장이 찍히며 길바닥에 나뒹굴게 되는 것이다.  

챠리 셸이 나팔바지를 입은 긴 다리로 돌려차기를 하면 스크린에서 폭풍이 부는 것 같았다. 그의 전광석화 같은 발차기는 상대방의 뺨따귀를 적어도 스무 번 이상 ‘갈겨’버린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이 눈을 덮게 하고는 “만주 호텔에 묵고 있으니 필요하면 찾아오라”는 한마디를 던지며 표표히 자리를 뜨는 것이다. 사내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그 또한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그 녀석’ 혹은 ‘태권도’라 불리는 이 정체 모를 사나이에게 어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름 없는 사나이 챠리 셸은 “돈을 벌려면 배신 따위는 떡 먹듯이 해야 한다”며 금을 갖고 있는 일본인 갑부 사사키와 금을 노리는 마을의 또 다른 부자 왕대인, 금을 독립군에게 전달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빼돌리려는 야욕 때문에 피바람을 불러온 알코올 중독자 왕태랑과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금을 독립군에게 넘기려는 왕태랑의 여동생 지화 사이를 오가며 자신이 금을 차지하려 한다. 이탈리아 웨스턴 영화 ‘황야의 무법자’와 비슷한 줄거리다.














 

‘연탄 찍어내듯이…’ 

영화 ‘용호대련’은 이탈리아 웨스턴의 피를 공급받은 한국의 만주 웨스턴과 홍콩 권격 영화, 그리고 태권도의 화려한 발차기가 잡탕처럼 범벅이 된 영화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잡탕 짝퉁이라고 무시하기에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특히 홍콩 권격 영화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하고 호쾌한 발차기가 그렇다. 도대체 당시 어떤 영화에서 발차기로 상대방의 뺨을 스무 번 이상 가격하는 액션을 볼 수 있었겠는가? 이소룡의 절도 있고 아름다운 발차기와 세련된 무술 연출에 비해 대단히 거칠고, 조악하지만, 챠리 셸의 발에는 독특한 힘이 있었다. 이탈리아 웨스턴이 할리우드 웨스턴을 표절해 자신들만의 영화를 만들었다면, 한국의 태권도 영화는 홍콩 권격 영화와 이탈리아 웨스턴을 표절해 만주 벌판에서 총 대신 발차기로 겨루는 사내들의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용호대련’은 허리우드극장에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한다. 이두용 감독은 챠리 셸을 기용해 두 번째 영화를 찍는다. ‘죽엄의 다리’. ‘용호대련’이 개봉한 지 불과 두 달 후의 일이다. ‘용호대련’이 만주 웨스턴이었다면, ‘죽엄의 다리’는 이소룡의 ‘정무문’과 닮았다. ‘죽엄의 다리’ 라스트 신은 챠리 셀이 일본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집 밖을 향해 뛰쳐나가며 발차기를 하고, 일본군이 그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이다. 이 장면이 정지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초등학생 시절 극장에서 이 장면을 본 나는 속으로 “에이, 정무문 라스트를 흉내 냈잖아”라고 투덜거리면서 “뭐, 그래도 멋있으니 용서해주지” 했다. 그리고 7월 이두용, 챠리 셸의 태권도 영화 3탄 ‘돌아온 외다리’가 개봉된다.  

자, 이쯤에서 말이 많아진다. 무슨 연탄 찍어내듯이 영화를 찍나? 물론 세 편의 영화 모두 흥행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돌아온 외다리’를 촬영 중인 이두용 감독의 숙소로 영화사 사장이 전화를 건다. 지방 배급업자들이 돈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로 올라와 빨리 다음 편을 계약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이 “아니 아직 영화를 다 찍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음 편이라니, 시나리오도 없는데 어쩌라는 말이냐”고 했지만 영화사 사장은 지방 배급업자들과 벌써 영화 제목까지 정했으니 알아서 이번 것 빨리 찍고 다음 편 또 찍으라는 것이었다. 영화사 사장과 지방 배급업자들이 급조한 이두용, 챠리 셸의 태권영화 4탄은 ‘분노의 왼발’이었다. ‘분노의 왼발’이 9월에 개봉하고 같은 달 말일에 5탄 ‘배신자’가 개봉한다. 하하하. 진짜 연탄 찍어내듯이 1, 2주 만에 영화가 완성된 것이다. 3탄 ‘돌아온 외다리’와 5탄 ‘배신자’ 사이에 만든 ‘분노의 왼발’은 엉성한 시나리오로 급조된 영화였다. 심지어 이전에 찍은 액션 장면을 짜깁기해 넣은 것까지 보인다.  






 

훅! 하는 입바람 



돌려차기의 명수, 태권황제  챠리 셸

챠리 셸은 1974년 2월 ‘용호대련’의 성공 이후 7개월 사이에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배신자’ 등 4편의 영화를 몰아 찍는다. 

‘배신자’는 내가 챠리 셸을 처음 만난 영화다. 마포 한 극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스크린에 어두컴컴한 골목이 보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골목길을 걸어간다. 골목길 중앙에 딱 버티고 선 까까머리의 남자. 쌍라이트 조춘이다. 사내가 조춘에게 두목이 전해주라고 한 편지를 건넨다. 조춘이 편지를 펴는 순간, 핀트 나간 클로즈업으로 내용이 화면에 가득 찬다. “죽여라” 조춘은 다짜고짜 사내에게 덤벼들고 사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와 싸운다. 조춘을 골목 구석에 있는 드럼통에 거꾸로 쑤셔 넣고는 발을 들어 드럼통을 난타한다. 마치 드러머가 드럼을 치듯 왼발을 들어 1초에 20회 이상 두드린다. 조춘을 해치운 사내가 고개를 든다. 사내는 두목이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 여수진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을 알게 되고, 아내 여수진이 두목에게 강간당한 후 자결한 사실도 알게 되면서 복수를 감행한다. 예전에는 동료였지만 이제는 원수가 된 친구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가던 사내는 또 다른 친구를 죽이기 위해 접근한다. 우연히 그의 집 창문에서 그의 말을 엿듣는 사내. 친구는 자신의 아내에게 고백한다. 친구를 배신하고, 그의 아내를 겁탈했으며 그가 자신을 죽이러 오고 있다…. 이 고백을 다 들은 사내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훅하고 입바람으로 머리카락을 넘기고는 자리를 뜬다. 죄를 고백한 친구를 용서한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조잡하고 막가는 한국 태권도 영화와 한·홍 합작 권격 영화와는 구별되는 어떤 지점이 ‘배신자’에 있었다. 그리고 아! 그가 바로 챠리 셸이었다. 이쯤에서 챠리 셸은 한국 태권도 영화 유일의 히어로가 된다.  

1969년 홍콩의 무협 영화배우 왕우는 시대극 분장이 귀찮고 힘들어 분장 좀 안하고 영화 찍을 수 없나 궁리하다가 자신의 첫 감독·주연작인 ‘용호의 결투’로 본격적인 권격 영화를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 몇 편의 액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분을 삼키던 이소룡은 홍콩으로 돌아와 왕우의 ‘용호의 결투’를 보다가 ‘왕우는 왜 다리를 안 쓰는가? 나라면 다리를 쓰겠다’며 절치부심, ‘당산대형’과 ‘정무문’으로 홍콩 영화를 평정했다. 한국에서는 그들의 영화를 보고 ‘태권도의 발차기를 멋지게 표현하면 뭔가 만들겠군’ 했다. 그렇게 나온 영화가 1년도 안 돼 한국 액션영화의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돌려차기의 명수, 태권황제  챠리 셸

영화 ‘돌아온 외다리’의 한 장면.

물론 다른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72년 당수를 연마한 이대엽이 주인공으로 나온 ‘인왕산 호랑이’가 있었고, 1970년대 말 텔레비전 연속극 ‘암행어사’에서 암행어사 이정길을 수행하는 호위 무사 ‘상도’ 역을 한 정도술의 달인 안길원이 주연하고 제작한 무협 영화가 1960년대 말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두용-챠리 셸’ 콤비의 태권 영화가 개봉되기 한 해 전, ‘이소룡 영화를 완전 압도하는 박진감 넘치는 새로운 영화’라는 광고 문구를 달고 개봉한 액션 영화 ‘동풍’(1973)도 있었다. 주연은 매력적인 미남 배우 신일룡이었다. 하지만 ‘인왕산 호랑이’에서 이대엽의 무술은 썩 매력적이지 않았고, 안길원의 검술 영화 ‘원한의 애꾸눈’ ‘요검’ ‘뇌검’ ‘비검’도 홍콩 무협 영화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시원시원한 미남형 얼굴에 이소룡을 능가하는 균형 잡힌 몸, 게다가 태권도 실력까지 갖춘 신일룡은 태권 영화의 황제로 등극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73년 이소룡 영화를 처음 극장에서 본 나는 신일룡보다는 못생긴 이소룡의 얼굴 클로즈업을 보고 ‘뭐야? 좀 못생겼잖아!’ 하고 불만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는 이 마스크 덕분에 홍콩의 최고스타 진성이 출연한 ‘심판자’(정창화 감독, 1976)와 성룡이 악역으로 출연한 ‘신 당산대형’(로웨이 감독, 1977)의 주연을 했다. 하지만 곧 액션 영화보다는 멜로 영화에서 잘나가는 배우가 돼버렸다. 결국 한·홍 합작 권격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무술 영화의 홍수 속에서 챠리 셸만이 빛나는 별이 되었다.  



가장 빛나는 별 

악당들의 본거지인 술집 안. 누군가 얼마 전 자신들에게 대항하던 청년 챠리 셸이 복수를 준비한다고 말한다. 나머지가 박장대소한다. “하하하. 우리에게 다리를 잘린 외다리 병신이 복수를 한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그렇다. 악당들은 챠리 셸의 왼발을 잘라버린 것이다. 어떻게 한쪽 발로 악당들과 싸우겠다는 건지. 그때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철컹철컹.’이게 무슨 소리인가? 돌이 깔린 도로에 쇠가 부딪히는 소리다. 육중한 쇳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악당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술집 앞까지 다가오던 쇳소리가 멈추고 정적. 문이 열리자 그 앞에 우뚝 선 사내는 바로 한쪽 다리가 없는 사나이, 챠리 셸이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은 앞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다. 챠리 셸이 고개를 들고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다. 긴장했던 악당들은 ‘뭐야? 이거’ 하면서 내놓고 비웃는다. 술집 안으로 한걸음 내디디는 챠리 셸. 잘린 왼쪽 다리에 무쇠로 만든 의족이 달려 있다. 그 때문에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나는 것이다. 챠리 셸은 말이 없다. 다만 그의 무쇠 다리가 분노를 표현한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악당들의 머리를 가격할 때마다 한 방에 한 명씩, 대포알 같은 무쇠 다리에 머리를 맞은 악당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속. 돌아온 외다리’(이두용 감독, 1974)다.  







장애인 액션 히어로 

나라마다 장애인 액션 히어로의 전설이 있다. 홍콩에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가 있고, 일본에 장님무사 쟈도이치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외다리다! 열아홉 나이에 미국에서 불려와 나이 들게 보이려고 콧수염까지 길러가며 영화에 출연한 챠리 셸은 1년 만에 몸값이 2000만원이나 됐다. 당시 최고 배우가 500만원 수준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첫 영화에서 트럭 짐칸에 앉아 촬영장으로 이동했던 그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챠리 셸의 태권 영화는 동남아로 수출돼 홍콩 권격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액션의 힘을 인정받았고, 이소룡이 죽은 후 대안을 모색하던 홍콩 영화인들이 한국의 태권도 배우들에게 눈독 들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재미동포 챠리 셸, 한국이름 한용철은 1974년 이두용 감독의 태권 시리즈 다섯 편과 ‘후계자’ ‘대비상망’ ‘흑백대련’을 찍고, 1975년 ‘강인의 무덤’까지 촬영하고는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1973년 한국으로 날아와 1975년까지 단 2년 사이에 10편의 영화를 남기고 떠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조악한 태권도 영화와 한국형 무협 영화, 위장 합작 영화가 쏟아져 나오면서 액션 영화가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된 1980년대 초반에 한국에 돌아왔다. ‘용호의 사촌들’(이혁수 감독, 1981) ‘내 이름은 쌍다리’(박우상 감독, 1981) 등 두 편의 영화에서 그는 그 옛날 제트 엔진을 단 것 같던 화려한 발차기를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다. 녹슨 다리를 움직이는 듯 초라한 모습을 보인 게 전부다. 이후 그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다. 태권황제의 짧은 전성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만다.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0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액션 영화배우를 근본 없는 ‘으악새 배우’ 취급하던 당시 충무로 풍조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챠리 셸, 한용철은 이제 예순이 다 된 나이일 것이다.


 

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무도인 액션배우의 영광과 한계


  • 합기도 고수 황인식의 발차기는 대포알 같았다. 영화에서 그에게 맞은 이가 5m 밖으로 나가떨어져도 과장돼 보이지 않았다.
  • 황정리의 발은 손보다 재빨랐다. 발바닥으로 상대의 뺨을 갈기다 그대로 목젖을 강타해 부숴버리기도 했다. 홍콩 배우 중 어느 누구도 이들 같은 정통 액션을 구사하지 못했다.
  • 그러나 당시 한국에는 두 사람을 배우로 존중하며 이끌어줄 감독과 제작자가 한 명도 없었다.
  • 무술의 달인이면서 동시에 액션 배우이고자 했던, 1970년대 홍콩 영화시장을 열광시켰던, 그러나 끝내 쓸쓸하게 스크린을 떠나고 만 두 명의 액션 스타를 추억한다.
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현란한 발차기 솜씨로 홍콩 영화계에서 ‘마왕’으로 군림한 배우 황정리. 

 

이소룡 주연·감독 ‘맹룡과강’(1972)의 3막. 음산한 음악이 흐르고 로마공항의 활주로에 여객기가 도착한다. 문이 열리고 비행기 트랩에 내려서는 인물. 검은 선글라스를 쓴 태권도의 고수, 척 노리스다. 마피아 두목은 총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이소룡을 제거하기 위해 무술 고단자를 고용한 것이다. 척 노리스가 마피아 두목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두 사나이가 싸우고 있다. 한 사람은 가라테의 고수 일본인, 또 한 사람은 척 노리스의 제자다. 험상궂은 가라테 고수는 미국인 태권도 고수들인 척 노리스와 그의 제자에게 가라테를 깔보지 말라며 도발한다. 사실 그의 실력은 척 노리스보다 한 수 아래고, 그의 제자와 막상막하다.


드디어 이소룡과의 대결. 척 노리스는 마지막 대결을 위해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고, 하수인 일본인 무술가와 척 노리스의 제자가 먼저 나선다. 일본인 무술가와 이소룡의 대결. “네가 탕룽이냐?” 독기 어린 눈으로 이소룡을 쏘아보는 일본인 무술가. 이소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라테 무술가는 필살의 자세를 취하는데, 앗! 그것은 태권도의 금강역사 품새다. 멋은 있었지만 이소룡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지고 만다. 가라테 고수로 출연해 금강역사의 품새를 취한 그 사나이는 바로 한국 합기도의 고수인 황인식이다.

내가 본 최초의 황인식 영화는 ‘흑무사’(1974)다. 홍콩 권격 영화와 한국 태권도 영화의 매력에 빠져 극장을 내 집 드나들 듯 다니던 나는 ‘흑무사’가 시작되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 홍콩 배우들이 출연해 연기하고, 영화의 배경도 중국의 어느 곳이고, 등장인물의 옷과 움직임 모두 중국인의 그것인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색하게 더빙된 한국어 아닌가. 이게 뭔가? 중국인들이 한국말을 하다니. TV 연속극 ‘전투’의 손더슨 중사가 한국말을 하는 것은 더빙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줄 아는 나이였지만, 극장에서 더빙 장면을 본 건 처음인 나는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한국 이름을 갖고 있고, 중국인이 한국인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이른바 한·홍 합작 영화였다.

나는 그것을 사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흑무사 황인식이었다. 잘생긴 주인공보다 험상궂게 생긴 그가 더 매력 있었고, 무술 실력도 월등했다. 영화가 재미가 없었던 것은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닌 악당 황인식을 보잘것없는 실력의 주인공이 이겼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선이 악을 이기려면 설득력이 있어야지 하며 혀를 찼다.

 


관절기, 드롭킥, 양다리 차기 

그 후 황인식이 출연하는 또 다른 영화를 봤다. ‘흑연비수’(1973)였다. 이 영화 역시 중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말하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파랗게 새싹이 돋아나는 아름다운 봄. 식민지 조선의 강나루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안젤라 마오 잉과 그의 사형인 황가달과 홍금보가 나들이 나와 망중한을 즐긴다. 이때 일본인 불량배가 나타나 아름다운 여인 마오 잉에게 치근거린다. 그들을 무시하려 하지만 식민지 여성을 노리갯감으로밖에 안 보는 불량배의 시비가 도를 넘어서고, 마침내 튀어나간 마오 잉의 돌려차기에 일본인들은 피떡이 된다. 장면이 바뀌면 마오 잉 일행은 한국까지 유학 와 합기도를 배우는 사람들임이 밝혀진다. 그들은 합기도 고수인 사형 황인식과 합기도장 사부 지한재를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가르침을 받는다. 조선에서 합기도를 배우고 중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합기도를 시기하는 일본인과 그 밑에 기생하는 중국인 무술가들에게 시련을 겪다 홍금보의 억울한 죽음을 계기로 복수를 시작하는데, 이때 조선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배를 타고 온 황인식의 도움으로 마지막 일전을 치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황인식은 관절기, 드롭킥, 양다리 차기, 돌려차기 등등 화려한 무술 실력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 뒤로 ‘흑권’(1973), ‘방랑의 영웅’(1974), ‘흑묘’(1974)와 같은 황인식 조연의 영화들을 봤는데, 그는 별다른 매력을 보이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악역 중 하나만을 했다.  

1975년 ‘흑거미’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당당하게 황인식 주연. 나는 그동안 황인식이 주연을 못 맡았기 때문에 그의 화려한 무술 실력이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주연이니 얼마나 멋진 영화가 될 것인지 기대했다. 그런데 수사관으로 나온 황인식은 주연배우라고 하기에는 연기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술도 ‘흑연비수’의 그것과 비교할 때 뛰어나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당시의 나는 영화배우와 무술가의 차이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술가라 해도 뛰어난 연출가를 만나지 못하는 이상 그의 발차기는 별 볼일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초록 물고기’라는 영화 조감독을 할 때, 주인공 한석규가 기차 안 좁은 공간에서 불량배에게 몰매를 맞는 장면을 찍었다. 불량배가 바닥에 쓰러진 한석규를 무자비하게 짓밟는데, 테이크를 거듭해도 가짜 같았다. 보다 못한 감독이 “진짜로 차라”고 했고, 이번에는 진짜로 한석규의 몸을 짓밟았다. 하지만 좀전에 가짜로 차는 시늉만 했던 연기보다 더 가짜 같았다. 그랬다. 연기를 잘 못하면 가짜 같은 것이다. 진짜로 때린다고 해도 안 되는 연기가 진짜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배우의 액션 연기 못지않게, 그걸 잘 통제해 연출하고, 제대로 된 곳에 카메라를 놓고 찍는 연출가의 역할도 중요하다.















 

황인식 VS 이소룡 

‘흑연비수’의 라스트 신에서 황인식의 무술은 누가 봐도 대단하고 찬란하다. ‘흑연비수’의 도장 안 결투 시퀀스와 거의 흡사한 장면이 또 하나 있다. 이소룡의 ‘정무문’ 도장 안 격투 시퀀스다. 황인식은 이소룡과 작업했고, 둘 간의 교류도 있었다. 한 기자가 황인식에게 이소룡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말을 아끼고 아껴 단 한마디만 한다. “이소룡은 스펀지처럼 어깨너머로 본 모든 장점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영춘권으로 무술을 시작한 이소룡은 한국 무술 배우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장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중 황인식의 합기도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관절기와 화려한 발차기 기술이 그랬다. ‘흑연비수’ 속 황인식의 무술 연기와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무술연기는 거의 같다. 특히 쉬지 않고 돌려차기를 해서 여러 명의 상대를 무너뜨리는 액션 장면에서 두 배우의 동작은 비슷하다. 그런데 이소룡의 그것이 훨씬 파워풀하다. 황인식은 수많은 무술 기예를 쏟아내기만 한다. 그러나 이소룡은 쓸데없는 잔가지를 모두 쳐내고 한 가지 액션만을 특화시켜 관객의 뇌리에 박히도록 한다. 특히 가장 화려한 기술은 액션 장면 속에서 구성점(plot point)으로 작용하도록 섬세하게 조절돼 있다. 이소룡은 어깨너머로 본 멋진 동작들을 재빨리 자기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이야기가 있는 액션 장면으로 만든 것이다.  

이소룡은 액션을 통해 주인공의 캐릭터와 그들의 감정을 대사 하나 없이 표현하는 연출을 한다. 액션영화를 활극이라 부른다. 액션을 통해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액션영화의 최고 경지다. 이소룡은 그것을 해냈다. 그러나 황인식 본인, 그리고 그와 함께한 연출가들은 무술 액션 하나하나가 영화를 구성하고 주인공의 캐릭터를 결정하며 나아가 감정을 이끌어낸다는 걸 알지 못했다.  

황인식이 영화배우가 된 건 우연이었다. 대개의 무술 고수들이 그렇듯, 황인식도 어릴 때 몸이 약해 운동을 시작했고, 그러다가 합기도라는 무술의 매력에 빠져 고수가 된 케이스다. 1970년대 초 그가 운동을 하던 서대문의 합기도 도장에 한국의 발차기 무술을 공부하기 위해 홍콩의 영화감독 황풍과 일찍이 무술감독에 뜻을 둔 홍금보가 찾아온다. 그들은 황인식에게 다리 기술, 관절기 등 중국 무술에 없는 비기(秘機)들을 배워 돌아갔고, 성심껏 자신들을 지도한 황인식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그를 홍콩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로 초청한다. 황풍 감독은 황인식과의 인연으로 자신이 준비하던 권격 영화의 제목을 ‘합기도’라 정하고 황인식을 배우로 캐스팅하기까지 한다. 영화 ‘합기도’는 한국에서 ‘흑연비수’로 개봉된 영화. 황인식은 이후 수많은 권격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처음부터 배우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자신의 가장 화려한 특기인 360도 돌려 차 상대방의 목을 가위꺾기 하는 비기도 자기가 사용하지 않고 상대 여배우에게 주어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액션 연출에 대해 이소룡처럼 관심도 없었다. 연출에 욕심 많은 이소룡이 자신의 액션 연기를 훔쳐 제 것으로 만들고, 질투심 때문에 자신을 초라하고 형편없는 단역으로 출연시켜도 군말 없이 해내는 것이다. 황인식의 인품이 드러나는 대목이긴 하지만, 이소룡이 최고의 액션 배우로 성장하는 시기에 이소룡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 무술가 황인식은 그렇게 소모돼갔다.








포스트 이소룡 


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황인식이 출연한 합기도 액션 영화 ‘흑연비수’ 포스터.

1970년대 중반. 이소룡이 죽은 후 홍콩 영화계는 죽은 이소룡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림사의 결투’(1975)를 시작으로 ‘소림십팔동인’(1976) ‘소림 십대제자’(1977) ‘소림 삼십육방’(1978) 등 소림사 영화가 아시아를 지배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이소룡의 후계자들을 내세운 영화가 나온다. 양소룡이란 이름의 배우가 ‘맹룡과강’의 리메이크라 할 만한 ‘홍콩서 온 불사신’(1974)으로 불을 지르고. 영화 속 이소룡이 죽은 후의 이야기 ‘신 정무문’(1976)이 나온다. 이후 정무문은 ‘속 정무문’(1977) ‘최후의 정무문’(1977) ‘정무문 81’(1981)도 모자라 ‘불타는 정무문’(1978)까지 만들어 불태워버리고는 속편의 행진을 끝낸다. 이런 권격 영화의 전국시대에 소리 없이 등장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단역으로 출발해 조연 연기와 스턴트맨 생활로 끼니를 연명하던 홍콩 경극단 출신 배우 성룡이었다. 그는 이소룡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할 틈새를 노렸는데 그것이 바로 코미디 권격 영화였다. ‘오룡대협’(1978)은 밑밥, ‘사학비권’(1978)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1978년 ‘취권’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 성룡의 시대가 활짝 열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콧수염을 기른 호리호리한 몸매의 험상궂은 사나이가 등장한다. 이 사나이는 중원의 무시무시한 킬러. 그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없다. ‘돈을 받으면 무조건 죽인다!’가 그의 신조다. 이 신조가 소름끼치는 것은 그의 발차기가 너무나 빠르고 정확하며, 발을 손보다 더 자유자재로 써서 발바닥으로 상대방의 뺨따귀를 갈겨 목뼈를 부러뜨리는 자였기 때문이다. 피스톤 킥인가? 아니면 독수리 발톱인가? 발끝으로 눈을 찌르고 발끝으로 상대방 목젖을 부숴버린다. 아니 어디서 저런 무시무시한 보물을 데려왔어! 홍콩 영화계는 이 사람의 등장으로 발칵 뒤집혔다. 누구냐 저자는. 그가 바로 황정리. 한국에서 건너간 발차기의 고수였다. 성룡은 이런 무시무시한 사나이와 맨 정신으로 싸울 수 없었다. 술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며 싸워야 겨우 운 좋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보물”  


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이소룡의 무술 연기에 큰 영향을 준 합기도 고수 황인식.

황정리는 이두용 감독이 태권도 영화를 만들 때 처음 영화계에 들어온 무술 고수였다. 1973년 합동영화사는 무술 유단자 자격을 가진 액션 배우를 모집했다. 신문 기사를 본 액션배우 지망생 청년 황정리는 노량진 어딘가의 체육관으로 갔고, 오디션 응시자 중 일곱 번째로 자신의 무술 실력을 보여준다. 그가 샌드백을 발로 차는 순간 이두용 감독과 영화사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발차기 한 방으로 황정리는 수많은 오디션 응시자를 제친다. 그러니 다 된 줄 알았을 것이다. 오디션에서 감독의 마음에 쏙 드는 1순위 연기자로 뽑혔으니 된 것 아닌가? 그러나! 고작 태권도 빨간 띠인 솜털이 보송보송한 재미교포 출신 젊은 풋내기(차리 셸)가 주인공이었고, 그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정신 차리고 스크린의 주변부를 찾아야만 겨우 얼굴을 언뜻 발견할 수 있는 단역이었다. 그래도 참았다. “몇 편 더 하면 주인공이 될 거야”라고. ‘용호대련’(1974) ‘속 돌아온 외다리’(1974) 등 3년 동안 수많은 태권도 영화에 출연해도 그는 언제나 단역이었다. 화가 났다. 에이, 홍콩으로 가버릴까 했지만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그에게 기회가 왔다. 홍콩의 오사원 감독이 한·홍 합작 영화 촬영차 한국에 와서 출연자를 물색하다가 영화사 벽에 붙어 있는 이두용 감독의 ‘무장해제’(1975) 스틸 사진을 본 것이다. 그중 하얀 수염을 붙인 백발 도사를 발견한다. 황정리였다. 오사원 감독은 자신이 준비하는 영화의 등장인물 이미지와 닮았다며 그를 찾아내라고 한다. 보물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황정리가 오사원 영화에 출연하자 충무로 영화계에서 말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를 보이콧한다. 그 참에 오사원은 황정리에게 홍콩으로 가자고 하고, 황정리는 당시 예명이던 황태수란 이름과 배고프고 서럽던 충무로를 버렸다. 황정리란 본명과 무시무시한 발차기를 갖고 홍콩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는 홍콩 영화계의 전설이 된다.  

황정리가 홍콩으로 갔을 때 황인식은 서울로 돌아와 있었다. 홍콩에 한국인은 단 하나, 그뿐이었다. 당시 홍콩의 액션 배우 중 어느 누구도 황정리처럼 발차기를 하지 못했다. 황정리는 숙소인 호텔의 한쪽 벽에 벽돌처럼 돈을 쌓아놓기 시작했다. 달리 둘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홍콩에 가서 황정리를 만났던 이두용 감독의 기억이다.

홍콩의 노천카페에서 이두용 감독과 황정리가 커피를 마시고 있다. 멀리서 황정리를 알아본 홍콩 영화계의 제왕 왕우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당시 홍콩 삼합회의 분노를 사 생명의 위협을 받은 성룡이 찾아가 도움을 청한 이가 바로 왕우였고, 왕우는 성룡을 호주로 피신시키고 삼합회와 담판을 지어 성룡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무사히 홍콩으로 돌아온 성룡은 왕우가 제작하는 영화에 수없이 출연해 왕우의 호주머니에 돈을 두둑하게 넣어준 뒤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여튼 이런 천하의 왕우가 다가와 인사를 하는데 황정리는 그냥 데면데면 받아 넘긴다. 이두용 감독은 깜짝 놀란다.

“너 저 사람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냐? 저 사람 왕우야”  

“알아요. 근데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하하하! 그는 홍콩 영화계에서 거물, 아니 마왕이 돼 있었던 것이다.











 

무술배우의 몰락 

천하의 마왕님께서 마음 한구석에 병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 병의 이름은 바로 주연병이다. 영화계에서 일하다 보면 멋진 조역들이 망가지는 예를 자주 본다. 주연병 때문이다. 조연으로 활약하던 배우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제작자가 좋은 시나리오와 멋진 캐릭터, 좋은 감독을 조합해주면 그 영화는 성공한다. 황정리에게 좋은 시나리오와 영화를 잘 만들어낼 연출자가 붙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호텔 벽면을 가득 메운 돈이 있었다. 황정리는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자신이 감독·주연을 한 영화 몇 편을 만들었다. 하지만 함량미달이었다. 발차기 연기에 관한 한 그는 마왕이었지만, 영화감독으로 마왕은 아니었고, 그동안 모은 돈은 사라져버린다.  

바로 이 시기에 성룡은 영화배우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생각했다. 그는 버스트 키튼(미국의 감독 겸 배우)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구인 홍금보가 있는 홍콩 최고의 회사 골든 하베스트로 이적하고, 무술배우 딱지를 떼버려야 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무술배우가 아닌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성룡에게 무술영화계를 향한 결별 작품.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사제출마’(1980).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초반 영화 ‘흑연비수’에 단역 스턴트맨으로 출연했던 성룡은 함께 출연한 황인식의 액션 연기를 보고 입이 쩍 벌어지고, 그를 흠모했다. 성룡은 이소룡 영화에도 스턴트맨으로 출연했지만, 황인식을 스승으로 모셨다. 경극단 출신인 그는 발차기에 영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황인식의 제자인 김진팔에게 합기도를 배워 발차기를 공부했다. 그리고 무술 영화배우 성룡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작품에 사부 황인식을 모셨다.



 


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배우이기 전에 무술인이었던 황인식.

‘사제출마’의 첫 장면. 나무로 만든 우리 안에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갇혀 있다. 10여 명의 관군은 너무 무서워 접근도 못한다. 저 괴물은 무엇일까? 사자인가? 호랑이인가? 아니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두려운 괴물이 우리 속에 있다. 한여름의 햇살 아래 괴물을 실은 수레가 움직이자, 황토 흙먼지가 일고 땀이 줄줄 흐른다. 무더위에 지쳐 나무 그늘에서 관군들이 휴식을 취하는데 험상궂은 사나이들이 나타나 우리 안의 괴물을 꺼내준다. 괴물은 백발의 중늙은이. 바짝 타들어간 입술의 괴물이 물 한 사발을 마신다. 그리고 천천히 걷는다. 10여 명 관군이 백발의 사나이를 향해 달려든다. 상체를 꼿꼿이 편 사내가 발을 든다. 그의 발끝은 방울뱀의 꼬리처럼 흔들리고, 그 맹독의 발이 관군을 향해 날아간다. 소리는 없었지만 대포알 같은 강타가 호송인의 배에 작렬하고 관군은 5m를 날아가 뻗어버린다. 한 방에 한 명! 황토 흙먼지가 사라지면 백발의 사나이가 서 있고, 관군은 모두 널브러져 있다. 장난하냐고? 아니다. 영화를 보면 괴물의 발차기가 대포알처럼 느껴져 그 위력에 등골이 으스스해진다. 진짜다.  


 

무술인인가 배우인가 

대포알 같은 발차기의 주인공. 그는 바로 마계에서 온 흑무사 황인식이다. 부활. 수많은 악역 출연 영화에서 한 번도 존재감 있는 액션 연기를 보여 줄 수 없었던 황인식. ‘흑연비수’에서 자신의 연기에 대해 “무술은 곧잘 하는데 연기는 아무리 인상을 써도 코미디언 서영춘 같다”고 자평했던 그 남자. 황인식이 그를 너무나 존경했던 성룡의 연출에 의해 부활한 것이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본 나는 황인식의 존재감에 부르르 떨었다. 성룡은 취권에서 술에 취해 맨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야 겨우 황정리를 이겼지만, 황인식과는 싸우기 위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그저 도망 다니고 또 도망 다닌다. 그러다가 물담배를 피우고 쌓인 담뱃진을 물인 줄 알고 먹고서는 그 쓰고, 매운맛의 고통 때문에 다른 고통, 황인식의 대포알 같은 발차기가 안 느껴지는 단계에 이른다. 담배진물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데 그것이 황인식을 지치게 만든다. 아무리 차고 때려도 성룡의 배 속에서 폭발하는 담뱃진을 이기기 힘들었고, 게다가 황인식은 늙었다. 아무리 때려도 성룡의 발광은 멈추지 않는다. 숨을 몰아쉬다 지치는 황인식. 성룡은 미쳐서야 겨우 황인식을 이긴다. 성룡도 멋졌고, 황인식도 멋졌다. 이 영화가 성공한 뒤 영화사가 이들을 내버려둘 리 없다. 그들은 이후 ‘용소야’(1982)를 만들지만 이미 흥은 깨졌다. 황인식은 이후 캐나다로 건너가 합기도 도장을 차려 성공한다.


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그들은 홍콩으로 건너가 그들이 보석이란 것을 알아본 홍콩 영화인들에 의해 걸작을 만들고 사라진다.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그들은 무술인인가? 아니면 영화배우인가? 성룡은 무술배우의 딱지를 떼버림으로써 월드 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멘토는 버스트 키튼이었다. 황인식과 황정리의 무술은 아마도 성룡보다 뛰어났을 것이다. 아니 이소룡과 비교해도 막상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술인 또는 무술배우가 아니라 영화배우로 영화를 생각하지 못했고 그들을 영화배우로 존경하며 이끌어줄 감독과 제작자가 한국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황인식은 영화 출연을 백일몽으로 생각하고 무술가로 돌아갔고, 황정리 역시 영화배우가 아니라 무술가로 남아 사업가가 되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악당, 그 뜨거운 매혹


  • 액션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멋진 악당이다.
  • 그들이 매력적일수록 영화는 근육이 붙고 피가 낭자하게 흐른다.
  • 허장강이 딸을 지키려는 장모 황정순의 이마를 도끼로 내리찍을 때, 황해가 독립군 남궁원을 가혹하게 고문할 때 비로소 ‘김약국의 딸들’과‘쇠사슬을 끊어라’가 살아 숨 쉬지 않던가.
  • 스크린 속에서 소름 끼치는 악의를 발산하던, 그래서 한국 액션영화의 지평을 한층 넓힌 매혹적인 악역들을 추억한다.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배우 황해가 열연한 영화 ‘독짓는 늙은이’의 한 장면.

1990년대 초. 영화 연출부에 막내로 들어가 일을 시작하던 무렵의 일이다. 그때는 이미 충무로가 영화인의 거리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해 있던 때였다. 새벽 6시면 촬영을 나가는 스태프들이 잠이 덜 깬 얼굴로 충무로 국밥집에 모여들어 후루룩 단숨에 국밥을 비우고 골목마다 매연을 뿜어내며 서 있는 촬영버스에 올라타던 분주한 풍경이나, 충무로의 다방마다 영화배우와 감독·작가가 북적이고 해가 지면 수많은 영화인이 충무로의 돼지갈비집과 골뱅이집에 모여 술을 먹고 왁자하게 떠들던 그런 풍경이 사라진 시기였다. 내가 일하는 영화사는 충무로가 아니라 안국동에 있었고, 새로운 세대들이 만든 영화사도 종로나 강남의 신사동 쪽에 하나 둘 자리 잡으며 충무로를 떠나던 시기였다.

추운 겨울날 충무로에 있는 편집실에 심부름을 갔던 나는 극동빌딩 뒤의 골목을 걷다가 순대국밥집에서 낮술을 먹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보았다. 아! 그들은 한국 액션영화에 단골로 출연해 기꺼이 주인공에게 한 방씩 맞아주던, 바로 악역 배우들이었다. 수많은 영화에서 항상 만나는 배우들이지만 이름도 몰랐던 그들을 대낮에 술집 앞을 지나다 본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뻔뻔하게 해댔건만, 옹기종기 앉아 술을 먹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은 대단히 쓸쓸해 보였다. 1970년대처럼 액션영화가 많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새로 등장한 젊은 감독들은 왕년의 액션 단역배우들을 더 이상 찾지 않던 그 무렵. 허름한 술집에 대낮부터 앉아서 왕년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을 그들은 ‘영화의 거리’라는 이름이 퇴색한 충무로 거리와 비슷한 쇠락의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액션영화 속의 악당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매력적일수록 영화는 근육이 붙고 피가 낭자하게 흐른다. 어네스트 보그나인이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며 프랭크 시내트라를 괴롭혀야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완성되고, 리 반 클립이 독사 같은 눈으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노려보며 괴롭혀야만 ‘젊은 사자들’이 완성된다. 리 마빈이 과묵한 스팬서 트레이시의 침대에 흙 묻은 부츠를 신고 누워 협박을 해야 ‘블랙록에서의 더러운 날’이 완성된다. 그들의 사악함이 설득력을 얻어야 우리는 주인공에게 더욱더 감정이입된다. 세계 영화 속에 빛나는 악역들의 별자리가 있듯이 한국 액션영화에도 소름끼치는 악의를 발산해 꿈속까지 나타나 나의 어린 시절을 괴롭혔던 매혹적인 악역들이 있었다.  

 


“조센징, 빠가야롯!” 

내가 혼자 극장을 드나들던 1970년대 중반, 한국 액션영화에서 맨 처음 내 머릿속에 각인된 악역은 배수천이다. 당시 나온 액션영화는 거의 모두 태권도 영화였고, 단골 악역은 배수천이었다. 그는 영화 속 악당 무리 중 언제나 가장 극악무도한 ‘악당 중의 악당’으로 출연하곤 했다. 그를 스크린에서 처음 만난 것은 ‘빌리 쟝’(김선경 감독, 1974)이라는 태권도 영화였는데, 영화를 다보고 난 후 주인공의 얼굴은 가물가물한데 대머리에 히틀러 콧수염을 한 흉물스러운 배수천의 모습만은 또렷이 기억에 남았었다.  

1975년. 추석 특선프로로 동네 극장에서 이두용 감독의 ‘무장해제’가 상영됐다. 일본군 장교로 등장한 배수천은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금붕어를 손으로 끄집어내 꼬리를 파닥이며 몸부림치는 모양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는 무장해제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맨주먹 맨다리 태권도를 사용해 대일본제국에 반항하는 구 한국군 병사들에 대한 증오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배수천이 눈동자 아래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상대방을 쏘아보면 한 마리 독사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살결은 왜 그렇게 하얀지. 그가 ‘훈도시’ 하나만 달랑 걸치고 터럭 하나 없는 뽀얀 맨살을 드러낸 채 “조센징. 빠가야롯!”을 외치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미안하지만 무섭기보다는 좀 민망하고 웃겼다.  

1970년대 중반 태권도 영화가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한국 액션영화 속의 마지막 단골 악역이던 배수천의 영화는 너무 내용이 뻔하고 선악 대립만을 강요해 흉물스러운 모습만 기억에 남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배수천 이전, 1960~70년대 한국 액션영화 속의 악역 중 멋있는 악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문오장이다. 문오장은 간첩단의 두목, 조총련의 악질 간부, 일본군으로 나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악역을 도맡아 했다. 이만희 감독의 ‘일본 해적’(1972)에서 일본 해적 부두목으로 등장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비록 해적이지만, 강하고 멋진 사나이다. 그가 모시는 두목과 동료들은 조선 해안에 침입해 강간과 노략질을 일삼지만, 문오장은 강한 상대를 찾아 칼부림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검에 목숨을 건 검객인 셈이다. 문오장은 두목이 여자를 강간하는 것을 막아서며 항명한다. 분노한 두목은 그에게 할복을 명하고 문오장은 두목의 명령이니 따르겠다며 서슴없이 자신의 배를 가른다. 배를 가르고 죽어가는 문오장의 눈에 서글픔이 서린다. 시대와 두목을 잘못 만나 자신의 재능이 헛되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다












설득력 있는 악의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1970년대 중반까지 악역 전문 연기자로 유명했던 배우 오지명. 

오지명도 빼놓으면 섭섭한 악역이다. 문오장과 비슷하게 1960년대 중반 등장해 1970년대 중반까지 온갖 악역을 도맡아 했는데, 이원세 감독의 ‘석양에 떠나라’(1973)에서 그는 하이에나 같은 악역을 해낸다. 영화가 시작되면 두 명의 사나이가 산등성이에 서서 여명이 밝아오는 공장지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지명과 1970년대 단골 악역 중 하나인 최성이다. 두 사람은 어제 교도소에서 출소하자마자 범죄를 벌이려 코를 벌름거리며 근대화 산업으로 돈이 돌기 시작한 시멘트 공업 지대에 들어선 것이다. 이 사악한 두 마리의 하이에나는 개과천선하고 성실하게 살려는 옛 동료 신일룡을 찾는다. 협박해 돈을 챙기려는 속셈이다. 산에서 내려온 그들은 아침에 문을 연 국밥집에 들어간다. 이른 아침 부엌에서 세숫대야를 놓고 머리를 감던 여주인의 하얀 목덜미와 허벅지를 보고 성욕이 동한 오지명과 최성은 거침없이 뻔뻔하게 강간을 한다. 신일룡의 집 거실에 들어간 오지명은 신일룡이 이뤄낸 안락한 가정을 질투하는 한편, 신일룡의 행복을 산산조각 낼 비루한 생각들을 떠올린다.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독사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눈에 보이는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파괴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오지명의 악의는 대단히 설득력 있었다. 

그가 멋진 연기를 펼친 또 다른 영화는 장동휘가 킬러로 출연하는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1969)다. 장동휘가 우익 인사를 암살하러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뻔뻔스럽게 침입해 장동휘의 어린 딸을 인질로 삼아 장동휘가 변심하지 못하게 하는 좌익 하수인으로 출연한 오지명은 어린 소녀 전영선과 마주 앉아 늑대와 소녀의 동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악한 늑대가 어린 소녀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더러운 궁리를 하는 역을 멋지게 해낸다.

오지명과 문오장, 최성은 한국 액션영화의 2세대 악역들이다. 1세대 악역, 장동휘·박노식·허장강·황해·독고성이 나이가 들어 중후한 멋을 갖추면서 악역보다는 성격 있는 주인공 쪽으로 옮겨가자 그 빈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독고성. 그는 주로 조연으로 출연했고, 장동휘·박노식처럼 파워풀한 에너지로 악의를 발산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늘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영화 속에서 진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장동휘 또는 박노식 같은 주인공의 깡패조직과 겨루는 상대방 깡패조직의 두목으로 나와 비열한 음모와 술수를 쓰는 몇 장면만 보이고는 사라져버리는 작은 역으로 기억된다. 그의 악역 연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웨스턴 ‘황야의 7인’(존 스터지스 감독, 1960)을 불법으로 리메이크한 ‘오인의 건달들’(1971)이다.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는 장동휘의 깡패 조직에 대항하는 다섯 명의 깡패 중 주인공 최무룡과 함께 리더 격 깡패 역을 맡은 독고성은 ‘황야의 7인’에서 리더 격이었던 율 브리너와 스티브 매퀸 중 율 브리너에 가까운, 조용하지만 사려 깊은 깡패로 나온다. 연기의 섬세한 결을 중시하는 최무룡의 버디 파트너로 독고성은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복수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최무룡 주위를 맴돌며 조금은 뻔뻔스럽고 조금은 교활한 깡패연기를 해냈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그가 사실은 형사였고 장동휘 일당을 체포하기 위해 잠입한 언더커버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좀 재미없어지기는 하지만, 연기력만은 발군이다. 자신을 과장되게 밀어붙여 혼자만 튀려는 한국 액션영화계의 고질적인 나쁜 연기를 독고성은 조용한 연기로 가볍게 비웃어버린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한국 액션영화 악역 중 가장 빛나는 별을 꼽으라면 허장강, 황해, 장동휘, 박노식이다. 장동휘는 1950~60년대 그가 했던 수많은 악역 연기를 뛰어넘는 가장 멋진 악역 연기를 박노식 감독의 영화 ‘광녀’(1975)에서 보여줬다. 박노식을 고문하는 일본 특무대의 앞잡이 조선인 역인데, 병 때문인지 살이 빠져 홀쭉한 얼굴을 하고 사이가 벌어진 이빨을 드러낸 채 사악하게 웃으며 박노식을 협박하는 그 악의가 대단했다. 좀 더 나와 더 사악한 연기를 해줬으면 했지만 그는 영화 속에서 단 한 번 나오고 사라졌다. 좀 더 비중이 있었더라면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악역 반열에 올랐을 텐데 아쉽다.







 

1세대 악역 스타들 

1975년 9월21일. 아마도 일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TV에서 뉴스가 나왔다. 영화배우들이 팬들을 위해 축구 대회를 열었는데, 선수로 뛰던 허장강이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나는 배우 허장강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는데, 그가 한국 영화계 최고의 악역배우였다는 해설이 곁들여졌다. 그날 이후 나는 한국 영화 속 최고의 악역배우는 허장강이라고,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고 말았다.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몇 해 뒤 TV에서 방영된 ‘대지옥’(1973)을 보고서였다. 극악무도한 악당 허장강이 지옥으로 가서 온갖 고초를 겪는 이야기였는데, 지옥에서 겪는 온갖 고초 때문인지 그는 불쌍해 보였고, 허장강을 괴롭히는 지옥의 악귀들이 오히려 영화 속 악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을 보았다. 영화 속에서 방자로 출연한 허장강은 악역 전문 배우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 재미있는 감초 조역이었다. 주인공 김진규 최은희보다 허장강과 도금봉이 나오는 장면이 더 재미있었다. 한국 영화에서 감초처럼 등장해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조연들의 계보 중 그가 최고이자, 최초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장강의 진면모를 보지 못했던 어릴 적 내 생각일 뿐, 허장강은 1960년대의 대표적인 악역 전문 배우였다. 물론 그의 연기 영역이 악역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탈한 중년 서민 연기와 노인 연기가 인상적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허장강 하면 악역’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악역이 오직 그만이 만들어낸 매력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악당 연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 허장강.

나는 한국 액션영화 속의 악역들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는 배우는 두 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뻔뻔스럽고 능청스러운 악당 허장강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키에 이를 부드득 갈아대며 상대방을 어둠 속에서 노려보는 히스테리컬한 악당, 황해다. 두 악역 배우가 한 여인을 두고 다투다 파멸하는 영화가 있다. 유현목 감독의 ‘김약국의 딸들’(1963)이다. 김약국의 셋째딸 최지희는 매우 분방한 여자다. 시집가기 전에 이미 머슴인 황해와 섹스를 즐긴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 황정순은 머슴 황해를 쫓아내고, 더 이상 소문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허장강에게 최지희를 시집보낸다. 쫓겨나는 머슴 황해. 그는 말이 없다. 눈알이 빠질 정도로 세상을 노려본다. 그리고 돌아선다. 머슴 신분이라는 열등감과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성욕, 그리고 배신감. 그는 고개를 반쯤 숙이고 이를 앙다문다.


 

허장강 vs 황해 

황해는 황정순과 김약국 집안 모두를 증오한다. 그는 반드시 복수하러 돌아올 것이다. 최지희가 시집간 허장강은 아편 중독자에 날건달. 게다가 성불구자다. 최지희의 과거를 알고 그녀의 성욕을 충족해 주지 못하는 허장강은 폭군이 되어버린다. 최지희가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허장강의 분노는 점점 끓어오르고 마침내 터져버린다. 시커먼 도끼를 들고 발광하며 최지희를 죽이려다 그를 막아서는 황정순의 이마에 도끼를 내리치는 허장강. 최지희를 차지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황해. 그는 작은 키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최지희를 찾아내 자기 품에 안는다. 열등감과 배신감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무서운 집념을 황해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김약국의 딸들’은 내가 성인이 돼 허장강과 황해 두 배우를 만난 첫 영화였다. 인상적인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황토 먼지가 휘날리는 만주 벌판. 저 멀리서 말을 탄 사나이가 다가온다. 사나이는 호피 무늬 재킷에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띠고 어디 좋은 건수가 없나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가 바로 허장강이 연기한 허달건이다. 허장강이 주막에 들어선다. 술집 안에는 요염하게 생긴 여자가 난로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비비면서 여자 앞에 앉으며 던지는 허장강의 첫 번째 수작. “한잔 따라” 첫마디가 반말이다. 반응이 없는 여자. 허장강, 실눈을 뜨고 여자를 위 아래로 훑어보고 그녀가 주막집 여자가 아니라 마차를 기다리는 손님이었음을 눈치 채고는 “실례했소”라 사과하고는 자기가 직접 차를 따라 마시며 “쳇, 좀 따라주면 안 되나?”며 구시렁거리자 여자는 미소를 짓는다. 알고 보니 요염한 여자는 예전에 알던 술집 마담이었고, 허장강이 눈웃음 살살 치며 수작을 거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만주 어느 도시의 마담은 싫지 않은 눈치다. 허장강이 “난 여자에게 관심 없어” 하고는 여자의 관심을 사기 위해 2단계 작전에 들어서는데 여자는 “여자보다는 밀정 일에 더 관심 있죠?”라 한다. 자신의 정체를 빤히 다 알고 있는 여자와 뭔가 잘되어 가는데 주막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지프를 몰고 손에 쇠사슬이 감긴 사내가 등장한다. 가죽재킷을 입은 험상궂은 사내는 여자에게 눈길과 관심을 절대 안 주고 쇠사슬 끊는 일과 펑크 난 타이어 고칠 일만 신경 쓰는데, 술집 마담은 허장강보다 그 사내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왜 아니겠는가? 가죽재킷의 사나이는 바로 장동휘인 걸. 허장강은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다. 뭐 세상사 그런 거다. 허장강은 슬그머니 물러나 “난 여자는 관심 없고, 오직 하나 밀정 일만 관심 있다”며 씁쓸함을 지우려 하지만, 이미 그의 폼은 다 망가져버렸다. 여자에게 다가가 먼저 수작을 걸지만 장동휘에게 번번이 여자를 빼앗기고, 그토록 찾아 헤매는 황금불상도 결국 일본군 장교 황해와 남궁원에게 빼앗기니, 악당이긴 하지만 측은하기도 하고 뻔뻔하기도 한, 미워할 수 없는 그리운 악당이 바로 이만희 감독의 만주 웨스턴 ‘쇠사슬을 끊어라’(1971)에서의 허장강이다.

언젠가 허장강을 기억하는 인터뷰에서 돈을 요구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허장강의 연기를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보통 연기자들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얼굴 가까이 대고 “돈”이라고 한다. 허장강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허리에 갖다 대고 배를 불쑥 내밀고 “돈”이란 제스처를 했다고 한다. 허장강의 악역 연기가 다른 수많은 악역 배우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유머다. 그는 어떤 악역을 하더라도 뻔뻔함과 능청스러움을 기본 캐릭터로 깔고 그 위에 작품에 따라 강약을 조절했다. 배우 허장강에게 매혹된 감독 이만희는 필름 원본과 프린트가 모두 사라져 이제는 볼 수 없는 영화지만 허장강을 위한 영화 ‘사기한 미스터 허’(1967)까지 만들었다니 그에게 매혹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시 ‘쇠사슬을 끊어라’로 돌아가자. 허장강은 독립군 남궁원을 속여 일본군사령부로 붙잡아 간다. 밧줄에 꽁꽁 묶여 일본군에게 끌려가던 남궁원이 허장강 앞을 지나다 멈춰서며 “나도 담배 하나 주라” 하자, 허장강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자신이 방금 불을 붙인 담배를 남궁원 입에 물려준다. 남궁원이 일본군사령부를 바라보며 “많이 아프겠지?” 한다. 사령부 지하실에서 남궁원을 고문하려 벼르고 있는 황해의 매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허장강은 웃으며 “많이 아플 거야. 난 아직 맞아본 적이 없지만” 한다. 허장강이란 악당이 매력적인 지점은 아무리 날고 기고 속이고 해봐야 이 영화에 등장하는 황해라는 더 큰 악당 앞에 서면 생쥐 꼴이라는 것이다. 조선인 밀정 허장강을 부려먹고 “조선인들은 멍청해”를 입에 달고 살며 고문이 주특기인 일본군 장교 황해가 고문실에 있다. 남궁원을 쇠사슬에 매달아놓고 황해는 일단 때리기부터 한다. 남궁원이 “보자마자 때리냐? 이름도 안 물어보냐?” 하자 황해는 “다 알고 있어” 하고는 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문을 하는 악당 황해. 그는 군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겨울 내복만 입고 집무를 보는 이상한 일본군 장교다. 황해는 이 영화에서 잔인한 고문 기술자부터 허장강과 장동휘, 남궁원의 흉계에 넘어가 포로가 된 뒤 비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되기까지 획획 캐릭터를 변신시킨다. 게다가 자신의 계획이 안 맞아떨어지자 작은 키로 방방 뜨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은 유년기로 퇴행한 소년의 모습처럼 보인다. ‘쇠사슬을 끊어라’는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악당들만 등장해 흥청망청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도시의 뒷골목 깡패들이 쓸법한 뻔뻔한 욕과 대사를 쏟아낸 아주 매력적인 영화다. 동시에 대표적인 악역 허장강과 황해의 악역 연기가 왜 특별하고 뛰어난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 한 편의 영화다.








 

악역 배우의 깊게 팬 주름 

황해는 1960년대 초 많이 만들어진 범죄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 범죄 영화들은 항상 연기력이 풍부한 악당 주인공을 원한다. 황해가 출연한 수많은 범죄 영화가 모두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황해의 아들 전영록이 어린 시절 보고 지금도 잊지 못한다는 범죄 영화 한편이 있다. ‘창살 없는 감옥’(강범구 감독, 1963). 6·25전쟁이 일어난 날 6월25일 새벽의 서울. 형사는 범죄자를 잡기 일보 직전이다. 그를 잡으려는 순간 전쟁이 터지고, 당황한 형사의 손아귀에서 범죄자는 달아난다. 범죄자는 형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에 자원입대하고 형사는 악마적인 집념으로 범죄자의 뒤를 따라 자원입대해 추적한다. 둘은 숙명적으로 격전지의 한복판에서 조우하고 형사가 부상을 당한다. 범죄자는 형사를 죽이고 달아날까 아니면 그를 구할까를 고민한다. 죄의식에 휩싸이고, 형사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달아나며 두려움에 떠는 주인공 역을 황해가 해냈다.  

영화 ‘마부’(강대진 감독, 1961)에서 황해가 연기한 싸움꾼 둘째아들도 잊을 수 없는 캐릭터다.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신에게 항상 다가오는 불운을 저주하는 황해는 어둠 속에 숨어 아버지 김승호와 형제들을 노려보며 입을 앙다물고 이를 부득부득 간다. 황해에게 이때 붙여진 별명이 있다. 한국의 제임스 케그니. 두 배우 모두 작은 키에 항상 열등감에 휩싸여 세상을 노려보는 역할을 훌륭하게 했다. 황해는 입을 앙다물고 세상을 노려보는 사나이였다.  

좋은 악역 배우들은 그들의 사생활에서 극도의 긴장을 유지하며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배우 리 반 클립은 악역을 하되 언제나 원칙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아이를 쏘는 장면은 절대 안 한다는 것. 감독들은 그를 존중해 아이를 쏘는 장면은 대역을 써서 촬영했다고 한다. 나는 영화인으로 허장강과 황해의 아들들과 촬영을 했고,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들 모두 똑같은 말을 했다. 악역 배우였던 아버지는 사생활에서 항상 엄격하게 스스로를 통제했다는 것이다. 수긍이 간다. 그런 엄격함으로 경계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악역 배우로서 자존심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배우들은 나이를 먹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면서 품격을 갖춘다.  








황해는 말년에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생을 살아온 정직하고 관용 있는 인물을 깊이 있게 연기한다. 나는 영화를 보며 황해의 주름살 사이에 낀 탄가루를 보고 그의 영화 인생 전체를 존경했다. 허장강의 ‘명동잔혹사’(변장호 감독, 1972) 라스트 신도 잊을 수 없다. 영화에서 내레이터로 등장한 그는 깡패들이 의리 없는 싸움 끝에 모두 죽는 잔혹한 결말이 벌어지자 고아 소년의 눈을 가리며 “보지마라 이 잔혹한 명동을 떠나자”라고 한다. 두 눈 사이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눈을 감는 허장강. 일생을 깡패 소굴 명동에서 바텐더로 살며 그들에게 당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던 그가 소중한 것을 모두 잃고 내뱉은 대사였다. 좋은 악역 배우들이 영화 속이라는 다른 세상에서 악당으로 살면서 그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찰한 고뇌와 그 깊이는 그들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로 드러난다. 허장강과 황해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에는 그것이 있었다.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환갑 지나 부활한 대배우여 부디 건강하시길!


  • 젊은 시절 그는 야만적인 열기를 내뿜었다. 잘생긴 얼굴 어딘가에서,
  • 늘 뻔뻔스럽고 야비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짐승 비린내가 났다.
  • 중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마초였다. 마누라와 자식을 패는 것 외엔
  • 자존을 확인할 길이 없는, 뒷골목 넝마 같은 사내의 삶을
  • 그보다 더 잘 표현하는 배우는 없었다. 성격파 연기자의 설 자리가 좁은
  • 한국 영화계에서 조로했지만 2006년 ‘사생결단’으로 다시 일어난,
  • 그리고 2010년 ‘시’를 통해 오직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감으로
  • 건재를 알린 배우 김희라의 젊음을 추억한다.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김희라에게 제13회 파나마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1975년 영화 ‘마지막 포옹’의 한 장면.

남들은 다 일하고 있을 대낮에 극장에서 시간을 죽이는 아저씨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인디언들의 신호처럼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스크린에서는 복수를 맹세한 김희라의 등에 문신이 새겨지고 있었다. 한 송이 두 송이, 붉은 목련이 피어나 김희라의 넓은 등판을 가득 메우자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고3 때인지, 재수할 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느 날. 나는 어느 변두리의 재개봉 극장 안에 있었다. 관객은 나를 포함해 서너 명밖에 없었다. 수험생이 공부는 안 하고 밝은 대낮에 극장 안에 있다는 약간의 불안감과 꼬박꼬박 액션 영화를 챙겨 보는 열혈 액션 영화광이기는 했지만 해가 갈수록 질이 떨어지는 한국 액션 영화를 보러 왔다는 약간의 창피함으로 김희라·박근형 주연, 김효천 감독의 ‘오사카의 외로운 별’(1980)을 보고 있었다. 별 기대 없이 영화를 보던 나는 넓은 등판에 붉은 꽃이 만개한 김희라의 압도적인 분노를 느끼는 경험을 하고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이다.

재일조선인 깡패 김희라는 단검을 들고 조총련계 야쿠자의 소굴로 홀로 향한다. 사랑하는 여인 이경실을 뒤로하고 추운 겨울의 이른 아침 거리를 나선 것이다. 그는 살아서 이 거리에 돌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김희라. 인기척을 느낀다. 남자의 기침 소리. 누군가 김희라를 기다리고 있다. 박근형이다. 김희라가 존경하는 선배였던 그는 폐병에 걸려 이미 은퇴한 몸이지만 김희라의 복수에 목숨 걸고 동반을 자청한 것이다. 김희라가 천천히 다가오자 박근형은 그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걷는다. “오늘은 죽기 좋은 날씨야.” 두 사내가 마주 보고 미소 짓는다. 하하하. 

지금 생각해보면 ‘오사카의 외로운 별’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쏟아져 나온 일본 임협(任俠)물, 즉 야쿠자 영화의 줄거리에 재일조선인 깡패 주인공과 조총련의 대결을 입힌 짝퉁 야쿠자 영화였다. 하지만 서울 극장가에 성룡의 쿵푸 영화, 복성 시리즈, 미스터 부 시리즈 같은 홍콩 코미디 액션 영화와, 홍콩 영화를 무조건 베끼거나 닮으려 했던 짝퉁 한국 무술 영화 일색이던 시기, 포악한 사내들의 땀과 피가 흐르고 비릿한 짐승 냄새가 풍기는 그런 액션 영화였다.  

 
쓸모없는 사내의 못난 자존심 

지독한 남근 숭배자이며 반공주의자인 김효천 감독이 1975년 ‘협객 김두한’을 만든 후 칩거하다 5년 만에 김희라를 주연으로 내세워 만든 영화가 바로 ‘오사카의 외로운 별’이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나는 김희라의 팬이 돼버렸다. 비슷한 시기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을 봤다. 지금은 철거돼 사라진 중랑천의 뚝방 동네 빈민촌.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아내 김보연이 벌어오는 돈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다, 제 성질에 못 이겨 애 패고, 마누라 패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꼬장질’과 ‘깽판’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사내로 김희라가 출연한다. 애틋한 김보연과 그의 옛사랑 안성기가 꼬방동네에서 재회한다. 아내 김보연을 매일 구박하고 머리채를 잡아 패는데 그녀를 안성기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고 두려워하는 김희라. 한 평이 채 못 되는 좁은 판잣집 안에서 빨간 빤스 하나 걸치고 빈둥거리는 김희라는 내가 살던 모래내 천변의 그 아저씨들이었다. 술에 얼큰히 취하면 기분을 내며 동네 사람들 걱정도 해주고 그 동안 깽판 친 일들을 사과도 해서 흐뭇한 풍경을 연출하다가도 무엇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졌는지 일순간 폭력적으로 변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싸움질을 하고, 옹색한 집안 살림을 부수고, 집안 살림만큼이나 옹색한 마누라와 아이들을 패고, 마지막에는 파출소에 끌려가거나 달을 보고 대성통곡하거나, 흙 묻은 속옷 바람으로 길바닥에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자던 그 아저씨들을 김희라가 영화 속에서 연기해냈다. 1980년대 초, 10대의 마지막을 보내던 나는 김희라를 통해 조악하지만 낭만적이던 1960년대 깡패 영화의 마지막 스타가 연기한 자기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남성 판타지의 세계를 봤고,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 남성의 애환과 분노를 봤던 것이다.  

배우 김승호의 아들 김희라는 1969년 임권택 감독의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데뷔한다. 문희, 박노식 같은 쟁쟁한 스타들과 함께 출연한 첫 영화에서 신인 김희라는 두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임권택 감독과 박노식이다. 그의 배우 데뷔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김희라 본인 입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하나는 충무로를 떠도는 ‘믿거나 말거나’의 수많은 전설 중 하나다. 김희라는 인터뷰에서 아버지 김승호의 49재가 있던 날 임권택 감독을 처음 만났고, 그의 제의로 영화에 출연했고, 하다보니 영화배우란 것이 해볼 만해서 계속 한 것이란 말을 한다. 임권택 감독의 말에 의하면 김희라에게 연기자의 길을 열어준 것은 연민 때문이었지만, 연기를 시켜보니 그는 다듬지 않은 보석이었고,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잘난 아들을 방치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거친 삶을 살게 한 배우 김승호에게 분노까지 느꼈다고 한다.










부리부리한 눈, 두툼한 입술 

다른 하나는 조금 과장되고 극적이다. 어린 나이에 재혼한 아버지 집에서 뛰쳐나와 거지왕 김춘삼 패거리와 어울리며 거친 삶을 살던 김희라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박노식을 찾아간다. 박노식의 집 마당에 엎드려 연기를 가르쳐달라고 읍소하고 그에 감동한 박노식이 그를 거두어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인데 믿거나 말거나. 하여튼 23세의 혈기방장한데다 거친 거리 생활에 물들어 있던 김희라는 임권택 감독과 박노식을 만나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임권택 감독, 박노식과의 인연은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지며 ‘사나이 삼대’ ‘황야의 독수리’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같은 한국 액션 영화의 걸작을 탄생시킨다.

1970년대 초 김희라가 출연한 액션 영화 중 그의 최고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다. 김희라는 데뷔 초기부터 박노식이 나오는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 박노식이 사랑하는 아우 또는 박노식과 갈등을 겪는 아우였다.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에서도 김희라와 박노식의 관계는 형과 아우다. 그들은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명동거리에서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생활을 하다 깡패 두목 장동휘가 거둬줘서 한가족이 된 사이. 젊고 거칠 것 없는 무뢰한 김희라는 아버지로 모시는 두목 장동휘의 사랑이 언제나 형뻘인 박노식에게로 향하는 게 불만이다. 자신도 형처럼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못 참겠는 것은 장동휘가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외동딸 최지희가 박노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김희라도 최지희를 사랑한다. 최지희에게 사랑을 받는 박노식에게는 사랑하는 여인(문희)이 따로 있다. 이 모든 것이 김희라를 화나게 한다.

조직에 일이 생기면 박노식을 견제해 앞장서지만 결국에는 박노식이 뒤에서 그를 봐주면서 자신의 실수를 해결해주는 것에도 화가 난다. 김희라는 박노식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로 몸부림치는 동생이다. 마치 ‘에덴의 동쪽’의 제임스 딘처럼. 김희라의 열등감과 질투, 박노식의 문희에 대한 눈먼 사랑. 그리고 짝사랑하던 박노식에게 실연당한 최지희. 이 세 사람의 애증은 그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그들의 파멸에 기름을 붓는 것은 바로 김희라의 야비한 배신이다.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두툼한 입술을 부르르 떨며 김희라는 박노식을 증오한다. 실연당한 최지희에게 억지로 사랑을 얻어내지만.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체념한 최지희의 육체만을 얻어낸 것일 뿐. 영화의 라스트. 모든 이를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 김희라는 한 팔을 잃고 복수에 나선 박노식과 대결을 한다. 박노식을 찌르려던 칼날을 돌려 자신의 배에 꽂고 죽어버리는 김희라. 비극의 씨앗을 뿌린 죄를 죽음으로 사죄하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영화 ‘시’로 제4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김희라가 팬들의 환호 속에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 

김희라의 열기는 윗세대인 최무룡, 김진규가 데뷔 초기에 보여준 젊음의 열기와 달랐다. 물론 신성일과도 달랐다. 그가 내뿜는 열기는 짐승의 비린내가 나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것이었다. 젊고 잘 생겼는데, 뻔뻔스럽고 야비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이런 멋진 캐릭터를 가진 김희라를 충무로가 가만 내버려둘 리 없었다. 박노식 하면 용팔이, 장동휘 하면 검은 장갑처럼 김희라에게도 별명이 필요했다. 드디어 그에게 왼손잡이라는 별칭이 부여된 영화가 등장한다. 이른바 왼손잡이 시리즈. 김두한과 그의 형제들의 신화를 다룬 영화 ‘팔도 사나이’로 흥행 감독이 된 김효천 감독과의 만남이었다. 주먹세계 묘사에 일가견이 있는,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협객이었던 김효천과 김희라는 서로 배포가 맞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첫 영화 ‘떠나가는 왼손잡이’(1969)는 임권택 감독과 박노식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박노식이 연기한 ‘상하이 박’ 캐릭터를 가져왔고, ‘왼손잡이’ 역시 박노식과 임권택 감독이 1년 전 ‘돌아온 왼손잡이’(1968)에서 만들어 낸 캐릭터였다. 두 번째 왼손잡이 시리즈 ‘마지막 왼손잡이’(1969)에서도 역시 김희라는 박노식과 교도소에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김희라는 젊은 혈기로 악당들을 제압해나가는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액션 배우의 세대가 바뀌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어진 ‘명동 잔혹사’(1972)가 바로 그것. 세 명의 감독이 세 명의 배우를 데리고 세 편의 에피소드로 만든 옴니버스 영화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배경은 일제강점기다. 왕년의 전설적인 주먹 박노식과 그를 죽이고 명동에서 이름을 날리려는 애송이 깡패 송재호가 등장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4·19 혁명 시대. 최무룡과 윤양하가 등장해 윤정희를 놓고 피의 혈투를 벌이다 몰사하는 비극적 라스트의 영화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 김희라가 등장한다. 월남전에 참전한 것이라 추측되는 김희라가 제대해 군복을 입고 명동거리에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미 조국은 경제개발과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새 시대. 김희라는 과거 깡패 짓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과거는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그가 꿈꾸는 새로운 삶은 과거에 그가 일했던 깡패 조직들의 음모와 배신으로 갈가리 찢기고, 김희라는 복수를 하고 파멸에 이르고 만다.

1970년대 초 이 영화가 만들어질 때까지 김희라는 새로운 세대의 액션 스타였고 유망주였다. 이제 더 이상 임권택 감독과 박노식의 그늘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시기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1970년대 중반. 더 이상 깡패가 등장하는 액션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액션 스타의 자리는 김희라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지만 주목받지 못하던 이대근이 혜성처럼 나타나 차지해버렸다.



 

조선 최고의 싸움꾼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젊은 시절 야만적인 액션 연기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김희라. 

197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유형의 한국 깡패 영화가 탄생했는데, 전설적인 주먹들의 실명을 다룬 영화였다. ‘김두한 시리즈’ ‘시라소니’ ‘거지왕 김춘삼’ 등. 이 모든 영화의 주인공은 이대근이었다. 액션 영화 팬들은 이대근에게 몰렸다. 이대근이 연기한 깡패 캐릭터에는 김희라에게는 없는 유머가 있었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로 연기하는 김희라보다는 밝고 유머러스한 이대근이 통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게다가 이소룡 영화의 광풍 때문에 한국 액션 영화는 모두 무술 영화가 차지해버렸다. 김희라는 박노식 세대의 배우로 인식됐고, 박노식·최무룡 같은 1950년대 말에 등장한 배우들의 사라짐과 함께 그의 존재도 사라져버렸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등장해 김희라가 가진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 영화가 ‘신풍객’(1976)이다. 시대물과 액션 영화 시나리오에 일가견이 있던 작가 윤삼육은 당시 쏟아져 나오던 국적 불명의 한국 액션 영화를 뛰어넘는, 한국 사내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통 액션 영화를 만들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홍명회의 ‘임꺽정’에서 볼 수 있는 영웅호걸풍의 조선 왈짜패 캐릭터를 영화에 담으려 했고, 주연 자리는 김희라에게 돌아갔다. 

영화가 시작되면 기생의 치마폭에 휩싸여 먹고 자고, 술 마시고, 섹스하는 일에만 열심인 한심한 왈짜패 사내 김희라가 등장한다. 화류계 계집 품에서 노는 것이 사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소일거리라 킬킬거리며 말하지만,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경상도 어느 곳에서 힘쓸 일, 즉 싸움질할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동안 싸움질 안 하고 어떻게 참았는지 가지 말라고 우는 계집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이번에는 어떤 놈을 늘씬하게 패주나 희희낙락 길을 떠난다. 여자도 안다. 자신의 치맛자락 속에서 놀 때 그가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란 것을. 죽지 않고 다시 돌아오기만 바랄 뿐. 뭐 이 장사 한 두 번 해보고. 저런 사내 한두 번 겪어봤나 하는 감정을 젊은 날의 박원숙은 아주 능청스럽게 표현해낸다. 왈짜패 김희라가 찾아간 곳은 저기 경상도 어느 마을. 이 마을에는 옛 왕조 즉 신라왕의 왕릉이 많이 있는데 일본인 부자와 순사, 야쿠자들, 조선인 도굴꾼들이 신라의 유물을 마구 약탈해간다. 무법천지를 참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신라의 유물을 지키려 하는데, 일본 순사들의 비호를 받는 일본인 부자들이 고용한 일본 야쿠자들의 싸움 실력이 보통이 아니고, 그들의 안하무인 행패 역시 마을 사람들을 참담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마을 사람들은 조선의 협객을 수소문하고, 의기가 있는 내로라하는 조선 협객들이 일본인 야쿠자와 대결하지만, 그들의 유도에 꼼짝 못하고 줄행랑을 놓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김희라가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조선 최고의 싸움꾼임을 자처하던 왈짜패에게 많이 속은 터라 행색이 초라한 김희라에게 눈길 한 번 안 준다. 마을에 나타난 김희라는 자신의 힘을 쓸 일에 너무 기뻐 방심하다 첫판에서 무참하게 얻어터진다. 첫 싸움에 졌지만 김희라의 얼굴은 매우 밝다. 한번 붙어볼 만한 놈들을 만난 것이 기뻐서 미칠 지경이라는 것이다.

김동리의 소설 ‘황토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태어나길 싸움만으로 먹고살게 태어났는데 도무지 힘쓸 일이 없는 사내들. ‘신풍객’에서의 김희라는 소설 ‘황토기’ 속의 사내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비록 당시 창궐하던 홍콩제 무술 영화와 한국 태권도 영화, 이대근 주연의 실명 깡패 영화의 기세에 밀려 소문도 없이 사라졌지만, 조선의 영웅호걸이 지닌 유유자적과 호탕함이 넘쳐나고 게다가 이런 곳밖에는 힘을 쓸 수 없는 나라 잃은 뛰어난 사내의 비애까지 표현한다. 김희라의 연기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이대근의 유머러스함을 가뿐하게 뛰어 넘는다. 지금까지 액션 영화에서 젊음의 분노와 어둠만을 연기하던 그가 유머러스한 캐릭터 연기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 영화였다.  







부전자전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김희라의 아버지로 1950~6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끌었던 연기파 배우 김승호.

1970년대 중반 이후 액션 영화에서 김희라를 더는 볼 수 없었다. 소위 정극이라 할 만한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그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그의 연기는 더욱 농익고, 깊이와 넓이가 더해졌다. 그리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웃음을 받던 액션 영화를 더 이상 연출하지 않는 임권택 감독과 다시 조우했다. 임권택 감독의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에서 김희라는 아주 인상적인 인민군 장교 역을 해낸다. 소년병들의 자살적인 죽음을 묵묵히 바라보는 인민군 포로였다. 라스트에 자신과 함께했던 소년병들이 모두 인민군 탱크를 향해 자폭하며 죽어버린 후 마지막으로 죽은 소년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그의 모습에는 전쟁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짙게 배어 있다. 나이가 서른에 접어든 김희라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주로 악당 역할을 해내는데 그것이 모두 훌륭했다. ‘바람 불어 좋은날’ ‘장남’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같은 영화에서 김희라는 포주, 기둥서방, 건달, 생선장수 등 도시 변두리 빈민촌과 우범지대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30대 남자를 연기해낸다. 그의 아버지가 1950년대 서민을 연기했던 것과 비교된다.


김승호가 1965년 출연한 영화 ‘마포 사는 황부자’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자린고비인 새우젓 장사 김승호는 점심값이 아까워 골목 귀퉁이에 자리 잡고 앉아 팔다 상해버린 새우젓을 한 움큼 집어 먹는다. 짜고 비린 새우젓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점심 한 끼를 때우는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 슬펐다. 그에 비견되는 김희라의 작품은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빨간 빤스 하나 달랑 걸치고 중랑천 판잣집 안방에 앉아 의붓 자식과 화상을 입은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하루벌이를 하는 가난한 아내를 앞에 두고 밥을 먹는 김희라. 그의 빨간 빤스 속에는 아내 김보연이 날품팔이로 벌어온 돈이 감춰져 있다. 하하하. 자격지심 때문인지, 아니면 아내 김보연의 옛사랑 안성기가 아내를 빼앗아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하여튼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초라한 밥상을 뒤집어엎고 난리를 치는 장면이다. 김승호는 점심을 새우젓으로 때워가며 악착같이 돈을 벌다 신장염으로 죽기에 이르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를 원망하고 경원시한다. 김희라 역시 아내를 패고, 의붓 자식을 패고, 그들의 돌린 등을 보며 김치 쪼가리 하나를 놓고 밥을 먹다 제 분에 못 이겨 밥상을 뒤엎는 것이다. 아버지가 서민 연기의 대가였다면 아들은 빈민 연기의 제왕이었다.

1980년, 배우 김희라는 인생 최고의 연기가 담긴 걸작에 출연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짝코’다. 처자식이 없고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게다가 젊어서 함부로 굴린 몸뚱이가 비명을 지르는 비참한 인생들의 종착역. 노인 행려병자들이 수용된 갱생원에 젊어서 힘깨나 썼겠지만 지금은 당뇨를 비롯한 온갖 질병이 가득한 몸뚱이를 웅크리고 앉은 노인 김희라가 있다. 새로 들어온 신참 하나가 그를 유심히 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묻는다. “혹시 짝코 아냐?” 6·25전쟁 당시 악명 높던 공비 짝코와 그를 체포해 압송하다 놓쳐버린 전투경찰 최윤석의 만남이다. 짝코를 놓친 그날 이후, 전투경찰 최윤석의 인생은 망가져버렸다. 단란했던 가정도 짝코의 뒤를 쫓는 그의 집념 때문에 박살이 났다. 그는 아직도 짝코의 행방을 쫓아다니는 미친 노인네다. 짝코 김희라 역시 망가지기는 마찬가지. 공비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며 악귀처럼 굴었던 죄의 대가로 일생을 도망자의 신세로 어둠에 숨어서 살았던 것. 이 영화에서 짝코를 연기한 김희라는 구구절절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가 내뱉는 숨소리와 고통에 찬 한숨 하나하나가 최윤석의 손에서 도망친 이후 20여 년의 삶을 표현해낸다. 최윤석의 집념에 의해 다시 압송되는 짝코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화를 보는 나는 ‘인간이란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





조로와 부활 

1970년대 한국에는 영화 수입 쿼터제라는 이상한 악법이 있었다. 한국 영화를 몇 편 이상 만들거나 영화가 대종상을 수상하면 외국 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인데, 이 법은 영악한 영화제작자들이 한국 영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외국 영화 수입쿼터를 따기 위해 이미 촬영한 영화의 자투리 필름을 이용해 만든 ‘짝코’는 극장에 일주일도 걸리지 못하는 천대를 받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사이 한국 영화의 가장 드높은 경지 중 하나다. 김희라도 이 영화로 그의 연기 인생에 정점을 찍었지만, 역시 영화란 흥행이 돼야 하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라야 권력과 영광을 얻는다. 세월이 지난 후 재평가돼 빛나는 별이 되었다 한들 이미 늦은 일이다. 이제 김희라는 더 이상 돈 되는 배우가 아니었다. 이후 그는 이런저런 영화에 조연 또는 단역으로 출연한다. 1980년대에 그가 출연한 영화는 거의 모두 인상적이지 않았다. ‘수탉’(1990)에서 달걀장수 김인문과 라이벌 관계이면서 그의 딸을 사모하는 중늙은이 달걀장수로 나온 김희라는 ‘역시 가난하고 볼품없는 도시 빈민 연기가 제격이야!’라는 감탄을 일으키지만, 그의 연기 인생은 이미 내리막이었다. 


1996년 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실패한다. 그리고 허물어져 간다. 마치 영화 ‘짝코’의 주인공처럼. 2006년 그는 다시 일어선다. 영화 ‘사생결단’과 ‘시’에서 그의 연기는 말년의 말론 브랜도를 연상시키는 존재감이 있다. 대배우 김승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밥을 빌어먹는 거지와 양아치 생활을 거쳐 1960년대 말 영화배우로 데뷔하고, 대한민국의 배우 중 가난한 서민 역할을 제일 잘했던 아버지를 능가하는 빈민 사내 연기의 제왕이자 액션 배우였던 김희라. 60대에 들어선 김희라가 보여줄 또 다른 경지의 연기를 기대하는 것은 영화광의 입장에서 행복한 기다림이다. 부디 건강하시길.


 

2011년 12월 호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영화 무림을 평정한 전설의 태권 스타


  • 1970년대 권격 영화 전성시대, 수많은 액션배우 중 왕호는 단연 돋보였다. 맨손으로 무쇠를 격파하는 무술 실력에 큰 키, 매서운 눈매까지 갖춘 그에게선 이소룡을 이어 아시아 영화계를 평정할 자질이 엿보였다. 홍콩에서 러브콜도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이 독이었다.
  • “현지 배우들이 못하는 것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에 무리가 오더라도 참고 일했다”고 고백하던 왕호는 때 이른 나이에 한국·홍콩 모두에서 소모되고 만다. 한때 ‘이소룡을 뛰어넘을 단 한 명의 태권 천재’로 불렸던 액션 배우, 왕호를 추억한다.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영화 ‘중원호객’에서 시원한 발차기 실력을 선보인 왕호.

1970년대 중반. 한국 극장가는 맨손으로 격투를 벌이는 권격 영화의 세상이었다. 홍콩에서는 쿵푸 영화가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는 태권도 영화, 일본에서는 가라테 영화가 만들어졌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새로운 유형의 권격 액션 영화들이 저마다 대문짝만하게 내거는 홍보문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소룡을 뛰어넘는 권격 스타의 등장’이었다. 1960년대 중반 홍콩에서 등장한 홍콩 쇼브러더스 영화사의 신무협 영화들은 단숨에 홍콩과 대만, 동남아시아의 화교 시장을 점령하고 이웃 한국에 상륙, 흥행에 성공했다. 1970년대 초, 동남아 화교 시장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이소룡의 ‘당산대형’은 홍콩과 대만을 넘어 한국과 동남아시아 전역을 휩쓸었고 당시 아시아 영화의 대표 선수였던 일본 극장가까지 점령해버린다. 아직 할리우드를 넘볼 수 없었던 그 시절, 이소룡 영화는 아시아 전역을 점령한 최초의 흥행작이었다.

갑자기 나타났다 너무 빨리 사라져버린 이소룡은 아시아 영화인들과 배우 지망생에게 성공 신화가 됐다. 이소룡 사후 모두 이소룡의 성공 신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성공 신화를 이루기 위해 꼭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소룡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소룡과의 친분이나 그의 영화에 출연한 경력을 지닌 배우를 내세운 홍콩 영화가 등장한다. 이소룡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소기린도 그와의 친분을 내세워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이소룡 친구인 것은 개인 사정일 뿐, 이소룡의 친구였다고 이소룡 영화를 뛰어넘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시킨 처참한 사례였다.

 


포스트 이소룡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이소룡의 친구였다고 주장하는 사나이가 주연을 한 영화가 등장했다. 신문 광고 상단에는 이소룡과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사나이의 사진이 월계수 이파리로 테두리가 장식된 채 대문짝만하게 놓이고, 그 밑에는 ‘친우 이소룡과 다정했던 한때’라고 적혀 있다.  

광고 문구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소룡 너의 뒤를 이어 나 바비킴이 왔다!” “동양의 찰스 브론슨. 찰스 브론슨과 닮았다! 그렇다! 아니다! 그러나 바비킴은 태권과 남성미를 갖춘 사나이 중의 사나이다” “새로운 액션 황제의 등극” “미 공군사관학교 태권도 교관. 미국의 무술 잡지 블랙벨트에서 선정한 발재간의 사나이” “이소룡에서 점보 사나이 바비킴의 새 시대가 왔다.”

광고 문구가 사실이라면 대단한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하여튼 영화 제목은 ‘죽엄의 승부’. 신문 광고를 본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 전 이소룡의 뒤를 이어 액션 영화계를 평정했다는 양소룡이 출연한 ‘홍콩에서 온 불사신’이라는, 이소룡의 ‘맹룡과강’ ‘짝퉁’영화를 보고 매우 실망한 터라 이제야말로 진짜 이소룡의 후계자가 한국에서 등장했다 생각하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물론 일말의 불안감도 있었다. 이소룡과 찰스 브론슨까지 동원해 영화를 홍보하는 것이 혹시 과대선전은 아닐까 하는. 과연 그랬다.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바비킴이 이소룡의 카리스마와 연기를 따라가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 프로그램 묘기 대행진을 보고 있던 나는 태권도 묘기를 선보이는 사나이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이름은 김용호. 당시 진행자였던 변웅전 아저씨가 화려한 경력을 소개했는데, 이건 뭐, 이소룡을 뛰어넘을 단 한 명의 태권 천재가 나타난 대사건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로 전국태권도 대회에 전북 남원 대표로 출전해 준우승을 하고, 중3 때는 태권도 대회 단체전 우승. 1970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태권도 체육관을 개설해 사범을 지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해병대 태권도 선수단에 입단, 제대 후에는 세계태권도 선수대회 시범단으로 활약. 그리고 1976년 태권도 영화 ‘흑룡강’으로 데뷔했고, 현재 홍콩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홍콩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화려한 경력의 사나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키였던 변웅전 아저씨보다 키도 더 크고, 눈매가 아주 매섭고, 약간의 촌티가 흘렀지만, 그래도 남자 액션 배우로 보자면 그럴듯한 얼굴과 몸이었다. 사나이는 먼저 자신의 주특기인 발차기를 보여주었다.

 


핵폭탄 같은 발차기 

돌이켜보면 그보다 2년 전 혜성과 같이 등장한 태권 스타 챠리셸이 있었다. 나팔바지를 입은 늘씬하고 긴 다리로 돌려차기를 하며 한국 태권도 영화의 탄생을 알린 첫 스타였다. 이소룡 닮은 잘생긴 외모도 한몫했지만 그의 성공은 뭐니 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무술 실력보다 멋진 외모와 늘씬하고 긴 다리를 가진 배우를 찾아내려 했다. 신체조건이 좋은 배우라면 태권도 실력이 보잘것없어도 멋진 액션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믿었고 영화는 그 믿음을 증명했다. 챠리셸이 발차기로 상대방의 뺨따귀를 스무 번 이상 연타로 날리는 통쾌함은 그의 무술 실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챠리셸이 발을 들어 올리면 바로 클로즈업해 쾌감을 극대화한 감독의 연출력이 만든 것이다.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왕호는 2005년 한국과 중국 무술을 결합한 새 무술 ‘대한천지무예도’를 창립하는 등 무술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묘기 대행진에 출연한 이 사나이의 발차기는 이전의 권격 액션 스타들, 챠리셸, 황인식, 황정리, 이소룡과 달랐다. 그의 발차기는 탱크를 움직이는 강력한 피스톤 엔진이었다. 이소룡의 발차기가 강하고 빠르지만 이 사나이의 발차기는 이소룡의 그것을 서너 배는 능가하는 파워와 빠르기를 지녔고, 무엇보다도 핵폭탄 같은 강함이 느껴졌다.  

파워풀한 발차기로 나의 얼을 반쯤 빼놓은 사나이는 이제 격파에 들어갔다. 그의 해머 같은 주먹에 벽돌이 산산조각 났다. 뭐 벽돌쯤이야. 하는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사나이는 무쇠로 만든 솥뚜껑을 격파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격파했다. 그다음은 물 펌프의 무쇠 손잡이였다. 시장통의 웬만한 약장수 뒤를 따라다니며 온갖 격파를 실제로 봐온 나였지만 무쇠로 된 두께 3㎝가 넘는 물펌프의 손잡이를 격파했거나 격파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었다. 저것을 격파한다면 저 사나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에 어마어마한 피스톤 발차기 능력을 지닌 진정한 이소룡의 후계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긴장감을 자아내는 드럼이 연주되고, 사나이의 굳은살 박인 칼보다 더 날카로운 수도(手刀)가 천천히 올라간다. 첫 번째 시도. 무쇠 펌프 손잡이는 부러지지 않고 사나이의 손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사회자 변웅전 아저씨가 당황했지만, 사나이는 침착하게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격파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두 번째 가격. 무쇠는 부러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세 번, 네 번째의 가격. 그의 손은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낭자했다. 다섯 번째 가격.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쇠 펌프 손잡이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보라! 태권왕 왕호를” 

우와! 나는 사나이 김용호의 팬이 되었고, 그가 이소룡을 능가할 최고의 권격스타가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홍콩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니! 김용호는 한국에서 ‘흑룡강’(김선경 감독, 1976)과 ‘밀명객’(김선경 감독, 1976)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두 편은 그저 그랬지만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저 사나이는 분명 홍콩에서 뭔가 일을 저지를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김용호는 이름을 왕호로 고치고 홍콩으로 날아갔다.

얼마 후,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화로 돌아왔다. 왕호 홍콩 진출 제1작 ‘사대문파’(김정용·황풍 감독, 1976). 당시 신문광고 문구 “보라! 태권왕 왕호의 3단 옆차기 도약격파를!”을 보고 나는 외쳤다. “꼭 보겠다, 그의 3단 옆차기를!” 광고 속에서 그의 이름은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아시아 무협 스타 진성의 바로 윗자리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신인이라도 이소룡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이니 홍콩에서도 당당하게 첫 영화에서 주연 자리를 꿰찼을 것이라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동네 친구들에게 왕호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를 열심히 떠들어서 혹하게 만들어 모두 몰고 서대문 로터리의 화양극장으로 갔던 날이. 영화가 시작됐다. 청 왕조의 무술가 진성이 구사하는 최강의 무술 나한진을 격파하기 위해 강호의 사대문파들이 도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영화 초반부터 악역인 홍콩배우 진성이 나와 중원의 사대문파들을 격파한다. 나는 시계를 봤다. 영화 시작 후 30분이 지났다. 진성은 악역이니까 조연이고, 나의 왕호는 분명 주인공. 그런데 왜 주인공이 안 나오지? 아! 악당 진성이 종횡무진 나쁜 짓을 저지르고 그의 악행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할 때 왕호가 나올 것이다. 조금만 참자. 왕호가 멋지게 나올 것이다.  

30분이 40분이 되고, 나는 왕호가 나오기를 기다리느라 영화 내용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왕호는 안 나온다. 이제 영화의 라스트. 악당 진성과 사대문파의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이제 왕호는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다. 아! 이게 뭔가? 또 속은 건가? 당시 한국 액션 영화 중 사기 치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나는 속았다고 생각하고 체념했다. 영화가 끝나기 10분 전. 사대문파의 고수들도 진성의 무술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쩔쩔맨다. 사대문파 최고의 위기. 그때 갑자기 사대문파 중 하나인 소림파에서 구원병이 도착한다. 50여 명의 소림 무술승이 우르르 떼거리로 몰려온다. 그리고 그 맨 앞에 머리를 빡빡 깎은 왕호가 달려오고 있었다. 앗! 왕호다. 진성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소림 무술승 중 왕호는 단연 시선을 끄는 탱크 엔진의 피스톤 같은 킥으로 진성을 정신 못 차리게 한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초에 20회 이상의 번개 같은 발차기가 진성을 똥오줌 못 가리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날아차기, 뒤차기 등 온갖 발차기를 선보이는 왕호 앞에 무너지는 진성. 그러나 곧 수많은 승려 속에 왕호는 묻혀버린다. 기운을 차린 이 영화의 주인공들, 곧 사대문파의 고수들이 나서서 진성을 공격해 그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다. 멋진 발차기를 선보이기는 했지만, 왕호는 주연이 아니고, 단역이었다. 아주 좋게 말하자면 3분 정도 출연한 ‘특별출연’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동네 친구들에게 액션 영화에 관한 모든 신용을 잃어버렸다.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왕호가 홍콩 진출 전 촬영한 영화 ‘밀명객’의 포스터.


혹시나, 역시나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홍콩 영화계에서 조역으로 활동한 왕호가 멋진, 그러나 조금은 지쳐 보이는 발차기를 선보인 영화 ‘생사결’.

낚시를 하다보면 방금 전 미끼를 물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달아난 붕어가 다시 미끼를 물어 잡히는 경우를 본다. 한국 액션 영화에 관한 한 나는 붕어였다. 사기성 광고에 속으면서도 늘 ‘이번에는 혹시나 멋진 영화를 볼까’ 하는 심정으로 극장에 가서 또 속는 신세였다. 1977년, 홍콩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른바 소림사 영화. 1975년 한홍 합작 진성 주연 ‘소림사의 결투’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홍콩 영화계는 소림사 영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소림사 18동인’ ‘소림사 십대제자’ ‘소림천하’ ‘소림 목인방’ ‘소림 통천문’ ‘소림 백호문’ ‘소림36방’ 등 소림 무술의 비기를 멋지게 영화화한 홍콩 영화와, 그와 비슷한 ‘짝퉁’ 소림사 영화까지 합해 ‘소림’ 딱지를 붙인 영화가 줄줄이 극장에서 개봉됐다.  

그 다음은 이소룡 영화의 속편 행진. 저마다 ‘이소룡의 후계자’임을 내세운 이소룡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의 배우들이 이소룡의 괴조음과 연기를 흉내 내는 작품들이었다. ‘속 정무문’ ‘신 용쟁호투’ ‘신 당산대형’ ‘신 정무문’에 이어 급기야 ‘불타는 정무문’과 ‘최후의 정무문’까지 나왔는데 대부분 이소룡 영화의 속편이라기보다는 전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내용에 이소룡 닮은 배우가 출연해 이소룡 흉내를 내는 영화였다. 나는 ‘누가 더 이소룡을 닮았나’ 심사하는 심사관이 돼 극장에 드나들었는데, 이여룡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가 나중에는 아주 대놓고 여소룡으로 이름을 바꾼 대만 출신의 배우가 기억난다. 그는 울상을 지을 때만 이소룡과 닮은 깡마른 몸매에 좀 빈티 나는 얼굴의 소유자여서 영화 보는 내내 애쓴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종도란 배우도 있었다. ‘쌍룡비객’이란 영화에서 이소룡 흉내를 냈는데, 라면만 먹고 몸을 만든 사람처럼 없어 보이는 여소룡에 비해 영화 주인공 같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짝퉁’이었다. 이 시기 이소룡 속편 행진 해프닝의 완성은 ‘사망유희’였다. ‘사망유희’는 이소룡이 라스트 몇 장면을 홍콩의 세트장에서 먼저 촬영한 뒤 한국에서 모든 장면을 촬영하려 했지만, 한국의 겨울 추위가 너무 두려워 촬영을 봄으로 연기했다가, ‘용쟁호투’를 계약하는 바람에 이를 먼저 촬영하고 편집하던 중 급사해 미완성으로 남은 영화다. 홍콩 골든하베스트와 미국 워너브러더스는 이소룡의 미완성 영화를 완성하기로 결정하고 이소룡 역을 대신할 배우를 뽑기로 했다.  







‘사망유희’의 비극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소룡의 후계자를 뽑는 것이라 생각했다. 전체의 5분의 1 정도만 촬영된 영화의 이소룡 등장 장면 외에 다른 부분은 이소룡 역으로 뽑힌 자가 이소룡 연기를 하는 것이다.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이소룡이 입던 깃 넓은 셔츠에 굽 높은 구두, 나팔바지를 입고 이소룡처럼 머리를 자른 젊은이들이 당구장에 넘쳐났다. 나 역시 쌍절곤을 휘두르고, 괴조음을 흉내 냈지만, 나는 이소룡보다는 홍금보를 더 닮아 결국 포기하고 누가 이소룡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드디어 이소룡 역이 결정됐다. 그 행운아는 다름 아닌 한국 사람이었고, 영화에 출연한 적 한 번 없는 신인 김태정이었다. 은근히 시기와 질투가 났다. 차라리 홍콩이나 대만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인데 한국 사람이라니. ‘어디 두고 보겠어. 이소룡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가는 험한 꼴을 볼 것이다!’ 

‘사망유희’가 완성되고 개봉됐다. 아, 한두 번 속나 했지만 또 속았다. 배우 김태정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나름 열심히 연기했다. 사기극의 주인공은 재능 없고 무능하며 나태하기 짝이 없고 색만 밝히는 감독 로버트 클로즈와 영화사 사장 놈들이었다. 영화의 중간 중간에 이소룡의 클로즈업은 모두 이전에 개봉한 영화에서 짜깁기한 것이었고,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김태정이란 배우의 얼굴을 영화 속에서 한 번도 확인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그는 얼굴의 반을 덮는 잠자리 선글라스를 쓰고 있거나 뒤돌아 있거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최악이었던 것은 이소룡의 사진을 가면으로 쓰고 나온 장면이었는데, 이런 사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길고 지루한 로버트 클로즈의 촬영분이 지나가고 진짜 이소룡이 등장하는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관객석에서 울려 퍼지던 탄성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소룡이 찍은 그 라스트의 10분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길고 긴 줄을 서서 영화관에 들어가 1시간20여 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왕호는 이 영화에 핀치히터로 급파된다. 이소룡 등장 장면 이전까지 영화의 액션 장면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간파한 제작진이 액션 장면 하나를 급히 재촬영한 것이다. 식물원에서 이소룡 역의 김태정과 왕호가 대결한다. 매우 훌륭한 액션 장면이었지만 제작자들의 그 어떤 재능도 발견할 수 없다. 그냥 배우들의 피와 땀만 착취한 것이다.











특별출연 배우 

‘사망유희’의 사기극을 잊으려 나는 다시 극장을 찾았다. 홍콩에서 활약하는 왕호의 출연작 ‘중원호객’. 이 영화 포스터에는 홍금보와 왕호 두 사람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왕호의 주연작이구나 했지만, 역시 왕호는 멋진 발차기를 선보인, 좋게 말하자면 특별출연이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나의 왕호는 분명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자질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악역으로 출연했던 성형수술 전의 성룡보다는 왕호가 더 카리스마 있고 무술 재능이 넘치는 배우였다. 성룡표 코미디 쿵푸 영화의 첫 시도였던 ‘오룡대협’으로 그의 재능이 발견되기 전까지, 성룡은 그렇고 그런 배우였다. 그런데 왜 왕호는 멋진 발차기를 선보이고는 사라지는, 좋게 말하면 특별출연 배우에 불과한 것일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나는 스무 살 성인이 됐다. 그리고 또다시 왕호를 보러 극장을 찾았다. 영화의 제목은 ‘생사결’. 홍콩 영화였다. 극장 간판에는 또 왕호 주연작이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흥, 하고 비웃었다. 이제는 성인이 됐으니 더 이상 속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시작됐다. 혹시 왕호가 이제는 홍콩 영화계에서 성공해 주연으로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하더니, 나는 또다시 왕호의 첫 홍콩 진출작 ‘사대문파’를 보던 초등학생이 돼 이제나 저제나 왕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왕호는 중간쯤 잠깐 출연해 멋진, 그러나 이제는 좀 지쳐 보이는 발차기를 선보이고는 죽어버렸다. 내가 분통이 터지는데 왕호 본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사라진 전설  

태국에서 만든 무에타이 영화 ‘옹박’이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주인공이 두 다리에 불을 붙이고 3~4m를 날아올라 상대방을 날려버리는 멋진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하하. 그까짓 것. 이미 30여 년 전 왕호는 두 다리에 불을 붙이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식탁 서너 개를 뛰어넘어 상대방의 몸통을 날려버리는 명연기를 선보였었다. 홍콩으로 건너간 왕호는 정말 열심히 영화 일을 했다. 온몸을 불사르고 영화 출연자 중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멋진 액션 연기를 한 전설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홍콩에서 돌아온 왕호는 야심만만하게 자신이 주연을 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 첫 번째가 1977년의 ‘사대철인’이다. 무술이 월등하게 뛰어난 적을 물리치기 위해 주인공 왕호는 일부러 적의 창이 자신의 배를 관통하게 해 적의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고는 적과 포옹해 자기 배에 꽂힌 적의 창으로 자신과 적이 함께 죽는 장렬한 라스트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몇 해 전 상영돼 관객을 감동시켰던 ‘소림사 18동인’과 ‘소림사 십대제자’의 라스트에서 다 보았던, 주인공이 희생해 적과 함께 자폭하는 장렬한 라스트였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한국의 관객 수준을 너무 생각했는지, 주인공 왕호는 적의 창을 배에 꽂고는 껄껄 웃으며 “크하하하. 넌 속은 거야. 넌 이제 무기가 없어. 내 뱃속에 들어와 있잖아. 넌 이제 너의 창에 찔려 죽을 거야”라고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준다. 형편없는 시나리오와 연출. 그가 잠깐 틈을 내 한국에서 만든 영화는 모두 급조된 형편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그의 멋진 발차기를 멋있게 찍어내는 연출조차 한국에는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왕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자신이 직접 감독을 하고 주연을 하며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홍콩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 게다가 돈도 모았다. 이제 내가 멋진 영화를 찍겠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홍콩에서 마왕으로 대우를 받았던 황정리가 생각난다. 1980년대 초.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한국 액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수없이 시행착오를 한 왕호가 영화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방법을 알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엿보이는 영화다. ‘흑표비객’(1981). 물론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많고, 당시 극장가를 휩쓴 홍콩의 코미디 쿵푸 영화를 닮으려는 기색이 뻔뻔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 왕호는 자신만 돋보여서는 영화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무술 액션배우가 아닌, 영화배우가 돼간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70년대. 나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뜨거운 사막의 땅, 사우디로 갔었다. 청소년 시절 왕호의 꿈은 미국에 가서 태권도 사범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사내들은 몸뚱이 하나를 밑천으로 멀리 타국으로 날아가 성공하고 싶어했다. 왕호의 인터뷰를 보면 홍콩 액션 배우들이 못하는 것을 자신은 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생각하며 몸에 무리가 오더라도 참아내며 일을 했다고 한다. 피와 땀을 흘리며 성실하게 육체노동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그를 한국 영화계는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저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서로의 재능과 열정을 탕진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제2의 이소룡이 될 수도 있었던 재능 있는 사나이는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린다.


 

2012년 01월 호

라스트 액션 히어로 이대근

 

1970년대 패기 넘치는 영웅 신화의 주인공


  • 스크린 속 그의 눈빛은 언제나 번뜩였다. 야수 같은 마음과 괴물 같은 힘,
  • 사내의 내면에서 아우성치는 원념이 샅샅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 김두한, 김춘삼, 시라소니…. 한국 현대사의 신화적인 주먹이
  • 모두 그의 몸을 통해 부활했다. 1990년대 이후 수많은 배우가 액션 영화에
  • 출연했지만, 한 시대를 상징한 영웅은 그가 마지막이었다.
  • 한국 영화의 라스트 액션 히어로, 이대근을 추억한다.

 

라스트 액션 히어로  이대근

이대근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2007년 영화 ‘이대근, 이댁은’의 한 장면.

1975년2월의 어느 날.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돌았다. 영화 ‘실록 김두한’(김효천 감독·1974)이 끝내주게 재미있다고. 일주일간의 제3개봉관 상영일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모양새를 바꾼 신촌로터리의 신영극장을 찾았다. 극장 매점에서 크라운 산도 과자를 하나 사고 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영화가 시작됐다. 당시 인기 있던 아역 배우가 소년 김두한으로 등장한다.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라던 소년 김두한은 영문도 모르고 쓰나미처럼 밀어닥친 불행에 의해 고아가 돼 거리를 떠돌다 종로 수표교 다리 밑의 거지왕초 허장강에게 거둬진다. 세월이 흐르고 햇살이 쨍한 겨울의 어느 날 아침. 멀리 보이는 수표교 아래서 거지들이 아침 준비를 하고 있다.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면 20대 초반의 청년이 보인다. 청년은 입김이 풀풀 나오는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웃통을 벗어 맨살을 드러낸 채 운동을 하고 있다. 몇 해 전,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수표교 다리 밑으로 흘러들어온 고아 소년 김두한이 성장한 것이다.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에 곰처럼 두터운 가슴. 아직 애송이 티를 벗지는 못했지만 싱싱하다. 청년은 그를 눈여겨보던 건달 이대엽에 의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자신이 왜 거리로 쫓겨나 이 수표교 다리까지 왔는지. 청년 김두한의 아버지는 청산리 대첩의 명장. 그는 바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불행의 근원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것을 안 청년 김두한은 서서히 변화한다. “나는 수표교 다리 밑의 거지새끼가 아니라 장군의 아들이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김두한은 과묵해지고, 매사에 신중해진다. 청년 김두한의 가슴속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새겨진다. 비록 거지새끼지만, 아버지가 그랬듯 뭔가를 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본인 야쿠자들로부터 방패막이 될 것을 결심한다. 일본인 야쿠자와 일전을 치르면서 그의 싸움 실력이 보통이 아니란 것이 알려지고. 청년 김두한은 신마적과 종로를 놓고 패권을 다투는 우두머리가 된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일본 고등계 형사의 독사 같은 눈길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일본인 야쿠자가 보낸 자객에 의해 수표교 다리 밑 생활 때부터 죽마고우였던 친구가 죽자 김두한의 분노는 폭발한다. 호랑이 같은 두 눈이 붉어지고, 훤한 이마에 핏줄이 곤두선다. 새로 단장한 하얀 양복을 입고 일본 야쿠자와 대결하기 위해 종로 거리를 걷는 김두한. 이쯤에서 영화를 보던 나는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생이던 나는 영화를 보며 주인공이 악당에게 이기거나 뭔가 큰 결심을 위해 일어설 때 관객이 박수 치는 것을 아주 창피한 행동이라 깔보고 있었다. 게다가 유치한 한국 액션 영화를 보고 박수를 치다니. 당시 한국 영화를 보던 관객의 최고 쿨한 행동은 끝나기 10분 전쯤 “알았어. 라스트는 안 봐도 뻔하다고!”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벌떡 일어나 극장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청년 김두한이 일본인 악당과 대결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데 박수를 치다니. 이런 귀신이 곡할 노릇이 있나! 영화가 끝난 뒤 극장 문을 열고 나서면서 내가 외친 탄성은 “우와 재미있다!”였다. 이렇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해서 한국 액션 영화를 본 경우가 그때까지 거의 없었다. ‘실록 김두한’은 ‘황야의 7인’이나 알랭 들롱의 프렌치 누아르, 이소룡과 왕우의 홍콩 액션 영화만큼의 몰입도가 있었다.

 

영웅의 탄생
 

당시 나는 한국 액션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할리우드 영화나 홍콩 영화와 비교할 때 몰입을 방해하는, 부족하고 민망한 장면이 끊임없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의 한국 액션 영화 중 하나였던 챠리 셸 주연의 태권도 영화들 역시 어디지 모르게 엉성하고, 홍콩 영화에서 본 듯한 줄거리가 나와 김이 새고, 더구나 주인공의 카리스마가 나를 압도하지는 않았지만 발차기가 좀 남다르게 멋있으니, 하며 보았다. 그런데 처음 본 저 배우. 이대근에게 나는 완전히 몰입했고, 영화 처음에는 애송이 같고 뭔가 불만족스럽던 그에게 점점 압도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이야기가 홍콩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뭔가 새로웠다. 물론 ‘실록 김두한’이 대단히 잘 만든 걸작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복수가 주된 골격인 당시의 한국 액션 영화와는 달랐다. 주인공이 쏟아내는 격한 감정에 동화될 수 있는 독특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라스트 액션 히어로  이대근

이대근은 김두한, 김춘삼, 시라소니 등을 연기한 선 굵은 액션스타였다. 

1974년 만들어진 ‘실록 김두한’은 김효천 감독의 두 번째 김두한 영화다. 김효천 감독은 6년 전 ‘팔도 사나이’란 영화로 한 번 김두한 이야기를 만들었었다. 당시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두한이라 짐작되는 주인공의 이름은 휘였다. 영화에 김두한의 실명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두한이라 추정되는 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장동휘. 영화가 시작되면 장동휘는 이미 종로 바닥의 영웅이다. 하지만 완전히 패권을 거머쥔 것은 아니다. 그 앞에는 태산과도 같은 권력을 지닌 일본 야쿠자와 일본 헌병들이 있다. 일본 헌병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야쿠자만큼은 종로 바닥에서 몰아내고 싶은 것이 장동휘의 생각이다. 그런 장동휘에게 무시무시한 실력을 지닌 싸움꾼 하나가 나타나 도전을 한다. 전라도에서 올라온 용팔이. 장동휘는 그를 원 펀치로 제압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용팔이는 무릎을 꿇고 장동휘를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장동휘의 인품에 반해버린 것이다. “좋은 동생이 생겼구나” 하고 용팔이를 거둬들인 장동휘는 전국에서 자신의 왕좌를 노리고 올라온 한다하는 싸움꾼과 대결하고, 그들을 동생으로 거둬들인다. 그뿐이 아니다. 이름난 싸움꾼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장동휘는 그곳으로 가서 그 지역의 싸움꾼과 일전을 치러 그를 거둬들인다. 그리하여 전국 팔도에서 내로라하는 주먹들이 장동휘 휘하에 모여들고 장동휘는 그들과 힘을 합해 야쿠자와 대결을 벌인다. 송강의 인품에 반해 그의 휘하로 모여든 108명의 호걸. 즉 수호지의 세계다.  

김효천 감독은 김두한의 실명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영웅 김두한의 탄생 편을 만들어낸다. 김두한 단 한 명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은 거지가 돼 깡통을 들고 동냥질하지만 고귀한 혈통을 지닌 소년. 그 소년이 각성해 밑바닥에서 출발해 정상에 오른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아더 왕의 이야기, 주몽 이야기, 그리스 신화 속의 영웅담과 같은 세계다. 즉 영웅 신화인 것이다. 그 영웅 신화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배경으로 들어와 그 역할에 어울리는 청년 영웅의 모습을 지닌 이대근을 내세워 당시에는 볼 수 없던 명쾌한 영웅담을 만들어낸 것이다. 장동휘에 이은 제 2대 김두한의 탄생이고, 동시에 새로운 세대 액션 히어로의 탄생이었다.  





파격적인 캐스팅 

당시만 해도 무명이던 이대근은 TV 방송국 공채 탤런트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문턱이 높은 영화계로 진출하려 기회를 노리던 그는 1960년대 말 최무룡 감독의 액션 영화 ‘흑점. 속 제3지대’로 처음 충무로 영화계에 발을 내디딘다. 이대근은 최무룡이 한국 최고의 배우라 생각해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최무룡이 주연·감독·제작한 영화가 줄줄이 흥행에 실패해 도산하자 이대근은 방송국으로 돌아가 ‘수사반장’에서 범인 역할 같은 조연으로 생활하다가 ‘실록 김두한’ 단 한 편의 영화로 액션 스타가 됐다. 어떻게 당시 무명이던 이대근이 액션 영화의 주연이 됐을까? 김효천 감독은 감독이라기보다는 협객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의 협객 기질은 선 굵고 투박한 영화의 내러티브와 남자 주인공 캐스팅에서 드러나는데, 무명이라 할지라도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기꺼이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도박을 즐겼다. 그의 그런 행동은 이후에도 곧잘 나타나는데 인물도 매력적이지 못한 조연 출신 이강조를 갑자기 주연으로 승격시켜 시라소니 역을 준 것이나, 당시 하이틴 영화의 조연이던 진유영을 ‘인간시장’의 주연으로 내세운 것. 당시 무명이던 윤승원을 갑자기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본 대부’를 만든 것 등이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협객 맹상군이나 수호지의 협객 조개처럼 자기 휘하로 들어오는 사람을 마다않고 보살피다 그들을 비장의 카드로 내세워 일을 도모하는, 영화계에서는 좀 보기 드문 파격적인 캐스팅을 하는 감독이었다. 이런 캐스팅이 마냥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효천 감독은 박노식·장동휘로는 청년 김두한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대근 내면에 숨은 마그마를 직감으로 알아차려 캐스팅한,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의 성공작이었다.  

‘실록 김두한’ 이후 이대근은 김효천 감독과 ‘협객 김두한’을 촬영한다. 영화의 첫 장면이 김두한의 무덤인 속편은 전편보다 더 재미있었고, 김두한이 전편부터 자신의 뒤를 쫓아다닌 일본 고등계 형사에 의해 감옥으로 들어가는 라스트는 장대했다. 그리고 1975년 한 해에 이대근의 영화가 무려 6편이나 개봉된다. 이대근은 이 시기를 ‘영화 세 편 출연하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때’로 회고한다. 1970년대 초. 이소룡 영화가 들어오면서 명동 깡패를 다룬 깡패 영화들은 시들해져간다. 1960년대를 주름잡던 최고의 액션 배우들. 장동휘, 박노식, 최무룡의 영화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면서 한국 극장가에는 홍콩 무술 영화와 비슷한 한국 무술 영화들이 액션 영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1975년이 되면서 한국 무술 영화가 차지하던 자리에 다시 한국 깡패 영화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깡패 영화는 모두 이대근 주연작이었다.




라스트 액션 히어로  이대근

2010 대종상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은 이대근이 시상식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두한은 시리즈를 거듭해 만들어진다. 1975년 김두한 시리즈의 세 번째 속편 ‘속 김두한 3부’가 만들어지고 같은 해 4부가 나온다. 그 다음해 ‘김두한 서대문 일번지’가 만들어지면서 김두한 시리즈는 총 5부작이 된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대근은 ‘거지왕 김춘삼’에 출연,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거물급 주먹을 두 명이나 연기하게 된다. 몇 년 후 ‘시라소니’에서 주연을 하면서 한국 현대사의 신화적인 깡패 세 명을 모두 연기해낸다.  

이대근은 1960년대의 액션 스타 장동휘, 박노식과는 다른 유형의 액션 스타다. 1960년대의 액션 스타들이 거의 모두 자신이 깡패로 살아온 과거를 뉘우치고 새 삶을 살려 했던 것에 비해 그는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한 영웅담의 주인공이었다. 1960년대 액션 영화 주인공들이 전후 비참하고 가난한 조국을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새로 태어나야 할 죄의식을 가진 인물이었다면 이대근에게는 죄의식이 없다. 그에게는 고귀한 혈통이 있고, 그것을 자부심으로 삼아 영웅으로 등극한다. 석유산업과 철강, 자동차산업을 기반으로 선진화를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던 1970년대에 가장 어울리는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1960년대만 해도 과거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이제는 신화화된 과거가 오늘의 자신에게 광휘를 입혀주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이대근은 영웅담의 주인공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나이의 활극인 ‘제삼부두 고슴도치’ ‘오륙도 이무기’ ‘동백꽃 신사’에 출연한다. 이 영화들 역시 대단히 재미있었다. 그는 쾌활한 주인공이었다. 개과천선해야 할 깡패가 아니다. 신분을 속이고 깡패 소굴에 잠입해 좌충우돌하는 형사다. 언뜻 그가 존경했던 액션 황제 박노식의 용팔이와 비슷하지만, 이대근은 박노식보다 더 가볍고 경쾌하다. 이대근이 출연하는 액션 영화에서 과거 죄의식의 그림자가 있는 배역은 없었다.







깡패를 넘어 

1970년대 말 이대근은 액션 영화를 넘어서 그의 연기 지평을 확장한다. 첫 번째 성공작이 유현목 감독의 ‘장마’다. 구렁이가 돼 해마다 제삿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삼촌. 그는 누구인가? 그 어떤 원혼이 있어 귀신도 못되고 흉물인 구렁이의 몸을 빌려 나타나는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마을에서 그동안 힘쓰는 일밖에는 모르고 업신여김을 당하며 죽어라 일만 하던 이대근은 완장을 찬다. 그동안의 업신여김은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 보니 자신은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이 영화에서 이대근은 용암처럼 분출하는 거칠고 격한 감정을 토해낸다. 그 감정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영화를 보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이대근이 그 배역의 감정에 어느 정도까지 빠졌는가 하면, 제삿밥을 먹으러 마당을 기어오는 구렁이까지 자신이 연기하고 싶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근을 격한 감정만을 토해내는, 그런 다혈질의 배우로만 기억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듬해 출연한 ‘최후의 증인’에서의 이대근은 또 다르다. 음흉하고 더러운 생각만으로 똘똘 뭉친 반공 청년단 단장 역을 맡은 이대근은 깊은 밤, 소리 없이 마을 유지의 사랑방 앞에 선다. 오늘 밤, 전멸 위기에 처한 빨치산 대장의 투항 조건을 이야기하는 비밀 회동을 하기 위해 마을 유지의 주선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마을 유지가 방으로 들어오라 하자, 이대근은 시꺼먼 군화를 벗으려다 만일을 위해라며 군화를 신은 채로 방 안으로 들어간다. 콩기름을 먹인 노란 장판 위를 군홧발로 걸어가 앉는 이대근. 빨치산 대장이 나타나자 신중하면서도 머릿속의 더러운 생각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아! 저 사람이 언제 영웅 김두한을 연기한 배우였던가 싶을 정도로 뻔뻔하고 야비한 연기를 능청스럽게 한다. 이 영화에서 이대근이 보여준 연기의 압권은 야비한 술수로 정윤희를 아내 삼고 그녀의 재산을 모두 가로채 가족을 이룬 노년의 모습이다. 이제는 마을의 최고 부자로 군림하고 정윤희와 낳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장성해 최고로 행복해야 할 그다. 그러나 정윤희의 마음만은 갖지 못했다. 아니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안다. 고등학생이 되어 도시로 유학을 떠났던 자식들이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반갑게 맞이하는 이대근. 자식들도 오랜만의 만남이니 화기애애하다. 정윤희는 아이들의 얼굴만 보고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이대근은 머쓱해진 얼굴로 “저 사람 또 저런다. 쌀쌀맞기는…” 한다. 자신의 허세뿐인 권위와 거짓 평화를 들키지 않으려 허튼소리로 무마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을 하자마자 거짓 권위와 평화는 깨지고 아이들은 모두 정윤희에게로 가고 이대근 혼자 넓은 마당에 남는다. 이 영화에서 이대근은 악당 남자 최고의 연기를 해낸다.




라스트 액션 히어로  이대근

영화 ‘연산군’에서 주연을 맡아 장녹수 역의 강수연과 호흡을 맞춘 배우 이대근.

이대근의 연기는 1980년에 이르러 물이 올랐다. 물 오른 연기 최고의 성취는 자타공인 이두용 감독의 영화 ‘뽕’이다. 비천한 머슴으로 출연한 이대근은 “왜 나만 안 줘?”라며 절규한다. 이미숙이 비록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팔아 생활하지만, 그녀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한량인지 사기꾼인지 정말로 독립군인지 모호한 남편이 지아비인지라, 머슴이라는 비천한 출신의 이대근에게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하하. 여기서 재미있어진다. 비록 수표교 다리 밑에서 거지새끼로 생활하지만 민족의 영웅, 독립군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과 비록 몸은 팔지만 독립군의 아내라는 이미숙. 그와 그녀의 앞뒤가 안 맞는 지독한 결핍과 그것을 감추려는 허세. 그것은 대한민국의 내면이 아닐까?



마그마 같은 원념 

이대근이 출연한 1970년대의 수많은 액션 영화 중 기억해야 할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김동리 소설을 영화로 만든 ‘황토기’다. 시대를 잘못 만난 두 남자가 있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인데 일제강점기 농촌에서 사내는 할 일이 없다. 농사로 일생을 보내기에는 야수 같은 흉한 마음과 괴물 같은 힘이 밤마다 아우성을 친다. 미칠 것 같다. 한밤중에 일어나 산속을 달려 집채만한 바위를 들어올려봐도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사내가 마을에 나타난다. 둘은 서로를 처음 본 순간 같은 피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 한심하고 따분한 세상에서 파멸시켜 구원해줄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시비를 걸고 싸울 구실을 만들어 싸움질을 해댄다. 죽을 때까지. 이 역에 어울리는 배우가 누구겠는가? 1960년대라면 장동휘와 박노식이었겠지만, 1970년대에는 단연코 이대근 하나뿐이다. 영화는 썩 뛰어나지 못하다. 이대근의 상대역이 너무 약하고, 사내의 마그마 같은 울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싸울 구실에 불과한 여자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괴물 같은 사내들의 무서운 원념을 표현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자, 여기서 했던 이야기를 또 하자. 1970년대 말. 한국 최고의 액션 배우로 등극해 미국 LA로 교민 위문 공연을 떠나는 스타의 행렬에 이대근이 있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대근은 자신이 흠모했던 왕년의 액션 스타 박노식과 조우한다. 1960년대의 액션 스타는 한국 땅에서 쫓기듯 떠나는 신세였고, 새로 등극한 액션 스타 이대근은 공연을 떠나는 참이었다. 참 운명적인 만남이다. 마치 ‘황토기’의 두 사내처럼 두 사람은 마주 본다. 선배 박노식이 입을 연다. “대근아 나한테 한 방 맞아주라” 영화의 꿈을 접지 않던 박노식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달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대근은 기꺼이 맞아주겠다고 했고. 그 약속은 몇 년 뒤 박노식 감독의 마지막 작품 ‘돌아온 용팔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장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장면. 완장을 찬 이대근이 죽창으로 첫 살인을 한다. 그는 이념이 뭔지 모른다. 다만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에 도취돼 있다. 계속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완장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한 이대근이 어머니 황정순 품에 고개를 묻고 울면서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라고 고백한다. 이 연기로 이대근은 더 이상 액션 히어로가 아닌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로 점프한다. 대신 우리 액션광들은 액션 히어로를 잃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액션 배우는 항상 등장하는 것. 그러나 액션 히어로들에게는 마그마와 같은 원념의 힘이 있다. 1990년대 이후 수많은 배우가 액션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액션 히어로로 한 시대를 상징한 배우는 이대근이 마지막이었다. 이대근은 라스트 액션 히어로였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희화화돼 개그 소재로 쓰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원념이 들끓어 올라 눈에 핏발이 서고, 이마에 핏줄이 곤두서는 그 연기조차 이제는 ‘마님’이라는 대사가 입혀져 포복절도를 자아낸다.


투박한 경상도 사나이 이대엽

 

2% 부족한 카리스마 비극적인 말로

 

  • “악당이지만 멋있는 놈.” 이대엽의 영화를 보며 여러 번 생각했다. 한국 액션 영화에서 악당은 야비하거나 악질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대엽은 달랐다. 그의 연기에서는 정직하고 당당하게 몸으로 먹고사는 노동자의 자존심과 패기가 풍겨나왔다. 문제는 그것이 단 5분이었다는 점. 긴 호흡으로 영화를 끌고 가야 하는 주연으로서, 이대엽은 실격이었다. 결국 스크린 밖으로 나가 진짜 ‘악당’이 되어버린 ‘빨간 마후라’의 전설, 이대엽을 추억한다.

 

투박한 경상도 사나이 이대엽

주인공보다 더 강렬한 매력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배우 이대엽.

레스토랑 문을 벌컥 열고 한 사내가 들어선다. 핏발 선 날카로운 눈매. 믿었던 보스의 배신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감방에 들어갔던 불운한 사내, 최무룡이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단 하나. 사랑하는 아내 윤정희가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이다. 얼마나 사랑했던 여자인가? 그녀를 위해 암흑가를 떠나려 했고, 여자 때문에 조직을 떠나려는 최무룡을 괘씸하게 여긴 보스가 그를 함정에 빠뜨려 감옥으로 보낸 것이다. 레스토랑 구석진 곳에 윤정희의 남편이자, 최무룡의 보스를 몰아낸 명동의 새로운 주인이 앉아 있다. 단도를 움켜쥐고 윤정희의 현재 남편 앞에 선 최무룡. 다짜고짜 윤정희를 내놓으라고 한다. 윤정희의 남편은 눈에 핏발이 선 최무룡을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당신의 괴로움을 나는 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윤정희는 이미 나의 아내다’라고 말한다. 자기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거대한 산 같은 사내 앞에서 최무룡은 당황한다. 악당이지만 멋있는 놈이다.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됐을 것이다. 영화를 보던 나도 최무룡과 똑같이 당황한다. “저 사내 너무 멋있잖아?”  

보통의 한국 액션 영화에서 저런 사내는 아주 악질이거나 야비하다. 최무룡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 윤정희는 최무룡의 소식을 알 수 없어 괴로워했고, 죽을 결심을 했을 때 윤정희 앞에 나타난 사내는 위안이 돼주었다. 결국 윤정희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간의 사정을 담담하게 말하는 남편. 최무룡의 귀에 그 말은 들리지 않는다. 최무룡은 사내 앞에 단도를 꽂고 말보다 칼로 해결해 이기는 자가 윤정희를 데려가자고 한다. 최무룡의 심사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내 역시 윤정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최무룡은 막무가내다. 이때 최무룡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윤정희가 나타나 둘의 싸움을 말리려 하다가 극단의 방법을 택한다. 자신이 죽으면 두 남자의 싸움은 없을 것이라며 자결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평상심을 유지하던 윤정희의 남편이 분노한다. 최무룡과 사내가 단도를 뽑아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를 찌른다. 최무룡의 칼이 사내의 급소에 더 가까웠다. 쓰러지는 사내. 이때까지 사내의 명령 때문에 지켜만 보던 부하들이 최무룡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벌집으로 만든다. 최무룡도 멋있었지만, 윤정희의 현재 남편으로 나온 사내가 훨씬 멋있었다. 30분짜리 옴니버스 영화 중 한 편에 단 5분 출연해 주인공 최무룡에게 가야 할 찬사를 나눠 가진 사내. 영화의 균형을 살려 관객에게 ‘사내 중의 사내’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한 배우는 ‘명동 잔혹사’(1972) 두 번째 에피소드에 출연한 이대엽이다.  

 

주연보다 멋진 조연
 

영화가 끝난 뒤 극장 로비에서 20대 청년이 “윤정희 남편이 최무룡보다 더 멋있잖아. 배우 이름이 뭐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청년이 그 배우가 성남시장으로 있으면서 탐학을 일삼은 탐관오리로, 현재 교도소에 있는 ‘악당’임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했다. 현실에서 이대엽은 악당이지만, 영화 속에서만큼은 멋진 사내 중의 사내였다.

또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해보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탱크가 38선을 넘어 밀고 들어오자 국군은 속수무책 피난민 행렬과 함께 후퇴하는 패잔병 신세가 된다. 장교 신성일은 무기력하게 패배한 군인은 직무유기를 저지르는 것으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국민에게 사죄하는 길은 오직 하나. 적과 싸우다 죽을 자리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뇌하는 군인 신성일이 죽을 자리를 찾으려 전선을 향해 올라가는데, 그 앞에 지프를 몰고 이대엽이 나타난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장교 이대엽은 지식인 장교인 신성일처럼 뭘 생각하고 자시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부하가 가져다준 커다란 사발에 찬물을 붓고 밥을 말아 후루룩 들이켜고는 “나 간다” 한마디를 남기고 지프 뒤에 폭탄을 가득 싣고는 적군의 탱크를 향해 돌진, 폭사해버린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내 이대엽. 기왕 이렇게 된 일. 칭얼거리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것.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돌진하는 청년 장교의 모습을 역시 5분도 안 되는 장면을 통해 명쾌하게 보여준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의 한 장면이다.






또 다른 영화를 보자. 암흑가 보스 장동휘의 아내 문정숙은 모함과 오해에 얽혀 거리의 여자로 전락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둥서방이란 자가 마약중독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시의 뒷골목 한구석에 문정숙이 서 있다. 다른 여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남자를 유혹하는데 그녀는 텃세에 밀린 것인지, 다른 여자들의 뒷전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문정숙의 얌전한 자태에 끌려 그녀에게 다가간 남자들은 얼굴에 난 흉한 상처를 보고는 질겁한다. 문정숙의 몸을 사려던 사내가 얼굴의 흉한 상처를 보고 자신을 속였다며 그녀를 때리려 하자, 둘 사이를 가로막는 사내가 나타난다. 이대엽이다. 그는 말로 하지 왜 여자를 때리느냐며 남자를 단숨에 제압한다. 그러고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나도 궁금해서 나왔는데 나하고 놉시다” 한다. 당당하고 구김살이 없다. 내뱉는 말은 짧고 명료하다. 그는 가난한 육체 노동자 신세여서, 밤거리 여자들의 신세를 지지만 적어도 야비하지는 않다. 상대가 창녀라도 지킬 것은 지킨다. 창녀들의 쪽방 마당에 들어서는 이대엽. 포주가 얼굴의 흉터 때문에 남자들과 트러블이 잦은 문정숙에게 방을 내주지 않으려 하자 지켜보던 이대엽은 “안되나? 갈란다 고마” 툭하고 내뱉고는 망설임 없이 돌아선다. 투박한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쪽방 주인과 계약이 성사되고 문정숙과 방에 들어간 이대엽. 문정숙은 방에 들어가자 불부터 끈다. 아침에 일어난 이대엽은 얼굴에 흉한 상처가 있는 것을 보고 “그래서 그랬고마” 수긍한다. 불행한 여자 앞에서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짧고 투박하지만 지저분한 창녀촌의 쪽방을 훈훈하게 만들 만큼 정이 넘치고, 이해심이 있다. 이만희 감독의 1964년 작 ‘검은머리’의 한 장면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감독, 1963)에서의 이대엽은 또 어떤가? 언제나 말없이 내무반 귀퉁이에서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던 이대엽은 장동휘 분대에 전입해 온 최무룡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른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최무룡의 형은 이대엽의 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원수다. 대원들의 중재로 일단 화해는 한다. 자신의 동생을 최무룡이 죽인 것은 아니잖은가? 하지만 최무룡의 얼굴을 보면 억울하게 죽은 동생이 생각난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최무룡은 같은 분대의 전우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이대엽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운다. 울어서 푸는 수밖에 없다. ‘검은 머리’에서 무뚝뚝하지만 정이 철철 넘치는 사내였던 그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는 과묵하고 책임감 넘치는 병사를 연기해낸다.  

투박한 경상도 사나이 이대엽

이대엽이 최무룡, 남궁원 등과 함께 출연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한 장면.

 

이만희 감독과의 만남
 

1958년 경남 마산으로 촬영 간 한형모 감독의 눈에 들어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배우가 된 이대엽은 박노식이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을 했듯 투박하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를 영화 속에서 쓰고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다. 전라도 사나이가 박노식이라면, 경상도 사나이는 이대엽이었다. 데뷔 초기 주로 한형모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한 감독의 1958년 작 ‘나 혼자만이’에서 김진규를 돕는 정의로운 청년 역을 맡아 평론가들에게 “키가 좀 작은 것이 흠이지만 장래를 보고 싶은 연기바탕을 가지 연기자”라는 칭찬을 받는다. 이후 주로 주인공을 돕는 정의로운 조연으로 출연하던 그가 개성 있는 자신만의 색깔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만희 감독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다.

1963년 작 ‘YMS 504의 수병’을 보자. 패기 넘치는 젊은 장교 박노식은 해군 사상 최고 말썽꾼들의 똥배라는 YMS 504호의 함장으로 부임한다. 부함장은 노상 술에 찌들어 바람둥이 아내의 무기력한 남편인 자신의 신세를 저주하는 개망나니 싸움꾼 알코올중독자 장동휘이고, 하사관의 최고선임 이대엽은 마음에 안 들면 주먹부터 날리는 싸움꾼에 술주정뱅이다. 이두박근에 여자 나체 문신을 하고 눈에 거슬리면 언제나 ‘계급장 떼고 한판 붙어보자’며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병사에게 웃통을 벗으며 덤벼든다. 박노식은 이대엽과 꼴통 수병들의 싸움질을 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런 꼴통들을 나더러 다루란 말이냐?”며.

이대엽과 이만희 감독의 두 번째 만남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었다. 이후 세 번째 만남 ‘검은 머리’에서 이대엽은 장동휘와 문정숙을 두고 삼각관계에 휘말리지만, 사내답게 문정숙의 행복을 빌고 떠나가는 택시운전사 역을 맡아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다. 이후 ‘빨간 마후라’(신상옥 감독, 1964)에 출연해 인기를 한 몸에 모은 그는 이후 반공 전쟁영화의 단골 조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모든 배우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배우의 출연작 중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 영화에서의 연기가 그 배우의 연기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대엽의 대성공작은 ‘빨간 마후라’였다. 이후 이대엽의 캐릭터는 항상 의리 있고, 뚝심 있는 경상도 사나이로,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돕는 역을 했다. 비슷한 종류의 영화에서 비슷한 배역을 맡는 조연. 이것이 1960년대 중반까지 이대엽의 모습이었다. 좋은 감독과 좋은 작품을 만나면 배우는 성장한다. 이대엽의 연기를 물오르게 한 감독은 이만희였다. 그러나 개봉 이후 군사정권이 필름을 강제 소거해버려 지구상에 남아 있지 않은 영화 ‘7인의 여포로’(1965) 이후 이대엽은 이만희 감독 영화에 더 이상 출연하지 않는다.











1960년대 중반, 이대엽에게는 넘어야 할 큰 산들이 있었다. 액션 영화에서는 장동휘와 박노식이었고, 멜로 영화로 가면 신성일을 비롯해 너무 많았다. 이대엽과 같은 시기에 데뷔한 남궁원은 훤칠한 키에 선 굵은 미남형 얼굴로 일찍부터 주연급 배우로 성장하고 있었다. ‘빨간 마후라’에서 남궁원은 최무룡과 대결하는 주연이었지만, 이대엽은 그들을 보조하는 조연이었다.  

박노식과 이순재 사이 

배우는 얼굴이 중요하다. 이대엽의 얼굴은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와 비슷하게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개성을 지닌 선배들이 있다. 장동휘와 박노식은 항상 김진규, 신영균, 신성일 같은 미남배우를 괴롭히는 조연으로 영화에 출연했지만, 연기에 대한 남다른 욕심과 열정이 만들어낸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들은 미남 배우를 압도하는 악의와 광기를 발산해 영화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살린다. 특히 박노식의 경우, 자신에게 온 영화가 일생에 다시는 못 잡을 좋은 영화라는 판단이 서면 선후배 간에 싸움을 벌여 술병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까지 광기를 만들어내 영화에서 뭔가를 해내고야 만다. 그래서 그들이 스타이고 최고의 배우인 것이다. 

이대엽에게도 박노식, 장동휘 같은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요구되는 시기가 왔다. 이대엽이 비슷한 반공 전쟁 영화의 비슷한 캐릭터 단골 조연으로 굳어질 무렵인 1960년대 후반.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배우와 감독이 속속 등장한다. 그의 선배 세대인 장동휘, 박노식이 조연급 성격배우에서 주연급 연기파 배우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을 때, 이대엽도 연기력 있는 성격배우를 목표로 틈을 노린다. 당시 최고의 감독 김수용과의 만남이다. ‘까치소리’(1967) ‘순애보’(1968)에서 이대엽은 악역으로 출연해 주연급 배우들을 압도하는 성격 배우로 자신의 연기 영역을 넓히려 한다. 1960년대 초 이만희 감독과 작업하며 경상도 사나이의 투박한 매력을 연기했다면, 이제는 김수용 감독과 만나 자신의 연기 영역을 넓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연기에 주목하지 않았다. 연기가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해 만들어진 ‘카인의 후예’(유현목 감독)에서 압도적인 악역을 해낸 박노식에게 시선이 모였다. 박노식은 40대 연기자만이 할 수 있는 원숙한 연기에 광기 어린 카리스마까지 더해진 명연을 펼쳤고, 장동휘는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1969)에서 매력적인 니힐리스트 킬러를 연기했다.  

이대엽에게 박노식과 장동휘는 너무 큰 산이었다. 그들이 30대에 맡았던 역이 자신에게로 와야 하는데 아직 이대엽에게는 그런 카리스마가 없었다. 갈 길이 멀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성격 배우들도 만만치 않았다. 이순재, 오지명, 최불암 등. 탤런트란 이름의 배우들이 영화계로 치고 들어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위로는 장동휘와 박노식이, 아래에서는 이순재, 오지명, 최불암, 문오장, 김성옥이 치고 올라왔다. 새로운 감독도 등장했다. 미스터리 액션 영화를 장기로 삼겠다는 장일호, 전쟁 영화의 고영남, 검객 영화의 최인현, 협객 영화의 김효천 등. 뭔가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갈림길이었다.

이대엽에게도 기회는 온다. 홍콩 무협 영화 바람이 이 땅에 불어온 것이다. 40대 장동휘 박노식보다는 30대 이대엽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무협 영화에서는 액션 영화보다 난도 높은 액션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1968년 이대엽은 검객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이대엽의 얼굴에는 홍콩 무협영화 배우인 왕우에 뒤지지 않는 남성적인 매력이 있었다. 홍콩 영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의 표절작인 ‘대검객’(강범구 감독, 1968)에서 이대엽은 남궁원과 함께 주연을 맡는다. 같은 해 박노식과 함께 정창화 감독의 ‘나그네 검객 108관’에도 출연한다. 그리고 다음 해, 마침내 단독으로 검객 영화 주연을 맡는다. 최인현 감독의 ‘3인의 여검객’, 임원식 감독의 ‘맹수’, 홍콩과 합작 영화 ‘용문의 여검’ 등이었다. 한홍 합작 영화 ‘용문의 여검’은 영화 프린트와 네거티브 필름 모두 남아 있지 않아 볼 수 없지만, 제목이 좀 그렇다. 여검이라니.  

영화 ‘맹수’가 시작되면 매우 젊고 아름다운 여자 검객이 등장한다. 맹인 검객이다. 아름다운 맹인 여협을 연기하는 여인은 누구일까? 놀라지 마시라. 사미자다. 비슷한 시기 홍콩에서 개봉한 여배우 정패패 주연의 ‘방랑의 결투(원제 대취협)’(1966)와 ‘심야의 결투’(1968)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나라에도 여검객이 등장하는 영화가 나온 것이다. 맹인 검객 사미자는 일본의 맹인 검객 ‘자토이치’가 쓰는 칼과 비슷한 지팡이 속에 날카로운 검이 숨겨진 맹인용 지팡이를 무기로 사용한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칠고 야비한 남성들과 갈대밭을 누비며 결투를 벌인다. 그녀의 뛰어난 검술과 미모는 사내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고, 주막의 봉놋방 구석에 누워 자고 있는 사내의 귀에까지 전해진다. 사내들이 야비한 호기심으로 사미자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하자 벽을 향해 몸을 누이고 자는 것으로 여겨졌던 사내가 몸을 돌린다. 이대엽이다. 그가 바로 맹인 여협 사미자에게 검술을 가르친 사부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미자가 나와 자신의 원수인 도금봉과 그녀의 일당을 찾아 헤맨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이대엽 주연 영화가 아니다. 물론 영화에서 주연자리가 뭐 그렇게 중요한가? 영화를 위해 좋은 연기를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대엽은 이 영화에서 사미자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영화 ‘3인의 여검객’을 보자. 조선 건국 초기, 고려 왕조의 부활을 꿈꾸는 무리가 있다. 그들의 이름은 검계당. 두목 이대엽은 ‘우리가 조선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고려 왕조를 부활시키기 위함보다는 조선 왕조의 학정 아래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검계당이 가장 두려워할 것은 강도나 산적으로 변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부두목인 김성옥은 생각이 다르다. 그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칼로 표현한다. 이대엽을 불시에 기습해 다시는 칼을 쥐지 못하도록 손을 잘라버린 후 계곡 아래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검계당은 명나라로 가는 조선의 조공물을 약탈해 사리사욕을 취한다. 검계당은 이대엽을 죽인 것에 그치지 않고 이대엽의 갓난아기를 유괴하고 아내 윤정희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윤정희는 천우신조로 목숨을 구하고 아기를 되찾기 위해 검객이 돼 팔도를 유랑한다. 한편 이대엽은 깊은 산속 도사에게 구조돼 천하제일의 검법을 전수받고, 명검까지 손에 넣는다. 검계당에 복수하기 위해 떠나는 이대엽. 이때 윤정희는 검계당에 복수하려는 두 명의 자매 여검객과 만나 검계당과 대결한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이대엽. 아내 윤정희를 돕기 위해 나서는데 이게 뭐야? 그는 광대탈을 쓰고 그녀들을 돕는다. 이 영화에서 이대엽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그가 자신의 얼굴로 연기하는 부분은 채 20여 분을 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무술 대역을 써야 하니 탈을 쓰는 주인공으로 쉽게 갔을 수도 있고, 당시 겹치기 출연이 많았으니 대역이 연기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대엽만의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만 것이다.  

사실 이대엽은 남자 연기자들과 있을 때보다 여자 연기자들과 있을 때 남성적인 매력이 더욱 빛을 발한다. ‘검은 머리’가 그 예다. 하지만 두 편의 검객 영화 모두에서 1960년대 초 이만희 영화에서 보여줬던 투박한 남성의 멋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 속에서 이대엽은 욕심을 갖고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냥 대충하는 것 같다.  

 

이탈과 몰락
 

1970년대 초. 이대엽은 수많은 액션 영화에 출연한다. 하지만 남다른 연기를 보여주는 작품이 별로 없다. ‘암흑가의 25시’(1970)라는 김효천 감독 영화가 있다. 미남 배우 남궁원이 살금살금 호텔 방 안에 숨어든다. 그런데 그 방에는 먼저 같은 목적으로 침입한 자가 있다. 독기 어린 실눈을 한 김성옥이다. 두 침입자가 서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견제를 하는데, 두 침입자보다 먼저 이 방에 들어와 볼일을 다 본,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이대엽이다. 남궁원은 007의 숀 코너리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연기를 하는데 제법 매력적이다. 태국 스파이인 김성옥은 정보에 능통한 자. 그리고 중국인인 이대엽은 표창의 명수인 킬러다. 세 침입자가 찾는 것은 황금 불상. 그들은 목적을 위해 서로 연합하기로 한다. 이 팀에 두 사람이 더 합류하는데 알코올중독자이며 날건달인 일본인 독고성과 이들의 목적을 방해하기 위해 악당 최불암이 심어놓은 배신자 오지명이다. 그런데 영화가 흘러갈수록 남궁원과 독고성, 오지명만 재미있고, 이대엽의 캐릭터는 전혀 재미가 없다. 마지막에는 그가 왜 있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약해진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미스터리 스릴러 전문 김묵 감독의 협객 영화 ‘일대일’(1972)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대엽은 처음에만 반짝하고, 영화 마지막에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된다. 이상하게도 이대엽은 영화의 라스트에 이르면 사라져버리는 배우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에서조차 라스트에서 그의 존재감을 느낀 경우가 별로 없다.  

왜 그랬을까? 배우는 좋은 감독과 좋은 영화를 만나면서 거듭 태어나는 불사조다. 그러나 동시에 한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하며 자신의 힘만으로 거듭나는 불사조이기도 하다. 좋은 배우는 영화 전체를 파악하고 자신이 불타오를 곳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뒤 연기한다. ‘카인의 후예’에서 박노식이 해낸 라스트를 보라. ‘암살자’에서 장동휘가 해낸 장대한 라스트는 또 어떤가. 이대엽의 연기에는 그것이 없다.  






1970년 대 초 이대엽의 연기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명동잔혹사’에서의 5분이다. ‘맨주먹으로 왔다’나 ‘팔도강산’ 시리즈 같은 서민극에서 가난 속에서도 당당하게 버티는 서민 연기를 할 때도 매력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1960년대의 연기에 나이가 주는 관록이 더해졌다는 점 외에, 그의 연기에서는 성장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대엽의 연기가 가장 멋졌던 1960년대 초반. 그의 연기에는 정직하고 당당하게 몸으로 먹고사는 노동자의 자존심과 패기가 서린 모습이 있었다.  

액션 배우들은 몸을 통해 남성의 판타지를 구현해내는 압도적 카리스마를 보여줘야 한다. 이대엽은 자신의 연기를 점프시켜 그의 선배들이 해낸 압도적 카리스마로 영화의 라스트를 힘 있게 몰아가는 그런 배우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길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2012.12.22

 

<마지막 회> 지나치게 잘생겼던 사나이 남궁원

광고 속 이미지로 남은 배우


  • 1958년 남궁원이 데뷔했을 때 영화계는 그를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라고 불렀다. 당대 최고의 감독 신상옥도 ‘국제적으로 통할 배우’라 했다. 이 잘생기고 키 큰, 호쾌한 사나이의 승승장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가 될 줄이야. 그에게는 잘생기고 모범적인, 밋밋한 배역 외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신 감독은 “너는 지금 나온 게 참 안됐다. 한 10년, 15년 뒤에만 나왔어도…”라며 혀를 차고 만다. 눈부신 외모가 오히려 한계가 됐던 배우, 남궁원을 추억한다.

지나치게 잘생겼던 사나이  남궁원

1960~70년대 멜로·첩보·가족영화 등에 두루 출연한 배우 남궁원.

 

남궁원은 멋있게 생긴 배우다. 이두용 감독은 남궁원을 한국 남자배우 중 가장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배우라 했고, 신상옥 감독은 외국의 미남배우와 견주어도 모자랄 것이 없는 국제적으로 통할 수 있는 배우라 했다. 나는 남궁원을 고급 남성정장의 광고 모델, 또는 남성 화장품의 광고 모델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본 영화 중 특별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강대진 감독, 1976)에서 수양딸 한유정을 사랑하는 양아버지로 나와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고 도망쳐 쓸쓸하게 죽어가는 삶을 선택하는 중년의 남자,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감독, 1984)에서 김진아를 더욱 비뚤어지게 만드는 완고한 아버지. ‘적도의 꽃’(배창호 감독, 1983)에서 잘생기고, 매너도 좋고 돈도 많지만 결국 장미희의 몸뚱이 하나만을 욕심낸 그렇고 그런 바람둥이 유부남…, 정도가 내 기억 속의 남궁원이다. 영화광들은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 무력해지는 남성성 때문에 우유부단해지고, 교활해지는 중년 남자와 하길종 감독의 ‘화분’(1972)에서 질투에 빠져 광기에 찬 폭력을 행사하다 몰락하는 동성애자 역을 생각해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영화팬이 기억하는 남궁원은 고급 남성복 광고에 등장하는 멋지고 품격 있는 배우이거나, 멜로 영화에서 중년의 미남 신사 또는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일 것이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법하다. 남궁원이 액션 영화배우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렇다면 액션 영화배우라 칭할 수 있는 배우는 어떤 사람인가? 내 기준에서 볼 때 액션 영화배우란 적어도 다섯 편 이상의 영화에서 몸을 사용하는 인상적인 연기를 한 배우여야 하고, 액션연기 때문에 그 배우의 존재감이 만들어진 경우다. 김진규는 액션 영화배우인가? 아니다. 그가 출연한 영화 중 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인상적인 장면을 기억해내기 어렵다. 윤일봉은? 아니다. 한석규는? 그가 ‘초록물고기’의 주차장 신에서 동물적인 감각으로 액션을 소화해내기는 했지만 액션 연기를 보여준 영화는 한두 편에 불과하고, 그는 ‘8월의 크리스마스’나 ‘접속’ 같은 멜로 영화에서 더 인상적인 연기를 해냈다. 신성일은 수많은 멜로 영화에 출연했지만, 뒷골목 깡패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한 영화가 적어도 열 편이 넘고, 이만희 감독의 ‘원점’ 같은 범죄 영화에서는 설악산 중턱의 가파른 등산로에서 혁대로 자신의 한 손을 난간에 묶고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는 매우 인상적인 액션 연기를 펼쳤다. 신성일은 액션 영화배우라 부를 수 있다. 최무룡과 그의 아들 최민수는? 둘 다 액션 영화배우다. 최민수는 ‘테러리스트’의 라스트 혈투 장면에서 1대 100이라는,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없는 장면에서 관객을 감탄케 한다. 최민수는 쇠파이프를 오른손에 붕대로 감아 쥐고, 수없이 밀려드는 조폭 패거리에 맞서 싸운다. 그는 육체의 모든 힘이 소진돼 고통스럽게 헐떡거리면서도 굴하지 않는 집념의 사나이를 기적처럼 멋지게 연기했다. 그의 아버지 최무룡 역시 자신이 감독을 한 ‘제삼지대’에서 일본도를 들고 일본 야쿠자와 1대 100의 대결을 펼치는 혈투를 만들어냈다. 감독이자 배우로 출연했던 최무룡은 일본 사무라이 영화 액션과 홍콩 무협 영화 액션 신들을 연구한 것이 분명한,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액션 신을 만들어냈다. 최무룡과 최민수, 두 사람 다 액션 영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갖고 대사 없이 육체를 움직여 집념 또는 죄의식 같은 추상적인 감정을 관객에게 명확하게 전달한 배우였다.

 

몸으로 말하는 배우 

액션 영화배우는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연기가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는 본능을 가진 자다. 박노식이 말했듯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탱탱한 육체를 주체하지 못해 여기저기 부딪치고 찢겨지고 싶어 안달이 난 자다. 영화에서 주먹이 오가는 격투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실제 상황과 똑같은 체력 소모와 고통이 있고, 영화에서 칼부림이 일어난다면 실제 상황과 똑같은 위험이 따른다. 서로 약속을 하고 안전에 대한 대책을 준비한다는 것 외에는 실제 상황과 똑같은 위험과 육체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액션 배우는 이런 위험과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고통을 통해서 나오는 연기를 사랑하는 자다.

그렇다면 남궁원은 액션 배우인가? 그렇다. 남궁원이 1958년 데뷔했을 때, 충무로 영화계에서는 그를 일러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라 했다. 게다가 그가 연기를 시작한 곳은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었다. 당대 최고의 감독이 낙점한 사나이. 당대 최고의 영화사 신필름의 전속 계약 배우. 남궁원은 김진규, 최무룡의 계보를 잇는 미남배우로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보증수표였다. 이 잘생기고 키 큰, 호쾌한 사나이의 승승장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1959년 데뷔한 지 한 해만에 신상옥 감독의 ‘자매의 화원’에 활달한 성격의 청년 화가로 출연해 가능성을 인정받고, 이듬해,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에서 김승호의 큰아들 어진이로 출연한다. 그는 그저 바라만 봐도 흐뭇해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믿음직한 소시민 가정의 큰아들이었다. 아직 조연이지만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는 배우였다.

그가 조연으로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가고 있던 1962년,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약진에 자극받은 신상옥 감독은 한국 검술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이것이 한국 검객영화다!’ 할 만한 영화를 만들고 싶던 제작자 신상옥 감독은 검술 영화 주인공으로 남궁원을 선택한다. 큰 키에 호남형의 미남. 액션 영화에 딱 들어맞는 신체 조건을 가진 배우는 남궁원뿐이었다.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와 견주어도 당당한 얼굴과 체격이었다. 이미 ‘원한의 일월도’와 ‘폭군 연산’으로 대규모 액션 신을 소화해낸 신필름의 본격 검술 영화였다. 영화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1964년, 신상옥 감독과 신필름의 점프를 결정짓게 된 영화 ‘빨간 마후라’가 만들어진다.  

남궁원이 주연은 아니었다. 새로 전입해온 전투기 조종사 최무룡은 중대장으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을 소개받는다. 최은희다. 최은희를 본 순간 최무룡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최은희에게는 과거 남편이 있었다. 그는 최무룡과 같은 전투기 조종사로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한 것이다. 최무룡의 귀에 들려오는 최은희의 전남편은 너무나 멋있는 사나이였다. 조국애, 동료애, 희생정신과 책임감,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남궁원이다. 죽은 남궁원의 그림자가 최무룡과 최은희 사이를 떠돈다. 최은희의 전남편이 너무나 멋진 사나이였기에 최무룡은 갈등한다. 그런 사나이의 자리에 자신이 들어설 수 있을까? 최무룡과 최은희의 고민은 남궁원이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으로도 설득력을 갖는다.

그 사이, 몇 해 전, 신필름에서 만든 ‘로맨스 빠빠’에 같이 출연해 막냇동생 역을 한 후배 신성일이 ‘맨발의 청춘’에 출연한다. 신필름에서 시키는 조연만 하다가는 배우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신성일이 과감히 신필름과의 계약을 끝내고 독립해 ‘맨발의 청춘’에서 주연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터졌다. 먼저 치고 올라간 자는 신성일이었다. 시대가 원하는 얼굴과 분위기가 신성일이었나보다. 신성일은 ‘맨발의 청춘’으로 1960년대 젊은이의 표상이 됐다. 신성일에게는 도시 뒷골목 젊은 청년의 불만과 우울, 열등감을 담은 얼굴이 있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대, 호쾌한 분위기의 배우보다는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두 눈을 찌푸리고 어딘가 노려보는 듯한 우울하고 연민 가는 사나이가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다.












머슴을 하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잘생겼던 사나이  남궁원

남궁원은 2011년 데뷔 52년 만에 TV 드라마에 처음 출연해 SBS 주말드라마 ‘여인의 향기’에서 대기업 회장 역을 맡았다.

김진규는 전후 한국 영화계의 미남배우 1세대로 지적이고 선해 보이는 이미지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 뒤에 데뷔한 최무룡은 김진규의 지적인 이미지를 이어가면서 어둡고 반항아적인 요소를 첨가해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바로 그 뒤를 이은 것이 신성일. 그리고 남궁원과 비슷한 이미지의 신영균. 그들의 10년 천하가 이어졌고, 그 누구도 이들의 아성을 뒤흔들지 못했다. 당시에 등장했던 미남배우들은 그들을 뛰어넘을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조연으로 빙빙 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조연 중 하나가 바로 남궁원이었고, 너무나 아까웠다.  

1960년대 중반. 남궁원은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이 출연하지 않는 종류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서서히 자신의 영역을 넓힌다. 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남궁원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는 이상하게도 공포영화였다. 그러다 그에게도 기회가 온다. 007시리즈가 대한민국 극장가를 강타했다. 신상옥 감독이 말했듯 국제적으로 통하는 배우, 서양인과 나란히 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배우 남궁원은 007시리즈를 흉낸 낸 영화들에 출연한다. ‘간첩작전’(문여송 감독, 1966) ‘국제금괴사건’(장일호 감독, 1966) ‘남남서로 직행하라’(장일호 감독, 1967) 같은 영화들이다. 북한 공작원이 연루된 사건이 홍콩 또는 일본에서 발생하고, 한국 정보부의 첩보원 남궁원이 급파돼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인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007시리즈를 본 관객에게 한국 첩보 스릴러 영화는 양에 차지 않는 조잡한 것이었다. 이쯤에서 남궁원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뒤 인터뷰에서 당시 심정을 토로한다.

“임금보다는 머슴, 007보다는 빨갱이 역을 맡고 싶었다.”  

남궁원이 ‘빨갱이 역’을 하고 싶어하자 제작자가 허락했고, 이제 촬영만 하면 되는데 중앙정보부에서 연락이 왔다. 잘생긴 사람이 간첩을 하면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 자신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벙어리 삼룡이 역을 남궁원이 할 수 있겠는가? 일개 사병 역에 그가 어울리는가? 임금이 아닌 내시가 그에게 어울리는 역이란 말인가?

1967년, 남궁원은 당시 액션 영화를 주로 찍던 임권택 감독과 만나 검객 영화를 찍는다. ‘풍운의 검객’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와 비슷한 줄거리의 이 영화에서 남궁원은 떠돌이 검객으로 출연한다. 사대부들이 주고객인 기루에 남루한 차림에 방갓을 깊이 눌러쓴 사나이가 들어선다. 초라한 행색의 사나이를 보고 기루 주모가 달려 나와 당신 같은 거렁뱅이는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니 당장 나가라 박대를 하고, 술 먹던 양반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눈알을 번뜩이며 사나이의 다음 행동을 기다린다. 사나이는 대꾸를 안 하고 옷을 털기 시작한다. 얼마나 많은 먼지가 옷에 달라붙어 있었는지 기루 안에 먼지가 퍼지고 양반들이 기침을 한다. 방갓을 벗는 사나이. 덥수룩한 수염에 번뜩이는 눈동자. 남궁원이다. 그가 예사롭지 않은 사내라는 것은 모두가 안다. 기루의 최고 인기 기생 남정임이 달려 나와 돈 한 푼 없지만 술을 마셔야겠다는 무뢰한 남궁원을 모신다. 이때 포악하기로 소문난 왕세자의 무사들이 술집에 난입해 남궁원에게 시비를 건다. 순간 남궁원의 돌려차기에 무사들이 칼자루에서 칼을 뽑아보지도 못하고 나뒹굴고, 남정임은 역시 자신의 눈이 틀림없었음에 만족해 미소 짓는다. 남궁원의 키가 너무 커서 상대역 남정임이 서로 마주 보는 신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벽돌 위에 올라서야 했다는 일화를 남긴 이 영화는 남궁원이 액션 연기가 가능한 배우라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다.  

1968년, 이때부터 배우 남궁원은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다. 신상옥 감독의 ‘내시’에서 수많은 후궁을 거느린 임금으로 나와 남성의 육욕을 잘 표현하는 배우로 인정받았고, ‘암굴왕’(최인현 감독, 1968)에서는 자신을 배신하고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린 악당 박노식과 허장강, 박암에게 차례로 복수하는 에드몽 단테스 역을 맡았다. 남궁원은 복수자의 냉혹한 일면과 악당을 심판하는 의로운 정의한. 두 측면 모두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영화의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어서 악당들이 얼마나 야비하고 잔혹하게 남궁원을 파멸시켰는지를 생략해 자칫하면 냉혹한 복수자의 측면만 강조돼 몰락하는 허장강과 박노식, 박암에게 관객의 동정이 갈 수 있는 영화였는데 남궁원이 가진 호쾌하고 반듯한 이미지가 균형을 이뤄 끝까지 주인공의 복수에 이입된 감정을 깨뜨리지 않게 해줬다.













이만희와의 만남 

1969년, 반듯한 이미지만 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 이후 그를 찾은 감독은 이만희였다. 모든 배우의 도약 뒤에는 감독과의 만남이 있다. 이만희 감독이 남궁원에게 출연을 제의했다. 주연은 장동휘, 남궁원은 조연. 그의 역할은 간교하고 사악한 빨갱이 하수인이다. 밝은 달빛 아래서 남궁원은 암살자 장동휘와 만난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장군을 암살하러 가는 장동휘는 죽음 앞에서 비굴하지 않은 그런 얼굴을 가진 장군을 이전에 암살하려다 실패한 경력을 가진 자다. 암살을 사주한 남로당의 하수인 남궁원은 암살자 장동휘를 안내하고 그를 감시하는 책임을 맡았다. 나룻배를 타고 가면서 장동휘는 어릴 때 자신은 대단한 겁쟁이였다고 말한다. 암살자 장동휘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온 것이다. 장동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생이 컴퍼스의 날카로운 바늘을 자신에게 들이대자 너무 무서워 오줌을 지렸다고 한다. 그 순간 남궁원의 고개가 옆으로 획 돌아간다. 남궁원 역시 비슷한 과거를 가진 겁쟁이였던 것. 남궁원은 방금 떠오른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는 듯 히스테릭하게 웃는다. 일본인 소년이 다시 덤벼들자 자신은 칼을 집어 들었다는 장동휘의 말을 듣고 더욱 히스테릭하게 웃는 남궁원. 남궁원은 폭력에 굴복해 비굴하게 살아온 잔챙이였던 것. 대단한 포스를 풍기는 장동휘와 달빛 아래 나란히 걸으면서 남궁원은 그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 할 때마다 히스테릭한 웃음을 짓는다. 남궁원에게는 또 하나의 임무가 있다. 그것은 암살에 성공한 장동휘를 살해하는 것이다. 너무나 강한 남자 장동휘 옆에서 깐죽거리며 이 남자를 살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려는 남궁원. 영화의 라스트. 암살에 성공해 돌아온 장동휘에게 총을 겨누는 남궁원. 두려움 때문인지 두서없는 말을 지껄인다. 총구 앞에서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장동휘가 “암살은 말없이 조용히 하는 것이다”라고 충고하자 남궁원은 이를 갈며 “이것은 암살이 아니다. 살인이다”라고 외치며 방아쇠를 당기고, 장동휘는 거목이 쓰러지듯 풀썩 쓰러진다. 어떤 비굴한 변명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어간 것이다. 엄청난 사나이를 쓰러뜨린 잔챙이 남궁원은 또다시 히스테릭하게 웃고 “별것도 아닌 것이”하며 자신의 살인 성공에 기뻐 날뛴다. 이런 연기는 이전의 남궁원에게는 없던 것이다.


 

늑대 같은 사내 

이만희 감독과 만난 다음 영화 ‘여섯 개의 그림자’(1969)에서 남궁원은 신성일, 허장강과 만나 악당 연기 대결을 펼친다. 영화가 시작되면 반라의 무희가 무대에서 춤추는 댄스 홀. 세 명의 사나이가 고개를 맞대고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 남궁원, 허장강, 신성일이다. 장면이 바뀌면 윤정희가 밤길을 걸어간다. 그 앞을 막아서는 허장강. 허장강이 윤정희를 희롱하자, 신성일이 나타나 윤정희를 구해준다. 윤정희는 멋진 사내 신성일에게 반해 그와 연애를 시작한다. 장충단공원에서 카메라를 자동으로 놓고 신성일과 윤정희가 다정하게 포즈를 잡는데, 두 사람 위로 검은 그림가가 드리워진다. 연인들의 사진 속에 들어온 무뢰한. 그가 누구겠는가? 남궁원이다. 신성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윤정희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녀가 죽이려고 칼까지 잡았던 남자. 그녀의 전남편이며 그녀에게 기생해 돈을 뜯어내고, 그 돈으로 다른 여자들을 품에 안으며 윤정희를 비웃던 악당 중의 악당이 바로 남궁원인 것이다.

남궁원은 옛 아내 윤정희가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교도소에서 만난 신성일, 허장강과 함께 수작을 부린 주범이다. 남궁원의 악당 행각은 계속된다. 신성일과 다방에서 만난 윤정희. 신성일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타나 신성일이 앉았던 자리에 앉는 남궁원. 윤정희를 협박하며 물이 든 유리잔을 들어서 마신다. 유리잔 속의 물은 반이나 줄었다. 윤정희는 신성일이 나타날까 안절부절못하고, 협박을 마친 남궁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윤정희 앞에 놓인 유리잔을 신성일 자리에 놓고 자신이 먹은 잔을 윤정희 앞에 놓고 비웃으며 사라진다. 신성일이 나타나고, 윤정희는 남궁원이 먹던 유리잔을 급하게 들어 마시는 척하다 사레에 들린다. 하하하. 여자를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거듭되는 남궁원의 협박에 견디다 못한 윤정희는 남궁원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열차로 유인해 달리는 열차 밖으로 밀어낸다. 남궁원이 죽은 후 신성일은 윤정희의 돈을 모두 가로채고 그녀에게 모든 것이 남궁원과 자신이 꾸민 일이며 남궁원은 친구였다 말하고는 잔인하게 사라진다. 그리고 몇 년 후. 세 남자에게 농락당한 윤정희는 절망의 삶을 사는데 악몽과도 같이 남궁원이 살아 돌아온다. 그의 얼굴에는 지옥에서 돌아온 자의 낙인처럼 흉터가 가득하다.







10년 후에 태어났더라면 

남궁원은 신성일과 허장강이 자신을 배신해 죽게 만들고 윤정희의 돈까지 가로챘다고 생각하고 돌아온 복수귀다. 허장강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이고 신성일을 죽이러 가는 남궁원. 그의 커다란 키와 늑대 같은 턱, 그 모든 것은 복수자의 얼굴이다.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 거울 앞에서 신성일을 찌르는 남궁원. 두 사람의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 하나는 칼에 찔려 죽어가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복수의 화신이다. 신성일은 윤정희를 속여 돈을 빼앗았지만 그 후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용서를 빌고 윤정희에게 사랑을 고백한 신성일. 사실 그에게는 돈도 그 무엇도 필요 없다. 오직 필요한 것은 윤정희의 사랑뿐. 역시 신성일은 죄의식 때문에 생긴 절망적인 표정이 어울리는 배우다. 그의 바로 뒤에 신성일의 가슴 깊이 칼을 박고 늑대처럼 눈을 번뜩이는 사내 남궁원.  

남궁원은 여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얼굴에 표정을 만들지도 않는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뛰어난 배우다. 오직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해 광기를 일으키는 자다. 이런 것을 보고 한 배우는 섬세하고 여린 감정의 끈을 표현하는 배우라 하고, 다른 한 배우는 선이 굵어 감정이 활화산처럼 터지는 배우라 한다. 두 배우의 차이점을 이용한 명장면이다. 남궁원은 감정 표현의 군더더기가 없다. 그저 돌아서 있는 뒷모습만 보여줘도 분노와 회한이 표현되는 배우다. 그런데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존재감이 터져나오는 이 멋진 배우는 이후에 출연한 액션영화에서 그냥 서 있기만 한다. 좋은 감독과 좋은 시나리오를 못 만난 것이다. 그는 다시 겉돌기 시작한다. 이후 그가 출연한 액션 영화는 모두 조악하게 007을 흉내 낸 영화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만희 감독과 다시 만난 남궁원은 또다시 활개를 친다. 이만희 감독의 만주 웨스턴 ‘쇠사슬을 끊어라’(1971)에서다. 이 영화에서 남궁원은 호쾌한 남자지만 미스터리한 사나이. 술과 돈, 여자에 환장하고 비상한 머리로 장동휘와 허장강을 속이는 매력적인 주인공 역을 맡는다. 아마도 남궁원과 이만희는 서로 배포가 맞는 한 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만희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대한 울분과 통한 속에 병을 얻어 몇 해 뒤 세상을 떠나고 남궁원은 다시 멜로 영화 속 불륜에 빠진 유부남이거나, 아버지 역을 맡는다. 1970년대 후반 이두용 감독과 만나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는.  

이두용 감독과 만난 남궁원의 배역은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잔혹한 내시들의 우두머리 내시감이다. 영화 ‘내시’(1986)를 만든 이두용 감독은 조선 시대 내시들이 남성의 성기를 제거하니 남성 호르몬이 몸으로 갔고, 그 결과 모두 체격이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체격이 우람하고 검술에 능한 내시가 탄생한다. 그뿐인가? 이두용 감독은 ‘피막’(1981)에서 남궁원에게 마을에서 가장 천한 피막(避幕·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기 위해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지은 오두막) 지역을 준다. 어쩌면 남궁원은 소원 성취를 한 셈이다. 








너무 잘생겨서 한정된 배역만 맡았던 사나이 남궁원은 액션영화 배우로 더 멋진 역을 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 충무로에는 그의 연기를 뽑아낼 좋은 감독과 시나리오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프랜치 커넥션’의 진 해크먼처럼 범인 잡는 일에만 몰두하다 광기를 일으키는 외골수 형사 역을 했어도 멋있었을 것이고, 숀 코너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중년이 돼 남성성을 더욱 힘 있게 구사하는 배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궁원의 데뷔 초기 신상옥 감독이 그에게 한 말이 있다. “너는 지금 나온 게 참 안 됐다. 한 10년, 15년 뒤에만 나왔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