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동아일보 2026-06/
06-01(월) 달러에 트럼프 얼굴?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미 정부는 무기 제조에 쓸 금속이 부족해지자 동전을 대신할 5센트짜리 지폐를 만들기로 했다. 그 지폐에 들어갈 인물로 남북전쟁의 영웅 윌리엄 클라크가 정해졌지만 이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와 성이 같았던 당시 재무부 화폐국장이 지폐에 자기 얼굴을 새겨서 ‘셀프 발행’을 한 것이다. “나라의 품위에 먹칠을 했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고, 의회는 재발을 막겠다며 곧바로 입법에 나섰다. 미국 지폐엔 오직 사망한 인물의 얼굴만 넣을 수 있다고 법에 못을 박았다.
▷이후 160여 년간 지켜져 온 원칙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건국 250주년을 기념해 트럼프 얼굴이 들어간 250달러 지폐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지폐 시안에는 트럼프가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한 혐의로 기소돼 교도소에 출석했을 때 정면을 노려보며 찍은 머그샷이 새겨져 있다. 45대, 47대 대통령인 트럼프를 뜻하는 4547 숫자도 보인다. 트럼프는 지폐 도안을 그린 영국인 화가와 연락하며 직접 의견을 냈다고 한다.
▷재무부 내 트럼프 측근 간부들이 이 작업을 주도하고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초상을 지폐에 넣는 건 현행법 위반이다. 지폐 종류도 1, 2, 5, 10, 20, 50, 100달러로 법에 정해져 있다. ‘트럼프 250달러’를 발행하려면 법부터 바꿔야 하는데 통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런데도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현직 대통령이 그려진 250달러를 발행하는 데 부적절한 점은 없다”며 믿기 힘든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이 와중에 바른말을 한 사람이 퍼트리샤 솔리메네 재무부 조폐인쇄국장이었다. 그는 법적 절차적 한계가 많다며 반대했다가 최근 경질됐다. 반대 이유에 대해선 “나 개인과 조직의 가치를 희생시킬 순 없었다”는 입장을 냈다. 공직자로서 당연한 처신이지만, 트럼프 정부에서 이런 직언을 했다간 무사하기 힘든가 보다. 트럼프의 수사 중단 요구에 불응한 연방수사국(FBI) 국장, 불법 이민 단속 당국에 납세자 정보 제공을 거부한 국세청장, 백신 음모론에 반대한 질병통제예방센터 국장이 이미 줄줄이 해임됐다.
▷미국 지폐에는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등 굵직한 업적을 세운 전직 대통령들이 주로 새겨져 있다. 트럼프가 벌써부터 자기 얼굴을 넣으려고 하는 건 미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조바심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정이 아닌 민주 국가에서 현직 지도자가 지폐에 자기 얼굴을 넣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 독재 국가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북한의 김일성 정도가 있을 뿐이다. 자칫 이런 독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뿐이라고 직언할 수 있는 참모가 트럼프 정부에선 씨가 말라가고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6-02 AI 시대엔 제너럴리스트

앤스로픽 공동 창업자인 다니엘라 아모데이 사장은 스스로를 제너럴리스트로 부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미국 의회에서 일했고 금융 스타트업, 오픈AI를 거쳐 오빠 다리오 아모데이와 앤스로픽을 창업했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내 경력을 보면 뭘 잘하는 사람일까 싶을 것”이라며 “호기심을 갖고 여러 분야에 걸쳐 배우는 능력,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의지야말로 과소평가되는 자질”이라고 했다. 이는 그가 만난 재능 있는 인재들이 공통으로 가진 자질이기도 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KBS 다큐멘터리 ‘인재 전쟁 2’에 출연해 AGI(범용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인간 간의 지식 격차가 줄어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너럴리스트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AI와 공존할 수 있는 법과 제도 같은 시스템을 새로 설계해야 하는 미래 사회에선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무언가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없고가 큰 차이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20세기는 ‘한 우물만 파는’ 스페셜리스트의 시대였다. 1913년 미국에서 헨리 포드가 자동차 생산에 분업을 도입한 이래로 기업에선 전문성을 가진 스페셜리스트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학문 역시 같은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과학의 발달로 지식의 총량이 급증하자 학문은 쪼개지고 나뉘었다. 장기나 세포 단위로 전문의를 배출하는 현대 의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변리사 등 각종 자격증의 위력도 막강했다.
▷스페셜리스트는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극도의 효율을 발휘한다. 하지만 AI 등장과 같은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큰 환경에선 제너럴리스트의 적응력이 월등하다. 사실 인류 역사상 스페셜리스트가 대접받던 시기는 매우 짧다. 철학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아이작 뉴턴까지 문명사를 바꾼 거인들은 본래 제너럴리스트였다. 산업혁명 이후 분업이 가속하고 지식이 폭증하면서 ‘융합형’ 인재가 탄생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육은 AI와 공존하는 법에 취약한 스페셜리스트만 길러내고 있다. 지식을 달달 외워 객관식 문제를 풀고, 함정을 피해 정답을 고르는 방법을 배운다. 인간의 지식 독점이 깨진 미래에는 크게 쓸모가 없어질 정보와 지식을 위해 집집마다 사교육비를 쏟아붓고 있다. 다니엘라는 “AI가 똑똑해질수록 인간적 역량이 중요해진다”고 했다. AI보다 잘 외우지는 못해도 질문하는 능력, 타인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능력, 도덕적 감수성과 윤리적 판단력…. 인간은 갖고 AI는 갖지 못한 이런 ‘초능력’을 뺏는 우리의 교육부터 서둘러 바꿔야 하지 않을까.⊙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6-03 ‘40억 포상금’에 쏟아진 탈세 제보

탈세 제보로 가장 많은 포상금을 받아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은 스위스 은행 UBS의 전직 직원 브래들리 버켄펠드다. 2008년 탈세 방조 혐의로 체포된 그는 내부고발자로 변신해 UBS 비밀계좌에 재산을 숨긴 탈세자 정보를 미국 국세청(IRS)에 넘겼고, 출소 후 포상금 1억400만 달러(약 1600억 원)를 챙겼다. 미국 정부가 탈세를 도운 UBS로부터 받아낸 과징금 중 1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IRS가 한도 없이 징수액의 15∼30%를 제보 포상금으로 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탈세 제보 포상금 한도는 2003년 건당 최고 1억 원에서 점차 늘어 2018년부터 건당 최고 40억 원이 됐다. 해외 페이퍼컴퍼니와 가상자산을 이용하는 등 탈세 수법이 지능화되면서 국세청 조사만으로는 적발하기 어렵게 되자 ‘로또 당첨금’ 수준으로 금액을 올린 것이다. 최근에는 100억 원 넘는 서울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부동산 탈세 제보만으로 수억 원대 포상금을 받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국세청은 지난해 10월 ‘부동산 탈세 신고센터’를 개설해 5개월 동안 780건의 제보를 접수했다고 최근 밝혔다. 가장 많은 유형은 아파트 취득 자금을 부모로부터 받고 증여세를 내지 않은 경우였다. 부모·자식 간의 은밀한 거래를 누가 알겠나 싶지만, 지인이나 부동산 공인중개사는 물론 다른 가족이 신고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담하거나 방조한 책임은 안 묻고 세금 징수에만 활용한다”는 국세청 방침이 제보를 끌어낸 것이다. 제보가 사실로 확인되면 징수한 세금의 5∼20%를 포상금으로 받을 수 있다.
▷해외에서도 고액 탈세 제보에 대한 보상은 강화되는 추세다. 영국은 고액 자산가와 다국적 기업의 탈세가 늘자 지난해 말 포상금 상한을 없애는 미국식 제도를 도입했다. 제보를 통해 150만 파운드(약 30억 원) 이상의 세금을 받아낸 경우 15∼30%를 포상금으로 준다. 국내에선 지난해 탈세 포상금을 건당 최고 100억 원으로 늘리는 법안이 발의됐다. 이재명 대통령도 “나쁜 짓 신고하면 평생 팔자 고칠 만큼 받게 하자”고 말한 바 있다.
▷탈세 포상금은 징수 비용도 덜 든다. IRS는 세무조사 등으로 세금 1달러를 걷는 데 10센트 이상을 쓰는데, 포상금 제도를 활용하면 징수 비용이 4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물론 경계할 부분도 있다. 국내에선 과거 교통법규 위반 신고 포상제도, 이른바 ‘카파라치’를 도입했다가 전문 신고꾼이 활개 쳐 폐지한 전례가 있다. 탈세 포상금이 금액이 훨씬 더 큰 만큼 근거 없는 제보가 난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고액 제보’에 집중해야 허위 제보에 따른 행정력 낭비를 막으면서 갈수록 교묘해지는 탈세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06-04 “공포보다 탐욕이 더 많아”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기업공개(IPO)를 위한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 4일부터 기관투자가 대상 설명회를 시작하는 이 기업은 IPO를 통해 750억 달러(약 114조 원)를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가 세웠던 최고 조달 기록(294억 달러)의 2.5배 규모다. 머스크가 목표로 하는 스페이스X의 기업 가치는 최대 2조 달러. 스페이스X의 베일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글로벌 자본시장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초대형 IPO는 새로운 자본을 끌어들여 금융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본 블랙홀’이 되기도 한다. 대형 펀드나 기관들이 새 종목을 투자 포트폴리오에 넣으려면 다른 주식들을 팔아 현금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전닉스’가 모든 자금을 빨아들이는 한국 주식시장에서 오른 종목보다 내린 종목이 훨씬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스페이스X 상장을 앞두고 시장의 기대감 못지않게 긴장감도 함께 고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우려를 의식해서인지 스페이스X의 IPO 대표 주관사인 골드만삭스가 직접 방어에 나섰다.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는 “우리는 분명히 공포보다 탐욕이 더 많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급격히 오른 주가의 조정 가능성이나 인공지능(AI) 버블에 대한 걱정보다, 자본 투자로 추가 이익을 얻겠다는 욕구가 아직은 더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금융시장에 유동성이 계속 공급돼 스페이스X를 포함해 앞으로 이어질 대형 IPO들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지금 한국 증시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공포’와 ‘탐욕’으로 구분된다. 2일 기준 코스피는 꼭 1년 전보다 226% 올랐다. 미국 나스닥(41%) 등 해외 증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파르게 오른 것이다. 이렇게 급격히 상승하다 보니 일부에서는 조정에 대한 공포심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투자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지난달 말 상장한 ‘단일 종목 레버리지’ 상품 16개는 이틀 만에 시총 5조 원을 넘어섰다. 주가가 오르면 두 배 수익을 내고, 내리면 두 배를 잃는 이 위험한 상품에 투자하려고 수십만 명이 의무교육을 신청하고 있다. 적어도 이 시각엔 탐욕이 공포에 완승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유튜브나 온라인 카페에 등장하는 자칭 주식 전문가들은 여전히 한목소리로 “더 올라간다”를 외치고 있다. ‘포모’(FOMO·소외 공포) 심리로 뒤늦게 뛰어든 투자자들로서는 기회가 남았다는 달콤한 말을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주가의 흐름은 누구도 예단할 수 없고, 투자의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져야 한다. “남들이 탐욕스러울 때 두려워하고, 남들이 두려워할 때 탐욕을 부려라.” 지금이 바로 워런 버핏의 조언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06-05 ‘아톰’ 작가의 반성

1970∼80년대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우주소년 아톰’의 원작자는 일본에서 ‘만화의 신’으로 불린 데즈카 오사무(1928∼1989)다. 40년간 700여 편을 남겼고, 아톰 외에도 ‘불새’ ‘블랙잭’ 등 히트작이 즐비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대를 연 선구자란 평가도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어려서부터 그의 작품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고 한다.
▷거장인 데즈카도 어릴 적엔 또래들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왜소한 체구에 유난히 두꺼운 테의 안경을 쓴 그를 친구들은 “60m 안경”이라고 놀리곤 했다. 학교 교문에 들어서기 60m 밖에서부터 그의 안경이 보여서 붙게 된 별명이라고 한다. 그가 중고교에 다닌 1940년대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인 때였다. 교실도 군국주의로 물들었던 시기다. 데즈카는 귀퉁이에서 만화를 그리다 교사에게 한가한 짓을 한다며 얻어맞고, 군수공장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의대에 진학했지만 미련 없이 만화가의 길을 택했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은 데즈카에게 ‘해방’의 날이었다. 이듬해 18세의 나이로 데뷔작을 발표하면서 “만화의 세계에도 평화가 왔다”고 인사말에 썼다. ‘아톰’ 역시 일본을 패망시킨 원자폭탄에서 주인공 이름(Atom·원자)을 따왔다. 그가 그린 아톰은 자신의 힘을 약자를 돕는 데 쓰는 로봇 소년이다. 데즈카는 후배 만화가들에게 “만화를 그릴 때 인권만은 건드려선 안 된다. 특히 특정 민족이나 집단을 깔보진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만화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던 그지만 일본에서 사실상 금서 취급을 당한 작품이 있다. 재일조선인이 겪는 차별을 그린 1970년 발표작 ‘긴 동굴’이다. 2차 대전 때 땅굴 공사에 강제 동원돼 학대와 멸시를 당했던 조선인이 전쟁 후 일본에서 출신을 숨기고 출세하지만 결국 뿌리 깊은 차별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주간지에만 실린 뒤 자취를 감췄고, 여러 종의 데즈카 만화 전집에 한 번도 포함되지 못했다. 당시는 강제 징용 같은 과거사 관련 책이 나오면 일본 우익들이 출판사에 테러를 서슴지 않던 시절이었다.
▷반세기 넘게 빛을 보지 못했던 ‘긴 동굴’은 최근에야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일본 호세이대 출판사가 2일 단행본으로 재출간했다.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지 말자는 데즈카의 목소리도 되살아나게 됐다. 그는 ‘긴 동굴’을 내놓기 4년 전인 1966년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인들은 군국주의에 희생되고 민족 역사를 짓밟힌 채 강제로 일본에 오게 됐다. 편견과 경멸 속에 수십 년을 살아왔다. 일본인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 우린 똑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가.”⊙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6-06(토) AI 시대, 자소서보다 면접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서류심사의 1차 관문인 자기소개서다. 취업 시즌이 되면 지원하는 회사가 요구하는 양식에 맞춰 수십 장씩 자소서, 혹은 ‘자소설’을 써야 한다. 취업에 성공한 합격 자소서를 1만∼2만 원에 사서 참고하거나, 건당 10만∼20만 원을 주고 첨삭 지도를 받는다. 하지만 자소서 공포증도 옛말이 돼가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자소서를 써내는 지원자가 늘면서 자소서 비중을 줄이거나 아예 안 보는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AI의 등장으로 기업들의 입사 전형이 바뀌고 있는데, AI가 잘하는 문서 작성 능력의 중요도는 낮아지고 실제 문제 해결 능력이나 사고력을 검증하는 면접과 동아리 활동 스펙은 중요해졌다. 컴퓨터활용능력과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 응시자가 줄어든 이유다. 영어도 문법과 독해 위주의 토익 점수보다는 말하기 시험 성적을 요구한다. 영문 서류 작성은 AI에 맡기면 되지만 해외 바이어와 원활하게 소통하는 회화 실력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취준생 입장에선 자격증 같은 정량 평가보다 정성 평가가 더 부담이 된다. 취업에 유리한 동아리들의 경우 결석하면 벌금을 물리거나 결석일수가 누적되면 퇴출시킬 정도로 내부 규율이 엄격해졌다고 한다. 특히 직무면접과 인성면접은 평가 기준이 모호한 탓에 ‘면까몰’, 즉 ‘면접은 (당락 여부를) 까볼 때까지 모른다’는 말들을 하며 부담스러워한다. 또래 취준생들과의 면접 스터디만으론 불안한 취준생들은 회당 20만∼40만 원을 주고 면접 컨설팅을 받는다.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취업 준비에 들어가는 비용은 날로 늘고 있다. 취업 컨설팅 비용, 학원이나 온라인 강의 수강료, 카페나 스터디룸 이용료 등 1인당 연간 취업 사교육비가 455만 원이다(잡코리아 2025년 조사). 4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배로 늘었다. 요즘은 원하는 기업에 가려고 재수 삼수를 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무전무업(無錢無業)’, 돈이 없으면 취업도 안 되는 세상이고, ‘엄빠은행’, 즉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못 받는 흙수저가 대기업에 입사하는 건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돼가고 있다는 자조가 나온다.
▷취업률이 100%에 가까운 일본 대학생들은 ‘내정 블루(우울증)’를 앓는다고 한다. 기업들의 입도선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르게는 신입생 때부터 취업이 ‘내정’된 학생들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불안감과 회사원이 된다는 중압감을 느끼는 현상이라고 한다. 한국 취준생들로서는 부럽지 않을 수 없다. 20대 고용률이 58.4%인 한국 젊은이들은 ‘존재통’, 존재하는 것만으로 아픔을 느낀다. 취업하면 절로 나을 병인데, 존재통이 성장통이 아니라 불치병이 될까 걱정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