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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동아일보 2026-05/ 05-01(금) 고1 男 173cm, 女 161cm… 미국만큼 큰 키 - 05.30(토) 여론조사 홍수 속 “응답 샘플 모자라 중단”

상림은내고향 2026. 5. 9. 11:46

[횡설수설] 동아일보 2026-05/

05-01(금) 고1 男 173cm, 女 161cm… 미국만큼 큰 키

 

키는 유전일까, 환경일까. 개인으로 보면 유전의 영향이 우세하겠지만, 집단의 평균 신장은 환경적인 영향이 크다. 200개국 아동 및 청소년(5∼19세) 6500만 명의 평균 키와 체질량지수(BMI)를 장기간 추적한 연구 결과가 2020년 의학 저널 랜싯(Lancet)에 실렸다. 1985∼2019년 35년간 한국은 세계에서 평균 신장이 가장 빠르게 자란 나라 중 하나였다. 한국 남학생은 세 번째, 여학생은 두 번째를 기록했다. 한국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이 최상위권을 휩쓸었는데 모두 급속히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들이다. 충분한 영양, 깨끗한 위생 등 환경적 요인이 아이들을 쑥쑥 자라게 한 것이다.

▷요즘 거리마다 외국인 관광객이 붐빈다. 그런데 생각보다 키가 크지 않아서 뜻밖이었다. 과거 올림픽, 월드컵에서 우리를 이긴 외국팀 선수들을 보며 ‘서구형 체형’ ‘타고난 체력이 다르다’는 말을 듣고 자란 세대로선 놀랍기도 하다.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학생 건강검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고1 학생의 평균 키는 남학생 173cm, 여학생 161.3cm였다. 고1이면 연간 몇 cm씩 크는 성장 급등기가 거의 지난 다음이라 성인까지 비슷한 수준이 유지된다.

▷고1 학생의 평균 키는 일본을 3∼4cm가량 일찌감치 따돌렸고 미국 학생들과도 비등비등하다. 지난해 미국 국립보건통계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1에 해당하는 16∼17세 남학생 평균 키는 174.4cm, 여학생은 161.1cm다. 여학생은 오히려 한국보다 작았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인의 평균 신장이 정체되면서 양국의 키가 비슷해졌다.

 

▷35년간 아동과 청소년의 키는 거의 자라지 않고 몸무게만 늘어 건강이 악화한 나라가 있다. 미국, 뉴질랜드, 멕시코 등이다. 소득이 낮은 계층에서 ‘고열량 저영양’ 식단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분쟁을 겪은 콩고, 수단, 에티오피아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선 아이들의 평균 신장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작아졌다. 영양 공급이 충분하지 못하고 식수가 부족한 탓이다.

▷이처럼 평균 신장은 그 나라의 경제력 총량과 불평등 정도, 복지 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고1 남학생 키가 170cm를 넘고, 여학생은 160cm를 넘어선 건 1997년이었다. 경제 호황기를 지나며 영양, 위생, 의료가 크게 개선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론 고1 남학생의 평균 키가 3cm가량 자랐을 정도로 증가 속도는 둔화됐다. 유전자에 숨어 있던 키는 다 자란 것 아닐까 싶다. 문제는 앞으로 미국을 따라가지 말란 법이 없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신체 활동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고1 남학생 100명 중 6명이 소아 대사증후군을 앓고 있다. 이젠 키에 집착하기보다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5-02(토) 한국GM의 변신 “철수는 없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메리 배라 회장이 요즘 인터뷰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하는 차가 쉐보레 트랙스다. 지난달 28일 주주 서한에서도 가장 먼저 거론하며 “수익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치켜세웠다. 한국GM이 개발해 경남 창원 공장에서 생산하는 이 차는 지난해 미국에서만 26만5000대 팔리며 소형 SUV 시장 점유율 27%를 기록했다. 부평 공장에서 만드는 트레일블레이저까지 합치면 점유율은 43%로 절반에 육박한다.

▷한국GM이 최근 공개한 창원 공장은 대우자동차 시절 티코를 만들던 곳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627대의 로봇이 용접을 전담하고, 3D 비전 카메라를 이용해 부품을 공정에 자동 투입하는 첨단 스마트 공장이 된 것이다. “넘치는 수요를 맞추지 못해 고민”이라는 이 공장의 가동률은 95%로 세계 GM 공장 중 가장 높다. 한국GM은 지난해 차량 46만 대를 만들어 대부분 수출했는데 미국 본사는 올 초 “풀 캐파(최대 생산 능력)에 맞춰 달라”며 50만 대 생산을 주문했다.

▷한국GM이 계속 잘나갔던 건 아니다. GM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파산보호를 신청한 이후 ‘철수설’은 꼬리표처럼 한국GM을 따라다녔다. 2014년부터 8년 연속 적자가 났고, 2018년에는 군산 공장이 문을 닫았다. 한국산업은행이 공적자금 8400억 원을 투입하며 2028년까지 국내 사업장 유지 약속을 받아냈음에도, 역대 한국GM 대표들은 철수설 관련 질문에 명확한 답을 피했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수입차 관세를 0%에서 25%로 올리겠다고 선언한 것도 생산차 대부분을 미국에 수출했던 한국GM에는 악재였다.

 

▷흐름을 바꾼 것은 트랙스와 트레일블레이저였다. 2020년경부터 두 차종이 미국 시장에서 연이어 히트를 쳤다. ‘가성비 SUV’를 찾던 미국 소비자 입맛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후 GM은 철수 대신 대규모 투자를 선택했다. 헥터 비자레알 한국GM 사장은 지난해 말 “3억 달러(약 4400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고 지난달 3억 달러를 더 투자하겠다고 했다. 트랙스의 미국 판매 가격은 2만1700달러(약 3200만 원)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미국 신차 평균 가격의 절반에 못 미친다.

▷지난해까지 4년 연속 흑자를 낸 한국GM은 창원 공장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철수할 생각이라면 대규모로 투자할 이유가 없다”며 철수설을 부인했다. 해외 자본의 한국 직접 투자가 해외로 나가는 국내 자본의 절반에 그치는 가운데 GM의 투자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한국GM이 창출하는 직간접적 일자리는 15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노동 유연성 확보와 세제 혜택 등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도와준다면 제2, 제3의 GM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05-04(월) ‘카지노 옆 교회’

 

5월 초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리는 버크셔해서웨이의 연례 주주총회는 전 세계 투자자들이 가장 기다리는 행사다. 그런데 올해는 그 열기가 조금 덜했다고 한다.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난 워런 버핏이 무대에서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다른 주주들처럼 관중석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자본시장의 슈퍼스타는 대중의 기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행사 후 C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버핏은 특유의 비유법을 사용해 투자자들의 조급함에 일침을 가했다.

▷버핏에 따르면 현재 투자 시장은 “카지노 옆에 있는 교회”와 같다. 교회는 전통적인 가치 투자를, 카지노는 초단기 거래와 옵션 상품 등을 의미한다. “아직은 교회에 사람이 더 많지만, 지금만 보면 카지노가 지나치게 매력적”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지금처럼 사람들의 도박 심리가 강한 때는 없었다”는 경고도 했다. 버핏의 투자 철학은 가치와 장기(長期)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런 그의 눈에 지금의 시장은 ‘투기’를 넘어선 ‘도박’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버핏이 여전히 대주주인 버크셔는 현재 3970억 달러의 현금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사상 최대 수준이다.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지자 ‘일단 기다리기’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셈이다. 이는 “많은 성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했던 그의 예전 발언과도 맞닿아 있다. 인공지능(AI) 등 기술 기업 투자에 지나치게 신중한 버핏에 대해 지난 2, 3년간 다양한 비판이 나온 것도 사실이다. 기술주가 폭등한 뒤로는 ‘버핏의 판단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의구심도 확산했다. 하지만 버핏은 그런 평판에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레그 에이블 버크셔 신임 CEO 역시 버핏의 철학을 그대로 잇는 모습이다.

 

▷최근 상황만 보자면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작년 말 대비 올 4월 말 기준 주가 상승률은 코스피가 56.6%로 일본 닛케이(17.3%), 미국 나스닥(7.1%), 영국 FTSE100(4.6%) 등을 압도한다. 단기 급등이나 급락은 많은 투자자들의 이성을 흐리게 만든다. 한국 증시의 경우, 버핏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그 옆 카지노로 새 버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다.

▷‘빚투’는 그런 시장의 또 다른 뇌관이다. 신용거래융자 잔액이 지난달 29일 36조 원을 넘어섰는데, 이는 23일 35조 원을 돌파한 지 4거래일 만에 1조 원이 불어난 것이다. 현재 글로벌 금융시장은 단기 빚투를 하기엔 변수가 너무 많다. 버핏의 말이 귀에 더 선명하게 꽂히는 게 그래서다. 점심 식사 한 번 함께 하려면 수십억 원의 돈을 내야 하는, 괜히 ‘오마하의 현인’이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닌 투자업계의 전설이지 않나.

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05-05 이젠 초6부터 “엄카 대신 내카”

 

혹시나 해서 지갑에 현금을 좀 넣어 다니지만 좀처럼 쓸 일은 없다. 신용카드나 간편결제, 계좌이체로 대부분 해결된다. 아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편의점이나 생활잡화점,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능숙하게 카드를 쓱 내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론 ‘엄카(엄마 카드)’, ‘아카(아빠 카드)’를 빌려 쓰는 것이지만, 이젠 초등학교 6학년도 본인 명의의 ‘내카’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신용카드는 만 19세 이상 성인만 발급할 수 있었지만, 4일부터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발급 가능 연령이 크게 낮아졌다. 부모가 신청하면 만 12세 이상 자녀 명의로 ‘가족카드’를 발급할 수 있다. 그동안 일부 카드사에서 혁신금융서비스로 제한적으로 운영하던 것을 전면 허용했다. 무분별한 소비를 막기 위해 한도는 월 10만 원(부모 허락 시 최대 50만 원)으로 제한된다. 문구점, 편의점, 학원, 병원 등 실생활에 밀접한 업종에서만 쓸 수 있고, 유흥·사행성 업종의 결제는 차단된다.

▷원칙적으로 신용카드를 가족을 포함한 타인에게 빌려주는 것은 여신법과 카드사 약관 위반이다. 분실·도난으로 부정 사용이 발생해도 책임소재를 따지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현금 없는 사회’로 빠르게 변화하면서 매번 용돈을 현금으로 주는 대신 ‘엄카’를 빌려주는 게 관행처럼 돼 왔다. 금융당국은 자녀들이 음성적으로 부모 카드를 쓰는 대신, 부모의 통제 아래 투명하게 소비를 관리하는 구조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본인 명의의 카드 사용을 통해 금융 시스템의 근간인 ‘신용’의 개념을 일찍 익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우려의 시선도 만만찮다. 당장 통장에 잔액이 없어도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경험은 아직 자제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겐 치명적인 유혹이다. 신용카드의 본질은 결국 ‘빚’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용돈 당겨쓰기’의 단맛에만 일찍 길들여질 우려가 있다. 아이들은 ‘내 카드로 내가 샀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엔 부모의 신용에 기대는 구조다. 내가 맘대로 써도 결국 누군가 갚아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부터 형성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통장 잔액 한도 내에서만 쓸 수 있는 체크카드만으로 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카드가 빚이란 사실을 깨닫기까지 우리 사회는 엄청난 수업료를 치렀다. 소득 없는 대학생, 저신용자 등에게 무분별하게 카드를 남발했다가 수백만 명의 신용유의자(옛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2000년대 초반 카드대란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카드를 긁는 행위가 훗날 어떤 책임으로 돌아오는지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첫 신용카드가 독배가 될지, 건강한 경제관념을 키워주는 자양분이 될지는 결국 카드를 허락한 어른들에게 달렸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06 보이스피싱에도 위장수사 허용되나

 

신세계, 무간도, 미스 에이전트. 한국 홍콩 미국으로 배경은 다르지만 모두 범죄조직에 잠입한 ‘언더커버’ 수사 요원들의 활약을 다룬 영화들이다. 한국의 경우 영화와 달리 위장수사는 특정 범죄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조주빈 일당의 ‘n번방’ 사건을 계기로 2021년 아동·청소년 성범죄에 대해 처음 위장수사가 허용됐고, 이후 성인 디지털 성범죄(2024년)와 마약 수사(올 4월)로 확대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여야 의원들이 조직범죄도 위장수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6일 발의한다.

▷위장수사는 n번방 사건처럼 폐쇄적이고 비대면에 점조직 형태로 이뤄져 압수수색이나 체포 같은 전통적 수사 방식으로는 증거 확보가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이번에 발의되는 법안도 보이스피싱, 로맨스스캠, 투자 리딩방, 기획부동산 사기처럼 내부자가 아니면 정보 접근이 어렵고, 조직 말단을 잡아도 윗선까지 검거하기 어려운 조직범죄가 대상이다. 수사관이 조직원이나 피해자로 위장해 계약이나 거래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위장수사의 효용은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서 입증된 바 있다. 2021년 9월 제도 도입 이후 4년간 위장수사 765건으로 성범죄자 2171명을 붙잡았다. 범인이 개설한 텔레그램 대화방에 위조 신분증으로 가입해 증거를 모았다. 2024년엔 지인과 연예인을 대상으로 가짜 영상물 3만 개를 제작 유포한 ‘합사방(합성사진방)’ 운영자 등 238명을 검거했다. 위장수사 개시 3개월 만이었는데, n번방 때는 조주빈 검거까지 6개월이 걸렸다.

 

▷하지만 위장수사는 불법인 함정수사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범죄 의도가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은 합법적 위장수사지만, 죄지을 생각이 없던 사람의 범죄를 유발하면 함정수사가 된다. 위장수사는 대상자의 모든 언행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어 기본권 침해 소지도 크다. 위장수사관은 범죄조직 내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 범죄에 가담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성범죄 조직에 잠입해 성착취물을 유포한다면, 마약조직에서 마약 거래를 돕는다면 정당한 수사 행위일까.

▷위장수사를 개별 법률로 허용하는 점도 개선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 발의되는 조직사기특별법을 비롯해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성폭력범죄처벌법, 마약류 관리법 등으로 관련 규정이 흩어져 있다 보니 위장수사의 범위와 한계 등에 대한 일관된 운용이 어렵다. 위장수사가 필요한 범죄 유형이 생길 때마다 개별법을 고치거나 특별법을 만든다면 일관성 유지가 더 어렵고 형사특별법이 난립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형사소송법, 영국은 수사권한규제법, 미국은 행정지침으로 규율한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05-07 ‘반값’ 5세대 실손보험

 

1998년 신세기통신의 ‘017 패밀리 무료요금제’는 나오자마자 메가 히트를 쳤다. ‘24시간 무료 통화’는 지갑이 가벼운 청년층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새벽 내내 잠들지 않는 연인이 속출하는가 하면, 얼굴을 맞댄 가족끼리도 “어차피 공짜”라며 전화기를 들기 일쑤였다. 급격히 늘어난 통화량에 회사는 설비 확충 속도를 맞추지 못했고, 이는 통화 품질 악화로 이어졌다. 신세기통신이 경영 악화를 이기지 못하고 2001년 SK텔레콤에 인수된 여러 요인 중 ‘무료요금제’는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같은 시기 금융업계에서도 예측 실패로 인한 애물단지가 탄생한다. 1999년 나온 1세대 실손보험이다. 가입자의 자기부담금은 아예 없거나 극히 소액이었고, 적용 범위는 한마디로 ‘안 되는 게 없는’ 정도였다. 경제학이나 수학 석박사가 즐비한 보험사들이 복잡한 수식을 바탕으로 설계한 이 상품은 ‘병원 쇼핑족’이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수익성이 곤두박질했다. 동네 정형외과는 도수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사랑방’이 됐고, 이들의 치료비는 모두 보험사에 청구됐다.

▷실손보험 정책은 이후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2009년 10∼20%의 자기부담금이 생긴 2세대, 2017년 도수 치료 등 일부 비급여 항목을 기본 보장에서 제외한 3세대, 2021년 비급여 항목 전체를 특약으로만 보장하는 4세대로 각각 진화했다. 세대 전환 기간도 10년→8년→4년으로 짧아졌다. 그런데 보험금 수령자들의 의료기관 이용 행태 역시 빠르게 적응했다. 1∼4세대 실손보험의 위험손해율은 110∼150%로, 보험사들은 여전히 고객들에게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내주고 있다.

 

▷다수 가입자들도 속이 쓰리긴 매한가지다. 작년 실손보험 가입자의 65%가 보험료를 내기만 했을 뿐 받은 적은 없다. 보험금 수령인 상위 10%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지급액 전체의 74%가 건네졌다. 다시 말해 고객 3분의 2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소수의 병원 비용을 대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병원에 간 적도 없는데 보험료는 계속 올랐다. 이달 6일부터 나온 5세대가 비급여 항목이나 비중증 질환 치료 보장을 축소하고 자기부담금을 늘리게 된 배경이다.

▷과잉 진료나 의료 쇼핑을 제한하겠다는 목적 자체는 이번에도 달라진 게 없다. 눈에 띄는 건 1, 2세대 가입자들이 일부 보장을 빼거나 5세대로 갈아타면 30∼50% 보험료를 깎아주는 ‘반값’ 정책이다. 하지만 “이제 병원 자주 다닐 나이”라며 기존 계약을 고수하겠다는 초기 가입자들이 많다. 보험사와 병원 쇼핑족 간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은 어떤 결말로 향할까. 2010년대까지도 7만 명 이상이 이용하던 ‘017 무료통화’는 2G 서비스 종료로 ‘017’ 번호를 쓸 수 없게 된 2020년에야 완전히 종료됐다.

김창덕 논설위원

 

05-08 오늘은 ‘어른이날’

 

해마다 5월 8일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의 왼쪽 가슴마다 빨간 카네이션이 활짝 피어올랐다. 훈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하셨다.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노래 ‘어머니의 마음’은 첫 소절부터 울컥해져 끝까지 부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요즘 자녀 양육에 한창인 MZ세대(밀레니얼+Z세대) 부모에겐 어버이날이 코끝 찡한 날만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챙기고 자축하는 이른바 ‘어른이날’로 부르는 신풍속도가 나타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맘카페를 보면 어버이날을 핑계 삼아 자신에게 이른바 ‘셀프 선물’을 했다는 인증 글이 넘쳐난다. 평소 가격표를 보며 망설이던 100만 원대 명품 액세서리나 고급 향수를 나를 위한 보상 차원에서 과감히 결제하거나, 육아에 지친 몸을 달래려 고가의 경락 마사지를 예약하는 식이다. 아이의 삐뚤빼뚤 편지도 물론 기쁘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고생한 나 자신을 위한 확실한 위로를 얻겠다는 심리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의 부모들에게 소홀한 것은 아니다. 다만 방식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일 뿐이다. 어버이날 선물 부동의 1위는 십수 년째 굳건하게 ‘현금’이 차지하고 있다. 카카오페이에 따르면 지난해 1년 중 송금이 가장 많이 이뤄진 날 2위가 어버이날이었다. 추석 연휴 다음으로 돈이 많이 오갔다. 한 설문조사에서도 10명 중 9명은 어버이날에 가장 선호하는 선물로 현금을 꼽았다. 부모님껜 가장 확실한 ‘봉투’를 드리고, 나에겐 취향에 맞는 ‘선물’을 주는 이원화 전략이다.

 

▷이러한 현상의 바탕엔 MZ세대 특유의 ‘미이즘(Meism)’이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들은 개인의 행복과 자아실현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자라난 세대다.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던 과거의 부모상에서 벗어나, ‘나를 소중히 여겨야 아이도 행복하게 키울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훗날 자녀에게 기대거나 보상을 바라기보다는, 당장 나 스스로를 챙겨 심리적 만족감을 얻고 육아의 동력을 잃지 않으려 한다.

▷예전엔 당장 굶더라도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보면 배부르다고들 했다. 어르신들의 눈엔 자녀의 카네이션을 자랑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명품 반지를 끼워주는 모습이 낯설거나 이기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팍팍한 살림살이와 육아의 고단함을 견디며 살아가는 젊은 부모들이 1년에 한 번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마저 탓하긴 어렵지 않을까. 오히려 ‘나’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부모의 무게를 견뎌내겠다는 긍정적인 다짐 의식에 가깝다. 꽤 실용적이고 씩씩한 요즘 부모들의 생존법일지도 모른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09(토) 주가 올라도 지갑 안 열리는 이유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8일 코스피는 7,500 선 턱밑에서 장을 마치며 4거래일 연속으로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증시는 뜨겁다못해 데일 지경이지만 체감 경기는 냉골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년 만에 기준선인 100 아래로 내려앉았다. 주식 계좌가 두둑해졌는데도 사람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다. 자산 가치가 오르면 씀씀이도 커진다는 이른바 ‘자산효과(Wealth Effect)’가 유독 한국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다.

▷최근 한국은행이 내놓은 ‘우리나라 주식 자산효과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보면 2011∼2024년 가계의 주식 자산이 1만 원 늘어날 때 증가하는 소비는 130원 남짓에 불과했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에서 300∼400원이 소비 증가로 연결되는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다. 한국에서 주식 자산효과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은 가계에서 주식을 많이 들고 있지 않아서다. 가계의 주식 보유 비중은 전체 자산의 7%에 불과하다. 주가가 많이 올라도 소비를 늘릴 수준만큼의 자산 증가를 체감하기 어렵다.

▷그나마 벌어들인 주식 소득의 상당 부분은 소비가 아닌 부동산으로 흘러갔다. 한은은 무주택 가계의 경우 주식 자본이득의 약 70%를 부동산 자산에 투자한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서울 주택 매입 자금 중 주식·채권 매각대금 비중은 지난해 5월 4.9%에서 올해 1월 8.9%로 치솟았다. ‘무리하게 빚을 내더라도 집은 사야 한다’는 부동산 불패 신화는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다.

 

▷한국에선 주식을 ‘안정적인 수익원’이 아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일시적 이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2011∼2024년 한국 주식 시장의 월평균 기대 수익률은 미국의 6분의 1에 불과했고, 변동성은 10% 높았다. 이 때문에 주식을 장기 보유하기보단 단기에 차익을 실현하고는 부동산 등 ‘안전자산’에 묻어 두려는 투자자들이 많았다. “주식 하면 패가망신” “주식에 손대면 이혼 사유” 등 주식투자에 대한 부정적 꼬리표도 한몫했다.

▷물론 지난해부턴 상황이 바뀌고 있다. 지난해 국내 가계가 주식의 매매 차익으로 벌어들인 돈은 429조 원으로, 직전 14년 연평균인 20조 원의 20배가 넘는다. 주식을 보유한 개인도 2019년 말 612만 명에서 지난해 말 1442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안정적인 투자환경을 조성해 한국 증시도 장기 우상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부동산 불패’ 신화를 꺾어 주식으로 번 돈이 부동산으로 쏠리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주식시장이 기업과 내수를 살리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11(월) 여행수지 ‘만년 적자’ 반전시킨 한류의 힘

 

6일 오후 5시경 대통령궁 발코니에 방탄소년단(BTS)이 모습을 드러내자 ‘아미밤’ 응원봉이 반짝이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북미 투어 중인 BTS가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과 환담한다는 소식에 대통령궁이 보이는 소칼로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BTS 팬 5만 명이 운집했다. 이들의 떼창과 춤으로 소칼로 광장은 마치 거대한 공연장 같았다. 멕시코 상공회의소는 세 차례 BTS 공연으로 인한 경제적 파급 효과가 1억750만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3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BTS의 복귀 공연 당시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이들은 평균 8.7일을 머물며 1인당 353만 원을 썼다. 올해 1분기 외국인 관광객보다 평균 2.6일을 더 체류하고, 108만 원을 더 소비한 것이다. 이 영향으로 3월 여행수지가 2014년 11월 이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만성적인 여행수지 적자국이었는데 136개월 만에 반전을 쓴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 관광의 주 손님은 쇼핑하러 오는 유커들이었다. 한중 관계에 훈풍이 불었던 2014년 여행수지가 반짝 흑자를 냈던 이유다.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로 한중 관계가 얼어붙자 관광업계는 직격탄을 맞았고, 그 여파가 오래갔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K팝, K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아시아뿐만 아니라 북미, 유럽, 중동에서도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급증했다. 식도락 관광, 한류 스타 관련 장소 방문 등 한국 관광의 내용도 달라졌다.

 

▷2024년 외래관광객조사에 따르면 ‘한류 콘텐츠를 접하고 나서’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1위로 꼽혔다. 3월 방한한 외국인들은 BTS 공연 전후로 서울 용산, 홍대, 성수 일대를 방문했다. 용산은 BTS 소속사인 하이브 사옥이 있고 인근은 ‘하이브 거리’로 불린다. 성수에는 SM엔터테인먼트 사옥이, 홍대에는 YG엔터테인먼트 사옥이 있다. 이 지역들은 아이돌 팝업스토어, 화보 촬영의 성지로 특유의 ‘힙’한 분위기가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을 보면 K팝, K드라마로 한국을 알게 됐지만 굴곡진 역사와 이를 극복한 끈질긴 한국인, 한국에 오는 비행시간 동안 배울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인 한글, 맛있고 푸짐한 한식, 개인주의 문화권에선 느끼기 힘든 친밀한 정서 등이 점점 궁금해졌다는 외국인이 많다. 과거 우리가 서구의 삶의 방식을 동경했듯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 매력적이라는 뜻이다. 2000년대 초반 드라마 ‘겨울연가’가 인기를 끌고 그룹 ‘H.O.T.’가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한류는 짧은 유행으로 끝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 전망과 달리 이제는 한국 문화가 품은 가치관과 정서가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5-12 늘어나는 수업 방해 ‘금쪽이들’

 

직장인 커뮤니티에서 회자됐던 초등 교사들의 경험담을 보면 ‘설마…’ 싶을 만큼 경악스럽다. 수업 시간에 활동을 시작할 때마다 “아,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김을 빼고는 “응, 내가 (활동) 안 해도 (선생님은) 아무것도 못 하죠?”라고 빈정대는 학생도 있었다. 교실을 자꾸 돌아다니고 소리를 지르거나 수시로 음란한 대사를 읊는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을 쉬는 시간에 불러 훈계했더니 “쉬는 시간에 놀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한 아동 학대”라고 응수한다. 아이를 가르치려 하면 교사에게 욕설을 하고, 옥상에 올라가 죽겠다고 위협한다.

▷교사들은 실제 교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들은 악의를 품고 무례하게 군다기보다 정서적으로 아픈 아이들인 경우가 많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연구에 따르면, 서울 초중고 교사 10명 중 절반은 최근 1년간 정서·행동 위기 학생에 의한 수업 방해와 교권 침해가 증가했다고 답했다. 학교급이 낮을수록 빈도도 높았다. 초교 교사가 58.6%로 가장 높았고, 중학교 54%, 고교 42.8% 순이었다.

▷교육부는 매년 초등 1, 4학년과 중1, 고1 학생을 대상으로 정서·행동 특성 검사를 시행한다. 정서·행동 위기 징후가 있는 학생을 파악해 지원하려는 것이다. 교사 절반은 검사 결과보다 교실에서 체감하는 정도가 더 심각하다고 답했다. 문제는 교사가 학생의 이상 징후를 발견하더라도 치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는 ‘보호자의 동의나 협조 부족’(78.6%)이 첫손에 꼽혔다. 학부모가 “집에서는 안 그런다” “어려서 산만하다”며 아이의 어려움을 부정하고 검사나 치료를 거부하면 학교가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서·행동 위기를 겪는 학생은 학교 안에서 기피 대상이 되곤 한다. 누구도 담임을 맡으려 하지 않고, ‘수업 방해하는 애’ ‘친구 괴롭히는 애’로 낙인이 찍혀 교우 관계도 원만하지 않다. 그런데 이들을 지원할 교내 인프라는 부족하다. 학교의 목표는 교육이 아니라 ‘큰 사고 없이 잘 달래 집으로 보내는 것’이 된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아이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된다.

▷교사들은 정서·행동 위기 학생 1명을 돌보다 보면 나머지 19명에게 쓸 시간이 부족해진다고 한다. 학부모의 무책임 탓만 할 수도 없다. 내 자식밖에 모르는 일부 학부모도 있지만, 부모가 우울증을 앓는다거나 다문화가정이라 소통이 어렵다거나 하는 사정 있는 집들이 많다. 그래서 미국, 영국 등에선 의학적 진단이 없더라도 교사의 관찰과 상담으로 위기 학생을 찾아내고 개입이 필요하면 담임·상담·특수 교사와 학부모가 팀을 꾸려 학생을 지원한다. 교사 한 명에게만 맡겨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5-13 “호스피스 확대”… 존엄사 보장 첫걸음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에겐 남은 날들 중 오늘이 몸 상태가 가장 좋은 날이다. 그런 ‘오늘’이 통증과 불안으로 가득하다면 얼마 남지 않은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통증을 덜 느끼며 차분히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심신을 보살펴주는 곳이 호스피스 병동이다. “죽으러 가는 곳 아니냐”는 오해도 있지만 ‘호스피스(hospice)’는 손님을 맞이한다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삶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손님을 환대하는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서울대병원 호스피스 병동에는 말기 환자들이 가족에게 못다 한 말을 편지로 쓰도록 돕는 ‘내 마음의 인터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담당 의료진들은 환자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은 게 늘 안타깝다고 한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가족들과 평온하게 작별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병상이 부족해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주로 오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호스피스에 온 지 짧게는 2∼3일, 길어야 몇 주를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짧은 안식조차 일부에게만 허락되는 게 요즘 실정이다. 국내 말기 환자 중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비율은 4명 중 1명에 불과하다. 유럽 국가들이 인구 100만 명당 최소 50개 이상 병상을 확보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37개뿐이다. 병원 입장에선 적자 사업이다 보니 정부 지원이 절실하지만 관련 예산은 인력 한 명 충원하기에도 벅차다. 결국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다 요양병원과 응급실을 전전하는 ‘임종 난민’들이 늘고 있다.

 

▷품위 있는 죽음은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 가능하다. 통증이 다스려지고 죽음의 공포가 누그러져야 비로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향서를 쓰는 이들이 급증했지만 실제 집행률이 낮은 건 존엄한 죽음을 위한 다른 선택지가 마땅치 않은 탓이 크다. 가족들이 무작정 치료를 중단하기엔 죄책감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사 조력 존엄사에 찬성하는 여론이 80%를 넘는 것도 고통 속에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호스피스같이 인간답게 눈감을 수 있는 대안이 다양하다면 무의미한 치료에 매달리거나 조력사를 고민하는 이들도 줄어들 것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호스피스를 확대하겠다고 한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본보 인터뷰에서 “호스피스를 요양병원에도 도입하고, 건강보험 재정으로 인력도 늘리겠다”고 밝혔다. 말기 환자들은 의사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죽을 땐 얼마나 더 아플까요.”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들의 짐을 덜어주는 건 정부가 책임져야 할 최우선 복지의 하나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삶의 마지막 여행길의 풍경은 얼마든 바꿀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5-14 ‘재택근무는 권리 아니다’

 

미국 델은 2024년 전사 직원들에게 재택근무자는 승진에서 제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상당수 직원들이 원격근무를 고수하자 작년 하반기부터는 일정 거리 이내 거주자들은 무조건 주 5회 출근하도록 지침을 강화했다. 아마존도 작년부터 전원 출근제로 전환했다. 구글이나 오픈AI 같은 경쟁사로 인재들이 떠나는데도 “속도감 있는 결정을 위해서” 정책을 밀어붙였다. 스타벅스는 작년 1월 ‘주 3회 사무실 출근’을 의무화한 지 10개월 만에 출근일을 ‘주 4회’로 늘렸다. “이것이 스타벅스에 올바른 길”이라는 브라이언 니콜 최고경영자(CEO)의 말에는 결연함마저 엿보였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흐름이 이어져 왔다. 신작 출시 지연으로 골머리를 앓던 엔씨(NC), 넥슨, 넷마블 등 게임업체들은 2022년 하반기 재택근무를 없앴다. 카카오가 2023년 3월 도입한 ‘오피스 퍼스트’ 근무제도 결국 서로 얼굴 보고 일하자는 것이었다. 한동안 출퇴근 시간을 아꼈던 직원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하지만 회사들은 낮아진 생산성을 회복하려면 유기적인 소통이 필수라 판단했다.

▷이런 변화 속에 재택근무 축소를 둘러싼 기업과 직원 간 갈등은 급기야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는 2022년부터 ‘주 2회’ 재택근무 선택권을 주던 것을 올 1월부터 ‘주 1회’로 바꿀 예정이었다. 그러자 민노총 소속인 이 연구소 노조가 법원에 ‘취업규칙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법원은 최근 기각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확산한 재택근무와 관련해 나온 첫 사법적 판단이다.

 

▷법원이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근로계약서에 ‘근로 장소’에 대한 근로자의 권리가 명시돼 있지 않고, 재택근무 횟수를 줄인다고 해서 근로자들에게 큰 불이익이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남양연구소 직원들의 평균 재택근무 횟수가 이미 주 1회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 즉, 노조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주장한 취업규칙의 ‘근로조건 불이익 변경’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안 소송의 결과가 아니라 해도, 이번 결정은 다른 기업 노사에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수는 있다.

▷2019년 10만 명이 안 됐던 국내 재택근무자 수는 2021년 114만 명까지 급증했다. 팬데믹이 끝나자 작년 52만 명으로 다시 줄었다. 직원들에게 사무실 출근을 다시 종용하는 기업은 원격근무의 한계를 명확하게 실감했기에 그런 경영적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 시행한 근무 형태를 직원들은 마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여겨 왔다. “줬다 뺏는 격”이라며 발끈하는 게 그래서다. 다만 직장인이라면 ‘집에서 일할 권리’를 따지기 전 ‘출근할 의무’부터 지켜야 하지 않나. 법원의 이번 판단도 그런 의미로 읽힌다.⊙

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05-15 ‘외로움’ 담당 차관

 

사회적 고립이란 사회적 관계가 부족하거나 단절된 상태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3명 중 1명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잠깐 집안일을 부탁하거나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할 때 도움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면 ‘사회적 고립’으로 판단한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고독사다. 해마다 늘어 2024년 사망자 100명 중 1.09명이 고독사였다. 홀로 사망하더라도 가족이나 지인이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거나 뜸하게 왕래가 있었다면 통계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실제 고독사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사회적 고립이라는 물리적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이 외로움이다. 미 공중보건 최고책임자인 비벡 머시 전 의무 총감은 외로움을 감염병으로 정의하면서 마음뿐만 아니라 몸을 병들게 한다고 했다. 마약 중독자부터 심혈관 질환자까지 질병의 기저에는 외로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뇌에서 외로움과 배고픔은 동일한 부위에서 처리된다. 음식에 대한 욕구만큼 관계에 대한 욕구도 본능적이란 뜻이다. 집단생활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외로움은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된다.

▷SNS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쉽게, 많이 연결을 경험할 수 있는 ‘초연결 사회’에 살고 있다.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친구와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외롭다고 느낀다. SNS에선 가장 보여주고 싶은 나를 순간 포착해 올리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관계는 쉽게 차단한다. 갈등 없는 피상적인 관계만 맺다 보니 정작 내적 감정을 공유할 사람은 없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이른바 인공적 친밀감(Artificial Intimacy)도 문제가 되고 있다. AI가 심리상담사를 자처하고 친구나 연인을 대체한다. 인간 대신 기계와의 관계로 도피하지만 거절도, 상처도 없는 안전한 관계에서 오는 인공적 친밀감은 결코 외로움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 ‘인공적 친밀감’을 연구하는 셰리 터클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 사진을 건네는 격”에 비유했다. 인간의 취약성을 이용해 감정을 조종하는 알고리즘은 진짜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없다.

▷외로움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 필요해지면서 보건복지부 제1차관이 한국의 초대 ‘사회적 고립 전담 차관’으로 지정됐다. 2018년 영국이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을 임명했고, 2021년 일본이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신설한 데 이어 우리도 범부처 대응을 선언했다. 전담 차관을 복지부에서 맡은 건 복지 자원을 동원해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취약 계층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뜻일 터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외로움의 질이 달라지고 있다. 생계 지원 같은 복지 정책을 넘어선 공동체 복원을 위한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5-18(월) 서울 광장시장 노점 실명제

 

멸치 육수에 펄펄 끓여낸 칼국수, 기름에 튀기듯이 부쳐낸 녹두전, 겨자에 찍어 먹는 한입 크기 김밥…. 외국인 관광객이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을 찾아 상인과 일꾼들의 허기를 달래던 서민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한 건 2019년 넷플릭스에서 아시아의 길거리 음식을 소개한 다음부터다. 광장시장 노점 요리사들의 ‘희로애락’이 버무려진 맛깔난 음식 영상을 보고 한국 방문 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저장됐다. 요즘은 가볍고 따뜻한 이불이 한국 쇼핑 ‘필수템’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이불집들이 붐빈다.

▷어른 세대가 장을 보러 가서 드센 흥정을 하는 곳으로 익숙했던 광장시장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재발견된 곳이다. 한 끼 대충 때우는 음식이 싸고 푸짐한 음식으로, 시끌벅적한 활기가 시장의 바이브로, 즉석조리가 손맛으로, 불편한 포장마차 좌석이 민주적인 공간으로 해석된다. 외국인 관광객에 이어 젊은 세대가 광장시장을 궁금해하고 찾기 시작하면서 요즘은 성수동 못지않게 ‘힙’한 장소가 됐다. 스타벅스, 올리브영에 이어 K패션 브랜드인 마뗑킴, 코닥어패럴 등이 들어섰다.

▷광장시장의 인프라와 주 고객이 바뀌었지만, 아직 그에 걸맞은 상도덕이 정착되진 않은 것 같다. 상인들의 불친절과 바가지요금이 끊임없이 논란이 된다. 곁가지 반찬으로 줄 만한 양의 모둠전을 1만5000원에 판 전집, 고기만두를 시켰는데 두 배 값의 모둠만두를 건넨 만둣집, 외국인에게만 비싼 가격제를 운용한 순댓집이나 물값을 2000원 따로 받은 분식집 등이 공분을 샀다. 최근에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료 컵 속 얼음을 씻어 재사용한 것이 적발돼 불량한 위생도 논란이 됐다.

 

▷서울 종로구는 해당 사고마다 과태료, 영업정지 같은 행정처분을 내렸고 상인회는 자정을 다짐했지만 잊을 만하면 사고가 터지곤 했다. 광장시장 노점상은 지난해 11월 도로법에 따라 점용 허가를 처음 부여받았다. 그 이전까지는 사실상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은 영업이었던 셈이다. 정식으로 허가받고 영업하던 일반 점포 상인들은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노점의 상식 밖 영업 행태가 논란이 되면서 피해를 봤다는 불만이 컸다.

▷종로구는 다음 달부터 노점 실명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노점 실명제는 바가지 판매나 음식 재사용 등 불법 영업으로 적발된 노점상에 대해 영업정지와 벌점을 부과하고, 1년간 4회 이상 위반하거나 벌점이 120점을 넘으면 영구 퇴출하도록 한 것이다. 광장시장은 1905년 조선인 자본으로 설립된 조선 최초 민간 시장이다. 6·25전쟁 당시 폐허가 됐다가 재건돼 한때 전국 물류망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젠 전통과 가치를 재평가받아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광장시장이 그 역사성에 어울리는 시장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를 바란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5-19 여권 들고 온 北 여자축구단

 

남북 간 인적 교류가 끊기면서 벌써 6년간 개점휴업 상태이긴 하지만 휴전선을 지나 방북할 수 있는 통로는 2곳이다. 개성으로 연결되는 경의선 출입사무소,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동해선 출입사무소다. 신원과 짐을 확인하는 건 출입국 절차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무소엔 출국, 입국이라는 표현 대신 ‘출경’(出境), ‘입경’(入境)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신원을 확인할 때도 여권이 아니라 북한이 내준 초청 문서를 근거로 통일부가 발급한 방북 증명서를 보여줘야 했다.

▷이는 우리 헌법과 법률이 북한을 외국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로 규정했고, 남북관계발전법은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로 명시하고 있다. 북한 주민의 방남 역시 통일부가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이들의 방문 신청서를 승인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남북 교류를 동족 간의 일로 봤던 북한도 이런 왕래 방식을 수용했다.

▷그런데 북-미 비핵화 협상이 깨진 2019년 트럼프-김정은의 ‘하노이 노딜’ 이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무장을 선언하더니 대남 단절 조치를 하나하나 취하기 시작했다. 2024년 헌법에서 통일, 민족대단결 같은 표현을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한국을 ‘제1의 적대국’이라 불렀다. 곧바로 북한은 남북 회담과 교류를 담당하는 조평통 등 대남 기구를 전부 폐지했다. 통일전선부는 노동당 10국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최근 노동당 10국이 외무성으로 편입된 사실이 확인됐다. 급기야 북한은 두 달 전 헌법에 남북을 경계를 맞댄 두 국가로 못 박았다.

 

▷이런 상황에서 1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을 찾은 북한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보인 모습은 새로운 딜레마를 안겼다. 통일부는 이전처럼 이들에게 방남 증명서를 발급했다. 그런데 북한 선수단은 그 증명서가 아니라 북한 여권을 내보이며 입국 심사를 받겠다고 했다. 우리가 사증을 발급하거나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으면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는 셈이 된다. 출입국청은 이를 피하려 여권은 얼굴 사진을 비교하는 용도로만 참고했다고 했다.

▷선수단은 굳은 표정으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자신들의 최고 지도자가 ‘영원한 적국’이라고 규정한 곳에 와서 활짝 웃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통일부는 18일 통일백서에 ‘남북이 사실상의 두 국가로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하겠다’는 대목을 넣었다. 하지만 당장 여권 문제부터 난제다. 우리 선수단이 북한에서 국제 경기를 치러야 할 상황이 생길 경우 북한이 여권 없이는 ‘입국’을 거부하겠다고 할 수도 있다. 북한이 통일을 지운다고 우리도 섣부르게 두 국가 운운하다가는 그런 관계가 고착화되는 빌미를 줄 수도 있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05-20 ‘5·18 탱크 데이’라니…

 

글로벌 커피 프랜차이즈 스타벅스는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크고 작은 정치적 역사적 논란에 휘말렸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때는 현지 운영권을 가진 맥심그룹 창업자의 딸이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을 옹호했다가 타깃이 됐다. 창업자 하워드 슐츠가 유대계다 보니 ‘친이스라엘 기업’으로 분류돼 중동에서 수차례 불매 운동도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미국 본사는 “어떤 정치적 종교적 이념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해명을 반복해야 했다.

▷이번에는 신세계그룹이 운영권을 가진 한국 스타벅스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인 18일 ‘5/18 탱크 데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텀블러 할인 행사를 홍보하면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탱크를 연상케 한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게시물에 포함된 ‘책상에 탁!’이란 문구를 두고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고문 사실을 은폐했다가 국민적 분노를 샀다. 여기에 할인 텀블러 용량이 박근혜 전 대통령 수형 번호를 연상케 하는 503mL라는 점까지 조명되며 행사 기획자의 정치적 의도에 대한 의심을 사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스타벅스는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서 “저질 장사치의 막장 행태”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결국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손정현 스타벅스 코리아 대표를 전격 경질하고 “국민께 깊은 상처를 드렸다”며 고개 숙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미국 본사도 하루 만에 성명을 내고 사과했지만 후폭풍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스타벅스 측은 ‘탱크 텀블러’라는 제품명을 활용한 프로모션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설사 실무자의 실수였다고 해도, 현대사의 큰 비극인 5·18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지식과 감수성이 있었다면 내부 검토 과정에서 걸러졌어야 했다. 경영진이 몰랐어도 문제고, 보고를 받고도 문제의식 없이 넘어갔다면 더 문제다.

▷한국은 인구 대비 스타벅스 매장 수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광주에만 71개의 매장이 있어, 인구 대비 매장 수로는 서울 다음이다. 더구나 신세계는 그룹 차원에서 3조 원을 투입해 광주종합버스터미널 개발을 추진 중이다. 이런 기업이 마케팅 행사를 하면서 5·18의 의미와 광주의 역사적 상처를 헤아리지 못했다는 건 어이없는 일이다. “저부터 교육을 받고 역사의식과 윤리 기준을 정립하겠다”는 정 회장의 다짐이 실천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05-21 비리 복마전 한남동 관저공사

 

여사님 업체’라고 불렸던 21그램은 2022년 윤석열 전 대통령 용산 관저 공사를 맡기 전까진 영세 인테리어업체였다. 연 매출 20억∼30억 원에 가정집이나 사무실 리모델링을 주로 했다고 한다. 증축이나 구조 보강 같은 전문 공사는 면허도, 경험도 없었다. 그런 업체가 이미 정부의 관저 공사 의뢰를 받고 설계까지 마친 굴지의 종합건설사를 밀어내고 공사를 따냈다. 그 건설사 간부는 21그램 대표가 김건희 여사와의 친분을 강조하며 종합건설업 면허를 빌려달라고 했으나 거절하자 공사에서 배제됐다고 법정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게 시작된 관저 공사는 졸속을 거듭했다. 공사 면허가 없는 21그램은 급하게 하도급 업체를 섭외해 일을 맡겼다. 공사에 동원된 18곳 중 15곳이 무자격 업체였다. 대통령실은 이런 불법 도급을 방관했다. 작업이 끝난 뒤엔 준공검사도 안 하고 ‘완료’ 서류에 서명했다. 관저 공사를 담당한 김오진 당시 대통령실 관리비서관은 21그램을 누가 추천했는지에 대해 ‘윤핵관’으로 불린 윤한홍 의원으로부터 “김 여사가 고른 업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2차 종합특검에 진술했다.

▷21그램은 공사비로 41억 원을 요구했다. 대통령실이 관저 공사비로 편성해 놓은 14억 원의 3배에 달했다. 정상적인 공사라면 시작 전 계약서를 쓰고 정해진 예산에 맞게 공사가 진행돼야 하는데 관저 공사는 그와 반대였다. 하도급 업체들이 일단 공사를 해놓으면 나중에 그에 맞춰 도면을 그리고 주먹구구식으로 비용 명세를 작성했다고 한다. 21그램이 제시한 41억 원이 객관적 근거가 있는지, 투명하게 집행되는지는 애초에 따지지 않았다.

 

▷행정안전부가 애꿎게 그 유탄을 맞았다. 대통령실은 행안부를 압박해 모자란 공사비를 대도록 했다. “전용할 예산이 없다. 차라리 인사 조치를 해달라”는 담당 공무원들의 반발에도 결국 강행됐다. 공사비를 증액해야 한다면 대통령실이 정식 예산을 받아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특검은 당시 대통령실이 관저 내 반려동물 수영장이나 다다미방 등 호화 시설을 설치한 게 드러날까 봐 행안부 예산을 끌어다 쓴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용산 이전 반대 여론을 의식해 일단 예산을 낮춰 잡았다가 야금야금 늘린 것이란 시각도 있다.

▷특혜와 탈법으로 얼룩진 관저 공사는 이후 윤석열 정부 실패의 예고편이었다. 1급 보안시설을 짓는 중대한 국가사업이 영부인 입김에 휘둘리고, 공직자들은 그에 끌려다니거나 출세를 위해 편승했다.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되던 날, 21그램 대표는 자신의 아내에게 “정권이 바뀌면 박살 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근 특검이 관저 예산 불법 전용에 관여한 혐의로 김대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고위 관계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한 걸 보면 틀리지 않은 예측이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5-22 온라인 쇼핑몰의 ‘가짜 할인’

 

온라인 쇼핑몰에 접속하면 ‘오늘만 50%’, ‘쿠폰 중복 할인’, ‘10% 적립’ 같은 문구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구매 심리를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사용자 인터페이스(UI)가 당장 사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볼 것 같은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구매 유도가 자칫 선을 넘으면 ‘다크 패턴’(온라인 눈속임 상술)이 된다. 기준은 소비자를 설득하느냐, 속이느냐다.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소비자원은 쿠팡, 네이버, G마켓, 11번가에서 판매되는 상품 1335개를 조사한 결과 눈속임 상술이 다수 확인됐다고 19일 밝혔다. 대표적인 수법이 정가 부풀리기다. 한 쇼핑몰에서 정가 3만 원, 할인가 1만9900원에 팔리던 제주 천혜향 세트는 올 초 설 명절 행사가 시작되자 정가가 11만4000원으로 4배 가까이로 뛰었다. 할인 판매가는 1만7900원으로, 상품에 표시된 할인율은 84%에 달했다.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사는 듯한 착시 효과를 노린 것이다. 공정위는 “조사한 설 선물 세트 8개 중 1개꼴로 할인율이 과장돼 있었다”고 했다.

▷‘오늘만 할인’이라던 귤이 다음 날도, 일주일 뒤에도 똑같이 10kg에 1만5900원에 팔린 경우도 있었다. 특정 기간에만 싸게 파는 것처럼 홍보하며 구매 결정을 압박하는 수법이다. 공정위는 “조사한 상품 5개 중 1개는 이처럼 할인 행사 종료 후 가격이 같거나 오히려 내려갔다”고 설명했다. 할인가와 정가가 같은데도 마치 가격이 내린 것처럼 표시하거나, 쿠폰을 발급하면서 유효기간과 사용 조건 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모두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을 가로막는 다크 패턴에 해당한다.

 

▷행사 상품을 다른 상품과 비교하기 쉬운 대형마트와 달리 온라인에선 ‘가짜 할인’을 가려내기가 훨씬 어렵다. 쿠폰, 적립금, 결제 할인, 배송비 등이 복잡하게 얽힌 데다 접속 경로와 이용자에 따라서도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비자 피해가 이어지자 유럽연합(EU)은 2022년 디지털서비스법(DSA)을 만들어 온라인 플랫폼의 다크 패턴을 금지했다. 미국에선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다크 패턴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해 제재하고 있다. 모두 “소비자의 자율적 선택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뜻에서다.

▷한국도 지난해 전자상거래법을 개정하며 다크 패턴 규제에 나섰지만, 이번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눈속임 상술은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 국내 온라인 쇼핑은 이미 3년 전 오프라인 쇼핑을 넘어섰다. 이제 일상의 소비 공간이 된 온라인 쇼핑몰이 계속 소비자를 ‘호갱’(호구+고객) 취급한다면 소비자의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더 강도 높은 규제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05-23(토) ‘학점 인플레’ 제동 건 하버드

 

2012년 한 한국인 대학생이 화제가 됐다. 한국 국적 유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하버드대의 ‘소피아 프로인트’ 상을 받은 경제학과 진권용 씨다. 이 상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법률가 맥스 프로인트가 1964년 어머니 소피아를 기리기 위해 거액을 기부하면서 제정됐다. 최우등 졸업생 중 최고 학점자에게 주어지는데,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계산할 정도로 엄격하게 수상자를 가린다. 3년 만에 조기 졸업한 진 씨의 학점은 4.0이었다. 전 과목 만점은 그해 졸업생 1552명 중 두 명뿐이었다.

▷그런데 작년에 이 상을 무려 55명이 받았다. 모두 만점이어서 소수점을 따질 수도 없었다. ‘학점 인플레이션’이 빚어낸 결과였다. 실제 2005∼2006학년도 하버드대 학부생 중 ‘A’학점(‘A-’ 제외)을 받은 비율은 수업별로 약 25%였는데, 2024∼2025학년도는 60%에 육박했다. 서서히 상승하다 온라인 위주로 수업이 진행된 팬데믹 때 껑충 뛰었다고 한다.

▷성적 변별력 문제는 하버드대 교수진이 이미 3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논의해 왔다. 그러다 더는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올해 ‘과목당 A학점 20% 이하’라는 개편안을 내기에 이르렀다. 단 A-를 포함해 이하 학점은 제한이 없다. 성적 제한제는 최근 이 대학 전체 교수를 대상으로 한 이메일 투표에서 70%의 찬성률로 가볍게 통과했다고 미 언론이 보도했다. 앞서 2월 학부생 대상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94%가 반대했지만, 교수들의 결심을 바꿔놓기엔 역부족이었다. 2027∼2028학년도부터 A학점을 받으려면 5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물론 하버드대가 고육지책으로 꺼내 든 성적 제한제가 교육적으로 무조건 ‘옳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하버드대가 벤치마킹했다는 프린스턴대는 2004년 A계열 학점(A+, A0, A-) 비율을 35% 미만으로 강제했는데, 취업 시장에서 타 명문대보다 불이익을 받는다는 불만이 커지면서 2014년 정책을 백지화했다. 또 세계 최고의 지성이 모인다는 하버드대인데, A학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많지 않겠냐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학교 측도 그래서 우선 3년만 제도를 운영한 뒤 재평가를 하기로 했다.

▷학점 인플레이션 논란은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작년 기준 A계열 학점 비중은 서울대가 63%, 연세대와 고려대도 각각 60%, 58%로 절반이 훌쩍 넘는다. 학점을 ‘짜게’ 주기로 유명한 서강대에서도 40%에 이른다. 채용 시장에서 고학점을 필살기로 쓰던 시대는 지났다지만, 대학 교육에서 경쟁이 점차 느슨해지다 보면 학문에 대한 열의도 함께 식을까 우려스럽다. 세계 최고 대학도 어떤 방향이 옳은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게 성적 평가다. 학생의 실력과 노력을 공정하게 가려주는 평가 제도는 입시만이 아니라 대학 교육에서도 꼭 필요하다.

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05-25(월) 수학·과학 외면하는 고교 교육

 

인도공과대(IIT) 같은 최상위권 공대 진학을 원하는 인도 고교생들이 11, 12학년(한국의 고2, 고3에 해당) 때 집중적으로 배우는 과목이 미적분이다. 11학년에 미적분 기초를 시작해 12학년에는 수학과목 평가 비중의 40∼45%가 미적분 등 고등수학이다. 미국 빅테크 최고경영자(CEO)와 핵심 엔지니어 중에는 인도인들이 넘쳐난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이공계 대학 1학년 수준의 미적분, 기하학 공부를 끝낼 정도로 수준 높은 수학 교육에서 그 비결을 찾는 이들이 많다.

▷서울대가 올해 자연계열 신입생을 대상으로 치른 수학 특별시험 결과 ‘기초수학’반에 배정된 학생 비율이 25%로 4년 전(12%)의 갑절로 늘었다. 기초수학은 학생을 수준별로 4단계로 나눴을 때 아래서 두 번째 단계로, 일반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 학생을 위한 보충 과정이다. 서울대 이공계열 학생임에도 4명 중 1명은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수학 실력이 달리는 것이다. 최상위반인 ‘고급수학’ 수강자 비율은 4년 전 18%에서 올해 9%로 반 토막 났다.

▷대학 신입생 수학 실력 하락의 원인으로 4년 전인 2022학년도에 도입된 문·이과 통합 수학능력시험이 지목된다. 수능에서 미적분·확률과 통계·기하 중 일부 과목만 선택해도 상위권 대학 진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서울대도 정시에선 미적분과 기하 중 하나만 선택하면 지원할 수 있고, 수시에선 미적분·기하가 필수과목이 아닌 권장과목이다. 이과생이 과학탐구 대신 사회탐구를 선택하는 이른바 ‘사탐런’까지 겹쳐 수학·과학 교육의 깊이와 폭이 모두 줄었다.

 

▷이달 7일 시행된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 심화수학인 미적분·기하를 선택한 수험생은 32%로 6년 새 최저로 떨어졌다. 특히 미적분 응시 비율은 통합수능 도입 이후 처음으로 30% 밑으로 내려갔다. 과탐 응시 비율(22%)도 5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고 한다. 2028학년도부터는 수학과 과탐에서 선택과목이 아예 사라지고 심화수학이 수능 출제 범위에서 빠지기 때문에 이과 과목 학력 저하는 더 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재 부족에 허덕이는 한국 벤처기업들 중 인도 개발자를 ‘원격 채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IIT 등 최상위 공대 출신에, 영어로 소통 가능한 AI 개발자를 한국 인재의 절반 이하 인건비로 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컴퓨터, 로봇 같은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기초언어’인 미적분·기하학 지식은 한국 인재보다 평균적으로 낫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대 정부가 과도한 입시 부담을 줄이겠다며 수학·과학의 입시 문턱을 낮춘 결과가 장차 첨단 산업에서 우리 청년들의 전문직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5.26 창고형 약국

 

온라인에는 제품이나 장소를 체험한 후 올리는 리뷰 콘텐츠가 많은데 최근엔 창고형 약국 리뷰들이 많이 올라온다. ‘가성비 약국템 총정리’나 ‘창고형 약국이 무조건 싸다는 착시’ 같은 것들이다. 창고형 약국은 대형마트처럼 널따란 공간에 일반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 등을 한데 진열해 놓아 사람들이 카트를 끌고 다니며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대형 약국을 말한다. 창고형 약국의 등장으로 약국이 의료 공간이 아닌 쇼핑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동네 약국은 소비자가 증상을 얘기하면 약사가 약을 선택해 꺼내 주지만 창고형 약국은 소비자가 약을 골라 가면 약사가 계산해 주는 구조다. 창고형 약국의 강점은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 말고는 다 있다는 점. 감기약이나 소화제 같은 상비약부터 영양제, 화장품, 염색약, 반려동물용품까지 수천 종의 제품을 대량 매입을 통해 동네 약국보다 싸게 판다. ‘1+1’ 행사 상품들로 호객하고 소비기한이 임박한 제품은 특가로 내놓기도 한다. 지난해 5월 경기 성남시에 처음 들어선 이후 1년 만에 전국에 40개가 생겼다.

▷해외에선 대형 약국들이 대세다. 월마트나 코스트코 같은 대형마트 안에 약국이 있고, 약과 생활용품을 함께 파는 드러그스토어도 많다. 미국 월그린, 영국 부츠, 일본의 마쓰모토 기요시 같은 체인형 드러그스토어는 인기 관광 코스다. 이와 달리 한국은 동네 약국 위주인데 이는 약사법의 ‘약사 1인 1약국’ 조항으로 체인화가 어렵고 2000년 의약 분업 이후 인근 병원의 처방전 조제만으로도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건강기능식품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실험하는 약사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약사들은 약을 필요에 따라 구매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가격 비교와 대량 구매 중심으로 바뀌면 의약품 오남용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약국이 대형화하면 복약 지도가 허술해질 위험도 있다. 창고형 약국 약사들이 소비자의 상담에 응하고, 계산할 땐 복약지도도 하지만 환자의 이력을 꿰고 있는 동네 약국을 대체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창고형 약국에 동네 약국들이 밀려나면 지역 보건 인프라 기능이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국회는 창고형 약국을 규제하는 법안을 검토 중이다. 드러그스토어 쇼핑의 즐거움을 체험한 해외 여행객들과 창고형 약국 덕에 약값 부담을 덜어낸 만성질환자들이 많아 약국의 대형화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동네 약국은 급할 때 가장 쉽게 의지할 수 있는 보건 의료 기관이다. 고령자가 많이 사는 지역에선 마을 사랑방처럼 심리적 안전망 역할도 한다. 좋은 약을 싸게 살 수 있게 하는 유통 혁신이 가장 가까이서 건강 지킴이 역할을 해 온 동네 약국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05-27 교황의 첫 회칙 “AI 무장해제”

 

교황 레오 14세는 디지털 친화적이다. 추기경 시절부터 X(옛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소통했고, 손목엔 애플워치를 즐겨 찬다. 사제가 되기 전 미국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기술의 가능성과 알고리즘에 대한 이해가 높은 ‘이과 출신 교황님’의 인공지능(AI)에 대한 생각은 단호하다. “단순한 규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AI는 무장해제돼야 한다”고 강하게 경고했다.

▷25일 교황은 바티칸 교황청 시노드 강당에서 즉위 후 첫 회칙(回勅)인 ‘마그니피카 후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고귀한 인류)’를 직접 발표했다. 교황은 회칙, 교서, 권고, 담화, 강론 등 다양한 문헌을 통해 사목적 지침을 전하는데, 그중 회칙은 가장 권위 있는 형태로 신자들은 이를 따라야 할 신앙적 의무가 있다. 245개 항목, 4만 개 단어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번 회칙은 AI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황은 회칙에서 “AI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볼 수 없다”며 “AI는 소수의 손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회칙은 살상 무기 사용 결정을 불투명하거나 자동화된 절차에 위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로봇과 AI가 노동 구조 자체를 바꾸면서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도 경계했다. 허위정보와 이미지 조작, 알고리즘이 진리와 판단을 왜곡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디지털 경제가 보이지 않는 노동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며 ‘현대판 노예제’라고도 비판했다. 회칙은 “AI 도입에 신중함, 엄격함, 더딘 속도를 요구하는 것은 진보에 대한 반대가 아닌 인류를 위한 책임감 있는 배려”라고 했다.

 

▷이번 회칙은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의 연장선에 있다. 레오 13세가 산업혁명 시기 노동권과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했다면, 레오 14세는 AI 혁명이 인간 존엄과 노동, 정의와 평화에 미칠 영향에 주목했다. 2020년 알고리즘에 윤리를 더한 ‘알고레틱스(Algorethics)’를 주창했던 가톨릭교회는 이제 AI를 성경 속 ‘바벨탑’에 비유하며 강력한 조치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혁신과 효과적 가속주의라는 미명 아래 폭주하는 거대 기술 기업들과 효율적인 살상력을 탐내는 강대국들이 교황의 경고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이번 회칙 발표장에 크리스토퍼 올라 앤스로픽 공동 창업자도 참석한 것은 기술계 내부에서도 윤리적 브레이크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AI 자체를 통제하는 것보다는,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오만함을 무장해제하는 것이 더 어렵고 시급한 일일지도 모른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28 2년 전 총선의 26배, 지선 덮친 딥페이크

 

2018년 온라인에 공개된 한 영상이 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영상 속 ‘가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다 갑자기 “이렇게 말해 볼까요. 트럼프는 완전 쓰레기”라는 말을 내뱉었다. 인공지능(AI)이 만든 정치인 딥페이크의 위험성을 일깨운 첫 사례였다. 영상 속 인물은 오바마 대통령 특유의 손동작까지 따라 했지만 입 모양과 눈의 움직임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런 어색한 딥페이크 영상은 옛날 일이 돼가고 있다. 8년 전과 달리 최근 쏟아지는 영상들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실제 장면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영국 왕립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일반인들에게 5개 영상 중 적어도 1개가 딥페이크 영상이라는 걸 미리 알려줬음에도 딥페이크 영상을 가려낸 비율은 21.6%에 불과했다. AI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속도를 고려하면 현실과 구별이 불가능한 딥페이크 영상의 출현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 더욱이 이제 오픈 소스를 사용해 누구나 딥페이크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

▷우리 선거에도 그런 딥페이크 기술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중앙선관위가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에게 삭제를 요청하거나 고발, 수사 의뢰한 6·3 지방선거 관련 딥페이크 게시물이 벌써 1만155건이다. 지난 총선 때는 389건이었는데 2년 만에 26배 넘게 증가했다. 3월엔 울산 지역 구청장 선거를 준비하던 인사가 자신이 미 타임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이 됐다고 뉴스 앵커가 보도하는 딥페이크 영상을 올렸다가 고발당했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투표일 90일 전부터 딥페이크 영상의 유포를 아예 금지하고 있는데도 적발 건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악의적인 딥페이크 영상은 기존의 허위 정보가 AI 기술의 외피를 입고 진화한 산물이다. 이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면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선거 자체의 신뢰성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실제 2023년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투표일 이틀 전 특정 후보가 선거 부정을 논의하는 것처럼 조작된 가짜 AI 음성이 공개됐고, 여론조사에서 앞서던 해당 후보는 결국 패했다.

▷설사 거짓이 드러난다고 해도 ‘수면자 효과(Sleeper effect)’가 발생할 수도 있다. 가짜 정보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 나중에는 사실을 접했던 것처럼 유권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해 혐오와 폭력을 부추기는 딥페이크 영상은 퍼지는 속도도 빠르다. 이제 선거 관리도 AI 시대에 걸맞은 전환이 필요하다. 딥페이크 영상이 카카오톡 대화방 등 소셜미디어 곳곳을 침투하고 있는 마당에 선관위가 일일이 찾아내 삭제를 요청하고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05-29 트럼프 생일날 백악관 격투기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생일을 국가적 행사로 기념하는 이는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유일하다. 독립 전쟁의 영웅인 워싱턴의 생일(2월 22일)이 되면 낮엔 축포를 쏘고 밤엔 성대한 무도회를 열었다. 그의 사후엔 생일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됐고, 지금은 2월 셋째 주 월요일로 옮겨 사흘 연휴를 쉰다. 공식 명칭은 ‘대통령의 날’로 바뀌었지만 몇몇 주에선 여전히 ‘워싱턴 탄생일’로 부른다. 이후 대통령들에게 생일은 개인적 기념일일 뿐인데 각자 성향에 따라 스타일이 다 달랐다.

▷농구광인 버락 오바마는 생일 주간에 대통령 휴양지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고교 동창들과 농구를 즐겼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퇴치를 위한 기금 모금 무도회를 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45번째 생일에 할리우드 스타들을 초대해 민주당 모금 행사 겸 생일 파티를 했는데 매릴린 먼로의 축가 ‘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프레지던트’로 지금껏 회자되는 행사다.

▷팔순이나 구순을 맞는 대통령은 전현직 구분 없이 각별한 축하를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던 아버지 부시는 75세부터 5년 단위로 생일 기념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특히 2014년 90번째 생일에는 파킨슨병으로 휠체어에 의지하는 몸으로 스카이다이빙에 성공해 박수를 받았다. 지미 카터가 2024년 100세 생일을 맞자 미국 전역에서 그가 퇴임 후 헌신했던 해비타트 사랑의 집짓기 운동 특별 행사가 펼쳐졌다. 조 바이든은 2022년 미 역사상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팔순을 맞았지만 나이 문제가 부각될까 봐 조용한 브런치로 생일상을 대신했다.

 

▷초대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을 국가적 행사로 치른 이가 도널드 트럼프다. 지난해 6월 14일 79번째 생일에는 미 육군 창설 250주년 군사 열병식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과 미 육군 창설일이 같다. 1991년 걸프 전쟁 기념 열병식 이후 최대 규모의 열병식이 사실상 대통령 생일 축하쇼로 진행되는 동안 미국 전역에선 최대 규모의 반(反)트럼프 시위인 ‘노 킹스(No Kings)’ 시위가 펼쳐졌다.

▷올해 80세 생일엔 백악관 남쪽 잔디밭(사우스론)에서 종합격투기(UFC) 대회를 개최한다. 미 건국 250주년 기념행사라지만 행사일이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이 아니라 트럼프 생일이다. 총 8만5000장의 무료 관람권을 발행할 계획이며 주최 측이 댄다는 비용이 적게 잡아도 6000만 달러(약 900억 원)다. 로마 제국 쇠락기에 굶주린 민중의 분노를 피 튀는 검투사 경기로 달랬듯, 전쟁과 고물가로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려는 ‘서커스 정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민주국가에선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트럼프다운 권력자의 팔순 잔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30(토) 여론조사 홍수 속 “응답 샘플 모자라 중단”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여론조사 기관들이 조사를 진행할 때 대상자의 연령, 성별 등 비율을 전체 유권자 분포에 맞추도록 하고 있다. 그에 따라 확보해야 할 응답자 수가 100명이라면 최소 70명은 조사에 응해야 가중치를 줘서라도 조사 결과를 공표할 수 있다. 그런데 국회의원 재선거를 치르는 경기 평택을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가 20대의 응답 샘플이 그 최소 기준에도 모자라 중단됐다. 평택지역신문협의회는 27일 “무차별적인 조사 공세로 인한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해 응답 거부가 잇따랐다”고 중단 원인을 설명했다.

▷평택을은 여야 후보 5명이 맞붙으면서 격전지로 부상한 곳이다. 그에 따라 여론조사도 몰리면서 3월 말 이후 공표된 조사만 20건이었다. 협의회에 따르면 조사 기관들이 공표용 여론조사를 위해 전화를 건 횟수는 23만1508번이나 됐다. 평택을 선거인 약 18만 명보다도 많은 숫자다. 협의회는 비공표 여론조사와 정당 내부 조사까지 합치면 평택을 유권자 한 명당 평균 4차례 이상 전화를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여론조사 범람은 평택을만의 문제가 아니다. 6·3 지방선거 예비 후보자 등록이 시작된 2월 초부터 이달 말까지 4개월간 선관위 산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된 여론조사 건수를 세어봤더니 무려 1850여 건에 달했다. 28일 하루에만 61건의 여론조사 결과가 올라왔다. 평일과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여론조사 전화가 몇 번씩 걸려오면 일상과 업무가 방해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거부감을 느낀 유권자들이 전화를 받지 않거나 끊어버리는 일이 늘어나자 어떻게든 응답자 수를 채우려는 조사 기관들이 무작위로 전화를 거는 횟수가 급증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설사 최소 응답자 수를 채웠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20대 응답자 100명이 필요한 조사에서 70명만 응답했다면 조사 기관들은 답을 듣지 못한 30명도 70명과 비슷한 답변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보고 가중치를 부여한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는 그야말로 가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실제 민심과는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결국 응답 거부가 확산될수록 여론조사의 정확도는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 민심과 동떨어진 여론조사는 유권자들에게 여론 지형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줘 혼란을 가중시키고 심지어 선거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학계에선 조사 기관의 공신력을 평가한 등급제를 도입해 일정 등급 이상의 기관만 선거 기간에 여론조사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안 등 여러 해법들이 거론되고 있다. 선관위는 선거 민심 왜곡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여론조사 홍수를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횡설수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