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독트린 -02/ 뉴데일리 인보길 기자
⑥ ‘분단의 원흉’ 누구?
03.17 ‘분단의 원흉’ 스탈린, 해방 한달만에 ▶38선 봉쇄▶김일성 입북▶북한정권수립 지령!...6개월만에 ‘단독정권’ 출범!

▲ 북한 체제설계자 시티코프(왼쪽). 오른쪽사진은 모자 쓴 김일성과 박헌영.
이승만 박사가 미국무부의 친소파들에 붙잡혀 귀국을 못하고 있는 사이, 한반도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가.
한마디로 남북한은 해방 한 달 만에 공산당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소련군의 북한점령과 동시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남한을 장악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38선 동의‘ 순간부터 ’북한 단독정권 수립‘의 준비작업에 돌입한다.
우선 해방 한달남짓에 단행한 ’‘분단고착’ 전단계 조처들은 이러하다.
★스탈린의 북한단독정권 수립 준비
⚫대일 선전포고 즉시 북한 총진격 (8.9)
⚫북한 진입 전부터 ‘김일성’ 선발, 스탈린 면접 낙점 (9,2)
⚫미군의 남한 진주(9.8) 일주일후 38선 전면봉쇄 (9.15)
⚫김일성 입북(9.19)...소련고문관들 사전에 모두 입북
⚫북한에 ‘단독정권 수립’ 지령 (9.20)

▲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사무실로 사용한 서양식 건물, 인왕산 기슭 옥인동에 지은 윤덕영의 별장이다. 순종의 계비 윤비의 큰아버지 윤덕영은 한일병탄 조약에 따라 일본황실의 자작위를 받은 친일파였다.
★박헌영, 미군진주 전에 ‘인민공화국’ 선포
스탈린의 북한 장악에 발 맞춘 것일까. ‘조선의 레닌‘ 박헌영(朴憲永,1900~1956)은 9월6일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서둘러 선포한다.
멀리 1000㎞ 떨어진 오키나와를 출발한 미군이 인천에 도착하기 이틀 전이다.
인민공화국 사무실은 인왕산 기슭 옥인동에 위치한 친일파 윤덕영(尹德榮)의 호화로운 별장, 여기서 ‘이승만을 주석’으로하는 정부각료를 허겁지겁 조립하여 명단을 발표하였고, 12일엔 경성(서울)운동장에서 인민공화국 출범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축하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다.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온 19일엔 박헌영이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까지 창간한다.
이 모든 것은 전남 광주 벽돌공장에 숨어지내던 박헌영이 서울 정동의 소련총영사관 부영사 샤브신(Anatolii I. Shabshin)과 고 내통하고 해방즉시 상경하여 정세판단에 따라 먼저 선수를 친 것이 ’인공‘ 수립이었다. ,즉 스탈린보다 먼저, 미군 진주보다 먼저 남한의 선취권을 잡은 것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이승만 귀국 전에 남한 조직화에 나선 박헌영이다.
이때 남한의 민족진영 우익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이러한 사태는 “고지식한 우익진영이 나라를 좌익에게 고스란히 바친 결과”라는 평가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즉, 일본의 항복 무렵 일본 총독이 당시 우익대표라 할만한 송진우(宋鎭禹,1887~1945)에게 “치안을 맡아달라“했지만 거절하였다. ”일본에 협력해선 안되고 충칭 임시정부가 돌아오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다. 하나만 알고 공산당과 국제정세를 몰랐던 ‘우물안 개구리’의 선택 아닌가. 당시 우파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다.
그때 만약 이승만이 귀국해 있었다면? 생각할수록 미국의 무정책이 통탄스럽다.
결국 마지막 일본총독 아베(阿部信行)는 여운형(呂運亨,1886~1947)에게 부탁했고 여운형은 즉석에서 나라를 맡았다. 거액의 비용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여운형이 설립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박헌영이 치고 들어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한전역에 ‘건준’ 간판을 단 인민위원회를 광범하게 조직하면서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던 것이다. ‘건준’은 10월7일 해체된다.

▲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 이은 테헤란회담 참석자들. 스탈린, 루즈벨트.처칠(왼쪽부터).
◆스탈린의 음모는 테헤란회담에서 시작
이와같이 해방순간 남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대한정책 차이에서 오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한반도를 오래전부터 다시 장악하려 준비한 스탈린의 음모와, 스탈린을 ’친구‘라 여겼던 루즈벨트 이래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무관심 무정책 탓이다.
트루먼도 마찬가지, 스탈린의 동유럽 공산화에 대한 경계심 뿐, 극동 아시아에 대한 전략은 백지상태였다. 이승만 박사가 국무부와 백악관에 ”일본 물러가면 소련 내려온다“며 임정 승인을 수없이 요청했지만 허사로 끝난 까닭이다.
★신탁통치? NO! 스탈린 메모엔 ’후견‘
러일전쟁때 일본에게 빼앗겼던 한반도를 ‘수복’하려는 스탈린의 야심은 1943년 11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회담에서부터 구체화 된다.
그는 카이로회담엔 가지 않았다.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자리에 왜 가나?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테헤란에 오라고 했다. 카이로선언을 마친 루즈벨트가 병든 몸으로 달려왔다.
스탈린이 묻지도 않는데 ‘4대국 신탁통치’를 꺼낸다. 즉각 찬동한 스탈린은 비밀메모에 신탁통치 대신 ‘후견’이라고 적어놓았다. 왜 ‘후견’인가. 간단히 말하면, 신탁통치(Trusteeship)는 ’독립‘을 전제로 일정기간 자치능력을 키워주는 국제관리를 가리킨다. 이에 반해 후견(Protectorate)은 강대국의 보호체제, 즉 독립국 형식은 유지해 주되 정치 외교-군사권 등 실권은 보호국이 쥐는 것이다. 바로 스탈린의 전매특허 소련공산당이 지배하는 국제공산주의 식민체제, 그때 폴란등 등 동유럽에서 써먹고 있는 ’위성국만들기 각본‘이 ’후견‘이다.

\◆스탈린의 시나리오! ‘극동 위성국 만들기’ 한달 작업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한반도에 미국은 주둔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스탈린은 쾌재를 불렀다. 당시엔 38선이 없던 때, 한반도를 통째로 삼킬 기회가 온 것이었다.
포츠담회담 열흘뒤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자 스탈린은 즉각 대일전에 참전, 앞장에서 본대로 한반도로 쇄도할 때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자 잠시 밀당 끝에 수락한다. 이미 장악한 북한이 있고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대 해도 루즈벨트 말대로 곧 철수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부터 위성국만들기 작전에 총력을 투입한 것이었다.
1) ‘가짜 김일성’ 만들기--스탈린의 ‘면접‘
앞에서 소개한 ‘화물정권’을 구성하는 주요 메뉴는 물론 ‘위성국 지도자’이다. 그동안 스탈린은 폴란드의 루불린(Lublin)처럼 소련에서 양성한 해당국 공산당원 가운데서 유능한 인물을 직접 면접하여 점찍곤 했다. 문제는 그에 해당하는 북한출신이 없다는 현실이다. 그리하여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제88여단의 한국인부대에서 일일히 물색하였다.
스탈린이 직접 설립한 제88여단은 대일 참전용 게릴라부대로 한국인 104명의 빨치산을 포함시켰는데 그 부대지휘관이 중국공산군 빨치산 출신 김성주(金聖柱) 대위였다.
”묵한에 설치할 인민위원회의 지도자를 찾아라“ 요컨대 위성국 두목깜 찾기, 크렘린 궁의 지시에 따라 정치장교들의 작업이 진행될 때 책임자는 역시 스탈린의 심복 베리야(Lavrentiy Beriay Beria,1899~1953)였고, 북한공산화 총책 시티코프(Terenty Shtykov, 1907~1964)는 극동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Alexander M. Vasilevsky)를 지휘하여 김성주를 점찍은 인물 검색 보고서를 보냈는데, 여기서 김성주를 ‘김일성(金日成)’으로 개명하면 더욱 효과만점이라는 의견까지 스탈린에게 올렸다. 한국에 잘 알려진 전설적인 항일투시의 이름을 빌어 카리스마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한자이름은 여러 가지 한자로 보도되곤 하였다. ‘김일성’이 된 김성주는 하바로프스크에서 군용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한다. 스탈린 면접은 필수코스였다. (바실레프스키의 부관 코바렌코 증언,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2008).
▶스탈린 면접◀
으리으리한 크렘린 궁에 들어선 김성주는 정치장교의 사전교육을 통해 무조건 ‘충성’을 외치기로 했다. 스탈린은 무려 4시간이나 면접을 했는데, ‘스탈린주의’ 강의도 했다. 러시아어를 전혀 못하고 중국말은 잘하는 김성주에게 스탈린의 설교가 일일이 통역되고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김성주는 말끝마다 충성을 외친다. 스탈린은 ‘공산주의는 모르지만 말 잘 듣게 생긴’ 소련군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야. 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협력하여 과업을 수행하라“
스탈린의 ‘합격’과 함께 가짜 김일성은 이제 북한 공산화의 앞잡이로 다시 태어났다.
2) 미군 진주 1주일후 소련군 ”38선 전면봉쇄“
미군의 발걸음은 느려도 너무 느리다. 하지 중장은 8월19일 맥아더로부터 남한주둔군사령관에 임명된다. 소련 스탈린이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를 극동군 제25군 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독일항복 직후 대일전 참전 2개월전 6월이었다.
9월1일에야 미공군 B24 폭격기 한 대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하지사령관의 전단을 뿌리고 갔다. ”주민의 무분별한 행동은 절대 금지“라는 포고문이다. 맥아더의 ‘일반명령1호’ 역시 군사용 명령이다. 이때 비로소 ‘38선 군사분할‘이 일반에 공표되었던 것이다. 해방을 하수고대하던 한국인들에게 ”해방이 분단?“ 치명적인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소련 사령관의 첫 포고문은 평양에 입성한 8월24일 발표되었는데 심리전의 표본이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조선인민이어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 손안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붉은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모든 조건을 마련했다...“ 일제의 착취에서 해방시켰다는 ‘해방군’의 이미지를 심는 구절로 채워져 있다.
이후 미군측 군사용 포고문들은 북한 소련군정이 비교 살포하여 주민심리를 흔들어 놓는 선전재료가 되었다.
9월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해있는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거행된 후, 하지 사령관은 9월 8일이 되어서야 인천에 상륙한다.
9월6일 조선공산당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공표하고 이틀 지나서였다. 이때까지도 하지사령관에겐 본국에서도 맥아더 장군에게서도 정책적 지침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탈린, 38선 전면봉쇄 명령
미국이 38선을 제안했을 때 소련군은 이미 38선 이남으로 진격중이었다. 육군선발대는 38선의 개성(開城)을 지나 서울로 향하고 있었고, 소련태평양함대 해병 상륙부대 함정들은 동해 중부 해안까지 내려왔다. 이들이 ‘후퇴명령’을 받은 것은 8월20일이다. (김국후, 앞의 책).
이 닷새동안 스탈린은 미국과 ‘남한 공동관리’를 협상했던 것이다. 미국이 거부하자 어쩔수 없이 ‘부산 상륙’을 포기하고 38선을 수락해야 했다. (연재⓷참조).
그 대신 스탈린은 38선을 전면 봉쇄 명령을 내린다. 미군의 인천상륙 1주일 시난 9월15일경이다.
극동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와 제5군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M. Chistiakov) 명령으로 실시된 38선 봉쇄는 한반도 ‘분단고착’의 최초의 조치로 강력한 증거이다. 자유통행, 자유통상 경제교류까지 차단한 민족의 허리 절단, 남과 북의 ‘국경선’으로 만든 스탈린이다.
트루먼이 일본군철수 관리용 ‘한시적 군사분계선’으로 제안했으므로, 일본군이 다 나가버린 지금에 와서 뒤늦게 들어온 미군이 ”38선은 의미가 없어졌다“며 철회를 제안한다든지 간섭하러 들면 ‘북한 후견’ 시나리오는 차질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처칠이 지적한 소련의 ‘철의 장막’이 한반도 허리에 ‘공산화 체제장벽’을 세운 것이었다. 사실은 이것도 한시적이다. 왜냐하면 5년후 스탈린은 38선을 깨고 6.25남침을 강행하지 않았던가.

▲ 평양 공설운동장서 열린 '김일성' 데뷔 무대, 소련군정 간부들이 동석하여 그동안 훈련시킨 김일성의 언동을 주시하고 있다. 33세 김성주는 스탈린의 낙점을 받아 '김일성'으로 둔갑, 공산당정치인 교육을 받았다.
3) 런던회의 ”부산, 진해, 제주도, 인천은 소련에 달라“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비화가 있다. 스탈린의 한반도 장악 야심을 보여주는 국제적 증거물, 신탁통치를 빌미 삼은 노골적인 영토 요구 사건이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사흘 후, 9월 11일 런던에서 미국, 소련, 영국, 중구그, 프랑스 5개국 외상이사회(the Council of Foreignministers)가 열렸다.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의 제의로 구성된 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외상 몰로토프로 하여금 ‘일본의 분할점령 관리’를 다시금 요구하게 하였다. 즉, 미국의 일본열도 독점에 대하여 불만이 강했던 스탈린은 일본열도 분활 점령의 욕심을 다시금 국제회의에 드러낸 것이었다.
몰로토프가 연일 일본점령문제에 관한 토의를 요구했지만 미국이 응할 리 없었다.
이때 내놓은 소련의 문서 ‘일본의 과거 식민지 및 위임통치 지역문제에 관한 노트’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정부의 제안’에 놀랄만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한반도는 미-소 양국군에 의한 점령을 2년쯤 거친 후에 미-영-소-중 4개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해야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핵심은 이것이다. ”신탁통치 협정에 부산, 진해. 인천, 제주도를 소련에게 분할하여 소련군사령부의 통제아래 둔다는 규정을 둬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유는 이 항구들이 소련함대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해야 하며, 만주의 중-소 공동관리로 되어있는 여순(旅順)항에 접근하는 항로를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비밀노트에는 부동항들의 확보와 미국의 태평양지역 전략적 거점을 견제하는 목적이라고 써놓았다. (James Byrnes, Speaking Frankly, FRUS 1945, vol Ⅱ. 전현수 [소련군의 북한진주와 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집)
4개국 신탁통치 이전에 미-소 양국군이 2년쯤 점령해야 한다는 속내는 무엇인가. 북한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위성국기반을 먼저 다져놓겠다는 꼼수였다.
참으로 탐욕스러운 ‘한국땅 사랑’이라 해야 할 것인가. 38선으로 막힌 남한의 항만들을 몽땅 달라는 요구, 토의에 들어가지도 못하자 한달 전에 부산상륙함정을 철수시키듯이 후퇴하고 말았다.
4) ‘김일성 데뷔’ 무대...소련군정이 교육 연출
스탈린의 지령을 실천하는 ‘북한의 왕’ 시티코프는 당중앙(스탈린)이 김일성을 간택하자 평양의 소련군정에 역시 극비 지령을 내린다.
”그를 당분간 공개하지 말고 ‘정치 사상훈련‘을 철저히 시켜라“
▶9월19일 원산항 도착, ”김성주입니다“ 스스로 소개
▶10월14일 평양 운동장, ”김일성입니다“ 소련장교가 소개
추석 전날 9월19일, 고향을 떠난지 20여년 만에 김성주는 고국땅 원산항에 내렸다. 소련군복을 입은 그는 부두에서 안내담당 소련장교 2명에게 ”김성주입니다” 자신을 소개한다.
스탈린이 결재한 이름 ’김일성‘은 당장 써서는 안된다. 소련군정이 마련한 비밀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쳐야만 ’김일성‘으로 공식 데뷔할 수 있기 때문이다.
9월22일 평양으로 이동한 김성주는 일단 평안남도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위장임명‘ 된다. 그의 일정 스케줄 일체는 소련군정이 맡았고 ’비밀교육‘이 시작된 것이었다.
김성주의 ’가정교사‘로 지명된 정치사령부 메클레르(Gregory Mekler) 중좌는 그가 겪은 고초를 1992년 김국후([평양의 소련군정] 저자)의 인터뷰에서 털어놓는다.
“그가 북한지도자로 낙점 받고 입북한 줄은 까맣게 몰랐죠. 그저 시티코프의 지시대로 그를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사상교육과 ’정치훈련‘ 시키는데 집중했지만 애로가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를 모르는 공산군 빨치산, 책은커녕 산적처럼 쏘다닌 김성주를 교육시킨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러시아어를 모르고 중국어만 잘해 중국인 같은 한국인인데 한국말도 천박한 용어뿐인지라 무엇을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막막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켸줄에 따라 조만식, 이주하 등 요인들에 소개하고 지방시찰을 시켰다. 시급한 것은 연설법 훈련이었다고 한다. 시티코프는 날마다 꼼꼼하게 점검하고 코치하였다.
★“가짜다” 군중 소란...빵빵빵 소련군 공포 쏘다
이윽고 ’김일성‘이 대중 앞에 공식 데뷔하는 날, 평양 공설운동장엔 5만여명 군중이 몰렸다.
단상엔 태극기와 연합국기들이 꽂히고 레닌과 스탈린의 대형초상화가 뒷면을 덮은 앞에 조만식이 먼저 열변을 토했다.
이어 김성주가 마이크 앞으로 나아갔다.
소련군정장관 로마넹코(Romanenko)가 “항일투자 김일성’을 소개하며 박수를 유도했다.
그러자 군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젊다...김일성 장군은 백발이 성성해야는데 새파란 30대 같아...진짜야? 가짜야?...가짜다!“
수군거리던 군중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커진다.
”빵 빵 빵“ 당황한 소련군이 공포를 발사했다. 장내가 조용해진 뒤에야 김일성이 연설한다.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준 붉은 군대에 감사한다...자유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대동단결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 조선독립만세. 스탈린 대원수 만세!“
이 연설문은 소련정치장교가 러시아어로 쓰고 고려인이 번역한 것을 김일성이 여러번 연습한 것이었다. 이 날 행사 자체가 발상부터 끝까지 소련군정이 기획, 연출한 작품임은 물론이다. (메클레르 및 레베데프 인터뷰, 김국후, 앞의 책).

- ▲ 전현수의 [쉬띄꼬프 일기] 표지ⓒ국사편찬위.
5) 스탈린의 비밀지령 ”북한 정권 수립하라“
김일성이 난생처음 평양 운동장에서 데뷔 연설을 한 다음날 9월 20일자로 스탈린의 비밀지령이 내려왔다. 시티코프와 치스차코프에게 군사용 암호문으로 송신된 그 유명한 ‘9.20 극비지령’은 아래와 같은 7개항을 전달하고 있다. 시티코프는 이 지령에 따라 북한체제를 설계한다.
■‘9.20지령’ 7개항 원문 번역문
(1) 북조선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정부는 일 본 제국주의와 그 협력자들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의 광범한 연합에 기 초하여 조직되어야 한다. 소비에트(의회) 및 소비에트 정권 기관은 설치하지 말 것.
(2) 새로운 행정기관은 인민위원회를 기초로 조직한다. 이 기관들은 지방행정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소련군 사령부와 긴밀히 협력 활동해야 한다.
(3) 일본 제국주의 협력자, 반동세력, 민족반역자들을 행정과 청치생활에서 제거해야 한다.
(4) 토지문제 해결을 준비한다. 일본인과 친일분자의 토지는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 지개혁을 실시할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북한주민들에게 붉은 군대는 영토 야심이 없고 북 한인들의 모든 사유재산은 소련군사령부가 맡아 보호한다고 설명해야 한다.
(5)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 농민조합, 청년단체 등 민주적 대중조 직을 발전시켜야 한다.
(6) 정치활동은 반일 민주주의 세력의 통일전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도해야한다.
(7) 북한 민간행정의 지시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가 수행해야한다. 소련군사령부(평양)는 위의 과업 수행을 지도하며 민주주의적 정권 수립을 돕는 모든 세력을 지원해야 한다.
(와다 하루키 [분단의 기원] 동경대학, 1990. [레베데프 비망록]과 증언, 김국후, 앞의 책)
★주요 멧시지★
스탈린의 지령 7개항의 함의는 대락 이러하다.
A. 북한에 ‘단독정권’을 조속히 수립하라.
B. 처음부터 소련식 소비에트 정권 말고 북한 인물들을 내세우라.
C. 친일파와 반동=반공세력을 제거하라. 즉, 반소반공세력은 모두 ‘친일파’로 숙청.
D. 토지개혁을 위한 조건, 즉 북한 사유재산을 소련 군정이 국유화하라.
E. 반일세력의 통일전선 강화, 즉 항일투쟁 민족진영 인사들을 포섭하라.
F. 북한 행정 지시는 시티코프(연해주 군사회의)가 전담한다.
스탈린의 지령은 북한단독정권 수립과 그 공산체제 설계 지침이다.
단독정권 수립 지령중 ‘소비에트 기관을 설치말라’는 것은 코민테른 통일전선이후 스탈린이 구사해온 단계적 공산화 방식으로서. 그 시간에도 폴란드, 체코, 항가리 등지에서 완료되었거나 진행 중에 있었다.
이와같은 모든 지령 수행의 총책은 시티코프였다. 실제로 북한 체제구성, 김일성의 정치감독, 토지개혁 총괄, 남북한 정치세력 관리, 남한 제주4.3등 박헌영의 폭둥 지원 감독, 김구 포섭과 남북협상의 기획 연출, 6.25남침준비와 전쟁지휘 등등 한반도 ‘분단-적화통일’의 파괴활동에 총력을 기울인 두목이다.
”북한의 모든 일 가운데 시티코프의 결재 없이 이루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은 북한정권 창출의 실무주역인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 소장의 증언이다.
특히 부르주아 계급을 앞세우려는 시티코프 자신이 조만식(曺晩植,1883~1950)을 포섭하려 집중했다.
김일성을 데리고 다니며 조만식을 여러차례 만나 설득했지만 헛걸음이었다. 대화를 끝내고 나올 때마다 김일성은 ”죽여버리자‘고 우겼다. 결국 조만식은 연금되고 투옥되었다가 6.25전야에 총살당한다. (전현수 [쉬띠꼬프 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과정, 역사비평사,1995. 레베데프 증언, 김국후, 앞의 책)
★’9.20지령문‘ 1993년에야 공개되다.
소련 해체후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이 소련 아닌 러시아를 공식방문한다. 러시아 대통령 옐친(Boris Yeltsin, 1931~2007)은 1992~3년에 공개한 소련의 비밀문서들 가운데 해방후부터 6.25무렵까지 한국관련문서들을 김영삼에게 선물하였다.
스탈린의 ’9.20지령문‘은 가장 늦게 1993년에야 전문이 공개되었다.
그것은 한반도 ’분단의 설계도‘였기에, 그만큼 ’분단의 원흉‘이 되기 싫었던 까닭이다.
한국에 온 극비문서들, 특히 스탈린의 ’9.20지령문’에 대한 연구들이 있지만, 스탈린을 ’분단의 원흉‘으로 단정한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연구자들도 좌익의 세뇌 ’이승만=분단의 원흉‘ 프레임에 중독된 탓일 것이다.

▲ 1946년 2월8일 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발족, 즉 북한단독정권 출범식이 열린 평양 대회장에 걸린 현수막들. '인민위원회는 우리에 정부이다'라는 구호가 눈길을 끈다
6) 해방 6개월 만에 ’단독정권‘ 출범
’북한 총독‘ 시티코프는 당중앙(스탈린)의 명령을 지체없이 밀어붙인다. 일본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가 규정했듯이 ’북한체제설계자‘였던 시티코프는 즉시 공산당체제부터 정비한다.
▶북한공산당 설립=서울의 박헌영을 소련군38선경비사령부로 불러 10월8일 김일성과 담판을 벌이게 하고, 10일 김일성을 ’북조선분국‘을 설립한다. 이날을 지금도 북한로동당 창건일로 기념하는 까닭이다. 그 대회 2주일후 반발하던 박헌영도 굴복, 당의 지위는 서울과 평양이 뒤바뀐다. 다음해 9월 박헌영이 미군의 불법화에 쫓겨 도망칠 때, 관속에 시체로 누워 상여로 산속을 헤매다 38선을 넘은 것도 역시 시티코프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태아적정부(Embryonic Government)’ 5도행정국‘ 설치=시티코프는 소련군정령관 치스차코프와 정치사상 담당 레베데프를 시켜 중앙집권조직을 11월19일 조직완료, 이북5도 행정국이 그것이다. 한달 걸려 조직한 10개국(局)은 곧 출범할 ’단독정권‘의 모태였다.
▶지방 인민위원 선출 ’흑백선거‘=11월부터 북한전역 면-군-시-도 총선거가 실시된다. 민주국가의 자유-비밀투표가 아니다. 단일 후보를 내놓고 검은 투표함과 하얀 투표함에 찬반을 표하는 ‘찬-반투표, 흑백투표’이다. 주민들의 성향을 판별한 ‘공개투표’였던 것이다. 누가 반대할 것인가. 그렇게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단독정권 출범준비가 끝났다.
★스탈린 명령 수행...국유화 토지개혁, 친일파 숙청
마침내 1946년 2월 8일 북한만의 단독정권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한다.
이것은 좌익이 ‘분단의 원흉’이라 낙인찍은 이승만 박사의 ‘정읍선언’보다 1년 4개월 앞선 것이다.
즉, 스탈린이 직접 설계한 위성국 ‘단독정권’의 수립! 8.15해방 6개월만에, 스탈린 지령 6개월만에 한반도 북쪽에 소련 위성국이 나타났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낙점 6개월만에 그의 하수인이 되었다. (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엔 김일성의 외당숙할아버지 강양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임시’는 미국이 무서워 단독정권을 숨기려는 스탈린의 위장 악세서리였다. 이 두 글자는 1948년 유엔이 남한의 단독선거를 실시하려 하자 스탈린이 직접 삭제해버린다. 이런 때를 기다렸던 스탈린, 더 이상 ‘임시’로 포장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단독정권은 시티코프의 지휘에 따라 스탈린의 지령을 본격 실시하다.▶토지개혁 ▶일본인과 지주들의 토지 몰수 ▶모든 사유재산 국유화 ▶친일파-반동분자 숙청 등이 그것이다.
‘토지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 소유권은 없고 농사만 짓는 정부의 농노(農奴)가 되었고, 농산물은 공산당 소유로 ‘배급’만 먹고 살아야 했다.
무엇이든 명령에 반발하면 ‘반동-친일파’로 처형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스탈린은 단독정권 출범 직전 미-소 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을 개최한다. 서울 덕수궁에서 1월16일부터 2월6일까지 열린 회담에서 의제 조정부터 결렬된다. 그러자 스탈린은 3월20일부터 본회담을 갖자고 제의, 미국이 동의한다. 이제부터 스탈린은 ‘남한을 흡수하는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왜 남한흡수협상인가? 다음 장에서 보자. <계속>⊙
⑦ 돌아온 ‘우리대통령’
03.21 귀국 제1성 “장애물 소련 제거, 북한국토 찾자” 이승만, "삼천만이 죽어도 미소협상 반대”...스탈린, “이승만 제외” 지령


“충역(忠逆)이 혼합되어 역전되었구나”
해방 두달 지나서야 10월16일 돌아온 이승만 박사의 귀국 소감이다.
망명 33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에 와보니, 충신(애국자)보다 역적(공산당)의 숫자가 더 많아 뒤집혀있다는 말이다. 왜 안그렇겠는가. 북한은 소련이 점령하고 ‘단독정권’ 수립을 준비중이고 남한은 박헌영의 공산당이 다 차지하였다.
이게 바로 이승만이 폭로한 바 “미국이 소련에게 한반도를 팔아먹은 얄타밀약”의 현실화 그것이다. 미국무부가 자신의 귀국을 두 달이나 방해한 이유가 이것이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다” 이를 악문 이승만 박사는 이런 상황에 대비했던 카드를 꺼낸다.
첫 날부터 숙소인 조선호텔에는 연일 수많은 인사들이 밀려들었다.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도쿄까지 가서 이승만을 맞았고,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하라”는 맥아더극동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옛조선왕실의 궁터 소공동 궁전(일본이 철도호텔 건축)을 이승만 숙소로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신문사설까지 존댓말...‘이승만 신드롬’
일반 국민들과 언론들이 날마다 펼치는 뜨거운 환영의 열풍은 가히 ‘이승만 신드롬(syndrome)’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
미군 진주이후 국민들은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왜 안 데려 오느냐”고 성화였다. 지방순시하던 아놀드 군정장관이 놀라 이를 하지에 알리고, 하지는 맥아더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재촉은 받은 미합동참모본부는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을 찾아서 서울로 보내라“ 지시하고, 전쟁부 소속 군사정보부가 이승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비밀리에 ‘동양노인’을 찾아낸 결과, 이승만은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그의 전용기 바탄(Bataan)까지 내주었다. 고대하던 ‘우리 대통령’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이때는 일제가 폐간시킨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 민족지들이 복간되기 전, 박헌영의 [해방일보]를 포함한 좌경화된 신문들까지 이승만에 대해 엄숙한 추앙과 깍듯한 존칭을 사용했다.
‘건국의 아버지’, ‘우리최고의 지도자’, ‘혁명전선의 거인’ 등을 대서특필하고 사설 용어도 ‘행차하시다’ ‘말씀하시다’ 등을 써서 마치 고종황제 기사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국민 전체가 독립운동의 신화적 존재 이승만 박사에 대한 존경심과 기대감이 높았음을 말해준다.

▲ 연설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외치는 이승만 박사.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이승만 키워드!
◆ “북한의 장애물 제거, 실지(失地)회복 시급하다”
이것이었다. 돌아온 ‘건국의 아버지’가 연일 토해내는 말들의 핵심이 이 두 가지였다.
“한덩어리로 뭉치자. 뭉치고 뭉치는 걸 보여주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우리 삼천리 강토환원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물이 제거돼야한다“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 38선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강제로 주어진 것이다. 38선을 없애고 남북이 합치는 완전한 독립, ‘통일독립’이 아니고는 독립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귀국 이튿날부터 이어지는 내외기자회견과, 조선호텔로 몰려드는 인사들에게 이승만 박사는 줄기차게 주장한다. 3천만의 ‘단결’과 난립한 정당들의 ‘합동’과 ‘3천리 국토회복’과 ‘장애물 제거’를 암송하듯 되풀이 강조하였다.
‘장애물’이란? 두말할 것 없이 북한을 점령한 소련공산당-소련군을 말한다.
23세 청년시절 러시아와 싸워 두 번이나 러시아의 야욕을 무산시켰던 투쟁경력을 가진 이승만,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레닌의 국제공산주의와 싸우며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을 써서 당시 최초의 반공투쟁을 벌인 이승만은 북한을 장악한 소련을 반드시 추방하여 통일독립을 이루어야할 절체절명의 사명 앞에 서있다. 40년 독립운동의 대단원 아닌가.
한마디로 ‘국민단결>소련 추방>남북통일독립‘이란 건국구상을 성공시키자는 절규였다.
★”시급한 것은 삼천리 강산을 되찾는 것...나에게 계획이 있다“
10월19일 몰려온 인사들 80여명에게 의미심장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우리의 가장 급한 문제는 삼천리 강산을 찾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나를 따르겠다면 끝까지 싸움으로 생을 마치겠소.
민생을 위하여 죽기를 배우자. 북쪽 문제가 캄캄하다.
당장 뛰어가서 보고싶다. 우리가 나아갈 길이 있음을 확신한다.
나에게 계획이 있다. 힘을 모아서 국가를 위하여 바치자.
그리하여 이 국가의 목숨을 살리자“ ([매일신보] 1945년 10월20일자)
★”남북의 우리강토 회복, 장애물은 제거돼야 한다“
10월22일 오후2시30분 조선호텔에서 재경신문기자단과 정식회견을 가진 이승만은 38선문제 해결의 질문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의지를 피력한다.
”...오늘의 현상에 미추어 국제적 우의도 좋으나, 우리나라의 생명주권도 국제적 우의보다 선결해야할 문제라는 것을 나는 주장하고 싶다. 38선 이북에 대한 비난과 여러 가지 사실을 다 듣고 있으므로 종합적인 해결책도 강구할 것이나, 계속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남북의 우리 강토를 회복해야 하므로, 북쪽에서 어떤 복리를 그곳 주민에 주든지, 남방 미군이 어떤 복리를 주든지, 이러한 분할적 복리로써 만족할 일이 아니므로, 우선 우리 강토의 회복, 강토환원을 위해 장애물은 속히 제거해야 할 것이다...“ ([자유신문] ‘한덩어리로 뭉쳐라’ 1945년 10월23일자)
▶‘정읍선언’ 8개월전의 ‘소련추방’ 통일 캠페인
여기서 여러분도 ‘정읍선언’의 구절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1946년 6월3일, 정읍선언 요지. 밑줄 필자)
귀국즉시부터 외친 ‘통일독립’ 실현을 일단 미-소공동위 협상에 맡겨봤지만 불가능해졌으니, 우리에게 가능한 남방에서 임시정부 같은 조직을 만들어 우리 힘으로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북한의소련을 추방, 통일독립을 이루자”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귀국순간부터 다음해 나온 정읍선언까지 이승만의 주장은 일관된 것이었다.
단, 공산당이 ‘분단의 원흉’이라 트집잡은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조직’이란 구절, 이것이 어찌 ‘분단’을 말하는가? 38선이북을 소련이 봉쇄하고 이승만 등 민족세력의 통일정부 합류를 한사코 거부하기 때문에, 뒤에서 보듯이, 미소공위가 결렬되었던 것이다.
그 결렬의 책임까지 이승만에게 뒤집어 씌우라는 ‘스탈린의 지령’도 공개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이승만의 일관된 주장은 어디까지나 ‘남북통일 독립’이 지상목표었다는 사실이다. 그 통일독립 추진기구가 바로 ‘독립촉성회’(약칭 독촉)이다.
◆ 귀국 1주일만에 통일독립 추진 기구 ‘독촉’ 결성
10월23일 오후 2시, 조선호텔에 한민당(9월16일창당),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 등 50여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200여명이 모였다. 이승만이 평생 꿈꾸던 ‘독립국가 건설’ 준비 모임이다. 해방후 민족세력의 국내조직으론 처음, 감격에 찬 이승만이 개회사를 토로한다.
”지금 이 자리는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다. 세계 각국이 이 한곳을 지금 주목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억지로 뭉치라고 강요하지도 아니하고 또 뭉쳐만들려 하지도 아니한다.
여러분들이 뭉치고 뭉쳐서 조선사람들에게 실감을 가르쳐라....우리가 죽으려면 죽고 살려면 살 길이 이 자리에 있다.
깊이 생각하라. 나의 묻고자 하는 것은, 듣고자 하는 것은 어느 단체의 편협된 의견이 아니라 3천만 민족이 원하는 바를 대표하는 부르짖음이다.
타국사람이 조선을 알려고 할 때 곧 물어볼 만한 책임있는 기관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방을 나갈 때에는 기쁨의 만세를 부르고 나가도록 약속하자“
이날 대표자 합동희의가 결정되고 모든 것은 이승만 회장에게 일임하여 만장일치가 되었다.
”독립촉성(促成)중앙협의회“ 출범 만세!” 이승만 말대로 전원 기립 만세를 불렀다.
이날까지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가 김구의 임시정부요인들이 귀국할때까지 대행기관이라 하였으나, 다음해 정읍선언 직후 ‘민족통일총본부’로 개편하면서 명실공히 ‘통일독립’ 추진기구, 즉 과도적 임시정부 역할을 맡게 된다.
★‘연합국에 보내는 결의문’을 직접작성 “38선 폐지” 요구
11월2일 천도교 강당에서 제2차 독촉중협 회의를 열고, 이승만은 직접 작성한 ‘4대연합국과 아메리카 민중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국내외에 선포한다.
요지는 *38선 철폐와 신탁통치 반대 *한국은 독립국 권리를 요구함 *미국은 신탁통치로 또 한번 한민족을 배신하지 말라 *일본의 선전에 속아 한국을 적대국처럼 대우하지 말라 *완전독립 이외의 모든 정책에 반대함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결의함 등이다.

▲ 대일전 참전 전부터 '한반도 위성국화' 시나리오를 짜두었던 스탈린, 그 시나리오를 철저히 실행한 '북한 총독' 시티코프(오른쪽).

◆“공산당은 저의 조국 소련으로 가라”
박헌영의 ‘인민공화국’과의 결별은 이승만의 귀국 두 달후 12월이다.
돈암장(敦岩莊)으로 옮긴후 박헌영이 찾아왔다. 이승만에게 ‘주석’ 수락여부를 묻고 담판하려는 박헌영은 부르주아민주공화국이란 과도적 위장정부 구성를 위해 이승만이 절대 필요하다.
박헌영은 ‘친일파를 모두 처벌하고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속아 넘어갈 이승만인가. “인민공화국을 버리고 대동단결하자”고 설득하는 이승만은 친일파문제 해결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물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일소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외국인(미군정)의 손으로 처벌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강토를 찾아낸 후에 우리 손으로 재판해야 할 줄 믿는다“
여기서도 이승만은 ‘우리 강토를 찾은 후’라며 북한을 점령한 소련을 추방하고 나서 북한 친일파까지 다 함께 심판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북한공산당이 실은 친일파나 같은 매국노이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알아들었는지는 밝혀진바 없다.
이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이승만의 주석추대를 포기한 박헌영은 그후부터 ‘친일파 이승만’을 규탄한다.
박헌영의 포섭을 포기한 이승만은 ‘독촉중협’ 39명중 박헌영 등 12명이나 포함시켰던 좌익들의 명단을 회의를 통해 모두 삭제하였고, 결국 공산당과 완전히 손을 끊게 된다. 매주 수요일 정기방송하는 라디오연설에서 12월19일 저녁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을 명백히 천명한 것이다.
▶귀국 이후 부정기적으로 시작한 이승만의 라디오 연설은 해방후 방황하는 국민들에게 ‘구원의 소리’처럼 설득력이 컸다. 이승만 특유의 유머 섞인 비유법과 역사해설을 곁들인 방송은 자상한 국제정세 해설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 정신교육에 좋은 강의가 되었다. 그러자 ‘원군’을 얻은 듯 미군정은 이승만의 방송을 매주 수요일로 정례화 시켰고, 그 ‘수요방송’을 통하여 이승만은 국내외 정치적 리더십을 쌓아갔다.
12월19일 김구의 임정귀국 환영식이 열린 날도 수요일, 그날 저녁 7시30분 방송 제목이 바로 유명한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서울운동장서 10여만 군중들에게 소련과 국내공산당에 대한 경고를 날리며 “나를 따르라”고 외쳤던 이승만이 저녁 방송에서 국내외에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의 ‘수요방송’ 원고를 사전에 검열해왔는데, 공산당에 대한 자극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이날 이승만은 연설 앞부분만 제출하였고 정작 중요한 본론 부분은 방송 중에 비서 윤석오가 몰래 전해주었다고 한다. (윤석오의 증언; 경무대4계, [남기고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사,1977),
이날 방송 내용은 미국의 대한정책은 물론, 이승만의 건국전쟁에 획기적인 것이었으므로 연설전문을 들어보자.

▲ 위기일수록 미소로 설득하는 미승만 박사.

■“한국은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세계에 선언합니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1945년 12월19일 오후7시30분 중앙방송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요, 공산당 극열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천년의 역사를 가졌으나 우리의 잘못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지금 간신히 살아나서 발을 땅에 다시 디디고 일어서려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밖에서 들어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병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먹는 음식과 행하는 동작을 다 극히 초심해서 어린 아기처럼 간호해야 할 것이고 건강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
◉폴란드 등 동유럽의 공산화 과정, 중국의 내전 실상을 보라
공산당 극열분자들의 행동을 보시오.
동서 각국에서 수용되는 것만 볼지라도 폴란드 극열분자는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폴란드 독립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 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영-미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가 급기야 노국(露國:러시아)이 독일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폴란드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차탁(藉托)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군기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 되고 충돌이 쉬지 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구라파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소련)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뭔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서 저항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인연하여 분열분쟁이 아니 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으로 보아도 장개석총통의 애국심과 용감한 군략으로 전국민중을 합동해서 왜적에 항전하여 실낱같이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여 놓았더니 연맹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거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여 중앙정부와 장총통을 악선전하여 그 세력을 뺏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일으켜 관병과 접전하여 동족상쟁으로 피를 흘리게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않기에 이르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지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여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어찌 차마 이 같은 파괴적 행동을 취하리오.
◉‘공화국’ ‘민주주의’로 거짓말...조국이라는 소련에 가서 충성하라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 명이 못 되었나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 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대다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들인 줄 우리는 의심 없이 믿는 바입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경을 없이 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사익과 영광을 위하여 부언위설(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여 군기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 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열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노국(러시아)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의 것을 빼앗아다가 저의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을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울 결심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남녀들은 어디서든지 각기 소재지에서 합동해서 무슨 명사로든지 애국주의를 조직하고 분열을 일삼는 자들과 싸워야 됩니다.
◉가족과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는 부모형제라도 거부해야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팔아먹으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 국족과 우리 가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그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실을 알려 주시오. 내용을 모르고 풍성학루(風聲鶴涙)로 따라 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우리는 과거를 탕척(蕩滌)하고 함께 나아갈 것이오, 종시 고치지 않고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親父兄)이나 친자질(親子姪)이라도 거절시켜서 즉 원수로 대우해야 할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는 애증과 친소(親疎)를 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미국인들이 독립을 위해 싸울 적에 그 부형은 영국에 충성하여 독립을 반대하는 고로 자식들은 독립을 위하여 부자형제간에 싸워가지고 오늘날 누리는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건설자와 파괴자는 합동 불가능...지금 해결 못하면 동족상잔 불가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와는 합동이 못되는 법입니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심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갖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됩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 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 중이니 지금이라도 그 중 극열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서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 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 무궁한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서울신문] 1945. 12. 21)

▲ 1945년 3월20일 미-소 공동위원회가 처음 개최된 덕수궁, 태극기를 중심으로 양국 국기가 계양되어있다.

◆ ”강대국은 우리강토 흥정 말라“ 미-소 공동위 반대
이때 소련 모스크바에서는 이른바 ‘3상회희’가 열리고 있었다. 12월16일부터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상,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이 모여 전후처리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는데,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추측들이 국내에도 외신을 인용 보도되어 어수선하다.
★이승만, ”3천만이 싸우다 죽을 지언정 신탁통치 단호히 배격“
이승만은 26일 ‘수요 방송’을 통하여 ”신탁통치를 단호히 배격한다면서 남한 전역에 ‘독촉’ 지부 조직을 독려하였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결의를 다졌다. 모스크바의 ‘신탁 결정’ 전야에 이승만은 ‘신탁 결사반대’를 다시 한번 국내외에 확인시킨 것이었다.
또한 “독촉의 통합이 성숙할 때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극단적 공산주의자만 없었다면 민족통합은 벌써 성공하였을 것“이라며 ”우리가 지금 방해자들의 파괴행위를 방관한다면 나중에는 아무리 싸워도 효과가 없다“고 경고한다. 신탁관리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주저하지 말고 ‘독촉’ 지부결성을 서둘자고 말했다. 독촉의 조직투쟁으로 신탁통치를 막자는 주장이다. 이승만은 독립촉성회를 새로운 정부 수립의 추진체로 활용하기로 하지 사령관과도 합의하였음을 시사하면서 ”(신탁통치용)과도정부 수립까지 한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 필요한데 그것이 독촉중앙협의회“라며 승인받지 못한 중국내 임시정부를 엄호하고 그 기능을 대행한다고 설득했다.

▲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경무국장 김구(왼쪽), 국무총리 이동휘.

◆김구, 뜻밖의 방송 ”소련 ‘국부’ 레닌 선생이 임정 도왔다“
이튿날 27일 아침부터 외신들이 ‘신탁통치’에 관한 급전(急電) 보도를 쏟아냈다.
한민당, 국민당 등 우파정당들은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하였는데 특히 한민당은 ‘신탁통치 반대’ 결의문을 채택하고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 발전을 저해하며, 동아시아인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으로서 3천만 최후까지 싸울 국민운동을 주창하였다.([조선일보]1945.12.28.)
조선공산당 대변인 정태식도 ”우리는 절대 반대한다. 5년은커녕 5개월 신탁통치라도 반대“라고 말했다.([조선인민보]1945.12.29.)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총무 이여성은 ”신탁통치안은 그 어느 나라가 하든 원치 않는다. 소련은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나라로서 조선에 들어 올 때 모든 것은 조선인의 것이라 하여 감사했는데 이제 와서 신탁통치를 하겠다하니 못 믿겠다. 오보가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신조선보]1945.12.27.)
★김구, 귀국후 처음 ‘레닌 선생’ 칭송과 ‘진보적 민주주의’ 꺼내다
이와 같이 좌우 정파들이 ‘반탁’을 들고 나온 판에 김구가 이상한 연설을 하였다.
27일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방송으로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연설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귀국후 이승만을 만나면서나 기자회견 때도 발언에 신중하던 김구와는 전혀 다른 적극적이며 좌파적인 주장이었다.
김구는 ”그동안 임시정부가 중국, 소련, 미국 등으로부터 사실상 ‘승인’과 같은 지원을 받았다“면서 그 지원의 보기로서 임정초기의 ‘레닌 자금’을 인용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부(國父) 레닌 선생은 제일 먼저 임시정부와 손을 잡고 거액의 차관을 주었다.“ 김구가 토해낸 ‘소련 국부 레닌 선생’이란 호칭은 그동안 한번도 못 듣던 말이었다.이어서 김구는 공산당의 슬로건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방송한다.
즉 ”우리는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장한다“고 했다. ”그러나 모 일계급의 독재는 반대한다“고 공산독재를 견제하는 말을 덧붙였다. ([동아일보]1945.12.30.)
지난 주 이승만의 ‘강렬한 반공’ 연설에 비판의 소리가 나오자 김구가 그 여파에 올라타는 ‘임정 선전‘의 다목적 포석이란 해석들이 나왔다. 그 연설문은 한독당 선전부장이자 김구의 연설과 편지작성 전담자 엄항섭(嚴恒燮, 1898~1962)이 쓴 것이었다고 한다.
★이동휘-김립, ”임정을 고려혁명위원회로 바꾸자”
서울 장안이 ’반탁‘으로 술렁이는 날,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대신에 ’소비에트 국부 레닌에게 감사‘한 연설에서 김구가 언급한 ’레닌의 지원‘ 정체는 무엇인가.
상하이 임정 초기 레닌이 대한민국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1873~1935)에게 제공한 200만 루블, 실은 코민테른 국제공산주의 확산을 위한 공작금이었다. 즉, 이동휘에게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벌이라‘는 돈인데 다름 아닌 임정의 공산화를 위한 지령이었다. 그 거액으로 이동휘가 임정 인사들과 상하이 한인 청년들을 고려공산당원으로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 돈 안먹은 사람 드물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김구는 거절하였다고 [백범일지]에 썼다.
레닌의 자금을 알게 된 임정은 ”독립운동 자금이니 내 놓으라“고 다그치지만, 이동휘는 ”임시정부와 무관하다“며 거부하고 ”이승만과 일 못하겠다“며 상하이를 떠나버렸다.
당시 대통령 경호담당 경무국장 김구는 이동휘의 측근 김립(金立,1880~1922)을 ’독립자금 횡령범‘으로 지목, 부하들을 시켜 1922년 2월 대낮에 노상에서 암살한 바 있다.
레닌 공작금으로 고려공산당을 조직-운영한 이동휘와 김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공산체제 ’고려혁명위원회‘로 바꾸자고 제안했다가 이승만 임정대통령의 반대로 좌절된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 조직은 3년후 포섭된 임정요인들을 앞세워 이승만을 ’탄핵‘이란 명목으로 파면하고, 헌법을 소련식 헌법으로 개헌하였으며 1927년 김구를 ’주석‘으로 앉혔던 것이다.
김구 자신이 내막을 잘 아는 이 사건을 왜 해방 후 새삼 소환한 것일까. 레닌을 칭송하며, 좌익의 상징 ’진보적 민주주의‘까지 내세운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대표단(오른쪽)과 소련 대표단이 마주 앉아있는 모습.

◆ 스탈린이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든 까닭은?
남다른 통찰력의 ’귀신‘ 이승만의 예상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에서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경고했던 이승만이 이번엔 ’미소공동위‘가 무엇을 위한 기구인지 한눈에 갈파했던 것이다.그것은 ”살인강도에게 안방문을 열어주는 것“--왜냐하면, 스탈린은 루즈벨트가 원하는 신탁통치를 지렛대 삼아, 이번에야말로 잃었던 한반도를 되찾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2월28일 모스크바 3국(이-소-영) 외상회의가 발표한 ’한국관련 결정서‘를 보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요지◀
1) 조선을 독립국으로 재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 창설.
2) 조선임시정부의 형성을 위해, 남조선 미군사령부 대표들과 북조선 소련군사령부 대표들로 공동위원회를 조직함.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들, 사회단체들과 반드시 협의할 것.
3) 위원회는 신탁통치 방책을 작성하며, 조선임시정부와 협희후 5년이내 기한으로 미-소-영-중 4개국의 신탁통치 협정을 위해 공동심의 한다.
4) 남북조선과 관련된 긴급문제들을 심의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2주내 소집한다.
★스탈린의 ’작품‘ 결정서를 미국이 덥썩 물다
아 결정서는 소련이 작성하였고 미국은 큰 이의없이 수락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만들어낸 결정서엔 4개국 신탁통치는 뒷전이고 소련과 미국의 2국협의가 초점이 되었다. 이는 얄타회담때 스탈린이 루즈벨트에게 이미 암시한 음모였다. “신탁통치 기간은 짧을수록 좋고 중국은 한반도의 오랜 종주국이니 거북하고 영국은 처칠이 화낼 테니 넣어주자”고 했던 스탈린의 속내 그대로 3상회의에 ’결정서를 제출, 콩과시켰던 것이다.
스탈린을 지배한 가장 결정적 요소는 필자가 앞서 지적했듯이 ’한반도 미군 주둔문제‘였다.
요컨대 ”미국은 한반도에 미군을 계속 주둔할 계획이 없다—루즈벨트로부터 이 한마디를 확인했던 순간, 스탈린은 극동아시아에 최초의 위성국 설계를 시작했음을 알아야한다.
즉, 현재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지만 머지않아 철수할 것이기에 ’미-소 공동위‘에서 미국만 잘 구슬러서 철군하고나면 한반도는 소련땅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2)항의 “민주주의 정당들과 반드시 협의할 것” 이것이 스탈린이 장치한 함정이었다.
’민주주의 정당‘이란 다름 아닌 ’공산주의 정당‘을 가리킨다. 소련식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의 귀에는 다 같은 민주주의로 들릴 것, 이것이 국제공산화의 ’용어전술’임을 미국은 모른다. 위의 방송연설에서 보듯이 이승만이 가르쳐줘도 그때 미국은 마이동풍이었다.
★스탈린, 이승만 배제 등 ’사전 지령‘★
이와같은 스탈린의 음모를 한눈에 보여주는 비밀문서가 여러개 공개되어 있다.
*미소공위 예비회담시 지령 *본회담 지령 *1차실패후 지령*2차회담용 지령 등 장황하고 치밀한 지침들이 되풀이 강조되는데, 이 가운데 몇 개만 뽑아보자..
ⓛ수석대표 시티코프, 본회담은 3월18일 개최할 것.
②남북조선의 협의대상 민주정당-사회단체의 명단 작성. 양측 인원은 균등할 것.
⓷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협의대상에서 끝까지 제외할 것...
⓸새로 수립할 임시정부는 미소공동위원회의 감독을 받아야한다.
⑤남조선에서 미군정과 반동세력의 각종 탄압 형태를 대대적으로 폭로할 것.
⑥북조선 소비에트화를 위해 소련 고문관 300명을 파견, 경제지원 강화...등.
결국, 명목만의 임시정부를 세워놓고 미국이 손 떼면 소련 차지라는 계산이다.
예비회담부터 금방 불 붙은 것은 ⓷항, ’우익정당 제외‘문제였음은 당연하다.
’신탁통치 반대 세력은 제외‘--즉, 공산당 등 좌익세력으로만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것, 뒤늦게 눈치 챈 미국은 아차! 하지만 너무 늦었다.
소련이 제외대상 첫 손가락에 꼽은 인물이 “가장 반동적인 이승만“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듬해 3월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깨어지는 소리를 들어볼 시간이다. <계속>⊙
⑧ 정읍선언의 국제정치학
03.29 한국통일문제를 세계의 Agenda로! 이승만의 1인전쟁: 정읍선언이 유엔결의안 되다! 소련은 ‘미군철수’ 요구

▲ 1945년 11월23일 귀국한 김구 주석을 하지 사령관에게 소개한 이승만 박사(왼쪽).

이때 김구를 설득하려다가 암살된 사람이 송진우(宋鎭禹,1890~1945)였다.
격분한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새해 첫날 1웗1일 김구를 호출했다. 반도호텔 집무실에 나타난 김구에게 “당장 과격시위 중지하라”며 “만약 나를 기만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호통을 쳤다. 권총을 빼들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김구는 ’자살하겠다‘고 응수했다 한다.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정용욱편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1)], 다락방,1994)
미국받은 임정이 “신탁통치 받을 바에야 우리 임시정부가 집권하면 된다”는 단순논리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제2의 독립운동'이라 했다.
이때 김구를 설득하려다가 암살된 사람이 송진우(宋鎭禹,1890~1945)였다.
격분한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새해 첫날 1웗1일 김구를 호출했다. 반도호텔 집무실에 나타난 김구에게 “당장 과격시위 중지하라”며 “만약 나를 기만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호통을 쳤다. 권총을 빼들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김구는 ’자살하겠다‘고 응수했다 한다.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정용욱편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1)], 다락방,1994)
미국의 입장에서 이것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이 ’서약‘을 파기한 예상 밖의 쿠데타였던 것이다. 하지는 사령관 목이 달아난 듯 길길이 분통을 터트렸다.
김구의 입장에서는 “내가 돌아왔으므로 정부가 돌아온 것”이라고 귀국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임시정부의 집권은 당연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애국봉기’였을 것이다.
포고문 ’국자(國字) 제1호-2호‘는 전국경찰력을 임시정부 지휘하에 두며, 반탁투쟁은 최후의 승리까지 계속한다고 했다. 즉, 반탁투쟁을 아예 집권투쟁으로 전환시켰다는 말이다. 이른바 ’임정봉대론((臨政奉戴論)‘의 실천이다. 그러나 세계 최강국들이 그토록 만만한 존재들인가.
다시 말하면, 김구는 자신을 임시정부와 동일시하였고, 미국측에 써준 서약서따위 귀국용일뿐, “미군을 내보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평자들은 말한다.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안이할뿐더러 38선분단상황을 극복할 전략적 사고력이 빈곤했다는 지적이다. 이와같은 김구의 ’집권집착 임정봉대론‘이 머지않아 ’스탈린의 먹이’가 될 줄을 김구는 예상이나 했을까.
◆정읍선언 이전에 ’돈암장선언‘ 있었다
김구의 무모한 ’집권투쟁‘을 말렸던 이승만은 비명횡사한 송진우가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도 가장 말이 통하는 국내 우익지도자였는데...애통한 이승만은 추모의 한시(漢詩)를 지어 슬픔을 달랜다.
송진우는 그날 밤 김구의 경교장(京橋莊)에 가서 미군정의 방침을 전해주고 궐기하려는 임정요인들을 설득하던 중, 매국노라 매도당하자 새벽에 귀가하여 잠자리에 들었을 무렵 사랑채에 뛰어든 괴한들의 총탄세례를 받았다.
이승만은 김구가 암살배후라는 소문을 못 들은체 시국대책 마련에 몰입한다. 반탁투쟁과 함께 다가오는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협상에 대한 전략이 시급하다.
★이승만, 미소공위 무력화 전략 마련...“한미일체 행동통일”
뭐든지 앞서가는 국제전략가 이승만 박사는 이미 미국대표단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두었다.
결코 믿어선 안되는 미소공위를 무력화시켜야 하므로, 이승만은 새해초 기자회견부터 ’독촉‘의 위상부터 굳게 세우는 일에서 시작한다. 독촉이 통일정부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나는 내외국인에 대하여 대한민족의 통일을 실지로나 형식으로나 완성되었음을 선언한다”
남북민족세력을 규합한 독촉의 존재 자체로서 통일이 되었음을 인식하라는 주장이다.
“한족정신(韓族精神)을 가진 한인들은 모두가 38선도 남북도 불문하고 정신적으로도 합동이고 사실적으로도 합동이다. 독촉중앙협이 전민족이 집중한 민족 대표기관이니 민족자주독립에 장애물은 다 용납지 못한다. 소련은 우리정부조직에 간여할 어떤 이유도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6.1.16.).
이렇게 미소공위에 소련참여부터 원천 부정한 이승만은 정치적 협상을 앞에 두고 난감해 하는 고립무원의 ’순수한 군인‘ 하지 사령관을 돕기위해 발벗고 나섰다.
“나에게 양책(良策)이 있다” 이렇게 격려한 이승만은 그동안 갈고 닦은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의 병법을 구사한다. 미국독립운동시 설립헸단 ’비상국민회의‘를 본떠 독촉과 한몸인 독촉비상국민회를 조직한 뒤, 하지와 공론하여 국회와 같은 국민조직 ’민주의원(民主議院)을 발족시킨다. 명실공히 남한의 정부격 대표기관이다.
이것은 이승만의 독촉-민주의원이 미군정과 혼연일체가 되어, 미소공위에서 벌어질게 뻔한 소련의 공산화협상 공작을 제압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지는 이승만이 둘도 없는 정치적 의지처였다.
★“외부에 누설 말라. 자주정부 세워 북쪽을 청소해야겠다”
그날도 하지와 만나고 돈암장에 온 1월21일, 이승만은 독촉 전체회의에서 미군정의 은밀한 방침을 전해주면서 자신의 굳은 결의를 토로하였다.
“이 말은 밖에 누설되어선 안된다. 군정측의 말은 소련측과 회의가 결렬되어선 안된다 하니....원컨대 여러분은 일어나서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조직한 후에 북쪽을 청소하지 않으면 안되겠다....우리의 통일은 우리가 직접 대북관계를 해결하겠다고 (내가) 했다.” ([비상국민대회대표회 회의록] 1946.1.21.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13] 건국기문서)
이날 돈암장의 비밀발언은 이승만의 준비된 결의와 ‘양책’의 정체를 보여준다. 즉, 미소공위가 결렬될 경우의 대비책으로 마련한 히든카드--‘우리 손으로 자주정부를 세워 북한의 소련과 공산당을 청소한다’는 그것은, 다시 말하면 6월에 나올 정읍선언의 내용이 이미 1월 이전에 구상이 끝나 돈암장에서 먼저 밝혔다는 이야기다. 이 구상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 미소공위 미국수석대표 하지 장군과 소련수석대표 시티코프(오른쪽).
◆미소공동위 개막부터 파열음...소련 ’친소정부‘ 고집
북한에 단독정권을 출범시켜 우위(優位)를 확보해놓은 스탈린은 시티코프 수석대표에게 미소공위에서 자신의 전략을 관철시키도록 명령한다. 사실 시티코프는 수석대표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스탈린 자신이 만든 규정대로라면 소련측 수석대표는 북한주둔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맡아야 맞는데 이를 제쳐놓고 연해주 정치 군사회의 책임자 시티코프에게 맡긴 것, 한반도 전체 위성국화 프로젝트는 그 전문가 시티코프에게 준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을 지적할 줄도 몰랐던 미국측 수석대표 하지였던 것이다.
★“개막연설이 폐막연설 같다” 미국, 소련 방침에 충격
3월20일 오후 2시,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1차 회의가 열렸다.
시티코프는 개막연설에서 “북한에 자치정부 기구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고 밝히고 ”앞으로 구성될 남북한임시정부가 소련을 공격하는 기지가 되어선 안된다“고 못박았다. 즉, 이승만 같은 반소세력의 참여를 반대한다는 예고였다.
이에 미군정측 대표 아널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은 ”마치 폐막연설처럼 들렸다“고 했다. 하지도 ”그가 한국의 소비에트화-식민지화를 추구하는 야심을 드러냈다“고 개탄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신탁통치용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대상을 두고 양국이 처음부터 맞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련은 “반탁세력 전면 배제, 그리고 “2대1 배분원칙’을 밀어붙였다.
남한측 협의대상 정당들의 배분률을 ‘좌익정당 2, 우익정당 1’로 하자는 것이다.
시티코프는 그 원칙에 따라 미리 확정한 각료명단까지 제시하며 강변한다.
이렇게 되면, 북한공산당 1, 남한 2대1, 합치면 전체 임시정부 각료는 공산측 3대 남한측 1이 되는 것, 한마디로 신탁통치도 ‘공산정부’이 맡아야 한다는 억설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동유럽 점령국가들을 차례로 위성국 만들고 있는 그 방식 그대로였다.
순진하게도 정치적자유와 언론자유만 강조하는 미국측은 반격 카드도 본국훈령도 없다.
생각다 못해 하지는 이승만을 동원한다. 그것이 이승만의 3남순행(三南巡行)이다.
당시 미군정은 주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해왔는데 조사마다 대통령후보 1위는 이승만이 압도적이었다.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를 보여주면 소련이 ‘이승만 배제’에서 양보를 얻어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전략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린애 장난 같았다.
★3남순행... ”이 참에 전국민에게 반공계몽 하자”
이승만은 그러나 생각이 다르다. 백악관도 미국무부도 기대할 수 없게 된 미소협상이지만 무엇이든지 주어진 기회마다 자기목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인이 이승만이다. 프란체스카도 동행한 그는 이번 기회에 남로당 인민위원회와 전평(全評:전국노동조합평의회), 전농(全農:농민노조), 부녀동맹과 청년동맹 등에 좌경화된 국민들을 일깨우자고 나섰다.
지방 144개군에 독촉국민회가 조직되어있고 회원수도 106만 8천명이 넘는다. 이들이 주관한 연설회는 가는 곳마다 운집한 군중은 수만명이 보통이었다.
“국부(國父) 만세! 우리 대통령 오셨네!”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이승만은 “반탁-찬탁을 떠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친다. 대구 10만, 경주 6만, 부산 공설운동장엔 개설이래 최대 20만이 넘는 인파가 나왔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보도)
이승만은 공산당 비판 강연을 이어갔다.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는 짓은 인민의 복리가 아니라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네들은 자본가 타도를 외치고 있지만, 자본과 노동과 토지가 발을 맞추지 않으면 우리나라 상업도 공업도 발전 못하고 민생도 발전할 수 없다“
동래에선 암살기도범이 잡히고 경호경찰은 갈수록 추가되어 수천명이 이동해야 했다.
마산, 남해, 하동, 진주를 거치는데 인근 섬지방에서도 많은 배들이 동원되곤 한다. 전남 순천, 벌교, 보성, 장흥, 영암, 영산포에서 연달아 연설한 이승만은 목포에서 3만여명 군중집회가 끝났을 때 ’예상했던 뉴스‘에 접한다.
’미소 공동위원회 무기 연기‘ 5월6일의 일이다.
광주 서정(西町) 초등학교 교정밖까지 꽉찬 5만여명 앞에서 이승만은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인들이 해결할 줄 알았더니 못하고, 미국대표들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이다...결국은 소련도 이롭지 못하고 불행으로 생각한다....우리는 전국민의 결심으로 공산당의 제안을 접수치 않기로 했고 우리 국토를 한치도 주지 않을 것이니 소련은 각성하라“
광주에서 급거 비행기편으로 상경한 이승만은 하지와 맥아더의 최측근 굿펠로(Preston Goodfellow) 등과 미소공위 무기연기 대책에 대하여 요담을 이어갔다.

- ▲ 삼남지방 순회연설회에 모인 군중들에게 연설하고 떠나는 이승만 박사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앞줄 가운데 한복차림).ⓒ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정읍발언‘...독자적 남북통일독립 선언
한달 가까이 급변한 정국 대책을 구상한 이승만 박사는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난다.
왜 새로운 길인가? 일단 미소공위에 맡겨보았던 남북통일독립 협상이 무기연기됨으로써 기대를 완전히 접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기대‘한 적 없다. 혹시나 하지도 않았다. 소련도 미국도 예상한 대로였을 뿐이다.
당초 기대하지 않았기에 진작부터 반대하지 않았던가.
역설적으로 소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소련의 음모를 일부나마 그 정체를 알았고, 역시나 무대책 미국에 맡겨선 안된
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일이다.
6월2일 아침 8시30분발 호남선 남행열차,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비서 이기붕(李起鵬)만 데리고 정읍(井邑)에서 내렸다. 중단했던 ’남선순행(南鮮巡行=3남순헹)‘ 일정에 따른 것이다.
이튿날 3일 오전 독촉국민회가 마련한 환영연설회, 국민앞에선 처음 공개하는 말들이 터져나온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야,
삼팔(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야 지금까지 노력해왔으나
이번에는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통일기관을 귀경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야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이것이 유명한 ’정읍발언’, 아니 ‘정읍선언’이다. 처음 보도한 [합동통신]이 요약한 기사 전문이다.
한마디로 줄이면 미국과 소련에 맡기지 말고 ”우리 힘으로 자주통일하자“는 것이다.
여기 [이승만 독토린] 연재에서 줄곧 보아왔듯이, 귀국순간부터 시작한 이승만의 통일독립 주장에서 크게 달라진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남방만이라도”와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한다는 구절 정도이다.
당시 소련이 북한 단독정권을 위장했지만 이런저런 보도로 다 알려진 사실, 남한에서도 “우리도 정부 빨리 세워야 북한에 먹히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던 때었다.
다음날 전주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이 묻자 이승만도 대수롭지 않게 응답한다.
“내 생각을 말한 것이지만, 민중들이 남방만이라도 무슨 조직이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서울신문] 1946년6월6일자).
▶특히 그해 3월부터 북한인민위원회가 진행한 ‘토지개혁’ 소식에 남한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언론들이 보도하고 탈북 피난민들이 전하는 소식에 정치권은 물론, 민중들이 더욱 남한도 정부를 세워 토지개혁등 민생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읍선언이 나오자 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정당 단체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남조선 단독정권 음모” “반동거두” “파쇼” “분단의 원흉”까지 시위는 물론, 좌익신문들이 온갖 중상모략적인 보도를 쏟아내었다. 북한단독정권 수립의 책임을 이승만에게 덮어씌우는 시티코프의 작전이다. 여기에 김구의 한독당이 ’단독정권 반대‘ 성명을 내어 가세한 것이 눈길을 끈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이승만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공산당은 자주통일기관(독촉)을 탈퇴하여 소련연방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기때문”이라며 자주통일정권 수립은 국민이 바란다“고 했다.
▶이승만은 전주 공설운동장에서도 정읍선언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하였고, 이리, 군산을 거쳐 중남북 공주, 청주, 진천, 경기도 장호원까지 강행군을 펼치며 ”소련 추방, 자주통일독립“을 목이 쉬도록 부르짖었다.
이렇게 끝낸 3남순행은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 큰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정읍선언 직후 6월7~9일 실시한 조사결과, 정읍발언 긍정평가 58%, 부정평가 28%였고,”이승만이 한국의 최고지도자냐“ 질문엔 ”그렇다“ 69%가 나왔다.
이 숫자는 그러나 이승만의 정읍선언이 미국정책과 배치되기 때문에 하지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70%이상도 ’과반수‘가 넘지않도록 줄인 결과였다고 한다.(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츨핀사. 2013)

- ▲ 이승만 박사의 돈암장을 방문, 대화를 나누는 김구(오른쪽).
◆‘민족통일 총본부’ 설치...”내가 ‘죽자’ 하면 죽을 각오 있소?“
1946년 6월29일, 이승만은 마침내 ‘민족통일총본부’(약칭 민통총본부) 결성을 발표한다.
‘정읍 선언’에서 밝혔던 ‘통일을 위한 임시정부나 조직’을 만들기 위한 전국조직체 통일추진단체이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6월10~11일 정동교회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2차전국대표대회를 열어 1,165명의 지방대표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는 절차를 거쳤다.
이날 한 시간도 넘는 이승만의 연설은 총재추대 문제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여러분의 원(願)이라면 내가 피하지도 않겠고, 통일의 긴요함을 느끼는 만치, 내가 마정방종(摩頂放踵:온몸을 바쳐 남을 위해 희생함)할지라도 모든 단체와 협의해서 통일을 이루도록 힘써 볼 터이지만, 나는 명의만 가지고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내가 허락할 수 없다. 여러분이 내 지휘를 받아서 내가 ‘죽자’하면 다 같이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같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소?“
그러자 장내는 1천여명이 ”예“로 답하는 열광적 박수가 폭발한다.
”그런 사람은 어디 손을 들어 보시오“
참석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보였다.
”한 손을 드는 것을 보니 절반쯤 각오가 드는 모양이야.“
이 말에 웃음이 터지고 대표들은 두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옳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겠단 말이지“
장내는 박수와 환호소리에 터져나갈 듯,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통일을 속히 이루려면 통괄하는 총본부를 설치, 전민족이 동일한 보조를 취해야만 할 터이지, 이를 위하야 사지(死地)라도 피하지 않고 복종할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고자 하오“
참석자들은 다시 일제히 두 손을 들어 마구 흔들었다.
이승만은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단호히 척결할 맹약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소련과 공산당이다.
대회는 ‘3천만의 총의로 통일정권 수립을 촉진할 것을 결의함’ 등 3개항의 결의문과 미소공위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대한독립촉성국민대표대회 회의록]1946.6.11,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14] 연세대한국학연구소,1998)
이어 일주일후 종로YMCA 강당에서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 ”나는 여자의 힘이 남자의 힘보다 크다고 생각한다“며 이승만은 남녀단합과 여성 평등과 민주주의 강의를 이어갔다. 그리고 3남순회 때 못 간 개성을 방문하여 반공연설회를 열었다.
이렇게 전국 순방을 끝낸 이승만은 전국민의 총의를 모아 남북통일정부 추진을 위하여 6월29일 민통총본부를 창설하고 ‘민족통일선언’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민통총본부는 이승만이 귀국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에 이어 만든 네 번째 민족통합 조직체이다. 이번엔 공산당 등 좌익이 일체 배제된 것이 특징이다.
◆미국 ”이승만-김구를 은퇴시켜라“
제1차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된 뒤 5월 24일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William R.Langdon)이 번스(James F.Byrnes)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미국의 남한 점령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에서 실시했던 것과 거의 다름없는 통일전선 정책을 강요하려 시도해왔다는 것이 이제 명백해졌다“고 말하고, ”만약 그런 정책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소련의 한반도 지배를 촉진시킬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6일 미국무부와 전쟁부-해군부가 확정하여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대한정책(Policy for Korea)’은 시티코프의 요구(반탁세력 배제)에 순응하는 것이어서 충격적이다.
즉, 그 새로운 정책은 미군정에 한국인 참여를 확대하라는 소위 '한국인화(Koreanization)정책'으로서, 핵심은 미국정책에 배치되는 반탁인물은 참여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일 한국의 정치적 논쟁에서 태풍의 눈이 되어 온 몇몇 인사들이 일시적으로 정치무대에서 은퇴한다면 미국과 소련 당국사이의 합의도 크게 촉진될 것”이라며 “그들은 일본의 항복이후 귀국한 망명그룹”이라고 콕 집어 지시하였다. “그들이 참여하면 미국목표 달성에 큰 방해”라고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자발적’으로 은퇴시키라는 명령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미국이 소련의 장단에 맞춰 하루 속히 신탁통치용 정부를 만들어주고 남한에서 “명예롭게 철군“하겠다는 트루먼 정부방침을 확인해준 것이다.
대다수가 자유민인 한국인의 운명따위 안중에도 없었던가. 일찌기 이승만이 지적한 바, 미국이 또 한번 한반도를 소련에 팔아넘기는 배신 행위에 다름아니다.
‘명에 살고 명에 죽는’ 군사령관 하지, 그날부터 이승만은 그에게 ‘미국의 장애물’이 된다.
그가 이승만과 ‘앙숙’이 된 것은 인간적으로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 수행탓이었다.
직무완수를 위해 하지는 이승만의 모든 언동을 감시하고 통신우편을 도청-검열하며, 숙소 돈암장에서 쫓아내었고. 허름한 빈집에 든 72세 노인을 사실상 연금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이 틈을 노린 남로당원 경찰관 5명이 경비를 핑계로 암살을 기도하다 잡히기도 하였다. (윤석오 ‘경무대 사계’ [남기고싶은 이야기들])
◆미국의 좌우합작...이승만 ‘유엔 외교’ 결심
”이승만-김구를 은퇴시키라“는 미국무부가 주도한 남한의 좌우합작(左右合作)은 하지 군정사령관이 실무를 맡았다. 여러 가지 수배를 끝낸 하지의 고문 버치(Leonard M. Bertsch) 중위 집에서 6월26일 본격회합을 시작한다. 중도우파 대표로 김규식(金奎植,1881~1950), 중도좌파 대표는 여운형(呂運亨,1886~1947)이다.
이와 병행하여 하지는 좌우합작정부를 뒷받침할 ‘입법의원’을 민선의원 45명, 관선의원 45명으로 정하고 민선의원 선거를 실시한다. 바로 ‘한국인화’ 정책의 실천에 나선 것이다.
결과는 하지의 뜻과 달리 이승만 등 우파가 승리했다. 이에 김규식과 여운형이 반발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후보들을 다시 추천하여 재선거해야한다“고 했다. 이에 하지는 임명의원 45명중 다수를 좌익세력으로 채웠다. 좌우합작 성공을 위해서다.
여기에 이승만이 격분한다. ”좌익 입법의원 설립을 포기하라“
하지는 ”이승만이 권력잡도록 놔누지 않겠다“고 맞섰다.
결국 이승만은 방미를 결심한다. 김구와 상의하자 김구는 다시 ‘임정봉대론(임정집권론)’을 주장하였다. ”안된다. 멀리 보라“며 이승만은 또 말렸다. 다시 그랬다가는 미군정과 한국인의 대결이 되어, 미국의 힘을 활용하려는 이승만의 용미론(用美) 카드가 날아가기 때문이다.
김구는 ”형님의 방미가 실패하면 그때 혁명을 하겠다“고 고집하였다. 그러면서 ”형님에 대한 저의 충성심은 남산의 소나무가 다 말라죽어도 변치않을 것“이라 했다.
다음해 김구가 변심했을때 이승만이 말한다. ”남산 소나무가 다 죽어버린 모양이야.“
■이승만의 유엔 외교■
‘한국통일독립’을 세계 Agenda로 세우다
이승만은 유엔외교 결심을 굳혔다. 미군정도 무망이고 김구도 김규식도 더 말릴 수 없다.
올리버의 말에 의하면 이승만은 ”북한에서 소련을 몰아낼 방책은 미국이 전생하는 것 뿐이다”라고 증얼거렸지만마음대로 될 일인가.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하], 앞의 책)
미국정부가 끝내 자유통일독립을 외면한다면, 이 문제를 유엔에 호소하는 길만 남았다.
’정읍선언‘에서는 ’남방만의 임시조직을 만들어 국제공론에 호소하자‘고 했지만 미국이 소련협력에 올인하는 마당에 전후순서를 따질 의미도 사라졌다. 가자! 유엔으로!
얄타회담 직후 유엔창설 때부터 유엔에 가입하려고 뛰고 뛰었던 이승만에게 ’유엔 활용‘은 곧’미국 활용‘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문제를 세계무대 중심에 우뚝 세워야만 가능하다.
⚫첫째, 한국통일독립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오, 세계평화를 좌우할 ’세계의 아젠다(Ggenda)’인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를 두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2개 최강국이 대결하는 이것은 새로운 정치전쟁, 곧 전후세계의 이념전쟁이기 때문이다. 이념전쟁이라면 자신있는 이승만이다. 이념전쟁에서 승리한 건국이라야 아무도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다.
⚫둘째, 38선을 그은 미국이 38선 폐지를 요구해도 소련은 38선을 봉쇄한채 거부하고 있다. 트루먼과 스탈린의 마음을 돌려 제압할 힘은? 인류평화와 정의를 내세운 유엔의 도덕적 파워 뿐 아닌가. 이것이 ’국제공론‘에 호소하려는 이승만의 계산이다.
⚫셋째, 만약 유엔이 한국의 통일독립문제를 지지해준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그 자체로서 신생국의 국가정통성과 국민정체성이 국제공인을 받아 확보되기 때문이다.
⚫넷째, 만약, 유엔의 도움으로 통일독립건국이 성공한다면? 이것은 만만세다! 유엔이 세워주는 나라라면 유엔 회원국이 될 것이며 신생국의 안전보장도 그만큼 튼튼해진다.
⚫다섯째, 그러므로 미소공위에서 버려진 통일독립 문제를 이번 유엔총회의 정식의제로 내세워 세계가 토론하고 찬성해 준다면, 우리나라 남북통일 건국은 전세계인의 지지를 받는 일석5조(一石五鳥)! 한민족사에 처음 쓰는 역사적 기념물이다.
◆유엔무대 드라마 5막◆
#서막 / ’미국 가기전에 다 끝내다‘
10월23일 개막한 유엔총회에 임영신을 우선 파견한 이승만은 서울에서 유엔외교를 시작한다.
유엔총회의장 스파크, 유엔사무충장 트리그브 리, 중국대표단장 웰링턴 구, 필리핀대표단장 로물로, 뉴욕교구 스펠만 추기경, 그리고 누구보다 한국에 호의적인 엘리너 루즈벨트(작고한 루즈벨트대통령 부인) 미국대표단장 등에게 ”유엔이 한국정부수립을 지지해주고 승인“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하는 전보를 몇차례 보냈다. 동시에 맥아더와 미정부 관료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유엔 50여개 회원국 대표들을 공략하는 홍보자료를 직접 만들어 임벽직 구미위원부와 임영신에게 계속 전달하였다. 자신의 특기 ’문서외교‘와 ’원격외교‘를 쉬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은 도쿄의 동지 맥아더 극동군사령관과 가장 중요한 유엔전략의 결정적 방안을 논의, 합의, 약속한다. 이 약속이 유엔외교를 성공시켰다. 내용설명은 아래로 미룬다.
#제1막 / ’정읍선언‘을 트루먼에게 제출
유엔총회의 막바지 12월4일 이승만은 군용기에 올라 태평양를 날아간다.
“우리 남북한 통일독립문제를 유엔총회에 제줄하겠다.”
이 출발 담화에 전국이 끓어올랐다.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환송대회, 외교활동비 모금운동까지, 답답하던 한국인들은 마치 이승만이 금방 통일을 가져올 것처럼 들떠있다.
이승만은 도쿄에 기착, 맥아더와 오랜 밀담을 가진다.
위에서 말한 유엔외교 전략, 즉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에 관한 대책의 재확인이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미국정가의 중심에 자리한 칼튼(Cartton) 호텔에 들었다. 한미협회의 미국인 VIP 이사진들과 임영신으로 전략본부를 차리고, 백악관, 국무부, 의회, 유엔을 상대로 캠페인에 돌입한다.
▶미국무부의 태클=이승만을 은튀시키라고 지시했던 미국무부는 그가 다시 워싱천에 나타나 유엔총회에 참석하려하자 성명을 발표한다. “이승만은 유엔총회에 참석할 공식 자격이 없다.” 당연한 반응이다. 독립운동기간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락고 성화를 부리던 ’고집장이 노인‘이 다시 워싱턴에 나타나 이번엔 세우지도 않은 정부를 지원해달라니 발목을 꽉 잡은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을 반드시 만나려던 이승만은 초장부터 국무부 친소파의 태클에 걸려버렸다.
▶영문판 ’정읍선언‘ 배포=이승만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한국문제 해결책(A Solution for Korean Problem)’ 6개항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첫째, 남북한이 총선거를 실시하여 재통일할 때까지 활동할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미소간 합의에 구애됨이 없이 유엔에 이관하여 가입해야 하고, 미-소 양국과 점령해소 협상권을 갖도록 허용할 것, 즉 북한에서 소련을 내보내는 협상을 제시하는 6개항이다. 특히 추가된 것 중에 남북한에서 미소 양국군이 철수한 후에도 미국‘보안군(security troops)’은 남한에 계속 주둔시키라는 조항이 눈길을 끈다. 이 6개항이 다름아닌 ‘정읍선언’을 영문으로 번역하며 구체화한 내용이다.
이 문서는 마셜 국무장관과 패터슨 전쟁부장관에게도 물론 보냈다.
▶미국민 설득 여론전=트루먼 면담이 불가능해지자 이승만은 홍보 페인에 더욱 집중한다. 평생 신문-잡지로 독립운동을 펼친 언론인 이승만은 ’여론전의 달인‘이다. 수십년 엮어놓은 미국 언론계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동지들! 한미협회 이사 윌리암스(INS통신 발행인편집인출신)는 물론, 뉴욕타임즈(NYT)발행인 설즈버거(Arthur Sulzberger)가 실어준 이승만 기사만도 수천건을 헤아린다. 이번에도 “미국의 중립적 태도가 우리문제 해결을 붙잡고있다”며 써준 주장을 보도해 주었다. 이승만은 보란 듯이 여러 신문들과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정부와 미국민들을 설득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 ▲ 라디오 방송연설하는 트루먼 미국대통령.
#제2막 / ’트루먼 독트린‘ 선언
새해 1947년이 밝자 희소식이 나왔다. 맥아더의 웨스트포인트 육사 2년 선배이며 세계2차대전을 함께 치른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이 1월20일 국무장관에 임명된 것, 이승만은 즉시 면담을 요청했다. 마셜은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주선하다가 좌절되어 귀국했다. 미국은 중국에서 실패한 좌우합작을 한국에서도 반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보다 더 큰 뉴스는 3월 12일에 터졌다. 트루먼의 미국회 연설에서였다.
“소련의 위협을 받는 그리스와 터키에 4억달러 경제-군사원조 제공을 승인해달라”
이것이 뒷날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으로 불리는 미국의 첫 반공노선 공표였다.
환호하는 이승만은 이튿날 트루먼에게 “역사적 연설 대환영” 편지를 보낸다.
”공산주의에 대한 각하의 용감한 입장에서 주한미군당국에 좌우합작을 포기하도록 지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은 그리스와 같은 전략적 위치이며 미군지역에 과도적 독립정부를 즉시 수립해야만 한국이 소련 공산주의를 막는 방파제가 될 수 있고 남북한의 통일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뛸 듯이 기쁘다. 3월13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다음날 국무부 회의에서 마셜 장관이 소련의 비협조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유영익, 앞의 책)
그뿐인가. 전쟁부 장관 패티슨(Robert P. Patterson)도 ’한국문제 해결책‘을 읽었다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반응을 보내왔다.
▶NYT에 폭탄성명 발표=“드디어 미국이 변하고 있구나” 흥분한 이승만은 NYT에 ’놀랄만한 성명서‘를 게재한다. 백악관과 미정부를 강타한 폭탄발언이다.
“남한의 독립은 곧 기정사실화 될 것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기본요소들이 사실상 합의되었다. 목적은 소련의 북한철수를 이행시키고 한반도 전체 통일독립이 완성될 때까지 한미양국 협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6개항을 열거하였다. 그것은 ’한국문제 해결책‘의 요약으로서 미정부의 변화에 용기를 얻은 이승만이 자신의 요구를 기정사실화 시키는 작전이었다.
놀란 미국무차관대리 애치슨은 전면부인하는 성명을 내고 이승만의 비행기 예약을 취소시켰다.
이승만은 이번에도 맥아더가 주선해준 군용기로 4월8일 귀국길에 오른다.
먼저 맥아더에게 방미 결과를 전했다.
”이승만의 첫 마디는 맥아더가 약속을 이행해준데 대한 감사였을 것이다“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그렇다. 그것은 방미전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신신당부한 일, 즉 ’한국문제 유엔이관’ 방안을 적극 돕겠노라고 다짐한 맥아더가 약속을 잊지 않았으며, 맥아더의 선배 마셜이 국무장관이 되자 다음 날로 이승만의 제안을 전달해 준 결과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또 기도를 올린다.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될 리가 없어...하나님 감사합니다!“
#제3막 / 맥아더 ’유엔 이관‘ 앞장
맥아더가 마셜에게 보낸 문서는 이승만의 제안에 자기의견을 덧붙인 것이었다.
1) 모든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 2) 한국문제 해결방안을 만들기위해 제3의 국가들로 위원회 구성, 3) 모스크바 결정서의 명확한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미-소-영-중 4개국회담 소집., 4) 하나의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전제하에 모든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미-소 최고위급회담 개최 등으로서, ‘한국문제 유엔 이관’에 따른 부수적 보완책까지 건의하고 있다.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마셜 장관에게 올린 메모랜덤, 1947년1월27일. FRUS 1947. vol.Ⅵ).
▶마셜, 조건부 찬성=중국의 국공합작에서 쓴맛을 본 마셜은 한반도 좌우합작에서 또 패배하면 무슨 망신이랴, 맥아더의 제안을 받자 그는 ‘한국문제에 대한 부간특별위원회(The Special
Interdepartmental Commitee on Korea)를 설치, 갖가지 시뮬레이션 분석을 맡긴다.
결론은 소련이 미국의 요구조건들을 거부할 경우 ’유엔이관 긍정검토‘로 정리되었다. 즉, 휴회된 미소공위를 한번 더 열어보고나서 미국이 빠져나올 명분을 소련책임으로 만들자는 뜻이다.
여기에 전쟁부 장관 패터슨이 역시 ‘찬성’을 표하고 나왔다. 4월4일 애치슨 국무차관대리에 보낸 문서에서 “남한의 미군을 조속히 우아하게 철수하는 방법”으로서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거나 독립정부를 수립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전한 것이다.
패터슨은 어디까지나 미군 철수가 우선이다. 2차대전후 미국은 국방예산 축소와 해외주둔병력감축에 매달릴 때였다.
#제4막 /이승만 “미국은 도망치지 말라”
5월21일 재개된 제2차 미소공위에서 소련 시티코프는 뜻밖에도 유연한 자세로 나왔다.
남한의 협의대상 정당 및 사회단체 범위를 대폭 확장하여 “반탁했더라도 일단 가입후 찬성하면 과거불문”이라며 인물선정을 위한 제3분과위까지 신설하고 미국도 동조하였다.
반탁 우익진영에 난리가 났다. 지금 참여하지 않으면 새 정부의 권력 배분때 제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수, 장덕수, 김준연 등 한민당 간부들은 미소공위 적극 참여로 돌아섰다. 이승만이 강력히 ‘보류’를 주장하자, 한민당은 “들어가서 반탁하겠다“며 하지에게 우르르 몰려간다.
”왜놈들 같아도 저렇지는 않을 것을, 쯧쯧“ 극히 실망한 이승만은 이때의 일로 한민당을 불신하고 건국 후에도 입각 요구를 외면하게 되었다고 한다.(윤석오 증언, 앞의 책)
김구의 한독당도 극심한 논란 끝에 파벌별로 각자 참가한다. 당은 두쪼각이 나버렸다.
권력 앞에서 이념노선 따위 안 보이는 한국정치인들, 그때나 지금이나 좌우 모두 마찬가지다.
▶소련 작전에 말린 정치선전=5월에 재개된 미소공위는 무려 4개월이 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소련이 미국을 지치게 하려는 듯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나왔기 때문이다.
⚫방대한 명부작성을 둘러싸고 특정 인물들과 15개 단체를 제외하자고 우긴다.
⚫남한 대표 수백명을 북한에 데려가 북한 대표들과 ‘상견례’ 회의까지 강행.
⚫미군정이 불법화한 공산분자들을 검거하자 소련측이 비난하며 회의 보이콧 위협.
⚫결국 양측의 정치선전장으로 변한 공동위는 원점으로 돌아가 격돌한다.
▶미, 한국문제 유엔에 이관=마침내 미국은 4개국(미-소-영-중)회의에 붙이자고 제안한다. ‘모스크바 결정서는 정치적자유와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소련은 “반탁세력은 민주세력이 아니다”라며 거부하였다.
끝내 소련과의 합의가 불가능함을 확인한 미국은 결단을 내렸다.
미국무부는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이관하겠다고 소련에 통고하였다. 이승만의 제안을 미국이 수락한 순간이다. 유엔 제1정치위원회는 9월21일 한국문제의 의제 채택 여부를 투표에 붙였다. 결과는 12대2 통과, 소련과 폴란드가 반대했다.
▶시티코프, 동시 철군 제안=한국문제가 유엔문제로 바뀌자 다급해진 시티코프가 남북한주둔 양국 군대를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한다. ”만일 미국대표가 1948년까지 미국군대를 완전히 철수시키는데 동의한다면 소련군은 미국과 동시에 조선에서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을 성명한다.“ 시티코프도 회의 실패를 자인한 것이다. 소련은 이 미군철수가 사실상 미소공위 협상의 최종적인 목표였음을 제입으로 실토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 ”소련군만 나가라“=이승만은 즉각 반격한다. ”우리는 그 철군제안의 의도를 잘 안다. 소련이 약소한 우방(한국)을 하등의 이유도 자격도 없이 점유함은 국제적 폭력이다. 일본이 항복하자 참전하였으므로 소련은 한국 해방에 한 치의 기여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철수는 소련군만이 해야 한다.
북한에는 이미 한인정권이 들어서 있다. 미국은 한국분단의 책임을 일부는 져야하므로, 우리가 남북한의 혼란을 정돈할 때까지는 빠져나감이 불가하며 빠져나갈 수도 없다.“
즉, 미국이 38선을 그엇으므로 북한청소가 끝날 때까지 도망치지 말고 책임지라는 말이다.

▲ 이승만의 유엔외교에 앞장서 유엔회원국들을 설득한 임영신과 임병직.
#제5막 / 유엔총회, 한국결의안 통과
해방후 2년 넘게 진흙탕에서 딩굴던 한반도 독립문제 해결의 문이 이제 빼꼼히 열렸다.
스탈린의 음모에 의한 미-소공동위가 완전파탄 나고, 국제전략가 이승만 특유의 용미론이 유엔 외교로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임영신이 기뻐 통곡한 유엔총회부터 가보자.
뉴욕의 가을 끝자락 11월14일 유엔총회는 찬성 43표, 반대 0표, 기권 6표로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 6개항을 채택하였다. 기권국은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1) 선거에 의한 한국대표들이 한국문제를 심의하는데 참여하도록 초청돼야한다. 한국(남북한)대표들이 한국민에 의해 실제로 공정하게 선출되는 것(남북한총선거”를 감시할 수 있는 여행권등 모든 권한을 가지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을 설치한다.
2) 한국국회(남북한통일국회)를 구성하여 한국중앙정부(Naional Government of Korea)를 수립할 대표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늦어도 1948년 3월31일 이전에 실시되어야 한다.
3) 선거후 가능한 빨리 국회를 소집,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위원단에 통보할 것.
4) 중앙정부는 위원단과 협의하여 자체의 국방군을 설립하고 이에 편인되지 않는 군사단체 및 준군사단체를 해산시키며, 남북한의 군사령부와 민간기관으로부터 정부의 기능을 인수하고, 가능한한 빨리, 90일 이내 점령군을 완전히 철수시키도록 점령국과 조정한다.
5) 위원단은 상황의 진전에 따라 유엔총회의 임시위원회(소총회)와 협의할 수 있다.
6) 회원국들은 위원단이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원조와 편의를 제공해야한다.
이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다음의 9개국으로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이들 가운데 인도 대표가 끼어 단장을 맡게 되는 사실이 한국에게 얼마나 역사적 행운이었던지는 뒤에서 잠깐 보기로 하자.
★ 안절부절 이승만, “조기총선” SOS...왜?
이때 이승만 박사는 유엔결의안에 환호하기 보다는 새로운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룬다.
왜? 남한엔 남한을 대변할 대표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워 소련에 대응해야 할텐데, 고군분투한 과도입법의원 총선거 법안이 아직도 온갖 핑계로 묶여있었다. 좌우합작에 올인한 하지는 물론, 중상모략 방해하는 정파들이 문제였다.
이승만은 날이 밝자마자 부르짖는다.
“서북파(평안도)의 지방열(지역감정) 싸움도 음험하고 친미파 이승만은 믿지말라는 측도 왜 그러는지 다 알고있다. 지금 긴급한 것은 유엔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민의에 의해 선출한 국회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유엔에 남한의 민의를 대변할 민선기관이 반드시 필요하다.
북쪽엔 이미 인민위원회라는 정권이 서있고 남방엔 아무것도 없으니, 유엔위원단이 오면 북쪽기관이 한국전체의 대표기관인줄 알고 그쪽에 의존할까 두렵다. 한시 바삐 총선거를 실시하여 우리 국회를 구성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동아일보] 1947년 11월19일자)
▶쉽게 말하자면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다. 천신만고 끝에 ’정읍선언‘을 유엔에 이관시켜서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으나, 남한은 속수무책 아닌가. 동유럽에서처럼 소련이 북쪽정권을 이용하여 유엔위원단을 기만한다면 ’가짜선거‘에 의한 공산화가 닥칠지도 모른다. “폴란드를 보라. 시간이 없다.”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만사에 빈틈없는 이승만이 발을 동동 구를 때,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어디로 방향을 뒤틀어 굴러가고 있는가.
---------------------------
■왜? ‘정읍선언=이승만 독트린‘인가?■
A. 자주독립정신의 일관된 원칙을 관철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했기 때문이다.
B. 국제공론(유엔)을 이용하여 소련을 물리치고 ‘자유민주기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C. 지금도 북한을 청소하고 자주자유통일을 이뤄야하는 국가명제이기 때문이다.
◆정읍선언 요약문답◆
▶문A: 정읍선언을 주창한 이승만은 과연 ‘분단의 원흉’인가?
◈답: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다.
▶문B: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조직하자는 주장이 결국 남한 단독정부로 결착괴었으니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 아닌가.?
◈답: 아니다. 소련이 북한의 총선거를 거부한 탓이므로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다. ▶문C: 소련이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북한에 자유선거를 실시하면 그동안 구축한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스탈 린은 북한 위성국을 결코 내놓을 인간이 아니다.
▶문D: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한대로 미국이 응했다면 통일독립이 되었을 텐데...
◈답: 그것은 동유럽같은 공산국가 통일이다. 통일만 되면 공산체제도 좋다는 것인가. 그런 입 장이라면 우리도 현재 북한같은 수령1인독재 전체주의 체제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계속>⊙
⑨ 스탈린과 김구
04.09 스탈린의 '김구 이용’ 결정적 장면-> 모스크바-평양 '통일극' 동시상영: '분단 말뚝' 박았다...모윤숙은 대한민국 살리다!

▲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남북한정당 연석회의를 개최한 평양 모란봉 극장. 1946년 2월 북한단독정권 출범후 지은 것인데 사진은 현재 모습.
1948년이 밝았다. 그해 8월15일은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이 탄생한 광복절!
청년 이승만이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로부터 천신만고 반세기 독립운동이 맺은 찬란한 열매 대한민국이 우뚝 솟은 그날의 감격! 그날은 그러나 그냥 오지 않았다.
그해 1월부터 스탈린의 ‘건국저지’ 공작이 연쇄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소련이 유엔결의안을 거부하고, 잇따라 김구가 평양으로 달려가 김일성과 미군철수-단정반대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그 사건들은 모두 스탈린의 오래된 ‘한반도 정복 시나리오’에서 나온 것이었다. 1992~3년 공개된 소련 극비문서들이 말한다.
■건국의 해 1948년: 년초부터 ’폭탄‘ 두방
★ 스탈린, 유엔한국위원단 입북(入北)을 거부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위원단)은 한국에 왔다. 열렬한 환영속에 입경한 유엔위원단 의장이자 인도대표 메논(K.P.S.Menon,1898~1982)이 북한 소련군사령관에게 입북을 신청하고 회신을 기다리던 1월21일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라디오 연설을 한다.
“우리 위원단은 38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38선은 마땅히 철거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한국은 단일체이며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될 나라이다.
나는 모든 한국사람이 가슴에 품고있는 염원을 반드시 반영시킬 각오이다.
한국은 군사기지로 존재하지 말고 양대 세력간 황금다리가 되기 바란다.”
이 연설에서 메논이 한국인의 ’통일염원’을 강조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14일 열린 환영대회의 50만인파가 부르짖은 ‘통일’ 함성에 감동하고, 그동안 접촉한 한국지도자들의 간절한 통일요청에 공감한 결과일 것이다. 거기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1910~1990) )이 있었다.
메논의 ‘염원’은 그러나 하루 만에 깨어지고 말았다.
1월22일 소련외상대리 그로미코(Andrei A. Gromyko)가 유엔에 청천벽력감은 통고를 보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조선 입경을 거부함」
바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공식 거부한 것이다.
왜 거부했을까? 스탈린의 사전에 ’자유‘는 없다. 내땅을 누가 건드릴소냐!
★김구의 돌변...“단독정부도 통일정부“라더니 ”단정 반대“
소련의 ‘입북거부’ 나흘후 1월26일 이번엔 김구의 ‘폭탄’이 터진다.
이날 오후 5시 유엔위원단을 만나고 나온 김구는 놀라운 담화를 발표하였다.
“미소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안된다. 양국군이 철퇴한 후에 ‘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28일엔 장문의 ‘의견서’를 유엔위원단에 보냈다.⚫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한다. ⚫남북한인지도자회의 소집을 요구한다. ([서울신문] 1948년1월29일자)
이만하면 폭탄도 핵폭탄이다. 평소의 김구로부터 못 듣던 말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우익진영에 난리가 났다. “백범은 배신자이다”
왜냐하면, 김구는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면서 ‘소련의 거부권’을 다들 걱정하던 무렵에도 다음과 같이 주장했던 사람이다.
“소련의 보이콧으로 북한서 선거를 못하면 남한단독정부처럼 보일 것이지만, 법리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이지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 하는 것은 유감이다”
그리고 이승만과의 견해차를 묻는 기자회견에선 “이승만 박사와 정치노선은 완전일치”라 답하고 며칠후 이를 다시 확인하는 담화도 발표하였었다.
이랬던 김구의 ‘변신’에 당황한 이승만의 ‘독촉’은 정중한 담화로 답한다.
“미소 양군이 먼저 철수하고 남북요인회담를 하자는 주장은 공산당의 선거 지연 주장이므로 우리 부총재 김구선생의 그러한 주장은 믿어지지 않는다. 공산당의 모략 아닌가.”
한민당은 “김구씨의 주장은 유엔총회에서 행한 소련대표의 주장과 꼭 일치된 것으로서 소련은 조선의 김구씨가 자기 대변인으로 생각할 것”이라 규탄한다. “김구씨가 평소 주장하던 민족주의적 입장과 달리 결국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화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표현한 것 아닌가. 우리는 이제부터 김구씨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는 보지 못할 것이고 ‘크레믈린궁의 신자’로 규정할 수 밖에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한민당은 한 달전 총탄에 쓰러진 한민당 중진 장덕수의 ’암살배후‘문제는 재판 중이라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일보]1948년1월30일자)
▶김일성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김구의 ’돌변‘ 이면에는 거물 간첩 성시백(成始伯,1905~1950)의 포섭공작이 결정적이라 한다. ([시티코프 일기], 박병엽 구술, 윤영구-정창현 옮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출판사, 2010). 성시백은 김일성이 직접 남파한 공작원이다.
뿐만 아니라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1894~1947)의 암살사건도 김구의 변신에 한몫 했다. 지난 연말 12월2일 집에서 식사하다가 경찰관 복장의 범인들 총에 쓰러진 장덕수는 김구의 한독당과 통합론이 일어났을 때 ”합당이 아니라 헌당(獻黨)“이라며 한사코 반대하였는데 그 길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송진우에 이어 한민당 수뇌의 잇딴 암살에 ”김구 배후“설이 높아지고 실제로 증거를 확보한 미군정의 재판에 불려다니던 김구였다.
특히 해방후 귀국한 뒤 ’임정봉대(임시정부집권)‘을 내걸었다가 실패한 ’쿠데타‘로 인하여 김구는 미군정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참에 살인교사범으로 몰렸던 것이다.
▶김구의 ’미군철수와 요인회담‘ 요구 출처=김구가 갑자기 내놓은 ’미군철수‘ ’요인회담‘ ‘한인지도자회의’ 용어는 시티코프와 김일성의 제안을 성시백이 전달한 것이었다. 지난해 9월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자 소련대표 시티코프는 미국측에 제안한다.
”남북한 미소양국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고 우리가 해결못한 문제는 남북한 한인들끼리 해결하도록 한인지도자회의를 개최하자“
이것은 물론 클렘린 스탈린의 지령이다. 이를 미국측에 제안한 시티코프는 즉시 김일성에게 지시하고 김일성은 11월부터 올해(1948) 1월까지 암호방송을 반복하였다. ([시티코프 일기])
”김구 김규식 등 우익 거물들을 포섭하여 남북 요인회담에 참가시켜라“ 이 암호지령을 받은 성시백이 임정때의 친분을 무기로 왕년의 ‘2중 스파이’ 실력을 십분 발휘했던 것이다. (박병엽, 앞의 책). 그러니까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전부터 성시백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 여류시인 모윤숙과 유엔한국위원단 의장 메논.
■ 다급한 이승만 ”유엔 결의안을 살리자“
거물간첩 성시백이 분주할 무렵, 이승만은 다급하여 긴급상황 돌파구를 찾는다.
소련의 ‘입북거부’로 유엔위원단이 우왕좌왕, 유엔이 결의해준 남북한총선을 통한 ‘통일독립의 꿈’이 사라지기 직전이다. 이때 유엔위원단이 남북한 총선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가서, 최종결정을 받기로 했으며 의장 메논이 뉴욕으로 내일 떠나기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모윤숙과 메논 ‘달 구경’★
이승만은 시간이 없다.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간청한다.
”이봐, 윤숙이. 밤이 늦었지만 메논씨를 좀 데려와야겠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박사님도...지금 몇신데 여자가 그런 청을 할수 있어요“ 모윤숙은 거절한다.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있나. 전화좀 걸어봐, 제발 마지막 청이야“
이승만의 너무도 간곡한 목소리에 모윤숙이 일어났다.
며칠전 메논과의 대화를 떠올린 모윤숙은 메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도의 타지마할 얘기가 나왔을 때 메논이 달밤에 타지마할을 봐야 그 낭만을 맛볼 수 있다던 말, 모윤숙은 한국의 왕릉들도 달밤에 안내하겠다고 말했었다.
”달빛이 좋은데 금곡릉 산책 어떠세요?“
메논은 뉴욕 다녀와서 가자고 거절했다. 모윤숙은 뉴욕 가시기 전에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졸랐다. 역시나 메논은 차를 몰고 나타났다. 유엔위원단 숙소 국제호텔 바로 옆집이다.
동대문 쪽으로 가다가 ”추운데 인삼차 한잔 마시고 가지요“ 이화장 마당에 차를 세웠을 때 메논은 따라 내리면서 ”소리쳤다. “Naughty girl...“ ‘못된 여자’란다.
그때, 바지 저고리를 입은 이승만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달구경 가자는 바람에 나왔지요. 여기가 목적지 아닙니다“ 겸연쩍게 웃는 메논은 이승만에게 끌려 인삼차 테이블에 앉았다.
그 사이 프란체스카는 모윤숙을 주방으로 끌고 가서 한지(韓紙) 두루마리를 주었다.
그것은 이승만 지지자 60여명의 명단, 붓글씨로 이름을 쓰고 날인한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미 지지자 명단을 메논에게 전달하였는데 비서 이기붕이 깜빡 잊어버려 뒤늦게 비서 윤치영이 급조한 것이었다. 모윤숙은 이화장을 나온 메논에게 두루마리를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승만은 포기한 줄 알았는데...왜 미스 모에게 이런 일을 시킬까요?“
중얼거리는 메논에게 모윤숙은 다짐을 두었다.
”그 모든 이유는 훗날 역사가 의장님께 알려 주겠지요. 만약 의장님이 이 서류로 성공시켜주신다면요...저는 의장님만 믿습니다. 온 국민이 이 서류에 쓰인 대로 이런 지도자를 지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그때 메논이 손을 잡았다. (모윤숙 [회상의 창가에서] 중앙출판공사, 1968).
▶ 메논 연설 ”이승만은 남한에서 마력을 가진 이름이다“
당시 뉴욕 롱아일랜드 레이크 석세스(Lake Success)에 위치한 유엔에서 유엔소총회가 2월19일 열렸다. 개회 벽두에 연단에 오른 메논은 한국문제 전반을 보고하는 연설을 했다.
메논은 소련의 입북거부로 난관에 빠진 위원단이 격론 끝에 유엔이 위임한 사항을 총회에 반납하는 선택은 만장일치로 폐기하였음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 등 3개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현재 남한의 대표적인 우익 3개정당(독촉국민회,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과 좌익4개정당(남조선로동당, 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공화당, 근로인민당)을 설명하고, ”유엔에 의하여 한국의 국민정부로서 승인 될 정부를 즉시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정당은 2개“라고 밝혔다. 그 정당들은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독촉국민회와 김성수가 영도하는 한국민주당이며 ”이들이 남한에서 여론의 대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진다.
”즉시 총선을 주장하는 우익 2개정당은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 재산이란 곧 이승만 박사의 성가이다. 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의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그의 연륜과 학식과 사교적 매력과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과 한국의 자유에 대한 평생의 일관된 옹호로 말미암아 판디트 자와하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이미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박사는 돌연히 38선이 표징하는 좌우대립이 들이닥침으로써 극우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옹호하거나 또는 고려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이다.“ (Yoon Sook Mo, [Speeches of Dr. Menon] Mun Hwa Dang, 1948. [동아일보] 1948년2월22일자).
▶체코 공산화 충격...유엔소총회,남한만의 선거 결의
메논의 연설이 진행될 무렵, 동유럽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과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스탈린이 지시한 쿠데타였다. 연립정부에서 경찰력을 장악한 공산당 내무장관이 우파세력을 숙청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2월21일 정권을 전복시킨 것. 독일 패망후 귀국한 망명정부 인사들이 세운 체코 제3공화국은 사라지고 스탈린이 지도하는 공산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 반공주의자 외무장관 마사리크는 호화로운 궁정에 있는 관저3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마셜 미국무장관은 성명을 발표, ”체코 정권은 인민이 승인한 것이 결코 아니오 ‘공포 정권’“이라 비상을 걸었다.
2월24일 다시 열린 유엔소총회에서 미국 대표가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중앙정부로 승인하자는 결의안을 제시하였고 26일 투표한 표결에서 절대다수 지지로 통과된다. (찬성 31표, 반대2표, 기권 11표). 한국에서는 전국민이 환호하는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이것으로 이승만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을까. 아니다. 첩접산중이다.

▲ 김일성을 만나러 38선을 넘는 김구. 아들 김신(오른쪽), 비서 선우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3. 불타는 제주도...김구는 평양으로 달리다
이제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평양으로 갈 때가 되었다.
제주도가 좌익의 폭력투쟁 불길에 휩싸여있던 4월 19일 김구는 경교장을 나선다.
우익청년단체는 물론, 김구의 한독당 청년들도 ”선생님, 가지 마시오“ 격렬한 반대농성을 했다. 현관이 막히자 김구 일행은 뒷문으로 빠져나와 차를 타고 그날저녁 38선을 넘었다.
김일성은 4월14일로 예정한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란 긴 이름의 민족통일전선 연극의 개막날짜를 김구의 입북이 늦어져 몇 번이나 미루지않으면 안되었다.
▶”김구 빠지면 안된다“=김일성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김구를 꼭 참석시켜야 한다“고 시티코프도 레베데프도 재삼 다짐을 두었다. 스탈린이 만든 ‘민족통일연극 각본’에 주인공이 빠지면 안되기 때문이다.
시티코프는 ‘통일극’ 쇼의 총책임자, 회의 전반에 관한 의제(議題)들과 토론순서, 담당 발표자 와 사회자를 정하는 것은 물론, 김일성의 연설과 성명서 원고, 마지막 남북공동성명서까지 완성해놓았다. 스탈린의 결재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그뿐인가. 김구가 2월10일 발표한 유명한 성명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원고도 직접 챙겼다고 한다. 김구가 딴소리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시티코프 일기] 및 레베데프 비망록))
‘읍고(泣告)’란 눈물로 호소한다는 뜻인데 ”민족통일을 위해 38선을 베개 삼아 죽을 지언정...“ 운운 매우 감상적인 구절들이 심금을 울리는 글이었다. 평양 군정의 선전전문가의 작품이란 설도 있지만, 아무튼 이 심부름도 성시백이 맡았다.
▶남한대표단 실무 총책은 성시백◀
성시백은 신이 났다. 스탈린과 김일성이 명운을 건 남북연석회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의 거물 두 김씨(김구-김규식)을 비롯, 자신이 포섭한 주요인사들이 2백명도 넘게 평양에 간다. 대표단 인물 선발, 회의진행 자료 체크, 교통편, 숙소문제등 모든 실무의 총책임자다. 약 17일동안 김일성의 ‘그림자 실세’로 빠지는 자리가 없었다. 명실공히 ‘남한의 북한대표‘로서 마지막날 대동강 쑥섬 어죽파티까지 요인회담 멤버들의 관리감시 임무를 다하였다.

▲ 평양 남북정당연석회의에서 축사를 읽는 김구(1948.4.22).
◆ 환대받은 김구 ’5분 축사‘...옛 약혼녀가 호텔 수발
1948년 4월은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동시에 ‘한반도 분단고착’ 드라마를 공연한 달이다. 평양에선 김구-김규식-김일성 3김이 주연이고, 클렘린궁에선 스탈린이 감독한다.
‘분단고착’이라 한 것은, 이때 같은 시간대에 모스크바 스탈린이 1년간 ‘임시’로 위장했던 북한임시정권(임시인민의원회)를 아예 세계에 공개할 ‘공식국가‘로 데뷔시킬 준비를 끝내기 때문이다. 그 ’국가데뷔’도 남한 단독정권이 등장한 이후라야 ‘분단 주범’이란 욕을 피할수 있으므로 스탈린은 때를 기다린다.
▶”우리민족끼리 통일문제 해결하겠다“ 던 김구는 열흘동안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회의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민족통일론’을 의제에도 올리지 못했다. 아니, 관심조차 없는 듯, 주석단에 앉았다가 ‘5분 축사’를 한 것이 전부였다.
백범이 17일동안 북한에서 했던 일은 연고지 방문, 평양 냉면, 대동강 어죽 등 토속음식 맛보는 일 등이다. 가장 눈길은 끈 일은 두 가지였는데, 옛 약혼자 안신호의 호텔 수발, 그리고 김일성과의 단독 밀담이다.
▶김구가 평양의 호텔에 들던 날, 뜻밖에도 무척이나 반가운 여인을 만났다.
과연 시티코프의 작전은 치밀했다. 김구가 28세 총각시절 약혼했다가 결혼을 못한 안신호(安信浩, 1884~1963)를 수배하여 72세 김구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여동생 안신호는 목사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진남포에서 살고 있는 64세 과부였다.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상수리 특별호텔에서 김구의 모든 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이 공로로 안신호는 북한의 국회의원까지 출세하게 된다.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 김일성이 김구를 회의장으로 안내하는 모습.
★ 김구-김일성, 2시간 밀담...‘통일 협상’은 없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요인회담“을 방북의 최대 사명처럼 내세웠던 김구가 정작 김일성과 단독회동한 결과를 보면 그의 방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아리송해진다.
왜냐하면 5월3일 장시간 김일성과 만났음에도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보다 ‘통일’과 무관한 것들 뿐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비밀주의야 그렇다 치고 김구는 이 문제에 침묵 일관이다.
레베데프의 기록에는 김구의 발언 요지가 송전(送電)과 송수(送水)문제, 조만식 석방, 그리고 남한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불평 등이었다고 써놓았다.
또한, 김일성이 여러차례 김구의 신변을 염려하자 ”남쪽에서 활동이 힘들면 북에 올테니까 과수원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고싶다“고 김구가 말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김구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상징하는 관인(官印)을 꺼내 놓으며 ”장군님께 바치겠다“고 말한 일이다. 김일성이 사양했다는데 당시 김구의 본심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한다.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출판사, 2010) 외 다수.)
김구가 자신의 한독당 청년들까지 말리는 모든 반대를 뿌리치고 평양행을 강행한 본심이란 무엇일까?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남조선에서 총선거로 세우는 정부나 북조선에서 세우는 정부나 단독정부임에 틀림없다...조상이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민족끼리 마주 앉아서 이야기나 하여보자는 것이 진의이며, 흉금을 털어놓고 담판을 해보아서 안되면 차라리 38선을 베개 삼아 자살이라도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중략),,,지난번 김석황문제에 아무 관계없는 나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것과 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려한 것을 볼 때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자유신문] 1948년2월17일자).
즉,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장덕수 사건으로 인한 위협을 피하고자 한다는 토로였다. 단지 그것만일까.
▶”통일정부 대통령“=이런 이유들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로 ‘성시백의 선물‘을 꼽는 연구자들이 대부분이다.
즉, 임정의 파리 특파원을 지낸 서영해(徐嶺海,1902~?)를 내세워 김구에게 미끼를 던진 성시백이 직접 김구를 찾아가 포섭했다는 것, 성시백의 ’선물‘이란 이것이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세울 통일정부에 주석각하를 대통령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회고록이나 증언에서 나도는 이 말이 당시 김구의 형편상 가장 유력한 정황증거로 내려오고 있다. 더구나 김구자신이 임정봉대론자로서 집권욕이 강했던 점을 스탈린이 콕 찝어 '큰 미끼'로 유혹함으로써 평양행을 성공시켰다는 지적들이다.

▲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남북정당연석회의, 주석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김일성 홍명희 김구가 보인다. 태극기에 놀라지 마시라. 이때 북한은 스탈린의 승인을 얻은 인공기를 만들어 놓았으나 남한흡수를 위한 심리전 차원에서 태극기를 계속 사용한다.
■남북공동성명서 & 김구의 서명■
김일성은 남북회의 벽두에 자칭 4대원칙을 내걸었다.
⚫유엔위원단 추방과 유엔결의 무효화. ⚫단선단정 반대 ⚫미소 양군 동시철퇴 ⚫자주적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이다. 자주적 선거란 유엔감시 총선을 반대하는 말이다.
열흘도 넘는 긴 회의를 마친 남북대표들은 4월30일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서명 발표한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김구의 서명이 매우 놀랍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김규식을 포함한 두 거물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재평가해야 할 정도로 치명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일성의 주도권에 철저히 이용당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명서 4개항을 요지로 살펴보자.
▶성명문 1) 미군 철수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로부터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은 지난해 미소동위가 좌절되자 소련대표 시티코프가 미국측에 제의한 그대로다.
’양국군 동시철수’가 함정이다. 북한과 접경한 소련군 철수와 태평양으로 나가야하는 미군철수를 동열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결정적 불평등이다. 소련은 좁은 두만강만 건너면 북한이기 때문이다.
특히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로부터 ”한반도에 미군 주둔계획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부터 한반도 장악이 쉽게 풀리리라 예상했지만 이승만이란 반소주의자가 큰 장애물이었는데, 그래서 미군정에 반감이 큰 김구를 동원하여 미군철수에 동조시킨 것이었다.
▶성명문 2) ”내전 발생 없다“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는 우리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당시 공산세력을 제외한 우익진영은 거의 내전(內戰)을 염려하던 때이다. 소련이 사주하는 남로당의 무차별 폭력투쟁 때문이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내전 없다’는 장담은 시티코프가 특별히 김일성에게 명령한 조항이었다. ([시티코프 일기])
미국을 안심시켜 미군철수를 촉진시키고 남한을 방심시려는 얄팍한 계산이다. 첩보망을 통해 미국정부의 한반도정책, 즉 미군철수 스케줄을 체크하며 때를 기다리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이미 1946년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북한 무장하라“ 지시하고 측근들에게 북한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모든 원조를 지령하고 있다.
미국철수가 곧 내전의 초대장임을 김구는 몰랐던가. 이승만과 너무 다르다.
이승만은 태평양전쟁 초부터 미국정부에 ”일본이 패전하여 한반도에서 물러가면 소련이 내려온다. 금방 공산화되어 미국이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 누누이 경고하며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했다.
▶성명문 3) ”이승만 배제“ 합의
”외국군 철수후 하기(下記) 제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 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총선거로 민주정부 수립...“
◉여기서 ‘하기’란 아래에 기록된 정당들을 말한다. 즉 ‘공동성명’에 서명한 정당-단체들 만으로 새로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말이다. 거기 서명한 남측 정당-단체들은 56개, 북조선노동당(김일성, 남조선노동당(박헌영), 한국독립당(김구), 민족자주연맹(김규식),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이승만(독립촉성회), 김성수(한국민주당) 등 우익정당을 통일정부에서 배제한 것, 곧 공산당과 협력세력만이 새정부를 만들겠다는 ‘남북좌익동맹체’ 결성이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대표 시티코프가 주장하던 ”반탁세력을 배제한 친소정부 수립” 그 방안 복사판이다. 그때 배제하려던 반탁세력 김구-김규식을 포섭해 합류시킨 점이 다르다. 이것이 평양연석회의 포인트! 드디어 김구-김규식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소련이 주장하던 ‘이승만 배제’를 이제 김구와 김규식이 대리인들로 앞장서서 이승만의 건국을 저지하면 되는 것이다.
▶성명문 4) 남조선 선거 반대
“천만명 이상을 망라한 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들이 남조선 선거를 반대한다...”
◉ 거짓말이다. 5.10총선 결과 전국 투표율은 평균 90%를 넘고 유효투표율이 무려 96.4%였다. 그만큼 독립건국에 목말랐던 총선거, 미국무장관 마셜도 성명을 발표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선거 저지와 방해활동에도 90% 넘는 유권자들이 투표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정부를 구성하려는 결의 보여주는 증거이다.” 스탈린과 김구의 ’단선반대’는 완패다.

▲ 김구와 김규식. 대한민국 건구후 유엔의 국가승인을 막고자 '반대 사절단'을 만들어 김규식을 단장으로 정했다. 그러나 김규식이 변심하여 좌절된다.
★두 김씨 귀환 회견 ”동족상잔 없다“ 장담
5월5일 저녁 서울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이 이튿날 공동명의로 남북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이 성명서 역시 평양에서 미리 작성하여 북측의 ‘검토’을 거친 것이었다. 다음은 발표내용 요지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단독정부)은 절대 수립하지 않는다고 확언하였다.
⚫공동성명서는 외국간섭만 없으면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어떤 정세하에서도 ‘동족상잔은 아니할 것을 확인하였다.
⚫우리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수 있음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는 송전(送電)을 재개하고 송수(送水)도 개방키로 다짐하였다.
⚫조만식 선생의 석방과 남쪽 송환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조선일보] 1948년5월7일자)
이 성명서의 문제점을 간단히 짚어보자. ’북조선당국자‘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정권을 지칭한 것이다.
▶김일성이 단정수립을 않겠다고 확인? 이미 2년전 북한단독정권은 출범했다.
▶남북공동성명서는 시티코프가 스탈린의 결재를 받아 미리 작성해놓은 것이다.
▶”동독상잔 않겠다“는 보장은 시티코프가 특히 강조한 것으로서, 이는 ’무력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스탈린의 특별지시였다.
▶’우리민족끼리‘는 민족통일전선의 전술용어, 협조가 확인된 것은 ”단독정부반대” 한가지 뿐,나머지는 두 김씨의 희망사항들이다.
▶송전-송수 약속은 두 김씨가 장담한지 열흘 만에 물거품이 되었다. 5.10선거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북한이 전기도 끊고 연백저수지 수문도 닫아 버렸던 것이다.
▶조만식 선생은 벌써 ’용도폐기‘ 처분되어 감옥에 버려져 있었다.
특기할 점은 어디에도 두김씨가 그동안 감상적인 미사려구(美辭麗句)로 주장하던 ’민족통일‘ 논의를 했다거나 그 결과가 무엇이라는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이 미리 결재한 남북공동성명서에 두 김씨의 발언을 추가할 틈은 없었던 것이다.한마디로 스탈린의 한반도공산화정책에 서명하고 박수를 쳐주고 왔다고 자백한 셈이었다.
이처럼 평양연석회의가 완전 실패하였음에도 두 김씨는 실패한 줄 몰랐다.
특히 김구는 평양으로 떠나기 전 유엔위원단 의장 메논과 수석대표 리우위완(劉馭萬)의 우려에 대하여 “남북협상이 실패한다면 5.10총선에 반대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계속 총선을 반대하였고 건국 직후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도 막기위해 사절단까지 보내려 했다.

▲ 한복입은 김구와 군복 입은 스탈린.
■스탈린이 김구를 이용하는 결정적 장면■
스탈린이 진작부터 김구를 이용해온 결정적 증거를 보여주는 명장면이 있다.
작년말 스탈린은 김구가 평양회의에 참가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 김구를 시티코프등 하수인들이 평양에서 잘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코치, 감독하는 스탈린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제 남은 것은 ’김일성 꼭두각시 위성국‘을 공식독립시키는 작업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것은 남한이 5.10선거로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에 북한단독정부를 공식화하는 스케줄이다. 미리 공개하면 ’분단책임‘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양에 ’통일극‘ 벌여놓고 ’분단의 쇠말뚝‘ 박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달려가 모란봉 극장에서 “소련의 장단에 맞춰 슬픈 춤사위”(김규식의 표현)을 연기하고 있을 때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선 스탈린이 또 하나의 ’중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 작품은 북한정권의 ’신장개업‘을 위한 북한 헌법의 제정이다.
북한헌법의 제정 과정도 김일성의 김구 포섭과정과 때와 궤를 같이한다.
▶북한 인민회의는 1947년 11월 북한헌법 제정 작업을 정식 개시한다. 그때 김일성은 자신이 남파한 성시백에게 ’김구 포섭‘을 암호방송으로 지령하던 무렵이다.
▶1948년 2월 초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규정한 1936년판 소련 헌법을 모델로 ‘임시헌법’ 초안을 경정, 스탈린의 승인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청지국으로 보낸다.
▶그 2월 초는 서울의 유엔위원단이 남한단독선거안을 유엔소총회에 보내자, 남로당을 중심으로 남한정역에서 대규모 폭동 ‘2.7구국투쟁’을 벌인 날이다. 이것도 시티코프가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거액을 지원한 투쟁임은 물론이다. 이 투쟁에 관계없이 유엔소총회가 ‘남한단선’을 결의하자 ‘3.1투쟁’을 벌였고, 그 투쟁이 곧 ‘제주4.3투쟁’으로 이어진 폭동이다.
▶4월22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북한헌법 초안의 전면 재검토를 끝낸다. 달라진 것은 주권을 규정한 제2조와 신앙의 자유를 규정한 제14조를 수정 정리한 뒤, 당중앙 스탈린에게 올렸다.
▶4월 24일 스탈린은 주권조항을 직접 손질하면서 ‘임시헌법’의 ‘임시’란 말을 삭제하였다. ([시티코프 일기]
이 무렵 평양에선 김구가 “우리는 단결하자”는 5분짜리 축사를 하였고(22일),
23일엔 김원봉의 사회로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내자”는 ‘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캑한다.
24일은 토요일엔 회의진행결과에 만족한 시티코프가 회의를 중단하고 “보고싶은 것을 보여주라, 군대도 보여주라”며 남측대표단에 선심을 썼다.
★야행성 스탈린, 철야회의서 북한정권 공식데뷔 준비완료
4월24일은 북한정권에게 기념할 만한 날이다. 스탈린이 그날 밤 직접 주재한 회의에서 북한정권의 세계무대 공식데뷔 채비를 갖춰준 날이기 때문이다. 헌법에서 국명, 국기, 수도 평양 등이 확정된다.
2년전 1946년 2월 8일 출범했던 ‘임시인민위원회’에서 ‘임시’란 ‘가면’을 떼어버리고 당당히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서, 즉 소련 위성국으로 출발하는 소비에트 체제를 완비하였던 것이다. 일찌기 남로당 박헌영이 갈망했던 일이다.
이것이 사실상 ‘분단의 쇠말뚝’을 박은 결정적 행위였다.
이제 남한의 단독정권 출범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분단책임을 미국와 이승만에게 돌리기 위해서다.
유명한 야행성 습관대로 스탈린은 그날 밤 자정부터 위성국 북조선체제를 전면 검토, 최종 승안을 마친 시각은 아침 8시였다.
나치 독재자 히틀러와 똑 닮은 스탈린의 밤샘회의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체제유지을 위한 ‘공포정치수단’이다. 실제로 1930년대 대숙청기간 밤중에 사라진 심복들이 수두룩하다.
▶남북한 동시총선거 지령=그날 밤 스탈린은 “수도를 평양으로 하되, 한반도전체의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 남북한 동시선거를 해야한다”고 지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생긴 해프닝이 바로 ‘도토리 도장’소동이다.
예컨대 제주4.3사건의 주모자 김달삼이 유령유권자들을 만들기 위해 온갖 가짜도장을 조작하여 숫자를 꿰맞춘 사건이다.
즉, 김일성은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10일 후 1948년 8월 25일 ‘흑백투표’ 선거를 실시, 북한측 대의원(국회의원) 212명을 선출하면서 남한측 대의원 360명이 8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선출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해주에 모인 남측대표자들 1,080명이 가짜 ‘지하선거’로 동원된 거수기들이었다.

▲ 김구의 옛 약혼녀 안시호(왼쪽), 오른쪽은 김구가 청년시절 중노릇하던 영천암을 찾아간 모습(오른쪽). 이 암자는 치하포에서 살인강도후 감옥살이중 탈옥한 김구가 잠시 은신하던 곳이다.
◆ 김구, ‘북한헌법제정’ 견학 기피, 왜?
하늘 아래 비밀은 없다. 러시아가 공개한 소련극비문서들이 증언한다.
북한측은 4월28일 평양연석회의에 참가한 남한측 대표단에게 견학을 안내하였다. 장소는 북한인민회의장, 즉 북한국회 청사에 들어가 방청하라는 것, 200명이 들어갔다.
이 견학 역시 시티코프의 연출, 다름아닌 스탈린이 최종승인한 헌법을 북한이 최종채택하는 ‘헌법제정 현장’을 남측대표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행사’였다.
회의진행을 보던 남한대표단은 북한헌법 축조심의를 보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북한인민의회는 남측에 보란듯이 헌법조항을 일일이 축조심의하는 과정을 거쳐서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심의하되 수정해선 안되는 ‘스탈린 헌법’을 가지고 연극을 상연한 것이다.
김구는 그날 견학에 불참했다. “북한의 분단작업에 협조했다는 비난을 의식해 몸을 피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레베데프가 비망록에 적어놓은 말이다.
이런 북한의 단독정권 헌법제정 현장을 직접 목도하고서도 남한 대표들은 줄지어 서서 북한측이 마련한 ‘단정반대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서울로 귀환했다는 이야기이다.
북한헌법 조목조목은 물론, 스탈린이 직접 수정했다는 인공기 도안에 이르기까지 심의와 채택이 이어질 때마다 북한의원들과 방청객들이 모두 기립하여 열광하였다. 200여명 남한대표단도 열렬히 환호와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이 헌법이 통일헌법“이라고 누군가 말하자 장내가 떠나갈 듯 박수가 쏟아진다. 맞다. 스탈린의 계획이 '조선통일헌법'이다. 미군이 철수하면 남북한 위성국에 적용할 헌법이니까.
그러므로 이 헌법제정 쇼가 바로 스탈린이 꾸민 ‘통일 쇼’의 ‘명장면’이 되었다.
마침내 4월30일 공동성명 발표와 함께 막을 내린 남북연석회의 나날은 크렘린궁의 북한헌법제정과 함께 스탈린이 육로 1만600㎞를 연결 동시상영한 ‘사기 드라마’로 막을 내린다.
스탈린은 보드카의 맛이 좋아졌다. ‘우리민족끼리’ 통일극은 대성공! 김구 덕분이다.

▲ 김일성이 대동강 쑥섬에 세운 '통일선전비, 뒷면에 김구 김규식 등 남측 대표단 요인들의 이름을 새겼다. 회의폐막후 김일성은 남북지도자회의 요인15명을 쑥섬으로 데려가 '공동성명'의 미군철수-남한선거반대 등 합의를 재확인, 축배를 들었다.
◆ 이승만 ’제2의 독립전쟁‘ 출발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결실을 맺었는가?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때 정읍선언에서 말했잖은가, “남한만이라도 과도정부를 세워 북한의 소련을 철퇴시키기 위해 국제공론에 호소하자”고. 2년간 진통 끝에 이제야 겨우 ’과도정부‘세우는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남한단독선거가 ’분단고착‘으로 되지 않을까? 아니다. 유엔 자유세계의 공론의 힘으로 소련을 추방하면 된다. 이승만은 이미 1933년 제네바에서 국제연맹의 공론을 일으켜 일본을 국제연맹으로부터 자진탈퇴하게 만든 경험과 자신감이 있다. 현재 국제정세는 그때보다 몇 배 좋아져서 승산이 눈앞에 보인다. 미국 ’트루먼 독트린‘을 비롯하여 자유세계가 소련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고 뭉치며, 동유럽의 공산화 도미노현상이 유럽의 단결을 강화시키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후에도 이승만은 “과도정부는 독립정부가 아니다. 남북한 통일정부래야 독립이 완성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이제 그 통일독립을 위하여 이승만은 과도정부를 탄생시킬 5.10총선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독립전쟁에 나서는 것이었다.
▶김구가 김일성을 만난 소감
“김일성을 직접 만나 들어보니 소련의 주구(走狗:앞잡이)는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김구가 평양에서 김일성과 단독면담을 마친 뒤 측근들에게 토로한 소감이다.
김구의 측근들을 일찌감치 동지로 만든 성시백이 김일성에게 보낸 보고서에 나오는 말이다. (박병엽, 앞의 책). 살인강도라도 정작 만나보면 착하기만 한 것이 인생지사 아니랴.
▶“스탈린과 담판해야지” 이승만의 한탄
“갈 테면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과 담판을 해야지, 김일성 뒤에 소련이 있는 줄 모르고...
백번 만나봐야 무슨 소용 있다고...북한서 큰 선전꺼리나 될 것을...쯧”
이것은 이승만이 김구의 북한행을 말리다가 안 듣자 한탄한 말이라고 한다. (경무대 비서 윤석오의 증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사, 1977).
답답한 이승만은 이런 담화도 발표했다.
“남북회담은 시간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 것은, 세계에서 소련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소련 목적을 성원하는 이외에 아무 희망도 없는 일을 가지고 국사에 방해만 되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면 우리는 낙심할 뿐이다.,.” ([동아일보] ‘남북협상은 소련목적에 추종’ 1948년4월2일자)
‘대세에 몽매한 지도자’ 이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국민이 풀어야 할 급선무다.
◆그래도 남는 수수께끼: 김구의 북한군무장 목격담
5.10총선이 끝나고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선거를 앞둔 무렵의 일이다.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유엔한국위원단 중국대표 리우위완(劉馭萬) 공사가 경교장 김구를 방문, 한 시간 넘게 문답을 나눴다. 방북한 김구를 설득하여 새 독립정부에 참여시키라는 장제스의 지시를 받아 방문한 것이다. 장제스는 자신이 도와준 김구 임정주석이 대통령 돼야 친중정부가 되기 때문이다. 리우어완은 김구와의 대화내용을 영문으로 요약, 장제스에 보고하고 당시 한국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에게도 전했다. 이화장에 보존된 이 문서를 읽다 보면 다음 대목에서 놀라게 된다.
김구가 대화 도중에 이런 발언을 한다.
“내가 남북한지도자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소....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 남한이 어떤 노력을 다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설만한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은 비난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북한군)을 남진(南進)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충격적 발언이다.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한 다음날 5월1일은 메이데이, 평양역 광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참관한 대표단은 상상이상의 군사페레이드를 보고 크게 놀란다. 시티코프가 ‘군대를 보여주라’고 지시한 이유였을 것이다. 김구의 목격담도 그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말해준다.
스탈린이 1946년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지시하였다. "북한을 무장하라" 그 무장이 2년새 모두를 놀라게 할만큼 진척되고 있는 현장을 김구의 남측대표단이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문제는, 북한군의 ‘남진’까지 언급한 김구가 엄청난 문제에 대하여 그후 공개적으로는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 국민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온갖 고초에도 임시정부를 지켜낸 김구 주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 때문이다. 해방후 김구의 좌회전 '실수‘에 눈감고 무작정 우상화해서도 안될 일이지만, 그의 허점만을 과장하여 독립운동 실적까지 폄하해서도 안될 것이란 주장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세월이 흘러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김구는 북한군의 강력한 무장태세를 보고 와서 무슨 이유로 입을 다물었을까?
정말 소련이 북한군을 남진시켜 남한에도 인민공화국을 세워 북한과 '통일'시켜줄 것으로 예상했던가?
김구 스스로 진술한 그 구절의 구체성에 의문이 짙어진다.
자신의 표현인가? 혹시 평양에서 들은 말은 아닐까? <계속>⊙
2026.04,23
⑩ 자유의 십자가
04.23 이승만 “하나님이 세운 나라” 감사기도..."십자가 지고" 건국혁명 12년...4.19는 ‘국민국가' 탄생이었다!

▲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 일본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 5층 석조건물은 김영삼 정부시 '일제잔재'라며 철거된다. ⓒ연세대이승만연구원
마침내 대한민국 건국의 문이 활짝 열렸다.
스탈린의 찬혹한 폭력공세와 김구의 단선반대를 뚫고 5.10총선거가 보기좋게 성공했다.
민족사 5천년만의 자유선거, 온갖 ‘투표방해’ 살인만행 속에서도 유권자들의 ‘자유독립’ 열망을 꺾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국 투표율 평균 90%이상, 유효투표율은 무려 96.4%였다.
개표 결과가 발표된 5월14일 남한은 암흑천지로 변했다. 김구가 김일성에게 보장받았다던 북한 송전(送電)을 김일이 끊어버린 것, 아니 스탈린이 단행한 ‘분단고착’ 폭거가 또 하나 더 해진 것이었다. 미군정은 인천 앞바다에 발전선(發電船)을 추가배치, 응급대첵을 서둘렀다.

▲ 5천년사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고 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기도로 ‘건국의 문’을 연 제헌국회!
1948년 5월31일 5천년 한민족사상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국회가 열리는 날이다.
중앙청(옛 일본총독부)에 마련된 제헌국회 의사당, 그곳이 일본식민침략의 소굴이라서 독립의 기쁨은 한결 더 컸다. 우리의 피땀으로 쌓아올린 우리 재산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감격의 그날 이른 아침부터 ‘제헌국회 개원 축하’ 행진이 서울 시내를 누비며, 세종로와 국회앞 광장을 가득 채웠다. 의사당엔 선거를 못한 제주도 2명을 제외하고 제헌국회의원 198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역사적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전10시, 최고령자로 임시의장이 된 만73세 이승만 박사가 단상에 오른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 일어서서 성심으로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식순에도 없는 식전(式前)순서, 이승만의 개원제1성(開院第一聲)이 “하나님께 기도“였다.
한민당은 물론 선거를 반대한 한독당 등 좌우파 의원들이 자동적으로 일제히 기립한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지 ‘역사의 명령’인지라 숙연하게 머리를 숙였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세월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제헌국회 속기록](1) 제1차회의 제1호, 1948.5.31)
평양 목사 이윤영(李允榮) 의원의 목소리는 감격의 오열에 떨린다. 간단하게 해달라는 이승만 의장의 부탁도 잊은 듯 눈물 섞인 기도는 길어졌다.
북한에서 해방후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만들었지만 소련의 폭거에 쫓겨 월남한 그는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종로 터줏대감 김성수를 설득 양보받은 결과였다. 이윤영을 ‘정치1번지 종로’에서 당선시킴으로써 국회의 상징적 ‘북한대표’로 세운 것이며, 그를 특별히 지목하여 ‘개원 감사기도’를 시킨 까닭이다. 이승만이 공포한 정읍선언의 과도정부로서 궁극적 목표가 ‘공산당 추방, 남북통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하나님이 세운나라”임을 세계만방에 증거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남북통일도 기독교를 부정하는 ‘악마’ 공산세력을 대한민국 기독교의 힘으로 추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통령 취임사도, 건국 기념사도 “하나님께 맹서”
헌법 제정이 끝나자 7월17일 공포하고, 사흘후 20일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서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24일 취임식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여러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있다가...”
또한 대통령 취임선서도 ”하나님에게 서약“하였으며, 8월15일 정부수립 건국선포식에서 건국비전 실천과 국민에 대한 약속도 하나님에게 맹서하고 있다.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건국선포식.
◆ ‘기독교 입국론’과 대한민국 건국
이승만에게 대한민국 건국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깊은 인식의 격차를 가진다.
그 이유는 다음에서 찾아진다.
⚫24세때 한성감옥에서 회심(回心)한 뒤 ‘기독교 입국론(立國論)’을 부르짖다.
⚫미국 유학 5년간 미국교회와 기독교단체를 순방하며 대한독립 지원을 호소하다.
⚫프린스턴대 박사학위 취득후 귀국, YMCA 학감으로 전국교회에 기독청년회 조직.
⚫망명후 ”하와이8도(島)는 조선8도(道)“라며 ’기독교공화국‘ 비전을 펼치는 건국실습.
⚫3.1운동시 기독교 정신에 따른 ’비폭력 투쟁‘을 관철, 33인중 기독교16명이 주도.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자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국 수립’을 미국에 선언하다.
⚫레닌의 공산화 공작에 맞서 ”공산주의는 인간의 적“임을 갈파한 첫 반공논문 발표.
⚫[JAPAN INSIDE-OUT] 출간, 기독교강대국 미국이 우상숭배 신정(神政)국가 일본을 선제공격하라고 촉구,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예고하여 미국인들이 ‘예언자’로 환호하다.
상세설명을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20대부터 70대까지 무려 반세기동안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벌였던 이승만 박사가 마침내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제 그는 평생 갈고닦은 기독교입국론의 꿈을 실천할 때가 온 것이다.

▲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휘호들. 위로부터 '민위방본=국민이 나라의 근본이다' '통일최선=통일이 가장 먼저다' 오른쪽에 '무적 해병' (왼쪽 아래는 이승만 싸인 '만').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왜?
우리는 흔히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는 말을 인용하곤한다.
비유하자면, 성공확률 5,000대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을 맥아더의 반전전술로 성공시켰듯이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정글 속의 바늘 찾기’였을 때 이승만이 ”끝내 성공시켰던 것이다.
무슨 신통술이라도 부렸는가. 아니다. 평소지론대로 밀고나간 결과이다.
정읍에서 이승만 박사가 쏘아올린 ‘통일독립국가’의 꿈, 정읍선언이 이승만의 과감한 유엔외교를 통하여 유엔결의안으로 변하고, 사상 최초의 유엔감시로 총선을 실시, 5.10총선을 국제적 법통을 확보한 선거로 만들었던 것이다.
신생국이 탄생부터 국제적 법통을 확보할 수 있는 비결? 그래서 이승만인 것이다.
유엔창설 때부터 유엔가입을 목표 삼은 이승만 국제법박사의 글로벌 전략 그것이다.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러 간다“했을 때 성공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장애와 고난을 넘고 넘어 때를 기다리고 기다려 결국 목표를 달성하고야 만다. 인간 이승만은 무엇보다 실패에 좌절과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가 33년간 쓴 일기 ‘Syngman Rhee’s Log Book’에는 고통과 절망에 대한 기록은 단 한줄도 찾기 힘들다. 어린 7대독자가 전염병에 숨졌을 때도 일기엔 ‘슬프다’ 한마디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의 남다른 초지일관(初志一貫)의 비결은 무엇이며 그 끈기와 인내, 불굴의 신념과 용기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샘솟는 것인가.
연구자들은 이승만 특유의 명석한 두뇌와 타고난 체력을 들기도 하지만, 정답은 그것과 융합된 ‘개신교 신앙’ 그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여러번 지적해 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논할 때 그의 기독교신앙을 빼놓고는 올바른 평가란 불가능하다.“ 그 배경을 엿보자.

▲ 종신 죄수 이승만, 24세부터 29세까지 5년7개월동안 한성감옥에서 복역, 1904년 8월 사면 석방된다
■ 이승만과 기독교 ‘십자가 신앙’■
▶성령과 회심(回心◀
24세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성령(聖靈:holy spirit)을 받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배재학당 졸업후 맹렬히 펼친 계몽운동과 왕정개혁을 위한 입헌군주론’을 밀어붙여 고종황제를 굴복시킨 이승만은 23세 국회의원(중추원의원)이 되자 개화당 집권론을 펼치다가 반역죄로 투옥되고 만다.
1899년 초 겨울한파에 얼어붙은 감옥 흙바닥에서 이승만은 날마다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사형수 이승만은 두 발에 차꼬(桎:형구)가 채워지고 두 팔과 손은 뒤로 뒤로 밧줄로 뒤로 묶이고 목에는 크고 무거운 긴 나무 칼이 씌워진 채로 매일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두 무릎과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 두 형리가 살점이 떨어지도록 힘껏 비틀고, 세모난 대나무 칼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틀기도 했으며 엎어놓고 몽둥이로 비명이 사그라들 때까지 마구 때린다. ”어느 날에나 죽이는고...“ 견딜수 없는 고통을 매일 당하면서 이승만은 목숨을 포기하였다.
어느날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순간, 저도모르게 기도가 터졌다.
”주여, 저의 영혼을 구하소서. 주여, 이 나라를 구하소서“
”그러자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온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지녔던 증오와 불긴감이 눈처럼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자기네가 매우 값지게 여기는 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출판부, 2002)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축복받는 순간, 즉 개신교의 회심(回心)이다.
▶”예수를 따라 목숨을 버리기까지“ 순교자신앙◀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극한의 고통속에서 생명을 포기한 순간 찾아든 생명 구원의 희열은 아픔보다 크고 초능력자의 축복까지 부여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성령 받는 체험도 여러가지, 개인마다 다르지만 이승만의 경우 이렇게 고백한다.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죄를 씻어주고 복을 받게 하셨으니...
이 은혜는 다른 것으로 갚을 수는 없고, 다만 예수의 뒤를 따라 목숨을 버리기까지 일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이 교(敎=예수교)로써 만사의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일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야 일하는 자가 되어야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영국 미국과 동등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세다” (이승만 지음 [독립정신] 비봉츨판다, 217).
“예수의 뒤를 따라 목숨을 버리기까지”란 말대로, 그리스도와 같이 생명을 바치겠다는 ‘십자가 신앙’ 곧 ‘순교자 신앙‘을 말하고 있다. 그 남을 위한 무한봉사가 이승만에게는 3천만 한민족을 위해 대한독립을 찾는 독립운동이요, 미국같은 나라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일이었다. 그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비전과 기독교적 실천방법론까지 상세히 정리한 책이 [독립정신]이다.
특히 말미에 붙인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실천6대강령‘이 그것인데, 이는 곧 죄수 이승만이 꼼꼼히 그려놓은 대한민국 건국설계도라 할만하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독립정신] 6대강령에 따라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자신이 꿈꾼 나라 모습대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경영했기 때문이다.

▲ 죄수북 차림 20대 이승만과 미국프린스턴대 박사학위 받은 35세 이승만.
▶기독교 입국론(立國論)◀
회심 즉시 죄수들을 상대로 ’무한봉사‘에 들어간 이승만은 성경공부와 감옥 예배로 간수들과 감옥장까지 기독교로 개종시켜, 감옥학교, 감옥도서실을 설치, 자신도 공부에 돌입한다. 동시에 백성계몽과 왕정개혁을 위한 논설을 몰래 써서 자신이 창간한 일간지 [제국신문]에 게재하였다. 확인되는 것만 수백편 논설은 그야말로 모든분야에 걸친 ’국가 개조론‘이라 할만하다.
그 목적을 이루기위한 방법론으로서 이승만은 ’기독교 입국론‘을 전개하고 있다.
“지금 예수교 받드는 나라들이 문명부강 태평안락하다는 것은 그 나라 안에 있는 악한 사람이 다른 나라보다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오. 그 나라 안에 악한 것을 몰아내는 일꾼이 다른 나라보다 많은 까닭이라, 선한 일이 악한 일을 이기는 나라는 선한 자의 천국이오 악한 자의 지옥이라 하겠고, 악한 일이 선한 일을 이기는 나라는 악한 자의 천당이오 선한 자의 지옥이라.
예수교 외에는 더 좋은 씨도 없고 더 좋은 밭도 없으니 남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교회에 남의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는 은혜로써 씨를 뿌려 먼저 내 마음에 뿌리를 박고 연후에 남에게 미치게 할진대, 사탄을 치는 강한 군사가 점점 많아지고 어린 양의 무리를 인도하는 목자가 차차 많이 생겨 서로 사랑으로 보호하는 중에서 합하는 힘이 부지 중 자라리니, 그런 후에야 능히 몸을 구원하며 집안을 보전하며 나라를 회복하여 오늘날에 살 수 없는 인간이 차차 천국같이 되어 가지고 영원한 영혼의 구원을 함께 얻을지라.” (‘예수교가 대한 장래의 기초’[신학월보]1903년8월호)
그리하여 청년 이승만은 기독교입국론의 목표를 미국-영국과 동등한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정하고 평생 이를 위해 독립운동가로, 정치외교가로, 목회자로, 교육자로 국민교육에 헌신했던 것이다.
특기할 점은 기독교입국론은 Nation-Building용일뿐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지 않았고, 전통적 유교와 불교도 적극 진흥하여 국민들의 종교의 자유를 육성했다는 점이다.
▶노예 해방 & 거짓말 청소
‘기독교입국론’의 출발은 계급사회 노예백성의 ’해방‘이었다.
아니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정신해방‘ 곧 썩어버린 성리학으로부터의 영혼세탁’이다.
◀“정치제도는 백성의 수준에 달려있다”
“백성의 마음(精神)이 먼저 자유해야 한다”
이승만은 미국 링컨의 유명한 연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를 설파한다.
양반과 천민으로 묶여있는 500년 고정관념의 사슬을 끊고 마음과 영혼과 정신의 해방를 부르짖는다.
특히 ’거짓말‘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폐습에 대하여 설명한다.
“거짓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거짓으로 친구와 교제하고 거짓으로 나라를 다스리니...
세계에서는 대한(大韓)과 청국(淸國)을 거짓말 챔피언이라 하여 외교사절도 받아들이지 않을 지경이라...”
이처럼 썩어문드러진 폐습을 깨끗이 청소할 특효약은 오직 정의와 진리의 예수교로 교화(敎化)시키는 것 뿐이라했다.

▲ 종신죄수 이승만의 모습(왼쪽). 그가 감옥에서 만난 루터, 칼뱅, 웨슬레 (왼쪽부터). 기독교 회심을 체험한 이승만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부터 장로교 칼뱅의 개혁주의, 감리교 창시자 웨슬레까지 신학연구에 돌입한다.
▶루터-칼뱅-웨슬레와의 만남◀
종신죄수 이승만은 또 하나의 ‘새로운 자유’를 발견, 혁명 에너지로 무장한다.
종교개혁의 원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공부하고,
그에 이은 장 칼뱅(Jean Calvin,1509~1564)의 개혁교회 정신,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의 자유의지와 구원신학 등을 잇따라 접하면서
개신교가 일으킨 자유의 혁명 세계에 빠져든다.
”...400년 전에 말틴 루터가 신약성경을 누구나 자유롭게 읽고 기도할 수 있게 만들며 프로테스탄트를 온전히 세워 200년 동안을 개신교가 정치제도를 개혁하기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미국의 대혁명이 일어났고 오늘날 구미각국의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모든 인간행복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를 근대문명의 시조로 칭함이며 그 능력은 곧 예수의 능력에서 온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교회에서는 지금까지도 신약성경 공부를 허락하지 않으며 러시아 같은 전제국들도 이를 금하니, 이는 모두 신약성경에 자유평등 사상이 충만한 까닭이다“ (이승만 [한국교회 핍박] 청미디어, 2008)
▶‘선지적 사도’(先知的 使徒)의 탄생◀
이승만의 독립투쟁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예언자다” 감탄하고 만다.
예컨대, 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시절 소련 레닌의 공산화 공작에 시달리면서 1923년 쓴 논문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을 보자. 난삽하기 짝이 없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A4용지로 치면 한두장 분량의 글로 쾌도난마처럼 그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전세계가 열광하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비판 논문이다,. 이승만대통령이 읽자마자 그 정답을 내놓은 것, 한마디로 “공산주의는 진리와 정의의 적이므로 멸망한다”였다. 또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예언했다해서 베스트셀러가 된 [Japan InsideOut]이 그러하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남보다 먼저 보고 먼저 알고 먼저 행하는 능력!
성경은 ’선지자‘ ’예언자‘와 함께 ’선지적 사도‘(先知的使徒:Prophetic Apostl)라 칭한다.
실제로 이승만의 18년 개인고문 올리버(Robert T. Oliver) 시라큐스대학 교수는 말한다.
“훗날의 역사는 이승만의 예견들이 대부분 맞았고 그 정당성을 입증하고도 남았다.”
그리하여 올리버는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Syngman Rhee:The Man behind Myth]란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인들에게 호소한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세기의 지도자를 왜 한국인들만 모르는가?”

▲ 전체주의 진영과 자유진영의 냉전을 예고한 책 [JAPAN INSIDE-OUT] 영문판 표지와, 번역판 표지. 이 영문저서에서 이승만박사는 미국의 평화주의를 비판하고 우상화신권국가 일본을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진주만기습'을 예견, 뒷날 예언서로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스도적 세계관과 자유철학◀
이승만이 ’선지적 사도‘로서 보여준 그리스도적 세계관을 엿 볼 수 있는 한 대목을 보자.
“지금 여러분이 한국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조국과 가족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한국 땅에서 자유가 사라진다면 여러분 조국의 자유가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춥고도 험한 이국 땅에서 피를 흘리는 여러분은 자유를 지키는 자유의 십자군입니다...”
이것은 1951년 중공군의 참전으로 6.25전쟁이 격화되었을 때 유엔군에 참여한 각국 군부대들을 쉴 새 없이 순방하며 위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다.
“유엔군은 자유의 십자군”이란 규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그리스도적 자유철학을 알게하고, 공산군과의 전쟁이 인류의 자유 수호에 있다는 세계관과 전략 포인트를 보여준다.
이것은 일찍이 동서이념대결, 즉 냉전시대의 도래를 경고한 이승만대통령이 미국에게 한미동맹 체결을 촉구하며 “한미동맹이 자유세계의 보루”라는 핵심에 직결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적 세계관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면 지정학(地政學)의 세계적 전략개념이 한눈에 들어온 것으로서, 이승만의 반공자유론은 칸트(Immanuel Kant)의 ‘영구평화론’과 엉기는 혈류(血流)가 일어나 인류의 보편적 자유평화론이 생성된다. (김학은 [이승만과 마사리크] 북앤피플,2013).

▲ 조선왕국 최초이자 유일한 근대적 사상서 [독립정신] 표지들.
◉조선왕국 최초의 근대사상서=이승만이 29세때 자신의 사상을 종합정리한 [독립정신]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 책에서 존 로크(John Locke)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자유사회계약론,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과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자유민주주의론을 망라하는 정치, 경제, 사회사상사의 핵심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기록왕’으로 칭할만큼 온갖 기록을 남긴 이승만의 옥중 독서목록엔 이런 서양학자들의 저서들은 안보인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사상 스펙트럼이 위에 거명한 학자들의 그것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하간에 [독립정신]의 학술적 면모는 구한말 뒤늦게나마 나타난 조선왕국 최초의 근대적 사상서로 평가할만 하다. 더구나 주자학에 통달한 동양적 선비사상에 서구적 논리가 융합됨으로써 그것은 독보적이다.

▲ 도쿄에서 팔을 낀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 ‘건국혁명’ 12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미국 독립혁명과 비견되는 자유의 혁명이다.
건국80년에 이름뿐인 혁명도 많지만 이승만의 건국혁명만이 그 본질과 스케일과 결과에서 세계혁명사에 걸맞는 진정한 혁명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이인호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이었다] 세이지, 2024)
성공한 건국혁명은 그러나 건국 자체만으로 혁명이 될 수는 없다. 그 혁명을 완성시키려는 제2,제3의 건국혁명들의 축적이 이뤄낸 총체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중에도 건국체제를 완성하려는 한미동맹 체결, 대학 설치, 국군현대화 등 여러가지 혁명적 정책들을 과감하게 끈질기게 밀어붙어 성공시켰다. (인보길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기파랑, 2020)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통치12년은 건국혁명의 완성을 위한 Nation-Building의 격동과 진통의 시대였다.
이 12년간이야말로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국가생존마저 부지할 수 없었던 조건이 바로 한반도의 타고난 지정학적 숙명이다.
스탈린의 6.25침략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알고 미국을 아는 이승만의 용병술이 구세주였다.
12년을 관통하는 이승만의 통치전략은 그 흐름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한말 계몽가 이승만의 꿈은 백성이 주인 되는 현대적 ‘국민 국가’ 형성이다.
▶둘째, 외침을 제압할 반공주의로써 분단 해소와 자유통일 달성을 위한 반공투쟁이다.
◆국민국가 형성의 조건과 목표(요약)
⚫국민의 민주시민 지적자유권 고양을 위한 남녀차별-신분차별 철폐와 의무교육에 집중 투자.
⚫국민의 경제적 자유권 보정을 위한 농지개혁, 사유재산권 극대화. 통제경제 최소화.
⚫정치적 자유권을 위한 선거권-피선거권 전면 부여. 친일파에 정치적자유권 박탈 법제화..
⚫국가 생존을 위한 한미동맹 결성. 자유세계와 자유통상 확대. 반공교육 강화. 기타.
⚫국가정신과 국민정신의 연단, 그 identify 능력을 통하여 국가정통성과 국민정체성 확립.
★ 대통령 직선제 개헌 <부산정치파동> 야당의 독재자론 첫 등장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국가 건설의 기본요소로서 헌법 제1조의 ‘주권재민(主權在民)’ 정신을 명실공히 정립하려 했던 사건이 부산정치파동이다. 즉 대통령선거를 국회의원의 간접선거제:간선제(間選制)로 규정한 조항을 직접선거제: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려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보다 먼저 야당은 건국 직후부터 간선제를 고집하며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추진했던 상황이다. 파동은 왜 생겼나?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왜 계엄령을 선포했나? 미국이 휴전을 결사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교체하려고, 국회 간선제를 이용하여 “미국말 잘 듣는 야당지도자”를 당선시키려 야당과 공모했기 때문이다.
유엔군과 중공군이 한창 전쟁하던 1952년 여름 5월26일부터 7월4일까지 이어진 사태를 ‘부산청치파동 40일’이라 부른다. 이때 처음 “이승만은 독재자”란 말이 나왔다. 바로 야당 대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였다.
그것도 계엄령후 침묵하는 야당을 보다못한 미국 무초(John J. Muccio, 1900~1989)대사가 “규탄대회라도 열라”고 부추겨서, 그제야 비밀집회를 연 김성수가 결의문에서 쓴 말이다. 간선제를 직선제로 변경하는 것이 ”헌정유린(憲政蹂躪)“이란 논리, 공감 얻기 힘든 주장이었다.
국민직접투표 대통령 선출이라는 직선제를 거부하고 간선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수구적 논리로서 오히려 국민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연일 직선제 개헌을 주창하며 ”국민의 기본권을 외면하고 개헌을 거부하는 국회의원은 미국이나 섬기는 사대주의자“라 비난하며 지방의회 의원들을 동원, 국민캠페인을 벌였다. 이승만은 미국과도 싸운다. ”미국은 내정간섭 말라. 야당은 사대주의 청산하라, 우리 운명은 국민손으로 결정한다.“ 직선제지지 국민들은 ”국민 배신 국회를 해산하라‘ 시위한다.
이승만은 “헌법에 국회해산권이 대통령에게 없으니 안된다”고 말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중에 정쟁하는 이유◀
이승만이 전쟁중에 미국과 싸우며 직선제개헌을 강행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미국에 순종하는 대통령이 등장하여 ’통일 없는 휴전‘에 순응하는 분단영구화 사태 방지.
⚫신판 사대주의 미국의 내정간섭 원천 봉쇄, 500년 묵은 ’사대병‘을 국민정신에서 청소.
⚫국민의 자주역량 극대화, 공산세력을 국민의 힘으로 물리치는 자주국방정신 고양 등이다.
이처럼 적을 막아주는 미국과 대결까지 한 이승만 대통령의 직선제강행 파동은 바로 ’극민국가‘ 형성을 위해서였다. 동시에 ’미국과 대등한 국가‘란 인식을 국내외에 심어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의 이런 자주권과시 행위는 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미국은 한사코 휴전을 반대하며 단독북진을 외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 군사작전까지 짰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미국이 후퇴한다. ”이승만을 대신할 지도자가 없다“는 결론에서다.
결국 미국이 손을 떼자 야당이 굴복하여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된다. 이른바 발췌개헌이다.
건국후 최초의 직선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휴전반대 투쟁을 본격화하였다.
야당과 야당대변지 언론은 이때부터 ”이승만 독재“ 카드를 툭하면 꺼내 국민을 선동했다.
이렇게 10년간 난타전을 벌인 끝에 이승만대통령이 4.19로 물러나자 드디어 민주당이 집권한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집권을 벼르던 민주당은 ’데모천국‘이 되자 속수무책, 파벌끼리 감투나눠먹기 싸움만 하다가 집권 10개월만에 박정희 쿠데타 앞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 시대와 박정희 시대 사이 ’반짝‘했던 해프닝이 민주당 정권이었다.

▲ 1954년 미국공식방문시 양원합동 의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참석자들이 30여회 기립박수를 보낼만큼 명연설이었다.
★ 순교자적 ‘통일 투쟁’...한미동맹-건국자금 쟁취
이승만의 기독교적 신념과 용기가 쟁취한 것이 숙원의 한미동맹이다.
평생의 적이 일으킨 6.25를 남북통일로 뒤집으려는 이승만은 ‘휴전 결사반대’ 365일 캠페인을 펼쳤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민족분단이 고착될 위험성이 뻔하기 빼문이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대통령도 여고생들도 상이용사들도 국민들도 몸부림쳤다.
”미국이 강요하는 일방적 휴전은 3천만 민족에게 사형 선고다“
”우리 운명은 우리가 해결한다. 단독북진 통일을 가로막지 말라“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려했다. 그러나 그를 대체할 지도자가 없으므로 포기한다.
⚫반공포로 석방 ⚫한미동맹 체결 ⚫대규모 군사경제원조 확보.
1905년 미국유학시절부터 목표였던 한미동맹을 미국이 거절할 때 이승만은 칼을 뽑는다.
”내가 너희에게 은총을 베풀려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장). 이승만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이다.
이승만의 칼은 반공포로 석방, 그리고 기독교 국가 미국의 양심을 찌르는 징벌의 칼이다.
”미국은 한국을 세 번 배신했다. 또 배신하려느냐?“
배신ⓛ 태프트-가쓰라 밀약, 배신②얄타 밀약, 배신⓷ 일방적 38선 설정이 그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에 펄펄 뛰던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무릎을 꿇었다. 한미동맹이 탄생한다.
”한미동맹은 배신의 보상일뿐, 휴전협정과 별개문제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서명을 거부하였다.
그리고선 한미동맹의 비준까지 미루면서 ”중국공산당을 원자탄으로 말살하라“ 압박한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중공을 살려두면 미국에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미국 양원합동의회에서 행한 연설이다. 동시에 미국 언론들과 주요지역을 돌면서 외치고 외친다. ”휴전은 무효다, 당장 중공을 격멸하지 않으면 미국민은 또 다시 피를 흘릴 것이다“
백악관은 지갑을 열었다. 그 해부터 한국정부는 매년 거액의 군사경제원조를 받아 군사력과 자본주의 시장경제 육성에 썼다. 이승만이 물러날 때까지 무려 30억달러가 넘었고, 박정희때도 원조는 계속되었다.

▲ 1954년 공식방미중 이승만 대통령이 뉴욕시장과 함께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영웅행진'을 벌이고 있다
★”한국인은 울면서 구걸하지 않는다.
미국 원조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자금”
그리스도적 세계관의 ‘선지적 사도’ 이승만은 세계를 넘나드는 민주주의 목회자요 자유의 전도사였다.
특히 미국 자금을 조달받아 Nation-Building 자금으로 써야하는 입장에서 그 ‘주고받는 명분’을 기독교적 이념적 고품격으로 업그레이드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굳건한 기초를 닦을 때까지” 미국민의 동의를 확보하려 노력하였다. 그 예를 보자.
▶장면-1◀
휴전직후 미국 공식방문시 한국원조를 주도하는 한미재단(The American-Korean Foundation) 만찬에서 그 진가를 실감있게 보여준다. 이 재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도하여 자기 동생을 이사장으로 앉혀 모금액수를 키우려는 의도에서 설립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돈 주는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유려한 영어구사로 심장을 파고들었다.
“...미국이 제공하는 돈, 상품, 식량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미재단과 다른 기관들이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맺어주는 정신적 유대가 더욱 위대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미국보다 작고 부족한 나라이지만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해서는 미국과 똑같은 신념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신문기자들이 방미에 만족하느냐고 내게 물었습니다. 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더 많은 원조, 더 많은 그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은 울면서 도움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감추고 조용한 결의와 용감한 미소로써 기아와 파괴를 이겨내는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구걸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구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들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감사하고 앞으로도 감사할 것입니다. 두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노력에 백만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자유세계의 적과 싸우는 동지 한미 국민간의 유대감을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공감대로 승화시키는 이승만, 수혜자 한국인의 자존심과 미국인의 원조 당위성을 환기시키는 논리가 돋보인다.
★“이런 원조 안받겠다”...미국의 ‘일본중심‘ 철회 성공
▶장면-2◀
방미시 대규모 군사경제원조에 합의하고 귀국한 이승만은 또 다시 분통을 터트린다.
미국이 어마어마한 ‘원조 조건’을 추가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긴 이야기를 줄여서 보자.
⚫이승만의 ‘단독북진 통일’ 정책을 포기해야 원조를 주겠다.
⚫원조자금의 일정액으로 반드시 일본에서 물품을 구입해야 한다.
⚫한국군을 현대화 시켜주므로 주한미군 4개사단은 철수하겠다.
⚫환율을 고정시키지 말고 시세에 따른 변동환율로 바꿔야 한다.
이와같은 4개조건에 불응하면 대한원조정책을 재검토하겠다는 으름장도 붙었다.
대한민국의 생명줄을 볼모로 북진통일을 고집하는 이승만을 길들이려는 노림수다.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협상을 중단시키고 길고 긴 반박성명을 계속 발표한다.
“유엔의 대한원조자금 2억5천만불 중 1억6천만불은 기계류를 일본서 구입하는데 충당한다고 하며, 한국에 찬조로 들어오는 금액중 그 반이상은 일본에서 물자 구입에 충당한 실정이니,
한국의 경제 부흥을 위한 것이 일본의 경제 부흥을 초래한 결과가 되고, 우리 경제부흥 없이는 정치상 독립을 얻었다 하더라도 경제상 노예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자급자족에 일심 협력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54년 9월21일자)
“...미국은 4년전쟁에 싸움을 한 것은 1년만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이길 수 있는 것도 이기지 못하게 하며, 유엔군이 싸움을 아니하면서 우리만이라도 싸우겠다는 것을 못 하게 하고,
평화로 통일한다 하여 회담을 열어서 판문점으로 제네바로 돌아다니다가 필경은 다 실패되고 ...
미국이 별안간 협의도 없이 군대 3분의 2를 걷어간다 하니, 우리 청년으로 터진 구멍을 채워놓겠다는 것도 거부하며 조금도 걱정 말라 하니, 이것은 4년 전(6.25직전)에 하던 것을 또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우의를 표하며 잘 가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또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은, 일본과 협동해야 된다며 협조치 않으면 원조를 안준다는 것이 한 조건에 들어있다.
우리는 원조를 못 받아서 우리가 다 굶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 1954.10.1.)
”한국을 위한 원조를 해야 한다. 안그러면 이런 원조는 받을 수 없다“
연일 맹공을 퍼붓는 이승만에게 미국은 ‘환율인상’을 압박했지만 이승만은 미군에게 제공하던 달러화도 끊어버린다.
이러다가 원조자금 확보는커녕 한미동맹 비준도 물건너갈 판이 되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아이젠하워가 또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협상전쟁은 끝난다.
마침내 분규는 4개월 넘는 137일만에 해결되었다. 11월 17일 오후 4시10분 한미회담 회의록에 조인, 교환함으로써 7억달러 군경원조와 환율문제 등을 합의한 한미경제협약이 발효되고 양측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이 요구한 254대1의 환율도 이승만이 주장한 원래의 180대1로 고정되었고, 미국이 원조자금으로 일본에서 물품을 구입하라는 강요도 이승만이 역설한 한국내 구입으로 합의 되었다.
미국은 ‘북침 포기’ 명문화나 환율 등에서 양보했지만 한국군을 유엔군(미군)의 작전권 안에 묶어둘 수 있게 된 것으로 안도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미외교는 도 한번 개가를 올렸다.
한미동맹 조약도 그제서야 동시에 발효된다. 이승만이 즉시 비준서를 교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승만표 외교전략! 그토록 갈구하던 한미동맹마저 조약체결 1년3개월간 틀어쥐고 미국의 군사-경제 지원책을 이승만 페이스로 바꿔놓고 나서야 비준서를 건네주었던 것이다.

▲ 1960년 4월 대학생들이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민주주의 사수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민국가’의 탄생과 4.19
필자도 4.19세대에 속한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연일 데모했다.
과연 4.19란 무엇인가? 의거야? 혁명이냐? 그 역사적 의미를 깨닫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한마디로 4.19는 이승만 대통령이 10년 공들여 키워놓은 국민의 자유민주의식이 민주주의 위기를 자각하자 일어난 국민정신의 거대한 폭발이었다.
다시 말하면 4.19는 이승만 평생의 목표, ‘국민국가” 건설이 성공했다는 반증이었던 것이다.
스무살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들어가 ‘자유의 신대륙’을 발견한 순간 작정했던 결심은 무지한 노예 백성을 계몽시켜 미국-영국과 동등한 근대적 ‘국민국가’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였다.
그 꿈이 이루어졌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 바로 그를 하야시킨 4.19 학생의거!
혹자는 ‘토크빌 효과(Tocqueville Effect)라며 ’자기 성공의 실패‘ 운운하지만 아니다. 대통령이 학생들을 열심히 키워놓았더니 대통령을 쫓아냈다는 비유는 모멸적이다. 사건의 표피만 보고 ”국민의 독재자 추방“이라 단정하는데 역사의 내면을 모르는 겉핥기 소리다.
사실은 사건의 외피라도 제대로 파악한 지식인이라면 그런 평가는 나올 수가 없다.
첫째, 학생들의 요구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 민주주의 살리자“였다.
즉, 이승만에게 배운 민주주의를 어겼으니 수정하라는 요구, 민주제도 확립을 말한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은 사퇴해야 한다“며 하야를 결단했다.
이것이다. ”부정을 보고 일어서는 똑똑한 국민이 있으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이것“ 똑똑한 국민의 탄생, 즉 자신의 평생소원이 달성된 현장을 목격한 이승만은 한없이 기쁘고도 한없이 아프다. 그는 자신의 자유당에 속았기 때문이다.
”부정을 왜 해? 어떻게 경찰이 국민들에게 총을 쏠 수 있어?
내가 맞을 총알을 학생들이 맞은 거야. 창피해. 내가 창피해...
장하다, 장해...부정을 보고 일어서야 젊은이지,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그만두면 젊은이들이 더 안다치겠지. 사퇴성명서를 써라“
서울대 병원 가서 문병한 청년들 손을 잡아주며 눈물을 흘린 이승만, 측근 각료 김정렬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통령의 심경을 증언으로 남겨놓았다.
내정을 정부에 맡기고 대미외교와 남북통일만 챙겼던 이승만,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수 없었던 국내외 상황을 원망했을까. 1956년 제3대 대통령 출마를 앞두었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처럼 나도 두 번만 하고 물러나기를 소원했었다“고...
명예로운 퇴진의 기회를 놓칠 수 밖에 없었던 조국의 상황과 자책의 통한을 삼키며 뒤늦게 후계자로 허정(許政,1896~1988)를 지명한 이승만은 ”북한의 재침을 막아야하며 자유민주공화국을 잘 지켜달라“며 경무대를 떠난다.
그의 자진하야는 자신이 평생걸려 구축한 자유민주헌법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마지막 민주화의 결단이었던 것이다.
4.19는 국민국가의 탄생이다.
독립운동 시절 이승만 박사는 독자적 헌법까지 만들어 놓았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구상들을 33개항이나 담은 것이었다.
건국후 12년간 Nation-Building Project는 소련-중공-북한의 침략 포탄을 맞아 중단되었으나. 앞에서 본 이승만의 대미투쟁외교 덕분에 장기원조를 확보, 자립의 터전을 닦았다.
그가 쏟아낸 수많은 담화, 성명, 연설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강의였다.
전쟁 중에도 교육투자는 계속되었고, 피난민 천막학교를 돌아보며 학생들을 격려한 그는 인자한 교장의 모습, 이승만은 교육대통령, 교육혁명가였다. 그런 8순 노대통령의 열정이 맺은 열매가 4.19--’국민국가‘의 기둥 국민교육 성공을 행동으로 증명한 4.19학생 의거는 따라서 이승만의 실패가 아니라 학생과 교장이 함께 일으킨 혁명, 즉 청년 이승만의 꿈이 60년만에 현실화 된 성공사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주도의 국민교육 집중 ⚫경자유전(耕者有田) 농지개혁 ⚫남녀 차별없는 국민의 자유선거권, 피선거권 ⚫시장경제 도입과 자유통상 무역입국(貿易立國) ⚫자주국방과 한미동맹 등인데, 해방후 미군정시에도 과도정부 헌법을 만들자며 제시 주창하였으며, 5.10총선수 제헌 헌법에 대부분 수용되었다. (유영익 [이승만대통령 재평가] 연세대 출판부, 2006)

▲ 1965년 7월27일 이승만대통령의 장례식날, 서울시민들이 몰려나와 영구행열을 추모하는 모습. 인파는 동작동 국군묘지까지 뒤덮었다.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어린양“
“통일은 어찌 되느냐? 이승만이 한바탕 했으면 누가 또 나와서 싸워야지...”
4.19이후 하와이로 요양간 이승만 대통령이 병상에서 소리치는 말이다. 양자(養子) 이인수(李仁秀,1931~2023) 교수가 기억하는 이승만은 숨거두는 날까지 ‘통일병 환자’였다고 한다.
자나깨나 기도와 찬송으로 향수를 달래는 건국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하나님 저는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게 하소서.”
기독교 회심이래 임종까지 이승만이 암송한 성경말씀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1절)
위대한 거인의 90세 평생, 마지막 가는 길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추모사를 올렸다.
“선구적 혁명아 이승만 대통령은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존재”이며 “조국을 위해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했다. 인류의 원죄를 뒤집어쓰고 골고다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빗댄 말,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으로서 한국인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나라를 살리는 제물이 되어 목숨을 바친 일생이라는 뜻이다.
매사 남보다 앞서 달려나가는 이승만의 고독한 독주(獨走:혼자달리기)를 스스로 고백한 신앙간증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8월 공식방미 중에 워싱턴 시내 파운드리 교회(Foundry Methodist Church)에서 자신의 헌신적 국가만들기 일생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결정적 증언이다.
“I know God will not tell us what we are doing is wrong.
He is God not only of love but God of righteousness.
I am not afraid. Let them all criticize me.
But as long as God does not condemn me, that is all.“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正義)를 따라 행하므로 다들 나를 비난해도 두렵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독교의 눈으로 본다면, 이승만은 스스로 자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라 목숨을 버리기까지” 맹세했던 길에서 싸우고 싸우다 쓰러진 순교자로 기록되지 않을까.

▲ 김인서 목사 지음 [망명노인 이승만박사를 변호함] 표지.
◆‘이승만 독트린’은 말한다
이승만의 영혼이 스스로 택한 동작동 국군묘지에 묻히자 세상은 ‘저주의 아우성’이다.
정치적 반대세력 민주당은 물론, 그 대변자 언론들과 이에 편승한 지식층이 ‘독재자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총동원되어 온갖 독설을 쏟아낸다.
모두 침묵이다. 자유당세력조차 입을 닫았을 때 딱 한 명의 ‘변호인’이 나타난다.
▶이승만 대통령의 4대 공로와 4대 무죄◀
⚫4대 공로
1) 90평생을 조국 독립운동에 국궁진력(鞠躬盡力) 하다.
2) 대한민국 건국에 절대한 공로가 있다.
3) 6.25동란시 적군 격퇴에 절대한 공로가 있다.
4)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절대한 공로가 있다.
⚫4대 무죄
1) 국토 상실죄(喪失罪) 없다.
2) 패전죄(敗戰罪) 없다.
3) 국체변혁죄)國體變革罪) 없다.
4) 항일 구국과 반공 건국에 변절죄(變節罪) 없다.
이것은 한국4대문장가의 한명으로 꼽히는 김인서(金麟瑞,1894~1964) 목사가 1963년에 써놓은 책 첫장에 나오는 항목들이다.
3.1운동시 3년옥살이 했던 독립운동가로서 야당과 지식인, 언론들이 이승만에게 겹겹이 씌우는 중상모략을 보다 못해 건국대통령의 신원(伸寃)운동을 벌이겠다며 긴 변론을 쓰고서, 도산계(島山系)와 인촌계(仁村系)의 무차별 인민재판에 대하여 조목조목 촌철살인의 비판을 가한 명문들로 가득 채운 책이다. (김인서 지음, 이주영 엮음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비봉출판사, 2016).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외치는 이승만 대통령 연설.ⓒ연세대이승만연구원
혹자는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차선(次善)‘을 선택하였다고. 아니다. 모욕하지 말라.
자유통일의 화신(化身) 이승만은 ’강요된 차선‘ 조국의 분단을 한번도 선택한 적이 없다.
이승만이 말한다. “한줌도 안되는 공산당만 추방하면 2천만 북한동포는 해방 된다”
스탈린은 진작 죽었지만 그만 만든 ‘스탈린체제’는 살아있다. 스탈린이 세운 김일성집단은 이제 ‘핵의 괴물’로 변했다. 그 괴물을 만들어준 또 다른 김구세력들이 날뛰고 있음을 보라.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가 말했다.
“선과 악이 싸우는 아마겟돈 결전장에 ‘중도’란 없다. 자유냐, 노예냐, 죽느냐 사느냐”
2차대전서 전체주의와 싸우는 미국인들에게 던진 경고다.
지금 전체주의 어둠을 뚫고 자유의 십자가를 진 어린 양떼 2030이 부활하고 있다.
‘이승만 독트린’이 말한다. “싸우라! 5천만 동포여, 5천만 이승만 되어 싸우라!”⊙
이승만 독트린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