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동아일보 2026-03/
03-02(월) ‘파멸적 위험’ AI 무기화 갈등

요즘 전쟁에선 인공지능(AI) 기술이 승패를 가르는 핵심 자산이다. 방대한 위성사진과 소셜미디어, 드론 영상을 실시간 분석해 적군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정밀 타격 지점을 찾아내는 데 AI 기술이 활용된다. 저비용으로 살상력을 높이는 데 AI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킬러 로봇’과 같은 치명적 ‘자율살상무기’가 현실화하면 인류를 파멸적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AI 무기화는 윤리적 문제를 낳기 마련. 미국 정부와 앤스로픽이 AI의 군사적 사용 범위를 놓고 벌이는 갈등이 대표적이다.
▷앤스로픽은 ‘가장 안전한 AI’를 지향하지만 이 회사 챗봇 클로드는 군사용으로 각광받는다. 다양한 언어와 방언으로 된 문서, 첩보 보고, 작전 계획서를 이해하고 요약 비교하는 능력이 뛰어나 미 국방부 기밀 작전에 사용되는 유일한 AI 모델이다. 올해 초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생포 작전 때도 팔란티어와 함께 위성 정찰, 첩보 보고 등을 요약 분류해 지휘관의 질문에 빠르게 답하는 ‘AI 참모’ 역할을 했다고 한다. 클로드, 챗GPT, 제미나이의 3자 가상 전쟁에선 클로드가 8승 4패로 최고 승률을 올렸다는 영국 연구팀의 실험 결과도 나왔다.
▷클로드가 이번 이란 공습에도 활용됐다는 보도가 나온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돌연 모든 연방 정부 기관에 클로드 사용을 6개월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클로드를 ‘합법적인 모든 용도’에 제한 없이 활용하게 해달라는 국방부 요구를 앤스로픽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군사작전 결정권은 대통령과 군에 있는데 민간 기업이 회사 정책을 군에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앤스로픽은 AI 기술이 인간의 개입 없는 완전 자율살상무기 체계에 활용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 정부 주도의 군사 기술 개발에 핵심 역할을 했던 실리콘밸리는 AI 기술에 관한 한 ‘반전(反戰)’ 정서가 강하다. 2018년엔 구글이 국방부의 AI 화상 인식 기술 개발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져 비난이 쏟아지자 ‘살상용 AI는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발표하고 사업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만큼 AI의 위력이 원자폭탄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를 써서 시행한 전쟁 실험에서는 21번의 전쟁 중 20번의 전쟁에서 핵무기를 쏴 충격을 줬다. AI가 핵을 공멸의 무기가 아닌 승리의 수단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이번 앤스로픽 사태를 두고 빅테크 기업들은 갑론을박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윤리적 제약 없이 AI 무기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만 손 놓고 있을 순 없다”는 주장과 “AI가 인류 최고이자 최후의 발명품이 돼서는 안 된다”는 반박이 교차한다. 민간의 혁신 기술이 주력 전략 자산으로 동원되는 ‘기술 징집’의 시대에 그 통제 권한은 누가 가져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3 자기 결정권 없는 콧줄 영양공급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의식이 희미해지고 기력이 떨어진다. 신체 기능이 하나씩 멈추는 것이다. 그쯤이면 쇠약해진 몸은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다. 죽조차 삼키기 어렵다.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이런 상태를 ‘곡기를 끊는다’고 표현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길이 60cm 콧줄(코와 위를 연결하는 비위관)을 통해 강제로 영양을 공급한다. 삽관 과정도 고통스럽지만 이물감으로 답답함을 느끼는 고령 환자들이 자꾸 콧줄을 빼려고 한다. 그래서 요양병원에서 콧줄을 뽑지 못하도록 억제 장갑을 끼우거나 아예 손발을 묶어두기도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병의원에서 콧줄을 삽관한 환자는 27만3850명이었다. 이들 4명 중 1명은 임종 말기 영양 공급을 위해서였다. 특히 요양병원은 중환자실도 없는데 콧줄을 쓰는 환자 수는 7만7322명이다. 요양병원, 요양원에선 법적으로 영양 공급이 의무라는 이유로 콧줄을 하지 않으면 입원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쇠약한 고령 환자에게 일일이 음식을 먹이기 힘드니 콧줄을 끼워 두는 편이 환자 돌보는 데 편리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연명의료 행위를 심폐소생술·혈액 투석·항암제 투여·인공호흡기 등으로 몇 가지만 인정한다.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거부 의사를 밝혔거나, 가족이 환자의 분명한 연명의료 거부 의사를 전달하더라도 콧줄·위루술 같은 영양 공급은 마지막 순간까지 중단할 수 없도록 했다.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 제정 당시 종교계를 중심으로 물과 음식을 끊는 것은 생명을 해하는 것이라 반대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사후 법적 책임을 우려해 일단 콧줄을 권하고, 한번 꽂게 되면 뺄 방법이 없다.
▷콧줄을 쓸지, 말지 결정해야 할 순간 자식은 부모를 굶기는 것 같아 후자를 선택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건강한 사람의 사고일지 모른다. 임종기를 연구한 의사들 다수는 생의 말기에 곡기를 끊어도 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본다. 신체 기능이 저하돼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잘 인지하지 못해서다. 임종기에 억지로 영양을 공급하는 것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시간’만 연장하는 것이라고 의사들은 말한다.
▷2000년 일찌감치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한 대만은 한국과 달리 강제 영양 공급을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연명의료 행위로 정해뒀다. 일본은 후생노동성 가이드라인에 따라, 미국과 영국은 의료계 자체 가이드라인으로 임종기 환자의 영양 공급을 중단할 수 있도록 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300만 명을 넘어섰다.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대하는 사회적 문화가 달라진 만큼 연명의료의 재정의를 생각할 때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04 UAE서 미사일 요격률 90% 보여준 ‘천궁-2’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에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잃은 이란은 바로 보복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물론 미군이 주둔한 페르시아만 건너편 산유국들을 자폭 드론과 탄도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탄도미사일 174발과 순항미사일 8발, 그리고 드론 689대가 아랍에미리트(UAE)에 집중됐다. 하지만 실제 영토에 떨어진 건 드론 44대뿐, 나머지는 모두 방공망에 의해 격추됐다. 요격률은 93%가 넘었다.
▷미 군사기지가 있는 중동 국가들은 주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패트리엇 방공 시스템(PAC-3 MSE)’으로 영공을 보호한다. UAE가 유독 주목받은 건 한국산 중거리 지대공유도무기 ‘천궁-2(M-SAM Ⅱ)’ 역시 실전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UAE는 2022년 천궁-2를 도입하기로 하고 미국 시스템 등과 함께 여러 겹의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이번 방어 작전은 우리가 수출한 국산 무기로는 첫 실전이 된 것이다. 이란은 저가 드론과 미사일을 꾸준히 뿌려 상대국의 값비싼 방공망 무기를 소진시키는 ‘가랑비 전략’을 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범용 패트리엇’이라 불리는 천궁-2가 이번 방어작전 때 보여준 요격률은 90% 안팎이었던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했다.
▷천궁-2는 미사일을 일단 공중 10∼30m 정도로 띄운 뒤 로켓엔진이 점화되는 ‘콜드 론치(cold launch)’ 방식을 쓴다. 직접 목표물을 맞히는 ‘직격 요격(hit-to-kill)’이라는 점에서는 미 록히드마틴의 패트리엇과 방식이 유사하다. 특히 미사일 한 발 가격은 패트리엇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해 ‘가성비’가 탁월하다. 저가 무기 공격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UAE에 이어 2024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가 연이어 천궁-2 도입 계약을 맺은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방위산업은 세계 정세가 어지러울수록 ‘호황’을 맞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트럼프 미 대통령의 그린란드 편입 시도 등은 유럽 각국이 방위체계 고도화에 서둘러 투자하도록 등을 떠밀었다. 작년 12월과 올 1월 폴란드, 노르웨이에 각각 다연장로켓 ‘천무’를 공급하기로 한 것도 그런 흐름에서다. 전쟁 장기화 우려가 나오는 중동에서도 한국 무기체계 도입 요구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은 그동안 사드 등 미국 방어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이번 천공-2가 성공적으로 실전 능력을 입증한 것은 우리 자체 방어 능력이 한 단계 더 올라섰다는 의미다. 여기에 한국 방산기업들의 전투기, 장갑차, 잠수함까지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자국 영토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군비 태세를 갖추는 국가들의 협력 파트너로서의 위치도 굳혀가고 있다.
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03-05 죽음과 전쟁까지 베팅, 폴리마켓 논란

미국과 이란의 전쟁에 주식 시장 못지않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장이 예측 시장이다. 세계 최대 베팅 사이트인 미국 폴리마켓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시점을 맞히는 내기에 5억2900만 달러(약 7800억 원)가 몰렸다. 지난달 28일 공습 하루 전 베팅해 12만 달러를 벌어간 사람도 있다. 현재는 ‘이란 정권은 3월 중 무너질까’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3월까지 유지될까’를 놓고 내기가 한창이다.
▷폴리마켓은 뉴욕대 중퇴생인 셰인 코플란(28)이 2020년 설립한 가상화폐 기반의 베팅 플랫폼으로 스포츠 경기나 선거 결과뿐만 아니라 이란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사건의 미래에 베팅할 수 있는 최초의 사이트다. 선거를 예로 들면 특정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Yes’나 ‘No’를 0∼1달러 가격에 사고팔 수 있는데 이 가격이 참여자들이 예상하는 그 후보의 당선 확률이 된다. 2024년 미국 대선 결과 예측에는 30억 달러 넘는 베팅이 이뤄졌다.
▷올해 초 잠시 한국어 서비스를 한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폴리마켓이 유명해진 계기는 그보다 앞선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때다. 탄핵 여부뿐만 아니라 정확한 시기를 맞히는 세분화된 상품이 나와 판돈이 커졌다. ‘윤 대통령이 2025년 4월 이전에 탄핵될까’에만 2600만 달러 넘게 베팅됐다. ‘LadyGunhee’라는 닉네임의 이용자는 16억 원을 벌어갔다고 한다. 현재는 ‘차기 서울시장’ ‘부산시장’ 맞히기 내기가 뜨겁다. 하지만 스포츠토토처럼 특별법으로 허용하는 경우가 아니면 온라인 베팅은 형법상 도박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폴리마켓은 2024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을 가장 먼저 예측해 주목받았다. 일론 머스크는 “여론조사보다 더 정확하다. 돈이 걸려 있어서”라고 했다. 하지만 2022년 미국 중간선거에선 공화당의 압승을 점쳤으나 빗나갔다. 참여자들 중 다수가 가상화폐에 익숙한 우파 성향의 젊은 남성들이어서 전체 민심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한다. 2024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선 여당 후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당선 예측에 실패했는데 집권 세력의 부정선거 변수를 놓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내부자 거래 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엔 이스라엘 예비군이 기밀정보를 이용해 베팅했다 걸려 기소됐다. ‘가장 빠르고 냉정한 여론 지표’라는 낙관론과 달리 ‘큰손’이 특정 후보나 이슈에 베팅해 여론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예측 결과의 판정 기준도 모호하다. 올 1월엔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언제 침공할까’ 내기가 있었는데 마두로 대통령 체포 압송은 ‘침공’이 아니라며 배당금 지급을 거부해 논란이 됐다. 무엇보다 ‘피 묻은 배당금’이 죽음과 전쟁으로 돈을 벌어도 되느냐는 무거운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6 변시 5번 떨어진 ‘오탈자’ 2000명 시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졸업생에게 주어진 변호사시험 응시 기회는 최대 5차례다. 예외는 없다. 이 시험에서 모두 탈락한 이들은 ‘오탈자(五脫者)’로 불린다. 올해 변시 결과가 나오면 로스쿨 도입 이후 오탈자 수는 총 2000명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변호사 자격을 얻을 방법은 없다. 변호사가 되려고 로스쿨 3년에 변시 준비 5년을 합쳐 8년을 써버린 터라 다른 직장을 찾는 것도 여의치 않다. 이들은 ‘변시 낭인’으로 불린다.
▷전국 25개 로스쿨 중에는 법철학 같은 기본 법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예 한 명도 없는 곳도 있다. 변시에 출제되지 않는 과목은 강의를 개설하더라도 수강생이 없고 괜히 ‘왜 이런 과목을 들어야 하느냐’는 불만을 사기 십상이다. 반면 변시와 직결되는 형사소송법연습 같은 과목은 수강생이 넘쳐난다. 로스쿨 교수들 사이에선 “학교가 변시 학원이 됐다”는 푸념마저 나온다. 변시 합격률이 낮아지면서 이런 현상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2012년 1회 시험에서 87.2%였던 변시 합격률은 2016년 이후에는 50% 안팎 수준으로 떨어졌다.
▷로스쿨이 처음 문을 연 2009년에 비해 지금 변호사 숫자는 3배 이상으로 늘었다. 그만큼 시민들이 법률서비스에 접근하기 쉬워졌고 변호사 비용은 낮아졌다는 점이 로스쿨 제도의 대표적 성과다. 하지만 로스쿨 제도가 사법시험에 매달리던 시절의 낭비를 막고, 시험 위주의 법학 교육을 정상화시켰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바라보는 로스쿨 측과 변호사 업계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로스쿨 측에선 변시 합격률을 80% 선으로 높이면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 그러면 변시 낭인이 줄고, 다양한 법학 교육이 가능해지며, 합격률이 90% 이상인 의사 국가시험 등과의 형평성도 맞게 된다는 것이다. 더 늘어나는 변호사는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에서 흡수할 수 있다는 게 로스쿨 측의 주장이다. 반면 변호사 업계에선 로스쿨 정원을 축소하고 변시 합격자를 더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법률서비스 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인 데다 인공지능(AI)이 저연차 변호사들의 업무를 빠르게 대체하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호사 숫자가 더 늘어나면 경쟁 과열로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고 업계에선 우려한다.
▷적정한 변호사 규모와 변시 합격률을 둘러싼 논쟁은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로스쿨 측과 변호사 업계는 각자의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양측이 밥그릇 싸움에서 벗어나 17년 전 왜 로스쿨을 도입했는지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로스쿨법에 적힌 것처럼 “국민의 다양한 기대와 요청에 부응하는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07(토) 쫓겨난 ‘아이스 바비’… 스포트라이트 뺏은 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을 지휘하는 크리스티 놈 국토안보장관은 ‘아이스 바비’란 별명을 갖고 있다. 바비 인형처럼 ‘풀 메이크업’을 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ICE의 불법 이민자 단속 현장에 나타나 사진 찍히는 걸 즐기기 때문이다. 지난해 엘살바도르에 있는 테러범 수용소까지 방문해선 문신 가득한 죄수들을 배경 삼아 영상을 찍기도 했다. 영상에서 놈은 불법 이민자들도 이런 신세가 될 거라고 경고했는데 더 주목을 끈 건 반짝이던 그의 7500만 원짜리 롤렉스 손목시계였다.
▷놈은 장관 임명 전부터 구설에 자주 올랐다. “두 살 손녀도 엽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총기 옹호론자인 그는 반려견이 거칠다는 이유로, 기르던 염소가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총으로 쏴 죽였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불법 이민에는 누구보다 강경해서 사우스다코타 주지사 시절 텍사스 국경 봉쇄를 위해 주 방위군을 5차례 파견했다.
▷놈은 ‘반(反)이민’ 선봉에 섰지만 선을 넘는 일이 잦았다. ICE가 조지아주 현대차 공장을 급습해 한국인 근로자 다수를 구금했을 때도 놈은 “법대로 추방할 것”이라며 사태를 키웠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비즈니스도 생각해야지, 머리를 쓰라”며 놈에게 한마디했다고 한다. 놈이 악명 높은 국경순찰대 간부를 발탁해 이민 단속 작전을 맡긴 것도 실책이었다. 작전이 벌어질 때마다 유혈 진압이 자행됐고 급기야 미니애폴리스에서 시민 2명이 ICE 총에 맞아 사망했다. 놈은 그 두 사람이 테러리스트라면서 여론에 불을 질러 트럼프를 곤혹스럽게 했다.
▷트럼프는 5일 놈을 경질했다. 이란에 대한 군사 공격으로 보복 테러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국토안보부 장관을 해임한 배경을 두고 해석이 다양하다. 전쟁으로 지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무차별적인 이민자 단속을 지속하는 게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하지만 놈 못지않게 불법 이민에 강경한 종합격투기 선수 출신 상원의원을 후임으로 지명한 걸 보면 그걸론 설명이 충분치 않다.
▷놈이 보좌관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며 공금으로 호화 전용기를 타고 다니고, 직원들에게 갑질을 했다는 것도 공(公)과 사(私)의 경계가 흐린 트럼프의 윤리 기준을 고려할 때 해임 사유가 되긴 어려워 보인다. 놈이 이민 정책을 홍보한다면서 TV 광고에 3300억 원의 예산을 쓴 게 유력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정책보단 말을 탄 자신을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셀프 홍보용”이란 비판이 거세다. 놈은 3일 의회 청문회에서 그런 광고에 왜 막대한 예산을 썼느냐고 추궁을 받자 트럼프가 승인했다고 해명했다. 트럼프는 “전혀 몰랐다”며 펄쩍 뛰었다. 트럼프로선 놈의 책임 떠넘기기가 괘씸하기도 했겠지만, 자기 홍보에 열을 올리는 행태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보스의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챈 죄’에 해당했을 수도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09(월) 밤낮 안 가리는 ‘약물 운전’

‘젊은 운전자가 앉은 비틀거리는 외제차는 무조건 피해라.’ 마약 등 약물 운전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빈발하자 운전자 사이에서 이런 방어 운전 수칙이 회자된다. 특히 서울 강남에선 대낮에 약물에 취한 운전자들이 심심찮게 적발되고 있다. 마약 접근이 쉬운 유흥업소, 의료용 마약류를 처방하는 성형외과 등이 밀집해 있어 벌어지는 일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약물 복용 운전으로 인해 면허가 취소된 사례는 237건으로 2020년에 비해 약 4.4배 늘었다.
▷약물 운전의 위험성이 공론화된 계기는 2023년 8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인근에서 길을 걷던 20대 여성을 치어 숨지게 한 롤스로이스 뺑소니 사건이다. 30대 남성 운전자는 사고를 낸 직후 태연히 도주해 공분을 샀는데 운전 당시 케타민에 취한 상태였다. 한 달 뒤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는 주차 시비 끝에 “칼침 맞아봤냐”며 흉기를 휘두른 람보르기니 운전자도 붙잡혔다. 그 역시 필로폰, 엑스터시 등 마약 양성 반응이 나왔다. 알고 보니 롤스로이스와 람보르기니 운전자는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수익을 공유하던 사이였다.
▷최근엔 마약뿐 아니라 의료용 마약류 오남용에 따른 약물 운전도 심각하다. 지난달 30대 여성이 몰던 포르쉐가 반포대교에서 추락해 한강 둔치로 떨어졌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포르쉐 안에서는 프로포폴 빈 병과 주사기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프로포폴은 의사 처방 없이 구할 수 없고 외부로 반출할 수도 없다. 불법 유통이 만연했다는 의심이 든다. 지난해 의료용 마약류 무단 투약 및 유통으로 검거된 인원은 총 1089명이다. 3년 전에 비해 3.4배 늘었다. 지난달에는 서울 서초구 일대에서 교통신호를 무시한 채 3km가량 운행하던 벤츠 운전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운전자는 손목에 주사기 바늘을 꽂은 채 잠들어 있었다.
▷정상적으로 의사 처방을 받았더라도 방심할 순 없다. 공황장애 치료제인 벤조디아제핀 계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인 메틸페니데이트 계열과 같은 향정신성 의약품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해 인지, 행동 반응을 느리게 한다. 지난달 압구정역 인근에서 50대 남성이 차량 3대를 잇달아 들이받아 4명이 다쳤다. 그는 항불안제를 복용했다고 했다. 영국과 독일은 향정신성의약품 복용 후 24시간, 호주는 12시간 운전을 금지하지만 우리는 아직 뚜렷한 기준이 없다.
▷술자리가 파한 뒤 주로 밤에 일어나는 음주 운전과 달리 약물 운전은 도로가 붐비고 행인이 많은 낮에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 위험이 더 치명적이라는 지적에 따라 4월부터 음주 운전만큼 처벌이 강화된다. 약물 운전은 마약류 투약 후 2차 범죄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마약, 의료용 마약의 불법 유통부터 뿌리 뽑는 것이 시급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10 반도체발 훈풍… 대규모 채용 나선 삼성, SK

저성장 시대에 인공지능(AI)까지 확산되면서 일자리 가뭄이 어느 때보다 극심하다는 요즘이다. 지난해 구직자 1명당 일자리 수가 0.36개로 역대 최악이었을 정도다. 기업 채용은 경력직 위주로 전환된 지 오래여서 특히 첫 직장을 찾는 20대 구직자의 한숨이 깊다. 이런 상황에서 슈퍼사이클을 맞은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대규모 채용 방침을 발표했다.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그룹 공채를 유지 중인 삼성은 9일 상반기 채용계획을 공개했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 18개사가 참여해 4월 삼성직무적성검사(GSAT), 5월 면접을 실시한다. 올해 삼성의 신규 채용 규모는 1만2000명으로 예년 대비 2000명 늘었다. 특히 반도체 분야 채용 인원이 크게 확대됐다고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4일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삼성전자의 영업 실적이 많이 올라 좀 더 채용할 여력이 생겼다”고 했다.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달성한 SK하이닉스도 10일부터 신입사원 모집에 나선다. SK하이닉스를 포함한 SK그룹의 올해 채용 규모는 신입과 경력을 합쳐 8500명이다. 2021년부터 수시 채용으로 전환한 SK하이닉스는 올해 ‘탤런트 하이웨이’라는 새 채용 시스템을 통해 경력사원뿐만 아니라 신입사원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주기로 했다. “경험 쌓을 기회는 안 주고 경력자만 뽑으려 한다”는 취업준비생들의 하소연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취업은 개인의 문제지만 취업포기자를 장기간 방치하면 사회적 문제가 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가 대표적이다. 버블 붕괴 직후인 1990, 2000년대 취업 빙하기를 경험한 이들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두고두고 사회에 부담이 됐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니트족(구직 단념자) 등이 늘며 가정 내 갈등으로 이어지고 저출산도 심화됐다.
▷한국에서도 2020년 팬데믹을 기점으로 일도, 구직 활동도 안 하는 ‘그냥 쉬었음’ 인구가 크게 늘었다. 특히 20대 쉬었음 인구는 지난해 40만8000명으로 3년 새 5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 어학 점수, 자격증, 공모전, 인턴 등 할 수 있는 걸 다 했음에도 취업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자 구직을 단념한 청년들이다. 기업이 즉시 활용할 경력직만 찾는 동안 서류와 면접 탈락을 반복하다 주저앉은 걸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공채든 수시 채용이든 중요한 건 청년들에게 직무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대와 30대의 고용률 격차는 최근 13년 동안 2배 이상으로 벌어졌는데 주된 원인은 경력직 위주의 채용 관행이었다. 기업은 미래 인재를 확보할 수 있고, 정부는 향후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신입 채용의 훈풍이 반도체 외 분야로도 퍼져가기를 기대한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03-11 ‘한 아비는 열 아들을 길러도…’

외모, 성격, 학력, 직업, 자산, 집안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을 요즘 결혼 시장에선 ‘육각형 배우자’라 부른다. 이 중 ‘집안’을 볼땐 배우자 부모의 노후 대비 여부도 따지는데, 부모의 자립도는 배우자의 직업만큼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대출 없는 자가(自家) 1채, 연금을 포함해 월수입 300만 원에 아플 때를 대비한 1억 원 이상의 현금을 갖고 있어야 합격권에 든다고 한다. 자녀의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해선 자녀에게 손 벌릴 생각을 접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국민 의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를 부양할 책임이 자식에게 있다’는 데 동의한 응답자는 20.6%였다. 이 조사를 처음 시작한 15년 전 53%가 부모 부양에 동의한다고 답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드는 소식이다. 저출산 현상으로 부양할 자식은 줄었으나 부모의 평균 수명은 늘어 부양 부담이 커진 데다, 가족이 전담해 온 돌봄 책임을 사회가 나눠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로 보인다.
▷요즘엔 부모들도 자립심이 강하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60세 이상 고령자 10명 중 8명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생활비를 마련하고, 10명 중 7명은 자녀와 따로 산다. 자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벌어 따로 사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은퇴한 부부의 월평균 적정 생활비는 300만 원, 연금 수령액은 110만 원이다. 이들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후로 미뤄둔 취미 생활과 여행의 꿈을 접고 생활비를 버는 데 상당 시간을 보낸다. 60세 이상 취업자는 절반에 육박한다.
▷부모 부양이 자식된 도리로 통하던 시대가 바뀌는 과도기엔 ‘낀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1960년대생이 이에 해당한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뜻에서 ‘마처 세대’라 불린다.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의 2024년 조사에서는 1960년대생의 56%가 부모나 자녀 중 어느 한쪽을 부양하고 있고, 15%는 부모와 자녀를 ‘이중 부양’하느라 월평균 164만 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 후엔 자신의 노후까지 ‘삼중 부양’을 해야 하는 처지다.
▷“한 아비는 열 아들을 길러도, 열 아들은 한 아비를 봉양하기 어렵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어느 나라든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나 보다. 더구나 ‘그냥 쉬었음’ 청년이 71만 명에, 청년 세대 전체가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다. 자식 덕 보기는커녕 자식 부양 부담만 덜어도 좋겠다는 부모들이 많다. 때 되면 부모 품 떠나 제 앞가림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이고, 자녀에게 기대지 않고 활기 있게 보내는 노후가 자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인 시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2 역사적인 BTS 광화문 공연

군 복무를 마친 방탄소년단(BTS)이 5번째 정규 앨범 ‘아리랑’을 들고 복귀하는 21일 공연은 대한민국 모두가 치르는 잔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광장 문화’를 낳은 우리의 앞마당 광화문광장이 야외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 남쪽 시청역 인근까지 2만2000명 규모의 관람 구역이 마련된다. 각국에서 손님이 몰려들면서 최대 23만 명이 운집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공식 국가나 마찬가지인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질 것으로 예상되는 현장을 넷플릭스가 190개국에 생중계한다. BTS 공연의 배경으로 당일 서울의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타는 것이다.
▷BTS 리더 RM은 앨범명이자 투어명인 ‘아리랑’에 대해 “저희다운 게 뭐냐, 저희가 어디서 출발했냐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2013년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 BTS가 데뷔했을 때 K팝의 상징이 될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다지더니 한국 가수 최초, 한국어 노래 최초로 빌보드 차트를 석권했다. 이번 앨범의 선주문량이 400만 장을 돌파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팬덤을 거느리고 있다. 대중 문화의 변방이었던 한국에선 상상조차 어려웠던 일을 그들이 해냈다.
▷서울 곳곳은 이미 ‘BTS노믹스’로 들썩이고 있다. 공연 당일 서울 도심 호텔은 객실이 동났다. 인근 카페, 편의점 등은 외국어 가능 직원을 구하고 컵라면, 핫팩 등을 평소 물량의 몇 배씩 늘렸다고 한다. 백화점, 면세점은 외국인 손님 맞이에 분주하다. 광화문 대형 전광판은 기업뿐 아니라 BTS 팬클럽인 아미(ARMY)까지 가세해 광고 특수를 누리고 있다. 다음 달부터 차례로 공연이 열리는 경기 고양, 부산까지 ‘BTS노믹스’ 온기가 퍼져 나가고 있다.
▷워낙 사람이 몰리다 보니 암표가 수십 배 가격에 거래된다. 관광지 길거리 음식부터 바가지요금이 극성을 부린다. 서울시가 나서 시장 교란 행위 단속에 나섰지만, 상인들의 자정 노력 없이는 한계가 있다. 안전 관리에도 비상이 걸렸다. 공연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명당’ 자리를 선점해 노숙하고 인파까지 몰려들면 자칫 사고가 날까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서울시는 사고, 화재 위험이 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점검했고 경찰은 인파 흐름을 통제하며 테러에 대비한 특공대까지 배치한다.
▷사실 BTS와 한국의 서사는 꼭 닮은 데가 있다. 대중 문화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올라선 BTS의 성공기는 한국이 지금과 같은 경제력과 문화력을 갖게 되기까지 걸어온 길과 겹쳐 보인다. 이번 ‘아리랑’ 공연은 그 성공을 자축하고 널리 알리는 축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손님들이 그 축제를 한껏 즐기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한국의 서사가 널리 알려지도록 제대로 손님을 치러야 할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13 구두 선물

겨울철이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종종 올라오는 따뜻한 목격담들이 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신고 있던 신발을 노숙인에게 벗어주는 사람을 봤다는 내용이다. 신발을 벗어주면 자신이 차가운 바닥과 뾰족한 물질에 노출되기에 선뜻 하긴 어려운 선행이다. 이런 사람들은 ‘제2의 크리스’라 불리기도 한다. 2012년 크리스 더블디라는 캐나다 버스 기사가 맨발로 걷던 노숙인에게 신발을 벗어준 일이 널리 알려진 이후부터다.
▷최근 화제가 된 한 여성화 브랜드 ‘착한구두’의 선물은 응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회사 입사 면접에서 떨어진 한 지원자는 “저희 신발이 후보자님의 내일에도 닿기를 바란다”면서 발 사이즈를 묻는 문자를 받았다고 한다. 문자에는 “앞으로 모든 길 위에서 발걸음만큼은 조금 더 가볍고 편안하길 바란다”는 응원도 담겼다. 그는 새 구두 덕분인지 취업에도 성공했다는 얘기를 X(옛 트위터)에 올렸고, 수백만 명이 조회했다.
▷교제 중인 이성에게 신발을 선물하면 떠나간다는 속설이 있다. 신발이 ‘이동’을 위한 수단이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말이 생긴 듯하다. 실제로도 신발 선물을 꺼리는 연인이 꽤 있다. 하지만 가족에게까지 그런 미신이 닿진 않는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주인공은 결혼을 앞두고 생전 처음 아버지에게 선물을 한다. 자신과 버진로드를 함께 걸을 때 신을 새 구두다. 무뚝뚝했던 딸의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긴 구두는 너무 커서 불편하지만, 그 마음만으로 충분했던 아버지는 “딱 맞다”며 기뻐한다.
▷이유는 달라도, 큰 구두를 선물받고 바꾸지 못하는 이들이 현실에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플로샤임’ 브랜드 구두를 선물받은 고위공직자들이 그렇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올해 초 J D 밴스 부통령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이 구두를 신은 모습이 포착됐는데, 뒤꿈치가 손가락 두 개는 들어갈 만큼 남았다고 한다. 트럼프가 발 크기를 눈대중으로 짐작해 주문했기 때문이다. 백악관 참모 여럿과 일부 공화당 의원도 같은 구두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조금 불편하다고 다른 구두를 신었다간 불충하다거나 팀워크를 깬 행동으로 오해받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정치인들이 ‘낡은 구두’로 서민 이미지를 부각시키곤 하지만, 트럼프처럼 자신이 즐겨 신는 구두를 직접 선물한 사례가 흔한 건 아니다. 내가 좋으면 남도 좋아할 것이란 트럼프식 일방주의가 드러나는 장면일 수 있겠다. ‘트럼프 구두’는 또 그가 얼마나 가까운 측근인지를 확인하는 표식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 구두는 145달러 정도로, 억만장자 트럼프의 신발치고는 저렴하다. 백악관에선 선물로 받기 전 스스로 구매해 은근히 충성심을 드러내는 참모도 더러 있을 것 같다.
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03-14(토) 美 법원서 제동 걸린 ‘AI 구매 대행’

2022년 인공지능(AI) 챗GPT가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사람처럼 알아듣고, 사람과 같은 말투로 답변한다는 데 있었다. 기존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의 서비스와 가장 차별화된 점이었다. 부족했던 정확성마저 개선되면서 AI의 활용도는 빛의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호시탐탐 선을 넘으려는 분야가 바로 사람의 일을 대신 해주는 ‘에이전트 기능’이다. AI 구매 대행이 대표적인데, 미국에서 일부 제동을 거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퍼플렉시티의 AI 에이전트 ‘코멧’에는 쇼핑 자동화 기능이란 게 있다. 코멧이 이용자가 알려준 아이디로 아마존에 대신 접속해 물건을 고르고 주문과 결제까지 완료하는 것이다. 아마존은 사람이 아닌 코멧의 접속을 허용한 적이 없다며 작년 11월 퍼플렉시티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은 10일 아마존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코멧의 해당 기능을 일정 기간 비활성화하도록 했다. AI가 사람 대신 쇼핑을 하려면 실제 구매 활동이 일어나는 플랫폼 기업으로부터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못 박은 셈이다.
▷아마존이 코멧의 진입을 막아선 건 실은 ‘광고 매출’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많이 팔려면 얼마나 구매자 눈에 잘 띄는지가 중요한데, 좋은 위치를 확보하려면 광고비를 내야 한다. 아마존이 이렇게 번 돈이 작년에만 약 700억 달러다. AI 에이전트가 알아서 물건을 사면 광고주들은 아마존이 아닌 코멧 운영사인 퍼플렉시티에 광고를 하려 할 테니 급한 대로 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런데 법원 결정 바로 다음 날 아마존이 보인 ‘이중적’ 행태에 많은 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사 AI 에이전트가 외부 플랫폼으로 이동해 구매 대행을 하는 ‘바이 포 미(buy for me)’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외부 AI에는 철저히 문을 닫으면서 자신은 외부 플랫폼들과의 파트너십 계약을 통해 AI 활동 영토를 넓힌 것이다. 아마존은 매월 3억 명 이상이 이용하는 디지털 커머스 시장의 절대 강자다. 웬만한 제조사 판매몰이나 중소 쇼핑몰은 그런 아마존의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이번 미 법원 결정으로 각 플랫폼이 외부 AI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도록 최소한의 ‘방패막’을 갖게 된 건 분명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마존 같은 강자만 유리해진 게 아닌가라는 우려도 나온다. 빅테크들의 AI 에이전트 공세 속에서 다양한 중소 플랫폼이 가진 개성과 특징, 브랜드 가치 등은 무의미해질 수 있다. 영화, 음악, 문학 같은 콘텐츠 영역에서도 AI에 선택되기 쉬운 ‘정답형’만 살아남을지 모를 일이다. AI 발전은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되지만, AI가 인간을 ‘대체’하지 않고 ‘보조’해야 한다는 대원칙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03-16(월) 트럼프 방중 코앞에 뚫린 北-中 여객 열차길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압록강 철교는 북-중 관계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코로나19 확산 전까지 열차들이 북-중 교역의 70%를 차지하는 이 다리를 수시로 오갔다. 중국 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들이 열차에 몸을 실었고, 평양을 구경하려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좌석을 메웠다. 유엔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북한 노동자가 중국에서 수억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이 2019년 관광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2억 달러 가까이로 추정되는데 중국인 관광객이 95%였다.
▷2020년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자 북한이 먼저 국경을 닫았다. 열차는 물론이고 평양과 베이징을 오가는 항공편까지 모두 끊겼다. 팬데믹 시기 북-중 교역액은 2019년의 10%대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6년 만인 12일 북-중 여객 열차 운행이 재개됐다. 2022년 화물 열차 운행길만 열린 상태였다. 30일부터는 중국 항공사의 베이징∼평양 노선도 6년 만에 다시 운항한다. 그간은 북한 고려항공만 오가고 있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코로나19 종식 선언을 한 것이 2022년이다. 경제난을 겪는 북한이 반길 열차길과 하늘길의 전면 개방은 4년이나 ‘지각’한 셈이다. 사실 지난해 김 위원장의 방중 전까지만 해도 북-중은 서로 얼굴을 붉혔다. 2024년 중국의 대규모 지진 때도, 북한의 압록강 대홍수에도 위로 전문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해 북-중 정상이 2018년 다롄 회담 때 함께 산책한 걸 기념한 발자국 동판이 제거되는가 하면, 중국은 대북 제재 준수를 이유로 중국 내 북한 노동자의 전원 귀국을 압박했다.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김 위원장이 핵보유 노선으로 방향을 튼 것이 1차적 원인이었다. 1993년부터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유지해 온 중국이 이를 선뜻 수용할 수는 없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속도로 밀착한 북-러도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김 위원장은 북-러 관계가 대외정책의 1순위라고 선언했고, 러시아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중재자를 자처했던 중국이 이를 지지하기는 어려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재집권하자 상황이 또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전방위로 압박하면서 김 위원장에게는 만나고 싶다는 뜻을 거듭 전했다. 13일에도 “김 위원장을 만나는 건 참 좋다”고 했다고 김민석 국무총리가 전했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1기 때도 싱가포르, 하노이 회담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먼저 찾았다. 시 주석에게 김 위원장과의 관계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과시할 수 있는 핵심 지렛대인 셈이다. 이달 말∼4월 초 미중 정상회담의 민감한 거래를 앞두고 시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을 얻을 카드를 꺼내 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03.17 ‘페트로 달러’ vs ‘페트로 위안’

미국의 글로벌 패권을 지탱하는 두 축은 ‘군사력’과 ‘달러’다. 그리고 이 둘이 맞물리는 지점에 ‘페트로(Petro) 달러’가 있다. 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협정으로 출범한 페트로 달러 체제에선 산유국은 달러로 석유를 거래하고 그 수익을 미 국채에 투자하고, 미국이 반대급부로 안보를 보장해 준다. 덕분에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특권을 누리며 막대한 재정·무역 적자 속에서도 달러를 마음껏 찍어낼 수 있었다.
▷CNN은 13일 “이란 정부가 원유를 중국 위안화로 거래하는 유조선만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불량 국가’로 찍혀 미국 주도 금융결제망에서 퇴출당한 이란의 원유 90%를 사들이는 ‘큰손’이다. 이란으로선 봉쇄 중인 호르무즈 해협을 선별적으로 열어 중국과의 에너지 협력을 확대하고, 페트로 달러 시스템에도 균열을 내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실제로 이란은 지금도 중국 유조선에 대해선 일부 통행을 허용하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20일 가까이 이어지면서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인도, 튀르키예 등은 자국 선박 통행을 위해 이란과의 개별 협의에 나섰다. 이들 국가가 위안화 결제를 받아들이면 세계 원유의 20%가 지나는 길목이 위안화 석유 거래의 전초기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2018년경부터 ‘페트로 위안’을 추진해 온 중국 정부로선 현재 5∼10%에 머무는 위안화 석유 결제 비율을 크게 끌어올릴 기회다.
▷반면 페트로 위안의 부상은 미국 입장에선 악몽에 가깝다. 위안화 거래가 확산되면 산유국의 미국 국채 수요가 줄어 금리가 오르고 막대한 부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 달러 가치 하락과 함께 기축통화국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과거 페트로 달러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라크는 2000년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에서 유로로 바꿨지만, 미국은 이라크전 직후인 2003년 다시 달러로 되돌렸다. 최근 러시아, 인도 등이 위안화 거래를 확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원유 결제의 80%가 달러화인 것도 미국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다.
▷중국은 “군함을 보내라”는 미국의 압박에도, “페트로 위안을 돕겠다”는 이란의 구애에도 신중하다. “미국의 이란 폭격에 반대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히는 수준이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으로서 에너지 수급 안정이 최우선인 탓일 것이다. 그렇다고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야심까지 사라진 건 아닐 터다. 에너지와 금융, 지정학적 이해까지 뒤엉킨 호르무즈 대치가 달러화와 위안화의 위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우리도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03-18 ‘봉대산 불다람쥐’

지난달 21일 경남 함양군에서 발생한 산불이 올해 첫 대형 산불로 번지자 주민들은 방화를 의심했다. 올해 들어서만 벌써 인근에서 여러 차례 산불이 발생해서다.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버섯, 약초를 캐며 지내던 60대 김모 씨가 수상쩍다고들 했다. 경찰이 폐쇄회로(CC)TV 등을 분석해 보니 발화지역 근처엔 항상 김 씨의 차량이 있었다. 그가 다녀간 뒤 2시간 정도 지나면 불길이 치솟았다. 경찰은 야산 세 곳에 불을 지른 혐의로 김 씨를 긴급 체포해 16일 구속했다. 초범이 아니었다. ‘함양 산불’은 그의 99번째 방화일 가능성이 커졌다.
▷김 씨는 과거 울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연쇄 방화범인 ‘봉대산 불다람쥐’였다.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7년 동안 울산 동구 봉대산과 마골산 일대에서 96차례나 불을 냈다. 처음엔 등산객의 실화로 여겨졌지만, 반경 3km의 좁은 범위에서 너무 자주 불이 나자 경찰은 방화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산 곳곳에 산불감시원을 매복시키고 수사 전담팀까지 꾸렸지만, 방화범은 날다람쥐처럼 유유히 빠져나갔다. 500만 원으로 시작된 현상금은 3000만 원, 1억 원을 거쳐 3억 원까지 올랐다.
▷김 씨는 매년 겨울, 특히 주말에 주로 범행을 저질렀다. 사흘 연속으로 불을 낸 적도 있고, 하루 세 곳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처음에는 주로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수준이었지만 갈수록 수법이 교묘해졌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새끼처럼 길게 꼬아 불을 붙여 ‘지연 방화’를 유도했다. 금속 너트에 성냥과 휴지를 묶어 불을 붙인 뒤 멀리 던지는 수법도 썼다. 산불 감시 상황을 확인하려 산불감시원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미궁에 빠진 범행은 2011년 3월 꼬리가 밟혔다. 아파트 단지 CCTV에서 흔적이 발견됐다. 잡고 보니 방화범 김 씨는 방화 지점에서 500m 떨어진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울산의 한 대기업에 다니던 50대 가장이었다. 가정불화와 금전 문제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다고 했다. 김 씨는 37차례 불을 낸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산불방화죄 공소시효가 7년이어서 2005년 이후 범행만 기소됐다.
▷출소 후 5년 만에 다시 불을 지른 김 씨는 “최근 뉴스에서 산불 소식을 보고 희열을 느껴 충동을 참지 못했다”고 했다. 10년을 복역하고도 가슴속 뒤틀린 불길이 꺼지지 않은 것이다. 그의 잘못된 선택에 축구장(7140m²) 328개 면적인 산림 234ha가 피해를 입었다. 방화는 유독 재범률이 높다. 지난해 경기 의정부의 한 오피스텔에서 불을 지른 60대는 방화미수 혐의로 복역한 후 출소 하루 만에 범행을 저질렀다. 방화 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은 물론이고 재범을 막기 위한 특별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19 “빌렸다” “모조품”… 이제야 “받긴 받았다”

김건희 여사는 2022년 6월 나토(NATO) 순방 때 착용했던 반클리프아펠 목걸이의 출처에 대해 계속 말을 바꿔왔다. 순방 직후 논란을 빚자 “지인에게 빌린 것”이라더니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엔 “2010년경 모친 선물용으로 모조품을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특검이 김 여사 오빠의 처가에서 목걸이를 찾아냈을 땐 “오빠에게 선물한 모조품”이라고 또 말을 뒤집었다. 그 와중에 해당 모델이 2015년 처음 출시됐다는 제조사 측 설명도 나왔다.
▷김 여사의 주장대로라면 원본이 나오기 전에 만든 짝퉁을 모친에게 선물했고, 12년 뒤 영부인 신분으로 빌려서 착용했으며, 이를 다시 오빠에게 ‘선물’했다는 말이 된다.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이 “내가 목걸이를 줬다”고 자수하면서 김 여사의 해명은 더 들어볼 것도 없는 수준이 됐다. 이후에도 수수 혐의를 줄곧 부인하던 김 여사는 17일 매관매직 혐의 사건 첫 공판에서 반클리프 목걸이를 받았다고 결국 인정했다. 김 여사 오빠의 처가에서 나온 모조품은 심어놓은 조작 증거란 사실까지 자백한 셈이 된다.
▷김 여사는 이 회장에게서 받은 반클리프 목걸이에 대가성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다. 6000만 원대 목걸이가 윤 전 대통령 당선 축하 선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 회장은 당선 직후인 2022년 3월 김 여사에게 목걸이를 줬다. 그 후 석 달 뒤 이 회장의 맏사위인 박성근 전 검사가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이 회장은 김 여사에게 사위의 관직을 부탁했다고 한다. 김 여사가 목걸이를 받고 얼마 뒤 “목걸이가 아주 예쁘다. 도와드릴 게 없느냐”고 하자 이 회장이 인사 청탁을 했다는 게 특검의 수사 결과다.
▷김 여사는 통일교 금품 수수 사건 재판에서도 샤넬 백 2개를 받았다고 뒤늦게 시인한 적이 있다. 이때도 받은 건 맞지만 대가성은 없었다고 했다. 이런 ‘일부 시인’ 전략은 실제 효과를 발휘했다. 재판부가 샤넬 백 중 1개를 대가성 없는 단순 선물로 판단해 유죄 리스트에서 빼준 것이다. 가방이 전달됐던 바로 그 시점에 청탁이 이뤄진 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통일교 사건 1심 판결은 ‘매관매직 재판’에 임하는 김 여사에게 힌트가 됐을 수 있다. 서희건설로부터 받은 반클리프 목걸이는 우겨봐야 소용이 없다는 판단 아래 받은 사실을 인정하되, 목걸이를 받던 그 자리에서 청탁이 있었던 건 아니니 대가성을 부인해 무죄를 받겠다는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일교 1심 판결 때와 같은 결과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한 전 총리는 비서실장 인사에 대해 “윤 전 대통령이 우리 박 전 검사님을 딱”이라며 ‘윤심(尹心) 인사’였다는 걸 밝힌 바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20 ‘네이밍 앤드 셰이밍’

국세청은 매년 12월 국세 체납액이 2억 원 이상인 고액·상습 체납자의 인적사항을 공개한다. 지난해 신규 공개 대상자는 개인 6848명, 법인 4161곳이나 됐다. 체납자를 압박하고 성실 납부를 유도하려는 일종의 ‘망신 주기’ 전략이다. 앞으론 주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기업들의 명단도 공개될 예정이다. 대상자 선정 기준은 ‘주가순자산비율(PBR)’이다.
▷금융위원회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자본시장 안정과 정상화를 위한 간담회’에서 PBR이 1배 미만인 ‘저(低)PBR 기업’을 집중 관리하겠다고 했다. PBR은 시가총액을 기업이 보유한 총자산으로 나눈 비율인데, PBR이 1을 밑돈다는 것은 기업을 청산했을 때의 가치보다 시장에서 평가받는 가치가 낮다는 뜻이다. 금융위는 ‘네이밍 앤드 셰이밍(Naming and Shaming·이름을 밝혀 망신 주기)’ 방식으로 관리하겠다고 했다. 동일 업종 기업끼리 PBR을 비교해 2개 반기 연속해 하위 20%인 기업의 명단을 반기마다 공개하고, 종목명에 ‘저PBR’ 꼬리표를 붙이는 식이다.
▷PBR이 낮은 기업에 대한 압박은 일본의 밸류업 정책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3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상장기업에 ‘자본비용과 주가 의식 경영’을 요구했다. PBR 1배 미만인 기업에는 기업가치 개선 계획을 공시하도록 했다. 다음 해부터는 개선 계획을 잘 짠 기업과 그러지 못한 기업의 명단을 공개했다. 법적 제재보다는 시장의 압박을 통해 참여를 유도했다. 일본 기업들은 앞다퉈 개선 대책을 내놨고, 일본 증시는 상승세를 타면서 2024년 40,000엔 선, 지난해 말 50,000엔 선을 넘어섰다.
▷한국 기업들의 PBR은 지난해 5월까지만 해도 평균 0.8∼0.9배 수준에 머물렀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저개발 국가보다 낮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지난해 이후 기록적인 주가 상승으로 지난달 말 기준 1.6배까지 올라왔지만, 미국(5.4배) 일본(2.6배)은 물론이고 2.4배 수준인 신흥시장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내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의 절반가량이 PBR 1배를 밑도는 실정이다.
▷한국 기업들의 자산 대비 주가가 유독 낮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주주환원에 소홀했고 지배구조가 취약해 기업이 돈을 벌어도 주주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았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해 PBR이 낮은 제조업의 비중이 높다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만성적인 주가 저평가 상태를 방치하는 경우는 바로잡아야겠지만, 업종별 특성과 회계 기준의 차이 등을 두루 고려해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명단 공개의 목적은 단순한 기업 망신 주기가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한 제값 찾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21(토) 日 파병 요청해 놓고 ‘진주만 기습’ 꺼낸 트럼프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히로시마-진주만 상호 방문은 미일 동맹의 역사적 화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하와이주 진주만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대신 아베 총리 등을 두드리며 “가장 치열했던 적이 동맹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이처럼 일본 정상 앞에서 진주만 공습을 직접 거론하길 삼갔고, 동맹의 가치를 부각하는 맥락에서 간접적으로 다루곤 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달랐다.
▷발단은 19일 미 백악관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 말미에 나온 일본 기자의 질문이었다. “이란 공격을 일본 등 동맹국에 왜 안 알렸느냐. 일본인들은 혼란스러웠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기습에 대해 일본보다 잘 아는 나라가 있느냐. 그럼 왜 진주만은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고 받아쳤다. 1941년 12월 선전포고 없이 이뤄진 일본의 기습을 농담 섞어 꼬집은 것이다. 미국 측에선 웃음이 터졌지만,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굳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속보로 전했다.
▷미국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뉴욕타임스(NYT)는 브루킹스연구소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동맹의 유대를 강조해야 할 자리에서 나온 이례적이고 충격적인 발언”이라고 썼다. 보수 진영에선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진주만 공습처럼 부당했다는 말이냐는 지적이 나왔다. 한편 트럼프의 발언이 호르무즈 해협에 더 기여하라는 대일 압박용 메시지였다는 시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아베 총리를 만났을 때도 “진주만을 기억한다”며 무역 협상에서 양보를 요구한 바 있다.
▷불편한 과거사를 불쑥 꺼내 상대를 압박하는 건 트럼프 대통령의 단골 수법이다. 지난해 6월 미국을 찾은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에게는 “내일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인데 당신들에겐 썩 기쁜 날은 아니잖냐”고 물었다. 메르츠 총리는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치 독재로부터 우리가 해방된 날”이라며 넘어갔다. 올 1월 다보스 포럼에선 “(2차대전 때) 미국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독일어와 일본어를 쓰고 있었을 것”이라며 유럽 동맹국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독일과 달리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일본에선 아직도 ‘대동아(大東亞) 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을 정당화하는 시각이 남아 있다. 아베 총리가 진주만까지 가서 헌화를 하고도 미국에 사과를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외교적 결례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이라는 문제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03-23(월) “안녕, 서울. 우리 돌아왔어”

“안녕, 서울. 우리 돌아왔어(We’re back).” 3년 9개월 만에 다시 뭉친 방탄소년단(BTS)의 복귀 공연은 리더 RM의 간결한 인사로 시작했다. 이어 경복궁, 광화문, 그리고 그 앞 월대까지 ‘왕의 길’이 비치고는 민요 ‘아리랑’ 선율이 삽입된 신곡 ‘보디 투 보디(Body to Body)’가 흘렀다. 태극기의 건곤감리를 응용한 미디어아트도 화려했다.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힙하게 소화한 이들을 보며, ‘국뽕’이라고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신곡 ‘에일리언스(Aliens)’에는 ‘김구 선생님, 어떠신가요(Tell me how you feel)’라는 소절이 있다.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는 ‘문화의 힘’을 갖기를 꿈꿨던 김구 선생에 대한 헌사로 들렸다. 한국적인 것을 숨긴 채 세계적인 것을 따라 하기에 급급했던 우리였다. 이날 190여 개국에 생중계된 BTS 무대는 우리가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가 한국을 보고, 한국을 입고, 한국을 즐겼다. 한국적인 것이 매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를 품은 광화문 일대는 주말 동안 BTS 팬들의 놀이터였다. 광화문 거리는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전광판을 통해 BTS 영상과 음악이 흘렀다. 어디서나 응원봉을 흔들며 춤을 추는 BTS의 팬클럽 ‘아미(ARMY)’ 회원들을 볼 수 있었다. 신문의 특집 섹션도 여럿 발행됐다. 동아일보도 ‘BTS 컴백 기념 특별판’을 배포했는데 아미들은 호외를 굿즈처럼 소중히 챙겨 갔다.
▷‘문화의 힘’이란 단지 K팝, K드라마의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민 의식 같은 우리 사회의 소프트파워가 뒷받침돼야 한다. 뉴욕타임스는 “광화문광장은 놀랍도록 질서정연했다”고 보도했다. 시민들은 안전한 축제를 위해 협조했다. 관객들은 공연 입장과 퇴장 시 검색으로 시간이 지연돼도 동요 없이 차분히 움직였다. 아미들은 ‘쓰레기를 치우고 떠나자’는 게시글을 공유했고, 자원봉사단을 구성해 공연이 끝난 뒤 청소를 했다. 그 덕분에 서울시 예상보다 쓰레기가 적었고 행사장은 깨끗했다.
▷BTS는 정규 5집 ‘아리랑’ 발매에 앞서 최초 아리랑 녹음본에 대한 사연을 담은 애니메이션 예고편을 공개했다. 1896년 5월 8일 자 워싱턴포스트에는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워드대로 유학 간 한국 청년 7명이 아리랑을 불렀고, 이를 인류학자가 축음기로 녹음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영감을 받아 당시 태평양을 건넜던 한국인 유학생 7명과 광화문광장 공연을 위해 경복궁 앞에 선 BTS 7명이 교차하는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BTS는 한이 서린 슬픈 아리랑을 신나고 진취적인 노래로 다시 불렀다. 지금의 아리랑은 그래야 맞을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24 반도체 품귀에 머스크 “내가 만들겠다”

일론 머스크는 몽상가다. 하지만 그가 진짜 무서운 건 막대한 자금을 무기로 그 꿈을 현실화한다는 점이다. 머스크의 눈은 화성을 향하고 있다. 정확히는 인류의 화성 이주가 목표다. 2024년 10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 등장했을 때도 ‘OCCUPY MARS’(화성을 점령하자)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그 꿈을 위해 인공지능(AI), 로봇, 우주선까지 손에 넣은 머스크가 반도체까지 직접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머스크는 22일 미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초대형 반도체 공장인 ‘테라팹(Fab)’ 건설을 공식화했다. 일주일 전 X(옛 트위터)에서 예고한 대로다. 그는 “테라팹을 짓지 않으면 필요한 만큼의 칩을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외부 위탁 생산만으로는 미래 반도체 수요에 대응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테라팹은 테슬라 자율주행차와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우주 데이터센터 등에 쓰일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다. 대만 TSMC가 자신의 공장을 ‘기가팹’으로 부르곤 하는데, 기가(10억)보다 1000배 큰 숫자인 테라(1조)를 공장 이름에 붙였다.
▷마치 ‘기가팩토리’ 탄생의 데자뷔 같다. 머스크는 2013년 “전 세계 배터리 생산 능력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하나의 공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머스크 특유의 ‘허세’라는 부정적 시선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미 네바다주에서 전기차와 배터리를 만드는 1호 기가팩토리가 문을 열었다. 테슬라가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을 장악한 데는 미 캘리포니아주, 중국 상하이, 독일 베를린까지 확장된 기가팩토리의 뒷받침이 절대적이었다. “답답하면 내가 만들면 그만”이라는 머스크식 투자 본능이 10여 년 만에 재등장한 셈이다.
▷다만 반도체는 머스크에게도 쉬운 도전이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극강의 실력을 쌓아온 삼성도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7%에 그친다. TSMC는 파운드리 사업만 하고,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만 만든다. 반도체 미세공정은 이미 1나노(10억분의 1)대에서 경쟁하고 있어 후발주자에겐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 하나씩도 어려운데 머스크는 AI 칩과 메모리 모두를 만드는 데다 설계, 제조, 패키징까지 수직 계열화하겠다는 구상이라고 한다. 아무리 머스크라도 성공 가능성을 높게 점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머스크에게 지금 가장 아쉬운 건 시간이다. 그는 발사 비용을 100분의 1로 줄인 재사용 로켓을 개발해 우주 시대를 성큼 앞당겼다. 그러니 사업의 빠른 진척을 가로막는 ‘반도체 공급난’을 하루빨리 풀어내고 싶을 것이다. 테라팹의 성공과 별개로 거대한 메기의 등장에 긴장한 기존 기업들이 반도체 공급 속도를 높인다면, 이 또한 머스크가 원하는 결과물일 수 있다.
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03-25 모사드의 오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정보력은 지난달 28일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암살 때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하메네이 경호원들의 차량 번호와 출퇴근 경로를 꿰고 있던 모사드는 수도 테헤란의 교통 카메라를 해킹해 이들이 비밀 관저로 향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또 외부에서 경호원들에게 위험 징후를 알리지 못하도록 주변 기지국을 교란시켜 전화를 걸어도 ‘통화 중’ 신호가 뜨게 했다. 결국 관저 지하 벙커에 모인 하메네이와 주요 수뇌부는 이날 오전 9시 45분 일거에 제거됐다.
▷모사드의 정보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마음도 움직였다. “이란을 침공하면 며칠 내에 반대 세력을 규합해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모사드의 보고가 트럼프의 공습 결정에 영향을 줬다는 미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달 28일 이란 공격 직후 이란 국민들에게 “우리가 작전을 끝내면 정부를 장악하라. 이란 정부는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반정부 시위로 이란 정권이 흔들리는 지금이 핵을 폐기시킬 적기로 본 것 같다.
▷하지만 수뇌부가 사라지면 정권이 무너질 것이란 정보는 오판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쟁 한 달이 다 되도록 이란 정권은 건재한 상태다. 핵심 세력인 혁명수비대는 무력 집단인 동시에 석유 등 국가 기간산업까지 장악하고 있다. 이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백업 시스템을 촘촘히 갖춰 수뇌부가 제거되면 곧바로 후계자가 채워지는 구조다. 하메네이보다 더 강경한 차남이 뒤를 잇게 된 가운데 반대 진영은 구심점 없이 무력한 상태다. 국민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만 전쟁을 원했던 건 아니다”라면서 봉기의 동력도 낮아졌다.
▷정보기관의 오판은 적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는 과대평가할 때 종종 벌어진다. 모사드 역시 그런 오류에 빠져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을 막지 못했다. 당시 모사드는 하마스가 가자지구 국경 일대에서 공격 예행연습을 하는 징후를 포착하고도 이스라엘군 수뇌부를 교란하려는 수작인 것으로 폄하했다. 또 아이언돔 같은 최첨단 방공망을 과신해 하마스가 픽업트럭과 패러글라이딩으로 뚫고 들어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번 이란 전쟁에선 모사드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의도된 오판’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모사드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다른 정보기관들은 체제 붕괴가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모사드의 정보를 앞세워 트럼프를 설득했다고 한다. 네타냐후는 며칠 전 “이란 국민들이 정권을 무너뜨릴지 확실히 말할 순 없다. 무너지진 않아도 약해지긴 할 것”이라며 한발 빼는 태도를 보였다. “이스라엘이 왜곡된 정보로 전쟁을 유도했다”면서 사임한 미국 대테러 수장의 말대로 가장 큰 오판을 한 건 모사드의 정보를 덥석 문 트럼프일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26 김건희 조사 두 달 전 ‘불기소’ 문건

2024년 5월은 검찰이 김건희 여사 사건으로 격변에 휩싸인 한 달이었다. 5월 2일 이원석 당시 검찰총장이 디올백 의혹 전담수사팀 구성을 지시하며 수사 의지를 드러낸 게 발단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4일과 12일 박성재 당시 법무부 장관과 각각 75분, 42분간 통화하며 긴박하게 움직였고, 13일 검찰 고위직 인사가 단행됐다. 이 전 총장은 패싱한 채 이뤄진 그 인사로 ‘찐윤’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이 기용되고 김 여사 수사팀 지휘부가 몽땅 물갈이됐다. 김 여사가 박 전 장관에게 “내 수사 어떻게 돼 가고 있느냐”고 물은 게 그로부터 이틀 뒤다.
▷그 5월 말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반부패2부에서 작성했던 문건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다. 민중기 특검은 이 문건이 검찰의 봐주기 수사를 뒷받침하는 단서라고 보고 2차 종합특검에 넘겼다. ‘불기소처분서’라는 폴더에서 발견된 한글파일에 김 여사의 예상 진술과 함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문건이 마지막으로 수정된 게 그해 5월 24일로 이 전 지검장 부임 9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것만으로 검찰이 김 여사에 대해 ‘봐줄 결심’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기소와 불기소로 나눠 수사 상황을 정리한 문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는 김 여사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아 기소 여부를 검토할 단계가 아니었다. 김 여사 대면조사는 두 달 뒤에야 이뤄졌는데 벌써부터 ‘불기소’ 표현이 수사팀 문건에 등장한 것이다. 김 여사 조사 역시 “검찰청사로 불러 조사하라”는 총장 지시까지 어기고 수사팀이 대통령경호처 부속 건물로 찾아가 ‘황제 조사’ 논란을 빚었다.
▷이창수 전 지검장이 수사 검사에게 “유사 사건의 무죄 판례를 참고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보도도 나왔다. 보도에 따르면 이 지시는 수사팀이 김 여사 기소 여부를 저울질하던 9월에 이뤄졌다. 사실상의 무혐의 처분 가이드라인일 수 있다고 특검이 의심하는 이유다. 이 전 지검장은 “판례 검토는 사건 처분 전 거쳐야 하는 절차”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지검장이 지휘 계통인 차장검사와 부장검사를 건너뛰고 일선 검사에게 직접 지시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서울중앙지검은 2024년 10월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공교롭게도 5개월 전 작성했던 문건과 같은 결론이다. 특검이 확보한 문건 중에는 수사팀의 수사보고서도 있는데 수사 결과 발표 후에도 수정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보고서 작성 날짜를 최초 작성일로 바꿀지 검사들끼리 대화한 내역이 발견됐다는 보도도 있다. 수사 과정이 정상적이고 떳떳했다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밝혀내야 할 의혹이 아직 많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27 첫발 뗀 통합 돌봄

정든 집이 보약보다 낫다’는 옛말이 있다. 친숙한 동네와 손때 묻은 집은 명약이 대신할 수 없는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노인 10명 중 8명은 집에서 생애 말기를 보내고 싶어 한다. 선진국 노인 복지정책의 핵심 목표도 ‘살던 곳에서 늙어가기(AIP·Aging In Place)’다. 그래야 건강하고 존엄한 노후를 보낼 수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 신세를 질 때보다 비용도 적게 든다고 한다. 27일부터 전국의 65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한국판 AIP를 위한 제도다.
▷지금까지는 아프면 병원 가고, 거동이 불편하면 장기요양등급 받아 요양보호사 부르고, 돌봄 서비스는 구청이나 복지관에 따로 신청해야 했다. 그런데 통합돌봄이 시행되면 의료, 요양, 돌봄 서비스를 집에서 받을 수 있다. 주소지 행정복지센터에 신청하면 전문가가 방문해 건강 상태 등을 확인한 후 방문 진료, 주거 개조, 목욕 지원 같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재원은 중앙과 지방 정부 예산,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 재정에서 충당하고, 사용자가 내는 비용은 서비스 종류와 소득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본격 도입에 앞서 시행된 시범사업의 효과는 고무적이다. 통합돌봄 서비스 이용자의 연간 의료비와 장기요양비 지출이 1인당 평균 282만 원 감소했다. 요양병원 입원율과 요양시설 입소율도 낮아졌다. 치료가 필요 없는데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병원에 머무는 ‘사회적 입원’이 줄고, 안전 손잡이 등을 설치해 낙상 사고를 예방하고, 정기적인 방문간호와 투약 관리를 한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범사업에서만 결과가 좋게 나오는 ‘파일럿 편향’은 경계해야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의사, 간호사, 요양보호사가 집집마다 찾아다닐 경우 병원이나 시설에 수용해 적은 인력으로 관리할 때보다 비용이 더 들 수 있다고 반박한다. 통합돌봄을 해준다 해놓고 예산과 인력 부족을 이유로 서비스가 부실해지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가족에 전가된다. 개별적인 요구에 맞추기보다 정해진 서비스 메뉴에 끼워 넣는 행정편의주의로 흐를 위험도 있다. 한국보다 앞서 통합돌봄을 시행한 일본이 20년간 겪어온 일이다.
▷지역 간 자원 격차가 통합돌봄의 격차로 이어질 우려도 크다. 통합돌봄을 하려면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한 명씩은 있어야 하지만 의료취약지역은 공중보건의도 없는 곳이 태반이다. 최소한의 서비스도 제공하기 어려운 곳부터 챙겨야 한다. 이해관계와 돈주머니가 제각각인 여러 조직들이 수요자 중심의 통합 서비스에 기여할수록 이득을 보는 보상 시스템도 필요하다. 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노년기 삶의 질이 달라진다면 통합돌봄은 성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28(토) 반성도 사과도 없이 숨진 ‘고문 기술자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를 만났던 피해자들은 이 씨의 손이 솥뚜껑처럼 컸다고 기억한다. 그런 손으로 팔을 확 잡아당겨 관절을 뽑았다가 다시 쭉 밀어서 집어넣었다고 한다. 이 씨의 주특기였던 이른바 ‘관절 뽑기’다. ‘날개 꺾기’ ‘통닭구이’도 그가 개발한 고문 기법이었다. 간첩으로 몰렸던 납북어부 김성학 씨는 “이 씨가 상대의 신체 반응을 봐가며 고문 강도를 세밀하게 조절해 고통을 극대화시켰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냈던 이 씨는 훗날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궤변까지 늘어놨다.
▷전국으로 ‘출장 고문’을 다니며 특진을 거듭했던 이 씨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잠적했다. 11년간 숨어 살았던 그는 1999년 검찰에 돌연 자수했다. 함께 고문을 했던 동료 형사들이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받은 걸 보고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다. 고문죄 공소시효도 대부분 지난 상태였다. 이 씨는 납북어부 사건으로만 기소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 씨에게 고문을 당했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5년 복역 중이던 이 씨를 찾아갔다. 당시 김 전 장관이 “어디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가 만든 죄악이지”라면서 용서를 해줬다는 게 이 씨의 주장이다. 김 전 장관은 그날 만남에 대해 “나의 용서가 진실인지 반문하곤 한다”고 회고록에 썼다. “고문당했던 기억이 떠오를 게 분명해 면회 가던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 해마다 고문을 받은 시즌이 되면 몸서리치게 몸살을 앓곤 했다.” 머리로는 용서했지만 몸에 새겨진 상처를 지우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씨는 2012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란 책을 내며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기자와 만난 이 씨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고 했다. 정확히 무엇에 대해 사과하느냐고 묻자 “쥐어박으면 안 되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고 했다. 김 전 장관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전기 고문을 당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고 했고, 이 씨에게 고문을 받은 뒤 옥사한 피해자도 있다. 이런데도 이 씨는 자신의 행위를 ‘쥐어박는다’는 정도로 표현했다.
▷이 씨는 25일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88세까지 살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던 김 전 장관은 파킨슨병을 앓다가 64세에 눈을 감았다. 이 씨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한 뒤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은 30, 40년 뒤에야 누명을 벗었지만 당사자가 이미 세상을 뜬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씨는 출소 후 사망하기까지 20년 동안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피해자가 힘들게 내민 용서의 손길에도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난 그에겐 고문 기술자란 낙인이 역사의 형벌처럼 남게 됐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30(월) 세탁실·화장실 고장으로 철수한 20조 원짜리 항모

“이 항공모함은 미국 군사력을 상징하는 기념비이며 평화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힘을 제공할 것입니다.” 2017년 3월 미국 항공모함 제럴드 포드함 진수식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찬사를 쏟아냈다. 130억 달러(약 20조 원)를 들여서 만든 포드함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군함이자 급이 다른 최첨단 항모다. 그런데 이란과의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포드함이 전장에서 사라졌다. 군사적 이유가 아니라 승조원 생활 시설에 문제가 생겨서다.
▷‘떠다니는 요새’라 불리는 항모는 원거리 군사작전에서 필수 불가결한 핵심 전력이다. 미군은 11척의 핵추진 항모를 보유하고 있다. 이 중 10척은 ‘니미츠급’으로 불리고, 포드함은 등급이 더 높다는 의미에서 ‘포드급’으로 분류된다. 포드함은 최신형 원자로를 탑재해 니미츠급 항모보다 3배 많은 전력을 생산한다. 그 덕분에 전자기식 사출기(EMALS)로 부드럽게 항공기를 띄워 보내고 차세대 강제착함장치(AAG)로 손상 없이 착륙시키는 등 장점이 많다. 미군은 내년 인도 예정인 존 F 케네디함 등 포드급 항모를 계속 건조해 니미츠급을 대체할 계획이다.
▷지난달 28일 미군이 이란을 공습하자 지중해에 머물고 있던 포드함은 홍해 쪽으로 이동했다. 중동 인근 해상에 배치된 항모 에이브러햄 링컨함과 함께 이란 공격의 기지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세탁실에서 화재가 나면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연기가 내부로 퍼져 침구가 그을음에 오염됐고, 4500여 명의 승조원 중 400여 명은 바닥에서 자는 지경이 됐다고 미 일간 뉴욕포스트가 전했다. 빨래를 못 해 세탁물은 헬기로 옮겼다. 포드함은 결국 뱃머리를 돌려 그리스 크레타섬에 정박했다가 크로아티아로 이동해 수리에 들어갔다.
▷포드함의 특징 중 하나인 ‘친환경 화장실’도 계속 말썽이다. 진공식 오수 처리 방식의 변기를 사용하는데, 툭 하면 막힌다. 제대로 청소하려면 정박해서 산성 액체로 특수 세척을 해야 하고, 한 번에 40만 달러가 든다. 언론에 공개된 최근 포드함의 모습을 보면 꽉 막혀서 오물이 가득 찬 변기가 여럿 있다. 한번 항모에 타면 몇 달씩 선내에서 근무하는 승조원들에겐 견디기 어려운 불편이다. 미 회계감사원(GAO)에서 2020년부터 이 문제를 지적했는데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포드함이 수리를 마치려면 1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이란전에서 모습을 보긴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전투 중에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니고 생활 시설 문제로 세계 최강으로 평가되는 항모가 전력에서 이탈한 건 미군으로선 어이없는 일이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최첨단 군사 장비를 만들어도 운용 인력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걸 포드함이 보여주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31(화) 배달 앱 개인정보 털어 ‘보복대행업’

보안성이 뛰어나고 서버에 기록이 남지 않는 텔레그램은 범죄자들에게는 완벽한 은신처를 제공한다. 디지털 성범죄, 마약 유통, 투자 리딩방 사기 등이 텔레그램을 매개로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돈을 받고 오물 투척 테러 등을 해주는 보복 대행 텔레그램 채널이 조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과거 흥신소나 심부름센터를 통해 이뤄지던 사적 보복이 텔레그램의 보안 기술을 만나 기승을 부릴 조짐이 있다는 것이 경찰 분석이다.
▷보복 대행 채널 운영자들은 ‘대신 복수해 드립니다’ ‘원한을 해결해 드립니다’ 같은 문구로 의뢰인을 모집한다. 보복 대행의 서비스 종류는 인분 투척하기, 페인트로 낙서하기,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나 피해자를 음해하는 내용의 전단 뿌리기 등 다양하다. 비용은 인분 테러가 200만 원, 전단 살포를 추가하면 50만 원이 더 든다. ‘사고 위장 신체 손상’이나 ‘범죄혐의 뒤집어씌우기’ 같은 중범죄 대행을 내건 채널도 있다.
▷채널 운영자가 실제 보복을 실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낙서 알바’ ‘심부름 알바’ ‘월 500+α 보장’ 같은 모집 공고로 뽑은 젊은 ‘특공대원’들이 실행을 맡는다. 올 2월엔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에서 아파트 현관문에 음식물 쓰레기와 인분을 뿌리고 래커칠을 한 20대가 붙잡혔다. 비슷한 시기 경기 군포에선 다세대주택에 침입해 현관문에 빨간색 래커칠을 하고 협박 전단을 붙인 20대가 검거됐다. 모두 텔레그램으로 알게 된 익명의 ‘윗선’으로부터 가상화폐 60만∼80만 원 어치를 받고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텔레그램의 자동 삭제 기능 탓에 윗선까지 추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검거된 행동대원들에겐 형이 무거운 보복 범죄 대신 주거침입, 재물손괴, 명예훼손 죄목만 적용한다. 얼마 전엔 보복 대행 총책인 30대 남성을 포함한 일당 4명 전원이 구속됐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들은 올 1월 경기 시흥의 한 아파트 현관에 인분을 뿌리고 욕설 낙서를 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보복 대행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일당은 범행에 필요한 개인정보를 빼내려고 40대 남성을 배달의민족 외주사에 상담원으로 위장 취업시키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이 남성이 상담 목적 이외에 조회한 개인정보가 1000건이 넘는다고 한다.
▷어느 시대나 법은 멀게 느껴졌고 사적 제재의 유혹은 존재해 왔다. 과거와 달라진 건 보복 범죄를 의뢰하기도 실행하기도 쉬워졌다는 점이다. 스마트폰과 가상화폐 계좌만 있으면 음성적인 심부름센터를 차리거나 찾을 필요가 없다. 보복으로 얻는 이익은 크고 리스크는 적다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보복 대행은 사법 질서를 흔들고 사회적 불안감을 퍼뜨린다. 사적 보복을 공공 범죄로 엄벌해야 하는 이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