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만물상] 조선일보 2026-03/ 03.02(월) 힙 트래디션 - 03.31(화) 유료 화장실

상림은내고향 2026. 3. 14. 11:42

[만물상] 조선일보 2026-03/

03.02(월) 힙 트래디션

K팝 걸그룹 블랙핑크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곡을 들려준다는 뉴스를 접하고 지난 주말 현장에 가봤다. 이벤트 공간이 마련된 상설전시관까지 백여 m 줄을 섰다. 전시관 내 감상실 앞도 블랙핑크의 새 앨범 ‘데드라인(DEADLINE)’을 들으려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안내 직원은 “30분쯤 대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다들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걸그룹의 신곡을 박물관에서 듣는 색다른 경험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QR코드로 접속해 듣는 ‘도슨트 블랭핑크’의 유물 해설도 새로웠다. 박물관은 ‘과거를 모아 놓은 곳’이란 선입견을 깨는 경험이었다.

 

▶공연계는 블랙핑크가 ‘박물관 신곡 발표’라는 파격적인 시도를 하게 된 배경에 MZ 세대 사이에 뜨겁게 부는 ‘힙 트래디션’이 있다고 본다. ‘멋진 유행’을 뜻하는 힙(hip)에 트래디션(tradition·전통)을 합친 힙 트래디션은 전통 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거나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를 즐기는 현상을 뜻한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2020년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펼친 ‘아이돌(IDOL)’ 공연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의 총합이었다. 한복 입고 칼군무 추는 것도 낯선데, 판소리의 ‘지화자’ 추임새까지 버무려 넣었다. 미국 인기 TV 프로그램 지미 팰런쇼를 통해 미 전역에도 공개됐다. 그때까지 한국 전통 무대 공연은 부채춤이 전부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전통과 현대를 결합한 한국 힙 트래디션에 매료됐다. 활기찬 태평소와 꽹과리 소리를 녹여 넣은 스트레이키즈의 노래 ‘소리꾼’, 조선 민화 속 호랑이 그림과 산수화 문양을 배경으로 노래한 걸 그룹 아이브의 뮤직비디오도 성공적인 힙 트래디션 사례다.

 

▶노래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요즘 신세대 장인들은 자개로 문양을 넣고 옻칠로 마감한 일렉트릭 기타를 제작한다. 박물관 기념품도 고리타분하다는 선입견을 벗었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흥행 후 ‘까치 호랑이’ 배지 등 새 아이디어 상품들이 사랑받으며 뮷즈(뮤지엄+굿즈)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오는 21일 또 한 번의 강력한 힙 트래디션 무대가 펼쳐진다. 군 복무를 마치고 완전체로 돌아온 BTS가 새 앨범을 발표하는 첫 무대로 광화문 광장을 선택했다. 경복궁 근정전을 출발해 광화문 앞 월대까지 이어지는 ‘왕의 길’을 지나 광화문광장에서 새 앨범 ‘아리랑’을 선보인다. 한국인의 한(恨)의 정서를 담아내던 민요가 힙 트래디션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세계인과 함께 즐기는 무대가 펼쳐지길 기대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김태훈 논설위원

 

03.03 우표 마약

/일러스트=박상훈

 

최근 제주도 해안에서 중국산 차(茶) 봉지로 포장된 마약류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신종 마약 케타민으로, 지난해 9월 서귀포시 성산 해변을 시작으로 17차례에 걸쳐 34㎏가량 신고됐다. 국내에 마약이 대규모로 퍼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해경은 지난해 7월 대만 서부 해상에서 표류하다 발견된 마약류 일부가 1300㎞ 거리를 떠밀려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마약 조직들은 밀항으로 마약을 들여오다 단속이 확실하면 바다에 던져버린다고 한다.

 

▶마약은 인신매매, 무기, 야생동물과 함께 인류가 근절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성행하는 암시장 품목 중 하나다. 중독성이 강력하고, 적발만 되지 않으면 높은 수익을 주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 필요성이 맞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불법으로 단속하다 보니 기상천외한 유통 방법이 사용된다. 항문 등 신체 일부에 넣거나 밀봉해 삼켰다가 꺼내는 방법까지 있다. 빼낼 때는 구토제나 관장약을 사용한다고 한다. 약속된 장소에 마약을 던져놓는 ‘던지기 수법’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텔레그램과 다크웹 등을 통한 온라인 거래 역시 활발하다.

 

▶교도소는 이동 욕구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제한하는 곳이다. 그렇다 보니 금지된 것을 반입하려는 수용자들의 욕망 또한 집요하다. 교도소는 매일매일 이런 욕망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른다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 전자담배와 함께 마약도 반입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품목 중 하나다. 교도관 매수, 우편 이용, 면회인을 통해 몰래 주기, 밖에서 던져주기 등은 고전적인 수법이고 해외에선 드론으로 띄워 보내는 사례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합성 마약인 LSD를 우표 뒤에 얇게 펴 바르는 방식으로 교도소에 반입한 일당이 적발됐다. 우표 테두리에 순간접착제를 바른 다음 그 가운데에 원통형 밀대로 얇게 핀 LSD를 넣는 수법이었다. LSD는 얇은 필름 형태로 만들어 혀에 녹이는 방식으로 이용 가능한 마약이라 가능한 방법이다. 교정 공무원 수가 부족해 우편물 하나하나를 점검하기가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미국이 배경인 넷플릭스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는 마약을 액체로 만들어 편지지에 적신 다음 말려서 교도소에 반입하는 수법이 나온다. 면회 온 애인이 키스하면서 입안에 마약 포장을 넣어주는 장면도 있다. 마약을 없애려면 강력한 단속과 치료·예방이라는 두 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국 지위를 잃을 정도로 마약이 범람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접근 틀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김민철 기자

 

03.04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 제국'

“엄마는 저런 걸 사 먹으면 배앓이를 하거나 이질에 걸려 죽는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아이들이 입술이 파래지도록 빨아먹으며 단물을 삼키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내 고결한 집안의 가풍이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박완서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지금의 6070 세대를 단숨에 그들의 유년 시절로 데려간다. 설탕 대신 사카린, 우유 대신 색소를 탄 얼음과자에 불과했지만 ‘아이스케키’는 가난한 소년소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 뿐만 아니다. 아이스크림 산업은 이후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1970년 국내 최초의 콘 아이스크림인 부라보콘의 등장은 그야말로 화제였다. 영하 18°C 이하에선 부패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유통기한 표시 의무도 면제받을 만큼 관리 효율이 높았고, 냉장고 보급과 함께 집집마다 냉동실을 채우는 품목이 됐다. 여름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이스크림 통을 비우는 게 중산층의 소박한 행복이자 나름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았던 ‘아이스크림 제국’이 녹고 있다고 한다. 2015년 2조원에 달했던 빙과 산업 국내 시장 규모가 지난해 1조4000억원대로 줄었다. 주요 기업들의 영업이익도 전년 대비 30%가량 동반 하락했다. 때로 보관의 이점이 탐욕과 만나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녹아내린 제품을 다시 얼려 파는 ‘재냉동 하드’는 서걱거리는 얼음 결정을 남겼고, 포장지 안에서 비틀린 형태가 됐다. 품질에 민감해진 소비자들에게 배신감을 안겼음은 물론이다.

 

▶유통의 패러다임이 배달로 바뀐 것도 쇠락 이유다. 동네 수퍼 냉동고에서 꺼내 먹을 때는 아무 문제 없던 아이스크림은 배달이 힘들다는 치명적 문제가 있었다. 여름철 독보적이었던 아이스크림의 자리는 이제 비슷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저가 아이스 커피와 제로 음료 등으로 다양해 졌다. 아직도 골목마다 무인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수두룩하지만 과열 경쟁과 전기료·물류비 부담에 시름이 깊다고 한다.

 

▶달콤한 아이스크림 한 스푼으로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쌉싸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고단함을 달래준다. 국내 커피 수입량이 20만t을 넘어서며 사상 최대를 기록하는 동안, 아이스크림 주 소비층인 5~14세 학령인구는 10년 새 100만명 가까이 줄어버렸다. 풍요의 시대에 마주한 빙과 산업의 쇠락은, 이제 차가운 얼음 막대 하나로는 채워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달라진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어수웅 논설위원

 

03.05 종교 쇼핑 시대

사춘기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후배는 유튜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로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또 운전대를 잡으면 요란한 대중 음악 대신 복음성가를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가끔 아내와 점을 보러 가기도 하지만, 믿는 종교는 따로 없다. 역시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대학생 조카는 방학 때면 유명 사찰의 템플스테이를 친구들과 찾는다. 새벽 예불을 하고 사찰 음식을 먹으면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라 좋다고 했다.

 

▶한국은 종교가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다. 갤럽에 따르면 2004년 54%였던 종교 인구는 2024년 49%로 감소했다. 20대 이하는 더 극적이다. 열에 여덟은 종교가 없고, 나머지 둘 중 한 명도 종교는 믿지만 예배나 법회는 가지 않는다. 미국도 Z세대 40%가 무종교인을 자처할 만큼 탈종교화는 세계적 흐름이다. 종교의 우선 가치가 ‘내세에서의 구원’인데 이를 믿는 현대인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대인은 내세가 아닌 지금의 삶에 집중하며 ‘힐링’과 ‘자아 발견’에 더 무게를 두는 듯하다.

 

▶2030의 탈종교에 위기감을 느낀 기성 종교들이 ‘파격 소통’에 나섰다는 기사가 본지에 실렸다. 신부님이 얼굴 가린 채 유튜브 인생 상담을 하고, 스님이 극락왕생 제사를 인기 애니메이션 방식처럼 지낸다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 젊은 세대는 굳이 특정 종교를 찾지 않고 여러 종교 전통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요소만 골라 조합하는 것 같다. 증상에 따라 이 병원 저 병원 골라 다니는 의료 쇼핑처럼 일종의 ‘종교 쇼핑’ ‘영성 쇼핑’인 셈이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 단체는 ‘공급자’, 개인은 ‘소비자’가 됐다고 했다. 아예 종교에서 영성은 거르고, 실용적 기능이나 라이프 스타일만 취하기도 한다. 힌두교 색채를 걷어낸 채 몸매 교정용 요가를 하고, 불교를 믿지 않으면서 ‘디지털 디톡스’를 위해 사찰을 찾는 식이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가톨릭과 상관없이 자아 성찰을 위한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부작용도 생긴다. 과거 “도를 아십니까”라며 노골적으로 접근하던 일부 사이비들은 이제 ‘MBTI 사주’나 ‘성공학 강의’의 가면을 쓰고 청년들을 유혹한다. 공동체적 의식 없이 나 혼자 만의 위안에 몰입하는 영성의 개인화가 역설적으로 이런 영적 사기극에 취약한 토양도 되는 셈이다. 종교가 취향처럼 보이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찾는 것이 진정한 내적 성장인지 아니면 단순한 위안의 탐닉인지 궁금하다.

 

 /일러스트=이철원

어수웅 논설위원

 

03.06 한국 요격 미사일

나치가 개발한 첫 탄도미사일 ‘V2’가 런던에 떨어졌다. 마하 속도로 떨어지는 미사일을 당시 대공포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미·소는 V2를 발전시켜 ICBM을 만들었다. ICBM에 핵탄두가 결합하면서 공포의 차원이 달라졌다. 날아오는 핵미사일을 미사일로 막아야 한다는 발상이 이때 나왔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마하 10 이상으로 날아오는 ICBM을 정확하게 맞히는 기술이 없었다. 공중에서 핵미사일을 터뜨려 적의 핵미사일을 무력화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1세대 요격 미사일이다.

 

▶핵으로 요격하면 아군도 피해를 입는 등 부작용이 컸다. 일반 미사일을 공중 폭발시켜 파편으로 적 미사일을 요격하는 2세대 시스템이 등장했다. 이 역시 한계가 있었다. 1990년대 말 레이더로 적 미사일을 탐지하고 컴퓨터로 속도·궤도를 계산해 요격 미사일을 발사해 직접 맞춰 파괴하는 3세대 요격 미사일이 등장했다. 미국 패트리엇3가 대표적이다. ‘게이트 제어 시스템(DACS)’이 핵심 기술이다. 적 미사일과 충돌 직전엔 1㎝만 오차가 생겨도 수백m가 빗나간다. 요격체에 가스나 액체를 순간 분사하는 장치를 달아 1000분의 1초에 방향과 궤도를 수정하는 기술이다.

 

▶2000년대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급속히 늘렸다. 주한미군은 패트리엇을 쓰는데 한국은 독자 요격 미사일 개발에 나섰다. 패트리엇은 너무 비쌌고 한반도 지형엔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당시 정부는 중·러 등이 ‘미국 미사일 방어 체계에 들어가지 말라’고 압박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러시아가 빌린 돈 대신 무기를 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러 기업과 협력해 비행기를 잡는 지대공 미사일 ‘천궁1’을 개발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시킨 것이 미사일 잡는 미사일 ‘천궁2’다.

 

▶UAE에 배치된 천궁2가 이란 미사일을 요격했다고 한다. 실전에서 미사일 요격에 성공한 나라는 자유 진영에선 미국·이스라엘과 한국 뿐일 것이다. 총 하나 못 만들던 나라가 총알로 총알을 맞히는 것보다 어렵다는 수준의 군사 기술을 갖추게 됐다.

 

▶지금 중동 국가는 요격 미사일 덕분에 이란 공격을 견디고 있다. 그런데 미국 미사일은 너무 비싼 데다 미국도 모자란 실정이다. 아랍국은 이스라엘 미사일은 쓰지 않는다. 결국 한국 요격 미사일을 찾게 됐다. 천궁2는 패트리엇 가격의 4분의 1이다. 여러 중동국이 천궁2를 빨리 더 보내달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전쟁을 반길 수는 없지만 한국 방산에 시장이 열린 것은 사실이다. 방어 무기라 부담도 적다.

양승식 논설위원

 

/일러스트=이철원

 

03.07(토) 끝나지 않는 트로트 열풍

 아예 안 볼 거면 몰라도 한번 보기 시작하면 채널을 고정하게 되는 프로그램이 있다. 5일 대장정을 끝낸 TV조선 트로트 오디션 ‘미스트롯4’도 그중 하나다. 모든 회차에서 방청객과 시청자는 손에 땀을 쥐었고,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출연자와 만났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1위(한국갤럽)’로 꼽혔다. 그 자체가 명품 브랜드가 됐다.

 

▶명품은 최고의 품질과 차별화된 고객 경험을 준다. 송가인(1대), 양지은(2대), 정서주(3대)로 이어져온 미스트롯 ‘진’의 계보가 그렇다. 이 계보에 시원스런 가창력을 뽐내는 이소나가 ‘미스트롯4′를 통해 새로 가세했다. 미스트롯이 주는 차별화된 소비자 경험 중 하나가 시청자와 함께 울고 웃는 가수들의 남다른 사연일 것이다. 허찬미의 어머니 김금희씨는 딸을 응원하고 싶어 67세 나이로 자신도 미스트롯 출전에 도전했다. 적우는 투병 중인 팬의 ‘미스트롯에 출전해 달라’는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왔다. 그 사연들이 노래 밖에서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미스트롯 결승전에서 경연자의 실력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50대 1의 경쟁을 뚫고 본선 무대에 선 88팀 중 최후에 남은 5인이다. 마스터 심사단이 그들의 실력을 보증한다. 실시간 문자 투표 직전 우승을 다툰 이소나와 허찬미의 점수 차이는 단 1점이었다. 심야 문자 투표에 111만표가 참여해 최종 우승자를 정하는 방식이야말로 국민 트로트 경연인 미스트롯다운 방식이다.

 

▶이소나와 허찬미가 펼친 최후의 대결은 트로트 경연사에 남을 명장면이었다. 이소나는 파킨슨병으로 몸을 떠는 어머니를 향해 서서 ‘나는 가진 것이 없어요/ 나는 드릴 것도 없어요/ 오직 그대 사랑하는 마음 하나뿐~’이라 노래해 시청자를 울렸다. 허찬미는 13세 걸그룹 연습생으로 시작해 도전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길 반복해 온 삶을 남진의 노래 ‘나야 나’와 아이돌 춤사위로 녹여내 큰 박수를 받았다. ‘트로트 뮤지컬’ 배우라 해도 손색이 없을 퍼포먼스였다.

 

▶경연이 이어지는 12주 내내 요즘 보기 어렵다는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 큰 흥행을 일으켰을 때 ‘트로트 열풍이 뜨겁지만 두세 차례면 시들 것’이라 전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 열풍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있다. 우리 가요계와 팬들 사이에 부동의 장르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미스터트롯4’가 몰고 올 감동이 벌써 기다려진다.

 

 /일러스트=김성규

김태훈 논설위원

 

03.09(월) AI가 누르게 될 '전쟁 버튼'

/일러스트=박상훈

 

1945년 7월 첫 원폭 실험을 앞두고 핵무기 원리를 고안했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 등 70여 명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연명 상소를 보냈다. “원자력은 살상 도구가 아닌 인류의 축복이 돼야 한다”는 호소를 담은 것으로, 과학자의 양심과 국가 권력이 충돌한 역사적 장면이었다. 80년이 흐른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판박이 사건이 재현 중이다. 이란 전쟁에 AI 활용을 두고, AI 기업 앤스로픽이 미 국방부에 반발한 데 이어 오픈AI의 로보틱스 총괄 케이틀린 칼리노프스키가 사표를 던졌다.

 

▶논란의 시작은 2021년이다. 오픈AI의 연구 담당 부사장 아모데이는 핵심 인재들을 이끌고 나가 ‘앤스로픽’을 세웠다. 반발의 핵심은 ‘헌법적 AI’였다. AI에 인간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보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헌법을 먼저 가르쳐 스스로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게 안전장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앤스로픽이 이란 전쟁에 앞서 “살상 무기에 우리 기술을 쓰지 말라”며 미 국방부에 맞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 경쟁사인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군사적 활용 범위는 기업이 아닌 민주적 절차와 공직자가 결정할 몫”이라며 미 국방부와 계약을 맺었다.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쓰임새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논리다. 칼리노프스키 총괄은 “기계가 인간의 최종 승인도 없이 스스로 살상 대상을 결정하는 미래에 대해 회사가 눈을 감고 있다”는 취지의 경고를 남기고 짐을 쌌다.

 

▶트럼프 행정부는 앤스로픽을 워크(깨어 있는 척하는 좌파) 기업이라 비난하며 이란 공습 직전 이 회사 모델을 정부 납품 목록에서 제외시켰다. 한술 더 떠 미 정부는 AI 기업이 정부와 계약하려면 자사 모델의 ‘모든 합법적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는 지침도 추진 중이다. 최근 국방부 최고데이터책임자(CDO)로 가빈 클리거를 임명하며 군사 AI 도입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후회했던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돌아온 것은 “저 징징대는 과학자를 다시는 내 앞에 데려오지 말라”는 트루먼의 면박이었다. 지금 AI 거물들은 ‘피 묻은 손’을 정부의 결정이란 장갑으로 감추려 한다. 영국 연구진의 전쟁 시뮬레이션에서 AI가 핵 버튼을 누르는 확률은 95%였다. 인간의 절제와 공포가 거세된 결과다. 오로지 승률만 따지는 알고리즘이 전쟁을 결정해도 되는가. 전쟁판에 뛰어든 AI를 목격하면서 인류의 머리를 짓누르는 질문이다.

이인열 기자

 

03.10 식당 손님 반려견

애완동물이라면 질색하는 지인이 일본 여행 중 어쩌다 애견 동반 가능 호텔에 묵게 됐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가 많은 개가 사람 옆에서 밥 먹는 걸 보고 기겁했다. 이 호텔은 방마다 애견 전용 침대도 제공한다. 개의 투숙을 환영하는 웰컴 장난감과 간식도 준다. 이 호텔 하나가 아니다. ‘도쿄 애견 동반 호텔’을 검색하면 5성급 호텔이 줄지어 나온다. 호텔 직원이 개를 산책시키는 서비스가 포함된 숙박 패키지를 파는 곳도 있다.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될 지 모르겠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국민이 1년 전 1500만명을 넘어서면서 전에 없던 애견 관련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다. 주인과 개가 함께 식사하고 산책도 할 수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전국 수십 곳에 이른다. ‘비행기 타는 반려견’도 지난 5년 사이 두 배로 늘자 항공사들은 반려동물을 화물칸 아닌 탑승칸에 태우는 상품을 경쟁하듯 내놓는다. 동물에게도 탑승 마일리지를 주고 동물 이름이 적힌 탑승권을 발급하는 식이다.

 

▶몰티즈와 함께 사는 지인은 동네에 있는 애견 동반 레스토랑을 즐겨 찾는다. 그는 “처음엔 반려견 동반 식당이 주변에 한 곳뿐이었는데 어느새 5곳으로 늘었다”며 “반려견과 함께 식당에 가는 문화가 정착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전에 없던 갈등도 겪었다. 그는 개털 알레르기를 가진 친구가 모임 장소에 왔다가 개를 보고 화내는 바람에 관계가 멀어졌다고 했다.

 

▶반려동물과 함께 음식점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이 이달 초 시행에 들어갔다. 세태 변화를 법에 반영한 사례이지만 혼선도 적지 않다. 업주들은 규정이 너무 엄격하다고 한다. 매장에 출입하는 동물의 예방접종 여부를 식당 업주가 확인해야 하고 조리실에 개나 고양이가 드나들 수 없게 칸막이도 쳐야 하는데 위반하면 영업정지를 당한다. 반려동물을 동반하는 손님을 받아 매출을 올리려 했다가 기존 단골 손님이 발길을 끊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펫 휴먼화’로 먹이·돌봄·보험·장례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관련 산업 규모가 2032년 21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반려동물을 사람 좌석에 태우는 서울~제주 왕복 항공기 상품은 가격이 두 배인데도 완판됐다. 아직은 사람 대접 받는 반려동물에 대한 반색과 거부가 혼재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반려동물 확산에 따른 사회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추세로 보인다. 유모차에 아기 아닌 개가 타도 어색하지 않은 세상이 올 줄은 누가 알았겠나.

 

 /일러스트=이철원

김태훈 논설위원

 

03.11 K-방산 도시들

지난 9일 오후 4시 대구공항 활주로에 짙은 회색의 거대한 수송기가 나타났다. 아랍에미리트(UAE) 공군 소속 C-17 ‘글로브 마스터’였다. 최대 77t까지 탑재 가능한 전략 수송기가 대구까지 날아온 것은 인근 구미 산업단지에서 생산된 요격 미사일 천궁-II를 싣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의 공습을 96% 확률로 막아냈다는 ‘한국판 패트리엇’의 위력에 UAE가 조기에 미사일을 받기 위해 ‘항공 퀵’을 요청한 것이다. UAE가 우리에게 원유 600만 배럴을 긴급 공급한 배경이 이것이란 얘기도 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탄생한 구미 산업단지는 K-전자 산업이 탄생한 곳이다. 2005년 구미는 국가 수출의 10.7%를 책임졌고, 1인당 GRDP(지역내총생산)는 전국 평균의 3배에 달해 1인당 소득 4만달러 시대를 가장 먼저 열기도 했다. 한때 삼성 휴대폰 전량이 이 곳에서 생산됐고, 글로벌 디스플레이 산업을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2010년대부터 중국의 저가 공세와 휴대폰 생산 기지 해외 이전으로 공동화(空洞化)의 겨울을 맞아야 했다.

 

▶구미에 K-방산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반세기 전 자주국방을 위해 시작한 ‘율곡 사업’ 때다. 1976년 금성정밀(현 LIG넥스원)은 텔레비전 회로를 만들던 정밀 기술을 미사일의 ‘눈(레이더)’과 ‘두뇌(유도장치)’로 진화시켰다. 여기에 레이더와 지휘통제 시스템의 강자 한화시스템이 가세하며 구미는 첨단 전장 시스템의 거점이 됐다. 최근 LIG넥스원이 2000억원을 들여 증설하고, 한화시스템이 1600억원 규모의 신규 공장을 짓고 있다.

 

▶K-방산 생태계는 K9 자주포와 K2 전차를 찍어내는 창원이 ‘근육’이고, 국산 전투기를 만드는 사천이 ‘날개’라면, 구미는 천궁 같은 첨단 미사일을 생산하며 전자전을 이끄는 ‘두뇌’로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다. 창원과 사천이 전통의 기계·항공을 지키고, 구미는 쇠락하던 전자 도시의 DNA를 고부가가치 전략 자산으로 업그레이드한 보기 드문 혁신 사례다.

 

▶철강 도시에서 바이오 메카가 된 미국의 피츠버그, 노키아의 붕괴를 딛고 6G 혁신 기지로 부활한 핀란드의 오울루, 거대 크레인을 떠나보낸 뒤 친환경 산업의 거점이 된 스웨덴 말뫼는 모두 ‘도시 변신’의 상징이다. 산업화 초기 노동집약 산업으로 가난한 나라에 젖줄이 돼줬던 구미가 세계 최첨단급 무기를 만들면서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대구공항을 박차고 오른 수송기의 엔진 소리가 우리 방위산업의 미래를 들려주는 것 같다.

 

/일러스트=김성규

이인열 기자

 

03.12 포스 마쥬어

2015년 국내 개봉한 영화 ‘포스 마쥬어’는 알프스 스키장으로 휴가 갔다가 눈사태를 만난 가족 이야기다. 남편이 아내, 어린 두 자녀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눈사태처럼 보이는 눈보라가 일자 혼자 탈출한다. 실제 눈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가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힐책하자, 남편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반사신경에 따라 움직인 것”이라고 변명한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제목 포스 마쥬어(Force Majeure)는 프랑스어로 거대한 힘, 법률 용어로는 불가항력이란 뜻이다.

 

▶포스 마쥬어(외래어 표기법으로는 포르스 마죄르)는 고대 로마법부터 이어진 면책(免責) 원칙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초기엔 지진이나 대홍수 같은 천재지변에 주로 적용되다가 차츰 전쟁이나 테러, 수출입 금지나 봉쇄 같은 정부 조치, 코로나 같은 팬데믹 등으로 확대됐다.

 

▶무조건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측이 불가능하고, 계약 당사자가 통제할 수 없으며, 최선을 다해도 극복하기 어렵다는 3대 요건을 갖춰야 한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으로 아랍 국가들이 석유 수출을 금지한 1차 오일쇼크 때 전 세계 정유업체들이 고객사에 제품을 공급하지 못했지만 3대 요건을 인정받아 면책받았다.

 

▶반면 미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는 오일 쇼크로 우라늄 가격까지 5배로 폭등하자 우라늄 공급을 중단했지만 포스 마쥬어를 인정받지 못했다. 원전 매출을 늘리려 “20년간 우라늄 원료를 파운드당 8달러에 공급하겠다”고 계약한 것이 화근이 됐다. 법원은 우라늄 가격 상승이 “경영상 리스크일 뿐 불가항력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웨스팅하우스가 총 10억달러의 합의금을 물면서 회사 명운이 기울었다. 국내에서도 2008년 리먼 쇼크 때 달러와 엔화 투자로 큰 손해를 본 기업들이 “금융 위기는 불가항력”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환율 변동은 통상적인 리스크”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란 사태 이후 국내외 석유화학 업체들의 포스 마쥬어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안에 갇힌 쿠웨이트 국영석유회사와 카타르에너지 등이 공급을 중단하자 인도네시아 최대 업체인 찬드라 아스리 등 아시아 업체들이 속속 두 손을 들고 있다. 아직 국내에선 최대 에틸렌 생산업체 여천NCC 한 곳만 포스 마쥬어를 선언했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어떤 업체도 견뎌내기 힘들다고 한다. 사태가 빨리 해결되기만 바랄 뿐이다.

 

 /일러스트=이철원

나지홍 논설위원

 

03.13 한·베트남 쾌속 밀착

 1957년 이승만 정부 시절 우리나라도 외국인 유학생들을 초청했다. 그 1호는 나중에 장관까지 오른 쯔엉 공 끄우 등 베트남 청년 5명이었다. 그 작은 씨앗이 70년 만에 한국 대학가의 풍경을 바꿀 정도가 됐다. 지난해 한국에 온 베트남 유학생은 7만5144명으로 25년간 1위였던 중국(7만6541명)을 1500여 명 차로 바짝 추격했다. 1년 만에 2만명 가까이 급증한 추세로 볼 때 올해 유학생 1위 국가가 베트남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니하오’에서 ‘씬짜오’로 이동이다.

 

▶하노이의 롯데몰이 개장 2년여 만에 방문객 3000만명을 돌파하며 ‘K-라이프스타일’의 성지가 된 것은 베트남에서 한국이 갖는 위상을 보여준다. 한국에 유학한 베트남 국민이 30만명에 육박하고, 인하대 박사 출신인 응우옌 반 푹 교육부 차관처럼 곳곳 요직에 한국 유학생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 베트남 정부가 2021년 한국어를 영어와 나란히 ‘제1외국어’로 승인한 배경에도 이들이 있다. 요즘 한국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일하는 베트남 알바생 대부분은 유학생이다.

 

▶‘3·2·1’은 양국의 급속한 밀착을 보여주는 숫자다. ‘3’은 베트남이 지난해 한국의 3대 교역국이 됐다는 뜻이다. 교역 규모는 945억달러로 한일 무역보다 많았다. 현지 진출한 우리 기업 수만 1만여 개를 넘어섰다. 베트남 수출의 약 25%가 한국 기업 생산품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물량의 절반 가까이를 이곳에서 생산하며 10만명을 직접 고용한다. 베트남 경제의 4분의 1이 우리 기업에 달려 있다.

 

▶‘2’는 베트남이 한국에서 공부하는 외국 유학생 2위라는 뜻이다. ‘1’은 결혼이다. 베트남은 수년째 한국인의 국제결혼 상대국 1위다. 특히 인구 소멸 위기인 농어촌에서는 혼인 다섯 쌍 중 한 쌍(20% 이상)이 베트남인과 결혼이다. ‘사돈의 나라’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대개 이 정도의 밀착은 국경을 맞댄 인접국끼리나 가능하다. 두 나라는 3000㎞라는 거리를 극복한 세계적으로 희소한 밀착 관계다.

 

▶유교적 동질성과 글로벌 분업화가 한 배경이라고 한다. ‘한강의 기적’을 모델 삼아 ‘홍강(紅江)의 기적’을 일구려는 베트남의 성취 욕구가 한국 글로벌 기업들과 만났다. 베트남은 중국에서 빠져나온 한국 경제의 활로가 되어주었고, 한국은 베트남에 도약의 사다리를 놓아 주었다. 한국인으로 이어지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양국 정서적 교류 효과까지 낳고 있다. 두 나라의 협력과 우정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일러스트=이철원

이인열 기자

 

03.14(토) 호르무즈

17세기 영국 시인이자 정치가 존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에 호르무즈란 표현이 등장한다. 악마가 앉아 있는 왕좌를 묘사하며 “화려함이 호르무즈와 인도의 부를 능가한다”고 했다. 호르무즈는 11~15세기 호르무즈 해협을 지배한 이란 남부지역 왕국 이름이다. 당시 유럽인에게 호르무즈는 사치스럽고 풍요로운 곳의 대명사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인 ‘아후라 마즈다’가 페르시아에서 긴 세월 변화를 거치며 ‘호르무즈’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라비아해와 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호르무즈 해협은 중세에도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 관문이었다. 중국 비단과 도자기, 동남아시아 향신료가 이곳을 거쳐 유럽으로 건너갔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인도에서 온 상인들이 보석, 진주, 비단, 상아를 팔기 위해 모여드는 세계 최고의 시장”이라고 썼다. 호르무즈 왕국은 항구에 정박하는 모든 배에 통행세를 부과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천혜의 요충지를 유럽 열강이 가만히 둘 리 없었다. 1507년 포르투갈 알부케르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호르무즈 왕국을 정복한 뒤 해협 가운데 호르무즈섬에 요새를 세웠다. 이 섬부터 맞은편 아라비아반도까지 39㎞다. 서울 남산타워에서 영종도 앞바다까지 거리쯤 된다. 맑은 날에는 망원경 없이 큰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알부케르크 제독은 호르무즈섬을 “이슬람의 숨통을 조이는 코르크 마개”라고 불렀다.

 

▶20세기 초 페르시아만에서 원유가 발견되면서 이 해협의 전략적 가치는 차원이 달라졌다. 총 길이 167㎞, 폭 34~54㎞인 좁은 해협을 하루 세계 원유 물동량의 20%인 2100만 배럴이 통과한다. 많은 암초와 얕은 수심을 고려하면 대형 유조선이 다닐 수 있는 항로는 왕복 각각 3.2㎞밖에 안 된다. 중간에 충돌 방지를 위한 2마일을 합치면 총 9.6㎞의 좁은 왕복 2차선 도로 위를 거대한 유조선들이 교차하는 것이다.

 

▶미국 에너지 안보 전문가인 더글러스 유반은 ‘제국의 숨통’이란 책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세계 경제라는 거인이 숨을 쉬는 가느다란 빨대’에 비유했다. 그 가는 빨대가 지금 막혔다. 유반은 1개월 이내 봉쇄는 심리적 공포를 자극할 뿐 실물 경제 충격은 크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1~3개월 봉쇄는 실제 원유 부족으로 이어져 세계 경제 성장률을 무려 2.5~5%포인트 떨어뜨릴 것으로 전망했다. 봉쇄가 국제에너지기구의 전략비축유 권장기간(90일분)을 넘으면 예측 불가능한 수준의 대공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일러스트=이철원

나지홍 논설위원

 

03.16(월) 새우등 터진 두바이

전 세계 억만장자들에게 두바이는 낙원이었다. 소득세·양도세·상속세가 모두 ‘0%’인 데다, 왕처럼 대접 받았다. 7성급 호텔, 미슐랭 레스토랑, 최첨단 빌딩 등 도시 인프라는 뉴욕이나 도쿄보다 쾌적했다. 엄격한 법 집행과 촘촘한 CCTV는 덤이었다. 한밤중에 롤스로이스를 세워두고 문을 열어놔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세금 없고 도둑 없는 안전한 피난처로 자본과 인재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돈은 겁이 많다.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도망간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두바이가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전쟁 시작 후 주식 시장은 한때 문을 닫았고, 부동산 지수는 최대 30% 넘게 폭락했으며, 최근 열흘 동안 주민과 관광객 수만 명이 짐을 쌌다. 공항 폐쇄로 하루 1800편 이상의 항공편이 취소되기도 했고, 수퍼카와 고급 아파트·빌라 급매물도 쏟아진다고 한다.

 

▶유독 두바이의 피해가 더 큰 이유가 있다. 이란과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있는 UAE는 7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다. 석유 수출량은 세계 5위권이지만, 매장량 95%는 큰 형님 격인 아부다비에 몰려 있다. 자원 없는 두바이가 금융·관광·물류에 전력투구한 이유다. 전쟁으로 유가가 오르면 아부다비는 오히려 버틸 힘이 생기지만, 두바이로서는 힘들게 쌓아 올린 피난처 이미지가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이란이 서방 자본의 상징인 두바이를 정밀 타격하며 심리적 공포를 극대화하는 까닭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다.

 

▶이 와중에 트럼프는 웃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전쟁의 원래 목적은 아니었지만, 글로벌 자본과 큰 손들이 법적 보호와 물리적 안전이 보장되는 뉴욕으로 다시 눈을 돌리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바이 부동산 지수가 30% 폭락하는 사이, 중동발 자금 이탈의 지표로 불리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USDC)의 시가총액은 한 달 새 100억달러(약 15조원) 가까이 불어났다. 두바이에 미사일·드론 파편이 떨어지는 광경은 억만장자들에게 “미국 밖의 낙원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를 각인시켰다.

 

▶화려한 고층 빌딩도 세금 없는 천국도 결국 ‘안전’이라는 토양이 없다면 신기루에 불과하다. 두바이 정부는 “방공 시스템이 건재하다”며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지만, 한번 금이 간 신뢰를 수선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 최고층 빌딩 부르즈 할리파에 공습 경보가 울리는 현실 속에서, “돈에는 조국이 없어도 안전에는 국경이 있다”는 격언을 두바이는 곱씹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어수웅 논설위원

 

03.17 '제2의 오나시스'

해운업계를 주름잡던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는 1953년 세계 최대 규모인 4만5000t급 대형 유조선 ‘티나 오나시스’를 건조했다. 당시 주력이던 T2 유조선(1만6500t급)의 거의 3배인 이 선박에 ‘수퍼 탱커(super tanker)’란 이름이 붙었다. 요즘은 30만t급 VLCC(초대형 유조선) 정도 돼야 수퍼 탱커라고 한다.

 

▶문제는 이 배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운하 수심이 이 배를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이 배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도는 먼 항로를 택해야 했다. 중동에서 런던까지 운하를 통과하면 20일 걸렸지만, 희망봉을 돌면 35일이 걸렸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 했지만 오나시스는 더 큰 유조선을 계속 주문했다. “전후(戰後) 재건에 석유는 필수적이고 배가 부족해질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의 베팅은 1956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으로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운하 운영권을 뺏긴 영국·프랑스의 공격으로 2차 중동전쟁이 발발해 수에즈 운하 통행이 5개월간 봉쇄됐다. 용선료는 몇십 배로 폭등했고, 희망봉 항로를 독점했던 오나시스가 막대한 돈을 벌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한국의 3위 해운사인 장금상선이 ‘최대 승자’ 중 하나로 부상했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장금상선은 1월 말 최소 6척의 초대형 유조선을 비어 있는 상태로 페르시아만으로 이동시켰는데,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원유 수출 길이 막힌 석유 회사들이 빈 유조선을 저장 공간으로 쓰기 위해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 용선료가 50만달러로 1년 새 10배 급등했다. 이 가격이 6개월만 유지되면 배 사는 데 들어간 비용을 회수할 수 있다고 한다. 장금상선을 경영하는 정태순 회장이 이란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글로벌 석유 회사들의 요청이 쇄도하며 ‘제2의 오나시스’로 불리는 뉴스 메이커가 됐다.

 

▶예측은 과학이기도 하지만 시운(時運)이기도 하다. 1990년대 후반 월가 펀드매니저들이 닷컴버블 붕괴를 예상하고 주가 하락에 베팅했다가 큰 손해를 봤다. 닷컴버블은 이들이 손 털고 나간 2000년부터 붕괴됐다. 과학적 예측은 정확했지만 시운이 맞지 않았다. 수에즈 운하 봉쇄 소식을 들은 오나시스의 첫마디는 ‘신의 선물’이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을 여기에 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러스트=이철원

나지홍 논설위원

 

03.18 드론 만큼 무서운 기뢰

/일러스트=박상훈

 

물에 떠다니는 지뢰인 기뢰에 대한 기록은 명나라 때부터 나온다. 현대식 기뢰는 미국 독립 전쟁 때 나왔다. 화약 통이 배와 부딪치면 폭발했다. 기뢰는 러·일 전쟁을 거치며 정식 무기가 된다. 닿자마자 터지는 전기 기폭 장치와 물속에 설치돼 보이지 않는 ‘계류 기뢰’의 개발로 전함들이 잇달아 폭침됐다. 1차 대전 때는 연합군이 독일 잠수함을 막으려고 북해에 수만 개의 기뢰로 ‘벽’을 만들었다. 2차 대전에선 군함 소리와 자기장 등을 감지해 폭발하는 기뢰까지 개발돼 깔렸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은 일본 근해에 수만 개의 기뢰를 뿌렸다. 일본 군함과 상선 수백 척이 침몰해 해상 물류가 막혔다. 전시 물자 수입은 물론 해외 군대에 군수품도 제대로 보낼 수 없었다. 일본은 기뢰 때문에 말라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미국이 붙인 기뢰 작전 명이 ‘굶주림(Starvation)’이다. 종전 후에도 일본은 근해에 널린 기뢰를 치우느라 애를 먹었다. 그 경험으로 일본 해상자위대는 세계 최고의 소해(掃海·기뢰 제거) 기술과 전력을 갖게 됐다. 일본은 이라크전이 끝난 뒤 걸프 지역에 소해함 여러 척을 보내 널린 기뢰를 걷어냈다. 전후 첫 해외 작전이었다.

 

▶‘소해함’은 기뢰를 청소하는 함정이다. 기뢰 성능에 비례해 발전했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기뢰는 기관총으로 폭발시켜 제거하고 수면 아래 계류 기뢰는 묶은 줄을 끊거나 소형 폭탄 등으로 없앤다. 소해함은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다. 그래야 금속에 반응하는 기뢰를 피할 수 있다. 특수 음파탐지기로 기뢰인지, 돌인지 구분하고 잠수부나 무인 장비를 투입한다. 해저에서 어뢰를 쏘는 기뢰까지 등장하자 소해 기술에서도 무인화가 중요해졌다.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로 급해진 트럼프가 동맹국에 소해함을 찾고 있다. 미 해군의 소해 전력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이란이 싸구려 부유 기뢰나 계류 기뢰만 깔아도 수천억원짜리 유조선과 미 군함을 잃을 수 있다. 가성비는 기뢰가 드론을 앞선다. 항모도 소해함이 길을 열지 않으면 발이 묶인다. 한국 해군은 12척의 소해함이 있다. 그런데 일본보다 작고, 700t급 이하 소형 함정이어서 중동까지 항해가 어렵다.

 

▶세계에 상대가 없는 미 해군은 소해 전력에 관심이 적었다. 소해함이 몇 척 없고 노후했다. 소해 헬기와 무인 장비 중심으로 재편 중인데 이란 기뢰 제거에는 역부족이다. 이란이 보유한 기뢰가 수천 개라는데 수십 개만 깔려도 호르무즈가 막힌다. 미국이 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전쟁을 벌인 것이 놀랍고 어이 없다.

안용현 논설위원

 

03.19 '실패를 목표로 하는 연구'

1983년 어느 날 밤 미국 생명공학 회사 연구원 캐리 멀리스가 여자 친구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당시 연구 중인 난제, DNA 연속 복제를 풀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흥분했지만 과학계는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엔 실패한 연구였던 셈이다. 그런데 유전자 증폭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그의 연구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10년 후인 1993년엔 노벨 화학상까지 받았다. 코로나 때 익숙해진 PCR 검사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과학기술 연구는 실패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렇지만 실패를 통해 얻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와 제품을 개발해온 것이 과학기술의 역사였다. 3M 소속 엔지니어 스펜서 실버 박사는 1968년 항공기 제작에 쓸 강한 접착제를 개발 중이었다. 연구는 완전 실패였다. 그가 만든 접착제는 접착력이 너무 약해 붙였다 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연구는 잊혔다가 6년 후 ‘포스트잇’으로 빛을 보았다. 3M엔 이렇게 실패했다가 나중에 빛을 본 제품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1956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디자인 공모전에서 덴마크 출신 예른 웃손이 제시한 조개껍데기 모양이 당선됐다. 그러나 웃손이 제출한 디자인은 투시도조차 없었다. 설계와 시공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했다. 공사 기간은 6년 늘어났고 비용도 초기 예상의 15배로 늘어났다. 프로젝트 효율 면에서는 초대형 실패작이었다. 하지만 완공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결국 호주의 아이콘이 됐고 대성공작으로 평가 받는다.

 

▶자신은 실패로 끝났지만 다른 성공을 낳은 연구도 많다. 개인 이동 수단 세그웨이는 한때 모빌리티 혁신의 상징이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 발명 이후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당 1000만원 안팎의 비싼 가격에다 초기 시장 형성에 실패하면서 2020년 생산이 종료됐다. 하지만 전동 스쿠터나 킥보드 등 다양한 1인용 이동 수단으로 이어지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서울대가 1000억원을 들여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연구’에 도전하는 ‘SNU 그랜드퀘스트’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동안 성공할 만한 연구만 해온 데서 벗어나 연구 과정을 중시하는 도전적 연구를 하겠다는 것이다. “성공이 아닌 실패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업 총괄 교수의 말이 인상적이다. 과학의 발전은 누가 봐도 안 될 것 같은 일에 도전해 이루어진 것이다. 서울대의 실험이 큰 성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일러스트=이철원

김민철 기자

 

03.20 1000억원짜리 해골

/일러스트=이철원

 

200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영국 데미안 허스트(61)의 ‘상어’를 봤다. 4m 길이의 실제 상어를 포르말린 수조에 넣은 현대 미술의 걸작이다. 흥미로운 건 이 상어가 ‘원작’의 상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방부 처리 실패로 1991년의 원작 상어가 썩기 시작하자 작가는 새 상어를 구해 통째로 갈아 끼웠다. 비평가들이 “원작이 훼손됐다”고 비판하자 허스트는 대답했다. “개념은 그대로다. 중요한 건 당신이 이 거대한 상어 앞에서 무엇을 느꼈느냐다.”

 

▶아이디어를 중시한 개념 미술은 100년 전에도 있었다. 변기를 가져와 ‘샘’이라 이름 붙인 마르셀 뒤샹이 원조고, 작업실을 공장이라 부르며 작품을 찍어낸 앤디 워홀이 뒤를 잇는다. 예술은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통념을 깨뜨린 선배들이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수천억짜리 권력’으로 만든 첫 인물은 데미안 허스트다. 그는 수백 명의 박제사·공예가 등 조수를 두고 외주 시스템으로 작품을 양산한다. “개념이 곧 예술이다. 나는 건축가처럼 설계하고 지시할 뿐이다.”

 

▶허스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죽음’이다. 상어 작품의 원제는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다. 부패하는 소 머리에 파리가 들끓는 작품 ‘천년’에서는 죽음을 외면하고 싶은 현대인에게 ‘메멘토 모리(네 죽음을 기억하라)’를 주문한다. 의학과 과학을 맹신하며 죽음을 늦추려는 세태를 복제약 대량 전시로 비판하는 ‘약국’ 시리즈도 그의 대표작이다.

 

▶백금 두개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는 약 1000억원에 팔린 작품이다. 하지만 뒤늦게 작가 자신과 갤러리 대표 등이 포함된 컨소시엄이 자전 거래를 한 것으로 알려지며 논란이 되자 그는 오히려 화를 냈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가치를 믿고 직접 투자해 지분을 갖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념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의 자산 규모는 약 1조원에 달한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늘부터 데미안 허스트 개인전이 열린다. 그의 작품 대규모 전시는 국내 처음이다. 제목은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그 유명한 ‘상어’와 ‘다이아몬드 해골’이 모두 포함됐다. 우리가 잊고 살고 있는 죽음과 자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괴물’을 미술관으로 끌고 들어와 작가는 묻는다.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믿고 싶으냐다.” 요즘 유행인 ‘탈진실’을 말하는 것 같다.

어수웅 논설위원

 

03.21(토) 공깃밥 3000원 시대

한국인에게 밥은 단순한 탄수화물 덩어리가 아니다. 안부를 물을 때 “밥 먹었니”, 고마움을 표할 때 “밥 한 끼 살게”라고 한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말은 관계의 지속을 의미한다. 식당에서도 밥은 상품을 넘어 인심의 영역이었다. 메인 요리를 시키면 공깃밥은 당연히 따라왔고 “한 공기 더요”를 외쳐도 공짜였다. 공기(空器)는 ‘빈 그릇’이란 한자어다. 묵직한 놋쇠로 만들어 뚜껑을 덮어 품격을 갖춘 ‘주발(周鉢)’과 달리 가볍고 실용적인 그릇으로 우리 식탁의 주인공 역할을 해왔다.

 

▶지금의 스테인리스 공기는 1970년대 부족한 쌀 소비를 줄이려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절 ‘절미(節米) 정책’으로 탄생했다. 1976년 서울시는 모든 식당에 지름 10.5㎝, 높이 6㎝의 표준 식기 사용을 강제하는 조치를 내놨다. 밥은 그릇의 8할만 채우는 게 원칙이었고, 뚜껑을 덮었을 때 밥알이 눌리면 안 됐다. 이를 어기고 고봉(高捧)으로 팔다 걸린 식당은 1개월 영업 정지를 당했다. 공무원들이 식당을 돌며 밥그릇 높이를 자로 재던 시절에도 주인들은 “야박한 인심은 천벌받는다”며 슬쩍 밥을 더 얹어 주다가 영업정지를 당하곤 했다. 법을 넘는 정(情)이 밥 인심에 담겨 있었다.

 

▶1976년 당시 공깃밥 한 그릇은 100원이었다. 1990년대 후반 1000원으로 자리 잡은 이래 30년 가까이 물가의 최후 방어선 역할을 해왔다. 같은 기간 자장면이나 삼겹살 값이 3~4배 올라도 공깃밥 값만은 변치 않았다. 서민들에게 밥 한 그릇은 1000원짜리 한 장이었다.

 

▶해외에서도 주식에 너그러운 문화는 드물지 않다. 미국 식당에서 식전 빵 바구니와 커피는 대개 무한 리필된다. 프랑스는 법으로 식전 빵과 물을 무료 제공하도록 정했다. 중국 서민 식당에선 차(茶)는 물론 밥을 무제한으로 내주는 ‘미판(米飯)’ 인심이 여전하다. 일본만은 밥값을 따로 받는다. 음식을 남기는 것을 금기시하는 ‘못타이나이(아깝다)’ 문화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산지 쌀값이 1년 새 20% 가까이 폭등하며 10개월째 고공 행진 중이다. 배달 앱에선 2000원 공깃밥이 예사가 됐고 3000원을 붙여 놓은 식당까지 등장했다. 쌀이 남아도는 나라에서 쌀값, 밥값이 폭등하는 기막힌 역설은 당국의 주먹구구식 수급 예측과 농민 단체의 압력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농업은 산업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 있다고 하지만 쌀이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나라에서 쌀값 폭등이라니 어이가 없다.

 

/일러스트=이철원

이인열 기자

 

03.23(월) 디에고 가르시아 섬

/일러스트=박상훈

 

16세기 초 인도 항로를 찾던 포르투갈이 인도양 한복판에서 울릉도 60% 크기인 산호섬을 발견했다. 인도 남쪽으로 1800㎞쯤 떨어진 곳이었다. 항해사 이름을 따서 ‘디에고 가르시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18세기 후반 영국 등이 인도·아프리카 노동력을 데려와 코코넛 농장을 일구면서 유인도가 됐다. 이 섬이 주목받은 건 냉전 때문이다. 1960년대 소련군이 인도양 진출을 시작했는데 미군은 인도양에 거점이 없었다. 중동산 석유 수송로의 전략적 가치도 커지고 있었다. 미국이 영국령이던 이 섬에 대규모 해·공군 기지를 만들었다.

 

▶이 섬은 큰 바다에 고립돼 주변에서 공격받을 위험이 적다. ‘V’ 자 모양인데 항모나 잠수함이 정박할 만큼 수심이 깊고 4㎞에 가까운 활주로도 건설할 수 있다. 대형 군함의 보급·정비와 대형 폭격기의 이착륙이 모두 가능하다. 전 세계 미군 통신을 연결하고 우주 발사체를 탐지하는 기지도 있다. 미군의 인도양 ‘불침 항모’가 됐다. 1991년 걸프전 때 이 섬을 떠난 B-52 폭격기들이 이라크를 융단 폭격했다. 미 본토 출격에 비해 절반 거리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도 B-2 스텔스 전투기 등이 인도양을 가로질렀다.

 

▶이란이 자국 영토에서 4000㎞ 떨어진 디에고 가르시아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란은 사거리 2000㎞ 이상 탄도미사일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위성 발사체에 탄두를 달아 장거리 공격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와 군함의 공격이 매우 고통스러웠다는 의미다. 이란 미사일은 디에고 가르시아 앞에 정박해 있던 미 이지스함에 요격됐다. 미국도 이 섬의 요격망을 촘촘히 갖춰놓은 것이다.

 

▶이 섬이 최근엔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 자산이 됐다. 중국이 도입하는 중동·아프리카산 석유가 대부분 이 섬의 공격 반경을 지나기 때문이다. ‘석유 생명길’인 호르무즈 해협과 동남아의 말라카 해협이 모두 이 섬의 통제 범위다. 인도양과 태평양의 연결 고리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사령부를 만들었는데 태평양에선 일본과 괌, 인도양에선 이 섬을 핵심 기지로 운용하고 있다.

 

▶영국은 지난해 이 섬을 아프리카 모리셔스에 돌려주겠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군사 기지만 영국이 99년간 계속 관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소유주’인 미국 트럼프가 “섬 반환은 멍청한 결정”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중동·아프리카·중국·동남아·석유 수송로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이 섬을 미국이 양보할 가능성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안용현 논설위원

 

03.24 유대인을 보는 눈

이달 초 미 상원 군사위 이란전 청문회에 나온 이라크전 파병 군인 출신 예비역 해병대원의 발언은 뜻밖이었다. “우리 아들딸을 이스라엘 때문에 전쟁터로 내몰 수 없다. 이스라엘을 위해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해병대원은 경찰에 끌려나가다 팔이 부러졌다. 이후 워싱턴·뉴욕·LA에서 그의 주장에 동조해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미국에서 반(反) 이스라엘로 찍히는 것은 사회적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일론 머스크가 자신 소유 소셜미디어에 게시된 유대인 비판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가 줄줄이 광고를 취소당하고, 하버드대와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이 반유대주의를 명확히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리에서 쫓겨난 게 불과 2년 전 일이다. 미국 내 유대인 인구는 2.4%에 불과하지만 정치·경제·문화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유대인=홀로코스트 피해자’라는 동정적 인식도 확고하다.

 

▶그런데 지난 2월 갤럽 조사에서 미국인 41%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고 응답한 반면,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대답은 36%였다. 3년 전 조사에선 이스라엘 지지가 54%, 팔레스타인 지지는 31%였다.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테러로 시작된 가자 전쟁과 최근의 이란 전쟁이 만든 변화다.

 

▶유대인은 오랜 핍박 속에 스스로를 단련해온 민족이다. 세계 인구의 0.2%밖에 안 되는데도 노벨상 수상자의 22%를 차지한다. 고작 경상북도 크기 나라가 무력과 정보력이 무섭다. 레바논 헤즈볼라 민병대원들이 주머니 속 무선호출기 폭발로 수 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두른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제 도를 넘는 것 같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가자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주민 7만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마스 테러로 희생된 이스라엘인 1200명의 60배다. 가자 건물들 연쇄 폭발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은 이스라엘 군인들을 본 세계는 이스라엘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대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30세 이하 청년 중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이는 14%에 불과하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영국·스페인·벨기에 등도 이스라엘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이나 무기 거래 계약을 중단했다. 영국 왕립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는 “이스라엘이 자국의 장기적인 안보와 국제적 입지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가장 가혹한 피해를 경험한 민족이 잔혹한 가해자로 탈바꿈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러스트=이철원

김태훈 논설위원

 

03.25 '기저귀 제로'

어머니가 팔순을 넘겼을 때 하버드 의대 교수인 아툴 가완디의 책을 읽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모두는 늙고 죽는다. 그 과정은 점차적이지만 가차 없다.” 가완디는 미국의 요양 병원이 노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은 1980년대 초반까지 치매나 병이 있는 노인들을 요양 병원의 침대에 묶고 기저귀를 채웠다. 하지만 사회복지법인의 이사장이었던 고야마 다케오의 생각은 달랐다. 기저귀는 노인들의 존엄을 빼앗는 도구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직원과 간병인 모두에게 기저귀 하루 체험을 하게 했다. “상상 이상으로 축축하고 기분 나쁘다” “누가 갈아주길 기다리는 시간이 굴욕적이다”라는 경험담이 터져 나왔다. 일본에서 ‘기저귀 제로’ 운동의 시작이었다.

 

▶물론 기저귀를 그냥 벗길 수는 없었다. 몸의 배설 기능을 되살리는 의학적 접근이 필요했다. 누워만 있으면 방광이 소변 모아두는 기능을 잃어버린다며 일정 시간 오줌을 참게 했고, 변비를 막는 하루 1500ml 이상의 수분 섭취, 죽이 아닌 씹는 음식, 변기에 앉아 중력으로 볼일 보기 훈련, 그리고 매일 일정량의 걷기를 시켰다. 욕을 입에 달고 살던 한 치매 할머니는 기저귀를 떼고 변기에서 볼일을 본 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존댓말로 인사해 담당 간병인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알고 보니 할머니의 난폭함은 치매 때문이 아니라 기저귀로 인한 수치심이 만든 분노 때문이라고 했다.

 

▶통념과 다른 통계가 있다. 식약처에 따르면 기저귀는 이제 유아용보다 성인용이 더 많이 팔린다. 2024년부터 역전됐다. 일본은 이미 10년 전부터 그랬다고 한다. 건강하지만 요실금이 있는 노인들이 품격 있는 외출을 위해 언더웨어형 기저귀를 찾기 때문에 발생한 역전 현상이다. 하지만 기저귀를 찰 때나 벗을 때나 목적은 하나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다.

 

▶한국에서도 냄새·낙상·욕창·와상(臥床)을 없애고 기저귀와 억제대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4무 2탈 요양 병원’이 인기라고 본지가 보도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시설은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복지부도 마침 27일부터 가족에게 돌봄 해방을 선사하는 ‘통합 돌봄’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내년부터는 간병비도 일부 지원한다. 관건은 예산과 인력이겠지만 결국 ‘존엄’이 먼저다. 기저귀 너머의 인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노화라는 가차 없는 운명 앞에 선 인간이 서로에게 약속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일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어수웅 논설위원

 

03.26 경기도의 정치 상전벽해

1995년 이후 치러진 8번의 경기지사 선거에서 국민의힘 계열이 5번, 민주당 계열이 3번 이겼다. 2014년까지는 6번 중 5번이 국힘 승리였다. 1992년 총선에서도 국힘 계열이 경기도에서 31석으로 민주당의 8석을 압도했다. 그런데 국힘 계열은 최근 4번의 경기도 총선을 내리 참패했다. 21·19·7·6석으로 쪼그라드는 동안 민주당은 29·40·51·53석이 됐다. 지난 총선 ’53석 대 6석‘은 지금 경기도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분당과 용인 일부 등을 제외하면 경기도는 거의 ’국힘 불모지대’다. 결국 이번 지방선거에서 국힘 쪽에선 경기도 지사는 물론 경기 지역 시장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사람 자체가 줄어 구인난이라고 한다.

 

▶서울 인구는 1988년 1000만명을 찍었다. 과밀 해소를 위해 주변 신도시 개발을 본격화하자 경기 인구가 폭증했다. 2002년 1000만명을 넘으며 서울을 앞섰고 현재는 1374만명까지 늘었다. 경기 남부만 1000만명으로 서울의 930만명보다 많다. 경기도 토박이는 보수 성향을 보였으나 점점 줄어 지금은 전체 인구의 25% 이하라고 한다. 반면 서울보다 싼 주택과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경기도로 온 사람들은 민주당 지지층인 30~50대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과거 경기도는 도농 복합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IT와 서비스업 중심이다. 유권자 구성과 산업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

 

▶신도시가 생기면 농촌의 보수 분위기가 옅어진다. 당 조직이 와해되는 경우도 있다. 토박이가 많던 수원은 국힘 계열의 텃밭이었지만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이후 최근 3번의 총선에서 지역구 5곳 전부를 민주당이 싹쓸이했다.

 

▶경기도에 호남 출신이 많다고는 하지만 영남, 충청 출신과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기업 도시들에는 영남 출신도 적지 않다. 그런데 민주당은 부산·경남에서 꾸준히 지지를 넓혀왔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PK 득표율이 40%에 달했다. 고가·재건축 아파트가 많은 분당·과천 등은 민주당의 부동산 정책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경기도 대다수 지역은 아파트 값이나 세금보다 서울 출퇴근용 교통 인프라, 보육·교육 확충에 더 관심이 많다. 민주당은 이 분야에 공약을 집중하고 있다.

 

▶경기도는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국힘은 둔감했다. 과거에 통할 수 있는 인물을 여전히 공천하고 있다. 경기도 전체가 호남 못지 않은 민주당 텃밭이 됐고 계엄 사태까지 거치며 이제는 굳어지는 단계라고 한다. 이제 국힘에선 출마자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라니 경기도의 상전벽해다.

 

 일러스트=이철원

안용현 논설위원

 

03.27 포화 속 '필수 인력'

 2011년 리비아 내전의 포화 속에서 서구 건설사들이 비싼 장비를 버리고 앞다퉈 탈출할 때 대우건설 현장에 남기로 한 필수 요원들이 현지 부족장들을 찾아갔다. “우리가 떠나면 이 발전소와 도로는 멈추고, 당신들 아이들의 미래도 끊긴다”고 호소했다. 감복한 부족장들이 총을 든 마을 청년들을 보내 사업장을 24시간 철통같이 지켜준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포탄이 오가는 사선(死線)에서 이들이 쌓은 것은 건물이 아니라 K-건설의 밑천이 된 신뢰였다.

 

▶기업의 ‘필수 인력’은 위기의 순간, 가장 마지막에 짐을 싸야 하는 사람들로 ‘산업 전사’라 불러 마땅하다.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공포가 중국 전역을 마비시켜 글로벌 기업들의 엑소더스가 이어질 때도 우리 기업 필수 요원들은 끝까지 중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 기업들은 중국 측과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중국 특유의 관시(關係)를 맺을 수 있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 LG전자는 지금도 필수 요원을 상주시키며 애프터서비스망 등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 간식’ 초코파이로 러시아 시장을 장악한 오리온은 전쟁 와중에도 고속 성장 중이다. 전쟁 초기 글로벌 물류망이 봉쇄돼 원재료 수급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혹한을 뚫고 대체 공급선을 찾아내 100% 공장 가동률을 이뤄냈고, 최근 3년 새 러시아 매출이 4배 치솟았다. 

 

▶한국 기업만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코카콜라 우드러프 회장은 “전장에 있는 군인은 어디서든 단돈 5센트에 콜라를 마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은 적자지만 미래 투자로 보았다. 군복 입은 코카콜라의 기술 파견관 140여 명이 유럽 등 최전방 수십 곳에 현지 병입 생산 라인을 구축해 이 약속을 지켜 냈고, 코카콜라는 전후 세계 1위로 우뚝 섰다. 이때 코카콜라 필수 요원 2명이 결국 사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중동 분쟁 지역 필수 인력 500여 명에게 1인당 500만원 상당의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하는 이들에 대한 예우와 보상일 것이다. 필수 인력이라는 말 뒤에는 그들 가족의 공포와 눈물이 숨어 있다. 폭음이 들리는 창밖을 보며 업무를 이어가는 이들은 말 그대로 산업 전사다. 기계는 멈췄다가 다시 작동하지만 사람 사이의 신뢰는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기업 필수 인력들이 전장에서 지켜내고 있는 것은 단지 제품과 공장이 아니라 미래에 먹고살 자산일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이인열 기자

 

03.28(토) 전기 없는 삶

 2015년 네팔 대지진으로 전기가 끊기며 수도 카트만두는 암흑천지가 됐다. 당시 1주일 동안 현장을 취재한 동료 기자는 전기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체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문명의 실종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막히자 사람들이 하나둘 건물 밖으로 나가 땅을 파고 용변을 보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는 통신 두절 상태에 빠졌다. 상·하수도가 끊기며 먹을 물도 씻을 물도 사라졌다. 사나흘쯤 되자 사람들은 근처 개울물에 들어가 몸을 씻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곧 몸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수질이 더러워졌다.

 

▶전기가 끊기면 사소한 일상부터 유지하기 쉽지 않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의 시골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다. 필자의 어머니는 호롱불 아래서 살았다. 여름에 더우면 행여 남이 볼까 봐 캄캄한 밤에 동네 앞 개울로 나가 목욕을 했다. 전기 없던 시절의 삶이었다. 냉장고는 꿈도 못 꿨고 아이스박스가 전부였다. 그런데 누구나 냉장고를 갖고 사는 지금, 오히려 정전 대비 아이스박스가 꼭 필요하다고 한다. 냉장고 안에 둔 음식이 상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계는 4시간이어서 전기가 오래 나가면 아이스박스에 음식을 옮겨 둬야 한다는 것이다.

 

▶전기 의존도가 높은 선진국일수록 정전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2003년 미국 북동부를 덮친 대정전은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뉴욕 맨해튼은 네온사인이 모두 꺼졌다. 대중교통과 신호등이 마비됐고 수십만 명이 지하철에 갇혔다. 하수처리장 가동이 멈추며 오수가 거리로 역류했다. 3일간 지속된 정전 피해액이 60억달러(당시 가치 72조원)에 이르렀다. 지난해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덮친 대정전 때는 신용카드 시스템이 중지돼 현금이 없으면 밥을 사 먹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1977년 미국 허드슨강 변전소에 벼락이 떨어지며 시작된 뉴욕 대정전 때는 무법천지가 펼쳐졌다. 상점 1700곳이 약탈당했고 자동차 도난과 방화가 잇따랐다. 3700명이 체포된 이 사태를 시민들은 ‘공포의 밤’이라 했다. 오늘날엔 중환자일수록 생명 유지에 전기의 도움이 필수다. 산소호흡기를 비롯한 의료 기구가 멈춰 수술까지 중단되니 위중한 환자를 치료하는 대형병원은 자체발전기가 필수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가 거듭되는 대정전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수도 아바나 시민들은 낮에 소형 태양광 패널로 충전한 휴대전화 불빛에 기대어 칠흑 같은 밤을 버틴다고 한다. 쿠바 사태는 새삼 전기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돌아보게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3.30(월) 내부자 고래

 올 초 개봉한 다큐 영화 ‘멜라니아’는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가 주인공이다. 배보다 배꼽이랄까. 제작비는 500만달러(약 75억원)였는데 홍보비로 3500만달러를 썼다. 별도로 판권료 4000만달러를 멜라니아 개인에게 지불했다. 제작사 MGM의 모회사는 아마존이다. 트럼프가 반독점법을 내세워 아마존을 압박하던 시점,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우리가 그 다큐를 만들겠다고 손들었다. 기업 생존을 위해 지불한 ‘보험금’이자 사실상의 ‘뇌물’이라는 말이 나왔다.

 

▶트럼프가 이란 에너지 시설 공습 유예를 발표하기 직전, 주식시장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리기 15분 전 누군가 원유 선물 매도와 S&P 선물 매수에 수억 달러를 베팅한 것이다. 대통령의 글이 올라오자 유가는 급락하고 증시는 급등했다. 해당 세력은 단 몇 분 만에 수천만 달러를 챙겼다.

 

▶암호화폐 기반 예측 시장인 폴리마켓에서도 이상한 징후가 포착됐다. 중대 발표 직전 생성된 신규 계정들이 수십만 달러를 한 방향에 걸어 거액을 거머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을 백악관 내부 사정에 밝은 ‘인사이더 웨일(내부자 고래)’이라 부른다. 작년 10월 대중 관세 유예와 올해 1월 베네수엘라 마두로 압송 직전에도 이들의 ‘족집게 베팅’은 어김없었다. 대통령 장남 트럼프 주니어는 폴리마켓의 고문이자 투자자다.

 

▶트럼프 가문엔 이런 구설이 상수다. 차남 에릭은 펜타곤에 드론을 납품하는 업체에 투자했다. 미 정부가 중국산 드론 사용을 금지하자마자 아들이 지분을 가진 업체가 수억 달러 계약을 따냈다. 사위 쿠슈너는 중동 특사로 협상에 참여하며 사모펀드를 운영한다. 낮에는 비밀 정보를 다루고 밤에는 그 정보를 지렛대 삼아 사우디와 UAE의 국부펀드 자금을 유치한다는 의혹이 무성하다. 막내 배런은 ‘코인 브레인’이다. 트럼프 가문의 암호화폐 프로젝트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의 공동 창립자다. 이 20세 청년의 재산은 무려 1억5000만달러라고 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이 기이한 ‘족집게 베팅’ 직후 “국가 안보 결정을 돈벌이에 이용한 반역”이라고 질타했다. 민주당도 정부 인사의 내부 정보 이용 거래 금지법을 추가 발의했다. 기존 법안은 암호화폐 등을 규제하지 못할뿐더러 관련 보고 의무 위반 시 벌금도 200달러에 불과해 사실상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아버지가 판을 깔고 자식들이 판돈을 챙기는 기막힌 ‘가족 비즈니스’라는 조롱이 무성하다.

 

/일러스트=이철원

어수웅 논설위원

 

03.31(화) 유료 화장실

중학교 때 화장실은 소위 ‘푸세식’이었다. 누적된 암모니아와 소리 내며 달려드는 파리 떼. 청소 당번인 날은 지옥이었다. 입이 걸었던 담당 선생님은 “핥아도 될 만큼 깨끗하게 닦으라”는 ‘군대식’ 지시를 내리곤 했다. 그 때 친구는 “유럽은 돈 내고 화장실 간다는데 우리는 돈 받고 들어가야겠다”고 했다. 한국이 후진국이던 시절이었다.

 

▶선진국에서 태어난 자식 세대에게 그런 과거는 상상의 영역이다. 최근 친구들과 도쿄 건축 여행을 다녀온 대학생 조카는 “여긴 돈을 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며 감탄했다. 일본 시부야의 ‘도쿄 토일렛(화장실) 프로젝트’ 이야기다. 안도 다다오, 구마 겐고 등 일본의 거장들이 지은 17곳 공공 화장실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청소원 역할을 맡은 야쿠쇼 코지가 정성껏 닦던 그곳들이다. 일본에서 화장실은 단순한 배설 공간이 아니라 환대의 상징이다. 모두 무료다.

 

▶반면 유럽은 ‘유료 화장실’의 본고장이다. 2000년 전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공중화장실에 ‘오줌세’를 처음 물린 인물이다. 아들이 오물에 세금을 매겨도 되느냐고 묻자 황제는 금화를 들이대며 말했다. “돈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화장실이 수익 모델로 등장한 첫 장면이라고 한다. 지금도 유럽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동전이 없으면 입구를 막아서는 화장실 관리인 앞에서 문화적 충격을 겪곤 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유료 화장실’ 논란이 일고 있다. 카페 키오스크 메뉴에 2000~5000원짜리 ‘화장실 이용권’이 등장했다고 본지가 보도했다. 음료 주문 없이 화장실만 이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하던 자영업자들의 고육지책이라고 한다. ‘사유 화장실에 아무나 들어와 험하게 쓰게 둘 수는 없다’는 의견과 ‘인심 야박하다’는 반대가 팽팽하다. 이 뿐 아니다. 정부는 민간 건물에도 ‘개방 화장실’을 유도하며 지원금을 줘왔지만 그 지정을 취소해 달라는 건물주가 급증했다고 한다. 도심 집회나 시위 참여자들의 무분별한 이용으로 더럽혀진 화장실을 견디다 못한 탓도 크다고 한다.

 

▶화장실 문을 여는 것 자체가 ‘공포’였던 시절은 오래 전에 끝났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을 본 탈북민이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며 놀랄 정도로 한국 화장실의 청결·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제는 그에 걸맞은 매너가 필요할 때다. 모두가 사용하는 타인의 공간을 이용자들이 제 집처럼 아꼈다면 한국에서 유료 화장실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도 같다.

 

/일러스트=이철원◎

어수웅 기자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