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일상적 이야기3/ 2025
https://youtu.be/Rzsg3il1Q24?si=O1aH4kmPUH4clwbl - 예수의 열두 제자 이야기
10.03 프란치스코 교황이 일깨운 것, '부끄러워하는 은총'의 의미

/책표지
희망
프란치스코 교황, 카를로 무쏘 지음
이재협 외 3인 옮김
가톨릭출판사
올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장 인기 있었던 가톨릭 지도자였다. 환한 미소, 소탈한 언행에 교회 개혁에 관한 뚜렷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관한 책을 검색하면 200권 넘게 나오는데 『희망』은 그의 '전모'를 살필 수 있는 자서전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이다.
선종 이후 유산으로 출판하려다 가톨릭 희년을 맞아 앞당겨 냈다는 후기 때문만은 아니다. 훗날 교황이 되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의 조부모와 그들의 외아들이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가는 여객선 티켓을 끊어 놓고 타지 못하는 바람에 침몰 사고를 모면한 사연을 전하는 프롤로그부터 강렬하다. 열일곱 살 때 여학생에게 결혼 제안 편지를 보냈던 일, 성소(聖召)를 확신하게 된 순간의 신비, 대작가 보르헤스와 조우한 사연 등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보는 데 부족함이 없다.
교황으로 선출된 콘클라베 내부를 전하며 언급한 '부끄러워하는 은총'은 신자가 아닌 사람도 인생의 지혜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풀어쓰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양심을 가진 것이 은총이라는 얘기다. 자신은 너무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과분한 복을 받았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고, 그래서 부끄러울 뿐이라고 했다.
그의 개혁적 성향과 통하는 대목일 텐데 그가 얼마나 도그마를 경계했는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그리스도인이 명확한 것만을 원한다면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전통과 과거의 기억은 하느님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어 줄 용기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살아 있는 신앙을 체험할 수 있단 얘기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10.05 홍성남 신부 "정치도 종교도 그냥 삼키면 광신도…꼭꼭 씹어라"
-창간 60년-종교 지도자를 만나다
천주교 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신부
지난달 22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홍성남(71) 신부를 만났다. 그는 ‘영성심리상담의 고수’다. 홍 신부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홍성남신부님의톡쏘는영성심리’의 구독자는 6만2000명이다. 그런데 구독자가 무려 78개국에 포진돼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그의 톡 쏘는 ‘사이다 해법’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상담소에서 마주 앉은 홍 신부에게 ‘상처와 치유’를 물었다. 그는 방황과 좌절, 치유와 구도의 여정인 자신의 삶을 놀랍도록 솔직하게 꺼내 놓았다.

▲홍성남 신부는 "나에게 영성심리 상담은 일종의 고해성사였다. 내 안에 퇴적층처럼 쌓여 있는 트라우마를 끄집어 낼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한국 사회가 양 진영으로 갈라져서 몸살을 앓고 있다. 소통과 화합의 정치, 왜 힘든가.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분열 현상은 ‘트라우마’ 때문이다.”
-어떤 트라우마인가.
“우선 일제 강점기에 대한 트라우마다. 식민 지배 겪은 사람은 친일파냐, 아니냐를 따진다. 한국전쟁도 트라우마다. 빨갱이냐, 아니냐. 군부 독재 트라우마도 있다. 민주냐, 반민주냐.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트라우마도 있다. 그 기간에 돈을 잃은 사람과 번 사람이 있다. 가진 자냐, 없는 자냐. 이 네 가지 트라우마가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다. 그걸 건드리면 폭발해 버린다.”
-크게 보면 한국의 역사이자 상처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면 덧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떡해야 하나.
“트라우마는 치유가 필요하다. 치유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선동에 쉽게 쉽게 넘어간다. 그러니까 음식을 먹을 때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꼭꼭 씹어 먹어라, 무슨 뜻인가.
“사람에게 치아가 왜 있을까. 음식을 씹으라고 있는 거다. 그런데 음식을 씹지 않고, 그냥 삼키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의 마음에도 치아가 있다. 씹는다는 게 뭔가. 이건 왜 이럴까. 저건 왜 저럴까.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궁리하는 거다. 그렇게 씹다 보면 뇌에 근육이 생긴다. 그럼 자기중심이 생기고, 부화뇌동에 안 넘어간다.”
-안 씹고 그냥 삼키면 어찌 되나.
“스스로 만든 자기중심이 없다. 그러니까 선동에 넘어간다. 씹지 않고 그냥 삼키는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쉽게 적개심을 갖는다. 삼키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상대를 적대시한다. 심리학에서는 그걸 ‘치아 공격성’이라고 부른다.
-치아 공격성, 근본적인 이유는 뭔가.
“주입식 교육 때문이다. 한 사회에 대화하는 문화가 있느냐, 싸우는 문화가 있느냐를 봐라. 그럼 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상대를 밟아버리려고 하지 않나. 주입식 교육 탓이 크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어떤 식인가.
“종교도 주입식은 곤란하다. 그냥 암기하면 안 된다. ‘이건 믿음이야, 믿음. 그러니까 그냥 믿어’ ‘안 믿어진다고? 그건 네 믿음이 약해서 그런 거야.’ 이런 식으로 종교를 믿으면 광신도가 나온다. 종교적 광신도, 정치적 광신도는 그렇게 나온다. 그렇게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킨 이들이 진영 간 싸움에서 최전방 공격수가 된다.”
홍성남 신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제가 된 이야기를 꺼냈다. “집안은 가톨릭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머니는 오히려 무당을 찾아가 물었다. 어머니의 수양 언니가 무당이었다. 나는 장남인데 외로웠다. 친구 따라 성당에 갔는데 형, 누나가 많았다. 그래서 좋았다. 수녀님이 신부나 수사가 되면 어울리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학대에 갔다. 그는 답을 얻으리라 기대했다. “하느님, 당신은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지옥은 왜 만드셨나요?” 풀리지 않는 신학적 물음들. 그에 대한 답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신학대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왜 후회했나.
“교수님들께 물어보면 상세하게 답을 해줄 줄 알았다. 그냥 주입식이더라. 한마디로 ‘종교 지도자 양성 사관학교’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갔는데, 또 군대였다. 나는 신학과 철학을 좋아했다. 그런데 수업은 암기식이었다. 너무 답답해서 숨 쉴 창이 필요했다. 그때 문고판 고전소설을 사서 다 읽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신학대에서 홍 신부는 운동권이었다. “가톨릭 성인전보다 체 게바라의 자서전을 더 열심히 읽었다. 해방신학에 빠졌다. 성경을 봐도 거부감이 들었다. 혁명을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지, 사랑으로 무슨 혁명을 해? 그렇게 생각했다.” 시위에서 돌아온 날, 밤에는 달랐다. ‘독재 타도’를 목이 터지라 외치고 돌아오면, 가슴 저 밑바닥은 꺼진 듯이 공허했다.
졸업 후에 서울 잠실의 본당으로 갔다. 신부는 2명, 신자는 1만2000명이었다. “무지막지한 사랑을 받았다. 동시에 마음속 우울감도 더해갔다. 신자들은 거룩한 신부로 나를 대했다. 나의 내면은 그만큼 영성적이지도, 거룩하지도 않았다. 늘 두려움이 있었다. 진짜 나를 알면 다들 도망갈 텐데. 강론을 할 때도 그랬다. 아, 이거 나도 못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혼자서 삭히고, 삭히고, 삭히다가 술에 빠졌다. 우울증도 왔다.”

▲홍성남 신부는 "어릴 적부터 효도해라, 바르게 살아라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신학생 때는 죄짓지 마라고 들었다. 이런 윤리 교육의 억압 속에서 컸다. 그런데 영성심리상담 대학원에 갔더니 나의 행복과 자기 실현을 이야기하더라. 내게는 거기가 천국이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마흔두 살 때였다. 홍 신부는 지방의 한 도시에서 강물 위, 인적 없는 다리 난간에 서 있었다. 뛰어내릴 참이었다. “그냥 무(無)로 돌아가고 싶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내가 남긴 발자국도 없어지겠지, 생각했다.” 그때 허공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이렇게 끝낼 거냐?” 처음에는 환시인가, 환청인가 싶었다. 다시 뛰어내리려는데, 또 들렸다. “이렇게 끝낼 거야?”
홍 신부는 돌이켜 생각했다. “내 나이 마흔둘. 문득, 이렇게 끝내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무렵 한 후배가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미국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예수회 신부였다. “별다른 기대 없이 갔다. 그런데 내 삶이 통째로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나.
“첫 상담은 한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더라. 나한테 스트레스 주었던 사람들, 아주 쌍욕을 했다. 당시 나는 밥맛도 없고, 불면증도 있었다. 그날 밤, 정말 간만에 숙면을 취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속도 너무너무 편안하더라. 어, 이게 뭐지 싶었다. 생각해 보니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준 건 예수회 신부가 처음이었다.”
상담을 할 때마다 치유의 코드가 작동했다. “오래된 퇴적층처럼, 내면에 쌓여 있던 나의 치부가 하나씩 드러났다. 유치원 때 있었던 일, 초등학생 때 있었던 일. 나중에는 나이 차가 많고 불편한 관계였던 아버지 이야기까지 나왔다.” 홍 신부에게 상담은 일종의 고해성사였다. “나중에는 예수회 신부가 말했다. 신부라는 역할 말고, 홍성남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라고.”
결국 홍 신부는 가톨릭대 영성심리상담 대학원에 들어갔다. 학위를 따거나 교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더 깊이 알고 싶어서였다. 대학원은 그에게 일종의 ‘수도원’이었다. “어렸을 때는 효도해라, 바르게 살아라. 신학생 때는 죄짓지 마라. 이런 윤리와 교육의 억압 속에서 살았다. 대학원 갔더니 달랐다. ‘행복’과 ‘자기실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 정말 반가웠다. 내게는 거기가 천국이었다.”
-왜 나의 행복이 중요한가.
“내가 우울한데 다른 사람한테 행복을 전할 수 있을까. 남에게 전하려면 내 마음에 행복이 먼저 있어야 한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나를 미워하고 있었구나. 전에는 늘 가난하고, 낮고, 드러나지 않게 살자고 생각했다. 그게 사제의 삶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내가 먼저 행복해지자. 행복한 사제가 되자. 그리고 나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자. 그게 ‘사랑’이더라. 학교도, 사회도, 종교도 얼마든지 주입식 교육의 장(場)이 될 수 있다. 영성 생활이 뭔가. 내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기 위한 삶이다. 그러니 음식이든, 교육이든, 종교든 그냥 삼키지 말고 꼭꼭 씹어 먹자. 그래야 내 눈이 생기고, 내 근육이 생기고, 나의 행복감도 생긴다.”
-올해는 중앙일보 창간 60주년이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달라.
“신의 눈으로, 우주의 눈으로 보면 우리에게 뭐라고 하고 싶을까. 싸우지 마라, 같이 살아라, 서로 아끼고 살아라. 이러시지 않을까. 중앙일보가 그런 길을 열어가면 좋겠다.”
◇홍성남 신부=1954년 서울 출생. 신학생 때는 해방신학에 심취했지만, 영성심리를 통해 길을 찾았다. 마석ㆍ논현2동ㆍ상계동ㆍ가좌동 성당 등 주임신부 역임.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10.08 신부님과 샌드백

▲홍성남 신부가 가톨릭회관 내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 사무실에 있는 '15년 지기' 샌드백을 소개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다들 샌드백을 궁금해 하네요ㅋㅋㅋ”
최근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신부로부터 받은 카톡입니다. 저는 신간 ‘끝까지 나를 사랑하는 마음’(김영사) 출간을 계기로 신부님과 인터뷰를 했지요. 기사가 게재된 아침에 홍 신부님은 이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기사를 읽은 신부님 지인들이 샌드백을 가장 궁금해했다는 것이죠.
그 기사는 제목이 “내 안의 심리적 폭군 쫓아내니… 샌드백 안 때리고 절친 됐네요”였습니다. 사진도 홍 신부님이 사무실에서 샌드백에 팔을 얹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모습이었지요. 제목과 사진이 샌드백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말하자면 기사의 ‘의도’(?)가 독자에게 잘 전달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도로 치자면 홍 신부의 의도가 기자를 거쳐 독자에게 제대로 이어졌다고 봐야겠지요.
홍성남 신부와의 인연은 지난 2019년 책 ‘착한 사람 그만두기’로 시작됐습니다. 신부님은 이미 ‘벗어야 산다’ ‘화나면 화내고 힘들 땐 쉬어’ 등의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대개 책 제목에서 드러나지요. 사실 성직자들은 ‘화가 나도 참으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 홍 신부는 ‘화나면 화내라’고 하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시달리지 말라’고 하니 역발상이지요. 이런 메시지 덕분에 ‘속 시원하다’ ‘죄의식을 덜었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홍 신부는 책을 냈다 하면 수만 권씩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습니다. ‘착한 사람 그만 두기’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그 인터뷰 이후 1년에 한두 차례 홍 신부를 만나곤 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홍 신부가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이번 책이 나온다는 소식도 미리 듣고 있었지요. 그런데 막상 출간돼 나온 책을 펼쳐 읽다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책이나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내밀한 이야기들이 엄청나게 포함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털어놓아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의 내용도 많았습니다. 기사에선 지면 제약 때문에 자세히 적지 못했지만 가령 이런 내용들입니다.
<어느 날 유치원 합창단이 KBS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런데 방송국에 도착하자 선생님이 말했다. “성남이는 노래를 못하니 친구들 부르는 거 구경해.” 나는 사탕을 입에 물고 스튜디오 안에서 노래하는 친구들을 구경해야 했다. 그 후로 음악에 심한 콤플렉스가 생겨 악보의 음표만 봐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증세가 나타났다.
초등학교 시절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반 친구들도 잘 그린다고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그림을 교실 뒷벽에 붙여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성남이 그림은 너무 어두워.”
어린 시절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아이였다. 그저 그렇고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잔병치레도 심하고, 열등감에 짓눌린 채 소년기를 보냈다.>
책을 펴면 가장 앞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저도 그의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의 상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선생님은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정말 그림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지요. 그러나 그의 부친은 완고했습니다. 실향민이었던 아버지는 ‘돈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셨지요. 그렇게 홍 신부는 인생 희망에서 화가를 지우게 됐지요.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집이 짐승 우리처럼 느껴졌다. 불교 서적을 보며 출가를 생각했다. 몇몇 절을 찾아가 스님들을 만나보기도 했으나 확신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성당에 발을 들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실한 신자’로 인정을 받았고, 주위에서 수도자나 신부가 되라고 은근히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수도 생활이 아닌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한 선택이었다.>(20~21쪽)
그러나 ‘현실의 나’와 ‘이상 속의 나’(되고 싶은 나)의 차이는 결국 그를 자기모멸과 종교 분열증으로 몰아넣었고, 수도회 입회나 신학교 입학은 물 건너가게 되었지요.
신부가 되기 직전의 선택은 ‘박수’ 즉 무속인이었답니다. 저도 이 부분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군 제대 후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기웃거렸답니다. 그러다 어머니 소개로 동네 무당을 만났다네요. 무당은 그를 보곤 점괘를 내놓았답니다. “타고난 박수무당이다. 35세에 유명한 점쟁이가 될 것이다.” 그날 이후 무당은 그의 멘토가 됐답니다. 아플 때에도 병원 안 가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가시나무를 집안 곳곳에 매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만 26세 성탄절 새벽에 예수님을 환시로 만났다고 합니다. 물론 그 당시는 성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때였고요. 이 사건을 계기로 신학대에 진학해 사제의 길을 걷게 됐고요.
이렇게 방황 끝에 어렵게 사제가 됐으면 그다음부터는 평범하고 평탄하게 사제 생활을 하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빛과 그림자가 계속 교차하더군요. 첫 발령지는 잠실성당. 여기선 신자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답니다. 그 덕분에 마음속에 쌓여 있던 심리적 불순물이 다 날아가 버리는 듯했답니다. 그런데 다음 발령지인 명동성당에선 주사파 운동권들이, 그다음 발령받은 성당들에서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었고 힘든 일이 반복됐다네요. 점점 ‘괜히 사제가 됐나 보다’ ‘옷을 벗어야 하나’ 고민을 거듭했답니다. 어찌 보면 보통 사람들, 일반 직장인들의 고민과 똑같더군요.
<마음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고, 비난의 소리를 잊으려 술에 의지하는 날이 많아졌다. 옷을 벗어야 하나 매일매일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미사는 물론 강론은 더더욱 하기 싫었다. 이런 내가 나도 싫은데, 신자들은 오죽하랴 싶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도했다. “제 발로는 나갈 용기가 없으니 당신이 저를 내쳐주십시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죽자.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사느니 차라리 사라져주자.” 이것이 44세 신부가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28쪽)
‘이런 내가 나도 싫은데…’ 사제가 자살 충동까지 고백한 것이지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때가 가좌동성당 주임신부 시절이랍니다. 가좌동은 당시 재개발이 시작돼 가좌동성당도 재건축하게 되었지요. 재개발 사업은 항상 순탄치 않지요? 그 여파가 성당까지 밀어닥쳐서 홍 신부도 매우 힘든 시절을 보냈답니다. 그럴 때 만난 것이 심리상담이었습니다. 심리상담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쌓여 있었던 ‘심리적 변비’ 상태임을 알게 됐고, 숙변처럼 마음속에 쌓여서 떨어지지 않던 상처들을 관장(灌腸)하듯 쏟아내고 배설함으로써 거듭난 것이지요.
여기서 오늘의 주인공 샌드백이 등장합니다. 재개발 공사가 시작돼 주민들은 떠나고 성당만 덩그러니 남은 동네에서 조폭들과 실랑이하며 버티던 그는 스트레스로 불면증, 피부병, 대상포진까지 앓았다고 합니다. 누군가 귀띔해 주었답니다. “그거 화병일지도 몰라요.”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쏟아내기 시작했답니다. 밤엔 철거한 빈집 동네를 다니며 ‘야, 이 나쁜 놈들아~’라며 고함을 질렀고, 성당에서는 혼잣말처럼 구시렁댔답니다. 혼자 구시렁대는 그를 보고 신자들 사이에선 엉뚱하게도 ‘방언의 은총이 내렸다’는 말까지 돌았다지요. 어쨌든 그렇게 하자 속이 좀 풀리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 무렵 동네 스포츠용품점 앞을 지나다 샌드백을 발견하곤 “저거다” 싶었답니다. 어른 허리 정도 높이의 샌드백을 사서 사제관에 들여놨습니다. 처음엔 방과 방 사이에 걸어두었답니다. 지나다가 툭툭 때리려고요. 그렇게 이동할 때마다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답니다. 싫고 미운 얼굴을 떠올리며 차고 때렸다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언젠가부터 그 샌드백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답니다. 일부러 눈에 잘 띄라고 방과 방 사이에 걸어두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만큼 겹겹이 쌓였던 분노가 누그러진 것이죠.
샌드백 에피소드는 책 중간에 있었습니다. 179쪽 ‘소리 질러!’라는 소제목으로 스트레스 해소법을 소개하는 중에 나옵니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저는 마음속으로 무릎을 쳤습니다. “사진은 이거다!” 싶었지요. 신부님이 그동안 항상 화가 날 땐 화내라고, 미운 마음 생길 땐 미워하라고 강조했는데, 그걸 실물로 보여줄 최고의 상징적 ‘소품’(?)이 샌드백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신부님께 샌드백의 ‘현위치’를 물었더니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 있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사제관 숙소에 두었는데 낮 시간엔 주로 가톨릭회관 사무실에 있다 보니 샌드백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밤에 잠깐밖에 안 됐답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사무실에 데려다 놓고 짜증 나는 일 있을 때마다 툭툭 차기도 하고 근력 운동 삼아 들어 올리기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샌드백은 그의 사무실 책상 바로 옆에 얌전히 앉아있었습니다. 검정색 가죽 껍데기엔 용 한 마리가 수 놓여 있었는데, 그렇게 봐서 그런지 그 용 그림도 귀여웠습니다. 샌드백은 15년 동안 맞은 것치고는 멀쩡했습니다. 실밥 터진 곳도 없고요. 홍 신부는 “친구”라고 했습니다. 과거엔 미운 놈 생각하면서 샌드백을 때렸다면, 요즘은 혼잣말하듯 말을 걸기도 하면서 지낸다네요. 그래서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촬영했는데, 때리는 모습보다는 끌어안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홍 신부는 책에서 때로는 약점, 때로는 치부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이유를 “상담 기법을 활용했다”고 했습니다. “저 사람도 저렇게 약한 인간인데…” 싶으면 자신의 속 이야기를 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독자들 중에는 홍 신부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은 1부 ‘홍성남, 나의 이야기’ 부분을 읽다가 눈물 흘렸다는 분이 많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에겐 한 가지 위안이 더 생겼습니다. 신부님과 샌드백을 생각하면서요. 마음속 상처는 털어놓고, 화날 땐 화내고 사시지요. 뭐든 다 참고 살 것 같은 신부님도 화날 때는 샌드백을 때린다고 하시지 않나요?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10-11 “예수의 마지막 순간은 금요일 오후 3시”…성경·역사·천문 기록으로 본 예수의 죽음
“예수, 서기 33년 4월 3일 오후 3시에 숨져”…美 성경학자 주장

▲빌라도 석비.(데일리메일 홈페이지 캡처)
미국의 한 성경학자가 성경과 역사, 천문학 기록을 종합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진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제시했다.
9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미국 성경학자 우드로 마이클 크롤은 최근 출간한 저서 ‘예수가 죽은 날(The Day Jesus Died)’에서 예수가 서기 33년 4월 3일 금요일 오후 3시에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 본문, 역사적 사료, 천문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성경 마가복음 15장 34절에는 예수가 ‘제 9시’에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유대인의 하루는 오전 6시를 기준으로 시작해 12시간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제 9시는 오후 3시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
예수가 금요일에 처형됐다고 본 이유도 제시됐다. 성경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는 모두 예수의 죽음이 ‘안식일 전날’에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유대 전통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므로, 그 전날은 금요일이다.
크롤은 천문학적 계산을 통해 서기 33년 4월 3일 예루살렘 상공에 유월절과 일치하는 보름달이 떠 있었으며, 그날 저녁 부분 월식이 관측됐다고 밝혔다. 달빛이 붉게 변하는 이 현상은 사도행전 2장 20절에 등장하는 ‘달이 피로 변하리라’는 구절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는 설명이다.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주관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서기 26~36년 유대 지방을 다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빌라도 석비’에는 그의 이름과 직책이 새겨져 있어 복음서 기록의 역사성을 입증한다고 크롤은 전했다.
또한 1968년에는 십자가형을 당한 남성의 발꿈치 뼈가 예루살렘 인근에서 발굴됐다. 이 유골에는 못 자국과 뼈 손상 흔적이 남아 있어 복음서에 묘사된 로마의 처형 방식과 일치한다고 한다.
크롤은 기독교인이 아닌 고대 역사학자 플레곤과 탈루스의 기록도 인용했다. 이들은 서기 33년 무렵 제202회 올림피아드 기간에 ‘정오에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과 지진’이 있었다고 남겼는데,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죽음 당시 정황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의 증언과 역사·과학적 자료를 종합할 때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순간을 명확히 특정할 수 있다”며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생생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심만수 기자
10-16 2027년 교황 맞이… 주한교황대사관 건물 신축 기공식

▲15일 공개된 대사관 모형.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참석을 위해 방한하는 레오 14세 교황이 한국에서 머물 공간이 새롭게 지어진다. 60여년간 한국과 교황청 교류의 거점이었던 서울 종로구 궁정동 주한교황대사관 건물의 신축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16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 따르면 주한교황대사관은 전날 궁정동 부지에서 주한 교황대사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및 천주교서울대구장을 지낸 염수정 추기경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열고 신축할 대사관 건물의 개요를 공개했다.
새 건물은 대지 면적 2353.1㎡의 터에 연면적 2063.76㎡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된다. 대사관 기존 건물보다 연면적을 약 36% 확대해 설계했다. 비용은 142억원 정도로 예상되며 대사관과 한국 가톨릭교회가 함께 부담한다. 약 16개월이 소요될 전망이며 2027년 1월 완공을 목표로 한다.
1층에 대사관 메인홀과 수녀원 부속 시설을 마련하고 2층에 업무 공간과 성당, 식당을 둔다. 3층에는 대사관저와 도서관, 수녀원, 손님방을 마련할 예정이다. 지하에는 문서고와 기계실 등을 설치한다.

▲15일 열린 주한 교황대사관 신축 기공식.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설계를 담당한 ㈜간삼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 진교남 부사장은 “교황청이 추구하는 평화, 대화, 연대의 정신을 건축으로 구현하고자 했다”며 “건물은 성스러움과 품격을 전달하면서도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형태로 지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사관과 수녀원, 미사 공간이 빛과 녹음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가지며, 각 공간은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순례 동선처럼 이어지도록 설계했다”고 덧붙였다.
주교회의에 따르면, 2027년 8월 3∼8일 WYD 참석 차 방한하는 레오 14세 교황은 바로 이 신축 건물에 머물게 된다. 기존 건물은 한국과 교황청이 1963년 정식으로 수교한 이후 62년간 사용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1984년·1989년)과 프란치스코 교황(2014년)이 방한했을 때 숙소로 사용됐다.
문화일보 박동미 기자
10.17 강화도에 '스며든' 성공회…40칸 한옥 '강화성당'

1900년 지어진 강화성공회성당은 40칸 한옥 외형에 바실리카 내부 구조를 가진 독특한 형식미.
종탑 대신 종각과 범종, 보리수와 산문, 묵상용 라브린스 정원 등이 설치돼 불교·유교·기독교가 공존.
현존 최고 한옥 성당(사적 424호), 인근 온수리성당과 함께 비교 순례 의미가 크다.
큰 기와집 한 채가 언덕 위에 길게 자리하고 있다. 큰 배[船]가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로 10칸, 세로 4칸, 총 40칸짜리 대형 한옥. 지붕 위의 십자가와 ‘天主聖殿(천주성전)’이란 편액이 없다면 그냥 큰 한옥 혹은 조선 시대의 공공기관쯤으로 보인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강화읍성당)은 이렇게 이색적인 외모로 유명하다.
10.18 교황님마저 충격에 빠뜨린 미사 중 공개 노상방뇨… 성 베드로 대성당 신도들 ‘경악’ (영상)

▲한 남성이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에서 한 남성이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고 있다. 엑스 캡처
교황, 소식 듣고 ‘충격’
가톨릭 교회의 본산인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 남성이 제단에 올라가 신도와 관광객 수백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변을 본 사건이 벌어졌다고 11일(현지시간) 일간 일템포, 코리에레델라세라 등 이탈리아 매체들이 전했다.
바티칸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은 전날 오전 9시 30분쯤 발생했다. SNS에 빠르게 확산한 영상을 보면 한 젊은 남성이 제단 앞에서 바지를 무릎까지 내린 채 소변을 보고 있다. 경비원 한 명이 남성을 뒤에서 붙잡았고, 잠시 뒤 또 다른 경비원이 합류해 남성을 제단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남성은 성 베드로 대성당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인 발다키노(천개) 주변 회전식 출입통제장치(tornello)를 우회해 계단을 재빨리 올라간 후 제단에 도착해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봐 제단을 더럽힌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현장에선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다만 해당 미사를 교황 레오 14세가 직접 집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교황은 사건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현지 것으로 알려졌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일템포는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 경비 시스템의 효율성에 대해 직접 언급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6월 1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폴란드 출신의 한 남성이 등에 “우크라이나의 아이들을 구하라”는 문구를 새긴 채 중앙의 제단에 올라서서 반전 시위를 벌였다.
이 남성은 당시 손톱으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등 과격한 행위도 벌였다.
해당 남성은 결국 이탈리아에서 추방됐다.
이틀 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대사제인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은 이날 ‘정화 의식’(rite of reparation) 미사를 집전했다.
문화일보 박준우 기자
11.05 그 신부는 왜 신자석이 아닌 천장을 보며 강론했을까?
#신자석 아닌 천장 보고 강론한 신부

▲염수의 신부가 개포동성당 주임신부이던 시절 촬영한 모습. /조선일보DB
“그 친구는 미사 때 신자석이 아니라 천장을 보고 강론하더라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 이유를 듣곤 고개를 끄덕였어. 내 친구지만 그런 면에서 존경해.”
‘천장을 보고 강론하는 신부’ 이야기를 들려준 건 신문사 선배였습니다. 그 선배는 천주교 신자였는데 고교 동기분이 사제가 돼 자신이 출석하는 성당의 주임신부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뭔가 이상해서 자세히 관찰해보니 미사 강론 때 신자석이 아니라 천장을 바라보면서 하더라는 것입니다. 비단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대중을 상대로 발언을 할 때는 참석자들과 눈을 맞추면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천장을 보면서 강론을 하다니요. 그 선배는 친구이자 신자의 입장에서 사적인 식사 자리에서 그 이유를 물었답니다. 그 답이 보통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자꾸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데, 그걸 다른 신자들이 눈치 채면 불편할 거 아니냐. 그래서 아예 천장을 보면서 강론하는 거야.”
성당이건 교회건 절이건 돈 들어갈 일은 많습니다. 큰일엔 큰돈이 들고, 그럴 때는 거액을 헌금한 분들이 고맙지요. 물론 그런 일이 사제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니고 성당을 위한 것이라도요. 주임신부라면 헌금 목록을 확인할 테니 누가 얼마를 헌금했는지 자연히 머릿속에 남게 되겠지요. 그러면 사제도 인간인지라 미사 때 거액 헌금자가 눈에 띄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곤 한다는 거지요. 여러 번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게 되면 주변 사람들도 눈치 채게 되고 그러면 공동체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신부는 적어도 헌금 액수로 신자를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편의 하나로 신자석이 아니라 성당 천장을 보면서 강론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제는 지금은 은퇴한 염수의 신부입니다.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염수정 추기경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염수의 신부는 개포동성당 주임신부 때에는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사업에 앞장섰고, 잠원동성당 주임신부 시절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敬天(경천)’을 구입해 서울대교구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재벌 부인도 n분의 1만 참여

▲동검도 채플과 조광호 신부. 채플의 미술작품은 모두 조 신부의 작품. /김한수 기자
종교인과 종교 단체도 이슬만 먹고살 수는 없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무소유와 청빈을 강조해도 최소한의 경비는 있어야 합니다. 법정 스님도 ‘무소유’에 대해 필요 이상의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 했지요. 이렇듯 종교인들이 돈을 다루는 방법은 일반인과 달라야겠지요. 적어도 일반인들은 종교인들에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방문한 인천 강화 동검도 채플에서도 돈과 종교의 깔끔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동검도 채플은 스테인드글라스 대가인 조광호 신부가 개인적으로 마련한 기도와 명상의 공간입니다. ‘실내는 7평, 마당은 천만 평’이라는 조 신부의 말처럼 강화도 서해안 경치 한복판에 자그마한 채플이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전면의 유리창 주변엔 조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장식돼 있고 정면으로는 갯벌과 마니산 정상이 보이는 곳이지요. 채플에 들어가 한참을 경치 감상에 정신이 팔렸다가 실내를 둘러보는데 명단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동검도 채플 건립 봉헌자’라는 명단이었는데요. 이런 글귀와 함께 명단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가득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이를 찬양하는 예술 작품이 함께 어우러진 이 채플은 80여 명 봉헌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지은 집입니다. 종교와 직업과 신분을 초월하여 이 ’영적 쉼터‘ 마련을 위해 정성을 다하신 분들의 이름(가나다순)을 여기 새겨 그 뜻을 길이 기리고자 합니다.’
명단엔 고(故) 김남조 시인과 이해인 수녀를 비롯해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문화인들과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의 이름도 있습니다. ‘가나다순’으로 적다 보니 홍 관장의 이름은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습니다.
조 신부는 “십시일반으로 봉헌하신 분들”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채플 구상을 할 때에는 공사 비용을 도맡겠다는 분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조 신부는 다 함께 정성을 모으는 방향을 택했답니다. 그래서 비용의 대부분은 조 신부 자신이 부담하고 뜻을 같이하는 80여 명의 정성을 보태 채플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80명 명단을 봐도 특별히 한 사람의 이름에만 시선이 머물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주 물(物)은 쇠 녹인 물
특정인에게 큰 후원을 받지 않는 원칙은 현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에게도 들었습니다. 성파 스님은 머물고 계신 통도사 서운암에서 된장, 고추장을 만들어 판매하는 등 사찰의 자급자족을 고민해 온 분입니다. 그런 바탕에서 8만대장경을 도자기 16만장으로 구워서 장경각을 만들었고, 지금도 옻칠 민화 작업을 하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공부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분입니다.
성파 스님이 특정인에게 큰 시주를 받지 않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출가 초기의 경험 때문이랍니다. 어떤 신도가 스님에게 장삼 한 벌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당시에 입고 있던 장삼이 멀쩡해서 다른 스님에게 주었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선물한 신도가 ‘왜 장삼을 안 입느냐’고 물었답니다. 대답이 막힌 스님은 우물우물 그 상황을 넘겼답니다. 그 일을 통해 왜 절에서 어른스님들이 ‘시주 물(物)은 쇠[鐵] 녹인 물 마시듯 하라’ ‘적 화살은 피해도 은혜 화살은 피할 수 없다’고 하는지 절감했다고 합니다. 은혜를 입고, 신세를 지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후로는 불사(佛事)를 할 때에도 가능하면 특정인에게 큰 시주를 받지 않게 됐다는 것이죠. 대신 단감나무 밭을 만들고 된장, 고추장을 담가 판매하는 등 자급자족에 힘썼습니다.
헌금, 시주와 관련한 종교인들의 이야기 중 액수와 관련해 ‘시선 차별’까지 염려했다는 부분이 오래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대놓고 돈을 이야기하는 종교인들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종교인들은 이렇게 ‘시선 차별’까지 조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11.05 교황청 새 교령 "예수만이 세상 구원, 성모는 아냐"
"성모는 구원의 문을 연 신과 인류의 중재자"
레오 14세 교황, 트럼프 정부 이민자 정책 반성 촉구

/미국 출신의 교황 레오 14세. 연합뉴스
성모 마리아가 세상을 구원한 예수를 도왔는지를 두고, 수백 년간 계속된 기독교 내부 논쟁이 교황청의 새 교령으로 마침표를 찍게 됐다. 4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14억명의 가톨릭 교인에 성모 마리아를 '공동 구세주'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혔다.
예수가 세상을 '저주'(죄악)로부터 구하는 데 성모 마리아가 도움을 주지는 않았고, 예수만이 세상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교황청은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낳음으로써 모든 인류가 기다렸던 구원의 문을 연 것"이라며 '공동 구세주'가 아닌 신과 인류의 중재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부각했다.
이번 지침은 교황 레오 14세의 승인을 받은 새 교령에 따른 것이다. 가톨릭 교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원했다고 믿는다. 이 때, 성모 마리아가 세상을 구한 예수를 도왔는지 여부는 수백년 동안 계속된 논쟁거리였다.
역대 교황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프란치스코 전 교황은 "성모 마리아는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아들로부터 아무것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라며 '공동 구세주' 칭호를 강하게 반대했다.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베네딕토 전 교황도 마찬가지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반면, 요한 바오로 2세 전 교황은 '공동 구세주' 칭호를 지지했다. 하지만 교황청 신앙교리부에서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자, 1990년대 중반 이후 공개 석상에서 '공동 구세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추방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레오 14세는 로마 외곽의 거주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영성체(예수의 몸과 피로 여겨지는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의식)를 금지당한 미국 정부 시설의 이민자와 관련해 트럼프 정부에 '깊은 반성'을 촉구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매일신문 권성훈 기자
11.07 “세상에 더 기여하라는 뜻… 상금은 유산보전에 기부”

‘해평상’ 김종규 명예이사장
김희중 대주교도 함께 수상
“노년에 상을 받는 것은 민망한 일이지만, 세상에 더 기여하라는 뜻으로 알고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금은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부할 것입니다.”
올해 해평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명예이사장은 7일 이렇게 말했다. 사단법인 상생과평화(이사장 송석구)는 이날 제3회 해평상 수상자로 김 명예이사장과 김희중 대주교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김 명예이사장은 오랫동안 출판과 박물관 계에서 활동했으며, 문화유산국민신탁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문화유산 보존 운동을 주도해 왔다. 그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장,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삼성출판박물관장,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문화재 계와 시민사회, 정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 상생과평화 측은 “김 명예이사장의 활동은 단순한 유산 보존을 넘어, 공존과 연대를 기반으로 한 평화 문화의 확산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라고 했다.
김 대주교는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종교 간 벽을 허물고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한 교류에 앞장서 왔다. 상생과평화는 “김 대주교는 오랜 기간 종교 간 대화,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남북 화해를 위한 실천을 이어오며 우리 사회의 진정한 상생 정신을 구현해 왔다”라며 선정 배경을 밝혔다.
해평상은 한국민족종교협의회를 창립한 창립 회장인 고 해평 한양원(1923∼2016) 선생을 기리고 상생과 평화 문화를 진작하기 위해 2023년 제정한 상이다. 시상식은 11일 오전 11시에 더플라자호텔서울에서 한양원 선생 9주기 추모식과 함께 열린다.
문화일보 김지은 기자
11.10 "성모는 구원의 문을 연 신과 인류의 중재자"
■교황청 새 교령 "예수만이 세상 구원, 성모는 아냐"
"성모는 구원의 문을 연 신과 인류의 중재자"
레오 14세 교황, 트럼프 정부 이민자 정책 반성 촉구
성모 마리아가 세상을 구원한 예수를 도왔는지를 두고, 수백 년간 계속된 기독교 내부 논쟁이 교황청의 새 교령으로 마침표를 찍게 됐다. 4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14억명의 가톨릭 교인에 성모 마리아를 '공동 구세주'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혔다.
예수가 세상을 '저주'(죄악)로부터 구하는 데 성모 마리아가 도움을 주지는 않았고, 예수만이 세상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교황청은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낳음으로써 모든 인류가 기다렸던 구원의 문을 연 것"이라며 '공동 구세주'가 아닌 신과 인류의 중재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부각했다.
이번 지침은 교황 레오 14세의 승인을 받은 새 교령에 따른 것이다. 가톨릭 교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원했다고 믿는다. 이 때, 성모 마리아가 세상을 구한 예수를 도왔는지 여부는 수백년 동안 계속된 논쟁거리였다.
역대 교황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프란치스코 전 교황은 "성모 마리아는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아들로부터 아무것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라며 '공동 구세주' 칭호를 강하게 반대했다.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베네딕토 전 교황도 마찬가지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반면, 요한 바오로 2세 전 교황은 '공동 구세주' 칭호를 지지했다. 하지만 교황청 신앙교리부에서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자, 1990년대 중반 이후 공개 석상에서 '공동 구세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추방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레오 14세는 로마 외곽의 거주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영성체(예수의 몸과 피로 여겨지는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의식)를 금지당한 미국 정부 시설의 이민자와 관련해 트럼프 정부에 '깊은 반성'을 촉구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매일신문 권성훈 기자
11.23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공식 기도문 발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조직위원회(LOC, 이하 조직위)는 11월 23일,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이하 서울 WYD) 공식 기도문을 발표했다. 이날은 제40차 세계 젊은이의 날이자 교회 전례력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기도 하다.
이번 기도문은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DLFL)와 함께 검토·조율해 확정된 것으로, 앞으로 전 세계교회가 서울 WYD를 준비하며 함께 바치는 공식 기도문이 된다.
서울 WYD 공식 기도문은 다양한 국적과 문화, 영성을 지닌 젊은이와 사제·수도자·평신도가 함께 기도하고 묵상하며 완성한 시노드 정신을 담은 창작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대회 주제성구인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에서 시작된 이번 기도문은, 서울 WYD의 준비와 실행이 모든 참가자에게 순례의 여정이며, 단순한 행사를 넘어 교회 쇄신을 향한 시노드 여정임을 강조한다.
조직위는 조직위 주교단의 제안으로 ‘기도문 피정’을 마련해 약 2개월간 기초 작업을 진행했다. 피정에는 각 교구 추천 청년 대표, 봉사자, 실무진, 주교, 사제, 수도자, 국내에 거주하는 해외 청년 등 77명의 참가자들이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주제 강의, 성체조배, 개인·소그룹 나눔, 개인 및 조별 기도문 작성 등을 통해 기도문에 담길 핵심 요소들을 공동으로 식별해 나갔다.
이후 개인·소그룹·전체 회의를 거쳐 초안이 작성됐으며, 조직위 집필팀과 온라인 의견 수렴 과정을 통해 초안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최종안은 조직위 주교단 심의와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 승인,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DLFL)의 검토를 거쳐 확정됐다.
서울대교구장이자 조직위원장인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는 “오늘 발표된 공식 기도문의 핵심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 모든 이를 초대하며, 용기를 내어 이 시대의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마주하고, 모든 이가 시노드 여정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라며, “2027년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서울 WYD가 모든 이에게 연대와 희망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도록 공식 기도문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장관 케빈 패럴 추기경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전 세계 청년들에게 선물처럼 공식 기도문을 준비해 준 조직위에 감사를 전한다”며, “전 세계 젊은이들이 각자의 공동체와 주교님들과 하나 되어, 지금 이 세상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평화, 형제애, 희망을 함께 외쳐주길 초대한다”고 말했다.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글레이손 데 파울라 소자 차관은 “많은 청년이 기도로부터 오는 힘을 체험하고 친구, 가족, 지인들에게 복음의 삶을 증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직위 사목사무국장 이희천 신부는 “이 기도문은 청년뿐 아니라 그들과 동반하는 모든 이가 함께 바칠 수 있는 기도”라며 “준비 과정부터 대회 기간까지 하느님께서 한국교회와 사회, 보편교회 그리고 온 세상에 내리실 은총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조직위는 이번 기도문이 청년 모임, 본당 및 교구 행사, 미사 전후, 사목 현장 등에서 널리 사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전 세계 신자들이 한 목소리로 기도함으로써, 2027년을 향한 영적 순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도록 초대한다.
<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공식 기도문 >
젊은이를 사랑하시는 주님,
저희를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초대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희 자신을 당신께 맡겨 드리오니,
온 세상 젊은이들이 교회의 품 안에서 위로받고
친교와 일치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이미 그리고 영원히’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님,
“용기를 내어라” 하신 당신의 말씀 안에서
온 세상 모든 이가 희망을 발견하고,
사랑과 용서의 십자가가 세상에 대한 승리임을 깨닫게 하소서.
사랑의 불꽃이신 성령님,
당신의 놀라운 손길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으셨으니,
한국 순교 성인들의 믿음이 저희 가슴에도 타올라
평화와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살아가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이 세계청년대회의 순례 여정을 통해
저희 모두가 서로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 안에서 당신의 뜻을 찾으며,
모든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 시노드 교회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자비와 평화의 모후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서울 세계청년대회의 주보성인들이여,
◎ 모든 젊은이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카톨릭신문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
11.25 나이지리아 가톨릭계 학생 300여 명 납치 충격

▲나이지리아 카두나 지역 한 소년이 지난해 3월 종교 박해에 항의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11월 21일에는 나이지리아 파피리 소재 가톨릭계 학교 학생 300여 명이 무장괴한에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OSV 자료사진
[나이지리아, 파피리 OSV] 나이지리아에서 11월 21일 무장괴한들이 가톨릭계 학교 학생 300여 명과 교사 10여 명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극단주의 이슬람 무장 단체의 그리스도인 박해가 심각한 상황이다.
나이지리아 그리스도교협회(The Christian Association of Nigeria)는 11월 22일 “니제르주 파피리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10~18세 남녀 학생 303명, 교사 12명이 무장괴한에 끌려갔다”고 발표했다.
나이지리아 콘타고라교구는 “무장괴한들은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학교를 공격했고, 학교 보안요원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밝혔다. 콘타고라교구장 불루스 요한나 주교도 “교회는 보안 당국, 지역사회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고, 구조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 경찰은 군 당국과 협력해 학교 인근 숲을 수색하며, 인질들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레오 14세 교황 역시 11월 23일 주일 삼종기도 중 “인질들이 즉각 석방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들의 석방을 보장하기 위해 관계 당국이 시의적절한 결정을 내려 줄 것을 촉구한다”고 호소했다.
카톨릭신문
11.26 회개의 표지로 네 배의 보상을 약속한 자캐오
스웨덴의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은 27세에 나이트로글리세린 제조법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는 평화와 문명을 파괴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되면서, 그에게는 칭찬보다 비난이 쏟아졌다. 한동안 깊은 시름에 빠져 정작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던 그에게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는 십만 프랑을 주며 “세계 산업에 일대 변혁을 초래할 발명품”이라고 격려했다. 그 이후 노벨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였던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화약이 인간을 살상하는 무기로 더욱 악용되는 현실을 보면서 큰 실망과 함께 자책감에 빠졌다. 유명한 ‘노벨상’은 이런 인간적인 고뇌에서 시작되었다. 노벨은 천문학적인 유산을 원금으로 맡기고, 매년 그 이자를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위대한 일을 한 사람’에게 큰 상금으로 수여하도록 했다.

▲제임스 티소의 <나무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캐오>
각종 기초과학·응용과학 분야의 상이 있지만, 수학상이 제정되지 않은 것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노벨은 친구인 수학자 미타크 레플러가 자신의 부인과 몰래 밀애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벨 수학상이 제정되면 당대의 천재인 레플러가 수상자가 될 것은 거의 확실했다. 노벨이 수학상을 두지 않은 것은 연적에 대한 마지막 복수였다는 것이다.
세리는 로마가 통치하는 지역에 꼭 있는 직업이었다. 로마는 식민지의 세금 징수에 그 나라의 사람들을 이용했다. 세관장들은 한 해의 예상 세입을 먼저 로마에 지불했다. 그러니 당연히 세리들은 선불금을 포함해 최대한 세금 수입을 올리려고 부당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에서 로마 제국의 하수인이자 대리인으로, 이방인이나 창녀 같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자캐오란 인물도 다른 세리들처럼 법을 악용하여 재물을 모은 부자였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에서 소문이 자자한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수님은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과도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이미 들은 터였다. 길가에 많은 사람이 환호하자, 키가 작은 자캐오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주님은 나무 위에 올라간 자캐오를 보고 그를 부르셨다. 주변 사람들이 죄인과 어울린다며 수군거렸지만, 예수님의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캐오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렀다.
동족에게도 비난과 멸시를 받으며 고독하고 소외된 삶을 살던 자캐오는, 자신을 평범한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예수님께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은 자캐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자캐오는 주님께, 많은 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약속했다.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소유를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율법에는 남을 기망하거나 착취해서 부당한 이익을 챙겼을 때, 이익을 본 액수에 20%를 더해 되갚도록 하여 죗값을 치르게 했다.(레위 5,24 참조) 자캐오는 자신의 회심을 이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사람은 마음이 변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카톨릭신문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12-03 교황 “중동은 복수·폭력의 사고방식 거부하라”
■ 레바논서 15만명 미사 집전
“분열 대신 화해로 나아가며
평화 요구하는 외침 듣기를”
트럼프 마두로 축출 시도에
“베네수엘라 군사 압박 말라”

레오 14세(사진) 교황이 즉위 후 첫 해외순방 일정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해안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15만 명에 육박하는 신도가 운집한 해당 미사에서 레오 14세 교황은 중동이 복수와 폭력의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정치·사회·종교적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레오 14세 교황은 2일(현지시간) 미사를 집전하며 “불안정과 전쟁, 고통으로 얼룩진 이 땅에 평화를 내려주시길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며 희망의 순례자로 중동에 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동은 복수와 폭력의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정치·사회·종교적 분열을 극복하며 화해와 평화의 이름으로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사랑하는 레바논을 위해 기도한다”며 “레바논은 다시 한 번 ‘정의와 형제애의 집’이자 ‘레반트(동지중해 지역) 전역의 평화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레바논에 다시 일어설 것을 촉구한다”며 “국제사회도 대화와 화해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미사를 집전하기 전 레오 14세 교황은 지난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현장을 찾아 218명의 희생자를 위해 기도하고 유족 일부를 만나기도 했다. AP통신에 따르면 항구 폭발 이후 5년이 흐른 지금까지 단 한 명의 공직자도 이 사고와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이에 유족들은 정의를 요구하며 정부에 항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레오 14세 교황은 전날에는 베이루트 북쪽 브케르케에서 현지 청년 1만5000명과 직접 만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또 1975∼1990년 레바논 내전 당시 전선 지역인 ‘그린 라인’에 있는 순교자 광장에서 레바논의 여러 종교 공동체 지도자들을 만나 “평화를 건설하는 이들이 되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수년간 분쟁, 정치 공백, 경제 파탄에 시달린 레바논 방문을 ‘평화의 사명’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레오 14세 교황은 2일 귀국하는 전세기 안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에 군사력을 동원해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대화 방안을 모색하거나 경제 압박을 포함한 다른 수단을 고려하는 게 더 낫다”고 덧붙였다. 또 트럼프 행정부의 베네수엘라 정책 신호가 불분명하다며 “미국에서 나오는 목소리들은 일정한 주기로 변한다”고 지적했다.
문화일보 박상훈 기자
12.05 오랫동안 소홀히 여겨진 로마교구 주교좌성당

▲11월 9일 수녀들이 라테라노 대성당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 CNS
로마를 방문하는 관광객 대부분, 심지어 가톨릭 성지 순례자들도,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이며 항상 교황의 거처이자 주교좌일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은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티베르강 건너, 로마의 다른 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 앞 넓은 광장은 오늘날 로마 시민들에게 주로 대규모 정치 집회와 콘서트가 열리는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4세기,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재위 315~345년) 때 이 성당의 원래 건물을 세웠다. 당시 붙여진 본래 이름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이었다.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당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로 여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건축 후 약 100년이 지나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은 약탈을 당했고,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지진과 큰 화재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의 대부분은 17세기에 재건된 것이며, ‘영원의 도시’ 로마 곳곳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당당히 십자가를 껴안고 있는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조각상 바로 아래, 이 장엄한 정면 파사드에는 이 성당의 공식 명칭을 암시하는 ‘Cristo Salvatori(구세주 그리스도)’라는 라틴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후 교황들은 세례자 요한과 복음사가 요한을 이 성당의 특별 주보 성인으로 더해 주었고, 그래서 오늘날 이 성당이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문 양쪽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 밑에는 또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다. ‘Sacros. Lateran. Eccles./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 이는 라테라노 대성당이 ‘로마와 온 세상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임을 알려 준다.
라테라노는 거의 1000년 동안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이자 교구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309년, 클레멘스 5세 교황과 교황청이 프랑스로 옮겨 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70년이 지난 후,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돌아왔을 때는 라테라노 대성당과 교황 거처는 이미 폐허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 무렵부터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요성이 점점 더 부각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로마교구의 주교좌인 라테라노 대성당은 서서히, 그리고 계속해서 소홀히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난 2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교구는 본받아야 할 전례의 모범으로 주교와 주교좌성당을 바라봅니다.” 부디 다른 교구들이, 교황들이 지금 자기 주교좌성당을 활용하는 방식(혹은 거의 활용하지 않는 방식)을 그대로 본받고 있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예를 들어, 교황은 부제·사제·주교 서품식과 같은 교구의 주요 전례를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집전하지 않고 있다. 교황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서품식을 주례한 것은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총대리 주교를 서임했을 때였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성 요한 23세 교황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거행했던 1962년이 마지막이다.
성유 축성 미사도 라테라노 대성당이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다. 로마에서 유학하거나 일하는 교구 외 사제들까지 초대하다 보니,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들이 꼭 모두 초대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교황은 로마교구 주교좌성당의 중요성을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제안을 하자면, 11월 8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의 명칭을 ‘로마교구 주교좌성당 봉헌 축일’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이렇게 하면 이 성당의 진정한 성격과 목적이 더욱 강조된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는, 자신의 주교좌성당에 착좌하기도 전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즉위미사를 거행한다. 순서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 제안하자면, 로마의 주교는 성유 축성 미사뿐 아니라 서품식, 파스카 성야 미사, 전례력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 미사 등 교구의 주요 전례를 자신의 주교좌성당에서 거행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 성당의 위상을 되살리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 또 실제로 해야 할 일은 이 밖에도 훨씬 많다. 보수 공사와 환경 정비도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지금의 교황도 로마교구 주교좌성당에 안장된 여러 교황들, 특히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레오 13세 교황과 함께 그곳에 잠들기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톨릭신문 글 _ 로버트 미켄스
1986년부터 로마에 거주하고 있으며, 40년 가까이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에 관해 글을 쓰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1년 동안 바티칸라디오에서 근무했다. 런던 소재 가톨릭 주간지 ‘더 태블릿’에서도 10년간 일했으며, ‘라 크루아 인터내셔널’(La Croix International) 편집장(2014~2024)을 지냈다.

12.05 사도단에 치맛바람 일으킨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한스 폰 쿨름바흐의 <아들 아고보, 요한과 함께 있는 제베대오와 살로메>
유다인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천재들이 많은 것은 그들의 특별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교육이 지식이나 암기, 연역적 방법을 중시하는 것에 비해, 유다인들은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감성이나 지혜에 초점을 두고 토론이나 귀납적 방법을 사용한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가장이며 제사장이며 교육자의 역할을 한다. 유다인들에게 식사 시간은 성경 공부 시간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율법을 직접 받은 것 같은 감동으로 자녀들에게 토라를 가르친다. 논리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하며 자녀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한다.
그런데 과학계는 지능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주장한다. 유다인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어머니는 자녀 정서교육의 원천이며 최고의 심리치료사이며 교육의 상징이다. 어머니는 자녀의 거룩함, 올바른 행위, 좋은 성품을 계발해 주고 남편과 자녀들이 하느님 말씀을 배우게 도와준다.
자비로운 어머니는 동시에 능력이 있는 교사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교육열이 유별난 우리나라의 어머니들도 치맛바람(?)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지만, 좀 더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식만 챙기다 보니 교권을 침해하는 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제베대오의 부인 살로메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아주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사도단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는데 어머니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 예수님께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여성 제자그룹의 가장 핵심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녀는 왜 그렇게 예수님을 따랐을까? 유다 사회에서 여성은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사상과 활동에 매력을 느껴 전심전력으로 사도단을 도왔다. 살로메는 보통 유다인 가정처럼 아들들에게 많은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살로메는 인간적으로도 예수님께 큰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살로메는 예수님에게 청탁한다. 예수님의 나라가 서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하나씩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분명히 예수님이 언젠가 큰 권력을 잡아 세상을 통치할 큰 인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도들 안에서는 당연히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물론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제자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살로메의 치맛바람으로 사도단 내에 말썽이 난 셈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제자들이 모두 줄행랑을 친 후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밑에까지 함께했던 의리있는 여장부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12.06 교황님이 거처하시는 곳은 어디?
로마를 방문하는 관광객 대부분, 심지어 가톨릭 성지 순례자들도,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이며 항상 교황의 거처이자 주교좌일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은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티베르강 건너, 로마의 다른 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 앞 넓은 광장은 오늘날 로마 시민들에게 주로 대규모 정치 집회와 콘서트가 열리는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4세기,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재위 315~345년) 때 이 성당의 원래 건물을 세웠다. 당시 붙여진 본래 이름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이었다.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당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로 여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건축 후 약 100년이 지나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은 약탈을 당했고,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지진과 큰 화재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의 대부분은 17세기에 재건된 것이며, ‘영원의 도시’ 로마 곳곳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당당히 십자가를 껴안고 있는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조각상 바로 아래, 이 장엄한 정면 파사드에는 이 성당의 공식 명칭을 암시하는 ‘Cristo Salvatori(구세주 그리스도)’라는 라틴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후 교황들은 세례자 요한과 복음사가 요한을 이 성당의 특별 주보 성인으로 더해 주었고, 그래서 오늘날 이 성당이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문 양쪽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 밑에는 또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다. ‘Sacros. Lateran. Eccles./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 이는 라테라노 대성당이 ‘로마와 온 세상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임을 알려 준다.
라테라노는 거의 1000년 동안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이자 교구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309년, 클레멘스 5세 교황과 교황청이 프랑스로 옮겨 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70년이 지난 후,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돌아왔을 때는 라테라노 대성당과 교황 거처는 이미 폐허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 무렵부터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요성이 점점 더 부각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로마교구의 주교좌인 라테라노 대성당은 서서히, 그리고 계속해서 소홀히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난 2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교구는 본받아야 할 전례의 모범으로 주교와 주교좌성당을 바라봅니다.” 부디 다른 교구들이, 교황들이 지금 자기 주교좌성당을 활용하는 방식(혹은 거의 활용하지 않는 방식)을 그대로 본받고 있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예를 들어, 교황은 부제·사제·주교 서품식과 같은 교구의 주요 전례를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집전하지 않고 있다. 교황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서품식을 주례한 것은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총대리 주교를 서임했을 때였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성 요한 23세 교황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거행했던 1962년이 마지막이다.
성유 축성 미사도 라테라노 대성당이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다. 로마에서 유학하거나 일하는 교구 외 사제들까지 초대하다 보니,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들이 꼭 모두 초대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교황은 로마교구 주교좌성당의 중요성을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제안을 하자면, 11월 8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의 명칭을 ‘로마교구 주교좌성당 봉헌 축일’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이렇게 하면 이 성당의 진정한 성격과 목적이 더욱 강조된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는, 자신의 주교좌성당에 착좌하기도 전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즉위미사를 거행한다. 순서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 제안하자면, 로마의 주교는 성유 축성 미사뿐 아니라 서품식, 파스카 성야 미사, 전례력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 미사 등 교구의 주요 전례를 자신의 주교좌성당에서 거행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 성당의 위상을 되살리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 또 실제로 해야 할 일은 이 밖에도 훨씬 많다. 보수 공사와 환경 정비도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지금의 교황도 로마교구 주교좌성당에 안장된 여러 교황들, 특히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레오 13세 교황과 함께 그곳에 잠들기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톨릭신문 글 _ 로버트 미켄스
12-08 아기 예수를 보라… 인류 구원의 약속으로 그 무겁디 무거운 몸을
예술 속 ‘아기 예수’ 이미지
유럽에 뿌리박힌 아기 예수 모습… 탄생화, 성모자상 등으로 확산돼
인간은 욕망의 굴레에 갇힌 존재… 인간 아기-구세주의 갈림길 시작
탄생 순간 ‘세상의 짐’ 진 존재로… 예수 형상은 인류 구원 서사 담아

❶ 이탈리아 화가 베르나르디노 루이니(1480∼1532)의 ‘아기 예수’. ❷ 독일 조각가 레온하르트 케른(1588∼1662)의 ‘잠자는 아이’. 루이니와 케른의 두 그림은 각각 구세주 아기와 인간 아기를 표현했다. 사진 출처 위키아트·위키미디어
《가장 어린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장르화는 물론 예수탄생화다. 현 팔레스타인 지역인 베들레헴으로 동방박사 세 사람이 황금, 유향, 몰약을 들고 ‘유대인의 왕’이 될 이의 탄생에 맞춰 온다.“유대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신약성서 마태오 2, 1-11)》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예수는 어쩌다 태어나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어느날 문득 구세주가 된 인물이 아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미리 고지했듯, 이 아기는 구세주가 되기로 예정돼 있었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에게만 통하는 이야기다. 예수의 신성을 전혀 믿지 않았던 고대 유럽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비웃었다. 하느님의 아들이기는커녕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아들이겠지! 성령으로 잉태하기는커녕 간통을 통해 태어났겠지! 십자가에 못박히다니, 범죄자의 수치스러운 종말이겠지!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형틀이겠지!
이러한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유럽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구세주 아기 예수의 이미지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덕분에 전근대 그림을 소장한 유럽의 어느 미술관에 가도 아기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리아와 함께한 성모자상이 대표적이다. 성모자상은 미술관뿐 아니라 제법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 중소도시 곳곳의 건물이나 길모퉁이에도 새겨져 있다. 일상에서 늘 경배의 대상을 찾던 그리스도교 문화의 흔적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크리스토퍼’(1485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성모상이나 예수탄생화 버금가게 흔한 장르화가 여행자의 수호성인 크리스토퍼 그림이다. 전승에 따르면, 크리스토퍼는 힘센 거인이어서 사람들을 어깨에 싣고 물살이 거센 강을 건네주곤 했다. 그가 여느 때처럼 한 아이를 어깨에 태우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거인도 힘겨워할 만큼 아이는 무거웠다. 가까스로 강 건너편에 이르고 나서야 그 아이가 바로 예수였음을 알게 됐다. 연약한 아이의 모습을 한 예수가 왜 그토록 무거웠을까? 그 아이는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성 크리스토퍼 장르화 속 예수는 지구(이 세상)를 손에 들고 있고, 크리스토퍼는 힘겨워 울상인 경우가 많다.
이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예수의 약속은, 단순히 아픈 사람의 질병을 고치고, 굶주린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만연한 부도덕을 일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굴레가 무엇이냐고? 그것은 욕망을 좇으며 안달복달하다가 결국 죽고 마는 인간의 삶 그 자체다. 그 점은 17세기에 활약한 독일 조각가 레온하르트 케른이 묘사한 (구세주 아기가 아닌) 인간 아기의 모습에 드러나 있다.
아이들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가 또 어디 있는가. 천하장사도 연일 육아를 하다 보면 지쳐 나가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불꽃도 결국에는 꺼지고 만다. 그래서 여기 잠든 인간 아기는 횃불을 떨구고 있다. 그 아이가 기대고 있는 해골은 생명의 불꽃이 꺼진 상태인 죽음을 나타낸다. 왜 이처럼 죽어야 하냐고?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해골 밑에 놓인 모래시계는 인간이 시간 속에서 사멸해 나가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잠든 아이의 머리에는 월계관이 씌워져 있다. 이 아이는 욕망을 좇으며 안달복달하다가, 운좋게도 경쟁의 승리자가 되는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빛나는 승리의 영광도 죽음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다. 죽어도 영광은 계속되지 않느냐고? 죽은 사람에게 그 영광이 다 무슨 소용이람.
케른의 이 조각은 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바니타스(vanitas) 예술’의 일종이다. 바니타스 예술은 인생의 덧없음을 정면으로 다룬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세속적 추구는 헛되고 구원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는 경우가 많다. 죽음은 노인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바니타스 예술에는 아름다운 여인 혹은 귀여운 아기가 등장하곤 한다. 이 아기와 아기 예수의 비교야말로 인간과 구세주의 차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16세기에 활약한 이탈리아 예술가 베르나르디노 루이니의 아기 예수 그림을 보자. 옆에는 뱀이, 밑에는 먹다 남은 사과가 놓여 있다. 뱀과 사과는 인간의 원죄를 나타낸다. 알다시피, 에덴동산에서 순진무구하게 살던 아담과 이브는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게 된다. 루이니 그림 속의 선악과를 보라. 누군가 베어먹은 자국이 선연하다. 이런! 인간은 이미 원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제 인류는 자력으로는 그 원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신없이 욕망하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동하고, 그러다가 자식을 낳고, 결국에는 차례로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가리킨다. 이는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이미 알고 있으며, 장차 그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감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으로 인해 예수 이미지는 재난과 불행으로 가득찬 인류 역사와 함께하게 됐다.
동아일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12.10 김수환 추기경과 항아리

▲지난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후 명동성당 앞에 전시된 그의 사진을 한 신자가 어루만지고 있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옹기'라는 아호를 썼다. /조선일보DB
<군위에서 석양이 지는 고갯마루를 볼 때면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태어난 곳이 대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고향으로서 대구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다.>
2004년 출간된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김 추기경은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지요. 어릴 적 선산(구미)을 거쳐 군위로 이사해서 살았지요.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할 때 넘었던 큰 고개 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라고 한 것은 선산을 그리워하는 마음이겠지요. 김 추기경이 태어난 곳은 대구·경북 지방이지만 김 추기경 집안은 이 지역 토박이가 아닙니다. 김 추기경 집안은 충청도 출신입니다. 이 회고록에서 김 추기경은 집안 이야기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대구광역시 군위의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모습. 곳곳에 옹기가 놓여 있다. /김수환추기경사랑과나눔공원 홈페이지
김수환 추기경은 충청도 순교자 집안 출신
<우리 집안은 조부 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본관이 광산(光山)인 조부 보현(요한) 공은 독실한 신자로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셨다. 그 바람에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피난길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당시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인 어머니(서중학 마르티나)와 결혼해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김 추기경 회고록 중 이 부분은 짧지만 많은 역사적 사실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김 추기경 집안은 대대로 경상도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충청도 출신의 순교자, 구(舊) 교우(敎友) 가정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았고, 이때 생계를 이어간 방법은 옹기장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깊은 산중에 숨어 살면서 시골장을 떠돌며 옹기와 숯을 파는 생활, 당연히 가난이 따라다녔지요.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추측컨대 선산에서도 셋방살이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다른 집 애들은 점심을 먹는데 난 왜 굶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 텐데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옹기’ 즉 항아리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관계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하면 아마도 많은 분이 ‘바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겁니다. 2007년 직접 그린 자화상 아래에 ‘바보야’라고 적은 그림이 유명하지요. 겸손한 표현이었지요. 이 ‘바보’에서 출발해 김 추기경을 기리는 재단이 생겼는데요, 그 이름이 ‘바보의 나눔’이지요.
김 추기경이 스스로에게 붙인 또 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드릴 ‘옹기’입니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옹기’라는 아호를 썼습니다. 김 추기경의 부친은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김 추기경은 부친이 옹기를 파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김 추기경은 자신이 옹기장수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잊지 않았고, 옹기가 초기 박해 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정체성과 연결된다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호를 ‘옹기’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념하는 장학회 이름이 ‘옹기장학회’입니다. 김 추기경 생전인 2002년 설립된 옹기장학회는 장차 통일 이후 북한 선교에 나설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지요. 올해까지 511명이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부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된 십자가 문양이 그려진 옹기. /부천시립박물관
박해 시절, 숨어 살던 신자들을 살린 옹기
김 추기경이 아호를 옹기로 쓸 만큼 옹기는 초기 천주교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이었습니다. 군위의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엔 곳곳에 옹기가 놓여 있고, ‘옹기동’이라는 건물도 있습니다. 전주의 치명자산 성지에는 ‘옹기가마경당’도 있습니다. 옹기가마 모양으로 경당을 만든 것이지요. 그 옛날 선조들이 옹기가마 안에서 모임을 갖고 미사를 드렸던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치 로마 시대 신자들이 지하 무덤 카타콤베에서 모임을 갖고 미사를 드렸듯이 옹기가마 경당은 한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며 옹기와 천주교의 관계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옹기였을까요? 한국적 특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옹기는 여러모로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우선 옹기는 우리 민족에게는 생활 필수품이었습니다. 청자, 백자처럼 비싼 도자기는 왕족이나 귀족 등 특권층만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간장, 된장, 김장김치를 담가 먹으려면 신분 귀천을 떠나 누구나 항아리가 필요했습니다. 또 자본이나 땅이 없어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도망자 천주교인들에겐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깊은 산중에 옹기가마와 숯가마를 만들어 옹기와 숯을 구워 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며 장터를 왕래하며 박해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고요. 그렇게 깊은 산속에 옹기가마와 숯가마를 중심으로 교우촌이라는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혹독한 박해 가운데도 신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죠.
앞서 김수환 추기경의 조상은 충청도 연산, 지금의 논산 지역 출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는 충남의 내포 지역이지요. 내포 지역은 지금의 아산, 당진, 서산, 예산, 홍성, 태안 등 충남 서남 지역입니다. 김대건 신부의 고향인 당진 솔뫼를 비롯해 초기 신자 대부분 이 지역 출신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자들이 생겨나 전국으로 확산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라고 부르고,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고 해서 ‘묫자리’라고도 부릅니다.

▲전북 김제 부거리 옹기가마. 박해를 피해 찾아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에서 옹기를 구웠다. /국가유산청
김대건 신부의 가족도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 안성 지금의 미리내 성지로 이주했지요. 지금은 아름다운 성당과 성지로 유명한 강원 횡성의 풍수원, 원주의 용소막,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와 진천 배티성지 등은 이렇게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에서 시작됐습니다. 배론성지는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제천인데 천주교 교구로는 원주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용소막성당과 자동차로 20분 거리이고요. 도(道) 경계에 걸쳐 있지요. 배티성지는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진천에 있어서 청주교구에 속하지만 고개 하나만 넘으면 경기 안성입니다.
이처럼 초기 천주교 교우촌들은 관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깊은 산중에 있으면서도 도(道) 경계에 걸쳐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추적해 오는 사람들은 찾아오기 어렵지만 자신들은 언제든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용이한, 자기들 나름의 ‘교통의 요지’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강원 속초 설악동 입구의 옹기마을. 박해를 피해 청주에서 온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를 굽던 마을이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경로당 이름에만 '옹기마을'이 남았다. /김한수 기자
원래 천주교 신자 중에 옹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지,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다가 옹기장이를 만나 기술을 배운 것인지 선후(先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박해시대라는 파도를 넘는 과정에서 옹기 기술은 천주교 신자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기술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옹기장이는 사실상 천민이었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지주나 양반은 노비 문서를 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킨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해방된 노비들은 “여기가 천국”이라며 신자가 됐다고 하지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평등 사상을 가진 분들이었으니 스스로 천민이 돼서 숯을 굽고 옹기를 구워도 신앙을 지킬 수만 있다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네요.
옹기에 십자가, 물고기 문양 그려 넣기도
당시 천주교 신자 옹기장이들이 만든 옹기에는 십자가나 물고기 문양 등을 새겼다고 합니다. 마치 로마의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물고기 문양을 그림으로써 서로를 알아봤다고 하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언제 박해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옹기 겉면에 십자가와 물고기 문양을 그리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런 모진 박해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선교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미 고향을 떠나 옹기장이로 생계를 꾸리고 있던 천주교 신자들은 가난한 가운데 신앙을 이어가게 됐지요. 그런 전통이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까지 이어졌고요. 그래서 김 추기경은 그런 전통을 잊지 않고 자신의 아호를 ‘옹기’로 지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천주교 신자와 옹기의 전설이 어린 곳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전북 김제 부거리, 경기 부천 여월동, 강원 속초 중도문 등이죠. 김제 부거리에는 실제 옹기가마가 보존돼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부창마을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적고 있지요. 부천 여월동에는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천주교인들이 만든 가마터가 있었다고 하지요. 부천시립박물관은 그 가마터 위에 지었다고 합니다. 또 속초 도문동의 옹기마을은 충청도 청주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 동해안까지 설악산 입구까지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를 구우면서 만든 마을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이름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속초 설악동 입구의 옹기마을을 찾아봤는데요. 경로당 이름에만 ‘옹기마을’이 남아 있더군요.
김 추기경이 스스로 ‘옹기’라고 아호를 쓴 것은 여러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옹기장이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우선이겠지요. 한편으로는 소박하지만 누구에게나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항아리 같은 삶을 지향한 것은 아닐까요.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했던 그의 당부도 같은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지도자와 신자들 덕분에 한국 천주교의 오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옹기 자체가 사라져 가는 시대, 전래 초기 천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옹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12.17 바오로 사도의 영적 아들, 티모테오

▲렘브란트의 <티모테오와 할머니>
지난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하느님 나라로 가신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은 성모님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성소를 결심했던 계기가 중학교 3학년 때 명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며 개인적으로 특별한 체험을 했고, 그때부터 사제의 길을 꿈꿨다 했습니다. 티모테오 주교님은 신학생 때부터 제 동생 신부와 같은 반이라 자연히 친동생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예전 독일 유학 시절, 차를 타거나 산책할 때 주교님은 늘 제게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자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산길을 함께 걸을 때도 주교님은 특히 묵주기도를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고속도로에서 매서운 바람과 폭우를 만나 차가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였는데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습니다.
우리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모님이 도와주셨네” 하며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티모테오 주교님을 기억하면, 어느 아름다운 봄 주일 아침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고 새들이 지저귀고 시냇물이 흐르는 숲속 산책길에서 함께 묵주기도를 했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전도여행 때 그의 할머니 로이스, 어머니 에우니케를 통해 그리스도교에 입교했을 것입니다. 티모테오의 성실한 믿음도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받은 것입니다. 티모테오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성실한 믿음은 사도 바오로에게도 강한 인상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훌륭한 사목자 뒤에는 훌륭한 부모님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분들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뒤에서 기도와 희생으로 사목자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어 줍니다.
바오로는 당시 소년 티모테오가 심성이 착실하다며 칭찬했습니다. 그 후에 바오로의 가장 믿을만하고 중요한 협조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바오로는 아들처럼 아끼던 티모테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자주 믿음과 바른 양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합니다. 티모테오에게 책임감을 강조하고 교회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제시하기도 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흠이 없고 가정에서는 충실한 남편, 절제와 신중한 성격을 지니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지도자는 가르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당시에 교회의 큰 문제로 야기되었던 사람을 속이는 영들과 마귀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는 거짓 신앙인들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며, 성경 읽기와 가르침, 권고에 열중해야 하며, 하느님이 주신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도 말 것을 당부합니다. 이런 사목적 행동에 전념하여 매일 성장하는 모습을 주문합니다.
바오로의 서신은 티모테오에게는 물론 교회를 책임질 지도자를 선정하는데도 유념하라고 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교회 지도자의 자질과 자세에 관해서 설명했다고 봅니다.

카톨릭신문 글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성당과 명화

/1910 한국인 신부가 지은 풍수원성당

/베르나르도 다디 성모자와 천사들 1346-47 피랜체 오르산미켈로 성당

/최후의 만찬 6세기 모자이크 라벤나의 성 아폴리네르 노오보 성당

/코레조, 예수 탄생 1528-1539
12.23 성탄을 알리는 경건한 속삭임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1440~1442, 프레스코화, 190 x 164 cm,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제3호실.
둥근 아치형 회벽에 작은 창문 하나가 난 방. 이른 새벽, 어둠을 뚫고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면, 마치 막혀 있던 벽이 열리듯이 그 옆에 그려진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1395~1455)의 벽화가 드러난다. 실제 천장과 마찬가지로 둥근 아치가 이어진 그림 속 공간에서는 성모 마리아 앞에 나타난 대천사 가브리엘이 그녀가 하느님의 아들, 즉 예수를 잉태했다고 알리고 있다.
기독교 미술에서 이 ‘수태고지(受胎告知)’는 구세주의 도래를 알리는 가장 기쁘고 영광된 장면이다. 그러나 프라 안젤리코의 천사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차분하며 우아하다. 놀라운 소식을 듣는 성모 마리아 또한 책을 쥔 손을 그대로 가슴에 얹고 무릎 꿇고 기도하던 겸손한 자세로 조용히 신의 뜻을 받아들인다. 성모의 옷은 정갈하고, 주위에는 기도를 위한 나무 의자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곳은 신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야 하는 왕이나 신에게 구원을 갈구하는 귀족의 궁전이 아니다. 오직 신 앞에 순종과 검약을 서약한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홀로 거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그림이 화려하거나 장엄할 리 없다. 산마르코 수도원 2층에는 이러한 독실이 40개 있었고, 이 수도회의 수사(修士)였던 프라 안젤리코가 실내 벽화를 모두 맡아 그렸다.
‘프라 안젤리코’는 ‘천사 같은 수사’라는 뜻이다. 본명과 수도명이 따로 있으나, 화풍이 천사처럼 순수하고 경건해서 사람들은 그를 ‘안젤리코’라 불렀다. 1984년, 교황청에서는 그를 ‘복자 안젤리코’로 공식 시복했다. 성탄은 원래 이처럼 ‘나 홀로 집에’ 조용하고 경건하게 보내도 좋은 날이다.
조선일보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12-23 “권력욕·사익 내려놔라”… 교황, 내부다툼 경고
■ 성탄 메시지로 ‘겸손’ 강조
“성직자간 갈등 업무에 지장
가면 벗어버리고 친구 되길”
사제 수 감소 위기 거론하며
성직자 성추행 사건 등 지적

▲교황 레오 14세가 22일(현지시간) 바티칸시티의 바오로 6세 알현실에서 한 어린아이의 이마에 성호를 그으며 축복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교황 레오 14세가 22일(현지시간) 연례 성탄절 메시지에서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의제를 계승할 뜻을 밝히며, 바티칸 추기경들에게 권력욕과 개인적 이익을 제쳐 두라고 촉구했다.
교황은 교회 안팎에서 화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면서 “불화와 폭력, 갈등으로 상처 입은 세상에서 크리스마스는 모든 이에게 평화와 보편적 형제애를 일깨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종종 발생하는 성직자 간의 갈등이 바티칸 업무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교황은 “교황청에서 오랜 세월 봉사한 후에도 권력 행사,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개인적 이익 추구와 관련된 특정 역학관계의 변화 속도가 더딘 것을 실망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된 일상 속에서 가면을 벗어던지고 누구도 이용당하거나 소외되지 않으며, 진정한 지지를 보내고 각자의 가치와 능력을 존중하는,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은 큰 축복”이라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로마 교황청에서 친구가 되는 것이 가능할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고 꼬집었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교황청 안에서 기관, 직책, 임무는 단순히 일상적인 행정을 보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주요 교회적, 사목적, 사회적 과제들을 고려하여 구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사제들은 신자들을 인도하는 일에 헌신하기 이전에, 자신 또한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스승의 제자임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며 평신도에 대한 우월감을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보다 훨씬 더 온화하고 건설적인 어조였지만 근본적인 메시지는 변함이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년 성탄절 연설에서 교황청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영적 알츠하이머’ ‘파벌의 암’ ‘야망의 부패’ 등 강렬한 단어를 쏟아냈다. 보수파와 바티칸 관료 일부와 대립각을 세웠던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리 레오 14세는 대체로 화합을 중시하는 외교적인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교황은 사제 수 감소 현상을 짚으면서 사제들이 사목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신학교의 교육 수준을 향상시켜야 한다고도 촉구했다. 2023년 최신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사제 수는 40만6996명으로 전년보다 734명 줄었다. 사제 수 감소의 원인은 성직자 성추행 스캔들로 인한 불신, 외로움, 경제적 어려움 등 다양한 요인이 거론됐다.
문화일보 이민경 기자
12.31 '두 교황' 시대 연 베네딕토 16세… '전임'으로 더 오래 살았다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22년 12월 31일 95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2011년.
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1927~2022)는 2005년 4월 19일부터 2013년 2월 28일까지 7년 10개월 10일간 재위(재임)했다. 스스로 교황 직에서 내려왔다. 86세 생일을 두 달 앞둔 2013년 2월 11일 라틴어로 작성한 성명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나의 양심에 묻기를 되풀이한 결과 고령으로 인해 교황으로서의 공식 업무를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종신직인 교황이 자진 사임한 것은 1415년 그레고리오 12세 이후 598년 만이었다.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황의 정통성을 둘러싼 알력 때문에 물러난 것이어서 ‘자진 사임’ 여부에 대해 이견이 있다. 그래서 1294년 첼레스티노 5세 이래 719년 만의 자진 사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베네딕토 16세 사임 발표. 2013년 2월 12일자 A3면
베네딕토 16세는 취임(즉위) 때부터 교황직에 오래 있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교황직 수락 연설에서 베네딕토 16세를 재위명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베네딕토 15세의 짧은 재위 기간(1914~1922)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했다. 베네딕토 15세는 1922년 선종할 때까지 7년 4개월 20일 재임했다.
즉위 때부터 ‘과도기 교황’이 될 것이란 관측이 있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당시 78세로 275년 만에 최고령 교황이었다. 재위 이전 2년 사이 뇌졸중을 겪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 2005년 4월 21일자 A4면.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정통 교리 수호’라는 보수 성향 신학을 견지했다. 사제 결혼, 여성의 사제 서품, 낙태 등 주요 쟁점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동성애 및 인권 단체의 비판, 이슬람의 폭력성을 부각했다는 이유로 비난이 일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는 2022년 12월 마지막 날 선종했다. ‘전임 교황’으로 지낸 기간이 9년 10개월로 현직으로 재위한 기간보다 길었다. 장례 미사는 2023년 1월 5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으로 열렸다. 이날 장례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추기경 125명, 주교 200명, 성직자 3700명을 포함해 6만여 명이 바티칸을 찾았다.

/베네딕토 16세 선종. 2023년 1월 2일자 A12면.
당시 기사는 현직 교황이 전직 교황 장례 미사를 집전한 일에도 주목했다.
“현직 교황이 전직 교황의 장례 미사를 직접 집전한 것은 221년 만이다. 1802년 비오 7세 교황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에 납치됐다가 선종한 전임 교황 비오 6세의 장례식을 집전한 이후 2000여 년 교회 역사상 전직 교황의 장례 미사를 현직 교황이 집전한 두 번째 사례다. 역대 교황의 장례 미사는 대부분 수석 추기경이 집전했지만, 베네딕토 16세의 경우 2013년 건강 문제를 이유로 스스로 교황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전·현직 교황이 공존할 수 있었다.”(2023년 1월 6일 자 A16면)

/영화 '두 교황' 리뷰. 2019년 12월 20일자 A25면.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9년 10개월간 ‘두 교황’ 시대를 함께했다. 보수적 성향 베네딕토 16세와 진보적 성향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비됐다. 두 교황이 오랜 시간 만나 긴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 상상해 만든 영화 ‘두 교황’은 사실적 묘사로 마치 다큐멘터리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베네딕토 16세, 조너선 프라이스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연기했다.◎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