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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살린 전두환 대통령1/ 2024.11.23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불멸의 의지 여전합니다 - 11.27 백신 그리고 문재인의 ‘전두환 사살 명령’

상림은내고향 2025. 6. 18. 16:35

나라를 살린 전두환 대통령1/ 2024

11.23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불멸의 의지 여전합니다

전두환 대통령님!

1988 1123. 당신께선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을 다 이루시고 백담사로 떠나셨습니다. 부처님의 도량에서 세속의 모든 잡념을 자비와 무욕의 하늘가 적멸(寂滅))로 올리시며 육신의 도리를 다하셨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

2021 1123, 당신께선 천명(天命)을 다하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백담사로 떠나던 날 이후 영욕의 세월 33년 만에 당신은 부처의 세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별이 되셨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

박정희 대통령 사후(死後), 극도의 혼란과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은 당신만이 구원자였습니다. 그리고 구해내셨습니다. 무수한 환난을 딛고 당신은 대한민국이 목표하는 고지에 온몸을 던진 장쾌(壯快)한 무인(武人)이셨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

당신은 바위처럼 사셨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소신(所信), 비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 그리고 역사 앞에 달빛처럼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 세속의 유혹으로부터 모든 것을 걸러낸 당신께선 보살행을 걸으신 분입니다.

 

 

전두환 대통령님!

아웅산 묘역에 메아리치던 슬픔을 당신은 어찌 이겨내셨습니까. 또한 KAL기 폭파되어 비처럼 바다에 떨어지던 날의 슬픔을 당신께선 어찌 이겨내셨습니까.

 
 

전두환 대통령님!

한강은 당신의 손으로 아름다운 오늘이 되었습니다. 국민을 사랑하는 당신의 눈빛으로 국민은 따뜻한 의료복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국민을 껴안는 당신의 가슴으로 국민은 풍족한 연금복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

당신의 진정한 유산은 한강도 복지도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불멸의 의지,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진 진정한 유산입니다.

 
 

그 정신, 그 뜻은 유전이 되어 우리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위대한 유산, 영원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전두환 대통령님!

오늘은 당신께서 떠난 지, 3년이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을 찾아 백담사로 가신 이후 당신은 33년 만에 영혼의 세계로 떠나셨고, 다시 3년 후에 우리는 당신의 기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3은 생명의 숫자이며 정족(鼎足)의 수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무수한 생명을 구해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

당신의 영면하심은 우리의 바람이자 기도입니다. 저 먼 곳 구천 하늘에 부처의 꽃이 피어나기를, 우담바라 일해(日海) 바다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가없는 사랑과 가없는 자비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곳 이승에서 저쪽 피안(彼岸)을 거니는 전두환 대통령님 당신을 향해 뜨거운 눈물로 두 손을 모읍니다.

 

스카이데일리 정재학 시인·칼럼니스트

11.23 전두환은 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을까

1988년 3월 영국‧서독 등 유럽의회 의원들이 추천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 중대 위기 평화적 해결”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 실현”

▲ 제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오른쪽)이 한국을 방문(1983.11.12~14)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 뒤 청와대 영빈관 만찬장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23일은 전두환(全斗煥1931~2021) 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서거한 지 3년이 된 날이다. 공교롭게 이날은 전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여사와 강원도 두메산골 사찰인 백담사로 입산한 날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대통령 유고(有故)라는 국가 변란 시국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위기를 수습한 뒤 대통령에 취임해 고도 경제성장과 88서울올림픽 유치한강정비 등 적잖은 공을 세웠음에도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5.18사태 관련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최근에도 각 지방자치단체에 설치됐던 그의 기념식수 표지석이 철거되는 등 모욕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최종보고서에서 발포 책임자를 특정하지 못함으로써 전두환=살인마라는 역사적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 마침 대통령직 퇴임 직후 유럽의회 의원들에 의해 국가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의 평화적 해결과 한국 정치사상 첫 평화적 정권 교체 실현 등의 업적으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에 시대의 금기를 깨는 종합일간지임을 자임하는 스카이데일리는 3주기를 맞아 전라도 출신 정재학 시인 겸 칼럼니스트가 기고한 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론을 게재한다. <편집자주>

1988 33일 일본 교도통신은 제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이 영국과 서독의 유력 의원들에 의해서 올해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고 일본 교토통신이 보도했다. 교토통신은 유럽의회 관계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 이유로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며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대통령직을 떠난 점도 추천 이유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들어가는 말

23일은 전두환 대통령이 서거한 지 3년이 되는 날이다. 전두환 대통령을 생각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되는 것은 필자만은 아니리라 믿는다. 필자는 전두환 그분만큼 사실과 다른 평가를 받는 분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더불어민주당과 5.18 세력에 의해 살인마라 난도질 당하는 분이라 믿기에 더욱 안타까운 심정이다. 따라서 반드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억울함을 풀어야, 대한민국 근대사가 완성된다고 믿고 있다.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 국시 제1호 반공(反共)은 절대의 가치이자 통치이념이었다. 바로 이 통치 이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좌익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 매도하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임헌영의 민족문제연구소가 나서서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아붙일 때, 대한민국 내부에 기생하는 종북주의자들은 너나없이 이를 거들고 나섰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수치스러운 제물로 만들어서 민주화의 제단에 올리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우리 애국우파는 이를 부정하는 팩트와 칼럼을 공개하면서, 동의하는 국민이 늘어났고, 이젠 민주당 좌익들도 이승만과 박정희 두 분의 진실을 부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은 오랜 치욕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은 그 명예를 회복하고 있다.

 

그렇듯 전두환 대통령도 5.18 세력이 민주화운동의 제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건 민족의 가슴에 죽창을 꽂아넣던 과거 빨갱이들의 잔인한 처형을 연상케 하는 일이었다. 관용이 없는 매도였고, 진실을 뒤엎은 역사의 반란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살인마가 되었다.

 

전두환이 살인마여야 만이 좌익빨갱이들의 입지가 공고해진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5.18 세력이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 바로 살인마 전두환으로 몰아붙이는 일이었다. 더 나아가 좌익들이 대한민국 정국(政局)을 지배하기 위해선 이유를 불문하고 전두환은 살인마가 되어주어야 했다.

 

5.18을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좌빨들과 가짜 민주화유공자들의 음모는 집요했다. 그들은 5.18 묘지 입구에 전두환 비석을 놓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어리석은 민중은 전두환 비석을 밟으면서, 전두환을 저주하는 만큼 5.18을 높게 우러러보았다.

 

그만큼 전두환과 5.18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전두환의 진실을 풀어내야 5.18의 가짜역사도 풀어낼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을 버려두고 5.18을 해결하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짓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이후로 전두환 대통령이 이룩한 영도자(領導者)로서의 업적은 묻혀지고 사라졌다. 오히려살인마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심지어 그 분의 마지막 유언대로 북녘 땅이 보이는 휴전선 어느 곳에 묻히지도 못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장례식 때도 장례식에 찾아가 명복을 빌어주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민주당과 민주당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5.18 세력에 의해 죽음마저 거부된 것이다.

 

이에 필자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알려, 그 분을 살인마라는 불명예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이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 자주국방과 부흥하는 경제를 보면서, 전두환 대통령은 살인마일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두환 대통령을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처럼 명예를 회복하여, 자랑스런 선진대한민국을 이룬 위인(偉人)으로 평가받게 해야 한다고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부족하지만 온힘을 다하여 전두환 대통령의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

 

1. 전두환과의 재회(再會)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민주주의를 파르헤지아 실천의 조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어로 ‘Free Speech’로 번역되는 파르헤지아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의미한다. ,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처벌이나 후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는 지금 진실을 말하기가 두려운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그대는 전두환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사회라면, 그 사회는 미래가 없다. 지금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정의는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 진실과 올바름이라면 정의는 칭송과 위대함의 화려한 옷을 입는다. 그러나 정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거짓과 불의(不義)라면, 정의는 역사를 짓밟는 가혹한 폭력이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입에 올리는 자들은 두 개일 수 없는 진실을 말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진실은 두 개로 나뉘고 있다. 따라서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용기, 즉 정의도 두 개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모든 사실에 대한 평가나 판단도 두 개로 나뉜다.

 

그 중의 하나가 전직 대통령에 관한 평가다. 예를 들면 전두환을 보자. 누군가는 전두환을 살인마라 평가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호황을 이끈 지도자, 혹은 이 시대 민주주의를 이끈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내린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평가라 할 것이다.

 

 현 대한민국이 극심한 가치혼란에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전두환을 저주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전두환 시대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전두환에 관한 한 무엇이 진실인가에 답을 내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해야만이,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진실을 가려내는 밝은 눈이 필요하고, 그리고 가려낸 진실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 용기를 우리는 정의라 말할 것이다.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두려운 사회에서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진실을 알면 속지 않는다. 전두환, 이 이름은 가장 혐오를 받고 있는, 그리하여 가장 안타까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끈 상징적인 인물일 것이다. 전두환도 대한민국의 국운 상승을 위해,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기에, 그에 대한 진실만큼은 밝혀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예노동자들과 정치권을 에워싼 진보좌파, 5.18 세력은 전두환을 끝까지 살인마라는 이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짓밟고 있었다.

 

좌파들로서는 그렇게 짓밟고 능멸해야만이 진보를 상징하는 집단들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일이라 믿었을 것이다. 더욱더 전두환과 박근혜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이후로도 진보의 장기집권을 위한, 폭력적인 그들의 행위와 존재 가치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것이기에, 무려 1981 12대 대통령이 취임 후 무려 40여 년이 지나간 지금까지 전두환을 놓아주지 않는지 모른다.

 

이에 필자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미래를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풀어내지 않고는 그 무엇도 온전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비교를 하자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끝없이 반대를 일삼던 두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 민주화 투사로 알려진 김영삼과 김대중이다. 이 두 인물들도 모두 대통령이 되었다.

 

이 두 인물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었느냐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나라 경제를 망쳐 IMF 시대를 열었고, 또 한 사람은 북핵을 완성 시켜 오늘의 비극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아직까지 민주화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아직도 광주와 호남은 김대중의 생일날을 성인의 탄신일처럼 기리고 있다. 지나친 행위일 것이며 조소(嘲笑)를 받을 일이다.

 

만약 전두환 이후 직선제 대통령제에서 노태우 대신 이 두 인물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철강왕 박태준은 김영삼의 인물됨을 이렇게 말한다.

김영삼은 한 시간만 대화를 나눠도 인물의 밑천이 보인다.”

한 마디로 대통령 욕심만 잔뜩 들어있지, 국가 경영에 대한 비전과 지혜와 경륜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김대중은 더 일찍 북한 경제의 회생과 북한 핵개발을 위해 전두환이 이룩한 경제 성과물을 북으로 보냈을지 모른다.

 

역사는 오늘에서 평가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오늘의 상황, 즉 현실의 상황을 파악하여 교훈을 추출한다. 그리고 그 교훈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 나아간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김영삼·김대중 시대는 우리가 바라는 역사가 아니다. IMF(국제통화기금)로 각인된 민주화 투사 김영삼, 북한 핵개발로 이어지는 김대중 시대는 깊이 묻어야 할 오류의 역사일 수도 있다. 우리의 미래로 연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민주화는 목표가 아니다. 민주화는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밑받침하는 도구적 이념일 뿐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어떤 이념을 막론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여 역사의 수치를 씻어내는 한편, 고토(古土)를 수복하여 강한 민족 강한 나라가 되어 민족의 영광을 재현하는 일이다. 전두환은 그 길을 걸었던 40년 전의 위인(偉人)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침묵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스티븐슨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잔혹한 거짓말은 침묵 중에 말하여진다.’

그대가 진실에 대하여 입을 닫고 있을 때, 전두환에 관련된 역사는 그릇되게 평가되고, 이로 인해 세상은 민주당 좌빨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잘못 굴러간다는 뜻이다.

 

2. 진실의 다면(多面)을 위하여

1980년대 우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라 불렀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지적인 풍모가 없는 담담하게 생긴 그의 외모와 벗겨진 머리, 그리고 이름 두환에서 를 연결시켜 이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의 이미지는 정말로 이었던 것 같다. 돌처럼 강하고 돌처럼 우직하고 돌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 전두환은 처음과 끝이 변함없이 한결같은 성격의 위인(偉人)이었다.

 

 그처럼 전두환은 솔직담백한 성격을 지닌 무인(武人) 기질의 대통령이었다. 만약 모든 것을 제쳐두고 성격만으로 역대 대통령을 평가하라면, 전두환은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백담사로 보낸 노태우의 병문안을 간 사람이었고, 사형선고를 내린 김영삼의 장례식에 찾아갔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의 장례식 때도 변함없이 예의를 갖춘 인물이었다. 사내 대장부답게 털 것은 털고 가는 그는 의리 또한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런 그가 살인마라는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으로만 비춰진다는 것은 좌파의 소설적 각색이 동원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그가 정말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이라면 아웅산 테러를 당하고 난 후, 북한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적(政敵) 김영삼과 김대중을 어떤 식으로든 처치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일반의 정치인들처럼 거짓말로 남을 현혹시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사내 대장부였고, 세상을 솔직담백한 시각으로 보는 남자였다. 세월호 사건 이전에 목사 유병언이를 위험하게 보고 거부한 사람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이러한 성격의 전두환은 우리 현대사에서 인상 깊은 두 가지 위대한 업적을 쌓아놓은 대통령이었다. 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작한 한강의 기적을 이어받아 경제를 완성한 일이고, 또 하나는 대통령으로서 7년 단임 약속을 실천하여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일이다. 이 평화적 정권 교체가 바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영국과 서독의 정치인들은,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점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대통령직을 떠난 점을 들어, 전두환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노벨위원회에 추천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여느 독재자처럼 일신(一身)의 영화와 안녕만을 바란 사람이었다면, 이 두 가지는 실현될 수 없는 주제였을 것이다. 어느 독재자가 나라와 민족의 풍요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경제에 집중했을 것인가. 그는 스스로를 무식한 자라 인정했다. 그리고 경제전문가에게 이 모든 일을 맡겼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나도 배우겠다. 당신들은 마음 놓고 경제를 완성시켜라.”

참으로 전두환다운 단순 솔직한 리더십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임기 중 우리나라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경제학자들은 전두환 시대를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였다는 평가를 한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전두환은 단임 약속을 지켰고 그리고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으며,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현재 윤석열까지 무려 7대에 이르는 6공화국의 기초를 닦았다.

 

만약 전두환이 권력에 취하여 정권 연장을 꾀했다면,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가의 판단이다. 그만큼 그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집회에 철퇴를 내렸을 만큼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6.29 선언 당시 측근들은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두환은 계엄령을 내리지 않았다. 취임 초 두 번 다시 군을 동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선호하던 내각책임제에서 직선제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만든 헌법으로,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까지 7명의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윤석열정부가 제6공화국 7기임을 명심해야 한다.

 

필자는 이 두 가지 면에 초점을 맞추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바르게 잡고자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전두환에 대한 살인마라는 일반의 평가를 거부하는 나의 반론(反論)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이 두 개의 각각 다른 평가에 대한 문제를 풀지 않고는 대한민국은 과거의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미래 또한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단면(單面)만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없다. 하나의 평면(平面)으로만 존재하는 존재는 절대 없다. 존재하는 사물의 절대성은 다면이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물과 인생,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까지,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면적이며 입체적이다. 앞과 뒤가 있으며 위와 아래가 있고 측면이 있다.

 

그리하여 그대가 그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를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한 면에서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저 뒤편의 것까지 살펴볼 줄 알아야, 우리의 판단은 올바른 길을 가게 된다.

 

코끼리의 다리만 보고 기둥이라 주장하는 오류는 편견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편견은 분열과 오해와 악()을 조장한다. 편견은 선입견을 발생시킨다. 자신의 시각과 판단을 버리고, 누군가의 판단에 좇아가는 것. 어떤 선입견에 의해 자신의 시각과 판단을 버리는 것도 악을 지원한다. 그러므로 편견과 선입견 모두 올바른 판단과 진실에 반하는 악이다. 전두환을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이 이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도 편견에서 출발한다. 5.18 당시 시민군을 향해 사격명령을 내린 자로 추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하여 살인마라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 역시 단면만을 바라본 편견이며 오류이다.

 

전두환, 그는 자존심 강한 무인(武人)이다. 그는 직선적이고 단순 솔직한 사람이며, 의리를 철칙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다. 끝까지 충성을 다한 장세동이란 인물에게서 보았듯이 그는 의리를 무엇보다도 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그의 성격상 사격명령을 직접 내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사격명령은 당시 도청 앞에서 버스를 몰아 경찰관을 살상(殺傷)을 한 사건 이후 위협을 느낀 현장 지휘관들이 내린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대법원도 그렇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다만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가 탈취되고 시민군들이 무장을 한 이후, 교도소가 습격을 당하는 등 광주가 무정부사태에 빠졌을 때부터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수뇌부에서 진압을 위한 사격명령을 내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5.18뿐만이 아니라 다면(多面)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역사엔 편견이 없다. 역사 역시 인간처럼 입체적인 존재이며, 주관이 아니라 객관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역사는 다면의 평가를 통해 진실을 기록한다.

 

헤겔은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두 번 반복한다고 썼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반복한다고 하였다.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도 비극에서 일어나 희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의라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3. 북한의 도발과 국난극복

우리 정치사에서 전두환의 등장은 정말 운명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1979 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난 뒤,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대처한 이가 전두환이었다. 보안사령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범인 김재규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김재규 체포 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에 오른 최규하. 그러나 전두환은 최규하가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무려 4시간이나 침묵을 지킨 점을 주목한다. 김재규와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전두환은 신현확 전 총리를 찾아가 대통령직 수행을 요청하였고, 이 제안을 신현확 씨는 거절한다.

 

결국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스스로 정권을 잡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1212일에 있었던 12.12 사태다. 전두환은 처음부터 정권을 잡고자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안 즉시 당시 영부인 직을 수행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남긴 말 또한 전두환의 뜻과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가 남긴 말은 북한의 도발을 걱정한 전방(前房)은요?”였다. 부친의 사망보다 국가 안보를 먼저 생각한 발언이었다.

 

전두환 역시 국내 혼란을 극복하고 북한의 도발과 침투를 막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했다. 최규하는 믿을 수 없고, 신현확 씨는 거절하는 상황.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과 김대중 씨에게 정권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양() 김 씨가 보여준, 경부고속도로 반대부터 사상적 행보까지, 전두환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우리 정치사에 등장한 것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나라를 맡자는 것이었으니,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에 서려있는 내면의 진실까지 흉측한 내란 음모로 처단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유럽 의회 관계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한 첫째 이유가 바로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점은 전두환에 대한 진실 중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안정보장상의 이유란 북한의 도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수없이 자행된 북한의 도발에 대해, 군사적으로 응징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했음을 의미한다. 전두환의 7년 치적 행간(行間) 속에서 두고두고 곱씹어 볼 만한 부분이다. 그는 독재자가 아니라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던가.

 

북한을 빼놓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반()대한민국 시위나 집회 역시 북한을 제외하고는 설명이 안 된다. 5만 간첩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 간첩들이 무엇을 획책하고 선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일 수 없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북한의 무력 도발과 간첩 테러를 정면으로 맞서 싸워왔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시대 역시 북한과 대결 속에서 온갖 도발과 간난과 신고의 과정을 겪으며 이루어낸 성과물이었다.

 

한 손으로는 맞서 싸워야 하고, 한 손으로는 경제를 일으켜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의 경제적 부흥은 북한이라는 적과 싸우면서 일으킨 위대한 업적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우리 대한민국에 자행한 도발은 1953년 휴전 이후 무려 40만 건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두환 시대의 배경 속 1970~1980년 대 일어난 북한의 도발을 시간의 흐름대로 간추려 본다, 조금만 살펴보아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는지, 우리 대한민국의 어떤 국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1970년부터는 화전양면전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해, 불리한 상황에서는 대화를 주선하는 한편 비무장지대를 은밀히 침투할 수 있는 땅굴을 굴착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유리한 상황에서 반드시 무력을 동원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70년 이후에 발생한 북한의 도발을 대표적인 것만 추려본다.

 

해군 방송선 I-2 피랍 사건(1970.6.5)

현충문 폭파 미수 사건(1970.6.22)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1971.1.23)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사건(1971.6.1)

철원군 비무장지대 총격사건(1973.3.7)

추자도 무장공비 침투사건(1974.5.20)

해경 863경비함 격침 사건(1974.6.28)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1974.8.15)-육영수 여사 서거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 사건(1974.11.5  1990년까지 총 4차례)

헨더슨 소령 사건(1975.6.30)

판문점 도끼만행사건(1976.8.18)

광천지구 무장간첩 침투사건(1978.11.4)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1978.1.14, 1978.7.19 순차적으로 납치)

 

전두환 집권 시기인 1980년대에는 주로 테러를 이용한 도발을 시행했는데, 범위를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제3국에서 실행해 테러의 주체를 알지 못하게 위장하려고까지 했다.

 

필승교 무장공비 침투사건(1981.6.29)

SR-71 정찰기 피격 사건(1981.8.26)

저진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1982.5.15)

임월교 무장공비 침투사건(1983.6.19)

월성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1983.8.4)

독도 근해 간첩선 격침 사건(1983.8.13)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1983.10.9)

다대포 침투 무장공비 매복 생포 작전(1983.12.3)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사건(폭탄 투척 사건)(1983.9.22)-체포된 공비 진충남과 이상규의 증언에 따른 발표.

청사포 간첩선 격침 사건(1985.10.19)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1986.9.14)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1987.11.29)

 

이 중에서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86아시안게임과 서울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테러였다.

 

특히 아웅산 테러는 북한 테러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버마(현재의 미얀마)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으로, 1983 10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나라를 일으킬 유능한 인재들은 이렇게 북한의 테러에 의해 꿈을 접고 산화(散華)하였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 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 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 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 차관 이기욱(李基旭), 주버마대사 이계철(李啓哲),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河東善),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 농수산부 차관 강인희(姜仁熙), 과학기술처 차관 김용한(金容澣),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李重鉉), 경호원 한경희·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李基百), 공보비서관 최재욱(崔在旭),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崔尙德),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宋鎭赫),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崔圭徹),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金基成), 코리아헤럴드 기자 김기석(金基石),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崔琴煐),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林三澤김상영(金相榮),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김포공항 폭탄 테러 사건은 1986 914일 김포국제공항 청사 앞에서 의문의 폭발물이 폭발하여 5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서울아시안게임 개막을 5일 앞두고 발생하였다. 아시안게임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테러였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Korean Air Flight 858 Bombing)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858(KE858) 1987 11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공중 폭파되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87 10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객기 폭파 후, 두 폭파범은 1987 12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일으킨 최대의 항공 테러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8 9월까지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이외에도 북한은 끊임없이 간첩과 무장공비를 남파시켰고, ()대한민국 활동 및 반()정부 활동을 진행시켜왔다. 전두환은 이런 국난을 딛고, 북한과 맞서 싸우는 한편 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도약 발전시킨 것이다.

 

4. 경제도약과 부흥

만약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웅산 테러 즉시 북한과의 전쟁에 돌입하거나 복수를 선택했더라면, 대한민국 경제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보복보다는 경제를 선택한다. 필자가 전두환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두환은 어떤 문제를 만나거나 난관에 부딪혔을 때, 상황을 피해 우회적으로 돌아가거나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직선적인 사람이며, 어떤 험로(險路)를 만나더라도 주저 없이 그대로 돌파해버리는 무인(武人)다운 추진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제가 위기에 있음을 알자, 주저 없이 경제 돌파에 돌입(突入)하였다. 그것은 고지를 향해 온몸을 그대로 던져버리는 처절한 군인의 모습이었다. 몰려드는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목표하는 한 점만을 바라보는 집중과 투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 그리하여 전두환, 그는 최선을 다한 뒤 결과에 결코 후회하거나 자만하지 않는 대통령이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가 경제 발전이었다. 두 번째가 단임에 대한 약속을 실천하여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루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두환은 경제라고는 봉급 봉투 한번 만져보지 않은 청맹과니 문외한이었다. 군인 출신의 전형적인 무인으로서 오직 군 전략과 전투로만 단련된, 그 외에는 아무런 지식도 능력도 취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그는 그를 보좌하는 김재익(아웅산 테러에서 사망)을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여러분을 믿고 경제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맡긴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여러분은 소신껏 마음 놓고 일해 주시기 바란다.”

 

전두환은 이런 말로도 김재익을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을 응원하였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참으로 어렵게 시작해 놓은 경제였다. 경제발전에 쓸 씨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월남 파병 군인들의 월급까지 경제 건설에 동원될 정도였고, ·일회담을 통해 받은 배상금으로 겨우겨우 경부고속도와 포항제철을 만들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주 어렵게 마련한 아주 적은 재화(財貨)를 어디에 집중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의 꿈과 결단에서 시작되는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일을 해낸 위대한 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경제라는 이 어려운 목표를 이루어 나갈 때, 나는 야당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 하나가 있다. 비록 진위(眞僞)가 불분명한 사진이지만,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고자 경부고속도로 공사판 위에 누워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사진이다. 김영삼·김대중측 둘 다 부정하는 사진이지만, 그러나 이 사진은 경제건설 반대를 의미하는 상징성에서 만큼은 의미가 분명한 사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시대에 이르러서도,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았고 야당의 반대도 극심한 시절이었다. 전두환은 1980 9월에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등용한다.

 

김재익은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다짐을 받아들이고 김재익을 신뢰할 것을 약속했다. 전두환이 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한 말은 바로 김재익에게 한 말이었다. 전두환은 김재익에게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경제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심지어 핵심 측근인 3(허삼수·허문도·허화평)조차도 김재익을 방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그들로부터 김재익이 괴로움을 당하자, 전두환은 격노하면서 허화평·허삼수 두 허씨를 청와대에서 내보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그만큼 전두환은 경제를 최우선 절대선의 과제로 삼았다.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한 뒤, 전두환의 경제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경제학·경영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새벽까지 강의를 들었다. 김재익은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경제·경영학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됐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대, 5공 초기 벼랑 끝에서 시작한 경제는 전두환 집권 불과 몇 년 사이에 유례없는 호황으로 발전하였다. 각종 경제전망은 기분 좋게 어긋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물가까지 안정되었다. 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이른바 ‘3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던 것이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30년 전 전두환 통치시대의 이야기이다(그러나 이 모든 성과에도 불구하고, 김재익은 아웅산 테러 현장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전두환은 경제를 물가 안정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김재익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화학공업 통폐합 등 각종 개혁 작업을 강행했다. 오일쇼크에 심한 흉작이 겹쳐 물가가 폭등하고 민심은 흉흉한 시절이었다. 한 자릿수 물가안정정책을 군사작전 하듯 밀어붙이다보니 무리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압정책에 따른 부작용도 많았지만, 한 자릿수 물가는 달성되고 경제 체질은 강화되었다. 때마침 도래한 3()의 기회를 살려 한국경제는 살아나고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우리나라는 최대의 호경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을 향한 강력한 지도력이 발휘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행되는 북한의 도발은 강력한 반공통치로 막아내고, 전두환은 나라경제 회복과 도약에 집중하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전두환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인해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국민 의식도 날로 개선되어갔다. 교육은 그 목표를 잃지 않았고, 시민들의 질서의식도 향상되어 갔다.

 

그러므로 경제의 번영은 실로 전두환 통치시대의 백미(白眉)로 보아야 한다. 물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같은 세계사적인 업적도 있으나, 경제의 발전과 완성이야말로 민족사적인 업적이라 보아야 한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에 이바지 한 점이 크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이루고 세계인의 존경을 받으며 G20(주요 20개국)에 가입하게 된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공이 가장 크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전두환 경제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자.

박정희 대통령 시대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이 3차에 걸쳐 성공리에 끝나고 있을 때, 우리는 10.26을 겪게 된다. 그 사건으로 우리는 박정희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고, 망망(茫茫)한 대해(大海)를 표류하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정치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가는 치솟고 있었고, 어렵사리 구축해온 중화학공업마저 경제 위기를 촉발시키는 골치덩어리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집권 3년 후 1983·1984년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10.2%, 도매물가 상승률은 0.5%, 저축률 26.6%를 기록한다.

 

중화학공업은 성장주도 산업으로 부상했고, 반도체·컴퓨터 등 신기술 제품이 양산체제로 돌입하며 국제경쟁력을 확보해 나가게 되었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GNP가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 1987년 현재 3000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필자가 교단에 발을 들여놓을 때가, 전두환 집권 2년째인 1982년의 일이었다. 경제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게 되자, 사회 전반에 걸쳐 고급 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게 되었다. 이에 각 기업들은 인력을 충원하고자 취업박람회를 여는 등 대학가는 말 그대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교단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학교가 세워지고 교사가 부족하게 되자, 단기 양성 과정을 거친 비사범계 출신들도 교단에 서게 되었다. 먼 섬마을이나 벽촌으로 발령을 난 교사들은 아예 부임조차 하지 않고 기업으로 나갈 때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흥이라는 말이 실감날 때였다.

 

그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구가했던 전두환이 이끈 5공시대의 경제는 전두환 리더십의 결과였다고 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두환 시대 경제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자료를 요약해 본다.

 

*소매물가상승률

1980 29%, 1982 7.1%, 1983 3.4%, 1985 2.5%

 

* 외채 및 외채잔액

1979~1981 3년 간 외채 2배 증가, GNP 50% 넘음, 세계 4위 채무국 됨

1986 24억 달러 감소되어 468억 달러가 되었고, 1987 356억 달러 외채가 줄어듦

 

* 경제성장률

1980 -5.6%, 1981 6.6%, 1982 5.4%, 1983 11.9%, 1984 8.4%, 1985 12.3%, 1986 12.92%, 1987 12.97%, 1988 12.42%

 

* 국민저축률

1980 20.8%, 1985 28.4%, 1986 32.5%, 1987 37%

 

*국민총생산

1980 630억 달러, 1987 1360억 달러(오스트리아·벨기에·그리스·노르웨이·스웨덴의 국민총생산을 넘어섬), 1988 1800억 달러

 

*1인당 소득

1980 1600달러, 1987 3218달러, 1988 4300달러

 

*무역

1982년 국산승용차 포니 미국에 수출, 1984년 엑셀(프레스토) 미국 대량 수출, 1987년 세계 12대 무역대국으로 성장

 

* 경상수지

1980 53억 달러, 1981 45억 달러, 1982 26억 달러, 1983 16억 달러, 1984 14억 달러, 1985 9억 달러, 1986 +46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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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경제가 호조를 보임에 따라, 전두환 시대에 드디어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등 복지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풍요로운 복지정책이 누구로 인해 시작되었는지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경제성과에 대해, 후일 전두환은 이렇게 담담하게 술회(述懷)한다.

 

 나는 내 일생을 통틀어 1986년이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된다. 취임 초에는 나라 형편이 어려워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는데 6년 만에 국제수지가 흑자라니 꿈만 같았다. 나는 당장 대통령을 그만둬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또 물가를 한 자릿수로 정착시킨 가운데 12.5%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또 사상 처음으로 국민저축률이 투자율을 상회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동안 긴축정책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잘 협조해준 모든 국민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제는 우연(偶然)이 있을 수 없다. 저축을 우연히 했다는 말이 있을 수 없듯이 경제는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다. 전두환의 노력과 투지, 불굴의 집념은 대한민국의 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엄청난 국방비를 부담하면서도 그와 같은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고 해야 할 놀랍고도 위대한 성취라 할 것이다.

 

5. 단임(單任) 실천

전두환은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온, 대한민국 현대사에 기록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달라이 라마는 욕심의 반대는 무욕(無慾)이 아니라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이다고 하였다. 전두환은 달라이 라마가 말한, 잠시 머무름에 만족한 행복한 위인이었다.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 올바른 인간이다. 탐욕이 지나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우리는 삶의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보고 겪는다. 지나치게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게 넘치지 않게 산다는 것. 이것이 인간사 고통과 번민을 이겨내는 유일한 삶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재물욕·색욕·식욕·수면욕·명예욕(권력욕) 다섯 가지 욕망을 오욕(五慾)이라고 칭하며 차고 넘침을 경계한다. 이러한 비록 욕심은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탐하면 삼구(三垢)의 하나, 또는 삼독(三毒)의 하나로 모두 몸을 망치는 독()이 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먹고 싶고 자고 싶고 누리고 싶고 번식하고픈 욕망을 견디고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드는 일이기에 우리는 탐하되 지나치지 않음을 수양의 첫째 덕목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옛 선인들이 말하기를 오욕 중에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권력욕이라 하였다. 권력을 쥔 자가 그 권력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식욕(食慾수면욕을 참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뜻이다.

 

 권력을 탐하다가 끝내 독재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가를 알면, 권력욕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의 독재자들이 그 교훈을 알면서도, 오래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권력을 내려놓기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권력만큼 달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천하가 내 손에 있고 모두가 발밑에 있는데 스스럼없이 내려놓기가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따라서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독재자일 수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혹 통치 과정에서 강압과 독선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전두환은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고,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소인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전두환은 자신의 의지와 생각에 솔직한 사람이었고, 비록 직선적이며 행동적이며 단순해 보이되, 자기가 행한 행동에 구차한 변명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언어 구사력도 단순 명확하였다. 그는 긴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번 내린 결정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전두환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견해는 필자뿐만이 아니다. 경제를 좀 안다는 사람이나 지난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입을 모은다. ‘조금은 서툴게 보이지만 그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자였다.

 

그렇다면 이 견해를 밑받침하기 위해, 전두환 시대 이후(以後)를 통시적으로 살펴보자.

 

전두환은 헌법을 개정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선제 대통령으로서 제5공화국을 열었다. 소위 체육관 대통령이라고 비아냥거리던 그 간선제 대통령이었다. 1981 3월부터 1988 2월까지의 시기가 전두환 대통령이 이끌던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이었다. 당시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정하고 있었다.

 

다음 노태우의 제6공화국 1기는 1988 2월부터 1993 2월까지의 시기이다. 1987 6.29선언으로 9차 개헌을 실시하여 직접 선거에 의해 노태우가 5년 단임제의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이후로는 헌법 개정을 통한 정치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각각 기수 내지는 별칭으로 구분을 한다.

 

, 노태우정부를 6 1기라 한다면, 김영삼정부는 6 2기 또는 문민의정부라 하였고, 김대중정부는 6 3기 또는 국민의정부라 불렀다.

 

 2003 2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인 노무현의 취임과 함께 공식 출범한 정부 역시 법적으로는 제6공화국 4기 정부다. 이명박정부는 제6공화국 5기 정부로서 실용정부라고도 하나 정확한 별칭은 없다. 박근혜정부는 제6공화국 6기 정부였고, 문재인정부는 제6공화국 7기 정부가 진행되었으며, 지금 윤석열정부는 6 8기인 것이다.

 

이것이 전두환 이후 진행되어온 대한민국 정부의 통시적 과정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전두환은 제9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 제6공화국 1기부터 8기까지를 열어준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단임 실천은 전두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그가 만약 일반의 독재자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정권 연장을 꾀했을 것이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예를 들면 군을 동원해서라도 정권을 존속시켰을 것이다.

 

국가의 마지막 보루는 국군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당시 60만 국군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지배구조가 확실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전두환의 명령 하나에 60만 국군이 계엄령을 통해 등장했다면, 그깟 한 줌도 안 되는 자칭 민주화 세력쯤은 간단히 처리했을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 정도는 간단히 없앨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가택연금이나 정치적 봉금(封禁)은 시켰을지언정 생명을 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군을 동원하지 않았다. 후일 김대중은 그의 재임기간 가끔씩 전두환을 청와대로 불러 환담을 나누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영삼은 전두환에 사형명령을 내렸으나 김대중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어쩌면 김대중은 전두환의 인품과 공적을 믿어준 유일한 대통령이었을지 모른다.

 

에피쿠르스는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고 하였다.

 

전두환은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위인이었고 행복한 사람이었다. 과감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 7년 단임을 분명하게 실천한 사람으로서 그는 군부통치의 탈을 과감하게 벗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단순솔직한 무인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정말 대단한 결단이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6. 개헌

미국 유학 중이던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은 부친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을 진언한다. 내각제와 직선제 사이에서 고민하던 전두환은 결국 직선제로의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6.29선언이 있었다. 전재국 또한 대한민국을 위한 결정에 합류한 셈이었다.

 

(1) 의원내각제

전두환은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를 선호한 사람이었다. 대통령제의 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는 내각제를 선호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오늘 여러분에게 처음 말하지만, 나는 솔직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두려운 때가 많았다.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기 위해 다들 서류를 잔뜩 챙겨오는데, 결심을 해야 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중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겠다는 재가 서류가 올라왔는데, 도대체 제시된 그 가격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비싸면 비싼 만큼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대통령중심제는 아주 작은 일에서 국가의 생존과 관련되는 큰일까지 모든 것이 대통령 하나에 달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문제를 대통령 한 사람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은 1986 45일 유럽 순방길에 오른다. 영국·서독·프랑스를 방문하면서 그는 의원내각제에 확신을 갖게 된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전두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건네준다.

 

영국은 지역감정의 골이 아주 깊은 나라입니다. 얼마나 심하든지 축구대표팀조차도 단일국가대표팀을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각 지역의 대표팀이 따로따로 출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판국에 영국이 대통령중심제를 선택했다면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가 극심했을 것입니다.”

 

서독도 의원내각제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영국처럼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 나라이며, 국론 분열이 극심한 나라이다. 비록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였지만, 그 개발 과정에서 일어난 지역감정은 망국(亡國)적인 현상이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후, 전두환은 진정한 정치발전을 위해 의원내각제를 결심하게 된다. 또한 개헌의 방향도 의원내각제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위와 집회의 주제를 대통령 직선제로 몰아갔다. 국민도 우리 손으로 뽑는 대통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시위에 동참하였다. 결국 전두환은 의원내각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선택이었고, 6.29선언을 마치 위대한 승리로 포장한 민주화 세력의 오판이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전두환의 뜻대로 의원내각제를 하고 있다면, 어느 한 정당의 전횡은 사라졌을 것이며, 권력을 잡기 위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식의 심각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좌우 세력이 권력을 잡은 다음 보복과 복수로 일관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 당파 싸움을 연상케 하고 있지 않은가.

 

후일 의원내각제는 자민련을 이끌던 운정 김종필을 통해서 다시 부활한다. 김대중의 대선 승리를 위해, 김종필은 김대중과의 합당 조건으로 대선 승리 후 의원내각제를 하기로 철통같은 약속을 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역사에서 의원내각제 논의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2) 대통령 직선제 개헌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모두 9차례 개헌을 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9차례 개헌의 과정과 내용을 간추려 정리해 본다.

 

 1공화국

 제헌헌법-1948 510일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제헌국회)가 헌법기초에 착수하여 동년 717일 공포. 대통령·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함

이승만정부

1차 개헌(1952년 발췌개헌)-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승만이 국회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장기 집권을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여 헌법을 개정함.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의원내각제를 주내용으로 하는 의회 발의안이 충돌하자, 정부와 의회가 협상으로 양 개정안에서 발췌한 발췌개헌안을 만들어 공고절차도 없이 기립 표결로 통과. 이렇게 야당의 개헌안과 정부의 안을 절충한데서 발췌개헌이라고 함.

 

2차 개헌(1954년 사사오입)-이승만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로 제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철폐하는 것이 골자

 

당시 국회에서 재적 203명 중 135표를 얻어서 개헌선(재적 2/3 135.333) 0.333인이 미달되어 부결되었다. 의장은 부결을 선포했으나 2일 후 ‘45 이론을 내세워 개헌선을 135표로 수정하여 개헌을 선포하였다.

 

 2공화국

3차 개헌(1960 6)-4.19혁명 후 내각책임제로 전환

 

이승만정부의 3.15부정 선거는 대대적인 국민의 저항을 받아 4.19로 이어지게 되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이승만은 하야하였고, 그후 의원내각제 정부 형태로 3차 개헌을 하게 되었다. 개헌에 따라 의원내각제가 도입되었고,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 보장하고 공무원의 신분 및 정치적 중립성 보장하는 내용이다.

 

4차 개헌(1960 11)-허정 과도내각. 반민주행위자처벌에 관한 부칙조항 삽입

 

3.15부정선거 관련 반민주 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 적용을 허용하는 헌법부칙만 개정

 

 3공화국

5차 개헌(1962 12)-장면 내각. 5.16 발생 후 대통령제로 전환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하는 5.16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후 민정 이양을 위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대통령제로 복귀하고 대통령의 재임을 2기로 국한하는 5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로 확정되어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5차 개헌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거친 헌법 개정이었다.

 

6차 개헌(1969 3선개헌)-박정희 대통령 3선을 위한 목적으로 단행

5차 개헌 때 3선을 금지한 조항을 철폐, 대통령의 재임을 3기까지 가능하게 함

 

 4공화국

7차 개헌(1972년 유신헌법)-유신체제 전환을 위한 개헌

 

1972 1017일 비상초치로 헌정이 중단되었고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개정안이 11월 국민투표를 통과하였다. 유신헌법의 특징은 기본권의 약화와 대통령의 1인 장기집권체제의 제도적 확립이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6년으로 중임이나 연임제한에 관한 조항을 두지 않아 1인 장기집권이 가능하였다.

 

 5공화국

8차 개헌(1980)-신군부 집권에 따른 전두환 정권으로의 전환

 

1979 10.26사태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하자 12.12사태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가 정권 장악.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자의로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헌법을 만들고 국민투표로 확정하였다. 이 헌법은 전면 개헌으로서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였다.

 

 6공화국

9차 개헌(1987년 현행헌법)-대통령 직선제

 

1987년 범국민적 저항운동 6월항쟁이 일어나자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이른바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 그 결과 최초로 여야 합의를 통해 개헌을 하게 되었다. 1987 1027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하고 5년 단임으로 하였다(전두환정부에서 개헌함. 현재 윤석열정부 또한 6공화국 연장선상임).

 

7. 9차 개헌의 증언과 기억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선언은 전두환의 구상과 결단에 따른 소산(所産)이었다. 노태우는 자신이 한 일이라고 주장하나, 당시 통치구조상 전두환 재가 없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유명무실한 헌법위원회를 없애고 헌법재판소를 만든 것도 전두환 작품이었다. 6월항쟁은 오직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을 뿐이고, 이는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

 

전두환은 1986년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하자, 그때에야 비로소 얼어붙은 정치를 해금시킨다. 경제에 자신이 생기자 드디어 정치선진국으로의 길을 향해 물길을 튼 것이다.

 

 1987 6·29선언으로 여야 합의하에 개헌안이 의결되고, 87 1027일 국민투표(찬성률 93.1%)로 확정, 29일 공포, 88 225일부터 시행된 제9차 개헌. 6공화국의 헌법이 된 이 개헌안의 개헌 과정을 간추려 본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1985 2·12총선거를 통해 제도권 정당의 지형도가 새롭게 재편되고 야당과 재야운동단체들의 연합으로 반정부 세력의 규모와 내실이 강화되는데 있어 중요한 핵심 의제로 작동했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법적으로 보장가능하게 했던 제5공화국 헌법 개정의 문제는 2·12총선거 직후부터 야당과 민주화운동 내부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다.

 

2·12총선거를 통해 창당한 지 채 1개월도 안 되는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고, 지도부는 1985 8월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식당론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를 12대 국회의 일차적 의제로 설정했다.

 

1985 9월 신민당은 정기국회에서 개헌을위한특별위원회(개헌특위)’ 설치를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신민당의 이러한 정치적 전략은 국회 내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을 둘러싸고 민정당과의 갈등 형성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세력 내부에서의 찬반 논의를 촉발했다.

 

민주화운동단체들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전제로 완전한 민주정부 수립 나아가 민중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은 개헌론을 제기했다. 직선제 개헌을 중시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개헌론 및 노동운동세력의 일부가 제시한 삼민헌법쟁취투쟁론까지 민주화운동세력 내부에서도 개헌에 대한 입장들의 스펙트럼과 정치적 차이는 컸다.

 

신민당이 제기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에 대해 민추협’ ‘민주헌정연구회’ ‘민주산악회’ ‘민주대학 등 신민당의 외곽 정치조직들은 찬성했으나 민통련을 비롯한 급진적 노동운동세력의 일부는 이를 거부했다. 특히 야당 정치세력과 민중운동 간의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1985 105일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안양지역노동3권쟁취위원회 등과 연합해 전국노동자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쟁취위원회를 결성하고, 결성선언문에서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이 목표가 아니며 민중이 주인되는 새로운 사회를 핵심 목표로 천명했다.

 

여기서 민중이란 근로인민대중의 준말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민중의 정부를 주창하면서, 북한을 옹호하고 반미(反美)를 부르짖는 문재인정부를 본 적이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비극은 그때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운동계에서도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1026일 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서명운동을 결의했으며, 1029일 서울지역 6개 대학에서 삼민헌법쟁취투쟁위원회가 삼민헌법쟁취실천대회를 개최했다. 1128일에는 전학련 산하 군부독재타도및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 소속 서울시내 14개 대학이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기습 점거하기도 했다.

 

1987 6월은 한국 민주화의 원년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그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독재자라는 전제하()에 기록된 역사다. 전두환 대통령이 민주주의자가 분명하다면, 이는 오류의 기록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쓰는 이 글의 주제 역시 6월항쟁에 대한 일반의 견해와 기록을 부인한다. 대한민국 민주화는 전두환의 경제가 성공할 때부터라고 해야 한다. 전두환은 1986년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하자, 그때에야 비로소 얼어붙은 정치를 해금시킨다. 경제에 자신이 생기자 드디어 정치선진국으로의 길을 향해 물길을 튼 것이다.

 

1987 527일 결성된 국본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선언문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단순히 헌법상의 조문 개정을 뛰어넘어 유신 이래 빼앗겨온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기본 권리를 확보하기 위함이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정부 선택권을 되찾음으로써 실로 안으로 국민 다수의 의사를 실행하고 밖으로 민족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는 정통성 있는 민주 정부의 수립을 가능케 함이라고 규정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은 1987년 한국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운동의 상징적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등장과 소멸, 협상과 합의의 복합적 구성 과정이었다. 10.26사태 이후부터 2·12총선거 시기를 거쳐 1987 6월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론을 정부의 공식 의제로 받아들일 때까지, 그리고 71일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당대표의 선언을 공식적으로 승인할 때까지, 그리고 9차 헌법 개정 과정이 완료될 때까지 직선제 개헌론은 상이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는 저항세력과 집권세력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 협상의 핵심 축으로 작동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 이후 국본 713일 산하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했으며 84일에는 헌법개정요강이라는 자료를 발간했으나 실질적으로 개헌 협상은 제도권의 민정당과 민주당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 수렴은 전혀 없었다.

 

6.29선언 이후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제도정치권의 개헌협상 과정에서 집권 여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은 각각 개헌안 시안을 마련했으나 여러 측면에서 이견이 있었으며, 특히 대통령 임기와 부통령제 신설에서 큰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1987 83일부터 시작된 집권 여당과 야당의 8인 정치회담은 831일 전문과 130개 조항의 본문에 합의를 이끌어냈으며, 916일 부칙까지 합의했다. 19차에 걸친 회담 끝에 8인 정치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넘겨받은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 917일 전문과 본문 10 130조와 부칙 6조로 구성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1012일 대한민국 국회는 제헌국회 이후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한 헌법개정안을 가결했다.

 

당시 개헌에 참여했던, 12대 국회 헌법개정안 기초소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현경대 전 의원은 이렇게 증언한다.

 

대통령 직선제로 합의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은 중임이냐 아니면 단임이냐는 문제였다. 4년 중임안은 너무 위험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연임을 위해 집권 기간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인기영합에 집중할 위험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7년 단임은 너무 길어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5년 단임으로 결정을 내렸다. 정말 심사숙고라는 말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1027일 국민투표에서 93.1%의 찬성을 얻어 그달 29일 최종적으로 공포되었으며, 1988 225일부터 시행되었다. 6공화국의 헌법이 된 이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의 계승 및 조국의 민주개혁의 사명 명시

총강에서 국군의 정치적 중립,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정책 수립 추진규정 신설

기본권에서 구속적부심청구권 전면보장, 범죄피해자에 대한 국가구조제 신설, 형사피의자의 권리 확대, 허가·검열의 금지에 의한 표현의 자유 확대

국정감사권 부활, 국회 회기제한규정 삭제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 대통령의 비상조치권·국회해산권 폐지

대법관을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

헌법재판소를 신설, 위헌법률 심판·탄핵심판·국가기관 간 권한쟁의 심판·헌법소원을 관장하게 한 것 등이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가 생긴 것도 모두 전두환이 꿈꾸던 일이었다. 전두환은 유명무실한 헌법위원회를 폐지하고, 헌법 수호에 대한 실질적 권한을 갖는 헌법재판소를 설립하였다. 이 헌법재판소가 후일 박근혜 탄핵을 결정한다.

 

8. 평화로운 정권 교체

과거 문재인정부와 정치 세력은 개헌을 말했다. 그러나 말만 있을 뿐이지, 개헌의 목표와 의도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찬반의 공방도 없고, 민의(民意)를 추출할 토론의 광장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개헌이 대한민국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좌파 정권의 연장을 노림인지에 대한 국민적 판단도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과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비록 내각제에 대한 꿈을 접었지만 최선을 다해 9차 개헌을 했고, 그 헌법으로 윤석열까지 무려 8기에 이르는 6공화국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앞으로 있을 개헌이 전두환 대통령이 그토록 근심했던 4년 대통령 중임제로의 개헌이라면, 문제가 있었다. 1000조 원에 달하는 빚더미에 앉아 있는 우리나라가 연임(連任)을 위한 퍼주기식 포퓰리즘 정책으로 나라가 거덜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 문재인 좌파정부가 시도하는 정책 대부분이, 무상급식부터 무상교복까지 대중을 향한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로 일관하고 있었지 아니한가.

 

우리 대한민국은 정치다운 정치가 필요할 때이다. 비록 정권을 놓는 한이 있더라도, 차기 집권에 실패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올바른 정책을 펼칠 위대한 정치가 절실하다. 그러나 과연 보수와 진보, 좌우를 막론하고 전두환 대통령만큼 고민하였던 정치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드디어 9차 개헌에 의해 탄생된 헌법에 의하여, 1987 12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1971 4.27 대통령 선거 이후 무려 167개월 만에 이루어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다. 민정당 노태우, 민주당 김영삼, 평민당 김대중, ()공화당 김종필 후보가 맞붙은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8282738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우려한 대로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김영삼의 부산 경남, 김대중의 호남, 김종필의 충청도로 나뉘어진 투표였고, 이 지역 감정이 내재된 투표 성향은 지역 감정의 골을 깊이 파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마침내 민정당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였고, 전두환은 소망하는 단임 실천과 평화적 정부 이양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게 되었다.

 

민주 정치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조차도 최초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것은 대헌장(Magna Carta) 이후 413년이 지난 후였다. 따라서 전두환의 단임 실천과 평화적 정권 교체는 전두환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킨 대한민국 유일의 대통령이었다.

 

전두환은 1988 17일 송별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즘 졸업을 앞두고 있는 학생과 같은 심정이다. 우선은 쉬고 싶다. 대통령은 국민 중에 가장 자유가 박탈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224일 환송만찬연에서 이제 역사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 무거웠던 책임자의 고독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전두환은 그렇게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쉴 수 없었다. 1988 34일에는 그 해의 노벨평화상 수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천거되었다. 이는 그해 129일에 이미 추천 수속이 끝난 것이었다. 

 

전두환을 추천한 유럽의회 관계자들이 12.12 사태를 통한 전두환의 등장과 5.18의 비극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발적으로 노벨평화상 추천에 나섰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안에선 좌익이 5.18을 끝까지 이용하고 있으나, 세계는 노벨평화상에 5.18 문제를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추천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어두운 그림자도 잊어서는 안 된다.

 

5.18이 민주화투쟁이냐 폭동이냐는 문제를 떠나 유럽의회 관계자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재임 중 발생한 안전보장상의 중대한 위기, 19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미수 사건, 1987년의 KAL기 폭파사건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 한반도의 평화 유지에 공헌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평화적 정권 교체. 그들은 이 두 가지를 이유로 들어 전두환을 노벨평화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추천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전두환 대통령에 의하여 우리나라 경제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비록 김영삼에 의하여 폭망하고 말았지만, 오늘의 풍요를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이 이루어 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9. 백담사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호()는 일해(日海)이다. ‘해 뜨는 바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호를 알고는 있으나, 설마 이 호를 탄허스님이 지어준지는 모른다. 잘 알려진 바대로 탄허스님은 민족의 영광을 예언한 우리 시대의 큰스님이다. 아마 불자(佛者)치고 탄허스님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법정스님도 백담사에 있는 전두환 대통령을 자주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많은 스님이 전두환 대통령의 백담사행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큰스님들 치고 전두환을 찾지 않은 스님은 드물었다고 본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하여 군에 남아 있고자 하였던 노태우를 예편시켜 정무장관을 시킨 것부터 88서울올림픽·86아시안게임조직위원장·민정당 총재까지 후계자로서의 모든 수업을 마치게 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 후에는 통치자금까지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세간에 알려진 전두환 비자금의 실체인지 모른다. 전두환 비자금 대부분이 노태우의 통치자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닌가 싶다. 평소 돈이라고는 봉급 봉투 한번 만져보지 않은 전두환의 인품으로 봐서 숨기고 감출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태우는 전두환을 배신한다. 당시 전두환을 제외한 많은 언론인과 측근은 노태우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김정렬은 전두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노태우를 잘 아십니까?”

전두환은 그렇다고 하였다.

 

1년 후 1988년 봄, 김정렬은 다시 묻는다.

 

지금도 노태우를 믿습니까?”

전두환은 같은 답변을 한다.

잘 안다. 지금도 믿는다.”

 

전두환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다. 전두환은 이 답변이 있은 후 약 6개월 후에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다. 1988 33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비리와 관련하여 친동생 전경환이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5공 비리가 터져 나오자, 노태우는 정국 안정을 위해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낸 것이다. 1988 1123일의 일이었다.

 

전두환은 의리를 중시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번 믿은 사람을 두 번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향해 나를 밟고 올라가라는 발언으로 노태우를 적극 지지하고 후원한, 진정한 의미의 친구였다. 그러나 노태우는 짓밟는 정도를 넘어서서 전두환을 귀양을 보냈다. 일종의 유배형이었다. 전두환은 몇 개월만 지내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1989 1231일 국회에 출석해서 5.18민주화운동 증언을 할 때까지, 전두환이 집으로 가기에는 2년 이상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당시 백담사로 떠나기 전, 전두환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남긴다.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본인이 재임했던 기간에 있었던 모든 국정의 과오는 그것이 누구에 의해 착안되었고, 또 어느 기관의 실무자가 시행한 것이건 간에 모두가 최종 결정권자이며 감독권자인 바로 이 사람에게 그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로 인해서 온 사회가 들끓고 있는 큰 물의가 빚어지고 있는데 대해 한량없이 죄송스럽다.

 

(광주문제에 대해) 그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대통령이 된 뒤에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는 점을 깊이 후회하면서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지 않겠다. 당시의 국가적 비상시국하에서 아무런 준비와 경험도 없이 국정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또한 오랜 병폐를 하루 빨리 뿌리뽑고 기강을 바로잡아 사회의 안정과 국가발전을 도모해야한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시행착오를 가져오게 된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한다.

 

국민의 기본적인 권익을 침해한 이러한 사례들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 기회를 빌어 피해당사자 한 분 한 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친인척 비리와 관련) 재임 중 처리하지 못한 채 대통령직을 물러난 지금 많은 집안 사람들이 형사소추를 받을 정도로 비리를 저질러서 국민 여러분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은 참으로 면목이 없다. 진심으로 사죄하며 머리 숙여 용서를 빈다.

 

연희동집 안채(대지 385평 건평 116.9)와 두 아들이 결혼해서 살고있는 바깥채(대지 94평 건평 78) 서초동 땅 200평 용평의 콘도(34) 하나와 골프회원권 2건 등 부동산과 1983년 총무처에 등록한 19억여 원과 그 증식이자를 포함한 23억여 원의 금융자산을 갖고 있으니 이 재산은 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처리해 주기 바란다.

 

퇴임 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됨에 따라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사용할 요량으로 여당 총재로서 사용하다가 남은 139억 원을 관리해왔으나, 지난 4월 자문회의 의장직을 사임한 만큼 이제 이 돈은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위해 국가가 관리해 주기 바란다.

 

여러분의 마음을 후련하게 풀어드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모처럼 시작된 민주화를 통해 국민의 화합을 이룩할 수 있다면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치면서 국민 여러분의 심판을 기다리겠다.

 

국민 여러분이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 여러분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닌 한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느 곳이라도 가겠다.”

 

전두환은 외국으로의 망명과 고향으로의 낙향 대신, 추운 절을 유폐 장소로 택했다. 백담사는 손삼수 비서관이 조계종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에게 추천 받은 곳이었다. 전두환은 그때까지 백담사라는 절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러나 불자(佛者)였던 형수를 통해 백담사 대웅전 불사 때 보시를 했던 적이 있었다. 대웅전 어느 기둥 주춧돌 밑에는 전두환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고 한다.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묵었다. 이 방은 두 사람이 눕고 나면 윗목에 책상 하나를 겨우 놓을 수 있었다. 방을 덥히려 아궁이에 군불을 때면 매운 연기가 방을 채웠다. 수도도 전기도 없었다. 백담사에서 전두환은 노태우의 배신에 대한 분노로 밤을 새운다. 의리를 중시하고, 사내다움을 철칙으로 여겼던 전두환이었기에 분노는 그만큼 컸다.

 

그 무렵 법정 스님·지학순 주교·김장환 목사 등이 다녀갔다. 전두환은 예불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다. 전두환은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일해라는 아호를 준 탄허 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국태민안과 영가천도를 위한 기도를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 영령들과, 일본에 의해 희생된 한민족 영령, 6·25전쟁 희생 영령, 광주민주화운동 희생 영령, 삼청교육 희생 영령 등의 천도를 빌었다. 기도는 매일 새벽 4·오전 10·오후 2·오후 6시 네 차례씩 했다. 이 가운데 오후 2시 기도는 불교 교리 공부나 경전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전두환은 경전 공부를 한 오후 2시 기도 외에 하루 세 번 기도 때마다 108배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20일째 첫 번째 장애가 왔다. 지독한 몸살이었다. 50일이 지나자 육식을 금해서 생긴 메스꺼움과 구토 빈혈을 동반한 입덧 증세가 나타났다. 전두환은 죽을 각오로 버텼다. 그리고 가피(加被)를 얻은 것이다.

 

가피란 일체중생이 부처의 은혜 속에서 생명을 유지 보존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은 사은의 가호하심과 가피를 입고 살아가며, 중생은 그 은혜를 알고 보은행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전두환의 가피, 그것은 부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에 열중한 결과였다.

 

당시를 전두환은 이렇게 기억한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도 70일가량 지나자 우리 내외를 괴롭히던 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랜만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 얼굴이 맑아지고 빛이 난다고 했다.”

 

이때 비로소 전두환은 분노와 번민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과연 우리 같은 범인(凡人)의 그릇은 아니었다. 우리 같으면 평생 기도를 해도 얻기 힘든 가피를, 기도 70일 끝에 얻는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불법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태우에게 업보(業報)가 찾아든다. 5년 후 노태우는 차기 대통령감으로 김영삼을 후계자로 낙점한다. 5공청산을 부르짖는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김영삼의 보호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군사정권으로 매도하며, 5.18특별법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학살자로 만들어 법정에 세운다.

 

10. 법정에서

1995 1127, 대한민국 사법은 진실과 원칙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니라 정권의 시녀(侍女)로 전락한다. 1124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5.18특별법을 수용하고자 한 3일 후였다. 내란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드디어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소급입법을 금(), 이른바 민주주의를 짓밟는 민주화 세력의 역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전두환 노태우 변호인단은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는 이미 재판의 결론을 내려놓은 정치재판이자 기교재판이었고, 그 어떤 변론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위 민주화라는 언어로 국민을 속이던 사이비(似而非) 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 대한민국의 사법은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나라는 마침내 IMF 비극 속으로 들어간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법정 세우기는 김영삼의 증오와 모종의 음모에서 출발한다. 김영삼 역시 역대 대통령들처럼 비자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는 구() 정권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그의 통치기간 혹은 죽을 때까지 전두환을 전직 대통령이라는 언어적 대접조차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

 

김영삼이 은혜를 배신하고,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해 본다.

1993년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후부터 전두환 노태우를 단죄하기로 결정한다. 1993 5월 김영삼 대통령은 5.13특별담화에서 ‘12.12 사태에 대해서는 쿠데타적 하극상이라고 규정했으며, ‘문민정부는 5.18 연장선에 있는 민주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한다.

 

하지만 김영삼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만큼은 역사에 맡기기를 희망하였고, 전 대통령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한 발 물러선다.

 

그러나 1993 719, 12.12 당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지휘권을 강탈당했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군 형법상의 반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다. 여기에 더하여 1994 513, 5.18 사건의 피해자 3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5.18 관련 책임자 35명을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한다.

 

이에 1994 1029일 검찰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 행위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불필요한 국력 소모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면서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한다.

 

이어 1995 718일 검찰은 5.18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신군부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사살됐고, 비상계엄 확대·정치인 체포와 연금·정치 활동 금지·국보위 설치와 운영 등은 전두환의 정권 장악 의도에 따라 기획·입안해 추진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수사 내용과 관계없이 반란죄 및 내란죄 등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고 관련자들을 불기소 처분을 한다.

 

그러나 이 불기소처분은 정치권·학계·시민사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는다. 같은 해 10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노태우가 구속된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 폭로 이후 김영삼은 1124일 마침내 5.18특별법 제정을 수용할 것을 시사(示唆)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3건이 헌법재판소에 제기되었고, 1995 1127일 헌법재판소는 5.18 내란 사건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평의회를 열고, 검찰의 공소권 없음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1995 1215일 헌법재판소는 결정 이유에서 성공한 쿠데타도 형사 처벌될 수 있음을 밝혔다. 1995 11월 말 신군부 인사의 새로운 혐의가 드러나자, 검찰은 12.12  5.18, 비자금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나섰다. 123일 검찰은 사전 수속 영장을 발부받아 전두환을 안양교도소에 수감한다.

 

1995 1221일 국회에서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노태우의 대통령 임기 동안 실질적으로 12.12 사건, 5.18 사건 소추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1996 123일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등의 관련자들은 5.18 사건에서의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의 혐의로 구속 기소가 되었다. 같은 해 22일부터 28일까지 검찰은 12.12 사건,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등의 관련자들을 다시 기소했다.

 

죄수번호 3124번 전두환: 1: 전두환 사형/ 2: 전두환 무기징역, 추징금 2205억 원/ 3(대법원): 전두환 무기징역·추징금 2205억원

 

대법원에서 확정된 전두환의 죄목이 무려 13가지였다.

1. 반란수괴 2. 반란모의참여 3. 반란중요임무종사 4. 불법진퇴 5.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6. 상관살해 7. 상관살해미수 8. 초병살해 9. 내란수괴 10. 내란모의참여 11. 내란중요임무종사 12. 내란목적살인 13.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1심 법원은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및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혐의에 대해 전두환을 내란 및 반란의 수괴로 판시, 사형 판결을 내렸다. 2심에서는 전두환에 관한 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 확정했다.

 

이로 인해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전두환·노태우는 기본적인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모든 예우를 박탈당한다.

 

그러나 1997년 김대중은 전두환을 사면(赦免)한다. 무려 2년여에 걸친 정치쑈가 끝난 것이다. 훗날 이 정치쑈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거듭한다. 그리고 전두환에 대한 국민적 조롱과 모욕·증오가 이어진다. 그 증오는 자식들에까지 이어지는 연좌제로 진화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무시되었고, 심지어 소급입법까지 적용시킨 악의적인 판결이었다. 사법의 명예에 치명타를 준 것이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라틴어: ne bis in idem ), 판결이 내려진 어떤 사건(확정판결)에 대해 두 번 이상 심리·재판을 하지 않는다는 형사상의 원칙이다. 그러니까 처벌이 약하다고 해서 다시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더 잔인한 것은 전두환에게 적용된 소급입법이다. 내란 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다. 이에 대한 법리논쟁이 일자 김영삼은 소급입법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법은 권정달 같은 이는 제외하고, 오직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에게만 적용되었다.

 

그리고 김영삼은 나라경제를 망친다. 국가경영에 혼신의 노력을 쏟아부어도 어려운 판에, 전직 대통령 잡기나 하고 있던 응보(應報)를 받은 것이다. 그 소름끼치는 IMF 시대를 경험해 본 국민은 이 처참한 시대를 통해 민주화세력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이다.

 

11. 응보(應報)

김대중은 정권을 잡자, IMF(국제통화기금)에 관해 이런 말을 남긴다. “그 많은 돈이 사라져야 할 국가적인 재난도 없었고, 전쟁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김영삼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얼마나 많은 회사가 부도가 나고, 국민이 자살하고, 가정이 파괴되었는지 모른다. IMF 20세기 말 6·25 이후 대한민국 국민이 겪은 처참한 비극이었고, 5000만 국민이 너나없이 겪은 깊은 시련이었다. 모 방송에 자연인을 다룬 프로그램이 있다. IMF로 가정이 파탄난 사람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살고 있다. 그들의 사연은 곧 눈물이었다.

국가경영에 노력을 다하지 않고, 소급입법이나 제정해서 전직 대통령 죽이기에 몰두했던 김영삼.

그러나 이는 문재인의 적폐청산과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북핵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개정 위기에 직면한 당시 문재인 역시 나라경제와 안보에 집중하지 않고 적폐 청산만을 외치고 있었다. 김영삼처럼 전직 대통령 죽이기에만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신()만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은 전두환을 향해 지극히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심판을 한다. 그리하여 사법의 정의는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었고, 진실은 숨고 허구(虛構)만이 국민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두환의 진실은 마침내 응보(應報)를 부른다.

 

응보, 이것은 전두환을 위한 신의 뜻일지도 모른다. 전두환의 진실을 역행한 역대 대통령들은, 그 끝이 하나같이 나빴음을 보면서 응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11부 제목을 응보(應報)’로 잡았지만, 이는 차라리 저주(詛呪)’라 해야 옳을 것이다.

 

먼저, 노태우. 노태우는 오랜 친구 전두환을 배신하고 백담사로 보낸다. 그리고 제직기간 동안 단 한번도 찾아주지 않는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 의해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법정에 선다. 그 역시 사형선고와 무기징역과 감형 절차를 밟는다.

 

1심에서는 징역 22 6개월을 선고받고 이후 항소심에서는 징역 17년으로 감형되었으며, 결국 1997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말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김대중·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 후인 1220일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요청으로 김영삼정부에 의해 전두환과 함께 사면복권 되었다.

 

결국 노태우는 거의 3000억 원에 이르는 추징금을 모두 냈고,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10년 넘게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투병 중이었다. 그 역시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예우를 박탈당했다. 88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치고, 무역수지 흑자를 이어갔으며, 중국과의 국교를 맺는 등 우수한 국가경영을 하였으나, 그의 결말은 비참이라는 말밖에는 없다.

 

그러나 전두환은 노태우의 병실을 찾는다. 오랜 옛 친구에 대한 우정이었고, 전두환다운 용서였다.

 

역사는 그들의 우정에 돌이킬 수 없는 애증의 골을 심어놓았다.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악연은 더욱 깊어져갔던 것이다”(드라마 5공화국 마지막회 중)

 

다음은, 김영삼 대통령이다.

그의 정치적 세력은 김대중에 미치지 못하였다. 결국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해 민정당 최고위원이 되었고, 박태준과 김종필을 제치고 대선 후보가 된다. ‘트로이의 목마라는 표현이 적확한 인물이었다(참고로 김영삼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노무현은 3당 합당에 반대하며 탈당, 이후 김영삼과 정치 노선을 달리하게 된다).

 

김영삼이 주로 사용한 경구가 바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이 재임 시절에 정말 닭의 목을 제대로 비틀었느냐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전두환이 소위 민주화 세력이라는 반정부 세력의 목을 제대로 비틀었다면 대한민국은 정녕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재임 시절 점심을 칼국수로 먹을 만큼 청렴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아들 김현철의 국정농단은 막지 못했다. IMF가 시작되는 한보그룹의 부도. 그 한보그룹 5조 불법대출의 주범이 바로 김현철이었다. 따라서 국가경영이란 칼국수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랍스타나 곰발바닥요리를 먹는다 하여도 대통령은 흉이 될 것이 없다. 나라만 부강하게 만든다면 송로버섯 정도야 얼마든지 먹어도 좋다. 칼국수가 전부일 수 없는 이유가 그렇다.

 

그렇다면, 온 국민의 눈물을 쏟게 하였던 IMF 진행 과정을 살펴보자.

1990년대는 3() 호황으로 빚을 내서 투자해도 돈을 버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기업들이 과도한 차입을 통해 투자를 확대해 외형을 불렸고, 당시 30대그룹 평균 부채비율은 518%나 되었다.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 과정에서 정경유착·분식회계가 만연하였다.

 

여기에 김영삼의 강력한 의지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여 자본시장 개방하였고, 해외 투자가 몰려들어 원화가치 급등하였다. 원화가치 급등이란 환율 하락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수출 부진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경상수지는 적자, 외채는 증가하였다.

 

여기에 100년 만에 홍콩의 중국 복속을 앞두고 화교경제권인 태국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아시아 시장에 투자한 외국인들은 빌려준 돈 못 받을까봐 불안해 하였고, 한보그룹 부도를 시작으로 은행과 기업들 연속 부도가 시작되었다. 당시 한보그룹은 2000억 원 정도의 자기자본으로 55000억 원의 대출을 받아 당진제철소를 짓다가 망했는데,  5조 원에 이르는 대출에 김현철이 관여한 것이다.

 

특히 당시 재계 8위였던 기아자동차 부도가 컸다. 이런 부도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경 유착과 분식회계가 세상에 드러났고, 이를 지켜본 외국인들은 한국의 투자환경을 불신하게 된다. 한국에 돈을 빌려줬던 외국인들이 한국도 태국처럼 되는 것 아니냐며 투자금을 회수하자, 안 그래도 경상수지 적자로 달러가 없는데 한화를 달러로 바꿔서 회수하므로 외환보유고는 마침내 고갈되었다.

 

결국 외환이 없어 모든 외채에 대한 지급 불능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달러로 갚아야 하는데 달러가 없어 못 갚게 되자, 유동성 부족에 의한 국가부도가 예상되므로 사전에 IMF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회사와 국민이 부도와 파탄에 이르러, 자살과 이혼과 가정파괴로 고통을 받았는지 모른다.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국민에게 고통을 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의 무능이 증명된 IMF사태는 이로써 끝나지 않는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진실을 숨기려 한 사실이다. 7차 교육과정 5-2 교사용 교과서는 국민의 과소비가 외환위기 원인이라고 하였고, 5-2 학생용 사회과탐구 교과서도 마찬가지 내용을 담았다.

 

이로써 김영삼은 역사적 조롱을 받는 인물로 전락하였다. 국가경영에 매진하지 않고, 전직 대통령 잡기나 하였던 응보(應報)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김영삼의 사망 때 빈소를 찾아가 조의(弔意)를 표한다.

 

다음은 김대중이다.

김대중은 당선 즉시 김영삼이 만들어 놓은 IMF시대를 극복해야 했다. 지진 같은 국가적 재난도 없었고, 전쟁도 없었던 마당에 노태우 시절까지 이어지던 무역흑자와 외환보유고가 모두 거덜났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알고 나서는 전두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에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 당선 즉시 전두환을 사면, 용서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을 전 대통령으로서 어느 정도 예우해줬으며 국정에 대해서 의논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도 이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한다고 언급한다. 전두환·노태우의 석방은 당시 대통령 당선인 김대중의 요청으로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김대중 입원 시에 전두환은 병문안을 가서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편했다라고 고백한 걸로 미루어보면,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용서하고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김대중은 대북불법송금부터 북한 핵 개발에 대한 거짓말까지 숱한 비난과 의혹을 받았으나, 천수(天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전두환은 김대중의 빈소를 찾아가 지극한 조의를 표한다.

 

그 다음 대를 이은 노무현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전두환을 증오했던 인물 중 하나다.

5공 청문회 당시, 청문회장에서 퇴장하려는 전두환에게 자신의 명패를 던진 것으로 유명하다. 본인은 그 명패를 바닥에 내팽개친 것으로 자서전에 기술하고 있으나, 명패 투척 사건은 노무현의 결말에 대한 복선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알 수 없으나 사이가 안 좋았다는 건 확실하다. 그래도, 2003년 취임을 앞두고 설에 유인태 정무수석을 보내서 세배를 드린 것을 보면 적당하게 예우는 갖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노무현 자서전 명패 투척 사건에 대한 기술이다.

내가 청문회로 꼭 덕만 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회복이 안 되고 있을 만큼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일도 있다. 소위 명패투척사건이 그것이다. 청문회에 나온 전두환 씨가 퇴장할 때 내가 명패를 집어던진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나는 당시 언론에 의해 국회의원의 자질이 문제라며 매우 무식하고 경우 없는 깡패(?)로 비난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나에게서 그런 이미지를 느끼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물론 그 반대로 기왕이면 머리통을 정통으로 맞출 일이지 그게 뭐요?”하면서 통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전두환 씨에게 명패를 던진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내동댕이를 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전두환 씨에게 대한 분노보다는 당시 내가 소속하고 있던 통일민주당의 지도부에 대해 화가 치밀어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자신의 명패 투척과 그의 석연찮은 죽음은 서로 복선적 관계에 있음을 이제야 필자도 깨닫는 바다.

 

그리고 이명박. 이명박은 전두환과는 철저하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을 지킨 인물이다. 보수든 진보든 멀리도 가까이도 하지 않는 중도적 인물로서 지극히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이명박은 전두환과도 중도적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2017년까지, 법적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빠짐없이 전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전두환의 응보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은 이명박을 감옥에 넣는다. BBK라는 기업이 누구 소유든 문제가 될 까닭이 없지만,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좌익들은 이걸 확대하여 영어(囹圄)의 신세로 만들었다.

 

그러나 박근혜에 이르면, 전두환의 응보는 구체성을 띤다. 박근혜는 전두환에게 연좌제를 적용시키는 입법을 한다. 전두환의 아들 3형제에 대해 전두환 추징금의 굴레를 씌운 것이다.

 

전두환은 박근혜가 빈손으로 청와대에서 물러났을 때, 청와대 금고에 보유 중이던 돈 6억 원을 모두 준다. 생활에 보태 쓰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1980년 시절 6억 원이라면 얼마나 많은 돈인지 모른다. 공무원 봉급이 5만 원, 집 한 채에 불과 몇 백만 원 하던 시절이었다.

 

전두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비록 그 측근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을 비판하고 전두환의 권력에 빌붙기 위해 박근혜를 배신하는 일은 있었어도, 전두환이 박근혜를 도와주었으면 주었지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더구나 전두환은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를 사형시킨 주동인물이었다.

 

그러나 박근혜는 전두환 추징금 환수에 박차를 가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에서 전두환 추징법이 만들어지고 채동욱의 검찰이 사냥개 역할을 한다. 초법적인 연좌제법으로 사돈의 팔촌 재산까지 압수수색을 벌였다.

 

아들의 이혼한 전처 집까지 뒤졌다. 이순자 여사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 대통령 시절에 와서, 나는 생을 포기할 뻔했다. 아들은 아버지 추징금으로 탈탈 털리고 벌금 낼 돈이 없자 강제노역장에 나가 황제 노역이니 신선 노역이니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박근혜는 탄핵을 받고 구치소에 5년을 있었다. 박근혜의 몰락은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모든 보수우익의 가치가 사라지고 부친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까지 무너뜨린 결과를 낳았다. 박근혜는 왜 그렇게 전두환을 미워했을까. 전두환은 박근혜를 위해 박근혜 주변을 맴돌던 최태민을 처단한 적이 있었다. 혹시 그 때문이었을까. 최순실이 그랬을까.

 

그러나 대통령의 자리에서 대한민국 정상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여도 부족한 판국에 박근혜는 김영삼처럼 전두환 잡기에 몰두했던 것이고, 응보는 우리가 보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5년 동안의 구금생활이 문재인과 좌익의 소행이라 보기엔 단순하지가 않았던 이유가 전두환 탄압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재인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가 65명에 달하는 경호원을 데리고 양산으로 떠났다 하나 문재인 그가 평안하리라고는 보는 국민은 없다. 딸 문다혜와 아내 김정숙 사건만이 아니더라도 드러난 간첩죄만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문재인의 얼굴에 김영삼과 김대중·노무현의 모습보다 더 독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전직 대통령잡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문재인의 적폐청산에서, 우리는 김영삼의 소급입법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더구나 김대중의 대북불법송금이며, 노무현의 반미와 북핵 옹호까지 무려 두 명이나 되는 전직 대통령의 실패가 어른거린다.

 

추석명절 때 문재인은 관행을 깨고 전두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명박을 제외하고 전직 대통령들이 추석 선물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로 현직 시절 저질렀던 범죄 때문입니다. 전두환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사면을 받긴 했지만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유죄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전직 대통령 예우 대상이 아닙니다.”

 

바로 이 말이 문재인에게도 곧 적용될 것이 분명하다.

 

12. 공과(功過)

전환은 재임 시절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였고, 연좌제를 폐지하였으며, 사교육을 금지시키는 한편, 적자투성이 무역수지를 흑자로 전환시킨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은 없다. 완벽하지 못해서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나 또한 너 또한 부족한 인간이다. 전두환 역시 우리네 인간의 부족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리하여 내가 부족한 인간일진대, 전두환의 부족함을 지나치게 탓하지 말라. 그의 공()과 과() 역시 한편으로만 치우쳐 바라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줄 알아야, 우리는 인간적인 부족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것이다.

 

(1) 5.18

5.18을 이용한 김일성의 전략은 절반의 성공으로 남는다. 남한 내 폭동이 전국으로 번지게 하여 적화무력통일의 기회를 잡는데는 실패하였지만, 5.18을 이용하여 수많은 운동권 학생들을 길러 그들을 주사파로 양성했다는 점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 주사파를 이용하여 오늘날 종북정당 더불어민주당을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종북간첩이 대통령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고무적인 성과였을 것이다.

 

김대중과 남민전 등 대한민국 내부에 기생하고 있던 좌익들은 베트남의 공산통일(1975.4.30.)에 고무된 바 있었다. 남민전은 그들의 깃발을 베트콩 깃발을 차용한 바 있고, 김대중 또한 베트남 적화 당시 수없이 발생한 시위집회에 주목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군철수와 평화를 외치던 스님들의 분신도 연이어 일어났다. 베트남이 혼란에 빠지던 그 강력한 시위집회를 김대중은 정읍 연설에서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을 만나 데모를 지시하였고, 박관현은 학생들을 도청분수대로 이끌고 나왔다. 여기에 남로당 잔존 세력과 고정간첩, 그리고 북한이 추모하는 5.18 인민군전사자들이 가세한 것이다. 당시 북한은 총동원령을 내리고 있었다. 북한 김일성은 가동할 만한 모든 세력을 합세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그때 대학 3학년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필자는 공수부대의 전투력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쫓기는 학생들은 대부분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어린 대학생들이었다. 학생가방만 들고 다녀도 곤봉으로 치던 무도함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 모든 것을 압축하여 이 글을 읽기 전에 5.18을 말하지 말라는 글로 5.18의 논란에 개인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만약 5.18에 대해서 누군가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전두환이 5.18을 조기 진압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만약 전두환이 5.18을 조기 진압하지 않았다면, 광주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온갖 소총부터 수류탄과 TNT까지 탈취된 상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해방구가 되었을 것이고, 여순반란 때처럼 누군가는 인민공화국 지지를 선언했을지 모른다. 당시 김일성은 이 점을 간절하게 노렸다. 

 

폭동과 혼란, 그리고 남침.

총기 탈취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무려 6차례에 걸친 교도소 습격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대학교 운동장 지하통로에서 살고 있던 넝마주이들도 합류했다고 하나, 지금까지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에 대한 의문도 있다. 그리고 행방불명자 또한 탈북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증언이 사실일 수 있다. 북한은 광주5.18을 선전선동에 이용하고자 산증인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희망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북으로 가다가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죽여서 산속에 묻었다는 증언이 있다. 험준한 산악을 한 시간에 5를 달린다는 북한특수군들이었다. 학생들이 따라가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윤기권을 월북시켜서 이용하였다.

 

더구나 특전사가 소지하던 총기는 M16이었다. 필자 역시 전방 군부대에서 다루던 총기였다. 그러나 사살된 사람들 중에는 M1이나 칼빈에 의해 당한 희생자가 많았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었다. 5.18 내부 세력의 총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북한 청진에 있는 5.18 인민군 전사자 추모비다. 무려 154(후일 4명 추가)이었고, 5.18이 진압되고 난 뒤 619일까지 돌아오지 않은 자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아쉬운 점은 5.18 이후를 전두환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였고, 동서화합을 위해 건설한 88고속도로 역시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5.18에 대한 함구를 목표로 유족에 대한 탄압을 했던 것도 그 중의 하나다. 미리 진실을 알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비극은 길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 유공자가 되는 현실은 없었을 것이다.

 

5.18 당시 광주 근처에도 오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면 이해찬이나 추미애문재인설훈, 그리고 통진당 이석기 같은 인물도 유공자라는 것이다. 가짜유공자 문제는 5.18 세력과 광주시가 합작한 범죄행위라 판단해야 한다. 5.18이 일어날 무렵 13살밖에 안 되던 김경수 같은 자들이 유공자인 이유는 코미디에 해당한다.

 

어쩌면 광주는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했고, 그 도움을 준 사람들을 유공자로 선정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을 아는 국민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았고, 다시 광주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극과 극이 부딪치는 이 시점에 못된 정치인들은 광주를 찾아가 정치적인 이용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화해와 해원(解寃)이 이루어지지 않는 지금의 평행선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사회에 떠도는 5.18의 의문을 이용하여 어떤 변명도 만들어 내거나 거짓을 섞지 않았다. 역시 돌 같은 성격의 위인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5.18 이후 광주에서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영호남을 잇는 도로를 만든 것이었다. 5.18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전두환다운 성의(誠意)였을지 모른다.

 

다만 5.18 이후 즉시 이러한 비극의 원인과 과정, 무력 진압의 필요성과 해원을 위한 노력을 다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전라남도 해남·진도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박지원은 지난 시절 전두환의 5.18 광주 진압을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그것(5.18 조기 진압)은 전두환의 위대한 결단이었다.”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하는 견해와는 완전히 다른 판단이며 평가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를 진압하여 더 이상의 혼란을 막고 국가를 정상화시켰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박지원은 다시 5.18특별법을 말하고 있다. 광주시민들에게 아부하여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정상모리배의 태도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제정한 5.18특별법은 5.18에 대한 비판 자체를 막겠다는 의도를 지닌 법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국민적 의혹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이 법으로 인해 다시 광주가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박지원은 간신(奸臣)의 상징으로 남아야 한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살인마일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5.18 당시 전남도청 지하에 설치된 60t 분량의 TNT를 폭파전문가 배승일을 급파해서 4일에 걸쳐 뇌관을 제거한 일과, 총을 쏠 수 없도록 총의 노리쇠 방아공이를 제거한 일이다. 그리하여 5.18은 최소한의 피해로 진압되었다. 이는 곧 전두환이 살인마가 아니라는 반증(反證)이 된다. 따라서 전두환의 이 노력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2) 삼청교육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전두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대부분 삼청교육대를 말한다. 맑고 깨끗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동경(憧憬)이었을 것이다. 특히 전과 10·20범들이 활보하는 사회에 대한 반감이 더욱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를 말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인권탄압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지만, 집행 과정에서 실무를 맡은 경찰이나 정보원들의 실수나 전횡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는 분명히 공()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필자 역시 시내나 거리에서 깡패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거리를 깨끗하게 하고, 사회를 깨끗하게 하며, 경제를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시작된 삼청(三淸)교육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부랑자·폭력배·경제사범 등을 삼청교육대에 입소시켜 순화교육을 시켰으나, 당시 교육대의 3분의 1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삼청교육대는 1981 1월까지 총 6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중앙정보부·헌병대 요원과 검찰·경찰서·지역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A·B·C·D 4등급으로 분류하여 A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C 3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케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 방면하였으며, D 17717명은 경찰에서 훈계 방면하였다.

 

삼청교육대 순화교육은 연병장 둘레에 헌병이 집총(執銃) 감시하는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가혹한 방법의 훈련을 감행하였다. 1988년 국회의 국방부 국정감사 발표에 의하면 삼청교육대 현장 사망자가 52, 후유증 사망자 397, 정신장애 등 상해자 2678명이 발생하였음을 보고하였다. 오죽했으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느니 자살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겠는가.

 

1988년 노태우정부 시절 삼청교육 피해보상계획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계획을 수립하고 삼청교육대 입소 피해자 3226명의 보상신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39000여 명의 피해자 중 신청자는 4600여 명에 불과했고, 보상금액도 몇 10만 원에서 몇 100만 원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골동네까지 득실거리던 거지가 사라지고 부랑배나 불량배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고 조용히 숨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간첩이나 용공주의자들이 발을 못 붙이는 세상이었다. 사실 좌익들뿐만 아니라 학교 학생들도 끌려갔으니 깡패·양아치·학교 일진 등도 무서워하던 시절이 바로 전두환 시대였다.

 

무고한 인권탄압이나 침해만 없었다면 전과 10·20범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범들이 감옥에서 인권을 말하는 지금, 더구나 민주시민의 질서가 사라진 지금 누가 전두환 시대를 마다하겠는가.

 

그러므로 한 인물의 평가는 어느 단면만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 인물이 갖고 있는 모든 다면에서 평가를 하는 종합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합리(合理).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은 살인마 독재자라기보다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라고 해야 옳을 것이라 믿는다.

 

(3) 비자금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사후(死後)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안정시킨 위대한 통치자였다. 그 안정을 위해서 전두환은 군대식 철권정치를 실행하였다. 기업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통치 앞에 무릎을 끓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전두환은 엄청난 비자금을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혹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권력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권력에 의해 공권력과 금융 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비록 국제그릅 판산은 국제그룹의 엄청난 부채가 그 원인이 되었겠지마는, 그 사건은 우리나라 경제계에 엄청난 유형(有形) 무형(無形)의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공포에 질린 기업들의 자발적인 정치헌금이었고, 이는 고스란히 대통령의 통치자금이나 비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무려 2000억 원이니 3000억 원이니 하는 비자금은 지금으로 보면 20조 원나 30조 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이에 김영삼은 나라가 망할 정도라는 말로 비자금의 실체를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풍토는 대통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군부 혹은 일선 공무원들조차도 각자 자기 몫을 챙겼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심지어 노태우 정권의 황태자 박철언 같은 이는 어느 여교수에게 자신의 비자금 약 178억 원에 해당되는 돈을 맡겼다가 뜯긴 사건도 알려졌다. 어디 숨길 곳이 없어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 모양인데, 2008년 박철언이 H대학 무용학과 강모() 교수를 고소하며 불거졌던 사건이었다. 그러니 알려지지 않은 정권의 실세들이나 일반 공무원들의 부정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흐린 윗물로 인해 아랫물이 맑을 까닭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부정부패에 젖어든다. 신군부와 전두환은 3(三淸)을 말하며 사회정화를 부르짖었으나, 전두환 자신부터 부정의 길을 걸었다는 점은 반성해야 할 점이 크다.

 

정권에 충성만 한다면 모든 것, 다시 말하면 부정과 부패가 용서가 되었고, 대한민국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썩어가는 부패공화국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공무원들이 그러했다. 필자는 대표적인 부정부패의 사례로 충청도 어느 마을 다리 난간을 튼튼한 나사못이 아니라 본드로 붙여놓은 짓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공사비를 빼먹은 흔적이었다.

 

결국 김영삼 정권 때 발생한, 1994 1021일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와 1995 629일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그런 부정부패가 누적된 사회에 대한 경고였다.

 

물론 사이비 기자들의 횡포도 보았고, 경찰이나 정보기관원의 무도한 인권침해도 수없이 보았다. 그리하여 전두환 시대를 독재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에 대한 욕이나 비판만 하여도 잡아가는 공포스러운 사회,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과 그에 충성하여 이권을 챙기던 측근들과 공무원들. 그러므로 부정부패에 관한 한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는 입이 백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어야 할 것이다.

 

(4) 88서울올림픽

전두환은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 중의 하나가 악명 높은 화장실 개선이었다. 공중화장실의 더러운 풍경을 겪어본 세대는 아마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똥 냄새가 등천을 하고 파리 구더기가 들끓는 화장실. 드디어 전두환·노태우 시대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화징실에는 깨끗한 물이 솟고 음악이 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세계 제1의 화장실 문화를 이룩한 나라가 되었다. 아마 선진국이라는 유럽 어디를 가도, 아니 세계 어디를 가도 대한민국만큼 화장실이 청결하고 깨끗한 나라는 단언코 없다. 중국도 지난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화장실 문화를 열심히 배워 간 바 있다.

 

88서울올림픽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역량만을 보여준 축제는 아니었다. 국민의 의식이 개선되어 쓰레기 없는 거리, 쓰레기 버리지 않는 수준 높은 시민의식이 있었다. 버스를 타도 줄을 서고, 임신부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아주머니 그리고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움도 있었다.

 

그 드높은 시민의식이 최고로 발양될 때가 2002년 한·일월드컵 때였다. 4강 대결 때 운동장에는 대형 대한민국 국기와 함께 터키 국기가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더키 국민은 우리 대한민국을 진정한 형제의 국가로 여기게 되었다. 승패를 떠나서 그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행복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삶의 질이 참으로 높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필자는, 늦은 밤 버스터미널에 내린 적이 있다. 택시를 타기 위해 택시승차장을 향해 가다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화들짝 놀란 것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아니라 수없이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였다. 거의 꽁초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너나없이 길바닥에 버리고 있었다.

 

필자가 민주화 세력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가장 주요한 이유가 바로 의식의 저질(低質)이었다. 선생님일지라도 학교에서건 거리에서건 아무에게나 눈 부라리고 대드는 아이들부터 욕설을 상투적인 투쟁수법으로 삼으며 소위 민주화투사라고 하는 젊은이들, 노인을 하찮은 짐처럼 멸시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등, 심지어 국익을 위해 외국순방을 하는 대통령에게 비행기나 떨어져 버려라는 저질들을 우리는 민주화를 말하는 무리 속에서 수없이 보았다. 효와 충과 질서와 예의 같은 인간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저질(低質)들을 현재는 물론 지난 시절에 필자는 아주 다양한 곳에서 수없이 겪고 또 겪었다.

 

사치와 낭비가 극심하고 죄의식이 없으며, 기본 질서마저 붕괴된 사회를 바라보며, 지난 전두환 시대를 그리워한다면 필자는 죄인일 것인가.

 

과거 노태우 시절까지는 그래도 효와 충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헌신과 희생, 저마다의 소질과 능력에 맞춰 노력하는 교육의 목표가 분명한 시절이었다. 교련 과목을 없앤 김영삼이나 김대중 시대까지도 민주시민을 양성하고자 하는 교육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을 거치며 교육은 독재에 이용된다는 이유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부정하였고, 요즘은 학생들이 즐거운 학교를 만들고자 하여 진단평가나 중간고사 같은 시험마저 부정되었다. 학교가 거대한 보육원으로 변한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실린 글 하나를 소개해 본다. 어느 관광지에서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초등생과 한국 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일본 아이들은 질서를 지키며 단정하게 서 있었지만, 우리 학생들은 장난치고 던지고 쫓아다니느라 여념이 없더란다. 통제가 안 되는 학생들이었다고 그 일을 전하는 네티즌은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육의 질적 수준에서 우리는 이미 일본에 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뜻 있는 국민이라면 교육이 엉망이다는 점은 누구나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자라나는 미래세대는 이런 교육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가 어두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던 대한민국이 소위 개판 사회가 된 것이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차마 바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만 장면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삼성 이재용과 이명박·박근혜의 얼굴 사진에 화살을 쏘게 하거나 축구공에 사진을 붙여 발로 차게 하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단두대를 세워놓고 박근혜의 목을 자르는 퍼포먼스. 민주가 아니라 폭력에 혈안(血眼)이 된 민주를 가장(假裝)한 저질(低質)들이었다.

 

그뿐이겠는가. 일국의 대통령 아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통령에 대한 추악한 욕설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쥐박이·닭년·닭그네라고 부르며 모욕을 즐기던 그런 촛불이 무슨 자랑이라고, 문재인은 촛불 정신은 아직 진행 중이라고 표현하는가!

 

 진행 중인 촛불들이 구토가 나오는 욕을 상습적으로 한다면,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욕설을 자랑이라고 보는가? 다시 한번 그 욕설을 읽어보라.

 

oo : 광화문 네거리에서 돌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살인마 전두환이 민주주의자라는 말에 할 말을 잃었네, 너같은 쓰레기 틀딱에게 예의 갖춰 댓글 단 내가 병신이네, 곱게 늙기는 애시당초 힘들겠고 추하게 늙지는 마라...(819일 오후 12:26)’

 

이들이 바로 젊은이들, 바로 이 나라의 미래라고 할 때, 더불어민주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시절 민주당은 민노총과 종북 좌파를 선동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잡을 때는 좋았겠지만, 이런 질적 저질성은 아마도 문재인 정권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나라의 혼란, 올바른 가치관과 수준 높은 국민의식의 부재(不在)로 나타난 이 나라의 암울한 현상에서, 민주당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13. 에필로그

서해해전으로 전사한 6인의 해군용사 장례식 때 전·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하게 오직 전두환 대통령만이 문상(問喪)을 했다. 바로 이 점,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위해 향불을 올리며 고개 숙이는 이 모습은, 오늘날 왜 다시 전두환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지도자는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쓴 전두환 찬양시로 알려진 처음으로란 시는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로 시작한다.

 

틀림없는 사실의 기록일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똥물이 흐르는 한강을 오늘의 한강으로 만든 위인이다. 나아가 미당의 시는 86아시안게임과 평화의댐 건설, 무역수지 흑자 등을 시적 소재로 다룬다.

 

이 시를 독재에 아부하는 시로 판단하는 진보 측 문학인들의 근거가 바로 ’5.18 살인마 전두환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살인마가 아니라, 이 나라를 OECD 선진국 20개국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단임을 실천한 가식(假飾)없는 민주주의자였다.

 

우리의 미당은 5000년을 이어온 조국과 민족과 하늘과 역사를, 자신의 문학 안에서 절대의 미()로 승화시킨, 끝없는 생명을 노래하던 전통적 서정의 시인이었다. 불초(不肖)들의 혈맥 속에도 미당의 서정이 유전이 되어 흐르고 있다. 먼 후학이지만 감히 문학의 하늘을 이룬 미당을 사모한다.

 

그리하여 친일시인이라 함부로 부르지 말라.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시가 생존을 위한 협조였다면, 그래도 너는 손가락질할 것인가. 더 이상 미당을 욕하고자 한다면, 일제치하를 살았던 너의 부모를 돌아보라. 네 부모 역시 신사에 참배하고 일본왕을 폐하라 불렀지 않았겠는가.

 

전두환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역사를 창조하는 중심 인물이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5년 혹은 7년 간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룩한 대통령은 모두 소중한 존재다. 조롱과 비판으로 그 시대의 전부를 매몰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과거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당시의 시대적 조건과 문화역사적인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면, 과거는 모두가 부정될 것이며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법은 죄형법정주의를 제창하는 것이며, 소급입법을 금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 기준이라면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제발전을 위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의 전투수당 약 500달러에서 450달러를 사용한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지금의 기준이라 해도 북한 김일성이 자행한 수 없는 데러와 침략에 대해 왜 한 마디 말을 못하는가. 소급입법을 해서라도 북한에 동조한 인물들을 잡아넣어야 할 것 아닌가. 김일성에 대한 소급입법은 없고 전두환에게만 소급입법을 적용하는 이 시대를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박정희 대통령은 커미션으로 주는 돈을 M16 같은 무기로 달라고 하였다.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4·19때 학생들이 이승만을 향해 대통령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무릎을 끓은 사실이 있다면, 그 행동을 지금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의 유신헌법을 독재로 몰아붙이고 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붙였고, 전국적으로 유신헌법에 대한 찬성 지지율이 90%가 넘게 나왔기 때문에 이를 선포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80%대를 기록한 서울과 부산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에서는 모두 90%를 넘겼다. 이게 독재일 것인가?

 

비록 유신헌법이, 민주국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헌법이라 할지라도 당시에는 그만큼 대내외적으로 대한민국은 위태로웠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경제발전의 성과가 나타나 그걸 피부로 느꼈기 때문에, 국민이 유신에 대해 90%라는 일방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인정할 수 있는가?

 

전두환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은 이념보다 경제에 더 민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물가를 잡고, 경제를 안정되게 운영했으며, 무역수지를 흑자로 바꾼 점은 참으로 찬탄할 만한 국가경영이었다. 이 뛰어난 지도력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명박의 4대강 공사에 침을 튀기며 욕하는 자들이 똥물과 다름없던 한강을 지금과 같이 멋진 한강둔치공원으로 바꾼 사람이 전두환이라는 점에 대해선 입을 닫고 함구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두환은 처음부터 대통령 단임제를 스스로 주장하고, 그 약속을 지킨 분이다. 바로 이점은 위대한 민주주의자로서의 덕목과 귀감(龜鑑)이 될 것이다. 독재자들은 평생 해먹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지, 전두환처럼 스스로 물러나려고 법을 정해서까지 약속하진 않는다는 점,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충분히 읽고 배웠을 줄 안다.

 

그리고 전두환 개인에 대한 비리와 부패는 독재자라는 점과 연관시킬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액수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노무현도 640만 달러라는 비리가 있지 않은가. 반면 독재자라고 욕을 해대는 박정희 대통령은 비자금이 전혀 없었음도 충분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무려 27억 원이나 되는 돈을 반납하지 않고 떼먹은 사실이 있다. 노골적인 반국가 정당이 27억 원이나 되는 돈을 어디다 썼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검찰은 바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직 전두환의 비자금만 압박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반국가적인 행동이자 야만(野蠻)스러운 검찰이가.

 

다만 아쉬운 점은, 전두환 시대에 핵실험 및 핵 개발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1980 1219일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핵 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강제로 통폐합시킨 뒤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에너지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전두환은 핵을 포기하였고, 1983 11월 당시 재처리 작업을 통해 추출했던 플루토늄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제출됐다.

 

19821983년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했고, 이는 일본과 미국 측 언론에 입수되어 보도됐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정부는 그런 정보를 입수해 계획 중지를 요구했으며, 1983 11월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지를 약속하게 되었다. 절통할 일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혼란했던 경제를 잘 수습하는 한편 안보 면에 있어서도 대북 우위를 확보했으며, 무엇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더이상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하여 필자는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당인 국민의힘에 말하는 것이다.

 

전두환만큼만 해 보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통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그 위대한 지도력과 북한을 뛰어 넘은 역사의 위상을 배워보라. 전두환 시절은 어느 누구도 국가의 정책과 목표에 이의를 단 사람이 없었다. 국론은 한 곳으로 모이고, 응축된 교육의 힘이 작용하여 수많은 인재가 세계를 향해 나아갔으며, 민주시민의 의식은 높아졌고 거리는 깨끗했다. 어디 한번 너희도 전두환만큼만 그렇게 해보라!”

 

민정기(閔正基)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이렇게 말하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이견(異見)이 있고, 자서전에서 밝힌 그분의 서술이 냉정한 관찰자의 증언(證言)이라 할 수 없다 해도, 그 해석과 평가는 국민 각자의 몫, 역사의 몫이다.”

 

이제 필자는 모든 찬반(贊反)과 호불호(好不好)의 의견을 뒤로 하고, 13부 여정 끝 조국을 위해, 아니 전두환 대통령을 위해 명복을 빌고자 한다. 전두환, 그 분은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국립묘지 어디 한 조각 땅마저 허락되지 아니하여 묻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오늘도 이 못난 전라도 사람은 호남 들판에 내리는 가을비에 젖어,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을 위해 두 손을 모은다.⊙

-2024년 11월23일 전라도에서 정재학 시인

 

11.23 [단독] 이순자 여사 “남이 뭐라 하든 진실은 본인이 알아”

5·18역사학회 연희동 자택 예방·조문
“무리하게 각하 5·18 원흉 만들려고…
팩트 힘드니까 영화로 감정에다 호소”

 ▲ 이순자 여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이한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예방한 5·18역사학회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허겸 기자

 

“5·18에 대해서 남이 뭐라고 하든 진실은 본인이 알잖아요. 세상에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누가 겁나야 하겠어요, 우리가 겁나야 하죠.”

 

이순자 여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 서거 3주기인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예방한 5·18역사학회(회장 이용식) 회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비정상이 오래가진 안잖아요. 정상이 오래가지”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자기가 집권하기 위해서 자기 국민을 학살한 것이라면 정말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면서 “국민 상당수가 대졸인 나라에서 있을 리 없잖아요. 군대 가는 장병들이 대부분 대학 다니다 왔는데 학교 다닐 때 데모하고 군대 오면 진압하는데 그 사람들이 전 아무개가 뭐라고…”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서 “이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라며 “그런데도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그럴 듯하게 해서 막 힘으로 밀어붙인다는 게 힘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가능해도, (나중에는)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 여사는 “언제든 사람이 납득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면 바로 잡아질 일이에요. 그런데 단지 그 세월 동안에 자꾸 하다가 보면 얘기가 흥미 위주로 되다보면 디테일이 틀려버리는 거예요. 디테일을 바로 잡기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라며 “너무 오래 가짜가 진짜 같이 되면 안 되긴 하지만, 바르게 될 거는 저는 된다고 봐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무리하게 각하를 5·18의 원흉으로 만들려고 사실을 갖다 하기 힘드니까 영화나 뭐 이런 것으로 감정에다 호소해 버리잖아요”라며 “그거는 저희가 데미지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마음을 추슬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해는 3년째 연희동 자택에 안치되고 있다. 이날 연희동에는 ‘구국의 영웅’ 전두환 전 대통령을 기억하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조문객의 발길이 아침 이른 시간부터 이어졌다. 5·18역사학회는 최근 제4대 회장으로 추대된 이용식 회장과 전임 박명규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헌화하고 추도했다.

 
 

▲ 5·18역사학회 회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이한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예방해 이순자(앞줄 오른쪽) 여사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자성 대표 제공

 

 

▲ 최종원(왼쪽) 5·18역사학회 위원이 이순자 여사에게 신간 ‘우리가 그때 광주에 있었다’를 전달하고 있다. 스카이데일리의 ‘도서출판 스카이’가 10월에 펴낸 이 책은 5·18 충정작전에 투입된 185공병대대 장병들의 생생한 증언을 가공하지 않은 자필 수기 기록 형태로 수록하고 있다. 편저자인 최 위원은 육사 32기로 5·18 당시 계엄군 중대장을 지냈으며 광주를 80회 이상 다녀올 만큼 5·18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이날 원종필(육사 45기) 전 국방부 조사본부 조사계획과장 등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사 후배이자 5·18을 연구해 온 인사들도 함께했다. 허겸 기자

 
 

▲ 이순자(왼쪽) 여사가 5·18역사학회 조우석 위원과 담소를 나누던 중 환하게 웃고 있다. 5·18역사학회(회장 이용식)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서거 3주기를 맞이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예방했다. 허겸 기자

 

허겸 기자kh@skyedaily.com

 
 

11.23 박정희 사후 전두환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되었을까

23일은 전두환 대통령 서거 3주기 날. 전 대통령은 구국 대통령 경제 호황기 합리적 국정운영으로 상징된다. ()대한민국 세력은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을 학살자의 굴레를 씌워 영원히 묻고 싶지만, 저변 민심과 군심은 국난을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완성한 전두환의 공적을 기억하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부하를 신바람 나게 만드는 참군인, 국난을 극복한 구국의 영웅, 국가 기능별 최고 인재를 등용하여 분야별 전문 대통령을 만든 최고 통치자, 물가와 치안과 교육 환경을 안정시켜 경제 부흥기를 이끈 행정의 수반, 적의 도발 속에서도 연 10%의 경제성장을 이끈 영도자, 두발과 학원자율화 등 통제 사회를 자율과 자유 문화로 탈바꿈시킨 주군 등 호칭도 다양하다.

 

군심이 기억하는 전두환은 국민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 성군이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챙기는 실용 외교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고, 국민을 생각하는 창의와 책임감으로 살기 좋은 시대를 창조했다. 국정 선진화와 평화 유지 노력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설계도와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강국 지도를 읽고 접목하여 한강의 기적을 계승하고 일부 완성했다. 군에서 배양한 인간 통솔력을 범국민 통치술로 전환하여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을 만든 전두환의 공적을 분야별로 정리해 본다.

 
 

국난 극복

군인 전두환은 타고난 인간존중·섬김 리더십으로 부하로부터 존경받았다. 12·12 결단으로 10·26 김재규 일당의 반인륜 쿠데타를 진압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석연치 않은 뭔가의 부추김과 오판과 유혹에 주군을 살해한 김재규 일당의 패륜적 쿠데타를 제압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억압과 통제로 민의를 누르는 후진국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훗날 역사는 12·12 신군부 쿠데타가 아니라 나라를 구한 구국의 결행으로 기록할 것이다.

 

1980 5·18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은 계엄군 지휘 선상에 있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었기에 재임 기간부터 서거 후에도 내·외부의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1988년 영국과 서독의 의원들이 전두환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북한의 도발과 국난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재임 기간 동안 한반도의 평화 유지와 평화적 정권 교체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은 자연인 전두환을 5·18 사건과 관련해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로 기소하여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국가의 명을 받고 출동한 계엄군은 학살자와 성폭행범이 되었고, 국난 극복 영웅은 살인자 프레임에 갇혔다. 역사 전쟁은 진실이 이기지만 그 과정은 고단한 싸움이다.

 
 

안보·경제 대통령

전두환의 섬김 리더십은 경제 분야에서도 발휘되었다. 경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지만, 김재익 등 경제 전문가들을 중용하여 경제 정책을 맡긴 결과 제5공화국은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 호황기'를 맞이했다. 사통팔달의 교통망 정비, 정보기술(IT) 강국 기초 구축,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확대, 내 집 마련과 자가용 시대 도래, 중화학공업 통폐합, 일본의 산업 기술 지원 유도, 3()의 기회를 살려 경제를 성장시켰다.

 

전두환은 안보와 경제는 공동운명체임을 보여주었다. 튼튼한 안보로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고 해외 투자를 이끌어냈다. 아웅산 테러 이후 극한적 남북 대결 속에서 연평균 경제성장률 10% 달성으로 국력과 안보 역량을 키웠다. 경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경제 돌파에 나섰고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박수를 받고 떠났다. 죽은 자에게도 노벨상을 추서(追敍)할 수 있다면 전두환 대통령은 평화·경제학상을 수상해야 한다.

 
 

정치개혁

5공화국을 체험한 국민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 안전했고 살기 좋았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송한다. 반대한민국 위정자는 전두환이 두렵고 불편했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 국민은 튼튼한 안보와 치안 유지 때문에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았다.

 

1986년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되자, 전두환은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1987 6.29 선언으로 개헌안이 의결되었고, 1027일 국민투표로 확정되어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와 헌법재판소 신설 등 다양한 정치개혁을 실현했다.

 

전두환은 군에서 익힌 의사결정 시스템을 국정에도 적용하여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국가 정책을 폈다. 정치와 사회개혁으로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자유 문화 기조하에 야간통금과 연좌제를 풀고 학원과 두발 자율화 등 통제문화를 자율과 개방으로 전환해 국민에게 진정한 민주적 질서와 자유를 심어주었다. 처음으로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실현한 전두환을 학살자의 프레임에 가둘수록 큰바위 얼굴로 부활할 것이다.

 

 

동서 화합

증오심과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역사와 국가는 퇴보한다. ()을 악()으로 변조하고 진실을 쪼아먹는 무리를 퇴치해야 한다. 전두환을 40년 이상 집요하게 악마화한데는 북한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전두환을 독재자와 살인마로 평가하는 진영은 전두환의 일대기를 돌아보고 생각 전향(轉向)을 기대한다. 1980년 적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전두환 대통령의 구국 용단을 내란죄로 변조한 5·18특별법 제정에 관여한 김영삼 정권 시절의 안기부와 법조계와 위정자들은 참회하고 양심선언을 해야 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유해(遺骸)는 서거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되어 있다. ‘북녘 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통일의 날을 맞고 싶다는 사실상의 유언도 들어주지 못했다. 전방 고지라도 모셨다면 오늘 3년 탈상(脫喪)을 해야 하는 날이다. 그러나 아직 안장(安葬)도 못한 상태이기에 탈상은 맞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전두환 대통령 유해를 전방 고지에 안장하라고 현대판 상소를 올리고 결기를 보일 의인(義人) 한 명이 나오길 기대한다.

 

▲ 박필규 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 이사·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예)육군중령스카이데일리


11.27 백신 그리고 문재인의 ‘전두환 사살 명령’

‘전두환 사살 명령’의 미스터리가 마침내 한 꺼풀 벗겨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21년 11월23일 오전 8시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서거했다.

 

전 전 대통령은 3년 전 백신을 접종한 뒤 혈액암과 심방세동에 걸려 숨을 거뒀다. 1주일 만에 체중이 무려 20kg 줄었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 측은 최근 3주기를 맞이해 연희동을 예방한 5·18역사학회(회장 이용식)에 이같이 확인했다. 쇠약했을 뿐 비교적 장수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날벼락을 맞은 듯 크게 충격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연희동 측은 이 사실을 공론화하지 않았다.

 

거짓 주장에 시달리며 5·18의 원흉으로까지 지목된 데다 예우까지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 처신에 신중했다.

 

자칫 국가 시책인 백신 접종에 대한 반발로 비칠까 우려했다는 후문이다.

 

지난달 31일 현재 질병관리청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 백신 누적 사망자 수는 총 2775명, 의식불명 등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거나 영구 장애·후유증 등 중대한 이상 반응을 겪는 누적 환자는 1만7182명에 달한다.

 

아직 백신 피해자 유·가족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항의 집회를 이어 가며 퇴임한 문재인 사저가 있는 경남 양산을 찾아 ‘내 가족 살려 내라’ ‘평온했던 과거의 삶을 돌려 달라’고 시위한다.

 

백신의 문제는 국가에 의한 강제로 요약될 수 있다. 강제 접종은 신체에 대한 자율적 선택과 배치된다.

 

백신 부작용으로 숨지고 영구장애를 입은 피해자가 매우 많다. 하지만 백신의 문제를 언급하면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5·18과 묘하게 겹치는 대목이 있다.

1980년 5·18 때 투스타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포스타 계엄사령관을 제치고 광주 국민을 죽이라고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믿는 국민이 많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절반이 남자이고, 그중 대다수가 군복무를 마치는 나라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안다. 명령 지휘계통에 있지 않은 군인이 다른 계통의 군인에게 명령과 지휘를 할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한 방송기자가 내게 묻는다. 스카이데일리는 왜 5·18 기사를 쓰냐고. 광주의 희생자들이 불쌍하지도 않냐고.

 

그러면 답한다. 같은 국민인데 이웃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냐고. 죽은 건 애달픈 일이지만 누가 죽였는지 알고 나서 비판하든 비난하든 늦지 않다고.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이 집단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가 있냐고 마지막으로 되묻는다.

 

단언컨대, 국민 누구도 전 전 사령관이 사격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기자의 말이 아니다. 4년간 500억 원 넘게 헛돈 쓰면서 진상규명에 실패한 5·18진상규명위원회 조사위원들의 넋두리다. 이번에도 규명에 실패했다고.

 

사정이 이런데도 전두환은 덮어놓고 악마라는 게 국민 대다수의 보편적 정서다.

 

여태껏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거액의 예산을 들여 정부 조사위원회를 꾸렸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전두환을 죽이고 또 죽여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머리는 잊어도 가슴에선 잊히지 않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살인의 증거가 없으면 무죄라는 건 상식이다. 이걸 상식이라 말하고 강조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이쯤에서 강제 접종으로 국민을 죽였다는 문재인 정권의 책임도 진지하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증거도 없이 44년간 학살자의 누명을 뒤집어쓴 전두환 전 대통령보다 강제 접종으로 2만 명을 죽고 반신불수 되게 만든 인과관계가 선명하고 또렷한 문재인이 더 학살자라는 주장이다.

 

또 다른 의미에선 문재인이 국민 사살 명령권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연희동 자택에서 만난 측근은 “이미 전 전 대통령은 돌아가셨고 대통령까지 하신 분이 예방주사를 맞다 돌아가셨다고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예방접종으로 확산을 막았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나 그거 맞고 암에 걸려서 죽었다고 할 수 없었어요. 국가 발전을 위해 가야 한다며 얘기할 처지가 아니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분하긴 합니다.”

 

떠나는 순간까지 국민을 생각한 전두환 전 대통령. 하지만 떠나서까지 유해조차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한 채 세간의 눈을 피해 자택에 3년째 안치된 구국의 영웅.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찢기는 것 같았다. 호국의 영웅을 이토록 헌신짝처럼 매도하는 나라가, 그리고 국민이 또 있을까 납득하기 어려웠다.◎

허겸 특별취재부장kh@skyedaily.com

 

 

- 나라를 살린 전두환 대통령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