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1/ 자유일보 유진 북한문제 전문가
2023년
04.24 1966~1971년 南 전역서 통혁당 조직 구축 시도했으나 실패
통혁당 창건 공작은 계속되고...
안성 출신 공작원 한영식 일당 19명 등 암약조직 잇따라 색출
기존 '대남총국'→'대남사업총국' 확대...대남공작기구도 개편

▲북한 정찰총국 산하 특수부대의 훈련 장면.
1963년 공작원으로 선발된 경기도 안성 출신의 남파공작원 한영식은 8.15 이후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면서 좌익계 간부로 활동했다. 6.25 전쟁 때는 민청 간부로 활약하다 북한으로 들어가 금강학원과 중앙당학교 분교를 졸업했다. 그 후 지방에서 행정기관 간부로 일하다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통일대학에서 3년간 대남공작 기본교육을 받았다. 한영식은 1966년 8월 ‘연고자 포섭 및 대동 복귀’ 공작임무를 받고 남파되어 학교 후배인 김춘식을 포섭해 대동 복귀했다.
약 1개월 동안 북한에 체류하면서 대남공작 교육을 받은 김춘식은 ‘경기지역에 통일혁명당 조직을 건설하라’는 임무를 받고 국내로 들어온 후 육군본부 군무원 김명식 등 여러 연고자들을 포섭해 통일혁명당 조직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1967년 가을 남파공작원 한영식이 ‘김춘식 접선 및 통일혁명당 경기지구당 지도부 구축’ 임무를 받고 재침투해 김춘식 등 여러 조직원들과 접선한 뒤 통혁당 조직 구축을 시도하다 1969년 10월 투숙하던 여관에서 격투 끝에 검거되고 일당 19명이 일망타진되었다.
또한 1968년 2월에 적발된 김남규 간첩사건 역시 통혁당 지역지도부 조직을 구축하려다 검거된 경우다.김남규는 1965년 7월 남파된 형 김남식에게 포섭된 후 형을 따라 북한에 들어가 약 1개월간 체류하면서 노동당 입당 및 공작교육을 받고 ‘연고자들을 포섭해 부산, 대구 등 영남지역에 통일혁명당 창건을 위한 모체조직을 건설하라’는 공작임무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남규가 돌아와 연고자들을 포섭해 지하당조직을 구축하던 시점에 그의 형인 남파공작원 김남식은 1966년에 이어 1967년에도 재침투하여 통혁당 영남지역 시ㆍ군 지도부 구축 공작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1968년 2월에 일당 32명이 일망타진되었다.
한편, 1968년 10월 국내에 침투하여 활동하다가 1969년 9월 자수한 남파공작원 진낙현과 체포된 박종엽, 최만춘의 경우에는 전북지역 통일혁명당 지도부 건설 임무를 받고 남파되었던 경우다.이외에도 1969년 9월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통혁당 조직 구축을 시도하다 검거된 경남 밀양 출신 남파간첩 임종영 사건, 1971년 9월 발생한 대구출신 전병모 간첩 사건, 1971년 10월 발생한 안동출신 유종인 간첩사건 등도 통혁당 조직 구축을 시도하다 검거된 사례다.
통일혁명당 사건은 물론 뒤에서 언급하게 될 1.21 청와대기습미수사건이나 울진ㆍ삼척 무장공비사건 등은 북한 내부의 정치상황에 따른 권력투쟁과 대남공작조직 개편 작업과 무관치 않다.김일성은 1967년 5월 25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유일영도체계 확립에 소극적이었던 박금철ㆍ이효순 등 갑산파를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당시 중앙당 부위원장 겸 대남총국장으로 있던 이효순에게는 김일성(金日成)의 유일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고 당 정치노선에 대해 불만이 많다는 죄와 함께 적극적인 대남공작을 벌이지 않고 많은 희생자를 내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대남공작을 망쳤다는 죄를 뒤집어씌웠다.

▲1968년 1월 21일 서울 세검정까지 침투했다가 소탕되면서 국군에 생포된 124군부대 소속 김신조.
당시 이효순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지하당공작을 대한민국 환경에 맞게 철저히 비합법적인 형식으로 벌이기 보다는 공개 합법적인 방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통혁당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들을 북한으로 끌어들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한국 수사기관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는 이효순이 김일성에게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과정에 초래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도의 보안을 요하는 대남공작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두 번째는 자만에 빠져 안이했다는 것이었다. 모든 게 잘 되고 있으니 대남혁명도 조국통일도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다는 자만과 안일한 생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평양 순안 인근 저수지기슭에 적구에서 돌아온 혁명가들이 휴식할 초대소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2층 한옥 초대소를 지어놓고 사실상 자기 별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에 이효순이 자신의 별장으로 지은 2층 한옥 초대소는 현재까지도 그대로 남아 남파공작원들의 초대소로 이용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세 번째는 이효순이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노동당간부 인사문제는 중앙당 조직지도부의 고유권한인데 이를 무시하고 자기 사람을 과장 자리에 마음대로 앉히려고 하는 등 제멋대로 인사문제에 개입하다 당시 중앙당 조직부장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아무튼 김일성은 대남총국장 이효순에게 대남공작의 실패 책임을 전가하면서 "이효순은 많은 혁명 간부를 남조선에 넘겨주어 희생시켰으며, 대남공작을 근본적으로 말아 먹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로 몰아 숙청했던 것이다.
숙청된 이효순 후임에는 북한군 총정치국장 겸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를 역임하고 있던 허봉학을 임명하고 기존의 대남총국을 ‘대남사업총국’으로 확대 개편했다.
김일성은 대남사업총국 내 중요 공작부서인 연락부도 확대 개편했다. 특히 연락부 산하 해외공작과와 해외공작 거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연락부의 작전(대남침투)부문을 분리 독립시켜 ‘작전국’을 신설하였다. 작전국에서는 기존에 연락부 작전부문에서 담당 수행했던 공작원들의 침투 및 복귀시 안내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연락부 산하 각 연락소와 전투방향, 전투원 및 선박 등 침투수단과 군부의 특수정찰국 산하 연락소와 전투원, 침투장비들을 작전국에 집중시키도록 했다.
또한 무장선전대 요원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고 특수훈련 기지도 설치했다. 먼저 무장선전대 요원 양성을 위해 695군부대(통일대학)에 무장선전대 특설반을 신설하여 무장선전대 요원들에 대한 특수교육 및 훈련을 맡도록 했다. 그리고 함북 청진과 평남 양덕 등지에 특수훈련 기지도 설치했다.
한편, 군부 계통의 대남공작기구도 개편하였다. 민족보위성 특수정찰국을 특수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하고 직능을 강화했다. 또 특수정찰총국 산하에 연합 특수부대와 훈련 기지들을 신설했다. 그 일환으로 1967년 중반에는 124군부대, 1967년 말에는 837군부대를 조직했다. 무장선전대 훈련기지와 멀지 않은 함경북도 청진과 평남안도 양덕, 상원 산악지대에 교육훈련 기지를 설치했다. /계속
05.01 "1968년 1월 21일 20시 청와대 건물 폭파하고 요인 암살하라"
1.21사태(청와대 습격 미수사건)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 명령에 따라 124군부대 무장습격조 131명 남파
세울 세검정파출소 앞을 지나던 중 경찰관 검문에 걸려 총격전 벌어져
29명 사살되고 1명은 북으로 도주...청와대 1층 습격 맡은 김신조는 생포

▲1.21 사태 당시 북한 무장습격조의 총격으로 사망한 당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 동상 앞에서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
‘1.21사태’라고도 불리는 청와대습격미수사건은 한마디로 북한이 청와대를 기습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세상에 너무 많이 알려진 사건이어서 여기에서는 간단한 사건 개요와 함께 북한이 당시 왜 무장군인들을 대담하게, 아니 무모하게 서울 중심부의 청와대까지 침투시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이 사건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짚어보려고 한다.
당시 북한군 수뇌부는 청와대를 폭파하고 대통령을 시해해서 한국사회를 극도로 혼란시키고 국민들을 반정부투쟁으로 이끌고 대남혁명 정세를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청와대를 기습 타격할 계획을 세웠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은 본래 한국의 심장부를 타격한다는 계획 아래 청와대와 함께 주한미국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특무부대 간첩수용소 등 5개 주요기관을 습격대상으로 설정하고 정찰국 직속 124군부대 무장소조원 76명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실행 직전 단계에 5개 시설을 동시에 타격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가 먼저 청와대 1개 시설만 타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해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청와대 습격은 124군부대에서 서울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6기지(황해북도 연산) 정예대원 31명이 담당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습격조를 목표에 따라 4개조로 세분하고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고, 2조는 청와대 1층,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에 침입하여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전원 살해한 다음 도피 및 탈출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청와대 1층 습격을 맡은 2조 조장이 나중에 생포된 김신조였다.
청와대 습격 시기를 연중 가장 추운 1월 하순 즉 혹한기로 설정한 것은 일반적으로 대남침투가 따뜻한 계절에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 군부에서 혹한기에는 침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방과 후방의 경계를 느슨하게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한기에 침투할 경우 휴전선 돌파는 물론 청와대까지 이동하는데도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침투로 상에 있는 임진강과 한강이 모두 얼어 침투 및 복귀 시 도강에 유리하고 무장공비들이 서울시내에 들어와 이동할 경우에도 시민들이 추위에 신경 쓰느라 그들의 어색한 행동을 눈여겨보지 않을 것이므로 작전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 등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북한의 판단이 대체적으로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북한은 1968년 1월 중에도 20일 전후가 가장 춥다고 예보되었기 때문에 20일 전후로 구체적인 습격일자를 정했다. 당시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는 ‘1968년 1월 21일 20:00를 기하여 청와대 건물을 폭파하고 요인을 살해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들은 청와대 습격을 위해 1월 17일 밤 휴전선을 돌파해 18일 밤에 임진강을 건넌 다음 19일 밤에는 파주 법원리 계선까지, 20일에는 북한산 비봉계선까지 진출했다. 21일 낮에는 청와대가 잘 보이는 지점까지 접근하여 정찰을 한 후 공격을 감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청와대 습격은 1월 21일 22:00에 시작하며, 5분 이내에 번개같이 타격하고 빠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운 무장습격조는 1월 17일 밤 휴전선을 넘어 1월 18일 밤에는 임진강을 도하한 다음 1월 19일에는 계획대로 파주 법원리 뒷산에 도착했다. 1월 19일 밤에 법원리를 출발하여 미타산과 앵무봉을 거쳐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을 주파한 뒤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진관사(眞寬寺)를 통과하여 1월 20일 새벽에는 북한산 비봉(碑峰) 북쪽 면에 도착해 숙영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 없이 전력질주를 한 것이다.
1월 20일 21:00에 출발하여 1월 21일 10:00경 북한산 승가사 근처에 도착한 무장습격조는 원래는 1월 21일 오후까지 북악산을 지나 밤 8시경에는 세검정 쪽으로 빠져 나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허리까지 눈이 쑥쑥 빠지고 발밑은 미끄럽고 더 이상 산을 타면 계획된 공격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습격조장의 결심으로 계획을 바꿔 비봉에서 곧바로 세검정 쪽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무장습격조 전원이 행인들과 같은 사복차림으로 변장한 다음 큰 길을 따라 1월 21일 밤 9:30분경에 서울 청운동 세검정 부근, 청와대로부터 500미터까지 진출했다.
▲1.21 사태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내버스 종점에서 세검정파출소 앞을 지나던 중 경찰관의 검문에 걸려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비상경계 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군ㆍ경 합동 소탕작전을 벌여 31명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북으로 도주하고 김신조 1명이 생포됐다. 북한의 청와대습격 기도는 이렇게 실패했다.
그러면 북한이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고 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표면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해서 한국사회 내부를 극도로 혼란시키고 국민들을 반정부 투쟁으로 이끌어 대남혁명 정세를 북한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변화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와대를 습격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고 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북한지도부의 한국사회 및 대통령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북한지도부는 한국을 미국의 철저한 식민지인 동시에 독재국가로 보고 박정희 대통령도 독재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남인식은 독재자인 박정희 대통령만 제거하면 독재로 유지되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일시에 통제력을 상실하고 극도의 혼란상태 혹은 무정부 상태에 빠지거나 최악의 경우 대한민국의 통치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한국사회가 극도의 혼란 상태 또는 무정부 상태에 빠질 경우 신속하게 무력남침을 감행해 적화통일을 달성하거나 민중봉기 또는 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것이 김일성과 북한지도부의 진짜 속셈이었고 최종적인 목표였던 것이다.
이러한 북한지도부의 생각은 적어도 전두환 대통령 시절까지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는 북한이 1968년 1.21 청와대기습미수사건이 있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해하려고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1970.6.22.)과 문세광 저격사건(1974.8.15),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사건(1983.10.9) 등을 일으킨 것이 증명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북한의 인식은 1987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이 민주화되고 그 결과 선거로 대통령이 주기적으로 교체되면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설사 독재자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임기 5년만 지나면 다른 인물로 반드시 교체될 것이기 때문에 무리하게 테러까지 감행해서 대통령을 제거할 이유는 없어졌으니까...또 북한이 특정 대통령을 상대하기 싫다면 그의 임기 5년만 참았다가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교체된 다음 대통령을 상대하면 되니까....
실제로 김정일은 1994년 7월 김일성이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사망했을 때 한국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전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자 "조문은 못할망정 초상집을 향해 칼을 겨누는 비상계엄령 선포가 뭐냐"라며 대노해 대남부서에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남측과 절대로 마주앉지 말라고 지시한 바 있다.
한편, 김일성은 훗날 비밀리에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청와대기습미수사건에 대해 군벌주의자들이 제멋대로 저지른 모험이라며 유감을 표시했다고 했는데, 북한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가장 중요한 상대인 대한민국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특수작전을 최고 통치자 김일성의 승인을 받지 않고 몇몇 군부 인물들이 독단적으로 감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일성은 1970년대 초반 노동당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에게 1.21 사태를 거론하면서 "30여명의 많은 인원이 서울 한복판 청와대 근처까지 노출되지 않고 진출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다. 앞으로도 대규모 인원이 비밀리에 서울 중심부까지 침투할 수 있는 방법을 부단히 연구하고 능력을 키워라"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래도 청와대기습미수사건을 김일성이 사전에 몰랐다고 해야 할까? /계속
05.08 北, 무장공비들 훈련시킬 때 "민간인 만나면 무조건 죽여라"
1.21 사태 실패가 北에 준 교훈
청와대 습격조가 침투 도중에 만난 '나무꾼 형제' 살려 줘
그들 신고로 작전실패 판단...이후 민간인 무자비한 살해

▲무장공비 토벌에 나선 공수부대 장병들이 공비들의 시신과 장비를 확인하는 모습.
그런데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해 대통령을 시해하려던 작전이 왜 실패했느냐 하는 것이다. 종로경찰서장을 비롯한 군·경이 작전을 잘해서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북한 대남공작지도부는 대사를 앞둔 청와대습격조가 원칙을 지키지 않고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침투 도중 만난 나무꾼 우씨 형제를 살려서 돌려보낸 것이 가장 결정적인 실패 원인이라고 나름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회제(30), 우경제(23), 우철제(21), 우성제(20) 등 4명의 나무꾼 형제는 북한군 청와대 습격조가 회유와 협박을 한 다음 살려 보냈으나 곧바로 경찰서에 출두해 신고했고, 그들의 신고로 군·경이 특별 경계 작전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북한군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근처까지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검문과 군·경 합동작전으로 결과적으로 청와대 기습작전이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는 1.21 청와대기습 작전이 실패한 이후부터 한국에 침투한 북한의 남파요원들이 침투 도중에 자신들과 마주친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21 청와대기습미수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울진·삼척 무장선전대 침투 사건과 1978년 11월에 발생했던 충남 광천사건이다. 1.21 청와대기습미수사건이 있은 지 불과 10개월 만에 남파된 울진·삼척 무장선전대 요원들은 파견 전 교육 및 훈련을 받을 때 1.21사태 당시 유일하게 생환했던 박재경 중위로부터 "대원들이 침투 도중 만나는 민간인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원칙을 어기고 나무꾼을 살려줘서 결과적으로 임무 수행에 실패했기 때문에 침투 하다 민간인과 조우할 경우에는 반드시 죽여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한편, 1978년 11월 4일 충남 보령 천북면 해안으로 침투한 3명의 무장공비들은 광천에서 산에 나무하러 온 주민들에게 노출된 때로부터 국군에 쫓겨 복귀접선지역인 김포까지 북상하는 과정에 자신들과 마주친 5명의 민간인을 무참히 살해한 뒤 1978년 12월 4일 저녁 김포에서 북한이 보낸 2명의 안내원과 접선한 뒤 함께 북한으로 복귀했다.
당시 이들이 자신들과 마주친 민간인들을 모두 살해한 것은 북한에서 1.21 청와대기습 작전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남파요원의 신분을 아는 한국 민간인들을 살려주었기 때문이라고 교육받았고, 그 교훈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21사태 직후 무장공비들의 유류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내부 약도가 발견된 바 있다. 그런데 내부 약도가 너무도 정확해 당시 중앙정보부과 경찰, 군 방첩대 등 대공수사 관계자들은 경악했다. 어떻게 이렇게 내부 약도와 경호원들의 배치 실태 등을 상세히 알 수 있었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공수사 파트에서는 분명 청와대 안에 북한의 간첩망이 침투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체 직원들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의 비서인 김옥화가 의심대상자로 지목되었다. 김옥화는 국내 유명 여대를 졸업한 뒤 독일에 유학 갔다가 거기서 만난 유학생과 결혼을 했었는데, 바로 그의 남편이 북한에 이미 포섭된 간첩이었던 것이다.
김옥화는 유학을 마치고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청와대에 취직하여 경호실장 비서로 근무하면서 대통령 집무실, 관저 등 청와대 경내를 제한 없이 들락거리며 확인한 내부 약도와 경호 인력에 관한 내용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이것이 고스란히 북한으로 전해진 것이다. 김옥화 간첩사건은 한국에서 가장 보안이 강한 청와대까지 접근할 정도로 북한의 대남공작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확인시켜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월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안보 상황은 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으로 안보 공백이 우려되는 등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여기에다 한미연합 방위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미군병력 역시 상당수가 베트남전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남북 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한국으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1965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으로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까지 해주면서 한국군 전투병력 1개 사단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한국은 태권도 교관단, 후방시설 건설을 위한 공병대 등 비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견한 상태였다. 린든 존슨은 1개 사단규모의 병력을 우선 증파해달라고 한국에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한국군 장비 현대화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 후 1965년 5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군 파병에 대한 논의가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8월 13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과 해병2여단의 파병을 결정했다. 그 후 10~11월 초까지 수도사단과 해병2여단의 제3차 파병이 마무리되었다. 또한 1966년 3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26연대와 제9사단 파병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5만명 규모의 한국군(누계 합산으로 총 30만)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북한은 바로 이러한 한국의 안보 공백 상황을 악용해 대규모 무장선전대로 게릴라활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당시 북한이 무장선전대 활동을 통해 노렸던 목적은 2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 목적은 무장선전대를 남파시켜 산악지역에 비밀거점을 구축한 다음 낮에는 한국군의 공격을 피해 거점에 은신해 있다가 밤에는 주변 행정관서들을 습격해 공포심을 조장하는 한편 주민들을 상대로 선전선동활동을 벌이는 방법으로 산악지역을 혁명거점화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목적은 무장선전대 활동을 통해 한국사회 전체를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뜨리고 나아가서 한국정부와 대통령의 통치권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후방에 2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무장선전대 대원으로 울진·삼척지역에 침투한 후 교전 도중 자수한 김익풍씨도 "1964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김일성이 대남도발을 적극 시도하게 만들었지. 성공 가능성이 커 보였을 거야. 사실 그때만 해도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을 두 배 이상 앞서고 있었으니까 우리들이야 ‘남조선 까짓 거 미군만 없다면...’하는 식으로 가볍게 보고 있었거든"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실제로 북한은 1946년 이래 연평균 20여 건의 대남도발 및 간첩단 사건 등을 일으키더니 1965년 한국이 베트남에 전투 병력을 파병하자 그 횟수와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1965년에 48건, 1966년에 59건, 1967년에는 대남도발 사상 최고인 140건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1968년 86건, 1969년 73건, 1970년에는 53건의 대남도발을 감행했다. 또한 1966년에서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에서 540건의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이러한 대남도발 및 2전선 형성으로 국내에 통치권 마비 또는 무정부 상황이 조성되면 기습적인 대규모 무력남침으로 적화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이 당시 북한 지도부의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
05.15 무장공비 120명, 게릴라 활동 거점 구축 위해 침투...'일망타진'
울진·삼척 무장선전대 침투사건
1968년 울진 고포해안으로 3회 침투...독립가옥 무력점거로 거점 마련
강제로 주민들 통혁당 입당 원서 받아..."공산당 싫어요" 이승복 등 살해

▲1968년 11월 무장공비 토벌을 준비하는 울진경찰서 정문에 경찰이 경비를 서고 있다.
울진ㆍ삼척 무장선전대 침투사건은 1968년 11월 3일~12월 28일까지 55일간에 걸쳐 울진ㆍ삼척ㆍ태백산ㆍ오대산 일대에서 벌어진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소탕 작전을 말한다. 당시 국군은 ‘공비’라고 일컫는 무장선전대원 107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으며 6명이 도주했거나 휴전선을 넘지 못한 채 사망해 120명 전원을 일망타진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은 대규모 무장선전대를 보내 산악지역 혁명화와 함께 2전선을 형성하겠다는 목적과 계획으로 1968년 10월과 11월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지역으로 무장선전대 인원 120명을 침투시켰다. 사실 대규모 인원을 단시간 내에 침투시킨 것은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하면서도 도발적인 행위였다.
1968년 10월 25일 공작선 2척에 15명 단위로 구성된 8개 무장소조 총 120명을 나누어 태우고 원산기지를 출발한 무장선전대원들은 10월 27일 울진앞 바다에 도착했다. 공작모선을 공해상에 정박시켜 놓고 상륙지점에 대한 정찰을 먼저 진행한 다음 침투용 자선과 고무보트에 분승하여 10월 30일과 11월 1일, 11월 2일 3회에 걸쳐 울진 고포해안으로 연속 침투시켰다.
10월 30일 1차로 침투한 2개조 30명은 경북 울진 고포해안으로 상륙한 뒤 1개조는 울진지역, 다른 1개조는 봉화지역으로 이동했다. 11월 1일 2차로 침투한 4개조 60명은 강원도 삼척, 정선, 명주(현재의 강릉) 등 3개 지역으로 각각 이동하였다. 또한 11월 2일 밤 3차로 침투한 2개조 30명도 강원도 삼척과 명주 지역으로 진출했다.
각 지역에 진출한 무장소조는 먼저 각 소조별로 북한에서 정해가지고 나온 대로 오지마을 또는 몇 개의 독립가옥을 무력으로 강제 점거하는 방식으로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곳 주민들을 강제로 집합시켜 놓고 북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평화통일 정책에 대한 정치선전선동과 한국과 미국을 반대하는 서적과 전단 등을 나누어주고 통혁당 입당원서에 강제로 날인하게 하였다. 또한 위조지폐를 나누어주면서 회유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비밀을 지킬 것을 강요했다. 또 의심되는 자는 배신자로 규정해 살해하는 등 주민들에게 위협과 공포심을 심어주어 자신들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이렇게 해서 강원도에서는 주민 150여명으로부터 통혁당 입당원서를 강제로 받아냈다. 울진의 어느 산간 마을에서는 46명으로부터 입당원서를 강제로 받아내기도 했다. 평창지방에서 활동하던 5명의 무장소조는 1968년 12월 초 민가를 점거하고 선전활동을 하다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항거하던 이승복을 비롯한 3명의 어린이들과 여러 명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군 차량까지 기습 파괴하였으며 식량과 닭 등을 약탈하는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1968년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평창군 계방산 중턱의 이승복 생가 앞에서 마을 주민들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국군과 경찰, 민간인 등의 합동작전으로 경북북부와 강원남부 산악지역에 침투했던 무장선전대 요원 120명 가운데 100여명은 사살되었다. 2명은 자수, 5명은 생포되었으며 6명이 북한으로 도주하면서 무장선전대에 의한 혁명거점화 공작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일성은 훗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1.21 청와대 기습미수사건과 함께 울진ㆍ삼척 무장선전대 침투사건도 당시 민족보위상 김창봉과 대남총국장 허봉학 등 군벌관료주의자들이 독단적으로 무리하게 일으킨 것이라며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바 있다. 그러나 1.21 청와대기습미수사건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허락을 받지 않고 120명이나 되는 대규모 특수병력을 남파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김일성의 그 발언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알 것이다. 울진ㆍ삼척 지역에 무장선전대를 침투시켜 진행하려던 공작이 실패한 후 북한 공작지도부는 대한민국은 종심이 짧은 데다 사방이 바다와 휴전선으로 막혀 완전히 고립된 지역이기 때문에 게릴라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전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작지도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장선전대를 침투시켜 대한민국을 극도로 혼란시키고 통치권을 마비시키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실제로 북한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인민봉기(북한식 표현)가 발생한 이듬해인 1981년 3월 무장선전대 요원 100명(25명씩 4개 소대로 편성)을 선발한 다음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시켜 3년 동안 특수훈련을 시킨 바 있다. 당시 무장선전대 인원 100명 양성을 기획했던 중앙당 대남담당비서 겸 통전부장 김중린은 1980년 5월에 일어났던 광주인민봉기와 같은 사태가 다시 발생하면 양성해놓은 무장선전대를 곧바로 투입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장선전대 교육이 한창이던 1983년 말 김중린이 대남담당비서 겸 통전부장 직책에서 해임되고 무장선전대 양성 3년 과정이 끝날 때까지도 한국에서 이렇다 할 혼란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무장선전대 요원으로 양성해놓은 100명은 3년제 대학 졸업 후 칠보산연락소(대남방송)와 조국통일사 등 중앙당 통전부 산하 기관에 뿔뿔이 배치되고 말았다. /계속
05.22 1967~1968년 어민 1100명 납치, 대남선전·지하당 공작 활용
어부 납치와 공작
납치 어부들 환대하고 사상교육 후 돌려보내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 北 우월성 선전
北 동경 김호섭·이동근 납북 후 공작원 변신

▲납치되었다가 귀환하는 어부들이 손을 들어 환호하고 있다.
북한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동해와 서해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어부들을 집단으로 납치해 그들을 대남선전 및 지하당조직 공작에 활용하는 전술도 구사하였다. 납북어부들을 활용하는 방식은 2가지였다.
하나는 어부들을 납치한 다음 정치사상 교육과 주요 산업시설 참관 및 물질적인 환대와 온갖 감언이설로 영향을 주어 돌려보내는데, 이렇게 하면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북한의 우월성에 대해 선전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납북어부 가운데 지하당 조직 공작에 써먹을만한 적임자를 찾아내 이들에게 공작 교육과 훈련을 시킨 다음 공작 임무를 부여해 다시 한국으로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1967~1968년 간 동해와 서해에서 어로작업 중이던 어선 140여척과 어민 1,100여명을 납치했다. 서해에서는 주로 봄과 초여름 조기잡이 철에 어부들에 대한 납치가 이루어졌다. 동해에서는 겨울 명태잡이 철에 어민들을 주로 납치했다. 북한 공작지도부는 많은 어민들을 납치해 공작에 활용하기 위해 평양 근교인 평안남도 평원군 석암저수지 기슭에 납북어부 집단 수용시설인 ‘어민강습소’부터 만들어놓았다. 이렇게 만들어놓은 어민강습소에 납치한 어민들을 수용한 다음 오전에는 정치사상교육을 실시하고 오후에는 산업시설 참관 및 시내견학, 연고자와의 만남, 관계자 면담, 병원치료 등을 했다. 밤에는 영화관람 등을 하도록 일정을 짜놓고 쇠뇌작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납북어부 가운데 대북 연고 관계, 나이, 건강 상태, 지식 정도, 계급관계, 생활환경, 사상의식정도, 반정부감정, 사회활동 경험, 교우관계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해 공작요원으로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대상을 선별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 공작요원으로 선발된 인원들은 초대소에 수용한 다음 공작교육과 훈련을 시켜 임무를 부여해 침투시켰다. 공작요원으로 선발되어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은 납북어부들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방법은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납북되었다 함께 한국으로 송환되는 어부들 속에 포함시켜 들여보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장기간 체류시키면서 공작원 정기교육을 시킨 뒤 공작임무를 부여해 비합법적으로 몰래 침투시키는 방식이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김호섭과 이동근은 각각 함경북도 명천과 길주 출신으로 북한에서 광복 이후 노동당까지 입당했던 인물인데 6.25 전쟁 중 미국의 원자탄 투하 공포 때문에 1.4 후퇴 시 월남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과 가까운 동해안 지역에 자리를 잡고 속초, 묵호, 양양, 삼척 등지를 같이 전전하며 어로작업에 종사하면서 항상 북한을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다. 그러던 중 북한에 납치되었던 어부들이 무사히 귀환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도 납북되기를 기대하였으나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969년 2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고정간첩 일망타진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64년 11월 이동근은 속초선적 ‘흥덕호’ 선장으로, 김호섭은 같은 선박 선원으로 어선을 타고 속초항을 출항하게 되었다. 이들은 흥덕호가 북한군에 납치되지 않으면 자진월북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출항신고도 하지 않은 채 명태잡이를 빙자해 출항했다. 이렇게 출항한 뒤 12월 초에 이들이 생각했던 대로 의도적으로 동해 해상분계선을 넘어가 북한군 경비정에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예인되었다. 이들은 평양여관에 도착하여 심사받는 자리에서 곧바로 자신들이 과거에 노동당원이었다는 것, 1.4 후퇴 때 미군의 원자탄 공포 때문에 월남하였으나 이를 후회하고 북한을 동경하면서 북한에 오고 싶어 납북되기를 원했다는 점, 그러나 납북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자진 월북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북한 공작부서에서는 이들이 살았던 함경북도 당조직과 보안기관을 통해 이들의 진술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이들을 대남공작에 활용하기로 한 다음 공작부서 담당자들을 각각 별도로 전담시켜 짧은 기간에 사상교육과 공작교육을 동시에 진행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귀환한 후 수사당국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납북되었던 어부들과 함께 평양시내 및 산업시설 참관 등을 하도록 하였다. 귀환 역시 통상적으로 걸리는 10여일 만에 함께 납북되었던 선원들과 같이 돌아가도록 해 의심의 여지를 최소화하였다. 물론 이들이 귀환하기 전에 공작임무를 부여한 상황이었다.
당시 김호섭에게 부여된 공작임무는 속초와 묵호 등지에 살고 있는 월남자들 가운데 과거에 노동당원이었거나 민청원이었던 사람을 찾아낸 다음 그들 가운데 북한을 동경하는 대상들을 포섭해 지하조직을 만들고 북한에서 남파되는 인원을 엄호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동근에게도 월남자 중에 북한을 동경하는 대상을 포섭해 대동월북하거나 속초와 묵호 등지에 정보 및 연락거점을 구축하라는 공작임무를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호섭은 동향 출신이면서 6.25 전쟁 전에 노동당원이었던 민리만과 김학진, 이태만 등을 포섭하여 통혁당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등 공작임무수행에 주력했다.
이동근 역시 김종옥과 서석민을 포섭한 뒤 1965년 11월 말 자신이 선장인 ‘선락호’에 포섭된 2명을 포함하여 6명의 선원을 태우고 속초항을 떠나 11월 30일 해상분계선을 넘어갔다. 그리고 북한 해군경비정에 단속 및 예인되어 원산항으로 입항했다. 입북한 이동근은 이미 포섭한 김종옥과 서석민을 공작부서에 인계해 그들이 공작교육을 받도록 했다. 또 그 때까지 국내에서 수집한 동해안지역 군 경계초소 위치와 경계근무 상태 등 정보를 보고하고 함경도의 고향을 방문해 연고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동근 일행은 1966년 2월 초 귀환한 후 북한에서 받은 지령대로 이수구를 포섭한 다음 대동입북 기회를 노리다 1969년 2월 중순 김호섭 등과 같이 일망타진되었다. /계속
05.29 윤이상, 조명훈에 드라이브 제안...차에 태워 北대사관으로 안내
동백림 간첩단사건
동서베를린 왕래 가능했던 동베를린을 유럽 공작거점으로
정보공작 베테랑 박일영이 동독 북한대사로 부임한 영향도
유학생·연수생·교포들에 편지·선전책자 보내는 '서신공작'
슈트트가르트 신문사의 유학생 조명훈 처음으로 걸려들어

▲유럽지역 대남공작 거점 역할을 했던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
동베를린에 설치된 북한 공작거점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한 대남공작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것이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사건’이다. 동백림(東伯林)은 동베를린의 한자표기이니까 정확하게 얘기하면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이라고 해야 맞다.
북한은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었지만 동서베를린 간에는 내왕이 가능하다는 입지적인 여건을 활용해 대남공작을 벌이기 위해 1958년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에 유럽지역 대남공작을 총괄하는 공작거점을 설치하였다.
동베를린에 유럽지역 공작거점을 설치한 것은 동서베를린 간의 왕래가 가능하다는 입지적 여건과 함께 당시 북한대사였던 박일영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박일영은 일제 때 소련공작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활동했던 소련파의 일원으로서 해방이후 북한으로 나와 내무성 정보국 부국장·국장 등을 역임한 뒤 대남공작 조직인 중앙당 연락부 부부장을 거쳐 부장까지 승진했던 정보공작의 베테랑이었다. 이러한 박일영이 불가리아주재 대사를 거쳐 동독주재 북한대사로 부임했던 것이다.
또한 서독과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 지역에 적지 않은 교포들과 한국인 유학생 및 주재원들이 체류하고 있었고 유럽을 내왕하는 한국인도 많았기 때문에 북한 공작부서 입장에서는 동베를린에 유럽지역 공작거점을 설치하는 것이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당시 동베를린 북한 공작거점에는 참사와 서기관 등의 외교직함을 가진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북한의 해외 공작거점 파견 사례와 비교해 볼 때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이원찬은 연락부 지도원이었고 석학철은 문화 참사로 직업 외교관이었다. 공작거점 책임자는 중앙당 연락부 김모 과장이었다.
동베를린 공작거점에서는 먼저 유럽의 여러 국가에 나와 있는 한국 유학생과 연수생, 한국인 교포들의 현황을 파악하는 작업부터 실시하였다. 즉 선전대상을 파악하는 작업을 선행하였다. 그 다음에는 유럽에 나와 있거나 살고 있는 선전대상에게 개별적으로 편지와 각종 선전책자 및 화보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보내는 방식의 서신공작을 진행하였다.
한국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같은 피를 나눈 동포로서 외국에서나마 서로 만나 동포애를 나누고 북한에 있는 친지들 소식이라도 알고 지내면 좋지 않겠느냐, 언제든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방문하면 환영할 것이라는 등 북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부추기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 같은 북한 공작거점의 편지를 여러 번 받는 과정에 자신도 모르게 북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 일부 교포들과 유학생, 특히 북한에 연고자가 있는 한국인들은 몰래 답장을 보내고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편지를 받은 한국인들은 북한 공작거점에서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으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노릇이었다.
편지를 받은 한국인들로부터 답장이 오고 대사관에 접근해오는 상황이 벌어지자 북한 공작거점에서는 다음 단계로 들어가 대사관에 접근하는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환대해주는 한편 이들을 통해 다른 유학생이나 교포들과의 접촉을 넓히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윤이상의 자가용 승용차와 조명훈
당시 북한 공작거점의 접근공작에 가장 먼저 걸려든 한국인은 서독 ‘슈트트가르트’ 신문사에 근무하던 유학생 조명훈이었다.
전라도 억양에 술을 좋아했던 조명훈은 북한 공작거점에서 보낸 편지와 선전책자 등을 받아보고 호기심이 발동해 북한대사관을 방문해보고 싶다는 답장을 보냈고, 1958년 9월 윤이상의 안내로 북한대사관을 방문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 동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검문소.
조명훈으로부터 북한대사관 방문을 제의받았던 서독 프랑크푸르트대학 유학생 임석진(2018년 작고)은 월간조선사가 펴낸 ‘과거史의 진상을 말한다’(조갑제 외 지음)에 조명훈이 자신에게 했던 얘기를 이렇게 전했다.
"하루는 윤이상 선생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나(조명훈)를 오라고 전화를 했어. 자가용이 생겼다는 거야. 그 어려운 형편에 차를 어떻게 샀을까 궁금했지. 같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하더라고. 겸사겸사 베를린에 갔더니 날 태우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차를 세웠는데, 거기가 동베를린 도로데아슈트라세 4번지의 북한 대사관이야.
윤 선생은 날더러 ‘조 군. 여기가 북한 대사관인데, 이 사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눠 보면 좋을 거야. 같이 들어가세’ 하고 날 끌고 들어갔지. 조금 있다가 윤 선생은 가버리고 나 혼자 남은 거야. 그런데 거기 대접 한번 후했어. 밤새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까. 만나보니 다 같은 우리 민족이더라고. 윤 선생이 생활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 같더라니까. 하긴 윤 선생은 수입이 아무것도 없는데 차(車)도 사준 것 같았어. 자네도 한번 가 봐."
북한대사관 서기관 석학철을 만난 조명훈은 그와 같이 차를 타고 북한대사관으로 들어가 당시 대사였던 대남공작 베테랑 박일영을 만나 인사를 나눈 후 대사관 근처 호텔에 투숙해 북한의 발전상과 평화통일 방침 등에 대한 선전을 들은 다음 향후 긴밀한 접촉과 연계를 가지는 동시에 서독에 와있는 다른 유학생들도 주선해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북한 측이 유학생활에 보태라며 준 미화 500$도 받아가지고 왔다.
그 후 조명훈은 여러 차례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환대도 받고 경제적 도움도 받으면서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 조명훈이 처음으로 북한 공작거점에 소개한 한국인이 임석진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명훈은 임석진을 만나 자신은 서독에 체류하던 작곡가 윤이상의 소개로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극진한 환대를 받고 왔는데 그들을 만나보니 정말 민족애와 애국주의 정신을 가진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하면서 한번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북한대사관 방문을 적극 권유하였다. /계속
06.06 임석진, 1960년 6월초 동독 北대사관에 전화 걸어 방문 약속
동백림사건의 임석진과 이기양
임, 3일간 동독 체류하면서 북에 포섭당해...1년간 20여 명 北에 넘겨
조선일보 특파원 이기양 대동하고 北대사관 방문해 공작원들에 소개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서 재판장의 심문을 받고 있는 윤이상과 그의 아내 이수자(맨 오른쪽).
이미 북한 공작거점으로부터 편지와 선전책자 등을 받아보고 호기심을 갖고 있던 임석진은 여러 차례 조명훈을 만나 북한대사관 방문을 독려하는 얘기까지 듣고 보니 북한사람들을 더욱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거듭되는 망설임 끝에 북한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조명훈의 말처럼 그들이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이 맞는지 한번 만나서 확인해보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기로 하였다.
친구 조명훈으로부터 격려를 받은 임석진은 용기를 내 1958년 12월 북한대사관 앞으로 편지 한 통을 썼다. 수양어머니 김 씨와 그의 아들 윤기봉의 소식을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대사관 방문을 환영한다’는 답신을 막상 받았지만 겁도 나고 찜찜해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민주당정권이 들어선 후 평화통일 운동이 활발해지고 남과 북의 대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구호를 들고 투쟁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포기하다시피 했던 북한대사관 방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평양에서 발송한 ‘조선민주청년동맹위원장 오정수’ 명의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이에 다시 북한대사관에 방문을 희망한다는 편지를 보내 대사관 직원 석학철로부터 환영한다는 답신을 받게 된 임석진은 1960년 6월 초 북한대사관에 먼저 전화를 걸어 만남을 약속했다.
약속장소에서 북한대사관 석학철을 만난 임석진은 그의 차를 타고 대사관으로 들어가 박일영 대사와 공작책임자 이도요 등을 만난 후 근처에 있는 호텔로 옮겨 3일 동안 체류하면서 북한의 평화통일 정책과 발전상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대사관에서 영화도 여러 편 관람했다. 또 선전책자도 보고 그들의 안내로 동베를린의 여러 관광지도 둘러보았다.
북한 공작요원들은 다른 대상에게 의례적으로 하듯이 먼저 임석진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부터 파악하였다. 그 결과 임석진의 남동생과 여동생 및 대학동창들이 유학생과 특파원 등의 신분으로 서독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들과의 접촉 및 대사관 방문 등을 주선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특히 임석진은 조선일보 서독특파원인 동창생 이기양을 데리고 다시 방문해달라는 요구를 받고 동의를 표시했다. 또 북한 측이 유학생활에 보태 쓰라며 주는 미화 500달러도 극구 사양하다 끝내는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이후에도 석학철 등 북한 공작거점 요원들은 임석진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동포애의 심정으로 도와주는 것’이라며 여러 차례 금품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북한 대사관에 발을 들여놓았던 임석진은 자신을 따라 유학온 남동생 임석훈과 쾰른에 살고 있던 여동생을 북측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약 1년 동안 한국교포와 유학생 등 20여 명을 연결시켜 주었다. 임석진으로서는 소개시켜준 것이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포섭대상을 연결시켜 준 것이었다.
1960년 8월에는 특별히 소개를 부탁한 바 있는 서울대 동창이자 당시 조선일보 서독특파원이던 이기양 기자를 동행하고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공작요원들에게 소개시켜 주기도 하였다.
1961년 서울에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어느 날, 임석진이 살고 있던 거주지 우편함에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그 속에 또 봉투가 들어있었는데 발신지가 평양이었다.
편지봉투 안에는 6.25 전쟁 전까지 이웃에서 함께 살았던 수양어머니 김씨, 그리고 자신(임석진)과 친형제처럼 지냈던 김씨의 아들(의형) 윤기봉씨가 보낸 편지와 사진 등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받은 임석진은 수양어머니 김씨와 의형 윤기봉씨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여기에 끈질긴 북한 공작요원들의 감언이설 등이 더해져 결국 평양에 가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재판정에서 증언하는 임석진.
임석진은 주변 사람들에게 오스트리아에 공부하러 간다는 구실을 대고 모스크바를 거쳐 1961년 9월 초 평양에 도착했다. 이후 약 3주 동안 특별초대소에 체류하면서 당시 중앙당 연락부장이었던 서철 등 고위간부들과 의형 윤기봉씨도 만나고 정치사상교육을 받고 산업시설을 참관했다. 독일로 돌아올 때는 ‘교포 및 유학생들을 입북시키도록 하라’는 임무를 받고 평양을 출발해 모스크바와 동베를린을 거쳐 서독으로 돌아왔다.
그 후 임석진은 1963년 10월과 1966년 5월에도 북한에 들어가 노동당에 입당하고 ‘서독에 장기체류하면서 비밀공작을 전개하라’는 임무를 받고 돌아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다음에도 여러 지역으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북한의 공작을 지원했다. 1965년에는 독일 본에서 북한 공작거점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중국음식점을 오픈해 운영하면서 북한 공작요원들의 지령에 따라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 동생 임석훈을 비롯하여 정규명ㆍ조영수ㆍ천영희ㆍ황성모 등 유학생들의 입북을 적극 권유, 지원하였다. 그 결과 임석훈은 1962년 봄과 1964년 여름에, 정규명은 1962년 가을과 1965년 봄에, 조영수는 1963년 봄과 1965년 여름에, 천영희는 1963년 가을에 각각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편, 1955년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정치학)로 유학 갔던 정하룡은 서울에서부터 잘 알고 지냈던 대학선배 노봉유가 1962년 그를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으로 데려갔다. 대학시절 경제학을 공부했던 그는 당시 한국보다 경제가 발전했던 북한의 계획경제 실상을 알고 싶어 그해에 평양을 방문하였으며, 1965년 여름 다시 방문하였다. 이때는 북한에서 공화국창건(1948년 9월 9일) 기념행사에도 참석했는데, 주석단에 안내되어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 인사들과 악수를 나누기도 하였다.
북한을 방문했던 유학생 대부분은 입북한 후 연고자들을 만나는 한편, 정치사상 교육과 산업시설 및 박물관 참관 등을 한 다음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가면 북한의 통일방안 선전 및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받고 돌아왔다.
동베를린의 북한 공작거점에서는 임석진을 비롯한 유학생들 외에도 음악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부부에 대해서도 그들이 북한 친인척들을 방문하도록 설득 및 주선하는 방식으로 접근 및 포섭공작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 작곡가 윤이상은 친구 정모씨를 만나보기 위해 1963년 봄에 방북한 것을 시작으로 친북활동을 지속적으로 했다. 북한은 이런 윤이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특별초대소에 머무르게 하고 김일성과의 만남도 주선하는 한편 평양에 ‘윤이상음악당’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화가 이응로 역시 6.25 전쟁 때 의용군으로 월북한 양자 이문세(1923~1996)를 만나보기 위해 1963년 봄에 방북하여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후부터 친북입장을 견지하였다. 참고로 이문세는 이응로가 둘째형 이종로의 차남을 양자로 들인 아들로,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동베를린 북한 공작거점은 이 밖에도 윤이상의 재북 친구 최모씨의 아들인 독일유학생 최정길에게 6.25때 헤어진 부친과의 상봉을 주선한다며 접근해 1964년 봄 방북을 성사시키는 등 공작을 진행했다. /계속
06.12 노무현 정부 '진실위'도 "동백림 간첩단 사건 조작 없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의 진실은?
기획조작설 사실 아닌 것으로...윤이상도 재판서 "실정법 위반했다"
北, 유럽 각국서 한국인 상대 '공작'...박노수·김규남 포섭 대표 사례

▲2006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 조사위원회는 "윤이상 등 관련자들이 동베를린이나 북한을 방문해 금품을 수수하는 등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이 있다"고 발표했다.
서독을 중심으로 한 유럽지역의 한국 유학생들과 교포들에 대한 북한의 포섭공작 즉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은 임석진이 1966년 5월에 귀국해 1년 후인 1967년 5월 자진 신고함에 따라 적발된 것이다.
임석진은 1966년 5월 북한 대남공작지도부가 자신의 귀국을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북한 측에 편지 한 장 띄운 후 그들 모르게 귀국해 버렸다. 북한 공작지도부는 임석진이 한국으로 귀국한 뒤 그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당국에 자진 신고하여 사건을 터뜨릴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터지자 당시 동베를린 공작거점 책임자였던 연락부 간부 이원찬 등 관계자들은 북한 공작지도부로부터 심한 추궁과 문책을 받았다.
이 사건이 터질 무렵 북한 지도부는 노동당 부위원장이었던 박금철과 노동당 대남비서 겸 대남총국장이었던 이효순 등 갑산파를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몰아 숙청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남총국 간부들이었던 부총국장 임춘추(김일성의 빨치산동료)와 신대석 등도 이효순과 함께 해임ㆍ철칙되는 등 대남공작 지도부가 큰 혼란에 빠져들고 있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 등 북한 최고수뇌부는 동베를린 사건에 대해 이효순을 위시한 대남공작지도부가 자만에 빠지고 성과에 도취되어 안일하게 지하공작 규율과 원칙을 위반하고 합법적으로 활동한 것이 가져다준 결과라고 추궁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북한 대남공작지도부는 이들이 적발된 후 그때까지 이렇다 할 공작성과도 없이 많은 공작금만 받아쓰고 한두 차례씩 북한을 오가면서 환대만 받고 간 사람들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따라 담당자들은 심한 비판과 추궁을 받아야 했다.
한편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대해 노무현 정부 시절 활동했던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약칭 진실위)는 2007년 10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자수자(임석진)의 진술에 따라 6.8선거 이전인 6월 초에 수사가 본격화되었고 수사계획서에 부정선거 대응차원임을 입증할만한 단서가 전혀 없는 점으로 보아 사전 기획조작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아울러 1967년 4월 14일 서독주재 조선일보 이기양 특파원이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 대회 취재차 체코 입국 이후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4월 24일 한국여자농구선수단 이재학 감독을 통해 최초로 이기양 기자 실종사실을 확인했다. 이 사건을 접한 임석진은 북한이 이기양 기자를 납치한 것으로 확신하고 자신의 대북접촉 전력 노출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어 자수를 결심했다. 그는 이 사실을 평소 알고 지내던 홍세표(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에게 설명했다. 홍세표는 박 대통령과 임석진의 만남을 몰래 추진했으며 1967년 5월 17일 2시간가량 면담이 진행됐다. 박 대통령은 임 교수로부터 유럽 유학생들의 대북 접촉상황을 듣고 "신변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수사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임석진에 대한 조사를 통해 대공혐의자 40여 명에 대한 명단 및 대북 접촉 내용을 파악,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며 자세하게 사건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진실위는 사건발표 당시의 수사결과와 마찬가지로 "사건 관련자들이 동베를린 및 북한방문, 금품수수, 특수교육 이수, 주변인물 근황제보, 대북접촉 주선 등 북측 요청사항을 이행하면서 실정법을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북한에서 받은 특수교육의 경우 강요된 측면이 강하고 귀국자들에 대한 북한의 지하조직 구축 등 지령사항도 대부분이행되지 않았으며 3~4명만이 호기심과 북한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1~2회 안착신호를 발송하고 A-3 방송을 청취하는 등 활동의 위반 정도가 약한 편이었다"고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백림 사건을 브리핑하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특히 진실위는 "윤이상의 경우 북한으로부터의 금품수수와 방북, 주변 인사들의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 방문주선 등 실정법을 위반한 점은 재판과정에서 본인도 인정했다"고 전제하고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독일에 거주하는 그(윤이상)를 연행해 귀국시킨 것은 불법적인 행동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하면 독일에 거주하는 윤이상을 국내로 연행해 귀국시킨 것은 불법적인 행동이고 잘못된 것이지만 "북한으로부터의 금품 수수와 방북, 주변 인사들의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 방문주선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윤이상 본인이 사건 당시 재판정에서 인정한 것처럼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결론적으로 진실위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중앙정보부가 기획ㆍ조작한 사건이 아니며, 관련자들을 해외에서 국내로 연행한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들이 한 활동은 실정법에 위반되는 범죄행위였다"고 인정한 것이다.
동베를린에 설치된 북한의 유럽지역 공작거점에서는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 나와 있는 한국인 유학생 및 교포들에 대한 공작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독일 외에 다른 유럽국가에 나와 있던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하던 박노수와 김규남에 대한 접근 및 포섭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53년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유학하던 박노수(1933-1972)는 1955년 잠시 귀국했다 일본 도쿄대학 법학부로 유학을 떠났다. 박노수는 일본 유학 중이던 1961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초청으로 같은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김규남(1929-1972)은 박노수의 일본 도쿄대 동창이었다.
박노수ㆍ김규남 등 영국유학생들에 대한 북한의 공작 역시 처음에는 선전용 책자와 화보 등을 우편으로 보내거나 북한 유력인사 및 연고자의 편지를 보내 북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북한방문을 회유하는 방식이었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 중이던 박노수와 김규남 등 3~4명에 대해 집중적인 선전 및 접근 공작을 펼쳤다. 그것은 북한에 이들의 혈육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노수의 북한 연고자는 6.25 전쟁 때 월북하여 공산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던 박상원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김규남 역시 원산농업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던 윤재호 등 여러 명이 북한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고향 친구, 학교 동창생들도 여러 명이 북한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 공작지도부는 박노수와 김규남의 북한 연고자들을 최대한 찾아내고 이들의 자세한 동정을 동베를린의 공작거점을 통해 박노수ㆍ김규남에게 미리 알려주는 등 적극적으로 이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계속
06.19 北 사상교육받고 南 학계·정계로...정부 와해 공작거점 구축 임무
국회의원·교수가 된 유학생 간첩 박노수와 김규남
중앙당 간부 신분위장시켜 합법적으로 英 드나들며 유학생 포섭
박·김, 한국인 여럿 포섭 후 방북...한국 온 뒤 동백림 사건서 발각

▲유럽간첩단 사건'의 박노수(오른쪽)와 김규남(오른쪽 두번째)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은 1970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72년 7월 사형이 집행됐다.
특히 북한은 중앙당 공작부서 간부를 무역전담 부서인 대외무역촉진위원회 간부의 신분으로 위장시켜 합법적으로 영국에 출입하도록 하면서 유학생 포섭공작을 추진했다. 그가 바로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 마련된 공작거점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중앙당 연락부 부과장 김진현이었다. 북한 공작거점에서는 첫 접촉 및 포섭대상으로 6.25 전쟁 전에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한때 학생운동에도 가담한 경력이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 유학생 박노수를 선정했다. 박노수와의 접촉은 김진현이 1960년 10월경 영국에 입국하는 기회에 추진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를 위해 서독에 사는 박노수 친구의 소개편지를 준비하였다.
박노수와의 접촉 및 포섭 준비를 마친 김진현은 영국에 입국한 뒤 박노수에게 전화해 서독에 사는 친구의 편지를 전달해주려고 한다며 그와의 접촉 약속을 받아냈다.이미 약속한 대로 박노수를 만난 김진현은 자신의 신분(북한사람)을 밝히고 북한에 살고 있는 박노수 연고자들의 동향을 알려준 다음 몇 가지 귀에 솔깃한 제안을 하였다.
김진현은 박노수에게 원한다면 북한 연고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할 수 있다는 것, 북한 연고자들이 박노수에게 보낸 편지와 사진 등이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 보관되어 있으니 기회가 되면 그곳을 방문해서 가져가라는 것, 서독에 살고 있는 한국유학생들도 동베를린 북한대사관과 접촉 및 방문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을 얘기해주면서 그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박노수는 그동안 동베를린 북한 공작거점에서 보내준 책자와 화보 등을 받아보면서 북한에 사는 연고자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서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 북한대사관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던 차에 김진현을 만나고 보니 더더욱 북한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 그 자리에서 동베를린 북한대사관 방문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961년 2월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박노수는 거기에서 김진현ㆍ이도요 등 공작요원들, 그리고 동독 주재 북한대사로 나와 있으면서 공작을 지휘하던 박일영도 만났다. 박노수는 북한이 마련해준 숙소에 수일간 머물면서 북한에 사는 연고자들이 보낸 편지와 사진, 그들이 보냈다는 선물까지 받고 감동한 데다 사상교육 및 학비지원 등 물질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북한 꼬임에 넘어가 결국 그들에게 포섭되고 말았다. 북한에 포섭된 박노수는 기회가 되는 대로 북한을 방문할 것과 영국에서 유학하는 김규남 등 다른 유학생들에 대한 포섭공작을 협력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약속했다.
북한 대남공작부서 간부 김진현은 박노수의 도움으로 1961년 4월 김규남을 접촉했고 김규남으로부터 동베를린 북한대사관 방문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김규남도 박노수처럼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 들어가 박일영 등 공작거점 요원들을 만나는 한편 북한이 마련해준 숙소에 머물면서 북한에 사는 연고자들이 보낸 편지와 사진, 선물 등을 받아보았다. 그리고 공작요원들의 사상교육과 설득, 학비지원 등 꼬임에 넘어가 포섭되고 말았다. 포섭된 후에는 앞으로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포섭공작을 추진하라는 공작임무를 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 모습.
그 후 박노수와 김규남은 영국에서 유학하던 여러 명의 한국인들을 동베를린 북한 공작거점과 연결시켜 그들이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방문하도록 협조했다.
박노수와 김규남, 그리고 영국에서 유학하던 여러 명의 한국인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한 북한 공작지도부는 이들을 방북시켜 확실하게 노동당원으로 만들기 위해 연고자들을 동베를린까지 보내 이들을 만나도록 주선했다. 북한에 살고 있는 연고자들은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서 박노수와 김규남 등 한국인 유학생들을 만나 북한 사회주의체제 우월성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방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노동당 간부들을 직접 만나 노동당의 평화통일 정책에 대해 설명을 듣고 배워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 적극 나서줄 것을 당부하면서 북한방문을 설득했다.
그 후 박노수와 김규남은 1962년 2월과 1963년 10월에 각각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최용건 등 북한 최고수뇌부와 이효순·임춘추 등 대남공작부서 간부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또 사상교육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의 특별 강의를 받기도 했다. 아울러 평양과 지방의 주요 산업시설과 박물관 등을 참관하여 감명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영국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정계와 학계에 진출해 상층부 인물들과의 정치적 비밀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전개하면서 군사정권 내부를 분열시키고 한국정부를 국민들로부터 고립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을 추진할 공작거점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아울러 북한 공작지도부와의 연락에 필요한 연락 암호와 방법 등 통신연락 관련 교육도 받았다.
그 후 영국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박노수는 대학교수로, 김규남은 당시 집권여당인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에 발생한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 박노수와 김규남 등이 동베를린과 북한을 방문했다는 첩보를 수집하고 심충적인 수사를 통해 1969년 5월 초 이들을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1970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1972년 7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중앙정보부의 불법 연행과 강압수사, 협박과 고문 등으로 박노수와 김규남 등이 허위 자백하였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고 같은 해 유족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서울고법은 2013년 10월 ‘유럽간첩단사건’ 유족이 청구한 재심에서 "수사 기관에 영장 없이 체포돼 조사를 받으면서 고문과 협박에 의해 임의성 없는 진술을 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년 후인 2015년 대법원도 서울고법의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말하자면 박노수와 김규남 등이 북한에 포섭되어 공작교육을 받은 후 검거될 때까지 북한으로부터 받은 공작임무 수행을 위해 해왔던 간첩행위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이들에 대한 체포과정 및 수사방식 등이 적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무죄라는 것이다. /계속
06.26 김일성 60세 생일맞이 무리한 충성경쟁...고정간첩망까지 '발각'
1970년대 초반 대남공작, 뜻밖의 변수
南에 '지하당조직' 밀어붙이다 50년대부터 활동한 부부공작단 들통
연락수단 끊긴 공작단 찾으려 침투한 임창술 검거되며 부부 체포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김창룡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의 특무부대는 1954년 휴전 후 지리산 일대에 잔존하던 유격대 남도부(하준수의 가명)를 체포하여 그 이듬해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1960년대는 소련공산당 서기장 후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따른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위기, 여기로부터 비롯된 소련과 북한, 소련과 중국 간의 갈등, 쿠바 카리브해 위기, 베트남전쟁 확대 등 북한 및 사회주의권과 연관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감행한 미 해군함정 ‘푸에블로’호 나포사건과 1.21 청와대기습미수사건, 울진ㆍ삼척 지역 무장선전대 침투사건 등으로 인한 미-북 및 남북관계 악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북한은 이와 같이 격변하는 정세 하에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대남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를 주동적으로 맞이하려고 대남공작을 더욱 활발히 벌이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 후반은 6.25전쟁 이래 지금까지 남북 간에 전쟁위험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일촉즉발의 아찔한 시기였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북한이 감행한 1.21 청와대기습미수사건이나 울진ㆍ삼척 지역 무장선전대 침투사건 등은 그 자체가 남침을 위한 구실 마련 또는 전초전 성격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남공작 측면에서 돌이켜볼 때 1960년대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대남공작이 가장 활발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많은 공작성과를 거두었던 시기로도 평가할 수 있다.
반면 1960년대는 통일혁명당 조직을 비롯하여 국내에 만들어졌던 많은 북한의 간첩망들이 노출, 파괴되면서 대남공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북한이 간첩조직을 많이 만들기도 하고 많이 망가지기도 한 시기였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중하반기에 새롭게 시도됐던 무장소조 형태의 선전공작과 내부혼란 조성공작이 완전히 실패하면서 남한주민들 속에 반공ㆍ반북 감정만 키우는 결과를 부르기도 했다.
1960년대 대남공작에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 초반에 들어와 북한은 새로운 전술에 따른 대남공작을 추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1950~1960년대부터 해오던 대남공작의 계속하거나 기존에 파견하거나 만들었던 공작조직 및 간첩망들을 수습하고 재연계하는 차원에서 대남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문제는 김일성 생일 60돌을 앞두고 대남공작부서가 무리하게 충성경쟁을 하다가 많은 남파공작조와 국내 고정간첩망을 말아먹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북한 대남공작지도부는 김일성의 60주년 생일인 1972년 4월 15일을 맞아 150일 기간(1971.11.1.~1972.3.31)을 지하당조직 건설 특별전투 주간으로 설정했다. 이 기간 동안에 가능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해 지하당조직 건설 공작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150일 특별전투 기간에 남한의 전 지역에 통일혁명당 각급 조직을 만들어 다가오는 혁명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대남공작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이를 위해 1950~1960년대까지 침투시키거나 만들어놓았던 조직 가운데 연락이 끊어진 남파공작조 및 고정간첩망, 유명무실해진 간첩조직, 일단 적발되었으나 노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간첩 등을 전면적ㆍ선별적으로 접선 검열 및 재정비했다. 조직을 살리려는 지도검열공작을 전개한 것이다. 아울러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간첩조직들도 재정비하고 더욱 확대 강화해 일정 단위의 지도부조직으로 발전시키고 조직지도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지도연락공작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 발생한 대표적인 간첩사건이 경상도지역 지하당조직 재건을 위해 1955년 남파되었던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 사건이다.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는 침투 후 공작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공작지도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데 지도연락공작원 임창술이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를 찾아내 북한과의 연락을 복구하고 이들과 힘을 합쳐 경상도지역에 지하당조직을 확대하라는 임무를 받고 남파되었다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 사건과 함께 발생한 지도연락공작원 임창술 간첩사건이다.
그러면 먼저 1955년 남파된 후 북한 공작지도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채 활동하다 검거된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의 남파 및 검거 경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부유한 지주 가정에서 태어나 경성제1고보 4학년 당시인 1929년 광주 항일학생사건에 가담한 바 있는 이석(1971년 당시 61세)은 해방 후 대구폭동사건을 주도하는 등 공산당과 남로당에서 중앙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6.25 전쟁 발발이후 탈출했다. 그 뒤에는 이승엽이 위원장으로 있던 서울시 인민위원회 농림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9.28 서울수복 때 월북하여 금강학원에서 간부학생으로 교육 및 훈련을 마친 후 1953년 12월 대남공작원이 되었다.
장옥순(1971년 당시 50세)은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길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했고 해방 전에는 유흥가 접대부 생활도 하고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생활했다. 8.15 광복 후에는 남로당에 입당한 뒤 여성동맹 간부로 활동했으며 6.25 전쟁 때는 충북 진천군 여맹위원장으로 활동하다 9.28 서울수복 때 자진 월북했다. 그 후 금강학원에서 교육 훈련을 받고 이석과 같은 시기인 1953년 12월 남파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대남공작원으로 소환된 후 훈련과정에 부부공작조로 편성되었으며 1955년 4월 경 서해안을 통해 국내에 침투했다.
침투 당시 이들이 받은 공작임무는 휴전 후 잔존유격대의 하나였던 남도부와 조직적으로 연계한 다음 경북 혹은 경남 지역 당지도부를 구축하고 조직지도체계 확립 및 지하당조직들의 활동이 정상화되면 남도부를 대동하고 복귀하는 것이었다. 복귀방법은 선박을 구입해 해상을 통해 자체적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임무수행 기간은 3~5년 정도 걸리는 장기공작이었다.
이들은 침투 후 1957년 여름까지 보따리 장사꾼으로 위장하고 부산과 마산, 진주와 밀양 등 경남지역을 전전하면서 수차에 걸쳐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남도부 부대와의 접선을 모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렇게 되자 접선에 자신을 잃고 더 이상 찾을 방법도 없어 남도부와의 접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남도부는 이들이 남파되기 훨씬 전인 1954년 1월에 김창룡장군의 육군특무부대에 의해 체포되었고 1955년 8월에는 사형이 집행된 상태였다. 1955년 4월에 국내에 침투한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가 남도부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도부와의 접선연계 공작임무 수행을 단념한 이들은 국내연고자들을 찾아내 포섭한 다음 이들로 지하당조직 구축공작을 추진시킬 계획을 세우고 관련 활동을 벌였다.
먼저 1958년 가을에 대구에 사는 이석의 여동생 이계석과 그의 남편 장지조에게 접근하여 자신이 북한에서 공작임무를 받고 왔다는 점을 밝히고 이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대구에 살면서 당시 국민은행에 근무하고 있던 외사촌 박노만을 포섭했고 그 다음에는 경남 창원에 살던 동생 이인석을 포섭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체 복귀수단인 선박을 마련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일이 잘 진척되지 않자 마산과 서울에 장기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어놓고 북한 대남공작 지도부와는 연락이 끊긴 채 포섭한 대상들로 지하당조직을 만든 다음 이를 지도하면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를 찾아 북한 공작지도부와 연계시키라는 공작임무를 받고 1971년 10월에 침투했던 지도연락공작원 임창술이 검거되는 바람에 이들도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계속
07.08 임창술, 1960년 8월~1969년 3월 4회에 걸쳐 국내 침투 공작
지도연락공작원 임창술 간첩사건
형제·조카·외사촌·동서 등과 영덕 지방 월북연고자들 포섭
1971년 10월 통영 해안으로 침투했다가 보름만에 붙잡혀
통혁당 지부 건설 임무...17명 연루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

▲임창술의 신원과 행적을 밝힌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의 유튜브 '유동열의 안보전선' 화면.
사실 북한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연락부 경상도지역 담당 공작과에서는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와의 연락이 두절된 뒤 장기간에 걸쳐 이석공작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 근거하여 공작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애매한 부분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국내에 침투했던 여러 공작원들이 이석공작조가 안전하게 정착해서 잠복해 있다는 정보를 수집해 보고했고 공작부서에서는 남파공작조들이 보고한 정보를 취합하여 검토한 끝에 신빙성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들을 찾아내 연계하기 위한 공작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토대로 여러 차례 경북지역에 침투하여 포섭 및 지하당조직 구축 공작을 성공함으로써 충분히 검증되었고 공작경험도 풍부한 임창술에게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를 찾아내 공작지도부와 연계시키는 공작임무를 맡기기로 하였다.
임창술은 경북 영덕 출신으로 일본에서 고학으로 동경공업공고 토목과를 중퇴한 토목기술자였다. 그 후 토목 관련 일을 하다가 8.15 광복을 맞게 되었고, 해방이후에는 공산당에 가담하여 활약하다 1947년경 체포되어 3년 동안 복역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 때 탈옥한 뒤 고향 영덕군에 가서 면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다 9.28 수복 때 자진 월북하였다. 북한에 들어가서는 사회안전학교를 졸업ㅁ하고 안전원(경찰)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사회안전부 산하 공작 관련 일을 하다가 1957년 4월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
공작원으로 선발된 뒤에는 695정치대학에 들어가 3년제 공작원 교육 및 훈련 과정을 졸업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1960년 8월~1969년 3월까지 4회에 걸쳐 국내에 침투해 공작임무를 수행하였다. 4차례의 침투 및 남파공작을 통하여 형제인 임창득, 임창복, 조카 임군혁, 임학수, 임만수, 외사촌 김교환, 김교윤과 동서 이인국, 그리고 영덕지방의 월북연고자 이국현, 처조카 박신수 등을 포섭하였으며 이국현의 경우에는 포섭한 뒤 대동 월북시키는 등 많은 공작성과를 거둔 바 있다.
이 같은 공작성과를 인정받아 김일성을 접견하였으며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으로부터 ‘혁명의 승패는 노동자, 농민들을 어떻게 조직 동원하느냐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더욱 분발하여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의 전위가 되라’는 격려까지 받았다.
북한 노동당 연락부에서는 4차례에 걸쳐 국내에 침투하여 공작임무를 수행하고 잠시 휴식 겸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사회 직장인 함경북도 나진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임창술을 재소환해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와의 연락체계 회복 및 수습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당시에는 공작원들이 남파공작 임무를 받고 훈련 및 공작준비를 할 때만 초대소에 수용되어 생활하고 공작임무 수행이 완료되면 사회에 나가 일정한 간부 직책을 가지고 활동하는 방식으로 공작원을 운용하였다.
이와 함께 임창술에게는 1959년에 북한에 포섭된 뒤 1964년까지 북한과 연계되어 활동하다가 연락이 두절된 경북지역 지하당 조직원 백대윤(당시 62세)을 열 확인한 후 이들을 중심으로 통일혁명당 경북지역 지도부를 건설하라는 임무도 부여하였다. 말하자면 백대윤을 중심으로 하는 통혁당 경북도당지도부와 이석공작조를 중심으로 하는 통혁당 경남도당지도부를 구축하라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연락이 두절된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와 고정간첩 백대윤을 찾아내 그들과의 연락체계 재구축 및 수습 임무를 받고 1971년 10월 27일 새벽 경남 통영 해안을 통해 국내에 침투한 임창술은 당일 오후에 곧바로 대구 계산동의 백대윤 집을 찾아가 그를 접선하는데 성공하였다.
백대윤을 만난 임창술은 북한에 있는 그의 동생들인 백삼윤, 백상윤의 편지와 안부를 전해주면서 ‘노동당 중앙에서는 백선생을 굳게 믿고 높이 신임하고 있으며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며 격려하였다. 그리고 11월 10일 경에 다시 접선할 것을 요구하면서 다음에 만날 때는 그동안 활동하면서 찾아낸 믿을 수 있는 동지들을 소개해줄 것을 당부하고 백대윤의 집을 나섰다.
그러나 임창술은 11월 12일 백대윤과의 2차 접선을 위해 다시 대구 계산동에 있는 백대윤의 집을 찾아갔다가 현장에 잠복하고 있던 군 보안대원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임창술은 국내에 침투한지 불과 보름 만에 체포되고 말았는데, 그의 체포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대윤과의 1차 접선을 순조롭게 마무리한 임창술은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곧바로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를 찾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임창술은 먼저 이석의 처남 장지조의 거주지가 있는 대구 북성로에 찾아갔다. 북한에서 이석의 처남 장지조가 대구 북성로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1차적으로 대구 북성로에 가서 장지조를 찾은 다음 그의 도움으로 이석을 찾아 접선하기로 계획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지조가 산다고 알고 나온 지역이 완전히 변해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백대윤과 약속한 접선날짜인 11월 10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전에 사전 약속도 하지 않은 채 백대윤의 집을 찾아갔으나 그가 부재중이어서 접선하지 못하였다.

▲철거되기 전인 1971년 무렵의 중앙청 건물.
이렇게 되자 1차 침투당시 포섭했던 박신수에게 부탁해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를 찾기로 하고 그의 근무지였던 서울 정부종합청사(당시 중앙청)로 찾아가 지하다방에서 그를 만났다. 그러나 박신수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광화문으로 나오지 않아 그에게 부탁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 동안에는 검문 및 단속이 심한 관계로 체포될까 두려워 여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야간열차를 타고 대구-서울 간을 왕래하면서 열차 안에서 쪽잠을 자면서 밤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대구에서는 백대윤의 학교 동창인 한모씨의 신고로 임창술 일당을 체포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모씨는 11월 9일 오전 대구지역 군 보안부대에 찾아와 ‘백대윤의 말에 의하면, 10월 하순에 부산에 산다는 50세가량의 남자가 집으로 찾아와 당신(백대윤) 동생이 백삼윤, 백상윤 아니냐? 백삼윤은 현재 인민공화국 임업성 간부로 일하고 있고 백상윤은 보건성에서 일하고 있으니 안심하라. 나도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혁명임무를 받고 활동하고 있다. 노동당에서는 백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굳데 믿고 있다. 차후에 다시 찾아올 테니 동지가 될 만한 인물을 소개해 달라고 한 후 갔는데 그 인물이 다시 찾아올 것 같다’라는 말을 그로부터 직접 들었다며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대구지역 군 보안부대에서는 신고내용 가운데 북한이 백대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점과 간첩이 직접 백대윤을 접선하였다는 점, 예전에도 백대윤이 북한에 포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던 점 등을 감안해 일단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먼저 백대윤을 소환 조사했다.
백대윤 조사 결과 그의 동생 백삼윤, 백상윤 등 2명이 9.28 서울수복 당시 월북한 사실이 있으며, 1964년 서울 경복고 학생 명의로 보내온 재북 동생들의 안부편지와 난수표, 암호연락방법, 지령문을 동봉한 서신을 받아 편지는 폐기하고 난수표는 하수구에 버렸다는 진술을 얻어냈다. 이는 한모씨의 신고내용과도 일치되므로 수사에 착수하기로 하고 준비를 빈틈없이 하였다.
이와 같이 체포준비를 완료하고 대구지역 군 보안부대가 백대윤의 집 주변과 방안에 수사요원들을 배치하고 임창술을 기다리던 중 11월 12일 16:00 경 백대윤의 집을 찾아온 임창술을 체포하는데 성공하였다.
임창술이 체포된 후 그의 진술로 간첩 백대윤은 물론 그가 예전에 직접 4차례에 걸쳐 국내에 침투한 후 포섭해 만들어 놓았던 간첩조직들이 일망타진되었다. 이와 함께 임창술이 찾아내 북한 공작지도부와 다시 연계시키려던 남파공작조 즉 1955년에 침투해 17년간 암약하던 이석ㆍ장옥순 부부공작조도 검거되었으며 이들이 구축했던 간첩망 역시 일망타진되었다. 당시 임창술 간첩사건에 연루된 인원만 17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간첩단사건이었다. /계속
07.10 강갑영, 1967년 9월 남파 공작원들에게 포섭돼 두 차례 입북
1970년대 대남공작
남해 출신 강갑영, 해방 후 좌익활동...자수해 용서 받고 농협조합장 역임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거점' 구축...1974년 7월 21일 일당 모두 일망타진

▲정갑영의 고향이자 정갑영이 북한공작원에 포섭되고 월북해서 대남공작 교육을 받고 첫번째로 침투했던 경남 남해 삼동면 마을과 해안.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지도부를 만들려고 시도하다 검거된 강갑영은 경남 남해군 삼동면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삼동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8.15 해방 후 교사를 그만두고 부산 동아대 정경학부에 입학한 강갑영은 학생 좌익학생 단체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하였으며 그로 인해 수 차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한 뒤 고향에 돌아와 남해군 인민위원회와 민청에서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9.28 서울수복 후에는 경찰서에 자수하여 부역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 농협조합장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던 강갑영이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것은 1967년 9월이다. 강갑영을 포섭한 북한 공작원은 강갑영과 함께 대학과 국민학교 교사 선후배 관계였고 6.25 전쟁 때 남해에서 같이 좌익진영 간부로 활약하다 9.28 수복 때 월북한 뒤 공작임무를 받고 남파되었던 이봉원과 이덕균이었다.
원래 이봉원은 부산 동아대에, 이덕균은 서울 단국대에 재학하던 중 좌익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 때는 고향인 남해에 돌아와 인민위원회와 민청에서 같이 활동하다 의용군에 자원입대한 후 인민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6년에 인민군에서 각각 제대한 후 이봉원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이덕균은 평양사범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졸업 후 이봉원은 국가건설위원회 지도원으로, 이덕균은 노동출판사 편집원으로 배치되어 일하다가 이덕균은 1964년에, 이봉원은 1965년 경 각각 노동당 연락부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았다. 이봉원과 이덕균은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1967년 초 이봉원을 조장으로 하여 2인 공작조를 구성하였고 1967년 9월 과거 동지관계였던 강갑영을 포섭하여 북한으로 대동 복귀하라는 임무를 받고 남파되었던 것이다.
당시 강갑영은 자신을 포섭하기 위해 침투한 이봉원과 이덕균으로부터 북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통일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통일위업 완수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권유받고 그들을 따라 입북하기로 결심하였다.
2명의 남파공작원을 자신의 집에서 하루 동안 은폐시켜주고 다음날 밤에 공작조를 따라 해안에서 안내조와 접선한 다음 공작선을 타고 대동강 하류의 남포항으로 입항했다.
남포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강갑영은 특별초대소에서 이봉원ㆍ이덕균과 함께 9월 20일~10월 10일까지 20일간 체류하면서 대남공작부서 고위간부들인 노동다아 대남담당비서 겸 총국장이었던 허봉학과 연락부장 유장식 등을 만나 고무와 격려를 받고 노동당에도 가입하였다. 아울러 김일성 역사박물관과 산업시설도 방문하고 금강산휴양소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공작활동에 필요한 각종 교육 및 훈련을 받고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조직거점을 구축하라’는 공작임무와 함께 공작금, 그리고 무전기를 비롯한 통신연락 수단을 받아가지고 남포에서 공작선을 타고 출발해 남해 삼동면 해안으로 상륙하는 방식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강갑영은 처남인 박종우를 시작으로 6.25 전쟁 때 같이 좌익 활동을 했던 김욱동과 이치선 등을 포섭하였으며 이들로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조직거점’을 구성하고 그 결과를 공작지도부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유재인, 김원호 등 연고자들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
북한에서는 강갑영의 공작성과를 더욱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1971년 9월 중순 남파공작원 이봉원을 다시 침투시켜 강갑영에게 지하당건설 교육과 함께 공작금과 무전기, 암호문건 등을 다시 전달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김일성 생일 60주년이 되는 1972년 4월 15일까지 강갑영 조직 명의의 기념선물과 축하문을 마련한 다음 무인포스트를 통해 북한으로 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이전에 같이 침투했던 이덕균은 몸이 아파 함께 하지 못했다.
강갑영은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1971년 12월 초 김일성 생일선물로 고급안경을 마련하고 작성한 축하문과 함께 약속된 무인포스트에 매몰한 뒤 무전으로 보고하였으며, 이에 북한은 안내조를 보내 강갑영이 매몰해놓은 선물과 축하문을 발굴해 가져갔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강갑영의 이와 같은 공작활동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김일성 생일 60주년을 기념해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였다.

▲정갑영이 1973년 4월 8일 남파공작원 이봉원을 따라 공작선을 타고 두 번째 입북할 때 이용한 원산항 모습.
한편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1973년에 이르러 강갑영의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조직거점’을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지도부’로 승격시키고 그 산하에 기층조직을 체계적으로 조직 확대하기로 하고 필요한 교육(기지교육)을 위해 그를 다시 북한에 불러들이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73년 4월 8일 남파공작원 이봉원을 3차로 침투시켜 강갑영을 접선하도록 한 다음 그를 대동하고 입북하도록 하였다.
남해 해안에서 안내조와 접선한 다음 공작선을 타고 동해안의 원산항을 통해 두 번째로 입북한 강갑영은 당시 대남담당비서였던 김중린과 연락부장 이완기 등을 만나 격려를 받았고 2년 전인 1972년 김일성 생일 60주년을 기념하여 본인에게 수여되었던 국기훈장 제1급도 직접 받았다.
강갑영은 평양에 도착한 뒤 약 1개월 동안 초대소에 체류하면서 신형 무전기 사용법과 함께 지하당 지역지도부를 어떻게 조직하고 운영할 것인지, 기층조직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고 확대할 것인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육받았다. 아울러 연락부장 이완기로부터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지도부를 건설’하며 ‘지도부 성원들을 입북시켜 교육 및 훈련을 받게 함으로써 지도부를 질적으로 강화하고 기층조직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라’는 공작임무도 부여받았다.
기지교육을 마친 강갑영은 1973년 4월 20일 북한 공작부서에서 주는 신형 무전기와 암호연락문건, 공작금 등을 받아가지고 열차편으로 평양을 출발해 본인이 타고 돌아갈 공작선이 정박해 있는 원산항으로 향하였다. 강갑영과 함께 연락부장 이완기, 부부장 이명곤 등도 원산항까지 동행해 남한으로 돌아가는 강갑영을 전송해주었다.
4월 22일 원산항을 출발한 강갑영은 고향인 경남 남해 삼동면 해안을 통해 상륙하는 방법으로 국내에 복귀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강갑영은 조직원들에게 자신의 입북 경과를 자세히 알려주고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시대로 본인을 책임자로 하고 박종우ㆍ유재인 등을 부책임자로, 김욱동ㆍ이치선ㆍ김원호 등을 조직원으로 하여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지도부’를 조직하였다.
이후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강갑영에게 지시한 대로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지도부 성원들을 한 명씩 차례로 북한에 불러들여 공작교육을 시키기로 하고 1차적으로 1974년 6월 초 지도부 부책임자인 박종우를 입북시키라는 지령을 하달하였다.
그런 다음 1974년 6월 말 박종우를 입북시키기 위해 공작선을 침투시켰으나 기상조건 악화로 접선장소에 접근하지 못해 실패한 후 다시 7월 말경에 접선하기로 하고 대기시켰으나 7월 21일 강갑영을 비롯한 일당이 적발 체포됨으로써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계속
07.17 北 비판에 흥분하다 발각된 채수정, 6개 간첩망 자백 ‘일망타진’
1970년대 대남공작
입북대기자, 겁먹고 숙부에 실토...보안부대에 제보해 강갑영 체포
통혁당 경남지도부 조직 실패로 대남공작부서 내부 책임전가 급급

▲여간첩 채수정이 침투하고 복귀한 장소를 알리는 '간첩 침투지역' 안내판.
강갑영 일당의 체포는 이미 포섭된 뒤 입북대기자로 선정되었던 김모가 제반 사실을 자신의 숙부에게 실토하였는데 그 사실을 전해들은 김모의 숙부가 군 보안부대에 제보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강갑영은 김모를 포섭할 목적으로 1974년 4월 20일경 그를 만나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방식으로 검증했는데, 김모가 본인의 말에 호응하는 등 동의를 표시하자 뜻을 같이하기로 하고 포섭하였다.
그러나 김모는 강갑영으로부터 북한에 입북하여 공작교육을 받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막상 입북 일자가 점점 다가오자 공포심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고민과 제반 사실을 숙부에게 그대로 이야기하고 자수의사까지 표출하였다. 조카의 말을 들은 숙부는 그의 말에 진심이 담겨져 있다고 판단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지역 군 보안부대에 자진 출두하여 ‘조카 김모가 동향 출신의 거동수상자 강갑영에게 포섭되어 입북 대기 중’이라는 내용으로 신고를 했던 것이다.
관련 신고를 받은 군 보안부대에서는 즉시 내사에 착수하여 강갑영의 출타사항과 재산변동, 평소 동향 등을 확인한 결과 2회(1967년 9월, 1973년 4월)에 걸쳐 10일 이상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지역으로 출타한 사실과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자금으로 경운기를 구입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같은 동네 출신으로 뜻이 통한다는 이유만으로 ‘유재인’이라는 인물을 고용한 점, 평소 사교술에 능하고 선심성 행위를 자주 베푸는 등 의심할만한 새로운 내용도 추가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1974년 7월 16일 강갑영 집을 수색한 결과 장롱과 뒤뜰 밭에 은닉하였던 무전기, 난수표, 라디오 등을 발굴하였으며 관계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7월 21일 강갑영을 비롯한 일당 19명을 검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강갑영 일당이 검거됨으로써 ‘통일혁명당 경남지역 지도부’를 조직한 뒤 산하에 기층조직을 구축 확대하려던 북한 공작지도부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공작부서 간부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였다. 특히 강갑영 포섭 및 지도검열을 위해 여러 번 국내에 직접 침투했던 이봉원과 이덕균은 대성통곡까지 했다고 한다.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연락부 내부에서는 늘 그러하듯 상호 공작사고 책임 전가에 급급하였고 대남담당비서 김중린은 연락부 부부장 이명곤과 과장 이영호 등 직접적으로 공작을 담당 지도했던 간부들의 잘못으로 사고가 발생했다며 강하게 질책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 연락부의 강갑영 공작담당 간부들이 한동안 출근도 기피하다시피 하면서 김중린의 처사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또한 강갑영을 직접 포섭하는 등 공작을 직접 했던 이봉원과 이덕균 등은 담당부서 간부들을 원망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데까지 이르러 이를 수습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으며, 그 후에 새로 연락부장에 임명된 정경희는 부임하자마자 이 사건 때문에 홍역을 앓았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다.
당시 강갑영 일당 간첩사건으로 검거된 인원은 총 19명이며, 주범인 강갑영은 군 보안사 유치장에서 대기 중 1974년 10월 1일 자살하였다. 강갑영의 자살 소식이 알려지자 북한에서는 그에게 최고훈장인 김일성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통일혁명당 지역지도부 구축을 위한 북한의 대남공작 사례 가운데는 통일혁명당 충남ㆍ전북 단위 지도부조직 구축을 위해 남파되었다 검거된 채수정 사건도 있다.
채수정은 충남 당진 출신으로 1966년 봄 공작원으로 선발된 뒤 3년 동안 695정치대학에서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고 1970년 9월과 1972년 10월, 1973년 11월 등 3회에 걸쳐 국내에 침투한 바 있는 베테랑 공작원이다.
당시 국내에 침투한 채수정은 연고관계를 이용해 채수근, 신창길 등을 포섭해 대전 및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간첩조직을 만들었으며 이 공로로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원래는 국기훈장 제1급보다 높은 명예칭호인 공화국영웅칭호를 주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으나 담당 간부들의 반대로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는데 그쳤다는 후문이다.

▲여간첩 채수정이 재판 받는 모습.
이후 채수정은 대남담당비서 김중린의 높은 신임에 의해 본인이 직접 포섭해 대전을 중심으로 만들었던 1개의 지하당조직 외에 다른 공작조가 1960년대에 침투해 충남 서천을 중심으로 만들어놓았던 간첩망 2개, 전북 김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1개의 지하당조직 등 3개의 간첩망을 넘겨받아 이들을 검열한 후 ‘통일혁명당 충남ㆍ전북 지역 지도부’를 구축하라는 공작임무를 받았다. 그런데 충남 서천의 1개 간첩조직이 3개의 조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졸지에 총 6개의 간첩조직을 지도 검열하게 되었다.
사실 다른 공작조가 만든 지하당조직을 1개도 아니고 여러 개를 넘겨준다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어서 담당 부서 공작지도원들이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김중린이 그런 의견을 묵살하고 독단으로 지하당 조직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채수정에게 여러 개의 지하당조직을 몰아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공작임무를 받고 1974년 4월 말 충남 서천해안으로 침투한 후 대전에 안착하는데 성공한 채수정은 지하당조직들을 검열 지도하는 등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대전에서 진행된 ‘북괴만행 규탄대회’에 참석했다가 북한을 규탄하는 소리에 흥분하여 발언한 것이 단서가 되어 경찰에 신고된 후 추적 끝에 체포되었다. 이에 따라 그가 지도 검열하기로 했던 충남ㆍ전북 지역 6개의 간첩망도 일망타진 되었다.
채수정이 체포됨으로써 같이 검거된 간첩망들을 보면 우선 본인의 남동생 채수구를 중심으로 충남 당진에 만들었던 지하당조직을 들 수 있다.
검거된 간첩조직 가운데는 충남 서천과 서울 중심으로 활동하다 검거된 정철우 일당도 있다. 동 조직은 충남 부여출신의 정관우가 1960년 7월과 1962년 1월 2회에 걸쳐 국내에 침투해 연고자들인 정철우, 정기우, 이경수 등을 포섭한 다음 이들로 만들었던 지하당조직이었다. 이 가운데 정철우는 공작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공작교육을 받은 후 돌아와 간첩활동을 하다 검거되었다.
또한 충남 서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간첩망도 검거되었는데, 고정간첩 장성순이 속한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서천출신의 장덕순이 6.25 전쟁 때 북한에 들어가 대학을 졸업한 후 간부로 활동하다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교육 및 훈련을 받고 1957년 9월과 1961년 4월 2회에 걸쳐 침투하여 연고자들인 장성순, 장연순, 장금순, 장민순 등 가족 친척들을 포섭하여 만들어놓았던 조직이었다. 이 가운데 장성순은 1957년 9월 남파되었던 장덕순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고 돌아와 18년간 간첩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케이스다.
아울러 채수정이 체포된 뒤 함께 일망타진된 간첩조직 가운데는 전북 김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송형섭, 송재광 간첩망도 있엇다. 이 간첩망은 전북 김제출신으로 6.25 전쟁 중 월북하여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간부로 재직하다 남파공작원으로 선발된 후 1960년 10월과 1961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국내에 침투했던 남파공작원 송명섭이 만들었던 조직이었다. 이 가운데 송형섭의 경우에는 북한에 들어가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고 돌아와 간첩활동을 하다 검거되었다.
마지막으로 1957년 국내에 침투한 후 단선되었던 남파공작원 신창길도 채수정의 체포로 검거되었다.
이와 같이 채수정이 체포되고 그가 자신이 지도검열하려고 했던 지하당조직들을 전부 폭로함으로써 일망타진되자 과거 국내에 직접 침투하여 동 조직들을 만들었던 남파공작원들이 들고 일어나 대남담당비서 김중린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중린이 공작원들의 항의를 묵살하자 곧바로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편지를 보내 김중린의 비원칙적인 지도방법을 비판하고 항의하였으며 본인들의 연고자들이 체포되어 치명적 피해를 입는 결과로 이어지자 ‘김중린과 채수정 간에 부정한 이성관계가 있다’고까지 말하면서 강하게 비난했다는 후문이다.
이렇게 남파공작원 채수정은 자기가 알고 있던 ‘목숨과도 같은’ 공작 비밀을 수사기관에 모두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이 만들었던 조직은 물론 다른 공작원들이 구축해놓았던 것까지 총 6개의 간첩망이 일망타진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 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상이 될 만하고 성공한 것만 선전하는 평양의 ‘남조선혁명사적관’에 여러 개의 간첩망을 망가뜨린 채수정 관련 내용을 전시해놓았다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채수정 공작관련 내용이 북한 남조선혁명사적관에 전시되었다면, 채수정이 체포된 후 처형당했으니까 일단 ‘남조선혁명을 위해 목숨 바친 혁명가’라는 의미에서 전시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계속
07.24 울릉도 출신 전덕술 침투시켜 통혁당 경북·서울 지도부 구축 시도
울릉도 거점 간첩단사건
1962년 연고자 포섭·간첩망 조직...지하당 만들고 책임자 전영관과 北 복귀
공작금으로 위장업체·아지트 마련...北, 직접침투·우회침투 섞어 ‘조직’ 지도

▲1974년 일본을 거쳐 우회침투한 공작원 이좌영이 적발되며 검거된 울릉도 거점 간첩단과 연루된 47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대남공작을 통해 검증된 공작원을 일정 지역(도 단위) 공작책임자로 임명해 침투시킨 다음 그가 해당 지역 내에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여러 개의 지하당조직(간첩망)을 통합해 통일혁명당의 도 단위 지도부를 만드는 공작은 울릉도에서도 진행되었다.
1974년 3월 15일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의해 알려진 울릉도 거점 간첩단사건은 한마디로 북한이 울릉도출신 남파공작원 전덕술을 침투시켜 통일혁명당 경북ㆍ서울 지역 지도부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다 일망타진된 대형 간첩단사건이다. 동 사건은 규모면에서 볼 때 1968년 적발된 통일혁명당 사건에 버금가는 사건이었으며 이들이 군부에 대한 공작도 전개하다 검거되었다는 면에서 보면 통혁당 사건보다 더 크고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릉도 거점 간첩단사건은 북한의 남파공작원 전덕술이 1962년 고향인 울릉도에 침투하여 연고관계를 이용해 연고자들을 포섭하고 그들로 간첩망을 만든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전덕술은 1962년 당시 47세로, 대구와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재학 중 좌익 활동에 가담하였으며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6.25 전쟁 때 의용군에 입대한 후 인민군에 편입되어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북한군에서 제대해 개성송도정치대학에 입학하였으며 3년 과정을 졸업하고 1958년부터 평안남도 당위원회 부부장으로 재직하다 1960년 6월 경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
공작원으로 선발된 전덕술은 6개월간 단기 밀봉교육을 받고 1960년 12월 ‘고향인 울릉도에 침투해 연고자들을 포섭하여 지하당조직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공작선을 타고 울릉도침투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기상조건 악화로 울릉도에 상륙하는데 실패하고 그 후에도 한 차례(1962.3) 더 울릉도에 침투하려다 기상이 나빠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 12월 세 번째 시도 만에 울릉도 상륙 및 침투에 성공하였다.
침투에 성공한 전덕술은 연고자들인 전영관, 전영봉, 전원술, 김용득, 김장곤 등 여러 명과 접촉해 이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전영관을 조직책임자로 하는 지하당조직을 구축하였다. 북한으로 복귀할 때는 지하당조직 책임자인 전영관을 대동하고 들어가 그가 공작관련 교육 및 훈련을 받도록 한 다음 다시 울릉도로 보내 공작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 후 전영관이 전영봉을 대동하고 북한에 입북해 공작 교육 및 훈련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전영봉은 지하당조직 부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아울러 김용득과 홍영태 역시 북한에 입북해 공작관련 교육 및 훈련을 받고 돌아왔는데, 이렇게 해서 총 4명의 조직원이 북한에 다녀온 셈이다.
그런 관계로 북한 공작부서 입장에서 볼 때는 울릉도 간첩망이 상당히 공고하고 튼튼한 조직으로 인식되었으며 정성을 많이 들인 지하당조직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영관(책임자)ㆍ전영봉(부책임자) 중심의 울릉도 거점 간첩조직에는 북한을 다녀온 김용득ㆍ홍영태를 중심으로 하여 울릉도 출신으로서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전석봉을 비롯해 교사, 은행원, 종교인, 현역 및 예비역 장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북한 공작금으로 대구, 서울, 울릉도에 인쇄소, 전화 매매상, 부동산중개소 등 각종 위장업체를 만들어놓고 이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활동 거점을 구축하였다. 심지어 울릉도에서는 선박을 구입한 다음 어선으로 위장시켜 공작선으로 활용하였고 서울 봉천동에는 가옥을 구입해 비밀아지트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974년 3월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는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또한 공개ㆍ반공개 형태의 반독재민주회복투쟁위원회, 애국투쟁장교위원회, 야생회, 민주회복국민협의회, 애국투쟁종교위원회와 같은 다양한 대중조직을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특히 현역 및 예비역 영관급장교 20명을 망라시켜 ‘6.5동지회’를 구성하고 여기에서는 2회에 걸쳐 북한에 들어가 공작교육과 훈련을 받고 나온 전영봉을 부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당시 울릉도 거점 간첩망을 대남 지하당조직 가운데 중요한 조직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 조직에 대한 지도에 있어서도 직접 침투와 우회 침투에 의한 지도방식을 배합하여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1974년 3월 초 북한 공작지도부에서 ‘경북과 서울지역 지도부를 건설하고 기층조직과 군부 내 특수조직을 확대할 것’ 등 새로운 공작방침을 전달하기 위해 일본에서 활동하던 우회침투 공작원 이좌영을 국내에 침투시켰다 적발되면서 전영관ㆍ전영봉 등을 중심으로 하는 울릉도 거점 간첩단이 일망타진되었다.
이 사건으로 울릉도와 서울, 부산, 대구, 전북 등 전국 각지에서 47명이 검거되었고, 그 가운데 전영관ㆍ전영봉ㆍ김용득 등 3명이 사형되었으며 20여 명이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중앙정보부가 일본에 사는 이좌영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딴 섬 울릉도에 1972년 2월에 처음으로 다녀갔는데, 또다시 멀고 먼 울릉도를 방문(1974.3)하는 것에 대해 수상하게 여기고 끈질기게 추적함으로써 검거 파괴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울러 울릉도 거점 간첩단사건은 노동당 대남공작부서를 관장하던 김중린이 1975년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겸 정치국위원에서 해임 강등되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도 한다.
한편, 울릉도 거점 간첩단사건의 피고인이었던 이성희 전 전북대학교 교수 등 일부 피해자들은 2006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고, 2010년 위원회가 중앙정보부에 의한 간첩 조작 사실을 인정한 뒤 피해자들은 각자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고 전영관 등 피해자 13명(사망 8명, 생존 5명) 당사자와 가족들이 청구한 재심에 대해 대법원은 무죄ㆍ면소 확정 판결을 했다. 이성희 교수는 2012년 11월 재심에서 간첩혐의가 벗겨지고, 일본유학 시절 방북한 사실에 대해서만 징역3년, 자격정지 3년을 받았다.
그리고 울릉도 거점 간첩단사건이 있은 지 40년이 지난 2014년 2월 서울중앙지법은 당시 울릉도 간첩단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전영관씨(1977년 사형)의 활동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복역한 전씨의 아내 김용희씨(78, 여) 등 울릉도 간첩단 사건 생존자 5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수사기관에 강제 연행돼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폭행과 협박을 당해 공소 사실을 자백했으므로 자백 진술은 증거 능력으로 인정할 수 없고 그 외 유죄로 인정할 만한 다른 증거도 없다"라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2014년 12월 11일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이성희 전 전북대학교 교수의 재심에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울릉도 간첩단사건 재심 첫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그 뒤 대법원 2부(주심 김창석 대법관) 역시 2015년 1월 26일 ‘울릉도 간첩단 사건’으로 처벌받은 김용희(79)씨 등 5명의 재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발표하였다. 2015년 11월 9일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도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박인조(80)씨 등 5명의 재심에서 무죄를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2019년 5월 22일에는 서울남부지법 민사11부(염기창 부장판사)에서 울릉도 거점 간첩단사건으로 사형당하거나 징역을 살고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당사자와 가족 등 7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총 125억 5500여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계속
07.31 재일민단 간부 진두현, 제주 출신 北공작원 고희선에게 포섭
재일교포 간첩 진두현 사건
조총련 활동 아내 박삼술이 1961년 9월 남편 진두현에게 고희선 소개
朴의 아버지와 가족은 10월 북송...진두현, 두 차례 입북해 ‘공작훈련’
1965년 국내 들어온 진두현, 박기래 등 일본으로 초청 고희선에 인계

▲진두현 간첩사건 3개망 일당들이 일망타진 된 뒤 공개된 사진들.
1959년 12월에 시작된 재일교포 북송 사업은 북한이 대남공작을 전개함에 있어 새롭고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일본과 한국에 연고를 가진 많은 재일교포들이 북한으로 들어옴으로써 이들을 기반으로 대남공작을 전개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재일교포를 유학생으로 위장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 등 일본을 거점으로 하여 활발하게 전개된 북한의 대남공작은 바로 그로부터 10여년 전인 1959년에 시작된 재일교포 대규모 북송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공작원을 북송 교포 또는 일본 현지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의 신분으로 위장시켜 일본에 침투하도록 하였으며, 일본에 침투한 북한공작원들은 북송된 재일교포 연고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현지에서 안전하게 활동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대일, 대남공작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에 그대로 남아 있는 북송 재일교포 연고자들을 포섭한 다음 공작선에 태워 북한으로 몰래 데려다 공작교육 및 훈련을 시킨 후 재일공작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북송교포들을 귀국시키거나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북한-일본을 왕래하였던 ‘만경봉호’ 등 북송선은 북한 공작지도부 간부들이 일본에 합법적으로 입국해 현지에서 공작원들을 접선 및 지도하는데 적극 이용되었다.
특히 북한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송교포 및 북한과 연고가 있으면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민단계 교포들을 포섭한 다음 이들을 입북시켜 공작교육 및 훈련을 시킨 후 민단 및 국내에 들여보내 연고자들을 포섭하여 지하당조직을 구축하는 우회침투 전술을 구사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74년 9월 일망타진된 재일민단 간부 진두현 간첩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진두현은 원래 경북 김천 출신으로 서울에서 중앙대학교 재학 중 1949년에 밀항 도일하여 일본 동경 명치대학 정경학부 경제과에 입학해 1952년에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과 함께 같은 대학 법학부 학생이면서 조총련 산하 소학교 교사였던 박삼순과 결혼하였다.
한편 진두현은 대학재학 중 교내 좌익계 학생서클인 ‘조선문화연구회’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초총련계 인물인 박삼순과 결혼한 이후에는 그로부터 조총련과 북한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장인이자 조총련계 간부인 박정술로부터 좌익사상과 북한의 통일정책, 우월성 등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졸업 후에는 민단조직에 적극 참여하여 1960년에 민단 중앙본부 선전국 차장, 1970년에는 민단 중앙본부 사무국 차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74년에는 민단 동경도본부 부단장을 역임하였다.

▲1974년 육군 보안사령관이 재일교포 간첩단 일망타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편, 진두현이 민단에서 간부로 일하던 시기인 1961년 10월 경 장인 박정술과 그 가족 일행이 북송되었는데, 그로부터 3년 후인 1964년 9월 경 처 박삼순의 소개로 재일 북한공작원 고희선을 만나 그로부터 정치사상적 교양을 받고 포섭되었다.
진두현을 포섭한 재일 북한공작원 고희선은 제주도 출신으로 8.15 해방이후 제주지역 남로당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대구10월사건 이후 제주도를 떠나 전남 광주에서 도당간부로 활동하다가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희선은 일본에 밀입국한 후 일본공산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북한이 조직한 재일교포 조직인 조총련에 가담하였으며 조총련 오사카지부에서 활동하던 중 1961년경 북한 공작원에 의해 포섭되었다. 포섭된 뒤 2회(1961년, 1964년)에 걸쳐 북한 공작선을 타고 몰래 입북해 각각 6개월, 3개월 간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고 일본거점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고희선에게 포섭된 진두현도 1965년 9월과 1972년 11월 2회에 걸쳐 북한에 몰래 입북해 당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김중린, 대남총국장 허봉학, 연락부장 유장식 등 고위간부들을 만나 격려를 받고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은 후 귀환하였다. 물론 북송된 장인 등 처가 가족들도 만났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는 진두현이 북한 공작지도부로부터 받은 임무는 ‘민단간부의 합법적인 신분을 이용하여 한국을 드나들면서 연고자들을 포섭할 것, 포섭된 대상들을 적절한 기회에 입북시켜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게 한 후 그들을 핵심으로 하여 통일혁명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확대할 것, 한국군부 내 연고자들을 포섭하여 장차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은 공작임무를 받고 1965년 5월 경 국내에 들어와 중앙대학교 동창관계인 박기래를 포섭하여 지하조직원으로 인입하였으며 그 후 박기래의 추천으로 김태열을 포섭하였다. 그 후 박기래와 김태열을 일본으로 초청해 고희선에게 인계하였고 고희선과 함께 이들이 북한에 들어가도록 적극 권유함으로써 두 사람이 입북을 결심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김태열은 1967년 5월에 일본에서 북한 공작선을 타고 입북하여 약 2주간의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고 일본으로 되돌아온 후 한국에 잠입하였으며, 박기래 역시 1968년 4월 일본에서 공작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2주간의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고 일본을 거쳐 국내에 입국하였다. /계속
08.07 진두현, 육군 군무원 통해 군부 침투...군사쿠데타 기반 구축 시도
1974년 일망타진 '재일교포 간첩사건' 전말
통혁당 서울·광주지역 지도부 구축...군부내 연고자 포섭해 군사정변 준비
전남·광주지역 책임자로 김태열 임명...과거 혁신계 인사들 결집 통일전선

▲재일거류민단 동경도본부 건물의 최근 모습.
이후 진두현도 1972년 11월 중순경 2차로 공작선을 타고 입북하여 12월 초까지 약 2주간 체류하면서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의 격려와 함께 노동당에 입당하고 새로운 공작임무 및 통신연락수단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진두현에게 부여된 구체적인 공작임무는 ‘박기래와 김태현을 중심으로 통일혁명당 서울지역 및 광주지역 지도부를 구축하며 조직을 더욱 확대하여 각종 형태의 공개ㆍ반공개 단체를 조직할 것, 군부 내 연고자들을 포섭하여 조직기반을 구축하고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할 때 군사쿠데타 또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혁명투쟁에 합세할 것’ 등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진두현은 그로부터 1년 후인 1973년 12월 말경 합법적으로 국내에 입국해 먼저 김태열을 만나 전남 광주지역 지도부 책임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구체적인 임무와 함께 무전기를 넘겨주고 북한과의 통신연락체계를 구축해주었다.
그 후 김태열은 황경주, 임춘호, 장사랑 등을 포섭하여 전남지역 통일혁명당 전위조직인 ‘민주수호동지회’를 구성하여 노동분야에는 황경주를 침투시켜 조직기반을 구축하도록 하였으며 임춘호는 과거 혁신계 인사들을 결집시켜 통일전선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 공화당 전남지부 청년분과위원장이었던 장사랑에게는 양심적 민주인사들을 포섭해 공화당 내부에 동조세력을 확대하도록 하였다.
서울지역에서는 박기래를 책임자로 하여 강을성, 박석주 등 3명으로 통일혁명당 서울지역 지도부를 조직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종 친목단체를 구성하여 각계층 인사들을 조직화하도록 하였다.
이 가운데 육군본부 문관(군무원)이었던 강을성에게는 군부에 침투해 각종 군사기밀을 탐지 수집하도록 하는 동시에 연고자들을 포섭하여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강을성은 토요회, 동우회 등 친목단체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기반구축을 시도하였다. 또한 박석주를 경인지역 노동분야 담당책으로 임명한 후 그가 인천지역 방산업체인 대우중공업에 침투하여 노동자들을 포섭한 다음 지하조직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실업가인 박상순, 대학교수인 이영행 등을 포섭하여 경제계, 교육계에 조직기반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한편 진두현은 국내에 들어올 때마다 박기래의 집에서 조직원들과 회의를 열고 공작활동 보고를 청취하였으며 새로운 지시를 하달하는 등 박기래의 집을 활동거점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1974년 4월 15일에는 박기래, 김태열, 강을성, 박석주, 장사랑 등 조직원들을 박기래의 집에 모아놓고 김일성의 63회 생일 축하연을 열었으며 여기에서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위해 축배를 들고 마당에 기념식수까지 하는 방식으로 조직원들을 고무하는 등 비합법활동 원칙을 심하게 위반하는 행동도 서슴없이 하였다.
이와 같이 진두현은 민단 동경도 부단장이라는 합법적인 신분을 이용해 한국에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연고관계를 이용해 군부와 대학교수, 기업인, 노동계, 혁신계 인사들을 포섭해 통일혁명당 지하조직망을 구축하고 군대내 동조자 포섭을 통해 군사기밀 탐지와 군사쿠데타 음모 공작을 추진하다가 1974년 9월 일당과 함께 일망타진되었다.
이 사건의 특징은 진두현이 민단의 고위간부라는 합법 신분을 이용해 한국에 자유롭게 출입하면서도 두 번이나 입북교육을 받았고 한국에서 포섭한 조직원들도 일본을 통해 입북시켜 직접 북한에서 교육을 받게 한 후 이들을 조직의 핵심으로 서울과 전남 지역의 통일혁명당 지도부를 구성한 점이다.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 발족 다음해인 1947년 동경에서 개최한 민중대회 모습.
특히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군속(군무원)을 포섭해 지도성원으로 끌어들이고 군부 내에 지하조직 부식을 위해 암약했으며 각계각층 인사들과 통일전선 형성을 위해서 적극적인 활동을 한 점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진두현 간첩사건이 발생하자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였던 김중린은 일본 거점 공작원 고희선을 불러들여 ‘진두현을 더 이상 남한에 들여보내지 말라’는 자신의 지시를 어겼다가 사고를 내게 했다며 책임을 추궁하였다고 한다. 한편, 진두현 사건 관련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비합법 지하당조직 공작을 공개 합법적인 방법으로 한 것이 큰 잘못’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두현이 검거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김일성이나 김중린이 지적한 문제가 아니었다.
1974년 3월 진두현이 민단 동경도본부 부단장직에 취임한 이이 국내 입국이 빈번하였을 뿐만 아니라 출입국시마다 국내에서의 접촉인물이 증가하고 있고 그 가운데 보안사에서 수사대상으로 관리하는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내사에 돌입하였다.
수사대상이 살고 있던 거주지 인천을 포함하여 민단 및 연고자 관계를 조사하던 중 진두현의 처 박삼순이 과거 조총련계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나 지금은 민단으로 이적하였으며 장인 박정술이 제8차 북송선편으로 북송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진두현과 접촉한 인물들을 파악하였다. 그 결과 진두현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공작원 고희선과 접촉한 사실을 확인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던 중 진두현이 1974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초청 요인으로서 한국의 초대장을 받고 9월 29일 KAL기 편으로 입국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9월 30일 그가 체류하고 있던 뉴서울관광호텔에서 진두현을 체포하고 3개망 18명을 일망타진하였다. /계속
08.14 재일교포 강종헌, 1971년 4월 서울대 의대 입학 통해 국내 침투
서울대 재일교포 모국유학생 강종헌 간첩사건
1973년 입북해 20여일 평양 체류하며 교육·훈련 받아
'서울대 안에 통혁당 지도부 조직' 등 임무 받고 돌아와
학원 내 조직 구축 암약...1975년 일당 15명 일망타진

▲1975년 강종헌 일당 일망타진 과정을 수사기관 관계자가 발표하고 있다.
강종헌은 일본 나라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로, 1967년 4월 오사카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일본 공산당원이었던 담임교사로부터 공산주의 영향을 받았다. 1968년 10월에는 일본인 담임교사의 권유로 일본 내에서 북한을 대표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 산하 조직인 ‘조선문화연구회’를 설립하고 그 회장이 되어 조총련 청년부로부터 각종 북한선전 자료를 제공받아 회원들을 교양하는 한편 교내 문화전에 북한의 발전상을 소개하는 사진전을 개최하는 등 친북 활동을 하였다. 아마 일본 공산당원인 담임교사가 북한 또는 조총련과 밀접히 연계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조선문화연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던 중 1969년 10월 고등학교 선배이자 오사카대학 조선유학생동맹 간부였던 김영일로부터 북한의 발전상 및 김일성 위대성 등에 대한 교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 7월 말경에는 김영일의 소개로 재일 북한공작지도원 기무라(가명)를 만나 본격적인 사상교육을 받게 되었다.
강종헌은 기무라로부터 북한의 대남혁명과 조국통일 방침, 남조선사회의 반인민적 실상, 김일성의 항일투쟁 역사 등에 대한 교육과 ‘유격대 5형제’ 등 북한 선전 영화를 함께 관람하는 과정에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되었으며 1970년 11월 포섭되었다. 당시 강종헌은 ‘남조선혁명을 위해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라’는 기무라 지도원의 권유를 흔쾌히 승낙하고 ‘위대한 수령과 노동당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내용의 맹세문을 제출함으로써 대남공작원으로 포섭되었다.
기무라는 강종헌에게 ‘모국유학생으로 가장해 국내에 침투할 것, 이를 위해 우리말을 열심히 배워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하며 신분을 철저히 위장해 정체가 노출되지 않도록 할 것, 데모 등에 직접 참여하지 말고 사태를 관망하면서 혼란 사태를 유발하도록 배후 조종할 것, 한국의 정치·경제·군사 등 각종 정보를 수집하며 특히 노동자·농민·청년학생들의 반정부활동 동향을 수집해 보고할 것’ 등 여러 가지 공작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와 같은 공작 임무를 받은 강종헌은 모국유학생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1971년 4월 모국유학생으로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방식으로 국내에 침투하였다.
강종헌은 서울대에서 공부하면서 동창생인 서광태와 고려대출신 박종열 등 대학생들을 포섭가능한 인물로 선정하고 이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국내에 침투한 지 2년째 되는 1973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입북하라’는 기무라의 지시에 따라 8월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니가타현 해안에서 북한 침투 요원과 접선한 후 공작선에 승선해 북한에 입북하였다. 청진항에 도착한 강종헌은 마중나온 대남부서 간부들과 함께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이동한 후 특별초대소(안가)에 20여 일 동안 체류하면서 공작원으로서 필요한 각종 교육 및 훈련을 받았다.
강종헌은 평양 초대소에 체류하는 동안 북한 공작지도부 간부들에게 서울에서의 공작활동 결과를 보고한 후 그들의 입회하에 진행된 노동당 입당식에서 노동당원증을 수여받았다. 아울러 북한 공작부서 지도원들로부터 김일성혁명역사, 노동당역사, 정치경제학,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이론, 지하당조직 구축 방법, 군사쿠데타 등 대남공작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아울러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였던 김중린으로부터 고무 격려를 받고 공작 임무도 직접 부여받았다.
당시 강종헌이 받은 공작 임무는 ‘서울대학교 내에 통일혁명당 지도부를 조직할 것, 서울의대 내 사회의학연구회에 침투하여 불만 학생들을 포섭 및 데모 선동 등 배후에서 지도할 것, 서울대에는 서광태를 책임자로 임명하고 기독교계에는 전성환·황승주·황혜헌을 침투시키며 불교계에는 최훈동을, 군부담당으로는 박종열을 각각 임명하도록 할 것, 포섭대상을 학생으로만 한정시키지 말고 노동자·농민 등도 포섭할 것’ 등이었다.
북한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다음 청진에서 북한에 들어갈 때 타고 갔던 공작선을 다시 타고 일본 가와사키 해안으로 상륙하는 방식으로 일본으로 복귀한 강종헌은 재일 공작지도원 기무라(가명)에게 입북 기간 중의 생활, 교육받은 내용, 공작 임무 등을 보고하고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1970년대 서울대 의대 건물 모습.
국내에 들어온 강종헌은 1973년 11월 하순 서울의대 동료인 서광태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 집에 찾아가 자신이 북한에 들어가 노동당에 입당하고 김일성 위대성 등 교육받은 내용을 얘기하면서 ‘우리 합심하여 싸우자’고 권유해 서광태를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1974년 12월 초 일본으로 돌아온 강종헌은 오사카에서 재일 공작지도원 기무라를 만나 서광태를 포섭한 사실과 함께 포섭가능한 대상자로 전성환·황혜헌·최훈동·박종열 등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1975년 8월 중순에는 일본 도쿄 신주쿠 프라자호텔에서 북한 노동당에서 직접 파견되어 온 여성지도원을 접선하여 그에게 그동안의 공작활동 내용을 보고한 후 새로운 공작 임무를 부여받았다.
북한에서 파견된 노동당 여성 공작지도원으로부터 강종헌이 부여받은 공작 임무는 ‘통혁당 서울대학교 지부를 조직할 것, 이를 위해 서광태를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서울대 총책을 맡길 것, 서울대 의과대 내 거점은 전성환에게 맡기되 서광태로 하여금 그를 배후조종하게 할 것, 황혜헌은 기독교계에, 최훈동은 불교계에 활동거점을 두도록 할 것, 박종열을 포섭해 군부조직을 만들게 하되 그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강종훈 본인이 직접 군의관 등 군부침투 대상을 물색할 것, 데모주동자로 제적된 서울대 동양사학과 출신 나병제를 기독교방송에 취직시켜 방송계에 지하조직을 포치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후 서울에 재침투한 강종헌은 서울대생 서광태, 고려대출신 박종열, 서울대 의대 학생들인 이수희·이동석·양남국·황혜헌·전성환·정병제 등을 포섭하여 통혁당 지하조직망을 구축하였다.
또한 서광태를 서울대학교 전체를 담당토록 하고 양남국은 서울대 문리대 책임자로, 박종열을 고려대 책임자로, 황혜헌을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 공작책임자로, 최훈동을 불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 공작책임자로, 서울대 제적생 나병제를 기독교방송에 침투시키고 박종열에게 군부 내 공작을 책임지게 하는 등 임무를 주어 활동하도록 하였다.
강종헌(당시 24세)은 서울대학교에 침투한 후 1975년 12월 초 적발될 때까지 일본과 한국을 20회 이상 왕래하면서 학원 내 통일혁명당 조직구축 공작과 학생투쟁을 배후조종하는 등 암약하다가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벌여온 군 보안사령부에 의해 일당 15명이 체포됨으로써 일망타진되었다. /계속
08.21 일본에 살던 이선실 조카 2명과 또래 北 청소년 2명 ‘바꿔치기’
기상천외한 ‘日 현지 청소년 공작원’ 양성 계획
출신성분 좋은 10대 초반 2명 선발 日에 몰래 침투 시킨뒤 이선실에 인계
北 공산주의자들 목적 달성 위해 천륜도 저버리게 강요하는 ‘잔인함’ 보여

▲정보기관에서 밝힌 대남공작지도총책 이선실이 사용한 증거품.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1970년대에 일본 현지에서 청소년들을 공작원으로 양성하기 위한 공작도 추진하였다.
북한이 청소년들을 일본에 몰래 침투시켜 현지에서 공작원으로 양성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는 사실일 것이다.
정확한 시점은 특정할 수 없지만 아마도 197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북한이 일본 현지에서 공작원으로 양성하려고 몰래 침투시켰던 청소년들의 당시 나이가 10대 초중반이었는데 1990년경 30대 초반이었으니까, 이를 역으로 계산하면 1970년대 초반이라는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북한 청소년들을 일본에 보내 현지에서 공작원으로 양성하기 위한 북한의 공작은 이선실의 일본침투 성공 및 거점 확보로부터 시작된다.
1960년대 후반 공작선을 타고 일본에 침투한 이선실은 오사카에 살고 있던 남동생을 찾아가 그를 포섭한 다음 그의 도움으로 일본 내에 공작 활동 거점 즉 생활 거처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이선실이 부여받은 공작 임무는 일본에 살고 있는 동생들을 포섭한 후 거점을 확보하고 일본에서 살면서 재일교포 또는 일본인들을 포섭하여 한국에 침투시키는 동시에 한국인의 신분으로 세탁하여 합법적으로 국내에 침투하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임무를 받고 일본에 침투한 후 오사카에 살고 있던 동생을 포섭하고 그의 도움으로 활동 거점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한 이선실은 계속해서 다음 공작 임무인 재일교포 및 일본인에 대한 포섭공작과 한국인의 신분으로 세탁하기 위한 대상자 물색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북한 공작지도부에서 이선실과 그의 동생에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제안을 하게 된다.
당시 이선실이 포섭한 남동생에게는 10대 초중반의 아들 2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몰래 북한으로 데려오고 이들 대신 북한에 있는 또래 청소년 2명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선실에게 보낸 후 이선실이 이들을 데리고 일본에서 살면서 현지에서 공작원으로 양성한다는 계획이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천륜까지도 저버리도록 강요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진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기상천외한 계획은 북한 공작지도부와 이선실 및 그의 남동생의 동의 및 치밀한 준비를 거쳐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먼저 일본 현지에 보내 공작원으로 양성할 10대 초반의 청소년 2명을 선발하는 작업부터 추진하였다.
공작원들은 통상적으로 출신성분이 좋고 건강 상태와 용모, 학업성적 등에서 뛰어난 대상들을 선발한다. 출신성분이란 본인이 태어날 당시 부친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었고 노동당에 입당했느냐 여부이다. 결국 출신성분이 좋다는 것은 본인이 태어날 당시 부친이 노동당원인 동시에 직업으로서는 군인 또는 간부, 노동자, 농민 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 상태 여부는 정밀 신체검사에서 아무런 이상 없이 완벽해야 하며, 용모는 뛰어난 미남이나 미녀는 아닐지라도 호감 가는 인물이어야 한다. 학업성적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북한 서열 22위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당시 이선실.
북한 공작지도부 간부들은 위와 같은 공작원 선발기준에 적합한 청소년들이 가장 많은 ‘만경대혁명학원’을 찾아갔다.
알려진 바와 같이 김일성의 고향인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있는 만경대혁명학원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빨치산 유자녀들을 간부 후비로 양성하기 위해 광복 직후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직접적으로 빨치산 또는 항일투쟁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자녀들이 줄어들면서 6.25 전쟁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우고 전사하거나 대남공작 과정에 희생된 사람들의 자녀들을 받아들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공작원선발 기준에 적합한 대상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만경대혁명학원에 찾아간 북한 공작지도부 간부들은 거기에서 대남 침투 및 공작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된 남파요원의 자녀들 가운데 10대 초반 남학생 2명을 최종적으로 후비 공작원으로 선발하였다. 그런 후 수개월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일본어교육과 함께 사상교육, 보안교육 등 공작원으로서 필요한 기본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같은 침투준비를 마친 북한의 공작원후보 10대 청소년 2명은 침투조의 안내를 받아 북한에서 공작선을 타고 일본에 몰래 침투한 다음 현지에서 이선실에게 인계되었다.
동시에 이선실의 재일교포 조카 2명은 부모가 몰래 먹인 수면제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 무의식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영문도 모른 채 공작선에 실려 북한으로 ‘운송’되었다.
이렇게 공작원 후보로 선정된 북한 청소년 2명과 재일교포 청소년 2명의 ‘인간 바꾸어 치기 공작’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 청소년들을 바꾸어 치기 한 다음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먼저 깊이 잠든 상태에서 영문도 모른 채 공작선에 태워진 상태에서 북한으로 향하던 중 잠에서 깨어난 이선실의 조카 2명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여기가 어디냐며 아빠 엄마를 찾고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느냐? 나는 가기 싫은데 왜 북한으로 가야 하느냐?’며 부르짖으며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공작선에 타고 있던 북한 공작지도부 간부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아무리 반발하고 항의를 해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공작선에 실려 북한으로 들어간 이선실의 재일교포 조카 2명은 또다시 이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들 대신 일본으로 침투한 후보 공작원 소년 2명이 다니고 있던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졌다.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다음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해 졸업하고 북한 정부 기관 간부로 임명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80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침투해 1990년 가을까지 한국에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북한으로 복귀한 이선실을 만난 조카 2명은 이선실에게 자신들을 왜 북한으로 데려왔느냐며 울며불며 항의하는 등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로 인해 이선실과 조카들의 관계가 한동안 얼어붙기도 했다는 전언이 있다. 물론 나중에는 조카들도 자신들이 북한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이에 따라 이선실과의 관계도 회복되는 등 원만해졌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상황으로 볼 때 그들이 북한으로 보내진 이후 이선실이 여러 번 북한을 다녀왔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 한 번도 조카들을 만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이선실은 1980년 영주귀국 형식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전인 1979년 말 공작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적이 있는데, 결국 이때도 조카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08.28 후계자 김정일, 대남공작 기관 장악 위해 간부급 대폭 '물갈이'
대남공작 무대 등장한 후계자
1972년 후계자로 내정된 ‘왕자’ 김정일 노동당 핵심부서 장악
인사부터 공작전술·결과 등 철저한 검열...‘유일지도체제’ 구축

▲김일성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은 노동당 핵심부서인 중앙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장악한 데 이어 대남공작 부서를 장악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생전의 김일성(오른쪽)과 김정일.
희생된 남파 요원의 자녀로서 어린 나이에 일본 예비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일본 현지에 침투한 10대의 북한 청소년 2명은 이선실과 같이 생활하면서 오사카 지역에 있는 조총련계 학교에 입학해 공부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에게도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들이 당시 일본에서 한창 유행하고 있던 파친코에 빠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북한에서 배운 사상교육 내용이 모두 거짓이라며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선실의 말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한 것이었다.
이들은 우선 조총련계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다음 이선실과 생활하는 집으로 곧바로 오지 않고 항상 오락실에 들러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파친코 오락을 하고 집에도 늦게 들어오는 등 일탈행위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를 지적하는 이선실과는 충돌하기 일쑤였다.
특히 자신들은 북한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거리에 거지가 많고 주민들은 헐벗고 굶주린다는 것, 경제도 발전하지 못하고 판자집만 많다는 식으로 배웠는데 일본에 와서 생활해보니 모두 거짓이었고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실제로 일본 오사카에 와서 생활해보니 길거리에 거지는 물론 판자집도 없고 오히려 먹을 것도 풍부하고 고층빌딩만 있으며 북한에는 고위간부 집에만 TV가 있는데 일본에는 집집마다 TV가 있어 매일 TV를 시청하면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이들의 반론이었다.
이선실은 이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한편으로는 지적을 하고 다른 편으로는 설득도 해보았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심한 반발과 마찰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결국 이선실은 이들을 일본 현지에서 공작원으로 양성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대남공작지도부에 강력하게 어필하였고, 북한에서는 이선실의 의견을 수용해 2명의 10대 청소년들을 공작선에 태워 북한으로 복귀시켰다.
이로써 10대 청소년들을 일본에 보내 현지에서 공작원으로 양성하려던 북한 공작지도부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북한으로 돌아온 청소년 2명은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약간의 비판은 받았지만 별다른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다시 만경대혁명학원에 복귀해 학업을 마치고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자신들의 모교인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돌아와 청년동맹 위원장 및 교수를 역임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전언이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에 비해 1970년대 대남공작 성과가 상대적으로 저조했는데, 이는 대남 및 국제정세가 북한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과 함께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이 대남공작 기관을 장악하고 공작부서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한 것과도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1972년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은 당내 기반을 다지기 위해 먼저 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중앙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장악한 데 이어 대남공작 부서를 장악하는 작업도 진행하였다.
물론 그전에도 김정일이 ‘왕자’의 권한으로 대남부문에 음으로 양으로 관여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업무적으로 직접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인 김중린과 대남부문 고위 간부들이 ‘도덕적 의무감’ 또는 왕자에게 잘 보이려고 김정일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정도였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김정일은 1970년대 중반부터 대남공작 부문을 직접 장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중앙당 조직지도부의 집중검열을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김정일이 대남부문을 장악하는 방식은 다른 기관을 상대로 자신의 체제를 구축할 때 했던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먼저 대남공작 전반에 대한 집중검열(특별감사)을 실시해 해당 조직의 인사, 조직, 업무 등에서의 약점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다음에는 검열 결과에 대한 총화(결산)를 통해 인사와 조직, 구체적 활동에서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조직과 구성원들에게 두려움과 불안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런 후 조직장악의 최후 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권을 휘둘러 지휘부를 교체하고 조직 전반을 본인(김정일)에게 충성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뜯어고치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는 체계, 단일 지휘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유일지도체제’ 구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1975년 6월 당내 대남공작 기관인 중앙당 연락부와 문화부, 조사부에 대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및 비서국 명의의 검열(특별감사)을 시작하는 것으로 대남공작 부문에 대한 장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중앙당 대남공작 부서에 대한 검열은 후계자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중앙당 조직지도부 검열 1과와 검열 2과 간부 30여 명이 동원되어 1975년 6월~10월 중순까지 6개월간 진행되었다.
원래는 검열 기간을 3~4개월 정도로 예상하고 시작하였는데, 검열에 투입된 간부들이 대남공작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공작 관련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전문가들로부터 배우면서 검열을 진행했기 때문에 기간이 6개월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전언이 있다.
검열 대상은 대남공작을 직접 담당 수행하고 있는 중앙당 연락부와 문화부, 조사부, 그리고 산하 공작원양성기관인 중앙당 정치학교(695군부대)와 남조선연구소, 각 지역에 있는 작전부 산하 연락소들, 일본과 동유럽 등에 설치된 해외 공작거점 등이었다.
검열내용은 간부사업(인사) 관련 문제로부터 각 시기별 공작전술과 그에 따른 공작내용 및 결과 등 전반적인 것이었다.
먼저 인사와 관련해서는 정확한 인사원칙을 가지고 그에 맞게 인사를 했는지, 간부들을 적재적소에 선발ㆍ배치했는지를 검열하였다. 구체적으로 대남공작 부서 간부들에 대한 선발ㆍ배치를 인사원칙대로 했는지, 또 대남공작원들을 선발원칙과 기준에 맞게 제대로 선발하고 교육과 훈련을 실전과 같이 실시했느냐 하는 점을 중점적으로 검열하였다.
다음으로 시기별 대남공작 전술과 그에 따른 공작 전개 과정 및 결과 등에 대한 검열도 실시하였다.
각 시기별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먼저 광복 이후~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간에 진행되었던 박헌영 및 남로당 사건의 후유증과 여독 청산 작업 결과에 대해 검열하였다. 또한 1953년 5월 중앙당 연락부를 명칭만 그대로 두고 새로 만드는 수준의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개편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전술과 방침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대남공작 전개와 그 실행 결과는 어떠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1960년 4.19 이후 대남공작 전술과 그에 따른 공작 결과, 5.16 이후 1971년까지 대남공작 전개와 결과 등이었다.
내용 측면에서는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대남공작 부문에 하달한 김일성의 교시가 철저히 집행되었는지, 지하당조직 건설을 당 정치위원회의 결정과 방침대로 진행했는지, 일본 조총련을 통한 대남공작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유럽을 비롯한 해외공작거점 운영 및 우회침투 공작은 잘 진행되었느냐 등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계속
[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