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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5/ <41> 권위주의 사회 권력의 힘으로 아버지 문제 해결 - <50> 잠꼬대하며 기밀 ‘줄줄’… 공작조장 또 교체

상림은내고향 2025. 5. 12. 11:40

[평양에서 왔습니다] 5/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스카이데일리 2025

 

04.22

<41> 권위주의 사회 권력의 힘으로 아버지 문제 해결

할머니 돌아가신 것도 모르는 채

간부 현실체험이 끝난 다음 나는 부서의 승인을 받아 두 번째 휴가를 갔다. 이때는 황해남도 당위원회에서 특별히 볼보 승용차를 내주어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아마도 첫 휴가 때 도당에서 차를 보장해 주지 않아 고생했다는 나의 말을 담당 지도원이 기억하고 있다가 도당에 강조했던 모양이다.

 

사실 2년 전인 1986년 초에 첫 휴가를 갔을 때 할머니가 몹시 위중한 것을 보고 왔기 때문에 그다음 해인 1987년 초에 다시 휴가를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안남도 평성에서 간부 현실체험을 할 때 보안 규칙을 어기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도당 초대소로 불러서 만난 것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할머니께서 1986 514일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할머니의 임종 소식도 모르고 지켜보지도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무덤에라도 찾아뵙고 싶어 간부 현실체험을 마치고 돌아온 후 휴가를 신청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할머니 무덤 앞에서 눈물 쏟아

막상 휴가를 받아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동생들이 반겨 맞아 주었지만 당장 문밖까지 달려 나오셨을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너무도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애지중지 키워 주신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남동생과 함께 할머니 무덤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의 무덤은 6·25 전쟁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무덤과 함께 조상들을 모신 선산이 있는 내 고향 광탄리에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과산리에서 광탄리까지 지름길을 따라 가면 10km 정도 되는 거리였다. 이용할 교통수단이 부족해 아침에 남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 산소에 찾아가 술을 한 잔 부어 놓고 절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평생을 손자들인 나와 형제들을 업어 키우느라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무엇 하나 보답해 드린 것이 없어 눈물이 쏟아졌던 것 같다.

오해로 시작돼 해프닝으로 끝난 결혼 약속

두 번째 휴가 때는 앞에서도 짧게 이야기했지만 첫 휴가 때 잠깐 만나 대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자 동창생과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간 지 3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지난번 휴가 때 동창생 순옥이와 어떤 약속을 하고 갔느냐?고 물었다. 어떤 약속도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러냐고 반문하자 “순옥이와 앞으로 결혼하자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냐?”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런 약속을 했으면 부모에게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섭섭한 표정까지 짓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첫 휴가를 다녀가고 얼마 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모교의 중학교 교사로 임명받아 근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부모가 평양에 가 있는 당비서 아들과 자기 딸이 결혼을 약속했다는 소문을 내고 다니며 어머니를 만날 때면 벌써 사돈이 다 된 것처럼 대하더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인 내가 결혼과 관련된 중대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확한 사실관계도 모르면서 무작정 부정하기도 난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편지조차 마음대로 주고받지 못하는 곳에 있으니 확인해 볼 방법이 없어 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2003년 평양 시민들이 추석인 9월11일 가족과 함께 조상의 묘소를 찾아 술을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2년 전 첫 휴가 때 그와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다 헤어지며 나눴던 말이 생각났다. 헤어질 당시 그가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없겠다며 서운한 감정을 표시해 별생각 없이 지나가는 말로 “앞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내 대답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 마치 내가 자기와 결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기 부모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자 그의 부모는 평양에 사는 당비서 아들과 자기 딸이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그때 나누었던 대화 내용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 말하며 그런 중요한 문제를 부모님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처리하는 그런 아들은 아니니 마음 놓으시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 후 어머니는 순옥이의 부모를 만나 나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전달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을 들은 그들이 나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 보겠다며 집으로 찾아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직속 부하에게 모함당한 아버지

두 번째 휴가 때는 우리 집안에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신상과 관련된 문제였다.

 

휴가 기간을 사흘 남겨 놓은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평소와 달리 말씀이 없고 어머니 또한 분명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참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어머니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몇 번 망설이다가 그만두려고 했는데 내가 물어보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아버지가 지금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써 놓았던 여러 장의 편지를 내놓았다.

 

편지에는 아버지의 직속 부하인 초급 당 부(副)비서 등 몇몇 사람이 아버지를 모함하려고 했던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서 편지를 썼다며 그 편지를 도당(道黨)이나 중앙당에 보낼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아버지가 출신 성분이 나쁜 사람들의 문제를 잘못 처리해 보위부와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고, 그 문제로 상급 기관인 군당에 불려 들어가 추궁을 당하고 경고까지 받은 상태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 큰소리 한번 안 내고 언제나 따뜻한 인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말보다는 솔선수범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지역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던 아버지를 모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증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정말 당장이라도 잡아다 박살을 내 주고 싶을 정도로 분하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버지 문제를 권력으로 해결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내가 편지를 가져가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이야기한 다음 휴가를 마치고 초대소가 있는 평양으로 돌아올 때 그 편지를 챙겨서 출발했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평양까지 가지고 와 담당 부부장이나 과장 등 중앙당 간부들에게 직접 전달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큰일을 할 사람이 사소한 문제를 들고 돌아다니며 간부들에게 매달린다고 하는 비난이 돌아올 것 같아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해주에 도착한 다음 도당에서부터 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해주역까지 따라 나왔던 도당 11과 부부장에게 열차에 오르기 직전 그 편지를 전해 주며 말했다.

 

사실 이 편지를 평양에 갖고 올라가 중앙당 연락부 담당 과장이나 부부장 동지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대남 부문 가족들의 생활 지원을 책임진 도당 11과가 욕을 먹을 것 같아 이렇게 부부장 동지에게 드리니 잘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양 초대소에 올라가서는 휴가 기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묻는 간부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내가 집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버지 문제는 그 후 약 1개월이 지나 모두 해결되었다. 아버지가 받은 경고가 해제되었고, 아버지를 모함하려던 초급 당 부비서는 다른 곳으로 전근시켜 아버지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물론 아버지 문제가 해결되어 좋기는 했지만 이것은 북한에서 노동당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공작조 조원이 되다

두 번째 휴가를 다녀온 후 4월 말경 또다시 다른 공작원과 공작조를 편성했다. 이때 나와 같은 공작조로 편성된 사람은 양강도 보천보가 고향인 김명걸이었다.

 

김명걸은 당시 나보다 서너 살 많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키가 170cm가량 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본인 말에 의하면 원래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다가 부모님이 너무 아파 병간호를 위해 대학을 자퇴한 후 군() 사로청 지도원을 하다가 공작원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양성반 3년제를 졸업하고 노동 단련을 마친 상태라고 했다. 연락부에서는 김명걸이 사회에서 사로청 지도원을 해 보았기 때문에 간부 현실체험은 생략했다.

 

어쨌든 그가 1986년 가을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했으니 당연히 나보다 1년 이상 후배였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입학 연도를 따지면 나보다 2년 후배였다. 그러나 담당부서인 중앙당 연락부에서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사회에서 사로청 간부를 했던 경력을 내세워 그를 공작조 조장으로 임명했고 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또다시 공작조의 조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북대천 9호 초대소에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있던 북대천 10호 초대소로부터 약 300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공작조가 편성되면서 내가 조장 김명걸이 생활하고 있던 9호 초대소로 이사 갔다. 그로부터 약 2개월 동안 9호 초대소에서 생활했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초등학교 때 체험학습 신청서를 저만큼 많이 제출한 친구가 드물었을 정도로 아버지는 저희와 많은 시간을 보내 주셨어요. 하지만 또 반대로 어린 저와 동생에게 엄격한 규칙들도 만들어 놓으셔서 어떨 땐 그걸 피해 보려고 잔머리 굴리다 더 무서운 엄마에게 걸려 엄청 혼난 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된 후 제 자식들이 자유에 대해 물어 온다면 어떻게 정의를 해 주어야 할까요? 아버지 삶의 절반은 자유가 없는 곳에서, 나머지 절반은 저희 아버지로서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오셨는데, 저에겐 아버지가 정의 내려 주시는 자유가 그래서 더 의미 있고 소중합니다.

 

아버지 : 내가 살아오면서 자유라는 단어처럼 소중하게 생각한 건 없는 것 같아. 네 말처럼 나는 자유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북한 땅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고, 인생의 후반기는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살았으니까.

 

일반적으로 자유는 양심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지금 생각하는 자유는 사람 또는 사회로부터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자유라고 하는 철학적·정치학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가 쉽지는 않아. 그렇지만 북한 김정은 체제는 생존권을 비롯한 인간의 기초적인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하는 사회이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시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사회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야.

 

<42> 적구화 교육 통과… 완전 ‘한국 사람’으로 개조

또다시 받게 된 종합판정 훈련

공작조를 편성한 지 1개월가량 되어 나와 김명걸은 종합판정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종합판정 훈련은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한 후 처음으로 함경북도 청진과 나남 지역에서 했던 비(非)합법 훈련과 반(反)합법 훈련, 훈련 종반에 진행한 100리 강행군과 사격·태권도 등과 같은 방법으로 했다. 훈련 지역이 평안남도 양덕과 함경남도 함흥으로 바뀌었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명걸이 종합판정 훈련에 처음으로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종합판정 훈련은 공작원 개개인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공작조가 편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공작원들이 각각 개인별로 참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김명걸은 처음으로 종합판정 훈련에 참가하는 데다 자신감도 없었는지 공작조 차원에서 훈련에 참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나와 같이 행동하게 되었다. 원래 모든 종목의 훈련을 혼자서 해내야 하는 종합판정 훈련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김명걸은 어떻게 하든 쉽게 훈련하려고 잔머리를 썼던 것이다.

종합판정 훈련이 처음인 조장과 함께 악천후 속 산악 행군

우리가 비합법 훈련을 했던 평안남도 양덕군 일대의 산은 북한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곳인데, 험한 산악지역에서의 비합법 훈련 마지막 날에 일이 발생했다. 원래 계획에는 훈련 마지막 날 밤에 산악 행군으로 양덕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아침 양덕역에서 열차를 타고 반합법 훈련 장소인 함흥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밤 많은 비와 짙은 안개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다 손전등에 들어가는 건전지까지 다 떨어져 지도를 전혀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산이 너무 험해 자칫 벼랑에서 떨어질 위험도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정해진 코스로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냥 다음 날 아침까지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양덕에서 열차를 타고 다음 훈련 장소인 함흥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훈련 담당 지도원들이 정해 준 코스를 따라 가든지, 아니면 훈련 코스를 주동적으로 변경시켜 일단 목적지까지 이동한 후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훈련을 차질 없이 실행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전자를 택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숙영을 하고 날이 밝은 다음 움직이면 될 것이지만, 후자를 택한다면 가던 방향을 바꾸어 산에서 내려간 뒤 밤새도록 걸어야 하므로 육체적으로는 힘이 드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전자보다 후자를 택하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한 방안이었다. 당시 훈련 일정은 하루 간격으로 여러 개의 공작조가 릴레이로 출발해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처럼 한다면 마지막 날 훈련은 물론 다음 공작조들까지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자를 택한다면 마지막 훈련은 약간의 차질이 생기더라도 다음 훈련이나 다른 공작조들은 모두 차질 없이 종합판정 훈련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며 조장으로서 빨리 결심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끝내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우리는 산꼭대기에서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양덕읍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양덕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훈련담당 지도원들은 정해 준 행군 코스를 이탈하더라도 날이 밝기 전에 왔어야 다음 훈련도 차질 없이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신분 노출하지 않고 모르는 여성의 신상 털기

그 후 함흥 시내에서 접선 및 무인포스트 매몰·발굴, 증명서 없이 열차승차권을 구매해 열차로 이동하거나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가 숙박하는 등의 반합법 훈련을 실시했다. 물론 나는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라 비교적 쉽게 훈련 내용을 소화해 냈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신분을 전혀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정해 주는 전혀 낯선 사람의 신원 정보를 파악해 오는 훈련이었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이 훈련을 할 때는 제약 조건이 있는데 본인의 신분을 공작원은 물론 당 간부나 보위부 또는 안전부(경찰) 요원으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함흥시 성천강 구역 당위원회 청사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훈련 담당 지도원이 만나고 돌려보내는 사람의 신상을 파악해 오는 것이었다.

 

내가 함흥시 성천강구역 당위원회 청사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훈련 담당 지도원이 50대 아주머니를 만나고 돌려보내면서 눈짓으로 그를 따라가 신상을 파악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신호대로 나는 아주머니를 미행해 그가 가는 곳까지 몰래 따라갔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부터 알아야 그의 신상을 파악할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2024년 3월1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인민군 항공육전병부대의 훈련을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6일 보도했다. 이 날 공수 훈련 도중 추락사고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함흥지함공장의 당비서 아주머니

 20분가량 아주머니가 가는 곳까지 따라가니 마지막에 한 공장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정문 앞에서 뛰어놀던 어린 학생들에게 이곳이 무슨 공장인가를 물었는데 그중 한 아이가 함흥지함공장’, 즉 종이박스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어서 내가 또다시 방금 들어간 아주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옆에 있던 아이가 당비서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단 내가 신원을 확인해야 할 임의의 여성이 함흥지함공장 초급당비서라는 정도까지 파악한 후 구체적인 신상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나는 사로청 간부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까지 사로청 간부를 역임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어떤 대화를 해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로청 지도원·노동청년’ 기자로 위장, 임무 수행

그래서 나는 일단 사로청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 금성정치대학을 졸업한 후 함경남도 사로청위원회에 배치받은 지도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함흥지함공장 사로청위원장을 만나 사로청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적당한 틈을 봐서 당비서의 신상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으로 그 아주머니의 성명과 나이·집주소 등을 알아냈다.

 

그런 다음 북한의 대표적인 일간지 중의 하나인 노동청년(현재는 청년전위)’ 기자로 위장해 취재를 구실로 당비서 아주머니의 집에 찾아가 그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부인인 당비서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훈련이 끝난 후 초대소에서 과장·지도원 등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훈련 결과를 결산했는데, 나는 훈련을 비교적 잘했다고 평가받았다.

적구화 교육… 검증된 공작원들의 마지막 과정

대학 졸업 후 3~4년간 기초교육 단계로부터 노동 단련 및 간부현실 체험과 초대소에서의 사상이론 및 실무 교육, 그리고 종합판정 훈련과 수영·잠수·통신 등 여러 단계의 어렵고 힘든 교육과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검증된 공작원들이 마지막으로 받는 것이 적구화교육이다.

 

한국 언론에서는 공작원들이 받는 적구화 교육을 이남화 교육이라고 하는데, 북한 공작부서에서는 대남 공작원들이 적지(敵地)인 남한의 말과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교육이라는 의미에서 적구화(敵區化) 교육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마디로 북한 사람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교육이 바로 적구화 교육이다.

 

사실 공작원에게 있어서 모든 교육·훈련 단계가 검증 과정의 연속이지만 공작원 교육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적구화 교육 단계까지 왔다고 해서 검증(테스트)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는 없다. 굳이 표현한다면 적구화 교육까지 받으면 일단 공작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내가 거친 여러 단계의 검증 과정 중 기초교육은 그 첫 단계로 앞으로 공작원으로서 임무를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해 담당 부서 입장에서 직접 판단하는 일종의 검증 성격을 띤 단계이고 이후 이어지는 나머지 과정 역시 실천을 통한 검증 단계이다.

 

따라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공작원양성반 과정을 이수하든 전투원양성반 과정을 졸업하든, 이와 같은 기초교육 과정을 마친 후 공작원으로 임명된 전체 인원 가운데 적구화 교육 과정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3~4년 동안 80% 이상의 공작원들이 제대(전역)해 집으로 가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적구화 교육을 받는 인원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

 

실제로 나와 같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전투원양성반 교육 과정을 졸업하고 연락부 공작원으로 임명되었던 인원은 총 6명이었고, 같은 시기에 공작원 교육 과정을 졸업한 공작원이 5, 여기에 1년 선후배까지 합치면 대략 30명 정도였지만 2~4년 사이에 대부분 제대(전역)하고 마지막까지 공작원으로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3·4명에 불과했다. 이 중 1995년 당시 실제로 남파된 공작원은 나를 포함해서 2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10%도 안 되는 인원이 최종적으로 남아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물론 대남 공작을 하는 부서마다 구체적인 임무가 다르고 연락부 내에서도 해당 과들의 특성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검증 형식과 방법이 동일할 수는 없다.

 

필자가 여기에 언급한 것들은 중앙당 연락부(현재 문화교류국)에서도 대남공작전담과를 기준으로 얘기한 것이고, 앞서 내가 거친 검증 과정과 기간 역시 같은 과의 공작원이라고 해서 같은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나는 여러 계기를 통해 대남공작담당과의 과장·부부장 등 간부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키워 내려는 간부들의 의도로 남들이 받지 않은 교육 과정을 거친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같은 교육 과정이라도 상대적으로 더 힘들게 넘기기도 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아버지께서 저와 동생에게 지난 삶에 대해 우리에게 직접 말해 주시기 전, 이미 발간된 아버지의 자서전을 엄마가 저희에게 건네주시며 아버지의 이야기이니 먼저 읽어 보고 남은 궁금한 것들은 아버지께 직접 듣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의 삶이 반드시 진실로 남아 있어야 할 대한민국 분단 역사의 하나라는 것을 그 책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면서 자식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아버지 삶을 알려야겠다고 따로 계획하셨던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일이 발생해서도 안 되고 또 앞으로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자식들로부터 아버지의 삶이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신 적은 없으셨나요?

 

아버지 : 내가 너희 엄마와 결혼하고 너희들을 낳아 키우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너희들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아버지인 나의 존재와 과거에 대해 알려줄까에 대해 엄마와 함께 고민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어.

 

물론 북한을 떠나온 탈북인들 중에는 자식들에게 일부러 자기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숨기고 사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해. 그러다가 자식들이 성인이 돼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 좋고, 아니면 그냥 방치해 둔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나와 너희 엄마는 너희들에게 아버지인 나의 존재와 과거에 대해 반드시 알려 주는 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식에 대한 도리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어. 다만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떤 식으로 너희들에게 나의 존재와 과거를 알려 줄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고민이고 숙제였어.

 

나와 너희 엄마는 너희들이 너무 어렸을 때 내 존재와 과거를 알려 주면 괜히 위축되거나 자신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사춘기 때 알려 주면 방황하거나 엇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

 

결국 너희들이 너무 어릴 때는 알려 주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정도 자라서 스스로 생각할 나이가 되면 알려 주자고 엄마와 결론을 내렸지. 그러던 중 내가 2013년 자서전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출간할 때 엄마와 상의해 너희들이 중학교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아버지를 이해할 나이가 됐다고 판단하고 자연스럽게 너희들에게 알려 주되, 본인인 나보다는 엄마가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엄마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한 거지.

 

<43> 남조선 사람 되기… 외국어보다 어려운 서울말

적구화 교육이란 한국인화 교육

공작원들이 공작 활동 지역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임무 수행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이것은 제3국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해외 공작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조선, 즉 대한민국을 공작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 대남 공작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남 공작원이었던 나에게도 남조선 사람이 되기 위한 적구화 교육, 즉 한국인화 교육은 중요한 의무이자 과제였다.

 

수십 년 동안 분단되어 살아오면서 남북 간에 언어는 물론 문화와 풍습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이는 엄청난 문화적 차이로 나타났다. 북한의 언어와 문화가 상대적으로 토속적이면서 러시아와 중국 등 사회주의권이나 북방의 영향을 받았다면 남한의 언어는 외래어가 많고 서양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공작원들에 대한 적구화 교육을 실시할 때 외래어를 따로 암기하도록 했다.

 

사실 나를 비롯한 새세대 공작원들은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이론적으로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런 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본 적 없는 북한의 학자들이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 보고 분석한 자료에 기초해서 작성한 일반상식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남북 간 언어와 생활풍습 등 문화적 차이가 상당히 심각해 남한을 공작활동 무대로 하는 대남 공작원들은 남한의 말과 생활 풍습·행동 방식·사회 환경 등을 제대로 모르고서는 공작임무 수행은커녕 남한 지역에서 한 발짝도 옮겨 놓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적구(敵區)에 침투하기 위한 한국인화 교육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작원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북한 출신 새세대 청년들이 대남 공작원 집단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서 과거 남한 출신 공작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던 적구화 교육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따라서 북한 출신 공작원들에게 있어서 적구화 교육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언론에서는 대남 공작원들의 적구화 교육을 이남화 교육이라고 표현하는데, 오히려 한국인화 교육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남파됐다”고 하지만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적구에 간다” 혹은 “적구에 침투한다”고 하므로 적구화(敵區化) 교육이라는 단어 자체가 말해 주듯이 공작원들을 적 지역 사람, 즉 한국 사람처럼 만드는 교육인 것이다. 그래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적구화 교육이란 용어를 공식 사용한다.

남조선 사람이 되어라

이러한 적구화 교육은 1980년대 초에는 기간도 6개월 쯤으로 하고, 그 수준도 간단한 대화나 며칠간 임시로 생활할 수 있는 정도로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교육 기간을 8개월~1년으로 늘리고 교육 내용도 남한에서 중·장기적으로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는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남한 현지인들의 의심을 받지 않게 하고, 생활방식이나 남한의 문화에 대해서도 최대한 숙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때 대남공작부서에서 공작원들에게 요구했던 적구화 교육 수준은 남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일반인이 알고 있는 수준의 상식을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보통 18개월 이상의 적구화 교육을 받는다고 하며, 그 수준도 대학생 정도의 상식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남한 사람보다 남한을 더 잘 아는 대남 공작원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나는 1987년 가을부터 1988년 여름까지 8개월 동안 사상교육도 체력 훈련도 잠시 중단한 채 오직 적구화 교육에 집중했다.

한국 표준어 서울말을 배워라

적구화 교육에서 기본은 어디까지나 언어이다. 남한의 생활방식이나 풍습·사회 환경 등 문화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몰라도 어느 정도 용서가 될 수 있지만 북한 말을 그대로 쓰거나 북한 지역에서만 쓰는 사투리가 나오면 절대로 용서될 수 없다.

 

말하자면 남한의 문화나 상식 같은 것을 모를 경우에는 책을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언어에 문제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북한 사투리를 그대로 쓰다가는 금방 노출·신고되어 남한에서의 공작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만큼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2015년 3월27일 북한 조선중앙TV는 국가정보원의 지령을 받은 남한 간첩 2명을 정탐·모략 혐의로 체포했다며 이들의 기자회견을 녹화 방영했다. 북한은 체포된 최춘길 씨가 남한 드라마를 불법적으로 유포하려 했다면서 남한 드라마 일부 장면을 노출시켰다. 연합뉴스

서울말·경상도말·전라도말 중 하나에 통달해야

한국말은 남한의 여러 지방에서 쓰고 있는 서울말 또는 표준어, 경상도말, 전라도 말 등 세 지역 언어 가운데 공작원이 속한 부서의 요구에 따라 특정 지역의 언어를 선택해서 배운다. 각 지역 언어를 가르치는 강사는 해당 지역에서 살다가 월북한 사람들이거나 강제로 납북된 남한 사람, 즉 한국인들이었다.

 

남한 출신 강사들은 공작원들과 하루 24시간 초대소에서 함께 지내며 해당 지역의 언어와 함께 춤과 노래까지 남한 사회 전반에 대한 학습을 책임지고 지도했다. 교육 방법은 강사들이 만든 교재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처럼 강사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따라 하고 녹음해서 들어 보면서 수정하는 방식과 TV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아나운서·탤런트들의 말을 반복해서 따라 하는 방식으로 했다.

 

나는 공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말(표준어)을 배우게 되었다. 공작원들이 어느 지역 말을 배우느냐는 전적으로 담당 부부장 등 간부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나 역시 스스로 서울말을 배우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공작부서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서울말 강사는 용산 출신 박 선생

당시 나를 담당한 서울말 강사는 박 선생이었다. 박 선생은 서울 용산구 후암동 출신으로 당시 명문고인 용산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공군에서 통역 장교로 근무한 뒤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유학하다 월북한 엘리트였다.

 

나는 박 선생으로부터 두음법칙 등 한국말의 일반적 특징에 대한 강의를 듣고 그에 기초해 서울말 교재를 보면서 그의 발음을 직접 따라 하고, 그것을 녹음해 들어 보면서 수정·보완하는 방법으로 서울말을 배웠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숙련된 다음에는 TV에 나오는 아나운서·탤런트 가운데 말하는 스타일이 비슷한 대상의 말을 반복해서 따라 하는 방법으로 했다.

외국어보다 더 어려웠던 서울말

서울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같은 조선말(한국말)’인데도 남과 북에서 쓰는 어휘와 발음·억양 등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근사하다는 단어를 북한에서는 비슷하거나 유사하다라는 의미로만 사용하지만 서울에서는 그러한 본뜻 이외에 아름답다·멋지다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20년 이상 써 오면서 완전히 몸에 밴 북한말을 버리고 같은 조선말이면서 발음과 억양만 약간 다른 서울말을 하려다 보니 오히려 전혀 모르는 외국어를 처음부터 새로 배우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한두 마디 흉내내는 정도야 잠깐이면 할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으로 익히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외국어도 6개월 정도 집중적으로 배우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데, 같은 나라의 언어를 8개월씩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더욱이 발음과 억양을 고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쓰던 북한의 고유한 사투리를 버리고 해당 지방의 고유한 언어(방언)와 외래어까지 새로 배워야 하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남한 TV를 보면서 아나운서나 배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해되지도 않았다. 발음과 억양이 달라서 귀에 들리지 않았고, 그나마 알아들은 것도 외래어나 서울에서만 쓰는 말이어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물론 이런 어려움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 문제는 남한 사람들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듣고 그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들었다.

황해도 말과 비슷한 서울말, 그래서 조금은 쉬웠던 서울말 배우기

나는 고향이 황해도였기 때문에 내가 어려서 쓰던 말이 서울·경기 지역 말과 억양과 발음이 비슷해 그런대로 조금 나은 편이었다. 또한 내가 살아온 세월이 다른 공작원들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20년 남짓한 기간이었고, 영어도 어느 정도 배웠기 때문에 나이도 많고 고향이 함경도이거나 평안도인 다른 공작원들보다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당시 나와 함께 적구화 교육을 받은 조장 김명걸은 고향이 양강도(과거의 함경도)여서 억양이 강했다. 그런 관계로 부드러운 서울말을 배우느라 무척 고생했다.

 

또한 1990년 내가 처음으로 남파되었을 때 공작조 조장으로 함께 활동했던 권중현의 경우에는 40대 말의 나이에 적구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40년 이상 써 온 말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말을 다시 배워 쓰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게다가 고향이 평안도인 그가 상대적으로 억양이 강한 경상도 말을 배우려다 보니 적구화 교육을 두 번씩 반복해서 받으며 고생했다는 얘기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고졸 학력의 남한 일반인 수준의 소양 갖추기

적구화 교육은 단순히 남한에서 쓰는 말을 배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말을 배우는 목적은 공작 임무 수행을 위한 것이며, 이 공작 임무는 남한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할 때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말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말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작원들은 한국말 학습과 함께 남한의 정치·경제·군사·문화·교육 등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와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과 더불어 남한 사람들의 생활방식·풍습 등에 대해서도 강의를 듣고 각종 자료를 보면서 연구한다.

 

또한 배운 것에 기초해서 여러 가지 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 상황에 따라 실제로 말과 행동을 해 보는 실습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함으로써 남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일반인 수준의 소양을 갖추는 것이 목표였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아버지는 북한에서 어떤 스포츠 활동을 하며 학교 생활을 하셨나요? 한국에서처럼 다양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북한에도 체육 시간은 따로 있을 거 같아요. 영어로 된 말들을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스포츠라는 말은 어떤 말로 대신해서 사용하는지도 궁금해요.

 

아버지 : 북한에서는 스포츠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한자어라고 할 수 있는 체육이라는 용어를 써. 북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은 그렇게 많지 않아. 물론 평양이나 대도시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하겠지만, 그것도 경제 사정 때문에 학교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은 한정되어 있어. 아이들이 가장 쉽게 많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축구와 농구·육상·기계체조, 그리고 태권도 정도일 거야.

 

내가 1970년대에 학교 다닐 때는 축구공이 없어서 축구도 못 했고, 기껏 한다는 운동이 철봉·평행봉 정도였어. 그때는 태권도 종목도 북한에는 도입되지 않았을 때였거든. 물론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과외 교육시설인 학생소년궁전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엘리트 양성을 위해 자기 지역에서 잘할 수 있는 종목의 스포츠 클럽(북한에서는 일본식 표현인 구락부라는 표현을 사용)을 운영하면서 각 스포츠 종목에서 특별히 잘하는 아이들을 선발해 유도나 레슬링·축구·농구·배구·사격·예술체조 같은 종목의 엘리트들을 양성하고 있기는 해.

 

<44> 적구화 강사는 남한 출신… 정치권도 손금 보듯

난생처음 본 남조선 드라마

적구화, 즉 한국인화를 위해 사용하는 자료는 여러 가지다. 주로 사용하는 것은 남한의 전반적인 사회 실상과 생활방식·풍습 등에 대해 월북자들과 남한 연구자들이 쓴 각종 서적과 참고서 등인데 이와 함께 남한 TV에서 방영하는 각종 프로그램을 녹화한 테이프와 일간지·주간지·월간지 및 남한에서 출판된 소설과 관광자료 등 각종 서적이 있다.

 

나는 적구화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한국 TV 드라마를 보았다. 당시 대표적으로 교육에 활용된 프로그램은 KBS MBC에서 방영했던 메인 뉴스와 드라마·각종 쇼·스포츠 프로그램 등이었다. 지금도 그때 시청했던 드라마 중에 사랑과 야망’ ‘도시의 얼굴’ ‘서울뚝배기’ ‘사랑이 뭐길래’ ‘서울의 달’ ‘숙희’ ‘여울목 등과 그 후에 봤던 모래시계를 비롯해 일일 및 주말 드라마 제목이 생각난다.

무삭제본으로 남조선 TV 프로그램 섭렵

그리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등의 오락 프로그램, 각종 다큐멘터리, 가요대제전’ ‘10대 가수 가요제’ ‘강변가요제’ ‘가요무대 등의 가요 프로그램과 야구ㆍ복싱 등 각종 스포츠 녹화본도 교육 자료로 활용되었다.

 

남한 TV 녹화는 대외연락부 산하 314연락소에서 하고 있는데, 적구화 교육을 받는 공작원 교육용 녹화 테이프는 보통 실제 방영일보다 2~3일 정도 늦게 전달된다. 녹화 테이프는 뉴스같은 데서 김일성·김정일이나 북한 체제를 비난하는 내용만 삭제하고 오락물 등 나머지는 하나도 삭제하지 않고 무삭제로 며칠 분씩 편집해 넘겨주었다.

 

그 후에는 강사가 지금 저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KBS 류근찬, MBC 백지연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으로 테스트도 진행되었다.

대중가요 100곡 이상은 불러야 공작원이다

한편, 강사들은 남조선 대중가요 100곡을 부르고 유명 가수 이름을 줄줄 외워야 공작원 자격이 있다며 한국 대중가요가 녹음된 테이프를 되풀이해서 틀어 주었다.

 

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등을 비롯해 배호·윤항기·남진·나훈아·서유석·혜은이·주현미·이은하·이선희 등 1960~80년대 대표적인 가수들의 이름과 히트곡을 외워서 불렀다. 당시 적구화 초대소에는 일본 가라오케 시설이 있어서 실제로 가라오케에 카세트를 넣고 음악을 틀어 놓은 다음 노래를 부르며 연습할 기회도 가졌지만, 이상하게도 팝송은 학습 목록에 없었다.

6대 일간지·주간지·월간지로 남조선 정세 파악

당시 6대 일간지였던 조선일보·한국일보·서울신문·경향신문·동아일보·중앙일보도 구독하며 남한 시사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주간조선과 주간경향·선데이서울·주간한국 등 주간지, 신동아·월간조선·월간중앙···낚시춘추 등 월간지도 남한 정세와 사회상을 파악하기 위한 교육에 활용되었다.

 

위에 언급한 내용 가운데는 1980년대 말에 방영되었거나 출판된 것이 아닌 것들도 있다. 적구화 교육은 정해진 기간에만 하는 게 아니라 일반 초대소 생활 기간에는 물론 남파되기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본 것들을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북한에는 없는 야구… TV 보며 선수 이름도 외워

또한 정치인과 10대 재벌 그룹 회장의 이름을 외우고, 가전제품·화장품·의류·신발류·식료품은 어떤 회사 제품이 유명한지 등도 암기했다. 이 밖에 스포츠·군대·대학·백화점·재래시장·숙박업소·교통수단·술집·카바레 등 남한 사람으로 위장하는 데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익혔다. 북한에는 없는 야구의 경우는 TV를 보며 야구 규칙을 습득하며 이만수·선동열·최동원·김성한 등 당시 유명했던 선수들 이름도 외웠다.

 

이와 함께 한국에서 출판된 각종 연감과 최인호의 고래사냥’, 황석영의 꼬방동네 사람들’ 같은 소설도 읽었다. 한국의 여로’ ‘뿌리 깊은 나무 등 관광 자료·서울시 도로 교통지도 등 내가 북한에서 적구화 교육 등 공작원 생활을 하는 동안 본 자료를 여기에 다 나열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 북한 조선중앙통신사가 발행하는 참고신문. 북한에서 간부들에게 보급하는 대표적인 대남 관련 자료로는 ‘참고통신’ ‘자료통신’ ‘참고신문’ ‘남조선 조사연구 자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참고신문’은 중·하위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배포되며 그 내용은 위의 ‘참고·자료통신’에서 주요 내용만 발췌해서 격일간으로 발행하는 일종의 신문이다. 연합뉴스·스카이데일리 

참고통신 자료통신 … 간부용 자료

북한에서 간부들에게 보급하는 대표적인 대남 관련 자료로는 참고통신 자료통신’ ‘참고신문 남조선 조사연구 자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참고통신은 남한의 방송 내용 가운데 정치·사회 및 사건·사고 등 일부 중요한 내용만을 녹취해 A4 용지에 프린트한 인쇄물이다.

 

자료통신은 남한 방송의 시사 해설이나 세계 각국의 방송 내용을 그대로 녹취해서 일자별로 묶어 참고통신 자료처럼 A4 용지에 프린트한 인쇄물이다. ‘참고통신 자료통신은 모두 조선중앙통신사에서 발행하는데 대남부서 간부들과 군당 책임비서 이상의 고위간부들에게만 배포된다.

한국 정치권 동정을 손금 보듯이

또한 중앙당 부부장 이상 간부들에게만 배포되는 자료로 ‘8호통신 ‘9호통신 등의 제목을 붙인 것도 있다. 이 자료들은 한국의 대통령과 주요 인물 등 정치권 동정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출판물 역시 조선중앙통신사에서 발행하며, 공작원이라면 모두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참고신문은 중·하위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배포되며 그 내용은 위의 참고·자료통신에서 주요 내용만 발췌해서 격일간으로 발행하는 일종의 신문이다. ‘남조선 참고신문은 대외연락부 산하 314연락소에서 남한의 주요 일간지들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스크랩한 다음 그것들을 편집해 만든 짜깁기 신문이다. 이 신문은 2~3일에 한 부씩 발행하며 주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재학생들이나 대남부서에서 일하는 일부 사람만 보게 되어 있다.

 

남조선 조사연구자료 남조선 조사자료 등은 314연락소와 통일전선부 산하 남조선 연구소에서 남한의 1차 자료를 분석, 가공한 자료이기 때문에 적구화를 위한 자료로는 사용되지 않고 남한 정세를 연구하거나 침투준비를 할 때 활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적구화교육에는 북한 내부에서 만들어진 자료와 함께 강사들이 특별히 만든 서울말 교재와 상용 어휘집·외래어 사전 등이 이용되고 있다.

 

적구화 교육은 공작원들이 남한에서 현지 주민들과 어울려 대화하고 생활해야 하므로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남한에 사는 일반인이 알고 있는 내용을 모두 다룬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익힐뿐 아니라 실제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실습을 하는 등 완전 습득을 목표로 한다.

공작원 세대교체로 남한 출신 필요해져

공작원들의 적구화 교육을 담당한 강사들은 모두 남한 출신이다. 그중에는 자진해서 월북한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납북자였다. 나는 그것을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 대남공작부서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한마디로 공작원 세대교체라고 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남북통일이 비교적 단기간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하에 6·25전쟁 전후로 월북한 수많은 남한 출신 가운데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공작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남한의 말과 문화를 잘 아는 남한 출신을 공작원으로 활용하면 교육 시간도 절약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북한 출신은 배제하고 남한 출신들만 공작원으로 활용했다. 다시 말하면 장기전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1970년대를 지나면서 나이가 많아 고도의 육체적 훈련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어렵고 힘든 대남공작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작원들에 대한 세대교체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된 것이다.

남로당·빨치산 2세 데려다 공작원으로 양성하라

이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고심하던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손쉬운 방법으로 남한 사람들을 공작원으로 쓰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게 된다. 순수 북한 출신을 선발해 공작원으로 양성하는 경우 남한의 말과 문화를 잘 몰라 그것을 가르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현지인, 즉 남한 사람은 공작에 필요한 교육과 훈련만 시키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공작원으로 양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과거에 남로당원이었거나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자녀를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월북시킨 다음 공작 교육과 훈련을 시켜 대를 이어 남조선 혁명가로 양성해 다시 남파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아버지께 처음 술을 배웠던 날이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생활하실 당시 그곳에서도 음주는 자유로웠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버지도 저처럼 할아버지로부터 술을 배우신 건지 궁금해요. , 지금도 생각나는 북한만의 전통주가 있나요?

 

아버지 : 나는 어린 나이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술을 배운 적은 없어.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는 대학에 가기 전에는 드러내 놓고 술을 마시지 않는 문화가 있었어.

 

그런데 내가 졸업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는 일반 사회대학과 달리 특별히 설날(1.1), 김정일 생일(2.16), 김일성 생일(4.15), 노동당창건 기념일(10.10), 이렇게 1년에 네 번 연회(파티)를 베풀어 주는데 이때마다 1인당 맥주 2병씩을 식탁에 올려 놔 줘. 그리고 파티에는 대학교 총장·부총장·학과장·교수·지도원 등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모두 참석해 같이 어울려 맥주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음주문화를 접하게 돼.

 

이렇게 대학교 총장부터 교직원들이 전부 참석하는 파티에서 학생들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거나 싸울 수는 없잖아. 그래서 결국 친구들 대부분이 조용히 안주와 함께 술을 마신 다음에는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침실로 돌아가 잠을 자는 방식으로 당시 대학의 술 문화가 형성되었고, 내가 술을 마시는 습관도 그때 생긴 거지.

 

대학을 졸업한 후 공작원으로 일하면서는 대학교 총장보다도 직급이 높은 장관·차관들과 술을 마시니까 더더욱 조심스럽게 술을 마시게 되었고, 집에 가서는 아버지와 같이 마시니까 또 조심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술 마시는 습관이 만들어지다 보니 지금도 나는 술 마실 때 조용히 마시는 편이야.

 

그리고 북한에는 각 시·군마다 자기 지역의 물로, 자기 지역에서 나오는 특산물을 가지고 술을 만들기 때문에 술 종류가 많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시·군 단위에서 만드는 술은 대체로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만 배급하고 다른 지역에는 유통시키지 않아서 어느 지역 술이 좋은지 모르는 게 사실이야. 다만, 평양에 있는 이름난 술 제조업체에서 만드는 술이나 일부 지역에서 옛날부터 만들어왔던 술 가운데 괜찮은 술은 노동당 고위 간부들이 가져다 마시는데, 그런 술 종류를 명주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

 

노동당 고위 간부들이 주로 많이 마시는 술 가운데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인삼주(개성)·대평곡주(남포 강서 대평)·용성술(평양시 용성)·백로주(자강도 강계)·인풍술(자강도 강계)·양덕술(평남도 양덕)·동양술(평남도 양덕)·들쭉술(양강도 혜산) 정도야.

 

이 가운데 양강도에서 나오는 들쭉술을 남북 관계가 좋을 때 일부 장사꾼들이 남한에 들여와 판매한 적이 있는데, 그 들쭉술은 평양에서 내가 마셨던 오리지널 들쭉술이 아니었어.

 

<45> 공작원 세대교체… 충원 위해 현지인 납치도

공작원 보충 위한 무작위 납치

다른 한편으로는 남로당이나 빨치산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납치하여 공작원 교육 및 훈련을 이수하도록 한 다음 다시 남파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1970년대 중·후반 과거 남로당 관계자들이나 빨치산 자녀들이 행방불명되고 수많은 남한 어선이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귀환하면서 일부 어부들이 북한에 억류된 채 돌아오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납북되었던 어부들은 실제로 공작 교육과 훈련을 받은 다음 남파되었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이재근 씨 같은 납북 어부가 본인이 북한에 있을 때 공작원 양성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한 것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현지인 납치해 적구화 교육 강사로

중요한 것은 1970년대에 발생한 고등학생 납치나 일본인 납치 등도 바로 이러한 북한의 공작원 세대교체에 따른 대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납치당한 현지인들이 남파 간첩 또는 대남 침투를 위한 공작원 적구화 교육에 강사로 동원된 아픈 역사다.

 

내가 잘 아는 김관섭 연락부 지도원은 1970년대에 고교생 납치 등에 직접 가담했던 인물로, 1995년 당시 대외연락부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대에 침투 요원으로 활동할 당시 현지인 납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화국영웅 칭호와 함께 김일성의 명함이 새겨진 스위스제 고급 금시계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를 직접 받고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에 대한 납치를 상부에서 주도한 인물이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중앙당 조사부의 부장 임호군과 부부장 이완기·강해룡 같은 인물이다. 이들은 한국의 유명한 영화감독 신상옥과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최은희 등을 납치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북한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 내가 아는 분들을 소개하려 한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밝혀 둘 것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 정확한 신상을 밝힐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모르는 건 알려고 하지 마라

대남공작부서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불문율인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신상이나 나와 관계없는 업무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해서 물어봐서도 안 되고 절대로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소개하려고 하는 남한 출신의 적구화 교육 강사들의 신상에 대해 정확하게 밝힐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불문율과도 같은 원칙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의 본명·납북 경위 등은 보안상 비밀에 해당되기 때문에 알고 있으면서 얘기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신상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작원은 보안이 첫째 신상 공개하지 않고 가명 사용

공작원들이 늘 생명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비밀, 즉 보안이다. 그래서 대남공작부서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가명부터 부여해 준 다음 비밀을 어떻게 준수할 것이냐에 대한 비밀 교육(보안 교육)을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사항이 본인의 신상이나 다른 업무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신상 등 업무와 직접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어보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남공작부서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받는 교육이며 모두가 알고 있는 기초 상식이다.

 

따라서 수년 동안 같은 공작조에서 조장과 조원으로 생활하는 공작원들의 경우에도 본인이 자진해서 신상을 얘기하면 몰라도 절대로 먼저 다른 공작원의 신상을 물어보지 않는다. 만일 다른 공작원에게 본명이 무엇이며 고향이 어디냐는 등의 개인 신상에 대해 물어볼 경우 오히려 물어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물어보더라도 질문을 받은 공작원은 본인의 정확한 신분을 절대로 얘기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상례이다.

 

이러한 내부의 규정 때문에 나 역시 적구화 교육 당시 강사들에게 신상을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일부 강사들의 원래 성씨나 이름까지 여기에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히도 그들이 직접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거나, 남한에 검거된 후 공개적인 출판물에 소개된 정보를 보고 기억해 냈던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 1970년대 후반 전북 군산 선유도에서 고교생이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된 사건이 있었다. 통일부는 2024년 5월24일 군산 선유도에서 이들의 송환을 기원하는 송환기원비 제막식을 갖고 납북자들이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남한 출신 적구화 교육 강사는 대부분 자진 월북자

적구화 교육을 담당한 남한 출신 강사들은 그들의 생김새나 출신 지역이 다양한 것만큼이나 입북하게 된 경위도 다양하다. 하지만 휴전선이나 해상 또는 제3국을 거쳐 자진 월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남한 사회 전반에 대한 학습을 책임지고 공작원들을 지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강사들 가운데는 고기잡이 중 NLL(북방한계선)을 넘거나 공해상에서 조업 중 북측 경비정에 나포된 뒤 납북되어 지금까지 북한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남한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여름에 해안이나 섬으로 피서갔다가 납치된 고등학생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씨 성을 가진 부산 출신 강사가 있었다. 그는 1970년대까지 대남공작 일선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1980년대 말 그의 나이가 50대 후반 정도였으니 아마도 6·25를 전후해 월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구화 교육 당시 그는 부산의 지리와 문화 등 지역적인 특성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다.

 

경상도 말 강사를 했던 최 선생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전직 남파 공작원이었다. 나와 함께 1차로 남한에 침투했던 권중현에게 경상도 말을 가르쳤던 강사가 바로 최 선생이다.

 

언젠가 권중현으로부터 최 선생의 원래 성씨가 가 아니고 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북한으로 들어가 대남 공작원이 된 좌익 2

최 선생은 항상 자신의 고향인 포항을 자랑하며 여름철에 바다에서 수영하며 놀았던 기억을 되새기곤 했다. 부친이 남로당과 빨치산에 참여했으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남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를 북한으로 들여보낸 것은 부친의 동료들이라고 한다. 그에게 대를 이어 남조선혁명을 하라며 의도적으로 월북시킨 것이다. 원래 1~2년 정도 북한에서 공작 교육 및 훈련을 받도록 한 다음 다시 남한에 침투시켜 북한이 부여한 공작 임무를 수행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이와 같은 계획이 실행에 옮겨져 최 선생이 실제로 남한에 침투한 적도 있다. 한번은 그가 남파되었을 때 고향인 포항에 가서 어머니와 누나가 사는 모습을 먼 곳에서 보기만 하고 돌아왔다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이 끝난 후 적어도 한 번 이상 남파된 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한번은 해상을 통해 남한으로 침투하던 중 엄청난 파도를 만나 북한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생겼는데, 그때 그는 배에서 넘어져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고 한다. 그 후유증으로 대남 침투는 물론 공작원 활동을 더는 지속할 수 없게 되어 결국 후배들을 가르치는 적구화 교육 강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서울말 강사는 프랑스 유학파 서울 샌님

서울말(표준어) 교육을 전담했던 박 선생과 하 선생은 모두 서울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 박 선생은 나를 적구화 교육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직접 담당해서 가르친 분이다. 박 선생은 전형적인 서울 토박이로서 적구화 교육 강사들 중에서도 가장 학력이 높았다. 당시 그는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독일어·스페인어·일어 등 5개 국어를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정말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성격이 부드럽고 온화하며 겸손한 데다 아는 것도 많아 박사로 불리기도 했다. 전형적인 서울 사람, 서울 샌님이었다.

 

그는 서울 용산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에 입학해 졸업했으며 군에 입대해서는 공군본부에서 프랑스어 통역 장교로 근무했다고 한다. 군 제대 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있는 종합대학에서 유학하다가 1970년대 말에 월북했다. 4·19때 외국어대학 1학년이었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1960년에 입학한 것으로 보이며 1940년이나 1941년생쯤 될 것이다. 그가 어떤 이유로 월북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른다.

5개 국어 ‘술술 미술·역사에도 정통했던 박 선생

그러나 그의 원래 이름이 오태식이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 정부 기관에 근무할 때 외국어대학 출신 동료가 가지고 있던 외국어대학 총동창회 명부를 보니 60학번 가운데 오태식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아마도 60학번 오태식이 박 선생일 것이다.

 

박 선생은 당시 공작원들의 적구화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평양에 있는 조선 중앙역사박물관과 미술박물관에 가서 자료를 정리하고 학자들의 연구를 돕는 자문위원 활동도 활발히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박물관에 갔을 때 그곳 연구사들과 해설 강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친절하게 대해 주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미술박물관에서 신사임당의 가지 그림 등을 보면서 신나게 설명해 주던 그의 해맑은 미소가 잊혀 지지 않는다.

수심에 찬 모습, 과묵했던 하선생은 납북 어부 출신

서울말을 가르치는 강사 중에는 하 선생이라 불리는 이도 있었는데, 그는 당시 30대 후반으로 키가 175cm 정도로 큰 편이었다.

 

내 생각에는 언행이나 지식 정도로 보아 대학은 졸업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에게서 서울말을 배우면서 친해졌다.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성격이었고 항상 수심에 찬 모습으로 자기 신상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아 그의 고향이 정말 서울인지 아니면 경기도인지조차 모른다. 다만 서울말을 가르쳤기 때문에 서울 사람 또는 경기도나 인천 출신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남한에서 살면서 2005 2 2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오대양 61·62호 선원 24명과 휘영37호 선원 12명 등 납북 어부 36명이 묘향산 관광을 기념해 찍은 사진을 보다가 그들 가운데 있는 하 선생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가 납북 어부 출신이라는 사실을 중앙일보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그가 묘향산에 가서 사진을 찍었을 때가 1970년대 초반이고 내가 그를 만난 시점이 1987년이었으므로 10년 이상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모습은 여전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대한민국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경제 활동을 해서 모은 돈을 저축을 하든 투자하든 내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어요. 말하자면 저축이나 부동산 매입 등의 방법으로 개인이 재산을 모으거나 증식하는 게 자유롭지요.

 

아버지께는 어이없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사적 소유가 허용되지 않는 북한에서도 일을 해서 번 돈을 개인이 전부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요.

 

아버지 : 북한도 직장이나 회사에서 일을 해서 번 돈은 전부 개인이 소유할 수 있어. 다만, 북한은 사적 소유가 허용되지 않고 모든 것이 국가 소유로 되어 있는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토지와 건물·주택을 비롯한 부동산과 철도와 전기·기계 등 중요 산업 및 생산 수단은 일체 개인이 소유할 수 없어.

 

어떤 사람들은 북한에서도 돈을 주고 아파트나 단독주택을 사고팔고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이런 말은 북한 체제를 정확히 모르고 하는 말이야.

 

앞서 얘기했듯이 북한은 사적 소유가 일체 허용되지 않고 모든 것은 국가가 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사고파는 것은 아파트나 주택의 소유권이 아니라 거주권 또는 이용권이라고 보면 돼.

 
 

북한 주민들이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건 텃밭에서 생산한 소량의 농산물, 일하고 받은 돈,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토끼·염소·양 같은 동물, 그리고 자기 돈으로 산 가구와 생활필수품 등이라고 보면 정확할 거야.

 
 

<46> 고교생·어부도 납치해 대남 공작에 투입

북한 땅의 경상도 사나이들

적구화 교육 당시 경상도 말과 문화를 가르친 경상도 사나이가 여러 명 있었다. 그중 내가 아는 사람은 차 선생과 권 선생·공 선생, 남파 공작원 출신의 한 선생과 최 선생 등이다.

 

차 선생은 경상도 사투리 중에서도 경상남도 말을 가르쳤다. 대남공작부서 내부의 원칙에 비추어 분명 씨라는 건 가명의 성씨일 텐데, 나는 그의 본래 성씨를 모른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175~180cm의 큰 키에 몸무게도 80kg 이상으로 거구였다. 원래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던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부산에서도 산 적이 있다고 한다.

남파되면 딸을 찾아봐 달라던 차 선생

그에게서 경상도 말을 배웠던 조장 권중현은 그가 어선 선장이었으며 그와 함께 배를 탔던 선원도 북한에서 살고 있다고 한 적이 있다. 권중현의 말대로 그가 바다 사나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상당히 크고 성격도 급했으며 쌍욕도 아주 잘했다. 정확히 그가 어떻게 북한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권중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다가 납북된 후 북한에 머물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자진해서 북한에 남게 되었는지 아니면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북한에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권중현과 내가 1990 5월 함께 남파될 때 권중현에게 찾아와 자기 딸을 찾아봐 달라고 조용히 부탁한 적이 있다. 나와 권중현이 이선실과 접선한 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살 때 권중현은 차 선생의 딸이 서울 강남 지역 어디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수첩에 메모해 온 전화번호를 가지고 찾아보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운동권 출신의 권 선생 “반정부 투쟁의 발원지는 대구”

권 선생은 대구 사람으로 170cm 중반의 비교적 큰 키에 마른 체구였으며 1987년 당시 50대 중반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195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던 진보당 청년 조직에도 관여한 적이 있다고 하며 광산을 경영하다가 부도가 났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그는 남한에서 반정부 투쟁의 발원지는 언제나 대구였다는 점을 늘 자랑하고 다녔으며 대구 경산에는 사과가 많고 따라서 미인도 많다는 말을 항상 했다. 또한 “한국에 살 때 만난 아내가 수재였다. 그래서 아이들도 수재였다.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3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였다”며 자기는 다윈의 진화론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공 선생은 1987년 당시 40대로 160~165cm 정도의 비교적 작고 왜소한 편이었으며 경상북도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거의 아는 게 없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전투원양성반 동기생 가운데 일본 공작과에 배치받았던 조성렬이 일본어를 배운 뒤 다시 공 선생으로부터 경북 사투리를 배웠던 관계로 그 친구와 함께 한 번 본 게 전부라서 얼굴 생김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라도 출신의 춤 강사 황 선생

황 선생은 적구화 교육 당시 내가 만난 유일한 전라도 사람이다. 그는 1987년 당시 30대 중반이었고 1980년대 초반 상선을 타고 제3국에 나갔다가 그곳에 있는 북한공관으로 귀순했다고 한다. 나중에 우연히 북한에서 발행한 잡지에 실린 황 선생 관련 기사와 사진을 보았는데 북한으로 입북할 때 그의 본명은 하영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본인 말로는 남한에 있을 때 가수 조용필을 따라다니며 밴드부에서 드럼을 쳤다고 항상 자랑하고 다녔다. 그의 노래 실력과 춤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아서는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정확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남파 공작원은 서울말과 경상도 말이 필수

흥미로운 점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남파 공작원 가운데 70% 이상이 경상도 말을 배웠고 나머지 30% 정도가 서울말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경상도가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85~87 2년간 남한에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다 복귀한 2인 공작조가 한국에서 생활하기에 가장 편한 언어가 서울말, 즉 표준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비율이 역전되어 70% 이상이 서울말을 배우게 되었고 나머지 30% 정도가 경상도 말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전라도 말을 배우는 공작원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전라도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전라도 말을 배우는 공작원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황 선생은 적구화 교육을 받고 있던 공작원들에게 언어보다는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아직도 매일 아침 그가 내가 생활하던 초대소에 찾아와 커피에 달걀노른자를 타서 모닝커피를 함께 만들어 마시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 2002년 10월16일 인천 팔미도 인근 해상에서 납북자 가족들이 납북자 생사 확인과 송환을 축구하는 선상 시위 중 납북자 중 고인이 된 이들의 명복을 빌며 꽃을 던지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군 관련 강사 20대 후반의 마 선생

적구화 교육 기간 나를 가르쳤던 강사 중에는 고교생으로 납북된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나는 검거될 때까지 나를 가르친 그들이 납북된 고교생들인지 몰랐다.

 

그 가운데 마 선생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당시 20대 후반에 미혼이었으며 공작원들에게 한국군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국군의 창설부터 군 구조와 각급 부대 현황, 병영 생활, 입대 및 제대 절차, 총검술 훈련 등 군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강의와 실습 등의 방법으로 가르쳤다.

 

그는 당시 내게 충청남도 천안이 고향이며 형제가 많다는 것, 그중에서 본인은 막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심성이 착한 데다 머리도 좋은 편이었고 6·25 전쟁을 겪은 세대는 더더욱 아니어서 그의 입북 경위가 대단히 궁금했다. 적구화 교육을 받는 동안 그와 비교적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지만 대남공작기관의 비밀 준수 원칙, 즉 보안 수칙 때문에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러한 나의 궁금증은 남한에 와서야 풀리게 되었다.

마 선생은 납북된 천안농고 이명우

이후 검거되어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던 당시 수사관이 앨범을 들고 와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앨범에는 1970년대 중·후반 서해와 남해에 있는 해수욕장 또는 섬에 피서 갔다가 납치된 고등학교 학생들의 사진도 있었는데 찬찬히 보니 일부는 내가 적구화 교육을 받는 과정에 만났던 강사들이었다.

 

그중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적구화 교육 강사 마 선생이었다. 그런데 사진 밑에는 천안농고 이명우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마 선생 이명우라는 이름의 천안농고 출신 납북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명우는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8년 친구 홍근표와 함께 전남 홍도에 피서갔다가 같이 납치되었으며 그 후 그의 부모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명우는 적구화 교육 강사로 있으면서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와 결혼해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그 후 북한 최고의 경제 간부 양성기관인 인민경제대학에 입학해 공부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충청북도 진천경찰서에 강연하러 갔다가 이명우의 친형을 만나 그의 안부를 전해 주기도 했다.

환경관 강사는 이명우와 함께 납북된 홍 선생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홍 선생 역시 이명우와 함께 납북된 사람이다.

 

그는 천안 상고 출신으로 친구 이명우와 함께 1978년 여름 홍도에 피서갔다가 납북된 홍근표다. 홍근표는 납북된 이후 이명우와 함께 대외연락부 소속 강사로 공작원들을 직접 가르치다가 1980년대 후반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임명되어 이명우와 헤어졌다.

 

나는 적구화 교육 막바지에 서울말 강사인 박 선생, 이명우 등과 함께 적구화 환경관에 실습 갔다가 홍근표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내가 보았던 홍근표는 밝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슈퍼마켓 담당 강사 이민교, 납북된 고교생 출신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슈퍼마켓을 담당한 이 선생도 있었다. 실습을 위해 적구화 환경관에 가서 그를 몇 번 만나 대화를 해 보니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서울이나 경기도 출신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직접 물어서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에 대해서도 검거된 후 알게 되었는데, 그는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7년 여름 홍도 해수욕장에 갔다가 납치된 이민교라는 이름의 고등학생이었다.

이발소·여관 담당 강사는 이민교와 함께 납북된 최승민

이 외에도 적구화 환경관에서 이발소와 여관 등을 담당하고 있던 강사도 이민교와 연배가 비슷했는데, 앨범 속의 사진을 보니 이민교와 함께 홍도에 놀러 갔다가 납치된 최승민일 가능성이 높다.

 

납북자 관련 얘기가 나온 김에 초대소에서 목격한 일본인 강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일본인 강사가 납북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20-2호, 120-21호 초대소는 일본어 교육 전문 초대소

적구화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평양시 순안구역 초대소 지역에는 대일공작과의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초대소도 있었다. 내가 적구화 교육을 받은 초대소 지역엔 전부 현지화 교육을 위한 초대소가 있었는데 그런 곳들에선 중국어·일본어·스페인어·영어 등의 외국어와 각국의 문화를 가르쳤다.

 

그중 120-2호 초대소와 120-21호 초대소는 일본어 교육 전문 초대소다. 2호와 21호 초대소에선 일본인 강사가 대일공작과 공작원과 함께 숙식하면서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친다. 말하자면 한국인 강사가 대남 공작원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적구화 교육을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일본인화 교육을 하는 것이다.

 

120-2호 초대소에는 일본말을 가르치는 다나카라는 이름의 일본인 남자가 있었다. 나는 이런 얘기를 일본공작과 공작원으로 그에게 일본말을 배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동창 조성렬로부터 들었다.

일본인 납북자 강사

조성렬은 1989년경에 공작원을 그만두고 제대했다. 그는 일본어를 배운 다음 남한 적구화 강사인 공 선생으로부터 경상북도 말을 배웠다. 그때 나와 만났는데, 그가 일본인 강사의 부인도 일본인이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일본인 강사와 그의 부인이 어떻게 북한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시 그가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이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일본인이 자진해서 월북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납북자로 추정된다.

 

내가 순안초대소 지역에 있는 2층짜리 특별초대소에서 생활할 때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다나카라는 일본인이 우산을 쓴 공작원과 함께 걸어가는 옆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공작과에 있던 내 친구와 얘기하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 170cm 정도의 키에 보통 체격이었고 안경을 쓰고 머리를 약간 기르고 있었는데 미남형이었다.

 

120-21호 초대소는 일반 초대소보다 규모가 큰 초대소였는데, 그곳에도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강사가 있었다.

 

대학 동창생 조성렬에 의하면 일본인 강사들은 북한 돈으로 월급을 받는 남한 출신 강사와 달리 엔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생활비로 받은 외화로 평양 시내 외화상점에서 외제 물품을 구매해 생활했으므로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다.

 

실제로 다른 초대소에서 생활할 때 창고에 빈 일본산 술병이 많아 요리사에게 물어보았더니 내가 초대소에 오기 전에 일본인 강사가 외화상점에서 사다가 마신 것이라고 했던 적이 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남한에서 자유의 몸이 된 후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면 자식들과 무엇을 가장 먼저 해 보고 싶으셨나요?

 

아버지 : 내가 아버지가 되면 가족과 함께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었어. 북한에는 여행의 자유가 없는 데다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아 내가 어렸을 때는 물론 그 후에도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없었거든.

 

그러다가 남파 공작원을 하면서 북한 전역을 거의 다 돌아다녔지만 금강산이나 백두산 관광을 제외하고는 즐거운 적이 거의 없었어. 주로 야간에 완전 군장을 하고 훈련하느라 걸어 다녔기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밖에 없어.

 
 

그래서 너희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자주 갔던 거야. 아마 너희 또래 가운데 너희들만큼 전국 방방곡곡 안 가 본 곳 없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들도 많지 않을 거야.

 
 

<47> “남한서 군대 얘기는 필수”… 관련 지식 달달 외워

정치인 신상 등 남한 정·관계 속속 파악

적구화 교육 당시 공부했던 내용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정치와 관련해서는 입법·사법·행정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비롯해 장관·국회의원 등의 신상에 대해 파악했다. 그 밖에 정치 조직 및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서도 배웠다. 사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오히려 북한의 정부 기관(현재 내각) 명칭보다 남한 행정부의 부·처의 명칭이나 장관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10대·30대 재벌 비롯해 생필품 브랜드까지

다음으로 경제와 관련해서는 10대 및 30대 재벌그룹의 명칭·회장·주요 생산품에 대해 파악했다. 나아가 각 재벌 그룹 계열사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가전제품·화장품·의류·신발류·필기용품·식료품 등 생활필수품은 어떤 회사 제품이 있고 유명한지에 대해 배웠다.

 

예를 들면 구두 브랜드로는 금강·에스콰이어가 있고, 맥주는 하이트·OB·크라운 등이 있으며 소주는 진로·그린·경월 등이 있고 막걸리는 포천막걸리가 유명하다는 것 등이다. 가전제품 기업은 삼성·엘지·현대·대우가 유명하고 식품이나 음료 하면 해태·동양·롯데이고 화장품은 태평양이 유명하다는 식이다.

군대 얘기 좋아하는 남쪽 사람들 군 관련 내용은 필수

한국군에 대해서도 배웠다. 군 입대를 앞두고 실시하는 신체검사 시기와 절차, 그리고 입영통지서를 받고 신병 훈련소에 입소해 신병 훈련을 받는 절차와 방법, 훈련 내용 등을 강의를 통해 숙지했다. 집총 동작과 제식 동작·총검술 등은 실제 동작으로 배우고 신병 훈련이 끝난 후 자대 배치·군 내무반 생활·제대 절차·예비군 훈련 등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리고 계급과 군번에 대한 일반상식도 가르쳐 주었다.

 

중요한 것은 향후 대남 침투 준비를 할 때 신분 위장(세탁)을 해야 하는데, 남자들의 경우에는 경력에 군 관련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에 군 관련 내용은 될수록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며 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실제로 남파되어 활동할 때 현지인들과의 대화 과정에 군대 얘기가 반드시 나오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군 복무를 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내용보다 군 관련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며 한국군 관련 교육을 강의와 함께 실제 동작을 해 보는 방법으로 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처럼

교육과 관련해서는 초·중·고등학교 등에서 배우는 교과 내용을 모두 숙지하도록 했다. 사실 교과 내용 가운데 한국사 같은 것은 북한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다른 과목에 대해서는 상식 수준에서 취급하고 있다.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졸업, 학교 생활 기간에 반드시 하는 행사의 종류와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한다며 이를 가르쳤다. 예를 들면 학예회라든가 소풍·운동회·수학여행 등의 시기와 장소·방법 같은 것들이다.

서울대는 데모 많이 해서 관악구로 쫓겨나

남한의 각 대학 명칭과 위치, 연혁과 특징에 대해서도 배웠다.

 

예를 들면 서울대학교는 원래 대학로가 있는 종로구 혜화동에 있다가 박정희 정권 시대에 데모를 많이 해서 변두리인 관악구로 쫓아냈고 한국에서 수재들만 가는 일류 대학이라는 것이다.

 

고려대는 법학과와 정치학과가 유명하고, 연세대는 의예과와 영문과·상과가 유명하며 서강대는 경제학과를 알아 준다는 식이다. 또한 경희대는 한의학과, 홍익대는 미술과, 건국대는 수의학과, 중앙대는 연극영화과, 동국대는 불교학과와 연극영화과, 한양대는 공과가 유명하다는 식으로 상식적인 선에서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향후 대남 침투시 신분 위장과 함께 공작 활동을 할 때 남한 사람들과의 원만한 대화를 위한 것이었다.

흥정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상업 시설과 그 이용 절차에 대해서도 배웠다. 백화점·전문점·시장·슈퍼마켓·창고형 매점(마트) 등 상업 시설의 종류와 명칭을 익히도록 했다.

 

대표적인 백화점으로 신세계·롯데·미도파가 있고 대표적 시장으로는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광장시장·황학동 벼룩시장·노량진 수산물시장·장안평 자동차부품시장·용산 전자상가·가락동 농수산물시장·경동 한약시장과 부산 자갈치시장 등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백화점을 제외한 모든 상가에서는 가격을 흥정할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흥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흥정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가상 상황을 설정해 놓고 실제 물건을 사는 것처럼 흥정을 해 보도록 하는 등의 방법으로 교육했다.

 

▲ 적구화 교육 당시 한국군에 대해서도 배웠다. 군 입대를 앞두고 실시하는 신체검사 시기와 절차, 그리고 입영통지서를 받고 신병 훈련소에 입소해 신병 훈련을 받는 절차와 방법, 훈련 내용 등을 강의를 통해 숙지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셋집 얻으며 흥정하는 방법 실습

숙박업소 종류와 이용 절차에 대해서도 배웠다. 숙박업소에는 호텔·여관·여인숙·하숙·민박 등의 종류가 있다는 것과 함께 각각의 이용 절차를 배웠다. 그리고 실제로 각종 숙박시설을 이용하고 셋집을 얻으면서 흥정을 해 보는 등의 방법으로 숙달하도록 했다.

 

또한 접객업소에는 이발소와 목욕탕·다방·술집·카페·카바레·나이트클럽 등이 있고, 이와 같은 시설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에 대해 강의를 들은 다음 가상 상황을 놓고 배운 대로 말하고 동작을 해 보는 방법으로 공부했다.

 

음식점에는 한식·일식·양식 등의 전문 음식점과 부페·분식집·포장마차 등이 있다는 것, 각종 음식점에서는 어떤 음식을 팔고 가격은 대체로 얼마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용하는지 등 이용 절차에 대해 배웠다.

선동열·이만수·홍수환·차범근… 아직도 기억나는 이름들

스포츠 및 오락과 관련해서는 스포츠 종목과 용어, 종목별 경기 방법, 특히 야구·복싱·축구 등 각종 프로 스포츠에 대한 상식을 배웠다. 이때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의 장면들을 비디오로 시청했다. 또한 당시의 유명한 스포츠인들에 대해서도 상식적으로 알아 두도록 했다.

 

그때 기억해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유명한 인물로 야구선수로는 선동열·이만수·장종훈·최동원·김성한·김재박 등과, 프로복싱과 레슬링선수로는 홍수환·김일, 축구선수로는 차범근·최순호·허정무 등이 있다.

고스톱도 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오락에는 장기·바둑·고스톱·당구 등의 종류가 있다는 것과 그것들을 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배우고 실제로 해 보기도 하는 과정을 통해 약간이나마 숙련했다. 당구는 주로 15구 포켓볼을 쳤는데, 적구화 교육 기간에 여러 번 밤을 꼬박 새우면서 쳐 보았고 장기와 고스톱 역시 여러 번 해 봐서 대충은 알고 있다. 한번은 담배 내기 고스톱을 치다가 감정이 생겨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사무소 이용 절차와 관련해서는 주민등록 전·출입 신고 절차와 방법, 호적 및 주민등록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호적, 주민등록 등·초본을 발급받는 방법 등에 대해 가르쳤다.

 

우편·통신 시설의 이용 절차에 대해서는 먼저 편지에는 일반 편지와 속달 편지가 있다는 것과 함께 편지 주소 쓰는 방법과 우편번호 등을 공부했다.

편지 봉투에 주소 쓰는 위치도 남·북한 달라

다른 점이 있다면 남한에서는 반드시 써야 하는 우편번호를 북한에서는 군()에서만 사용한다는 점이다. 편지 주소 역시 북한에서는 상단에 수신자 주소를 기재하고 하단에 발신자 주소를 기재하는데 남한에서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널리 사용되고 있던 공중전화 이용 방법과 요금제에 대해서도 배웠다.

 

남한에 있는 각 종교의 교리와 교파 등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배웠다. 예를 들면 종파로는 가톨릭 또는 천주교, 기독교 또는 개신교, 불교·원불교·대종교·천도교·정교·이슬람교·통일교·침례교 등 수많은 종파가 있고, 각각의 종파가 예수를 믿거나 석가모니를 믿는 등 서로 믿는 대상과 교리가 다르다는 것도 배웠다.

 

관혼상제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지켜야 할 에티켓, 그리고 인사말과 부조 문화 등 생활풍습에 대해서도 배웠다.

반드시 알아야 할 관광지와 유명 사찰 등

관광지와 관련해서는 유명한 관광지와 피서지, 특산물 등에 대해 배웠다. 이를 통해 국립공원은 설악산·계룡산·오대산·속리산·지리산·덕유산·내장산·한라산·북한산·가야산 등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수욕장으로는 부산 해운대와 송정·광안리해수욕장, 대천·경포대·속초·만리포·제주도 등에 있는 해수욕장이 유명하다고 배웠다.

 

그리고 과천 어린이대공원·성동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용인 민속촌과 자연농원, 한려해상국립공원·단양팔경·강릉 오죽헌·의상대·청간정·진주 촉석루 등의 관광지 및 놀이시설과 함께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비원·종묘 등의 고궁이 있고 경주·부여 등지에 역사 유적 등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유명 사찰로는 서울의 조계사, 속리산의 법주사, 계룡산의 갑사와 동학사, 내장산 백양사,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 공주 마곡사, 동래 범어사 등이 있다는 것, 유명 온천지는 온양·도고·덕산·수안보·이천·유성·부곡·동래·마금산·백암·경산·화순 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산물로는 강화의 인삼과 화문석, 여주·이천 지방의 쌀과 도자기, 춘천의 막국수, 전주의 비빔밥, 경산 사과, 제주도 감귤, 순창 고추장, 포천 막걸리, 천안 호두과자 등 너무 많아 여기에 일일이 다 옮겨 적을 수 없을 정도다. 이와 함께 관광지를 이용하는 시기와 절차, 그리고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배우고 실제로 해 보기도 했다.

교통수단의 종류 배우고 이용 절차 실습

교통수단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널리 이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열차와 버스ㆍ택시ㆍ지하철 등이 있으며, 열차에는 새마을호ㆍ무궁화호ㆍ 통일호ㆍ비둘기호 등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버스에는 고속버스·시외버스·시내버스·좌석 버스·마을버스 등과 최근에 새로 생긴 우등버스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택시에는 일반택시와 중형택시·모범택시·공항택시·콜택시 등이 있다는 것을 공부했다.

 

아울러 1987년 당시 지하철이 건설되어 운행되는 곳은 서울과 부산이며, 서울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노선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 외에도 렌트카와 여객선·비행기 등 여러 가지 교통수단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이러한 각종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절차, 즉 매표·개찰·승차·하차·집찰 방법, 그리고 각종 요금 및 계산·지불 방법, 교통시각표를 이용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배우고 가상 상황을 만들어 직접 해 보는 방법으로 습득하도록 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아버지와 엄마는 사상과 이념은 물론 문화적 차이가 심한 북한과 남한이라는 곳에서 각각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다른 것이 많았을 것 같아요. 거기에다 아버지와 엄마가 연애했던 기간이 정말 짧았기 때문에 두 분이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 많이 없었을 텐데. 결혼을 하고 엄마랑 많이 다투진 않으셨나요?

 

아버지 : 네가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엄마는 연애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체제와 이념은 물론 경제 발전 수준이 다른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문화적 차이가 컸던 것이 사실이야. 그런 문화적 차이 때문에 결혼 초기에는 엄마와 엄청 많이 다퉜어. 물론 지금도 그 간극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체제와 이념, 경제 발전 수준이 같은 사회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문화적·성격적 차이는 필수적으로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해.

 

문제는 각자가 그러한 차이를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 우리 부부도 이견이나 갈등이 생겼을 때 처음에는 언성을 높여 다툼을 벌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이해하니까 더 이상 싸울 일이 없더라고.

 

결국 나는 부부생활을 하면서 이견이나 갈등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두 사람의 인내와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어.

 
 

<48> 조장의 화풀이 생트집… 그래도 진심은 통한다

서울과 지방 대도시 정도는 알아야 한다

적구화 교육 강사들은 서울과 부산·대구 등 지방 대도시의 자연·지리적 특징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우선 내가 서울말을 배우고 있었고 강사 역시 서울 출신이라서 서울의 일반적 특징에 대해 다른 지역보다 더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서울의 지리에 대해서는 서울 토박이 정도는 아니지만 대체적인 윤곽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서 길을 잃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갈 수 있다.

부산엔 돈이 많고 대구엔 미인이 많다

아울러 부산과 대구에 대해서도 배웠다. 당시 들었던 내용 가운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우선 부산에는 3가지가 많다는 것이었다. 즉 부산에는 물보다 술이 많고, 종이보다 돈이 많으며 여자보다 아가씨가 많다는 것이었다. 자갈치시장 회가 맛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대구에는 아가씨들이 사과를 많이 먹어서 미인이 많다는 것, 곰탕을 잘하는 현풍할매곰탕이 유명하다는 것 등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물론 앞에서 얘기한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에 배웠던 것들이어서 그동안 기억에서 지워진 것도 있고, 일부는 적구화 교육이 끝난 후에 남한 자료를 보면서 새로 알게 된 것도 있다. 그렇다고 여기에 적은 내용이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관련한 적구화 교육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적구화 교육 기간에 사상이론 학습이나 강연 등을 일절 중단하고 훈련도 일시적으로 중지한 상태에서 오직 적구화 교육에만 집중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당생활 총화와 함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약간의 운동 정도는 하게 한다.

금강산 관광 때부터 꼬인 관계

적구화 교육을 받는 동안 여러 가지 일도 많았다.

 

조장 김명걸과 함께 적구화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해 가을, 서울말 강사 박 선생과 함께 또다시 금강산관광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담당지도원과 박 선생, 나와 조장 김명걸 등 우리 일행은 금강산 관광을 마칠 즈음 해금강 지역에 갔었다. 원래 그곳은 휴전선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군()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얻어 해금강에서 관광도 하고 해산물을 채취해 어죽을 쑤어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금강은 정말 몇 마디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이었고 바다에는 홍합과 해삼 등 해산물도 얼마나 풍부한지 모른다. 그날 우리는 해금강에 간 기념으로 사진도 찍고 회와 어죽도 쑤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내가 기분이 좋은 나머지 그곳 군인들과 함께 주정 농도가 40도인 개성 인삼주 3병을 마시고 만취되어 백사장에 누워서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한마디로 필름이 끊긴 것이었다.

잠에 취해 투덜거린 게 화근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오후 4시경,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 일행이 해금강을 출발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김명걸이 내게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왜 무시하느냐”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으니 오히려 왜 그러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제야 자초지종 이유를 이야기했다.

 

내가 한참 정신없이 자고 있을 때 김명걸이 나를 깨워 카드놀이를 하겠다며 카드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카드놀이를 하려면 할 사람들이 가져다 하지 왜 자는 사람을 귀찮게 깨우면서 그러느냐”고 투덜대고는 그냥 누워서 잤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봐도 술을 많이 마시고 자다가 잠결에 한 말이었기 때문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자다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필름이 끊어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쨌든 내가 실수했다고 판단하고 솔직하게 “술에 취해서 무의식중에 한 실수이니 양해해 달라. 미안하다”고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며 내 사과를 받아 주는 것처럼 하고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내 실수를 들먹이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괴롭혔다.

 
 

▲ 1995년 11월24일 경찰청 청사 1층 로비에서 한 달 전 검거된 충남 부여 무장 간첩 김동식(33·본명 이승철) 등 2명으로부터 노획한 장비 전시회를 가졌다. 연합뉴스

약속 어기고 적반하장으로 충성심 들먹여

그 앙금이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후에도 가시지 않았던지 김일성·김정일에게 보내는 축전을 작성할 때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축전은 원래 초안을 써서 지도원들에게 검사받은 다음 최종적으로 깨끗이 정성스럽게 써서 제출하는데, 처음 초안을 작성할 때는 글씨를 그다지 잘 쓰지 않아도 된다. 북한에서는 정성을 다해 곱게 쓰는 것, 정자로 글을 쓰는 것을 정서(正書)라고 한다.

 

김명걸은 자기 글씨체가 예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초안을 쓸 테니 자기보다 글씨체가 나은 내가 정서를 하라고 했다. 물론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작성하기로 한 초안부터 마지막 정서까지를 통째로 내게 맡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안은 글씨를 알아볼 정도로 쓰면 되고, 이미 조장이 초안을 쓰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대로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정서는 약속대로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짜고짜 내게 충성심이 없다고 하면서 단순한 절차상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걸고 들었다. 여기에 나도 질세라 그런 문제를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모함하지 말라며 “당신은 약속도 안 지키고 여자들처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이 바뀌는 사람”이라고 그를 몰아세웠다. 그래서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김명걸은 이때에도 담당 부서에 제의해 당장 공작조를 해체하도록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부서에 전화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어서 전화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자 제풀에 취소했다. 이 일은 그 후 내가 술을 같이 마시며 화해하자고 해서 넘어갔다.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에게 차인 김 조장

이런 와중에 김명걸과 수개월 전부터 사귀던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가 다른 공작원과 눈이 맞아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접대원 아가씨와 결혼한 공작원은 1985년 가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가 1987년 말경에 복귀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2인 공작조의 조원 박모 씨였다.

 

사실 김명걸은 그때 적구화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 남파 공작 임무를 받으려면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운이 나쁘면 남한에 침투했다 죽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그 접대원 아가씨로서는 이미 남한에 침투했다 복귀해 공화국영웅 칭호까지 받아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남자를 선택할 만도 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그 아가씨가 김명걸을 차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졌다. 며칠 동안 말도 안 하고 고민하더니 자기가 사귀던 아가씨가 다른 공작원과 결혼한 것, 본인이 화가 난 것 등 모두가 내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나중에 나도 모르게 담당 부서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동에서 뺨 맞고 서쪽에 눈 흘기기 조장의 옹졸한 화풀이

그는 내 성격이 까다롭고 조장인 자기 말도 잘 안 들어서 나와 같이 일을 못 하겠다며 공작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담당 부부장과 지도원들이 갑자기 초대소에 들어와 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담당부서에서 회의를 소집한 이유조차 몰랐다가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회의가 시작된 후 담당 부부장이 조장인 김명걸에게 먼저 발언권을 주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단점만 열거하고 나서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니 앞으로 같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담당부서 회의에서 자아비판

조장의 발언이 끝나자 담당 부부장은 나를 쳐다보면서 조원도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소집된 회의에 참석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격이었다. 정말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고 눈물까지 나왔다. 당장 조장 김명걸이 잘못한 것을 전부 나열하면서 반격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둘 사이에서 생긴 문제가 어떤 이유에서든, 또 누구에 의해서 발생했든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가지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런 자리가 마련된 것 자체를 수치로 생각했다. 그래서 조장 김명걸이 지적한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며 자신을 반성한 다음 앞으로 기회를 주면 고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조장 김명걸의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그 누구에게 빚을 지고 그것을 갚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며, 그 누구의 눈치나 보고 비위나 맞춰 주려고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데 대해서는 어떤 비판을 해도 충분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또 어떤 책임이라도 내가 질 것이 있으면 결코 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진정성을 가지고 단호하게 이야기한 다음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면서 보니 김명걸은 ‘당신들도 들은 것처럼 저 친구가 다 잘못했다고 하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진심은 통한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되었다. 담당 부부장이 회의를 결속하는 자리에서 김명걸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부부장은 “조장이 나이도 많고 또 조장이라는 책임을 맡았으면 그에 걸맞은 생각을 해야 한다. 공작조 내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도 조장이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조장은 책임지는 모습을 하나도 보이지 않고 조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오히려 나이 어린 조원은 자기가 모두 책임지겠다고 하니 이 공작조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며 김명걸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리고 내게는 조원도 너무 본인 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결과적으로 나와 갈라지든가 아니면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 비판받게 하려던 김명걸의 의도는 빗나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우리 둘의 관계는 적구화 교육이 끝난 그해 말까지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김명걸은 적구화 교육 강사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하지 못해 그들에게도 나쁜 인상을 안겨 주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담배를 걸고 고스톱을 치다가 승부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다. 당시 강사가 김명걸에게 피박을 씌워 담배를 많이 따게 되었는데, 이때 김명걸이 화를 못 참고 강사에게 주어야 할 담배를 그 자리에서 다 꺾어 버렸다. 그래서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김명걸과 어떤 오락도 하지 않게 되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제 기억으로는 저와 동생이 어릴 때 다녔던 유치원은 유독 학부모가 직접 참여하는 활동이나 상담 같은 프로그램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거의 대부분을 직접 참여해 저희와 함께 많은 체험을 해 주셨는데, 혹시나 학부모가 되어 참여한 그런 활동들에서 당황스러웠던 적은 없으셨나요? 완전히 다른 교육과 문화 풍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로서는 모든 것이 새로웠을 것 같아요.

 

아버지 : 너희들이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진행했던 모든 프로그램이 한국과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았던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어. 그래서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야.

 

나도 어렸을 때 북한에서 유치원에 다닌 적 있지만 북한에는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전혀 없어. 기껏해야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 부모님을 불러다 자식 교육 잘하라며 훈계하는 게 전부였지.

 

그러나 너희들이 다녔던 유치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나도 그렇지만 다른 학부모들도 자식을 처음 낳아 키울 테니까 생소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또 자식의 일이라서 그런지 그런 어색함과 쑥스러움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어.

 

오히려 너희들이 유치원에 가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즐겁게 참여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즐거웠고, 그래서 유치원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급적이면 참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49> 비밀 아닌 비밀… KAL기 폭파 등 모두 북한 소행

적구화 실습과 테스트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적구화 교육을 마칠 즈음 우리는 평양시 용성구역에 있는 적구화 교육환경관(일명 남조선환경관’)에 가서 강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2주간에 걸쳐 실습과 함께 테스트 준비를 했다.

 

남조선환경관은 산 중턱에 너비 15m, 높이 10m, 길이 1.5~2km 정도 되는 터널을 뚫고 그 안에 음식점·슈퍼마켓·이발소·여관·개찰구·역대합실·커피숍·극장·문방구·양장점·내무반 등 남한의 각종 시설물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촬영 세트장 같은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각 시설물에는 남한 출신의 강사가 들어가 있다. 이들은 실습하러 온 공작원들이 해당 시설을 이용하면서 말과 행동을 자연스럽고 현실감 있게 하는지 체크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지적해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남한 출신 가장해 백화점에서 쇼핑하기

한편, 대남 공작원들이 적구화 교육을 마치기 직전이나 마친 다음 꼭 한 번씩 해 보는 장난 비슷한 것이 있다. 그것은 평양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 들어가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이나 해외에 사는 남한 출신 교포처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자신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이다.

 

처음에 어떤 공작원이 시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에서는 돈을 가지고도 자기가 필요로 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사지 못하기 때문에 고안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가 북한 내부의 기본적인 절차나 규정에서는 벗어나는 것이지만, 한국인화가 얼마나 되었는지 테스트도 하고 동시에 원하는 상품도 살 수 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이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도 운전기사를 지도원으로 둔갑시켜 대동하고 평양 제1백화점에 들어가 얼마 전에 월북한 남한 사람처럼 서울말을 쓰면서 술과 담배를 산 적이 있다.

대학 졸업 후 적구화 완료까지의 8년 세월

우리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친 후 그해 6월 하순에 대남 담당 부부장과 교육 담당 부부장, 그리고 해당 과의 과장·지도원 등 간부들 앞에서 그때까지 배운 서울말과 남한의 사회 환경, 각종 시설 이용 절차에 대한 종합적인 테스트를 받았다. 그런 다음 비교적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적구화 교육을 마쳤다.

 

적구화 교육을 마친 후 담당 과장은 우리에게 선생들은 이제야 공작원이 되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한 때로부터 꼬박 8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적구화 교육을 마친 공작조는 평양 순안 초대소 지역 내에 있는 북대천 1호 초대소로 옮겼다.

비밀 아닌 비밀 KAL기 폭파 등 각종 테러 사건

내가 적구화 교육을 마치던 1987년 후반기에는 한국인들은 물론 세상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한 KAL기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선거와 함께 88서울올림픽이 성공리에 개최되고 남북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많이 있었다.

 

특히 1987 1129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한 후 북한에서는 신문·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공작원들의 경우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을 뿐 그것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쯤은 대체로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83 9월에 있었던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과 같은 해 10월에 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등도 모두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공작원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 북한 공작원들은 적구화교육을 마칠 즈음 평양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 들어가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이나 해외에 사는 남한 출신 교포처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자신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으로 한국인화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스스로 테스트해 보기도 한다. 1991년 무렵 평양역 근처에 있는 역전백화점 건물 모습. 평양=연합뉴스

대구 미문화원 폭파범은 대학 선배 이철

대구 미문화원 폭파를 거행한 테러범은 나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2년 선배 이철과 그의 조장이었다. 이철은 키가 작고 얼굴도 동안이어서 고등학생으로 위장하고 대구 미문화원에 들어가 폭발물을 설치한 후 원격조종 방식으로 건물을 폭파했다. 이철은 대구 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 후 여러 번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한편, KAL기 폭파 사건의 당사자인 김현희는 대외정보조사부(현재 정찰국 해외정보국) 소속이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연락부에서도 2개 공작조가 해상을 통한 직접 침투의 방법으로 서울에 침투한 후 테러를 감행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폭파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88서울올림픽을 파탄내기 위한 이러한 테러 공작은 준비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제2의 KAL기 사건도 준비

당시 북한에선 제2 KAL기 사건도 준비했다. 이 공작에는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이철이 속한 공작조와 윤동철·김군철 공작조의 2개 공작조가 동원되었다.

 

이 공작은 당시 하나밖에 없었던 국제공항인 김포국제공항이나 서울역 또는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올림픽주경기장 등 시민이 많이 모이는 다중 집합 장소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불안감을 조성해 외국 선수들이 마음 놓고 올림픽 개최지인 서울에 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KAL기 폭파 사건 이후 김현희가 검거되고 안기부에 의해 그것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국제사회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등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김정일이 어쩔 수 없이 제2 KAL기 폭파, 즉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려 준비했던 테러 행위를 중단한 것이다.

김정일 경호 전담 요원 선발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던 1985,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작전부에서는 김정일 전용 선박 운영과 경호를 전담할 경호원을 선발했다.

 

당시 작전부에서는 나와 동기인 19기 졸업생 가운데 키가 165~170cm인 친구들 가운데 40여 명을 1차로 선발해 대남 공작요원 전문 병원인 915 병원에 데려가 무좀까지 체크하는 등 별도의 정밀 신체검사를 했는데, 나도 거기에 차출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 입학 때부터 연락부에서 공작원으로 선발해 위탁교육 중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 본격적인 인선 과정 도중에 제외되었다.

 

그렇게 40여 명을 상대로 여러 차례의 정밀 신체검사와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19기 동기생 14명이 김정일을 경호하는 전담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들은 1985 5월 말 대학 졸업과 함께 중앙당 작전부 산하 원산연락소 예하에 있는 충성호 방향에 배치되었다.

김정일 전용 선박 ‘충성호 방향

충성호는 김정일이 동해상에서 이동할 때 이용하는 전용 선박의 명칭이다. 말 그대로 김정일을 충성 다해 모시기 위해 만든 선박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방향이라는 것은 연락소 산하의 조직 명칭으로, 군대로 치면 대대나 중대 정도의 규모에 해당한다. 당시 충성호 방향에는 김정일 전용 선박과 호위 선박 등 3척의 충성호가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김정일의 요리사를 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쓴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충성호 선박과 함께 경호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책 앞 부분에 1988 5월에 원산에서 선박에 타고 있는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었던 허담의 옆모습이 보이는데, 그가 타고 있던 배가 바로 충성호이고 그 옆에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승조원 겸 경호원들이다.

김정일 낚시 위해 잠수 도중 사망한 동기생

그런데 내 동기생들이 충성호 방향에 배치된 지 3년이 지난 1988~89년에 그들 가운데 2명이 서로 다른 이유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충성호 방향 경호원으로 차출된 동기생 가운데 강호성과 유재석이 바로 그 비운의 인물들이다. 강호성은 잠수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유재석은 총기를 휴대하고 탈출해 군 병력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강호성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원래 대학 4학년 시절 1중대장이었던 나와 함께 3중대장을 했을 정도로 잠수와 수영은 물론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친구였다. 그런 그가 잠수복을 입고 공기통을 멘 상태에서 바다에 들어갔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임무는 김정일이 원산에 와서 충성호를 타고 낚시질할 때마다 물속으로 들어가 김정일 낚시에 물고기가 잘 물리도록 몰아주는 것이었다. 그 임무 수행을 위해 미리 수중에 들어가 훈련하던 도중 어부들이 쳐 놓은 그물에 잠수장비가 얽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탈출하려다 경비대와 총격전 후 자살한 동기생

유재석은 남한의 인기 개그맨 유재석과 이름이 똑같아서 더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특공대반 2중대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비교적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훈련 도중 휴대했던 AK 자동소총과 실탄 수십 발을 들고 뛰쳐나가 북한군 경비대 군인들과 대치하면서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는 군인들에게 실탄을 난사해 여러 명을 사망하게 한 다음 끝내 자살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김정일이 원산에 오지 않는 기간에 훈련을 너무 혹독하게 시켜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남파 전 적구화 교육을 받을 당시 서울의 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런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아버지께선 그런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리고 그 후 남한에 침투해서 실제 서울의 모습을 보셨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궁금합니다.

 

아버지 : 실제 서울의 거리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서울 모형 사판’이라고 해. 실물 모양의 건물 등을 축소해 서울 지도에 붙여 놓은 것이지. 그것은 평양시 교외인 용성구역에 터널을 뚫고 만들어 놓은 적구화환경관이라는 곳에 있어.

 

적구화환경관은 평양시 교외의 산 중턱에 길이 1~1.5km, 높이 10m, 너비 15m 정도 크기의 터널 내부에 만들어 놨는데, 터널의 제일 안쪽 부분에 서울 모형 사판이 있거든. 말 그대로 서울 지도를 그려 놓고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그대로 축소해 만들어 놓은 거야. 예를 들면 광화문에서 세종대로를 바라볼 때 오른쪽에 정부 서울청사와 외교부 청사, 그리고 세종문화회관 순으로 있는데 그 건물들을 그대로 축소 제작해서 엄청나게 큰 지도에 붙여 놓은 거라고 보면 돼.

 

서울 모형 사판을 보면서 정말 서울의 거리와 유사하게 잘 만들어 놨다는 데 놀랐고, 그것을 보면서 서울의 지리와 대표적인 건축물들의 위치·형태 등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어. 그리고 서울 모형 사판을 보면서 서울 지리를 익혀 놔서 그런지 서울에 와서도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었어.

 

다만, 모형 사판이나 TV 화면에서 보던 것과 실물은 엄청나게 차이가 났지. 서울에 와서 백화점을 비롯해 건축물들을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하고, 섬세했어. 값비싼 건축 자재를 보면서 남한이 정말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실감했지.

 

그래서 북한에 복귀해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에게 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서울에 가 보고 절실히 느꼈다. 서울에 가 보니 거리와 건축물들을 엄청나게 잘 지어 놨던데, 통일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민족이 건설해 놓은 창조물들이 모두 파괴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파괴되면 그것들을 다시 복구하느라 또 수십 년이 걸릴 텐데, 그런 통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통일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거야.

 
 
 

2025.05.12 

<50> 잠꼬대하며 기밀 ‘줄줄’… 공작조장 또 교체

조장이 뭐 대단한 벼슬이라고

적구화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1988년 여름, 나와 조장 김명걸은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석암저수지에서 열흘 동안 연례행사의 하나인 수영·잠수 훈련을 했다. 이때 김명걸의 수영 실력과 잠수 실력을 보니 먼저 만났던 박철만보다는 좀 나았던 것 같다.

 

그러나 훈련 기간에는 보통 야외에 텐트를 쳐놓고 스스로 밥을 지어 먹는데, 김명걸이 조장이라는 위치를 대단하게 생각했는지 열흘 동안 한 번도 식사 당번을 하지 않아 동행했던 운전기사나 지도원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갓 결혼한 조장은 백두산 답사를 신혼여행으로

수영·잠수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백두산 답사를 다녀오게 되었다. 담당 과에서는 김명걸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고, 또 그의 고향이 답사 코스의 중간 지점인 양강도 보천보였기 때문에 신혼여행을 겸해서 아내를 데리고 가게 했다. 나는 총각이었으므로 그와 떨어져 다른 지도원과 다녀왔다.

 

김명걸은 이미 1988년 초 평양에 사는 친척의 중매로 김일성이 거처하고 있던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 경흥관의 결혼식 매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렸었다. 원래 사귀던 아가씨보다 키가 약간 작은 것을 제외하면 생김새도 미인이었고 성격도 좋았던 것 같다. 김명걸은 그 후 아내 덕을 단단히 보았다.

 

백두산 답사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되는 9월 중순 김명걸과 함께 또다시 약 10일에 걸쳐 종합 훈련에 참가했다.

또다시 받게 된 비합법 훈련 지도원에게 이의 제기

당시 담당 지도원이 초대소에 들어와 종합 훈련을 할 예정이라고 전하며 기본은 비합법 훈련을 위주로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불만이 있던 나는 지도원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비합법 훈련은 과거에도 여러 번 해서 이미 숙련되었으니 자동차 운전 연습과 같은 숙련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훈련 종목 가운데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훈련을 하자고 했다. 뜻밖의 문제 제기에 당황한 지도원은 당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이지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내 주장을 굽히지 않자 지도원은 말문이 막혀 “당의 방침이니 무조건 집행해야 한다”며 당의 방침까지 들먹였다. 그래서 그것이 당의 방침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당의 방침에 의해서 이번 훈련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그랬으면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을 텐데요라며 다시 항의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작부서에서 결정했기 때문에 훈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열흘 동안 늦가을의 차가운 비를 맞으며 평안남도 평원과 숙천·문덕 일대에서 행군과 숙영·무인 포스트 매몰 및 발굴·접선 등의 비합법 훈련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에는 100리 강행군을 해서 초대소 근처까지 뛰어 들어와 산속에 비트를 파고 다음 날 아침 지도원의 비트 수색을 끝으로 훈련을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이것 역시 계획대로 마쳤다.

6·25 때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지도원은 내가 이의를 제기했던 것 때문에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었던지 100리를 뛰어와서 초대소 요리사가 끓여다 준 따끈한 꿀물을 마시려는데 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지도원은 빈정대는 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이런 정도의 훈련을 하면서 꿀물까지 마시면 되겠소? 우리는 6·25 전쟁 때 그런 것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래서야 어떻게 혁명을 하겠소?”

 

나는 그 말에 또다시 참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6·25 전쟁 때 지도원 동지가 그렇게 했다고 우리가 꼭 그때처럼 해야 한다는 법이 있습니까? 우리가 고생하는 것도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것인데, 일부러 좋은 조건도 마다하고 고생을 사서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꿀물 한 모금 마시는 게 무슨 대단한 사치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건 지나친 것 아닙니까? 우리도 앞으로 고생을 해야 할 시기가 오면 감수할 각오가 다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지도원은 얼굴이 상기되어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언제 선생하고 논쟁하자고 했소?”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해 4월 4일 특수작전부대 훈련기지를 방문해 종합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5일 보도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지도원 골탕먹이려 찔레꽃 넝쿨 속에 판 비트

그날 밤 비합법 숙영을 하기 위해 비트를 팠는데, 나는 아예 다음 날 아침 지도원이 비트를 수색할 때 찾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가시가 많이 돋아 있는 찔레꽃 넝쿨 속을 헤집고 들어가 비트를 팠다.

 

사실 훈련을 거의 마무리할 때쯤 되면 다른 지도원들 경우에는 공작원들에게 일단 비트를 파게 한 다음 검열만 하고 거기서 잠을 재우지 않고 초대소에 들어와 자게 한다. 그런데 최 지도원은 비트를 파고 난 후에도 나오라거나 초대소로 철수하자는 말이 전혀 없었다. 당시 나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가 워낙 원칙적인 선에서 조금도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도원은 김명걸의 비트를 찾고 나서 내가 파고 들어가 있는 비트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큰소리로 나를 부르며 나오라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고생 좀 해 보라는 마음으로 나가지 않자 그는 아예 포기하고 나에게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초대소로 돌아가 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스스로 비트에서 나와 초대소로 돌아오자 지도원은 내게 비트를 파지 않고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잠을 자다가 오지 않았느냐고 의심부터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실망스러워 자기 부하를 그렇게 믿지 못하겠느냐며 직접 내가 파고 들어가 잠을 잔 비트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확인을 시켜 주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무 말도 못 했다.

격술은 각종 무술이 결합된 종합 무술

그해 10월에는 조장 김명걸과 함께 또다시 719훈련장에 들어가 약 20일 동안 격술 집중훈련을 받았다. 다른 공작원이라면 한 번만 받으면 될 격술 집중훈련을 후임 조장으로 만난 김명걸이 나보다 후배였던 관계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받아야 하는 을 입었다. 격술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태권도와 유도 및 호신술과 기합술 등 각종 무술이 결합된 종합 무술이다.

 

격술 훈련을 받는 과정에 한 번은 나와 김명걸이 자유대련을 하다가 진짜 싸움이 날뻔한 적이 있었다.

진짜 싸움으로 번질 뻔한 자유대련

자유대련 전에 김명걸은 본인이 공작원양성반을 졸업한 공작원 가운데 격술을 제일 잘한다고 말끝마다 자랑했고, 내게도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덤벼들었다. 나는 김명걸이 나이도 많고 또 조장이어서 처음에는 공격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방어 위주로 했다.

 

그랬더니 그는 정말로 내 수준이 낮아 공격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겁 없이 덤벼들었다. 나는 그냥 한번 위협을 준다는 차원에서 결정적인 순간 발차기로 맞받았다. 그랬더니 그는 미처 피하거나 방어를 못한 채 그대로 내게 얻어맞았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대로 계속 하다가는 감정이 개입되어 훈련 과정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것 같아 그만두자고 말하며 일단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 순간 그가 내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와 권투장갑을 낀 주먹으로 내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그에게 한 방 얻어맞고 나도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 곧바로 그에게 돌아서며 맞받아치려고 공격 자세를 취했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똑같이 유치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동작을 멈춘 것이다.

또다시 혼자 받은 격술 판정

그 후 격술 훈련 종합 판정을 하루 앞두고 낙법 연습하다가 목이 꺾어질 뻔한 사고가 발생해 결국 김명걸은 최종 테스트를 받지 못했다.

 

당시 나는 격술 교관의 지시에 따라 김명걸이 보는 앞에서 내 키 높이의 뜀틀을 향해 뛰어가다가 점프를 한 다음 뜀틀에 손을 대지 않은 채로 뜀틀을 넘는 낙법을 성공시킨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자존심이 상했던지 낙법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충분한 연습조차 없이 뜀틀을 뛰어넘으려고 하다가 공중에서 곤두박질해 목을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의 부상으로 인해 마지막 격술훈련 판정은 또다시 나 혼자서 받아야 했다.

 

이 외에도 초대소에서 적구화 교육 기간에 발표된 김일성·김정일의 노작과 당 정책, 주체 철학에 대한 공부는 물론이고 무전 송·수신 훈련과 암호 해독 훈련 등 통신 연락과 관련한 훈련도 지속적으로 실시했고 실탄 사격 훈련도 했다.

잠꼬대하는 공작조장

김명걸과 함께 하는 적구화 교육 과정 중 전에는 서로에 대해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된 적도 있다.

 

김명걸은 낮에 조금만 힘든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면 어김없이 잠꼬대를 하곤 했는데, 일반적인 그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당일 낮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옆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물론 좀 변덕스럽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겁이 많은 것 등은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낮에 있었던 일들을 다른 사람과 대화하듯 털어놓는 그의 특별한 잠꼬대는 적지에서 공작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공작원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잠꼬대 사실을 알려 주며 주의를 당부했지만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냈다.

 

결국 그 후 나는 이러한 사실을 담당 지도원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낮에 있었던 일 늘어놓는 잠꼬대 공작원의 최대 약점

김명걸이 잠꼬대하면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와 함께 적구에 침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기 위해 공작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모든 것은 부서에서 판단할 일이지만 저로서는 그의 잠꼬대가 고쳐지지 않는 한 절대로 그와 함께 적구에 나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내 의견을 경청한 담당 부부장과 지도원은 김명걸에게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면 앞으로 공작원을 하기가 힘드니 무조건 고치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이 잠꼬대를 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렸다. 할 수 없이 담당 지도원이 초대소에서 직접 잠을 같이 자면서 확인하고 이야기해서야 겨우 믿는 눈치였다.

 

비단 잠꼬대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는 결국 그 이듬해 초에 김명걸과 헤어져 다른 사람과 공작조를 이루게 되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 아버지는 자식인 저와 동생에게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다음 세대가 더 나아진다”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제가 아버지를 뛰어넘는다는 게 과연 가능할지 또 어떻게 해야 가능할지 등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삶은 국가를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거든요.

 

아버지 : 사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의 대부분을 개인이 아닌 국가를 위해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북한에서의 15년은 김씨 독재 체제를 위해, 남한에서의 20년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해 바쳤으니까.

 

내가 자식인 너희들에게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한 것은 단순히 나처럼 국가를 위해 충성하라는 건 아니었어.

 

후대 세대가 선대 세대를 뛰어넘어야 가정이든 국가든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얘기한 거였어. 실제로도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렇게 해서 발전해 왔으니까.

 

그런데 내가 너희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려 했던 것은, 내가 제대로 된 대남 공작원이 되기까지 준비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기 때문에 너희들도 어떤 일을 하든 10년은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 그 분야에서 프로가 된다는 의미에서 얘기한 거야.

 

한국은 북한에 비해 모든 면에서 조건과 환경이 좋으니까 그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너희들이 충분히 나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얘기한 거야. 지금 너희들을 보면 충분히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면 얼마든지 아버지인 나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믿어.

 

[평양에서 왔습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