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說竪說(동아일보) 2025-04/
04-01(화) 쿠데타에, 내전에, 초강력 지진까지 덮친 미얀마

미얀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는 28일 발생한 규모 7.7 강진의 최대 피해 지역이다. 인구가 120만 명인 이 대도시의 더없이 취약한 구조 인프라가 이번 지진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무너진 건물 틈새로 “살려달라”는 비명이 곳곳에서 난무하지만 잔해를 치울 장비가 없어 맨손으로 구조한다고 한다. 도시에 몇 안 되는 병원들은 이미 부상자로 가득 차 흙바닥에서 담요를 깔고 치료받는 환자들이 많다. 병원이 무너지는 바람에 들것에 실려 나온 한 임신부는 거리에 누운 채 출산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폭염까지 겹쳐 생존자들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미얀마의 이 같은 아비규환은 비단 지진 때문만은 아니다. 4년 전 군부 쿠데타와 그에 따른 오랜 내전으로 이미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군부와 저항세력 간 무력 충돌로 의료·구호 시설은 파괴됐고, 교통·통신 등 기반시설도 마비됐다.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은 군사 정권에서 일할 수 없다며 의료 현장을 떠났다. 게다가 저항군이 장악하고 있는 만달레이 주변 지역은 군부 정권이 각종 물자 지원도 끊은 상황이었다. 군부는 반군을 소탕한다며 이 지역을 계속 공습해 왔고 심지어 지진이 나던 날에도 폭격을 퍼부었다.
▷미얀마 군부 수장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2021년 총선 패배에 불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4년간 군부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4400여 명에 달한다. 미얀마를 외부와 단절시키기 위해 방송과 인터넷을 차단해온 군부는 대지진이 나자 “모든 국가의 도움을 받겠다”며 국제사회에 처음 손을 벌렸다. 그만큼 상황이 처참하단 얘기다. 원자폭탄 334개에 맞먹는 강진으로 현재까지 공식 사망자만 1600여 명에 이른다.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을 수 있다는 분석(미국 지질조사국)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얀마를 돕겠다”고 하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미국의 해외 구호를 총괄하는 국제개발처(USAID) 폐지를 추진하면서 원조 사업을 대폭 축소한 장본인이 트럼프다. 그에 따른 인도주의적 지원 공백이 현실화되는 첫 사례가 미얀마 지진일 거란 우려가 높다. 국제사회 지원이 이뤄지더라도 군부가 통치 지역 외에는 원조품을 공급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미얀마의 거의 절반은 민주 진영 임시정부의 관할하에 있다.
▷최악의 시기에 강타한 초강력 지진으로 구조대와 의료진이 절실한 만달레이에는 총을 든 군인들만 넘쳐난다고 한다. 총으로는 단 한 명도 살릴 수 없다. 힘겹게 구조 활동을 벌이는 시민들은 외신에 “여긴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죽음의 도시”라고 말한다. 재난은 정치가 불안한 나라를 더 가혹하게 뒤흔든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4-02 트럼프 피해 ‘학문적 망명’ 떠나는 美 석학들

폭정과 독재 연구의 대가인 미국 예일대 석학 3명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학 정책에 반발해 이민 길에 오른다. 새로 둥지를 틀 곳은 트럼프가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무시하는 캐나다의 명문 토론토대다. 이런 선택을 한 티머시 스나이더는 ‘폭정’(2017년)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2019년) 등 저서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역사학자다. 그는 트럼프를 아돌프 히틀러에 빗대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이라고 경고해 왔다. 예일대 동료인 그의 부인, 유명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도 함께 떠난다. 스탠리는 “독재로 기울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이들이 ‘학문적 망명’을 결심한 건 미 유수의 대학들이 트럼프의 압박에 학문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컬럼비아대가 교내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허용한 것을 문제 삼아 반(反)유대주의를 부추긴다며 4억 달러(약 5900억 원)의 연방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결국 대학 측은 집회 중 마스크 금지, 시위 학생 징계 등 방안을 내놓으며 항복했다. 하버드대, 펜실베이니아대 등도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관련 정책을 없애지 않으면 연방 예산을 끊겠다는 트럼프의 겁박에 비상이 걸렸다.
▷미 연구자들의 엑소더스(대탈출) 조짐은 학계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최근 네이처지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5%가 ‘미국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예산 절감을 명분으로 연구비를 대폭 삭감한 충격이 크다고 한다. 많은 연구 프로젝트가 중단 위기에 처했고, 적대적 이민 정책까지 겹쳐 연구실을 지탱해온 해외 인재들을 데려오기도 깐깐해졌다.
▷미국의 과학기술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시즘과 유대인 탄압이 심했던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망명해온 학자들 덕에 획기적으로 도약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독일), 엔리코 페르미(이탈리아) 같은 과학자들이 미 기술 패권의 토대가 됐다. 요즘 실리콘밸리를 이끄는 건 인도계인 순다르 피차이(구글), 사티아 나델라(마이크로소프트), 대만계인 젠슨 황(엔비디아), 리사 쑤(AMD) 등 이민자 출신 CEO들이다. 또 풀브라이트 등 장학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 인재들을 빨아들인 게 국제개발처(USAID)인데 트럼프는 ‘국제 봉사에 왜 돈을 쓰느냐’며 이 기구를 없애려 한다.
▷해외 대학들은 지금이 미국 인재들을 데려올 기회라고 보고 있다. 토론토대뿐 아니라 영국 케임브리지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등이 이들에게 자유로운 연구를 보장하겠다며 손짓하고 있다. 중국도 미국이 뒤로 빠진 틈을 타 개도국 인재들에게 두둑한 장학금을 내걸었다. 트럼프가 일부 열성 지지층만 바라보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는 사이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재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4-03 봄철 산불 막으려 세종대왕도 “寒食 땐 불 사용 금지”

한식(寒食)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올해는 5일이다. 봄철 성묘를 가는 날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한식에는 찰 한(寒), 밥 식(食)이라는 한자 그대로 찬 음식을 먹었고 불의 사용을 금했다. 이런 전통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건조한 봄철 화재를 예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31년 세종대왕이 “한식 사흘 동안 불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왕명을 내린 기록이 있다. 봄철 실화 대책을 논의하던 자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식의 전통이 ‘불조심’의 경고를 담고 있지만 한식만 가까워져 오면 성묘객의 부주의로 인한 산불이 자주 발생한다. 연간 산불 발생 건수의 절반 이상이 3∼5월에 발생한다. 건조한 대기, 강한 바람, 그리고 불쏘시개가 될 수 있는 바싹 마른 나무까지 불이 나기 쉬운 조건을 고루 갖춘 시기다. 성묘를 와서 축문(祝文)을 태우거나 음식을 조리하고,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렸다간 삽시간에 산불로 번진다.
▷지난달 21일 경남 산청에서 시작돼 149시간 35분 동안 서울 면적의 75%를 태운 ‘영남 산불’ 대부분은 실화가 그 원인이었다. 주불이 가장 크게 번졌던 경북 의성은 성묘객이 라이터로 묘지를 정리하다 불을 냈다. 경남 김해 산불은 문중 묘지에서 과자 봉지를 태우다가, 경남 통영 산불은 부모님 묘소 앞에 피운 초가 넘어지며 발생했다. ‘영남 산불’은 아니지만 전북 김제에서는 성묘객들이 부탄가스로 음식을 조리하다 산불을 냈다. 산림청의 최근 10년간 산불 통계에 따르면 한 해 평균 발생 산불 546건의 원인은 입산자 실화(37%), 쓰레기 소각(15%), 논·밭두렁 소각(13%), 담뱃불 실화(7%) 순이었다.
▷산불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명문 종가들부터 이미 성묘 절차를 간소화해 왔다. 광산김씨대종회는 향 피우기를 생략하고 있고, 안동김씨대종회는 산에선 축문을 태우지 않는다. 자식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향을 피우고 축문을 태우는 건 고인도 바라는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한식에는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
▷‘설마’ 하는 부주의가 산불로 번지면 사람도 다치지만 산속에 살던 식물, 동물까지 모조리 떼죽음을 당한다. 이번에 ‘영남 산불’로 잿더미가 된 산이 다시 회복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어렵다. 더욱이 갈수록 산불이 대형화되고 있어 애초에 불씨를 만들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향 초 축문 등을 태우지 말고, 라이터 부탄가스 등도 휴대해선 안 된다. 담배도 금물이다. 산에 화기, 인화 물질, 발화 물질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산림보호법 위반이다. 쓰레기도 함부로 태우지 말고 가지고 온다. 만약에 대비해 통상 300∼500g 정도의 가벼운 휴대용 소화기를 지참하는 것도 방법이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4-04 “직 걸겠다” “사표 말려서”… 이복현의 경망함

“제가 최근에 (김병환) 금융위원장께 연락을 드려서 (사퇴) 입장을 말씀드렸거든요.” 2일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본인이 사의를 표명했음을 불쑥 밝혔다. 진행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공개했다. 그런데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께서 연락을 주셔서 시장 상황이 너무 어려운데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고 자꾸 말리셨다”고 했다. “직을 걸겠다”는 소신을 지키려 물러나려고 했더니 주변에서 간곡히 만류해 뜻을 접었다는 얘기다.
▷“사실 공개된 자리에서 막 다 얘기할 건 아닌데”라면서도 방송을 통해 요란하게 밝힌 사의 소동은 지난달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달 13일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를 법제화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이 원장은 정부가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며 강하게 주장했다. “직을 걸고 반대한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상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재계에 공개토론을 제의하고, 라디오에 나와 외환시장 충격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소관 부처인 법무부도, 직제상 상급 기관인 금융위원회도 제치고 나선 좌충우돌에 ‘월권’이란 지적이 나왔다.
▷결국 거부권이 행사되자 사의를 밝혔다던 이 원장이 마음을 돌린 건 지금이 엄중한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침 미국이 상호관세를 발표하면서 3일 잡힌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F4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4일 탄핵 심판 선고 결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국정 혼란과 대외 경제 환경 악화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금융당국 수장으로서 직의 무게를 생각했다면 애초에 사퇴 운운하며 불협화음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
▷대통령의 생각이 자신과 같다는 듯 언급한 것도 논란이 됐다. 2일 이 원장은 라디오에서 “주주가치 보호와 자본시장 선진화는 (윤석열) 대통령께서 직접 추진한 중요 정책이고 대통령께서 계셨으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지난해 1월 윤 대통령이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맞지만, 이후 숱한 논의를 거쳐 지난해 11월부터는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부 입장이 정리돼 있었다.
▷금융당국 수장의 발언은 진중하고 일관돼야 하지만 취임 후 이 원장의 행보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민간 금융사 최고경영자(CEO) 임기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해 관치논란을 불러왔고, ‘공매도 재개’ 같은 섣부른 발언과 대출 정책에 대한 오락가락 지시로 시장을 혼란에 빠뜨렸다. 직을 걸었다지만 임기가 두 달가량 남은 그의 일정은 해외 출장에 지방 은행 순시, 유튜브 출연까지 빼곡하다. 임기가 끝난 뒤 무엇을 노리는 건지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행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05(토) 3년간 나라 뒤흔든 ‘영부인 리스크’

윤석열 전 대통령의 3년을 요약한 듯한 사진이 한 장 있다. 지난해 9월 2일 윤 전 대통령은 방한한 미국 상원의원단 부부를 청와대 상춘재 만찬에 초대했다. 마침 생일이었던 김건희 여사가 한 의원의 배우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환히 웃고, 그 옆자리에선 윤 전 대통령이 박수를 치는 만찬 사진이 공개됐다. 참석자들은 생일 축하 노래도 불렀다고 한다. 김 여사가 “잊지 못할 생일”이라 했던 이날은 제22대 국회 개원식 날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계엄설이 난무하고 특검·탄핵을 남발하는 국회 정상화가 먼저”라며 불참했다. 국회를 경시하고 내심 계엄을 생각했던 대통령과 외교 사절로부터 당당히 생일 축하를 받은 영부인. 비극은 잉태되고 있었다.
▷윤 전 대통령 임기 내내 나라는 ‘영부인 리스크’로 시끄러웠다. 취임 초기부터 김 여사가 운영했던 코바나컨텐츠 후원 업체가 수의계약으로 관저 공사를 맡았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 양평 고속도로 노선 특혜 변경 의혹으로 ‘김 여사 특검법’이 네 차례나 발의됐고, 국회 통과와 거부권 행사가 반복되며 정국은 얼어붙었다. “뭐 쪼그만 백”이라던 디올백 수수 의혹은 지난해 4월 총선 참패의 주요 원인이었다.
▷‘진짜 권력’인 김 여사를 보호하려다 국가 기관은 참담하게 망가졌다. 감사원은 관저 공사 의혹에 대해 위법은 맞지만 누가 선정했는지는 모른다는 ‘맹탕 감사’를 했다. 국토교통부는 감사 시늉만 하고 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과정은 제대로 따져보지 않았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공직자 배우자는 처벌할 수 없다며 ‘디올백 면죄부’를 줬고, 검찰은 김 여사의 도이치 사건 연루 의혹을 뭉개더니 4년이 지나 ‘알현 조사’를 했다.
▷공적 권한이 없는 영부인의 국정, 공천 개입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김 여사 라인’이 장악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김 여사 전화를 직접 받았다는 공직자가 수두룩하다. 지난해 9월에는 ‘명태균 게이트’가 터졌다. 김 여사가 2022년 재보선, 2024년 총선 때 공천에 개입한 정황을 보여 주는 통화 녹취와 메시지가 공개된 것이다. 김 여사가 “아니 오빠, 명 선생 그거 처리 안 했어”라고 윤 전 대통령에게 따져 묻고 “김영선 (공천) 걱정 말라고, 자기 선물”이라고 했다는 것이 명 씨의 전언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해 12월 3일은 명 씨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날이다. 국정, 공천 개입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황금폰’ 폭로를 막기 위해 비상계엄을 실행한 건 아닌지 하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헌정사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은 따지고 보면 아내를 유독 사랑했든지, 외로운 처지의 남편을 돕고 싶었든지 간에 선출되지 않은 영부인이 권력을 공유했다 벌어진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4.07(월) 美서 번지는 ‘트럼프, 손 떼라’ 시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갖고 있는 ‘문제적 기록’은 화려하다. 미국 역사상 두 번이나 탄핵 소추된 유일한 대통령이며, 중범죄자 꼬리표를 달고 취임한 첫 대통령이다. 그런데 재취임 두 달 만에 또 하나의 기록을 추가하게 됐다. “억만장자는 권력에서 손을 떼라”는 뜻의 대규모 ‘핸즈오프(Hands Off)’ 시위를 촉발한 대통령이 된 것이다. 요즘 미 전역은 반(反)트럼프 시위로 들끓고 있다. 5일(현지 시간)에만 50개 주, 1300여 개 지역에서 핸즈오프 시위가 벌어졌고 60만 명이 참석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시위대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라’ ‘사회보장에 손대지 마라’ ‘관세가 무섭다’ ‘교육에서 손 떼라’ 등 각양각색의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무역 정책, 공무원 대량 해고, 복지 축소 등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적인 시위로 분출된 것이다. 시위 현장에는 트럼프 못지않게 연방정부 구조조정을 이끄는 ‘퍼스트 버디’ 일론 머스크를 규탄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트럼프 2기에서 해고된 공무원이 벌써 12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특히 전 세계를 향해 융단폭격 식으로 퍼부은 ‘트럼프 관세’가 미국 증시부터 박살내면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상호관세 발표 직후인 3, 4일 이틀간 미국 증시의 3대 지수는 일제히 10% 안팎 급락하며 팬데믹 위기 이후 최악의 폭락장을 연출했다. 미 증시는 관세 폭탄을 맞은 나라들보다 더 많이 떨어져 이틀 새 1경 원에 가까운 시가총액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 같은 폭락 장세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어서 더 무섭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미국 유권자의 절반 이상(54%)이 트럼프 관세 정책을 반대한다고 답했다. 올 초만 해도 관세 정책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반대보다 많았던 것과 딴판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세운 높은 관세 장벽이 미국 내 물가를 높이고 해외에 공장을 둔 미국 기업의 이익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 탓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그는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비판했을 정도다.
▷이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발표 바로 다음 날 플로리다의 마러라고 리조트로 날아가 골프를 즐기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지금이 부자 되기 좋을 때”라고 썼다. 시위 현장 곳곳에서 “주식시장은 폭락하고, 트럼프는 골프 친다”는 분노의 외침이 들린 배경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에도 “이것은 경제 혁명이며,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버텨내라”며 관세 전쟁을 강행할 뜻을 거듭 밝혔다. 미국 대통령이 막무가내로 힘을 휘두르는데 막을 사람이 없다. 분노한 시민들이 트럼프의 일방주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달아 줄 수 있을까.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08 ‘다크 투어리즘’ 현장 된 탄핵집회

재난이나 전쟁이 벌어진 참사 현장은 훗날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다. 9·11테러 현장인 미국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서대문형무소, 비무장지대(DMZ) 같은 곳들이 있다. 역사적 고난을 물리적 증거로 남기는 동시에, 그때의 비극을 이겨냈다는 걸 보여주는 장소들이다.
▷얼마 전까지 이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관련 집회에는 외국인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시위대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다. 해외 언론도 현장 생중계까지 하며 한국의 집회 문화를 조명했다. 참가자들이 K팝을 떼창하고 야광봉을 흔드는 모습에 K팝 콘서트를 연상시킨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들에게 서울 종로와 여의도 등 집회 현장을 구경시켜 준다는 관광 가이드들까지 등장했다. 우리 민주주의에 재난과도 같았던 계엄 사태로 빚어진 시위가 현재 진행형의 다크 투어리즘 상품이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한국에 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올 2월까지 석 달간 입국한 해외 여행객이 전년 대비 19% 증가했다. 계엄 충격으로 원화 가치가 떨어져 한국 여행이 저렴해지기도 했지만 탄핵 집회에 대한 호기심이 영향을 줬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의 시위 현장이 안전하다는 소문이 SNS로 많이 퍼졌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택시 기사에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집회 장소로 가달라고 한다거나, 서울 도심 호텔에 투숙하는 외국인들이 ‘집회 뷰(view)’가 나오는 방을 선호한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계엄 사태로 인한 전례 없는 불안과 혼돈이 외국인들에게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탄핵 찬반으로 갈려 과격하게 목청을 높이는 국론 분열의 속살이 외국인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됐다. 법원이나 재판관들을 공격하자는 일부 시위대의 선동은 한국의 국격을 의심케 했다.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된 뒤 대부분의 시위대가 헌법재판소 결정에 승복해 자진 해산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외국인들에게 싸움 구경만 시켜주는 민주주의의 흑역사를 쓸 수도 있었다.
▷탄핵 집회가 자주 열린 서울 안국동과 광화문 일대는 우리 민주주의의 전시장 같은 곳이다. 북촌, 경복궁 등 유명 관광지들과 붙어 있어 외국인들의 시선이 늘 향해 있다. 이런 접근성 때문에 탄핵 집회가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다행히 시위 참가자들이 평화롭게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더는 다크 투어리즘 상품으로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탄핵 집회는 뜨겁고 요란했지만, 뒤끝은 없었던 쿨한 이벤트로 기억됐으면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4-09 “나도 한번”… 국민의힘 13룡? 15룡?

우리 정치에 잠룡(潛龍)이란 말이 본격 등장한 것은 1997년 대선 때다.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 등 9명이 각축했는데, 아홉 잠룡이란 뜻에서 ‘9룡’으로 불렀다. 아직은 물속에 몸을 맡긴(潛) 미래의 대통령(龍)이란 뜻이었다. ‘1호 당원’이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국민의힘에선 잠룡이 넘쳐난다. 6·3 대선을 50여 일 앞두고 15명 안팎까지 늘어난 이들을 13룡, 15룡으로 부른다. 모두가 잘 준비된 잠룡일 수는 없건만, 출마 희망자는 늘어나고 있다.
▷안철수 의원과 이정현 전 대표가 8일 대선 도전을 선언했고,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도 출마를 위해 이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오세훈 서울시장, 유승민 전 의원, 유정복 인천시장, 이철우 경북지사, 한동훈 전 대표, 홍준표 대구시장이 출마를 공식화할 것으로 보인다. 탄핵 반대를 주도했던 나경원 윤상현 의원,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도 거론된다. 황교안 전 대표는 탈당 후 출마를 예고했다. 당 일각에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영입 의견까지 나온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처럼 압도적 1등 후보가 없는 가운데 ‘나도 한번’ 하는 심정이 있을 것이다.
▷경선 참여를 위해선 당에 기탁금을 내야 한다. 후보 난립 방지를 위한 것으로, 3년 전 대선 때 국민의힘은 1억 원을 책정했다. 4월 말 결정짓게 될 최종 후보군에 못 끼는 후보들은 길어야 보름 동안 대선 예비후보의 지위를 얻게 된다. 컷오프되는 후보라면 연설과 경선토론 몇 번 참여하는 비용만으로도 억대의 돈을 써야 한다. 캠프 임차료와 홍보 비용 등을 합치면 부담은 더 늘어난다. 그런데도 도전자는 넘친다. 대선주자라는 이력과 인지도를 쌓으면서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당 대표 선거를 준비하겠다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경선 참여가 이들에게 마냥 꽃길이 될 리는 없다. 국민의힘은 2번 연속해서 자당 대통령이 파면당했다. 경선 주자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비롯해 대통령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새 정치가 뭔지 질문받을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이란 상투적 답변으로는 곤란하다. 대선주자급 정치인이라면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왜 대통령의 실패를 막지 못했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국민의힘은 대선 체제로 돌아섰다. “하루의 치유면 충분하다”는 어느 예비후보의 말을 당은 믿는 듯하다. 2차례 탄핵은 보수정치에 완전한 깨어짐을 요구한 국민의 명령이다. 이번 경선이 잠룡들의 ‘대선 이후’를 준비하는 수단 정도라면, 수긍할 유권자가 얼마 없을 것이다. 13명이건 15명이건 잠룡들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자기 정치의 본질과 밑바닥을 드러낼 때가 온 것이다. 열성 지지층 눈치 보느라 옹색한 답이 나오지 않기를 기대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4-10 차기 주자들 너도나도 “용산 안 간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의 빠른 실행을 약속하며 “좋아, 빠르게 가”를 외치곤 했다. 그 시원한 외침은 ‘밈(meme)’으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은 말 그대로 ‘빠르게 가’였다. 애초 광화문 집무실을 공약했지만 당선 열흘 만에 용산 집무실로 바뀌었다. 그리고 50일이 지난 2022년 5월 10일 취임 당일 국방부 신청사에 마련된 집무실로 출근했다. 집을 이사해도 두 달은 더 걸릴 법한데, 국가 최고 보안시설이 ‘번개 이사’를 한 것이다.
▷폐쇄적인 공간인 청와대를 떠나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집무실을 만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권위를 탈피한 일하는 대통령을 기대하는 국민이 많았다. 그런데 경호와 보안 문제 등을 이유로 난데없이 용산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광화문은 경호에 수반되는 시민 불편이 크고 안보 시설 구축이 마땅치 않은 반면에, 용산은 지하 벙커 등이 이미 갖춰져 비용이 적게 든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다지 타당한 설명은 아니다.
▷당시 전 합참의장 11명이 대통령실 이전에 따른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의 연쇄 이동으로 안보 공백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실제 미국이 대통령실을 감청한 사실이 드러났고, 북한 드론이 대공 방어망을 뚫고 침투했다. 이전 비용도 끊임없이 불어났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까지 대통령 관저와 대통령실 용산 이전에 집행된 비용을 조사했더니 모두 832억 원이었다. 당시 윤 전 대통령이 얘기한 496억 원의 1.7배다. 야당에선 경기 과천으로 옮길 예정인 합참 신축 비용 등을 포함하면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외교 행사는 청와대 영빈관, 상춘재를 계속 이용했고 대통령 동선이 복잡해져 시민 불편도 결코 줄지 않았다.
▷상식적이지 않은 의사 결정의 퍼즐은 ‘무속’으로 맞춰졌다. 지난해 11월 공개된 명태균과 지인의 통화 녹음에서 명 씨는 대선 직후 김건희 여사에게 “경호고 나발이고, 거기(청와대) 가면 뒈진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김 여사와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풍수가 백재권은 “청와대는 흉하다”, 무속인 천공은 “용산으로 가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백 씨는 관저 후보지였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방문한 사실이 경찰 수사에서 확인된 바 있다.
▷윤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용산 대통령실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야를 막론하고 유력 대선 후보들이 입주를 꺼리고 있어서다. “군사 쿠데타를 모의한 본산” “불통과 주술의 상징” “안보적 취약성”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3년 임차료로 832억 원이나 내고 방을 뺄 판이다. 윤 전 대통령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며 용산 대통령실을 백악관 웨스트윙처럼 개방적인 공간으로 만들겠다더니 정작 그곳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용산 대통령실은 ‘구중궁궐’이라던 청와대보다 더한 공간이었나.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4-11 “나바로는 벽돌보다 멍청” vs “머스크는 단순 조립업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향해 마구잡이로 퍼부은 상호관세를 둘러싸고 ‘트럼프 2기 경제팀’의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먼저 격돌한 건 관세 전쟁의 설계자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과 ‘퍼스트 버디’ 일론 머스크다. 상호관세 조치가 발표되고 사흘 후 머스크는 “미국과 유럽은 무관세로 가야 한다”며 트럼프 기조와 상반되는 주장을 펼쳤다. 나바로를 겨냥해선 “뭐 하나 이룬 게 없다”고 비꼬았다. 나바로는 트럼프 1기 4년을 꽉 채우고 2기에 발탁된 유일한 경제 관료다.
▷“미국 산업이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장담과 달리, 해외에 공장을 둔 미국 기업들이 관세 직격탄을 맞을 거라는 우려가 커지자 머스크가 총대를 메고 나선 셈이다. 그러자 나바로는 “머스크는 차를 파는 게 중요하다. 상호관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공개 비판했다. 그러면서 “머스크는 자동차 제조업자가 아니라 조립업자다. 테슬라의 많은 부품이 중국, 일본, 대만에서 온다”고 깎아내렸다.
▷머스크는 “테슬라는 가장 미국산 차(the most American-made cars)”라며 “나바로는 벽돌보다 멍청하다”고 맹비난했다. 트럼프의 최측근들이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설전 수위를 높인 것이다. 나바로는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부상을 막는 게 최우선 과제지만 테슬라는 전체 매출의 20%가 중국에서 나온다. 오히려 자동차 부품 관세 때문에 미국 공장에서 만드는 테슬라 차의 가격을 올려야 할 처지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골수 마가(MAGA)파’가 중국을 때릴 때마다 머스크가 제동을 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두고 ‘골수 마가’와 트럼프 2기의 신진 세력으로 분류되는 ‘다크 마가’의 충돌이라는 해석까지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류 관료나 정치인을 배제하는 인사를 하면서 경제팀엔 빅테크 엘리트와 정통 금융인·기업가 출신을 포진시켰다. 머스크를 비롯해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자수성가 기업인 출신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대표적이다. 두 그룹의 경제 철학은 닮은 듯 서로 달라 트럼프의 경제 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가 관심사였는데,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나라의 상호관세를 느닷없이 유예하는 과정에서도 경제팀의 내분이 엿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유예를 검토하면서 베선트, 러트닉 장관과 논의했다고만 했을 뿐 나바로는 언급하지 않았다. 베선트는 한국, 일본 등과의 무역 협상도 맡았다.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월가와 공화당 지지자들마저 분노를 표출하자, 고율 관세에 반대해 온 온건파 장관들에게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이번 유예 조치로 각국은 시간을 벌었지만, 트럼프 경제팀의 분열과 갈등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12(토) ‘매드맨’ 트럼프도 두 손 든 美 국채 투매

“때로 무엇인가를 고치려면 약(medicine)을 먹어야 한다.” 미국이 2일 상호관세를 발표한 뒤 미국 주식시장에선 연이틀 대폭락장이 연출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태연했다. “꽉 잡고 버텨라. 끝은 아름다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장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9일 “국채 시장을 보니 사람들이 약간 불안해하더라”며 상호관세를 90일 유예한다고 했다. 증시 패닉과 동맹국의 반발에도 꿈쩍하지 않던 그를 채권 시장이 막아 세운 것이다.
▷위험자산인 주식과 안전자산인 채권은 통상 반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아 치우는 동시에 가장 안전하다던 미 국채도 대량으로 내던졌다. 대규모 국채 매도는 자칫 정부 존립을 뒤흔들 수 있는 ‘폭탄’이다. 2022년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를 취임 44일 만에 사임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도 국채 투매였다. 재원 대책 없이 감세 정책을 내놓자 투자자들이 영국 국채를 대거 매도했고, 결국 국채 가격과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해 위기를 맞았다.
▷미국은 특히 국채에 민감하다. 정부 빚이 많기 때문이다. 미 연방정부 부채는 지난해 말 기준 36조1400억 달러(약 5경2500조 원)에 이른다. 지난해 국채 이자로만 국방비보다 많은 1300조 원 가까이 썼다.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 금리가 오르는데, 워낙 빚이 많다 보니 금리가 조금만 올라도 이자 부담이 급증한다. 재정적자 감축을 목표로 내건 트럼프 대통령에겐 재앙 같은 상황이다. 모기지론(주택담보대출) 금리 등이 국채 금리에 따라 오르게 되면 미국민들의 생활에도 큰 타격을 준다.
▷갑자기 미국 국채를 팔아 치운 건 누구일까. 일단 주가 급락으로 큰 손실을 본 헤지펀드들이 채권을 팔아 현금 확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채권 투자자 일부가 ‘채권 자경단’으로 나섰다는 해석도 있다. 정부의 재정 및 통화정책에 반발해 항의의 의미로 국채를 대량 매도하는 투자자들을 말한다. 미국 국채를 1조 달러 이상 쥐고 있는 일본과 7600억 달러가량 보유한 중국이 관세 전쟁에 대한 맞불로 투매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일단 상호관세 유예로 한 고비를 넘겼지만 미국 금융시장의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관세 엄포와 철회가 반복되며 미국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제조업을 살리고 적자를 줄이면서 중국도 견제하고 달러 패권도 놓고 싶지 않은 모순된 목표 때문에 정책 방향이 널뛰기를 한다. 이러다 보니 과연 미 달러와 국채가 세계의 안전자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커졌다. 그나마 ‘매드맨’ 트럼프도 결국 시장을 이기긴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14(월) 오사카 엑스포, 부산 엑스포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3대 글로벌 이벤트로 꼽히는 엑스포가 12일 오사카에서 개막했다. 1970년 오사카, 2005년 아이치에 이어 일본에서 열리는 세 번째 등록 엑스포다. 오사카가 개최지로 선정될 때만 해도 전후 일본의 부흥을 알렸던 55년 전 오사카 엑스포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들떠 있던 현지인들은 이번엔 시작부터 저조한 흥행에 ‘동네 잔치’로 끝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오사카 엑스포 개최 지역은 매립지에 만든 인공섬 유메시마다. 엑스포 상징물인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 ‘그랜드 링’(둘레 2km) 안팎으로 한국을 비롯해 각국의 전시관 42개가 마련돼 첨단 기술을 선보인다.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한국인들이 몰려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개최지 선정 당시만 해도 관람객 2820만 명을 유치해 33조 원의 경제 파급효과를 낼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금까지 팔린 티켓은 1000만 장도 안 된다. 라멘 한 그릇에 3만8000원, 여행 가방 맡기는 데 하루 10만 원인 ‘바가지요금’도 논란이다.
▷한국은 오사카 다음으로 국내 최초 등록 엑스포가 될 2030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려다 실패했다. 지역 안배 원칙을 감안하면 오사카에서 가까운 부산이 될 가능성은 낮았음에도 대통령실에 전담 조직까지 두고 유치전에 올인한 결과 2023년 11월 1차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29 대 119로 대패했다. 부산만의 매력을 보여주기보다 강남스타일과 오징어 게임을 내세운 홍보 전략은 “뜬금없고 식상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1차 투표 3개월 전 ‘잼버리 사태’가 터지자 한국의 대형 행사 개최 역량이 의심받기도 했다.
▷결과 예측에 실패해 헛심 쓰게 한 정부의 무능은 더 큰 문제였다. 대통령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론 ‘한국 지지로 선회’ ‘불과 10여 표 차이’라는 보고가 줄을 이었다. 1차 투표에서 70표 얻고 2차 투표에서 뒤집자는 전략이었다. 일선에서 ‘아직 그만한 표를 확보 못 했다’고 보고하면 ‘왜 사기를 꺾느냐’는 질책이 떨어졌다고 한다. 외교망 확충 효과를 거뒀다고 하나 2년간 5744억 원, 표당 198억 원이 들었다.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지만 그뿐이었다. 판세 예측 실패나 허위 보고 여부에 관한 진상 규명은 없었다. 외교부 장관과 대통령실 참모는 징계는커녕 총선 공천을 받았고, 외교부 차관은 경제 부처 장관으로 승진까지 했다. 여권에서도 “무능하고 아부에 찌든 참모들이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는 질타가 나왔는데, 그때 대통령 보고 체계를 점검했더라면 엑스포 유치엔 실패해도 정권 실패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산 엑스포의 꿈을 접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당시 유치전부터 복기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15 1명만 더 사퇴하면 위헌… 위태로운 국무회의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2008년 3월 열린 첫 국무회의에는 전임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됐던 행정자치부 장관 등 장관 4명이 참석했다. 헌법에 국무회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제외하고 최소 15명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된다고 규정돼 있다. 그런데 당시 장관 후보자가 연달아 낙마해 15명을 채우지 못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전임 정부 장관들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현 내각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뺀 국무위원 수가 딱 15명이다. 국무위원 19명 중 국방부, 행정안전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장관 등 4명이 사퇴해 공석이다.
▷어디서 장관을 꿔 올 수도 없는 현 정부는 한 명이라도 더 사퇴하면 헌법상 국무회의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하는 위헌 상황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국무회의 효력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2·3 비상계엄 정국에서 가장 먼저 사퇴한 이는 ‘계엄 2인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었다. 면직 당일 열린 국회 긴급 현안 질의에 김 전 장관이 출석해 계엄 전말을 증언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나왔다.
▷김 전 장관과 함께 윤 전 대통령의 충암고 동문인 이상민 전 행안부 장관의 사퇴 경위도 비슷했다. 이 전 장관이 계엄 옹호 발언 등으로 자신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다음 날 사의를 밝히자마자 윤 전 대통령이 면직을 재가했다. 더군다나 당시는 윤 전 대통령이 국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상태에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라 의도가 더욱 의심됐다. 이후 이 전 장관은 계엄 당일 윤 전 대통령의 쪽지를 본 뒤 언론사 단전·단수를 지시한 의혹이 드러나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여기에 윤 전 대통령 파면 뒤 김문수 전 노동부 장관이 대선에 출마하며 사퇴해 한 명 더 줄었다. 여가부 장관 자리는 지난해 김현숙 전 장관이 잼버리 파행으로 물러난 뒤 윤 전 대통령이 어정쩡한 상태로 방치해 1년 넘게 비었다. 4명 공석 다 윤 전 대통령이 초래한 것인데, 남은 장관을 15명으로 유지해도 국무회의 참석자가 의사정족수 11명이 안 돼 회의조차 열 수 없는 상황을 정부가 우려할 지경이 됐다. 통상 화요일에 열리는 국무회의를 월요일인 14일로 앞당긴 것도 15일 장관들의 해외 출장과 국회 일정 등이 겹쳐 정족수를 채우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엄 직전 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를 위해 반드시 심의를 거쳐야 할 국무회의를 열 생각이 없었다. 국무위원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지적에 정족수 11명을 채우는 시늉을 했지만 정상적 회의 절차를 무시한 채 계엄을 강행해 국무회의를 무력화했다. 국무회의를 무시했던 윤 전 대통령의 위헌적 행태가 국정 기능이 자칫 마비될 수도 있는 작금의 위태로운 상황을 낳았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04-16 지르고 거두고 뒤집고 미루고… ‘양치기’ 트럼프

하루만 한눈을 팔아도 이 롤러코스터를 따라잡을 수 없다. 11일 미국 정부는 스마트폰, 노트북 등을 상호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13일 전자제품 관세 예외는 없고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것일 뿐이라 했다. 다음 날인 14일엔 자동차 부품 관세 면제 가능성을 시사했다. 강경과 유연의 냉온탕을 오간다. 엘리자베스 워런 미 민주당 상원의원은 “대통령이 관세를 가지고 ‘신호등(red light, green light)’ 게임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지러운 변덕엔 패턴이 있다. 일단 질렀다가 미국이 손해 볼 것 같으면 거둬들인다. 미국을 얕잡아 본다 싶으면 다시 공세로 돌아선다. ‘미국 해방의 날’이라며 상호관세를 밀어붙이더니 미 국채 가격이 급락하자 90일 유예 카드를 꺼냈다. 중국 생산 비중이 높은 애플 아이폰 값 급등 우려에 스마트폰 관세를 접었다가 ‘중국에 대한 양보’라는 평가가 나오자 다시 예외는 없다고 했다. 자동차 부품 관세 면제를 거론한 것도 제너럴모터스(GM), 포드, 스텔란티스 등 미국 완성차 3사가 더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건 중국의 대응이다. 2018년 1차 무역전쟁 때처럼 엄포를 놓으면 꼬리를 내리며 협상에 나설 줄 알았더니 결사항전의 태세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1기의 경험으로 기술 자립과 내수 진작에 공을 들여 맷집을 키웠다. 세 자릿수 관세에 곧바로 보복관세로 응수하고, 전략물자인 희토류 수출 통제 카드까지 꺼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14일부터 동남아 순방에 나서 대미 공동전선을 모색하고 있다.
▷동맹국들의 반발과 미국 소비자들의 불만도 고민거리다. 처음엔 동맹국들을 상대로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이 먹혔지만 시간이 갈수록 트럼프 대통령을 ‘양치기 소년’으로 보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총리가 날아가 투자와 방위비 증액 보따리를 내밀었던 일본조차 이젠 협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태도다. 미국 내에선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애덤 포즌 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소장은 “트럼프가 ‘경제적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1968년 북베트남의 ‘구정 대공세’는 작전 자체는 실패였지만, 베트남전의 운명을 가르는 전환점이 됐다. 미국대사관이 공격받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고 반전 여론이 고조됐다. 트럼프 지지자들 중엔 ‘관세는 중국 기업이 내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실제론 미국 소비자가 최종적으로 부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들이 깨닫는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설 자리가 크게 좁아지게 될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17 美-中 ‘관세전쟁’에 더 거세질 ‘알테쉬 공습’

한국 소비자들이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직접 사들인 물건이 지난해 8조 원어치에 육박하는데, 이 중 60%가 중국발(發) 직구다. 초저가를 앞세운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의 등장 이후 중국 직구액은 해마다 조 단위 숫자를 바꿔가며 최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국내에선 150달러 이하 소액 수입품은 관세와 부가세가 면제되는데 중국에서 직구하는 제품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 과거엔 중국이 저가 제품을 쏟아내더라도 관세 장벽으로 1차 방어를 할 수 있었다면, 알테쉬 직구 시대엔 이마저 사라졌다는 뜻이다.
▷알테쉬의 초저가 공습에 골머리를 앓는 건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800달러 이하 소액 수입품에 면세를 해주는데, 이를 이용해 미국에 들어온 중국산 제품이 지난해 8억 개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를 발판으로 테무는 단숨에 미국 내 앱 다운로드 1위에 올랐고, 쉬인은 미국 패스트패션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미국 유통시장을 뒤흔들고 아마존, 월마트를 위협하는 중국 이머커스의 존재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2일 전 세계를 향해 무차별 상호 관세를 발표하면서 중국산 제품에 대한 소액 면세 제도를 폐지했다. 소액 소포로 밀반입되는 마약류 펜타닐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했지만, 실상은 알테쉬를 정조준한 셈이다. 중국이 보복 관세로 맞대응하자 트럼프는 중국발 소액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30%에서 90%로 올린 데 이어 이틀 만에 120%까지 높였다. 그동안 무관세로 들어오던 알테쉬 제품에 다음 달 2일부터 120%의 관세 폭탄이 더해지는 것이다.
▷미국 진입이 사실상 막힌 중국 이커머스 업체들은 더 무섭게 한국 시장을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벌써 올 1분기에 면세 혜택을 받고 국내에 들어온 중국발 직구 상품은 처음으로 6억 달러를 돌파했다. 알테쉬는 값싼 중국산 제품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 상품을 직접 유통하는 방식도 서두르고 있다. 테무는 올해를 한국 공략의 원년으로 삼고 국내 판매자를 모집 중이고, 알리익스프레스는 국내 유통 대기업과 손잡고 합작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알테쉬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국내 경쟁 이커머스 업체는 물론이고 중국산 헐값 제품에 맞서 물건을 생산해야 하는 중소기업까지 고사 위기에 내몰릴 거라는 우려가 높다. 가뜩이나 내수 침체로 허덕이는 중소 제조업체들은 중국발 직구 여파로 적잖은 타격을 입고 있다. 지난해 설문조사에선 중국 직구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의 절반이 ‘과도한 면세 혜택’을 문제로 꼽았다. 알테쉬에 대한 견제는 세계적 추세여서, 호주 싱가포르 베트남 등도 소액 면세 제도를 없앴다. 미중 관세 전쟁이 이커머스 봉쇄로 확전된 상황에서 우리도 알테쉬만 배불리는 제도를 손볼 때가 됐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18 美-日 관세 협상에 깜짝 등판한 트럼프

“큰 진전(big progress)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 고위급 무역협상을 위해 백악관을 찾은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과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도 함께였다. 회담 전엔 “일본이 협상하러 온다. 나도 재무, 상무장관과 함께 회의에 참석한다”고 예고까지 했다. 도쿄에서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협상 당일 장관급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트럼프의 일방 통보, 당장은 피하고 싶었던 방위비 문제 거론, 첫 만남부터 큰 성과라도 나온 양 과장하는 그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해 긴급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관세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지금 트럼프에겐 ‘전리품’이 절실하다. 이달 초 세계를 상대로 상호관세 포문을 열었다가 90일 미루고, 중국에만 145% 초고율 관세를 물리며 화력을 집중하는 중이다. 그런데 중국은 희토류 수출 금지 등의 조치로 맞서며 요지부동이다. 하루 전 유럽연합(EU)과의 무역협상도 성과 없이 끝났다. 트럼프의 돌발 행동에 압박을 느꼈을 이시바 총리마저 “여전히 입장 차이가 있다. 이번 협상은 다음 단계를 위한 초석”이라고 한다. 이젠 트럼프 쪽이 오히려 안달복달이다.
▷다음 주 한미 무역협상을 시작하는 우리 정부로선 이런 장면을 미리 본 게 그나마 다행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협상단을 트럼프가 직접 만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수십 개국과 동시협상을 벌이는 미국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나라에 관세를 더 많이 깎아 주겠다’며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부추기고 있다. 트럼프의 거친 기세에 휘말리면 엉뚱한 실수를 할 수 있다.
▷트럼프의 공격적인 태도에는 대선에서 트럼프 편에 섰던 빅테크, 월스트리트의 거물들마저 부정적 태도로 속속 돌아서는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 관세정책이 미국의 국가 신뢰도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퇴임 후 침묵하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도 “그들은 확실히 뭔가를 망가뜨리고 있다. 총부터 먼저 쏘고 나중에 조준한다”며 설익은 정책들을 꼬집었다.
▷한국엔 중국을 압박하는 미국의 추가 조치들까지 부담이다. 중국 인공지능(AI) 모델 딥시크에 쓰이는 엔비디아 칩의 대중 수출이 막혀 이 칩에 들어가는 한국산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도 타격을 받게 됐다. 이래저래 힘든 상황이지만 한국은 조급함을 달래고 상대 패부터 확인해야 한다. 협상 테이블에선 언제나 성질 급한 쪽이 더 많은 걸 내주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4-19(토) “관용과 절제” “대인논증 지양” “재판관 다양화”

18일 퇴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전날 한 대학 강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헌재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는 데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를 엿볼 수 있는 얘기였다. “설득에는 시간이 걸린다.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시간의 차이가 있다. 급한 사람이 늦은 사람을 기다려야지, 늦은 사람이 급한 사람을 어떻게 기다리겠나.” 만장일치에 이르기까지 재판관들 사이에 치열한 토론과 인내의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 권한대행은 “통합을 호소해 보자는 게 탄핵 선고문의 전부였다. 그래서 오래 걸렸다”고 했다.
▷재판관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의견 차가 있었는지 아직 확인된 건 없다. 헌재 안팎에서 야당의 잘못을 결정문에 어느 정도 수위로 넣을지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는데 문 권한대행의 강연에도 그렇게 해석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정치권의 관용과 절제를 강조하면서 “야당에 적용되는 권리는 여당에도 적용돼야 하고, 여당에 요구되는 절제는 야당에도 요구된다. 양쪽에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다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느냐”고 했다. 윤 전 대통령과 야당 중 어느 한쪽에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려 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 야당의 잇단 탄핵안 발의 등 일방적 행태를 적시한 것은 그런 논의의 결과로 보인다.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고 한 대목이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헌법 위반을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야당 역시 정치적 해결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해 설득력을 높였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더디게 가더라도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만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을 막을 수 있다는 걸 헌재가 보여줬다.
▷문 권한대행이 퇴임사에서 대화와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헌재 결정에 대한 학술적 비판은 수용하지만 ‘대인논증(對人論證)’ 같은 비난은 지양하자고 했다. 대인논증이란 사람의 경력이나 사상 등을 문제 삼아 근거 없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이런 행태는 재판관 개인에 대한 부당한 공격일 뿐 아니라 법관들 간의, 법원과 국민 간의 합리적인 대화를 가로막는다.
▷대부분 판사 출신인 헌재 재판관의 구성을 다양화하자는 그의 제안도 비슷한 취지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재판관들이 폭넓게 대화하고 차이를 좁혀야만 판사들만의 집단사고에 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에선 변호사나 학자, 행정부 공무원, 정치인이 헌재 재판관이 되는 사례가 흔하다.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헌재는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법원이다. 다양한 재판관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야 그들 사이에서도 관용과 절제가 발휘될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4-21(월) ‘현직 비판 않는다’ 불문율 깬 美전직 대통령들

미국에는 전직 대통령이 아무리 후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공개적인 비판을 삼가는 불문율이 있다. 200년 넘게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전·현직 대통령 간의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오랜 전통이다. “나라를 하나로 묶고 정부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미 정치전문매체 ‘더힐’)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불문율이 흔들리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시도에 의해 우리의 삶이 압도된다면, 건국 이래 더 완벽한 연방을 위한 250년간의 여정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했다. 앞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에서는 ‘그건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평범한 시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트럼프를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분명하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도 “이 정부는 100일도 안 돼 너무나 큰 피해와 파괴를 가져왔다”며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세 사람 모두 트럼프와 이런저런 악연이 있기는 하다. 트럼프는 바이든을 향해선 “졸린 조”, 클린턴의 아내이자 2016년 대선에서 맞붙은 힐러리는 “사악한 힐러리”라고 부르며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오바마가 처음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미국 태생이 아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렸다. 그렇다고 유례가 없는 전직 대통령들의 동시다발적 현직 대통령 비난을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긴 어렵다. 트럼프에 대한 미국 사회의 반감이 심상치 않아서다.
▷트럼프가 보조금 중단을 무기로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등 ‘진보의 아성’으로 꼽히는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길들이려 하자 미 지식인들과 대학가가 들끓고 있다.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이민자 추방 정책에 보수 성향인 대법원이 ‘정부는 추방을 잠정 중단하라’며 제지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연방정부 직원들을 대규모 해고하면서 관가 분위기도 흉흉하다. 트럼프의 대표 정책인 관세 인상으로 시민들은 물가 상승, 기업들은 미국의 대외 이미지 하락에 따른 해외 영업 손실을 우려하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반(反)트럼프 시위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19일 워싱턴, 뉴욕 등 미국 700여 곳에 모인 시민들은 “창피하다” “왕은 없다”고 외치며 집회를 열었다. 미 전역에서 ‘핸즈오프(Hands Off·트럼프는 손을 떼라)’ 시위가 벌어진 지 2주 만이다. 미 갤럽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1분기(1∼3월) 지지율은 45%로, 1952년 이후 취임한 대통령들의 첫해 1분기 평균 지지율 60%보다 한참 낮다. 이대로라면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 의원들이 ‘손절’에 나설 수도 있다. 국민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 트럼프가 끝까지 독주를 계속할지, 아니면 중간에 돌아설지는 미국인들의 손에 달렸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4-22 관세 포화 속 빛나는 현대차-포스코 ‘쇳물동맹’

철강업계 1, 2위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관계는 가전의 삼성·LG전자, 유통의 롯데·신세계와 비슷하다. 외환위기로 쓰러진 한보철강 인수를 놓고 포스코와 현대차그룹이 맞붙은 것을 시작으로, 최대 라이벌이자 앙숙으로 사사건건 부딪혔다. 한보철강을 품에 안은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이 용광로를 갖춘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자, 30여 년 독점 체제가 깨지게 된 포스코가 자동차용 강판 공급을 중단한 건 유명한 일화다. 대통령을 비롯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총출동한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기공식에도 포스코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런 두 회사가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이례적으로 손을 맞잡았다. 현대제철이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에 짓는 제철소에 포스코가 함께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미국에 21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엔 현대제철이 58억 달러를 들여 루이지애나에 연산 270만 t 규모의 자동차 강판 제철소를 건립하는 게 포함됐는데, 포스코가 최소 1조 원 이상을 투입하고 일부 생산 물량을 직접 판매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어제의 적을 동지로 돌려세운 건 트럼프발 관세다. 미국은 금액 기준으로 한국 철강 기업들의 최대 수출 시장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12일부터 수입 철강과 파생상품에 25%의 관세를 때리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 철강은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 가뜩이나 중국산 덤핑 공세에 밀리던 국내 철강 기업들은 트럼프발 관세가 현실화되자 지난달에만 미국 수출액이 16% 넘게 줄었다. 트럼프의 ‘관세 철벽’을 넘으려면 현지 생산을 늘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동맹은 윈윈 전략으로 꼽힌다. 현대제철로서는 포스코와 힘을 합치면 현지 투자 리스크를 크게 줄일 수 있다. 현대제철은 당초 투자금 58억 달러 중 일부를 외부에서 조달할 계획이었는데, 미국 진출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자금 사정까지 넉넉한 포스코가 제격이다. 10년 넘게 미국 제철소 설립을 놓고 고심하던 포스코 역시 나 홀로 투자의 부담을 덜면서 미국 진출이라는 해묵은 숙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의 철강 ‘빅2’가 해외에서 공동 투자와 생산에 나선다는 건 과거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포스코와 현대차그룹은 철강 외에도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 대응해 이차전지 소재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와 트럼프 관세의 틈바구니에 껴 휘청대는 다른 산업에서도 상상을 뛰어넘는 우리 기업들의 협력을 기대한다. 경쟁 상대와도 손잡을 수 있는 기업들의 과감하고 유연한 전략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트럼프 스톰’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23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늘 낮은 곳 걸은 프란치스코

21일 향년 88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점진적 개혁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신대륙 출신 교황이자 예수회가 배출한 첫 교황이었다. ‘교황청의 아웃사이더’인 셈인데 동시에 아르헨티나 국적이긴 하나 이탈리아 혈통이고 가톨릭 교리에 충실한 보수주의자였다. 급진적이지 않으면서 성추문과 부패 문제로 신뢰를 잃어가던 가톨릭 교회를 재건할 적임자로 제266대 교황에 선출된 그는 12년간 12억 가톨릭 교인들과 함께 안정적인 변화를 이끌며 울림이 깊은 말을 남겼다.
▷가톨릭의 최고 이론가였던 전임 교황과 달리 그는 거리의 성직자였다. “천성이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선 살 수 없다”던 그는 1969년 사제품을 받은 후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평생을 낮은 곳에 사는 이들과 함께했다. 가난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제2의 출애굽’으로 여기는 해방신학의 고장 남미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좌파적 해방신학에 거리를 두면서도 “가난한 이들의 깃발은 기독교도의 것”이라고 했다.
▷76세 고령에 교황이 된 그는 우려와 달리 전 세계를 바삐 다니며 평화와 화해를 호소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도 피하지 않았다. 난민들의 떼죽음엔 “우리 모두 공범”이라고 질타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민 정책에 대해선 “다리가 아닌 벽만 세우려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무슬림 과격분자의 공격을 받은 후엔 이슬람과 폭력을 동일시하지 말라며 “이슬람 폭력을 말하려면 가톨릭 폭력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했다. 2014년 방한 당시 세월호 리본을 단 그에게 주변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으니 떼는 게 좋겠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인간적 고통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선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동성애자 사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반문했다. “내가 누구라고 그들을 판단하겠나.” 동성애, 이혼, 재혼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하지만 동성혼 허용과 여성 사제 서품엔 반대하며 가톨릭의 핵심 가치를 고수했다. 개혁론자들은 반발했지만 “더 크고 오래가는 합의를 만들려면 점진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는 것이 교황의 지론이었다.
▷청빈했던 그는 교황에 오른 뒤엔 화려한 전용 숙소를 거부하고 소박한 사제들의 공동 숙소에서 살았다. 낡은 구두를 신고 순금 대신 철제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나머지는 다 헛것이라고 했다. “공작새를 보라. 앞에서 보면 아름답지만 뒤에서 보면 진면모를 알게 된다.” 마지막 부활절 강론에서 “전쟁을 끝내 달라”고 당부하고, 유언장에는 “장식 없는 무덤에 이름만 새겨 달라”고 했다. 13세기 ‘빈자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딴 이름다운 마무리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24 부동산 불황 ‘칼바람’ 맞은 ‘국민 자격증’

2005년 1월 정부과천청사가 대규모 시위대에 뚫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전년도 공인중개사 시험 불합격자 1500여 명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청사에 난입해 한밤중까지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건설교통부 건물을 에워싸고 “합격자를 추가 선발해 달라”고 요구했다. 통상 20% 안팎이던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률이 그해 1%로 뚝 떨어지며 발생한 일이었다. ‘중년 고시’, ‘인생 2막 자격증’으로 불리는 공인중개사 시험의 인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부동산 광풍에 취업 한파까지 겹쳤던 2021년에는 공인중개사 시험에 역대 최다인 28만 명이 응시했다. 집값이 워낙 올라 매물 한두 건만 중개해도 웬만한 직장인 월급을 능가하는 수입을 올릴 수 있어 젊은층이 대거 몰렸다. 중년 고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응시자 열 중 넷이 20, 30대 청년이었다. ‘미친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현장 단속을 피해 불을 꺼놓고 몰래 영업하는 중개업소가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첫 시험이 치러진 1985년 이후 현재까지 배출된 공인중개사 자격증 소지자는 55만여 명이다. 경제활동인구 55명당 1명꼴로 공인중개사이니, ‘국민 자격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중 80% 정도는 ‘장롱 면허’이고, 실제 영업하는 공인중개사는 11만1600명에 그친다. 부동산 시장이 식으면서 개업 공인중개사는 2023년 2월 이후 줄곧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2년 넘게 새로 문을 연 중개업소보다 폐업하거나 휴업한 곳이 더 많다는 얘기다.
▷특히 올해 들어선 3개월 연속 새로 개업한 공인중개사가 1000명을 밑돌고 있다. 봄 이사철을 앞두고 신규 개업이 몰리는 시기에 개업자가 1000명 아래로 떨어진 건 통계 집계 이후 처음이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길어지면서 서울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새로 문 여는 중개사가 급감했다. 거래가 끊긴 데다 고금리, 대출 규제, 내수 침체가 겹쳐 공인중개사들도 사무실 관리비와 임차료를 감당하기 힘든 처지다. 부동산 시장 호황기에 연간 100만 건을 웃돌았던 전국 주택 매매 거래는 지난해 64만 건에 그쳤다.
▷여기에다 부동산 직거래가 활발해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최근 3년간 이뤄진 부동산 거래 319만 건을 살펴보면 중개와 직거래 비중이 거의 반반일 정도다. 한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성사된 부동산 직거래는 3년 새 220배 폭증했다. 집값이 뛰면서 덩달아 치솟은 중개수수료가 부담인 데다 ‘건축왕’ ‘빌라왕’ 같은 전세사기에 공인중개사가 빠짐없이 등장한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새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 부동산중개업소부터 들어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지만, 이젠 공인중개사도 살아남는 것 자체를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25 0→20→54→104→125→145%→“中에 잘해 줄 것”

‘10%→20%→54%→104%→125%→145%.’ 올 1월 취임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매긴 관세율은 가파르게 올랐다. 보편관세, 상호관세, 보복관세라는 이름이 붙었다. 4월 초 한국(25%), 일본(24%) 등 60여 나라에 부과하기로 한 상호관세는 시행 3시간 만에 90일 유예가 발표됐다. 이런 식의 관세 정책은 전략적 로드맵 없이 트럼프가 그때그때 만난 참모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됐다는 보도도 있다. 주먹구구 정책으로 물러난 이는 없었으니, 책임이 트럼프에게 있다는 의미다.
▷백악관은 거침없었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은 “90일 동안 90개국과 무역협정을 맺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취임 100일을 앞둔 24일 현재 실제 체결된 나라는 한 곳도 없다. 미국은 이번 주 한국 일본 태국 인도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동맹국과 우방국 먼저’라는 미국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관세 외에도 안보와 투자까지 패키지 딜로 다룰 수 있어서 단기간에 결론짓기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궁지에 몰리다 보니 트럼프로선 체면 불고하고 생각을 뒤집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22일 145% 대중국 관세에 대해 “그렇게 높게 유지될 수 없다. 중국을 매우 잘 대해줄 거다”라고 말했다. “중국 하기에 달렸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선제적인 유화 제스처였다. 금리 인하를 요구하면서 교체 가능성을 흘렸던 제롬 파월 연준(FRB) 의장에 대해서도 “교체할 뜻이 없다”고 돌아섰다. 145%라는 상식 밖 관세를 매기거나, “언제 그를 해고(termination)하더라도 빠른 게 아니다”라고 할 때의 호기로움은 안 보였다.
▷트럼프의 변덕은 미국과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한 결과다. 그는 “참 아름다운(beautiful) 단어가 관세인데, 관세를 매겨 다시 부자가 되자”며 관세 전쟁의 승리를 당연시했다. 안보 이슈에서도 “내가 취임하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전쟁은 몇 주 내로 끝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트럼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악관은 충성파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트럼프가 세운 불가능한 목표를 두고 “이건 어렵다” “달리 접근해 보자”는 의견을 내지 못했다는 게 미 언론의 평가다.
▷트럼프를 실제로 멈칫하게 만든 것은 시장의 힘이다. 트럼프가 관세를 발표할 때마다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은 약세를 면치 못했다. 개인투자자, 연금가입자의 자산이 줄어드는데 버틸 정치인은 없다. “중국 제품이 안 들어오면 2주 뒤엔 매대가 텅 빌 수 있다”는 대형 유통사 사장들의 경고에 트럼프는 위축됐다. 트럼프의 오락가락은 국제질서에 예상보다 더 큰 리스크를 안겼다. 그렇다면 시장의 힘을 절감한 트럼프가 속도 조절에 나설까.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혼란이 큰 약이 된 셈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4-26(토) 건진, 명태균, 도이치… ‘김 여사’에게로 모이는 의혹들

‘건진법사’ 전성배 씨는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 캠프 네트워크 본부에서 ‘실세’로 불렸다. 이 본부 사무실을 방문한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직원들을 소개하는 동영상도 공개됐다. 하지만 무속인이 대선 캠프에 합류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배경은 뚜렷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김건희 여사의 소개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전 씨의 측근은 2022년 김 여사가 전 씨에게 “남편이 대선에 나가니까 도와달라”고 제안했고, 이를 전 씨가 수락해 캠프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전 씨가 언제부터 김 여사와 알고 지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두 사람이 꽤 친분이 있었던 정황은 여럿 있다. 전 씨는 김 여사가 운영한 코바나컨텐츠의 ‘고문’이라고 적힌 명함을 갖고 있었고, 2015년 이 업체가 주관한 전시회 VIP 개막 행사에도 참석했다. 김 여사와의 관계를 발판 삼아 전 씨가 캠프에서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 당선 뒤 전 씨는 통일교 고위 간부 윤모 씨로부터 ‘김 여사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받았다고 한다. 전 씨와 김 여사가 가까운 사이라는 얘기가 퍼졌기 때문에 윤 씨가 접근했을 터다. 윤 씨는 ‘윤 전 대통령 부부를 따로 만났다’고 주장했고, 이를 토대로 캄보디아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추진하려 한 정황도 포착됐다.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이다.
▷돌이켜보면 김 여사가 “내가 되게 영적인 사람이라 도사들하고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 녹음파일이 공개된 적이 있다. 김 여사는 윤 전 대통령도 “약간 영적인 끼”가 있다고 평했다. 이런 윤 전 대통령 부부의 성향 때문인지 무속인들과 관련된 게이트급 비리 의혹이 잇따랐다. 그중 한 명이 ‘지리산 도사’ 명태균 씨다. 명 씨가 윤 전 대통령 부부에게 김영선 전 의원 공천 등을 부탁했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는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두 사건 모두 진상 규명을 위해선 김 여사 출석 조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가운데 김 여사와 관련된 또 하나의 사건인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연루 의혹도 재수사가 이뤄지게 됐다.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검이 불기소 처분한 것에 대한 항고를 서울고검이 25일 받아들인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질질 끌다가 김 여사를 ‘출장 조사’할 때부터 공정성이 의심받았던 사건이다. 김 여사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던 공범들이 말을 바꾸면 김 여사 재조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정부 내내 김 여사 관련 의혹들이 여기저기서 불거졌지만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권력’일 때는 묻힐 듯했던 일들도 결국엔 드러나는 게 세상 이치다. 김 여사도 예외일 수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4-28(월) 묘비명 ‘프란치스쿠스’… 검박한 마지막 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인사 8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130여 개국 대표단과 함께 25만 명이 장례미사에 참석했고, 15만 명이 운구 행렬을 따랐다. 26일 엄수된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식 참석자들의 면면과 추모 인파는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자 14억 가톨릭 신도들의 지도자로서 교황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장례식은 검박했다. ‘가난한 이들의 겸손한 수호자’였던 교황의 유언대로 품위 있되 소박한 마무리였다.
▷21일 선종한 교황은 전임자들과 달리 방부 처리를 않고 세 겹이 아닌 홑겹 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았다. 선종 후에도 우상이 되기보다 인간적이었던 교황의 마지막 모습에 조문객들은 사진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장지인 성모 대성전에서 교황의 관을 처음 맞이한 이들은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76세에 즉위한 후 12년간 68개국을 돌며 약자들을 위로했던 고단한 몸은 땅 아래 묻혔고, 고급 대리석 대신 증조부 고향에서 캐낸 ‘민중의 돌’로 만든 비석엔 ‘빈자의 성인’에서 따온 교황의 라틴어 이름만 새겨졌다. ‘프란치스쿠스’.
▷검소했던 장례 절차는 교황직을 수행하던 모습 그대로다. 교황청은 보유 자산이 최소 8조5000억 원에 연간 예산이 1조2000억 원이지만 교황은 ‘가난 서약’에 따라 월급(4600만 원)을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된 후로도 월급(670만∼840만 원)을 받지 않았다. 교황이 남긴 전 재산이 100달러뿐이라는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도 나왔다. 교황은 저서에서 “교회의 사제, 주교, 추기경들이 고급차를 몰며 청빈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썼다.
▷청빈함은 12년 전 남미 출신으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된 비결이다. 교황청 안팎으로 비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교황이 된 그는 방만한 재정 개혁에 나섰다. 2021년엔 “교황청 재정은 투명한 유리집이 돼야 한다”며 교황청이 전 세계에 보유한 5000여 개 부동산 실태를 공개했다. 교황청 고위직이 신자들의 헌금으로 영국 런던의 고급 빌딩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들였다 큰 손해를 본 사건이 계기가 됐다. 연간 800억∼900억 원의 적자 해소를 위한 추기경 임금 삭감 등 구조조정도 마지막까지 힘을 기울였던 과제다.
▷한국에선 김수환 정진석 염수정 유흥식 4명의 추기경이 나왔고, 이 중 2명이 선종했다. 2009년 선종한 김 추기경 장례미사는 일반인과 별 차이 없이 소박했고, 2021년 선종한 정 추기경 때는 코로나로 더욱 간소했다. 김 추기경은 각막 기증으로 빛을, 정 추기경은 장기 기증으로 생명을 주고 떠났다. 모든 걸 내어주고 빈손으로 떠난 성직자들을 보며 혼탁한 뉴스로 어지러운 세상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29 코로나 때보다 줄어든 韓 1인당 GDP

문재인 정부가 자랑했던 경제 성과 중 하나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이다. 2006년 2만 달러를 처음 넘어선 1인당 국민소득이 문 정부 첫해인 2017년 3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거였다. 당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문 정부에서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5년마다 이뤄지는 GDP 통계 기준연도 개편에 따라 국민소득 3만 달러 돌파 시기는 2017년에서 2014년으로 앞당겨졌다.
▷3만 달러를 돌파했든 아니든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 빠짐없이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핵심 공약이나 정책 목표로 내세웠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기준으로 꼽히는데, 선진국 문턱을 넘어 한 단계 더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을 담은 셈이다. 윤 정부는 취임 2년 차에 “민간 주도 성장을 유지한다면 5만 달러도 꿈이 아니다”라며 목표치를 더 높였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싱크탱크도 최근 5만 달러 달성을 담은 성장 전략을 내놓았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1인당 GDP 4만 달러 달성이 4년 뒤인 2029년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2027년 달성을 예상했는데 반년 만에 두 해나 늦춰 잡았다. 또 올해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4642달러로 지난해보다 4% 줄어든다고 분석했다. 코로나 위기가 한창이던 2022년보다 낮은 수준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국가에서 1인당 소득이 이만큼 뒷걸음질 치는 건 이례적이다.
▷1인당 GDP는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보여주는 경상 GDP를 미국 달러로 환산한 뒤 총인구로 나눠 계산하는데, IMF의 전망엔 저성장과 고환율 쇼크에 발목 잡힌 우리 경제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겼다. 최근 IMF는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에서 1%로 반 토막 냈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봤다. 관세 폭탄에 국내 정치 불안, 내수 침체까지 맞물려 원화 가치는 주요국 통화보다 약세를 보이고 있다.
▷IMF 전망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은 15년이나 1인당 GDP 3만 달러의 덫에 갇히는 꼴이 된다. 우리보다 앞서 3만 달러를 통과한 선진국들이 평균 6년 만에 4만 달러 시대를 연 것과 비교하면 늦어도 한참 늦다. 게다가 내년부터 경쟁국인 대만에 1인당 소득이 추월당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 가는데도 경제 체질 개선과 사회 전반의 구조 개혁을 게을리한 대가다. 자칫 한눈팔다가는 4만 달러 벽을 깨기는커녕 2만 달러 추락을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30(수) ‘블랙 아웃’… 19세기로 돌아간 스페인-포르투갈

작동하던 것들이 일제히 멈춰 선 건 월요일이던 28일 낮 12시 반쯤이었다. 달리던 전철은 지하터널 한복판에 서버렸고, 덜컹하며 멈춘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갇혔다. 착륙하던 비행기는 관제탑과 교신이 끊겨 공항 상공을 맴돌았다. 도로엔 신호등이 꺼져 교차로마다 차량들이 뒤엉켰다. 카드 결제 단말기가 고장 나 손님들은 현금을 찾아 헤맸고, 냉동 기능을 상실한 진열대 속 아이스크림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휴대전화는 인터넷이 끊겨 무용지물이 됐다. 그마저 배터리가 닳아버리자 낯선 이들끼리 전화 한 통을 사정했다.
▷대규모 정전으로 혼돈에 빠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주요 도시들의 풍경이다. 전기가 꺼진 사회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비행기가 안 떠 발이 묶인 관광객들은 호텔을 예약하려 해도 스마트폰이 먹통이라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 이동 수단이 자가용뿐이어서 주유소는 기름을 채우려는 차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도로변에는 목적지를 적은 종이를 흔드는 히치하이커들이 길게 늘어섰다.
▷스페인에서 15GW의 전력 발전량이 갑자기 손실된 게 정전의 발단이다. 스페인 하루 발전량의 60%에 달하는 양이다. 스페인과 전력망을 공유하는 포르투갈도 덩달아 피해를 봤다. 전력 손실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조사 중이다. 스페인은 태양광과 풍력을 통한 전력 생산 비중이 50%가 넘는데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에 맞게 전력망과 저장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게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일부 지역 전력망이 복구되곤 있지만 완전 복구까진 일주일 넘게 걸릴 것이라고 한다.
▷유럽 서남부의 이베리아반도를 멈춰 세운 이번 정전은 21세기의 국가도 단번에 19세기로 후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전기가 없으면 병원 수술실과 중환자실이 문을 닫고, 수도 가스 등 기본 인프라가 무력화된다. 운송망이 끊기는 건 한 나라의 혈액순환이 멎는 것과 같다. 정유공장도 돌릴 수 없어 이 상태가 며칠 더 이어지면 연료가 바닥난 차들이 하나둘 길가에 버려지고, 텅 빈 거리만 남게 된다. 정부가 재난 정보를 알리려 해도 인터넷과 TV가 먹통이라 조그만 휴대용 라디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사이 불안한 사람들 틈새로 괴소문이나 가짜 정보가 스며든다.
▷우리에겐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있다. 스위치만 누르면 켜지는 불, 언제든 열리는 인터넷, 시간표에 맞춰 도착하는 지하철, 카드를 긁으면 들려오는 결제 완료음…. 이 모든 것은 전기가 끊기는 순간 곧바로 사라진다. 스마트폰 없인 하루도 버티기 힘들 만큼 ‘연결 사회’가 된 지금은 전기에 더 깊이 의존하고 있다. 갈수록 활용도가 커지는 인공지능(AI)도 전기를 엄청나게 먹는다. 우리의 문명이 깨지기 쉬운 얇은 껍질 위에 아슬아슬 얹혀 있다는 걸 이번 스페인 대정전이 일깨워준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橫說竪說(동아일보) 202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