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說竪說(동아일보) 2025-03/
03-01(토) 피해국인데 패전국 취급… 젤렌스키의 슬픈 투항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만큼 트럼프 시대를 맞아 신세가 뒤바뀐 지도자도 없을 듯하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시절 그는 칙사 대접을 받았다. 미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을 화상 연설을 포함해 2차례나 했다. 까다로운 선정 기준 때문에 일본 총리도 2차대전 이후 80년 동안 3번밖에 서지 못한 자리다. 유엔, 주요 20개국(G20) 등 외교 무대에서 젤렌스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침략당했지만, 자유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동지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28일 미-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은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던 실지(失地) 회복, 나토 가입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면서 물 건너갔다. 이번 회담의 핵심은 광물협정이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전쟁 복구를 위해 우크라이나의 희토류와 원유 이익금 50%를 모아두는 펀드를 만들기로 했다. 트럼프는 처음엔 “펀드에 720조 원이 쌓일 때까지는 미국이 전액 갖고, 그 이상 걷히면 적절히 배분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젤렌스키는 제국주의식 강탈에 가깝다며 반발했다. 최종 합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안전보장 다짐을 얻기 위한 ‘투항’을 예상하는 이들이 많다. 침공당한 피해국이지만 패전국처럼 대우받게 됐다.
▷트럼프 진영에 괘씸죄에 걸린 것이 젤렌스키의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해석도 있다. 젤렌스키는 지난해 미 대선을 앞두고 미군 소유 155mm 포탄 공장을 찾았다. 그곳은 하필 대선 최대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였는데, 트럼프식 ‘일방적 전쟁 중단’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계 유권자가 10만 명 넘게 사는 곳이다. 민주당 주지사가 밀착 수행하면서 젤렌스키가 트럼프보다 민주당 후보를 편든다는 인상을 남겼다.
▷트럼프는 초기 구상에 거부감을 보인 젤렌스키를 “지지율 4%에 그치는 독재자”라고 불렀다. 젤렌스키가 2019년 임기 5년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전쟁통 계엄 상태에서 지난해 선거를 치르지 않고 건너뛴 것을 꼬집은 것이다. 미국 갤럽의 우크라이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젤렌스키 지지율은 50%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트럼프는 이런 정도 숫자 오류는 개의치 않았다. 트럼프는 “그를 독재자라 불렀었나? 믿기지 않는다”며 빠져나갔다.
▷트럼프 2기가 표방하는 강대국 중심 외교는 더 선명해졌다. 이상과 가치를 나누는 국가끼리 동맹하고 연대하는 2차대전 이후 외교 문법보다는 강대국끼리 자기 세력권을 인정받아 이익을 챙기는 19세기 외교 방식이 중심에 서게 됐다. 약소국의 이익은 잊힐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번 주 유엔 안보리에 “러시아에 전쟁 책임이 있다”는 표현을 뺀 결의안을 냈다. 우리가 알던 미국이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워싱턴에 정권교체가 있었을 뿐인데, 국제 외교의 틀이 150년 전으로 후퇴한 느낌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3-03(월) 외국인 건보 무임승차론 키운 엉터리 통계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건강보험료를 적게 내고 혜택은 많이 받는 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매년 보험료로 낸 돈보다 보험 혜택을 적게 받는다. 2023년 외국인 건보 재정은 7400억 원 흑자였다. ‘외국인 건보 무임승차’는 외국인 건보 가입자(146만 명)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의 적자 폭이 커서 생긴 오해인데 이마저도 통계 오류로 일부 과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건보 무임승차론이 반중 정서를 키워 온 점을 감안하면 유감스러운 오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외국인 가입자 건보 재정 수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중국인 건보 재정은 239억 원 적자로 공표해왔으나 사실은 365억 원 흑자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에는 640억 원 적자를 봤다고 했는데 다시 계산해보니 27억 원으로 적자 폭이 줄었다. 2년간 1200억 원의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공단은 2020년의 경우 통계 산출을 수작업으로 하다가, 2023년엔 국가 코드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했으며, 전체 재정 수지에는 변동이 없다고 밝혔다.
▷중국은 외국인 가입자 수 상위 10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거의 매년 적자가 나는 나라다. 하지만 무임승차 방지를 위해 2019년 국내 6개월 이상 거주 외국인은 직장가입자나 피부양자가 아니면 지역가입자로 건보에 가입해 보험료를 내도록 규정을 강화한 후로 적자 폭이 줄어드는 추세다. 2017년엔 1108억 원 적자였으나 2019년엔 세 자릿수로 줄었고, 코로나로 외국인 입국이 줄었던 2020년엔 흑자를 냈다가 2023년엔 27억 원 적자로 두 자릿수가 됐다.
▷외국인 건보 무임승차의 문턱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는 국내 거주 기간이 6개월 이상 지나야 피부양자가 될 수 있다는 요건이 추가됐다. 외국인들이 입국하자마자 이곳에서 일하는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의 피부양자로 건보에 가입한 후 많게는 수천만 원어치의 치료를 공짜로 받고 돌아가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다. 올 1월에는 한국인에게 건보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은 한국의 건보 가입을 금지하는 ‘상호주의’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건보 재정은 정부의 의대 증원으로 고갈 속도가 빨라져 당장 올해부터 적자로 전환돼 2028년엔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전망된다. 건보 재정 누수 방지가 급선무지만 3500만 국내 가입자들의 의료 쇼핑, 과잉 진료부터 막을 일이다. 전체 가입자의 4%밖에 안 되는 외국인 무임 승차만, 그것도 잘못된 통계에 근거해 문제 삼다간 외국인 혐오 정서만 부추길 수 있다. 건보공단은 행정안전부의 ‘데이터 기반 행정 실태 점검’에서 3년 연속 최고 등급인 우수 기관에 선정됐다고 하니 이번 통계 오류 소동이 더욱 기막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4 텔레그램 엑소더스

한국에서 텔레그램 탈퇴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건 5년 전이다. 텔레그램 본사가 ‘n번방’ 수사에 협조하지 않자 국내 가입자들이 정해진 시각에 한꺼번에 탈퇴하며 압박에 나선 것이다. 누리꾼들은 텔레그램을 주무대로 벌어진 성착취물 유포 사건을 각종 외국어로 번역해 알렸고 해외 언론사에 제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탈퇴 러시도 잠시뿐, 한국 가입자는 갈수록 늘어 텔레그램은 국내 2위 모바일 메신저로 급성장했다.
▷범죄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보다 보안성과 익명성이 부각된 덕이다. 한국 경찰의 수차례 수사 협조 요청에도 텔레그램은 일절 응하지 않은 채 범죄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 불법 음란물 유통을 막기 위한 ‘n번방 방지법’이 시행되자 오히려 텔레그램 가입자가 수십만 명씩 늘어난 건 아이러니다. 해외에 서버를 둔 외국 기업은 규제에서 쏙 빠진 탓이다. 지난해 불법 계엄 사태 때도 카카오톡이 검열될 수 있다는 괴담이 퍼지자 시민들은 텔레그램부터 깔았다.
▷그런데 5년 만에 다시 텔레그램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일반 가입자가 아니라 텔레그램을 방패 삼아 활개 치던 범죄자들이 중심이다. 한국 경찰과 텔레그램이 핫라인까지 구축해 수사 공조에 나서자 범죄자들이 텔레그램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한결같이 수사에 비협조적이던 텔레그램은 지난해 8월 파벨 두로프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프랑스 검찰에 체포되자 태도를 바꿨다. 이용자 간 대화가 서버에 전혀 남지 않는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었다.
▷텔레그램은 234명의 피해자를 성착취한 이른바 ‘자경단’ 사건을 시작으로 수사 협력에 물꼬를 튼 뒤 한국 경찰의 자료 요청에 90% 넘게 협조하면서 하루 3번꼴로 소통하고 있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지던 성범죄, 마약 등 강력 범죄뿐만 아니라 투자 리딩방 같은 신종 사기 수사에도 속도가 붙었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자들이 추적을 피해 해외의 다른 보안 메신저로 갈아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감청 프로그램을 세상에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쓴다고 해서 유명해진 ‘시그널’이 대표적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다 같이 시그널로 갈아타면 끝 아님?”, “보안 쪽에선 시그널이 좋음” 등의 글들이 퍼지고 있다. 과거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 이 메신저가 쓰였고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계엄 관련자들과 시그널로 소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자 아이디가 없는 메신저 ‘심플엑스 챗’, 동유럽에서 많이 쓰는 ‘바이버’ 등도 범죄자들이 숨어드는 곳이라고 한다. 이들 메신저가 초창기 텔레그램과 닮아 있어 새로운 범죄 소굴이 될까 걱정스럽다. 하지만 텔레그램이 결국 꼬리를 내린 것처럼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05 국제기구에 “헌재 불신” 서한 보낸 인권위원장

12·3 비상계엄 사태 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정부 기관 중 하나가 국가인권위원회다. 지난달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의결한 데 이어 18일엔 구속 기소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등 장군들에 대해 신속한 보석 허가와 접견 제한 해제를 권고해 “내란죄 피의자 변호인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최근에는 국제인권기구에 헌법재판소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 논란이다.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보낸 답변서에서 ‘국민의 50% 가까이가 헌재를 믿지 못한다’ ‘헌재가 형사소송법 적용을 일부 배제하는 등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관이 정치 성향에 따라 재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국내 인권 단체들이 ‘계엄을 옹호하는 안건을 의결했다’며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에 인권위에 대한 특별 심사를 요청하자 안 위원장이 심사 관련 실무를 맡고 있는 사무소에 반박 답변서를 보낸 것이다.
▷한국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헌재를 ‘신뢰한다’는 답변은 52%, ‘신뢰하지 않는다’는 40%였다. 윤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헌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진 건 사실이지만, 비상계엄 이후 시행된 국가기관별 신뢰도 조사 4건 모두에서 헌재는 정부 국회 검경 등 다른 국가기관보다 높은 신뢰도 1위였다. 윤 대통령 탄핵 심리는 8인 재판관 전원이 합의한 절차에 따라 마무리돼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재판관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안 위원장이 잘 알 것이다. 보수성향인 그는 헌재 재판관 시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는 대통령 방어권 보장을 권고하며 “신분을 이유로 인권 보호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인권위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려 했던 계엄 선포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약자를 위한 기관이 대규모 변호인단의 도움을 받는 대통령 방어권만 챙기니 ‘윤권위’란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대통령이 지명한 상임위원은 “대통령을 탄핵한다면 헌재를 흔적도 남김없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인권위는 위원 11명 중 6명을 대통령과 여당이 지명해 여권 편향적이라는 지적이 간혹 제기됐지만 이번엔 도를 한참 넘었다.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은 5년마다 118개 회원기구를 심사한다. 2001년 출범한 인권위는 2004년 최초 심사부터 가장 최근의 2021년 심사까지 줄곧 A등급을 받아왔다. 다음 심사에서 A등급을 유지할 수 있을까. 최근 해외 기관의 민주주의 성숙도 평가 결과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하락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인권위 같은 국가기관이 중심을 잡아야 할 텐데 오히려 내부 분열과 국격 추락을 부추기는 듯해 유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6 트럼프 ‘관세 폭격’의 역설

미국 증시의 달콤한 허니문이 끝났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거침없이 올랐던 미국 S&P500지수와 나스닥 지수는 4개월 만에 당선 직후 수준으로 돌아갔다. 주식과 가상자산에 끼어 있던 ‘트럼프 버블’이 꺼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선포하고 각국이 보복관세로 맞불을 놓으면서 투자 심리가 급격하게 위축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한동안 글로벌 자금은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미국 증시, 가상자산, 달러 등이 일제히 치솟았다. 감세와 규제 완화 등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한 ‘미국의 번영’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취임 후 1년 동안 S&P500지수가 24% 올랐던 트럼프 1기 때의 경험도 생생했다. 관세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지만 1기 때처럼 협상 카드로 활용할 것이란 예상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블러핑이 아니라 진짜였다.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상대국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상처를 주고 있다. 관세 부과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이 거세져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 침체) 위험을 키울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부과가 미국 기업과 일자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미국 기업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미국 자동차 업체 포드의 짐 팔리 최고경영자(CEO)는 “관세는 미국 자동차 산업에 전례 없는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했다.
▷미국 관세 공격의 주요 표적인 중국은 정작 태연한 모습이다. 올해 들어 5%가량 하락한 미국 나스닥 지수와 달리 중국판 나스닥으로 불리는 홍콩 항셍테크 지수는 30% 가까이 올랐다. 미국 빅테크에 대한 관심이 주춤해진 대신 인공지능(AI) 딥시크 등을 앞세운 ‘레드 테크 M7’이나 ‘테리픽 10’ 등 중국 기술주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중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촨젠궈(川建國)’ 동지라고 부르며 환호할 정도다. 트럼프(川普·촨푸)가 중국을 때리면서 오히려 제2의 건국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끊임없이 관세 예고와 수정 조치가 계속되면서 미 증시는 극도의 피로감에 싸여 있다. 투자자들이 가장 기피하는 게 불확실성인데, 관세전쟁이 어디까지 확산될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도 “관세는 전쟁 행위”라며 “시간이 가면 관세는 상품에 매기는 세금이 된다”고 트럼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적을 겨냥하는 사진을 둥근 전봇대에 말아 붙이면 총부리가 내 등을 향한다는 반전광고처럼,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트럼프의 관세전쟁이 오히려 미국 경제를 되치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07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는 간병 지옥

‘간병하던 80대 아내를 살해한 뒤 한강에 뛰어든 80대 남편과 그의 50대 아들이 긴급 체포됐다.’ 4일 경기 고양시에서 발생한 간병 살인을 다룬 기사의 첫 문장이다. 건조하게 사건을 요약한 문장 사이사이에 이 가족이 10년 동안 겪었을 절망과 고통이 묻어난다. 한강에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된 이들 부자는 “(먼저)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며 범행 사실을 자백했다. “오랜 간병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도 했다.
▷2023년 기준 간병인을 고용하는 월평균 비용은 370만 원이고, 임금근로자 월평균 소득이 363만 원(세전)이다. 간병인을 쓰게 되면 웬만한 직장인은 한 달 월급을 통째 갖다줘도 모자란다. 요즘은 더 올라 하루 평균 15만 원은 줘야 한다. 저출산 고령화로 간병인 공급은 줄고 수요는 늘어났기 때문이다. 아픈 가족을 버려둘 수도, 간병비를 댈 수도 없으니 가족이 직접 간병을 떠맡는다.
▷‘간병 지옥’은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고 한다. 2020년대 들어 환자를 살해하거나 함께 목숨을 끊은 간병 살인은 한 해 평균 18.8건이 발생하고 있다. 법원 판결이 난 것만 집계했는데도 이렇다. 효자가 존속 살인자가 되고, 잉꼬부부가 동반 자살을 하는 슬픈 사연이 넘쳐난다. 보통 두 시간마다 자세를 바꿔 줘야 하고, 밥을 먹이고 대소변도 치운다. 끝을 알 수 없는 반복 노동에 몸이 아프거나 우울증을 앓는 가족이 많다. 대다수 간병 살인은 잠을 못 자는 등 극한으로 몰렸을 때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장기요양보험 제도가 있지만 간병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아직 성긴 제도다. 65세가 넘어야 하고, 등급에 따라 돌봄 시간이 제한적이다. 결국 가족이 빈틈을 메워야 한다는 뜻이다. 2021년 스물둘 아들이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5일간 방에 혼자 둬 숨지게 했다. 아버지의 뇌출혈 수술비 2000만 원을 겨우 갚았고, 입원할 돈이 없어 집으로 모셔 왔던 터였다. 아들이 간병을 위해 일을 그만두면서 가스, 전기, 인터넷이 차례로 끊겼다. 50대 아버지는 노인장기요양 제도의 대상이 아니고, 병원비를 꼬박꼬박 내는 바람에 긴급의료비 지원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필요하면 부를 테니 나가 있어라”고 했고 아들은 울고 또 울다가 방을 나왔다. 아들은 존속 살인으로 복역 중이다.
▷옛날에도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평균 수명이 83세인 시대에 간병 부담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은 불행을 몰아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육이 국가 책임이 되었듯이, 간병도 그렇게 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온 사회가 연대해 그 부담을 조금씩 나눠 질 수밖에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08(토) 아무도 모른 좌표 실수, 오폭 뒤늦게 안 수뇌부

국내에서 전투기 오폭 사고는 드물다. 실전용 폭탄을 잘못 떨어뜨린 적은 아예 없었다. 2004년 F-5B 전투기가 충남 보령시 한 주차장에 폭탄을 잘못 투하해 차량이 훼손됐지만 폭발하지 않는 연습용 폭탄이었다. 이듬해엔 F-16 전투기가 전북 농가 비닐하우스에 연습탄 2발을 떨어뜨렸는데 인명 피해는 없었다. 6일 발생한 F-16 전투기 오폭 사고가 충격을 주는 건 실전용 폭탄이 8발이나, 그것도 주민 700여 명이 사는 경기 포천시 한 마을을 덮쳤기 때문이다.
▷폭탄이 떨어진 시각은 오전 10시 4분이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느닷없이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건 전시(戰時)가 아니고선 상상하기 어렵다. 수많은 주민들이 혼비백산하며 “전쟁 난 줄 알았다”고 울먹였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마을 곳곳에 폭발 굉음이 들리고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를 때 이들이 느꼈을 공포는 형언하기 힘들 것이다. 한 여성은 어찌나 놀랐는지 남편에게 “여보, 어떻게 해…” 하며 말을 잇지 못하다 “우리 집이 날아갔어”라고 힘겹게 전하는 통화 내용이 언론에 공개됐다.
▷민가에 떨어진 MK-82 폭탄은 교량과 건물을 파괴하기 위한 대량 투하용으로 쓰인다. 폭발 때 직경 8m, 깊이 2.4m 구덩이를 만드는 건 물론 살상 반경이 축구장 1개 면적에 달한다. 낙탄 위치가 달랐다면 돌이킬 수 없는 대참사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폭탄은 유도 기능이 없기 때문에 전투기에 표적 좌표를 정확히 입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좌표 숫자 1개라도 틀리면 몇 km씩 오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조종사가 출격에 앞서 바로 그 좌표 15개 숫자 중 위도 숫자 1개를 잘못 입력한 탓에 훈련장에서 8km 떨어진 민가가 오폭당했다는 게 군의 설명이다. 조종사는 좌표를 잘못 입력한 뒤 전투기 탑승 직후 지상에서 한 번, 공중에서 투하 직전까지 두 번 더 표적을 검증해 오류를 바로잡아야 했지만 세 번 기회 모두 지나쳤다. 그런데 애초 조종사만 좌표를 확인한다고 한다. 이번에도 혼자 타는 K-16 조종사 본인 외에 아무도 좌표를 검증하지 않았다. 한 치 오차도 없어야 할 살상무기를 다루는 매뉴얼이 이리 허술하리라 예상한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군 수뇌부는 사고 30분이 지나도록 오폭 사실조차 몰랐다. 김명수 합참의장에게는 사고 36분 뒤,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인 김선호 차관에게는 39분 뒤에야 보고됐다. 원래 폭탄을 투하했어야 할 포천 훈련장에선 사고 뒤에도 다른 훈련이 계속됐고 훈련을 참관한 김 의장과 한미연합군사령관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장병들과 대화도 나눴다고 한다. 합참이 사고를 파악한 시점 자체가 오폭 20분 뒤였다. 사고 1분 만에 구조에 착수한 소방 당국보다 19분 늦었다. 전쟁 때도 이렇게 한심하게 대처할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03-10(월) ‘국제 밉상’ 된 머스크에 테슬라 주가 추풍낙엽

‘일론이 미치기 전에 샀다고요’ ‘반(反)일론 테슬라 운전자 연합’…. 전 세계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반일론 머스크’ 차량용 스티커들이다. 테슬라를 타고 다니다 야유를 듣거나 봉변을 당한 소유주들이 주로 구매한다. 테슬라를 처분하고 싶어도 워낙 헐값이 되어 팔 수도 없고, 그냥 타고 다니자니 머스크 지지자로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차량 범퍼를 전부 가릴 만한 대형 스티커가 잘 팔린다고 한다.
▷신드롬에 가깝던 인기를 누리던 일론 머스크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돌격대장 역할을 자임하면서 국제적 밉상으로 등극했다. 미국 내에선 그의 무자비한 정부 예산 삭감과 해고가 역풍을 부르고 있다.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맡아 연방정부 개혁에 나서면서 2월에만 무려 6만 명이 넘는 공무원이 해고됐다. 미국 보스턴, 오리건 등에서 충전소가 불타거나 대리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났다. 뉴욕 테슬라 쇼룸에선 시위대가 모여 “아무도 머스크에 투표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유럽에선 각국 정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내정 간섭 발언으로 반머스크 정서가 고조됐다. 노동당 소속인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독일의 마지막 희망”이라며 지지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서 나치식 경례와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며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해 독일인들은 경악게 했다. 독일 베를린 테슬라 공장 공사 현장에선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고, 프랑스 툴루즈에선 테슬라 차량이 불에 탔다. 1월 유럽의 테슬라 판매량은 절반으로 급감했다.
▷머스크의 딴짓에 테슬라 투자자들은 울고 싶다. ‘오너 리스크’ 때문에 테슬라 주가는 7주 연속 하락했다. 공교롭게도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워싱턴에 간 시점부터 주가가 뚝뚝 내려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 역대 최고점(479.86달러)을 찍었던 테슬라 주가는 7일(현지 시간) 262.67달러로 마감했다. 최고점 대비 44%나 하락한 것이다. 전망도 어둡다. 세계적인 반머스크 현상으로 테슬라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고 판매도 부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머스크에 대한 반감은 개혁에 따르는 진통 이상이다. 하루아침에 생계를 잃을까 두려운 사람들에게 전기톱을 흔들어 대거나, 역사적 상처를 들쑤시고도 태연한 그의 ‘공감 능력 결여’는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머스크는 친트럼프 성향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민과 사회보장 제도를 언급하며 “서구 문명의 근본적인 약점은 공감이고, 그 공감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냉혹한 내면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기업 경영에는 공감보다 효율이 우선이겠지만 낙오자도 포용해야 하는 정부 운영은 다르다. 그가 워싱턴에 집착하는 한, 반머스크 물결이 쉽게 잦아들 것 같지 않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11 “구치소는 대통령이 가도 배울 게 많은 곳”

김대중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감옥은 작지만 큰 대학”이라고 했다.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옥살이 6년간 하루 10시간씩 독서하고, 그리운 가족과 편지 주고받고, 화단을 가꾸며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깨칠 수 없는 진리를 깨쳤다”고 썼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예찬일 뿐 감옥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최고 권력을 쥐어본 이들에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수감 생활을 한 이는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윤석열 대통령. 속칭 ‘범털’들은 입소 초기엔 음식 때문에 고생한다. 박 전 대통령은 구치소 음식이 짜서 맨밥만 먹다가 나중에는 컵라면을 사서 물을 많이 부어 먹었다고 한다.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이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가 12·12와 5·18 사건 등으로 같은 법정에 출석해 처음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자네 구치소에선 계란프라이 주나?” “안 준다.” “우리도 안 줘.”
▷수감 생활 중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많다. 건강을 핑계로 쉽게 탈옥한다는 비난이 제기되지만 고령인 탓이 크다. 구치소에선 튼튼한 장정도 1년 지나면 몸이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구속된 지 4개월 만에 수면 무호흡과 당뇨로 입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건강이 나빠져 형 집행정지를 두 차례 신청했지만 검찰이 모두 불허했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이던 시절이다. 결국 법무부 결정으로 외부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으로 석방된 윤 대통령은 “잠을 많이 자니 더 건강해졌다” “구치소는 대통령이 가도 배울 게 많은 곳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 계엄 선포로 밤잠 설쳐가며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듣기엔 불편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응원해준 국민들에게 감사하고, 내란 혐의로 구속된 계엄군의 석방을 기도한다고 했다. 좌우 할 것 없이 어려움과 분열을 겪는 모든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화합을 당부했어야 하지 않나. 배울 게 많은 곳에서 무엇을 배웠다는 걸까.
▷윤 대통령은 그동안 구속 기소했던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났다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언급했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지휘하며 구속시킨 이들로 양 전 대법원장은 1심에서 무죄, 임 전 차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만 콕 집어 지목하자 ‘보수층 외연 확장을 노린 발언’ ‘재판을 앞두고 법원에 선처를 호소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의 수감 생활은 52일, 이 중 8일은 헌법재판소, 하루는 내란죄 법정에 출석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배움을 얻기엔 갇혀 지낸 시간이 길지 않았던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2 기부 받아 ‘상품권 깡’, 아파트 ‘우회 소유’ 도운 공익법인들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한 의료 관련 공익법인 이사장은 지난해 백화점 상품권 수십억 원어치를 사들였다. 그러곤 상품권을 되팔아 현금으로 바꾼 뒤 자기 계좌로 입금했다. 기부받은 돈으로 ‘상품권 깡’을 한 것인데 거리낄 게 없었는지 상품권을 살 때 법인카드로 긁었다. 최근 국세청이 확보한 그의 법카 결제 내역에는 귀금속도 다수 있었다. 함께 적발된 다른 공익재단은 기부금으로 고가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샀다. 임대 수익금으로 공익 활동을 했다면 문제가 없지만 재단은 고액 기부자의 가족들에게 이 아파트를 공짜로 내줬다. 기부자가 재단을 우회해 세금을 안 내고 아파트를 사실상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다.
▷공익법인은 공익 목적으로 출연한 재산에 대해 증여세 면제 등 각종 혜택을 받는다. 그 대신 기부금이나 출연금을 공적 용도로 써야 한다. 복지, 의료, 교육 등 분야에 더 많이 기부가 이뤄지도록 도입된 제도지만 공익으로 위장한 ‘사익법인’이 적지 않다. 지난해 한 공익재단 대표가 기부금으로 수억 원대 골프장 회원권을 사들여 사적으로 쓰다가 걸린 일이 있었다. 수백억 원대 토지를 출연받아 놓고 기부자가 쓸 개인 건물을 짓거나, 재단 자금으로 기부자 손녀 유학비를 대는 등 부당 거래가 이뤄진 사례도 있다.
▷일부 자산가들은 세금 회피나 재산 보호를 위해 공익법인을 이용하기도 한다. 공익법인에 출연한 재산은 상속세나 증여세를 물지 않고, 채권자에게 압류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재단 명의로 고가 아파트를 사서 자녀에게 제공하거나 재단 돈으로 가족에게 허위 급여를 지급하는 등 재산을 우회시키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게다가 공익을 중시한다는 이미지까지 얻을 수 있어 여러모로 남는 장사다.
▷이 때문에 외부 감시가 철저해야 하지만 국세청에 공시된 공익법인은 10곳 중 3곳꼴이다. 엉터리 공시도 많다. 국세청이 지도 감독을 강화하고 있다곤 해도 총 4만 곳에 달하는 공익법인을 꼼꼼히 살피긴 쉽지 않다. 출연자와 특수관계에 있는 사람이 이사장 등 임원진을 맡아 재단 운영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아 내부 감시에도 한계가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노점상이나 분식집을 해온 어르신이 평생 모은 돈을 장학재단 등 공익법인에 쾌척했다는 미담을 자주 접하게 된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준 기부자들에게 일부 공익재단의 부정 행태는 큰 상처를 안기는 배신 행위다. 공익법인이 신뢰받지 못하면 설립 목적에 맞게 묵묵히 공익 활동을 해온 다른 재단들까지 의심받게 된다. 또 사회 전반의 기부 의욕이 꺾이고, 어렵게 일궈온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자산가들도 망설일 수 있다. 무엇보다 공익재단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기회의 문이 더 좁아지는 게 가장 뼈아픈 결과일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13 ‘특혜 의혹’ 뺀 국토부의 양평고속도 맹탕 감사

갑작스러운 노선 변경으로 김건희 여사 일가 특혜 논란에 휘말렸던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과 관련해 용역 관리가 부실했다는 국토교통부 자체 감사 결과가 나왔다. 용역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업체에 돈을 지불했고, 자료 일부를 고의로 삭제해 국회에 제출한 사실도 드러났다. 국토부 공무원과 한국도로공사 직원 등 7명에 대해 징계 등의 처분이 내려졌다. 2023년 9월 국회에서 자체 감사를 요구한 지 1년 6개월 만에 나온 결론이지만 뭔가 찜찜하다. 노선을 누가, 왜, 어떤 근거와 절차로 바꿨을까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2017년 첫 계획 단계부터 2021년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 조사까지 줄곧 양평군 양서면이 종점이었다. 그러다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22년 3월 29일 노선에 대한 타당성 조사가 시작됐는데, 두 달 뒤 용역업체는 양평군 강상면을 종점으로 하는 대안을 제시했고 국토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강상면 일대에 김 여사 일가가 4만여 m²의 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특혜 의혹이 제기됐다.
▷국토부 자체 감사 결과를 보면 용역 감독 부서인 국토부 도로정책과는 용역업체가 편익 산정, 경제적 타당성 분석, 종합평가 등을 하지 않았는데도 “용역 100%가 준공됐다”고 날인한 뒤 대금 18억6000만 원 전액을 지급했다. 과업수행계획서와 월간진도보고서 등의 자료를 기한 안에 제출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요구하지 않았다. 1조9000억 원 규모의 국책사업에 대한 관리가 깜깜이 수준이었다는 것인데, 단순히 부주의나 실수로 치부하긴 어렵다.
▷고의로 핵심 자료를 누락한 것도 확인됐다. 국토부는 2023년 7월 국회에 용역업체가 작성한 38쪽짜리 과업수행계획서를 제출했는데, 이 중 ‘종점부 위치 변경 검토’ 내용이 담긴 4쪽 분량을 통째로 들어내고 쪽 번호도 다시 매겼다. 당시 국토부는 ‘실무진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감사 과정에서 담당자는 “문서에 용역과 무관한 오타가 있어 신뢰성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삭제했다”고 했다. 당시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의혹 해소를 위해 모든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했는데, 실무자가 임의로 훼손하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남는다.
▷사실 이번 감사는 출발부터 결과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노선 변경 과정의 위법행위는 처음부터 들여다보지 않았다. 박상우 현 국토부 장관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특혜와 외압은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 확실한 신념이 있다”고 했다. “(대안 노선은) 기술자적 양심을 가지고 찾은 것”이라고도 했다. 장관이 이렇게 확신하는데 다른 내부 결론이 나오긴 어렵다. 의혹에 대한 진실은 외부의 시선으로 검증할 수밖에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14 철권통치자 두테르테에게 양날의 칼이 된 ‘범죄와의 전쟁’

11일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홍콩 방문 후 귀국하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80)을 인터폴 형사들이 에워쌌다. 재임 시절 범죄자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했던 철권통치자 두테르테에게 형사들은 체포영장을 내밀었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반인도적 살상 범죄 혐의로 발부한 영장이었다.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야!” 그는 역정을 냈지만 형사들에게 붙들려 ICC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압송됐다.
▷두테르테는 “범죄자 10만 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강에 버리겠다”는 공약으로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필리핀 제2의 도시인 다바오시 시장 시절 범죄 용의자 1700명을 즉결 처형하는 극단적 방법으로 범죄를 척결했던 그다. 취임 후 공약대로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마약 등 강력범죄 혐의자에 대해선 체포에 저항하면 사살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죽음이 적지 않았다. 사법절차 없이 처형된 용의자가 정부 집계로만 6000여 명이다. ICC는 1만2000∼3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리핀에선 두테르테의 초강력 리더십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국제사회의 비판이 거셌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에게 “범죄 소탕은 올바른 방법으로 하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ICC가 2018년 인권 유린 수사에 착수한 게 큰 위협이었다. 두테르테는 ICC 회원국 탈퇴로 맞섰고, 2022년 후임으로 선출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도 수사를 막아줬다.
▷그렇게 수사를 피해 온 두테르테가 결국 체포된 건 마르코스가 방패를 거둬들인 결과다. 몇 달 전 “ICC가 두테르테를 체포할 경우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2022년 대선 때만 해도 둘은 굳건한 동맹이었다. 필리핀의 오랜 독재자의 아들인 마르코스는 퇴임 때까지 인기가 많았던 두테르테의 딸 사라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나서준 덕에 당선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사이가 틀어졌다. 마르코스는 사라에게 국방장관직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친미 외교를 펴 아버지의 친중 노선을 계승하려는 사라와 건건이 부딪쳤다. 급기야 여당 주도로 사라가 탄핵될 위기에 놓이자 다음 대선에서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려 했던 두테르테는 마르코스와 정적 관계가 됐다.
▷ICC에 구금된 두테르테가 어떤 처벌을 받을진 아직 불분명하다. 과거 반인권 범죄로 기소된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10년 넘게 실형을 산 전례가 있다. 필리핀에선 마르코스가 정적 제거를 위해 해외 사법기관을 끌어들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냥 놔두면 큰 위협이 될 두테르테를 위해 그가 구명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두테르테에게 초법적인 범죄와의 전쟁은 대통령에 오르게 해준 정치적 자산인 동시에 스스로를 나락으로 내몬 양날의 칼이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15(토) 고립·은둔 청년 2년 새 2배, ‘그냥 쉬었음’은 역대 최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에 출생한 청년을 Z세대라 부른다. 스마트폰을 끼고 자란 첫 세대다. 다소 계산적이라는 의미에서 개인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욜로족’ ‘플렉스’처럼 소비지향적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부유한 한국에서 태어난 철부지 같은 이미지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들을 설명하는 숫자를 보면 ‘절망’ 그 자체다.
▷딱 Z세대에 해당하는 15∼29세 청년층의 ‘그냥 쉬었음’ 인구가 지난달 처음으로 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취업자도 아니고 실업자도 아니다. 학업, 입대, 육아, 질병 등 특별한 이유 없이 구직조차 하지 않는 자발적인 취업 포기자들이다. 일할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이력서라도 넣는 실업자보다 심각한 문제다. 노동시장이 경직돼 신규 채용은 줄고 있는데 경기 침체까지 겹쳐 좋은 일자리 입성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된 탓이다.
▷‘그냥 쉬었다’는 기간이 길어지면 대인관계가 단절된 ‘고립’이나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은둔’ 청년이 되기 쉽다. 국무조정실의 ‘청년의 삶 실태조사’를 보면 지난해 고립·은둔 청년이 5.2%로 2년 전 조사 때보다 2배 이상으로 늘었다. 고립·은둔의 첫 번째 이유가 취업의 어려움이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나 학업 중단을 이유로 꼽은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반복되는 취업 실패로 인한 좌절감이 깊어지면 도전을 회피하게 된다. 세상이 두려우니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이다.
▷고립·은둔은 청년들이 겪는 극단적인 어려움이다. 하지만 보통의 청년들도 과도한 경쟁 압박에 시름시름 앓고 있다. 같은 조사에서 최근 1년간 번아웃(소진)을 경험했다는 청년은 32%였는데 진로 불안, 업무 과중, 일에 대한 회의감 등이 그 이유였다. ‘우울증을 겪었다’는 청년은 8.8%였고, ‘자살을 생각했다’는 청년은 2.9%였다. 실제 2023년 자해나 자살 시도로 응급실을 방문한 4만6000여 명 가운데 10, 20대가 45%를 차지했다. 인생의 봄을 막 지나는 청년들이 죽음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회를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청년에게 간절한 삶의 요소는 무엇일까. ‘원하는 일자리’였다. 고도성장 시대를 살았고, 고임금-정규직 1차 노동시장에 쉽게 진입한 기성세대가 ‘눈높이를 낮추면 된다’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1차 노동시장의 성벽은 너무도 높아서 개인이 아무리 스펙을 쌓고 또 쌓아도 넘기 어려운 수준이다. 더욱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각종 정책에서 소외되고 있고, 실패하면 게으르고 나약하다는 비난까지 받는다. 청년 세대에 최소한 젊어서 고생할 기회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17(월) 관세 겁박하더니 “남는 달걀 좀” 손 벌리는 트럼프

요즘 미국의 마트에선 이른 아침부터 달걀 손님들이 수십 m씩 줄지어 선다. 이들이 개장과 동시에 달걀 코너로 몰려들어 직원들은 안전사고라도 날까 봐 바짝 긴장한다고 한다. 구매 가능 개수가 1인당 12개로 제한돼 있어 더 가져가는 손님이 없는지도 살펴야 한다. 정오쯤 달걀이 한 번 더 입고되는데 아침에 못 사고 돌아간 이들이 더 필사적으로 달려든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덜 비싼 달걀을 사기 위해 벌어지는 오픈런 현장이다. 미국의 계란값이 너무 오른 탓이다. 올 1월 기준 12개들이 달걀 평균가(4.95달러)가 전년 동월 대비 50% 넘게 폭등했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선 12개짜리 한 판이 10달러(약 1만4500원)가 넘는다. ‘금값’이다 보니 계란 털이범들도 나오는데 식당 냉장고에 있던 달걀 수십 판이 사라지는 사건부터 화물 트레일러에 실린 계란 10만 개가 통째로 도난당한 일도 있었다.
▷미국에선 최근 2, 3년 새 조류독감으로 암탉들이 대규모 살처분됐다. 자연히 달걀 공급도 크게 줄었다. 조류독감 예방에는 백신 등 보다 근본적 대안이 필요하지만 닭고기 주요 수출국인 미국은 백신 개발에 소극적이다. 백신을 맞은 가금류 제품은 일부 국가에서 수입을 꺼리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살처분에 의존하다 보니 조류독감이 덮치면 계란값이 크게 출렁인다.
▷흔한 식재료여서 만만하게 보이지만 계란은 물가 상승의 도화선이 되는 품목 중 하나다. 아침마다 계란 후라이나 오믈렛 등으로 거의 매일 먹기 때문에 조금만 비싸져도 바로 체감되는 데다 빵, 파스타 등 계란이 들어가는 다른 식료품도 같이 오른다. ‘에그플레이션(eggflation)’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전방위적 관세 전쟁으로 물가 상승 우려가 큰 상황에서 계란값 폭등은 정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악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은 최근 낙농 강국인 덴마크에 계란을 수출해 달라고 SOS를 쳤다. 얼마 전까지 덴마크령인 그린란드를 팔지 않으면 무자비한 관세를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는데 이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덴마크는 자국 내 계란 수요를 맞추기에도 빠듯하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 도움을 청한 나라에는 한국도 있다. 충남 아산시의 양계농장에서 며칠 전 33만 개를 수출했는데 한국산 계란이 미국에 수출된 첫 사례다.
▷작은 것이 복병이 되곤 한다. 초강대국인 미국도 조류독감으로 계란이 부족해지면 덴마크나 한국과의 무역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상대국을 존중하는 외교와 통상의 중요성을 깨달으면 좋으련만 그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닭들을 대거 살처분했던 게 문제”라며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 있어 미국의 계란 파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18 목소리 잃은 ‘미국의 소리’… 미국의 적에게 주는 선물

언론 통제 국가들에 외부 소식을 전해온 국영방송 ‘미국의 소리(VOA)’가 설립 83년 만에 신규 방송을 중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VOA를 운영하는 글로벌미디어국(USAGM)을 구조조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1300명 넘는 VOA 기자와 PD들이 휴직 처리됐다. USAGM 산하 조직으로 중국의 인권 유린 실태를 폭로해온 자유아시아방송(RFA)도 방송이 중단됐다. 트럼프는 비용 절감을 내세우지만 비판 언론 길들이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VOA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선전전에 대항해 설립된 후 영국 BBC 해외방송과 함께 주요 심리전 수단으로 활약했다. 신규 방송 중단 전까지 북한 중국 이란 등의 수용자 3억6000만 명에게 48개 언어로 해외 뉴스를 전하고 독재 정권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VOA 총국장은 “80년 넘게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온 미국의 귀중한 자산이 침묵당해 슬프다”고 했다.
▷한국어 방송은 같은 해 8월 시작됐는데 첫날 방송에서 이승만의 떨리는 육성 연설 ‘2000만 동포에게 고한다’를 내보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를 단파방송으로 몰래 듣고 외부에 전파한 이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전쟁 발발과 미국의 참전을 가장 먼저 전한 것도 이 방송이었다. 전쟁 기간 내내 매일 1시간 15분씩 정규 방송을 편성하고, 학교 교육이 어려워지자 ‘방송학교’라는 교육 프로도 내보냈다. 주요 청취자는 귀한 라디오를 가진 엘리트 계층이었는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땐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다고 한다.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있었던 ‘부산 정치 파동’으로 방송이 중단된 적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집권을 노리고 직선제 개헌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자 VOA는 이를 비판 보도했고, 공보처가 ‘내정 간섭’이라며 KBS를 통한 중계방송을 2주 넘게 중단했다. 전후 한국 언론이 제자리를 잡은 후엔 북한을 핵심 청취 및 취재 대상으로 바꿨다. 2018년 북한산 석탄의 국내 위장 반입 의혹을 처음 보도한 것이 VOA였다.
▷VOA는 연간 예산 10억 달러(약 1조4500억 원)를 정부에서 지원받지만 방송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해왔고, 백악관은 그런 VOA를 “좌파 편향적”이라며 불편해했다. 민영 방송사와도 소송전을 마다하지 않는 트럼프에게 국영방송 문을 닫게 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VOA 신규 방송 중단 소식에 중국 관영 언론은 “거짓말 공장”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논평했다. 미국 언론이 지적하듯 ‘독재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침묵하게 하는 것은 ‘미국의 적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9 인구절벽 지자체 “난민, 소각장, 화장장도 환영”

충북 청주시 외곽에는 국내 유일 여성 전용 교도소인 청주여자교도소와 청주교도소, 청주외국인보호소가 모여 있다. 과밀 상태이고 시설이 노후화돼 이전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일자 지난해 충북 보은군과 경북 청송군이 “우리 지역으로 와 달라”며 손을 들었다. 보은과 청송은 전성기 대비 인구가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소멸위기 지역이다. 교도소를 유치하면 재소자와 교정공무원이 유입되면서 인구가 늘고, 면회를 오는 이들로 인한 경제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구애에 나선 것이다.
▷교도소, 소각장, 화장장 등은 전통적으로 주민들이 꺼리는 기피 시설이다. 해외도 마찬가지여서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영어 문장을 줄인 ‘님비(NIMBY)’란 단어가 통용될 정도다. 하지만 최근에는 소멸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피 시설 유치에 나서는 지자체가 적지 않다. 경남 거창군은 지원금 60억 원과 운영 수익 20% 공유를 내걸고 화장장 부지를 공모했는데 9곳이 신청했다. 선정된 대야리는 주민 97%가 유치에 찬성했다. 제주에선 소각장 공모에 3곳이 신청해 상천리가 선정됐고, 강원 태백시와 전북 남원시는 지역 요구에 따라 교도소 건립을 확정했거나 추진 중이다. 기피 시설이 님비 대신 ‘핌피(PIMFY·제발 우리 앞마당에 지어 달라)’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난민이나 교포 유치에 나선 곳도 있다. 울릉도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경북 영양군은 주민 수가 1만5000명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미얀마 난민 40명을 유치하기 위해 법무부와 협의 중이다. 영양군은 그동안 교도소 유치, 양수발전소 건립, 북한이탈주민 정착촌 조성 등도 추진했다. 인구가 17만 명에서 12만 명대로 떨어진 충북 제천시는 중앙아시아 3곳에 협력 사무소를 두고 고려인을 유치하고 있다.
▷주민 동의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기피 시설 유치에 나섰다가 내홍을 겪는 곳도 있다. 광주시는 지난해 소각장 후보지 모집에 7곳이 지원하자 “주민 인식이 개선된 결과”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후보지가 3곳으로 압축된 후 해당 지역 주민 일부가 삭발 등을 하며 강하게 반대해 후보지 선정이 무산됐다. 경북 포항시 동해면도 지난해 화장장 유치를 놓고 찬반으로 나뉘어 대립한 끝에 유치에도 실패하고 주민 간 불화만 생겼다.
▷해외에선 기피 시설에 예술을 더해 관광 명소로 만든 곳이 여럿 있다. 친환경 건축가 훈데르트바서가 리모델링한 후 오스트리아 빈의 랜드마크가 된 슈피텔라우 소각장이 대표적이다. 소멸 위기 지역의 아쉬운 처지를 이용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기피 시설을 안기는 대신 주민들이 해당 시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면 더 많은 지역이 흔쾌히 기피 시설 유치 경쟁에 뛰어들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ecchaos@donga.com
03-20 무역 상대국을 ‘더티 15’라고 칭한 美 재무장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진두지휘하는 ‘관세 전쟁’의 다음 무기는 4월 2일로 예고된 상호 관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개념의 관세인데, 각국이 미국산 제품에 적용하는 관세만큼 미국도 똑같이 상대국에 관세를 물리겠다는 것이다. 국가마다, 품목마다 관세율이 제각각이어서 상호 관세 부과는 AI 프로젝트급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어떤 나라가 대상인지, 어떻게 관세율을 매기겠다는 건지가 초미의 관심사인데 트럼프 행정부 고위 당국자가 ‘더러운 15(Dirty·더티 15)’ 국가들을 지목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18일 현지 인터뷰에서 나라별로 상호 관세율이 다를 거라고 설명하면서 “대미 무역량이 많은 15%의 국가들, ‘더티 15’라고 부르는 국가들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과거 미 행정부가 중국을 겨냥해 ‘더러운 철강(dirty steel)’이라고 언급한 적은 있지만 무역 상대국을 싸잡아 지저분하다고 지칭한 건 이례적이다. 남의 나라 총리를 ‘주지사’라고 조롱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례함이 행정부 전반으로 옮겨간 듯하다.
▷베선트 장관은 ‘더티 15’에 어느 나라가 포함됐는지 밝히진 않았지만 미국에 상당한 관세를 부과하고, 관세 못지않게 중요한 ‘비관세 장벽’을 치는 국가라고 지적했다. 미국에 불리한 세금이나 규제, 정부 보조금 같은 비관세 장벽까지 고려한 상호 관세를 거듭 확인한 것이다. 미국에 여덟 번째로 많은 무역 적자를 안긴 한국도 ‘더티 15’에 올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위를 떠나 “한국의 평균 관세가 미국의 4배”라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까다로운 농산물 검역 규제와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금지, 구글의 정밀지도 반출 제한 등은 미국 측이 꾸준히 문제 삼아 온 한국의 비관세 장벽 이슈들이다. 최근 국무장관, 상무장관, 백악관 핵심 참모 등이 돌아가면서 한국을 콕 집어 압박 수위를 높이는 배경이다. 일본 대만 등이 미국에 더 큰 무역 적자를 떠안겼는데도 한국을 향한 칼날이 유독 매섭다. 국정 리더십에 구멍이 난 한국이 동네북이 된 신세다.
▷베선트 장관은 “사전에 협상하면 상호 관세를 피해갈 수 있다”며 “일부 국가는 이미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미 관세를 대폭 낮추겠다고 제안했다”고 강조했다. 교역국들을 상대로 4월 2일 전까지 선물 보따리를 가져오라고 압박한 셈이다. 일본, 인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만나 관세 면제를 요청하면서 각각 1조 달러 투자와 미국산 에너지·무기 수입을 약속했다. 대만은 정부 대신 반도체 기업 TSMC가 나서 100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이 ‘더티 파트너’가 아니라 ‘대체 불가 파트너’임을 설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21 “세계에서 혼밥 가장 많은 나라”

세계 여러 언어권에서 절친한 관계를 뜻하는 단어는 어원이 ‘함께 먹는다’인 경우가 많다. 친구를 프랑스에선 ‘코팽(copain)’, 이탈리아에선 ‘콤파뇨(compagno)’라고 하는데 둘 다 ‘빵을 나눠 먹는다’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중국어로 동료나 짝을 뜻하는 ‘夥伴(훠반)’도 ‘같은 불로 밥을 지어먹는 관계’라는 고대어에서 왔다. 우리말로 가족과 같은 말인 ‘식구(食口)’ 역시 마찬가지다. 직역하면 먹는 입, 해석하자면 한솥밥 먹는 사람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함께 식사하는 관계를 귀하게 여겨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요즘은 ‘혼밥’ 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게 최선이어서라기보단 효율과 편의를 우선시한 선택이다. 원치 않는 상대와 불편하게 같이 먹느니, 식사 약속 잡느라 신경 쓰느니 혼자가 편하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보며 호젓하게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1인용 간편식과 배달 음식도 다양해져 혼밥은 더욱 손쉬운 선택이 됐다.
▷최근 발표된 유엔 세계행복보고서는 ‘혼밥 해서 행복하십니까’란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매년 140여 개국을 조사하는데 올해는 각국의 혼밥 현상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1인 가구 증가와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한국에 주목했다. 한국은 저녁을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 횟수가 일주일에 평균 1.6회에 불과해 일본(1.8회)과 함께 세계 최하위권이다. 점심, 저녁을 다 합쳐도 4.3회에 그쳤다. 중남미는 9회, 유럽은 8회가 넘어 우리의 두 배다. 공교롭게도 행복지수 상위 10위권은 핀란드를 필두로 한 유럽과 코스타리카,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이다. 우리는 58위다. 지인과 식사하는 빈도와 삶의 만족도는 연관관계가 깊다는 게 이 보고서의 분석이다.
▷한국의 혼밥족 중에는 아동, 청소년들도 많다. 얼마 전 아이들이 혼밥을 할수록 행복감이 낮아진다는 연구 논문도 나왔다. 특히 저녁 식사를 편의점, 분식집 등에서 혼자 때우는 경우가 많은데 하교 후 각자 학원이나 독서실로 직행해야 해 가족이나 친구들과 식사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학원 시간에 쫓기고, 과제·시험 부담 때문에 인스턴트 음식이나 자극적인 음식을 찾는 경향도 강했다. 가족과의 편안한 저녁 식사는 한국 아이들에겐 사치에 가깝다.
▷영국 옥스퍼드대 학생 식당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나무 테이블이 주로 놓여 있다. 학생들이 함께 밥을 먹도록 안쪽부터 차곡차곡 채워 앉는 게 오랜 전통이다. 식당이야말로 학생들이 서로 연결되고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라는 게 이 대학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렇게까진 안 하더라도 마음 맞는 사람과의 식사를 자주 즐길 수 있도록 여러 대안들이 나와야 우리가 좀 더 행복해질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22(토)“주말까지 팔아 달라”… 토허제 패닉 빠진 집주인들

“가격을 낮춰도 좋으니 어떻게든 일요일(23일)까지 집을 팔 수 없을까요?” 최근 서울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구)와 용산구의 공인중개사 사무실에는 이런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19일 서울시와 국토교통부가 이 지역 전체 아파트를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24일부터는 강남 3구와 용산구에서 전세를 끼고 주택을 사는 ‘갭투자’가 불가능해진다. 하루 이틀 내로 매수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호가를 2억∼3억 원 낮춘 집주인들도 생겼다.
▷당초 허가구역이 아니었다가 새로 지정된 서초구에선 이틀 새 500건이 넘는 민원과 문의가 구청으로 쏟아졌다. 이에 21일 서초구는 ‘주요 Q&A’를 정리해 구 홈페이지 메인화면에 게시했다. 강남 3구와 용산구의 세입자들은 갭투자 규제로 전세 매물이 크게 줄어 전세금이 오를까 불안에 떨고 있다. ‘풍선효과’가 예상되는 마포, 성동, 강동, 동작구 등에선 집주인들이 집값 상승을 예상해 매물을 거둬들여 실수요자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서울시의 오락가락 정책이 화근이었다. 지난달 12일 서울시는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이른바 ‘잠삼대청’(잠실 삼성 대치 청담동)을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서 해제했다. 집값이 하향 안정화에 접어들고 거래량이 감소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후 강남 3구를 중심으로 집값이 들썩였지만 서울시는 ‘평균 매매가격은 오히려 떨어졌다’(지난달 28일), ‘실제 상승률은 미미하다’(이달 9일)고 해명했다. 그러더니 19일엔 갑자기 거래량 급증, 가격 급등 등 과열 조짐이 감지됐다고 했다.
▷재산권 침해 가능성이 있는 토지거래허가 제도는 암세포만 죽이는 표적 항암제처럼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 지난달 서울시가 “지역 단위로 ‘광범위’하게 지정했던 허가구역을 ‘핀셋’ 지정으로 전환한다”고 한 것도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 만에 강남 3구와 용산구 전체를 통째로 지정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허가구역을 확장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라고까지 했다. 2월의 서울시와 3월의 서울시는 서로 다른 기관인가.
▷오락가락 정책엔 정부도 할 말이 없다. 서울 집값을 안정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지난해 9월 당시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특정 지역 집값을 잡는 것이 정부 주택 정책의 목표는 아니다”라고 했는데 최근엔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상승 요인을 차단하겠다”고 했다. 대출 정책도 뒤죽박죽이다. 금융당국은 갭투자를 차단한다며 ‘조건부 전세자금 대출’을 지난해 8월 중단시키더니 올해 초 허용했다가 21일부터 다시 죄었다. 시장은 그대론데 정부만 흔들리니 국민들도 덩달아 어지럼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24(월) 김성훈 영장 심사에 檢은 왜 불참했을까

김성훈 대통령경호처 차장과 이광우 경호본부장에 대한 영장실질심사에 검사가 불참한 것을 놓고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들의 영장은 “범죄 혐의에 다퉈 볼 여지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21일 법원에서 기각됐는데, 검사가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해서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이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검찰이 일종의 ‘태업’을 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김 차장과 이 본부장은 경호처 내에서 대표적인 ‘강경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경찰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하고, 경호처가 관리하는 비화폰 서버에서 군 사령관들의 통화 기록을 삭제하려 한 혐의 등으로 김 차장에 대해 3차례, 이 본부장에 대해 2차례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도주나 증거 인멸 우려 등이 없다’며 번번이 기각했다. 이에 경찰의 신청으로 6일 열린 서울고검 영장심의위원회에서 ‘영장을 청구하는 게 타당하다’고 권고한 뒤에야 검찰은 법원에 영장을 청구했다.
▷경찰이 수사를 주도하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의 영장실질심사에 검사의 참석 여부는 사안의 중대성에 달려 있다. 경찰이 일상적으로 넘기는 사건은 검사가 영장실질심사에 불참하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라면 검사가 직접 챙긴다는 것이다. 내란 혐의로 영장이 청구된 조지호 경찰청장은 물론 ‘음주 뺑소니’ 사건으로 영장이 청구된 가수 김호중 씨 등은 경찰이 수사했어도 검사가 심사에 들어갔다. 고위 검사 출신의 법조인은 “심사에서 검사에게는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지만 경찰관은 판사가 묻는 것에만 답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검사가 참석하면 구속 사유를 입증할 기회가 늘어나는 셈이다.
▷법원이 발부한 윤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경호처가 막아서면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및 경찰과 대치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던 게 두 달 전이다. 비화폰 서버에 계엄 당시 벌어진 일들에 대한 단서가 남아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국민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지목된 두 사람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영장실질심사였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영장을 청구하게 됐든 심사에 참석해 최선을 다하는 게 검찰의 기본 아닌가.
▷더욱이 윤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에 대해 검찰이 항고를 포기한 것을 놓고 ‘봐주기’라는 비판 여론이 일었고, 그 여진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다. 계엄 선포 직후 대검 과장급 간부가 방첩사 대령과 통화한 것 등을 놓고 ‘검찰도 뭔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미묘한 시점인 만큼 검찰이 계엄 관련 사건에서는 더욱 신중했어야 했는데, ‘나 몰라라’ 식의 행보로 의혹과 논란을 키운 결과가 됐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25 “등짐 펌프 하나 메고”… 산불에 스러진 60대 진화대원들

22일 정오경 경남 산청군 구곡산 산불 현장에서 불을 끄던 진화대원 8명과 공무원 1명이 다급하게 산길을 뛰기 시작했다. 도깨비불처럼 불덩이가 날아다니더니 불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 불덩이가 강풍을 타고 주불과 400m 떨어진 곳까지 날아들었고 역풍이 불며 순식간에 이들의 뒤를 덮쳤다. 움푹 팬 웅덩이로 피신한 5명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엎드려 불길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진화복을 입었는데도 온몸이 타들어 갔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은 살아남았다. 화마를 피하지 못한 진화대원 3명과 공무원 1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산불이 나면 산림청 공중진화대와 특수진화대가 주불을 끄고 각 지방자치단체 공무원과 진화대원이 잔불을 잡는 식으로 진화 작업이 진행된다. 이번 산불 현장에 투입된 진화대원 8명은 모두 60대였다. 창녕군 소속이지만 ‘산불 대응 3단계’ 발령에 따라 산청군까지 지원을 나섰다. 산길을 안내한 산청군 녹지직 공무원만 30대였다. 지자체 소속 진화대원은 보통 10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 일하는 기간제 근로자다. 평소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일당 8만 원 정도를 받고 진화대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화조장이었던 고 이모 씨(64)는 홀어머니를 수발하며 농사를 지었다. 동네 어르신을 병원이며 읍내며 차에 태워 나르던 ‘동네 효자’였다. 고 공모 씨(60) 또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당일 아침까지 이웃 마늘밭에 물을 대주고 나올 정도로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고 황모 씨(63)는 지난해 일을 시작한 새내기였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됐다.
▷전국 진화대원 9604명 중 70%가 60대 이상이고 70, 80대도 종종 있다고 한다. 만 18세 이상이면 지원할 수 있지만 지역에 워낙 청년이 없기도 하고 처우도 열악해 사실상 고령자 일자리가 됐다. 선발 이후 받는 교육 역시 이틀 이내로 짧게 이뤄지고, 산림청 특수진화대원과 달리 갈퀴와 등짐 펌프 등 화재 진압 장비도 간소하게 지급된다. 문제는 겨울철 이상 고온과 봄철 가뭄으로 인해 산불이 잦아지고, 갈수록 대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불 진화 자원을 총동원해도 불길이 빨리 잡히지 않으니 진화대원까지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
▷지난 주말 전국 42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은 축구장 1만2475개(8733ha)만큼의 면적을 태울 만큼 맹렬하고 난폭했다. 강풍을 타고 불이 자꾸 번지면서 사흘간 진화율은 71%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고령의 진화대원을 변변한 장비도 주지 않은 채 헬기를 띄워도 접근이 어려운 대형 산불 진압에 투입했다. “마지막이 얼마나 뜨거웠을까….” 남은 가족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26 “소름 돋는…” 그날 밤 용산 합참서 무슨 일이

지난해 12월 4일 새벽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의결 직후 윤석열 대통령이 찾은 곳은 용산 합동참모본부 지하에 있는 결심지원실이다. 그곳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 등 군 간부들이 있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시 대통령은 지체 없이 해제한다’는 계엄법에 따른다면 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계엄 해제와 함께 군 철수를 지시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윤 대통령 발언을 접한 방첩사령부 간부가 공수처에 한 진술은 그와 거리가 멀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소름 돋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국회의원부터 잡으라고 했는데”라며 소리를 질렀다. “인원이 너무 부족했다”는 김 전 장관의 말에는 “그건 핑계다. 국회에서 의결했어도 새벽에 비상계엄을 재선포하면 된다”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는 당시 상황을 지켜본 방첩사 요원이 단체대화방에 이 내용을 공유해줘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합참 간부도 윤 대통령이 “그러게, 잡으라고 했잖아요” “다시 걸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공수처에 진술했다.
▷윤 대통령의 결심지원실 발언은 그가 계엄 당시 군경 지휘관들에게 의원들을 끌어내란 지시를 왜 그리 반복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윤 대통령은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에게 “의결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인원을 끄집어내라”고 했다. 조지호 경찰청장에겐 6차례나 국회의원 체포를 닦달했는데 이 중 2번은 국회의 계엄해제안이 통과된 이후였다고 한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에게도 “해제됐다 하더라도 내가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니까 계속 진행하라”고 했다. 의원들을 끌어내고 국회를 장악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계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지시가 나왔을까.
▷윤 대통령은 결심지원실에 와서 몇 분 뒤 김 전 장관과 박 전 사령관만 남겨 얘기를 나눴다. 세 사람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 전 장관은 이 회의 직후 곽 전 사령관에게 중앙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지 문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계엄 설계에 관여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과도 통화하며 대응 방안을 상의했다. 이때까지도 계엄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는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이다.
▷윤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발표한 건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한 지 3시간 반이 지나서였다. 합참 결심지원실에서 벌어진 상황에 비춰 보면 “국회를 무력화할 의사가 없는 2시간짜리 경고성 계엄”이라는 윤 대통령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3시간 반 동안의 행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하는 이유다. 윤 대통령이 그날 밤 합참에서 ‘의원부터 잡아놓고, 다시 계엄을 선포하면 된다’고 말한 게 사실이라면 정말 “소름 돋는 일”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27 남편 대출을 아내가 심사… 이쯤 되면 은행이 아닌 사금고

국책은행인 IBK기업은행에서 전현직 임직원 수십 명이 가담한 880억 원대 부당 대출이 적발됐다. 퇴직한 직원이 은행에 다니는 배우자와 동기, 선후배 등과 결탁해 무려 7년 동안 부당 대출을 받거나 알선했다고 한다. 두 달 전에는 우리, KB국민, NH농협은행 등 3곳에서 고위 임원부터 일선 영업 현장까지 연루된 3800억 원대 부당 대출이 확인됐다. 소비자들에겐 가혹할 만큼 엄격한 대출 잣대를 들이대는 은행들이 국책은행, 시중은행 가릴 것 없이 짬짜미로 대규모 부정·편법 대출을 일삼아 온 것이다.
▷금융감독원 검사 결과, 기업은행에서 14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A 씨는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출을 끼고 땅을 산 뒤 건물을 짓고 되파는 식으로 돈을 벌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행 대출 심사역인 아내와 기업은행 사모임 5곳에서 만난 전현직 임직원이 대거 동원됐다. 대출 증빙 서류를 허위로 꾸며 제출했지만 아내와 동료들은 이를 묵인하고 돈을 내줬다. A 씨의 입행 동기인 대출심사센터장과 지점장들은 미분양 상가의 부당 대출을 줄줄이 승인해 줬고, 고위 임원은 미분양 난 건물에 아예 은행 점포를 입점시켰다.
▷이런 식으로 A 씨가 2017년 6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직접 빌리거나 건설사에 알선해준 부당 대출은 51건, 785억 원에 달한다. 이쯤 되면 국책은행이 아니라 ‘사금고’라 불러야 할 판이다. A 씨의 부정을 공모하거나 눈감아준 임직원들은 두둑한 대가를 챙겼다. A 씨에게 해외 골프 접대를 받은 임직원이 스무 명이 넘고, 일부 임직원은 배우자들이 A 씨 회사에 취업하는 방식 등으로 16억 원 상당의 금품을 챙겼다. 은행원들의 기강 해이가 ‘도덕 불감증’ 수준이다.
▷더군다나 기업은행은 지난해 9월 자체 조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도 금감원에 보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감원 검사가 시작되자 일부 직원들은 수백 개 문서와 사내 메신저 기록을 삭제하며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다. 또 은행 조사 결과 부당 대출 규모가 240억 원이라고 공시했지만 금감원 검사에서 3배 넘게 늘었다. 은행권에 만연한 제 식구 감싸기가 도를 넘은 셈이다.
▷지난해 손태승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얽힌 불법 대출이 드러난 데 이어 대규모 부당 대출이 끊이지 않으면서 은행권의 내부통제 강화와 윤리 경영이 말뿐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국민은행과 농협은행에서는 직원들이 대출 브로커와 짜고 억대 금품을 받은 뒤 수백억 원을 대출해 주는 등 위법 행태도 갈수록 대담해지고 조직화되고 있다. 고객들이 이런 은행을 믿고 돈을 맡겨도 되나 싶다. 신뢰와 리스크 관리가 생명인 은행권의 탈선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어 걱정스럽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28 시그널 게이트’… 나사 풀린 트럼프 사람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인사 18명이 상업용 앱인 ‘시그널’에 단체 대화방을 만들었다. 부통령, 백악관 비서실장, 안보보좌관, 국방장관, 국무장관,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이 망라된 이 대화방에서 이달 13일 친이란 성향의 예멘 후티 반군을 공격할지 여부가 논의됐다. J D 밴스 부통령이 난색을 보였다가 국방장관이 공습을 고집하자 동의로 돌아섰다. 이틀 뒤 국방장관은 이 대화방에 폭격 2시간 전부터 공습 계획을 올렸고, 작전 후엔 빌딩 붕괴 등 폭격 성공 사실을 공유했다.
▷여기엔 심각한 보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온라인 월간지 ‘디애틀랜틱’의 편집장이 이 대화방의 19번째 참여자로 13일 초대됐고 이들의 논의 과정을 다 지켜본 것이다. 이 매체의 제프리 골드버그 편집장은 24일 관련 내용을 보도하며 “(대화방 참여자들은) 외부 민간인이 들어온 사실조차 몰랐던 데다가 군사용 보안 기능이 없는 상업용 앱(‘시그널’)을 써서 극비 군사 계획을 노출했다”고 지적했다.
▷“민간 앱이 해킹됐다면 미군 조종사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는 지적이 ‘시그널 게이트’ 로 번지면서 워싱턴이 발칵 뒤집혔다. 보도 하루 만에 상원 정보위가 소집됐다. 소환된 CIA 등 정보당국 책임자들은 “대화 내용에 군사 기밀은 없었다” “백악관 조사 중에는 답할 수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트럼프의 참모들은 “야당 성향 기자의 트럼프 비판일 뿐”이라며 의미 축소에 급급했다. 언론인을 대화방에 초대한 사람은 마이클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확인됐다. 육군 특수부대(‘그린 베레’) 대령 출신인 왈츠는 하원의원 시절 골드버그 편집장과 알고 지냈다고 한다.
▷논란이 커지자 디애틀랜틱은 “군사 기밀은 다루지 않는다는 보도 원칙이 있지만, 이번엔 독자의 판단을 구한다”며 2차 보도에 나섰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공격 당일 오전 11시 44분에 “F-18 출격. 13시 45분 1차 타격. 목표인 테러범은 평소 위치에. MQ-9 드론도 이때 출격”이라고 올렸다고 한다. 공습 2시간 전에 공격 수단은 물론 공습 예정 시간을 공개한 것이다. 외부 민간인이 이를 퍼뜨렸거나 해킹됐다면 어땠을까. 후티 반군에게 대공포 격추를 시도할 기회를 줬을 수 있다.
▷이들이 왜 정부 보안 채널을 안 썼는지, 언론인을 왜 초청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분명한 건 트럼프 안보라인 전원이 기본적인 보안 상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보도 후에도 기본적인 사실 관계조차 부정하면서 오히려 언론을 공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트럼프가 충성파만 찾는 바람에 최고위직을 맡기에는 경험과 경륜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입증된 셈이어서 더 뜨끔했는지 모르겠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3-29(토) 의대생 일단 복귀는 한다는데…

의대 증원에 반발해 1년간 집단 휴학했던 의대생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 서울대 의대는 입대자를 제외한 전원이 등록하기로 했다. 고려대·연세대 의대는 일부 강경파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원이 복귀 의사를 밝혔다. 울산대 의대도 전원이 복학을 신청하기로 하는 등 지역 의대들의 기류도 바뀌고 있다.
▷꿈적하지 않던 의대생들을 움직인 건 대학이 일제히 제적을 통보하면서부터다. 연세대, 전남대 등 의사 출신 총장들부터 유급·제적 카드를 꺼내 들고 “원칙 처리”를 선언했다. 이젠 더 이상 사정을 봐주려야 봐줄 수 없는 상황이라서다. 올해 신입생까지 휴학에 동참하면 내년에는 24·25·26학번을 한꺼번에 교육해야 한다. 의대생만 특혜를 준다는 학내 여론도 비등하다. 지난해 두 학기나 집단 휴학을 승인했고, F학점을 받아도 유급되지 않도록 학칙을 개정했다. 다른 과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의대 정상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지만, 실제 수업이 원활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의대 비상대책위원회가 유급·제적을 피하기 위해 일단 등록 후 휴학을 하고, 휴학이 반려되더라도 수업을 거부하자고 했다. 정부는 의대생 전원이 복귀하면 내년 의대 정원을 증원 이전(3058명)으로 동결하기로 했고, 반발이 극심했던 진료 면허제와 미용시술 개방은 철회했다. 그랬더니 실손보험 개혁을 포함한 필수 의료 정책 전부를 폐기해야 복귀한다고 한다. 수업 거부로 의대 교육이 파행되면 증원 철회도 없던 일이 되고 의정 갈등도 다시 ‘강 대 강’으로 치달을 우려가 크다.
▷그런데도 의료계를 대표한다는 대한의사협회가 28일 “의대생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면서도 “공식 입장은 없다”고 했다. “의대 학장과 대학 총장은 학생의 재난적 상황에 더해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뜬금없는 훈수도 뒀다. 의협 주류를 구성하는 개원의는 의정 갈등 동안 환자가 늘고, 수가는 오르고, 전공의가 쏟아져 나와 인건비는 줄어드는 수혜를 누렸다. 그러면서 의사 면허조차 없는 의대생을 대정부 투쟁에 앞세우는 건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박단 의협 부회장 겸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은 “팔 한 짝 내놓을 각오도 없이 뭘 하겠다고. 저쪽이 원하는 건 굴종 아닌가”라며 오싹한 선동을 했다.
▷의대생이 돌아온다면 정부는 약속대로 의대 교육을 내실 있게 준비해야 한다. 24·25학번 순차 졸업 등 커리큘럼, 시설과 교수 확보에 차질이 있어선 안 된다. 이렇게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가야 의료계와 건설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의대생은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굴종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다. 고장 난 제도를 고치지 않고, 무모한 정책을 추진한 건 의대생 잘못이 아니다. 세상을 고민했던 시간을 바탕으로 좋은 의사가 되면 될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31(월) 쿠데타에, 내전에, 초강력 지진까지 덮친 미얀마

미얀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는 28일 발생한 규모 7.7 강진의 최대 피해 지역이다. 인구가 120만 명인 이 대도시의 더없이 취약한 구조 인프라가 이번 지진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무너진 건물 틈새로 “살려달라”는 비명이 곳곳에서 난무하지만 잔해를 치울 장비가 없어 맨손으로 구조한다고 한다. 도시에 몇 안 되는 병원들은 이미 부상자로 가득 차 흙바닥에서 담요를 깔고 치료받는 환자들이 많다. 병원이 무너지는 바람에 들것에 실려 나온 한 임신부는 거리에 누운 채 출산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폭염까지 겹쳐 생존자들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미얀마의 이 같은 아비규환은 비단 지진 때문만은 아니다. 4년 전 군부 쿠데타와 그에 따른 오랜 내전으로 이미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군부와 저항세력 간 무력 충돌로 의료·구호 시설은 파괴됐고, 교통·통신 등 기반시설도 마비됐다.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은 군사 정권에서 일할 수 없다며 의료 현장을 떠났다. 게다가 저항군이 장악하고 있는 만달레이 주변 지역은 군부 정권이 각종 물자 지원도 끊은 상황이었다. 군부는 반군을 소탕한다며 이 지역을 계속 공습해 왔고 심지어 지진이 나던 날에도 폭격을 퍼부었다.
▷미얀마 군부 수장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2021년 총선 패배에 불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4년간 군부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4400여 명에 달한다. 미얀마를 외부와 단절시키기 위해 방송과 인터넷을 차단해온 군부는 대지진이 나자 “모든 국가의 도움을 받겠다”며 국제사회에 처음 손을 벌렸다. 그만큼 상황이 처참하단 얘기다. 원자폭탄 334개에 맞먹는 강진으로 현재까지 공식 사망자만 1600여 명에 이른다.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을 수 있다는 분석(미국 지질조사국)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얀마를 돕겠다”고 하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미국의 해외 구호를 총괄하는 국제개발처(USAID) 폐지를 추진하면서 원조 사업을 대폭 축소한 장본인이 트럼프다. 그에 따른 인도주의적 지원 공백이 현실화되는 첫 사례가 미얀마 지진일 거란 우려가 높다. 국제사회 지원이 이뤄지더라도 군부가 통치 지역 외에는 원조품을 공급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미얀마의 거의 절반은 민주 진영 임시정부의 관할하에 있다.
▷최악의 시기에 강타한 초강력 지진으로 구조대와 의료진이 절실한 만달레이에는 총을 든 군인들만 넘쳐난다고 한다. 총으로는 단 한 명도 살릴 수 없다. 힘겹게 구조 활동을 벌이는 시민들은 외신에 “여긴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죽음의 도시”라고 말한다. 재난은 정치가 불안한 나라를 더 가혹하게 뒤흔든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橫說竪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