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物相(조선일보) 2025-01/
01.01(수) 세계가 즐기게 된 한국 공기놀이

▲일러스트=이철원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3년 전 첫선을 보였을 때 전 세계가 빠져들었다. 스토리의 참신함과 흡입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계인은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의 다양한 놀이에 낯설어하면서도 매료됐다. 유럽 청년들이 광장에 모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놀았다. 문양을 따라 설탕 과자를 잘라 먹는 ‘달고나’ 놀이는 단연 인기였다. 소셜미디어엔 달고나 만드는 법 동영상이 넘쳐났다.
▶‘오징어 게임’ 시즌2가 지난 주 공개되자마자 90여 나라 1위에 올랐다. ‘한국 게임 하기’ 열기도 다시 불붙고 있다. 이번엔 ‘공기’ 놀이가 최고 인기다. 배우 강하늘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공깃돌 5개를 허공에 던져 낚아채는 동영상은 조회수 1000만회를 돌파했다. 인터넷에는 한 남자가 드라마 속 게임 참가자처럼 녹색 운동복을 입고 나와 K팝 가수 로제가 부른 ‘아파트’를 들으며 공기놀이를 즐기는 동영상도 화제다.
▶공기놀이가 한반도에서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세기 초 학자 이규경이 집필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공중에 돌을 던져 손바닥으로 받는다’는 설명과 함께 ‘들어올린다’는 뜻의 공(拱)과 ‘바둑돌’을 뜻하는 기(棋)를 합쳐 ‘공기’라고 소개했다. 조선총독부가 1941년 펴낸 ‘조선의 향토오락’에는 석유(石遊)로 돼 있다. 우리만의 놀이도 아니다. 이규경은 같은 책에서 “일본에는 돌 10개로 하는 척석(擲石)이 있다”고 설명했다. 네팔·태국 등에도 비슷한 놀이가 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도 등장했을 만큼 역사도 오래됐다. 그런데도 한국의 놀이가 됐다. 드라마의 힘이고 이런 게 소프트 파워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 놀이 전시장이다. 등장인물들은 딱지치기·비석치기·팽이 돌리기·제기차기로 운동회를 한다. ‘가위바위보 하나 빼기’도 러시안룰렛 게임과 결합해 목숨을 건 놀이로 탈바꿈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게임뿐 아니라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동요 ‘둥글게 둥글게’까지 “중독성 있다”는 반응을 얻으며 푸른 눈의 시청자들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됐다.
▶황동혁 감독은 새해 공개될 시즌 3을 이미 다 만들어 놨다고 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벌써부터 “또 어떤 한국의 놀이가 등장할까?” 궁금해한다. 우울하고 참혹했던 한 해가 가고 새해 아침이 밝았다. 세계가 우리를 위로하면서 툭툭 털고 일어나 전처럼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기 바랄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상실을 겪은 분들에게도 희망이 깃들기를 소망한다.
01.02 뱀, 생태계의 수호자

▲일러스트=이철원
뱀은 혐오와 숭배, 양극단 이미지를 한 몸에 지닌 특이한 동물이다. 온기 없고 징그러운 외모, 한입에 통째로 먹이를 삼키는 엽기적 사냥 방식, 거기에 맹독까지 있으니 사랑받을 구석을 찾을 수 없다. 구약 창세기에선 이브를 유혹하는 사탄이고 그리스 신화의 괴물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뱀이다.
▶어릴 적 시골 외가에 갔다가 뱀의 이미지를 깨는 일이 있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시골엔 뱀이 많았다. 외할머니는 뱀을 보고 놀란 손자에게 “내가 어렸을 땐 서까래 아래 앉아 있으면 뱀이 머리 위로 떨어질 만큼 많았다”며 “뱀은 재산을 지켜주는 영물이어서 내쫓으면 가세가 기운다”고 하셨다. 농경 사회에서 뱀은 곡식을 축내는 쥐를 잡아먹는 익수(益獸)여서 가뜩이나 쌀이 귀한 농가에 고마운 존재라고도 했다. 이런 믿음이 민간의 뱀 숭배로까지 발전했다는 걸 훗날 알게 됐다.
▶뱀은 이로운 짐승일 뿐 아니라 천연 방제 기능도 있다. 근대 이전 농가에는 고양이 수가 적었기 때문에 병균을 옮기는 쥐를 구제할 목적으로 일부러 독이 없는 구렁이를 집 안에 들이고 살았다. 이런 기능이 상상력을 자극해 그리스 신화에선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들고 다니는 치유의 지팡이를 뱀이 칭칭 감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해 군의 의무 부대 마크 등에 뱀 문양이 쓰이는 이유다. 우리 역사에는 수호자 캐릭터로 나온다. 신라 경문왕이 침소에 들면서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잠잘 수 없다”고 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왕을 지키는 병사를 뱀에 빗댄 것으로 해석한다.
▶뱀이 인간뿐 아니라 자연의 수호자로 훼손된 생태계를 치유하는 기능도 크다는 사실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자연계에서 뱀은 중간 포식자다. 작은 쥐나 개구리를 먹고 족제비나 멧돼지 같은 큰 짐승의 먹이가 된다. 먹이사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여서 뱀이 없으면 생태계 균형이 무너진다. 한반도엔 이런 뱀이 11종 서식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대부분의 뱀이 멸종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환경부 산하 국립생태원이 2025년 뱀의 해를 맞아 제주도 비바리뱀 구조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고 한다. 비바리라는 이름은 정수리부터 목덜미까지 검은 줄무늬가 마치 처녀의 제주도 방언인 비바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1981년 한라산 성판악 근처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10여 년 전부터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한다. 뱀은 다산과 생명력의 상징이다. 혼란스러운 시국에서 맞이한 새해, 우리 사회도 뱀처럼 힘찬 생명력을 발휘했으면 한다.
01.03 "대박 나세요"

▲일러스트=이철원
신년 덕담으로 “복 받으세요” “건강하세요”만큼 “대박 나세요”가 많이 들린다. ‘대박’ 신년 덕담이 등장한 것은 2002년부터다. 2001년 연말, 낯설지만 강렬한 광고가 TV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눈 내리는 마을을 배경으로 산타클로스 복장의 여배우가 연신 “부~자 되세요”를 외치는 신용카드 광고였다. 사람의 원초적 욕망을 꿰뚫는 광고 문구가 대유행하면서, 신년 덕담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거의 모든 자산 가격이 뛰는 ‘에브리싱 랠리(everything rally)’가 펼쳐졌다. 주요 투자 자산 중 최고 수익률은 비트코인(136%)이 차지했다. 2023년(154%)에 이어 2년 연속 대박을 터트렸다. 2위는 금(42%), 3위는 미국 주식(25%), 4위는 일본 주식(19%)이었다. 한국 주식(코스피)은 -10%로 꼴찌를 차지했다. “국장 탈출은 지능 순”이란 말이 나올 만했다.
▶개미 투자자들이 미국 증시로 대거 ‘계좌 이민’을 떠났다. 작년 한 해 서학개미들은 600억달러 이상을 미국 주식에 투자했다. 서학개미의 공격적 투자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테슬라 주가 상승폭의 2배 수익을 노리는 ETF(TSLL)는 총자산 34억달러 중 60%가 한국 서학개미들이 투자한 것이다. 양자컴퓨터 대표주 아이온큐의 지분 33%를 한국 서학개미들이 보유 중이다.
▶지나고 보면 늘 엉터리지만, 올해도 여기저기서 유망 투자 종목을 추천한다. 투자 업계에선 지난해 미국 증시를 뜨겁게 달군 애플, 테슬라,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아마존, 알파벳, 엔비디아의 ‘M7′에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인 브로드컴을 더해 ‘배트맨(BATMMAAN)’이란 영업용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2025년 예측’에서 비트코인이 20만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다. 코스피의 주가수익비율(PER)이 역사적 저점(7.7배)이라는 점을 근거로, 올해는 국장 투자를 권하는 전문가도 있다. 거품론이 나오는 미국 주식을 팔고, 원화로 바꿔 환차익까지 실현한 뒤, 저평가 한국 주식을 사라는 것이다.
▶곳곳이 지뢰밭인 투자 세계의 앞날을 누가 알겠나. 대가들의 조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워런 버핏은 “투자 원칙 첫째는 돈을 잃지 말라, 둘째는 첫째 원칙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덱스 펀드를 창안한 존 보글은 “건초 더미에서 바늘(개별 기업)을 찾느니 건초 더미(지수)를 통째로 사는 게 낫다”고 했다. ‘대박’ 욕구는 폭망을 부를 수 있다. ‘소박’에 만족하는 게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01.04(토) 해외건설 1조달러

▲일러스트=박상훈
국내에 건설 일감이 부족하던 1965년 11월,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은 해외에서 활로를 찾겠다며 16국 업체와 경쟁해 태국 남부 파타니-나랑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처음 따냈다. 폭우와 기술 부족으로 공사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억척스럽게 완공했다. 이 경험을 기초로,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 경부고속도로를 1968년 착공해 2년 5개월 만에 지었다.
▶1976년에는 단일 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를 수주했다. 수주액 9억6000만달러는 우리나라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육지에서 8㎞ 이상 떨어진 곳에 해상 유조선 정박시설을 건설하는 난공사였다. 공사에 필요한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의 대형 철제 구조물 89개를 울산에서 제작해 1만2000㎞ 떨어진 사우디까지 해상 운송하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했다. 그 덕에 공기를 8개월 단축하고 시공 능력을 입증해 ‘주베일의 기적’으로 불린다.
▶‘21세기 피사의 사탑’으로 통하는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은 각국 건설사들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쌍용건설이 완공했다. 세 개의 빌딩 위에 배가 얹혀진 모양인데, 비대칭적 구조로 인해 기울어진 건물은 경사도가 52도에 달한다. 기울어진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콘크리트 타설 전 관을 설치하고 그 안에 강연선을 넣어 한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포스트텐션 공법을 적용했다.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조차 “우리가 꿈꾼 모든 것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동화 같다. 기쁘고 믿기 어렵다”고 했다.
▶829.8m 높이의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 679m 높이의 말레이시아 ‘메르데카118′ 등 세계 1, 2위 초고층 건물은 삼성물산이 시공사로 참여했다. 사막의 연약한 지반과 강한 바람을 견디고 초고층으로 지어진 부르즈 할리파는 현대 공학의 결정체로 불린다. 삼성물산이 3일에 1층씩 초고속으로 건물을 올리는 ‘K 공법’으로 완성했다.
▶해외건설은 1970년대 오일쇼크로 휘청이던 나라 경제를 ‘중동 특수’로 되살린 1등 효자 산업이었다. 지금은 반도체, 자동차 등에 순위가 밀렸지만 여전히 4위 수출 산업이다. 해외 건설사업 누적 수주액이 1조달러(약 1468조원)를 돌파했다. 1965년 11월 첫 해외 수주 이후 59년간 실적이다. 한국 건설사들의 도전 정신, 해외건설 근로자들의 피땀과 눈물이 이 기적의 탑을 쌓았다. 이제는 우리 건설도 단순 시공 차원을 넘어 예술 감각과 공학기술이 합쳐진 ‘K 설계’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01.06(월) 음주 경고 문구

▲방송인 신동엽씨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 '짠한형'에서 소주잔을 들이켜는 모습. 정부는 음주 장면이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 '경고 문구' '연령 제한 조치' 등을 권고하고 나섰다. /뉴스1

▲일러스트=김성규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는 2013년 영국에서 시작된 금주 캠페인이다. ‘술 없는 1월’이라는 뜻으로, 새해 금주 결심을 오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1월 한달만이라도 술을 참아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 캠페인 참가자 수가 미미했지만 올해는 미국 참여자만 75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미국 성인의 30% 정도가 참여할 만큼 공감을 얻은 것이다.
▶모임 분위기나 개인적 선호 때문에 금주를 실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비알코올(1% 미만) 또는 무알코올 음료도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다. ‘목테일(Mocktail)’은 가짜(Mock) 칵테일, 즉 칵테일과 주조법이 비슷하지만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칵테일이다. ‘버진(Virgin) 모히토’처럼 맛과 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알코올이 없는 버전도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알코올 함량 0%에다 열량까지 월등히 낮은 제로 알코올 맥주가 날로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금주 또는 절주 바람이 부는 것은 음주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결과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 정부는 수십 년 동안 여성의 경우 하루 1잔(맥주의 경우 355㎖), 남성의 경우 2잔 이내의 음주는 안전하다고 권고해왔다. 그러나 최근엔 하루 한 잔 미만으로도 암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의학계의 정설로 굳어져 가고 있다. ‘적당한 음주는 괜찮다’는 과거 통념과 달리 소량 음주더라도 유방암·대장암·간암 등 최소한 7종의 암에 걸릴 위험을 높인다는 것이다.
▶미국 의무총감(Surgeon General)이 “알코올 섭취는 미국에서 담배와 비만 다음으로 암 원인 3위”라며 술병에 ‘알코올은 암을 유발한다’는 내용의 경고 문구를 달도록 법으로 의무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의무총감은 미국 공중보건을 책임지는 자리다. 그는 미국에서 알코올 섭취에 따른 암 발생 건수는 매년 10만건, 사망자는 매년 2만명에 이른다고 했다. 미 주류 회사 로비력이 막강해 실제 법제화 여부는 미지수다.
▶우리나라는 이미 술병에 ‘지나친 음주는 간암·위암 등을 일으킨다’ 등 문구를 넣고 있다. ‘지나친 음주’, 즉 ‘과음’에 대한 경고다. 더구나 술병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국회 등에서 경고가 너무 약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복지부가 과음을 음주로 바꾸는 등 경고 문구를 강화하는 방안을 식약처 등 관련 부처와 논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담배에 비해 비교적 관대한 음주 문화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다.
01.07 美 남부연합 깃발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버지니아주(州)에서 앨라배마주까지 5주 1071km를 관통하는 주간(州間) 고속도로 85호선(I-85)은 미 동남부의 혈맥이다. 2022년 10월, 이 도로의 중간쯤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턴버그에 가로 15m, 세로 9m의 대형 깃발이 세워졌다. 붉은색 바탕 위에 파란 십자가가 X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고, 그 속에 13개의 하얀 별이 있는 ‘남부연합기(Confederate Flag)’였다.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며 1861년 미 연방을 이탈했던 남부 주들이 남북전쟁 때 사용한 깃발인데, ‘남부연합군 참전용사의 후손들’이란 단체의 지부에서 이를 사유지에 게양한 것이다.
▶남북전쟁은 1865년 링컨 대통령이 이끈 북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미 정부는 남부연합을 ‘반란군’으로 규정했고, 많은 미국인들은 남부연합기를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본다. 2020년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손에 사망하자,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 인종차별 반대시위가 일어났다.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E. 리 장군의 동상 등 수많은 남부연합 상징물이 끌어내려졌다.
▶하지만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주들에는 남부연합 상징물을 자신들의 ‘역사’로 보는 사람이 많다. I-85가 지나가는 5주도 모두 여기 속한다. 그래서 하루 8만여 대의 차량이 지나는 곳에 남부연합기가 내걸린 것이다. 지난해 7월 한 청년이 이 깃발을 끌어 내리려다가 ‘사유지 침입’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자, “옳은 일을 했는데 왜 처벌하냐”는 논란이 일었다.
▶160년 전 남북전쟁은 끝났지만, 그 영향은 이처럼 미국 사회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남부연합에 가담한 미시시피주에서 남부군 게릴라 부대 대령의 증손자로 태어난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평생을 이 문제에 천착해 1949년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는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이란 장편에서 남북전쟁의 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지나갔다고 할 수도 없다.”
▶공수처의 윤석열 대통령 체포 시도가 있었던 3일, 광주광역시가 시청사에 미국 버지니아 주기(州旗)를 게양해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 광주시장은 여신이 폭군을 짓밟은 그림 아래 적힌 ‘언제나 폭군은 이렇게 되리라(Sic Semper Tyrannis)’는 문구가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깃발은 버지니아주가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며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1861년 만들어졌다. 링컨이 ‘폭군’이란 것이다. 그 의미를 떠나 미국 주 깃발 게양을 뜬금없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01.08 직조 도시

▲일러스트=박상훈
프랑스 파리 근교의 소도시 누아시엘(Noisiel)은 160년 전 한 초콜릿 기업가가 만든 유토피아형 신도시다. 초콜릿 공장 주변에 사원 주택 311채를 짓고, 단돈 1프랑에 분양했다. 주거 단지 안에 무료 탁아소·학교를 짓고, 도서관까지 갖춘 복지회관을 배치했다. 마을 식당에선 근로자와 가족들에게 아침 식사를 매일 공짜로 제공했다. 1차 세계대전 여파로 기업이 쇠락하면서 유토피아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도시’라는 말이 있다. 모든 기술 혁명과 혁신은 도시라는 종합 플랫폼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위대한 건축가들은 이름을 남기기 위해 혁신적 미래 도시 구상을 내놓곤 한다.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100년 전 파리 중심부에 고층 타워를 18개 짓고, 8만명이 거주하는 ‘부아쟁 계획’을 발표했다. 이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파트 단지 내에 학교와 각종 커뮤니티 시설을 배치했다. 차도는 지상 5m 고가도로로 만들어 보행 공간과 분리했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고층 아파트 구상을 싫어했다.
▶르코르뷔지에가 꿈꾼 마천루 도시는 미국 뉴욕에서 완성됐다. 1931년 102층 ‘엠파이어 스테이트’가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바꿨다. 초고층 건물은 1854년 오티스가 뉴욕 세계박람관에서 첫선을 보인 ‘엘리베이터’로 가능했다. 이 덕에 뉴욕은 인구 1000만명이 넘는 메트로폴리탄으로 변신했다.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은 ‘스마트 도시’ 개념을 등장시켰다. 도시 기반 시설에 IT를 접목시켜 생활 편리성을 극대화하는 개념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건설 중인 ‘네옴 시티’가 대표적이다. 길이 170㎞, 너비 200m의 유리 도시에서 물류 이동은 지하 철도망을 활용하고,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며, 1년 내내 도시 내 기온을 완벽하게 조절한다. 수직 농법을 통해 식량도 100% 자급자족한다.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세계 최대 IT 전시회인 미국 CES에서 AI가 모든 도시 기능을 제어하는 ‘우븐 시티’(Woven city· 織造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방직기 회사로 출발한 도요타가 첨단 기술을 씨줄, 날줄로 활용해서 직물을 짜듯 미래 도시를 새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도시 내 이동은 자율주행차로, 도시 간 이동은 공중교통(UAM)을 이용하며, 택배는 드론이 한다. 파출부 로봇이 가사를 돕고, 반려견 로봇이 산책을 함께 한다. 1단계 공사가 끝나 올가을 도요타 직원 100명이 입주할 예정이다. 도요타 AI 도시는 거주민을 2000명까지 늘려 자율주행, 로봇, 스마트홈 연구 산실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도요타의 스케일과 추진력이 놀랍다.
01.09 그린란드

▲일러스트=이철원
북극해에 있는 그린란드는 남한 면적의 21배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216만여㎢)’이다. 이곳 서북쪽엔 이누이트 원주민들이 “비두픽(Pituffik)”이라 부르는 평원이 있었다. ‘개를 묶어놓는 장소’란 뜻의 사냥터였다. 1951년 여름, 미군이 연중 9개월은 얼어붙어 있는 이곳에 공군기지를 짓는 극비 작전을 시작했다. 작전명은 ‘블루 제이’. 노퍽, 볼티모어, 뉴욕 등에서 30만t의 자재와 인력을 실은 수송선 수십 척이 출항했다. 1만여 명이 하루 12시간, 주 7일을 일해 60여 일 만에 활주로와 기지 대부분을 완공했다.
▶미국이 덴마크 식민지였던 그린란드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부터다. 그러나 1951년 덴마크와 새 방위 조약을 맺고 기지를 건설한 배경엔 냉전이 있었다. 소련이 북극권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그린란드를 지나 미국 본토로 날아가는 게 지름길이다. 따라서 중간 지점인 그린란드에 장거리 폭격기와 요격미사일을 배치할 기지를 확보하는 게 시급했다. 이를 위해 미국이 투입한 예산이 당시 돈으로 1억2500만달러였다. 1952년 기지 건설이 공개되자 라이프지(誌)는 이를 “얼음 위의 노르망디 결전”이라 표현했다.
▶이누이트들이 살던 눈과 얼음의 땅에 그린란드란 이름을 붙인 사람은 10세기 아이슬란드에서 살인죄를 짓고 쫓겨나 이곳에 온 바이킹 ‘에릭 더 레드’로 알려져 있다. 더 많은 이주자를 모으기 위해 마치 살기 좋은 땅인 양 ‘그린란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진짜 ‘그린란드’가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인구 5만여 명의 이 땅에 세계 가용 매장량의 20%에 해당하는 희토류가 매장돼 있다고 한다.
▶블루 제이 작전 후 74년이 흘렀다. 그린란드는 덴마크로부터 외교·국방 이외의 자치권을 획득한 ‘자치령’이 됐고, 그린란드를 포함한 북극권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 커졌다. 러시아는 1950년대 북극해의 섬에 건설한 공군기지를 대폭 확장했고, 중국도 북극 개척에 적극적이다. 미군은 그린란드의 공군기지를 우주군으로 이관해서, 본토로 향하는 미사일을 레이더로 탐지하고 요격하며 외국의 우주 발사체까지 추적하는 곳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그린란드를 팔라고 연일 덴마크를 압박하고 있다.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처럼 위협하기도 했다. 자신의 취임식을 앞두고 장남까지 그린란드로 보냈다. 그린란드 획득을 업적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보통이 아닌 듯하다. 그린란드 주민들은 어떤 심정일까.
01.10 여의도 女, 한남동 男

▲일러스트=이철원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 하얀 헬멧을 쓴 2030 남성 30여 명이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 체포를 막기 위한 조직이라는데 ‘백골단’ ‘반공청년단’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원래 백골단은 1980년대 하얀 헬멧을 쓰고 시위대를 진압하던 경찰 부대의 별명이다. 기성세대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도 참가자들은 ‘백골단’이라고 자칭했다. 지금 관저 앞에는 2030 남성이 적지 않게 보인다. 반면 12월 서울 여의도의 탄핵 찬성 집회에선 2030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BBC 코리아가 서울시 생활 인구 데이터를 분석한 통계에서 20대 여성은 집회 참여자의 18.9%로 가장 많았다. 30대 여성도 10.8%였다. 그런데 20대와 30대 남성은 각각 3.3%, 5.3%에 그쳤다.
▶남녀 분열 현상은 2016년 ‘서울 강남역 20대 살인 사건’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평소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했다”는 피해 망상증 범인의 발언에 2030 여성들이 자신의 일처럼 분노하며 ‘여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젊은 남성들은 ‘우리를 잠재적 범인 취급 말라’고 반발했다. 그해 여성 고용률이 사상 처음 50%를 넘었다. 대학 진학률은 이미 2009년 여성이 남성을 앞질렀다. 취업, 승진 등에서 남녀 경쟁이 본격화했다.
▶강남역 사건 당시 국회의원이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음 세상에는 남자로 태어나요’라는 메모지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2017년 대선 후보 때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젊은 여성 표 공략이었다. 그해 대선 직전 여론 조사에서 문 전 대통령을 지지한 ‘이대녀(20대 여성)’는 56%, ‘이대남’은 37%였다. 문 정부 여성가족부 조사에서 39세 이하 여성 70%가 “불평등하다”고 했고, 남성 과반은 “역차별당한다”고 답했다. 작은 불씨에도 젊은 남녀 갈등이 들불처럼 번졌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 후보가 여가부 폐지를 공약했다. “한국에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도 했다. 대선 출구 조사에서 20대 남자는 윤석열 후보 58.7%, 이재명 후보 36.3%를 찍었다. 반면 20대 여성은 윤석열 33.8%, 이재명 58%였다. 2030 남녀 분열과 반목은 정치가 끼어들면서 더 꼬이고 있다.
▶지금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하는 2030 남성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탄핵 찬성 시위 현장에서 K팝을 부르는 건 대부분 젊은 여성이다. 여성이 많이 모인 장소에는 남성들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남녀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01.11(토) 천사 도시 덮친 악마 바람
바람이 정상적으로 불지 않아도 큰 문제다. 작년 11월 유럽에서는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 현상이 발생했다. 독일어로 ‘어둡고 고요한 상태’라는 말인데 바람도 불지 않고 햇빛도 거의 없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이 며칠 지속되면서 태양광과 풍력 발전량이 급감했다. 그 여파로 신재생에너지에 의존도가 높은 독일 전기 도매 요금은 평소에 비해 20배 이상 폭등했다.
▶황사는 바람의 거대한 에너지를 실감하게 하는 현상이다. 중국과 몽골에서 발생한 황사는 수천km 날아와 한반도에만 한 번에 약 8만t의 흙먼지를 쏟아놓는다. 15t 덤프트럭 5000대 분량이다. 황사는 부정적 영향이 크지만 긍정적 영향도 없지 않다. 이 흙먼지가 산성화하는 우리나라 표토층을 중화해 주고 바다의 적조 현상도 줄여주는 것이다. 그 경제적 가치가 연간 수천억 원이라고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알프스산맥에선 산 위에서 골짜기로 고온의 바람이 불어 내릴 때가 있다. 지중해 쪽 습한 공기가 알프스를 넘어 독일과 스위스를 지나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바람을 ‘푄(Föhn)’이라 불렀는데, 고트어로 ‘뜨거운 불’이라는 뜻이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산을 타고 올라가면 100m마다 약 0.5도씩 기온이 떨어진다. 어느 정도 올라가면 수증기가 뭉쳐 비나 눈으로 내린다. 습기가 빠진 건조한 바람은 온도 변화가 커지고, 산을 내려갈 때는 100m마다 약 1도씩 오른다. 이 때문에 산을 타고 내려오며 뜨겁고 건조한 바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악동처럼 세계 곳곳에서 바람 재앙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 양간지풍(襄杆之風·양양과 간성에 부는 강한 바람)도 이 현상 때문에 생긴다. 바람이 서쪽에서 태백산맥을 넘으면 고온 건조한 강풍으로 돌변한다. 양간지풍은 자주 대형 산불을 일으키는데 2005년 낙산사 화재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봄철 동해에서 태백산맥을 넘어온 높새바람은 너무 고온 건조해 농작물에 피해를 줄 정도다.
▶미국에서는 태평양에서 로키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부는 바람을 치누크(Chinook), 동쪽에서 서부에 영향을 주는 바람을 샌타애나(Santa Ana)라고 부른다. 지금 미국 LA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는 바람이 바로 샌타애나다. 이 바람은 주기적으로 큰 피해를 주고 사람을 공격적으로 만든다고 ‘악마의 바람(Diablo Wind)’이라고도 부른다. 악마의 바람이 ‘천사의 도시’를 공격하고 있는 셈이다. LA 산불이 더 이상 큰 피해 없이 잦아들기를 바란다.
01.13(월) 독순술(讀脣術)

▲일러스트=양진경
입을 보고 대화 내용을 파악하는 독순술(讀脣術)은 청각 장애인의 소통법이지만 범죄 수사와 첩보 수집 등에도 활용된다. 몇 해 전 직장 동료 간 폭행 사건이 벌어졌는데 가해자는 때린 사실만 인정하고 때린 이유는 함구했다. 경찰은 폭행 현장을 녹화한 승용차 블랙박스를 찾아냈다. 독순술 전문가에게 보여주고 가해자가 “누가 신고했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보복 범죄로 구속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할’은 우주선에 함께 탑승한 승무원들이 밀실에서 나누는 대화를 창밖에서 ‘엿보고’ 내용을 파악한다. 대화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작전 모의란 사실을 알아내자 ‘할’은 승무원들을 먼저 살해한다. 영화 ‘미션임파서블3′나 엘러리 퀸의 추리소설 ‘Y의 비극’에서도 독순술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요소로 쓰였다.
▶독순술로 대화 전모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적으론 쉽지 않다. 2006년 월드컵 때 프랑스 축구 선수 지단이 이탈리아 선수 마테라치의 가슴을 시합 중 머리로 들이받았다. 마테라치가 뭐라 했기에 지단이 폭력을 썼는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독순술가들이 나섰고 “마테라치가 지단의 누이를 매춘부라 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나중에 마테라치가 공개한 자초지종은 사뭇 달랐다. 몸싸움 중에 유니폼을 붙잡는 마테라치에게 지단이 “경기 끝나고 준다”고 했고 마테라치가 “옷보다 네 누이가 좋다”고 한 게 화근이었다.
▶독순술가들은 유럽 언어보다 한국어 ‘해독’이 더 어렵다고 한다. ‘ㅁ’ ‘ㅂ’ ‘ㅍ’처럼 발음할 때 입 모양이 같거나 ‘ㄱ’ ‘ㄲ’ ‘ㅋ’처럼 입안에서 발음이 만들어져 눈으로는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밀담을 나눴을 때 독순술가들이 대화 내용 파악을 시도했지만 ‘핵시설’ ‘트럼프’ ‘미국’ 같은 단어를 썼다는 사실 정도만 유추할 수 있었다.
▶9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오바마 전 대통령이 TV 화면에 잡혔다. 껄끄러운 사이인데도 이날은 미소 지으며 대화를 나눴다. 독순술가들이 ‘포렌식’에 나섰지만 국제협약 관련으로 추정된다는 일부 내용만 파악했을 뿐, 어떤 맥락에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눈은 귀보다 정직하다’는 말이 있다.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어도 전직 대통령 장례식을 화합의 장으로 승화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이 땅의 정치인들과 너무도 다른 소통 방식이었다.
01.14 필사

▲일러스트=이철원
남이 쓴 글을 베껴 쓰는 필사(筆寫)는 역사가 3000년이 넘을 만큼 오래된 일이다. 성경을 뜻하는 영어 바이블(Bible)도 필사용 파피루스가 거래되던 고대 페니키아의 항구 비블로스에서 비롯됐다.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필사가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로마제국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필사가를 교사로 초빙했다. 그의 저서 ‘명상록’엔 스토아 학자인 에픽테토스의 명언록을 필사해서 한 권을 갖게 됐다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인쇄술 등장 이후 필사는 직업에서 거의 퇴출됐지만 필사 자체는 남았다. 불교에선 절을 하면서 한 글자씩 베껴 쓰는 일자일배(一字一拜)를 대표적인 심신 수양법으로 꼽는다. 가톨릭도 세례받는 이에게 신심을 높이기 위해 성경 필사를 하게 한다. 다산 정약용은 효과적인 공부법으로 필사를 권한다. “열흘 동안 책 100권을 베끼는 것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뇌과학도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손으로 쓰는 필사의 기억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의 한 뇌과학자는 필사하는 손을 ‘몸 밖의 뇌’라고 했다.
▶지난해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 3권에 이어 필사를 다룬 책이 종합 4위에 올랐다고 한다. 독서를 멋으로 여기며 패션처럼 소비하는 최근 유행을 ‘텍스트 힙’이라고 하는데, 필사도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해석한다. 가수 출신 유명 배우가 얼마 전 TV에 출연해 “내 취미는 필사”라며 책 6권을 필사한 노트를 증거로 보여주기도 했다. 소셜미디어에서 ‘#필사’를 입력하면 수천 개 게시물이 뜬다.
▶필사가 이처럼 주목받는 배경엔 필사가 주는 치유 효과도 있다. 바쁜 일상에 쫓겨 마음의 여유를 잃거나 업무 스트레스, 불안 등에 빠졌을 때 필사를 하면 반복되는 신체 활동이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불을 멍하니 바라볼 때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되는 ‘불멍’과 비슷하다고 해서 필사를 ‘글멍’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달 들어 헌법 베껴 쓰기 책이 필사 인기에 가세했다. 계엄 전과 비교하면 한 달 만에 판매량이 50배 넘게 급증한 책도 등장했다. 소설이나 시, 격언, 경전을 주로 베끼던 걸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출판계에선 계엄과 연이은 탄핵소추를 목도한 이들이 헌법을 직접 써보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해석한다. 이런 마음을 정치인들이 미리 살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필사용 책 인기를 지켜보는 심사가 씁쓸하다.
01.15 사설 소방대

▲일러스트=박상훈
미국 남부 테네시주(州)에 있는 오비언 카운티는 서울(605㎢)보다 2배 이상 넓은 1437㎢의 면적에 약 3만명밖에 살지 않는다. 2010년 9월 이곳에 사는 진 크래닉의 집에 불이 났다. 크래닉은 911에 전화를 했지만, 소방차는 오지 않았다. 오비언 카운티에는 카운티 전체를 관할하는 소방본부가 없고, 소도시들이 각자 소방세를 걷어 ‘자치 소방서’를 운영한다. 시(市) 경계선 밖의 주민들은 인근 도시에 ‘소방 정기요금’을 내야 하는데, 크래닉이 연간 75달러의 정기요금을 미납한 사실이 확인돼 출동을 거부당한 것이다. 불이 번지자 소방대가 출동했지만, 요금을 완납한 옆집 불만 끄고 돌아갔다. 크래닉의 집은 전소되고 말았다.
▶미국연방재난관리청(FEMA)에 따르면 미국의 91%엔 정부 등록 소방본부가 있다. 나머지 9%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사설 소방 회사들이다. 이들은 소방서가 없는 지역 주민들에게 정기요금을 받고 불이 나면 출동해준다. 지방 정부가 소방세나 정기요금을 받다 보니 아예 사설 회사를 찾는 경우도 있다. 소규모 지자체나 리조트, 산업 단지의 소방 업무 대행도 한다. 크래닉의 사례가 논란이 됐을 때도 미국엔 “돈을 안 내도 불을 꺼주면 누가 돈을 내냐”는 여론이 있었다.
▶사설 소방대의 역사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삼두 정치를 했던 크라수스는 사병 500명으로 소방대를 조직했다. 불이 나면 현장에 출동해 고액의 진화료를 요구했다. 돈을 내면 불을 꺼주지만, 요금 협상이 결렬되면 방치했다. 이런 식으로 돈을 번 크라수스는 당대 로마 최고의 부자였다.
▶런던 시내의 85%를 잿더미로 만든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영국 보험 회사들은 자체 소방대를 조직했다. 보험 가입자 집의 외벽에 ‘파이어 마크(fire mark)’라 불리는 명패를 부착하고, 불이 나면 소방대를 보내 명패가 붙은 집 불만 꺼줬다. 지금도 사설 소방 회사들의 가장 큰 고객은 대형 보험 회사들이라고 한다. 프리미엄 화재보험에 가입한 거부(巨富)의 집 주변에 불이 나면 보험 회사가 사설 소방대를 보내 진화한다.
▶로스앤젤레스(LA) 부촌에서 대형 산불 피해가 계속되자, 부유한 주민들이 하루 1만달러(약 1470만원) 이상 드는 사설 소방대를 서로 부르려고 난리라고 한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퍼시픽 팰리세이즈 지역에서도 사설 소방대가 지킨 쇼핑몰은 멀쩡했다. 기후변화로 산불이 잦아지는데, 화재 진압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갈라지는 미국인 것 같다.
01.16 산분장(散粉葬)

▲추석 당일인 24일, 성묘(조상의 묘를 손질하고 살피는 일)를 하기 위해 전북 전주효자공원묘지를 찾은 사람들.
1997년 세상을 떠난 덩샤오핑은 “각막은 기증하고 시신은 해부용으로 쓴 다음 화장해 바다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유골은 홍콩 앞바다와 중국과 대만 사이의 바다에 뿌려졌다. 그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난센스’라며 이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는 사후에 자신의 기념관을 세우지 말고 동상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치고는 소박하게 삶을 마무리했다.

▲일러스트=이철원
▶상당수 국가에서는 화장한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바다장이 보편적인 장례 문화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중국은 묘지 값이 비싸 ‘돈 없으면 죽지도 못할 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중국 당국은 대안으로 바다장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상하이시는 1991년, 홍콩은 2007년부터 바다장을 도입했다.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도 해안에서 일정 거리 나가서 화장한 골분을 뿌리는 것은 제한이 없다. 무한한 바다가 골분 정도는 환경오염 없이 흡수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인천 앞바다에서 골분을 뿌릴 수 있게 돕는 업체가 있어서 해마다 이용이 늘고 있지만 현행법에 근거 규정이 없는 ‘그림자 장례 문화’였다.
▶복지부가 바다와 육지의 일부 장소에 화장한 유골의 골분을 뿌리는 ‘산분장(散粉葬)’을 합법화했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해 한 해 사망자가 30만명이 넘는데 납골당·수목장 등 시설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장사법에 수목장 등 자연장(自然葬)을 새로운 장례 방식으로 추가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2008년) 또 새로운 장례 방식이 추가됐다. 정부는 2027년까지 산분장 이용률을 30%로 올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장례 방식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반려동물 유골을 주얼리로 제작해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업체에 맡기면 유골을 1500~3000도로 가열해 유리와 함께 녹여 만들어준다. 이를 ‘메모리얼 스톤’이라 하는데, 영롱한 구슬로 만들어 갖고 있거나 목걸이 등으로 만들어 걸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일본에서는 곧 사람 골분으로도 주얼리를 만들어 집에 간직하는 것이 트렌드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고 관련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떠나는 길을 자식이나 장례 전문가 손에 맡기지 않고 내 뜻대로 할 방법이 있다. 사전 장례 의향서를 작성해 가족과 공유해두는 것이다. 바다장 등 장례 방식은 물론 마지막에 입을 옷, 제단을 장식할 꽃, 영정 사진, 추모 곡까지 골라 둘 수 있다. 유족들도 망자의 뜻을 명확히 알 수 있어서 한결 부담을 덜 것이다.
01.17 게티 빌라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석유 재벌 J 폴 게티(1892~1976)는 1966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부자로 등재된 거부였다. “돈을 셀 수 있다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그런데 돈 씀씀이가 한없이 인색했다. 옷과 구두는 10년 넘게 입었고 호텔에 투숙하면 양말을 직접 빨아 신었다. 집에 손님을 초대해놓고 전화는 바깥 공중전화를 쓰라 했다. 1973년 마피아가 당시 16세이던 손자를 납치하고 귀를 잘라서 보내며 거액을 요구했는데도 흥정으로 몸값을 깎아 수전노라는 오명도 얻었다.
▶그런데 미술품 수집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고대 조각, 중세의 필사본, 인상파 회화 등을 모았다. 미술품을 혼자 즐기지 않고 자신이 살던 저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개방했다. 1976년 사망할 때는 미술품 수집과 전시에 쓰라며 유산 7억달러도 기부하며 무료로 일반에게 개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 아카이브 업체 ‘게티 이미지’도 그의 손자가 세운 회사다.
▶게티는 수장품이 늘어나자 태평양과 접한 LA 팰리세이즈의 말리부 해안에 고대 로마 대저택을 재현한 미술관 게티 빌라를 지었다. 이번 LA 화재 중 팰리세이즈 지역 화재가 최악이었지만 게티 빌라는 주변 건물과 달리 홀로 무사했다. 첨단 방화 시스템과 직원들의 철저한 대비 덕분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게티 빌라에서 동쪽으로 30분 차를 달리면 샌타모니카 산맥 중턱에 게티 재단의 또 다른 미술관인 게티 센터가 나타난다. 이 일대가 2018년 화재로 서울 면적의 절반 가까이 탔는데 그때도 게티 센터는 건재했다.
▶게티 센터는 ‘백색의 마이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1997년 완공했다. 강릉 씨마크 호텔을 설계한 사람이다. 마이어는 산불이 흔한 LA 특성을 설계에서부터 반영했다. 유명한 흰색 외벽은 내연성 석재인 트래버틴으로 마감했고, 건물 밖 정원에 설치된 방화용 스프링클러는 약 400만리터의 물을 담은 대형 지하 수조와 연결돼 있다. 전시실에는 연기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가압 장치를 설치했다. 정원 조경수도 불이 잘 붙지 않는 것으로 심었다.
▶게티 빌라와 게티 센터에는 8000년 전 조각부터 현대 회화까지 미술품 수만 점이 전시돼 있다. 반고흐의 ‘아이리스’, 모네의 ‘건초더미’,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남자’ 등도 모두 무사했다. 미술관 측은 화재가 수습되는 대로 다시 전시를 재개한다고 한다. LA를 넘어 세계적 명물인 두 미술관이 안전하다니 다행이다.
01.18(토) 트럼프 공식 사진
노란 머리를 스프레이로 고정한 ‘수탉 머리’형 헤어스타일은 오는 20일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트럼프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수십 년 전 부동산 개발업자로 명성을 얻은 이후 줄곧 이 독특한 머리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2000년대 TV쇼 ‘어프렌티스’를 진행할 때 머리 손질 비용으로 7만달러(약 1억원)를 세금공제 받기도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트럼프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능숙하다. 4년 전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 그는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고 워싱턴 DC 앤드루스 공군 기지에서 ‘셀프 퇴임식’을 열고 전용기에 올랐다. 전용기가 이륙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my way)’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 소절 ‘yes, It was my way’가 나오는 순간 전용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잘 짜인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본인 행동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다른 사람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였다.
▶트럼프는 2019년 미중 무역 전쟁의 정당성을 얘기하다 “나는 ‘선택받은 사람(Chosen One)’이며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고 했다. ‘Great’, ‘big’ 등은 그가 인터뷰나 연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다. 그가 2020년 이란에 경제 제재를 발표하려고 백악관 응접실에 들어설 때 그의 뒤로 강한 빛이 쏟아졌다. 그는 이 빛을 등진 채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빛 때문에 트럼프 주변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 장면을 연출했다.
▶트럼프 인수위가 ‘대통령 공식 사진’을 공개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상태에서 눈을 치켜뜨면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다. 미국 대통령 공식 사진으론 특이하다. 지난 2023년 트럼프가 기소됐을 때 구금 과정에서 찍은 머그샷(mugshot·범죄자 기록 사진)과 유사하다. 트럼프는 이 머그샷을 티셔츠·머그잔에 넣는 등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해 이틀 만에 710만달러(약 109억원)를 모금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트럼프는 2015년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하면서 정책 비전을 담은 책 ‘불구가 된 미국’(Crippled America)을 펴냈다. 당시 트럼프는 출판사에 표지에 분노한 사진을 써달라고 특별히 주문했다고 한다. 머그샷이나 이번 대통령 공식 사진과 똑같은 표정이다. 트럼프 측은 미국 상황에 대한 트럼프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이번 사진으로 전 세계를 향해 앞으로 4년이 어떨지 미리 경고하는 것 같다.
01.20(월) 판교 사투리

▲일러스트=이철원
“물 먹어라”는 말은 건강을 챙겨주는 덕담이지만 기자들한테는 악담이다. 언론계에서 “물 먹는다”는 건 경쟁사한테 특종을 뺏기거나 꼭 써야 하는 기사를 놓친 걸 뜻한다. 기자들 사이에서 “영어는 환영, 일본어는 사절”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풀(pool), 엠바고(embargo)는 낙종 염려 없이 편하게 취재해서 보도하는 방식이고, 초년 기자 시절에는 일본어 표현이 유독 많이 쓰였다. ‘나와바리’(관할 지역)에서 ‘마와리’(돌면서 취재)하며 기사 작성했는데 선배한테 “대체 이 기사 ‘야마’(핵심 주제)가 뭐냐”고 혼나기 일쑤였다.
▶직업별로 통용되는 은어는 해당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의사소통을 위해 생겨난 일종의 언어적 약속이다. 가령 병원에서 긴급 공지하는 ‘코드 블루’(심정지 환자 발생), ‘코드 레드’(화재 발생) 같은 의료 코드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없이 상황의 심각성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알린다. 이런 용어는 일반인에게는 외국어만큼이나 알아듣기 어려운 장벽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직업별 은어도 시대상을 반영한다. 오래된 업종일수록 일본어에서 넘어온 말이 많은 반면, 신생 업종에는 영어를 섞은 단어가 더 흔하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급성장한 배달업계는 요즘 “신년부터 역대급 콜사” “미션 낚시냐”고 푸념한다. 콜(call)은 배달 주문이고, 콜사는 콜 사망, 즉 배달 주문이 없는 상태다. 미션은 배달업체가 라이더들에게 특정 목표를 달성하면 추가 보상을 해주는 제도다. 라이더들이 체감하는 불황이 그들만의 은어로 간결하게 소통된다.
▶”작업 마치면 핑(ping·연락) 주세요” “해당 이슈(issue·문제)는 로컴(low communication·소극적 대응)으로 갑시다” “그 일은 아삽(ASAP·As Soon As Possible·가능한 한 빨리) 팔로업(follow-up·후속 조치)해줘.” IT 기업이 몰린 경기도 판교에서 업계 종사자들이 나누는 대화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판교 사투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판교 IT 기업에 취업하려고 취업 준비생들이 이 ‘판교 사투리’까지 미리 익힌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언어 지문’을 남긴다(제임스 페니베이커 텍사스대 교수).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마치 자신의 손가락 지문처럼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정체성이나 배경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취업을 위해 영어, 중국어 같은 외국어뿐 아니라 판교 사투리 같은 ‘직업 언어’까지 익혀야 한다니 요즘의 취업난을 보여주는 듯하다.
01.21 수퍼챗

▲일러스트=이철원
지난해 개봉한 영화 ‘드라이브’의 주인공 한유나는 인기 유튜버다. 어느 날 잠이 든 유나는 어두운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눈을 뜨고, 그를 납치한 범인은 휴대전화를 통해 “지금 바로 방송 시작하세요”라고 말한다. 유튜브 생방송에서 ‘슈퍼챗’을 받아 1시간 안에 몸값 6억5000만원을 벌면 살려주겠다는 것이다. 범인의 제안에 유나는 ‘긴급 라이브! 실제 상황!’이라며 생중계를 시작한다.
▶이런 영화까지 등장한 것은 그만큼 수퍼챗이 유튜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2017년 1월 유튜브에 도입된 수퍼챗은 생방송 도중 시청자가 1000원부터 50만원까지 현금을 결제하면, 유튜버와 주고받는 실시간 채팅창에 특별한 색상의 메시지를 띄워주는 기능이다. 소액에서 고액으로 올라갈수록 메시지의 색상과 노출 시간이 달라진다. 수퍼챗을 받으려면 시청자들이 원하는 자극적 말과 장면이 필요하다.
▶수퍼챗이 생기기 10년 전부터 국내에는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TV의 ‘별풍선’이 있었다. 시청자들이 대금을 결제하고 별풍선을 ‘쏘아’ 주면, 인터넷 방송인이 이를 환전해 수익을 올린다. 일부 방송인이 별풍선 금액에 따라 노출이나 무리한 행동을 하고, 별풍선 순위가 공개돼 팬들 간 경쟁이 붙으며 부작용도 많았다. 올해 초엔 별풍선을 쏘려고 일하던 병원에서 약 5억원을 횡령한 병원 직원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구속된 19일 서울서부지법에서 법원 난입이 벌어지자, 일부 유튜버가 수퍼챗을 받기 위해 이를 선동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20일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비상계엄 후 극우 성향 유튜버 상당수의 수퍼챗 수입이 2배 이상 증가했다”면서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실의 분석에 따르면 구독자 162만여 명의 한 채널은 지난달 수퍼챗으로만 1억2500만원을 벌었다고 한다.
▶물론 수퍼챗으로 돈을 버는 유튜버는 양 진영에 다 있다. 이달 초 한남동 관저에서 김건희 여사로 추정되는 여성이 개를 산책시키는 영상을 공개해 인기를 끌었다는 한 유튜브 채널은 윤 대통령 체포 전후 생방송으로 수퍼챗 세계 1위를 했다고 한다. 이틀간 3500만원 이상을 벌었다는 것이다. 민주당 ‘상왕’이라는 김어준씨는 2023년 1월 유튜브 채널 개설 사흘 만에 수퍼챗으로 1억4700만원을 벌었다고 한다. 이러니 초등생들 장래 희망 직업에서 유튜버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 자극적 선동을 예사로 하는 유튜버들이 적지 않다. 법률 미비로 책임도 지지 않는다.
01.22 '매킨리'산

▲일러스트=이철원
인(韓人)들의 미국 이민은 1903년 하와이에서 시작됐다. 그 10년 전까지 하와이는 미국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세운 ‘하와이 왕국’이었다. 그런데 1892년 하와이에 정착한 미국인들이 ‘합병 클럽’을 만들어 미 정부에 하와이 합병을 요청했다. 1893년엔 미 해군의 도움으로 마지막 여왕도 폐위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했던 민주당의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합병을 거부했다. 하지만 1897년 대통령에 취임한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는 달랐다. 그는 “이것은 ‘명백한 운명’”이라며 1898년 하와이를 합병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말은 미국이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캘리포니아에 눈독 들이던 1845년 한 언론인이 만들었다. “북미 대륙은 신의 섭리로 미국에 주어졌으므로, 이를 차지하는 것은 명백한 운명”이란 팽창주의 논리였다. 이를 정책화한 것이 매킨리였다. 그는 스페인과의 전쟁에 이겨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식민지로 만든 뒤 “미국을 세계의 최강대국 반열에 올렸다”고 자부했다.
▶매킨리는 미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원 의원 시절인 1890년 관세를 38%에서 49.5%로 높이는 ‘매킨리 관세법’을 발의·제정해 ‘보호무역의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얻었다. 대통령 당선 후엔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운하 건설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01년 매킨리가 암살되는 바람에 파나마운하 건설은 후임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맡았지만, 구상은 그가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위대한 매킨리 대통령의 이름을 딴 ‘매킨리산’이란 지명을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알래스카에 있는 해발고도 6190m 북미 최고봉 이름을 ‘디날리’에서 ‘매킨리’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은 줄곧 이 산을 ‘높다’, ‘위대하다’는 뜻의 디날리로 불렀다. 매킨리란 이름은 1896년 대선 당시 그를 지지했던 금광업자가 붙인 것으로, 매킨리는 알래스카에 가본 적도 없다.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이 ‘디날리산’이란 명칭을 되찾아줬는데, 트럼프가 이를 번복했다.
▶트럼프가 연일 파나마운하 회수, 그린란드 합병 등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쿠바 사이 ‘멕시코만’ 이름도 ‘아메리카만’으로 바꾸겠다고 한다. 취임사에서 트럼프는 “미국 우주인들이 화성에 성조기를 꽂아 우리의 ‘명백한 운명’을 별들에까지 펼치겠다”고 했다. ‘이 세상은 미국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트럼프 같다.
01.23 작년 해외 관광 2800만명

▲설 명절 연휴를 앞둔 22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면세 구역이 승객으로 붐비고 있다. 올해 설 연휴 기간 국내 공항을 통해 130만여 명이 해외여행을 떠날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24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열흘간 하루 평균 출발 승객은 13만4000명으로, 작년 설 연휴 일평균(11만7000명)보다 13.8% 증가할 전망이다. 2025.1.22 /연합뉴스

▲일러스트=이철원
얼마 전 일본 후쿠오카에 다녀온 지인은 가는 관광지마다 온통 한국 사람밖에 없어서 기분이 묘하더라고 했다. 관광지만 아니라 도쿄나 오사카 시내 번화가에 가도 일본어보다 한국말이 더 많이 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주위엔 1년 동안 일본만 5번 이상 관광한 사람들도 있다. 일본 유명 맛집 한 끼를 먹고 온다는 사람도 보았다. 일본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엔화 약세로 우리나라 여행객들의 여행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3687만명 중 한국인이 882만명으로 가장 많았다. 전년 대비 26.7%나 늘어났다.
▶일본만이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해외 관광 출국자 수는 역대 최고를 기록한 2019년(2870만명)에 근접했을 것 같다. 항공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제선 여객 수는 8892만명으로, 코로나 이전인 2019년의 98% 이상을 회복했다. 이 수치에서 내국인 중 여행 목적을 ‘관광’으로 적고 출국한 수치가 해외 관광 출국자 수다. 계산해 보면 대략 2825만명이다. 내국인의 56% 정도가 지난해 해외여행을 다녀온 셈이다.
▶해외로 관광을 가는 일본인 수는 매년 2000만명 정도로 일본 인구의 16% 수준이다. 중국은 매년 10% 정도인 1억5000만명이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 미국의 경우 인구의 26%인 약 9000만명이 해외여행을 간다는 통계가 있다. 이웃 나라로 수퍼마켓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경이 육로로 열려 있는 유럽을 제외하면 한국인의 해외여행이 세계 최다 수준이 아닐까 싶다.
▶2023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해외 관광객 수는 1100만명 정도에 그쳤다. 그해 우리 국민 해외 관광객(2271만명)의 딱 절반이다. 이 때문에 관광수지 적자도 100억달러(약 14조5000억원)에 육박했다. 지난해에도 상반기에만 65억달러 관광수지 적자가 났다. 100억달러가 국내에서 쓰였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자연 경관은 결코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내 관광지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좋은 원석(原石)을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연에 유럽식 가공이 더해지면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국내 관광지는 천박한 모양의 냉면 갈비 광고판으로 뒤덮여 있고 그마저도 바가지 안 쓰면 다행이다. K팝, K드라마 등 전 세계가 좋아하는 한류 문화도 관광 상품화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설 연휴 해외여행객 숫자가 또 기록을 쓸 것 같다.
01.24 위장 잠입 수사

▲유덕화(오른쪽)와 양조위가 주연한 홍콩 액션 ‘무간도’.

▲일러스트=이철원
경찰이 신분을 속이고 범죄 조직에 잠입해 수사하는 것은 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다. 홍콩 영화 ‘무간도’는 젊은 경찰 사관생도(양조위 분)가 경찰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위장해 폭력 조직 삼합회에 침투하는 내용이다. 이 경찰은 10년 동안 폭력 조직에서 생활한 후 경찰로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하면서 갈등을 겪는다.
▶국내에서도 2013년 이정재가 주연으로 출연한 ‘신세계’, 2017년 설경구가 주연을 맡은 ‘불한당’ 등 경찰이 위장 수사에 뛰어드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런 위장 수사를 ‘언더커버(undercover)’라고 하는데, 같은 이름의 영화가 있을 정도다. 범죄 조직에 경찰이 위장 잠입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영화의 좋은 소재다.
▶실제로 외국에선 적극적으로 위장 수사를 허용한다. 마약에 시달리는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국 법무부는 위장 수사 대상 등을 제시하는 ‘언더커버 가이드라인’을 두고 있다. 중남미 마약 조직들은 미국 위장 잠입 수사관 명단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미국은 마약은 물론 음란물, 화이트칼라 범죄, 부패 범죄, 테러, 조직 범죄, 마약 범죄 등에도 위장 잠입 수사를 활용하고 있다. 연방수사국(FBI)은 2015년 아동 성범죄자를 잡기 위해 직접 아동 음란 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독일은 1992년 조직범죄대책법을 만들어 위장 수사 제도를 시행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경찰이 위장 수사를 할 수 있는 분야가 제한적이다. 범인 검거에 효과적이지만 자칫 역효과를 일으키고 국민 인권도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상 경찰이 위장 수사를 하면서 범죄 의도가 있는 이에게 범죄 기회를 제공하는 정도는 적법, 범죄를 저지를 생각이 없는 사람의 범행을 유도한 정도라면 위법이었다. 그 기준이 모호해 현장 수사관들이 위장 수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n번방’ 사건을 계기로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위장 수사를 허용했다. 경찰은 법 시행 이후 4년간 위장 수사 500여 건으로 피의자 1415명 검거하고 94명을 구속했다. 지난해 11월엔 딥페이크 등 성인 대상 디지털 성범죄까지 위장 수사 범위를 넓혔다. 정부가 이번에 마약 범죄에 대해서도 수사관이 가짜 신분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허용 범위가 디지털 세상이었다면 현실 세계로 넓어졌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마약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위장 수사 범위를 보이스피싱 등 금융 사기 범죄 등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01.25(토) 미국 성공회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을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고 표현할 때 대개 떠올리는 것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지금의 매사추세츠주(州) 플리머스에 내린 순례자들이다. 이들이 영국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떠났기 때문에 미국은 반(反)성공회적인 나라일 것 같다. 하지만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독실한 성공회 신도였고, 그가 태어난 버지니아는 ‘성공회의 보루’였다. 청교도보다 먼저 신대륙에 도착한 것도 성공회 신도들이었다.
▶영국 성공회는 아내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고 싶었던 헨리 8세가 1534년 이혼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만들었다. 영국은 1607년 북미에 첫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앤 불린의 딸이자 ‘처녀 여왕’으로 불렸던 엘리자베스 1세를 기려 ‘처녀지’란 뜻의 ‘버지니아’란 이름을 붙였다. 왕실 공인 식민지였던 만큼 영국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성공회 사제들도 파견됐다.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많은 성공회 사제가 캐나다나 영국으로 피신했지만, 일부 성공회 사제는 독립을 지지했다. 1776년 미국 독립 후 이 성공회 사제들이 신앙의 틀은 유지하되 영국 왕실과는 단절한 ‘미국 성공회’를 출범시켰다. 영국 성공회는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인데 미국 성공회는 ‘주교의 교회(Episcopal Church)’로 공식 명칭도 달라졌다. 역대 미국 대통령 45명을 종교별로 나누면, 가장 많은 11명이 성공회라는 사실도 놀랍다. 그다음으로는 장로교·감리교·침례교 등이 많다. 가장 최근의 성공회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였다. 아들 부시는 아내 로라를 따라 감리교로 옮겼다.
▶영국에서 독립은 했지만 미국인들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같은 대성당을 수도 워싱턴 DC에 두고 싶어했다. 1907년 고딕 양식의 ‘워싱턴 국립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당시 주류였던 미국 성공회 소속이었다.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광장에 있어 ‘대통령의 교회’로 불리는 세인트 존스 교회도 성공회 소속이다. 미국 성공회는 신자 150만명 정도로 교세가 약화됐지만, 여전히 대통령 취임 기도회는 전통에 따라 국립 대성당에서 열린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취임 기도회에서 성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자비를 요청한 국립 대성당 여성 주교를 “극좌파”라고 비난했다. 오늘날 미국 성공회는 성소수자와 난민 포용을 강조하는 비교적 진보적 종파다. 진보 성향이 강한 워싱턴 DC와 정반대 성향인 트럼프의 갈등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01.27(월) 장영자의 다섯 번째 구속

▲일러스트=박상훈
1982년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로 불렸던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이 터졌다. 중앙정보부 출신 전직 국회의원과 결혼한 장씨는 이순자 여사 삼촌의 처제였다. 권력의 배경에 메이퀸을 지낸 미모와 지성. 그야말로 사기 치기 딱 좋은 스펙이었다. 대통령 친인척이 연루된 당시 정부 예산의 10% 수준인 6400억원대 사기 사건이었다. 이순자 여사는 자서전에서 “남편이 자신감을 얻고 있던 시점에서 날벼락같이 찾아온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장영자 사건에 당대 최고 검사들이 투입됐다. 대검 중수부장이었던 이종남은 훗날 법무장관, 감사원장을 지냈고 이명재, 정홍원, 박주선, 안대희는 나중에 검찰총장, 국무총리, 국회의원, 대법관을 지냈다. 사실상 대검 중수부의 첫 사건이었던 장영자 사건을 통해 대통령 처삼촌 등 32명이 구속됐다. 민심 수습 차원에서 국무총리와 안기부장, 그리고 11명 장관이 교체됐다.
▶그러나 시중에는 장영자가 사기 친 돈이 “이순자와 관련 있다” “민정당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영부인 리스크’였다. 액수도 컸지만 38세에 세 번째 결혼인 장영자의 미모와 개인사가 더 화제였다. 그녀는 구속되면서 “경제는 유통 아니냐”며 사기가 아닌 경제 활동임을 강조했다. 당시 드라마의 대사 ‘민나 도로보데스(모두가 도둑이다)’와 맞물려 사회 현상이 됐다. 1985년 총선 때 야당은 “장영자와 이순자”를 부각시켰고 결과는 신민당 돌풍이었다. 5공 붕괴가 여기서 시작됐다.
▶장씨는 81세인 지금까지 인생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지냈다. 차용금 사기, 구권(舊券) 화폐사기 등 대부분 사기였다. 구속 기간만 33년. 최근 위조수표 사용으로 다섯 번째 구속됐는데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 모두 34년을 복역하게 된다. 장씨는 교도소에서도 자신의 명예회복(?)에 관심이 많았다. 2004년 한 정치인이 대통령 친인척이 연루된 645억원 펀드 의혹을 거론하며 “제2의 장영자 사건”이라고 하자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그녀의 패소였다.
▶2022년 네 번째 출소 후 장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방송국에서 영어 프로그램 대담자로 일하다 중정에 발탁돼 특수훈련을 받았고, 이후 중정 위장회사에 일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두 번의 이혼 모두 결혼이 아니라 반강제 혼인신고였다며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154억 위조수표를 사용하다 또 구속됐다. 사기도 경험이 필요한 모양이다.
01.31(금) 위험한 항공기 수하물

▲지난 28일 오후 부산 강서구 대저동 김해공항에서 홍콩행 에어부산 항공기에서 화재가 발생해 소방당국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다./뉴스1
1990년대 초만 해도 항공기 수하물 규제는 까다롭지 않았다. 기내 흡연도 자유로웠던 시절이라 휴대용 라이터 반입을 지금처럼 한 개로 제한하는 규정 같은 것도 없었다. 수하물 반입 규제의 주된 목적은 사고 예방과 테러 방지에 있다. 1970년대 일본 적군파와 팔레스타인의 검은9월단은 여객기 납치 테러로 악명 높았다.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의 기내 반입을 막아야 했다. 우리도 북한의 대한항공 858기 폭파 테러 이후 여행객과 휴대품의 보안 검색을 강화했다.
▶그래도 9·11 테러 이후와 비교하면 관대한 편이었다. 2001년 9·11 이후 특히 미국행 비행기 승객은 사생활 침해 수준의 몸수색을 당했다. 그해 12월 영국 국적의 무슬림 테러리스트가 신발 속에 숨겨 반입한 폭탄을 기내에서 터뜨리려다 미수에 그친 것을 계기로 신발을 벗어 엑스레이 검색대에 올리는 보안 규정이 추가됐다. 2006년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액체 폭탄을 음료수 병에 담아 반입하려던 시도가 적발된 뒤엔 액체류의 기내 반입도 제한됐다. 생수병을 검색대 직전 쓰레기통에 버리는 풍경이 그때 시작됐다.
▶2016년 소말리아 모가디슈 공항을 이륙한 여객기가 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숨졌다. 조사 결과 노트북 PC 형태의 폭탄이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과 영국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자국으로 들어오는 항공기에 스마트폰보다 큰 전자제품의 객실 내 반입을 금지하는 수하물 제한 규정을 신설했다. 승객이 과도한 규제에 반발하는 ‘수하물 분노(luggage rage)’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설 연휴 기간 김해공항에서 발생한 여객기 화재가 객실에 반입된 보조 배터리 발화 때문일 수 있다고 한다. 이륙 전에 불이 났기 망정이지 비행 중이었다면 대형 참사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니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보조 배터리에 주로 쓰이는 리튬 이온 전지는 충격을 받으면 화재 위험성이 커서 짐으로 부칠 수 없고 객실 반입만 허용됐다. 불이 나면 즉시 끄기 위한 안전 조치다.
▶그러나 리튬 이온 전지는 발화하면 삽시간에 섭씨 2000도까지 온도가 치솟는 열폭주 현상을 일으킨다. 한번 불이 나면 물을 뿌려도 소화가 안 되는 속수무책 상황에 빠지기 십상이다. 보조 배터리 위험성이 새삼 주목받으면서 배터리를 객실 내 짐칸에 따로 두지 말고 몸에 지니게 하는 등 규정을 더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 여행객이 불편을 참는 지혜도 필요하다. 보조 배터리는 집에 놓아두고 여행지에서 사거나 임차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