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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산 신화를 만든 사람들]1 조선일보 2024/ [1]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 - [10]美록히드마틴 울머 사장… 그가 말하는 K방산의 힘

상림은내고향 2024. 11. 26. 17:49

[K방산 신화를 만든 사람들] 조선일보 2024

■"유신 개발 독재? K2 전차·원전 수출은 박정희 '중화학 선언'의 열매"

 박정희의 '마지막 비서관' 김광모

▲박정희 중화학공업 정책의 산증인인 김광모 전 청와대 비서관이 6월 17일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 관련 자료와 문서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대부분 대통령기록관과 서울대 한국사회과학자료원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망백(望百)의 노인은 매일 아침 휠체어를 타고 집 근처 커피숍으로 간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그의 구십 생애 중 “가장 바빴으나 찬란했던” 1970년대를 기록하는 중이다.

 

1971년부터 8년 동안 그는 청와대 중화학 담당 비서관으로 일했다. 오원철과 함께 박정희의 손발이 되어 방위산업, 중화학공업, 원자핵 개발을 기획하고 실행한 인물이다. “나는 ‘했다고 한다’가 아니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는 “K2전차와 원전 수출, 반도체 산업의 번창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위에서 탄생한 것인데도 MZ세대는 박정희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아 서글프다”고 했다.

 

핵무장론과 ‘대왕고래’ 탐사로 소란한 요즘, 박정희 핵 개발과 원유 시추 사업의 전말을 알고 있는 ‘마지막 비서관’ 김광모를 만났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알리고 죽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했다.

◇ 박정희의 손과 발로 뛴 8년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관련서를 이미 여러 권 출간하셨다. 왜 또 글을 쓰시나.

“써도 써도 모자란다는 생각에…. 책을 내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니 요즘은 매주 한 편씩 글을 써서 카톡으로 배달한다. 카톡이란 놈이 참 신통하다. 원고지, 볼펜이 따로 없어도 되니 나 같은 늙은이에겐 아주 제격이다(웃음).”

 

-첫 책은 자비로 출간했더라.

“1988년 낸 ‘한국의 산업 발전과 중화학공업화 정책’이다. 박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중화학 정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 한 게 안타까워 그간의 자료와 문서, 현장 경험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다. 그런데 출판해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탓일까?

“신군부는 박정희 죽이기에 몰두했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유신 개발 독재의 산물이라며 저평가했다.”

 

-박정희의 중화학 선언은 왜 중요한가?

“박정희 최고의 업적은 새마을운동도, 고속도로도 아니다. 중화학공업화로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기초를 만든 것이다. 중화학이 뭔가. 철강, 기계, 조선, 석유화학, 전자 등 모든 산업의 기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지만 반도체도, AI 산업도 중화학의 토대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 시작은 방위산업이었더라.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 계획을 성공시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청와대 습격 사건, 울진삼척 지구 침투 사건 등 북한이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닉슨 독트린’과 함께 미국이 주한 미군 사단 하나를 철수하겠다는 통보를 해오자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오원철 수석이 이때 등장하는 건가?

“방위산업 추진 지시에 경제기획원은 주물선·특수강·중기계·조선소 등 4대 핵 공장 건설 계획을 세웠는데, 1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자 대통령이 크게 실망했다. 그때 서울대 공대 출신인 오원철 당시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가 기막힌 대안을 마련해 왔다. 어떤 병기(兵器)도 분해하면 부품이 되는 것이니,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4대 핵 공장을 짓는 대신 부품 공장과 조립 공장을 설립하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병기를 양산할 수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바로 다음 날 오원철은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나는 중화학 및 방위산업 기획관으로 발령이 났다.”

 

-’공업 구조 개편’도 이때부터 시작되나?

“1971년 말부터 병기를 시제(試製)하는 단계에 들어갔는데 철강, 특수강, 화공약품 같은 원자재가 없으니 한계에 부닥쳤다. 오죽하면 청계천 고물 상가에 버려진 병기를 주워다 만들었겠나. 병기를 생산하려면 원자재를 만드는 중화학 공장과 정밀 가공 기술 인력이 필수라는 걸 절감하고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개편하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 대통령 단상으로 날아간 파편

-미국은 박정희의 방위산업, 중화학 선언에 반대했다던데.

“방위산업을 하려는 박정희의 의도와 역량을 의심해서 무기 제조 기술은커녕 설계 도면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국방과학연구소는 최종 제품을 분해한 뒤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했다. 마침내 창원 기계단지에서 기본 병기를 양산하고 유도 무기와 핵 개발까지 논의하게 되자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창원 단지를 시찰했고, 한국의 방위산업이 공산권 수중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판단에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이 중단된다.”

 

-병기 시사(試射) 때의 일화가 흥미롭더라.

“모든 시사에 참석할 만큼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어린애 돌보듯 키웠다. 한번은 대전차 지뢰를 선보이는 날이었는데, 탱크 밑에 지뢰를 넣고 폭파했더니 그 파편이 대통령 단상으로 날아가 난리가 났다. 아찔한 상황인데도 대통령은 ‘지뢰 유력이 대단하구나. 계속해!’ 하며 칭찬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지뢰가 터지지 않을까 봐 두 개를 설치했다가 너무 세게 폭발한 거였다(웃음).”

 

-박정희의 중화학공업이 유신 개발 독재의 산물이란 비판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유신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유신으로 인해 안정된 정권이 보장됐기 때문에 최소 10년이 걸리는 중화학공업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은 개인 치부가 아니라 그가 즐겨 쓰던 휘호대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나는 믿는다.”

 

-대기업 특혜라는 비판도 따른다.

“중화학공업은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당시 대기업들이 참여하지 않으려고 해서 박통이 일일이 달래고 설득했다. 설득도 안 되면 행정명령으로 지시해 맡겼을 정도다. 조선소만 해도 건설업으로 성공한 현대를 지명했는데 정주영 회장이 못 한다고 버티자 대통령이 호통을 치셨다. 부품 생산과 가공 공장은 중소기업체들에 맡겨, 이 시기 중소기업 육성이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전경. /현대중공업 제공

◇ 신군부의 박정희 죽이기

-박정희의 핵 개발은 거의 완성 단계에서 포기했다던데.

“1972년 9월 박통이 오원철 수석에게 핵 개발 계획을 지시했다. 오 수석은 원자력연구소 윤용구 소장, 핵 개발을 전공한 현경호 부소장과 회의한 뒤 극비리에 플루토늄탄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프랑스에서 핵연료 재처리 기술과 도면을 획득했는데, 이를 안 미국이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고리 원전 2호기 차관을 중지하겠다고 통보해 중단됐다. (핵 개발이) 완성 단계도 아니었다. 정치인들이 잘 알지 못하면서 회고록에 그렇게 쓰더라.”

 

-그래도 박정희가 비밀리에 핵 개발을 지속했다고 하더라.

“공식적으로는 포기했다고 선언했지만, 핵연료공단은 기술 개발을 이어갔다. 그러나 박정희 서거 후 신군부가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고 핵 개발 관련 기관들을 모두 없애고 연구 인력도 퇴출시켰다. 국방과학연구소 인력을 반으로 줄이고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로 축소시키면서 기술이 크게 퇴보했다.”

 

-김진명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핵 물리학자로 등장하는 이휘소 박사가 서울대 화공과 동기라던데?

“뛰어난 학생이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세계적인 과학자였지만 박정희 지시로 핵을 개발하다 CIA에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는 핵 개발과는 상관없는 소립자 물리학자였다. 박 대통령이 이휘소에게 친서를 보낸 적도 없다. 김진명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요즘 나오는 핵무장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대안도 없으면서 정치인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이다. 당장 누가 핵 개발을 주도할 것이며, 핵실험은 또 어디에서 할 건가.”

 

-6개월 내 핵을 가질 수 있다고도 한다.

“허무맹랑한 말들이다. 핵을 개발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동해 석유 탐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원유 시추 실패담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1960년대 유공의 합작 회사였던 걸프 오일이 서해안 지역에 석유가 매장돼 있다는 미국 해양연구소의 에머리 보고서를 보여주면서 상공부에 대륙붕 개발 신청을 했다. 정부는 걸프오일, 텍사코, 셸 등 세 회사에 조광권을 주고 여섯 광구에서 원유 시추를 했다. 비용은 전액 시추자 부담이고 원유가 나오면 반씩 나누기로 한 조건이라 재정적 부담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 ‘드라이(징후 없음)’로 판정 났다. 일본과 분쟁지역인 7광구에서도 원유는 나오지 않았다.”

 

-상공부 석유화학과장을 지냈고, 대한석유공사에서도 근무하셨더라. 윤 정부의 동해 석유 탐사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나.

“석유 240억배럴이 있을 가능성이 20%라면 당연히 시추해야 한다. 부존 가능성 판단을 누가 어떻게 했는지가 관건인데, 나는 액트지오가 어떤 회사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것이 걱정된다. 박정희 때와 달리 국가 재정 부담이 큰 사업인데, 원유가 나오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져야 할 부담이 너무 크다.”

 

-박정희 대통령도 1976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우리도 석유국가가 됐다’고 발표했는데,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그해 박 대통령이 진해로 휴가를 가면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느 기자가 석유 탐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돌발 질문을 하자, 당황한 대통령이 ‘원유는 있는데 경제성이 없어 포기했다’고 얼버무리셨다(웃음). 기대를 엄청 했는데 원유가 없다는 최종 결과에 대통령이 가장 크게 실망하셨다.”

◇ 尹 주위에 검사보다 과학자 많아야

-가까이서 본 박정희는 어떤 사람이었나?

“보고서에 깨알같이 메모하며 공부를 많이 하는 대통령이었다. 외강(外剛)이 몸에 배었으나 실은 내유(內柔)의 인사였다. 독일 함보른 광산에서 파독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울던 장면, 방산 현장에서 순직한 이석표 비서관을 꼭 살려내라며 울던 모습이 생생하다.”

 

-8년간 청와대에 있으면서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다던데.

“김정렴 실장의 ‘청와대 공무원 수칙’이었다. 명함도 못 만들게 하고, 대통령과 사진도 못 찍게 했으며,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게 했다(웃음). 모범공무훈장인 청조근정훈장 받은 것을 최고 영예로 느끼며 살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하나?

“강직하지만 포용이 없는 정치 스타일로 일관하다 무너진 게 안타깝다. 나는 그가 전자공학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올해는 중화학 선언 51년, 산업단지 60년이다.

“제조업 없이, 중화학 없이 첨단 산업도 없다. 자동차 부품 업체 없이 차세대 전기차를 만들 수 없고, 원전 방산 업체 없이 K원전·K방산 제품을 만들 수 없다. 반도체의 실리콘은 누가 만들 것인가. IMF 외환위기도 중화학 제품의 수출로 이겨냈다.”

 

-윤 대통령에게 조언한다면?

“방위산업, 항공산업, 원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과학자와 기술자가 대우받고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한국 중화학공업의 일등 공신은 박정희의 기술 인력 양성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 주위에 검사보다 과학자가 많아야 한다.”

 

-왜 그렇게 박정희에게 ‘진심’인가?

“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그만한 지도자, 애국자가 없었다.”

☞김광모

1933년 경남 김해 출생. 부산고,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상공부 화학과에 들어가 호남비료, 대한석유공사를 거쳐 상공부 석유화학과장으로 일했다. 1971년 청와대 경제2수석실에서 방위산업과 중화학, 핵개발 관련 실무를 맡았다. 삼성엔지니어링 대표, 삼성그룹 고문을 지냈다. ‘중화학 공업에 박정희의 혼이 살아 있다’ 등의 저서를 펴냈다.

김윤덕 기자 07.08  조선일보

 

 

2024.10.22 

 [1]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

방산 첫 로열티 시대 열었다, 불가능 뚫은 K2 전차 아버지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이 21일 경기 의왕시 현대로템 기술연구소에서 K2 전차 모형을 가리키며 전차에 적용된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 기술로 만든 전차를 세계 시장에 내놓는 게 일생의 과업이었다”며 “K2 전차를 통해 기술력을 확보한 만큼, 차세대 전차 경쟁에서도 해외에서 당당하게 겨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대로템

 

대한민국 방위 산업이 해외에서 따낸 무기 공급 계약이 100조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국내 4대 방산 기업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LIG넥스원,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수주 잔고는 올 상반기 기준 약 91조5500억원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총알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방위 산업은 작년 140억달러(약 19조3000억원) 규모 무기를 해외 12국에 팔 정도로 성장했다. 전차, 미사일, 자주포 등의 품질과 성능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방산 수출 세계 10대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자주 국방’이란 이름 아래 우리 고유 기술을 확보하려고 했던 개척자들의 힘이다. 이들은 외국 무기를 가져다 분해하고 베끼고, 해외에 나가 고개 숙여 기술을 전수받고 공부해 K방산 기틀을 만들었다. 그 주역들에게 K방산 신화의 비결과 역사를 들어봤다.

 

첫 순서로 우리 주력 전차 ‘K2′ 개발을 지휘한 김의환(70) 전 ADD(국방과학연구소) 전차개발 단장(현 현대로템 고문)을 만났다. K2 전차는 K방산이 본격적인 지식재산권 사용료(로열티)를 받고 수출한 첫 제품이다. 지난 2008년 튀르키예가 4억달러에 K2 개발 기술을 사갔다. 2022년에는 폴란드에 1000대 공급 계약도 맺었다. 제작사인 현대로템은 개발비 수천억원이 들어간 이 전차로 국내외 7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은 병역 특례를 받으려 ADD에 들어갔던 것이 인연이 돼, ADD 지원을 받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재료공학 박사를 마쳤다. 1989년 귀국한 후에도 쭉 방산의 길을 걸었다. 국내외 기업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지만 “공학자로서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고 국가에도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 고문은 첫 국산 전차인 K1부터 첫 고유 기술로 만든 K2까지 현재 우리 군 전력의 핵심인 전차 개발에 깊숙이 관여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전차의 아버지’란 별명이 붙었다.

 

지상전의 꽃인 전차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 군은 1970년대부터 개발에 나섰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에서 1차 설계한 전차를 국내 생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지상군의 핵심 전력인 전차를 고유 기술로 개발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 10여 국에 불과하고, 수출까지 하는 나라는 미국·독일·프랑스 등 5~6곳에 그친다.

 

K1은 1990년대 우리 군에 배치됐는데, 우리가 생산을 하지만 수출을 할 수도 없었고 한국군 실정에 맞춰 개량을 하려 해도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했다. 생산을 맡기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설계도만 보내줘서 기술을 배우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이 과정을 직접 겪으며 김 고문은 “우리 기술로 만든 전차를 세계 시장에 내놓는 걸 내 일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차 지식재산권 확보에 사활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김 고문은 “우리 군이 전투 훈련에 매진했다면 우리 연구원들은 14년 동안 K2 전차를 개발하기 위한 지식재산권 전투를 벌였다”고 했다. 애초부터 해외 시장이 공략 목표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전차를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그러기 위해 작동 원리 등 시스템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선 1995년부터 3년간 전차란 무엇인지 개념부터 연구했다. 국내엔 배울 스승도 없어 해외 최고 전문가를 삼고초려해 불러와 강의를 듣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예습도 복습도 정말 열심히 했다고 한다.

“당시 최고 수준이었던 미국의 에이브럼스 전차나 독일의 레오파드 전차, 이스라엘의 메르카바 전차 등보다 더 우수한 전차를 만들겠다는 걸 목표로 삼았어요. 솔직히 우리 중에도 과연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김 고문을 비롯한 연구팀들은 영국·이스라엘· 일본 등에서 전차 전문가 5명을 초청해 매일 8시간씩 5일간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ADD 연구원뿐만 아니라 방산 기업 관계자들도 수십 명이 모여 전차 기술을 배웠다. 김 고문은 “메르카바 전차를 만든 이스라엘 탈 장군 등이 강연을 했는데, 당시 이들의 강연을 녹음한 테이프가 몇 박스씩 나왔고 이게 소중한 자료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 전차만의 경쟁력을 갖기 위해 ‘이용자 중심의 전차’라는 개념도 자체적으로 고안해봤다. 기업들이 소비자 중심으로 제품을 만드는 요즘 트렌드를 미리 적용한 셈이다. 김 고문과 연구원들은 국내 10여 곳의 주요 전차부대를 돌아다니면서 주요 간부들과 인터뷰해 ‘고객 수요’를 일일이 파악했다. 미래 전투를 수행할 전차에 꼭 필요한 기능이 무엇인지, 한국 전차만의 특징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등을 반영한 것이다. 산악부터 평지까지 다양한 지형이 있는 우리 국토를 감안해, 자동차의 서스펜션을 조절하듯 지형에 맞춰 좌우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세계 최초로 탑재했다.

 

무게를 다른 경쟁 전차보다 10톤 안팎 가벼운 55톤으로 줄여 험지에서 최고 시속 50km, 평지에서 시속 70km로 달릴 수 있는 기동성을 확보했다. 김 고문은 “많은 현역 군인들이 앞으로 미래 전투는 IT가 필수라고 말해, 전차 간 무선 디지털 통신이 가능하게 해 가상 공간에서 모의 전투도 할 수 있는 기능도 갖췄다”고 했다.

 

▲그래픽=양진경

◇1000개 오류 찾아라, 그래야 성공

실제 전차를 만드는 과정은 오류와의 싸움이었다. 경쟁력 있는 전차를 만들기 위해 그는 연구원들에게 “오류를 최소 1000개는 찾을 각오로 꼼꼼하게 테스트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4.1m 수심에서 활동하는 전차를 만들기 위해 현대로템 직원들이 탄 전차 객실을 크레인으로 들어 물에 집어 넣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주포가 회전을 하지 않는 일이 생겨 며칠 발을 동동 굴렀는데, 핵심 부품에 물이 차서 생긴 일이라는 걸 뒤늦게 발견하는 일도 있었다. 김 고문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비들이 있었지만, 당시 우리의 고유 전차를 만들자는 열망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힘든 순간들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2006년의 어느 날을 잊지 못한다. 처음 전차 주포 사격 테스트를 하는 날이었다. 2km 안팎 먼 거리의 표적을 타격하는 주포는 전차의 핵심 경쟁력이다. 김 고문은 “첫날 주포를 세 발 쐈는데, 과녁 귀퉁이에 20㎝ 간격으로 포탄이 명중한 것을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면서 “비로소 우리가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2003년쯤부터 국방부, ADD, K2 생산에 관여한 현대로템 등 19개 기업의 임원과 실무진들이 ‘차전회’(차기전차회)를 만들어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던 것도 K2 성공의 비결 중 하나다. 군과 민간, 연구소가 하나가 되어 외길을 달렸다는 것이다.

 

김 고문은 K2 전차가 폴란드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세계 시장을 더 누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최근 노르웨이 수출이 아깝게 실패했지만 노르웨이 군에서는 독일 전차보다 K2를 더 높게 평가한 게 고무적”이라면서 “세계 누구와도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전차 기술을 확보한 만큼, K2 다음 세대의 전차도 우리가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기업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고문은 “정부와 군이 주도하고 기업이 따라가는 형태가 아니라,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신기술을 개발하고 군에 제안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재량권을 더 많이 줘야 빠르게 변화하는 방위산업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다”고 했다.

정한국 기자  이정구 기자

 
 
 

[2] 'T-50′ 개발 주도한 전영훈 박사

"기술도 돈도 없는데 웬 비행기? 모두 반대할 때 30년 후를 생각… 그렇게 T-50 개발 시작"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 개발을 주도한 전영훈 박사가 지난 14일 경기도 김포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 도중 T-50을 다목적 전투기로 개량한 ‘FA-50′의 모형을 손에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조인원 기자

 

2002년 8월 20일 경남 사천 비행장 활주로. 공군 조광제 중령이 초음속 고등 훈련기 ‘T-50(별칭 골든 이글)’ 조종간을 잡고 하늘로 비상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경영진과 T-50 개발자들은 기체가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다시 눈앞에 나타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40분 후, T-50이 사뿐히 땅으로 내려앉자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만세를 불렀다. 1989년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개발을 제안하며 첫발을 내디딘 첫 국산 초음속 고등 훈련기 ‘T-50′이 초도 비행(첫 비행)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초도 비행은 비행기 설계가 제대로 됐는지, 수만개 부품이 모두 정상적으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하는 항공기 개발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다. 그 이후 시제기를 계속 만들고 시험 비행 과정을 여러번 거쳐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간다. T-50은 2005년 양산을 시작해 6년 만인 2011년 인도네시아로 첫 수출에 성공했다. 이어 이라크·폴란드 등 중동·유럽 시장까지 뚫었다. 현재까지 수출된 T-50 계열 항공기는 6국에 138대, 총 78억달러(약 10조7000억원)에 달한다. T-50은 세계 최강인 미 해군의 고등 훈련기 사업 수주에도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대한민국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T-50' 고등 훈련기로 상공에서 배면 비행(기체를 뒤집어 수평으로 비행)을 하는 모습. 현재까지 T-50 계열 항공기는 모두 6국에 138대를 수출했는데, 금액이 78억달러(약 10조원)에 이른다. K방산은 T-50을 앞세워 미 해군 고등 훈련기 사업 수주에도 도전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22년 전 사천 비행장에서 T-50 초도 비행을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인 전영훈(77) 박사. K방산의 핵심 품목이 된 T-50의 탄생을 이끈 조종사 출신 주역이다. 그를 만나 T-50 탄생의 비화와 함께, 지금도 커지고 있는 T-50의 꿈을 들어봤다.

 

그는 1970년 공군 소위로 임관해 미국 전투기 팬텀을 몰다가 제대로 된 국산 전투기 개발의 꿈을 꾸었다. 공군 유학생으로 뽑혀 미 미시시피 주립대에서 항공공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달 경기 김포 자택 근처에서 만난 전 박사는 “T-50 기초 연구비로 첫해(1990년) 배정받은 돈은 단돈 530만원이었다”면서 T-50 개발을 둘러싼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다.

◇530만원으로 시작한 국산 항공기의 꿈

그는 “당시 우리 공군 내부는 물론 ADD에서조차 ‘기술도 돈도 없는데 사서 쓰면 되지 왜 굳이 개발을 해야 하느냐’는 반대 목소리가 컸었다”며 “하지만 한번 구입하면 30~40년은 사용하는 항공기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지금 포기하면 한참 뒤에나 후대에 기회가 올 거 같아 매일 아침 연구계획실장을 찾아가 졸랐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첫해 ‘기초 연구’란 단서를 달고 배정된 예산이 530만원이었다.

 

▲전영훈 박사가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의 록히드마틴 공장에서 모형 전투기를 탄후 촬영한 모습 . /전영훈 박사 제공

 

적은 예산으로 겨우 굴러가던 사업은 1991년 우리 군이 록히드마틴과 전투기 F-16 구매 계약을 맺으며 급물살을 탔다. 절충 교역(무기 도입 대가로 기술이전 등을 받는 방식)으로 록히드마틴 연구진에게 고등 훈련기 개발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얻게 됐기 때문이다. 이듬해 가을 ADD·삼성항공(현 KAI) 연구원 10여 명이 1차 선두 인원으로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있는 록히드마틴 공장으로 떠났다. 이 공장에서 5㎞쯤 떨어진 조립식 건물이 이들의 연구실이었다.

 

전 박사는 “록히드마틴 사람들과 친해지면 기술 하나라도 더 알려줄까 싶어 바비큐 파티까지 열어주며 친분을 쌓았다”고 했다. 3년간 총 89명의 연구원·엔지니어가 동고동락하며 기체 설계부터 성능 시험 방식까지 고등 훈련기 개발 기술을 배웠다.

▲그래픽=이철원

◇‘신의 한 수’ 된 초음속 항공기

T-50의 첫 형태는 영국 ‘호크기’ 같은 아음속(음속 이하) 훈련기였다. 그러나 골든 이글 개발팀은 논의 끝에 초음속 항공기로 방향을 틀었다. 고등 훈련기도 전투기처럼 기동성이 뛰어난 초음속을 원하는 추세였고, 아음속 훈련기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개발해 판매 중인 만큼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봤다. 당시 격려차 찾아왔던 조근해 공군참모총장 등을 설득해 초음속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전 박사는 “개발 후에는 수출이 필수인데, 그러려면 세계시장에서 더 수요가 많아질 초음속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방향 전환은 ‘신의 한 수’가 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T-50 계열 항공기는 기본형(고등 훈련기 T-50)보다 이를 다목적 전투기로 개량한 ‘FA-50′이 더 많다. 초음속이기에 전투기로 개량이 가능했고, 더 많은 국가를 공략하게 된 것이다.

 

부족했던 기술력은 록히드마틴과의 공동 개발로 채웠다. 초음속 항공기는 소리의 속도(마하 1.0)를 돌파하기 위해 공기의 저항을 견딜 수 있는 구조로 설계해야 한다. 재료나 엔진 같은 부품에도 아음속 항공기보다 더 공을 들여야 한다. 필요한 부품만 35만개에 달하고 성능 시험도 더 많이 반복해야 하는 만큼 개발 비용도 올라간다. 전 박사는 “비용이나 기술 문제뿐 아니라 나중에 수출할 때 우리 혼자 개발한 것보다 록히드마틴이라는 파트너를 내세워야 믿음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봤다”고 했다.

 

▲공군 시절 美팬텀기 조종 - 공군 조종사였던 전영훈 박사는 F-4 팬텀 전투기를 몰며 국산 항공기 개발의 꿈을 갖게 됐다. /전영훈 박사 제공

◇선박·자동차 인력까지 끌어모아

골든 이글팀은 1997년 기체를 설계하고 성능을 시험하는 본격적인 개발 단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고등 훈련기를 설계할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에 다녀온 89명을 포함한 100명 정도가 전문 지식을 갖춘 인원의 전부였다. 이 인원으론 공군에 약속한 기한 안에 개발을 끝내기가 어려웠다. 골든 이글 팀은 사방에서 개발 인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전 박사는 “당시 IMF 사태로 자동차나 선박 쪽에서 실직자가 많이 나왔는데, 여기서 일한 기술자까지 데려왔다”고 했다. 야전 침대를 갖다 놓은 사무실에서 낮에는 설계하고 밤에는 서로 배우고 가르쳐주는 주경야독을 몇 개월간 반복했다.

 

▲T-50이 최종라인에서 조립되고 있다. /KAI

 

설계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전 박사는 “전차는 고장 나면 멈춰서 수리하면 되고 문 한 짝이 떨어져도 운행할 수 있지만, 항공기는 부품 하나만 어긋나도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차 설계를 마칠 시점에 항공기 전방·중앙·후방 동체의 중심축을 담당팀마다 서로 다르게 잡았다는 걸 깨닫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를 시작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랜딩기어(착륙 장치)에 문제가 생겨 연구원 한 명이 프랑스로 날아가 겨우 새로운 랜딩기어를 구해오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T-50이 탄생한 것이다.

◇방산 본고장 미국 시장에도 도전

엔진 같은 주요 부품 대부분을 외국에서 사오는 등 국산화율이 낮은 한계도 있었다. 온전한 독자 개발이 아닌 록히드마틴과의 공동 개발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 박사는 “기술력이나 개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록히드마틴과 함께 개발한 게 결국 옳은 결정이었다”고 했다. T-50을 통한 초음속기 개발 경험은 현재 KAI가 개발 중인 초음속 전투기 ‘KF-21(별칭 보라매)’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차세대 항공기 개발의 초석이 된 셈이다.

 

T-50은 조만간 방산의 본고장 미국 시장에도 도전한다. 미국 정부는 2028년 입찰을 목표로 해군 고등 훈련기 도입을 추진 중인데, 여기에 KAI가 T-50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방산 업계에선 KAI·록히드마틴이 한 팀이 돼 보잉·사브(스웨덴 방산업체) 연합과 겨루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성유진 기자

 

 

[3]천궁Ⅱ '13조 수출' 김지찬 부회장

美도 5년 넘게 걸렸는데 '무기 현지화' 1년에 끝내… 중동軍 "말도 안돼" 깜짝

▲이것이 ‘전차 킬러’ 현궁 - 김지찬 LIG넥스원 부회장이 지난 18일 경기 성남시 LIG넥스원 사옥 홍보관에서 대전차 유도무기 ‘현궁’ 모형을 어깨에 메고 성능을 소개하고 있다. ‘전차 킬러’로 꼽히는 현궁은 발사대와 유도탄을 합해 약 20㎏ 수준이라 보병이 휴대하고 견착 자세로 발사할 수 있다. 김 부회장은 “정확한 파지법(把指法·손으로 쥐는 방법)은 다르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지호 기자

 

2022년 가을 중동 A국 사막 한복판에 꾸려진 군(軍) 통제소. 국산 탄도탄 요격 체계 ‘천궁-II’의 ‘연동’ 신호가 불발됐다. 현지에 파견된 LIG넥스원 연구원들의 짧은 탄식 이후 침묵만 흘렀다. 조(兆) 단위 계약을 한 달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K방산’의 신뢰와 명운은 남은 한 달 안에 승부를 걸어야 할 상황이었다.

 

주변국 무장 단체의 미사일 공격에 시달리던 A국은 ‘미사일을 격추하는 미사일’, 탄도탄 요격 체계를 추가 도입하며 미국·이스라엘 등 방산 선진국 대신 한국의 천궁-II를 택했다. 파격적 선택, 그러나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계약 마지막 조건에 “1년 안에 현지 군 지휘 체계(C2)와 천궁-II가 완벽하게 연동하는 것을 시연해야 한다”는 문구를 적어 놓은 것이다. 이종(異種) 무기 체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연동은 고난도 작업으로, 과거 A국에 무기 체계를 수출한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방산업체도 5년 넘게 걸린 일이었다.

 

1987년 금성정밀공업(현 LIG넥스원)에 입사해 ‘38년 방산 외길’을 걸어온 김지찬(65) LIG넥스원 부회장(당시 사장)은 지난 18일 경기 판교 R&D센터에서 만나 “계약 조건으로 약속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아 시쳇말로 모두 ‘멘붕’이 됐다”고 했다. 낯선 사막 환경에서 씨름하던 현지 파견 연구원, 한국 본사 지원 인력까지 핵심 연구원 40여 명이 모두 투입돼 300개 시험 항목을 샅샅이 원점부터 재검토했다. 김 부회장은 “마감 날짜는 총알 같은 속도로 다가왔고,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인 만큼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ADD)까지 나서 총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운명을 가를 사격 시험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천궁-II 문제가 아닌 현지 통신망의 ‘방화벽’ 문제임을 찾아냈다. 며칠 뒤, A국 고위 군 관계자가 참석한 사막 통제소에서 시험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발사 성공.’ 김 부회장은 “현지 군 관계자 모두 ‘말도 안 된다’며 극찬했다”며 “K방산이 또 한 단계 도약하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UAE·사우디·이라크, 중동 3국 하늘 지키는 ‘천궁’ 13조원 수출

천궁-II는 초음속으로 날아오는 적 탄도탄까지 요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유도 무기 체계다. 적 항공기를 요격하는 중거리 지대공 유도 무기 ‘천궁’의 후속 모델이다. 천궁은 1960년 미국에서 도입한 호크(Hawk·매)를 대체한다는 의미로 1998년 ‘철매-II’ 프로젝트로 시작됐다. 천궁은 2015년, 천궁-II는 2020년 실전 배치를 시작했다. 김 부회장은 “탄도탄 요격 체계는 미국·러시아·이스라엘 등 세계 6~7국만 개발에 성공하고, 기술 개발에 성공해도 극비로 숨길 정도의 무기 체계”라며 “후발 주자가 진입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시장이었다”고 했다. ADD가 개발을 총괄한 상황에서 교전통제소, 유도탄, 체계 종합 등 핵심을 모두 LIG넥스원이 맡았다. 다기능 레이더와 발사대는 한화 측이 담당했다.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던 중동 방산 시장 공략은 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2022년 UAE와 35억달러(약 4조8000억원), 작년 사우디아라비아 35억달러, 지난 9월 이라크와 25억달러 규모 천궁-II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3년 연속 중동의 맹주 사우디를 포함해 3국 하늘을 지키는 방공망에 K방산 무기가 수주를 따낸 것이다. 2022년 4월 방한해 무기 지원을 요청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그해 11월 방한한 사우디 빈살만 왕세자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인 무기도 천궁-II로 알려졌다.

 

3년 연속 조 단위 수출 신화를 쓰고 있지만 방위산업 초창기에는 찬밥 신세였다. ‘자주국방’을 강조한 국가 요청에 따라 1976년 럭키금성(현 LG그룹)에서 출범한 금성정밀공업은 미군이 가져온 호크 미사일을 정비하는 게 주 업무였다. 김 부회장은 “금성사 텔레비전과 전화기가 최고였던 시절이었고, 국방 예산에 의존해야 하는 방산은 그룹 예산 확보 등에서도 어려운 처지였다”고 했다. 그룹 경영진 회의에서 금성정밀 차례에는 “됐고, 다음”이 일상이었다. 지금은 필수인 ‘자동화’ 공정을 두고도 “1년에 미사일 1~2발 만드는데 무슨 자동화가 필요하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국민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 1987년 럭키금성 그룹 공채에 지원한 김 부회장은 ‘금성정밀’을 1지망으로 지원해 방위산업에 입문한 뒤 38년째 방산 외길을 걸었다. 1990년대 무기 체계 국산화가 싹트던 시기에는 레이다 분야 연구개발(R&D) 사업, 유도 무기 영업을 맡았고, 2004년 LG그룹에서 분사돼 LIG그룹에서 방산 투자가 확대된 이후, 회사의 영업과 연구개발 업무를 총괄했다. 첨단 국산 무기 개발·양산 현장에서 오래 근무해 군에서도 조언을 구하는 방산 전문가로 꼽힌다.

 

▲그래픽=양진경

◇내수 출혈경쟁에 악몽…이제 ‘원팀’으로 수출 확대

김 부회장은 “국방 예산의 제약 속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하려면 해외 수출만이 답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2006년 국산 무전기 첫 수출을 시작으로, 미국·콜롬비아·인도네시아·UAE·사우디 등에 현지 사무소를 열며 해외 사업을 확대했다. 김 부회장은 “2012년 국내 최초로 중남미·동남아에 유도 무기를 수출했고, 2011년부터는 UAE ‘IDEX’ 방산전시회에 참여하며 해외 시장을 미리 개척했다”고 했다. 재계 ‘중남미통’으로 꼽히는 구본상 회장도 현장 세일즈로 힘을 보탰다.

 

김 부회장은 “국방부, 방사청, ADD 등 기관과 방산업계의 협력으로 글로벌 메이저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된 지금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산은 개발부터 전력화까지 오랜 기간 끝없는 검증을 반복해야 하는데 K방산의 성과는 중남미, 동남아, 중동 현지 낯선 환경에서 최적화된 제품을 고안한 직원들 덕분”이라고 했다. 이 회사 연구개발 인력은 약 2800명으로 전체 임직원의 60%에 달한다.

 

김 부회장은 “동유럽에서 한국에 밀린 유럽 방산 기업이 긴장하는 K방산 경쟁력은 협력 업체를 포함한 K방산 생태계”라고 했다. 그는 “무기 체계의 기술 수준은 LIG넥스원뿐 아니라 협력 업체의 기술 수준에 달려 있다”며 “품질은 협력사 중 가장 밑단 협력사의 품질에 비례하기 때문에 상생하며 기술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정구 기자

 

10.26 [바로잡습니다] 23일자 A1면 'K방산 신화를 만든 사람들…10조원 수주 하늘의 효자 T-50′ 사진 속 외

▲23일자 A1면 ‘K방산 신화를 만든 사람들…10조원 수주 하늘의 효자 T-50′ 사진 속 항공기는 ‘T-50B’가 아닌 ‘T-50′이므로 바로잡습니다.

 

▲24일 자 A16면 ‘독립 의지 담은 안중근 글씨’ 기사 중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그 이름 쇠와 같고’에서 ‘이름’을 ‘마음’으로 바로잡습니다.

 

 

[4] M16 소총 국내 대량생산 주역들

'M16 국산화' 특명 받고 美 날아간 27인… K방산의 시작이었다

1971년 11월 신문에 실린 육군본부의 ‘해외 유학 기술 요원 모집’ 공고. 해외 출국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1972년 상반기에 바로 9개월간 도미(渡美) 기술 교육을 시켜준다는 공고에 전국 공학도가 구름같이 몰렸다. ‘공과대학 기계과 전공, 군필자, 기계 분야 경력 5년’에 더해 ‘영어 회화 및 전문 기술 분야 영문 원서 해득 가능자’ 등 까다로운 조건이었음에도 약 1800명이 모여 27명이 선발됐다. 다만, 미국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는 ‘극비’였다.

 

▲전쟁기념관 소장 중인 국내 생산 1호 M16 소총. /사진=전쟁기념관·그래픽=송윤혜

 

1972년 초 노스웨스트항공 여객기를 타고 하와이를 거쳐 미국을 향하기 직전에야 이들은 임무를 알게 됐다. ‘M16 소총 제조 공장 도미 훈련기사’가 이들의 공식 직함이었다. 소총 하나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없던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 손으로 우리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주국방을 강조하며 1971년 국방부 조병창(造兵廠)을 착공했다.

 

당시 한국의 정밀기계공업은 같은 부품 10개도 계속 만들지 못하고 불량이 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공장 준공에 맞춰 1년 안에 미국에서 M16 모든 기술을 배워와 국내 생산을 준비해야 했다. 목표는 ‘연간 소총 10만정 생산’.

 

▲박정희 휘호 앞에 선 황익남 기사 - ‘자주국방’을 강조한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1973년 조병창(造兵廠)이 부산에서 출범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정밀하게 병기를 만든다’는 뜻을 담아 친필 휘호 ‘정밀조병’을 보냈다. 조병창이 민영화된 이후 경기 용인시 자택으로 가져와 걸어두고 있는 휘호 앞에 황익남(85) 전 대령이 서 있는 모습. /장련성 기자

 

지난 10일 당시 도미 기사단 부단장 역할을 맡았던 황익남(85) 예비역 대령을 만났다. 황 전 대령은 “이름도 생소한 코네티컷주에 도착해 아파트를 처음 봤다”며 “공장으로 출근해야 하는데 운전면허가 없어서 몇 명이 부랴부랴 공터에서 ‘속성 운전 교육’을 받은 게 우리의 첫 기술 수업이었다”고 했다.

 

이후 1년여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도미 기사들은 부산 조병창에서 1973년 초도 물량 수천 정을 생산했고, 이듬해 불가능한 목표로 보였던 연간 소총 10만정을 ‘도미 교육’ 2년 만에 성공적으로 생산했다. 최종 목표였던 60만정 생산도 1년 9개월이나 단축했다. 6·25 전쟁에서 구형 M-1 소총으로 싸우며 소총 한 자루 만들 수 없던 한국에서 ‘K방산’이 시작한 순간이었다.

 

▲당시 ‘渡美 훈련 기사단’ - 1972년 여름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휴일을 보내는 도미 기사들과 콜트사의 엔지니어들 모습. 왼쪽 둘째가 황 전 대령. /황익남 전 대령 제공

◇”후진국이 무슨 총을 만드느냐”

도미 기사는 미국 콜트사(社)에서 기술을 배워와 부산에서 M16 국내 생산을 시작하며 ‘K방산’과 자주국방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육군사관학교 18기 출신 보병 장교로 1970년 월남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황 전 대령도 선발됐다. 도미 기사단에 군(軍) 출신도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서울대 기계공학과 위탁교육을 다녀온 그가 발탁됐다. 황 전 대령은 “2년 전 월남에서 이렇게 멋진 총이 있나 하면서 사용했던 M16을 이제 내가 미국에 직접 가서 제작 기술을 배운다니 믿기지 않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황 전 대령과 도미 기사들은 생전 처음 가보는 하와이를 경유해 뉴욕을 거쳐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 도착했다. 숙소로 지급받은 아파트가 신기했던 것도 잠시, 차량으로 20분 정도 걸리는 출퇴근이 문제였다. 모두 운전면허가 없어 부랴부랴 몇 명이 면허를 땄다. 아시아 남성 여럿이 검은 양복에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면 현지인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국은 후진국인데 무슨 총을 만들겠느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이런 순간 든든한 응원군이 있었다. 하트퍼드 한인회였다. 고(故) 송자 연세대 총장 등 교민들이 이들을 집으로 초청해 한식을 먹여주고, 주변 관광도 시켜줬다고 한다.

 

1년이 안 되는 단기 교육. 하지만 우리 정부와 콜트사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도미 기사들이 집요하게 달라붙자 콜트사 기술자들도 ‘맨투맨’으로 기술을 전수했다. 처음에는 의견 충돌도 잦았다. 당시 M16 주요 부품은 126개였다. 도미 기사들이 126개 기술을 모두 알려달라고 하자 콜트에선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며 “핵심 부품 몇 개만 우리가 만들고 나머지는 협력사가 만든다”고 했다. 당시 한국은 협력사 개념도 없었다. 콜트의 하도급 회사가 있는 미국 서부와 중부까지 뿔뿔이 흩어져 기술을 배웠다.

◇10개만 만들어도 불량 나오던 시절, 소총 60만정 생산

황 전 대령은 “당시 1970년대엔 한국의 정밀기계공업은 대량생산 개념이 없어 조악했다”며 “장인이 부품 1~2개를 만들면 기가 막히게 품질이 좋았지만, 여러 사람이 손을 대는 순간 10개 이상부터는 불량이 나왔다”고 했다. 이 때문에 도미 기사 훈련 때부터 ‘불량품 없애기’에 집착했다고 한다. 당시 콜트의 불량률은 6% 수준이었지만 도미 기사들의 목표는 ‘불량률 제로’였다.

 

황 전 대령은 “당시 어려운 나라 상황에서 불량률을 줄이는 게 무조건 최선이란 생각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집요하게 배워 귀국한 이들에게 내려진 새로운 임무는 1974년부터 6년간, 매년 10만정씩 모두 60만정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저작권료 등을 감안한 콜트사와 계약 조건이 60만정이었다. 그런데 불과 4년 3개월 만인 1978년 3월 60만정을 조기 생산했다. 당시 월남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자주국방에 대한 절박감이 더 높아졌고, 이 때문에 ‘속도전’을 냈던 것이다. 그는 “2교대를 해가며 소총을 생산하고 정부 요청에 따라 M60 기관총, M203 유탄발사기 등 무기도 개발해야 했다”며 “모두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 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황 전 대령은 이후 조병창 기술·생산부장, 부창장까지 맡아 소총 공장 민영화까지 맡았다. 이후 국방품질검사소 창설 요원, 미 군수무관 파견 등 방산 업무를 담당하다 1989년 예편했다. 현재도 국내 기업의 해외 방산 수출 자문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올해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 등장한 한국 방산 제품들을 보면서 50여 년 전 고생했던 순간들이 생생히 떠올랐다”며 “K방산은 이제 도약을 시작하는 단계인데 첨단 무기는 비축이 되면 금세 포화 시장이 되기 때문에 차세대 무기 개발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이정구 기자

 

 

[5] '천무' 개발 이끈 신현우 사장

"천무 추락 때 잔해 건져 분해 연구… 이젠 이스라엘도 기술 탐내"

▲강원도 고성군에서 육군이 다연장로켓 시스템 ‘천무’를 테스트하고 있는 모습. 천무는 239mm짜리 미사일을 최대 80km까지 한 번에 12발 쏠 수 있고 목표와의 오차 거리도 평균 15m에 불과해, 화력과 정확도에서 미국 록히드마틴의 하이마스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육군

 

2012년 말 이스라엘 남부의 한 보안 시설. 한화 방산 부문 개발팀 30여 명은 텔아비브에서 차로 3시간을 달려 보안 시설 정문을 통과한 뒤 또다시 비포장도로로 1시간을 달렸다. 도착한 곳은 미사일 발사 시험장. 이들이 이곳을 찾은 것은 당시 극도의 보안 속에서 개발 중이던 국산 다연장로켓시스템 ‘천무’의 사거리 80㎞ 발사 시험을 위해서였다. 국내엔 시험장이 없어 그동안 바다로 발사하는 시험만 했는데, 막바지 성능 입증 테스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튀르키예 등 여러 나라를 탐문한 끝에 이스라엘을 시험 장소로 낙점한 것이다.

 

발사대에서 미사일이 80km 떨어진 목표물을 향해 떠나고 3분여쯤. 개발팀 전원이 숨죽여 성공 여부를 기다린 끝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이 시험에서 미사일이 목표물인 깃대 반경 15m 안에만 들어가도 성공인데, 이 수준을 뛰어넘어 정중앙 깃대를 정확히 명중했기 때문이다. 골프로 따지면 홀인원(한 번에 홀에 공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당시 개발팀을 이끌던 신현우(60)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장은 “시험장을 지켜보던 이스라엘 방산 업체 관계자조차 ‘정확도가 정말 대단하다. 우리와 협력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이듬해 말 천무는 우리 군의 최종 시험 평가를 통과했고, 양산에 돌입해 2015년 실전 배치됐다.

▲그래픽=이철원

◇바다 추락한 로켓까지 수거해 분석

천무의 개발 논의가 시작된 건 2005년. 사거리가 최대 6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장사정포·방사포가 집중 배치돼 수도권을 위협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 군의 주력 대응 무기는 자체 개발한 다연장로켓 ‘구룡’으로 사거리가 40㎞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짧은 창으로 긴 창에 맞서는 것은 불리하기에 우리도 발사 거리 늘리기가 급선무인 상황이었다. 더욱이 기존 구룡은 목표물을 추격할 수 있는 유도탄이 아니라 정밀도도 떨어졌다. 결국 북한에 대응하려면 사거리도 늘려야 하고 정밀도도 높여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다.

 

방산 기업 한화는 당시 군이 이런 무기를 미국에서 살지, 아니면 독자 개발할지 결정 나지 않은 상황에서 천무 개발에 뛰어들었다. 신 사장은 “‘우리가 먼저 시제품을 만들어 독자 개발을 제안해보자’는 판단에 수백억 원을 날릴 각오로 개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승연 한화 회장도 “실패해도 기술은 남지 않겠느냐”며 힘을 실어줬다.

 

2012년 이스라엘 시험장에서 성공을 확인하기까지 수많은 실패 과정을 겪었다. 특히 미사일 같은 유도무기에는 두뇌 역할을 하는 유도 조정 장치, 눈 역할을 하는 관성 항법 장치, 손발 역할을 하는 구동 장치 기술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 신 사장은 국방과학연구소(ADD)부터 대학·기업 연구소까지 사방에서 인력을 끌어모아 설계와 조립, 구동 시험을 계속했다.

 

천무는 지대지 미사일이다. 땅에서 쏴 땅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엔 이런 지상 시험장이 없었다. 2006년 여름, 한화 개발팀은 충남 태안으로 향했다. 바다를 향해 쏘는 시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첫 발을 쏘아올렸다. 결과는 실패. 목표점은 물론 발사 거리 80㎞도 못 날고 바다에 추락했다. 그런 실패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발사 시험 한 번에 드는 비용도 엄청났다.

 

▲지난 25일 서울 중구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본사에서 신현우 사장이 사무실에 걸린 세계 지도 앞에 서 있다. /김지호 기자

 

개발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저 수거 전문 업체를 고용했다. 바다에 추락한 로켓을 찾아 실패 원인을 분석해보기 위해서였다. 추락한 3개의 로켓 중 건져낼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개발팀은 그날부터 미사일을 분해하며 유도 조정 장치가 문제였는지, 날개 부문에 문제가 있었는지, 제품 재질이나 코팅·가공·조립 문제였는지 하나하나 분석했다. 신 사장은 “날개 구동 쪽이 문제였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때부터 수개월간 관련 부품을 보완하고 시험을 거듭했다”고 했다. 그렇게 시험을 반복한 끝에 정부가 내놓은 기준(두 발 연속 명중)을 통과하고 2009년 정식으로 개발 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정식 개발에 들어가면서 핵심은 명중 성공률이었다. 그 시험의 대부분을 이스라엘 시험장에서 진행했다. 바다로 발사해선 미사일이 정확하게 목표물을 타격하는지 정밀 측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 사장은 “2013년까지 이스라엘에서 6번 시험 했는데 한 번은 깃대에 정확히 맞혔고, 나머지 5번도 모두 반경 15m 안에 넣었다”고 말했다.

 

▲육군 1군단이 지난 17일 오후 강원도 고성 일대에서 동해상 표적지를 향해 130mm 로켓탄 천무 실사격을 실시하고 있다. /육군

◇중동 넘어 폴란드 뚫어, 다음은 동남아 해상

한화는 2015년 천무 실전 배치 후 본격적인 수출 세일즈에 나섰다. 첫 수출은 몇 년 후 중동 A 국가. A 국가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의 다연장로켓인 하이마스와 천무를 저울질하다 천무를 최종 낙점했다. 한 번에 장착할 수 있는 미사일이 하이마스는 6발, 천무는 12발이다. 브랜드 명성에서는 뒤처졌지만 빠른 납기 약속에 사후 관리 능력에서도 천무의 조건이 좋았다.

 

중동부터 유럽까지 방산 전시회를 훑은 끝에 이후 A국에 이어 또 다른 중동 B국가와도 계약을 맺었다. 비밀 유지 조항 때문에 국가 이름은 물론 계약 시점, 계약 금액도 비밀이다. 업계에서는 각각 조 단위로 추정한다. 재작년 11월부터 2차례에 걸쳐 폴란드에 천무 290대와 관련 탄을 수출했다. 당시 공개된 계약 규모는 7조2000억원이었다. 신 사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유럽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시 사장인 김동관 부회장의 지시로 TF팀을 구성해 유럽 시장에 공을 들였다”고 했다.

 

천무는 노르웨이·루마니아와 같은 유럽 국가는 물론 필리핀·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도 수출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필리핀 방산 전시회에서 섬이 많은 동남아 특성을 고려해 지상에서 함대 요격이 가능한 천무 실물을 전시했다. 신 사장은 “입사 2년 차인 1988년에 ‘미육군협회 방산전시회(AUSA)’에서 패트리엇 미사일 같은 미국 무기를 보고 기가 죽었었다”며 “그런 우리나라가 이제 방산 전시회에서 부스를 차릴 때마다 세계 각국 사람이 몰려드는 상전벽해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현우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1987년 한화에 입사해 37년간 방산 분야에서 일해왔다. 한화 방산전략실장, 한화테크윈 항공방산부문 대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표를 거쳐 전략부문 사장을 맡고 있다.

성유진 기자

 

 

[6] '백곰' 개발 주역 안동만 前소장

"방산 인재에 삼성 2배 파격 대우… 첫 K미사일로 보답"

▲지난 22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안동만 전 ADD 소장이 국내 첫 미사일인 백곰 모형(왼쪽)과, 백곰을 토대로 개발된 현무 모형(오른쪽) 앞에서 각 무기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1975년 미국 LA 인근의 작은 도시 호손(Hawthorne). 한 아파트에 한국인 3명이 모여 복사기 한 대를 둔 채 여러 종류의 책자를 복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대지미사일을 개발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최초의 탄도미사일 ‘백곰’을 개발하던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원들이었다.

 

20~40대 안팎의 연구원 10여 명은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의 노스럽 항공과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 등을 만든 방산기업 맥도널 더글러스(현 보잉사에 흡수) 연구 시설 등에서 기술 연수 중이었다. 이들이 복사하던 것은 미사일 등 항공 무기와 관련된 노스럽 항공 도서관에 있던 각종 논문과 맥도널사에서 제공한 교육용 교재였다. 당시 미사일은커녕 전차도 만든 적 없던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미사일 및 항공기 설계 등이 담긴 희귀한 자료가 그곳에 즐비했다. 맥도널 측이 교육 때 열람은 시켜주지만 외부 반출을 금지한 것들도 있었다.

 

▲그래픽=양인성

 

20대 중반이었던 안동만(75) 전 ADD 소장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서울대 항공공학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을 거쳐 ADD에 합류한 그는 백곰 미사일의 기체 설계 등을 맡은 개발 주역 중 한 명이다. 안 전 소장은 “귀국할 때 복사한 자료 대부분을 갖고 들어왔는데 사과 상자 크기 기준 10박스가 넘더라”면서 “당시 절박했던 우리에게 백곰 개발은 물론, 훗날 다른 미사일 개발 등에 두고두고 참고할 소중한 자료가 됐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이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해안의 안흥시험장에서 솟아오른 백곰 미사일이 정확하게 표적을 맞히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지난 22일 서울 도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안 전 소장은 “백곰 발사 성공은 가난하고 기술도 부족했던 우리나라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일군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백곰 개발을 포함해 ADD에서 30년 넘게 일한 항공 무기 분야 전문가로, 지난 2005년 ADD 역사상 처음으로 연구원 출신 소장에도 올랐다.

◇가난과 기술 부족을 극복한 성과

본격적으로 백곰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73년 전후였다. 개발팀은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미국 미사일 ‘나이키 허큘리스’를 토대로 미사일을 만들기로 했다. 이 미사일을 만든 맥도널 더글러스가 약 160만달러를 받고 기초 설계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이 회사는 2000만달러를 주면 핵심 설계와 시제품 제작 등까지 다 해준다고 제안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안 전 소장은 “너무 큰돈인 데다 사서 쓰는 기술로는 우리 실력을 기를 수 없다는 게 당시 ADD 생각이어서 직접 개발에 도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백곰’ 발사 지켜보는 박정희 前대통령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8년 9월 26일 충남 안흥시험장에서 ‘백곰’ 시험 발사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500kg짜리 탄두를 포함한 5000kg 미사일을 180km 밖 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날리는 기술은 1970년대 대한민국에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는 우리 제조업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1973년 당시 포항제철이 고로에서 처음 쇳물을 쏟아냈고, 삼성전자는 흑백 TV를 생산했던 시절이었다. 1975년에야 국내엔 국산 자동차 포니가 처음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사일을 개발하려고 ADD에는 심문택 소장과 이경서 박사 등의 지휘 아래 내로라하는 최고 인재 수십 명이 모였다. 안 전 소장도 이때 합류해, 해외 기술 연수도 떠난 것이다. 기초 기술을 배웠더라도 이를 우리 실정에 맞춰 구현하는 것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특히 아직 미성숙 단계였던 제조업이 문제였다.

 

예컨대 알루미늄으로 기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 제조업에선 알루미늄이 생소한 소재라 이를 제대로 가공해본 곳이 거의 없었다. 경운기를 만들던 회사나,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를 수소문해 찾아서 일을 맡겼다. 거기서도 네모난 알루미늄판을 원형으로 잘라내야 하는데, 장비가 없어 테두리를 따라 드릴로 구멍을 여러 개 뚫는 방식을 쓰는 등 시행착오가 많았다.

 

안 전 소장은 “기술 연구뿐만 아니라 기체 등을 만드는 제작까지도 연구원들이 어떻게 할지 궁리해서 기업들에 알려주는 일의 반복이었다”면서 “그러다 보니 단순히 미사일을 쏘는 데 그치지 않고 항공, 전자뿐만 아니라 금속 가공 등 많은 기초 산업에서 많은 사람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래픽=양인성

◇최고 인재에 대한 파격 대우

역경을 딛고 미사일을 쏘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최고 인재들의 피나는 노력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대우도 큰 역할을 했다. 안 전 소장 등에 따르면 1970년대 초 삼성 같은 대기업 월급이 2만~3만원 할 때, ADD는 연구원들에게 갑절에 이르는 5만원 안팎을 줘서 1등 신랑감 대우를 받을 때였다고 한다. 해외여행은커녕 여권만 발급받는 것도 까다로운 시기에, ADD에서는 기술 연수차 수십 명을 선진국에 파견할 수 있었다.

 

안 전 소장은 “나라를 지키는 기술을 개발한다는 차원에서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도 ADD 내부 부서장이 결재하면 한국은행에서 처리해주는 등 권한을 많이 줬던 시기였다”면서 “인재들이 먹고살 걱정 없이 최고 대우를 해줬고 이들이 다른 생각 않고 기술 개발에 몰두했기에 불가능한 일을 해냈던 것”이라고 말했다.

 

▲첫 연구원 출신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을 역임하며 K방산을 이끌었던 안동만 박사가 2024년 10월 22일 서울 퇴계로 한 사무실에서 한국방위산업의 역사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전기병 기자

 

그는 “지금은 어떤가요?”라고 되물었다. 과거 기술 자립 노력의 결과로 K방산이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시장 환경은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던 당시와 달리 한쪽에서는 관료들의 지나친 감사와 문책 등으로 ADD 연구원들이 압박을 받고 자율성을 잃고 있다”면서 “지금부터 첨단 방산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와 연구원 사기 진작, 중소 전문 업체를 육성해야 우리 방산이 성공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전 소장은 또 “지금의 방산 수출은 가성비가 좋기 때문인데, 미래는 가격만으로는 경쟁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술력을 키우는 것에 더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한국 기자

 

 

[7] K200 개발 참여한 김계환 고문

수천대 국산 장갑차의 모태 됐다... K200 별명이 多産 '두꺼비'인 이유

▲1993년 11월 경남 마산항에서 K200 장갑차가 화물선에 실리고 있다. 이날 화물선에 실린 장갑차 42대는 말레이시아로 수출돼 보스니아 내전에 투입됐다. 우리나라가 개발한 군 기동 장비로는 첫 번째 수출이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1993년 11월 3일 경남 마산항. 화물선 ‘다이아몬드 하이웨이’에 유엔(UN) 표지를 단 장갑차 42대가 줄지어 실렸다. 석 달 전 말레이시아는 보스니아 내전에 평화유지군을 보내려 한국산 장갑차 ‘K200′ 111대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장갑차는 전장에서 우리 보병을 안전하게 수송하는 역할을 한다.

 

이날 장갑차 1차 선적을 끝낸 화물선이 고동을 울리며 말레이시아 클랑항으로 출항하자 사방에서 오색 테이프가 흩날리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K방산이 처음으로 국산 기동 장비를 수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탄약, 중소형 함정 등을 수출한 적은 있지만 전장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기동 장비를 대규모로 수출한 건 최초였다.

 

이때부터 31년이 지난 지난 8월, 우리 방위산업은 당시 수출한 K200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는 사업을 또 따냈다. 우리가 당시 보병 수송용으로 수출한 K200을 전투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개량할 계획이다. 독자적으로 쌓아온 기술력 덕에 과거 개척한 해외시장에서 새 사업 기회를 또 발굴한 것이다.

 

▲지난 11일 경남 창원의 한 카페에서 김계환(70) 원진엠앤티 기술고문이 K200 장갑차 개발에 참여했던 당시의 사진들을 소개하며 웃고 있다. /김동환 기자

 

이런 ‘31년의 인연’을 가능하게 한 K200 개발에 참여했던 김계환(70) 원진엠앤티 기술고문을 지난 11일 경남 창원에서 만났다. 원진앰엔티는 대우중공업의 후신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협력사다. 그는 대우중공업 입사 4년 차인 1981년 여름, 회사에 K200 장갑차 개발을 위한 특수사업본부가 꾸려질 때 처음으로 방산에 발을 들였다. 당시 사업본부의 팀장급은 7~8년 차, 실무진은 3~4년 차에 불과했다. 대부분 방산 전문가가 아닌 엔진, 공작 기계, 중장비 같은 부서에서 일하다 차출돼 장갑차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그래픽=양진경

◇손쉬운 미국 ‘카피’ 대신 독자 개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군은 미국 장갑차 ‘M113′을 쓰고 있었다. 기술력이 아직 부족하니 계속 미국 제품을 사서 개조해 쓰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우리 군 일부에서 “당장 예산을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 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밀어붙인 끝에 한국형 장갑차를 개발하게 됐다.

 

사업자로 낙점된 것은 M113을 개조, 정비해 본 경험이 있는 대우중공업이었다. 하지만 장갑차를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개발팀은 M113 도면을 구해 반년 넘게 공부했다. 김 고문은 “당시 정비를 가르쳐주던 미국 쪽 사람이 갖고 있던 설계도를 빌려 기초 공부 자료로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큰 난관 중 하나는 장갑차의 핵심 동력 장치를 무엇으로 만들지였다. 당시 국방부는 국산 엔진에 대한 불신이 커서, 엔진과 변속기 모두 미국 제품을 쓰길 원했다. 하지만 개발팀은 국산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두 가지 시제품을 만들었다. 첫째는 미국제 엔진·변속기를 써서 M113과 거의 동일하게 만들었고, 다른 두번째 시제품은 대우중공업 엔진에 영국제 변속기를 썼다. 엔진까지 미국제를 쓰면 M113의 복사판에 그친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 고문은 “우리 엔진에 맞는 변속기를 구하려 미국 업체를 방문했을 때 ‘한국이 무슨 장갑차를 만드느냐. 절대 팔지 않겠다’고 문전박대 당하기도 했다”며 “전 세계를 수소문한 끝에 영국에 가서 겨우 변속기를 조달해 왔다”고 말했다.

 

▲K200 장갑차 개발 당시 모습. /김계환 고문 제공

 

1984년 10월 국군의날 시가 행진. K200이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인 날, 우리 군이 내세운 건 시제품 2호였다. 국산 엔진으로도 같은 성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날 K200 16대 행진을 보고선 미국 M113 제조사 관계자가 대우중공업을 찾아와 “지식재산권을 침해했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회사는 그를 K200을 생산 중이던 창원 공장으로 데려가 장갑차 내부를 뜯어 보여줬다. 김 고문은 “우리 엔진에 영국제 변속기를 썼으니 핵심 동력 장치부터 이미 달랐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은 사과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전쟁터 한복판서 AS 해준 K방산

K200의 사업명은 다산의 상징인 두꺼비다. 독자 기술을 확보하면서 K200 장갑차는 이후 궤도형 화생방 정찰차 등 다양한 계열화 차량으로 재탄생했다. 그 이름처럼 장갑차 수천 대 생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김 고문은 “우리가 손쉬운 복제 대신 독자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K200을 기반으로 다양한 차량을 만들 수 있었고 수출할 때도 자유로웠던 셈”이라고 했다.

 

말레이시아 수출을 위해 K200을 빠르게 개량한 것도 개발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당장 장갑차를 전쟁터로 보내야 하니 한두 달 내로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대우중공업은 군과 협의해 당시 군에 납품된 K200을 빌려 와 말레이시아가 원하던 지휘용, 의료용 장갑차 등으로 빠르게 바꿨다.

 

▲K200 장갑차 개발 당시 모습. /김계환 고문 제공

 

대우중공업은 보스니아 주둔지에 3차례 애프터서비스(AS) 팀도 파견했다. 장갑차를 100% 가동해 성능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김 고문은 “이후 ‘한국은 전쟁터에도 AS팀을 보내준다’는 소문이 나 수출 세일즈 현장에 갈 때마다 얘기가 나왔다”며 “두려움을 뚫고 전쟁터 한복판으로 향한 동료 모두 지금도 자긍심을 느낀다”고 했다.

성유진 기자

 

 

[8] 김재관 초대 표준과학연구원장

우리 鐵로 우리 무기를... 국립묘지에 묻힌 'K방산의 아버지'

▲초대 표준원장인 김재관 박사 현충원 안장식이 31일 대전 현충원에서 진행되고 있다./한국과학기술한림원

 

31일 오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비어 있던 자리에 ‘과학기술유공자 김재관의 묘’라고 적힌 묘비가 세워졌다. 1960~1970년대 포항제철소 설립의 산파 역할을 한 고(故) 김재관(1933~2017년) 박사의 유해가 경기 화성에서 이날 이장됐다. 현충원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무원이나 경찰관, 소방관, 군인 등이 봉안되는 경우가 많다. 김 박사는 과학기술과 한국 산업의 발전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된 후, 과학자로서 이날 현충원에 봉안된 것이다. 안장식에는 유족과 과학계 원로 3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그와 함께 연구를 했던 정낙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명예연구원은 “고인은 앞서 내다보는 혜안으로 국가와 사회 발전을 이끌었다”고 했다.

 

국가 수호에 대한 김 박사의 공헌은 전쟁터의 군인 못지않다. 그가 공장 자재 하나까지 챙기며 세운 포항제철소의 쇳물은 방산 국산화의 마중물이 됐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초대 총괄부소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엔 박격포, 로켓포, 대전차 지뢰 등 시제품을 제작했다.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표준연구원 초대 원장 등을 지내며 그가 기틀을 닦은 특수강, 중기계 공장, 대형 조선소는 대포·탱크·군함을 제작하는 방위산업의 전초 기지가 됐다.

 

▲1979년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장으로 재직하던 김재관(왼쪽) 박사가 당시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기관 소개를 하고 있다. /김재관 박사 기념사업회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에 긴급 명령을 내렸다. 소총과 박격포, 로켓포, 수류탄, 지뢰 등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 이른바 ‘번개 사업’이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미군 철수를 추진한 ‘닉슨 독트린’으로 자주 국방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할 때였다.

 

1차에 이어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2차 번개 사업’의 실무 총괄을 당시 ADD 부소장으로 재직하던 김재관 박사가 맡았다.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철강과 기계 분야에서 김 박사는 당시 국내에서 최고 전문가였다. 주어진 시간은 단 3개월이었다. 그해 4월 시험 발사에서 박격포와 로켓포는 모두 목표물을 명중했다. ‘K방산’의 효시로 꼽히는 ‘번개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김 박사의 아내인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은 “남편은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연구에 매달렸다”며 “그때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1964년 독일 뮌헨에서 김 박사가 박 대통령에게 건넨 '한국 철강 공업 육성 방안' 보고서.

◇K방산의 마중물을 붓다

방산 분야에서 김재관 박사의 기여는 단순히 미사일·전차 개발에 그치지 않는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했다. 현지 유학생들을 초청한 조찬 모임에서 박 대통령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김 박사가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 “철강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이고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보고서 표지에는 영어로 ‘한국에서 철강 공업 육성을 위한 제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3년 후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1호 해외 유치 과학자로 김 박사를 불러들였다. 김 박사는 국가 숙원 사업인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 설계를 맡았고, 결국 연생산 103만t의 포항종합제철소를 세웠다.

 

포항제철소는 중공업뿐 아니라 국내 방산의 마중물이 됐다. 1978년 개발된 미사일 ‘백곰’, 1984년 개발 완료된 국산 전차 ‘K1′ 등이 모두 포항제철소의 쇳물로 만든 특수강으로 제작됐다. ‘K1′ 전차의 기술은 이후 ‘K2′와 K9 자주포 등을 발전했고, 백곰은 현무4 등 미사일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됐다. 이날 김 박사 봉안식에 참석한 한 제자는 “1970~1980년대 무기 개발은 미국 등 외국의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며 “김 박사가 개발한 무기의 기초 기술과 포철의 특수강이 없었으면 무기 국산화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KIST에서 초대 연구부장을 맡아 중공업 기반 산업화의 밑그림도 그렸다. 주물선(철 덩어리), 특수강, 중기계 공장, 대형 조선소 건설을 4대 핵심 분야로 키워야 한다고 했다. 모두 대포와 장갑차 등 군수 물자 제작에 필요한 군수 산업과 연결되는 분야로, 역시 오늘날 K방산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기술의 표준을 정립하다

김 박사와 방산의 인연은 필연과 같았다. 1933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김 박사는 1950년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첫 학기를 마치기 전에 6·25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야 했다. 미군 부대에서 통역원을 모집했고, 그는 전공을 살려 기계 관련 통역을 맡게 됐다. 영어로 적혀 있는 미국산 무기들의 사용 설명서를 한국군 장교들에게 알려주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군 박격포와 탱크 등 각종 중화기들이 특수강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수강까지 생산할 수 있는 종합 제철이 한국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을 굳힌 순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56년 서독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뮌헨공대로 향했다. 뮌헨공대에서는 기계공학, 철강학, 금속학, 자동차공학 등을 두루 공부했다. 1961년 5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듬해 독일 최대 철강사 ‘데마그’에 입사해 철강 생산 기술부터 제철소 기획과 건설, 특수강 생산 기술 등을 두루 익혔다. 1965년에는 가정도 꾸렸다. 독일에서도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이었지만 고국에서 철강 공업을 육성할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했다.

 

과학기술의 기반이 되는 ‘표준’ 역시 김 박사의 관심사였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설립을 지휘하고 초대 및 2대 소장을 맡았다. 당시 한국에는 ‘한국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시간 표준을 확립하지 못해 일본 방송국의 시보를 받아 사용했다. 그는 국제원자시와 협정세계시를 나타내는 시계를 확보해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시간 표준을 구현했다. 이호성 표준연구원 원장은 “방산을 비롯해 모든 첨단 산업의 근간이 되는 ‘표준’이라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인천대 기계공학부 교수와 대학원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2017년 12월 89세로 별세했다. 숱한 업적을 세웠음에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박사가 인천대 교수로 재직할 때 제자였던 이태식씨는 “본인이 하신 일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하시지 않는 겸손한 분이었다”며 “묵묵하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일하셨는데, 이제라도 국립묘지에 안장돼 뜻깊게 생각한다”고 했다.

 

유족들은 김 박사의 이번 국립묘지 안장이 과학기술인에 대한 존중과 예우가 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과학기술유공자 중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은 6명에 불과하다. 김 박사가 7번째다.

 

이날 안장식에 앞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연못 정자에는 김 박사의 호를 따 ‘우정’이라는 현판이 붙었다. 우정(宇正)은 ‘온 우주의 균형이 올바로 잡히다’라는 뜻이다. 김 박사의 아들인 김원준 삼성글로벌리서치 대표도 부친의 뜻을 이어 공학과 산업 관련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박지민 기자

 

 

[9] 한국형 이지스함 이끈 김정환 前사장

"우린 고물 함정" 해군 말에 충격… 35년 이지스함 팠다

▲지난 2016년 환태평양훈련(RIMPAC·림팩)에 참가한 세종대왕함이 ‘SM-2 함대공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우리나라 해군의 첫 이지스함 세종대왕함은 건조에 약 1조원을 투입해 2008년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신의 방패’라고 불리는 이지스함 취역은 미국·일본·스페인·노르웨이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였다. /HD현대중공업

 

2012년 12월 12일 오전 9시 49분. 북한이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기습적으로 발사했다. 이 로켓을 가장 먼저 포착한 건 서해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우리 해군의 첫 이지스함 세종대왕함이었다. 세종대왕함은 고성능 레이더로 약 9분간 로켓 궤도를 추적했고, 2·3단과 분리된 1단 로켓의 낙하 위치까지 정확히 찾아냈다. 덕분에 우리 군은 바다에 떠 있는 로켓 잔해물을 수거해 분석할 수 있었다. 이지스함의 탐지 능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강력한 레이더로 1000㎞ 떨어진 거리에서도 적 항공기나 미사일을 발견해 요격할 수 있는 이지스함은 ‘꿈의 함정’ ‘신의 방패’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첫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은 2007년 진수, 2008년 취역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일본·스페인·노르웨이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였다.

 

세종대왕함의 설계와 건조 작업을 이끈 김정환(70) 전 HD현대중공업 사장은 경기고 재학 시절 해군사관학교 견학을 갔다가 한 생도에게 “우리나라 군함은 2차 대전 때 미군이 쓰다 넘긴 고물뿐”이라는 말을 듣고 함정 개발의 꿈을 꿨다. 1977년 입사 후 회사 선배들이 모두 “호황인 상선 사업부로 오라”고 권유할 때도 35년 함정 외길을 걸어 한국의 첫 호위함인 울산함부터 첫 이지스함 세종대왕함까지 만들어냈다.

 

▲김정환 전 HD현대중공업 사장이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현대빌딩에서 세종대왕함 모형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박상훈 기자

◇사용료 700억원 대신 독자 설계에 도전

국내에서 우리 힘으로 이지스함을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시작된 1990년대 후반이다. 이지스 시스템을 보유한 미국 록히드마틴에서 설계도를 사 와 그대로 건조만 할지, 우리가 직접 설계할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도면 구매 가격은 5000만달러(약 700억원).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말고 사 오는 게 안전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김 전 사장은 “호위함, 잠수함, 구축함까지 만든 기술력으로 이지스함도 충분히 설계할 수 있다”고 회사와 해군을 설득했다.

 

이지스 시스템은 인체로 비유하면 일종의 두뇌다. 이 두뇌는 가져오되 손과 발이 될 무기·장비, 이를 잇는 신경망은 국내에서 만들기로 한 것이다. 김 전 사장은 “미국의 설계 도면을 쓰면 함정에 배치할 무기까지 모두 미국 것을 따라 써야 하지만, 자체 설계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세종대왕함 주요 장비 120여 종 가운데 미사일 수직 발사대 등 90여 종이 국산품이다. 함대지 크루즈미사일 ‘해룡’, 함대함 유도탄 ‘해성’, 대잠 미사일 ‘홍상어’ 등 국산 무기도 대거 탑재했다.

 

이지스함에 국산 무기가 호환되도록 하는 데는 난관이 많았다. 김 전 사장은 “쉽게 말하면 영어를 하는 장비와 한국어를 하는 무기를 연동하기 위해 둘에 서로 언어를 가르치거나, 혹은 통역을 둬야 했던 것”이라고 했다. 설계팀은 장비 공급 업체들을 수없이 오가며 연동 체계를 조율했다. 록히드마틴에 가서 막바지 연동 작업을 할 때는 미국에서 회의 직후 회사에 이메일을 보내면 한국에선 밤을 새워서라도 연구해 답을 보내줬다고 한다. 그는 “하루 만에 수정된 부분을 들고 회의에 들어가니 록히드마틴에서 ‘다른 나라는 한 달 후에나 답이 온다’며 놀라더라”고 했다.

 

▲한국의 첫 이지스 구축함 '세종대왕함'. /HD현대중공업

 

핵심 장비인 이지스 레이더 타워를 선체에 탑재하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작은 오차가 수백km 떨어진 표적 근처에선 수백m 오차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은 주로 밤에 이뤄졌다. 김 전 사장은 “햇빛 때문에 미세하게 휘어지는 오차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야간 작업만 4개월 가까이 했다”고 말했다.

 

◇최신 기능 찾아 전시회, 해외 설계사무소 직접 돌아

김 전 사장은 “보통 군에서 함정을 요구하고 설계를 거쳐 실제 취역하기까지 10년이 걸린다”며 “바다에 떠다니는 다른 나라 함정을 참고해 만들면 기능이 10년은 뒤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사장은 이런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해외에서 열리는 학회와 전시회, 설계 사무소 곳곳에 발품을 팔았다.

 

세종대왕함에는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스텔스(은폐) 기능과 배의 일부가 폭발해도 가라앉지 않는 폭발강화격벽 기능이 들어가 있다. 모두 당시 막 취역한 함정에만 반영된 최신 기능이었다. 김 전 사장은 “2001년쯤에 미국 설계 회사에 갔더니 ‘요즘 트렌드는 단순히 포에 안 맞는 게 아니라 맞아도 안 가라앉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함정에 폭발을 견딜 수 있는 격벽을 설치해 한쪽에 어뢰를 맞더라도 함정 전체로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미사일을, 얼마나 견딜 정도여야 하는지 같은 세부 사항은 물론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 기준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북한·중국·러시아 등 우리나라를 공격할 가능성 있는 나라 무기를 연구해 우리나라 함정에 맞는 기준을 만들고, 이에 기초해 폭발을 견디는 기능을 넣은 것이다.

 

▲한국의 첫 이지스 구축함 '세종대왕함'. /HD현대중공업

 

스텔스 기능도 이런 발품의 결과였다. 스텔스는 레이더에 잘 걸리지 않는 특수 재료를 쓰거나, 배에서 나는 열·소음을 줄이는 기술로 함정이 최대한 적에 발견되지 않게 만든 것이다. 김 전 사장은 스텔스 기능을 넣기 위해 미국 업체와 계약하며 “한국 연구소나 대학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스텔스 기능이 보편화할 거라고 보고 기술 이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텔스 기능은 세종대왕함보다 앞서 2003년 취역한 충무공이순신함에서 첫선을 보였고, 이후 세종대왕함에 전면적으로 적용됐다.

◇미국도 놀란 기술력, 이제 K함정 세계로

2010년 7월 하와이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환태평양훈련(RIMPAC·림팩).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7국, 함정 19척이 모여든 이 훈련에서 세종대왕함은 ‘탑건함’ 명칭을 받았다. 7.2km 떨어진 표적을 향해 각국 함정이 5인치 함포를 5발씩 쏘는 대회가 열렸는데, 훈련에 처음으로 참가한 세종대왕함이 우승자가 된 것이다. 김 전 사장은 “당시 미 해군 이지스함 함장이 우리 세종대왕함을 돌아보곤 ‘우리 배 2대를 줄 테니 그쪽 배 한 대와 맞바꾸자’고 농담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세종대왕함 초대 함장인 김덕기(가운데) 당시 대령과 김정환(왼쪽) 전 HD현대중공업 사장. /HD현대중공업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K함정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이미 뉴질랜드·베네수엘라 등에 함정 총 6척을 인도했고, 필리핀에 보낼 8척을 건조 중이다. 지난 4월에는 페루에서 4척을 수주했다. 김 전 사장은 “함정 수출은 조선소에서 주관하지만, 각종 시운전과 외국 해군 승조원 훈련 등에 해군,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 등의 협력이 필요하고 다 함께 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지스함

미 해군이 함대 방어용으로 만든 ‘이지스 시스템’을 탑재한 함정을 뜻한다. 최첨단 레이더로 1000㎞ 거리에 있는 항공기와 미사일을 탐지·추적하고, 이를 파괴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북한 탄도탄 추적용으로 주로 쓰인다. 이지스란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딸 아테나에게 준 방패 이름에서 유래했다.

성유진 기자

 

 

[10]美록히드마틴 울머 사장… 그가 말하는 K방산의 힘

록히드마틴 "한국에 조립 가르쳤는데, 이젠 우리가 배워"

▲방한한 그레그 울머 록히드마틴 사장(항공사업부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록히드마틴코리아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모습. 그는 “대한민국의 첨단 기술과 혁신, 숙련된 인력, 탄탄한 물류 인프라, 확고한 제조 입지, 강력한 공급망, 그리고 지속적인 혁신 노력이 한국 방위 산업이 가진 강점”이라고 했다. /박상훈 기자

 

“한국의 방위산업은 이제 록히드마틴에 기술적으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세계 1위 방산기업 록히드마틴에서 연매출 250억달러(약 34조원) 규모 항공사업을 총괄하는 그레그 울머 사장은 K방산의 달라진 위상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울머 사장은 “다른 국가와 차별화되는 한국의 제조·엔지니어링 역량이 K방산의 성공 요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록히드마틴은 미 공군의 주력이자 현존 최강으로 꼽히는 전투기 F-22(랩터), 5세대 스텔스 전투기 F-35, 이지스 전투체계 등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방산기업이다. 무기 원조에 의존하고 수입도 겨우 하던 국가에서 무기 수출 세계 9위권으로 성장한 K방산의 오랜 ‘파트너’이기도 하다. 한국이 1990년대 이 회사의 블랙호크(UH-60) 헬기, F-16 전투기를 조립 생산하던 시절부터 T-50 초음속 항공기를 공동 개발해 수출까지 하는 현재까지, 약 40년간 K방산의 시작부터 성장의 모든 과정에 참여하여 지켜봤다.

 

그는 “세계 정세의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힘을 통한 평화’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K방산은 매우 강력하고 믿을 수 있는 파트너십”이라고 말하며 경남 사천시에 본사를 둔 한 방산 중소기업을 언급했다.

▲그래픽=양진경

◇”K방산은 믿을 수 있는 파트너”

울머 사장은 “대한민국 산업은 경제적인 동시에 매우 높은 품질의 소재를 생산한다”며 한 부품 협력사를 꼽았다. 항공기 금속 부품 제조를 전문으로 하는 ‘켄코아에어로스페이스’라는 회사였다. 방산에 특별한 관심이 없다면 생소한 수백억원대 연매출의 중소기업이다. 그러나 록히드마틴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C-130′ 수송기 핵심 부품 등을 공급하는 ‘강소기업’이기도 하다.

 

항공기는 작은 결함이라도 있으면 띄울 수조차 없고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 회사는 록히드마틴, 보잉 등 주요 기업 1차 협력사로서 초정밀 가공과 고난이도 조립이 필요한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미국 법인에서도 자체 생산해 현재 록히드마틴의 C-130, F-16, F-35 등의 항공기 부품 제작을 공급하고 있다. 울머 사장은 “방위산업에서도 경제성과 품질을 모두 갖춘 안정적 글로벌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검토하고 있다”며 “록히드마틴이 한국 산업 생태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라고 했다.

 

항공 공학을 전공한 울머 사장은 1987년 방산기업 맥도널 더글러스(현재는 보잉에 합병)에 입사해 항공 분야 엔지니어로 일하다 록히드마틴으로 옮겼다. 현재 록히드마틴의 4개 사업부 중 항공사업부 사장을 맡아 직원 약 3만5000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철통 보안으로 관리되는 록히드마틴 연구시설 ‘스컹크워크스(Skunk Works)’에서 운영 총괄 부사장을 맡아 생산·품질·공급망·시설·보안 등 모든 자원과 인프라를 책임지기도 했다.

◇공동 개발한 K방산으로 美 수출 도전

록히드마틴과 K방산의 협업은 약 40년 전,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는 록히드마틴 등 해외 방산기업이 거의 다 만들어 놓은 부품을 국내로 가져와 조립하는 초보 수준의 생산이었다. 협업 논의를 거쳐 1990년 ‘블랙호크’로 알려진 록히드마틴의 군용헬기 UH-60 생산, 1994년부터 국내 생산이 시작된 베스트셀러 전투기 F-16 등의 시작이 모두 ‘조립 생산 방식’이었다.

 

▲F-16 전투기

 

이후 급성장한 한국의 제조업 역량이 맞물리면서 절충 교역(무기 도입 대가로 기술이전 등을 받는 방식) 형태로 진화했다. 록히드마틴 등 수출 기업이 설계 기술 등을 제공하면 한국 기업이 일부 부품은 국산화하면서 생산은 전적으로 맡아 완성하는 방식이다. 협력 초기에는 애로 사항이 많았다. 울머 사장은 “초기엔 당연히 구조, 복합재, 항공 전자 분야 등 다양한 주제에서 어떻게 문제를 개선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했다”면서 “그래도 록히드마틴과 한국 방산기업은 빠른 시간 안에 신뢰를 구축해 냈다”고 말했다.

 

록히드마틴과 한국 국방부, 방산기업의 F-16 전투기 협력은 올해 30주년을 맞았다. F-16은 조립 생산을 넘어 개량형 면허 생산까지 한국이 해냈고, 이 경험의 축적이 한국형 훈련기 개발의 기반이 됐다.

 

다음 단계는 공동 개발 방식이었다. 대표 사례가 KAI(한국항공우주산업)와 록히드마틴이 진행한 T-50이다. 1991년 차기 전투기 사업인 KFP의 대상 기종으로 F-16이 선정된 뒤 우리 측은 록히드마틴 측에 훈련기 개발 기술을 이전해줄 것을 계약 조건으로 내걸어 관철했다. T-50 개발의 출발선이 됐다. 아직 100% 국산화를 위해선 넘어야 할 산들이 남아 있지만, T-50 곳곳에는 최첨단 소재로 꼽히는 탄소섬유 복합 소재, 디스플레이, 타이어, 항공전자장비 등에 K방산의 핵심 기술이 녹아 있다.

 

울머 사장은 KAI와 공동으로 추진 중인 T-50 계열 초음속 전투기의 해외 수출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T-50을 개량한 모델은 인도네시아, 폴란드 등으로 수출 계약을 이미 따냈고 지금은 최대 20조원이 넘는 미 해군 훈련기 사업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울머 사장은 “세계에서 비슷한 파트너십 기회는 많지만, 한국 그리고 KAI 협력은 서로 윈윈 할 수 있었던 특별한 파트너십”이라며 “미 해군뿐 아니라 미 공군, 캐나다 공군, 호주 공군을 포함해 다양한 국가의 T-50에 대한 자료요청서(RFI)에 회신했다”고 했다. 항공 분야뿐 아니라 해상전력의 핵심인 이지스함에서도 HD현대중공업의 건조기술과 록히드마틴의 이지스 전투체계를 결합해 제3국에 함정 수출을 공동 추진하고 있다.

◇”기술 주던 韓에서 새 접근법 배워”

울머 사장은 앞으로 세계 각국이 ‘힘을 통화 평화’ 확보에 나서면서 글로벌 방산시장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K방산과 ‘차세대 플랫폼 통합’, 그리고 ‘첨단 소재’ 분야에서 협력 중요성을 강조했다. 울머 사장은 “과거에는 기술 이전으로 한국 방산기업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며 “현재는 한국의 항공우주 산업이 기술, 방법론 측면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록히드마틴이 (한국에서) 배울 점도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투명성이 보장되는 양측 파트너십이 가장 많은 배움이 일어나는 지점”이라고 했다.

 

울머 사장은 “한국이 록히드마틴으로부터 도입한 F-35, 록히드마틴과 함께 개발한 한국형 전투기 KF-21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는지, 이러한 플랫폼을 항공 및 우주 시스템과 어떻게 통합하는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준의 기술을 공유할 수 있고 어떤 기술을 연구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두 중요하다”며 “로드맵을 그릴 수 있도록 양국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기술 발전에 따라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하는 소재도 등장할 것”이라며 “이런 정보와 기술을 최대한 많이 배우고 공유하고자 한다”고 했다.

☞록히드마틴

1995년 방산기업 ‘록히드’와 ‘마틴 마리에타’ 합병으로 출범한 세계 최대 방위산업체. 현존 최강 전투기 F-22(랩터), 이지스 전투 체계, 패트리엇 미사일 등을 생산한다. 2023년 말 기준 수주 잔액은 역대 최대인 1610억달러(약 221조원)를 기록했다.

#[K방산 신화를 만든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