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 스카이데일리 김기삼 변호사 2024
△ 미 프린스턴 대학 졸업
△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시카고 트리뷴지(Chicago Tribune)·프랑스 파리의 IHT(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를 비롯해 50년간 한반도 문제 전문 최고령 현역 기자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2024.11.04
[21] 헤르스빅 방북… 노벨상 공작 ‘밑밥 깔기’
“북측에 부담 줄라” 판문점 콘서트 구체적 논의는 나중으로
“김용순에 타진해 달라” 윤이상 처 이수자 통해 ‘차선책’ 마련
세 번째 방한 헤르스빅, 김한정과 평화 콘서트 논의
1999년 10월, 헤르스빅은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 회의) 참석차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헤르스빅은 김한정과 만난 자리에서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노벨상 위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한 문화적 접근 방법을 다각도로 논의했다.
특히 김한정과 헤르스빅은 판문점 비무장지대(DMZ)에서의 평화 콘서트 개최를 위해 북한을 설득하는 방안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또한 평화 콘서트와 별개로 평화를 상징하는 조각 전시회를 판문점 등에서 개최하는 구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헤르스빅이 이끌고 있는 월드뷰 인권재단은 노벨평화상 시상식을 비롯해 여러 차례 국제적인 행사를 개최한 바 있었다. 특히 이 단체는 매년 노벨평화상 수상식 후에 진행되는 노벨 콘서트 주관 단체로도 유명하다. 월드뷰 인권재단은 노벨평화상을 배경으로 문화를 통한 인권 신장이라는 기치 아래 엄청난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단체였다.
김한정은 김대중의 노벨상 사냥을 위해서는 헤르스빅을 통해 이 단체가 가지고 있는 막강한 문화적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헤르스빅 방북… 윤이상 앙상블의 노르웨이 공연 추진
헤르스빅은 2000년 1월 초, 노르웨이 작곡가 닐스 헨릭 아쉐임(Nils Henrik Aasheim)을 대동하고 평양을 방문하기로 계획했다. 헤르스빅은 자신의 방북 일정에 맞춰 뉴욕에 살고 있는 윤이상의 딸 윤정도 베이징에서 만나 함께 평양으로 들어가기로 합의해 놓았다. 이번에 그들이 평양을 방문하는 목적은 윤이상 앙상블의 노르웨이 초청공연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고, 판문점에서 남북한 합동 평화 콘서트와 평화 상징 조각 전시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북측에 제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슬로 대사관의 국정원 파견관 박노용은 헤르스빅이 평양을 방문하기 전에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그는 헤르스빅에게 “북측의 감시 및 인물 평가에 대비해 방북 중 언행에 조심하고, 특히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을 삼가며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게재된 인쇄물을 함부로 다루지 말 것” 등을 당부했다.
박노용, 헤르스빅에 방북 시 처신 조언
또한 그는 헤르스빅에게 카메라를 지참할 것을 권유하고, 방북 시 북측 접촉자들에게 줄 선물로 위스키·말보로 담배·스타킹·스카프·넥타이 등을 준비하도록 조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북한 내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메모해 오슬로에 돌아온 후 자신에게 설명해 줄 것”도 특별히 부탁했다.
헤르스빅 일행은 2000년 1월6일 스타방거를 출발, 1월 8~11일 평양을 방문한 다음 1월13일에 오슬로로 돌아왔다.
헤르스빅을 환대한 북한 당국
일행은 평양에서 북한 측과 이번 5월 윤이상 앙상블 공연팀의 노르웨이 공연에 합의했다. 북측은 공항 입국 시에 VIP 통로를 이용하도록 하는 등 방북단 일행을 매우 환대했다. 또한 이들이 평양에 도착하자 최신형 벤츠 승용차를 내주고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안내원이 항시 수행하게 했다.
일행은 윤이상 음악연구소와 묘향산에 있는 김일성 기념관을 방문하고 청소년 공연을 관람했으며 윤이상의 처 이수자의 평양 자택도 방문했다.
방북의 또 다른 목적이었던 판문점 평화 콘서트 및 평화 상징 조각 전시회 개최 건은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성숙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행사의 목적이 남북한의 화해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관한 세계의 관심을 높이는 것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밑밥 깔기’라는 것을 그때쯤이면 북측도 이미 눈치채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헤르스빅이 북한에서 돌아오자마자 국정원 파견관 박노용은 헤르스빅의 방북 결과에 대한 장문의 보고 전문을 본부에 띄웠다. 박노용의 보고서는 마치 헤르스빅이 박노용의 개인 심부름으로 평양을 다녀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 2002년 3월8일 경남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창원시향이 개막 연주회 첫 작품으로 윤이상의 ‘서주와 추상’(1979년작)을 연주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4월 축전 행사에 헤르스빅 공식 초청
보고서에 의하면 헤르스빅과 헨릭 아쉐임 작곡가협회장 그리고 윤이상의 딸 윤정은 평양 보통강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들 일행은 북측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비록 김용순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김’이라고 불리는 당 간부와 최창일 윤이상 음악연구소장과 면담할 수 있었다. 이들 북측 인사는 그해 4월에 열릴 축전 행사에 헤르스빅을 공식 초청했다.
헤르스빅은 북한이 혹시나 거액의 사례비를 요구할지 몰라 은근히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북측은 “공연 자체에 큰 의의가 있다”며 “수천 달러 정도 규모의 공연비만 받아도 무방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대신 북측은 공연단 14명의 왕복 항공료와 체제비를 월드뷰 측이 부담해 줄 것을 요구했다. 베르겐 공연 시 공연 내용을 CD에 라이브로 녹음해 줄 것도 원했다.
헤르스빅 일행은 북측과 판문점 평화 콘서트와 조각 전시회 건은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못했지만 차선책을 마련해 두었다. 그는 이수자에게 그러한 계획을 설명하고, 그녀가 나중에 김용순 등에게 간접 전달하는 방안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은 “처음 방북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거론하면 북측이 부담을 느껴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윤정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헤르스빅, 평양 고급 주택가의 이수자 집 방문
이수자는 방문객 일행을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평양 고급 주택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환대했다. 그녀는 이들에게 “이 집은 김일성 주석께서 하사해 주신 집”이라며 자랑했다. 물론 방문객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행사 요원들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감시하고 있으며, 자신이 외부인들과 나눈 대화는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모두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노용의 전문은 헤르스빅이 평양에서 윤이상의 처 이수자와 그의 딸 윤정과 대화한 내용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윤정은 남북한 판문점 평화 콘서트 개최 등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던 반면, 이수자는 큰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추진할 의욕을 보였다. 또한 윤정이 “조각 전시회 장소로는 판문점보다 평양이 좋겠다”는 견해를 보인 데 반해 이수자는 “판문점이라도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또한 전문은 “이들의 2000년 1월 방북은 북한과의 연결 채널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방북으로 “북한 공연단의 노르웨이 공연이 사실상 확정되었으며, 북한 측이 헤르스빅을 4월 봄 행사에 초청함으로써 추가 방북 여건이 조성되는 등 성과가 있었다”고 썼다. 이를 통해 판문점 콘서트와 조각 전시회 개최를 보다 긴밀히 협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기대감을 나타낸 것이다.
윤이상 통영음악제·판문점 평화 콘서트 연계 계획
박노용은 이어서 “헤르스빅이 이번 방북 결과를 분데빅 수상에게 직접 설명하고 별도 보고서를 작성하여 노르웨이 외무부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보고했다.
헤르스빅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노용은 헤르스빅에게 전화해서 4월 중 재방북에 대해 물었다. 그는 헤르스빅의 재방북을 적극 권유하면서, 윤이상 앙상블 초청 공연의 진전 사항에 대해 체크했다. 그러면서 그는 2월18일부터 20일간 통영에서 개최될 예정인 윤이상 기념 통영국제음악제의 추진 동향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이 행사가 남북한 판문점 콘서트 개최에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22] “김용순과 담판”… 남북 콘서트 팔 걷은 헤르스빅
“방북하면 직접 협상 채널 만들겠다” 안달하는 김남용 달래
“안 되면 노벨평화상 콘서트에 윤이상 앙상블·조수미 초청”
스폰서는 노르웨이와 한국에서만 구하겠다…
박노용은 그다음 달에도 헤르스빅과 만나 윤이상 앙상블의 노르웨이 초청 공연에 관해 협의를 이어 갔다. 헤르스빅에 의하면 그때까지 얘기되기로는 북한 측의 오케스트라 단원·임원·윤이상의 처 이수자 등 총 17명의 공연단이 노르웨이를 방문하고 베르겐과 스타방거에서 5월 하순 1주일간 머물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르웨이 월드뷰 재단 측에서 아직 예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최종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산은 약 10만 달러인데 이 중 3~4만 달러를 아직 확보하지 못해 스폰서를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헤르스빅은 계획의 성격상 “노르웨이와 한국에서만 스폰서를 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노르웨이 공연을 준비하던 중에 헤르스빅은 실망스러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실내악단 단원 중 제1바이올린 주자 한 명이 빙판에 넘어져 다리를 다쳐 당분간 연주를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부득이하게 당분간 노르웨이 공연 일정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헤르스빅은 “덕분에 공연 준비에 다소 시간적 여유가 생겨 다행”이라면서 “4월 방북은 계획대로 진행해서 판문점 콘서트 추진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협의를 이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박노용은 그 후에도 두어 차례 오슬로로 출장 나온 헤르스빅과 계속 만나 상의했다.
박노용 귀임, 김남용 파견관이 노르웨이로
2000년 3월, 그동안 노르웨이에서 노벨상 공작을 담당하던 박노용이 서울로 귀임하고 후임 김남용 파견관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2000년 3월17일, 오슬로 시내 테아터 카페 식당에서 박노용과 김남용은 스타방거에서 오슬로로 출장 나온 헤르스빅과 오찬을 같이 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그동안 헤르스빅이 이수자와 통화한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그때까지 추진해 온 윤이상 앙상블의 노르웨이 공연 진척 사항을 점검하는 등 판문점 남북한 평화 콘서트 개최에 관한 동향을 파악했다.
이날 박노용은 본부로 보낸 마지막 전문에서 “금번 헤르스빅과의 회동은 신·구 파견관의 이임 인사 및 부임 인사를 겸해 실시했다”고 전하면서 “헤르스빅에게서 새로 부임한 김남용과 계속 긴밀히 접촉을 유지, 협조해 나갈 것을 약속받았다”고 보고했다.
박노용은 또한 “앞으로 헤르스빅의 4월 중 방북을 반드시 추진하여 북측과의 접촉 채널을 보다 강화함으로써 판문점 남북한 콘서트 건 추진을 위한 여건을 조성토록 유도하겠다”는 다짐을 전송했다.
박노용이 서울로 귀임한 이후 김남용은 4월5일·7일 양일간 헤르스빅과 연쇄 전화 접촉을 가진 데 이어 4월10일에는 직접 만났다. 당시 헤르스빅은 노르웨이 외무차관과 면담하기 위해 오슬로를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이 2000년 9월14일 청와대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남 특사인 김용순 비서와의 오찬에 앞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헤르스빅을 대북 비선 라인으로
김남용은 헤르스빅이 조만간 방북해 판문점 콘서트 추진 등에 관한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전하면서, 향후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헤르스빅의 활용 방안에 대해 본부에 상세하게 보고했다.
김남용은 보고서에서 “헤르스빅이 방북하면 윤이상의 처 이수자 등 기존 접촉 인물들을 활용, 김용순 등 북한 고위층과의 직접 접촉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향후 효과적인 대북 업무 추진에 도움이 될 것임을 강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헤르스빅이 김용순과 친분을 쌓는 데 성공할 경우 헤르스빅을 대북 비선 라인으로 활용하겠다”는 복안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문화 교류를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 분위기에 기여한다는 차원에서, 끈기를 갖고 북한 측을 설득, 판문점 콘서트 건이 반드시 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겠다. 헤르스빅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 등 최근 우리 정부의 대북 이니셔티브에 대한 북한 측의 반응을 관심을 갖고 수집해 주도록 요청할 계획이다.”
김용순과의 직접 채널 개설 약속한 헤르스빅
2000년 4월10일, 오슬로 시내 그랜드 카페에서 김남용은 다시 헤르스빅을 만나 판문점 콘서트 추진 계획 등 그때까지 진행된 방북 사업을 재점검했다. 둘은 대북 협상 시 유의점과 대처 방안 등을 화제로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특히 이 자리에서 헤르스빅은 “김용순과의 직접 접촉 채널을 개척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도 매우 중요한 문제로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니 차기 방북 시 유념하여 추진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김남용은 같은 달 26일 다시 한 번 헤르스빅과 통화했다. 헤르스빅은 “며칠 전 평양의 이수자와 통화했으나 자신의 방북 문제 및 윤이상 앙상블의 노르웨이 공연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협의를 하지 못했다”면서 “금주 중으로 이수자· 윤정과 다시 통화하여 윤이상 앙상블의 노르웨이 공연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였다.
“남북 관계가 당초 지난 1월 방북했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윤이상 앙상블의 노르웨이 공연·남북한 판문점 콘서트 등의 구상이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북측도 확실하게 입장 정리를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르스빅의 노벨평화상 콘서트 남북 합동공연 구상
김남용과 헤르스빅은 5월4일 오슬로 시내 블롬(Blom) 식당에서 다시 만나 그동안 협의해 온 문제들을 다시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헤르스빅은 “김대통령의 남북 화해 프로세스를 문화적 측면에서 지원한다는 차원에서 윤이상 앙상블 노르웨이 공연 및 판문점 남북한 콘서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면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남북한 관계자들과의 협의를 통해 계속 추진해 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여의치 않을 경우 12월11일 오슬로 시내 스펙트럼(Spectrum)에서 개최될 노벨평화상 콘서트에 윤이상 앙상블과 조수미를 포함해 한국의 적절한 연주단을 초청해 합동 공연하는 방안도 생각 중이라고 복안을 피력했다.
이렇게 헤르스빅의 방북 문제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김남용과 헤르스빅은 만남을 계속 이어 갔다. 2000년 5월23일, 헤르스빅은 김남용에게 5월 말~6월 초에 서울을 방문할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서울에서 특히 박권상 KBS 사장과 오페라 가수 조수미를 면담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이틀 후인 5월25일, 이 둘은 오슬로 그랜드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전문 보고에서 김남용은 헤르스빅의 이번 서울 방문이 판문점 콘서트 진전 사항을 점검하고 곰리(Gommly)의 조각품을 전시할 장소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본부에서 헤르스빅이 박권상· 조수미와 면담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건의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 내부의 변화
한편, 그 사이 아·태민주지도자회의 내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김세웅 사무총장이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하게 되자 이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것이다. 이로써 김세웅은 사무총장 자리를 내놓았다. 전임 사무총장이었던 김상우도 총선에서 재선에 실패했다. 이런 사정으로 김상우가 다시 사무총장으로 복귀했다.
다음 해인 2001년 8월, 김세웅은 자신이 원래 소속됐던 외교통상부로 되돌아갔다. 이때 외교부 내에서는 “정치권으로 떠났던 사람을 왜 다시 받아 주느냐”는 특혜 채용 시비가 일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김 과장이 아세안 지역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 등 대외관계에 관한 중요한 활동을 많이 하고, 박사학위도 갖고 있는 등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 특채했을 뿐 정치적 배경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발표는 오히려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걸 자인한 꼴이 돼 버렸다. 이럴 때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23] 이산가족 상봉 참관 본데빅… 노벨상 ‘최고 우군’
노르웨이 언론 핫이슈로 보도… 방한 이끈 김한정 전략 ‘적중’
1001년 총리로 재선… DJ와 정상회담 등 각별한 관계 유지
남북정상회담 성사… 다급해진 공작팀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노벨상 공작팀에게는 갑자기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노벨상 수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마지막 급피치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김한정으로서는 노르웨이의 현장을 방문해 분위기를 점검하고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2000년 6월24일, 그는 황급히 노르웨이로 날아가 3일간 머물렀다. 그의 일곱 번째 오슬로 방문이었다. 그동안 ‘풀방구리에 쥐새끼 드나들 듯’ 오가던 오슬로였지만 이번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출장을 떠나면서 그는 노르웨이 파견관 김남용에게 숙소 예약 등 제반 편의 제공을 요청했다. 그는 또한 김남용에게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중에서 현직 재임 기간 중 수상한 사례를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때 김한정의 오슬로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스톨셋 부위원장과 룬데스타드 사무총장을 만나고 돌아갔을 것으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루네 헤르스빅 월드뷰 인권재단 사무총장과도 만나 뭔가 중요한 협의를 했을 게 틀림없다. 노벨위원회에 임팩트 있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을 것이다.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 같은 정계 거물이 서울을 직접 방문해 뭔가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다는 데 서로 공감하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불발된 헤르스빅의 방북 계획
한편, 2000년 7월에 들어서자 헤르스빅의 방북 계획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물 건너가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헤르스빅도 이러한 상황 변화에 맞추어 판문점 남북한 콘서트 계획을 접는 대신 서울에서 8·15 남북한 콘서트를 개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헤르스빅은 7월14일 김남용에게 전화하여 “8·15 서울 콘서트는 클래식 콘서트로 개최하기로 했기 때문에 외국 연예인들은 참가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유럽과 아시아 연예인들을 동원하여 남북정상회담을 경축하는 록 페스티발을 10월21일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계획이 조정되었다”고도 덧붙였다.
며칠 후인 7월19일, 헤르스빅은 김남용 파견관에게 다시 전화하여 한 가지 중요한 일정을 알렸다. 자신이 8월 초순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의 초청으로 다시 서울을 방문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쉘 엠 본데빅(Kjell M. Bondevik) 전 노르웨이 총리와 저명한 작곡가 에릭 힐레스타드(Erik Hillestad)와 동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일정이 더 구체적으로 확정되는 대로 다시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도 서울로
국정원이 2000년 8월10일 작성한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 일행 방한 행사 지원’이란 제하의 내부 보고서엔 본데빅 일행의 방한 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이에 의하면, 국정원은 본데빅 일행에게 출입국 시 VIP실을 이용하도록 조치하는 등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보고서는 본데빅의 서울 초청 목적이 “8월15일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 현장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상봉 현장으로 본데빅 일행을 안내할 사람으로는 국정원 해외공작국 동유럽과 박노용 담당관이 지목되어 있다. 박노용은 1996년 8월∼2000년 3월 오슬로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헤르스빅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 2000년 8월17일 오후 서울에서의 마지막 개별 상봉을 마친 남북 이산가족들이 만찬장과 숙소로 향하는 각기 다른 버스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이별의 아쉬움을 삭이고 있다.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의 방한 행사 하이라이트는 8월15일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 현장에 안내하는 것이었다. 연합뉴스
노벨상 공작팀이 기획한 하이라이트의 순간
이 문서에 나타난 본데빅 일행의 방한 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착 당일 라종일 전 국정원 차장과 김상우 FDL-AP 사무총장이 공항에 나가 일행을 영접한다. △첫째 날 저녁에는 청와대 관계자(김한정)가 신라호텔에서 만찬을 주최하고 △둘째 날에는 임동원 국정원장과 조찬, 정오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예방을 겸한 오찬, 이어서 오후에는 코엑스(KOEX)에서 열리는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참관하고 저녁에는 다시 FDL-AP 주최 만찬에 참석한 다음 △셋째 날에는 박지원 문화부 장관과 조찬을 하고 원광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로 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한정이 직접 결정하고 FDL-AP가 실행하고 국정원이 보조한 이 초청 행사는 김한정 노벨상 공작팀이 기획한 최고의 하이라이트 순간 중의 하나였다.
행사의 목적은 본데빅 전 총리 같은 노르웨이의 정치 거물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 데려와서 ‘눈물의 상봉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화해 평화 무드를 노르웨이의 안방에 직접 배달하려는 실로 야심찬 기획에 있었다.
보기좋게 적중한 김한정의 ‘회심의 한 방’
김한정과 노벨상 공작팀은 본데빅과 힐레스타드가 실제로 눈앞에서 본 장면을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에 직접 전달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본데빅의 눈도장으로 아예 ‘못을 박겠다’는 심산으로 추진한 김한정의 ‘회심의 한방’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이들 일행이 노르웨이로 돌아가자마자 오슬로에서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뉴스가 쏟아지고 본데빅의 상봉장 참관은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2000년 8월16일자 노르웨이 일간지 아프텐포스텐은 ‘본데빅, 강렬한 경험을 말하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같은 날 또 다른 신문 닥사비센은 ‘본데빅이 경험한 김 대통령과의 면담과 역사적인 눈물’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본데빅은 “이산가족 상봉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본인이 경험한 것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고 감동적인 술회를 했다. 또한 본데빅은 “김 대통령이 시점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으나 통일 여정이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본데빅의 깜짝 방북 계획
노르웨이로 돌아간 헤르스빅은 8월23일 김남용에게 방한을 도와준 데 대에 감사를 표하면서 “본데빅 전 총리도 방한 결과에 대해 지극히 만족하고 있다”며 후일담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월드뷰 인권재단이 본데빅과 회의를 가질 예정인데 본데빅의 방북 추진 문제를 협의하게 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김남용은 이에 대해 “본데빅 전 총리에게 방북 기회를 활용하여 북한 고위층에게 개혁개방의 필요성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국제사회의지지 분위기 등을 직접 전달하고, 필요시 북한 고위급 인사를 노르웨이로 초청하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본데빅의 방북이 계획대로 실현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언론에 노출하지 않고 비밀리에 방북했을 수도 있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DJ의 노벨상 수상이 결정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조치가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쯤이면 김정일로서도 서로 간에 거래와 정산이 이미 끝났다고 보고 더 이상의 협조는 원치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DJ, 총리로 재선출 본데빅과 정상회담
한편 DJ는 다음 해인 2001년 말 노르웨이를 방문하여 총리로 재선출된 본데빅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다음 해인 2002년 초에는 본데빅이 서울을 방문해 핑퐁 예방을 주고받았다.
이들의 서글프고 우스꽝스런 우정은 둘 다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됐다. 본데빅은 두 번째 총리를 그만둔 후 오슬로 평화인권센터의 회장으로 활동하며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을 이어 갔다. 노르웨이 루터교 목사이자 기독민주당의 당수를 지낸 이 키 큰 정치인이 그 후 DJ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는지의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24] DJ 노벨평화상 긴 여정… 1987년부터‘노크’
노벨위 “대선 출마 땐 수상 배제” 조건 정식 후보에 올려
‘4자 필승론’에 대권 승리 지나치게 집착… 수상 기회 날려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출간된 DJ의 책
1987년은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다. 선거철이면 바쁜 정치인들이 책을 낸다. 그해 연초에 일월서각이라는 출판사에선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라는 책자를 출간했다. 김대중의 연설문과 인터뷰 기사 등을 모아 펴낸 것이다. 물론 책이란 형식으로 나온 정치 선전물이었다. 그 책은 또한 ‘Philosophy and Dialogues (철학과 대화): 평화와 민주주의 만들기’라는 다소 무거운 제목의 영문판으로도 함께 출간되었다.
영문판의 서문에는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30년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1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책의 겉표지 안에도 “이는 김대중 자신은 물론이고 김대중이 자랑스럽게 섬겨 온 대한민국 국민에게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낯 뜨거운 자화자찬이고 도를 넘은 ‘자작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무렵에 이르러 김대중은 적어도 그의 정치적인 고향에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의 성인으로까지 추앙받았다. 그해 선거 캠페인에서 적어도 전라도에서만은 자신이 온 세계 지식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자랑할 만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쌓아 온 민주투사로서의 경력만으로도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에 충분히 비견될 만한 인물이라고 선전하고도 남았다.
순탄치 못했던 DJ의 정치 인생
시계를 거꾸로 돌려 김대중의 정치 인생을 잠시 되돌아보자. 야당 정치인으로 시작한 그의 정치 역정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1961년 5월, 국회의원 선거 세 번 실패 끝에 네 번째 도전한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됐지만 5.16 군사혁명으로 3일 만에 물거품이 됐다.
1963년과 1967년, 목포에서 연이어 당선되면서 유명 정치인 반열에 올랐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극적으로 4선 의원이었던 김영삼(YS)을 누르고 신민당 후보로 선출되면서 야당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결과적으로 패하기는 했지만 대선을 치르고 나자 그는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거물이 됐다.
납치 사건으로 국제적 스타가 된 DJ
1973년 8월, 도쿄에서 중정에 의해 납치되면서 그는 일약 국제적인 스타가 됐다. 그는 투옥과 가택연금과 또다시 투옥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독재와 맞서 싸우는 민주투사’로 각광받았다.
1980년 내란 음모로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국제 여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1982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잠깐 머무는 동안 아시아 민주주의의 아이콘이란 인상을 전 세계에 심었다.
DJ의 두 가지 꿈
그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정치적으로 성장한 후 노벨상에 대한 열망 또한 거대하게 부풀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윽고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될 무렵에는 그는 종종 사석에서 “나에게는 꿈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입니다”고 말하곤 했다.
▲ 1987년 일월서각 출판사에서는 김대중의 연설문과 인터뷰 기사 등을 모아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라는 책을 출간했다. 일월서각
노벨평화상을 향한 DJ의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그해 처음으로 노벨상 추천장을 제출했고, 그 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노벨위원회로 추천장을 보냈다. 2000년 12월, 대망의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무려 14차례나 똑같은 일을 되풀이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그가 노벨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3월8일자 프레시안 기사
2011년 3월8일 프레시안에는 ‘DJ는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평화상 후보였다’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김대중의 오랜 지지자였던 박경서 전 인권대사의 회고를 정리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기사는 “이런 사실을 알리는 이유는 아직도 ‘김대중은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김정일을 만났으며 금전이 영향을 주었다’는 억측이 남아 있어서다”는 친절한(?) 설명을 달고 있다.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87년 당시 박경서는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이사회(WCC)에 5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루터교 세계연합체 사무총장이자 1983년부터 노벨평화상 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스톨셋 주교와 절친한 사이가 됐다. 박경서는 ‘김대중의 옥중 서신’ 등의 번역본을 스톨셋에게 전달하면서 김대중을 알리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해 박경서와 많은 국내외 인사들이 김대중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고, 노벨위원회는 “김대중이 대선에 출마하면 수상자가 될 수 없다”는 조건으로 그를 최종 3인의 후보 압축명단(Shortlist)에 올렸다. 박경서는 서울 출장길에 DJ와 동교동에서 조찬을 함께 하면서 노벨위원회의 입장을 전했다. 이때 DJ는 숙고 끝에 대통령에 더 뜻이 있어서 평화상은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1987년 8월14일, 박경서는 서울에서 스톨셋 목사를 통해 최종 심사위원회에 김대중의 뜻을 통보했다.”
결국 1987년도 노벨평화상은 중앙아메리카의 평화를 이룬 공로로 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현실주의자 DJ의 선택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벨위원회는 통상 매년 8월15일에 압축명부를 작성한다. 그런데 김대중은 압축명부 작성 직전에 포기 의사를 전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최종 압축명부에 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경서의 기억회로에 오류가 있었든지 아니면 과장이 더해졌던 것 같다.
박경서뿐만 아니라 DJ의 또 다른 측근들도 이와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 DJ 처조카 이영작은 사석에서 김대중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실 그때 김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를 YS에게 양보했더라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겁니다. 대통령도 사석에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집권해서 민주화를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입니다.”
이영작의 말처럼 이때 만약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후보를 양보했더라면 군부 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5년 일찍 민간인 정부를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YS와 DJ라는 두 야당 지도자가 분열함으로써 민주화 세력도 양분되고 말았고, 이 때문에 정권 교체에 실패한 것이다.
‘4자 필승론’ 과신한 DJ의 실책
이때 김대중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네 명이 다 후보로 나오면 호남 고정표가 있는 김대중이 이긴다”는 이른바 ‘4자 필승론’을 과신하고 일부 민주화 세력의 자신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결국 그로서는 권력도 놓치고 명예도 잃는 최악의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 후에도 DJ는 노벨평화상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매년 강요하다시피 해서 각계로부터 추천장을 받았다. 그의 노벨평화상 추천은 아예 연례행사가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한 번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떠오른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1993년도였다.
‘아름다운 은퇴’와 동시에 정계 재진입 준비
1992년 대선에서 패한 후 그는 소위 ‘아름다운 은퇴’를 했다. 그리고 그해 초부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6개월간 은신하고 있었다. 그때의 정계 은퇴 선언도 그의 긴 거짓말 목록의 하나가 된 에피소드였다. 실제로는 ‘YS로부터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잠시 도피한 것이었다.
케임브리지에서의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간담회에서 DJ를 만난 유학생 중에는 “한반도 정세와 독일 통일을 주제로 연설하면서 한국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평화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DJ는 정계에서 은퇴한 것이 아니라 정치권에 재진입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25] ‘평생 라이벌’ YS·DJ… 노벨상도 이전투구
정계 돌아온 DJ, 노르웨이 들렀다 ‘정치자금 루머’에 곤혹
YS 측에서 음해 작업… DJ 이미지 흠집 내기 조직적 공작
DJ, 수상 가능성 타진 위해 직접 노르웨이로
1993년에 김대중(DJ)은 방문학자 자격으로 영국 런던의 케임브리지 대학에 반년간 머물렀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해 직접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아무도 그가 런던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정계를 은퇴한 마당이니 훨씬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해 그는 또다시 최종 명단에 들었다. 하지만 그해에 DJ에게는 운이 따라 주질 않았다. 갑자기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였다.
그해의 국제 뉴스는 온통 남아공 소식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결국 그해 노벨상은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고 남아공에 민주주의의 초석을 깐 공로로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과 프레드릭 디 클라크 남아공 대통령에게 공동으로 돌아갔다. DJ로서는 또다시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이듬해를 기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태재단과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설립
1993년 6월, DJ는 서울로 돌아왔다. 1993년 7월14일, 그가 반년 전의 은퇴선언을 뒤집고 정계 복귀를 전격 선언한 것이다. 정치권이 발칵 뒤집어졌다. ‘영일만 왕소금’ 이기택 민주당 대표가 정면으로 반발했다. 이부영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도 “권력에 눈먼 사람”이라며 맹비난했다.
DJ는 로키(low-key)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한편 정치권 재진입을 위한 발판으로 아태평화재단(아태재단)을 만들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실은 정계 복귀를 위한 교두보였다.
그는 또한 아태재단 산하에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도 만들었다. 이 단체는 민주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맞춤 도구였다. 아시아 지도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물들과 연대함으로써 자신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속셈이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사무총장은 경희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온 김상우 외교특보에게 맡겼다. 김상우는 경상도 출신에 영어가 가능하다는 점이 고려됐을 것이다. 2년 후에는 김상우에게 국회의원 뱃지를 달게 했다. 국회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DJ는 이 두 단체를 통해 여러 명목의 국제 세미나와 회의를 자주 열었다. 자신을 아시아와 세계의 민주 지도자로 포장하기 위한 이벤트성 행사들이었다. 이러한 사업에는 특히 경희대학교 조영식 총장의 보이지 않는 후원이 있었다.
DJ의 집안과 경희대학교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의 두 아들이 이 학교 졸업생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기자 출신으로 한때 DJ의 최측근이었던 양준용 씨는 “고교 시절 김홍일은 공부와 담을 쌓은 문제아였는데, 내가 친척인 경희대 관계자를 통해 뒷문으로 입학시켜 줬다”고 증언했다.
▲ 김대중 亞太평화재단이사장이 1994년 11월17일 서울에서 열리는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언론 설명회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1994년, 노벨상에 대한 DJ의 기대는 한층 더 커졌다. 그 전해의 수상 결과는 그의 1994년의 수상 가능성을 더 높여 주는 것으로 보였다. 1994년 1월 말, 노벨평화상 추천서가 마감되기 직전 김대중은 또다시 10일 일정으로 직접 북유럽 3개국을 순방했다. 그가 북구 여행에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만났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현지 분위기를 파악하고 노벨상 관계자를 만난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일 것이다.
리콴유 싱가포르 수상과의 공개 논쟁
그해에 DJ는 아시아 민주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구축하기 위해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를 이용했다. 그 잡지를 통해 리콴유 싱가포르 수상과 공개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해 봄, 리콴유 수상은 “오랜 유교 문화의 전통과 권위주의 통치로 서구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동아시아에는 적용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해 가을, DJ는 “서구 민주주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통하는 만큼 아시아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다분히 노벨위원회를 겨냥한 전략적인 코멘트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해 역시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또다시 넘기 어려운 강력한 경쟁자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1994년 노벨평화상은 중동의 평화 정착에 공을 세운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와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Shimon Peres)와 이샤크 라빈(Yitshak Rabin) 세 사람에게 공동으로 돌아갔다. 아마 빌 클린턴 미 대통령도 공동 수상 대상에 고려는 됐을 것이다.
해마다 추천서를 써 준 사람들
이즈음 해마다 DJ를 위해 노벨상 추천서를 써 준 사람 가운데는 제프리 톰슨(Jeffery Thoomson) 뉴질랜드 국민당 당수‧개리 우다드(Garry Woodad) 호주 멜버른대 교수‧톰 포글리에타(Tom Foglietta) 미연방 하원 의원‧윌리엄 커(William Kerr) 가톨릭계 대학 총장‧조지 토튼(George Totten) 남가주대 교수 등이 있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보수 정치인들의 추천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주로 교수들에게 추천장을 쓰게 한 것이다.
DJ 노벨상 수상 민주당 차원에서 추진
1995년 들어서는 아예 민주당 차원에서 DJ의 노벨평화상 추천 작업을 벌였다. 정당 차원에서 후보를 추천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후보 추천서 작업은 민주당 현직 의원이었던 남궁진 아태평화재단 이사가 도맡았다. 그해부터 DJ의 추천 공적서에는 아태민주지도자회의 결성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신장과 평화 증진에 기여한 그의 공로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해에는 뜻밖에도 아주 가까운 데서 경쟁자를 만났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현직 대통령이기도 한 김영삼(YS) 역시 노벨상을 향한 꿈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해외에서 DJ의 후보 추천 작업을 하던 관계자에 의하면 이때가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한다.
뜻밖의 경쟁자
“1995년 경이었어요. 노르웨이를 방문한 길에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인 룬데스타드 교수를 만났더니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DJ도 부패하지는 않았는지, 재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지는 않았는지를 묻는 거예요. 근거 없는 음해성 루머라고 해명하긴 했지만 상당히 곤혹스러웠어요.”
아마도 익명의 이 관계자는 이영작 박사로 보인다. 김영삼정부가 DJ의 노벨상 수상을 방해했다는 의혹은 앞서 설명한 대로이다. 노르웨이 주재 한국 대사관를 통해 DJ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작업이 이뤄졌다. 당시 노르웨이 대사는 권영민이었고, 국정원 파견관은 최종흡이었다. 이들은 YS의 노벨상 작업을 위해 현지에서 발벗고 뛰었다. 그 과정에서 DJ의 노벨상 수상 저지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98년 초, 권영민은 김대중정부의 의전수석으로 발탁됐다가 이때의 행적 때문에 낙마했다. 말레이시아 참사로 나가 있던 최종흡도 소환 명령을 받고 감찰실 조사를 받은 끝에 국정원에서 옷을 벗었다.
이전투구 속 노벨상은 엉뚱한 데로
이렇게 YS와 DJ가 집안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사이 1995년 노벨평화상은 듣도 보도 못한 엉뚱한 데로 가 버렸다. 그해의 노벨평화상은 핵무기 감축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은 조지프 로트블랫(Joseph Rotblat)과 과학과 국제 정세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s on Science and World Affairs)에 주어졌다.
조지프 로트블랫은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반핵운동가로 변신한 폴란드 태생의 영국 핵물리학자로 핵무기 폐기 운동에 앞장서 온 인물이고, 퍼그워쉬 회의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꿈꾸는 단체였다. 마땅한 후보를 찾을 수 없는 해에는 핵무기 관련 단체나 인물에게 상을 주는 것이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오랜 전통이다.⊙
[26] 본데빅 손잡은 DJ… 세계적 민주지도자 야심
미얀마 민주화 지지 앞장… 아시아 연대 확산 통해 위상 높여
1997년 대선 승리 후 본격 노벨상 사냥… 김한정에 특별 임무
DJ의 대리인으로 활약한 김상우
연이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노벨상을 향한 김대중(DJ)의 집념은 더해만 갔다. 그는 특히 아시아 민주 지도자들과의 연대 사업에 주력했는데, 그중에서도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사업에 집중했다. 김상우가 이때 DJ의 충실한 대리인 노릇을 했다.
1995년 초 무렵 김상우는 가택연금 중인 아웅산 수치를 만나 DJ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에는 “아태민주지도자회의가 아웅산 수치와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수치는 1995년 7월, 6년간의 연금에서 풀려났다.
이듬해인 1996년 4월에 있었던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상우는 당선되었다. DJ가 자신의 분신 노릇을 할 그를 의도적으로 국회에 넣은 결과였다. 국회의원 뱃지를 달자마자 그는 현역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십분 활용했다. 그는 국회 내에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의원 모임을 결성해 110명의 국회의원으로부터 연대 서명을 받았다. 그러고는 이 서명장을 들고 1996년 여름 다시 미얀마로 가서 아웅산 수치를 두 번째로 만났다.
1997년 2월, 그가 세 번째로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미얀마 정부가 그를 위험인물로 분류하여 공항에 내리자마자 체포해 강제 추방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김상우가 오히려 노리던 상황이었다.
다음 날인 1997년 2월8일, 그는 방콕에서 30여 명의 외신기자를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의 회견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에도 그는 방콕과 서울을 오가며 미얀마 관련 세미나를 개최했다.
PD 버마와 손잡은 아태민주지도자회의
당시 전 세계적으로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는 단체로는 아태민주지도자회의와 1996년 노르웨이의 마그네 셀 본데빅이 조직한 PD 버마(Promoting Democracy in Burma)가 꼽혔다. PD 버마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전 세계 민주 지도자들의 네트워크였다.
1998년 8월, 국회의원이자 아태민주지도자회의의 이사였던 김상우는 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 등 PD 버마 회원들의 만장일치 결정으로, 이 단체의 공동의장으로 추대됐다. 이후 아태민주지도자회의와 PD 버마는 사실상 자매 단체처럼 움직였다.
본데빅의 정치적 계산으로 탄생한 PD 버마
노르웨이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노벨평화상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평화와 인권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본데빅의 PD 버마도 다분히 정치적 계산에서 창설된 것이다. PD 버마를 창설한 이듬해에 본데빅이 노르웨이의 총리로 등극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DJ 또한 노르웨이의 이러한 정치‧사회적 배경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두 단체는 1997년 10월 17‧18일 양일간 세계의원연맹(IPU) 총회가 열린 자카르타에서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과 경제지원 문제를 연대하여 여론화했다.
▲ 필리핀 시위자들이 2009년 7월 31일 마닐라의 마카티 금융가 주재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가택연금 상태의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의 사진을 들고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DJ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활동을 통해 인류 보편의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했다. 그는 이런 활동들이 전 세계 민주 지도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격상시켜 줄 것으로 확신했다. 그는 이제 본데빅의 PD 버마와 손을 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민주 지도자로 발돋움하려고 계산한 것이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본데빅이 총리로 있는 북유럽의 이 나라가 매년 수여하는 노벨상 메달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노벨상을 향한 DJ의 집념
1997년 9월1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 DJ는 한국의 방송 토크쇼에 출연해 “나는 노벨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통일을 이루고 우리 국민을 위해 노벨상을 받을 것입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선에서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제 남은 또 하나의 꿈, 노벨상 사냥에도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DJ에겐 노벨상 사냥을 나설 모든 여건이 갖춰진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방법론뿐이었다. 그가 이 대업을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까 고민하지 않았을 리 없다. 모든 일은 자신이 주도하겠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손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DJ에겐 계륵과도 같은 존재 국정원
국정원에 눈이 갔지만, 평생 자신을 감시해 온 그들을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국정원은 ‘쓰자니 찜찜하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노벨상에 관한 한 국정원은 이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었다. 전두환정부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고, YS 시절에는 실제로 공작도 벌였다. DJ가 노벨상을 받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국정원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DJ의 노벨상을 저지해 온 경험으로 그 반대 방향에 대해서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국정원은 전 세계의 상황을 분석하고 종합하고 그에 대비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국정원의 촘촘한 정보망은 노벨상 수상에 필요한 정보의 신속한 수집을 가능하게 했다. 북유럽 현지에도 경험 많은 요원이 파견 나가 있었다. 거기에는 필요하면 평양과도 테이블 아래로 대화할 수 있는 라인이 있었고, 대통령의 지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드는 충견들이 있었다. 소리 소문 없이 일을 처리하기엔 ‘딱’ 맞는 곳이었다.
고민 끝에 DJ가 내린 결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국정원에 넣어 그를 통해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공보비서 출신인 김한정을 국정원에 심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다.
국정원에 김한정을 심기로
김한정이 직접 작성한 ‘노벨평화상 추천 및 심사 과정’과 ‘노벨평화상에 관한 전략적 접근’이라는 두 건의 문서엔 노벨평화상의 후보 추천과 심사 과정이 자세히 정리돼 있다. ‘노벨평화상에 관한 전략적 접근’에는 전략적 접근을 위한 명제와 추진 가능한 분야가 추가로 담겨 있다.
이들 보고서에 의하면 “노벨평화상을 심사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노르웨이 의회가 임명하는 5인으로 구성되며 노르웨이 정부나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완전 독립기관이다. 위원의 임기는 6년으로 재선출이 가능하며 반드시 노르웨이인일 필요는 없으나 대부분의 경우 노르웨이 국적 소유자로 구성되어 왔다.”
노벨상 심의 과정 분석한 김한정의 보고서
“노벨연구소 소장이 동 위원회의 사무장으로 봉사하고 위원회는 후보자들의 심의를 지원받기 위해 국제법‧역사‧정치경제 등의 분야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자문단을 설치하고 있는데, 1980년 이후 현재까지 4인의 자문단은 주로 오슬로 대학의 역사 및 정치학 교수이다.”
후보 추천 과정을 살펴보면 “후보자 추천서는 당해 연도 2월1일 이전 소인으로 노벨위원회에 접수되어야만 그 해의 심사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이후 접수된 후보자는 이듬해로 이월하게 된다. 후보자를 추천할 자격이 있는 인사로는 노벨위원회 전‧현직 위원과 노벨연구소 자문위원, 각국 의회 및 정부의 구성원과 국제의원연맹(IPU) 구성원, 상설중재재판소‧국제사법재판소‧상설국제평화국 등의 구성원, 정치학‧역사학 등 전공의 대학교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포함되어 있다.”
심사 과정을 보면 “5인의 위원은 사무총장의 안내에 따라 자문단으로부터 지원받은 결과를 바탕으로 비밀 심사를 수행하는데, 자문단 작업의 대부분은 위원회가 후보자로 가장 적합하다고 심의한 후보자의 압축명부(Shortlist)에 근거하여 후보자들의 자질을 검토한다. 자문단은 후보자를 평가하지는 않으나 자문단의 보고서는 위원들의 기본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수상자 결정의 중요한 자원은 위원회의 압축명부‧자문단의 보고서‧당해 연도 이전에 축적된 보고서들이다.”⊙
[27] 이번엔 동티모르 파병… 노벨상 노린 ‘파상 작전’
“추천장 써 줄 사람 필요”… 헤르스빅 소개로 호르타 포섭 나서
국내 반대에도 파병 강행… ‘행동하는 민주주의’ DJ 위상 높여
김한정의 어설픈 노벨상 사냥 전략
김한정이 작성한 ‘노벨평화상에 관한 전략적 접근’이란 문서에 들어 있는 전략적 접근을 위한 명제를 순서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서방 측의 이념, 가치 그리고 이해에 부합하는 운동 명제 필요
△평화는 원래 강자에게 유리한 것
△객관적인 업적만큼 업적을 인식시키는 것 또한 중요
△현재의 세계평화가 미국에 의해 주도된다는 사실에 기초, 노벨평화상을 위한 작업은 오슬로가 아닌 워싱턴에서 추진
△어느 특정 분야에서의 뛰어난 공적이 중시됨에 비추어 특정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며 나머지 업적은 경력 차원에서 고려
△수상의 특정 시점을 계획, 시간을 감안한 체계적 접근 필요
△국내 정치 여건을 감안, 2000년부터 매해 핵심 사안 선정 및 체계적 공략 경쟁 상대에 대한 연구도 필요
△평화협의회(Peace Counsil) 같은 비정부단체(NGO)와의 연계 필요
한편 문서가 열거하고 있는 추진 가능한 분야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남‧북한 군축안 마련
2)미얀마 사태의 중재
△평화를 위한 보다 현실적 접근
△현 미얀마 군사정권과 야당 간의 타협 유도
△이를 위해 군부와 아웅산 수지‧PD 버마와 같은 국제기구와 이해당사자 간 사전 합의 필수
△군부의 실력자를 방한 초청하여 최종 합의 도출 → 정치효과 극대화
3)탈북자 문제의 처리
△난민 지위 부여를 위한 가시적 노력 경주
4)지구적 민주주의의 이론화와 현실적 접근을 위한 대안 마련
5)동북아시아 평화협력 체제 추진
△중·일, 미·중 간의 불편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중재
△한반도 주변 강대국 간 별도의 경제협력 방안 모색
초기 전략의 오류와 한계점
이 문서에는 작성일자가 나타나 있지 않다. 내용으로 보면 김한정이 1998년,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초기의 아이디어들이다. 그런데 국제 정치질서 현실에서 볼 때 실현 불가능한 설익은 명제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미얀마 민주화 세력과 군부를 중재한다든지, 미·중, 일·중 관계를 중재하겠다는 발상은 언어도단에 가깝다.
평화협의회는 냉전 시대에 옛 소련이 만든 단체로 미연방수사국(FBI)이 스크린하는 단체다. 특히 “노벨평화상을 위한 작업은 오슬로가 아닌 워싱턴에서 추진한다”는 발상은 오판으로 드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되었다.
이 문서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DJ의 노벨상 노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정표들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동티모르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 김한정의 초기 문서에 동티모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가 1999년 2월 헤르스빅을 만나기 이전에는 동티모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 1999년 9월13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김대중(오른쪽 네 번째) 대통령 등 각국 정상이 보도진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노벨상 수상자를 포섭하라는 헤르스빅의 꿀팁
DJ의 노벨평화상 추천서는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가 써 줬다. “노벨상 수상자의 추천서가 노벨위원회에 효과가 있다”는 꿀팁을 전수해 준 이가 바로 헤르스빅이었다.
실제로 2000년도 추천 때에는 김한정은 노벨상 수상자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제까지의 실패를 분석한 결과, 수많은 저명인사의 추천서는 있었지만 정작 기존 노벨상 수상자의 추천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노벨 클럽 안으로 데려가 소개시켜 줄 이른바 ‘대부(God Father)’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관건은 어느 수상자를 꼬셔서 추천서를 받는가 하는 문제였다. 김한정이 꼽은 수상자 추천인 후보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아웅산 수치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호세 라모스 호르타 동티모르 민주화운동 지도자 등이었다.
동티모르로 눈 돌린 공작팀
이들 가운데 김한정이 주목한 인사는 호세 라모스 호르타였다. 그는 카를로스 벨로 주교와 함께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해 싸운 공로로 1996년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서태평양과 인도양 사이에 있는 동티모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이었다. 당시 동티모르는 아직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김한정은 동티모르의 이러한 절박한 사정에 착안했다. 그들의 궁박한 처지를 잘만 이용한다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
1999년 하반기에 들어 김한정의 동티모르에 관한 활동이 부쩍 늘어났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한정은 1999년 7월 방콕에서 열린 PD 버마 회의에서 헤르스빅의 소개로 호르타를 처음 만났다. 둘은 만나자마자 금방 의기투합했다.
이때부터 김한정은 외교부를 통해 동티모르에 대한 경제 지원을 추진했다. 인도적 지원으로 가장했지만 일종의 뇌물이었다. 국방부를 통해서는 국제평화군 편성을 서둘렀다.
동티모르 문제에 직접 나선 DJ
1999년 9월, DJ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제7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 중국의 장쩌민 등 세계 지도자들을 만나 동티모르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국제사회가 협력할 것을 제안하면서 인도네시아의 탄압을 중지시키기 위해 UN 평화유지군을 결성할 것도 제창했다. 이에 발맞추어 김한정은 상록수 부대 파견을 서둘렀다. 국제 평화를 가장한 또 다른 형태의 뇌물이었다.
그해 12월1일 호르타가 20여 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동티모르에 입국할 때 그들은 대한민국 국군의 군용기를 타고 같이 들어갔다고 한다.
동티모르의 독립운동가 호르타 방한 초청
1999년 10월25일, 김한정은 호르타를 방한 초청해 동티모르의 인권과 경제 지원에 관해 논의했다. 1999년 10월19일자 경향신문은 ‘동티모르 노벨평화상 수상자 호르타 초청해 놓고 고민’이라는 기사를 냈다.
경향신문은 이 기사에서 “이 회의를 준비 중인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가 ‘호르타로부터 참석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면서도 동티모르의 인권 문제를 거론할 경우 자칫 인도네시아 정부를 자극할 우려가 있어 고민에 빠져 있다”고 보도했다.
김한정으로서는 동티모르가 일종의 난관이었다. 노벨상 사냥을 위해서는 호르타의 추천장이 꼭 필요했지만 정작 동티모르가 우리의 국가 이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국익에 보탬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국익을 훼손할 가능성이 컸다. 동티모르를 지원하면 인도네시아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익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우선시해야 했다. 그러니 그로서는 최대한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동티모르에 상록수 부대 파견
1999년 11월에 들어 야당이 동티모로 파병에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과거 DJ가 야당 시절 해외파병에 반대했던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DJ는 상록수 부대를 파견했다. 강경하고도 단호했던 초강수 조치였다. 상록수 부대의 파견은 민주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상을 전 세계에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실제로 행동하는 민주주의의 표상 김대중’이란 눈도장을 찍은 것이다.
김한정은 상록수 부대 파견을 위해 상업용 항공기가 없는 동티모르에 군용기를 이용해 여러 번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 국군의 본연의 임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연인원 3000명이 넘는 우리 젊은이들이 모기가 우글대고 독벌레가 득실거리는 이 정글에서 개고생을 했다. 그들 중 다섯 명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급류에 흽쓸려 꽃 같은 청춘을 바쳤다. 그들의 죽음은 조용히 ‘순직’ 처리됐다. 그 병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는지 저세상에 가서도 결코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28] 호르타 “DJ 추천, 어떤 약속도 없었다” 뻔한 거짓말
추천서 대가로 1999∼2009년 경제 지원 1000만 달러 펑펑
노벨위가 밝힌 수상 이유 “동티모르·미얀마 헌신적 지원”
김기삼의 폭로 내용을 뒷받침한 동아일보 기사
2003년 2월5일 동아일보는 익명의 전직 장관급 인사의 말을 인용하여 ‘청와대 실장 노벨상 로비했다’ ‘김 실장, 동티모르 의사당 건립 건의’라는 기사를 냈다. 이 기사는 2003년 1월31일,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의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 -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대북 뒷거래 실상’이라는 양심 증언이 공개된 후 일주일 만에 나온 것이다. 기사의 중요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비밀 프로젝트 의혹 등을 인터넷에 올린 전직 국가정보원 직원 김기삼(40) 씨의 주장을 둘러싼 공방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국정원과 의혹 당사자들은 전면 부인하며 법적 대응을 불사하겠다 하고 있지만 반대로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발언과 정황도 속속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청와대 김모 실장이 노벨상(로비)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가 ‘(노벨상을 받기 위해) 동티모르에 국회의사당을 지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한 전직 고위직(장관급) 인사의 4일 발언은 김씨의 폭로 내용을 일정 부분 뒷받침하고 있다.”
“‘김 실장은 특히 스웨덴 교포 의사 H씨와 함께 그런 활동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노벨상은 로비로 받을 수 없는 상인데도 당시 김 실장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자 정부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는 위험한 행동이란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김 실장의 활동에 협조했던 노르웨이 주재 P대사는 (외교통상부) 본부로부터 ‘외교관이 그런 일에 깊게 관여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인용한 익명의 취재원은 이정빈 전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보인다. H씨와 P대사는 스웨덴 교포 한영우와 노르웨이 대사 박광태를 가리킨다.
동아일보 보도에 대한 김한정의 격렬한 반발
같은 날 동아일보는 ‘노벨상 로비 의혹 청와대 실장 “생트집” 반발’이라는 제하의 후속 기사에서 김한정의 격렬한 반발을 보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이다.
“김 실장은 ‘공부 잘해서 큰 상을 받았는데 뒤늦게 너 커닝한 것 아니냐고 트집 잡는 격’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로비라는 단어 자체에 부정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양심과 공직자의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다’ ‘(부정적인 인식을 전제로 한) 이런 분위기에서 실체적 진실을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동티모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일까. 김한정이 남긴 문서 중에 그 단서가 되는 것이 남아 있다.
알버커키가 김한정에게 보낸 팩스 편지
2000년 1월11일에 나자르 알버커키라는 사람이 김한정에게 보낸 두 장짜리 팩스 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알버커키는 동티모르의 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유엔이 설립한 위임통치기구인 ‘유엔 동티모르 과도행정기구(UNTAET)’의 연락관이었다.
▲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이 2000년 1월29일 청와대에서 방한 중인 사나나 구스마오 동티모르저항협의회(CNRT) 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알버커키의 편지엔 “사나나 구스마오 동티모르저항협의회(CNRT) 의장이 2월(* 필자주: 1월을 2월로 착각한 것임) 27~29일, 서울을 방문하여 아태민주지도자회의와 광주시민연대 인사들과 만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수행원 명단에는 구스마오의 부인 커스티 스워드‧호세 라모스 호르타 등을 비롯해 알버커키와 다른 한 명의 UNTAET 관계자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구스마오 일행의 방한 시점이다. 이때는 노벨상 후보 추천 마감일인 2월1일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다. 구스마오 일행이 하필 이 시기에 그저 악수나 하고 인사말이나 전하려고 서울에 들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행 중에 포함된 노벨상 수상자인 라모스 호르타가 김대중(DJ)의 노벨상 추천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 먼 걸음을 한 것이었다.
구스마오에 방한 답례 위해 광주인권상 제정
노벨 공작팀은 구스마오의 방한에 맞춰 5·18재단에 광주인권상을 제정토록 했다. 구스마오에게 답례로 메달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광주인권상의 뻔한 제정 의도를 비판하는 여론이 잠깐 일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벨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노벨상에 눈이 멀어 이성을 상실한 모습이었다.
이때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구스마오 일행을 접견한 DJ는 그 자리에서 한국 농촌개발 사업의 경험과 성공 사례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한껏 치켜세워 자랑했다. 김한정이 사전에 만든 ‘말씀 자료’에 있는 대로 얘기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정적의 업적도 마다하지 않고 이용할 줄 아는 실용적인(?) 정치인의 면모를 보여 줬다.
라모스 호르타의 추천서에 들어간 비용
그러면 김한정이 라모스 호르타로부터 추천서를 받아내기 위해 지불한 비용은 어느 정도였을까.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발표한 동티모르에 대한 개발 원조 내역을 살펴보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1999~2009년 동티모르에 약 1000만 달러에 달하는 경제 지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2001~2009년 무상원조 총액은 약 663만 달러였다.
인도적 지원으로는 1999년 난민구호 활동에 25만 달러, 2001~2006년 물자 지원에 15만 달러, 2001~2003년 긴급 원조에 61만 달러, 2008년 취약 계층 식량 지원에 15만 달러를 지원했다. 그 외에도 1999년 6월 동티모르 신탁기금에 20만 달러, 1999년 12월 유엔 동티모르과도행정기구(UNTAET) 신탁기금에 40만 달러, 그리고 동티모르의 독립기념관 건립에 114만 달러를 지원했다.
DJ 노벨상의 ‘대부’를 자처한 호르타
월간조선 2004년 2월호는 ‘내가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대부가 된 까닭은…’이라는 제목으로 라모스 호르타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 인터뷰에서 호르타는 자신이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대부’였음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호르타는 자신이 2000년에 DJ를 추천한 데 대해 “순전히 그의 30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이라는 인생 역정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김대중을 마하트마 간디나 넬슨 만델라 같은 민주투사로 평가한다”는 아부도 잊지 않았다.
라모스 호르타는 김한정에 대해 ‘김대중의 인권외교 담당 특사’로 기억하면서 “정직하고 매우 스마트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는 “동티모르에 대한 김한정의 정성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김대중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는 것과 관련해 어떠한 약속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는 당연히 계산된 거짓말이었다. 그는 자신 또한 DJ 노벨상 사기극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벨위원회가 밝힌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유
2000년 10월12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김대중을 그해 수상자로 선택할 때 발표한 수상 이유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 씨는 (…)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 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김대중이 무엇 때문에 우리와 별로 관계 없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저렇게 집요하게 노력한 걸까’ ‘왜 아무런 국가적 실익이 없는 동티모르에 저렇게 많은 자원을 쏟아붓는 걸까’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결과적으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이런 의문들에 대해 위의 발표문을 통해 그들 나름의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29] DJ 신신당부했건만… 줄줄 샌 ‘노벨상 공작’
언론 유출 의혹 이영작‧최규선 내치고 김한정에 임무 맡겨
2002년 강남에서 예기치 않은 절도사건… 한국 사회가 발칵
1998년 DJ 대통령 당선 직후의 신년 하례회
1998년 1월13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서교호텔에서는 조금은 특별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수동 아태평화재단(아태재단) 행정실장 주관으로 신년 하례회가 열린 것이다. 지난달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룬 감격과 흥분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열린 새해 첫인사 모임이었다. 이날 행사는 “간소하고 경제적으로 치르라”는 김대중(DJ) 당선자의 뜻을 받들어 우거지탕과 막걸리가 접대 음식으로 나왔다.
1998월 1월28일 자 주간한국은 ‘다음은 역사에 남은 인물 만들기’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날 모임의 이모저모를 보도했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날 행사에 모습을 보인 250여 명의 참석자 중에는 아태재단의 관계자와 후원자들뿐만 아니라 재단이 세들어 있는 아륭빌딩의 수위와 청소원, 그리고 우편배달부까지 있었다. 심지어는 재단과 거래하는 은행과 인쇄소의 직원들도 초대받았다고 한다. 김 당선자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박홍 서강대학교 총장의 모습도 보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막걸리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의 재단 활동 방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내용 누설된 사고
이 모든 게 국민을 배려하는 ‘김대중 당선자’의 넓은 아량을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껄끄러운 사람에게까지 온정을 베푸는 당선자의 자상한 인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이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될 민감한 내용까지 누설되고 만 것이다. 문제가 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아태평화재단의 이런 단기적인 변화와 함께 재단은 앞으로 ‘위대한 김대중’을 만드는 일에 전력할 것으로 관측된다. ‘재단은 김 당선자의 이념이나 이상,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김 당선자를 연구·개발하고 남북 관계를 화해 국면으로 만들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기초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한 관계자의 말은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이런 측면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이다. (…) 앞으로 재단이 ‘역사에 남는 김대중’을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될 때 구체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FDL-AP가 또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FDL-AP의 설립 목적이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인권 보호‧지구적 민주주의 실현‧민주 지도자들과의 유대 강화’ 등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DJ 노벨상 전략을 보도한 일요신문 기사
이 보도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매체가 한발 더 나간 기사를 냈다. 1998년 2월25일자 일요신문의 ‘DJ 노벨상 전략’이라는 제하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아태평화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노벨상 수상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보도했다.
“DJ의 노벨상 팀은 국내 캠프와 해외캠프로 이원화하여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국내 캠프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지명된 남궁진 의원의 지휘하에 1998년 1월24일 현역의원 8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추천서를 발송하고 위원회로부터 도착을 확인받았다.
해외 캠프는 워싱턴 소재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DJ의 처조카 이영작 박사가 지휘하며, 이영작 박사는 넬슨 만델라‧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코라손 아키노 등으로부터 추천 의사를 확인했다.”
이 기사들을 접한 DJ와 그 측근들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깜짝 놀랐다. 절대 비밀로 해야 할 내용이 누설된 것이다. 천기가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DJ로서는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과잉충성 분자들이 초를 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후 이 기사들은 노벨상 프로젝트팀에서 보안 누설을 경고할 때마다 누누이 언급되며 그와 같은 실수가 두 번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재차 환기되곤 했다. 물론 비록 메이저급의 언론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긁어 부스럼이 될 게 뻔했던 터라 기사에 대한 대응은 일절 하지 않았다.
▲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이 2001년 4월12일 청와대에서 리처드 스미스(왼쪽) 뉴스위크지 회장과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DJ, 노벨상 공작의 밑그림 수정
이 기사들이 나온 이후 DJ는 노벨상 공작의 밑그림을 다시 그리게 됐다. 처조카 이영작과 최규선 국제특보를 노벨상 프로젝트에서 완전히 배제한 것이다. 동교동에서 기사의 출처를 자체 조사한 결과 이영작과 최규선이 기사의 취재원으로 지목된 것으로 보인다. DJ는 ‘이들의 북 치고 장구 치는 식의 자가발전 소동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자신의 공보비서 출신인 김한정을 국정원에 넣어서 작업하기로 한 것이다.
보안 누설 문제뿐만 아니라 이 기사들이 전하는 수상 전략과 접근 방법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다. 바로 해외 캠프의 문제였다. 기사에서 설명하듯이 애초에 해외 캠프의 활동은 워싱턴과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노벨상 수상의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는 데서 생긴 판단 착오였다.
노벨상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주(主)무대이고, 특히 평화상은 노르웨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미국과 유엔은 노벨평화상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지렛대도 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물론 이영작과 최규선을 낙마시킨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최규선의 불성실한 사생활과 사기행각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월간중앙 등 언론들이 자세히 보도한 바 있다.
역삼동 삼부빌딩의 절도 사건
한편 이로부터 한참 지난 2002년 8월3일 토요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676번지 삼부빌딩에서는 한 건의 특이한 절도 사건이 벌어졌다.
아스팔트 위의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한여름의 한가한 저녁 시간이었다. 두 명의 여성과 한 남성이 잰걸음으로 빌딩 안으로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서 멈춰서자 그들은 텅 빈 사무실의 문을 곧장 밀고 들어갔다. 입구에 걸린 ‘미래도시환경’이라는 간판만이 이들 무단 침입자를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무실 구조를 잘 아는 듯한 사내가 사무실 여기저기를 두루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작업을 끝내려는 듯 서둘러 사무실 이곳저곳을 뒤져 나갔다. 이윽고 인솔자인 듯한 여성이 뭔가 중요한 서류를 발견하고는 함께 온 여성에게 복사를 부탁했다. 언뜻 보아 송금 전표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또 다른 서류뭉치를 발견하고는 아예 복사를 단념하고 통째로 가방에 구겨 넣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의 보물찾기가 끝나자 그들은 소리 없이 그 자리를 떴다. 사무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날 저녁 서울 강남 도심에서 벌어진 이 예사롭지 않은 절도사건이 그해 가을 한국 사회를 벌집 쑤신 듯 뒤집어 놓게 될 줄은 그때까지는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주간 뉴스위크의 임도경 기자와 ‘최규선 녹취록’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일행 중의 중년 여성은 중앙일보의 자매지 주간 뉴스위크의 임도경(본명은 임희경) 기자였다. 남성은 허철웅이란 사내였는데, 그는 그해 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최규선의 측근으로, 그의 자서전 대필 작가였다.
임도경 기자가 속한 뉴스위크는 미국의 유명 주간지 뉴스위크의 한국어판인데 미국판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기사뿐만 아니라 국내 기사도 자체 발굴하여 게재하고 있었다. 한국어판 뉴스위크는 주간지가 없는 중앙일보에서 자매 주간지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임도경은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바쁘게 살다 보니 아직 미혼이었는데, 그해 들어서는 유독 더욱 더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해 봄부터 이른바 ‘최규선 녹취록’을 여러 차례 특종 보도하면서 기자로서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30] 김대중 정권에 ‘최후의 일격’ 된 뉴스위크 특종
‘최규선 게이트’로 번진 특종… 임도경 기자 신데렐라에서 절도범으로
유엔 인권상 수상·마이클 잭슨 방한 초청… 팽 당한 최규선 아이디어
주간 뉴스위크의 특종 기사
2002년 5월 7일, 주간 뉴스위크는 최규선의 육성 녹음테이프를 단독 입수해 ‘특종: 최규선의 비(秘)파일 - “DJ가 날 버렸다”’는 제하의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뉴스위크는 그다음 주에도 ‘특종 2탄 : 최규선 비파일 - 최규선은 DJ의 밀사였다’를 연달아 보도했다. 연이어 터진 메카톤급 특종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집권 마지막 해에 터져 나온 최규선 게이트는 진승현·이용호·정현준 등 이미 여러 차례의 게이트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김대중(DJ) 정권에게는 최후의 일격이나 다름없었다.
‘최규선 게이트’로 번진 녹취록 테이프
이처럼 뉴스위크가 최고의 뉴스 메이커였던 최규선과 김대중(DJ)‧김홍걸 부자의 내밀한 관계를 생생하게 기사화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씨의 자서전 대필작가 허철웅(당시 40세‧시공사 단행본 사업부 근무) 씨로부터 최씨의 녹취록을 단독으로 입수한 덕분이었다.
그 녹취록은 2003년 4월 최규선이 구속되기 직전에 녹음해 둔 12개 분량의 카세트 테이프를 푼 것이었다. 최규선은 자서전 집필을 위해 9시간 분량의 녹음을 해 두었고, DJ와 그 측근들을 협박할 요량으로 1시간 분량의 녹음을 남겨 놓은 것이었다. 특히 최규선이 남긴 협박용 녹음 카세트테이프에는 최규선이 김홍걸에게 거액의 뇌물을 줬다는 내용과 청와대가 자신에게 미국으로의 밀항을 강요했던 정황 등이 담겨 있었다.
기 수련원에서 건진 행운
임도경 기자가 이러한 세기의 대특종을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히 얻은 행운의 결과였다. 당시 그녀는 평창동의 한 기(氣) 수련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곳은 빙의를 퇴치하는 데 특별한 영력을 가졌다는 여성 심령치료사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기 수련원에서 알게 된 후배로부터 솔깃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 후배는 자기 남편이 최규선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작가인데 “최규선의 육성 녹음테이프와 여러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임도경의 기자로서의 촉이 발동했다. 그녀는 일생일대의 대특종 기회가 바로 눈앞에 와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어렵사리 후배 부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최규선이 남긴 초특급 파일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언론계의 신데렐라가 된 임도경 기자
그해 봄과 가을에 임도경 기자가 특종 보도한 일련의 ‘최규선 파일’ 기사들은 무려 대여섯 번이나 뉴스위크의 표지를 장식했다. 그 결과 임도경 기자는 그 해의 기자상을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그녀는 이달의 기자상 2회 수상을 비롯해 권위 있는 관훈언론상과 한국기자상을 석권했고, 한국언론대상‧최은희 여기자상‧자랑스러운 이화언론인상에 이르기까지 상이란 상은 모조리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가을 그녀는 덤으로 뉴스위크 편집장으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 관훈언론상을 받은 ‘최규선 파일’. 관훈클럽은 2003년 1월10일 프레스센터에서 관훈언론상 및 최병우 국제언론상을 시상했다. ‘최규선 파일’ 보도로 상을 받은 임도경(앞줄 오른쪽 두 번째)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연합뉴스
하지만 인생이란 게 늘 그렇듯이 좋은 일만 계속 이어질 수는 없었다. 하루아침에 언론계의 신데렐라로 등장한 그녀였지만 몰락 또한 한순간에 찾아왔다. 짧은 영광이 지나간 자리에는 긴 시련이 닥쳐왔다. 얼마 안 가서 최규선으로부터 절도 혐의로 형사고소를 당했기 때문이다.
짧은 영광의 끝에는 긴 시련
2006년 1월 23일, 대법원은 이른바 ‘최규선 파일’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임도경 뉴스위크 편집장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 최씨가 피고인에게 사무실에 보관 중인 자료를 가져갈 것을 허락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피고인도 범행 당시 최씨의 자료를 절취하겠다는 명확한 범의와 불법영득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기자의 취재윤리와 언론의 취재 자유의 범위에 대해 두고두고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어쨌거나 그날 임도경이 허철웅의 도움으로 최규선의 사무실에서 들고나온 문서들은 또다시 메카톤급 폭발력을 발휘했다. 2002년 10월9일, 제16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에 뉴스위크의 표지는 ‘DJ 특명 ‘블루 카펫’을 깔아라’라는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장식됐다.
‘블루 카펫’을 깔아라
기사는 김대중 정권의 성역을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노벨평화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로비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뉴스위크 한국판은 최규선(당시 42세·미래도시환경 대표) 씨의 노벨평화상 만들기 작전인 ‘블루 카펫(Blue Carpet)’과 ‘M 프로젝트’ 문건들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이 두 개의 노벨상 프로젝트는 1998∼99년 국민회의 총재 보좌역으로 일했던 최규선 씨가 기획하고 박지원 현 청와대 비서실장과 연락을 취해 실행해 왔음을 보여 주고 있다.”
‘M 프로젝트’와 ‘블루 카펫 프로젝트’
기사는 두 개의 보고서 문건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다. 두 개의 보고서 문건에는 각각 ‘M 프로젝트’와 ‘블루카펫 프로젝트’라 명명된 제목이 붙어 있었다. 전자는 1998년 5월, 후자는 1999년 2월에 각각 작성된 것이었다.
‘M’이란 노벨평화상 메달(Medal)의 첫 글자였고, ‘블루 카펫’은 노벨평화상 수상식장에 깔리는 푸른색의 카펫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다. 이들 문건에는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이 마치 청사진처럼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DJ의 2000년 노벨상 수상을 목표로 한 M 프로젝트
먼저 ‘M 프로젝트’는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화 및 인권 투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정당한 평가를 기반으로 하여 21세기 최초 수상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2000년에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공동 수상하는 것이 아니라 DJ가 단독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노벨평화상의 사전 정지작업 차원에서 먼저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몇 개의 인권상을 수상한다”는 구상도 담겨 있었다. 또한 ‘M 프로젝트’는 “노벨상 작업팀은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벨평화상 수상자 또는 국제 저명인사를 앞세워 국외에서는 자발적인 성격의 범세계적인 추대 조직을 운영하고, 국내에서는 소수 정예의 믿을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중심으로 비공식‧비공개 비선조직을 구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수상 분위기 띄우기 위한 DJ 업적 만들기
특히 보고서엔 “미국의 스칼라피노 교수‧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등 김 대통령의 해외 인맥을 전면에 내세워 활용하고, 해외 현지에 팀을 조직해 현지 교포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 프로젝트 보고서는 “DJ의 수상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업적과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김 대통령의 민주화 및 인권 투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민주 지도자 이미지를 만들고, 북한 기아 어린이 돕기 등 인도적 지원을 확대해 인도주의자의 이미지를 심어야 한다. (…) 다른 나라의 민주화 및 민권 투쟁을 지원해 국제적인 리더십을 보이며, 특히 미얀마와 인도네시아 등 세계 각국의 민주화 및 민권 투쟁을 지원한다.”
주 공략 대상은 5인 위원회·스웨덴 한림원·노르웨이 국회
‘M 프로젝트’는 또한 “노벨평화상 5인 위원회·스웨덴 한림원 및 노르웨이 국회를 주 공략 대상으로 삼아 재계의 해외 인프라 및 인맥과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이들에게 로비한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 보고서엔 “5인 위원회의 개인 신상정보와 현지 한국인 지인을 파악하며, 맨투맨 식 접근을 통해 5인에 대해 1인당 최소 3명이 마크한다”는 세부 지침까지 들어 있었다.
뉴스위크 기사 ‘DJ 특명 ‘블루 카펫’을 깔아라’에는 최규선이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돼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엔 인권상을 수상하는 것과 마이클 잭슨을 방한 초청하여 비무장 지대에서 평화 콘서트를 여는 방안이었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