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진실 찾기(5·18 ‘진실의 문’ 연다)4/ 스카이데일리 허겸 기자
2024.03.20
<31>“폭도 총 맞아 죽나”… 공포에 떤 계엄군
“마약하고 광주시민 몰살 나섰다”는 악의적 선전과는 딴 판
광주체육관 고립 장병들 ‘지옥체험’… “이게 민주화 투쟁이냐”
“44년 학살자로 일방 매도된 현실 억울… 이젠 풀어야 한다”
▲ 1980년 5·18 당시 무장폭도들에게 포위돼 고립된 채로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1118야전공병단 185공병대대 2중대 이○○ 상병은 자필 체험수기에서 “군인들이 버젓이 이렇게 있는데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뛴다는 것은 군인들이 너무나 온순하게 그리고 무기력하게 군중들에게 대한 결과”라며 “더군다나 간첩들의 침입 경로가 다분히 있는 남해안 도서지방에 혼란한 틈을 이용해 북괴가 남침 또는 무장간첩을 남파하면 이건 정말 큰일이어서 울화통이 터졌다”고 분노했다. 그러면서 “누가 정말 애국자며 민주주의 선봉자인가”라고 물었고 말로만 애국하는 얄팍한 애국심에 대해선 “정말 총으로 쏴 갈기고 싶었다”고 격앙된 감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1980년 5·18 당시 총·칼·낫·곡괭이를 든 무장폭도들에게 포위된 채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계엄군 장병들의 자필 수기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44년간 학살자로 매도돼 온 계엄군의 이미지와 큰 괴리를 낳아 사건의 실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스카이데일리와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민진사)는 폭도들의 무장공격으로 공포에 직면한 장병들이 죽음을 넘나드는 사선에서 생존을 갈망하는 한 인간으로서 고뇌와 애환·절규를 상세하게 기록한 장병 체험수기 ‘광주사태 진압을 위한 충정작전 체험담’을 단독 입수했다.
‘피해자 계엄군’ 관점 장병 자필수기 44년 만에 공개돼
장병들은 군인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과 무장해제 당한 치욕감, 광주가 고향인 동향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허무함, 주민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폭동 현장을 탈출한 안도감과 한없이 밀려드는 패배감 등을 수기에 절절하게 담아냈다. 대(對) 정부 무장봉기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현장 목격자들의 굴절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원전 기록이다.

▲ 빛바랜 충정작전 투입 장병 手記.
이 때문에 계엄군의 탄식과 비애가 기록된 수기는 가히 ‘반전’이라 불릴 만 하다. 신군부 집권시나리오에 따라 계엄군이 마약까지 흡입하고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데 혈안이 됐다는 일각의 주장과 딴 판이었다. 지독한 공포를 억누르며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광주 출신 장병의 애틋한 체험담은 읽는 이에게 가슴 먹먹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장병들의 수기 속엔 3㎞ 가까이에 있는 부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목포 부근의 다른 부대까지 68㎞를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장병들은 ‘밤만 되면 폭도로 돌변하는 그들’ ‘군인들이 버젓이 있는데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는 건 군인들이 너무나 온순하고 무기력했기 때문’ ‘간첩들의 침입 경로가 다분히 있는 남해안 도서지방에서 혼란을 틈타 북괴가 남침 또는 무장간첩을 남파할까 울화통이 터졌다’ ‘누가 정말 애국자이며 민주주의 선봉자인가?’라고 거침없는 분노를 쏟아냈다.

▲ 1118야전공병단 185공병대대 소속 조○○ 2중대장은 수기에서 “폭도들이 월남전에서 베트콩과 다를 바 없이 행동을 하더라는 연대장의 말씀이 머리에 생생하게 남는다”고 적었다.
‘월남전에서 베트콩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더라’는 박동조 31사단 96연대장의 간접 증언도 기록됐다. 박 대령은 파월 장병으로 알려졌다. 이는 김대중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의 선동 발언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 5·18 발생 일주일 전인 5월11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전을 하라”고 대중 선동했고 군인의 정부 명령 불복종을 촉구했다. 1981년 최초 대법원 판결은 김대중이 “반(反)정부 봉기 의식을 고취했다”고 판단해 사형을 언도했다. 군 전문가들은 실제 5·18에서 도시 게릴라전의 형태가 나타난 것으로 분석한다. <본지 2024년 2월8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30>“게릴라戰 나서라” 무장투쟁 부추긴 김대중 보도 참조>
볼펜으로 꼭꼭 눌러쓴 장병들의 수기를 보면 과연 독재정권의 폭력에 맞서 자유를 외쳤다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장이 사실일까 충분히 의구심을 갖게 한다. 장병 체험 수기의 발견은 역사적 실재(實在)보다 두려운 것은 인간의 망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간의 5·18 역사는 정치적 해석으로 점철된 가운데 은폐와 망각 궤적만 오롯이 그려왔다는 반박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은폐와 망각의 세월 44년… 정치적 유불리 안 따진 ‘비극의 현장’ 목격담
수기집은 31사단에 배속·편성돼 광주 시내에 주둔한 1118야전공병단(야공단) 185공병대대(대대장 이명재 중령)가 진압부대로 출동해 폭도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복귀한 1980년 5월18일부터 23일까지 남광주지역의 진압작전 시 단면을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당시 이명재 대대장이 이례적으로 작성을 지시한 뒤 장병들로부터 수거해 유구한 세월을 원본 그대로 보관한 덕분에 44년 만에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 185대대 김○○ 상병은 5월18일 계엄군으로서 모교인 조선대에 출동한 심정을 기술했다.
185대대 2중대 김○○ 상병은 5월18일 계엄군으로서 모교인 조선대에 출동한 심정을 기술했다. 그는 “우리는 말로만 듣던 폭동에 대해 실제로 참상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조선대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오면서 폭도들이 남겨 놓은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며 “8년간 진리를 탐구했던 정들은 모교에 군인이 주둔하기 위해 말뚝을 박고 돌아온 나의 마음은 쓰라렸고 억울하기만 했다. 이제 내가 군인이었고 명령이니만큼 그리고 폭도들의 진압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겠지. 이보다 더한 것이라도 할 수 있다며 자신을 달래 보았다”고 수기에 적었다.
장병들의 수기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른 자의적 해석을 배제하고 5·18 비극의 현장을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은 채, 직접 눈으로 본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 사수지역 광주대교. ©스카이데일리
2중대 홍○○ 병장은 추적추적 부슬비가 내리는 20일 새벽 3시쯤 잠에서 깨 어둠을 가르며 광주 시내로 출동하며 목격한 참상의 기억을 기록했다. 홍 병장은 “가로변의 화분대가 차선에 어지럽게 부서져 난장판을 이뤘고 벽돌 조각·돌·쓰레기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며 “그런가 하면 광주고속터미널 앞에는 많은 차량이 불에 타 있었고 인근 상가에서 폭도들이 집어 던진 플라스틱 제품이 부서져 있었으며 거리는 온통 글자 그대로 수라장을 이뤘다”고 기록했다. 박○○ 병장은 “사람이 없는 (새벽) 빈 거리는 완전 폐허가 되다시피 너무도 비참했다”며 “얼마나 심한 데모·폭동·난리였었나 그 거리를 볼 때 그들이 행동하는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고 했다. 또한 낮에는 “광주 충장로에서 계속해서 폭동 사태가 벌어지는 광경이 멀리나마 보였고 우리 뒤에 몰려오면 함락돼 목숨까지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며 “낮에만 해도 조용했던 시민이 밤에는 이 모양이다. 화가 난다고 성질대로 하면 군인으로서 수치라 하겠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박 병장은 이어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몸과 정신력으로 싸우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덤벼온다. 그러기에 군인들이 피해를 많이 입는 것”이라고 수기에 적어 대민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전 형태를 엿보게 했다.
2중대장 조○○ 대위는 19일 자정 연대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수기로 남겼다. 그는 “우리는 24시00분 명령 수령 관계로 연대장실에 집합해 소요 사태의 전반적인 사항을 들었다”며 “그중 머리에 생생하게 남는 것이 월남전에서 베트콩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더라는 말씀이었다”고 썼다. 조 대위는 이튿날 “광주대교의 통행을 차단하기에 이르렀는데 사태는 이때부터 조금 심각해지기 시작했다”며 “해산한 군중이 광주공원에 화염병을 들고 이동한다는 무전 보고를 입수했는데 지금에 와서 판단해 보니 과격파가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수기에 적었다.

▲ 185공병대대가 사수하려 했던 광주교. 광주실내체육관 맞은편에 자리해 있다. ©스카이데일리
광주 출신의 2중대 무전병 김○준 상병은 19일 “대대장님으로부터 광주 MBC방송국이 폭도들에 의해 방화됐다는 상황 설명을 들었다”며 “광주가 고향인 나로서는 시내 상황이 걱정됐으나 우리가 출동하면 능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자위하며 잠을 청했다”고 적었다. 20일에는 “16시(오후 4시)경 설득으로 군중을 해산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며 중대장이 설득에 들어갔다”며 “인파는 많이 해산됐으나 일부 과격한 흥분 상태의 시민들은 뒤로 후퇴해 군중들을 선동하고 있었다”고 목격담을 기술했다. 그러곤 “식사는 했냐며 걱정하는 시민들이 있었는데 구동 동회장님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고향에서 고향 주민들에 의해 죽는다면 억울한 일 아닌가”
야공단의 공포는 이날 밤 극한으로 치닫는다. 앞서 20일 이른 새벽 4시30분 광주천의 4개 교량을 통제했던 장병들은 범람하는 강물처럼 불어나는 폭도들에 밀려 광주 실내체육관으로 철수한 날 밤 시위대가 방화하지 않을지 공포감에 시달리다 21일 아침 체육관을 탈출하기로 한다.

▲ 체육관 폭파 첩보가 적힌 조 대위 수기.
조 대위는 20일 밤 “버스에 승차하기 전까지만 해도 주위의 분위기가 험악해진 줄 몰랐다. (중략) 군중들은 꽉 차 있으면서 체육관 진입을 방해하려 했다. 이때부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에 대대장님 이하 간부 및 병사들은 휩싸이게 됐다”며 “시간이 가면 갈수록 폭도들의 시위는 점점 더해져 가며 실내의 전화벨 소리, 밖의 폭도들의 외침·만행,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게 하는 방화 행위·횃불 시위, 이 모두가 사태의 심각성과 우리 간부들에게 점점 공포의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요소들“이라고 수기에 적었다.
사병들도 똑같은 공포감을 느꼈다. 김○구 상병과 또 다른 병사는 “통금 시간인 21시(오후 9시)가 지났는데도 폭도들은 광주공원 앞에 운집해 구호를 외치며 기름을 끼얹어가며 방화를 했다”고 썼다. 구체적으로 “석유를 뿌리고 전국체전전남예선대회라는 탑을 불태워 가슴 아파 어쩔 줄 몰랐다”고 설명했다.

▲ “폭도들이 기름을 끼얹어가며 방화했다“는 장병의 체험 수기.
총성이 멎기를 간절히 바라며 폭도에 포위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장병의 이야기도 있었다. 2중대 김○구 상병은 “새벽 2시.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M60의 사격 소리에 잠이 깨었다. 시내 일각에선 화염이 계속 치솟고 있었으며 폭도들의 고함과 구호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며 “나는 이 사태가 빨리 수습돼 나의 고향인 광주가 더 이상 파괴와 방화, 살육으로부터 벗어나길 하느님께 기도드렸다”고 슬픔을 달랬다. 그러고는 “제발 나의 전우·동생·형제들은 폭도의 무리와 합세하지 않기를 바라며 억지로 잠을 청했으나 잠은 오지 않고 두 눈은 더욱 초롱초롱해진다”고 수기에 적었다.
한 병사는 폭도들이 공격해 오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맞서야 한다는 심경을 기술했다. 그는 “폭도들의 함성, 그리고 멀리 보이는 화염만이 우리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며 “체육관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폭도들이 우릴 공격하면 생명을 버릴 결의를 다지며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고 했다. 홍○○ 병장은 “군중들이 마치 거센 파도처럼 움직이기 시작해 ‘폭도들은 해산하라’ ‘주민들과 시민들은 귀가하십시오’ 확성기로 수없이 외쳤으나 그들은 해산할 줄을 몰랐다”며 “밖에서는 아치를 불태우고 있었고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온종일 비를 맞은 탓인지 추워서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고 적었다.

▲ 온종일 비를 맞은 탓인지 추워서 잘 수가 없었다는 장병의 수기.
김○○ 상병도 “날이 새도록 폭도들의 합성은 짙어지고 대대장님과 중대장님 그리고 참모진 모두 잠을 자지 않는 것 같았다”며 “몸에 냉기가 돌아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고 기술했다.
이들이 주둔한 광주 실내체육관은 1965년 건설돼 2008년 철거됐다. 지금은 그 자리에 빛고을시민문화관이 들어섰다. 5월20일부터 21일 아침까지 밤사이 체육관은 폭도들에게 온전히 둘러싸였고 계엄군은 군사학적으로 완전하게 포위됐다

▲ 광주실내체육관(작은 사진)이 2008년 철거된 자리에는 빛고을시민문화관이 들어서 있다. 남충수 기자 ©스카이데일리
일각에선 계엄군의 폭력성을 가슴에 새겨 두길 바라지만, 수기집을 읽다 보면 도리어 시위대 내부의 집단적 광기와 그것이 악한 본능임을 방증하는 광경이 더 또렷하게 그려진다.
고향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죽는 끔찍한 상황을 걱정한 수기도 있었다. 김모 상병은 수기에서 “만약 이 장소를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폭도들에 의해 희생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군인으로서 값진 죽음, 즉 북괴의 잔적들을 소탕하다 죽는다면 영광으로 후회는 없겠으나 만약 이곳에서 폭도들에 의해 죽는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더구나 내 고향에서 내 고향 주민들에 의해 죽는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라고 기록돼 있다.

▲ 고향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걱정한 광주 출신 계엄군의 수기.
“베트콩과 다를 바 없는 폭도 만행”… 연대장도 치 떨어

“탈출… 불 타 죽거나 낫·삽·곡괭이·칼로 찢겨 죽는 일 모면”
5월21일 아침 불과 하루 반 만에 폭동의 양상은 180도 달라졌고 야공단은 살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체육관 철문이 열리면서 앰뷸런스·2호차·버스·1호차·군용트럭이 순차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월산동파출소가 있는 서쪽 방면으로 질주했다.

조 대위(2중대장)는 “불에 타 죽을 일과 굶어 죽는 일 아니면 폭도들에게 끌려가 총을 빼앗기고 농기구인 낫·삽·곡괭이와 칼로 찢겨 죽는 일로부터 우선은 모면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간다”고 썼다. 김 상병은 “월산동파출소가 불에 타 있는 것을 보고 쓰라림을 맛보았다”고 심경을 전했다.

▲ 불 타는 월산동 파출소를 목격한 장병의 체험 수기(위). 취재진과 최종원·김덕수 민진사 위원은 지난달 16일 5·18 당시 185공병대대가 탈출한 이동경로를 답사하면서 월산동 파출소가 있던 터(아래 왼쪽 사진 붉은원)를 발견했다. 아래 오른쪽은 확대한 사진.
오전 8시30분쯤 체육관에서 차로 2~3분 거리에 있는 월산동파출소가 불에 탄 모습을 목격하며 야공단 병력이 탄 차량이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를 향해 내달렸다. 이 시각은 ‘군분교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사건이 일어난 시각(오전 8시10분)으로부터 약 30분 흐른 시점이다. <본지 2023년 7월26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⑦] ‘군분교 습격’은 외부세력 개입한 군사작전 보도 참조>
야공단은 철수 이동 중 돌고개에서 운집한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시위대는 돌멩이를 투척하고 삽과 곡괭이로 차를 두들겼고 오전 8시50분쯤 공단입구에서는 불타는 차량과 바리케이드 장애물, 병력이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만큼의 시위대 인파와 봉착했다. 오전 9시 M16을 소지하고 군용 지프차를 운전하는 시위대가 처음 목격됐다. 야공단은 이들을 앞에 두고 좌회전한 뒤 백운동 철도 건널목의 장애물을 강행 돌파했다.
김 상병은 당시 눈에 들어온 상황을 기억을 더듬어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는 “돌고개에 올라서서 부대방향으로 이동하는데 길 복판에 폭도들이 가로수를 꺾어 바리케이드를 쳐 두었다. 끝은 겨우 차량 1대가 통행할 정도였다. 광송도로를 이동하는 중 공무원교육원쯤 왔을 때 폭도들을 실은 동양고속버스가 반대 방향에서 오다가 우릴 보고 ‘죽여라’ 하면서 차를 돌려 추격했다”고 상술했다. 다른 김○○ 상병도 “폭도들은 미리 준비해 온 휘발유병과 폭약 뭉치를 차내에 던지려 애써 보였고 군용 지프차를 빼앗아 타고서 추월해 왔다”고 묘사했다.

▲ 폭도들이 추격전을 펼치며 화염병과 폭약뭉치를 던지려 했다는 증언이 담긴 장병의 자필 체험 수기.
불운하게도 2호 차량은 폭도들이 탄 버스에 들이받혀 길섶으로 올라섰다. 무전병 김 상병은 다시 “폭도의 버스가 2호차를 길 쪽으로 받아넘긴 뒤 탈취한 지프를 타고 M16 소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이 우릴 공격할 기세였다”며 “선두의 앰뷸런스는 공단 입구에서 커다란 바리케이드를 만나 논두렁으로 처박혔으며 2호차는 버스에 밀려 인도로 튀어 올랐다가 겨우 방향을 잡아 도망하였으나 고속버스는 계속 추격했다“고 수기에 적었다.
“광주 빠져나오며 수많은 치욕… 죽든 살든 박살 내고 싶었다”

▲ 2중대 박○○ 병장은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고 비유했다.
이 상황을 2중대 박○○ 병장은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고 비유했다. 박 병장은 “계속해서 돌이 날아온다. 전원이 흥분 상태에 들어섰다. 군 지프차를 4대씩이나 타고 거리를 누비며 우리를 보고 멈추라 한다”고 위협받은 순간의 기억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때 같으면 우리에게 총알이 있었다면 아마도 총을 쏘고 했을 것”이라며 “폭도들의 고속버스가 커브를 꺾으며 의무차를 길가로 밀어붙였다”고 묘사했다.

▲ 폭도 버스의 추격을 받았다는 체험 수기
탈출 병력은 1진과 2진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공단 입구에서 방향이 갈린다. 2중대장이 탄 차량은 “좌로!”라는 외침과 함께 핸들을 꺾어 백운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 대위는 “뒤에는 바로 폭도들이 지프차를 타고 손에는 화염병·삽·낫을 들고 버스 옆에서 따라오면서 화염병을 던지고 양쪽 길에서는 돌멩이가 날아와 유리창이 깨어지면서 우리 차 안에서도 가스탄(M7A3최루탄)을 지프차에 2발을 던져 명중이 되니까 폭도의 차는 옆으로 빠져 따돌렸다“고 회고했다.
백운동 철도 건널목 앞에는 차량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 대위는 “폭도들이 건널목을 봉쇄하고 있었는데 난 ‘무조건 통과’하고 외쳤고 운전병은 경적을 울리며 바리케이드를 지나고 중대원은 개스탄을 수없이 던지며 그 건널목을 통과했다”고 했다.

▲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바리케이드를 강행 돌파한 과정을 설명하는 체험 수기.
철도 건널목엔 직경 50cm 정도의 검은 주철 파이프가 바리케이트로 쳐져 있었다고 이들은 증언했다. 차량이 빠져나갈 공간은 없고 파이프가 짧아 도로를 완전히 봉쇄하지 못하고 있을 뿐 1m 정도의 간격이 남은 유일한 통로였다는 것이다. 차량 동승병은 “운전병이 과감하게 차를 몰더니 남은 공간으로 바퀴 하나를 빼고 한 바퀴는 파이프 위에 걸치고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이 파이프를 통과하자 흩어진 주민들이 차에 돌을 던졌다”고 수기에 기록했다. 한 병사는 “맹목적으로 선동에 앞장선 주민들은 올바른 이성의 판단에 의해 폭도들을 지지하는가”라며 시민과 폭도를 구분해 수기에 적었다. 또한 “상부에서는 총기로 무장한 폭도들에게 최루탄을 유일한 무기로 지급하고 대처하라니… 우리들의 생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장병의 수기도 있었다. 정○○ 상병은 “날아온 주먹만 한 돌멩이에 의해 내가 앉아 있는 옆 유리창이 박살 나는 순간 유리 조각이 나의 얼굴에 튀었고 눈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며 “나는 눈가에 피를 훔쳐내며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우리가 죽든 살든 한바탕 해서 그들을 박살 내고 싶었다”고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박 병장은 “우리들은 막 욕을 하면서 죽이지 못해 억울한 마음을 먹었다. 왜! 우리가 광주를 빠져나오면서 수많은 치욕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적기도 했다.

▲ 공병대대 2중대 박○○ 병장은 “(폭도들을) 죽이지 못해 억울한 마음을 먹었다. 왜! 우리가 광주를 빠져나오면서 수많은 치욕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수기에 썼다.
2중대 이○빈 상병은 “정말 아연실색했다. 군인들이 버젓이 이렇게 있는데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뛴다는 것은 군인들이 너무나 온순하게 그리고 무기력하게 군중들에게 대한 결과라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더군다나 여기는 남해안 특히 도서지방이 많은데 간첩들의 침입 경로가 다분히 있는 지방에서 저렇게 날뛴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며 “이 혼란한 틈을 이용해서 북괴가 남침 또는 무장간첩을 남파하면 이건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해 울화통이 터졌다. 누가 정말 애국자며 민주주의 선봉잔가?”라고 분노했다. 그러면서 “난 폭도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 중에 정말 진정한 애국자가 있으면 손들라고. 그리고 길가다가 애국가나 태극기를 보았을 때 경청하거나 경례한 적이 있었냐고 말이다. 말로만 애국하는 얄팍한 애국심을 정말 총으로 쏴 갈기고 싶었다”고 했다.

▲ 44년간 학살자로 매도돼온 계엄군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 판인 계엄군의 모습이 묘사된 장병 체험 수기집이 공개돼 사건의 실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방위병들, 목포는 쑥대밭… 폭도들 주민에 가담하라 강요”
나주 방면으로 질주하던 1진은 군용차량을 만나 가까운 군부대를 물었다. 목포에 93연대가 있다는 답변을 듣고 그곳으로 다시 달렸다. 조 중대장은 “얼마 후 광주 방면에서 고속버스를 선두로 4대의 버스에 폭도들이 승차하고 군부대 앞을 지나는 것을 목격하고 사태가 점점 심각해짐을 직감할 수가 있었으며 공포감이 더욱 심해 갔다”며 “병사들을 안심시키고 난 후 연대 상황실에 대기하면서 상황을 파악하던 중 목포에도 폭도의 만행이 자행돼 방화와 파괴와 폭동이 시작됐다는 상황을 접수했다. 우리도 (93연대) 군수주임과 협조해 실탄을 개인당 60·48발 수령했다. 그동안 폭도들은 계속 광주~목포 간 도로를 왕래하면서 구호를 외침과 동시에 각종 유언비어를 퍼뜨리기에 바쁜 모양이다”라고 적었다.
무전병 김 상병은 “우리는 광주~목포간의 도로를 봉쇄해 폭동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93연대 측에서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다. 오전 10시30분 광주 방면에서 고속버스를 선두로 여러 대의 버스에 분승한 폭도들이 목포를 향해 93연대 정문 앞을 통과하는 걸 목격했다. 결국 폭도들에게 목포에서도 만행을 자행할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상부 판단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 2중대장은 목포 93연대에 진입한 이후에도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수기에 적었다.
1진은 목포 앞바다에서 3분가량 떨어진 군부대에 안전하게 진입했다. 조 대위는 이튿날인 22일 “폭도들은 계속 부대 앞을 왕래하고 목포·강진·해남·나주·무안 등지에서는 총기·실탄이 피탈됐다는 소식만 계속 상황실에 접수가 됐다”며 “오후 4시경 도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에 따라 광주~목포 간에 도로를 봉쇄했지만 매복지점에서는 총성이 계속 울리고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적었다.

▲ 장병들은 도로 봉쇄를 제때 하지 않아 목포가 피해를 본 데 대해 현지 실정을 모르는 군 지휘부를 탓하기도 했다.
간밤에는 폭도들이 부대를 습격할 것이라는 첩보에 따라 경계근무를 섰다고 했다. 무전병은 “폭도들은 광목도로를 타고 계속 무기고와 경찰지서를 습격해 다수의 무기를 확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현지 실정과 급변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탁상공론하는 자들을 욕했다. 하지만 군인은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므로 나의 분개는 폭도들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광주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고 썼다. 그러곤 “아침이 되자 겨우 목포를 빠져나와 출근한 방위병들이 목포에서 벌어진 방화·약탈·파괴의 참상을 이야기해 줬다”며 “우리들이 부대에 도착했을 때 도로를 봉쇄했더라면 그런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포까지 피해를 보다니 억울한 일이다”고 밝혔다.
2중대 이○빈 상병은 “출퇴근하는 방위들에 의하면 목포시는 쑥밭이 됐으며, 젊은이는 무조건 총을 주며 일에 가담하라고 강요했으며 주민들에게도 자기들이 지나가면 박수 치며 호응하라고 공포를 줬다고 했다“고 수기에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목포 93연대로 탈출한 185공병대대 1진은 23일 헬기편으로 전교사로 복귀한다. 2중대장은 이때의 심경을 “순간 얼마나 기뻤었는지 그때 당시 마음의 흥분을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며 “환송 나온 단장님, 대대장님, 단 참모님 그리고 중대원들을 봤을 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이제까지 불안과 공포의 날이 계속되던 것이 평온한 안도감을 가슴에 안은 채 대대 연병장에 도착했다”고 마무리했다.

▲ 이명재 185 공병대대장이 44년간 CD와 문서 형태로 보관해 온 계엄군 장병 수기집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살았단 기쁨 티끌도 없어… 실탄 없는 빈 총, 우린 군인 아니었다”
구사일생으로 현장을 빠져나간 1진의 걱정대로 공단 입구에서 전방으로 직진한 2진은 불운하게도 군분교 앞에서 탈출이 좌절됐다. 화정동의 폭도들은 장병들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이곳은 불과 한 시간 전 20사단 지휘부 차량 14대가 오도 가도 못하는 가운데 폭도들에게 무장 해제된 곳이었다. 공병단 2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전병이 아닌 2중대 김○준 상병은 “돌고개를 넘어서는데 수많은 폭도와 시민들… 손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우리는 여러분들을 악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손짓 몸짓으로 표현했지만 필요 없었다”며 “낫·삽·곡괭이·함마 등으로 모든 장비들을 마구 부수려 대들고 군용 지프차며 일반 차량이며 마구잡이로 빼앗는 것 같았다“고 수기에 적어 내려갔다.
2진 소속의 3중대 신○○ 일병은 무장 해제된 수치스러운 기억을 수기에 적었다. 신 일병은 “군인으로서 폭도 앞에 손을 든 것을 수치스러움과 미약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광주폭동 사태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엄청난 사태라고 생각한다. 광주에서 근무하는 군인으로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폭동 진압대원으로서 진압에 참가해 보았지만 극소수의 불순분자로 인해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진압 전투대원으로서 폭도들에게 많은 공격과 피해를 봤다“고 감정을 억눌렀다.

▲ 뒤쳐진 전우가 희생됐을지 모른다며 걱정하는 체험 수기.
3중대 우○○ 상병은 “우린 차를 빼앗기고 도보로 빠져나왔다. 폭도들은 군을 무기력하게 보았을 것”이라며 “그러나 생각은 오산이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북한 괴뢰 집단에 총부리를 겨눠야 할 우리 군으로서 어찌 그들의 가슴에 총을 겨눌 수가 있을까? 광주 시민들이여! 이 살기 좋은 한반도의 역사에 더러운 오점을 남기지 말고 더욱 자중해서 사태가 호전되도록 당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수기에 적었다.

▲ 홍○○ 일병은 “차량 및 병기를 빼앗긴 것은 통탄할 노릇”이라며 “병기가 있어도 실탄이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은 이미 발포명령이 내려졌어야 했다. 적어도 20일 저녁까지 말이다. 그렇게 됐다면 각 지역으로 분산되지 않았을 것이며 총기 내지는 실탄을 빼앗기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원인을 분석하는 수기를 적어 제출했다.
실탄 없는 빈 총으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어렵고 살았다는 안도감조차 없었다는 기록도 발견됐다. 185대대 3중대 한○○ 병장은 “살았다는 것이 기쁜 것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군인이 시민들에 쫓겨 후퇴해야 한다는 군인의 수준에 아니 군인이라는 사명감에 눈에는 눈물이 몸은 어떤 초조함에 싸여 흔들리는 트럭에 기대어 있었다”며 “잿등 밑에서 도로가 차단된 데서 시민들의 돌멩이가 날아오고 군 트럭이 박살 날 때 죽기 아니면 살기다. 침착하게 냉정히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실탄 없는 빈 총의 군인들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군인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이 모두가 머릿속에 상주해 있는 제대 날짜 때문일 것이다. 광주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던 나의 마음은 미련을 두지 말자고 마음속 깊이 다짐하며 골목길을 내달았다“고 광주에서 겪은 일을 잊고 싶다는 마음을 수기에 표현했다.

▲ 스카이데일리 취재진과 최종원·김덕수 민진사 위원은 지난달 16일 5·18 당시 185공병대대가 탈출한 경로를 따라 목포 앞바다가 3분 거리에 있는 옛 93연대 부대 터가 있는 곳까지 답사했다. 광주~목포 고속도로에서 외진 경사로에 자리한 부대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엇갈려 놓여 있다. ©스카이데일리
체험수기를 발굴한 계엄군 중대장 출신의 최종원 민진사 위원은 “국민을 지켜야 하는데 오히려 광주시민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 2진은 왜 상세한 체험을 쓸 수가 없었을까. 군인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과 굴욕으로 인해 창피했기 때문에 단지 몇 자만 적었을 뿐”이라며 “그들은 결코 광주시민들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
<32> 화순경찰서 ‘유치인 빼내기’… 800명 습격 가담
“유치인 내놓으라” 경찰서 내부에 총 쏘며 무기탈취 시도
기결수·피의자 등 탈옥 지원은 反사회적… 정당성 의문
5·18조사위 ‘민주화 운동’ 잠정 결론 심각한 타격 예상

▲ 1980년 5월 전남도경찰국에 불에 탄 차량들이 있다. ‘사진으로 확인된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문화체육관광부·2024년 1월) 391쪽 한국일보 기증 사진 재촬영
1980년 5·18 당시 폭도 800여 명이 5월21일 ‘집단발포’ 이전에 경찰 유치장에 갇힌 이들을 빼내려고 총을 쏘며 경찰서를 습격했다는 정부 기록물이 새롭게 발굴돼 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시위대가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수감돼 있는 구금자를 빼내기 위해 총을 쏘며 경찰을 위협한 사실이 정부 문건으로 공식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13일 문재인정부에서 출범해 지난해 12월 공식 조사 활동을 종료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위원장 송선태)가 공개한 ‘전남 일원 무기고 피습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5월21일 오전 11시쯤 무장 폭도 800여 명이 ‘유치장에 있는 유치인을 내놓으라’며 화순 경찰서 내부에서 총을 쏘고 무기 탄약을 탈취 시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제2의 교도소 습격’ 사건으로 5·18 연구가들은 해석한다. 5·18 당시 시위대는 간첩 및 비전향 장기수 약 170명이 수감된 교도소를 습격했다. 이 사건은 5·18이 순수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받는 데 적잖게 발목을 잡았고 여전히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다. 악한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무기고를 찾아 총과 칼을 손에 쥐었다는 시위대의 주장과 교도소 습격이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 치안본부 ‘전남사태 관계기록2’ 무기 탄약 피탈 및 회수상황(1980년 6월1일)
전 세계적으로 교도소와 구치소·유치장 등 국가 교정시설에 구금된 양형 확정 기결수 또는 미결수나 피의자를 탈옥시키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반(反)사회성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직접적인 공격 행위에 대해선 강력하게 대응한다. 특히 총을 든 무장 습격이라면 더욱 강력한 사법적 제재가 뒤따른다.
송선태 5·18 조사위 위원장이 대외적으로 공개를 승인한 공시 보고서(일련번호 직바-7)에 따르면 5·18 당시 시위대는 논란 속 교도소 공격뿐만 아니라 경찰 유치장에 대한 직접적인 무장 공격도 감행한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등 총 4개 정부 기록물을 근거로 작성한 5·18조사위 보고서 135·136쪽에는 △10:40(오전 10시40분) 무장 폭도 50여 명이 CAR 및 각목 휴대하고 화순 이십곡리 검문소 피습 유리창 및 기물 파괴하고 △10:50 무장 폭도 110여 명이 칼빈 및 각목으로 무장하고 경찰서 기습 현관문을 파괴하고라고 기재돼 있다고 보고서는 기술했다.
이어 △11:05 광주고속·화물차량 등 10대에 분승 2차 경찰서 기습 내부에 침입해 경무과 유치장에 칼빈을 난사하면서 유치인을 내놓으라고 하며 닥치는 대로 서장실과 각과 집기물·비품 등과 유리창을 파손하고 △11:50 무장 폭도 800여 명이 재차 기습 각과를 돌며 기물 파괴 및 라디오 등 절취하고 일부는 시위에 속하고 일부는 지역 각 방면 분산해 무기탄약 탈취 시도라고 수기(손 글씨)로 기록돼 있다고 조사위는 공개했다.
보고서는 “내용들이 분 단위로 상세히 기록돼 있다”고 언급했다.

▲ 군의 관점에서 작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충정작전결과’ 보고서에는 이미 5월21일 오전 11시30분에 ‘시위 군중 330명이 전(남)대 지역 3공수여단 공격’ ‘차량 12대로 돌진공격 감행’이라고 적시됐다. 전교사 자료집
정부 조사위원 3인 “이전 공개 안 된 신규 발굴 자료” 밝혀
자료의 정확성을 담보하기 위해 5·18조사위 상임위원 등 위원 3명은 또 다른 정부 기록물에도 동일한 상황 설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조사위는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에 기록돼 있는 위 내용들은 당시 근무일지를 작성했던 △심동섭의 자술서(1980년 6월4일) △화순경찰서 경무과장의 징계의결서(전라남도경찰국 경찰관 보통징계위원회 1980년 6월14일) △당시 화순경찰서에서 작성한 서류인 ‘경찰관서 피습상황’ 이상 3건의 서류에도 모두 동일한 내용들이 기록돼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면서 “즉 4건의 서류에 적힌 내용들이 모두 동일한 것이고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작성자가 심동섭인 데다 심동섭의 ‘자술서’와 종합상황실 근무일지의 필체가 같으며 내용도 같다”며 “당시 화순경찰서 경무과장의 ‘징계의결서’ 내용을 보면 종합상황실 근무일지에 적혀 있는 내용과 동일하고 당시 화순경찰서에서 작성한 ‘경찰관서 피습상황’에 적혀 있는 내용도 동일하다. 이 4건의 서류에 적힌 내용들이 모두 동일하다”고 밝혔다.
이번 정부 기록물의 발굴은 우파적 관점에서 5·18을 조사해 온 연구가들에겐 의외의 소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애초 5·18조사위는 당시 공소 기록상 ‘무기고 피습’ 죄명으로 처벌된 63명의 신원이 확인됐기 때문에 ‘북한군 등 외부 세력’의 개입은 있을 수 없고, 오후 1시 이후에 무기고를 탈취한 기록물을 제시하며 ‘민주화운동’이 맞는다는 잠정 결론을 내리면서 이번 ‘무기고 습격’ 직권조사 과제에 대해 ‘진상이 규명됐다’고 전원위원회에 의견을 제출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록물에 담긴 사실관계 등을 근거로 조사위원 3인이 ‘오전에도 무기 탈취가 있었기 때문에 진상이 규명됐다고 보기에 어렵다’고 소수의견을 내 결국 조사위가 출범 무렵인 2020년 5월 제10차 전원위에서 5·18특별법 3조에 근거해 조사 개시를 결정하고 공을 들여온 ‘전남 일원 무기고 탈취’ 과제는 ‘진상규명 불능’으로 최종 처리됐다.
‘화순경찰서 유치인 탈옥 시도’ 사건은 이 같은 결론이 도출되기까지 주효한 사례이자 조사위 전원위 결과물을 반박하는 결정적인 하나의 증거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위원 9명 중 이종협 상임위원과 이동욱·차기환 비상임위원은 보고서에서 조사의 부정확성과 부실함을 탓하며 “진상 규명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민병로·김희송·오승용·서애련 위원은 지난해 12월26일 제116차 전원위원회에서 ‘전남 일원 무기고 피습’ 보고서에 대해 “일관성과 체계성이 없는 조사보고서이고 (작년) 9월17일까지만 해도 무기 피탈 시간을 밝혔음에도, 그 이후 무기 피탈 시간의 신빙성이 낮은 주장을 근거로 시간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고 보고서가 바뀌었다”고 소수의견과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 전남도청 정문 옆 민원실 내에 회수한 총기들. ‘사진으로 확인된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문화체육관광부·2024년 1월)’ 183쪽 이창성 기자 기증 사진 재촬영
뜨거운 감자’ 시민 선제 무장과 무기고 습격 시점
5·18조사위는 출범부터 직권조사 과제로 삼은 ‘무기고 습격’ 안건 보고서에서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2008년)’ 등 지만원 박사의 저서들에 언급된 북한군 침투 의혹을 반박하는 데 절대적 분량을 할애했다.
지 박사의 최초 의혹 제기에서 출발한 시위대의 선제 무장 논란은 무기고 습격이 5월21일 오후 1시 이전인지, 이후인지로 요약된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측에선 이날 오후 1시 계엄군이 일제히 선제사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을 집단 살해했기 때문에 시위대가 전남 각처로 흩어져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빼내 와 ‘악마’ 같은 진압군에 맞섰다는 논리를 편다.
이에 대해 우파 관점의 5·18 연구가들은 도청 앞 계엄군이 선제사격했다는 이른바 ‘집단발포’는 명백한 허위이자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입장이 명확하다. 직접적인 시위대 목격 기록물이 없는 데다 광주·호남 출신 장병 등이 상당수 포함된 국군의 성정(性情)과도 맞지 않는다고 본다.
하루 전날인 20일 밤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계엄군 최초 사망자인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가 광주역에서 차에 깔려 죽었고 비슷한 시각 전경 4명이 시위대 차량에 깔려 죽어 격앙된 계엄군이 수위 높은 폭행을 가했을 순 있어도 가만히 일렬횡대로 모여 있는 시민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는 논지다.
옥상 하향 사격도 알려진 실체와 다르며 KBS 다큐멘터리 등에 등장한 예비역 중위 광주시민의 수협 옥상 군복 사격도 시점이 불명확하다고 본다. 당시 군 관련 기록에도 시위대와 장갑차의 선제 돌진 공격이 있자 대응 사격을 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집단 발포의 직접 증언으로 쓰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포(砲)’를 쏜 것이 아니므로 ‘발포’라는 표현 자체도 북한식 선전·선동과 유언비어에 속은 결과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 같은 관점을 임시로 배제하더라도, 21일 오후 1시 집단발포보다 먼저 무기고를 습격한 사례가 있다면 민주화운동으로서 명분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돼 왔다.
이 때문에 시위대의 무기고 습격 시점은 2000년대 들어 꾸준히 ‘뜨거운 감자’였지만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정부 문건으로 우파 중심의 추가 조사의 여지가 확대됐다.
5·18 정부 조사위원들이 ‘화순경찰서 습격 및 유치인 탈출 총격 시도’ 사건을 근거로 시위대 선제 무장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진상규명 가능’에서 ‘불가능’으로 결론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문재인 조사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우파 중심의 조사위 구성이 절실하다는 새로운 시사점을 던지며 마무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❶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가 낸 ‘전남 일원 무기고 피습사건(직바-7)’ 보고서 표지. ❷❸ 5·18조사위 소속 위원 3인은 ‘무기고 피습사건’의 진상이 규명됐다는 전원위원회 보고서에 반박하기 위해 뜨거운 논란인 ‘5월21일 오후 1시 집단발포’ 이전인 이날 오전 11시쯤 폭도 800여 명이 화순경찰서 유치인을 빼내기 위해 총을 쐈다’는 내용이 동일하게 적시된 새 기록물 4건을 발굴한 사실을 보고서 136·137쪽(가운데)에 공개했다. ❹전남대 정문 앞 5·18 조형물. 남충수 기자 ©스카이데일리
“진압군 발포보다 무기고 먼저 습격” 논란 가열
시민 선제 무장·무기고 습격시점 기존관점에 변수
조사위 3인 “다른 기록물에도 화순상황 동일” 확인
문재인정부 조사위 한계… 우파 중심 진상규명 필요
정부 기록에 드러난 ‘폭도 800여 명’... 지만원 제기 600명보다 많아
이번에 새롭게 발굴돼 일반에 공개된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등 정부 기록물 4건에는 ‘폭도 800여 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
이는 지금까지 전남 일대의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 또는 시위대의 규모로는 가장 큰 것이다.
일찍이 북한군 침투 의혹을 제기한 지 박사는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2008년)’에서 습격 주체의 규모를 ‘600명’으로 표현했다. 5·18조사위도 이번 보고서에서 “지 박사가 무기를 탈취한 주체를 시위대 600명이라고 했다”고 6쪽에서 적시했다.
이에 대해 조사위 보고서 132쪽은 “5·18 당시 기소자 중 63명이 전남 일원의 무기 탈취에 직접 관련돼 처벌받았음이 확인됐다”고 했다.
끝내 ‘규명 불능’으로 분류돼 사실관계가 불분명함을 전제로 조사위 전원위에 상정된 조사 결과물에 따르면 “이 63명은 주거지에 따라 광주에서 혹은 지역에서 시위대에 합류하고 시위 과정에서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사실이 이들에 대한 수사기록 등에서 확인됐고 공수부대의 폭력을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에 가해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주저 없이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중략) 도청 발포 소식을 접한 이후 본격적인 무장을 시도했던 것이 군과 정보기관의 시위대 동향 보고와 위원회 조사 결과 등에서 확인됐다”고 보고서는 기술했다.
이로써 조사위는 규명 불능으로 폐기되기 전에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발포 이전에 시위대가 무장했다는 시위대 선제 무장 여부 문제는 전남 일원으로 진출한 시위대에 의한 무기고 피습 시간대 또한 남평지서 피탈 시간인 오후 1시30분쯤을 시작으로 모두 오후 시간대임이 확인됐다”며 “전남 일원으로 진출해 무장한 시위대의 선제 무장설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됐다”고 결론 내렸다.
조사위는 또 보고서에서 “5월21일 오후 1시 이전 피탈 현황을 조사한 결과, 5월19~21일 기간 중 계엄군의 총기 분실 및 피탈 사례는 총 7건으로 이중 총기와 함께 실탄이 분실된 사례는 5월19일 1건으로 당일 회수했고, 실탄 분실은 5월21일 오전 8시10분쯤 광주공단 입구에서 20사단 지휘차량 탄약(실탄 200발) 피탈 단 1건이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 무기류 피탈 현황이 기재된 보안사령부 존엄 문서.
그러면서도 그간 공개된 정부 기록물에 따른 21일 오후 1시 이전 습격 사례들도 열거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88년 국방부 ‘국회특위부록I’은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작전상황일지와 전교사·특전사·20사단·31사단 전투상보를 근거로 ‘21일 오전 11시 나주금성동파출소 무기 피탈(칼빈 650정·칼빈 실탄 3만9000여 발) 치안본부/전남도경 보고자료’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또한 “육군본부가 치안본부에 기록을 요청하기 전에 작성했던 ‘현안문제 관련자료’(1988년 5월19일 발송)는 금성파출소 습격 무기 탈취 시간을 5월21일 낮 12시~12시20분으로 정리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가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상황(1985년 5월)’에서 ‘5월21일 오전 9시~낮 12시 나주서 금성파출소 습격 무기 탈취·총기 773정·실탄 10만8806발·수류탄 182개’ 피탈로 정리한 사실도 소개했다. 조사위가 인용한 보안사의 존안문서(전남도경 상황일지 21·22쪽)에 반남지서와 남평지서의 피탈 시각을 각각 5월21일 오전 8시와 9시로 기록한 점도 기술했다.
반박의 재반박 끝내 ‘규명 불가’… 4년간 예산만 낭비한 조사위
‘63명이 집단발포에 반발해 오후 1시 이후에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조사위의 다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조사위 내부 반론, 즉 ‘소수의견’은 논리와 근거가 탄탄해 보인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추천 몫으로 5·18조사위에 참여한 이종협 상임위원은 지난해 조사위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아직 (내부) 견해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채택할 때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합의가 이뤄지거나 표결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했다. 또 한기호 당시 국회 국방위 상임위원장이 “(소수의견을) 같이 기술해달라”고 재차 요구하자 이 위원은 “예”라고 약속했다. <본지 2023년 10월13일자 “하나회-발포명령 엮지 말라”… 혼쭐 난 5·18조사위원장 보도 참조>
이에 따라 이 위원 등 3인은 이번 보고서 133쪽에서 “남평지서·금성동파출소·영산포지서 무기고는 5월21일 오전 무렵 시민들에 의해 총기가 탈취됐다는 사실이 징계 기록 등 우리가 배척하기 힘든 공적 서류에 기록돼 있다”며 시민 선제 무장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기 힘든 사유를 제시했다.
또한 “총기 피탈 현장에 있었던 경찰관 등의 인원들 중에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 일부가 총기가 피탈된 시간이 ‘1980년 5월21일 오전’이라고 여전히 진술하고 있다”고도 거론했다.
이들은 1980년 사건 직후 작성된 징계 기록 등 공적 서류 작성에 신군부의 입김이 개입되지도 않아 자료의 신빙성이 크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위원 등은 “당시 공적 서류가 신군부의 입김이 개입된 조작되고 의도됐다면 신군부가 1988년 국회 청문회와 각종 5·18 관련 법적 다툼 과정에 이 자료들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이 자료는 조사위가 발굴한 것으로 지금까지 공개된 바가 없기 때문”이라고 전례 없는 최초 공개 자료임을 역설했다.
전원위원회 속기록에도 조사 결과를 불신하는 의견들이 속출했다. 보고서 116~120쪽은 ‘남평지서는 오후 1시30분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지만 전원위는 나주경찰서 경무계장·남평지서장·남평면 예비군 전투소대장 등 생존자 3명은 아직도 “총기 피탈 시간은 오전”이라고 진술한다고 반박했다.
나주경찰서 경무과장의 징계의결서에도 ‘(21일) 오전 9시50분쯤 무장 폭도들이 침입 무기를 탈취하고’라고 기록됐다는 반론이 제시됐다.
‘금성동 파출소 오후 2시’ 결론을 내린 보고서 118~120쪽에 대해서도 금성동파출소 김종빈 경장의 계고장에는 ‘오전 11시30분 총기를 난사하며 난입한 폭도들에게 (중략) 피탈 당한 비위 사실에 대해’라고 기록됐다는 사실을 들어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보고서 67쪽은 영산포지서는 시점을 확정하지 못했다고 기술했으나 위원 3인은 ‘나주경찰서 수기 작성 서류는 21일 오전 11시 약 60명·피탈 총기 CAR 1정·무기 탄약고 자물쇠를 총으로 난사 파괴’로 기록된 점을 꼽아 반박했다.
역시 조사 결과물로써 전원위에 ‘규명’으로 올라간 보고서 71쪽에 대해서도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등 4건의 신규 발굴 기록물을 근거로 강력하게 ‘규명된 것으로 합의에 이르러선 안 된다’는 의견을 보고서 135·136쪽에서 피력한 결과 전체 보고서가 ‘규명 불능’으로 종결됐다.

▲ 불에 탄 광주 임동파출소. ‘사진으로 확인된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문화체육관광부·2024년 1월) 450쪽 이창성 기자 기증 사진 재촬영
“우파 중심 새 조사위 꾸려 진상 철저 규명해야”
이 밖에도 소수의견은 보고서 112쪽에 ‘표17’은 21일 오후 1시 이전 ‘광주지역 계엄군의 무기 분실 및 피탈 현황’이 제시돼 있는데도 “미회수 총기 최소 26정과 M60기관총의 실탄 200발에 대해 별도의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고 의견을 냈다.
또한 ‘5월21일 오전 3시30분쯤 광주세무서 칼빈 17정 분실’로 표현된 것과 관련해 위원 3인은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분실’이라는 표현보다는 ‘피탈’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했다. 그 이유로 “31사단 김영해 상병의 경우 CBS 방송국으로 진입한 시위대가 김 상병의 총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져버렸고, 11공수여단 김 하사의 경우 양림다리 근처에서 시위대에게 구타를 당했으며, 광주세무서의 경우 시위대가 세무서 방화 후 침입해 무기고 속에 보관 중이던 칼빈을 가져간 것”이라며 “당시 계엄군 기록에 ‘분실’이라고 (표현된 것은) 총기 보관 책임을 경감하기 위해 잘못 기록된 것이고 우리 보고서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평가해 ‘분실’됐다는 표현보다는 ‘피탈’됐다는 표현이 더 타당하다”고 적합한 용어 채택·사용을 조사위에 주문하기도 했다.
그동안 민간 5·18 연구가들은 정부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다. 특히 기밀자료는 열람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5·18특별법’상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는 정부 조사위는 당시 자료에 대한 광범위한 열람·복사·요구 등의 권한으로 기밀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다.
특히 5·18의 진상을 알만한 관계자에 대해선 계엄군 또는 시위대 출신 인사, 당시 정부 당직자 등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제 대면 조사까지 가능하다.
따라서 우파적 관점에서 정부 조사위를 새롭게 구성해 그동안 숨겨진 정부 문건을 다시 확인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계엄군 중대장 출신의 최종원 민간5·18진상조사위원회 위원은 본지에 “5·18 당시 있었던 사건들을 유불리에 의한 인간 법칙의 적용이 아니라, 있었던 그대로의 실체를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자연 법칙으로 정부에 숨겨진 문서들에 의해 규명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제언했다. ⊙
<33> 전일빌딩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다
기총소사 피해자·증거 없는데 의혹만 부풀려 진실 왜곡
“조비오 주장 신빙성 인정 어렵다” 조사위 공문서 수록
▲ 문재인정부가 만들어 4년간 500억 원 이상의 국민 혈세를 들인 5·18 정부 조사위원회가 끝내 ‘헬기 기총사격’ 규명에 실패했다. 조사위는 부실한 근거와 추정으로 진상이 규명됐다고 무리수를 던졌지만 ‘이런 식으로 결론 내려선 곤란하다’는 조사위 내부 반발에 부딪힌 결과, 사실관계를 입증하지 못했다. 헬기에 기관총 거치대를 설치하기 위해선 이륙 전부터 헬기 문짝을 분리해야 한다는 항공 관계자의 지적이 있다.(작은 칼라 사진·매일신문 온라인 캡처). 당시 문을 연 헬기의 모습이 목격됐다거나 사진으로 촬영된 전례가 없는 데도 전일빌딩 전시관에는 문을 개방한 헬기 모형이 일반에 공개돼 있다. 조사위는 시민군이 헬기에 총을 쏜 사건에 대해선 규명조차 안 해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그래픽©스카이데일리
1980년 5·18 당시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現 전일빌딩245) 헬기 사격은 증거가 없다고 정부 일부 조사위원들이 결론 내렸다.
이로써 조비오 신부(본명 조철현·2016년 사망) 등이 1989년 국회 청문회에서 처음 공개 증언하면서 촉발된 ‘기총소사’ 논란은 35년 만에 실체 확인이 불가능한 일방의 주장인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동안 전일빌딩 최고층인 10층(옛 전일방송) 천장과 중앙 기둥에 있는 총탄 자국(탄흔)은 계엄군 헬기가 쏜 ‘기총소사’ 때문이라는 주장이 지속됐고,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잔혹성을 집중 부각함으로써 국민을 호도하고 군의 사기와 명예를 떨어뜨렸다는 비난이 있었다.
실제 헬기 기관총에 맞아 죽은 피해자가 단 한 명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헬기 사격 이슈는 신문과 방송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며 ‘계엄군은 악마’라는 주장과 맞물린 채 확대 재생산됐다. 도리어 시위대가 군헬기를 쏜 사건은 규명조차 안됐다. 군 3급기밀 문건에는 1980년 5월21일 오후 2시45분 전남도청, 3시50분 광주 국군통합병원 상공에서 각각 UH-1H 군 헬기가 지상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6개 탄흔이 발생한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앞서 문재인정부가 구성한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는 2018년 최종 보고서에서 ‘분명한 사실은 충정작전 시 1980년 5월27일 많은 무장 헬기가 작전에 참가했다는 것’이라고 언급한 뒤 어떠한 물증과 가담자 증언 없이 84쪽에 “시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M60 또는 M16 총기를 사용해 전일빌딩을 향해 사격을 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는 황당한 결론을 끌어내 국민에게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과학적·합리적 배척 사유를 들어 헬기 사격 주장의 물증이 없고 근거 자체가 빈약하며 실제 정황과 맞지 않는 데다 당시 관공서와 군 기록에도 전혀 존재하지 않아 조씨 주장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논리적 반박이 정부 조사위 공문서에 구체적으로 처음 기재된 것이다.
15일 문재인정부에서 출범해 지난해 12월 공식 조사 활동을 종료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위원장 송선태)가 공개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직나-10)’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5월27일 새벽 헬기 기총소사가 규명됐다는 다수 의견을 반박하는 소수의견이 처음 기재됐다.
5·18조사위의 이종협 상임위원과 이동욱·차기환 비상임위원은 다른 위원들이 ‘기총소사가 사실로 규명됐다’는 취지로 전원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가 증명이 미흡한 일방의 주장을 근거로 했다며 조목조목 반박했고 오히려 ‘헬기를 못 봤다’는 신빙성 있는 증언은 고의로 배제한 데 대해 질책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직나-10)’ 보고서 표지.
구체적으로 위원 3인은 위원회의 실험사격 탄흔과 전일빌딩 탄흔 245개의 감정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한 결과 ‘탄흔 크기가 최대 7.4배, 관입 깊이는 5.6배 차이 난다’는 회신을 받고 전일빌딩 탄흔은 헬기 기관총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이어 전일빌딩 탄착군(탄흔이 모인 지점)은 수평사격이어야 가능한 각도인데 헬기가 고도를 낮춰 10층 높이를 유지했다는 ‘호버링(hovering.공중정지비행)’에 대한 목격자 진술이 없고 직접 총을 쐈거나 기관총 사격을 도왔다는 조종사와 사수·부사수의 증언이 없는 데다 기관총 사격 후 바닥으로 떨어졌을 탄피 200여 발 중 한 조각이라도 발견됐다는 역사적 기록이나 증언이 전혀 없는 점을 들어 설득력 있게 반박했다.
또한 당시 전일빌딩 옥상에 있던 외신기자 2명과 건물에 있다가 체포된 시민군 김모 씨가 ‘헬기를 목격하지 못했다’고 신빙성 있게 진술했지만 전남대 출신이 주축인 5·18조사위에서 다른 상임 및 비상임위원들이 이 사실을 외면한 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전일빌딩 기총소사 시점으로 주장되는 5월27일 새벽은 계엄군이 전남도청 수복 작전을 위해 곳곳에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던 시점이었는데도 군 기록물에 ‘헬기 사격’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마찬가지로 전남경찰과 전남도청·광주시청·동구청 등 관공서의 각종 상황일지에도 기록이 없어 조씨 등의 목격 진술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고 “헬기 사격의 진상이 규명됐다고 결론 내려선 안 된다”고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조씨 등으로부터 비롯된 ‘기총소사’ 사건은 숱한 국가적 손실과 기회비용만 날려버린 채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일방의 주장으로 남게 됐다.
“표적 맞은 탄두가 뾰족?… 시위 군중 위협사격했다는데 본 사람 없어”
이 상임위원 등 5·18조사위원 3인은 “헬기사격에 관한 ‘결정적 증거(스모킹건)’가 없다”며 전원위가 부실한 근거를 앞세워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진상규명’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막았다.
이들의 논리적·과학적 반박을 살펴 보면 그동안 ‘헬기가 총 쐈다’는 조씨 주장이 얼마나 허구에 가까운 것인지, 이를 질끈 부여잡은 5·18조사위가 얼마나 억지 논리를 덧대려 했는지, 이를 보도한 언론들의 팩트체크가 얼마나 함량 미달이었지를 손쉽게 가늠할 수 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그 이유로 “헬기 사격을 직접 실행하는 조종사와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사실을 알 수밖에 없는 정비사·무장사·승무원들이 헬기사격을 부인하는 데도 위원회가 정황 증거들만으로 헬기사격이 실제 존재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위원 3인은 못을 박았다.
소수의견은 크게 △5월21일 광주천 헬기 사격 △5월27일 전일빌딩 헬기 사격의 두 가지 과제에 대해 ‘근거 없다’고 일치된 판단을 제시했다.

▲ 군 헬기가 위협사격을 했다는 조사위 다수 의견에 대한 반대 논리로 소수 의견은, 위협하려면 시위군중이 모여 있어야 하고, 모인 군중 가운데 목격자가 없다는 건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지적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직나-10)’ 보고서 159쪽
먼저 이 위원 등은 “조사위가 21일 광주천 불로동 다리 상공에서 506항공대 소속 500MD 헬기가 광주천과 광주공원 및 사직공원을 향해 위협사격 수준 이상의 사격 사실이 있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조씨와 천주교 신도 이모 씨의 목격 진술은 당시 불로동 다리 주변에 상당수 시위군중이 밀집해 있었는데 헬기사격 목격자가 전혀 없다”며 “목격자가 없다는 것은 만약 헬기가 위협사격했다면 위협을 받을 사람이 전무했다는 희한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반박했다.
또한 “전남경찰·전남도청·광주시청·동구청 등 관공서의 각종 상황일지에 헬기에서 사격했다는 내용이 없고 당시 도청 앞 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들 중에서도 목격자가 나오지 않아 (조씨 등의) 목격 진술을 신뢰하기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소속이 다른 조종사들이 사격했다고 대화하는 소리를 광주비행장에서 들었다는 조종사 진술에 대해서도 이 위원 등은 “믿기 어렵다”고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이들은 “203항공대 UH-1H 조종사 고모·노모 씨 진술은 자신들이 직접 헬기 사격을 목격한 게 아니고 소속이 다른 코브라 또는 500MD 헬기 조종사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는 전언 진술”이라며 “그러나 광주천변에 코브라 사격이 있었다면 20㎜ 발칸의 위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당시 광주천변에 있었던 많은 시위 군중이 인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목격한 사람이 없고 AH-1J 코브라 헬기나 500MD 헬기 사격 시 다량의 탄피들이 기체 밖으로 배출돼 떨어지는 데 어떤 실물 증거나 목격자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헬기 사격 지시·지원 요청·명령 하달이 존재했다는 진술만으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고 조종사·정비사 등은 헬기 사격을 부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명령 하달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헬기 사격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조사위 내부의 반박 의견.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직나-10)’ 보고서 159쪽.
조사위 보고서 154쪽은 ‘5월22일 광주로 출동한 AH-1J 코브라 헬기 사격의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한다’며 31항공단 탄약관리하사의 진술과 조선대 절토지에서 발견된 한 발의 20㎜ 연습탄두 등을 근거로 적시했다.
그러나 소수의견은 “31항공단 최모 하사가 코브라 헬기가 출동 시 20㎜ 발칸 탄약 헬기당 500발씩 총 1000발을 무장한 채 출동했으나 3분의 1가량 소모된 채 복귀했다고 진술했다”며 “그러나 이를 모를 수 없는 무장사나 정비사들의 증언이 전혀 없고 사격한 수량만큼의 탄피가 발견된 바도 없다”고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했다.
20사단 전투상보 보급문서에 기록돼 있다는 ‘5월23일 20㎜ 발칸 탄약 1500발 항공대 보급’과 관련해서도 위원 3인은 “실제 보급이 이뤄졌다면 탄약을 보급해 준 20사단 탄약 업무 관련자와 코브라 항공대의 무장사나 정비사들도 모를 수 없는데도 이들의 증언이 없다”고 언급했다.

▲ 끝 부분이 뾰족하게 원형을 유지한 채로 발견된 원형 탄두는 코브라 헬기에서 발사된 탄두가 아니라는 조사위 소수의견.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직나-10)’ 보고서 160쪽.
이어 조선대 절토지에서 발견된 한 발의 20㎜ 연습탄두에 관해서는 “M16 소총도 (표적에 맞으면) 탄두 끝부분은 뭉그러지는데 헬기에서 쏜 탄두의 끝부분이 뾰쪽한 것은 코브라 헬기에서 발사된 탄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과학적 근거에 따라 조사위 주장을 일축했다.
또한 “발칸사격 시 10여 발씩 연발로 발사되고 탄착군이 형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 발만 발견된 것도 일반적이지 않다”고 봤다.

▲ 1980년 5월 항쟁기간에 전일빌딩 상공을 비행하는 군헬기. 연합뉴스
왜곡된 주장만 득세… “헬기 못봤다” 증언 고의로 외면
이종협 위원 등 3인 전일빌딩 탄흔 245개 국과수에 의뢰
“헬기 기관총 탄흔 아니다” 통보 받아… 과학적 근거 제시
그동안 궤변으로 국민 현혹… 5·18 책임 軍에 뒤집어 씌워
“전일빌딩 헬기 사격 근거 없다”… 흥미진진한 과학적·논리적 내부 반론들
송선태 조사위원장이 공개를 승인한 이번 보고서의 소수의견을 살펴보면, 그동안 헬기 사격 주장의 근거가 얼마나 빈약하고 일방적 추정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엿 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일빌딩에 관한 조사위 보고서 154·155쪽도 ‘헬기 사격은 근거가 없다’고 위원 3인이 의견일치를 보였다.
보고서는 “5월27일 광주재진입작전 당시 전남도청 일대 진압작전에 대한 항공부대의 작전 참가 과정에서 대공화기가 전일빌딩 옥상에 설치됐다는 첩보에 따른 전일빌딩에 대한 사격이 있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놨다.
이에 대해 위원 3인은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 같은 근거로 “위원회 실험 사격 탄흔 데이터와 전일빌딩 탄흔 데이터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전일빌딩의 탄흔 크기 데이터는 위원회 실험 사격의 탄흔 크기 데이터에 비해 약 1.5∼7.4분의 1 비율에 불과해 매우 작고 관입 깊이도 또한 약 5.6배 차이가 난다”며 “전일빌딩 내 탄흔의 크기 및 관입 깊이는 실험 사격의 탄흔 크기 및 관입 깊이와 차이가 너무 크게 나서 헬기 사격으로 인한 탄흔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적시했다.

▲ 조사위가 자체 실험한 데이터를 국과수에 감정 의뢰한 결과, 이 결괏값과 전일빌딩 탄흔 크기 데이터는 크기와 깊이가 달라 헬기 사격 때문에 발생한 탄흔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조사위 다수 의견은 또다시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며 ‘진상 규명’ 결론에 이르는 정황 증거로 간주하려 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직나-10)’ 보고서 161쪽.
이어 “감정 결과에서 탄환이 유리를 통과한다든지 하면 탄흔의 크기 차이가 날 수 있다고 돼 있지만 유리는 한 번 통과하면 깨지고 없어진다. 몇 발 정도는 탄흔의 크기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탄흔 크기 차이가 이렇게 현저히 나는 것에 비추어 헬기 사격으로 인한 탄흔이라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전일빌딩 옥상에 거치된 대공화기(LMG) 제압을 위해서 헬기가 격추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버링 상태에서 용감하게 임무 수행할 조종사는 없다”며 “전일빌딩에 남아 있는 탄흔은 UH-1H 헬기가 호버링 상태에서 M60기관총 또는 M16소총으로 사격했을 때나 생성 가능한 탄착군을 형성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 밖에도 “‘계엄군 지상병력의 작전을 공중화력으로 지원하기 위한 헬기 사격을 포함한 항공작전이 전개됐을 가능성을 목격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는데 당시 작전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시민 이모 씨는 ‘오전 3시30분쯤 적십자병원 삼거리에서 헬기가 병력을 내려놓고 도청 쪽으로 UH-1H 이동하면서 3번 사격했고 헬기에서 내린 병력도 도청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는데 이는 당시 작전 상황과 전혀 맞지 않다”고 증언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전일빌딩 내 탄흔과 UH-1H에서의 사격 상황이 현실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들 위원은 “전일빌딩에 생성된 탄흔이 245개인데 시민 목격자들은 목격 시각도 제각각이며 한결같이 헬기가 잠깐 쏘고 사라졌다는 진술밖에 없다”며 “이러한 진술로는 전일빌딩 탄흔 245개를 설명할 수 없고 목격자들의 진술은 헬기 호버링 사격 상황이 없는데 호버링 사격이 아니고선 전일빌딩 탄흔 245개를 설명하기 어려워 목격자 진술은 상호 모순된다”고 판단했다.
헬기 내에서 M16소총을 사용했을 경우 245발을 쏘기 위해서는 20발들이 탄창이 최소 12개 이상 필요하고 탄창 교환을 거치며 연속 사격했다면 발생하는 총구 과열 등 여러 문제가 설명되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
이 위원 등은 “M60기관총의 경우 조사에 참여했던 위원회 전문위원은 ‘당시 UH-1H에도 기관총 거치대가 설치됐다’고 위원회에서 진술했으나 사진 제시 등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그 무엇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이 같은 주장을 유지하는 위원이 누군지 소수의견에서 실명을 밝히진 않았다.
이들은 또 “M60기관총을 사용할 경우 거치대가 없었다면 양손으로 들고 쏠 수밖에 없고 사격 시 반동으로 탄착군을 형성시키기 매우 어려워 전일빌딩 내에 형성돼 있는 탄흔처럼 한 공간으로 집중 사격이 가능하지 않다”고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M60기관총은 사수와 부사수 두 사람이 운용하므로 이들의 증언도 실재해야 하지만 그런 증언이 없다는 점도 ‘헬기 사격’을 단정하지 못하는 이유로 꼽았다.
소수의견은 “분당 발사 속도 550∼650발의 M60기관총을 기준으로 제작된 탄띠는 7.62㎜ 실탄 100발이 한 줄로 연결돼 있고 전일빌딩의 탄흔 245개가 M60기관총에 의한 것이라면 최소한 3번의 탄띠 교환을 위해 부사수가 세 번 이상 사수의 사격에 개입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헬기가 호버링 상태에서 사격했을 경우 아래로 쏟아지는 탄피 200여 발이 증거물이 될 수 있으나 5·18 당시 전일빌딩 일대에서 M60기관총 탄피 실물의 발견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헬기 사격과 전일빌딩 탄흔과는 현실적으로 연결 지어 설명할 수 없다”고 조사위 전체 결론을 반박했다.

▲ 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수복 작전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곳곳에 숨어 대기하던 계엄군 중에 전일빌딩 10층을 향해 헬기가 총을 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진술이 단 하나도 없음을 지적한 소수의견.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직나-10)’ 보고서 161쪽.
계엄군이 도청 일대에서 본격적인 작전을 전개하기 이전에 육군 항공의 헬기들이 임무에 투입돼 오전 3시20분쯤부터 전일빌딩을 향해 사격한 것처럼 본문 내용에 기술된 점도 문제 삼았다.
조사위원 3인은 “이 시간에는 이미 3·7·11공수여단 특공조 및 20사단, 그리고 이들의 길 안내를 맡은 경찰이 도청·전일빌딩·광주공원 인근에 은밀히 접근해서 공격 대기 중이었다”고 작전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상황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은밀히 접근해서 공격 대기 중이던 계엄군 작전 병력 중에서 여러 증언자가 안 나올 수가 없고 피아 구분이 어려운 야간에 아군이 공격대기를 위해 배치된 지역으로 헬기를 띄워 사격할 정도의 공·지협동 항공작전을 계획했다면 지상작전부대와 항공작전부대가 사전에 협조 회의를 안 할 수 없다”며 “그런데 당시 지상작전부대와 항공작전부대가 사전에 협조 회의를 했다는 정황과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는 군사 상식에 배치된다”고 조씨 등의 입에서 시작됐고 미디어를 통해 소용돌이치며 기정사실인 양 굳어진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준용한 조사위의 비상식적인 결론을 꼬집었다.
특히 “외신기자 로숑과 쇼벨은 자신들이 ‘27일 자정~오전 3시 사이에 전일빌딩 옥상으로 올라가 취재하다가 새벽 시간 전일빌딩에 투입된 11공수여단 특공조에 의해 옥상에서 밑으로 내려보내졌다’고 했다”며 “자신들이 전일빌딩 옥상에 있는 동안 헬기 사격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고 공개했다.
또한 “27일 오전 2시쯤부터 전일빌딩 안에 있다가 빌딩 내부로 진입한 계엄군에게 체포된 시민군 김모 씨는 5·18조사위의 직접 조사에서 ‘27일 새벽 2시쯤에 탄창 2개를 받고 전일빌딩으로 들어갔다’고 했다”며 “‘수위실에 있던 시간이 1·2시간쯤 되는 것 같은데 수위실에 있던 중에도 체포된 이후에도 총격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위원 3인은 “외신기자 로숑과 쇼벨의 증언, 그리고 시민군 김씨의 증언은 27일 전일빌딩 헬기 사격 여부를 밝히는 조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고 신뢰할 만한 진술임에도 조사위 보고서는 이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5월27일 광주 재진입 작전을 위해 ‘26일 오후 항공대장이 직접 공격헬기 조종사들을 집합시켜 구체적인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고 하는 내용이 본문에 기술돼 있다”며 “이렇게 진술하는 사람은 천모·노모 씨 두 사람인데 지시받았다는 내용이 서로 달라 신빙성이 떨어지고 다른 조종사 10여 명도 똑같은 지시를 받았을 텐데 추가 증언자가 없어 천모·노모 씨 진술의 신빙성을 더욱 의심하게 한다”고 진술을 배척했다.
이에 대해 문재인정부에서 불거진 ‘공군 훈련기 폭격대기설’이 전혀 근거 없이 날조된 허위사실임을 유튜브채널 이봉규TV에 출연해 낱낱이 밝혀낸 함선필(예비역 공군 대령) 민간 5·18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은 “개별적 사실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하나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며 “대부분 생업에 바쁜 국민은 물증이 없는데도 그럴듯하게 사실처럼 포장한 얘기를 듣다 보면 자동적으로 부화뇌동하고 세뇌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 조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사실을 대하는 정직한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 1980년 5월21일 오후 시위대가 헬기에 총을 쏴 헬기 탄흔이 생성된 사실이 정부 3급 기밀 자료로 확인됐지만 조사위는 이 사안을 철저하게 파헤치지 않았다. 군 3급 기밀 문건.⊙
〈34〉는 오기? ㉞ [단독] 증거조사 없이 ‘계엄군 성폭행범’ 결론 논란
〈35〉권영해 “5·18 北 개입 안기부서 확인”
1994~1998년 안기부 재직 때 비밀공작 통해 확인
“北 청진에 있는 ‘남파영웅 렬사묘’가 직접적 증거
南에 묘비 존재 들통나자 돌연 제3의 장소로 옮겨”

▲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비’. 본지에 사진을 제공한 대북정보수집팀은 2011년 11월 촬영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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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現 국가정보원)가 북한의 5·18 광주사태 개입을 1990년대에 ‘비밀공작’을 통해 이미 확인한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권영해(87·權寧海) 전 안기부장은 최근 스카이데일리와 만나 “정보기관장 재직 시절 북한의 5·18 개입을 우리 정부가 직접 확인했다”고 폭로했다.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에 대해 전직 정보기관장이 확인 발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3년 국방부 장관에 이어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안기부장을 지낸 권 전 부장은 지금까지 ‘북한의 5·18 개입’을 증언한 정부 최고위직 인사다.

▲ 권영해 전 안기부장
그는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에 걸쳐 안기부장으로 재임했다. 이 기간은 5·18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회적 평가가 극명하게 뒤바뀔 무렵이었고, 김영삼정부가 증거를 조작하는 과정에 정보기관장으로서 권 전 부장도 가담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 때문에 이번 인터뷰는 그에겐 최초의 양심선언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권 전 안기부장에게 제기된 의혹과 시대적 분위기 탓에 그는 공개석상 또는 언론 인터뷰에서 5·18에 북한이 개입했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실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본지 인터뷰에서 현직 안기부장 재직 시절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을 우리 요원들이 직접 확인한 사실을 처음으로 실토함에 따라 향후 추가 폭로에 나설지 그의 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권 전 안기부장은 17일 서울 모처에서 열린 정당 행사 직후 기자와 만나 “현직 (안기부장) 시절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을 비밀공작을 통해 내가 직접 확인했다”고 충격 폭로했다.
그는 당시 공작 방식과 경위에 대해선 “정보기관 고유 업무”라고 말을 아끼면서도 “북한 청진에 있는 (남파) 영웅들의 비석은 사실”이라고 구체적인 지형지물을 적시했다.
권 전 부장은 “(청진 비석의 존재가 남한에 알려지자) 위치를 바꾸고 제3의 장소로 숨겼다”면서 비석과 북한 광주 개입의 관련성에 대해 “사실이고 내가 확인한 것”이라고 거듭 부연했다. 제3의 장소는 북한 동북부는 아니다.
확인한 시점에 관해선 “내가 있을 때”라고 현직 정보기관장으로서 확인한 사실을 강조한 뒤 “북한 교과서에 나왔기 때문에 확인하려 한 것이었고 소스(source)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여지를 남겼다.
그러면서 “북한 교과서에 (비석의 존재가) 나와서 청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확인에 나섰다”면서 “그러나 공작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 정보기관에서 확인했다는 말을 확인해 줄 수 없어 탈북자들이 제공한 것으로 그렇게 처리됐다”고 밝혔다.
당시 공작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임기 후반부는 국민의정부(DJ정부)와도 겹친다.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1998년 2월25일 취임했고 권 전 안기부장은 그해 3월까지 재직했다.

▲ 청진 묘비 뒷면에는 534군부대 소속으로 5·18에 남파됐다는 전사자 158명의 명단이 있다. 함경남도 108군부대 112명, 강원도 806군부대 74명 등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 344명을 포함해 모두 490명이 전사했다는 북한 기록물도 함께 입수됐다. 기록물과 묘비의 명단은 일치한다.
권 전 부장에 대해선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노태우의 비자금이 탄로 나면서 5·18이 국가전복 무장 폭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하는 과정에 그가 일익을 담당했다는 의혹도 받아왔다.
중앙정보국(CIA) 등 미국 정보기관에서 40년간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조사한 마이클 이(91) 박사(미 조지 워싱턴대·정치학)에 따르면 노태우가 민정당 연수원 매각 대금을 착복한 사실을 안 김영삼은 노태우를 압박해 정치자금 3000억 원을 뜯어내고 대권 바통까지 물려받았다.
3당 합당으로 재야인사에서 보수정당인 민자당 대선 후보로 변신한 김영삼은 집권 후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들통나자,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는 호남 세력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박사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협력한 대표적 인사가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과 홍준표(현 대구시장)였다”고 직격했다. <본지 2023년 11월1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21> “5·18이 민주화운동 된 건 정치권력 야합 탓” 보도 참조>
이런 배경 탓에 권 전 안기부장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쪽과 대체로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는 그동안의 평가가 있었다. 자해 소동과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전력 등 각종 논란에 휩싸여온 인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 전 부장이 본지 인터뷰에서 “우리 요원들이 직접 확인했다”고 한 발언은 크로스 체킹(cross checking·교차검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청진 묘비의 확인 공작에 관여한 A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모처에서 익명을 전제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직원” 또는 “우리 라인”이 직접 가서 확인했다고 확인 방식을 제시한 바 있다. 삼성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장비에 대해서도 밝혔다.
구체적으로 ‘북파공작원(HID)’으로 불리는 군 첩보부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가 관여했다고 증언한 데 이어 5·18 북한 개입 정보의 최초 입수 경위는 “안기부/정보사 자료”라고 답했다.
HID가 북한 현지에서 취득한 안기부 획득 자료를 기초로 북한 현지에서 팩트 체크를 거듭한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권 전 부장의 말과 일치한다.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대북 정보는 다양하게 취득하며 북한에서 협력하는 사람을 통한 휴민트(HUMINT·인간정보) 방식도 널리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우리 요원들이 공작을 통해 확인했다”는 말은 권 전 부장이 이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선 알거나 섣불리 밝힐 수 없는 내용이다.
작년 A씨와 인터뷰 당시 본지는 이민트(IMINT·이미지 정보)를 제시한 만큼 현지 정보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봤다. 하지만 교차 검증할 방법이 없어 ‘첩보’ 단계로 분류하고 이에 관한 보도를 유예하고 있었다.
청진 비석에 새겨진 北 남파공작 사망자 490명
1998년 2월8일 청진역 건물 북쪽 800m 떨어진 곳에 세워
534·108·806군 부대 ‘전사자’ 기록물·전투기록장 2건 존재
사망일 1980년 6월19일… 죽은 날 달라 작전 종료일로 통일

▲ 묘비 명단은 북한 보위부가 관리하는 전사자 명단과 일치한다. 수기로 쓴 옛 자료는 북한이 1990년대 중반에 전산화했다.
전직 안기부장의 폭로로 청진 묘비의 존재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청진 묘비 확인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만든 ‘북한과 한·미·일 정보기관의 기록물로 본 광주사태(새동아서·2020년 6월 刊)’에 따르면 김일성이 5·18에 남파한 북한 군부대 사망자는 534군부대 158명, 108군부대 112명, 806군부대 74명 등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 344명을 포함해 모두 490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중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 구역 낙양동 해발 약 70m 지점, 청진역 북쪽 약 800m 지점에는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비’가 있다. 1998년 2월8일 세워진 묘비에는 전사자 명단이 새겨 있다. 비석 왼쪽 옆에는 붉은색으로 ‘일천 구백 구십 팔년 이월 팔 일 세움’이라고 건립 날짜가 적혀 있다.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한 인민군 전사들의 전투 기록장(1980년 6월)’과 ‘남조선 통일전선을 위한 투쟁에서 전사한 조선인민군 열사자료(1980년 8월1일)’ 등 2개의 북한 문건에 기재된 명단과 묘비의 명단은 일치한다.
전투 기록장은 함경북도·함경남도·강원도에 자리한 534·108·806군부대 전사자에 관한 기록이다. 김계철 외 15명의 저자는 책 26쪽에서 534군 부대는 북한군 최정예로 1968년 김신조 1.21사태 당시 청와대를 기습한 124군 부대의 후신이라고 밝혔다.
이들 북한 문건에 따르면 조선 인민군 무력부 소속 각 군부대는 1980년 8월1일자로 전사자 명단을 만들었다. 붉은 표지 상단에 ‘당과 수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라는 금색 글씨가 있고 표지 중앙에 북한 국장(國章·북한을 상징하는 공식 표장)이 있다. 보위부가 이 명단을 관리한다고 책은 기술했다.
명단 작성 시기인 1980년 여름에 남녀 별개로 가묘 두 기를 만들었지만 북한 당국은 광주사태 남파를 비밀로 하기 위해 처음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김계철 등 저자들은 책 118쪽에서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북한은 자신들이 숨긴 것이 성공했다고 판단해 1998년 묘역도 새로 단장하고 비석도 세웠다’고 해석했다.

▲ 북한 보위부와 대남공작 기관은 2012년 9월28일 긴급회의를 열어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비’를 은폐하기로 결정하고 자료를 유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처벌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4년 철거되기 직전 주차장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정문 안쪽으로 묘비가 목격된다. 계단 좌우에는 전쟁 부조물이 있다.
실제 묘에는 시신은 없다. 머리털이나 소지품을 넣고 만든 가묘(假墓)다.
가묘에 이름이 적힌 전사자들의 사망 날짜는 모두 1980년 6월19일로 똑같다. 이날은 북한의 5·18 작전 종결일로 알려졌다.
신원이 확인된 344명을 비롯해 북한에서 490명이 전사한 대규모 교전 또는 전투가 1980년 6월에 있었다는 정보는 아직 없다. 이 때문에 가묘는 최초 사진이 공개된 이후부터 5·18 관련성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2012년 9월27일 탈북인 단체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묘와 비석의 정체를 밝히자 묘비를 숨기기 위해 2013·2014년에 걸쳐 철거했고 6·25 전쟁 기념물, 즉 인민군 렬사묘로 위장했다고 책은 기록했다. 청진 렬사비가 세워진 지 15년 만이다.
2014년에도 묘 단장으로 위조해 묘 두 개는 그대로 두고 비석은 모처에 옮겨 숨겼다고 한다. 이어 중앙 계단이 있는 곳에 새로운 기념비를 세우고 앞면 하단에 1950~1953년이라는 숫자를 넣어 1980년 6월 사망자들의 가묘가 별안간 6·25 전쟁 전사자의 묘지로 변했다.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 묘비’에는 전사자 명단이 있었지만 2013·2014년 새 단장을 마치고 세워진 ‘인민군 렬사 묘비’에는 명단이 없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북한 당국이 감춰야만 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며 ‘위장의 증거’라고 입을 모았다.

▲ 북한 당국은 1980년 여름에 남녀 별개로 가묘 두 개를 만들었지만 2014년 여름 공사가 끝난 뒤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비’를 제거하고 6·25 관련 묘지로 위장한 것으로 파악됐다. 구글 위치는 N 41° 47' 54.03'' E 129° 47' 59.3''
이들 전사자 명단이 든 북한 문건에는 또 다른 전사자들의 명단도 발견된다.
북한 534부대 전투 기록장에는 1975년 9월11일 전북 고창에 침투해 14명이 사살됐다고 기록됐다. 당시 경찰특공대가 투입돼 교전을 벌이다 우리 경정 3명이 숨졌다. 전투 기록장은 최영남 대위 등 전사자 14명의 명단을 기재하고 있다.
1980년 6월 경기 문산 임월교 간첩 침투 사건은 강철환 소좌 등 4명이 전사한 것으로 534군부대 전투기록장은 기록했다. 정부는 무장 공비 3명을 소탕한 것으로 발표했다. 전사 일은 3월23일로 다르다. 우리 발표가 틀렸거나 북측이 훈련 중 사망자를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간첩침투 사건 당시 박철 소좌 등 북한군 534부대 전사자 13명 명단도 전투 기록장에서 발견된다. 이와 별도로 승조원 12명의 명단도 있다고 책은 밝혔다. 승조원 11명은 숨진 채 발견됐고 승조원 이광수는 주민 신고로 생포됐다. 534부대원 14명 중 13명은 도주 중 사살됐고 1명은 휴전선 철책을 넘어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우리 군은 파악하고 있다. 공비 13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한 우리 군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북한은 이들의 전사 일을 일괄적으로 9월20일로 기록했다.
가묘 확인 공작에 관여한 A씨는 “확인 과정에서 4명이 보위부에 발각돼 숨졌다”며 “공동저자 중 맨 앞에 이름이 있는 이들이 목숨을 잃은 공로자들”이라고 밝혔다. ⊙
〈36〉“5·18 뒷처리 나선 北 간첩선 격침시켰다”
1980년 6월21일 서산 앞바다서 교전… 3군 합동 격퇴
간첩 8명 사살… 생포 1명 “광주 선동 위해 침투” 실토
훈장 받을 때 “5·18 후속처리 간첩선 격침 공로” 들어

▲ 1980년 당시 이성언 소령이 몰고 출격했던 공군 팬텀 전투기.
북한이 1980년 6월 광주사태의 뒷처리를 위해 간첩선을 남파했다가 육·해·공군 및 해경 합동작전에 의해 격침됐다는 당시 출격 전투기 조종사의 직접적인 증언이 나왔다.

23일 당시 대(對)간첩대책본부(본부장 신현수 육군 중장) 발표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우리 해군함에 쫓기는 간첩선을 엄호하기 위해 미그기 12대를 출격하고 북한 군함 5척을 급파했으며 이 중 일부는 북방한계선(NLL)을 뚫고 우리 영공과 영해로 남하했다.
이에 맞서 출격한 우리 공군 팬텀기가 선제 ‘락온(Lock on)’에 성공하자 이 사실을 알아차린 북한 전투기와 군함이 북으로 기수를 돌려 퇴각하면서 작전 상황이 종료됐다. 락온은 항공기 자체 레이더로 항체를 잡아 물고 있다는 뜻으로 공대공 미사일의 레이더에 같이 잡아 물리게 되는 상태다. 당시만 해도 레이더를 활용하는 우리 미사일의 속도가 열추적 방식의 북한 전투기 속도를 훨씬 앞질렀다.
우리 군 당국은 5·18 한 달 뒤인 1980년 6월21일 오전 5시40분쯤 충남 서산 서쪽 40마일(64.3km) 해상에서 6·7t급 북괴 무장간첩선 1척을 12시간 가까이 추격한 끝에 격침하는데 성공했다.
우리 해군함은 전복된 간첩선에 매달려 수류탄을 던지며 완강하게 저항하던 무장공비 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신현수 대간첩대책본부장은 작전 종료 직후 “이 간첩선은 국내 고정간첩들과 연락을 맺고 최근 광주사태 등과 관련해 광주 일원에 아직도 소요의 불씨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여기에 가세·선동함으로써 학원 소요의 재발을 기도할 목적으로 남파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곧이어 방첩 당국은 생포한 공비 1명에 대한 대공심문 과정에서 5·18 관련 목적성을 확인했으며 최규하 대통령은 각 군과 경찰 소속 공훈자들에게 훈장을 서훈한 것으로 전해졌다.
작전에 참여한 공로로 ‘인헌(仁憲)무공훈장’을 받은 이성언(77·공사 20기) 당시 공군 제17전투비행단 소속 153전투비행대대 정보편대장(공군 소령)은 무공훈장을 받던 7월12일 공군본부에 갔던 이들과 함께 이 같은 첩보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과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스카이데일리와 만나 진행한 인터뷰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겪었던 일촉즉발의 남북 공중대치 위기 상황을 회고하면서 5·18의 후속처리를 위한 간첩선의 침투 시도와 군 당국의 심문 결과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특히 무공훈장을 받게 된 공적에 대해서는 공군 수뇌부로부터 전해 들은 말을 4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훈장을 받으러 공군본부에 갔을 때 공군 사령부에서 말하기를 ‘북한에서 광주사태 후속 처리를 하러 온 간첩선을 격침한 공로’라고 공훈을 밝혔습니다. 그 사이 대공 수사본부가 생포한 공비에게서 남파 목적을 심문하다 얻은 첩보였습니다.”
이 전 편대장이 받은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하에서 전투에 참여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
당시 간첩선 격침 사건은 여느 작전과 달랐다.
방첩 당국에 따르면 간첩선 침투 기도가 폭로된 것을 탐지한 북한은 우리 해군함에 쫓기며 사격을 받는 간첩선을 엄호할 목적으로 정전협정까지 위반하면서 미그기와 군함 5척을 서해에 급파했고 남북은 전쟁 발발 위기까지 상황이 악화됐다.
남북이 공중교전 위기에 맞닥뜨린 것은 흔치 않은 상황이다. 1983년 미그기가 남하해 적기의 도발로 판단한 공군이 출격했지만 귀순한 북한 이웅평 상위(한국군 중위·대위 중간 계급)를 쫓은 적기들로 판명됐다. 이 전 편대장의 출격은 이보다 3년 더 빨랐다.
방첩 당국에 따르면 6월20일 오후 5시55분쯤 충남 대천 서북쪽 7마일(11.2km) 해상에서 해안으로 접근 중인 간첩선을 해안경계부대 초소 근무자가 발견하고 멈추라는 정선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 응답이 없자 2발의 경고사격을 가했다.
아군초소를 향해 대응 사격한 간첩선은 시속 50노트(시속 92.6 km)의 전속력으로 서쪽으로 달아났고, 무전 연락을 받은 해군함정이 전북 군산 어청도(於靑島) 근해에서 초계 작전 도중에 즉각 추격에 나섰다.
해경 경비정 3척과 F5를 비롯한 공군 전폭기 3대도 합세했다. 이 전 편대장에 따르면 F5에는 조명탄이 있었다. 어둠을 틈타 도주하는 간첩선을 쫓기 위해 하늘에 쏴서 해역을 밝게 비추는 작전이다. 광주에서 출격한 F5가 조명탄을 전량 소비하자 이번엔 조명탄 50탄을 장착한 군용 수송기가 서울공항에서 발진했다. 수송기가 간첩선 인근 해역을 선회하며 조명탄을 잇달아 터뜨리자 대낮처럼 밝아졌다. 충남 태안군 앞바다의 동서로 나뉜 격렬비열도(東西 格列飛列島) 사이로 도주하는 간첩선을 발견한 해군함정은 일제히 격파 사격을 개시했다.
북한도 여느 때와 달랐다. 전쟁 발발 상황으로 악화할 것을 감수하고도 신형 미그21기 12대와 군함 5척을 보낸 것이 방증이다.
우리 해군에 쫓기는 간첩선이 무전을 타전한 것으로 우리 군 당국은 파악했다. 머지않아 황해도 북한 전투비행단에서 미그기들이 출격해 빠르게 남하했고 북한 군함도 전속력으로 남진했다.

▲ 이성언 전 공군 제17전투비행단 소속 153전투비행대대 정보편대장(공군소령)이 14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팬텀 전투기 앞에서 1980년 5·18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북한 이웅평 상위가 1983년 몰고 귀순한 미그기가 보인다. (왼쪽 위) 용산전쟁기념관 상징 조형물 (오른쪽) 간첩선 격침 작전에 참가한 공로로 받은 ‘인헌(仁憲)무공훈장’ (왼쪽 아래) 팬텀기에 탑승한 이 전 편대장.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왼쪽 가슴주머니에 소형 성경책을 넣고 다녔다. (아래 가운데) ©스카이데일리
교전 때 北 미그기 12대·군함 5척 남하… 일촉즉발
당시 팬텀기 신형 레이더 추적 미사일 탑재
“사정권 진입 땐 격추” 보고… 승인명령 떨어져
北 미그기 피격 위기 몰리자 기수 돌려 퇴각
남쪽으로 바로 내려오는 항체가 공군 레이더에 잡혔다. 곧이어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이성언 전 편대장은 팬텀기에 올라 즉각 출동했다. 새벽 2시 무렵이었다. 팬텀기는 대구비행장에 구형이, 청주비행장 최신형이 있었다. 공군 편대는 최신형 팬텀 2대로 대형을 갖춰 NLL 쪽으로 북진했다. 이 전 편대장은 청주비행장 소속이었지만 수원비행장에서 비상대기 임무 중 출격했다.
최신형 전투기 발진은 신(神)의 한 수로 평가됐다. 당시 대간첩대책본부는 “공군의 적절한 조치로 북괴기와 군함이 퇴각함으로써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겼다”고 대국민 발표했다.
‘공군의 적절한 조치’가 곧 이 전 소령이 이끄는 편대의 대응이었다.
당시 팬텀기에는 두 종류의 미사일이 장착됐다. 적기의 후미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를 쫓아 요격하는 구형 열추적 미사일과 신형 레이더 추적 미사일이었다.
충남 서산의 망일산과 대구 팔공산에는 공군 레이더기지가 있었다. 이곳에서 빠르게 남하하는 적기를 레이더가 포착했다.
레이더가 잡은 이상 우리 공군의 공대공 신형 미사일에 북한 전투기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전 편대장은 “우리가 딱 물으면, ‘락온’에 딱 물리면 이제 미사일을 쏘면 적기는 요격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 적기는 아무리 빨라야 음속이지만 미사일은 초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북한 미그기가 어떤 기동을 하든, 훨씬 더 빠른 레이더 추적 미사일이 따라붙으면 결국 적기가 공중분해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은 열추적에 의존했을 뿐 레이더 추격 무기 체계가 없어 제공권에서 우리보다 열세였다.
“락온에 딱 잡혔어요. 보통은 오산의 공군 작전사령부에서 전체 레이더에서 받은 한국 영공 내 모든 움직임을 감시·추적하고 적성기로 식별되면 사격명령을 내리는데, 그때는 레이다로 적기를 가뒀으니 ‘인 레인지(In-Range·유효사거리)’에 들어오면 격추하겠다고 이쪽에서, 제가 먼저 ‘암핫(Arm Hot)’을 선포했고 작전 승인을 받았습니다.”
암핫은 적기가 사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레이더 추적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하겠다는 허가를 받고 공격 자세로 접근 비행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북한 미그기가 갑자기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면서 우리 공군은 비로소 안도했다. 전장 우세권을 선점한 순간이었다. 우리 영공에서 적의 전투기를 근접하지 못하게 하는 작전이 성공한 것이었다.
이 전 편대장은 “북한도 우리의 성능을 잘 안다”며 “통신감청으로 레이더 락온에 걸린 걸 안 그들이 항로를 되돌려 퇴각하면서 격추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우리 해군이 간첩선을 포획하게 도와 큰 보람을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 해역에서는 전장 우세권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이 동이 틀 무렵까지 이어졌다.
미그기가 되돌아가고 연이어 터지는 조명탄에 숨을 곳을 찾지 못한 간첩선은 아군의 격파 사격으로 날이 새기 전인 21일 오전 3시14분 서산 서쪽 40마일 격렬비열도 근해에서 전복됐다.
북한군의 저항은 격렬했다. 무장공비 9명이 뒤집힌 선체에 매달려 접근 중인 해군함정에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최후의 발악을 했다. 아군은 위협사격을 가하면서 교전을 벌였으나 공비의 완강한 저항으로 8명을 사살하고 새벽 5시40분 1명을 생포하며 작전이 끝났다. 우리 측은 가벼운 총상자가 2명 있었다.
신 본부장은 작전이 끝난 뒤 대국민 발표에서 “앞으로도 무력 적화 야욕에 혈안이 된 북괴는 더욱 교활한 수법으로 대남 침투활동을 격화할 것이 예상된다”며 “국민은 대공 경각심을 새롭게 하고 대간첩 작전에 적극 협조해달라”고 당부했다.
본지는 당시 생포자의 대공심문조서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기밀로 분류된 정부 보안문서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반면 문재인정부가 만들고 작년 12월까지 조사 활동을 벌인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의 보고서에는 이 내용이 누락됐다. 정부5·18조사위는 이달 26일까지 모든 활동을 끝내고 최종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5·18특별법상 정부 기밀에 대한 막강한 강제 조사·열람 권한을 갖고 있지만 북한 개입을 확증할 간첩선 침투 사건 자체가 조사 대상에서 빠진 것을 두고 부실 조사인지, 고의로 회피한 것인지 책임소재를 가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5·18조사위에는 4년간 국민 혈세 500억 원이 투입됐다.
이 전 소령은 당시 공군전투비행단 전투비행대대 정보편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상관으로부터 쪽지 형태로 주 1회씩 정보를 건네받았다고 했다.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광주여 영원하라’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광주사태가 발생했으니 북한에서 ‘계속하라’ ‘잘하라’고 하는 뜻”이라며 “정보부에서 우리 비행부대에서 정보 담당하는 편대장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건네는 쪽지”라고 설명했다.
또한 “(정보 편대장으로 있던 내게) 북한에서는 이런 것을 하고 있다고 분석된 자료가 주간동향으로 한 번씩 전달된다”며 “조금씩 들어오는 대북 정보에 ‘광주여 영원하라’가 있었다는 뜻이고 우리 대원들에게 이런 것이 왔다고 하달했다”고 보충 설명했다.
그는 광주 무장 폭격설에 대해서도 “전혀 사실과 다른,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당시 국가의 명령에 충성한 계엄군을 악마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광주사태 당시에도 공군 전투기들은 무장사가 무장을 장착하면 나갔다 들어오길 반복하는 무장 훈련을 했다”며 “광주 쪽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조종사들이 아닌 일반 행정 보는 이들이 전투기가 광주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들이 있었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적극 부인했다.
이 전 편대장은 대한항공 여객기 기장으로 근무하다 2004년 1월 은퇴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평생의 신념을 ‘정확과 정의’라고 덧붙였다. ⊙
〈37〉[특별대담] 권영해 前안기부장 “교도소·무기고 습격 광주시민들이 했겠나”
‘안기부서 5·18 北개입 확인’ 본지 보도 거듭 인정
“北교과서 훑어보니 ‘5·18 우리가 했다’ 서술 많아”
“파악하라” 지시→“개입 확인” 대공수사국이 보고

▲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3일 조우석 스카이데일리 칼럼니스트와 특별대담에서 “안기부장 시절 북한의 5·18 개입 사실을 확인했다”는 본지의 6월21일자 단독 보도는 사실이라고 재확인했다. ©스카이데일리
김영삼정부 시절 정보기관 수장이던 권영해(87·權寧海)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은 1980년 광주 5·18 때 북한의 개입이 확실하다는 견해를 재확인하면서 “광주사태 당시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공격하고 무기고 40여 곳을 한꺼번에 턴 데다 좌익사범이 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사람들은 결코 순수한 광주시민일 수 없다”고 일갈했다.
권 전 안기부장은 3일 오후 서울 강남의 모처에서 조우석 스카이데일리 칼럼니스트 겸 평론가와 2시간에 걸친 단독 대담에서 본지가 6월21일자로 단독 보도했던 ‘권영해, 5·18 北 개입 안기부서 확인’ 기사가 대부분 사실임을 재확인했다.
단 자신의 그런 견해 표명이 양심선언의 일환이라는 세간의 관측은 일축했다. 권 전 부장은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 초기에 걸쳐 안기부장으로 재임했다. 이 기간은 5·18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회적 평가가 바뀔 무렵이었고, 따라서 김영삼정부가 관련 증거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그가 최종 실무자로 가담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날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안기부 재직 시절 정보기관 수장으로 북한의 5·18 개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비밀공작을 진행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비밀공작을 지시한 배경과 관련해 “안기부장 취임 이후 내 관심은 남북한 통일 이후 남북 사이의 진정한 사회통합의 문제였다. 그래서 기초연구를 위해 북한 교과서 수집을 지시했다. 그걸 훑어보니 수도 없이 ‘5·18은 우리가 했다’는 서술이 수두룩했다. 놀랐다. 물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교육 차원의 언급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 이상이었다. 그 전부터 나는 북한 개입의 개연성은 있다고 봤지만, 뭔가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권 전 부장은 대공수사국 보고문건을 통해 당시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별도의 보고서를 만들어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바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확인 작업은 일상 업무의 일환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동시에 권 전 부장은 “광주 5·18은 동시에 순수한 민주화운동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폄훼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그럼에도 “광주 5·18을 헌법 전문에 넣자는 정치권 논의에는 반대하며, 그건 정치권 놀음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5·18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폄훼돼선 안 된다는 이중의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북한 개입으로 민주화운동의 순수성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걸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권 전 부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의 광주 5·18 개입 문제를 밝히자는 주변의 제안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책임 있는 정보기관 수장 출신인데, 재임 중 인지하고 파악했던 일을 가지고 기자회견을 열어 떠들어댈 수 있느냐? 세상에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권 전 부장의 광주 5·18 관련 특별대담에는 최명주 전 안기부 1차장이 배석했다. 최 전 차장도 북한의 5·18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권 전 부장은 자신이 1994~1998년 안기부장 재직 시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설에 관심 가졌던 배경과 그 이후 인지했던 사항을 2시간에 걸쳐 두루 밝혔다.
그는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5·18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폄훼돼선 안된다는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북한 개입으로 민주화운동의 순수성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5·18 개입을 증언한 정부 최고위 인사로서 그의 증언은 의미 있다. 동시에 그는 5·18 문제를 개헌 때 헌법전문에 집어넣자는 정치권 논의에는 부정적이라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헌법 전문에는 자유민주주의란 대의를 집어넣은 것으로 충분하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 [1] 1980년 5·18 당시 광산경찰서 역전파출소 앞에서 긴 머리에 군복과 경찰복장을 한 장정들이 총기와 철모·요대·군장 등으로 무장한 채로 버스에 오르고 있다. 5·18 당시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외지인들이 대거 출현했다는 증언들이 무등산 증심사에서 목격된 장정 100명을 비롯해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2] 1980년 5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대공요원들은 북한방송을 시청하다 ‘연고대생 600명’이라는 북한 진행자의 멘트가 자막과 함께 공개된 사실을 접한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확인된 바 있다. ‘연고대생 600명’은 5·18의 일련의 사건 전개 과정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표현 중 하나였다. 계엄령으로 학생시위 주동자들이 군경을 피해 숨어든 상황에서 수백 명의 대학생이 외지, 그것도 서울에서 광주까지 원정을 갈 수 있었겠냐는 의구심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주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했다는 문헌이 남아 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숫자를 북한의 지령을 수행한 이들이라고 주장하는 연구가들도 있다. [3] 총을 든 인물이 머리에 ‘김대중씨 석방’이라는 글귀가 씌여진 흰 띠를 두르고 있다. 호남 사람이 ‘김대중 선생님’이 아닌 ‘김대중씨’라고 부르는 것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이 인물의 신원에 관심이 집중된 바 있다.
“5·18 헌법전문 게재 반대… 정치놀음돼선 곤란”
민주화운동 가치 폄훼 안 돼… 北 개입과 분리해 다뤄야
北 대상 정보수집·크로스체크 통해 검증한 건 모두 사실
청진 5·18 전사자 비석은 스카이데일리 자체 취재한 것
다음은 권영해 전 안기부장과 일문일답이다.
-뒤늦게 광주 5·18과 관련한 증언을 하게 된 배경이 뭔가?
“6월17일 자유민주당이 주최하는 위헌정당 진보당·더불어민주당해산국민운동본부 출범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레스센터에 갔던 것이 시발이었다. 전부터 나는 아내와 딸까지 함께 자유민주당 당원이다. 현재는 등 떠밀려서 당 고문까지 맡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때 대회장에 참석했다가 스카이데일리 기자를 만났다.”
-그럼 어떤 얘길 나누신 건가?
“당시 기자가 내게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기에 소신대로 ‘그건 사실이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묻기에 ‘당시 광주 5·18에 왔다가 전사한 북한 군인들의 묘비가 청진에 있다’고 밝혔다. 언제 그걸 확인했느냐는 질문에는 ‘안기부장 현직 시절’이라고 밝혔다. 세 마디가 그날 대화의 전부다. 정보기관 출신으로 너무도 상식적인 판단을 언급했을 뿐 특별한 건 없었다.”
-그럼 대화는 한 10분 정도 걸렸을까?
“무슨 10분인가? 한 3분 내외로 아주 짧았다.”
-그럼 그 뒤에 나온 6월21일자 스카이데일리 지면은 보셨나?
-세상에 나도는 이러저런 세평을 아시나?
“모두 터무니없다. 일부는 나와 당시 파견검사 홍준표(현 대구시장)를 의혹의 시선으로 보지만 모두 근거 없다. 1996년도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 제정이란 건 엄연히 입법부인 국회 소관이고 정치권에서 벌어진 일인데, 정보기관 수장 신분인 내가 어떻게 거기에 개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근거 없고, 그런 무책임하게 말해 온 게 누군지도 안다. 광주 5·18을 연구해 온 지만원이고, 출신이 좀 의심스러운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마이클 이(Michael Yi)라는 사람 아니냐?”
권 전 부장은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 초기에 걸쳐 안기부장으로 재임했다. 이 기간은 5·18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회적 평가가 극명하게 뒤바뀔 무렵이었고, 따라서 김영삼정부가 증거를 조작하는 과정에 정보기관장으로서 그가 가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런 이유로 그는 광화문 애국운동에서 역할을 해 온 애국자이면서도 1996년 김영삼의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그가 참여했다는 의혹도 여전히 따라다닌다.
-차제에 광주 5·18에 관한 생각을 가감 없이 들려주시길 바란다.
“우선 나는 5·18민주화운동과 북한 개입설 두 개를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게 논점을 분명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밝히지만 나는 광주 5·18이 민주화운동임을 폄훼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북한 개입설은 별도로 꼼꼼하게 연구해 봐야 한다.”

▲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1980년 5월21일발 보도를 인용한 북한 노동신문 5월22일자는 광주시의 20만 폭동군중이 1만 명의 괴뢰군(한국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무기고들을 부수고 무기를 탈취해 괴뢰기관(한국 정부기관)을 점거했다고 신속하게 전하고 있다. 당시 국내에서는 언론보도 통제에 따라 광주 소식에 더 둔감했다. 노동신문 캡처
-아까 5·18에 북한이 개입설 등은 정보기관 출신으로 너무도 상식적 판단이라고 말하셨다.
“사실이다. 오래 군에서 생활했던 사람으로서의 직감도 있다. 어떻게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시민들이 광주 사태 당시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공격하고, 군수품을 만드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할 수 있는가? 그들은 순수한 광주시민이 아니었다. 또 무기고 40여 곳을 동시에 털었다는 것도 그렇고, 좌익사범이 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것 등을 보면 당시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군 지휘관 시절 5·18과 직접 연결된 적은 있으셨나?
“5·18 당시 나는 강원도 전방의 3군단 작전참모였으니 후방의 5·18 같은 건 전혀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1988년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으로 근무하며 국회의 5공 청문회 때 5·18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나는 국방부의 청문회 대응팀을 총괄했다. 내가 했던 일은 당시 5·18 문제의 최종적 권위를 가졌던 대법원 판결문과 우리 군의 작전일지를 대조해서 그것에 근거해서 책임 있는 정부 답변을 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아까 5·18 때 북한 개입 여부를 확인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가? 스카이데일리에 따르면 비밀공작을 지시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 건 말할 수 없다. 방법은 물론 시기 같은 것도 역시 확인해 줄 수 없다. 다만 북한을 대상으로 한 정보 수집을 내가 지시해서 진행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게 해서 확보한 첩보 사항을 검증해 보기 위해 별도로 크로스 체크를 해봤던 것은 모두 사실이다.

▲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비’.
-스카이데일리는 함경북도 청진에 있었다는 5·18 전사자 가묘와 비석의 존재를 북파공작원(HID)을 보내 권 전 부장이 직접 확인한 것으로 돼 있다.
“그건 그 신문이 내 인터뷰와 별도로 확보한 제3의 채널을 통해 취재한 사실이다. 다시 밝히지만 나는 그렇게 구체적 발언을 그날 한 적 없다. 나는 다만 당시에 어떤 구조물의 존재를 확인했을 뿐이다”(그가 말한 구조물이란 5·18 전사자 가묘와 비석에 대한 언급이다. 참고로 스카이데일리 기사에는 5·18에 남파된 북한 군부대 중 사망자는 534군부대 소속 158명, 108군부대 소속 112명, 806군부대 소속 74명 등이 344명이고, 별도의 인원을 합해 모두 490명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날 인터뷰에는 북한 국가보위부 명단도 언급하셨던데.
“아니다. 그 얘긴 한 바 없다. 상식적으로 국가보위부가 인민군 내부의 5·18 전사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혹시 인민무력부의 명단이라면 또 모를까.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北개입 보고서 김영삼 대통령에 보고 안 했다”
“정보기관 수장 출신이 이제 와서 회견 열어 밝힐 일 없어”
퇴임 이후 30년 가까이 왜 침묵했는지 석연치 않은 점도
일각선 허위 사실 유포죄로 고소·고발 검토… 후폭풍 예고
스카이데일리는 권 전 부장이 보위부 명단에 대해 언급했다고 보도하진 않았다. 앞서 지난해 11월 인터뷰에서 대북첩보수집팀이 자료의 최초 출처를 ‘안기부/정보사(국군정보사령부-HID)’로 언급했으나 추가 검증을 못해 보도를 유예한 가운데 권 전 부장이 최근 인터뷰에서 안기부가 청진 묘비를 확인하고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을 파악했다고 언급함에 따라 크로스체킹이 됐다고 판단해 권 전 부장 인터뷰에 포함해 보도했다. 권 전 부장은 첫 인터뷰에서 “청진 묘비가 사실이다”고 확인했을 뿐 ‘보위부’에 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5·18 때 북한 개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셨는데, 안기부장 재직 시에 그런 비밀공작을 지시한 배경은 뭔가?
“안기부장 취임 이후 내 관심은 남북한 통일 이후 남북 사이의 진정한 사회통합의 문제였다. 물리적 통일과 화학적 통합은 서로 다른 것이니까. 그래서 기초연구를 위해 북한 교과서 수집을 지시했다. 놀랍게도 그걸 훑어보니 수도 없이 ‘5·18은 우리가 했다’는 서술이 수두룩했다. 놀랐다. 물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교육 차원의 언급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 이상이었다. 그 전부터 나는 북한 개입의 개연성은 있다고 봤지만, 뭔가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
-그게 상식이다.
“그렇다. 우린 강한 의구심을 거둘 수 없다. 일테면 김일성은 생존 시 이른바 비밀교시에서 남조선을 통일할 두 번의 기회로 6·25와 4·19를 활용하지 못한 채 허투루 넘긴 것을 천추의 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 못지않은 혼란기이던 5·18을 수수방관하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간첩을 내려보내거나 특수군을 가동했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건 그런 북한 개입을 보고서를 만들어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건 굳이 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했던 일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일상적 업무 차원의 하나였을 뿐이지 그걸 별도의 보고용으로 생각한 바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권 전 부장 당신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오늘 했던 증언을 반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물어보자. 내가 명색이 책임 있는 정보기관 수장 출신인데, 그런 내가 재임 중 인지하고 파악했던 일을 가지고 기자회견을 열어 떠들어댈 수 있느냐? 세상에 그런 경우는 없다. 난 지금 그런 걸 생각지 않고 있다.”
-좋다. 당장 5·18 문제를 헌법 전문에 집어넣자는 문제로 매번 시끄럽다.
“지금 헌법 전문에는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가 들어가 있고, 4·19까지 다 들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 개인적으론 5·18 문제를 개헌 때 헌법 전문에 넣은 건 반대다. 그건 정치권의 놀음일 수 있다. 헌법 전문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선명하게 집어넣은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 1980년 5월21일 정오 무렵 전남 영암을 거쳐 해남에 도착한 복면 무장괴한들이 해남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군 또는 북한의 민간 특작대였는지, 아니면 김대중의 용역이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순수한 시민이었는지 44년째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권 전 부장의 증언은 6월21일자 스카이데일리의 충격적인 단독 보도가 실언이거나 일회성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 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거리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 이후 30년 가까이 침묵을 선택했던 것도 석연치 않다.
5·18 하나로 국군의 명예가 통째로 실추되고, 권 전 장관이 군대 시절 가까이 모시던 정호용 전 참모총장·최세창 전 국방부 장관 등 군 선배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한 바 없다. 그 점에서 육사총구국동지회와 사단법인 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의 1일 성명서는 이해 못할 게 아니다.
국가정보원(안기부의 후신)에 권 전 부장의 발언과 관련된 정보공개를 요구하고, 정보공개가 거부되면 행정소송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힌 것이다. 5·18특별법에 의한 허위사실 유포죄로 고소·고발도 검토 중이다. 광주의 입장에서 그를 궁지에 몰겠다는 게 아니다. 논의의 활발한 전개를 위한 방법론으로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대담=조우석 평론가·정리=허겸 정치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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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는 물심양면 후원

권영해(87·權寧海·사진) 전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은 경북 경주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5기로 졸업한 뒤 비(非)하나회 출신으로 1988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군문에서 무난한 경력 관리에 성공했던 그는 외려 예편 이후 공적인 삶을 시작했다. 국방부 기획관리실장·국방부 차관으로 있던 그를 눈여겨본 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김영삼정부가 출범한 1993년 2월 바로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김영삼정부 출범 전 당선자 신분의 김영삼에게 하나회에 대해서 보고하고, 국방부 장관으로서 대대적 숙군(肅軍)을 주도했다. 하나회 때문에 진급 불이익을 받는 등 하나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안기부장에 임명된 건 1994년 말이다. 이후 김대중정부 출범 초기까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3년 3개월을 근무했으니 장수한 편이다. 당시 재임 중의 일로 기소와 재판 그리고 복역을 반복하다가 2008년 특사 이후 많은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다. 특히 2016년 이후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를 후원하면서 광화문 애국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현재는 대한민국통일건국회 회장은 물론 자유민주당 고문으로도 활동 중이니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성격은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다. 그러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광주 5·18 증언으로 다시 한번 그가 주목받고 있다. 혹시 스카이데일리 대담과 별도의 정보를 그가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우석 평론가
〈38〉계엄군 시신 목줄 매 트럭에 끌고 다녔다
조선대→화순 이동 중 피습… 軍 사망 3명 수습 못하고 탈출
운전병 시신 매달고 시내 돌아다녀… 시민 “저럴 수가” 치 떨어
오월항쟁 사료집에 “폭도들이 운전병 붙잡아 난자” 기술도

▲ 7·11공수 차량들의 조선대~주답 철수경로 그래픽 ⓒ스카이데일리
1980년 5·18 당시 무장 폭도가 계엄군 병사를 로프로 묶고 트럭에 매달아 끌고 다닌 충격적인 사실이 복수의 군 내부 문건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 이 병사는 숨진 채 발견돼 뒤늦게 계엄군 측에 시신이 인계됐다.
광주사태에서 순수한 시민과 구분되는 불순세력이나 무장 폭도가 계엄군의 시신 훼손에 가담한 정황 또는 무용담은 있었지만 우리 군 당국이 계엄군의 직접적인 목격 증언을 문서 기록으로 보관해 온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이들 문건은 일반의 접근이 극히 제한돼 그동안 국민 대부분은 이처럼 끔찍한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특히 이 사건은 계엄군뿐 아니라 복수의 시민에 의해서도 동일하게 목격됐지만 오월단체 측에선 폐기하라고 요구한 정황이 드러났다. 정부 공식 기록의 존재와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외면한 채 오로지 ‘민주화운동’으로만 일의적으로 해석하려 해 온 그간의 정부 조사 방식이 합당했는지 논란이 가열될 전망이다.
12일 스카이데일리가 단독으로 입수한 육군 제20사단 작전참모 함덕선(육사 20기) 중령의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자필 진술서에는 비극의 현장에 투입된 계엄군 장병들로서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법한 흉측한 만행이 자행된 과정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무장 폭도 선제사격에 계엄군 9명 사상… 죽음의 탈출
증언 시점에 육군 준장이었고 이후 26사단장(소장)과 11군단장(중장)을 지낸 함 중령은 자술서에서 무장 폭도의 선제 사격으로 계엄군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을 먼저 기술한다.
1980년 5월21일은 ‘집단발포’ 논란이 촉발된 당일이다.(※본지는 '집단발포'가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입장을 공식 견지하나 국민에게 널리 인식된 용어인 만큼 사건의 앞뒤 맥락에 관한 이해를 돕고자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흥분한 시위대의 기세에 밀려 전남도청으로 밀려난 계엄군은 조선대로 황급히 퇴각한 뒤 이날 일몰 직전에 다시 조선대에서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함 중령의 진술은 안전지대로 꼽히는 저수지가 있는 제2수원지로 향하기 위해 차를 타고 조선대를 빠져나오면서 겪은 일에 기초한다. <7공수·11공수 조선대~주답 철수경로 그래픽 참조>
그는 구체적으로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던 공수 계엄군이 차량 30대를 이용해 화순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해 조선대 정문으로부터 멀지 않은 광주 시내를 통과 중 민가 2층 옥상에 배치됐던 무장 불순분자들이 차량에 탑승 노출된 상태로 이동하는 공수 계엄군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와 6명이 다치고 차량 3대가 전복됐다”고 적었다.
그가 진술한 상황은 다수의 군 기록과도 일치한다. 본지가 익명의 5·18 연구가로부터 입수한 ‘차량 행군부대 기습상황’ 보고 반전지 차트 원본에도 7공수35대대는 21일 오후 4시쯤 조선대에서 화순 방향으로 가던 중 도로 양편 좌우 건물로부터 총격을 받은 것으로 기재됐다.
상황 보고 차트는 4km에 걸쳐 피습 상황이 이어졌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조선대를 빠져나와 화순 쪽으로 이동하던 중 양쪽 민가에서 공수대원을 향해 가해진 무차별 총격이 계엄군 차량이 무려 4km를 주행하는 동안 계속됐다는 증언이다.
이는 본지가 입수한 생존 장병의 직접 증언과도 동일하다. 퇴각 차량을 인솔했던 고OO 지역대장(당시 육군 대위)은 지난해 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명본)의 한 이사와 통화에서 “양측 민가 2·3층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와 차에 탄 우리 장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사격에 노출됐다”며 “창문이 열린 곳으로 대응 사격하라고 외쳤지만 피해자가 속출하는 아비규환의 상황이 계속됐다”고 일관되게 당시 참상을 증언했다.
공수부대 공식 기록에도 폭도의 선제 사격에 의한 피습 상황으로 적혀 있다.
제7공수·11공수 전투상보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40분쯤 OO제대가 전남대병원·남광주시장·숭의실고 부근을 지나면서 최소한 도로 양측의 7군데 건물에서 시위대의 사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받아 군 차량 3대가 전복되고 그 과정에서 장교 1명과 사병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 계엄군 사망 경위 및 인적 사항.
추가 피해 막으려 사상자 수습 포기… 울분 속 탈출
그러나 군은 곧바로 피습 차량에 대한 복구 및 수습 작업에 나설 수 없었다고 한다. 함 중령 자술서에 따르면 피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사고 현장으로 다가가면 무차별 선제 사격을 가한 무장 폭도와 대치가 불가피하고 군인 또는 민간인이 추가 피해에 노출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함 중령은 “도로 양쪽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으로 피해를 봤으나 부대를 정지시켜 대응 시 선량한 시민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지휘관은 전복차량과 사망 운전병을 그대로 둔 채 화순으로 철수했던 것”이라고 진술했다.
육군의 ‘차량 행군부대 기습상황’ 보고 차트 원본에도 도로 양쪽 건물로부터 불의의 사격으로 희생을 입었으나 대응 시 더 큰 피해 발생을 우려해 전복 차량과 운전수 1명을 실종한 채 주답(광주남방 4km)으로 이동했다고 대응 조치로 군은 기재했다.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탈출하던 계엄군은 곧이어 무장 폭도에 의해 저질러진 반(反)인륜적인 인권 유린의 현장을 목격한다.
함 중령은 “그 뒤 사망 운전병은 불순분자들이 로프로 목을 묶어 추럭(트럭)에 매달아 시내로 끌고 다니는 것을 광주적십자 부녀회에서 시신을 수거한 것을 해당 부대에서 인수했다”고 자필로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군인에게 잘못이 있었다 한들 군인도 국민의 자식인데 차량 운전한 것이 무슨 잘못이라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참혹한 짓을 보고 많은 시민들이 얼굴을 돌리며 치를 떠는 지경이었다”고 참혹했던 실상을 전했다.
그는 계엄군을 농락한 괴한들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고 진술서에 당부했다. 함 중령은 “‘불순분자여 그대들은 누구냐’ 탈을 벗고 진상을 밝힐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한탄하며 자술서에 글씨를 눌러 썼다.
함 중령은 1988년 3월10일 자필 진술서 작성 시점엔 육본 군수참모부 장비정비처장으로 복무하던 준장이었다. 육본 군사연구실은 3월24일 자필서에 소인을 찍은 뒤 기록을 보관했다. 이후 해당 문건은 비공개됐다. 이런 문건이 있는지조차 국민에게 잊히게 된 과정이다.

▲ 함덕선 20사단 작전참모(중령)의 자필 진술서 표지 및 핵심 증언 페이지와 숨진 채 계엄군에 인계된 7공수특전단 소속 이관형 일병의 시신(노란 네모). 기무사령부·육군본부 군사연구실.
민간 목격자들 “차량 뒤쪽에 매달아 끌고 와”
이 일병은 21일 실종된 뒤 뒤늦게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돼 26일 계엄군 측에 시신이 인도됐다. 이 때문에 군 문건에는 사망 일자가 21일과 26일로 혼입돼 있다.
복수의 정부 문건 등에 따르면 시민 4명은 22일 숨진 이 일병의 시신을 목격했다. 시민 박모씨는 22일 오전 11시쯤 광주공원에서 군용 지프에 탑승한 시위대가 공수부대원 시신을 차량 뒤쪽에 매달고 사직공원에서 광주공원으로 끌고 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김모씨는 적십자병원에서 시신들이 도청으로 운구돼 왔는데 시신 중 한 구를 가리키며 ‘이건 공수부대원인데 우리 시민들한테 두들겨 맞은 시신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정확한 날짜는 22일인지 23일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관형 일병의 구체적 사인에 관해선 정밀한 추가 조사가 요구된다. 일단 묶인 채로 트럭에 끌려다닌 건 정부 문건과 복수의 증언으로 미뤄 사실로 파악된다.
다만 죽은 계엄군 시신을 묶은 채로 폭도 차량이 질주한 것인지, 숨이 붙은 계엄군을 트럭에 묶어 끌고 가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인지는 합리적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당시 가해자가 순수한 시민이었는지, 외부 세력은 아니었는지 가늠할 또 하나의 열쇠다.

▲ ‘차량 행군부대 기습상황’ 보고 반전지 차트에 기재된 당시 작전 및 피해 상황. 맨 아래 ‘실종 운전수는 폭도들에 의해 피살됨’이라고 기록돼 있다.
시신에 잔혹한 상처… 순수한 시민 짓 맞는지 의문
“총알 날아오자 軍 대응 사격”… 선제공격에 의한 교전 분명
정부 기록물 “유치인 빼내려 폭도들이 경찰서 습격” 명시
계엄군이 먼저 총 쏴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 설득력 없어
가짜·위선 가득한 ‘광주’… 가려진 역사의 진실 벗겨내야
산 채로 묶여 끌려가다 죽었나… 李 일병 구체적 사인 조사 필요
호남 출신의 우파 5·18 연구가들은 문재인정부가 만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위원장 송선태)가 외부 세력의 개입을 철저하게 배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도저히 광주시민의 온화한 ‘성정(性情)’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기 힘든 잔혹하고 끔찍한 행위까지 광주시민이 범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일단 함 중령은 “최 후미 예비 차량 운전병은 운전 중 즉사해 차량으로 민가를 들이받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자필 진술서에 적고 있다.
반면 다른 군 내부 문건인 육군 20사단 ‘차량 행군부대 기습상황’ 보고 원본에는 ‘실종 운전수는 폭도들에 의해 피살됨’으로 적혀 있어 정확한 사인과 관련해 의문을 품게 한다.
오월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는 “운전수가 (중략) 시민들에 잡혀 칼로 난자당했다”는 증언이 발견된다. 이 내용은 계엄군 군의관의 진술을 인용한 전집에 담겨 있다. 서두에 ‘정OO’로 기술하다 마지막 부분에 ‘다만 이OO 일병의 성명을 ‘정관현’이라고 잘못 기재했다’고 정정한 것으로 미뤄 이관형 일병의 사망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인 것이다.
이 문헌에서 7공수 군의관 위OO 대위는 이 일병의 사망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내 앰뷸런스 운전수도 그때 죽었다. 운전수가 총에 맞아 차가 서자 같이 타고 있던 병장 한 명은 영리해 총을 가지고 지프차 밑에 숨어 있었고, 또 한 사람(정OO-뒤에 정OO은 이관형 일병으로 정정)은 다급한 나머지 총을 드르륵드르륵 쏘아대어 총알이 떨어지자 시민군들에게 잡혀가 버렸다고 한다. 정OO(이관형 일병)의 시체는 후에 적십자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찾았다. 칼로 난자당해 있었고, 약이 오른 시민들이 끌고 다녔는지 등의 살가죽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서로 총을 들어 이미 전쟁으로 돌입돼 버리자 서로가 잔인해질 대로 잔인해져 자제를 못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화장시켜 줬다.”
위 대위는 또 조선대에서 주남마을로 철수 간에 OO제대에 편성돼 운전병으로 임무 수행하다 행방불명된 정OO 일병이 나중에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인계됐을 때 시민군에 의해 훼손된 시신 상태를 목격했고, 후에 정OO 일병을 화장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위OO은 이OO(이관형) 일병의 성명을 ‘정관현’이라고 잘못 기재했다고 오월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은 뒷부분에서 밝힌다.
“진압군 발포보다 무기고 먼저 습격”… 명분 잃은 시위대 무장

▲ 적십자병원 영안실 기록. 기무사령부
5·18을 순수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쪽에선 계엄군이 21일 선제사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맞서 시위대가 전남 각처로 흩어져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훔쳐 와 ‘악마’ 같은 진압군에 맞섰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우파 연구가들은 계엄군에 의한 이른바 ‘집단발포’는 명백한 허위이자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하루 전날인 20일 밤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계엄군 최초 사망자이자 만삭의 아내를 둔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가 광주역에서 폭도의 차에 깔려 죽었고 비슷한 시각 전경 4명이 시위대 차량에 깔려 죽어 격앙된 계엄군이 수위 높은 폭행을 가했을 순 있어도 가만히 일렬횡대로 모여 있는 시민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는 논지다.
특히 광주·호남 출신 장병 등이 상당수 포함된 국군의 성정과도 맞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올해 6월 해단한 정부 5·18조사위는 1980년 5·18 당시 폭도 800여 명이 5월21일 ‘집단발포’ 이전에 경찰 유치장에 갇힌 이들을 빼내려고 총을 쏘며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 탄약을 탈취 시도한 사실이 담긴 정부 기록물을 발굴해 공개했다. <본지 5월14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32> 화순경찰서 유치인 빼내기… 800명 습격 가담' 보도 참조>
이로써 계엄군이 먼저 총을 쏴 시민들이 무장하게 됐다는 주장은 명분을 잃게 됐다. 5·18조사위 내부에서는 자료 공개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일부 위원의 노력으로 문건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시민의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으면 계엄군을 향해 총을 쏘고 군인의 시신까지 훼손했겠냐는 그동안 국민이 가진 보편적인 생각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정보 은폐 또는 적극적인 기망행위에 따른 착각이라는 관점에 힘이 실리게 된 것이다.
“등가죽 벗겨진 계엄군”… 순수한 광주시민 성정에 맞지 않는 잔혹성
순수하고 선량한 광주 시민의 행위로는 차마 간주할 수 없는 무장 폭도의 잔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21일 조선대 철수 작전에선 계엄군 장병(장교+사병) 3명이 숨졌다. 이 일병 외에도 변상진 대위는 탈출 초기인 오후 7시쯤 조선대 학내에서 총격을 받아 즉사했고 역시 운전병인 11공수 이상수 상병은 전남대병원-남광주시장-숭의실고를 지나다 폭도가 쏜 총알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군 문헌은 기록한다.
민간인 정모씨는 21일 이전 불로동 다리 밑에서 낙오된 계엄군이 시민들의 돌멩이 투척으로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 ‘실종 운전수는 폭도들에 의해 피살됨’으로 적힌 군의 상황 보고서.
내용은 유사하나 목격 시점이 20일인 진술도 있다. 민간인 목격자가 이 일병을 보고도 날짜를 혼동한 것이거나, 날짜가 맞는다면 이 일병이 아닌 또 다른 계엄군 피해자일 수 있다.
적십자병원 기사 김모씨와 남모씨도 20일의 상황을 동일하게 묘사했다. 이들은 공수부대원 사망자가 있다는 얘기는 직접 듣지도 목격하지도 못했다고 일치된 진술을 하면서도 낙오된 공수대원을 목격한 상황은 똑같게 기술했다.
김씨는 “계엄군이 광주 천변 좌·우측에 있던 시위대로부터 돌멩이로 공격을 받고 쓰러지자 (중략)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후송해 병원 정문에서 신병을 인계해 줬다”고 진술했다. 남씨도 “계엄군이 시위대에 포위돼 돌멩이 공격으로 인해 상해당했는데도 저항하지도 않고 웅크리고 앉아 있어서 (중략) 김씨와 함께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인계해 줬다”고 같은 상황에 대해 유사하게 증언했다.
국군광주통합병원 일반보급과장 우모 대위는 “5월26일 시민군이 국군광주통합병원에 두고 간 계엄군 시신 관련해 시신이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나무관 위에 태극기가 덮여 있었고 관 안에 이OO 일병 시신에는 목에 자상이 있었으며 옆구리 쪽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 목과 옆구리에 구더기가 많아 소독약으로 제거한 후에 염을 했던 기억이 있으며 당시에는 누구인지 몰랐다”고 진술했다.
고구마 줄기 캐듯 나오는 무장 폭도의 잔혹성… 오월단체 “보고서 폐기하라”

▲ 도청 및 조선대 철수 작전 중 계엄군 사망자 인적사항.
5·18조사위는 6월 종합보고서에서 이 일병 사건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했다.
비록 구체적인 사인을 확인함으로써 폭도의 잔혹성을 규명할 실체적 진실 접근은 가로막혔지만 5·18조사위가 군경의 피해 상황 보고서를 공식 문서로 처음 남겼다는 데 의의를 두는 우파 5·18 연구가들도 많다.
폭도의 선제사격에 대해 명시하지 않은 데다 피격 후 대응사격을 ‘교전’으로 표기한 부분은 아쉽다는 의견이 있지만 보고서가 “직접 사인을 확인할 사망진단서가 없기 때문에 당시 매화장보고서 및 계엄군이 주장하는 흉기에 의한 사망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고 일부 적시한 것은 괄목할 만하다는 관점이 있다.
한 5·18 연구가는 “총알이 날아오는 데 대응사격을 하지 않을 군인은 단언컨대 한 명도 없다”며 “‘폭도의 선제사격에 의한 교전’이라고 표기했다면 더 정확했을 것”이라고 본지에 밝혔다.
이에 대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하는 쪽은 종합보고서에 강하게 반발했다. 요컨대 암매장 사건 보고서는 54쪽인 반면 조사위 출범 초기에는 계획에 없던 군경 피해 보고서가 514쪽에 달한 데 대한 불만으로 풀이된다.
김정호 민변 광주전남지부의 전 지부장은 3월 광주MBC ‘시사용광로’에 출연해 “가장 문제는 암매장 보고서는 54페이지밖에 안 된다”며 “그런데 지금 가장 왜곡의 절정판이라고 하는 군경 피해 보고서는 514페이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전두환 회고록 민·형사 법률대리인이라고 광주MBC가 자막으로 소개한 김 전 지부장은 이어 “10배 분량을 내놨는데 이 514페이지에 이르는 군경 피해 보고서는 그냥 저는 진상 규명과는 아주 거리가 있기 때문에 부실이 아니라 왜곡 보고서”라며 “저는 그냥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가 당초에는 진상규명 과제에 들어 있지 않았다. 2019년 출범할 때는 (중략)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태생적 한계가 있다. 처음부터 군경 피해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게 5·18진상규명은 아니죠”라며 우파 5·18 연구가들과 극명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 봄 채비를 서두르는 아름다운 조선대 캠퍼스 전경. 광주=허겸 기자 ⓒ스카이데일리
“폭도 선제사격엔 침묵… 일방적 민간인 학살 주장 대가 치러야”
이에 대해 한 5·18 연구가는 “5·18조사위가 그 많은 계엄군, 특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계엄군들을 조사하고서도 광주사태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단학살이라고 주장한 사건들에서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선제사격의 예를 특정하게 발표하지 않는 것은 철저한 진상규명의 조사 결과라고 할 수 없다”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계엄군은 ‘경고하라’ ‘접근하지 마라’ ‘사격 해오면 대응사격 하되 하반신을 쏘라’는 3가지 원칙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며 “계엄군이 민간인에게 먼저 총을 쐈다면, 이는 명령 불복종으로 군형법 적용 대상으로 그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고 명령 위반 시에는 심지어는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받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군의 속성을 모르고 군대가 시민에게 총을 마구 쏜 것으로 국민을 인식시킨 것은 군에 대한 모략과 이간질로 볼 수밖에 없다”며 “계엄군이 폭도의 선제사격으로 피해를 당한 조사 결과를 5·18조사위가 특정하게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은 채로 그냥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책임과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10.15
〈39〉“DJ가 학생들에 돈 주고 내란 선동”… 美기밀문서 해제
물적증거 당국서 확보… 美대사관이 본국에 기밀 보고
연루자 거짓 자백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축소
‘5·18 광주사태’ 민주화운동으로 변질시킨 단초 제공

▲ 미국 정부가 10월1일(현지시간) 관계부서 협의를 거친 뒤 4일 기밀 해제한 외교 전문(80SEOUL 014538)에 따르면 김대중의 실패를 자책한 정동년 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감옥에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법정에 서기 전 김대중 연계와 유죄를 자백하는 진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왼쪽). 또한 당시 정부는 연루자들의 진술 녹취록 외에도 일기장과 무기들을 비롯해 사진·인쇄된 전단지·반란을 촉구하는 지하 신문 등의 ‘물적 증거(material evidence·오른쪽)’도 압수·확보해 DJ 내란 선동의 유력한 증거물로 제출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외교 전문 일부
1980년 5·18 당시 김대중이 학생들에게 돈을 주고 내란을 선동한 ‘물적 증거(material evidence)’를 우리 당국이 확보한 사실이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기밀 문건에서 드러났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연루자들이 모진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사실을 자백했다고 주장하면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의미가 축소됐고, 훗날 5·18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성격이 뒤바뀌는 단초를 제공했다.
미 국무부가 10월4일(현지시간) 추가로 기밀 해제한 5·18 당시 극비문건(80SEOUL 014538)에 따르면 미 대사관은 1980년 10월에 열린 1심 재판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같은 달 30·31일 광주를 방문해 군검찰로부터 브리핑을 청취하던 중 이 같은 정보를 확보하고 워싱턴에 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김대중 등을 내란 혐의 등으로 기소한 군검찰은 ‘사진·인쇄된 전단지·반란을 촉구하는 지하 신문·일기장·무기 등 형태의 물적 증거(material evidence in the form of photos, printed leaflets and underground newspapers urging rebellion, and diaries and arms)’를 재판의 증거로 확보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듬해인 1981년 대법원은 군검찰이 물적 증거와 녹취록에 기반해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한민통 일본본부는 북괴와 조총련 지령으로 구성되고 자금 지원을 받아 목적을 이루는 반국가단체”라고 이적성을 판단했고, 군인에 대한 김대중의 정부 명령 불복종 촉구는 내란 음모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본지 2024년 2월8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㉚] “게릴라戰 나서라” 무장투쟁 부추긴 김대중’ 보도 참조
김대중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제출한 탄원서에서 국가안보에 누를 끼친 잘못을 자백했고 향후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며 선처를 호소한 뒤 사면됐다.
그러나 16년이 흐른 1997년 대법원은 김대중이 국가 변란을 획책하려 했다는 증거들을 무시하고 같은 사건에 대해 두 번 확정판결하지 않는다는 헌법상 일사부재리 원칙까지 깨며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했다.
미 대사관의 외교 전문에는 김대중의 내란음모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의 하나로 정동년(2022년 작고) 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재판정에 서기 전에 김대중과의 연계와 유죄를 자백하는 진술을 했다고 기술돼 있다.
특히 정부는 “정씨가 봉기의 주동자이자 김대중과 밀접하게 활동하며 ‘폭력을 통해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overthrow the government by violence)’”고 주장한다고 미 대사관은 보고문을 띄웠다.
그러면서 김대중에게 푹 빠진(infatuated) 사람으로 알려진 정씨는 학생들에게 내란을 일으키도록 돈을 줬으며 정씨는 이 돈이 김대중으로부터 왔다고 말했다(he was allegedly so infatuated with KIM DAE JUNG that he gave money to students for insurrection from his own pocket, saying it came from Kim)고 미 대사관은 보고했다.
또한 정씨가 김대중이 권력을 쥐게 되면 ‘국회의원 자리 하나(a National Assembly seat)’를 보상받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군검찰이 브리핑한 사실도 보고서에 기술했다.
기밀 해제된 외교 전문에는 “그는 나중에 김상현을 통해 500만 원을 김대중으로부터 받았다(Later he received 5 million won from Kim trough Kim Sang-hyun)”고 기록돼 있다.
이어 “정동년과 심복들은 5월17일에 체포됐으며 이들은 더 큰 폭력을 예고해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태를 야기했음이 분명하다고 정부 관계자는 설명했다”며 “정동년은 김대중의 실패를 자책하며 감옥에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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