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 [1] “DJ 치부 드러날라”… 美서 출판 저지 공작 - [20] ‘가든 사업’의 조준 반경에 들어온 라프토 재단과 람스타드

상림은내고향 2024. 11. 2. 20:57

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  스카이데일리 김기삼 변호사 2024

 △ 미 프린스턴 대학 졸업
△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시카고 트리뷴지(Chicago Tribune)·프랑스 파리의 IHT(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를 비롯해 50년간 한반도 문제 전문 최고령 현역 기자

 

2024.10.01

[1] “DJ 치부 드러날라”… 美서 출판 저지 공작

편집 끝난 공저 ‘배신당한 한국’ 출판사에 온갖 협박
1000페이지 달하는 김대중 영문 자서전 대신 출간 후 회유·무마
“우리가 최종 원고대로 출간” 출판사와 담판… ‘노벨상 수상’ 진실 공개

2000년 12월10일,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 게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탄두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김대중이 전 세계를 상대로 어떻게 가짜 평화를 만들어 노벨상 사기극을 벌였는지, 어떻게 노벨평화상과 핵무기를 뒷거래했는지… 양심 증언으로 미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락받은 유일한 한국인 김기삼 변호사와 한반도 전문 국제 저널리스트 도널드 커크가 밝히는 아찔하고도 끔찍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편집자 주]

 ▲ 김기삼 국정원 내부고발자

 

 ▲ 도널드 커크(Donald Kirk) 국제 저널리스트

팔그레이브가 던진 수수께끼

 2012년 필자들은 책 한 권을 집필했다. 영국의 저명한 출판사 팔그레이브 맥밀란(Palgrave Macmillan)사가 흔쾌히 원고를 받아 주었다. 팔그레이브는 이전에도 이 책의 공저자인 도널드 커크(Donald Kirk)가 쓴 배신당한 한국(Betrayed Korea): 김대중과 햇볕정책을 출간한 바 있었다.

 

출판을 위한 교정과 교열을 모두 마친 때는 2013년 중반 무렵이었다. 팔그레이브 편집자는 책이 곧 인쇄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정말 반갑고 신나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2013년 어느 여름날, 팔그레이브 편집장이 법적인 검토가 끝날 때까지 출판을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맨해튼의 명물인 플랫 아이언(Flat Iron) 빌딩 2층 사무실에서 저자들에게 원고를 재검토하여 명예훼손의 우려가 있는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우리는 그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내용뿐만 아니라 출처·인용·이름·철자 등이 정확한지 다시 면밀히 검토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미세한 조정만 거치고 나면 약속대로 책이 곧바로 출판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는 벌써 전자책 판매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틀린 생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출판사 측은 이미 출판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려놓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수정을 요청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모든 검토 작업을 끝마친 우리에게, 영국에 있는 모 법률회사의 변호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는 이 책이 팔그레이브 출판사의 모델에 맞지 않기 때문에 출판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은 팔그레이브가 지난 1년여 동안 근사한 표지도 만들고 수정 사항을 일일이 반영하고 모든 페이지 구성을 다듬는 등 책의 최종 출판본을 완성한 지도 한참이 지난 후에 일어났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

우리는 팔그레이브의 그러한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커크는 이미 팔그레이브에서 세 차례 책을 출판했는데 언제나 커크를 공정하게 대하고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책 출간 이후에 나오기로 되어 있던 커크의 또 다른 책 오키나와와 제주(Okinawa and Jeju): 불만의 기지도 역시 그해 말 예정대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 책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이 더 지나도록 우리는 팔그레이브 편집진에게 우리의 정당한 요구와 주장을 되풀이하여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이 책의 킨들 버전은 아마존과 팔그레이브사의 웹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에서 계속 판매되고 있었다. 우리는 팔그레이브에게 전자책의 판매에 따른 로열티에 대해 문의했다.

 

그러자 팔그레이브는 킨들에서 책을 온라인으로 계속 판매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실수였다고 변명했다. 우리가 실수가 아니었다며 항의를 계속하자 팔그레이브 측은 5000달러의 합의금을 제시하면서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국정원의 내부고발자 김기삼 변호사와 한반도 전문 저널리스트 도널드 커크의 저서. 노르웨이 오슬로의 스파르타쿠스 출판사에서 출판한 축약본 ‘노벨위원회에 대한 한국의 비밀 첩보 작전’(왼쪽)과 ‘김대중은 북한 김정일을 상대로 어떻게 노벨상을 뒷거래했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김대중의 노벨상 원정’. 필자 제공

노르웨이에서 출간된 책

한편 그런 와중에 2016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스파르타쿠스(Spartacus) 출판사가 우리 책의 노르웨이어 축약본을 출간했다. 노르웨이 공영TV를 비롯한 노르웨이 언론들은 노벨평화상 수상 뒤에 숨겨진 음모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스캔들은 한동안 북구의 극야 아래에서 음울한 오로라처럼 퍼져 나갔다. 물론 이런 소식은 서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더 지난 후, 우리는 팔그레이브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2018, 놀랍게도 김대중이 사망한 지 무려 9년이나 지난 시점에 팔그레이브가 행동하는 양심(Conscience In Action): 김대중 자서전을 출간한 것이다.

 

그 책은 원래 두 권짜리 한글 자서전을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거의 1000페이지에 이르는, 정확히 말하면 934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팔그레이브에서 출간하는 다른 책들의 거의 4배에 달하는 분량의 초거대작이었다. 그들 표현대로라면 틀림없이 그들의 모델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팔그레이브의 속사정

팔그레이브는 우리 책의 출판을 중단시키면서 동시에 우리 모르게 김대중을 찬양하는 사람들과 그의 자서전 출판에 대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의 입맛에 맞춘 거짓 이야기를 담은 방대하고도 진부한 책을 출판하기 위해 김대중과 김씨 신화의 추종자들이 찾아갈 만했던 곳이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팔그레이브였던 것이다.

 

김대중의 추종자들은 줄곧 커크의 저서 배신당한 한국을 비판하며 혐오감을 드러내 왔었다. 그들은 김대중의 치부를 들추는 우리의 책이 출판되지 못하도록 팔그레이브사에 공갈 협박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말 그대로 마지막 순간에 출판사를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김대중의 영문 자서전을 탄생시키면서 우리 책을 매장시킴으로써 한꺼번에 두 개의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팔그레이브와의 타협

2019, 전 노르웨이 노벨연구소 소장이자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이었던 게이르 룬데스타드(Geir Lundestad) 세계에서 가장 품격 있는 상(The World’s Most Prestigious Prize): 노벨평화상의 내부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 책은 우리 책의 출판에 자극받아 자기방어 내지는 변명의 목적으로 쓴 것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노벨상 수상 시스템을 잘 아는 저명한 내부 인사가 쓴 최초의 기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우리 책에 인용되었던 내용이 그 책에도 일부 그대로 반영되었지만 노벨위원회의 허위와 타락을 성찰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후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계속 살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팔그레이브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했지만 우리는 법에 호소할 인력도 자금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팔그레이브 측에 팔그레이브가 편집하고 최종 승인했던 원고의 내용 그대로를 우리가 따로 출판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팔그레이브는 자신들이 출판을 위해 준비했던 책 전체에 대한 모든 권리를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이 기록이 한 개인과 국가의 중요한 시기에 관한 소중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믿는다. 동시에 우리 필자들은 이 책이 앞으로의 노벨평화상 수상 과정에 일종의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올해 마침 김대중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대중이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무슨 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궁금해하는 모든 이에게 늦게나마 진실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2] 용감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

자넷 힌쇼우 프라임-ECR 대표의 특별한 경험

2003 12월 어느 날, 김기삼 씨가 내 작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진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지키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의 삶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일종의 행운이자 특권이다

 

우리가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사무실에는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 박해받는 피해자가 많이 찾아온다. 그들 중에는 박해받은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신체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으며, 정신적으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이민 판사 앞에서 정부 측 검사를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이고 즐거운 도전이다.

 

언론인 출신의 의뢰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비극적인 체험 혹은 상처받은 삶에서 어느 부분이 사안의 핵심이 되는 요소인지를 쉽게 이해한다. 하지만 교육받지 못했거나 문맹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망명 케이스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김기삼 씨의 경우에는 이런 것들과는 성격이 다른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일단 그가 한국에서 왔다는 게 문제였다. 왜냐하면 과거의 한국이라면 독재정권하에서 박해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현재의 한국이라는 나라는 물리적인 고문이나 박해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부 고발자의 아슬아슬한 삶

김기삼 씨는 한국 정부의 총체적 기만행위에 관한 사실들을 부지런히 폭로했다. 그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기사·블로그·이메일 등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폭로했다. 이메일이 해킹당하고, 인터넷에서 기사가 삭제되고, 출판사들이 그의 글을 싣거나 출판하지 않겠다고 협박했지만 그는 줄기차게 폭로를 이어 갔다. 아마도 자신이 밝혀낸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김기삼 씨는 이미 미국으로 건너와 한시적으로나마 신체와 생명·자유를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한국 정부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험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서울로 강제 추방되기라도 한다면 한국 정부의 불법 행위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틀림없이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질 위험이 있었다. 그는 또한 본국으로 송환될 경우 북한 요원들에 의해 위해를 당할 가능성에도 직면해 있었다.

 

내부 고발자의 삶은 늘 힘들고 위험하다. 그래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디프스로트(Deep Throat·익명의 내부 고발자)처럼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도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최선봉에 있는 나라인 미국에서조차 내부 고발자들은 대다수의 경우 조롱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해고와 빈곤, 때로는 감옥살이까지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 2018년 6월21일 서울 마포구 서정아트센터에서 열린 정형모 정진미 부녀 초대전 ‘인물화의 계보를 잇다’를 찾은 관람객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허니먼 판사를 만난 행운

 우리는 아주 운 좋게도 우리 케이스를 잘 이해하는 이민 판사를 만났다. 정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판사를 만난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민 판사들은 난해한 이민법 조항에는 통달해 있어도 지극히 제한적인 삶을 살아온 터라 망명 신청자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나라들의 복잡한 정치적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허니먼(Honeyman) 판사는 사석에서 이전에 변호사로 일할 때 옛 소련 출신 망명자를 변호한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덕분에 그는 국적은 각각 달라도 이런 종류의 사건들이 갖고 있는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유사성을 이해하고 또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김기삼 씨의 사건 담당 판사인 허니먼 판사가 엄청난 핍박과 고문 가능성에 직면한 김기삼 씨의 용기와 도전 정신을 높이 인정해 주었다고 믿는다. 게다가 나는 허니먼 판사가 북한 요원들의 교묘한 수법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허니먼 판사였기에 두 번씩이나 정부 측 검사의 주장을 기각하고 김기삼 씨와 그의 가족의 망명을 허락했던 것이다.

국가원수의 불법 대북 송금이라니

김기삼 씨는 이 기록을 통해 자신의 조국 대한민국의 국가원수가 북한으로 대규모 불법 자금을 송금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핵무기 개발을 지원한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가 이러한 반역적이고 반인륜적인 일들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불법 대북 송금이 국제적 명성을 얻고자 하는 한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김기삼 씨는 그동안 한국의 정보기관이 노벨상과 불법 송금 문제뿐만 아니라 정적들에 대해 상시적으로 불법 도청을 하는 등 탐욕적인 정치인을 위해 봉사해 왔다는 증거도 밝혀낸 바 있다.

 

 김기삼 씨가 영어권 독자들에게, 아니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까. 나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잘 알려진 것처럼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국가 정치의 영역에서 선출직 공직자도 일반 시민과 같은 법적 기준을 적용받아야 한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할 법적 기준

 대통령이나 또는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 위에 군림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기삼 씨와 같은 용기 있는 사람이 나서서 권력자들의 무분별한 야망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들은 그가 기록한 복잡다단한 불법 행위들이 경사면을 따라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하나둘씩 쌓이고 쌓여 결국은 나라 전체를 결정적인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김기삼 씨의 용기를 높이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 그의 글에는 탐욕에 빠진 정치인들을 제어해 견제와 균형을 갖춘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도록 하는 데 있어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주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에버스타트의 추천사

 니콜라스 에버스타트(Nicholas Eberstadt) 박사는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최고 선임연구원이다. 초대 북한인권특사를 지낸 제이 레프코위츠, UN 주재 미국대사와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역임한 존 볼턴과 함께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자)으로 분류되는 그는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이다.

 

에버스타트 박사는 김기삼 씨의 글을 가리켜 지난 2000,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을 사냥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노벨위원회를 대상으로 벌인 장기간의 비밀공작에 관한 충격적 기록이라고 평했다. 그는 그 공작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과 국정원의 공식 문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한 김기삼 씨의 글을 읽고 나면 누구든 노벨평화상을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3] 8년 법정투쟁 승리… 김기삼 ‘자유의 날개’ 달다

수잔 숄티 등 각계 인사 망명 허용 탄원서 서명 운동… 들불처럼 번져
허니먼 판사 “金은 전형적 망명자”… 양심에 따른 내부고발자로 인정

8년 만의 망명 허가

 

2011 1212, 이날은 한국의 전직 정보요원 김기삼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미 이민국 검사와의 8년간의 기나긴 법정 다툼을 드디어 승리로 끝낸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필라델피아 이민법원의 찰스 허니먼 판사는 김기삼과 그의 가족에게 미국 망명을 허가하는 판결문을 낭독해 주었다.

 

앞서 2003 12, 김기삼은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매수했고 그 대가로 북한의 김정일에게 미화 15억 달러를 불법 제공했다는 의혹을 폭로하고 미국 법원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었다.

 

허니먼 판사의 판결 덕분에 김기삼과 그의 가족은 이민국 검사가 주장했던 불법체류 혐의에 대한 완전한 면죄부를 받았다. 당시 김기삼은 김대중정부에서 벌어진 갖가지 불법과 부패를 폭로하고 있었다. 그가 세상에 밝힌 내용은 김대중의 대북 송금과 노벨상 공작·임동원의 간첩 의혹·국정원의 상시적인 불법 도청과 감청 그리고 김영삼과 김대중 정권의 무기 도입 비리와 비자금 조성 등 메가톤급 정보들이었다. 그가 만약 그때 서울로 추방되었더라면 그는 곧바로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 정부의 너무나 민감한 비밀 정보를 세상에 공개했기 때문이다.

 

허니먼 판사의 판결은 두 가지 점에서 이례적인 것이었다. 먼저 김기삼은 보통의 다른 망명 신청자들과 달리 폭압적인 정권을 피해 탈출해 온 난민이나 망명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는 양심에 따라 자신의 조국에서 일어난 반역적인 상황과 부정부패를 세상에 알린 용기 있는 내부고발자였다. 다른 하나는 그가 무려 ‘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미국 이민국 소속 검사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고, 끝내 그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다는 점이다.

2008년의 망명 허가 판결

사실 허니먼 판사의 망명 허가 판결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허니먼 판사는 이미2008 415일에도 똑같이 김기삼 가족의 망명 신청을 승인한 바 있었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는 미 국방부와 국무부 고위 관리였던 척 다운스·북한 인권 운동가이자 디펜스포럼재단 대표인 수잔 숄티·한인 인권 운동가 남신우 선생 그리고 한인 사업가 윤홍준 씨 등이 진술서를 쓰거나 기꺼이 증언자로 나서 주었다. 또한 해리스버그 지역 교회의 많은 동료 신자들도 김기삼과 그의 가족을 위해 망명 허용 탄원서에 서명해 주었다.

 

당시에 이미 허니먼 판사는 이민검찰 측의 시간 끌기에 인내심이 바닥나 있었다. 허니먼 판사는 구두 판결문에서 김기삼은 본질적으로 전형적인 망명자라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이 가족의 노력이 기이하게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면서 그들의 주장이 적어도 미국의 보안기관으로부터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고 판시했다. 또한 그는 사건 과정에서 담당 검사가 끊임없이 노력했음에도 미 국무부의 개별 의견서가 제출되지 않았고, 어떠한 보안기관도 명시적으로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며 행정부를 거의 질책하다시피 했다.

 

그는 또한 최종 선고문에서도 본 법정은 지금 이 판결의 마지막 순간까지 국무부나 연방수사국 또는 그 밖의 다른 행정부 이해관계 기관으로부터 ‘그 어떤 의견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며 재차 미 정부의 대응 부재가 자신의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시사했다.

▲ 2011년 12월12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미국 이민법원 찰스 허니먼 판사가 각 관련 행정부서에 대해 김기삼 씨의 미국 망명 허가 명령을 적시한 판결문. 필자 제공

플레처 스쿨 기자회견과 박지원의 발언

허니먼 판사가 첫 판결을 내린 지 일주일 만인 2008 422, 40여 년간 아시아 특파원을 지낸 도널드 커크는 매사추세츠주 메드포드시에 있는 터프츠(Tufts)대학 플레처 스쿨(Fletcher School)에서 열린 오찬장에서 김대중과 그의 최측근인 박지원을 만났다. 그 오찬은 DJ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주한 미 대사를 지낸 스티븐 보스워스 학장이 주최한 행사였다.

 

점심 식사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지원은 지난 수년간 김기삼이 제기해 왔던 의혹들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는 한국 언론인들에게 김씨가 망명을 허가받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언어로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면서 김대중의 노벨상 로비설은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에 불과하다고 강변했다. 그는 또한 김씨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아니라 영고의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허니먼 판사의 판결문

그로부터 약 3년이 지난 2011 12월에 다시 열린 재판에서도 허니먼 판사는 미국 정부를 대변하는 이민검찰의 집요한 노력과 주장을 물리치고 김기삼과 그의 가족에 대해 또다시 망명을 허락하는 판결을 내렸다. 허니먼 판사는 판결문에서 본 사건의 응소인은 한국으로 송환될 경우 그의 정치적 견해로 인해 한국 정부나 국정원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합리적인 근거가 충분히 있다고 판시하면서 이들은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망명을 허락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결했다.

 

그는 또한 응소인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이 크며 한국 정부는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응소인을 지켜줄 의지와 능력이 없어 보인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민국 검사가 현명하게도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김기삼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락받은 최초의 한국인 내부고발자가 됐다.

 

이 판결의 결과로 김기삼과 그의 가족은 한국과는 사회적·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인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이 유리거울을 통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와 달리 그들은 꿈을 꾸지도 않았고 원점에서 다시 깨어나지도 않았다.

불안했던 시간에 마침표를 찍고

허니먼 판사가 판결문에 서명하는 순간 김기삼 씨 가족은 수년간 감내해 온 불안한 나날, 그 불확실성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김씨 가족은 미국에 온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났지만 허니먼 판사의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미국에 얼마나 머물 수 있을지, 언제 갑자기 쫒겨나게 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살아온 김기삼과 그 가족은 이제 망명 법원의 판단에 따라 1997년도에 처음 도착했다가 2002년부터 계속 살아온 펜실베이니아 중부의 한 시골 마을에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김기삼과 그의 가족은 2002 3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고, 김기삼은 한국 언론에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내용을 폭로한 후 2003 12월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었다.

 

그의 양심선언 핵심 내용은 “15억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2000 6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 김정일의 금고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국정원을 비롯한 다른 정부 기관들은 대북 첩보 수집에 사용되어야 할 수많은 자원과 귀중한 시간을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공작에 허비했으며 이러한 노력 끝에 김대중은 2000 12월 노벨평화상을 품에 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4] 한반도를 위험에 빠뜨릴 진실… 침묵할 수 없어 떠났다

김대중 노벨상 수상 비밀공작팀 운영… 만천하에 추악한 비리 폭로
“돈으로 산 남북정상회담·핵 참화 부를 진실 국민이 알아야”

국정원을 떠나며

 

 김기삼은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김대중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한 지 2주 만인 2000 1028일 국정원을 떠났다. 공직에 대한 봉사와 신뢰라는 신념이 몸에 배어 있는 국정원 요원이 사직한다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김기삼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0 10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DJ의 수상 발표 소식을 저녁 통근 버스 안에서 들었다. 그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그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훼손된 국익은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기삼은 김대중이 전 세계의 찬사를 받으며 노벨상을 받으러 가는 동안 국정원 주변에서 들려올 환호와 뒷담화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대표 월간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사직을 결심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대중 정권이 하는 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였다. 국정원 직원으로서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대통령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월급 때문에 머리 숙이고 산다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대답했다.

양심 증언인가 배신인가

국정원을 퇴직한 후 김기삼은 혼자서 은밀하게 김대중 정권과 그 핵심 측근들의 추악한 비리를 추적하고 파헤치며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 1월 말, 그동안 수집한 정보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양심 증언 후 심정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매우 홀가분하다. 지난 2년간 항상 가위에 눌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 털어 버리고 나니까 해방된 것 같다. 이제야 마음까지도 국정원에서 퇴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기삼은 국정원이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비밀 공작팀, 즉 노벨상 프로젝트(NP 프로젝트)팀을 운영해 왔다는 사실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나는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에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다. NP 프로젝트는 극도의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고 내가 밝힌 사실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했다. 개중에는 오랜 시간 근무해 온 국정원을 사직하며 기밀 사항을 폭로한 그를 배신자라 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 무려 8년에 걸쳐 진행된 김기삼 씨에 대한 망명 허용 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나서 준 국제 칼럼니스트 도널드 커크 기자의 저서 ‘배신당한 한국:김대중과 햇볕정책’ 표지에 실린 이미지. 필자 제공

국정원 입장에서 보면

또한 한국의 국가정보원이 내부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김기삼을 고발하고 기소했다고 해서 덮어 놓고 국정원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대중이 김정일을 만나 남북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가짜 평화를 꾸며 냈다고 해서 무턱대고 김대중을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북한에 건넨 수억 달러 또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이 세 차례에 걸친 핵실험에 투입된 것을 몰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일의 선택을 받은 후계자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과 1994년 사망한 할아버지 김일성처럼 강력한 지도자가 될 것임을 확실히 보여 주기 위해 또 다른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젊은 김정은이 실권을 쥐고 있는 노쇠한 장군들의 말을 듣지 않고 실제로 핵무기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일이 벌어질는지의 여부는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김기삼의 주장처럼 남북정상회담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매수된 것이 사실이라면 한반도를 핵 참화의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를 이러한 진실을 한국 국민이 제대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전 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알 권리가 있을 것이다.

도널드 커크 기자의 개입

아시아, 특히 동북아시아 문제 전문가인 도널드 커크 기자는 2009년 김대중 서거 직후 출간된 자신의 저서 배신당한 한국: 김대중과 햇볕정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김기삼과 만나 이 드라마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김기삼은 김대중의 생애와 시대에 대한 기존 연구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공했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영웅적으로 싸웠던 김대중이 북한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거나 눈감아 주거나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행각을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한 사실들은 이상하리만치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11 1217일 김정일이 사망한 직후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원수님의 위대한 유산으로 그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꼽았다. 김정일은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주민을 위해 식량과 의약품에 투자했어야 할 막대한 자금을 핵 개발에 쏟아부었다. 남한으로부터 지원받은 현금을 핵 프로그램에 쏟아 넣지 않았더라면 핵 개발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전문가 증인으로 나서 준 커크 기자

김기삼이 제공한 정보와 그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커크 기자는 허니먼 판사 앞에서 열린 이민 청문회에 전문가 증인으로 기꺼이 나섰다. 허니먼 판사는 판결문에서 한국 당국은 전직 국정원 직원이 국가 기밀을 누설해 국정원을 배신한 것에 대해 가장 분노했다고 커크의 증언을 요약해서 인용한 바 있다.

 

허니먼 판사는 그의 두 번째 판결문에서 한국 당국은 커크를 국가의 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김기삼 씨가 커크 기자에게 비밀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노했다고 밝혔다.

 

또한 허니먼 판사는 커크가 중국 내 탈북인들에 동조하거나 그들을 돕는 개인들이 북한의 표적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고도 언급했다. 그는 또한 김기삼 씨가 북한 정권에 대한 매우 공개적인 비판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 요원들의 보복 대상이 될 가능성이 최소한 10%는 되는 것 같다고도 판시했다. 허니먼 판사는 판결문에서 따라서 피고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박해의 법적 근거가 그의 정치적 견해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고 결론지었다.

이해할 수 없는 미국 정부의 태도

이 사건에서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미국 정부는 김기삼과 그의 가족의 망명에 대해 그토록 강경하게 반대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점이다. 김기삼의 망명 신청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정부 측 대리인으로 선임된 사람은 국토안보부 소속 이민검찰 수석 보좌관 파멜라 랜섬(Pamela Ransom)이었다.

 

이에 반해 김기삼은 이제까지 수백 명의 망명 신청자를 변호한 자넷 힌쇼우-토머스라는 무료 변론인을 법률대리인으로 선임했다. 그녀는 커크 기자를 증인으로 부른 것 외에도 북한 주민의 인권을 대변하는 사람은 누구나 북한 정권의 적이라고 주장하는 디펜스포럼재단(Defense Forum Foundation)의 대표인 수잔 숄티도 증인으로 요청했다. 숄티는 김기삼 씨는 남한에서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의 흐름을 폭로했기 때문에 북한 정부에게는 확실히 위험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증언했다.

 

[5] 덮고 가려 했던 대북정책의 불편한 진실

“생명 위협” 신변안전 우려 커져… 김기삼 씨 이례적 망명 허용
정몽준 前의원 ‘대북정책 불편한 진실’ 신문 칼럼 통해 문제 제기

미국 정부가 망명을 거부한 이유

 

미국 정부는 왜 그토록 오랜 기간 수많은 자원을 낭비하면서 김기삼과 그의 가족에 대한 망명을 거부하는 헛된 시도를 한 것일까. 찰스 허니먼 판사는 김기삼 씨의 망명 건에 대한 판결문에서 “도널드 커크 기자는 한국 정부의 정치적 압력 때문에 미국 정부가 반대했다고 증언했다며 그의 증언을 증거로 채택했다.

 

허니먼 판사가 판결을 내린 지 몇 주 지난 후 김기삼 씨의 변호를 맡은 자넷 힌쇼우-토머스가 매우 경쟁적이라고 묘사한 랜섬 검사는 미 정부가 또 다른 항소를 제기하지는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힌쇼우-토머스는 랜섬이 이번엔 당신이 이겼어요라고 상냥하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기뻐하지는 마세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회상했다.

 

한국 정부는 김대중 정권이 고수해 온 햇볕정책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 사람을 미국에서 내쫓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주한 미국 대사관과 국무부 내에 자신들의 편이 되어 줄 사람들도 있었으니 뜻한 대로 일이 풀려 갈 가능성도 컸을 것이고 한국 정부이 관계자들 또한 그렇게 전망했을 것이다.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의 관점

퇴역 미 해병대 출신 베트남 참전 용사인 제임스 줌왈트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는 자신의 칼럼에서 놀랍게도 이 판결이 거의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베트남 전쟁의 전설적인 해군 사령관 엘모 줌왈트 제독의 둘째 아들인 제임스 줌왈트는 이번 이민법원의 결정이 두 가지 이유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풀이했다.

 

그는 우선 한국인이 망명을 신청했다는 사실 자체가 특별한 사건이라면서 동맹국의 국민이 미국에서 망명을 허가받은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지난 10여 년간 대북 유화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최고의 순간이라고 꼽았던 일들이 실제로는 사기였다는 김씨의 주장을 미국 법원이 받아들였다는 점이 특별하다고 썼다.

 

줌왈트는 또한 김기삼 씨의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이 아니라 남한, 즉 대한민국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김기삼 씨는 김대중이 국제사회를 상대로 저지른 중대한 사기의 증거를 공개했기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한 김대중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가짜 평화를 만들어 노벨상을 탔으며, 그가 북한에 제공해 준 자금은 핵 개발에 투자되어 한국의 안보에 대한 위협을 증대시켰다고 주장했다.

남북정상회담의 뒷거래 가능성을 최초로 기사화

도널드 커크는 남북정상회담에 금전 거래가 있었을 개연성을 최초로 기사화한 사람이다. 2001 131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에 실린 기사에서 커크는2000 6월 평양에서 김정일을 설득하기 위해 막대한 현금이 지급됐을 가능성을 보도했다. IHT 편집장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요청으로 작성된 이 기사는 김대중정부가 대북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임동원 국정원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 2001년 6월15일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미국 CNN방송과의 인터뷰에 앞서 관계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기사 전문은 북한과 해빙의 길을 닦은 남한의 정보 책임자라는 제목으로 IHT 2면에 크게 실렸다. 문제의 정보 책임자는 김대중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 위해 국정원장으로 임명한 임동원이었다. 커크는 기사에서 비록 대가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남·북한 모두 선물을 가장한 뇌물수수가 관행이 된 사회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에도) 금전적인 뒷거래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커크의 기사가 일으킨 소동

이러한 금전 거래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서울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청와대 대변인은 우리는 해외 언론들이 부정확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기사를 쓰더라도 지나친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자제한다면서 하지만 이번 IHT 기사는 도가 지나쳤으며 우리는 모든 옵션을 고려하고 있다고 위협했다. 한국 국내 언론들은 이 사건을 한국 정부가 외신의 오보를 바로잡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간주했다.

 

결국 김명식 해외정보원 차장은 커크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당신이 쓴 기사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커크의 태도로 보아 쉽게 설득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김명식은 특파원을 추방하거나 비자를 거부하는 기존의 방식을 취하지는 않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는 IHT에 사과나 철회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커크 앞으로 그러한 거래 사실을 부인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IHT는 그 해명성 편지를 지면에 게재해 주었다. (이것으로 체면을 살린 김명식은 IHT가 자신의 편지를 게재한 것은 기사를 철회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정몽준 전 의원의 칼럼

한국 정부는 김기삼에 대한 망명 허가의 의미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 당국은 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유력 정치인이자 재벌 2세인 정몽준 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해 특유의 직설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칼럼에서 미국 법원의 이번 판결은 우리가 덮고 가려고 했던 대북정책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면서 우리 정부가 어떻게 대처했기에 이처럼 수치스러운 판결이 나올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했다. 그는 또한 긴밀한 동맹국인 한국과 미국 간에 정치적 망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몽준 의원은 우리가 이런 논의를 공개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면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외국으로 망명을 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한탄했다. 그는 김씨는 우리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겠다면 언제든지 귀국해 조사에 응하겠다고 밝혔지만 우리 정부는 그의 대한민국 여권 갱신 신청을 두 차례나 거부했고, 그는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중지 상태이다고 썼다. 정 의원은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그가 자유롭게 증언하고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질 리 없다고도 말했다.

 

우리는 아직까지 햇볕정책의 효과나 영향에 대해 심층적이고 객관적인 논의나 평가를 해 본 적이 없다. 김씨 사건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달린 대북정책에 대한 정치권의 보다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북한 동포는 품어야 하겠지만 무슨 희생이 따르더라도 북한 정권에는 대적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안보는 우리가 지킨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김씨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6] ‘NP 프로젝트’ 휘어잡은 김한정… 노벨상 공작 주도

국정원의 대외협력보좌관실… NP 프로젝트 특수임무 팀

이종찬·라종일 DJ에 충성 ‘한통속’… 대외협력보좌관실 구성

 

국정원에서의 마지막 1 대외협력보좌관실

 김기삼 씨는 1993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국정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 10, 8년간 몸담았던 국정원에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사직했다. 이듬해인 2001 3월에 기약 없는 망명의 길을 떠나 2003 1, 그는 미국에서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남·북한의 금품 수수 사이의 연관성을 폭로했다.

 

그가 국정원에서 마지막으로 일했던 부서는 대외협력보좌관실이라는 곳이었다. 그럴듯한 명칭과는 달리 이 부서는 김대중의 노벨평화상을 사냥하기 위한 특수임무 팀이었다. 그는 거기서 외신 담당관으로 일했다. 이 조직은 ‘NP(Nobel Prize·노벨상) 프로젝트 또는 ‘S 프로젝트(S Special의 약자)’를 수행하기 위한 위장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국정원장 이종찬의 야심

김기삼 씨가 이 특수임무 팀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1년 후인 1999 2월이었다. “김대중이 1998 5월 이종찬 국정원장에게 자신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비밀 팀을 꾸리도록 지시했다고 김기삼 씨는 회고했다.

 

이종찬은 보수적인 한나라당과는 결별했지만 대통령 출마의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종찬은 김대중의 환심을 사기에 가장 좋은 선물이 노벨평화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종찬의 김대중을 위한 노벨상 공작 구상에 맞장구를 치고 한통속이 된 사람이 있다. 런던과 서울에서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고, 대선 때는 이종찬과 김대중 캠프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으며 특히 외신기자들과도 가까웠던 라종일 국정원 차장이었다. 이종찬과 라종일은 함께 팀을 구성했고, 김기삼 씨는 우연히 그 팀의 보조 요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NP 프로젝트에 소극적이었던 대외협력보좌관 이종훈

 대외협력보좌관실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만 해도 그 사무실이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NP 프로젝트’라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조직이었다고 김기삼 씨는 회상했다. 인원 규모 약 10명의 그 조직은 원장 직속으로 극비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대외협력보좌관은 노르웨이와 노벨평화상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였던 이종훈 씨였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종훈 보좌관은 프로젝트 추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마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한정의 등장

얼마 지나지 않아 김한정이 모든 비밀 프로젝트를 완전히 장악하고 노벨상 공작에 필요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빠르게 통합해 갔다.

 

이종찬은 1999 5월 국정원장직에서 해임된 뒤에도 이 사무실과 관련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기보다 실제로 그는 대외협력보좌관실의 역할에 대해 거짓말로 일관했다.

 

이종찬은 2003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설립한 이 사무실에 대해 국제경제를 분석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했다. “국가정보원장으로 와서 보니 여러 정치 정보들은 많은데 경제 정보가 전달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정보기관의 역할이란 다가올 위기를 예측하고 통치권자에게 이를 사전에 보고하는 것이다는 어설픈 변명도 늘어놓았다.

▲ 김한정(왼쪽)·박지원(왼쪽 두 번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2019년 6월14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또한 이종찬은 1997~98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 58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IMF 사태가 온 이유도 사실 정보기관이 경제정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한 박사들을 불러와 대외협력보좌관실을 만들었다고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 그 사무실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은 김한정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것도 학부 때의 일이고 대학원에서는 국제정치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대외협력보좌관실은 국제경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곳이었다.

대외협력보좌관실의 또 다른 임무

앞서 언급했듯이 이 부서에는 또 다른 특별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2003 3월 월간조선에서 한 익명의 정부 관계자가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대외협력보좌관실의 설립 목적은 주변 4강에 대한 국제적인 인맥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특히 미국 쪽에 큰 비중을 뒀다면서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사를 섭외해서 한·미 관계를 원만하게 만드는 것이 그 조직의 임무였다고 설명했다.

 

가령 조지 부시 대통령이 텍사스 주지사 시절 부시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국내 S기업으로 하여금 텍사스주 현지에 지사를 세울 것을 요청한 적이 있는데, S기업은 실제 그곳에 지사를 만들었다. 또한 그에 의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해외에서 자주 거론될 수 있도록 홍보전략을 짜는 일도 이 사무실의 업무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는 김한정 실장이 주로 그 일을 담당했다고 덧붙였다.

김한정은 누구인가

김한정은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85 114, 13명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서울 미 상공회의소에 난입해 방화를 시도하다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 이로써 그는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훈장을 받은 것이다.

 

김한정은 한반도 동남부의 산업 중심지인 창원과 부산 인근의 시골 마을 출신이었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기에는 한반도 서남부 전라 지역의 항구 도시 목포 출신의 포퓰리스트 지도자인 김대중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경상도 지역 사람들은 김대중을 빨갱이(공산주의자) 또는 거짓말쟁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남부 지역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메시아로 여긴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신이 단순히 한 지역을 표상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전라권 인사가 아닌 경상도 출신을 영입하길 선호했다고 전해진다. 김한정의 경우가 대표적이고, 아태(亞太)민주지도자회의 이사인 김상우도 마찬가지였다.

 

김한정은 감옥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간의 해묵은 지역감정을 나름대로 잘 소화했는지 출소하자마자 김대중 평화민주당 대표의 공보비서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3 7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DJ는 처음에 내게 신문 스크랩을 시켰어요. 다른 일은 안 시키고 그 일을 6개월이나 시키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다음에는 DJ의 구술을 받아 적었어요. 연설문이나 논평을 받아 적은 거죠.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워드프로세서가 도입되면서 구술한 내용을 타이핑해서 재빨리 수정하고 보기 좋게 편집해 문서를 갖다 드렸더니 굉장히 신기해 하셨죠.”

 

4년간 동교동에서 공보비서관으로 일한 김한정의 임기는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보수 세력과 손잡은 김영삼에게 패하면서 끝이 났다.

 

[7] 국정원 들어온 김한정에… 이종찬 특별 배려

‘기획력이 뛰어나다’는 김한정의 DJ 띄우기 전략
‘햇볕정책’ 누구를 위한 것인가… 회의와 번민이 분노로

기획력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김한정

 

김한정은 1992년 대선 패배 후 뉴저지 주립대 럿거스(Rutgers)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다시 DJ와 함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하지만 1998년 초 그가 다시 동교동을 찾았을 때는 그사이 새로 영입된 두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가 파고들 공간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1998 5월 국가정보원에 자리를 잡았다. 학창 시절 좌파 활동을 했던 사람의 선택이라기엔 다소 의외의 행보였다. 그는 국정원에 입사하자마자 이종찬 원장으로부터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아파트 전세금조차 없는 그에게 이종찬은 특별히 국정원 안가 아파트에서 살 수 있도록 특혜를 베푼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매우 똑똑하고 기획력이 뛰어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때는 성질이 아주 급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국정원에서의 DJ 띄우기 전략

김한정은 국정원에 1년여 근무하면서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여러 특수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국정원 시절 그의 관심사 중 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을 분단시킨 비무장지대에서 세계적인 가수들이 공연하는 평화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또한 199798년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를 휩쓴 금융위기 속에서 DJ의 햇볕정책을 홍보하는 책자와 팸플릿을 발간하는 등 DJ를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이자 위대한 정치가로 세우는 데 집중했다.

 

그는 DJ를 띄울 목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가적 영웅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의 서울 방문을 위해 한동안 줄기차게 노력했지만 만델라가 너무 많은 초청비를 요구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기도 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에서의 기초 작업들

1999 5월 말, 국정원에서 물러난 김한정은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의 사무부총장이 되어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에 더욱 매진했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이 무렵 김한정은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DJ의 목에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걸어 주는 데 성공했고, 동티모르와의 관계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동티모르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그 작은 신생국가의 지도자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 2017년 6월14일 ‘6.15 남북공동선언의 의미와 과제’를 주제로 열린 김대중 포럼 토론회에 김한정(앞줄 왼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1999 1213, 김한정은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발탁되면서 문고리 권력이 된다. 그의 나이 36세 때의 일이다. 그가 일반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터라 그의 부속실장 임명은 많은 사람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희호 여사는 김한정을 가리켜 배앓이 없이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김한정의 부인 박정희를 며느리로 여긴다고도 했다. 김대중은 김한정을 무슨 일이든 맡길 수 있는 유능한 젊은이로 여겼다.

김한정과 DJ의 오랜 인연 나의 멘토 김대중

하지만 국정원에서 반년가량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이 일했던 김기삼 씨의 눈에 김한정은 아주 위험한 인물로 비쳤다. 김기삼 씨는 김한정이 국정원을 떠난 후에도 그의 활동을 지켜보았다. “김한정은 김대중의 그림자, 혹은 분신이 되기를 열망했다고 김기삼 씨는 회고했다. “그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일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김한정의 청와대 근무는 김대중과의 오랜 인연의 정점을 찍은 것이었다. 그는 1992년 대선 전 공보비서관으로 4, 1998~99년 국정원에서 1년여, 2000~2002년 청와대에서 2년여, 그리고 퇴임 후 DJ의 비서관으로 2년여 등 도합 10년여간을 김대중의 그림자가 되어 따라다녔다.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김한정은 자신의 저서 제목을 나의 멘토 김대중이라고 지었다. “그가 부속실장으로 일할 때 청와대에 출입하는 기자들조차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을 정도로 철저히 숨어서 일했다. 그저 몇 사람만 짐작 정도 했을 뿐이다고 김기삼 씨는 회고했다.

비밀공작의 핵심 조직인 대외협력보좌관실

국정원의 대외협력보좌관실은 DJ의 햇볕정책을 외신에 홍보하는 또 다른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NP프로젝트 팀원들은 홍보 전사로서 외신 특파원들의 호의적인 여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외신 기자들을 초청해 오찬 모임을 갖고 만찬을 대접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였다. 외신 기자들이 우호적인 기사를 쓰도록 브리핑해 주고 정서적으로 DJ를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외신 조율은 우리의 기본 업무였다. 가능한 한 극적인 사건을 많이 만들어서 외신이 계속 DJ 관련 뉴스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고 김기삼 씨는 회상했다.

대외협력보좌관실 외신 담당관이었던 김기삼 씨의 업무는 외국 언론을 상대로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정원 외신 대변인을 도와 외신 보도를 모니터링하고 외신 브리핑을 주선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다.

당시 외신 담당 대변인은 김영준이었다. 그는 런던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막 귀국한 인재였는데, 1998 8월 같이 학회 활동을 하던 라종일 차장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비밀팀에 합류했다. 그는 주한 외신 기자들에 대한 국정원의 모든 정책을 관장하고 조율하는 업무를 맡았다. 나종일에게 매일 외신의 주요 기사를 브리핑하는 것도 그의 일상 업무였다. 또한 외신 기자들에게 북한 관련 정보와 영상을 제공하거나 황장엽 같은 고위 탈북자와의 인터뷰를 주선해 주는 것도 그의 업무의 하나였다.

햇볕정책은 노벨상 사냥의 도구

 김기삼 씨는 국정원에서 김한정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 동료였지만 김한정이 노벨상 사냥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어깨 너머로 지켜보았을 뿐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김한정이 비밀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햇볕정책이 노벨상을 위한 수단이며, DJ가 그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국익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젊은 국정원 요원의 마음속에는 불안한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노벨상이 국제적 명성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과연 그렇게 막대한 자원과 시간·인력을 투입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문제는 햇볕정책이 우리의 혈육인 북한 주민의 절망적인 삶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북한의 독재자가 지배력과 통제력을 강화해 주민의 고통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게 문제였다.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지역과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이었다. 김기삼 씨의 회의와 번민은 차츰 분노로 바뀌어 갔다.

 

[8] 카터 방북이 불붙인 ‘YS 노벨평화상’ 추진

카터 ‘남북정상회담’ 선물 갖고 돌아왔지만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
YS ‘한국인 최초’노벨평화상 수상 야망… 권영민이 회고록서 밝혀

의전수석으로 발탁되었다가 낙마한 권영민

 

 1998 27일 김대중 정권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인수위) 김중권 비서실장은 청와대 수석 비서관 후보자 명단을 발표했다. 의전수석으로는 권영민 외교정책실장이 발탁됐다.

 

권영민은 1년 전인 1997년 노르웨이 대사 근무를 마치고 귀임하여 외무부 본부에서 노벨재단의 미카엘 슐만(Michael Sohlman) 사무총장의 방한 초청 문제에 전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김대중은 2주 후 그런 결정을 뒤집고 그를 낙마시켜 버렸다. 그 일은 인수위 시절의 작은 가십거리가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리다가 점차 잊혀졌다.

자네 출세했네

 그 후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은퇴한 전직 외교관 권영민은 2008 1210 자네 출세했네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권영민은 최규하 국무총리 시절 그의 비서관으로 일했는데, 당시 최 총리가 자네 출세했네라고 농담 삼아 건넨 말을 책 제목으로 정했다고 한다. 책의 부제목도 내가 본 최규하 대통령과 홍기 여사라고 지었다.

 

그는 그 회고록에서 김대중 정권 인수위 의전수석 지명과 낙마와 관련한 전후 사정을 아주 상세하게 밝혔다. 그런데, 그의 회고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1994 6월 애틀랜타 총영사로 일하던 시절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과정에서 그가 한 역할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당시 미국과 북한 간의 1차 핵 위기로 한반도에서는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정밀타격을 심각하게 고려했고 이에 대해 김영삼(YS) 대통령은 결사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지미 카터는 미·북 간의 긴장을 완화할 요량으로 자신의 방북을 추진했다. 카터는 실제로 그해 6월 중순 방북길에 올라 평양에서 김일성과 회담했다.

카터의 방북

권영민은 회고록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회고록에 의하면권영민 애틀랜타 총영사는 미·북 간의 긴장이 정점에 이르러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갔던 612, 카터가 방북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을 처음으로 전해 들었다. 그는 즉시 애틀랜타 소재 카터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매리언 크릭모어 2(Marion Creekmore Jr.)에게 이에 관해 문의했다. 크릭모어는 카터의 최측근으로 후에 위기의 순간(A Moment of Crisis)’이란 책을 펴내 이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다.

 

권영민의 전화를 받은 크릭모어는 나도 잘 모른다. 확인해 줄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권영민이 크릭모어의 비협조와 무례한 태도에 대해 분을 삭이고 있을 때 이번에는 크릭모어가 권영민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크릭모어는 카터의 방북길에 한국 대통령과의 면담과 관계 장관들의 브리핑을 주문했다. 카터가 돌아오는 길에는 한승수 주미 대사와의 만남도 부탁했다. 특히 카터 측은 판문점에서 육로로 북한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협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카터의 방북은 노벨상을 받기 위한 수단

당시 권영민은 카터가 한국을 동맹국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인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권영민의 눈에는 카터가 북핵을 둘러싼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극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스스로를 평화의 중재자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노벨평화상을 타려고 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카터 측과 얘기해 본 결과 카터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 2008년 12월10일 전직 외교관 권영민은 ‘자네 출세했네’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내가 본 최규하 대통령과 홍기 여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최규하 국무총리 시절 그의 비서관으로 일할 당시 최 총리가 “자네 출세했네”라고 농담 삼아 건넨 말을 그대로 제목으로 썼다.

 

이런 와중에 한국 정부는 1994 613일 북한이 핵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게 되자 카터 측의 요구를 서둘러 수용했다.

 

카터 일행은 615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카터와 김일성은 북한의 NPT 복귀 및 이 경우 미국·일본·한국 등이 북한의 경수로 건설을 위한 금융지원을 제공하는 방안 등에 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고 한다.

도로아미타불이 된 카터의 깜짝 선물

 그런데 카터는 618일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을 들고 왔다. 김일성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3주 후인 78일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역사적인 사건이 될 뻔했던 정상회담은 수포로 돌아갔고, 남북관계는 잠시 들떴다가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소동을 겪으면서 김영삼(YS)은 자신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룬 지도자로 자리매김하여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게 됐다. 이런 사정으로 권영민은 팔자에도 없는 YS 노벨상 사냥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동아일보가 연재한 비화 문민정부

 YS 정권이 끝난 후 동아일보는 비화(祕話) 문민정부라는 제목의 심층취재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중에서 특히 1998 727일자 기사엔 YS 시절의 노벨평화상 추진 내용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기사에 따르면 문민정부 일각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헌상하기 위한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기사는 오슬로 현장에서 그 일을 담당했던 실무자를 미스터 C’라는 익명으로 처리해 보도했다. 그의 실명은 최종흡이다. 또한 기사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본부에서 이 공작을 총지휘한 인물은 정영철 해외공작국장이었다.

 

최종흡은 당시 노르웨이에 파견되었던 안기부 요원으로 노련하고 민완한 공작관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오슬로대학에서 2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고 이미 현지에서 3년간 근무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협조자와 네크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노벨상 공작에 특화된 최적임자였다. 훗날 그는 이명박정부에서 국정원 3차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재임 중 DJ 비자금을 추적했다는 이유로 문재인정부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노르웨이 대사직을 놓고 대립한 외무부와 안기부

동아일보는 “93 10월 노르웨이 대사관에 부임한 C씨는 김 대통령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노벨평화상 작업은 동료 외교관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비밀리에 이뤄졌다. C씨는 노벨평화상 로비와 관련해 외무부에서 파견된 외교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외무부의 한 고위 관리는 안기부 파견관이 노르웨이 주재 C대사가 노벨평화상과 관련한 활동을 소홀히 한다는 정보 보고를 자주 한다는 얘기가 외무부 내에파다했다고도 전했다. 기사에서 ‘C대사라는 익명으로 등장한 이는 최대화 주 노르웨이 대사다.

 

동아일보는 최 대사의 인사 문제를 놓고 안기부와 외무부 간에 벌어졌던 갈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최대화를 당장 잘라야 한다는 안기부의 의견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외무부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고 한다. 안기부는 정보 판단력과 로비력이 뛰어난 안기부 간부 출신을 노르웨이 대사로 보내야 로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외무부는 대사를 조기에 바꾸면 역효과가 난다며 대사 교체를 거부하고 버텼다.

 

하지만 대사를 갑자기 바꾸는 것이 YS의 노벨상 공작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외무부의 주장은 끝내 통하지 않았다.

 

[9] YS맨 권영민의 ‘DJ 노벨상’ 저지 공작

김영삼 위해 노르웨이서 발 벗고 뛴 權 ‘김대중 험담’ 역풍 시달려
DJ가 의선수석 맡기려다 취소… 회고록에 ‘인생은 한 조각 구름’

제네바 합의로 한숨 돌린 YS 정부

 

1994 10, 북한이 NPT 탈퇴를 보류하고 미국과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다. 이로써 한숨 돌릴 수 있는 상황이 되자 YS 정부는 다시 노르웨이 대사 교체를 시도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멈추는 대신 미국이 경수로 2기 건설 및 중유 제공을 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YS의 노벨평화상을 추진할 여건이 마련됐다고 판단하고 노르웨이 대사 교체를 단행한 것이다.

 

결국 최대화 대사는 1995 1월 서울로 소환됐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YS 노벨상을 추진하고 노르웨이 대사 교체를 주장하던 인사들이 제네바 기본 합의로 한반도 긴장 완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보고 로비를 본격화할 적기로 판단했다. ()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사의 임기를 3년으로 하는 게 외교 관행인데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대사를 소환하자 노르웨이 정부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해서인지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한편 이 기사에는 엉뚱하게도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언급이 등장한다. 노르웨이 대사 소환이 월드컵 대회 유치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기사에서 정몽준은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노르웨이 집행위원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대사 소환을 이유로 오히려 항의를 했어요. 노르웨이 정부는 대사 교체에 대해 외교적으로 모욕당했다는 분위기였습니다. 한 표가 아쉬운 마당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고 말했다.

YS의 마틴 루터 킹 비폭력 평화상 수상과 권영민

 조기 소환된 최대화를 대신해 1995 2월 노르웨이 대사로 발령난 사람이 바로 권영민이었다. 그는 안기부와 외무부 간의 물밑 암투로 인해 이를테면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권영민은 애틀랜타 총영사 시절 마틴 루터 킹 인권재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YS 마틴 루터 킹 비폭력 평화상을 수상하는 데 크게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YS는 이 상의 열여덟 번째 주인공이었다.

▲ 김영삼(오른쪽) 대통령이 코레타 킹(왼쪽 두 번째·미국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미망인)으로부터 비폭력 평화상을 수여받았다.

 

YS에 앞서 그 상을 탔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YS가 상을 받고 얼마나 기뻐했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투(Tutu) 주교·고르바초프 전 소련공산당 서기장·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등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그들 중 몇 명은 이미 노벨평화상도 탔거나 앞으로 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YS가 권영민을 노르웨이 대사로 낙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회고록을 보면 권영민은 당시 상황을 조금은 다르게 회상하고 있다.

노르웨이 대사 교체의 진짜 이유

한편으로는 내가 왜 노르웨이 대사로 발령이 났는지 궁금했다. 외교부 차관과 공로명 장관을 차례로 만나 그 배경을 물었으나 신통한 답을 얻지 못했다. () 나에게 왜 노르웨이 대사직을 맡겼을까. 셀 수도 없이 자문해 보았지만 해답을 찾을 수 없어서 노르웨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하나하나 챙겨 보았다. 그러던 중 뇌리에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노벨평화상이었다.”

 

이어서 그는 당시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관장 회의가 끝난 후 지인들에게 부임 인사를 다니다가 내가 노르웨이로 가게 된 배경을 소문으로 들을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노벨평화상에 관심이 많으며 노르웨이 현지에서 이에 대한 동향을 알아보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권영민의 이해하기 어려운 기억회로는 직업 외교관의 무해한 자기방어 쯤으로 봐 줘도 무방할 것 같다. 권영민이 정말 자신을 노르웨이 대사로 임명한 이유를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가 노르웨이 대사로 발령 날 이유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권영민은 회고록에서 대사로서 업무의 무게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고 밝혔다. 이 같은 언급 또한 물론 자기변명이다. 그는 이미 카터의 방북을 통해 노벨상 수상에 대한 카터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경험한 바 있었고, 그 덕분에 한국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아이디어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확실해진 것은 노르웨이에서 그가 수행해야 할 핵심 임무가 YS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권영민이 노르웨이로 부임하기 전 한 선배 대사가 “3김 중 한 명인 김대중 씨가 노르웨이가 수여하는 노벨평화상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선배는 이 문제는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이 말을 듣고 권영민은 자신이 독일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DJ와 같은 지역 출신인 H의원이 찾아와 김대중을 위해 로비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권영민의 김대중 노벨상 수상 저지 활동

 노르웨이 대사로 3년 가까이 재직하며 권영민은 김영삼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공작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달리 말하면 그가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한 핵심 인물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1998 2 DJ의 최대 라이벌인 YS를 위해 그런 일을 한 인물을 의전수석으로 임명하자 DJ의 측근 참모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뇌리에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YS가 정주영의 제3당 돌풍에도 DJ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권영민은 YS 정권에서 노르웨이 대사로 재직하며 “DJ는 실제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도자가 아니다” “DJ는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등 DJ를 험담하고 다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입장이 난처해진 권영민은 “YS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로비를 하지 않았으며 단지 대사로서 노벨상 후보에 필요한 조언을 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라고 항변하면서 “DJ와 관련해 어떠한 나쁜 얘기도 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자신은 그저 대사로서 YS의 노벨상 수상 기회가 있는지 알아보는 정도로 활동했으며, YS의 마틴 루터 킹 평화상 수상에도 관여한 바 없다고 못 박았다.

권영민의 회고록에 언급된 DJ의 노벨상 공작

흥미롭게도 권영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불법도청 폭로 김기삼이 밝히는 DJ의 노벨상 공작이라는 소제목으로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에 관한 김기삼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그는 허구인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이라는 애매한 단서를 달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그는 김기삼의 주장 내용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고 비판이나 주석도 달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고뇌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권영민의 회고록 속에는 노르웨이의 슬픔과 노벨평화상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인생이란 한 조각의 구름인 것을이라는 선문답 같은 소제목이 이어진다. 여기서 그는 김대중 정권에서 의전수석에 내정됐다가 낙마하면서 겪었던 고초와 개인적인 소회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외교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한 점 오점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그가 노벨상을 추구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안타깝게도 이 작은 소제목에 녹아 있는 것만 같다.

 

[10] 노르웨이에 DJ 알리기… 양세훈 대사의 물밑 작업

현지 호평에 고무… “남북관계 돌파구 만들면 승산 있어” 보고
청와대와 ‘직거래’로 “투자유치 소홀” 질책 등 외무부와 갈등

권영민에 이어 양세훈이 노르웨이 대사로

 

 1997 9 권영민에 이어 양세훈 호놀룰루 총영사가 노르웨이 대사로 발령받았다. 당시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였다. 지상천국과 같은 하와이에서 꿈같은 외교관 생활 3년을 보내고 난 후 갑자기 불어닥친 외환위기의 한파 속에서 춥고 음울한 오슬로로 떠나게 되었으니 그의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오슬로에 도착하는 그날부터 본국의 경제위기에 대처하느라 동분서주 뛰어다녀야 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양세훈도 그의 전임자처럼 퇴임 후 책을 냈다. 그의 책은 권영민의 책보다 3년 앞선 2005년에 나왔다. ‘장춘에서 오슬로까지라는 제목에 나타나 있듯이 이 책은 자서전의 성격이 강하다. 장춘은 자신이 태어난 만주 지역의 가장 큰 도시 이름이고, 오슬로는 자신이 외교관으로서의 인생을 마무리한 도시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는 자서전이라는 형태를 피하고 의도적으로 자전적 소설이란 형식을 빌었다. 책에 담긴 내용이 불러올지 모를 정치적·사법적 파장을 차단하려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나중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고 무슨 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담백하게 잘 쓴 책이다.

양세훈의 자서전 장춘에서 오슬로까지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 역시 책의 맨 마지막 장인 제6 노벨평화상이다. 6부는 분량으로만 본다면 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크게 다르다. 어쩌면 양세훈도 권영민과 마찬가지로 김대중(DJ)의 노벨평화상과 관련한 자신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 책에 의하면 양세훈은 1997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올림픽조직위원회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내 온 왕동운 사장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왕 사장은 그에게 자기 회사 부사장의 누이가 새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하나인 이우정이라는 사람인데 공식적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 양세훈 전 노르웨이 대사가 외교관으로 체험한 일제 패망 이후 21세기까지의 한국사 회고록 ‘장춘에서 오슬로까지’ 표지.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 NIS Whistleblower

남북관계 물꼬 터야 노벨평화상이 온다

양세훈은 부임 인사차 노르웨이 노벨위원회(평화상) 위원장과 사무국장을 예방한 자리에서 오래전부터 DJ가 매년 노벨상의 유력한 후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썼다. 노르웨이 대사로 부임하면서 이런 정도의 정보는 사전에 파악했을 터이지만 아무튼 그는 책에서 그렇게 밝혔다. 그는 또한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서는 인권 투쟁만으로는 부족하고, 남북관계에 결정적 물꼬를 터야 한다고 간파했다”고 했다.

 

다시 말해 남북관계에 어떤 결정적인 돌파구를 만들어 내야 노벨평화상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양세훈에 의하면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정부 부처뿐만 아니라

 

 국회·언론계·학계 등 어디를 가든 DJ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었다. 노벨위원회 회원 중에도 개인적으로 DJ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DJ 알리기 양세훈의 노력

양세훈은 DJ의 노벨상 수상에 도움이 될 환경 조성을 위한 아이디어들을 정리해서 왕동운에게 보냈다. 곧이어 왕 사장에게서 이우정에게 자료를 전했다는 전갈이 왔다. 양세훈이 보낸 보고서의 요점은 “DJ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양세훈은 새 대통령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을 문서로 만들어 노르웨이 각계와 노벨위원회에 뿌렸다. 물론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DJ의 생애를 기록한 문서도 함께 보냈다. 그는 또한 텔레비전의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DJ가 한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인권침해에 맞서 싸워 온 영웅이라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1997 12월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다녀온 양세훈은 대사관 직원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오늘 시상식에 가 보니 그 많은 그간의 수상자 중에서 한국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 여기 와서 파악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에 근접해 있는 건 대통령뿐입니다. 오랫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정치와는 무관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만, 굳이 밝히자면 나는 지금의 대통령과 이념을 달리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대북 정책은 나라나 국민 입장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래도 그분이 노벨상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람이 받는다면 나라의 영광이요, 민족의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 나는 여기 있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내 뜻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청와대에 보낸 양세훈의 보고서 논란

 이듬해인 1998, 서울에서 공관장 회의가 420일부터 닷새간 열렸다. 양세훈은 공관장 회의를 마친 후 왕 사장의 안내로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이우정을 만났다. 이우정은 그에게 지난번 보내 주신 문서는 대통령께 직접 드렸습니다. 자세히 읽어 내려가시다가 가끔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라고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는 그에게 이우정은 그런데 얼마 전 외교부(외교통상부) 장관과 한차를 타고 가다가 잠깐 그 일을 언급했더니 장관이 대사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순간 양세훈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을 알게 되었다. 현지 대사가 본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청와대에 보고를 했으니 본부로서는 당연히 불쾌했을 법했다.

 

며칠 뒤 선준영 외교부 차관을 만났을 때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선준영은 문서를 들여다보더니 여기 보면 노벨위원회 위원을 방한 초청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들이 한국에 오겠습니까? 현실성 없는 방안은 만들지도 마세요라며 트집을 잡았다.

이번에는 박태영 산자부 장관과의 불화

양세훈은 본부로부터 핀잔을 듣고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오슬로로 돌아왔다. 하지만 노벨상을 위한 활동은 계속했다. 노르웨이의 각계에 김대중 대통령을 알리는 작업을 더욱 열심히 한 것이다. 하지만 한번 꼬이기 시작한 일은 그 후에도 계속 꼬이기만 했다.

 

1998 628, 박태영 산업자원부(산자부) 장관이 투자유치단을 이끌고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양세훈은 현지 대사로서 장관의 투자유치 활동에 적극 협조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과 장관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박 장관과의 관계가 냉랭해져 버렸다. 박태영은 귀국한 후 청와대에 좋지 않은 보고를 했다. 이어서 본부로부터 현지 대사가 투자유치에 별 의욕을 보이지 않은 데 대해 해명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PD 버마의 공동의장 김상우 의원도 노르웨이로

그 후에도 양세훈에게는 불운이 계속됐다. 1998 12, 이번에는 여당 국회의원인 김상우가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당시엔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PD 버마라는 단체의 공동의장이기도 했다.

 

김상우는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존 흄(John Hume)과 데이빗 트림블(David Trimble)의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슬로를 방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시상식 참석보다는 DJ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 탐색 차원의 현장 점검을 위한 방문이었다. 아마도 틀림 없이 ‘PD 버마를 창설한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를 만나는 것도 일정에 포함되었을 터였다.

 

[11] 김한정의 표적이 된 스톨셋 주교

수난의 와중 양 대사에 이종찬 국정원장의 격려 편지
스톨셋 노벨 위원 방한 위해 김한정이 직접 오슬로로

패거리 정치 속 양 대사의 수난

 

김상우가 오슬로에 도착하자 양세훈 대사는 그가 대통령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영접했다. 그에게 ‘월드뷰 인권재단’의 에릭 슐하임 이사장과 루네 헤르스빅 사무총장을 소개하기도 했고, 얀 에글란드 전 외무차관 등 주요 인사들과의 만남도 주선했다. 하지만 양세훈은 “공항에서 서로 웃는 얼굴로 그를 배웅했는데 그 역시 나를 좋지 않게 보고했다는 전갈을 왕 사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양세훈은 DJ의 처조카 이영작 박사로 인해 또 한 번 곤욕을 치렀다. 1999 2, 오슬로를 방문한 이영작은 다짜고짜 문서를 내놓으라 DJ 노벨상 공작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요구했다. 양세훈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에게 문서들을 보여 줬는데 이것이 또다시 큰 문제가 됐다. 왕 사장으로부터 그 인척에게는 문서 같은 것을 주면 안 된다는 게 이우정 여사의 전언이라는 맥 빠지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양세훈은 책에서 끼리끼리 짜고 도는 패거리 정치에는 도리가 없었다” “패거리 안에서도 두목과 가까워지려고 아귀다툼하고 줄을 잘 서려고 야단들이었다며 통탄했다.

 

이종찬 원장의 격려 편지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대사관에 같이 근무하던 박노용 국정원 파견관은 양세훈의 노고를 높이 사 주었다. 양 대사는 “대사관 정보파견관이 서울의 상관에게 나의 텔레비전 인터뷰를 수록한 비디오와 그간의 활동 상황을 보고했는지 이종찬 원장에게서 격려 편지가 왔다고 했다.

 
 

양 대사는 노르웨이 민영 텔레비전 방송사인 오메가TV의 한반도 관련 특집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햇볕정책의 당위성과 그 결과로 나타난 한반도의 해빙 무드를 한국 사회의 변화와 아울러 설명한 적이 있었다.

사실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나라에서 극동아시아 한 귀퉁이의 한반도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설령 제작한다고 해도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 어려워 당연히 시청률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르웨이의 민영 방송이 한국의 햇볕정책을 특집프로그램으로 편성한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서울의 국정홍보처에선 노르웨이에서 만든 이 프로그램을 재구성해서 품격과 비전을 갖춘 지도자 김대중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좋은 소재로 활용했다.

 

양 대사의 스톨셋 방한 추진

한편 1998 12월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끝난 직후 양세훈은 그동안 접촉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두 명의 노벨 위원을 각기 만나 방한을 권유했다. 양세훈은 그들이 남북관계가 발전된 현장을 직접 가서 보게 하고자 노력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고 소 떼가 대거 휴전선을 넘어갔다는 등 한반도의 변화된 상황을 거론하면서 남북한 관계의 진전을 직접 가서 보면 유익한 정보가 되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그들의 마음을 떠보았다.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1991년부터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프란시스 세예르스테드였다. 그는 이전에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만하다는 생각을 밝힌 적이 있었다. 1992 9월 방한하여 판문점을 방문했고 고려대에서 열린 강연에서 한반도의 갈등 상황 극복에 기여하는 인물 또는 단체가 나오길 바란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했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방문을 주저하는 빛이 역력했다.

 
 

또 다른 한 명은 군나르 요한 스톨셋(Stẚlsett) 오슬로 주교였다. 양세훈은 그가 미국을 여행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가는 길에 서울에 들를 것을 권했다. 그러자 그는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선뜻 동의했다. 양세훈으로서는 이제까지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는 곧바로 국정원 파견관 박노용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박노용은 비밀 팩스로 김한정에게 보고했다. 곧이어 박노용은 서울에서 대통령의 또 다른 측근 김한정이 온다고 알려 왔다.

▲ 노벨위원회 스톨셋(Stẚlsett) 위원 부부의 방한 비용과 관련, 김한정이 지불한 항공료 지급 청구서.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 NIS Whistleblower

 

DJ 측근 김한정도 오슬로로

양 대사는 책에서 김한정의 오슬로 방문이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1999 1월쯤이었을 것이다. 김한정은 스톨셋이 서울을 방문할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노르웨이 현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김한정으로서는 임무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다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한정은 노벨상 공작을 위해서는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내에 협조자,  빨대를 꽂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멤버들은 당연히 최우선 공작 대상이었고, 그중에서도 스톨셋은 단연 최고의 목표였다. 그가 위원회 내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데다 무엇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DJ에 대해 특별한 애정과 호의를 보여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한정, 스톨셋 방한 추진

김한정은 오슬로에서 양 대사를 만나 만드신 문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환경 조성에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앞으로 같이 일해 보십시다. 한번 와서 대사님도 뵙고, 현지 사정에 관해서도 직접 들어 보려고 이렇게 왔습니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김한정은 또한 대사님이 여기 오래 계시도록 건의하겠습니다고도 덧붙였다.

 

김한정은 스톨셋에게 그럴듯한 서울 방문 목적을 만들어 줘야 했다. 1999 23, 김한정은 한상진 정신문화연구원장 명의로 종교와 인권이라는 비공식 학회에 스톨셋 부부를 정식으로 초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초청장에선 스톨셋에게 한국과 노르웨이 사이의 머나먼 거리 만큼이나 흔치 않은 기회임을 고려하시어 당초 일정보다 며칠 더 체류해 주시기 바랍니다며 작업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도록 미끼를 던졌다.

급조된 비공식 학회가 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김한정은 곧이어 좀 더 그럴싸한 초청장을 마련했다. 때마침 1999 227·28일 정부와 월드뱅크 주최로 롯데호텔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국제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회의는 DJ 취임 1주년에 맞춰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업적을 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김한정은 이 행사 일정 가운데 세계 정치지도자 원탁회의에 스톨셋을 특별 패널로 참석시켰다. 패널 참석 요청은 월드뱅크가 대신했다.

롯데호텔 원탁회의

원탁회의에는 DJ와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총재 외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1987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 전 코스타리카 대통령·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펠리페 곤잘레스 전 스페인 총리·폴 쉴뤼테르 전 덴마크 총리 등 다섯 명의 전임 국가 수반이 참석했다.

이 토론회에서 DJ는 민주주의를 하지 않으면 경제는 발전할 수는 있지만 부정부패와 관치경제가 심화된다. 시장경제 없는 민주주의는 견실하지 못하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개발 업적을 은근히 깎아내렸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지론이었던 대중경제론을 버리고 시장경제론자로 은근슬쩍 변신하는 탈색성 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12] DJ 신임 한 몸에… ‘문고리 권력’ 된 김한정

국정원→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어 부속실장 영전
김대중과 독대… 동티모르·북유럽 누비며 총력 로비

스톨셋 밀착 수행한 김한정

 

1999 22533일 김한정은 극비리에 스톨셋의 모든 방한 일정을 밀착 수행했다. 그는 스톨셋 부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톨셋 부부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더블 도어와 국빈용 VIP 라운지에 모신 것은 물론이다. 국제회의를 마친 후에는 김한정과 한상진이 주교 부부를 모시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유채꽃 만발한 제주 들판과 아스라한 한라산을 배경으로 그들의 노벨상 열망은 이제 막 움터 오르기 시작했다.

 
 

주교의 방한 일정에는 당연히 김대중 대통령과의 비공식 면담도 포함되었다. 극진한 대접을 받고 노르웨이로 돌아간 스톨셋은 먼저 양세훈 대사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한 스톨셋은 1999 312일 김한정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특별한 환대와 봉사에 감사를 표하면서 이미 국제회의에서 받은 자료들은 공유했으며 여러 행사에 보고하고 언급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영부인을 만나 환담한 것이 이번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고 썼다. 이 편지는 협조자 포섭에 성공했다는 증표가 됐다. 드디어 빨대를 꽂은 것이다.

임기 중 소환된 양 대사

한편 양세훈은 3년의 대사 임기가 반쯤 지났을 즈음, 그리고 스톨셋 주교의 방한을 주선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게 외교통상부(외교부) 본부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았다. 당시 외교부는 갑작스럽게 재외공관 대사의 정년 단축을 예정보다 앞당겨 실시했다.

임기 도중에 오슬로를 떠나게 된 양세훈은 이임식에서 평소에 품고 있던 불만을 쏟아 냈다.

지금 대통령은 항간의 소문처럼 과거 야당 시절 북한 측 지원을 받았기 때문인지, 평소의 소신 때문인지 또는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선지 알 수 없지만, 북한에 너무나 유화적입니다. 머지않아 이런 정책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끝으로 양세훈은 36년 외교관 인생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게 아주 마지막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한 가지 임무가 남아 있었다. 대사직을 그만둔 지 두 달쯤 지난 1999년 늦여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양세훈은 국정원의 어느 간부로부터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았다. 짐작건대 이종찬 국정원장이었을 것이다.

▲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내 김대중 홀에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노벨평화상 증서 및 메달의 복제품 등 김대중(DJ) 대통령의 생애와 흔적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외교관 인생의 마지막 임무

 그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놀랐지만 그 이유를 듣고는 더더욱 놀랐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스톨셋 주교를 만나 양 대사가 하던 역할을 김한정이 대신할 것이라는 점을 알리는 일이었다.

 

 

국정원 간부는 이러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노르웨이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치적인 오해를 원치 않았던 양세훈은 이미 자리를 떠난 마당에 그런 일로 다시 노르웨이에 간다는 게 부자연스럽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들의 완강한 요청을 끝내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그는 마무리 작업을 위해 이종찬·김한정과 함께 다시 노르웨이로 갔다.

 
 

만찬 자리에서 양세훈은 스톨셋 주교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넌지시 물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내부의 움직임을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눈치 빠른 스톨셋은 위원회는 항상 추천받은 후보자들을 객관적으로 검토합니다. 객관적 사항에서 위원들의 동의를 얻으면 지명되는 거지요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했다.

 
 

그러면서 스톨셋은 특별히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귀국의 사정은 점점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할 것으로 믿습니다 팁을 줬다. 밥값’을 한 셈이다.

 
 

양세훈은 주교에게 나는 이미 퇴직하고 야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앞으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청년에게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자주 연락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고 부탁했다. 양세훈은 그것이 자신의 외교관 인생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면서 그 둘 사이의 인연을 맺어 주었다. 이른바 접촉선 인수인계를 마친 것이다.

노벨상 공작 본부의 갑작스러운 변고

양세훈이 은퇴하고 난 후 노르웨이의 노벨상 공작 거점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새로 부임한 박경태 대사는 직업 외교관답게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히 임하려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그는 부임 초기에는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되었던지 외교관이 노벨상 공작과 같은 일에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가 본부로부터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노르웨이 공작 기지의 분위기가 변한 것은 이러한 갑작스러운 공관장 교체보다 그즈음 서울의 노벨상 공작 본부에서 벌어진 예기치 못한 변고 때문이었다. 1999 522일 일요일, 이종찬이 골프장에서 운동 중에 전격 경질 통보를 받은 것이다. 그는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청와대에 들어가 새로 임명될 국정원 간부의 인사안에 대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김홍일과 권노갑 등 DJ의 핵심 측근들은 이종찬이 차기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종찬이 국정원 내에 자기 사람을 심는다고 판단해 그를 제거한 것이다. 물론 거기엔 DJ의 추인이 있었던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새 국정원장 천용택의 함량 미달 행보

 새로 국정원장으로 부임한 천용택은 노벨상 공작을 전면 중단시키고 대외협력보좌관실의 업무도 전면 중지시켰다. 그는 공작 담당관 김한정도 즉시 국정원에서 내쫓았다. 그해 5월 말 토요일 오후, 원장실에 급히 불려갔다 돌아온 김한정은 부랴부랴 책상을 정리하고 황급하게 국정원을 떠났다.

 
 

천용택은 그 일은 국정원이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니 바깥에 나가서 하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애초에 위험한 일인 줄 알았기 때문에 국정원에서 한 것이 아니었던가. 천용택은 국정원장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턱없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벨상 프로젝트 자체가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국정원에서 진행하지 않았을 뿐, 프로젝트 자체는 오히려 훨씬 더 은밀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변함없는 김한정의 활약

국정원에서 잘린 김한정은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사무부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거기서 노벨상 프로젝트에 더욱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해 6월 말,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마이클 잭슨 공연을 실질적으로 뒤에서 총지휘했다. 그리고 7월 초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DJ에게 자유의 메달을 안겼다.

 

 

김한정은 1999년 하반기에 동티모르의 열대 정글에서부터 북유럽의 얼음 바다까지 전 세계를 두루 누볐다. 그는 국정원 재직 시 발급받은 관용 여권을 반납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며 이 나라들을 여행했다. 당연히 불법이었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그는 라모스 호르타와 함께 동티모르에 들어가 동티모르 지원 방안을 의논했다. 당시 그는 대한민국 군용기를 이용해 거의 매달 동티모르를 방문했다고 한다. 노르웨이와 스웨덴도 여러 번 들락거렸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99 8월 말, 이종찬과 함께 노르웨이로 날아가 스톨셋 주교의 인수인계를 마쳤다. 또한 DJ의 책 감옥에서 대통령까지 출판기념회 직후 스웨덴 스톡홀름에도 들렀다.

 

DJ의 부름을 받은 김한정

 

그해 말인 1999 1213, 그동안의 노고를 인정받아 그는 드디어 DJ의 부름을 받았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제1부속실장 자리로 영전한 것이다. 대통령에게 들고 나는 모든 사람과 정보를 통제하는 이른바 문고리 권력을 잡은 것이다.

 

 

이로써 김한정은 이제 DJ와 얼굴을 맞대고 상의하면서 노벨상 프로젝트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순간부터 DJ의 노벨상 프로젝트는 국정원에서 청와대로 그 지휘부를 옮겨 최우선 국가적 사업이 되었다. 새천년의 희망과 함께 노벨상의 영광에 한 걸음 성큼 다가선 것이었다.

 
 

[13] DJ 후계 노린 이종찬… ‘노벨상 공작’ 올인

김한정과 스웨덴판 DJ 옥중수기 출간 극비리에 진행
현지 파견관 이병춘이 귀임까지 연장… 특명 사업 챙겨

이종찬의 야망을 실현해 줄 비밀 병기

 

앞서 설명한 대로 1998 8, 이종찬은 국정원 내 자신의 비서실 직속으로 대외협력보좌관실이라는 비밀팀을 신설하고 이 조직을 이용해 노벨상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했다. 노벨상이야말로 김대중(DJ)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받을 수 있는 비밀 병기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비밀 병기의 핵심 조커 DJ의 공보비서 출신인 김한정을 선택했다. 이종찬은 설훈의 조카인 김한정을 배기선을 통해 소개받았다고 한다.

 

 

대외협력보좌관실이 본격 가동될 무렵, 대한민국의 시급한 과제는 국제사회에서 땅에 떨어진 국가 신인도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한국은 1997년 말 발생한 외환 부족 사태로 국가 부도 직전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580억 달러에 달하는 긴급 차관을 지원받았지만 이 미증유의 경제위기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대미문의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섰다. 그중에서도 상징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는데 무려 350만 명이 동참하여 227(t), 금액으로는 22억 달러에 달하는 금을 모았다.

국제사회에 DJ 알리기

애초부터 노벨상 공작 핵심 요원들은 DJ의 노벨상 수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 소재 개발에 몰두했다. 무엇보다 새로 선출된 한국의 대통령이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을 위해 열렬히 싸워 온 인물이라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중점을 뒀다.

 

특히 그들은 남북한의 화해를 위한 DJ의 노력을 국제사회에 널리 홍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김한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한정이 국정원에서 노벨상 공작을 진행하는 것이 적절한가의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에서 일하든 그에게는 DJ에게 노벨상을 안기는 것이 절대적인 지상과제였다.

 
 

김한정의 머릿속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DJ를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있을까 하는 아이디어로 가득했다. 그는 비무장지대(DMZ)에서 평화 음악 콘서트·평화 조각 미술 전시회를 개최한다든가 혹은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평화 콘서트를 개최한다든가 하는 등 문화 예술을 통한 DJ의 평화 어젠다를 띄우기 위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추진했다. 심지어는 세계적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 행사도 비록 시작은 최규선이 한 것이지만 결국에는 김한정이 비밀리에 개입하여 진행한 공작의 일환이었다.

스웨덴어판 DJ의 옥중수기

그중에서도 김한정이 특히 신경을 쓴 사업이 하나 있었다. 바로 DJ의 옥중수기를 현지어로 번역하여 발간하는 작업이었다. 사실 이 사업은 애초부터 이종찬과 김한정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은밀히 추진한 노벨상 프로젝트의 최우선 과제 중의 하나였다.

 
 

김한정은 1998년 여름, 노벨상 공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때부터 DJ의 옥중일기 등 여러 저서를 외국의 독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국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극비리에 진행했다.

 

▲ 2020년 7월27일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인사청문회에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에게 월간조선 ‘국정원 DJ 비자금 의혹 보고서와 박지원’이란 기사와 관련해 질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월간조선 2004 10월호 기사

월간조선 2004 10월호에 실린 ‘2년간의 추적,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 로비와 국정원의 역할이란 제하의 기사에는 김한정의 이와 관련한 활동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월간지는 김한정이 1998 5월부터 이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월간조선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김한정은 이 작업을 위해 이종찬 국정원장의 편지를 소지하고 스웨덴을 방문하여 DJ의 영어판 옥중서신을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스톡홀름대 루디엔 교수가 연구소장으로 있는 아태평화연구소 이름으로 1999 8 감옥에서 대통령까지라는 책을 4000부 발간했다. 월간조선엔 원고를 번역한 사람이 스웨덴 문학가 구테르겐이라고 소개돼 있다.

두 건의 증거 서류

이 기사에서 월간조선은 놀랍게도 두 건의 증거 서류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1998 127 DJ가 자필 서명한 영문 편지인데, 이 편지엔 DJ가 스웨덴 교포 최병은에게 옥중서신 등 자신의 저서를 번역 출간하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다른 하나는 1999 86일 최병은이 한글로 쓴 자필 영수증인데, 당일 수령한 옥중수기 번역료 잔금 195600크로나를 포함해 총 35만 크로나를 번역과 편집 비용으로 수령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영수증은 총 35만 크로나 가운데 한스 비(Hans B)와 군나르 비(Gunnar B)에게 각각 10만 크로나씩을 지불했다고도 밝히고 있다. 월간조선의 기사엔 이 출판 작업의 총경비가 145000달러( 17400만 원)라고 되어 있다.

 
 

기사에 나온 한스 비는 한스 베르그렌(Hans Berggren)이고, ‘군나르 비는 조병화와 구상의 영어 시집을 스웨덴어로 번역한 적이 있는 군나르 베르그스토롬(Gunnar Bergstrom)이다.

 
 

이 기사는 베르그렌을 구테르겐, 로디엔을 루디엔, 그리고 아태연구소를 아태평화연구소라고 표기하는 등 사소한 오류가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정확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월간조선과 이병춘의 인터뷰

내부 관련자의 제보 없이는 이런 수준의 기사를 쓸 수 없다. 사족을 붙이자면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이병춘과 가진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기자는 국정원의 스웨덴 파견관으로 근무하면서 김한정 씨의 지시를 받아 스웨덴 현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벌였던 이○○ 씨에게 수차례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이씨는 지금은 그 사실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씨는 ‘DJ의 노벨상 수상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돈이 김정일에게 전달됐고, 이 돈이 결국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무기 구입에 사용된 내용들에 대해 국회 차원의 국정감사 등이 시행될 경우 증인으로 나가 보관하고 있는 모든 증거를 공개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씨는 김한정 씨에게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면서 다만 내가 그동안 했던 노벨상 로비 관련 사실들을 밝힐 경우, 근무해 왔던 조직(국정원)이 곤경에 처할 우려가 커서 지금은 모든 사실을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월간조선 기사가 설명하듯이 DJ의 옥중수기 번역과 출간 작업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사람은 국정원의 스웨덴 파견관 이병춘이었다. 그는 1996 8월부터 1999 12월까지 스톡홀름에서 근무하면서 수시로 이종찬과 김한정에게 관련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당초 이병춘은 1999 7, 3년간의 정상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귀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종찬은 이병춘에게 현지에서 6개월 더 연장근무를 하고 책 출간 작업을 완료한 후 귀임하라고 특별 지시했다. 이병춘도 특명 사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수긍하고 연장 근무했다.

 
 

한편 월간조선에 실린 대금 지불인에 대한 소개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위 영수증에 등장하는 한○○ 박사는 스웨덴에 거주하는 교포다. 한씨는 당초 의무지원 요원으로 스웨덴으로 간 뒤 현재까지 그곳에서 거주해 왔으며, 스웨덴 왕실 주치의를 지냈다. 경기고를 졸업한 한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스웨덴 유력 인사들을 대상으로 로비활동을 벌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를 위해 스웨덴 측 인사들을 안내해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고, 김 전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행사장에도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던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 동그라미 익명 처리된 빈칸을 채우면 한영우가 된다.

 
 

[14] 국정원장 특수사업비로 만든 DJ의 옥중수기

노벨상 후보 명단 작업에 맞춰 8월15일에 수기 발간
DJ 삼성그룹 배제 지시 등 옥중수기 발간 직접 챙겨

옥중수기 번역 출판에 매진한 이병춘

 

이병춘이 이 출판 사업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는 그가 1999년 초 본부에 보고한 전문에 잘 나타나 있다. ‘대통령 옥중수기 번역 발간 관련(:-16603, :-515,516)’이라는 제목의 전문에서 이병춘은 현재 약 2분의 1가량을 번역했으며, 번역 작업은 최병은 및 그의 처(박경주·영문학 전공)와 장녀(최서경·외국어 능통) 등 온 가족이 합동으로 매달리고 있다고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또한 스웨덴어 감수는 금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호세 사라마고(Jose Saramago)의 작품을 번역한 한스 베르그렌(Hans Berggren)에게 의뢰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노벨상 수상작을 번역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베르그렌에게 맡겨 옥중수기를 최고 수준의 번역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삼성그룹도 옥중수기 발간에 관여

이 전문에서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점은 옥중수기 발간 프로젝트와 관련해 삼성그룹과의 연계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병춘의 전문 보고에 의하면 국정원이 이 문제에 본격 개입하기 전에 이미 삼성그룹이 이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더욱 놀랍게도 이 전문은 김대중과 그의 차남 김홍업이 관여한 정황까지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김대중이 삼성의 개입을 차단하라고 지시했음을 이 전문은 전하고 있다.

 
 

전문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8 4월경, 최병은이 서울에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인 고향 후배 김윤진(전 삼성생명 부장·현재 삼성 성우구락부 간사장·58)을 접촉했다. 그리고 이때 DJ 옥중수기 번역 건에 대해 최초 발설했다. 그 후 김윤진은 삼성그룹이 문화재단을 통해 이 사업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최병은을 김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과 학훈단 동기인 삼성물산 지승림 부사장(구조조정본부 소속)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번역 출판 건에서 배제된 삼성그룹

그 후 지승림은 이건희 회장에게 이 건을 보고하고 김홍업에게도 고지했다. 하지만 그 후 삼성의 출간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것은 삼성 측이 2억여 원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면서 그 전제조건으로 출판위임권을 요구한 것이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전문에 의하면 삼성 측이 이 건을 대외적으로 유포하는 등 기업 이미지 제고에 이용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문은 결국 최병은이 서울을 방문하고 귀국한 한영우에게서 기업과 연결해서 이 건을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서울의 분위기다는 말을 듣고 나서 삼성과 결별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옥중수기 번역 건을 직접 챙긴 DJ

한편 이병춘이 국정원에 보낸 전문에는 대통령께서는 동 번역 추진 건과 관련 9월 중순경 차남 김홍업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특정 기업과 연결해 동 건을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동 건을 보류하도록 지시하셨다는 최병은의 전언이 기술돼 있다.

 
 

최병은이 이렇게 DJ의 지시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왜냐하면 이는 DJ이 자신의 옥중수기 출판 건을 직접 챙겼다는 증언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DJ 자신이 노벨상 프로젝트 전체를 직접 챙긴 정황증거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DJ가 삼성이 이 사업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외부에서 청와대 또는 국정원의 노벨상 프로젝트 추진에 관해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삼성그룹에는 이런 자질구레한(?) 사업이 아니라 대북 사업 등 좀 더 큰 사업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7년 투옥 당시 부인 이희호 여사 앞으로 보낸 옥중 서신. 연합뉴스

 

 20만 달러의 경비가 소요된 특명 사업

어쨌거나 이후 이종찬과 김한정은 영수증 제출이 필요 없는 국정원장의 특수사업비에서 약 20만 달러의 경비를 지출하여 이 특명 사업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 이병춘은 스톡홀름대학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 토르비호른 로디엔(Torbjorn Loden) 교수를 찾아다니며 삼고초려한 끝에 그 연구소 이름으로 책의 출판 및 감수를 맡아 줄 것을 설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순진한 스웨덴 교수는 서울의 정보기관이 책의 이면에 무슨 꿍꿍이를 숨겨 놓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춘은 책이 1999 815일에 맞춰 출간될 수 있도록 인쇄소를 회유하고 닥달했지만 인쇄를 맡은 노드테드사는 마침 여름 휴가철이라 일손이 태부족했다. 우여곡절 끝에 책은 결국 목표한 날에서 2주일쯤 지난 828일에야 출간됐다.

815일에 맞춰 출간해야 했던 이유

이병춘이 기를 쓰고 출판 기한을 815일에 맞추려고 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 표면적으로는 본국의 기념일인 광복절을 축하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날이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의 1999년도 수상 후보자 명단 압축 작업을 마무리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김한정과 노벨상 공작팀은 그해에도 DJ의 이름이 최종 압축 명단에 들어갈 것으로 계산하고 있었으며, 이 책 출판이 DJ의 수상자 결정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국제 저명인사들에게 서문 청탁

이병춘은 이러한 일정을 염두에 두고 팔메 재단과 접촉했다. 팔메 재단은 스웨덴 총리로 재임하다가 피살당한 존경받는 정치인 올로프 팔메(Olof Palme)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재단이다. 이병춘은 팔메 전 총리의 미망인 리스벳 팔메에게 책의 서문을 써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쾌히 승락을 받았다. 이와 별도로 김한정은 미얀마의 아웅 산 수치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에게도 각각 따로 옥중수기의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춘은 1999 828일 본부로 보낸 전문에서 스웨덴 국립 스톡홀롬대학이 이날 옥중서한집을 스웨덴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전문에서 마치 자신이 그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듯이 3인칭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전문 말미에서는 보도자료를 작성하여 프랑스 주재 거점에 제공했고 현지 공보관과 협력·연통 등 특파원을 활용하여 국내에 관련 기사를 작성토록 협조했다며 생색을 냈다.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서의 출판기념회

1999 910일 로디엔 소장은 스톡홀름대학 부설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팔메 재단의 리스벳 팔메는 물론 잉게 요한슨 전 스톡홀름대 총장, ·현직 외교부 관리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병춘은 이날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당초 아태연구소 측에서는 동 출판기념회를 우리 공관과 합동으로 대대적으로 개최할 것을 제의했으나 공관 측에서는 여러 정황을 고려해 국한된 관계자만 참석하는 조촐한 리셉션을 아태연구소 단독으로 개최토록 유도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자칫 이 눈치 없는 스웨덴 학자의 오버 액션이 불러올지 모를 파장을 사전에 저지한 자신의 용의주도함을 은근히 자랑한 것이다. 로디엔 소장은 인사말을 통해 세계적으로 저명한 정치인인 김 대통령의 옥중서한집을 출판하게 돼서 학교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서한집을 통해 독자들은 김 대통령의 극진한 인류애 및 가족애, 그리고 신실한 종교관을 접하게 됨으로써 숱한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데 정신적 바탕이 되었던 김 대통령의 사상과 철학을 직접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런 다음 그는 DJ의 지속적인 건강과 한국과 스웨덴의 우호 증진을 위한 건배를 제안했다.

 
 

[15] 이번엔 노벨 재단 밀어 주기… ‘큰손’ 삼성 동원

과잉 충성 국정홍보처 자서선 출간 무산되자 플랜B 선회
진급 물먹은 이병춘 폭로 으름장… 입 막으려 자리 마련

성공적이었던 옥중수기 출판

 

옥중수기를 출간하고 나서 이병춘은 호의적인 서평을 받아내기 위해 다시 동분서주했다. 국정원 내부 보고서는 이와 관련된 동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스웨덴 유력 일간지 스베스카 다그블라뎃 지가 118일 대통령님의 옥중서한집에 대한 서평 및 대통령님의 존영을 4단 크기로 게재했다.”

 

보고서는 또한 팔메 전 총리의 미망인 리스벳 팔메가 기구한 운명의 사람에 의해 쓰여진 주목할 만한 책이라는 서문을 썼다고 소개하면서 이 기사가 현지 언론 최초의 서평으로서 책에 대한 관심과 민주 지도자로서의 김대중 대통령 이미지를 북유럽 및 국제사회에 전파하고 고양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한껏 치켜세우고 있다.

국정홍보처의 과잉 충성 두 번째 책 출판 결정

옥중수기 출판 작업이 나름 큰 성공을 거두자 곧바로 다음 책의 출판 논의가 이어졌다. 국정홍보처 산하 해외홍보원은 1999 12, DJ의 또 다른 자서전인 나의 삶, 나의 길을 스웨덴어로 번역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손명현 공관장과 문화담당관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이병춘은 이에 대해 그들과 상의했다. 이병춘이 1999 12월 초 국정원 본부로 보낸 국정홍보처의 대통령님 자서전 출간 계획 관련(:-362)’이란 제하의 전문을 보면 그 후속 동향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전문에서 이병춘은 대통령님의 옥중서한 책자가 스웨덴어로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또다시 대통령님의 저서가 연쇄 출간될 경우 주재국 내에서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농후하다면서 손명현 공관장도 같은 의견임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사업 주체가 대사관이 됨으로써 향후 주재국 내·외적으로 물의가 일어날 소지가 있으며 이에 따른 부작용 발생, 특히 반정부 성향의 불순 교포에 의한 국내 연계 기도 시 정쟁 요인으로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두 번째 책 출간에 반대한 이병춘

이병춘의 이러한 의견은 달리 말하면, 두 번째 책을 서둘러 출판하는 것은 DJ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효과만 있을 뿐 실제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는 별다른 추가적인 효력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부 정체불명의 한국인들이 옥중수기의 출판 배경을 캐고 다닌다는 우려 섞인 정보도 함께 전달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표지. 도서출판 산하

 
 

이러한 상황판단에 따라 이병춘은 전문 말미에 동 자서전의 출간 추진은 상기 공관장의 견해대로 현재로선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되는 바, 꼭 출간할 필요가 있다는 방침이 서더라도 상당 시간 기일이 경과한 연후에 학술단체나 문화재단 등 비정부기관이 사업 주체가 되어 은밀히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DJ의 자서전을 번역 출판하려는 국정홍보처의 과잉 충성 열기는 한동안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와 같은 그들의 오버는 해를 넘기도록 지속되었다.

씹다 버린 껌이 된 이병춘

한편 이종찬과 김한정은 1999 9월 초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진급시켜 주겠다고 이병춘에게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 약속은 공수표가 됐다. 그해 연말 인사에서 이병춘은 진급은커녕 계급정년에 걸려 공로 연수를 명령받았다.

 
 

1999 1220일 스톡홀름에서 서울로 귀국한 이병춘은 자택에서 퇴직 대기하는 신세가 됐다. 6개월간의 공로 연수 기간이 끝나면 자동으로 퇴직될 예정이었다. ‘씹다 버린 껌 신세가 된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2000년 초, 이병춘은 임동원 국정원장을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만약 진급시켜 주지 않을 경우 2000 4월 총선 전에 노벨상 공작 관련 모든 자료를 언론에 공개하겠다며 협박했다. 당시 임동원은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몰두하느라 극도로 민감한 시기였다. 만일 이 문제가 바깥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정권 차원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병춘은 진급을 약속했던 이종찬과 김한정에게도 같은 협박을 가했다. 이렇게 해서 이병춘의 인사 문제가 노벨 공작팀 전체에 발등에 떨어진 화급한 불이 됐다. 이들은 퇴직 후 자리를 봐 주겠다고 이병춘을 달래고 설득해 일단 조용히 퇴직하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병춘은 퇴사 후 국정원 산하 연구소에서 몇 년간 더 근무했다. 참으로 부끄럽고 볼썽사나운 전직 정보기관원의 처신이 아닐 수 없었다.

이병춘 후임 박종재의 보고서

한편 1999 12, 이병춘의 후임으로 스톡홀름에 파견된 사람은 박종재 서기관이었다. 그는 1960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로 진학하여 장교로 복무하다가 1987년 정보기관으로 전출돼 온 사람이었다.

 
 

박종재는 훤칠한 키에 외모도 깔끔한 데다 매너 있고 수완 좋은 공작관이었다. 그는 노무현정부에서는 청와대 안보정보비서관실에 파견 근무를 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퇴직 후에는 정보전쟁이란 책을 내기도 했고, 모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0 3, 박종재가 본부에 보낸 전문에는 국정홍보처가 추진하고 있는 DJ의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의 스웨덴어 출판 관련 동향에 관한 상세한 보고가 담겨 있다.

 
 

전문에 의하면 당초 2000 2월 스톡홀름에 파견된 장길남 국정홍보처 홍보관이 독일어판을 텍스트로 삼아 스웨덴어판을 출간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책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독일어에 능통한 스웨덴 저명인사를 활용하여 번역하고 2~3회 감수를 거칠 예정이었다. 또한 최종 출판은 스톡홀름대학 출판부 등 저명 출판사를 선정해 2001 2월까지는 출판을 마무리하는 등의 세부 계획이 마련되었다.

두 번째 자서전 출간 계획 전면 보류

하지만, 국정홍보처는 2000 2월 말 전문을 통해 이러한 자서전 출간 계획을 당분간 전면 보류토록 하는 지침을 하달했다. 특히 이 전문엔 이와 같은 보류 조치가 청와대 등과의 협의 후 결정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는 김한정 제1부속실장이 노벨상 공작을 전면 지휘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보류 결정은 DJ와 김한정이 직접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해서 비록 두 번째 책의 출판이 중단되긴 했지만 스웨덴 노벨상 공작팀의 활동이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은 더욱더 은밀하고 한층 강력하게 공작을 추진해 나갔다. 그들은 이전부터 줄곧 진행해 오던 스톡홀름의 영향력 있는 스웨덴 인사들을 포섭하기 위한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왕에 추진해 왔던 출판물을 이용한 홍보보다도 훨씬 중요한 공작이 이미 그 1년 전부터 은밀히 진행돼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막대한 재력으로 추진된 작업

그것은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그룹, 삼성의 막대한 돈의 힘을 빌려 추진하고 있던 작업이었다. 당시 스톡홀름의 노벨 재단은 노벨상 100주년을 기념하는 노벨상 국제 전시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노벨 재단은 2001 4월을 목표로 창조성의 문화라는 테마 아래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 1901~2001’이라는 행사를 야심차게 기획하고 있었다. 노벨 재단이 공들여 제작한 소책자는 행사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기념전시회는 수많은 국제적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기존 노벨 시스템에 의한 독창적인 지식뿐 아니라 과학·문학 및 평화를 위한 노력에 관하여 매년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의 발전을 추구한다.”

 
 

전시회는 2001 8월 오슬로에서 시작하여 2002 26월 도쿄, 같은 해 810월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기획되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시카고·뉴욕 등 미국의 도시들을 순회한 후 베를린에서 대장정을 마치도록 설계되었다.

 
 

[16] 국정원 패싱… ‘노벨상 공작’ 청와대서 주도

김한정 靑부속실장 ‘노벨상 100돌 한국전’ DJ 재가 받아
슐만 노벨 재단 총장 방한 이후 급작스러운 기류 변화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 1901~2001’이라는 제하의 대대적인 전시회에 대해 1999 10월 이병춘이 보고한 전문은 이 전시회가 노벨상 작업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람회의 한국 개최는 국내의 과학분야 선진화를 위해 일반 국민에게 큰 자극제가 될 수 있으며, 창의성 개발에 관심을 둔 교육과정 정착 등에도 상당한 파급효과가 기대되는 바, 정부 차원에서의 관심 표명 및 가능한 한 지원을 통해 동 전시회의 성공적 개최와 함께 노벨 재단과의 유대를 더욱 제고해 나가는 계기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요점은 노벨 재단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심 표명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2000 3월에 작성된 국정원 내부 문서도 이 전시회는 인류의 창조성 고양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알프레드 노벨의 사진 및 노벨상 수상자 약 50명의 저서·실험 장비·옷을 비롯한 개인물품 등이 전시물 목록에 들어 있다고 소개한다. 또한 전시 행사의 초반에 한국이 포함된 것은 볼보·에릭슨·ABB 등 스웨덴 주요 기업들이 한국과의 무역 및 투자 확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행사 안내 책자는 이 행사를 통해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의미 있고 교육적인 풍부한 자료들을 접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와 함께 책자 맨 뒤의 재정 항목에 행사를 후원하는 스웨덴 기업들은 각 지역 후원사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노벨 재단의 린드비스크 서울 방문

실제로 노벨 재단의 스반테 린드크비스트 박물관장은 1999 11월 재정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삼성문화재단을 비롯해 외교부·경희대학교 등과 지원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대략적으로 책정된 예상 비용은 전시장 임대료 등 경비를 제외하고도 약 135만 달러였다. 하지만 실제 비용은 200만 달러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린드크비스트가 1999 1122~26일 서울을 방문한 후 이병춘은 관련 동향을 본국에 보고했다.

 

스반테 린드크비스트 관장이 1125일 외교통상부 김승의 문화국장을 면담하여 동 전시회 계획을 설명하고 한국 정부의 참여 의사를 타진했지만 김 국장은 제반 여건상 정부 차원에서는 지원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다만 민간 차원에서의 참여 여부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린드크비스트는 김 국장에게 한국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며, 향후 전시회 개최 관련 진행 사항을 한국 측에 알려 주겠다고 대답했다.”

외교부, 범정부 차원의 지원 거절

또한 린드크비스트는 1124일 삼성문화재단 한용외 부사장을 면담하고 전시회 계획을 설명했는데, 이 자리에서 한 부사장은 삼성 측에서는 당초부터 동 전시회의 개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서 검토 후 통보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병춘은 린드크비스트의 방한 결과를 보고한 데 이어 민간 레벨보다는 범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함을 외교통상부에 역설했으나 상기 김 국장의 면담 결과 정부 지원이 불가하다는 답을 듣고 매우 실망하고 있다면서 스웨덴 공관의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그는 이어서 특히 공관장은 동 전시회와 병행하여, 세계 석학 등이 참여하는 과학 학술 심포지엄 등의 개최를 통해 국민, 특히 학생들에게 과학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수 있다며 외교부의 결정에 불만을 표하고 있다면서 주 스웨덴 공관의 부정적인 기류를 덧붙였다.

 

▲ 6.15 남북공동선언은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이뤄진 분단 55년 만의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온 선언문이다. 연합뉴스

 

김한정 등장으로 상황 반

그런데 2000 1, 김한정이 청와대에 입성한 지 한 달 되는 시점에 전시회 개최를 둘러싼 상황이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된다. 김한정이 노벨상 프로젝트를 총지휘하는 위치에 앉자마자 모든 관련 부서를 휘어잡고 노벨상 수상 공작에 전적으로 협조하도록 강력하게 주문했기 때문이다.

 
 

변화의 첫 조짐은 2000 2월 미카엘 슐만 노벨 재단 사무총장의 방한에 맞춰 나타났다. 슐만 총장의 방한은 그때가 두 번째로, 그는 이미 1998 3월 권영민 외교안보실장의 초청으로 방한해 이종찬 국정원장을 예방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교부가 아니라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초청한 것이다. 즉 이것은 DJ와 김한정이 주도한 행사였다.

갑작스러운 기류 변화에 당황한 국정

이즈음 국정원은 갑작스러운 기류 변화에 몹시 당황해했다. 2000 1월 말 박종재가 본부로 보낸 보고 전문을 보면 이러한 정황이 뚜렷이 읽힌다.

 
 

한영우가 120일 청와대 김한정 제1부속실장과 전화 통화 후 제보한 바에 의하면 동 전시회 개최 건은 대통령께 기()보고되어 대통령님의 재가를 이미 받은 사항이기 때문에 당연히 개최되는 방향을 추진될 계획이다.”

 
 

또한 동 전시회 개최 문제는 기존의 외교부 입장과는 달리, 청와대 쪽에서 이미 개최 추진 쪽으로 방침이 결정되어 정부 지원의 범위 및 참여기업 선정 등 실무적인 문제로 진전되어 갈 것으로 보인다고도 보고한다.

연결고리 한영우에 대한 국정원의 오판

국정원이 2000 125일 작성한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시회 재정지원 관련이라는 제하의 내부 보고서도 상황 변화의 긴박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보고서는 스웨덴 원로 교포 한영우 박사는 노벨평화상 100주년 기념 한국 전시회 재정지원 관련, 청와대 측이 기존 입장을 변경하여 정부 차원의 재정지원을 추진키로 확정하였음을 제보해 왔다고 하면서 이 내용은 한영우가 120일 김한정 제1부속실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확인한 사항이며, 또한 김한정 실장은 이미 대통령님의 재가를 받은 상황이라고 언급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국정원의 검토 및 조치 의견과 관련해 김한정 박사가 청와대 부속실장으로 취임하면서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시회 재정지원 문제를 노벨평화상 수상 로비 활동의 일환으로 추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평가하면서 현재 미결 단계임에도 한영우 박사가 진전 동향을 확대 해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결론 맺고 있다.

 
 

하지만 국정원의 이러한 판단은 오판이었다는 것이 금세 드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영우가 확대해석한 것이 아니라 국정원이 축소 해석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김한정이 슐만을 방한 초청하면서 스웨덴 공관이라는 공식 채널을 거치지 않고 스웨덴 교민으로 노벨상 프로젝트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던 민간인 한영우를 통해 모든 일정을 준비하는 동향이 포착된 것이다. 이는 국정원을 패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장 앞으로 보낸 박종재의 비밀전문

당시 박종재가 본부에 보고한 비밀전문 내용을 보면 그런 낭패감과 위기감이 더 잘 읽힌다. 2000 2월 초 한상철 방한 계획 관련 (국장님 친전)’이란 보고서에 의하면 한상철은 지난 1월 말 김 교수로부터 당지에서 추진 중인 사업에 대해서는 파견관에게도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받았다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전문 보고서에 언급된 한상철 김 교수는 각각 한영우와 김한정의 코드네임이다.

 
 

특히 박종재의 전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김 교수 및 박지원 장관은 자신(한상철)이 당지에서 추진하는 상기 사업들에 대해 국정원이 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지하는 것조차도 싫어한다고 하는 만큼, 상기 보고 내용에 대한 대외 보안 및 파견관의 입장에 대해 배려해 주실 것을 건의드립니다라며 이례적으로 극도의 보안 유지를 부탁했다.

 
 

[17] 슐만 총장 ‘구워삶기’… DJ 예방이 하이라이트

제주도 관광·삼성전자 방문 등 환심 사기 공작 착착 진행
DJ와 50여 분간 만남에 흡족… “통일 노력 깊은 감명” 칭송

노벨재단과 호암재단의 양해각서

 

은밀히 진척되어 가던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시회 프로젝트는 2000 2월 말 슐만

 

노벨재단 사무총장의 방한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게 된다.

 

228일 슐만과 호암재단 이실 전무가 서로 교환한 양해각서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노벨재단 산하 노벨박물관은 최신 박물관 설계 및 멀티미디어 기술을 활용해 모든 연령대의 관람객에게 의미 있고 교육적인 결과를 제공하고, 호암재단 측은 노벨박물관의 행사를 최대한 지원할 것이며 행사 개최에 필요한 전시장 임대료뿐 아니라 운송·번역·보험·건축비 등 관련 제반 경비를 지원하기로 한다.”

모두가 윈윈하는 게임

사실 호암재단과 노벨재단은 오래전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 오고 있었다. 1995 8월 호암재단 관계자가 노벨재단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그해 12월에는 노벨재단이 권이혁 호암재단 이사 등 호암재단 간부를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 초청하기도 했다. 그다음 해에는 호암재단이 호암상 시상식에 노벨상위원회 얀 린드스텐(Jan Lindsten) 이사를 초청해 노벨재단 측의 축사를 맡겼다. 이후에도 양 재단은 주요 인사들이 서로 교환 방문하며 협력 관계를 다져 왔다.

 
 

삼성과 노벨재단의 우호적인 관계는 1998 3월 슐만의 첫 방한 때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과의 면담 후 더욱 긴밀해졌다. 정권 교체에 따른 삼성의 태도 변화도 한몫했음은 불문가지이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노벨재단은 2000 2월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 행사에 삼성의 공식적인 참여를 요청해 온 것이다.

 
 

노벨재단으로서는 삼성의 을 이용하고 싶었고, 삼성으로서는 노벨상의 권위를 빌려 문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드러나진 않지만, 삼성은 이를 통해 김대중에게 아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모두가 윈윈하는 게임이었다.

 

 슐만 방한의 하이라이트는 청와대 예방

한편 국정원은 한영우의 주선에 따라 슐만의 세부 방한 일정을 마련했다. 한영우와 슐만은 2000 226일 서울에 도착해 하얏트 호텔에 여장을 풀고 환영 만찬을 가지는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 관광·호암 미술관 방문·삼성전자 공장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슐만 방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청와대 예방이었다. 김한정은 슐만을 DJ에게 소개시킨 후 그를 협조자 명단에 올릴 심산이었다. 노벨상을 향한 기름치기 작업이었다.

 
 

슐만 방한 후 국정원이 작성한 슐만 노벨재단 사무총장 방한 관련이라는 제하의 내부 보고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슐만은 서울 개최 전시회의 재정적 지원을 맡을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들과 실무적인 협의를 하였으며 정부 측 인사로는 박지원 문화부 장관이 개별 면담을 가졌다. ()슐만은 박지원 장관과의 면담을 통해 우리 정부의 적극적 지원 의사를 확인했으며, 서울 전시회 개최는 2002 8~12월로 잠정 확정지었고 개최 장소는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

 
 

보고서는 또한 슐만의 청와대 예방과 관련해 “229일 오후 4시부터 50분간 대통령님과의 비공식적인 면담이 있었으며, 슐만은 대통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에 대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언급했다고 전하고 있다.

 
 

슐만이 김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주로 논의된 내용은 남북관계 개선 한국과 러시아 외교 발전 방향 유럽연합(EU)과의 협력 강화 문제 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례적으로 길었던 면담 시간

슐만이 50분간이나 대통령을 면담한 것은 통상적인 외부 인사의 예방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다. DJ가 그만큼 그를 우대한 것이다. 특히 보고서는 이 자리에는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조규향 교육문화수석·김한정 제1부속실장이 배석하였으며, 스웨덴 교포인 한영우 박사도 함께 참석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슐만은 대통령을 만난 후 행사 담당관에게 자신은 전년도 8월에 발간된 스웨덴어판 옥중수기를 두 번이나 읽었고, 평소 대통령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번 면담을 통해 대통령님의 민주주의를 위한 삶과 남북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영우 가족의 여행 경비도 국정원 예산으로

슐만과 한영우의 방한을 위해 국정원이 지출한 국정원 자체 예산은 약 25000달러로, 이는 전액 노벨상 공작을 위한 국정원장의 비밀 사업비에서 충당되었다. 스웨덴과서울 왕복 항공료·특급호텔 숙박비·제주도 관광경비 등이 여기에 포함됐다.

 
 

한영우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여덟 살 난 아들의 항공권 1등석 업그레이드 비용까지 모두 국정원 예산으로 지불됐다.

 

 

좀 더 자세한 내역을 들여다 보면, 이들의 항공권 구입에 약 1300만 원, 하얏트 호텔 숙박비에 약 700만 원 등이 쓰인 것 이외에도 슐만에게 줄 선물(양복) 100만 원, 한영우 부인 선물 비용 61만 원, 한영우 가족의 만찬비 37만 원 등도 포함돼 있다. 행사의 결산 보고서는 이와 같은 비용 지출은 당초 기획한 예산보다 약 250만 원 초과로 지출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슐만이 다녀간 지 열 달 후 2000 12월 노벨상 시상식 직전에 노벨재단은 “DJ 옥중서신 원고·투옥 당시 입었던 죄수복·DJ가 옥중에서 지니고 있었던 성경책 등을 100주년 기념전에 전시하기 위해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2000 127일자 경향신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노벨재단은 127 700명이 넘는 수상자 중 3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기념전 전시 대상으로 선정했으며 이들 가운데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김 대통령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등 단 네 명만 선정되었다.”

거짓의 향연이 된 100주년 전시회

2001년 김대중은 다시 스웨덴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노벨상 100주년 기념식에 수상자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기념식은 노벨재단 창립 이래 최대 규모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가 제공한 최신형 TFT-LCD 디스플레이와 디지털 비디오 디스크 플레이어가 100대 이상 설치되어 행사장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삼성은 노벨재단으로부터 자사 제품을 전시하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이 중에는 최신형 MP3 플레이어 CD-Yepp이 포함됐다. 이는 쏘니의 워크맨이 삼성의 디지털 제품에게 왕좌를 내어 줬다는 상징이었다.

 
 

2002 823, 서울 로댕 갤러리에서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이 열렸다. DJ가 옥중에서 입었던 죄수복과 그가 사용하던 안경·지팡이·그가 쓰거나 받은 편지·상장들·명예학위증 등이 퀴리 부인의 이온화상자·뢴트겐의 엑스레이 튜브·플레밍의 페니실린 병 등과 함께 전시되었다. 이 기념전은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이라며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 어린 자녀의 고사리손을 이끌고 나온 부모들이나 장래 노벨상을 꿈꾸며 따라나온 어린 새싹들, 행사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어느 누구도 그 행사의 이면에 깔린 숨은 그림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서울의 기념전 행사장을 찾은 슐만은,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의 투명성을 통해 노벨상의 권위를 지켜 왔다면서 만약 누군가 특정인의 수상을 위한 영향력 행사를 시도한다면 우리는 그를 후보에서 제외하거나 심사를 더욱 꼼꼼하게 한다면서 만약 어떤 로비 행위가 발견된다면 후보에게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다고 말했다. 물론 뻔한 거짓말이었다. 2002 823일 성균관대학교는 슐만에게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성균관대학교는 삼성문화재단 소유이다. 모든 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요, 거짓의 향연이었다.

 
 

[18]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일조한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 ‘남북통일’ ‘DJ’ 언급… 노벨상 위한 밑밥 깔기
외곽 인물도 놓치지 않고 포섭한 김한정의 용의주도한 공작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

 

1999 625,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이날은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공연을 선보인 날이다. 서울의 언론들은 일제히 20세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지상 최대의 쇼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란 제목이 붙은 이 공연은 올림픽 경기장을 가득 메운 5만여 명의 관중과 TV 생중계를 통해 100만 명 이상의 시청자들이 지켜봤다. 50억 원 이상의 경비와 500(t)이 넘는 장비가 동원됐다. 그야말로 초호화 스펙터클이었다.

 
 

저녁 630분에 시작된 이날 공연은 장장 5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무대 양쪽에 설치된 철제 다리가 한가운데서 만나는 장면이었다. 잭슨이 다리 위에서 노래하는 동안 두 개의 철교가 하나로 합쳐져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이 장면은 남과 북의 통일을 상징했고, 이때를 맞춰 잭슨은 김대중(DJ) 대통령에게 특별히 감사의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한국이 통일되는 날, 그것을 기념하는 공연을 하러 서울에 다시 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0년이 되던 날, 2009 625일 마이클 잭슨은 이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 다시 오겠다던 그의 말은 공수표가 됐다. 그런데 다음 날 잭슨의 부음을 전한 서울의 언론들은 DJ의 메세지도 함께 보도했다. DJ 좋은 친구를 잃었다며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얼핏 생각하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두 달 지난 818, DJ마저 저세상으로 떠났기에 이 물음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공연 배후의 보이지 않는 손

애초에 이 공연은 55일 판문점에서 열릴 계획이었다. 이날이 잭슨의 어린이들에 대한 유별난 사랑을 부각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측의 협조를 얻지 못해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공연 목적도 원래는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어린이를 돕기 위한 행사로 기획됐지만, 슬그머니 전 세계 불우 어린이를 돕기 위한 공연으로 변경되었다. 북한의 기아를 거론하는 게 북한을 자극할 것이라는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다.

▲ 1996년 10월 ‘평화와 환경을 위한 공연’차 한국을 방문한 마이클 잭슨이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한복을 차려입은 문화방송 어린이 합창단과 그의 히트곡 ‘힐더 월드(Heal the world)’를 합창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 공연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가 얼마 전까지 현직 국정원 직원이었던 김한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이런 민간 행사에 왜 전직 국정원 직원이 개입한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이 공연의 테마가 한반도의 분단 현실과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데서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DJ를 카메오로 깜짝 등장시킨 평화 콘서트

김한정과 노벨상 공작팀은 대중 문화행사의 정치적인 효과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중의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콘서트와 전시회 등이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기회를 높여 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이클 잭슨 등 출연진에게 이 평화 콘서트를 통해 한국 국민의 소망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행사 당일에는 DJ를 카메오로 등장시켜 평화와 인권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평화·인권의 사도로 부각시킬 깜짝 이벤트까지 기획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공연의 귀빈석 한편에는 저 멀리 북구의 얼음 나라에서 날아온 두 명의 특별한 관람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한정이 공들여 모셔 온 손님들이었다. 바로 에릭 슐하임(Erik Solheim)과 루네 헤르스빅(Rune Hersvik)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에릭 슐하임은 노르웨이 사회주의 정당의 당수를 지낸 유명 정치인이기도 했고, 당시엔 월드뷰 인권재단이라는 비영리 단체의 총재로 있던 사람이다. 루네 헤르스빅은 그 단체의 사무총장이었다.

에릭 슐하임과 루네 헤르스빅의 방한

가든 사업이라는 이름이 붙은 국정원의 내부 문서철을 들여다보면 이 두 사람의 방한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김한정은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가 주최한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NGO의 전략이라는 국제회의에 이 두 사람을 방한 초청한 것이다. 이 회의는 1999 623일부터 나흘간 서울에서 열렸다. 마이클 잭슨의 공연이 FDLAP 행사 중간에 열리도록 기획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가든 사업 문서철엔 국정원이 두 사람의 제주도 관광 비용과 남산타워·전쟁기념관 등 서울 시내 관광 비용 등을 포함해 약 7000달러의 경비를 지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방한 초청 예산 중에는 지출처를 밝히지 않은 2000달러의 접대비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룸살롱 등 유흥시설이나 밝힐 수 없는 사업에 지불되었을 것이다. 항공료 등 나머지 경비는 FDLAP가 지출한 것으로 보인다.

외곽 인물도 놓치지 않은 김한정의 치밀함

슐하임과 헤르스빅은 김한정의 공작 대상 리스트 가운데 비교적 외곽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김한정은 스톨셋 노벨위원회 부위원장이나 룬데스타드 사무총장 같은 핵심 인물뿐 아니라 이들과 같은 외곽 타깃의 쓰임새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헤르스빅은 이후 김한정의 노벨상 사냥에 초특급 사냥개로 활약하게 될 인물이었다. 북유럽인치고는 덩치가 그리 크지 않은 이 사나이는 노르웨이 정계와 노벨위원회에 엄청난 인맥을 가지고 있는 마당발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또 다른 내부 문서에 의하면 헤르스빅은 오랜 기간 인권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국정원과 노벨위원회 양측에 모두 도움이 될 인물이라고 평가되어 있다. 노르웨이 파견관은 본부에 보낸 보고 전문에서 헤르스빅에 대해 “UN 산하 환경개발회의(UNCED)의 후원을 받는 노르웨이 남서부 해안 도시 스타벵거 소재 월드뷰 인권재의 사무총장으로서 인권 문제에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전문은 또한 노르웨이 트론다임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지만 나의 관심 분야는 공학이 아니라 인간이다는 헤르스빅의 언급도 전하고 있다.

 
 

김영삼(YS)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DJ정부가 임기를 마친 후 동아일보는 비화(祕話) 국민의 정부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냈다. 2003 326일자 1 13번째 기사는 ‘DJ 노벨상 수상 막전막후라는 제목으로 DJ정부의 노벨상 공작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기사는 심층 취재라고 하기에는 함량 미달이다. 부끄러울 정도로 조악하고 엉성하며, 지엽말단의 단편적인 사실만 나열하고 있다.

이종찬의 황당한 거짓말

당시까지만 해도 이 공작에 관한 것은 철저히 비밀의 장막 속에 묻혀 있었고, 그 전달인 2003 25, 동아일보의 동티모르 관련 보도가 DJ 측으로부터 호되게 반박을 당한 것도 기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기사에서 이종찬이 말한 부분은 거의 모두 가짜뉴스다. 일부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종찬의 설명. “김한정이 노르웨이에 다니고 하는 가운데 동교동 측과 접촉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노벨상 얘기가 나온 것이 사실이다. 나는 노벨상과 관련되는 일을 국정원에서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 이를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 쪽으로 넘기고 김한정도 FDLAP로 내보내기로 했다. 그 당시 나로서는 솔직히 DJ가 노벨상을 받는 데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김한정을 국정원에서 내보낸 이는 천용택이다. 이종찬은 남이 한 일을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황당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19] 김한정 ‘가든 사업’의 특급 도우미 헤르스빅

화려한 인맥의 헤르스빅… 노벨상 향하는 지름길
국정원 “귀순 황장엽 입 막아라”… 北 눈치보기에 노심초사

동아일보의 비화(祕話) 국민의 정부

 

DJ정부의 임기가 끝나고 동아일보는 비화(祕話) 국민의 정부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냈다. 2003 326일자 동아일보엔 ‘DJ 노벨상 수상 막전막후라는 제목으로 DJ정부의 노벨상 공작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동아일보의 기사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황당한 거짓말을 그대로 옮기는 등 조악하고 형편없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부 흥미로운 사실도 소개했다.

 
 

또 정치권 안팎에서는 국정원이 노벨상 지원을 위해 상당액의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여권 일각에서는 학자 출신 M씨가 노르웨이 현지 인맥과 접촉한다는 구실로 국정원 돈을 받아 실제로는 집을 사는 데 쓰는 등 개인적으로 챙겼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여기서 M씨로 언급된 사람은 문정인이다. 2003 2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그는 첫 국정원장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이 돈 문제가 발목을 잡는 바람에 입각하지 못했다.

 

 

기사는 또한 루네 헤르스빅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 단초는 1998년 말 한반도 비무장지대에서의 평화 콘서트 개최를 위해 방한한 노르웨이 인권단체 월드 뷰 라이츠의 헤르스 비크 사무총장과 김한정의 만남이었다. 김한정은 당시 비크를 영접, 비무장지대 답사 작업 등을 안내했다. 결국 비무장지대 평화 콘서트는 무산됐지만 김한정과 비크는 그 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기사는 루네 헤르스빅의 이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헤르스빅이 서울을 방문한 시기도 엉터리로 기록했다. 헤르스빅이 방한한 것은 1998년 말이 아니라 1999 2월경이었다. 양세훈 대사가 1998 12월 오슬로를 방문한 김상우에게 헤르스빅을 소개하고, 김한정이 1999 1월 이후 노르웨이를 방문한 다음 헤르스빅의 방한이 이루어졌다.

 

▲ 황장엽(왼쪽) 북한 전 노동당 비서는 자신을 수행하던 김덕홍과 함께 1997년 2월 중국에서 북한으로 돌아가던 길에 주 북경 한국 총영사관에 뛰어들어 한국으로 귀순했다. 연합뉴스

 

어쨌거나 기사는 헤르스빅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한정이 그를 판문점에 데려갔고, 판문점을 둘러본 헤르스빅은 비무장지대(DMZ)에서의 평화 콘서트와 동티모르 및 미얀마(버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원 등의 아이디어를 김한정에게 제공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활동들이 DJ의 정책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모으는 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헤르스빅이 말한 세계의 관심이란 노벨위원회의 관심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특급 도우미가 된 헤르스빅

이후 헤르스빅은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에 특급 도우미가 되어 노벨상을 향하는 지름길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헤르스빅이 일개 노르웨이 인권단체의 사무총장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인권 활동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헤르스빅은 김한정에게 문화행사뿐만 아니라 신생국 동티모르와 군부 독재국 미얀마 등 제3세계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도 김한정에게 조언을 해 주고 길을 열어 주었다.

 
 

1999 7, 헤르스빅과 김한정은 함께 방콕에서 열린 ‘PD 버마(Promoting Democracy in Burma·버마 민주화운동)’ 회의에 참석했다. 거기서 헤르스빅은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에 망명해 싸우고 있던 라모스 호르타를 김한정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헤르스빅은 그 자리에서 호르타에게 김대중의 세계 인권운동에 대한 자신의 지지 입장을 전달했다. 그 후 김한정과 호르타는 동티모르에 같이 들어갔다. 호르타는 그 후 동티모르의 외교 장관이 되었다가 총리를 거쳐 대통령까지 됐다.

헤르스빅의 화려한 인맥

국정원 노르웨이 파견관 박노용은 헤르스빅에 대해 월드뷰 인권재단 사무총장으로서 국제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피디 버마 노르웨이 지부 사무총장으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보고했. PD 버마는 셸 마그네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가 설립한 단체이다. 또한 박노용의 전문은 헤르스빅이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호세 라모스 호르타 동티모르 민주화운동 지도자 등과도 친분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박노용은 헤르스빅이 넬슨 만델라·아웅산 수치·라모스 호르타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근황을 추적하고 그들이 정치적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후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썼다. 이 밖에도 헤르스빅의 인맥 수첩에는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친북 인사인 윤이상과 그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9년 초 월드뷰 인권재단은 판문점에서의 평화 콘서트와 전시회 준비에 속도를 냈다. 이때부터 김한정과 헤르스빅은 NGO(시민단체 등 비정부기구)를 통한 공작에 박차를 가했다. 헤르스빅은 월드뷰 인권재단을 통해 북한과 채널을 개설했고 몇 차례 북한을 다녀왔다.

 
 

월드뷰 측은 2000년 말까지 평화 콘서트와 전시회를 여는 것을 목표로 작업했다. 이를 위해 헤르스빅은 1999년 한 해 동안 세 차례 서울에 왔다. 연초에 있었던 첫 번째 방문부터 헤르스빅과 김한정은 북한의 협조를 끌어내는 방안을 논의했다.

김한정의 가든 사업 또 한 명의 초청자 얀 람스타드

한편, 김한정의 가든 사업에는 또 다른 초청자가 하나 있었다. 얀 람스타드 라프토(RAFTO) 재단 부이사장이었다. 슐하임이나 헤르스빅과 달리 람스타드는 서울 방문에 드는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했다. 그는 PD 버마 회의에 참석하는 것 외에 다른 방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서울을 찾은 것은 북한 노동당 최고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최고위 탈북인 황장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황장엽은 자신을 수행하던 김덕홍과 함께 1997 2, 중국에서 북한으로 돌아가던 길에 주 북경 한국 총영사관에 뛰어들어 한국으로 귀순했다. 한국 도착 후 황장엽은 자신이 만들어 전파하고 북한식 사회주의의 기둥이 됐던 주체사상이 사실은 기만이고 환상이었다고 고백했다. 황장엽은 자신이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사유재산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을 도입하자는 자신의 주장을 김정일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람스타드의 방한 목적은 황장엽과의 면담

람스타드가 황장엽과의 면담을 강력히 원했던 것은 그의 시각이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 대다수 진보적 인사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김한정과 노벨 공작팀에게는 람스타드의 이런 모습이 눈에 거슬렸지만 노르웨이에서의 그의 위치를 고려하여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당시 국정원은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황장엽의 대외 활동을 최대한 막고 있었다. 황씨는 국정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원의 원장이었지만 신변안전을 이유로 대외 활동은 엄격히 통제받았다. 노벨상 공작팀으로서는 황장엽이란 존재가 혹시라도 걸림돌이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황장엽의 워싱턴 증언과 갑작스러운 죽음

국정원 안가에서 긴 시간을 머물던 황장엽은 한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강연 요청이 이어졌지만 국정원은 이를 사실상 거부해 왔다. 황씨는 국정원 내부의 대공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북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알릴 수 있기를 원했지만, 2003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공개적인 강연이 막혀 있는 처지였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그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DJ 정권이 끝난 후 2003 11, 황장엽은 워싱턴을 방문해 의회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북한의 실상을 증언했다. 이때 김기삼은 그를 만나 저녁을 같이하며 환담했다. 2010 10월 국정원 안가에서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몇 개월 전에도 황장엽은 다시 워싱턴을 방문해 국제전략연구소(CSIS)에서 강연을 했다. 이때는 도널드 커크 기자도 그 자리에 참석해 그의 마지막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20] ‘가든 사업’의 조준 반경에 들어온 라프토 재단과 람스타드

라프토 인권상… 노벨평화상으로 가는 고속특급의 비책
황장엽을 도우려 한 람스타드… 국제 인권 무대에 연결 시도

황장엽의 증언을 돕고 싶었던 람스타드

 

1999 6월 서울로 출발하기 전 람스타드는 국정원 파견관 박노용에게 황장엽 등 탈북인 문제에 관해 제대로 얘기해 줄 수 있는 증언자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람스타드는 내심 노르웨이 외무부·국제 인권단체·언론 등을 통해 황장엽이 북한 인권 문제와 북한의 실상을 증언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람스타드는 이 문제를 중국·러시아 등과 직접 접촉할 기회로 삼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람스타드는 국정원에 북한의 인권 실상에 관한 자료 및 해외에서 활동 중인 북한의 인권 운동가의 명단을 요청했다. 이러한 이유로 람스타드는 또 다른 유명 탈북인 강철환과의 면담도 요청했다.

또 다른 유명 탈북인 강철환

강철환은 가족 모두가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 수용소에 갇혀 그곳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강철환의 아버지는 일본 조총련 간부를 지낸 사람이었는데 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결국은 요덕 수용소에 수감된 것이다.

 
 

대부분의 재일교포 북송자들처럼 강철환의 부모 역시 북한에 살면서 자신들이 일본에서 품었던 북한에 대한 환상이 모두 거짓임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부모가 모두 사망한 후 수용소에서 풀려난 강철환은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한국에 들어왔다.

 
 

강철환은 한국에 정착한 후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기도 했고, 자신의 북한에서의 경험을 엮어 수용소의 노래라는 자서전을 내기도 했다. 북한의 강제 수용소를 고발하는 이 책은 프랑스 언론인 피에르 리굴로(Pierre Rigoulot)에 의해 평양의 어항 (Aquariums of Pyongyang): 북한 수용소에서의 10이란 제목으로 서유럽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을 읽은 람스타드는 강철환을 직접 만나 북한 인권의 실상에 관해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노벨상 공작팀으로서는 람스타드가 이들을 만나 북한 인권에 관해 듣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활동은 사실상 노벨상 공작팀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고, 어쩌면 방해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한정이 람스타드를 초청한 이유

그런데 이처럼 노벨상 공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람스타드를 김한정이 초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라프토 인권상과 라프토 재단에서의 람스타드의 위상에서 찾을 수 있다.

 
 

라프토 재단은 동유럽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하다가 1979년 프라하에서 체코 비밀경찰에 체포돼 고문당하고 1986 11월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쏘롤프 라프토(Thorolf Rafto) 베르겐 소재 노르웨이 경제대학 교수를 기리기 위해 1986년에 설립된 단체이다. 이 재단은 노르웨이 인권단체 중 유일하게 인권상을 수여하는 단체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특히 재단에서 매년 수여하는 라프토 인권상은 적어도 노르웨이에서는 노벨평화상 이상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라프토 재단의 창설 멤버 람스타드 

국정원은 19992000년 북한 인권·남북 관계 및 한국의 대북 정책 등에 관해 라프토 재단의 연구를 지원했다. 특히 국정원은 DJ의 노벨상 수상이 거의 결정되던 시기인 2000년 후반 노르웨이 경제대학을 통해 노르웨이 현지에서 한반도의 현 상황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주최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국정원은 라프토 재단에 대한 람스타드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국정원은 람스타드가 197986년 베르겐 상과대학에 재직하면서 라프토 교수와 함께 동유럽인권운동에 참여했고, 1986년 라프토 재단이 창설될 때는 원년 멤버였으며, 198699년 재단의 부이사장으로 북한 인권 문제 업무를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람스타드가 재단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며, 특히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창설 멤버라는 점에 국정원은 주목했다. 김한정과 노벨상 공작팀은 김대중이 노벨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여러 가지 국제 인권상을 타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라프토상도 당연히 그중의 하나였다.

노벨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챙겨야 할 것

노벨상 공작팀은 DJ가 라프토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에 헌신하고 있는 람스타드의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공작팀은 라프토 재단이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지극히 우호적인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극도로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라프토 재단은 국정원의 조언을 받아 북한의 인권 신장과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람스타드가 노르웨이 외무부와도 긴밀하게 협조하며 신중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람스타드는 잘 활용하기만 하면 가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강경한 대북관이 자칫 대북 햇볕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사전 예방조치를 취할 필요도 있었다. 국정원은 일단 람스타드의 요구 사항을 전폭적으로 들어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황장엽을 만난 람스타드

람스타드는 세미나 기간 방한 중 국정원의 지원을 받아 황장엽 당시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유명 탈북인 강철환과 면담을 가졌다. 황장엽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과학교육비서 및 국제비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등을 역임한 최고위급 탈북인이었다. 람스타드는 황장엽과 강철환에게 북한의 인권 상황·탈북인 현황 및 국제기구 구호물자의 군사 전용 실태·북한 인권 신장을 위한 비정부 단체의 활동 방안 등에 대해 폭넓게 질문했다.

 
 

이에 대해 황 이사장은 북한의 김정일 독재체제는 북한 주민이 인권 문제에 신경 쓰는 걸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김정일 집권 이후 발생한 대기근으로 약 20만 명에 달하는 탈북인이 발생했으나 북한 보위부 요원들의 추적과 중국·러시아 정부의 감시 때문에 조직화된 반북한 활동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대답했다.

 
 

람스타드는 황장엽과의 면담에서 북한 잠수정에서 노르웨이 적십자사가 지원한 비상용 농축 식량이 발견된 사실을 노르웨이 언론에 폭로해 대북 지원물자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황장엽은 람스타드가 직접 적십자사 요원으로 가장해 북한에 침투해서 북한 적십자사 관계자와 종교인을 대상으로 인권 활동을 전개하는 방안에 대해 묻자 북한 적십자사 관계자와 종교인은 모두 김정일의 앞잡이들이기 때문에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했다.

강철환이 알려 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

한편 람스타드는 탈북인 강철환 씨와도 만나 그의 북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생활과 그 과정·수용소의 규모·수용자들의 일일 식량 배급 상태·작업량·감시체계·가학행위 정도 등과 함께 북한 사회의 주민 통제 실상·탈북 동기 및 경로 등을 약 1시간에 걸쳐 경청했다.

 
 

람스타드는 이 자리에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과 총살형이 수시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언뿐만 아니라 어린이에게도 예외 없이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 매우 충격적이었다고 언급했다.

국정원의 람스타드 방한 결과 종합 보고

국정원은 람스타드의 방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종합 보고했다.

 
 

그가 황장엽·강철환과의 면담을 통해 북한의 인권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라프토 재단의 대북한 인권 활동 착수에 큰 도움이 된 것을 국정원에 감사해했다. 라프토 재단의 북한 인권 활동은 국제인권 운동의 선도국인 노르웨이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하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제적인 인권단체의 조직화된 활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국정원은 북한 인권 자료 및 국내 인권단체 발행 홍보물을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국내외 인권단체와 상호 연계 활동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