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萬事 2024-09/
09.01 '돼지 도살 사기꾼'과의 일주일… 놈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스팸 문자 일부러 낚여보니
여기에 속는다고? 하지만…
“[국제발신] 오랜만이에요. 9월에 한국 가는데 시간 괜찮아?”
“[국제발신] 31일 서울 도착해요. 공항 마중 나와주세요.”
“[국제발신] 이혼한 지 5년 돼가니 많이 외로워요.”
며칠 새 이런 문자메시지를 10통 넘게 받았다. 00777…로 시작되는 낯설고 긴 전화번호,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외국인 여성 행세를 하는 어설픈 한국어, 혼자 한국에 가는데 시간이 빈다는 유혹, 자신의 메신저앱 ID를 추가해달라는 부탁까지. 무차별 무작위 살포되는 미끼, 얼마 전 개그맨 박명수도 받아봤다고 한다. 진동하는 사기꾼의 입냄새.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개수작일까?
◇잡아먹으려 오래 살찌운다

▲일러스트=김영석
그리하여 저 수상한 메시지 중 하나를 골라 ‘친구 추가’하고 먼저 말을 걸어봤다. “저를 아세요?” 칼답이 왔다. “김직호 아닌가요?” 누가 봐도 방금 지어낸 엉터리 이름.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제 어시스턴트가 잘못된 전화번호를 보내서 실수로 귀하를 추가했을 수 있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온라인 번역기를 돌린 티가 역력했다. “그래도 어쩌면 일종의 운명일지 모르니, 우리가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ID에도 연락을 취해본 바, 이 같은 서론은 공통적 매뉴얼인 듯했다. 이제 속아줄 차례. “몇 살이냐”고 물었다. “하하, 제 이름은 장스이(Zhang Shiyi)이고 32세입니다. 홍콩 출신이고 현재 인천에 있어요.” 여성 의류 사업을 하고 있다며 바삐 손가락을 놀리던 그는 “오빠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했다. “편한 대로 불러.” “결혼은 했나요?” “비밀이야.” “당신에게 아내가 있다면 우리의 대화가 영향을 받을까요?” “나한테 뭘 원해?” “하하, 지금은 그냥 친구일 뿐입니다.”
◇일론 머스크가 채팅을 걸어온다면?

▲최근 급증하고 있는 국제 발신 스팸 문자(위). 기자가 일부러 라인 ID를 친구 추가한 뒤 말을 걸자, 동양인 미녀의 프로필 사진(도용 사진)을 내세운 녀석이 빤한 수작을 걸어댔다. 일주일동안. /정상혁 기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을 ‘돼지 도살 사기’라고 한다. 돼지를 키우듯 천천히 먹이(애정)를 먹여 신뢰 관계를 살찌운 뒤 단칼에 도살하는 금전 사기. 미인계와 거짓말로 현혹하는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이다. 관련 피해가 심각해지자 지난 2월부터 경찰청이 별도로 통계 작성을 시작했다. 6개월 새 791건, 피해 액수는 502억원에 달한다. 이 같은 범행의 특징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속여 먹기 위해 한 달, 징한 경우 1년까지 교제를 이어간다.
다시 채팅창으로. “인천으로 가겠다”는 도발이 먹혔는지, 놈이 응수했다. “정말 나를 좋아해? 그냥 즐기고 싶은 거라면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 몇 마디 징그러운 대화가 오가고, 드디어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요새 내 쇼핑몰 벌이가 좋지 않아요…. 오늘은 214달러밖에 못 벌었어요. 투자만 해주면 당신은 내 이익의 10%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연인에게만 이 일을 허락할 거예요. 감정은 장난이 아니잖아요.” 이윽고 ‘알리 익스프레스’ 로고가 들어간 조악한 웹사이트 주소를 안내한 뒤 이런저런 가입 등을 요구했다. 굿바이.
당신이 아무리 선량하고 외로워도, 생면부지 타인이 질척댄다면 모질게 쳐내는 게 신상에 이롭다. 그게 설령 미국 갑부 일론 머스크일지라도. 지난해 7월 한국 여성 A씨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누군가의 ‘팔로잉’ 알림이 떴다. 이름도 사진도 일론 머스크였다. “나는 무작위로 팬들에게 먼저 연락한다”며 자신의 여권과 테슬라 CEO 신분증 인증샷을 전송했다. 물론 사칭 계정이었지만 A씨는 “의심하면서도 진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딥페이크 기술로 감쪽같은(?) 영상 통화까지 나눴다. 교류가 무르익자 천하의 일론 머스크가 A씨에게 코인 투자를 권유했다. 7000만원을 넣었다. 해당 코인 거래처는 가짜였다.
◇101세도 당했다… ‘대대적 광고’ 필요해

▲며칠 전 기자에게 텔레그램으로 온 메시지. 동일한 수법이다. /정상혁 기자
인간에 대한 믿음을 악용한다는 점에서 가장 비(非)인간적인 죄악이다. 현재 국내 ‘로맨스 스캠 피해자 모임’ 온라인 카페에는 약 4300명이 가입돼 있다. 황당한 사연이 매일 업데이트된다. 이 카페에 가입한 피해자들에게 “사기 피해를 해결해주겠다”며 접근한 2차 범죄도 있다. 법무법인 대륜 이승호 변호사는 “관련 상담 및 사건 의뢰 건수가 늘고 있다”면서 “소셜미디어로 사람을 사귀고 마음을 주는 것에 거부감이 적은 분들이 쉽게 표적이 된다”고 말했다. “사진과 외모가 다르기에 실제 만남은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달콤한 말로 호감을 사면서도 만남은 피하고 그러다 금전 거래를 요구하는 전형적인 수법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칭 행세는 제각각. 주한 미군, 해외 파견 의사 등 ‘그럴듯한’ 직군을 연기한다. 지난 6월에는 ‘이스라엘 전장에 파견된 주한 미군 의사’라는 독특한 캐릭터도 등장했다. 강원도 양양에 사는 여성 B씨와 소셜미디어로 한 달 정도 채팅을 이어오다가 “가자지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5000달러(약 660만원)가 없어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 못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반(半)협박을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B씨의 친구가 B씨를 택시에 태워 경찰서로 데려갔지만 B씨는 “빨리 송금해야 한다”며 신고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주변의 설득 끝에 다행히도 피해는 면했다.

▲그래픽=송윤혜
피해자의 순진함을 비난할 수도 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물론 기본적인 합리성에만 기초하면 이런 사기 피해는 피할 수 있지만 사회적 고립이라는 틈을 파고드는 ‘맞춤형 접근’에 무장 해제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며 “민감한 요구를 받았을 때 피해자가 단 한 번이라도 관계기관에 ‘이게 맞나’ 물어라도 볼 수 있게 정부가 적극 홍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헷갈리면 잠깐 멈추고 경찰서에 전화 한 통 걸어보라는 것이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이 같은 유형을 ‘10대 악성 사기’로 재편하고 근절 방안 마련에 나섰다. 정부는 불법 스팸 발송 업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피싱 범죄 특별 단속을 10월까지 벌인다.
‘외로움’을 이용하는 도살꾼들의 암약은 세계적인 추세다. 영국의 경우 최고령 피해자가 101세로 조사됐다. 올해 초 영국 정부는 TV·라디오·옥외광고 등으로 이 같은 ‘낚시’의 유형을 알리는 대규모 광고 캠페인 ‘STOP! THINK FRAUD’를 시작했다. 잠깐 멈춰 의심해보자는 구호. “사기로부터 면역인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나 정보를 훔치기 전 범죄자들은 피해자를 감정적으로 조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하고, 그들이 다가올 때마다 확인하는 것.”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09.03 딥페이크 범인 잡으려면 위장 수사 허용해야

▲그래픽=김현국
텔레그램을 통해 딥페이크 영상물이 버젓이 유포되는 현상의 기저에는 ‘잡힐 일 없어’라는 범죄자들의 자신감이 깔려 있다. 정부의 법 집행 활동을 우습게 본다는 얘기다. 피해자에게 수사기관이 “해외에 서버를 둔 플랫폼은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대응하니 범죄자들이 마음 놓고 텔레그램 같은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플랫폼에서 받을 수 없는 정보를 수사기관 스스로 확보할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소위 ‘N번방’ 사건 이후 2021년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 착취물에 대해서는 위장 수사를 허용했다. 하지만 최근의 딥페이크 범죄 피해자에는 미성년자뿐 아니라 대학생, 군인, 교사 등 성인들도 광범위하게 포함돼 있다. 피해자가 협박을 받아 촬영했던 성 착취물은 아동·청소년들이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컸던 반면, 딥페이크를 활용한 허위 영상물은 피해자의 사진만으로 제작할 수 있어 성인이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작다고 할 수 없다.
이제는 수사기관이 제대로 위장 수사를 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수사관들이 딥페이크 범죄자 수사 목적으로 기존 법률상 허용되지 않는 행위들을 할 수 있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여건에서는 딥페이크 범죄자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사를 담당한 사람이 새로운 신분을 창설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모바일 신분증 등을 만드는 것은 현행법상 공문서 위조 등에 해당한다. 새로 만든 허구의 신분을 활용해 계약이나 거래에 나서는 활동도 당연히 위법이다.
법을 집행하는 수사관들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 범법자가 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사를 위해 위장을 할 수는 없다. 딥페이크 영상물을 제작·유포하고 영상물을 팔아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들과 그릇된 성적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추악한 연결 고리를 끊으려면 수사관들이 새로운 신분을 창설하고 그에 근거해 거래에 나설 여건을 법제화해야 한다.
독일은 아동 음란물의 제작·배포뿐만 아니라 조직범죄, 무기 거래, 통화 위조 등에도 위장 수사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영국도 수사 권한 규제법을 통해 국가 안보, 범죄 예방, 범죄 수사, 공공 질서, 경제 안보 등 목적 제한을 두고 신분 위장 수사를 허용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우려되는 인권침해를 차단하기 위해 수사 돌입 전 상부 수사기관이 승인하거나 사법기관이 허가토록 하는 등 절차적 통제 장치를 갖추어 놓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벤치마킹하면 된다.
딥페이크 범죄에 대해 평범한 사람들의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고, 피해자들의 일상이 붕괴되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 성범죄에서 위장 수사를 허용하는 것은 지금이 적기다. 외국의 위장 수사 법제를 근거로 절차적 통제에 따라 실질적인 수사가 가능하도록 위장 수사 허용 범위를 확대해 주기 바란다.
조선일보 황정용 동서대 경찰학과 교수
09-03 성·마약 범죄 온상 텔레그램, 적극 수사와 입법 나설 때
고위 공직자들도 애용할 정도로 높은 보안성이 강점인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이 출시 11년 만에 성·마약 등 온갖 범죄의 온상이 되면서 세계 각국의 우환 거리가 됐다.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최대 피해국 지적을 받을 정도임에도, 사실상 손 놓고 있던 한국 당국이 적극 대응에 나선 것은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우종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2일 “서울경찰청이 텔레그램 법인에 대해 내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텔레그램 본사에 성범죄 방조 혐의에 대한 사실 확인 공문 등을 보냈다고 한다. 국내에 텔레그램 공식 지점이 없지만, 수사 당국의 의지와 아이디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표현의 자유가 범죄의 자유로 남용되도록 방치해서는 결코 안 된다.
텔레그램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인 파벨 두로프는 지난달 24일 프랑스에서 미성년자 성착취물 유포 등을 방조·공모한 혐의로 현지 검찰에 체포돼 곧바로 예비기소된 상태다. 경찰이 텔레그램 법인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면 프랑스 수사 당국과 협조해 공동 조사는 물론 국내 송환 노력 등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 범정부 차원에서 더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대책도 서둘러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미국 사이버 보안 업체 보고서를 인용해 지난해 7∼8월 딥페이크 성착취 영상물 9만5820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도했는데, 대상자의 53%가 한국인이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여가수와 배우 등이라면서 “한국이 세계적 문제의 진앙”이라고 했다. 암호화된 대화방에서 가상화폐를 이용한 마약 거래가 횡행한다는 점에서, 마약 사범 급증에도 텔레그램 책임이 크다.
메신저 플랫폼 기업이 범죄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범죄 방조는 물론 공범 혐의까지 적용해서 엄단해야 한다. 실효성 있는 단속과 수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할 입법 보완도 시급하다. 위장 수사, 잠입 수사 등도 폭넓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 플랫폼 기업이 유해 콘텐츠를 감시·차단·삭제하도록 강제하는 입법은 기본이다. 딥페이크 제작·소지·구매뿐만 아니라 시청에 대한 처벌 규정을 신설하고, 반포 목적을 입증해야 하는 성폭력처벌법도 개정해야 한다.
문화일보 사설
09-03 이수정 “N번방 조주빈 한명 징역 20년 선고하고 끝낸 결과 초중고 딥페이크 초토화”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 조은희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 참석자들이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딥페이크 디지털 성범죄 예방과 대응책 마련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최근 텔레그램 내 ‘딥페이크 성 착취물’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처벌 강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실과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딥페이크 디지털성범죄 예방과 대응책 마련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제자로 참석한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N번방’ 가해자 몇 명을 엄벌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한 게 실수였다"는 말로 사태의 심각성을 표현했다. 그는 "지난 2019년 N번방 사건 때도 딥페이크는 있었고, 이를 과연 피해로 봐야 하는지 문제가 제기됐지만 많은 분들이 ‘창작의 자유’라는 단어를 쓰면서 굉장히 많은 비난을 했다"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 N번방의 2만 명이 10배 늘어 22만 명이 이 추세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여가부 청소년 보호위원장을 하면서 목격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짚었다.
그는 "매달 저희들이 300개에서 400개 정도의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모니터링하기 때문에 정부는 어디서 아동들이 ‘그루밍’ 돼 성폭력 피해자가 되고 영상이 촬영되고 유포되는지 알고 있다"며 "문제는 여가부가 처벌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모니터링 후 권고하거나 수사의뢰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문제의 앱들은 모두 영상채팅앱 형태를 띄고 있고, 몇 분 이상 영상채팅을 하는 경우 여성 이용자에게 쿠폰이나 게임 아이템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앱이나 사이트들이 영리적인 목적을 취한 결과, 해당 미성년자들은 처참히 성폭력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 벌건 대낮에도 가능한 게 현실"이라고 했다.
특히 조주빈으로 대표되는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물 제작 유포 사건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국제적인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가해자 조주빈 하나만 징역 20년 선고하고 끝난 결과가 바로 초중고가 초토화되고 선생님들이 교단에 서지 못하는 오늘날의 현실"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해외 사례를 소개하며 입법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 서비스법’을 제정해 올해 2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디지털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사회 안전에 위협되는 서비스를 제공해선 안 되고, 사용자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이를 어길 시에는 최대 6%를 과징금으로 부과한다.
최근 텔레그램의 창업자인 파벨 두로프가 프랑스에서 체포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EU의 디지털 관련 법 제정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프랑스는 ‘정보조작대처법’을 제정해 해외에 기반을 둔 서비스가 허위정보 유포로 프랑스의 기본 이익을 해치는 경우 시청각최고심의회(CSA)에 의해 서비스 정지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형사처벌할 수 있다.
영국은 ‘온라인 안전법’을 통해 딥페이크 기술로 제작된 불법 성 착취물을 제작·공유하는 것에 대해 형사처벌하는 것은 물론, 플랫폼 운영자에게 불법 콘텐츠가 유포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고 피해자들에게 업체를 대상으로 집단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문화일보 조재연 기자
09-03 3년간 ‘딥페이크’ 로 붙잡힌 403명, 구속 4%뿐… ‘솜방망이 처벌’
올해도 범죄구속률 2.7% 불과
“구속수사·강력 처벌” 지적 나와
지난 3년 7개월간 허위영상물(딥페이크) 범죄로 403명이 경찰에 붙잡혔지만, 이 가운데 구속 인원은 16명으로 구속률이 4%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딥페이크 성범죄 근절을 위해선 구속수사와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사이버 성폭력(정보통신망 이용 불법촬영물 유포 등)이 9864건 발생했고, 7530명이 검거된 것으로 나타났다. 범죄 유형별로는 아동 성 착취물이 3295명(43.8%)으로 가장 많고, 불법촬영물 2415명·불법성영상물 1563명·허위영상물 257명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검거된 피의자 중 구속된 비율은 5.5%(412명)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논란이 된 딥페이크 성범죄만 놓고 보더라도 2021년 79명, 2022년 78명, 2023년 100명 등 3년간 257명이 검거됐는데 단 12명만이 구속됐다. 지난 1월부터 7월까지는 허위영상물 범죄 297건이 발생해 146명이 검거됐는데, 이 기간 구속 인원은 4명에 불과했다.
지난달 학교별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 학교 명단이 SNS에 올라오면서 관련 신고도 급증했다. 허위영상물 특별 집중단속을 실시하고 있는 경찰은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5일 동안 총 118건의 신고가 접수됐고, 33명의 피의자를 특정했다고 밝혔다. 피의자 90% 이상은 10대였다. 특정된 33명 중 10대는 31명이었고, 검거된 7명 가운데서도 6명이 10대였다.
관계기관에 신고된 딥페이크 관련 피해도 6년 만에 1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성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팀장은 이날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센터의 피해 유형 중 합성편집물 피해는 2018년 69건에서 2024년 8월 기준 874건으로 약 12.7배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올해 피해를 입은 874명 중 여성은 854명으로 절대다수였고, 남성은 20명에 불과했다.
딥페이크 성범죄 근절을 위해선 경찰의 위장수사가 더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함영욱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과장은 “피해자가 성인인 경우에도 선제적·적극적 위장수사가 가능하도록 성폭력처벌법 개정을 통해 대상 범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09-03 유아인 법정구속…프로포폴 181회·대마 등 상습 마약 투약 혐의 유죄

▲프로포폴 상습 투약’ 혐의로 기소된 배우 유아인이 3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기일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로포폴 등 마약류 상습 투약 혐의로 기소된 배우 유아인(38)이 3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지귀연 부장판사)는 이날 마약류관리법 위반(향정), 대마 흡연 및 교사, 증거인멸 교사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유씨에게 징역 1년과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실형 선고와 함께 유씨를 법정구속했다. 검찰의 구형은 징역 4년이었다.
함께 대마를 흡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유씨의 지인 최모(33)씨에게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유씨는 2020년 9월∼2022년 3월 서울 일대 병원에서 미용 시술의 수면 마취를 빙자해 181차례에 걸쳐 의료용 프로포폴 등을 상습 투약한 혐의로 지난해 10월 재판에 넘겨졌다.
2021년 5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44차례 타인 명의로 두 종류의 수면제 1100여정을 불법 처방받아 사들인 혐의도 받는다.
올해 1월 최씨 등 4명과 함께 미국에서 대마를 흡연하고 다른 이에게 흡연을 교사한 혐의도 있다.
두 사람은 범행을 숨기려 공범인 유튜버 양모씨를 해외로 도피시키고 다른 공범에 대해선 진술을 번복하도록 회유·협박한 혐의로도 기소됐다.
지난해 2월 마약 혐의가 언론에 보도되자 지인들과 수사 대응 방안을 논의하면서 “휴대전화를 다 지우라”며 증거 인멸을 교사한 혐의도 있다.
경찰과 검찰은 수사 단계에서 한 차례씩 유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청구했지만 기각됐다.
문화일보 김유진 기자
09-03 등록금 최고 ‘924만원’ 추계예대… 2위는 연세대
최저는 ‘무료’ 광주가톨릭대
올해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평균 등록금이 가장 비싼 대학은 약 924만 원을 기록한 추계예대로 나타났다. 서울 주요 대학 가운데는 연세대와 이화여대가 각각 평균 등록금 순위 1, 2위를 차지했다.
3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2024년 대학 평균 등록금 순위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 195개교 가운데 서울 소재 사립대인 추계예대가 한 해 평균 등록금 923만9000원으로 가장 높았다. 2위는 919만5000원을 기록한 연세대였고 경기 소재 사립대인 한국공학대가 903만5000원으로 뒤를 이었다. 4위는 881만8000원을 기록한 신한대, 5위는 874만6000원인 이화여대였다.
서울 주요 대학의 평균 등록금 액수는 한양대(856만5000원), 성균관대(845만 원), 홍익대(843만7000원), 고려대(834만8000원) 등의 순이었다. 서울대는 평균 등록금 603만5000원으로 146위를 기록했다. 반면 전국에서 가장 등록금이 저렴한 대학은 무료인 광주가톨릭대였다.
김남석 기자 namdol@munhwa.com
09.04 고시엔 우승에서 우리가 놓친 진실
고교의 축구·야구팀 보유 비율
일본은 축구 80%, 야구 76%
한국은 각각 8%, 4%에 불과
단순히 스포츠만의 문제 아냐
유년시절 운동과 팀의 경험은 신체 넘어
사회적 역량 발전의 장
입시만 올인한 우리, 제정신인가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열흘 전쯤 도쿄 출장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온통 고시엔 결승전 얘기뿐이었다. 호텔방에 돌아와서 본 하일라이트는 드라마 자체였는데, 거기서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라는 타이틀이 민망할 정도로 초특급 해설자들이 나와서 경기 분석을 하고 있었다. 고시엔은 그 자체가 일본 국민의 축제 같았다.
한국 언론이 이웃 나라 고교 야구 결승전을 대서특필한 이유는 우승팀인 교토국제고가 재일교포들이 세운 학교이기 때문이다. 고시엔은 매 경기가 끝나면 이긴 팀이 도열한 가운데 그들의 교가를 틀어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는데, 마침 교토국제고의 교가가 한국어 가사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한국 고교팀이 우승을 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일본 고교야구대회가 한국에서 크게 조명된 것은 바로 이 교가 때문이다.
사실 놀라운 것은 교가만이 아니다. 전교생 160명의 작은 학교가 어떻게 3715팀이 참여한 토너먼트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할 만한 실력을 갖출 수 있었는지는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다. 일본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역사도 매우 뭉클하다. 게다가 진짜 고시엔 우승이라니! 출장 중에 만난 일본 교수들도 이번 우승은 일본 사회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라며 축하의 악수를 청했다.
어깨가 으쓱할 법도 한데 그러지 못했다. 우리 고교의 현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고시엔 본선에는 47지역의 총 3715팀의 치열한 예선을 거친 49교만이 참가했다. 엄청난 규모다. 반면 한국은 100개 정도의 고교야구팀이 활동 중이니 일본에 비해 37배 작은 수다. 인구 차이를 감안해도 규모는 15배 정도 작다. 축구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교 중 구기 종목 팀을 보유한 비율이다. 2021년 통계로 보면 일본 고교 축구팀은 3962개(우리는 190개)다. 일본 고교 수가 4887개이니 일본 고교 중 80%가 축구팀을 보유하고 있고, 76%가 야구팀을 꾸리고 있는 셈이다. 반면 한국은 단 8%만이 축구팀을, 단 4%만이 야구팀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한일 양국의 고교팀 스포츠 격차이다. 즉 우리 고교에서 팀 스포츠는 하나의 생활이나 문화가 아니고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다시 고시엔. 이렇게 많은 자기 지역 고교팀들 중 우승팀만이 고시엔 본선에 나서니, 가령 여름 고시엔 본선이 치러지는 8월은 모두가 자기 지역 공동체의 치어리더들이 된다. 실제로 이번에 교토국제고를 응원하기 위해 온 교토의 이웃 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의 열띤 응원이 카메라에 자주 잡혔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우리’의 축제가 된 것이다. 축제가 되는 순간 경기의 승패는 보너스가 된다.
팀 스포츠는 말 그대로 팀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장이다. 청소년기에 크고 작은 팀에 속해서 함께 경기를 뛴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 기량을 발전시킨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협동과 배려심과 같은 사회적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승리와 패배에서 오는 기쁨과 슬픔, 응원과 비난에서 오는 안도감과 좌절감, 잘함과 못함 때문에 느끼는 자존감과 열등감을 경험하는 감정 조율의 장이다. 게다가 자기 팀원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상대팀에 대해서까지 역지사지를 해볼 수 있는 공감의 연습장이다.
어린 시절에 ‘놀이’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성인이 되어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겪는다는 연구는 수도 없이 많다. 놀이는 감정의 출렁임을 경험하고 조율해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는 신체적으로 왕성하고 호르몬적으로 역동적이며 인지적으로 유연한 시기다. 이 시기에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팀 스포츠를 도려내고 청소년들을 경주마처럼 홀로 달리게 만든 우리 어른들은 제정신일까? 지속적인 단체 체육 활동이 인지 능력과 학습력을 높이고 스트레스를 완화하며 항우울제 기능을 한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어른들의 이런 판단은 심각한 오류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오도하는 심각한 범죄일 수 있다.
‘운동화를 신은 뇌’의 저자인 하버드 의대의 레이티 교수는 고등학교의 0교시 체육 수업이 학생들의 학습력 향상과 뇌 구조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며 운동이 신체뿐만 아니라 뇌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사실에 깊이 공감한 국내의 모 자사고 교장이 학교의 교육철학을 ‘체지덕’으로 삼고 전교생에게 운동부터 시킨 일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부모의 극심한 반대로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인생에서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부모들인데도 이런 반대를 하고 있다는 현실이 매우 초현실적이다.
조선일보 장대익 가천대학교 창업대학 석좌교수 · 진화학
09-04 딥페이크 범죄와 국회 책임
‘딥페이크(Deepfake)’로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딥페이크가 성 착취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고, 엄청난 피해 실태마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그 심각성과 위험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딥페이크는 명백한 범죄행위”라며 “뿌리 뽑아 달라”고 촉구하자 정부 관계부처, 경찰과 사법 당국이 앞다퉈 대책을 내놨다. 심우정 검찰총장 후보자도 “취임하면 디지털 성범죄 검사를 확대하고 경찰과 협조해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딥페이크의 위험성은 그동안 수없이 제기됐다. 수년 전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딥페이크가 악용될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당시 AP통신은 딥페이크 기술이 향후 1∼2년 안에 정치와 외교판을 뒤흔들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보도했고,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인공지능(AI)이 핵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딥페이크가 처음부터 ‘절대악(惡)’이었던 것은 아니다. 딥러닝을 활용한 영상과 이미지, 음성 기술은 큰 환영을 받았다. 영화 제작에서 사망한 배우를 다시 등장시키거나, 특정 배우의 젊은 시절을 재현하는 데 사용돼 호평받았다. 디즈니+의 ‘카지노’(2022)에서 60대의 최민식은 딥페이크 기술에 힘입어 자신의 30대 시절까지 직접 소화했다. 딥페이크와 음성 기술을 접목해 고 김현식과 김광석의 목소리를 부활시켰을 때는 많은 팬이 감격했다. 영화나 음악뿐 아니다. 교육에서도 딥페이크 기술은 가상현실(VR) 콘텐츠를 만들거나, 새로운 방식의 교육 자료를 제공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연예인들의 얼굴을 합성해 사기나 도박에 이용하고, 심지어 이런 가짜 이미지가 일반인들의 일상까지 파고들어 범죄에 악용되자 새삼 문제로 지적된 것이다.
그동안 딥페이크의 폐해를 적절히 제어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유튜버들은 죄의식 없이 불법 콘텐츠를 제작했고, 유통 플랫폼은 이게 마구 퍼지는데도 짭짤한 수익 앞에서 방조했다. 경찰과 사법 당국도 적극적이지 못했다. 진영 다툼에 빠진 국회마저 시급한 현안을 도외시하면서 결국 한국은 딥페이크 취약국 세계 1위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에 이르렀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대통령부터 관련 기관까지 일제히 딥페이크 엄단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히고 실행에 착수한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련 법률의 제정이다. 유럽은 지난 2월부터 플랫폼 기업에 불법 콘텐츠의 확산 방지 책임을 부과한 ‘디지털 서비스법’을 시행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우려해오던 미국도 최근엔 빅테크 기업의 무책임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성폭력처벌법과 정보통신망법 등에는 아직도 허위 영상물의 소지·구입·저장·시청 등을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뒤늦게 국회가 딥페이크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이게 하루빨리 입법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적어도 규정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딥페이크 자체는 죄가 없다. 이를 악용하고, 방조하고, 책임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있다.

문화일보
09-04 송전망·데이터센터 막는 ‘지자체 님비’
동해안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국도 7호선을 따라 위쪽에는 석탄화력발전소가, 아래쪽엔 원전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올봄부터 이곳 화력발전소들이 줄줄이 가동을 줄이거나 멈춰 섰다. 전기를 생산해도 수도권으로 실어 나를 송전망이 부족해서다. 동해안 지역의 전기 생산량은 최대 18GW인데 송전선로 용량은 11GW에 불과하다. 매년 신기록을 써내려가는 폭염과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확대로 수도권의 전력 수요는 치솟고 있지만 송전망이 부족해 지방에 발전소를 짓고도 놀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론 눈치 보느라 변전소 증설 막은 하남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전력은 당초 2019년 준공을 목표로 동해안과 수도권을 잇는 8GW 용량의 송전선로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강원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5년 넘게 지연된 데 이어 최근 환경단체들이 행정소송을 내면서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여기에다 이 송전선로의 종점 역할을 하는 동서울변전소 증설을 두고 인허가권을 쥔 경기 하남시가 지난달 퇴짜를 놨다. 수도권 전력난 해소를 위한 국책사업이 수도권 지자체의 반대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하남시는 전자파가 주민 건강을 해칠 수 있고 의견 수렴 절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증설을 불허했다. 초고압 송전망에 대한 주민 불안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기우에 가깝다. 변전소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에서 측정된 전자파는 편의점 냉장고보다 낮고, 변전소를 증설하면서 설비를 실내로 옮기면 전자파가 55% 이상 줄어든다고 한다. 서울 시내에도 2km마다 하나씩 변전소가 있다. 이런데도 하남시가 주민을 설득하기는커녕 반대 여론에 편승해 송전망 건설에 제동을 건 것은 전형적인 님비(NIMBY) 행태다.
2008년 밀양 송전탑 사태 이후로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실력 행사에 나서면 지자체가 이들 눈치를 보며 인허가를 주저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서해안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경기 남부로 보내기 위한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는 주민 민원과 지자체의 공사 중지 명령 등으로 소송전이 벌어져 12년 넘게 준공이 늦춰졌다. 인천 송도 바이오클러스터에 전력을 공급할 송전선로 사업도 5년 넘게 지연되고 있다. 최근 10년간 국내 발전설비가 55% 늘 때 송전망은 고작 9% 증가한 배경이다.
수도권 데이터센터 절반이 ‘지자체 암초’ 걸려
주민 반대와 지자체의 비협조로 몸살을 앓는 건 데이터센터도 마찬가지다. 경기 고양시는 덕이동 데이터센터의 착공 신고를 지난주 최종 반려했다.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가정용 전기밥솥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사업자가 소명했지만, 전자파 유해성을 앞세운 주민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비슷한 이유로 김포시는 3년 전 건축 허가를 내준 데이터센터에 대해 최근 착공을 불허했다. 수도권에서 인허가를 받은 데이터센터 33곳 중 절반 이상이 차질을 빚고 있다.
‘산업 혈관’에 해당하는 전력망과 AI 시대에 필수인 데이터센터 확충은 더는 늦출 수 없는 생존의 문제다. 이대로라면 각국이 뛰어든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에서 뒤처지는 건 물론이고 첨단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도 전력 공급이 안 돼 공장을 돌리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이 닥칠 수 있다. 국가 핵심 인프라 건설의 발목을 잡는 ‘님비 지자체’에 확실한 불이익을 줘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전력 수급의 미스매치와 전자파 포비아는 한전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중앙정부가 직접 합리적 보상 방안을 마련해 주민 갈등을 중재하고, 지자체와 각 부처로 나뉜 인허가 절차를 일원화해 전력망 구축 속도를 높일 토대를 서둘러 갖춰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9-05 응급실 파행 ‘민낯’과 해법
권도경 사회부 차장
응급실이 파행 위기다. ‘추석 응급실 위기설’도 파다하다. 4년 전과는 천양지차다. 2020년 전공의 총파업 당시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마비되진 않았다. 생사를 오가는 환자를 맡는 의료진은 남겨뒀다. 낮에는 파업에 동참해도 밤에는 환자를 보살피던 의사도 적지 않았다. 이번엔 중환자실은 비워졌고, 응급실은 ‘뺑뺑이’ 사태로 위태롭다. 응급실 의사들마저 ‘줄사표’를 던졌다. 처우가 좋은 대형병원이나 개원가로 이직하기 위해서다. 몇 년 전부터 중형급 병원에선 흔했던 일이다. 이젠 지역대학병원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들이 빠져나간 지역병원 응급실은 황폐해졌다. 그나마 응급실이 무너지지 않는 건 책임감 강한 의사들이 버텨준 덕분이다.
응급실 의사들에겐 독특한 문화가 있다. 이들은 여러 명이 함께 이직한다. 당직 등 근무 편의 때문이다. 집단으로 움직이다 보니 연봉 협상력은 높아졌다. 요즘 시세는 연봉 5억 원대다. 응급실 의사를 뽑지 못하는 지역병원은 상당수다. 응급실 의사들이 전국 각지 병원을 돌면서 연봉만 올렸다는 의료계 내부 비판도 많다. 상업화된 배경에는 근무 형태가 한몫했다. 통상 응급실 의사들은 24시간 근무 후 3∼4일 쉰다. 다른 진료과처럼 매일 출근하지도 않고, 돌봐야 할 입원환자도 딱히 없다. 병원과 환자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 힘든 구조다. 병원을 쉽게 옮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잦은 이직은 응급실 파행의 단초가 됐다. 수도권과 지역 의료 격차도 커졌다. 응급실은 몇 년 전부터 위기였다. 전공의 이탈에 전문의 집단사직까지 겹치자 문제는 커졌다. 이는 의료계 고질적인 병폐와도 맞물린다. 주된 원인은 배후 진료를 맡는 필수의료진이 부족한 탓이다. 전공의 집단사직 후 대형병원에서 경증환자 등 외래진료 비중은 금세 회복됐다. 본연의 목적인 응급·중증 치료를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았다는 얘기다. 대형병원이 응급·중증환자에게 집중하려면 외래진료를 최소화해야 한다. 환자를 제때 회생시키려면 흉부외과나 신경외과 등 배후 진료과의 업무 부담을 덜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1차 의료 강화도 필요하다. 응급실 의사는 대형병원에서 1차 의료 기능을 맡고 있다. 이들은 환자가 오면 중증도를 분류한 후 배후 진료과로 넘긴다. 지역사회에서 1차 의료기관인 병·의원이 제 역할을 다 한다면 경증환자가 응급실에 갈 이유는 사라진다. 독립적인 진료를 위해 의대 졸업 후 임상 수련을 의무화하는 ‘진료면허’ 도입도 시급한 대목이다.
응급실은 중증환자에겐 마지노선이다. 의사사회에서 응급실 파행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은 없다. 일부 의사단체는 응급실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추석 연휴 휴진을 독려 중이다. 마치 인명 피해가 생겨 정부가 비난을 받고 무릎 꿇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다. 미국의사협회 윤리지침엔 ‘진료 중단은 비윤리적인 행위’라며 ‘의사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만큼 다른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7개월째 의사단체는 모든 걸 반대만 하고 있다. 의사들이 반대하면 정부가 제대로 일하는 것이라는 쓴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정부도 시간만 보내선 안 된다. 응급실 파행은 의료개혁의 당위다. 원칙을 훼손치 않는 정공법이 필요한 때다.

문화일보
09.05 ‘온대→아열대’ 변하는 대한민국, 열대 사탕수수도 심는다
기후변화가 바꾼 한반도 작물 재배
지난달 21일 오후 제주시 한림읍의 제주농업기술원 서부농업기술센터. 연구용 온실 시험장에 들어서니 사람 키만 한 사탕수수가 길고 풍성한 잎사귀를 늘어뜨리며 자라고 있었다. 한반도 기후변화의 최전선인 제주도에서 열대작물 재배 가능성을 시험하는 현장이다. 올여름 같은 찜통더위는 사탕수수 성장에 유리한 조건이다. 고대 인도가 원산지인 사탕수수는 덥고 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30년 뒤 남한 기후 절반은 아열대
겨울 제외하면 더운 날씨 이어져
찜통더위에 잘 자라는 사탕수수
제주도에서 재배 가능성 시험 중
아열대 과일, 고수익 작물로 인기
감귤 줄고 망고·패션프루트 늘어

▲지난달 21일 제주시 한림읍의 서부농업기술센터에서 현대양 농촌지도사가 열대성 작물인 사탕수수의 노지 재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정완 기자
지금은 베트남 등을 다녀온 한국 관광객들이 소셜미디어에 사탕수수 음료 체험담을 올린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만일 제주도에서 사탕수수 재배에 성공한다면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에게 색다른 경험이 될 것으로 제주농업기술원은 기대한다. 바닷가 카페 등에서 고객의 주문을 받아 즉석에서 사탕수수의 즙을 짜내면 이국적인 느낌의 음료로 판매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러면 제주도 농가에는 새로운 소득작물이 생기는 셈이다.
제주 평균기온 80년간 3도 상승
아직은 본격적인 재배에 앞선 초기 연구 단계다. 원래 제주도는 열대가 아닌 아열대 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사탕수수 재배는 어렵다는 게 농업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작물 재배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1940년대 섭씨 14도 안팎이었던 제주도 평균기온은 2020년대 들어 17도를 넘어섰다. 지난 80년 동안 평균기온이 3도가량 상승한 셈이다. 현재 경남 거제도 등에서도 체험용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있지만 생육 기간이나 품질 기준 등 재배기술이 정립되지 않았다고 제주농업기술원은 전했다.
현대양 제주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는 “대나무처럼 생긴 사탕수수의 긴 줄기를 잘라내 즙을 내면 달콤한 음료가 된다. 그냥 마시면 너무 달아서 물과 얼음으로 희석하는데 한번 마셔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름철 바닷가에서 달고 시원한 음료로 팔면 관광객 사이에서 인기를 끌 것”이라며 “어떻게 하면 사탕수수의 수확 시기를 관광 성수기에 맞출 수 있느냐가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제주도의 기상 여건을 고려하면 사탕수수는 서리가 내리기 전인 10~ 11월까지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제주도 관광의 최성수기는 7~8월 휴가철이다. 갓 수확한 제주도 사탕수수를 여름철 관광객에게 제공하기에는 계절이 맞지 않는다. 온실에서 난방하면 겨울에도 사탕수수를 키워 수확 시기를 앞당길 수는 있다. 이 경우 생산 비용이 커지는 만큼 경제성을 따져봐야 한다.
제주 서부농업기술센터는 지난 4월 초순에는 난방 없는 온실에, 지난 5월 초순에는 노지(맨땅)에 사탕수수를 심었다. 처음엔 성장이 더뎠지만 지난달 들어선 성장 속도가 빨라진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고 한다. 아직 갈 길은 많이 남았지만 추가 연구를 통해 재배 가능성이 확인되면 우수한 품종을 선별해 농가에 시범적으로 보급할 계획이다. 현 지도사는 “늦어도 8월 말께 사탕수수 수확이 가능하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에 난방하는 온실에서 모종을 키웠다가 봄이 되면 밭에 옮겨 심는 방법도 연구해 볼 것”이라고 전했다.
아열대 과일 재배면적 5년간 72% 늘어

▲다양한 아열대 과일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파파야, 패션프루트, 애플망고. 중앙일보
한반도가 더워진다. 이 땅에서 나는 농작물도 변화한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 따르면 감귤을 제외하고 망고·파파야·패션프루트(백향과) 등 아열대 과일의 재배 면적은 2022년 기준 188.8㏊였다. 5년 전(109.5㏊)과 비교하면 72% 급증했다. 아열대 과일 재배지는 제주도나 남해안으로 한정되지 않고 경기도 일부 지역까지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농진청은 2050년대에는 남한 지역의 절반 이상(55.9%)이 아열대 기후대에 속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 30년간(1981~2010년)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계산한 기후변화 ‘고탄소 시나리오’(SSP5)다. 국제 사회가 온실가스를 제대로 감축하지 못했을 경우를 가정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2090년대에는 남한 지역 대부분(97.4%)이 아열대 기후대로 변할 것이란 분석이다.
온실가스 감축이 어느 정도 이뤄진다는 걸 가정한 시나리오(SSP2)도 있다. 여기선 2050년대에 남한 지역의 절반 이상(54.9%), 2090년대에 남한 지역의 80.9%가 아열대 기후대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월 평균기온 10도 이상인 기간이 연간 8개월 이상인 지역을 아열대 기후대로 정의했다. 해마다 3개월 정도의 겨울을 제외하면 더운 날씨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심교문 농진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연구관은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대로 변한다고 연중 따뜻한 기온이 계속되는 건 아니다. 겨울에는 차가운 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으로 기온이 급격히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극한적인 기온 변화에 대응하는 작물 재배 기술의 연구와 보급이 시급하다”며 “지난해 사과의 작황 부진으로 ‘금사과’란 말이 나왔던 것도 기온의 변동 폭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산 망고, 수입산보다 달고 신선”
아열대 과일 중에선 망고와 패션프루트를 재배하는 농가가 빠르게 늘고 있다. 우리나라 겨울 기온도 비교적 잘 견디면서 시장에서 고수익 작물로 인정을 받고 있어서다. 가격은 수입산보다 다소 비싸지만 검역 절차가 필요 없는 만큼 소비자가 신선한 과일을 맛볼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농진청은 지난해 기준으로 망고의 재배 면적(92.6㏊)은 바나나(20.6㏊)의 4.5배, 패션프루트(30.2㏊)는 바나나의 1.5배라고 전했다.

▲제주시 오등동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아열대과수 시험 재배지에서 연구원들이 애플망고의 생육 상황을 조사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제공
지난달 21일 제주시 오등동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를 찾아갔다. 김성철 농업연구관의 안내로 온실 시험장에 들어서니 빨갛게 익은 애플망고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열대성 작물로 국내 기후 환경에 적합한 애플망고(품종명 어윈)의 재배 기술을 연구하는 현장이다. 껍질을 벗기니 달콤한 과즙을 머금은 노란 과육이 드러났다. 외국에는 노란 껍질의 열대성 망고도 있지만, 국내 농가에선 난방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재배를 권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 연구관은 “수입산 망고는 병해충 방지를 위해 덜 익은 상태에서 수확하거나 고구마를 찌는 것처럼 가열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만큼 수입산은 국산 망고보다 단맛도 덜하고 신선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보카도 재배도 시험했지만 국내에선 생산성이 매우 낮은 것을 확인했다. 안 되는 작물의 정보를 농가에 제공하는 것도 연구소의 임무”라고 덧붙였다.
다른 온실에선 파파야도 시험 재배를 하고 있었다. 파파야에 함유된 천연 소화 효소(파파인)는 음주 후 숙취 해소에 도움을 주고 화장품 원료로도 쓰인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파파야는 망고보다 저온에서 잘 견디기 때문에 난방비가 비교적 적게 들어간다. 그만큼 생산성은 좋지만 아직은 국내 소비자의 입맛에 낯선 편이란 게 단점으로 꼽힌다. 전지혜 연구소장은 “다문화 가정도 늘어나고 한국인의 입맛도 세계화된 만큼 파파야도 충분히 성장 잠재력이 있다고 본다. 동남아에선 파파야를 채소로 많이 먹지만 국내에선 디저트용으로 먹기에 적합한 품종을 개발 중”이라고 소개했다.
◆감귤 생산 꾸준한 감소세…한라봉 등 만감류로 대체
국내 아열대 과일의 대표 주자인 감귤은 오히려 재배면적이 줄고 있다. 농가의 수익성 부진과 소비자 기호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줬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감귤 재배면적은 지난해 2만2100㏊였다. 2000년(2만6800㏊)과 비교하면 18% 감소했다. 감귤의 연간 생산량은 2007년 77만8000t으로 정점을 찍은 뒤 지난해에는 61만5000t으로 21% 줄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2028년 무렵에는 연간 생산량이 60만t을 밑돌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엔 감귤의 주생산지인 제주도에서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감귤밭을 없애고 다른 작물로 바꾸도록 유도한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제주도의 감귤 재배 면적은 2021년을 고비로 2만㏊ 아래로 내려갔다. 반면 전북 정읍이나 전남 고흥·완도, 경남 거제·통영 등 내륙 지역의 감귤 재배 면적(311㏊)은 최근 4년간 40% 넘게 늘었다고 농촌진흥청은 전했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감귤 재배지도 점차 북상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반 감귤보다 수익성 높은 한라봉·천혜향 등 만감류를 재배하는 농가는 늘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전체 감귤 재배면적에서 만감류 비중은 지난해 21.4%를 차지했다. 2015년(10.3%)과 비교하면 두 배 수준으로 비중이 커졌다. 만감류는 만다린 계통의 감귤과 오렌지의 교배로 만든 품종을 가리킨다. 주로 일본에서 개발한 품종을 국내 농가에 도입한 뒤 국내 상품명을 붙여 판매하고 있다.

중앙일보 주정완 논설위원
09-06 “100% 순혈 열도의 소녀들”… 일본女 원정 성매매 포항·제주까지
“한국어 잘한다” 버젓이 광고
일본 여성들 한국 관광 겸 돈벌이
인터넷에 나이·신체 소개도

▲일본인 전문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는 업체가 텔레그램 봇으로 제작한 ‘유흥맵’. 지역별로 업소 현황 등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텔레그램 캡처
‘열도의 소녀들’이란 문구로 광고하며 서울 강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성매매 조직이 지난 6월 재판에 넘겨진 후에도 유사 업체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이들은 부산·포항·제주 등 전국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데, 일본 여성들이 여행으로 한국에 와 성매매에 뛰어드는 ‘관광 성매매’가 ‘전국구 유행’이 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
6일 인터넷 검색창에 ‘일본인 ○○’ 등을 검색하니 일본인 전문 성매매 업소 사이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일본 여성들의 사진과 함께 나이와 신체 스펙 등을 소개했다. 일본인 여성을 두고 “한국어 패치 완료(잘함)” “어렵게 데려온 아이들이니 잘 다뤄주세요”라고 광고하기도 했다. 높게는 1시간당 50만 원 등 ‘가격표’도 올라와 있다. 한 업체에 연락해보니 “100% 순혈 일본인이고, 전문 에이전트가 현지에서 엄선해 데려왔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또 수사나 취재를 의식한 듯 명함 사진이나 다른 업체 출입 기록을 요구했고, 구체적으로 질문을 이어가자 연락을 끊었다.
이러한 ‘일본인 업소’들은 애초 시장이 큰 수도권 지역에서만 관찰돼 왔지만, 최근에는 부산·포항·제주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포항 상륙’이라면서 오픈 이벤트를 광고하는 등 지방에 자리 잡은 업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음지 문화의 총본산으로 여겨지는 텔레그램에서도 일본인 업소 채널이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텔레그램 ‘봇’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예약 가능한 업소를 나타내는 ‘유흥맵’이란 전국 지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성매매를 오는 배경에는 엔저 현상과 ‘한류’가 있다는 설명이다. 상대적으로 원화 가치가 높아지면서 한국 여행을 하며 ‘용돈 벌이’를 하는 ‘관광 성매매’가 일본 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일본 유흥업계 관계자는 “특히 한국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일본인 여성들에게 중간 모집책이 ‘한국에서 호화로운 관광을 즐길 수 있다’고 유혹하곤 한다”고 전했다. 서울경찰청 풍속단속계 관계자는 “베트남, 태국 등에서 여성들이 들어오던 예전에 비해 일본이라는 선진국에서도 ‘원정’을 올 만큼 한국의 성매매 산업이 나쁜 의미로 번창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전수한·김린아 기자
09.06 딥페이크 고통 지옥인데 정책 노력은 한가하기만

▲최근 국내에서 딥페이크 영상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일파만파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30일 경찰이 단속과 예방에 초비상이 걸렸다. 이날 대전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한 대전경찰청 소속 고광표 경사가 학생들을 상대로 딥페이크 특별 범죄 예방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딥페이크 성범죄는 다른 사람의 얼굴 사진을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사진이나 동영상에 합성하는 범죄를 말한다. [프리랜서 김성태] 2024.08.30.
피해 급증 방치하더니 장관 공석에 법안은 재탕
세계 성 착취물 피해자 53%가 한국, 대책 시급해
연일 새로운 딥페이크 범죄가 터진다. 어제도 학생 10명과 교사 1명의 성 착취물을 만들어 팔아 온 고교생이 경찰에 붙잡혔다. 여성가족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 접수된 허위 영상물 피해는 2019년 144건에서 지난해 423건으로 증가했고, 올 상반기에만 726건이 접수됐다. 더욱 끔찍한 건 한국 여성의 피해가 해외로 확산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사이버보안업체 시큐리티히어로는 지난해 7~8월 전 세계에 유포된 딥페이크 성 착취물 9만여 건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의 53%가 한국인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해외 언론도 한국의 딥페이크 피해 실태를 잇따라 보도하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우리 정부와 국회는 뭘 하고 있었는가.
지난 4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은 장관이 6개월째 공석인 여성가족부를 질타했다. 국회도 남 탓할 처지가 못 된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의원들은 법률 개정안을 쏟아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22건을 포함해 무려 33건을 발의했다. 급조하다 보니 내용이 비슷하고 21대 국회 때 발의했다가 폐기된 법안과 대동소이하다.
법이 범죄를 못 따라가자 피해자가 자신을 구제해야 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정부에 신고해도 피해 영상물 삭제가 신속히 이뤄지지 않는 바람에 피해자가 수백만원씩 내며 사설 업체를 통해 지워나가는 실정이다. 관계 기관이 성 착취물을 즉시 삭제하고 가해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이 시급하다. 여가부가 더불어민주당 김남희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접수된 불법 촬영물 삭제 요청 94만 건 가운데 26만 건 넘게 아직 삭제되지 않고 있다니 피해자의 고통이 어떻겠는가.
처벌 강화도 필수다. 지난 4년간 딥페이크 성 착취물 제작과 유포로 기소된 87명 중 34명(39%)이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한다. 성 착취물을 제작, 소지만 해도 처벌하도록 법을 바꾼 영국을 참고할 만하다. 범죄 영상물의 온상이 되는 텔레그램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해외에 서버가 있어 수사의 어려움이 있겠으나 창업자 파벨 두로프를 체포한 프랑스의 사례를 분석하면 대안이 나올 수 있다. 최근 국내의 텔레그램 사용자가 오히려 급증했다니 실효성 있는 대비책이 절실하다.
딥페이크 범죄는 관련자 대부분이 10대다. 그래서 처벌보다 예방이 절실하다. 경찰이 올해 들어 지난 7월까지 검거한 딥페이크 범죄자 178명 중 10대 청소년이 73.6%였다. 피해자 역시 절반 이상이 10대다. 어린 시절 잘못된 판단으로 평생 나락에 빠지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 정부와 국회가 시간을 허송하는 동안 성 착취물은 기하급수적으로 유포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중앙일보 사설
09.06 ‘여의도 대통령’과 ‘불쾌한 골짜기’
“처음엔 진짜처럼 보였던 손이 사실은 인공 의수(義手)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섬뜩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악수하면 뼈 없는 그립감과 차가운 감촉에 깜짝 놀랄 수 있다. 손은 기괴하게 느껴지고 친밀감은 사라진다”(『언캐니 밸리』).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로봇이 실제 인간과 같은 모습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반응이 공감에서 불쾌감으로 급전직하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의 상상은 짧은 에세이로 1970년 일본의 한 무명 저널에 실렸다.

▲지난달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로봇 컨퍼런스에서 엑스로보츠가 개발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윙크하는 모습. 연합뉴스
당시엔 그다지 빛을 못 보던 ‘기괴한 감정의 하강 곡선’은 나중에 ‘언캐니 밸리(불쾌한 골짜기)’로 번역되고, 로봇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목을 끌게 됐다. 그 후 반세기, 인공지능(AI) 기반 이미지 합성 기술인 딥페이크는 일순에 모리의 가설을 뒤흔들었다. 진짜와 가짜를 제대로 구별해내지 못하는 현실이 도래하면서다.
2022년 영국 랭커스터대·미국 UC버클리대 연구진이 315명을 대상으로 실험했더니 실제 인물 사진과 합성 사진을 식별해낸 사람은 48.2%로, 홀짝 게임 확률에도 못 미쳤다. 또 다른 223명에겐 어느 쪽이 신뢰감을 주는지 물었더니 가짜 얼굴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 가장 믿을만하다고 지목된 3개가 모두 합성 사진이었다. 연구진은 “딥페이크가 음란물·사기 범죄에 악용돼 개인과 사회, 민주주의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다”며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딥페이크의 부작용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와 그의 팬들이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를 표하는 것처럼 조작된 가짜 사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들 사진을 지난달 18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나는 받아들인다”고 썼다. 사진 소셜트루스 캡처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미국 대선은 가짜 사진이 급속히 돌면서 혼란을 부추긴다.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자랑스럽게 소셜미디어에 띄운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트럼프 지지 사진은 조작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할리우드 유명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가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이름이 적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확산했는데 이 역시 가짜임이 드러났다. 비영리 단체인 ‘뉴스 리터러시 프로젝트’는 허위 주장과 가짜 지지가 뒤섞인 AI 생성물이 판을 친다며, 500건이 넘는 조작 사례를 공개했다. 그 중엔 온라인 조회 수가 1000만 건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텔레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선 여성 사진만 있으면, 불법 합성 이미지를 자동으로 만들어 준다는 딥페이크 채널이 활개 친다. 길거리·대중교통에서 찍힌 여성 사진이 범죄의 대상물로 마구 흘러든다. 22만명, 40만명씩 가입된 채널의 존재도 드러났다. 더 심각한 건 딥페이크 음란물 범죄가 청소년층으로 급속히 확산한다는 점이다. 가해자의 75.8%, 피해자의 60%가 미성년자라는 수사 기관의 최근 통계는 그런 우려를 더 한다.
시민의 불안은 날로 증폭된다. 도심 집회마다 “경찰은 해외 서버라서 못 잡는다는 핑계를 댄다” “딥페이크는 물리적 접촉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 수위가 낮다” “N번방 사건에도 당국의 인식이 변한 건 없다” “입법기관은 반성하고 국가는 책임져야 한다” 등 대응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한다.
딥페이크 합성사진·음란물 ‘시끌’
‘AI 육성·규제 기본법’ 지각 시동
여권은 물론 거야도 책임 못 피해
현실이 이런데도 우리나라는 ‘AI 기본법’ 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산업 육성은 물론 부작용에 대한 규제책도 무방비 상태인 셈이다. 정부를 채근해 입법을 서둘렀어야 할 국회는 손을 놓다시피 했다. AI 기본법은 지난 21대 국회 때 소관 상임위원회인 과학기술정보방송 통신위원회(과방위)에서 공전만 거듭하다가 자동 폐기됐다. 과방위는 22대 국회 들어서도 석달여 동안 20번 넘게 전체회의를 열었지만, 방송 정쟁에만 매몰됐다. 텔레그램 딥페이크가 사회 문제로 떠들썩해지자 부랴부랴 이번 주부터 법안 논의를 시작했다. 여성가족위원회(여가위)도 엊그제서야 긴급 현안질의를 시작으로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유럽연합이 이미 AI 법을 승인(5월)하는 등 선진 각국이 입법화에 속도를 내는 것과 대비된다.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범죄영상물 어떻게 근절하 것인가' 토론회 모습. 뉴시스
민생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론 정부·여당에 있겠지만,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 또한 비껴갈 수 없다. 과방위 여야 구성은 7대13, 여가위는 6대11이다. 거대 야당 허락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압도적 여소야대 구도다. 지난 2일 지각 개원식을 한 22대 국회는 거야의 능력 유무를 낱낱이 따져보는 무대가 될 터이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사태는 그 일면일 뿐이다.
뭐라도 할 줄 알고 표를 몰아줬는데 어느 순간 무능력함을 절감할 때, 유권자의 낭패감은 깊고 깊은 불쾌한 골짜기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딥페이크로 그런 진실은 가릴 수 없기에⋯.
중앙일보 임종주 정치에디터
09.06 파리올림픽, 프랑스혁명, 그리고 대한민국
1986년 임춘애 선수가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이 됐을 때 “라면만 먹고 달렸어요”라는 신문 기사 제목이 온 국민을 울렸습니다. 훗날 임춘애 선수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라면보다 삼계탕을 더 많이 먹었다”고 열심히 해명했지만, 당시 그녀의 지친 표정과 여린 몸은 ‘라면만 먹고 달렸다’는 신문 기사 제목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했습니다.
그 시절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막대한 포상이 뒤따르는 금메달을 따는 것은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그들과 별로 다를 것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던 많은 국민이 그들의 성취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반면에 금메달을 놓친 선수들은 시상대에 올라서도 ‘국적(國賊)’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죽상을 했습니다. 언론은 또 그들을 보면서 “동메달을 따도 즐거워하는 선진국 선수들처럼 얼굴을 좀 펴지 못하느냐?”고 타박했습니다.
이번 파리올림픽에 나선 우리나라 선수들은 달랐습니다. 다들 대갓집 자제들처럼 허여멀건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잘생기고 예쁘고 체구는 듬직한지…. ‘라면’이 아니라 ‘비후스떼끼’만 먹고 자란 젊은이들 같았습니다.
파리올림픽의 ‘선진국 국민들’
무엇보다도 경기에 임하는 표정들이 밝았습니다. 금메달을 못 땄다고 울고불고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도, 올림픽이라는 무대에 서본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듯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경기 자체를, 아니 자신들의 인생을 즐기는 듯했습니다. 88 서울올림픽 무렵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 선수들에게서 봤던 것 같은 바로 그런 표정들이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선수는 여자 탁구의 신유빈 선수였습니다. 8월 3일 탁구 여자 단식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의 하야타 히나 선수에게 2대 4로 패한 신 선수는 환하게 웃으며 하야타 선수에게 다가가 포옹하고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나를 이긴 상대들은 그만큼 나보다 더 오랜 기간, 묵묵하게 노력했던 선수들이다. 그런 점은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 나도 더 오랜 기간, 묵묵하게 훈련해야 한다” “하야타를 오랫동안 봐왔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간절하게 경기했다. 그런 부분을 인정해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모습이 참 의젓해 보였습니다. 국제경기에서 일본과 맞붙을 때면 독립전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결연하게 ‘승리’를 다짐하고, 패하면 ‘나라를 잃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옛날 선수들과는 굉장히 달랐습니다.
메달을 따오는 종목도 확 달라졌습니다. 얻어맞고 몸싸움하는 종목이 아니라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종목들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이런 변화는 박태환이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무렵부터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달라지고, 세대가 달라진 것입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50대 이상이 ‘후진국에서 태어난 국민’이라면 그들은 ‘선진국에서 태어난 국민’들인 것입니다.
여전히 정치는 엉망이고, 세상은 어지럽지만, 그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기성세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아니,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꼰대스러운’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못나고 낡은 생각들, 역사적·문화적·경제적인 부채(負債)를 물려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들은 자유롭게 날개를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혁명의 광기를 고발한 귀스타브 르봉
반면에 파리올림픽 개막식 장면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합니다. 특히 목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가 떼로 등장하는 대목이 영 거슬렸습니다.
1980년대를 살았던 소위 586 세대 중에서는 “프랑스인들은 왕의 목을 잘라본 사람들”이라고 감탄을 섞어 말하거나, “우리는 혁명 한 번 못 해본 민족”이라고 속상해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막식에서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이 나오는 장면들을 보며 ‘프랑스인들은 정말로 왕·왕비의 목을 자른 역사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역사라고 내세우고 싶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인이면서도 그 ‘혁명의 역사’를 통렬하게 비판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1841~1931년)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군중심리》로 유명한 그는 《프랑스혁명과 혁명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심리학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프랑스혁명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신화(神話)들을 가차 없이 벗겨냈습니다. 르봉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동이 현실을 경멸하면서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사건들의 물줄기를 바꾸어놓겠다고 나설 때, 그 행동은 언제나 해롭다. 사회를 갖고 마치 실험실에서 도구를 갖고 실험하듯 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은 그러한 사회적 실수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안겨주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혁명 동안에 군중의 활동을 보면 교훈적인 구석이 많다. 그 기간의 군중의 역사는 모든 미덕의 뿌리를 민중의 혼에서 찾는 정치인들이 잘못되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사실들은 정반대로 국민이 문명의 바탕인 사회적 제약에서 풀려나 본능적인 충동을 따를 경우에 아주 쉽게 고대의 야만 상태로 빠져버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르봉이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혁명기의 다양한 인간군상-혁명의 지도자와 군중들-의 모습, 혁명으로 인해 아노미 상태에 빠진 프랑스 사회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박근혜 탄핵 사태 이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야만이나,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팬덤 정치의 광란(狂亂)들과 판박이기 때문입니다. 혁명 당시 급진과격파였던 자코뱅파에 대한 르봉의 기술(記述)도 눈길을 끕니다.
“자코뱅파는 자신의 믿음을 이성의 바탕 위에 세우기는커녕, 자신의 믿음에 맞춰 이성을 다듬는다.… 자코뱅파가 이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언제나 극히 제한적인 세계관 때문에 그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열정적인 충동에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코뱅의 심리는 특히 편협하고 열정적인 성격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곧 믿음 외에는 그 어떤 비판과 고려도 용납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암시한다.… 그가 세상사의 관계를 오직 피상적으로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도 그가 상상 속에서 그린 터무니없는 이미지들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어떤 믿음을 확신하면서 그 믿음의 벽에 갇혀 사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코뱅파는 그곳을 절대로 달아나지 못한다.”
주사파(主思派), 그리고 ‘있었던 사실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있어야 마땅했다고 자신이 상상하는 역사’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어떤 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르봉은 차가운 머리로 역사와 현상을 해부하는 심리학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1세기 넘게 혁명과 반(反)혁명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유럽 제1의 강대국 자리를 내주고 쇠락해버린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던 가슴 뜨거운 애국자였습니다. 아마 하늘나라에서 이번 파리올림픽 개막식을 보았다면, 르봉은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조국 프랑스여, 내가 책을 쓴 지 100여 년이 지났건만, 너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후손들에게 어떤 조국을 물려줄 것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파리올림픽에서 활약한 우리 젊은 선수들이 상징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그동안 참으로 빛나는 성취를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그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과 정통성에 한사코 상처를 내려는 자들 때문에, 이 나라가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아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지금 우리는 후손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주려는 것일까요? ‘삐약이’ 신유빈 같은 젊은이들이 마음껏 웃으며 꿈을 펼칠 수 있는 나라일까요? 아니면 잘린 머리가 거리를 뒹구는 미친 나라일까요?⊙
글 :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ironheel@chosun.com 월간조선 09월 호
09.07 '의대 증원 원점 재논의'가 의료 정상화 물꼬 트길

▲추석 연휴를 앞두고 전국 병원 곳곳이 응급실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가운데 5일 주 1회 성인 진료 중단을 알린 서울 양천구 이대목동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에 관련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대통령실과 여야는 6일 의료 대란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대통령실은 2026년도 의대 증원 규모(2000명)를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의료계가 합리적 추계를 갖고 대화 테이블에 나온다면 얼마든지 정원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야·의·정 협의체를 운영하자”는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의 제안에 대해서도 긍정적 입장을 밝혔다. 더불어민주당도 “즉시 협의체를 가동하자”고 했다. 의대 증원 문제로 7개월째 이어져온 의료 대란을 해결할 계기가 마침내 마련된 것이다.
지금 의료 현장은 전공의 이탈 장기화로 비정상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지방뿐 아니라 일부 수도권 대형 병원 응급실까지 제한 운영에 들어갔고 ‘응급실 뺑뺑이’로 인한 피해가 커지고 있다. 추석 연휴 동안 의료 공백도 우려된다. 하지만 정부와 의료계는 그동안 대화 없이 상대와 싸워 이기려고만 했다. 정부는 의료 개혁은 물러설 수 없는 과제라며 정원 조정에 경직적 태도를 보였다. 응급실 진료 차질은 과장됐다며 시간만 보냈다. 일부 의사들은 큰 인명 피해나 의료 대란이 일어나 정부가 백기 투항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전공의들은 아예 대화의 문을 닫았고 의사협회는 정치적 구호만 외쳤다.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의료계가 책임 있는 대표를 여·야·의·정 협의체에 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지금 의료계는 전공의와 의사협회, 의대 교수, 병원협회 등으로 분열돼 있다. 누구와 협상을 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대표가 나와 합의를 이룬다 해도 의료계 다른 측에서 거부할 수도 있다. 의료계가 지혜를 모아 사태를 끝내는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 이번 협의체는 전공의 처우 개선과 수가 조정, 의사 사법 리스크 경감 등 오랜 숙원을 해결할 기회이기도 하다.
현재 의사 단체들은 여·야·의·정 협의체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내년 의대 증원부터 백지화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대학별 정원을 확정해 입시 요강까지 발표한 상황에서 내년 정원 조정은 어렵다.
의사 증원이 필요하다는 국민 다수 여론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대다수 의료계도 의사 증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다만 정부가 일방적으로 2000명으로 정한 데 대해 반발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어느 정도의 증원이 적절한 것인지 여·야·의·정이 마음을 열고 논의해 결론을 내기 바란다. 야당과 일부 의사들이 주장하는 ‘2000명 책임자 해임’은 사태 해법이 마련된 뒤에 따져도 된다. 모처럼 마련된 기회가 의료 정상화로 매듭지어지기를 바란다.
조선일보 사설
09.07 한국인의 술친구 眞露 100세
“가난한 사람들의 보너스, 진로 한 잔이면 걱정도 없다”
⊙ ‘眞露’는 ‘참못[眞池]’이라는 지명과 이슬이 맺히는 것 같은 ‘술을 빚는 과정’에서 유래
⊙ “100년의 기록은 국내 상장기업 중 9번째, 주류·식음료 기업 중 최초”
⊙ 원래 트레이드 마크는 원숭이… 1954년 부산에서 사업 재개하며 ‘차고 깨끗한 이슬을 받아먹는 長生의 동물’ 두꺼비로 바꿔
⊙ 이북(以北)은 소주, 이남(以南)은 막걸리… 6·25 전쟁 후 피란민 덕에 소주가 한국인의 술로 자리 잡아
⊙ 6·25 전쟁과 피란, 산업화와 민주화 뒤안길에서 겪은 희로애락, 소주로 씻어…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술”
⊙ 진로소주는 1924년 평남 용강 출신 장학엽이 증류식 소주로 시작… 1·4 후퇴 때 피란과 굴지의 종합주류회사로 키워
⊙ ‘독한 소주’의 공식 바꾼 참이슬… 저도화(低度化) 바람 불며 희석식 소주 출고량 반등

▲진로소주. 왼쪽 끝이 원숭이표 진로. 오른쪽 끝이 최근 출시된 진로 골드.
한국인의 술, 진로소주가 올해로 100세가 됐다. 하이트맥주 회사(전 조선맥주㈜·1933년 창업)가 지난 2011년 진로를 합병해 만든 하이트진로㈜에서 현재 ‘참이슬’과 ‘진로(眞露)’ 같은 소주를 만들고 있다. 진로소주의 모태는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창립한 진천양조상회(眞泉釀造商會)다.
1924년 이곳에서 진로가 태어났다. 창업주는 평남 용강 출신의 우천(友泉) 장학엽(張學燁·1903~1985년).
원래 이북(以北)은 된 발음의 ‘쐬주’, 이남(以南)은 막걸리였다. 기후와 상관관계도 있겠지만 이북에선 알코올 25도의 톡 쏘는 맛을 즐겼다. 6·25 전쟁통에 전통적 막걸리는 ‘정말 마구 걸러대서’ 형편없이 질(質)이 저하됐고, 피란민이 좋아하던 소주가 한국인의 술맛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장학엽은 1·4 후퇴 때 부산에 정착해 1951년 3월 동업자와 함께 ‘금련(金蓮)’ ‘낙동강’이란 이름으로 소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1954년 상경해 서광주조㈜를 따로 설립하면서 30년 전에 팔던 진로 이름을 가져와 상표 등록을 했다. 이북 진로가 이남 진로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장학엽의 진로소주는 승승장구해 1984년 경기도 이천에 당시 단일 종류의 술로는 세계 최대의 소주공장을 세웠고 89년에는 위스키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94년 ‘카스’ 맥주마저 출시해 종합주류회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때 진로는 노른자위 땅인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 진로유통과 서울남부터미널 및 트럭터미널 등 약 3만 평의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유통·건설·방송·식음료·서비스 등 계열사만 24곳(1997년)에 달할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진로그룹의 1996년 매출액이 3조5000억원이었고 2010년 그룹 매출 목표를 38조원으로 잡을 만큼 포부가 장대했다. IMF 직전인 1996년 진로는 9억9000만 병을 판매, 성인 남자 1인당 연간(年間) 60여 병꼴로 마실 만큼 인기를 구가했다. 수십 년간 부동의 소주 판매 1위를 고수해왔다. 일본 시장에서도 전체 소주 브랜드 중 2위에 오를 정도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겪으며 진로그룹은 공중 분해됐고 2000년대 초반 사실상 완전히 해체됐다. 잘나가던 카스는 오비맥주, 소주는 하이트로 분해됐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하이트진로가 고객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장수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00년을 이끌어온 수많은 ‘최초’와 ‘1등’ 제품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하이트진로에서 생산하는 제품으로는 참이슬, 진로소주, 과일소주(에이슬 시리즈)를 비롯 테라, 켈리, 필라이트 등이 있다.
프롤로그

▲진로소주의 창업주 우천(友泉) 장학엽(張學燁· 1903~1985년).
경상도가 고향인 기자는 어릴 때는 금복주밖에 몰랐다. 서울로 상경해서야 처음으로 진로를 알았다. 해거름 녘 실비집에서 막찌개 하나로 소주를 서너덧 병씩 축을 내는 직장인들 사이에 끼여 소주잔을 기울였다. 얼굴이 좀 불그레해진 뒤에야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셨지 주종목은 소주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이 대세지만 배가 차거나 배에 가스가 차면 애주가들은 소주로 ‘각 일 병씩(1병씩)’ 마무리하는 술 문화에 익숙하다.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등 소주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술꾼들은 옛 향수를 떠올리며 진로를 찾는다. 진로소주의 상징인 두꺼비에 무슨 한(恨)이 서린 것도 아닌데 두꺼비 앞에서 온갖 시름을 쏟아내고 종국에는 두꺼비와 접신(接神)을 하기도 한다. 두꺼비 진로의 경계는 낮과 밤이 없었다. 낮술이야말로 진정한 술꾼들의 시간이다. 낮술은 ‘뼁끼’칠을 한 듯 얼굴을 불타오르게 만들고 환희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한다.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정현종의 시 ‘낮술’ 일부

▲《조선일보》 1954년 3월 29일자 4면에 실린 ‘소주의 명곡, 진로’ 광고.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서린동 낙지골목은 애주가들에게 추억의 공간이다. 매운 낙지 한 접시에 소주 한 잔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시끌벅적하고 생기에 찬 추억의 기념물이다. 미치게 매운 양념을 희석시키는 데는 소주만 한 게 없다. 그러고 보니 대개의 소주가 ‘희석식’ 소주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뒤안길에서 경험한 세상의 쓴맛, 매운맛을 반드시 소주로 씻어내야 하는 당위론을 한국인들은 일찌감치 체감했다. 이 가운데 진로소주 100년의 저력이 숨어 있다.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언어로 시를 쓴 백석(白石·1912~1996년)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라.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거나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는 행(行)이 나온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군 태생이다. 쓴 소주 맛에 익숙한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런 시가 나왔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박인환(朴寅煥·1926~1956년)의 시 ‘목마와 숙녀’는 맨 정신으로 몇 번을 읽어봐도 잔뜩 취해서 쓴 시 같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혹은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든지,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술병에 별이 떨어’지거나, 가을 바람소리가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울 정도다. 이 시를 읽으면 박인환이 즐겨 마시던 술이 막걸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혹자는 그가 카바이드술이나 도라지 위스키 같은 악주(惡酒)를 좋아했다지만 그가 가짜 위스키인들 얼마나 마셨겠는가. 분명 소주, 그것도 진로를 좋아했음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토록 도회적(都會的)이면서 ‘쓰디쓴’ 낭만을 무심한 듯 찐하게 노래할 수 있었으리라.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
소주의 뜻은 ‘불사를 소(燒)’에 ‘술 주(酒)’다. 불로 끓여서 만든 술이란 의미. 즉 누룩으로 빚은 막걸리에서 맑은 부분만 정제한 청주를 불로 끓여서 생기는 증류수를 냉각시킨 것이다. 원재료의 향이 남아 있는 증류식 소주가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 소주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酒精)에 물과 첨가물(감미료)을 넣어 희석한 술이다. 일반적으로 녹색 병에 담긴 술이다. 쌀, 보리, 고구마, 타피오카와 같은 곡물을 발효해 200번 넘게 증류해 불순물을 모두 제거한 뒤 95도의 주정에 물과 첨가물을 넣어 희석한 술을 일컫는다. 어떤 사람들은 물 탄 술이 술이냐고 꼬집기도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부터 줄곧 90만㎘ 이상을 기록해온 ‘참이슬’ ‘처음처럼’ ‘진로’ 같은 국내 희석식 소주 출고량이 2010년대 중후반부터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라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회식 문화의 변화와 사회적 거리 두기, 주 52시간제 시행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판매량이 줄자 소주 메이커들이 잇따라 순한 소주를 출시했는데 이에 반전이 일어났다. 저도화 바람이 불며 국내 희석식 소주 출고량은 2021년 82만6000㎘까지 줄었다가 2022년 86만2000㎘로 반등했다.
“100년의 비결은 국민과 숱한 희로애락을 함께했기에”
▲하이트진로 마케팅실 오성택 상무.
먼저 하이트진로가 이뤄놓은 진로소주 1세기, 100년의 의미를 들어보았다. 하이트진로 마케팅실 오성택 상무와의 일문일답이다. 오 상무는 하이트진로그룹의 마케팅커뮤니케이션 팀을 이끈 뒤, 맥주브랜드 팀장, 마케팅실 총괄 팀장을 거쳐 2017년부터 마케팅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 진로가 올해 창립 100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역사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대한민국 상장기업 중 9번째이고, 주류기업 중 최초로 달성한 겁니다. 또 식음료 상장기업 중에서는 첫 번째로 100년을 맞이했으니 영광스러운 일이죠.
하이트진로그룹의 100년 역사는 단순히 시간이 흘러 완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과 숱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하며 만들어 온 것이기에 더욱 뜻깊게 생각하고 있어요.”
― 참이슬, 진로가 100년간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광복과 산업화, 민주화, 외환위기, 최근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국민 가까이에서 기쁨과 탄식, 환희와 설움을 나눈 것이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시대의 흐름보다 반걸음 먼저 시장을 바라보고 본연의 맛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 국내 주류 시장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사랑받아온 원동력이라 생각하고요.”
― 100년의 역사 속에서 하이트진로의 명품 술 5가지만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100년 역사 속 5개 브랜드만 딱 꼽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 또는 상징성이 있는 제품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약 40여 년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은 ‘크라운맥주’, 대한민국 맥주의 판도를 뒤집은 ‘하이트’, 창립 이래 100년간 이어오고 있는 브랜드 ‘진로’, 소주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참이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정신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맥주 시장 턴어라운드의 청신호를 연 ‘테라’를 꼽겠습니다.
이 밖에도 최근 증류식 소주 시장의 성장세와 함께 품질 측면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일품진로’도 빼놓을 수 없는 명품 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오늘날의 마케팅 방식과 과거의 마케팅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궁금합니다. 현재를 중심으로 설명해주세요.
“어떤 분야나 비슷하긴 하겠지만 특히나 마케팅 분야에 있어서는 과거의 성공 방식이 현재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최대의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의 성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테라’와 ‘진로’의 성공을 어느 정도 인정받긴 했어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와 소비자 취향에 맞춰 디테일과 완성도를 추구하는 마케팅 활동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중성 앞에서는 겸손함을 잃지 않고 끌로 파는 노력을 하는 것만이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오 상무의 설명을 듣다 보니 소주보다는 맥주에 강세를 두는 듯한 느낌이 왠지 모르게 전해졌다.
하이트맥주가 진로소주를 끌어안았으니 사내(社內) 우선순위로 따지면 소주보다 맥주가 먼저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이 좋아하는 술은 소주다. 압도적으로 소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주제를 토론하기 위해서는 맥주잔보다는 소주잔을 기울일 사람이 훨씬 많을 듯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2004년 평소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술 종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10년 뒤인 2014년, 5년 뒤인 2019년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15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2004년 5월 조사에서는 술을 마시는 이들의 65%가 좋아하는 술을 소주라고 답했다. 29%가 맥주, 각각 2%가 막걸리와 와인을 꼽았다.
10년 뒤인 2014년 10월 조사에서는 소주가 54%로 다소 줄고 맥주가 35%, 막걸리 7%, 와인 2%로 막걸리에 대한 선호도가 올라갔다. 강산이 변하는 만큼의 시간이 흘렀어도, 소주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5년 뒤인 2019년 5월 조사에서는 소주가 다시 61%로 늘어났다. 맥주와 막걸리는 31%와 5%로 감소했다. 와인은 2%로 동일했다. 결론적으로 애주가들은 뭐니뭐니 해도 소주파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세월이 흘러도 소주의 저변이 확대되는 이유는 저도화, 맛의 다양화 영향으로 보인다.
원숭이표 眞露의 탄생
100년 전인 1924년 진로소주가 세상에 등장할 때 인천의 조일(朝日), 부산의 대선(大鮮), 평양의 대평(大平)이 희석식 소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장학엽은 증류식 소주를 팔면 틀림없이 승산이 있다는 동업자 홍석조, 강기욱의 주장에 처음에는 마음이 복잡했다고 한다. 그러다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증류식 소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있다 해도 평양과 함경도 등지에 밀집해 있었고, 생산량도 미미했고 주질(酒質) 또한 일정치 않아 인기가 없었다.
개인당 500원씩 출자하여 자본금 1500원을 확보한 세 사람은, 평남 용강군 지운면(池雲面) 진지동(眞池洞)에다 합자회사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하고 마침내 진로의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1924년 10월 3일이었다.
예부터 술은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특히 수질(水質)이 좋아야 뛰어난 명주(銘酒)를 빚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진지동은 지형이 섬세하고 수질이 좋아 입지조건이 양호했다고 전한다. 북쪽 강서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303m의 석천산(石泉山), 서쪽으로 길이 50리에 이르는 인황천(仁皇川), 대동강변에 인접한 동쪽의 원당산(阮堂山) 등은 명주를 빚는 입지조건으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진지동은 평양에서 진남포에 이르는 평남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 또한 편리해 금상첨화였다.
간판을 내건 세 사람은 술의 이름과 상표를 정했다.
특히 술의 이름을 정하는데 여러 가지 안(案)이 나왔으나 결국 ‘진로’로 결정했다. 이 이름을 쓰게 된 데는 그만한 내력이 있었다. 애초에 참못이란 지명을 가진 마을 이름[眞池]에서 진자를 먼저 따기는 했으나 그 이면에는 아울러 참되고 옳으며 거짓이 없다는 ‘진정(眞正)’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露)’자는 술을 빚는 과정을 상징한다. 예부터 소주를 증류할 때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힌다는 의미의 ‘노주(露酒)’라는 운치 있는 단어가 있었다.
장학엽은 원숭이를 진로의 트레이드 마크로 택했다. 원숭이는 생김새가 사람과 비슷하고, 사람의 말을 이해하며, 술을 즐기는 기이한 짐승으로, 서북 지방에서는 예부터 복신(福神)으로 추앙받아온 영물이었다. 그리하여 세로로 ‘眞露’라는 붓글씨체 한자를 크게 박고, 양쪽에 원숭이 두 마리를 마주 보게 앉혔으며, 더불어 타원형 벼 이삭으로 감싸안는 도형을 상표로 제작했다. 이 모두를 뭉뚱그리면 쌀로 빚은 소주를 마시면 수복장수(壽福長壽)한다는 뜻이 된다.
진천양조상회 진천공장은 출발 첫해에 700석의 소주를 생산했다. 이듬해 850석, 1926년에는 880석, 1927년에는 900석을 생산, 적어도 생산량만큼은 해마다 증가세를 보였지만 경영 수지 면에서는 만성적인 적자가 누적되었다. 계속되는 동업자끼리의 갈등과 알력, 누적되는 부채로 1927년 11월, 창업 3년 1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자산을 정리해보니 남아 있는 것은 3만2000원의 부채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즈음 장학엽의 재산을 모두 정리해봐야 1만원 안팎이었고 당시 쌀 1석 값이 33원 안팎이었으니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부채인 셈이었다.
장학엽은 이듬해 1월 새로운 동업자의 도움으로 진천양조상회를 재건, 또다시 진로를 생산했다. 그는 이제 미경험자가 아니었다. 술에 관한 전문 지식이나 거래처에 대한 판매 전략에도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인 양조업자들이 주로 만드는 희석식 소주에 대항하는, 씁쓸하면서도 짜릿한 맛이 나는 증류식 소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자신이 공산당의 숙청 대상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천신만고 끝에 남하해 피란수도 부산에 자리 잡았다.
부지런한 닭이냐, 多産의 두꺼비냐
장학엽은 부산에서 동화양조, 구포양조에서 동업으로 새로운 소주 사업을 시작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모두 정리하고 식솔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곤 영등포구 신길동 170-8번지에 서광주조㈜를 설립했다. 1954년 2월이었다. 서광(西光)은 서쪽의 광명이란 뜻으로 평안도 서북 지방 사람들이 피란지에서 겪은 짙은 향수와 자부심이 물씬 배어 있는 단어였다. 소주 제조 면허가 나온 것은 그해 7월이었다.
소주 이름은 30년 전 진천양조상회 때 사용했던 ‘진로’로 다시 결정했다. 부산의 동화양조와 구포양조 시절, 장학엽이 동업자들에게 진로라는 이름을 쓰자고 제안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던 그 이름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그의 집념의 힘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어쩌면 이러한 집념이 오늘의 진로 100년을 있게 한 뿌리일지도 모른다. 그 무렵 서울 일원에서 이름을 날리는 소주 메이커로 명성(明星)이 있었고, 백마(白馬), 백양(白洋), 청로(淸露), 청천(淸泉), 새나라, 보배(寶盃), 보해(寶海), 미성(美星), 옥로(玉露), 제비원 등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중에서 업계의 선두주자인 명성은 하루 판매량이 무려 400상자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제품명을 ‘진로’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소주병 레이블에 그려 넣을 회사의 상징 동물을 놓고는 한참 동안 임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개중(個中)에는 ‘닭’을 상품의 심벌로 삼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술 주(酒)자에 닭 유(酉)자가 들어간다는 점에 착안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닭의 부지런함이 끌리기는 했지만 장학엽은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동물사전을 펴놓고 동물들의 특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손길이 머문 곳이 ‘두꺼비’였다. 의젓하고 중후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두꺼비의 모습도 끌렸지만 ‘떡두꺼비 같은 아들만 하나 낳으라’는 덕담도 복스럽게 느껴졌다. 그 순간 손바닥으로 무릎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가 외친 ‘유레카’가 오버랩된다. 두꺼비는 산란기에 7000~3만5000개의 알을 낳을 만큼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두꺼비는 아침저녁으로 차고 깨끗한 이슬을 받아먹는 장생(長生)의 동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한의 회고
▲진로 창립 30주년 기념 복금 추첨을 마친 장학엽 사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1959년 2월 28일)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장학엽 창업주의 일가(一家)를 만났다. 그는 한사코 얼굴 내밀기를 꺼려했다. 대신 장학엽의 자서전 《항심(恒心)의 세월(歲月)》(1977)을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시인이자 부흥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주요한(朱耀翰·1900~1979년)이 쓴 책 서문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주요한 역시 장학엽과 같은 평안남도[평양] 출신이다.
〈… 대동강 하류의 작은 도시의 공장에서 전국적인 시장을 휩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기술과 성실한 경영 정책의 성과였다고 볼 것이다. 해방을 맞이하여 일본의 경제 세력은 물러갔으나, 뜻밖에 붉은 무리들의 국가 통제 경제와 정치적 박해 밑에서 무수한 고초를 그는 겪어야만 했다. (중략) 나중에는 1950년 공산군의 남침으로 다시 한 번 시설과 판로를 잃고 부산 지역으로 피란했다. (중략) 우천 장학엽이라는 한 사람이 이루어놓은 분투의 역사는 커다란 무엇을 가르쳐주는 바가 있으리라.…〉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진로소주의 상표는 타원형 상단에 JIN-RO라는 영문이 새겨졌고, 역시 타원형 벼 포기로 둘러싸인 가운데 眞露라는 한자(漢字)와 함께 두꺼비가 여유롭게 자리했다.
장학엽의 서광주조는 1966년 12월 23일 상호를 진로주조㈜로 바꿨다. 1975년 진로주조에서 ㈜진로로 상호를 다시 변경했다. 그리고 2011년 하이트맥주와 합병하면서 지금의 하이트진로가 되었다.
순한 소주 ‘참이슬’과 증류식 소주 ‘일품진로’의 등장
▲하이트진로가 만든 참이슬 소주들.
진로소주를 이야기하며 ‘참이슬’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98년 국내 소주 시장에 첫선을 보인 참이슬은 소주는 25도라는 상식을 깨며, 독한 소주의 이미지를 ‘부드럽고 깨끗하게’ 바꿔놓았다. 출시 당시 23도 제품으로 출발한 참이슬은 리뉴얼 과정을 통해 현재는 20.1도 참이슬 오리지널과 16도 참이슬 후레쉬로 두 개 브랜드가 국내 소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진로소주 원년 멤버로 제품 연구소 등지에서 25년 근무 후 지난 2011년 퇴사한 이기호씨는 “출시 당시 대나무 숯 여과 공법을 도입해 잡미와 불순물을 제거하고, 깔끔한 끝맛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회고한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에 물을 섞어 희석하며 제조합니다. 맛의 차별화는 각사의 여과공법의 차이에서 나는데 참이슬은 대나무 숯을 이용한 여과공법으로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죠.”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참이슬은 품질, 브랜드 파워, 판매량 등에서 소주 시장의 역사를 바꾼 획기적인 제품”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1993년 두산그룹이 경월소주를 인수한 후 이듬해 ‘그린’을 출시하면서 한때 진로의 1위 자리를 위협한 일이 있었어요. 절치부심해서 ‘참이슬’ 출시를 통해 반격에 나설 수 있었고 1위를 고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이슬은 1998년 출시 이후 2023년까지 누적 387억 병이 판매됐어요.”
참이슬 소주병을 누이면 지구 213바퀴를 회전, 달을 12번 왕복할 수 있는 판매량이란다. 우리에게 이렇게 셀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쌓였다는 의미일까. 기쁨을 나누며 기울인 잔이 더 많았으면 한다.
참이슬의 아성에 밀리던 두산은 2006년 ‘처음처럼’을 출시한다. 이후 2009년 롯데가 두산을 인수하며 롯데 처음처럼으로 참이슬을 흔들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지속하지만 참이슬은 여전히 우위를 지키고 있다.
이기호 전 부장은 또 1996년 6월 출시해 9개월간 1억 병을 판매한 ‘참나무통 맑은 소주’에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
“오크통에서 10년 이상 숙성한 증류식 원액을 희석식 소주에 블렌딩하여 만든 프리미엄급 소주였어요.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단종됐는데 증류 원액 부족이 원인이었죠.”
진로소주는 처음부터 증류식 소주로 명성을 쌓았지만 1965년 정부의 양곡관리법 시행에 따라 희석식 소주로 변신했었다. 그러다 2007년 ‘일품진로’를 만들며 증류식 소주로의 귀환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하이트진로는 1만~200만ℓ 오크 7000t 이상, 목통 원액 약 160만ℓ를 보유하는 등 대규모 목통 저장 계획을 세웠다. 현재 증류식 소주 브랜드는 일품진로를 비롯해 진로1924 헤리티지, 일품진로 오크43, 일품진로 23년산 등 4종으로 구성된다.
하이트진로 마케팅실 관계자는 “2015년에 자몽에이슬 출시를 시작으로, 청포도에이슬, 자두에이슬, 딸기에이슬, 복숭아에이슬 등 다양한 맛으로 해외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당대 酒豪들의 공간은…
문인들은 대체로 술을 많이 마신다. 위장(胃腸)을 뚫을 기세로 강소주를 들이켠다. 갈 곳 없는 예술인들은 주로 다방이나 단골 술집에 모여 시와 문학을 논하곤 했다. 과거엔 술과 관련된 일화와 기행(奇行)들이 넘쳐났다. 그 시절에는 내남없이 죄다 궁(窮)한 시절이어서 만만하고 속 편한 곳이 단골일 수밖에 없었다. 앉았다 하면 한 사람 앞에 빈 소주병이 서너 개씩 놓이도록 쉴 새 없이 입안에 털어 넣기가 예사였다.
요절한 작가들이 대개 술병을 앓았다. 이상(李箱)이 그랬고 김소월(金素月)이 그랬고 현진건(玄鎭健)·김유정(金裕貞)·최서해(崔曙海)가 그랬다. 이들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주호(酒豪)들이었다. 마음껏 즐겨 “부어라 마셔라”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다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염상섭[廉想燮·아호가 ‘옆으로 걷는다’는 뜻의 횡보(橫步)였다.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비뚤고 바르지 않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변영로(卞榮魯), 이효석(李孝石), 조지훈(趙芝薰), 박목월(朴木月) 등은 이른바 서울 종로통의 대폿집파였다. 옛 종로예식장 뒷골목에 위치한 안국동파 술꾼들로는 정지용(鄭芝溶), 오장환(吳章煥), 임화(林和), 서정주(徐廷柱) 등이 있었다.
1970년대 청진동에는 월간(月刊) 한국문학사와 세대사, 계간 창작과비평사와 문학과지성사, 그리고 소설가 천승세(千勝世)가 돈을 댄 일석기원(一石棋院) 등이 속칭 빈대떡 골목과 해장국 골목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관철동으로 내 집 장만을 해 가기 전까지 민음사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동네였다. 싸구려 술집이 고만고만하게 이어진 그곳에 예술쟁이들이 몰려들었다. 고은(高恩), 이문구(李文求), 김주영(金周榮), 박상륭(朴常隆), 손춘익(孫春翼), 송기숙(宋基淑), 이호철(李浩哲) 등이 그 시절의 주역들이었다.
지난 2009년 서울역사박물관이 너덜너덜해진 하드 커버에 깨알 같은 글씨로 외상값이 적힌 ‘사직골 대머리집’ 외상장부 세 권을 공개한 일이 있다. 기자는 그해 《월간조선》 9월호에 〈가난한 인텔리·예술인의 고향, 사직동 대머리집〉이란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정식 옥호는 명월옥(明月屋). 하지만 1960~70년대 대머리집이라 부르며 당대 기자와 문인, 예술인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 무렵만 해도 생활이 옹색하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탓에 주객(酒客)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집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조선일보》와 《서울신문》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했던 신동한(申東漢)씨의 회상이다.
“한 가지 특색은 대부분이 외상 술꾼이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거나 원로의 자리에 있는 언론인이나 문인치고 이 집 외상장부에 이름이 안 오른 주객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대머리집 현관이 미닫이였는지 여닫이였는지는 증언이 엇갈린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풍광은 이러했다. 방송작가 박서림(朴西林)씨의 얘기다.
“길에서 한 계단 정도 내려가는 어둑한 홀에 널빤지로 상처럼 높직하게 만든 술청이 몇 줄 놓여 있고 의자는 드문드문, 서서 마시는 경우가 많았지요. 처음에는 안주값을 받지 않고 술값만 받았어요.”
1964년 동아방송 성우 2기로 데뷔한 연극인 조명남(趙明男)씨는 “일주일에 닷새는 대머리집에 들렀다”고 말할 정도로 한때 주당이었다.
“퇴근하다 문을 열고 빠끔히 쳐다보면 반드시 아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고추전, 호박전, 노가리 구운 것, 계란찜, 두부부침도 맛있었어요. 가난한 연극쟁이들의 열정을 발산하는 곳이었다고 할까요? 술 다 먹고 갈 때마다 완전히 취하곤 했는데 외상장부를 굳이 확인 안 해도 믿었어요. 또 통금시각이 임박하면 택시비까지 받아 외상장부에 올리기도 했어요.”[《월간조선》 2009년 9월호, 이문구의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1994) 참조]
三鶴소주 vs 眞露소주
▲1980년대 서울 신길동에 위치한 진로 본사의 모습이다.
1960년대 희석식 소주의 강자는 삼학(三鶴)소주였다. 삼학은 사카린을 첨가해서인지 몰라도 단맛의 소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진로는 증류식 소주로부터 축적된 쓴맛의 이미지를 살렸기에 쓰다는 대중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4년 12월 8일 박정희 군사정권이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 제조를 불허하는 주세법(酒稅法) 38조를 정부 입법으로 강행 처리했다. 대신 고구마로 만든 주정(酒精)에 물을 타는 ‘희석식 소주’는 허가했다. 1962년 대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해도 ‘증류식 소주’만 만들던 진로로선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진로가 행정소송을 걸었고 다행히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여 주세법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여기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6·25 전쟁을 거치며 쌀이 귀해지자 주정 원료를 밀로 대체했는데 미국의 잉여농산물(밀, 밀가루)이 막걸리와 재래식(증류식) 소주의 주원료로 1950년대를 장식했다. 이후 고구마와 강원도 옥수수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양곡 절약 정책으로 ‘국산 고구마’에 한해 술을 만들게 제한한 것이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주세법 대신 양곡관리법으로 다시 묶는 정책을 발표했다. 순곡소주(純穀燒酎)를 자랑해온 증류식 소주의 선두주자인 진로는 하루아침에 소주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1965년 8월부터 희석식 소주로 전환한 진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67년 상표를 바꾸며 두꺼비 삽화만 남기고 벼 이삭을 지워버렸다. 곡물을 한 알도 넣지 않았던 것이다.
삼학은 원래 정종 메이커였는데 1957년 목포에서 서울 청파동으로 자리를 옮겨 처음에는 주정에 증류식 소주를 섞고 첨가물을 배합해 단맛의 소주를 만들었다. 삼학은 대방동에 희석식 소주공장을 짓고 급속도로 시장점유율을 높여갔다. 진로가 쓴맛을 고수하는 동안 삼학의 단맛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반면 초기의 희석식 진로소주는 판매량이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7대 3으로 삼학소주가 우세했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당시 서광주조(진로소주)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갖가지 기발한 판매 작전을 차례차례 펼쳐나갔다. 그 첫 번째 작전이 ‘밀림의 바’ 작전이었다”고 했다.
“당시 장충공원의 수목 지대를 비롯하여 남산과 후암동 일대의 수목 지대에는 이른바 들병소주 행상이 성행하고 있었어요. 돗자리를 끼고 다니면서 들병소주를 판매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속칭 ‘밀림의 바’라고 불렀죠. 얼핏 보기에는 대단치 않은 것 같아도 ‘밀림의 바’에서 소비되는 소주의 양은 상당한 것이었으며, 그 일에 종사하던 행상의 수도 한때는 600여 명에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 행상 여인들은 1966년 중반까지만 해도 한결같이 삼학소주만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자 진로소주 판촉원들은 이들이 술병을 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보자기를 제공하는 한편 소주 행상에게 진로를 공급한 후 판촉원들이 다시 진로를 사 마시도록 했다. 계속된 하이트진로 관계자의 말이다.
“행상 여인 600여 명이 모두 ‘손님들이 삼학은 마다하고 진로만 찾는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될 때까지 날마다 진로소주 사 마시기 작전을 전개했죠. 그 결과 ‘밀림의 바’의 600여 명의 행상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로소주의 판촉원이 되어갔어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출혈경쟁 이후
▲《조선일보》 1971년 11월 25일 자 7면 〈납세필증 삼학서 대량 위조〉 기사다.
또 다른 아이디어로 왕관(병마개)을 사들이자는 기발한 판촉 전략이 등장했다. 진로소주를 팔고 그 왕관을 한 개에 2원씩 사들이기로 한 것이다. 연간 5000만원의 왕관 회수비를 지출한 결과, 시장 개척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또 병마개와 코르크 사이에 두꺼비 그림을 숨겨놓았다. 이 그림을 찾아 응모한 사람에게 추첨을 통해 경품을 증정했는데 나중에는 금·은·복 두꺼비를 찾아 응모한 사람에게 경품을 지급했다. 출혈경쟁에 가까운 기상천외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기자가 1960년대 후반의 소주업계 동향 자료를 보니 1968년 삼학과 진로를 제외한 군소 업체가 338곳이나 난립했다. 이듬해 69년에 이들 업체가 줄도산해 214곳으로 줄어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삼학과 진로는 죽기 살기로 PR 대전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1970년에 마침내 진로가 16.2%의 시장점유율로 삼학의 16.1%를 앞지르게 되었고 숙명의 라이벌 삼학은 그때부터 점차 퇴조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삼학은 납세필증을 대량 위조하다 검찰에 적발돼 사장 등 10여 명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71년 11월 25일 자 7면 기사 〈납세필증 삼학서 대량 위조〉 중 일부다.
〈…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은 24일 삼학소주 본포인 삼학산업 주식회사가 지난 수년 동안 위조납세필증을 사용, 수억원의 각종 세금을 포탈해왔다는 사실을 포착, 수사에 나서 이날 밤 영등포구 신대방동 522의2 삼학회사에서 위조한 납세필증 30여만 장을 압수했다.
검찰은 동 회사 사장 김상두(63)씨 등 회사 간부 10여 명을 마포구 노고산동 은혜여관에 연행, 긴급 구속 상태로 철야 신문하고 있으며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압수해온 경리 및 판매장부 등 관계 서류를 대조, 탈세액을 뽑고 있다.…〉
검찰조사 결과 삼학은 서울시내 100여 개소의 삼학대리점에서 팔고 있는 소주, 청주 등 주류에 붙어 있는 국가 검인의 납세필증의 70%가량을 위조했다. 심지어 주정 도수 30도도 어겼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물을 더 넣어 맹탕 소주를 만든 셈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양조업계의 지나친 출혈경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매스컴을 통한 무리한 선전 공세, 각종 경품 경쟁이 소주 전쟁으로 촉발됐고 막대한 사채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나 결국 불법행위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진로 역시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자가 비싼 사채라 하더라도 감지덕지였다.
돈을 빌리기 위해 재벌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는가 하면 전혀 예기치 못한 이에게 돈을 얻기도 했다. 평안도 고향 사람들이 선선히 돈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그 무렵 장학엽은 지프를 구입했다. 돈을 얻으러 다니기 위해서였다. 경향 각지로 돌아다니며 돈을 얻어 나르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지프 바퀴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작은 돈도 얻어다 댔고, 큰 돈도 얻어다 썼다.[《진로그룹 칠십년사》(1994) 참조]
국내 최초의 CM송 ‘진로 파라다이스’
▲하이트진로가 만든 맥주들. 왼쪽 끝이 크라운 맥주이고 오른쪽 끝이 테라다.
증류식 소주를 생산하던 시절, 진로의 광고 문안은 ‘순곡소주 진로’ ‘마셔도 좋고 깨어서 좋은 주중(酒中)왕자 진로소주’ ‘진미(眞味)의 진로’ ‘소주라 하지 말고 진로라 불러주세요’ ‘소주의 진미는 역시 진로야!’ 등이었다. 진로나 두꺼비를 소주의 대명사로 인식시키는 브랜드 밸류 효과를 가져왔다. 또 희석식 소주를 은근히 견제하는 내용도 담았다.
〈진짜 소주의 맛은? 술맛이 달다고 좋은 소주로 아시면 큰 잘못입니다. 소주의 참맛은 100% 순곡으로 만들어진 진로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애주가 여러분!
소주를 선택하실 때는 병 이면에 첨부된 세무서 검사필증에 유의하시어 증표에 증류식 소주라고 쓴 것만이 재래식 순소주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애주가 여러분의 귀중한 위장(胃腸)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도 증류식 순곡소주 진로를 권하고 싶습니다.〉
진로소주의 광고는 주요 일간지에 게재됐고 광고 크기는 5단이거나 8단통으로 대형에 속했다. 진로의 트레이드 마크인 두꺼비가 배를 쑥 내밀고 앉아 진로 소주병을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1959년 4월 15일에 우리나라 상업 방송국의 개척자인 부산문화방송이 개국되었는데, 진로는 제1호로 상업 광고를 의뢰하고 당시 인기 프로였던 〈직장대항 노래자랑〉 프로그램의 스폰서가 되었다. 그해 1959년 11월 국내 최초로 CM송인 ‘진로 파라다이스’, 속칭 ‘차차차 송’을 만들어 전파 매체에 실었다. 이 CM송은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전국 각지에 널리 알려져 라디오 및 TV의 시청자들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진로 진로 진로 진로/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향기가 코 끝에 풍기면 혀끝이 짜르르하네/ 술술 진로소주 한 잔이 파라다이스/ 가난한 사람들의 보너스/ 진로 한 잔이면 걱정도 없다/ 진로 한 잔 하고 ‘크~’ 하면 진로 파라다이스〉
이 ‘차차차 송’으로 진로는 판매량이 25배가량 늘어나는 대전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차차차 송’은 당시 술좌석의 단골 노래 메뉴였으며 군대 훈련소에선 행진곡으로 부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1959년 국내 최초 CM송 ‘진로 파라다이스’로 전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물했고, 월남전 기간에는 국내 최초로 베트남에 맥주를 수출해 파병 군인들을 위로했다”며 “진로의 CM송 개발은 우리나라 광고, 선전활동 분야의 새로운 장을 여는 촉매제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골목마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진로 CM송 소리가 떠들썩하자 교육상 문제가 있다고 해서 가사를 고쳐 부르게 할 정도였다. CM송이 널리 알려지기 전만 해도 진로는 경북 안동에서 나오던 30도짜리 ‘금곡’, 전라도 ‘보해’, 마산 ‘무학’, 부산 ‘대선’에 짓눌려 오금조차 펴지 못했었다.
알코올 도수 낮추기의 비밀
▲1930년대 조선맥주 본사와 2024년 하이트진로 서울 청담동 본사 전경이다.
1965년 30도로 출발한 소주 알코올 도수는 1973년 25도로 낮아진 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남원상이 쓴 《우리가 사랑하는 쓰고도 단 술 소주》(2021)에 따르면, 업계 1위였던 진로가 기존 30도 소주의 생산을 중단하고 25도 소주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주정 원료 수입이 억제됨에 따라 알코올 함량을 낮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수가 낮아 ‘물 탄 소주’라는 싸구려 취급을 받더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동시에 소주 가격도 인하했는데, 도수를 낮춰서인지 아니면 가격을 낮춰서인지 어쨌든 부담이 덜어진 것만은 분명해서 당시 판매량이 50%나 뛰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회사들도 속속 25도 소주 생산에 나섰고, 30도 소주는 사라졌다.
그러다 1982년 재래의 쓴 소주맛을 살려 30도의 진로드라이를 출시했다. 25도의 단맛을 줄이고 쓴맛에 접근시킨 드라이 타입이었다. 부드러운 25도와 쓴 30도를 기호에 따라 택할 수 있도록 했다. 보해양조는 1991년 9월부터 35도짜리를 시판하기 시작해 25도와 30도만 있는 소주 시장에서 알코올 도수 차별화를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소주 취향이 이미 순한 맛에 길들어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소주는 25도’라는 공식을 깬 건 1996년 부산 대선주조에서 내놓은 23도짜리 소주 ‘시원(C1)’이다. 시원은 13개월 만에 1억 병이 넘게 팔렸다. 진로가 25도 소주에서 23도로 낮춘 것은 참이슬을 출시할 무렵인 1998년 10월이었다. 참이슬 출시 전에도 23도짜리 순한 진로를 내놓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2001년 2월 참이슬 리뉴얼을 내놓으면서 22도로 낮췄고 3년 뒤 다시 21도가 되었다. 소주의 심리적 하한선인 20도를 깬 것은 2006년 8월이다. 참이슬 프레시 리뉴얼을 출시하며 19.8도로 다시 낮췄다. 이후 해마다 조금씩 낮아져 2021년 3월과 8월에 각각 출시된 진로 리뉴얼과 참이슬 프레시 리뉴얼의 도수는 16.5도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 소비자 성향이나 트렌드가 빨리 변해 도수를 조정하는 주기도 빨라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작년 1월 출시한 진로 리뉴얼은 16도. 반면 참이슬 오리지널은 20.1도로 쓴맛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20도만 넘어도 독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여파로 홈술족이 늘고 여기다 MZ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들 사이에 저도수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 다양한 소비자의 기호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격과 방어를 끊임없이 반복한 주류 시장 100년 전쟁에 하이트진로는 또 다른 100년 전쟁을 위해 신형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지난 3월 출시한 소주 신제품 ‘진로골드’와 5월 말 출시할 증류주 신제품 ‘일품진로 오크25’로 라인업을 확대, 향후 점유율을 더욱 끌어올릴 계획이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진로골드는 하이트진로의 100년 양조 기술을 바탕으로 완성한 황금비율 레시피로 최상의 ‘부드러운 맛’을 구현해냈다. 과당을 사용하지 않은 ‘제로슈거’ 소주로, 쌀 100% 증류 원액을 첨가해 부드러운 맛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또 일품진로 오크25는 목통 숙성 원액 블렌딩으로 색과 풍미가 다른 프리미엄 소주이며, 국내 최대 규모의 목통숙성실에서 100년 노하우로 관리되는 최고급 원액을 사용했다.
에필로그
진로 100년의 역사 안에는 수많은 사람과 사건이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영화처럼 등장했다. 전쟁이 있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변이 있었으며 사활(死活)을 건 판매전과 기업의 흥망성쇠가 있고 살아남은 자와 끝내 잊힌 자가 있었다.
전쟁 중 피란수도에서 마시던 한 많은 ‘낙동강’ 소주가 있었고 호남선 야간 열차에서 먹던 ‘막소주’가 있었으며 뱃사람이 어선에 싣고 나가는 ‘됫병 소주’도 있었다. 메틸알코올로 만든 소주로 실명자가 생겼다는 이야기, 맥주병에 생쥐가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게 소주 한 잔에 울고 웃으며 그렇게 100년이라는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왔다. 그리고 다시 100년을 시작한다. 미래에도 깊은 시름을 소주로 달랠까. 소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술이 시장을 바꿔놓을까. 소주의 역할을 누가 대신할까. 소주는 환희와 애환이 농축된 우리의 집단기억 속 정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이미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인터뷰
손봉수 전 하이트진로 사장
“머지않아 한국인의 술맛이 세계인의 술맛이 될 터”

▲손봉수 하이트진로 전 사장. 초대 생산총괄 사장을 지냈다.
손봉수(孫鳳秀) 전 사장은 하이트맥주의 전신인 조선맥주에 1982년 입사해 거의 30년 만에 CEO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2011년 합병한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통합 법인인 하이트진로의 초대 생산총괄 사장, 하이트진로음료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태생이 다른 두 집단을 하나로 엮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손봉수 전 사장은 젊은 시절,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땀을 흘렸고 1994년 발효공학으로 경상국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에 입학한 지 7년 반 만에 얻은 값진 땀의 대가였다. 논문 제목은 〈Xanthomonas sp.EPS-1에 의한 고점도 다당류의 생산 및 이화학적 성질〉. 미생물이 생산하는 고분자 물질인 다당류를 개발하여 식품보조제로 사용하기 위한 균주를 연구한 논문이다.
당시 조선맥주에 박사 학위자가 그를 제외하고 1명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제가 입사할 당시만 해도 경쟁사인 OB맥주의 시장점유율이 70%이고 조선맥주는 30%밖에 안 됐어요. OB맥주는 연구소에 박사 학위자도 많았어요. 제가 발효공학으로 학위를 받으니 임원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손 전 사장은 “석·박사 과정을 다닐 때 회사에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회사와 대학 실험실을 오가며 살았다”고 했다.
1993년 하이트맥주가 출시되면서 주류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점유율이 30%에 불과한 회사가 순식간에 1등 회사가 된 것이다. 그는 품질관리팀장을 맡으면서 신제품 출시에서 양산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게 됐다.
“과거 크라운맥주와 하이트맥주는 근본적으로 맛이 달랐어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맥주였죠.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이 좋고 깨끗한 느낌의 맛이 났습니다. 그전에는 먹고 나면 맥주 냄새가 오래 남았는데 그게 품질 관리를 잘못해서 나는 잡냄새거든요.”
하이트맥주는 국내 최초 비열처리 맥주, 온도계 마크, 신선도 유지 시스템, 음용권장기간 표시제 등 다양한 성공 키워드로 시장 변화를 이끌었다. 하이트의 폭발적인 성장에 OB맥주는 1999년 진로의 ‘카스’를 인수한다. 이후 OB맥주는 세계 최대의 맥주 기업인 앤하이저부시(ABI)에 인수되면서 맥주 경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손 전 사장은 증류식 소주로 개발한 ‘일품진로’에 애착이 깊다. 제품 개발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사실 진로는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로 성장한 회사다.
“2006년 첫 출시 당시 천연 참나무목통(OAK)에서 10년 숙성 과정을 거쳐 수작업으로 빚어낸 술로 선을 보였어요. 그러니까 100% 국내산 순쌀 원료로 발효, 증류한 원액을 10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시켰는데, 365일 24시간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반지하 창구에서 숙성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최상급 싱글몰트 위스키와 견줄 만큼의 품질을 갖췄다고 자부한다.
“대한민국 소주 명가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일품진로는 쌀로 빚은 술의 진가를 보여주는 제품으로 애착이 많이 갑니다.”
“소주, 맥주 구성원 간에 문화 차이 커”
손봉수 전 사장은 2011년 합병 당시 하이트와 진로 두 구성원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영업노조, 생산노조, 음료노조가 따로 있었고 소주와 맥주 쪽 구성원 간의 문화 차이도 컸어요. 서로 양해시키고 통합시키는 게 참으로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소주, 맥주 전 영업·생산직 직원들을 다 모아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어요.”
― 그 수가 수천 명은 되지 않나요?
“그렇죠. 우리나라의 한가운데가 충북 괴산입니다. 괴산의 공설운동장을 통째로 빌려 직원들을 다 불러 땀을 흘리며 뭉치게 했죠.”
하이트진로는 해외 80여 나라에 참이슬후레쉬, 참이슬오리지널, 진로이즈백, 에이슬시리즈(자몽에이슬, 청포도에이슬, 자두에이슬, 딸기에이슬 등), 일품진로 등을 판매 중이다.
― 향후 하이트진로의 100년을 어떻게 전망하나요?
“저는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해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주는 과거엔 진로, 지금은 참이슬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증류주가 참이슬이에요.
한국인의 술이 세계 1위 술입니다. 머지않아 한국인의 술맛이 세계인의 술맛이 될 겁니다.”
참이슬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로, 2001년부터 세계 증류주(Distilled Spirits) 판매량 부문에서 23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장엄하게 보이는 기록 뒤에는 보이지 않는 땀으로 빚어져 담아낸 이슬 방울들의 열정이 있지 않을까.⊙
월간조선 09월 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09-09 어쩌다 디지털 성범죄 ‘진앙국’ 됐나
한국 딥페이크 성범죄 불명예
한국이 세계적 문제 진앙 주장
중국·일본 여성들 연대 시위
기술 속도 못 따라가는 제도·법
N번방 사건 후 여전히 제자리
일상 붕괴에 전방위 대책 절실
1999년말 빌보드 한국 특파원이 ‘K-팝’이라는 단어를 쓴이후 ‘대문자 K’는 한국의 상징적 접두사가 됐다. K-팝, K-드라마, K-푸드는 물론 K-배터리, K-원전, K-방산처럼 전방위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K를 호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자격이 필요하다. 첫째 지극히 한국적인 특징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세계 1, 2위를 다투는 ‘수위권’에 들어야 한다. 그런데 참담하고 부끄럽게도 이번에 ‘빌런 K’의 등장이다. K-디지털 성범죄 말이다.
한국의 딥페이크(허위 영상물) 성범죄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썼고, 영국 BBC와 가디언은 특집을 마련했으며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여성들의 온·오프 연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이 ‘가짜 성착취물을 생성·유포하는’ 세계적 문제의 ‘진앙(epicenter)’이라고 했다.
미국 사이버보안 업체 시큐리티 히어로의 최근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딥페이크 음란물에 가장 취약한 국가다. 지난해 7∼8월 딥페이크 음란물 사이트 10곳과 동영상 플랫폼 딥페이크 채널 85개에 올라온 영상물 9만5820건을 분석한 결과, 등장하는 개인 중 한국인이 53%로 가장 많았다. 딥페이크 음란물의 표적이 된 개인 10명 중 8명은 K-팝 가수였다. 한국이 디지털 성범죄 1위국인 셈이다. 최대 피해자인 한 한국 가수는 1595건에 등장해 조회 수는 561만 회에 이르렀다. K-팝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한국이 문화 강국으로 등극했다는 자부심이 차오르고 있을 때 음지 디지털에선 여자 아이돌 가수들이 성범죄 최대 피해자가 되고 있었다.
이번에 피해자가 초중고교생까지 확대되면서 사회적 관심이 폭발했지만, 이는 한국의 오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뿌리 깊은 성차별과 성폭력, 빠른 기술을 못 따라가는 법과 제도 그리고 정쟁에 매몰된 정치의 결합이다. 한국에서 2022년 성폭력 발생률은 10만 명당 80.5건. 성범죄는 시간당 3.4건으로 증가 추세다. 2023년 교제 폭력으로 입건된 피의자는 1만3000여 명. 역시 매년 늘고 있다. BBC는 “한국은 세계 부국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심한 곳으로 급성장한 기술 산업에 만연한 성희롱 문화가 더해져 디지털 성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초고속 인터넷’이 상징하듯 늘 기술은 빠르게 도입하지만, 법과 제도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미국, 유럽에선 SNS와 거대 플랫폼에 대한 규제 법안이 잇따라 제정·시행되는 것과 달리 아직 빈손이다. 성범죄물과 가짜뉴스가 끊임없이 제기돼도 당국은 늘 해외 플랫폼에 요청했지만 답이 없다는 무책임한 말만 되풀이해왔다.
결국, 2019년 이른바 ‘N번방’ 사건을 겪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국회는 지난해 디지털 성범죄의 징역형 상한을 올리는 법안, 디지털 성착취물을 수사기관이 압수·보전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무관심 속에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번에 사건이 터지자 의원들은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22건을 포함해 무려 33건을 발의했는데 급조하다 보니 내용이 비슷하고 제21대 국회 때 폐기된 법안과 다르지 않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엔 유명인뿐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는 물론 교사, 여군에 여기자까지 포함됐다. AI봇으로 2000원에 음란 사진, 1만 원에 음란 영상을 만들 수 있다. 피해자 개인정보 노출도 심각하다. 거리도, 가정도, 학교도, 직장도, 모든 곳이 위험해졌고 일상과 신뢰는 무너졌다. 세상이 위험하니 문 닫고 집에 있는다고 안전하지 않다. 모두가 피해자의 모집단에 들어왔다. ‘성범죄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라’는 주장은 젠더 문제도 정치의 문제도 아니다. 법·제도부터 미디어 리터러시·성 예방 교육까지 할 일이 산더미다.
한국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나일 수 있다’ 즉, 한국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디지털 성범죄 1위의 오명을 벗고 전 세계적 위험에 모델 규범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최초의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말했다. “시작은 항상 오늘이다(The beginning is always today).”

문화일보
09.09 의료계도 협의체 참여해 요구하고 주장해야

▲<YONHAP PHOTO-3876> 하루 남은 수시 원서접수, 2025 의대 정원 변경은?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2025학년도 대학입학시험전형 수시모집 원서접수를 하루 앞둔 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원 건물에 의대 입시 홍보문이 붙어있다. 2024.9.8 yatoya@yna.co.kr/2024-09-08 14:29:20/ <저작권자 ⓒ 1980-2024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대한의사협회가 의대 증원 등을 논의할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 조건으로 ‘2025년과 2026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언급했다. 의협 회장은 “2025년 의대 정원 원점 재논의가 불가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했고, 의협 관계자는 “2027년도 의대 정원부터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정부가 ‘원점 재논의’ 가능성을 열어둔 2026년도 입시는 물론 이미 확정돼 절차가 진행 중인 내년 대입부터 의대 증원을 없던 일로 하라는 것이다.
오늘(9일)부터 의대를 포함한 전국 대학들이 2025학년도 수시 원서를 접수한다. 의대 39곳 정원은 전년보다 1497명 늘어난 4610명인데 이 중 3118명(67.6%)을 수시에서 뽑는다. 의대 등 대입 정원이 결정된 것이 지난 5월이고 여기에 맞춰 각 대학은 수시 모집 요강을 확정 발표했다. 재외국민·외국인 모집 전형은 지난 7월에 이미 시행됐다. 의료계는 수시 합격자 발표가 오는 12월인 만큼 내년 의대 증원도 되돌릴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제 수능이 두 달쯤 남았다. 각 대학은 의대 관련 입시 요강을 다시 짜야 한다. 수시를 지원한 수험생들은 혼선을 겪어야 한다. 수시 원서를 다시 내야 할 수도 있다. 내년 증원 철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 의사는 복지부 장차관 파면을 요구했다. ‘의대 2000명 증원’의 정부 책임자에게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책임자 문책은 의료 사태를 해결하고 따져도 될 문제다. 의협은 “협의체 참여 전에 여·야·정이 단일안을 미리 내놔야 한다”고 했다. 마음에 들어야 참여하겠다는 것인가. 지금 의료 사태에선 의사들의 목소리가 누구보다 중요하다.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해 병원을 떠난 것이 전공의이고 의대생은 수업을 거부하고 있다. 여·야·정이 단일안을 내놔도 의사들이 거부하면 의미가 없어진다. 의료 갈등을 풀 단일안은 여·야·정과 의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야 한다.
의사들이 참여를 유보한 상태에서 여·야·정은 추석 전 협의체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매번 충돌하던 여야가 이 문제에선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만큼 의료 현장이 심각하고 사태 해법이 시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료계도 어렵게 마련된 협의체에 책임 있는 대표를 참여시켜 할 말을 해야 한다. 의료 정상화를 위한 현실적 해법이 나오기를 온 국민이 기다리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
09-09 여야, 의료개혁 대의 지키되 의사단체 동참 이끌어야
전국 대학들의 2025학년도 수시 모집 원서 접수가 9일 시작됐다. 전국 의과대학 39곳의 모집 정원은 전년보다 1497명이 늘어난 4610명인데, 이 중 3118명(67.6%)을 수시로 뽑는 만큼, 현실적으로 내년 모집 정원 문제는 더 이상 손대기 어렵게 됐다. 의사단체나 전공의 요구대로 이를 백지화한다면 입시 대혼란이 빚어지고, 또 다른 가처분·손해배상 등 소송전도 예상된다. 잘잘못을 떠나 대학 입시가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인 만큼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 합리적이다.
의대 정원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은 시대적 대의(大義)다. 지난 27년 동안 의대 정원이 전혀 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정상이다. 윤석열 정부가 방향은 제대로 잡았지만 ‘정무적 실패’ 탓에 7개월째 파행이 이어진다. 며칠 전까지 윤 대통령은 원칙 고수 입장이었지만, 심각해지는 응급실 등 의료 현장의 문제를 뒤늦게 인식하고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에 동의한 것은 다행이다.
전공의 이탈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의료 불안이 나날이 심각해지고, 정부와 의사 직역의 입장은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하는 만큼 정치권의 적극적 중재 노력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날 오전 우원식 국회의장 주재로 추경호 국민의힘,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만나 협의체 구성의 방향을 논의했다. 정부와 여야는 공감대를 표시한 만큼, 관건은 의사단체와 전공의·의대생 동참을 끌어내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단체들의 입장이 다르고, 대표성도 의심받는 만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정치력을 발휘해 추석 연휴 이전에 해법을 도출하기 바란다.
의사단체는 무리한 요구를 접기 바란다. 2025년 의대 증원 백지화 요구는 국민 지지를 얻을 수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절충안을 낸다고 해서 의사들 주장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협의회에 참여해 합리적 해법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윤 정부는 여당에서조차 보건복지부 장·차관 경질 요구가 공개 표출되는 등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의료개혁이라는 대의를 지키면서 다수 국민이 공감할 해법을 찾는 데 여·야·의·정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문화일보 사설
09-09 대선있는 2027년 증원논의하자는 의협… 협의 거부한채 ‘꼼수’
■ 여야의정협의체 외면 의료계
대화 조건 ‘증원백지화’ 요구
사실상 대화·협상 거부한 셈
내부서도 “국민고통 외면” 비판
7개월째 기존 입장만 반복
“의료계 진정한 대표단체 없어”

의료공백 사태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대한의사협회(의협)가 협의체에는 참여하지 않고 2025학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 등 비현실적인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아 의료계 내부에서도 과도한 전제 조건 대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공의들은 복귀하지 않고, 의사단체들은 정부와의 협의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의료계에서는 증원 철회만 주장하는 강경파들의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일부 의과대학 교수들은 “의협이 내민 조건은 의대 증원을 하지 말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고통받는 국민을 외면하고 있는 의협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조승연(인천시의료원장)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장은 9일 문화일보와 통화에서 “(의협이) 내년도 증원 백지화 등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우는 건 대화나 협의를 아예 안 하겠다는 뜻”이라며 “국가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회장은 “환자가 힘들어하는 상황을 빨리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의사의 의무 중 하나”라며 “(내년도 의대 증원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만큼 협의체에 들어와 의대 증원으로 인한 부작용 완화 방안을 논의하는 게 전문가다운 자세”라고 말했다.
전날 의협은 여당이 제안한 여야의정 협의체에 의료계가 참여하기 위해서는 2025년과 2026년 의대 증원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2027년 정원부터 재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부터 2025학년도 대입 수시전형 원서 접수가 시작돼 정원 조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게다가 대선이 있는 2027년부터 의대 증원을 논의하겠다는 주장은 사실상 증원을 하지 않겠다는 ‘꼼수’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 7개월간 대안 없이 반대 의견만 내놓은 의협의 사태해결 의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정부가 의대 증원을 백지화하면 다음 순서로 간호법 폐지 등 모든 정부 정책을 원점으로 돌리는 시도가 나올 것이라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대 교수는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는 현 상황에서 누구에게 물어봐도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의협은 국민 고통에 관심이 없다”며 “의협이 (전제조건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회원용 쇼’를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의료계는 여야의정 협의체 출범이 순탄치 않으리라고 보면서도 의·정 대화를 위해 계속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옥민수(울산시 공공보건의료지원단장) 울산대 의대 예방의학과 부교수는 “양측이 날이 서 있어 협의하기 쉽지 않은 구조”라며 “출구가 보이지 않아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여야의정 협의체라는 대화의 끈은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의료계에 진정한 대표성을 가진 단체가 없다”며 “의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협의체에 참여해 의료개혁 의제를 테이블 위에 올린 후 과학적 논거에 따라 협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일보 권도경·유민우 기자
09-10 응급실 블랙리스트, 의료계 퇴출시킬 反생명 중대 범죄
응급실 비상 상황에서 번 아웃을 견디며 버티고 있는 응급실 의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블랙리스트’가 나와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응급실 위기 경보가 울리고, 중환자가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현실에서 의사 윤리를 저버린 반(反)생명 행태이다.
의사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넷 사이트 ‘감사한 의사’에 7일 ‘응급실 부역’이라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여기엔 187개 수련병원 응급실에서 근무 중인 전문의·전공의 인원 집계와 일부 근무자의 실명이 공개됐다. 맨 위엔 ‘군 복무 와중에도 응급의료를 지켜주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비꼬며 응급실 파견 군의관 명단을 공개했다. 이에 1차로 응급실에 배치된 군의관 15명 중 일부는 배치를 거부하고 대인기피증까지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2월 전공의 이탈 후 블랙리스트 문제는 반복돼왔다. 3월 의사 온라인 커뮤니티에 병원에 남은 전공의 실명을 담은 ‘참의사 리스트’가 공유됐고, 그 뒤에도 ‘복귀 전공의 제보받는다’는 글에 개인 신상이 포함된 댓글이 올라왔다. 이는 예·본과 6년에 전공의 기간까지 10년 이상 관계가 이어지는 의사 사회 특유의 폐쇄성 때문이다.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있지만, 배신자로 낙인 찍힐까 두려워 나서지 못한다. 결국 전공의 복귀를 막고 의료 현장을 최악으로 몰고 가 자신들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겠다는 집단적 이기주의다. 이는 정치권에서 여·야·의·정 협의체를 만들어 출구를 마련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다.
보건복지부는 9일 “응급실 의사들의 실명을 악의적으로 공개하는 건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이들을 위축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응급실 블랙리스트는 응급실 위기를 최악으로 몰고 가는 반생명·반윤리 범죄이다. 만약 리스트를 만든 이들이 의사라면 면허 박탈을 포함해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문화일보 사설
09.10 서울 사상 첫 '9월 폭염 경보'... 내일 35도까지 올라간다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서울에서 1908년 이후 116년 만에 가장 늦은 열대야(최저 기온 25도 이상)가 나타났다. 10일 오후에는 서울 전역에 처음으로 ‘9월 폭염 경보’가 발령됐다. 11일도 한낮 기온이 35도까지 오르며 ‘가을 폭염’이 이어질 것으로 예보됐다.
10일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전날 오후 6시 1분부터 이날 오전 9시 사이 최저 기온이 25.6도를 기록하며 열대야가 나타났다. 관측 기록이 남아 있는 1908년 이후부터 직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늦은 열대야는 1935년 9월 8일이었다. 이 기록이 89년 만에 바뀌었다. 기상청 관계자는 “낮 동안 기온이 많이 오른 상태에서 우리나라에 고온다습한 남동풍이 불어와 열기를 가둬 밤에도 기온이 식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낮에는 최고 기온이 34도 안팎까지 올라 여름처럼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10일 기상청에 따르면 전체 183개 지역 중 164개에 폭염 특보가 내려졌다.
이날 오후 4시에는 서울 전역에 폭염 경보가 내려졌다. 폭염 경보는 일 최고 체감온도 35도 이상이 2일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발표된다. 서울에서 9월에 폭염 경보가 내려진 것은 2008년 폭염특보제가 도입된 이후 처음이다.
이날 낮 최고 기온은 서울 33.2도, 대전 35.3도, 광주 33.4도, 대구 33.9도 등에 달해 한여름 불볕더위를 방불케 했다.
‘가을 폭염’은 11일 정점을 찍은 뒤 전국 곳곳에 비가 내리며 다소 꺾이겠다. 11일 전국 낮 최고 기온은 28~35도로 예보됐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후부터 충청과 남부 지방, 제주도를 중심으로 시간당 30㎜의 강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해 12일에는 수도권, 강원, 충청 북부에 최대 60㎜의 비가 내리겠다.
13일 비가 그친 뒤에는 북쪽에서 찬 바람이 불어 들어오며 더위를 식혀주겠다. 기상청 관계자는 “12~14일은 비와 북쪽 찬 공기 영향으로 폭염 특보가 해제되거나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며 “15일 이후 대기 상층 고기압이 확장하면서 다시 기온이 오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김윤주 기자
09.11 젊은 선수들 땀으로 실속 챙기는 횡포, 배드민턴협회뿐이겠나
문화체육관광부의 배드민턴협회에 대한 조사에서 회장의 ‘배임·횡령’ 의혹 등 각종 불공정한 협회 운영이 드러났다. 후원사 용품 사용을 강제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등 선수들을 옭아맨 정황도 밝혀졌다. 지난 파리 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가 협회 운영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자 문체부가 조사단을 구성해 협회를 점검한 결과다.
협회 회장 등은 지난해와 올해 후원사로부터 셔틀콕 등 물품을 구입하면서 협회 직원들 몰래 후원사에 구매 금액의 30%에 해당하는 물품을 추가 후원받기로 하고 약 3억원 상당 물품을 지급받아 임의로 배정한 것으로 밝혀졌다. 문체부는 “횡령과 배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임원은 보수를 받을 수 없는데도 일부 임원은 후원사 유치 기여 명목으로 유치금의 10%를 인센티브로 챙기기도 했다. 세계적인 선수가 속한 협회가 구멍가게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수들을 옭아맨 규정도 적지 않았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라켓과 신발 등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는 용품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사용하길 희망하지만 협회는 후원사 용품을 사용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미국·일본·프랑스는 용품 사용을 강제하지 않는다. 배드민턴협회는 전체 후원금의 일정 비율을 국가대표 선수단에게 배분하도록 명시한 규정도 선수들도 모르게 삭제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대표 선수의 복종을 규정한 조항도 여전히 갖고 있었다. 문체부는 국가대표 선수 선발 방식의 공정성 문제, 비국가대표 선수의 국제 대회 출전 제한 문제, 실업연맹 신인 선수 연봉 상한과 지나치게 긴 계약 기간 등도 문제로 지적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 규정은 없어져야 한다.
땀을 흘리는 선수들이 따로 있고 이를 이용해 실속을 챙기는 어른들이 따로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문제들이 배드민턴협회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민의힘 진종오 의원은 배드민턴과 태권도·사격 등 종목에서 협회 비리와 뇌물 수수, 성폭력, 승부 조작 등 70여 건의 체육계 비리 제보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다른 협회에도 이런 문제들이 만연하고 있다면 관리 감독 역할을 해야 할 대한체육회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9-11 의대 응시 쇄도, 미래 지향적 의료개혁 새 출발점 돼야
의사단체들이 의대 증원으로 인해 의사 과잉 사태가 빚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지만, 의과대학 수시모집 원서 접수가 시작되자마자 지원자가 쇄도했다. 현재 의대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있고, 의대 증원 탓에 교육이 파행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개의치 않는 것이다. 물론 의대 블랙홀이라는 표현처럼, 이공계 인재 이탈 등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대 증원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넘쳐나진 않을 것이라는 국민 인식과 전망의 반영이기도 하다.
진학사에 따르면 11일 오전 9시 기준으로 전국 39개 의과대학 중 37개 의대 수시모집에 1만9324건이 접수됐다고 한다. 수시 접수가 시작된 9일부터 사흘도 채 안돼 경쟁률이 6.62 대 1로 치솟았다. 우선, 의대 증원 정책에 따라 정원이 늘고 합격선은 소폭 하락이 예상되면서 지원자가 대폭 늘어난 결과로 보인다. 2025학년도 전국 의대 정원은 올해 3113명보다 1497명 늘어난 4610명이며, 그중 67.6%인 3118명을 수시모집으로 뽑는다. 의대 증원에도 의사를 지망하는 학생이 많다는 사실은, 의사는 변함없이 소득 높은 직종으로 남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인구 1000명당 한국 의사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못 미친다. 2009년 로스쿨 출범으로 더 많은 법조인이 배출되면서 송무 영역을 뛰어넘어 행정부와 공공기관, 지자체 등 공적 영역과 민간 기업으로 법률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의대 지원자 폭발은 의사 수 부족이 의료개혁과 의대 증원의 출발점임을 또다시 상기시킨다. 앞으로 몇 년 진통이 불가피하겠지만, 2025학번 이후의 의대생들이 미래 의료체계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범국가적 지원이 절실하다.
문화일보 사설
09-11 강력 처벌 시급한 ‘의사 블랙리스트’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인한 응급실 위기로 중환자가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한다. 응급실을 돌다가 의사가 없어 숨지는 불상사는 통탄할 일이다. 응급실을 지키는 의사들은 그만큼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정신적·육체적 한계를 견디고 있다.
그런데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 및 파견 군의관의 명단을 공개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용의자 5명을 특정해 수사 중이라고 한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10일 관련 용의자 2명을 우선 특정해 1명은 조사 후 검찰에 송치하고, 나머지 1명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압수수색과 조사를 통해 범죄 혐의를 규명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아카이브(정보 기록소) 등 접속 링크 게시자 2명을 추가 특정해 스토킹처벌법 위반 방조 혐의로 입건해 수사 중이며, 관련자들을 추적하고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스토킹처벌법에서 스토킹범죄란,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스토킹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해 7월 11일 일부 개정하면서, 상대방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스토킹행위의 형태를 이 같은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상대방의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거나 배포 또는 게시하는 행위(제2조 제1호 바목)까지로 확대했다. 또한, 스토킹범죄에 인정되던 피해자의 의사에 반(反)해 처벌할 수 없다는 반의사불벌죄 규정(제18조 제3항)을 폐지했다.
앞서 지난 7일 ‘감사한 의사 명단’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응급실 부역’ 코너가 개설됐고, 여기에 추석 연휴 기간 병원별 응급실 근무 인원과 근무자 명단이 올라왔다. 이 사이트는 아카이브 형식으로 운영진이 제보를 받아 복귀 전공의(인턴, 레지던트)와 의대생 명단 등을 게시해 왔는데, 최근 응급실 근무 의사 명단도 올라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울 지역 병원 응급실에 파견된 한 군의관은 이로 인해 자신의 신상과 관련한 글이 게시되자 병원 측에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경찰은, 의사 집단행동 초기부터 진료 복귀를 방해하는 명단 공개, 모욕·협박 등 조리돌림 행위에 대해 모두 42건을 수사해 48명을 조사한 끝에 32명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한다. 경찰의 설명대로, 의료 현장에서 성실히 근무하는 의사들의 명단을 악의적으로 공개하는 행위는 엄연한 범죄 행위이다. 정도가 심한 행위자에 대해서는 구속수사 등 신속·엄정하게 대응해야 한다.
정부는 응급실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 자정(自淨)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의료계에 촉구했다. 보건복지부는 브리핑에서 “선배 의사로서, 동료 의사로서 일부 의사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바로잡아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대한의사협회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회원들에게 블랙리스트 작성·유포를 멈춰 달라고 당부했다.
추석 연휴 응급의료 대란이 우려되는 가운데 분만·소아·화상·심뇌혈관 등 필수의료(바이털) 진료를 맡은 2차 전문병원들이 추석 연휴 기간에 병원 문을 닫지 않고 응급진료를 이어가기로 했다는 낭보도 있다. 응급실 블랙리스트는 반생명·반윤리적 범죄로서, 범죄자의 가족도 응급실 뺑뺑이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화일보
09.11 응급실 근무 의사 블랙리스트, 묵과할 수 없는 범죄다
최후 보루인 응급실마저 위협하는 겁박 엄벌 필요
유감 표명한 의협, 대책 마련 위해 대화 참여하길
정부가 시민들의 불안을 고조시키는 응급실 근무 의사 블랙리스트에 대해 엄정히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2월 전공의들이 병원을 이탈한 이후 진료 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의 블랙리스트는 여러 차례 인터넷에 올랐다. 급기야 국민 생명의 최후 보루인 응급실 근무 의사까지 겁박하는 명단이 등장했다. ‘응급실 뺑뺑이’로 환자가 숨져 가는 마당에 응급의료를 지탱하는 의사를 괴롭히는 행위는 묵과하기 어렵다. 방식 또한 악의적이다.
‘감사한 의사 명단’ 등 사이트엔 ‘응급실 부역’이라며 병원별 응급실 근무자 인적사항을 띄웠다. “민족의 대명절 추석, 의료대란을 막기 위해 힘써 주시는 분들께 감사와 응원을 드린다”며 비꼬는가 하면, “일급 520만원 근로자 분들의 진료정보입니다”라는 비아냥도 서슴지 않는다. 명령에 따라 현장에 투입된 군의관 명단까지 공개했다. 의사들의 행위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저열하다.
현 정부의 일방적인 증원 강행이 의사들로선 못마땅할 것이다. 대통령실과 보건복지부를 향한 반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치면 안 된다”며 불안해하는 국민을 위협하는 행위는 절대 용납이 안 된다. 응급실 근무 의사를 압박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간신히 지탱해 온 응급 현장을 완전히 마비시키려는 의도 말고 어떤 해석이 가능한가. 그러니 대한의사협회조차 “국민께 우려를 끼친 데 대해 심각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을 테다.
지금 응급실은 의료 사태 이전 평상시 대비 73%(지난 2일 기준)의 의사들로 어렵게 끌어가고 있다. 예년 명절과 차원이 다른 격무가 예상되는 여건에서도 환자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버텨 온 의사들이다. “이런 상황이 힘들었다면 응급의학과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정성필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의 말에서 응급실을 지키는 의료진의 마음이 읽힌다. 이런 헌신의 뒤에서 블랙리스트나 만드는 의사들은 부끄럽지 않은가.
윤석열 대통령은 어제 추석 연휴 기간 중증·응급환자의 전문의 진찰료를 평소의 3.5배 수준으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연휴를 반납하는 노고에 합당한 대우다. 그러나 이런 식의 대증요법으로 매번 고비를 넘기기엔 한계가 있다. 현 의료 위기는 의료계와 소통을 소홀히 한 정부의 책임도 작지 않다. 사태 해결을 위해 여·야·의·정 협의체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지혜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그제 시작한 의대 수시모집 접수에서 일부 전형 경쟁률이 벌써 10대1을 넘어섰다. 의협은 2025년 증원 백지화 같은 비현실적 요구에만 매달리지 말고 즉시 대화에 참여하라. 협의를 성공으로 이끄는 건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응급실 블랙리스트처럼 적대감만 유발하는 행위는 엄하게 처벌해야만 원만한 논의가 가능해진다.
중앙일보 사설
09-11 막나가는 의사들… “하루 1000명씩 죽어 나가야”

▲온라인커뮤니티 캡처
■ 커뮤니티 게시글 논란
‘더 죽어도 상관없다’ 취지 다수
“드러누울수록 의사 가치는 상승”
복지부 “경찰에 수사 의뢰할 것”
경찰 ‘블랙리스트’ 작성 5명 수사
최근 응급실 뺑뺑이 등 의료사태와 관련해 의사·의대생 커뮤니티에 “국민이 더 죽어 나가야 한다”는 취지의 과격한 글들이 여과 없이 올라와 논란을 빚고 있다. 일부 글에서는 “개돼지들 매일 1000명씩 죽어 나갔으면 좋겠네” 등 의료대란으로 더 많은 국민이 희생돼야 한다는 표현까지 등장해 충격을 주고 있다.
11일 의료계에 따르면 의사나 의대생임을 인증받아야 가입할 수 있는 한 커뮤니티에 의료대란으로 많은 국민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취지의 게시글이 다수 게재됐다. 해당 게시글에는 “사실 국민들 죽어도 별 상관없긴 하다” “드러누울수록 의사 가치는 오히려 올라간다. 왜냐하면 의사라는 건 검사·변호사 따위와는 달리 필수적이며 대체불가 인력이기 때문이다” 등 내용이 포함됐다. “응급실 못 가? 어쩌라고. 너희들이 이렇게 만들었잖아” “죽으라고 눕는 거지. 더 죽어라 더” 등의 과격한 내용도 있었다. 한 작성자는 “이젠 (응급실 뺑뺑이로 의식불명 상태에 놓인) 2살 아기 사건을 봐도 감흥이 떨어진다”며 “그냥 사람들이 더 죽어 나갔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국민이 더 많이 희생될수록 의사들에게는 이득이라는 글도 게재됐다. 해당 글에는 “나중에 의사가 되더라도 무조건 사회 후생을 ×져버리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복수”라는 내용이 담겼다.
일반 국민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표현도 다수 눈에 띄었다. 해당 게시판에는 “개돼지들이 매일 1000명씩 죽어 나갔으면 좋겠네” “진짜 개돼지 ××들 조금도 동정심이 안 드네” 등의 글이 이어졌다. 한 작성자는 “난 증원 그런 거 관심 없고 오로지 개센징에 대한 복수만 필요하다”며 “하루에 100명, 200명씩 응급실 앞에서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개센징들에 대한 혐오·증오는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며 “히틀러가 이해된다”고까지 적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해당 게시글에 대해 “경찰에 수사 의뢰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실명과 개인정보가 ‘응급실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유포된 것과 관련해 모두 5명의 용의자를 특정하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최근 의사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아카이브(정보 기록소) 형식의 한 사이트에는 ‘응급실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응급실 운영 병원의 근무 인원과 근무자 명단이 추가됐다.
유민우 기자 yoome@munhwa.com
09-12 “매일 천 명 죽어나갔으면…” 막말과 의료개혁 절박성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응급실 파행 등 의료 공백에 대한 국민 걱정이 더 커진 상황에서 일부 의사와 의대생들이 “다 죽어라” “매일 천 명씩 죽어나갔으면 좋겠다” 등의 막말을 쏟아내는 것으로 확인됐다. 충격적이고 참담하다.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일탈이겠지만, 최근 전반적 상황을 보면 상당수 의사가 동조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의사와 의대생만 가입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인 메디스태프에 최근 현 의료 사태에 대해 “추석에 응급실 대란이 진짜 왔으면 좋겠다” “의사에게 진료받지 못해 생을 마감할 뻔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야 의사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을 갖게 된다”는 등의 글들이 올라왔다고 한다. 국민을 ‘개돼지’ ‘조센징’으로 조롱하며 “개돼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라” “조선인들 죽는 거 볼 때마다 기분 좋다”와 같은 패륜적 내용도 있었다. 집단 이기주의도 넘어선 집단 광기로 비친다. 14만 명의 전체 의사, 특히 번아웃을 견디며 현장을 지키는 의료진에 대한 모독도 된다.
그 숫자가 얼마이든, 이런 비뚤어진 품성을 가진 사람은 의사의 자격이 없다. 끝까지 추적해 의사 면허를 박탈해 의료계에서 퇴출하라는 요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건복지부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방침이라고 한다. 명확하게 가려 엄벌에 처해야 한다. 선배 의사와 의대 교수 등도 이 같은 악성 행태에 선을 긋고 꾸짖지 않으면 의사 전체의 명예가 훼손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최근 응급실 의사·전공의 명단을 담은 블랙리스트에 이어 또다시 드러난 의사 사회 내부의 패륜적 인식은 의사 집단에 대한 국민의 감정적 골을 깊게 만들어 사태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 및 협의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사태 핵심인 전공의 및 의대생 단체는 침묵을 지키고, 대한의사협회도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는 가운데 대한병원협회와 상급종합병원협의회 등은 협의체 참여에 긍정적이라고 한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의료 위기부터 해결하자며 쟁점 법안 처리를 추석 연휴 이후로 미뤘다. 의료계는 즉각 대화와 협상에 참여하기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막말 게시글에 찬동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
09-12 [속보]경찰 “36주 낙태 집도의 따로 있어…살인 혐의 추가 입건”
수술 참여 의료진 총 6명…알선한 브로커도 입건해 수사
20대 유튜브 살인 혐의 수사 중
“유튜버, 금전적 목적으로 낙태 게재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는 ‘36주 태아 낙태’ 사건과 관련해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따로 있었던 것을 확인해 입건했다고 12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이날 “그간 원장 의사가 (수술을) 집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수사를 진행하고 압수물과 의료진 진술을 분석한 결과 실제 집도의가 별도로 있어 특정하고, 지난달 하순 살인 혐의로 입건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집도의가 뒤늦게 파악된 이유에 대해 “최초에 관계자들이 거짓으로 진술을 했다”며 “각 의료진에 대해서는 전원 조사를 했으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상호 엇갈리는 내용이 확인돼 진술을 분석한 뒤에 추가 조사를 이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집도의는 산부인과 전문의이며 다른 병원 소속의 의사인 것으로 드러났다. 집도의는 경찰 조사에서 수술한 사실을 인정했고 출국이 금지된 상태다.
현재까지 수술에 참여한 의료진은 병원장과 보조 의료진 3명, 이 병원 직원이 아닌 집도의와 마취의 등 총 6명으로 확인됐다.
병원장과 집도의는 살인, 다른 의료진 4명은 살인 방조 혐의를 받는다. 병원장에게는 병원 내부에 CCTV를 설치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 의료법 위반 혐의도 적용됐다.
경찰은 해당 낙태 경험담을 유튜브에 올린 20대 유튜버 역시 살인 혐의로, 병원을 알선한 브로커 1명은 의료법 위반 혐의로 입건해 수사 중이다.
이 브로커는 병원 관계자가 아님에도 인터넷 블로그에 광고를 올려 환자를 알선하고 병원에서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당초 낙태를 한 유튜버는 지인을 통해 산부인과 정보를 알게 된 것으로 전해졌는데, 지인이 블로그 광고를 보고 이를 알려준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태아의 사망 시점을 포함해 살인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수사를 이어가고 있으며 관련 보도가 나오고 보건복지부가 수사의뢰를 한 직후 태아가 화장된 이유 등도 들여다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수술 날짜는 지난 6월 25일이지만 화장 일자는 수사의뢰 다음 날인 지난 7월 13일이다.
경찰은 앞서 세 차례의 병원 압수수색 등으로 휴대전화, 태블릿 13점과 진료기록부를 비롯한 기타 관련자료 18점을 확보했으며 종합병원 산부인과 전문의와 자문업체를 통한 의료 감정도 진행 중이다.
경찰은 유튜버를 추가로 조사했으며 유튜버가 금전적 목적으로 낙태 브이로그를 게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일보 박세영 기자
09-12 “악질 불법 사채 원천 무효화”…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6월 2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사당역 승강장에 본지 히어로콘텐츠팀이 취재한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기사를 소개하며 불법 사채 근절을 위한 캠페인 광고물이 부착되어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성 착취 추심’이나 폭행·협박 등이 연루된 악질적 불법 대부계약을 원천적으로 무효화해 이자뿐 아니라 원금도 갚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법안을 정부와 국민의힘이 추진한다. 더불어민주당도 불법 사채 근절을 위한 법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어 정기국회에서 대부업법이 여야 합의로 개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와 여당은 어제 당정협의를 열어 법정 최고금리 연 20%를 위반한 미등록 대부업자의 처벌 수위를 ‘징역 3년 이하 또는 벌금 3000만 원 이하’에서 ‘징역 5년 이하 또는 벌금 2억 원 이하’로 높이기로 했다. 금융 소비자의 오인을 막기 위해 불법 대부업체를 부르는 명칭도 ‘미등록 대부업’에서 ‘불법 사금융업’으로 바꿀 방침이다. 특히 대부 기간 연장을 조건으로 성 착취 영상을 요구하는 등 범죄 행위가 있는 경우 계약 자체를 무효로 보고 범죄 수익을 박탈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기로 했다.
불법 사채의 막대한 폐해를 고려할 때 당정의 대응은 늦은 감이 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의 기획보도에 따르면 40대 일반주부가 아이 학원비로 빌린 40만 원이 6주 만에 15배로 불어나고, “평생 네 딸을 괴롭히겠다”는 협박을 사채업자에게서 받을 정도로 불법 사채는 우리 주변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정식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려다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이 소개한 불법 사채조직의 함정에 빠진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채무자에게 수천 % 고리를 물린 사채조직이 적발돼도 20% 법정금리를 넘는 부분만 범죄 수익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원금과 이자의 환수, 피해자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불법 사채 계약을 무효로 보고 원금까지 회수하는 일본과 다른 점이다. 이번에 정부 여당이 원천 무효를 추진하는 계약은 범죄와 관련된 반사회적 계약만이 대상이다. 민주당은 법정이자의 2배가 넘는 대부계약의 원금까지 무효화하는 법안 등을 놓고 내부 협의 중이다.
금융 약자의 피해를 막자는 큰 방향에서 일치된 만큼 여야는 서둘러 의견을 조율하고 법을 개정해야 한다. 다만 제도 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능력도, 신용도 없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법만 고친다고 불법 사금융이 근절되진 않는다. 저소득층을 위한 정부의 긴급자금 지원 체계를 확충하는 한편 당국의 지속적 감독과 감시, 엄격한 처벌이 뒤따라야 하는 이유다.
동아일보 사설
09-12 선수 보너스 슬쩍, 후원용품 유용… 배드민턴協뿐일까
대한배드민턴협회가 후원금의 20%를 국가대표 선수단에 지급하는 규정을 선수단 몰래 없앤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면서 협회 임원들은 내부 규정을 어기고 후원사 유치에 따른 성공보수를 받았다고 한다. 금메달리스트 안세영 선수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협회의 운영 실태를 조사 중인 문화체육관광부는 10일 선수들이 땀 흘린 대가를 이용해 협회가 법규를 위반해 가며 실속을 챙겨 온 정황들이 담긴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협회는 정부 예산이 투입된 사업의 경기 용품을 수의계약으로 구매하면서 1억5000만 원어치 라켓 셔틀콕 등을 따로 받는 ‘페이백’ 계약을 맺었다. 이 중 3분의 1을 협회 회장의 연고지에 몰아줬다는 것이다. 문체부는 회장에 대해서는 횡령 및 배임 가능성을 제기하고, 후원사와의 수의계약은 보조금관리법 위반이라고 했다. 이 밖에 국고보조금 관리 지침을 어기고 협회 감사가 운영하는 회계법인과 거래하고, 협회 정관상 임원은 보수를 받을 수 없는데도 부회장과 전무는 후원사 유치에 기여했다며 성공보수 68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협회는 임원들이 잇속을 챙기는 동안 선수들의 개인 후원을 막고, 경기력과 직결되는 라켓과 신발도 후원사 용품만 쓰도록 강제하면서, 후원사 보너스는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가대표 선수단에 나눠주는 후원금 조항을 임의로 삭제하고, 선수단에 직접 지급하던 국제대회 보너스는 협회를 통하도록 규정을 바꿨는데 이후 보너스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는 것이 선수들의 증언이다.
한 해 정부 지원금만 71억 원 넘게 받는 협회 내부에서 각종 비위 행위와 불공정 계약이 판치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문체부와 대한체육회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국민의힘 진종오 의원은 체육계 비리 제보센터를 운영한 결과 70건이 넘는 제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대한사격연맹이 직원들에겐 성과급을 주면서 파리 올림픽 선수단엔 포상금 3억 원을 주지 않았다는 제보도 있다. 연맹 회장이 취임 때 약속했던 후원금을 내지 않고 사임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비단 배드민턴협회와 사격연맹에서만 벌어졌는지도 의문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한체육회 산하 경기단체 전반의 운영 실태를 점검해 불법과 부조리를 철저하게 뿌리 뽑아야 한다.
동아일보 사설
09.12 대한체육회, 후배를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난 파리 올림픽 경기는 젊은 선수들의 자랑스러운 결과로 국민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한 여 선수의 지도부에 대한 비판 때문에, 사회적 관심과 반성을 유발했다. 쌓여있던 체육회와 지도부에 대한 우려가 표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젊고 유능한 선수들의 장래를 위해서 책임져야 할 과제가 되었다.
체육회·협회에 대한 우려 표면화
체육계 자기반성이 사안의 핵심
선수 성장·인격에 손상줘선 안

국가대표 메달과 인생의 행복
오래전 일본에서 있었던 선례가 기억에 떠오른다. 어린 고등학교 여학생이 탁월한 수영기록을 세웠다. 체육회에서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고 싶으니까 선수촌에 오라고 권했다. 선수 공동생활의 실상을 살펴본 부모는 소중한 딸을 국가대표 선수로 만들기 위해 딸의 행복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아 딸 생각을 물었다. 딸의 대답은 부모보다 앞서 있었다. 내 소중한 인생을 국가대표의 메달과 바꾸고 싶지는 않다고 거절했다. 그 부모는 무엇을 우려했는가. 체육 동료들 인격 수준과 지도자들의 품격이 일반사회 수준보다 뒤처져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의 인생을 체육 기능과 메달의 가치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체육계의 인격과 품위

▲김학균 배드민턴 국가대표팀 감독이 지난달 1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회관에서 안세영 선수의 문제제기와 관련해 진행된 대한배드민턴협회 진상조사위원회에 출석해 진술하고 있다. 뉴시스
이번에 여 선수가 지도부의 혁신과 체육계의 개혁을 암시했던 내용도 사회적으로 보면 같은 평가였을 것이다. 체육계와 더불어 정부 차원에서부터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할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체육 지도부의 교양과 체육계의 자기반성이다. 그들의 교양이 젊은 국가대표 선수를 육성할 정도의 수준이 되고 있는지, 체육계의 인격과 품위가 예술 등 문화적 창조계에 비교해 대등한 자질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가 문제다. 지도자가 후배들의 교양과 인격 수준 이상의 정신도 갖출 수 없으면 책임 맡을 자격도 없다.
축구협회에 대한 실망도 같은 성격의 사례다. 정치적 목적을 도입시켜서 체육의 순수성을 병들게 해도 안 되지만 코치나 감독이 되었다고 해서 유능하고 장래성이 있는 후배 선수들의 성장과 인격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직책으로 맡은 책임이 높은 사람들은 유능한 후배들을 키우기 위해 자기반성과 품격을 높여 갈 수 있어야 한다. 체육계는 물론 우리 사회 모두가 더 나은 사회, 더 우수한 인재 양성이라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홍명보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6일 서울 종로구 대한축구협회에서 열린 한국축구기술철학(MIK) 워크숍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지금 우리 선수들의 공동체 생활은 어떤지 모르겠다. 예능 분야의 소양을 위해 음악도 감상하고, 미술 작업의 소중함도 깨우쳐 주어야 한다. 명화 감상도 하고, 젊은 시절의 학식과 교양을 위한 독서도 권장하는지 궁금하다. 가능하면 사회 각계의 관심 있는 인사들을 초청해 강연도 들려주는 등 학교 교육보다도 교양을 높이기 위해 노력 하는지 모르겠다. 성년이 되었을 때 체육 기관과 젊은 시절을 통해 내 인생의 많은 것을 터득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높은 수준의 인재 양성의 길이다. 체육 기술이 인생의 부분이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체육계의 지도자들이 사회적 중책을 맡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에 수양과 인격을 갖춰야 한다. 일찍 출발해 빨리 인생을 끝내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할 뿐이다. 예술인들은 같은 전문적 노력을 평생 계속한다.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는 사람은 60세 이후라고 인정한다. 체육계의 지도자들도 동등한 사회적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왜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되었는가. 많은 사람은 정치개입이라고 한다. 정치인들이 권리 행사에 이용한다는 뜻과 정치적 폐습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권리 행사만 하고 책임과 의무가 따르지 않는다면 질서 유린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체육계의 책임자는 뚜렷한 주체 의식과 자존,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 협회에 주어진 책임은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의무이기 때문에 전체 회원과 함께 최선의 노력을 같이 한다는 사명 의식이 앞서야 한다. 직책의 상하관계는 있으나 인간다운 교양과 인격의 가치는 동등하다는 관념이 필요하다. 직책이 낮더라도 식견이 높은 사람이 있고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부하가 얼마든지 있다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방에게 대접을 베풀라는 교훈은 진리이다. 상대방을 얕보면서 존경받는 사람이 없고 남을 욕하는 사람이 상대방보다 높이 인정받지 못한다.

▲7월 25일 오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 경기장에서 열린 2024파리올림픽 여자 리커브 개인 랭킹 라운드 경기에서 한국 임시현 선수가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체육의 목적 숙고해야
나 같은 사람은 평생을 교육계에서 보냈다. 교육의 열매는 제자들을 얼마나 위하고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의 인격과 행복을 위해주는 사랑은 자연스러운 의무이지만 쉽지는 않다. 그래도 그 마음과 정성을 가지고 제자들을 사랑한 사람이 제자의 존경을 받는다. 명령을 내리고,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고 체벌을 가하거나, 인격을 모독하는 욕설을 삼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격과 지도자 됨의 자질을 먼저 살펴야 한다. 선배들의 옷 빨래를 강요하거나 상습화했다면 그 사실 자체가 일반사회의 관습이 될 수 없음을 반성해야 한다. 정신적 가치 질서는 수준이 높을수록 존경스러워진다.
체육의 목적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인간다운 삶의 향상을 위해서다. 사회적 의무까지 위하고 섬기는 지도자가 된다면 국가를 위한 헌신과 감사의 대상이 된다.
중앙일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09-13 ‘대통령 관저 무자격 업체 시공’ 감사 결과와 남는 의문
국가 최고 보안시설인 용산 대통령실과 한남동 관저 이전 공사 과정에서 무자격 업체가 시공하는가 하면, 이런저런 비위도 있었던 것으로 감사원 감사 결과 드러났다. 단 하루도 청와대에서 근무하지 않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급하게 이전하면서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긴 하다. 2022년 10월 참여연대가 국민감사를 청구하면서 시작된 감사를 1년9개월 만에야 결론을 낸 것도 석연찮다. 게다가 여전히 명료하게 밝혀지지 않은 의문점들도 있어, 또 다른 정쟁과 수사·특검 시비 등도 걱정된다.
감사원은 “계약과 시공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는 있었지만, 시공 계약 자체는 적법했고 특혜는 없었다”고 했다. 이런 설명 자체도 모순적이지만, 이미 제기된 의혹들을 잠재우긴 어려울 전망이다. 관저 인테리어 공사는 ‘21그램’이라는 영세업체가 수의계약을 했다. 김건희 여사가 대표로 있었던 코바나컨텐츠의 전시 후원사 중 한 곳인데, 종합건설업 면허가 없어 증축 공사를 할 수 없게 되자 18개 업체에 하도급을 줬다. 그 중 15곳 역시 무자격이었고, 대통령비서실의 사전 승인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계약 체결 전에 공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일반 공사장에서도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왜 벌어졌는지 의문이다. 관저 공사 실적 자체가 해당 업체엔 자산이 된다. 관저 이전 총괄 책임자는 “(수의계약 업체 추천자가) 기억 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도 추가 조사를 벌이지 않았다.
집무실 공사와 관련, 경호처 간부와 유착된 브로커가 방탄 창호 공사비 24억여 원 가운데 15억여 원을 빼돌린 사실이 적발됐다. 비리와 별개로 방탄 공사 자체가 날림으로 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실무 책임자에 대한 인사 조치와 수사 등이 이뤄지고 있지만, 윗선의 관리 책임은 없는지, 다른 의혹은 없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관저 공사는 대통령실 청사와 달리 비교적 시간 여유도 있었다.
문화일보 사설
09-13 추석 전 ‘여야의정’ 난항… 의료 공백 없게 만전 기해야
추석 연휴가 다가왔지만, 여·야·의·정(與野醫政) 협의체 출범은 서로의 입장 차로 난항을 겪고 있다. 의료 공백과 응급실 뺑뺑이 우려로 인해 ‘추석에 아프면 안 된다’가 명절 인사가 됐을 지경이다. 추석 연휴 시작 전에 4자 대표들의 협의 기구를 출범시켜 국민 불안을 덜어주자던 약속은 빈말이 됐고, 추석 전날인 16일까지라도 성사시키자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12일 “의료계가 단일 대오를 갖추기 어렵기에 참여하는 의료계와 함께 일단 출발하자”고 했다. 출범한 뒤 다른 의사 단체가 추가로 참여하면 된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협의체 구성 목표 시점을 당초 추석 연휴 전에서 추석 당일(17일) 전으로 늦췄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대한전공의협의회, 대한의사협회 등 핵심 단체가 빠진 협의체엔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의료계는 참여 반대 혹은 유보다. 국민의힘은 지난 10일 15개 의사·병원 단체에 협의체 참여 요청 공문을 보냈지만, 어느 곳에서도 공식 참여 답신을 받지 못했다. 사태 핵심인 전공의·의대생 단체는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의협은 불참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의대 교수와 병원 등 참여에 긍정적이던 단체도 유보 입장으로 돌아섰다. 자칫 대화의 동력마저 잃을까 걱정스럽다. 의료계는 더 이상 밖에서 반대 목소리만 높여선 안 된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야당도 미온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의료계를 설득해야 한다.
정부는 추석 연휴에 지난 설 연휴보다 2배 이상 많은 하루 평균 약 8000개의 당직 병의원이 문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150여 분만 병원도 진료에 나선다. 병의원·약국 안내가 필요하면 119로 전화하면 된다. 의료 사태 후 처음 맞는 명절이다. 정부는 의료 공백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국민도 불필요한 응급실 이용 등을 자제하기 바란다.
문화일보 사설
09-13 의대 지원 열풍과 ‘의대 증원’ 블랙홀
김양균 경희대 경영대학 의료경영학 전공 교수
현재 우리는 의대 정원 확대와 관련된 의·정 갈등으로 인해, 의료 공백에 따른 생명 위협을 걱정하는 국민의 모습과 학생들의 의대 지원 열풍을 동시에 목격하고 있다. 의대 지원 열풍은 학생의 미래를 위한 직업 선택의 결정과 의료 공백으로 인한 현재의 걱정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보여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K-방역이니 K-의료니 하며 칭찬 대상이던 의료계가 왜 국민의 손가락질 대상이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초 정부는 △지역의료 강화 △의료인력 확충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 체계의 공정성 확보를 골자로 한 의료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의료를 제공 받기 위해 수도권의 대형병원으로 환자들이 집중되는 것을 예방하고, 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와 관련한 대안 마련, 현재의 ‘저수가 저보상’ 체계를 적정하고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보상도 의료 전달을 위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료 인력 확충을 위한 의대 증원 규모와 관련된 이슈가 다른 개혁 방안을 빨아들이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는 의대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의 지원 열풍이 불고 있다. 12일 오후 6시 기준 의대 수시모집에는 정원의 16배 가까운 지원자가 몰렸다. 아직 모집 기간이 남았으니 최종 경쟁률은 더 높아질 것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수시모집에서 의대 합격선이 기존 1.3등급에서 1.5등급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가전과 반도체·자동차·방산·건설 등의 수출을 통해 성장한다. 그래서 정부에서 자연 및 공학 분야를 지원·육성해야 하며, 이를 위한 인재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수한 학생들이 직업의 안정성만을 위해 의료계로의 쏠림 현상을 지속한다면 우리의 경쟁 우위는 상실될 것이다. 이공계로의 진출이 줄어드는 인재의 불균형도 국가 전체의 산업적 측면에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의료와 교육 그리고 정부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국민이 우려하는 부분을 해결하긴커녕 더욱 미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주위에서 ‘제발 아프지 마라’든지 ‘행여 이번 추석 연휴에 고향 갔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는 이야기를 쉽게 듣는다.
의료란 불확실한 부분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질병의 불확실성과 환자 개인의 특성 차이로 인한 불확실성, 그리고 의사 개인의 판단 차이에 따른 불확실성이 의료 제공 때 함께 고려돼야 한다. 불확실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몇 명의 의사가 필요하고, 몇 퍼센트(%)의 의사가 응급실에 남아 있고, 몇 명의 의사가 진료하고 있다는 단순한 숫자보다는 실제로 양질의 의료 서비스가 국민에게 제공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의료는 단순한 숫자로 결정될 수 없는 예술이다.
국민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여·야·의·정이 열린 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협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의 입장만을 주장한다면 갈등이 생기고 관계는 끊어질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위한 의료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고 방향성이 옳다는 동의를 얻어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를 추진해야 한다. 14일부터 닷새 동안의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 모여서 고민과 즐거움을 함께하듯 우리의 걱정과 우려도 함께 해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문화일보
09-14 의대 수시 7만2351명 접수…‘의전원 폐지’ 이후 가장 많다
종로학원 취합…지난해 입시보다 1만5159명 많아
최종 24.04대 1…지원자 서울 줄고, 경인·지방 늘어
경쟁률 30대 1 밑으로 갔지만 7만명 넘은 적 처음

▲2025학년도 대학입학 수시 모집 원서 접수 마감을 하루 앞둔 12일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 입시 학원의 모습. 전날 수시 원서 접수를 마감한 서울대와 고려대의 의대 지원자 수는 지난해 3027명에서 3335명으로 308명(10.2%) 증가했다. 2025학년도 대입에서 의대 수시 모집 인원은 3010명으로 지난해 대비 1138명 늘어 지원자는 2만명이 넘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2024.09.12. [서울=뉴시스]
2025학년도 의과대학 수시모집이 종료됐다.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 학제 폐지 이후 가장 많은 수험생이 지원했으나, 대규모 증원 탓에 경쟁률은 가장 낮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14일 종로학원이 전날 오후 11시30분 2025학년도 수시모집을 마친 전국 39개 의대(의학전문대학원인 차의과대 제외) 현황을 취합한 결과, 7만2351명이 지원해 지난해 5만7192명보다 1만5159명(26.5%) 늘었다.
모집인원(정원 내 기준) 3010명의 24배 이상이 몰린 것이다. 다만 지난해보다 1138명(60.8%)을 더 뽑기로 한 탓에 경쟁률은 30.6대 1에서 24.04대 1로 줄었다.
대부분 의대가 과거 4년제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지금의 6년제 학부로 돌아온 지난 2018학년도 이후 의대에 7만명 넘는 수험생이 몰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전원은 현재 차의과대만 남아 있지만 지난 2003년 제도 도입 이후 한때는 27곳까지 늘었다. 그러나 교육부가 학제를 각 학교의 선택에 맡기자 2018학년도 입시 당시 강원대·건국대·차의과대 3곳만 남고 모두 학부생을 뽑는 의대로 되돌아갔다. 강원대는 2021학년도, 건국대는 2022학년도부터 학부생을 뽑고 있다.
2018학년도부터 5만4631명→5만6010명→5만6831명→6만865명→6만5611명→6만1831명→5만7192명 등 수시모집 지원자는 그간 5~6만명대 수준에 머물렀다.
경쟁률(24.04대 1)은 가장 낮았다. 2018학년도 34.3대 1→2019학년도 30.6대 1→2020학년도 31.0대 1→2021학년도 32.9대 1→2022학년도 36.3대 1→2023학년도 33.3대 1→2024학년도 30.6대 1 등 적어도 30대 1은 넘겼다. 그만큼 의대 증원의 규모가 컸던 탓이다.
권역별로도 희비가 엇갈렸다. 정원이 그대로인 서울 지역에서는 지원자 수가 줄고 경쟁도 다소 누그러졌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접수량과 경쟁 모두 올랐다.
서울 지역 의대 8곳에 총 1만6671명이 접수해 지난해(41.19대 1)보다 내린 35.77대 1을 보였다. 지원자도 지난해(1만8290명)보다 1619명(8.9%) 줄었다.
서울에서는 중앙대 의대가 87.67대 1로 경쟁이 가장 치열했지만 전년도(115.59대 1)에 못 미쳤다. 다만 서울대(13.56대 1), 연세대(14.29대 1), 한양대(29.67대 1), 고려대(30.55대 1) 등은 경쟁률이 더 상승했다.
경기·인천 4개 의대에는 총 2만2333명이 접수했다. 지난해보다 6871명(44.4%) 불어났음에도 경쟁률은 같은 기간 131.03대 1에서 77.01대 1로 하락했다.
가천대 의대가 104.19대 1로 모든 의대를 통틀어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 성균관대(90.1대 1)는 논술우수자전형의 경쟁률이 412.5대 1까지 치솟은 상태다.
지방 소재 의대 27곳에는 총 3만3347명이 원서를 썼다. 경쟁률은 14.79대 1로 지난해 17.89대 1보다 주춤했다. 수험생은 9907명(42.3%) 많아졌지만 모집인원이 1310명에서 2254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지방대 의대 경쟁은 수도권보다는 덜 치열한 편이다. 가장 낮은 제주대는 6.6대 1이었고 부산 인제대(7.6대 1), 광주 전남대(8.26대 1)도 지원자가 10배를 넘지는 않았다. 그 중 강원 연세대 미래가 39.46대 1로 가장 치열했고 계명대 20.8대 1, 충북대 20.53대 1 등이다.
지난해보다 지원자 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가천대는 1118명에서 9377명으로 8.4배 폭증했다. 대전 을지대도 270명에서 1193명으로 4.4배 뛰었고, 증원 폭이 가장 큰 충북대도 3배(394명→1211명) 더 많이 몰렸다.
전날 수시모집을 끝낸 전국 일반대는 곧바로 대입 전형에 들어간다. 모집요강에 따라 서류, 면접 등을 실시하고, 전형 특성에 따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종료된 이후 최저학력기준을 당락에 반영하기도 한다.
수시 전형 첫 합격자 발표는 오는 12월13일이고, 등록은 같은 달 18일까지다. 대학들은 이후 오는 27일까지 등록을 포기한 합격자 결원을 충원하면 수시가 끝난다. 수시에서 못 뽑은 모집인원은 정시로 넘겨 뽑는다.
[서울=뉴시스]
09.14 美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말한 '자유의 여신상' 놓치기 쉬운 3가지

▲미국 국립공원공단의 매튜가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 발 뒤꿈치가 들려 있다. /윤주헌 특파원
“‘자유의 여신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구상에 거의 없을 거에요. 하지만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비밀도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한 해 60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대표적인 관광 도시 미국 뉴욕. 뉴욕의 랜드마크인 ‘자유의 여신상’은 평일과 주말을 구분할 것 없이 사진을 찍거나 동상의 ‘왕관’까지 올라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과는 별개로 ‘자유의 여신상’에는 일반인들이 놓치기 쉬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미 국립공원공단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담당하는 ‘매튜’가 말하는 ‘알고 보면 더 재밌는’ 자유의 여신상 이야기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Q1. 자유의 여신상은 걷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얼핏 보면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갈수록 오른쪽 발부분이 눈에 띈다. 사실 이 동상은 앞으로 걷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매튜는 자유의 여신상 뒤편을 가리키며 “자세히 보면 오른발 뒤꿈치가 올라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앞으로 걸어간다는 의미”라면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다. 1886년 완공된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인 에두아르 드 라불레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 동상 아래에서는 볼 수 없지만 위에서 보면 동상 바닥에는 끊어진 쇠사슬과 족쇄가 있는데 미국의 독립과 억압의 종식을 의미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왼손에 들고 있는 석판에는 미국 독립 기념일인 1776년 7월 4일이 로마 숫자로 적혀 있기도 하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벼락이 내리는 모습. /AccuWeather
Q2. 자유의 여신상은 안전한가?
올해 4월 미국 뉴욕에서 큰 규모의 지진이 났을 때 CCTV(폐쇄회로)에 자유의 여신상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 잡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 동상은 튼튼하다. 매튜는 “내부 구조 공학이 잘 되어 있어서 폭풍에도 안전하다”면서 “폭풍이 몰아칠 때 흔들릴 수는 있지만 안전에는 문제없다”고 했다. 22층 건물 높이의 이 동상은 시속 50마일의 바람이 불면 3인치(7.62㎝) 흔들리고, 횃불은 5인치(12.70㎝) 흔들린다고 한다. 다만 ‘낙뢰(落雷)’는 걱정되는데, 실제 동상이 여러 차례 벼락을 맞고 있기 때문에 인근에 피뢰침을 두고 있다. 미 국립공원공단은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년 여러 번 벼락을 맞는다”면서 “동상은 거대한 콘크리트와 화강암 바닥을 통해 안전하게 접지되어 있다”고 밝혔다.
Q3. 자유의 여신상도 수리를 하나?
자유의 여신상은 50년 만에 한 번씩 대대적인 수리 과정을 거친다. 1930년대 후반에 1년 반 정도 문을 닫았고, 가장 최근에는 1984년 폐쇄됐다. 당시 2500만 달러를 들여 정비한 뒤1986년 7월 5일 대중에 다시 공개했다.
매튜는 “동상 내부에 있는 철근이 부식될 수도 있고, 외부 구리 덮개를 교체해야 하는 등 수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던 횃불은 1984년 철거됐다. 부식 등으로 많은 부분이 손상됐기 때문이다. 철거된 횃불은 지금 뉴욕 리버티섬의 자유의 여신상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조선일보 뉴욕=윤주헌 특파원
09.18 낮 36도, 밤 28도 "살다 살다 이런 추석은 처음"
주말 비 내리며 '기록적 폭염' 끝날 듯
추석 연휴 기간에도 전국은 폭염·열대야로 몸살을 앓았다. 폭염은 연휴가 끝난 첫날인 19일까지 이어지다가 20일 전국에 내리는 비와 함께 해소될 전망이다.
연휴 내내 전국 곳곳에서는 9월 최고기온 기록을 경신했다. 추석 당일(9월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광주광역시 35.7도, 전남 광양 35.4도, 순천 33.6도까지 올라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높은 9월 기온으로 기록됐다. 연휴 마지막 날인 18일 서울 낮 최고기온은 33.6도에 달했다. 이날 오후에는 서울 전역에 역대 가장 늦은 폭염 경보가 발효됐다. 서울에 ‘9월 폭염 경보’가 내려진 것은 지난 10일 사상 첫 발령 이후 이날이 두 번째다.

▲폭염경보가 발효된 18일 오후 인천 중구 을왕리해수욕장을 찾은 시민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연합뉴스
18일까지 전국 평균 9월 폭염 일수는 기록이 시작된 1973년 이후 올해가 4.8일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위 기록은 2010년 1.3일이다. 9월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염이 나타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연휴 내내 이어진 더위로 피해도 속출했다. 18일 부산소방재난본부와 롯데 자이언츠 구단에 따르면 지난 17일 오후 4시 20분쯤 부산 동래구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LG트윈스의 경기 도중 10대 1명이 어지럼, 구토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겨지는 등 관중 43명이 온열 질환으로 응급처치를 받았다. 이날 사직구장이 있는 동래구 기온은 34도에 달했다.
폭염 피해가 커지자 18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부산), 삼성 라이온즈·kt 위즈(수원), 한화 이글스·NC 다이노스(창원)의 경기 시작 시간을 오후 2시에서 5시로 늦췄다. 롯데 자이언츠 관계자는 “온열 환자에 대비해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3루석 관중에겐 모자를 무료 배포했다”고 말했다.
성묘객과 농촌 피해도 있었다. 추석 당일인 1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곡동에선 60대 성묘객이 벌에게 쏘여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다. 소방 당국은 “최근 무더위로 벌의 활동이 왕성해졌다”며 “벌집을 발견했을 때는 섣불리 제거하거나 자극하지 말고 신속히 119에 신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남에선 벼 수확기를 앞두고 벼멸구 방제에 비상이 걸렸다. 벼멸구는 볏대에 붙어 즙액을 빨아먹는데, 올해 고온 건조한 날씨로 평년보다 1.7배 많이 확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남도는 연휴 마지막 날인 18일 전담 지도사 70여 명을 긴급 투입해 방제 작업을 시작했다.
전남 여수에선 긴 명절 연휴와 무더운 날씨로 물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돌산, 율촌 등 15개 마을에서 36시간 동안 수돗물 공급이 중단됐다.

▲서울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1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네거리 전광판에 기온이 표시돼 있다 /뉴시스
밤에는 열대야가 이어졌다. 보름달이 뜬 추석 당일 밤에는 27~28도의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열대야가 나타났다. 밤 최저기온이 서울 26.5도, 강원 원주 25.4도, 충북 청주 27.7도, 대전 26.8, 부산·전남 여수 27.5도, 제주 26.9도에 달했다. 강원 춘천에선 최저기온이 25.1도로 나타나 1966년 기상관측 이래 첫 ‘9월 열대야’가 발생했다. 서울, 인천, 대전 등에선 ‘가장 늦은 열대야’ 기록을 연휴 내내 경신했다.
폭염은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인 19일까지 이어지겠다. 19일 전국 낮 최고기온은 28~35도로 예보됐다. 경기 남부와 충청권, 남부 지방에선 35도 이상까지 기온이 오르는 지역도 있겠다. 기상청은 “폭염 특보는 20일 전국 대부분 지역에 비가 내리면서 점차 완화되거나 해제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상청 중기 예보에 따르면 다음 주 아침 기온은 14~25도, 낮 기온은 21~29도로 예보돼 더위가 한풀 꺾일 것으로 보인다. 아침과 밤에는 20도 밑으로 기온이 떨어지는 곳도 있어 쌀쌀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09.18 "빵집만도 못한 상장사가 90%"...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민낯
'국민빵집' 작년 영업익 315억원
성심당보다 장사 잘한 상장사는?
코스피 46%, 코스닥은 단 10%뿐
명절이면 더 생각나는 국민빵집 ‘성심당’. 연간 방문객 수가 1000만명을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더니, 작년 매출이 1243억원을 기록했다. 단일 빵집 브랜드가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것은 한국에선 성심당이 최초다.
작년 영업이익은 315억원으로 전년 대비 두 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파리바게뜨를 운영하는 파리크라상(199억원)과 뚜레쥬르를 운영하는 CJ푸드빌(214억원)의 영업이익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오는 11월 코스피 상장 예정인 백종원 대표의 더본코리아 영업이익(255억원)보다도 많다.
빵 구매 손님들이 끊임없이 몰리면서, 성심당은 대전 경제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형 자산운용사 임원 A씨는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전년 대비 크게 증가한 점이 인상적인데, 50%가 넘는 매출 성장이 추가 마케팅이나 단가 인하 없이 이루어진 듯 하다”면서 “모든 기업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성장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A씨는 이어 “앞으로도 성심당이 품목 다변화와 실적 확장성을 지속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관전 포인트”라고 덧붙였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대전=성심광역시’로 불리는 까닭
20년 경력의 증권사 임원 B씨는 “성심당 모회사인 로쏘는 상장하게 되면 시가총액 3000억원(코스피 평균 PER 10배 적용)의 가치를 지닐 우량 기업”이라며 “한국에는 충분히 상장할 수 있는 체력이 되는데도 현금이 풍부해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보석 같은 비상장 기업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상장사들이 모여 있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성적표는 어떨까. 국민빵집 성심당은 지난해 315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영업이익은 회사가 순수하게 영업 활동을 해서 남긴 이익을 말한다.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사 중에 성심당보다 장사를 잘한 기업은 얼마나 될까.
1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코스피 상장사 중에서 영업이익 315억원을 넘긴 곳은 모두 373곳으로, 전체의 46%를 차지했다. 현대차, 기아, 삼성전자, KB금융, 신한지주의 순으로 장사를 잘했다. 반면 코스닥은 전체 1631곳 중 161곳(10%)만이 성심당 영업이익을 웃돌아 체면을 구겼다. 오히려 영업이익이 마이너스(-)인 적자회사가 전체의 40% 이상으로 더 많았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좀비기업 퇴출 못하는 韓 증시
지난해는 반도체 수출 부진 등의 여파로 국내 상장사들의 영업이익이 역대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하는 등 전체적으로 실적이 부진했다. 전문가들은 “영업이익 315억원이 높은 기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 증시에 돈을 못 버는 허약한 상장사들이 많은 건 사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증권사 임원 B씨는 “성장성이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는 부실 기업을 마구잡이로 상장시켰고, 상장한 이후에도 제대로 된 퇴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나타나게 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상장하고 나면 주가 관리나 기업설명회(IR) 개최 등 복잡하고 까다로운 의무가 많이 생기죠. 재무제표가 나쁘면서도 IPO에 나서는 기업들은 상장을 통해 최대 주주와 기존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거나, 혹은 상속·증여세 절감 차원의 목적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증권사 임원 B씨)
상속·증여의 경우 비상장 기업일 때는 순자산 가치로 평가해서 세금을 내야 하지만, 상장하면 시가로 가치를 따지게 되므로 주가 수준에 따라 오너 입장에선 유리할 수 있다.

▲추석 명절을 앞둔 지난 13일, 대전역에서 한 남성이 성심당 쇼핑백을 들고 귀성길에 오르고 있다./뉴스1
✅증시 건강성 해치는 악질 IPO
기업공개(IPO)는 새싹 기업들이 성장과 도약의 기회를 잡기 위해 거쳐야 하는 중요한 절차 중 하나다. 그러나 상장을 기업의 최종 종착지로 여길 뿐, 일단 상장하고 나면 책임을 소홀히 하는 기업들이 많다는 것은 문제다.
운용업계 임원 H씨는 “일부 증권사들이 실적 욕심에 C급 기업 상장에 집중하면서 부실 기업들이 대거 증시에 진출하게 됐고 ‘빵집만도 못한 상장사들’이 넘쳐 나게 됐다”면서 “최근 증시의 최대 화두가 밸류업(기업가치 개선) 프로그램인 만큼, 거래소와 관련 기관들이 게이트키핑(선택과 거부) 기능을 더욱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이경은 기자
09-19 추석 고비 넘긴 응급실, 의료체계 정상화 길 보여줬다
전공의 집단 이탈 사태가 19일로 7개월을 맞았지만, 의료 파행이 해소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추석 연휴 중 ‘응급실 대란’은 가까스로 피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대다수 의료진은 응급실을 지켰고 경증· 비응급 환자들은 응급실 이용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의료 정상화까지는 수많은 난제를 극복해야 하지만, 이런 국민과 의료진의 노력은 의료개혁의 올바른 방향과 희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냉철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공의 이탈로 권역·지역 응급센터 의사는 지난해 말보다 400여 명 줄었지만, 추석 연휴에 전국 응급실 411곳 중 408곳이 매일 24시간 운영됐다. 추석 연휴 응급실을 찾은 경증·비응급 환자는 지난해 추석 연휴에 비해 40% 가까이 감소됐다고 한다. 경증환자가 응급실을 찾을 경우의 본인 부담금이 90%까지 오른 데다, 문을 연 병·의원이 하루 평균 9871곳으로 작년 추석의 2배에 이르는 등 동네 병원 시스템도 제대로 가동됐기 때문이다. 경증 환자들은 동네 병원을 찾고, 중증 환자들은 대형병원 응급실로 가면서 의료 전달체계 정상화의 가능성을 실험한 셈이 됐다.
응급실 대란을 막은 이유 중 하나가 필수의료 수가 조정이라는 점도 중요한 대목이다. 정부는 이번 연휴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를 이전에 비해 250%까지 인상했고, 응급실 진료 후 수술·처치 등의 수가 가산도 기존 150%에서 200%로 높였다. 필수의료 수가 인상, 향후 5년간 건강보험 10조 원, 재정 10조 원 투자라는 정부의 계획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 정부는 15일 ‘응급의료법상 진료 거부의 정당한 사유 지침’을 마련해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리는 환자의 진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오랜 의료 현장의 적절한 요구 역시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추석 고비를 넘겼을 뿐, 의료진의 체력과 정신적 부담이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추석 연휴 동안 여·야·의·정 협의체 논의는 공회전만 거듭했다. 협의체 구성이 곧 문제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4자가 한자리에 모이면 의료개혁의 길을 함께 열 수 있을 것이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승적 결단과 초당적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화일보 사설
09.19 굿바이 대한극장, 66년 막 내렸다

▲서울 충무로의 대형극장 대한극장이 누적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1958년 국내 최대 극장으로 개관한지 66년 만이다. 대한극장의 현재 모습(사진)과 1960년대 할리우드 대작 ‘벤허’를 개봉한 당시 모습(아래 사진). [연합뉴스]
서울 충무로 흥행사를 상징했던 간판 영화관 대한극장이 66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국내 최초 70㎜ 초대형 스크린 시대를 열었던 대한극장은 1962년 할리우드 대작 ‘벤허’의 전차 액션을 보려는 관객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벤허 극장’이란 애칭도 얻었다. 극장은 지난달 말까지 ‘아듀 대한극장 1958~2024’ 타이틀로 고전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상영 이벤트를 진행한 뒤 영화 상영을 중단했다. 대한극장 건물은 영국 런던, 미국 뉴욕에서 관객 몰이한 논버벌 이머시브(관객 참여형) 공연 ‘슬립 노 모어’를 내년에 선보이는 걸 목표로 현재 내부 개조 공사를 진행 중이다.
대한극장 폐관과 함께 한국 영화 메카로 통했던 충무로 시대도 역사의 뒤안길로 저물게 됐다. 1907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 상설 영화관 단성사(2008년 폐관), 2015년 CJ CGV에 운영권을 넘긴 피카디리 극장, 2021년 폐관한 서울극장에 이어 단관시절 극장으론 서울 시내 유일하게 남아있던 대한극장마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1960년대 할리우드 대작 ‘벤허’를 개봉한 당시 모습. [사진 대한극장]
1958년 미국 영화사 20세기 폭스의 설계로 개관한 대한극장은 최첨단 설비로 극장 문화의 획기적 전환기를 이끌었다. 빛의 방해를 받지 않게 지어진 국내 1호의 창문 없는 영화관이었다. 초대형 스크린에 더해 국제 규격에 맞춘 당대 최다 1900여석 매머드 객석, 웅장한 입체 음향 시설까지 갖췄다.
한 편의 신작 영화를 영화관 한 곳에서만 개봉했던 1990년까지, 대한극장은 할리우드 대작 개봉의 대명사였다. 창립작은 캐리 그랜트, 데보라 카 주연의 ‘잊지 못할 사랑’(1957)이다. 서울 인구 250만명 중 70만이 관람한 ‘벤허’부터 ‘사운드 오브 뮤직’(1969년 개봉), ‘아라비아의 로렌스’(1970년 개봉), ‘마지막 황제’(1988년 개봉)까지 매진 신화를 이어갔다. 1967년 영화관람료 500원 시대를 연 대작 ‘클레오파트라’(1963)도 대한극장 개봉작이다. 한국영화 중에선 1958년 꼬마스타 안성기 출연작 ‘눈물’을 비롯해, 1967년 우리나라 최초 만화영화 ‘홍길동’, 1968년 신성일·홍세미 주연 ‘춘향’ 등이 대한극장 히트작이다.
대한극장은 2000년 1년 간 휴관하고 250억원을 투입해 7층, 11개관 규모의 멀티플렉스로 재탄생했다. 2018년엔 개관 60주년 기념 ‘루프탑 상영회’를 열며 건재함을 알렸지만, 2년 만에 코로나19 팬데믹 된서리를 맞았다. 오후 1시 조조할인, 반값 관람료 등 할인 정책을 폈지만,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시민들은 “9월 말 영업종료라고 해서 예매하려고 보니 아무것도 안 나온다” “청춘의 기억이 있던 곳인데 안타깝다” 등 아쉬움을 토로했다. 영화 ‘신과함께’ 시리즈 제작자인 원동연 리얼라이즈 픽쳐스 대표는 SNS에 “집에서 5분 거리였던 대한극장은 영화의 꿈을 키운 곳”이라고 적었다.
전국적으로 단관시절 극장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가운데, 영화관을 문화 유산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130년 된 최고령의 인천 애관극장, 광주 광주극장 등도 운영난을 겪은 지 오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2022년 ‘한국영화 현장 기록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보존 대책은 없는 실정이다. 영국·독일 등에서 유서 깊은 영화관을 정부·대기업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09.19 TV수신료 분리징수 후 징수액 65억 감소…KBS 첫 무급휴직 추진

▲지난 7월 1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우체국에 KBS TV 방송 수신료 고지서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TV 수신료 분리징수 시행 후 징수액과 수납률이 감소한 것으로 파악됐다.
19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박민규(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KBS로부터 제출받은 월 TV 수신료 징수 현황에 따르면 분리징수가 본격 시행된 지난달을 기점으로 수신료 수입이 전월 대비 약 65억원 줄고 수납률도 97.8%대에서 85.6%로 하락했다.
올해 수신료 고지 금액은 1월 578억4000만원, 2월 578억6000만원, 3월 578억1000만원, 4월 570억1000만원, 5월 576억원, 6월 569억2000만원, 7월 571억6000만원, 8월 577억6000만원이었다.
실제 수신료 수입과 수납률은 1월 572억2000만원·98.9%, 2월 549억7000만원·95%, 3월 567억4000만원·98.1%, 4월 561억원·98.4%, 5월 555억5000만원·96.4%, 6월 567억6000만원·99.7%, 7월 558억9000만원·97.8% 정도로 큰 차이가 없었다.
당초 KBS·EBS 수신료는 월 2500원씩 전기요금에 포함해 징수됐었지만, 방통위는 지난해 7월 이를 분리징수하는 방안을 담은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수신료를 전기요금에서 분리하고 싶은 자동이체 고객은 납기 마감 전 위탁징수 기관이었던 한국전력공사에 전화해 신청하면 따로 낼 수 있게 됐다.
이를 위해서는 KBS와 한전 간 협의가 필요해 실제 본격적인 시행은 최근부터 이뤄졌다.
박민규 의원은 "분리고지로 수신료 납부율이 떨어질 것은 명약관화했지만, KBS는 TV 수신료를 보장하는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 1년 사이 입장을 180도 바꿨다"며 "내부 구성원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TV 수신료 분리 징수로 경영 위기에 처한 KBS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무급휴직을 추진한다.
지난달 20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등에 따르면 KBS는 비용 절감을 위해 21일로 예정된 이사회에서 무급휴직 시행안을 보고할 예정이다. 무급휴직은 이사회 의결이 필요하지 않아 큰 이견이 없으면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시행 여부와 세부 계획안을 확정할 것으로 보인다. 계획안이 최종 확정되지 않았으나 KBS는 원하는 직원들만 무급으로 휴직하게 하고 퇴직금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무급휴직은 수신료 분리 징수로 인한 재원 악화에 따른 것으로, KBS가 회사 차원에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무급휴직을 한 것은 1973년 회사 창립 이래 처음이다.
KBS는 올해 종합예산안에서 분리 징수로 수신료 수입이 작년보다 2600억원가량 급감해 적자가 1431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인건비 1101억원을 줄여 재정난을 해소하겠다는 계획이다.
앞서 KBS는 올해 1월 희망퇴직과 특별명예퇴직을 실시해 총 87명이 회사를 떠났다. 최근에는 2차 희망퇴직·특별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배재성 기자 hongdoya@joongang.co.kr
09.20 광고성 문자 수신, 동의하십니까?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투자, 신제품, 급등, 당일 지급, 종목, 손실, 내부 정보, 최저가….’ 최근 이 단어들이 포함된 문자메시지를 받지 않도록 차단 문구로 설정해뒀다. 하루에 많게는 10통, 적어도 1~2통은 받는 광고성 문자, 스팸 문자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자 발신 업체들은 수신자보다 한 수 위에 있다. 사전 검열 키워드를 뚫고 도달한 문자들은 ‘투 자’ ‘신@제품’ ‘급/등’처럼 띄어쓰기나 특수 기호를 활용하고 있었다.
이번 추석, 가족들의 대화 화두 중 하나는 광고 문자였다. 이미 이골이 난 동생과 사촌들은 독소 조항인 광고성 문자 수신동의, 마케팅 목적의 개인 정보 수집 항목을 찾아내 동의하지 않는다고 표시하지만, 부모님과 조부모님 세대는 다르다. 문자보다 전화가 편하다는 할머니의 하소연도 이 탓이었다. 안부 여쭈려 보낸 문자가 수백 통의 스팸과 함께 뒤섞여 있기도 했다. “그럼 이런 것 좀 안 오게 해보라”는 요청에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요즘 회원 이용 약관은 현대판 을사늑약이라고도 불린다. 항목들이 고객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서다.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누구든지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 문자를 전송하려면 수신자의 명시적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이 동의를 받는 방법이 갈수록 교묘해진다는 것이다. 식당이나 헬스장 멤버십 회원 가입을 할 때 수십 개의 약관 항목 중 하나로 광고성 문자 항목을 끼워 놓고 동의를 받는다. 선택 항목인 광고성 문자 수신 동의 체크 박스를 가장 아래에 숨겨 놓는 경우도 있고, 동의하면 사은품을 준다는 식으로 꾀는 경우도 있다.
기업들이 마케팅 목적이라며 수집한 고객 개인 정보가 유출돼 2차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업 광고 문자가 아닌 불법 스팸 문자의 경우, 무작위 번호로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다른 업체가 가진 개인 정보를 해킹하는 식으로 입수하는 경우가 많다. 불법 스팸 문자를 보내는 업체들이 포털 사이트나 여행사, 콜택시 업체 등이 가진 고객 전화번호를 몰래 빼내오는 식이다.
이런 광고를 뿌려도 당장 매출이 늘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런 문자는 왜 계속될까. 광고 수익을 위해 이동통신사들이 스팸 문자를 사실상 용인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통신사는 자사 고객에게 외부 광고 업체의 광고 문자를 보내는 식으로 광고 대행 영업도 한다. 대부 업체를 비롯해 여러 영역의 광고를 해주며 수익을 올리는데, 한 통신사의 경우 광고 대행 서비스 중 저축은행 비율이 2022년 기준 36%에 달하기도 했다. 통신사 3사는 AI 등을 통해 메시지를 필터링한다고 설명하지만, 이렇게 광고 대행 영업을 지속하는 한 큰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개그맨 출연자들을 주축으로 한 유튜브 채널에선 10년 뒤엔 광고성 문자 동의를 받으려는 업체들 수법이 더 교묘해질 것이라며 풍자했다. 마우스로 드래그를 해야만 광고 동의 항목이 보이도록 하거나, 결제 확인 서명인 줄 알았더니 사실 개인 정보 수집 동의를 받는 식이었다. 2034년이 오기 전이지만 기업과 고객 사이 이미 현실인지 개그인지 모를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조선일보 신지인 기자
09.20 "조국 위해 일한 영원한 로비스트"…'코리아게이트' 박동선 빈소 가보니
정·재계 인사 조문·화환 이어져
"로비라는 잘못된 방식 취했지만
나라를 위한 애국자였다"
"아직 할 일 많이 남았는데 아쉬워"

▲20일 박동선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 현장. 박씨는 1970년대 한미 정부의 외교 마찰을 부른 코리아게이트의 로비스트 당사자다. /강우석 기자
20일 오후 조지타운대 한국총동문회 조기가 놓여져 있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 2층. 1970년대 한미 정부의 외교 마찰을 부른 ‘코리아게이트’의 주역 박동선(89)씨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한 정·재계 인사들의 조문과 화환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난 19일 순천향대병원에서 숨을 거둔 박씨는 1970년대 말 한미 관계를 요동치게 한 코리아게이트의 핵심 인물이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17세 때 미국 조지타운대로 유학을 간 그는 사업을 하며 쌓은 미 정계 인사들과의 친분을 앞세워 한국 정부 측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미국 정치 인사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미 의회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박씨의 빈소 안에는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가 보낸 조화가 놓여져 있었다. 고인은 생전 김장환 목사가 운영하는 수원중앙침례교회 예배를 다녔고, 김 목사의 누님 고(故) 김인숙 권사와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김인숙 권사는 한국에서 여성 최초 권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빈소 앞에는 ‘민간 외교관’ ‘한국의 제1호 로비스트’라는 호칭으로 불렸던 그의 마지막답게 일본·케냐·이집트·아랍에미리트·튀르키예·우크라이나·레바논·요르단·오만 등 각 국가 대사관에서 보낸 화환과 주호영·윤호중·윤상현 의원, 박진 전 외교부장관,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 오명 전 체신부장관, 홍정욱 전 의원 등 정치계·사회 인사들의 화환이 놓여져 있었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도 이날 오후 빈소를 들렸다. 김 전 의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이 중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 경험이 많다보니 정치를 할 때 자문을 종종 구한 인연이 있다”며 “특히 국내에 외교 문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소도 마땅한 것이 없어 국가적인 외교 네트워크가 필요할 때마다 고인이 많은 도움과 조언을 해주셨다”고 했다.
이날 오전 빈소를 찾은 이심(85) 전 대한노인회장은 고인을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했던 영원한 로비스트’라고 평했다. 고인과 30년 지기라는 이 회장은 “고인은 국가를 위해 공헌했고, 국내에서는 외국 대사들과 만나 한국의 외교 관계를 위해 힘썼다”고 했다. 이 회장은 “고인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 세 달 전”이라며 “이때도 고인은 한미관계와 한-중동 관계, 야당의 계속되는 정치 공세 등 나라의 미래를 우려했다”고 했다.
이 회장은 “코리아게이트는 고인이 애국을 위해서 했지만, 로비 활동으로 미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만큼 생전 고인이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언급은 자제해온 편”이라며 “1970년대 한국은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애국을 위해서 로비라는 후진적인 방법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20일 박동선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 현장. 박씨는 1970년대 한미 정부의 외교 마찰을 부른 코리아게이트의 로비스트 당사자다. /강우석 기자
이날 빈소를 찾은 고인의 측근 장봉우(74)씨는 “고인은 평소 한일 관계 회복을 위해 힘써왔고, 실제로 2022년 김진표 당시 국회의장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일본 의원들을 만나는 데 기여했다”며 “생전 고인은 중국 자본으로 잠식된 아프리카를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했다. 장씨에 따르면 고인은 가나, 케냐, 콩고 정상들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고인의 측근들에 따르면 고인은 별세 전까지 멕시코 정부와 총 3조원 규모의 복합화력발전소(LNG) 건립 사업을 추진했다고 한다. 오는 10월 취임 예정인 멕시코의 새 여성 대통령 클라우디아 파르도와 협력해 복합화력발전소 건립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2021년 포스코에서 파나마에 복합화력발전소를 수주했는데, 멕시코 정부가 그것을 벤치마킹해 발전소를 지어달라는 의사를 표시해왔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인 박준홍(77) 자유민주주의실천연합 총재는 “고인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나에게 숙식을 제공해준 평생의 은인”이라며 “코리아게이트 당시 일부 언론에서 우리 정부가 고인에게 돈을 주고 로비를 시켰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고인은 로비 자금을 사비(私費)로 충당했다”고 했다. 이어 “별세 1~2주전까지도 전화로 사업 이야기를 할 정도로 로비스트 일에 매진하며 국가에 이바지했는데,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나 마음이 좋지 않다”고 했다.

▲1978년 4월3일 최초의 미 하원 윤리위의 공개증언에 앞서 선서하는 박동선씨 /연합뉴스
한 측근은 “고인은 영어, 일어, 불어, 스페인어에 능통했던 민간 분야의 외교관이었다”면서 “전남 순천이 제2의 고향이라며 그곳에서 열린 국제정원박람회에 외국 인사들을 데리고 왔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09-20 ‘학폭’ 유명인의 바른 처신
안진용 문화부 차장
학교 폭력(학폭) 논란으로 다시금 방송가가 들썩이고 있다. 유명인의 학폭 가해가 병역 기피, 거짓말 논란과 더불어 대중에게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으로 자리매김한 모양새다.
여러 드라마에서 감초 연기로 주목받던 배우 안세하는 지난 9일 ‘학폭 가해자’라는 폭로가 나온 후 사실상 활동이 중단됐다. 당초 소속사는 ‘100%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지만, 추가 폭로가 나오자 출연 중이던 뮤지컬에서 하차하고, 프로야구 시구도 취소됐다.
2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여행 유튜버 곽튜브는 지난 15일 학폭 논란이 불거졌던 걸그룹 출신 배우 이나은을 옹호하는 영상을 올렸다가 뭇매를 맞았다. 과거 학폭 피해를 고백했던 그가 학폭 가해자로 지목받은 연예인을 ‘대리 용서’하며 면죄부를 줬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곽튜브는 이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했지만, 교육부는 그가 출연한 학폭 방지 캠페인 영상을 비공개 처리했다.
학폭은 문신과도 같다. 지워도 흔적이 남는다. 특히, 가해자와 피해자 간 기억의 크기가 다르다.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떠올린다. 그리고 그 부메랑은 가해자로 지목받은 유명인이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되돌아온다. 상반기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표독스러운 악녀 연기로 전성기를 맞은 송하윤도 드라마 종방 직후 폭로가 나왔다. 이에 앞서 배우 조병규, 지수 등도 드라마 주연 배우로 각광 받을 때 학폭 논란에 휩싸였다.
수십 년 전 자행된 학폭은 입증하기도, 반박하기도 어렵다. 뚜렷한 물증을 제시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럼에도 학폭 가해자로 지목받은 연예인들을 대중이 유독 싸늘하게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예민한 사춘기 시절,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트라우마를 남긴 것에 대한 대가다. 학폭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TV에 나와서 선한 웃음을 짓고 인기를 얻는 것을 도저히 볼 수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제대로 단죄가 이뤄지지 않는 것도 학폭 가해자가 지탄받는 이유다. 촉법소년이라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분에 그치거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논란이 학교 울타리를 넘지 않도록 쉬쉬하며 무마하는 경우도 적잖다.
학교폭력 예방 전문기관 푸른나무재단이 지난 7월 발표한 ‘전국 학교폭력·사이버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폭 피해로 인한 자살·자해 충동 경험률은 39.9%로 3년 연속 증가했다. 아울러 피해 학생의 과반수인 52.2%는 ‘학교폭력이 잘 해결되지 않았다’고, 48.8%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래서 뒤늦게 유명 연예인이 된 이들을 가해자로 지목하며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진심 어린 사과’다.
학폭을 소재로 삼아 세계적 주목을 받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피해자 문동은(송혜교 분)은 “어떤 증오는 그리움을 닮아서 멈출 수가 없다”며 “나는 너의 아주 오래된 소문이 될 것”이라고 가해자에게 경고한다. ‘오래된 소문’ 앞에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연예인은 드물다. 수긍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는 탓이다. 하지만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자신이 없다면, 대중에게 용서받을 욕심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문화일보
09.21 '의료계 블랙리스트' 만든 전공의 구속
"증거인멸 염려"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고 복직한 의사들의 명단이 적힌 이른바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혐의를 받는 사직 전공의가 20일 구속됐다.

▲의료계 집단행동 불참 의사와 의대생 명단을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게시한 혐의를 받는 사직 전공의가 20일 영장실질심사 후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중앙지법 남천규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는 정모씨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를 연 뒤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검찰과 경찰 조사 등에 따르면 정씨는 지난 7월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의료계 집단행동 등에 참여하지 않는 의사·의대생들의 실명과 병원, 학교 등의 신상 정보를 담은 ‘감사한 의사’ 명단을 만든 뒤 텔레그램과 의사·의대생 온라인 커뮤니티 ‘메디스태프’를 통해 이를 여러 차례 게시한 혐의를 받는다. 명단엔 800여명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한 의사’는 다수 전공의의 현장 이탈에 동조하지 않고 근무 중인 소수 의사를 비꼬는 표현이다.
앞서 정씨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입건됐으나 경찰은 그가 당사자 의사에 반해 개인정보를 온라인에 게재하는 등 지속·반복적인 괴롭힘 행위를 했다고 보고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3부(부장 김태훈)는 경찰이 정씨에 대해 신청한 구속영장을 지난 13일 청구했다.
조선일보 박강현 기자
09.21 구속 전공의 만난 의협회장 울먹 "정부가 의사들 다 결딴내고 있다"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는 의사 명단을 작성·게시해 구속된 사직 전공의를 면회한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이 "구속된 전공의와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입은 분 모두 정부가 만든 피해자"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임 회장은 21일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전날 구속된 사직 전공의 정모 씨를 면회한 뒤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주장하며 "참담함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감정이 북받친 듯 울먹이는 모습도 보였다.
임 회장은 "오늘 유치장에 있어야 할 자들이 과연 자기 몸 하나 돌볼 시간도 없이 환자들이 죽어가던 현장에 있던 전공의여야 하는가, 아니면 '의사들을 악마화하고 의대정원을 증원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고 역사에 남는 개혁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대통령 귀에 속삭인 간신들, 그 명령에 따라 영혼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국민들이 길가에서 숨져가게 한 공무원들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정부가 의사들 사이를 다 결딴내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씨는 지난 7월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 집단행동 등에 참여하지 않는 의사들의 신상 정보를 담아 '감사한 의사'라는 제목의 명단을 만든 뒤 텔레그램과 의사·의대생 커뮤니티 메디스태프에 여러 차례 게시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해준 기자 lee.hayjune@joongang.co.kr
09.21 태풍 '풀라산'이 뿌리는 폭우… 부산 등 최대 180㎜, 전국 곳곳 호우특보

▲20일 경남 창원시 의창구 감계신도시에서 비바람에 쓰러져 도로를 덮친 가로수를 경남소방본부 직원이 제거하고 있다. /경남소방본부
제14호 태풍 ‘풀라산’에서 약화한 열대저압부의 영향으로, 21일 전국에 강하고 많은 비가 내리겠다. 열대저압부란 태풍 전 단계의 약한 열대저기압을 의미한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열대저압부가 우리나라에 접근하면서 서해 남부와 남해를 중심으로 강한 바람과 함께 물결이 매우 높게 일겠다. 기상청은 “열대저압부 이동 경로와 가까운 남부 지방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많은 비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겠으니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9시 기준, 전국 곳곳에 호우 특보가 내려졌다. 충남·충북·전북·경북·경남·제주 일부 지역과 부산·울산에는 호우 경보가 발효됐다.
이 시각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시간당 30~50㎜의 매우 강한 비가 내리고 있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시간당 10~30㎜의 강한 비가 내릴 전망이다. 특히 부산에서는 시간당 70㎜의 비가 쏟아지고 있다.
수도권과 강원 내륙 지방은 이날 오후 3~6시까지, 충청권과 전라권은 오후 6~9시까지, 경상권은 밤 9~12시까지 비가 내릴 전망이다.
이날 예상 강수량은 경기 남부 20∼60㎜, 서울·인천·경기 북부 5∼30㎜, 강원 동해안·산지 30∼80㎜, 강원 내륙 5∼50㎜, 대전·세종·충남·충북 30∼80㎜, 광주·전남·전북 및 대구·경북 30∼80㎜, 부산·울산·경남 30∼100㎜ 등이다. 부산과 울산 등에는 최대 180㎜ 이상 비가 내릴 수도 있다.
낮 최고 기온은 20~30도로 예보됐다. 무더위는 누그러졌지만, 평년 기온(11.5~19도)보다는 여전히 높다.
하늘은 오는 22일까지 전국적으로 흐리다가, 저녁에 중부 지방부터 맑아지겠다.
수도권과 강원 내륙 지방은 이날 오후 3~6시까지, 충청권과 전라권은 오후 6~9시까지, 경상권은 밤 9~12시까지 비가 내릴 전망이다.
이날 예상 강수량은 경기 남부 20∼60㎜, 서울·인천·경기 북부 5∼30㎜, 강원 동해안·산지 30∼80㎜, 강원 내륙 5∼50㎜, 대전·세종·충남·충북 30∼80㎜, 광주·전남·전북 및 대구·경북 30∼80㎜, 부산·울산·경남 30∼100㎜ 등이다. 부산과 울산 등에는 최대 180㎜ 이상 비가 내릴 수도 있다.
낮 최고 기온은 20~30도로 예보됐다. 무더위는 누그러졌지만, 평년 기온(11.5~19도)보다는 여전히 높다.
하늘은 오는 22일까지 전국적으로 흐리다가, 저녁에 중부 지방부터 맑아지겠다.

▲호우경보가 발령된 충남 서산에 지난 20일부터 21일 오전 3시 10분까지 239㎜의 물 폭탄이 쏟아진 가운데 서산시 동문근린공원이 물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조선일보 정해민 기자
09.21 폭우 200mm 내린 부산서 대형 싱크홀.. 트럭 2대 빠져

▲21일 오전 8시 45분쯤 부산 사상구 한 도로에서 가로 10m, 세로 5m, 깊이 8m가량의 대형 싱크홀이 발생해 트럭 2대가 빠져있다. /연합뉴스
21일 부산에 200㎜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도로에 대형 땅꺼짐(싱크홀) 현상이 발생해 트럭 2대가 빠지는 사고가 났다.
부산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 45분쯤 부산 사상구 한 도로에서 가로 10m, 세로 5m, 깊이 8m가량의 대형 싱크홀 현상이 발생했다.

▲21일 오전 8시 45분쯤 부산 사상구 한 도로에서 대형 싱크홀이 발생해 트럭 2대가 빠졌다. /부산소방재난본부
이 사고로 당시 도로에서 배수 지원을 나갔던 부산소방본부 배수 차량이 싱크홀에 빠졌고, 바로 옆으로 지나가던 5t 트럭도 구멍으로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소방 당국은 이 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없다고 밝혔다.
경찰은 현재 사고 현장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부산 사상구는 사고 수습을 하면서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고 있다. 사상구에서는 올해 들어 땅꺼짐 현상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사상구 감전동에서 지름 약 5m, 깊이 3m의 대형 싱크홀이 발생하는 등 같은 달에만 3차례 땅 꺼짐이 있었다.
올해 4월, 5월, 7에도 한 차례씩 발생했다.
조선일보 부산=김주영 기
09.21 디지털 문명의 부작용, 방치하면 안 된다
최근 국내외를 막론하고 딥페이크 범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여성 얼굴에 음란물을 합성해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뜨리는 행위는 피해자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그런데 이런 범죄가 한국에서 가장 극성을 부린다. 미국의 한 사이버 보안업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작년 7~8월에 전 세계에 유통된 딥페이크 성 착취물 피해자의 53%가 한국 여성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의 인터넷 인프라가 잘 되어있다는 점, 새로운 기술을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는 점, 그리고 사이버 성범죄를 수사하고 처벌하는 제도가 미비하다는 점 등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서울여성회와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원들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OUT 말하기 대회를 하며 딥페이크 성범죄 엄중 처벌 및 근본적 종합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뉴시스
딥페이크 같은 유해 콘텐트 범람
소셜미디어 청소년 정신건강 위협
해외에선 플랫폼에 책임 묻는 추세
우리도 포괄적 대책 속히 마련해야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가짜뉴스들도 소셜미디어를 통하여 범람하고 있다. 특히 불순한 세력들이 가짜뉴스를 이용하여 선거의 공정성을 위협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문명의 부작용이 심각하게 드러나자 세계 각국에서는 법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올 2월부터 ‘디지털 서비스법’을 시행하여 플랫폼 기업에 불법·유해 콘텐트 및 가짜뉴스 확산을 막는 책임을 부과하였다. 최근 미국 필라델피아 항소법원은 틱톡에서 유행한 ‘기절 챌린지’로 10세 딸을 잃은 미국 여성이 제기한 소송에서 위험한 게임을 방치한 틱톡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한국에서도 뒤늦었지만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법률안들이 국회에 제출되었다고 한다.
물론 디지털 범죄를 방지하고 처벌하는 법과 제도는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의 부작용은 사이버 범죄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심각한 것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다. 최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불안세대』라는 책에서 2010년대 초반 서구 10대 청소년들의 우울증 발생 빈도가 인종이나 사회 계층과 관계없이 2.5배 증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그 원인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세대 청소년들에게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 ‘브랜드’ 관리가 필수적이 되면서 직접 친구들과 부딪치는 놀이문화 대신 스마트폰 기반의 가상세계가 사회 활동의 주 무대가 되었는데, 이 가상세계에서는 타인과의 비교가 쉽고, 특히 완벽하게 보정된 타인의 사진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전체적인 불안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의한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위기에 대해서 미국 보건당국도 나섰다. 미국의 의무총감(Surgeon General)인 비벡 머시(Vivek H. Murthy) 박사는 올 6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담뱃갑에 건강에 대한 경고 문구를 붙이듯 소셜미디어에 그 부작용에 대한 경고 문구를 의무적으로 붙일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청소년들의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치고, 지나친 사용을 조장하는 푸시 알림이나 자동 재생 같은 기능도 제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빅테크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생각할 때 머시 총감의 제안이 당장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미국 의무총감은 과거 담배 회사들의 강력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담뱃갑에 경고문을 붙이는 데 성공한 역사가 있다.
머시 박사의 제안에 부응하여 미국 41개 주 법무장관들은 소셜미디어에 “청소년 건강에 유해하다”는 경고문을 달게 하는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는 서한을 의회에 보냈다. 세계의 몇몇 정부도 청소년들을 소셜미디어 중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호주의 앤서니 앨버리지 총리는 최근 “연내 어린이가 소셜미디어 계정을 개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안할 것”이라며 “연령제한 기준은 14~16세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도 “소셜미디어 사용 연령을 15세로 제한해야 한다”고 유럽연합(EU)에 제안한 바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압박을 느낀 빅테크들도 최근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틀 전 인스타그램은 10대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메타플랫폼스(이하 메타)는 청소년 이용자를 위한 안전 사용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사진 인스타그램 홈페이지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태연하다. 사실 청소년들의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중독은 우리나라가 가장 심각한 수준일 것으로 예상되는 데도 말이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지능정보화사회진흥원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10~19세 청소년 10명 중 4명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으로 나타났고, 심지어 3~9세의 유·아동도 4명 중 1명이 위험군에 속해 있다고 한다. 한국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사용시간은 조사기관에 따라 들쭉날쭉하지만 주 중에는 4.7시간, 주말에는 6.6시간이라는 조사도 있다(이동훈 교신저자, 대한안과학회지, 2023). 미국의학협회에 따르면 하루에 3시간 이상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청소년은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2배로 높아진다고 하는데, 이러한 결과는 우리나라 청소년의 정신건강이 심각히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속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09.22 남부 물바다 만든 9월 폭우, 200년에 한 번 내릴 비 쏟아졌다

▲21일 오전 전북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에서 소방대원들이 고립된 차량을 이동조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오후 전국 모든 지역에서 호우특보가 풀리면서 행정안전부가 가동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해제됐다. 다만, 전국을 할퀸 역대급 폭우로 7개 시도에서 1500여 명이 대피하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22일 기상청에 따르면 19일 오후부터 제주도와 남해안을 시작으로 21일까지 전국적으로 매우 강하고 많은 비가 내렸다.
특히 남해안과 서해안에는 시간당 100㎜ 내외, 남부지방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시간당 50~80㎜의 매우 강한 비가 내렸다. 경상권해안과 제주도산지에는 최대 500㎜ 이상, 남부지방과 제주도, 충청권, 강원영동에는 200~300㎜ 내외의 매우 많은 누적 강수량을 기록하며 극값을 기록한 곳이 많았다.
이번 비로 경남 창원은 일강수량와 1시간 동안 내린 비의 양 모두 기록을 새로 세웠다. 21일 하루 동안 397.7㎜의 비가 내렸는데, 이는 2009년 7월 268.0㎜의 기존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양이다. 또 1시간 동안 104.9㎜의 비가 내려 2009년 7월(102.0㎜) 기록을 깼다. 이는 200년 만에 한 번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이다.
9월 일강수량 최고치 기록도 바뀌었다. 충남 서산에 20일 하루동안 221.8㎜의 비가 내려 1999년 9월 기록(180.3㎜)을 28년 만에 깼다. 전남 순천에도 같은 날 200.8㎜의 비가 내려 기존 2014년 9월 기록(179.5㎜)을 경신했다. 21일 내린 비로는 부산(378.5㎜), 거제(348.2㎜) 등 경남권 지역의 9월 일강수량 기록이 새로 세워졌다.
19일 0시부터 21일 자정까지 누적 강수량은 ▲제주 삼각봉 770.5㎜ ▲경남 창원 529.4㎜ ▲경남 김해 431.1㎜ ▲전남 여수 400.5㎜ ▲강원 속초 388.5㎜ 등이다.

▲21일 오전 8시45분쯤 부산 사상구 한 도로에서 가로 10m, 세로 5m, 깊이 8m 가량의 대형 땅꺼짐 현상(싱크홀)이 발생해 도로에서 배수 지원을 하던 삼락119안전센터 배수 차량과 5톤 트럭이 빠져있다. /뉴스1
이번 비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시설 피해가 잇따랐다. 기상 악화로 55개 항로 77척 여객선의 발이 묶였다. 항공기 16편도 결항했다. 22개 국립공원 641구간, 지하차도 39곳, 하천변 3061곳, 도로 38곳의 접근도 막혔다.
도로 침수 107건, 토사유출 21건, 주택 침수 170건의 시설 피해도 잇따랐다. 부산 사상구에서는 싱크홀이 생기는 등 도로 파손이 있어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또 약 4116ha 면적에 달하는 농작물이 침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는 여의도 면적(약 290ha)의 약 14배에 달하는 크기다.
21일 오후 11시 기준 부산‧충북·충남·경북·경남·전남·전북 등 7개 시도에서 1014세대 1501명이 대피했다. 이 중 455세대 682명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405세대 595명에게 임시주거시설을 제공했다. 다른 이들은 친인척집, 경로당‧마을회관, 민간 숙박 시설 등에 머물렀다.
22일에는 강원 영동 지역에 거센 비가 올 가능성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기상청은 강원 동해안에 22일까지 비가 최대 60㎜까지 올 수 있다고 예보했다. 또 충청권에도 5~30㎜의 비가 올 수 있다. 제주에는 지리적 영향으로 23일까지도 비가 이어지겠다. 강수량은 10~60㎜로 예보됐다.
조선일보 이가영 기자
09-23 블랙리스트 옹호, 간호사 모욕… 막가는 의협 회장·부회장
전공의 이탈 사태와 의료개혁을 논의하기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블랙리스트’를 옹호하고, 부회장은 ‘동료’인 간호사를 향해 막말을 퍼붓는 행태를 보였다. 표현이 저급해 인성을 의심케 하는 것은 물론, 내용도 법치를 훼손하는 적반하장 식이어서 의사 단체 지도부 발언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개탄스럽다. 이런 몰상식한 행태가 의료계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묵묵히 헌신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명예와 신뢰를 훼손하고도 남을 정도다.
임현택 회장은 21일 응급실 의사 등 800여 명의 명단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개해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직 전공의 정모 씨를 면회한 후 “구속된 전공의와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입은 분들 모두가 정부가 만든 피해자”라며 “정부가 의사들 사이를 다 결딴내고 있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지금 유치장에 있어야 할 자들은 전공의가 아니라 용산의 간신들”이라고 했다. 이에 앞서 박용언 부회장은 진료지원(PA) 간호사를 합법화하는 등의 간호법 제정안이 20일 공포되자 SNS에 간호사들을 ‘건방진 것들’이라며 ‘그만 나대세요. 그럴 거면 의대를 가셨어야죠’ ‘장기 말 주제에 플레이어인 줄 착각 오지시네요’ 등 비하 글을 올렸다. 인간성부터 의문이 들 정도다.
블랙리스트는 의료 파행 기간 내내 정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며 복귀나 대화를 요청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등장해 전공의들의 복귀와 의료계의 소통을 막아 왔다. 경찰은 병원을 지키고 있는 의사를 모욕·협박한 행위에 대해 현재까지 42건을 수사해 조사 대상 45명 중 32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예외 없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번아웃을 감당하며 진료실을 지키는 의사들을 조리돌림 하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의사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냉철히 돌아보길 바란다.
문화일보 사설
09-23 간호사에 “건방진 것들” “장기말 주제” 막말 해댄 의협 부회장
의료개혁 방안을 놓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한의사협회(의협)의 박용언 부회장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간호사들을 비하해 비난을 사고 있다. 그는 진료지원(PA) 간호사의 의료 행위를 법으로 보호하는 간호법 제정안이 20일 공포되자 간호사들을 “건방진 것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만 나대세요. 그럴 거면 의대를 가셨어야죠” “장기말 주제에 플레이어인 줄 착각” 같은 비하성 글을 올렸다.
간호법은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 이후 PA 간호사의 역할 확대 목소리가 높아진 상황에서 지난달 28일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 통과 직후 임현택 의협 회장은 “불법 무면허 의료 행위가 만연하고 의료 현장이 아수라장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간호법은 양 측면이 있는 것으로 의사들로선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의협의 간부가 간호사들을 “건방진 것들” “장기말 주제” 운운하며 모독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런 행태는 정당한 주장의 신뢰성조차도 떨어뜨릴 뿐이다.
의대 증원에 항의해 사직했다가 복직한 의사 약 800명의 신상정보를 담은 이른바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인터넷과 메신저에 게시한 전공의 정모 씨가 20일 구속된 데 대한 의료계 일각의 반응도 일반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의협 소속의 몇몇 지방의사회들은 블랙리스트를 “의사 표현의 자유”라며 옹호했고, 특히 경기도의사회는 “북한 수준의 인권 유린”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협 회장은 구속된 전공의도 피해자라고 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오른 의사들 중에는 신상이 공개돼 대인기피증을 겪는 경우도 있다. 전공의 등에게 사직할 권리가 있듯 복직할 권리도 있다. 그런데도 “감사한 의사”라고 조롱하며 신상을 공개한 것을 표현의 자유라 할 수 있나.
의정 갈등 초기부터 선민의식을 드러낸 일부 의사들의 몰지각한 발언으로 의료계 전체가 매도되면서 의료계의 정당한 요구도 지지를 얻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추석 연휴 응급실 대란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의사 커뮤니티에는 “매일 1000명씩 죽어 나가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극히 일부의 일탈이겠지만, 정부의 무리한 의대 증원에 대한 비판이 커지는데도 의료계의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게 의료계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때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동아일보 사설
09.25 블랙리스트 만든 의사에게 모금운동…국민은 안중에 없나
피해자 아닌 가해자 위해 모금, 독립투사 비유까지
선민의식·우월감에 안하무인으론 국민 지지 못 얻어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사직 전공의를 위해 일부 의사가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동료를 괴롭힌 사람을 영웅시하며 거액을 송금한 의사도 있다. 블랙리스트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위해 모금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사직 전공의 정모씨는 병원을 지키는 전공의와 수업에 복귀한 의대생들의 실명과 소속 병원, 연차 등을 적시한 명부를 만들어 의사들만 가입할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 ‘감사한 의사’라는 제목의 게시물은 명백한 조롱이자 의사 집단 내에서 조리돌림당하라는 악의가 담겼다. 이름이 공개된 전공의들은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어렵고, SNS나 문자를 통해 조롱과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전공의들은 처음부터 사직이 집단행동이 아닌 개인적 결심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병원에 남겠다는 개인적 결단도 존중해야 마땅하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단체행동의 파괴력을 유지하려는 의도뿐이다. 이탈자 때문에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이기심까지 엿보인다.
경찰은 정씨에게 스토커처벌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발부했다. 지속해서 개인정보를 전송·게시하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다. 그런데도 일부 의사들은 자제를 촉구하는 게 아니라 범죄자를 두둔하고 나섰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장은 정씨를 “정부가 만든 피해자”라고 언급했다. 정씨를 잔다르크나 독립영웅에 비유하는 의사도 있다. 경기도의사회는 블랙리스트가 표현의 자유라며 “전공의 구속은 인권 유린”이라고 주장했다. 적반하장이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뒤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생명이 위독해지거나 삶을 마치는 사례가 속출한다. 그나마 병원에 남은 전공의와 교수들의 헌신 덕에 근근이 버티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관철하기 위해 국민이 기댈 마지막 언덕마저 없애겠다는 일부 의사의 이기심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의사들이 보여온 이 같은 행태에는 자신들이 특권층이라는 선민의식과 우월감만이 짙게 배어 있다.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7개월 동안 2000명 증원 정책의 허점이 속속 드러났다. 의대 증원 여론도 90%에 가까운 찬성에서 과반이 잘못하고 있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돌출하는 일부 의사들의 과격 발언과 안하무인 행태는 이 같은 차분한 성찰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뿐이다. 정부와 격렬히 충돌하고 있는 의사들이 주장을 관철하려면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필수다. 선민의식을 거두고 국민 감정과 정서를 고려하며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를 권한다.
중앙일보 사설
09.26 국민 품에 안긴 ‘육영수 특활비 장부’의 뜻은
8월 7일자 중앙일보 보도로 공개된 ‘육영수 특활비 경리 장부’가 국민 앞에 영구히 전시돼 교육자료로 쓰이게 된다. 1971년부터 3년간 대통령실 제2부속실에서 육영수 여사를 수행한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은 육 여사가 매달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20만원으로 빈민과 약자를 도운 내역을 꼼꼼히 기록한 장부를 “10월 8일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에 기증한다”고 필자에게 밝혔다.
약자 돕기에만 쓴 ‘특활비 내역’
내달부터 박정희 기념관 전시
전·현직 영부인, 가서 보고 배우길
장부에 따르면 육 여사는 매일 40여 통씩 오는 민원 편지를 바탕으로 기아나 질병에 시달리는 빈민·나환자나 학비가 부족한 학생 등에게 수천~수만원씩 지급했다. 김 비서관은 “육 여사는 대통령에게 받은 특활비를 1원도 빠짐없이 이런 공적 용도로만 썼고, 본인과 가족의 사적 비용은 대통령이 주는 월급에서 썼다”고 했다. 육 여사는 대통령이 매달 20만원짜리 수표를 주면 즉각 김 비서관에게 넘겼고, 김 비서관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보관하면서 매일 육 여사 지시에 따라 약자·빈자를 찾아가 돈을 지급했는데 반드시 ‘헌돈’을 줬다고 한다. 띠지 묶인 빳빳한 신권(관봉권)을 주면 받는 이가 부담을 느낄까 봐 배려했다는 것이다.
김 비서관의 말이다. “삭아빠진 대학 노트 한 권에 기록된 장부가 중앙일보에 공개되자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고, 수많은 감사 전화를 받아 깜짝 놀랐다. 고위 공직자 출신 저명인사가 내게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하더라. 전·현직 영부인들이 구설수로 시끄러운 마당이니 육 여사의 처신이 장안의 화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공감한다.”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이 딱 맞다. 전 영부인은 “관봉권으로 명품 옷을 사고 딸 문다혜씨에게 수상한 돈뭉치를 입금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또 다혜씨가 송기인 신부의 제주 주택을 헐값에 매입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25일 송 신부와 함께 국회 국토위 증인으로 신청(서범수 의원)되는 곤혹을 치르고 있다. 현 영부인은 명품백 수수 논란에 이어 ‘공천 개입’ 의혹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국민은 당사자들의 투명한 소명과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원하고 있다. 특히 현 영부인 김건희 여사는 제기된 의혹들의 근본 원인이 ‘오지랖’이란 한탄까지 나온 ‘과한 소통’이란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필자가 취재해 보니 김 여사는 여당 정치인들과 문자 소통이 유달리 많고 잦아 사달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이미 조성돼 있다는 거다. 4·10총선 직전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보냈다가 ‘읽씹’당한 문자들이 대표적인데, 이런 문자를 다른 여당 의원들과도 많이 주고받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나도 여사와 문자 주고받는다”는 수도권 국민의힘 정치인의 말이다. “여사가 별생각 없이 준 문자나 통화 내용을 캡처·녹음해 가진 여당 의원들이 널리고 널렸을 거다. 여사 딴에는 남편 돕는다고 문자를 하는데, 받는 사람 마음은 공천과 관직뿐이니 악용될 소지가 크다.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다.”
이런 여사의 ‘과한 소통’을 제어할 사람은 사실상 없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김 여사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로 존중해 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게 여권의 일치된 전언이다. 윤 대통령을 만난 법조계 선배들이 김 여사와 관련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하면 대통령은 “선배님, 저한테 앞으로 그 얘기 하지 마십시오. 제가 집사람한테 그런 말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고 답한다는 것이다. 통화 도중 여사 문제를 조언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비서진들이 ‘여사 문제’만 거론 되면 “그 얘기 내게 하지마”라고 손 사례를 치는 이유다.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겠다”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도 대통령과 독대 시 건의할 리스트에 여사 문제는 제외했다고 한다. 국민 입장에선 가장 먼저 거론돼야 할 사안이 가장 먼저 빠진 셈이니 독대가 성사돼 봤자 무슨 성과가 날지 의문이다.
김 여사는 며칠 전 “꼭두새벽에 개 끌고 산책 나가 경호진을 고생시켰다”는 구설에 올랐다. 알고 보니 추석 연휴에도 관저 경호하느라 수고하는 군인들에게 간식을 갖다 준 행보가 왜곡돼 전달된 것이었다. 인근 주민 불편을 줄여주려고 일부러 늦은 시각을 택했다는 것이다.
답은 여기에 있다. 김 여사 스타일을 보면, 소통 욕구가 상당하다. 그건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들과의 문자나 통화는 아무리 좋은 뜻에서 했어도 국정 개입 구설수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대신 고생하는 공무원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을 위로하는 데 소통 욕구를 꾸준히, 진심으로 쏟아붓는다면, 시일은 걸릴지 모르나 국민이 여사에게 닫았던 마음의 문이 열릴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 강찬호 논설위원
09-27 딥페이크, ‘창조적 혼돈’도 부른다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만족감
AI 기술과 접목되며 질적 도약
악용 부작용 피해는 상상 초월
가짜를 진짜로, 진짜를 가짜로
규제·예방 실패 땐 불신 부메랑
교육과 훈련 등 장기 대책 절실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인간이 가장 창조적인 존재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뭔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더없는 통제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창조성이 인간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면서 인간은 진화·발전해 왔으며, 인공지능(AI) 기술과 만나면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진입하게 됐다.
그중 하나가 딥페이크 기술이다. 이는 역사적 자료의 복원, 교육 및 의료 기술의 혁신, 영화 산업과 마케팅에서의 다양한 활용 등 일상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주면서 비약적인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신기술은 엄청난 무기가 돼 우리 스스로를 점점 옥죄고 든다.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결과물은 이를 조작하면서 가지게 되는 통제감·만족감과 같은 심리적 보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악용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성적 딥페이크의 확산으로 미성년 피해자가 다수 발생해 충격을 안겨줬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가해자 역시 상당수가 10대라는 점이다. 호기심 많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어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시기이기에 청소년들은 처벌의 두려움이나 사회적 윤리감보다는 딥페이크 기술을 조작해 보려는 욕구가 더 강렬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으로 시작하더라도, 경쟁하듯 점점 더 자극적이고 그럴듯한 영상을 만들고 그 결과물에 대한 다른 친구들의 반응에서 성취감을 느끼면서 ‘딥(deep)’페이크에 ‘깊이(deep)’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범죄인지에 대한 자각 부족은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만든다.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피해는 이미 2018년 ‘오바마 딥페이크’ 영상 때부터 있었다. 2년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에 항복하는 모습을 담은 딥페이크 영상이 한때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곧 가짜임이 드러났다. 최근에는 대규모 팬덤을 지닌 테일러 스위프트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딥페이크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지지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딥페이크의 정치적 사용에 많은 사람이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래도 딥페이크 기술은 급속히 발전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이나 촉각의 조작까지도 가능해짐에 따라 딥페이크 인물에 더욱 안정감 있는 매력을 더할 수 있게 됐다.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AI 기술로 만들어진 인물을 접하는 대중의 무의식적 감정까지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피해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딥페이크로 조작된 인물이 진짜로 인식된다는 점에 더해 더 위협적인 것은, 역으로 이를 활용해 진짜를 가짜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언론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것은 취약한 정치 환경에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언론이 조작됐다고 확신하게 되는 순간 사회는 혼란에 휘말리게 된다. 실제 촬영된 사진이나 영상을 더는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실제 증거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짜로 치부되고 의심받게 될 수 있다. 딥페이크 기술에 대한 규제책 마련이 꼭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규제는 기술보다 늘 한발 늦기 마련이다. 인간의 창의성에 기반한 무한한 인간의 조작 능력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으면서 이에 대한 예방과 처벌 조항이 마련되고 있지만, 인간의 무한한 창조성은 규제를 뛰어넘어 계속 진화해 버릴 수 있다.
우리나라도 딥페이크·딥보이스 등 허위조작 콘텐츠를 탐지할 수 있는 딥러닝 기술 개발비를 내년 경찰 예산에 따로 책정하는 등 이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다. 허위조작 콘텐츠 제작과 배포에 대한 처벌이나 규제 또한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지금 마련되고 있는 대책들이 무언가 창조하고 조작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인간의 욕구를 적절히 차단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여러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어릴 때부터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이를 잘 다스리도록 내면의 양심이나 윤리를 발달시킨다.
이제는 창조 욕구조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인간의 조작 욕구에 의한 창조성이 부메랑이 돼 불신과 혼돈을 초래하지 않도록 강력한 장기적 대책도 마련해야 할 때다.

문화일보
09.28 4번 다운된 뒤 극적인 KO승 거뒀다…홍수환, 이 말에 정신 번쩍
대통령 특사 된 챔피언 홍수환

▲서울 서초구 더케이호텔 앞뜰에서 홍수환 선생이 펀치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복싱 노하우를 전해주는 게 사명이라고 했다. 최기웅 기자
벌써 50년이 지났다. 1974년 7월 3일, 육군 일병 홍수환은 남아공 더반에서 아널드 테일러에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경기 직후 “엄마 나 참피온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라는 모자의 통화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다.
3년 뒤 홍수환은 신설된 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을 놓고 파나마로 건너가 헥토르 카라스키야와 맞붙었다. 열한 번을 모두 KO로 이긴 ‘지옥에서 온 악마’ 카라스키야의 강펀치에 2회 네 번이나 다운됐지만 3회 역전 KO승을 거둔다. 한국 체육사에 길이 남을 ‘4전5기 신화’였다. 은퇴 후 그는 2012년부터 10년간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을 맡아 쇠락한 한국 프로복싱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홍 전 회장은 지난 7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파나마에 다녀왔다. 호세 라울 물리노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윤석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파나마 복싱의 전설인 ‘돌주먹’ 로베르토 두란, 길베르토 멘도사 WBA 회장 등과 만나 양국 스포츠·문화 교류 방안도 논의했다. 특히 한·중·일 3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파나마 메트로(지하철) 건설 수주를 위해 ‘복싱 인맥’을 동원해 측면 지원을 했다.
칠십 중반에도 왕성한 체력, 탁월한 기억력, 유려한 말솜씨를 유지하고 있는 홍 전 회장을 만났다. 그는 “못 싸워서 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안 싸워서 지는 건 비겁한 거다. 인생에서 싸워야 할 대상이 있다면 용감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파나마 전설’ 두란, 카라스키야 등과 교류

▲세계챔피언이 된 홍수환이 1974년 7월 18일 모친 황농선 여사와 함께 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대통령 특사로 파나마 다녀오셨네요.
“내가 세계챔피언 출신이지만, 권투 선수가 대통령 특사로 간다는 건 놀랍고 고마운 경험이었죠. 열성 복싱 팬인 물리노 대통령이 로베르토 두란과 워낙 가까운 사이거든. 시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카라스키야도 영향력이 막강하고. 내 복싱 인맥을 통해 나라의 글로벌 비즈니스에 미력이나마 도울 수 있으니 고맙죠. 올해 안에 다시 파나마로 갈 계획이 있어요.”
▶두란 자택에도 초대 받으셨죠.
“주로 복싱 얘기를 나눴죠. 그 양반도 카라스키야 경기를 현장에서 봤대요. 자기들은 내가 네 번 다운되는 것 보고 끝났다고 생각해서 먼저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경기장이 조용해지더라는 겁니다. 내가 3회 50초 만에 끝냈거든. 워낙 쇼킹해서 아직 뇌리에 남아 있다고 해요.”
▶카라스키야가 그렇게 예뻤다면서요.
“경기 전 눈싸움을 하는데 나를 끝까지 째려보지는 않더라고. 나는 딱 봤는데 피부가 이 커피 색깔인데 그렇게 예쁘게 생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겁이 나는 거야. 얼마나 안 맞았으면 얼굴이 그렇게 깔끔하겠어요. 날 두 번 이긴 사모라도 얼마나 잘생겼는데.”
▶당시 주심과도 인연이 있었다면서요.
“경기 직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는데 영어로 몇 마디 했더니 날 좋게 본 모양입니다. 그게 운명이죠.(주심은 홍수환이 다운됐을 때 카운트를 천천히 셌다.) 한 회 세 번 다운되면 자동 KO패 하는 룰을 바꿔서 무제한 다운제로 간 것도 운명이고. 하나님이 겸손한 사람한테 복을 준 거지, 내가 실력으로 이겼다고 생각 안 해요. 3회전 시작 직전에 암모니아를 훅 들이마셨는데 그게 순간적으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하거든. 다 이겼다고 방심하고 나오는 카라스키야한테 제대로 한 방 먹였죠.”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도 있지요.
“1974년 남아공에서 챔피언 따고 개선한 뒤 7월 18일 청와대 초청을 받았어요. 박 대통령이 ‘홍 일병, 체육관 하셔야지요’ 하니까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홍 일병이 있는 충무로 수도경비사 밑에 한국체육관이 있습니다. 시설이 낡고 재정난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 겁니다. 박통이 ‘그거 조치해 줘’ 하셨는데 한 달도 안 돼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잖아요. 정신이 없는 통에 흐지부지 된 거죠. 한국체육관이 홍수환이 거 될 뻔했는데. 하하.”
▶일본 선수만 만나면 펄펄 날았다면서요.
“그랬죠. KO 시킬 수 있었는데 계속 세워 놓고 두들겨 팼다는 얘기는 좀 와전된 거고. 일본 선수와 13번 싸워 12번 이겼어요. 1970년 규슈에 가서 석연찮게 판정패 한 하라다는 2년 뒤 서울에 불러서 깨끗하게 설욕하고 병원 보냈잖아요. 할아버지가 일제 때 일본 순사한테 맞아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일본 선수한테는 절대 안 진다고 맹세했거든.”
▶‘1회전만 더’ 정신으로 위기 극복해야
홍수환이 두 번 만나 모두 KO로 진 상대가 멕시코의 ‘KO 머신’ 알폰소 사모라(38전 33승 32KO 5패)다. 1975년 3월 LA에서 열린 WBA 밴텀급 2차 방어전. 경기 몇 시간 전에 꿀을 두 숟갈 먹었는데 명현(瞑眩) 현상이 나타났다. “그게 확 달아오르는데 어질어질하고 술 취한 것 같은데 차라리 술이 낫지.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홍수환은 4회 KO패로 허무하게 타이틀을 빼앗긴다.

▲카라스키야를 KO 시키는 홍수환. [중앙포토]
76년 10월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열린 리턴 매치. 심판이 명승부를 망쳤다. 9회 홍수환이 사모라를 코너에 몰아넣고 강타를 퍼붓는데 심판이 끼어들어 둘을 확 갈라놓는다. 그리고 12회, 이번에는 사모라가 홍수환을 코너에 몰고 연타를 날리자 심판은 사모라의 TKO승을 선언해 버린다. 당시 중계 영상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못 찾았다고 홍 전 회장은 말했다. TBC(동양방송)에서 중계했는데,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내 경기 영상은 없어도 되지만 김기수 선배가 니노 벤베누티 이기고 첫 세계 챔프 된 경기 풀 영상도 없어요. 그만큼 우리나라의 기록 문화가 성숙하지 않은 거죠”라고 그는 탄식했다.
홍 전 회장은 “당시 심판 장난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겼을 수 있죠. 그렇다면 카라스키야 경기는 없는 거고. 난 사모라한테 두 번 졌지만 대신 두 체급 챔프가 됐고, 4전5기 신화를 창조했잖아요. 운명인지 하나님의 섭리인지, 어쨌든 그 앞에서 인간은 늘 겸손하고 준비하는 것밖에 없어요.”
▶선생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작업은?
“지금 진행 중인데 시나리오는 아직 안 나왔어요.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였던 이주노가 음악을 맡아줬으면 좋겠어요. ‘로키’에서 실베스타 스탤론이 로드워크 할 때 ‘바바 밤~ 바바 밤~’ 나오는 그 음악이 영화의 백미잖아요. 로키가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 뛰는 게 인상적이지만 나한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든. 난 군대 있을 때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정상까지 1978계단을 한 번에 뛰어 올라갔잖아요. 70년대 사회상을 보여주고 남진·이수미 노래도 나오고, 그러다가 홍수환 인생이 저랬구나, 보고 나서 느끼는 영화가 나오길 바라요.”
▶“진정한 복서는 비참하게 쓰러지는 사람, 비극적으로 사라지는 영혼이다”고 하셨는데요.
“남들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 챔피언 됐잖아. 그래 놓고 나는 편하게 은퇴한다? 그건 사나이 답지 않죠. 복서도 지는 걸 무서워하면 안 돼요. 내 마지막 국제경기에서 리카르도 카르도나한테 피를 흘리며 깨지는 사진이 SNS에 돌아다니는데 그게 제일 멋진 겁니다. 모든 건 기한이 있는 거니까 과정을 중요하게 살아야지. 맨 끝날 보면 저분이 어떻게 살았나 알 수 있거든요. 난 유튜브를 통해 노하우를 후배들한테 전수해 주는 게 남은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는 다시 4전5기로 되돌아갔다. 네 번째 다운 당했을 때 링사이드에 있던 큰형이 타월을 던지려다 잠깐 망설이는 새 공이 울렸다. TBC 생중계를 보시던 어머니는 “그 아새끼 와 자꾸 일어나니. 그냥 쓰러져 있으면 안 맞을 텐데” 하셨단다. 2회 끝나고 세컨드 조수현 선생이 말했다. “수환아, 1회전만 더 하고 그만 하자. 어차피 판정으로 가봐야 우린 진다. 딱 1회전만 더 뛰자.” 그건 진심으로 제자를 걱정한 사랑이라고 홍수환은 느꼈다. ‘그래 죽더라도 가슴으로 총 맞자. 등 뒤로 맞지 말자’는 각오로 다시 경기에 임한 게 기적을 낳았다.
홍수환 선생이 말했다. “뛰다 보면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이 힘든 때가 있어요. 그 고비를 넘기면 어느새 다시 호흡이 편안해지는데, 영어로 이걸 세컨드 윈드(second wind)라고 한다지요. 내가 그 1회전을 더 뛰지 않고 포기했다면 4전5기는 없었죠. 한국 복싱도, 대한민국 국민도 ‘1회전만 더’ 정신으로 고비를 넘기고 세컨드 윈드를 맞았으면 좋겠어요.”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09.30 모든 곳 엿보는 '중국산 인터넷 카메라' 공포

▲지난 2022년 경찰청 사이버테러수사팀은 국내 아파트 거실에 설치된 월패드에 침입해 거실 등 아파트 내부 공간을 몰래 촬영한 영상 일부를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해 판매하려 한 피의자를 검거했다./뉴스1
중국의 음란물 사이트에서 중국산 IP캠(인터넷 카메라)으로 찍은 한국인들의 사생활 동영상이 대거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산 IP캠에서 해킹을 통해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사이트엔 한국의 가정집 거실이며 산부인과 분만실, 탈의실, 수영장, 마사지숍 등 신체를 노출할 수밖에 없는 공간을 해킹한 동영상들이 널려 있다. 지난해 서울의 한 성형외과에서 연예인 등 환자들 탈의 과정 등이 무단 유출돼 논란됐던 동영상도 올라 있었다. 한 중국 사이트엔 ‘한국인’으로 분류된 동영상이 전체 국가 카테고리에서 가장 많았다. 일상생활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 음란물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정집 돌봄용이나 상업·공공시설에서 방범용으로 광범위하게 보급된 IP캠의 80%는 중국산이다. 중국산 IP캠은 제조사가 서버·기기에 사용자 정보를 빼갈 수 있는 ‘백도어’를 심어둔 제품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다수 사용자들은 값싼 중국산 IP캠을 해외 직접 구매로 구입하고 있어 정부의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심지어 국내 시장을 장악한 중국산 로봇 청소기 제품에도 IP캠이 장착돼 있다. 미국 IT 매체는 중국산 로봇 청소기가 해킹 되면 이용자를 감시하고 사생활 정보를 유출하는 채널로 악용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외부와 차단된 CCTV와 달리 IP캠은 인터넷 네트워크를 이용하기 때문에 해킹에 취약하다. 하지만 정부와 업계, 사용자들의 보안 의식은 미흡하기만 하다. IP캠을 사용하는 기업체의 65%는 국산과 중국산 제품의 정보 유출 가능성에 차이가 없다고 인식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주요국들은 정보 보안을 이유로 중국산 영상 보안 장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2022년 중국산 영상 보안 장비 수입을 전면 금지시켰다. 영국·호주 등도 주요 국가 시설에서 중국산 영상 장비를 철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군부대에 설치된 방범 카메라(CCTV) 1300여 대가 중국산인 걸 확인하고, 순차적으로 철거키로 했다. 군대뿐 아니라 가정집 안방과 상업시설까지 침투한 중국산 IP캠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정부는 중국산 IP캠 제품과 IP캠이 장착된 전자 기기에 대한 보안 점검을 통해 해킹 위험과 대비 방법을 사용자들에게 널리 홍보해 알릴 필요가 있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한 해킹 위험을 원천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선책으로 중국산 IP캠 사용자들에게 우선 처음 사용할 때 설정했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바꿀 것을 권고하고 있다. 경각심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9.30 치킨게임은 제발 그만… 醫政 이제 대타협을
"시간은 우리 편"? 정부 착각일 뿐
전공의도 계속 '눕기'만 해서야
서로 비난만 말고 얻은 걸 보자
말 말고 행동으로 국민 위해야

▲서울 시내 대학병원 앞에서 환자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뉴스1
이달 중순 2025학년도 수시 모집 원서 접수가 끝났다. 2025학년도 전국 의대 신입생 선발 인원은 4610명으로 지난해보다 1497명 늘었다. 이 가운데 3118명(67.6%)을 수시 모집에서 선발한다. 모집 정원이 크게 늘자, 의대 수시 지원자가 처음으로 7만명을 넘어섰다. 올 2월 시작된 의대 증원 절차가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의대 증원’ 열차는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지만, 이에 반발해 수련 병원을 떠난 전공의 1만명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들 3명 중 1명은 다른 의료 기관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대부분 동네 병원이다. 나머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학교를 떠난 의대생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학교와 교육 당국은 학기제를 학년제로 바꾸는 등 각종 시도를 하고 있지만, 10월이 되면 의대생 집단 유급은 더 이상 막기 힘든 상황이 된다. 6년 뒤 의사 수 1500명이 늘어나지만, 당장 내년에 의사 3000명이 없어지는 것이다. 의료계는 ‘정부가 전 국민의 건강과 목숨을 볼모로 의료 시스템 붕괴를 초래했다’며 비판하지만, 여기엔 의료계 책임도 크다.
지난 8개월 동안 의정 갈등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었다. 이제는 감내할 수준이 한계치에 다다랐다. 정부와 의료계는 서로의 잘못만 계속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번 사태를 통해 얻은 것을 생각하며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을 위해 ‘의대 증원’이라는 어려운 카드를 꺼냈다. 이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 어떤 대통령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추진 과정에서 좀 더 치밀하고 세밀하게 준비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한 번에 정원 60% 이상을 확대했을 때의 부작용, 전공의 이탈 등 뻔히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당초 취지는 퇴색되고 무능한 정부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다.
의료계는 이번 사태에서 자기 밥그릇을 위해 환자를 버린, 머리만 좋은 전문가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정부가 ‘의사를 악마화했다’ 비판하지만, 자초한 측면이 더 크다. 그러나 의료계도 얻은 것이 있다. 전공의들이 주 100시간 이상 일하며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는 열악한 현실을 전 국민이 알게 됐다.
이들의 값싼 노동력과 희생 덕분에 한국이 최고 수준의 의료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는 민낯이 드러났다. 의사들이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라고 일컫는 이른바 필수 의료과를 기피하게 만드는 낮은 의료 수가·높은 의료 소송 부담 등에 대해서도 상당수 국민이 문제점을 인식하게 됐다. 무조건 큰 병원, 대학 병원 응급실부터 찾는 국민들의 의료 소비 형태도 바뀌고 있다.
의료 개혁은 치킨게임이 아니다. 한쪽이 완전히 쓰러지는 게 답이 될 수 없다. 정부와 의료계는 더 늦기 전에 타협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며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모두 말뿐”이라며 강한 불신을 드러내는 의료계를 끝까지 끌어안아야 한다. 전공의도 이제 돌아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탕핑(躺平·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드를 계속 이어가면 완전히 잊힐 수 있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 “진정 국민을 위한다”며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진짜 아기 엄마를 가려낸 탈무드 솔로몬왕처럼, 국민도 끝까지 이기려고 하는 쪽과 진정 국민을 위한 쪽이 누구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 신은진 기자
09-30 딥페이크, ‘창조적 혼돈’도 부른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DGIST 석좌교수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만족감
AI 기술과 접목되며 질적 도약
악용 부작용 피해는 상상 초월
가짜를 진짜로, 진짜를 가짜로
규제·예방 실패 땐 불신 부메랑
교육과 훈련 등 장기 대책 절실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인간이 가장 창조적인 존재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뭔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더없는 통제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창조성이 인간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면서 인간은 진화·발전해 왔으며, 인공지능(AI) 기술과 만나면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진입하게 됐다.
그중 하나가 딥페이크 기술이다. 이는 역사적 자료의 복원, 교육 및 의료 기술의 혁신, 영화 산업과 마케팅에서의 다양한 활용 등 일상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주면서 비약적인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신기술은 엄청난 무기가 돼 우리 스스로를 점점 옥죄고 든다.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결과물은 이를 조작하면서 가지게 되는 통제감·만족감과 같은 심리적 보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악용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성적 딥페이크의 확산으로 미성년 피해자가 다수 발생해 충격을 안겨줬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가해자 역시 상당수가 10대라는 점이다. 호기심 많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어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시기이기에 청소년들은 처벌의 두려움이나 사회적 윤리감보다는 딥페이크 기술을 조작해 보려는 욕구가 더 강렬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으로 시작하더라도, 경쟁하듯 점점 더 자극적이고 그럴듯한 영상을 만들고 그 결과물에 대한 다른 친구들의 반응에서 성취감을 느끼면서 ‘딥(deep)’페이크에 ‘깊이(deep)’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범죄인지에 대한 자각 부족은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만든다.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피해는 이미 2018년 ‘오바마 딥페이크’ 영상 때부터 있었다. 2년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에 항복하는 모습을 담은 딥페이크 영상이 한때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곧 가짜임이 드러났다. 최근에는 대규모 팬덤을 지닌 테일러 스위프트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딥페이크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지지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딥페이크의 정치적 사용에 많은 사람이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래도 딥페이크 기술은 급속히 발전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이나 촉각의 조작까지도 가능해짐에 따라 딥페이크 인물에 더욱 안정감 있는 매력을 더할 수 있게 됐다.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AI 기술로 만들어진 인물을 접하는 대중의 무의식적 감정까지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피해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딥페이크로 조작된 인물이 진짜로 인식된다는 점에 더해 더 위협적인 것은, 역으로 이를 활용해 진짜를 가짜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언론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것은 취약한 정치 환경에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언론이 조작됐다고 확신하게 되는 순간 사회는 혼란에 휘말리게 된다. 실제 촬영된 사진이나 영상을 더는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실제 증거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짜로 치부되고 의심받게 될 수 있다. 딥페이크 기술에 대한 규제책 마련이 꼭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규제는 기술보다 늘 한발 늦기 마련이다. 인간의 창의성에 기반한 무한한 인간의 조작 능력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으면서 이에 대한 예방과 처벌 조항이 마련되고 있지만, 인간의 무한한 창조성은 규제를 뛰어넘어 계속 진화해 버릴 수 있다.
우리나라도 딥페이크·딥보이스 등 허위조작 콘텐츠를 탐지할 수 있는 딥러닝 기술 개발비를 내년 경찰 예산에 따로 책정하는 등 이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다. 허위조작 콘텐츠 제작과 배포에 대한 처벌이나 규제 또한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지금 마련되고 있는 대책들이 무언가 창조하고 조작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인간의 욕구를 적절히 차단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여러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어릴 때부터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이를 잘 다스리도록 내면의 양심이나 윤리를 발달시킨다.
이제는 창조 욕구조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인간의 조작 욕구에 의한 창조성이 부메랑이 돼 불신과 혼돈을 초래하지 않도록 강력한 장기적 대책도 마련해야 할 때다.
문화일보
09-30 [속보]‘이태원 참사’ 박희영 용산구청장 무죄…전 용산경찰서장은 3년 선고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혐의를 받은 박희영 서울 용산구청장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이 지난해 1월 박 구청장을 기소한 지 1년 8개월 만이다. 반면 이임재 전 서울 용산경찰서장은 금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재판장 배성중)는 30일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기소된 박 구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 7월 15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박 구청장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한 바 있다.
박 구청장은 지난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당일 대규모 인파로 사고 발생을 예견할 수 있었는데도 안전관리계획을 세우지 않고 상시 재난안전상황실을 적정히 운영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또 용산구청의 부실 대응을 은폐하기 위해 참사 현장 도착 시간 등을 허위로 기재하도록 한 혐의(허위공문서작성·행사)도 받는다.
그러나 박 구청장 측은 대규모 압사 사고가 발생할 것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재판 과정 내내 고수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반면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서장은 금고 3년을 선고받았다. 금고는 수형자를 교도소 내에 구치하되 노역이 강제되는 징역과 달리 노역이 강제되지 않는 형벌이다. 다만 재판부는 이 전 서장이 국회 청문회에서 허위 증언한 혐의(국회증언감정법상 위증)와 허위공문서작성·행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전 서장은 이태원 참사 당일 이태원 일대에 대규모 인파로 안전사고 발생을 예견할 수 있었는데도 사고 방지 대책을 세우지 않고 경비 기동대 배치와 도로 통제 등 조치를 제때 하지 않아 인명피해를 키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부실 대응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현장 도착 시각을 허위로 기재하도록 직원들에게 지시한 혐의(허위공문서작성·행사)와 국회 청문회에서 참사를 더 늦게 인지한 것처럼 증언하고 서울경찰청에 경비기동대 지원 요청을 지시했다고 허위 증언한 혐의(국회증언감정법상 위증)로도 기소됐다.
문화일보 임정환 기자